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11.19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시122.함께올라가는복음교회_유기적 참생명공동체.친히세우신주임재의거처.공중예배흠모.평안형통의진복기도.부르짖음_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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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시122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저높은곳을향하여491.[천부여의지없어서280].주예수님내맘에오사286.나의영원하신기업435..MyPeaceIGiveUnto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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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구속자, 구속하시는 여호와====@구속[무름(속량)/자유]회복---속전(지속적으로 정결케 하는 보혈의 능력)--보수./보응/심판

la'G:(1350, 가알) 되 사다, 속량하다, 구속하다, 근친의 역할을 행하다 [구속자 redeemer..근친/근족/혈연자 =고엘]

가알(동사)은 기본어근이며, '되사다, 도로 찾다, 속량하다, 구속하다 redeem, 근친 역할(권리, 의무)을 행하다'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어근은 '자기 친족을 어려움이나 위험에서 구하다'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 어근과 매우 유사한 어근 파다([d"P; , 6308): 구속하다 redeem) 사이의 한 가지 차이점은, 일반적으로 가알(la'G: , 1350)의 강조점이 구속자의 자격과 행함에 있는데, 반드시 근친이어야 하며, 근친의 특권이나 의무는 다름아닌 속량에 있다는 것이다.((JC가 바로 그러하시다..그는 태초이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신 아들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이미 예고된 대로, 참사람으로서 성육신하셨고 인성을 가지셨기에 [죄로 인해 자기의 모든 것을 사탄에게 넘겨주고 파산한 자들인]우리의 피를 나눈 근친/근족으로서 모든 면에서  참된 자격과 능력을 갖추신 유일무이한 고엘이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00회 이상 나오며, 칼형과 니팔형으로만 사용되었다.

가알은 착하고 진실한 사람이 자기의 친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포함하는 4개의 기본적인 상황에서 사용되었다.

(a)  첫째로, 가알은 오경의 법령에서 궁핍한 때에 판 밭을 되사는 것이나 가난할 때 자신을 판 이스라엘인 노예를 자유롭게 하는 것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합당한 대가를 치르고 되사서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바로 그대로 각 사람에게 배정/배분된 대로 모든 것을 돌려주고 모든 권리를 회복시켜 지고지선의 진복 누림의 바탕을 제공하여 주는 구속의 일]로서 이런 매입과 무르는 일은 근친의 의무였다(레 25:25-54).

레 25:25에서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라고 하였다. 

물론, 만약에 자신이 부유하게 되면 그 사람 자신이 그것을 '무를' 것이다(레 25:26). 

한편, 가난한 자는 기업만이아니라 자기 자신을 동족 이스라엘인에게나(레 25:39)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타국인(레 25:47)에게 팔기도 하였다. 

그를 속량할 책임은 가장 가까운 친척 - 형제, 삼촌, 사촌들, 가족의 혈족 - 에게 있었다(레 25:25, 레 25:48, 레 25:49).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친척을 속량한 redeemed 자(혈연자)는 '근족 - 구속자'로 알려져 있었다. (참조: EDBW).

---가난한 자의 구제에 관한 가장 유명한 실례는 수혼법에 대한 구약성경의 증거가 가장 광범위하게 미치는 룻기에 있는 것 같다. 

신 25:5-10에 의하면, 남편의 형제는 후사 없는 과부를 취하여서 씨를 영속시키고, 남자 후손과 결부되어 있는 땅의 계승을 보증해야 했다. 

여기 [수혼법의 실행 의무]에서 그것을 실행하는 근친은 야밤이라고 불리어지며, 어근 가알은 사용되지 않는다.

....룻의 상황에서는 두 가지 것들, 즉 밭을 되사는 것과 수혼이 언급된다. 근친은 밭을 사는 것을 기꺼워했지만, 룻과 결혼하는 것은 기꺼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의 요지는 나오미가 가난하여 밭을 팔 수 밖에 없었을 때, 근친은 그녀를 위해 그 밭을 되사야 했다는 데 있다. 그는 후사 없는 형제의 과부를 위해서 이 일을 기꺼이 하려 했지만, 그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그 근본을 모르는] 룻과 결혼하여 그들의 기업을 지속시킬 자손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그는 거부하였으며 여기에 보아스가 개입하였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것, 즉 친족과 수혼은 구별되어야 한다. 고엘(구속자)이란 단어는 후자의 제도를 가리키지 않는다. 

....레게트(Leggett)는 룻기에 구속적이고 메시야적인 유형론의 주제가 들어있다고 보았다. 

...."고엘(goel)로서의 보아스의 행동들에서 우리는 보아스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가 예시되어 있음을 보았다. 보아스가 구속의 권리를 소유하였으면서도 분명히 룻을 위하여 개입할 의무(까지)는 없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보라...룻은 나오미의 견해를 따라서 겸손하게 자신을 신부로 취하여 후사를 낳도록 해 달라는 뜻으로 보아스의 이불을 들추고 눕는다!!...겸손과 순종의 극치이다!!))

....보아스가 이 가난한 과부들의 곤경을 보았을 때 그의 생애가 여호와와 여호와의 율법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었으므로 그들을 구원하러 왔던 것과 같이 메시야의 경우도 그의 생애가 하나님의 법에 의해 지배되고 또한 그가 가난한 자들과 억압 받는 자들을 공정하고 정당하게 대우하실 것이라는 사실이 예언되었다(시 72:2, 시 72:4, 시 72:12, 시 72:13, 사 11:4).

(b)  둘째로, 가알은 재산이나 여호와께 바쳐진 희생제물 아닌 짐승들을 무르는 것, 혹은 부정한 짐승들의 첫 소산을 무르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레 27:11-33). 

이 [속전!!]사상은 인간이 교환물로 그에 상응하는 것을 여호와께 바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속전은 부정직한 교환을 피하기 위해 약간의 추가 몫이 제공되었다. 이런 경우에 무르는 자는 친족이 아니라 재산의 주인이었다.

(c)  셋째로, 가알은 살해당한 사람을 대신하여 "피의 보수자"(RSV '보복자' revenger)가 되는 가장 가까운 친족을 언급하는데 사용되며, 칼 분사 고엘로 나타난다. 

고엘은 구속자이며, 이 구속자는 '피의 보수자'로 불리우는데, 그의 임무는 자신의 친척을 살해한 자를 처벌하는 것이다(신 19:6). 

이 사상은 가까운 친족이 생명에는 생명으로 지불해야 한다는 것임에 틀림없다. 

돈을 지불함으로서 집을 재매입하거나 노예를 속량할 수 있는 것처럼, 친족의 잃어버린 생명은 마땅히 살인자의 그에 상응하는 생명으로 지불되어야 한다. 

