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C께서 찾으시는 그 사람...성육신하여 오신, 대속의 십자가 죽음-부활-승천을 통해 <신성과 함께 참 인성을 얻으신> 만인의 구주-Q-대제사장이시요 차원의 제약 받지 않으신ㄴ 그영이 되사, 영접하는 이 곧, JC를 개인적인 구주와 Q로 진정 영접하여 하나됨으로 붙좇는 믿음과 그의 주님-주인-왕-머리로 삼고 친밀한 영적 교통과 직관으로 주님의 움직임과 운행하신-행하심따라 한걸음씩 동행하는 자 그의 도드 삼으신 분...구주의 부활 승천 후에도 (하늘에서 하나님 곁에서, <몸소 사람으로서 이 땅을 사시면서 인간의 연약함을 겪어 아시고 모든 시험 받고 십자가 대속의 죽음으로 이기셨기에> 그토록 많은 눈물과 부르짖음으로 여전히 유일무이한 중보,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중보하고 계시는 분을 바라볼지니.. <오직 모든 세대의 그 어느 한 사람도 멸망당하지 않도록, 회개하고 돌이켜 주 이름 불러 영접하여 믿어들어감으로써 아버지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Q이 사람을 지으신 이후로 그토록 오래 참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영적 병듦, 곧 무지무각-연약함에처해 있어서 그들이 스스로 무엇 하고 있며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자각이 없어 전혀 모르고 있음에 대해 긍휼히 여기사 모든 자비하심으로써] 더 참아주시도록 간구하고 계심>으로 인해(공의의 Q, 그분의 쌓여진 진노 쏟아냄을 아드님의 십자가 대속의 보혈 흘림의 공로를 보사 보류하시고 Q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더 오래참아주시도록..그리고 땅끝까지 모든 이들이 주님의 복음 듣도록 번파되기까지 기다려부시도록...이것이 주의 재림 지연의 유일한 ), 바로 그분 그리스도의 신부이자 어린양의 아내-반쪽으로서 JC의 마음=곧 생각과 심정을 알아드리며 날마다 눈물 범벅이 되어 계신 사랑하는 분 구주 JC의 마음을 찢는 애통의 중보에 전존재 기울여 동참하는자, 바로 그분의 사랑하심과 포기할 수 없는 열정을 그 자신이 경험하였고, 그분의 모든 것을 그 자체로 사랑하기에, 모든 것 내려놓고 내어 비워드려 그분으로 채워지기를 갈망하며, 막힘없이 교통하며 순종하며, 그분의 은혜에 동참함의 친밀한, 다함없는 기쁨으로 넘치며, 상황-환경-형편-처지에 괘념치 않고 일편단심 주와 하나됨으로 붙좇는자.....[마16: 24-28...*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27.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이 때 바로 그 주님이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는 바대로...그분의 긍휼어린 마음으로 한반도, 대한민국과 북한의 영적 실상과 [악이 악을 대하여 서로 권력투쟁하는 가운데 공멸에 빠져들기를 꾀하는] 사탄마귀의 궤계로 인한 영적 착시와 혼돈-염증을 불러 일으키는 현 실상에 대한 참된 이해를 가지고 중보/중재하도록 분별하며 합당하게 부르짖도록 하고 계심을 깨달아야 한다....기도는 결코 사라지지않음..
##기억하라...그리스도의 통치영역을 의미하는 좋은 땅 가나안의 서쪽과 동쪽 경계로서 대해와 요단강, 북쪽 경계 이루는 유브라데 강들은 이제 주님의 부활 능력 안에서 이미 이겼음을 의미한다...그러나, 남쪽 경계를 이루는 지역들인 애굽-에돔-염해는 인본주의(사탄체계인 세상을 의미하는 애굽)-물질주의(육신의 정욕을 의미하는 에돔)-쾌락주의(소돔과 고모라)를 의미하며 가나안 땅 안에조차도 멸절되어야 할 온갖 중독과 사로잡힘의 영적 질병이 만연한 상태임... 이교숭배(우상숭배)-사신숭배(초혼-영매-무당)-기복신앙(몰렉숭배-점쟁이-복술사-주술사)으로 물들어 있는 바, 이제는 주님의 기도 안에서 깨어나서 기도와 금식으로 영적 무장을 강화해야 한다...지금 모든 나라 족속 백성 방언, 곧 열방의 영적 상황이 그러하다.
[[믿는 이의 완전, 온전, 순전의 선순환, 그 시너지에 대한 느낌]]..주 안에 거함(요15:4-17)은 접붙임/붙좇음의 교통 살기..곧 주 이름 불러 앙망하며 먼저 Q, 말씀 청종, 주님 순종-동행함, 주님이 행함으로 보여주신 사랑 같이 (자기를 내어줌에 이르기까지) 서로 형제 사랑함 이룸, 이것이 JC 사랑함이니, 이로써 아버지께 사랑 받고, 주님 사랑 받음 되며, (아버지-아들-성령이 함께 오사) 그분의 형상의 실제 나타내심(요14:21,24-26) 이룸
살아 생동하는, 발휘하는 산 믿음<진리를 믿고 붙들어 하나되고, 이제 주 이름 불러 주께 여쭈어 그 다음 행보를 인도받아 그분 임재 안에서 그대로 따라가기>을 실행함으로 그리스도를 경험함의 선순환 안으로 들어감 -->순전<보혈로 씻김>에서 <주님 알고 사랑함으로 부어주신 사랑 통해 역사하는 믿음으로 사랑하며 반응함의>온전으로, 이제 더 나아가 <무시로 하나님 임재 앞에서 행함의> 완전의 선순환 시너지 이룸.
...CORAM DEO SOLA FIDE, SOLA SCRIPTURA, SOLA Christos, SOLI DEO GLORIA
....완전 = 주님 말씀 전적 순복(청종...몸의 활동 돕게 하신 섬김이 역할 기능, 직분자의 구비 조건과 태도 완비 : 나는 죽고 구주 사심으로 살기..주가 준비하신 바로 그것을, 복음과 그분의 풍성을 그대로 살아내며 공급함)-
---온전 = (친히 내주하사 도우시며 위로-격려-세우시는 HS따라) 고난의 섭리 통해 연단된 JC 인격 그대로 닮는 성화---
---순전 = 날마다 회개/보혈에 씻긴, 자기 십자가 감당하며 주와 동행 이룸의 필수 요건
***인간의 연약함 = 영적 무지무각 + 미혹/오도됨 --> 인간의 절대무력함으로 인해 그 연약함의 당연한 귀결은 영적 사망(하나님으로부터 전존재적 단절...사탄의 손쉬운 먹이감으로 전락...하나님을 비웃고 조롱하는 수단으로 전락함) -->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화해를 위해 하나님이 인정-지명하여 세운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로우신 성품을 그대로 반영하면서(즉, 중보의 제사장은 하나님의 임재-현존 동시에 죄를 속하기에 합당한 희생과 예물을 하나님께 드려 중재하는 제사장이 필요함..
***우리 주 하나님, 말씀속에 계시며 말씀하시며 구원의 말씀을 부탁하신 아버지,
모든 인생과 피조세계의 창조주-주권자-통치자-모든 공급근원, 유일무이한 절대 필요충분-모든 풍성부요충만과 참 능력근원<절체절명에서조차> 그 자체이신 아버지여
...사모하며 앙망하오니, 더이상 제 마음으로 주님을 제한함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소서 ((무한하신, 본래 제한 받지 않는 분이지만 우리의 무지함과 주관적 제한 안예서 제한 받으시는, 기꺼이 갈망하여 기다리면서 마음 문 열어 달라 노크하고 계시는, gentle하신 분이심))
참되게 기도하신 그리스도의 <기도의 영>을, <고난 통해 순종함 배우시고 온전케 되신 순종의 영을> 부어주소서...
<하나님 경외함>이루신 그리스도의 <일향 미쁘신, 일편단심, 경건의 영을> 부어 주소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말씀하시는 주 임재 앞에서 <완전한 경외함을 끝까지 견지하심으로> 경건함의 모본 보이신 JC 주님이시여,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아버지께 드리신 바 열정적인, 전존재 쏟아붓는 통곡과 눈물, 부르짖는 간구와 소원 기도(결코 포기함 없이 구하고 찾고 두드림의 열정 공급하사)의 영, 바로 그 영을 오늘이라는 (각자에게 허락하신) 시간동안 주님 얼굴 구하며 주 이름 부르는 나와 모든 형제자매 성도들에게 부어주사 참되게 회복시켜 주소서,
하여, 그 안에 머무름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 뜻 온전히 이루게 하여 주소서.
주 이름 부르는 모든 성도마다에게, 고난통해 순종함 배우셔서 온전케 되시고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신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르며, 얻고, [단체적 그리스도] 그 가운데에서 발견되도록 도우소서.
오 주여, [진정한 참된 영광, 그리스도 빼어닮음, 그리스도의 형상 온전히 이룸, 이를 위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리스도께 자원하여 구하는> 성도 각자의 몸에 채우게 하소서].
**[[누가 하나님괴 같으랴!! ..하나님은 믿는, 절대긍정-절대신뢰-절대기쁨으로 하나됨을 사는 내게 절대 만족-절대진리-절대진복이요 영생이심 ]]
^^피상적인 허망한 색성향미촉의 오감 중독/상대적 일시적 만족감을 초월한 근원적 절대만족(무한 풍성-부요-충만-능력) * 열납하시며 열어주사 누리게 하시는 바 절대기쁨/절대긍정/절대신뢰의 유일무이한 초월적 근원적 진리 샘(길-진리-생명) * 지고지선의 진복=요동없는 초월적 절대 평강의 하나됨/거함/누림/의지-빼어닮음/행복
고린도전서(서론)
고린도는 아가야라고 불려지는 지역에 있는 그리스의 주요한 도시이다. 그것은 펠로포네소스 지방과 그리스의 다른 지방을 연결하는 지협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인접한 두 항구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고린도만 하단에 있는 레키움(레기움)이며 고린도와 가까이 있고 그 곳에서 이탈리아와 서방으로 무역을 하였다.
다른 하나는 조금 떨어진 켄크리아(겐그레아)라 불려지는 곳으로 시누스 사로니쿠스 하단에 있고, 아세아로 무역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고린도가 무역과 부의 장소임은 당연하다. 그리고 부는 모든 종류의 사치를 조성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와 예술로 유명한 장소가 악으로 유명한 것도 이상하지 않다.
고린도는 특별히 음란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고린도 여자”는 매춘부라는 별명이 붙었고 “고린도 사람과 즐긴다”(!)라는 말은 매춘부와 즐긴다, 음욕을 채운다는 의미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음란한 도시에 바울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고 자라게 하였다.
사도행전 28장(1-18절)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그리고 고린도전서 12장 2절의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대로 끌려 갔느니라”는 말씀에 비추어 보면 주로 이방인들 사이에 고린도 교회를 세웠다고 볼 수 있다.
사도행전 18장 8절의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의 말씀과 같이 고린도 교인 중에는 개종한 유대인들이 많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사도행전 18장 11절과 18절의 말씀에서 분명한 것처럼 바울은 이 도시에서 거의 2년 동안 머물렀고 사도행전 18장 9, 10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는 말씀으로 바울을 확신시키시며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환상으로 격려를 받아 큰 성공을 거두며 사역을 하였다. 바울은 그의 사역이 성공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한 곳에 오래 머물지도 않았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떠난 얼마 후에 (3차전도여행중 에베소에 머물러 있던 시기에)이 서신을 그들에게 보냈다.
목적은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떠나 거기에 있지 못한 그 동안에 거짓 교사들이 일으킨 선하지 못한 영향력과 고린도 교인들이 믿기전에 받았던 (아직은 미처 기독교 진리로 철저하게 정화되어 사랑으로 역사하는 굳센 믿음, 소망의 인내안에 머물러 성령따라 동행하며 자라가고 있지는 못한 상태였다) 옛 교훈과 관습의 누룩으로 생기게 된 교회내 혼란을 바로잡고 그가 심은 것에 물을 주기 위해서였다.
바울이 그들을 책망한 몇 가지 잘못을 본다면 그들의 부요가 그들의 행동을 얼마나 타락시켰는가를 볼 수가 있다.
교만한 탐욕과 사치와 정욕(육적이고 타락한 마음의 자연적 소산임)이 외부적인 풍부에 의하여 조장되었다.
그들의 교만은 당파나 분당에서 나타나고 심한 혼란은 그들의 영적 은사를 사용하는 일에서 일으키고 있다.
이 악은 그들의 부함으로만 생긴 것이 아니고 희랍의 학문과 철학의 통찰력에서 생기기도 했다. (고린도시는 수사학자와 철학자가 많다고 옛날의 학자들은 말한다.)
이들은 허망하고 자만으로 가득차 있고 복음의 단순한 교리를 경멸하기 쉬운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복음은 질문하고 논쟁하는 성질의 호기심을 채워 주지도 않았고 재치있는 연설과 유수같은 말로써 귀를 즐겁게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탐욕은 이방인의 재판장 앞에서 내 것 네 것에 대한 소송 사건을 일으키는 데 분명히 나타난다. 그들의 사치는 여러 일에 나타났는데 부자들은 교만하고 가난한 자들을 경멸하였다.
그들의 정욕은 가장 심하였는데 이방인들 사이에도 말할 수 없는 가증스러운 일들이었다. 한 남자가 자기의 아내로 만들거나 간음하기 위하여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이 일은 특별한 어떤 [교회내 지위가 높은]사람의 비행인 것 같다. 그러나 전 교회가 그런 그의 죄를 혐오하지도 않았고 용인했기 때문에 교회 전체가 책망을 받았다.
옛 학자들이 언급하는 바와 같이 그들은 근친상간의 죄를 범한 이 사람들의 높은 학문과 웅변을 자랑하였으므로 그들의 죄는 더욱 컸다.
여러 절에서 보면 엄한 경고와 음란에 대한 책망을 듣지 않아도 될 만큼 이전의 호색적인 경향을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6:9-20).
그들의 학문적인 교만이 부활의 교리를 불신하고 논박하도록 많은 사람들을 미혹시켰다. 그들은 부활 문제를 철학에서 행하듯이 따지고 찬반을 위해서 모든 기술을 동원했던 것같이 보인다.
이런 상태로 보아서 이 교회는 책망을 많이 받을 만하고 시정이 필요했다.
바울은 성령의 지도와 영향으로 모든 지혜와 성실로써 그리고 그 교회에서 그처럼 높고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답게 온유와 권위를 적당히 가지고 일에 착수한다.
서신 서두에서 간단한 소개를 한 후에 바울은 먼저 그들의 분열과 분당을 책망하고 그것의 원인을 규명하고 거짓 교사들이 나타내는 교만과 허영과 학문의 자랑과 웅변이 얼마나 많이 나쁜 분열을 조장시키는가를 보여 준다.
그리고 겸손과 신령한 교훈에 순종함과 성령에 의한 하나님의 가르침이 외부적인 계시나 내부적인 깨달음을 통하여서 그들 가운데 있는 많은 악의 치료제임을 가르친다.
여러 가지 이유로 뽐내는 학문과 웅변의 허영을 보여 주고 있다. 제4장까지 이 문제를 다룬다.
제5장에서 음행한 사람의 경우를 취급하고 그들 중에서 추방하도록 지시한다. (옛 학자들의 말과 같이 이 음행한 사람은 크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고 적어도 어느 당수임에 가깝다.)
사도는 그들이 그자 때문에 교만하여짐을 책망한다(5:2).
제6장에서 이방인 재판관들 앞에서 행하는 소송 사건을 책망한다. 왜냐하면 재산에 대한 분규는 그들 사이에서 평화적으로 해결해야만 했었다.
이 장 끝 부분에서 음란 죄에 대하여 경고하고 여러 가지 말로 권면한다.
제7장에서 양심의 문제를 취급한다.
이것은 그들 중의 누가 결혼에 대하여 편지로 물었던 것이며 결혼은 음란에 대한 치료제로써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이며 남편이나 아내가 이방인으로 계속해 있고 그 하나가 기독교인이 되어도 결혼의 줄은 끊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 간단히 말하면 기독교는 인간이 시민으로서의 상태와 관계를 변화시키지 않는다.
또한, 아마 고린도 사람이 질문하였을 법한데, 처녀로 시집가지 않는 일에 대해서도 더불어 지도한다.
제8장에서는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에 대하여 지도하고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남용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고 있다.
제9장에서 자유에 대한 바울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자기가 사역하던 교회로부터 부양을 받아도 좋았지만 이 요구를 포기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었다.”
다른 일들에 있어서도 그가 함께 노력하는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들의 형편에 조화를 시키었다.
제10장에서는 그들이 주의 상과 귀신의 상을 동시에 참예하지 못하므로 제물을 먹음으로 우상 숭배자들과 교제하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였다.
물론 고린도 사람들이 시장에서 팔리는 고기나 불신자의 연회석에서 주어지는 고기에 대하여 물어보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제11장에서 그들의 공중 예배에 대하여 지도한다. 그리고 주의 성찬을 받을 때에 불규칙적인 일과 혼란을 책망하고 그렇게나 거룩한 제도의 남용을 엄하게 경고한다.
제12장에서 영적 은사를 생각하는데 이 은사들은 고린도 교회에 풍족히 임하였고 이것을 자랑하였다.
이 장에서 바울은 모든 은사가 같은 근원에서 나왔고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은사들은 한 성령에서 나왔으며 교회의 유익을 위함, 이 목표를 위하지 않을 때에 남용되었다.
이 장의 끝부분에 이르면 이들의 은사가 참으로 가치가 있으나 이보다 훨씬 더 좋은 은사를 추천하는데, 이는 제13장에서 사랑의 권면으로 나타난다.
제14장에서 영적 은사를 사용함에 있어서 질서와 품위를 지키도록 지도한다. 그들은 은사를 자랑하고 그것을 나타내는 허영심 때문에 아주 혼란하였던 것 같다.
제15장은 위대한 부활 교리의 설명과 확신으로 차 있고 마지막 장은 특별한 충고와 인사로 구성되어 있다. 이리하여 이 서신이 끝을 맺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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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린도전서 표제
매우 초기로부터 이 편지서는 “고린도인들에게 Ⅰ”(헬, Pros Korinthious A)라는 표제를 갖고 있었다.
이 짤막한 표제는 이 편지서의 현존하는 최고의 사본인 체스터 베티 성경 파피루스에서 이미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이 파피루스는 3세기 경에 기록된 것이다. 바울이 기록한 원문에는 이 표제가 포함되지 않았다.
2. 저자
바울이 실제로 존재했는지 안했는지를 의심하기까지 멀리 빗나간 초극단주의적인 비평가들을 제외하고는 이 편지서의 저자가 바울이라는 사실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고린도후서, 로마서, 갈라디아서와 함께 이 편지서는 사실에 있어서 바울의 모든 편지들 가운데 그 저자가 가장 뚜렷하게 밝혀진 것으로 믿어진다. 저자의 이름이 이 편지서의 처음과 끝에 나타나 있다(고전 1:1, 2; 16:21). 바울이 “친필로”(고전 16:21) 문안한다고 기록한 끝부분의 인사말을 제외하고 이 편지서는 한 사람의 필생(畢生), 또는 서기가 바울의 말을 받아서 기록하였다.
바울이 서기들을 사용한 데 대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하는 것이 그에게는 관례적인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롬 16:22; 골 4:18; 살후 3:17). 그 이유로서 한가지 추측되는 것은 그 사도가 시력이 나빴기 때문일 것이다(갈 6:11).
3. 역사적 배경
고린도전서는 에베소에서 기록되었다(고전 16:8). 이 도시는 바울이 “3년이나”(행 20:31) 머무르며 일하던 곳이요, 그의 제3차 선교 여행 동안에 활동의 중심지였던 곳이다(행 19장; 20:1). 이 편지서가 다 기록될 무렵 바울은 이제 막 헬라와 마게도냐를 향하여 출발하려 하였으나, “오순절까지”는 에베소에 머물기를 희망했다(고전 16:5-8). 그러나 사태는 변하여 바울의 출발을 재촉하게 되었다(행 19:21-20:3).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때, 이 편지서의 기록 연대가 A.D. 57년 봄일 것으로 짐작된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제2차 선교 여행 동안에 세워졌다. 사도는 그곳에서 적어도 18개월을 유하면서 일하였다. 그곳에서의 활동은 퍽 어려웠으나 성공적이었으며 하나의 힘있는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행 18:1-11).
고대 도시 고린도는 펠로폰네수스와 헬라 본토를 연결하는 지협(地峽)에 위치하고 있었다. 고린도는 그 지협의 남단에 그리고 아크로-코린투스라고 알려진 산의 북쪽 기슭에 있는 나즈막한 고원에 자리잡고 있었다. 아크로-코린투스 산의 꼭대기에는 성루와 신전이 서 있었다. 그 도시는 펠로폰네수스와 앗티카를 잇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따라서 전략적으로 요충의 위치에 있었다. 또한 동쪽에는 사로스만 서쪽에는 고린도만을 끼고 있는 위치상의 잇점 때문에 고린도는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거래되는 많은 상품들의 시장이 되었다. 그리하여 다수의 페니키아인들이 그 도시에 거주하면서, 인근 바다에서 나는 조개류로부터 자주 물감을 만들어 장사를 하였다.
그들은 또한 다른 기술들도 고린도에 도입함과 아울러 페니키아의 신들을 섬기는 불순한 예배 의식을 도입하였다. 상업의 중심 도시요 바다들을 잇는 길목에 위치한 고린도는 도덕적으로 방탕이 극심하여 마침내 그 도시 이름은 음란의 대명사가 되기까지 하였다. “고린도화하다”(to Corint-hianize)는 표현은 쾌락적이고 사치성이 있는 방탕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들은 고린도에서 사는 것처럼 산다”와 같은 격언은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는 형편이다.
