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5.04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고후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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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7장    [335. 크고 놀라운 평화가]

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고린도 교회의 회개를 기뻐하다

2.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3.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4.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5.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6.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7.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8.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12.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13.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로 말미암아 안심함을 얻었음이라

14.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가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15.  그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16.  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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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rinthians 7  Amplified Bible

==Paul Reveals His Heart

1 Therefore, since we have these [great and wonderful] promises, beloved, let us cleanse ourselves from everything that contaminates body and spirit, completing holiness [living a consecrated life—a life set apart for God’s purpose] in the fear of God.

2 Make room for us in your hearts; we have wronged no one, we have corrupted no one, we have cheated no one. 

3 I do not say this to condemn you, for I have said before that you are [nested] in our hearts [and you will remain there] to die together and to live together [with us]. 

4 Great is my confidence in you; great is my pride and boasting on your behalf. I am filled [to the brim] with comfort; I am overflowing with joy in spite of all our trouble.

5 For even when we arrived in Macedonia our bodies had no rest, but we were oppressed at every turn—conflicts and disputes without, fears and dread within. 

6 But God, who comforts and encourages the depressed and the disquieted, comforted us by the arrival of Titus. 

7 And not only by his arrival, but also by [his account of] the encouragement which he received in regard to you. He told us about your longing [for us], your mourning [over sin], and how eagerly you took my part and supported me, so that I rejoiced even more. 

8 For even though I did grieve you with my [a]letter, I do not regret it [now]; though I did regret it —for I see that the letter hurt you, though only for a little while— 

9 yet I am glad now, not because you were hurt and made sorry, but because your sorrow led to repentance [and you turned back to God]; for you felt a grief such as God meant you to feel, so that you might not suffer loss in anything on our account. 

10 For [godly] sorrow that is in accord with the will of God produces a repentance without regret, leading to salvation; but worldly sorrow [the hopeless sorrow of those who do not believe] produces death. 

11 For [you can look back and] see what an earnestness and authentic concern this godly sorrow has produced in you: what vindication of yourselves [against charges that you tolerate sin], what indignation [at sin], what fear [of offending God], what longing [for righteousness and justice], what passion [to do what is right], what readiness to punish [those who sin and those who tolerate sin]! At every point you have proved yourselves to be innocent in the matter. 

12 So even though I wrote to you [as I did], it was not for the sake of the offender nor for the sake of the one offended, but in order to make evident to you before God how earnestly you do care for us [and your willingness to accept our authority]. 

13 It is for this reason that we are comforted and encouraged.  And in addition to our comfort, we were especially delighted at the joy of Titus, because you have refreshed his spirit. 

14 For if I have boasted to him at all concerning you, I was not disappointed. But just as everything we ever said to you was true, so our boasting [about you] to Titus has proved true also. 

15 His affection is greater than ever as he remembers the obedience [to his guidance] that all of you exhibited, and how you received him with the greatest respect. 

16 I rejoice that in everything I have [perfect] confidence in you.

==Footnotes

 

2 Corinthians 7:8 See note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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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7장 (개요)

본장의 내용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Ⅰ. 이 장은 점진적인 거룩한 생활과 복음의 사역자들에 대한 관심을 격려하면서 시작한다(1-4).

Ⅱ. 오랜 간격 후에 다시 근친상간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고 디도를 만나 이 문제에 대한 소식을 들고 기뻐한다(5-7).

Ⅲ. 그들의 회개에 대하여 기뻐한다(8-11).

Ⅳ. 마지막으로 고린도 교인들을 위로하고 그의 충고의 효과가 큼을 나타낸다(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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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생활과 교제(고후 7:1-4)

이 절은 이중적인 권면을 가지고 있다.

Ⅰ. 거룩함에 있어서 전진해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자"(1절). 

이 권면은 사랑을 받는 자들에게 가장 부드러운 말씀으로 전하여지며 고린도 교인들이 가진 특별한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며 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초대한다. 즉

1. 죄에 죽고 우리의 정욕과 부패를 죽이는 것이다. 

우리는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죄는 더러운 것이며 육체와 마음의 더러움이 있다. 몸으로 범하는 죄가 있고 영적인 악함이 있는 영의 죄가 있다. 

우리는 이 두 더러움에서 깨끗해야 한다. 하나님은 육과 영으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2. 의와 거룩함에 살아야 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 소망한다면 우리는 "그의 거룩함에 참예하여야 한다." 

그와 같이 거룩하며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 같이 온전하여야 한다. 우리는 계속 거룩함에 있어서 전진해야 한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죄없는 생활은 할 수 없어도 계속 전진해야 한다. 이것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 

경외가 모든 신앙의 뿌리요, 원리이다. 이것 없이는 경건은 없다. 

다음을 주목하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앙과 소망은 우리의 경외심을 파괴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를 두려워하며 그의 자비하심을 바라는 자에게 기뻐하신다."

Ⅱ. 복음의 사역자들에게 온당한 배려를 하여야 한다. 

"우리를 영접하라"(2절). 

말씀과 진리에 수고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사역 때문에 존경을 받아야 한다." 이것은 거룩한 생활의 도움이 된다. 

복음의 사역자들이 그들의 직책 때문에 경멸을 당하면 복음 자체까지도 무시되어진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사랑을 요구해도 무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비록 우리가 아무에게도 아첨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에게 온유해야 한다. 그는 그들에게 말한다.