친족은 피의 보수자이다. 이런 사형 제도는 피비린내 나는 숙원과 구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고엘은 죄없는 사형 집행인이었으며 따라서 살해되어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보수자'라는 의미로 12회 나온다(민 35:12, 민 35:19, 민 35:21, 민 35:24, 민 35:25, 민 35:27, 신 19:6, 신 19:12, 수 20:3, 수 20:5, 수 20:9).(참조: R. L. Harris).

(d)  넷째로, 가알은 하나님께서 '구속자'로서 '구속하시는 행위'에 대해 사용되었다.

....출 6:6에서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라고 약속하신다(출 6:6, 참조: 시 77:15). 

이스라엘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출 15:13). "하나님이 저희의 반석이시요 지존하신 하나님이 저희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시 78:35).

....이사야서에는 '구속자'라는 단어가 하나님을 지칭하여 13회 나오는데 모두 사 41- 63장에서 사용되었다. 가알은 하나님에 대해 9회 사용되었으며, 사 43:1에서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가알은 애굽으로부터의 구원(사 51:10, 사 63:9)과 바벨론의 포로생활로부터의 구원(사 48:20, 사 52:3, 사 52:9, 사 62:12)을 언급하는데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의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사 41:14)이며 '너희의 왕 이스라엘의 창조주'(사 43:14, 사 43:15)이며 '만군의 여호와'(사 44:6)이며 '야곱의 전능자'(사 49:26)이다. 그의 구원에 참예하는 자는 '구속 받은 자'이다(사 35:9).

....시편에는 종종 영적인 구원이 육적인 구원과 병행되어 나온다. 예를 들면 시 69:18., "내 영혼에게 가까이 하사 구속하시며 내 원수를 인하여 나를 속량하소서". 시 103:2, 시 103:4.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윤택을 잊지 말찌어다...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이 그러하다(참조: EDBW).


[욥19:25,26,27]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내 육체안에서 밖에 계신) 하나님을 보리라   *27.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25. "And as for me, I know that my Redeemer lives, And at the last He will take His stand on the earth.   *26. "Even after my skin is destroyed, Yet from my flesh(yet in my flesh) I shall see God;   *27.Whom I myself shall behold, And whom my eyes shall see and not another. 

....유명한 구절, 욥 19:25에서 고엘이란 단어는 흠정역성경에서 '구속자' redeemer로 번역되며 어떤 이들은 이 단어가 속죄의 사역을 하러 오실 그리스도의 오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히브리어 "파다"에 의해 더욱 특징적으로 표현될 것이다. 

....이제 욥 19:25에 나오는 이 단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결국에는 욥을 죽음의 먼지에서 구속할 친구이자 친족으로서의 하나님의 사역과 더욱 정확하게 관련된다. 욥 19:26의 난해한 어구, "이 가죽을 벗은 후에"는 다른 모음들과 함께 "내가 깨어난 후에"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NIV 각주와 욥 14:12-14을 참조하라. 욥 14:12-14에서 부활에 관한 욥의 질문은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그를 돌아보시며 욥은 나무처럼 제 2의 성장을 할 것이라는 그의 소망에 의해 절정에 달하게 된다 - 욥 14:14의 할리파(육체의 부활)는 욥 14:7의 할라프(소생)에 대한 응답이다). 어쨌든 욥은 마침내 자기 자신의 눈으로 자기의 고엘이신 하나님을 볼 것으로 기대한다(참조: R. L. Harris). 


..[[사59:20,21]]..*2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21.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9:24]] *23.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24.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미가6:8]]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시120]   *1.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2.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3.  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   *4.  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숯불이리로다   *5.  메섹에 머물며 게달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   *6.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   *7.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

-------그러하기에-----

[시121]  *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3.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7.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그러하기에----


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아마르..JC로 사는 기독자의 섬김을 경험하여 보고, 모든 인생마다 각자 결론적으로 주께 자원하여 돌이키게 하소서..그것이 주안에 사는 기독자의 진정한 기쁨이오니!!) 여호와의 집에(바이트 예호와..신구약시대전체에 걸친 복음교회) 올라가자(알라크)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샤마흐..기뻐하고즐거워하다)
2.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사랑겨워 자원하는 순종헌신의 발걸음의 실행) 네 성문 안에(심판보좌가 베풀어지는장소) 섰도다(아마드 하야)
3.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바나..기초를 세워 짓고 건축하여 완성-번성-번영-충만하다)
4.  지파들 곧 여호와의(YHWH) 지파들이(세베트..지파/부족.. 홀/지팡이) 여호와의 이름에(솀...임재의 어떠함-영광의 광채-얼굴..계시된 말씀의 기록/존재)  감사하려고(야다...전존재의 중심 기울여 감사-찬양-고백-사랑하다) 이스라엘의 전례대로(에두트..증거/약속/명령하신 말씀)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5.  거기에 심판의(미슈파트) 보좌를(킷세,,보좌)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
6.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샬롬..방탕-방종-방심-나태함의 죄와 죄성이 철저히 배제된, Q의 사랑의 열정 그대로 따른 자기희생/헌신적 섬김으로 이루시는 주 임재와 다스리심 : 균형조화안전, 고요, 기쁨, 모든 적극적 긍정적 참생명충만누림감사의 궁극) 구하라(
샤알 : [어떤일의 최선을]구하다-묻다/여쭈다-[필요를 따라]간청/요청/구걸하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아헤브...하나님의 아가페로 사랑함!!) 자는 형통하리로다(샬와/샬라...구하며 여쭈고 묻는 자, 그 간구결과 응답하며 도우시는 Q임재 인한 영생의 평온/평안/평강/번영의 실재와 영광)

7.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샬롬 하야...살아 생동하는 평강 능력)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샬와...영생빛이신 하나님 공급함)
8.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다바르...노래하며 말하여 역속/선포/권고하다)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9.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을(토브...Q임재영광의 통치구현으로 인한 지고지선의 진복:생육번성충만정복섬김) 구하리로다(바카쉬...간절히원하여묻고찾고추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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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새번역]시122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다윗의 시
1.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다윗의 시) 사람들이 나를 보고 "주의 집으로 올라가자" 할 때에 나는 기뻤다.
2.  예루살렘아, 우리의 발이 네 문 안에 들어서 있다.
3.  예루살렘아, 너는 모든 것이 치밀하게 갖추어진 성읍처럼, 잘도 세워졌구나.
4.  저 지파들, 주의 지파들이, 주의 이름을 찬양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를 따라 그리로 올라가는구나.
5.  거기에 재판의 보좌들이 놓여 있으니, 다윗 가문의 보좌들이로구나.
6.  예루살렘에 평화가 깃들도록 기도하여라. "예루살렘아,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7.  네 성벽 안에 평화가 깃들기를, 네 궁궐 안에 평화가 깃들기를 빈다" 하여라.
8.  내 친척과 이웃에게도 "평화가 너에게 깃들기를 빈다" 하고 축복하겠다.
9.  주 우리 하나님의 집에 복이 깃들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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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V]시122
1.  I was glad when they said unto me, Let us go into the house of the LORD.
2.  Our feet shall stand within thy gates, O Jerusalem.
3.  Jerusalem is builded as a city that is compact together:
4.  Whither the tribes go up, the tribes of the LORD, unto the testimony of Israel, to give thanks unto the name of the LORD.
5.  For there are set thrones of judgment, the thrones of the house of David.
6.  Pray for the peace of Jerusalem: they shall prosper that love thee.
7.  Peace be within thy walls, and prosperity within thy palaces.
8.  For my brethren and companions' sakes, I will now say, Peace be within thee.
9.  Because of the house of the LORD our God I will seek thy good.
===시122 개요===
이 시편은 이스라엘의 백성이 세 가지 장엄한 축제를 맞아 예루살렘으로 예배하러 올라갈 때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 다윗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예루살렘이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나타내기를 원하시는 도성으로 처음 선택된 때가 바로 다윗의 시대였다. 

