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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란 무엇인가2 / 죄의본성 / 죄의 주체로서의 사르크스 / 육체의소욕
@@@죄란 무엇인가 2.....죄의 주체로서의 사르크스
롬 8:13 너희가 육신대로(사르크스, 육체 flesh, 죄의 본성)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롬 7:5 우리가 육신에(사르크스, 육체 flesh, 죄의 본성)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사르크스 - 살, 육체 flesh.
사르키노스 - 살로 된 consisting of flesh, 육의 fleshly.
사르키코스 - 육의 식대로 after the manner of the flesh, 육의 영역에 속한 belonging to the domain of the flesh, 육체의 fleshly.
크레아스 - 살 flesh, 고기 meat.
용례
롬 7: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롬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 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롬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롬 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 5: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1. 고전 헬라어 문헌
사르크스는 호머의 작품에서 거의 항상 복수로 사용되며, 근육등과 구별되는 '인간의 살' flesh of a man을 의미한다. 또한 이 단어는 헤시오드(Hesiod) 이후로는 '동물의 살' flesh of an animal을 의미하기도 하며, 더욱더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생선이나 작은 동물이나 과일의 살(과육)을 의미하고 있다.
몸 Body(소마)은 뼈, 피, 근육, 살, 피부(Plato, phaedr., 98 c.d)로 구성되어 있거나, 머리, 살, 뼈로 구성되어 있다. 간혹 사르크스는 노화하거나(사르키 팔라이아, Aesch., Ag., 72) 늙어질 수 있는 '전 육체' Whole Physical body를 의미하기도 한다. 전형적인 표현은 하이 사르케스 케나이 프레논(Eur., EI., 387)인데, 이 단어는 지각이 없는 그저 단순히 육적인 인간들을 의미한다.
덧없음은 사르크스의 특별한 특징을 나타내는 말이다. 활력(프쉬케, 영혼Soul)과 욕망(뒤모스)이 사라질 때, 살과 뼈는 소멸하고 만다. 신이 인간과 동물과 다른 점은 사르크스를 가지고 있지 않은, 누스(마음, 정신 mind)와 에피스테메(통찰력 insight)와 로고스(말 Word, 이성 reason)라는 점이다(Epict., Diss., 118, 2). 따라서 인간의 불멸의 본성은 사라져 없어질 그의 육신과 더욱 더 대조된다.
땅 속에 묻히는 온코스 사르콘(육의 몸 body of flesh)은 우리 자신의 실재가 아니다(Plato, Leg., 959c; 참조: “육체라는 낯선 의복” Emp., Frag., 126). 그러나 에피쿠루스(Epicurus)는 이러한 관념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소멸이라는 것은 원자의 분산에 불과할 뿐이며, 이러한 분산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선의 시작과 근본은 행복 곧 배(belly)의 헤도네(욕망 Desire)이다. 육이 “배고파서는 안 된다, 추워서도 안 된다, 목말라서도 안 된다”고 소리쳐 요구할 때, 영혼은 이러한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디아노이아(분별력 understanding)는 사르크스의 종말과 한계를 알기 때문에, 에피쿠루스(Epicurus)는 사람들에게 결코 쾌락의 생활을 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철저한 자기 통제와 절도 있는 생활을 권유하고 있다.
이러한 관념들은 플라톤학파와 같은 그들의 반대자들에 의해 탐욕을 추구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형태로 많이 격하되고 통속화되었다. 반대자들에 따르면, 몸의 욕구와 욕망은 신성함이 담겨져 있는 영혼(Soul)을 더럽힌다는 것이다. 에피쿠루스(Epicurus)는 식욕과 육체적 욕망과 간음과 그리고 무절제를 옹호한다는 비난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애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2. 구약성경과 70인역
사르크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바사르와 셰에르이다(70인 역본).
1. (a) 바사르는 인간들이 먹는 식품으로서의 '고기' flesh를 의미한다(삼상 2:13; 삼상 2:15; “메추라기 고기”, 민 11:33; 돼지고기, 신 14:8; 소고기, 창 41:2). 고기와 술은 경사스러울 때 먹는 음식이다(단 10:3).
(b) 바사르는 또한 '인간의 살' human flesh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갈빗대를 하나 취하시고 그곳을 살로 채우셨다(창 2:21).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음식을 먹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살이 쪘다”(베리에 바사르). 그리고 그로 인해 몸의 상태도 양호하였다(단 1:15).
겔 37:6; 겔 37:8은 힘줄과 살과 피부 그리고 정신(영 Spirit 루아흐)을 함께 언급하고 있으며, 욥 10:11은 피부와 살과 뼈와 힘줄을 언급하고 있다. 음경(the penis)은 특별한 의미로 '노출된 살' naked flesh(출 28:42, 하체), '양피로 된 살' the flesh of the fore skin(창 17:11 이하; 레 12:3, 양피)로 지칭되며, 단순히 '몸' flesh으로 지칭되기도 한다(소마, 레 15:2 이하; 겔 16:26; 겔 23:20; 겔 44:7; 겔 44:9).