1. 그들의 존경과 선의를 사기하기 위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원한을 받지 않도록 주의했다(2절).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항상 너희들의 유익을 생각했다."  "나는 어떤 사람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않았다."고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말했다(행 20:33). "우리는 아무도 타락시키지 않았다. 거짓 교리나 아첨의 말로써 부패시키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도 속이지 않았다. 우리는 어떠한 사람을 해치고 자신의 세속적인 이익을 구하지 않았다." 이것이 사무엘의 호소와 같다(삼상 12장). 

다음을 주목하자. 목회자들은 불명예와 불쾌한 일을 행하지 않았다면 자기의 교인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다.

2. 바울은 자기에 대한 사랑이 없다고 그들을 비난하지 않았다(3,4절). 

바울을 비난하고 악선전하는 사람이 있는 고린도의 교인들에게 부드럽게 그리고 주의깊게 호소한다. 

바울에 대한 비난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의 사역이 허용하는 한 고린도에서 마지막 호흡 거두기 원함을 말한다. 

"너희로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바울이 그러한 "담대함"을 가지고 말하며 "자유로운 말이나" "자랑함도" 그들에 대한 바울의 사랑 때문이라 첨가한다. 

그리고 모든 경우에 있어서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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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 이르는 신령한 근심(고후 7:5-11)

바울이 드로아에서 디도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에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했다는 2장 13절과 이 장의 제 5절과는 관계가 있는 것 같다.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애정과 그들의 행위에 대한 바울의 관심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근친상간의 일로써 바울은 평안을 얻지 못했다.

Ⅰ. 바울은 많이 괴로워했다(5절). 

드로아에서 디도를 만나지 못했을 때에 그는 고통을 당했다. 그 후 얼마 동안 마게도냐에서 그를 만나지 못했다. 

이것은 고린도에서 자기가 어떠한 대접을 받으며 형편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으므로 슬픈 일이었다. 

이것 외에도 그들은 다른 어려움과 계속되는 핍박을 당했다. "밖으로는 다툼이요" 즉 계속적인 다툼과 반대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왔던 것이다.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대한 염려가 있었다. 그들이 타락하거나 유혹을 받지 않도록 염려했다.

Ⅱ. 바울이 얼마나 위로을 받았던가(6,7절).

1. 디도의 방문이 그에게 얼마의 위로가 되었다. 

바라고 보기를 기대하던 그를 만남은 기쁨의 일이다. "같은 믿음을 따라 그의 참 아들이 된" 디도의 방문은 여행과 고난 중에서 큰 기쁨이 되었다.

2.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디도가 가지고 온 소식은 큰 위안이 되었다. 

바울이 그들에게 편지한 것에 대한 만족을 주도록 그들이 노력한다는 소문은 특히 바울에게 위로가 되었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 중에 있던 나쁜 일에 대해서 슬퍼하며 잘못을 수정하기 위해 충성스럽게 충고한 바울에 대하여 뜨거운 애정을 나타내었다. 

솔로몬의 말이 진실이다(잠 28:23). "사람을 경책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느니라."

3. 바울은 모든 위로를 하나님에게 돌리었다. 

디도의 옴으로 바울을 위로하신 이는 위로의 하나님이었다. "비천한 자들을 위로 하시는 하나님이다"(6잘). 

다음을 주목하자. 우리가 즐기는 모든 수단과 도구를 초월하여 모든 위로와 선의 시행자로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Ⅲ. 그들의 회개와 그 열매로써 바울은 대단히 기뻐한다. 

바울은 그들을 슬프게 만든 것, 그들 중에서 경건한 사람들이 전서에서 들은 책망을 마음에 두며 기쁘게 하여야 할 사람들을 슬프게 만든 것이 가슴 아펐다(8절). 그러나 지금은 기뻐하였다. 그들의 "근심함으로 회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9절). 

그들의 슬픔 자체가 바울의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니고 슬픔의 성질과 효과 때문이다(구원에 이르는 근심 10절). 

그들이 바울에 의하여 아무런 손해도 당하지 않고 그들의 슬픔은 잠간이요 그것은 영원한 기쁨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1. 참다운 회개의 선행자는 신령한 근심이다. 

이것은 회개를 낳는다. 회개 자체가 아니고 회개의 준비이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회개를 만드는 원인이다. 

범법자가 큰 슬픔을 가지면 "지나친 슬픔으로 삼킴을 당할" 위험도 있다. 

세상의 기쁨은  슬픔으로 된다. 그들의 슬픔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다. 

하나님에 의한(원어로) 근심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성령으로 하는 근심이다. 

하나님의 뜻으로 하는 슬픔으로 된다. 그들의 슬픔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성령으로 하는 근심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슬픔이기 때문에 죄에 대한 슬픔이며 하나님에 대한 배은으로써의 슬픔이다. 

신령한 근심과 세상의 근심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와 변혁과 구원을 만든다. 세상의 근심은 사망을 낳는다. 

세상의 근심은 백발의 머리를 만들고 무덤으로 재촉하며 유다가 가진 죄에 대한 슬픔도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다음을 주목하자.

(1) 회개는 구원을 동반한다.

(2) 참다운 회개는 회개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3) 겸손과 신령한 슬픔은 회개에 필요하다. 이들은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것이다.

