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11.20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시127.오직주임재바라기.건축자지킴이돌보미여호와의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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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시127 솔로몬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비둘기같이온유한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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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구속자, 구속하시는 여호와=====@구속[무름(속량)/자유]회복---속전(지속적으로 정결케 하는 보혈의 능력)--보수./보응/심판

la'G:(1350, 가알) 되 사다, 속량하다, 구속하다, 근친의 역할을 행하다 [구속자 redeemer..근친/근족/혈연자 =고엘]

가알(동사)은 기본어근이며, '되사다, 도로 찾다, 속량하다, 구속하다 redeem, 근친 역할(권리, 의무)을 행하다'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어근은 '자기 친족을 어려움이나 위험에서 구하다'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 어근과 매우 유사한 어근 파다([d"P; , 6308): 구속하다 redeem) 사이의 한 가지 차이점은, 일반적으로 가알(la'G: , 1350)의 강조점이 구속자의 자격과 행함에 있는데, 반드시 근친이어야 하며, 근친의 특권이나 의무는 다름아닌 속량에 있다는 것이다.((JC가 바로 그러하시다..그는 태초이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신 아들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이미 예고된 대로, 참사람으로서 성육신하셨고 인성을 가지셨기에 [죄로 인해 자기의 모든 것을 사탄에게 넘겨주고 파산한 자들인]우리의 피를 나눈 근친/근족으로서 모든 면에서  참된 자격과 능력을 갖추신 유일무이한 고엘이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00회 이상 나오며, 칼형과 니팔형으로만 사용되었다.

가알은 착하고 진실한 사람이 자기의 친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포함하는 4개의 기본적인 상황에서 사용되었다.

(a)  첫째로, 가알은 오경의 법령에서 궁핍한 때에 판 밭을 되사는 것이나 가난할 때 자신을 판 이스라엘인 노예를 자유롭게 하는 것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합당한 대가를 치르고 되사서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바로 그대로 각 사람에게 배정/배분된 대로 모든 것을 돌려주고 모든 권리를 회복시켜 지고지선의 진복 누림의 바탕을 제공하여 주는 구속의 일]로서 이런 매입과 무르는 일은 근친의 의무였다(레 25:25-54).

레 25:25에서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라고 하였다. 

물론, 만약에 자신이 부유하게 되면 그 사람 자신이 그것을 '무를' 것이다(레 25:26). 

한편, 가난한 자는 기업만이아니라 자기 자신을 동족 이스라엘인에게나(레 25:39)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타국인(레 25:47)에게 팔기도 하였다. 

그를 속량할 책임은 가장 가까운 친척 - 형제, 삼촌, 사촌들, 가족의 혈족 - 에게 있었다(레 25:25, 레 25:48, 레 25:49).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친척을 속량한 redeemed 자(혈연자)는 '근족 - 구속자'로 알려져 있었다. (참조: EDBW).

---가난한 자의 구제에 관한 가장 유명한 실례는 수혼법에 대한 구약성경의 증거가 가장 광범위하게 미치는 룻기에 있는 것 같다. 

신 25:5-10에 의하면, 남편의 형제는 후사 없는 과부를 취하여서 씨를 영속시키고, 남자 후손과 결부되어 있는 땅의 계승을 보증해야 했다. 

여기 [수혼법의 실행 의무]에서 그것을 실행하는 근친은 야밤이라고 불리어지며, 어근 가알은 사용되지 않는다.

....룻의 상황에서는 두 가지 것들, 즉 밭을 되사는 것과 수혼이 언급된다. 근친은 밭을 사는 것을 기꺼워했지만, 룻과 결혼하는 것은 기꺼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의 요지는 나오미가 가난하여 밭을 팔 수 밖에 없었을 때, 근친은 그녀를 위해 그 밭을 되사야 했다는 데 있다. 그는 후사 없는 형제의 과부를 위해서 이 일을 기꺼이 하려 했지만, 그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그 근본을 모르는] 룻과 결혼하여 그들의 기업을 지속시킬 자손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그는 거부하였으며 여기에 보아스가 개입하였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것, 즉 친족과 수혼은 구별되어야 한다. 고엘(구속자)이란 단어는 후자의 제도를 가리키지 않는다. 

....레게트(Leggett)는 룻기에 구속적이고 메시야적인 유형론의 주제가 들어있다고 보았다. 

...."고엘(goel)로서의 보아스의 행동들에서 우리는 보아스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가 예시되어 있음을 보았다. 보아스가 구속의 권리를 소유하였으면서도 분명히 룻을 위하여 개입할 의무(까지)는 없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보라...룻은 나오미의 견해를 따라서 겸손하게 자신을 신부로 취하여 후사를 낳도록 해 달라는 뜻으로 보아스의 이불을 들추고 눕는다!!...겸손과 순종의 극치이다!!))

....보아스가 이 가난한 과부들의 곤경을 보았을 때 그의 생애가 여호와와 여호와의 율법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었으므로 그들을 구원하러 왔던 것과 같이 메시야의 경우도 그의 생애가 하나님의 법에 의해 지배되고 또한 그가 가난한 자들과 억압 받는 자들을 공정하고 정당하게 대우하실 것이라는 사실이 예언되었다(시 72:2, 시 72:4, 시 72:12, 시 72:13, 사 11:4).

(b)  둘째로, 가알은 재산이나 여호와께 바쳐진 희생제물 아닌 짐승들을 무르는 것, 혹은 부정한 짐승들의 첫 소산을 무르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레 27:11-33). 

이 [속전!!]사상은 인간이 교환물로 그에 상응하는 것을 여호와께 바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속전은 부정직한 교환을 피하기 위해 약간의 추가 몫이 제공되었다. 이런 경우에 무르는 자는 친족이 아니라 재산의 주인이었다.

(c)  셋째로, 가알은 살해당한 사람을 대신하여 "피의 보수자"(RSV '보복자' revenger)가 되는 가장 가까운 친족을 언급하는데 사용되며, 칼 분사 고엘로 나타난다. 

고엘은 구속자이며, 이 구속자는 '피의 보수자'로 불리우는데, 그의 임무는 자신의 친척을 살해한 자를 처벌하는 것이다(신 19:6). 

이 사상은 가까운 친족이 생명에는 생명으로 지불해야 한다는 것임에 틀림없다. 

돈을 지불함으로서 집을 재매입하거나 노예를 속량할 수 있는 것처럼, 친족의 잃어버린 생명은 마땅히 살인자의 그에 상응하는 생명으로 지불되어야 한다. 

친족은 피의 보수자이다. 이런 사형 제도는 피비린내 나는 숙원과 구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고엘은 죄없는 사형 집행인이었으며 따라서 살해되어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보수자'라는 의미로 12회 나온다(민 35:12, 민 35:19, 민 35:21, 민 35:24, 민 35:25, 민 35:27, 신 19:6, 신 19:12, 수 20:3, 수 20:5, 수 20:9).(참조: R. L. Harris).

(d)  넷째로, 가알은 하나님께서 '구속자'로서 '구속하시는 행위'에 대해 사용되었다.

....출 6:6에서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라고 약속하신다(출 6:6, 참조: 시 77:15). 

이스라엘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출 15:13). "하나님이 저희의 반석이시요 지존하신 하나님이 저희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시 78:35).

....이사야서에는 '구속자'라는 단어가 하나님을 지칭하여 13회 나오는데 모두 사 41- 63장에서 사용되었다. 가알은 하나님에 대해 9회 사용되었으며, 사 43:1에서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가알은 애굽으로부터의 구원(사 51:10, 사 63:9)과 바벨론의 포로생활로부터의 구원(사 48:20, 사 52:3, 사 52:9, 사 62:12)을 언급하는데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의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사 41:14)이며 '너희의 왕 이스라엘의 창조주'(사 43:14, 사 43:15)이며 '만군의 여호와'(사 44:6)이며 '야곱의 전능자'(사 49:26)이다. 그의 구원에 참예하는 자는 '구속 받은 자'이다(사 35:9).

....시편에는 종종 영적인 구원이 육적인 구원과 병행되어 나온다. 예를 들면 시 69:18., "내 영혼에게 가까이 하사 구속하시며 내 원수를 인하여 나를 속량하소서". 시 103:2, 시 103:4.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윤택을 잊지 말찌어다...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이 그러하다(참조: EDBW).

[욥19:25,26,27]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25. "And as for me, I know that my Redeemer lives, And at the last He will take His stand on the earth.   *26. "Even after my skin is destroyed, Yet from my flesh I shall see God;   *27.Whom I myself shall behold, And whom my eyes shall see and not another.  

....유명한 구절, 욥 19:25에서 고엘이란 단어는 흠정역성경에서 '구속자' redeemer로 번역되며 어떤 이들은 이 단어가 속죄의 사역을 하러 오실 그리스도의 오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히브리어 "파다"에 의해 더욱 특징적으로 표현될 것이다. 

....이제 욥 19:25에 나오는 이 단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결국에는 욥을 죽음의 먼지에서 구속할 친구이자 친족으로서의 하나님의 사역과 더욱 정확하게 관련된다. 욥 19:26의 난해한 어구, "이 가죽을 벗은 후에"는 다른 모음들과 함께 "내가 깨어난 후에"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NIV 각주와 욥 14:12-14을 참조하라. 욥 14:12-14에서 부활에 관한 욥의 질문은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그를 돌아보시며 욥은 나무처럼 제 2의 성장을 할 것이라는 그의 소망에 의해 절정에 달하게 된다 - 욥 14:14의 할리파는 욥 14:7의 할랍에 대한 응답이다). 어쨌든 욥은 마침내 자기 자신의 눈으로 자기의 고엘이신 하나님을 볼 것으로 기대한다(참조: R. L. Harris). 


..[[사59:20,21]]..*2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21.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9:24]] *23.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24.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미가6:8]]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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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괴수 죄성 지닌 자, 세상살이는 메섹과 게달의 장막에 사는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 탈취와 노략의 쟁투, 곧 환난의 날이라, 오직 구주JC께 부르짖어 그분안에 충만히 거하라.

[시120]   *1.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2.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3.  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   *4.  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숯불이리로다   *5.  메섹에 머물며 게달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   *6.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   *7.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

--이제, 마음 열어, 중심으로 동행하시는 영원반석/성채/산성-보혜사-인도하시며 지키시는 목자, 엘에제르 HS와 동행하라

[시121]  *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3.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7.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보라, 그리스도를 살라, 사람들로 하여금 평강과 형통 허락하시는 네안의 여호와를 감사하며 흠모하고 기리게 하라, 자원하여 나아와 공예배에 함께 참석하기를 원하도록 만들라.

[시122편]  *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2.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3.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4.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5.  거기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   *6.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7.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8.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9.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눈을 [세인의 조소와 멸시로부터]구주 JC께 돌려 중심으로 산 믿음 발휘함으로 앙망하라, 긍휼 구하라, 정복자 그 이상의 존재, , 허락하신 영생안에서 모든 이김을 감사하라

[시123편]    *1.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2.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3.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4.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엘에제르, 임마누엘 여호와께 감사하라...[세인의 약탈-침노와 멸절로부터말씀의 뜻대로 행하시도다.

[시124]   *1.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였으랴   *2.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3.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우리에게 맹렬하여 우리를 산채로 삼켰을 것이며   *4.  그 때에 물이 우리를 휩쓸며 시내가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며   *5.  그 때에 넘치는 물이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 할 것이로다   *6.  우리를 내주어 그들의 이에 씹히지 아니하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7.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8.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지고지선의 진복은 오직 구주로 사는 (선을 행하며 정직하게 동행하는) 기독자들은 여호와의 선대하심/평강형통 깨닫고 감사하라..

[시125편]   *1.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2.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3.  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들로 하여금 죄악에 손을 대지 아니하게 함이로다   *4.  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   *5.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부활-오순절-해방/회복]구속 은혜 기쁨안에서: 섭리의 때, 해방 감격 = 전존재로 누리는 영적 기쁨과 감사, 실제적 형통 [모든 이들이 주께 돌이킴] 회복/부흥 추구 실행의 긍휼 간구

[시126편]   *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2.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3.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솔로몬에게 깨닫게 하신 말씀--친히 집과 가정을 세우며 지키시는 전능-은혜 구주를 높이며 친밀한 하나됨 이루어 따르라, 자랑-기쁨의 가정과 기업된 자녀들이여


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바나..건축하다 ...야긴[그가세우신다]..보아스[그에게 능력이 있다])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샤마르) 아니하시면 파수꾼의(샤마르)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에체브)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형>에디드..<명>야다드:사랑하다/야다 : 알다..연인:도드...여디디야=야디드+ 야 :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솔로몬)에게는 잠(안식, 쉼)을 주시는도다
3.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나할라..맡긴 바 됨/유업, 소유, 기업, 누림)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사카르)
4.  젊은 자(나우르)의 자식은() 장사의(깁보르) 수중의 화살(헤츠) 같으니
5.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아쉬파)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에셰르) 그들이 성문에서(샤아르)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다바르)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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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새번역]시127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솔로몬의 노래
1.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솔로몬의 노래) 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을 세우는 사람의 수고가 헛되며, 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된 일이다.
2.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눕는 것, 먹고 살려고 애써 수고하는 모든 일이 헛된 일이다. 주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는 그가 자는 동안에도 복을 내리신다.
3.  자식은 주께서 주신 선물이요, 태 안에 들어 있는 열매는, 주님이 주신 보상이다.
4.  젊어서 낳은 자식은 용사의 손에 쥐어 있는 화살과도 같으니,
5.  그런 화살이 화살통에 가득한 용사에게는 복이 있다. 그들은 성문에서 원수들과 담판할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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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V]시127
1.  Except the LORD build the house, they labour in vain that build it: except the LORD keep the city, the watchman waketh but in vain.
2.  It is vain for you to rise up early, to sit up late, to eat the bread of sorrows: for so he giveth his beloved sleep.
3.  Lo, children are an heritage of the LORD: and the fruit of the womb is his reward.
4.  As arrows are in the hand of a mighty man; so are children of the youth.
5.  Happy is the man that hath his quiver full of them: they shall not be ashamed, but they shall speak with the enemies in the g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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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27장 (개요)
앞에 나온 시편들이 국가 시나 교회 시로 다양하게 분류되듯, 이 시편은 가정 시다.

이 시편은(우리가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의 아버지에 의해 그에게 주어진 “솔로몬의 시”다. 그는 도성을 지킬 집을 짓고서 그의 아버지를 높이고 있다.

다윗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숭상하게 하고, 그의 섭리에 의지하도록 지시한다. 그것이 없다면 그의 모든 지혜와 보살핌과 근면은 헛되다고 가르친다.

어떤 이들은 이 시편을 솔로몬 자신이 기록했다고 한다. “솔로몬의 노래”처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실로 많은 시를 썼다. 그리고 그것들과 전도서와 비교해 볼 때 세상 관심의 허무성과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보여주는 점에서 양자의 내용은 같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1. 재산에 대해(1-2).
2. 그것을 남겨줄 상속자에 대해(3-5).
.....이 시편을 노래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맡은 일에 대한 성공과 우리의 모든 위로와 즐거움에 대한 축복을 바라면서, 하나님을 우러러보아야 한다. 

그는 모든 피조물을 우리에게 있도록 할 수도 있고 더 이상 없도록 할 수도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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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리에의 신뢰(시 127:1-5)
우리는 모든 이생의 관심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계속 주목하도록 가르침을 받고 있다.

솔로몬은 현자가 되기 위해 부르짖었고, 그래서 [사람으로서] 자신의 이해와 예견에 의존하기 쉬웠다. 

그러므로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좀더 높이 바라보도록 [여호와를 참되게 알고 사랑하며 섬기며 의뢰하도록] 가르치며, 그의 모든 기업에 하나님을 모시도록 가르친다. 

