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역개정]시129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주를앙모하는자354.환난과핍박중에도336. 십자가를내가지고341.죄에서자유를얻게함은268....예수결박푸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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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구속자, 구속하시는 여호와====@구속[무름(속량)/자유]회복---속전(지속적으로 정결케 하는 보혈의 능력)--보수./보응/심판
la'G:(1350, 가알) 되 사다, 속량하다, 구속하다, 근친의 역할을 행하다 [구속자 redeemer..근친/근족/혈연자 =고엘]
가알(동사)은 기본어근이며, '되사다, 도로 찾다, 속량하다, 구속하다 redeem, 근친 역할(권리, 의무)을 행하다'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어근은 '자기 친족을 어려움이나 위험에서 구하다'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 어근과 매우 유사한 어근 파다([d"P; , 6308): 구속하다 redeem) 사이의 한 가지 차이점은, 일반적으로 가알(la'G: , 1350)의 강조점이 구속자의 자격과 행함에 있는데, 반드시 근친이어야 하며, 근친의 특권이나 의무는 다름아닌 속량에 있다는 것이다.((JC가 바로 그러하시다..그는 태초이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신 아들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이미 예고된 대로, 참사람으로서 성육신하셨고 인성을 가지셨기에 [죄로 인해 자기의 모든 것을 사탄에게 넘겨주고 파산한 자들인]우리의 피를 나눈 근친/근족으로서 모든 면에서 참된 자격과 능력을 갖추신 유일무이한 고엘이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00회 이상 나오며, 칼형과 니팔형으로만 사용되었다.
가알은 착하고 진실한 사람이 자기의 친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포함하는 4개의 기본적인 상황에서 사용되었다.
(a) 첫째로, 가알은 오경의 법령에서 궁핍한 때에 판 밭을 되사는 것이나 가난할 때 자신을 판 이스라엘인 노예를 자유롭게 하는 것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합당한 대가를 치르고 되사서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바로 그대로 각 사람에게 배정/배분된 대로 모든 것을 돌려주고 모든 권리를 회복시켜 지고지선의 진복 누림의 바탕을 제공하여 주는 구속의 일]로서 이런 매입과 무르는 일은 근친의 의무였다(레 25:25-54).
레 25:25에서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라고 하였다.
물론, 만약에 자신이 부유하게 되면 그 사람 자신이 그것을 '무를' 것이다(레 25:26).
한편, 가난한 자는 기업만이아니라 자기 자신을 동족 이스라엘인에게나(레 25:39)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타국인(레 25:47)에게 팔기도 하였다.
그를 속량할 책임은 가장 가까운 친척 - 형제, 삼촌, 사촌들, 가족의 혈족 - 에게 있었다(레 25:25, 레 25:48, 레 25:49).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친척을 속량한 redeemed 자(혈연자)는 '근족 - 구속자'로 알려져 있었다. (참조: EDBW).
---가난한 자의 구제에 관한 가장 유명한 실례는 수혼법에 대한 구약성경의 증거가 가장 광범위하게 미치는 룻기에 있는 것 같다.
신 25:5-10에 의하면, 남편의 형제는 후사 없는 과부를 취하여서 씨를 영속시키고, 남자 후손과 결부되어 있는 땅의 계승을 보증해야 했다.
여기 [수혼법의 실행 의무]에서 그것을 실행하는 근친은 야밤이라고 불리어지며, 어근 가알은 사용되지 않는다.
....룻의 상황에서는 두 가지 것들, 즉 밭을 되사는 것과 수혼이 언급된다. 근친은 밭을 사는 것을 기꺼워했지만, 룻과 결혼하는 것은 기꺼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의 요지는 나오미가 가난하여 밭을 팔 수 밖에 없었을 때, 근친은 그녀를 위해 그 밭을 되사야 했다는 데 있다. 그는 후사 없는 형제의 과부를 위해서 이 일을 기꺼이 하려 했지만, 그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그 근본을 모르는] 룻과 결혼하여 그들의 기업을 지속시킬 자손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그는 거부하였으며 여기에 보아스가 개입하였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것, 즉 친족과 수혼은 구별되어야 한다. 고엘(구속자)이란 단어는 후자의 제도를 가리키지 않는다.
....레게트(Leggett)는 룻기에 구속적이고 메시야적인 유형론의 주제가 들어있다고 보았다.
...."고엘(goel)로서의 보아스의 행동들에서 우리는 보아스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가 예시되어 있음을 보았다. 보아스가 구속의 권리를 소유하였으면서도 분명히 룻을 위하여 개입할 의무(까지)는 없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보라...룻은 나오미의 견해를 따라서 겸손하게 자신을 신부로 취하여 후사를 낳도록 해 달라는 뜻으로 보아스의 이불을 들추고 눕는다!!...겸손과 순종의 극치이다!!))
....보아스가 이 가난한 과부들의 곤경을 보았을 때 그의 생애가 여호와와 여호와의 율법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었으므로 그들을 구원하러 왔던 것과 같이 메시야의 경우도 그의 생애가 하나님의 법에 의해 지배되고 또한 그가 가난한 자들과 억압 받는 자들을 공정하고 정당하게 대우하실 것이라는 사실이 예언되었다(시 72:2, 시 72:4, 시 72:12, 시 72:13, 사 11:4).
(b) 둘째로, 가알은 재산이나 여호와께 바쳐진 희생제물 아닌 짐승들을 무르는 것, 혹은 부정한 짐승들의 첫 소산을 무르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레 27:11-33).
이 [속전!!]사상은 인간이 교환물로 그에 상응하는 것을 여호와께 바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속전은 부정직한 교환을 피하기 위해 약간의 추가 몫이 제공되었다. 이런 경우에 무르는 자는 친족이 아니라 재산의 주인이었다.
(c) 셋째로, 가알은 살해당한 사람을 대신하여 "피의 보수자"(RSV '보복자' revenger)가 되는 가장 가까운 친족을 언급하는데 사용되며, 칼 분사 고엘로 나타난다.
고엘은 구속자이며, 이 구속자는 '피의 보수자'로 불리우는데, 그의 임무는 자신의 친척을 살해한 자를 처벌하는 것이다(신 19:6).
이 사상은 가까운 친족이 생명에는 생명으로 지불해야 한다는 것임에 틀림없다.
돈을 지불함으로서 집을 재매입하거나 노예를 속량할 수 있는 것처럼, 친족의 잃어버린 생명은 마땅히 살인자의 그에 상응하는 생명으로 지불되어야 한다.
친족은 피의 보수자이다. 이런 사형 제도는 피비린내 나는 숙원과 구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고엘은 죄없는 사형 집행인이었으며 따라서 살해되어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보수자'라는 의미로 12회 나온다(민 35:12, 민 35:19, 민 35:21, 민 35:24, 민 35:25, 민 35:27, 신 19:6, 신 19:12, 수 20:3, 수 20:5, 수 20:9).(참조: R. L. Harris).
(d) 넷째로, 가알은 하나님께서 '구속자'로서 '구속하시는 행위'에 대해 사용되었다.
....출 6:6에서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라고 약속하신다(출 6:6, 참조: 시 77:15).
이스라엘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출 15:13). "하나님이 저희의 반석이시요 지존하신 하나님이 저희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시 78:35).
....이사야서에는 '구속자'라는 단어가 하나님을 지칭하여 13회 나오는데 모두 사 41- 63장에서 사용되었다. 가알은 하나님에 대해 9회 사용되었으며, 사 43:1에서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가알은 애굽으로부터의 구원(사 51:10, 사 63:9)과 바벨론의 포로생활로부터의 구원(사 48:20, 사 52:3, 사 52:9, 사 62:12)을 언급하는데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의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사 41:14)이며 '너희의 왕 이스라엘의 창조주'(사 43:14, 사 43:15)이며 '만군의 여호와'(사 44:6)이며 '야곱의 전능자'(사 49:26)이다. 그의 구원에 참예하는 자는 '구속 받은 자'이다(사 35:9).
....시편에는 종종 영적인 구원이 육적인 구원과 병행되어 나온다. 예를 들면 시 69:18., "내 영혼에게 가까이 하사 구속하시며 내 원수를 인하여 나를 속량하소서". 시 103:2, 시 103:4.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윤택을 잊지 말찌어다...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이 그러하다(참조: EDBW).
[욥19:25,26,27]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25. "And as for me, I know that my Redeemer lives, And at the last He will take His stand on the earth. *26. "Even after my skin is destroyed, Yet from my flesh I shall see God; *27.Whom I myself shall behold, And whom my eyes shall see and not another.
....유명한 구절, 욥 19:25에서 고엘이란 단어는 흠정역성경에서 '구속자' redeemer로 번역되며 어떤 이들은 이 단어가 속죄의 사역을 하러 오실 그리스도의 오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히브리어 "파다"에 의해 더욱 특징적으로 표현될 것이다.
....이제 욥 19:25에 나오는 이 단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결국에는 욥을 죽음의 먼지에서 구속할 친구이자 친족으로서의 하나님의 사역과 더욱 정확하게 관련된다. 욥 19:26의 난해한 어구, "이 가죽을 벗은 후에"는 다른 모음들과 함께 "내가 깨어난 후에"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NIV 각주와 욥 14:12-14을 참조하라. 욥 14:12-14에서 부활에 관한 욥의 질문은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그를 돌아보시며 욥은 나무처럼 제 2의 성장을 할 것이라는 그의 소망에 의해 절정에 달하게 된다 - 욥 14:14의 할리파는 욥 14:7의 할랍에 대한 응답이다). 어쨌든 욥은 마침내 자기 자신의 눈으로 자기의 고엘이신 하나님을 볼 것으로 기대한다(참조: R. L. Harris).
..[[사59:20,21]]..*2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21.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9:24]] *23.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24.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미가6:8]]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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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괴수 죄성 지닌 자, 세상살이는 메섹과 게달의 장막에 사는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 탈취와 노략의 쟁투, 곧 환난의 날이라, 오직 구주JC께 부르짖어 그분안에 충만히 거하라.
[시120] *1.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2.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3. 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 *4. 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숯불이리로다 *5. 메섹에 머물며 게달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 *6.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 *7.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
--이제, 마음 열어, 중심으로 동행하시는 영원반석/성채/산성-보혜사-인도하시며 지키시는 목자, 엘에제르 HS와 동행하라
[시121] *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3.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7.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보라, 그리스도를 살라, 사람들로 하여금 평강과 형통 허락하시는 네안의 여호와를 감사하며 흠모하고 기리게 하라, 자원하여 나아와 공예배에 함께 참석하기를 원하도록 만들라.
