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11.19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벧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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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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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는 하나님 나라의 신성한 통치, 그 아래서 사는 그리스도인이 누구며, 그들의 생활 가운데 완전한 그들의 영생구원 위해 반드시 거치도록 예비하신 삶의 제문제들과 그것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자세로 극복하기 원하시는 지 그  의미를(특히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겪는 고난/환난, 핍박/박해, 어려움들, 간고, 질고 등 제반 시련들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하는 하나님의 심판<그리스도 닮음 위한 징게/연단 의 다루심>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이요,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때에 그 어떠함이 드러날 것인데, 그것을 통해서만  구원영생의 완전함에 도달하게 됨을) 말하고 있으며, 베드로후서는 하나님 나라의 신성한 통치에 협력하며 동역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덕으로 부르사, 그 안으로 부르심 받은 바 그들을 온전케 하며, 마침내 충만케 될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조금도 흘리지 않고 완전히 소유하고 누림 통해>신적 성품에 참예함 이루시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신성한 공급(신성한 신적 성품, 곧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계획하고 이루어 나가시는 영생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사 공급하시는 God's provision or supply)이 어떤 단계를 거쳐서 이루어지는지, 그것을 위해 조심할 것은 무엇인지를 밝혀준다.

---신약의 참 기독자인 성도들마다에게 할당된 기업/분깃/유업은 바로 영존하시는 하나님 자신, 곧 성육신하시고 이 땅에서 우리 위해 고난-십자가 죽음의 모든 과정 거치사 부활승천하시고 성령으로 오셔서 내주하시는 구주예수그리스도이시니, 그분의 영광과 덕 +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곧, 그분의 이름-인격-영광<능력-부-지혜-힘> 등 모든 소유, 전능한 신적인, 동일한 보배로운 믿음-소망-사랑, 그 모든 것>이 그분과 함께 믿는 이의 분깃에 포함된다...오직 주바라기의 하루하루 매순간마다, 만유안에 만유 위에 충만하신, 존귀하신 분이요 영광과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한 참생명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고 살아내며, 감상-음미-누림 그 가운데서  공급받아 충만케 된 바로 그대로 참생명 그리스도를 공급하라!!

---즉, 신약의 유업은 오직 참되게 믿는이들의 믿음을 통해 그 누림안에 있게 하셨는데, 구주 하나님이 분배하신 바 하나님 자신과 그분께 속한 신성한 (신적)본성/성품을 포함한, 생명<내적 수단과 능력>과 경건<외적 표현>에 관한 모든 것 + 보배로운 믿음 + 보배롭고 지극히 뛰어난 약속들,


^^4가지 종류로서의 의 : 우리의 의(행함)-율법의 의-하나님의 의/구주의 의...신약시대에서 인정되고 적용되는 의란 율법의 의나 타락한 사람의 행위에서 난 의가 아니라 오직구주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잊지말라.... *적용의 측면에서는 공정(justice...베푸심에 차별 없음)  *그 원어적 의미는 공의(righteousness...오직 유일하게 의로우신 하나님께 합당함/완전한 하나됨과 완전히 열납됨의 조건....십자가 대속의 행위<구주 하나님 편에서는 완전히 해결하시고 베풀어 놓으셨음...다만 남은 것은 이것을 믿음으로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냐의 여부임>)


@@신앙이란 하나님의 경륜, 곧 분배의 내용이다
.... 하나님의 경륜(오이코노미아 : 분배, 계획, 가정관리)은 하나님 자신을 신자안에 분배함이요, 결국 신약경륜은 신약시대에서 하나님의 친히 행하시는 바 하나님, 곧 구주를 신자안으로 분배함이다.
...., 신약경륜은 그 실제(=성경안에 계시된 객관적 진리의 실제)가 분명하다.
..... 참믿음(the faith, 보배로운 믿음)은 그 실제(진리)를 실지로 체득함, 곧 실체화(주관적 체득 통해 확증함) 시키는 것이며,
..... 영원생명은 신앙의 신성한 실제를 실행 가능하게 하는 수단과 능력이요
...., 경건은 하나님의 모든 풍성안에서 그분의 영광표현을 그대로 표현해 내는 생활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살아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이임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신대로) 당신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 산 믿음을 발휘하여>참되게 알 때, 그분의 능력이 하나님 자신을 우리의 생명과 경건에 관련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음을 깨달아 알게 됨....하나님에 대한 객관적 지식에서 피상적으로 머무름이 아아니라 바로 그분의 모든 속성, 성품과 이름의 영광 그대로, 실지로 그러하심을 알아가기를 추구함으로써, 길이-너비-높이-깊이에 있어서 철저히,심오하게, 실천적, 체험적인 주관적 깨달음과 앎 ...

 즉, 성경에 계시해 주신 바 하나님의 모든 영광과 덕, 곧 이름과 속성(비공유적/공유적)들을 참되게 체득하여 알게 될 때(열린 마음으로 성령의 깨닫게 하심따라 교통함 통해), 연이어 구주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의 내적 참생명(생활 수단과 능력 근원)과 외적 경건(하나님 경외함, 곧 살아계신 하나님을 살아내며 표현함)에 관련된 모든 것으로 주셨음을 참되게 깨달아 알게됨.....은혜란 바로 이 하나님 자신과 그분의 모든 영광<하나님의 신성의 표현된 광채 : 이것은 목표이다>과 덕<미덕, 그 목표에 도달하게 하는-그 어떤 것도 막지 못하는-탁월한 생명에너지요 힘.하나님의 속성과 본성들>을 누림[=그리할 때, 거기에 마침내 도달함/이르게 됨]이며, 평강은 그분과 온전한 하나됨을 누림통해 이루는 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화해-화목-화평-평안-안정-안돈인데 이것은 계속 증가하는 것이며 이때, 신적 본성[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강과 생명나무로 묘사된, 풍성한 생명 특히, 능력-부(풍성부요충만)-지혜-힘]에 참예(참여)함이 된다....이 부르심은 믿는이가 동참할 때 이루어 짐을 명심하라. [[아가서의 도드처럼 상호사랑안에 머물며 그 뜻대로 살기를 실행하라]]


==>은혜와 평강의 증가/증대를 체험하는 길은.....이미 하나님의 영광과 미덕에 이르도록 예정하시고. 당신의 영광과 모든 미덕으로 부르신 바, 생명과 경건에 관한 모든 것을 받아 누리도록,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보혈을 믿고 붙들고 생명삼음의 절대기쁨/절대 긍정/절대확신과 신뢰의 보배로운 믿음을 발휘함으로써) 참되게 믿는 이마다에게 열어 공급해 주셨고, 내적 수단이요 능력으로서 참생명을 받았기에, 단순히 말씀을 펴서 [신약안에서 주어진 약속들을] 기도로 읽어나감<기도로 말씀읽기> 통해서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에 참여(참예)할 수 있게 되었음..

==>이제 더 나아가 기도하고 구하라, [막 11:22-25]  *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 *22 Jesus replied, “Have faith in God [constantly].   *23 I assure you and most solemnly say to you, whoever says to this mountain, ‘Be lifted up and thrown into the sea!’ and [f]does not doubt in his heart [in God’s unlimited power], but believes that what he says is going to take place, it will be done for him [in accordance with God’s will]. *24 For this reason I am telling you, whatever things you ask for in prayer [in accordance with God’s will], believe [with confident trust] that you have received them, and they will be given to you. *25 Whenever you [g]stand praying, if you have anything against anyone, forgive him [drop the issue, let it go], so that your Father who is in heaven will also forgive you your transgressions and wrongdoings [against Him and others]. *26 [h][But if you do not forgive, neither will your Father in heaven forgive your transgressions.”]


로마황제 네로의 통치시기 후반부인 AD 66년경 베드로가 순교하기 직전에 쓴 글

본 서신의 저자는 베드로전서를 쓴 저자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어떤 학자들이 본 서신의 문체를 전서의 문체와 구분함으로써 다소간의 차이점을 지적하고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본 서신이 예루살렘 교회에 있었던 사도 야고보의 후계자인 시몬에 의해 씌어졌다는 것을 논박할 만한 충분한 근거는 되지 못한다. 

그 이유는 본 서신을 기록한 저자가 자신을 시몬 베드로 또는 사도라고 하고 있으며(1:1), 또 그리스도께서 변화산 위에서 변화하실 때 거기에 참예하였던 세 사람의 사도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말한 점(1:18) 그리고 그가 전번 편지를 썼다고 하는 점을 분명히 밝힌 것(3:1) 등을 보아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본서의 기록 목적은 3장 1절에서 밝힌 바와 같이 전서와 동일하다. 

이 구절을 살펴볼 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일에 있어서,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경계에 경계를 더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교훈의 말씀을 충실하게 기록하고 자주 기억을 되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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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 ◉베드로후서 개관◉

1. 본 서와 유다서의 정경성(正經性)에 관한 문제

유다서와 본 서는 많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함께 언급하는 것이 좋다.

먼저 신악성경에서 이 두 서신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상정하는 문제이다.

오늘날에 있어 베드로 후서는 평범한 내용의 전개와 더불어 한쪽으로 치우쳐 강조하며, 유다서는 고발적이며 단조로운 내용으로 전개되어 있기 때문에 독자들이 쉽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또한 두 서신서는 묵시 문학으로 종말론을 집중적으로 강조하고 있다고 한다.

16세기에 이르러 성경에 관한 정경성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이 두 서신서 역시 도마 위에 올려지게 되었다.

칼빈(John Calvin:1509-1564)과 에라스무스(Erasmus;1466-1536)는 결론적으로 두 서신서를 정경으로 인정은 하지만, 애매 모호한 입장이다. 특히 루터(Martin Luther;1483-1546)와 같은 경우는 '9월의 언약'(September Testament, 1522)이라는 부록에 유다서를 첨가시키고 있다.

그리고 카제탄(Cajetan)과 외콜람파디우스(Oecoampadius)는 정경에 가까운 제2의 권위에 속한다고 분류하고 있다.

신약성경 중에서 베드로후서만큼 오랜 기간을 두고 정경성 문제에 관한 논쟁이 지속된 것이 없을 정도로 오랜 세월동안 정경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제롬에 의하면 베드로전서에 비교해 볼 때 문체상 많은 상이점이 있는 이유로 인해 정경으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본 서는 다른 성경과는 달리 동방에서 먼저 정경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모습은 초기 콥트 번역과 헬라어 파피루서72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오르게네스는 라틴어 번역을 믿을 수 있다면 정경으로 인정할 수 있으나 논란의 여지는 남아있다고 한다.

오르게네스 이외에도 아다나시우스, 그레고리(Gregory), 에피파니우스(Epiphanius) 등은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유세비우스,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몹수에스티아(Mopsuestia), 데오도르(Theodore) 등은 본 서를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A.D.397년 카르타고 회의에서는 정경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수리아 교회등지에서는 6세기 초까지 베드로후서를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 두 서신에 대해 오늘날에도 많은 의심의 여지를 남겨 놓고 있다. 즉 다른 신약성경과 비교해 볼 때 우수성이 결여되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으나, 초대교회 기독교 신앙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루터는 복음의 메시지가 불분명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두 서신서는 영적인 능력과 통찰력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비평의 와중에서도 (여전히 !!)두 서신서의 영적 위치에 대한 일정한 의의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즉 장차 있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와 재림, 사도들의 가르침에 대한 것들이다.

2. 수신인과 수신지

본 서의 수신인과 수신자는 베드로전서와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즉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벧후3:1)라는 구절에서 엿볼 수 있다.

따라서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나에 흩어진 나그네"(벧전1:1)이다.

그런데 여기서 흩어진 나그네는 일시적인 체류자나 방랑자들까지도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베드로가 이런 나그네까지 포함한 이유는 이들 역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소유한 자이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아시아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베드로를 사도행전에서는 최초의 교회지도자로 평가하고 있다. 베드로는 주로 팔레스틴 지역을 중심으로 복음의 메시지를 전파함과 아울러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한 유대인들과 타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3. 저술 동기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외압과 내부적인 붕괴가 일어나고 있던 시기이다. 또한 바리새파인들은 기독교를 유대화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베드로전서는 옛 계약과 새 계약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베드로후서는 반(反)유대화에 역점을 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의 인용과 거짓 교사들에 관한 저주를 설명하고 있는 점이 유다서와 대동소이한 점이다.

베드로전서와 후서의 이런 차이점은 바로 역사적인 시대의 변화를 암시한다.

로마의 쇠퇴와 더불어 헬레니즘 사상의 보급은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마저 신비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이게 되자, 올바른 가르침을 위해 본 서를 기록한 것이다.

1. 서론

2. 저자 문제

1) 가장 의심받는 본 서의 저자

신약성경 중 본 서처럼 저자의 진위 문제에 논란이 많은 정경은 별로 없을 것이다. 본 서는 2,3세기경부터 논란의 대상이었다.

유세비우스(Eusebius)는 베드로전서를 사도 베드로가 쓴 것으로 인정했으나 베드로후서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오리겐(Origen)도 마찬가지로 제2서신서는 다소 의심스럽다고 했다.

종교 개혁 시대에 이르러서도 루터(Luther)만이 베드로의 저술을 인정했고 칼빈(Calvin)이나 에라스무스(Erasmus)는 부인하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었다.

20세기의 학자들(진보적)은 거의가 베드로후서를 위작으로 보며, 신약성경 중 가장 후대에 기록되어 삽입한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다.

전서와 후서의 전혀 다른 주제의 차이. 또 문제의 차이와 표현이 전서는 매우 고상한 반면 후서는 상대적으로 수준이 낮은 것으로 보이는 점이다.

그 다음 유다서와 내용이 많이 중복되었다는 점과 교회 안에서 많은 성도들이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를 포기했다고 언급한 점(벧후3:4) 그리고 신앙의 조상들(사도)이 이미 잠들었다고 언급한 점과 교회가 늦게 베드로후서를 정경으로 받아들였다는 점 등의 이유를 들어 본 서가 2세기경 어느 무명인에 의해 위작된 것으로 추정하게 된 것이다.((그러나, 그 의견들은 상당히 가변적이다...오히려 그 생생한 생명의 메세지에 주목하라!!))

2) 베드로 사도가 저자인 증거들

그러나 그와 같은 문제들이 오히려 사도 베드로만이 본 서의 저자임을 대변해 주는 증거가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베드로는 분명히 '시몬 베드로'(벧후1:1)라고 자신을 밝혔다. 만일 위작이라면 그냥 베드로 사도라고 했을 것이다.

또 생생한 신앙의 경험담, 즉 변화산에서 주님이 변모하신 사건을 말하고 있다(벧후1:16-18). 이는 베드로 자신이 아니면 증거할 수 없는 내용이다.

문체나 어휘가 틀린 것에 대해서는 전편이 실루아노의 대필로 작성된 것이라면 후편은 베드로 스스로 쓴 것이기에 헬라어의 수준이 다르고 문체가 다른 것으로 본다.

또 유다서를 인용했다고 했는데 사실은 베드로후서는 '거짓 교사'들을 앞으로 나타날 존재들로 말하며 미래 시제로 표현했고, 유다서는 현재 시제로 말했음을 볼 수 있다. 오히려 유다서가 베드로후서를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어휘나 내용이 전서와 1/6이 일치한다. 이는 전서나 후서가 같은 사람이 쓴 것임을 반증한다.