솔로몬은 [가업을 세우고 지키기 위해] 바쁜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다윗은 그에게 신앙의 지도 아래 그의 기업을 경영하는 법을 지도했다.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을 가르칠 때 그들의 상황과 경우에 따라 훈계를 적절히 해야 한다. 

[그 모든 일에서]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Ⅰ. 가정의 문제와 사업에서, 심지어는 왕의 가족이나 왕의 가정에서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심보다 더 안전한 것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에 의지해야 하며, 우리 자신의 재간에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1. 가정을 세우는 데.

---“여호와께서” 그의 섭리와 축복으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아무리 정교하다 할지라도 “헛되다.”

===우리는 그것을 실질적인 집이라 생각할 수 있겠다. 

여호와께서 건물과 그 가정사의 근본동기 자체를 축복하지 아니하시면 집을 세우는 것이 인간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 

그것은 하늘을 공격하려고 시도한 바벨론의 건축이나 저주 아래 여리고를 건설한 히엘이나 다를 바 없다. 

===만일 그 모양과 설계가 교만과 허무한 것에 그 뿌리를 둔 채 그대로 놓이고, 그 기초가 압박과 불의에 놓인다면(합 2:11-12), 하나님은 확실히 거기에 세우시지 않는다. 

아니, 하나님께 인정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의 축복을 기대할 아무런 이유도 없고, 그의 축복 없이는 모든 것이 다 허사다. 

오히려 그것이 가정을 형성하는 데 비천하다고 이해될지도 모른다.

===인간들은 유익한 결연과 직무, 고용과 구매에 의해 이것을 행하려고 노동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주장하사 가정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모든 것이 헛되며, “가난한 자들을 진토에서 일으키시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허사다. 

가장 잘 구성된 설계도 하나님께서 성공적으로 거두시지 않는다면 무너질 것이다(말 1:4 참조).
2. 가정 혹은 도성의 안전 돌봄과 지킴에 대해(바로 시편 저자가 특별히 언급하는 것이다).

---성의 파수꾼이 하나님 없이 지킬 수 없다면, 집에 있는 선한 사람도 그의 집이 무너지는 것을 구할 수 없다. 

“여호와께서” 불과 적으로부터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성을 돌아보며 그 성벽을 따라 순회하는 “파수꾼”이 졸거나 잠들지 않고 “경성함이 허사다.”

===맹렬한 불길은 볼 수 있을지 몰라도, 즉각 발견한 불행은 막을 수 없다. 

파수꾼이 살육 당하거나 수많은 돌발 사건에 의해 도성이 배반당하거나 상실될지도 모른다. 

그러한 사태는 가장 주의 깊은 파수꾼이나 가장 사려 깊은 통치자도 미연에 방지할 수 없다.
3. 가정을 부요-형통-번성케 함에.

---이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며, 생각해야 할 일이지만, 사람이 행복하게 될 어떤 산물보다도 섭리의 은총이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눕는 것이 헛되도다. 그리하면 세상의 부를 열심히 추구하여 너희 육체의 원기 회복도 부정하는 것이 된다.”

===보통 일찍 일어나는 자들은 늦게 눕는 일에 관심하지 않으며, 늦게 눕는 자들도 일찍 일어나려고 자신들을 쉽게 설복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 열중해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그들의 관심사에 몰두하느라 잠을 줄인다. 

그리고 그들은 휴식에서는 물론 음식에서도 거의 위로를 얻지 않는다. 그들은 “수고의 떡을 먹는다.”

===얼굴에 땀을 흘리면서 빵을 먹는다는 것이 우리의 금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보다 더하다. “그들은 일평생을 어두운 곳에서 먹는다”(전 5:17). 

그들은 끊임없이 근심에 가득 차 있고, 위로를 쓰디쓰게 하며, 그들의 생을 짐으로 여긴다. 이 모든 일을 돈을 얻기 위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번영하게 해주시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사다.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전 9:11).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를 가장 사랑하는 자들은 이렇게 수고하지 않아도 그들의 마음을 편케 하며, 매우 안락하게 살아간다

...[땅에 거하는 경건자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재물의 풍부함보다 낫다]

솔로몬은 “여디디야”라고 불렸다.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었다”(삼하 12:25). 그에게 왕국이 약속되었다. ...[주님은 그 뜻하신 말씀 그대로 이루신다]

그래서 압살롬이 다윗왕에 대해 반역할 그 때, 압살롬이 일찍 일어나 백성들을 감언이설로 꾄 것이 허사였으며, 아도니야가 그런 방식으로 동요해서 솔로몬왕에 대해 반역을 꾀함으로써  “내가 왕이 되리라”고 말하는 것이 헛되었다. 

솔로몬은 평안하게 앉아서 “여호와의 사랑하심을 받았고”, 하나님은 그에게 잠을 주시고, 왕국도 역시 주셨다.
(1)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헛되고 쓸모 없다. 

.....우리는 그것을 취할 때도 쓸데없이 걱정하며 헛되게 바라며 걱정한다(학 1:6, 9).
(2) 육체의 잠은 그의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의 잠이 안전하며(4:8) 달콤한 것은(렘 31:25-26) 그의 인자하심을 힘입은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 것같이 우리에게 잠을 주신다. 

그는 잠과 함께 우리에게 그를 경외하며 눕는 은총을 주신다(우리의 영혼이 그에게 돌아가며, 그에게서 우리의 휴식을 취한다).

.....우리는 그와 함께 고요한 중에 깨어 잠을 취함으로써 얻은 원기를 그를 섬기는 데 사용한다.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 

즉, 그들에게 마음의 고요와 만족을 주시며, 현재의 안락한 즐거움과 미래의 안락한 기대를 주신다.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을 많이 갖든지 적게 갖든지 평안하게 될 것이다.
Ⅱ. 가족의 증가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것을 나타내주고 있다.
1. 자녀들은 “하나님의 기업”이다(3절).

---만일 자녀들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그들을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창 30:2).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며, 또는 걱정이 된다.

===솔로몬이 율법에 반해 많은 아내를 두었으나 그가 가진 아들이 한명에 지나지 않는 것을 본다. 

===여호와께로부터 기업으로 자녀를 사모하는 자들이 한 아내에 대한 법적인 결혼에 의해 자녀를 주시기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자녀를 낳아야 하기 때문이다(말 2:15). 

“어찌하여 하나를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저희가 음행하여 번성하지 못하리라.” “자식은 기업이요, 상급이로다.” 

그렇게 여겨져야 하며, 그들이 축복이지 짐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를 신뢰한다면 입을 보내신 자가 고기를 보내실 것이기 때문이다.

===오벧에돔은 여덟 아들들을 가졌다. 왜냐하면 그가 언약궤를 영접했으므로 여호와께서 축복해 주셨기 때문이다(대상 26:5). 

자녀들은 여호와께로서 온 것임은 물론 그를 향한 기업이다. 그들은 “네가 나를 위하여 낳은 자녀”(하나님의 말씀)들이다(겔 16:20). 

자녀들이 그에게서 한 세대로 정해질 때 우리의 가장 큰 영광이요 위로가 된다.
2. 자녀들은 선한 기업이며, 가족에게 큰 도움과 방어가 된다....[하나님 나라, 복음교회의 성도, 자녀의 증다는 영원한 젊은이, 엘 깁보르이신 구주께 축복이요 자랑이다!!
]

---젊은 자의 자식은, 즉 젊은 부모들에게 태어난 자식은, 자신의 안전과 유익을 위해 자기에게 있는 화살을 사용할 줄 아는,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다.” 

그들은 가장 강하고 가장 건강한 자식들이다. 그들은 저희의 봉사가 필요할 때 부모들을 섬기도록 성장할 것이다. 

그들은 부모와 가족에게 크게 선한 도구가 된다. 그들은 적들에 대해 방어를 튼튼히 할 수 있다. 

===수많은 자녀들이 있는 가정은, 우리가 상상하건대, 크기가 다른 화살의 전통과 같다. 그러나 모두 다 때에 따라 쓰인다. 

서로 다른 재능과 경향을 가진 자녀들은 여러 가지 길로 가족에게 도움이 된다. 많은 자식을 가진 자는 “성문에서 그 원수와” 담대하게 판단해 말할 것이다. 

그는 젊은 기백을 가진 많은 자손과 매우 열심 있고 신실한 자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싸움에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삼상 2:4-5).
===다음의 사실을 고찰해 보자. “젊은 자의 자식은 수중의 화살과 같다.” 

그들은 신중하게 표적, 즉 하나님의 영광과 그 세대의 섬김을 향해 똑바로 겨냥할 수 있다. 

그러나 후에 그들이 세상 밖으로 갈 때 손에서 나간 화살이 된다. 그때에는 너무 늦어 그들을 구부릴 수 없다. 

그러나 손에 있는 화살은 너무도 자주 머리가 희어진 경건한 부모들에게 부단한 슬픔이 되고, 마음에 화살이 된다. 그러한 연고로 부모들은 슬픔으로 죽어 가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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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B;(1129, 바나) 세우다, 짓다, 건축하다
바나(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세우다, 짓다, 건축하다 build'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370회 이상 나오며, 칼형과 니팔형으로만 사용되었다.
바나는 가옥을 건축하는 것뿐 아니라, 가문을 세우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 단어는 '자손을 가지다(번성케 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a)  바나는 제단(창 13:18, 창 22:9, 창 35:7), 집(창 33:17, 신 8:12), 성읍(출 1:11, 수 24:13), 성전(왕상 6:2-36, 왕상 8:13), 산당(왕상 14:23, 왕하 17:9), 성채(대하 17:12, 대하 27:4), 망대(대하 26:9, 대하 26:10), 문(대하 27:3), 성벽(대하 27:3, 대하 32:5, 느 4:6), 흉벽(전 9:14, 렘 52:4), 거리(단 9:25), 바벨탑(창 11:6-8)을 건설(축)하거나 쌓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b)  동사 바나의 신학적 의미는 이 동사가 처음에는 하나님을, 그리고 다음에는 사람을 주어로 취하여 사용되었음을 고찰함으로 이해할 수 있다.
① 바나는 건축가로서의 하나님에 관해 묘사한다. 여호와는 성경에서 창조 질서와 역사 질서의 건축업자로 나온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서 취한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고 하는 대목에서(창 2:22) 비유적으로 인간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의 마지막 창조 행동에 대해 사용되었다. 그 외의 경우에 성경에 나오는 시인들은 질서 잡힌 우주를 여호와께서 계획하여 지으신 건물로 묘사한다(암 9:6, 참조: 시 104:2-3).
여호와, 곧 창조질서의 지혜롭고, 능력 있고 좋은 건축가는 또한 세속사의 주권자요 도덕적 건축 청부업자이기도 하다. 그의 역사에 대한 주권적 지배는 여리고를 재건하는 자는 장자를 잃게 된다는 여호수아의 예언에 나타나 있다(수 6:26). 벧엘 사람 히엘은 800년이 지난 후에 이 끔찍한 예언을 이루었다(왕상 16:34). 역사의 설계자이신 하나님은 그 자신의 왕국을 지으면서 악한 자의 건축물을 파괴하신다. 불경한 자의 업적들을 파괴하시는 그의 지배에 대하여, 욥은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모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 그가 헐으신즉 다시 세울 수 없고"(욥 12:13-14a). 그의 의로우신 완성 때문에, 시편기자는 다음과 같이 예견하였다: "저희[악한 자들]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시 28:5). 심판 때에, 하나님은 불경한 자들이 결코 재건할 수 없도록 그들의 도시들을 파괴하실 것이다. 이것이 가나안인들(신 13:16, H17)과 두로(겔 26:14)의 운명이었다.
이사야는 송영으로 다음과 같이 외쳤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 외인의 궁성으로 성읍이 되지 못하게 하사 영영히 건설되지 못하게 하셨으므로"(사 25:1-2). 한 마디로 말해서, 불의하게 세워진 것은 불안정하며 멸망할 것이다. 지배자들이 시온을 유혈로 짓고 예루살렘을 폭력과 불법으로 지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폐허가 될 것이며(미 3:10), 여호야김은 불의와 불법으로 광대한 집을 지었기 때문에 완고한 당나귀처럼 매장당할 것이다(렘 22:13-19, 참조: 합 2:12).
여호와는, 이스라엘이 새로 건축한 집을 그들이 미처 사용하기도 전에 적에게 넘겨줌으로써 여호와께서 가나안인들에게 가한 운명과 똑같은 운명을 자기가 선택한 도시도 당하게 하셨다(신 28:30, 습 1:13). 비록 에돔같은 나라들이 그의 명령을 거스려 세우고자 결심하다 하더라고, 그들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말 1:4).
그렇지만 그의 주권이 그의 의로운 목적에 따라 선민을 통해서 그의 왕국을 세운다고 단언하는 본문들도 있다. 여호와께서는 만약 여로보암 1세가 여호와의 법령을 지킨다면, 견고한 집을 세우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왕상 11:38). 그러나 다윗과는 달리, 여로보암 1세는 여호와의 신실한 종으로 행동하지 못했다.
그의 충성스런 제사장들과 왕들의 집을 세우는 외에, 그는 또한 시온과 성전의 건축업자이기도 하다. 심지어 모세 시대에도, 하나님은 제단들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해 지시하셨다(출 20:25, 신 27:5). 이스라엘의 황금기인 통일 왕국 시기에 하나님은 자기의 집을 지을 시기와 장소 그리고 사람을 선정하셨다(왕상 8:16-20). 다윗은 솔로몬에게, 여호와의 축복을 받아 그가 그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재료와 장인들을 얻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대상 22:11, 대하 2:7 이하, H 6). 따라서 그가 자기 이름을 둘 곳을 택하기 위해 이 민족을 창설하셨을 때, 그는 자기의 약속을 성취하신 것이다(신 12:5).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이 건물을 짓는 것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상세하게 지시되어 있다(참조: 왕상 6장, 겔 40장, 느 3장).
더구나, 그가 다윗과 시온의 집을 잠시동안 헐어버림으로써, 그들을 징벌하시기는 하지만, 구원을 가져오시는 그의 목적이 영원히 망쳐질 수는 없다.
예레미야가 "건설하며 심다"라는 합성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합성어가 하나님의 파괴적인 심판행위 뒤에 나오므로,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다시 세우신다"는 것을 나타내준다(렘 1:10, 렘 18:7-10, 렘 42:10).
이 백성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리라는 여호와의 약속은 인상적이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렘 31:4, 참조: 렘 24:6, 렘 33:7). 이런 단어 쌍의 비유적인 용법에서 주어는 항상 여호와이며, 예레미야서에서 이것이 나올 때, 목적어는 언제나 한 무리의 사람들, 주로 이스라엘이다. 이 단어 쌍은 구원사와 결부되며 여호와의 염려뿐만 아니라 그의 주도권을 강조한다. 예컨대 그는 고레스를 보내어 성전을 재건하게 하셨고(대하 36:23, 스 1:2-4) 다윗의 집을 재건할 것을 약속하셨다(암 9:11). (아마도 우주적인 구원을 가져오는 데에 이스라엘을 이용하려는 그의 의도에 대한 하나의 암시로서, 그는 첫번째 성전을 짓는 데에 뵈니게인들을 이용하시고, 또 두 번째 성전을 짓는 데에 할례 받지 않은 고레스를 이용한 것 같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므로, 그의 축복 없이 건물을 짓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시 127:1). 모든 집과 도시들은, 여호와께서 선민들에게 그들이 짓지 않은 도시와 집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시고(신 6:10 이하, 수 24:13) 배반자의 도시들을 멸하겠다고 위협하실 때(신 13:16, H 17) 보여주신 것처럼, 그의 재량권에 달려 있다. 여호와가 없으면, 공격 장비와 방어 공사도 아무 소득이 없다(겔 17:17, 참조: 겔 21:22, H 27). 다윗은 하나님을 크게 의지하여 예루살렘 성벽을 지었다(시 51:18, H 20).
② 바나는 건축가로서 인간에 관해 묘사한다. 사람이 만든 건물들은 하나님의 성품이나 목적에 부합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에 의해 선한 것으로 판단되기도 하고 악한 것으로 판단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노아(창 8:20), 족장들(창 12:7-8, 창 13:8, 창 13:18, 창 22:9, 창 26:25, 창 35:7). 모세(출 17:15, 출 24:4), 여호수아(수 8:30)가 쌓은 제단들을 받으셨다. 반대로 그는 산당과 아론(출 32:5), 솔로몬(왕상 11:7), 르호보암(왕상 14:23) 등이 쌓은 이방신 제단들을 거부하셨다.
바나의 목적어로 가장 자주 나오는 도시들도 똑같은 기준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시온에 관한 노래는 기뻐하시지만(시 122:3), 가인이 지은 도시(창 4:17)나 앗수르의 니느웨(창 10:11)는 기뻐하지 않으셨다. 비록 두로가 유능한 장인들에 의해 이룩된 아름다운 도시로 유명하긴 했지만(겔 27:3 이하), 죄 때문에 멸망하고 말았다(겔 27:26 이하). 비록 사마리아에는 다듬은 돌로 만들어지고(암 5:1, 참조: 사 9:10, H 9) 상아로 장식된(왕상 22:39, 암 3:15) 집들이 있었지만, 이 곳도 두로와 똑같은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건축 활동은 자주 하나님의 구원 활동과 관련되곤 한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시온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저장 도시들과 다른 요새지들도 세웠다(대하 8:5). 에스겔은 이스라엘이 다시 집을 세울 날을 예기하였으며(겔 28:26, 겔 36:10, 겔 36:33, 겔 36:36)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종들이 또 다시 유다의 도시들을 세울 것이므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늘과 땅에게 명령하였다(시 69:35, H 36). 낭독자는 그들 스스로 예루살렘 주변에 동네를 세운 느헤미야 시대의 노래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한다(느 12:29).
이스라엘 역사에서 집들은 그 곳에 사람이 정착하게 되었을 때 중요시되었다. 야곱이 가축을 위해서 집과 오두막을 지었다고 하는 첫 번째 언급은 그가 밧단아람에서 되돌아와 에서와 헤어지고 난 뒤에 나온다(창 33:18). 모세는 백성들이 그 땅에 정착할 것을 예상하여, 그들의 평평한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라고 지시하였고(신 22:8), 그는 새 집을 짓고 낙성식을 하지 못한 사람의 병역을 면제해 주었다(신 20:5).
바나는 자녀를 출산함으로써 가계를 세우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라헬과 레아는 결혼 축복에서 이스라엘의 집을 세웠다고 언급된다(룻 4:11). 수혼은 "집"이나 가계를 세우기 위해 제정된 것이다(신 25:9). 창 16:2, 창 30:3에서는 니팔형이 사용되어 '자손을 얻는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c)  바나는 비유적으로, 안전의 표시(겔 28:26, 겔 11:3), 사치, 호사(전 2:4, 렘 22:14), 영구한 거주(왕상 2:36, 렘 29:2, 렘 29:28), 지혜의 집(잠 9:1), 회복(렘 12:14, 렘 12:16), 회개하는 자의 흥함(욥 22:23), 악인의 번영(말 3:15)을 나타낸다.
(참조: BDB; TBC; B. K. WALT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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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m'[;(5998, 아말) 힘써 일하다, 수고하다
아말(동사)은 기본어근이며, '일하다, 노동하다, 힘써 일하다, 수고하다, 고생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1회 나오며, 칼형으로만 사용되었다(시 127:1, 잠 16:26, 전 1:3, 전 2:11, 전 2:19, 전 2:20, 전 2:21, 전 5:16, 전 5:18, 전 8:17, 욘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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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m'v;(8104, 샤마르) 지키다, 준수하다, 보존하다, 감시하다, 주의하다
샤마르(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지키다, 준수하다, 보존(간수)하다, 감시하다, 주의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470회 나오며, 칼, 니팔, 피엘, 히트파엘형으로 사용되었다.
(a)  샤마르의 기본적인 개념은 '큰 주의를 하여 행한다'를 의미한다.
이 기본적인 개념은 이 동사의 변형된 다양한 의미들 저변에 깔려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동사가 다른 동사들과 결합되면 그 의미는 '면밀하게 혹은 부지런히 행하다'가 된다. 

