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pitiation, appeasement, placation = making favorable, 贖罪 속죄,속량 (<피로써> 대가 지불하여 죄를 덮음 -->..심판 보류<구>), 宥和 유화 = 화해 ==> 목표 :: atonement 보상(통한) 일치, 하나됨의 소통 관계 회복
@@@代贖 대속(대가 지불한 구속), 대가 지불 ransom payment + 구속 통한 구원 salvation thr' redemption * 거듭남(중생), born again(replace by Christ) + 자유 주심 giving freedom = JC의 (십자가 죽음의) 대가 지불 통한 유일무이한 구속<되 사옴 buying back + 자유 주심 giving freedom = 구원(사망에서 생명으로) eternal salvation> redemption through ransom payment by Jesus Christ' blood (예수(Jesus)가 십자가(十字架)의 보혈(寶血)흘림으로 만민(萬民)의 죄(罪)를 대신(代身) 씻어 구원(救援)한 일.) ....대가 지불하고 구속함(ransom and Redeem) : 여기서 ransom<대가>란 노예나 죄인을 자유케 하기 위해서 대신 지불한 값을 말함(민 18:15).
@@@redemption, buying back 救贖 구속 [대속(代贖)하여 구원(救援)함. 죄악(罪惡)과 악마(惡魔)의 손에서 인류(人類)를 건져냄.]........하늘의 속죄소에서 JC는 그분의 피로 <단 일회적으로> 대가를 치루심으로써 전 인류의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고, 죄를 마귀-사탄에게되돌리셨음(아사셀 양).....이에 더하여, JC 믿는이마다 [구원 받은 후에도 일상 생활 중에 범하는 죄들마다 친히 주께 나아가 회개-아뢰고 고백함으로써 얻는 죄 사함의 속죄 위해] 언제든지 지성소 시은좌(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음 ::: (([속죄 개념이 달라졌음] 구약시대에서는 희생제물의 흘린 피로 속죄소를 덮어 죄인의 죄를 (일시적으로) 가림으로써 진노하심을 진정(심판 보류)/화해-은총 재개의 의미를 가졌지만<죄 흔적 남음>, 신약에서는 *1) 하늘 지성소의 속죄소에 뿌려진 구주 JC 보혈로 인한 완전한 대속을 통한 구원 이룸<모든 죄 하나하나마다 흔적조차 제거해 버리심> + *2) 믿는이는 <죄와 죄들을 자각할 때마다> 언제든지 시은좌에 나아가 구주 보혈을 의지함으로써(구주를 속죄제-속건제로 취함으로써 죄 사함 받을 수 있고, 또한 번제와 소제되신 구주를 그 자신의 번제와 소제로 취함으로써 ) 항상 하나님과 화목 + 연합한 한 영됨을 누리게 하셨음
개역개정]시130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주음성외에는446. 455주님의마음을본받는자.주님의뜻을이루소서425.나주를멀리떠났다273. 주없이살수없네292.구주를 생각만해도85.내가늘의지하는예수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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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구속자, 구속하시는 여호와====@구속[무름(속량)/자유]회복---속전(지속적으로 정결케 하는 보혈의 능력)--보수./보응/심판
la'G:(1350, 가알) 되 사다, 속량하다, 구속하다, 근친의 역할을 행하다 [구속자 redeemer..근친/근족/혈연자 =고엘]
가알(동사)은 기본어근이며, '되사다, 도로 찾다, 속량하다, 구속하다 redeem, 근친 역할(권리, 의무)을 행하다'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어근은 '자기 친족을 어려움이나 위험에서 구하다'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 어근과 매우 유사한 어근 파다([d"P; , 6308): 구속하다 redeem) 사이의 한 가지 차이점은, 일반적으로 가알(la'G: , 1350)의 강조점이 구속자의 자격과 행함에 있는데, 반드시 근친이어야 하며, 근친의 특권이나 의무는 다름아닌 속량에 있다는 것이다.((JC가 바로 그러하시다..그는 태초이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신 아들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이미 예고된 대로, 참사람으로서 성육신하셨고 인성을 가지셨기에 [죄로 인해 자기의 모든 것을 사탄에게 넘겨주고 파산한 자들인]우리의 피를 나눈 근친/근족으로서 모든 면에서 참된 자격과 능력을 갖추신 유일무이한 고엘이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00회 이상 나오며, 칼형과 니팔형으로만 사용되었다.
가알은 착하고 진실한 사람이 자기의 친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포함하는 4개의 기본적인 상황에서 사용되었다.
(a) 첫째로, 가알은 오경의 법령에서 궁핍한 때에 판 밭을 되사는 것이나 가난할 때 자신을 판 이스라엘인 노예를 자유롭게 하는 것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합당한 대가를 치르고 되사서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바로 그대로 각 사람에게 배정/배분된 대로 모든 것을 돌려주고 모든 권리를 회복시켜 지고지선의 진복 누림의 바탕을 제공하여 주는 구속의 일]로서 이런 매입과 무르는 일은 근친의 의무였다(레 25:25-54).
레 25:25에서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라고 하였다.
물론, 만약에 자신이 부유하게 되면 그 사람 자신이 그것을 '무를' 것이다(레 25:26).
한편, 가난한 자는 기업만이아니라 자기 자신을 동족 이스라엘인에게나(레 25:39)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타국인(레 25:47)에게 팔기도 하였다.
그를 속량할 책임은 가장 가까운 친척 - 형제, 삼촌, 사촌들, 가족의 혈족 - 에게 있었다(레 25:25, 레 25:48, 레 25:49).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친척을 속량한 redeemed 자(혈연자)는 '근족 - 구속자'로 알려져 있었다. (참조: EDBW).
---가난한 자의 구제에 관한 가장 유명한 실례는 수혼법에 대한 구약성경의 증거가 가장 광범위하게 미치는 룻기에 있는 것 같다.
신 25:5-10에 의하면, 남편의 형제는 후사 없는 과부를 취하여서 씨를 영속시키고, 남자 후손과 결부되어 있는 땅의 계승을 보증해야 했다.
여기 [수혼법의 실행 의무]에서 그것을 실행하는 근친은 야밤이라고 불리어지며, 어근 가알은 사용되지 않는다.
....룻의 상황에서는 두 가지 것들, 즉 밭을 되사는 것과 수혼이 언급된다. 근친은 밭을 사는 것을 기꺼워했지만, 룻과 결혼하는 것은 기꺼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의 요지는 나오미가 가난하여 밭을 팔 수 밖에 없었을 때, 근친은 그녀를 위해 그 밭을 되사야 했다는 데 있다. 그는 후사 없는 형제의 과부를 위해서 이 일을 기꺼이 하려 했지만, 그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그 근본을 모르는] 룻과 결혼하여 그들의 기업을 지속시킬 자손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그는 거부하였으며 여기에 보아스가 개입하였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것, 즉 친족과 수혼은 구별되어야 한다. 고엘(구속자)이란 단어는 후자의 제도를 가리키지 않는다.
....레게트(Leggett)는 룻기에 구속적이고 메시야적인 유형론의 주제가 들어있다고 보았다.
...."고엘(goel)로서의 보아스의 행동들에서 우리는 보아스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가 예시되어 있음을 보았다. 보아스가 구속의 권리를 소유하였으면서도 분명히 룻을 위하여 개입할 의무(까지)는 없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보라...룻은 나오미의 견해를 따라서 겸손하게 자신을 신부로 취하여 후사를 낳도록 해 달라는 뜻으로 보아스의 이불을 들추고 눕는다!!...겸손과 순종의 극치이다!!))
....보아스가 이 가난한 과부들의 곤경을 보았을 때 그의 생애가 여호와와 여호와의 율법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었으므로 그들을 구원하러 왔던 것과 같이 메시야의 경우도 그의 생애가 하나님의 법에 의해 지배되고 또한 그가 가난한 자들과 억압 받는 자들을 공정하고 정당하게 대우하실 것이라는 사실이 예언되었다(시 72:2, 시 72:4, 시 72:12, 시 72:13, 사 11:4).
(b) 둘째로, 가알은 재산이나 여호와께 바쳐진 희생제물 아닌 짐승들을 무르는 것, 혹은 부정한 짐승들의 첫 소산을 무르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레 27:11-33).
이 [속전!!]사상은 인간이 교환물로 그에 상응하는 것을 여호와께 바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속전은 부정직한 교환을 피하기 위해 약간의 추가 몫이 제공되었다. 이런 경우에 무르는 자는 친족이 아니라 재산의 주인이었다.
(c) 셋째로, 가알은 살해당한 사람을 대신하여 "피의 보수자"(RSV '보복자' revenger)가 되는 가장 가까운 친족을 언급하는데 사용되며, 칼 분사 고엘로 나타난다.
고엘은 구속자이며, 이 구속자는 '피의 보수자'로 불리우는데, 그의 임무는 자신의 친척을 살해한 자를 처벌하는 것이다(신 19:6).
이 사상은 가까운 친족이 생명에는 생명으로 지불해야 한다는 것임에 틀림없다.
돈을 지불함으로서 집을 재매입하거나 노예를 속량할 수 있는 것처럼, 친족의 잃어버린 생명은 마땅히 살인자의 그에 상응하는 생명으로 지불되어야 한다.
친족은 피의 보수자이다. 이런 사형 제도는 피비린내 나는 숙원과 구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고엘은 죄없는 사형 집행인이었으며 따라서 살해되어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보수자'라는 의미로 12회 나온다(민 35:12, 민 35:19, 민 35:21, 민 35:24, 민 35:25, 민 35:27, 신 19:6, 신 19:12, 수 20:3, 수 20:5, 수 20:9).(참조: R. L. Harris).
(d) 넷째로, 가알은 하나님께서 '구속자'로서 '구속하시는 행위'에 대해 사용되었다.
....출 6:6에서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라고 약속하신다(출 6:6, 참조: 시 77:15).
이스라엘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출 15:13). "하나님이 저희의 반석이시요 지존하신 하나님이 저희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시 78:35).
....이사야서에는 '구속자'라는 단어가 하나님을 지칭하여 13회 나오는데 모두 사 41- 63장에서 사용되었다. 가알은 하나님에 대해 9회 사용되었으며, 사 43:1에서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가알은 애굽으로부터의 구원(사 51:10, 사 63:9)과 바벨론의 포로생활로부터의 구원(사 48:20, 사 52:3, 사 52:9, 사 62:12)을 언급하는데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의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사 41:14)이며 '너희의 왕 이스라엘의 창조주'(사 43:14, 사 43:15)이며 '만군의 여호와'(사 44:6)이며 '야곱의 전능자'(사 49:26)이다. 그의 구원에 참예하는 자는 '구속 받은 자'이다(사 35:9).
....시편에는 종종 영적인 구원이 육적인 구원과 병행되어 나온다. 예를 들면 시 69:18., "내 영혼에게 가까이 하사 구속하시며 내 원수를 인하여 나를 속량하소서". 시 103:2, 시 103:4.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윤택을 잊지 말찌어다...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이 그러하다(참조: EDBW).
[욥19:25,26,27]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25. "And as for me, I know that my Redeemer lives, And at the last He will take His stand on the earth. *26. "Even after my skin is destroyed, Yet from my flesh I shall see God; *27.Whom I myself shall behold, And whom my eyes shall see and not another.
....유명한 구절, 욥 19:25에서 고엘이란 단어는 흠정역성경에서 '구속자' redeemer로 번역되며 어떤 이들은 이 단어가 속죄의 사역을 하러 오실 그리스도의 오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히브리어 "파다"에 의해 더욱 특징적으로 표현될 것이다.
....이제 욥 19:25에 나오는 이 단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결국에는 욥을 죽음의 먼지에서 구속할 친구이자 친족으로서의 하나님의 사역과 더욱 정확하게 관련된다. 욥 19:26의 난해한 어구, "이 가죽을 벗은 후에"는 다른 모음들과 함께 "내가 깨어난 후에"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NIV 각주와 욥 14:12-14을 참조하라. 욥 14:12-14에서 부활에 관한 욥의 질문은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그를 돌아보시며 욥은 나무처럼 제 2의 성장을 할 것이라는 그의 소망에 의해 절정에 달하게 된다 - 욥 14:14의 할리파는 욥 14:7의 할랍에 대한 응답이다). 어쨌든 욥은 마침내 자기 자신의 눈으로 자기의 고엘이신 하나님을 볼 것으로 기대한다(참조: R. L. Harris).