[시122편] *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2.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3.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4.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5. 거기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 *6.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7.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8.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9.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네눈을 [세인의 조소와 멸시로부터]구주 JC께 돌려 중심으로 산 믿음 발휘함으로 앙망하라, 긍휼 구하라, 정복자 그 이상의 존재, , 허락하신 영생안에서 모든 이김을 감사하라
[시123편] *1.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2.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3.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4.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엘에제르, 임마누엘 여호와께 감사하라...[세인의 약탈-침노와 멸절로부터] 말씀의 뜻대로 행하시도다.
[시124] *1.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였으랴 *2.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3.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우리에게 맹렬하여 우리를 산채로 삼켰을 것이며 *4. 그 때에 물이 우리를 휩쓸며 시내가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며 *5. 그 때에 넘치는 물이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 할 것이로다 *6. 우리를 내주어 그들의 이에 씹히지 아니하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7.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8.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지고지선의 진복은 오직 구주로 사는 (선을 행하며 정직하게 동행하는) 기독자들은 여호와의 선대하심/평강형통 깨닫고 감사하라..
[시125편] *1.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2.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3. 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들로 하여금 죄악에 손을 대지 아니하게 함이로다 *4. 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 *5.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부활-오순절-해방/회복]구속 은혜 기쁨안에서: 섭리의 때, 해방 감격 = 전존재로 누리는 영적 기쁨과 감사, 실제적 형통 [모든 이들이 주께 돌이킴] 회복/부흥 추구 실행의 긍휼 간구
[시126편] *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2.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3.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솔로몬에게 깨닫게 하신 말씀--친히 집과 가정을 세우며 지키시는 전능-은혜 구주를 높이며 친밀한 하나됨 이루어 따르라, 자랑-기쁨의 가정과 기업된 자녀들이여
[시127편] (솔로몬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3.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4.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5.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 경외함 : 야다-에셰르-바라크, 구주영접/영생부활생명의 은혜, 믿음소망사랑오래참음기쁨평강-감사/형통/번성/번영/창대함--
[시128편] *1.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2.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3.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4.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5.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6.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세상 악인들이 주님의 기독자, 영적이스라엘을 미워하며 괴롭히나 결코 이기지 못하리라..JC안에서 소명과 사명 이루라---
1.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도다(차라르)
2.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야콜) 못하였도다
3. 밭 가는(하라쉬)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마아나) 길게 지었도다
4.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찻디크) 악인들의 줄을(아보트) 끊으셨도다(카자츠)
5.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샤네) 자들은 수치를 당하여(부쉬) 물러갈지어다(수그)
6. 그들은 지붕의 풀과 같을지어다 그것은 자라기(살라프) 전에 마르는(야베쉬) 것이라
7. 이런 것은 베는(카차르) 자의 손과 묶는(아마르) 자의 품에 차지(말레) 아니하나니
8. 지나가는 자들도 여호와의 복이(베라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거나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한다(바라크) 하지 아니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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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새번역]시129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1.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이스라엘아, 이렇게 고백하여라. "내가 어릴 때부터, 나의 원수들이 여러 번 나를 잔인하게 박해했다.
2. 비록 내가 어릴 때부터, 내 원수들이 여러 번 나를 잔인하게 박해했으나, 그들은 나를 이겨 내지를 못했다.
3. 밭을 가는 사람이 밭을 갈아엎듯 그들이 나의 등을 갈아서, 거기에다가 고랑을 길게 냈으나,
4. 의로우신 주께서 악인의 사슬을 끊으시고, 나를 풀어 주셨다."
5. 시온을 미워하는 사람은 그 어느 누구나, 수치를 당하고 물러가고 만다.
6. 지붕 위의 풀같이 되어, 자라기도 전에 말라 버리고 만다.
7. 베는 사람의 품에도 차지 않고, 묶는 사람의 품에도 차지 않아
8. 지나가는 사람 가운데 어느 누구도 "주께서 너희에게 복을 베푸시기를 빈다" 하지 아니하며, "주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한다" 하지도 아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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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V]시129
1. Many a time have they afflicted me from my youth, may Israel now say:
2. Many a time have they afflicted me from my youth: yet they have not prevailed against me.
3. The plowers plowed upon my back: they made long their furrows.
4. The LORD is righteous: he hath cut asunder the cords of the wicked.
5. Let them all be confounded and turned back that hate Zion.
6. Let them be as the grass upon the housetops, which withereth afore it groweth up:
7. Wherewith the mower filleth not his hand; nor he that bindeth sheaves his bosom.
8. Neither do they which go by say, The blessing of the LORD be upon you: we bless you in the name of the LORD.
==시129개요===
이 시편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대중적 관심에 관련되어 있다.
이 시편이 기록된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아마도 그들이 바벨론 포로로 있을 때, 또는 그들의 귀환 시기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1. 그들은 그들이 대대로 겪었던 많은 고난으로부터 하나님께서 그들과 선조들에게 행하신 이전의 구원 사건에 대해 감사함으로써 회상하고 있다(1-4).
2. 그들은 믿음의 기도로써 시온의 모든 적들의 파멸을 전망하고 있다(5-8).
---우리는 이 시편을 노래하면서, 거센 폭풍우에 시달리고 많은 적들에 의해 위협받는 구약의 이스라엘과 같이, 그 두 가지 방법을 복음의 이스라엘에 적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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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의 행복(시 129:1-4)
하나님의 교회는 여러 세대에 걸쳐 이제는 늙고 백발의 머리를 한 개인과 같이 말해지고 있으며, 또한 이 시편에서도 그렇게 말해지고 있다.
전날을 회고하며, 지난 때를 반성하는 한 개인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렇게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는다.
Ⅰ. 교회가 지상의 적들에 의해 종종 크게 핍박을 받아왔다.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나는 다른 백성보다 더 많이 핍박받았고, “무늬 있는 매”와 같아서 “매들이 에워싸”(렘 12:9) 쪼임을 당했다.
저희가 저희의 죄로 인해 고난을 받게 된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벌하신 것은 그들을 위해서였다.
그들의 이웃이 이스라엘을 미워하고 박해한 것은 이스라엘 언약의 특수성과 그 신앙의 유일성 때문이었다. “저희가 나의 소시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게 하였도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목해 보자.
1. 하나님의 백성은 항상 많은 적을 갖고 있으며, 교회의 상황은 그 소시부터 자주 고난받아 왔다.
이스라엘은 초기 애굽에 있을 때, 사사 시대 이래로 다소 고난을 받았다.
복음의 교회는 시작된 이래로 처음부터 고난을 받아왔다.
교회는 소시부터 이 멍에를 대부분 담당했고, 초대교회가 그 아래서 신음하던 열 가지의 박해를 증언하고 있다. “밭가는 자가 내 등에 갈았도다”(3절).
우리는 “악인의 권세가 의인의 업에 미친다”(125:3)는 것을 읽은 바 있는데, 거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정하는 쟁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사악한 자의 쟁기가 의로운 자의 등에 미치는 것을 읽는다.
우리는 여기에서 오히려 권세를 찾고자 기대한다. 그러나 여기에 나타난 은유는 “십자가에 못박힘”을 말해 주는 것 같다.
양자의 의미는 동일하며, 매우 자명하다. 하나님 백성의 적들이 항상 그들을 야만적으로 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농부가 쟁기로 땅을 갈 듯이 그들을 괴롭히고 파괴해, 할 수 있는 모든 악행을 저질렀다.
그리하여 땅을, 오랫동안 버텨온 땅을 마멸시키고(우리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마음에서 평온을 빼앗아 “지고자의 성도들을 마멸시켰다.”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갈도록 허용하셨을 때, 그는 그 백성의 유익을 위해 그것을 의도하셨다.
이와 같이 휴경지를 파괴함은 그의 은총을 저들에게 뿌려서 그들에게서 좋은 열매의 추수를 거두려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들은 그렇게 생각지 않았으며, 그들의 마음도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사 10:7). “그들은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그렇게 행할 때, 그들은 교회의 파멸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아무것도 노리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 백성의 등에 이룬 “고랑”이 이스라엘 백성과의 싸움이라고 이해한다. 그들은 “재단사들이 내 등을 잘랐다”고 풀이한다.
성도들은 종종 잔악한 채찍과 악독한 조롱의 시험을 받는다(아마도 포로기 때에 받은 채찍을 의미할 것이며, 혀의 채찍과 매를 의미하는 조롱일 것이다. 히 11:36).
그것은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는”(사 50:6)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이스라엘의 도성을 황폐케 함을 언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같이 갊을 당하리라”(미 3:12).
2. 교회는 항상 은혜롭게 하늘에 있는 후원자에 의해 구원을 받았다.
(1) 적들의 계책은 패배 당했다.
그들이 파멸시키려고 교회를 괴롭혔지만, 그들은 목적을 성취하지 못했다.
교회는 많은 강풍을 만났고, 많은 충격을 받았으며, 불사름을 당했고, 괴로움을 당했지만,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들은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태풍으로 배가 뛰고, 큰 파도와 물결이 배를 뒤덮을 때 이 배가 바다에서 어떻게 견뎠는지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셨다. 그래서 지옥의 문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영원히 이기지 못한다.
(2) 적들의 능력이 끊어졌다.
하나님께서 “악인의 줄을 끊으셨도다.”
하나님께서 바퀴와 쟁기 자국을 끊으시고, 저희의 밭가는 일을 중지시키셨다.
그들의 매를 끊으시고, 채찍질을 못하게 하셨다. 그들이 함께 연합한 결속을 끊으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포로의 속박에서 끊어내셨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도로 악한 자들이 교회에 대해 해를 끼치려고 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시며, 그들의 계획을 부끄러워하게 하신다.
“여호와께서 의로우사”라는 말씀은 교회의 고난 혹은 구원에 대해 언급하는 것일 수 있다.
① 고난받은 이스라엘에 대해 “여호와께서 의로우시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의 적들이 아무리 불의할지라도 “우리가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다”(느 9:33)고 고백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② 파멸되어도 고난받지 않는 이스라엘에 대해 “여호와께서 의로우시다.”
왜냐하면 그가 백성을 스스로 보존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과 같이 선하시다.
그는 그들의 박해자를 생각하시고 그들에게 “보상”하시는 일에서도 의로우시다(살후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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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시 129:5-8)
시편 저자는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 지옥만큼 깊이 놓인 많은 계획을 패배시킨 것을 보고 승리의 개가를 올리면서 드보라가 노래한 것처럼 이 시편을 결론짓고 있다.
“여호와여, 주의 대적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소서”(삿 5:31).
Ⅰ. 시온을 미워하며, 시온의 하나님과 그에 대한 예배와 예배하는 자들을 미워하는 많은 자들이 있다.
신앙과 경건한 백성에 대해 반감을 갖고 그것을 파멸시키려고 추구하는 많은 자들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상에서 교회를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하는 자들이 있다.