예컨대 잠 19:8에서 "명철에 주의하다"(한글개역 "명철을 지키는"), 신 11:32에서 "모든 규례와 법도를 너희는 행하도록 주의하라 즉 주의 깊게 수행하라(한글개역 "지켜 행할찌니라")", 그리고 민 23:12에서는 주의 깊게 말하다 혹은 충실하게 말하다.
(b)  샤마르는 언약 의무, 율법, 법규, 등에 '면밀하게 주의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창 18:19에서 보면 아브라함은 그의 자식들에게 여호와의 도를 지키도록 즉 하나님의 도에 조심스럽게 유의하도록 명령해야 한다(출 20:6, 레 18:26, 신 26:16, 겔 11:20).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은 단지 이론 만의 문제나 마지 못해 추종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들을 행하라'는 표현이 자주 첨가되는데, 겔 37:24에서 그 실례를 찾아볼 수 있다. 

잠 4:21은 그것들을 마음에 지키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이 표현은 율법 등을 지키는 것 뿐만 아니라 제사장 직분과 같은 성직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도 사용된다(민 18:7).
(c)  샤마르는 '돌보다, 보호하다'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정원(창 2:15), 양떼(창 30:31), 집(삼하 15:16) 등과 같은 것들을 지키거나 돌보는 것이 포함된다. 

또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지키는 그룹(창 3:24)이나 문지기(사 21:11)나 파숫꾼(아 5:7)과 같이 침입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도 이 의미의 범주에 포함된다. 

사람에 대해서도 이러한 의미가 적용될 수 있다.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 4:9)라고 묻는다.
다윗은 시 34:20, 시 86:2, 시 121:3-4, 시 121:7 및 기타 구절들에서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하심에 대해 자주 말한다. 

욥 2:6에서 하나님은 사단에게 욥의 생명을 건드리지 말라고 명할 때 샤마르를 사용하신다.
또한 다윗은 요압이 압살롬과 싸우러 가기 전에 그에게 비장하게 타이르기를 "나를 위하여 압살롬을 지키라"(한글개역 "해하지 말라", 삼하 18:12)고 했다.
흔히 이 동사는 인격의 훈련, 즉 개인의 생활과 행동 면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에 대해 사용된다. 

시 39:1에서 자기 행위를 조심하는 것, 잠 13:3에서 입을 조심하거나 지키는 것을 묘사한다.
(d)  샤마르는 '중시하다', '...에 유의하거나 주의하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사람이 하나님이나 기타 다른 것들에게 주의하거나 경의를 표하는 태도를 기술한다. 

예컨대 호 4:10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유의하기를 그만두었다(한글개역 "여호와 좇기를 그쳤다")고 한다. 

시 31:6은 헛된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을 언급한다. 

또 다른 관련 용법에서 시 130:3에서 기자는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진실로 주의하실진대) 누가 서리이까?"라고 한다(욥 13:27). 

이 단어는 삼하 11:16에서처럼 적대한다는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고 슥 11:11과 시 59:9에서처럼 기대한다는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다.
(e)  샤마르는 '보존하다' preserve, '축적하다' store up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에돔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분노를 계속하여 품고 있는 것(암 1:11)이나 지식을 축적하는 것(말 2:7). 이 단어가 창 41:35과 삼상 9:24에서는 음식에 대하여, 출 22:7에서는 귀중한 어떤 물건에 대해 사용되어 있다.(참조: J. E. Hartley;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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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q'v;(8245, 샤카드) 지켜보다, 감시하다, 경계하다, 깨어있다.
샤카드(동사)는 기본어근이며, '깨어있다 wake, 지켜보다, 지키다, 망보다, 경계하다 watch'를 의미한다.
샤카드는 페니키아어와 시리아어에 동족어를 가지고 있다. 

이따금 샤카드는 샤마르(rm'v; , 8104: 지키다, 경계하다)와 의미가 일치하며, 또한 함께 사용되기도 한다. 

샤마르(rm'v; , 8104)는 면밀한 주목과 보호를 강조하는 반면에 샤카드는 기본적으로 경계하는 태세를 강조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2회 나오며, 칼형으로만 사용되었다.
(a)  '~을 지키다, 지켜보다'(유익을 위하여 렘 31:28, 렘 44:27, 이루거나 임하게 하기 위하여 렘 1:12, 단 9:14, 인간이 죄를 범할 기회를 사 29:20, 먹이를 잡기위해[비유] 렘 5:6, 지혜의 문에서 '기다리는' 사람에 대해 잠 8:34) = '감시하다, 경계하다'(욥 21:32, 스 8:29, 시 127:1).
(b)  '깨어 있다, 잠자지 않고 있다'(시 102:8). (참조: BDB; TWOT).
--일어나다----
!Wq(6965, 쿰) 일어나다, 일어서다, 세우다
쿰(동사)은 기본어근이며, '일어서다, 일어나다, 일으키다, 세우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630회 나온다.
이 어근은 본질적으로 '일어선다'는 신체적 행위를 가리킨다. 파생어의 의미들에는 그러한 행동의 결과가 내포된다. 즉 '서 있다'는 뜻이 된다. 

또한 이 어근은 상징적으로 일어나거나 서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이와 동일한 용법들이 우가릿어에서 등장한다(참조: UT19: no. 2214). 본 어근은 1,085회 출현한다.
동사 쿰은 여러 그리고 다양한 문맥에서 나타난다. 근본적으로 이 단어는 엎드린 위치에서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예: 수 3:16). 

수많은 용례에서 이 단어는 예비적 행위를 가리키며 특히(예외 없이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음) 여행에 따른 준비 행위를 가리킨다(신 17:8 등등). 

그러므로 창 27:19의 "일어나 앉아서(!)"는 단순히 "자 앉으세요"를 의미한다. 

본 어근은 존경을 보이는 행위를 내포할 수도 있다. 발람은 발락에게 "일어나" 하나님의 말을 받으라고 말한다(민 23:18).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노인들 앞에서 "일어서라"고 명한다(즉 노인을 공경하라, 레 19:32). 

이러한 강조 사항이 종교 의식에까지 이르고 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 모든 사람이 자기 장막 문에 "서서" 경배하였는데(출 33:10) 이는 하나님께 합당한 경의를 표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때 열왕들조차도 일어설 것이다(경배한다는 말과 대구를 이룸, 사 49:7). 

나아가서 종교 의식적 용법에는 거룩한 물건들과 성역들을 세우고 바치는 행위가 포함된다(신 27:4). 

하나님은 우상들을 세우지 말라고 명하신다(레 26:1). 진정 종말에 그는 이 계명이 성취되게 하실 것이다(사 27:9). 

이 동사는 또한 직무적 용법을 가지고 있다. 즉 이 동사가 특정 직무수임에 적용된다. 

예를 들면 종족의 종교적 우두머리(창 37:7), 선지자(신 34:10), 사사(삿 10:1) 등이다. 

이러한 직무들은 세습적으로 계승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타와 구별된다(이 단어가 제사장 직무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이 단어가 법적 용법으로 쓰일 때 재판에서의 증언의 유효성을 내포한다(신 19:15). 

이와 관련된 한 용법에서는 소유권 이양의 유효성을 의미한다(창 23:17). 

하나님의 말씀이 설 것이라는 표현도 아마 이러한 법적 개념을 반향할 것이다(민 23:19, 시 40:8, 기타). 

이 용법은 계약과 관련된 문맥에서, 그리고 특히 하나님의 언약을 다룬 문맥에서 종종 등장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언약을 인간에게 알리시며(창 9:11) 그가 친히 그것이 성취되게 만들 것이라고 선언하신다(창 17:19). 

그는 자기의 언약을 세운(종종 '쿰'의 히필형) 여러 역사적 순간들을 기억하신다(출 6:4). 

언약적 축복이 인간의 순종에 달려 있음을 그들이 기억해야 된다고 하나님은 확언하신다(신 28:9). 

그러나 그 축복이 인간의 공로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님을 그들은 결코 망각해서는 안된다(신 9:5). 

베리크(언약 covenant)와 결합시켜, 카라트(자르다 cut)와 헤킴을 상호 대용한 것은 각기 상이한 자료 J/E와 P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양자 간의 어의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하나는 언약을 '개시하다' initiating 또는 '체결하다' making(tr'K; , 3772)를 뜻하며 또 하나는 언약을 '확정하다, 확립하다' confirming or establishing(!yqije)를 뜻한다. 

이스라엘 역사 전체에 걸쳐 이러한 상호 관련 주제들이 등장하며 경건한 사람들은 언약 수행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신실성을 증언하고 있다(예: 왕상 8:20). 

궁극적으로 인간의 모든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으나 하나님의 언약은 설 것이다. 

하나님의 일시적 언약들은 그의 영원한 언약을 계시하는 단계들이며 이 영원한 언약은 파기할 수 없는 그의 계획(사 46:10)과 목표(사 14:24)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뜻(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속에서 가장 완벽하고 가장 완전하게 표현되었다(예: 갈 3장, 히 9장).
마지막으로 이 단어는 군사적 문맥에서 자주 사용된다. 

이것은 전쟁을 위한 준비(삿 7:15), 전쟁 수행(출 2:17), 전쟁의 승리(또는 분투노력의 성공, 수 7:2)를 가리킨다.
때로 쿰이 예상되는 또는 실현된 승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전투에 참가하실 때 승리는 확실하다. 따라서 이 단어는 그의 창조적 행위, 구원 행위, 심판하는 행위를 뜻한다. 

경건한 사람들은 자주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위하여 일어나실 것을 간구하였다(민 16:35). 

이점은, 이러한 승리 개념이 직접 표출되지 않은 수많은 시편 본문들을 밝혀준다(시 3:7, H8, 시 76:9, H10, 시 35:2). 

하나님이 어느 편에 서게 될 때 그는 대적에게 승리한다. 하나님께 대항하는 자들은 즉각적(시 89:43, H44), 궁극적(시 1:5) 패배를 당하리라는 경고가 주어진다.
----눕다---
bv'y:(3427, 야샤브) 앉다, 머무르다, 살다, 거주하다 = 거하다 abide.
야샤브(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앉다, 머무르다, 살다, 거주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080회 나오며, 칼, 니팔, 피엘, 히필, 호팔형으로 사용되었다.
1. 칼형에서
(a)  '앉다, 내려 앉다'(창 27:19, 욥 2:13, 시 9:5, 창 21:16).
사사나 왕(시 9:5, 사 10:13), 매복한 자(욥 38:40, 렘 3:2), 적(삼상 13:16), 애곡자(욥 2:13, 사 47:5), 게으른 자(사 30:7, 렘 8:14)에 대해 사용되었다.
(b)  '머무르다, 체류하다'(창 24:55, 출 24:14, 삿 19:4, 삼상 16:8 등).
(c)  '거주하다, 살다, 거처를 정하다'(창 4:10, 창 4:20, 시 107:10 등, 분사로, '거주자, 거주민이나 주민' 창 19:25, 삿 1:21).
2. 니팔형에서
'거주하다'(출 16:35, 렘 6:8, 렘 22:6, 겔 12:20, 겔 26:19 등).
3. 피엘형에서
(a)  '두다, 정하다, 치다' (겔 25:4).
4. 히필형에서
(a)  '앉게하다'(왕상 2:24, 대하 23:20, 욥 36:7, 왕상 21:10 등).
(b)  '살게하다'(삼상 30:21),
(c)  '거하게 하다'(창 47:6, 창 47:11, 레 23:43, 삼상 12:8, 왕하 17:6, 호 12:10, 사 54:3, 겔 36:33).
4. 호팔형에서
(a)  '살게되다, 거하게 되다'(사 5:8, 사 44:26, 겔 35:9)(참조: BDB; Gesenius).
-----수고----
bx,[,(6089, 에체브) 상처, 수고, 고통, 그릇
1. 에체브(명남)는 아차브(bx'[; , 6087: 괴롭히다, 고통을 주다)에서 유래했으며, '아픔, 고통, 상처, 수고, 고생, 슬픔'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7회 나온다.
(a)  '상처, 아픔', 잠 15:1에서 가정을 상하게 하거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상처에 대해 사용되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b)  '수고, 고생'(잠 14:23, 시 127:2, 잠 5:10)
(c)  '고통', 창 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2. 에체브(명남)는 아차브(bx'[; , 6087: 모양을 만들다)에서 유래했으며, '그릇 vessel'을 의미한다.
렘 22:28에서 '파기'는 고니아(여호야긴)을 가리킨다: "이 사람 고니야는 천한 파기냐 좋아하지 아니하는 그릇이냐 어찌하여 그와 그 자손이 쫓겨나서 알지 못하는 땅에 들어 갔는고".
(참조: BDB; HELOT).
----사랑하는 자-----
dydiy](3039, 예디드) 사랑하는 be loved   ...야다=알다(사랑하다)....도드:연인
예디드(형용사)는 사용되지 않은 어근 야다드(dd'y:: 사랑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사랑하는 be loved, 사랑스러운 lovely'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9회 나온다.
예디드는 주로 여호와의 사랑을 크게 받는 사람들로서의 이스라엘(혹은 유다) 민족과, 개인들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사 45:1의 '사랑의 노래'(제목)는 임금, 곧 메시야(히 1:8, 히 1:9)에 관해 노래한다. 