2. 참다운 회개의 바람직한 열매와 결과가 언급된다(11절).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회개한 가장 좋은 증거이다. 마음이 변하는 곳에 생활과 행동이 변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들의 슬픔이 신령한 슬픔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즉 영혼에 대한 주의와 죄의 회피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 

그것은 또한 그들을 깨끗하게 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이 아니요, 죄 중에 있어도 저주의 일을 멀리하고 악한 일을 멀리하였다. 

죄에 대하여 분노를 가지고 자신과 성질에 대하여 혐오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불신을 두려워하며, 자신을 불신하고 하나님을 믿으며 경외하는 것이다. 

잘못은 수정하고 범법은 하나님과 화해로 대치한다. 마지막으로 죄와 그들의 우매에 도전하며 상처를 치료한다. 

이래서 "모든 일에 그들 자신이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그들이 순결하기 때문이 아니요, 그들이 회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이 참 회개한 것에 대하여 책망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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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기뻐한 이유(고후 7:12-16)

이 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위로하려고 한다. 바울의 충고가 효과를 거두었다.

1. 가혹하다고 생각될 전서에 있어서 그의 계획을 말한다(12절). 

그것은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함도" 아니다. 그의 유익뿐만 아니라 더우기 처벌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 불의당한 자를 위함도" 아니다. 즉 상처받은 아버지를 위함도 아니다. 

더우기 그에게 주어지는 만족을 주기 위함도 아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대한 그의 크고도 진실한 관심을" 보이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전체 교회가 그러한 죄악을 묵인하여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함이다.

2. 그들의 회개와 선한 행동 때문에 디도와 바울의 기쁨을 그들에게 알린다. 

디도가 위로를 받고 그의 정신이 새롭게 되었고 이것이 바울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였다(13절). 

디도가 그들에게 있을때에 위로를 받고 그들이 사도의 지도에 복종하며 두려움으로 준행한다는 생각이 그들에게 대한 바울의 애정을 강하게 하였다(15절). 

다음을 주목하자. 큰 위로와 기쁨은 신령한 슬픔뒤에 따라온다. 죄악이 슬픔을 일으키는 것과 같이 회개와 천선은 기쁨을 일으킨다. 

바울과 디도는 기뻤고 고린도 교인들은 위로를 받았고 하늘에서 기쁨이 있었기 때문에 땅에서도 기쁨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죄인이 회개하기 때문이다.

3. 바울은 그들에 대한 확신으로써 모든 일을 종결한다. 