(c) 바사르는 또한 전체의 부분 부분을 일일이 들어 설명할 때 전체 그대로의 인간의 몸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합이 ……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왕상 21:27), 깊은 잠 속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을 때, 몸의 털이 곤두섰다(욥 4:15). 그러나, 육체(flesh)는 단순한 몸만이 아니라 인격체로서의 인간, 즉 전인을 의미한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 63:1; 참고 54:3). 여기서 육체는 인간 자신의 자아 man's own self를 의미한다.
(d) 그러나 사람은 결코 고립된 존재가 아니다. 친척은 “나의 골육이다”(창 29:14). 따라서, 창 2:23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한다(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여자는 남자를 위해 존재한다, 말하자면 그가 세상에서 편히 쉬는 장소인 것이다. 남자는 여자와 친밀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가정을 일으킨다.
형제는 “우리의 골육”이다(창 37:27). 좀더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골육은 '모든 인류' all mankind를 의미한다. “그가 만일 자기만 생각하시고 …… 모든 혈기 있는 자가 일체로 망하고 사람도 진토로 돌아가리라”(욥 34:15; 참조: 시 56:6; 시 56:12). 이와 유사하게 “모든 골육”은 “모든 사람” everyone을 의미한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모든 혈육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하리라”(사 66:23). 마지막으로 이 구절은 창 6:17 이하; 창 9:11 이하에서 볼 수 있듯이, 인류와 동물세계를 포함하기도 한다.
(e) 살에 관한 의미가 그 시발점에 있어서는 구약성경과 헬라 문헌 사이에서 아무런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할지라도, 분명한 것은 이미 앞에서 예를 들어 입증한 살에 관한 다양한 의미들에서 볼 때, 그들 사이에는 인류학적 결론이 다름을 알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살(flesh)은 전체로서의 인간을 의미한다. 즉, 인간은 살을 그의 본질로 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희랍 개념에서 볼 때, 인간은 살을 가지고 있으나 살 그 자체만은 아니다. 이러한 개념은 또한 에피쿠루스(Epicurus)에게도 적용되는데, 그는 육체의 요구를 어떠한 수단을 써서든지 만족되어져야만 하는 현실적 실재(actual reality)로 이해했다.
덧없음에 관한 이해에서도 이와 같은 차이점이 나타난다. 구약성경에서, 육체는 병과 죽음과 싸움으로 고통 당하는 자로서의 무상함 속에 있는 인간을 의미한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마음(heart)과 같은(창 8:21) 다른 용어들로 표현된다. 예를 들어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사 40:6; 사 40:8). 산헤립이 이끄는 앗수르의 무리들은 “육신의 팔”로 지칭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에 비교해 볼 때 보잘것 없는 것이다(대하 32:8). 하나님은 “저희(이스라엘)는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 따라서 그는 그들의 부정을 용서하신다(시 78:39). 다른 한편, 렘 17:5은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있다.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2. 셰에르(아카드어 쉬루[siru]: 살 flesh, 몸 body)는 좀더 오래된 고어로 추정되며 다음과 같은 의미들을 가지고 있다. 식용고기(출 2:10; 시 78:20; 시 78:27), 인간의 살(미 3:2 이하; 렘 51:34 이하), 골육지친(레 18:6; 레 20:19; 레 25:49; 민 27:10; 70인 역본에서 연루자 related person, 친척 kin을 뜻하는 오이케이오스 혹은 오이케이아). 시 73:26의 언급은 이 말의 의미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즉, 나는 사라지지만; 참조: 잠 5:11],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3. 유대교는 여러 모양으로 인간의 육욕을 인간의 죄와 밀접하게 연관시키고 있으나 육체를 죄의 실제적인 동기로 판단하고 있지는 않다. 구약성경의 언명들은 육체에 의존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일 뿐만이 아니라 죄라고 묘사하기도 한다(사 31:3). “모든 육체”는 인류를 말하는 것이며 악에 대한 추구는 본래부터 인간의 마음 속에 내재해 있다(창 8:21). 인간은 “자궁에 있을 때부터 부정하다”(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3. 신약성경
성경의 헬라적 유대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각기 내리는 육체에 대한 평가가 다양하다.
1. 공관복음서에서의 사르크스.
(a)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여기에서 "혈육"은 제한성(limitation)을 지닌 인간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반대어이다. "혈육"은 인간의 도덕성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력을 가리킨다. "혈육"은 인간의 부분들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지적, 종교적, 신비적 능력을 포함한다. 그 반대는 하나님이시다.
(b) 막 14: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여기서 사르크스("육신")는 프뉴마("마음")와 대조 및 반대이며 피곤한 육체, 연약한 의지 등이다. 그러나 이 "육신"의 반대는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이다.
(c) 눅 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여기서 "살과 뼈"는 지상 인간의 실체를 의미한다. 여기서 대조는 육체적 세계와 비육체적 세계의 대조이다. "살과 뼈"는 비육체적 영에 대조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실재적 육체임을 가리킨다.
