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10.30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시109.자애기도축복중보하는성도의환난고통섭리.HS의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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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시편109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내주여뜻대로549]..영혼의햇빛예수님60..구주예수의지함이542..너희죄흉악하나272..고통의멍에벗으려고255.. 374 380


 <자아 체계의 거듭남>[[[영적 참자아로 거듭남의 결과]]] 

@사탄-죄성/옛사람-세상(사탄적 체계 추종)에 매여 종노릇하는 참혹한 욕된 굴복 ==>@그리스도-(중생)HS과 하나된 영적 참자아-JC빼어닮는 성도들/기독교회(하나님나라), 진리로 자유함안에 순종 

=== @거절감/부족(부적당)감/고립(고독)감/수치(허망)감/두려움(불안감)/분노(원망/원한/불평불만)감 ===>@사랑/희락/화평(이김/극복-만족/자족/가치충족감)/오래참음/자비/양선/충성/온유/절제 [[정서[희노애락애오욕]감정/느낌, 지성//이성과이해(총명/명철/통찰/경청순종/깨달음)/지식과 지혜/동기와 지향/결단과 실행 + 성령과 하나된 새로운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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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 : 자기사랑-의-주장-자산) 옛본성따른 세상적 습관[=육적 옛자아의 흔적들]을 대적/배제하고 보혈 의지하여 회개하며 전존재적 삶에 오직 충만케 되기 원하시는 HS께 내어 비워드림으로써 HS의 찬양-기도-감동-인도를 따라 살기를 실행함의 나날 되게 하라]

*나는 날마다 죽노라*내가 그리스도와 함께....그리스도의 어떠하심 온전히 빼어닮기...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의 영광, 곧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혀의 말>도 바로 그 자신의 영광<됨됨이>...주여 내안에서부터 진정한 주인됨 이루소서.



1.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2.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3.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4.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5.  그들이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

6.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7.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8.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9.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10.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11.  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 그가 수고한 것을 낯선 사람이 탈취하게 하시며

12.  그에게 인애를 베풀 자가 없게 하시며 그의 고아에게 은혜를 베풀 자도 없게 하시며

13.  그의 자손이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

14.  여호와는 그의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의 어머니의 죄를 지워 버리지 마시고

15.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그들의 기억을 땅에서 끊으소서

16.  그가 인자를 베풀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하였기 때문이니이다

17.  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더니 복이 그를 멀리 떠났으며

18.  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더니 저주가 물 같이 그의 몸 속으로 들어가며 기름 같이 그의 뼈 속으로 들어갔나이다

19.  저주가 그에게는 입는 옷 같고 항상 띠는 띠와 같게 하소서

20.  이는 나의 대적들이 곧 내 영혼을 대적하여 악담하는 자들이 여호와께 받는 보응이니이다((자업자득))

21.  그러나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를 선대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나를 건지소서

22.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나의 중심이 상함이니이다

23.  나는 석양 그림자 같이 지나가고 또 메뚜기 같이 불려 가오며

24.  금식하므로 내 무릎이 흔들리고 내 육체는 수척하오며

25.  나는 또 그들의 비방 거리라 그들이 나를 보면 머리를 흔드나이다

26.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구원하소서

27.  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

28.  그들은 내게 저주하여도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 그들은 일어날 때에(부활의 때!!) 수치를 당할지라도 주의 종은 즐거워하리이다

29.  나의 대적들이 욕을 옷 입듯 하게 하시며 자기 수치를 겉옷 같이 입게 하소서

30.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31.  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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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새번역]시109 지휘자를 따라 부르는 다윗의 노래 

1.  (지휘자를 따라 부르는 다윗의 노래) 하나님,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잠잠히 계시지 마십시오.

2.  악한 자와 속이는 자가 일제히, 나를 보고 입을 열고, 혀를 놀려서 거짓말로 나를 비난합니다.

3.  미움으로 가득 찬 말을 나에게 퍼붓고, 이유도 없이 나에게 싸움을 걸어 옵니다.

4.  나는 그들을 사랑하여 그들을 위하여 기도를 올리건만, 그들은 나를 미워합니다.

5.  그들은 선을 오히려 악으로 갚고, 사랑을 미움으로 갚습니다.

6.  "악인을 시켜, 그와 맞서게 하십시오.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고발하게 하십시오.

7.  재판을 받을 때에, 유죄 판결을 받게 하십시오. 그가 하는 기도는 죄가 되게 하십시오.

8.  그가 살 날을 짧게 하시고 그가 하던 일도 다른 사람이 하게 하십시오.

9.  그 자식들은 아버지 없는 자식이 되게 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게 하십시오.

10.  그 자식들은 떠돌아다니면서 구걸하는 신세가 되고, 폐허가 된 집에서마저 쫓겨나서 밥을 빌어먹게 하십시오.

11.  빚쟁이가 그 재산을 모두 가져 가고, 낯선 사람들이 들이닥쳐서, 재산을 모두 약탈하게 하십시오.

12.  그에게 사랑을 베풀 사람이 없게 하시고, 그 고아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줄 자도 없게 하십시오.

13.  자손도 끊어지고, 후대에 이르러, 그들의 이름까지도 지워지게 하십시오.

14.  그의 아버지가 지은 죄 주님이 기억하시게 하시고, 그 어머니가 지은 죄도 지워지지 않게 하십시오.

15.  주의 감시가 잠시도 그를 떠나지 않게 하시고, 세상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16.  남에게 베풀 생각은 않고, 도리어 가난하고 빈곤한 자를 괴롭히며, 마음이 상한 자를 못살게 하였습니다.

17.  저주하기를 좋아하였으니, 그 저주가 그에게 내리게 하십시오. 축복하기를 싫어하였으니, 복이 그에게서 멀어지게 하십시오.

18.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였으니, 그 저주가 물처럼 그의 뱃속까지 스며들고, 기름처럼 그 뱃속에까지 배어들게 하십시오.

19.  그 저주가 그에게는 언제나, 입은 옷과 같고, 항상 띠는 띠와 같게 하십시오."

20.  주님, 나를 고발하는 자와, 나에게 이런 악담을 퍼붓는 자들이 오히려 그런 저주를 받게 해주십시오.

21.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니, 주의 명성에 알맞게 나를 도와주십시오. 주의 사랑은 그지없으시니, 나를 건져 주십시오.

22.  나는 가난하고 빈곤합니다. 내 마음이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23.  나는 석양에 기우는 그림자처럼 사라져가고, 놀란 메뚜기 떼처럼 밀려 갑니다.

24.  금식으로, 나의 두 무릎은 약해지고, 내 몸에서는 기름기가 다 빠져서 수척해졌습니다.

25.  나는 사람들의 조소거리가 되고, 그들은 나를 볼 때마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멸시합니다.

26.  주, 나의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주님은 신실하시니,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27.  주님, 이것이 주께서 손수 하신 일임을, 이 일을 하신 분이 바로 주님이심을, 그들이 알게 해주십시오.

28.  그들이 나에게 저주를 퍼부어도, 주님은 나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들은 치려고 일어났다가 부끄러움을 당하여도, 주의 종은 언제나 즐거워하게 해주십시오.

29.  나를 고발하는 사람은 수치를 뒤집어쓰게 해주시고, 그들이 받을 수모를 겉옷 걸치듯이 걸치고 다니게 해주십시오.

30.  내가 입을 열어서 주님께 크게 감사드리며,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서 주님을 찬양하련다.

31.  나를 정죄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해 주시려고, 주께서는 이 가난한 사람의 오른쪽에 서 계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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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V] 시109

1.  Hold not thy peace, O God of my praise;

2.  For the mouth of the wicked and the mouth of the deceitful are opened against me: they have spoken against me with a lying tongue.

3.  They compassed me about also with words of hatred; and fought against me without a cause.

4.  For my love they are my adversaries: but I give myself unto prayer.

5.  And they have rewarded me evil for good, and hatred for my love.

6.  Set thou a wicked man over him: and let Satan stand at his right hand.

7.  When he shall be judged, let him be condemned: and let his prayer become sin.

8.  Let his days be few; and let another take his office.

9.  Let his children be fatherless, and his wife a widow.

10.  Let his children be continually vagabonds, and beg: let them seek their bread also out of their desolate places.

11.  Let the extortioner catch all that he hath; and let the strangers spoil his labour.

12.  Let there be none to extend mercy unto him: neither let there be any to favour his fatherless children.

13.  Let his posterity be cut off; and in the generation following let their name be blotted out.

14.  Let the iniquity of his fathers be remembered with the LORD; and let not the sin of his mother be blotted out.

15.  Let them be before the LORD continually, that he may cut off the memory of them from the earth.

16.  Because that he remembered not to shew mercy, but persecuted the poor and needy man, that he might even slay the broken in heart.

17.  As he loved cursing, so let it come unto him: as he delighted not in blessing, so let it be far from him.

18.  As he clothed himself with cursing like as with his garment, so let it come into his bowels like water, and like oil into his bones.

19.  Let it be unto him as the garment which covereth him, and for a girdle wherewith he is girded continually.

20.  Let this be the reward of mine adversaries from the LORD, and of them that speak evil against my soul.

21.  But do thou for me, O GOD the Lord, for thy name's sake: because thy mercy is good, deliver thou me.

22.  For I am poor and needy, and my heart is wounded within me.

23.  I am gone like the shadow when it declineth: I am tossed up and down as the locust.

24.  My knees are weak through fasting; and my flesh faileth of fatness.

25.  I became also a reproach unto them: when they looked upon me they shaked their heads.

26.  Help me, O LORD my God: O save me according to thy mercy:

27.  That they may know that this is thy hand; that thou, LORD, hast done it.

28.  Let them curse, but bless thou: when they arise, let them be ashamed; but let thy servant rejoice.

29.  Let mine adversaries be clothed with shame, and let them cover themselves with their own confusion, as with a mantle.

30.  I will greatly praise the LORD with my mouth; yea, I will praise him among the multitude.

31.  For he shall stand at the right hand of the poor, to save him from those that condemn his s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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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Vengeance Invoked upon Adversaries. To the Chief Musician. A Psalm of David.109 

1 O God of my praise! Do not keep silent,

2 For the mouth of the wicked and the mouth of the deceitful are opened against me; They have spoken against me with a lying tongue.

3 They have also surrounded me with words of hatred, And have fought against me without a cause.

4 In return for my love, they attack me, But I am in prayer.

5 They have repaid me evil for good, And hatred for my love.

6 Appoint a wicked man against him, And let an attacker stand at his right hand [to kill him].

7 When he enters into dispute, let wickedness come about. Let his prayer [for help] result [only] in sin.

8 Let his days be few; And let another take his office.

9 Let his children be fatherless And his wife a widow.

10 Let his children wander and beg; Let them seek their food and be driven far from their ruined homes.

11 Let the creditor seize all that he has, And let strangers plunder the product of his labor.

12 Let there be no one to extend kindness to him, Nor let anyone be gracious to his fatherless children.

13 Let his descendants be cut off, And in the following generation let their name be blotted out.

14 Let the wickedness of his fathers be remembered by the Lord; And do not let the sin of his mother be blotted out.

15 Let them be before the Lord continually, That He may cut off their memory from the earth;

16 Because the man did not remember to show kindness, But persecuted the suffering and needy man, And the brokenhearted, to put them to death.

17 He also loved cursing, and it came [back] to him; He did not delight in blessing, so it was far from him.

18 He clothed himself with cursing as with his garment, And it seeped into his inner self like water And like [anointing] oil into his bones.

19 Let it be to him as a robe with which he covers himself, And as a sash with which he is constantly bound.

20 Let this be the reward of my attackers from the Lord, And of those who speak evil against my life.

21 But You, O God, the Lord, show kindness to me, for Your name’s sake; Because Your lovingkindness (faithfulness, compassion) is good, O rescue me;

22 For I am suffering and needy, And my heart is wounded within me.

23 I am vanishing like a shadow when it lengthens and fades; I am shaken off like the locust.

24 My knees are unsteady from fasting; And my flesh is gaunt and without fatness.

25 I also have become a reproach and an object of taunting to others; When they see me, they shake their heads [in derision].

26 Help me, O Lord my God; Save me according to Your lovingkindness— 

27 And let them know that this is Your hand; You, Lord, have done it.

28 Let them curse, but You bless. When adversaries arise, let them be ashamed, But let Your servant rejoice.

29 Let my attackers be clothed with dishonor, And let them cover themselves with their own shame as with a robe.

30 I will give great praise and thanks to the Lord with my mouth; And in the midst of many I will praise Him.

31 For He will stand at the right hand of the needy, To save him from those who judge his soul.

-----[NLT]---------

For the choir director: A psalm of David. 109

1 O God, whom I praise,   don’t stand silent and aloof

2 while the wicked slander me     and tell lies about me.

3 They surround me with hateful words     and fight against me for no reason.

4 I love them, but they try to destroy me with accusations    even as I am praying for them!

5 They repay evil for good,    and hatred for my love.

6 They say,[a] “Get an evil person to turn against him.    Send an accuser to bring him to trial.

7 When his case comes up for judgment,    let him be pronounced guilty.    Count his prayers as sins.

8 Let his years be few;    let someone else take his position.9 May his children become fatherless,    and his wife a widow.

10 May his children wander as beggars    and be driven from[b] their ruined homes.

11 May creditors seize his entire estate,    and strangers take all he has earned.

12 Let no one be kind to him;    let no one pity his fatherless children.

13 May all his offspring die.    May his family name be blotted out in the next generation.

14 May the Lord never forget the sins of his fathers;    may his mother’s sins never be erased from the record.

15 May the Lord always remember these sins,    and may his name disappear from human memory.

16 For he refused all kindness to others;    he persecuted the poor and needy,    and he hounded the brokenhearted to death.

17 He loved to curse others;    now you curse him. He never blessed others;    now don’t you bless him.

18 Cursing is as natural to him as his clothing,    or the water he drinks,    or the rich food he eats.

19 Now may his curses return and cling to him like clothing;    may they be tied around him like a belt.”

20 May those curses become the Lord’s punishment    for my accusers who speak evil of me.

21 But deal well with me, O Sovereign Lord,    for the sake of your own reputation! Rescue me     because you are so faithful and good.

22 For I am poor and needy,    and my heart is full of pain.

23 I am fading like a shadow at dusk;    I am brushed off like a locust.

24 My knees are weak from fasting,    and I am skin and bones.

25 I am a joke to people everywhere;    when they see me, they shake their heads in scorn.

26 Help me, O Lord my God!    Save me because of your unfailing love.

27 Let them see that this is your doing,    that you yourself have done it, Lord.

28 Then let them curse me if they like,    but you will bless me! When they attack me, they will be disgraced!    But I, your servant, will go right on rejoicing!

29 May my accusers be clothed with disgrace;    may their humiliation cover them like a cloak.

30 But I will give repeated thanks to the Lord,    praising him to everyone.

 

31 For he stands beside the needy,    ready to save them from those who condemn them.

===[시109 개요]======

다윗이 사울에게 박해를 받았을 때 기록된 것인지, 압살롬이 그에게 반역했을 때, 또는 그에게 다가온 어떤 다른 문제에 부딪쳤을 때 기록된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그가 기도했던 특정한 적대자가 사울인지, 도엑인지, 아히도벨인지 또는 다른 대상인지에 대해서는 이 이야기에서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결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사실만은 확실하다. 즉, 그가 그리스도와 그의 고난과 그의 박해자를 바라보면서 기록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 저주(8)가 유다에게 적용되고 있기(행 1:20) 때문이다. 

여기에 나타난 그의 적대자들에 대한 기도의 나머지 부분은 수난의 표현들이 아니라, 예언의 성령에 대한 표현이다.(예수의 증거는 예언의 영이라!)

1. 그는 그의 적들의 악하고 비열한 배덕(背德)을 하늘의 궁정에서 탄식한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의로우신 하나님께 호소를 한다(1-5).

2. 그는 적들에 대해 기도하고, 그들이 파멸할 것을 간구하고 있다(6-20).

3. 그는 홀로 기도한다. 하나님은 그의 낮은 상황에서 그를 도와 구원하실 것이다(21-29).