디도에게 그들에 대한 자랑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14절). 바울의 기대를 그들은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들의 행동을 확신하여 앞으로도 믿는 것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충성스러운 이 자기의 교인들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과 그들의 유익을 생각하는 모든 일을 따를 때의 큰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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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제 7장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 전체를 일컫는 말이다(고전 7:34, Plummer). 
따라서 어느 한쪽이 더러워지면 그것은 다른 쪽도 더러워짐을 의미한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는 '온갖 더러운 것'은 무엇이었을까 ? 
혹자는 본절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미 더럽혀졌음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본다(Harris). 이 경우 '더러운 것'(* , 몰뤼스무)은 우상의 신전에서 음식을 함께 나누는 것, 이방인들의 사원에서 열리는 축제나 의식에 참여하는 것, 어떤 특정한 이교에 가입하여 회원이 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전 8:10;10:14-22 주석 참조). 
이와 더불어 갈 5:19-21에서 언급되고 있는 '음행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 등이 본절의 '더러운 것'에 해당될 것이다. 성도들은 이런 것들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켜 성결하게 해야하며 그것이 곧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결국 본 절은 성도의 성결을 다음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1) 성결은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요구받는 것이며 (2) 단순히 윤리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서 생겨나고 또한 (3) 성결은 영과 육, 즉 성도의 전인격에서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으로 가령 영적 성결만을 중요시할 때는 쾌락주의[니골라당의교훈과 행위, 발람의 교훈]에 빠질 위험이 있고 육체적 성결만을 강조할 때는 율법적 금욕주의[바리새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7:2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 바울은 매우 솔직하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 말은 6:13과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으로 거듭 화해와 일치를 촉구하고 있다. 
이것은 1절의 '온갖 더러운 것'이 '분쟁', '시기', '분냄', '분리' 등이 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암시해 준다. 
한편 '영접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레사테'(*)는 장소를 나타내는 '코로스'(* )에서 파생된 말로 '...을 위해 장소를 마련하다'의 뜻이다. 그렇다면 본문은 '마음속에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자리를 만들라'로 직역할 수 있다. 결국 바울이 말하는 바 '영접하는' 것은 상대를 위해 마음에 장소를 만드는 것 즉 상대를 자기 실존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Strachan).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요구할 때 그 자신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었다(6:11-13).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 본절에서 바울은 다시 그의 사역의 동기가 순수하고 그에 대한 중상(中傷)은 잘못된 것이라고 변호하고 있다(4:2;5:12, 13;6:3). 그러나 본문에서는 앞서 제기된 문제들, 가령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한다든가 스스로를 천거한다든가 하는 문제들에 비해 윤리적 문제들이 거론되고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본문을 보면서 바울이 사람들에게 불의를 행하고 해롭게 하며 속여 빼앗는 자라는 비난을 받았었다고 추론한다. 
그러나 바울에게 가해진 그러한 비난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오해는 복음의 진리에 눈먼 거짓 교사들에 의해 야기된 것이었다(2:17;4:3). 
사실 바울은 언제나 고린도 교인들에 대하여 영적 아버지로서의 따뜻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6:13) 모든 일을 그들을 위하여 행했다(1:24;4:15).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인들이 허황된 거짓 가르침에 현혹(眩惑)되고 바울을 불신했을 때 그의 심정은 큰 애통으로 눈물을 흘려야 했다(2:4). 
그러나 바울은 넘치는 사랑과 용서하는 마음으로 그들이 스스로 회개할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리는 목회자적 모범을 보였다(2:7-10;7:9).
=====7:3
@정죄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기에게 대하여 오해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바울의 사랑에 상응하는 행위를 하지 않고 도리어 마음이 식은 것을 지적하는 것은(2절;6:12) 그들을 책망하기 위함이 아니라 바울과 그들이 공동의 운명으로 묶여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정죄하거나 책망하려는 의사가 없다는 것은 앞에서도 밝힌 바 있는데, 그는 이미 문제를 일으킨 자들이나 그 문제에 동조한 자들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용서하였다(2:7-10).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이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케 하고 구원하는 것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권면을 할 때 그것이 정죄의 차원이 아니라 다만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껴 잘못을 뉘우칠 수 있도록 하는 차원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게 노력하였다(고전4:14;6:5;15:34)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 본문이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것은 6:11 내용이다(Bruce, Martin). 
혹자는 본문에서 바울의 화제가 급작스럽게 전환된 것을 보고 다시 고린도교인들에 대한 사랑의 권면을 하기 위해 6:11-13로 되돌아왔다고 한다. 
만일 이러한 견해가 옳다면 그것은 6:14-7:1 부분이 다른 서신에서 가져온 삽입부라고 주장하는 견해(Gnilka)를 반박하는 것이 된다.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 바울이 자기가 돌봐야 할 성도들과 운명을 같이 하며 그들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희생할 수도 있다고 한 그 자세는 그의 전생애를 통해 일관하는 목회자적 신념이었다(살전 2:8). 
한편 본절은 권면의 목적과 바른 자세에 관한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사랑의 동기에서 출발하며 선을 지향하는 것이다. 
본절 외에도 성경에는 다양한 권면이 나오는데 그 권면들의 목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회개에의 인도(눅 3:17, 18). (2) 믿음을 유지하게 함(행14:22). (3) 순종할 것을 권고함(딛 3:1). (4) 거룩한 생활의 독려(살전 4:1-6).
=====7:4
