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역개정]시126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벧전1장!!)
[내가예수믿고서421]..나의백성이겸비하여..이땅의황무함을보소서..아무도예배하지않는..우리 오늘 눈물로..이땅에생명샘솟아나...주님다시오실때까지..부흥있으리라이땅에...오소서진리의성령님..마라나타주예수여..하늘의문을여소서..이세상을살아가는동안에
.(비록 죄인괴수이나)주님품에 사는 새로운 인류로 거듭남/구속의 의미를 깊이 통찰하고 마음에 새길 것!!
---------------------
=====여호와 구속자, 구속하시는 여호와=====@구속[무름(속량)/자유]회복---속전(지속적으로 정결케 하는 보혈의 능력)--보수./보응/심판
la'G:(1350, 가알) 되 사다, 속량하다, 구속하다, 근친의 역할을 행하다 [구속자 redeemer..근친/근족/혈연자 =고엘]
가알(동사)은 기본어근이며, '되사다, 도로 찾다, 속량하다, 구속하다 redeem, 근친 역할(권리, 의무)을 행하다'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어근은 '자기 친족을 어려움이나 위험에서 구하다'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 어근과 매우 유사한 어근 파다([d"P; , 6308): 구속하다 redeem) 사이의 한 가지 차이점은, 일반적으로 가알(la'G: , 1350)의 강조점이 구속자의 자격과 행함에 있는데, 반드시 근친이어야 하며, 근친의 특권이나 의무는 다름아닌 속량에 있다는 것이다.((JC가 바로 그러하시다..그는 태초이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신 아들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이미 예고된 대로, 참사람으로서 성육신하셨고 인성을 가지셨기에 [죄로 인해 자기의 모든 것을 사탄에게 넘겨주고 파산한 자들인]우리의 피를 나눈 근친/근족으로서 모든 면에서 참된 자격과 능력을 갖추신 유일무이한 고엘이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00회 이상 나오며, 칼형과 니팔형으로만 사용되었다.
가알은 착하고 진실한 사람이 자기의 친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포함하는 4개의 기본적인 상황에서 사용되었다.
(a) 첫째로, 가알은 오경의 법령에서 궁핍한 때에 판 밭을 되사는 것이나 가난할 때 자신을 판 이스라엘인 노예를 자유롭게 하는 것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합당한 대가를 치르고 되사서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바로 그대로 각 사람에게 배정/배분된 대로 모든 것을 돌려주고 모든 권리를 회복시켜 지고지선의 진복 누림의 바탕을 제공하여 주는 구속의 일]로서 이런 매입과 무르는 일은 근친의 의무였다(레 25:25-54).
레 25:25에서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라고 하였다.
물론, 만약에 자신이 부유하게 되면 그 사람 자신이 그것을 '무를' 것이다(레 25:26).
한편, 가난한 자는 기업만이아니라 자기 자신을 동족 이스라엘인에게나(레 25:39)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타국인(레 25:47)에게 팔기도 하였다.
그를 속량할 책임은 가장 가까운 친척 - 형제, 삼촌, 사촌들, 가족의 혈족 - 에게 있었다(레 25:25, 레 25:48, 레 25:49).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친척을 속량한 redeemed 자(혈연자)는 '근족 - 구속자'로 알려져 있었다. (참조: EDBW).
---가난한 자의 구제에 관한 가장 유명한 실례는 수혼법에 대한 구약성경의 증거가 가장 광범위하게 미치는 룻기에 있는 것 같다.
신 25:5-10에 의하면, 남편의 형제는 후사 없는 과부를 취하여서 씨를 영속시키고, 남자 후손과 결부되어 있는 땅의 계승을 보증해야 했다.
여기 [수혼법의 실행 의무]에서 그것을 실행하는 근친은 야밤이라고 불리어지며, 어근 가알은 사용되지 않는다.
....룻의 상황에서는 두 가지 것들, 즉 밭을 되사는 것과 수혼이 언급된다. 근친은 밭을 사는 것을 기꺼워했지만, 룻과 결혼하는 것은 기꺼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의 요지는 나오미가 가난하여 밭을 팔 수 밖에 없었을 때, 근친은 그녀를 위해 그 밭을 되사야 했다는 데 있다. 그는 후사 없는 형제의 과부를 위해서 이 일을 기꺼이 하려 했지만, 그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그 근본을 모르는] 룻과 결혼하여 그들의 기업을 지속시킬 자손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그는 거부하였으며 여기에 보아스가 개입하였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것, 즉 친족과 수혼은 구별되어야 한다. 고엘(구속자)이란 단어는 후자의 제도를 가리키지 않는다.
....레게트(Leggett)는 룻기에 구속적이고 메시야적인 유형론의 주제가 들어있다고 보았다.
...."고엘(goel)로서의 보아스의 행동들에서 우리는 보아스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가 예시되어 있음을 보았다. 보아스가 구속의 권리를 소유하였으면서도 분명히 룻을 위하여 개입할 의무(까지)는 없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보라...룻은 나오미의 견해를 따라서 겸손하게 자신을 신부로 취하여 후사를 낳도록 해 달라는 뜻으로 보아스의 이불을 들추고 눕는다!!...겸손과 순종의 극치이다!!))
....보아스가 이 가난한 과부들의 곤경을 보았을 때 그의 생애가 여호와와 여호와의 율법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었으므로 그들을 구원하러 왔던 것과 같이 메시야의 경우도 그의 생애가 하나님의 법에 의해 지배되고 또한 그가 가난한 자들과 억압 받는 자들을 공정하고 정당하게 대우하실 것이라는 사실이 예언되었다(시 72:2, 시 72:4, 시 72:12, 시 72:13, 사 11:4).
(b) 둘째로, 가알은 재산이나 여호와께 바쳐진 희생제물 아닌 짐승들을 무르는 것, 혹은 부정한 짐승들의 첫 소산을 무르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레 27:11-33).
이 [속전!!]사상은 인간이 교환물로 그에 상응하는 것을 여호와께 바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속전은 부정직한 교환을 피하기 위해 약간의 추가 몫이 제공되었다. 이런 경우에 무르는 자는 친족이 아니라 재산의 주인이었다.
(c) 셋째로, 가알은 살해당한 사람을 대신하여 "피의 보수자"(RSV '보복자' revenger)가 되는 가장 가까운 친족을 언급하는데 사용되며, 칼 분사 고엘로 나타난다.
고엘은 구속자이며, 이 구속자는 '피의 보수자'로 불리우는데, 그의 임무는 자신의 친척을 살해한 자를 처벌하는 것이다(신 19:6).
이 사상은 가까운 친족이 생명에는 생명으로 지불해야 한다는 것임에 틀림없다.
돈을 지불함으로서 집을 재매입하거나 노예를 속량할 수 있는 것처럼, 친족의 잃어버린 생명은 마땅히 살인자의 그에 상응하는 생명으로 지불되어야 한다.
친족은 피의 보수자이다. 이런 사형 제도는 피비린내 나는 숙원과 구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고엘은 죄없는 사형 집행인이었으며 따라서 살해되어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보수자'라는 의미로 12회 나온다(민 35:12, 민 35:19, 민 35:21, 민 35:24, 민 35:25, 민 35:27, 신 19:6, 신 19:12, 수 20:3, 수 20:5, 수 20:9).(참조: R. L. Harris).
(d) 넷째로, 가알은 하나님께서 '구속자'로서 '구속하시는 행위'에 대해 사용되었다.
....출 6:6에서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라고 약속하신다(출 6:6, 참조: 시 77:15).
이스라엘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출 15:13). "하나님이 저희의 반석이시요 지존하신 하나님이 저희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시 78:35).
....이사야서에는 '구속자'라는 단어가 하나님을 지칭하여 13회 나오는데 모두 사 41- 63장에서 사용되었다. 가알은 하나님에 대해 9회 사용되었으며, 사 43:1에서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가알은 애굽으로부터의 구원(사 51:10, 사 63:9)과 바벨론의 포로생활로부터의 구원(사 48:20, 사 52:3, 사 52:9, 사 62:12)을 언급하는데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의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사 41:14)이며 '너희의 왕 이스라엘의 창조주'(사 43:14, 사 43:15)이며 '만군의 여호와'(사 44:6)이며 '야곱의 전능자'(사 49:26)이다. 그의 구원에 참예하는 자는 '구속 받은 자'이다(사 35:9).
....시편에는 종종 영적인 구원이 육적인 구원과 병행되어 나온다. 예를 들면 시 69:18., "내 영혼에게 가까이 하사 구속하시며 내 원수를 인하여 나를 속량하소서". 시 103:2, 시 103:4.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윤택을 잊지 말찌어다...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이 그러하다(참조: EDBW).