예루살렘이 전에는 여부스 족속의 손에 있었으나, 거룩한 도성으로서 백성들이 새로이 사랑하는 대상이 되었다.
1. 그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 가졌던 즐거움(1-2).
2. 그들이 예루살렘에 대해 가졌던 위대한 존경(3-5).
3. 그들이 예루살렘에 대해 가졌던 커다란 관심과 복지를 위해 드렸던 기도(6-9).
우리는 이 시편을 노래하면서 복음의 교회, 즉 “위로부터 내려온 예루살렘”이라 불리는 교회를 바라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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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예배의 즐거움(시 122:1-5)
Ⅰ. 다윗과 다른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공중예배에서 하나님께 가까이하며 나아가는 데서 즐거움을 취한다(1-2절).
1. 그들은 초대를 환영했다.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 다윗이 기뻐했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가 “기뻐하였다”고 말했다.
(1) 우리가 합심해 하나님을 예배하고, 많은 사람들이 공중예배에서 그를 함께 시중들기 위해 연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집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는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야” 할 것이며, 거기에서 그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
(2) 우리는 서로 일치해야 할 뿐만 아니라,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러 가기 위해 서로 열심을 품고 고무되어야 한다.
“올라가자. 너는 가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라. 우리는 집에서 머물러 있으리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가겠노라”(슥 8:21)고 말해야 한다. 

“너는 먼저 가라. 그리고 우리는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가겠다”거나 “우리가 먼저 가겠다. 너는 우리 뒤를 따라 오라”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상호 교화와 격려를 위해서 함께 “올라가자”는 것이다. 

우리가 느리게 하고 뒤로 물러서면 다른 사람들도 역시 그렇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이 쇠가 쇠를 날카롭게 만드는 것처럼 서로를 선한 것으로 재촉해 예리하게 해야 한다.
(3)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자들은 그를 기다리라는 부르심과 기회를 기뻐한다.
다윗은 그가 신앙적 훈련에 대한 열심에 박차를 가할 필요를 거의 느끼지 않았지만, 그의 백성의 미천한 자들과 함께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그것을 기뻐해 친절히 대했다.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인간의 우애를 갈망해야 한다. 

그들이 수중에 선한 일을 갖고 우리를 불러 함께하자고 할 때에 그들을 흠모해야 한다.
2.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 매우 즐거운 일이었다(2절).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에 섰도다.”
시골에서 올라온 자들이 여행에 지쳤을 때 이것으로 자신들을 위로했다. 즉, 예루살렘에 곧 당도하리라 함과 그것이 저희 여행의 모든 피로를 풀어주리라 함이었다.
우리는 거기에서 [주님의]종 된 자격으로 서게 될 것이다. 

우리가 “섰는 자들 중에”(슥 3:7) 있다고 할지라도, 또 문지기의 자리라고 할지라도(84:10) 예루살렘에서 자리를 차지하게 됨은 흠모할 만한 일이다. 

우리는 이제 법궤가 거하는 처소에 이르렀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 거하게 될 것이다.
Ⅱ. 예루살렘에 대한 찬양(48:12 참조).
1. 예루살렘은 그 위치나 건축에서 아름다운 도성이다.
예루살렘은 흩어진 집이 아니라 인접한 집으로 지어졌고, 아름답고 공간적인 거리로 이룩된 “성읍”으로 지어졌다. 

예루살렘은 집들이 서로 튼튼하게 지탱할 수 있도록 “조밀하게” 단장되었다. 

비록 성읍이 높고 낮은 지역으로 구분되었지만, 여부스 족속들은 추방되었다. 그리고 성읍은 완전히 하나님 백성들의 소유가 되었다.
조밀한 성읍이라고 불리는 예루살렘은 경애함과 성도의 교제로 조밀하게 되어 모든 것이 한 성읍으로 되는 복음교회의 모형이 되었다.
2.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성이다(4절).
그곳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장소다. 

그의 명령에 복종해 “여호와의 지파”라는 유기적 참생명공동체 성격으로 모든 나라 각처로부터, 또는 개인 자격으로 “지파들이 그리로 올라간다.” 

예루살렘은 그들의 보편적인 회합 장소로 정해진 곳이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모였다.
(1) 하나님께로부터 가르침을 받기 위해. 그들은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와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며, 그의 신탁을 설명하심에 대해 들으려 했다.
(2)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함께 모였다.
우리는, 특히 이스라엘의 전례를 알고 있는 자들은 모두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 의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우리의 감사에 의해 그에게 응답해야 할 이유를 갖고 있다. 

우리가 공중예배에 갈 때 무엇을 하러 가는지 주시해야 한다. 즉, “감사하려고” 올라간다.
3. 예루살렘은 왕의 도성이다(5절). 

“거기 판단의 보좌를 두셨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예루살렘을 사랑해야 할 이유가 있다.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는 인간에 의해 거기에서 정의로 다스려지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시민권은 저희의 교회적 관심과 같이 잘 보장받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전례”와 “판단의 보좌”를 보는 것이 얼마나 좋은 통찰인가 보라. 그들은 좋은 이웃이어서 서로 크게 도울 것이다. 

이스라엘의 전례는 판단의 보좌를 향하도록 지시하며, 판단의 보좌는 이스라엘의 전례를 보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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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기도(시 122:6-9)
Ⅰ. 다윗은 예루살렘이 평안하기를 바라도록 다른 사람에게 요청하고 있다(6-7절).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의 복지와 모든 선, 특히 거민들의 연합과 적대자들의 침입으로부터의 보호를 간구하라.”
진실로 구한다면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평화를 얻게 된다. 