그리고 권위 있고 단호하게 바울 사도가 쓴 서신서의 영감적 권위(정경성)를 인정하는 내용도 있는데(벧후3:16), 이는 사도 베드로 외에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이와 같은 몇몇 사례만 볼지라도 본 서의 저자는 사도 베드로임이 분명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다.

3. 저작 시기와 장소

만일 본 서가 베드로가 쓴 것이라면 전서의 집필 시기인 주후 63-64년에서 순교한 주후 68년경 사이일 것이다.

벧후1:13에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옴을 암시한 듯한 내용으로 볼 때 본 서는 순교 직전인 67-68년사이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장소도 마지막 활동 무대였던 로마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4. 대상과 목적

이 공동서신 역시 베드로의 첫째 서신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교회나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로마 제국 판도에 있었던 모든 교회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벧후1:1에서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한 것이다.

본 서의 수신자들은 이미 기독교의 모든 진리 체계를 이해하고 믿는 자들이다(벧후1:12). 그들은 베드로 사도의 권위를 이미 알고 있고 그의 가르침에 진지한 열의와 사모심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어떤 목적으로 본 서를 기록했을까? 그 목적은 크게 베드로 사도의 개인적인 문제와 당시 세계 교회의 보편적인 당면 문제 때문일 것이다. 즉 사도 베드로는 유언적으로 온 교회에 당부하고 싶은 말을 하고자 했을 것이다. "내가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벧후1:15)는 말대로이다.

그 다음 세계 각처에서 성행하는 이단적 종교 사조인 '영지주의 풍조'를 경계하고자 본 서를 쓴 것으로 추정된다(벧후2:1-3).

영혼만 귀한 것이요, 육체는 하찮은 것이니 육체로 어떤 죄를 지어도 구원과는 관계없다는 교설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자 사도 베드로는 종말적인 심판을 염두에 두고 거룩한 생활을 할 것을 강조한다.

5. 주제

'신앙적인 참지식'이 본 서의 큰 주제이다. '앎, 지식'(Know, Knowledge)이라는 말이 16회나 반복된다. 끝 말도 "오직 우리 주 곧 구주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벧후3:18)고 했다. 이는 당시 특별한 영적 지시과 지혜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미혹하는 영지주의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는 예수그리스도를 닮는 생활을 강조했다(벧후1:5-7). 영지주의에 미혹된 자들이 극단적으로 무도덕한 생활을 했기에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이 참지식과 지혜임을 교훈한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생활은 종말에 필히 시행될 하나님의 대심판을 염두에 두고 행해야 함을 강조한다. 신앙의 참 지식, 참지혜가 본 서의 강조점이다.

6. 내용 구성

1. 참된 지식의 의미(1장)

2. 거짓 지식을 전하는 자에 대한 경계(2장)

3. 참지식과 거짓 지식을 따르는 자들의 미래(3장)

◉[연구1] 그리스도인의 성숙(1장)

거짓 선지자에 대하여 경고하기 전에 베드로는 먼저 자신의 권위를 밝히고 자신이 전하는 바가 참임을 전한다.

성도들이 흔들리지 말고 사도가 전해 준 가르침 위에 굳게 서서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성결한 삶을 살아 성숙하여 부르심과 택하심에 굳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1. 신의 성품에의 참여(벧후1:1-1)

베드로는 두 번째 서신의 서두에서 특별히 자신이 누구인가를 밝히고 있다. 왜 그는 자신을 밝히고 있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주 예수를 안다'고 하는데, 이 앎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신의 성품'은 무슨 의미인가?

1) 그리스도를 아는 삶

시몬이라는 이름은 복음서 외에 행15:14에만 나타난다. 또 시몬이라는 본명과 '게바'의 헬라어 의미인 베드로라는 별칭이 같이 쓰여진 것도 특이하고 '종'이라는 겸비한 호칭과 '사도'라는 존귀한 호칭이 같이 쓰여진 것도 특이하다. 즉 베드로는 이런 호칭들을 통해 자신이 이 서신의 저자임을 밝히고 이 서신의 권위를 드러내 주고 있다.

'앎'이란 단순히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생활 태도까지 포함된다. 따라서 당시 유행하던 영지주의(참지식의 소유와 도덕 무용론을 주장)의 '앎'과 구별된다. '신의 성품에 참예'도 영지주의와 불교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인간이 신의 본질과 같아진다거나 신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웨슬리(John Wesley)가 주장한 바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할 때 하나님의 형상이 새로 나타나게 되고 하나님과 교제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2) 하나님과의 교제

이 서신은 베드로의 권위로 우리 모두에게 쓰여진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의심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단순히 지식으로 신앙 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생활 가운데서(사회와 가정에서) 주 예수를 아는 지식을 소유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리할 때 우리는 이 세상의 죄악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성품으로 태어나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는 것이다.

2.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벧후1:5-11)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는 구원이 확보되었으므로 나태해져도 되는 것일까? 신앙 생활에 있어서 열매는 어떻게 얻어지는 것인가? 그리고 '부르심'과 '택하심'을 서로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겠는가? 칼빈(J. Calvin)의 '예정론'과 웨슬리(J.Wesley)의 '성화론' 가운데 이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겠는가?

1) 성결한 삶

칼빈과 웨슬리 모두 신앙 생활에 나태하지 말 것을 명령한다.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 모두를 갖추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 신앙이 성장해야 한다.

이러할 때 하나님께 대한 봉사가 가능하고 실질적은 열매를 맺게 된다. 이런 것이 없을 때 소경과 같이 옛 죄를 씻지 못한 자가 된다.

칼빈은 믿음만 갖추고 나미지 것들을 등한시 여긴다면 참믿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라 하였다.

참믿음이란 위의 모든 요소를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라 하였다.

부르심과 택하심의 우선 순위를 놓고 칼빈의 예정론과 웨슬리의 성화론이 대립될 수 있다. 그러나 '택하심'에 신학적 중심을 둔 칼빈이나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응답에 신학적 중심을 둔 웨슬리에게 있어서의 공통점은 구원받은 자는 성결한 삶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2) 열매 맺는 삶

우리 주변에는 주일만 교인행세 하는 주일 교인들이 많다. 즉 세상 가운데서는 마음놓고 죄를 짓고 주일 교회에서만 그리스도인다운 사람들이 많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을 토대로 우리는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즉 평소에도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

택하심에만 의지하여 성결한 삶을 게을리하면 이는 참믿음이 못되며 '부르심'만 의지하여 확신을 갖지 못한다면 이 또한 참믿음이 못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여 실족치 않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3. 친히 본 자라(벧후1:12-21)

본문은 마치 유언장을 읽는 느낌이다. 베드로후서에 대한 긴박함과 강렬함이 느껴진다. 왜 베드로는 유언장과 같은 내용을 기술하였는가? 베드로는 무엇을 남기기를 원하였는가? 예언이란 왜 중요하고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1) 베드로의 증거

이 서신의 저자는 베드로임에 틀림없다. 반화산상 사건의 목격자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이기 때문이다.

임박한 죽음을 앞두고 베드로는 사도의 권위와 증인으로서 사도가 전해 준 유산을 굳게 지키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 신앙 유산은 영지주의의 것과 같이 공교히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눈으로 본 바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의 자의적 해석을 경고하고 있는데, 사도적 전통에 근거한 해석만이 권위가 있으며,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자를 경계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2) 성경의 중요성

지금 이 시대에는 사도들은 다 잠들어 없고 그들이 남겨 준 신앙 유산만이 있다. 가장 중요한 신앙 유산은 성경이다. 그러나 이 성경을 이단들은 마음대로 풀고 해석하고 오남용하고 있다.

진정 이시대를 살아가는 참 기독자로서 우리가 의지해야 할 사도적 전통은 먼저 성령의 인도하심이고 그 다음으로는 사도신경과 초대 교부들의 가르침일 것이다. '성서만으로'를 주장한 루터도 초대교회의 가르침을 중요시하였다.

그러므로 자의적으로 함부로 성경을 해석하여 이를 취하는 사이비 교주를 조심해야 할 것이다.

베드로는 지금 본서를 통해 유언을 하고 있다. 그것도 자신이 직접 본 바를 전하고 있다. 이는 공교히 지어낸 허황된 이야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므로 성도는 사도들의 가르침에 굳게 서서 성결한 삶으로 성숙해 가야 한다. 이러할 때 열매 맺는 삶을 살게 되고 신의 성품에 참예하고 부르심과 택하심에 굳게 하여 실족치 않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연구2] 거짓교사들에 대한 경고(2장)

당시 교회를 위협하고 있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하여 베드로는 경고하고 있다. 그들이 누구이며 어떤 일을 행하고 있는 가를 보여줌으로써 베드로는 성도들이 가야 할 바를 보여 주고 있다. 악한 자들에게는 심판이 임박해 있다.

베드로는 주의 교회를 지키기 위해 유언의 형식으로 악한자를 구별하여 물리치도록 이 편지를 썼다.

이 내용은 쾌락의 극치를 걷고 있고 사이비 종교가 판을 치는 현대 사회의 우리들에게도 경종이 되는 말씀이다.

1. 거짓 선지자의 나타남(벧후2:1-3)

어느 시대에나 거짓 선지자는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초신자가 교리적으로 이들을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분별의 영이신, 내주하시는 성령인도따라, 말씀을 기준삼아 살펴 볼 때]그들의 의도와 행동에서 구별할 수가 있다.

그러면 그들의 의도는 무엇인가? 그들은 어떻게 나타나면 어떻게 행동하는가? 또 그들은 무엇을 부인하는가?

1) 사도들의 가르침을 부인

먼저 그들의 가르침은 사도적인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예수를 부인하는 것과 같다.

그들의 행동은 정욕적이다. 그들 탐심을 도구로 삼아 사람을 유혹한다. 그리스도가 자신을 희생하였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리고 양 떼들은 그들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호주머니를 위하여 양 떼들을 이용하는 늑대요, 사도들의 가르침을 부인하고 헛된 말로 유혹하는 거짓 선지자들이다.

2) 오늘의 이단자들

이런 거짓 선지자들은 전통적인 신학과 교리를 무시하고 자신의 말과 주변의 철학, 한국 민속 신앙에 흐르고 있는 무속적인 요소를 잘 이용한다.

그들은 세력 확장에 혈안이 되어 있고 '돈'을 추구하고 있다. 간혹 어떤 단체는 '성관계'를 부녀자에게 요구하기도 한다.

이러므로 성도는 그들을 잘 구별하여 조심해야 할 것이다.

2. 심판의 긴박성과 의인의 구원(벧후2:4-9)

거짓 선지자에 내려질 심판을 설명하는데 3가지 예를 들었다. 범죄한 천사들,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범죄한 천사의 심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노아의 홍수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여야 심판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1) 심판의 경고

심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죄인은 심판의 그 순간까지 죄를 짓는다. 심판이 잔혹히 진행되지 않을 때 죄인들은 심판 자체를 무시하거나 안일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심판의 긴박성과 무서움을 베드로는 경고하고 있다.

범죄한 천사에 대해서는 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바가 거의 없다. 분명한 사실은 천사라도 범죄자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노아의 홍수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서는 사람들이 심판받기 직전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갔다. 심판의 경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던 것이다.

사회, 정치적으로 번영해도 하나님의 심판은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노아와 롯과 같은 의인은 구원받을 수 있다.

이것을 거울삼아 성도는 더욱 경건해야 할 것이다.

2) 심판의 긴박성을 인식

경제가 발전하고 과학이 발달할수록 많은 사람들이 안일해지고 죄악으로 달려가는 발걸음이 빠르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성도는 심판의 긴박성을 깨달아야 한다. 현대는 고도의 물질 문명을 바탕으로 투기, 섹스, 아편 등의 죄악이 범람해 있다.

그러나 성도는 성결하게 삶으로 마지막 심판 때 구원을 받아야 한다.

3. 저주의 자식(벧후2:10-22)

본문에서는 악인에 대해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무슨 죄를 짓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베드로는 그들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개와 돼지의 비유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왜 하나님은 이들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가?

1) 성도를 미혹케 하는 자

악한 자의 속성에 대하여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정욕, 담대, 고집, 떨지 않음, 훼방, 낮에 연락, 간사, 음심, 유혹, 탐욕, 허탄한 자랑' 등 지을 수 있는 죄는 다 짓고 있다.

이들에 대해 베드로는 '물 없는 샘, 광품에 밀려가는 안개, 이성 없는 짐승'등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이들은 악한 자이다.

이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기는 하였으나(벧후2:20) 이는 베드로의 요점이 아니다.

여기에서 베드로의 요점은 성도들을 미혹케 하는 자들의 죄악성과 심판의 메시지이다.

그리고 성도되었다가 이렇게 타락한 자들은 자기가 토한 것을 먹는 개와 자신을 씻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 돼지로 비유하였다.

즉 매우 죄악되고 타락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들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2) 말씀으로 사는 삶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하는 것은 너무 많다.

그리고 음란 비디오, 뇌물, 돈, 마약 등을 종교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이비 종교 단체도 있다. 이들은 다 거짓의 아비들이다.

마지막 심판날을 기억하며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 각종 악에 걸려 넘어지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이 말씀을 거울삼아야 할 것이다.

저들은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멸망에 이르는 방종과 방탕일 뿐이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경고는 사이비 종교가 판을 치고 있는 오늘날 우리에 대한 경고이다.

주 예수를 부인하는 거짓 교리와 더불어 온갖 음란, 방탕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그러나 성도가 기억해야 할 것은 타락한 천사를 심판하시고 노아의 때를 심판하시며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심판은 긴박하게 온다. 그러므로 성도는 깨어 죄악된 길로 가지 말고 거짓 선지자를 경계하여 살아가야 할 것이다.

◉[연구3] 재림에 대한 소망(3장)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종말론적으로 살아갈 것을 명하고 있다. 임박한 재림에 대한 사랑은 구약과 예수님과 사도들의 공통된 가르침이다.

종말론적인 신앙을 갖지 않을 때 이 세상의 삶이 방탕해짐을 베드로는 마지막으로 경고하고 있다.

1. 가르침의 일치(벧후3:1-5)

베드로는 둘째 편지를 쓴 목적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면 첫 번째 편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반복적으로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구약과 신약은 어떻게 일치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런 일치된 가르침을 부정하는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1) 재림에 대한 가르침

첫째 편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학자마다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 문자적으로 베드로전서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여기에는 종말에 대해 거의 언급을 하지 않으므로 지금은 잃어버린 또 다른 베드로의 편지인지 또는 벧후1,2장이 3장과 구별된 편지였는지 지금은 확실치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베드로는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며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성령따라 참생명안에서의 실행함(그 증진-증강-확장, 공급을 일편단심, 일심으로 굳게서서 뿌리내리고 개화/생명열매맺음에 이르도록)] 반복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재차 강조하고 있다.

새로운 설교, 새로운 성경 공부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매일 밥을 먹듯이 [이미 지식으로 알고, 체험적으로 체득하여 도달한 바 각자에게 이미 있는 것이라 해도, 매일 새롭게 공급받는 참생명안에서, 처음 접하는 것처럼 기대하고 앙망-갈급함으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듣고 배워야 한다.

