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12.30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요1:19-51.증거자세례요한-5제자들의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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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 요1:19-51 


@@엘리야 승천 언덕이 위치한 요단 동편 베다니 = 예수님이 세례받으신 요단강가---[벧산, 애논-살림, 요단 동편 베다니] @@

---벧산 = 벧스안 =스키토폴리스(데가볼리 중 하나), 여기는 이스르엘골짜기와 요단 골쩌기가 만나는 곳이기에 평지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동남쪽에 위치한 애논과 살림은 ((사마리아 지경 경계지점...예수님께서도 십자가 고난 받으시러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실 때에, 이곳을 통해서 요단 동편의 데가볼리나 베뢰아지역으로 건너가셨고 요단동편 베다니 거쳐 여리고로 들어가셨다고 여겨짐)) 세례요한이 주로 세례를 베풀었던곳, 즉 요단강 세례터로서 요한이 주로 세례를 베푼 지역은 벧산 돵남쪽 12km지점인 요단강 서편, 하지만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받으신 곳은 요단강의 동쪽  세례터인 요단 동편 베다니((여리고에서 요단강 건너에 보이는 요단 동편 베다니))였는데, 여기서 엘리야가 회리바람 타고 승천했던 곳이었고, 엘리야 승천 언덕이 위치한다....세례 받고 나오시자마자 하늘로부터 내려와 머무르시는, 비둘기같은 형상의 성령에 이끌려 여리고 광야 시험산에서 40일 금식후 마귀의 시험 이기신 직후 요단동편 베다니로 복귀하사 제1, 2일은 온종일, 그리고 제3일 아침 나절 머무르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신 다음, 갈릴리 가나로 향하고 계신다..(5명의 제자를 부르고 계셨다)..

---분명히 알아둘 것은, 물세례+성령세례 받으신 직후 성령께 이끌려 요단을 건너오셔서 여리고 아래 시험산에서 40일 금식에 들어가셨다는것!!


===세례 요한의 증언

19.  [[탁월한 지도자, 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등장을 기다렸던 바]]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21.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24.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

25.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28.  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29.  ○이튿날[(여리고) 광야 시험산, 금식40일후 마귀에게 시험받으심에서 승리하시고 (요단 동편 베다니에) 돌아오신 그 다음날 = 귀환 제1일]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요한의 두 제자...제자를 부르심 :: 요한의 두 제자(안드레+도마)+베드로 시몬+빌립+나다나엘+(세베대의 아들들, 야고보-요한)

35.  ○또 이튿날(귀환 제2일)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또 다른 하나는 디두모라 하는 도마]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예호하난]]의 아들 시몬[[듣다, 응답하다, 순복하다..작은 조약돌]]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빌립과 나다나엘을 부르시다

43.  ○이튿날[-귀환 제3일]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  빌립이 나다나엘(나탄+엘 ::하나님이 주셨다..JC를)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십자가에 달린 구속주JC상징 :생명나무의 표상)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표준새번역 요1:91-51---

세례자 요한의 증언

19.  ○유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을 요한에게 보내서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어 보게 하였을 때에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였다.

20.  그는 거절하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하고 고백하였다.

21.  그들이 다시 요한에게 "그러면, 당신은 누구요? 엘리야요?" 하고 물으니, 그는 "아니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당신은 예언자요?" 하고 물으니, 요한은 "아니오" 하고 대답하였다.

22.  또 그들이 말하였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오? 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할 말을 좀 해주시오. 당신은 스스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오?"

23.  요한이 대답하였다. "나는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24.  ○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그들이 또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니면, 어찌하여 세례를 주시오?"

26.  요한이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이가 한 분 서 계시오.

27.  그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 만한 자격조차 없소."

28.  이것은,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다.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아라

29.  ○이튿날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한 분이 오실 터인데, 그분은 나보다 먼저 계시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다'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분을 두고 한 말입니다.

31.  나도 이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이분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32.  요한이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령은 이분 위에 머물렀습니다.

33.  나도 이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분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어떤 사람 위에 내려와서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알아라' 하셨습니다.

34.  그런데 나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첫 제자들

35.  ○다음날 요한이 다시 자기 제자 두 사람과 같이 서 있다가,

36.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서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하고 말하였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하는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갔다.

38.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랍비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랍비'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고 대답하시니, 그들이 따라가서, 예수께서 묵고 계시는 곳을 보고, 그 날을 그분과 함께 지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이다.

41.  ○이 사람은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42.  그런 다음에, 시몬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로구나.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게바'는 베드로라는 말이다.)

빌립과 나다나엘이 부르심을 받다

43.  ○다음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떠나려고 하셨다. 그 때에 빌립을 만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44.  빌립은 벳새다 사람으로,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고을 사람이었다.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나서, 말하였다. "모세가 율법책에 기록하였고, 또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만났습니다. 그분은 나사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입니다."

46.  나다나엘이 그에게 말하기를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니, 빌립은 그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아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

48.  나다나엘이 예수께 물었다.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49.  나다나엘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50.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다고 해서 믿느냐? 이것보다 더 큰 일을 네가 볼 것이다."

51.  예수께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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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의 증언(2)(요 1:19-28)

여기에 요한의 증언이 있다. 이것은 자기를 시험하러 예루살렘에서 보낸 사자들에게 한 것이다.

Ⅰ. 요한에게 파송한 자들과 파송 된 자들은 누구인가?

1. 우선 사람을 보낸 자들은 누구인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로서, 유명한 산헤드린, 혹은 최고 재판관들이었으며, 유대교를 대표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종교에 관계되는 모든 문제들과 종교에 관계되는 모든 무리들을 심리하는 역할을 한다. 

...그들은 지식의 원천이요, 유대교회의 리더로서 성경에 의하여 메시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을만큼 시대를 잘 분별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자기들의 인도자로서 그리스도를 즉시 알아볼 수 있어야 했고, 받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알고 받드는 대신에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 요한과 "문답하려고" 사자들을 보냈다.

(조심하라)세속적 지식, 위엄,  권한 등 외적 체면은 사람의 마음으로 하여금 거룩한 빛을 영접하려는 겸손을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다.

2. 그들이 보낸 사자들은 누구인가?

(1)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로서, 아마도 그 공의회의 회원들일 것이며, 현명하고, 중대하고 권위 있는 자들이다. 

...세례 요한도 아론 자손의 제사장이므로, 제사장 이외에는 그 어떤 사람에게도 시험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케"해야 한다고 요한의 직무를 예언한 예언이 있었다.(말 3:3). 그러나 그들은 요한과 그의 개혁을 시기했다.

^^^[말3] *1.---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2.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2) 그들은 "바리새인으로서," 교만하고 독선적인 자들이며, 자기들은 회개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자기들의 일에 대하여 회개하라고 가르치는 자에게는 참을 수가 없는 자들이다.

Ⅱ. 그들이 보낸  사자들의 임무는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요한과 "그의 세례"에 대해서 심문하는 것이다.

그들은 (공의회 저리에 참석하도록) 요한을 부르러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 아마도 "무리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요한이 머물러 있는 곳의 무리들이 분노할까봐 겁이 났거나, 또는 자기들 주변의 민중도 그를 잘 알게 될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요한을 무리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그 사자들은 요한에게 질문했다.

1. 그것은 자기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려고 해서이다. 

...아덴 사람들이 호기심 때문에 바울의 교리에 관하여 물은 것처럼(행 17:19, 20) 그들도 물었다.

그들은 대단한 자만심을 가지고 있어서, 회개의 교리가 그들에게는 이상스럽게 여겼기 때문에, 그를 심문한다는 것은 곧 자기들을 "위대하게" 보이게 하리라 생각했음직 하다.

2. 그들은 요한의 교리에서 어떤 구실이라도 발견하게 된다면, 그를 "억누르고" 잠잠케 하려는 의도를 가졌다. 

...그들은 커가는 그의 인기를 시기했으며, 그의 전도가 그들이 오랫동안 영향받아 왔던 모세의 율법과 일치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생각하고 기대해 왔던 메시야 왕국의 건설에도 빗나갔기 때문이었다.

Ⅲ. 요한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세례에 대한 답변과 설명을 하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했다.

1. 그 자신에 설명을 보자. 그들은 "네가 누구냐?"하고 요한에게 물었다. 

...요한의 차림은 놀라왔다. 그는 자기 자신을 나타낼 때까지 광야에 살았다.

그의 정신, 외침, 그리고 교리는 이제까지 존경을 받던 그들에게 도전하는 무엇이었다.

그러나 요한은 결코 유혹자 처럼 하지 않았고, 자기 자신을 위대한 사도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는 "위대하게 보이기" 보다는 "선한 일을 하려고" 애썼다. 그래서 정식으로 심문 받기까지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하려 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낮추어 말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로서 요한은 자기의 업적들을 자기의 입으로 사랑하지 아니했다.

요한은 그들의 심문에 대답하고 있다.

(1) 소극적인 면에서 보자.

요한은 자기가 사람들이 기대하는 만큼의 위대한 선지자가 아니라 했다. 

...하나님의 신실한 증인들은 불공평한 경멸에 대해서 보다는 지나친 존경에 대해서 더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

바울은 자기를 지나치게 평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나는 그저 바울이오"하고 타일렀다.

또 그를 과소평가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자기의 육체는 연약하다고 했다. 그는 자기를 신으로 부르는 자가 있을 때 자기의 옷을 찢었다.

① 요한은 자기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했다(20절).

즉 "그는 나는" 지금 당신들이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했다."

... 여기서 주의할 점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그리스도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특권을 침해해서는 안되며, 자기 자신들을 그렇게 높여서도 안 된다.

사역자들은 그리스도가 아니므로, 하나님의 주신 특권을 지나치게 뽐내서도 안 되며, 다른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주장하려 해서도 안 된다.

그들은 결코 스스로 은혜와 평화를 창조하지 못한다.

즉 그들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며, 회개나 중생이나 위안을 주지 못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요한에 대해서 그 말이 얼마나 강조되고 있는가를 유의하라.

여기 원문은 "그는 부인하지 않고, 고백했다"고 했다. 즉, 그는 자기의 단언에 대해 열렬히, 그리고 항구여일하게 나아갔음을 뜻한다.

---교만해지려는 유혹,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명예를 취하려는 유혹은 많은 열정과 솔직성을 가지고 거절해야 한다.

...요한은 자기가 메시야로 인정되었을 때, 그것을 묵인하지 않았다.

그는 어떠한 애매함의 여지도 없이 솔직하고 엄숙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이 표현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말은 아니다.

자신을 낮추어 보잘 것 없이 여기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린다.

그러나 자신을 부인하지 않는 사람은 사실상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사람이다.

② 그는 자기가 [유대인들이 대망하고 있는 바로 그 엘리야로서] 엘리야도 아니라고 분명히 한다(21절). 

...유대인들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엘리야 같은 사람을 기대했다. 그래서 그들과 같이 거하며, 자기들에게 위대한 일들을 약속해 주기를 바랬다.

요한의 성격, 교리, 그리고 세인들의 반응을 보고, 엘리야의 승천지점에서 사역하고 있었기에 하늘로부터 내려 온 사람으로 여긴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요한은 역시 이런 존경을 부인한다. 그러나 그는 실상은 참으로 엘리야의 이름으로 예언된 자이다.(말 4:5).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온 자이며(눅 1:17), 또 "오리라 한 엘리야" 이다(마 11:14).

그러나 한편 그는 엘리야가 아니다. 엘리야가 왔으나 그들은 "그를 알지 못했다"(마 17:12). 그래서 그는 자기를 엘리야로서 스스로 알리지는 않았다.

그들, 유대인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결코 약속한 일이 없는 그런 엘리야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③ 그는 자기가 "그 선지자"도 아님을 분명히 했다.

첫째, 그는 모세가 말했던 "주께서 자기 형제들 위에 세우실" 그런 선지자가 아니었다.

-- 만약 그들이 이렇게 생각했다면, 그들은 질문할 필요도 없다. 그 이유는, 그런 선지자는 바로 메시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은 이미 자기는 바로 그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했다.

둘째, 그는 사무엘과 엘리야 같은 또는 공적인 사건에 끼어 들어 자기들을 로마의 명예로부터 구원해 주리라 기다리는 그런 선지자도 아니었다.

셋째, 그는 선지자들처럼 꿈이나 환상에 의한 선지자가 아니라 계시를 지닌 선지자였다.

-- 그래서 그의 전도와 사명은 다른 한 선지자라고 말했다면 그의 말은 유리하게 인정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역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말을 조심을 하여 사람들이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2) 긍정적 측면에서 보자. 

...그에게 온 자들은 적극적인 답변을 요구했다. "무슨 권위"로 일하는지를 알려 했다(22절).

"누군지 말하라. 우리는 너를 믿고 세례를 받진 않지만, 우리를 보낸 자에게 대답을 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니라."

보낸이들에게조차 요한은 신실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일부러 애매한 답을 하리라 생각지는 않았다. 분명하고 뚜렷한 답을 하리라고 생각했다.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 그래서 요한은 그렇게 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다." 여기서 다음을 관찰하자.

① 요한은 성서의 구절을 인용해, 자기에게 성서말씀이 이루어졌음을 나타냈으며, 또 자기 임무가 신의 권위에 의하여 인정된 것임을 말했다.

--성서가 말하는 사역자의 사명은 고귀한 소명을 받은 사람에 의해 수행되며, 하나님 말씀만이 그렇게 만든다.

② 요한은 대답으로써 매우 보잘 것 없고 겸손한 그리고 자기 부정의 표현을 하고 있다.

--그는 자기를 낮추어, 자신의 관작이 아니라 의무와 의존에 의해 수행함을 나타내며, 단지 소리에 불과한 것처럼 나는 그저 "광야의 소리"라고 말한다.

③ 요한은 자기에게 경청하도록 하고, 감명을 주고 깨우칠 수 있도록 설명했다.

-- 그는 "소리"이다.(사 40:3 참조). 또 경성의 소리이며 지시하는 소리이다. 진정,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소리요 매개자이다.

바울과 아볼로도 단지 전달자들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첫째, 요한은 한 "인간의" 소리였다는 점이다.

--사람들을 천둥소리와 큰 나팔소리처럼 자기들을 두렵게 하는 소리로써 율법을 받을 준비를 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나타나신 때처럼 (왕상 19:12) 복음은 인간의 목소리로, "조용하고 작은 음성"으로 들을 준비를 해야 했다.

둘째, 그는 "외치는 자"의 소리였다.

a.. 그의 "진지함"과 "집요함"이 사람들을 회개토록 부르고 있다.

-- 즉 듣는 이들의 마음이 산만하게 될 여유를 주지 않고 성령께 감동받은 그대로 진지하세 큰 소리로 외치었다. 사역자들은 진지함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열정을 가지고 가르쳐야 한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그것에 먼저 자신들이 감화를 받아야한다.

b. 그가 가르치는 교리는 아주 "공개적이다."