하나님의 이런 사랑은 사랑 받는 백성들에게 보호(베냐민, 신 33:12)와 번영(시 127:2)을 가져온다. --->평강-형통-번성/번영/창대함

이 사랑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이 불순종하고 불신실하였을 때조차,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항상 신실하신 이유를 설명해 준다(렘 11:15).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자기의 말을 듣고 심판에서 구해주기를 간구하는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이런 사랑의 기초 위에서이다(시 60:5[7], 시 108:6[7]).
이사야는 여호와, 곧 불충실한 이스라엘이라는 포도가지를 손질하는 분을, 여호와에 대한 자기의 큰 사랑을 나타내면서, 자기의 사랑하는 자로 묘사한다: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사 5:1).
시편 기자는 성전 안에 있는 거처들을 '사랑스러운 곳'(혹은 "사랑하는 곳"), 즉 그가 즐거이 여호와께 예배 드리는 곳이라고 기뻐한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시 84:1).(참조: R. H. Alexander; BDB).
----잠----
hn:ve(8142, 셰나) 잠 sleep
셰나(명여)는 야셴(@vey: , 3462: 자다)에서 유래했으며, '잠 sleep'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3회 나온다.
(a)  잠은 축복이다. 

잠은 휴식을 주며 원기를 회복시켜 준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고(시 127:2), 지혜를 쫓는 자(잠 3:21-24)와 노동하는 자에게(전 5:12) 이로운 잠(단잠)을 주신다. 

즐거운 꿈을 꿀 때 잠이 달다(렘 31:26).
(b)  부자는 배부름 때문에 이런 의로운 잠을 자지 못하여 원기 회복을 누리지 못한다(전 5:12 하반절). 

그리고 또 잠 못 이루는 원인은 과다한 일(창 31:40, 전 8:16), 악의 충동(잠 4:16), 번민이나 걱정(단 2:1), 불면증(에 6:1)이다.
인간은 잠자기를 좋아해서는 안 된다. 잠자기를 좋아하는 것은 빈궁의 원인이다(잠 6:9, 잠 6:10, 잠 20:13, 잠 24:33).
잠은 또한 대적에게 유리하게 하는 기회를 제공해 줄 수도 있다. 삼손이 자고 있는 동안에 결국 힘을 잃었다(삿 16:3, 삿 16:16).
(c)  비유적, 상징적 표현으로서 육체의 죽음(욥 14:12), 멸망(시 76:5, 렘 51:39, 렘 51:37), 덧없는 인생(시 90:5)에 대해 사용되었다.
(d)  야곱이 잠이 깨서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했다(창 28:6). 스가랴는 잠잘 때 천사가 와 깨웠다(슥 4:1).(참조: BDB; TWOT).
----기업----
hl;j}n"(5159, 나할라) 상속, 재산, 유산, 소유 [기업]
나할라(명여)는 '상속재산, 유산 inheritance, 물려받은 것 heritage, 소유 possession'를 의미한다. 

나할라는 기본적으로 유산으로 전해지는 것이나 전해질 수 있는 것(예: 창 31:14), 옛적 권리에 의해 어떤 사람의 소유가 되는 것, 그리고 영구적으로 어떤 사람의 소유인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근접한 동의어는 모라샤(소유, 유산)가 있다. 그리고 때때로 점유된 세습재산, 소유를 뜻하는 예루쉬샤, 분깃, 할당된 부분을 의미하는 헬렉, 매입한 소유물을 뜻하는 미크네, 소유, 토지, 소유로 차지한 것을 의미하는 아훗자 등이 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20회 나온다.
나할라를 연구함에 있어 꼭 수반되는 것은 유산(기업)에 대한 성경의 광범위한 가르침이다.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에게 주시는 기업, 땅에 대한 사회적, 법적 규정들, 여호와의 소유, 경건한 자의 기업/유산으로서의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요약해 보라.
온 땅은 창조주에게 속한다(시 47:4, H5). 그리고 창조주가 만물을 다스리므로 이스라엘은 그의 특별한 소유(신 32:8 이하, 출 15:17), 즉 왕들에게 어울리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신 31:20), 참된 구원을 상징하는 곳(신 12:9, 참조: 히 3:17-19, 히 4:1-3, 누아흐)을 받았다. 이리하여 성경은 하나님을 위대한 왕(삿 8:23, 삼상 12:12), 그의 땅을 인간에게 주권적으로 나누어 주시고(참조: KD, 사 49:8, 사 57:13) 그의 신민에게 개인적으로 봉사할 의무를 지우는 영주(신 32:8)로 묘사한다. 

드보(de Vaux)의 주장대로, 고대 근동에 널리 퍼져있던 봉건적 개념은 이스라엘에서 신학적인 면으로 전이되었다(AI, p. 164). 

따라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의 율법에 순종하느냐에 따라서(예: 민 33:50-54) 팔레스틴을 이스라엘에게 영원한 유업으로(출 32:13) 약속하시고(창 12:7, 출 32:13) 주셨다(수 21:43 이하 등). 점차적으로 하나님께서 가나안 원주민을 쫓아내실 것이다(출 23:30). 

그러나 이 선물은 단계적으로 얻어야만 했다(여호수아). 한번 거주하게 되면 그 땅은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해야 했으며 그 땅을 깨끗게 하고(신 20:16), 깨끗하게 지키고(예: 신 21:23), 하나님께 바침으로써(신 26:1 이하) 거룩하게 보전해야 했다. 

불순종은 하나님의 징벌을 가져왔다(렘 16:9, 렘 17:4). 종말에는 그 땅을 다시 차지할 것이다. 

단, 이 땅은 천년왕국에 대한 각자의 견해에 따라서 문자 그대로의 실재적인 땅으로나, 아니면 영적인 실재로 사료될 것이다(KD: 겔 47:14, 사 57:13, 참조: 히 12:25-29).
정복 이전에 제비로 땅을 분배하는 일은 고대 근동에서 잘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AI, p. 165). 신의 주권을 나타냈다(민 26:56).
루쉬두니(R. J. Rushdoony)는 가족 경제학(p. 174이하), 홀로된 여인을 돌볼 가족의 의무를 포함하여 장자의 의무, 제한된 장자 상속, 사회적, 도덕적, 영적인 기업(호 5:10), 실로 삶 그 자체(신 19:14, 신 20:19-20)를 상징하는 지계표(landmarks)에 대해 다룬다.
하나님이 특별히 창조하시고 선택하신 유업은 이스라엘 백성이다(신 4:20, 출 34:9, 참조: 행 15:16이하, 엠 1:3-4). 

이러한 복된 위치(시 33:12)는 특별한 간구(신 9:26, 신 9:29, 시 28:9)와 확신(미 7:14, 미 7:18, 시 94:14, 참조: 시 37:18)의 근거였다. 

하나님이 그들의 주인이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를 자산으로 소유해서는 안되었다(레 25:47 이하, 참조: KD; 사 14:2, 습 2:9). 