구약과 신약의 가르침은 사로 일치한다. 선지자, 주님, 사도들의 일치되고 반복적인 가르침 중에 하나가 중의 임박한 재림과 심판이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노아 시대, 롯의 시대 그리고 지금도 임박한 심판을 애써 외면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들은 정욕에 사로잡힌 자요, 현실에 안주하는 자요, 주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자들이다(벧후3:5)

2) 재림에 대한 인식

귀를 간지럽게 해주는 설교를 따라 움직이는 성도들이 많다. 새로운 성경 공부법과 설교법이 서점가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교만을 취하고 드러냄이 아닌가 경계하라...주님은 완전하시다..종래의 말씀 전파 방법을 폐기하고 사람이 나름대로 새로 개발하고 사용할 필요가 있는]해야 할 새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 말씀을 반복적으로 듣고 행하는 길이 최선이다.

특히 풍요로운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성경 여러 곳에 계속해서 반복되어 가르치고 있는 재림을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2. 주의 날(벧후3:6-13)

심판에 대하여 베드로는 기록하고 있다. 심판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과거와 미래의 심판에 차이점은 무엇인가? 또 그 근거는 무엇인가? 심판이 늦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변을 베드로는 기록하는 자들에 대한 변증으로 하고 있다.

1) 심판의 날

하나님은 결코 이 땅의 죄악에 대해 무관심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 증거는 노아의 시대 때 있었던 물의 심판이며, 또 미래에는 불의 심판이 있다.

그 근거는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기 때문이다.

심판이 더디게 보이는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하나님의 시간 개념과 우리의 시간 개념이 다르기 때문이고(시90:4 벧후3:8), 또 하나는 죄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벧후3:9). --셋 셀 동안 잘못 인정하지 않으면 벌 줄거야.. 이제 셀 거야, 하나-둘, 둘반, 둘의 반의 반...이처럼 오래 참으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끝이 있음을 기억하라, 돌이키라!!--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약속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기대가 약속에 근거하기 때문에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2) 재림에 대한 올바른 사상

잘못된 재림 운동의 후유증으로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재림이니 심판이니 하는 용어를 기피하고 이런 용어를 언급하면 이단 보듯이 한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재림 사상으로 어리석은 양무리를 꾀는 사악한 사이비 집단들이 아직도 있다.

사회가 풍요로와지면서 한쪽에서는 현세의 향락을 즐기고, 경쟁 사회에서 실패한 다른 한편의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종말을 바라거나 사회가 전쟁 등으로 뒤집어지는 걸 바라고 있다. 이럴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깨어 올바르게 주의 재림에 대하여 가르쳐야 할 것이다.

3. 저를 아는 지식(벧후3:14-18)

임박한 재림의 때에 성도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어떤 유익이 있고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가? 그리고 베드로가 바울의 편지를 언급한 것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가 있는 것인가?

1) 재림의 때에 바른 신앙

베드로는 재림의 때에 우리가 행해야 할 바를 네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 성실한 삶이다(벧후3:14). 불신자는 회개하고 돌아와야 하지만 신자는 그리스도의 날까지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인내가 우리를 구원하셨듯이 우리도 인내로써 구원의 날을 기다려야 한다(벧후3:15).

셋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미리 갖추어 악에 대항하여 미혹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벧후3:17). 호세아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하였다(호4:6).

넷째로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나야 한다(벧후3:18).

음식은 육체를 강건하게 하지만 영의 양식은 영혼을 살찌우게 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한 가지 주의를 잊지 않고 있다.

당시 바울의 편지는 이미 널리 읽혀지고 있었고 베드로조차도 바울의 편지를 정경의 권위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뜻과 욕심대로 바울의 편지를 해석하며 오남용하는 이들을 경계하라고 하였다

2) 재림을 준비하는 신앙

당시에 영지주의는 바울의 편지를 자신들의 정욕대로 해석하여 율법의 무용론을 주장하며 쾌락에 빠진 집단들이었다.

이는 오늘날에도 성서를 멋대로 해석하는 사이비 집단들이 있다. 정규 신학 공부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신학 대학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해석을 막아 주고 신학의 틀을 잡아 준다. 그러나 이것을 무시하고 계시만을 외치며 양무리를 미혹하는 무리들이 [분명히, 그리고 여전히]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억지로 풀 것이 아니라 올바로 배워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이러할 때 양무리들이 올바로 배워 성장하는 성결한 삶을 살아 재림을 준비하게 되는 것이다.

종말론적인 신앙은 우리가 결코 피해야 할 주제도 아니며 반대로 너무 편집적으로 집착해야 할 주제도 아니다.

바른 신학적 관점으로 올바른 종말론 신앙을 가져야 한다.

지금은 한국교회가 번영과 평안을 누리고 있다고들 하지만 불과 40여 년 전 순교의 피를 흘렸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비록 이 세대가 물질 만능주의로 흘러가고 있지만 우리 성도들은 베드로가 일깨워 주었듯이 종말론적 신앙을 갖고 이 땅에 성결된 삶을 살아 주의 날을 대비하며 깨어 있어야 한다

==================[539.너예수께조용히나가]

개역개정]제1장
부르심과 택하심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그리스도의 영광과 성경의 예언
12.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3.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14.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15.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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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새번역]제1장
인사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나 시므온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서, 우리의 믿음과 같은 귀한 믿음을 받은 이들에게 문안합니다.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써,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더욱 풍성해지기를 빕니다.
부르심과 선택하심
3.  ○그리스도께서는 신적 권능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경건에 이르게 하는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불러 주신 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4.  그분은 그 영광과 덕으로, 귀중하고 아주 위대한 약속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 약속들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세상에서 정욕 때문에 부패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적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5.  그러므로 여러분은 열심을 다하여, 여러분의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6.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인내를 더하고, 인내에 경건을 더하고,
7.  경건에 상호 우애를 더하고, 상호 우애에 사랑을 더하도록 하십시오.
8.  이런 것들이 여러분에게 갖추어지고 또 넉넉해지면,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게으르거나 열매를 못 맺는 사람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9.  그러나 이런 것들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앞을 못 보는 사람이며, 눈이 근시인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옛 죄가 깨끗해진 것을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10.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더욱더 힘써서,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은 것과 택하심을 받은 것을 굳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11.  또한 여러분은,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충분히 갖출 것입니다.
12.  ○그러므로 비록 여러분이 이런 것들을 알고 있고, 또 스스로가 받은 진리에 굳게 서 있지만, 나는 언제나 이런 것들에 대하여 여러분을 일깨우려 합니다.
13.  이 육신의 장막에 사는 동안, 나는 여러분의 기억을 일깨워서 분발하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보여 주신 대로, 내가 육신의 장막을 벗을 때가 멀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5.  그리고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언제든지, 여러분이 이런 일들을 기억할 수 있게 하려고, 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과 예언자의 말
16.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드린 것은, 교묘하게 꾸민 신화를 따라서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의 위엄을 눈으로 본 사람들입니다.
17.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에게 존귀와 영광을 주실 때에, 곧 지극히 영광스러운 분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아들이다" 하실 때에, 우리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18.  우리가 그 거룩한 산에서 그분과 함께 있을 때에, 우리는 이 말소리가 하늘로부터 들려 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19.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날이 새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여러분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등불을 대하듯이, 이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20.  여러분이 무엇보다도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예언은 마음대로 해석되어서는 안 됩니다.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령에 이끌려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말씀을 받아서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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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Peter 1 Amplified Bible

==Growth in Christian Virtue

1 [a]Simon Peter, a bond-servant and apostle (special messenger, personally chosen representative) of Jesus Christ,   To those who have [b]received and possess [by God’s will] a precious faith of the [c]same kind as ours, by the righteousness of our God and Savior, Jesus Christ: 

2 Grace and peace [that special sense of spiritual well-being] be multiplied to you in the [true, intimate] knowledge of God and of Jesus our Lord. 

3 For His divine power has bestowed on us [absolutely] everything necessary for [a dynamic spiritual] life and godliness, through [d]true and personal knowledge of Him who called us by His own glory and excellence. 

4 For by these He has bestowed on us His precious and magnificent promises [of inexpressible value], so that by them you may escape from the immoral freedom that is in the world because of disreputable desire, and become sharers of the divine nature. 

5 For this very reason, applying your diligence [to the divine promises, make every effort] in [exercising] your faith to, [e]develop moral excellence, and in moral excellence, knowledge (insight, understanding), 

6 and in your knowledge, self-control, and in your self-control, steadfastness, and in your steadfastness, godliness, 

7 and in your godliness, brotherly affection, and in your brotherly affection, [develop Christian] love [that is, learn to unselfishly seek the best for others and to do things for their benefit]. 

8 For as these qualities are yours and are increasing [in you as you grow toward spiritual maturity], they will keep you from being useless and unproductive in regard to the true knowledge and greater understanding of our Lord Jesus Christ. 

9 For whoever lacks these qualities is blind—shortsighted [closing his spiritual eyes to the truth], having become oblivious to the fact that he was cleansed from his old sins. 

10 Therefore, believers, be all the more diligent to make certain about His calling and choosing you [be sure that your behavior reflects and confirms your relationship with God]; for by [f]doing these things [actively developing these virtues], you will never stumble [in your spiritual growth and will live a life that leads others away from sin]; 

11 for in this way entry into the eternal kingdom of our Lord and Savior Jesus Christ will be abundantly provided to you.

12 Therefore, I will always be ready to remind you of these things, even though you already know them and are established in the truth which is [g]held firmly in your grasp. 

13 I think it right, as long as I am in this earthly tent, to inspire you by reminding you, 

14 knowing that the laying aside of this earthly tent of mine is imminent, as our Lord Jesus Christ has made clear to me. 

15 Moreover, I will diligently endeavor [to see to it] that even after my departure you will be able, at all times, to call these things to mind.

==Eyewitnesses

16 For we did not follow cleverly devised stories or myths when we made known to you the power and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but we were [h]eyewitnesses of His majesty [His grandeur, His authority, His sovereignty]. 

17 For when He was invested with honor and [the radiance of the [i]Shekinah] glory from God the Father, such a voice as this came to Him from the [splendid] Majestic Glory [in the bright cloud that overshadowed Him, saying], [j]“This is My Son,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pleased and delighted”— 

18 and we [actually] heard this voice made from heaven when we were together with Him on the holy mountain.

19 So we have the prophetic word made more certain. You do well to pay [close] attention to it as to a lamp shining in a dark place, until the day dawns and light breaks through the gloom and the [k]morning star arises in your hearts. 

20 [l]But understand this first of all, that no prophecy of Scripture is a matter of or comes from one’s own [personal or special] interpretation, 

21 for no prophecy was ever made by an act of human will, but men moved by the Holy Spirit spoke from God.

==Footnotes

2 Peter 1:1 Two early manuscripts read Simeon, the direct transliteration of the Hebrew. The only other place this spelling appears in the NT is in Acts 15:14.

2 Peter 1:1 From a Greek word meaning to obtain by lot, emphasizing the fact that salvation is not something gained because of personal effort, but is received as an undeserved gift because of God’s grace.

2 Peter 1:1 I.e. equal in rank, honor and privilege.

2 Peter 1:3 There is no “secret knowledge” or “better way” or alternative belief system which God has revealed to some unique group or teacher. The truth is available to everyone.

2 Peter 1:5 Lit supply.

2 Peter 1:10 I.e. developing the moral virtues outlined in vv 5-7.

2 Peter 1:12 Lit present with you.

2 Peter 1:16 A reference to the transfiguration (Matt 17:1ff).

2 Peter 1:17 The word “Shekinah” does not appear in Scripture, but has been used by both Christians and Jews to describe the visible divine Presence of God (the brilliant light of the divine), in such things as the burning bush, the cloud and the pillar of fire that led the Hebrews in the wilderness, and the Presence of God that rested between the cherubim over the mercy seat of the ark.

2 Peter 1:17 With these words God affirms the deity of Jesus and His divine essence.

2 Peter 1:19 Lit light-bringer.

2 Peter 1:20 Or For you k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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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V]제1장
1.  Simon Peter, a servant and an apostle of Jesus Christ, to them that have obtained like precious faith with us through the righteousness of God and our Saviour Jesus Christ:
2.  Grace and peace be multiplied unto you through the knowledge of God, and of Jesus our Lord,
3.  According as his divine power hath given unto us all things that pertain unto life and godliness, through the knowledge of him that hath called us to glory and virtue:
4.  Whereby are given unto us exceeding great and precious promises: that by these ye might be partakers of the divine nature, having escaped the corruption that is in the world through lust.
5.  And beside this, giving all diligence, add to your faith virtue; and to virtue knowledge;
6.  And to knowledge temperance; and to temperance patience; and to patience godliness;
7.  And to godliness brotherly kindness; and to brotherly kindness charity.
8.  For if these things be in you, and abound, they make you that ye shall neither be barren nor unfruitful in the knowledge of our Lord Jesus Christ.
9.  But he that lacketh these things is blind, and cannot see afar off, and hath forgotten that he was purged from his old sins.
10.  Wherefore the rather, brethren, give diligence to make your calling and election sure: for if ye do these things, ye shall never fall:
11.  For so an entrance shall be ministered unto you abundantly into the everlasting kingdom of our Lord and Saviour Jesus Christ.
12.  Wherefore I will not be negligent to put you always in remembrance of these things, though ye know them, and be established in the present truth.
13.  Yea, I think it meet, as long as I am in this tabernacle, to stir you up by putting you in remembrance;
14.  Knowing that shortly I must put off this my tabernacle, even as our Lord Jesus Christ hath shewed me.
15.  Moreover I will endeavour that ye may be able after my decease to have these things always in remembrance.
16.  For we have not followed cunningly devised fables, when we made known unto you the power and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but were eyewitnesses of his majesty.
17.  For he received from God the Father honour and glory, when there came such a voice to him from the excellent glory, This is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 pleased.
18.  And this voice which came from heaven we heard, when we were with him in the holy mount.
19.  We have also a more sure word of prophecy; whereunto ye do well that ye take heed, as unto a light that shineth in a dark place, until the day dawn, and the day star arise in your hearts:
20.  Knowing this first, that no prophecy of the scripture is of any private interpretation.
21.  For the prophecy came not in old time by the will of man: but holy men of God spake as they were moved by the Holy Gh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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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Ⅰ. 사도 베드로가 본래 의도했던 대로 이끌려고 하는 서론과 개요(1-4).
Ⅱ. 모든 그리스도인의 은사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권면(5-7).
Ⅲ. 이 권고를 강조하며,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이 권고에 따라 순응하도록 하기 위한 몇 가지 부언.
1. 이로 인하여 그들에게 주어질 커다란 유익에 대한 설명(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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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과 택하심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교회의 축복(벧후 1:1-4)
유대인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편지를 쓰도록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도 베드로는 그 서문에서도 역시 전서에서와 같은 식으로 축복과 인사의 말씀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 이 서문 가운데서 우리는 약간의 첨가 변경된 부분을 찾아 볼 수 있다.
Ⅰ. 사도는 자기를 나타내는 칭호에 있어서, "베드로"라는 이름과 함께 "시몬"이란 이름을 덧붙였고, "사도"라는 칭호와 함께 "종"이란 칭호도 아울러 사용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베드로"란 이름은 두 편지에서 흔히 사용된 이름인데, 이 이름은 "예수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고백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으로부터 수여 받은 이름으로써 아마 그가 즐겨 사용한 <그리스도안의 거듭난>이름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사람이 집을 지을 때 반드시 반석을 기초로 해야 한다는 진리의 근거가 되는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몬"이란 이름은 전서에는 생략되었으나 여기서는 기록되어 있다. 이 이름은 그가 할례를 받을 때 붙여진 <옛사람의>이름이다. 