..[[사59:20,21]]..*2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21.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9:24]] *23.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24.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샤칼..알아들음) 나를 아는 것(야다)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빈 : 식별/분별/지각/이해) 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합당한 사랑/경외함/존귀히여김/친밀한 섬김동행-경험 체득한 바 참지식-심사숙고/주의집중-이해/총명/명철(샤칼)/통찰-배운바를 깨달아앎(=야다)/분별/지혜 [[성품/뜻과 길-기념이름-능력과 힘]]...추구할 바
..[[미가6:8]]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의-인-신따라]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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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괴수 죄성 지닌 자, 세상살이는 메섹과 게달의 장막에 사는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 탈취와 노략의 쟁투, 곧 환난의 날이라, 오직 구주JC께 부르짖어 그분안에 충만히 거하라.
[시120] *1.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2.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3. 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 *4. 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숯불이리로다 *5. 메섹에 머물며 게달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 *6.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 *7.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
--이제, 마음 열어, 중심으로 동행하시는 영원반석/성채/산성-보혜사-인도하시며 지키시는 목자, 엘에제르 HS와 동행하라
[시121] *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3.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7.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보라, 그리스도를 살라, 사람들로 하여금 평강과 형통 허락하시는 네안의 여호와를 감사하며 흠모하고 기리게 하라, 자원하여 나아와 공예배에 함께 참석하기를 원하도록 만들라.
[시122편] *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2.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3.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4.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5. 거기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 *6.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7.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8.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9.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네눈을 [세인의 조소와 멸시로부터]구주 JC께 돌려 중심으로 산 믿음 발휘함으로 앙망하라, 긍휼 구하라, 정복자 그 이상의 존재, , 허락하신 영생안에서 모든 이김을 감사하라
[시123편] *1.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2.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3.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4.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엘에제르, 임마누엘 여호와께 감사하라...[세인의 약탈-침노와 멸절로부터] 말씀의 뜻대로 행하시도다.
[시124] *1.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였으랴 *2.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3.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우리에게 맹렬하여 우리를 산채로 삼켰을 것이며 *4. 그 때에 물이 우리를 휩쓸며 시내가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며 *5. 그 때에 넘치는 물이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 할 것이로다 *6. 우리를 내주어 그들의 이에 씹히지 아니하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7.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8.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지고지선의 진복은 오직 구주로 사는 (선을 행하며 정직하게 동행하는) 기독자들은 여호와의 선대하심/평강형통 깨닫고 감사하라..
[시125편] *1.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2.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3. 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들로 하여금 죄악에 손을 대지 아니하게 함이로다 *4. 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 *5.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부활-오순절-해방/회복]구속 은혜 기쁨안에서: 섭리의 때, 해방 감격 = 전존재로 누리는 영적 기쁨과 감사, 실제적 형통 [모든 이들이 주께 돌이킴] 회복/부흥 추구 실행의 긍휼 간구
[시126편] *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2.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3.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솔로몬에게 깨닫게 하신 말씀--친히 집과 가정을 세우며 지키시는 전능-은혜 구주를 높이며 친밀한 하나됨 이루어 따르라, 자랑-기쁨의 가정과 기업된 자녀들이여
[시127편] (솔로몬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3.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4.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5.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 경외함 : 야다-에셰르-바라크, 구주영접/영생부활생명의 은혜, 믿음소망사랑오래참음기쁨평강-감사/형통/번성/번영/창대함--
[시128편] *1.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2.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3.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4.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5.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6.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세상 악인들이 주님의 기독자, 영적이스라엘을 미워하며 괴롭히나 결코 이기지 못하리라..JC안에서 소명과 사명 이루라---
[시129편] *1.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도다 *2.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3.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4.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 *5.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 *6. 그들은 지붕의 풀과 같을지어다 그것은 자라기 전에 마르는 것이라 *7. 이런 것은 베는 자의 손과 묶는 자의 품에 차지 아니하나니 *8. 지나가는 자들도 여호와의 복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거나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한다 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부르짖음과 간구로 기도하며 주님을 앙망하노라---
1.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마아마크) 주께 부르짖었나이다(카라)
2. 주여 내 소리를(콜) 들으시며(샤마) 나의 부르짖는(타하눈..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캇사브..경청하다)
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아온) 지켜보실진대(샤마르...주의하여 지켜보다.감찰하다) 주여 누가 서리이까(아마드)
4. 그러나 사유하심이(살라흐)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야레) 하심이니이다
5.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카와) 나는 주의 말씀을(다바르) 바라는도다(야할)
6. 파수꾼이(샤마르) 아침을(보케르)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아도나이)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7.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헤세드) 풍성한(라바) 속량이(페두트,,구속, 대가를 치르고 되사옴) 있음이라
8.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파다,,구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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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새번역]시130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1.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주님, 내가 깊은 구렁 속에서 주님을 불렀습니다.
2. 주님, 내 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나의 애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3. 주님, 주께서 죄를 지켜 보고 계시면, 주님 앞에 누가 감히 버티어 설 수 있겠습니까?
4. 용서는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므로, 우리가 주님만을 경외합니다.
5. 내가 주님을 기다린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며 내가 주의 말씀만을 바란다.
6.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림이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하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하다.
7. 이스라엘아,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주님께만 인자하심이 있고, 속량하시는 큰 능력은 그에게만 있다.
8. 오직, 주님만이 이스라엘을 모든 죄에서 속량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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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V]시130
1. Out of the depths have I cried unto thee, O LORD.
2. Lord, hear my voice: let thine ears be attentive to the voice of my supplications.
3. If thou, LORD, shouldest mark iniquities, O Lord, who shall stand?
4. But there is forgiveness with thee, that thou mayest be feared.
5. I wait for the LORD, my soul doth wait, and in his word do I hope.
6. My soul waiteth for the Lord more than they that watch for the morning: I say, more than they that watch for the morning.
7. Let Israel hope in the LORD: for with the LORD there is mercy, and with him is plenteous redemption.
8. And he shall redeem Israel from all his iniquities.
==시130개요====
이 시편은 개인적이거나 대중적인 어떤 일상적인 관심에 관련되어 있지 않고, 전적으로 영혼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시편은 일곱 개의 참회시 중의 하나다. 또한 이 시편은 교회에 들어가는 참회자들에 의해 사용되어 왔다.
이 시편을 노래하면서 우리는 그것을 우리 자신들에게 적용할 수 있도록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시편 저자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표현하고 있다.
1. 하나님을 향한 그의 간구(1-2).
2. 하나님 앞에서의 그의 참회(3-4).
3. 하나님을 기다림(5-6).
4. 하나님께 대한 그의 기대(7-8).
바다에서 표면이 표면에 응하듯이, 겸손한 참회자의 마음이 또 다른 자의 마음에 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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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시 130:1-4)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배운다.
Ⅰ.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비록 매우 비참한 경우일지라도, 끊임없이 하나님께 아뢰어야 한다(1절).
가장 훌륭한 인간이라도 때로는 큰 고통과 고난에 빠진다. 또한 때로는 어쩔 줄 몰라서 무엇을 할지도 모르는 비탄과 절망의 심연 속에서 어둡고 낮은 정신으로 사는 불안하고 절망적인 존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엄청난 절망 가운데서도 우리가 하나님께 매달리며 울부짖을 수 있고, 그로부터 응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부여된 특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기도하는 자는, 비록 같은 지옥에서일지라도, 예레미야의 감옥이나 다니엘의 야수의 굴, 요나의 고기 뱃속에서와 같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의 한복판에서라도, 하늘의 높이에 이를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것은 우리의 의무며, 권리다. 그것이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40:1-2)에서 우리가 더 깊이 빠지는 것을 막아주며, 구원하는 가장 훌륭한 길이기 때문이다.
Ⅱ. 한편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평안의 응답이 올 것을 확신하면서 하나님께 간구를 계속한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이다(2절).
“여호와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탄식과 기도를 들으소서. 그리고 나의 고통과 소망 속에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Ⅲ. 우리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죄책감으로 인해 하나님의 정의 앞에 우리 자신을 겸손히 하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수많은 죄를 인해 그에게 응답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3절).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누가 그 앞에 서리이까?”
그가 하나님을 부르는 아주 짧은 단어들인 야(Jah, 여호와)와 아도나이(Adonai, 주님)는 어세가 매우 강하다.
그 단어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의 두려운 느낌과 여호와의 징벌의 두려움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배우고 있다.
1. 우리들의 죄악이 용납되기 위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들을 정당화하거나 죄가 없음을 주장할 수 없다.
우리들의 죄악은 명백하고, 그 책임을 면하기란 어렵다.
2. 그러한 하나님의 권능과 정의를 고백하도록 가르침 받고 있다.
만일 그가 우리의 빗나감을 극단적으로 드러내신다면 우리가 거기에 도달할 소망은 없게 된다.
그의 눈은 가장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책망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를 발견하실 수 있다.
그리고 만일 그가 우리에게 계속 이같이 대하신다면 우리는 자신을 도울 어떤 길도 가질 수 없고, 설 수도 없으며, 틀림없이 던짐을 받게 될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엄격한 정의로 우리를 대하신다면 우리는 파멸에 이를 것이다.
만일 그가 우리의 부정에 대해서 주목하신다면 크고 많은 부정을 발견하실 것이며, 크게 나쁘고 매우 거역된 죄들을 발견하실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가 그것에 따라 계속 추궁하신다면 그는 우리에게서 그의 은총의 모든 소망을 닫으시고 우리를 그의 진노 아래 감금시키실 것이다.
그러면 무엇으로 우리 자신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인가? 우리들은 탈출을 도모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징벌의 손에 저항하거나 견딜 수도 없게 된다.
3. 하나님의 [일절 오래참으심] 인내와 용서를 찬양해야 한다.
그가 우리의 죄악을 드러내신다면 우리는 파멸할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 “우리가 소멸되지 않음은 그의 자비로 말미암은 것이다.”...애3:19-33(22,23).
Ⅳ.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자비에 우리를 맡겨야 하며, 우리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정의에 비추어볼 때 심판 받을 만함을 이해하고, 우리를 위로해야 함을 배우고 있다(4절).
여기에서 다음 두 가지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참회하는 죄인에 의해 발견되고 간구되는 하나님의 은총.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나이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가까이 할 때 그에게 죄사함이 있다는 사실은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된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시는 능력을 자신에게 두신다.
그가 스스로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고,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포하셨다(출 34:6-7).
그는 회개하는 자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로 약속하셨다. 그를 대하는 어떤 자라도 그가 무자비하다고 생각지 않으며, 오히려 간구하기 쉽고, 자비를 쉽게 보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죄악이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 사유하심이 있음은 우리에게 복이 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주께는 화해가 있나이다”라고 해석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한 화해자며, 하나님께서 주신 속량이다.
그는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셔서 우리를 옹호해 주신다. 우리는 그를 통해서 용서를 얻을 수 있는 소망을 갖는다.
2. 그러한 발견에서 설정하고, 거기서 추론해 낸 우리의 의무.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께서 인간을 대담하게 하거나 주제넘게 방치해 두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주께서는, 죄인이며 하나님을 대할 수 없는 인간의 자녀들에 의해 예배를 받으며, 섬김을 받으시려는 것이다.
만일 그가 주가 아니라면, 많은 죄악을 사죄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비행으로 빗나가게 되지 않는 그의 예배에로 인도되도록 용기를 북돋아준다.
아니, 우리가 진실로 회개한다면 그는 어떤 것이라도 사해 주신다.
그는 특별한 방법으로 회개하는 죄인들을 초청하시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로 돌아가게 하신다.
그는 은혜롭고 자비로우셔서 저희의 회개를 받아주신다(욜 2:13; 마 3:2).
특별히 우리는 경외의 하나님이 사유하시는 자비에 존경을 가져야 한다(호 3:5. “저희가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그리고 우리는 사유하심의 은혜를 기대해야 하며, 우리가 경외의 대상을 하나님으로 정할 때 죄사함의 은혜를 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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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림(시 130:5-8)
Ⅰ.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를 기다릴 것을 약속하고 있다 (5-6절).
다음과 같은 내용을 고찰해 보자.
1. 그의 하나님께 대한 의지.
이것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로서 절정적으로 표현되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나이다. 나는 그로부터 구원과 위로를 기다리며, 그때가 올 것을 믿고, 그때가 올 때까지 갈망하나이다. 그러나 지연되어도 인내로 참고 견디며, 다른 손으로부터 그것을 찾지 않기로 결심하나이다. 내 영혼이 기다리나이다. 내가 그를 가식으로 기다리지 않고, 오직 성실하게 진심으로 기다리나이다. 나는 기다리는 사람이며, 내 영혼이 기다리는 것은 여호와를 향한 것이고, 그의 은총의 선물과 그의 권능의 활동을 기다리는 것이니이다."