4. 그는 그를 위해 하나님이 나타나실 것이라는 즐거운 기대로써 결론을 맺는다(30-31).

---우리는 이 시편을 노래하면서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모든 적들이 확실히 파괴될 것을 믿음으로 예견하면서,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에게 가까이 하는 모든 자에게는 확실한 구원을 베풀 것을 믿으면서 스스로 위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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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자들에 대한 호소(시 109:1-5)

선한 자들에게는 그 누가 대적해 오든 하나님이 그들 편이라는 사실이 지극히 큰 위로가 된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그분에게 자신을 맡길 수 있다. 

다윗도 여기에서 그같이 서술하고 있다.

Ⅰ. 그는 하나님의 심판에 맡긴다(1절).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의 판단을 주 앞에서 나오게 하옵소서(17:2). 주께 간구한 호소에 대해 심판을 지체하지 마옵소서.” 

하나님은 다윗의 적들이 다윗에 대해 행한 것을 보시면서도, 마치 그것을 묵인하며 침묵하시는 것으로 보였다. 

다윗이 하나님께 드린 서두는 주목할 만하다. 

나의 찬송의 하나님이여! 내가 영광 돌리는 하나님―나 자신의 어떤 지혜나 힘에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찬송의 모든 것이 되는 하나님, 내가 찬송했고 미래에도 찬양할 것이며 영원히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시여”, 

그는 전에 하나님을 “인자하신 하나님”(59:10)이라고 불렀으나, 여기에서는 “나의 찬송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자비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우리의 찬송의 하나님 [찬송하올 하나님!]”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이 그에 대해 존재하며, 그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

Ⅱ. 다윗은 그의 적들에 대해 호소한다. 동시에 의로우신 하나님이 그들을 치기 위해 나타나시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1. 그들은 매우 짓궂고 악의에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악한” 자들이었으며, 불의를 행하기를 기뻐한다(2절). 그들의 말은 “미워하는 말”(3절)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인해 선한 사람에게 피할 수 없는 증오를 받게 된다. “그들은 나를 삼키려고 그들의 입을 벌렸으며, 가능한 한 나를 제하려고 공격하였나이다.”

2. 그들은 유명한 거짓말쟁이들이다. 

거짓말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증오하시는 일곱 가지 일 중 두 번째다. 

“그들은 말과 주장하는 일에서 속였으며, 동시에 내가 없는 곳에서 나에 대해 거짓된 혀로 말한다. 그들은 아첨과 모략하는 일에서 똑같이 거짓된 자들이다.”

3. 그들은 그들의 모의에 술수를 쓰며, 끊임없이 애쓴다. 

“그들은 사방에서 나를 부르고, 내게 행하는 것만 보도록 한다.”

4. 그들은 불의했다. 

그에 대한 그들의 고소와 그에 대한 진술은 모두 근거 없는 말들이었다. 

“그들은 무고히 나를 공격하였다. 나는 결코 그들을 성나게 한 일이 없다.” 심지어는 최악의 경우일지라도 절대로 그런 일은 없었다.

5. 그들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며, “악으로 그의 선을 갚았다”(5절). 

그는 그들에게 많은 친절을 베풀었으며, 모든 경우 그들에게 사랑으로 갚았지만, 그는 자기에 대한 그들의 악의를 배제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그를 분개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격분했다.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한다”(4절). 

그가 그들을 은혜롭게 참고 대하면 대할수록 그들은 더욱더 그를 미워했다. 우리는 어떤 자가 그렇게 사악하게 될 수 있는지 이상할 정도다. 

그렇지만 그러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떤 자가 우리에게 사악한 일을 행하더라도 이상하게 여겨서는 아니 된다.

Ⅱ. 그는 자신의 의무 지키기를 결심하고, 그 위로를 취한다. 

“그러나 나는 기도할 뿐이다”(4절). 

“나는 기도한다”(원문으로는 후자가 더 옳다). 

나는 기도를 위해 있으며, 나는 기도의 사람이다. 나는 기도를 사랑하며, 기도를 고귀하게 여겨 실천한다. 그리고 기도의 일을 행하며, 내가 기도할 때 참 내가 된다.” 

선한 사람은 기도에 힘쓰며, 사도들처럼 “기도하는 일에 전무한다”(행 6:4). 

다윗의 적들이 그를 거짓되게 고소하고, 그를 거짓으로 내세웠을 때, 그는 하나님께 맡겼으며, 기도로써 그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위탁했다. 

그들은 그의 사랑에 대한 적대자들이었지만, 그는 계속해서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사람들이 우리를 학대하며 해친다고 해도, 그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버리거나, “저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서 결단코 범치 아니해야 한다”(삼상 12:23). 

그들이 그의 신앙 때문에 그를 미워하고 박해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그것을 반드시 지켰다. 

그들은 그의 예배를 인해 그를 조롱했지만, 그들은 그것으로부터 그를 떠나게 하지 못했다. “나는 기도할 뿐이다.”

여기 다윗은 “미워하는 말”과 거짓말로 둘러싸여 이유 없이, 그의 사랑과 그의 “선한 일들”(요 10:32)에는 아랑곳없이, 적들이 그를 박해했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들을 위해 기도했고, “기도할 뿐이었다.” “아버지여, 저희를 용서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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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적 저주(시 109:6-20)

다윗은 여기에서 그의 대적자들보다 더 악했던 하나의 특정한 사람을 대하고 있다. 그는 대적자들 중의 괴수다. 

그러나 악과 복수의 원칙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열성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대적자들을 주목하면서, 죄에 대해 다룬다. 

특히 유다와 같은 자는 그리스도를 배반했고, 그의 죄는 그를 정죄했던 빌라도의 죄보다 더 컸다 하겠다(요 19:11). 

다윗은 그의 파멸을 빌고 예고했으며, 그가 완전히 불행에 빠지기를 예견해 공포했다. 마치 우리 주님께서 그를 “지옥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과 같이.

칼빈(Calvin)은 당시 프란체스코 수사들과 다른 수사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참을 수 없는 신성모독을 말해 주고 있다. 

즉, 어떤 사람이 자기 이웃에게 앙심을 품으면, 그는 수도사들 중 어떤 자들을 고용해 자기가 미워하는 자를 매일같이 저주케 하는데, 이 성경 구절을 인용해 저주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특히 자기 친아들과 의가 좋지 않은 한 프랑스 여인이 수도사를 시켜 자기 아들을 저주케 했던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렇듯 성서에서 악마적인 감정을 뽑아내며, 하나님의 제단에서 불을 훔쳐다가 불화의 불을 붙이며,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지옥불을 붙이라고 기도하는 따위는 그 어떤것으로도 비교할 수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전혀 맞지않는, 극악무도한 불경건이다.

Ⅰ. 여기에 나타난 저주는 매우 두려운 것으로 되어 있다. 

하나님이 “아멘”이라고 한 자들에게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화가, 수많은 화가 미칠 것이다. 

“돌이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교회와 그 백성에게 무자비한 적이 된다. 여기에 이러한 사악한 자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

1. 그는 범죄자로서, 무서운 시련과 단죄와 저주를 받아 던져지고 선고받게 될 것이다(6-7절). 

“악인이 저를 제어하게 하시사, 그가 다른 자들에게 행한 것같이 그에게 난폭하고 억압하게 하소서.” 

하나님은 때때로 악인을 다른 사람에 대한 채찍으로 삼으시고, 약탈자를 약탈하게 하시면서 배반자로 배반당하게 하셨다.

“대적으로 그 오른편에 서게 하소서.” 즉, 그 대적은 사단을 의미한다. 사단이 유다에게 들어가서 유다를 지배했고, 죄를 향해 그를 재촉했으며, 결국 파멸로 이끌었다. 

그의 사악한 심정이 유다를 제어했고, 유다의 양심은 사단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사단이 유다 자신의 양심을 정면으로 반대했다. 

“사단으로 그의 오른편에 서게 하소서. 그리고 그를 속이기를 늦추지 말게 하소서.” 마치 그가 아합을 파멸로 이끌고 그를 송사하고 저해한 것과 같이, 그는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슥 3:1-2) 하고 말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변호인에게 관심을 갖지 못한 채, 확실하게 패소할 것이다. 

“그가 인간 피고석에서 심판 받게 될 때 정의를 회피하던 그의 평소 경향이 그에게 어떤 도움도 줄 수 없게 하고, 그가 그의 죄를 발견하도록 해 죄를 지고 나오게 하소서.” 

그는 하나님 법정 앞에서 도망할 수 없으며, 거기에서 심판과 보상의 날이 올 때 정죄 받게 될 것이다. 

저주받은 악인의 아우성이 용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법정 모독으로 간주되는 것과 같이 “그 기도가 죄로 변케 하신다.” 

따라서 사악한 자의 기도는 죄가 된다. 위선과 악독의 곰팡이가 슬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더 큰 날을 당하게 되었을 때는 이미 늦어 “여호와여, 우리에게 보이소서”라고 외쳐도 소용이 없다. 

모든 것이 그에게 거역하며, 심지어는 그의 기도까지도 그에게 손해를 증진시키기 때문이다.

2. 그는 정죄됨으로 말미암아 가장 유명한 악인으로서 판결된다.

(1) 그는 정의의 칼에 의해 그의 생명을 잃게 되고, 그 연수가 도중에 끊어지게 된다. 

“그 연수를 단촉케 하시며”, 짧게 하소서. 정죄 받은 죄인은 짧은 기간 동안만 살게 된다(8절). 그렇게 잔인하고 거짓된 사람들은 도중에 생명이 끊어지게 될 것이다.

(2) 그 결과로 그의 모든 직분이 다른 사람에게 양도되며, 그들은 승진과 채용을 기뻐하게 된다.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신다.” 이것은 베드로와 사도들의 회합에서 맛디아를 선택함으로써 유다의 직분을 채우게 함에 적용된다(행 1:20). 

신뢰를 저버린 자들은 공평하게도 그들의 직분을 빼앗길 것이며, 그것은 신실한 자들에게 주어진다.

(3) 그의 가족은 멸절되고, 거지가 되며,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의 불시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될 것이다(9절). 

사악한 자들은 그들의 사악한 행적으로 말미암아 돌보고 부양해야 할 그들의 아내와 자녀를 파멸로 인도한다. 

그의 자녀가 아버지를 잃고서도 살아갈 능력을 가졌다면 여전히 위로 가운데 생활해 가겠지만, 그들은 “유리 구걸하게 된다.” 

그들은 거주할 집을 갖지 못하며, 거할 곳도 찾지 못하고, 음식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모르는 채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 황폐한 집을 떠나”, 굴에서 나온 들짐승과 같이 “빌어먹게 된다”(10절). 그들은 모든 사람이 자기들의 조상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을 증오하는 것이 당연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4) 악인의 소유가 몰수되는 것처럼 그의 소유는 넘겨진다(11절). 

“고리대금하는 자로 저의 소유를 다 취하게 하시며, 저가 수고한 것을 외인이 탈취하게 하소서.” 그는 그의 소유를 전혀 갖지 못한다(욥 5:4-5).

(5) 그의 후손은 비참하게 된다. 

고아들은 비록 가진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때때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자들의 친절함에 의해 보양(保養)된다. 그러나 사악한 자는 결코 자비를 베푼 일이 없기 때문에 “그 고아를 연휼할 자도 없다”(12절). 악한 부모의 자녀는 종종 그들 부모의 악행 때문에 더 나쁘게 대접받는다. 동정심의 긍휼이 그들에게는 차단된다. 자녀들이 고난을 받게 되는 이유는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불운이라 해야 되지 않겠는가?

(6) 그의 이름이 도말되며, 망각 속에 잊혀지고, 불명예로 남아 있게 된다. 

“그 후사가 끊어지게 하시며”, “그의 종말이 파멸에 이르게 하신다.” 그리고 “후대에 저희 이름이 도말되게 하소서.” 오직 경멸과 분개로써 기억된다. 

씻을 수 없는 불명예의 표적이 남아 있게 된다(15절). 여기에서 수치스러운 죽음으로 향하는 것과 가족과 그 지위가 파멸되고, 

그들에게 야비하고 가증한 일이 나타나서 그들 후손에게 빈곤과 수치와 불행을 상속시켜 줌을 보라! 불행하게 파괴시키는 장본인은 바로 죄다. 

박식한 하몬드 박사는 이것을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말미암아 유대 나라가 당하게 되는 최후의 분산과 황폐에 적용시킨다. 

그들의 왕과 민족은 제거되고, 그 나라는 황폐케 되었으며, 그들의 후손은 도망해 유리방랑하는 자들이 되었다.

Ⅱ. 이러한 저주의 근거는 매우 혹독하게 들리지만, 그들에게는 매우 정당한 것임을 말해 준다.

1. 죄인들의 후손에 대한 복수의 저주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의 조상들의 죄, 즉 “그 열조의 죄악”과 “그 어미의 죄”가 여기에서 문제시된다(14-15절). 

이에 대해 하나님은 종종 후대의 자녀까지 징벌하신다. 그렇다고 거기에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악함이 피를 따라 계속될 때는 저주도 또한 피를 따라 계속되어 마땅하다. 땅에 흘려진 무죄한 피, 즉 의로운 아벨의 피와 같은 모든 피는 박해시대에 생기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죽음에 이르게 함으로써 “그들 열조의 죄악의 그릇을 넘치게 했다.” 범죄가 그들 앞에 있는 한 복수도 그들을 뒤따를 것이다. 결국 그들은 “그의 피가 우리와 우리 자녀에게 있도다”고 말하는 것에 동의한다.

2. 죄인에 대한 복수의 저주를 정당화하기 위해 여기에서 그 자신의 죄가 그에게 돌려졌다.

(1) 그는 잔인성을 사랑했다. 그러므로 그는 그에게 피를 마시게 했다(16절). “그가 긍휼히 여길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자비를 나타내도록 권유하는 생각을 기억하지 않고서, 또한 그에게 제시된 동정의 대상을 기억하지 않으며, 그가 보호하고 소생시켜야 할 가난한 자들을 박해했으며, 위로하고 고쳐주어야 할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해 죽이려 하였다.” 여기에 실로 살기에 적합하지 못한 한 야만적인 인간이 있다.

(2) 그는 저주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므로 저주가 그의 머리 위에 떨어진다(17-19절). 그의 잔인성이 미치는 자들에게 저주로써 공격했으나, 그것은 무력했다. 오히려 그 저주들은 그에게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는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이 잘 되기를 원하거나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는 일을 도무지 기뻐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에게도 선한 말을 하거나 좋은 소원을 주지 않았으며, 더욱이 누구에게도 선한 표현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복이 멀리 떠났다. 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였다.” 그는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주변의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할 수 있는 것을 마치 의복의 장신구인 양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그것을 마치 갑옷인 양 신뢰했으며, 그가 두려워하는 자들의 모욕으로부터 그를 보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그는 저주하기를 즐겼는가? “하나님의 저주가 물같이 그 내부에 들어가며” 수종(水腫)과 같이 그를 부풀게 했으며, “기름같이 그 뼈에 들어갔다.” 저주의 말은 빠르고 힘이 있어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는다. 그것은 힘있게 그리고 유효하게 작용한다. 그것은 영혼을 붙잡는다. 그것은 맹렬해 해독제가 없다. 그것은 “입는 옷과 같이”(19절) 모든 면에서 그를 에워싸고 있다. 그의 저주가 그의 이웃에 대한 자랑이었던 만큼 하나님의 저주는 그에게 수치가 되리라. 그에게 “항상 띠는 띠와 같이” 부착되어, 그는 결코 그것을 제거할 수 없으리라. 그것이 그에게 진노하는 물과 같이 되어 “복부를 부풀게 하며, 사지를 썩게” 만든다.

이것은 유다의 완전한 파멸을 지적하며,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에게 임하는 영적인 심판을 가리킨다. 시편 저자는 무서운 “아멘”으로 그의 저주를 결론짓고 있다. 그것은 “내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나도 그렇게 될 것을 알고 있나이다”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는 대적, 곧 내 영혼을 대적하여 악담하는 자가 여호와께 받는 보응이니이다”(20절). 그리고 이것은 주 예수의 모든 대적자들에 대한 보응이 된다. 그의 통치를 받지 않으려 하는 그의 적들은 “그 앞에서 살육 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어느 날 그의 백성을 괴롭히던 자들에게 고난으로 보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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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 간구(시 109:21-31)

다윗은 그의 적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선언하고서 자랑하지 않고 매우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의 위로를 스스로 취하고 있다.

