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역개정]시137....고통의멍에벗으려고272.환난과핍박중에도336.내모든시험무거운짐을337.괴로울때주님의얼굴보라..하늘문이열리면..(다니엘처럼기도하라!!)
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야샤브) 시온을 기억하며(자카르) 울었도다(바카)
2.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킨노르) 걸었나니(탈라)
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샤바)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쉬르) 청하며(샤알)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툴랄) 기쁨을(쉬므하)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쉬르) 함이로다
4.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5.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샤카흐)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6.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쉬므하)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다바크)
7.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욤)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아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예소드)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8. 멸망할(샤다드) 딸(바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가말) 대로 네게 갚는(샬람)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에셰르)
9.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야하즈)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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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B]시137
1. By the rivers of Babylon, There we sat down and wept, When we remembered Zion.
2. Upon the willows in the midst of it We hung our harps.
3. For there our captors demanded of us songs, And our tormentors mirth, [saying], "Sing us one of the songs of Zion."
4. How can we sing the Lord's song In a foreign land?
5. If I forget you, O Jerusalem, May my right hand forget [her skill.]
6. May my tongue cleave to the roof of my mouth, If I do not remember you, If I do not exalt Jerusalem Above my chief joy.
7. Remember, O LORD, against the sons of Edom The day of Jerusalem, Who said, "Raze it, raze it, To its very foundation."
8. O daughter of Babylon, you devastated one, How blessed will be the one who repays you With the recompense with which you have repaid us.
9. How blessed will be the one who seizes and dashes your little ones Against the rock
-----<시137개요>------
시편 중에 유대 교회의 말기에 기록되었다고 생각되는 많은 시편들이 있다.
유데교회의 말기, 그때 선지자들의 예언사역은 거의 끝나고 구약성서의 정경(正經)이 마감 완성되었다.
시편 중에 이 137편보다 늦은 시기에 나타난 것은 없다.
이 시편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 되었을 때에 기록되었다.
그들은 거기에서 교만한 압제자에 의해서 모욕을 당했다. 아마도 이 시편은 바벨론 포로시대 말기에 씌어진 것 같다.
그들은 이제 [주님의 언약말씀을 붙드는 믿음의 눈으로 볼 때] 바벨론의 파멸이 촉진되는 것을 지켜보며 파멸의 임박을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며(9절). 그 파멸을 향한 그 진행과정은 그들로 하여금 해방을 기대하도록 했을 것이다.
이 시편은 통곡의 시편이며 애가다. 칠십인역은 이 시편을 예레미야의 애가 중의 하나로 보고 있기도 하며, 예레미아, 그를 이 시편의 저자로 하고 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 나라, 그 무엇보다도 주의 성전 훼파와 함께 사로잡혀 고국을 떠난, 슬픈 포로들이 즐거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1-2).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위협을 받을지라도 마땅히 그들은 교만한 압제자들의 육적 요구를 따라 그들의 비위를 맞춰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3-4).
3. 그들은 결코 예루살렘을 잊을 수 없었다(5-6).
4. 그들은 에돔과 바벨론에게 넘겨져 고난받고 있으나 섭리를 이루실 때에 관한,반드시 이루실 회복의 언약말씀이 있기에 그대로 자포자기하여 주저앉아 멸절될 수는 결코 없었다(7-9).
---우리는 이 시편을 노래하면서 교회의 중요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특히 고난 중에 있는 교회에 동참해야 한다.
---하나님 백성들의 슬픔을 우리의 가슴에 안고, 때가 이르러 이루어질 교회의 구원과 그 적대자들의 파멸을 전망하면서 우리 자신을 위로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개인적인 원한을 피하고, 우리의 희생에 악의 누룩을 섞지 않도록 주의 깊게 대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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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의 슬픔(시 137:1-6)
우리는 여기에서 시온의 딸이 구름에 덮여 바벨론의 딸과 거하는 것을 본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비록 환난중에, [극도의 실존적 비참과 고생의 눈물 가운데 [사로잡혀] 있을지라도] 그래도 눈물을 흘리며 [생명말씀의 소망따라] 씨를 뿌려야 하는 법이다.
Ⅰ. 그들은 일에서나 영혼에서도 [분명히 참으로]슬픈 상태에 처해 있었다.
1. 그들은 포로로 사로잡혀 이끌려 와서 이방 땅이며 본국에서 거리가 먼 “바벨론의 여러 강변”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전쟁 포로로 끌려온 것이다.
바벨론 땅은, 처음에 애굽 땅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물론, 애굽땅에는 주님의 인도-보호하심따라 당당히 이주하였었지만) 그 백성의 속박의 집이 되었다.