Ⅱ. 우리는 교회에 대한 그들의 모든 시도가 좌절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들의 계획과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게 되어 “수치를 당하여 물러가게”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들이 모두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하는 말은 그들이 반드시 수치를 당할 것임을 의미한다.
저주받고 예측된 혼동이 비유로 묘사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무거운 종려나무나 푸르고 열매 맺는 감람나무처럼 번창하는 반면에, 적들은 “지붕의 풀과 같이 마를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 그들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풀과 같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사 51:12).
시온에 대적하는 많은 적들이 파멸을 위해 노력하지만, 그들은 지붕의 풀과 같이 적고 짧고 신 냄새가 나고, 쓸데없는 지붕의 풀과 같이 경멸 당하며,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
1. 그것은 재빨리 사라진다.
성숙하게 “자라기 전에”, 뿌리를 내리기 전에 “마르는 것이라.”
그 자리가 높을수록, 아마도 교만한 자리에 있을수록 태양의 내리쬐는 열기에 노출되어 결국 더욱 쉽게 마르게 된다.
어떤 이들은 “그것은 뽑히기 전에 마르는 것이라”고 읽는다. 하나님의 대적들은 저절로 마르며, 하나님의 심판 전에 사라진다.
2.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쓸모가 없다.
그들은 지상의 무익한 짐에 지나지 않으며, 시온에 대한 저희의 계략이 무르익어 어떤 자의 머리에 떠오른다고 해도, 저희가 스스로 약속한 것이 무엇일지라도 그들은 농부가 지붕의 풀과 같이 여기는 것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한다. “심한 슬픔의 날에 저희의 농작물은 없어질 것이다”(사 17:11).
Ⅲ. 어떤 현명한 자도 베는 자나 묶는 자를 축복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다(8절).
1. 낯선 자와 여행인에게 인사하며, 좋은 하루가 되기를 소원하는 고대의 훌륭한 관습이 있었다.
그때에는 특히 추수하는 일꾼의 번영을 위해 기도했다. 보아스도 이와 같이 그의 추수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했다(룻 2:4).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섭리를 감사해야 하며, 우리 이웃에게 우리의 선한 뜻을 증거하고, 그들의 근면을 칭찬해야 한다.
경건하고 정직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경건한 절규로써 하나님을 영접해야 할 것이다.
2. 신앙적인 표현은 거룩한 것들이기 때문에 결코 가볍고 경박한 행동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지붕의 풀을 베는 것은 희롱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에 경의를 표하는 자들은 열심을 자극하는 인사의 일상 형태를 거기에 악용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거룩한 것들이 그렇게 조롱당하지 않아야 되기 때문이다.
3. 방심함으로써 기독자인 우리의 선한 소망을 교회의 적들에게, 교회 멸절을 획책하는 바 그들의 계략에 일임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요이 11).
이것은 아무도 그들을 축복하지 않으며, 그들을 존경하지도 않으리라 함을 의미한다.
더욱이 모든 지혜롭고 선한 백성들이 그들의 수치를 외치며, 그들이 패배 당하도록 하나님께 빌 것임을 의미한다.
성도들의 기도가 그들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내가 그 집을 저주하였노라”(욥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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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r'x;(6887, 차라르) 묶다, 좁다, 속박하다, ~향하여 적의를 보이다
차라르(동사)는 기본 어근이며, (a) '묶다, 매다, 좁다, 인색하다, 속박하다, 고통 중에 있다, 고통을 가하다', (b) '~향하여 적의를 보이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47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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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koy:(3201, 야콜) ~할 수 있다, 우세하다, 이기다, 정복하다
야콜(동사)은 기본어근이며, '할 수 있다 be able, 우세하다, 이기다, 정복하다 prevail, overcome'를 의미한다.
야콜은 70인역본에서 주로 두나마이(dunamai: 나는 ~할 수 있다 I can, am able)로 번역되는데, 이 헬라어 단어는 이스큐오(강하다, 강력하다 be strong, powerful)와 비교해 볼 때, 다소 약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야콜은 신체적, 도덕적, 혹은 종교적 의미에서 '능력'으로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00회 나오며, 그 중에서 약 85가 부정불변화사로 사용되었다. 이 히브리어 단어가 오직 약한 능력만을 나타낼 뿐인데 반해, 아람어 예킬은 큰 능력을 나타내는 것 같다.
(a) '~할 수 있다' be able라는 기본적인 의미는 주로 사람에게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부정적으로) 자기 통제력의 부족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요셉은 자기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다(창 45:1, 참조: 창 45:3). 혹은 이 단어는 모세의 어머니가 더 이상 그를 숨길 수 없게 되었을 때, 상황을 통제하지 못함을 언급한다(출 2:3, 참조: 또한 창 13:6, 출 7:21). 이 단어는 또한 어떤 일을 행할 수 있는 재량, 게다가 부정적으로, 모세의 이적을 모방하지 못하는 마술사들(출 9:11), 그리고 새롭게 거주하게된 땅에서부터 적을 "쫓아내지 못한" 이스라엘의 지파들(예: 수 15:63, 수 17:12, 삿 2:14, 참조: 신 31:2, 사 36:14, 애 1:14)에 대해 사용되었다.
도덕적 혹은 종교적 의미에서, 신 17:15, "타국인을 네 위에 [왕으로] 세우지 말 것이며"에서처럼, 종종 '~해서는 안되며'로 번역되곤 하는 금지의 한계가 있다(신 7:22, 신 12:17, 신 16:5, 신 21:16 등. 모두 칼미완료시제로 나온다). 아마도 인간의 능력을 한정 짓는 하나님의 명령에 관한 가장 인상적인 예는 발람의 언명, "발락이 그 집에 은, 금을 가득히 채워서 내게 줄찌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어...못하겠노라"(민 22:18, 참조: 민 24:13, ASV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능가할 수 없다")일 것이다.
(b) 그렇지만 야콜이 싸우거나 전쟁하는 사람들에게 사용될 때, '이기다, 정복하다'가 이 단어의 정확한 번역이다. 이에 관한 두드러진 예는 야곱이 여호와의 천사와 씨름한 것일 것이다(창 32:25 이하). 천사는 야곱을 이기지 못하였으며, 그 후에 야곱의 이름은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으므로" 이스라엘로 바뀐다.
삼상 17:9에서 골리앗은 사울의 군사들에게 양자택일을 제안한다. "그가 능히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기어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c) 야콜은 신들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대하 32:13-15에서 산헤립은 자기 백성들을 그의 강한 군대로부터 보호해주지 못한 열방의 여러 신들의 무능력을 조소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열방의 신들과 동일하게 취급함으로써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참조: 대하 32:19). 왜냐하면 천군 천사의 여호와, 곧 우주의 군주이신 하나님은 실로 자기의 언약 백성들을 산헤립으로부터 건져내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를 창조하여 유지하시는 역사의 하나님이시며, 그의 권능과 뜻은 민족과 개인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하나님의 능력은 마땅히 멸망해야 할 이스라엘을 위해 중재한 모세에 의해 나타났다. 그러나 이방 민족들이 말할 것은 "여호와가 이 백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에 인도할 능이 없는 고로 광야에서 죽였다"는 것이다(민 14:16, 신 9:28).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구출하시고 구속하실 그의 강한 권능을 나타낸 것은 바로 "주의 크신 능력(베코하카 학가돌)과 주의 펴신 팔"에 의함이다(신 9:29).
신 9:26-29에서 이스라엘인들은 여호와의 큰 코아흐(koah)에 의해 구속되었다. 이 용어는 어근 야콜이 암시하는 것보다 더 강한 용어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 능력의 큰 펼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참조: P. R. GILCHRIST;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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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m'(4618, 마아나) 일터, 밭이랑
마아나(명남)는 아나(hn:[; , 6030)에서 유래했으며, '일터, 경작지, 밭이랑'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회 나오며, 일터(삼상 14:14), 밭이랑(시 129:3)에 대해 사용되었다.(참조: HELOT;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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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j;(2790, 하라쉬) 새기다, 갈다, 궁리(고안)하다, 침묵하다
1. 하라쉬(동사)는 기본어근이며, '파다, 새기다 engrave, 갈다, 경작하다 plow, 궁리하다, 고안하다 devise'를 의미한다. 기본적인 의미는, 금속을 새기는 것, 혹은 땅을 경작하는 것과 같이 어떤 재료 속으로 끼어 드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6회 나오며, 칼, 니팔, 히필형으로 사용되었다.
(a) 칼형에서
① 이 단어는 '새기다'를 의미한다.
하라쉬는 몇 번 금속을 조각하는 것에 대하여 사용되었는데, 예를 들어 솔로몬 왕이 성전 일을 시키려고 부른 두로의 전문 기술공은 놋 일을 하는 '세공인' worker('조각사', 분사)으로 묘사되어 있다(왕상 7:14).
렘 17:1에서 비유적으로, 마음 판에 새기는 것을 묘사한다: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단 뿔에 새겨졌거늘".
② 이 단어는 '갈다, 경작하다'를 의미한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부름을 받았을 때 열두겨리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다고 한다(왕상 19:19). 모세 율법에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라고 되어있다(신 22:10).
'갈다'라는 개념은 또한 비유적으로 사용된다. 이것은 악한 행동을 상징하며(호 10:13) 이스라엘은 악을 '밭 갈았다'고 비난 받는다.
시 129:3에서 이것은 '압제'를 상징하며, 여기서 시편 기자는 "밭 가는 자가 내 등에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라고 울부짖는다.
③ 이 단어는 대체로 악과 연결되어 '궁리하다, 고안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잠언서는 네 이웃에 대하여 "악을 고안하지 말며"(한글개역 - "모해하지 말며", 잠 3:29)라고 말한다. 잠 14:22에서 하라쉬는 악과 선 모두를 언급하는데, "악을 도모하는" 자는 그릇되고 "선을 도모하는" 자는 인자와 진리를 받는다고 한다.
잠 6:14, 잠 6:18, 잠 12:20에서 악을 궁리하거나 고안하는 것을 묘사한다.
(b) 니팔형에서 '경작하다, 감을 당하다'를 의미한다.
미가는 예루살렘이 밭 같이 감(경작)을 당하리라고 예언한다(미 3:12). 렘 26:18에서 미가의 예언을 인용한다.
(c) 히필형에서 이 단어는 삼상 23:9에서 다윗에 대하여(해하기 위해 '고안한', 분사) 계교를 묘사한다: "다윗이 사울의 자기를 해하려 하는 계교를 알고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에봇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고".
2. 하라쉬(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침묵하다, 조용하다, 잠자코 있다, 말 못하다, 벙어리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0회 나오며, 칼형과 히필형으로만 사용되었다.