고린도의 종교적 형편을 이해하는 것은 그 악명 높은 도시에서 악의 세력을 극복하는 일과 성도들을 거듭나게 하여 교회를 굳게 세우는 일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밝히 깨닫는 데 도움을 준다. 그 도시의 부요와 사치와 상업과 잡다한 인구 등으로 인하여 고린도는 반즈(Barnes)가 칭한 바 있는 “고대의 빠리”(The Paris of antiquity)라는 칭호가 썩 합당한 도시였다. 그곳의 주된 신은 가장 저열한 형식과 방탕한 열정의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였다. 이 종교는 관능적인 호색을 신성시하는 것으로서, 그 결과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능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아폴로의 신전이 아크로-코린투스 산의 북쪽 언덕에 세워져 있었다. 당시의 법적 요구에 의하여 그 사랑의 여신 앞에는 천명의 젊은 여성들이 고급 매춘부 또는 공적인 매춘부로서 그 직무를 이행하고 있었다. 이들을 찾는 손님들은 주로 외국인들이었으며 그들의 악행의 결과로 그 도시는 지속적인 수입을 얻고 있었다.
고대 도시 고린도에서 복음의 사자가 당면했던 과업은 다음과 같은 말 가운데 잘 묘사되어 있다. “복음이 고린도에서 개선할 수 있었다면 그 복음은 어떠한 여건 하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W. D. Chamberlain).
약 3년 전에 그곳에 교회를 세운 후 바울이 거기에 없는 동안, 여러가지 문제들이 야기되었으며 이 문제들은 사도의 주의를 이끌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 편지서 자체에서 알 수 있다. 우선 그 문제들 중의 하나는 당파들이 조직되어 교회를 분열시킨 것이다. 아볼로는 그의 웅변과 학식으로 말미암아 많은 교인들에 의하여 바울보다 더 높이 받들림을 받았다(고전 1:12; 3:4; 행 18:24-19:1 참조). 다른 이들은 또한 바울도 아볼로도 아닌 베드로, 곧 예수님의 직접적인 사도의 추종자임을 뽐내고 있었다(고전 1:12). 또 다른 이들은 어떠한 인간적 지도자에게 속하는 것을 거절하고 바로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무리라고 공언했다(고전 1:12).
그 밖의 다른 문제들로서는 일단 교회에 들어와서 신자가 되었다가 다시 옛날의 악습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에 관한 문제(고전 5장), 교회 내에서 교인들 사이에 벌어진 문제들을 세상의 재판정으로 가져가는 이른바 소송에 관한 문제, 성만찬 예식을 잔치의 기회로 삼는 문제(고전 11:17-34), 그리고 결혼 생활과 그에 관계된 사회적 문제들(고전 7장),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던 음식물을 먹는 문제(고전 8장), 공중 예배에 있어서의 여인들의 합당한 행동(고전 11:2-16) 등등이었다. 또한 고린도 교회 내에서 영적 은사들의 적절한 기능에 관한 오해가 있었으며(고전 12-14장) 또 어떤 이들은 부활의 사실과 방법에 관하여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고전 15장).
바울은 고린도 교회 내에 분쟁이 생겼을 때 그곳을 떠나 온 아볼로에게서 고린도 교회의 상태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아볼로는 에베소에서 바울과 함께 있었다. 바울은 그가 고린도로 돌아갈 것을 강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전 1:12). 다른 소식은 “글로에의 집 편으로”(고전 1:11) 들었으며, 또한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고전 16:17) 등으로 구성된 대표단에 의하여 들었을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형편은 바울의 심한 염려거리가 되었으며, 그는 이미 한통의 편지를 그 교회에 보낸 적이 있었다(고전 5:9). 그리고 그가 에베소에 머무는 동안에 고린도를 짧게나마 일차 방문했을 가능성이 있다(고후 13:1 참고). 그는 또한 디모데(고전 4:17; 16:10)와 디도(고후 2:13)를 고린도에 보냈었다. 이 모든 일에 다시 덧붙여서 바울은 여기 “고린도 전서”로 알려진 편지를 그곳에 보내면서 그 안에서 야기되었던 여러가지 문제들을 다루었던 것이다.
4. 주제
이 편지서의 주요 골자는 두 가지로서, 첫째는 복음의 가르침을 부패시킨 행습을 교회 내에 도입하게 한 타락한 교인들을 꾸짖는 것이요, 둘째는 신자들이 명백히 알기를 원한 몇가지 신앙과 실제의 문제들에 관하여 가르치고 설명하는 것이다. 바울은 죄에 대한 방종을 간과하거나 두둔하지 않았다. 그는 죄를 정죄함에 있어서 공평무사하였으며, 범죄를 어떤 방법으로든지 조장하거나 덮어주는 일이 없었다. 그는 옳은 길로부터 이탈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단호하고도 가혹할 정도로 단죄하였다. 교회 내의 무질서를 지적하고 점차로 확대되어 가는 불법들을 질타하는 일과 함께 이 편지서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는 참된 동역자의 심중에서 언제나 우러나는 동정적인 긍휼과 알뜰한 자비, 곧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고 방황하는 자를 불러들이며 상처입은 영혼을 감싸주는 한결같은 사랑이 나타나 있다. 바울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정복하는 능력은 강제나 완력이 아니라 사랑임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고린도 교회의 영적인 수술로 인한 아픔을 부드러운 사랑의 향유로써 진정시켰던 것이다. 이것은 제13장에 기록된 바 그리스도인 사랑을 묘사한 탁월한 걸작품 가운데 특별히 잘 나타나 있다. 교훈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이 편지서는 결혼 관계,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던 음식물의 사용, 교회 예배시의 행동, 성만찬, 영적 은사들의 적절한 행동 등과 같은 여러가지 실제적인 문제들을 취급하고 있다.
이 책은 바울의 모든 편지들 가운데서 “가장 풍부하고 가장 교훈적이며 가장 힘있는” 편지로 일컬어져 왔다.
5. 개요
Ⅰ. 서론 1:1-9
1. 서두의 인사 1:1-3
(1) 기자와 그의 동료들의 신원 1:1
(2) 편지의 수신처 1:2
(3) 서두의 축복 1:3
2. 영적 성장에 대한 칭찬 1:4-9
Ⅱ. 무질서에 대한 책망 1:10-6:20
1. 교회 내의 분파 1:10-4:21
(1) 분파 정신을 책망함 1:10-13
(2) 그의 봉사와 복음에 대한 바울의 변호 1:14-2:16
(3) 당파 정신의 부조화 3:1-23
(4) 영적 지도자들에 대한 합당한 태도 4:1-21
2. 근친 상간의 경우 5:1-13
3. 세상 법정에서의 소송을 비난함 6:1-20
Ⅲ. 고린도 신자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들에 대한 대답 7:1-11:1
1. 결혼에 관한 교훈 7:1-40
(1) 부부간의 권리에 대한 상호 존중 7:1-6
(2) 특수 상황 하에서 독신이 권장됨 7:7-11
(3) 불신자와의 결혼 문제 7:12-16
(4)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이 사회적인 지위를 바꾸지 않음 7:17-24
(5) 처녀에 대한 교훈 7:25-40
2. 우상에게 드려진 음식에 관한 교훈 8:1-11:1
(1) 연약한 형제를 위해 삼갈 것을 권함 8:1-13
(2) 그리스도인 자유의 사용에 대한 설명 9:1-27
(3)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 10:1-22
(4) 그리스도인 자유의 정당한 사용 10:23-11:1
Ⅳ. 기독교 예배에서의 합당한 행동 11:2-14:40
1. 여인들과 얼굴 가리움 11:2-16
2. 성만찬 예식의 합당한 준수 11:17-34
3. 영적 은사들의 위치와 기능 12:1-14:40
(1) 은사들의 근원과 다양성 12:1-31
(2) 제일 큰 은사인 사랑 13:1-13
(3) 방언과 예언의 은사에 대한 논의 14:1-40
Ⅴ. 부활의 교리 15:1-58
1. 부활의 확실성 15:1-34
2. 부활의 실제적 성질 15:35-50
3. 부활의 소망이 재림시에 실현됨 15:51-58
Ⅵ. 결론 16:1-24
1. 가난한 자들을 위한 연보에 대한 교훈 16:1-4
2. 고린도 방문 계획을 밝힘 16:5-9
3. 디모데를 받아들일 것을 요청함 16:10, 11
4. 에베소에 머물기로 한 아볼로의 결정 16:12
5. 마지막 권고 16:13-18
6. 마지막 인사 16:19-24
=========[149주달려죽은십자가] [315.내주되신주를 참사랑하고] [304그크신하나님의사랑] [310아하나님의은혜로]
1 Corinthians 1 Amplified Bible
==Appeal to Unity
1 Paul, called as an apostle (special messenger, personally chosen representative) of Jesus Christ by the will of God, and our brother [a]Sosthenes,
2 To the church of God in Corinth, to those sanctified (set apart, made holy) in Christ Jesus, who are selected and called as saints (God’s people), together with all those who in every place call on and honor the name of our Lord Jesus Christ, their Lord and ours:
3 Grace to you and peace [inner calm and spiritual well-being] 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4 I thank my God always for you because of the grace of God which was given you in Christ Jesus,
5 so that in everything you were [exceedingly] enriched in Him, in all speech [empowered by the spiritual gifts] and in all knowledge [with insight into the faith].
6 In this way our testimony about Christ was confirmed and established in you,
7 so that you are not lacking in any spiritual gift [which comes from the Holy Spirit], as you eagerly wait [with confident trust] for the revelation of our Lord Jesus Christ [when He returns].
8 And He will also confirm you to the end [keeping you strong and free of any accusation, so that you will be] blameless and beyond reproach in the day [of the return] of our Lord Jesus Christ.
9 God is faithful [He is reliable, trustworthy and ever true to His promise—He can be depended on], and through Him you were called into fellowship with His Son, Jesus Christ our Lord.
10 But I urge you, believers, by the name of our Lord Jesus Christ, that all of you be in full agreement in what you say, and that there be no divisions or factions among you, but that you be perfectly united in your way of thinking and in your judgment [about matters of the faith].
11 For I have been informed about you, my brothers and sisters, by those of Chloe’s household, that there are quarrels and factions among you.
12 Now I mean this, that each one of you says, “I am [a disciple] of Paul,” or “I am [a disciple] of Apollos,” or “I am [a disciple] of Cephas (Peter),” or “I am [a disciple] of Christ.”
13 Has Christ been divided [into different parts]? Was Paul crucified for you? Or were you baptized into the name of Paul? [Certainly not!]
14 I thank God that I did not baptize any of you except Crispus and Gaius,
15 so that no one would say that you were baptized into my name.
16 Now I also baptized the household of Stephanas; beyond that, I do not know if I baptized anyone else.
17 For Christ did not send me [as an apostle] to baptize, but [commissioned and empowered me] to preach the good news [of salvation]—not with clever and eloquent speech [as an orator], so that the cross of Christ would not be [b]made ineffective [deprived of its saving power].
==The Wisdom of God
18 For the message of the cross is foolishness [absurd and illogical] to those who are perishing and spiritually dead [because they reject it], but to us who are being saved [by God’s grace] it is [the manifestation of] the power of God.
19 For it is written and forever remains written, “I will destroy the wisdom of the wise [the philosophy of the philosophers], And the cleverness of the clever [who do not know Me] I will nullify.”
20 Where is the wise man (philosopher)? Where is the scribe (scholar)? Where is the debater (logician, orator) of this age? Has God not exposed the foolishness of this world’s wisdom?
21 For since the world through all its [earthly] wisdom failed to recognize God, God in His wisdom was well-pleased through the [c]foolishness of the message preached [regarding salvation] to save those who believe [in Christ and welcome Him as Savior].
22 For Jews demand signs (attesting miracles), and Greeks pursue [worldly] wisdom and philosophy,
23 but we preach Christ crucified, [a message which is] to Jews a stumbling block [that provokes their opposition], and to Gentiles foolishness [just utter nonsense],
24 but to those who are the called, both Jews and Greeks (Gentiles), Christ is the power of God and the wisdom of God.
25 [This is] because the foolishness of God [is not foolishness at all and] is wiser than men [far beyond human comprehension], and the weakness of God is stronger than men [far beyond the limits of human effort].
26 Just look at your own calling, believers; not many [of you were considered] wise according to human standards, not many powerful or influential, not many of high and noble birth.
27 But God has selected [for His purpose] the foolish things of the world to shame the wise [revealing their ignorance], and God has selected [for His purpose] the weak things of the world to shame the things which are strong [revealing their frailty].
28 God has selected [for His purpose] the insignificant (base) things of the world, and the things that are despised and treated with contempt, [even] the things that are nothing, so that He might reduce to nothing the things that are,
29 so that no one may [be able to] boast in the presence of God.
30 But it is from Him that you are in Christ Jesus, who became to us wisdom from God [revealing His plan of salvation], and righteousness [making us acceptable to God], and sanctification [making us holy and setting us apart for God], and redemption [providing our ransom from the penalty for sin],
31 so then, as it is written [in Scripture], “He who boasts and glories, let him boast and glory in the Lord.”
==Footnotes
1 Corinthians 1:1 This man may have served as secretary to Paul to record his dictation, and may be the synagogue leader mentioned in Acts 18:17.
1 Corinthians 1:17 Paul may be referring to the danger that convincing people to become Christians by the use of clever rhetoric would result in false conversions (cf 2:5).
1 Corinthians 1:21 The straightforward message of salvation seemed foolish to unbeliev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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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제1장 인사와 감사
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고전1:1-3)===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은 제일 먼저 갈라디아교회에 편지를 했고, 두 번째로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했고, 세 번째가 바로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하였습니다.
때는 바울이 2차 선교여행 중에 성령의 이끄심으로 유럽으로 방향을 바꿔 마게도냐로 건너갔을 때 빌립보교회를 세우고 그 다음에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웠으나 박해로 인해 남쪽 지역인 아가야로 옮겨서 제주도처럼 섬 지역이었던 곳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 고린도에서 교회가 세워지고 왕성하게 성장을 했습니다.
바울은 3차 선교여행 중에 에베소에서 집중 선교를 하여 2년 동안 두란노서원에서 말씀을 가르쳐 큰 성장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내 앞으로 고린도를 방문할 계획을 밝히면서 자신의 선교 비전인 로마를 걸쳐 땅 끝인 서바냐(스페인)까지 선교를 할 것과 협력을 당부한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행19:21) [그러나 이 편지는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회신이 왔는데 고린도교회가 문제가 발생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편지로 문제를 해결도록 여러 내용을 담은 편지를 보내게 두 번째로 되었는데 그 편지가 지금의 고린도 전서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의 내용은 파벌이 있다는 것에 대해 책망하며 도덕적인 혼란에 대해서도 책망하고 있는데 성문제, 소송문제, 방종 문제 등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또 교리적인 문제인 우상에게 바쳤던 음식, 예배 질서, 은사, 부활 등에 대해 깊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인사말이지만 내용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짚어 주는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개인적인 정체성과 공동체적인 정체성, 그리고 지도자적인 정체성을 가르쳐 주므로 가장 기본적인 정체성을 정리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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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라고 했습니다. 2하-3절
그리스도인으로써 개인적인 정체성을 먼저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누가 그리스도인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많은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인이란 우리 주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여기서 “이름”은 “오노마”인데 이는 “오노마조”에서 유래했는데 “그의 권위 앞에 고백하다.” 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구원자로 고백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부르다”는 “에피칼레오”인데 에피(..대해)와 칼레오(부르다 또는 초청하다, 영접하다)의 합성어입니다. 그렇다면 정리하면 “예수님을 그리스도 구원자로 고백하면서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구주라는 분명한 고백과 마음에 영접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1:12-13에서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했습니다. 그리고 고후5:17에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 영생할 수 있는 새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3절에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잘 성장하도록 신령한 영양소인 은혜와 평강을 주시는 것입니다.
2.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도라고 했습니다. 2상반절
여기서는 그리스도인으로써 공동체적인 정체성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도(聖徒성스러울성,무리도)란 “하기오스”인데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또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敎會가르칠교,모일회)인데 “에클레시아”입니다. 이는 에크(..로부터)와 칼레오(부르다)의 합성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모인 무리 즉 공동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 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거룩하여 진다는 “하기아조”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통해 죄를 씻어 성결해진 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분명한 성결 체험이 있어야만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엡1:6-7절에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했고, 또 13절에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자라고 했습니다. 1절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으로써 지도자적인 정체성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사역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뜻”은 “델레마”인데 “결정하다, 의도하다”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깊고 오묘하신 섭리를 통해 지도자를 결정하시고, 의도를 가지고 사용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使徒부릴사,무리도)는 “아포스톨로스”인데 아포(..로부터)와 스텔로(불러모으다)의 합성어입니다. 이를 소명(召命부를소,목숨명)을 받았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사역하는 것을 사명(使命부릴사목숨명)이라고 말하는데 사명은 두 가지로 표현했습니다.
“오이코노미아”로 “청지기직”을 의미하고, 고전9:17에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했습니다.
또 하나는 “디아코니아”로 “섬김”을 의미하는 것으로, 행20:24에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했습니다.
바울은 행9장에서 특별하게 부르셔서 일하게 하셨고, 소스데네는 고린도 유대인 회당장이었습니다. 바울이 1년 6개월 동안 선교하면서 강력하게 교회가 부흥하자 골수 유대인들이 시기가 나서 법정에 고발하였으나 뜻을 못 이루자 대신 회당장 소스데네에게 분풀이를 하여 폭행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 후 그는 바울의 동역자가 된 것을 볼 때 이미 회당장으로 있을 때 바울을 선대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당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오묘한 섭리를 통해 부르시고 사역자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구주를 분명하게 고백하고 영접하며, 분명한 죄씻음과 거듭남으로 공동체의 일원 되고, 예수님을 위해 섬김과 청지기의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해 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6.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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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B]제1장
1. Paul, called [as] an apostle of Jesus Christ by the will of God, and Sosthenes our brother,
2. to the church of God which is at Corinth, to those who have been sanctified in Christ Jesus, saints by calling, with all who in every place call upon the name of our Lord Jesus Christ, their [Lord] and ours:
3. Grace to you and peace 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4. I thank my God always concerning you, for the grace of God which was given you in Christ Jesus,
5. that in everything you were enriched in Him, in all speech and all knowledge,
6. even as the testimony concerning Christ was confirmed in you,
7. so that you are not lacking in any gift, awaiting eagerly the revelation of our Lord Jesus Christ,
8. who shall also confirm you to the end, blameless in the day of our Lord Jesus Christ.
9. God is faithful, through whom you were called into fellowship with His Son, Jesus Christ our 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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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과 소개(고전 1:1-9)
전체 서신에 대한 사도의 서문을 살펴 보자.
Ⅰ. 편지의 기명(inscription). 그 때의 편지를 쓰는 관습에 의하면 편지를 쓴 사람과 편지를 받는 사람의 이름이 기입되었다.
1. 이 서신은 그가 손수 세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이방인들의 사도인 바울의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그의 사도직을 문제시한 사람들도 있었고(9:1, 2), 그의 인격 과 사역을 비방한 지들도 있었다(고후 10:10). 가장 성실하고 유용한 목사도 이런 경멸을 들을 수 있다. 이런 사도의 자격을 요구하면서 편지를 시작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 그는 이 명예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지 않고 그것에 대한 신령한 사명을 가졌었다.
거짓 교사들이 바울을 비방하고 경솔하고 미혹된 추종자들이 거짓교사들과 바울을 동등하게 취급하는 이 때에 바울의 자격을 주장하고 자기의 직책을 강조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다. 그의 사도적인 자격과 권위를 주장한 것은 바울 안에 있는 교만이 아니고 그의 사명에 대한 성실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더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하여 지위가 낮은 사역자인 소스데네를 언급한다. 바울의 형제로 칭한 소스데네는 동료적인 사도가 아니라 동료적인 사역자이며 한때 유대인 회당의 지도자였으나 그 후에 기독교로 개종했고 아마 고린도에서 탄생한 사람이며 그리고 고린도 사람들에게 친근한 소스데네를 함께 말함은 고린도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함이었다. 소스데네가 사도적인 영감을 받았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전 서신을 통하여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만 말하고 있다. ((바울이 고린도에 체재할 당시 그 곳 회당장. 아마도 그리스보의 개종 후에 그리스보의 후임이 되었던 듯함(행 18:8). 갈리오총독이 바울의 기독교 설교에 대해 분개하여 제기한, 성난 유대인들의 고소를 기각하였을 때(행 18:12-행 18:16), 그 중들은 소스데네를 붙잡아 재판 자리 앞에서 때렸었는데, 바로 이사람으로 보임.))
바울은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그의 사도적 권위를 약화시키지는 않았으나 자기가 사역하는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친절하고도 겸손한 일을 할 준비는 항상되어 있었다.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처럼 성화되었으므로(참되게 믿는 바로 그순간부터 주께서 그렇게 여겨주시며 신실하게 변화시켜 가신다!!..다만 끝까지 따라가야함을 잊지말라!!) 세례를 받을 때 그에게 헌신되고 그리고 거룩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성화를 고백하는 것이다. 만약 고린도의 믿는 사람들이 진실로 거룩하지 않다면 그것은 (단지, 진정)그들의 잘못이요 수치다.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그리스도 안에서(!!!..연합한 하나됨으로 그리스도를 살아갈 때 그리스도를 빼어닮게 하심으로) 우리를 성화시키는 것은 기독교의 설계이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4).
고린도에 있는 교회와 함께 바울은 이 서신을 "또 각 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의 주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보낸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적이고 무신론자와 다른 점은 [주 하나님, 참생명 JC 공급받고 누림, 살아냄을 가능케 하는!!] "기도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이며,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이로써 그분의 임재하심안에서 동행한다"는 점에서 유대인과 이교도들과 구별된다. 예수는 그들의 공통의 주님이시요 머리이다. 다음을 관찰하자.
기독교 세계의 모든 곳에는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은 모든 장소에 남은자(remnamt)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하고, 주님의 교통하심따라!!]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생각하고 그들과 교제를 나눠야 한다.
Ⅱ. 사도적인 축복.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평강의 왕의 사도는 평화의 전파자와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 복음은 이 축복을 지닌, 복음 설교자가 충심으로 원하고 기도하는 이 축복이 그가 사역하는 자들의 상태가 되기를 빈다.
은혜와 평화는 하나님의 은총이요, 화해이다. 그것은 실로 모든 축복의 요약이다.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6)는 것은 구약의 축복 형식이었다. 그러나 복음에서 우리가 가지는 잇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하나님의 평화를 어떻게 얻는가를 지도받는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해서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도 없고 어떤 유익을 얻을 수도 없다.