2. 신뢰의 기반.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
우리는 그의 말씀 속에서 약속하신 것만을 소망해야 하며, 결코 우리 자신의 환상이나 공상의 피조물을 소망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그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소망할 수 있을 뿐, 결코 우리 자신의 공로에 대한 생각으로 소망해서는 안 된다.
3. 신뢰의 정도.
“파수꾼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1) 아침이 올 것을 확신한 사람보다 더하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에 따라 내게 자비로 돌리실 것을 확신한다.
하나님의 언약은 낮과 밤의 법칙보다 정확하기 때문이다. 낮과 밤은 사라질지라도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하다.
(2) 아침이 오기를 대단히 갈망하는 사람보다 더하다.
성을 지키는 파수꾼들과 병자들을 돌보는 자들, 해외로 여행하는 자들은 하루 전에 새 날의 동트는 여명을 보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 선한 사람은 진지하게 하나님 은총의 표징과 그의 은혜의 초대를 위해 더욱 갈망하며, 낮에 행하는 사람들보다 더욱 부지런하게 그의 첫 출현을 알고자 한다.
하몬드 박사는 그것을 이와 같이 읽는다. “내 영혼이 아침의 수비대로부터 여호와를 재촉하나이다.”
그리고 거기에 이러한 의미를 붙인다. “내가 매일 아침에 일찍 주께로 나아갑니다. 나의 깊은 영혼이 제사장들이 아침 예배를 드릴 때에 기도를 드리고자 주 앞에 나아갑니다.”
Ⅱ. 그는 하나님을 같은 방법으로 의지하며, 신뢰하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격려하고 있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라고 그를 기다릴지어다.”
백성의 일부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칭호하는”(사 44:5) 모든 선한 사람들을 격려한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모든 자들은 즐겁게 자신들을 그에게 두어야 한다(7-8절).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1. 자연의 빛이 “그에게 인자하심이 있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자비로운 하나님이시며, “모든 자비의 아버지”가 되심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자비는 그에게 있다.”
그 자비는 그의 본성에 기인하는 고유한 것일 뿐 아니라, 그것이 바로 그의 기쁨이다. 그것은 그의 모든 활동과 그의 모든 뜻에서 그와 함께 있다.
2. 복음의 빛이 “그에게 구속이 있으며”, 그에 의해 설계되고, 그것이 “때가 찼을 때” 이루어짐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 구속은 태초로부터 하나님 안에 숨겨져 있던 것이었다.
(1) 이러한 구속의 성격.
그것은 죄로부터의 구속, 모든 죄로부터의 구속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관하시는 영원한 구속 이외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이시며,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딛 2:14),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는”(롬 11:26)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죄의 저주와 죄의 지배적인 권세로부터 구속하실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2) 이러한 구속의 풍성함.
그것은 “풍성한 구속이다.”
구속자에게는 공로와 은혜의 충만함이 있으며, 모두에게 풍성하고, 각자에게 충만함이 있다. 신앙인은 각자마다 "내게 풍성하다"고 말한다.
죄로부터의 구속은 모든 다른 악으로부터의 구속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풍성한 구속이다.
(3) 이러한 구속의 은총을 받는 사람들.
“저가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것이며”, 그의 성령에 따라 이스라엘을 구속하시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모든 사람들을 구속하실 것이다.
“진실로 흠이 없는 이스라엘과 같이”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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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m;[}m'(4615, 마아마크) 깊은, 깊은 곳 depth
마아마크(명남)는 아마크(qmo[; , 6009: 깊다)에서 유래했으며, '깊음, 깊은 곳 depth'을 의미한다.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5회 나온다.
마아마크는 사 51:10에서 문자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얻은 자들로 건너게 하신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마아마크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겔 27:34에서 바다 "깊은 데서 파선한" 것은 두로의 멸망을 가리킨다.
시 69:2의 "깊은 수렁"과 시 69:14의 "깊은 물"은 고통이나 고난을 가리킨다.(참조: BDB; HE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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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q;(7121, 카라) 부르다, 선포하다, 소환하다, 읽다
카라(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부르다, 선포하다, 소환하다, 읽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740회 나오며, 칼, 니팔, 푸알형으로 사용되었다.
(a) 카라는 일차적으로 특별한 말 또는 메시지의 발설을 의미한다.
후자의 용법에 있어서는 이것이 보통 특정한 수령인에게 주어지며 특별한 응답을 유도해 내기 위한 의도가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이 어근은 '선포하다, 초대하다'로 번역되는 수가 있다.
드물지만 카라가 단순한 부르짖음을 의미할 때도 있다(예: 시 147:9, 사 34:14).
(b) 카라는 '부르다'는 의미에서 '소환하다'를 나타낸다(창 12:18, 창 20:8-9, 민 22:5, 민 22:20, 민 22:37, 삿 8:1, 삼상 3:5-6, 삼상 3:8 등).
(c) 카라는 '초대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출 34:15, 삿 14:15, 삼상 16:3, 삼상 16:5 등).
(d) 카라는 '이름의 명명'에 대해 사용되었다.
작명은 때로 이름 지어진 사물에 대한 주권의 주장이 된다.
하나님의 창조는 별들의 작명과 계수를 수반하였다(시 147:4). 그리고 어둠에 관한 작명(창 1:5), 참으로 모든 것에 대한 명명과 계수가 수반되었다(사 40:26).
하나님은 동물들을 아담에게 주어 그것들에 대한 그의 상대적 주권을 주장하게 하였다(창 2:19).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고레스의 이름을 불렀다(여기에 임무를 위한 선택의 뜻이 내포되어 있음에 유의하라, 사 45:4).
때로는 "명명"의 개념이 없을 경우라도 이 주권의 관념이 내포된다.
예컨대 하나님이 태초부터 만대를 불렀다는 표현 등이 그것이다(사 41:4, 한글개역: "명정[命定]하였다"; 참조: 암 5:8). 상기의 용례들에서 그 대상은 응답해야 한다.
(e) 카라는 많은 경우에, 주어진 이름이 명명된 그 사물의 주요 특성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때로 여기에는 언어 유희가 포함된다(창 27:36). 그밖에 이러한 명명은 대상에 대한 고백 또는 개인적 가치 평가를 형성하고 있다(사 5:13, 사 60:14).
혹은 영원한 진리에 대한 인지를 함유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예언에 의해 약속되는 아이가 "하나님에 의해", "임마누엘"이라 명명되는 경우이다(사 7:14).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자기의 주권을 확언하였다(사 41:2). 그러나 그들을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사 65:15, "은 찌꺼기", 렘 6:30, 한글개역: "내어버린 은"). 출 33:19, 출 34:6과 신 33:3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반포한다는 것은 그의 속성에 대한 묘사와 주권적 행위에 대한 묘사를 내포한다.
(f) 카라는 '선포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렘 34:5, 욘 3:5, 욜 3:9, 렘 7:2, 왕상 21:9, 왕상 21:12, 렘 36:9 등).
(g) 카라는 '읽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사 29:11, 사 34:16, 렘 36:6, 렘 36:8, 렘 36:10, 렘 36:13, 렘 36:14, 렘 36:15, 렘 36:21, 렘 36:23 등).
(h) 카라는 또한 특정한 직무에로 누군가를 부른다는 뜻을 내포하기도 한다.
바로의 딸의 시녀는 자기가 가서 유모를 "불러" 올 것인지 물었다(출 2:7).
가나안의 모든 주민들을 멸망시킨 것은, 우상숭배에로의 개인적 초대를 수락함으로써 거기에 말려들 수 있는 우호 관계의 온갖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출 34:15).
(i) 카라의 가장 두드러진 용법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관계가 있다.
보통 그러한 문맥은 위급한 요구(시 34:6, 시 81:7)나 오랜 필요와 관련된다(예: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인간은 저주의 충분한 효과를 깨달았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창 4:26). 경건한 자들은 하나님을 계속 부름으로써 원죄의 존재를 인지하였다(창 12:8, 창 13:4, 시 116:2).
하나님은 이처럼 자신을 부르는 모든 자에게 응답하신다(시 145:8).
참으로 언약의 백성(이방인을 포함하여, 왕상 8:43)에게는 그와 같이 기도하라는 가르침이 주어지며, 그들은 또한 하나님께서 저주를 역전시킬 것을 확신한다(사 55:6, 사 55:13).
그와 같이 하나님을 부르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합당하며(시 79:6) 그것이 정당하다(사 65:12). 말세에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부르는 자들은 저주 받은 이방인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며(사 55:5), 그들은 그에게로 달려갈 것이다.
그는 바벨을 역전시킬 것이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들은 모두 하나의 순수한 언어로 그를 섬길 것이다(습 3:9).
그들이 부르기 전에도 그는 응답할 것이다(사 65:24). 따라서 에덴이 복원되며 저주는 완전히 폐기된다.
그러한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부름을 거부했다는 사실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사 65:12). 구원은 진정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참조: L. J. COPPES;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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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q(6963, 콜) 소리, 목소리, 음성
콜(명남)은 '소리, 음성, 목소리 sound, voice, noise'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00회 이상 나온다.
콜은 주로 성대에서 말하는 소리를 의미한다(실제적으로나 비유적으로).
시적인 구절들(대부분)에서 그 의미는 다양한 여러 소리까지 포용한다.
빈도가 높지는 않지만 콜이 육성이나(창 3:17) 기록에 의해(왕하 10:6) 발성된 것을 뜻할 경우도 있다.
이 단어가 또한 감탄조의 "들으라"라는 뜻으로 작용하기도 한다(참조: GKC, 146b, 사 13:4, 사 66:6 등등).
'소리를 높여 울다'라는 문구는 광범하고 다양한 감정과 상황을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면 도와 달라는 울부짖음(창 39:14), 현실적 또는 예상되는 비극에 대한 슬픔(창 21:6), 재난이나(출 16:34) 기쁨(창 29:11)의 소리 등이다.
하나님께서는 산 위에서 그리고 후에는 속죄소 위에서 모세와 말씀하심으로써(출 25:22, 민 7:89, 참조: 출 20:22), 법궤를 어떤 수호신으로 여기면 안된다는 것을 가르쳐 보이시고 확증하셨다(삼상 4:6, 삼상 4:14). 후에 하나님의 목소리가 블레셋인들을 뿔뿔이 흩어버렸다(삼상 7:10).
'아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라는 표현은 다음의 뜻을 함축한다.
주의하여 믿다(창 4:23), 아무의 제의에 따르다(창 3:17), 요청을 들어주다(창 21:12), 명령에 순종하다(창 21:18),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다(삼하 22:7).
본 단어가 다음과 같은 신학적 문제들과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한다(더 좋은 이름들이 없으므로).
예언, 천둥, 언약, 나팔, 이 주제들은 종종 서로 뒤얽힌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의 음성과 모세의 음성(후에는 선지자들의 음성)은 상호 교환될 수 있다(참조: 출 3:18, 출 4:1, 출 7:1).
하나님은 그에게 특정한 표적들을 주시는데 사실상 이 표적들 자체가 말하는 역할을 한다(출 4:8, 한글개역: 난외주를 보라).
그리하여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셨음을 확증한다(그러나, 출 5:2). 천둥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상징한다. 즉 천둥이 심판을 초래하며 두려움과 복종심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출 9:23, 출 9:29, 참조: 시 29장).
하나님의 '콜'은 우르렁거리는 천둥소리이다. 반면 하나님께 나아갈 때의 인간의 '콜'은 딸랑 거리는 방울 소리이다(출 28:35).
언약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간명하게 선언하신 다음과 같은 원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종 모세의 명령(음성)은 하나님의 명령(음성)이며, 만일 백성이 그의 언약에 복종하고(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지키면 복을 받을 것이다(출 19:5).
그들이 불순종하면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시내산에서 충분히 설명된 바 있다(특히 신명기에서, 삼상 12:14-18, 예레미야의 용례들).
천둥 치듯 바로에게 심판을 내렸던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이 이제는 축복의 표적으로 등장한다(출 19:16, 참조: 삼하 22:7-14, 삼하 3:16, H4:16, 등등).
마지막으로 '콜'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들은 나팔소리이다. 그 나팔소리는 하나님의 능력(수 6:5)과 임재의 신호이다(삼하 6:15, 왕상 1:40-45, 고전 15:52).