하나님은 또한 열방에 대해 특별하고 영구한 권리를 가지신다(시 82:8, 시 2:8-9, 참조: KD).
경건한 자들의 참된 영적 유업(시 111:6이하, 시 37:18, KD; 렘 12:14-17)은 특별히 그리고 비유적으로 아론, 제사장들, 레위인들, 이들은 자손들에게 물려줄 재산이 없으나(민 18:20 이하에 대한 KD를 참조하라) 사실상은 모든 것 중에 가장 큰 유산, 즉 여호와 자신(수 18:7, KD; 겔 47:22)을 가지고 있다 - 에 의해 기술되었다.
(참조: C. E. B. CRANFIELD; L. J. COPPES).
----열매--
yriP](6529, 페리) 열매 fruit
페리(명남)는 파라(hr;P; , 6509: 열매를 맺다, 결실이 많다)에서 유래했으며, '열매 fruit'를 의미하며, '과일, 자손, 결과'라는 의미를 지닌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20회 나온다.
명사 페리에는 세 가지 주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① 나무의 열매(창 1:12), 포도나무 열매(슥 8:12), 무화과 나무의 열매(잠 27:18),
② 태의 열매 즉 자식(창 30:2, 신 28:4, 신 28:11, 시 21:10, 시 127:3).
③ 어떤 행동으로부터 일어나는 결과라는 뜻의 열매, 예를 들면 "보수"(시 58:11, 잠 11:30).
페리가 쇼레쉬(뿌리 root)와 6회 병행하였다(왕하 19:30, 사 14:29, 사 37:31, 겔 17:9, 호 9:16, 암 2:9).
긴스버그(Ginsberg)는 이 구절들에서 페리가 '열매 fruit'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 branch, 큰 가지 bough'를 뜻한다고 말하였다.
신 29:18과 같은 구절들에서 파라의 뜻이 그와 같이 될 수도 있다. "너희 중에 독초와 쑥'에로 가지를 내는'(즉 독초와 쑥의 '싹을 틔우는') 뿌리가 있어서"(한글개역: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상기한 세 가지 용법 중 세번째 즉 결과를 뜻하는 열매의 의미가 가장 많이 출현한다(특히 시편에서 11회, 잠언에서 10회). 잠언은 "말/입의 열매"를 언급하고 있으며(잠 12:14, 잠 13:2, 잠 18:20, 잠 18:21) 업적이라는 의미의 "손의 열매"에 대해서도 두 번 언급하였다(잠 31:16, 잠 31:31). 잠 1:31에서 교훈을 경청하지 않는 자는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이라고 말한다. 행위와 결과의 관계는 씨와 나무의 관계가 같다.(참조: BDB; Hamilton).
---상급---
rk;c;(7939, 사카르) 삯, 임금, 보수, 상급
사카르(명남)는 사카르(rk'c; , 7936: 고용하다)에서 유래했으며, '고용가, 삯, 임금'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8회 나온다.
(a)  '삯, 임금'. 종(창 30:28, 창 30:32, 창 30:33, 창 31:8, 출 2:9, 신 15:18, 신 24:15, 왕상 5:20, 슥 8:10, 말 3:5), 군병들(겔 29:18, 겔 29:19), 목자(상징, 슥 11:8), 짐승(출 22:14)은 삯(임금)을 받는다.
(b)  '보수, 보상, 상금'.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큰 '상급'이며(창 15:1), 레아는 잇사갈을 생산 했을 때 하나님이 자기에게 상급으로 주었다고 했다(창 30:18). 회막에서 일하는 자는 '보수'를 받았다(민 18:31, 이런 의미로 렘 31:16, 대하 15:7, 사 40:10, 사 62:11, 시 127:3, 전 4:9, 전 9:5).
(c)  '통행료',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욘 1:3).(참조: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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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W[n:(5271, 나우르) 젊음, 청년기, 어린 시절
나우르(명여)는 나아르(r['n" , 5288)에서 유래한 수동 분사이며, '젊음, 청년(기), 어린 시절'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47회 나온다.
나우르는 인생의 젊고 미숙하지만 원기왕성하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시기에 강조점을 두며, 주로 '젊어서부터'(한글개역, "어려서부터") from one's youth up이라는 어구에서 가장 자주 사용된다(창 8:21, 삼상 17:33, 왕상 18:12, 욥 31:18을 보라. 욥 31:18에서 이 어구는 "내가 모태에서 나온 후로"와 병행되어 있으며 한창 젊은 시기를 나타낸다).
나우르는 또한 비유적으로 바벨론(사 47:12, 사 47:15), 유다, 모압(렘 22:21, 렘 48:11)에 대해서도 사용된다.(M. C. Fis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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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1121, 벤) 아들, 아이, 손자
벤(명남)은 기본어근이며, '아들, 손자, 자식, 아이, 어떤 집단의 구성원'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130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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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wOBGI(1368, 깁보르) 강(력)한, 강(력)한 자, 용사
깁보르(형용사)는 가바르(rb'G; , 1396: 강하다, 능하다, 위대하다)에서 유래했으며, 형용사로 '강한, 강력한', 실명사로 '강(력)한 사람, 용사'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50회 이상 나온다.
(a)  형용사에서
① 창 30:30에서 가장 강한 사자, 삼상 14:52에서 강한(힘 있는) 자, 시 112:2에서 후손이 강하다는 것을 묘사한다.
② 창 10:9에서 "특이한 사냥군"은 '능한 사냥군'이다. 니므롯은 강한 자, 곧 폭군 내지 전제 군주였으며, '능한 사냥군', 분명히 사람을 사냥하여 그들을 노예로 삼은 자였다. 그의 이름은 그의 시대의 사회에서 악을 뜻하는 속담이 되었는데 이는 마치 금세기에 히틀러의 이름이 악과 잔인성을 뜻하는 속담이 된 바와 같다.
③ 사 9:6에서 메시야에 대한 기대에는 메시야가 '(전)능하실' mighty 것이라는 소망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깁보르)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것이라"(사 10:21).
예레미야의 감동적인 고백(렘 32:17 이하)은 창조(렘 32:17)과 구속(렘 32:18)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증거 한다. 시 24장의 "영광의 왕이 뉘시뇨?"라는 강조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하신 여호와시로다"(시 24:8).
하나님은 크고 능하시다(신 10:17, 느 9:22).
(b)  명사에서
① 깁보르는 창 6:4에서 처음으로 나온다: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② 전투에 대한 문맥에서 이 단어는 전사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깁보르는 '시험을 거친 전사' proven warrior인데, 특히 깁보르가 하일(힘)과 결합되어 사용될 때 그러하다. KJV는 문자적으로 '용감한 용사' mighty men(깁보르) of valor(하일)로, NIV는 숙어로 '전투하는 사람들' fighting men로 번역하였다(참조: 수 1:14). 스스로 전사임을 증명했던 다윗은 사울에게 추격을 받는 동안 '용사들' heroes을 자신의 군대로 이끌었다.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이 사람들은 군대장관의 일부가 되었다. 깁보르 하일이라는 어구는 상류 사회 계급의 남자, 곧 군사적 의무를 지고 있는 지주를 가리키기도 한다. 사울은 이러한 가문 출신이며(삼상 9:1), 여로보암도 그러하다(왕상 11:28).
③ 왕은 그의 왕국의 힘을 상징했다. 그는 전투에서 자기의 군대를 이끌어야 했으며 지휘관으로서 '용사' hero로 생각되어졌다. 다윗은 생애 초기에 '용사' hero로 인정되었다(삼상 18:7). 왕은 '용사' hero로 묘사된다: "능한 자여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영화와 위엄을 입으소서"(시 45:3).
④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는 전능자이시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깁보르)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참조: BDB; V. P. Hamilton).
----수중의----
dy:(3027, 야드) 손 hand
야드(명여)는 기본어근이며, '손 hand'을 의미하며, 여러 가지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600회 이상 나온다.
야드의 기본적인 의미는 '사람의 의지의 기능들을 수행하기 위해 사용된 팔의 끝부분'이다.
이 용어는 문자적으로 좋든 나쁘든(창 4:11), 일반적인 일의 기능을 행하는 사람의 손에 대해 사용된다(창 5:29). 동해보복법("손에는 손")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받은 신체 부위에 해당하는 신체부위를 파괴하는 형벌이다(참조: Harris, R. L., Man-God's Eternal Creation, Moody, 1971, pp. 117-18).
"손"이란 말이 관용적으로 사용되는 방법이 여러 가지라는 사실은 신학적으로 의미심장하다. 이런 관용어들은 손의 용도가 넓다는 데서 나온 것이다. "어떤 사람의 손 안으로(혹은 아래에)"라는 어구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책임, 돌봄 그리고 지배를 포함하는 권한을 나타낸다. 사람은 이런 권한의 보호하에 있을 수 있다. 아마르나 서신에 나오는 가나안인들의 어휘 바-디-우(ba-di-u)는 '그의 손안에' in his hand를 의미한다. 인간은 다른 창조물을 "그의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창 9:2). 하갈에 대한 사라의 권한(창 16:6, 창 16:9), 보디발의 집에 대한 요셉의 권한(창 39:3-8), 이스라엘에 대한 모세와 아론의 권한(민 33:1), 그리고 아람에 대한 다윗의 권한(대상 18:3), 이 모든 것은 이 어구로 표현된다. 여호와는 우리의 생명에 대한 권한을 갖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그의 돌보심, 주권, 그리고 심판에 맡겨둔다(시 31:5, 시 31:15, H6, 16, 삼하 24:14). 더구나 이 관용어는 어떤 사람이 '자기 손안으로 인도될 때 그에 대한 승리'를 묘사한다. 반대로, 구원은 '어떤 사람의 손 밖으로 인도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종종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원수들을 '이스라엘의 손 안으로 인도할' 것이며(창 49:8, 수 6:2) 이스라엘을 '원수들의 손 밖으로 인도하리라'고(출 3:8) 약속하였다. 도피성은 피의 보수자의 '손에서부터' 무고한 살해자의 '구출'을 제공해 주었다(민 35:15).
손은 '능력' power이나 '힘' strength을 상징한다(신 8:17). 신 32:36은 "그들의 손이 가버렸다"고 말함으로써, 이스라엘의 힘의 상실을 묘사하였다. 모세의 손은 애굽에 대항한 재앙에서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 맹렬하게 사용되었다(출 10:12-15).
이 은유의 가장 두드러진 용법은 이 은유가 하나님의 능력을 전달한 것이다. 야드는 하나님의 전능 하심의 상징이다(대하 20:6, 시 89:21). 대상 29:12은 여호와의 손에 능력과 힘이 있다고 선언한다(참조: 시 89:13, H 14). 그의 손은 '짧지'(혹은 '약하지')(사 59:1) 않고 강하다.
하나님의 손은 천지 창조, 통치(사 48:13)를,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손은 구원과 해방을, 이스라엘의 적들에게는 파멸과 멸망을 나타낸다(출 7:4, 출 9:3, 삼상 7:13).
그의 능력에 대한 두드러진 증거는 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신 것이었다(출 13:3-16, 민 33:3). 모든 세상은 이 사건을 통해서 여호와의 능력을 목격했다(수 4:24). 하나님의 손은 진리와 정의를 행하시며(시 111:7), 의인들을 지지하고 인도한다(시 37:24, 시 139:10). 하나님의 손은 그의 의로운 형벌(삼하 5:6, 삼하 5:11), 그의 자애적 돌봄(스 7:6, 욥 5:18, 시 145:16, 사 49:16), 그의 보호(사 51:16)를 표현한다.
그는 언제나 우리를 위해서 손을 들어올린다(시 10:12). 그 당연한 결과로서의 개념은 어떤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에 관한 것이다. '손이 미치다'나 '손이 있다'는 어떤 일을 하거나 얻을 수 있는 능력을 나타낸다(레 14:21-32).
야드는 '소유'라는 의미를 전달한다. '소유'는 손의 일반적인 기능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손에'라는 어구는 종종 이런 의미를 함축하곤 한다. 이스마엘 사람들은 요셉을 그들의 소유물로 취했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창 39:1). 여호와께서는 자기가 다윗 왕국을 그의 아들의 손에서 취하시겠다고 선언하였다(왕상 11:12, 왕상 11:31-35).
야드는 '복종'이란 의미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복종은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의 수하에 두다'라는 문구로 표현된다. 대상 29:24에서 "...여러 아들이 솔로몬 왕에게 복종하니"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여러 아들이 그들 자신을 솔로몬 왕의 수하에 두니'이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에게 반역하지 말고 그에게 '복종하라'고 권면하였다.
야드는 기호와 상징 언어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손을 펴거나 들어 올리는 것은 서너 가지의 행위와 관련되어 사용되었다.
첫째, 기도, 겸손한 탄원을 나타낸다(시 28:2, 대하 6:12 이하).
둘째, 주기적으로 공식적인 축복을 수반했다(레 9:22).
셋째, 맹세할 때 손을 들어 올린다. 아브람이 전쟁 전리품을 취하지 않겠다고 맹세할 때, 그는 소돔 왕에게 자기 손을 들어 올렸다. 맹세를 나타내는 또 다른 방법은 아브람의 종이 아브람의 명령에 충실할 것을 맹세하면서 행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넓적다리 아래에 손을 넣는 것이었다(창 24:2, 창 24:9). 성경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서원은 하나님께서 신인동형론적으로 행하신 것들이다. 성경에서 이것을 수반하는 징표로서 가장 기억할만한 맹세는 아브람에게서 한 민족을 세워 이 민족, 즉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계를 축복하시겠다고 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영원한 언약적 약속이다(창 12:1-3, 참조: 출 6:8, 민 14:30). 하나님은 또한 자기 백성의 피를 보수하시겠다고 맹세했다(신 32:40).
'손을 대는 것'은 4가지의 기본적인 의미를 지닌다.
첫째, 이 어구는 죽이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창 37:22, 창 37:27).
둘째, 이 단어는 축복의 의식적인 의례에서 사용되었다(참조: 창 48:17).
셋째, 특별한 직무나 일을 위임할 때는 대개 손을 대는 것이 수반되었다(참조: 모세가 여호수아를 취임 시킨 사건과 행 13:1-3).
넷째, 대속이라는 중요한 신학적 개념은 언제나 희생 짐승에 손을 대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염소에 손을 댐으로써, 민족의 죄를 염소("대속물")에게 전이 시켰다. 각 사람들은 이런 표현을 사용하여 자기들의 죄가 희생 짐승에게 전이되어 그 짐승들이 그 죄를 짊어졌다고 묘사하였다(출 29:10-19, 레 1:4). 마침내 이런 비유적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일에서 성취되었다(골 2:14).
손을 채운다는 것은 직분을 맡기는 것을 나타낸다(출 29:9-35, 출 16:32, 민 3:3). 성직 수임은 '손을 채우다'라는 관용어로 묘사되었다. 출 29:9에서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위임하여 거룩하게 할찌니라"는 문자적으로 '아론의 손과 그 아들들의 손을 채우게 하라'이다. 일부 학자들은 손을 채운다는 말은 손이 가득 차 있어 다른 일을 할 여지가 없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학자들은 이 어구가 주로 제사장들의 성직 수임 때에 사용되었으므로, 희생 제물의 몫을 취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손을 뻗친다'는 것은 두 가지 개념을 전하는데 하나는 어떤 대상을 "공격하는 것"을 나타낸다(수 8:19, 수 8:26). 다른 하나는 여호와에 대한 시편 기자의 열망을 묘사한다(시 143:6).
손으로 머리를 싸는 것은 슬픔을 나타낸다(렘 2:37).
손뼉을 치는 것은(그 감정에 따라) '불쾌, 격렬한 흥분'(민 24:10), '기쁨'(시 47:1, 겔 25:6), '악의에 찬 기쁨'(겔 6:11)을 나타낸다.
손을 얹는 것은 능력의 전달(왕하 13:16)이나 죄의 전가(레 1:4, 레 8:22 등)를 나타낸다.
'어떤 사람이 손을 어떤 일에 두다'라는 어구는 그 사람이 관여하고 있는 "일"과 활동을 나타낸다(신 2:7, 신 30:9).
'손을 강화하는 것'은 어떤 사람을 돕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다윗을 돕는 요나단, 삼상 23:16).
강퍅한 반역은 "높은 손"이란 어구로 묘사된다(민 15:30). 반대로, 이와 똑같은 표현이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해내신 하나님의 강한 구출을 나타내었다(출 14:8).
'손을 흔드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와 파괴를 상징했다(사 10:32, 사 19:16). 마찬가지로 모욕도 이런 상징으로 묘사되었다(습 2:15).
손을 씻는 행위는, 정결하게 하는 것과 관련된 계명들을 지키기 위해 행해졌을 뿐 아니라 결백의 확증 및 깨끗한 양심을 나타내기 위해 시행되었다(신 21:6, 시 26:6, 참조: 욥 17:9, 시 24:4, 마 27:24). 의식적 정화는 '손을 씻는 것'으로 묘사되었다(레 5:11), 이것은 그 사람을 의식적으로 의롭게 만들어준다(삼하 22:21).
손의 기호(출 13:9, 출 13:16, 신 6:8, 신 11:18)는 자기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계명들을 끊임없이 기억하기 위한 하나의 생생하고도 영구적인 수단이었다.
'손을 여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 주는 것이었다(신 15:8, 신 15:11). 반면에 '손을 닫는 것'은 주지 않는 것이었다(신 15:7). 하나님은 모든 생물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서 그의 손을 여신다(신 145:16).
'자기 손을 늦추는'(자기 손을 움츠리는) 사람은 '포기하는' 사람이다(수 10:6), 게으론 자는 "자기 손을 그릇에 묻는다"(잠 19:24). 침묵은 손으로 입을 막는 것이다(잠 30:32).
흥미 있는 것은 '손'이 '법령' ordinance(스 3:10)이나, 아마도 언약을 세우기 위해 혹은 종교적 기념으로 사용된 '기념물' monument(참조: 하솔에 있는 의식적 석비)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삼상 15:12, 사 56:5). 율법이 삶의 중심임을 이스라엘인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율법은 상징적으로 그들의 손에 두어졌다(신 6:8). 법령과 하나님의 말씀을 제공하는 수단은 '~의 손으로' by the hand of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아마도 손을 결합한다는 것 때문에, 야드가 부어 만든 바다의 바퀴들의 '축' axles(왕상 7:32-33)과 성막이나 성전의 판지를 고정하기 위한 '지주' stays(장부 tenons)라는 의미로 사용되게 된 것 같다(출 26:17-19, 왕상 7:35-36). 옆에 늘어뜨린 손으로 말미암아 야드가 '측면' side, '해안' coast, 혹은 '경계' border라는 뜻으로 사용되게 된 것 같다(출 2:5, 민 2:17, 민 34:3). 손을 펼치는 것은 '공간' space을 의미했으며(창 34:21), '손'은 또한 '부분' part이나 '시간' time을 의미했다(창 43:34, 창 47:24).
(참조: R. H. Alexander; BDB; DNTT).
----화살------
$je(2671, 헤츠) 화살 arrow
헤츠(명남)는 하차츠($x'j; , 2686: 화살을 쏘다)에서 유래했으며, '화살 arrow'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56회 나온다.
화살은 치명적인 무기로서, 대개 활로 쏜다. 그러나 웃시야는 화살을 쏘거나 돌을 던질 수 있는 노포(弩砲)를 만들었다: "또 예루살렘에서 공교한 공장으로 기계를 창작하여 망대와 성곽 위에 두어 살과 큰 돌을 발하게 하였으니 그 이름이 원방에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더라"(대하 26:15).
강한 군대는 날카로운 화살로 무장하였다: "그들의 살은 날카롭고 모든 활은 당기어졌으며 그 말굽은 부싯돌 같고 차 바퀴는 회리바람 같을 것이며"(사 5:28).
그러나 하나님은 앗수르가 히스기야의 예루살렘에 단 하나의 화살도 쏘지 못하도록 막으셨다(왕하 19:32 = 사 37:33).
이스라엘의 군대(민 24:8)와 왕들도(시 45:5, H6) 날카로운 화살을 소유하였다.
바벨론 왕은 점치는 수단으로 화살과 우상과 희생의 간에게 물었다: "바벨론 왕이 갈랫길 곧 두 길 머리에 서서 점을 치되 살들을 흔들어 우상에게 묻고 희생의 간을 살펴서"(겔 21:21, H26).
엘리사는 승리를 상징하기 위해 요아스 왕에게 화살을 쏘고 그의 화살로 땅을 치게 했다(왕하 13:15, 왕하 13:17, 왕하 13:18).
악한 자들은 의인을 쓰러뜨리기 위해 화살을 쏜다(시 11:2). 종종 이것은 비유적으로 경건한 자에게 던져진 매우 거친 말을 가리킨다(시 57:4, H5, 시 64:3, H4, 렘 9:7).