그들의 정복자들은 그들을 거기에서 노역을 시킬 목적으로 그들을 “강변”에 숙영케 했다. 그리하여 자기들의 갤리선(galley, 노예들이 젓는 전함)에서 일하게 했다.
아마도 그들이 생각에는 가장 나쁜 장소라 여겨지는 곳으로서 그곳을 선정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곳은 슬픈 영혼에게는 차라리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그들이 거기에 집을 지어야 한다면(렘 29:5), 그곳은 도시나 군집하는 장소가 아니라, 그들이 눈물을 물줄기에 섞을 수 있는 고독한 장소, 즉 강변에 짓는 것이 된다.
우리는 그들이 지금, “그발 강”(겔 1:3)가와 또 “을래 강변”(단 8:2)에 있음을 볼 수 있다.
2. 그들은 “앉아서” 그들의 불행을 [곰곰이] 숙고하면서 [거룩한!!...하나님이 그토록 바라시던대로 통회와 자복의]슬픔에 빠져 있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속박 속에서 “혼자 앉아서 잠잠하고 입을 티끌에 대는 것”(애 3:28-29)을 가르쳤다.
“우리는 머무르기를 기대하며 만족해하는 자들처럼 앉아 있었다.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3. 시온에 대한 생각으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를 놀라게 하는 문제에 의해 우는 그런 갑작스런 고통의 눈물이 아니었고, 생각이 깊은 [죄를 통회와 자복함 + 회복의 언약말씀 앙망함의]눈물이었다
(우리는 “앉아서 울었도다”).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우리는 주의 성전이 그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워졌던 바,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하나님의 집에 대한 그들의 애정이 그들 자신의 집, 궁전, 도성에 대한 관심을 삼켜버렸다.
[보라..그들의 관심을!!]그들은 그들이 시온의 궁성에서 가졌던 시온의 옛날 영광과 만족을 기억했다(애 1:7).
“예루살렘이 환난과 핍박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생각함이여”(42:4).
그들은 현재의 시온의 황폐를 기억했고, 하나님의 긍휼의 때가 오면 황폐함이 사라진다는 좋은 표징을 살펴보며, “[주께서는]그 티끌도 연휼히 여기시는 것을” 기억했다(102:13-14).
4. 그들은 음악 기구들을 걸어놓았다(2절).
“그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도다.”
(1) 그들은 [평소 일상의] 오락과 접대를 위해 수금을 사용했다. 그들은 이것들을 멀리 치웠다.
왜냐하면 지금 시기는 그것들이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 심판의 때, 하나님께서 울고 통곡하라고 부르신 때이기 때문이다(사 22:12).
그리고 그들의 영이 슬프기 때문에 수금을 사용할 마음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들은 저희의 슬픔을 덜기 위해서 악기를 사용할 목적으로 수금을 지니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러나 슬픔이 너무 커서 실행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음악은 어떤 사람들을 슬프게 하기도 한다. 슬픈 마음에 노래를 부르는 것은 마치 질산칼리에 식초를 침과 같다.
(2) 그들은 하나님의 예배에 수금, 즉 레위인들의 수금을 사용했다.
그들은 이것을 버리지 않고 다시 사용할 때가 오기를 소망했다. 단지 현재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곁에 둔 것뿐이다.
하나님은 수금을 중지시키고, “너의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하게” 하라고 명하셨다(암 8:10). 모든 것은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때를 따라야 아름다운 법이다.
그들은 저희의 수금을 숲 속이나 구멍에 감추어두지 않았다. 그것을 보이는 곳에 걸었다. 그것을 봄으로써 이 슬픈 변화에 대해 [소망으로 암망하는 믿음으로] 대처하려고 했다.
그러나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아무래도 그들은 잘못한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 위에 초월적 주권자이시기에, 영생지존전지전능하신, 영광의] 하나님을 찬양함은 [상황-환경이나] 계절을 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희노애락의]모든 일에 [참되게] 감사하는 것”이 그의 뜻이기 때문이다(사 24:15-16).....((언제 어디서나, 모든 상황속에서 주께 감사하라!!...아들아, 이럴 수가 있겠느냐??))
Ⅱ. 저희 대적자들은 그들이 이러한 슬픈 상황에 있을 때에 악기를 남용했다(3절).
그들이 자기들의 나라로 “그들을 사로잡아”가고, 포로의 땅을 “황폐케” 하며, 그들로부터 적은 것을 탈취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들의 괴로움을 더하기 위해 그들에게 모욕을 주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기쁨과 노래를 청했다.”
1. 매우 야만적이며 비인도적인 태도였다.