[욥19:25,26,27]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25. "And as for me, I know that my Redeemer lives, And at the last He will take His stand on the earth. *26. "Even after my skin is destroyed, Yet from my flesh I shall see God; *27.Whom I myself shall behold, And whom my eyes shall see and not another.
....유명한 구절, 욥 19:25에서 고엘이란 단어는 흠정역성경에서 '구속자' redeemer로 번역되며 어떤 이들은 이 단어가 속죄의 사역을 하러 오실 그리스도의 오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히브리어 "파다"에 의해 더욱 특징적으로 표현될 것이다.
....이제 욥 19:25에 나오는 이 단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결국에는 욥을 죽음의 먼지에서 구속할 친구이자 친족으로서의 하나님의 사역과 더욱 정확하게 관련된다. 욥 19:26의 난해한 어구, "이 가죽을 벗은 후에"는 다른 모음들과 함께 "내가 깨어난 후에"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NIV 각주와 욥 14:12-14을 참조하라. 욥 14:12-14에서 부활에 관한 욥의 질문은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그를 돌아보시며 욥은 나무처럼 제 2의 성장을 할 것이라는 그의 소망에 의해 절정에 달하게 된다 - 욥 14:14의 할리파는 욥 14:7의 할랍에 대한 응답이다). 어쨌든 욥은 마침내 자기 자신의 눈으로 자기의 고엘이신 하나님을 볼 것으로 기대한다(참조: R. L. Harris).
..[[사59:20,21]]..*2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21.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9:24]] *23.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24.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미가6:8]]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
--죄인괴수로 사는, 세상살이는 메섹과 게달의 장막에 사는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 탈취와 노략자의 쟁투 현장, 곧 환난의 날이니 오직 구주JC께 부르짖어 그분안에 충만히 거하라.
[시120] *1.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2.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3. 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 *4. 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숯불이리로다 *5. 메섹에 머물며 게달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 *6.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 *7.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
-----이제, 마음중심으로 동행하시는 영원반석/성채/산성-보혜사-인도하시며 지키시는 목자, 엘에제르와 동행하라
[시121] *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3.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7.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보라, 사람들로 하여금 평강과 형통 허락하시는 네안의 여호와를 감사하며 흠모하고 기리게 하라, 자원하여 나아와 공예배에 함께 참석하기룰 원하도록 만들라.
[시122편] *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2.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3.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4.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5. 거기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 *6.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7.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8.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9.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눈을 구주 JC께 돌려 중심으로 산 믿음 발휘함으로 앙망하라, 긍휼을 구하라, 허락하신 영생안에서 모든 이김을 감사하라
[시123편] *1.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2.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3.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4.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엘에제르, 임마누엘 여호와께 감사하라...말씀대로 행하시도다.
[시124] *1.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였으랴 *2.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3.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우리에게 맹렬하여 우리를 산채로 삼켰을 것이며 *4. 그 때에 물이 우리를 휩쓸며 시내가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며 *5. 그 때에 넘치는 물이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 할 것이로다 *6. 우리를 내주어 그들의 이에 씹히지 아니하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7.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8.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그러므로 송축하나이다---지고지선의 진복은 오직 주로 사는 (선을 행하며 정직하게 동행하는) 기독자들에 대한 여호와의 선대하심/평강형통이니.
[시125편] *1.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2.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3. 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들로 하여금 죄악에 손을 대지 아니하게 함이로다 *4. 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 *5.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부활-오순절-해방/회복]기쁨 구속 은혜 실감: 섭리의 때, 해방 감격 = 전존재로 누리는 영적 기쁨과 감사, 실제적 형통 되도록 [모든 이들이 주께 돌이킴] 부흥 추구 실행의 긍휼
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쉬바..포로) 돌려(슈브,,되돌리다, 회복하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꿈인지생시인지 구분못할정도의 기적적 사건 체험)
2.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세호크...조롱/비웃음/조소가 아닌, 생생한 실감 통한, 진심에서 우러난, 저절로 어깨가 들썩이는 춤+ 만면가득 초월적 기쁨의 황홀!!) 가득하고(말레..충만하다) 우리 혀에는 찬양이(린나...ringing sing.. 저절로 터져나오는, 기쁨의 환성 그자체인 벅차오르는 감사찬양 ::: 주앞에서 참된 의미 통찰과 결단이 무엇보다 중요!!)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깨닫는 자마다)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아사...이루어 완성/완결하다)하였도다
3.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사메아흐...사마흐<기뻐하고즐거워하다>...극도/무한의 기쁨)
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아직 귀환하지 못한)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슈브...네겝광야의 와디가 주님 내리신 비로 물이 풍성한 시내 이루어 그 땅의 식물생명 산출함 같이..마치 고난통과한 욥의 경우처럼, 재산과 모든 소유<영권-물권-인권>도 또한 새로이 더하심..새로운 패러다임과 신분따라 일할 것!!)
5. 눈물을(디므아....주임재앞에 참믿음으로 나아가 전존재를 새롭게 하는 죄를 애통/참회/고뇌/결단의 눈물) 흘리며 씨를(제라..씨앗) 뿌리는(자라....씨뿌리다 :: 모든 합당한 준비/약속하신 말씀 바로그대로 마음밭을 기경하고, 살아 있는 생명말씀씨앗을 합당한 방식으로 뿌리고 생동하는 주믿음의 의뢰로 기다림..사랑과 신뢰로 전력다함..주와함께-주로부터-주님에의해-주님위해...중보기도자의 자세와 선택....각자에게 주어진 전존재의 모든 역량 다하여 부지런히, 열심히, 완전함으로)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카차르...수확하다...그 결과는 생명과 평안 + 배가의 축복 :: 생육번성충만정복다스림)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알라크,,,걷다 :: 범사에 걸음걸음마다 주를 의뢰 + 동행 + 부지런함/열심의 섬김과 다짐/각오로)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
표준새번역]시126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1.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주께서 시온에서 잡혀간 포로를 시온으로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을 꾸는 사람들 같았다.
2. 그 때에 우리의 입은 웃음으로 가득 찼고, 우리의 혀는 찬양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그 때에 다른 민족도 말하였다. "주께서 그들의 편이 되셔서 큰 일을 하셨다."
3. 주께서 우리 편이 되시어 큰 일을 하셨을 때에, 우리는 얼마나 기뻤던가!
4. 주님, 네겝의 시내들에 다시 물이 흐르듯이 포로로 사로잡힌 우리가 다시 한 번 번영하게 해주십시오.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거둔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정녕,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
--------
KJV]시126
1. When the LORD turned again the captivity of Zion, we were like them that dream.
2. Then was our mouth filled with laughter, and our tongue with singing: then said they among the heathen, The LORD hath done great things for them.
3. The LORD hath done great things for us; whereof we are glad.
4. Turn again our captivity, O LORD, as the streams in the south.
5. They that sow in tears shall reap in joy.
6. He that goeth forth and weepeth, bearing precious seed, shall doubtless come again with rejoicing, bringing his sheaves with him.
===시126개요====
속박과 고난으로부터 하나님 백성이 크고 놀라운 구원을 얻을 것을 언급한 것을 볼 때, 이 시편은 아마도 에스라 시대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바벨론으로부터의 귀환 때 기록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바벨론이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137편에는 언급되어 있다), 바벨론 포로는 주목할 만한 큰 사건이었고, 그로부터의 귀환 역시 그러하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의한 우리의 구속 사건의 모형이 되었다.
아마도 이 시편은 에스라에 의해, 혹은 첫 귀환자들과 함께 나온 몇몇 선지자들에 의해 기록된 것 같다.
우리는 당시의 귀환자들로서, 유명한 시편 저자인 아삽의 자손들 중 노래하는 자들에 관해 읽은 바 있다(스 2:41).
이 시편은 똑같은 것이 진전을 보이며 두 번 반복되는(2-3절과 4-5절)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에 속하며, 그 표제를 가진 나머지 시편들 중에 놓이게 되었다.
1. 포로에서 돌아오는 자들은 감사하라고 부르심 받고 있다(1-3).
2. 아직 포로 중에 남아 있는 자들은 여기서 그들을 위한 기도와(4), 격려를 받고 있다(5-6).
---이 시편을 노래하며 그것을 교회 또는 우리의 땅에 행해진 어떤 특별한 구원과 그리스도에 의한 우리 구원의 놀라운 업적에 적용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
슬픔 중의 소망(시 126:1-3)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 되었을 때, 비파가 버드나무에 걸려 있었다.
왜냐하면 그때 하나님은 울고 통곡하라고 부르셨고, 그때 하나님께서 친히 저희를 슬퍼하시며 그들을 애곡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포로는 되돌려졌고, 그들은 비파를 되찾았다. 해방시키시는 주님의 섭리가 그들에게 외쳐지고, 그들은 춤을 춘다.