-- 그는 "외치는" 소리로써 모든 사람들이 듣고 주목할 수 있었다.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잠 8:1)

셋째, 목소리가 외치는 곳은 "광야이다." 

...광야는 조용하고 고적한 장소로써, 세상의 소음이나 분주한 일이 없는 곳이다.

세속적인 일의 시끄러움에서 떠날수록 우리는 그만큼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넷째, 그의 외침은 "주의 길을 곧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말은 이런 뜻이다.

(a) 하나님의 길에 대해 사람들의 잘못을 "바로 잡는다"는 것이다.

-- 주의 길은 확실히 바르나, 율법을 왜곡해서 해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굽게 만들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본래의 법칙으로 돌아오도록 요구하고 있다.

(b) 그는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사람들이 영접하고 즐길 수 있도록 예비하러 왔다.

-- 즉 왕자나 위대한 사람을 위해 "방을 예비하는" 선발자(先發者)들과 같은 격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실 때 우리는 그분을 영접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면 영광의 왕이 들어가실 것이다.(시 24:7).

2. "세례"에 관한 그의 증언을 보자.

(1) 그것에 관한 사자들의 질문을 보자.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니면,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25절).

① 그들도 세례가 거룩한 의식이나 행사로써 적절하게 사용되어야 할 줄로 알고 있었다. 

...유대 교회에서는 세례를 할례와 더불어 개종자의 입단식으로써, 죄로 더럽혀진 이전의 상태에서 씻음을 받는 표시로 행하고 있었다.

-- 이러한 의식은 기독교 교회에서 사용됨으로써, 더 잘 어울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새로운 것을 즐겨 사용하진 않으셨다. 그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② 유대인들이 보낸 사자들은 세례가 메시야의 도래 때에 사용될 것이라 기대했는데, 그 이유는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며"(슥 13:1), "맑은 물이 뿌려지리라"(겔 36:25)라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 엘리야, 그리고 "바로 그 예언자"는 죄로 "더러워진 세상을 깨끗케 하실 것이다.

③ 그러므로 사자들은 요한이 어떠한 권위로 세례를 베푸는지를 알려했다. [[분명한 것은 권위는 속사람의 하나님 형상imago dei으로 충만함, 곧 성화-영화의, 하나님의 영광 충만의 흘러넘침에 자연히 뒤따른다는 것임을 주의하라]]...그들은 이미 요한에게서 그것을 감지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가 그리스도, 엘리야 혹은 그 예언자가 아니라는 자기 부인으로 인해 사자들은 더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 사람의 겸손이 오히려 그를 거역하고 또 나쁜 편견을 조성한다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마귀가 우리를 교만으로 유혹하고 우리를 죄인으로 선고해 우리의 교만한 사상을 이용당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우리를 멸시하려고 우리 자신의 겸손한 사상을 이용하는 것이 더 낫다.

(2) 거기에 대한 요한의 설명을 보자(26,27절).

① 요한은 자기 자신을 외형적인 세례를 주는 사역자라고만 나타냈다.

-- "나는 물로 세례를 주는게 전부이다. 나는 육의 눈으로 보이는 것 이상이 아니다. 나는 세례 요한이란 이름 이외에 다른 이름이 없으며, 물이 상징하는 성령의 은사는 줄 수 없다." 

::: 바울은 아무도 자기를 지나치게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했다(고후 12:6). 세례 요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역자들은 (아무리 하나님 영광으로 충만해졌다 해도 피조물에 지나지 않음을 명심하고 스스로가)그리스도인 체해서는 결코 안 된다.

② 그는 자기보다 더 위대한 사람을 그들에게 지시했다. 

-- "나는 단지 물로 세례를 주며, 그것을 나의 최선의 사명으로 여긴다. 나는 단지 내 뒤에 오시는 분을 안내할 따름이며, 그분에게 사람들을 넘겨 줄 뿐이다." 

::: 그리스도의 사역자의 위대한 역할이란 바로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에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사역자들은 자기 자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야 한다.

요한이 사람들에게 전했던 복음을 그대로 일반인들에게 전해야 한다. "내가 전하려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15절). 

-- 요한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였다. 그의 증언은 한결같이 변함이 없었다.

산헤드린의 대제사장들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요한을 시기했으나,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를 능가할 사람이 이미 서 있다고 말했다.

[[이제, 바야흐로, 40일전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유대광야에서 40일간 금식기도 마치시며 사탄에게 시험 받으신 다음 다시 세례요한에게 돌아오신 그리스도를, 바로 그 분을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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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광야 : 여리고-실로-예루살렘-베들레헴-헤브론 산악지대와 남북으로 종주하는 사해(사해에 인접하여 북쪽에 쿰란, 중간에 엔게디, 그 하부에 맛사다,  아래 경계는 소금골짜기로 네게브사막과 경계 지음) 그 사이의 광야지역을 지칭 :: JC는 요단동편 베다니에서 세례받으신 후 여리고와 벧엘 사이 인근의 유대광야에 속한 시험산(여리고 서북방1km주변의 석회암 바위산)에서 40일 금식 끝에 시험받으신 것으로 추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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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요한은 이 때에 "사람들 중에 있는" 그리스도를 이야기했다.

-- 즉 "여러분 중에 한 사람이 있는데, 여러분들은 그분을 알지 못합니다."

이 때 그리스도는 무리들 사이에서 계셨으며, 그들 중의 한 사람처럼 보여졌다. 여기서 이 점을 살피자.

.....이 세상 안에는 참다운 가치가 숨겨져 있다. 즉 참다운 탁월성은 흔히 가려져 있다.

성도들은 하나님이 "숨겨놓은 자들"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잘 모르고 있다." .

....또한 하나님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가까이 계신다. "주님이 바로 곁에 계셨지만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기다리던 메시야가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나님 나라는 여기에, 혹은 저기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둘째, 그는 그리스도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 "그분이 내 뒤에 오시지만 나보다 먼저 택하심을 받았다."

이 말에 이어서 그는 "나는 그의 신들에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러므로 나는 그와 같이 이름 불리우기에도 적합치 못하겠노라. 그러므로 나는 그와 같이 이름 불리우기에도 적합치 못하며, 너무 위대하므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명도 나는 감당할 수 없다"(삼상 25:41).

::: 그리스도의 중요성을 아는 자들은 그에 대한 봉사, 심지어 가장 낮은 문지기까지도 영광으로 알고 있다(시 84:10 참조).

만약에 요한과 같은 위대한 사람이 가까이 계시는 그리스도의 위엄을 감당치 못한다고 말하면, 우리 자신들은 얼마나 무가치하랴!

... 이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을 생각해 보자.

메시야가 그들 가까이에 접근하고 있다는 외침에, 그들은 메시야가 누구이며, 어디 있는지를 들었을 법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게다가 이 사자들은 (사실상) 요한을 방해하러 왔기 때문에, 그에게서 어떠한 교훈도 거절했다.

그래서 그들의 무지는 "고의적인"것이 되고 말았다. 그리스도를 알 수 있었으나 알지 못했다.

... 마지막으로, 이러한 것이 행하여 진 장소에 주목된다. 이 장소는 "요단강 건너편의 베다니"이다(28절).

베다니는 "과객의 집, 고통받는자들의 집"이란 뜻이 있다.

(어떤 사람은 이 장소가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요단강을 건너 약속된 땅으로 들어가는 바로 그 장소로 추측하고 있다.)

---[세례요한의 세례처, 요단동편 베다니는 엘리야 승천지점 인근이자, 요단 건너 길갈-여리고성으로 진군하는 요단강 도하 출발지였음]---

즉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길이 열려 복음이 들어간 곳이다. 그래서 이 장소에서 요단을 건너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아주 멀었다.(???)

-- 아마도 요한이 그 장소를 택한 것은 예루살렘에서 거의 방해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아모스 선지도 법정에서 먼(!!!) 이 지역에서 외쳤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그의 평화"에 속한 길을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요한은 자기가 세례를 주고 있는 바로 그 장소에서 증거 했고 그의 세례를 받으러 온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 했기 때문에 거기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모른다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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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등장(요 1:29-36)

이 구절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으로서, 요한이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에게 이 증언을 했다.

먼저, 그리스도는 세례를 받고 즉시 광야로 가서 시험을 받았다.

거기서 그리스도는 40일 동안 시험받으시고 요한에게 오셨고, 이 때 요한은 "자기에게로 나아오시는 예수를 보았다."

-- 시험을 이기신 그리스도가 전도하며 세례를 주고 있는 요한에게 즉시 돌아왔다.

::: 그리스도가 아주 모범으로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에 그것은 분명 우리에게 격려가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또 있다.

1. 우리가 "어려운" 시험 상태에 있을 때는<땅에 거하는 것 자체가 그러하다>, 하나님의 규례(의식)와 밀접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야"한다(시 73:17). 

-- 사탄과의 영적 싸움은 우리로 성도들과 더욱 밀접한 친교를 갖게 하는데 그것은 한 사람보다 두 사람이 더 낫기 때문이다.

2. "영예로운" 승리를 거두었다 해서 "의식을 무시해서는" 결코 안 된다. 

-- 그리스도는 시험을 이긴 후 천사들이 수종을 들었지만, 결국 하나님나라를 전도하면서 세례를 베풀고 있는 요한에게로 돌아 왔다.

우리가 하늘 이편, 곧 땅에 속해 있는 한, 시험을 통과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특별히 받았다 하더라도 여전히 은혜와 위로를 받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

이제 그리스도에 대한 요한의 "두 증언"이 나타나는데, 이 두 증언이 "하나로 일치"된다.

Ⅰ.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나온 첫 날, 그에 대한 요한의 증거가 있다.

즉 요한이 자기 앞에 있는 그리스도에 관해 증언한 4가지가 있다.

1.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29절)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이런 것을 배운다.

(1)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그는 인간의 죄 때문에 보상되어지고,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려는 큰 희생 재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제사의 희생물로 쓰이는 어린양이 자기 자신이라고 암시했다.

왜냐하면 어린양은 온유의 상징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는 자기를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같이 되어야 하고(사 53:7), 특별히 다음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① 아침저녁으로 매일 드리는 "날마다의 희생 제물"인 "어린 양"이다(출 29:38).

--이것은 영원한 속죄를 증거 해 주는 그리스도의 예형이다.

② "유월절의 어린 양"을 가리킨다.

-- 그것은 문설주에 그의 피를 뿌리고, 이스라엘인들을 멸망시키는 천사들로부터 구했던 양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월절 양이다(고전 5:7).

그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하나님이 그를 세우셨고(롬 3:25), 하나님에게 바쳐졌고(17:19), 하나님에게 인정받았다. 그를 하나님이 기뻐하셨다.

속죄제로 드릴 염소를 뽑는 제비를 "주님(여호와)의 제비"라고 했다(레 15:8, 9). 그래서 죄의 대속물인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불리 우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어린 양"인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지고 가서 제거해 버린다"는 것이다. 

... 그리스도는 자신을 희생함으로(히 9:26), 죄를 제거하려고 나타나신 것이며, 그것이 사명이었다. 요한은 죄의 용서를 받도록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했다.

비록 우리의 회개가 죄에 대하여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죄의 용서가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 의하여 가능하며, 또한 회개를 통하여 우리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있다. 우리가 주목하는 근거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것 뿐 이다.

① 그리스도는 "죄를 짊어지신다."

--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인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거룩성을 침해하고 인간의 행복을 파괴하는 죄를 전부 짊어지신다. 그가 오신 것은

첫째, [대속의 영=화해와 회복의 영]그의 죽으심으로써 아담의 범죄를 포함하여 그 이후에 범함 모든 죄를 제거함으로써 인간이 처해 있는 심판을 거두게 하시고, 박탈된 권리를 회복시키며, 그의 배상 행위로서 회개하고 순종하며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려는 것이다.

둘째, [내주하사 끊임없이 의롭게, 영화롭게 하시는 은혜의 영=생명과 생명 산출의 영]으로 죄의 권세를 물리침으로써 죄가 우리를 주관치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롬 6:14).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우리 피 속에 있는 죄들을 깨끗이 씻기를 바라고 있다. 즉 그는 우리를 "의롭게"하시며 동시에 "성화 시킨다." 그는 죄를 짊어지신다. ...곧 그는 세상에서 죄를 져다 버리고 계신다. - ‘호 아이론’ - 이것은 한 번이 아니라 계속적인 제거를 뜻한다. 그 짊어지심은 그의 계속적인 활동이고 임무이며, 시간이 끝나기 전에는 끝날 줄 모르는 "시간의 임무"이다. 하늘에서 그의 계속적인 피의 중재와, 땅에서 그의 계속적인 은혜의 감화를 통하여 그는 항상 죄를 져다 버리고 계신다.

② 그는 "세상 죄"를 짊어지시고 있다.

-- 그는 어느 나라나 국가, 그리고 어느 언어를 가지고 있든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용서를 하나님에게 구하고 있다.

율법의 제사는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이스라엘만의 보상이지만, 하나님의 어린양은 "온 세상의 죄"를 위한 화해 제물이다(요일 2:2 참조).

::: 이것은 우리들의 신앙에 용기를 준다. 만일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짊어지신다면, 나의 죄를 짊어지시지 않겠는가? 그리스도는 자기 능력을 죄가 범람하는 중심 부분에 거누고서, 그 뿌리를 꺾으시며, "온 세상에" 편만한 "사악함"을 물리치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화해하셨다.

③ 그는 "죄를 친히 담당하신다."

-- "세상 죄를 담당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난외에는 그런 뜻으로 되어 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죄를 담당하였다." 따라서 "우리에게서" 죄를 가져간다.

희생 염소가 자기 머리에 이스라엘의 죄를 담당하듯이(레 16:21),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지셨다."

::: 하나님은 엣 세상의 죄를 제거하셨던 식으로, 역시 죄인을 제거시킴으로써 죄를 제거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없애는 방법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죄"를 자기 아들에게 부담시킴으로써 죄인들을 살려두시고 계신다.

3) 믿음의 눈으로, 세상 죄를 담당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 죄를 담당하는 그리스도를 보면 죄를 미워하게 되고, 죄에 대항하는 새로운 결심이 일어나게 된다.

하나님의 어린양이 친히 죄를 제거하러 오셨으니, 이제는 죄인 스스로 죄를 제거해 보려 하는(스스로 의롭게 되려는) 그런 목적의 금식에 매달리지 말자.

그는 우리의 죄나 죄로 물든 우리 자신을 친히 제거하고 정결케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죄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신"(계 1:5)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도록 하자. [[내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무엇을 제거한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우리의 죄가 사라진다면 우리는 거기에 감사해야지 불평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2. 요한이 전에 말했던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30,31절). 

...요한은 예수께서 서 계신 곳을 가리키면서, "내 뒤에 오신다고 했던 사람이 이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1) 요한은 가장 영예로운 예언자였다. 