2. 무엇이 우리가 이 평화를 누리도록 자격을 부여하나를 듣는다. 즉 은혜이다.
첫째는 은혜요, 그 다음이 평화다. 하나님께서 평화를 죄인들에게 부여하시기 전에 죄인들을 그에게 화해시키신다.
Ⅲ. 고린도인들을 위하여 하나님에게 드리는 바울의 감사. 바울은 그의 서신을 친구를 위한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기도로 시작한다. 아래 사항을 주목하자.
우리의 친구들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은 그들을 위한 기도와 감사로 가장 잘 나타난다.
우리가 받은 은사와 은혜와 위로 때문에 서로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것은 성도의 교제의 마땅한 일이다. 바울은 감사를 드린다.
1. 예수를 믿는 그들의 믿음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4절)
예수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게 하며 취급하시는 분이다. 믿음으로 예수와 연합되고 그의 성령과 공로에 참여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총의 대상이 된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충심의 선의를 베푸시며 아버지 같은 웃음과 축복을 부여해 주신다.
2. 그들의 영적 은사의 풍요함 때문에 고린도 교회가 유명한 것이었다. 그 어떤 은사에 있어서도 그 어떤 교회보다 뒤지지 않았다(7절).
먼저, 구변과 지식을 자세히 논한다(5절).
하나님께서 이 두 은사를 주실 때 사용할 능력도 주셨다. 지식의 뿌리가 없는 사람들이 꽃 같은 구변은 가지고 있을 수 있으나, 그들의 말은 내용이 없을 수 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사용할 구변이 없을 수 있다. 그것은 수건에 싸둔 것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두 은사를 주실 때 그 사람은 잘 사용할 능력을 갖추게 된다.
고린도 교회가 구변과 지식의 풍족한 은사를 받았을 때 많은 찬양을 하나님에게 바치는 것이 합당하다. 이 두 은사가 기독교 진리에 대한 증거, 그리스도의 증거가 될 때 더욱 그렇다(6절). 그들은 "성령의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히 2:4)이었다. 이것들로써 하나님은 그들의 사명과 교리를 증거해 주셨다.
그래서 어떤 교회에 더 많은 은사가 주어지면 더 많은 사도들이 전한 진리에 대한 증거, 그들의 사명에 대한 증거가 있게 된다.
고린도 교인들이 진리에 대한 그와 같은 터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기대를 가지고 사는 것이 당연하다(7절).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징이다. 우리의 신앙은 이 점에 집착되어 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재림을 믿고, 기다리고 그리고 그 재림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기독교 신앙에 우리가 확고히 서면 설수록 더욱 더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믿고 더욱더 열렬하게 재림을 고대한다.
Ⅳ.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리스도의 능력과 사랑에 기초한 앞으로 고린도 교인들이 가질 소망에 관하여(8,9절).
그들에게 선한 일을 시작하시고 지금까지 그 일을 계속하신 하나님은 그것을 미완성으로 남겨두시지 않는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보호되고 끝까지 견고히 지켜진다. 이런 사람들은 "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게 된다."
이것은 엄한 정의의 원리에 의함이 아니고 은혜로운 사면에 의하여, 엄한 율법 안에서가 아니고 풍부하고도 값없는 은혜로 되는 것이다.
이런 목적으로 그리스도에 의하여 보호되고 굳게 지켜지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우리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이와 같은 특권을 소망하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고!
심판날에 우리가 흠없이 나타나도록 그리스도의 능력에 의하여 우리들 자신의 타락이나 사탄의 유골에서 해방되어 보존되는 이 일이 어떠한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우리 소망을 지탱해 주는 이 영광스러운 대망이여!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4).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접근시키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신 이는 신실하시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신뢰 할 수 있다.
그의 부르심을 듣고 오는 사람들은 결코 실망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에게 진실하다면 그는 결코 성실치 못한 일이 없다. "그는 그의 성실함을 폐하지 아니한다 "(시 8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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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교회의 분쟁
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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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의 원인(고전 1:10-13)
이제 바울은 그의 주제에 언급한다.
Ⅰ. 바울은 그들이 하나가 되고 형제애를 가지도록 권면한다. 그리고 분리를 책망한다.
그들의 불행한 분리상태에서 벗어나 잘 되기를 바라는 어떤 이로부터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분열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을 어떤 이가 전함은 교회에 대한 악의도 아니고 사역자에 대한 반감도 아니고 바울의 중재로 분리된 과열을 식히고저 함이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아주 상냥한 태도로 쓴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을 권하노니"
만약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그 귀하고 가치있는 이름을 생각한다면 하나가 되어라. "다 같은 말을 하고 분열을 피하라(원문대로)." "즉 피차의 사랑에서 멀어진 것을 피하라. 할 수 있는 한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신앙의 큰 일들에 있어서 한 마음을 품고 감정으로 하나가 될 수 없으면 사랑으로 하나가 되라. 큰 일에 있어서 하나가 되면 작 은 일에 대한 분리나 분쟁을 없앨 수 있다."
Ⅱ. 바울은 분쟁의 근원을 암시한다.
교만이 밑에 놓여 있었다. 이것이 그들을 갈라놓았다. "교만에서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잠 13:10). 그들은 그들의 사역자에 대항하여 싸웠다.
바울과 아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사역자였다. 그리고 그들의 신앙과 기쁨을 도와 주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분쟁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당을 짓고 고상하고 영적인 선생으로 불렀고, 다른 이들은 아볼로를 아마 가장 열렬한 웅변가로 불렀고, 또 어떤 이들은 게바를 혹은 베드로를 그때의 가장 권위있는 사람으로 불렀다. 왜냐하면 그는 할례받은 사도였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따랐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도 타락하기 쉬운 것같이 복음과 그의 제도가 차이와 불화와 분쟁의 도구가 되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잘못이 아니고 인성의 타락과 부패의 증거이다.
교만이 기독교인들을 얼마나 서로 적대하게 만드는가를 명심하라. 그리스도와 그의 종들을 분리시키고 그들을 서로 경쟁하는 자들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Ⅲ. 바울은 그들의 불화와 싸움에 대하여 충고한다. "그리스도가 나뉘었느뇨?" 아니다.
오직 한 분의 그리스도가 계실 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느냐? 혹은 그를 사역자 외에 다른 이로 여기었느냐? 혹은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 신성한 예배시에 나를 경배하거나 나의 제자가 되었느냐? 그런 권리를 너희에게서 요구하였느냐. 이것은 너의 구속자 하나님의 고유한 권리이다.
사역자가 아무리 훌륭해도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신 할 수는 없다.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져오는 어떤 일도 주장하지 못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요, 희생이요, 우리의 주님이요, 지도자다. 그리스도가 나뉠 수 없는 것같이 그들 사이에 여러 이름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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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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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준 세례(고전 1:14-16)
여기서 바울은 그의 사역을 설명한다.
바울은 몇 사람만 세례 준 것을 하나님에게 감사한다. 고린도에 있는 회당장이었던 그리스보와(행 18:8) 가이오와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만 세례 주고 그 외는 기억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이 어찌 감사의 일이 될 수 있나. 모든 민족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사도의 임무가 아니였던가? 바울은 그의 의무의 태만을 하나님에게 감사하였나?
전연 세례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자기의 제자를 만들고 그들의 머리가 되는 그런 일로 세례를 주지 않았음을 하나님에게 감사한다.
세례 주는 일은 다른 사역자에게 맡기고 바울은 더 유용한 복음 전하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이것이 더 중요하며 바울은 이것을 그의 사명이라 생각했다.
세례 주는 일은 조수들에게 맡기고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복음 전하는 일을 바울이 했다. 이런 뜻으로 바울은 말한다.
"세례를 베풀기 위함이 아니고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그를 보냈다."
다음 사항을 주목하자.
사역자들은 그들의 임무의 어떤 부분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그리스도의 영광과 영혼구원에 가장 기여하는 일을 위하여 특별히 보냄을 받았다고 생각해야 한다.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행한 주요한 일은 "복음과(17절) 십자가와(18절)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23절)를" 전하는 것이었다.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의 군인들로서 십자가의 군기를 세우고 나타내야 한다. 그는 자기의 상상이 아니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
즉 십자가에서 못박힌 구속자를 통하여 평화의 기쁜 소식과 하나님과의 화평을 전해야 한다. 십자가에서 못박힌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희망과 기쁨의 원천이다.
그의 죽음에 의하여 우리가 산다. 이것이 바울이 설교한 내용이고 모든 사역자들이 설교한 내용이고 모든 성도가 살아야 할 기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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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이신 그리스도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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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전도 방법과 그 성공(고전 1:17-31)
Ⅰ. 바울이 복음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방법.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며 "(17절)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2:4) 웅변의 유창함과 헬라인이 자랑하고 사도를 반대하는 자들이 전하는 철학적인 섬세한 말로 바울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아니하며 진리의 힘이 아닌 예술의 힘으로 성공이 이루워지지 않도록, 십자가에서 못박힌 그리스도의 소박한 교리가 아니고 강한 웅변으로 복음이 전하여져서 십자가의 명예가 감소되지 않도록 바울은 복음을 전했다.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유대의 학문을 배웠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함에 있어서는 가진 바 그의 학문을 버렸다. 그는 소박한 언어로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를 전했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간의 구주이며 구원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의 통치와 율법을 복종해야 함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진리는 기교적인 옷이 필요 없다. 그것은 자체의 빛으로 빛나며 신령한 권위로 세상에 퍼지며 인간의 도움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로 전파된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소박한 전도가 이방인의 웅변과 철학보다 더 능력이 있었다.
Ⅱ. 이런 전도의 여러 효과들.
멸망하는 자에게는 그것은 미련한 것이나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18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23,24절).
1.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는 유대인에게 거리낌이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넘어갈 수 가 없었다.
그들은 대망하는 메시야가 현세의 위대한 왕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하기에 그렇게 볼 모양이 없고 그렇게나 저주스러운 죽음을 한 사람을 그들의 왕이나 구속자로 고백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를 경멸하고 저주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고 십자가에서 죽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의 기적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 하였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22절)(마 12:28).
2.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를 비웃고 사도의 말을 경멸하였다. 그들은 지혜를 찾았다.
그들은 지혜와 독서를 한 사람이고 예술과 학문을 연마하고 여러세기 동안 지식과 학문의 근원이 되어왔다.
십자가의 소박한 진리가 그들의 구미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허영을 채우지 못하고 호기심과 변론을 만족 시키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십자가를 경멸하였다.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는 자에 의하여 구원을 받으라고! 저주를 받고 비천하며 천한 생활을 하고 모욕적인 죽음을 당한 사람을 믿으라니 어처구니 없구나!
이것은 인간의 이성과 학문의 교만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교리를 받아들이고 그런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우매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리하여 그들은 그들의 교만과 고집 가운데서 멸망하도록 되어 있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십자가의 교리에 적용되고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신비를 알게 된 사람들임을 명심하자.
Ⅲ. 구약의 예언과 같이 인간의 지혜를 이긴 십자가의 승리를 볼 수 있다(사 19:14).
" 내가 지혜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지혜있는 자가 어디 있으며 선비가 어디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 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19,20절).
이 세상의 가치있는 학문이 그리스도교의 계시와 십자가의 영광스러운 승리에 의하여 부끄럽게 되고 무색케 되었다.
이방인의 정치가와 철학자, 유대인의 랍비와 박사들, 자연의 비밀을 탐구하는 자들, 이들이 모두 난처하게 되었다.
이 진리는 가장 훌륭한 정치가와 철학자와 유대인이나 헬라인 의 현학자들을 초월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할 때 그의 고유한 길을 택하셨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21절).
세상의 뽐내는 학문이 이 세상을 하나님께 접근시키지 못한다.
그들의 지혜에도 불구하고 무지가 넘치고 있으며 불의가 차 있다. 인간은 자기의 지식으로 뽐내나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세상적인 판단으로 보면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 하신다.
1. 전도의 내용이 세상적으로 현명한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다.
그의 죽음으로 우리가 살고 그의 저주를 통해서 우리가 축복을 받고 그의 정죄를 받아 우리가 의롭게 되는 생활이 자만으로 눈이 어둡고 편견과 이성과 철학의 교만으로 차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일이었다.
2.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 그들에게는 역시 어리석은 일이었다.
지혜와 웅변으로 유명한 사람이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는데 채용되지 않았다. 몇 사람의 어부들이 부름을 받고 이 사명을 위하여 보내졌다.
이들은 세계 만민을 제자로 삼도록 위임을 받았다. 이들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식을 세상에 전파할 그릇이었다.
이들은 첫눈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 같은 장엄함과 숭고함을 찾을 수가 없다. 학문과 지혜로 뽐내는 자들은 전하는 사람들의 처지를 보고 복음을 경멸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롭다"(25절).
허영의 사람들이 비난하는 신령한 행동의 방법이 그 들의 모든 학문과 지혜보다 더 진실하고 확고하며 성공적인 지혜를 가지고 있다.
"형제들아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26절).
기독교의 형편을 주시하라. 학문과 권력과 명예로운 가문의 사람들을 부르지 않았다. 우리의 종교는 외부적으로 볼 때 비천하고 연약하다.
(1) 세상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복음의 사역을 위하여 선택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철학자나 웅변가나 정치가나 부나 권력이나 흥미있는 사람을 선택하여 은혜와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시지 않았다.
지혜와 학문이 많은 사람이 복음의 성공을 위하여 기여하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육으로 지혜있는 사람을 택하지 않았다. 능력있는 사람이나 귀족도 아니다.
인간들은 이들이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데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과 세상의 연약한 것들과 세상의 비천한 것들과 비천하고 낮은 신분과 교양이 없는 사람들을 택하여 복음의 전도자와 교회의 설립자로 만드신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좋은 판단자이시기에 무슨 기구나 조치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적합 할까를 아신다.
(2) 유명한 신분이나 인격자가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 전도자가 가난하고 미약했던 것같이 예수를 믿는 사람도 그러했다.
지혜있는 자나 권력이 있는 자나 귀족이 십자가의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의 처음 기독교인은 연약하고 어리석고 비천했다.
지식 수준이 낮고 재산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신령한 지혜가 얼마나 좋으며 복음의 성공을 위해서 좋은 길이 없던가!
Ⅳ. 모든 일이 얼마나 잘 되었나의 설명을 들어보자.
1. 인간의 교만과 허영을 타파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세상의 어리석은 일을 택하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다.
학문이 없는 사람을 택하사 학문이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들며, 세상의 연약한 것들을 취하사 능력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비천한 계급과 환경에 있는 자들을 택하사 세상 임금의 권력과 권위를 부끄럽게 하였다.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을 폐하려 하시었다."
즉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이방인들을 회개시켜 유대인들의 제를 폐지하고 세상을 경시하는 잘못을 꺽였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없는 것들로 말했다. 이리하여 에스더 위경에서 그 여자는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없는" 자들에게 왕권을 주시지 마옵소서(에스더 위경 14:11). 에스드라(Esdras)는 그의 외경에서 "이방인을 없는자들로"말한다(에스드라 후서 6:56, 57).
바울이 아브라함을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이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하였다.
복음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의 교만을 꺾기에 알맞고 헬라인의 자랑하는 학문을 부끄럽게 하며 유대인들이 자기를 귀 하게 여기고 이방인들을 무시하는 제도를 멸하신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29절). 자랑할 여지가 없다. 신령한 지혜만이 구원의 방법을 계획한다. 신령한 은혜만이 그것을 계시하고 알린다.
이 두가지 점은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이다. 교리와 발견이 인간의 모든 예술과 권위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퍼져나갔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교만을 덮고 부끄럽게 하셨다. 복음의 섭리는 인간 을 겸손하게 하는 계획이다.
2.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기독교의 실체와 생활에는 능력과 영광이 있다.
비록 사역자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였으며 신자들이 비천한 계급이지만 주의 손이 전도자에게 함께 하였다. 그래서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역사하였다. 그리스도는 사역 자와 교인들에게 위대함과 영광이었다. 우리가 가진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구속함이 되셨다." 이것은 우리가 필요한 전부이다. 우리의 지식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지혜가 되었다. 우리는 죄가 있고 정의에 복종해야 한다. 그는 우리의 의로움이 되고 우리의 구속과 희생이다. 우리는 타락하고 부패했다. 그는 우리의 거룩함이 되었다. 이것이 영적 생활의 원천이다. 성령에 의하여 머리이신 그이로부터 각 지체에게 전달되었다. 우리는 속박되었으나 그는 우리의 구속이 되고 우리의 구주요 해방자다. 아래 점을 관찰하자. 그리스도가 의로 주어지는 어떠한 영혼도 거룩하게 된다. 죄의 능력에서 해방하지 않고서는 죄의 벌에서 벗어나게 하시지 않는다. 마침내 그리스도는 완전한 구속자가 되시고 영혼을 죄에서 해방하고 육체를 무덤의 속박에서 풀어 준다. 이 모든 계획은 "모든 육체가 주안에서 자랑하도록 함이다"(31절). 주안에서 영광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겸손해야 하고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높임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전체의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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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vri"(5485, 카리스) 은혜 grace, 호의, 친절 favour.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카리스(Homer 이래)는 기본어이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a) 이 단어는 '사람들 중에 복리를 가져오는 것'을 의미하며, 카라(carav, 5479)는 이 복리에 대한 개인적 경험이나 표현을 의미한다.
(b) 이 단어는 (a)의 기본 의미에서 여러가지 의미가 파생되었으며, '은혜, 호의, 아름다움(미), 미덕, 사은, 감사, 사의, 친절, 즐거움, 호의의 표현, 돌봄, 감사의 빚, 보답'을 의미한다.
(c) 이 단어는 속격과 함께 사용될 때, '~을 위하여, ~에 대한 고려를 해서'를 의미한다.
(d) 아이스킬루스는 신들의 호의에 카리스를 사용했다. 플라톤의 문헌들에서 카리스는 '좋은 선물, 좋은 뜻, 호의, 기쁨, 기쁘게 하는 것, 감사' 등의 뜻을 가진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카리스는 70인역본에서 약 190회 나오며 여러 히브리어로 사용되었으며, 그 중 헨이 가장 자주 나오며(61회), 대개 '호의, 좋아함, 의향, 기호', 드물게 '매력, 아름다움, 애교'를 의미한다(시 45:2). 그리고 이 단어는 라촌(만족스러운 것, 사람들 사이에서, 잠 10:32; 사람이 하나님께 구하는 은총, 잠 11:27; 사람이 '하나님께 얻는 은총'), 헤세드(은총, 에 2:9; 에 2:17), 라함(우애감, 단 1:9; 동정, 창 43:14), 토브(선한 것, 잠 18:22), 게둘라(영예의 표시, 에 6:3)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카리스는 신약성경에서 15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누가의 기록.
① 카리스는 비종교적인 행 24:27; 행 25:3; 행 25:9 등에 나타나며, 좀 더 분명하게는 행 2:47; 행 4:33에 나타난다.
② 구약성경의 영향이 눅 1:30; 행 7:46; 행 7:10; 눅 2:40; 눅 2:52; 눅 6:32 이하의 종교적인 용법에서 나타난다.
③ 카리스는 눅 4:22; 행 14:3에서 복음의 특성을 설명해 준다.
이 단어는 행 6:8에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묘사한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행 11:23에서는 교회 성장에 있어서 카리스의 지도적인 역할을 볼 수 있다: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행 14:26; 행 15:40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한다.
행 15:11은 권고 형식의 본문에 나타나는 바울 사상의 표현이다: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b) 바울 서신.
① 카리스는 바울의 중심 개념으로서 인사말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롬 1:7; 살전 5:28 등).
② 바울에게 있어서는 카리스는 독특하게 구원 사건의 구조를 설명해 준다. 기본적인 사상은 값없이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문제는 카리스가 하나님의 속성만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구체화되고(갈 2:21) 복음으로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 은혜는 죄인들에게 나타났고(롬 3:23-24) 구원의 전부이며(고후 6:1) 모든 신자들이 받은 것이다(고전 1:4).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화된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과 더불어 신자들은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롬 3:24 이하). 이것은 구원의 방법으로서 율법을 배제하는 것이다(롬 4:16). 은혜는 칭의의 기반이며, 그것에서 나타나게 된다(롬 5:20-21). 그래서 은혜는 어떤 의미에서 일종의 상태이다(갈 5:2). 또한 은혜는 항상 선물이다. 은혜는 충분하다(고전 1:29). 우리는 더 요구하거나 더 얻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은혜에는 확신적 요소가 들어있기는 하나 거짓 확신이 아니므로 자랑할만한 여지가 없다(고전 1:29; 참조: 갈 5:4).
③ 죄를 극복하는데 있어서 은혜의 작용은 그 능력을 보여준다(롬 5:20-21). 은혜와 죄와는 구조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은혜는 숙명적인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하신 자들에게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롬 11:5-6). 은혜는 교회 안에서, 보기로 바울의 모금에서(고후 8장)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은혜의 목적은 모든 선행을 하는데 있으며(고후 9:8), 그렇기 때문에 선행을 요구하는 것이지만(고후 6:1), 자원하여 순종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할 뿐이다. 은혜는 방종을 허용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이론이다. 바울은 롬 6:1에서 그런 단순한 생각을 책망하고 있다.
④ 바울의 사도직은 롬 1:23 등에서 특별한 은혜이다. 사도직이 바울에게 주어진 것과(롬 12:3), 그것을 수행하는 것은 은혜였다(고후 1:12). 교회를 방문하는 것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은혜였다(고후 1:15).
⑤ 골 1:6에서 카리스는 복음을 뜻한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골 4:6에서 '매력'을 의미한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엡 1:6-7에서 카리스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호의"를 의미한다: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특히 엡 2:5 이하가 바울적 특색이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엡 3:2; 엡 3:7-8도 마찬가지다. 엡 4:7; 엡 4:29에서 "주다"라는 단어와 함께 쓰는 것은 상투적인 표현이다.
⑥ 목회서신에서 카리스는 딤전 1:12에서 '감사'를 의미한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딤후 2:1에서 직분의 '은혜'를 나타낸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딤후 1:9에서 은혜가 나타났다는 본문을 통해서 은혜와 행위를 대조시키고 있다(참조: 딛 2:11).
딛 3:4 이하에서 선하심이나 자비 등의 용어가 같은 뜻을 가진 단어들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행위와의 대조를 보는데 이번에는 세례(침례)를 받는데서 나타난 은혜를 언급하고 있다(딛 3:5 이하).