베드로는 그가 그러한 이름을 생략함으로 율법에 대해 열심인 유대인 신자들로부터 그가 할례를 무시하고 거부하는 것으로 알고 질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여기서는 <시몬 베드로..라고>이름을 덧붙였다.
베드로는 여기서 자신에 대해(사도라는 호칭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호칭하였다. 

[사도란 위임받았음을, 종이란 순종하였음을 말함....참 기독자마다 주께 순종할 때, 그분은 또한 무언가를 위임해 주심을 기대해도 좋다!!]

따라서 베드로는 다윗이 행했던 것처럼 영광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시 116:16). 그리스도를 섬긴 것은 가장 귀한 영광이다(요 12:26). 

그리스도께서는 "왕중의 왕이시며 만 주의 주님"이시다. 또 그는 그의 종들을 "하나님을 위한 왕들과 제사장들"로 삼아 주신다(계 1:6). 

이러한 주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따라서 죄만 없다면 조금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의 종"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의 생을 살게 하는 사람이 마땅히 받을 만한 칭호이다.
Ⅱ. 우리는 본 서신을 받을 수신자들에 대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전서에서는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 후서에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자들"이라고 묘사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 하나님과 구주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명심하라]

왜냐하면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믿음은 이교도들의 허황된 믿음이나, 위선자들의 거짓된 믿음과 그리고 아무리 정통적이라 할지라도 형식주의자들의 열매 없는 믿음과는 매우 거리가 먼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부름 받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이다(딛 1:1).

1. 참으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은 보배로운 은사이다. 

그리고 보이는 교회의 많은 믿는 이들 가운데서도 참다운 신앙의 소유자는 그 수가 적고 희귀할 뿐만 아니라(마 22:14), 그러한 믿음은 매우 탁월한 것이며 그러한 믿음의 소유자에게 커다란 이득을 가져다 준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다시 말해서 참으로 경건하고 영적인 삶을 산다. 

믿음은 이러한 탁월한 삶에 필요한 모든 도움과 위로를 공급한다. 

믿음은 새로운 인간을 양육하는데 필요한 포도와 젖을 사기 위해(사 55:1) 그리스도께 나가게 하여 준다. 

믿음은 또 우리를 부요하게 하는 불로 연단된 금과 하늘의 보화를 사가지고 오게 해 준다. 

그리고 찬탄과 경배의 대상이 되게 하여 주는 왕의 옷인 흰 옷을 [주 앞에서 겸손한 자에게]입게 하여 준다(계 3:18).

2. 믿음은 일반 그리스도인이나 사도들에게 있어서 마찬가지로 귀한 것이다. 

그리고 양자에게 모두 귀한 결과를 가져다준다. 

믿음은 강한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와 단단히 결합시켜 주는 것처럼 연약한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에게 단단히 결합시켜 주며, 그들의 마음 역시 모두 깨끗케 하여 준다. 

그리고 모든 신실한 신도들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하심을 얻으며 모든 죄로부터 깨끗함을 받는다(행 13:39). 

믿음을 가진자는 누구든지 다 같이 귀하신 주님을 영접할 수 있으며 다 같이 귀하신 약속을 받아 누릴 수 있다.
3. 이 보배로운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우리가 소유할 수 있다. [[이 믿음은 참 기독자라면 누구나 받고 누릴 수 있는 바, 그리스도의 전능한 믿음이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은사이다.
4. 믿음의 귀중함은 우리가 그것을 소유할 수 있게 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완전하고도 만족할 만한 의와 순종이 믿음에 대하여 그 가치와 귀중함을 부여하여 주신다. 

그리고 믿는 자의 의로움은 그것을 받아들임으로 그 무한한 가치가 더욱 인정될 수밖에 없다.
(1)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

그렇다. 그는 태초적부터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참된 하나님이시며, 무한하신 존재로서, 이러한 의를 이룩하셨기 때문에 무한한 가치를 인정받게 된 분이시다.
(2) "그는 믿는 자들의 구주이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완전한 순종을 보여 주셨다. 

보증자와 구세주로서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을 대신하여 이러한 의를 가져왔기 때문에 그의 순종은 믿는 자들에게 말할 수 없이 커다란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Ⅲ. 베드로는 사도로서의 축복을 기원하고 있다. 

.그 축복에서 그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충만할 것과 그들 속에 은혜의 역사가 증진하고 성장할 것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 함께 하며 그들의 양심 안에 충만한 평강이 넘치기를 기원하고 있다. (평강,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가능하지 못하다).  

이것은 전서에 나오는 기원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몇 가지가 첨가되었다.

1. "은혜와 평강이 넘치게 되는" 방법과 수단이 설명되었다. 

그 방법이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야다...참되게 전존재를 경험하여 앎...이때 진실한 참 믿음과 참 사랑, 산 소망으로 반응하게 됨)  말미암는" 것이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은 영적인 삶에 커다란 증진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그러한 지식과 믿음이 없이는 영생에 이를 수 없다(요 17:3).
2. 충만한 은혜를 구하는 사도 베드로의 믿음과 이를 기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의 근거를 덧붙여 주고 있다. 

우리가 이미 받은 바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것을 구하도록 고무한다. 

은혜의 사역을 시작하신 이는 그것을 완성해 주실 것이다.
(1) 이 모든 영적인 축복의 원천은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인간이 아니었다면 중보자의 모든 사명을 감당하실 수 없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능력이시다.
(2) 진실한 영적인 생활과 거룩한 삶과 능력에 연관되어 있으며, 또한 이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그 모든 것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의 안에 모든 충만함이 있으며," 그리고 그로부터 우리가 무든 것을 받으니 곧 "은혜 위에 은혜"이다(요 1:16).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에서 생명의 은혜, 증가되는 은혜, 각양(각 방면의) 은혜, 모든 은혜, 참 은혜..라는 표현으로 그안의 하나님 생명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역동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은혜와 평강을 보존하며 증진시키며 완전케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그로부터 받는데, 어떤 주석가는 이 구절에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을 의미한다고 하고 있다.
(3)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그에 대한 믿음은 모든 영적인 도움과 위로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수단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가 여기에 묘사되어 있는 바와 같이 우리를 확실히 부르신 분이라고 고백하며 또 그렇게 인식하여야만 한다. 즉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 우리를 부르신 자"이시다. 

인간을 부르사 회심시키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그들에게 "영광과 덕"을 가져다주시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영원히 살아 생동함으로 작동하는 그리스도의 모든 인격과 신적 성품, 거기에 그분의 모든 영광의 능력-부-지혜-힘-존귀한 은혜를 다 포함한 것이며, 그분과 하나됨안으로, 상호누림-거함-기업-소유됨-닮음을 다 포함한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과 같이 "평강과 은혜"를 주시기 위한 것이다. 

그저 많은 사람들은 난외의 주와 같이 "영광과 덕으로써"라고 읽기를 좋아한다.(역주. 한국어 성경은 그렇게 취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영광과 덕의 활동 또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말미암아 확실하게 부르심을 받았다.(엡 1:19). 

죄인을 회개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소에서 모여지고 경험되어지는 능력과 영광이다(시 63:2). 

이 능력과 덕은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간" 모든 자들의 찬양을 받아야 한다(벧전 2:9).
(4) 제 4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은혜와 평강을 증진시켜 주기 위하여 그들의 믿음과 소망에 대해 격려하고 있다. 

왜냐하면 같은 은혜와 덕이 우리를 부르신 복음서 약속을 확실히 하기 위해 효과적으로 채용되었기 때문이다.
① 약속을 성취시키는 좋은 일들은 사실 위대한 것들이다. 

죄의 용서는 여기에 언급되어진 하나의 축복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능력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신속히 죄를 고백하게 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것은 "주의 크신 능력"(민 14:17)이 나타내 주시기로 약속하신 은총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영원히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헤아릴 수 없이 많고 흉악한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시편 119편 18절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매우 기이한 것이다.
② 복음서에 나타난 약속된 축복은 매우 귀한 것이다. 

구약 성서의 위대한 약속이 "여인의 후손" 곧 메시야라면(히 11:39) 신약 성서의 위대한 약속은 "성령"이시다(눅 24:49). 

우리를 생기 있게 하여 주시며, 깨우쳐 주시며, 성결케 하시는 성령은 매우 위대하시다.
③ 복음의 약속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식과 의와 성결에 있어서 그들의 심령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 지움을 받는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게 되고 그를 위해 봉사하게 된다. 동시에 그들은 거룩한 성품과 영적인 성향을 소유하게 된다. 

율법은 "죽음을 부여하는 것"이요, 문자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나. 복음은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요, 성령은 "죄와 허물 가운데 죽은 자들을 살리신다."
④ 성령께서 거룩한 성품을 그들 속에 이룩해 주신 사람들은 멸망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얻은 자들이다. 

성령의 은혜로 "그들의 심령이 새로 지음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왜냐하면 "멸망이 지배하는" 곳은 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자녀"가 되지 못하고, "이 세상의 자녀"가 된 자들은 죄의 세력 아래 있다. 이 세상은 악한 자의 손안에 놓여 있다(요일 5:19). 

죄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은 정욕을 통해서이다. 그들의 욕망은 정욕에 매여 있다. 따라서 정욕이 그들을 지배한다. 

우리를 다스리는 죄의 지배는 우리가 정욕을 좋아하는 데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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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피스티스, 에무나 : 살아 생동하는 발휘되는, <하나님의>믿음)(아레테, 테힐라-호드...거침 없는 <그리스도의 인격의>탁월성-우수함, 힘과 용기)을, 덕에 지식(그노시스, 다아트..<하나님의>계시적 지식, 곧 경험 통해 확증된 체득된, 생동하는 참지식)을,
6.  지식에 절제(엥크라테이아, 아파크...억제하다/제지하다 : 합목적적 자제)를, 절제에 인내(히포모네, 미크웨/티크와...소망/기대를 향한 참고 견딤)를, 인내에 경건(유세베이아, 야례 예호와..하나님 경외함)을,
7.  경건에 형제 우애(필라델피아...믿는 형제자매간에 일절 순수하고 정결한, 서로 위하고 돌보며 유익케 함의  친애함)를, 형제 우애에 사랑(아가페, 아하바...모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 : 바라지 않고 베푸는 순결한, 자선적 사랑)을 더하라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경건의 진보(벧후 1:5-11)
사도 베드로는 이 부분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보배로운 믿음을 소유하였고,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들이 되었으므로 그들로 하여금 은혜와 경건에 있어서 더 큰 진보를 이룩하도록 격려하며, 고무시키려는 이 서신에 있어서의 중요한 문제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것은 매우 훌륭한 출발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완성된 자인 것처럼 생각해서 그 자리에 그대로 안주해서는 안 된다. 

사도는 그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도록 이미 기도했으며, 지금도 그들이 더 많은 은혜를 받도록 힘쓰기를 바래서 그들을 권면하고 있다. 

우리는 기회가 있는 대로 우리가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을 권면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려 주시기를 원하는 바를 그들이 얻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활용하도록 그들을 권면해야 한다. 

신앙의 진보를 꾀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극히 부지런하고 근면하게 노력해야만 한다. "힘써" 근면하지 아니하고서는 거룩한 사업에서 이룩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신앙의 사업에 있어서 게으른 사람들은 아무런 성과를 올릴 수 없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자"하는 사람들은 분투 노력해야 한다(눅 13:24).
Ⅰ. 여기에서 우리는 신자들의 진보가 어떻게 점차로 이룩되어지는 것인가를 주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1. 신자는 "덕"을 지녀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의"(義)라고 이해한다.((바로 하나님 그분의 원판 그대로 찍어 낸 복사판이란 의미..그분의 짝으로서 갖추어야 할 바요, 거기에는 그분으로부터 공급받는 힘과 불굴의 용기<전적으로 신뢰/확신/의뢰하는 믿음>이 필요하다)) 

^^^[요일3:7-10].. *7.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먼저 주님말씀따라 자신을 살피고 모든 거리낌을 회개하되,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죄까지도 주께 맡겨드림의 보혈로 정결케 될 필요가 있음..이제, 믿음으로 자신의 영광의 그 모든 것을 열어주시는 분을 앙망하는 바, 성령 인도하심따라 행함이 의를 따름임을 기억하자...그 안에서 주님은 당신의 친밀함으로 그분의 덕을 따라 행하게 하실 것) *8.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9.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거듭남, 중생을 의미...거듭난 자는 <그리스도의 어떠함-의로우심-에까지 충만히 자라날 수 있는>그리스도의 씨가 그안에서 이미 자라고 있기에...하나님의 절대긍정을 믿는자 자신의 것으로 믿음으로 취하라!!))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일부러 고의적으로 반복해서 죄를 짓지 않음..라는 의미))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10.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그리고 (그리스도의 전능한) 믿음을, 여기에 (그리스도의)덕<의...그 어느것도 막아설 수 없는 (생동하는 믿음, 곧 힘과 용기, 담력을 통해 발현되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인격의 탁월성>을, 이제 거기에 "지식(야다...참되게 체득하여 살아 생동하고 발휘하게 하는 참된 생명안에서의  앎), 절제(자율적 통:: 생명력의 낭비, 곧 오남용이나 새어나감 없이 오직 주님 뜻에 합당하게 쓰이도록 잘 간수함) 그리고 인내(불같은 시련<질고, 간고, 고난/환난, 핍박/박해, 재앙 등> 과정 통해 <영적 참자아만 남고, 옛자아에 속한>모든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전한 참 생명력 충만 그 자체의 활력을 극대화 함)"를 계속해서 지녀야 한다. 그것들은 덕의 항목에 밀접하게 관련되어진 것들로서,(믿음-지식-절제-인내) 매우 중요한 네 개의 덕목이며, 모든 덕목 중의 덕목으로써 그들이 최우선적으로 힘써야 할 것이라고 사도는 생각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며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다"(딛 3:8)는 말씀을 볼 때, 여기에 나오는 "덕"이란 "힘과 용기"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힘과 용기가 없는 신도들은 반드시 수행해야 할 수많은 선한 사업을 성취할 수 없다. 의인은 사자와 같이 담대해야 한다(잠 28:1). 

믿는 바 자기의 신조를 고백하거나 복음의 사명을 수행하기를 두려워하는 비겁한 기독자는 그 날에 가서 그리스도께서 그를 부끄럽게 할 것이다. 

"너의 심령이 악한 날에 처하여 있는 너 자신에 대해 외면하지 않도록 하라. 모든 반대에 맞서 대항하며 모든 대적과 세상과 육신 그리고 죽음까지라도 대항해서 싸울 수 있을 정도로 담대한 자신을 보여 주라."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덕을 지녀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리고 더욱이 믿는 우리들이 죽음에 임하게 될 때 이러한 덕이 더욱 절실히 필요하게 된다.