바알(가나안의 천둥 신)의 거짓 선지자들과 엘리야의 싸움에서, 번개와 천둥을 일으키고(왕상 18:41) 비를 내림으로써(왕상 18장, 참조: 시 29편) 그 상황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실현시킨 이는 바로 하나님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 하심으로써(왕상 19:12), (바알이 그러하듯) 자신이 자연의 힘에 불과한 어떤 존재 이상임을 보여 주신다.
바알과의 이 싸움은 두 종교 사이에 있는 오랜 복합적 갈등의 일부이다(참조: W. F. Albrigth).
이러한 갈등은 구약성경의 선지서들과 시가에서 줄곧 입증되는 바이다.
마지막으로 콜이 아담이 동산에서 들었던, 바람을 타고 실려온 하나님의 음성이었음을 당연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창 3:8, 왕상 14:6).(참조: L. J. COPPES;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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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8085, 샤마) 듣다 hear
샤마(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듣다 hear'를 의미하며, '경청하다 listen to, 순종하다 obey'라는 의미도 지닌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15회 나오며, 칼, 니팔, 피엘, 히필형으로 사용되었다.
샤마는 '듣다'라는 기본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 기본적인 의미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확대되는데, 대개 효과적인 들음이나 경청을 포함한다.
① '경청하다' listen to, '주의를 기울이다' pay attention,
② '순종하다' obey('명령'고 같은 단어들과 함께 쓰일 경우),
③ '기도에 응답하다' answer prayer, '듣다' hear,
④ '이해하다' understand,
⑤ '비판적으로 듣다' hear critically, '(법정에서) 조사하다, 심문하다' examine(in court).
파생 어간들은 이런 의미들에서 적합하게 수정된 의미를 지닌다.
샤마의 기본적인 용례는 무수하다(예를 들면 민 12:2에서 여호와께서 미리암과 아론의 불평을 들으셨다).
신 4:12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음성은 들었지만 형체는 보지 못했다.
창 3:8에서 아담과 하와는 동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무엇을 듣는지 하는 것은 종속절에서 표현된다.
창 37:17에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창 14:14에서 "그의 형제가 사로잡혔다는 것을 들었다", 삿 7:11에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
샤마는 '귀를 기울이다', '따르다' listen to라는 의미를 지닌다.
창 3:17에서 아담이 아내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즉 그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랐다. 왕상 22:19에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라고 한다. 시 81:11, 잠 12:15에서도 예증된다.
샤마는 이러한 의미에서 점차 변하여 '순종하다' to obey라는 의미를 나타내게 되었다. 그 실례는 출 24:7, 사 42:24, 느 9:16, 렘 35:18에서 볼 수 있다.
삿 13:9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반응한다.
즉 응답한다는 의미에서 "마노아의 목소리를 들으신다". 비슷한 용법이 겔 8:18, 시 4:1에서 발견되는데,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라는 표현은 "내가 부를 때에(내게) 응답하소서"라는 말과 병행된다. 또한 시 34:17에서도 발견된다.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기도의 응답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렘 11:10-11에서 매우 중요하고 진지한 원리를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으므로 환난 날에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을찌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신다(응답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그들은 알게될 것이다.
미 7:7은 의인의 확신을 표현한다. 즉 하나님의 음성에 스스로 귀기울이는 자는 하나님께서도 그의 기도를 진실로 들으시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보다 더 고무적인 강한 말씀이 시 94:9에 나온다.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않으시겠느냐?".
효과적으로 듣는다는 말은 '이해한다'는 개념도 역시 포함한다.
예컨대 창 11:7에 의하면 바벨탑 사건에서 언어가 혼란된 이후에 사람들은 더 이상 서로 "들을"(즉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J. E. Hartley)(참조: BDB; Gesenius; TW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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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nj}T'(8469, 타하눈) (은혜를 위한) 탄원(간청)이나 기도
타하눈(명남)은 하난(@n"j; , 2603: 호의, 은혜를 베풀다)에서 유래했으며, (은혜를 위한) 탄원이나 기도 supplication(for favour)'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사람에게 간청, 가난한 자가 부자에게 간청하는 것(잠 18:23), 악어가 사람에게 간청하는 것(욥 41:3)을 묘사한다.
(b) 하나님께 기도(시 143:1, 단 9:3, 단 9:17, 대하 6:21), 탄원의 소리(시 28:2, 시 28:6, 시 31:23, 시 86:6, 시 130:2, 시 140:6, 시 116:2), 그리고 렘 31:9, 렘 3:22, 슥 12:10, 단 9:18, 단 9:23.(참조: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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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 오젠(명여)은 아잔(@z"a; , 238)에서 유래했으며, '귀' ear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87회 나온다.
오젠은 대부분 사람의 귀에 대해 사용하지만 짐승의 '귀'(잠 26:17, 암 3:12), 그리고 신인동형론적으로 하나님의 '귀'나 '청력'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귀는 몇가지 동사와 함께 사용되었다. 귀에 들리다(겔 24:6), 귀를 귀울이다(시 10:17, 시 78:1), 귀를 막아 듣지 않다(사 33:15), 귀가 막히게 하다(사 6:10), 귀가 울리다(삼상 3:11).
귀에 대하여 청각 기관으로서의 귀, 상징적 행위에 속하는 신체의 일부로서의 귀, 그리고 반응과 이해의 표시로서의 귀, 하나님의 귀라는 네가지 주제로 적절하게 연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a) 듣는 신체 기관으로서의 귀는 스스로 들을 수 있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다(시 94:9).
하나님은 듣는 귀를 지으셨다(잠 20:12). 하나님께서는 귀를 열어 교훈하시고(욥 33:16), 그 교훈을 듣게 하시며(욥 36:10), 귀를 깨우치사 알아듣게 하신다(사 50:4).
귀는 말을 듣고(민 14:28, 욥 13:1) 깨달으며(사 64:4), 담아두며(욥 13:17), 분별한다(욥 12:11, 욥 34:3). 귀는 말을 전달 받는다(창 44:18, 창 50:4, 출 10:2, 신 31:28, 수 20:4, 삿 7:3, 삿 9:2, 삿 9:3 등). "어떤 사람의 귀에 말하다"는 "그가 들을 수 있게 말하다"라는 뜻이다(창 44:18).
그러나 인간이 만든 우상의 귀는 전혀 아무 것도 듣지 못한다(시 115:6, 시 135:17).
귀가 듣기 위해 기울여야 할 것은 계명(출 15:26), 법도와 규례(신 5:11), 지식의 말씀(잠 23:12, 잠 18:15), 지혜(잠 2:2, 잠 22:17), 생명의 경계(잠 15:31), 하나님의 법과 말씀(사 1:10, 사 1:2, 렘 13:15), 선지자의 말(사 32:9)이다.
(b) 귀는 들음과 순종을 나타내므로, 중요한 상징적 행동과 함께 귀에 대한 의식이 있다.
만약 어떤 노예가 영원히 자기 주인을 섬기기로 결정하고 나면, 그의 귀를 송곳으로 뚫었다(출 21:6, 신 15:17, 참조: 시 40:6).
이런 법적인 행위에 의하여, 그 노예는 전 생애동안 순종해야 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에 위임될 때, 희생된 수양에서 흘러나온 피를 그들의 오른쪽 귓볼과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 위에 발랐다(레 8:23-24, 출 29:20).
문둥병으로부터 깨끗함을 받은 사람의 경우도 이와 비슷했다.
그의 정결 의식 제 8일째에는 올리브 기름뿐만 아니라 피도 그의 오른쪽 귀, 엄지손가락, 그리고 엄지발가락에 발랐다(레 14:14, 레 14:17).
귀걸이는 결혼식 때 신랑이 신부에게 주었던 것 같다(겔 16:12)(리브가에게 준 "귀고리"[창 24:22 KJV]는 코고리였다). 그러나 이 귀걸이가 창 35:4에서는 우상숭배와 관련되어 나온다. 이스라엘인들은 아론이 금 송아지를 만들 수 있도록 자기네의 금 귀걸이를 빼내었다(출 32:2-3). 완전한 거부의 징표로서, 성난 적은 귀와 코를 베었다(겔 23:25).
(c) 귀나 들음에 관한 대부분의 언급들은 듣는 자의 반응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듣는 것 혹은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예를들면 현자의 말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잠 22:17).
얼마나 자주 하나님은 고집 센 이스라엘에게 임박한 심판을 염두에 두고 행한 그의 경고에 귀 기울여 주목하라고 간청했던가(호 5:1, 렘 13:15).
심지어 하늘과 땅 조차도 이스라엘의 언약 약속의 증인들로서 경청하라는 요청을 받았다(신 32:1, 사 1:2).
국가적인 재앙에 대한 예고는 귀를 울리게 하거나 아프게 한다고 언급된다. 이 메시지는 이처럼 충격적인 것이기 때문이다(삼상 3:11, 왕하 21:12, 렘 19:3).
"완악함" hardness, 혹은 "무거움" heaviness이라는 말이 이스라엘의 귀에 두 번 사용되었다.
그들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에서부터 귀를 닫아버렸다(슥 7:11-12).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벌을 내리시어 귀가 막히게 하셨기 때문이다(사 6:10, 참조: 대하 24:19, 느 9:30). 우상들과 마찬가지로, 이 민족은 귀를 가졌으되 들을 수가 없었다(렘 5:21). 한때 백성들의 귀는 "할례 받지 못했다"고, 즉 언약의 하나님의 말씀에 닫혀 있다고 일컬어졌다(렘 6:10). 열방도 귀가 막힐 것이라 한다(미 7:16).
듣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 밀접하게 결부되었으며(욥 13:1), "귀"는 거의 "마음"을 의미할 수 있다(욥 33:15).
호스트(Horst)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즉 "우리의 두뇌가 아니라, 귀가 말과 명령을 기록하는 도구로 간주된다. 그래서 귀는 '통찰'의 자리가 되는 것이다".(TDNT, V, 546). 잠 21:13은 가난한 자의 울부짖음에 귀 기울이기를 거부하여 그들의 곤경에 대해 모르는 것을 정죄하였다. 그러나 살인의 꾀에 귀를 막아버리는 자는 칭찬을 받았다(사 33:15).
인간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 이 기관이 중요하다는 것은 욥이 언명하였다. 즉 "입이 식물의 맛을 변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변하지 아니하느냐"(욥 12:11).
(참조: H. Wolf).
(d) 하나님께서도 관용적으로 귀를 갖고 계신다.
듣고 행동을 취하는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언급들이 많이 있다. 시편기자는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 하시랴"고 논증했다(시 94:9).
다윗의 부르짖음이 하나님의 귀에 들렸고 그의 응답을 받았다(삼하 22:7, 시 18:6). 그러나 산헤립의 오만한 말은 그의 귀에까지 와서 파멸로 끝나고 말았다(왕하 19:28, 사 37:29).
대부분의 구절들은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다루고 있다.
시편기자는 자주 도와달라는 자기의 부르짖음을 들어 주시고(시 80:1[2], 시 54:2[4]), 적으로부터 자기를 구원해주실 것을 하나님께 간청하곤 하였다.
성전 봉헌시에, 솔로몬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여 백성의 기도를 경청해 주실 것을 요구하였다(대하 6:40).
다니엘은 그 성전쪽으로 돌아서서,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이시어 예루살렘의 파멸에 대해 무엇인가를 해주실 것을 간구 하였다(단 9:18).
성도는 하나님께서 기도에 귀를 기울이실 것을 확신한다(시 77:1).
하나님은 의인과(사 34:15), 성도의 기도(시 40:1, 시 116:2)에 귀를 기울이신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듣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사 59:1). 이스라엘의 죄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응답에서 그들을 끊쳐내였기 때문이다(신 1:45).
"귀를 폭로한다"(갈라 오젠[gala ozen])는 것은 왕에 대한 음모와 같은 "중요한 정보를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삼상 22:8, 삼상 22:17).
법률적인 문맥에서 이 말은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문제에 주목시키다"를 의미한다(룻 4:4).
하나님이 주어로 나올 때, "귀를 열다"는 자기 종들에게 진리를 "드러내다" reveal를 의미한다(삼상 9:15, 삼하 7:27). (참조: H. Wolf).