딤전 1:14에서 믿음, 사랑, 그리고 소망 대신 은혜(카리스)를 둔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c) 히 4:16에서 카리스와 엘레오스(e[leo", 1656: 자비, 동정, 불쌍히 여김)를 사용한다(참조: 딤전 1:2). 그리스도는 은혜를 구현하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은혜를 받는다(히 7:25).
히 2:9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은혜로 고난 받으셨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히 10:29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또는 피)은 계약과 은혜를 결합하였다. 은혜와 제사에 쓰인 고기를 대조시키는 것은 히 13:9에서 계약에 대한 반대 명제를 언급한 것의 일부분이다.
히 12:15에서 우리가 은혜에서 떨어지지 말아야 할 것을 언급한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d) 베드로전서에서 고난은 은혜로 이해되고 있다(벧전 2:19-20). 벧후 3:18은 카리스를 그노시스(지식)에 관련시킨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약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e) 요한의 기록.
카리스는 요이 1:2과 계 1:4; 계 22:21의 인사말에 나온다.
요 1:14; 요 1:16-17에서 은혜는 율법과 반대되고, 진리와 완전함에 결합되어 나타나는 로고스의 계시의 결과를 언급한다. 그럼으로써 이 단어의 독특한 의미가 드러나는 것을 도와주고 있다.(참조: H. -H. Esser; H. Conzel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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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jrhvnh(1515, 에이레네) 평화, 복지, 번영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에이레네의 기본 개념은 본래 사람들 사이의 관계(relationship)나 태도(attitude)를 의미하지 않고 상태(state), 즉 '평화의 때', 또는 '평화의 상태'를 의미하며, 처음에는 순전히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상태에서의 한 막간(a interlude)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 단어는 전쟁에 반대되는 것, 혹은 전쟁의 종식으로부터 결과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평화는 복된 번영을 가져 오도록 법과 질서가 유지되는 상태이다. "에이레네"는 평화의 상태이며, 평화의 상태에서 땅과 백성을 위한 복이 흘러나온다. 필레몬(Philemon)은 이를 최고의 선(supreme good)으로 격찬했다.
에이레네는 평화 조약이나 평화의 타결과 관련이 있다. 에이레네는 또한 소란, 소요의 정반대를 의미할 수 있다. 에이레네는 평화적인(온화한) 태도, 즉 적의가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에픽테투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의 스토아 철학자들의 작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에이레네는 영적 평안이나 마음의 평안이라는 의미를 띠고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단어는 이들의 저작에 그리 자주 사용되지 않았다.
특별한 언급으로, 아우구스투(Augustus)가 지중해 세계를 지배한 에이레네를 들 수 있다. 이 시대에서 구속(redemption)을 동경하는 강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황금시대라고 불리워진 이 평화의 상태는 로마 황제가 군대의 힘으로 성취한 법적 또는 정치적 안정이다(Toerster, TDNT).
2. 구약성경 및 70인역본의 용법
1. 구약성경 및 70인역본의 용법 및 의미들
(a) 구약성경에서 에이레네는 250회 이상 나오는 히브리어 단어 샬롬의 역어로 사용된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이에 대하여 예외적인 경우들은 대체로 왕래 및 문안 인사에 관련된 구절들이다. 예컨대 창 26:31; 창 43:23이 이러한 예이다.
그러나 렘 20:10; 사 48:22; 57:21은 이러한 경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외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예외적인 구절에서는 소테리아(구원, 구출), 카이레인(기쁨, 안녕)등을 역어로 사용되었다.
약 15개의 구절에서 에이레네는 안식, 평온, 안전, 염려 없음, 믿음직스러움 등의 광범위한 의미 영역을 포괄하는, 히브리어의 여러 가지 단어들에 해당하는 역어로 사용되었다.
예컨대 대상 4:40에서는 '…로부터 안식을 얻다'를 뜻하는 샤카트(히2453)의 역어로, 욥 11:18; 잠 3:23; 사 14:30; 겔 34:27; 38:8, 11, 14; 39:6, 26에서는 '믿을만함, 안전, 염려없음'을 뜻하는 베타흐(히233a)의 역어로, 삼하 3:24에서는 '가다, 걷다'를 뜻하는 할라크(히498)의 역어로, 사 29:24에서는 '이해'를 뜻하는 레카흐(히1124a)의 역어로, 그리고 잠 17:1; 호 2:18에서는 '평온, 안락'을 뜻하는 샬와(히2392d)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또한 에이레네를 역어로 사용하고 있는 몇몇 구절들은 해당 히브리어 단어가 모호하거나 없다: 에 4:16; 미 2:4; 사 32:4; 겔 34:29; 잠언 8:18.
(b) 70인역본은 히브리어 단어들, 주로 샬롬의 역어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 히브리어의 의미들이 이 헬라어의 의미에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70인역본의 용법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헬라어는 새로운 풍부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샬롬과 70인역본의 에이레네를 살펴보면, 에이레네의 여러 가지 의미를 알 수 있다.
이 단어는 '평화 peace'라는 좁은 의미로 제한시켜서는 안된다. 그것은 모든 가능한 형태의 악(evil)과 대조되는, 가장 넓은 의미의 '안녕, 복리' well-being를 의미한다. 만남이나 편지에서(삼하 18:29; 삿 19:20; 단 4:1), 작별 인사에서(삿 18:6; 삼상 20:42) 다른 사람들에게 안녕을 빌며, 대화에서 다른 사람에 관한 안녕을 구한다(삼상16:5). 사람들은 문안 인사를 한다 : "문안하고".
왕하 9:17이하에서와 같이 어떤 사람이 오는 이유에 대한 질문이 있는데, 곧 "평안이냐"는 '도전적인 목적이냐 화평한 목적이냐'라는 질문이다.
왕상 2:13에서 밧세바가 아도니아를 맞이 하면서 "화평한 목적으로 왔는냐"(너의 옴이 화평이냐)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그녀가 그에게 그의 방문이 '좋은 일'을 뜻하는지를 실제로 묻고 있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에이레네를 '행운이나 형통'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는데, 불경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적용되고 있다. 의인은 악인의 이런 형통을 봄으로 시험을 받기도 한다(시 73:3). 그러나 이 형통은 외적인 것에 불과하며, 진정한 형통이 아니다(사 48:22).
사 57:18; 시 38:3에서는 육체의 건강을 의미한다.
집회서 38:8에서 의사가 가져오는 에이레네, 즉 건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전장에서 무사히 안전하게 돌아오는 사람은 건강을 보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수 10:21; 왕상 22:17; 대하 19:1; 시 55:18).
또 이 단어는 '만족이나 흡족함' satisfaction을 의미하였는데, 이별에 관하여(창 26:29; 출 18:23; 사 55:12), 잠자리에 드는 것에 관하여(시 4:8), 죽음에 관하여(창 15:15; 렘 34:5)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에이레네는 단순히 안식이나 마음의 평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폭력이나 재난으로 압도당하지 않은 인간의 전상태로서, 폭력을 당하거나 변사의 정반대를 의미한다(참조: 왕상2:6).
또한 살펴볼 가치가 있는 것은 사 29:24의 내용이다: "원망하던 자도 교훈을 받으라"(70인역-말더듬는 혀들은 평화를 말하는 것을 배울 것이다). 이 구절에는 히브리어 샬롬이 없지만 에이레네가 나온다. 이 문맥에서 에이레네는 그들이 올바르게(에이레네) 말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사야 32:4에서도 이와 유사한 의미를 나타낸다. 이 단어는 더욱 보편적으로, 전쟁과 대조되는 평화를 의미한다. 잠 17:1; 호세아 20:18("평안히 눕게하리라")과 사 14:30("평안히 눕게 하려니와")에서 이 의미로 에이레네가 샬롬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잠언에서는 다투는 가정과 대조되는 평화로운 가정의 안락을 의미하며, 호세아와 이사야에서는 이 단어는 평화의 때를 의미한다.
대상 22:9에서 평화의 상태를 의미한다: "내가 저의 생전에 평안과 안정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히스기야는 평화가 그의 시대에는 계속된다는 기대를 가졌기 때문에 이사야의 중대한 예언을 경솔히 취급했다. 여기에는 번영을 누리는 그룹, 예를들면 국가의 번영이라는 의미도 지닌다.
에이레네는 전 3:8에 전쟁과 대조시킨 "평화"와, 그리고 렘 29:7에 "성읍의 평안", 38:4에 "백성의 평안" 등에서 "평안을 구한다"는 표현에서와 같이 "평화의 상태"보다 더 근본적인 것, 즉 평화 =백성의 안녕에 관련된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샬롬/ 에이레네는 상태보다 오히려 관계를 암시한다.
많은 구절에서 이 단어는 이러한 의미를 가지는데, 국가나 그룹 간의(왕상 5:12; 삿 4:17; 왕상 5:4; 대상 12:18), 개인 간의(슥 6:13) 우호적 관계를 의미한다.
신 20:10에 '한 백성에 평화를 선언'하는 것은 한 백성의 관계의 수용을 의미하며(참조: 삿 21:13), 그 안으로 들어가는 자들은 평화의 사신들이다(사 33:7).
이 단어는 시편 35:27에서 외적 형통이나 성공에 더하여 인간의 전적인 안녕(well-being)을 의미할 수 있다: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로 기꺼이 부르고 즐겁게 하시며 그의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여기서 형통과 안녕은 선(good)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시편 122:8에서 시인은 "네 가운데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 70인역본에는 '내가 참으로 너를 위하여(에 관하여) 평화를 말했다'고 번역되어 있다. '너를 위하여'는 '예루살렘을 위하여'이다.
시인은 바로 앞에서 이미 안녕과 형통을 원했다. 환언하면 이 용어는 여기서 확고한 '형통'이라는 의미에서 '선(good)'이라는 더 넓은 의미로 쉽게 이동한다.
따라서 잠 3:17에서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고 말한다. 70인역본은 '그녀의 길은 옳은 길이요 그녀의 모든 첩경은 평화에 있느니라'고 번역했다.
시 34:14은 도덕적 선을 의미한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그를) 따를지어다."
슥 8:19에서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말 2:6에서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들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70인역본은 '그가 그의 길을 에이레네로 똑 바르게하여 내 앞에서 행하게 하며…'라고 번역했다.
잠 12:20에서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궤휼이 있고 화평을 논하는(조장하는) 자들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 70인역본은 '에이레네를 원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리라'고 번역했다. 이러한 구절에서 '에이레네'는 도덕적 선을 의미한다.
(c) 이 단어는 두람(J. I. Durham)에 의하면, '완전, 완성, 성공, 성취'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샬롬은 '완전'이란 개념은 민 6:24이하에 나오는 축복의 절정을 이루는 대목에 나타난다. 여기에서 이 개념은 다른 모든 축복들을 요약하고 있으며, 여호와의 임재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축복은 모세가 여호와로부터 받아 아론과 그의 자손들에게 이스라엘을 축복하는데 사용하도록 전한 것이다(민 6:22 이하). 이 축복의 내용은,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이다(민 6:24이하).
여기에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찌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 6:27)는 구절이 첨가되었다. 두람은 이 구절을 주석하기를 '샬롬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오직 그가 임재하실 때에만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축복 속에 샬롬이 사용된 것을 볼 때에도 샬롬은 제의 용어로서 사용되었으며, 여러 가지 번역본이나 많은 주석가들이 일반적으로 이 말에 부여해 온 것보다 횔씬 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다 확실하게 믿게 된다. 왜냐하면 민 6:24-26 에 나오는 샬롬은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고(바라크) 지킴을 받으며(샤마르) 은혜를 받는(하난) 사람, 하나님의 임재 속에 이 두가지 상태로 있는 사람, 즉 충족되고, 그리하여 온전하게 된 사람을 묘사하는 말로서 사용되고 있다. 실로 이러한 사람은 신약성경의 주의 말씀에 부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또 두람은 '샬롬은 구약성경에서 자주 포괄적으로 본 성취 또는 완성, 실제로 사람이 혼자 힘으로 가장 좋은 환경에서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성공이라도 훨씬 능가하는, 삶과 정신에 있어서의 완성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된다'라고 주장한다(창 15:15; 29:6; 37:14; 43:27이하.; 출 18:7,23; 민 25:12; 신 23:7; 삿 18:15; 삼상 17;18, 22; 20:7; 25:6; 삼하 11:7; 18:28이하; 왕상 22:27이하; 왕하 22:20; 사 45:7; 48:18; 53:5; 54:10, 13; 57:2,19; 59:8; 60:17; 66:12; 말 2:5이하.).
특히 이 점은 왕하 22:20에 나오는, 요시야가 열조에게 돌아가리라는 여호와의 약속에서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여기에서 요시야가 평안히(in peace, KSB) 열조에게 돌아간다는 식의 해석보다는, 그는 '성공하여 in success', 즉 그의 소명을 완성하고 흡족한 마음으로 열조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래서는 항목을 만들어 에이레네의 의미를 설명한다.
2.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에이레네
이 단어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서, 선, 좋은 것, 구원을 의미한다. 샬롬/ 에이레네와 연합된 좋은 것은 그것들을 위한 기도에서든, 그것들이 나타날 때 하나님의 선물로 인정하든, 자연적으로 이스라엘에서 항상 하나님과 관련시키었다.
기드온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샬롬'이라고 불렀다. 이 매우 오래된 고대 표현에 대한 분명한 해석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이 고백의 위대한 의미에는 경건한 자들이 후에 많은 다른 상황에서 말하고자한, 특별히 구약의 기도에서 표현된 것과 같은 모든 것을 그 근본에 포함하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평화를 만드시며(욥 25:2), 또한 우리에게 평화를 약속하시며, 그의 백성에게 평화의 복을 내리시며, 그의 종들의 형통을 원하신다(시 35:27; 참조: 147:14), "다윗과 그 집에는 여호와로 말미암은 평강이 영원히 있으리라"(왕상 2:33).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시 122:6).
샬롬은 진실로 여호와로부터 오며, 완전히 충족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신념은 시편 85편에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다. 기자는 기도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가 그 백성, 그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 영광이 우리 땅에 거하리이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입맞추었으며"(85:8-10).
이 사상의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성향은 완전한 지상적 평화의 동기로 생각된다. 여기서 우리는 샬롬이라는 말의 구약의 용법의 최고점을 본다.
레위기에서 하나님은 그 땅에서 그의 백성에게 샬롬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레26:6). 이 문맥은 확고한 복이 뜻하는 것, 즉 원수들과 야수들로부터 평화를 아주 분명히 보여 준다. 이것은 특별한 의미에서 일종의 구원이다. 그것은 약속의 땅에서 안식과 평온이며, 그러므로 신명기 기자는 독특한 용어 메구하(안식)를 표현한 것이다(신 12:9). 이렇게 그들은 예언적 약속의 바로 가까이에 있다.
에이레네는 이 시대나 구원 시대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게 되었다. 이 단어가 어떤 생활 영역에서나 하나님이 주신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구약신앙의 특성이다. 사 46:7에서 그 일반적인 기사를 볼 수 있다: "나는 평안도 짓고 환란도 창조하니". 이 경우에는 앞에서 언급한 레위기 26:3이하의 축복과, 그리고 민 6:26의 축복("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도 포괄한다.
때때로 에이레네의 정확한 내용을 말하기란 불가능하지만, 한편 그것이 항상 인간을 위한 선한 것이며, 거기에 그의 안녕이나 구원이 놓여있는 것이다. '에이레네'는 이런 의미에서 선한 것이며 구원이다.
이러한 구원을 의미하는 구절들을 더 들어보면, 렘 29:11에서 하나님은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시 119:165에서 율법을 사랑하는 자들의 큰 평화는 율법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들이 당하는 장애물과 대조된다. 여기에 평화는 내적 구원이며 파멸이 아니다.
따라서 집회서 1:18에서 에이레네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증진되고 '기에이아 야세오스'(건강한 치유, 완전한 건강)와 연결되어 있다(참조: 사 9:7). 시 35:8과 9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평화는 구원이며, 이 문장에서 평화와 구원이 연결되어 있다.
이 구원은 렘 16:5에서 하나님의 구원이라 부른다: "나의 평강". 애 3:17에 "주께서 내 심령으로 평강을 떠나게 하니"라는 말은 "내가 복(아가다: 선, 선한것)을 잊어버렸음이여"라는 말로 해석되어야 한다. 여기서 평강은 선한 것이며, 곧 구원이다. 이 평화에 참여한다는 것은 거기에 포함된 구원의 은총을 누린다는 것을 뜻하는 반면, 평화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그 모든 복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평화를 거두어 가시면 어쩔 수 없이 애통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히브리인들은 때때로 이러한 동맹이나 협정에 대해 베리트(언약)를 사용했으며, 따라서 샬롬은 베리트와 관련하여 나타난다. 이 두 단어의 관계는 너무 강하므로, 이런 문맥에서 샬롬은 일종의 공식 용어가 된 것같다.
이 사상은 샬롬의 관계가 언약에서 두 당사자에 의해 인쳐진다는 것이다(수 9:15; 왕상 5:12). 환언하면, 언약은 '샬롬'의 관계를 개시하는 것이다. '샬롬'의 관계는 언약의 결과이다. 여호와의 이스라엘과의 화평의 언약을 나타내는, 이러한 구절들에서 '샬롬'은 실질적 안녕이 아니라 언약을 맺은 자들의 성향에 의존하는 평화의 관계를 의미하는 동시에 구원을 위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누하스와 평화의 언약(민 25:12; 집회서 45:24), 레위와 평화의 언약(말 2:5), 다윗과 평화의 언약(겔 34:25; 37:26)은 구원의 언약이다.
사 54:10에서 여호와께서는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신다(Rad, TDNT).
3. 종말론적 기대의 한 요소로서 샬롬/ 에이레네
샬롬은 종말론적 기대의 한 요소이다. 영원한 평화의 최종적 상태에 대한 대망은 선지서들과 다른 성문서들에서 일관하게 표현하는 구약 종말론의 한 요소이다.
이 널리 퍼진, 다방면에 걸친 이 대망의 사실은 샬롬이라는 단어가 관계하고 있는 구절들에서 항상 발견되지 않을지라도 언급되고 있다.
낙원의 상태의 회복이 예언될 때(사 11:10이하; 호 2:20이하; 암 9:31), 하나님의 주관하에 국제적인 평화가 예언될 때(사 2:2이하), 혹은 평화의 때가 도래하는 마지막 시대의 한 겸손한 평화의 왕에 대한 기대를 말할 때(슥 9:9이하), 샬롬이라는 단어가 이런 중심적인 종말론적 구절에 사용되지 않거나 슥 9:10에서와 같이 오직 많은 다른 것들 곁에 사용될지라도, 우리는 가능한 한 가장 넓은 의미의 샬롬에 관한 예언적인 선포를 듣게 된다.
따라서 그 단어가 실제로 발견되는 구절들에 대해 어떤 보다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사 9:5에 메시야 아이의 이름들에서 그 최종 이름 샬롬 사르(평화의 왕)는 의미의 중요성에 있어서 선행하는 다른 이름들과 다를 바 없다. 그 이름은 하나님의 사명(commission)을 지닌 분(사 9:1-6)으로서의 메시야는 도래하는 메시야 왕국의 평화의 보증인(guarantor)과 보호자이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사 9:7의 가장 중요한 기사에서 다시 다윗의 보좌와 결부된 구원을 위해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미 5:5에서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시다"라는 표현은 이 전체 예언의 본질을 요약한 것이다.
피조된 세상은 지금은 그것이 저지른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고 있고 스스로 분열하고 있지만, 결국은 다시 온전하게 될 것인데(사 11:6-9; 29:17-24; 6:1-9), 그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이다(사 65:17-19; 참조: 계 21:1-4).
평화에 관한 언약의 갱신에 관련된 메시지는 우주적이고 영속적인 평화에 관한 약속으로 발전되었으며, 이 구원의 날의 도래는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사 61:1, 2)로서 평화의 나라의 담지자요 설립자인 평강의 왕(사 9:5,6)에 자주 결부되었다.
흥미있는 점은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모든 풍부한 의미를 지니는 데도 불구하고 어느 곳에서도 특별히 내적인 평화의 태도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참으로 그것이 개인보다 오히려 그룹에 대해 사용되는 구절들이 더 많다.
개인에 대한 용법의 전형적인 보기로서, 애 3:17을 들 수 있다: "주께서 내 심령으로 평강을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잊어버렸음이여". 그러나 여기에 샬롬도 감추인 내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외적 안녕의 형태로 나타낸다. 그룹과 관련된 대부분의 보기에서 샬롬은 분명히 외적으로 드러내보일 수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Rad, TDNT).
샬롬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열망에 관련된 사회적 차원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순전히 개인적인 영역을 훨씬 넘어서는 공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샬롬이 체다카(의, 사 48:18; 시 86:10)와, 그리고 미쉬파트(재판, 슥 8:16)의 실제적 이상과, 나아가 심지어는 페쿠다(관리, 사 60:17)와 밀접히 관련된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이것은 또한 가장 보편적인 용례에서 이 단어는 개인적 개념어라기 보다는 사회적 개념어임을 시사한다(H. Beck, C. Brown , DNTT).
4. 예언자의 메시지로서의 샬롬/ 에이레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에서 에스겔까지의 소선지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이 선포한 구원의 메시지를 강렬하게 대항했다. 수세기를 통해 계속된 이 투쟁에서 모든 사람의 주의를 끈 표어는 샬롬(평화)이다. 참으로 전문 용어 인나베 레샬롬(그는 평화를 예언한다)은 이와 관련하여 나타난다(렘 28:9).
샬롬은 어떤 선지자 서클의 정점이었으며, 따라서 이 용어는 두 파당 사이의 심한 투쟁의 중심이 되었다. 문제는 이미 구원의 선지자들을 반대한 미가야의 입장에서 보여졌다. 그러나 이 용어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왕상 22:5이하).
미가는 몇몇 대항자들과 싸웠는데 그들을 이득을 얻기 위하여 예언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그들은 이득이 있는 한, 구원을 선포할 것이다: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 도다…"(미 3:5이하).