...많은 예언자들은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말했지만, 요한은 이미 그분이 오신 것을 알았다.

"이 사람이 그다." "지금" 내가 그를 보며, "가까이서" 보았다(민 24:17).

현재의 믿음과 장차의 기다림과는 차이가 있다. 현재 우리는 보지 않은 사람을 사랑한다.

그러나 장차에는 우리의 영혼이 사랑하는 그분을 볼 것이며, 그분과 이야기할 것이다.

내가 말하던 사람, "나의 그리스도," "나의 전부," "내가 사랑하는 이," "내 친구"가 이 사람이다.

(2) 요한은 그리스도를 "사람"이라 했다. 

...자기 뒤에 "한 사람이" 올 것이라 했다. 곧 "강한 사람," "남자"다운 사람, "하나님의 오른 팔과 같은 사람"이다.

(3) 그는 자기가 전에 말한 것을 인용한다. "내가 말했던 그가 이 사람이다." 

... 그리스도의 가장 고귀한 점을 이야기했던 사람들은 그것들을 철회해야 될 이유를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그만큼 그를 더 존경하게 된다. 요한은 여전히 자신을 비천하게 여기고 그리스도를 높이고 있다.

그리스도가 어떤 외적인 화려함이나 위엄스런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요한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내가 말한 그가 이분이며, 나 이전에 택함을 받았다"라고 담대히 말했다. 요한이 사람들에게 그를 말하지 않았던들 지금까지 요한이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하던 그가 이렇게 매우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4) 그는 이러한 예수와 어떤 사건의 공모나 동맹이 없었다고 했다. "나는 그를 모른다." 

... 비록 서로(엘리사벳은 동정녀 마리아와 사촌간이다) 어떤 인척 관계는 있다 하더라도, 서로 사이에는 전혀 친분이 없었다.

즉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 받으러 오는 것을 볼 때까지는 예수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다. 서로의 삶의 양식이 달랐다.

즉 요한은 대부분을 광야에서 그리고 고적한 데서 보냈으며, 예수는 나사렛에서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지냈다. 그들 서로간에 연락이나 대화가 전혀 없었다. 이것은 서로간의 개인적 어떤, 계획이나 모의에 의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늘의 지시나 처분에 따라 진행되었을 것이다.

::: 여기서 요한은 모든 공모의 관련성을 부인할 뿐 아니라, 일체의 편파성도 부정한다.

그는 예수를 친구로서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서로 사이에 우정이나 친밀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요한에게 낯선 사람이기 때문에 편견을 가지지 않는 것처럼, 예수가 정말 낯선 사람이기 때문에 "하늘에서 주신" 바가 아니면 그에 대해서 어떠한 일도 알 수 없을 것이다(3:27).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 그들이 보지 못했던 사람, 구주 예수님을 "믿고" 고백하는 자는 복이 있다.

(5) 요한의 전도와 세례의 중요한 의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이었다. 

... 그는 자기가 주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그를 드러내려 함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여기서 다음을 주목하자.

① 예수를 만나 본 일이 없었지만, 요한은 그를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 하늘의 즐거움을 어떻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분명히 알려지리라는 사실만은 알 수 있다.

② 요한은 세부적인 것에 대해서 아직도 미궁에 있지만, 그리스도임을 나타내야 한다는 일반적인 확신만을 가지고도 결의를 가지고 일을 수행했다.

-- [눈에]보이지 않는 일의 실재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우리는 그 의무를 능히 이행할 수 있다.

③ 하나님은 점차적으로 자기 백성에게 자신을 드러낸다.

-- 처음에는, 요한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가 분명하게 드러내리라는 사실밖에 몰랐다. 그런 확신으로 세례를 주었다. 그런데 그가 그를 보게 되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그대로 실행함으로써  [현재]보이지 않는 것을 멀지 않아서 보게 될 것이다.

말씀과 규례(의식)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해서 보다 분명하게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는 외에는 다른 목적이 없다.

⑤ 물로 주는 세례는 우리의 부패와 타락상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길목이 된다.

3. 이는 "성령이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임하신" 그 사람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요한의 증언을 확실케 하기 위하여, 그는 세례에서 나타나는 이상한 현상을 하나님이 그리스도 사명의 놀랄 만한 증거가 되었다.

이제 그것을 더 살펴보자.

(1) 세례 요한은 비둘기같이 임하는 성령의 증거를 보았다. 그는 "증거의 계시 기록을 가졌다." 

...그 사실을 하나의 이야기처럼 말한 것이 아니라, 열정과 단호함을 가지고 아주 확고하게 목격자로서 증거하고 있다.

그는 이 사실을 맹세했다. 즉 "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성령을 보았다."

요한은 직접 성령을 표상하는 비둘기를 보았다. 이제 그 성령이 그리스도에게 머물러, 그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도록 하였다.

::: 그리스도는 왕관이 내려졌거나 그의 형체가 변화됨으로써가 아니라 비둘기 같은 성령이 내려옴으로써 세상 죄를 지고 갈 분 임이 알려지셨다.

이와 같이 제자들의 첫 증언도 성령이 임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은혜"에 의해서 드러난다.

하나님 자녀로서 영광은 장차 주어지게 된다. 여기서 다음을 주목하자.

① 성령이 "하늘로부터" 내려 왔다.

-- 선하고 완전한 선물은 모두 "하늘에서" 온다

② "비둘기같이" 임했다.

-- 순종과 온화함, 그리고 온순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가 "가르치기에 적합함"을 나타낸다.

또 비둘기는 평화를 나타내는 감람나무 잎사귀를 가져 왔다.(창 8:11).

③ 예언된 것처럼 그리스도에게 임한 성령은 "그에게 [머물러] 남아 있다"(사 11:2).

-- 성령은 그에게 삼손처럼 때때로가 아니고(삿 13:25) "내내" 머물러 계신다. 그에게는 성령이 "측량할 수 없도록" 주어졌다.

즉 그에게는 항상 성령이 계셔서, 어느 때고 일할 수 있었다.

(2) 요한은 증거를 아주 확실하게 해야 했다. 

... 요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을 예측에서가 아니고 순전히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알았다. 그것은 "지정된" 약속이었다.

"나는 그를 몰랐으나 전에 나에게 말씀하신 그가 표적이 나타나면 그리스도인 줄을 알라고 했다"(33절).

그는 이 계시가 없었더라면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몰랐을 것이다.

① 요한이 전도하며 세례를 베풀었던 확신의 근거들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최대의 만족으로써 증거할 수 있었다.

...첫째, 그는 "보냄이 없이는" 전하지 않았다. 즉 하나님이 "세례를 베풀도록 그를 보냈다."

그는 자기가 정했던 것을 하늘로부터 보장받았다. 사역자로서의 부름이 명백하면 때때로 그의 사역이 성공치 못하더라도 확실한 위로가 있다.

...둘째, "시급함이 없이는" 전하지 않았다.

그가 "물로써 세례를" 주도록 보냄을 받았을 때,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줄" 사람을 때에 맞게 곧바로 지시하라[드러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러한 의향에서, 세례 요한은 우리에게 회개와 믿음을 주고 그를 기초로 해서 건물을 짓고 완성시킬 수 있는 그리스도를 영접토록 가르쳤다. :

:: 밖으로 드러난 표적들이 봉사를 통해서 생명과 능력으로 나타난다.

사역자들이여 귀에 말하지 말고 마음에다 말하라. 그러면 마른 뼈들이 생기를 얻을 것이다.

② 그가 메시야란 인물을 말하는데 사용한 말의 확실한 근거를 알아보자. 

... 하나님이 사울에 관해서 사무엘에게 지적했듯이 요한에게 전에 한 표적을 주었다. "성령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거든, 그 사람이 그다."

이 말은 어떠한 잘못도 예방할 뿐만 아니라 담대하게 증언토록 했다. 이러한 말이 요한에게 주어짐으로써 담대하게 되었을 때는 기대가 매우 컸었다.

그래서 그 예언이 정확하게 사건으로 나타났을 때, 그의 믿음은 그만큼 더 확고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을 우리로 믿도록 하기 위해 기록되어졌다.

4.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말이 요한의 증언의 결론이 되었다.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도다"(33절).

(1) 외쳐진 진리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하늘의 소리가 들리어 요한이 기록했는데, 그는 신의 능력을 가지고 성령으로 세례를 줄뿐만 아니라 신의 본성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마 16:16). 이것은 사도신경의 한 내용인데, 여기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2) 요한의 증거를 보자. "내가 보고 증거 하였다. 내가 지금 그 사실을 증거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보는 순간에 증거했었다(기록했다)."

① 그는 증거 할 것을 보았다.

-- "우리는 보고들을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20).

② 그는 본 것을 증거 했다.

--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은 목격자들의 증언이다. 그래서 그만큼 더 신빙성이 있었다.

"너희에게 전하려는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 1:16).

Ⅱ. 그 다음날에 그리스도에게 대해 요한이 한 증거가 있다(35,36절).

1. 요한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려고 모든 기회를 이용했다. 

... 요한은 무리로부터 떨어져 자기의 두 제자와 함께 서서 이야기하다가 "예수의 다니심"을 보았으나, 직접 그에게로 가지는 아니했다. .

.. 그것은 자기가 예수와 모의하고 있다는 최소한의 의심도 사람들에게 주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즉 침착하게 그러면서 계속 눈길을 떼지 않았다.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려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때때로 그리고 부지런히 그리스도를 심사숙고해야 한다.

...요한은 전에 그리스도를 보았지만 지금은 그를 "주목"하고 있다(요일 1:1).

2. 그는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의 증언을 전날과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다.

... 그의 증언은 한결같고 계속적이며 모순이 없었다. 그의 말은 바울처럼 공과 사가 일치되었다(행 20:20, 21).

::: 사람들에게 들은 것을 반복하는게 좋다(빌 3:1). 훌륭한 사역자들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의 속죄 교훈을 특히 강조해야 한다.

특히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강조해야 한다.

3. 그는 자기와 같이 서 있던 두 제자들에게 이 교리를 특별히 주지시키고 있었다.

... 그는 기꺼이 자기 제자들을 그리스도에게 가도록 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자기 두 제자에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둘, 자기 두 제자를 그리스도에게 보내는 것이 낫다고 여겼다.

::: 요한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제자들을 택했고,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섬기도록 했다(눅 1:17).

그는 그리스도의 세력이 점점 더 커지는 것 이외는 바라는 것이 없었다.

-- 겸손하고 관용성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기꺼이 낮추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의 장점들을 공급해 주려고 한다. [[배워서 남 준다!!]]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진 명성이란 자기 자신을 다 내 주도록 헌신한다고 해서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5제자들 : 세례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와 도마(요한?) ==>베드로 , 빌립==>나다나엘(바돌로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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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와 베드로(요 1:37-42)

여기서 우리는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에게로의 전향하는 것을 본다.

그들 중의 하나가 제 3일에 택해지며, 그래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첫 열매가 된다.

교회의 처음 시작이 얼마나 초라했는지 보라. 또한 위대한 일들의 새벽이 어떠했는지 보라.

Ⅰ. 세례 요한의 제자인 안드레와 또 한 제자가 그리스도를 좇았다(37절). 

... 다른 한 제자는 이름이 나와 있지 않는데 21장 2절과 비교할 때 아마 도마인 것으로 보인다.

[[또 어떤 사람은 요한 자신으로 본다. 그는 이 복음서의 기록자이며, 그이 태도로 보아 자기의 이름을 굳이 밝히지 않는 것 같다(13:23; 20:3).]]

1. 그리스도를 좇는 두 제자의 즉각적인 태도를 보자. 

... 그들은 "요한에게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어린양이란 사실을 듣고서" "예수를 좇았다."

아마도 그들은 그 전날도 같은 소리를 요한에게서 들었으나 그 때는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그 다음날 예수를 좇은 것을 보면, 거기에는 같은 내용의 반복과 설득이 겸해진 개인적인 대화가 영향을 준 것 같다.

즉 요한으로부터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이야기로써 이 대화가 그리스도를 좇게 만들었을 것이다.

::: 현명하고 깨우치게 하는 정신으로 예수를 따르게 하는, 가장 강하고 거의 사로잡을 듯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요한이지만, 예수만이 죄를 짊어지신다.

2. 친절하고 세심한 그리스도가 그들을 보았다(38절). 

...그들이 그의 뒤를 좇았을 때, 그는 그들을 알아보고 돌이켜 좇아오는 그들을 보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리스도는 자기에게로 오는 사람의 첫 행동과 하늘의 길을 걷는 첫 걸음을 먼저 알고 계신다는 점이다(사 64:5; 눅 15:20 참조).

그는 그들에게 지체하지 않고 먼저 이야기했다.

한 인간과 그리스도와의 사귐이란 이런 과정을 말한다. 시작하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그가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이런 질문은 자기에게 오는 사람의 대담함을 책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찾으러 오신 그리스도는 자기를 찾으러 온 어떤 사람을 책하려 하는게 아니라 반대로 수줍어하고 겸손해 하는 그들을 영접해서 자기의 친구로 삼으려는 것이다.

"와서, 나에게 말하려는 것이 무엇이냐? 너의 청원이 무엇이냐? 너의 요구가 무엇이냐?라고 말씀하신다.

:::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역자들은 겸손하고 온화해야 하며,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용기를 내어] 묻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이 제자들에게 한 질문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좇아 그의 거룩한 종교를 전파하려 할 때에 자신들에게 먼저 스스로 물어야 한다.

"무엇을 구하고 있는 걸까? 우리가 계획하고 바라는 것이 진정 무엇일까?"

::: 그리스도를 따르려 한다는 사람들조차 여전히 아직도 세상을 구하거나 자기를 구하거나 혹은 자신을 속이고 인간의 영광을 구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스도를 찾고 있는 우리는 진정 지금 무엇을 구하고 있는 것일까? 선생, 통치자 혹은 화해자인가?"

만약 이 때의 우리 눈이 정직하다면 우리는 빛으로 충만하게 된다.

3. 그의 거처에 대한 그들의 가장 겸손한 물음을 보자. "랍비여 어디 계십니까?"

(1) 그를 "랍비"라 부름으로써, 그에게 가르침을 받겠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 여기서 랍비란 뜻은 선생 즉 가르치는 선생을 말한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박사들 혹은 학자들을 랍비라고 부른다.

그들에게 있어서 랍비란 말은, 선생, 위대한 사람 등등 많은 뜻을 가진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랍비는 결코 그런 뜻이 아니라, 참 지혜와 지식의 원천으로써의 [진정한] 랍비라는 뜻이다.

그리스도를 따른 이 두 사람이 그의 제자가 된 것처럼, 그를 따르려는 사람들은 마땅히 그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요한은 이 두 제자에게 소개한 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자 랍비로서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다(계 5:9).

:::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마음을 열어드려 통치받고 가르침을 받는데 우리 자신을 맡기지 않는 한, 그는 우리의 죄들을 짊어지지 않을 것이다.