기본적인 개념은 말하지 않거나 듣지 않는 것으로 인한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이다. 이 단어는 주체는 침묵하는 것을, 객체는 귀먹은 것을 뜻할 수 있다.
(a) 칼형으로 사용될 때는 대체로 '말하는데 있어서 침묵'과 관련된다. 이것은 언제나 하나님과 관련하여 사용되는데, 예를 들어 다윗은 필요의 때에 그를 향하여 "잠잠하지" 말기를 여호와께 요청한다(시 35:22). 이 시편 기자는 시 83:1, H2에서, 하레쉬와 다맘을 병행적으로 사용하여, 이와 유사하게 기도 드린다. 칼형으로는 오직 1회, 분명히 '귀먹다'를 의미하는데, 즉 미 7:16에서 선지자는 열방이 장래의 이스라엘에 대하여 '귀먹을' 것이라고 말한다.
(b) 히필형으로 사용될 때도 대체로 '말하는 데 있어서의 침묵'과 관련되어 나오지만 칼형과 달리, 거의 항상 인간을 가리켜 사용된다.
그러나 그 의미는 칼형과 아주 똑같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의 종은 리브가를 보았을 때 그녀가 바로 하나님께서 이삭의 아내로 선택한 여인이 아닌가 하여 '침묵을 지켰다'('침묵했다')고 한다.
단 욥 11:3에 나오는 히필형은 분명 사역적인 의미를 전달한다. 이 단어가 히필형으로 사용된 실례 중에서 단 한번 '귀먹다'를 의미한다. 즉 블레셋인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자기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을 '멈추지 말라'(문자적으로, '귀 막히지 말라')고 촉구하였다.
(c) 이 단어는 히트파엘형으로 단 한번 나오는데, 재귀적인 의미를 지닌다: "혹이 가사 사람에게 고하여 가로되 삼손이 여기 왔다 하매 곧 그를 에워싸고 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하고 밤새도록 종용히 하며 이르기를 새벽이 되거든 그를 죽이리라 하였더라"(삿 16:2).
(참조: L. J. WOOD;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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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yDIx'(6662, 찻디크) 의로운, 공정한, 올바른
찻디크(형용사)는 '의로운, 올바른, 공정한, 공의로운'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00회 이상 나온다(창 6:9, 스 9:15, 시 116:5, 사 45:21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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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o[}(5688, 아보트) 끈, 줄, 섞어 짠 잎 장식
아보트(명남, 여)는 아바트(tb'[; , 5686)에서 유래했으며, '끈, 줄, 섞어 짠 잎(장식)'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5회 나온다.
(a) 아보트는 '끈, 줄'을 의미한다.
① 결박하는 줄(삿 15:13-14, 삿 16:11-12, 겔 3:25, 겔 4:8, 욥 39:10, 시 118:27).
시 2:3, 시 129:4에서는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세력).
② 끄는 줄,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사 5:18, 호 11:4).
③ 금을 노끈처럼 땋은 것(출 28:14, 출 28:22, 출 39:15, 출 39:17-18), 사슬(출 28:24).
(b) 아보트는 '섞어 짠 잎 장식'에 대해 사용되었다. 겔 19:11, 겔 31:3, 겔 31:10, 겔 31:14에서 백향목에 관해 사용되었는데, 여기서 '구름'을 뜻한다.
(참조: BDB; TW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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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q;(7112, 카차츠) 잘라내다, 베어내다, 끊다
카차츠(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잘라내다, 베어내다, 끊다 cut off'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4회 나온다.
1. 카차흐는 '잘라(베어)내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신 25:12, "너는 그 여인의 손을 찍어 버릴 것이고 네 눈이 그를 불쌍히 보지 말찌니라".
남자의 생식기를 움켜 잡음으로써 그를 욕보인 여인은 비록 그녀의 행위가 자기 남편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손을 잘리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
렘 9:26에서 "그 머리털을 모지게 깎은 자들"(수동분사)이란 표현은 '모서리를 깎아낸 모든 자들', 즉 '귀와 관자놀이 주위의 머리털을 잘라낸 모든 자들'을 가리킨다.
헤로도투스(Herodotus)는 아랍인들에 관하여 말하면서, "그들의 풍습은 관자놀이로부터 떨어져 둥글게 머리를 깎는 것이다"고 말한다. 또한 람세스 3세의 무덤에 있는 여러 민족들을 그린 색칠된 인물상 가운데서 바로 관자놀이 바로 위로 모지게 머리를 깎은 자들을 보게 된다. 이와 같이 바싹 자른 부분 아래의 머리털은 길게 기르도록 허용되었으므로 땋아서 타래진 머리채로 만들었다. 예레미야가 렘 25:23과 렘 49:32에서 암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관습이다. 그들에 대한 금지가 레위법에서 명하여진다(참조: 레 19:27, 레 21:5).
2. 피엘형에서
(a) 이 단어는 '잘라 내거나 찍어 자르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삿 1:6에서 아도니 베섹은 자신이 과거에 타인들을 괴롭힌 그대로 형벌을 받는다: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끊으매". 그는 그들로 하여금 무기를 휴대하거나 빨리 도망갈 수 없게 만들었으며 백성을 지도하거나 그들 앞에서 종교적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을 박탈하였던 것이다.
삼하 4:12에서 다윗은 이스보셋을 참수한 손과 그의 머리를 자기 면전으로 가져온 발을 절단하라고 명령한다: "소년들을 명하매 곧 저희를 죽이고 수족을 베어 헤브론 못가에 매어달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다가 헤브론에서 아브넬의 무덤에 장사하였더라". 그 살인자들의 행위는 물론 숙적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아버지 사울이 그 아들로 계속 이어짐).
(b) 이 단어는 '둘로 자르거나 끊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출 39:3에서 금실을 자른 것을 묘사한다: "금을 얇게 쳐서 오려서 실을 만들어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에 섞어 공교히 짜고".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줄(아마 고삐, 속박)과(시 129:4) 그들의 창(시 46:9)을 꺾을 때 그는 그것들을 산산조각 내 버린다. 금실을, 시 129:4에서 줄을 (둘로) 끊는 것을 묘사한다.
(c) 이 단어는 '조각조각 자르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왕하 24:13에서 느부갓네살이 성전의 금 기명들을 조각조각 자른 것을 묘사한다: "저가 여호와의 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고 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전의 금 기명을 다 훼파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대하 28:24).
그리고 문 등에 입힌 금을 조각조각 잘라 내었다(왕하 18:16). 금(하나님의 영광을 상징?)은 결국 하나님의 직접적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이방 압제자의 손에 공물로 넘겨졌다(왕하 18:16).
3. 푸알형에서 '스스로 자르다'를 의미한다(삿 1:7).(참조: L. J. Coppes;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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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Ec;(8130, 사네) 미워하다, 증오하다 hate
사네(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미워하다, 싫어하다, 혐오(증오)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50회 나오며, 칼, 니팔, 피엘형으로 사용되었다.
사네는 적대적이며 혐오를 받고 경멸 당하는 사람과 사물, 그리고 접촉이나 관계를 가지고 싶지 않은 사람, 사물을 향한 감정적 태도를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랑의 반대말이다. 사랑은 끌어 당기고 결합시키는 반면 미움은 분리시키고 멀리 떨어지게 한다. 미움 받거나 미워하는 사람은 원수나 적으로 간주되며 밉게 생각되고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절기일을 미워하신다. 그는 종교적 모임에 대해 아무런 즐거움도 가지지 않으며 희생 제사를 열납하지 않을 것이다(암 5:17). 왜냐하면 사실상 규정된 이러한 예배의 요소들이 위선과 궤휼 그리고 영적 간음의 가리개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슥 8:17, 참조: 사 1:13-15). 그것들은 우상(신 16:22) 및 죄를 표현하는 기타 수단들(잠 6:16)과 동일한 범주에 속하였다.
우상과 절기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가 사람들에게 향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에서같은 경우이다(말 1:3, 창 27장, 시 5:5, 시 11:5). 매 경우마다 증오받는 사람의 성격과 행위가 표현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단순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죄악적인 사람으로서 그를 대적하며 그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그 자에게 그의 증오의 결과를 안겨준다.
구약성경은 수차에 걸쳐 사람들이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인간이 이런 저런 방법으로 하나님을 향해 사랑과 친절한 감정의 부재 또는 실제적 악의와 증오심을 표현한다(출 20:5, 신 5:9, 대하 19:2, 시 22:8).
보통 구약성경에서 언급된 미움은 인간이 동료 인간에 대해 가지는 적대감, 악의, 혐오감이다. 인간 마음의 부패의 정도와 완악성이, 아내에 대한 남편의 미움(창 29:31, 창 29:33), 형제들 간의 증오(창 37:4), 자매에 대한 형제의 미움(삼하 13:15), 이웃 간의 미움(신 19:11), 가난한 자들 간의 미움(잠 19:7), 아들에 대한 어버이의 미움, 국가들 간의 미움(사 66:5) 등에 의해 표현된다.
하나님께 용납될 수 있는 인간 편에서의 미움도 있다. 사람은 악에 대해 증오심을 가져야 하며 악에서 떠나야 한다. 그러믈 시편 기자는 말한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시 26:5). 이러한 증오는 또한 신자의 여호와께 대한 신뢰감과는 정반대의 대립적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말한다.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를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시 31:6).(참조: G. Van Groningen;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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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WB(954, 부쉬) 부끄러워 하다
부쉬(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부끄러워 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00회 이상 나온다.
1. 칼형에서
(a) '수치스럽게 생각하다(느끼다)'(렘 6:15, 사 19:9, 사 23:4, 사 37:27, 사 45:16, 겔 16:63, 미 7:16, 욜 2:26, 욜 2:27, 왕하 19:26, 겔 9:6, 욥 6:20, 시 6:11 등).
(b) '부끄러워 하다'(렘 2:36, 렘 12:13, 렘 48:13, 사 1:29, 사 20:5, 겔 32:30, 겔 36:32 등).
2. 폴렐형에서
'지연(지체)하다'(출 32:1, 삿 5:28).
3. 히필형에서
'부끄럽게 하다'(시 44:8),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다'(시 119:31, 시 119:116), '부끄러움을 끼치다'(잠 10:5, 잠 12:4, 잠 14:35, 잠 17:2, 잠 19:26, 잠 29:15).
4. 히트파엘형에서
'서로 부끄러워 하다'.
창 2: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참조: BDB).
*부쉬의 기본적인 의미는 '대체로 실패로 인하여, 자기나 혹은 신뢰의 대상이 불명예를 당하다'이다.
부쉬와 그 파생어들은 약간 다른 5가지 방법으로 사용된다.