이와 같이 기독자는 마땅히 섭리의 모든 활동에 순응해야 하며, 적절하게 감동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쓰이지 않던 슬픈 때를 지난 후에는, 비파가 멜로디를 타고 곡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
자비에 대한 오랜 소망이 그들의 귀환을 크게 기쁘게 한다.
Ⅰ.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구원.
그는 “시온의 포로를 돌리셨다.”
시온이 그 타락의 형별로 인해 포로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그 포로의 목적이 달성되고 의도했던 일이 이루어졌을 때, 포로 됨이 되돌려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
고레스가 나라의 사정상 하나님의 포로들에게 자유를 선포했을지라도, 그것은 수년 전에 하신 그의 말씀을 따라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포로로 보내심은 불에 태우기 위해 풀을 집어넣는 것 같지 않고, 오히려 금을 정화하기 위한 것과 같다.
이스라엘의 해방은 거룩한 산, 즉 하나님의 성소와 거처인 “시온의 포로를 돌리신 것”이라고 불렸다.
왜냐하면 그들의 거룩한 관심의 회복과 신앙의 공적 실행의 활기를 되찾음이 포로 귀환에서 얻은 가장 고귀한 이득이 되었기 때문이다.
Ⅱ. 구원이 그들을 향한 것이라는 기쁨의 놀라움.
그들은 보고 놀랐다. 갑자기 온 것이기 때문에 처음에 그들은 혼돈 중에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했으며,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 되었는지를 알지 못했다.
우리는 “꿈꾸는 것같이” 생각했다. 우리는 그것이 너무 기쁜 소식이어서 사실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우리가 깨었는지 아닌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또한 사도 베드로가 그의 구원을 잠깐 생각했을 때와 같이(행 12:9) 사실이 아니라(때때로 예언자들에게도 있었던 일이다), 환상 중에 그 표현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때때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와 같이 그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축복을 받는다.
“우리는 건강을 급작스럽게 되찾은 자들과 같았도다”(하몬드 박사의 해석).
구원이 우리에게 임한 것은 위로의 행복한 변화와 같아서 마치 죽음에서 생명으로, 격렬한 고통에서 갑작스런 평안에로 옮겨진 것과 같다.
그 놀라움은 그들에게 황홀경과 같았다. 그것은 황홀한 기쁨과 같이 주어져 그들도 좀처럼 기쁨을 표현하는 데 체면의 한계를 지킬 수 없었다.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들은 이와 같이 그들의 기쁨을 발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얼마나 큰 이적을 행하셨는가를 모두에게 알렸다.
과거에 울었던 자들이 이제 웃으며, “새 노래가 그들의 입에 담겼다.” 그것은 적들에 대한 경책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기쁨의 웃음이었다.
Ⅲ. 저희의 이웃이 그것을 인식함.
“그들은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 백성을 위해 다른 신들이 우리를 위해 할 수 없는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열방들은 그들의 환난을 보았고, 그 환난에 승리하는 것을 보았다(137:7; 렘 22:8-9). 이제 그들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책망 받고 멸시받은 자들에게 명성이 주어지고, 그들을 괄목하게 했다.
그들의 승리가 크게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려졌고,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섭리에 대한 감사를 그에게 돌림으로써 다른 신을 섬기는 자들을 무력하게 했다.
Ⅳ. 그들이 구원에 대해 감사함(3절).
열방은 구경꾼에 지나지 않았고, 그것을 단지 뉴스거리로만 말했다. 열방은 그 사건에 참여하지 못했고 아무런 업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에 대한 참여자로 그것에 대해 말했다.
1. 마음을 기울임으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즐겁고, 그로 인해 은택을 입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대로, 행하신 구속에 대해 말하는 것은 위로가 된다. “누가 나를 사랑하며, 나를 위해 자신을 바쳤는가?”
2. 감동되어서. “우리는 기쁘도다.”
이스라엘이 저희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간음하러 간 동안에 기쁨이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았다(호 9:1).
그러나 이제 야곱의 불의가 포로에 의해 속죄되었고, 저희의 죄가 사해졌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을 즐겁게 하신다. 기뻐하는 백성, 장차 그렇게 기뻐할 백성은 참회하며 개혁하는 백성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고찰해 볼 수 있다.
(1) 그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것은 대사로 간주되어야 한다.
(2) 하나님은 교회를 위해 이루신 모든 대사의 창시자로서 여겨져야 한다.
(3) 교회의 구원이 우리를 위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관찰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기뻐하게 될 것이다.
-------
소망의 자비(시 126:4-6)
이 구절들은 소망했던 자비를 바라보고 있다.
포로에서 나온 자들은 여전히 고난 중에 있었으며, 그들의 본토에서도 고난을 당했다(느 1:3).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바벨론에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떨면서 기뻐했고, 아직도 회복되어야 할 슬픔을 마음속에 담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볼 수 있다.
Ⅰ. 그들의 구원을 완전케 해달라는 기도(4절).
“우리의 포로를 돌리소서. 자기 본토에 돌아간 자들로 하여금 지금까지 신음하던 고역을 풀게 하소서. 바벨론에 남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우리가 자유의 혜택을 부여받은 것처럼 저희의 마음이 뛰놀게 하소서.”
자비의 시작은 그것을 완전케 하도록 간구하는 우리에게 격려가 된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우리가 찬양할 일이 넘쳐 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기도할 문제가 남아 있게 된다.
우리가 자유하게 되고 번영 중에 있게 될 때, 우리는 고난과 속박 중에 있는 우리의 형제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미 돌아온 형제들과 함께 연합해 포로 중에 있는 자들이 돌아옴은, 남방에 있는 마르고 건조한 나라들에 양쪽으로 흐르는 물줄기처럼 환영될 것이다.
먼 땅에서 오는 이 좋은 소식은 목마른 영혼에게 냉수가 주어진 것과 같다(잠 25:25).
Ⅱ. 구원을 기다릴 수 있는 격려에 대한 약속.
그들이 지금은 슬픈 때에 있을지라도 그 약속을 확신해 장차 좋은 결과가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그 약속이 일반적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성도들이 이러한 확신을 갖고 자신들을 위로할 수 있으며, 그들의 눈물의 씨가 결국 기쁨의 수확을 거두게 될 것이다(5절).
1. 고난 당하는 성도들은 눈물의 씨를 뿌린다.
그들은 종종 눈물을 흘린다. 그들은 인생의 고난에 참여하고 있으며, 대체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고난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울며 씨를 뿌린다.”
그들은 고난의 상황에서 의무를 수행하며, 그리하여 그들이 지배받는 섭리의 목적에 응답한다. 눈물을 흘리는 일이 씨를 뿌리는 일을 막을 수 없다.
우리가 크게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더욱 잘 행동해야 한다.
아니, 비를 맞고 땅이 씨를 받을 준비를 하며, 농부가 젖어 있는 땅을 찾아 씨를 뿌리는 것과 같이, 우리는 회개와 기도와 겸손을 행해 고난의 때를 선용해야 한다. 아니, 그 자체로 씨가 되는 눈물이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한 슬픔의 눈물, 고난받는 교회에 대한 동정의 눈물, 기도와 말씀에서 생기는 자비의 눈물을 뿌려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농부가 곡식이 귀할 때 씨를 뿌리며, 그의 가족을 위해 적지 않은 것을 뿌려 땅에 묻고, 다시 얻을 수확을 기대하면서 뿌리는 것과 같은 귀중한 씨앗이다. 선한 사람은 이와 같이 눈물로써 씨를 뿌린다.
2. 그들은 기쁨의 단을 거두게 된다.
성도들의 고난은 항상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저희의 업을 마치면 행복한 시기가 오게 된다.
바벨론 포로는 오랫동안 눈물로 씨를 뿌렸지만, 드디어 기쁨으로 나아오게 되었으며, 견딜 수 있는 고난의 혜택을 수확했고, 그들 본토의 곡식 단을 가져오며,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하게 되었다.
욥과 요셉과 다윗과 많은 사람들이 슬픔의 씨 다음에 오는 기쁨의 수확을 경험했다.
경건한 슬픔의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들은 인봉한 용서와 안정된 평화의 기쁨으로 거두게 될 것이다.
눈물의 골짜기에서(이 세상에서) “성령으로 씨를 뿌리는 자들은 성령으로 영원한 생명을 거두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실로 기쁨의 추수가 될 것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라.”