예레미야는 그 치열한 투쟁에 투신하여 선지자들로부터 가장 강렬한 저항을 받았다. 큰 고통 중에서 예레미야는 샬롬 에메트(영원한 구원)를 약속하는 예루살렘의 운명이 무엇인지를 말한다(렘 14:13이하).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렘 28장에서 예레미야와 이런 선지자들 간의 극적인 교전의 이야기를 읽는다. 예레미야와 하나냐 간의 문제의 요점은 샬롬(평화)이냐, 라아(환란)이냐 이다.
최종적으로, 에스겔은 거짓 선지자들이 구원이 없는데도 샬롬 하존(구원의 이상)을 본다고 하며 백성을 잘못 인도했다고 동일한 항의를 했다(겔 13:16이하). 여기서 "이들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예언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의 묵시를 본다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니라…"며, 대항한다.
거짓 선지자들의 문제는 샬롬의 문제를 넘어가며, 이 문맥에서 추적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의심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선포한 샬롬이 신화적 개념으로 옷 입은 궁국적 종말론적 평화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실제적 정치적 평화, 즉 모든 중대한 정치적 문제가 잘 해결되어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보장하는 평화 가운데서 살 수 있다는 약속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마치 예레미야가 처음에 이 견해를 함께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다음에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게서 평강을 빼았으셨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렘 16:5).
거짓 선지자들의 프슈도스(yeu'do", 5579: 허위, 거짓말)는 그들이 샬롬을 예언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와 에스겔도 다른 상황들에서 이것을 예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이 백성의 죄를 알지 못했으며, 따라서 절박한 심판에 관하여 어두운 정치적 장면을 해석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로서는 대응 표어 에인 샬롬(평강이 없다)이란 표어를 만들었다(렘 6:14; 8:11; 12:12; 30:5; 겔 13:10,16).
거짓 선지자들의 샬롬과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에인 샬롬 간의 싸움은 강도를 더하여 갔으며, 그러나 주전 597년과 586의 예루살렘의 정복과 멸망으로, 어떤 긴장 완화가 있게 되고, 구원을 예언했던 거짓 선지자들은 철저히 불신을 당했다. 이제는 새롭고 더 큰 의미에서 샬롬의 약속은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예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사로잡힌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악이 아니라 구원을 생각하신다는 놀라운 기사를 기록한다(렘 29:11). 여기에서 우리는 예레미야서에 있는 후기 구원 예언의 근거를 본다. 다른 나라들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가져올 구원을 보고 떨 것이다(렘 33:9). 동일한 주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맺은 평화의 언약에 대한 에스겔의 절정에 달한 메시지에 다시 등장한다(겔 24:25; 37:26이하).
샬롬에 대한 싸움은 이사야의 마지막 장들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서 샬롬은 벌써 선지자의 입장의 어떤 중요한 양상을 보여주는 표어가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이 예언의 충분하고 장엄한 요지의 하나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다면, 그들의 샬롬은 강과 같이 흘러내렸을 것이고 그들의 체다카(의)는 바다의 물결과 같이 되었을 것이다(사 48:18). 여기서 이 평행 관계는 이 용어가 지금 한 영적 의미를 받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유사하게 사 54:13에서 예루살렘 자손에게 약속한 구원의 복은 체다카(의)의 복과 결부되어 있다. '샬롬'과 '체다카'의 동일한 결합은 하나님의 새 도성에 대한 예언적 표현에서 나타난다: "내가…화평을 세워 관원을 삼으며 의를 세워 감독을 삼으리니 다시는 강포한 일이 네 땅에 들리지 않을 것이요 황폐와 파멸이 네 경내에 다시 없을 것이며 네가 네 성벽을 구원이라 네 성문을 찬송이라 칭할 것이라"(사 60:17-18).
사 32:17에 의하면 샬롬은 의의 결과이다: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이 시적 예언에는 '샬롬'이 더욱 실제적 의미로, '카보드'(영광)와 연결되어 있는 사 66:12에서 다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가능한 가장 풍부한 음조를 발하는 것이 있다.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아름다운 소리로 "먼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사 57:19)고 한 것과 같이 평화는 풍부한 기대를 표현하는 용어지만, 더욱 정확한 신학적 용어로 해석되지 않은 용어이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어떤 모호함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러한 많은 측면적 용어를 잘 사용하지 못하는 번역자들은 때때로 이러한 구절들에서 샬롬이 그의 회복된 백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이상, 더욱 현실적인 '안녕, 복리 well-being'를, 더욱 분명한 '평화 peace'를, 신학적으로 더욱 포괄적인 '구원 salvation'을 사용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3. 랍비들, 위경 등 유대 문헌의 용법
1. 랍비들의 문헌
(a) 랍비 문헌에서 평화라는 개념 전체에 깔려 있는 것은 여호와의 샬롬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와 그리고 순전히 인간적인 차원에서 모두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샬롬은 인사말로서 만날 때('샤알 베샬롬', 안녕을 구하거나 비는 말)나 작별할 때(안녕히 가라) 상대의 안녕을 구하는 것이다. 살롬으로 인사하고 인사에 답한다.
또한 샬롬은 '순조(順調), 안녕, 안전'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pBer, 60에는 임신 6개월 부터 9개월 까지 순조로운 출산(순산)을 위해 기도한 것과 아이의 가고 오는 길에서의 보호,곧 안전을 위한 언급이 있다. 그리고 '휴식이나 안식'이란 의미로도 나타난다. 샬롬은 유대인의 무덤비에서 '안녕이나 구원'이란 의미로 기록되었다.
(b) 랍비 문헌에서도 구약성경에서와 같이 샬롬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벨론의 18개의 간구는 그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를 기원하는데 그 최종 간구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복과 평화가 임하기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샬롬은 베레카(복, 지복)와 병행되고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비록 유대인들 간에 메시야 시대의 평화의 개념에 대하여 견해차가 있었지만, 평화는 의인의 몫이며, 구약성경에서와 같이 메시야 시대의 지복(Blessings)의 총화이다. 이사야 52:7은 이것에 대하여 언급한다.
(c) 샬롬은 또한 사람들(개인들, 가정, 단체, 국가들) 간의 투쟁의 반대어이다. 따라서 사람들 간의 화평케 하는 것에 대해 자주 강조한 내용을 찾아 볼 수 있다. pea.,1.1에 의하면 이것은 그 열매들을 즐기는 것들 중에 하나이다. 학자들의 역할은 세상에 평화를 증진시키는 일이며(Ber 64a), 엘리야는 와서 세상에 평화를 먼저 확립한다(Eduy. 8:7). 예배에서 평화를 위한 기원으로 끝맺지 않은 축도나 기도가 없다(Lev. R. 9:9). '샬롬'은 하나님의 이름들 중 하나이다(Shab. 10b; 2:1, 4b). UK. 3:12에 '거룩한 자여, 그는 찬양을 받으리로다. 그 안에 평화보다 더 가치있는 어떤 복을 간직하고 있는 그릇이 없도다'라고 말한다.
Rabban Simeon b. Gamaliel의 기록에 '세 가지, 즉 진리와 심판과 평화로 말미암아 세계가 보존된다'고 하였다(Avot 1:18). 이 기록에 의거하여 탈무드(Talmud)는 '만일 심판이 집행되면 진리가 지지를 받고 평화가 증진되기' 때문에 그 세 가지는 사실상 하나라고 선언한다(TJ, Ta'an. 4:2, 68a). 탈무드 랍비들의 최고 이상은 평화이기 때문에 그들은 할 수만 있으면 평화를 위하여 정의나 심판을 유보하거나 제외하였다.
힐렐(Hillel)에 있어서 아론은 평화를 추구하는 자의 한 모델이다(Ab,.1,12; ckawh, Str.B,.1.217). S.NU(42.6:26)에는 이방인들이나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의 죄가 있을지라도 그들이 평화하는 한 사탄이 그들을 해칠 수 없다고 한다. 랍비들은 호 4:17을 해석하여 '이스라엘이 우상들과 연합되어 있을지라도 평화가 그 안에 우세하고 있는 한 그대로 두라'고 가르친다(Gen. R.38:6).
평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진리의 엄격한 노선에서 벗어나는 것도 허락되었으며(Yer. 65b), 탈무드는 민 5:23에 관련하여 '만일 남편과 아내 사이에 평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신성하게 기록된 하나님의 이름을 지울 수 있다면, 전세계의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참으로 더욱 많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랍비들은 성경 자체와 모순하여 어떻게 사람들 간의 평화를 지지하는지를 설명한다(CKAWH,Slav. En. 52:11-13).
이것은 이웃의 '샬롬', 곧 구원을 구하는 문제가 아니라 다툼의 종식이라는 의미의 [샬롬]을 구하는 문제이다. 아마도 이것은 불일치나 불화가 메시야의 도래를 방해한다는 사상에 의한 것같다. 랍비들의 기록은 시기, 다툼, 불화가 하나님의 뜻에 반대가 된다는 강한 신조를 명시하고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바로 세상의 존속은 평화에 의존한다(Ab., 1,18). 물론 하늘에 있는 것들 역시 불화할지라도 그렇다는 것이다(참조, 골1:20).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하여 구약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샬롬'의 용법을 도입하게 한다. 다마스커스 문서는 하나님이 모든 육체와 다투고 있다는 사실로 시작한다. 이 다툼은 평화를 이루는 장막을 만들기까지 널리 펴져 나간다. 우상숭배와 같은 죄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반목을 조성하지만(Lv. r.,7 on 6:2), 제단의 돌들은 그들 간의 평화를 조성한다M. Ex., 29 등). 하나님과 사람 간의 평화와 다툼은 사람이 두 가지, 곧 긍정적으로와 부정적으로 행동하는 상호관계를 포함한다.
(d) 앞에서 살펴본 바, 샬롬은 유대인이 대망하던 구원의 핵심 바로 그것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평화를 추구하고( Rabbi Hille1, Aboth I:I2. SBI 217)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세우는 것은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었다. 랍비들의 가르침에서 평화롭게 하는 자의 역할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그것과 유사한데, 이 점에서 랍비 유대주의는 신약성경의 '새 계명'과 비슷하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근본 동기는 이유에 대한 적극적인 사랑이라기보다는 샬롬을 방해할런지도 모르는 모든 것을 제거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순전히 인간적인 차원에서 적용되는 것은 또한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이리하여 평화라는 개념은 사람이 행한 것과 행하지 않은 것 모두를 한층 중요하게 생각하는 새로운 차원을 얻게 된다. 이러한 평화에 대한 개념은 구약 시대 이후 발전한 새로운 용법에 큰 영향을 주었다.
2. 위경, 요셉푸스, 필로
(a) 위경에서 종교적 용법을 고찰해 보면, Test ⅩⅡ에서 '평화의 천사'라는 말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에이레네는 Test. L. 18:4와 D. 5:9,11에서와 같이 전쟁의 중단으로 표현된 구원을 의미하지만(Test. Jud. 22:1이하) 그것은 구원의 효과를 내지 못한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Test. ⅩⅡ와 특별히 Eth. En에서 평화의 반대는 랍비들의 견해와 같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또는 인류와 투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다. Eth. En에 의하면 불경건한 자에게는 긍휼과 평화가 없고(5:15), 하늘의 타락한 수호 천사들에게는 평화도 없고 용서도 없지만(12:5), 반면에 의인에게는 평화가 약속되어 있다.
그러나 Eth. En. 1:17이하에 의하면, 평화는 심판의 유보 또는 비집행이며, 따라서 평화는 용서와 심판자의 긍휼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지만 평화는 또한 빛과도 연결되어 있어서 긍정적인 의미를 함축하며, 구원을 뜻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의 평화는 '평안히 내버려 두었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열 두 족장의 유훈에서 평화는 재판을 유보하는 것, 즉 범법자를 동정하여 유예해 주는 것, 혹은 적어도 그에 대한 형벌의 집행을 유예하는 것을 의미한다. 위경에서 평화는 또한 인간들 사이의 일치나 화합을 의미하기도 한다(Foerster, TDNT; H.Beck, C. Bro wn, DNTT).
(b) 요세푸스는 구약성경과 랍비들의 용법을 철저하게 따른다(Ant. 1, 179; 11, 216; 8, 405; War 2, 135).
(c) 필로는 언어학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헬라 전승을 따른다. 그에게 있어서 에이레네는 정치적 평화와 욕망의 싸움과 대조로, 오직 하나님께만 속하고(Heinemann,413ff), 하나님으로부터만 찾아 얻을 수 있는 내면적 안식인 마음의 평안을 의미한다(Vit. Mos., 1, 304). 그렇다고 해서 평화의 외면적이고 객관적으로 입증이 가능한 상태를 가리키는 측면과 무관하지 않다. 내면적, 외면적으로 싸움과 평화는 그룹을 이룬다. 내면적 싸움이 가장 나쁘며, 그것이 모든 악의 근원이다. 필로는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역시 내면적 평화를 유혹과 탐욕에 대한 승리로 간주하였다(Jos. 57). 이디오피아어 에녹서 52:11은 '평화와 사랑을 가져오는 자는 복이 있다'라고 선언하고 있다(Foerster, TDNT).
3. 쿰란 문서
쿰란 공동체는 변절한 이스라엘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켜(1QS 8:4-9; CD 1:4과 해당 구절) 자신을 구원 받은 자들의 종말론적 공동체라고 생각하였다. 이 공동체의 성원들은 이미 종말론적 평화를 향유하는 경지에 들어간 것이다.
그들의 문헌에서는 영원한 평화(IQS 2:4), 평화의 넘치는 풍요( IQS 4:7), 끝이 없는 평화(IQH 7:l5), 지속적인 평화(IQH 15:16), 제한 없는 평화(IQH 18:30) 등에 관한 구절이 나온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아직도 투쟁의 와중에 있다(CD 4:13 및 그 밖의 해당 구절에서는 벨리알과 이스라엘 및 미가엘의 싸움이 언급되고 있고, IQM 1:9 이하에서는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의 싸움이 언급되어 있다).
평화의 도래는 재난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IQH 1:17). 구원은 구원을 받을 사람들이 불 붙는 용광로 속에서 연단을 받은 후에라야만 참된 것으로 인정 받는다(IQM 17:1). 하나님은 이미 영원 무궁한 평화의 언약(구원)을 생명의 바늘로 새겨 놓으셨다(IQM I2:3). 이러한 평화는 더 이상 거절을 당하지 않으며(IQH 9:11), 구원의 복으로 충만한 피난처가 된다(IQH 9:33). 평화는 구원과 행복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평화'(IQM 3:5; 4:14)와 '하나님의 기쁨'은 하나님의 백성이 안전한 그들의 고향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암호이다(1QM 3:11).
4. 신약성경의 용법
1. 서론
에이레네는 신약성경에 92회 사용되었으며, 요한 1서를 제외한 신약의 모든 성경에 나온다. 복음서에 25회(마 4회, 막 1회, 눅 14회, 요 6회), 사도행전에 7회, 바울 서신에 47회, 야고보서에 3회, 베드로서에 5회, 유다서에 1회, 요한서신과 계시록에 4회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에이레네의 변화 또는 발전된 의미를 모두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단어는 형태와 내용에 있어서 70인역본과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전통을 착실히 따르고 있다. 그리고 랍비 문헌의 샬롬과 같은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추가로 고전 헬라어 문헌에 나타난 의미들이 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의 의미는 인사와 그리고 유사한 표현에서 안녕(well-being)이나 구원(salvation)이란 의미를 가진다.
마 5:34(눅 7:50)와 약 2:16에서 작별 인사로, 눅 10:5; (눅 24:36); 요 20:19; 요 20:21; 요 20:26에서 도착 인사로 사용되었으며, 당시 팔레스틴에서 유행한 인사를 번역한 것이다.
행 16:36에서 누가가 로마 간수의 인사말로 "평안히 가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그는 분명히 그 인사말을 70인역본에서 취했으며, 새 언약의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인사말이라고 생각했다.
사도 바울 역시 항상 그의 편지서들에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라는 인사말을 사용했다.
계 1:4에도 동일한 인사말이 나온다. 이것은 히브리인과 아람인의 인사와 같은 것이다.
디모데전·후서, 요한이서, 그리고 유다서에서는 자비를 뜻하는 말과 함께 사용되었으며, 평화는 또한 예를 들어 벧전 5:14; 요삼 1:15에서처럼 끝맺는 인사말에 나온다. 구약성경의 평안히 가라와 비슷한 말이 행 15:33과 고전 16: 11에 나오며, 눅 2:9에 나오는 시므온의 말도 이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안전(security)이란 의미의 에이레네는 눅 11:21에서 찾아볼 수 있다(참조: 살전 5:3). 고전 14:33에서는 구약성경의 영향이 한층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서 에이레네는 무질서의 정반대이며, 교회 안의 무질서에 반대되는 상태를 나타낸다. 행 14:2.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의 주요 의미는 분명히 헬라적인 의미가 아니라 보다 깊은 의미에서의 구원이다. 에이레네는 인간 간의 일치 또는 조화를 나타내며(행 7:26; 갈 5:22; 엡 4:3; 약 3:18; 참조: 벧전 3:11), 하나님과의 화평도 의미한다.
에이레네는 행 12:20; 행 24:2; 마 10:34; 계 5:4에서는 전쟁과 반대되는 평화에 대해 사용되었다. 바울은 이 단어를 영혼의 평안에 대해 사용하는데(참조: 롬 15:13), 이런 용법은 매우 드문 헬라의 용법이다.
눅 14:32에서는 평화의 조건을 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인사하는 것을 뜻하는 아람어투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문맥상으로는 존경과 무조건적 복종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그 용법상 세 가지 중요한 개념을 지니고 있다. - ⑴ 안식의 느낌으로서의 평화, ⑵ 하나님과의 화해의 상태로서의 평화, ⑶ 그리고 종말론적 구원으로서의 평화이다. 이 중 마지막 의미가 기본적인 것이다.
2. 가장 광범위한 의미에서 만물의 정상적인 상태로서의 에이레네
고전 14:33에서 바울에게 있어 에이레네는 고린도 교회에서 생각을 예언함으로 야기된 어지러움(혼란스런 상태)과 반대되는 정상적인 상태이다.
영감을 주시는 하나님은 어지러움(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평화의 하나님이시다. 영감은 다툼과 혼란을 위한 구실을 허용하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시기와 분쟁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가 아니다. 여기서 지적하는 원리는 이적(miracles)이 법의 위반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법을 위반하는 편이 아니라 법을 지키므로 결과하는 평화, 곧 질서의 편이다. 이 질서의 평화는 진정한 교회의 정상적 상태인 것이다(고전 12:2; 약 3:16과 비교).
평화는 공동 예배(고전 14:33)와, 사도와 그의 협동자들 간의 교제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것이다. 이 의미에서 에이레네가 분명히, 강조적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주목을 끄는 내부와 외부 사이의 관계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건강한 또는 정상적인 상태는 하나님에 의해 영혼이나 인류에 제한되지 않고 전 우주에 미치는 것이다(참조: 1corinthians, ICC; V. Hasler, EDNT; Foerster, TDNT).
3. 인간의 종말론적 구원으로서의 에이레네
(a) 여기에서 출발점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 특별히 종말론적인 구원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구약성경의 샬롬이다.
눅 1:79에 사가랴의 찬송에서 에이레네는 대망한 종말론적 구원이다.
눅 2:14에 천사의 찬송에서 에이레네는 사람들 중에 평화나 하나님과 평화 뿐만이 아니라 이제 땅으로 온 구원을 가리킨다.
눅 19:42에 "평화에 관한 일"과 눅 19:38에 "하늘의 평화"도 구원이다.
계 12:10과 계 19:1에 "구원(소테리아)은 에이레네와 동일한 것이며, 그 의미는 (요한계시록에서 소테리아와 동일한) 에이레네가 하늘에 있고 하늘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적 사건으로 온다. 히 13:20은 이것을 "평강의 하나님"과 "양의 큰 목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자"를 동일시 함으로써 넌지시 암시한다.
히 7:2은 그리스도의 전형으로서의 멜기세덱은 살렘 왕, 곧 평화의 왕이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구원은 평화의 복음으로 선포된다(엡 6:15; 참조: 행 10:36; 엡 2:17).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이다(요 14:27). 세상은 오직 [샬롬]을 원하며, 그리스도는 자기가 확보한 구원을 주신다.
예수님은 관습적인 작별인사를 사용하셨으며(막 5:34; 병행구, 눅 7:50),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평안의 인사(이 집에 평안이 있을 찌어다)를 가르쳐 주셨다. 제자들이 어느 집에든지 들어갈 때 하는 인사는 소원이 아니다. 그 평안은 그대로 거절하거나 받거나 해야 하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만일 거절하면 참으로 그 평안은 제자들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눅 10:5이하; 마 10:13). 이스라엘의 마지막 세대는 최종적 선택을 직면하고 있다. 평화의 인사 형태에 동반하는 구원의 말없이 어느 성읍이나 집에도 들어갈 수 없다. 이 인사를 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평화의 아들'이 되지만 이 인사를 거절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으로부터 영원히 제외되어 있는 것이다(V. Hasler, EDNT).
그리고 편지서들(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빌 1:2; 살전 1:1; 몬1:3)과 계시록(계 1:5)에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라는 인사 또는 축도의 말은 특수한 의미를 지닌다. 유대인의 축복 공식문은 '긍휼과 평화'이다(2bar. 78:2). 바울은 이 축복문에서 '긍휼' 대신 '은혜'를 취하여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있기를 원하노라)"라고 축복한다.
그는 "은혜와 평강"을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시키므로, 예배 의식을 따랐다. 이 축복으로 그는 그의 독자들에게 주님의 구원의 은사를 수여하는 것이다.
그는 이 은사를 고전 1:4-고전 1:9의 서언에서 더욱 정확히 묘사하며, 갈 1:4에서 그 축복을 이어 부언하고 있다. 후자에서 카리스(은혜)는 희생제사의 방식으로 설명되어 있고, 에이레네는 악한 현세대로부터 구원 받는 해방의 과정으로 설명되어 있다. 사도 요한이 그의 계시록 서언에서 독자들에게 한 축복도 바울의 축복이 의미하는 바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 구원을 구해야 한다: 히 12:14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경고한다. 이 문구에서 에이레넨 메타(개역, 더불어 화평함)는 다른 사람들과 일치나 화합을 의미하지 않는다. 저는 다리가 고침을 받을 수 있는 우리의 발을 위한 곧은 길을 만들라는 권고 후에 모든 사람과 교제하여 구원을 구하라는 명령이 뒤따른다.