(a) 첫째로, 이 단어는 '오랜 연기' long delay나 '중단' cessation을 나타내는 관용어로 사용된다. 삿 3:25, 왕하 2:17, 왕하 8:11에서 이 단어는 지나치게 오랫동안 지체될 때 기다리는 사람이나 시중 받는 사람이 느끼는 당혹감을 나타내는데 사용된다. 폴렐(polel)어형의 두 용례도 이 관용어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출 32:11이 그렇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기를 "부끄러워" 하였다(ASV와 RSV, '지체하였다' delayed)고 말하였다.
(b) 둘째로, 부쉬는 어떤 사건이 사람의 기대와는 다르다는 것이 판명될 때 느끼는 당혹, 당황, 그리고 경악, 낙담의 느낌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욥은 대상들이 예상했던 곳에서 물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 부끄러워 낙심했다고 언급한다(욥 6:20). 또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비를 중단하실 때 부끄럽게 될 것이다(렘 14:3). 더 심오한 의미에서, 이스라엘과 열방들은 우상들이 그들을 실망시킬 때, 그 우상들로 인하여 수치를 당할 것이다(사 42:17, 렘 22:22, 호 10:6).
가장 일반적인 세 번째 용법은 앞의 개념 이상의 것을 전달하여, 전쟁에서나 어떤 다른 방식으로 적의 손에서 패한 결과로 당하게 되는 '치욕, 창피' disgrace를 나타낸다. 특별히 포로로 행진하게 되는 것에 대한 무서운 수치가 고려된다(미 1:11, 참조: 렘 2:26). 여기에는 당혹, 환멸, 굴욕, 그리고 이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낙심, 이 모든 어감이 다 포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선지자들은 이 단어를 이런 의미로 사용하여, 이스라엘에게 만약 회개하고 우상숭배의 길에서 돌아서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패하여 포로로 잡혀가는 수치를 당하게 되리라고 단언한다(참조: 사 1:29, 사 30:5, 렘 2:36, 렘 9:19, H18, 스 9:6, 단 9:7 등).
(c) 이 단어의 세 번째 용법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신뢰의 문제이다. 만약 이스라엘이 하나님 신뢰하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우상(사 1:29)이나 이방 나라들(사 20:5, 사 30:3, 사 30:5)을 믿어 자기 자신의 영광을 지키고자 한다면, 이스라엘은 영광을 얻지 못하고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 하나님께 겸손히 복종하는 사람은 참 영광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이 수치를 당하게 되도록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사 29:22, 욜 2:26, 욜 2:27, 습 3:19). 시편기가가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상기시킨 것은 바로 이 약속이다(시 25:3, 시 31:17, H18, 시 37:19, 시 119:46).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잠시동안 이스라엘을 제압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참한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다(사 41:11, 렘 46:24, 렘 51:47). 또한 자기가 하나님을 믿으므로, 자기를 멸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스스로 수치를 당한다는 것이 시편기자의 열렬한 기대이다(시 6:10, H11, 시 22:6, 시 40:14, H15, 시 109:28).
(d) 넷째로, 수치는 경솔하거나 부도덕한 행동에서 기인한다. 이런 용법은 삼상 20:30에서 발견된다. 사울의 관점에서 볼 때, 요나단은 통치하는 왕에게 패역부도한 불법을 저지르고, 자기 어머니의 위치를 위태롭게 하여, 장차 다윗의 후궁이 되게 하는 어리석음을 스스로 범하였다. 마찬가지로 요압은 사정을 충분히 생각하지 않고 어리석게 행동한다고 다윗을 비난하였다(삼하 19:5, H6). 그러나 이런 용법은 주로 잠언에 국한되어 있다. 이 모든 용례들은 부모나 배우자에게 부끄러움을 끼치는 사람들의 행동을 명시적으로나 암시적으로 묘사하는 언명들에 나오는 히필분사이다(잠 10:5, 잠 12:4, 잠 14:35 등).
부쉬의 마지막 용법은 일반적인 영어 의미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즉 '나쁜 일을 행한 데서 오는 죄책감' a feeling of guilt from having done what is wrong을 의미한다. 예레미야(렘 6:15)는 백성들이 가증스러운 일(우상숭배)을 저지르고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전율했다. 마찬가지로 에스겔(겔 16:63)은 복구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은혜가 유다의 수치심을 감소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증가 시킬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때 비로소 이스라엘은 살아계신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믿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에스라는 예루살렘에서 이런 상황을 발견하고서, "우리의 죄가 우리의 머리보다 더 크기" 때문에 부끄럽다고 외친다.
분명히 우상숭배에 대한 이런 혐오감은 사울의 아들들, 이스바알(바알의 사람)과 므비바알(바알의 말)의 이름을 이스보셋(수치의 사람)과 므비보셋(수치의 말)으로 바꿔버린 이유를 설명해 준다(삼하 2:8, 삼하 9:6 등). 이처럼 '바알' 대신 '수치'를 사용하는 것은 더욱 발전하여 보셰트(boshet)의 모음들을 다른 말로 바꿔버리는데 까지 이른다. 예를 들어 몰렉은 '왕'을 뜻하는 단어 멜렉(melek: 거룩한 왕 the divine king)의 모음을 다른 모음으로 바꿔서 만든 말인 것 같다. 어쨌든 이 단어는 보셰트(boshet)로 발음되어왔던 것 같다. 마찬가지로, 식쿠트(sikkut)와 키윤(kiyun)도 쉭쿠츠(shiqqus : 가증한 것 abomination)에서 나온 것 같다(암 5:26).
우가릿어의 동족어가 사용된 몇 가지 용례들에서 이 단어는 마지막 의미로 사용된 것 같다. 예를 들어 아세라(Asherah)는 바알이 얌(Yam)을 죽였다고 비난하면서 "부끄럽다, 부끄럽다"고 말한다. 그러자 바알은 부끄러워 밖으로 나갔다고 한다(68:28-31).(참조: J. N. Oswa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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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Ws(5472, 수그) 되돌아가다, 물러가다
수그(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되돌아가다 backslide, 물러가다 move away'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4회 나오며, 주로 적대를 나타내는 문구에 사용되었다(시 35:4, 시 40:14, 시 70:2, 시 129:5).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의 친구들이 결국 그로부터 되돌아 갈 것이고(렘 38:22), 애굽은 그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느부갓네살의 군대 앞에서 패주할 것이라고(렘 46:5) 예언하였다. 이사야(사 42:17)와 스바냐(습 1:6)는 배교한 우상 숭배자들이 끌려와서 철저히 수치를 당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시편기자(시 53:3)는 중생치 못한 사람의 마음의 자연적 상태가 하나님으로부터 외면한 상태이라고 공언하였다. 배교한 이스라엘과 같이 그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간섭이 필요한 것이다(시 80:14-19).(참조: R. D. Patterson;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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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8025, 샬라프) 뽑다, 뽑아내다
샬라프(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뽑다, 뽑아내다, 빼어내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5회 나오며, 주로 칼을 칼집에서 뽑아내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a) '빼어내다'. 샬라프는 상한 몸에서 칼을 빼어 내는 것(삿 3:22, 욥 20:25), 칼집에서 칼을 뽑아 내는 것(삿 8:20, 삿 9:54, 삼상 31:4, 대상 10:4, 삼상 17:51, 수 5:13), 칼을 뽑는 자들(능동수동분사, 삿 8:10, 삿 20:2, 삿 20:15, 삿 20:17, 삿 20:16, 삼하 24:9, 왕하 3:26, 대상 21:5)을 묘사한다.
수동분사형 사용된 구절에서 샬라프는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고" 서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이 표현은 여호와의 사자가 칠 준비가 되어 있음을 그린 것이다. 예를 들어 민 22:23, 민 22:31에서 발람은 그 사자를 만남으로써 그가 죽음의 심판을 받게 될 절박한 위험 중에 처해 있다는 엄숙한 경고를 받고 있다. 대상 21:16에서, 다윗은 천사가 손에 칼을 빼어 들고 하늘과 땅 사이에 서 있는 것을 본다.
(b) '벗다 draw off'. 샬라프는 룻 4:7 이하에서 신을 벗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옛적 이스라엘 중에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 신을 벗어 그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의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c) 시 129:6에서 샬라프는 지붕 꼭대기에서 자라는 풀에서 사용되어 있다. 주석가들은 여기에서 "그것이 싹트기 전에"로 번역하는 쪽과 "그것이 뽑히기 전에"로 번역하는 쪽으로 나누어진다. 후자의 번역이 더 바람직한 것 같다(70인 역본은 후자와 같이 번역한다).
(참조: BDB; TW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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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bey:(3001, 야베쉬) 마르다, 시들다
야베쉬(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마르다, 시들다'를 의미한다. 이 어근의 기본적인 의미는 '필수적, 혹은 일반적으로 수분을 지닌 물체가 수분이 없어서 마르다 혹은 마르게 되다'이다. 동의어 하라브(br"j; , 2717)는 야베쉬와 거의 같은 뜻을 지니지만, 하라브는 마르게 되는 수역을 나타내기 위해 더욱 자주 사용되는데 반해, 야베쉬는 초목의 시들음을 묘사하기 위해 더욱 자주 사용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80회 나오며 칼, 피엘, 히필형으로 사용되었다.
비록 동사적 어근이 내부의 수분 부족으로 말라가는 식물들, 그리고 비가 부족하여 마르는 땅의 개념들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다 하더라도, 이 어근은 구약성경에서 주로 4가지의 기본적인 신학적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a) 첫째로, 이 동사는 두 가지의 중요한 구약성경의 이적들, 즉 노아의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지구 표면을 마르게 하신 것(창 8:7, 창 8:14),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굽 때 홍해를 건널 때, 가나안 정복 때, 요단 강을 횡단할 때, 그들이 걸어갔던 땅의 마름(수 2:10, 시 74:15)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b) 두 번째 신학적 사실은 첫 번째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어근은 하나님의 어떤 속성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불변성은 그가 이전에 홍해를 말리신 것처럼(수 4:23), 요단 강물을 말리신 데에서 관찰된다.
하나님의 주권은 명령으로 식물을 시들게 하고 땅을 말리신 그의 능력으로 강조된다(사 40:24, 겔 17:24 등).
하나님의 전능은 앞에 언급된 이적들에서 분명하게 고찰된다(참조: 욥 12:15).
(c) 야발로 전달된 세 번째 사실은 심판이다. 비를 내리지 않음으로써 땅을 불모지로 만들고 그 땅의 모든 물을 마르게 하고 생산물들을 시들게 하는 여호와의 문자적인 심판은 구약성경 전체에 걸쳐 자주 언급된다. 이런 형태의 심판은 모압(사 15:6),
애굽(사 19:5-7, 슥 10:11), 바벨론(렘 50:38, 렘 51:36)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과 유다의 대부분(렘 12:4, 사 42:15, 욜 1:20 등)에 퍼부어졌다.