2. 바울 서신에서의 사르크스.
사르크스는 몸(Body)을 의미한다.
(1) 사르크스는 고후 12:7에서 육체에 가시라는 표현에서와 같이 단순히 몸의 근육 부분을 의미할 수도 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 내 몸에 가시 같은 병을 주셨다. 이것은 내가 교만하지 않도록 나를 괴롭히는 사탄의 사자다.
(2) 사르크스는 몸(body)을 의미한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고전 15:39) ; 모든 육체가 다 같은 육체는 아니니, 어떤 것은 사람의 육체요 어떤 것은 짐승의 육체며, 어떤 것은 물고기의 육체요 또 어떤 것은 새의 육체라.
(3) 갈 4:13에서 육체의 약함은 곧 병인 것 같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전에 내가 병을 앓았던 것이 기회가 되어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갈 4:14에서 바울의 병든 몸을 가리킨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내 병이 너희에게 시험이 되긴 했지만 너희는 나를 업신여기거나 버리지 않고 하나님의 천사나 그리스도 예수님과 같이 나를 환영해 주었다.
(4) 그렇지만 롬 6:19에서 동일한 표현은 인식의 약함을 나타낸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 이해력이 미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방식으로 말하겠다.
(5) 고후 7:5에 따르면 사르크스에는 외적 고생과 내적 근심도 포함된다.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 우리는 마케도니아에 도착한 후에도 조금도 쉬지 못했다. 쉬기는커녕 가는 곳마다 환난을 당했다.
(6) 고전 7:28에서도 유사하게 사르크스는 박해와 핍박 등과 같은 육적 고난과 영적 고난에 노출되어 있는 전 인간(全人間)을 의미한다: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박해와 핍박 등과 같은 고난이 있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는게 더 좋다.
(7) 고후 7:1(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에서 "영과 육" 은 둘 다 불결이나 오염에 위협을 받고 있으며 둘 다 정화되어야 한다. 몸과 영혼을 더럽히는 모든 것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온전히 거룩한 생활을 하자.
(8) 고후 4:11에서 "죽을 육체"는 바울의 지상적 존재를 의미한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언제나 예수를 위해서 죽음의 위험을 겪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죽을 몸에 예수의 생명이 살아 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9) 고후 10:3; 갈 2:20; 빌 1:22; 빌 1:24에서 사르크스도 지상 생활을 의미한다.
[고후 10:3]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 내가 보통사람처럼 약한 인간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싸움에 이기기 위해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내가 지금 내 몸 안에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구하시려고 자기 몸을 바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사르크스는 지상적 영역을 의미한다.
(1) 롬 1: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소식이다. 그분은 인성으로 말하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분이며. 바울은 사르크스의 영역을 하늘이나 프뉴마의 영역과 대조시키고 있다. 이 사르크스의 영역은 여기서 하나님께 적대적이고 죄 많은 것이 아니라 단지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영역으로 보여진다. 이것은 세대의 자연적 영역이며, 이 영역(인성) 안에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메시야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에는 성결의 영(롬 1:4)에 따라 하나님의 아들됨을 천명하고 있다.
롬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거룩한 신성으로 말하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어 하나님의 아들로 확인되신 분이다.
(2) 롬 11:14에서 단수는 지상적 민족적 이스라엘의 전체를 의미한다: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롬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여기서 사르크스는 세속적 관계, 인간의 영역을 의미한다. 롬 4:1; 롬 9:5; 롬 9:8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갈 4:23; 갈 4:29에서 "약속으로 말미암아"라는 문구는 "육체를 따라"와 서로 반대의 뜻이다: "23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그래서 롬 9:8에서 약속의 자녀는 믿음의 자녀요 영적 이스라엘이다. 반면 육체를 따라 난 자는 그냥 혈통적 이스라엘일 뿐이다. 고전 10:18에서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은 혈통적 민족이다.
(3) 고전 1:26에서 육신에 따른 지혜는 이 세상의 인간의 범주에 따른 지혜를 의미한다(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라!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인간적으로 볼 때, 세속적인 견지에서 볼 때에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4) 고전 1:24-26에서 하나님의 지혜는 사르크스의 지혜와 대조되며(참조: 고후 1:12), 고후 10:4에서 하나님의 힘은 사르크스의 무기와 대조된다(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우리의 무기는 세상의 무기, 인간의 손으로 만든 무기가 아니라 마귀의 요새를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이다.
^^ 살과 피, 모든 육체.
(1) 갈 1:16에서 "혈육"은 마 16:17에서처럼 인간 그 자체, 곧 신학적 통찰력, 종교적 경험, 교회의 전통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 나는 어떤 사람과도 상의하지 아니하고.
(2) 고전 15:50에서 이 문구의 요지는 우리의 부분들 중에서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수 없는 부분과 받을 수 있는 부분으로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인간성 그 자체가 변화되지 않고는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쉽게 부패할 뿐만 아니라 쉽게 유혹에 빠진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 같다. 혈과 육은 썩을 수 밖에 없는 자연적인 인간의 상태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썩은 것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변화를 받아 부활체(復活體)가 되어서만 천국에 참여한다.
