@@@주의 모든 증거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
...[계명-율례-법도-판단, 곧 근원적 사랑과 생명 충만한 Q의 모든 것인 명령과 규례...JC십자가부활승천-HS내주하심으로 온전/완전/순전케 하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 기록된 말씀 + 즉각적인 말씀들..
....하나님의 뜻과 어떠하심(성품)-능력-기념이름 그대로 반영하는 (지혜의) 모든 약속/언약말씀의 총체]..
....추구(사모/사랑/간구)함. = 기쁨과 즐거움 삼음, + 믿음-소망-인내, 붙들고-묵상-가르침 깨닫고, 기억/새김/충만/변화(노래-찬송), + 주이름부름-누림-인도하심 순복[예비/공급/구원-도움-인도-보호-돌파-이김과 극복, 지족, 평강]
@@@HS과 하나되라
... Q말씀[완전한 방어/공격 겸용의 영적 무장, 동시에 영원한 참생명 하나님의 모든 것]으로 사는 소명과 사명의 영적참자아를 대적하는 모든 극악무도 인식분별대적, 극복하라
== 육신(죄성)-세상(악인)-사탄마귀 == 공격들 [미혹(오해착각)/참소...유혹/조롱/비아냥...핍박/박해/침노/탈취/살해]...선악진위 혼동케 하며 하나님 배역을 부추기기 위해기 위해 주어지는 고통환난역경들임을 자각하라, 회개하고 주와 하나됨으로써 끝까지 주안에 거하고 동행하며 머물라...하나님 말씀따라 JC이름으로 대적하라
나의영원하신기업435..주음성외에는446..완전하신나의주..주께와앞드려..주앞에나와경배를..주내소망은..주께가오니..주님과함께하는...
..주하나님 성품의 어떠하심의 그 영광 나타냄이 의로움 righteousness, 체데크[Q의 성품은 선하심-인자하심-진실하심<영원한 사랑의 언약안에서 자비긍휼은혜, 오래참으심, 죄를 미워하심...이를 모든 사람들에게 끄들 각자의 지고지선의 진복누림 위해 틀림없이 공평히 적용하심>이요
...이에따라 사람에게 베푸신 진복누림과 생명을 위한 말씀의 기록이 율법[토라]Law...곧 계명(미츠와. Commandments ..실행 또는 금지명령)--율례(호크.Statues..계명의 상세의미 [지혜로운]상술설명) + 법도(픽쿠드/파카드. Precepts.. 새로운 피조물/주의자녀들의 참생명안에서의 성숙/성장을 위한 교훈/영생깨우침).
...계명<미츠와>에 따른 율례<호크>+법도<픽쿠드>+판결/판단/분별(<쉐페트>Judgement...샤파트<판결,결의실행하다>...엘 쇼페트)의 총합 = 규례/법규Ordinance (이 모든 말씀따라 위임받은 자가 Q앞에서 [사람에 따라]편벽됨없이 [스스로에 대해서도 그러함이 정직임] 공정/공평하게 적용, 판결 실행함이 미슈파트 = 정의 justice)
...선하심--인자하심(자비-긍휼-은혜-오래참으심의 영원한 언약적 사랑)-진실하심 :: 지고지선의 진복(사랑-희락-화평 충만의 영생구원복락)누림 위한 교훈과 징계로서 참회개하는 자 사유하기를 기뻐하시고 그의 미워하시는 바 죄를 보응하시되 진노중에도 긍휼로 함께 하시며 인자를 천대까지 베푸시는 분.. ...율법의 정신 [의(공의/체데크와 정의/미슈파트...righteousness+justice)-인(헤세드...lovingkindness-mercy/compassion/grace)-신(에무나...faithfuness-truthfulness)
..[[사59:20,21]]..*2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21.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9:24]] *23.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24.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미가6:8]]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나의영원하신기업435] [달고오묘한그말씀200][주예수크신사랑205][온세상이캄캄하여서84][주의확실한약속의말씀듣고267]===
97. ○내가 주의 법을(토라)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아헤브)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시아흐...시하<명여>..묵상하다)...영생말씀을 살기위해..
98. 주의 계명들이(미츠와) 항상(올람)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하캄..지혜롭다/현명하다)
99. 내가 주의 증거들을(에두트)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샤칼...지혜롭다/총명하다/ 교차검토하다)나의 모든 스승보다(라마드) 나으며
100. 주의 법도들을(픽쿠드) 지키므로(나찰) 나의 명철함이(빈...식별/분별/이해/지각하다.깨달아알다) 노인보다(자켄) 나으니이다
101. 내가 주의 말씀을(다바르) 지키려고(샤마르..지키다/준수/감시/보존/주의하다) 발을(레겔)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오라흐)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102.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야라) 내가 주의 규례들에서(미슈파트) 떠나지(수르) 아니하였나이다
103. 주의 말씀의(이므라) 맛이(헤크)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말라츠...<기쁘고 즐겁게>들리다,<삼키키게>부드럽고 매끄럽다)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데바쉬)
104.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빈)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세케르) 행위를(오라흐) 미워하나이다(사네...미워하고증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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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니르...등불) 내 길에(나티브...보행로/도로, 길..의인의길은 비록 좁고 함정이 있으나 기도할때 Q께서 처리하심) 빛이니이다(오르)
106. 주의 의로운(체데크..주의 성품의 어떠하심 그대로 발현) 규례들을(미슈파트..YHWH의 명령말씀) 지키기로(샤마르..붙들고 착념/묵상..연습실행 자연스레 하나됨) 맹세하고(샤바..맹세/다짐-결단하다) 굳게 정하였나이다(쿰,,,일어나 서서 세우다....열중/몰입하다)
107. 나의 고난이(아나) 매우 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하야)
108. 여호와여 구하오니(나...청컨데, 비옵나니, 호쉬아 나<오셔서 우리를 구하소서>=호산나) 내 입이 드리는 자원제물을(네다바...자유의지 발휘함으로써 드리는, 자발적인 자원예물....자원함으로 확정한 바 전존재, 심중과 혀와 입술의 열매, 찬양, 기도) 받으시고 주의 공의를(미슈파트....각사람을 향한 하나님 어떠하심의 공평한 적용) 내게 가르치소서(라마드...잘 알아듣도록 그 의미를 상술하여주고, 깨어 묵상하게 하시며 깨우친 바 그 깨달음을 붙들고 생명삼아 실행하도록 일깨우심)
109. 나의 생명이(하이 네페쉬..목숨...**영원생명<조에>의 Q, YHWH께서 친히 사람/게셈의 코에 불어넣어주신 생기<네샤마=루아흐...제3위Q이신 성령=생명<조에>주는 영..[하나님의 신/하나님의 영>그 자체이신 HS 네샤마/루아흐께서 레브(=영혼..내적인간)를 만드사 사람의 영spirit(프뉴마<르웨크>)에 내주하심으로 인해 부활가능한 혼soul(프쉬케<네페쉬>을 개우시며..생동/활동하는 생물학적(bios) 몸body(소마<바사르=살, 육체>으로 살게 하심 [**한편, 죄의 몸[육신]은 사르크스, 그 중심은 죄성/육을 가진 몸의 죄성/죄로 이끌려 범죄하는 옛습관적 경향성을 가짐// 한편, 아드님 JC는 사르크스로 성육신하셨으되 HS을 힘입어 육신/죄성의 유혹을 이기시어 죄없는 인생을 사셨고 그 몸을 아버지께 대속제물로 드리셨음], 성령은 Q생명<조에..영원생명> 곧 부활생명이시며 인간의 영spirit=프뉴마(헬)/르웨크(히)에 거하심으로써 흙으로 지어진 사람은 비로소 생령 Living spirit=생동하는 몸/피조물 Living Creature =산혼 Living soul이 됨(**레브와 소마가 조에로 충만함)...부활하신JC께서는 숨을 내쉬시면서 [<믿음으로>성령을 받으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심<요20:22> ..겔37장, 살전5:22, 23참조) 항상(타미드) 위기에(카파프, 카프...손바닥오목부..<악인의 장중>을 의미.) 있사오나 나는 주의 법을 잊지(샤카흐) 아니하나이다
110. 악인들이(라샤) 나를 해하려고 올무를(파흐) 놓았사오나(나탄) 나는 주의 법도들에서 떠나지(타아) 아니하였나이다
111. 주의 증거들로(에두트) 내가 영원히(올람) 나의 기업을(나할)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레브) 즐거움이(사손) 됨이니이다
112. 내가 주의 율례들을 영원히(올람 에케브..끝까지 길이) 행하려고(아사)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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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내가 두 마음 품는(세에프) 자들을 미워하고(사네)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아헤브)
114. 주는 나의 은신처요(세테르) 방패시라(아겐) 내가 주의 말씀을(다바르) 바라나이다(야할)
115. 너희 행악자들이여(라아) 나를 떠날지어다(수르) 나는 내 하나님의(엘로힘) 계명들을(미츠와) 지키리로다(나차르)
116. 주의 말씀대로(이므라) 나를 붙들어(사마크) 살게(하야) 하시고 내 소망이(세메르) 부끄럽지(부쉬) 않게 하소서
117. 나를 붙드소서(사아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고(야샤) 주의 율례들에 항상 주의하리이다(샤아)
118. 주의 율례들에서(호크) 떠나는(샤가) 자는 주께서 다 멸시하셨으니(살라) 그들의 속임수는(토르마) 허무함이니이다(세케르)
119. 주께서 세상의 모든 악인들을(라샤) 찌꺼기(시그) 같이 버리시니(샤바트) 그러므로 내가 주의 증거들을(에다) 사랑하나이다(아헤브)