2. 신자는 그의 덕에 "지식"을 용기에 지각을 더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에 앞서서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 그분의 어떠하심에 대한 우리의 [경험통해 확인된, 체득한 참된]지식이 있어야 한다(시 9:10).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전에는 결코, 진정 하나님의 선하시고, 우리가 받아들일 만하며, 동시에 온전하신 그분의 뜻을 따라 시행할 수가 없다. 

그러나 임무 수행을 위한 적합한 환경이란 것이 있는 법이기에, 우리는 그것이 어떤 환경인지 알아내어야 하며, 그리고 적절한 방법과 시간을 활용하여야 한다. 합당한 지각은 우리가 함께 일해야 할 사람들과 우리가 끼어들어야 할 장소와 무리들을 영적 차원에서까지 분별하여  살펴보게 한다. 

참신자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임무가 잘 수행될 수 있는 적절한 방법과 규칙을 바르게 가르쳐 주는 지식과 지혜에 따라서 수고를 기울여야 한다.
3. 우리는 우리의 지식에 "절제"를 더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여러 물질을 사랑하고 그것들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온전하고도 온당한 위치를 지켜야 한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외적인 위로에 대한 바른 이해와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 가치와 효용성이 영적인 축복에 비해 훨씬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육체적인 우월성이나 육체적인 특권은 다소 유익은 있으나 매우 적은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그 일에 따라 고려되고 또한 사용되어야 한다. 

복음은 우리에게 정직할 것을 가르치며 동시에 절제할 것도 가르쳐 준다(딛 2:12). 

우리는 우리의 본능적인 삶에 있어서 좋은 것들, 다시 말해서 고기와 술, 옷, 잠자기, 오락 그리고 명예와 같은 것들을 바라고, 또 그것들을 이용하는데 있어서 이를 절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과도한 욕망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생각과는 상치되는 것이다. 

이것들을 더욱 취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다 할 수 없다.
4. 절제에 대해 인내를 더해 주라.  

그것은 모든 것을 "온전하게 이루게"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될 수가 없다(약 1:4). 

왜냐하면 우리는 환난을 받도록 태어난 존재이며, 많은 환난을 겪고서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런 환난이다(롬 5:3). 

환난은 인내를 낳으며, 연단과 은혜의 증가를 가져다주며,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아무런 불평이나 불만을 토하지 아니하고, 침묵과 순종으로 모든 재난과 십자가를 견디어 나가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에게 환난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처사가 바른 것임을 인정하며, 우리는 또 우리의 고난은 우리의 죄값에 비해서는 휠씬 가벼운 것임을 고백하며, 그 환난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임을 믿어야 한다.
5. 우리는 인내에 "경건"을 더해야 한다. 

경건은 바로 인내로 말미암아 이룩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내는 연단을 낳기 때문이다(롬 5:4). 

그리스도인들이 인내로써 환난을 이겨 나갈 때 그들은 비록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지팡이로 저희 범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죄악을 징계"할지라도 그의 "인자함을 그들에게서 다 거두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신 사랑을 체험적으로 알 수 있다(시 89:32, 33). 

참다운 경건이 있는 곳에 어린아이들과 같은 두려움과 외경에서 오는 사랑을 가지게 된다.
6. 우리는 여기에다가, 동일한 아버지의 자녀요, 동일한 주인의 종들이며, 동일한 가족의 권속들이며, 동일한 고향을 향해 가는 나그네이며 그리고 동일한 유업의 상속자들인 그리스도인 동료들에 대한 "형제애" 즉 따뜻한 애정을 더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순전한 마음과 온전한 사랑으로 사랑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우리가 각별한 기쁨을 얻게 되는 우리의 가장 친밀하고 사랑스러운 자들이다(시 16:3).
7. "사랑" 즉 모든 인류에 대한 선의의 사랑이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베푸는 자원적인 사랑에 첨가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들을 한 혈통으로 지으셨다. 인간의 모든 자녀들은 같은 인간의 본성을 나누어 가졌으며, 그들은 같은 자비를 받을 수 있고, 같은 고난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비록 영적인 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 보다 우위에 있도록 구별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재난 속에 있는 자들을 동정하며, 기회 있는 대로 그들을 궁핍으로부터 구원하고, 영육간에 그들의 복리를 증진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해 주어야 한다.
Ⅱ. 우리는 앞서 언급한 모든 은사들을 소유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우리는 "모든 선한 일들" 즉 계명에 나타난 모든 의무와 능동적 혹은 수동적인 복종이라든가 또는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하며 동시에 하나님을 모방하기 위한 그런 봉사가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귀한 은사를 근면함과 불요불굴의 태도로 추구하도록 하기 위해, 열심하는 자들이 누릴 여러 가지 풍성함과 이익에 대해 말해 주고 있다(8-11절).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1. 우선 보다 일반적인 면에서 말한다(8절). 이런 은사를 가지면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의 방법 그대로 그 외적인 표현 이상의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유대의 왕들 중에서 가장 사악하고 선동적이었던 아하스 왕에 대해서 이야기 될 때 그는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치 아니하"였다고 한다(왕하 16:2). 

이것은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즉 그의 그후의 생활이 보여 준 것과 같이 그는 가장 반역적이며 지독한 삶을 살았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 안에 모든 그리스도인의 은사가 충만하게 넘치게 됨은 우리로 하여금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도록 하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실제적 삶에 있어서, 우리들을 보다 의욕적이고도 생기있게 그리고 용맹스럽고도 활기있게 만들며, 모든 선한 사업에 있어서 놀라운 성과를 맺도록 한다.. 

이러한 사실은 사람들 사이에서 많은 열매를 맺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풍성하게 하며, 그리스도를 그들의 "주님"으로 고백하며,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맡겨 주신 일을 풍성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그리스도의 종임을 증거하는 것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리게 한다.
이러한 것은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는 데서 오는 당연한 결과이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은사가 심령 속에 내재하게 될 때, 그 은사들은 피차간에 증진시키며, 강화시키며, 또한 격려하고 새롭게 하여 준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가 8절 초반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것들은 모두 번창하며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은사가 충만하면 선한 행위도 풍성하게 된다. 

사도 베드로가 내세우고 있는 증거는 매우 멋진 증거이다(9절). 

거기서 베드로는 생명력을 통해 열매를 맺게 하는 은사가 함께 하지 않는 삶이 얼마나 비참한 삶인가를 보여 주었다. 

앞서 말한 그러한 은사가 없거나, 있다고 해도 또는 있는 척해도, 그 은사를 활용하거나 증진시키지 못하는 사람은 "소경"이라고 했다. 

그것은 "원시치 못한다"는 다음 구절이 잘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영적이며 하늘에 속한 일들에 관해 소경이라는 뜻이다. 

그는 이 악한 현세의 것들을 볼 수 있고, 또 지극히 사랑하지만 영적인 특권과 거룩한 축복을 누릴 수 있으리 만큼 내세를 위한 분별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기독교의 탁월성을 아는 자는 "영광과 존귀와 그리고 영생"을 얻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모든 은사를 추구하는 일에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은사를 못 얻거나 또는 추구할 수 없는 경우에 사람들은 실제에 있어서 먼 곳에 있지 않으며, 드러나 있고 또 이해할 수 있는 영역에 있는 것들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을 바라보지 못하게 된다. 

그것들을 그들이 먼 곳에 가져다 놓음으로써, 그들로부터 거리감을 유지하게 하고 있다. 

내세에 누릴 그처럼 놀라운 사실에 대해 소경과 같이 보지 못하며, 하나님께서 무서운 형벌의 실재성과 그 확실성, 그 위대함과 그리고 그것들이 매우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매우 가련한 자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신앙에 덕과 지식 등등을 더하지는 못하는 자들"이 가지고 있는 가련함의 전부가 아니다. 

그들은 앞을 바라보지 못하듯이 또한 뒤로 돌아다보지 못한다. 

그들은 그들의 시력이 부족하여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것과 같이 그들의 기억력이 감퇴되어 지난 일을 지탱하는 것조차 불가해진다. 

그들은 그들이 과거에 세례를 받았다는 것과 따라서 그들의 마음과 생활을 거룩하게 해야 한다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게 된다.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는 죄에 대항하여 거룩한 싸움을 싸워야 하며, 육과 세상 그리고 마귀와 싸우도록 소집을 당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주님의 것이 되겠노라고 한 단단한 약속과 그리고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을 벗어버리고자 하였던 여러분의 진취적인 마음과 결단을 때때로 기억해 내기를 바란다.
2.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과업을 근면하게 수행하는데 따라오는 두 가지의 특별한 이점을 제시하고 있다. 

즉 은혜 안에서의 안정과 영광에 이르는 승리이다. 

베드로는 이러한 사실을 제시함에 있어서 앞서의 권고를 요약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고 있다. 

앞서 5절에서는 "더욱 힘써 너의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공급하라"고 했던 것을 10절에서는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아래의 몇 가지 점을 유의하자.
(1) 신자들이 그들의 "부르심을 굳게 하는 것," 다시 말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스스로 밝히는 것은 그들의 의무이다.
(2) 신자들이 그들의 영원한 택하심을 굳게 하는 길은 그들의 부르심을 실제화 시키는 데 있다. 

아무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과 그의 섭리를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것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바요,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구체화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단정해도 좋을 것이다.
(3) 우리가 택함을 받고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굳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부지런함이 필요하다. 

즉 여기에서 우리 자신에 택한 지극히 면밀한  시험과 우리들이 온전히 중생하고, 마음이 교화되고, 의지가 새로워졌으며, 온 심령이 바른 방향으로 변화되고 있는가를 밝히기 위한 면밀한 조사와 엄격한 심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에 이르기 위해서는 최선의 근면이 요청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이루어질 수도 또한 보전될 수도 없다(시 139:23; 롬 8:16).  

"그러나 그 수고가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그렇게 괘념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 수고 때문에 얻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
① "이로 말미암아 여러분은 타락하지 않도록 보호를 받는다. 그리고 어떤 때, 어느 시기든지 더욱이 이 땅에 임하는 어 시련의 때라고 할지라도 여러분은 보호를 받는다. " 

다른 사람들이 사악하고 가증스러운 죄 가운데로 빠져 들어갈 때에도 그처럼 근면한 자들은 지극히 주의 깊게 행동할 수 있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바르고도 온전하게 설 수 있게 될 것이다.
② 신앙 생활에 부지런한  사람들은 영광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비록 한편 하늘에 들어가는 사람이 적고 또 겨우 구원을 얻으며(벧전 4:18), "불 가운데서 얻는"(고전 7:15) 것같이 구원을 받기가 매우 어려워도, "은혜 중에 성장하며," 그리고 "주의 일을 많이 힘쓰는" 사람은 "그들의 주님의 기쁨에 넉넉히 들어갈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영원한 왕국에까지라도 들어갈 수 있으며, "주님과 함께 영원히 영원히 다스릴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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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3.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14.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15.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영적 분발(벧후 1:12-15)
Ⅰ. 은혜와 경건을 발전시키며 또 유지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의 자기의 의무를 부지런히 행하였으며, 따라서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를 성실히 행하도록 고무하며 격려할 수 있게 되었다. 

만일 목사들이 그들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나태하면 성도들이 그들의 의무를 수행하는데 부지런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나태할 수가 없었다(다시 말해서, 어느 때, 어느 장소, 어떤 일을 하든지 나태할 수가 없었다). 

오직 그는 누구보다도 모범적인 행동을 해야 했으며, 어떤 일에 대해서도 부지런해야만 했었다. 

더욱이 성도들에게 많은 은사를 생각나게 하는 일에는 더욱 그랬다. 이것은 사도 자신들까지 포함한 모든 훌륭한 주의 종들의 직무이다. 

그들은 "여호와를 기억하시게"(사 62:6) 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특히 하나님의 약속들을 언급하도록, 그리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의 백성들에게 선을 베풀기로 약속하신 바를 기억나게 하도록 사명을 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또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교훈을 일러주며, 기독교의 교리와 의무를 기억나게 하여 주며,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하고 그대로 행하게 하여 주는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가 말하는 바를 이미 알고 있으며, 그가 주장하고 있는 진리 가운데 이미 굳게 서 있기 때문에 그런 교훈은 새삼 필요 없다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해도, 그는 여기서 그러한 교훈을 다시 일깨워 주고 있다.
1. 우리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라 할지라도,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그리고 우리의 지식을 더욱 증진시키며 나가고, 아는 바를 실천에 옮기도록 하기 위해서 그것들을 늘 명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우리는 또 어떤 교훈의 풍조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진리의 믿음, 특히 현존하는 진리에 굳건히 서야 한다. 

더욱이 이러한 진리는 우리를 평안케 하는 것으로써 이 시대의 것과는 상반되며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더욱 알아야 할 진리이다. 

그 진리 즉 복음서가 가르치는 위대한 교훈은 바로 이런 것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삼가 조심하며 선을 행하여야 한다. " 

이것은 사도들이 그들의 시대에 널리 선포한 진리이다. 그리고 이 진리의 말씀은 어느 시대의 교회라도 "받아들여야 할 신실한 말씀"이다.
그리고 이러한 말씀은 목사에 의해 늘 강조되어야 하고(딛 3:8), 동시에 사람들은 이 말씀으로 잘 교훈함을 받고 확신을 얻어야 하며, 비록 지식을 얻은 뒤에도 아직 충분히 알지 못하고, 아직 그처럼 확신을 가지지 못한 것이라고 늘 생각하여야만 한다. 

제 아무리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계명의 범위를 초월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주시고 부여해 주신 방법을 필요로 하지 않아도 될 수는 없다. 

그리고 사람들이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 교훈과 권고를 필요로 한다면 그들이 이 장막에 머물러 있는 동안 목회자들이 그들을 교훈하고 권고하며 그들이 전에 들어서 아는 진리라도 다시 기억나게 해 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할 때 그들을 일깨워서 복음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열심히 살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Ⅱ. 사도는 이러한 작업을 시작하면서 우리에게 말하기를(14절), 그가 이미 알고 있는 이 문제에 대해 열심을 내는 것은 그 자신이 확신을 가지고 할뿐만 아니라, 그가 "이 장막을 벗어날" 날이 임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 우리의 몸은 우리 영혼의 장막에 불과하다. 

이 몸은 비천하고 유동적인 구조를 자기고 있고, 그 기둥은 쉽사리 움직여질 수 있으며, 그 기반은 당장에 파괴된다.
2. 이 장막을 벗어나야만 한다. 

우리는 이 흙집에서 오래 살 수 없다. 밤에 옷을 벗어서 옆에 내던지는 것같이 임종시에 우리는 우리의 육신을 벗는다. 

그리하여 부활의 아침이 이를 때까지는 우리의 육신이 무덤 속에 눕혀질 수밖에 없다.
3. 임박한 죽음은 사도 베드로로 하여금 생명의 활동을 더 열심히 하게 하였다. 