우리는 진지하게 구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이요, 또 그가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도 그것을 위한 기도를 할 수 있다. 그 기도는 그들의 선한 뜻을 보여주는 그 이상의 어떤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비를 가져오는 정한 길이다.
복음교회의 평화와 복지는 특히 우리의 땅에서, 우리 모두에 의해 열심히 간구되고 기도되어야 한다.
1. 우리는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한 기도를 하라는 격려를 받는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우리는 구습을 따라서나 형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류 통치에 대한 사랑의 원리,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원리로부터 예루살렘을 위해 구해야 한다.
공공의 복지를 찾으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것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을 사랑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형통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적어도 저희의 영혼은 그들이 극진히 사랑하는 법령에 의해 형통하게 될 것이다.
2. 우리는 그것을 위할 기도를 제시받으며, 말씀이 우리의 입에 놓인다(7절). 

“네 성안에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는 우리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친다.
(1) 성안에 있는 모든 미천한 자에게서부터 가장 높은 자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인 모든 거민들을 위해.
평화는 주의 성채에 있다. 요새는 결코 공격받거나 넘어지지 않으며, 도성의 유효한 안정책이 되어야 한다.
(2) 특히 방백들과 통치자들을 위해.
투구를 쓰고서 공공문제의 방향을 제시하는 위대한 사람들의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지어다.” 

그들이 형통한다면 그것이 바로 대중을 위해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 

가난한 부류들은 궁성의 번영을 부러워하기 쉽지만, 저희는 이제 그것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침 받고 있다.
Ⅱ. 그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할지라도 자신은 예루살렘에 대해 신실한 친구임을 입증하기로 결심한다.
1. 그의 기도에서. 

“이제 말하리니”, 나는 이스라엘의 증거를 따라 이리로 즐겁게 올라오는 지파들을 보고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기록하신 곳이 바로 예루살렘임을 안다. 

이제 내가 말할 것이다. “네 가운데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는 다른 사람들, 공공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직업인 제사장들과 선지자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백성들에게서 그것을 위해 투쟁하고 다스리겠다고 결코 말하지 않았다. 아니, 나도 그것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2. 기도를 보충하겠다는 그의 노력에서.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내가 네 복을 구하리로다.” 

대중의 복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활동의 영역이 어느 범위에 있든지 우리는 그것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기도하는 데에 열심을 품은 것이 아니다. 

예루살렘의 복지에 대해 걱정하는 다윗에게 감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예루살렘은 그의 도성이었고, 그의 가족의 재산이 거기에 묶여 있었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그가 예루살렘의 복지에 대한 관심을 가졌던 이유가 아님을 밝힌다. 오히려 그것은 그가 다음과 같은 것에 대해 가졌던 따뜻한 존경에서 우러나왔다.
(1) 성도의 교통을 위해서. 

그것은 “내 형제와 붕우를 위하여”, 즉 내가 내 형제로 간주하며(그는 그들을 그렇게 불렀다. 대상 20:2), 

하나님의 예배에서 내 붕우가 되었고, 내 마음이 저희와 함께 연결되었던 모든 진실한 마음을 가진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서였다.
(2) 하나님의 명령을 위해서. 

그는 “그의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였다”(대상 29:3). 

그는 공중예배에서 큰 기쁨을 취했다. 그러한 이유로 예루살렘의 복을 구하려 했다. 

“그렇다면” 대중의 복지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제도들에 대한 진지한 사랑과 하나님의 신실한 예배자들에 대해 영향을 미칠 때 올바르게 된다.

###영적 평강과 형통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뜻 

---- 기름부음 받은 바 성의진선, 아가페사랑 JC로 충만케 된 기독자들마다 JC를 빼어닮고, 친히 섬기시는 그분의 섬김 통로됨 통해, 맡겨주신 바 온 우주의 모든 피조물로 하나님의 진복 누림 위해 [생육-번성-충만-정복-다스림]안으로 참되게 인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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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지고지선, 완전한 아가페사랑의 3가지 측면===

@@은혜( 십자가로 이루신  구속/회복의 사랑)를 통하여 주님과 화목함(하나됨)의 문을 여시고 하나님자신의 모든 것을 (믿음을 통해) 누리도록 하심으로 평강안으로 이끄심.....

@@긍휼을 통하여 체휼하시는 사랑(환난과 고난, 역경 중, 특히 죄인괴수의 자각가운데 전적으로 무력한 피조물로서 도움없이 살 수 없음 호소할 때, 불쌍히 여겨 친히 아파하며 동감/동정/공감하사 동행/인도하며 일으켜 세우심)으로 평강안으로 이끄심.....

@@평강(임마누엘하나님이 반석-방패-산성/요새-목자 되심 믿고 붙듦으로 인해 조성된 생명의 번성번영창대케 됨, 그것을 통해 생육-번성-충만-정복/다스림의 근원이신 주님 발견하고 그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여 동행하며, 주뜻 안에 하나되어 살아감)....이 평강으로 인해 참된 형통, 곧 하나님의 지고지선의 진복의 실제의 어떠함이 나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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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14: 7-12, 14]---

*7.○나무는 희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소생..할라프)   *8.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9.물 기운에 움이 돋고(=소생) 가지가 뻗어서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   *10. 장정이라도 죽으면 소멸되나니 인생이 숨을 거두면 그가 어디 있느냐   *11.물이 바다에서 줄어들고 강물이 잦아서 마름 같이   *12.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 :::: *7. "For there is hope for a tree, When it is cut down, that it will sprout again, And its shoots will not fail.  *8. "Though its roots grow old in the ground, And its stump dies in the dry soil,  *9. At the scent of water it will flourish And put forth sprigs like a plant.  *10. "But man dies and lies prostrate. Man expires, and where is he?  *11. "[As] water evaporates from the sea, And a river becomes parched and dried up,  *12. So man lies down and does not rise. Until the heavens be no more, He will not awake nor be aroused out of his sleep. -----------*14.  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모든 고난의 날 동안을 참으면서 풀려나기를(=육체의 부활...할리파) 기다리겠나이다  ::: 14.  "If a man dies, will he live [again?] All the days of my struggle I will wait, Until my change co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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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j;(2498, 할라프) 나아가다, 지나가다, 꿰뚫다, 변경하다, 바꾸다(sprout again...새 움이 돋다 = 소생 )

할라프(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나아가다, 지나가다, 통과하다, 꿰뚫다, 관통하다, 변경(화)시키다, 바꾸다, 갈아입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8회 나오며, 칼, 피엘, 히필형으로 사용되었다.

1. 칼형에서

(a)  '나아가다, 지나가다, 통과하다': 사람이 나아가는 것(삼상 10:3), 홍수가 휩쓸고 지나가는 것(사 8:8), 회오리 바람, 정복자들, 유령들이 통과하거나 지나가는 것(합 1:11, 사 21:1, 사 8:8, 욥 4:15), 하나님이 지나가시는 것(욥 9:11, 욥 11:10), 풀이 자라나는 것(시 90:5, 시 90:6).