----
----
@/Yxi(6726, 치욘) 시온 Zion(지)
치욘은 그 의미를 '보호받는' 또는 '양지바른' 등으로 보며, 아랍어로는 차웨(산마루)이다. 어떤 학자들은 '요새'나 '성'이란 뜻이라고 한다.
시온은 원래 예루살렘의 기드론과 투로포에온(Tyropoeon) 골짜기 사이의 산등성이의 남쪽 정상에 있는 바위로 된 비탈면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 이름은 일찍이 예루살렘이 펼쳐져 있는 동쪽 산등성이 전체에 대해서 사용되었다. 후에 시온은 더 나아가 예루살렘 도시 전체를 포함하기까지 확장된다(시 126:1; 사 1:26 이하, 사 10:24; 예루살렘 지도를 보라). 신약성경에서 시온은 계시를 함축하는 상징적인 단어가 되었다(히 12:22; 벧전 2:6; 계 14:1). A.D. 4세기 이후에 시온은 투로포에온과 힌놈 골짜기 사이, 예루살렘 서쪽 산등성이의 남쪽 부분으로 잘못 연상되었다.
기드론과 투로포에온 골짜기 사이의 동쪽 산등성이 지점의 바위로 된 가파른 비탈은 커다란 천연 요새였다(사 19:11 이하). 기혼 샘(지금은 'Ain Sitti Maryam 또는 동정녀의 샘이라고 불린다) 지역과 En-rogel(지금의 Bir Ayyub 또는 Job' Well)은 도시의 대지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물을 공급하였다. 다윗이 이 여부스 사람의 성채를 포위 공격할 때에 조롱과 야유와 무시를 당했다(삼하 5:6, 삼하 5:8; 대상 11:5).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성이더라"(삼하 5:7; 대상 11:5-대상 11:8).
이 구역의 발굴은 게젤과 므깃도에서처럼 지하의 수도가 이른 시기에 시온의 수비에 이용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지점에서 본문이 심하게 훼손되고 알아보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삼하 5:8), 지하의 "도랑"(A.V.) 또는 "수로"(A.S.V.)가 다윗의 신복들에 의해 그 성채로 몰래 들어가는데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
성경상의 증거는 원래의 시온의 위치가 처음 서기 몇 세기 동안의 전통이 옹호하는 바와 같이, 서쪽 언덕 보다는 동쪽 산등성이의 돌출부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고고학상의 발견에 의해 지지를 받게 되었다. 다윗은 시온에 그의 궁전을 지었고(삼하 5:11; 느 12:37); 여호와의 궤를 위해서 장막을 쳤다(삼하 6:12, 삼하 6:17; 왕상 8:1); 그리고 그가 죽었을 때 그 곳에 장사되었다(왕상 2:10). 시온이 발전할 때에 다윗은 그 산등성이를 더 올라가 바위로 이루어진, 여부스 사람 아리우다(Ornan)의 타작 마당을 사서 거기에다 희생 제물을 위한 제단을 쌓았으며(삼하 24:18, 삼하 24:24 이하), 나중에 솔로몬이 그 곳에 성전을 세웠다. 요새이자 성채였던 시온에서 거룩한 땅으로의 시온의 변화는 성경과 고고학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비록 시온이 때때로 예루살렘이라는 특정한 지역으로 언급되기도 하지만(시 51:18; 사 30:19, 사 64:10; 암 1:2; 미 3:12), 시온과 성전 지대가 동일한 의미로 나타나는 성경 구절들이 있다. 시온은 여호와께서 그 곳에서 예배 받으셔야 할(시 65:1; 렘 31:6) "거룩한 산"(시 2:6), "여호와의 처소"(시 9:11, 시 76:2, 시 132편, 137편; 사 8:18, 시 60:14)이다.
바벨론 사람들이 히브리 포로들에게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고 요구하였다(시 137:1). 설사 이 노래가 어떤 히브리의 노래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 해도, 그것은 아마도 성전 주위를 향한 포로들의 향수에 가득찬 신앙을 표현한 곡조들 중의 하나를 언급하는 것일 것이다. 시 48 편은 동쪽에서부터 여행하면서 감람산에서 시온산을 바라보며 순례자의 생각과 감정을 기록한 일기이다. 유대인의 디아스포라에도 불구하고 흩어진 백성들의 신앙성장하는 예루살렘은 후에 서쪽 산등성이를 차지한다(대하 33:14).
기독교 전통은 마가 요한의 어머니의 집이 그 도시의 이 지역에 위치한다고 한다. 이미 A.D. 4 세기에 이 초기 교회의 모임 장소는 "사도들의 교회," 또는 "시온의 교회"라고 불리웠다. 시리아와 아르메니아의 교회들은 특히 이 예루살렘의 남서쪽 모퉁이를 시온으로서 소중히 여긴다.
신약성경에서 시온은 7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마 21:5과 요 12:15에서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시온의 딸이라고 불리우는 거민들을 다루고 있다(참조: 슥 9:9; 사 40:9; 사 62:11).
롬 11:26에서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라고 한다. 이 구절에 대해(참조: 사 59:20 이하) 브루스는 '복음이 제일 먼저 예루살렘에서 세상으로 전파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은(바울의 언어에 대한 이런 해석이 옳다면) 그 영화로운 성취의 자리가 될 것이다'라고 주석했다.
계 14:1에는 성전의 언덕을 가리키는 구약성경의 이름, 즉 시온산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고, 종말 때에 욜 2:32(3:5MT)의 예언이 시온산 위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적혀 있다.
히 12:22은 이에루살렘 에푸라니오스, 즉 그 안에 시온산이 자리잡은 하늘의 예루살렘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은 단지 지상에 영구한 도성이 없는 하나님 백성의 순례의 목표인 것만은 아니다(참조: 히 13:14). 공동체가 이미 시온, 즉 하늘의 예루살렘에 이르렀다. 새 예루살렘은 새로운 디아데케가 예수님의 피를 통해 이루어진 도성인 것이다"(E. Lohes).
벧전 2:6,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리스도는 새로운 건물의 맨 밑바닥에 있지 않고 맨 꼭대기에 있으므로(엡 1:22,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 기초석보다도 '요긴한 모퉁이 돌'로 본 것이 아주 적절하다. 사람들은 바로 보좌 위에 계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야 한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구원받은 무리들에게 가담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승귀된 주님으로 인정해야 한다. 이 예언이 성취된 시온은 하늘의 예루살렘이다(시 110:1; 시 110:2, 참조: 히 4:14; 히 4:16; 히 12:22-24).(A. M. Stibbs).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BD; H. Schultz).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시126:1)===
bWv(7725, 슈브) (되) 돌아가(오)다, 회복하다
슈브(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되)돌아 가(오)다, 회복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000회 이상 나오며, 칼, 폴렐, 푸알, 히필, 호팔, 풀랄형으로 사용되었으며,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칼형과 히필형에 국한한다.
성경에는 회개의 과정에 있어서의, 인간의 책임을 묘사해 주는 관용구들이 풍부하다: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라"(수 24:23),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여호와께 속하라"(렘 4:4), "네 마음의 악을 씻어버리라"(렘 4:14),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호 10:12) 등등. 그러나 인간의 회개 행위에 관한 이러한 모든 표현은 이 한 동사 슈브에 포괄되며 슈브로 요약된다. 이 동사는 본질적으로 회개의 두 가지 필수 조건들을 다른 어느 동사보다도 더 잘 결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필수 조건이란 악에서 돌아서는 것과 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칼 어간에서 슈브는 10가지 상이한 의미를 지니며 이 의미들도 각각 다시 나뉘고 그 중 몇몇 용례는 의미를 정확히 지적하기 어렵다고 한다(Hollacay). 이 중 두 세 가지는 특별히 고찰해 볼만하다.
우선 첫째로, 물리적 동작이나 운동의 뜻을 함축하고 있는 슈브의 기본 의미 '(되)돌아오다'는 270회 이상 출현한다. 하나님이 주어일 경우가 몇 번 있다: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사라)로 돌아오리라"(창 18:14). 인간이 주체인 경우가 가장 많다: "내가(아브라함) 아이(이삭)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창 22:5). 히필 어간에서는 '되돌리다, 다시 가져가(오)다'라는 의미로 87회 등장한다.
둘째로, 종종(120회 이상) 슈브는 일종의 조동사 구실을 하여 둘째 동사의 행위를 되풀이하는 기능을 갖는다: "그리고 이삭이 그 우물들을 '다시' 팠다"(창 26:18).
셋째로 슈브의 칼형이 지니는 중요한 용법이 또 하나 있는데 이것은 신학적으로 극히 중대한 것으로서 언약의 공동체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회개의 의미에서), 또는 악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죄를 버리고 부인한다는 의미)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는 것(배교한다는 의미)을 다루고 있는 구절들에서 출현한다. 이러한 문맥에서 슈브의 칼형이 129회 사용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 대 인간의 관계를 논할 때 슈브의 히필형은 11회 밖에 사용되지 않는다.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칼명령형) 우상을 '떠나고'(히필)"(겔 14:6).