(2) 그의 거처를 묻는다는 것은 그와 더 친히 지기를 바라는 암시가 있다. 

...그리스도는 이 지방에서 하나의 낯선 사람이었으므로, 그들은 그가 기거하는 숙소를 알고 싶어했다.

그래서 가르침을 받고자 그가 정하는 알맞은 시간과 장소에 가려는 것이었다. 즉 알맞은 시기에 찾아가려는 것이다.

--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들은 정중함과 좋은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또 한편으로 그들은 그와의 간단한 이야기보다 더 많이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자 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와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요했다.

그리스도와 어떤 친분을 가지려는 사람들은 그것을 부업이 아니라 주요 사업처럼 생각하고 진지하게 올인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그를 더 알려" 할 수밖에 없다.

② 그와의 "확고한 교제"를 원한다.

-- 그들은 그의 곁에 앉아서 그의 교훈을 들으려 했다. 그는 그들에게 "와서 보라"고 말한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향하는 좋은 바람이며, 그와의 친교를 장려하는 말이다.

(1) 그는 자기 처소로 그들을 초대한다.

--우리가 그에게 더 가까이 접근할수록 그의 아름다움과 우월성을 볼 수 있다.

사기꾼들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멀리함으로 자기 세력을 유지하나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자기의 존경과 매력을 맡기고, "내가 거하는 초라한 숙소를 와서 보라.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세인들에게 아부하여 그들을 랍비라고 부르는 자들처럼 그런 기대를 가지고 오지는 말라. 나를 따르려면 어떤 것을 생각해야 되는지 와서 보라"(마 8:20 참조)고 말씀하셨다.

(2) 그는 이 제자들에게 "즉시" 오라고 했다.

-- 그들은 좀더 좋은 때에 그를 시중들려고 그의 거처를 물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즉시 와서 보라, 지금보다 더 나은 때가 결코 없다"고 말했다.

①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도 배우자.

--사람들이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그들을 택하는 것이 최선이다. 즉 쇠는 달구어 졌을 때 쳐야 한다.

② 우리 자신에게 대해서도 배우자.

-- 현재의 기회를 포착하는 것이 현명하다. "보라, 지금이 은혜받을 때요, 구원의 날이다."(고후 6:2).

5. 기쁘고 감사에 넘쳐 그들이 초대를 수락했다.

"그들은 그가 거처하는 곳을 가서 보았고," "그날을 그와 함께 거했다."

(1) 그들은 즉시 그와 동행해, "그의 거처를 가서 보았다."

--은혜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은혜스러운 초청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즉 다윗처럼 한다(시 27:8).

그들은 그와 어떻게 기거할지를 묻지 않고 되어가는 대로 했을 것이며, 그들이 알고 있는 최대로 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거처하고 있는 곳은 어디나 좋다.

(2) 그들은 "그 날을 그와 같이 기거한다"는 것을 매우 기뻐했다("주님, 여기가 좋사옵니다").

-- 그리고 그는 환영했다. 이 때가 제10시경이었다. 

흑자는 요한이 로마의 계산에 따라서 그 때를 아침 10시로 보았으며, 그들은 그와 밤까지 머물렀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유대인의 계산에 따라서 말한 것으로 보고, 그 때가 오후 4시이며, 그들이 그날 밤부터 다음날까지 기거했다고 말한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그리스도와 함께 보낸 그 다음 날이 안식일이며, 안식일 전날에는 집에 갈 수 없으므로 지체하고 있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에, 우리의 영적인 이익과 도움이 되는 만큼 우리는 안식일을 어떻게 해서든 지켜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살아있는 신앙, 사랑, 헌신의 활동으로 그리스도와 친교 하는 그들의 안식일을 보낸 축복 받은 자들이다.

참으로 안식일은 "인자(人子)의 날," 즉 주의 날이다.

Ⅱ. 안드레는 그의 형제 베드로를 예수에게 데려 갔다. 

...만일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처음이라면 카톨릭 교도들은 그 사실에 대하여 소란을 피웠을 것이다.

베드로는 참으로 은혜 안에서 후에 더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기억하라,,대개 두번째가 더 뛰어난 법이다!!..구태여 첫째가 되려 하지 말고 겸손하라))

그러나 안드레가 먼저 그리스도와 친분을 가지는 영예를 획득했으며, 베드로를 그리스도에게 데려가는 도구 역할을 했다.

1. 안드레게 베드로에게 준 "정보"를 보자.

(1) 안드레가 베드로를 "찾았다." 

..."안드레가 먼저 그의 형제 시몬 베드로를 찾았다." 즉 베드로를 두루 찾았다.

시몬은 안드레와 함께 세례요한의 설교와 세례에 따라 다녔으므로 안드레는 시몬을 만날 수 있는 장소를 알고 있었다.

아마도 안드레와 함께 있었던 다른 제자들은 같은 시간에 그의 친구를 찾으러 밖에 나갔을 것이다.

안드레는 "먼저" 요한을 만나려고 왔던 시몬을 만났으나, 그의 기대는 "시몬이" 예수를 만나는 것이었다.

(2) 안드레는 자기들의 경험을 시몬에게 말했다. "우리는 메시야를 보았다." 다음을 주시하자.

① 안드레는 겸손하게도, 그리스도를 만난 영광을 자랑하지 않고 "내가 그분을 찾았다"가 아니라, "우리가 같이 그분을 찾았다"라고 말했다.

② 안드레는 대단히 기뻐하면서 말한다.

-- 우리는 가치가 있는 진주와 참다운 보물을 찾았다. 그래서 그는 마치 문둥이들이 외치듯이(왕하 7:9)외쳤다.

③ 안드레는 알아듣기 쉽게 말하고 있다.

-- 우리는 메시야를 만났고, 그분은 이제까지 들은 그 이상의 사람이다. 요한은 "그가 하나님의 어린양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했다.

안드레는 그 말을 구약 성서와 비교하면서, 그분은 때가 찼기 때문에 온 아버지께서 보내라고 약속하신 그 메시야이다라고 단정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안드레는 "하나님의 증거를 명상함으로써," 이제까지 "그의 선생"인 요한이 말한 것보다 더 확실하게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시 119:99).

(3) 안드레는 "시몬을 예수에게 데려갔다."

-- 안드레는 자신이 설명하지 않고, 근원이신 예수에게로 데려가 그를 소개했다.

① "자기" 형제를 진실로 사랑한 하나의 모범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친척들에게 영적인 행복을 찾아 주려는 특별한 관심을 경주해야 됨을 배운다.

우리와 그들의 관계가 그들의 영혼이 잘 될 수 있는 기회를 보태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② 그것은 안드레가 그날 그리스도와 대화한 결과이다.

은혜로써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최선의 증거는 앞으로 우리의 생활이 거룩해지고 유용성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안드레는 "예수와 함께 있었고," 그래서 그의 얼굴이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충만한 것을 알았다.

은혜를 맛보면서 그는 자기의 형제들도 같이 맛볼 수 있을 때까지는 편안할 수가 없었다.

"참다운 은혜는 독점을 싫어하며 한 조각이지만 혼자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한다."

2. 예수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준 "환대"를 보자. 그의 형제 안드레의 권유로 온 베드로를 예수는 환영했다(42절).

(1) 그리스도가 베드로의 이름을 불렀다.

-- "예수가 베드로를 보고, 말하기를 네가 요나의 아들 시몬이로다 하니라."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몰랐을 것이 분명하다.

① 그렇다면 첫 눈에 어떤 물음도 없이 그리스도가 그의 이름과 그의 아버지 이름을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전능함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 "주님은 자기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처지를 알고 계신다."

② 그러나 시몬은 보잘 것 없는 하찮은 사람인데도 그리스도가 꾸밈없고 친절하게 그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하강적인 은혜와 호의의 한 예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 하나님이 모세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호의를 나타내는 한 예이다(출 33:17) .

...혹자는 이름의 특징을 주목한다.

"시몬"은 "복종적, 듣다, 응답하다..작은 조약돌"이란 뜻이요, "요나"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예호하난), 비둘기"란 뜻이다.

비둘기같이 복종적인 정신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데 필요한 자질이다.

(2) 그는 베드로에게 "게바"라는 이름을 주었다.

① 이름을 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총애"를 뜻하는 것이다. 또 새 이름은 어떤 관작을 나타내기도 한다(계 2:17; 사 62:2).

-- 이러한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리스도는 그의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가문의 수치를 씻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제자로 택하셨다.

②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 굳셈, 견고함"을 뜻하는 이름이다. "너를 게바(번역하면 반석)라 하리라."

-- 베드로는 천성이 딱딱하고 완고하고, 그리고 단호했던 것이 그리스도가 그를 "게바"(반석)라 부른 까닭은 나중에 경험할 바 (주를 부인함의) 중요한 실패를 겪지 않도록 하려 함과 동시에 그런 실패를 맛보았다 해도 오히려 돌이켜서 굳게 주님을 붙들어 믿음을 확고히 하며, 동시에 그의 "형제들에게 힘을 주고 지지하며," 다른 형제들에게 도움이 됨으로써 참으로 "게바"(반석)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에게 오는 사람들은 주님께 융합되어 하나의 반석처럼 단단히 그리고 천천히 그러면서도 확고하게 결합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되어질 수 있다. "한결같이 굳세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를 반석처럼 만들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가 (카톨릭에서 주장하듯)곧 교회의 유일무이한 기초라는 뜻이 아님에 주의하라...야고보와 요한은 일명 보아너게=우뢰의 아들들,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 불렸지만 그들이 그 이름으로 불리는 유일한 사람은 아님을 잊어서는 안된다.

^^^성도에게 닥치는 고난을 기뻐하고 즐거워할 이유 : (그리스도를 닮음 통해 하나님 영광에 참여하도록)고난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

[행14:22, 23]*22.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 *22. strengthening and establishing the hearts of the disciples; encouraging them to remain firm in the faith, saying, “It is through many tribulations and hardships that we must enter the kingdom of God.”  *23. When they had appointed elders for them in every church, having prayed with fasting, they entrusted them to the Lord in whom they believed [and joyfully accepted as the Messiah].
[벧전4:16-19] *16.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19.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16.  but if anyone suffers [ill-treatment] as a [e]Christian [because of his belief], he is not to be ashamed, but is to glorify God [because he is considered worthy to suffer] in this name.  *17. For it is the time [destined] for judgment to begin with the household of God; and if it begins with us, what will the outcome be for those who do not respect or believe or obey the gospel of God?
*18. And if it is difficult for the righteous to be saved, what will become of the godless and the sinner?  *19. Therefore, those who are ill-treated and suffer in accordance with the will of God must [continue to] do right and commit their souls [for safe-keeping] to the faithful 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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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과 나다나엘(요 1:43-51)

우리는 이 대목에서 빌립과 나다나엘의 소명을 볼 수 있다.

Ⅰ. 그리스도에 의한 부름에 즉시 응하는 빌립. ...*43.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는 안드레처럼 요한이나 베드로에 의해서 그리스도에게 인도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직접적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해서 선택한 사람들을 부르신다. 그러나 그 방법이 다양하지만, 그 방법에 얽매이지 않는다.

1. 빌립은 예수께서 먼저 발견하고 불렀다. 

...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찾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는 우리들을 찾으셨다.

"빌립(원뜻 : <승마하는>말을 좋아하는 자)"이란 이름은 원래 희랍말이며, 이방인들 사이에서 많이 상용되었는데, 이 때의 유대 교회는 쇠퇴되어 이방인들과 닮아가는 중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의 이름을 바꾸도록 하지 않았다.

2. 그는 그 "다음 날" 부름 받았다. 

... 그리스도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시는지를 보라. 하나님을 위해 일할 때는 한 날도 낭비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성령을 받기 전에는 하루에 한 두 사람씩을 불렀으나 성령을 받은 후에는 실제로 하루에 수천 사람들을 불러서 일을 성취시키신다(14:12).

3. 예수가 (주도적으로 친히 빌립을 찾아 부르려고 !!) "갈릴리로 가시고자 하셨다."

그리스도는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은 누구나 어느 곳에 있든지 찾으시며, 잃지 않는다.

4. 빌립은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수반된 그리스도의 권능에 의하여 그의 제자가 되었다.

-- 진실한 기독교인의 태도를 보라. 이 태도란 "그리스도를 따르고," 자기 자신을 그의 말씀과 행동에 복종시키며, 그의 전도에 참여하고, 그가 가는 길에 뒤따라 가는 것이다. 또 말씀을 실행되게 하는 은혜의 효능을 보라. 그것은 "그의 권능의 자랑이다."

5.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다(44절).

-- 이런 훌륭한 제자들이 고향 벳새다에서 존경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 동네에 영광을 주었다.

벳새다는 "그물의 집"을 뜻하는데, 대부분 어부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택했으며, 그들은 특별한 은사를 받을 것이기 때문에, 학식은 특별히 필요치 않게 되었다.

벳새다는 [고라신도 마찬가지로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두로와 시돈보다 더 ]사악한 장소였는데(마 11:21), 아직도 남아 있음은 은총에 의하여서이다.

Ⅱ. 나다나엘은 빌립에 의하여 그리스도에게 인도되었다. 그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있다.

1. 흔히 초심자들에게 볼 수 있듯이 연약하나 경건한 열성을 나타내는 빌립과 나다나엘을 관통하는 것은 단지 "시온으로 가는 길을 묻는 물음"이다.

(1)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준 기쁜 소식을 보자(45절),

...*45.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 전에 안드레처럼 빌립도 그리스도에 관한 어떤 지식을 가지고서 그가 구세주라는 사실을 분명히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빌립은 비록 그리스도와는 처음 사귀지만 나다나엘을 인도하려고 하였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있는 최선의 기회가 주어졌을 떼에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는 것이다(행 20:35).

우리도 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야 한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만났다"(45절). 여기서 주목해 보자.

① 빌립이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사귐에서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가?

"우리가 자주 이야기했고 오랫동안 바랬고, 기다렸던 그이가 결국에는 왔고, 우리가 그를 발견하고 찾았도다!"

② 빌립이 구약 성서를 잘 알고 있어서, 복음의 빛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그래서 더 쉽게 이해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유익이 되었던가! "모세와 예언자들이 기록했던 그를" 그는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구약 성서에 기록된 사실들은 부분적이고 몇 번에 걸쳐서, "거룩한 계시들"의 책에서 베껴 쓴 것이다.

거기에는 여인의 자손, 아브라함의 자손, 실로, 모세와 같은 예언자, 다윗의 자손, 임마누엘, 인자(人子)순, 메시야, 왕 등으로 그에 관해 영광스럽게 기록되어 있다. 빌립은 이러한 사실들을 잘 알았기 때문에 즉시 그리스도로 영접했다.

③ 그러나, 빌립이 범한 실수와 약점을 보자.

-- 그는 그리스도를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다. 그러나 실상 그는 "베들레헴" 출신이었다.