(e) 귀에 관한 잠언(잠 2:2, 잠 15:31, 잠 17:4, 잠 18:15, 잠 20:12, 잠 21:13, 잠 22:17, 잠 23:9, 잠 23:12, 잠 25:12, 잠 26:17, 잠 28:9).(참조: BDB; T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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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V;q'(7183, 캇샤브) 주의 깊은, 경청하는
캇샤브(형용사)는 카샤브(bv'q; , 7181)에서 유래했으며, '주의 깊은, 경청하는, 친절한'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5회 나오며,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귀가 주의를 기울인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들려오는 간구에 유의하신다(대하 6:40, 대하 7:15, 느 1:6, 느 1:11, 시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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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71, 아온) 불법, 부정, 죄악, 죄의 벌
아온(명남)은 아와(hw:[; , 5753)에서 유래했으며, '불법, 부정, 죄악, 사악, 유죄, 죄의 벌(징계)'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30회 나온다.
명사 아온은 집합명사이다. 예컨대 하나님은 아모리인의 범죄, 타락에 대해 말씀하신다: "아모리 족속의 죄악(단수)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창 15:16).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에게 당신은 "내 죄(단수)를 생각나게"하려고 왔다고 불평한다(왕상 17:18). 따라서 이 단어는 다음과 같은 관용구에서 나타난다. '아온을 지다'(창 4:13, 출 34:7, 호 14:3, 시 85:3), '아온을 제거하다(히필형)'(슥 3:4), '아온을 갚다'(출 20:5) 등. 이러한 '전체'라는 개념은 집단의 죄뿐만 아니라 개인의 죄와 연관하여서도 나타난다.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복수)를 지고"(레 16:22);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단수)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더욱이 위의 언급들이 가리켜주는 바와 같이 이 단어는 행위 및 행위의 결과, 범죄 및 범죄의 형벌 모두를 나타낸다. 양 개념이 모두 나타나지만 때로는 행위('죄')에 초점이 주어지고, 또 때로는 범죄의 결과('형벌')에, 때로는 행위와 그 결과 사이의 상황('죄의식' guilt)에 초점이 주어진다. 형벌을 요하는 범죄에 초점이 주어지는 실례: "이 '죄악' sin이 너희로 마치 무너지게 된 높은 담이 불쑥 나와 경각간에 홀연히 무너짐 같게 하리라"(사 30:13, 참조: 겔 18:30, 겔 44:12, 호 5:5, 욥 31:11, 욥 31:28). 형벌에 강조점이 주어지는 예: "일어나라...그렇지 않으면 네가 성읍의 '형벌' 가운데서 소멸되리라"(참조: 렘 51:7, 시 39:12, 시 106:43, 욥 13:26, 욥 19:29, 스 9:7). '죄의식'(guilt)에 강조점이 주어지는 예: "이 '죄악'을 내게로 돌리시고"(삼상 25:24). 다른 많은 실례들에 대해서는 아래를 보라.
'행위로서의 죄'라는 의미와 '형벌'이라는 의미 사이의 현저한 양면적 의미는 구약성경의 사상에서 죄와 그 형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경향과 같이 근본적으로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구약성경에서 인간의 행동과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은 기본적인 하나님의 질서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전제된다. 이러한 연관성은 "삶에 대한 종합적인 견해"라고 불리워졌다(Von Rad, G).
어근 하타(죄)도 마찬가지의 기본적인 '종합적' 개념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민 32:23을 보라: "너희가 만일 그 같이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함이나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 두 번째 나타나는 이 어근의 명사형은 행위에 대한 '형벌'을 나타낸다(참조: 민 12:11). 따라서 죄는 개인과 혹은 공동체를 멸망시키는 피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며 근절되어야만 한다(B. K. W.).
아온은 분명히 하나님의 성품의 특성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행동의 특성도 아니고(출 20:5, 출 20:6, 출 34:7), 인간의 속성과 행동(그러한 행동에 수반하는 결과를 포함하여)의 저항할 수 없는 특성이다.
아온은 삼상 20:1, 삼상 20:8, 삼하 3:8, 느 4:5, 시 51:2에서 여러 종류의 시민 생활 혹은 사회적(규칙) 위반을 지칭하고, 수 22:17, 삼상 3:13-14에서는 제의적인 (규율) 위반을 가리킨다. 이 용어는 집합 명사 혹은 유사 추상명사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과거의 범죄의 총합을 나타내는데, 이에 대한 실례는 너무 많아서 모두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민 14:34, 삼상 25:24, 삼하 22:24, 왕상 17:18, 스 9:6, 욥 13-26장, 사 1:4, 렘 11:10가 그 예이다.
어떤 구절에서는 아온의 성질과 내적 근원에 강조점이 주어진다.
욥 15:4-5에서 아온은 하나님 경외하기를 폐하는 것 등과 관련되어 있다.
반면에 시 78:37-38에서 아온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이) 확고 부동하지 않음과 결합되어 있으며 렘 14:10에서는 그들이 이렇게 방황하기를 좋아하였다 라는 진술과 관련되어 있다.
아온은 간음(민 5:31) 및 우상 숭배(호 5:5, 렘 16:10-11)와 관련된다. 이러한 은유에서는 위반하는 행동과 그 결과인 더럽힘 모두가 묘사된다.
아온의 다른 결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 소외(alienation, 레 26:40, 사 59:2, 사 1:4), 그리고 부정(시 51:2, H4)으로 나타난다.
죄책감(guilt)은 내적 인간에 대한 아온의 주요한 결과다. 이 요소는 과거 범죄에 대한 총합을 나타내는 아온의 기능과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BDB는 죄책감의 요소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실례를 30여회 이상 열거한다(p. 731).
아온은 그 결과가 내적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는 외에도 가문, 지파, 이스라엘 민족, 열방 및 자연에도 영향을 끼친다. 가문에 대하여, 친숙한 진술은 출 20:5, 신 5:9에서 발견된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벌은 가문이나 지파의 개개인들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내리는 벌로 집중할 수 있다(레 5:17, 레 18:25, 민 5:31, 삼상 25:24, 삼하 14:9, 시 106:43, 렘 36:31). 아온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형벌을 면할 수 없게 한다(레 26:39, 스 9:7, 스 9:13, 시 107:17과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에 있는 많은 실례). 어떤 의미에서,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그들 임무의 거룩과 성소의 거룩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형벌의 위험을 떠 맡았다(출 28:38, 출 28:43, 레 22:16, 민 18;1, 민 18:23). 예루살렘의 멸망 이후 그 재난은 이스라엘 민족의 아온의 결과로 인식되었다(애 4:6, 애 4:13, 애 4:22, 겔 39:23, 단 9:13, 단 9:16).
아온에 반드시 형벌이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형벌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인간의 탄원 기도와 하나님의 구원 선포는 아온을 벗어날 길을 보여준다.
인간은 아온을 깨닫고 고백해야 한다(창 44:16, 레 16:21, 느 9:2, 시 32:5, 시 38:18, H19). 그리고 하나님께 죄 사함을 구해야 한다(출 34:9, 민 14:19, 욥 7:21, 시 25:11). 인간은 또한 그의 생활 방식을 변화시켜야 한다(겔 18:30, 겔 36:31). 형벌을 대신 받을 대체물이 제공된다(레 16:22, 사 53:5-6, 사 53:11, 겔 4:4-6).
가장 중요한 것은 아온을 제거하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이다. 이것은 약속되고 실제로 선포된다(민 14:18, 시 65:3, H4, 시 78:38, 시 103:3, 잠 16:6, 사 6:7, 렘 32:18, 단 9:24, 미 7:18-19, 슥 3:4, 슥 3:9, 참조: 다윗의 입맞춤에 의한 용서의 행동, 삼하 14:32). 세 군데에서는 하나님의 깨끗케 하시는 행동이 강조되어 있다(시 51:4, 렘 33:8, 겔 36:33).
(참조: C. SCHULTZ;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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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m'v;(8104, 샤마르) 지키다, 준수하다, 보존하다, 감시하다, 주의하다
샤마르(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지키다, 준수하다, 보존(간수)하다, 감시하다, 주의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470회 나오며, 칼, 니팔, 피엘, 히트파엘형으로 사용되었다.
(a) 샤마르의 기본적인 개념은 '큰 주의를 하여 행한다'를 의미한다.
이 기본적인 개념은 이 동사의 변형된 다양한 의미들 저변에 깔려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동사가 다른 동사들과 결합되면 그 의미는 '면밀하게 혹은 부지런히 행하다'가 된다. 예컨대 잠 19:8에서 "명철에 주의하다"(한글개역 "명철을 지키는"), 신 11:32에서 "모든 규례와 법도를 너희는 행하도록 주의하라 즉 주의 깊게 수행하라(한글개역 "지켜 행할찌니라")", 그리고 민 23:12에서는 주의 깊게 말하다 혹은 충실하게 말하다.
(b) 샤마르는 언약 의무, 율법, 법규, 등에 '면밀하게 주의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창 18:19에서 보면 아브라함은 그의 자식들에게 여호와의 도를 지키도록 즉 하나님의 도에 조심스럽게 유의하도록 명령해야 한다(출 20:6, 레 18:26, 신 26:16, 겔 11:20).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은 단지 이론 만의 문제나 마지 못해 추종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들을 행하라'는 표현이 자주 첨가되는데, 겔 37:24에서 그 실례를 찾아볼 수 있다. 잠 4:21은 그것들을 마음에 지키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이 표현은 율법 등을 지키는 것 뿐만 아니라 제사장 직분과 같은 성직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도 사용된다(민 18:7).
(c) 샤마르는 '돌보다, 보호하다'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정원(창 2:15), 양떼(창 30:31), 집(삼하 15:16) 등과 같은 것들을 지키거나 돌보는 것이 포함된다. 또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지키는 그룹(창 3:24)이나 문지기(사 21:11)나 파숫꾼(아 5:7)과 같이 침입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도 이 의미의 범주에 포함된다. 사람에 대해서도 이러한 의미가 적용될 수 있다.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 4:9)라고 묻는다.
다윗은 시 34:20, 시 86:2, 시 121:3-4, 시 121:7 및 기타 구절들에서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하심에 대해 자주 말한다. 욥 2:6에서 하나님은 사단에게 욥의 생명을 건드리지 말라고 명할 때 샤마르를 사용하신다.
또한 다윗은 요압이 압살롬과 싸우러 가기 전에 그에게 비장하게 타이르기를 "나를 위하여 압살롬을 지키라"(한글개역 "해하지 말라", 삼하 18:12)고 했다.
흔히 이 동사는 인격의 훈련, 즉 개인의 생활과 행동 면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에 대해 사용된다. 시 39:1에서 자기 행위를 조심하는 것, 잠 13:3에서 입을 조심하거나 지키는 것을 묘사한다.
(d) 샤마르는 '중시하다', '...에 유의하거나 주의하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사람이 하나님이나 기타 다른 것들에게 주의하거나 경의를 표하는 태도를 기술한다. 예컨대 호 4:10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유의하기를 그만두었다(한글개역 "여호와 좇기를 그쳤다")고 한다. 시 31:6은 헛된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을 언급한다. 또 다른 관련 용법에서 시 130:3에서 기자는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진실로 주의하실진대) 누가 서리이까?"라고 한다(욥 13:27). 이 단어는 삼하 11:16에서처럼 적대한다는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고 슥 11:11과 시 59:9에서처럼 기대한다는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다.
(e) 샤마르는 '보존하다' preserve, '축적하다' store up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에돔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분노를 계속하여 품고 있는 것(암 1:11)이나 지식을 축적하는 것(말 2:7). 이 단어가 창 41:35과 삼상 9:24에서는 음식에 대하여, 출 22:7에서는 귀중한 어떤 물건에 대해 사용되어 있다.(참조: J. E. Hartley;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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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5975, 아마드) 서 있다, 위치를 취하다, 머무르다, 지탱하다
아마드(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서 있다, 위치를 취하다, 머무르다, 멈춰서다, 지탱하다, 견디다'를 의미한다.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00회 이상 나온다.
(참조: BDB; HE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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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l's;(5545, 살라흐) 용서하다, 사면하다
살라흐(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용서하다, 사면하다 forgive, pardon'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46회 나오며, 칼형과 니팔형으로만 사용되었다.
살라흐는 성경에서는 오직 하나님에 관하여 사용되었다. 살라흐는 하나님께서 죄인에 대하여 사죄하고 용서하시는 것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그 어떤 형태로든지 사람들이 서로 용서하는 것에 대하여는 결코 사용되지 아니하였다.