모든 어간을 고찰하고 난 후 홀러데이(Holladay)는 언약의 문맥에 슈브의 용례가 총 164회 등장한다고 결론짓는다.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의 대다수 곧 113회가 고전적/문학적 선지서들에서 발견되며 예레미야가 그 선두를 달린다(48회). 예레미야와는 대조적으로 이사야의 첫 39장에는 슈브의 언약적 용법이 단지 6회 밖에 발견되지 않는다(만일 우리가 사 30:15을 "너희가 [하나님께로]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고 읽지 않고 '여전히 앉아 yashab 즉 외국과의 동맹을 끊고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고 읽는다면 5회 밖에 되지 않음). 나머지 뒷 부분의 27장에서는 단 4회가 발견된다: 사 44:22, 사 55:7, 사 57:17, 사 59:20. 이처럼 우리는 이 두 예언서가 정경에서 서로 등을 돌리고 있는 흥미로운 현상에 접하게 된다. 즉 첫째 것은 이 주제에 관해 사실상 침묵하고 있으며, 둘째 책은 소리가 꽤 크게 울린다는 사실이다. 이사야의 용례 결핍 현상은 아마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는 식의, 이 선지자의 어투 때문일 것이다. 매우 통렬하게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말한다: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염려컨대 그들이 다시 돌아와서(슈브)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10). 돌아올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하고 말았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완악성을 미리 내다보시고 이를 자기의 계획 속에 혼입시켰다. 그러므로 선지자 이사야는 좌절할 필요가 없었다(마 13:13 이하).
수많은 구절에서 슈브가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다" to return from exile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칼형: 물론 에스라와 느헤미야에서 나오며(스 2:1, 느 7:6), 그리고 특히 사 10:22, 렘 22:10, 슥 10:9.
히필형: 특히 왕상 8:34, 렘 12:15.
포로 생활에서의 귀환 개념과 언약에로의 복귀 개념 사이의 관련성은 명백하다. 포로생활로부터의 귀환은, 어느 형태의 죄이든 그 죄에서 돌아서는 것 만큼의 갱생이었다. 하나님의 그 어느 쪽의 돌아옴이든 허락한다는 것은 그의 언약적 신실성을 확증해 주는 것이다.
확실히 구약성경에는 회개의 교리에 대한 체계적 설명이 없다. 이것은 그 어느 것보다 더 잘 예증된다(시 51). 그러나 백성들에게 '~에로' 또는 '~으로부터' '돌아서라'는 요구가 주어진다는 사실은, 죄가 근절할 수 없는 오점이 아니라 돌아섬으로써 즉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능력에 의해 죄인이 자기 운명의 방향을 수정할 수 있음을 뜻한다. 회개를 이해하는데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즉 하나님의 자비의 임의로운 주권적 행동과, 인간이 통회와 슬픔을 초월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의식적 결단을 하는 것이 그것이다. 후자에는 모든 죄의 거부와 자기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을 긍정하는 행위가 포함되어 있다.
(참조: V. P. Hamilton; BDB).
===[이스라엘나라를 회복하실때..행1:6-8]]====
ajpokaqivsthmi(600, 아포카디스테미) 되돌리다, 회복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아포카디스테미는 아포(ajpov, 575)와 카디스테미(kaqivsthmi, 2525)에서 유래했으며, 기본 의미는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거나 회복시키다'이며, 이 의미에서 다음의 의미가 파생되었다.
(a) '반환하거나 돌려주다', 임대한 것이나 빌린 것에 대하여 사용되었다.(P. Oxy., Xenoph.)
(b) '복구하다'나 '회복하다'.
① 수로(canal)에 대하여 사용되었다(Ditt. Or.).
② 중간태로 '치유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Diosc.).
(c) 우주론적으로 '세상을 새롭게 하다'(Herm. Trismeg.).
(d) 정치적으로 '나라를 재건하다'(Antiochu Ephipanes)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아포카디스테미는 70인역본에서 48회 나오며, 몇회를 제외하고는 모두 히브리어 슈브(7725)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되돌리다, 회복하다'라는 의미에서 '돈을 지불하는 것'(창 23:16), 우물 아구에서 돌을 굴려 내는 것(창 39:3), 전직을 회복하거나 복직하는 것(창 40:13; 창 40:21, 창 41:13), 물이 다시 흐르는 것(출 14:26 이하)을 나타낸다.
그리고 출생 때가 같이 되게 하는 것(호 2:5), 공의를 세우는 것(암 5:15), 이스라엘을 포로에서 고국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것(렘 16:15; 렘 23:8; 렘 24:6), 지위를 회복하는 것(겔 16:55), 마음을 서로 돌이키는 것(말 4:6), 병에서 치유됨(욥 33:25) 등을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아포카디스테미는 신약성경에서 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아포카디스테미는 '회복하다'는 의미에서 '치유하다'를 의미한다.
① 막 3:5,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병행구, 마 12:13; 눅 6:10).
② 막 8: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b) 아포카디스테미는 '만물을 회복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① 마 17:1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병행구, 막 9:12). 변모 기사에서 이 예수님의 언급은 말 4:5 이하에 대한 언급이다. 이것은 엘리야가 모든 사물을 올바른 상태로 회복시키므로, 백성들을 회복시키며 개조시키는 도구가 되어 메시야에 대한 올바른 개념과 그의 오심을 준비하도록 할 것이라는 것이다. 세례(침례) 요한이 출현하기 전에는 그들의 견해가 잘못되었고 세상적 기대로 가득차 있었으며, 그들의 행동은 말할 수 없이 부패해져 있었다. 세례(침례) 요한은 메시야에 관한 그들의 잘못된 개념을 바로 잡아 주었으며(마 3장), 광범한 개혁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회복시키는 도구가 되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유대인들의 메시야에 대한 그릇된 견해를 바로 잡고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하도록 하였다(참조: Barnes' Notes).
그러므로 메시야에 관한 논쟁에서 예수님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할" 인자의 운명을 언급함으로, "모든 것을 회복할" 엘리야의 기능에 집중된 정치적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논박하신다.
② 행 1:6 이하에서 이와 유사한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여전히 정치적 메시야의 관점에서 인식했던 제자들의 이런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기한을 계산하지 말고 약속 받은 성령의 선물을 기다리라고 답변하신다.
(c) 히 13:19에서 아포카디스테미는 '되돌아 가다'를 의미한다: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 -G. Link; A. Oepke).