@담대한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르레시아'(* )는 '모든 것을 거침없이 자유롭게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 대하여 어떤 비밀도 없이 다 말하였다는 의미가 있다.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 바울은 14절에서 디도를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기 전에 디도에게 교인들을 자랑하였었다. 바울이 이렇게 고린도 교인들을 자랑하는 것은 그들에 대해 좋은소식을 들었으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이길 것이라는 그의 확신(13:8)에 근거한 것이었다. 물론 바울은 마게도냐에서 재회한 디도를 통해 고린도 교회에 대한 좋은 소식을 들은(5-16절) 후에 더욱더 그들에 대한 자신의 자랑이 헛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 본절에서 표현되는 바울의 기쁨은 디도가 가지고 온 기쁜소식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Harris, Lowery). 즉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신뢰가 배반당하지 않았음을 확인한 것에서 바울은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바울이 이렇게 기쁨을 누리는 것은 고난이 끝났기때문에 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바울은 계속해서 고난을 당할 것이었다. 
그리고 바울은 그러한 고난 가운데서 위로와 넘치는 기쁨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것이었다.
=====7:5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 바울은 마게도냐에서 겪은 일들을 회고하면서 앞절에서 언급한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이유를 계속 설명하고 있다. 
본 절의 '육체'(* , 사륵스)는 신학적인 의미가 아닌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Bruce). 바울은 12:7에서 '육체에 가시'를 언급했던 바, 여기서 자신의 신체적 연약함을 나타내고 있다.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 바울은 마게도냐에 도착한 후 그들이 신자든 불신자든간에 많은 적대자들로부터 줄곧 박해를 받는 역경에 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바울은 심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것은 분쟁에 말린 고린도 교인들을 치유(治癒)하기 위해 디도를 파견했던 바, 고린도 교인들이 디도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에 대한 염려요, 부차적으로는 예정된 시점에 디도를 만나지 못함으로 야기 되었던 염려에서 비롯되었다(Plummer, Martin).
=====7:6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 - 바울은 그가 디도를 통해서 전달한 편지에 대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반응하는 상태의 여부를 매우 심각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이렇게 볼 때 디도를 만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바울에게 있어 심적으로 커다른 근심의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Harris). 
'비천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페이누스'(*)는 본래 '지면상 낮은 위치'를 가리켯다(겔 17:6). 그런데 후대에 와서 '상태의 낮음'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롬 12:16;빌 3:21;약 1:9). 
이 말의 좀더 깊은 신학적 의미는 세상에서 지위가 낮고 천한 자들로서 의지할 만한 그 어떤 인간적인 것을 소유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철저하게 당신만을 의지하는 자들을 위로하신다. 
한편 본절의 '위로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1:3,4에서 강조된 바이며, 이는 사 49:13의 '여호와가 그 백성을 위로하였은 즉 그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길 것임이니라'는 말씀을 상기케 한다. 본절과 사 49:13 말씀과의 연관성은 바울이 6:2에서 역시 같은 장(章)인 사 49:8을 인용하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매우 의미 심장하다.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 디도가 바울에게 돌아온 것이 바울에게 위로가 된 것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1) 디도가 돌아옴으로써 바울은 그의 조력(助力)을 받을 수가 있었다. (2) 디도에게 준엄한 편지를 주어 고린도에 보낼 때 고린도 교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해 바울과 디도 두 사람 모두 불안해 했었다(13-15절).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이 의외로 디도를 환대했기 때문에 디도는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3) 디도를 통하여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태도가 매우 고무적이라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바울에 대한 고린도 교인들의 애정, 그를 보고 싶어하고 그와 화목하기를 사모하는 마음, 그를 실망시켰던 행위들에 대해 회개하는 마음, 그리고 다시금 그를 따르고자 하는 열심 등에 관한 소식은 바울에게 더할 나위 없는 큰 위로와 기쁨이 되었다(7절).
=====7:7
@사모함 - 바울이 고린도에 소위 '가슴 아픈 방문'을 한 후 양자 사이는 심각하게 냉각되어 갔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고린도를 방문할 때 서로가 더 어렵게 되는 상황이 야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방문을 피해야 했었다(2:1).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달라졌다.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몹시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애통함 -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슬픈 방문 때 보여준 그들의 행동, 즉 적대자들이 바울을 공격할 때 바울을 옹호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통회(痛悔)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바울과 함께 있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있다(Barrett).
@열심 있는 것 - 고린도 교인들은 놀랍게도 과거를 완전히 청산하고 바울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려는 열심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변화된 고린도 교인들의 소식이 바울에게 전해졌을 때 그가 느꼈을 위로와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에 대해서는 다음의 견해를 고려하면 능히 짐작이 된다. 즉 바울은 가슴 아픈 방문 이후 디도를 통해 준엄한 편지를 보내면서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자신의 장래가 그 편지의 권위에 대한 고린도 교인들의 반응 여하에 달려있다고 보았다(Harris). 그리하여 그는 디도를 만나기까지 걱정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5절). 바울의 기쁨은 잃었던 고린도 교인들을 다시 찾은 기쁨에 더하여 자기의 사도직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한 기쁨이 있었던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다(6절).
=====7:8
@편지로 - 이 편지에 대해서 혹자는 '고린도 전서'를 가리킨다고 보기도 하나(Farr-ar) '고린도전서'를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편지를 소위 '눈물의 편지'또는 '준엄한 편지'로 본다(Barrett, Harris, Robertson). 
이 편지는 바울이 A.D.55년경 고린도 교회에 대한 '가슴 아픈 방문'을 끝내고 돌아온 후 A.D.56년 봄 디도 편으로 보낸 것으로 보이며 지금은 분실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 바울이 '준엄한 편지'를 쓸 때 마음이 몹시 고통스러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조금이라도 그들을 정죄하려 하거나 고통을 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3절). 도리어 그는 자식을 생각하듯 사랑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썼다(2:4;6:13). 그러나 이러한 의도와는 달리 고린도 교인들이 그 편지를 받고는 마음의 고통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울은 잠시나마 그 편지에 대해 후회를 하였었다. 아마 그는 너무나 강한 어조로 편지를 쓴 것에 대해 후회했을 것이다.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 다행스럽게도 고린도 교인들의 고통과 근심은 지속되지 않았으므로 바울은 더 이상 '준엄한 편지'를 써 보낸 것에 대해서 근심하지 않았다. 만일 편지를 보낸 결과가 좋지 않은 것이었더라면 그때 바울은 그 편지를 쓴 것을 계속 후회하였을 것이다.