그리고 "요셉의 아들"이라 했다. 그러나 단지 그렇게 추정될 뿐이었다.

초심자들은 오류를 범하기가 쉽다. 그러나 그 오류를 마치 진실인 듯 분명히 못박아 하는 말도 잘못이다.

사실은 그들이 찾기 전에 그리스도가 먼저 그들을 찾았기 때문이다.

빌립은 아직도 바울처럼,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것을 (빌 3:12) 알지 못했다.

(2) 이에 반대한 나다나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46절)

① 그의 "신중"은 칭찬할 만하다.

-- 그는 듣은 것들을 가벼이 수락하지 않고 일단 시험해 본다. 속담에 "돌다리도 두들겨 보라"는 말이 있다.

② 그러나 그의 이의 제기는 주님에 대한 무지에서 발생했다.

-- 만일 그가 나사렛에서는 어떤 선한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뜻했다면, 그것은 신의 은총에 대한 그의 무지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장소의 우열이나 또는 사람 자신의 어리석음과 심술궂은 관찰에 기인함과 같다.

만일 메시야 즉 위대한 일이 나사렛에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면 이제까지의 그의 생각은 옳다(율법에서 모세의 기록을 보면, 메시야는 유대에서 나올 것이며, 예언자들은 그가 태어날 장소를 베들레헴으로 정했다).

그러나 이때의 나다나엘은 이 "참된 사실"을 아직 몰랐다. 이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빌립은 그를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분에게로 데려 가게 되는 실수가 벌어졌다.

-- 여기서 주의할 점은 가르치는 자의 실수가 가끔 듣는 자에게 편견을 줄 수가 있다는 점이다.

(3) 나다나엘의 이의에 대한 빌립의 간단한 대답은 "와서 보라"이다.

① 그가 만족할 만한 대답을 주지 못한 것은 그의 "연약함" 때문이다.

-- 그러나 그것은 초심자에게 있어서는 흔한 경우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만족시키는 방법은 잘 알고 있지만, 만만찮은 상대의 트집을 침묵시키는 방법에는 자신 있다고 말할 수가 없다.

② 그가 직접 그 이의에 답할 수 없었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것, "와서 보라"하고 대답한 것은 그의 "지혜"와 열성이었다.

-- 더 이상 논의해도 해결할 수 없는 것과 싸우지 말자. 우리가 가서 그리스도와 이야기하면 이런 어려움 모두가 즉시 사라질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의심스러운 논쟁으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어리석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보다 나은 시간 활용과 보다 좋은 목적을 위해서는 경건과 헌신의 훈련이 필요하다.

"와서 보라." "가서 보라"는 것이 아니다. "오라. 그러면 내가 함께 가겠다"이다(사 2:3 참조). 빌립과 나다나엘의 이러한 대화에서

첫째,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사건의 시비곡직에는 전혀 관계없이 어떤 이국적인 분위기 때문에 종교를 적대시하는 불합리한 편견에 사로잡혀서 신앙의 길을 떠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둘째, 무조건 종교를 적대시하는 자들의 편견을 제거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직접 시험해 보고서 시비를 가리게 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기 전에 미리 대답을 하지 말자.

2. 나다나엘과 우리 주 예수 사이에 되어진 일을 보자.

나다나엘은 와서 "보았으며," 그러한 행동이 무익하지가 않았다.

(1) 우리 주 예수는 나다나엘의 순전성을 영예롭게 증언하셨다. 

...예수는 그가 오는 것을 보시고 호의 있는 태도로 그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를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라고 하셨다.

① 그를 "칭찬했다."

-- 예수의 칭찬은 아첨이나 자신이 선한 호의를 과시하는 게 아니고, "겸손한" 사람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생각이 좁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은 나다나엘의 진실함을 의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겸손한 마음의 태도의 사람이었기에 그리스도를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나다나엘은 어떤 사람보다도 그리스도를 반대했지만, 여기서 그리스도는 그를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갈릴리의 이름 없는 한 마을, "나사렛에서 어떤 선한 인물이 날 수 있겠는가?"(21:2) 그러나 예수는 빌립을 논박하지 않았다.

그는 나다나엘에게 호의를 보이셨다.

::: 이것은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할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용기를 주며, 또한 무조건 우리에게 하찮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위엄 있게 말하도록 우리를 가르치시며, 또 그들에게 적당한 칭찬을 하도록 해 주신다.

② 그의 "순전함"에 대한 그리스도의 칭찬을 보자.

첫째,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 사람의 참됨을 아는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우리는 "최상을 바랄" 뿐이다. 명목상으로는 그 민족 전체가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서 난 사람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롬 9:6),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있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이다.

...에서의 교활성에 반(反)하여, 나다나엘의 순전함을 가진 사람이 이스라엘의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는 그의 혈통과 정신에 있어서도 야곱의 참 자손이 되어진다.

-- 이스라엘 신앙의 진실한 고백자라야 한다.

그가 고백하는 종교에 신실하며 그렇게 살아 왔다. 즉 그는 정말 선하게 보였으며, 그의 행위는 평화에서 나왔다.

그는 "내면적으로도" 유대인(롬 2:29)인 진정한 유대인이다. 그래서 역시 기독교인이기도 한다.

둘째, 그는 "간사함이 없는," 즉 참 이스라엘의 특성을 지녔다. 

-- 참 기독교인의 한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에게 간사함이 없는 사람으로 속임이나 음모가 없는 진실한 사람이며, 또 하나님에게 간사함이 없음이란, 자기의 죄를 진정으로 통회함과, 하나님과 진실한 계약을 맺음이며, 마음에 "간사가 없음"(시 32:2)을 뜻한다. 이는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간사함"이 없다는 것이다.

비록 그가 여러 가지 일에 있어서 어리석고 미련할지 모르지만, 잘못함이 없으며, 하나님을 멀리하는 부도덕함이 없다.

즉 그에게도 비록 결점은 있지만, 범죄라 인정할 만한 사실은 없었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면, 우리들은 그의 가르침을 알게 되고, 그를 정말 좋아하게 된다." "그를 찬양하라. 즉 바라 보라. 그러면 놀라게 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으로 유대 교회와 유대인들이 물이 들어, 그들의 종교가 타락되어 형식화 되거나 국가 정책화되었다.

그러나 참 이스라엘인은 욥처럼(욥 1:8), 신의 은혜에 놀라와 "하며 경외하는 자"이다.

(2) 나다나엘은 자기가 이전에 행했던 신앙 생활을 그리스도가 아심으로 인해서 그의 전능함에 매우 놀랐다.

① 여기에서 나다나엘의 겸손이 나타난다.

-- 즉 그는 그리스도의 세심한 주의에 당황했는데 이 당황에서 그리스도는 그를 기꺼이 맞아 들였다.

"나같이 무가치한 자를 어찌 아십니까? 주 여호와여, 내가 무엇입니까?"(삼하 7:8) 이 태도가 그의 진실함을 나타내는 하나의 증거이다.

그는 그가 접한 놀라운 사실은 알지 못했지만, 그 놀라움에 빠져 들어 갔다.

그리스도는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를 잘 안다. 사람들은 표정을 보고서 사람들의 현재의 마음을 알 수 없지만, 그리스도 앞에서는 모든 것들이 드러내지고 열려진다(히 4:12, 13). 그리스도가 우리를 알고 있는가? 이제 그리스도를 알아보자.

②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그에게 좀 더 "나타내셨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내가 너를 보았다."

첫째, 그리스도는 자기가 그를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알려 줌으로써, 자기의 신성을 드러내고 있다.

-- 사람과 더불어 모든 것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런 능력을 가지시고 그리스도는 여러 경우에 자기 자신이 하나님임을 나타내신다.

메시야에 관해서는, 그가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한채 아니하고" "공의와 정직으로 판단하신다"(사 11:2, 3)고 예언되어 있었다.

이 예언이 여기서 그대로 성취되었다(딤후 2:19 을 참조).

둘째, 빌립이 그를 부르기 전에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

-- 이런 말은 그의 특별한 친절을 표시하고 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기 이전에, 그리스도가 먼저 나다나엘을 주목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어떤 점을 알기 전에 먼저 그가 사람들을 알고 계신다(사 45:4; 갈 4:9 참조).

::: 나다나엘이 ((명상괴 기도, 교제가운데서 주님께 무엇인가 말씀드리기 위해 특별히))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어떤 사람도 너를 볼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 때 너를 보고 있었다."

들에서 이삭이 명상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처럼 무화과나무 아래서 나다나엘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즉 어쩌면 그 장소에서 그는 주님과 깨뜨릴 수 없는 계약을 맺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은밀히 보고 그의 행위에 따라서 그에게 공개적으로 보답했다.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있다"는 것은 정신의 "안정과 침착을 나타내며, 그래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더 가까워질 수 있다(미 4:4; 슥 3:10 참고).

이 점에서 나다나엘은 참 이스라엘인이었다. 그는 이스라엘처럼 하나님하고 씨름했으며(창 32:24), 위선자처럼 거리의 모퉁이에서 기도하지 아니하고 무화과나무 아래서 기도했다.

(3) 나다나엘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충만한 확증을 얻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는 고백에 나타나 있다(49절).

즉 간단히 말하면 당신이 정말 메시야입니다라는 뜻이다.

① 확고한 마음으로 믿는 그의 신앙을 보라.

-- 비록 그가 그리스도에 대한 몇 가지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모든 편견들이 사라졌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살아 있는 신앙 안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편견들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나사렛 예수가 바로 으뜸 선이며, 따라서 그 예수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② 아주 "꺼리낌 없는" 그의 고백을 보라.

-- 그의 고백은 우리 주 예수에 대한 경모의 형식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다.

... 첫째, 그는 그리스도를 "랍비"라 부름으로써, 그리스도의 예언자적 직능을 고백했다.

이 랍비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흔히 가르치는 자들에게 부여하는 이름이다. 그리스도는 위대한 랍비로서,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 둘째, 그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시 2:7 에서 일컬어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으로써 그의 신성과 사명을 인정하고 있다.

비록 그가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있지만 신의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나다니엘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있었다.

... 세째, 그는 "당신은 이스라엘의 왕이시며, 그 왕을 우리들은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습니다"고 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다. 여기서 나다나엘은 자신이 이스라엘 왕을 즉시 받아들여서 그에게 복종하는 참 이스라엘인임을 증명하고 있다.

(4) 그리스도는 나다나엘의 희망과 기대를 보다 큰 어떤 것으로 들어올리신다(50,51절). 

....그리스도는 개심자(改心者)에게 매우 친절하셔서, 비록 그들이 약하지만, 그들의 선한 출발을 격려해 주신다(마 12:20).

① 그리스도는 나다나엘의 준비된 믿음을 보시고 그를 칭찬하신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고 해서 믿느냐?"

그리스도의 지혜에서 나타난 결과에 그는 감탄했다. 즉 이것은 나다나엘이 사전에 준비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에 대한 존경과 그의 은혜는, 그가 첫 설교를 듣고 마음이 사로잡혀졌음을 보아서 그만큼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② 그리스도는 그에게 더 위대한 증거를 약속했으며, 그가 처음에 가졌던 믿음을 더 굳게 가지도록 하셨다.

...첫째, 일반적인 것을 보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즉 내가 메시야임에 대한 더 확고한 증거들을 보리라."

이것은 그리스도의 기적으로, 그의 부활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지니고 있는 것을 선용하면 할수록 그에게 더 좋은 것이 주어지게 된다.

복음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은, 그 복음에 대한 증거를 더욱 알게 되며, 그 믿음에 대한 결과를 점점 더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발견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기꺼이 그의 백성이 된다는 것으로써, 세상에서 이름을 떨치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갖는 것이다. 즉 아직은 보이지 않는 영광을 갖는다는 것이다.

...둘째, 세부적으로 보자. "너만이 아니라 너희들, 제자들 모두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이 말은 무화과나무 밑에 앉아 있는 나다나엘에게만 말한 것이라고는 볼 수는 없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라"는 서두가 있는데, 이 말은 집중된 주의력과 의심할 바 없는 완전한 동의를 요구하고 있다.

비록 유대인들이 흔히 기도의 끝에 이 말을 사용하곤 하며, 또 때로는 두 변씩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리스도 이외는 어떤 사람도 이 말을 문장의 처음에 사용하지 않았다. 이 말은 하나의 엄숙한 단언이다.

그리스도는 "아멘"이시요(계 3:14), 여기서도 "나는 아멘이요, 아멘으로써" 너희에게 이른다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나, 신실한 증인"으로서.......하는 식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그의 말씀 의에 우리의 확신이 세워졌을 때 드러난다.

그리스도가 확신하는 말을 살펴보면, 지금으로부터, 혹은 잠깐 동안, 혹은 멀지 않아, 혹은 장차, "너희들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a. 여기서 그리스도가 스스로를 "인자(人子)"라 지칭하고 있다.

-- 이 지칭은 복음서에서 그리스도께서 흔히 자기를 지칭하는 칭호이다.

나다나엘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이라 부르고 있지만, 그는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칭하고 있다.

(a) 그것은 존귀의 절정에서도 그가 지니는 "겸손"을 나타내며

(b) 그의 신성과 마찬가지로 "인간성"을 가르치고 있다.

(c) 현재의 그의 굴욕을 시사하는 것으로써, 나다나엘로 외적인 영화 속에 나타나는 이스라엘 왕을 기대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b. 그러나 그리스도가 예언한 것은 놀랄 만한 사건들이다.

-- "너희들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a) 어떤 사람은 특별한 사건을 지적함으로써 글자 그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

[a]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시현(視現)을 말한다.

-- 이 시현은 글자 그대로 이루어졌으며,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그리스도의 변화 산상의 모습을 보았듯이 나다나엘이 어떤 영광스런 모습을 보았다는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20:30), 어째서 기록하지 않았을까?

[b] 우리 주 예수에 대한 천사들의 많은 수종으로 이루어졌는데, 특히 그의 승천시 하늘 문이 열리며,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그를 영접하고 그에게 영광을 베풀었으며, 이 광경을 제자들이 보았을 때이다.

-- 그리스도의 승천은 그의 사명의 위대한 증거였으며, 제자들의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하였다(6:62).

[c]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 때는 하늘이 열릴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그를 볼 것이며,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를 호위하는 것처럼 오르락 내리락할 것이고 사람들은 기도하는 그 날이 올 것이다(살전 1:10 참조).

(b) 또 어떤 사람들은 이제부터 시작되는 어떤 상태나 일련의 사건들을 말함으로써 비유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a] 나다나엘은 그리스도의 표적들을 믿는다.

-- 그것은 옛 예언자들처럼 그리스도도 자기에게 비밀스러운 일들을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리스도는 하늘이 열리는 것처럼 옛 예언자들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놀랄 만한 표적들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마치 탁월한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 그의 지시를 계속적으로 수행하는 것처럼 그러한 능력이 인자에 의해서 구사되어질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신 즉시 그리스도는 표적을 행하셨다.(2:11).