[오직 선하심-인자하심-진실무망하신 하나님, 아가페사랑의 주님 패러다임따라 동행하라!!]
불행에 처한 적이라 할지라도 긍휼히 여기고 [존중하라!!]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고난 중에 있는 자들을 나무라거나 곡조를 잃어버린 자들에게 이전의 즐거움으로 혹은 현재의 슬픔으로 [승자를 위해 축하하며]기뻐하라고 응징하는 것은 비열하고 더러운 정신이다.
이런 태도는 고난받는 자들에게 고난을 더하는 것이다.
2. 매우 모독적이며 불경건한 태도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시온 노래” 외에 다른 노래를 청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러한 요구에서 하나님을 겨우 벨사살 정도로 간주했다.
그때에 벨사살은 성전 기명으로 포도주를 마셨다. 그들의 대적자들은 “저희의 안식일을 조롱했다”(애 1:7).
Ⅲ. 그들은 인내로 이러한 만용을 참았다(4절).
그들은 수금을 멀리 두고 다시 잡으려 하지 않았다. 자비를 베풀도록 환심을 사기 위해 수금을 켜지 않았다.
[오직 사려분별-지각과 명철, 총명과 이해력을 통한 통찰 통해 깨닫는 바] 불경하게 조롱하는 자들에게 [득의양양한]기쁨을 주지 말아야 하고,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저희의 어리석음을 따르는 미련한 자들에게 응하지 않으려 했다.
다윗은 “악인이 그 앞에 있을 때에” 신중하게 처신해 “선한 말도 발하지 아니하였다”(39:1-2). 그는 말한 것이 우습게 되며, 조롱거리가 됨을 잘 알았다.
그들이 제시한 이유는 매우 겸손하고 경건하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그들은 “우리가 이렇게 큰 슬픔 중에 있는데 어떻게 노래할 수 있을까?” 하고 말하지 않았다.
(때와 장소, 처지, 감정에 합당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생하시는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떠한가 하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였다면 아마도 그들은 주인들이 억지로 노래를 시킬 때 부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여호와의 노래”다. 거룩한 것이다. 성전의 예배에만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상들이 있는 이방 땅에서 그것을 감히 부를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 합당한 어떤 것을 가지고 일상적인 쾌락에, 더욱이 모독적인 쾌락에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때때로 신앙적인 말에 의해서는 물론 신앙적인 침묵에 의해서도 영광을 받으신다.
Ⅳ. 그들은 바벨론에 있을지라도 계속되는 사랑으로 그들 제전의 도성 예루살렘을 기억했다.
저희 대적자들이 예루살렘을 과장해서 말하거나 심지어는 더러운 말을 해서 희롱할지라도 예루살렘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조금도 감소되지 않았다.
그들이 그렇게 조롱해도 결코 조롱당하지 않을 것이다(5-6절).
다음과 같은 것을 관찰해 보자.
1. 이 경건한 포로들이 [거의 70여년간] 어떻게 예루살렘에 대한 애정을 유지했는가?
(1) 그들의 머리는 예루살렘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이 항상 그들의 마음속에 있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잊지 않았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오랫동안 떠나 있어도 잊지 않았다.
그들 중에 많은 자가 기록된 것과 성서에서 읽은 것 외에는 예루살렘을 본 적도 없고 어떤 것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손바닥에 새겨졌다.
그들 앞에 파멸이 계속 닥쳐온다고 해도 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때가 이르면 예루살렘이 회복되리라는 약속에 대한 그들의 신앙의 증거였다.
[다니엘이 그랬듯이]그들은 일상기도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예루살렘을 잊을 수 있었겠는가?
((예수를 보지 못하고 믿었고, 보지 않고서도 사랑하는 이들이여 그대들도 또한 명심하며 기억하라!!))..... [벧전 1:8, 9] *8.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2) 그들의 마음은 예루살렘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 찼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좋아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루살렘을 기억했고, 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자들은 그를 위해서 예루살렘을 그들의 즐거움으로 삼고, 가장 큰 즐거움이 무엇이라 할지라도 그것보다 예루살렘을 더 좋아한다.
예루살렘은 그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다.
경건한 사람은 어떤 개인적인 만족이나 희열보다도 공동의 유익을 더 좋아한다.
2. 그들이 이러한 애정을 어떻게 견고하게 지키기로 결심했는가?
그들이 실패했다면 스스로 자신들을 불행의 엄숙한 저주로 표현했을 것이다.