=====7:9
@기뻐함은...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 바울의 준엄한 편지는 잠시 동안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근심을, 바울에게는 후회를 가져다 주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바울에게 기쁨을 안겨주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편지를 받고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회개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바, 근심에서 회개로 후회에서 기쁨으로의 반전(反轉)은 바울이 쓴 편지 자체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개입 때문이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렇게 여러분이 마음 아파한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된 일이니 결국 여러분이 우리로 해서 손해 본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공동번역)의 뜻이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의 근심이 회개로 이어졌을 때 그것을 단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 하나님의 섭리가 개입되어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그러기에 때로 하나님께서는 근심을 통하여 회개에 이르게 하신다.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세상 근심 - 바울은 두 종류의 근심과 그 각각의 결과들을 극명하게 대조시켜 설명하면서 앞절 내용과 연결하여 계속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 초점을 두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의 판단에 합당한 것인가를 생각하여 자기의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치고 돌이키는 데까지 나아가는 근심이다. 그리하여 혹자는 이 근심을 죄에 대한 근심이요, 하나님의 은총을 저버린 행위에 대한 근심이라고 하여 '신령한 근심'이라고 정의하였다(M. Henry). 
이에 비해 '세상근심'은 분노하고 원한을 품으며 자기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애쓰는 근심이다. 이 근심의 결과는 낙담하고 좌절에 빠져 자기 파괴적인 상황으로 발전한다. 이상에서 언급한 두 종류의 근심에 대한 성경의 전형적인 실례는 두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에서와 다윗이다(Hughes). 그 이후에도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는 없었다(히 12:16,17). 그러나 자기의 신하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다윗은 자기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였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았다(시 51:1-19). 
둘째는, 가룟 유다와 베드로이다. 유다는 예수를 배반하기 전에 회개할 기회가 있었으나 끝까지 타락하였던(마 26:24) 반면,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 부인한 후 통곡하며 회개하였다(마 26:75). 
고린도 교인들은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그들은 바울의 편지를 받고 회개하였으며 거짓 사도들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향하였다. 이렇게 바울의 사랑('준엄한 편지')에 응답한 그들은 결과적으로 '영적 사망'을 낳는 죄의 길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Martin).
=====7:11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겪은 근심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한 것임을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증명해 보이고 있다. 
구체적 증거들은 다음의 7가지로 정리된다.
>간절하게 하며 -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잘못된 것들에 대하여 그 심각성을 진지하게 의식하고 그것들을 바로잡고자 하는 열심을 갖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변명하게 하며 - 이에 대해서는 대개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들의 입장에 대해 탄원(歎願)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분하게 하며 - 이것은 바울을 공격하여 그의 명예를 실추시킨 적대자들에 대해 고린도 교인들이 의분을 느끼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과거에 고린도 교인들은 이들에게 동조하였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들의 행위를 방임하였었다.
>두렵게 하며 - 이것은 바울을 다시 볼 면목이 없는 것, 또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낸다.
>사모하게 하여 - 7절에서처럼, 복음을 심어준 바울을 진정한 사도로 받아들이며 예전처럼 신뢰와 사랑의 관계로 회복 되기를 간절히 열망하는 것을 나타낸다.
>열심있게 하며 - 이는 회개와 성결의 실천을 위한 열심 그리고 바울을 섬기려는 열심을 의미한다.
>벌하게 하였는가 -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공격한 자들을 공의에 입각하며 처벌하였음을 말해준다.
>깨끗함을 나타내었으니라 - 본문의 의미가 고린도 교인들의 본래적인 무죄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본래 있던 잘못이 용서된 것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엇갈린다. 
혹자는 본문의 '나타내었느니라'(* , 쉬네스테사테)가 '입중하였느니라'를 뜻한다고 본다(Barrett).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들의 무죄함을 입증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인들이 회개한 것(9, 10절)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 
이에 대해서는 고린도 교인들이 실제로 범한 잘못을 회개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잘못을 범할 때 무관심했던 것을 회개한 것이라고 한다. 
칼빈(Calvin)도 이와 유사한 견해를 보여주는 바, 그는 '고린도 교인들이 편한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잘못된 것처럼 보일 수 있었겠지만, 결코 그들 자신이 잘못을 범하지는 않았으며 이에 대해 그들은 분명하고도 진심에서 우러난 증거를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이런 견해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게 되었고'로 번역하고 있는 공동번역과도 일치된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Harris, Lowery)은 '고린도 교인들은 전에 실제적인 잘못을 했으나 지금은 회개하고 용서받았기 때문에 깨끗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본절을 해석한다. 
바울이 '눈물의 편지'를 쓰게 된 직접적인 배경은 고린도를 향한 '가슴아픈 방문'이었다. 그런데 그 방문이 가슴 아픈 방문이 되었던 것은, 적대자들이 바울을 공격할 때 고린도 교인들이 보여준 태도와 관련이 있다. 즉 고린도 교인들이 적극적으로 동조했는지 아니면 방관자적 태도를 취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그 어떤 경우이든 그들이 보여준 행동은 바울에게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때 보여준 행동에 대해 회개를 하였기에 지금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 자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앞의 두 견해는 다 참조할 수 있으며 굳이 어느 하나 선택할 필요는 없다.
=====7:12