[b] 그의 중재로, 즉 하늘과 땅 사이를 왕래하시는 복된 교제를 통하여, 제자들은 점점 신비 속에 들어가게 된다.

첫째, 중재자인 그리스도에 의하여 제자들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볼 것이며, 우리들은 그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히 10:19, 20).

하늘이 열린 것을 우리는 신앙으로 바라보고 결국에는 들어가서 주의 영광을 보며, 그의 기쁨에 참여하게 된다.

둘째, 제자들은 인자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천사들을 볼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거룩한 천사들과 교제를 나누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하늘과 땅이 화해되고 함께 합쳐진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야곱의 사닥다리와 같다(창 28:12).

그로 말미암아 천사들은 계속 성도들 주의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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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제 1장

=====1:1

@태초에 - 온 우주 창조의 시작을 선포하는 창 1:1을 연상시키는 본 구절을 매개로 하여, 저자 요한은 구약과 일관된 흐름으로 신약의 복음서를 쓰고 있다.  

계시의 시작인 천지 창조의 기사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에 이르러 계시가 완성된다고 볼때, 본 구절은 이 복음서의 서두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태초'(*, 아르케)라는 용어는 원래 '시간과 공간의 시초'를 의미한다. 따라서 고대 그리이스의 자연철학자들은 '만물의 시초(始初)'라는 뜻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처음 시간의 특별한 한 시험 뿐만 아니라 초(超) 시간적인 영원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1:1-18 주제 강해 '베레쉬트와 엔아르케의 의미' 참조).

@말씀이 - 원어상 '말씀(* , 로고스)은 '수집', '계산', '목록', '말' 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용어는 철학적인 의미로서 (1) 어떤 법칙, 의미, 구조의 내용, (2) 형이상학적 실재나 사물을 이해할 수 있는 법척, (3) 우주론적인 실재들을 표상하는 개념 등으로 사용되었다. 

이 용어를 신학적 의미로 전환시킨 사람은 플라톤 철학에 심취했던 1세기의 유대인 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a)였다. 그는 '하나님의 로고스'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하며, 인간을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중재자(즉 대변자거나 제사장)로 부각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로고스란 하나님의 창조 늪력의 총화(總和)이자 이 세상을 질서있게 다스리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성경 전반에 걸쳐서 '로고스'는 주로 하나님의 권능(시 147:15;148:8;히 4:12)과 계시(사 2:1;렘 26:1;딤전 5:17)를 의미한다. 특히 요한은 본절에서 '로고스'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Deity)을 부각시킴으로써, '로고스'가 바로 계시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임을 보여준다. 

본절에서와 마찬가지로 14절에서의 '말씀'에서도 '로고스'의 인격성이 뚜렷이 표현되고 있다. 

본서에서 '믿다'(*, 피스튜오), '사랑'(* , 아가페)과 더불어 주요 개념으로 쓰인 이 용어(로고스)는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강화(講和)로 구성되어 있는 본서의 특성까지도 잘 드러내고 있다(1:1-18 주제 강해 '로고스 개념의 배경과 그 의미' 참조).

@계시니라 - 존재를 나타내는 동사 '에이미'(* )의 3인칭 단수 미완료형 '엔'(* )을 사용함으로써 요한은 (1) '로고스'가 태초의 어느 시점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보여줌과 아울러 (2)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과 영원성을 드러낸다. 따라서 당시의 이방 철학의 인본주의적 경향과 유대교적 신관(神觀)의 오류를 분쇄하고, 세상의 시초 이전에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존재하였다는, 그리고 지금도 존재하고 계시다는 엄연한 사실을 선포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동등하게 선재하신 그리스도의 초시간적 영원성을 무시하고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라고 주장한 아리우스는 니케아 종교 회의(A.D. 325)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 '하나님과 함께'(* ,프로스 톤 데온)에서 전치사 '프로스'(* ) '...와 함께'란 뜻의 전치사들(*, 엔;* , 메타;* , 파라;* , 쉰)과 의미상 유사하다. 그러나 후자인 여러 전치사들이 주로 정적(靜的)인 공존(共存)을 나타낸다면, 전자인 '프로스'는 동적(動的) 공존을 나타낸다. 따라서 후자는 같은 시간에 동일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며, 전자는 서로간의 친밀하고도 부단한 인격적 관계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 전치사는 '서로 마주 대하는'이라고도 해석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전치사를 통하여 우리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셨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의 영화로우신 '친교'(Robertson)를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삼위 일체 교리의 근간'이 되고 있다(Calvin).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혹자는 본문에서 '하나님'(* , 데오스) 앞에 관사 '호'(* )가 없기 때문에 말씀이 절대적인 신성을 지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볼 경우 '말씀'은 단지 종교적 신성(神性)을 지니고 있는 막연한 존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당시 로마 제국 내에서 풍미하던 영지주의(마태복음 신약서론,'이방 종교' 참조)의 학설대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된 존재로서 하나님보다는 하등의 신으로 전락할 위험성도 내포할 수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이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표현된 것은 헬라어 문법상의 특성을 관찰하면 잘 알 수 있다. 

헬라어 문장은 주어와 술어의 어순(語順)을 바꾸어 쓸 수 있다. 따라서 헬라어에서는 주어와 술어의 구분을 어순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헬라어에서 주어와 술어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관사이다. 따라서 주어는 관사를 가지고 있고, 술어는 주어와의 구분을 밝히기 위해 관사를 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문 '카이 데오스 엔 호 로고스'(* )에서 '말씀(로고스)이 주어, '하나님'(데오스)이 술어임을 알 수 있다. 결국 본문은 성자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간결하고도 명확한 선포이다. 이러한 성자 하나님의 참 모습은 20:28의 도마의 고백에서 확실하게 밝혀진다. 

한편 3개의 문장으로 기술된 본절은 원문 구조상 '말씀이 계시니라'(* ...호 로고스 엔...)는 주어와 동사를 중심으로 (1)말씀의 선재성과 영원성, (2) 인격성 그리고 (3)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선언은 요한복음 전체의 기독론(Christology)을 대변한다. 따라서 본절은 그리스도에 관한 심오한 내용을 단 세 문장으로 간결하게 함축한 것으로서 복음서 문장 양식 중 백미(白眉)라고 하겠다.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 1절의 앞 두 문장의 내용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반복은 내용을 강조하기 위한 전형적인 히브리적 표현 방법이다. 

예로부터 유대인들은 자녀 교육시 반복을 통해 기억시키는 학습법을 흔히 사용했다(출 13:9). 특히 시편의 반복적 찬양시들(시118편;136편)과 잠언의 반복적 교훈들(잠1:8;4:1-4;6:20;13:1)은 이스라엘의 반복 교육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반복 교육은 내용을 강조하고 그것을 상대방(피교육자)에게 선명하게 주입시키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어려서부터 히브리적 교육을 받았던 저자 사도 요한은 율법의 완성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철저히 전파하고 교육시키기 위하여 반복적인 문장을 자주 소개했다(3절;3:3, 5, 11등). 특히 '진실로 진실로'(* , 아멘 아멘)라는 표현이 다른 복음서에서는 단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는데 반해서 요한 복음에는 무려 25회나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사도 요한의 교육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요한일서도 사랑을 주제로 한 문장의 반복을 심층적으로 구사하면서 과거의 성도들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사랑의 중요성을 마음속 깊숙이 심어준다. 

전설에 의하면 요한은 무척 늙어서 강대상에 올라 갈 수 없었을 때, 제자들이 그를 의자에 앉히고 강대상에 올려 줄 때마다 '어린 아들들아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늘 동일한 말씀을 전했다. 같은 말만을 반복하자 제자들이 그 이유를 여쭈었다. 그때마다 요한은 '이것이 주님의 교훈이니 이것만 실천하면 족하다'고 하였다고 전한다(Jerome). 이렇듯 복음서와 서신의 집필 그리고 죽을 때까지 주의 말씀을 꾸준하게 반복적으로 선포한 사도 요한의 자세에서 말씀에의 사랑과 말씀전파의 숭고성을 볼수 있다. 끊임없이 말씀을 상고(詳考)하고 배우는 자세는 구약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말씀과 더불어 살아가는 성도들의 참다운 태도이다(시 119:9, 105;살전 2:13).

=====1:3

@만물이 - 원문상 '만물'(* , 판타)에서 관사가 없다. 따라서 '만물'이란 현재의 시점에 국한된 전 우주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에 존재하는 전 우주를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역사와 더불어 존재하는 만물을 의미한다. 이와는 다른 관점에서 사도 바울은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골 1:16)이라고 공간적인 의미로서 만물을 정의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 이것의 헬라어 '디 아우트'(* )라는 표현은 '말씀을 통하여'(공동번역)라고 번역하는 것이 의미 전달상 명확하다. 

이러한 표현은 '만물이 주로 말미암고'(롬 11:36)라고 표현한 바울의 말씀과 일맥 상통한다.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전치사 '디아'(* )는 성경 전반에 걸쳐 사용된 것으로서 주로 (1)창조(히 2:10)와 (2) 구원(10:9;롬 5:1, 21) 사역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적 역할을 잘 드러낸다. 본절에서 이 전치사는 창조시의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리킨다. 1절에서 언급한대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고려한다면, 창조시 그리스도의 사역은 성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수단으로서의 사역이 아니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창 1:26)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대등한 인격적 친교를 바탕으로 한 사역이었던 것이다.

@지은바 되었으니 - 헬라어 '에게네토'(* )는 '...이(존재가) 되다'라는 뜻을 지닌 헬라어 '기노마이'(* )의 3인칭 단수 과거형이다. 이 동사는 '구성되어지다'(constructed)의 뜻이 아니라 '...이 되다'(become)는 의미를 지니는 바, 이는 그리스도께서 무(無)의 상태로부터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 동사는 1절의 '계시니라'(* , 엔)와 대조되어 그 의미를 명확하게 한다. 즉 본절의 동사는 피조된 것을 1절의 동사는 존재성을 나타낸다. 또한 본절에서는 '만물'(all things, NIV)이 주어인데 반해서 1절에서는 '말씀'이 주어이다. 이로써 (1)말씀은 존재하고 있었으며, (2) 만물은 말씀을 통하여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만물이 하나님의 우주적 사역의 현장이며, 수단임에 비하여, 말씀은 하나님과 더불어 항상 존재해 왔다.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 '생명'으로 번역된 헬라어 '조에'(* )는 '영원한'(* , 아이오니오스)이라는 형용사를 수반하여 '영생'이라는 용어로 자주 등장한다(3:15, 16; 요일 5:12). 그런데 요한은 단지 '조에'라는 단어로써 영원한 생명을 묘사할 때도 많으며 본문의 경우도 그러하다. 

한편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생명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시 36:9) 생명의 주인(시 104:29, 30)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구약성경의 생명관이 반영된 것이 본문의 '생명'9* , 조에)이다.

따라서 저자 요한은 '생명'이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고 있는 생명이 영원한 생명(영생)임을 명시한다(14:6;17:3). 따라서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영접하는 성도들에게는 영생이 부여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 본원적(本源的)으로 존재하고 있는 영생을 매개로 하여 영원한 하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이다(엡 2:19).

@사람들이 빛이라 - '빛'이라는 용어는 단순히 자연 현상인 빛을 가리키거나 빛과 어두움을 절대적 차원에서 대치시키는 이원론적인 종교 사상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빛(the light, NIV)에 대한 개념은 구약성경의 맥락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1) 빛을 발하는 구름(욥 37:15)이나 불기둥(시 78:14) 가운데 현현하시는 분 (2) 감추인 것을 드러내시는(욥 12:22) 빛나는 분(사 42:16) (3) 빛과 어두움의 주(암 5:8) (4) 이스라엘의 영원한 빛(사 60:1, 2)으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요한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참되고 영원한 생명이 곧 인류에게 임할 참빛이라는 사실을 피력하고 있다(1:9). 그리고 본절의 두개의 문장에서 '에이미'(* , '존재하다')의 3인칭 단수 미완료형인 '엔'(* )을 두 번 사용함으로써 이러한 생명과 빛은 창조되었거나 형성된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삼위 일체 하나님 안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 성도들로 하여금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시 36:9)라는 기쁨의 찬양에 이르게 한다.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 빛과 대조되어 나타나는 '어두움'(* , 스코티아)은 앞절에 비추어 볼 때, 생명을 가로막는 죽임의 세력, 즉 사단의 세력과 그 세력하에서 부단히 죽어가는 이 죄악된 세상을 상징한다. 

원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리고 빛이 어두움 안에서 비추고 있다'(*, 카이토 포스 엔 테 스 코티아 파이네이)라는 뜻이므로, 본문은 이 죄악된 세상과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역사적인 성육신을 통하여 죄악된 세상인 이세상 안으로 임하셨다는 뜻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과 승천 후에 생명의 빛은 소멸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요한은 '비추다'의 헬라어 '파이노'(* )의 3인칭 현재형을 구사함으로써 말씀의 빛이 쉼없이 비추고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생명의 빛은 지금도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16:13) 성도들에게 비추이며 생명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빛의 군사로서 어둠의 세력과 끝까지 투쟁하는 능력을 공급하고 있다(딤전 1:18;6:12).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 '깨닫지'의 헬라어 '카테라벤'(* )의 원형 '카타람바노'(* )는 본래 '굳게 잡다'라는 뜻으로서 본문에서는 (1) '이해하다', (2) '이기다'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여기서는 '깨닫다','이해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죄악된 세상 속으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처형했다는 것이 바로 본서의 전반적인 맥락이다. 이러한 증거는 예수의 말씀에서 여러 차례 나타난다(4:5-26,31-38;5:10-47;6:25-65;7:14-36;8:12-59;9:39-10:18, 22-39;12:20-36;13:1-16:33). 

따라서 저자 요한은 영적으로 무지하여 생명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한 이 세상의 정체(正體)를 준열하게 드러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어두움의 세력에 휘말린 세상이 이제 재림하실 그리스도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요한계시록에 기록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동사 '카테라벤'은 현실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1)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죄악된 세력의 실상을 깨우쳐 주며 (2) 이 죄악된 세력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빛의 세력을 궁극적으로는 '이길 수 없는'는 사실을 보여준다(히 11장).

=====1: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 1-4절까지 '말씀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함축적으로 서술한 저자는 여기서 잠시 1세기 초반 팔레스틴에 영적인 쇄신을 일으키며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위해 터를 닦았던 한 인물을 소개하고 있다. 