하나님은 이 위험스러운 화살들을 무가치하게 만들고(시 58:7, H8, 시 91:5) 그의 화살을 원수의 피로 적시는(신 32:42) 분이시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심판의 화살은 이스라엘을 겨냥한 것이며(신 32:23), 시편 기자, 욥, 그리고 예레미야는 모두 하나님의 화살이 그들의 깊은 곳에 박혔다고 불평한다(시 38:2, H3, 욥 6:4, 애 3:12).
신의 현현에서, 번개 빛은 종종 화살로 지칭된다(시 18:14, H15, 시 144:6, 합 3:11).
시 127:4은 자식들을 군인의 손에 있는 화살에 비유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사 49:2에서 여호와의 종은 선택된(닦아진) 화살이라고 일컬어진다: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시고".
구약성경 시대 말 경에, 바사 군대는 사수들에게 몹시 의존하고 있었다. 그들은 등에 큰 화살통을 짊어지고 매우 빨리 쏘도록 훈련 받았다.(참조: H. WOLF).
--전통---
hP;v]a'(827, 아쉬파) 화살통
아쉬파(명여)는 '화살통'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6회 나온다(욥 39:23, 시 127:5, 사 22:6, 사 49:2, 렘 5:16, 애 3:13).
시 127:5에서 비유적으로 '자녀를 전통에 가득찬 화살'에 비한다: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렘 5:16에서 그들의 전통은 열린 묘실이니 그들의 화살들은 죽은 것이다: "그 전통은 열린 묘실이요 그 사람들은 다 용사라".(참조: Gesenius; H. Freedman).
----가득한----
alem;(4390, 말레) 채우다, 가득 차다, 충만하다
말레(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채우다, 가득 차다(채우다), 충만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50회 나온다.
(a)  말레는 칼형과 니팔형에서 그 용법들을 검토해보면 공간적인 의미를 지니거나 확대되어 시간적인 의미에 대한 중요한 신학적인 개념을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간적인 의미는 다음의 구절들에 나온다. 출 10:6(집들을 가득 채운 메뚜기), 욜 3:13(즙으로 가득 찬 포도즙틀), 그리고 왕하 4:6(가득찰 때까지 텅빈 그릇에 기름을 쏟아 붓는 과부).
시간적인 의미는 정해진 때의 완성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면, 출산함으로써 완성된, 리브가의 임신의 날들(창 25:25), 여호와께서 나일강 물을 치신 후 경과한, 즉 끝나고 지난 7일간(출 7:25), 그리고 다니엘이 금식을 끝낸 3주간(단 10:3).
말레는 하나님의 편재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의미심장하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 23:24). 그는 우주적으로 임재하시며 모든 땅을 그의 영광으로 가득 채우실 뿐만 아니라(민 14:21, 시 72:19, 사 6:3), 또한 장막을 채우는 구름에서 나타난 그의 영광(카보드)에 의해 지역적으로 보여지기도 한다(출 40:34-35, 왕상 8:10-11, 사 6:1, 겔 10:3, 겔 43:5, 겔 44:4).
말레는 또한 시작된 일을 완성하거나 혹은 약속된 말씀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피엘형은 말의 성취를 강조하는 것 같다.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하겠다고 말한 대로, 우상을 숭배할 때, 그들은 자기네의 말을 이루는 것이다(렘 44:25). 70년 포로생활로 예레미야의 말이 이루어진 것처럼(대하 36:21), 솔로몬이 아비아달을 제사장직에서 쫓아내었을 때, 엘리의 말이 이루어졌다(왕상 2:27).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으셨을 때, 그는 다윗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해 행동하신 것이다(왕상 8:15, 왕상 8:24, 대하 6:4, 대하 6:15). 하나님은 또한 그의 메시야의 도모와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행동하실 것이다(시 20:4, 시 20:5, H5, H6).
(b)  말레의 피엘형은 때의 기간을 나타내기 위해서도 사용된다. 즉 날수(창 29:27-28), 햇수(대하 36:21), 혹은 만료되어야 하는 임신의 기간(욥 39:2), 따라서 강조점을 오로지 예언적 말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해진 것을 이루고, 완성하고, 행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 있다. 예언과 그 예언의 성취 사이의 시간에는, 연대적인 시간(크로노스[chronos])을 적절한 순간(카이로이)으로 계속하여 채우시는 바로 그러한 능력 있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의미심장한 사건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말씀이 약속한 모든 것의 저 최종적인 성취에 속한다.
비유적인 표현에서 땅은 종종 폭력으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창 6:13, 미 6:12, 렘 23:10, 렘 51:5, 겔 7:22), 때로는 하나님의 영광, 자비, 선, 그리고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가득 찬 것으로 묘사되곤 한다(시 33:5, 시 119:64, 사 11:9, 합 3:3). 땅은 죄로 가득 차게 될 수도 있다(렘 16:18, 겔 8:17).
(희생제물로) "손에 채우다"는 어떤 사람의 직무를 "신성하게 하다"(대상 29:5, 출 32:29)나 제사장을 성직에 임명하는 것을 말한다(삿 17:5).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욕망을 성취하는 것은 그를 "만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출 15:9).(참조: W. C. KAISER; BDB).
---복되도다---
rv,a,(835, 에셰르) 행복, 복, 지복 [[친밀한 앎(야다) = Q의 사랑으로 인침-채움받고 바로 그 사랑으로 상호교통함의 순종]]
에셰르(명남) 또는 아샤르(rv;a;)는 아샤르(rv'a; , 833)에서 유래했으며, '행복 happiness, 복 blessedness, 지복 bliss'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45회 나온다.
이 명사는 언제나 남성 복수 연계형 아쉬레로 나오며, '~는 복되도다(복이 있도다)' 또는 '복되도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복되도다'는 축하(아쉬레)를 받기 위해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해야 한다. '복 있는 사람', 곧 복된 사람은 동사 아샤르가 지적하는 것처럼 '똑바로 가거나 걷는 것' 말하자면 올바로 행하는 사람이다. 예를들어 '복된' 사람은 분명히 말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다(시 2:12, 시 34:8[9], 시 40:4[5], 시 84:5[6], 시 84:12[13], 시 146:5, 잠 16:20). 복된 사람은 하나님의 계시의 권세, 즉 그의 율법(시 119:1, 시 1:2, 잠 29:18). 그의 말씀(잠 16:20), 그의 길(시 128:1, 잠 8:32) 아래에 들어온 사람이다. 복된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을 베푼다(시 41:1, 잠 14:21).(참조: BDB; TWOT).
----성문----
r['v'(8179, 샤아르) 문, 성문 gate
샤아르(명남)는 '문, 성문 gate'을 의미한다.
이 단어의 어근의 개념은 '뚫다, 둘로 분리하다, 분리하다'이다. 샤아르는 복합적인 문 전체 및 그 문의 양쪽에 남아있는 빈 공간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370여회 나온다.
(a)  샤아르(문 gate)는 성의 크기에 따라서 문의 개수는 다양하였다. 그러나 한 개의 주요한 문은 반드시 있었는데, 이 주요한 문은 종종 하나의 외부 문과 하나의 내부 문으로 이루어져 있거나(삼하 18:24), 하솔, 게셀, 므깃도에 있는 솔로몬의 문과 같이 3개 혹은 4개의 도어로 이루어져 있었다.
(b)  문(door)의 재료로는 대개 목재로 만들어 졌으며(느 1:3, 느 2:3, 사 45:2), 놋쇠로 입히거나 놋문이 있었다(참조: 시 107:16, 사 45:2).
(c)  성문은 벽으로 둘러싸인 성으로 출입할 것을 통제하는 수단이었다. 성문의 측면에는 파숫군들의 방이 있었다. 삼하 18:24에서는 성문 위에 있는 방을 언급하고 있다. 밤에는 성문을 닫았는데(수 2:5 이하, 느 7:3),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망대도 세워졌다(대하 26:9).
안식일에는 성문을 닫았다(느 13:19).
(d)  성문은 백성들의 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회적, 행정적, 사업적 교섭과 종교적 행사가 거기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성문의 용도로는 집합장소(창 23:10, 잠 8:3, 렘 14:2, 렘 22:2), 공무집행장소(창 23:10, 왕상 22:10), 공공회의장소(창 34:20), 법정(재판소)(신 21:19, 신 22:15, 신 25:7 이하, 수 20:4, 룻 4:1, 삼하 15:2, 슥 8:16), 사열대(왕하 18:4), 방어(c를 보라), 왕의 보좌를 두는 장소(왕상 22:10, 대하 18:9, 렘 38:7), 율법을 읽어주고(느 8:1-3, 느 8:1-18), 말씀을 선포하는 장소(렘 17:19, 렘 17:20), 축제 행사(시 24:7), 시장(왕하 7:1)의 역할을 하였으며, 죄인의 시신을 전시하기도 하였다(왕하 10:8). 죄인은 성문 밖에서 처형되었다(신 17:5).
(e)  문의 종류로는 성문(삿 16:3, 룻 4:1, 룻 4:11, 삼하 18:24), 진문(출 32:26, 출 32:27), 성막의 뜰문(출 38:14, 출 38:15, 출 39:40), 황금문(에 2:19, 에 2:21, 에 3:2, 에 3:3, 에 4:2, 에 4:6, 에 5:9, 에 5:13, 에 6:10, 에 6:12, 렘 22:2, 렘 22:4), 성전문(대하 23:19, 렘 7:2, 렘 26:10, 겔 11:1), 성전에 속한 문들(겔 40장 이하), 제단문(겔 8:5) 등이다.
옛 예루살렘문은 모통이 문 또는 옛문(대하 25:23, 대하 26:9, 느 3:6, 렘 31:38, 슥 14:10), 에브라임문(대하 25:23, 느 12:39), 골짜기문(대하 26:9, 느 3:13), 분문(느 2:13, 느 3:13, 느 3:14), 샘문(느 2:14, 느 3:15), 양문 또는 베냐민문(느 3:1), 어문(느 3:3), 수문(느 3:26), 마문(느 3:28), 동문(느 3:29), 함밉갓문(느 3:31)이다.
(f)  문에서 일어난 일들이 있다. 소돔 성문에서 롯이 두 천사를 만났다(창 19:1). 세겜 성문에서 세겜이 할례에 동의했다(창 34:20 이하). 여리고 성문에서 여호수아가 정탐꾼을 잠복시키었다(수 2:5, 수 2:7). 가사 성문에서 삼손이 성문짝 등을 어깨에 메고 산으로 올라갔다(삿 16:2, 삿 16:3). 베들레헴 성문에서 룻과 보아스가 결혼했다(룻 4:1, 룻 4:10). 실로문에서 엘리가 블레셋에게 이스라엘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쓰러져 죽었다(삼상 4:18). 가드 성문에서 다윗이 미친 시늉을 하여 위기를 모면했다(삼상 21:13). 사마리아 성문 어귀에서 네 문둥이가 굶주리 도시를 구하기로 작정하였다(왕하 7:3). 바사궁 문에서 빅단과 모르드개가 아하스로에로 왕을 모살하려 하였다(에 2:21-23). 바스홀이 예레미야를 베냐민의 윗문에 있는 착고에 채워 두었다(렘 20:2).
(g)  비유 및 상징적 표현으로서 문은 성읍(창 22:17), 구원(창 28:17, 시 118:20, 사 26:2), 사망의 권세(문)(시 9:13, 시 107:18, 사 38:10), 하늘 나라(시 100:4, 시 118:19), 복음(사 60:11)을 가리킨다.(참조: BDB; TB).
---원수--
byEao(341, 오예브) 적, 원수 enemy
오예브는 아야브(by"a; , 340: 원수가 되다)의 능동분사형이며 '적, 원수' enemy를 의미한다.
(a)  오예브는 대체로 단순히 한 민족이나 개인의 원수들을 가리키지만, 수많은 문맥들에는 신학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원수에 대한 승리는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축복의 표징이었다(레 26:7, 레 26:8, 신 6:19).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면, 그들은 적들의 손에서 패하리라고 예상하기도 하였다(레 26:17,레 26:25, 레 26:32등, 민 14:42, 신 1:42, 왕하 21:14).
원수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리는, 예를들어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한다든가(레 26:3, 참조: 레 26:7) 회개하는 것(왕상 8:33, 대하 6:24)과 같은 순종에 달려 있었다.
다윗의 원수들의 패한 것은 그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은총의 표징이었다(삼하 7:9, 삼하 22:18, 삼하 22:41).
이스라엘의 원수들의 파멸은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로 간주되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증거가 되었다(수 23:1, 삿 8:34, 왕상 8:46).
하나님에게도 원수들이 있으나, 그 원수들은 어떤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사 66:6, 시 37:20, 시 68:1).
(b)  오예브는 여러 문맥에서 윤리적인 의미로 나온다. 사람들은 적의 패망에 대해 기뻐해서는 안된다(잠 24:17). 사람의 길(행위)이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실 것이다(잠 16:7).(참조: T. E. Mccomiskey).
-----말하다-----
rb'D;(1696, 다바르) 말하다 speak
다바르(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말하다'를 의미하며, '말하다, 선언하다, 담화하다, 명령하다, 약속하다, 경고하다, 위협하다, 노래하다'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150회 나온다(창 8:15, 창 12:4, 출 9:13, 출 9:35, 출 11:2 등).
----부끄러워하다---
vWB(954, 부쉬) 부끄러워 하다
부쉬(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부끄러워 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00회 이상 나온다.
1. 칼형에서
(a)  '수치스럽게 생각하다(느끼다)'(렘 6:15, 사 19:9, 사 23:4, 사 37:27, 사 45:16, 겔 16:63, 미 7:16, 욜 2:26, 욜 2:27, 왕하 19:26, 겔 9:6, 욥 6:20, 시 6:11 등).
(b)  '부끄러워 하다'(렘 2:36, 렘 12:13, 렘 48:13, 사 1:29, 사 20:5, 겔 32:30, 겔 36:32 등).
2. 폴렐형에서
'지연(지체)하다'(출 32:1, 삿 5:28).
3. 히필형에서
'부끄럽게 하다'(시 44:8),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다'(시 119:31, 시 119:116), '부끄러움을 끼치다'(잠 10:5, 잠 12:4, 잠 14:35, 잠 17:2, 잠 19:26, 잠 29:15).
4. 히트파엘형에서
'서로 부끄러워 하다'.
창 2: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참조: BDB).
*부쉬의 기본적인 의미는 '대체로 실패로 인하여, 자기나 혹은 신뢰의 대상이 불명예를 당하다'이다.
부쉬와 그 파생어들은 약간 다른 5가지 방법으로 사용된다.
(a)  첫째로, 이 단어는 '오랜 연기' long delay나 '중단' cessation을 나타내는 관용어로 사용된다. 삿 3:25, 왕하 2:17, 왕하 8:11에서 이 단어는 지나치게 오랫동안 지체될 때 기다리는 사람이나 시중 받는 사람이 느끼는 당혹감을 나타내는데 사용된다. 폴렐(polel)어형의 두 용례도 이 관용어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출 32:11이 그렇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기를 "부끄러워" 하였다(ASV와 RSV, '지체하였다' delayed)고 말하였다.
(b)  둘째로, 부쉬는 어떤 사건이 사람의 기대와는 다르다는 것이 판명될 때 느끼는 당혹, 당황, 그리고 경악, 낙담의 느낌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욥은 대상들이 예상했던 곳에서 물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 부끄러워 낙심했다고 언급한다(욥 6:20). 또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비를 중단하실 때 부끄럽게 될 것이다(렘 14:3). 더 심오한 의미에서, 이스라엘과 열방들은 우상들이 그들을 실망시킬 때, 그 우상들로 인하여 수치를 당할 것이다(사 42:17, 렘 22:22, 호 10:6).
가장 일반적인 세 번째 용법은 앞의 개념 이상의 것을 전달하여, 전쟁에서나 어떤 다른 방식으로 적의 손에서 패한 결과로 당하게 되는 '치욕, 창피' disgrace를 나타낸다. 특별히 포로로 행진하게 되는 것에 대한 무서운 수치가 고려된다(미 1:11, 참조: 렘 2:26). 여기에는 당혹, 환멸, 굴욕, 그리고 이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낙심, 이 모든 어감이 다 포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선지자들은 이 단어를 이런 의미로 사용하여, 이스라엘에게 만약 회개하고 우상숭배의 길에서 돌아서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패하여 포로로 잡혀가는 수치를 당하게 되리라고 단언한다(참조: 사 1:29, 사 30:5, 렘 2:36, 렘 9:19, H18, 스 9:6, 단 9:7 등).
(c)  이 단어의 세 번째 용법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신뢰의 문제이다. 만약 이스라엘이 하나님 신뢰하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우상(사 1:29)이나 이방 나라들(사 20:5, 사 30:3, 사 30:5)을 믿어 자기 자신의 영광을 지키고자 한다면, 이스라엘은 영광을 얻지 못하고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 하나님께 겸손히 복종하는 사람은 참 영광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이 수치를 당하게 되도록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사 29:22, 욜 2:26, 욜 2:27, 습 3:19). 시편기가가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상기시킨 것은 바로 이 약속이다(시 25:3, 시 31:17, H18, 시 37:19, 시 119:46).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잠시동안 이스라엘을 제압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참한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다(사 41:11, 렘 46:24, 렘 51:47). 또한 자기가 하나님을 믿으므로, 자기를 멸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스스로 수치를 당한다는 것이 시편기자의 열렬한 기대이다(시 6:10, H11, 시 22:6, 시 40:14, H15, 시 109:28).
(d)  넷째로, 수치는 경솔하거나 부도덕한 행동에서 기인한다. 이런 용법은 삼상 20:30에서 발견된다. 사울의 관점에서 볼 때, 요나단은 통치하는 왕에게 패역부도한 불법을 저지르고, 자기 어머니의 위치를 위태롭게 하여, 장차 다윗의 후궁이 되게 하는 어리석음을 스스로 범하였다. 마찬가지로 요압은 사정을 충분히 생각하지 않고 어리석게 행동한다고 다윗을 비난하였다(삼하 19:5, H6). 그러나 이런 용법은 주로 잠언에 국한되어 있다. 이 모든 용례들은 부모나 배우자에게 부끄러움을 끼치는 사람들의 행동을 명시적으로나 암시적으로 묘사하는 언명들에 나오는 히필분사이다(잠 10:5, 잠 12:4, 잠 14:35 등).
부쉬의 마지막 용법은 일반적인 영어 의미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즉 '나쁜 일을 행한 데서 오는 죄책감' a feeling of guilt from having done what is wrong을 의미한다. 예레미야(렘 6:15)는 백성들이 가증스러운 일(우상숭배)을 저지르고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전율했다. 마찬가지로 에스겔(겔 16:63)은 복구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은혜가 유다의 수치심을 감소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증가 시킬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때 비로소 이스라엘은 살아계신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믿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에스라는 예루살렘에서 이런 상황을 발견하고서, "우리의 죄가 우리의 머리보다 더 크기" 때문에 부끄럽다고 외친다.
분명히 우상숭배에 대한 이런 혐오감은 사울의 아들들, 이스바알(바알의 사람)과 므비바알(바알의 말)의 이름을 이스보셋(수치의 사람)과 므비보셋(수치의 말)으로 바꿔버린 이유를 설명해 준다(삼하 2:8, 삼하 9:6 등). 이처럼 '바알' 대신 '수치'를 사용하는 것은 더욱 발전하여 보셰트(boshet)의 모음들을 다른 말로 바꿔버리는데 까지 이른다. 예를 들어 몰렉은 '왕'을 뜻하는 단어 멜렉(melek: 거룩한 왕 the divine king)의 모음을 다른 모음으로 바꿔서 만든 말인 것 같다. 어쨌든 이 단어는 보셰트(boshet)로 발음되어왔던 것 같다. 마찬가지로, 식쿠트(sikkut)와 키윤(kiyun)도 쉭쿠츠(shiqqus : 가증한 것 abomination)에서 나온 것 같다(암 5:26).
우가릿어의 동족어가 사용된 몇 가지 용례들에서 이 단어는 마지막 의미로 사용된 것 같다. 예를 들어 아세라(Asherah)는 바알이 얌(Yam)을 죽였다고 비난하면서 "부끄럽다, 부끄럽다"고 말한다. 그러자 바알은 부끄러워 밖으로 나갔다고 한다(68:28-31).
(참조: J. N. Oswa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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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시입니다. 