(b)  '꿰뚫다, 관통하다': 삿 5:26, 욥 20:24.

(c)  '넘어가다, 범하다': 사 24:5, "땅이 또한 그 거민 아래서 더럽게 되었으니 이는 그들이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영원한 언약을 파하였음이라".

2. 피엘형에서

'갈아입다': 옷을 갈아입는 것을 묘사한다(창 41:14, 삼하 12:20).

3. 히필형에서

(a)  '바꾸다, 변경하다': 의복을 바꾸는 것(창 35:2, 시 102:27), 품값을 변경하는 것(창 31:7, 창 31:41).

레 27:10에서 서원물은 변경하지 못한다고 한다.

(b)  '대신하게 하다': 사 9:9, "모든 백성 곧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거민이 알것이어늘 그들이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말하기를".

(c)  '갱신하다, 새롭게 하다': 사 40:31, 사 41:1.(참조: BDB).

[이 동사의 이 마지막 용법은 특별히 흥미로운데, 그 이유로는 이 단어는 미래의 생에 대한 욥의 관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절망하여 욥은 죽기를 바랐다(욥 3:11-15). 

그리하여 욥은 자기를 거의 파멸시킬 것만 같은 하나님에게 구제를 청했다(욥 10:8-9). 

그 뒤에 한 어려운 성구에서 그는 자신의 희망(욥 13:15)과 자신의 변호하는 진술에 대한 보증을 확신하고 있다(욥 13:18). 

욥 14장에서 그는 사후의 생에 대하여 명백한 고찰을 하였다. 

첫째 그는 베어진 후에 다시 싹을 내게 될 나무를 예를 들고 있다(욥 14:7, 할랍의 히필형). 

사람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나무보다 더 귀중한 것으로 사람은 죽으며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 

욥은 이러한 것을 터무니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날카로운 질문을 제기하였다. 즉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욥은 나무에 대한 예증으로부터 끌어낸 믿음을 공표함으로 자신의 외침에 대답했다. 

욥은 곧 오게 되는 "다시 살 것"을 기다릴 것이다(욥 14:14, 할리파).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으로 만드신 피조물인 욥에게 관여하시고 염려하시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중요한 단어 할라프를 고찰함으로써 해석한 이 구절은 그 주제에 대한 보다 더 유명한 구절, 즉 욥 19:23-27을 위하여 준비하고 있다.](참조: R. L. HAR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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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p;ylij}(2487, 할리파) 변화, 변경, 교체(환), 바꿈 [육체의 부활 = 새 몸으로의 부활 = 재생 ]

할리파(명여)는 할라프(#l'j; , 2498)에서 유래했으며, '변화, 변경, 교체(환), 바꿈'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2회 나온다.

(a)  할리파는 '바꿈'이란 의미에서 옷에 대하여 사용되었다(창 45:22, 삿 14:12, 삿 14:13, 삿 14:19, 왕하 5:5, 왕하 5:22, 왕하 5:23).

(b)  할리파는 '교체, 교대'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왕상 5:14, 욥 10:17).

(c)  할리파는 '교체나 변화'라는 의미에서 죽음 후의 소생(재생), 비유적으로 군사적인 봉사에서 '면제'를 나타낸다(욥 14:14).

(d)  할리파는 생의 코스를 바꾸는(변경하는) 것을 의미한다(시 55:19). (참조: BDB; Gesenius). 


-----욥 19:23-29-------

*23.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28.  너희가 만일 이르기를 우리가 그를 어떻게 칠까 하며 또 이르기를 일의 뿌리가 그에게 있다 할진대   *29.  너희는 칼을 두려워 할지니라 분노는 칼의 형벌을 부르나니 너희가 심판장이 있는 줄을 알게 되리라  ::: *23.  "Oh that my words were written! Oh that they were inscribed in a book!   *24.  "That with an iron stylus and lead They were engraved in the rock forever!   *25.  "And as for me, I know that my Redeemer lives, and at the last He will take His stand on the earth.   *26.  "Even after my skin is destroyed, Yet from my flesh I shall see God;   *27.  Whom I myself shall behold, And whom my eyes shall see and not another. My heart faints within me.   *28.  "If you say, 'How shall we persecute him?' And 'What pretext for a case against him can we find?'   *29.  "[Then] be afraid of the sword for yourselves, For wrath [brings] the punishment of the sword, So that you may know there is judg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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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신앙 고백(욥 19:23-29)

욥과 그의 친구들의 대담 속에서 우리는 이것보다 더 무게 있고 중요한 구절은 발견할 수 없다. 누가 그것을 기대했겠는가?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와 하늘에 대해 많은 것이 언급되어 있다. 

이같이 말하는 그의 믿음이 조상들처럼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것을 찾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히 11:14).

우리는 여기에서 욥의 신조 또는 신앙 고백을 알 수 있다. 

그는 때때로 전능하신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자연 종교의 으뜸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계시 종교를 모르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당시 약속된 후손과 약속된 유업에 대한 계시는 단지 여명처럼 희미했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알며, 살아계신 구속자를 믿고, "죽은 자의 부활과 장차 다가올 세상의 생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가 이러한 것들을 알고 이야기했음이 틀림 없다. 

이러한 기대를 가지고 그는 스스로를 위로했던 것이지, 어떤 사람들의 견해대로 그가 그 환난 가운데서 벗어나거나 이 세상의 행복을 되찾고자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만일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이 일시적인 구출을 뜻한다면, 그가 이 세상에서 다시 번영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매우 명백한 사실이므로, 그가 여기에서 구속자가 "후일에 땅에 서리라"는 것과 하나님을 보리라는 것 그리고 "내가 친히 그를 보리라"는 것은 억지로 사용한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길이 막히고"(8절), "그의 소망이 나무 뽑듯 뽑혔다"(10절)고 방금 말했다. 

그리고 이 말을 한 뒤에도 그는 이 생에서의 위안이 모두 끊어졌음을 시사했다(23:8, 9; 30:23).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며 그를 영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반드시 이해해야 하는데 이것은 시편 49편 15절에 언급되어 있다.

우리는 욥이 바로 이제 축복된 성령의 놀라운 충동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성령은 욥 자신도 놀랄 정도로 그 자신을 딛고 일어서게 했고, 그에게 빛을 주었고, 또 할 말을 주었다. 

그리고 이후에는 우리가 전에 읽은 것과 같이 하나님과 그의 섭리에 대한 격렬하고 까다로우며 어울리지 않는 불평을 그의 이야기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즉 이 소망이 그의 영을 진정시키고, 그 폭풍우를 가라 앉혔던 것이다. 