(3) "모든 육체"라는 표현은 시 142:2에서 인용한 롬 3:20; 갈 2:16과 고전 1:29에 나온다. 이 세 구절에서 "모든 육체"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으며, 하나님 앞에 자랑할 수 없는 인류를 의미한다.
^^사르크스를 신뢰의 대상으로 삼는 것.
(1) 롬 2:28에서 바울은 몸의 지체의 할례를 마음의 할례와 대조시키고 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 겉모양으로 유대 사람이라고 해서 유대 사람이 아니요, 겉모양으로 살갗에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할례가 아니다.
여기서 사르크스는 사람들이 사르크스에 행한 할례를 보고 그것에 대해 자랑하거나, 구원의 조건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면을 지닌다(참조: 롬 2:23; 롬 2:27; 롬 2:29).
(2) 갈 6:13에서 거짓 교사들이 자랑하는 "너희 육체"는 할례받은 육체다(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갈 6:12에서 사르크스는 '육체의 겉모양을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 즉 '인간적인 겉치레만을 일삼는 자들' 을 의미할 수 있다(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 그들은 인간적으로 볼 때 교회 안에서 기독교인이 할례를 받음으로써 유대인의 핍박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갈 6:13). 그러나 육체를 신뢰하고 자랑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한다.
(3) 빌 3:3(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며 세속적인 것에 의지하지 않는 우리야말로 진정한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다. ; 빌 3:4(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에서 사르크스는 이스라엘의 자연적 혈통을 의미하지만 바리새주의, 율법적 의, 종교적 위선, 자기 자랑을 위한 열심도 의미하며 그래서 특별히 인간의 외형적 종교적 역할을 의미한다. 이런 것들은 그 자체로는 나쁘지 않으나, 그것들을 신뢰하는 것이 잘못이다. 따라서 여기서 사르크스의 정반대는 크리스토스 이에수스(그리스도 예수)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로 난 의의 계시는 다른 모든 것을 제미아("해")로 만든다(빌 3:7-9).
[빌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사르크스는 더 이상 삶의 기초로서 신뢰의 대상으로 간주될 수 없다.
##죄의 주체로서 사르크스
(1) 사르크스는 신자의 내면에 있는 죄의 세력이나 죄의 본성으로 성령과 반대의 의미를 갖는다(빌 3:3; 롬 8:13 이하; 갈 4:23; 갈 5:18 이하). 사르크스와 성령은 서로 대적한다. 이신칭의를 얻었다 해도 사르크스의 정욕, 죄의 소욕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성령으로 신자 안에 있는 사르크스를 죽여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다. 거듭났다 할지라도 만약 사르크스에 복종하여 지배를 받으면 사망과 심판을 당한다.
[롬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 죄의 본성에 따라 산다면, 죽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몸의 악한 일을 죽인다면, 살 것이다.
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 우리는 성령께서 바라는 것과는 정반대로 악한 일 하기를 좋아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인도하는 길을 따라 살며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은 우리 본성의 욕망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우리 속에 있는 이 두 힘은 서로 우리를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양쪽 틈에 끼여서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할 수가 없다.
이신칭의를 얻은 신자는 성령을 따라 행하여 열매를 맺혀야 한다 . 그러면 율법의 모든 요구를 충족하며(플레로마) 모든 율법을 완성하는 것과 같다(갈 5:16; 갈 5:19; 롬 13:14).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 본성이 시키는 대로 육체의 욕망에 따라 살면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곧 곧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롬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죄의 본성이 바라는 정욕을 만족시키는 일을 하지 말라.
(2) 그렇지만 율법 준수를 구원의 조건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 자체가 사르크스의 표현이다(갈 3:3; 갈 4:8 이하).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선포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성령의 새롭게 하며 변화시키는 임재를 그들의 삶 속에서 경험했다. 어떻게 그들이 이제 율법의 행위에서 무엇인가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육체로 마친다(갈 3:3)는 것은 구원의 조건으로 행하는 할례를 암시한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육체의 할례를 구원을 얻는 조건의 필수 불가결한 조건으로 요구했다.
갈 4:8 이하에 의하면 유대의 율법 교사의 요구를 따르는 것은 이방의 미신으로 회귀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유대 절기의 규정들은 갈 4:9-10에서 이방의 점성 미신의 행불행 사상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되었다(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은 세상의 원소들, 세상의 세력들, 세상의 자연력, 우주의 원소들의 힘, 기초적 원리들, 자연숭배, 원시종교 등등이다. 갈 4: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그런데 메시아닉은 다시 유대주의로 돌아가려고 거짓 교리로 미혹을 하는가?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 몽학선생 초등교사
갈 4: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스토이케이온, 기본 요소, 기본 원리.)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스토이케이아 - 초보 elements, 기본 ...