120. 내 육체가(바사르) 주를 두려워함으로(파하드) 떨며(사마르) 내가 또 주의 심판을(미슈파트) 두려워하나이다(야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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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내가 정의와(미슈파트) 공의를(체데크) 행하였사오니(아사) 나를 박해하는 자들에게(아샤크) 나를 넘기지(야나흐) 마옵소서
122. 주의 종을(에메드) 보증하사(아라브) 복을 얻게 하시고(토브) 교만한 자들이(제드) 나를 박해하지(아샤크) 못하게 하소서
123. 내 눈이(아인) 주의 구원과(예슈아) 주의 의로운(체데크) 말씀을(이므라)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칼라)
124. 주의 인자하심대로(헤세드) 주의 종에게(에메드) 행하사(아사) 내게 주의 율례들을(호크) 가르치소서(아마드)
125. 나는 주의 종이오니 나를 깨닫게 하사(빈) 주의 증거들을(에다) 알게 하소서(야다)
126. 그들이 주의 법을(토라) 폐하였사오니(파라르) 지금은 여호와께서 일하실(아사) 때니이다
127.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들을(미츠와) 금 곧 순금보다(파즈) 더 사랑하나이다(아헤브)
128. 그러므로 내가 범사에 모든 주의 법도들을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영원한 노모스/노멀/캐논=구원영생복락의 말씀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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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묵상(시 119:97)
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다윗의 사랑이 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그는 거룩한 열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애정을 증언한다.
그는 자신의 본성의 타락과 세상의 유혹을 생각하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그에게 행하신 은총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마음속에 말씀에 대한 사랑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약속을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율법도 사랑했고, 속사람을 따라 그것을 즐거워했다.
Ⅱ. 이에 대해 제거할 수 없는 증거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생각하고 싶어한다. 이에 의해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의 “묵상”임이 증명된다.
그는 율법서를 읽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읽은 것을 그의 생각 속에서 소화했고, 옥토에 넣는 것같이 머리에 넣었다.
그의 묵상은 조용하고 고독하고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밤에만이 아니라, 사업과 동료로 가득 찬 낮에도 행해졌다. 아니 “종일” 묵상했다.
어떤 좋은 생각은 그의 일상의 생각으로 짜여 있으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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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지혜의 근원(시 119:98-100)
우리는 다윗의 배움에 관한 설명을 본다. 그 배움은 애굽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실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것이다.
Ⅰ. 그가 배움을 얻은 좋은 방법을 보자.
그는 젊었을 때 시골에서 목동으로서 하던 일을 기억했다. 그의 소년시절부터 궁정과 진영에서 하던 일을 모두 기억했다.
어떤 방법으로 크게 배울 자료를 얻었는가? 그는 그가 어떻게 거기에 도달했는지 말해 주고 있다. 그는 그것을 조물주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얻었다.
“주께서 나를 지혜롭게 하시나이다.”
모든 진정한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그의 계명에 의해”, “그의 증거에 의해” 지혜를 얻었다.
지혜는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며, 모든 선한 행실을 위해 하나님의 사람을 양육케 한다.”
1. 그의 영원한 동반자로 삼았다.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하며, 영원히 나의 마음과 나의 눈에 있나이다.”
선한 사람은 그가 어디에 가든지 성서를 가지고 있다. 손에 가지고 가지 않더라도 그의 머리와 마음속에 지니고 다닌다.
2. 그의 생각의 즐거운 주제로 삼았다.
학자들이 즐거움을 위한 묵상의 대상으로 그들의 사상을 연구하는 것과 같은 “묵상”일 뿐만 아니라, 사업가들이 올바른 경영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자신들의 사업을 가장 좋은 방법으로 경영하기를 생각하는 것과 같이 그의 “묵상”이 되었다.
3. 그의 모든 행동을 다스리는 규범으로 삼았다.
“내가 주의 법도를 지키나이다. 즉, 내가 모든 일에서 나의 의무를 인식하나이다.”
지식을 증진하는 가장 좋은 길은 모든 진지한 거룩함에 있고, 거기에만 풍부함이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뜻을 행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교훈을 알게 될 것이며”, 그 뜻을 더욱더 잘 알게 될 것이다(요 7:17).
진리를 사랑함은 진리의 빛을 준비함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Ⅱ. 그가 깨달음으로써 성취한 위대한 탁월성을 보자.
하나님의 계명을 연구하고 실천함으로써, 그의 규범으로 삼음으로써, 그는 “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는”(삼상 18:14) 법을 배웠다.
1. 그는 그의 대적자들을 능가했다.
하나님은 이러한 방법으로 그를 대적자들보다 더 현명하게 해, 대항하는 그들의 계책을 좌절시키고 패배 당하게 했다.
하늘의 지혜는 마침내 세속적인 정책에 대한 문제점에도 미친다.
우리는 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을 우리편에 두고, 그를 우리 친구로 삼아 그를 적으로 삼는 자들보다 확실히 지혜롭게 된다.
우리는 계명을 지킴으로써 우리의 대적자들이 빼앗아간 마음의 평화와 고요를 되찾을 수 있으며, 그들보다 더 현명하게 된다.
2. 그는 그의 “스승”을 능가했다.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은 것을 이해했다. 그는 그의 행위를 책망하며 그에게 가르쳐준 그의 스승들을 능가하고(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의 문제를 처리했고, 결국 올바른 방법으로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처리했다. 그러나 그들은 좋지 않게 처리했다), 또한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입에는 지혜를 담았으나 율법 연구를 소홀히 하고, 자기들의 영광과 수입을 생각하며 신앙의 형식만을 유지하려 했던 제사장들, 레위 사람들과 같은 그의 스승들을 능가했다.
성경을 연구했던 다윗은 그들보다 더욱 지혜롭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어렸을 때 스승들을 능가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들이 쌓았던 기초 위에 성서의 도움으로 성장해서, 그들을 가르칠 수 있게, 그들 모두를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이제 젖이 필요한 유아가 아니라,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게 되었다”(히 5:14).
실제적으로 스승들보다 승하도록 발전하는 것은 스승에 대한 수치가 아니라 그들에 대한 영광이다.
우리는 묵상함으로써 자신들을 가르치며, “명철함이 우리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게 된다.”
우리는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우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그는 “노인들”을 능가했다.
그 시대의 노인들은 물론(그는 젊었고, 엘리후와 같이 그들은 매우 늙었지만 그는 많은 연장자들보다 하나님의 율례를 지킴으로써 더욱 지혜를 쌓았다. 욥 32:7-8), 그 이전 시대의 노인들보다도 승했다.
노인들의 금언을 인용했지만(삼상 24:13), 하나님의 말씀은 그에게 전승에 의해 배울 수 있는 것과 선조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모든 학식보다 더욱 많은 것을 이해하게 해주었다.
간단히 말해, 씌어진 말씀은 교회의 박사와 교부들, 모든 스승과 노인들보다 하늘로 인도하는 확실한 안내자가 된다.
그리고 거룩한 문서들은 모든 문서들보다 더 많은 지혜를 가르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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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길과 의의 길(시 119:101)
Ⅰ. 죄의 행실을 피하려는 다윗의 관심이 나타나 있다.
“내가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악한 길은 내게서 옆으로 비켜섰나이다. 내가 유혹에 빠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나는 나 자신을 교정하고 뒤로 물러섰나이다.”