@불의 행한 자...불의 당한 자 - 여기서 논점이 되는 것은 바울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과 가해자의 구체적인 범죄 행위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불의를 행한 자와 그가 저지른 불의는 고전 5:1이하에 기록된 고린도 교회 내의 음행 사건, 즉 아비의 아내를 취한 패륜아 사건이었다고 보는 견해이다(Farrar). 이럴 경우 불의를 당한 자는 아들에게 아내를 빼앗긴 아비가 될 것이다. (2) 불의를 행한 자는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교사이며 이들의 불의한 행위는 바울의 사도직에 도전하고 그의 명예를 훼손시킨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다(Fallon, Martin). 이 경우 피해자는 바울이다.
전자의 견해는 2:5을 볼 때 다소 타당성이 적어진다. 왜냐하면 2:5에 의하면 피해자가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자의 견해가 전개되는 상황에 더 잘 부합된다. 
문제는 바울이 고린도를 방문했을 때, 외부에서 온 거짓 교사들이 자기들의 권위를 내세우며(3:1) 바울의 권위를 무시하는 언동을 하고 그의 인격을 모독하는 행위를 했을때 생겼을 것이고, 그때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기대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그의 편을 들지도 않고 그 적대자들을 제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불의를 행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회개해야하고 해명해야했던 이유가 된다(9-11절). 
또한 바울이 적대자들로부터 무시당한 것은 곧 적대자들이 고린도 교인들을 무시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수수 방관했던 그들의 행동은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11절).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준엄한 편지'를 보낸 목적이 드러나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을 일깨워주기 위하여 '준엄한 편지'를 보냈던 것이고 혹시나 고린도 교인들이 그 편지에 대하여 오해하거나 근심하지 않을까 걱정하였었다(8절).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곧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자기들의 잘못을 뉘우쳤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이 '준엄한 편지'를 쓴 것은 불의한 자들이나 직접적 피해자인 바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서서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성도들간의 교제를 회복토록하기 위함이며, 아울러 바울에 대한 고린도 교인들의 열정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7:13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 바울이 편지보낼 때 목적했던 바 그의 사도적 권위에 대해 고린도 교인들이 여전히 존중하고 있음을 확인했으므로 바울은 커다란 위로를 받았다.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 어떤 이유에서인지 분명치는 않지만 디도가 바울이 건네준 '눈물의 편지'를 가지고 고린도로 향할 때 다소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 디도가 그렇게 유쾌하지 못한 마음으로 고린도를  방문했을까'에 대해서는 단지 추측할 수 있을 뿐인데 과거에 고린도에서 좋지 않은 경험을 했거나 아니면 바울이 당한 쓰라림을 자기도 당할 수 있다는 불안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디도는 전혀 예상 밖의 환대를 받았고 결과적으로 그의 마음은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동역자인 디도의 이런 모습은 바울의 기쁨을 더욱 배가(倍加)시켰던 것이다.
=====7:14
@자랑한 것이...참되게 되었도다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문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들에 대한 신뢰를 굳게 가지고 있었고 비통한 심정으로 편지를 써 보내면서도(2:4) 디도에게 고린도 교인들은 믿을만 하고 사랑이 풍부하다고 자랑을 했다. 
참다운 목회자로서 바울의 넓은 마음과 신실함이 탁월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디도가 환대를 받았다는 소식을 접한 바울은 자신의 확신을 배반하지 않은 고린도 교인들에 대하여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진실만을 말했다(1:17-20). 그리고 지금은 디도에게 한 말이 진실임이 증명된 것이다.
=====7:15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 바울 자신이 편지를 보낸 후 상당한 심적 조바심을 내었던 만큼 디도 역시 고린도 교인들이 자기와 자기가 가져온 편지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 대해서 불안한 마음을 가졌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이 나타낸 반응은 바울과 디도의 염려가 기우(杞憂)였음을 보여주었다. 고린도 교인들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디도를 영접하였고 더 나아가 순종하기까지 하였다. '두려위함', '떪' 그리고 '순종' 같은 단어들은 고린도 교인들이 여전히 바울의 권위를 존중하고 있음을 말해주며 바울의 대리인인 디도에 대해서도 동일한 태도로 예우해 주었음을 말해준다.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 '심정'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플랑크나'(*)에는 '애정', '사랑', '긍휼'의 뜻이 담겨 있다.
고린도 교인들이 디도를 겸손하게 대접하고 그가 하는 말들에 대해 순종하였을 때 그는 대단히 큰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이 선하고 훌륭한 신앙인들이라고 한 바울의 말(14절)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한 것도 물론이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디도의 마음속에는 고린도교인들에 대한 편견과 오해(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실망시킨 것을 보면서 그런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가 사라지고 대신 그들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깊어진 것이다.
=====7:16
@범사에 담대한 고로 기뻐하노라 - 이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조금도 거리낌없이 신뢰할 수 있게 되었다. 
본 문에 표현되는 바울의 신뢰와 기쁨은 자신이 애써 수고한 모든 사역들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았음을 확인한 데서 느끼는 목회자로서의 신뢰와 기쁨이며,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의 현재 상태뿐만 아니라 미래에까지 이어진다. 바울은 이 모든 위로와 기쁨이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겸손한 자에게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울로 하여금 실패하지 않는 목회자가 되게 한 중요한 이유였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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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브라디도, 디도, 에바브라==
영어 킹제임스 성경으로 보면 이들은 전혀 다른 인물들입니다. 
에바브로디도(Epaphroditus)-'에바브로 디도'가 아님. 즉 에바브로 +디도가 아님. 
디도(Titus) - 철자에 유의할 것. Ditus가 아니라 Titus(타이터스, 티토)이다.
에바브라(Epaphras)  -*에바브로가 아니라 '에바브라스'이다.
1. 에바브로디도(Epaphroditus)는 빌립보의 사역자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는 자요 동료 군사요 또한 너희의 사자로서 내게 부족한 것들을 공급한 자인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였노라.](빌 2:25).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의 *사자였습니다. 
[오직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니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보낸 것들을 받았으므로 내가 풍족한데 이것은 달콤한 냄새의 향기요 받으실 만한 희생물이며 [하나님]을 매우 기쁘게 한 것이니라.](빌 4:18). *빌립보 교회는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바울의 필요를 공급했습니다. 바울과 빌립보 교회의 가교 역할을 한 사람이 에바브로디도입니다. 에바브로 디도는 바울의 편지를 받아서 빌립보 교회로 가져왔는데 그것이 빌립보서입니다.