우리 주 예수께서 그가 떠날 날이 임박했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따라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일깨워 더욱 열심을 내어 부지런히 일했다. 그는 그의 편지를 받을 사람들과 곧 헤어져야만 한다. 그리하여 사도 베드로는 그가 떠난 후에라도 그가 그들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그들이 꼭 기억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에 그는 이러한 권면을 그의 서신에 첨부하고 있다.
베드로는 구전으로 전달되는 것이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못하다고 본 것 같다. 사실 구전이라는 방법은 베드로가 기대할 만한 최선의 방법은 아니었다. 

베드로는 독자들이 이러한 말씀들을 항상 기억하되, 다만 그 정도로 생각만 하지 않고,  맨 처음 들려지던 그대로 항상 그들에게 들려지도록 하기를 원한 것이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며," 그의 친절에 대해 말한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 대한 지식을 널리 펴는 길이며, 베드로는 이러한 것을 마음에 생각하고 있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있는 자가 곧 그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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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복음의 확증(벧후 1:16-18)
여기에는 앞서 언급한 그러한 권면, 다시 말해서 그처럼 열심을 가지고 진지한 태도로 권면한 그 이유가 나온다. 

이것들은 근거가 확실한 폭넓은 관심에서 나온 것이다. 복음은 "공교히 만든 이야기"가 아니다. 

복음의 말씀은 귀신들린 자의 이야기거나 간교한 수법으로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계략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방법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다시 말해서 무한히 지혜로우신 여호와의 가장 탁월한 섭리에서 나온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들을 구원하는 이 방법을 창안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이 복음서에 나타나 있으며, 사도 베드로의 설교는 이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이었다.
1. 복음의 설교는 그리스도를 통해 나오는 모든 죄인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능력이 그리스도께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죄인들을 그의 죄와 그 죄의 허물에서부터 구해 줄 수 있다.
2. 복음의 설교는 또한 그리스도의 강림을 가르쳐 주었다. 

인간의 타락 직후 때가 차면 여인의 후손으로 태어나리라고 약속되어진 그 분이 이제는 육신을 입고 오셨으며, 이 사실을 부인하는 자는 적 그리스도요(요일 4:3), 적 그리스도의 영에 미혹되어 영향을 받은 자이다라고 설교한다. 

그러나 또 그리스도께서 구약 성서에 나오는 모든 신자들이 믿고 죽은 그러한 약속에 따라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증거하는 사람들은(히 11:39) 그리스도의 참된 사도요 그리고 사역자들이며,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라고 설교한다. 

그리스도께서 구원하기로 약속하신 자들이 "살과 피를 함께 나눈 자들이기 때문에," 그 자신도 인간의 본성을 지니사, 고난을 받음으로 속죄의 제물이 되기 위하여 "사람들과 같은 살과 피를 나누어 가지셨다." 이 그리스도의 강림을 복음서는 가장 알맞고도 평이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음으로 해서 복음의 사역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 중에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재림하실 때, 그가 산 자와 죽는 자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실 역시 알려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복음에 의거하여 정당하게 심판하며, 선악간에 우리가 우리의 육체로 행한 바에 따라서 우리를 보응해 주시기 위해 오실 것이다.
3.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들"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하나의 "꾸민 이야기"라고 모욕적으로 하고 있는데 대해, 베드로는 우리의 복되신 주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의 일은 매우 확실한 것이며 실제적인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종의 형상을 취하고 사람의 모습으로 계셨을 때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 앞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난 일도 있다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 앞에서 변형하셨을 때, 그의 얼굴이 해갈이 빛났고, 그의 옷이 빛과도 같이 그리고 눈과도 같이 하얗기가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처럼 하얗게 만들 수 없으리 만큼 빛나던 그런 영광스러운 모습을 그들의 눈으로 직접 목격한 것이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이 일의 목격자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 사실을 증거할 수 있으며 또 증거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들은 바를 증거하는 것이기에 그 증거가 참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지상에서 그리스도께 주어진 보이는 영광만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들려진 음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1) 은혜로운 선포가 있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것은 하늘로부터 땅에 들려진 가장 좋은 말씀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기뻐하셨고, 그를 통해 우리도 기뻐하신다. 

그는 약속된 메시야이시며, 그를 믿는 자는 모두 영접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

(2) 이 선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신 것인데, 그는 자기 아들에 대해 공적인 선언을 내리시는데(그가 종의 형상을 입어 비천한 처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공언하셨다. 

그리스도의 천하고 보잘 것 없는 처지가 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감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러한 사랑이 있기에 감히 그의 목숨을 버릴 수 있었다(요 10:17).
(3) 이 소리의 목적은 그리스도가 이 낮은 세상에 있는 동안 구세주로서의 그에게 영광을 돌려주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받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이 존귀하게 하기를 기뻐하는 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아들에 대해 그가 우리의 구주이심을 고백함으로 그에게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것을 원하시듯 그 스스로는 그를 그의 아들이라고 밝히심으로 우리의 주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려 주셨다.
(4) 이 소리는 하늘로부터 들려 왔다. 

그리고 "지극히 큰 영광" 중에 들려 왔다고 했는데, 이는 우리 주님에 대해 놀라운 영광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다. 

이 선포는 존귀의 원천인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께서 영광 중에 거하시는 영광의 보좌인 하늘로부터 들려 왔다.
(5) 이 소리가 들려졌을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다른 사람들 모양으로, 요 12:28, 29) 소리만 들은 것이 아니요, 그 의미까지 알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바울의 동행자들처럼 소리는 듣되(행 9:7) 그 의미를 알지 못하므로 그에게 하신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할 때에도(행 22:9), 그의 백성들에게는 그들이 알아들어야 할 말씀을 알아듣도록 귀를 열어 주시고 이해하는 마음도 주신다. 

이 사실을 증거한 베드로와 같이 소리를 들을 뿐 아니라 그 뜻을 깨달으며, 그 진리를 믿으며, 하늘로부터 들려 오는 소리의 능력을 깨닫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능히 그의 증거를 받아들일 만한 많은 까닭을 가지고 있다. 

베드로는 하늘로부터 들려온 소리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6) 그 소리를 그들이 예수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 들었다. 

그런데 그 산이 거룩한 산이 된 것은 그곳이 본래부터 거룩한 땅이었던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심으로 그 땅이 거룩한 땅이 되었으며(출 3:5), 그리고 성전이 세워짐으로 거룩한 산이 된 것과 같이 (시 87:1)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신을 현현하심으로 인하여 거룩한 산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장소는 상대적인 면에서의 거룩한 곳이다. 

다시 말해서 거룩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현현하심을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동안이거나 또는 말씀의 보증을 받고 그러한 현현을 믿음으로 기대하는 동안은 거룩한 곳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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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성서의 영감(벧후 1:19-21)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복음의 진실성과 실재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또 다른 논증을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고 있는 논증은 앞에서의 논증보다 더욱 강력하고 또 확신에 찬 것임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재림에 관한 교리는 단순히 만들어낸 이야기나 또는 인간의 공교한 고안물이 아니라, 거룩하고 자비하신 하나님의 지혜롭고 놀라운 섭리에 의한 것임을 더욱 철저하게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영의 감독과 지시에 따라서 말하기도 하고 책을 쓰기도 한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언자들과 저자들이 예언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몇 가지 사실에 대해 유념하자.
Ⅰ. 구약 성서에 대한 설명에 대해 유념하자. 구약 성서를 "더 확실한 예언"이라고 하였다.
1. 그 예언은 우리 구세주의 능력과 강림 그리고 신성과 성육신에 대한 예언적인 선포인데, 구약 성서에 나와 있는 것이다. 

구약 성서에는 "여인의 자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라고 예언되어 있다. 

악마와 악마의 활동을 멸하는 그의 능력과 그가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리라는 예언이 성경에 있다. 

그리고 구약 성서가 말해 주고 있는 하나님의 놀랍고도 위대하신 이름인 "여호와"란 이름의 뜻은 단순히 "그는 있는 자다"라는 뜻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이름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으로 해석되었다(출 3:14). 

따라서 그러한 뜻으로 해석되었기에 예언자들은 하나님 스스로가 그의 백성을 구속하고, 구원하기 위해 이미 "이루어진 바"와 같이 육신을 입게 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구약 성서가 예언인데 반해 신약 성서는 그러한 예언의 역사이다. 

다시 말해서 "요한의 시대까지의 모든 선지자와 율법에 예언된 것이다" (마 11:13). 

그리고 복음서 기자들과 사도들이 기록한 것은 전에 예언의 말씀으로써 주어진 말씀의 역사이다. 

그런데 신약 성서는 구약 성서의 완성이며, 신약 성서와 구약 성서가 일치한다는 사실은 구약 성서나 신약 성서 모두가 진실하다는 것에 대해 충분한 증명이 된다. 구약 성서는 그리스도께 대한 예언의 말씀으로, 신약 성서는 구약 성서의 주석서로써 부지런함과 감사한 마음으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2. "구약 성서는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다." 

그것은 구약 성서를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인 유대인에게 있어서 더욱 그렇다. 후배 예언자들은 선배 예언자들이 예언한 것을 확증하였다. 

이러한 예언들은 명확한 지시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특별한 배려에 의해 보전되었다. 그리고 많은 예언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의해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하늘로부터 들려온 소리에 대한 사도 베드로의 이야기 보다 성서의 말씀을 읽은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더 확실한 것이다.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이" 기사 이적보다도 더 설득력이 있다(눅 16:31). 

이러한 확고부동한 말씀에 기반을 두고 있는 우리의 믿음은 매우 견고하고 확실한 것이다. 

더욱이 모든 예언의 말씀이 정확하고 세밀한 부분까지도 성취되었다는 것을 아는 우리들에게는 구약 성서의 예언이 보다 더 확실하고 명확한 것이다.
Ⅱ. 사도 베드로는 우리더러 성서의 말씀을 깊이 상고하라고 격려하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집중하며, 이러한 확실한 말씀에 관한 진실성을 믿도록 우리의 마음을 모을 것뿐만 아니라, 그것에 집중하라는 것인데, 이는 우리들이 그 예언의 말씀으로 다시 지음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 말씀은 우리들이 힘써 지켜야 할 교훈의 본이며(롬 6:17), 우리의 모든 행실을 조정해야 하는 "지식의 바탕"이다(롬 2:20). 

우리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전력을 기울이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또 우리 자신들도 이롭게 할 수 있다. 

이는 실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우리가 마땅히 돌려야 할 경의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언의 말씀에 보다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기 위해 사도 베드로는 선한 목적을 가지고 성서에 접근하는 자들에게 유용한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1. 그들은 성서의 말씀에 대해, 그것은 온 세상의 표면을 뒤덮고 있는 어두움을 몰아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빛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 빛을 활용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바르게 사용하는 사람들의 발의 등불이 된다. 

이 말씀은 사람들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을 발견하게 해 준다. 이 말씀에 따라서 우리는 생명의 길을 찾을 수 있다.
2. 사람들은 자신의 어두움을 인식해야 한다. 

이 세상은 과오와 무지가 들끓는 곳이다.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불가불 영생을 얻는데 필요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3. 인간이 구원을 얻을 만큼 지혜로워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속에 빛을 비쳐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자연적인 이해는 타락한 인간들에게는 충분한 것이 되지 못한다. 인간이 최선을 다해 알고 있다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알아야 할 만한 분량에 비하면 지극히 적은 것이며,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께 대해 알던 것에 비해서도 지극히 적은 것이다.
4. 성서의 말씀의 빛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소경된 마음과 어두어진 지각에 비쳐질 때, "그들의 심령에는 영적인 새 아침의 서광이 비쳐오고 샛별이 떠오르게 된다." 

이처럼 여명의 빛이 어두운 마음을 밝히는 것은 날이 점점 밝아져서 드디어는 원만한 광명에 이르는 것같이, 그 영혼을 점점 더 밝게 하여 주고 점점 더 증진시켜 준다(잠 4:18). 

그것은 점점 성장하는 지식이다. 이렇게 해서 깨닫게 되는 사람들은 결코 그들에게 알려진 것 이상으로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이 빛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요 또 의무이어야 한다. 

그리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이 빛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동안, 진리를 행하는 자들은 이 빛에 가까이 이르게 된다.
Ⅲ. 사도 베드로는 우리들이 성서의 말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며 또 거기서 어떤 이익을 얻는데 있어서 그보다 앞서서 필요한 사항들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중요한 진리를 그는 다만 주장할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입증하기도 한다.
1. 성서의 말씀은 사적인 설명이 아니다(혹은 한 인간의 개인적인 의견이나 자기의 의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지자와 세상에 속한 거짓 선지자와의 차이이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참된 선지자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모세와 같이 그들의 마음에 있는 어떤 것을 말하거나 거기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다. 

모세는 이렇게 말했다(민 16:28). "나의 임의로 함이 아닌 줄을(또는 직분을 주거나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님을) 이 일로 인하여 알리라."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헛된 것을 가르치는데 그들의 말한 즉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렘 27:16). 

선지자들과 성서의 저자들은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을 말했고 또 기록했다. 

그들이 성령의 감화를 받고 그러한 것들을 나타내고 또 기록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하게 하고 기록하게 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성서의 말씀이 개개 인간의 의견이나 의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사와 뜻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지라도, 모든 인간은 그것을 탐구해야 하고 또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2. 하나님께 근원을 둔 중요한 성서의 진리는(하나님의 생각이니 인간의 생각이 아닌데)참다운 예언의 말씀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에게는 알리고 또 고백되어질 수 있다. 

성서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란 사실은 그 말씀이 참다운 기독교의 신앙을 나타낼  아니라, 과학과 지식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인간이 그의 참다운 친구의 인격 속에서 그의 모든 타당하고, 특성이 있고, 현저한 표징들이 있다는 것을 단순히 믿을 뿐만 아니라 확실히 알고 있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성서 안에서 그 책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신에 의해 감동되어 저술한 책임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독특한 표징들을 찾아보고 있다. 그들은 성서의 말씀에서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단맛을 맛보며, 능력을 힘입으며, 영광을 바라본다.
3. 사람들이 성서의 말씀을 타당하게 이용하는 법을 배우기 전에, 또 이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 전에 먼저 그 신성을 깨달아야 하고 또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관심을 다른 책들로부터 성서로 돌리며,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규범이라고 하여 그것을 우리의 행동 지침으로 삼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전 존재가 성서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이며, 거기에는 참으로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수록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시인하여야 한다.
Ⅳ. 성서의 근본이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충분히 납득시켜야 할 필요성을 깨달은 사도 베드로는(21절) 구약 성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1. 부정적인 면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다." 

구약 성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기록들은 인간의 의견이 아니며, 또 성경의 정경이 되는 말씀이라도 그것을 말하고 기록한 예언자이나 저자들의 뜻이 반영된 것이 아니다.
2. 긍정적인 면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그대로 말한 것이다."
(1)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책을 위해 고용된 사람들이다.