(3) 바울에게 있어서 사르크스는 신앙의 자유를 이용하여 죄를 향한 방탕과 무질서와 무책임을 양산한다. 사르크스는 무한대로 죄를 지어도 회개만하면 무한대로 용서받는다고 자기 합리화한다. 그러나 이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사르크스를 신뢰하여, 그것에 의해 안녕과 명성을 얻도록 유혹하는 이상 사르크스는 성령의 역사에 반대되는 죄다.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 그러나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채우는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겨라. 따라서 사르크스에 예속은 죄이다.
(4) 롬 7:18(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 다시 말해서 나의 죄악된 본성 안에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선을 행하려는 바람은 내게 있지만, 선을 행할 수는 없다);
롬 7: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 그러므로 나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는 반면, 죄악된 본성으로는 죄의 법에 복종하고 있다) 에서 사르크스와 누스(마음)의 분열이 암시되어 있는데 이신칭의를 얻은 자의 내적갈등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누스는 사르크스를 다스리거나 제지할 수 있는 힘이 없다. 반대로 중요한 관찰자이다. 이 말의 요점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에게 반대되는 행위로 빠져든다는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인간의 정당한 욕망도 즉시 자신의 육적 행위로 빠져든다. 따라서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안되며 성령을 따라 행해야만 사르크스를 정복할 수 있다.
^^ 사르크스의 정복
롬 7:5; 롬 8:8 이하; 갈 5:24에 보면 신자들은 성령을 따라 행하여, 성령께 순종하여, 사르크스를 죽이여 한다.
[롬 7: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 우리가 죄의 성품에 사로잡혀 살았을 때는, 율법이 우리 몸 속에서 죄를 지으려는 욕망을 일으켜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했다
[롬 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 죄의 본성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자기 육체를 정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았다
신자는 자신의 사르크스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이 메시지는 바울의 새롭고 전형적인 메시지이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삶으로 들어간다(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러나 신자가 직면하는 현실은 사르크스의 유혹에 시달리며 내적갈등을 느낀다. 사르크스에서 벗어나려고 인간의 의지로 노력하면 할 수록 종교적 위선에 빠지고 구원의 기쁨과 확신은 점차 사라진다. 신자는 사르크스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금욕적인 방법이나 종교적인 고행을 의지하지 않는다. 사르크스를 죽일 수 있는 힘은 인간 내부에는 없으며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성령을 따라 행할 때만 사르크스를 죽일 수 있으며 내면의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다. 신앙의 본질은 세상이 추구하는 땅의 가치와 사르크스의 욕망을 버리고 성령을 따라 행하며 하늘의 가치와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다. 신자들은 더 이상 사르크스에 의존하지 않고 성령의 권능에 의존한다.
^^ 동사와 함께 사용된 카타 사르카타("육체대로", 육체를 따라).
(1) 고후 10:2 이하에서 언급하는 것은 특히 분명하다(또한 우리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을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려는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육체대로 행하다"는 '육체의 욕망을 가지고 지상에서 사는 것', '세상의 표준대로 사는 것', '속된 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바울의 대적자들이 바울을 모함할 때 쓰던 표현이었다.
고후 11:18에서는 세상의 기준을 의미한다(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기준에 비추어 자랑하니 나도 자랑해 보겠다). 이러한 육체의 자랑은 바울의 대적자들이 하던 방식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를 위해 당한 고난과 약함을 자랑한다.
유사하게 고후 1:17(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에서 "육체를 좇아 경영하는 것"은 인간적인 동기로 계획을 세우는 것, 이기적인 동기에서 경솔하게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이는 주변상황의 상황만을 주목하고 하나님의 뜻에는 주의하지 않는 계획이다. 이 구절은 바울은 갑작스런 계획의 변경이 육체를 좇아 된 것이 아니라 어떤 중요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변호하는 문맥이다.
(2) 동일한 것이 훨씬 더 논란이 되는 구절인 고후 5:16에 적용된다(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여기서의 육체대로는 [세속적인 표준으로, 세상적인 관점에서] 라는 뜻이다. 바울이 예수를 바라보는 관점은 유대 종교인의 관점을 포함하여 세상의 관점과는 다르다. 바울은 "외모로", 즉 표면적으로 보이는 자질을 자랑하는 자들에 대하여 자신을 변호하고 있다(고후 5:12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 은 "속에는 자랑할 것이 없으면서도 겉으로만 자랑하는 사람들, 또는 내적인 것을 자랑하지 않고 외적인 것을 자랑하는 사람들" 이다.
(3) 마지막으로 갈 4:23(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9(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에서 육체를 따라 난자(게난 카타 사르카)는 육신을 따라 태어난, 인간적인 육정으로 태어난, 보통 방법으로 태어난 뜻이며, 약속으로 난 자는 성령을 따라 난 자와 같다. 사르크스를 따르는 삶이냐 주님과 그의 약속과 성령을 따르는 삶이냐 하는 결정은 분명히 단지 순간의 단 한번의 결정인 것이 아니라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의 기초다. 이것은 롬 8:4(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12(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이하에서도 나타나는데, 여기서 육신은 죄의 본성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라면, 영을 좇는 것은 성령을 따라 행하는 새로운 삶의 양식이다. 롬 8: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 죄의 본성에 따라 사는자는 죄의 욕망에 마음을 쓰고, 성령을 따르는 사람들은 성령의 일들을 생각한다.