비록 넓은 길이었고 푸른 길이며, 많은 사람들이 걷는 길이라 할지라도 죄 된 길이기 때문에 그것은 악한 길이었다.
그는 그 길로부터 발을 금하고, 그 길의 끝을 예측하고 있다.
그의 관심은 우주적인 것이었다. 그는 모든 악한 길을 멀리 했다.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좇아 스스로 삼가 강포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였나이다”(17:4).
Ⅱ. 의무의 길을 찾으려는 그의 관심이 있다.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하며, 범하지 아니하나이다.” 그가 죄를 삼간 것은 다음의 이유 때문이다.
1.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의 규범으로 삼았다는 증거다.
2. 경건을 훈련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방편이었다.
죄 아래 있거나 곁길로 갈 때는, 어떤 위로나 담대성을 가지고 그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거룩한 의무에서 하나님을 모실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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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고수함(시 119:102)
Ⅰ. 다윗이 자기 신앙에 충실한 모습이 나타나 있다.
그는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이외의 다른 규범을 선택하지 않았고, 고의적으로 그 규범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시험의 때에도 하나님의 법도를 끊임없이 고수하는 것은 우리의 성실에 대한 좋은 증거가 된다.
Ⅱ. 그 불변성의 이유가 있다.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즉 그것은 내가 배운 하나님의 교훈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가르침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만족스럽게 여깁니다. 그러므로 나는 고수합니다. 그러한 가르침을 받도록 해주심은 내 마음에 하나님의 은총이었나이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을 배웠다. 이해(명철)를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배운 자들, 그들만이 그들이 배운 것들을 끝까지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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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보다 더 단 말씀(시 119:103-104)
Ⅰ.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취한 놀라운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
그것은 “맛이 달아 꿀보다 더 달았다.”
영적인 맛과 내적인 향기와 하나님의 것에 속한 풍미가 있으며,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없는 경험에 의해 우리 자신들에게 그 증거가 있다.
우리가 “친히 그의 말씀을 들었다”(요 4:42).
이러한 성서의 맛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달며, 어떤 육욕의 만족보다, 심지어 가장 맛있는 것보다 더 달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과 은총의 발견에서 얻게 된 만족을 표현할 말이 없다는 듯이 말한다. 어떤 즐거움도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Ⅱ.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얻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이득과 도움이 있다.
1. 그에게 좋은 머리를 주었다.
“주의 법도로 인하여 내가 진리와 거짓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도록 명철케 되었나이다. 그리하여 내 자신의 삶의 행위에서 실수하지 않고, 남을 권면하는 데에 실수하지 않게 되었나이다.”
2. 그에게 좋은 마음을 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진리를 이해하였기 때문에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나는 견고하게 그리로 다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하였나이다.”
(1) 죄의 길은 거짓된 길이다.
그 길을 따라 걷는 모든 자들을 기만하며, 파멸시킨다. 그것은 나쁜 길이지만, 사람에게는 옳은 길처럼 보인다(잠 14:12).
(2) 죄의 길을 미워하며, 거짓된 길이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 모든 선한 사람의 성격이다.
그는 그 길에서 발을 금할 뿐만 아니라(101절), 그것을 “미워하며”, 그것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그것을 무서워한다.
(3) 죄를 죄로서 미워하는 자들은 모든 죄를 미워하게 되며, 모든 거짓된 길을 미워하게 된다.
모든 거짓된 길은 파멸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4)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많은 명철을 얻으면 얻을수록, 죄에 대한 우리의 증오는 더욱 깊게 된다(“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했다. 욥 28:28).
우리가 성서를 더욱 가까이 하면 할수록 시험에 대처할 수 있도록 잘 양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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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주시는 말씀(시 119:105)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살펴볼 수 있겠다.
Ⅰ. 하나님 말씀의 본질과 그것을 세상에 주는 커다란 목적이 있다.
그것은 “등이요, 빛이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들에 대해 알려주고 있다.
우리에게 무엇이 어긋나며, 위험스럽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과업과 걸어야 할 길을 인도해 준다. 실로 세상은 주의 말씀 없이는 어두운 장소가 된다.
우리가 곁에 두어야 할 등, 특별히 사용하기 위해 우리의 손에 들어야 할 등이다(잠 6:23).
계명은 성령의 기름으로 계속 불타오르는 등이다. 그것은 마치 성소에 있는 등과 같으며, 이스라엘에 비추어진 불기둥과 같다.
Ⅱ. 우리에겐 유용하게 사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은 “우리 눈의 빛이며, 두 눈을 즐겁게 해주고, 우리의 머리를 묵상으로 채울 뿐만 아니라, 우리의 발과 우리의 길에 빛이라.”
우리 대화의 올바른 질서를 가르쳐주며, 우리가 걷는 일반적이고도 특수한 발걸음을 스스로 택하게 해, 우리로 하여금 거짓된 길로 가지 않게, 올바른 길을 거짓된 발걸음으로 걷지 않게 한다.
진실로 그러한 등과 빛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인식할 때 우리는 우리의 발과 우리의 길을 인도하는 안내자로 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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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의무와 맹세(시 119:106)
Ⅰ. 다윗이 신앙에 관해 이해한 생각이 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의로운 규례를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그의 규례며, 무한한 지혜의 강화(講話)다.
하나님의 규례는 의로운 규례며, 영원한 공평의 규범에 일치한다. 이를 주의 깊게 지키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Ⅱ. 신앙적이기 위해 스스로 부과한 의무가 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교훈에 의해 의무가 지워진 것을 그의 약속에 의해 스스로에게 의무를 지웠다.
“내가 맹세하고”(여호와께 내 손을 들었고, 내가 되돌아갈 수 없나이다), 앞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지키리이다.”
다음의 사실들을 주목해 보자.
1. 신앙적이기 위해 우리 자신을 엄숙한 맹세에 결속시킴이 우리에게 유익하다.
우리는 이 약속에 대한 진지성을 하나님께 간구하고, 충성의 의무를 약속하며, 이를 수행하지 않는다면 저주받음을 고백하고, 신민으로서 여호와의 주권에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
2. 우리는 종종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맹세를 기억하며, 우리의 맹세를 상기해야 한다.
3. 우리는 우리가 한 서약을 여호와께 주저하지 말고 수행해야 한다(정직한 자는 그의 말씀과 같이 선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의 마음에 맹세하지 말아야 하며, 우리가 그것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말로 다할 수 없는 우리의 상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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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중의 탄식(시 119:107)
Ⅰ. 다윗이 처한 슬픈 상황이 나타나 있다.
“나의 고난이 막심하다.”
영적으로 고난을 받고 있는 그는 그 상태를 특별히 비천하게 여기고 있다. 그는 큰 실망으로 고생하며, 싸움을 하고 있지 아니할 때도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경우는 많은 훌륭한 성도들도 종종 당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상황이 우리에게 닥치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Ⅱ.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의지해야 했던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했다.
“여호와여, 나를 소성케 하소서. 나를 살게 하시며, 나를 기쁘게 하소서. 나의 활동에 더 큰 부지런함을 주시사 고난에서 나를 소성케 하소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즉, 나를 고난에서 건지소서. 죽은 자로부터 생명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간구하며, 거기에 그의 소원을 두고, 소망을 정초시킨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다윗은 하나님께 그의 약속을 행할 것을 결심한다(106절). 그러므로 그는 겸손한 담대함으로 하나님께 그의 말씀을 자신에게 선하게 이루어주실 것을 간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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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기쁨으로 드리는 예배(시 119:108)
여기에서 우리는 신앙적 행사에 대해 두 가지 간구할 것을 배우고 있다.
Ⅰ. 그 행사가 열납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행하는 모든 일에서, 참석했든지 부재중이든지, 여호와께 용납되기를 목적해야만 한다.
다윗이 용납되기를 진지하게 기도하는 것은 그의 지갑이 아니라, 그의 “입”과 기도와 찬양에 의한 “낙헌제”이다.
“숫송아지를 대신한 입술”(호 14:2), “입술의 열매”(히 13:15), 이러한 것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영적인 제사다.
그것들은 “낙헌제”(자원해 드리는 제물)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들을 풍부하고 즐겁게 드려야 한다.
받아주시는 것은 이같이 기꺼이 드리는 마음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자유와 기쁨으로 이룩되면 될수록 그것이 그에게는 더 큰 즐거움이 된다.
Ⅱ. 그것들을 도와줄 것을 기도해야 한다.