이 구원은 골 3:5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이다.
이 구원은 빌 4:7에서 사람을 보호하는 능력이다.
어떤 학자들은 6절에 비추어 이것이 불안에 반대되는 평안감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그것은 신자가 보호받는 왕국이다. 비록 인간 관계 속에서 이 구원이 때때로 사람의 외적인 일들과 동일하지 않으며, 심한 적대적인 경험으로 인도할지라도 그렇다(마 10:34이하).
(b) 이런 구절들에서 에이레네는 실질적으로 조에(생명)와 병행하며, 바울은 롬 8:6에서 평안과 생명을 동일하게 취급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바울은 육신의 노력은 사망, 영의 노력은 에이레네로 인도한다고 말한다. 그는 7절의 첫 부분에 근거를 둔다. 육신의 노력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며 오직 사망으로 인도한다. 조에(생명)와 다나토스(사망)가 종말론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일 존재 양식인 것과 같이 조에(생명)는 그와 병행하는 에이레네와 함께 있다.
에이레네(= 샬롬 = 구원)는 최종적 성취의 상태이며, 새로운 피조물의 정상적 상태이다. 이와 같은 특징은 벧후 3:14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안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엔 에이레네) 나타나기를 힘쓰라."
여기에서 에이레네는 기본적인 내적 성벽이나 내적인 평안도, 하나님의 은혜도 아니며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형성된 심신의 회복과는 별도로, 상상할 수 없는 완전한 복지(안녕)나 정상 상태를 암시한다.
이 의미에서 바울의 더욱 친숙한 인사는 때때로 데오스 테스 에이레네스(평화의 하나님)로 말한다. 이 묘사는 바울이 평화의 하나님을 기대한 것과 확고하게 연결되어 있다.
평화의 내용은 문맥에서 결정될 수 있다. 롬 16:20에서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고 말했는데, 이 사탄의 파멸은 구원의 일부이다. 평강(화)의 하나님('데오스 테스 에이레네스')이란 말은 하나님이 평화와 지복을 시행할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탄을 멸하실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벧후 3:14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정도의 구원과 복지(안녕)의 절대적인 내용은 살전 5:23에 나타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에 흠이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에이레네는 바로 '영적 번영'이 아니라 전인간, 곧 영혼과 몸의 구원이다. 동일한 의미는 히 13:20이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에이레네는 카리스(은혜)의 결과인 영혼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인간의 구원을 의미한다.
구약성경과 랍비적 용법에 근거해서, 에이레네는 이와같이 가장 심오하고 포괄적인 의미를 요구한다. 에이레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미 일어나고 있는 전인(whole man)의 종말론적 구원이다. 그것은 확실한 성취의 상태로서 카이네 크티시스(새로운 피조물)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 의미에서 구원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계시되었다(참조: Foerster, TDNT; H.Beck, C.Brown, DNTT; V.Hasler, EDNT 등).
4. 하나님과의 화평으로서의 에이레네
신약성경에서 에이레네는 하나님과의 평화의 관계에 대하여 드물게 사용되었다. 그 첫 언급은 엡 2:14-엡 2:17이다. 바울은 사 57:19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러므로 구원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용어가 15절에 나타날 때 그 반대어 에크드라(증오, 적의; 개역, 원수된 것)에 대하여 어떤 해석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적의를, 어떤 해석자들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의를 의미한다고 한다.
만일 율법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놓고 이스라엘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이 두 가지 역할을 알지 못한다면 이 구절들을 거의 올바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율법으로 말마암아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대와, 또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적대가 일어난다. 사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하여, 그리고 율법을 위하여 그들 자신들을 이방인들로부터 분리하고 이방인들을 원수로 생각해야 했으며, 이방인들은 그런 유대인을 적대적으로 대했다.
따라서 14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에이레네)이시라"는 포괄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폐하셨을 때, 두 가지 무질서 곧 사람들 중에 무질서와 하나님에 대한 무질서를 파기하셨다.
이 에이레네는 하나님과의 평화와 인류 중에 평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질서, 모든 관계의 회복(healing)을 의미한다. 그래서 15절에 에크드라(원수된 것)란 표현도 일반적인 의미를 가진다. 15절에 "화평하게 하시고"와 16절에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도 역시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에크드라와 에이레네는 여기서 인종 안에서 많은 서로 다른 형태를 취하는 객관적 상태들이다.
만일 하나님과 평화가 이 구절에서 에이레네의 일부이라면 롬 5:1에서 에이레네는 그 유일한 의미를 나타낸다. "하나님으로 더불어"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이 언급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적한다. 이것은 롬 5:10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원수들이며, 하나님이 그들과 화해하셨다는 사실에 동의한다(참조, 엡 2:16). 그래서 다음 평화는 사람이 변경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상호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의 사역을 하심으로써 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게 되는 관계이다.
5. 인간의 상호 평화로서의 에이레네
롬 14:17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한다. 그는 강한 자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먹고 마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서 의와 평화와 희락의 통치로 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희락(카라)"은 15절의 "근심하게 되"(뤼페이타이)어서는 안되는 것을 보여 주며, 의(디카이오쉬네)는 여하한 사람의 양심도 침해 당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생각나게 한다. 평화(에이레네)는 하나님의 나라에는 어떠한 종류의 질병이나 악이나 불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계속하여 이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봉사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든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하여 "평화에 관한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라는 권고를 한다. 여기에 에이레네는 오이코도메(덕을 세움)와 병행하는 것이며, 그것은 분명히 상호 간의 평화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17절에서 에이레네는 이것보다 더 큰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은 성령 안에서 건강을 증진시키는 어떤 것의 창조, 즉 '에이레네'를 함축한다. 그렇지만 실제적으로 로마에 있는 교회에 적용하면, 이 건강을 증진시키는 일은 의심 없이 평화이다.
우리는 고전 7:15의 난해한 말에 동일한 사상의 어떤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화평 중에서 너를 부르셨느니라". 바울이 만일 이방인 배우자가 결혼을 파하려고 하면 기독교인 배우자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주님께서 이혼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과 모순되는 것같이 보인다: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이것은 오직 주님의 말씀, 곧 우리는 이러한 경우에 노예들과 같이 구속받지 않는다는 말씀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15절에서 우리는 제한(restriction)이 아니라 이유(reason)를 가진다. 여기에 '데'는 '그러나 but'가 아니라 '오히려 rather'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부름에 대한 언급은 바로 앞에 말한 것을 위한 근거를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오히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언급된 개인적 경우를 넘어가서, 하나님이 우리를 평화로(혹은 평화를 위하여) 부르신 것을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말하는 근거를 확립한다. 따라서 '에이레네'는 마지 못해서 유지하는 결혼 생활의 불화에 대한 반대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죄가 의도한 정상에 대한 파괴 상태와 정반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물의 건강한 상태, 정상적 상태를 함축한다. 당신이 배우자와 불화할 때 그를 구원하는 것이 당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해 보라. 구원과 그 결과인 화합의 복이 당신의 가정에 임할 것이다. 인간의 상호 간의 평화도 이 정상적 상태에 포함되어 있다. 다음 절(16절)은 '가르'로 시작한다. 여기서 '그러면, 그렇다면'이란 의미를 지닌다. : "(그렇다면)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딤후 2:22은 확실히 우리가 내적 경건(신앙심)으로 평화를 조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메타가 에이레네에 관계하지 않고 '…와 함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체 안에서 에이레네는 '구원을 가져 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당연하다. 한편 그것은 확실히 싸우고 있는 변론(제테세이스)을 한번 보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23절).
다음 구절들에서는 단순히 사람들 사이의 일치나 화합(concord)을 의미한다. 엡 4:3: "화평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약 3:18 :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의가 자라나는 씨는 화평케 하는 자들이 화평으로 뿌리게 되는 것이다. 시기(젤로스)와 다툼(에리데이아)은 '에이레네'의 정반대이다. 벧전 3:11에서 시 34편에서 인용하여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라는 말을 무슨 의미로 사용했는지 정확히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의미는 아마도 일치와 화합(참조, 9절)일 것이다(참조: Foerster, TDNT).
6. 영혼의 평화로서의 에이레네
롬 15:13에서 이 단어는 영혼의 평화를 의미한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그러나 이 단어가 어떻게 이 의미를 취하게 되었는지를, 즉 정상적 상태에 대한 신약성경의 이 단어의 일반적 용법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평강의 하나님"이란 말이 외적 생명에 관한 의미를 함축하는 것과 같이, 그리고 에이레네가 인간의 전존재의 정상적 상태 - 카라(기쁨)와 불가분리적인 상태인 구원 - 을 인간 안에 창조하신다.
여기에서 에이레네의 개념은 스토아 철학의 소극적인 갈레네(고요함, 평온)와 다르다. 이 평화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세상으로부터 은둔도 아니고 영적 세계나 시비적 명상에로의 경건한 도피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삶을 살아가면서 영원을 찾을 때에 이미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는 기쁨이 충만한 확신이다(참조: Foerster, TDNT; H.Beck, C.Brown, DNTT). 이러한 영혼의 평화는 히브리어 샬롬의 특징도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평화는 독특하게 기독교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리고 영혼 또는 마음의 평화에 관한 문맥들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롬 8:6의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이라는 구절과 갈 5:22의 성령의 열매들 중 하나로서 "화평"은 이러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전자에서 에이레네는 생명인 구원을 뜻하고, 후자에서 사람들 간의 일치, 조화를 뜻하지만 내적, 영혼의 평화도 포함하고 있다(참조: 롬 14:17, [인간 상호 평화로서의 에이레네] 항목).
빌 4:7에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골 3:15에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평강",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이 다스리는 영역으로서 마음과 생각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 구원하는 능력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마음 또는 영혼이 평화를 누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참조: Walter Bauer; H.Beck; C.Brown; W.Foerster; G.Von.R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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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의와 거룩과 구속함이 되신 그리스도 1 (고전1:30)[생명의 말씀/조지 휫필드]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전 1:30).
지금 여러분들에게 읽어드린 이 말씀은 하나님 말씀 가운데서 의미가 아주 풍성한 귀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본문은 신자들에게 매우 복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신자들이 누리는 귀한 특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이모든 축복의 근원인 아버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축복의 근원
첫째로 나는 여러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이 참여하게 되는 모든 축복의 근원을 먼저 지적해드리겠습니다. 그 분은 바로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말은 아니지만 아버지 하나님은 신성의 근원이십니다. 우리가 예수께서 중보자로서 역할하신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아버지 하나님은 그보다 더 크신 분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사이에는 영원한 언약이 있었습니다. “나는 내 택한 자와 언약을 맺었나니 곧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신 것이라”. 여기서 다윗은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그와 더불어 아버지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시고 수난을 받으셔서 죄를 위한 제물로 자신을 드리게 되면 “그는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영광스러운 기도 속에서 우리 주님은 이 언약을 언급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준 모든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졌습니다. 아니 차라리 확신을 가지고 요구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당신이 내게 주신 그들로 하여금 내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하옵소서". 이 동일한 이유 때문에 사도는 하나님을 향해서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향해서 찬송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영원한 사랑으로서 택한 자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표현하신대로 '창세 전부터' 사랑하신 자들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우리 주님께서 그들의 구원을 나타내 보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로부터 복받는 자들이여 창세전부터 너희를 위해서 예비된 하나님의 나라를 받으라”. 그러기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에게 대답하십니다.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그러므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특권을 말하면서 그들의 구원이 그들 자신의 신실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도록 하기위해서 또 그들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를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아버지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에 대해서 돌아보도록 회상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서 나온'자입니다.
이 교리에 대해서 보다 더 생각했더라면 사람들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맺은 구속의 언약에 대해서 보다 더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이 선택의 교리를 두고 왈가왈부하여 심지어 마귀의 교리라는 심한 말들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 입장에서 말씀드리면 참으로 겸손한 마음을 가진다고 하면 이 사실에 대해서 알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나는 선택의 교리를 부인하는 모든 사람들이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은 나쁜 징조라고는 말하고 싶습니다. 그가 누구든지 그러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참되게 알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가 선택을 부인한다고 하면 우리는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우리 자신에 대해서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속은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인간의 자랑은 이 교리를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이 교리에 따르면 아무도 자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무엇을 더 말하겠습니까? 선택은 선택의 사랑에 깊이 도취한 자의 말로서 표현된 찬란한 빛이 빛나는 신비입니다. 그 빛은 심지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들에게 조차도 그 연약한 눈에 너무 눈부실 뿐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 사랑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그들은 모든 축복을 받고 그 특권을 아버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으로부터 받아 누립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택함 받은 자들에게 주어진 축복
둘째로 나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택자들에게 주어진 이 축복에 대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지혜, 참된 지혜가 되셨습니다.
참 지혜란 무엇일까요? 내가 여러분에게 묻는다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은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육체의 쾌락을 누리는 것이라고 대답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동물적인 욕망의 충족에 지나지 않습니다. 땅 위에 있는 식도락가의 감각적인 쾌락을 위한 미각과 풍미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지혜는 집에 집을 더하고 토지에 토지를 더하고 땅을 자기 이름으로 칭하는 것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지혜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는 가끔 그 자체가 날개를 가지고 있어서 하늘을 향해서 날아가는 독수리와 같이 사라질 뿐입니다. 지혜는 우리에게 “사람의 생명이 그가 소유한 물질의 풍부함에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될 뿐입니다. 왜냐하면 부가 그 가진 자를 떠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소유자는 부를 곧 떠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부자도 또한 죽어 그 부를 다른 사람에게 끼친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그들의 부는 무덤에서부터 그들을 구속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신속히 지나가는 자에 불과합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부나 쾌락을 멸시하고 책에 있는 지식에다 지혜를 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별들의 수효를 말하게 하고 그 모든 별들을 이름을 따라서 부를 수 있지만 여전히 어리석은 자일 수 있습니다. 배운 사람이라고 해서 언제나 지혜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갈구하는 우리의 공통적인 학식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양을 갖춘 어리석은 자를 만들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을 더 이상 망설이게 하지 않고 오히려 겸손하게 만들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한 이방인의 학교에 여러분을 보내어서 참된 지혜가 무엇인지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고 한 말은 희랍의 지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남긴 말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참된 지혜입니다. 이것은 본문이 말하고 있는 지혜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모든 택함 받은 죄인들에게 이런 지혜가 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해야 할 이상 그들을 생각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전에 그들은 어두움이었습니다. 지금 그들은 주 안에서 빛입니다. 그 및 가운데 그들은 그들 자신의 어두움을 이제는 봅니다. 그들은 날 때부터 타락한 피조물인 것과 죄와 허물로 죽은 자신을 보고 지옥의 자식이며 진노의 자녀인 이제 슬퍼합니다. 그들은 지금 그들의 모든 의가 더러운 누더기와 같을 뿐임을 봅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혼에는 아무런 활기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들은 가련하고 비참하고 눈멀고 헐벗은 자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들의 구원이 되는 것을 압니다. 그들은 구주께 가까이 나아가야 할 필요를 보게 되고 하나님의 지혜가 구주로 임명하신 분은 주님밖에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설정하신대로의 구원을 기꺼이 받아드리려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그들의 모든 것의 모든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지혜가 되신 것입니다.
==주 우리의 의
이제 의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이 되셨으니". 그리스도의 모든 개인적인 의는 그들에게로 전가되어 그들의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잡을 수 있게 되었고 아버지 하나님은 그들의 범과를 제거하셨습니다. 짙은 구름으로 덮음 같이 덮어 주십니다. 그들의 죄와 허물을 더 이상 기억하시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었습니다. 예수는 믿는 모든 자에게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지금 그들 안에 아무런 죄를 보시지 않습니다. 모든 행위의 언약은 그들에게 성취되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의롭다고 인정되고 방면되고 하나님의 눈에 의로운 자로서 간주됩니다. 그들은 그 사량하는 자안에서 온전히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들은 그 분 안에서 완전해졌습니다. 전에 사방으로 움직이던 하나님의 진노의 화염검은 이제 제거되었고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들은 밀음의 팔을 펴서 생명나무를 따먹고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복된 특권의식을 가지고 사도는 승리의 고백을 합니다. “의롭다 하신 이는 그리스도니 누가 정죄하리요”.
죄가 정죄합니까? 그리스도의 의는 모든 죄책으로부터 믿는 자를 구원합니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구주이시고 그들의 죄에 대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하나님의 택한 자를 송사하겠습니까? 율법이 정죄합니까? 그들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하므로 그들은 행위의 언약으로 말미암는 율법의 요구에 대해서 죽은 자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것을 그들을 대신해서 성취하셨습니다. 죽음이 그들을 위협합니까?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죽음의 쓰는 것은 죄고. 죄의 권능은 율법이지만 하나님은 주 예수의 의를 그들에게 전가해주시므로 그들에게 이김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실 때에 천사들이 비천한 목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보라 내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노라”. 구주의 탄생을 믿는 너희에게 전하노라. 천사들은 불쌍한 죄인이 회심할 때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그들의 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정죄를 당하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고개를 드십시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십시오".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여러분의 의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셨습니다. 여러분은 “주 우리의 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더 두려워하겠습니까? 이제부터 무엇이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분리하겠습니까?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로”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여러분에게 의가 되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여러분을 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특권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자가 누리는 축복의 시작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자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의가 되실 뿐만 아니라 거룩함이 되십니다.
올바른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모든 외적인 규정을 차선으로 지키는 것을 그들의 의무와 특권으로 생각하지만 거룩함이란 외적인 율법 규정을 위선자처럼 지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룩함이란 외적인 생활의 개혁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잠깐 잠깐 스치는 죄의식이나 죄에 대한 애통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거룩하지 않은 사람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거룩함이라고 말할 때에는 전인의전적인 새로움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의로움은 신자에게 법적인 자격을 갖추도록 하고 거룩함은 그들을 영적으로 살아 있는 자로 만듭니다. 의로움은 그들을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주고 거룩함은 영광에 합당한 자로서 만듭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영과 혼파 몸이 전부 거룩해집니다.
그들의 지식은 전에는 어두웠지만 지금은 주 안에서 밝아졌습니다. 그들의 의지는 전에는 하나님의 뜻에 대항했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위에 있는 것들에 지금 쏠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하나님의 것들로 지금 채워져 있습니다. 그들의 자연적인 양심은 지금 더 밝아졌습니다. 전에는 더러움의 도구로서 불의에서 불의로 치닫던 그들의 지체는 지금 새로운 피조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심령은 "옛 것이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로워졌습니다". 죄는 지금 더 이상 그들 위에 군림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음과 생활에 있어서, 모든 행동 양식에 있어서 거룩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들은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은혜는 그들의 영혼에 모방되고 전수됩니다. 그들은 그의 모습을 닮아서 변화합니다. 그는 그들 안에서 형상이 이루어집니다. 그들은 그 안에 거하고 그는 그들 안에 거합니다. 그들은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아서 그로 인해서 열매를 맺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임마누엘이셔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그들 안에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살아계신 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거하실 거룩한 처소가 되어져서 모든 삼위께서 그들 안에 거주하시고 동행하십니다. 여기에서부터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이미 앉았습니다. 살아있는 믿음으로 그들의 머리이시고 그들의 구속자이시고 그들의 창조주이시고 그들의 신랑되신 그 분과 밀접히 연합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그의 살 중의 살이요 뼈중의 뼈입니다. 마치 사람이 그 친구와 함께 말하고 동행하는 것과 같이 그들은 그와 함께 말하고 그와 함께 동행합니다. 요약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하나되신 것처럼 그들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에게 거룩함이 되십니다. 이것은 얼마나 큰 특권인지요. 야수와 같은 인생이 성도로서 변화합니다. 마귀와 같은 인간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자 되었습니다. 사탄의 나라에서부터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썩어져가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 안에서 창조된 새 사람을 입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나는 그것들을 생각할 때에 거의 현기증을 느낍니다.