=====
[[어떤 에봇인가, 아이사무엘 궤를 메어 오는 다윗처럼 겸비의 중보자에 합당한 세마포 베에봇을 입는가?]]삼상2:18 사무엘하 6:12 - 6:23
12.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13.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14.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16.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17.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준비한 자리에 그것을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18.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19. 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에게 남녀를 막론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누어 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20.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21.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22.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23.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
---------
역대상 15장 [개역개정]
하나님의 궤를 옮길 준비
1. 다윗이 다윗 성에서 자기를 위하여 궁전을 세우고 또 하나님의 궤를 둘 곳을 마련하고 그것을 위하여 장막을 치고
2. 다윗이 이르되 레위 사람 외에는 하나님의 궤를 멜 수 없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택하사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영원히 그를 섬기게 하셨음이라 하고
3. 다윗이 이스라엘 온 무리를 예루살렘으로 모으고 여호와의 궤를 그 마련한 곳으로 메어 올리고자 하여
4. 다윗이 아론 자손과 레위 사람을 모으니
5. 그핫 자손 중에 지도자 우리엘과 그의 형제가 백이십 명이요
6. 므라리 자손 중에 지도자 아사야와 그의 형제가 이백이십 명이요
7. 게르솜 자손 중에 지도자 요엘과 그의 형제가 백삼십 명이요
8. 엘리사반 자손 중에 지도자 스마야와 그의 형제가 이백 명이요
9. 헤브론 자손 중에 지도자 엘리엘과 그의 형제가 팔십 명이요
10. 웃시엘 자손 중에 지도자 암미나답과 그의 형제가 백십이 명이라
11. 다윗이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을 부르고 또 레위 사람 우리엘과 아사야와 요엘과 스마야와 엘리엘과 암미나답을 불러
12.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의 지도자이니 너희와 너희 형제는 몸을 성결하게 하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올리라
13.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니
14.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올라가려 하여 몸을 성결하게 하고
15.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명령한 대로 레위 자손이 채에 하나님의 궤를 꿰어 어깨에 메니라
16. ○다윗이 레위 사람의 어른들에게 명령하여 그의 형제들을 노래하는 자들로 세우고 비파와 수금과 제금 등의 악기를 울려서 즐거운 소리를 크게 내라 하매
17. 레위 사람이 요엘의 아들 헤만과 그의 형제 중 베레야의 아들 아삽과 그의 형제 므라리 자손 중에 구사야의 아들 에단을 세우고
18. 그 다음으로 그들의 형제 스가랴와 벤과 야아시엘과 스미라못과 여히엘과 운니와 엘리압과 브나야와 마아세야와 맛디디야와 엘리블레후와 믹네야와 문지기 오벧에돔과 여이엘을 세우니
19. 노래하는 자 헤만과 아삽과 에단은 놋제금을 크게 치는 자요
20. 스가랴와 아시엘과 스미라못과 여히엘과 운니와 엘리압과 마아세야와 브나야는 비파를 타서 알라못에 맞추는 자요
21. 맛디디야와 엘리블레후와 믹네야와 오벧에돔과 여이엘과 아사시야는 수금을 타서 여덟째 음에 맞추어 인도하는 자요
22. 레위 사람의 지도자 그나냐는 노래에 익숙하므로 노래를 인도하는 자요
23. 베레갸와 엘가나는 궤 앞에서 문을 지키는 자요
24. 제사장 스바냐와 요사밧과 느다넬과 아미새와 스가랴와 브나야와 엘리에셀은 하나님의 궤 앞에서 나팔을 부는 자요 오벧에돔과 여히야는 궤 앞에서 문을 지키는 자이더라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다
25. ○이에 다윗과 이스라엘 장로들과 천부장들이 가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즐거이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올라왔는데
26. 하나님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을 도우셨으므로 무리가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로 제사를 드렸더라
27. 다윗과 및 궤를 멘 레위 사람과 노래하는 자와 그의 우두머리 그나냐와 모든 노래하는 자도 다 세마포 겉옷을 입었으며 다윗은 또 베 에봇을 입었고
28. 이스라엘 무리는 크게 부르며 뿔나팔과 나팔을 불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힘있게 타며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어 올렸더라 29. ○여호와의 언약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춤추며 뛰노는 것을 보고 그 마음에 업신여겼더라
---------
[[삼상2:18-21]] *18.사무엘은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 *19.그의 어머니가 매년 드리는 제사를 드리러 그의 남편과 함께 올라갈 때마다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그에게 주었더니 *20.엘리가 엘가나와 그의 아내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게 다른 후사를 주사 이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얻어 바친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니 그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매 *21.
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시사 그로 하여금 임신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
###. 어린 사무엘은 매우 잘 하였다. 여기에서는 사무엘에 관한 언급이 네 번에 걸쳐 나오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1) 사무엘은 여호와를 잘 섬겼다(11, 18절). 그는 교리를 배웠으며 항상 기도에 힘썼고, 곧 읽기를 배우고 율법서를 읽을 때 즐거움을 깨달았으며, 이처럼 여호와를 섬겼다. 그는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겼다. 말하자면 엘리의 감독하에 엘리의 명령에 따라 여호와를 섬겼다. 엘리의 아들들 앞에서 섬긴 것이 아니었다. 무엇으로 보든지 그들은 사무엘의 후견자가 될 수 없었다.
아마 사무엘은 엘리의 곁에서 직접 그를 섬겼으며, 그의 일을 도와주었는데, 이것을 두고도 그가 하나님을 섬겼다고 일컬어졌을 것이다. 사무엘은 레위기의 제사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나이보다도 훨씬 적었지만 제단 곁에서 엘리를 도와 주었을 것이다. 사무엘은 촛불을 켜거나 접시를 들거나, 또는 심부름을 하거나 문을 닫는 일 같은 것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할 때도 매우 경건한 심정으로 했기 때문에 “여호와를 섬겼다”고 말할 수 있으며, 또 크게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한동안 사무엘이 그의 일을 하도 잘했기 때문에 엘리는 (그가 비록 제사장이 아니지만) 제사장들이 입는 에봇을 입도록 허락해 주었을 것이다. 엘리가 볼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과 함께 계셨던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일찍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 부모들은 이렇게 자녀들을 양육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받아 주실 것이다. 특별히 아이들에게는, 사무엘이 엘리를 대하듯이, 스승을 존경하는 태도를 가르쳐 주어야 한다. 신앙은 매우 어린아이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시 8:2; 마 21:15, 16 참조).
(2) 사무엘은 여호와의 축복을 받았다. 사무엘은 어린 나무와 같이 여호와 앞에서 자라났다(21절). 힘과 키 그리고 특히 지혜와 이해력이 점점 자라서(26절), 그 일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능력이 있는 대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젊은이들은 하나님을 보다 잘 섬길 수 있는 은혜를 입는다. 여호와의 집에 심어진 나무는 더욱 흥왕하게 된다(시 92:13). 사무엘은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았다.” 어린이들이 순종을 잘하게 하며 덕스럽게 기르는 것은 그들에게 크게 힘을 돋우어 주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때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들은 하늘로부터 그리고 땅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여기에 사무엘에게 일컬어졌던 바로 그대로 우리의 주님 예수께 대해서도 그대로 일컬어졌다(눅 2:52).
=====
다윗의 재도전과 미갈(삼하 6:12-19)
다윗은 여기서 다시 한 번 궤를 자기의 도성으로 옮기려는 시도를 벌인다. 그리고는 이전과는 달리 성공을 거둔다.
Ⅰ. 다윗이 다시금 도전을 하도록 하게 된 주요 원인은, 오벧에돔이 궤 때문에 받은 축복을 그가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 소식을 듣자(12절), 다윗은 즉시 사람을 보냈다. 그 이유는
1. 그 사실은 하나님이 자기들과 화해하시사 노를 돌이키셨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었다. 다윗은 웃사의 죽음에서 자기들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읽었듯이, 이제는 오벧에돔에게 내린 번영을 보고 저들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호의를 입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화해해 주시면, 우리는 즐거이 우리의 계획을 밀고 나갈 수 있다.
2. 궤란 지고 가야 할 무거운 짐이 아니라, 그 가까이에 있는 자들에게는 복의 근원이 된다고 하는 증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불복종하는 자에게는, 그리스도가 “걸림돌이요 훼방의 반석”이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그가 “모퉁이 돌이요, 세워 주는 귀중한 돌”이 된다(벧전 2:6-8).
다윗은 오벧에돔이 그토록 궤의 은덕을 입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그것을 도성으로 가져오려 했다. 남들이 복을 받는 경험을 보면, 우리도 더욱 신앙심을 굳게 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궤가 어떤 집에 축복의 근원이 되었는가? 그렇다면 그것을 우리 집으로 가져오라. 우리는 그것을 남에게서 빼앗지 않고도, 가지게 되고, 복을 받게 되리라.
Ⅱ. 이번에는 다윗이 어떻게 일을 처리했는지 보자.
1. 그는 이전의 실수를 시정했다. 이번에는 궤를 수레에 싣지 않았다. 그 일을 맡을 임무가 있는 자들에게 시켜서, 그것을 어깨로 매고 가게 했다. 그 사실이 여기서는 암시만 되었지만(13절), 역대상 15장 15절에서는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전의 실수를 교정하고 났을 때에야, 우리에게나 남들에게 내린 하나님의 심판을 선용한 것이 된다.
2. 먼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시작했다(13절). 그렇게 함으로써 이전의 실수를 속죄하고, 오벧에돔에게 내려 준 축복을 감사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서 일을 시작하고, 그와 화해를 하는 데에 부지런했을 때에야, 우리의 계획을 급속히 진행시킬 수 있는 법이다. 거룩한 규례를 통해서 하나님을 받을 때에는, 저 대희생 제물을 염두에 두고 해야 한다. 그 제물을 통해서 우리가 계약을 맺을 수 있었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되었음을 시인해야 한다(시 50:5).
3. 다윗 자신이 최대한의 기쁨을 표명하면서 그 식전에 참례했다(14절). “그는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다.” 그는 마치 도취된 사람처럼 기뻐서 뛰었다. 더구나 지난 번에 당한 일로 인한 좌절이 컸기 때문에, 이번엔 그만큼 기뻤던 것이다.
잘못이 시정되고 자기가 의무를 이행하게 되는 것을 아는 일은 선한 자들에게는 즐거움이다.
생각건대, 그가 아무렇게나 춤을 춘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 그는 일정한 규칙을 따라서 춤을 추었을 것이다. 아무도 그와 함께 춤을 추지 아니했다. 그러나 그의 춤은 최대의 기쁨과 환희에서 우러나온 자연스런 표현이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춤을 추었다. 그러므로 우리도 모든 종교적 행사를 최대한의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해야 한다. 실상 온갖 힘을 다한다 해도, 그것은 거룩한 의무를 다하기에는 어림도 없다.