동일한 어근이 우가릿어(VT 19: no. 1757)와 아카드어에도 나타나지만 그러나 그 형태에 관한 어떤 분명한 관계에 대하여 고려할 것이 없다. 아카드어 살라후는 제의와 의학문서에서 "뿌린다 sprinkle"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복음주의적인 어조 중 하나는 이 단어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용서와 사면이다. 이 단어는 또한 큰 문제를 일으킨다. 이러한 용서의 본질이 무엇인가? 히브리서는 구약의 용서가 효과가 없고 불가능이었다는 것을 마치 절대적인 것처럼 서술하는 것 같이 보인다(히 9:9, 히 10:4).
해답은 분명한 것이다. 첫째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한 모세의 기도의 응답으로, 그가 이스라엘의 가장 무지몽매한 순간에 저지른 두 가지 죄, 즉 금송아지 사건과 가데스바네아에서의 불평 때에도 이스라엘을 용서하셨다는 것을 친히 선언하신다(출 34:9, 민 14:19-20).
둘째로, 모세의 율법을 기초로 하는 실재적 속죄와 용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도전적이며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의 죄를 제외한 모든 죄에 대해서 유효한 것이었다(민 15:30-33). 속죄가 될 때 죄인의 죄가 용서 받는다는 주장은 되풀이 되었다(레 4:20, 레 4:26, 레 4:31, 레 4:35, 레 5:10, 레 5:13, 레 5:16, 레 5:18, 레 5:26, 레 19:22). 거짓말, 절도, 거짓 맹세, 사기(레 6:1-7)와 같은 모든 죄나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한"(레 4:2) 자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죄들은 제외되기 보다는 "그릇 범죄"(sins of ignorance)와 더불어 신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규례(provision)에 특별히 포함되어 있다(민 15:25, 민 15:26, 민 15:28). 마치 이러한 점을 강조하는 것처럼 속죄일에 이스라엘의 "모든 불의"와 죄가 속죄 받았음을 되풀이하여 기록되었다(레 16:21, 레 16:30, 레 16:32, 레 16:34). 그러나 개개 이스라엘인들은 진실한 고백에서 당연히 '겸손해야'("괴롭게 하고") 하였다(레 16:29, 레 16:31). 이러한 용서는 솔로몬이 성전 봉헌 기도를 인도할 때 모든 사람에게 유효하게 되도록 기도한 그러한 종류의 용서이다(왕상 8:30, 왕상 8:34, 왕상 8:39, 왕상 8:50와 대하 6장에 있는 그 병행 구절). 아모스는 다니엘과 같이(암 9:19), 유다를 위하여 용서를 간구하였다(암 7:2). 그러나 때때로 이스라엘은 용서를 받지 못하였다(신 29:19, 애 3:42).
이러한 공개적인 용서의 제안이 너무 고무적이었기 때문에 이사야(사 55:7)는 구원으로 초대하는 마음으로 이 제안을 크게 보도하였다. 그들의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므로 이사야의 청중들은 사람들을 미워하는 데서 나온 모든 생각을 잊어버리고 서로 용서해야 한다.
구약성경에서의 용서의 경험은, 비록 객관적으로 그 용서의 기초와 근거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을지라도 인격적인 효험이 있었다. 용서에 대하여 사용된 다른 용어들은 죄에 대한 기억을 없애거나 도말하는 죄에 대한 기록을 덮거나 감추는, 죄를 제거하거나 일소하는, 죄를 관대히 봐주는, 대속물을 근거로 하여 용서하는 관념을 강조한다.
예레미야서에 있는 세 가지 본문, 렘 31:34, 렘 33:8, 렘 50:20은 새 언약과 우리 주님의 최후 재림과 관련된 우리 주님의 미래의 용서를 공포한다.(참조: W. C. KAISER;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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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y:(3372, 야레) 두려워하다, 무서워하다, 경외하다
야레(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두려워하다, 무서워하다, 경외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330회 나오며, 칼, 니팔, 피엘형으로 사용되었다.
야레의 성경적 용법은 다섯 가지 의미의 영역을 가진다.
(1) 두려움의 감정,
(2) 감정적인 반응에 강조점을 두지 않는, 악에 대한 지적인 예상,
(3) 존경이나 경외,
(4) 의로운 행동이나 경건,
(5) 형식적인 종교적 예배.
(a) 칼형에서 감정적인 반응으로서의 두려움에 관한 전형적인 예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시내산의 불을 보고 유대인들이 두려워 한 것(신 5:5), 유대인들이 블레셋인들의 동원 소식을 듣고서 미스바에서 두려워한 것이다(삼상 7:7).
다른 예들은 반드시 감정적 반응을 지적할 필요가 없는 악에 대한 예상을 더 강조한다. 다윗이 아기스 궁전에서, 그의 명성이 그에게 위험이 되었다고 생각한 그 인식은(삼상 21:13, "그들의 앞에서 그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 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자기 가족이 자기 자신에게서 빼앗겨질지도 모른다는 야곱의 예상과 부합하는 하나의 실례이다: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말하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하였음이니이다"(창 31:31).
이 두 용법은 위로의 어구나 인사말로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부정 명령을 사용할 때 고려된다(예: 창 50:19, 창 50:20). 이런 경우에 야레는 하나 혹은 그 이상이 동의어들과 병행하여 자주 사용된다(예: 하타트: 타락하다, 아라츠: 놀라다). 이와 비슷한 주제는 안전을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정의하는 것이다(예: 시 56:4).
앞에 기록되어 있는 세 번째 용법의 예들은 많이 있다. 이런 존경은 어떤 사람의 부모(레 19:3), 거룩한 곳(레 26:2), 하나님(시 112:1),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시 86:11)에 기인한다. 하나님의 일에 대한 하박국의 "두려움"(합 3:2)과 욥의 고난을 바라보는 그의 친구들의 두려움은(욥 6:21) 이런 종류의 두려움으로 간주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몇몇 구절들에서, "두려움"과 그에 상응하는 삶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므로 실제의 동의어 개념들이다(레 19:14, 레 25:17, 왕하 17:34, 신 17:19). "두려워하다"를 의로운 삶을 뜻하는 실제적인 동의어로 보는 이 용법이 - 앞에 나오는 어떤 의미로든지 간에 - 의로운 삶을 산출해 내는 동기로서의 "두려움"을 고찰하는 데에 생겼다는 사실은 그럴듯하다. 이런 실제적이고 능동적인 두려움은 애굽 산파들이 그들의 두려워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받은 그런 종류의 두려움이다(출 1:17, 출 1:21). 이런 종류의 두려움은 율법을 읽음으로써 가장 적절하게 알게 되었다(신 31:11-12). 되풀이하여, 강조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관련된 인간의 의로운 행동은 나그네나 체류자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다(예: 신 10:18-20, 참조: 신 25:18).
형식적인 종교적 예배로서의 "두려워하는 것"에 대한 가장 분명한 예는, 제사 예배에 대해서는 여호와를 "두려워" 하지만(참조: 왕하 17:32-34), 그의 율법에 의로운 순종을 하였는가의 측면에서는 여호와를 "두려워" 하지 않은 북 왕국의 종교 혼합주의자들을 묘사하는 데에 나온다. 신 14:22, 신 14:23에 언급된 형식적 제사 요소들은, 이것이 배워지는 그런 종류의 두려움임을 이 문맥에서 시사해 준다. 앞의 논의와 수 22장의 문맥에 비춰볼 때, RSV가 이 구절에서 '두려움' fear을 '예배' worship로 번역한 것은 아마도 옳을 것이다(신 22:25).
'두려워하는 것'이 '열성가나 추종자임'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는 몇몇 구절들이 있다. 이 용법은 앞의 네 번째 용법이나 다섯번째 용법을 반영해주는 것 같다. 추정되는 동사의 예들은 욥 1:9과 대하 6:33에서 발견된다.
여러 종류의 두려움이 여러가지 인간의 행위(삼상 7:7, 삼상 15:24)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행동(출 14:31, 수 4:23, 수 4:24, 삼상 4:7, 삼상 4:9), 심판(사 59:18, 사 59:19),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신 4:10)에 의해 야기될 수 있다.
(b) 니팔형에서 이 단어는 수동적으로 '두려워하게 되다, 경외하게 되다'를 의미한다(시 130:4).
니팔 분사형은 '무서운' terrible, '두려운, 경외하는 awesome, 혹은 '무서워하게 하는' terrifying과 같은 것들을 묘사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었다. 이것은 '두렵게 되다'의 니팔분사형의 동명사적 특성의 좋은 예이다(GKC, 116e). 이것은 장소(창 28:17), 하나님(출 15:11), 하나님의 이름(신 28:58), 하나님의 행위(출 34:10), 백성(사 18:2), 그리고 주의 날(욜 2:31, H3:4)을 묘사한다.
(c) 피엘형에서 이 단어는 '두려워하게 하다, 무섭게 하다'를 의미한다(삼하 14:15, 느 6:9, 느 6:14, 느 6:19, 대하 32:18).(참조: A. BOWLING;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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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p,n<(5315, 네페쉬) 숨쉬는 존재, 영혼, 생명 등
네페쉬(명여)는 '숨쉬다, 원기를 회복하다'를 뜻하는 동사 나파쉬(vp'n: , 5314)에서 유래한 명사이며, '숨쉬는 것이나 호흡하는 존재(피조물), 영혼, 생명' 등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750회 나온다.
(a) 네페쉬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간에 육체를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단어는 어떤 경우에서(창 36:6) 소마(몸 body)로 번역되어질 수 있다. 네페쉬가 프쉬케로 번역되어 지면 프쉬케는 '넓은 의미에 있어서 인간의 생명적인 것을 의미하며'(G.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1, 1962, 153), 다른 말로는 살아 있는 것을 뜻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살아 있는 혼'이라는 말을 읽게 된다(창 1:20, RSV, living creatures). 죽어가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밖으로 불어내거나(AV 'gives up the ghost' 영혼을 포기한다. 참조: 렘 15:9), 혹은 영혼을 쏟아 붓는다(애 2:12). 영혼은 죽는 자에게서 떠난다(창 35:18). 그러나 영혼(즉 생명)은 육체로 되돌아 올 수 있다(왕상 17:21). '영혼은 영혼으로'라는 것은 '생명은 생명으로'라는 것을 의미한다(출 21:23). 생명의 좌소로서의 피(Blood)는 실질적으로 '네페쉬'나 프쉬케와 동일할 수 있다(창 9:4 이하, 레 17:11, 레 17:14, 신 12:23). (G. Harder).
(b) "생물"(네페쉬 하이야)는 창 1:20에서 물에 사는 생명체 피조물에 대해 창 1:24에서는 땅에 사는 동물에 대해, 창 2:7에서는 사람(개역: "생령")에 대해, 창 9:10에서는 새들과 땅에 사는 동물에 대해, 창 9:16에서는 사람과 동물에 사용되었다. 동일한 용어가 '모든 생물', 그리고 '사람'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런 경우에 네페쉬 하이야라는 용어는 생명을 가지고 호흡하는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일 용어 '네페쉬 하이야'가 모든 생물에 사용되었다고 해서 모든 생물이 우리 인간과 같은 혼이나 영혼을 가졌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분명히 네페쉬의 기능과 능력에 있어서 곤충과 물고기의 네페쉬와 소, 말 등의 네페쉬와 사람의 네페쉬가 다른 것이다. 기계의 가치와 능력에 따라 장착되는 동력이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있다.
특히 인간적 존재는 본래부터 충동, 욕구, 소망, 의지를 포함하기 때문에 네페쉬는 그런 의미들로도 사용되었으며, 한 개인의 생명을 의미한다. 소생시키고 회복시키는 대상으로서 네페쉬는 영혼(soul)이라는 개념과 생명 life이라는 개념을 모두 포함한다(R. V. Harris의 구약원어사전).
동물의 네페쉬와 사람의 네페쉬가 다른 것은 우선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대한 기사가 밝혀준다. 사람은 창조될 때 동물들과는 달리 생명의 숨(니셰마트 하임, 생명의 숨)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다. 그래서 '네페쉬 하이야'가 된 것이다. 이는 사람의 네페쉬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과 창조 의지에 의해 창조된 동물의 네페쉬와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의 네페쉬와 동물의 네페쉬의 차이를 밝혀주는 또 하나의 성구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전 3:19-21을 보면 "19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것이 헛됨이로다 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 누가 알랴"
전 3:19에서 단지 한 사건, 즉 죽음이 사람과 짐승에게 똑 같이 찾아온다는 것, 전 3:20에서 '단 한 곳으로 간다는 것은 일종의 무덤을 가리킨다.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인간이건 짐승이건 간에 예외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전 3:21에서 사람의 네페쉬와 동물의 네페쉬가 돌아가는 곳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전도서에서는 루아흐[영]가 사용되었지만 문맥상 네페쉬[혼]를 의미한다). 일부 학자들이 전 3:21을 회의적으로 해석하지만 매우 분명하고 명확한 어투로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간다'고 말한다. 이 사실을 누가 알겠는가? 오직 하나님 선만이 아신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자는 이 사실을 안다. 그러면 솔로몬도 알고 있었다.