사도가 신자들에게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한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정말로 그들은 죽어가는 자리에서조차 언제나 기뻐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습니다. 이 사실은 자연인에게는 숨겨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사람 자신에게도 신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신비는 신자조차도 그 전모를 헤아릴 수 없는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되신 여러분! 여러분 자신의 빛나는 모습을 바라보면 여러분은 현기증을 느끼지는 않습니까? 주님의 빛이 비칠 때, 그의 복된 얼굴빛을 여러분의 영혼에 비춰주실 때에 여러분은 어지러움을 느끼지는 않습니까? 성령으로 여러분의 심령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 바 된 것을 느낄 때에 여러분은 놀라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자비의 홀을 가지시고 여러분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주시겠다고 말하실 때에 여러분은 감격해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의 모든 생각을 초월해서 여러분의 마음을 지키시고 다스리지 않습니까?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없는 기쁨이 아닙니까? 충만한 영광이 아닙니까? 나는 그것이 그러하다고 확신합니다. 여러분의 내밀한 교제 가운데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영혼에 부은 바 될 때 여러분은 거기에 삼켜진 바 되고 사도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솔로몬과 함께 주께서 참으로 그 백성과 함께 계신다고 소리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한 교제가 무엇인지를 알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마음에서 이와 같은 진리를 말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을 내어다보십시오. 여러분 앞에는 영원한 행복이 끝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미 받은 것은 가나안 땅으로부터 가지고 나온 포도송이와 같이 첫 열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가올 훨씬 더 좋은 것의 보증일 뿐입니다. 추수는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제 후로는 영광 가운데 삼킨바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위대하신 여호수아, 자비로운 대제사장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기다리고 있는 안식의 땅, 약속의 땅으로 넉넉히 들어가도록 역사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자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이 되실 뿐만 아니라 또한 구속함이 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마지막 특권에 대해서 설명하고 묵상하기에 앞서서 성화와 내적인 거룩에 대해서 말은 하지만 성화를 칭의의 원인으로 삼는 자들의 잘못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화는 칭의의 결과로서 생각해야 합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의 혹은 우리 밖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받아들여지는 유일한 원인이 됩니다. 하나님의 눈에서 가련한 죄인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우리 안에 있는 어떤 빛도 아니고 우리 안에 역사하는 어떤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호의를 가지시고 보시는 근거입니다. 우리의 최선의 거룩함도 현세에 있어서는 불완전합니다. 비록 우리가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출함을 받았지만 우리는 죄의 내재함으로부터 자유함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죄가 지배함으로부터 자유함을 받은 것이지 죄의 내재함으로부터 자유함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보고 욕망의 기회를 주지 말라고 명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탐내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욕망의 원리가 남아있는 한 우리는 결코 거룩해질 수도 없고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희망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바깥에 있는 한 의를 찾아야만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입니다. 이로 인해서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거룩함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다른 교리를 가르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 가르치는 자가 아닙니다. 그들 안에서 역사하는 성화의 사역에 대해서 경험적으로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 반율법주의자들과 형식적인 위선자들을 반박할 수 있습니다.그들은 잘 믿는 척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계시지 아니하므로 주님은 그들에게 의가 아니십니다. 그들은 영광의 소망에 대한 아무런 실질적인 근거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성화가 원인은 아니지만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것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피조물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의로움와 거룩함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다시 행위 언약 아래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심령을 살펴보면 우리의 심령이 변화되고 새로워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상태가 완전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해주는 근거가 됩니다. 그것은 성경 안에서 우리가 지향하는 바입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음으로서 참으로 하나님의 성령에 참여자가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부터 생명으로 옮겨진 것"을 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말할지라도 우리는 율법적 설교자를 반대합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우리의 심령과 삶에 있어서 거룩하지 않다고 하면, 만약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성령에 의해서 거룩해지고 새로워지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는 자이고 다만 위선자에 지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결합시켜 둔 것을 우리는 나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두 극단 사이에서 중용을 지켜야만 합니다. 한편으로는 바깥에 있는 그리스도만 주장하지 않아야 되겠습니다.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배제하고 우리 삶 속에 그가 계신 증거가 나타나지 아니하고 미래의 행복한 삶에 대한 준비가 없는 밖에 계신 그리스도만 주장하는 것도 잘못이고 동시에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내적인 의와 거룩에만 의존하는 그리하여 우리 바깥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를 배제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마지막 특권에 대해서 설명하고 묵상하기에 앞서서 성화와 내적인 거룩에 대해서 말은 하지만 성화를 칭의의 원인으로 삼는 자들의 잘못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화는 칭의의 결과로서 생각해야 합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의 혹은 우리 밖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받아들여지는 유일한 원인이 됩니다. 하나님의 눈에서 가련한 죄인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우리 안에 있는 어떤 빛도 아니고 우리 안에 역사하는 어떤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호의를 가지시고 보시는 근거입니다. 우리의 최선의 거룩함도 현세에 있어서는 불완전합니다. 비록 우리가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출함을 받았지만 우리는 죄의 내재함으로부터 자유함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죄가 지배함으로부터 자유함을 받은 것이지 죄의 내재함으로부터 자유함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보고 욕망의 기회를 주지 말라고 명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탐내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욕망의 원리가 남아있는 한 우리는 결코 거룩해질 수도 없고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희망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바깥에 있는 한 의를 찾아야만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입니다. 이로 인해서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거룩함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다른 교리를 가르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 가르치는 자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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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의와 거룩과 구속함이 되신 그리스도 2 (고전1:30)[생명의 말씀/조지 휫필드]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신자가 누리는 특권의 다른 한 편 끝인 구속에 대해서도 생각해봅시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야곱의 사닥다리와 같이 그 한 쪽 끝이 하늘에 도달해 있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거기로 모든 신자들이 올라가서 하나님의 오른 편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습니다". 이것들은 참으로 황금고리와 같습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은 그 연결고리가 서로서로 전혀 나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성경 가운데서 다른 구절이 없다고 해도 이 구절만 해도 참신자의 궁극적인 구원이 보장되는 것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구속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성화시키지 않을 자를 의롭다고 하시지 않으십니다. 완전히 구속하셔서 영화롭게 하시지 않을 자를 성화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입니다. 그는 시작하신 일을 성취하십니다. 맨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새 창조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면 거기에 빛이 비칠 것입니다. 점점 더 완전한 광명에 이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처럼 그들도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신 자들을 결국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가치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를 그에게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무가치함도 그리스도의 의를 그로부터 빼앗아가는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물과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의를 분명히 안다고 하면서 성도의 궁극적인 개념에 대해서 부인하는 자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들이 칭의를 너무 저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합니다. 칭의를 다만 죄의 용서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칭의는 과거의 죄의 용서만이 아니라 장차 올 모든 좋은 것에 대한 언약적 권리를 포함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다면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서 선물로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도는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우리에게 의가 되셨다"고 말하고 나서 "거룩함과 구속함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의와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복된 특권들 사이에는 영원토록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연결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이 신자에게 전가되듯이 그 순종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견인은 또한 신자들에게 전가됩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논쟁을 하는 것은 은혜와 구속의 언약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구속이라는 말을 우리는 모든 악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뿐만 아니라 몸과 영혼 모두가 충만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지금 몸과 영혼 둘 다를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또한 우리 몸도 위하십니다.
성도의 몸은 현세에서 성령의 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의 몸과 더불어서도 언약을 맺으십니다. 비록 죽은 뒤에는 벌레들이 먹어치우는 몸이지만 몸 안에서 그들은 주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나는 몸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사두개인들이나 우리의 부활은 우리의 중생시에 이미 지나갔다고 말하는 이단들이 오늘도 있지 않나 두려워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결국 우리 주님께서 몸을 입고 오신 것과 재림심판날을 부인하는 것에 다름없습니다.
또한, 결과적으로 주님의 성찬의 성례전을 던져버린 것이 됩니다. 다시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다. 그들이 말하는 대로라면 그가 심판하러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왜 기억해야 합니까? 만약에 그가 우리 마음속에서 이미 오셔서 심판하셨다면 두번째 오셔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런 모든 논리들은 무지하고 교리에 굳게 서지 못한 자들이 무엇을 스스로 말하는지 확증하는지도, 알지도 못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중생에 있어서 우리 주님을 따르는 것과 새 생명의 참여자가 되어야 하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속에 오셔야 하는 것을 우리는 거침없이 고백하고 소망합니다. 이런 사실을 말할 때에 우리는 우리가 알고 느끼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후에 심판하시러 오신다는 사실도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가 여기 지상에서 가지셨던 몸을 가지고 천국에 올라가셨다는 사실도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부활 후에 "나를 만져보라 영은 몸과 뼈가 없지만 나는 몸과 뼈를 가지고 있느니라"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보증인 것은 분명합니다.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아담 안에서 모두 죽고 썩음에 종노릇하는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 둘째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은 확실히 다시 살아나고, 마지막 날 그들의 몸이 일어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에 장차 여러분들이 참여하게 될 구속의 가장 낮은 차원인 몸의 구속이 있습니다. 이 썩어질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어야 합니다. 이 죽어야할 것이 죽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합니다. 영혼과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몸이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졌습니다. 몸은 바라보고 금식하고 기도하는 일에 있어서 전인적 구원의 동반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영혼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몸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으키실 것입니다.
==성별된 기숙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덤 속을 들여다보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무덤은 성별된 기숙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여러분의 몸은 부활의 아침까지 조용히 잠들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팔이 울려 퍼질 때에 "너희 죽은 자는 일어나서 심판을 받으라"는 천사장의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땅과 하늘과 불과 물들이 여러분의 분해된 원자들을 내어줄 것이고 몸과 영혼이 모두 주와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은 병약한 몸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때로는 불멸의 영혼을 인해서 그 무게에 여러분의 죽을 몸이 눌리고 있음을 불평하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저 자신은 그러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참으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육신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 머지않아 진흙으로 만든 장막은 분해되고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집을 덧입게 될 것입니다. 이 후로는 우리의 몸은 신령해지고 육체로 인해서 우리의 영혼이 걸림이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육신은 강건해져서 영광의 크고 중한 것을 견디어 내도록 될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추해지고 병으로 쇠약해지고 노동과 나이로 인해서 망가진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기다리면 복된 변화가 올 것입니다. 그 때에 여러분의 몸은 새로워지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영광스럽게 변화될 것입니다. 거기에 관해서는 산 위에서 우리 주님의 변화한 기록으로부터 희미한 개념만 가질 수 있습니다. "그의 옷은 희고 빛나게 되고 그의 얼굴은 태양보다 더 빛났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 신자들은 사도가 소리쳤던 승리의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오 사망이여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무덤이여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마음속에 남아있는 죄
우리의 더 고상한 부분인 우리의 영혼의 구속과 우리 몸의 구속을 어떻게 족히 비교할 수 있을까요! 이 둘을 비교할 때에 신자인 여러분에게 나는 천사가 요한에게 했던 것과 같은 말을 하고 싶습니다. "이리로 올라오라".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룩하신 구속에 대해서, 우리가 실제로 잠시 후에 소유하게 될 그 구속에 대해서 보다 분명한 전망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미 의롭다하심을 받았고 이미 거룩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죄의 지배와 죄책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안에 죄의 존재와 내주는 남아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에 아말렉 사람들을 남겨두셔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싸우도록 하신 것을 좋게 보신 것과 같습니다.
나는 가장 완벽한 그리스도인이라도 우리신앙 고백의 한 구절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중생한 사람 안에도 본성의 타락이 남아있는 것과 육신은 항상 영혼을 거스리며 영혼은 육신을 거스리는 것"을 동의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신자들은 그들이 소원하는 만큼 완벽하게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이 그들의 의로운 영혼을 날마다 슬퍼하게 만들고 사도와 함께 외치게 합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부터 누가 우리를 구원하랴" 나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의 몸이 분해되기 전에는 이 일이 완벽하게 일어나지 않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의 존재를 한날 멸망시킬 것입니다. 또한 내적인 부패를 영원토록 중단시킬 것입니다. 이것이 위대한 구속이 아닙니까. 모든 신자들은 그러하다고 확실히 믿습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자녀의 가승 속에 가장 큰 고통이 되는 것은 우리 마음 속에 남아있는 죄의 문제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자는 여전히 여러 가지 시험 가운데 힘들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것을 그들에게 허락하신 것은 그것이 필요하고 좋다고 보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신자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자들이며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때로는 삼층천까지 올라갑니다만 사단의 사자는 가끔 그들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보냄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계시의 지극히 풍성한 것으로 인해서 교만하지 않도록 도울 뿐입니다. 그러나 지치지 마십시오. 연약해지지 마십시오. 완전한 구속의 날이 가까와오고 있습니다. 하늘에서는 악한 자가 여러분을 괴롭히는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연약한 영혼은 그때 영원한 휴식을 누릴 것입니다. 사단의 맹렬한 불화살은 그 복된 영역에까지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는 사단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히고 고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가 들어오는 문을 닫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의로운 영혼은 악한자의 경건치 못한 행동으로 인해서 날마다 슬퍼합니다. 지금은 밀 가운데 가라지가 자라고 있습니다. 늑대가 양의 옷을 입고 옵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구속은 이러한 모든 염려로부터 여러분을 해방시켜줄 것입니다. 이 후로는 성도들과 더불어서 완벽한 교제를 즐길 것입니다. 거룩하지 않은 것이나 성별되지 못한 것은 여러분을 위해서 위에 준비된 지성소 안에 결코 들어 올 수 없습니다. 하늘에서 여러분의 구원이 완성될 때 여러분은 이런 모든 종류의 악으로부터 벗어날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충만한 즐거움 속에 들어갈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동일한 정도의 행복을 누리지는 아니할 것이지만 모두다 그들의 마음이 원하는 만큼 행복해질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악한 자를 심판할 것이고 선한 자와 더불어서 교제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완전하게 된 영혼과 더불어서 그날 앉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행복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여러분이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서 보다 더 그를 닮아갈 것이고 영광에서 영광으로 영원토록 변화할 것입니다.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그러나 나는 여기서 잠시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천상에서 누리게 될 영광이 내 마음 속에 너무나 빠르게 몰려듦으로서 나는 그것들을 생각하는 것만 해도 현기증을 느낍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가 말하는 구속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것을 전부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눈이 본 적도 없고 우리의 귀가 들은 적도 없고 가장 거룩한 삶을 산 성도의 마음조차 생각지 못한 것들입니다. 그 영광은 얼마나 놀라운 것일까요? 내가 만약 그 사실에 대한 이야기를 영원토록 말씀드린다고 해도 여러분이 천국에 가서는 시바의 여왕과 같이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들은 것은 반도 아니 천 분의 일"도 되지 못한다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비스가 산에 올라가서 신앙의 눈으로 약속된 땅을 멀리 바라보는 것 밖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이 했던 것처럼 멀리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다만 부분적으로 알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시기를!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신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고 하나님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주 예수님, 당신의 택한 백성을 모두 구원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님, 당신의 나라를 속히 임하게 하옵소서.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오늘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고 미친것이라고 하겠지만 그리스도인의 종말은 영화로울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참된 가치를 모르는 불신자들, 세상의 진실로 불행한 자들이여! 여러분들은 여러분이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눈이 열렸다고 하면, 여러분이 영적인 것을 분별하는 감각을 가졌다고 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해서 함부로 악한 말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그들을 땅 위에서 가장 존귀한 자들로서 여기게 될 것이고 그들의 행복을 사모하게 될 것이며 여러분의 영혼은 그것을 찾아서 굶주리고 목마른 것처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어리석은 자 되기를 작정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혜를 자랑합니다. 고린도에 있는 철학자들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지혜는 하나님의 보시기에는 어리석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그것이 여러분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지 못한다고 하면 여러분의 지혜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모든 지혜를 가지고 여러분 앞에 지금 준비되어져 있는 것보다 더 일관성 있는 구원의 설계를 할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모든 자연적인 이성의 힘을 가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는 것보다 나은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더 나은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의 노력이 조금이라도 그것을 이루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 할 수 있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왜 여러분은 주님을 믿지 않습니까? 왜 여러분은 그의 의에 자신을 맡기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 타락한 인생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이 무질서하고 이 무질서가 여러분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보지 못하십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십니까? 여러번 여러번 결심하고도 여러분의 타락한 본성이 여러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여러분은 욕망의 노예이며 사단의 뜻에 따라서 포로 된 자가 아니십니까? 왜 거룩함이 되신 그리스도께 나오시지 않습니까?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소원하지 않으십니까? 그들과 같은 미래를 갖고 싶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죽어 없어지지도 아니하고 비참한 상태를 영원히 면할 수도 없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렇지 아니한 척 할 수는 있지만 진리를 말한다면 당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양심은 알고 있고 지옥은 그림 속의 불붙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여러분은 그리스도께 나아오시지 않습니까? 그 분만이 여러분에게 영원한 구속을 보장하실 수 있습니다. 가련하고 어리석은 죄인들이여 주님께로 속히 나아갑시다. 여러분은 지혜가 부족한 자입니다. 지혜를 그리스도께 간구하십시오 그가 여러분에게 주실 지 누가 아십니까? 그는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지혜는 영원한 지혜입니다. 여러분은 의를 소유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나아가십시오 그리스도는 믿는 모든 자에게 의가 되시고 율법의 완성이 되십니다. 여러분은 거룩하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피하십시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그의 충만한 데서부터 그를 믿는 자들은 모든 것을 받아 누립니다. 여러분은 죽기를 두려워합니다. 이 두려움이 여러분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를 바랍니다. 그는 죽음과 음부의 권세를 가졌습니다. 그 분 안에는 풍성한 구속이 있습니다. 그 분만이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을 여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도 안되는 생각으로 더 이상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무엇을 생각하더라도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비합리적인 일입니다. 왜 여러분은 죽기를 자처하십니까? 왜 여러분은 그 분께 나아가서 생명을 얻지 않으시렵니까? "목마른 자들은 생명수 샘으로 나아오라. 와서 값없이 마시라. 와서 돈 없이 사고 값없이 사라"는 이 복된 특권들을 돈으로 구입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가난해서 구입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만약 그러한 축복들이 상당한 수준의 죄인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라고 하면 우리와 죄인이 그것을 어떻게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특권들은 죄인 중의 괴수에게도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에게, 나와 같은 핍박자에게도, 고린도교인 여러분과 같은 더러운 자들이나 술주정뱅이나 욕심 많은 사람들이나 우상숭배자에게도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쌍한 죄인마다 '왜 내게는 주어질 수 없는가'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의 축복만 가지고 계십니까? 그리스도께서 이미 수백만의 사람들을 복 주셔서 그들을 불의에서부터 돌아서게 하셨다면 그분은 지금도 계속해서 동일한 사역을 하십니다. 그는 영원히 살아계셔서 중보의 기도를 드리심으로 여러분을 복 주시고 여러분 같은 자도 축복하십니다. 비록 에서와 같이 여러분은 불경건한 삶을 살았고 지금껏 하늘 아버지의 장자권을 멸시해왔지만 지금이라도 여러분께서 믿기만 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실 것입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
그러나 나는 다시금 신자인 여러분의 교훈을 위해서 이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부름에 참여한 형제 여러분, 여러분의 머리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을 위해서 얼마나 엄청난 축복이 쌓여져있는지요. 그의 이름을 믿음으로 누릴 수 있는 축복이 얼마나 놀라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을 부르신 부름에 합당하게 생활하십시오. 여러분은 얼마나 사랑을 받는 자인지 가끔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택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택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택한 자로서 겸손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자랑하는 자는 다만 주안에서 자랑하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것은 모두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나면서부터 어리석은 자이고 불경건한 자이고 저주받아 마땅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하십시오 성화는 계속적인 사역이기에 이미 얻은 것처럼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거룩한 자는 더욱 거룩하게 되어야 합니다. 심령이 깨끗하면 할수록 이 후로 하나님을 더욱 분명하게 볼 것입니다. 내주하는 죄가 여러분의 매일의 부담이 되게 하십시오. 슬퍼하거나 한탄만 하지말고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그것을 쳐서 복종시키십시오. 계속해서 여러분의 믿음의 시작자이시고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앙모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신실함 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불변하심 위에 여러분 자신을 세우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자유의지의 능력에 의해서 설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아버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유일한 소망과 위로가 되게 하십시오. 이 사실이 모든 시련 속에서도 여러분을 굳게 세우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한번 여러분을 사랑하셨다면 끝까지 여러분을 사랑하실 것입니다. 이 사실이 여러분을 복종하게 만들고 그 복된 시간을 사모하게 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이 되실 뿐만 아니라 완전하고 영원한 구속이 되실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영광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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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누구인가?((말 씀 : 고린도전서 1:30~31))]]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항상 뿌리가 없는 나무처럼 바람에 날리며 불안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우리에게 분명합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여러분 우리는 정처 없는 인생이 아닙니다. 우연히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우연히 살다가 우연히 죽는 존재도 아닌 것입니다. 다윈의 진화론처럼 아메바에서 성장하고 장성하고 변화되어서 사람이 된 것도 아닙니다.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셔서 예수님 안에 들어가게 해주시고 예수님은 우리를 의로운 사람, 지혜로운 사람, 거룩한 사람, 구속받은 사람이 되게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정체불명의 사람이 되지 않고 내 신변이 신분이 뚜렷해지는 것입니다.
<본론>
1. 지혜로 사는 존재
첫째로, 나는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므로 지혜로운 사람, 깨달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지혜라는 것은 깨닫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믿는 우리의 깨달음이시요,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위대한 깨달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면 그리스도가 우리의 깨달음이 되는 것입니다.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모시자마자 우리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지혜이신 분을 깨달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무엇을 깨닫습니까? 우주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계신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주가 우연히 생겼다고 말합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인 것입니다. 어떻게 우주가 우연히 생깁니까? 성경은 말하기를 인간은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고 우연히 왔다가 우연히 살다가 우연히 가버리고 만다면 인간은 너무나 처절한 절망적인 존재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자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섬기면서 살다가 육신의 장막 집 무너지면 하나님이 예비한 영원한 천국으로 간다는 확실한 깨달음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이 밝고 맑고 환하게 되어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창조주 하나님을 깨닫게 해주신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요한복음 14: 6~ 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골로새서 1:15~16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히브리서 1: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고전2:6-16) *6.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7.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5..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바로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형상이요, 영광의 광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가 아버지의 자녀인 것을 깨닫게 되고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는 아버지의 품에 영원히 살도록 지음을 받은 것을 깨닫게 되므로 우리의 신분이 분명해지고 정체성이 확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믿음으로 [이제 나와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분께 여쭈어 봄으로써] 인생의 생사문제뿐 아니라 모든 문제에 해답을 주시는 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죽는 것도 멸망이 아니라 육신의 장막집 벗어 버리고 영원한 천국으로 가는 방편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주를 모르는 사람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고 모든 것은 안개구름같이 사라진다고 말합니다만,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말인 것입니다. 사람은 죽으나 없어지지 아니하고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생사문제가 뚜렷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장사지내고 함께 부활하사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앉았으니 우리는 영원한 영광을 누릴 후보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우리가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고 살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모든 일을 예비해 놓은 것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예비해 놓은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함과 같더라. 그러나 성령이 이 모든 것을 깨닫게 해준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 안에서 우리는 깨달음을 얻어 우리 인생을 살 때 어느 길로 가는 것이 바른길이며, 어떻게 살아야 올바르게 사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대학을 졸업해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와 총명이 있어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통해서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잠언 9:10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지혜는 예수님을 앎으로 얻고 하나님을 섬김으로 명철하게 사리를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삶은 그리스도를 알아서 내가 지혜의 근본을 모시고 깨달음을 얻고 사물을 잘 분별하는 명철한 사람이 되는 것이지 세상에 학력이 이런 지혜와 명철을 주지 않습니다. 이런 지혜와 명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인 것입니다.