Ⅰ. 그는 하나님 앞에서, 그의 적들이 그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 이용했던, 그가 처한 비참한 상황에 관해 탄식을 토로한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해 긍휼의 대상이 되며, 주의 도움이 필요하고, 그것을 갈망하는 자입니다.”

1. 그는 마음이 괴로웠다(22절). “나의 중심이 상하여” 영혼을 쇠약케 하며, 힘없게 하는 외적인 문제로 상했을 뿐만 아니라, 죄의식으로 상했다. “상한 영혼을 누가 담당할 수 있습니까? 누가 고칠 수 있습니까?”

2. 그는 스스로 그의 종말이 가까이 다가온 것을 인식했다. “나의 가는 것은 이미 사라져 가는 석양 그림자 같도다.” 인간의 생애는 기껏해야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때때로 그것은 “석양 그림자같이” 다가오는 밤의 표징이다.

3. 그는 “메뚜기같이 휩쓸려가며”, 불안으로 마음이 파도치며 동요했다. 그의 외적인 상황이 어떤 평정을 주지 못했고, 산 위 메추라기가 사냥될 위기에 처해 있듯이 계속 요동했다.

4. 그의 몸은 약해 거의 수척해졌다(24절). “금식함을 인하여 내 무릎은 약해졌다.” 강요된 금식을 인해(음식의 결핍이 그를 괴롭혔거나 식욕의 결핍이 그를 병들게 했다), 또 자발적인 금식을 인해 그는 심히 약해졌다. 그때 그는 그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죄로 인해, 또는 고난으로 인해, 자기 영혼을 징벌했다(35:13, 69:10). “내 육체는 수척하옵니다.” 즉, 그는 육체가 지녔던 강건함을 잃었고, 따라서 살가죽과 뼈에 지나지 않는 해골이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같이 육체가 살찌는 반면에 영혼이 쇠약해짐보다, 육체는 쇠잔하지만 영혼이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것이 더 낫다.

5. 그는 그의 대적자들에 의해 조롱받고 비난받았다(25절). 그들이 조롱거리로 삼았던 그의 헌신과 고뇌가 있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러한 경우 질책을 무수히 당했다.

이런 모든 점에서 볼 때, 다윗은 겸손하게 당하며 약해지고 조롱받았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그는 또한 종종 고난을 받고 폭풍우에 시달리며 위로 받지 못한 교회의 모형이었다.

Ⅱ. 그는 자신을 위해 자비를 간구한다. 그는 먼저 일반적인 말로 간구했다(21절). “주 여호와여, 나를 선대하소서! 내게 나타나시며, 나를 위해 행하소서.”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계신다면, 그는 우리를 위해 행하실 것이다. “우리가 간구하며 생각하는 것보다 더 풍성하게 우리를 위해 행하실 것이다.” 

그는 해야 할 것을 하나님께 명령하지 않고, 그의 지혜에 위탁한다. “여호와여, 주의 눈에 선히 여기시는 것을 내게 행하소서. 주께서 아시는 것을 내게 있게 하시며, 진정으로 내게 행하소서. 비록 지금은 그것이 내게 해가 될지라도.”

그는 더 특별한 말로 간구한다(26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나를 구원하소서. 나의 문제에서 나를 도우시며, 나의 괴로움으로부터 나를 구원하소서. 죄로부터 구원하시며, 나의 의무를 행할 수 있도록 나를 구원하소서.” “저희는 저주하여도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28절) 하고 그는 간구한다.

그는 그의 적들의 까닭 없는 저주를 경멸한다. “저희로 저주를 하게 하소서.” 그는 시므이에 대해,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고 말했다. 그들은 오직 그들의 사악함을 드러낼 뿐이다. 그들은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같이”(잠 26:2) 그를 더이상 불행에 몰아넣을 수 없다. 그는 그들의 저주에 균형을 맞추기에 충분한 하나님의 축복을 헤아린다.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 그들이 저주할지라도 내게는 상관없다.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저희가 어찌 저주하며”(민 23:8), 그가 축복하신 자를 어찌 저주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의 저주는 무력하다. 하나님의 축복은 전능하다. 우리가 부당하게 저주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축복, 즉 그의 특별한 축복을 믿음 가운데서 기다리며 간구한다. 그리스도를 고백했다는 이유로 불쌍한 사람을 바리새인들이 쫓아냈을대, 그리스도는 “그를 만나셨다”(요 9:35). 사람들이 까닭 없이 그들이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악한 것을 말하며,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것을 소원할 때 우리는 이러한 간구에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높이 올려 위로를 취할 수 있다. “저희는 저주하여도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 “주의 종은 즐거워하리이다” 하고 그는 간구한다.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를 아는 자들은 그것을 확신하게 되며, 그들은 그것을 즐거워하게 된다.

Ⅲ. 그는 그의 대적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여”(28절) “수치를 겉옷같이 입게 되리라”(29절)고 기도한다. 그들은 자가당착에 빠져 스스로 떠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 앞에서 저희의 어리석음을 나타내며”, 그들은 그들의 계획에서 좌절될 것이다. 유대인들의 대적자들과 같이 “수치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느 6:16).

아니, 그는 여기에서 그들이 회개하도록 간구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의 대적자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중요한 일이다. 실로 죄인들은 스스로 수치를 당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욕을 당하며 “자기 수치를 겉옷같이 입는” 진실한 참회자이다.

Ⅳ.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이름의 명예를 주장한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선대하소서”(21절). 

특히 그가 그의 이름을 선포했던 그의 인자하심의 영광을 위해 나를 선대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선함을 인하여 나를 건지소서.” 그것은 저가 기뻐하며 내가 의지해야 할 바이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나의 공적에 따라서가 아니라,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그것이 바로 나의 구원의 근원이 되며, 이유가 되고, 척도가 되나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시편을 기쁨으로, 신앙의 기쁨으로, 그의 현재의 투쟁이 승리로 끝나리라고 확신하는 기쁨으로 결론짓고 있다.

1.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리라고 약속한다(30절). “내가 여호와께 크게 찬양하리로다.” 

나의 마음으로만이 아니라, “내가 입으로” 찬양할 것이다. “내가 그를 찬양하리로다.” 남몰래 혼자서만 아니라, “무리 중에서” 찬양할 것이다.

2. 그는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를 갖게 될 것임을 스스로 약속한다(31절). “저가 궁핍한 자의 우편에 서사”, 

그에게 가까이 하며 현실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후원자로서 그의 오른편에 서며, 그의 대적자들에 대해 그의 소원을 지지하고, 대적자들을 제하며, 그를 보호하고, “그 영혼을 판단하려 하는 자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 