마지막 때까지 이스라엘을 흩으신다는 것은 "마른 뼈"로 상징된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겔 37:11).
하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때로 수족이 마르는 심판을 받으며(왕상 13:4, 슥 11:7)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은 시든 식물처럼 죽을 것이다(욥 8:12, 욥 15:30, 욥 18:16).
(d) 마지막으로 인간과 생명의 덧없음은 마른 풀에 비유된다(사 40:7, 사 40:8). 인간의 평균 수명이 짧다는 것은 아침에 자랐다가 저녁 무렵에는 시들어 죽는 풀에 비유된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시 90:6). 게다가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영속적인 속성과 대조된다(사 40:7-8). 인간의 생명력과 힘의 감퇴는 메시야 시편(시 22:15, H16)에서 그릇 조각의 마름에 비유되며(시 22:15, H16), 인간의 재난(시 102:4, 시 102:11)과 죽음(욥 14:11)은 또한 마른 풀에 비유된다.
심령의 근심은 심지어 정신질환까지도 야기시킬 수 있다("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잠 17:22).
(참조: R. H. ALEXANDER;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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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x'q;(7114, 카차르) 짧다, 수확하다, 추수하다
카차르(동사)는 기본어근이며, (a) '짧다 be short' (b) '추수하다, 수확하다 reap, harvest'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0회 나온다.
(a) 카차르는 '짧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카차르는 짧은 것(시 89:45, 시 102:23) 또는 부적합한 것(예컨대 침상이, 사 28:20)을 가리킨다.
수사 의문문에서는 여호와의 손(민 11:23, 사 50:2, 사 59:1) 또는 여호와의 영(미 2:7)이 짧겠느냐고, 즉 그 일을 성취할 수 없겠는가고 묻는다.
어떤 구절에서는 이 어근이 낙담(민 21:4), 애담(삿 10:16, 삿 16:16, 욥 21:4) 또는 혐오(슥 11:7) 등을 의미한다.
(b) 카차르는 '수확하다, 추수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카차르는 여러 종류의 농작물 수확을 가리킬 때 가장 많이 사용된다(레 23:10 등등).
이 단어는 또한 비유적으로 의로운 또는 악한 행동의 결과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레 12:13, 호 8:7, 호 10:13, 잠 22:8). 그러므로 추수기는 심판의 때에 대한 적절한 상징이 된다(참조: 암 9:23).
칼 분사형은 수확하는 자들, 즉 추수군들을 의미한다(룻 2:3, 왕하 4:18 등등).
(참조: J. P. LEWIS;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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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m'[;(6014, 아마르) 포악하게 다루다, 단으로 묶다
1. 아마르(동사)는 기본어근이며, '포악하게 다루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신명기에서 2회 나온다.
신 24:7, "사람이 자기 형제 곧 이스라엘 자손 중 한 사람을 후려다가 그를 부리거나 판 것이 발견되거든 그 후린 자를 죽일찌니 이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찌니라".
신 21:14, "그 후에 네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그 마음대로 가게 하고 결코 돈을 받고 팔지 말찌라 네가 그를 욕보였은즉 종으로 여기지 말찌니라".
2. 아마르(동사)는 오메르(rm,[o , 6016)에서 유래했으며, '단으로 묶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시 129:7에서 1회 나온다: "이런 것은 베는 자의 줌과 묶는 자의 품에 차지 아니하나니".(참조: BDB; HE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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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m;(4390, 말레) 채우다, 가득 차다, 충만하다
말레(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채우다, 가득 차다(채우다), 충만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50회 나온다.
(a) 말레는 칼형과 니팔형에서 그 용법들을 검토해보면 공간적인 의미를 지니거나 확대되어 시간적인 의미에 대한 중요한 신학적인 개념을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간적인 의미는 다음의 구절들에 나온다. 출 10:6(집들을 가득 채운 메뚜기), 욜 3:13(즙으로 가득 찬 포도즙틀), 그리고 왕하 4:6(가득찰 때까지 텅빈 그릇에 기름을 쏟아 붓는 과부).
시간적인 의미는 정해진 때의 완성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면, 출산함으로써 완성된, 리브가의 임신의 날들(창 25:25), 여호와께서 나일강 물을 치신 후 경과한, 즉 끝나고 지난 7일간(출 7:25), 그리고 다니엘이 금식을 끝낸 3주간(단 10:3).
말레는 하나님의 편재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의미심장하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 23:24). 그는 우주적으로 임재하시며 모든 땅을 그의 영광으로 가득 채우실 뿐만 아니라(민 14:21, 시 72:19, 사 6:3), 또한 장막을 채우는 구름에서 나타난 그의 영광(카보드)에 의해 지역적으로 보여지기도 한다(출 40:34-35, 왕상 8:10-11, 사 6:1, 겔 10:3, 겔 43:5, 겔 44:4).
말레는 또한 시작된 일을 완성하거나 혹은 약속된 말씀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피엘형은 말의 성취를 강조하는 것 같다.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하겠다고 말한 대로, 우상을 숭배할 때, 그들은 자기네의 말을 이루는 것이다(렘 44:25). 70년 포로생활로 예레미야의 말이 이루어진 것처럼(대하 36:21), 솔로몬이 아비아달을 제사장직에서 쫓아내었을 때, 엘리의 말이 이루어졌다(왕상 2:27).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으셨을 때, 그는 다윗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해 행동하신 것이다(왕상 8:15, 왕상 8:24, 대하 6:4, 대하 6:15). 하나님은 또한 그의 메시야의 도모와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행동하실 것이다(시 20:4, 시 20:5, H5, H6).
(b) 말레의 피엘형은 때의 기간을 나타내기 위해서도 사용된다. 즉 날수(창 29:27-28), 햇수(대하 36:21), 혹은 만료되어야 하는 임신의 기간(욥 39:2), 따라서 강조점을 오로지 예언적 말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해진 것을 이루고, 완성하고, 행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 있다. 예언과 그 예언의 성취 사이의 시간에는, 연대적인 시간(크로노스[chronos])을 적절한 순간(카이로이)으로 계속하여 채우시는 바로 그러한 능력 있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의미심장한 사건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말씀이 약속한 모든 것의 저 최종적인 성취에 속한다.
비유적인 표현에서 땅은 종종 폭력으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창 6:13, 미 6:12, 렘 23:10, 렘 51:5, 겔 7:22), 때로는 하나님의 영광, 자비, 선, 그리고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가득 찬 것으로 묘사되곤 한다(시 33:5, 시 119:64, 사 11:9, 합 3:3). 땅은 죄로 가득 차게 될 수도 있다(렘 16:18, 겔 8:17).
(희생제물로) "손에 채우다"는 어떤 사람의 직무를 "신성하게 하다"(대상 29:5, 출 32:29)나 제사장을 성직에 임명하는 것을 말한다(삿 17:5).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욕망을 성취하는 것은 그를 "만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출 15:9).(참조: W. C. KAISER;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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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5674, 아바르) 지나가다, 건너가다, 사라지다, 소멸하다, 성내다
아바르(동사)는 기본어근이며, (a) '지나가다, 통과하다, 건너가다, 넘겨주다, 사라지다, 소멸하다, 끝나다', (b) '거만하다, 성내다, 화내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50회 나오며, 칼, 니팔, 피엘, 히필형으로 사용되었다.
이 동사의 주요 개념은 움직임의 개념이다. 대체로 정지해 있는, 움직이는 어떤 다른 대상에 대한 어떤 것의 움직임을 나타낸다. 어떤 학자들은 아바르의 가장 단순한 번역은 '통과하다'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번역은 아바르가 전달하는 여러가지 뉘앙스를 참으로 전달하지 못한다. 이 단어는 약 550회 사용된다.
이 단어의 의미의 미묘한 차이를 모두 논의하기란 불가능하나 일반적인 네 가지 용법이 있다.
1. 움직인다는 개념은 단순한 의미에서 사용될 수 있다. 아바르는 '넘어가다' 혹은 '더 멀리 가다'이다. 예컨대 아브라함은 그를 방문한 천상의 방문객에게 먹은 후에 계속하여 가라(RSV 'pass on' 한글개역 "지나가소서")고 말한다(창 18:5).
다른 대상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이 특별히 움직임을 강조할 경우에 아바르는 '가다' go를 의미한다(출 38:26, 신 2:14, 욥 13:13).
2. 아바르는 두 개의 구체적인 장소 사이에 어떤 이동이 있음을 표현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 이러한 범주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해주는 많은 언급들을 찾아 볼 수 있다(신 27:3). 모세는 약속의 땅에 관한 언약적 약속의 성취를 여실히 보여주는데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방해물 혹은 장벽을 어떻게 극복해야만 했는지를 나타내기 위해 이 표현을 종종 사용하였다. 수 1:2에서도 이와 동일한 강조가 발견된다. 건너다(가로지르다)는 개념은 창 31:21에서도 나타난다. 여기에 야곱은 라반에게서 도망할 때 유브라테스강을 건넌다.
아바르는 또한 땅을 통과(횡단)한다는 개념을 나타내는데도 사용된다. 모세는 아모리왕 시혼에게 이스라엘이 그 땅을 통과해 진행해 가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다(민 21:22). 미가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숲을 뚫고 지나가는 사자처럼 이방 땅을 통과한다고 말한다(미 5:8).
이 동사의 히필형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이동하게(건너가게) 한다는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매우 종종 나타난다(창 8:1, 창 32:23, 민 32:5 등).
이 단어는 신 18:10과 그 외 다른 곳에서 어린 아이로 하여금 희생제물의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여 죽게 만드는 것을 나타내는데 사용된다.
3. 아바르의 움직임의 개념은 은유적인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다. 솔로몬의 부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부를 능가했다(넘어섰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악은 다른 민족들의 악을 넘어섰다는 점에서 끝이 없었다(렘 5:28).
다른 은유적인 용법도 언급될 수 있다. 사람은 죽을 때 이생으로부터 지나가 버린다(욥 30:15, 잠 22:3). 남편과 사이에 어떤 일이 발생하고 그들은 서로 멀어진다(렘 6:8). 주위에 "통용하는" 돈이란 현행의 표준 세겔을 가리킨다(창 23:16). 사람들은 장사를 하고 물품들을 교환한다(겔 27:9). 수소들은 새끼를 낳는다(아바르: 낳다 breed의 피엘형, RSV) 즉 다산한다.