본문은 세가지 단어를 실마리로 하여 그 인물의 특성을 보여준다. (1)전치사 '파라'(* ,'...에게서')는 1절의 전치사 '프로스'가 서로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나타낸다면, '파라'는 친근하기는 하되 동등하지 않은 관계를 나타낸다. (2) '보내심을 받은'(*, 아페스탈메노스)은 '보내다', '파송하다'라는 뜻을 지닌 '아포스텔로'(* )의 주격 단수 남성 분사로서 70인역(LXX)에서는 메시지나 임무를 위임받아 파송될 경우에 쓰였다. 이는 주로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보내실 때 썼던 용어이다(사 6:8). 이러한 사실은 이 인물이 남성이며,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그리스도의 선구자였음을 나타낸다(7, 8절). 그리고 '아포스텔로'의 완료 수동형을 사용함으로써 이 인물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명대로 사역했던 사람임을 보여준다. (3) '났으니'(* ,에게네토)라는 부정 과거형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그 사람이 하나님과 동등하게 존재하는 말씀과는 달리 단지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이름은 요한이라 - 앞 문자에서 한 인물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공관 복음에서 '세례 요한'(마 3:1;막 6:14, 25; 눅 7:20)이라고 명시한 것과는 달리 그저 '요한'이라고만 명명한다(25, 19, 20, 26, 28절). 

이는 공관 복음서 기자들이 독자들의 이해를 위하여 세례 요한과 사도 요한을 구분할 필요가 있었던 반면에 사도 요한은 자신의 저작이므로 이를 구별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1:7

@저가 증거하려 왔으니 - 본절에서는 '증거자'로서의 세례 요한의 사역이 간략하게 요약되어 있다. 

'증거'(*, 마르튀리아)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증언하다'라는 뜻으로서, 요한의 사역이 예수의 사역처럼 획기적인 신기원(新紀元)을 이룬 것은 아님을 보여 준다. 이는 세례 요한 자신이 스스로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23절)로 비유한 데서도 드러났다.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 증거자 세례 요한의 증거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빛'에 대해서는 4절 주석을 참조하라.

@모든 사람 - 세례 요한의 증거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될 대상들을 명시한 '모든 사람'이란 일차적으로 세례 요한의 증언을 들은 모든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에서 '모든 사람'이란 유대 군중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마치 아벨이 비록 죽임을 당하였어도 오히려 믿음으로 증언한 말씀이 남아서(히 11:4)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영접케 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처럼, 그의 증거는 시공의 범위를 점점 더 확산하여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까지 미친다고 볼 수 있다.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 '자기를 인하여'의 헬라어 '디 아우투'(*)라는 표현은 3절의 '그로 말미암아'(* , 디 아우투)와 같은 단어이나 각기 그 성격을 달리한다. 

3절에서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창조시의 중보적 사역을 나타낸다면,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예비하기 위한 중간 매개로서의 요한의 사역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와 같은 요한의 사역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하려 함에 있었다. 비록 방식에 대해 일말의 의구심을 표했던 적이 있었을지라도(마 11:2, 3). 요한복음에 언급된 바대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증거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항상 그리스도의 영광을 찬양했던 사람이다(15, 26, 27, 29-34절;3:28-30).

=====1:8

@그는 이 빛이 아니요...증거하러 온 자라 - 6, 7절에 나타난 요한의 본질적 특성과 사역을 간략하게 요약한 본절은 전형적인 히브리적 표현 방법으로서(2절 주석 참조) 요한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올바르게 정립(定立)하고 있다. 

저자 요한이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확실하게 명시했던 이유는 세례 요한의 사역의 참뜻을 알지 못하고, 그가 죽은 후 하나의 당파로 고착되어 버린 요한의 제자들을 깨우치기 위함이었다. 

특히 저자 요한이 전도와 교육을 집중했던 에베소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행 19:2, 3).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 계시를 소유한 초대 교회로서는 요한의 제자들을 복음의 빛 안으로 인도하는 것이 하나의 과제였다.

=====1:9

@참빛 - 6-8절에 걸친 세례 요한의 소개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던 4, 5절의 주제가 본절에서부터 다시 이어지고 있다. 

'참빛'(the true light, NIV)으로 번역된 원문은 '그는 참빛이시다'(* , 엔 토 포스 토 알레디논)이며, '말씀이 곧 참빛 이었다'(공동번역)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여기서 '참'(* , 알레디논)은 사도 요한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로서 '거짓에 반대되는 참'(* , 알레데스)이 아니라 '불완전을 완전케 하는 참'(Calvin)을 의미한다.

따라서 '참'(true, NIV)이란 용어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둠의 세력에 대항하여 싸우는 빛의 세력인 성도들(롬 12:13;엡 5:8;살전 5:5)의 참된 주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또한 참빛이신 주님께서는 말세에 어두움의 권세를 종식(終熄)시키고 빛의 왕국인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이다(계 21:9-27).

@세상에 와서 - '세상'의 헬라어 '코스모스'(* )는 원래 질서와 연관된 의미를 지닌 용어로서, '각부분들이 모여서 잘 구성되어 있는 것'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이 용어는 개인이나 단체 또는 국가 등이 질서있는 상태에 있을 때 사용될 수 있었다. 그후 헬라인들은 각각의 통일된 구성체들(* , 코스모이)이 질서와 조화로써 완전한 통일체를 형성한 우주를 '코스모스'라고 불렀다. 그리고 각각의 '코스모이'들이 '코스모스'로 되는 근본적인 규준(規準)이 바로 '로고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이러한 개념을 도입하지 않았다. 즉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당시 헬라적 문화권에서 통용되는 헬라어로 성경을 기록하고 복음을 전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코스모스'의 개념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사용하였다. 즉 신약성경에서 '코스모스'란 (1) 구약성경에서 사용한 '하늘과 땅'(출 20:11)과 동의어인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우주'(롬 1:20) (2) 인간 역사의 현장인 '지구'(롬 1:8) (3) 타락한 '인류 '(1:29)등을 가리킨다. 

따라서 성경적인 관점에서 본절의 '세상'이라는 개념을 요약한다면,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창조되었지만, 인간의 타락과 함께 부패된 곳, 다시 말해서 어두움의 세력인 사단의 권세가 지배하는 곳이다.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 각 사람(* , 판타 안드로폰)이란 인류라는 집단 또는 어느 단체와는 무관한 개념으로서, 실존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개체적인 의미이다. 

그리고 여기서 빛은 참빛이신 그리스도의 존재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비취는 빛')이라는 의미도 포함한다.

따라서 참빛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각 개인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신다는 뜻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이 구약 시대에서처럼 한 민족, 한 국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악된 세상에서 중생(born again,NIV)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성도들 개개인을 통하여 끊임없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부인 교회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서로 차별이 있을 수 없으며, 성도 하나 하나가 모두 귀한 형제 자매들임을 깨닫게 된다.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 엔 토 코스코 엔) - 1절에서는 영원전부터 그리스도가 계셨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면, 본문에서는 이세상에 오셨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기간을 보여준다. 

학자들은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셨다는 사실을 두 가지로 해석한다. (1) 창조 이후 성육신하기 전까지 영(靈)으로서 세상에 계신 것을 가리킨다는 견해(Godet, Westcott). (2) 성육신부터 승천하시기까지의 예수의 생애를 가리킨다는 견해. 

전자는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는 뒷 문장에 착안한 견해인 반면에 후자는 9절의 말씀과 연관시켜 해석하고 있다. 이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취할 수 있는 방편은 본절의 문장을 중심으로 하고 9절과 11절의 연관 관계를 살펴 보는데 있다. 

주지하다시피 본절은 세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제의 본 문장을 일단 차치하고 본절의 전체 의미를 보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으나 세상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11절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땅에 왔지만 자기의 소유들로부터 따돌림당했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10절과 11절은 문장의 전체 의미에 있어 일치한다. 그러므로 본절의 처음 문장은 이 세상에 참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묘사한 이 세상에 참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묘사한 9절과 연관된다. 그러므로 앞의 두 학설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 세상의 창조주이자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실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무지를 보여준다. 

어둠에 잠긴 죄악된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는 (1) 목수의 아들(마 13:55) (2) 귀신들린 자(마 12:24;막 3:22)에 불과하였다. 더구나 예수를 따르던 군중들도 예수를 기적 행위자 내지는 정치적 메시야로 판단했다는 사실을 연상한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무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여기에서 '알지'(* , 에그노)는 '알다'(* , 기노스코)의 3인칭 단수로서 (1)감각적인 지각(* , 아이스다네서다이) (2) 사물들에 대한 지식(* , 도케인), (3) 선천적인 지식(* , 에이도)등을 나타내는 용어들과는 그 의미가 다름에 주의하라. 

'기노스코(알다)'는 후천적, 객관적 관찰로써 온갖 대상(사물, 인간, 불변하는 영원한 실재)에 대해 파악하는 지식까지도 포괄하는 용어이다. 특히 마1:25에서는 남녀간의 성적 관계를 의미하는 구약성경의 뉘앙스(창 4:1;민 31:17)를 살림으로써 이 용어가 인간 간의 긴밀한 관계를 통한 '앎<관계적 앎>'까지도 표현함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 이 용어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실히 아는 것이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는데 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도 '앎'이며, 예수와 성도들의 관계도 역시 '앎'이다(10:14, 15). 그리고 성부와 성자께서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을 얻는 길이다(4절;5:26;17:3). 이러한 '앎'은 사랑에 의해 평가되고, 사랑을 매개로하여 계속 유지된다(요일 4:7-12). 결국 '알지못함'과 '앎'은 '미움, 다툼'과 '사랑', 그리고 '영원한 심판'과 '영생'으로 귀결된다.

=====1:11

@자기 땅에 - 헬라어 '타 이디아'(* )는 '자기 자신의'(* ,이디오스)라는 형용사의 중성 복수형으로서 19:27에도 '자기 집'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자기 소유의 거처'를 가리킨다. 

세상은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소유이며, 거처이다. 아무리 세상이 타락되었고 사단의 세력이 흥왕(興旺)할지라도 세상의 궁극적 소유권은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이다.

@자기 백성 -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고(창 18:19;신32:9) 이 세상의 죄악을 감당하고 사단의 권세와 싸울 제사장 나라가 되는 특권을 부여받았으나(출 19:6). 타락된 세상 속에 휘말려버린 이스라엘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실패하였다. 

따라서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본래 그리스도의 소유인 선민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고 배척하였을뿐만 아니라 극랄하게도 십자가 처형을 자행하였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영광스런 특권을 상실하였다. 이와 같은 '소유'(*, 타 이디아)라는 관점은 선민 이스라엘에서 예수의 제자들(13:1)로 넘어간 것이다.

이 영광스런 특권은 영생과 아울러 영원한 것이다(계 20:6). 이렇듯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즉, 상호 소유-->상호 거처-상호 거함-상호 누림]]신앙은 가혹하고도 잔인한 로마 제국의 박해에서도 더욱더 성도들을 강건케 하였음을 볼 때, 현대의 물신주의(物神主義)와 기타 세속적 이데올로기(ideology)가 판을 치는 세상 속에서 복음의 군사로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확신과 긍지를 소유함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 '영접하다'의 헬라어 '람바노'(* )가 주로 개인적인 영접을 의미하는 데 비해 본문의 '파랄람바노'(* )는 집단적 공동체적 영접을 나타낸다. 

따라서 예수께서 '선민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환영받지 못했다는 본문의 내용은 예수의 공생애 기간, 특히 예수의 체포와 제자들의 도주(逃走), 유대 당국자들의 모의와 재판, 그리고 예수의 죽음을 요구하는 군중들의 함성,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군중들의 조롱이라는 역사적 상황을 연상케 한다. 

한편 저자 요한은 '깨닫지 못하더라'(5절), '알지 못하였고'(10절), '영접지 아니하였더라'(본절)라는 세 구절을 통하여, 창조주이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배척한 이세상의 죄악과 부조리(不條理)를 폭로하고 있다. 이는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 1:3)라는 과거 이스라엘의 실상과 대동소이한 현상이다. 따라서 예수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알탉이 그 새끼를 날개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라고 탄식했으며, 스스로 선민이라 자부하던 자들을 '마귀의 자식이라 선언하셨다(8:44).

=====1:12

@영접하는 자 - 원문상으로는 역접 접속사 '데'(* ), '그러나'를 사용함으로써 세상의 반응과 성도의 반응을 극명하게 대립시킨다(5, 10, 11절). 

주지하다시피 11절의 '영접지 아니하였으나'가 집단적 공동체적 거부를 의미한다면, 본문에서 '람바노'의 3인칭 단수 부정 과거형인 '엘라본'(* )은 개인적인 영접을 시사한다. 즉 구원이 하나님과 개인과의 단독적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저자 요한은 보여준다. 

그리고 '영접한다'는 것은 단순히 '신뢰하다'(trust)라는 의미보다 더 강력한 표현으로서, 한개인이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권세를 주셨으니 - 이 문장은 자체 내에 파격(破格)구문을 가지고 있다. 즉 '아우토이스'(* , '자들에게는')가 선행 관계적을 서술하는 여격으로 쓰여져 있다. 

이는 헬라어 문장에 아람어적 관용 어법이 침투한 경우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저자가 아람어 문화권과 헬라어 문화권의 양대 지류에 속한 상황에서 살았기 때문에 자주(본서에서 27회) 발생하는 파격 구문인 것이다. 또한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서 그리스도를 '이름'으로 칭한 것도 히브리 전통에 입각한 아람어적 표현이다. 따라서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 이름을 지닌 사람'을 믿는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믿는다'(* , 피스튜오)의 현재 능동태 분사 여격인 '피스튜우시'(* )을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부터 끊임없이 계속되는 강력한 신앙'을 나나낸다. 따라서 '그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역사적 생애와 그의 구원의 능력 그리고 그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믿는다는 단순한 사실을 뛰어넘어 그리스도를 '개인마다'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다는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테크나 데우 게네스다이)이란 표현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영접한 자의 신분 규정이다. 즉 '어두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의 놀라운 변화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음을 본문은 명시한다. 

또한 여기서 '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네스다이'(* )는 '기노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던 것이 생겨나서 영원히 계속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역사적 시점에서의 신분의 변화가 초역사적 지평에까지 열려져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자녀'에 해당하는 원문은 출생과 직결되는 용어인 '테크논'(* )-이와 유사한 의미로서 사용되는 '휘오스'(*)는 '상속자'라는 뜻을 내포한다(갈 4:5, 6)-인바, 이는 죄악 세상에서 구원받을 성도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본질적인 변화를 통해 자녀가 되는 길은 오직 중생으로만 가능하다(3:3-9;벧전 1:3, 23). 

한편 그리스도를 믿고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곧 '권세'를 부여 받음이다. 여기에서 '권세'란 헬라어로 '여수시아'(* )이다. '여수시아'는 성경에서 주로 (1)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눅 12:5;골 1:13), (2)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부여해 주신 절대적인 권한과 힘(17:2;마 28:18;막 2:10;3:15;눅 4:36)을 나타낸다. 성도는 이와 같은 권세를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는다(고후 10:8;계 22:14). 따라서 이와 같은 권세를 부여받았다는 것은 죄와 어둠의 세상에서부터 자유롭게 됨을 의미하며, 이 자유로운 권능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 사역에 사용되어야만 한다(고전 9:12, 18).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 앞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과정이 묘사되었다면,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출생(중생)의 근원이 나타나있다. 