하나님은 다윗이 고난 중에 있을 때 그의 보호자였으며, 그의 “우편에 서 계신” 주 예수와 함께 나타나신다. 그리하여 그는 “요동치 않고”(16:8), 그 영혼을 판단하려고 하는 자에게서 구원하시며, 그것을 그의 손에 두신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난 당하는 모든 자는 저희의 영혼을 그가 지키시도록 위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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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5:1-11, 3-6]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의 삶...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피스티스)) 의롭다((디카이오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에이레네))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라촌/구한바은총, 헤세드/Q인자-자애-은총, 라함/우애-동정, 토브/Q선하심, 게둘라/영예)) 들어감을((그 안에 참예함))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독사..카보드..주임재영광과 그 광채)) 바라고((엘피스...티크와...소망-신뢰-안전 :: 확신하는바 희망)) 즐거워하느니라((카우카오마이...할랄 : 자랑-찬양하다...렘9:24..고전1:31.자랑하는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들립시스...차르/환난..라하츠/고생....요16:33.고후1:4-,))  인내를((휘포모네....인내/기다림..미크웨/기대와소망, 티크와/소망)),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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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vsti"(4102, 피스티스) 믿음 faith.....에무나(진실/성실/신실/충성)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피스티스(Hes., Hdt.이래)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a)  피스티스는 '신뢰, 확신, 확실성, 확고한 확신'을 의미한다.
(b)  피스티스는 사람이 가지는 확신 뿐만 아니라 사람이 향유하는 확신, 즉 '신뢰할 수 있음, 의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차이가 있을지라도 확실성이나 신뢰성과 관련되어 있다.
(c)  피스티스는 신뢰의 가능성, 의지할 수 있는 것을 보장하는 '보증, 증명, 증거, 신실성'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피스티스는 70인역본에서 약 55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에무나(경고, 충실, 성실, 확고부동의 믿음)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피스티스는 신약성경에서 약 230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피스티스는 '신실성, 신뢰성'을 의미한다: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롬 3:3; 딛 2:10; 갈 5:22; 살후 1:48.
(b)  피스티스는 '엄숙한 약속, 서약'을 나타낸다: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딤전 5:12).
(c)  피스티스는 '증거, 보증'을 의미한다: 행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딤후 4:7.
(d)  피스티스는 '신뢰, 확신, 믿음'을 나타낸다.
① 하나님에 대하여, 막 11:22; 벧전 1:21; 히 6:1; 살전 1:8; 롬 4:5; 롬 4:9; 롬 4:11-롬 4:13; 롬 4:16; 롬 4:19이하 등.
② 그리스도에 대하여, 마 8:10; 마 9:2; 마 9:22; 마 9:29; 마 15:28; 막 2:5; 마 4:40; 마 5:34; 마 10:52; 눅 5:20; 눅 7:9; 눅 7:50; 눅 8:25; 눅 8:48; 눅 17:19; 눅 18:42. 롬 3:23; 롬 3:26; 갈 2:16; 갈 2:20; 갈 3:22; 엡 3:12; 빌 3:9; 약 2:1; 계 14:12.
(e)  피스티스는 '신앙의 내용, 교리'를 나타낸다: 유 1:3, 유 1:20; 롬 1:5; 갈 1:23; 갈 3:23이하; 딤전 1:19; 딤전 4:1, 딤전 4:6; 딤전 6:10; 딤후 2:18; 롬 12:6; 딤후 4:7.
(참조: Walter Bauer; A.Weiser; O.Mich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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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kaiovw(1344, 디카이오오) .....차다크(동) 체데크. 체다카(명) =righteousness, equity
의롭다 하다 justify.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디카이오오(Soph., Hdt. 이래)는 디카이오스(divkaio", 1342)에서 유래했으며,
(a)  '바로 잡다'(법으로 폭력을), '옳은 것으로 세우다', '정당화 하다'
(b)  '권리로서 요구하다, 옳다고 간주하다, 판단하다, 승인하다'
(c)  '누군가에게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다'. 이 경우는 '형을 언도하다, 벌을 내리다,징벌하다'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의롭다고 선언하다, 정당하다고 인정하다'라는 뜻일 수도 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디카이오오는 70인역본에서 약 45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차다크(올바르다, 공정하다, 의롭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디카이오오는 신약성경에서 39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으로 거의 항상 법적인 관련이 나타난다.
(a)  계 22:11에 나오는 이례적인 의미는 '의를 행하다' exercise righteousness이다.
(b)  흔히 하나님의 변호를 언급한다(눅 7:29; 마 11:19; 롬 3:4; 딤전 3:16).
(c)  '자기의 결백을 주장하다'는 눅 10:29(보다 약한 의미로 사용됨)과 눅 16:15에 나온다.
(d)  눅 18:4과 마 12:37에서는 '무죄로 된' acquitted이나 '의롭다고 선언된' declared righteous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마 12:37에서는 마지막 심판과 분명하게 관련된다.
(e)  바울 기록에서 우리는 맨 처음
① 법적인 용법을 발견한다. 악한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동에 근거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이러한 칭의는 현재에 일어나는 구원적인 방면이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제정되고 믿음으로 이해되는 관계의 객관성을 지닌다. 
갈 2:16-17에서 이 단어의 의미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롭다는 의미이다. 심판의 개념은 항상 나타나지만, 디카이오오는 그리스도를 통한 현재적인 은혜의 행동이다.
② 그렇지만 바울의 이 용어 사용은 체험의 문제에 기여하였다(참조: 갈 3:8, 갈 3:11; 롬 3:24). 십자가에서의 모든 사람에 대한 칭의와 믿음 안에서의 개인적인 칭의는 조화된다. 칭의는 은혜의 완성품이다. 그러나 "믿음으로"라는 말은(참조: 갈 2:16; 갈 3:8, 갈 3:11) 칭의가 또한 현재에 계속되는 것이므로 우리는 객관적인 행동과 주관적인 이해를 끊어버릴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마지막 심판에 관한 한, 바울은 디카이오오를
③ 우리 삶의 전체적인 활동에서 우리에게 유리하게 내려지는 선고와 관련시킨다(참조: 고전 4:4). 미래가 사용될 때 항상 이것이 의도되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결코 확실하지 않다. 롬 2:13에서 언급하는 바는 의심할 여지없이 마지막 심판에 관한 것이지만 문맥상 요지는 어느 누구도 의로운 심판관이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이다. 
롬 5:19은 종말론적인 언급인 것 같지만, 의미하는 바는 십자가에서 제정되고 계속적인 선물로 알려진 신적 칭의는 결정적인 무죄방면에서 완성될 것이라는 것이다(참조: 롬 8:24, 롬 8:33).
④ 이 동사는 행 13:38-39(여기에서는 법정적 의인이 또다시 문제가 됨)에서 처럼, '~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바울은 롬 6:7에서 이 용법을 사용한다: 그리스도와 함게 십자가에 못 박힘은 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근거는 죽음을 통한 속죄라는 랍비적 개념이다. 이것은 바울이 얼마나 밀접하게 칭의와 속죄를 결부시키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새로운 특징은 이런 해방하는 죽음은 그리스도의 대리적인 죽음에서 그리스도와 일체가 되는 죽음이라는 것이다.
(f)  야고보서.
야고보는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에 대해 3회 언급하고 있다. 이 언급은 현재의 칭의에 관한 것이다. 이 언급은 현재의 칭의에 관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의 행위가 인정을 받은 의로운 사람이다. 이것은 바울주의에 대한 논박으로 언급된 것이 아니라 참된 신앙은 게으름이 아니라 적극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언급된 것이다(약 2:21이하).
(참조: G. Schrenk; C. Brown;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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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jrhvnh(1515, 에이레네) 평화, 복지, 번영....샬롬/평화, 화평, 평강. 평안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에이레네의 기본 개념은 본래 사람들 사이의 관계(relationship)나 태도(attitude)를 의미하지 않고 상태(state), 즉 '평화의 때', 또는 '평화의 상태'를 의미하며, 처음에는 순전히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상태에서의 한 막간(a interlude)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 단어는 전쟁에 반대되는 것, 혹은 전쟁의 종식으로부터 결과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평화는 복된 번영을 가져 오도록 법과 질서가 유지되는 상태이다. "에이레네"는 평화의 상태이며, 평화의 상태에서 땅과 백성을 위한 복이 흘러나온다. 필레몬(Philemon)은 이를 최고의 선(supreme good)으로 격찬했다.
에이레네는 평화 조약이나 평화의 타결과 관련이 있다. 에이레네는 또한 소란, 소요의 정반대를 의미할 수 있다. 에이레네는 평화적인(온화한) 태도, 즉 적의가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에픽테투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의 스토아 철학자들의 작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에이레네는 영적 평안이나 마음의 평안이라는 의미를 띠고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단어는 이들의 저작에 그리 자주 사용되지 않았다.
특별한 언급으로, 아우구스투(Augustus)가 지중해 세계를 지배한 에이레네를 들 수 있다. 이 시대에서 구속(redemption)을 동경하는 강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황금시대라고 불리워진 이 평화의 상태는 로마 황제가 군대의 힘으로 성취한 법적 또는 정치적 안정이다(Toerster, TDNT).
2. 구약성경 및 70인역본의 용법 
1. 구약성경 및 70인역본의 용법 및 의미들
(a)  구약성경에서 에이레네는 250회 이상 나오는 히브리어 단어 샬롬의 역어로 사용된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이에 대하여 예외적인 경우들은 대체로 왕래 및 문안 인사에 관련된 구절들이다. 예컨대 창 26:31; 창 43:23이 이러한 예이다.
그러나 렘 20:10; 사 48:22; 57:21은 이러한 경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외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예외적인 구절에서는 소테리아(구원, 구출), 카이레인(기쁨, 안녕)등을 역어로 사용되었다.
약 15개의 구절에서 에이레네는 안식, 평온, 안전, 염려 없음, 믿음직스러움 등의 광범위한 의미 영역을 포괄하는, 히브리어의 여러 가지 단어들에 해당하는 역어로 사용되었다.
예컨대 대상 4:40에서는 '…로부터 안식을 얻다'를 뜻하는 샤카트(히2453)의 역어로, 욥 11:18; 잠 3:23; 사 14:30; 겔 34:27; 38:8, 11, 14; 39:6, 26에서는 '믿을만함, 안전, 염려없음'을 뜻하는 베타흐(히233a)의 역어로, 삼하 3:24에서는 '가다, 걷다'를 뜻하는 할라크(히498)의 역어로, 사 29:24에서는 '이해'를 뜻하는 레카흐(히1124a)의 역어로, 그리고 잠 17:1; 호 2:18에서는 '평온, 안락'을 뜻하는 샬와(히2392d)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또한 에이레네를 역어로 사용하고 있는 몇몇 구절들은 해당 히브리어 단어가 모호하거나 없다: 에 4:16; 미 2:4; 사 32:4; 겔 34:29; 잠언 8:18.
(b)  70인역본은 히브리어 단어들, 주로 샬롬의 역어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 히브리어의 의미들이 이 헬라어의 의미에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70인역본의 용법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헬라어는 새로운 풍부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샬롬과 70인역본의 에이레네를 살펴보면, 에이레네의 여러 가지 의미를 알 수 있다.
이 단어는 '평화 peace'라는 좁은 의미로 제한시켜서는 안된다.  그것은 모든 가능한 형태의 악(evil)과 대조되는, 가장 넓은 의미의 '안녕, 복리' well-being를 의미한다. 만남이나 편지에서(삼하 18:29; 삿 19:20; 단 4:1), 작별 인사에서(삿 18:6; 삼상 20:42) 다른 사람들에게 안녕을 빌며, 대화에서 다른 사람에 관한 안녕을 구한다(삼상16:5).  사람들은 문안 인사를 한다 : "문안하고".
왕하 9:17이하에서와 같이 어떤 사람이 오는 이유에 대한 질문이 있는데, 곧 "평안이냐"는 '도전적인 목적이냐 화평한 목적이냐'라는 질문이다.
왕상 2:13에서 밧세바가 아도니아를 맞이 하면서 "화평한 목적으로 왔는냐"(너의 옴이 화평이냐)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그녀가 그에게 그의 방문이 '좋은 일'을 뜻하는지를 실제로 묻고 있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에이레네를 '행운이나 형통'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는데, 불경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적용되고 있다. 의인은 악인의 이런 형통을 봄으로 시험을 받기도 한다(시 73:3). 그러나 이 형통은 외적인 것에 불과하며, 진정한 형통이 아니다(사 48:22).
사 57:18; 시 38:3에서는 육체의 건강을 의미한다.
집회서 38:8에서 의사가 가져오는 에이레네, 즉 건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전장에서 무사히 안전하게 돌아오는 사람은 건강을 보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수 10:21; 왕상 22:17; 대하 19:1; 시 55:18).
또 이 단어는 '만족이나 흡족함' satisfaction을 의미하였는데, 이별에 관하여(창 26:29; 출 18:23; 사 55:12), 잠자리에 드는 것에 관하여(시 4:8), 죽음에 관하여(창 15:15; 렘 34:5)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에이레네는 단순히 안식이나 마음의 평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폭력이나 재난으로 압도당하지 않은 인간의 전상태로서, 폭력을 당하거나 변사의 정반대를 의미한다(참조: 왕상2:6).
또한 살펴볼 가치가 있는 것은 사 29:24의 내용이다: "원망하던 자도 교훈을 받으라"(70인역-말더듬는 혀들은 평화를 말하는 것을 배울 것이다). 이 구절에는 히브리어 샬롬이 없지만 에이레네가 나온다. 이 문맥에서 에이레네는 그들이 올바르게(에이레네) 말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사야 32:4에서도 이와 유사한 의미를 나타낸다.
이 단어는 더욱 보편적으로, 전쟁과 대조되는 평화를 의미한다. 잠 17:1; 호세아 20:18("평안히 눕게하리라")과 사 14:30("평안히 눕게 하려니와")에서 이 의미로 에이레네가 샬롬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잠언에서는 다투는 가정과 대조되는 평화로운 가정의 안락을 의미하며, 호세아와 이사야에서는 이 단어는 평화의 때를 의미한다.
대상 22:9에서 평화의 상태를 의미한다: "내가 저의 생전에 평안과 안정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히스기야는 평화가 그의 시대에는 계속된다는 기대를 가졌기 때문에 이사야의 중대한 예언을 경솔히 취급했다. 여기에는 번영을 누리는 그룹, 예를들면 국가의 번영이라는 의미도 지닌다.
에이레네는 전 3:8에 전쟁과 대조시킨 "평화"와, 그리고 렘 29:7에 "성읍의 평안", 38:4에 "백성의 평안" 등에서 "평안을 구한다"는 표현에서와 같이 "평화의 상태"보다 더 근본적인 것, 즉 평화 =백성의 안녕에 관련된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샬롬/ 에이레네는 상태보다 오히려 관계를 암시한다.
많은 구절에서 이 단어는 이러한 의미를 가지는데, 국가나 그룹 간의(왕상 5:12; 삿 4:17; 왕상 5:4; 대상 12:18), 개인 간의(슥 6:13) 우호적 관계를 의미한다.
신 20:10에 '한 백성에 평화를 선언'하는 것은 한 백성의 관계의 수용을 의미하며(참조: 삿 21:13), 그 안으로 들어가는 자들은 평화의 사신들이다(사 33:7).
이 단어는 시편 35:27에서 외적 형통이나 성공에 더하여 인간의 전적인 안녕(well-being)을 의미할 수 있다: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로 기꺼이 부르고 즐겁게 하시며 그의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여기서 형통과 안녕은 선(good)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시편 122:8에서 시인은 "네 가운데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 70인역본에는 '내가 참으로 너를 위하여(에 관하여) 평화를 말했다'고 번역되어 있다. '너를 위하여'는 '예루살렘을 위하여'이다.
시인은 바로 앞에서 이미 안녕과 형통을 원했다. 환언하면 이 용어는 여기서 확고한 '형통'이라는 의미에서 '선(good)'이라는 더 넓은 의미로 쉽게 이동한다.
따라서 잠 3:17에서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고 말한다. 70인역본은 '그녀의 길은 옳은 길이요 그녀의 모든 첩경은 평화에 있느니라'고 번역했다.
시 34:14은 도덕적 선을 의미한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그를) 따를지어다."
슥 8:19에서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말 2:6에서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들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70인역본은 '그가 그의 길을 에이레네로 똑 바르게하여 내 앞에서 행하게 하며…'라고 번역했다.
잠 12:20에서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궤휼이 있고 화평을 논하는(조장하는) 자들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 70인역본은 '에이레네를 원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리라'고 번역했다. 이러한 구절에서 '에이레네'는 도덕적 선을 의미한다.
(c)  이 단어는 두람(J. I. Durham)에 의하면, '완전, 완성, 성공, 성취'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샬롬은 '완전'이란 개념은 민 6:24이하에 나오는 축복의 절정을 이루는 대목에 나타난다. 여기에서 이 개념은 다른 모든 축복들을 요약하고 있으며, 여호와의 임재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축복은 모세가 여호와로부터 받아 아론과 그의 자손들에게 이스라엘을 축복하는데 사용하도록 전한 것이다(민 6:22 이하). 이 축복의 내용은,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이다(민 6:24이하).
여기에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찌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 6:27)는 구절이 첨가되었다. 두람은 이 구절을 주석하기를 '샬롬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오직 그가 임재하실 때에만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축복 속에 샬롬이 사용된 것을 볼 때에도 샬롬은 제의 용어로서 사용되었으며, 여러 가지 번역본이나 많은 주석가들이 일반적으로 이 말에 부여해 온 것보다 횔씬 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다 확실하게 믿게 된다. 왜냐하면 민 6:24-26 에 나오는 샬롬은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고(바라크) 지킴을 받으며(샤마르) 은혜를 받는(하난) 사람, 하나님의 임재 속에 이 두가지 상태로 있는 사람, 즉 충족되고, 그리하여 온전하게 된 사람을 묘사하는 말로서 사용되고 있다. 실로 이러한 사람은 신약성경의 주의 말씀에 부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또 두람은 '샬롬은 구약성경에서 자주 포괄적으로 본 성취 또는 완성, 실제로 사람이 혼자 힘으로 가장 좋은 환경에서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성공이라도 훨씬 능가하는, 삶과 정신에 있어서의 완성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된다'라고 주장한다(창 15:15; 29:6; 37:14; 43:27이하.; 출 18:7,23; 민 25:12; 신 23:7; 삿 18:15; 삼상 17;18, 22; 20:7; 25:6; 삼하 11:7; 18:28이하; 왕상 22:27이하; 왕하 22:20; 사 45:7; 48:18; 53:5; 54:10, 13; 57:2,19; 59:8; 60:17; 66:12; 말 2:5이하.).