^^ 골로새서에서 사르크스.
(1) 사르크스는 외부의 눈에 보이는 육체에 대해 중립적으로 사용된다(골 2:1; 골 2:5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의 규모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을 기쁘게 봄이라).
(2) 골 3:22에서 명사와 함께 쓰인 카타 사르카("육신의")는 인간 관계의 영역을 나타낸다(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골 1:24에서 이 단어는 바울이 교회를 위해 몸으로 당하는 고난이다(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 나는 너희를 위해 받는 고난을 오히려 기뻐하며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인 교회를 위해 받으신 고난의 남은 부분을 내 몸으로 겪고 있다). 고후 4: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항상 죽을 위험을 당하는 것은 우리의 죽을 몸에 그의 생명이 나타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참조: 고후 5:19 이하).
(3) 골 2: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 이런 규정들은 제멋대로 만든 종교적 숭배나 거짓된 겸손이나 자기 몸을 괴롭히는 데는 지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육체의 정욕을 막는 데는 아무 효과가 없다.
(4) 골 2:13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 너희가 전에는 죄와 할례받지 못한 육적인 욕망 때문에 영적으로 죽어 있었으나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함께 너희를 살리셨다. 육체의 무할례는 할례받지 못한 육적인 욕망이다(골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따라서 사르크스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의 죄의 본성을 묘사한다.
(5) 골 1:22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육체에 대해 사용되며, 그러므로 사르크스는 단순히 물리적인 육체이다(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그러나 골 2:18(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에서는 "육체의 마음" 은 세속적인 생각으로 헛된 교만에 부풀어, 자신들의 인간적인 생각과 어리석은 교만으로 들떠있는 마음이다. 골 2:11(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에서 육적 몸을 벗는 것은 그리스도의 할례로 육신의 죄들의 몸을 벗어버리는 것, 즉 손으로 행하는 육체적인 할례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게 되는 할례다.
^^ 에베소서의 사르크스.
(1) 사르크스의 용법은 에베소서에서 훨씬 더 단순하다. 엡 5:31에서 우리는 고전 6:16에서와 동일한 인용을 본다(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리하여 엡 5:29에서는 아내를 사르크스(소마)로 묘사한다(엡 5:28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2) 엡 5:32에 전제되어 있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는 이러한 개념의 사용은 독특한 것이다. 엡 2:14은 지상의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육체를 언급한다.
(3) 엡 2: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너희는 지난날에 육신으로는 이방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뽐내는 이른바 할례자들에게 너희는 무할례자들이라고 불리며 따돌림을 당했다.
엡 2:2에서 엡 2:3에 병행하는 개념을 주목한다면, 어떻게 사르크스가 점차적으로 악령의(demonic) 특성을 취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엡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엡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전에는 너희가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세속적인 풍조에 젖어 살았고 마음에는 죄악만이 가득 찼다. 공중을 다스리는 세력자인 사탄에게 붙잡혀 그가 시키는 대로 따라 할뿐이었다. 이 사탄은 지금도 주님을 대항하는 자들의 마음속에서 활동하고 있다. 우리 모두 저들과 똑같이 죄된 본성을 좇아 행하고,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온갖 일을 저질렀다. 우리가 하나님의 분노를 사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이 세상의 풍속이나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이방인과 유대인들을 지배한 사르크스였다. 사람을 사르크스와 디아노이아이(마음)로 구분하는 것은 놀랍다. 그러나 디아노이아(민 15:39[70인역본])는 사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썩어질 것이라는 사실에서 구약성경의 영향이 보인다.
(4) 엡 6:12은 독특하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우리가 싸워야 할 적들은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이 아니라 육체가 없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상의 악한 지배자들과 강력한 존재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어둠의 왕들과 영적 세계에 있는 무수한 악령들이다.
^^히브리서의 사르크스
히브리서에서 사르크스는 요일 4:2에서처럼 예수님의 인성, 지상의 존재를 의미한다(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1) 히 5:7에서 "그의 육체의 날"(그는 육체에 계실 때)이라는 표현은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이며, 하늘의 존재이신 예수님의 지상의 삶은 단지 잠시동안이었음을 보여준다(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2) 비슷하게 히 2:14에서 "혈육"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이며 예수께서도 그들과 같은 피와 살을 가지고 오셨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다. 예수께서도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의 모습으로 나셨다. 그것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죽음의 권세를 가진 악마의 세력을 쳐부수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토록 공포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셨다. 예수께서는 천사를 붙들어 주신 것이 아니라 분명히 아브라함의 후손을 붙들어 주셨다(참조: 히 2:16).