2. 디도(Titus).
디도는 그리스 사람으로서 바울의 동역자로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입니다. 디도는 고린도와 크레테에서 사역했으며 바울의 고린도서를 고린도에 전달한 사람입니다. 디도는 사도 바울의 명령에 따라 그 지역에 장로들을 세우는 일을 했습니다. 
[그 뒤 십사 년이 지나서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도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라.](갈 2:1)
[그러나 나와 함께 있던 그리스 사람 디도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갈 2:3) 
3. '에바브라'로 기록된 사람은 '에바브라스'(Epaphras)로서 골로새 사역자입니다.
[또한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동료 종 에바브라에게 배웠는데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역자요,](골 1:7). **골로새 사람들은 '에바브라'에게 배웠습니다. 에바브라가 골로새의 사역자임을 보여 줍니다.
[너희에게 속한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종인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가 너희를 위해 항상 기도로 뜨겁게 수고하나니 이것은 너희가 [하나님]의 모든 뜻 안에서 완전하고 완벽하게 서게 하려 함이라.](골 4:12). *에바브라는 골로새 성도들을 위해 항상 기도로 뜨겁게 수고하며, 그들을 세우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된 에바브라가 네게 문안하며](몬 1:23). *에바브라는 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혔습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뿐만 아니라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Note. 에바브로디도와 에브브라를 동일 인물로 보는 견해는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디도는 전혀 다른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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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도 Titus(인) Tivto"(5103, 티토스) 
티토스는 '공경하다'를 의미하며, 신약성경에 13회 나온다.
티토스/ 디도는 헬라인이며 바울의 동역자였다(고후 8:23; 갈 2:3).
바울이 그를 아끼고 사랑했다(고후 2:13; 고후 8:23; 딛 1:4).
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바울과 동행했다(갈 2:1-3; 행 15:1; 행 15:2).
그는 바울이 고린도로 보내었으며(고후 8:6; 고후 8:16-22; 고후 12:17; 고후 12:18), 마게도냐에서 다시 바울을 만났다(고후 2:13; 고후 7:6; 고후 7:7).
그로 인하여 바울이 위로를 받았다(고후 7:13; 고후 7:14).
고린도 성도들에 대한 그의 사랑이 더욱 깊어갔다(고후 7:15).
바울이 그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두었으며(딛 1:5)  바울이 편지로 그가 그레데에서 할 일을 지시했다(딛 1:4).
그는 니고볼리에서 다시 바울과 함께 하였으며(딛 3:12) 그는 달마디아로 갔다(딤후 4:10).(참조: T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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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브로디도 Epaphraditus !Epafrovdito"(1891, 에파프로디토스) 
에파프로디토스는 '잘생긴, 매력적인'을 뜻하며, 한글 개역 성경에서 '에바브로디도'로 번역되었다.
에파프로디토스는 신약성경에서 빌립보서에 2회 나온다.
(a)  빌 2: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b)  빌 4: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에바브로디도는 로마에 있는 바울에게 헌금을 가져온 빌립보 교회의 일원이다.
그의 헬라 이름은 라틴어 베누스투스(Venustus, "비너스에 속한")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본래 유대인이 아님을 보여 준다. 그 이름은 헬라나 라틴 이름 중에 흔한 이름이다. 
에바브라(Epaphras)라는 축약형으로도 흔히 사용되었다. 그러나 골로새의 에바브라와 그를 동일시할 만한 증거는 없다(골 1:7; 4:12).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의 존경받는 교인이었다. 그가 관리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교회의 헌금을 바울에게 전달하도록 위임받았으며(빌 4:18) 그와 함께 머물면서 그를 도왔다(빌 2:25; 빌 2:30).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 대하여 그를 그들을 대신하여 바울을 섬기도록 보내어진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고 부르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로마에서 위독한 병에 걸리게 되었다. 그의 병은 여행으로 인한 것일 수도 있으나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을 완수하려는"이라는 구절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로마에서 그의 사명을 감당하는데서 온 과로 때문일 가능성이 더 많다. 
에바브로디도가 천천히 회복이 된 후에 바울은 그를 고향으로 돌려 보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빌립보에서 자기를 걱정하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을 듣고 근심하였다.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에게 편지와 함께 그를 보내면서 "주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할 것을 부탁하였다.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로 묘사한 것을 보면 개인적으로 그를 매우 존중한 것을 알 수 있다.(참조: D. E. Hieb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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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브라 Epaphras(인) !Epafra'"(1889, 에파프라스) 
에파프라스는 에파프로디토스(!Epafrovdito")의 축소형이며, '매력적인'을 의미하며, 한글 개역 성경에서 '에바브라'로 번역되어 있다.
에파프라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바울 서신에만 사용되었다(골 1:7; 골 4:12; 몬 1:23).
에바브라는 골로새  태생의 사람이며 골로새 교회의 창시자로서 바울이 골로새서를 쓸 때 그와 함께 있었다(골 1:7, 8; 4:12, 13; 몬 23). 그를 빌립보 교회의 일원인 에바브로디도(빌 2:25; 4:18)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에바브라는 바울이 개종시킨 사람인 것같다. 바울의 대리자로서 그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하고 있는 동안에(행 19:10) 골로새(골 1:7 RSV)와 이웃 도시인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4:12, 13)에 복음을 전하였다. 
그가 로마에 있는 바울을 방문하였고, 루거스(Lycus) 계곡 교회의 상태에 대한 그의 보고를 받고 바울이 골로새서를 쓰게 되었다(골 1:7-9).
바울이 에바브라를 높이 평가한 것은 바울이 그에 대하여 "우리와 함께 종된 사랑하는…",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군이요"(골 1:7), "그리스도 예수의 종"(4:12), 그리고 "나와 함께 갇힌 자"(몬 23)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마지막 구절은 아리스다고에도 적용되었기 때문에(골 4:10), 에바브라와 아리스다고가 번갈아서 자발적으로 바울과 함께 옥고를 치렀을 가능성이 있다.
에바브라의 훌륭한 인격은 바울이 루거스(Lycus)에 있는 교회들을 위하여 뜨겁게 중보기도하는 그를 칭찬하고 있는 데서도 일 수 있다(골 4:12, 13).(참조: H. S. Seek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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