특히 이 점은 왕하 22:20에 나오는, 요시야가 열조에게 돌아가리라는 여호와의 약속에서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여기에서 요시야가 평안히(in peace, KSB) 열조에게 돌아간다는 식의 해석보다는, 그는 '성공하여 in success', 즉 그의 소명을 완성하고 흡족한 마음으로 열조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래서는 항목을 만들어 에이레네의 의미를 설명한다.
2.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에이레네
이 단어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서, 선, 좋은 것, 구원을 의미한다. 샬롬/ 에이레네와 연합된 좋은 것은 그것들을 위한 기도에서든, 그것들이 나타날 때 하나님의 선물로 인정하든, 자연적으로 이스라엘에서 항상 하나님과 관련시키었다.
기드온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샬롬'이라고 불렀다. 이 매우 오래된 고대 표현에 대한 분명한 해석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이 고백의 위대한 의미에는 경건한 자들이 후에 많은 다른 상황에서 말하고자한, 특별히 구약의 기도에서 표현된 것과 같은 모든 것을 그 근본에 포함하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평화를 만드시며(욥 25:2), 또한 우리에게 평화를 약속하시며, 그의 백성에게 평화의 복을 내리시며, 그의 종들의 형통을 원하신다(시 35:27; 참조: 147:14), "다윗과 그 집에는 여호와로 말미암은 평강이 영원히 있으리라"(왕상 2:33).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시 122:6).
샬롬은 진실로 여호와로부터 오며, 완전히 충족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신념은 시편 85편에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다. 기자는 기도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가 그 백성, 그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 영광이 우리 땅에 거하리이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입맞추었으며"(85:8-10).
이 사상의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성향은 완전한 지상적 평화의 동기로 생각된다. 여기서 우리는 샬롬이라는 말의 구약의 용법의 최고점을 본다.
레위기에서 하나님은 그 땅에서 그의 백성에게 샬롬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레26:6). 이 문맥은 확고한 복이 뜻하는 것, 즉 원수들과 야수들로부터 평화를 아주 분명히 보여 준다. 이것은 특별한 의미에서 일종의 구원이다. 그것은 약속의 땅에서 안식과 평온이며, 그러므로 신명기 기자는 독특한 용어 메구하(안식)를 표현한 것이다(신 12:9). 이렇게 그들은 예언적 약속의 바로 가까이에 있다.
에이레네는 이 시대나 구원 시대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게 되었다. 이 단어가 어떤 생활 영역에서나 하나님이 주신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구약신앙의 특성이다. 사 46:7에서 그 일반적인 기사를 볼 수 있다: "나는 평안도 짓고 환란도 창조하니". 이 경우에는 앞에서 언급한 레위기 26:3이하의 축복과, 그리고 민 6:26의 축복("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도 포괄한다.
때때로 에이레네의 정확한 내용을 말하기란 불가능하지만, 한편 그것이 항상 인간을 위한 선한 것이며, 거기에 그의 안녕이나 구원이 놓여있는 것이다. '에이레네'는 이런 의미에서 선한 것이며 구원이다.
이러한 구원을 의미하는 구절들을 더 들어보면, 렘 29:11에서 하나님은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시 119:165에서 율법을 사랑하는 자들의 큰 평화는 율법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들이 당하는 장애물과 대조된다. 여기에 평화는 내적 구원이며 파멸이 아니다.
따라서 집회서 1:18에서 에이레네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증진되고 '기에이아 야세오스'(건강한 치유, 완전한 건강)와 연결되어 있다(참조: 사 9:7). 시 35:8과 9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평화는 구원이며, 이 문장에서 평화와 구원이 연결되어 있다.
이 구원은 렘 16:5에서 하나님의 구원이라 부른다: "나의 평강". 애 3:17에 "주께서 내 심령으로 평강을 떠나게 하니"라는 말은 "내가 복(아가다: 선, 선한것)을 잊어버렸음이여"라는 말로 해석되어야 한다. 여기서 평강은 선한 것이며, 곧 구원이다. 이 평화에 참여한다는 것은 거기에 포함된 구원의 은총을 누린다는 것을 뜻하는 반면, 평화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그 모든 복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평화를 거두어 가시면 어쩔 수 없이 애통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히브리인들은 때때로 이러한 동맹이나 협정에 대해 베리트(언약)를 사용했으며, 따라서 샬롬은 베리트와 관련하여 나타난다. 이 두 단어의 관계는 너무 강하므로, 이런 문맥에서 샬롬은 일종의 공식 용어가 된 것같다.
이 사상은 샬롬의 관계가 언약에서 두 당사자에 의해 인쳐진다는 것이다(수 9:15; 왕상 5:12). 환언하면, 언약은 '샬롬'의 관계를 개시하는 것이다. '샬롬'의 관계는 언약의 결과이다. 여호와의 이스라엘과의 화평의 언약을 나타내는, 이러한 구절들에서 '샬롬'은 실질적 안녕이 아니라 언약을 맺은 자들의 성향에 의존하는 평화의 관계를 의미하는 동시에 구원을 위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누하스와 평화의 언약(민 25:12; 집회서 45:24), 레위와 평화의 언약(말 2:5), 다윗과 평화의 언약(겔 34:25; 37:26)은 구원의 언약이다.
사 54:10에서 여호와께서는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신다(Rad, TDNT).
3. 종말론적 기대의 한 요소로서 샬롬/ 에이레네
샬롬은 종말론적 기대의 한 요소이다. 영원한 평화의 최종적 상태에 대한 대망은 선지서들과 다른 성문서들에서 일관하게 표현하는 구약 종말론의 한 요소이다.
이 널리 퍼진, 다방면에 걸친 이 대망의 사실은 샬롬이라는 단어가 관계하고 있는 구절들에서 항상 발견되지 않을지라도 언급되고 있다.
낙원의 상태의 회복이 예언될 때(사 11:10이하; 호 2:20이하; 암 9:31), 하나님의 주관하에 국제적인 평화가 예언될 때(사 2:2이하), 혹은 평화의 때가 도래하는 마지막 시대의 한 겸손한 평화의 왕에 대한 기대를 말할 때(슥 9:9이하), 샬롬이라는 단어가 이런 중심적인 종말론적 구절에 사용되지 않거나 슥 9:10에서와 같이 오직 많은 다른 것들 곁에 사용될지라도, 우리는 가능한 한 가장 넓은 의미의 샬롬에 관한 예언적인 선포를 듣게 된다.
따라서 그 단어가 실제로 발견되는 구절들에 대해 어떤 보다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사 9:5에 메시야 아이의 이름들에서 그 최종 이름 샬롬 사르(평화의 왕)는 의미의 중요성에 있어서 선행하는 다른 이름들과 다를 바 없다. 그 이름은 하나님의 사명(commission)을 지닌 분(사 9:1-6)으로서의 메시야는 도래하는 메시야 왕국의 평화의 보증인(guarantor)과 보호자이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사 9:7의 가장 중요한 기사에서 다시 다윗의 보좌와 결부된 구원을 위해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미 5:5에서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시다"라는 표현은 이 전체 예언의 본질을 요약한 것이다.
피조된 세상은 지금은 그것이 저지른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고 있고 스스로 분열하고 있지만, 결국은 다시 온전하게 될 것인데(사 11:6-9; 29:17-24; 6:1-9), 그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이다(사 65:17-19; 참조: 계 21:1-4).
평화에 관한 언약의 갱신에 관련된 메시지는 우주적이고 영속적인 평화에 관한 약속으로 발전되었으며, 이 구원의 날의 도래는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사 61:1, 2)로서 평화의 나라의 담지자요 설립자인 평강의 왕(사 9:5,6)에 자주 결부되었다.
흥미있는 점은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모든 풍부한 의미를 지니는 데도 불구하고 어느 곳에서도 특별히 내적인 평화의 태도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참으로 그것이 개인보다 오히려 그룹에 대해 사용되는 구절들이 더 많다.
개인에 대한 용법의 전형적인 보기로서, 애 3:17을 들 수 있다: "주께서 내 심령으로 평강을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잊어버렸음이여". 그러나 여기에 샬롬도 감추인 내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외적 안녕의 형태로 나타낸다. 그룹과 관련된 대부분의 보기에서 샬롬은 분명히 외적으로 드러내보일 수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Rad, TDNT).
샬롬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열망에 관련된 사회적 차원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순전히 개인적인 영역을 훨씬 넘어서는 공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샬롬이 체다카(의, 사 48:18; 시 86:10)와, 그리고 미쉬파트(재판, 슥 8:16)의 실제적 이상과, 나아가 심지어는 페쿠다(관리, 사 60:17)와 밀접히 관련된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이것은 또한 가장 보편적인 용례에서 이 단어는 개인적 개념어라기 보다는 사회적 개념어임을 시사한다(H. Beck, C. Brown , DNTT).
4. 예언자의 메시지로서의 샬롬/ 에이레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에서 에스겔까지의 소선지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이 선포한 구원의 메시지를 강렬하게 대항했다. 수세기를 통해 계속된 이 투쟁에서 모든 사람의 주의를 끈 표어는 샬롬(평화)이다. 참으로 전문 용어 인나베 레샬롬(그는 평화를 예언한다)은 이와 관련하여 나타난다(렘 28:9).
샬롬은 어떤 선지자 서클의 정점이었으며, 따라서 이 용어는 두 파당 사이의 심한 투쟁의 중심이 되었다. 문제는 이미 구원의 선지자들을 반대한 미가야의 입장에서 보여졌다. 그러나 이 용어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왕상 22:5이하).
미가는 몇몇 대항자들과 싸웠는데 그들을 이득을 얻기 위하여 예언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그들은 이득이 있는 한, 구원을 선포할 것이다: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 도다…"(미 3:5이하).
예레미야는 그 치열한 투쟁에 투신하여 선지자들로부터 가장 강렬한 저항을 받았다. 큰 고통 중에서 예레미야는 샬롬 에메트(영원한 구원)를 약속하는 예루살렘의 운명이 무엇인지를 말한다(렘 14:13이하).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렘 28장에서 예레미야와 이런 선지자들 간의 극적인 교전의 이야기를 읽는다. 예레미야와 하나냐 간의 문제의 요점은 샬롬(평화)이냐, 라아(환란)이냐 이다.
최종적으로, 에스겔은 거짓 선지자들이 구원이 없는데도 샬롬 하존(구원의 이상)을 본다고 하며 백성을 잘못 인도했다고 동일한 항의를 했다(겔 13:16이하). 여기서 "이들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예언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의 묵시를 본다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니라…"며, 대항한다.
거짓 선지자들의 문제는 샬롬의 문제를 넘어가며, 이 문맥에서 추적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의심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선포한 샬롬이 신화적 개념으로 옷 입은 궁국적 종말론적 평화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실제적 정치적 평화, 즉 모든 중대한 정치적 문제가 잘 해결되어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보장하는 평화 가운데서 살 수 있다는 약속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마치 예레미야가 처음에 이 견해를 함께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다음에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게서 평강을 빼았으셨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렘 16:5).
거짓 선지자들의 프슈도스(yeu'do", 5579: 허위, 거짓말)는 그들이 샬롬을 예언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와 에스겔도 다른 상황들에서 이것을 예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이 백성의 죄를 알지 못했으며, 따라서 절박한 심판에 관하여 어두운 정치적 장면을 해석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로서는 대응 표어 에인 샬롬(평강이 없다)이란 표어를 만들었다(렘 6:14; 8:11; 12:12; 30:5; 겔 13:10,16).
거짓 선지자들의 샬롬과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에인 샬롬 간의 싸움은 강도를 더하여 갔으며, 그러나 주전 597년과 586의 예루살렘의 정복과 멸망으로, 어떤 긴장 완화가 있게 되고, 구원을 예언했던 거짓 선지자들은 철저히 불신을 당했다. 이제는 새롭고 더 큰 의미에서 샬롬의 약속은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예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사로잡힌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악이 아니라 구원을 생각하신다는 놀라운 기사를 기록한다(렘 29:11). 여기에서 우리는 예레미야서에 있는 후기 구원 예언의 근거를 본다. 다른 나라들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가져올 구원을 보고 떨 것이다(렘 33:9). 동일한 주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맺은 평화의 언약에 대한 에스겔의 절정에 달한 메시지에 다시 등장한다(겔 24:25; 37:26이하).
샬롬에 대한 싸움은 이사야의 마지막 장들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서 샬롬은 벌써 선지자의 입장의 어떤 중요한 양상을 보여주는 표어가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이 예언의 충분하고 장엄한 요지의 하나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다면, 그들의 샬롬은 강과 같이 흘러내렸을 것이고 그들의 체다카(의)는 바다의 물결과 같이 되었을 것이다(사 48:18). 여기서 이 평행 관계는 이 용어가 지금 한 영적 의미를 받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유사하게 사 54:13에서 예루살렘 자손에게 약속한 구원의 복은 체다카(의)의 복과 결부되어 있다. '샬롬'과 '체다카'의 동일한 결합은 하나님의 새 도성에 대한 예언적 표현에서 나타난다: "내가…화평을 세워 관원을 삼으며 의를 세워 감독을 삼으리니 다시는 강포한 일이 네 땅에 들리지 않을 것이요 황폐와 파멸이 네 경내에 다시 없을 것이며 네가 네 성벽을 구원이라 네 성문을 찬송이라 칭할 것이라"(사 60:17-18).
사 32:17에 의하면 샬롬은 의의 결과이다: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이 시적 예언에는 '샬롬'이 더욱 실제적 의미로, '카보드'(영광)와 연결되어 있는 사 66:12에서 다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가능한 가장 풍부한 음조를 발하는 것이 있다.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아름다운 소리로 "먼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사 57:19)고 한 것과 같이 평화는 풍부한 기대를 표현하는 용어지만, 더욱 정확한 신학적 용어로 해석되지 않은 용어이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어떤 모호함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러한 많은 측면적 용어를 잘 사용하지 못하는 번역자들은 때때로 이러한 구절들에서 샬롬이 그의 회복된 백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이상, 더욱 현실적인 '안녕, 복리 well-being'를, 더욱 분명한 '평화 peace'를, 신학적으로 더욱 포괄적인 '구원 salvation'을 사용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3. 랍비들, 위경 등 유대 문헌의 용법 
1. 랍비들의 문헌
(a)  랍비 문헌에서 평화라는 개념 전체에 깔려 있는 것은 여호와의 샬롬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와 그리고 순전히 인간적인 차원에서 모두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샬롬은 인사말로서 만날 때('샤알 베샬롬', 안녕을 구하거나 비는 말)나 작별할 때(안녕히 가라) 상대의 안녕을 구하는 것이다. 살롬으로 인사하고 인사에 답한다.
또한 샬롬은 '순조(順調), 안녕, 안전'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pBer, 60에는 임신 6개월 부터 9개월 까지 순조로운 출산(순산)을 위해 기도한 것과 아이의 가고 오는 길에서의 보호,곧 안전을 위한 언급이 있다. 그리고 '휴식이나 안식'이란 의미로도 나타난다. 샬롬은 유대인의 무덤비에서 '안녕이나 구원'이란 의미로 기록되었다.
(b)  랍비 문헌에서도 구약성경에서와 같이 샬롬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벨론의 18개의 간구는 그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를 기원하는데 그 최종 간구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복과 평화가 임하기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샬롬은 베레카(복, 지복)와 병행되고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비록 유대인들 간에 메시야 시대의 평화의 개념에 대하여 견해차가 있었지만, 평화는 의인의 몫이며, 구약성경에서와 같이 메시야 시대의 지복(Blessings)의 총화이다. 이사야 52:7은 이것에 대하여 언급한다.
(c)  샬롬은 또한 사람들(개인들, 가정, 단체, 국가들) 간의 투쟁의 반대어이다. 따라서 사람들 간의 화평케 하는 것에 대해 자주 강조한 내용을 찾아 볼 수 있다. pea.,1.1에 의하면 이것은 그 열매들을 즐기는 것들 중에 하나이다. 학자들의 역할은 세상에 평화를 증진시키는 일이며(Ber 64a), 엘리야는 와서 세상에 평화를 먼저 확립한다(Eduy. 8:7). 예배에서 평화를 위한 기원으로 끝맺지 않은 축도나 기도가 없다(Lev. R. 9:9). '샬롬'은 하나님의 이름들 중 하나이다(Shab. 10b; 2:1, 4b).  UK. 3:12에 '거룩한 자여, 그는 찬양을 받으리로다. 그 안에 평화보다 더 가치있는 어떤 복을 간직하고 있는 그릇이 없도다'라고 말한다.
Rabban Simeon b. Gamaliel의 기록에 '세 가지, 즉 진리와 심판과 평화로 말미암아 세계가 보존된다'고 하였다(Avot 1:18). 이 기록에 의거하여 탈무드(Talmud)는 '만일 심판이 집행되면 진리가 지지를 받고 평화가 증진되기' 때문에 그 세 가지는 사실상 하나라고 선언한다(TJ, Ta'an. 4:2, 68a). 탈무드 랍비들의 최고 이상은 평화이기 때문에 그들은 할 수만 있으면 평화를 위하여 정의나 심판을 유보하거나 제외하였다.
힐렐(Hillel)에 있어서 아론은 평화를 추구하는 자의 한 모델이다(Ab,.1,12; ckawh, Str.B,.1.217). S.NU(42.6:26)에는 이방인들이나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의 죄가 있을지라도 그들이 평화하는 한 사탄이 그들을 해칠 수 없다고 한다. 랍비들은 호 4:17을 해석하여 '이스라엘이 우상들과 연합되어 있을지라도 평화가 그 안에 우세하고 있는 한 그대로 두라'고 가르친다(Gen. R.38:6).
평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진리의 엄격한 노선에서 벗어나는 것도 허락되었으며(Yer. 65b), 탈무드는 민 5:23에 관련하여 '만일 남편과 아내 사이에 평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신성하게 기록된 하나님의 이름을 지울 수 있다면, 전세계의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참으로 더욱 많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랍비들은 성경 자체와 모순하여 어떻게 사람들 간의 평화를 지지하는지를 설명한다(CKAWH,Slav. En. 52:11-13).
이것은 이웃의 '샬롬', 곧 구원을 구하는 문제가 아니라 다툼의 종식이라는 의미의 [샬롬]을 구하는 문제이다. 아마도 이것은 불일치나 불화가 메시야의 도래를 방해한다는 사상에 의한 것같다. 랍비들의 기록은 시기, 다툼, 불화가 하나님의 뜻에 반대가 된다는 강한 신조를 명시하고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바로 세상의 존속은 평화에 의존한다(Ab., 1,18). 물론 하늘에 있는 것들 역시 불화할지라도 그렇다는 것이다(참조, 골1:20).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하여 구약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샬롬'의 용법을 도입하게 한다. 다마스커스 문서는 하나님이 모든 육체와 다투고 있다는 사실로 시작한다. 이 다툼은 평화를 이루는 장막을 만들기까지 널리 펴져 나간다. 우상숭배와 같은 죄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반목을 조성하지만(Lv. r.,7 on 6:2), 제단의 돌들은 그들 간의 평화를 조성한다M. Ex., 29 등). 하나님과 사람 간의 평화와 다툼은 사람이 두 가지, 곧 긍정적으로와 부정적으로 행동하는 상호관계를 포함한다.
(d)  앞에서 살펴본 바, 샬롬은 유대인이 대망하던 구원의 핵심 바로 그것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평화를 추구하고( Rabbi Hille1, Aboth I:I2. SBI 217)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세우는 것은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었다. 랍비들의 가르침에서 평화롭게 하는 자의 역할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그것과 유사한데, 이 점에서 랍비 유대주의는 신약성경의 '새 계명'과 비슷하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근본 동기는 이유에 대한 적극적인 사랑이라기보다는 샬롬을 방해할런지도 모르는 모든 것을 제거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순전히 인간적인 차원에서 적용되는 것은 또한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이리하여 평화라는 개념은 사람이 행한 것과 행하지 않은 것 모두를 한층 중요하게 생각하는 새로운 차원을 얻게 된다. 이러한 평화에 대한 개념은 구약 시대 이후 발전한 새로운 용법에 큰 영향을 주었다.