"내가 조국의 종교를 잊고서 바벨론의 아들들을 기쁘게 하고 바벨론의 신들을 찬양하기 위해 내 노래와 수금을 사용한다면 나로 하여금 노래하며 수금을 켜는 것을 영원히 할 수 없게 하소서.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노련한 음악가의 손은 그 손이 떨리지 않는 한 그 재주를 잊지 않는다).
아니, 내가 어디 있든지 예루살렘을 위해 선한 말을 하지 못한다면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그들은 바벨론 사람들 가운데서 시온의 노래를 감히 부르지 않을지라도 그 노래를 잊을 수는 없다.
현재의 속박이 벗겨지자마자 그들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과 같이 쉽게 노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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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돔과 바벨론의 멸망을 전망함(시 137:7-9)
바벨론에 있던 경건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파멸에 대한 생각으로 고심하고서, 여기서는 완고하고 무자비한 대적자들의 멸망을 전망하면서 기뻐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쁨은 복수의 정신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그 나라의 영화를 향한 거룩한 정열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Ⅰ. 에돔 사람들이 확실히 고려되고, 예루살렘의 파괴에 참여한 모든 다른 나라들이 고려될 것이다.
그들은 도왔고 선동했으며, “고난을 더하였고”(슥 1:15) 승리감에 차 있었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해 받던 날에, 훼파하라 훼파하라. 그 기초까지 훼파하라”고 말했다. “무너뜨리라 무너뜨리라. 돌 위에 돌이 남아 있지 않도록 하라”고 외쳤다.
그들은 이미 자극이 필요 없을 정도로 난폭하게 된 갈대아 군대를 더욱 격렬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수치를 주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제거되어야 할 백성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때에 저희의 이웃나라들은 그들에게 그렇게 악의를 품었다.
이 모든 것은 야곱에 대한 에서의 옛 반감의 결과였다. 야곱이 에서로부터 이삭의 장자권과 축복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여자의 자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 있었던 더욱 고대의 적대감의 결과였다.
“여호와여, 기억하소서”라고 시편 저자는 말한다. 그 말은 그들에 대한 그의 정의에 호소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힘이 있다고 할지라도 스스로 복수하는 행위는 피해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복수는 내게 속한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이에게 맡겨야 한다.
재난을 보고 기뻐하는 자들, 특히 예루살렘의 재난을 보고 기뻐하는 자들은 벌을 피할 수 없다.
선한 백성들을 박해하는 자들과 동맹하고, 박해자들을 부추기며, 그들과 함께 앉아서 그들이 하는 것을 기뻐하는 자들은 확실히 그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 대해 그 모두를 기억하실 것이다.
Ⅱ. 바벨론이 주요 대상이다.
바벨론은 떨리는 잔과 그 잔재를 마시는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8-9절).
“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진리의 성경에 의해서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너는 교만하고 확고하다. “너는 멸망당할 것이다.”
혹은(하몬드 박사가 해석하는 대로) “너는 멸망자이다. 파괴자들은 파괴당할 것이다”(계 13:10).
그리고 아마도 “멸망의 아들”(살후 2:3)이라고 불린 죄의 사람, 신약 바벨론의 머리는 이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완전한 멸망으로 예언된 바벨론의 멸망(너는 “멸망당할 것이다”)은 다음과 같이 언급되었다.
1. 정당한 멸망으로 언급되어 있다.
바벨론은 그 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너는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받을 것이다. 우리가 너희에게 당한 것처럼 파괴자들에 의해서 야만적으로 이용될 것이다(계 18:6 참조).
권세를 가졌을 때 자비를 보이지 않은 자들로 하여금 자비를 기대하지 말도록 해야 한다.
2. 완전한 멸망으로 언급되어 있다.
바벨론의 아주 어린 자라도 강풍이 닥치고 모두 칼날 앞에 서게 될 때, 포악하고 무자비한 정복자에 의해 던져지게 될 것이다.
어린것들이 멸망하게 되면 아무도 도망할 수 없다. 그들은 다음 세대의 근원이다. 그들이 근절된다면 파멸은 전체적인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멸망과 같이 종국적인 것이 된다.
마치 맷돌이 바다에 가라앉고 떠오르지 않는 것과 같다.
3. 그 도구에 대한 영광을 반영하는 파멸로 언급되어 있다.
그것을 행하는 자는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일을 행한 고레스를 그의 “종”, 그의 “목자”, 그의 “기름부은 자”(사 44:28, 45:1), 그리고 그의 “거룩히 구별한 자”(사 13:3)로 고용된 용사라고 부르신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확장을 위해 길을 예비한다.
어떤 방법으로든 그 일에 봉사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 신약의 바벨론의 멸망은 모든 성도들의 승리가 될 것이다(계 19: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