(3) 관련된 구절 히 12:9에서 "우리 육체의 아버지"는 낳아준 아버지로서 "영의 아버지"와 구별된다.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영의 아버지는 위의 세계가 복종하는 전능자이시고, 반면에 육의 영역에 속하는 아버지들은 지상의 아버지들이다.
(4) 히 9:10에서 "육체의 예법"은 예식에 관한 인간적인 규칙들, 외적인 의식, 이런 저런 규칙을 정해 놓은 일정한 의식의 약속으로, 거의 언제나 육체와 관련된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로 이해된다(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이것은 히 9:13 이하에 의해 지지된다(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5) 히 9:13 이하에서 육체의 정결은 양심의 정결과 대조된다. 여기서 육체의 정결은 분명히 제의적 정결을 말한다. 반면 양심의 정결은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의 대제사장으로 오신 그리스도에게서만 발견된다.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13,14절).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사람의 손으로 만들지 않은 성막, 곧 이 세상의 창조물에 속하지 않은 더 크고 완전한 성막에 들어가셨다(히 9: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6) 히 10:20에서 예수님의 사르크스는 그가 그 가운데로 새롭고 산 길을 만들어 놓으신 휘장이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이제 우리는 예수께서 흘려 주신 그 피의 덕분으로 하나님이 계시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휘장 가운데로, 곧 당신의 몸을 통하여 신선하고 새로운 이 생명의 길을우리에게 열어 주셨다. 하늘에 이르는 길은 오직 예수님의 사르크스를 지나서(혹은 의해서) 신자를 인도하되, 이러한 방법으로 신자는 그것을 통하여 하늘의 대제사장에게로 간다. 이 하늘의 대제사장은 지상적인 모든 것의 저편에서 하나님과 함께 신자를 위하여 중보 기도를 하신다.
(7) 이 모든 구절들에서 사르크스는 하나님의 세계와 분리되어 있는 지상의 영역을 나타낸다. 그러나 죄의 본성과는 연관되어 있지 않다. 새 언약에 대하여 제의적 율법이 그러하듯이 하늘의 영역에 대해 지상의 영역은 부적절하고 일시적인 영역이며, 사망의 위협을 받으나 하나님에 대항하여 결코 반역하거나 저항하지 않는다.
^^공동 서신의 사르크스.
(a) 약 5:3(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에서 너의 "살"(사르카스)이라는 복수는 살점(살의 조각)과 같은 육체의 살 부분을 의미한다(참조: 계 17:16; 계 19:18; 계 19:21). 너희의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그 녹은 장차 너희를 고발할 증거가 될 것이요, 불과 같이 너희의 살을 먹을 것이다.
(b) 베드로전서에서 사르크스의 용법은 거의 다 이미 언급된 것의 범주 내에 속한다.
(1) 벧전 1:24에서 파사 사르크스("모든 육체")라는 표현은 사 40:6을 인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모든 인간은 풀포기처럼 허무하고 인간의 모든 영화와 권세도 들에 핀 꽃들과 다를 것이 없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육체 곧 인간은 풀과 꽃처럼 덧없다.
(2) 벧후 2:10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 ; 육체의 더러운 욕망에 빠져 사는 자들과 하나님의 권위를 멸시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큰 벌을 내리실 것이다. 같은 방법으로, 벧전 2:11은 영혼을 대적해서 싸우는 육적인(사르키코스) 욕구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벧전 4:1에서 그리스도는 육체의 고난을 당하셨다.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1절). 즉 인성에 있어서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즉 "그리스도께서 인성에 있어서 고난을 받으신 것처럼 너희는 자기 부정과 훈련으로 죄의 몸을 죽임으로써 너희의 부패한 본성을 고난 받게 하라. 죄를 그치라. 온갖 죄를 대적하는 가장 강하고 가장 좋은 논증들이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신 것에서부터 취해지고 있다.
[벧전 4: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벧전 4: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벧전 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다른 한편, 사실상 그리스도는 육체의 사망을 당하였으나, 그는 영으로는 살아 계셨다(벧전 3:18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인성의 영역에서는 죽음을 경험했지만 결국 신성의 영역에서 사망을 정복하시어 다시 살아나셨다. 벧전 4:6(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에 관한 바른 해석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는지, 사람의 정욕을 따라 살았는지 심판대 앞에서 이렇게 고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해) 믿고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 되었었고(부정 과거 수동태, 과거회상), 그들의 몸은 심판을 받았으나(크리도시-부정과거, 육체의 썩음을 당했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조시-현재형, 하나님처럼 영원한 생명을 지속적으로 누리고 있다) 하려 함이라] 가 된다. 즉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성경적인 관점이 아니다.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1/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 육체로는 심판 영으로는 살게/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음부와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1 벧전 3: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
(3) 벧전 3:21(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에서 세례는 단순히 우리 몸을 물로 깨끗하게 씻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와 죄에서 깨끗해지기를 하나님께 간구하고 그렇게 살기를 약속드리는 것이다.