이 때를 당하여 다윗은 자기의 왕복을 벗어치우고, 평범한 베옷으로 갈아 입었다. 그 베옷은 가벼워서 춤추기에 편리했으며, 제사장이 아닌 자들이 종교적 의식을 거행할 때 사용했던 것이다. 사무엘도 그런 옷을 입었기 때문이다(삼상 2:18).
이 위대한 임군은 자기가 궤를 받드는 일군의 관습을 따르는 것을 조금도 품위 하락으로 생각지 않았다.
4. 이 제가 진행되자 모든 사람들이 나팔을 불었다(15절). “그들은 소리를 치며 나팔을 불어서 궤를” 왕성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박수갈채를 보내어 자기들의 기쁨을 표했고,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같이 즐거워한다는 뜻을 알렸다.
일반 시민 권력의 보호와 또 웃음 아래 규례가 공적으로 자유로이 집행되었다는 것은 모든 민중에게 실로 즐거움거리였다.
5. 궤는 미리 준비된 장소에 안전하게 인도되어, 영예롭게 안치되었다(17절). 그들은 궤를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다가” 두었다. 모세가 쳤던 장막은 아니다. 그것은 기브온에 있기 때문이다(대하 1:13). 게다가 그것은 천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오랜동안 낡아졌기 때문에 이동하여 다니기에는 부적합해졌을 것이다. 그래서 궤를 맞이하기 위해서 새로운 장막을 마련했던 것 같다. 다윗은 궤를 자기의 사저나 궁궐로 가져가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필경 다윗이 지나치게 그것을 독점하는 것이요, 백성들이 그 앞에서 기도하기 위해 나아오는 출입이 부자유해졌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궤를 위해 집을 짓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되면 시기가 되어서 보다 견고하게 건축될 성전 건축을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당분간 모세의 회막을 본떠서 만든 장막 속에 넣어 두었던 것이다.
궤가 정돈되자마자 다윗은 번제와 화제를 드렸다. 더 이상 아무 실수도 없이 그 업무를 하게 된 데 대한 하나님께 감사를 위해서요, 계속하여 은혜를 내려 주십사고 비는 하나님께 대한 간구의 뜻이었다. 우리도 기쁨이 있을 때는 언제나 찬미와 기도를 수행해야 한다. “그 같은 제사를 하나님이 즐거워하시기 때문이다.”
아마 이 때를 당하여 시편 132편을 썼을 것이다.
6. 그러자 백성들은 크게 만족한 태도로 돌아갔다. 다윗은 이렇게 하여 그들을 돌려 보냈다.
(1) 은혜로운 기도를 해 줌으로써. “그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였다”(18절). 그것은 예언자의 한 사람으로서 하늘과 특별한 이해 관계를 가지고 한 것임과 동시에 그들을 다스리는 군주의 권위로 한 것이었다. “더 작은 자는 더 큰 자의 축복을 받는 법”이기 때문이다(히 1:7).
다윗은 하나님께서 백성을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특별히 그같은 여행이 자기들에게는 조금도 손해가 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자기들의 가사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감당키 어려운 것이 되리라는 확신 밑에서, 그들이 궤에 대해서 표한 그 존경심에 대한 하나님의 상급이 있기를 기도했다. 다윗은 이 기도로써 그들의 복리에 대한 자신의 갈망을 입증했고, 그들에게는 자기들을 사랑해 주는 왕이 있다는 사실을 알린 셈이다.
(2) 관대한 대접을 하여 보냈다. 사실 상당한 자선을 베풀어 보냈기 때문이다. 귀빈들은 아마 자기 집에서 대접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무리에게 남녀를 불문하고” (요세푸스는 아이들에게까지라 한다) 한 가지로 “떡 한 개, 고기 한 점, 그리고 (요세푸스에 의하면) 화목 제물 한 조각”을 주었다. 그래서 그들이 모두 다윗과 같이 “제물과 포도주” 를 즐기게 했다(19절:한글 성경과는 다소 다름―역주). 아마 다윗은 그들을 각각 지방별로 나눠서 이 같은 대접을 할 수 있도록 조처했을 것이다.
① 그것은 다윗 자신의 기쁨과 하나님께 대한 감사한 마음의 표시였다. 마음이 즐거움으로 커지면, 손은 후대로써 열려져야 한다. 부림절은 “서로 예물을 주면서”(에 9:22) 지냈다.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자는 용서의 자비를 남에게 베푸는 데에 자비로와야 하듯이, 하나님의 관후한 대접을 받은 자들은 역시 남에게 주는 데에 관후해야 한다.
② 백성에게 자신을 천거하며, 자기와 그들과의 이해 관계를 확신시키는 것이었다. “예물을 주는 자는 모두 친구이기 때문이다.”
다윗의 기도에는 관심없던 자도 그의 후한 인정 때문에 다윗을 사랑했을 것이다. 또한 이런 사실 때문에, 앞으로 언제든 다윗이 부르면 그들은 기꺼이 응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으리라.
********
********
[[애통<펜데오-πενθεω>하는자에게 하늘 문이 열립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4-5)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욜2: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이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16:20)
“애통하다”의 헬라어가 <펜데오-πενθεω>입니다. “슬퍼하다, 아파하다”의 뜻입니다. <유월절>의 “넘어 간다”의 뜻을 가지고 있는 <페사흐-פסח>에 그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펜데오-πενθεω> 의 뜻에는 <절뚝 거리다>의 의미가 또한 담겨 있습니다. 얍복강에서 야곱이 하나님의 사람과 영적 씨름 했을 때의 그 모습입니다. 고난 당하는 영혼이 하나님 앞에 와서 절뚝거리며 영적인 씨름을 하는 모습입니다. 처절한 애통의 마음일 것입니다.
<펜데오-πενθεω>는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보면서 통곡하는 모습입니다.
그러한 고통스러운 절규가 애통입니다. 진정한 <애통>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보면서 마음을 찢는 것입니다.
<내> 죄의 모습을 보면서 <애통>하며 <절뚝거리며> 마음 아파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애통>을 통해서 <유월절>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고통과 고난의 시간에 어린 양의 피를 믿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예수 그리스도!
<내>죄로 인해서 죽었음을 진정으로 애통하며 슬퍼 할 때 보이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애통하는 영혼이 깊이 만나는 그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위로보다도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모든 것의 모든 것 되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축복입니다.
------------
dPes]mi(4553, 미스페드) 비탄, 울부짖음, 통곡, 애곡
미스페드(명남)는 사파드(dp's; , 5594)에서 유래했으며, '비탄, 울부짖음, 통곡, 애곡'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6회 나온다.
(a) 미스페드는 어떤 사람의 죽음에 대한 애곡과 관련되어 있다.
요셉은 아버지를 위해 애곡했다(창 50:10). 죄에 대한 국가적 회개의 필요성과 도래하는 심판의 확실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메시야의 도래시에 약속된 궁극적 구원을 강조하는 예언적 애도라는 완전한 유형이 생겨났다. 이 애곡은 메시야의 죽음에 관련되어 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슥 12:10-11).
이 메시야의 시대에 보다 깊은 의미에서 신자는 "오 주여...당신은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셨도다"!라는 시편 기자의 부르짖음을 다시 부르짖을 것이다(시 30:10-11). 사 22:12, 욜 2:12에서도 회개에 대한 애곡을 언급한다.
(b) 미스페드는 재난을 당함(암 5:16, 암 5:17, 미 1:8, 미 1:11, 렘 48:38, 겔 27:31)을 예견된 재난(렘 6:26, 에 4:3)에 관하여 사용되었다.(참조: BDB; TWOT).
----------
penqevw(3996, 펜데오) 슬퍼하다, 애통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펜데오(Homer 이래)는 펜도스(pevnqo", 3997)에서 유래했으며, '슬퍼하다, 애도하다, 애통하다'를 의미하며, 흔히 죽은 자를 위해 슬퍼하거나 애통하는 것을 나타낸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펜데오는 70인역본에서 약 60회 나오며, 주로 아발(애통하다)을 번역한다.
이 단어는 대부분의 경우, 이미 닥친 또는 임박한 불행 때문에 우는 행위를 내포하고 있다. 재앙을 만난 또는 맞게 될 지구, 땅, 도시의 일부분에 대하여 상징적으로 사용되었다(참조: 사 3:26; 사 24:4; 사 33:9; 렘 4:28; 렘 23:10; 애 2:8; 호 4:3).