“주의 규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우리는 그가 기뻐 받으시리라 생각할 만한 어떤 것을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 그러나 그가 기뻐하시겠다고 말씀하심을 따라 행할 수는 있다.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택을 열심히 간구하듯이, 우리 안에 작용할 하나님의 은총도 열심히 사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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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삶의 사이에서 드리는 탄식(시 119:109-110)
Ⅰ. 다윗은 그의 생명을 잃을 위험 속에 처했음을 말한다.
그와 죽음의 거리는 한 발짝밖에 안 될 만큼 밀착되어 있었다. “악인이 그를 해하려고 올무를 놓았기 때문이다.”
사울이 여러 번 그렇게 행했다. 그의 경건심으로 인해 그를 미워했기 때문이다.
사울은 다윗이 어느 곳에 있을지라도 그의 생명을 앗아가려는 계략을 찾았다.
바로 그들이 노리는 것, 그들은 드러난 힘으로 달성할 수 없었던 것을 배반으로 달성하기를 소망했다.
그리하여 다윗으로 하여금 “나의 생명이 항상 위경에 있다”고 말하게 했다.
그 위경은 한 “인간”으로서의 그에게 항상 있었다. 사실 우리 모두도 그러하다.
우리가 어느 곳에 있을지라도 죽음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우리 수중에 있는 것도 폭력에 의해 쉽게 강탈되며, 우리의 인생은 모래와 같아 저절로 우리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 흘러내린다.
또 그는 “전쟁에 능한 사람”이요, 병사였지만, 광야의 높은 곳에서 종종 생명이 위태로운 경우를 당했다.
특히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는 자”로서 미움을 당하고 박해받았을 뿐만 아니라, “항상 죽음에 넘기우고”(고후 4:11), “하루 종일 죽임을 당했다.”
Ⅱ. 다윗은 그의 신앙을 잃을 위험 속에는 있지 않았다.
그가 매 시간 이러한 위험 속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그의 의무에 충실했다. 이러한 어떠한 것도 그를 요동치게 할 수 없었다.
1. 그는 “법을 잊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잘 지킬 수 있었다. 그는 그 자신의 안전에 대한 많은 걱정 속에 생각과 마음의 여유를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것을 그의 생각 속에 언제나 새롭게 소유한다. 그리고 풍성하게 거하는 곳에서, 그것은 “생명수의 샘”이 된다.
2. 그는 하나님의 법도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것을 소망으로 삼았다. 그는 많은 충격을 견뎌냈고, 그의 존재의 기반을 지켰으며, 지금까지 그를 도운 은총이 죄에 빠지지 않게 앞으로도 그의 방황을 막아주실 것을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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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즐거운 기업(시 119:111-112)
시편 저자는 여기에서 실로 한 이스라엘인답게 가장 열정적인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에 밀착하고, 말씀에 의해 살고 죽을 것을 결심하고 있다.
Ⅰ. 그는 말씀 안에서 자기의 분깃을 찾고, 행복을 추구하며, 즐거워할 것을 결심한다.
“주의 증거(주의 말씀의 진리와 약속)로 내가 영원히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
그가 말씀에서 취한 현재의 즐거움은, 말씀 안에 포함된 좋은 것들이 그의 생각에 가장 좋으며, 그가 마음에 정한 보화였다는 증거가 된다.
1. 그는 하나님의 증거에서 영원한 행복을 기대했다.
하나님께서 그와 더불어 이루신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을 “영원히 기업으로” 삼았다.
그가 “주의 증거는 나의 기업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어도, “내가 주의 증거를 나의 기업을 위해 택했고, 결코 이생의 분깃으로 매혹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17:14-15).
하나님의 증거는 양자의 영을 받은 모든 자에게 기업이 된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라.” 주의 증거는 “영원한 기업”이다. 그것은 세상의 기업이 결코 아니다(벧전 1:4).
주의 증거를 영원한 기업으로 받아들인 모든 성도들은 주의 증거에 매혹되어 살아가며, 이 세상에서 가난해도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다.
2. 그는 주의 말씀 안에서 현재의 만족을 즐겼다.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 왜냐하면 “영원히 나의 기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소유물에서 자기의 분깃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에서 구하기 위해서는 선한 사람의 마음이 필요하다.
Ⅱ. 그는 말씀에 의해 자신을 다스리며, 거기에서 그의 법을 취하기를 결심한다.
“내가 주의 율례를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
하나님의 증거의 축복들을 받으려 하는 자들은 그의 율례의 속박 아래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의무의 길에서만 위로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의무는 다음과 같이 수행되어야 한다.
1. 완전한 승낙과 만족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 내가 그것을 싫어하는 마음을 정복하였나이다.”
선한 사람은 마음을 그의 일에 기울인다. 그럴 때 그 일은 잘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은혜로운 성향은 모든 복종의 훌륭한 원리다.
2. 끝까지 인내로써 수행되어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율례를 항상, 모든 경우에, 일상 생활의 의무에서, 거룩한 발걸음의 부단한 과정에서 수행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싫증내지 않고 “끝까지” 수행하기를 원했다. 이렇게 함은 완전하게 여호와를 따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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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시 119:113)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본다.
Ⅰ. 죄의 발생과 죄의 처음 기원에 대한 다윗의 공포. “내가 두 마음을 품는 자를 미워하나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 중에 두 마음 품는 자를 미워하려 한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서는 그것을 분별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품은 두 마음을 미워했다. 모든 선한 자는 자기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마음을 품는 것은 아무리 작을지라도 죄가 되며 해침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마음을 증오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선한 것으로부터 마음을 분열시킬 뿐만 아니라, 모든 악을 향해 문을 개방시키기 때문이다(렘 4:14). 비록 다윗이 두 마음 품는 것에서 자유했다고 말할 수 없더라도 미워했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는 찬성하지 않았고, 환대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할 수 있는 한 막으려 했고 억제하려 했다. “내가 행하는 악을 허용할 수 없다.”
Ⅱ. 의무의 규칙에 있는 다윗의 기쁨. “내가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 주의 법은 두 마음 품는 것을 금하며 위협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의 두 마음 품는 것을 다스리게 되며, 모든 율법에 반대되는 것을 더욱 미워하게 된다. 우리가 주의 깊게 두 마음에 대항하면 할수록, 우리가 사랑하는 율법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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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보호하심(시 119:114)
Ⅰ.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호하고 방어하며 돌보셨다. 그는 대적들이 그에게 큰 악을 끼쳤을 때 스스로 위로했다. “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사울이 추적할 때, 다윗은 가까운 은신처로 도피했다. 그는 전쟁터에서 방패로 자신을 보호했다. 이제 그에게 하나님은 위험으로부터 지켜주고 막아주는 은신처요, 방패가 되었다.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지켜주는 은신처요, 죄로부터 영혼을 지켜주는 방패가 되었다. 선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안전하다. 하나님은 그들의 “힘과 방패”요, “저희의 도움과 방패”가 되시며, “저희의 해와 방패”요, “저희의 방패와 큰 보상”이 되신다. 여기에서는 저희의 “은신처시요 방패”가 되신다. 그들은 믿음으로 그에게 숨을 수 있고, 그를 저희의 은신처로 삼아 안식할 수 있다. 그들은 그에게서 비밀 중에 보존된다. 그들은 믿음으로 그의 능력을 힘입어 대적들의 힘과 악에 대항할 수 있으며, 그는 모든 날아드는 창을 부러뜨릴 저희의 방패가 된다.
Ⅱ.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신뢰가 있다. 그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안전을 취하며, 편히 쉰다.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주의 말씀은 나를 주께 가깝게 해주며, 내게 주의 인자하심을 확증시켜 주었나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자들은 그의 권능의 은택을 받게 될 것이며, 그의 특별한 보호하심 아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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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 생활에 대한 결심(시 119:115)
Ⅰ. 경건한 생활을 하고자 하는 다윗의 굳고 강인한 결심이 나타나 있다. “나는 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리로다. 용감하게 결심하였도다! 성자와 같이 병사와 같이……” 진정한 용기란 모든 죄에 대한 굳은 결심과 모든 의무를 향한 견고한 결의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원하는 자들은 그들의 결심을 자주 새롭게 해야 한다. “나는 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리로다.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하든지간에 나는 이것을 행하리로다. 내가 홀로일지라도, 나를 둘러싼 모든 자가 행악자일지라도, 그리고 나를 버릴지라도 나는 이것을 행하리로다. 지금까지 내가 무엇을 행했을지라도 나는 미래를 위해 하나님께 가까이 가리라. 그 계명이 하나님, 나의 하나님의 계명이므로 나는 그것을 지키리로다. 그는 하나님이시며, 내게 명령하실 수 있도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며, 오직 내게 유익한 것을 명령하실 것임이로다.”