그리고 천국에 닻을 내렸으므로 이제부터는 그의 마음의 안정을 지킬 수 있었다.

Ⅰ. 어떠한 의도로 여기에서 욥은 신앙 고백을 하였는가 살펴보자. 

이것보다 여기에서 더 적절한 것은 또는 더 유익한 것은 없었다.

1. 욥은 지금 비난받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을 그는 탄원하였다. 

욥의 친구들은 그를 사특한 자라고 책망했고, 또 악한 자라고 그를 정죄했다. 

그러나 그는 무죄할 뿐만 아니라 축복된 부활에 대한 소망으로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그의 신조, 그의 믿음, 그의 소망, 그리고 그 자신의 양심에 호소했다. 

"이것은 마귀에게 잡힌 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그는 법정 문 앞에서 더 이상 논쟁하지 않고, 법정의 재판장 곧 모든 심판을 맡고 계시며, 앞으로 오실 구속자에게 호소했다. 

그는 그 구속자가 그를 구해주실 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날이 오리라는 생각은 "사람에게 판단받는 것이 우리에게는 매우 작은 일"로 여겨지게 만들 것이다(고전 4:3, 4). 

우리가 구속자의 영광스런 출현과, 마지막 날의 그의 구속, 그리고 그 때에는 육체는 물론 명예도 부활하리라는 것을 기대하고 있는 한, 사람들의 부당한 비방과 책망은 얼마나 참기가 쉬울 것인가!

2. 욥은 이제 고통 중에 있었고, 이것은 그의 원기를 돋구었다. 

그가 무거운 고통에 억눌려 있을 때, 그가 "살아날 땅에서 주의 선하심을 보리라"는 믿음은 그를 질식하지 않게 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일어날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은 자의 땅이기 때문이다.

Ⅱ. 욥은 얼마나 엄숙한 서론과 함께 그 신앙 고백을 시작했는가 살펴보자(23, 24절). 

그는 갑자기 호소하던 말을 중단하고, 즐거운 환호를 부르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그 자신의 만족감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이것이 앞으로 올 후손들을 위해 기록되기를 원한다. "나의 말이, 내가 지금 하려는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이것은 마치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과도 같았다. 

"나는 충고가 되지 못하는 말들을 많이 했음을 인정한다. 나는 그것들이 잊혀지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나를 영예롭게 하지 못하며,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익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신중하게 말하려 하고, 그것이 온 세상에 알려지며, 앞으로 올 세대들을 위해 영원한 기념으로 보존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씌어지거나 혹은 크고 읽기 쉬운 필체로 작성되어 후손들이 쉽게 읽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흩어져 다니는 종이 조각에 기록되지 않고 "책"에 기록되어 보존되었으면 한다. 혹, 그것이 헐어버리게 된다면 어떻게 하나! 그러니 기념비의 비문처럼 연이나 돌 위에 철필로 새겨졌으면 좋겠다. 그것을 새기는 자는 후손에게 오래 전해질 수 있도록 그의 온갖 힘을 기울이게 하라."

여기에서 욥이 열렬하게 원한 것을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허락해 주셨다. 

그의 말이 기록되었다. 그것들이 하나님의 책에 기록된 것이다. 

그러므로 어디에서 그 책이 읽혀지든지 누구나 욥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였다.

Ⅲ. 욥의 고백은 어떤 것이었는가 살펴보자. 

그가 꼭 기록하려던 말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여기에서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다(25-27절). 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욥은 구속자의 영광을 믿었고, 그 자신도 거기에 참여할 것을 믿었다(25절).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다시 말해서 그가 존재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시니 후일에(마지막 날에 또는 장차)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다." 

그는 일어서실 것이다. 또는 후일에(즉, 때가 차면: 복음의 날은 마지막 섭리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마지막 때"라고 불리운다) 땅 위에 오실 것이다. 

이것은 구속자의 성육신을 가리킨다. 

또는 땅으로부터 들리시거나(이라는 것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가리킨다), 또는 땅에서 일어나실 것이다(이것은 그가 부활한 것을 가리킨다). 

또는 우리가 보통 이해하고 있듯이, 마지막 때에 땅 위에 나타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며, 모든 사람이 그 눈으로 그를 볼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는 땅 가까이 오실 것이다. 

그는(문자 그대로) 티끌 위에 그의 모든 적들 위에 설 것이다. 

그리하여 그 적들은 그 발 밑의 티끌처럼 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들을 밟고 이기실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을 살펴보자.

(1) 타락한 자를 위한 구속자가 계시다. 

그 구속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구속자를 나타내는 "고엘"(Go l)이라는 단어는 원래 가장 가까운 친척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 사람은 모세의 율법에 의해, 그 친척의 저당잡힌 기업을 도로 회수해 줄 권한을 가지고 있다(레 25:25). 

우리의 천국의 기업도 죄로 인해 몰수되었다. 

우리 스스로는 그것을 결코 다시 살 수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다시 사 줄 수 있는 우리의 근친이 되신다. 

그는 우리의 빚을 갚아 주시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켜 주셨으므로, 그 저당잡힌 것을 회수해 주시고, 새로운 기업을 마련해 놓으셨다. 

우리 몸 역시 구속자가 필요하다. 

우리는 죄로 인해 죄 아래서 팔린 것이다. 

우리 주 예수는 우리를 위해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어 우리를 다시 사셨음을 선포하셨으니, 그는 진실로 우리의 구속자가 되신다.

(2) 그는 살아 계신 구속자이시다.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듯이 우리는 또한 살아 계신 구속자에 의해 구원되었다. 

그는 전능하시고 영원하시므로 끝까지 우리를 구하실 수 있다. 

그 분은 산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히 7:18; 계 1:18). 

우리는 죽어가나 그는 살아 계신다. 

그리고 그는 "그가 사셨으므로 우리도 살 것이라"는 것을(요 14:19) 확증해 주셨다.

(3) 은혜로 말미암아 이 구속 사업에 참여할 자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선한 동기 위에서 그 구속자를 그들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욥은 그의 모든 재산과 모든 친구들을 잃었을 때에도 그리스도로부터 떠나지 않았고, 또한 그와의 관계도 끊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나의 구속자이시다." 

그의 모든 친척들이 그를 버렸을 때에도 그 근친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으므로, 그는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4) 우리는 구속자와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그것을 아는 자들은 승리를 거두며, 모든 슬픔을 평정시킬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내가 알기에는"(그가 바로 이 일에 대해 확신을 가진 자로서 얼마나 자신 있게 말하는가 보라)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다." 

그의 친구들은 때때로 무지하게 혹은 헛된 지식으로 그를 꾸짖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가 그의 구속자라는 것을 충분히 그리고 훌륭히 알고 있었다.

(5) 후일, 마지막날, "지체하지 아니할 때가" 올 것이다(계 10:6). 