2. 위경, 요셉푸스, 필로
(a)  위경에서 종교적 용법을 고찰해 보면, Test ⅩⅡ에서 '평화의 천사'라는 말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에이레네는 Test. L. 18:4와 D. 5:9,11에서와 같이 전쟁의 중단으로 표현된 구원을 의미하지만(Test. Jud. 22:1이하) 그것은 구원의 효과를 내지 못한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Test. ⅩⅡ와 특별히 Eth. En에서 평화의 반대는 랍비들의 견해와 같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또는 인류와 투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다.  Eth. En에 의하면 불경건한 자에게는 긍휼과 평화가 없고(5:15), 하늘의 타락한 수호 천사들에게는 평화도 없고 용서도 없지만(12:5), 반면에 의인에게는 평화가 약속되어 있다.
그러나 Eth. En. 1:17이하에 의하면, 평화는 심판의 유보 또는 비집행이며, 따라서 평화는 용서와 심판자의 긍휼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지만 평화는 또한 빛과도 연결되어 있어서 긍정적인 의미를 함축하며, 구원을 뜻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의 평화는 '평안히 내버려 두었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열 두 족장의 유훈에서 평화는 재판을 유보하는 것, 즉 범법자를 동정하여 유예해 주는 것, 혹은 적어도 그에 대한 형벌의 집행을 유예하는 것을 의미한다.  위경에서 평화는 또한 인간들 사이의 일치나 화합을 의미하기도 한다(Foerster, TDNT;  H.Beck, C. Bro wn, DNTT).
(b)  요세푸스는 구약성경과 랍비들의 용법을 철저하게 따른다(Ant. 1, 179; 11, 216; 8, 405; War 2, 135).
(c)  필로는 언어학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헬라 전승을 따른다. 그에게 있어서 에이레네는 정치적 평화와 욕망의 싸움과 대조로, 오직 하나님께만 속하고(Heinemann,413ff), 하나님으로부터만 찾아 얻을 수 있는 내면적 안식인 마음의 평안을 의미한다(Vit. Mos., 1, 304). 그렇다고 해서 평화의 외면적이고 객관적으로 입증이 가능한 상태를 가리키는 측면과 무관하지 않다. 내면적, 외면적으로 싸움과 평화는 그룹을 이룬다. 내면적 싸움이 가장 나쁘며, 그것이 모든 악의 근원이다.  필로는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역시 내면적 평화를 유혹과 탐욕에 대한 승리로 간주하였다(Jos. 57). 이디오피아어 에녹서 52:11은 '평화와 사랑을 가져오는 자는 복이 있다'라고 선언하고 있다(Foerster, TDNT).
3. 쿰란 문서
쿰란 공동체는 변절한 이스라엘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켜(1QS 8:4-9; CD 1:4과 해당 구절) 자신을 구원 받은 자들의 종말론적 공동체라고 생각하였다. 이 공동체의 성원들은 이미 종말론적 평화를 향유하는 경지에 들어간 것이다.
그들의 문헌에서는 영원한 평화(IQS 2:4), 평화의 넘치는 풍요( IQS 4:7), 끝이 없는 평화(IQH 7:l5), 지속적인 평화(IQH 15:16), 제한 없는 평화(IQH 18:30) 등에 관한 구절이 나온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아직도 투쟁의 와중에 있다(CD 4:13 및 그 밖의 해당 구절에서는 벨리알과 이스라엘 및 미가엘의 싸움이 언급되고 있고, IQM 1:9 이하에서는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의 싸움이 언급되어 있다).
평화의 도래는 재난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IQH 1:17). 구원은 구원을 받을 사람들이 불 붙는 용광로 속에서 연단을 받은 후에라야만 참된 것으로 인정 받는다(IQM 17:1). 하나님은 이미 영원 무궁한 평화의 언약(구원)을 생명의 바늘로 새겨 놓으셨다(IQM I2:3). 이러한 평화는 더 이상 거절을 당하지 않으며(IQH 9:11), 구원의 복으로 충만한 피난처가 된다(IQH 9:33). 평화는 구원과 행복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평화'(IQM 3:5; 4:14)와 '하나님의 기쁨'은 하나님의 백성이 안전한 그들의 고향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암호이다(1QM 3:11).
4. 신약성경의 용법 
1. 서론
에이레네는 신약성경에 92회 사용되었으며, 요한 1서를 제외한 신약의 모든 성경에 나온다. 복음서에 25회(마 4회, 막 1회, 눅 14회, 요 6회), 사도행전에 7회, 바울 서신에 47회, 야고보서에 3회, 베드로서에 5회, 유다서에 1회, 요한서신과 계시록에 4회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에이레네의 변화 또는 발전된 의미를 모두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단어는 형태와 내용에 있어서 70인역본과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전통을 착실히 따르고 있다. 그리고 랍비 문헌의 샬롬과 같은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추가로 고전 헬라어 문헌에 나타난 의미들이 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의 의미는 인사와 그리고 유사한 표현에서 안녕(well-being)이나 구원(salvation)이란 의미를 가진다.
마 5:34(눅 7:50)와 약 2:16에서 작별 인사로, 눅 10:5; (눅 24:36); 요 20:19; 요 20:21; 요 20:26에서 도착 인사로 사용되었으며, 당시 팔레스틴에서 유행한 인사를 번역한 것이다.
행 16:36에서 누가가 로마 간수의 인사말로 "평안히 가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그는 분명히 그 인사말을 70인역본에서 취했으며, 새 언약의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인사말이라고 생각했다.
사도 바울 역시 항상 그의 편지서들에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라는 인사말을 사용했다.
계 1:4에도 동일한 인사말이 나온다. 이것은 히브리인과 아람인의 인사와 같은 것이다.
디모데전·후서, 요한이서, 그리고 유다서에서는 자비를 뜻하는 말과 함께 사용되었으며, 평화는 또한 예를 들어 벧전 5:14; 요삼 1:15에서처럼 끝맺는 인사말에 나온다. 구약성경의 평안히 가라와 비슷한 말이 행 15:33과 고전 16: 11에 나오며, 눅 2:9에 나오는 시므온의 말도 이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안전(security)이란 의미의 에이레네는 눅 11:21에서 찾아볼 수 있다(참조: 살전 5:3). 고전 14:33에서는 구약성경의 영향이 한층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서 에이레네는 무질서의 정반대이며, 교회 안의 무질서에 반대되는 상태를 나타낸다. 행 14:2.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의 주요 의미는 분명히 헬라적인 의미가 아니라 보다 깊은 의미에서의 구원이다. 에이레네는 인간 간의 일치 또는 조화를 나타내며(행 7:26; 갈 5:22; 엡 4:3; 약 3:18; 참조: 벧전 3:11), 하나님과의 화평도 의미한다.
에이레네는 행 12:20; 행 24:2; 마 10:34; 계 5:4에서는 전쟁과 반대되는 평화에 대해 사용되었다. 바울은 이 단어를 영혼의 평안에 대해 사용하는데(참조: 롬 15:13), 이런 용법은 매우 드문 헬라의 용법이다.
눅 14:32에서는 평화의 조건을 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인사하는 것을 뜻하는 아람어투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문맥상으로는 존경과 무조건적 복종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그 용법상 세 가지 중요한 개념을 지니고 있다. - ⑴ 안식의 느낌으로서의 평화,  ⑵ 하나님과의 화해의 상태로서의 평화, ⑶ 그리고 종말론적 구원으로서의 평화이다. 이 중 마지막 의미가 기본적인 것이다.
2. 가장 광범위한 의미에서 만물의 정상적인 상태로서의 에이레네
고전 14:33에서 바울에게 있어 에이레네는 고린도 교회에서 생각을 예언함으로 야기된 어지러움(혼란스런 상태)과 반대되는 정상적인 상태이다.
영감을 주시는 하나님은 어지러움(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평화의 하나님이시다. 영감은 다툼과 혼란을 위한 구실을 허용하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시기와 분쟁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가 아니다. 여기서 지적하는 원리는 이적(miracles)이 법의 위반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법을 위반하는 편이 아니라 법을 지키므로 결과하는 평화, 곧 질서의 편이다. 이 질서의 평화는 진정한 교회의 정상적 상태인 것이다(고전 12:2; 약 3:16과 비교).
평화는 공동 예배(고전 14:33)와, 사도와 그의 협동자들 간의 교제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것이다. 이 의미에서 에이레네가 분명히, 강조적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주목을 끄는 내부와 외부 사이의 관계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건강한 또는 정상적인 상태는 하나님에 의해 영혼이나 인류에 제한되지 않고 전 우주에 미치는 것이다(참조: 1corinthians, ICC; V. Hasler, EDNT; Foerster, TDNT).
3. 인간의 종말론적 구원으로서의 에이레네
(a)  여기에서 출발점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 특별히 종말론적인 구원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구약성경의 샬롬이다.
눅 1:79에 사가랴의 찬송에서 에이레네는 대망한 종말론적 구원이다.
눅 2:14에 천사의 찬송에서 에이레네는 사람들 중에 평화나 하나님과 평화 뿐만이 아니라 이제 땅으로 온 구원을 가리킨다.
눅 19:42에 "평화에 관한 일"과 눅 19:38에 "하늘의 평화"도 구원이다.
계 12:10과 계 19:1에 "구원(소테리아)은 에이레네와 동일한 것이며, 그 의미는 (요한계시록에서 소테리아와 동일한) 에이레네가 하늘에 있고 하늘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적 사건으로 온다. 히 13:20은 이것을 "평강의 하나님"과 "양의 큰 목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자"를 동일시 함으로써 넌지시 암시한다.
히 7:2은 그리스도의 전형으로서의 멜기세덱은 살렘 왕, 곧 평화의 왕이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구원은 평화의 복음으로 선포된다(엡 6:15; 참조: 행 10:36; 엡 2:17).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이다(요 14:27). 세상은 오직 [샬롬]을 원하며, 그리스도는 자기가 확보한 구원을 주신다.
예수님은 관습적인 작별인사를 사용하셨으며(막 5:34; 병행구, 눅 7:50),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평안의 인사(이 집에 평안이 있을 찌어다)를 가르쳐 주셨다. 제자들이 어느 집에든지 들어갈 때 하는 인사는 소원이 아니다.  그 평안은 그대로 거절하거나 받거나 해야 하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만일 거절하면 참으로 그 평안은 제자들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눅 10:5이하; 마 10:13). 이스라엘의 마지막 세대는 최종적 선택을 직면하고 있다. 평화의 인사 형태에 동반하는 구원의 말없이 어느 성읍이나 집에도 들어갈 수 없다. 이 인사를 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평화의 아들'이 되지만 이 인사를 거절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으로부터 영원히 제외되어 있는 것이다(V. Hasler, EDNT).
그리고 편지서들(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빌 1:2; 살전 1:1; 몬1:3)과 계시록(계 1:5)에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라는 인사 또는 축도의 말은 특수한 의미를 지닌다. 유대인의 축복 공식문은 '긍휼과 평화'이다(2bar. 78:2). 바울은 이 축복문에서 '긍휼' 대신 '은혜'를 취하여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있기를 원하노라)"라고 축복한다.
그는 "은혜와 평강"을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시키므로, 예배 의식을 따랐다. 이 축복으로 그는 그의 독자들에게 주님의 구원의 은사를 수여하는 것이다.
그는 이 은사를 고전 1:4-고전 1:9의 서언에서 더욱 정확히 묘사하며, 갈 1:4에서 그 축복을 이어 부언하고 있다. 후자에서 카리스(은혜)는 희생제사의 방식으로 설명되어 있고, 에이레네는 악한 현세대로부터 구원 받는 해방의 과정으로 설명되어 있다. 사도 요한이 그의 계시록 서언에서 독자들에게 한 축복도 바울의 축복이 의미하는 바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 구원을 구해야 한다: 히 12:14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경고한다. 이 문구에서 에이레넨 메타(개역, 더불어 화평함)는 다른 사람들과 일치나 화합을 의미하지 않는다. 저는 다리가 고침을 받을 수 있는 우리의 발을 위한 곧은 길을 만들라는 권고 후에 모든 사람과 교제하여 구원을 구하라는 명령이 뒤따른다.
이 구원은 골 3:5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이다.
이 구원은 빌 4:7에서 사람을 보호하는 능력이다.
어떤 학자들은 6절에 비추어 이것이 불안에 반대되는 평안감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그것은 신자가 보호받는 왕국이다. 비록 인간 관계 속에서 이 구원이 때때로 사람의 외적인 일들과 동일하지 않으며, 심한 적대적인 경험으로 인도할지라도 그렇다(마 10:34이하).
(b)  이런 구절들에서 에이레네는 실질적으로 조에(생명)와 병행하며, 바울은 롬 8:6에서 평안과 생명을 동일하게 취급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바울은 육신의 노력은 사망, 영의 노력은 에이레네로 인도한다고 말한다. 그는 7절의 첫 부분에 근거를 둔다. 육신의 노력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며 오직 사망으로 인도한다. 조에(생명)와 다나토스(사망)가 종말론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일 존재 양식인 것과 같이 조에(생명)는 그와 병행하는 에이레네와 함께 있다.
에이레네(= 샬롬 = 구원)는 최종적 성취의 상태이며, 새로운 피조물의 정상적 상태이다. 이와 같은 특징은 벧후 3:14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안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엔 에이레네) 나타나기를 힘쓰라."
여기에서 에이레네는 기본적인 내적 성벽이나 내적인 평안도, 하나님의 은혜도 아니며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형성된 심신의 회복과는 별도로, 상상할 수 없는 완전한 복지(안녕)나 정상 상태를 암시한다.
이 의미에서 바울의 더욱 친숙한 인사는 때때로 데오스 테스 에이레네스(평화의 하나님)로 말한다. 이 묘사는 바울이 평화의 하나님을 기대한 것과 확고하게 연결되어 있다.
평화의 내용은 문맥에서 결정될 수 있다. 롬 16:20에서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고 말했는데, 이 사탄의 파멸은 구원의 일부이다. 평강(화)의 하나님('데오스 테스 에이레네스')이란 말은 하나님이 평화와 지복을 시행할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탄을 멸하실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벧후 3:14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정도의 구원과 복지(안녕)의 절대적인 내용은 살전 5:23에 나타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에 흠이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에이레네는 바로 '영적 번영'이 아니라 전인간, 곧 영혼과 몸의 구원이다. 동일한 의미는 히 13:20이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에이레네는 카리스(은혜)의 결과인 영혼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인간의 구원을 의미한다.
구약성경과 랍비적 용법에 근거해서, 에이레네는 이와같이 가장 심오하고 포괄적인 의미를 요구한다. 에이레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미 일어나고 있는 전인(whole man)의 종말론적 구원이다. 그것은 확실한 성취의 상태로서 카이네 크티시스(새로운 피조물)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 의미에서 구원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계시되었다(참조: Foerster, TDNT; H.Beck, C.Brown, DNTT; V.Hasler, EDNT 등).
4. 하나님과의 화평으로서의 에이레네
신약성경에서 에이레네는 하나님과의 평화의 관계에 대하여 드물게 사용되었다. 그 첫 언급은 엡 2:14-엡 2:17이다. 바울은 사 57:19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러므로 구원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용어가 15절에 나타날 때 그 반대어 에크드라(증오, 적의; 개역, 원수된 것)에 대하여 어떤 해석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적의를, 어떤 해석자들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의를 의미한다고 한다.
만일 율법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놓고 이스라엘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이 두 가지 역할을 알지 못한다면 이 구절들을 거의 올바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율법으로 말마암아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대와, 또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적대가 일어난다. 사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하여, 그리고 율법을 위하여 그들 자신들을 이방인들로부터 분리하고 이방인들을 원수로 생각해야 했으며, 이방인들은 그런 유대인을 적대적으로 대했다.
따라서 14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에이레네)이시라"는 포괄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폐하셨을 때, 두 가지 무질서 곧 사람들 중에 무질서와 하나님에 대한 무질서를 파기하셨다.
이 에이레네는 하나님과의 평화와 인류 중에 평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질서, 모든 관계의 회복(healing)을 의미한다. 그래서 15절에 에크드라(원수된 것)란 표현도 일반적인 의미를 가진다. 15절에 "화평하게 하시고"와 16절에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도 역시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에크드라와 에이레네는 여기서 인종 안에서 많은 서로 다른 형태를 취하는 객관적 상태들이다.
만일 하나님과 평화가 이 구절에서 에이레네의 일부이라면 롬 5:1에서 에이레네는 그 유일한 의미를 나타낸다. "하나님으로 더불어"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이 언급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적한다. 이것은 롬 5:10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원수들이며, 하나님이 그들과 화해하셨다는 사실에 동의한다(참조, 엡 2:16). 그래서 다음 평화는 사람이 변경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상호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의 사역을 하심으로써 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게 되는 관계이다.
5. 인간의 상호 평화로서의 에이레네
롬 14:17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한다. 그는 강한 자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먹고 마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서 의와 평화와 희락의 통치로 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희락(카라)"은 15절의 "근심하게 되"(뤼페이타이)어서는 안되는 것을 보여 주며, 의(디카이오쉬네)는 여하한 사람의 양심도 침해 당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생각나게 한다. 평화(에이레네)는 하나님의 나라에는 어떠한 종류의 질병이나 악이나 불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계속하여 이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봉사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든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하여 "평화에 관한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라는 권고를 한다. 여기에 에이레네는 오이코도메(덕을 세움)와 병행하는 것이며, 그것은 분명히 상호 간의 평화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17절에서 에이레네는 이것보다 더 큰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은 성령 안에서 건강을 증진시키는 어떤 것의 창조, 즉 '에이레네'를 함축한다. 그렇지만 실제적으로 로마에 있는 교회에 적용하면, 이 건강을 증진시키는 일은 의심 없이 평화이다.