1절과 2절,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에서 ‘헛되도다’가 3번이나 나옵니다. 솔로몬의 노년에 기록한 전도서를 읽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전도서의 핵심적인 주제는 “헛되도다.”입니다. 

전도서 안에 ‘헛됨’이라는 주제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이 ‘헛되다’라는 주제는 굉장히 묵직한 주제이고 우리 인생 전반에 걸쳐 거대한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인생 전체를 뒤덮고 있는 핵심적인 단어가 “헛되다” 입니다. 이 “헛되다.”는 단어는 굉장히 치명적인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힘든 이유가 뭘까요? 

사는 게 힘들지만 진짜 힘든 것은 수고해도 결과를 얻지 못할 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수고하여 얻은 결과가 있다 할지라도 그 결과가 의미 없을 때, 헛되다는 것을 느낄 때 오는 절망감은 더 크다는 것입니다. 희망을 가지고 있을 때는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희망이 이루어졌는데 그 희망이 의미 없음을 뒤늦게 발견할 때 찾아오는 것이 ‘헛되다’라는 생각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허무를 느끼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많은 것을 누렸던 왕입니다. 재물과 권력과 명예와 쾌락 등 누려보지 않은 것이 없고 가지지 않았던 것이 없었습니다. 지혜가 많았고 능력도 있었습니다. 모든 걸 다 구가하고 누렸지만 그의 가정사는 복잡했습니다. 가정뿐 아니라 나중에는 나라까지 둘로 나누어지는 불운을 맛봅니다. 그가 가진 것들로 가정을 세우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정을 바로 세우진 못했습니다. 그리고 나라도 지켜낼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적으로는 이스라엘이 전성기를 누렸지만 가정은 불행했습니다. 자녀들 가운데 불행한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말년에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쓸쓸한 노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본문에서 솔로몬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는 그 모든 행위가 다 헛되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과 수고를 부정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손을 모으고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하실 것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해야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수고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땀을 흘린 만큼 얻는 것이 분명이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기본적인 삶의 태도는 성실입니다. 가끔 신앙생활은 열심히 하는데 사회생활에는 소극적인 분들이 있습니다. 그 반대 경우도 있습니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다 하신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에서 지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이 수고와 노력을 하지만 그 노력과 수고에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전도서 2장 22-23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22.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23.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수고하고 애쓰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인이 말하는 “집을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고 성을 지키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에서 집이란 뭘까요? 건물보다는 가정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을 지킨다고 할 때 이 성은 도시, 때로는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수고하고 노력해보지만 그 인간의 수고와 노력이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는 핵심은 하나님 없는 인간의 수고의 한계입니다. 

우리가 수고와 땀을 흘려야 하지만 인간의 노력이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강조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하면 다 될 것처럼 여깁니다. 우리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를 구원하려고 합니다. 성공을 위해서 막 몸부림을 칠 때 내가 구원주가 되어버립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성공의 자리, 높은 지위에 올라가기 위해서 애를 쓰는 모습은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구원해 내려는 인간의 교만이 서려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노력할수록 하나님을 부정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도움을 원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노력하면 문제가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결혼 하는 것, 가정을 꾸려가는 것, 가정의 안정과 행복을 유지하는 것들이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남녀가 만나 함께 가정을 이루고 살아간다는 게 기적입니다. 얼마나 다릅니까? 남녀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행복은 커녕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 때가 많습니다. 성격 차이를 극복하는 것, 기질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식성, 취미 차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그 사랑이란 것이 매우 까다롭고 어렵습니다. 강아지를 사랑하는 것과는 또 다릅니다. 

부부문제만 해도 첩첩산중이지만 자녀문제는 어떻습니까? 자식은 마음대로 안 됩니다. 대한민국 부모의 교육열은 세계가 알아줍니다. 부모들은 허리가 휘도록 자녀들을 위한 대가를 지불하고 애를 쓰지만 그 결과가 생각하는 것만큼 주어지지 않을 때 헛됨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부부가 따로 떨어져 사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습니다. 부부만 힘든 게 아니라 사실은 아이들도 힘듭니다. 외국의 문화 속에서 살아가며 영어는 되지만 정체성의 문제가 있습니다.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 겪는 그 갈등은 부모도 모릅니다. 부모가 아이들을 얼마동안 보호해 줄 수 있을까요? 부모가 자녀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실은 사춘기만 되어도 더 이상 따라다니고 간섭할 수가 없습니다. 중학교 2학년만 되어도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부모의 눈 밖으로 벗어난 순간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눈앞에 있는 동안에는 뭔가를 도와줄 수는 있지만 문밖을 나가면 알 길이 없습니다. 아이들에 대한 기대를 가지지만 실망으로 변할 때가 많습니다. 요즘은 대학을 나와도 쉽지도 않고, 시집, 장가를 보내도 쉽지 않고 불안합니다. 자녀들이 커 갈수록 부모들이 해 줄 수 있는 일이 점점 없어집니다. 부모의 한계를 절감합니다. 왜냐하면 부모의 능력 밖의 일들이 수도 없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무엇을 강조합니까?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여호와께서 성을 지켜주시지 아니하시면” 우리의 수고와 땀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건축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아름다운 벽돌을 쌓아 건물을 지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그 성은 세워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무리 수백 명, 수천 명 보초가 지켜도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시면 그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고만으로는 헛된 것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한계와 절망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솔직히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우리의 가정을 책임질 수가 없습니다.” “나는 우리의 자녀를 책임질 수가 없습니다.”

---이런 고백과 함께 2절 하반절에 독특한 한 구절이 삽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갑자기 이 이야기가 왜 나왔을까요?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구절이 삽입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이 말씀이 여기 왔을까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잠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노동을 그친 후 저녁 일상을 마치고 침상에서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은 안식과 회복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6일 동안 창조하시고 일곱 째 날 쉬게 하셨습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자게 하셨습니다. 이 잠을 통하여 우리에게 놀라운 회복을 주시는 겁니다. 하루의 삶이 아무리 힘들었다 할지라도 저녁에 모든 것을 잊고 잠을 잔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최고의 고문은 잠을 재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미쳐 버립니다. 현대인들은 수면 장애를 많이 겪고 있습니다. 수면제가 엄청나게 팔립니다. 잠을 자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무엇인가 하려고 하지만 한계를 느낄 때 불안한 것입니다. 안식이 없는 상태입니다.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축복은 안식입니다. 

신자가 누릴 최상의 축복이 바로 안식입니다. 세상의 그 어디에도 안식이 없습니다. 세상 안으로 들어가면 모든 사람들은 불안해합니다. 존재론적 불안과 함께 우리의 삶을 둘러싼 수없는 문제에 대한 불안함, 긴장, 만성불안 장애를 겪습니다. 왜 불안할까요? 불안의 근원은 사실은 “내가” 입니다. “내가 우리 집안을” “내가 우리 자식을” “내가 지켜 내야해!” 재산도, 건강도, 자녀도 내가 지켜내야 하고, 내가 이루어 가야 하기 때문에 마음에는 안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안간힘을 쓰고, 노력과 수고에도 불구하고 초라한 결과 때문에 불안해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십니다. 누가 잠을 잘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 자는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자기의 힘으로 집을 지으려고 하는 사람, 자신의 힘으로 성을 지키려고 하면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는 자신이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온전히 맡기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잠을 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맡기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34절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그 다음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거라는 겁니다. 34절의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하게 하라”에서 내일이라는 말은 시간적 개념인데 이것을 의인화시킨 것입니다. 내일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내일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문제가 완전히 해결됨으로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사람이 잠을 잘 수가 있는 겁니다. 우리의 인생에 문제가 없는 날이 있습니까? 문제가 사라진 날이 있습니까? 자녀들에 대해서 걱정거리가 사라지는 날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문제가 없는 순간이 없습니다. 자녀에 관련된 문제는 끝도 없습니다. 내가 풀려고 끌어안고 있으면 안식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는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완전히 문제를 맡기면 평안히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잠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징표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맡긴다고 하지만 맡기지 않습니다. 말로만 맡기지 않고 진짜 하나님께 맡기는 그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그는 무슨 문제가 일어난다 할지라도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건축가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감찰자가 되십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결정이 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고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애쓰고 노력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우리의 삶을 의탁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인생인 줄로 믿습니다. 주님이 “너희가 염려함으로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가징 먼저 구해야 할 최우선순위....하나님의 열납하시는 자 "진정한 여디디아...그리스도의 연인이자 신부요, 어린양의 아내됨"을 보여주시기를 구하십시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침받고 아버지가 아드님을 사랑하시는 바로 그 사랑의 기쁨과 즐거움, 그 황홀한 매력과 매혹됨을 생생하게 경험하며, 바로 그 사랑으로 주께 반응하며, JC를 빼어닮아가며 이웃들에게 흘려 보냄으로써 세상을 돌보는 사람, JC의 맛과 향기를 그대로 지닌, 빛과 소금됨을 살도록 하십시다!!...이것이 마땅히 구할 바를 구하는 아이테오의 기도요, 바로 그 안에서 그의 품에 기대어 나의 사정을 아뢰는 바 에로타오의 기도로 나아갑시다...주의 기도는 바로 그렇게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선적인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누가 합니까?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 자신의 힘을 뺀 사람만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기도란 하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며 두 손들고 내 뜻이 아니라 주님 뜻 이루시도록, 육신의 힘을 빼고 성령께 의지함으로써 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능력보다 하나님의 능력을 더 의지하는 사람만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자녀들을 지켜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부모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역할입니다. 

우리가 따라다니며 아이들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습니까?  24시간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며 깨어 계시는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자녀들을 지켜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얼마나 위험하고 얼마나 악한 유혹이 많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보호를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책임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과 방법으로 아이들을 다루려고 하다가 부작용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강요하고 통제하고 아이들을 내 욕망을 위하여 다루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아주 귀중한 하나의 인격체입니다. 우리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시적으로 맡겨주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의 소유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대로 다뤄서는 안 됩니다.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소유가 아닙니다. 아이들은 아주 어려도 존중해야 합니다. 막 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키워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내가 어떤 말을 이 아이에게 해 주어야 할 것인지를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지으신 하나님보다 더 잘 알 수는 없습니다. 아이의 마음을 내가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사춘기가 지나고 나면 아이들의 마음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어 주셔야 합니다. 

---우리는 자녀에 대해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빨리 철이 들면 너무 감사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내를 통하여 부모들을 다루어 가십니다. 아이를 키워가면서 하나님의 의도는 부모도 같이 자라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먼저 좋은 부모가 되어 있으면 어느 날 아이는 틀림없이 좋은 아이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 교육에 대해서 심플한 하나의 원리는 부모가 부모의 자리에서 온전한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가끔 혹독하게 힘들게 하는 자녀들이 있다할지라도 그 자녀들을 통한 부모를 연단하시는 바, 하나님의 깊고 놀라운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그 자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 안에, 부모 안에 놀라운 하나님의 뜻을 감추어 놓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신다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왜 자녀나 배우자들에 대해서 분노를 잘 할까요? 

거기에는 우리의 욕망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욕망이 많을수록 아이들에 대해서 분노가 잦아집니다. 그 분노가 잦다는 것은 내 안에 아이에 대한 하나님의 뜻보다 나의 욕망이 더 있기 때문에 분노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우리의 열심히 더 많이 작용될 때 분노가 들끓게 됩니다. 우리의 지나친 의욕이 역기능적 작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사랑과 인내로 품을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자녀들을 위해 해야 할 부모의 가장 귀중한 역할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자녀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염려, 근심하지 말고 내가 언제나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는가를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에 대한 인간적 욕심, 내 힘으로 자녀를 키울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보조자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한계가 많은가를 인정하고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어도 그것으로 아이가 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르시고 먹이시고 입히셔야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진정한 보호자가 되시고, 하나님만이 진정한 인도자가 되십니다. 

우리 자녀를 가장 사랑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경험하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우리보다 하나님이 훨씬 더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자녀들에 대해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 옆에 우리는 보조 역할을 하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인생의 길목, 인생의 가는 모든 영역들 속에 하나님의 전적인 개입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래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서로를 바라보면서 티격태격하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며 서로를 바라보며 격려해야 합니다. 지금의 모습만 보면 판단하고, 정죄하고, 상처를 줄 수밖에 없지만 자녀들 안에서 역사하시고 가정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하며 아이를 바라볼 때 격려하고 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망가져도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의 놀라운 일하심을 바라보며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모든 것을 맡길 때 주시는 상이 있습니다. 

3절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4절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자녀는 부모에게 고통을 주는 애물단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고 축복이며 상급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고통만 안겨주는 인생의 무거운 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최상의 기업입니다. 우리의 미래가 자녀 세대들에게 있습니다. 한 가정뿐 아니라 한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세상의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기업입니다.

5절 상반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라며 자녀를 화살로 비유를 했습니다. 사실 고대사회는 자녀의 수가 힘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처럼 복지가 되어 있는 사회적 시스템이 없던 시대에는 자녀야말로 부모의 미래의 부양할 수 있는 힘이고 부모의 삶을 지켜줄 수 있는 보호막이었습니다. 재판이 일어나거나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날 때 자녀들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보증이었습니다. 물론 패역한 자식은 부모의 가슴을 찌르는 화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요즘과 같은 시대의 자녀 문제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면 자녀는 분명히 복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신 기업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의 자녀들이 그렇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경우에도 헛된 인생이 되면 안 됩니다. 우리의 눈물과 땀과 생명과 청춘, 우리의 모든 것들을 드려 수고하며 자녀들을 위하여 애썼는데 나중에 뚜껑을 열어보니 아무 것도 없다면 그것처럼 허망하고 기가 막힌 일이 없을 겁니다. 인생은 참 짧습니다. 우리의 자녀들, 우리의 가정이 헛되지 않기 위하여 끊임없이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기르시는 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녀가 우리의 인생에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이요 선물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건강을 지켜가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생명, 행복, 사랑, 자녀 등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습니다. 내가 지킨다고 노력하지만 그게 내 힘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건강관리 열심히 해야 하지만 건강관리로 내 생명을 내가 주장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운동하고, 좋은 것을 먹어도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쏟아 붓는다고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작은 일상, 가정에 하나님을 모셔 드리시길 바랍니다. 