잠언 3: 6에는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골로새서 2:3에도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그리스도 안에 지혜가 있고 지식의 보화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속에 모시면 우리는 지혜로운 자, 지식 있는 자가 되고 깨닫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무신론적 유물론에서는 인본주의가 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중심의 지혜로써 인생을 산다고 말하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로써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 지혜 경쟁을 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은 머리가 되고 꼬리 되지 않고 위에 있고 아래 내려가지 않고 남에게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참말인 것입니다. 인생은 지혜의 경쟁인 것입니다. 지혜는 사물을 깨닫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인데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서 문제를 해결하면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 달은 이번 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더 성장하고 발전하고 향상하는 삶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을 구하지 말고, 은을 구하지 말고, 지혜를 구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지혜는 바로 그리스도를 모시므로 지혜의 근본을 마음속에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를 통하여 우리는 명철하게 사물을 깨달아 알면서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신론자들이 인본주의적으로 인생을 산다고 자랑하지만 그것은 다 깨닫지 못하고 캄캄한 흑암 가운데 방황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미국 남부를 농경사회에서 농업 산업사회로 전환시킨 농업과학자 조지 워싱턴 카버는 위대한 과학자였습니다. 그는 목화밭의 흑인노예 후손으로 어릴 때부터 “오늘도 새로운 지혜를 주시옵소서.”라며 늘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독실한 크리스챤이었습니다. 그는 후에 해충 피해가 갈수록 심해져 목화밭이 완전히 폐허가 되어 목화밭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가난하게 되었을 때 그는 땅콩을 대신으로 심게 했습니다. 그리고 땅콩으로 만들 수 있는 무려 300가지 제품을 발명해 냈습니다. 그리고 고구마와 포도의 산업적 가치를 발견해서 남부에 농업혁명을 일으켜 헐벗고 굶주린 남부사람들을 다 잘살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가 국회에 초청을 받아서 강연을 하고 국회의원들이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 놀라운 과학적인 발명과 발견을 했습니까?” 하니까 그는 성경을 들고 “이속에서 다 얻었습니다.”
“성경에 어디 그렇게 과학적인 것이 있습니까?” 하니까 “성경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고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나는 아버지를 알게 되고 아버지께 기도하므로 아버지가 내게 모든 과학적인 발명과 발견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은 예수를 구주로 모시므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지혜가 되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모든 일상생활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 지혜로운 아버지, 지혜로운 어머니, 주부, 자녀들, 사회인, 국가 경영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의 지혜를 받지 않고 인생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생문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어 우리를 짓누르기 때문에 이것을 해탈해 나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하고 그 하나님의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얻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냐.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므로 해탈함을 받아서 지혜를 받은 사람이요, 깨달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인생을 삶으로 모든 일에 문제해답을 얻고 성공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소독학의 창시자라 불리는 조지프 리스토는 인체 수술이 시작된 19세기에 수술환자의 90% 이상이 죽는 것을 보고 세균 감염이 그 원인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세균을 몰랐기 때문에 수술 칼을 소독 안하고 사용해서 세균이 감염되어서 수술을 받고도 90%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조지 리스토는 기도하는 중에 이것이 세균으로 말미암아 온다는 것을 깨닫고 수술을 방법을 개선했습니다. 수술도구를 불에 소독하고 수술한 결과 90%의 사망률이 80%의 생존율로 바뀌었습니다. 훗날 조지프 리스트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지혜 덕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를 주셔서 많은 사람을 부요와 생명으로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나서 우리들에게 지혜가 되셨습니다.여러분은 예수를 구주로 모셨으면 지혜를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인 것입니다. 몽매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두움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광명한 빛을 받고 깨달음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지혜안에 거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지혜로써 인생을 사십시오. 문제를 해결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저서 「역사의 연구」에서 “세계를 지배했던 21개의 문명 가운데 19개의 문명이 자멸했는데, 그 이유는 무신론과 물질주의 문명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21개의 역사적인 문명이 19개의 문명이 파멸당한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그리고 인본주의에 섰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한 기독교 심리학자는 무신론자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무신론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기 안에 각인되어 있는 하나님 의식을 지워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인본주의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파멸을 재촉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예수님 안에 있고 그 예수님의 지혜로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에 어떠한 역경에도 그것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 지혜와 총명을 가진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2. 의를 덧입은 존재
둘째로,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나서 우리에게 의로움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모심으로 우리는 의롭게 태어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타락한 아담이 하나님의 영광을 잃고 벌거벗었을 때 하나님이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시고 가죽을 벗겨 옷을 만들어 입힌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원래 하나님의 영광의 옷을 입었기 때문에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서로 쳐다보아도 부끄럽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서도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영광이 떠나자 순식간에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서로 부끄럽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 설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무 뒤에 숨어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앞치마를 엮어 입었으나 햇빛이 나니 말라서 쪼글쪼글하고 부서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앞치마를 만들어도, 만들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들은 불쌍히 여겨서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게 하시고 가죽을 벗겨 영구한 옷을 입혀서 내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죄의 양심이 벗겨져서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여 피를 흘리시고 의로운 옷을 벗겨서 우리에게 입혀 주실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우리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짐승이 죽임을 당하고 피를 흘린 것처럼 예수님은 너희 죄, 나의 죄,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몸을 찢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죄가를 지불하시고 당신의 의로운 옷을 벗어서 우리에게 입혀 주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모두 다 부끄러움의 수치를 가득히 안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부귀, 영화, 공명, 지식을 가지고 부끄러움을 일시적으로 잊어버리고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설 때 이 모든 옷은 다 필요가 없습니다. 벌거벗은 자기를 발견하게 되고 지옥으로 자기 스스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장마가 진 이후에 해가 번쩍 났을 때 마당에 나가서 거적 대기를 들춰 보십시오. 밑에서 많은 벌레들이 기가 막히게 빨리 어두운 곳을 찾아 도망을 치는 것입니다. 그 벌레들은 어두움의 산물입니다. 어둠속에 있다가 햇빛이 비취니까 견디지 못하여 스스로 어두움을 향해서 줄달음질치는 것입니다. 오늘날 죄인들이 지옥 가는 것 하나님이 보내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죄의 부끄러움이 얼마나 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설수가 없어서 지옥의 어두움으로 줄달음쳐 도망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부끄러움의 수치를 오직 가릴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과 그 의로운 옷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예수님은 하나님께로써 나서 우리에게 의로운 옷을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의가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의 모든 과거의 죄가 용서를 받고 그리스도의 의로운 옷을 입음으로 부끄러움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믿고는 죽음을 겁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옷으로 화려하게 옷을 입었기 때문에 하나님 품에 안길 수 있고 하나님과 손을 잡을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요한일서 2: 2에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고 하셨으며, 고린도후서 5:21에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으면 하나님처럼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원래 아담이 범죄 했을 때 그 죄 대신에 짐승이 죽고 피를 흘리고 가죽옷을 만들어 입은 것이 인류의 생각 속에 다 박혀 있습니다. 인류는 아담, 하와 이후로 노아홍수 이후로 온 세계 퍼져 살았지만 피 흘림이 없이는 죄가 사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족속들도 다 신 앞에 나갈 때는 피를 흘려야 된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알고 그것을 집행했던 것입니다.
멕시코는 유행병이나 재난이 오면 흠 없고 잘 생긴 청년을 골라서 여러 가지 색을 칠합니다. 그 젊은이가 큰 소리로 “내 죄를 가져가시오!”라고 여러 번 외치면 그를 죽여 피를 뿌렸습니다. 아테네는 도시에 질병이 만연하면 가난한 사람을 돈 주고 샀습니다. 도시의 군중들이 그 사람을 향해 자신들의 죄를 고백한 후 돌로 쳐서 피를 흘려 죽게 했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사람의 심장을 찔러 피를 뿌리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은 심장에서 나온 피를 병에 담아 신의 노여움을 풀려고 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해마다 궁중에서 거위나 닭, 소 같은 짐승의 목을 찔러 피를 뿌렸고, 우리나라도 무당이 푸닥거리를 할 때는 돼지 목에 피를 내고 열십자를 긋고 그 가운데 칼을 콱 박는 습관이 있습니다.
기독교 인간학자 알렉산더 그리골리아(Alexander Grigolia) 박사는 “세계 인구의 95%가 피로써 신께 제사를 드렸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또한 “사람이 신께 죄를 짓거나 악을 행했을 때에 어떤 종류든지 꼭 피를 의지해서만 속죄 받는다고 믿는 것이 원래부터 타고난 인간의 성품”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아담이 하나님의 영광을 잃고 벌거벗었을 때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시고 그 가죽을 벗겨 옷을 입힌 것처럼 인생이 타락해서 멸망당하는 사람은 짐승의 피로써는 안 됩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서 피를 흘려서 죄 없는 자가 우리의 죄를 대신 청산하시고 그 의로운 옷을 벗겨 우리에게 입혀 주시므로 우리의 예수 믿고 얻은 옷은 너무나 의롭고 영광스러워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과거가 한번도 죄를 안 지은 것처럼 맑혀지고 그 피로 의로운 옷을 입은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신부로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가 되신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3. 거룩하게 하신 존재
셋째로, 예수는 하나님께로써 나서 우리에게 거룩함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세속적인 사람이요, 마귀의 종입니다. 세속이란 더러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패하고 오염되고 썩어진 것이 세상인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오고 죽음은 썩고 썩으면 온갖 벌레가 그곳에서 나오는 것처럼 인간의 영혼이 죄를 짓고 죽었으므로 그 죽은 가운데 모든 더러운 벌레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불의, 추악, 저주, 절망, 음란, 방탕, 시기, 분노, 질투 온갖 더러운 것이 다 영의 죽음에서 꿈틀거리고 나와서 인류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오염이 공기, 물, 음식, 생활, 환경을 부패시켜 병과 죽음을 가져오는 것처럼 영혼이 죽어서 그 속에 오염을 통해서 수많은 사망의 더러운 것이 나와서 인류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5:26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했으며, 출애굽기 23:25에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 병을 제하리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은 오염이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하고 죽게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15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말했었으며, 로마서 5:12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사망을 누가 제할 수 있습니까? 사망으로 말미암아 다가온 죽음을 누가 철폐하고 죽음에서 기어 나온 이 더러운 모든 벌레들을 누가 제할 수 있습니까? 인간의 지식과 총명, 제도와 노력으로써는 이 사망을 철폐할 수 없고 부패를 철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의 보혈이 죄를 없게 하고 그 보혈로 말미암아 다가온 성령께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죄의 오염을 제하시고 성령께서 사망을 제하시고 거룩함과 신령한 생명을 주시는 역사를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 1~ 2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해방된 사람인 것입니다. 압박과 설움에서 수천 년을 고난당한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했습니다. 죄가 사라지자 사망이 청산되고 거기에서 나온 모든 썩어짐의 더러운 것들이 다 제하여지고 우리는 그리스도 앞에서 깨끗해지고 거룩하고 성령님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중국에는 “종록자 불견산”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뜻은 ‘사슴을 잡으러 뛰어 가다가 자기가 나중에는 깊은 산속 늪 속에 들어와서 빠져나갈 길을 잃어버리고 사슴도 잡지 못하고 길을 잃어버리고 늪에 빠져 죽는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탐욕이라는 사슴을 쫓아서 깊고 깊은 죄악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요사이 신문과 라디오, TV에 보면 계속해서 범법자들이 나오지 않습니까? 특별한 커미션을 받았다. 비자금을 만들었다. 부패를 했다. 부정을 했다. 해가 뜨고 해가 지면서 늘 그 소리를 듣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탐욕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탐욕이란 노루를 잡으려고 따라가다가 보니 너무 깊이, 깊이 들어와서 그만 나무숲을 모르고 늪을 모르고 숲에 걸리고 늪에 빠져 좌절과 절망에 처한 것입니다. 마귀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는 탐욕으로 우리는 끌어가는 것입니다. 탐욕만 쳐다보고 끌어가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깊은 늪에 빠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장자크 루소는 인간에 대해, “열 살 때에는 과자에 따라가고, 이십 대에는 연인에게 따라가고, 삼십 대에는 쾌락에 따라가고, 사십 대에는 야심에 따라가고 오십 대는 탐욕을 따라간다. 그러나 이렇게 무엇엔가 끌리고 있는 동안 인간은 허수아비일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즉, 자기가 사는 것 같지만 실제는 자기가 아니라 탐욕이 주인이 되어서 탐욕이 끄는 대로 천방지축으로 따라가다가 나중에 좌절과 절망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탐욕이라는 것이 바로 죄의 썩어짐의 산물인 것입니다. 죄에 빠져서 썩어진 곳에서 탐욕이 넘쳐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은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를 섬기고 내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되면 탐욕에 빠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죄의 오염을 제하시고 성령께서 사망을 제하시고 거룩함과 신령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4. 구속 받은 존재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 나서 우리에게 구속함이 되셨습니다.
구속함이란 값을 주고 종을 사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종으로 팔려서 옴짝달싹 못하고 도저히 해방될 수 없는 사람을 값을 주고 사주어서 종 문서를 찢어 버리고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는 것을 구원. 즉, 구속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의 종, 질병의 종, 저주의 종, 죽음의 멸망의 종이 되어서 헤어나 올수 없는 고통 속에 있는 우리를 값 주고 하나님 앞에 사서 해방과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 6에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 할 것이라”고 말했으며, 히브리서 9:12에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 5에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계시록 5: 9~10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주님께서 당신의 피를 흘리시고 몸을 찢으셔서 우리를 값 주고 사셨습니다. 우리 공짜로 구원받은 것 아닙니다. 예수님이 엄정한 값을 지불했습니다. 당신의 피로 값을 지불하고 살을 찢어서 그 값으로 지불하고 생명을 쏟아서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종에서 사서 하나님 앞에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값비싼 산물입니다. 하나님 앞에 귀하고 귀한 것은 너무나 고가의 대가를 주고 우리를 샀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유물 중에서 가장 귀한 소유물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병의 종살이에서 구속하여 주셨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영의 병, 마음의 병, 육신의 병, 가정의 병, 생활의 병, 병이 들었습니다. 병이란 비상적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건강이 허물어지면 병들지요. 정상적인 마음이 아니면 병든 마음이지요. 정상적이지 않은 가정은 병든 가정이지요. 정상적이 아닌 사회는 병든 사회지요. 주님은 병을 고치는 능력을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시편 103: 3에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베드로전서 2:24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주님은 비정상적인 것에 오셔서 정상적으로 만듭니다. 마음을 정상적인 마음으로, 육체를 정상적인 건강으로, 사회, 국가를 정상적으로 만드는 것이 예수님의 치료하는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비정상적인 곳에 예수를 모시고 기도하면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정상적인 삶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저주의 종살이에서 구속하여 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인생들은 저주받은 사람이 되어서 저주받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찔리고 상처투성이로 인생을 살았는데 주님께서 우리를 저주에서 구속하여 주셨습니다. 그가 우리 대신하여 저주를 받아서 저주를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고린도후서 8: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고린도후서 9: 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은 우리가 저주에서 몸부림치기를 원치 않습니다. 가시에 찔리고 상처투성이가 되고 헐벗고 굶주리고 남에게 구걸하고 의지하고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님은 저주의 종이 된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와서 대신 저주를 다 청산하시므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여러분과 나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옆에 계신 분들에게 “당신은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세요. 매일 아침 일어나면 예수님을 바라보고 나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잠자리에 들어갈 때 나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크게 외치고 생활하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저주에서 해방이 되고 그 대가를 주님이 지불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죽음의 멸망에서 구속해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육체적 죽음이 예정되어있지요. 믿지 않는 사람은 죽음이 절망이요, 마지막이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죽음은 하나의 커튼을 펼치고 저 건너편으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저 강 건너 언덕 편에 아름다운 땅이 있도다. 믿음으로만 그곳에 가겠네".
우리는 믿음으로 저 건너편에 가서 아름다운 하나님의 예비한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 죽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사망의 장막을 무찌르시고 부활과 영생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죽음의 어두운 길은 예수의 부활로 광명한 대로가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살고 우리는 살지 죽지 않습니다. 주를 모르는 사람은 죽음에 처하면 멸망당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살고 영원히 사는 우리들이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2:14~15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고린도전서 15:55~58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우리는 죽음을 이겼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율법을 다 철폐하시고 사망을 철폐하시고 우리에게 부활을 주시고 영생을 주시고 천국에 광명을 이미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1847년 성 안드레 교회에서 50년간 목회한 라이트 목사(Henry Francis Lyte)가 스코틀랜드의 항구에서 출발해 프랑스의 리비에라로 떠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첫 번 기항지인 프랑스의 북부 항구에서 하룻밤을 지내기 위해 여관에 묵었습니다. 그런데 여관주인이 보니까 이 손님이 나갈 시간이 되었는데도 안 나가서 문을 두드려서 소리가 없기에 열어보니 세상을 떴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뜨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책상에 엎드려서 시를 적었습니다. 그 시 한 편을 적어 놓고 책상에 엎드린 채 세상을 떴는데 그 시가 바로 오늘날 전 세계인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가 531장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인 것입니다.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 / 구주여 나와 함께 하소서 / 내 친구 나를 위로 못할 때 / 날 돕는 주여 함께 하소서
내 사는 날이 속히 지나고 / 이 세상 영광 빨리 지나네 / 이 천지 만물 모두 변하나 / 변찮는 주여 함께 하소서
주 홀로 마귀 물리치시니 / 언제나 나와 함께 하소서 / 주같이 누가 보호하리까 / 사랑의 주여 함께 하소서
이 육신 쇠해 눈을 감을 때 / 십자가 밝히 보여 주소서 / 내 모든 슬픔을 위로하시고 / 생명의 주여 함께 하소서
마지막 그는 숨이 넘어가면서 이 아름다운 찬송에 놀라운 희망으로 가득히 채워서 적어 놓고 세상을 뜨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죽음의 사망에서 구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숨지는 순간에도 승리의 찬송을 부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소속성-한계성-유일성-정체성]의 네 가지 감각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소속감입니다. 내가 어디에, 누구에게 소속되어 행복할 수 있는가를 본능처럼 알고 살아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소속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어 주셨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게 만들어 주십니다. (고전1:30)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고 우리의 소속감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단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닙니다. 우리를 하나님께 속했고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소속감이 분명합니다.
둘째는 한계성입니다. 나의 한계를 아는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은 겸손할 수 있으며, 그 한계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한계를 압니다. 우리는 다 죽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한계를 알기 때문에 저 건너편에서 손을 내미는 하나님의 손을 잡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속에 지혜나 총명이나 모략이나 재능이나 지식이 모자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이 있는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총명과 모략과 재능을 얻어 인생을 성공하고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계를 아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유일성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독특한 피조물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람은 스스로를 존중하며 살게 됩니다. 여러분은 정말 독특한 사람입니다. 누군가가 “왜 자꾸 코를 훌쩍이느냐? 코를 훌쩍이지 마라”.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이 “나는 그렇게 만들어진 유일한 나이다. 이 우주 가운데 나 같은 사람은 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고 미래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코를 훌쩍이든 무슨 상관이냐? 하나님은 나 같은 사람 한 사람밖에 안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걱정할 것 없다.” 여러분은 여러분 같은 사람 이 우주 속에 한분밖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이례적 사건입니다. 과거를 다 들춰 보아도 여러분같이 생긴 사람은 없어요.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습니다. 유일한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해요. 여러분이 두 개, 세 개 있으면 덜 사랑할지 모릅니다만 여러분은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여러분을 기쁘게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랑스러운 하나님의 피조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평가절하하지 마십시오. 폄하하지 마시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십시오. 자기의 개성을 기쁘게 생각하십시오.
넷째는 정체성입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자신에 대한 정체성의 감각을 바르게 가질 때 값진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정체성이 확실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는 지혜 있는 사람이 되어 깨닫게 되고 나는 의로운 사람이 되어서 죄를 벗어나고 영광의 의의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사람이 되며 나는 세상의 죄와 부패를 벗어나고 거룩한 사람이 되었으며 나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값주고 사서 이제는 종의 멍에를 벗어 버리고 자유인, 해방인이 되어 영원히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사람이 되었다는 우리의 정체성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나의 신분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고후5:17)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나는 새로운 사람,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신분, 새로운 정체성을 확실히 알고 있으므로 요동치 않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결론>
내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예정이 있어 태어나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 안에서 주님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을 받은 당당한 신분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나는 우연히 태어나서 덧없이 살다가 죽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예정이 있어 태어나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 안에서 주님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을 받은 당당한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체불명의 고등동물이 아닙니다. 정체가 확실한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늘 알고 감사하고 찬양하며 살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정체성 상실의 위기에 처해있지 않습니다.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는 부평초 같은 인생도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는 지혜를 얻어 깨달은 사람이 되어서 해탈을 얻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구속받아 해방과 자유를 얻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정체성이 확실하고 신분이 뚜렷합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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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요15장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하나님, 곧 JC의 목숨보다 더 고귀한 가치를 지닌 자요, JC에게서 난 일가친척이요, JC와 형제자매지간인 동시에 증언자요 친구관계인 참성도와 제자들...고린도전서 1:30~31...“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하나님은 JC안에서 창세전부터 믿는 우리들을 [JC의 친구로] 예비하시고, 가장 알맞은 때에 가장 적합한 상태와 모습으로, 아버지의 뜻안에서 JC에 합한 믿음으로 내주하시는 HS따라 JC를 살며 공급하며 반사함으로써 아버지의 뜻 이루도록 보내쎴고, 내 이름 부르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살아 생동하며 발휘하는 참 믿음으로 하나되신 성령따라 통해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살며 사랑하며 섬기며 온통 그분의 어떠하심 그대로 닮아가며 성도의 직분, 곧 사명 받은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제2의 창조인 하나님나라, 곧 교회를 위해 영혼구원위한 복음을 증거하며 전파하게 하셨음!!))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21.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22.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23.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24.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25.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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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의 유대인들은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고소하지만, 아가야 총독 갈리오는 바울이 부정하거나 불량한 일을 했으면 몰라도 유대인들 내부의 종교적인 문제라면 자신이 관여할 일이 아니니 알아서 해결하라고 말하며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냈습니다. [[주께서 이때 바울에게 하신 말씀이 있었지요....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행18장 10절)]]....그런데,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행18장 17절)....바울을 정죄하는 데 실패한 사람들이 회장당 소스데네를 잡아 때립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머물 때, 회당장 그리스보가 바울의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았고 그 후임인 소스데네도 그리스도인이 되어 바울을 도운 것입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서 소스데네는 배신자와 다름없으니 바울보다도 더 얄미웠을 것인데, 총독 갈리오가 바울을 놓아주자 소스데네에게 분풀이를 한 것입니다.[[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장 12-13절)....그러나, 이후 소스데네의 이름이 성경에 다시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고전 1장 1절)]]...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발신인으로 바울의 이름과 나란히 소스데네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소스데네가 고초를 당할 때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주님을 위해 당한 고난으로 소스데네가 더 큰 복을 받은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안락한 생활을 하며 신앙을 잃어버리는 것에 비하면야 고난 중에 있더라도 신앙이 굳건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는 것이 훨씬 더 복 있는 삶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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