4. 아바르는 특별한 영적 개념을 나타낸다. 인간들은 언약을 어기고 율법을 범한다. 즉 간음하고 우상 숭배함으로(신 17:2) 혹은 다른 죄를 지음으로 언약이나 율법의 요구를 벗어나거나 넘어선다. 그러나 보다 긍정적인 면에서 모세는 또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고 있던 언약으로 이스라엘이 들어갔다고 한다(신 29:12, H11). 발람은 그가 "내가 능히 여호와의 말씀을 넘어서 지나갈 수 없다"(민 22:18,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라고 말했을 때 아바르의 또 다른 영적인 의미를 표현해 주었다.
5. 아바르는 '사라지다, 소멸하다, 끝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욥 7:21, 욥 33:18, 욥 34:20, 욥 36:12, 렘 8:13, 슥 3:4).
6. 아바르는 '성내다, 화내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시 78:21, 시 78:59, 시 78:62, 잠 20:2).(참조: TWOT;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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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k;r;B](1293, 베라카) 축복, 복을 주는 것
베라카(명여)는 바라크(&r'B; , 1288)에서 유래했으며, '축복, 복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70회 나온다.
(a) 베라카는 '축복, 복 주심 blessing'에 대해 사용되었다.
① 부모의 축복(창 27:12-41, 창 49:28), 모세의 축복(신 33:1).
② 하나님의 복 주심(출 32:29, 레 25:21, 신 11:26, 신 11:27, 신 11:29, 신 23:6(= 느 13:2), 신 28:2, 신 28:8, 신 30:1, 신 30:19, 수 8:34, 삼하 7:29, 시 3:8, 시 21:3, 시 133:3, 사 44:3, 스 34:26, 스 44:30, 욜 2:14, 말 3:10, 창 39:5, 신 12:15, 신 16:17, 신 33:23, 시 129:8, 잠 10:22, 시 24:5, 창 28:4).
③ 사람의 축복(시 109:17, 잠 10:6, 잠 11:25, 잠 28:20).
④ 가난한 자의 축복(욥 29:13, "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인하여 기뻐 노래하였었느니라").
(b) 베라카는 복의 근원 즉 복을 주는 한 복에 대해 사용되었다. 아브라함(창 12:2), 이스라엘(사 19:21, 겔 34:26, 슥 8:13), 의인의 씨(시 37:26), 왕(시 21:6), 의인의 기념(잠 10:7), 새로운 포도즙(시 65:8)은 세계나 인류 사회에 한 복이 되는 것이다.
(c) 베라카는 '복, 번영'에 대해 사용되었다. 정직한 자의 축원이나 번영(잠 11:11), 이른 비의 은택(시 84:6), 하늘의 복, 원천의 복, 태의 복(창 49:25), 아비의 복(번영)(창 49:26), 너의 복(번영)(말 2:2).
(d) 베라카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에 대해 사용되었다. '축복'이 하나님께 돌려질 때, 그것은 찬양과 감사의 표현이었다: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찌어다 주여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송축하올 것은 주의 이름이 존귀하여 모든 송축이나 찬양에서 뛰어남이니이다"(느 9:5).
(e) 베라카는 '선물, 선사'에 대해 사용되었다(창 33:11, 수 15:19, 삿 1:15, 삼상 25:27, 삼상 30:26, 왕하 5:15).
잠 11:25에서 베라카는 '활수한 사람'에 대해 사용되었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f) 베라카는 '평화 협정'에 대해 사용되었다: 왕하 18:21(= 사 36:16): "이제 네가 저 상한 갈대 지팡이 애굽을 의뢰하도다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그 손에 찔려 들어갈찌라 애굽 왕 바로는 무릇 의뢰하는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참조: BDB; TW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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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1288, 바라크) 무릎을 꿇다, 축복하다, 복을 주다, 찬양하다
바라크(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무릎을 꿇다, 축복하다(복을 주다), 찬양하다'를 뜻하며, 다른 의미로는 주로 하나님에 대하여 '저주하다, 욕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왕상 21:10, 왕상 21:13, 욥 1:11, 욥 2:5). 기본적으로 바라크는 '유익한 능력을 부여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구약성경에서 '축복한다'는 것은 '성공, 번영, 생산, 장수 등을 위한 능력을 부여한다'를 의미한다. 이 의미는 부여하는 과정과 부여 받는 상태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진정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다. 또한 바라크의 의미를 보면 무릎을 꿇는 것과 축복이나 복을 받는 것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1) 무릎을 꿇는 것, 곧 기도하는 것은 축복을 받는 비결이다.
대하 6:13(참조: 왕상 8:14, 왕상 8:54)을 보면 솔로몬은 성전 봉헌에서 놋대 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나님의 복은 백성들이 예배가 끝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갈 때 그들에게 내려졌다. 이렇게 하여 이 복은 그들의 일상 생활에 실현된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이삭의 신부를 구해오라는 주인의 부탁을 받고 메소포타미아 나홀의 성에 이르러 낙타를 그 성밖 우물 곁에 무릎을 꿇게 하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 종의 기도로 주인과 종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삭의 좋은 신부감을 얻는 복을 받은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열심히 기도하자.
(2) 무릎을 꿇는, 곧 여호와를 경배하는 것은 복을 받는 비결이다.
시 95:6이하에서 시인은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을 듣기를 원하노라"(빌 2:10, 빌 2:11)라고 말했다.
시인은 시 115:2이하에서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무론 대소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라고 노래했다.
(3) 신앙 공동체는 자기가 받은 복에 대하여 여호와를 찬양함으로서, 곧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라는 외침으로 응답했다.
시 28:6, 시 28:7에서 다윗은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노래했다.
여러분 바라크라는 말을 기억하라.
바라크 -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다.
바라크 -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것이다.
바라크 -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이다.
바라크 - 받는 복을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이다.(참조: H. -G. LINK; 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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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 나무의 영적 의미..21.06.14
‘무화과나무’ תאנה (테에나 8384) συκον (쉬콘 4810)
♣명제: 무화과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종말을 상징해 주는 나무이다.
♣목적: 무화과나무를 통하여 속죄의 은혜와 종말을 배우게 된다.
무화과나무는 잎이 크기 때문에 고대 근동에서는 그늘을 많이 만들어 주는 나무입니다.
이스라엘 지역은 건기와 우기로 기후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6개월은 비가 오게 됩니다. 이 시기가 11월~3월까지이며 이때가 기후 상으로 우기입니다.
그리고 4월~9월까지는 비가 전혀 내리지 않습니다. 이때는 건기가 됩니다.
비가 전혀 내리지 않기 때문에 우기 때에 비가 많이 온다고 해도 모든 우물과 샘들이 말라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물을 찾아볼 수가 없는 때입니다.
이런 건기에는 비가 오지 않아 습도는 전혀 없고, 태양이 내려쬔다고 해도 그늘에 앉아있으면 시원하게 되기에, 건기에는 무화과나무 그늘이 최고입니다. 잎이 크고 넓기 때문에 많은 그늘을 만들어 주게 됩니다.
건기에 토라를 공부하려는 유대인들은 무화과나무그늘에서라면 뜨거운 여름날에라도 시원하게 토라를 공부할 수가 있고, 해가 넘어가면 그때부터 일상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 증거를 성경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요1:48-49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할 때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말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의심을 했습니다.
이때에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찾아왔을 때에 주님이 나다나엘을 보면서 하시는 말씀이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너를 보았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나다나엘이 주님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다나엘’ נתנאל(네탄엘 5417) 나다나엘은 נתן(나탄 5414) 주다, 라는 뜻과 אל(엘 410)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합성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셨다’라는 뜻입니다.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열심히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토라를 공부했습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택한 바 된 백성으로서 나다나엘에게 [그리스도 영접함의]구원의 은총을 받았고, 때가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무화과나무’ תאנה(테에나 8384) 무화과나무,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을 때에 보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테에나’의 히브리적 의미는,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기로 작정되신 JC를 통하여 부활생명 능력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영원히 죽었던 자들을 구원하시고 숨을 불어넣어 당신의 하나님생명을 주신 바, 곧 새생명 주시는 구속주예수님을 의미하며, 바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나다나엘은 이 나무 아래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있었던 바, 주님께서는 이미 나다나엘의 신앙과 믿음을 보고 있었다, 즉 이 사람이 이미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주님이 보았다고 하는 단어에서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보았노라’ ειδω(에이도 1492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 단수, 1인칭) 보다, 알다, 시인하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빌립이 데려오기 전부터 아시면서 보고 있었다고 말씀하시고,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시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실제로 전부터 처음 보는 나다나엘을 알고 계신 것이 역사적 사실임을 말씀하고 계신 바, 직설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는 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나다나엘을 만세전부터 알고 계셨고, 이미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즉, 구원받은 자로서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하심을 따라 이미 나다나엘처럼 구원이 확정된 자이며, 주님은 나를 이미 알고 계셨고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있으라 하신 곳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교회에서 열심히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나다나엘은 초림의 예수님을 기다렸다면 나는 재림하실 예수님을 무화과나무와 같은 교회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이런 신앙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무화과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상징해 주고 있습니다.
창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아담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가 단절된 것입니다. 그때에 자신의 눈이 밝아졌음을 알고 무화과나무의 잎을 엮어 치마로 입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무화과 잎은 곧 말라 사라져 버리기에 이것으로는 영원한 속죄가 이루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영원한 속죄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셨던 것입니다.
‘눈이 밝아져’ פקח(파카흐 6491 와우계속, 동사, 닢알, 미완료, 여성, 3인칭, 복수) 눈이 열리다, 뜨다, 열다, 라는 뜻입니다.
아담의 [죄를 자각하는] 눈이 열린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불순종하여 범죄함으로써 그 죄과, 곧 선악과를 먹고서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눈이 열리고 나니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운 생각이 났고 죄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자 즉시로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죄에 대하여 눈이 뜨여지게 된 것입니다. 니팔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화과나무 잎을’ עלה(알레 5929 명사, 남성, 단수, 연계형) 나뭇잎, 잎사귀,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עלה(알라 5927) 치료받다, 올라가다, 상달되다, 옮겨가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육신은 930세까지 살았지만 영혼은 바로 죽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회복하기 위하여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은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영원안에서 창세전에 이미]속죄의 제사를 드림으로 죽었던 것을 바라봄(앙망하며)으로 아담이 치료받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하나님께 올라가 상달되어 아담의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옮겨져 생명을 얻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마음으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입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아담이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기 위해서는 나뭇잎이 많이 들어가야 합니다. 최소한 하나 이상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 잎의 문법은 단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담은 십자가에 못 박히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해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죄를 대속해 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엮어’ תפר(타파르 8609 와우계속, 동사, 칼, 미완료, 남성, 3인칭, 복수) 함께 꿰매다, 바느질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습니까? 무화과나무잎을 함께 엮어 바느질하여 치마삼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엮이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 스스로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을 아담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죄인이라는 것을 안 순간 즉시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를 해 입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있습니다.