발람이나 가야바 또는 거룩치 못한 다른 사람들이 때로 예언의 영을 받았던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의 소용이 되는 성서의 말씀의 어떤 부분을 위해서도 그것을 쓰도록 쓰임을 받지 못했다. 성서의 모든 기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다.
(2)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전달함에 있어서 "거룩한 사람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 성령은 위대한 시동자요 거룩한 사람은 그 도구에 불과하다.
① 성령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가를 감동시켜 주고 지시하여 주었다.
② 성령이 그가 그들의 입에 담아 준 바를 말하도록(쓰도록) 감동을 주고 자극하여 주셨다.
③ 성령은 그가 그들에게 전해 준 바를 바르게 전하도록 지혜롭고도 세심하게 도와주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나타내 보여 준 바가 잘못 이해되지 않도록 지켜 주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성서의 모든 말씀은 성령의 말씀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성서가 가지고 있는 모든 평이하고도 단순하며, 능력과 덕이 함양되어 있으며, 우아함이 있고 예의가 바른 말씀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인정하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성서의 말씀에서 발견한 것에 믿음을 더해야 한다. 그리고 성서는 성령에 의해 감화 받고, 영향받고, 도움을 받은 거룩한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책으로써 존중히 여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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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 제 1장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 - 베드로는 수신자들에게 자신을 두 가지 호칭으로 소개하고 있다. (1)예수 그리스도의 종. '종'에 해당하는 헬라어 '둘로스'(*)는 당시 사회에서 주인에게 완전히 예속되어 있는 '노예'를 가리킨다. 본문은 베드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바 된 존재이며 동시에 수신자들과 동등한 존재임을 나타낸 것으로 베드로 자신의 겸손을 시사한다(Blum, Green). (2)사도 헬라어 '아포스톨로스'(* )는 문자적으로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의미로 베드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위임받아 행사하는 대리인임을 시사한다(Lenski, Blum). 이 것은 베드로 자신의 사역과 권위를 강조한 표현이다(Kelly,Bauckham). 

한편 '시몬 베드로'로 번역된 헬라어 '쉬메온 페트로스'(*)에서 '쉬메온'은 '쉬므온'(* )을 헬라어로 음역한 것이며, '페트로스'는 아람어에서 유래한 '케파스'(* )와 동일한 것으로 '반석'을 의미하는 별명이다(서론참조).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본문이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두 위격(位格)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Plumptre, Mayor, Windisch,Kasemann). (2) 혹자는 '하나님과 구주'가 예수 그리스도를 수식하는 것으로 한 위격(位格) 즉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고 주장한다(Bauckham, Blum, Bigg).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과 구주'는 하나의 관사인 '투'(*)에 의해서 수식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란 칭호는 비록 드물게 사용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칭호로 사용되고 있으며(요 1:1,18;20;28;히 1:8,9) '구주'또한 기독론적 칭호로 사용되고 있다(11절;2:20;3:2,18;눅 2:11;요 4:42; 행 5:31;13:23;엡 5:23;딤후 1:10;딛 1:4;2:13;3:6). 

한편 '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카이오쉬네'(* )는 '동일하게 보배로운'과 연결된 것으로 (Bigg, Bauckham) 믿음을 힘입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라기보다는 (Spicq, Stoger)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공정함을 의미한다(13절;2:5,7,8,21; 3:13, Green, Bauckhanm, Bigg).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 - '동일하게 보배로운'의 헬라어 '이소티몬'( )은 '이소스''(* , '동등한')와 '티메(*, '명예')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 '같은 특권을 가진'이란 의미이다. 이것은 '우리와'와 대조된 것으로 혹자는 베드로와 같은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대조시킨 것이라고 주장하나(Plumptre, Mayor, Leaney) 베드로와 같은 사도들과 사도가 아닌 그리스도인을 비교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Moffatt, Spicq, Zahn, Lumby,James). 

왜냐하면 본서에서 유대인 그리스도인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Bauckham). 따라서 본문은 본서의 수신자들이 베드로와 같은 사도들과 동등하게 하나님을 의지하여 구원에 동참하였음을 시사한다.

=====1: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 본절의 '앎'은 일반적인 지시를 뜻하는 헬라어 '그노시스'(* )가 아니라 '온전한 지식'을 의미하는 헬라어 '에피그노시스'(* )이다. 

'에피그노시스'는 기독교로 개종하여 구원을 얻는데 꼭 필요한 결정적인 하나님의 지시를 말하는 반면에(3절;2:20, Bultmann), '그노시스'는 기독교적 생활 과정에서 획득되어지고 발전되어지는 지식을 의미한다(5절,6절; 3:18,Bauckham).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에피그노시스'를 통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하여 보다 깊고 참된 지식을 소유하게 되며 은혜와 평강을 누리게 된다(Green).

=====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 '신령한 능력'의 헬라어 '테스 데이아스 뒤나메오스'(* )는 '희한한 능력'(행 19:11)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을 말한다(수 22:22;시 50:1;사 9:6;겔 10:5). 

그러나 '테스 데이아스 뒤나메오스'를 수식하는 '그 의'가 가장 가깝게 언급된 것이 '그리스도'이며 1절에서 '우리 하나님'이란 칭호가 그리스도에게 사용된 것으로 보아 본문은 '그리스도의 신적인 능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Green, Bauckham, Bigg).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제2위격이신 하나님으로서 하나님과 같은 신기한 능력을 소유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공유한 자이심을 시사한다(Fornberg, Bauckham). 

한편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신적인 능력을 통해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게 된다. '생명'은 인간들이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는 원동력, 즉 예수께서 공급하시는 힘을 의미하는 것으로(요 1:4;요일 5:11, 12) '영생'을 암시한다. 

또한 '경건'은 변화된 자가 지니게 되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행 3:12;딤후 3:5)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고 순종함으로 누리게 되는 도덕적인 생활을 시사한다(Bauckham).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 '영광과 덕'의 헬라어 '독세 카이 아레테'(* )는 신적인 능력의 현시로서 구약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나(LXX 사 42:8, 12) 본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영광과 덕'을 통해서 사람들을 변화시키며 회개토록 역사하신다(Blum). 한편 본서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강조하므로(8절;2:20) '부르신 자'는 하나님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봄이 타당하다(Bigg, Green, Bauckham).

=====1:4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 이 약속은 그리스도의 영광과 덕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미래의 일들 즉 그리스도의 재림(3:4,9,12), 새 하늘과 땅(3:13)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11절)에 참여케 되는 것을 가리킨다.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 '피하여'의 헬라어 '아포퓌곤테스'(* )는 부정 과거 분사로서 '피한 이래로'라는 의미이다(Bigg, Blum).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은 후부터 죄와 정욕과 거리가 멀어지며 피하게 된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네스데 데이아스 코이노노이 퓌세오스'(*)에서 헬라어 '데이아스'(* , '신에게 속한')는 성경적 용어라기보다는 헬라 사상에 따른 이교적 표현이다(Richardson). 

베드로는 이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여 그의 논쟁을 전개시키고 있다(Kasemann). 

그러나 본문은 이교도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의 내면에 본래부터 신과 같은 거룩한 성품이 있어서 이것을 잘 계발하면 성인(聖人)이 되고 거스리게 되면 악인(惡人)이 된다는 사상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참된 연합을 통해서 성령의 교제로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됨을 시사한다(Bigg, Green).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로 거듭나게 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참된 영적 교제를 나누며(요 14:16,17,26), 장차 나타날 영광과 축북에 참여하게 된다(롬 8:18).

=====1:5,6,7

@이러므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 아우토 투토'(* )는 문자적으로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for this very reason)라는 의미로 3,4절 전체를 받는다(Bauckham).

@더욱 힘써...공급하라 -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통해서 얻은 구원에만 만족해서는 안 된다. 

하여,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데 필요한 모든 영적 자원을 주셨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이 그 자원을 바탕으로 자발적으로 성숙을 향하여 진보해 가야 함을 권면한다. '공급하라'의 헬라어 '에피코레게사테'(*)는 무대 공연 비용을 지불하는 사람을 가리켜 사용된 것으로 풍부하게 공급하고 지원하라는 의미이다(Green, Blum). 

[[이제 하나님을 앎(체득하여 알아감으로부터 그분을 참되게 빼어닮아감으로 나아간다...자비-은혜-노하기를 더디함-인자와 진실의 무궁함 + 온유-겸손-친절/온화(자비) + 사랑희락화평오래참음자비양선충성온유절제 등...신적성품에 참여함에 대해 그 덕목 체득 여정을 소개하고 있다]]

@믿음에 덕을 - '믿음'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로서(엡 2:8,9)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이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게 되며 세상과 썩어질 것을 피하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된다(4절). 따라서 이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밑바탕이 된다(롬 5:1; 히 11:1;유 1:20). [[믿음은 처음엔 구주JC의 대속하신 은혜에 대한 믿음 :: 절대기쁨-절대긍정-절대확신/신뢰로 시작하여 포도나무이신 주께서 열어 접붙여 주심으로 연결됨 통해서 이제는 그분의 생명수액을 받아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전능한 믿음(Faith)에 참여함을 누리게 된다]]

베드로는 이 '믿음'에 '덕'을 공급하라고 권면한다. '덕'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레텐'(* )은 '디카이오쉬네'(*, '의')와 동일한 것으로 도덕적인 탁월성을 의미한다(Bauckham, Green).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덕을 말하는 것으로(3절)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닮음으로 도덕적 탁월성을 배울 수 있음을 시사한다(빌 4:8;벧전 2:9). [[구주JC의 믿음-->+구주JC의 탁월한 도덕성/인성에 참여]]

@덕에 지식을 - '지식'은 기독교인이 덕 있는 생활을 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 또는 '통찰력'을 말한다(롬 15:14;고전 13:2;벧전3:7, Bauckham). 이것은 점진적으로 획득되어진다. [[구주의 도덕적 탁월성/인성-->+ 지식( 말씀안으로 들어가서 깊이 묵상하고 주께 여쭈며 앙망함 통해 얻는 영적 깨달음을 실행함으로써 더 증대/강화되는 경험적 산 지식 나눔)]]

@지식에 절제를 - '절제'는 고대 그리스 사상과 헬레니즘의 철학적 윤리학에서 높이 평가되는 덕목이다. 

신약성경에서  절제는 육체적 욕망의 지나친 방종과 이방 세계의 성적 남용(濫用)에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열매에 속한다(갈 5:23). [[지식-->+절제 :: 하나님의 뜻에 순복함/일치 위해 옛습관을 배제하고, 점검-돌아봄-회개-결단 통해 하나님 경외함에 올인하며 경건 이루기를 연습함....내적 싸움]]

@절제에 인내를 - '인내'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리라고 소망하는 가운데 고난과 악에 대항하여 용기있게 지속적으로 참는 것을 가리킨다(Bauckham). 이것은 믿음을 지속하는 능력이며 세상 체계의 압박에 저항하는 능력으로(눅 8:15;롬 5:3;히 12:2) 환난에 직면해서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견디어서 끝내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다.  [[유혹-미혹-박해-위협의 모든 상황-환경-사람에 대해 (오직 주와 연합한 하나됨의 믿음 발휘함 통해 일절 오래참고 견뎌냄으로써 경건 이루기를 연습함]]

@인내에 경건을 - '경건'은 삶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헌신하여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을 가리킨다(Green, Blum). 특별히 초기 기독교에서는 이 말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존경과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도덕적 생활방법을 나타낼 때 사용하였다. [[인내-->+경건]]

@경건에 형제 우애를 - '형제 우애'는 베드로전서에서도 이미 언급되었으며(벧전1:22;3:8) 또한 신약성경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진 덕목이다(롬 12:10; 살전 4:9;히13:1; 요일 5:1). 이방 세계에서는 이 단어가 혈육을 나눈 가족간의 사랑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으나 초대 교회에서는 믿음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가 된 그리스도인들의 교제를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Bauckham). [[경건(교통하시는 그리스도로 살기)-->+형제우애<필레아+스테르고...큰오빠, 큰형님 그리스도와 한 가족 살기>]

@형제 우애에 사랑을 - '믿음'으로 시작된 그리스도인의 덕목이 '사랑'으로 완성된다. 

'사랑'은 모든 덕목들 가운데 으뜸이며(고전 13장), 사랑의 본체인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세상에 보여주신 것으로 남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행동을 의미하며,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다(요 3:16;롬5:5; 요일 3:16;4:8). 이와 같은 덕목들은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들이 맺어야 하는 열매로서 바울이 언급한 '성령의 열매'(갈 5:22,23)와 '하나님의 사람'(딤전 6:11)이 갖추어야 할 덕목과 내용이 유사하다. 위의 모든 덕목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점진적으로 얻을 수 있으며, 각 덕목은 다른 덕목들과 상호 관계 속에서 생성되며 발전된다.이러한 덕목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사랑으로 완성되어가야 한다(Bengel). [[형제우애-->+ 사랑 : 아가페적 사랑의 모본을 보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관제의 제물로 자신을 드리기에 이름]]

=====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 본문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주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앞서 언급한 덕목들의 목적이요 부산물이라고 주장한다(Mayor, Reicke, Green, Spicq). (2)혹자는 그리스도을 아는 지식이 앞서 언급한 덕목들의 근원이라고 주장한다(Bigg, Kelly, Bauckham). 이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시며(3절) '알기에'라고 번역된 헬라어 '에피그노신'(*)이 2절에서도 언급된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그리스도인의 전생활에 기본이 되는 구원 얻는 지식임을 가리키기 때문이다(Bauckham).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 '게으르지'(* ,아르구스)와 '열매 없는'(* , 아카르푸스)은 본서에서 동의어로 사용된다(Bauckham). 이 두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대부분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있어서 윤리적 노력과 관계되어 쓰여졌다. '게으름'은 '행함이 없는 믿음'(약 2:20)을, '열매없음'은 윤리적 특성이 드러나지 않는 삶을 나타낸다(마 3:8;막 4:20;갈 5:22;골 1:10;약 3:18).

=====1: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 5-7절에서 언급한 덕목들을 갖추지 못한 자들에 대한 묘사이다. '소경'의 헬라어 '튀플로스'(* )는 신약성경에서 진리 보기를 거절하거나 보지 못하는 자들을 은유적으로 표현할 때 사용되어졌다(마 15:14;23:16;눅 6:39;요 9:40,41;롬 2:19). 

또한 '원시치 못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뮈오파존'(* )은 '근시'라는 의미로 본절에서는 '튀플로스'와 함께 결합하여 장님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Bauckham). 

앞서 언급한 덕목들을 갖추지 못한 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의 빛을 잃어버려서 영적 안목이 어두워진 자들이다(계 3:17, Bigg). 이들은 바로 앞에 놓여 있는 인간적인 탐욕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한다.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 본절은 과거에 그리스도인들이 받았던 세례에 대한 언급이다. 

'옛'에 해당하는 헬라어 '팔라이'(* )로 미루어 볼 때 베드로는 본절에서 과거에 행한 세례를 염두에 두고 있으며 죄가 청산된 것을 잊어버리고 과거로 되돌아가려는 자들을 전제로 언급하고 있다(Blum, Bigg). 

또한 '깨끗케 하심'의 헬라어 '투 카다리스무'( )도 역시 정결케 하는 세례를 가리킨다(행 22:16;고전 6:11;엡 5:26;딛 3:5). 본래 세례는 죄 용서와 더불어 이제까지의 죄된 생활을 시작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믿음을 세례에만 국한시킨 나머지 거룩한 삶을 추구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옛 죄악의 상태로 되돌아갈 위험이 있다(2:20). 

이에 베드로는 죄악된 삶으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을 경고하면서 세례가 죄를 씻을뿐만 아니라 더이상 죄에 머물지 않고 성결한 삶을 살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상기시킨다(Bauckham).