^^ 요한의 기록에서 사르크스.
(1) 요 17:2에 나오는 만민(파사 사르크스)는 "모든 사람" 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2) 요 8:15에서 예수님은 대적자들에게 비난하여 "너희는 육체(덴 사르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고 하였다. 즉 사람이 정한 기준을 따라, 세상의 표준을 가지고 판단하나. 요 8:14에 따르면 그러한 판단은 예수님께서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의 무지(blindnes)의 표시이다. 동일한 대조가 요 7:27에도 언급되어 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어디서 오는지를 그들이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앞에 다음과 같은 경고가 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요 7:24). 요 6:42을 보면 이 언급이 예수님께서 청중이 잘 아는 부모에게서 태어났음을 말해주는 것임이 분명하다(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그러므로 사르크스는 예수님의 인격에 관하여 외적으로 보이는 것과 특히 그의 혈통을 나타낸다. 혈통과 태생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매우 옳은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에 관한한, 이러한 말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하여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르크스는 지상의 것들을 판단할 때 아주 적절하지만, 하늘의 영역에서 오신 예수님을 판단하고자 할 때는 전혀 부적절한 것이다.
(3) 요 3:6에 사르크스는 인류에 대해 말하며, 인류에서 태어난 모든 것이 사르크스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이 단어는 그것이 사용된 대조적 병행구절로부터 그 내용을 획득한다. 사르크스 곁에 나란히 놓인 것은 프뉴마이다. 사르크스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으며 그러므로 그러한 지식을 전달할 수 없는 인간의 지상의 영역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는 그것이 죄 가운데 서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요 1: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에서 사르크스는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과 구별되는 자연적 출생의 원리이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핏줄이나 육체적 욕망이나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된 것이다. 사르크스는 해부학상으로 특정한 몸의 일부분이 아니라 구원을 소유하지 않은, 하나님에게 맞서 서있는 자로서의 인간 전체를 포괄한다.
(4) 요 1: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에서 사르크스 에게네토("육신이 되어")는 로고스의 자기 계시가 인간의 형태를 취했음을 말해준다. 말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하나님 아버지의 외아들의 영광이었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그런데 이 자기 계시는 옷과 같이 인간의 형태를 거저 입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형태와 동일하게 되어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 아버지의 독사(영광)를 볼 수 있게 하였으니, 그것도 기적을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분명하게,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하신 예수님의 순종으로 그렇게 하였다.
(5) 요 6:6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의 대조는 요 8:15(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의 대조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요 6:63은 요 8:15의 비슷한 논쟁에서 말한 것과 정확히 똑같은 것을 말한다. 생명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며 인간의 육체는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생명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요 6:63은 다음을 의미한다.-예수님의 사르크스, 즉 예수님의 외적인 모습을 고려하는 자는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한다. 오직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는 예수님의 말씀만이 프뉴마(영)요 조에(생명)이다. 이 구절은 다음처럼 인자의 살과 피를 먹는 문맥에서 주어졌다.
요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 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 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요 6: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인자의 살과 그의 피'라 불리우고 있다(53절). 인자의 그 살고 피는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어졌다고 말한다. 즉 이 말씀은 죄로 말미암아 빼앗긴 세상의 생명을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의 육체를 대속물로 주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인자의 살과 피는 그리스도와 그의 못박히심,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진 구속을 의미한다. 이 살을 먹고 이 피를 마신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말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의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 말은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을 의미한다. 이 신령한 먹음과 마심은 주리고 목마름에서 시작된다(마 5:6). 이것은 그리스도로부터 영적 자양분이 나온다는 사실을 의미하며 우리의 신령한 삶과 새 사람의 힘과 성장과 활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함을 나타낸다
(b) 요한 서신들.
(1) 요일 4:2(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요이 1:7(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에서 "육체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정점에 있다. 예수님이 육으로 오신 것은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을 구별하는데 이용된다. 참 신앙을 가진 자는 예수님의 신성 뿐만 아니라 인성도 시인한다. 요한의 반대자인 영지주의자들은 결코 예수의 인성을 거부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다"는 고백 여하에 따라 하나님의 영인지 아닌지를 시험할 수 있다(요일 4:2; 참조: 요이 1:7). 창세 전부터 계시던 창조주 로고스가 육신이 되는 비싼 대가를 치르시면서 역사의 무대에 개입하셨다. 따라서, 요한 이외의 다른 신약 성경 기자들은 그리스도가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다거나(벧전 4:1)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셨다는 점을 강조한다(딤전 3:16; 참조: 눅 24:39; 롬 8:3; 엡 2:15; 히 5:7).
(2) 요일 2:16에서 "육신의 정욕"이라는 표현을 본다(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즉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체의 쾌락과 눈의 쾌락을 좇는 것이나 재산이나 지위를 가지고 자랑하는 것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사르크스는 욕망을 자극하는 감각 기관으로 여겨진다. (참조: E. Schweizer; A. C. Thiselton; H. Seebas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