이것은 우리가 매일 관심을 가지고 생각해야 할 날이다.

(6) 우리의 구속자는 그날에 땅에 또는 땅 위에 서서 죽은 자들을 무덤으로부터 불러 모으실 것이며, 

그들에게 확고한 지위를 정해 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모든 심판이 맡겨졌기 때문이다. 

그는 마지막에 땅이 큰 불로 망한 잿더미 위에 서게 될 것이다.

2. 욥은 구속의 행복을 믿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믿는 자들이 영광스럽게 일어나 하나님의 환상과 결실 속에서 온전히 축복 받게 될 때에 그 자신도 영예를 얻게 되리라고 믿었다. 

그는 이러한 믿음을 그 자신에게도 적용시켰다.

(1) 그는 무덤 속에서 그의 육신이 썩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는 무관심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것에 대해 거룩하게 언급하고 있다. 

"나의 이 가죽"(이미 닳아 없어져 잇꺼풀 밖에는 남지 않은, 20절) "이것이 썩은 후에"(그는 17장 14절에서 구더기와 무덤이 그것을 썩게 하는 것에 대해 말했다), 하나님을 보리라. 

이것(즉 이 육신)이라는 단어가 덧붙어 있다. 

"비록 그들이 이것이며, 이 그림자(17:7), 내 손을 얹은 이것이 썩게 할지라도" 또는(그의 약하고 기운 없는 사지를 가리키면서) "너희가 보는 이것을 너희 마음대로 부르라. 나는 그것이 곧 구더기의 잔치감 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몸이 썩지 않지만 우리의 몸은 썩어야 한다. 

욥은 그가 믿고 바라는 부활의 영광이 더욱 밝게 빛나리라는 것을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육신에 죽음이 다가올 뿐 아니라, 그것이 무덤 속에서 썩어 없어지리라는 것을 자주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 

그러나 그것이 부활하리라는 소망을 위축시켜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처음에 사람의 몸을 만든 것과 같은 권능이 그것을 그 흙으로부터 다시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이처럼 돌보고 음식을 공급해 주는 이 몸은 곧 썩어질 것이다. 

"내 마음이"(욥은 말하고 있다) "조급하구나"(27절). 

몸의 가장 깊숙이 있는 것들이 아마도 제일 먼저 썩을 것이다.

(2) 그는 죽음과 무덤 저편에 있는 행복에 대한 소망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내가 깨어난 후"(난외에 적혀 있는 대로),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1) 영혼과 몸은 함께 다시 살아날 것이다. 

무덤에서 썩어야 하는 몸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일어날 것이다. 

"내가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역주. 우리말 개혁 성경에는 "육체 밖에서"라고 번역되었지만, 영어 KJV 성경에서는 육체 안에서 in my flesh라고 되어 있다). 

분리된 영혼은 하나님을 보기 위한 눈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마음의 눈이다. 

그러나 욥은 육체의 눈으로 "육체에 있는 내 눈으로" 그를 보리라고 말하고 있다. 

즉 죽은 바로 그 몸이 참된 육체로, 그러나 저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에 합당한 영광된 몸인 "신령한 몸"으로써(고전 15:44), 다시 일어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체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육체를 위해 이러한 영광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2) 욥과 하나님은 함께 다시 올 것이다. 

내가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즉 영광을 입으신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곧(어떤 사람들의 견해대로) 인간의 눈으로도 볼 수 있는 육체를 입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보리라." 

비록 무덤 속에 있는 몸은 초라하고 비참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환상 속에서 존귀하고 행복하게 될 것이다. 

욥은 그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음을 불평했으나(23:8, 9), 영원히 그를 만나 보지 않게 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면서 곧 그를 보게 되기를 바랬다. 

그리고 이 현재의 흑암과 거리감이 걷힌 후에 그를 보게 되는 것은 더욱 반가운 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며, 그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게 되며, 더 이상 거울로 희미하게 보지 않고, 얼굴을 맞대고 보리라는 것은 축복받은 자의 축복이다. 

거룩한 욥은 이 일을 얼마나 기쁘게 이야기하고 있나 보라(27절). 

"내가 친히 그를 보리라." 

다시 말해서 말할 수 없는 기쁨과 만족과 함께 그를 보고 기뻐하리라. 

"나는 그를 특이한 광경과 함께 나의 하나님으로서 보리라"(계 21:3). "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저희 하나님이 되리라." 

"저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나"(요일 3:2), 저희 스스로 그를 보게 되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첫째, "그를 대신한 다른 사람이 아닌 그를 볼 것이다. 즉 그의 원형이나 상징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을 볼 것이다." 

영광을 입은 성도들은 그들이 속임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것-"거짓된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완전히 확인한다.

둘째, "나를 대신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가 그를 보리라. 비록 내 살과 몸이 없어졌을지라도, 나는 대리인이 필요하지 않다. 나는 내 자신의 눈으로 친히 그를 보리라." 

이것이 바로 욥이 바라는 것이었고, 또한 진심으로 원하는 것으로서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의미가 마지막 구절에 담겨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 

다시 말해서 "나의 모든 소망을 요약한다면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것이 내 모든 소망을 장식하고 완성할 것이다. 내 소망은 이것이다. 이것 외에는 더 바랄 것이 없다. 그것으로 모두 충분하다." 이러한 말로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는 끝난다.

Ⅳ. 욥은 이것을 그의 친구들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그의 신앙 고백은 그에게 위안을 주나, 그를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경고와 두려움을 주었다.

1. 그것은 그들이 더 이상 그에게 불친절한 대우를 하지 말라는 그들에게 주는 경고의 말이었다(28절). 

욥은 그들이 말한 것에 대해 책망했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그들이 그들 스스로를 바로 잡기 위해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그리고 서로 어떻게 대해야 하는 가를 그들에게 말해 주고 있다. 

"우리가 그를 어떻게 칠꼬? 일의 뿌리가, 또는 말의 뿌리가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서도, 왜 우리가 그를 책망하고 정죄하여 그를 근심케 하고 화나게 하겠는가?" 

이것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지시하고 있다.

(1)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모든 일의 뿌리가 우리 안에 있지 않는가를 살피는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마음에 있는 은혜의 원리를 활발히 진척시키고 명하는 것은 나무에게 있어서 뿌리와 마찬가지로, 우리 믿음에 있어서 필요한 일의 뿌리이며, 그것은 그것의 견고성과 결실에 의해 좌우된다. 

하나님과 우리 형제에 대한 사랑, 그리스도 안의 믿음, 죄에 대한 증오-이러한 것들이 일의 뿌리이다. 

이 밖의 것들은 이러한 것들에 비해 잎에 지나지 않는다. 참된 경건은 필요한 한 가지 일이다.