(c) 네페쉬는 자아 생명의 민감한 부분으로서 감정, 사랑(Cant. 1:7), 갈망(시 63:1), 기쁨(시 86:4)의 좌소를 의미한다. 이것은 어떤 것을 더 숙고해야 할 문제는 아니다. '영혼'은 그 생명의 운동과 감정의 여러가지 표현을 나타낸다. 영혼은 인간의 내적 능력을 결합한 요소이다. 따라서 "너의 영혼을 다하여"라는 말이 성립된다(신 13:3). 영혼의 내부에서 음식에 대한 욕망(신 12:20, 신 12:21), 육체의 욕망(렘 2:24), 살인과 복수에 대한 갈망(시 27:12)이 거주하고 있다. 영혼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즉 그것은 울고(시 119:28), 눈물을 흘리며(욥 30:16), "오래" 참는다(욥 6:11). 그러나 지식과 이해(시 139:14), 생각(삼상 20:4)과 기억(애 3:20)도 마찬가지로 영혼에 자리잡고 있다. "영혼"은 전 인격 곧 인간의 전 자아의 총체이다. 따라서 "영혼"은 의미상 "나 자신" 또는 "네 자신"과 동일시 될 수 있을 정도이다(삼상 18:1). 창 2:7에서 네페쉬는 '사람' person, 혹은 '존재' being를 의미한다.
살아있는 피조물 역시 혼(soul)으로 묘사되어 질 수 있다. 집합적 의미에서의 살아있는 모든 것, 곧 모든 생물들(레 11:10). 율법에서 영혼(soul)이라는 말은 특별한 법규와 관련된 당사자를 의미한다(레 4:2, 레 5:1, 레 5:2, 레 5:4, 레 5:15). 사람들을 계수할 때 영혼들(souls)이라고 계수한다(출 1:5, 신 10:22). 구약성경이 죽은 사람을 가리켜 그 사람의 영혼이라 말하며 따라서 이러한 표현으로써 죽은 시체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영혼이 몸과는 별개라는 개념 또는 죽을 때 영혼이 몸에서 분리된다는 개념에 구약성경이 전혀 친숙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해 주고 있다(민 6:6). (G. Har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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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q;(6960, 카와) 기다리다, 기대하다, 바라다, 소망하다
1. 카와(동사)는 기본어근이며, '기다리다, 기대하다 wait, look for, 바라다, 소망하다 hope'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0회 나오며, 칼형과 피엘형으로만 사용되었다.
카와는 의인의 생명을 파멸시키고자 하는 악인들에 대하여 사용되었다(시 56:6, H7, 시 119:95). 꾸준한 인내의 기다림은 위대한 믿음의 표현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결정적으로 행동하실 것을 확신 있게 소망하며 끈기 있게 참는다는 의미를 지닌다(창 49:18). 기다림은 인간 존재의 본질, 즉 인간의 혼(nepesh)과 관련된다(시 130:5). 진실한 믿음으로 기다리는 자들은 새 힘을 얻어 계소하여 여호와를 섬기며 그의 구원 사역을 기대한다(사 40:31). 하나님께서 약속한 모든 것이 실현되고 성취될 때가 올 것이다(사 49:23, 시 37:9). 한편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의지함으로 자신의 성실과 정직에 의해 생존하게 된다(시 25:21). 그의 믿음은 시험을 통하여 강화되고 그의 인격이 더욱 개발된다(시 27:14). 이스라엘은 사랑과 공의를 굳게 잡으라는 권면을 받는다. 즉 그들은 충성스럽게 율법에 순종해야 하며 공의의 표준들을 변함없이 유지시키고 동시에 신적 사랑의 자세를 간직해야 하는 것이다(호 12:6, H7, 참조: 시 37:34, 욥 4:6).
재난과 심판의 때에 의인들은 위대한 믿음을 발휘해야 한다(사 26:8, 애 3:19-33). 그러므로 아시야는 변함없이 말한다: "이제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사 8:17). 하나님께서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현장에 임하실 때, 기다렸던 자들은 넘치는 기쁨과 커다란 노래로 응대할 것이다(사 25:9).
욥은 극렬한 시험 중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소망을 나무와 같이 뽑는다고 말한다(욥 19:10). 아마 이 진술은 다음과 같은 그의 믿음의 단언에 대한 하나의 응답일 것이다: "나무는 소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욥 14:7). 그러나 그의 철저한 좌절이 이미 다음의 외침에서 표현되었었다: "나의 날은...소망 없이 보내는구나"(욥 7:6, 참조: 잠 11:7).
악인도 역시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기초 위에 놓여 있는 이상 그 소망은 그들의 죽음으로 끝날 것이다(잠 11:7, 잠 11:23, 참조: 잠 10:28).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끊어 버릴 것이다(욥 8:13, 욥 27:8). 욥은 말한다: "그의 소망은 기운이 끊침이리라"(욥 11:20).
소망은 인간의 마음 속에 영원한 집을 가진다. 장래가 있는 한 소망이 있다(잠 23:18, 아마 영원한 장래를 뜻할 것이다). 그러나 오직 신자만이 진정으로 장래에 대한 자기의 소망을 표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소망은 여호와께만 속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장래를 보장하고 소망을 실체화하기 위해 지혜를 공급하신다(잠 24:14). 악인에게는 그러한 장래(잠 24:20)도 소망(잠 10:28)도 없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있어서 소망의 원천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한 장래와 한 소망을 약속하셨다(시 62:5, H6, 렘 29:11). 예레미야는 포위 공격을 받고 있는 유다를 향해 말한다: "너의 장래(한글개역: "최후")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렘 31:17). 스가랴는 하나님의 백성을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 prisoners of hope이라 부른다(슥 9:12).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회복시키는 경험을 기대하라고 촉구한다(슥 9:1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친히 "이스라엘의 소망"이라 불린다(렘 14:8, 렘 17:13, 렘 50:7, 참조: 시 71:5).
하나님도 인간에 대한 소망을 표현하신다. 그는 이스라엘을 심고 잘 가꾸어진 포도원으로 만들었다. 하나님의 소망과 목적은, 이스라엘의 성취 즉 그들이 열매를 맺는 것이었다. 이 점은 포도원 안에 포도즙 짜는 틀(한글개역: "술틀")을 설치하였다고 말함으로써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사 5:2이하). 그러나 이스라엘은 들 포도만을 맺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스라엘을 준엄하게 심판해야 했다(사 5:5 이하). 그러나 하나님의 소망은 계속되었다. 왜냐하면 언젠가는 풍성한 열매를 맺을 새 포도원을 계획하였기 때문이다(사 27:2-6).
2. 카와(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모으다, 수집하다 collect'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3회 나오며 니팔형으로 사용되었다(렘 3:17, 창 1:9, 사 60:9).
(참조: J. E. HARTLEY;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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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D;(1697, 다바르) 말, 일, 사건
다바르(명남)는 '말, 말하는 것, 언어, 일(thing), 어떤 것이나 모든 것, 계명, 문제, 행동, 사건, 역사(history) 사업, 원인, 이유'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450회 나온다(창 11:1, 창 12:17, 창 15:1, 창 19:22, 창 20:8, 민 25:18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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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j'y:(3176, 야할) 기다리다, 기대하다, 바라다
야할(동사)은 기본어근이며, '기다리다, 기대하다 wait, 바라다, 희망을 하다 hope'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40회 나오며, '니팔, 피엘, 히필형으로 사용되었다. 70인역본에서 이 단어는 '바라다 hope'를 뜻하는 엘피조와 에펠피조로 번역한다.
야할은 니팔형으로 사용된 세 가지 용례들에서, '짧은 기간동안 기다리다'라는 단순한 개념을 지닌다. 예를 들면 노아는 비둘기를 보내기까지 "또 칠일을 기다렸다"(창 8:12). 겔 19:5에서는 "암 사자가 기다리다가 소망이 끊어진 줄을 알고 그 새끼 하나를 또 취하여 젊은 사자가 되게 하니"라고 했다.
이 개념은 또한 피엘형(욥 14:14)과 히필형(삼상 13:8)으로도 표현된다.
그렇지만 야할은 신자들에게 있어 '믿음, 신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결국 '인내심 강한 기다림'을 야기시키는 '기대' expectation, '소망' hope에 대해 사용되었다. 기대의 의미는 긍정적인 것이다. 즉 미래에 좋은 일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겔 13:6은 백성들이 거짓 선지자들의 공언에 의지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적절한 예이다: "사람으로 그 말이 굳게 이루기를 바라게 하거니와". 이 문구는 문자적으로 '그들이 그들의 말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속임으로, 그들이 스스로 속아 실제로 어떤 성취를 기대하고 있다.
시 71:14에서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라고 한다. 야할이 좋은 것을 나타낼 때, 70인역본에서 주로 '엘피조' 즉 '바라다'로 번역되었다.
이 야할(바라다 hope)은 고통을 없애주는 상상의 진정시키는 소망도 아니며(희랍 개념에서처럼) 불확실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야할(바라다 hope)은 의인에게 있어 기대의 확고한 근거이다. 이렇게 이것은 하나님께로 향해있다. 시편기자는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여호와께는 인자하심(히브리어 헤세드)과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시 130:7, 참조: 시 131:3)고 명령한다.
절망의 때에,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격려한다(시 42:5, H6, 또한 시 42:11, H12, 시 43:5).
그렇지만 이런 확신에 찬 기대에 대해서는, 욥이 "그가 나를 죽이신다 하더라도 내가 그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하리라"고 외치는 대목보다 더 잘 증거해 주는 것은 없다(욥 13:15). 그렇지만 ASV와 RSV는 이 구절을 "보라 그가 나를 죽일 것이니 나는 소망이 없다"(한글개역 -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라고 번역한다. 이것은 70인역본과 다른 역본들에 의해 뒷받침되는 케레(Qere) 대신 마소라본문의 케딥(Kethib) 독법을 따른 것이다. 이 경우에 욥의 성급함은 그가 여호와를 '인내하면서 기다리기를' 거부하였음을 나타내 준다: "내가 무슨 기력이 있관대 기다리겠느냐 내 마지막이 어떠하겠관대 오히려 참겠느냐"(욥 6:11).
그렇지만 야할(바라다 hope)은 바타흐(신뢰하다 trust)나 카와(기다리다 wait for, 바라다 hope for)와 의미가 비슷한 동의어이다. 예를 들면 미 7:7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나는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마지막 어구는 죄가 심판 당할 때, 하나님의 미래 행동에 대한 의인들의 확신을 분명하게 나타내 준다. 그러나 더욱이 이 절은 믿음의 근거이신 여호와 자신만을 숙고할 뿐만 아니라 그의 하나님의 구원 활동도 숙고하고 있다. 짧게 말해서, 바랄 것은 인간의 상상에서 생겨난 어떤 요구 사항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과 그가 이루도록 제안하실 모든 것이다. 우리는 롬 8:28-29에 표현된 바와 같이, 기독교인의 확신을 상기하게 된다. 즉 경건한 사람은 확신에 차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할 것이다. 예를 들면, "주를 경외하는 자가 나를 보고 기뻐할 것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는 연고니이다"(시 119:74).
시편기자는 주의 규례(시 119:43), 주의 말씀(시 119:81, 시 119:114, 시 119:147, 시 130:5)을 바란다고 고백한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적 사랑에 대해서도 확신할 것이다. 예를 들면,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헤세드)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시 33:18),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애 3:21),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애 3:24) 등이다.
"소망"은 현재 문제로부터의 구원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종말론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궁극적인 구원을 "바라는 것"은 모든 고난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전능한 도움을 약속하신 사 51:5을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내 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 섬들이 구원자의 오심을 앙망하는 것은 그가 그들을 구속하시고 구원할 능력 있다는 소망의 믿음을 소유하고 있음을 말해준다(참조: G. RAWLINSON).
미 7:7에서는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라고 고백한다. 여기서 야할 즉 "바라보나니"는 간절한 믿음으로 구원의 하나님을 기다릴 것인데, 하나님이 지체하신다 해도 이 믿음은 무너지지 아니할 것이다. 믿음이 있으면 소망도 있는 것이다(참조: W. J. DEANE).