Ⅱ. 그 결심에 따라 악한 친구들과 작별한다. “너희 행악자여, 나를 떠날지어다.” 다윗은 선한 통치자로서 행악자들에게 위협이 되었으나, 많은 행악자들은 그의 인격을 침해했고, 심지어는 궁성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는 그들을 버리고, 더불어 대화하지 않을 것을 결심한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로 결심하는 자들은 행악자들과 아무런 교제도 하지 않는다. 악한 친구는 경건 생활에 대한 가장 큰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친구로서 악한 사람들을 택하지 말고, 그들과 더불어 친하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행하는 것과 같이 하지 말아야 하며, 그들이 우리에게 하려 하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1:1; 엡 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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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오른손(시 119:116-117)
Ⅰ. 다윗은 지속적인 은총을 간구한다. 그는 은총을 위해 여호와께 두 번 간구했다. “나를 붙드소서.” 그리고 또다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소서.” 다윗은 그 자신의 어떤 힘에 의해 그의 의무를 계속 수행할 수 없음을 보며,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보존되지 않는 한 죄에 떨어질 위험에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보존을 위해 붙들어 줄 은총을 진지하게 간구한다(41:12). 그는 그 은총으로 넘어짐과 피곤함에서 보호되어 악행으로 향하지 않게 되며, 선행을 역겨워하지도 않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주시지 않는다면 오래 지탱할 수 없고, 그가 우리를 인도해 주지 않는다면 멀리 갈 수 없다.
Ⅱ. 그는 열심히 은총을 간구한다.
1.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간구하며, 그 약속에 대한 그의 신뢰를 표하고, 그 약속으로부터 그의 기대를 토로한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소서. 나는 주의 말씀을 소망하나이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나는 내 소망으로 부끄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소망하는 자들은 그 말씀이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의 소망은 그들을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다.
2. 그는 하나님 은총의 커다란 필요성과 그에게 가져다줄 커다란 이득에 대해 말한다. “나를 붙들어 살게 하소서.”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살아갈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붙들어주시지 않았다면, 그는 반드시 죄와 사망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의해 지탱된다면, 그는 틀림없이 산다. 그의 영적 생명은 유지되며, 영원한 생명의 표징이 된다.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위험으로부터, 위험의 공포로부터, “안전하게 되리이다.” 우리의 거룩한 보장은 하나님의 후원에 근거해 있다.
3. 그는 은총의 힘을 입고, 그의 의무로 나아갈 결심을 말하고 있다.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율례에 항상 주의하리이다. 결코 내 눈과 발을 주의 율례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리이다. 내가 주의 율례에 종사하리이다(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해석한다). 내가 주의 율례를 기뻐하리이다(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해석한다).” 하나님의 오른손이 우리를 붙드신다면, 우리는 그의 권능 안에서 우리의 의무를 부지런히 기쁨으로 계속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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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에 대한 심판(시 119:118-120)
Ⅰ. 사악한 자들과 “주의 율례에서 떠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그들은 다른 규칙을 그들의 법도로 삼고, 하나님을 통치자로 모시지 않으려 한다. 하나님의 율례에서 떠나는 모든 것은 확실히 하나의 실책이며 치명적인 것으로 판명된다. 이들은 “세상의 악인”들이다. 그들은 세상적인 것들을 추구하며, 세상에 저희의 보물을 쌓아두지만, 하늘과 하늘에 속한 것들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요 대적자들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대하시는가를 보자. 우리는 그들을 두려워하거나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1. 하나님은 “그들을 모두 짓밟으신다.” 하나님은 파멸, 즉 완전한 파멸과 부끄러운 파멸로 그들을 이끄신다. 그는 그들을 그의 발등상으로 삼으신다. 그들이 아무리 높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낮게 끌어내리신다(암 2:9). 그는 그런 일을 여러 번 행하셨으며, 앞으로도 행하실 것이다. 그는 교만한 자들을 꺾으시며, 그의 나라에 대항하는 자들을 물리치실 것이기 때문이다. 교만한 박해자들은 그의 백성들을 짓밟지만, 조만간 그가 그들을 짓밟으실 것이다.
2. 하나님은 “그들을 찌끼같이 버리신다.” 악한 사람들은 찌끼와 같다. 찌끼는 광석에 좋은 금속과 섞여 있지만, 그리고 좋은 금속과 같은 품질로 보이지만, 분리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평가로 그들은 세상의 무가치한 것들 즉 찌꺼기와 폐물이며, 훌륭한 금과 오물과의 차이처럼, 의로운 자와 비교될 수 없다.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는 날이 오고 있다(마 13:49). 그러므로 그때 그들은 “의인의 회중에서”(1:5) 아무런 자리도 차지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때 그들은 찌꺼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인 영원한 불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악한 자들은 때때로 이 세상에서 교회의 견책에 의해, 통치자의 칼이나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찌끼같이 제하여질 것이다”(잠 25:4-5).
Ⅱ. 심판의 원인이 나와 있다.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신다. 그들이 “주의 율례에서 떠났기” 때문이다(말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그 저주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저희 궤사가 허무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율례에 반대하는 거짓된 규범을 세움으로써 자신들을 기만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한 척하는 위선과 간교하고 해로운 속임수로 다른 사람들을 속이려 하기 때문에 그의 율례에서 떠나고 있다. “저희의 간교는 거짓이니이다”(하몬드 박사). 그들의 최상의 정책은 배반과 불신이다. 진리의 하나님은 이것을 미워하시며 심판하신다.
Ⅲ. 다윗은 이러한 심판을 향상시킨다. 그는 심판을 깨닫고 그로부터 교훈을 받았다. 악한 자들의 파멸은 다음과 같은 것을 증진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1.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사랑을 보자. “나는 죄로 인해 초래되는 것을 보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의 증거를 사랑하나이다. 주의 증거는 나로 하여금 그런 위험한 길에서 숨게 하시며, 멸망의 길에서 나를 지키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죄와 죄인들에 대한 그의 심판에서 성취된 것을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증거를 사랑해야 한다.
2.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그의 두려움을 보자. “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함으로 떠나이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하심 아래 있는 자들을 모욕하는 대신 스스로 겸손하게 되었다. 사악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관해 읽고 듣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하게 하는가?
(1) 그의 두려운 위엄을 존경하고, 그를 경외하게 한다.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삼상 6:20).
(2) 그를 대적하지 않게 하며, 그의 진노를 받게 됨을 두려워하게 한다. 선한 사람들은 “주를 두려워함으로” 죄를 억제할 필요가 있다. 특히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되며”, 위선자들이 발견되고, “찌끼같이 버리실 때”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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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를 행하는 자의 압박(시 119:121-122)
다윗은 하나님께 호소한다.
Ⅰ. 그가 결코 악을 행하지 않았다는 증언을 함으로써. 그는 진실로 “내가 공과 의를 행하였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즉, “나는 양심적으로 저희에게 주어야 할 모든 것을 갚았고, 저희의 어떠한 권리도 무력이나 사기에 의해 침해하지 않았나이다.” 그가 왕으로 취임했을 때 “모든 백성에게 공과 의를 행하였다”(삼하 8:15). 개인적인 자격으로 사울을 만났을 때, 그에게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나이다”(삼상 24:11) 하고 호소할 수 있었다. 정직이 최상의 정책이며, 악한 시대에 우리의 즐거움임을 명심해 두자.
Ⅱ. 그가 결코 악을 행하려 하지 않았다는 판단으로써. 그는 압박을 당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의를 행하고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의를 행하실 것과 그의 대적자들에게 복수해 주실 것을 간구한다. “주의 종을 보증하사 복을 얻게 하소서. 나를 넘어뜨리고 파멸시키려는 자들에게서 나를 보증하소서.”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를 복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결국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나타나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우리의 보증이다. 만일 그가 그러한 분이시라면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모든 세상에 대한 우리의 보증이시다. 하나님의 권능과 인자하심이 우리의 보호와 구원에 참여하신다면 누가 또는 무엇이 우리를 해칠 것인가? 그는 그를 위해 무엇을 하실 것인가를 하나님께 지시하지 않았다. 단지 무한한 지혜가 가장 좋은 것을 보는 태도와 방법으로 “복을 얻게 하소서”라고만 말한다. 단지 “나를 압박자에게 붙이지 마옵소서”라고 했다. 다윗이 비록 “공과 의를 행하였다”고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많은 적들이 있었다. 그러나 친구가 되어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그는 저희가 그를 대적하는 뜻을 갖지 않기를 소망했다. 그러한 소망에서 다시 기도한다. “교만한 자가 나를 압박하지 못하게 하소서.” 가장 훌륭한 사람 중의 하나인 다윗도 하나님을 멀리서 바라보는 교만한 자들에 의해 압박 당했다. 그러므로 박해받는 자의 상황은 박해하는 자보다 훨씬 더 낫다. 마침내 그렇다는 사실이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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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구원을 사모함(시 119:123)
박해를 받고 있는 다윗은 여호와의 구원을 기다리며 소망하고 있다.