(2) 우리는 형제에 대한 우리의 처신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것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 곧 어리석음과 연약함과 허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안에도 일의 뿌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그러한 자들을 학대하는 것이 우리에게 해롭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 작은 자들 하나라도 거스리는 자들에게 화 있으리라! 

하나님께서 격노하시며 그것을 갚아 주실 것이다. 

욥과 그의 친구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견해는 달랐지만, 그들은 일의 뿌리와 다른 세상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러한 차이점으로 해서 서로를 학대해서는 안 되었다.

2. 그것은 그들에게 위협의 말이었다. 

"동무들을 때리다가"(마 24:49) 들키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매우 두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칼을 두려워할지니라"(29절). 

그것은 사방으로 번쩍거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칼이다. 

너희가 그것으로 처벌받지 않도록 두려워하라. 

선한 자들은 놀라며, 죄로부터 떠나기 위해 전능자의 위협을 받을 필요가 있다. 

그것이 그들의 형제를 경솔하게 비판하는 죄일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마 7:1; 약 3:1). 

그들의 형제에게 화를 내고 무례하게 행하며 그들을 비방하고 그들에 대해 악의를 품는 자들은 그것이 그들이 받을 진노이며 그것이 어떠한 일을 가장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행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1) 그들은 이 세상에서 그에 대한 형벌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칼의 형벌을 부른다." 

분노는 심판자의 칼을 받게 되는 범죄를 야기시킨다. 

하나님은 때때로 그 자신이 그것을 보복하시며, 긍휼을 베풀지 않는 자들은 긍휼을 얻지 못하게 된다.

(2) 만일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그것은 더욱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  

이것으로써 우리는 현재의 세상에서 뿐만이 아니라, 미래의 세상에서도 심판이 있어서, 가혹한 말은 기필코 형벌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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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0:13]]

((개역개정))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새번역))  여러분은 사람이 흔히 겪는 시련 밖에 다른 시련을 당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셔서, 여러분이 그 시련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해주십니다.......((NKJV))

 

No temptation has overtaken you except such as is common to man; but God is faithful, who will not allow you to be tempted beyond what you are able, but with the temptation will also make the way of escape, that you may be able to bear it.  ((NRSV)) No testing has overtaken you that is not common to everyone. God is faithful, and he will not let you be tested beyond your strength, but with the testing he will also provide the way out so that you may be able to endure it

===[[부르짖음, 간구, 기도, 도고, 감사]]======

[딤전2 : 1-4] *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3.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KJV)) *1.  I exhort therefore, that, first of all, supplications, prayers, intercessions, and giving of thanks, be made for all men;  *2.  For kings, and for all that are in authority; that we may lead a quiet and peaceable life in all godliness and honesty.  *3.  For this is good and acceptable in the sight of God our Saviour;  *4.  Who will have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unto the knowledge of the truth.  ((NASB))  *1.  First of all, then, I urge that entreaties [and] prayers, petitions [ and] thanksgivings, be made on behalf of all men,  *2.  for kings and all who are in authority, in order that we may lead a tranquil and quiet life in all godliness and dignity.  *3.  This is good and acceptable in the sight of God our Savior,  *4.  who desire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the knowledge of the truth.  ((AMP))  *1. First of all, then, I urge that petitions (specific requests), prayers, intercessions (prayers for others) and thanksgivings be offered on behalf of all people, *2. for [a]kings and all who are in [positions of] high authority, so that we may live a peaceful and quiet life in all godliness and dignity. *3. This [kind of praying] is good and acceptable and pleasing in the sight of God our Savior, *4. who [b]wishes all people to be saved and to come to the knowledge and recognition of the [divine] truth.

[[부르짖음과 간구기도 도고 감사]]

@@부르짖음(주 이름 부름.....모든 환경 상황에서 ) + 간구(피조물의 자각아래에서 겸비함으로 구함)

((렘33:3))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빌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부르짖음의 본래적 의미 = 전심으로 하나님 이름 부름...부르짖는 자의 중심 알고 계신다!!]---------

ar;q;(7121, 카라) 부르다, 선포하다, 소환하다, 읽다

카라(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부르다, 선포하다, 소환하다, 읽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740회 나오며, 칼, 니팔, 푸알형으로 사용되었다.

(a)  카라는 일차적으로 특별한 말 또는 메시지의 발설을 의미한다. 

후자의 용법에 있어서는 이것이 보통 특정한 수령인에게 주어지며 특별한 응답을 유도해 내기 위한 의도가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이 어근은 '선포하다, 초대하다'로 번역되는 수가 있다. 드물지만 카라가 단순한 부르짖음을 의미할 때도 있다(예: 시 147:9, 사 34:14).

(b)  카라는 '부르다'는 의미에서 '소환하다'를 나타낸다(창 12:18, 창 20:8-9, 민 22:5, 민 22:20, 민 22:37, 삿 8:1, 삼상 3:5-6, 삼상 3:8 등).

(c)  카라는 '초대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출 34:15, 삿 14:15, 삼상 16:3, 삼상 16:5 등).

(d)  카라는 '이름의 명명'에 대해 사용되었다.

작명은 때로 이름 지어진 사물에 대한 주권의 주장이 된다. 

하나님의 창조는 별들의 작명과 계수를 수반하였다(시 147:4). 그리고 어둠에 관한 작명(창 1:5), 참으로 모든 것에 대한 명명과 계수가 수반되었다(사 40:26). 

하나님은 동물들을 아담에게 주어 그것들에 대한 그의 상대적 주권을 주장하게 하였다(창 2:19).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고레스의 이름을 불렀다(여기에 임무를 위한 선택의 뜻이 내포되어 있음에 유의하라, 사 45:4). 

때로는 "명명"의 개념이 없을 경우라도 이 주권의 관념이 내포된다. 예컨대 하나님이 태초부터 만대를 불렀다는 표현 등이 그것이다(사 41:4, 한글개역: "명정[命定]하였다"; 참조: 암 5:8). 상기의 용례들에서 그 대상은 응답해야 한다.

(e)  카라는 많은 경우에, 주어진 이름이 명명된 그 사물의 주요 특성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때로 여기에는 언어 유희가 포함된다(창 27:36). 

그밖에 이러한 명명은 대상에 대한 고백 또는 개인적 가치 평가를 형성하고 있다(사 5:13, 사 60:14). 

혹은 영원한 진리에 대한 인지를 함유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예언에 의해 약속되는 아이가 "하나님에 의해", "임마누엘"이라 명명되는 경우이다(사 7:14).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자기의 주권을 확언하였다(사 41:2). 그러나 그들을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사 65:15, "은 찌꺼기", 렘 6:30, 한글개역: "내어버린 은"). 출 33:19, 출 34:6과 신 33:3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반포한다는 것은 그의 속성에 대한 묘사와 주권적 행위에 대한 묘사를 내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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