(참조: P. R. GILCHRIST;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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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q,Bo(1242, 보케르) 새벽, 아침
보케르(명남)는 바카르(rq'B; , 1239)에서 유래했으며, '햇빛의 헤치고 나아감' the breaking through of the daylight를 의미하며 따라서 '새벽' dawn이나 더 일반적으로는 '아침' morning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00회 이상 나온다.
(a) 보케르는 '아침'을 의미하지만, 정오 이전의 시간대를 가리키지 않고 오히려 밤이 낮으로 바뀌는 시점이나 밤이 끝나는 시각을 가리킨다: "모세가 애굽 땅 위에 그 지팡이를 들매 여호와께서 동풍을 일으켜 온 낮과 온 밤에 불게 하시니 아침에 미쳐 동풍이 메뚜기를 불어 들인지라"(출 10:13).
(b) 보케르는 해 뜨기 직전의 시간을 나타내기도 한다. 삿 19:25에는 기브아인들이 레위인의 첩에게 행음하여 '밤새도록 욕보이다가 새벽 미명에 놓았다'고 언급되어 있다(참조: 룻 3:13). 고대 근동에서는 밤이 세 경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밤의 마지막 시간대는 조경(출 14:24, 한글개역 - "새벽")이라고 불리웠다. 조경(새벽)은 A. M. 2:00에서 해 뜰 때까지 인데, 그와 같은 문맥에서 이 단어는 이 시간대를 가리키는 것 같다.
(c) 보케르는 '새벽녘, 동틀녘' daybreak, dawn을 의미할 수도 있다. 출 14:27에는 아침이 되자(문자적으로, 아침이 돌아올 때 at the turning of the morning) 홍해의 물이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아 왔다는 기사가 나온다. 욥 38:12에서 보케르는 '새벽'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네가 나던 날부터 아침을 명하였었느냐 새벽으로 그 처소를 알게 하여...".
(d) 때때로 보케르는 '이른 아침', 즉 동이 트고 난 바로 직후를 의미한다: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보니 그들에게 근심 빛이 있는지라"(창 40:6). 모세는 아침 일찍 일어나 시내산에 올라갔다. 즉 그는 동 트기 전에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아침'에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있었다(출 34:2, 출 34:4). 야곱은 '아침'에 그의 신부가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다는 것을 알았다(창 29:25, 참조: 삼상 29:10).
(e) 보케르는 밤에 대조되는 것으로 낮 시간 전체를 나타내기도 한다. 시편기자는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시 92:2). 이것은 다른 말로 언제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참조: 암 5:8).
(f) 시 65:8에서 보케르는 장소, 특히 해 뜨는 곳을 나타낸다: "땅 끝에 거하는 자가 주의 징조를 두려워하나이다.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
(g) 보케르는 적어도 한 번은, 부활을 의미한다: "양같이 저희를 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저희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가 아침에 저희를 다스리리니..."(시 49:14).
(h) 보케르는 '다음날, 내일' morrow, nextday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런 의미는 출 12:10에 처음으로 나온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월절 음식을 남기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소화하라"(출 12:10, 참조: 레 22:30).
(i) 보케르가 저녁(에레브)과 결합될 때, 이것은 '하루종일(전체)' (창 1:5)을 의미하거나 "저녁부터 아침까지"라는 어구에서는 '밤시간'을 나타내며(레 24:3), "아침부터 저녁까지"라는 어구에서는 '낮 시간'을 나타낸다(출 18:13).(참조: EDBW;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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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n;doa}(136, 아도나이) 나의 주 my Lord, LORD
아도나이(yn;doa} , 136)는 아돈의 강조형이며 '나의 주'를 의미한다. 아돈이 가장 일반적인 단수명사형어미와 함께 독특한 복수어형으로 나올 때(아도나, 아도나이) '나의 주'라는 의미를 지니며, 언제나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 경우 아도나이(yn;doa} , 136)의 눈 아래 모음이 장모음 '아'이다. 엘로힘(하나님)이 히브리어 복수형인 것처럼, 이 단어도 위엄을 나타내는 강의형복수나 복수형일 것이다. 이 접미사가 번역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참조: 창 18:3, 사 21:8, 시 16:2).
하나님의 이름(야훼 YHWH)을 망령되이 일컫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경건한 유대인들은 고유명 그 자체 대신 아도나[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비록 마소라 본문이 그 본문에 4개의 본래적인 자음을 남겨두었다 할지라도, 그들이 모음 에(?, 다른 이유 때문에 아[?]대신 사용됨)와 아(?)를 첨가 시켜 독자들로 하여금 자음들에 상관없이 아도나[이]로 발음하게 만들었다. 이런 특징이 히브리어 성서에 6,000회 이상 나온다. 가장 좋은 번역은 모두 대문자를 사용하여 "LORD"라는 칭호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예외적인 것으로는 '여호와' Jehovah라는 말을 사용하는 미국표준역성서(ASV)와 신세계번역본(New World Translation), '주' Lord라는 말을 사용하는 확대된 번역본, 그리고 '야훼' Yahweh라는 말을 사용하는 예루살렘 성서가 있다. 유대인들의 이런 신중함은 본문에 나오는 약어 "i. e."를 보고서 "즉" that is이라고 말하는 우리의 관습과 비슷한 것이었다. 후에 유대인들은 "이 이름", "찬송 받을 자", 혹은 "하늘"과 같은 다른 말로 대치시켰다(참조: 막 14:61-62).
아도나이 야훼가 나오는 그런 구절들에서 야훼라는 말은 엘로힘에서 나온 모음으로 지적되며 "Lord GOD"(주 하나님)과 같은 영어 번역어들이 생겨났다(예: 암 7:1).
(참조: L. J. Copper; HE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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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eje(2617, 헤세드) 친절, 인자, 자비, 자애
1. 헤세드(명남)는 하사드(ds'j; , 2616)에서 유래했으며, '친절, 인자, 자비, 자애'를 의미한다.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40회 나온다.
2. 헤세드(명남)는 하사드(ds'j; , 2616)에서 유래했으며, '책망, 비난, 수치, 치욕'을 의미한다.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회 나온다(레 20:17, 잠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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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r;(7235, 라바) 많다, 크다, 증가하다, 쏘다
1. 라바(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많다(많아지다), 크다(커지다), 증가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20회 나오며, 칼, 피엘, 히필형으로 사용되었다.
라바는 창 1:22에서 처음으로 나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여기서 모든 번역은 '증가하다, 번식하다'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그 이후의 구절에서 라바는 '증가하다'(창 7:17-18), '많다'(대상 23:17), '너무 많은'(창 43:34)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단 한번의 경우에 매우 많은 이란 의미들이 입증된다.
라바의 히필어간의 표준적이고 가장 보편적인 의미는 '증가하다, 번식하다'이다. 그러나 이 외에 다양하게 '많은 것을 구하다' ask much(창 34:12), '많이 모으다' gather much(출 16:18), '많이 산출하다' yield much(느 9:37), '더 많이 주다' give more(민 26:54), '쌓다' to heap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제시된 의미의 넓은 범위는 본래의 히브리어 어근의 범위를 보여준다.
라바는 일반적으로 양을 나타내는 문맥에 제한되어 나타나긴 하지만 비유적인 표현에서도 얼마간 사용된다. 이 어근은 다음과 같은 특별한 의미로도 사용된다. '오래 살다'(욥 29:18), 하나님을 거역하는 '말을 많이 하다'(욥 34:37), '많은 자녀들을 갖다'(대상 7:4).
2. 라바(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쏘다, 던지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회 나온다.
창 21:20,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참조: W. WHITE;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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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dP](6304, 페두트) 구별, 자유(구속)
페두트(명여)는 파다(hd:P; , 6299)에서 유래했으며, (a) '분리, 구별', (b) '몸 값을 치르고 자유케함, 속전'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4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분리, 구별', 출 8:19.
(b) '자유(구속)', 시 111:9, 시 130:7, 사 50:2.
(참조: Gesen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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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d:P;(6299, 파다) 대(구)속하다, 속량하다, 구원하다
파다(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대(구)속하다, 속량하다, 구조하다, 구원하다'를 의미한다.
파다의 기본의미는 값을 지불하거나 그에 상당하는 대체물을 줌으로써 한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 소유권이 이전되는 것을 뜻한다. 이 어근은 앗수르어에서 '아끼다, 용서하다' spare를, 우가리트어에서 '속량하다' ransom을 의미한다(UT 19: no. 2013).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59회 나온다.
(a) 파다의 의미의 발전은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원래 이 단어는 소유권의 이전을 위해 요구되는 대금을 지불하는 것과 관련된 상업적인 용어였다. 그러나 삼상 14:15을 보면 이러한 금전적 개념이 이 단어에 본질적으로 내재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울이 요나단의 본의 아닌 잘못에 대한 대가로 그를 죽이기로 결정했으나 "백성이...요나단을 구원하여 죽지 않게 하셨다". 노예 상태란 '속량'(ransom) 받을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출 21:8과 레 19:20에서 결혼을 위한 노예 소녀의 속량을 언급하고 있다.
(b) 파다는 초태생에 관한 율법과 관련이 있으며, 이것은 출애굽기에서 특별한 종교적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구원하실 때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에 있는 모든 첫태생을 죽이는 대가로 그 일을 행하셨던 것이다(출 4:23, 출 12:29). 하나님께서는 이로서 이스라엘의 사람과 짐승의 모든 첫태생의 생명에 대한 영원한 권리를 소유하시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 사건은 여호와께 사람과 짐승의 모든 첫태생을 바침으로써 이스라엘에서 영구히 기념되었다(출 13:12).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계수할 당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들을 대신하여 예배의식을 집행할 목적으로 레위 족속을 구별시키시고(민 3:40 이하), 백성들의 가축대신 레위인들의 가축을 자기의 몫으로 성별하셨다(민 3:44 이하).
레위인들의 수를 초과한 장자들의 수는 따라서 1인당 5세겔의 값으로 속량 되었으며 이 돈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졌다.
(c) 후대에서 사람이나 부정한 짐승들의 초태생은 속량 받아야 했지만 소, 양, 염소의 첫 새끼는 속량될 수 없었다. 이는 그것들이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었으므로 희생으로 드려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귀의 첫새끼는 어린양으로 대속하든지 도살되어야 했다. 여호와께 거룩한 것 즉 소나 양, 염소는 대속될 수 없었다(출 13:11-16, 출 34:19-20, 민 18:8-32).
마찬가지로 여호와께 "바쳐진", 즉 금지를 당해 사람이 소유하기에 합당하지 못한 사물이나 사람은 모두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하였으므로 속량될 수 없었다(레 27:28-29).
(d) 대속에 관한 문제가 단지 이스라엘의 초태생에 관련된 것만은 아니었다. 이스라엘 자체도 하나님의 초태생이었으며(출 4:22) 여호와의 구속을 받았었다: "너는 애굽 땅에서 종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하셨음을 기억하라"(신 15:15, 신 24:18).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이스라엘은 애굽의 노예 신분으로부터 구원 받았으며 속량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그 후 수세기를 통해 히브리 사상의 특징을 형성시켰다(삼하 7:23, 시 78:42, 시 111:9, 미 6:4). 이사야는 아브라함이 우르에서 받은 하나님의 소명을 대속으로 보기까지 하였다(사 29:22, 참조: 벧전 1:18). 마찬가지로 그는 시온의 장래 구원을 그와 동일한 대속적 행위의 결과로 보았다(사 35:10, 사 51:11, 슥 10:8).
(e) 대속의 개념은 '구원하다'는 의미로 나아간다.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구속하신 하나님은 다른 어려움으로부터 또한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를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음을 확언할 수 있었고(삼하 4:9, 왕상 1:29), 따라서 그는 기도하였다: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구속하소서"(시 25:22).
시편은 종종 하나님께서 어떤 위험(시 26:11, 시 31:5, 시 34:22, 시 44:26, 시 71:23) 또는 인간의 압제로부터(시 55:18, 시 69:18, 참조: 욥 6:23) 생명을 구원 내지 구속하는 것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인간이 직면하는 가장 큰 위험이나 재난은 사망, 스올, "구덩이"다. 시편 기자는 시 49:8, 시 49:9에서 인간의 부적격성을 날카롭게 표현하지만 하나님의 구속 능력은 한이 없다고 결론 짓는다(시 49:16).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궁극적 구속은 부활이다.
(f) 파다는 오직 한번 죄나 불의로부터 해방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저가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시리로다"(시 130:8).(참조: BDB; Gesenius; W. B. Co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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