그분의 은혜를 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삶의 알파와 오메가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우리의 계획과 우리의 기대를 넘어선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계획과 공식과 모든 노력을 다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빠져버리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길 축원합니다. 

---자녀들을 하나님의 손에 맡길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승패는 하나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특별히 그 은혜가 우리의 자녀들에게 미치도록 우리의 의욕과 열심을 내려놓고 우리는 보조자로 서 있고 하나님이 양육자로, 하나님이 인도자로, 하나님이 지키시는 자로 우리의 자녀들과 함께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겸허하게 우리의 욕망을 내려놓고 그리고 주의 도우심을 구하며 엎드려 기도할 때 언제나 우리의 하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 되시고 우리의 삶이 헛되지 않도록 역사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들을 아름답게 세워주심으로 믿음의 명문가를 이루는 은혜가 여러분들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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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12:24, 35] *24.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25.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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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molov](8010, 셸로몬) 솔로몬 Solomon(인)

셸로몬(명남)은 샬람(!l'v; , 79999)에서 유래했으며, '평화스러운'을 의미한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3번째 왕(B.C 971-931년경)이며, 다윗과 밧세바의 아들이다.

선지자 나단이 그를 "여디디야"("여호와께서 사랑하심")라 칭했다(삼하 12:25). 그의 태평한 치세로 "솔로몬"이라는 이름이 더 대중적인 이름이 되었다.

솔로몬에 관한 주요기사는 왕상 1:11이하와 대상 22장-대하 9장에 기록되어 있다.

열왕기상의 기록은 예컨대 솔로몬의 행장(왕상 11:41)과 같은 초기 업적, "유다왕 역대지략"(왕상 14:29)에서 얻은 자료와 왕상 7:13-8:66에 있는 초기 성전 기록들에 근거한다. 

두 어머니가 한 아이를 놓고 다툰 싸움에 관한 유명한 재판 기사는 왕상 3:16-18에 기록되어 있다.

다윗은 장자 아도니야보다 솔로몬을 후계자로 삼고 싶어했다(왕상 1:15-31). 

이리하여 성직자같은 화려함을 소유한 솔로몬이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기혼 샘에서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왕상 1:38-40). 

실망한 아도니야가 일으킨 왕궁의 모반은 진압되었으나 그 모반자(왕상 1:52 이하)와 그를 따른 공모자, 제사장 아비아달(왕상 2:26 이하)에 대해서는 솔로몬이 자비로운 조치를 내렸다. 

성공하지 못한 쿠데타의 군대 지도자 요압은 젊은 왕의 손에 무사하지 못했다(왕상 2:28-3:5).

후에 아도니야가 밧세바를 통하여 아비삭을 자기 아내로 줄 것을 요청하자 솔로몬은 그 요청을 자신의 지위에 대한 정치적 위협으로 해석하여 의심하게 되고, 아도니야를 처형했다(왕상 2:19-25).

솔로몬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간 것과 이 높은 곳에서 여호와께로부터 그가 받은 신탁은 하나님과 생명을 향한 그의 초기의 태도를 보여준다(왕상 3:4-15). 

선과 악을 분별하여 백성을 올바르게 재판할 수 있도록 지혜로운 마음을 구한 것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졌으며, 이것은 그의 명성을 떨치는데 일조하였다(왕상 3:16-28).

솔로몬은 문학적인 잠언을 전문적으로 다루었다. 

그는 궁정의 현자들의 무리의 도움을 받았다(왕상 4:30이하). 그는 생명체에 관한 3천가지의 함축적인 관찰 기록을 남겼으며 엄청난 양의 노래를 작곡하였다고 한다(왕상 4:32). 

솔로몬은 나무, 짐승, 새, 물고기 등에 관한 "권위가"로 간주되었으며, 그의 궁정은 이웃 나라로부터 지적인 조언을 받으려는 자들이 방문하였다(왕상 4:33; 9:23). 

시바의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뿐만 아니라 그의 부에도 감탄해 마지 않았다(왕상 10:1,3이하, 7이하). 

다윗이 시편의 아버지로 간주되었듯이 솔로몬은 후대에 히브리 지혜 문학이라 불리운 것의 아버지였다.

잠언서는 전통적으로 이 철학자 왕의 저작으로 인정된다.

그리스도시대에 솔로몬의 화려하고 장엄한 시류의 전통은 사실로 증명된 역사적, 경제적, 사회적면에 기초한다(마 6:28).

솔로몬은 북쪽 홈스(Homs)에서 남쪽의 아카바 만에 이르는 왕국을 다윗에게서 물려받았다. 이스라엘의 영토가 그렇게 광대했던 적은 전무후무하다. 

이 거대한 왕국은 한마디로 평화로 특징지을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주로 이스라엘의 강대한 이웃 국가들, 특히 앗수르와 이집트가 이 시기에는 세력이 약화되었거나 적어도 침묵의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솔로몬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육상과 해상에서 유리한 모험적인 사업에 착수하였다.

해상 수송의 상업적 측면은 솔로몬 시대에 이스라엘에 의해 발달하였다. 

지중해상 무역을 지배하고 있던 두로왕 히람Ⅰ세와의 동맹무역으로 솔로몬은 아카바만의 에시온 게벨을 아라비아와 아프라카와의 무역에서 이스라엘의 관문이 될 정도로까지 발전시켰다(왕상 9:26-28).

육상 교통에서 혁명적인 변화도 솔로몬에게 부를 가져다 주었다. 

낙타의 가축화로 인하여(B.C. 12세기)적절한 물만 공급하면 가능한, 며칠이 걸려 사막을 통과하는 대상 여행이 증가하게 되었다. 

소바, 다메섹, 하우라, 암몬, 모압, 에돔의 변방 지역에 대한 솔로몬의 통치는 그가 아라비아와 북쪽 나라 사이의 대상 무역전체를 통할했음을 의미했다(왕상 4:21). 

힛타이트 길리기아(왕상 10:28 이하에 대한 더 나은 번역)로부터 수입한 말과 애굽에서 온 병거는 육지와 바다의 길을 지배한 솔로몬의 상고들에 의해 정가에 구매되었다. 

솔로몬은 국가 수비를 위해 일련의 병거성을 건설했는데(왕상 4:26; 9:15-19; 10:26) 여기에 배치할 병거와 기병은 국가 예산에서 값비싼 것들이었다(대하 9:28).

므깃도와 게셀(Gezer) 발굴물들이 성경의 기록과 전승을 입증해준다. 구리가 아라바에서, 에시온게벨과 그 주변지역에서 채광되고 정련되어 요단 계곡의 숙곳에서부터 사르단까지(왕상 7:46) 페니키아 일꾼들의 숙련된 원조아래 운반되었으니, 이는 솔로몬을 초기 구리 왕들 가운데 하나로 만들어주었다. 이 모든 산업과 무역이 이스라엘에게 가져다 준 부에 예속 국가들이 매년 바친 정규적인 공물이 추가되었음에 틀림없다(왕상 4:21-28)

솔로몬은 건축계획을 위해 백성 중에서 일꾼을 징집하였다(왕상 5:13-17; 왕상 9:19-21). 

이스라엘에서 산출된 밀과 기름은 결코 잉여분을 남기지 않고 페니키아로 수출하여 숙련공, 목재, 금과 교환하였다(왕상 5:7-11; 왕상 9:14). 마지막에는 솔로몬이 히람왕과의 무역 균형에서 불리한 조건에 처하게 되어 갈릴리의 성읍 20개를 히람왕에게 양도하였다(왕상 9:10-13). 솔로몬이 38년을 치리하고 죽은 후(왕상 11:43), 국제 정세가 변화하였으며(왕상 11:14-25), 국방과 정부 소요경비는 여전히 높은 채로 있는 한편 국가 수입의 많은 원천이 떨어졌다.

솔로몬은 국제적 사업과 정책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심각하게 영향을 끼친 세계주의(cosmopolitanism)를 배양하였다. 

그의 통치 초기에 그는 애굽왕 바로의 딸과 결혼하였으며(왕상 3:1), 그녀의 지참금으로 게셀(Gezer)의 성채를 얻었다. 그것은 전에 바로가 가나안족속에게서 탈취한 것이다(왕상 9:16 이하). 이 애굽왕녀는 계속하여 솔로몬의 총애를 받았으며, 솔로몬은 자기에게 가까운 곳에 그녀의 궁을 건축했다(왕상 9:24). 

솔로몬은 결혼을 통하여 이웃 나라들과 많은 동맹을 맺었는데(왕상 11:1-3), 그는 그 나라에서 탁월한 지위에 있는 여인들과 결혼을 하였다. 그런데 이 여자들은 궁정과 나라 전체에서 세계주의의 풍조에 기여하였다. 

성경 밖의 전승은 시바 여왕의 방문을 로맨스로 변형시켰다. 비록 일부다처제는 당시 중혼을 할 수 있었던 사람들 사이에 결혼 규범이긴 했지만 후대의 랍비는 솔로몬에게 단 한명의 아들 르호보암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일부일처제를 어긴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한다. 

솔로몬의 아내들과 동료들은 사적인 채플을 소유했다. 시돈의 아스다롯과 암몬의 몰록과 모압의 그모스(왕상 11:5-7)는 예루살렘에서 사당과 제사장과 궁정 후원자를 가진 이방의 신들이었다. 이와 같이 여자들의 영향력은-아마도 심지어 궁정에서 공개적 개종과 함께-솔로몬의 종교의 순결성에 영향을 끼쳤다(9절이하). 

통일 왕조의 붕괴는 경제적인 몰락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솔로몬의 불순종과 이방신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9-11절).

솔로몬의 통치 시초부터 이스라엘의 옛 부족 체계는 중앙 집권식 통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왕상 4:7-19). 

"솔로몬 앞에 섰던" 선지자들이 솔로몬의 후계자 르호보암에게 부친이 부과한 과중한 세금을 가볍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왕상 12:1-19). 그러므로 솔로몬의 영화를 이룩한 경제적 힘이 또한 솔로몬의 영화를 무너뜨린 결과를 가져왔다.

솔로몬의 건축 계획은 두드러진 업적이 되었다. 

비록 그는 나라의 농경생산물을 증대 시키거나 생활의 기준을 향상시키지는 못했지만 막대한 부와 나라 경제의 장악을 통하여 거대한 건축 계획을 시작함으로써, 무역을 보호하고 국가 수비를 위해 국고성과 병거성을 건설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행한 공적 역사 가운데는 다윗이 여부스족속에게서 도성을 탈취했을 때 세운 성벽의 균열을 보수하고(3:1), "다윗성"의 북쪽 지역에 밀로성을 건축한 일도 포함되었다(9:15, 24). 

솔로몬은 오늘날의 하람 지역에 에쉬 셰이프esh-Sheif(예루살렘의 성전지역)를 세웠다. 이것은 남쪽에서 시작하여 북쪽방향으로 다음과 같은 순서에 따라 서 있었다. 즉 레바논 나무의 집(이 건물의 특징은 백향목으로 지어졌다, 7:2-5);솔로몬 행각(7:6, 이것은 그리스도 시대와[요 10:23] 사도들의 시대[행 3:11; 행 5:12]에 성전 지역의 건축물로 계속 남아 있었다); 보좌의 낭실과 재판하는 낭실(왕상 7:7); 솔로몬 자신의 거처(왕상 7:8); 솔로몬의 아내 애굽 왕녀의 거처(7:8); 그리고 성전 순이다.

예루살렘 도시에 세운 이러한 건축물들은 솔로몬에게 지속적인 명성을 가져다 주었는데, 그는 이 건물들을 짓기 위해 외국의 건축가와 일꾼을 고용했다(5:18; 7:13). 이것은 새로운 사상에 대한 솔로몬의 개방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5:2-10).

언약궤를 다윗성에서 성전으로 올리는, 즉 건설중인 건축물을 지나 성전의 내소로 옮겨 안치한 의식과 그 다음의 성전 봉헌식에서 솔로몬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을 입증하고 증거 하였다. 이 의식은 분명 그의 종교적 경력의 최고봉이었다. 비록 그 장황한 기도와 연설은 신명기 기자 같은 양식을 취하고 있지만, 솔로몬의 열정과 헌신만은 분명히 보여진다(8:22-66). 

솔로몬은 그의 백성에 대하여 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했는데, 이는 그의 종교적 성품 및 초기의 단련과 어울리는 것이었다.

이후 솔로몬은 그가 지은 성전에서 해마다 세번씩 제사를 드렸다(9:25). 당시 솔로몬의 성전은 그 땅의 모든 다른 신전들을 무색케 했다. 그곳에서는 아마도 다른 어떤 신전보다 더 오랜 기간동안에 걸쳐 계속적으로 경배가 드려졌을 것이다. 하늘이나 하늘의 하늘이나 어떤 예루살렘의 신전이라도 용납치 못할 하나님께서(8:17) 솔로몬이 여호와를 경배하기 위하여 지은 이 집에서 영광을 받으셨다.

솔로몬은 신약성경에서 12회 나온다. 솔로몬은 사실 신약성경에서 별로 나타나지도 않고 크게 높여지지도 않으며, 모욕도 당하지 않는다.

(a)  마 1:6이하에서 그는 그리스도 계보의 적절한 곳에 나온다. 

마 6:29(=눅 12:27)은 그의 "영광"을, 그리고 마 12:42(=눅 11:31)은 그의 지혜를 언급한다. 마지막으로 행 7:47은 그를 성전의 건축자로서 인정한다.

이처럼 그에 대한 언급들이 따로따로 분리된 것은 그의 업적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것들이 하나님의 목적에 완전히 합치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는 것이다.

(b)  솔로몬은 위대한 다윗의 위대한 아들이었으나, 약속된 왕도 아니요, 메시야도 아니었다; 그는 메시야의 조상에 불과했다(마 1:6이하).

(c)  참으로 솔로몬이 하나님을 경외하여 장엄한 성전을 건축하긴 했다. 

그러나 사도행전 7장의 연설 전체에서 스데반이 나타내고자 하는 바는 어떤 것이든 "손으로 만든" 성전의 가치를 하락 시키는 것이었다; 솔로몬의 성전과 그 뒤에 건립된 제2의 성전은 배교와 불신앙, 바로 그것들의 중심지였다.

(d)  행 7:50과 마 6:29은 모두 청중들과 독자들의 주의를 솔로몬의 업적과 같은 인간적인 업적으로부터 창조주의 영광으로 돌린다.

(e)  마 12:42은 온갖 지혜를 겸비한 솔로몬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무색해졌음을 명백히 말한다. 

먼저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공격하고 있는 이 구절은 솔로몬이 그리스도의 전형으로 묘사된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솔로몬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신약성경의 구절들의 공통적인 증언은 초대교회가 글자 그대로 다윗의 아들을 드물지 않게 그의 종말론적 후계자와 비교하고 대조 시켰다는 것을 제시해준다. (참조: HBD; D.F. pay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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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d]ydiy](3041, 예디데야) 여디디야 Jedidiah 

예디데야(명남)는 야디드(dydiy] , 3039)와 야(Hy: , 3050)에서 유래했으며, '여호와의 사랑을 받는'을 의미한다. 이것은 나단이 솔로몬에게 붙인 이름이다(삼하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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