우리는 고전 7:15의 난해한 말에 동일한 사상의 어떤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화평 중에서 너를 부르셨느니라". 바울이 만일 이방인 배우자가 결혼을 파하려고 하면 기독교인 배우자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주님께서 이혼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과 모순되는 것같이 보인다: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이것은 오직 주님의 말씀, 곧 우리는 이러한 경우에 노예들과 같이 구속받지 않는다는 말씀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15절에서 우리는 제한(restriction)이 아니라 이유(reason)를 가진다. 여기에 '데'는 '그러나 but'가 아니라 '오히려 rather'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부름에 대한 언급은 바로 앞에 말한 것을 위한 근거를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오히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언급된 개인적 경우를 넘어가서, 하나님이 우리를 평화로(혹은 평화를 위하여) 부르신 것을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말하는 근거를 확립한다. 따라서 '에이레네'는 마지 못해서 유지하는 결혼 생활의 불화에 대한 반대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죄가 의도한 정상에 대한 파괴 상태와 정반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물의 건강한 상태, 정상적 상태를 함축한다. 당신이 배우자와 불화할 때 그를 구원하는 것이 당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해 보라. 구원과 그 결과인 화합의 복이 당신의 가정에 임할 것이다. 인간의 상호 간의 평화도 이 정상적 상태에 포함되어 있다. 다음 절(16절)은 '가르'로 시작한다. 여기서 '그러면, 그렇다면'이란 의미를 지닌다. : "(그렇다면)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딤후 2:22은 확실히 우리가 내적 경건(신앙심)으로 평화를 조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메타가 에이레네에 관계하지 않고 '…와 함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체 안에서 에이레네는 '구원을 가져 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당연하다. 한편 그것은 확실히 싸우고 있는 변론(제테세이스)을 한번 보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23절).
다음 구절들에서는 단순히 사람들 사이의 일치나 화합(concord)을 의미한다. 엡 4:3: "화평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약 3:18 :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의가 자라나는 씨는 화평케 하는 자들이 화평으로 뿌리게 되는 것이다. 시기(젤로스)와 다툼(에리데이아)은 '에이레네'의 정반대이다. 벧전 3:11에서 시 34편에서 인용하여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라는 말을 무슨 의미로 사용했는지 정확히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의미는 아마도 일치와 화합(참조, 9절)일 것이다(참조: Foerster, TDNT).
6. 영혼의 평화로서의 에이레네
롬 15:13에서 이 단어는 영혼의 평화를 의미한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그러나 이 단어가 어떻게 이 의미를 취하게 되었는지를, 즉 정상적 상태에 대한 신약성경의 이 단어의 일반적 용법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평강의 하나님"이란 말이 외적 생명에 관한 의미를 함축하는 것과 같이, 그리고 에이레네가 인간의 전존재의 정상적 상태 - 카라(기쁨)와 불가분리적인 상태인 구원 - 을 인간 안에 창조하신다.
여기에서 에이레네의 개념은 스토아 철학의 소극적인 갈레네(고요함, 평온)와 다르다. 이 평화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세상으로부터 은둔도 아니고 영적 세계나 시비적 명상에로의 경건한 도피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삶을 살아가면서 영원을 찾을 때에 이미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는 기쁨이 충만한 확신이다(참조: Foerster, TDNT; H.Beck, C.Brown, DNTT). 이러한 영혼의 평화는 히브리어 샬롬의 특징도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평화는 독특하게 기독교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리고 영혼 또는 마음의 평화에 관한 문맥들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롬 8:6의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이라는 구절과 갈 5:22의 성령의 열매들 중 하나로서 "화평"은 이러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전자에서 에이레네는 생명인 구원을 뜻하고, 후자에서 사람들 간의 일치, 조화를 뜻하지만 내적, 영혼의 평화도 포함하고 있다(참조: 롬 14:17, [인간 상호 평화로서의 에이레네] 항목).
빌 4:7에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골 3:15에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평강",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이 다스리는 영역으로서 마음과 생각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 구원하는 능력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마음 또는 영혼이 평화를 누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참조: Walter Bauer; H.Beck; C.Brown; W.Foerster; G.Von.R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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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vri"(5485, 카리스) 은혜 grace, 호의, 친절 favour.....헨(은총, 호의), 라촌(주의 은총), 헤세드(은총), 라함(우애. 동정), 토브(선대), 게둘라(영예)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카리스(Homer 이래)는 기본어이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a)  이 단어는 '사람들 중에 복리를 가져오는 것'을 의미하며, 카라(carav, 5479)는 이 복리에 대한 개인적 경험이나 표현을 의미한다.
(b)  이 단어는 (a)의 기본 의미에서 여러가지 의미가 파생되었으며, '은혜, 호의, 아름다움(미), 미덕, 사은, 감사, 사의, 친절, 즐거움, 호의의 표현, 돌봄, 감사의 빚, 보답'을 의미한다.
(c)  이 단어는 속격과 함께 사용될 때, '~을 위하여, ~에 대한 고려를 해서'를 의미한다.
(d)  아이스킬루스는 신들의 호의에 카리스를 사용했다. 플라톤의 문헌들에서 카리스는 '좋은 선물, 좋은 뜻, 호의, 기쁨, 기쁘게 하는 것, 감사' 등의 뜻을 가진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카리스는 70인역본에서 약 190회 나오며 여러 히브리어로 사용되었으며, 그 중 헨이 가장 자주 나오며(61회), 대개 '호의, 좋아함, 의향, 기호', 드물게 '매력, 아름다움, 애교'를 의미한다(시 45:2). 그리고 이 단어는 라촌(만족스러운 것, 사람들 사이에서, 잠 10:32; 사람이 하나님께 구하는 은총, 잠 11:27; 사람이 '하나님께 얻는 은총'), 헤세드(은총, 에 2:9; 에 2:17), 라함(우애감, 단 1:9; 동정, 창 43:14), 토브(선한 것, 잠 18:22), 게둘라(영예의 표시, 에 6:3)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카리스는 신약성경에서 15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누가의 기록.
① 카리스는 비종교적인 행 24:27; 행 25:3; 행 25:9 등에 나타나며, 좀 더 분명하게는 행 2:47; 행 4:33에 나타난다.
② 구약성경의 영향이 눅 1:30; 행 7:46; 행 7:10; 눅 2:40; 눅 2:52; 눅 6:32 이하의 종교적인 용법에서 나타난다.
③ 카리스는 눅 4:22; 행 14:3에서 복음의 특성을 설명해 준다.
이 단어는 행 6:8에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묘사한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행 11:23에서는 교회 성장에 있어서 카리스의 지도적인 역할을 볼 수 있다: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행 14:26; 행 15:40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한다.
행 15:11은 권고 형식의 본문에 나타나는 바울 사상의 표현이다: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b)  바울 서신.
① 카리스는 바울의 중심 개념으로서 인사말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롬 1:7; 살전 5:28 등).
② 바울에게 있어서는 카리스는 독특하게 구원 사건의 구조를 설명해 준다. 기본적인 사상은 값없이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문제는 카리스가 하나님의 속성만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구체화되고(갈 2:21) 복음으로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 은혜는 죄인들에게 나타났고(롬 3:23-24) 구원의 전부이며(고후 6:1) 모든 신자들이 받은 것이다(고전 1:4).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화된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과 더불어 신자들은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롬 3:24 이하). 이것은 구원의 방법으로서 율법을 배제하는 것이다(롬 4:16). 은혜는 칭의의 기반이며, 그것에서 나타나게 된다(롬 5:20-21). 그래서 은혜는 어떤 의미에서 일종의 상태이다(갈 5:2). 또한 은혜는 항상 선물이다. 은혜는 충분하다(고전 1:29). 우리는 더 요구하거나 더 얻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은혜에는 확신적 요소가 들어있기는 하나 거짓 확신이 아니므로 자랑할만한 여지가 없다(고전 1:29; 참조: 갈 5:4).
③ 죄를 극복하는데 있어서 은혜의 작용은 그 능력을 보여준다(롬 5:20-21). 은혜와 죄와는 구조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은혜는 숙명적인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하신 자들에게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롬 11:5-6). 은혜는 교회 안에서, 보기로 바울의 모금에서(고후 8장)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은혜의 목적은 모든 선행을 하는데 있으며(고후 9:8), 그렇기 때문에 선행을 요구하는 것이지만(고후 6:1), 자원하여 순종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할 뿐이다. 은혜는 방종을 허용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이론이다. 바울은 롬 6:1에서 그런 단순한 생각을 책망하고 있다.
④ 바울의 사도직은 롬 1:23 등에서 특별한 은혜이다. 사도직이 바울에게 주어진 것과(롬 12:3), 그것을 수행하는 것은 은혜였다(고후 1:12). 교회를 방문하는 것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은혜였다(고후 1:15).
⑤ 골 1:6에서 카리스는 복음을 뜻한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골 4:6에서 '매력'을 의미한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엡 1:6-7에서 카리스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호의"를 의미한다: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특히 엡 2:5 이하가 바울적 특색이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엡 3:2; 엡 3:7-8도 마찬가지다. 엡 4:7; 엡 4:29에서 "주다"라는 단어와 함께 쓰는 것은 상투적인 표현이다.
⑥ 목회서신에서 카리스는 딤전 1:12에서 '감사'를 의미한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딤후 2:1에서 직분의 '은혜'를 나타낸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딤후 1:9에서 은혜가 나타났다는 본문을 통해서 은혜와 행위를 대조시키고 있다(참조: 딛 2:11).
딛 3:4 이하에서 선하심이나 자비 등의 용어가 같은 뜻을 가진 단어들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행위와의 대조를 보는데 이번에는 세례(침례)를 받는데서 나타난 은혜를 언급하고 있다(딛 3:5 이하).
딤전 1:14에서 믿음, 사랑, 그리고 소망 대신 은혜(카리스)를 둔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c)  히 4:16에서 카리스와 엘레오스(e[leo", 1656: 자비, 동정, 불쌍히 여김)를 사용한다(참조: 딤전 1:2). 그리스도는 은혜를 구현하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은혜를 받는다(히 7:25).
히 2:9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은혜로 고난 받으셨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히 10:29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또는 피)은 계약과 은혜를 결합하였다. 은혜와 제사에 쓰인 고기를 대조시키는 것은 히 13:9에서 계약에 대한 반대 명제를 언급한 것의 일부분이다.
히 12:15에서 우리가 은혜에서 떨어지지 말아야 할 것을 언급한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d)  베드로전서에서 고난은 은혜로 이해되고 있다(벧전 2:19-20). 벧후 3:18은 카리스를 그노시스(지식)에 관련시킨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약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e)  요한의 기록.
카리스는 요이 1:2과 계 1:4; 계 22:21의 인사말에 나온다.
요 1:14; 요 1:16-17에서 은혜는 율법과 반대되고, 진리와 완전함에 결합되어 나타나는 로고스의 계시의 결과를 언급한다. 그럼으로써 이 단어의 독특한 의미가 드러나는 것을 도와주고 있다.(참조: H. -H. Esser; H. Conzel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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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vxa(1391, 독사) 광채, 영광, 영화, 명성.....카보드(권능, 장엄/장려, 영광의 위엄과 권능)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독사(Homer이래)는 도케오(dokevw, 1380)에서 유래했으며, 기본 의미는 '생각하는 것, 의견'이다. 이것은 두 가지 형태를 취하는데, '나는 생각한다'라는 도케오의 의미에서 '내가 가지는 의견'을, '나는 ~라고 간주한다'라는 도케오의 의미에서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가지는 의견'을 의미한다.
(a)  이 단어는
① '기대, 의견, 견해, 단순한 추측', 철학적 주의.
② 좋은 평판, '명성, 칭찬'.
③ '빛, 광채'를 의미한다.
(b)  이 단어는 요세푸스와 필로의 작품에서,
① '견해'나 '주의',
② '명예'나 '영광',
③ '장려' 그리고
④ '하나님의 광휘'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독사는 70인역본에서 400회 이상 나오며, 25개의 히브리어를 번역하며, 주로 카보드(영광)를 번역한다.
독사는 70인역본에서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카보드와 동일한 의미를 나타낸다. 독사는 '견해, 의견'(전 10:1; 집회서 8:14; 마카베오사서 5:17), '장려, 권능, 세상적 장엄'(사 17:4; 사 35:2; 학 2:3),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사 24:7이하; 사 29:3; 사 42:8),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사 2:10, 사 2:19, 사 2:21; 출 33:22; 시 102:15) 등을 의미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독사는 신약성경에서 167회 나오며, 한글개역 성경은 한번 '광채'로 번역하고, 모두 '영광'으로 번역했다.
(a)  독사는 하나님의 존재 양식을 나타낸다. 신약성경에서 독사의 용법은 일반 헬라어 용법보다 70인역본을 따른다. 이 단어는 '평판'과 '능력'이라는 의미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존재 양식'을 표현한다. 따라서 이 용어는 헬라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성서적 용어가 되었다.
신약성경에서 70인역본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 영예', '하나님의 장엄',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가견적 광채는 고전적인 것이 아니며, 단지 문맥에서 차이를 식별해야 한다. 그렇지만 항상 표현되는 것은, 비록 신현현의 가시적 요소를 여러 가지로 강조할지라도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다. 예를 들면,
행 7:2에서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본 "하나님의 영광",
눅 2:9의 크리스마스 기사에서 "주의 영광",
눅 9:31이하; 벧후 1:17의 변형에 대한 기사에서 "지극히 큰 영광",
행 22:11의 다메섹 도상의 경험 "그 빛의 광채",
계 15:8; 계 21:23의 하늘의 성전과 하늘의 도성에서 "하나님의 영광" 등이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이미 실재하는 것을 실제적 인정과 감사로 고백하거나(행 12:23; 롬 4:20; 계 16:9) 찬양하는 것(눅 2:14; 눅 19:38; 롬 11:36; 롬 16:27; 엡 3:21; 빌 4:20; 딤전 1:17; 계 4:9; 계 7:22 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송영은 에스틴(ejstivn)을 전제한다(갈 1:5; 벧전 4:11).
요한의 독특성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키는 용법과 인간이나 하나님이 부여해 주는 명예나 찬양에 대한 용법을 거의 순수하게 병행시킨다는 사실이다(요 12:41; 요 12:43).
(b)  독사는 예수님의 영광을 표현한다. 신약성경에서 독사를 하나님과 관련시킨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와 관련시킴으로써, 결정적인 단계를 취한다.
이 관계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표현되며,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의 전동력론(whole dynamism)은 독사의 용법에 반영되어 있다.
롬 6:4에서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영광에 의해 다시 살아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딤전 3:16에서는 영광 속으로 올리워진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행 7:55에서 스데반은 하나님의 영광의 오른 편에 계신 그를 보았다.
베드로전서에서 그의 "고난 후에 받으실 영광"(벧전 1:11)과 그에게 "영광을 주신 하나님"(벧전 1:21)에 대해 말한다.
히 13:21에 의하면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지는 것처럼 그에게 돌려진다. 그는 영광의 주님이시다(고전 2:8; 약 2:1)
종말론적인 소망(참조: 사 40:5)은 우리의 위대하신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나타남이다(딛 2:13; 벧전 4:13; 벧전 5:1; 막 13:26등). 이 언급들의 대부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며, 독사가 성육신한 예수님에 적용된 것은 매우 드물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이 단어는 재림(parousia)과 관계되어 있다(막 8:38; 막 10:37; 막 13:26과 병행구, 마 19:28; 마 25:31).
누가복음에서 독사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변모 기사에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탄생에 독사의 계시(눅 2:9)는 천사들의 출현과 같이 하늘나라에서 그의 오심을 지적한다. 요 17:5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 전 "하나님과 함께 가졌던 독사"를 언급한다.
요한복음에서, 오직 믿음으로 또한 성육신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본다(요 1:14; 요 2:11; 요 11:40). 그리스도의 이 독사는 본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요 7:39; 참조: 요 12:23; 요 13:13; 요 16:14; 요 17:1, 5의 기도). 영광으로 들어간 것은 십자가에서이다(요 13:31). 여기에서 하나님의 독사가 고백되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 신자들이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은 이 수난의 빛에서이다.
(c)  독사는 신자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 강조점은 하나님의 독사를 보는 것에 있다(참조: 레 9:6; 사 6:1; 사 35:2). 랍비들에게 있어서도 영원한 행복은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강조점은 참여에로 옮겨진다.
빌 3:21에서 부활 때에 몸은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영광의 몸으로 변모된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화롭게 된다.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그 영광에 참예할 것이다(골 3:4).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을 것이다(참조: 롬 8:17). 그리스도는 영광의 소망이다(골 1:27).