‘치마를’ חגור(하고르 2290 명사, 여성, 복수) 치마, 허리띠, 허리 덮개, 라는 뜻이며 이 단어는 חגר(하가르 2296) 묶다, 띠를 띠다, 매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담이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입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인 복음을 허리에 띠고 함께 묶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엡6: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진리의 허리띠를 띠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도 죄인이었지만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입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묶여서 진리의 허리띠를 띠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묶여서 내 허리에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 무화과나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죄인들은 주님의 그늘 아래에 숨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의에 숨지 않으면 죄가 드러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들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은 아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의 치마를 입어야 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마21:17-19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길 가에서 한 무화과(無花果) 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유하시고 이른 아침에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셨습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가셨는데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는데 무화과나무가 곧 말라버렸습니다.
‘베다니’ Βηθφαγη(베드파게 967) ‘무화과나무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파게..이는 [덜 익은]무화과, 상품성이 떨어지기에 빈자나 나그네들이 따 먹도록 따지 않고 두는 무화과를 뜻함))
베다니는 벳바게와 같은 지역 안에 있고 히브리어 בית פג(베이트 파그) 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בית(바이트 1004) 집이라는 뜻과 פג(파그 6291) 덜 익은 무화과 열매, 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베다니의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의 영적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무화과나무의 집에 무화과 열매가 없으면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 곧 이것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JC의 십자가 복음의 열매가 없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는 것이 정상입니다. 구원받은 의인은 의의 열매를 맺어야 정상입니다. 선한 나무는 선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장하신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에게 다가가셨는데 열매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여, 바로 저주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복음서에는 아직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열리지 않을 때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은 무화과나무를 왜 예수님이 저주하고 있을까요?
막11: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똑같은 사건을 놓고 마가의 관점은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무화과나무는 아직 열매를 맺을 시기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직 때도 되지 않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면 주님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라고 우리는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때가 되면 열매가 열릴 것인데 왜 때도 되지 않았는데 가셔서 미리 저주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무화과나무의 특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무화과나무는 특이하여 열매를 한 번만 맺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유월절 직후 4월부터 시작하여 초막절이 있는 10월까지 4~5번 정도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때는 건기입니다. 비가 오지 않다가 10월경 우기가 시작되면 겨울에 앙상한 가지만 있던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때 나오는 열매는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3월과 4월의 뜨거운 바람에 열매가 익게 됩니다. 상품성이 떨어지는 이 열매의 이름이 פגה(파게)입니다.
파게가 익어서 떨어지면 다음에 계속해서 열리는 무화과 열매는 תאנה(테에나)로서 이 무화과 열매는 상품가치가 있어서 수확하여 파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무화과나무 첫열매인 파게는 상품가치가 없기 때문에 주인이 따지를 않았습니다. 그대로 나무에 남겨두는 것입니다. 우기인 겨울 동안 달콤한 열매를 좀체로 먹지 못하던 고아나 과부나 나그네들인 가난한 사람들이 따 먹도록 했던 것이지요.
그럼 예수님께서도 시장하셔서 무화과나무로 가셨던 것은 유월절경에 열리는 파게를 잡수시기 위하여 가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잎은 무성하지만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봄에 열리는 파게 열매가 열리지 않았다는 것은 더 이상 상품성이 있는 테에나의 무화과 열매를 기대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무화과나무는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저주하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ειδω(에이도 1492 동사, 분사, 과거, 능동, 주격, 남성, 단수) 보다, 알다, 경험하다, 당하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다니에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기 전에 무화과나무를 보게 됩니다.
몹시 시장하셔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가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의 열매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경험으로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나무는 절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무화과나무를 바라보고 있다면 현재입니다. 그런데 이미 과거부터 예수님은 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아신 것입니다. 그리고 즉시 이 나무는 저주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맺지 못하리라’ γινομαι(기노마이 1096 동사, 가정, 과거, 중간디포, 단수, 3인칭/동사, 명령, 과거, 중간디포, 단수, 3인칭) 되다, 이루다, 맺다, 계시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 저주받은 무화과나무는 절대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뿌리가 마르기 때문입니다.
영양분만 먹고 잎만 무성하고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는 결국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들었지만 구원의 확신도 없이 신앙생활을 했던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의 열매가 없다면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했는데 가정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너는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맺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인데 이 나무는 영원히 맺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이 나무는 사람들이 볼 때는 건강한 나무입니다. 잎이 무성하여 멀리에서 보면 풍성한 열매가 열려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원하실 때에 열매를 요구했지만 하나도 내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과거에 열매를 맺을 수가 없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열매를 맺지 못하니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 것은 저주였습니다. 중간 디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을 통해서 깨달을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들은 구원의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선택받지 못한 백성들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어 잎사귀만 무성하게 됩니다.
원래 파게의 열매는 잎사귀는 없고 앙상한 나무에서 열리게 되는 열매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의 삶이 초라하고 육적으로 부족한 삶을 살아가지만 주님이 시장하여 원하실 때에는 얼마든지 의의 열매 구원의 확신의 열매를 내어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주의 신앙을 주장하는 자들의 삶은 겉보기에는 풍성합니다.
잎이 무성하여 멀리에서 보니 대단한 나무 같습니다. 열매가 풍성하게 많이 열려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막상 가까이 가보니 내놓을 수 있는 열매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복음의 열매, 구원의 확신의 열매, 의의 열매는 하나도 내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데 모든 것을 써버렸기 때문에 막상 열매를 맺으려고 하니 맺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결국 저주를 받아 영원한 지옥의 불 못으로 들어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셔서 하나님의 마지막 과업인 십자가에 달리셔야 합니다.
이 과업을 수행하시기 위하여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잡수시려고 가셨는데 아무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현재 유대인들의 신앙과 믿음이 이와 같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고 겉으로만 드러내는 신앙만 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의만 나타내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저와 여러분들은 어떠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주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상품가치가 높은 테에나의 무화과나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높이고, 주님만 찬양하고, 주님만 의지하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볼품없고 가치가 없는 파게를 먼저 찾아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나에게 이런 신앙과 믿음도 없다면 이 시간 정신 차려야 합니다.
테에나의 명품 신앙을 원하지 않으시는데도 파게의 신앙과 믿음조차 아직 없다면 영원한 불 못의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들은 파게의 신앙을 뛰어넘어 테에나의 명품 신앙으로 도약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번 구원받은 것은 취소가 되지 않는다는 명품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영원한 저주가 사라졌다는 테에나의 신앙입니다.
이것을 믿지 못한다면 파게의 열매도 없는 껍데기 신앙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는 절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제 주님이 파게의 열매를 요구하셨지만 우리는 그것을 뛰어넘어 테에나의 신앙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화과나무는 종말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마24:32-33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마태복음 24장은 종말 장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을 말씀하시면서 무화과나무로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4-10월의 건기가 임박하였음)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알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이 모든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깨달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종말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유대인들에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가르쳐 주는 나무입니다.
우기에 들어가는 겨울에는 잎이 떨어져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게 됩니다. 이때가 겨울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3월~4월의 봄이 되면 앙상한 가지에서 잎이 자라게 되며 이때에 파게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면 봄이 찾아온 것입니다.
여름은 파게 열매가 모두 떨어지고 잎이 연해지고 무성하게 되며 이윽고 테에나 열매를 맺게 되면 이때가 여름이 된 것입니다.
가을은 풍성한 잎사귀에 무화과에서 수액이 흘러나와 끈적거리게 됩니다. 그러면 공기 중에 떠돌아다니는 먼지가 달라붙어 지저분하게 보이게 됩니다. 이때가 가을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 잎이 무성해지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로 깨달을 것을 말씀하시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우리나라의 여름은 가장 뜨거울 때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뜨겁다’라고 하는 여름에 대한 생각이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여름 하면 종말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우리나라의 계절 시작과 유대인들의 계절 시작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봄에 계절이 시작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가을이 계절의 시작점입니다. 그 이유는 나팔 절기가 있는 10월 달이 이들에게는 민간력으로 1월 1일 신년이 됩니다.
왕상8:2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다 에다님월 곧 일곱째 달 절기에 솔로몬 왕에게 모이고
‘에다님월’ איתנים(에타님 388) 에다님,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달은 바벨론으로 끌려가기 전에는 에다님월이라고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으로 끌려간 후부터는 ‘티쉬리월’ 이라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름이 계절의 끝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은 성경에 여름이 온다는 것은 마지막 종말이 온다는 것을 예고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왔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연하여지고’ γινομαι(기노마이 1096 동사, 가정, 과거, 중간 디포, 단수, 3인칭) 생겨나다, 되다, 만들어지다, 행해지다, 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아를 인정하기 시작하는 것이 가지가 연하여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유대인들이 생겨나고 주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면 너희들은 종말이 가까이 온 줄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직 종말이 도래하지 않은 것이지만 만약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면 신앙과 믿음을 준비하여 종말을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가정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반드시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가지가 연하여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롬11: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의 충만한 구원받은 수가 생기게 하시기 위하여 유대인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우둔하게 만들어 버리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되어 유대인들의 눈을 열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시고 메시아로 주님을 믿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현재 이스라엘에서 이루어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인들은 무엇을 예의 주시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종말의 때가 도래하고 있다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신앙을 점검하여 종말에 구름 타고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잎사귀를 내면’ εκφυω(에크퓌오 1631 동사, 가정, 현재, 능동, 단수, 3인칭) 산출하다, 싹이 나다, 라는 뜻입니다.
무화과나무가 잎이 나오고 싹이 나면 마지막 종말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때가 되면 반드시 인자가 문 앞에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없으면 아직도 종말은 도래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현재 일어나고 있다면 인자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정법과 현재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재 이스라엘에서는 유대인들이 잎사귀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점점 현재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어떠해야 합니까? 주님을 맞이할 믿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종말 때에는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때에 우리는 점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확신을 갖고 십자가 복음의 말씀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현재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눈을 열어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눈이 막혀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너무나 많아졌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영적으로 감지하여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면서 기다리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영적으로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무화과에는 그늘, 쉼, 나라, 도시,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뜨거울 때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으면 쉼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의 그늘이 뜨거운 태양을 가려주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 무화과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세상에서 열심히 살다 보면 뜨거운 태양 아래에 고통스러운 것처럼 인생이 힘들고 지칠 때가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고단하고 영적으로 지치게 되어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오면 쉼을 얻게 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늘 밑으로 들어오면 아무리 뜨거운 태양과 같은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안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쉼을 얻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다나엘이 토라를 공부하면서 메시아를 기다린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공부하고 듣고 연구하면서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럴 때에 영적으로 항상 깨어 있어서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종말을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그늘 아래에서 쉼과 안식을 얻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억하시면서 종말의 신앙을 가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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