Ⅰ. 그는 그때가 늦게 오리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 그의 눈은 구원으로 향했으며, 오랫동안 그런 상태로 있었다. 그는 하늘로부터 오는 도움을 갈구했지만(우리는 구원을 다른 길에서 갈구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구원은 그가 기대한 것처럼 빨리 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눈은 피곤하기 시작했고, 때때로 절망에 빠지려 했다. 그가 갈구했을 때 구원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기들의” 때가 지나갔을 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다가 지치는 것은 종종 선한 사람들의 결점이기도 하다.
Ⅱ. 그렇지만 그는 구원이 틀림없이 온다고 소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의로운 말씀”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말씀에 의해 얻어지는 구원 이외의 다른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 그 말씀은 의로운 말씀이기 때문에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눈이 피곤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 위에 집을 짓는 자들은 지금은 비록 실망할지라도 적당한 때에 그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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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가르치심을 사모함(시 119:124-125)
Ⅰ. 하나님의 가르치심에 대한 다윗의 간구가 있다.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내게 나의 모든 의무를 알게 하소서. 내가 회의 중에 있을 때, 내 의무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지 못할 때 나를 가르치시며, 그것을 내게 분명히 하여주소서. 내가 고난을 당하고 억압당하며, 내 눈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나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 가운데 내 의무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소서.” 어려운 때 우리는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보다 우리가 행해야 하는 것이 더욱더 알려지기를 갈망해야 하며, 성서의 예언에 관한 지식보다 성서의 교훈에 관한 지식으로 더욱 인도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방법은 다음과 같은 간구에 암시되어 있다. “깨닫게 하사”(하나님의 빛을 받기에 용이한, 새로워진 이해를 내게 주소서) “주의 증거를 알게 하소서.” 우리가 하나님의 증거를 알 수 있는 이해를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특권이다. 하나님의 증거를 가장 잘 아는 자들은 더욱더 알기를 갈망하며, 주의 증거를 가르쳐주실 것을 하나님께 더욱 열심히 간구한다. 그들은 결코 충분히 알았다고 생각지 아니한다.
Ⅱ. 이러한 간청을 실시해 달라는 그의 간구가 나타나 있다.
1. 그는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구한다. “주의 인자하신 대로 주의 종에게 행하소서.” 가장 선한 성도들은 어떤 축복을 위한 간구에서도 이것이 가장 좋은 간구라고 생각한다. “주의 인자하신 대로 나로 그것을 갖게 하소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아무런 은총도 받을 만한 자격이 없고, 빚진 자에게 하는 것처럼 주장할 수도 없다. 오히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에 맡기고 위탁한다면 가장 안전하게 될 것이다. 특히 우리가 가르침을 받기 위해 그에게 갈 때 우리는 그것을 자비로서 간구해야 하며, 가르침을 받음으로써 우리가 잘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2. 그는 그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한다. “나는 주의 종이오니 주를 위해 행할 일을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행하고, 잘 행할 수 있도록 내게 가르치소서.” 자기의 일에 대해 어찌 할 바를 모른다면 종은 그의 주인이 자기에게 가르쳐줄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일이 그의 능력 안에 있다면 이행하도록 한다. 다윗은 “여호와여, 내가 주를 섬기기를 갈망하나이다. 내게 그 방법을 가르치소서” 하고 말한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종으로 그 뜻을 행하기로 결심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증거를 알게 될 것이다(요 7:17, 2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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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때의 간구(시 119:126)
Ⅰ. 사악한 자들의 무모한 불경건을 탄식한다. 다윗은 스스로 거룩한 분노를 가지고 하나님께 겸손하게 고백한다. “여호와여, 주의 법을 폐한 자들이 있으며, 저희가 주님과 주의 나라를 무시하고 주의 계명의 의무를 취소하고 공허하게 하였나이다.” 연약하며 죄를 짓는 자들은 법을 위반하지만, 뻔뻔스러운 죄인들은 사실상 법을 피한다. 그리고 “여호와가 누구냐?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전능자가 무엇이냐?”고 말한다. 거룩한 자는 계명에 대해 죄를 지을 수 있으나, 악한 사람은 계명을 멀리하고 죄를 지으며, 하나님의 법을 폐지하고 자신의 욕정대로 행한다. 이것이 죄의 죄성(罪性)이며, 육적인 마음의 악성(惡性)이다.
Ⅱ.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변호하기 위해 나타나주실 것을 간구한다. “지금은 여호와의 일하실 때니이다.” 무신론자와 이단자에 대한 효과 있는 논박과 하늘에 대항해 말하는 자들을 침묵케 하기 위한 어떤 일을 하실 때다. 하나님이 일하실 때는 악이 가장 무도하며 불의의 정도가 충만한 때다. “내가 이제 일어나리이다. 여호와여, 말씀하소서.” 어떤 이들은 이렇게 읽으며, 원문도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여호와여, 주를 위해 일할 때니이다.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 모든 자를 위해서 여호와의 편에서 나타나실 때니이다. 신성모독과 비도덕의 위협적인 성장에 대해서 나타나실 때니이다.” 우리는 침해받는 신앙의 권익을 뒷받침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께 그 자신의 손으로 그 일을 맡아주실 것을 간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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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사랑하는 자의 윤리(시 119:127-128)
다윗은 시편에서 자주 그러했던 것같이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에 대해 가졌던 커다란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 그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해 다음의 사실들을 관찰해 보자.
Ⅰ. 그의 사랑의 정도. 그는 성경을 돈을 사랑했던 것보다 더욱 사랑했다. “금 곧 정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금, 곧 정금은 거의 모든 인간들이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저희의 눈을 현혹시키며 매혹케 하는 것은 없다. 그것은 정금이며 저희의 눈에 아름다운 것이다. 그들은 금을 얻고 보존하기 위해 저희의 영혼과 저희의 하나님과 저희의 모든 것을 내건다. 그러나 다윗은 돈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목적에 응답해 주는 사실을 보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영혼을 풍요케 해준다. 그러므로 그는 금보다 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다. 금이 할 수 없는 것을 그를 위해 이루어주었으며, 세상의 부요함이 그를 실망시킬 때 그를 세워주었기 때문이다.
Ⅱ. 그의 사랑의 기반. 그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사랑했다. 하나님의 계명이 옳고 합당하고 공평하며 끝까지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의 계명은 모두 이렇게 이루어질 것이며, 거기에서 아무런 결점도 발견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내포하고 있고, 그의 뜻의 계시이기 때문에 주의 계명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이와 같이 “주의 법도를 바르게 여긴다면”, 우리는 속사람을 따라 그 안에서 기뻐하게 될 것이다.
Ⅲ. 이러한 사랑의 결실과 증거. 그는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였다.” 올바른 하나님의 법도에 직접적으로 반대되는 죄의 길은 거짓 행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도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자들은 거짓 행위를 미워하고, 그것에 동화되기를 원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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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p,n<(5315, 네페쉬) 숨쉬는 존재, 영혼, 생명 등
네페쉬(명여)는 '숨쉬다, 원기를 회복하다'를 뜻하는 동사 나파쉬(vp'n: , 5314)에서 유래한 명사이며, '숨쉬는 것이나 호흡하는 존재(피조물), 영혼, 생명' 등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750회 나온다.
(a) 네페쉬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간에 육체를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단어는 어떤 경우에서(창 36:6) 소마(몸 body)로 번역되어질 수 있다. 네페쉬가 프쉬케로 번역되어 지면 프쉬케는 '넓은 의미에 있어서 인간의 생명적인 것을 의미하며'(G.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1, 1962, 153), 다른 말로는 살아 있는 것을 뜻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살아 있는 혼'이라는 말을 읽게 된다(창 1:20, RSV, living creatures). 죽어가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밖으로 불어내거나(AV 'gives up the ghost' 영혼을 포기한다. 참조: 렘 15:9), 혹은 영혼을 쏟아 붓는다(애 2:12). 영혼은 죽는 자에게서 떠난다(창 35:18). 그러나 영혼(즉 생명)은 육체로 되돌아 올 수 있다(왕상 17:21). '영혼은 영혼으로'라는 것은 '생명은 생명으로'라는 것을 의미한다(출 21:23). 생명의 좌소로서의 피(Blood)는 실질적으로 '네페쉬'나 프쉬케와 동일할 수 있다(창 9:4 이하, 레 17:11, 레 17:14, 신 12:23). (G. Harder).