어떤 개인의 죽음을 애도함(왕하 14:2; 대상 7:22), 후회(느 8:9),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동안 겪은 슬픔에(왕하 13:27; 왕하 19:1)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 밖에도 펜데오는 사 16:8; 사 19:8; 사 24:4, 사 24:7; 사 33:9에서 히브리어 아말(약하다, 약해지다, 기운이 빠지다, 번민하다)을 번역하며, 이것은 이 단어가 때때로 애통의 심리적·신체적 효과를 묘사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창 23:2과 창 50:3에서 펜데오는 히브리어 바카(울다)를 나타내며, 시 78:63[77:63]에서는 할랄(찬양하다)을 번역한다.
렘 23:10에서 펜데오는 누드(두근거리다 또는 떨다, 그러므로 슬픔의 감정을 나타내다),
겔 31:15에서는 카다르(스스로를 어둡게 하다, 즉 애통하다)를 번역한다.
이상에서 볼 때, 펜데오는 후회의 외적 표현을 비롯한 슬픔의 여러가지 의미를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펜데오는 신약성경에서 10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a) 펜데오는 마 9:15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슬퍼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막 16:10에서 펜데오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바울은,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죄를 회개하지 않는 것을 그가 알게 될 때 자기가 겪게 될 근심에 대하여 이 단어를 사용했다(고후 12:21).
(b) 마 5:4에서 펜데오는 영적 가난에 대하여 애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영적 상태와 회개와 관련된 슬픔이다.
눅 6:25에서 펜데오는 지금 웃는 사람들이 나중에는 울게 되리라는 내용 중에서 웃다의 반대어로 나온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지금 죄를 뉘우치지 않음으로 해서 나중에 그 댓가를 받게 될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c) 계 18:11; 계 18:15; 계 18:19에서 바벨론에 임한 심판을 보고, 바벨론과 무역하던 사람들이 울고 애통한다.
이들의 반응을 묘사한 곳에는 이들의 부의 원천인 바벨론이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로 인하여 느끼는 깊은 상실감이 깃들여져 있다.
⒟ 바울과 야고보가 사용한 펜데오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슬픔 또는 회개라는 관점에서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고전 5:2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기들 중에 있는 비도덕적인 것들에 대하여 취한 태도를 묘사하는데 펜데오를 사용했다. 그는 현재 그들의 태도를 "교만"하다고 말하면서, 그들이 그러한 상황에 대하여 "통한히 여겨야" 한다고 지적한다.
야고보는 약 4:9(참조: 약 4:8-약 4:10)에서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스스로를 낮추는 일환으로서 "[애통하며] 울라"고 권고한다. 이러한 마음 자세를 가질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높여주실 것이다. (참조: Walter Bauer; J.H.Thayer; T.McComiskey).
----------
((시126:5,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
hk;B;(1058, 바카) 울다, 비탄(애통)하다,
바카(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울다, 비탄하다, 애통하다'를 의미한다.
히브리어에서 이 어근은 '기쁨이나 슬픔의 이유로 울다'를 의미하며, 슬픔으로 인하여 우는 경우에 이 어근이 사용될 때는 애도, 불평, 후회나 회개를 포함한다.
그러나 눈물이 눈과 관련되는데 반해, 울음은 소리와 관련된다; 셈인들은 조용히 울지 않고 큰 소리로 울었다. 이런 병행구들은 우가릿어에 자주 나온다(Fisher). 그렇지만 아카디아어나 아랍어에서처럼, 우가릿어에서도 바카와 춤(금식하다)을 결합하는 데서 나타나는 회개에 대한 강조는 나오지 않는다.
동의어로는 다마크(눈물을 흘리다), 사파드(슬퍼하다), 그리고 죽은 자를 위한 형식적 애도를 강조하는 아발이 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14회 나오며, 칼형과 피엘형으로만 사용되었다.
(a) 바카는 다섯 가지의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비록 울음이 일반적으로 고난이나 슬픔과 관련되긴 하지만, 그것은 기쁨의 표시이기도 하다. 흥미있는 것은, 이 용법의 모든 용례들이 야곱의 기사에 나온다는 것이다.
야곱은 가나안에서부터 여행하고 난후, 라헬을 만나 기쁨의 울음을 울었다(창 29:11).
야곱과 에서가 오랫동안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났을 때 울었다(창 33:4).
요셉과 야곱은 애굽에서 만나 서로 울었다(창 49:29) 등.
(b) 바카는 고난 가운데서 우는 것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아기 모세는 바로의 딸 앞에서 울기 시작했다(출 2:6).
마찬가지로, 에서는 야곱의 사기 행위가 밝혀졌을 때 비탄과 좌절 가운데서 울었다(창 27:38).
욥은 자기가 "밭이랑"을 오용하여 그것으로 하여금 울게 만든 죄를 포함하여, 많은 죄들 중에서 하나라도 범했다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욥 31:38).
이스라엘은 적의 위협 때문에 울었다(삼상 11:4, 삼상 30:4 등); 그들은 포로지에서 울었다(시 137:1, 참조: 렘 31:15); 그리고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멸시하는 자들을 위해 울었다(시 119:136).
울음은 다른 사람의 고난에 대한 동정적 반응일 수도 있으므로, 고난이 반드시 그 사람 자신의 것 만은 아니다(참조: 욥 2:12, 욥 30:25, 사 16:9, 렘 48:5, 겔 27:31).
(c) 바카는 죽음에 대한 비탄을 나타낸다.
이런 형태의 애도는 삼무엘상 1장에 뚜렷하게 나타나 있는데, 여기에서 다윗은 살해된 사울과 요나단을 위해서 울고 있다.
사울을 위해서 우는 다윗의 울음에 보여진 그의 도량은 그가 적의 장군인 아브넬을 위해 우는 데에서도 다시 나타난다(삼하 3:32).
애곡의 시기가 신중하게 규정되었다는 것은 몇 가지 점에서 입증된다(창 50:4, 신 34:8, 등). 전문적인 애도자는 임종 때에 울도록 초청되었다(삼하 1:24, 렘 49:3, 시 78:64, 욥 27:15).
이것은 사자(死者)가 충분히 애도 되었으며 또 이 애도가 끝없이 계속되지 않음을 보증하는 이 두 가지 목적에 이용되었다.
죽은 자를 위한 이런 애도는 풍요 제의의 특별한 부분을 이루었으며, 그때에 죽은 초목 신은 그 해 가을에 애도 되었다. 우가릿 문헌에는 이 의식에 관한 언급들이 많이 있다(예: 본문 62; 67: Ⅵ, 그리고 참조: 왕상 18:26-29,
여기에서도 이와 비슷한 의식이 분명히 실행되었다). 에스겔은 이런 관습이 성전 안에서도 실행되고 있음을 보고 전율을 느꼈다(겔 8:14).
(d) 바카는 간구나 불평과 관련된 울음에 대해 사용되었다.
한나는 아들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삼상 1:7-10).
이와 마찬가지로 에스더도 바사의 황제 앞에서 자기 백성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하면서 울었다(에 8:3).
히스기야도 참조하라(왕하 20:3). 이런 유형의 울음은 쉽사리 푸념으로 바뀌기도 한다. 예를 들면 수수께끼를 풀어달라고 삼손을 졸라대는 그의 아내(삿 14:16)와 고기를 달라고 외치는 이스라엘인들의 부르짖음(민 11:4-20)이 이에 대한 증거이다.
(e) 바카는 회개의 울음에 대해 사용되었다.
후회하거나 벌을 슬퍼하여 우는 울음은 고대 근대의 다른 문화권에서도 알려져 있었지만, 순전히 하나님께 범죄한 것에 대해 슬퍼하는 것은 결코 알려져 있지 않았다.
구약성경에는 이 두 가지 모두 나온다. 전자의 한 예는 삿 21:2에서 발견될 것인데, 여기에서 이스라엘인들은 베냐민인들을 많이 죽인 자기네의 어리석음 때문에 울었다.
다른 한편, 요시야는 율법을 낭독하다가 울었고(왕하 22:19),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돌아서면서 울었다(렘 31:9, 렘 50:4).
귀환한 포로들이 율법을 읽고서, 자신들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깨달았을 때, 그들에게 거룩한 날이 애곡의 날이 아님을 일러주어야 했다(느 8:9, 참조: 스 10:1, 호 12:4, H5).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였음을 깨닫고 운 것도 이런 울음이었다(마 26:75).
아마도 자신의 죄에 대한 비통한 슬픔 없이는, 참된 회개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슬픔은 너무나 깊기 때문에, 울음을 유발시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할 것이다. 종말에 하나님은 모든 울음을 종식시키실 것이다(사 65:19, 참조: 사 25:8).
(참조: J. N. Oswalt; BD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