=====1:10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 본절은 5절의 반복으로 부지런히 애쓰라는 권면이다.

'굳게 하라'의 헬라어 '베바이안...포이에이스다이'(* ...)에서 '베바이안'은 의사(意思)를 확인할 때 사용하는 법률 용어로 무엇을 '확실히 한다'는 의미이며, '포이에이스다이'는 중간태로서 수신자 스스로가 해야 하는 일임을 시사한다(Blum, Bauckham, Bigg). 

한편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의 구원이 하나님의 '부르심'(벧전 1:15;2:9,21;3:9;5:10)과 '택하심'(벧전 1:2)에 관계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Richardson). 그런데 베드로가 본절에서 '부르심'을 먼저 언급한 것은 인간의 응답에 강조점을 두기 위함이다(Blum). 즉 복음에 합당한 윤리적 삶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인은 은혜 안에서 이루어지는 도덕적인 노력을 통해서 거룩한 삶을 영위해야 하며 궁극적인 구원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Blum, Bauckham).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 '실족'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타이세테'(* )는 원래 말(馬)이 '디딤돌에서 미끌어지는 것'을 나타낸다. '프타이세테'에 대해서 혹자는 '범죄'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롬 11:11;약 2:10;3:2,Blum, Green). 그러나 본절의 '프타이세테'는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구원얻지 못하는 것을 시사한다(유 24:Bigg, Richardson, Kelly, Lenski, Grundmann). 왜냐하면 다음 절에서 영원한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노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Bauckham).

=====1:11

@이같이 하면...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 '주시리라'의 헬라어 '에피코레게데세타이'(* )는 7절에 언급된 '공급하라'와 같은 단어로, '넉넉히'(* ,플루시오스)와 함께 결합되어 하나님께서 거룩한 관대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기에 충분하도록 하실 것임을 시사한다(Bauckham). 비록 베드로가 앞절에서 궁극적인 구원을 얻는데 인간의 노력이 필요함을 역설하였으나 본절에서 또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고 있다(3절).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를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묘사하지 않고 그리스도께 속한 것으로 진술한다(눅 1:33;계 11:15). 베드로가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아마도 본 단락(3-11절)에서 언급된 기독론적 관심과 일치시키기 위함일 것이다(Bauckham). 이러한 그리스도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으로(눅 22:30)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하며(마13:41;16:28;눅 23:42;요 18:36) 미래에 주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을(3:13)가리킨다. 

한편 '우리 주 곧 구주'의 헬라어 '투 퀴리우 헤몬 카이 소테로스'(* )는 문자적으로 '우리 주이시며 구세주이신'이란 의미로 기독론적 칭호이다(2:20;3:2,18).

그리스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구세주이실 뿐만 아니라 온 우주의 주(主)이시다.

=====1:12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 '진리'는 '복음'을 가리키는 것으로(갈 2:5,14;5:7;엡 1:13;골 1:5;살후 2:12,13;딤후 2:15;약 1:18;요이 1:4) 전반적인 사도적 가르침을 시사한다(Green, Blum, Bauckham). 

한편 '섰으나'의 헬라어 '에스테리그메누스'(* )는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형제를 굳게 하라'고 권면할 때 사용하신 단어와 동일한 것으로(눅 22:32) 수신자들이 기독교 신앙안에서 가르침을 받고 굳게 서있기 때문에 거짓된 가르침의 위험에 쉽게 넘어지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베드로는 본절에서 수신자들이 사도적 진리를 바탕으로 굳게 선 그리스도인들임을 인정하고하고 있다.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 베드로는 수신자들이 이미 진리에 서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다시 권고하는 이유가 수신자들로 하여금 항상 진리를 상기하고 부지런히 애써서 진리 가운데 굳게 서있게 하기 위함임을 역설한다.

=====1:13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 '장막'의 헬라어 '스케노마티'(* )는 문자적으로 고대 근동의 유목 민족들이 임시적인 거주지로 사용했던 '천막'을 가리킨다. 본절에서 이것은 '육체'를 가리키므로 본문은 '목숨이 살아 있을 때까지'를 의미한다. 이는 베도로가 자신의 죽음이 곧 다가올 것을 예감하였음을 암시한다(14절,Blum, Bauckham, Green).

=====1: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 본절은 베도로가 자신의 죽음의 임박함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설명해주고 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지시는 요 21:18을 가리킨다(Plumptre, Bigg, Lumby, Green, Zahn, Bauckham,Lenski). 

요 21:18은 예수께서 친히 베드로가 노년에 당할 순교에 대해서 예고하신 것으로 베도로는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하기 이전에 이미 그 예고를 알고 있었으며(Robertson) 당시 초대 교회에서도 요 21:18의 예수 그리스도의 예고가 베드로의 순교에 대한 예언이라는 것을 대부분 광범위하게 알고 있었다(Bauckham). 따라서 요 21:18의 베드로 순교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은 그의 임박한 죽음에 대한 암시가 되며 본서의 수신자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다.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 베드로는 그의 죽음이 가까와옴을 깨닫고 있었다. 여기서 '임박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키네'(* )는 베드로가 사용한 독특한 용어로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2:1). (1)'곧'(사 59:7), '신속한'(약 1:19)을 의미한다(Bauckham). (2) '갑작스런'을 의미한다(2:1, Green, Zahn,Plumptre). 이 두 가지 의미 중 어느 한 견해를 선택하기는 어려우나 두 가지 의미 모두가 베드로의 죽음의 절박함을 표현한 것으로 그의 순교의 임박함을 암시한다(Meyer,Bengel, Bigg).

=====1:15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 '이런 것'은 베드로가 수신자들에게 행한 '교훈'이나 '권면'을 가리키는 것으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이런 것'이 미래 즉 베드로의 죽음 후에 주어진 권면을 가리키며, 마가가 베드로의 해석자로서 베드로의 설교를 근거로 마가복음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이런 것'은 '마가복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Irenaeus, Plumptre,Bigg, Mayor, Green). (2)혹자는 '이런 것'이 본서 자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Knopf, Chaine, Windisch, Kelly, Grundmann).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서내에서 마가복음과 상관 관계를 맺는 암시가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본서 전체와 12-15절은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Bauckham). 따라서 베드로는 본서에서 언급한 모든 교훈과 권면이 자신의 죽음 후에도 보존될 뿐만 아니라 수신자들에게 계속적으로 상기되어서 수신자들로 하여금 진리 안에 굳게 설 수 있게 될 것임을 확신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나의 떠난 후'는 '나의 죽음 후'를 의미한다. 여기서 '떠난'의 헬라어 '엑소돈'(* )은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의미하며 은유적 표현으로 '죽음', '임종'을 시사한다(눅 9:31).

=====1: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 본서에서 '능력'과 '강림'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나타난다. '강림'의 헬라어 '파루시안'(*)은 일반적으로 영광 중에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종말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마 24:3,27,37,39;살전 3:13;4:15;약 5:7,8;요일 2:28). 혹자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초림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나(Spicq, Chase) 본절의 '파루시아'는 미래에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킨다고 봄이 타당하다(Bauckham, Green, Blum). 왜냐하면 베드로는 본 서신 전체에서 거짓 교사들의 그릇된 가르침으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종말론적인 가르침 즉, 영광중에 오실 그리스도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3:4,12). 

한편 '능력'의 헬라어 '뒤나민'(* )은 '파루시아'와 연결되어 '영광'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마 24:30;막 9:1;13:26;눅 21:27,Bauckham). 그리스도의 능력은 재림하실 때 온 세계에 완전하게 드러나게 된다(마26:64;막 14:62;행 1:11;히 9:28). 그의 능력은 재림을 통해서 불법한 자와 적대자들을 심판하시고(살후 2:8;계 19:11-16) 그 나라를 온전히 완성하심으로(계 11:15-18) 드러나게 된다.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 '공교히 만든 이야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세소피스메노이스 뮈도이스'(*)는 '지어낸 말', '허구', '우화', '신화', '거짓말'을 뜻하는 고대 용어로 신약성경에서 복음의 진리와 대조되어 항상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딤전 1:4;4:7;딤후 4:4;딛 1:14). 베드로는 사도들이 전하여준 종말론적 교훈들이 거직 교사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님을 강력하게 변호한다. 당시 거짓 교사들은 사도들의 종말론적 권면이 수신자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하여 도덕성을 유지시키기 위함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러한 종말론적 권면을 사실적이고 문자적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우화적으로 해석하였다(Bigg, Bauckham, Blum). 그래서 베드로는 이러한 거짓 교사들의 교훈을 강력하게 반박하면서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재림 등 사도들이 전하여 준 교훈들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님을 주장한다. 한편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위엄을 친히 보았음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위엄'은 신적인 권위와 장엄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베드로가 목격한 예수의 변화산상 사건을 가리킨다(Green, Bigg).

'친히 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포프타이'(* )는 신비 종교들에서 사용된 전문 용어로서 가장 높은 경지의 신비를 경험하였음을 가리키는 말이다(Kelly,Green).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와 어휘들을 채택하여 그들의 거짓된 가르침을 반박하고 있다(Blum).

=====1:17

@지극히 큰 영광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 '지극히 큰 영광'은 변화산상 사건의 구름과 연결된 히브리적 표현으로서(출 16:10;민 14:10;겔 1:4) 하나님의 초월성을 드러내는 표현 방법이다. 이와 같은 표현은 변화산상의 사건은 물론(마17:1-9;막 9:2-10;눅 9:28-36) 구약의 시내산 사건(출 24:16)에도 나타난다. 그러나 본절에서 베드로는 시내산 사건이 아니라 변화산상 사건의 독특성을 약화시키지 않기 위함이다. 베드로는 변화산상 사건에서 계시된 예수를 모세와 같은 종말론적 예언자로 본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왕이신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보고 있다(Bauckham, Blum).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 '내 아들'은 유대주의에서 메시야에 대한 진술로 해석한 시 2:7의 인용이다. 시 2편에 의하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야는 '아들'이라 불리며(7절) 시온산에서 왕으로 등극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모든 적대 세력을 지배하시고 다스리신다(8,9절). 초대 교회는 이런 시 2편을 예수께 적용시켜 예수께서 재림 때에 종말론적인 심판을 행사할 것으로 해석하였다.

또한 '내 사랑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아가페토스 무'(*)는 메시야의 칭호로서 구약성경에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유일한 자' 혹은 '독자'라는 해석으로(창 22:2, 12, 16) 예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시사하며, 다른 하나는 '선택된 자'라는 해석으로 (사 42:1) 예수께서 메시야 직분을 수행하기 위해서 선택받은 자이심을 시사한다(Bauckham). 

한편 '내 기뻐하는 자'는 사42:1의 인용으로 메시야 직분을 수행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기쁘게 선택하셨음을 시사한다(Green, Bauckham).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 여기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한편 '존귀와 영광'의 헬라어 '티멘 카이 독산'(* )은 일반적으로 한 짝을 이루고 있는 단어이다(시 8:5;히 2:7, 9;벧전 1:7). '존귀와 영광'에 대한 해석은 세가지이다. (1)혹자는 예수의 변형된 모습의 영광스러움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igg,Windish).(2)혹자는 하늘 음성에 의하여 예수에게 주어진 '위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Grundmann, Chase, Muller). (3)혹자는 '존귀'는 음성을 통해서 예수에게 주어진 위엄을 의미하며, '영광'은 가시적인 변형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ayor, Wand, Green, Kelly). 그러나 '존귀와 영광'은 엄밀하게 구별할 수 없는 이중적인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예수의 변형된 모습의 영광스러움에 아들이심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시는 존귀를 부여하셨다는 의미로 봄이 타당하다(Blum). 따라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성한 영광을 입으셨으며, 하나님의 대리자인 왕으로서 종말론적인 심판과 통치를 수행할 임무와 권한을 부여받았음을 암시한다(Bauckham).

=====1:18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 '거룩한 산'은 구약성격에서 시온 산을 의미하나 역사적으로 시온 산에서 예수께서 변형하셨다는 근거가 없다(Green). 그래서 오늘날 그 산이 구체적으로 어느 산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으나 대부분 헤르몬 산이나 다볼 산 중의 하나로 보고 있다. 그 산이 어느 산이든지 간에 베드로가 그 산을 '거룩한 산'이라고 부른 이유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 산에 영광 가운데 임하셨고 예수의 신적 영광이 그 산에서 나타났기 때문이다(Bigg).

=====1:1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 본절에서 '더 확실한 예언'은 구약 전체에 나타난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의미한다(Blum,Bauckham, Spicq, Kelly, Grundmann). 

베드로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들이 자신들이 체험하고 전하고 행한 일들과 동일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변화산상 사건이 구약의 예언자들이 미리 예상했던 예언의 성취로서 미래에 나타날 파루시아(재림)를 확실히 보증해줌을 진술한다(RSV, NIV, Bauckham). 

한편 베드로는 '예언'을 '어두움을 비추는 등불'에 비유한다. '어두운 데'는 빛되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을 의미한다(사 9:2;엡 6:12). 그 예언의 말씀은 등불로서(시 119:105)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추는 역할을 한다(Blum).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 '날'은 재림의 날을 가리키며(Blum, Green) '샛별'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 다(계 22:16). 따라서 '날이 새어 샛별이...떠오르기 까지'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까지'를 의미한다. 

한편 '너희 마음에'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혹자는 본절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삶 가운데 일어나는 계몽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Plumptre, Spicq, Grundmann, Kasemann). (2)혹자는 본절이 종말론적인 진술이나 말씀을 연구하는 가운데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내면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chelkle, Kelly, Green). (3)혹자는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재림의 때에 초래되는 그리스도인들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lum, Bauckham). 세 가지 견해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1:20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 베드로는 성경에 나타난 모든 예언들을 함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여기서 '사사로이 풀 것'의 헬라어 '이디아스 에필뤼세오스'(* )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성경의 어떠한 예언도 사람이 개인적으로 해석할 문제가 아니다(NIB, RSV, KJV,Blum, Bauckham). (2)성경의 어떠한 예언도 예언자 자신의 해석에 의한 것이 아니다(Calvin, Plumptre, Lumby, Green, NIV). 두 가지 견해 중 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서에서 베드로는 당시 거짓 교사들이 성경을 임의로 그릇되게 해석하고 있다는 점을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2:1;3:16).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 베드로는 예언의 말씀이 사사로이 해석되지 않아야 되는 근거로 성경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제시한다.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라는 베드로의 진술은 성령의 이중적인 저작권을 암시한다. 즉 원저자이신 성령께서 영감을 통해서 성경 기록자에게 오류가 없는 성경을 기록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고전 14:37;딤후 3:16;딤후 3:10-17 주제 강해 '성경 영감론' 참조). 

 

구약의 제자들도 역시 자신들의 예언이나 말씀이 자신의 뜻이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삼하 23:2;렘 1:7,9). 그러나 당시의 거짓 교사들은 재림에 대한 구약성경의 예언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부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지자 자신이 표적이나 꿈, 환상을 통하여 지어낸 신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16절). 베드로는 이러한 거짓 교사들의 주장을 논박하기 위하여 본절에서 구약성경의 예언에 대한 신적 기원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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