(b) "생물"(네페쉬 하이야)는 창 1:20에서 물에 사는 생명체 피조물에 대해 창 1:24에서는 땅에 사는 동물에 대해, 창 2:7에서는 사람(개역: "생령")에 대해, 창 9:10에서는 새들과 땅에 사는 동물에 대해, 창 9:16에서는 사람과 동물에 사용되었다. 동일한 용어가 '모든 생물', 그리고 '사람'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런 경우에 네페쉬 하이야라는 용어는 생명을 가지고 호흡하는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일 용어 '네페쉬 하이야'가 모든 생물에 사용되었다고 해서 모든 생물이 우리 인간과 같은 혼이나 영혼을 가졌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분명히 네페쉬의 기능과 능력에 있어서 곤충과 물고기의 네페쉬와 소, 말 등의 네페쉬와 사람의 네페쉬가 다른 것이다. 기계의 가치와 능력에 따라 장착되는 동력이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있다.
특히 인간적 존재는 본래부터 충동, 욕구, 소망, 의지를 포함하기 때문에 네페쉬는 그런 의미들로도 사용되었으며, 한 개인의 생명을 의미한다. 소생시키고 회복시키는 대상으로서 네페쉬는 영혼(soul)이라는 개념과 생명 life이라는 개념을 모두 포함한다(R. V. Harris의 구약원어사전).
동물의 네페쉬와 사람의 네페쉬가 다른 것은 우선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대한 기사가 밝혀준다. 사람은 창조될 때 동물들과는 달리 생명의 숨(니셰마트 하임, 생명의 숨)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다. 그래서 '네페쉬 하이야'가 된 것이다. 이는 사람의 네페쉬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과 창조 의지에 의해 창조된 동물의 네페쉬와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의 네페쉬와 동물의 네페쉬의 차이를 밝혀주는 또 하나의 성구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전 3:19-21을 보면 "19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것이 헛됨이로다 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 누가 알랴"
전 3:19에서 단지 한 사건, 즉 죽음이 사람과 짐승에게 똑 같이 찾아온다는 것, 전 3:20에서 '단 한 곳으로 간다는 것은 일종의 무덤을 가리킨다.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인간이건 짐승이건 간에 예외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전 3:21에서 사람의 네페쉬와 동물의 네페쉬가 돌아가는 곳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전도서에서는 루아흐[영]가 사용되었지만 문맥상 네페쉬[혼]를 의미한다). 일부 학자들이 전 3:21을 회의적으로 해석하지만 매우 분명하고 명확한 어투로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간다'고 말한다. 이 사실을 누가 알겠는가? 오직 하나님 선만이 아신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자는 이 사실을 안다. 그러면 솔로몬도 알고 있었다.
(c) 네페쉬는 자아 생명의 민감한 부분으로서 감정, 사랑(Cant. 1:7), 갈망(시 63:1), 기쁨(시 86:4)의 좌소를 의미한다. 이것은 어떤 것을 더 숙고해야 할 문제는 아니다. '영혼'은 그 생명의 운동과 감정의 여러가지 표현을 나타낸다. 영혼은 인간의 내적 능력을 결합한 요소이다. 따라서 "너의 영혼을 다하여"라는 말이 성립된다(신 13:3). 영혼의 내부에서 음식에 대한 욕망(신 12:20, 신 12:21), 육체의 욕망(렘 2:24), 살인과 복수에 대한 갈망(시 27:12)이 거주하고 있다. 영혼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즉 그것은 울고(시 119:28), 눈물을 흘리며(욥 30:16), "오래" 참는다(욥 6:11). 그러나 지식과 이해(시 139:14), 생각(삼상 20:4)과 기억(애 3:20)도 마찬가지로 영혼에 자리잡고 있다. "영혼"은 전 인격 곧 인간의 전 자아의 총체이다. 따라서 "영혼"은 의미상 "나 자신" 또는 "네 자신"과 동일시 될 수 있을 정도이다(삼상 18:1). 창 2:7에서 네페쉬는 '사람' person, 혹은 '존재' being를 의미한다.
살아있는 피조물 역시 혼(soul)으로 묘사되어 질 수 있다. 집합적 의미에서의 살아있는 모든 것, 곧 모든 생물들(레 11:10). 율법에서 영혼(soul)이라는 말은 특별한 법규와 관련된 당사자를 의미한다(레 4:2, 레 5:1, 레 5:2, 레 5:4, 레 5:15). 사람들을 계수할 때 영혼들(souls)이라고 계수한다(출 1:5, 신 10:22). 구약성경이 죽은 사람을 가리켜 그 사람의 영혼이라 말하며 따라서 이러한 표현으로써 죽은 시체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영혼이 몸과는 별개라는 개념 또는 죽을 때 영혼이 몸에서 분리된다는 개념에 구약성경이 전혀 친숙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해 주고 있다(민 6:6). (G. Har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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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84:2...내마음과 육체가...곧 나의전존재가]]
***레브(심령=영 : 르웨크/프뉴마spirit +정신=혼 : 네페쉬/프쉬케soul) + 몸 : 게셈/바사르/소마…---네샤마(루아흐…생기 : 하나님의 영….생명주는
영=성령)을 게셈/몸의 코에 불어넣으심으로 인해 창발된 것이
마음(레브…혼<지정의>을 가진 영<직관양심영교>)
***게셈(아람어)=바사르(히)/소마…생명체의 몸 : 식욕-성욕-수면욕-물욕-명예욕의 5욕 + 충동 + 5감(색성향미촉감)...생명주는 영HS 따를때 균형조화 회복
***너희몸을 산제사로...여기에서 몸 = 육체 +마음의 전인을 표상... cf>죽을 몸 죄의 몸 …사르크스=mortal body 육체…생령/산혼이 된지라 ==>-- 육체가 됨이라 [[육체가 됨이라..육체=죽을 몸/죽은 몸/죄의 몸..활동의 작동중심이 영에 내주하시는 Q생명의 HS에서 육체의 죄성/육신으로 이동 !!]] .... HS따름으로써 죄를 JC이름으로 대적하여 이김!! JC는 사르크스로 성육신하셨으나 죄는 없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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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삼하 7:1~12....제목 : 너의 집을 세우리라
본문 말씀은 구약성서 신학에서 다윗의 언약(Davidic covenant)이라고 쓸 정도로 유명한 말씀입니다. 구약은 신약, 새로운 언약,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을 앞서있는 옛 언약으로 보통 우리가 말하는 모세의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구약 안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언약, 복음의 언약의 그림자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다윗의 언약입니다.
다윗의 언약을 보면 다윗이 무엇을 하면 내가 너를 내 백성으로 삼겠다, 내 아들로 삼겠다가 아니라 다윗의 행동을 보지 않으시고 다윗의 믿음을 보시고, 다윗의 순종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다윗을 축복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복음의 언약이다. 오늘 구약성경에 있는 예수그리스도에 새로운 언약, 신약의 그림자 다윗의 언약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래전에 프랭크 로바흐(Frank Laubach)라는 영성가가 있었는데 아프리카를 선교여행 하면서 아들에게 편지를 이렇게 썼습니다. “내 아들아, 네 자신에 작은 문제들과 의심을 위해 기도할 때 네 기도는 아주 얇고 작은 것이 된단다. 그러나 다른 이들을 돕기 위해 네 자신을 나의 통로로 의탁할 때 네 기도는 즉시 크고 고결한 것이 된단다.”
우리모두 신앙과 신학의 훈련을 통해서 작은 기도에서 큰 기도를 하는 주의 언약의 백성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1924년에 파리 올림픽 400미터 종목에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 에릭 리델이라는 사람이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는 400미터가 주 종목이 아니라, 영국 최고의 100미터 달리기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100미터 결승전이 주일날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주일을 지키기 위해 경기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영국이 금메달을 딸 수 있는 기회를 버린 매국노라고 영국 전역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그 날 리델은 파리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이사야서에 있는 “주를 앙모하는 자는 달려가도 지치지 아니하고 독수리같이 날아오리라”고 하는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하면서 주일성수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다음 주에 있는 400미터 결승에 출전했습니다. 그는 400미터가 주 종목이 아니었기 때문에 결승에 진출도 못 합니다. 그런데 400미터에 마땅한 선수가 없었기 때문에 영국의 올림픽위원회에서 에릭 리델에게 기회를 준 것입니다. 그에 대한 소문이 퍼졌고, 에릭 리델이 출발선에서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키 큰 한 미국 선수가 와서 쪽지를 전해 주었습니다. 그 쪽지에는 사무엘상 2:30 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에릭 리델이 그 말씀을 손에 쥐고 달렸고, 물론 금메달을 따게 되었습니다.