독사에의 참여는 그리스도에의 참여로 말미암는다. 영원한 영광이 우리의 부르심의 목적이다(벧전 5:4; 고전 5:10; 살전 2:12; 살후 2:14; 고후 4:17; 딤후 2:10). 여기에서부터 그 영광을 누리는 것이 신자의 목적의 하나이다(롬 5:2). 이 죄많은 시대에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한다(롬 8:18; 롬 8:21). 욕된 것으로 심겨진 것이 영광스런 것으로 다시 산다(고전 15:43). 그렇지만 미래의 영광은 그 근거를 하나님의 목적과 행동에 두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이미 영화롭게 되었다고 말해질 수 있다(참조: 롬 8:29 - 롬 8:30; 고전 2:7). 성령은 영광을 가져오는 새로운 것의 보증이다(참조: 엡 3:16; 벧전 4:14).
이것은 특히 고후 3:7이하에서 분명해진다. 여기에서 모세의 영광을 그리스도의 새롭고 더 큰 영광과 대조시키며,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신자들이 어떻게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되는가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움직임은 현재의 영광에서부터 종말론적인 완전한 영광에로 옮겨가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의 사역에 의해 실행된다. 왜냐하면 복음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고전 4:6).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17장에는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것이며(요 17:24), 그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되며(요 17:10), 그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을 그들에게 주신다(요 17:22)고 언급되어 있다.
(d)  독사는 천사들의 영광을 표현한다.
겔 9:3 등에서 그룹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고 유대교에서처럼 천사가 영광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히 9:5은 영광의 그룹에 대해 언급한다: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계 18:1은 천사의 영광에 대해 언급한다: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유다서와 베드로후서에서 천사들을 '독사이'라고 부른다. 유 1:8에서는 "영광", 벧후 2:10에서는 '영광있는 자들'로 번역했다.
(e)  독사는 인간 또는 세상 권세에 대하여 사용되었으며, '화려, 장대, 탁월' 등을 나타낸다. "천하 만국과 그 영광", 즉 그것들의 자원, 부, 그들 도성들의 장대함과 위대함, 그것들의 비옥한 땅, 그것들의 많은 인구(마 4:8; 눅 4:6), "땅의 왕들의 영광"(계 21:24), "만국의 영광"(계 21:26), 왕의 영광, 찬란한 의복 등(마 6:29; 눅 12:27), "육체의 영광"(벧전 1:24), "직분의 영광"(고후 3:8 - 고후 3:11), "여자는 남자의 영광"(고전 11:7), "땅에 속한 자의 영광"(고전 15:40), "해, 달, 별의 영광"(고전 15:41)을 나타낸다.
(참조: Walter Bauer; J.H.Thayer; S.Aalen; G.Kitt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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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ucavomai(2744, 카우카오마이) 자랑하다 to boast....할랄(자랑하다.찬양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카우카오마이(Sappho. 이래)는 '자랑하다, 뽐내다, 자랑으로 여기다'를 의미하며, 보통 나쁜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철학자들이나 풍자 작가들의 저서에서 자랑에 대하여 경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카우카오마이는 70인역본에서 약 32회 나오며, '자랑하는 것'을 나타내는 여러 히브리 단어들을 번역한다. 70인역본에서 자랑에 대한 비판적 격언이 나온다(왕 20:11; 잠 25:14). 부를 자랑하는 것은 부를 의뢰하는 것이다(사 49:6).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이 있을 수 없다(삿 7:2).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자랑할 수 있다(렘 9:23-24). 의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자랑할 것이다(시 5:11). 집회서 39:8에서는 율법을 자랑하는 것을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카우카오마이는 신약성경에서 37회 나오며, 야고보서에 2회를 제외하고는 모두 바울 서신에만 사용되었다.
바울은 신약성경에서 카우카오마이를 거의 독점적으로 사용한다. 바울은 공적에 의하여 의롭게 된다는 유대인의 교리를 공박하는 동시에 그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율법 성취에 근거한 인간의 자기 자랑의 습관을 반박하였다. 믿음의 법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모든 자랑은 하잘것 없는 것이 되고 만다(참조: 롬 3:27). 이런 사실은 엡 2:8 이하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은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이것에 대해 슐랏터(A. Schlatter)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이용하여 우리 자신의 영광을 세우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주석한다. 롬 2:23에 보면 율법에 근거한 인간의 자랑이 무가치하다고 한다.
유대 사상과 달리, 바울도 역시 개종하는데 따르는 자랑을 거부하였다: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갈 6:13).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들의 소피아(지혜, 고전 1:29; 고전 3:21)를 자랑하는 헬라인들의 자기 과신을 강하게 논박하였다. 이 모든 형태의 육적인 자랑(고후 11:18; 빌 3:3 이하)에는 이방 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 유대인에 대해 가지는 오만한 태도(참조: 롬 11:17 이하) 및 허위적인 자랑(고전 4:7; 고후 5:12; 고후 12:6)과 같은 것 까지도 포함된다. 이런 자랑은 악 즉 의롭지 못한 자랑의 범주에 든다: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6; 참조: 고전 5:6). 그리고 이런 자랑은 렘 9:24을 인용한 고전 1:31의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후 10:17 이하)는 구절에서 볼 수 있는 "적절한 자랑의 한 형태와 모순된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이러한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롬 5:11; 빌 3:3); 혹은 갈 6:14에 기록된 바와 같이,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기뻐하는 것은 유일하게 적합한 자랑의 형태이다. 이 자랑은 "(이렇게) 모든 자기 자랑을 사라지게 만드는 어떤 것을 그 목표로 삼는다"(K. L. Schmidt). 기독교인의 자랑에는 사도들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행위와 사도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는 자들에 대한 자랑도 포함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예를 들면 거짓 선지자들과는 달리(고후 11:12 이하). 자기에게 주어진 엑수시아(권위)를 자랑하기도 하였다(고후 10:8; 참조: 롬 15:17). 그는 또한 믿음의 열매를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각 교회를 자랑하고 있다(고후 7:14; 살후 1:4).
기독교인은 진실로 자기의 연약함만을 자랑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이 여기에서 분명해지기 때문이다(고후 11:30; 고후 12:5; 고후 12:9; 롬 5:3). 롬 5:2에서 바울은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하느니라]"라고 한다.(참조: R. Bultmann; H -C. H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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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livyi"(2347, 들립시스) 억압 oppression, 고난 affliction, 환난 tribulation...차르(환난), 라하츠(고생)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들립시스(Thu. 이래)는 들리보(qlivbw, 2346)에서 유래했으며, '억압, 압박', '고통, 괴로움, 고난'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들립시스는 70인역본에서 약 130회 나오며, 12개의 히브리 단어 및 어군을 번역하는데 주로 차랄 어군을 번역한다. 이런 히브리어 단어들은 '억압, 근심, 괴로움, 고난, 환란' 등을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들립시스는 신약성경에서 4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1. 고난의 성질.
(a)  신자와 사도들 모두 고난을 겪는다. 이 고난은 실제적인 것이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행 11:19). 또한 피할 수 없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16:33). 이와 관련하여 이스라엘은 하나의 본보기이다. 바울은 사도로서 특별한 고난을 당한다(살전 3:3-살전 3:4; 행 20:23; 고후 1:4).
(b)  이 고난은 그리스도 자신의 고난이며 계속된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사도에게 계속된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경험한다(참조: 고후 4:10-고후 4:11).
계 7:14의 순교자들도 이와 비슷하게 그리스도 자신의 고난들을 증거한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당하는 고난은 그들이 높임 받으신 주님이 이미 당하신 고난을 주님의 지체들에서 나타낸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이라 일컬어진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난에 기초하여 그의 백성들 안에서 고난 당하신다.
(c)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은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떨어질 수 없으며, 그리스도 자신의 고난이며, 그리스도께서 끝내신 이 세대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종말론적인 것이다(고전 7:26이하; 마 24:9이하; 계 1:9; 여기에서 현재의 환란은 말세의 대환난의 견지에서 고려된다). 유대교도 역시 종말론적인 환란은 기대하지만, 신약성경에서 새로운 특징은, ① 이 마지막 환란이 시작되었다는 것과, ② 메시야 자신의 수난이 이 환란을 개시하신다는 것과, ③ 이 환란은 그의 흩어져 있는 백성들이 당하는 고난이라는 것이다.
(d)  또한 마지막 심판과 관련된 고난도 있는데, 불의한 자들과 교회를 핍박한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일 것이다(롬 2:9; 살후 1:6). 교회는 이 심판을 고대하는데, 이는 그 심판이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당하신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은 믿음의 눈으로 볼 때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참된 표이다(참조: 살후 1:5).
2. 고난의 체험.
(a)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롬 2:9; 살전 3:7; 요 16:21; 막 4:17).
① 구체적으로 이 고난들은 살전 1:6에서는 박해를 가리킨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② 행 20:23에서는 옥에 갇힘을 가리킨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③ 히 10:33에서는 조롱을 가리킨다: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④ 고후 8:13에서는 가난을 가리킨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⑤ 계 2:22에서는 아마도 질병을 가리킨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참조: 또한 계 8:35과 고후 11:23이하의 목록을 참조하라).
⑥ 또한 내적 고민과 슬픔(빌 1:16이하)이나 불안, 걱정과 두려움(고후 7:4이하)의 고난도 있다.
(b)  고난의 공통되는 힘은 그 안에서 역사하는 사망의 권세이다(참조: 고후 1:8-고후 1:9; 고후 4:10-고후 4:11; 고후 11:23).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겪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타파하신 사망의 효과를 체험하는 것이다(참조: 빌 3:10). 고난은 그 뜻하지 않은 사건과 부패성으로 우리 현재 삶에 외적 흔적을 남긴다(고후 4:16이하). 따라서 우리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복음을 지킬 것인지, 생 그 자체의 가능성의 견지에서 삶을 볼 것인지,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열려진 가능성의 견지에서 삶을 볼 것인지를 시험받게 된다(고후 1:8-고후 1:9). 믿음은 고난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이고, 생명을 하나님께 도로 바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은 소망 가운데 보이지 않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꿋꿋한 인내를 낳으며(살후1:4), 위로를 주며(참조: 고후 1:5-고후 1:6) 장래의 영광이 현재의 고난에 비할 수 없으리만큼 중하다는 확신(고후 4:17-고후 4:18)을 준다. 이리하여 덕스러운 순환을 가지는데, 이 순환에 따라 약속은 소망을 주고, 소망은 고난을 받아들이며, 고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소망을 증대한다. 이리하여 기쁜 성령의 약속을 성취한다.
(c)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고난을 받아들임으로 공동체를 세운다. 이러한 고난 속에서 말씀은 다른 사람들에게 적절한 위로의 약속이 된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4이하). 그의 백성의 고난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친히 교회를 세우시며, 따라서 사실상 그리스도는 이미 고난의 권세를 깨뜨리셨음을 보여준다.
(참조: J.H.Thayer; H.Schlier; R.Schipp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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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Jpomonhv(5281, 휘포모네) 견고히 섬, 인내....미크웨(기대, 소망), 티크와(소망)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휘포모네(ps. -pla.)는 휘포메노(uJpomevnw, 5278)에서 유래했으며,
(a)  '견고히 섬, 확고부동, 인내',
(b)  '기대, 기다림'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휘포모네는 70인역본에서 약 25회 나오며, 히브리어 미크웨(기대, 소망, 에스드라하 10:2; 렘 14:8; 렘 17:13), 티크와(소망, 시 9:19; 시 61:6; 시 70:5; 욥 14:19)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휘포모네는 신약성경에서 3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공관복음.
눅 21: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누가가 사용한 명사형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도 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엔 휘포모네) 결실하는 자니라"(눅 8:15; 참조: 마 13:23; 막 4:20). 이 비유에 대한 누가의 진술에만 휘포모네가 언급되어 있고, 반면 마가와 마태는 누가가 빠뜨린 풍성한 결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는 그의 복음서를 이방 세계에 소개한다는 성격에서 연유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비유는 열매 맺는 것을 방해하는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반면, 앞에 언급한 종말론적 강화는 시험과 환난에 연결시키고 있다. 즉 두 경우가 다 인내를 전제 조건으로 하고 있다. 한 경우에는 구원에 대하여, 한 경우에서는 말씀의 열매를 맺는 것에 대해서이다.
(b)  바울서신.
① 로마서에서 휘포모네가 나타난다. 인간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을 영위하고자 한다면, 그에게는 휘포모네가 필요하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롬 2:7). 이 구절은 "선행 중의 꾸준한 인내"(NEB)라는 능동적 의미와 고난 중의 끈질긴 인내라는 수동적 개념, 이 양자 가운데서 어떠한 해석을 하더라도 무방하다(참조: M. Black).
롬 5장에서 바울은,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가 어떻게 하여 고난까지도 유익한 것으로 삼을 수 있는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참조: 롬 5:2) 즐거워한다. 나아가서는,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들리프세신)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들리프시스)은 인내(휘포모넨)를, 인내(휘포모네)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3 이하).
롬 8:25에서 소망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인내로써 기다린다는 특징을 띠고 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여기의 문맥상 배경은 피조물의 고통에 대한 언급이다(참조: 롬 8:23).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5).
②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인내의 문제를, 특히 교회를 위해 자신이 행하는 주의 일과 관련시켜 언급하였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후 1:6). 고후 6:4과 고후 12:12은 바울 자신의 사도적 인내를 언급하고 있다.
③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을 위한 기도에서 인내를 언급한다: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골 1:11).
④ 살전 1:3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소유한 '소망의 인내'가 하나님께 대한 바울의 특별한 감사의 원인으로서 작용한다. 살후 1:4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그들의 인내와 믿음에 대해 친히 자랑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살후 3:5에서 바울은 기도한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참조: 히 12:2 이하). 데살로니가인들은 그들의 주께서 보여 주신 인내를 가지도록 권면을 받고 있다. 주는 그들이 본받아야할 인내의 모범을 보이셨던 것이다.(L. Morris).
⑤ 목회 서신에서 인내는, 기독교 사역자들(딤전 6:11; 딤후 3:10)과 노인들(딛 2:2)에게 필요한 하나의 자질로서 묘사된다.
(c)  히브리서에서 휘포모네는 인내에 대한 권면에 나타난다(히 10:36; 히 12:1). 히브리서 기자는 지속적 인내를 강력히 촉구하고 있다. 즉 지난날 세상의 소유물까지 손실하면서 참았으니 지금도 참을 것이며(히 10:32; 참조: 히 10:34),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하여" 참아야 한다(히 10:36). 징계는 하나님의 자녀됨의 증거이니 참아야 한다(히 12:7).
(d)  야고보도 시련이 믿음을 굳게 하고 인내를 강화하여 온전함에 이르게 한다고 증거한다(약 1:3-4). 욥은 그에 관한 훌륭한 예이다(참조: 약 5:10). 욥의 경우처럼 만일 신자들이 굳게 인내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실 것이다(약 1:11; 참조: 약 1:12; 마 5:12).
(e)  벧후 1:6에서는 일련의 미덕을 진술하는 가운데 휘포모네를 두번 언급하였다: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롬 5:3 이하, 그리고 약 1:3 이하와 유사한 면이 있는 구절이다.
(f)  요한계시록에서 인내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계 1:9) 밧모섬에 유배당한 요한 자신이 겪어야 했던 것이기도 했다(계 1:9). 성령께서는 두아디라와 에베소의 교회들에 대해, 그들의 인내를 칭찬하신다(계 2:2 이하; 계 2:19). 빌라델비아 교회 역시 유사한 위로의 말씀이 주어진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계 3:10). 짐승과의 싸움을 위해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계 13:10).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참조: U. Falkenroth; C. Brown; F. Ha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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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모든 문제/역경, 환난, 고통, 고생의 의미, 가치, 보람, 목적은??...절대유일무이한 진리-생명-길....여호와하나님의 어떠하심<성품 : 의>-<기념이름의 모든 것>-베푸신 모든말씀, 영광의 광채이신 JC = 전지전능의 해결사(지혜-총명-모략-재능-권능-하나님경외함과 지식의 근원) , HS으로 내주하심 ..하나님 나라와 의를 이루라..구하라/찾으라/두드리라/여쭈라!!./동행하라/산믿음발휘하여 경험하며 누리라..왕중왕, 아버지, 혼약의 신랑...유일무이지고지선최상의 친구/선생...빼어닮아가며 그분이 영위하시는 인생되게 하라 : 열어, 비워, 내어드리라!!
=====JC.새로운피조물, 전존재/영혼몸의 구주!!..무의식까지!!
((영))직관-양심-교통((혼))지성[지식지혜논리판단-사고-기억-상상]-감성[칠정]-의지((몸))평강/강녕-충만-번성 [욕망 :: 식성수물명//감각 :: 색성향미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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