Jenny라고 하는 에릭의 동생에게 에릭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God you made me for a purpose, 하나님 당신은 나를 어떤 목적을 위해 지으셨습니다. But you also made me fast. 또한 당신은 나를 빠르게 달리게 만드셨습니다. When I run, 내가 달릴 때, I feel your presence. 나는 당신의 임재를 느낍니다.
에릭 리델은 금메달을 딴 후에 중국 선교사로 헌신하였고,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모르게 순교했습니다.
1. 오늘 삼하 7:1~17의 성경말씀을 보면, 다윗왕은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으로 삼킨바 된 사람”(시 69:9, 요 2:17)입니다.
본문을 보면 다윗 왕이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 또는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성이 하루 이틀만의 일이 아닙니다. 유년기부터 전 생애를 거쳐서 죽을 때까지 지속된 그러한 열심인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 왕 당시는 사사시대 말기에서 사울 왕이 다스리는 왕정시대로의 전환기였습니다. 엘리 제사장에 무능하고 사악한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자신들의 잘못된 정치에 인해서 실로 성전의 하나님의 법궤를 이방 블레셋에 사람들에게 탈취당하는 수모를 겪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서 초대 이스라엘에 왕으로 등극한 사울은 왕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법궤 회복에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도리어 예배를 자신의 전쟁과 정치적 승리를 위해 동원하는 독재자였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은 원수들이 출몰하는 나라가 되었고 사울시대에 하나님의 은총이 빼앗긴 시대 하나님의 이름이 다시 모욕당하는 시대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 제일 처음에 한 일이 길르앗여아림에 있던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다윗이 너무 기뻐서 바지춤이 내려오는 것도 모르고 춤을 추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자신이 왕궁에 편하게 살고 있는데 하나님의 법궤가 장막 가운데 있는 것을 안쓰러워하였다고 나옵니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에게 성전을 건축하겠다는 그의 구상을 밝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시대로부터 건축된 집에 살지 아니 하시고 하나님은 장막 가운데 계시며 백성과 함께 “다녔나니”하시며, 하나님을 위한 백향목 집을 건축하라고 명하신적이 한 번도 없었음을 상기시키셨습니다.
세상에 제국을 건설하게 되고 왕이 되고 황제가 되면 자기를 위해서 자기의 권력을 위해서 성전을 짓고 우상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도 처음에 그런 동기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단호하게 사람의 만든 건축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하나님의 백성 안에 기도하는 곳, 진정으로 예배하는 곳에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그것이 바로 성전이라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안에 있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이 주의 집을 위하여 품은 열성은 단순히 성전을 건축하겠다는 그러한 열심만은 아니었습니다. 시편 69편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사역에 전심전력을 다하다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시69:2), “까닭 없이 미워하는 자들이 머리털보다 많아졌으며”(시69:4) “부당하게 원수가 된 자들이 그를 끊으려 하였고”(시 69:4) “주를 위하여 비방을 받고 수치가 얼굴을 덮었다”(시69:7)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길 때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시험하고 유혹하고 넘어뜨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고자 할 때 수많은 원수들이, 복음의 원수들이 우리를 위협하고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덤벼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확 속에서도 다윗은 “주의 집을 위한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나에게 미쳤나이다”(시69:9)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은 주님의 사역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헌신을 뜻합니다. 요한복음 2:17에도 성전을 깨끗하게 하는 예수님을 가리켜 제자들이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라는 다윗의 말씀으로 기억했다고 하면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르치심입니다. 주님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교회를 당신의 몸과 그렇게 동일시 하셨습니다. 당신의 몸 된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 하나님에 공동체가 타락했을 때, 훼파 됐을 때 주님은 견딜 수 없는 거룩한 열정과 분노를 느끼시면서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켰다고 하십니다. 채찍을 들어서 장사꾼들을 몰아내고 타락한 교회를 꾸짖고 하나님의 정의를 외쳤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일을 했기 때문에 빌라도 법정에서, 가야바 법정에서 예수님은 성전을 훼파한 사람으로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 한 사람으로 그렇게 고소를 당한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 Church goer가 되지 말고 다윗처럼, 예수님처럼,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으로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으로 삼킨바 된 헌신의 사람이 됩시다.
2. 하나님은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인 자, 이 다윗에게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데려다,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았노라”(삼하 7:8)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은 출신 성분이 굉장히 미천합니다. 귀족 가문이 아닙니다. 베들레헴 가난한 소작농의 막내아들 즉, 하나님이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들판의 목동인 너를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그 당대에 하나님 백성의 CEO로 삼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에 주권자가 된 것은 정치 공작적 음모와 야합의 산물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 당시에 사람들에게 다윗의 왕권 장악과정과 그것에 대한 신적 보증은 그렇게 자명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울왕의 후예들과 수많은 귀족들과 수많은 권세가들이 다윗을 무너뜨리고 다윗을 넘어뜨리고자 모함하고 공격하고 핍박했습니다. 이러한 과정 가운데서 오늘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언약을 맺으시며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본문 8절의 재 확증의 말씀이 나온 것입니다. “내가 너를 데려다가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았다” 하나님이 너 다윗을 데려다가 미천한 신분에서 너를 끄집어내어 하나님인 내가 너를 이스라엘에 주권자로 삼았노라 즉,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인 것입니다.
9절은 다윗의 엄청난 군사적 업적과 제국적 위엄구축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결과라고 강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삼하 7:9)
다윗이 기가 막힌 환란과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에 주권자로 삼으심으로 다윗은 무엇보다도 자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주님을 바라보는 약자들이 가난한 자들이 수치를 당하고 욕을 보지 않게 되어서 기뻤다고 시편 69:6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의 승리는 단지 한 개인의 성공과 축복이 아니라 다윗이 선포하는 대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백성 모두의 승리요 성공이요 축복이 된 것입니다. 시편 69편에 나와 있는 다윗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 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 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생물도 그리 할지로다. 하나님이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시리니 무리가 거기에 살며 소유를 삼으리로다. 그의 종들의 후손이 또한 이를 상속하고 그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가 그 중에 살리로다” (시 69:32-36) 이는 다윗의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집을 위하는 열성자는 비록 처음에는 무수한 고난과 박해와 어려움을 당하지만 종당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주권자로, 능력자로, 성공자로, 승리자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성공과 승리는 사람들의 시기와 시샘의 대상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을 바라는 자들의 기쁨이요, 행복이요, 찬양거리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교만하여 내 힘으로 다 이룰 것 같이 하고자 할 때는 우리를 사용하시지 않으시나 우리가 다윗처럼 낮아질 때, 실패를 거듭하고, 더 이상 이 세상에서의 모든 소망이 끊어질 때, 바로 그 때가 하나님의 도우심이 시작되는 때임을 믿기 바랍니다. 그러니 믿고,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자가 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은 그런 자를 데려다가(어디서? 낮고 천한 데서, 실패의 나락에서) 주권자로, 성공자로, 승리자로 삼으실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자에게 “내가 너를 위해서 집을 지으리라”고 약속하십니다(삼하 7:11F, 12-13, 16). 하나님은 성전에 거주하지 않고, 다윗을 위해 지어주신 집, 즉 “영원한 왕조 안에 거주하실 것”임을 뜻합니다. 여기서 영원한 왕조라는 의미는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는 데 투신된 왕권, 왕실을 의미합니다.
“다윗왕가의 정의와 공평을 실천하는 신실함을 보인다면, 북이스라엘 왕국의 경우처럼 아홉 왕조가 교체하고, 열아홉 명의 왕들이 난립한 그런 혼란스런 왕국이 아니라, 다윗 왕조처럼 단일왕조가 이어지는 그런 복을 베푸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베푸신 영원한 집에 관한 말씀은 어디까지나 다윗의 후손들에게도 일관되게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의 통치를 대행하라는 책임을 안겨 주시는 말씀입니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자들에게 하나님은 어느 시대나 “내가 너의 집을 세우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약속의 말씀처럼 위대한 축복과 위로의 말씀은 다시 없습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누리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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