먼저 본문에서 저자는 부정사 '우크', '우데'(*, )를 사용하여 중생에 이를수 없는 부정적인(negative) 세 가지 요인 [(1)혈통, (2) 육정, (3) 사람의 뜻]을 나열한다. 

첫째로, 혈통(* , 하이마톤)은 '피'나 '혈연'을 의미하는 '하이마'(* )의 복수 소유격으로서, 육체적인 혈연 관계를 의미한다. 혈연 관계가 구원과 무관하다는 사실은 세례요한과 예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했던 유대인들을 규탄할 때 잘 드러난 바이다(8:39-44;마3:7-9). 

둘째로, 육정(* , 델레마토스 사르코스)이란 '육체적인 욕망'(fleshly desire, NEB)이란 뜻으로 1차적으로는 성욕을 비롯한 인간의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가리킨다(엡 2:3). 더 나아가 2차적으로는 성령의 뜻에 거슬리는 모든 육체적 욕구나 세상적 정욕을 통칭한다(고후 11:18;갈 5:16). 저자 요한이 타락한 세상을 어두움으로 정의했듯이, 빛이 없는 어두움 속에 처한 인간의 육체적 욕구와 이로 인한 가치 체계(사회적 명망, 권력, 부)로써는 구원이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셋째로, 사람의 뜻(* , 델레마토스 안드로스)이란 절대자에게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의 이성적(理性的) 노력이나 수양, 율법 준수 등을 통칭한다. 이러한 태도는 앞의 두 가지 요인보다 더 고상할지 모르지만 이도 역시 구원에로 인도하지는 못한다(롬 3:19, 20;고전 1:20, 21). 

따라서 위에 열거한 세 가지 조건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무관한 것이다(고전 1:22-25).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타락한 세상에서 비롯된 인본주의적 구원의 욕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세상에서 육체를 따라 의롭다 여김을 받을 자는 하나도 없다(롬 3:20). 결국 저자는 이 세계의 절망(어두움)을 묘사하며, 인간 스스로의 구원의 길이 근본적으로 막혀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죄악된 인간이 인간을 인도한다는 것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부조리이며(마 15:14), 그 인도자는 도둑이며, 삯꾼 목자에 지나지 않는다(10:10-13).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 원문에서 이 문장은 강한 반전(反轉)을 의미하는 접속사 '알라'(* )가 먼저 나타난다. 

이 접속사는 8절에서 세례 요한(증거자)과 그리스도(빛)에 대한 본질적인 차이를 묘사하는 데 쓰였으며, 본문에서는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구원 수단과 신본주의적(神本主義的) 구원 간의 대립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본문은 어둠 속에 빛이 비추듯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초자연적, 초역사적 성격을 보여줌으로써, 구원받은 성도로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케 하고 겸손하게 주의 뜻을 따르는 성도의 자세를 견지(堅持)케한다. 이러한 영적 출생의 비결에 대해서는 3:1-15절 주석을 참조하라.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 본문은 9절에 서술한 성육신 사건을 다시 언급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육신'(* , 사르크스)은 육체적 존재를 의미한다(갈 4:13). 따라서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오신 것처럼 보였으나 육체로 오시지 않았으며 그의 수난도 하나의 가상(假像)이었다'고 주장했던 영지주의의 가현설(Docetism)을 본문은 '육신'이라는 한 단어로 여지없이 붕괴시킨다. 

한편 '사르크스'는 일반적으로 '몸'을 의미하는 '소마'(* )와는 다른 뉘앙스로 쓰였다. 즉 '사르크스'는 주로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신을 의미한다. 바울도 이 용어를 하늘이나 영의 영역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고 있다(롬 1:3,4). 즉 하나님의 지혜와 육체의 지혜, 하나님의 권능과 육체의 무기는 서로 반대되며 서로 대적한다(고전 1:24-31;고후 10:4).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육체'는 결코 부합 될 수 없다(롬 9:8). 그러나 이 용어가 그리스도에 대해 쓰일 경우에는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체'를 의미하지 않으며(고후 5:21), 단지 인간적인 한계성과 연약성을 지닌 존재임을 나타낸다(히 4:15). 이는 그리스도의 완벽한 성육신을 나타낸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증으로서 본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잘 보여준다. (1) 피곤(4:6) (2) 갈증(4:7) (3) 하나님께 의존(5:19) (4) 슬퍼 눈물을 흘리심(11:35) (5) 분노하심(11:38) (6) 갈등(12:27) (7) 수난과 죽으심(18, 19장) 등.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우리 가운데'(* , 엔 헤민)라는 표현은 10절의 '그가 세상에'라는 말과 내용상 일치한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졌으며, 우리 인간들 속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천막을 치다'란 뜻의 동사 '스케노오'(* )의 부정과거 능동태인 '에스케노센'(*)을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역사성을 실증한다. 따라서 본절은 마1:18-2:23과 죽 2:1-20의 성육신 기사를 함축적으로 요약한 말씀이다. 

한편 '에스케노센'이란 표현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러한 해석은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현현(顯現) 장면과 본문의 전후 내용을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설득력을 제공해 준다. 

(1) 성육신하신 예수께서 '임시적으로' 이 땅에 계셨음을 가리킴. (2) '하나님의 임재'를 상기시킴.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방랑할 때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으로 정해진 곳이 바로 '장막'이었으며, 특히 요한이 곧이어 '영광'에 관해서 언급한 사실도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왜냐하면 영광과 장막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출 40:34이하). (3) 모세에게 주어졌던 계시가 예수에 의해 확연히 밝혀졌음을 보여줌.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 '보니'에 해당하는 헬랑어는 '놀라운 광경을 보다'라는 뜻의 '데아오마이'(* )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놀라운 상태에서 실제로 목격했다'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는 아마도 저자 요한이 예수님의 변모*Transfiguration, 마 17:2-8;막 9:2-8;눅 9:28-36)에 대한 회상을 기초로 하여 사용한 용어인 것 같다. 그때 예수는 거룩한 광채와 함께 나타나 보이셨으며, 하나님의 사랑스런 아들이심을 나타내셨다. 이는 시편 기자의 '주의 영광를 저희 자신에게 나타내소서'(시 90:16)라는 간구를 연상케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와 부활은 그 자체로서 어둠 속에서 빛이 환하게 비치듯이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사건으로서 우리 성도들의 영광을 위하여 예정된 것이었다(고전 2:7;벧전 5:4).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 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근원이 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에 있음을 재천명한다. 

1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나타냈듯이 본문에서도 '...같이', '...만큼'이란 뜻을 지닌 부사 '호스'(* )를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이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대등함과 동질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독생자'(공동번역, '외아들')라고 번역된 '모노게누스'(*)는 '모노스'(* , '유일한')와 '게노스'(* , '종류', '혈족')의 합성어로서 누가 복음과 히브리서에서 '외아들'(눅 7:12;9:38;히 11:17) 또는 '외동딸'(눅 8:42)을 지칭한다.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이 용어는 오직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으며(3:16, 18;요일 4:9), 누가복음과 히브리서에서 보다 더 심오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1) 하나님의 자녀(12절 주석 참조)중 하나가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서 중보자적 사역을 담당하시는 유일하신 분(3:17;갈3:26)이며, (2)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지니신 대등하신 분(1절 주석 참조;3:18;5:18;10:30;17:5, 24)이며, (3) 이 세상에 하나님을 완벽하게 계시하신 유일하신 분(14:9;빌 2:6, 7)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일부 학자들은 1:1-3절의 내용을 무시하고,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요일5:18의 내용을 증거로 하여 '그리스도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한 것일 뿐이다(요일 5:18 주석 참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은혜와 진리'(* ,카리스 카이 알레데이아)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였다(삼하2:6). 

사도 요한은 앞 문장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이 대등하고 등질적 (等質的)임을 묘사한 후에 곧 이어서 하나님의 성품인 은혜와 진리가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성품과 일치함을 보여준다. 이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그의 지상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성을 [가감없이 그대로] 드러내셨음을 시사한다(10:30). 특히 기독교적 측면에서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이 인류 구속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신 그 일방적인 행위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한편 '가득차서 넘치는'이란 뜻의 헬라어 서술적 형용사 '플레레스'(* )는 은혜와 진리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 속한 은혜와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차고 넘치게 흘러 나와 성도들에게 임하여 역사(役事)한다는 것이다.

=====1:15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 사도 요한은 '마르튀레오'(* , '증거하다')의 3인칭 단수 현재 직설법인 '마르튀레이'(* )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세례 요한의 사역을 극적이고도 생생하게 재현시킨다. 그리고 그의 증거 사역이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과 일치됨을 분명하게 보여준다(사 40:3).

@내가 전에 말하기를 - 원어상으로 본절은 '내가 전부터 그에 대하여 증거해 왔다'라고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이 표현은 혹자들의 이해대로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한 저자 요한의 삽입적인 해석(Westcott, Hort)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세례 요한의 부단한 증언이라고 봄이 문맥상 타당하다.

@나보다 앞선 - 앞에서 언급한 '내 뒤에'라는 표현과 대조된다. 즉 (1)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보다 6개월 뒤에 태어나셨으며(눅 1:36), (2) 세례 요한의 사역의 시작뒤에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막 1:14, 15). 그러나 예수가 세례 요한보다 '앞선'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1) 세례 요한이 인간에 지나지 않는 반면에 예수는 창조 전부터 하나님과 더불어 선재하셨던 분으로서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시다(빌 2:6). (2) 따라서 신분이나 권능에 있어서 당연히 세례 요한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특히 세례 요한은 예수의 우월성을 당연하게 시인하였으며(3:22-30), 예수를 가리켜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눅 3:16), '하나님의 어린양'(29, 36절),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분'(막 1:7) 등으로 호칭하였다. 이처럼 세례 요한과 예수는 결코 비교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세례 요한과 예수가 상호 비교되어 묘사되어 있는 것은 (1) 예수의 공생애 직전 세례 요한의 추종자들이 많았다는 점과 (2) 그에 따라 세례 요한이 메시야로 오인(誤認)되었다는 점, 그리고 (3) 초대 교회의 선교 당시에도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상당수 존재했다는 점 등에서 기인한다. 즉 사도 요한은 이러한 비교를 통하여 (1) 예수께서 참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2) 요한 사역의 핵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함에 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1:16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 '충만한'의 헬라어 '플레로마토스'(*)는 '플레로마'(* )의 소유격 단수로 '차고 넘치는 완전한 분량'을 의미하며 14절의 '충만하더라'는 표현과 연관된다. 

그러나 14절의 '충만하더라'가 그리스도의 본성과 관련하여 사용된 반면, 본문에서는 바로 그리스도의 충만하신 은혜가 차고 넘쳐서 성도에게 미치는 상태를 의미한다. 

한편 헤르마스 목자서(Shepherd of Hermas)는 '충만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하나님은 만유인 동시에 하나이다. 그것은 만유의 충만함이 하나이며, 하나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범신론적 경향은 당시의 영지주의의 영향에 의한 결과이다. 즉 그리스도교적 영지주의자들은 '플레로마'를 최고의 영적 세계로 간주하고, 예수가 '플레로마'에서 이 세상으로 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사도 요한은 '충만함'이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이며, 성도들에게 은사로서 주어지는 것임을 명시함으로써 당시의 영지주의의 거짓된 학설을 물리쳤다. 사도 바울의 말을 빌자면, 이 충만함은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신' 것이며(골 1:9)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이다(엡 3:8). 그리고 루터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아무리 물을 퍼내어도 고갈되지 않는 샘'에 비유했다.

@은혜 위에 은혜러라 - '...위에'라고 번역된 헬라어 '안티'(* )는 원래 '...와 대조하여'라는 뜻이나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대신에'(눅 11:11)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은혜 위에 은혜'(one blessing after another, NIV)라는 말씀은 문자적으로 '은혜 대신에 은혜'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한 번 받은 은혜가 그 능력을 다 발하고 나면 또 다른 은혜를 받게 된다'는 의미로서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공동번역)라는 뜻으로 번역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곧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이는 넘쳐 흐르는 충만함으로 인하여 성도에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은혜임을 요한은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제 성도는 성자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존재인 자신을 자각케 된다. 당시 유행했던 인본주의적 이방 종교와 이방 철학들 그리고 형식주의적 유대교라시 유행했던 인본주의적 유대교라는 어두움을 뚫고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구원의 빛과 은혜를 성도들에게 끼치신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라고 선포하였다.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 6절부터 16절까지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를 비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육신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충만한 은혜를 묘사한 저자는 이제 구약의 율법 시대와 신약의 은혜 시대의 대조를 통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도래하는 새 시대의 특성을 간략하고도 명확하게 밝혀준다. 

먼저 사도 요한은 율법 시대의 대표자인 모세를 통하여 율법의 특성을 간명하게 규정한다. 즉 율법은 피조물인 인간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롬 3:20), '몽학 선생'(갈 3:24)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 율법에 대조되는 은혜와 진리란 단순한 은사의 차원보다 더 높은 것이다. 

은혜와 진리의 근원은 다 하나님의 속성에서 발견될 수 있고 이는 예수 안에서 구체화되었다. 어떤 면에서 예수 자신이 곧 은혜와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특히 본 구절에 사용된 동사 '온'이라는 말에 의해 강력히 뒷받침된다. 은혜와 진리는 율법의 경우처럼 수동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과 선교(Mission) 가운데 임했던 것이다. 또 '온'의 헬라어 '엥게네토'(* )는 '발생하다'라는 뜻을 지닌 '기노마이'(* )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임함으로써 기독교가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이는 바로 형식과 위선에 치우친 유대교의 근거를 뿌리채 뽑아버리는 말씀임과 아울러 교회의 근거를 확고한 참신앙의 반석 위에 세우는 말씀인 것이다.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 문자적으로는 '결코 보이신 적이 없는 하나님'이란 의미이다. 비록 모세가 여호와와 대면했다는 명성을 얻기는 했으나(출 33:11;신34:10) 그 역시 하나님의 본체를 본것은 아니었다(출 33:17-34:9). 왜냐하면 유한하고 죄악된 인생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출 33:20).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내신데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이 예수를 죽이려고 할 정도로 격렬하였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10:20-33).

@아버지 품속에 있는 - 이 표현은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나타낸다. 

즉 1절의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는 말씀과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는 이 표현은 영원전부터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존재하고 계셨던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암시하며 또한 그리스도의 신성까지도 함유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 품속에 있는'이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구절이다.

@독생하신 하나님 - 14절의 '아버지의 독생자'와 상호 연관되는 이 칭호는 바로 은혜와 진리의 부여자(附與者)이신 예수 그리스도(17절)를 가리킨다('득생자'에 대해서 는 14절 주석을 참조하라).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의 본성인 은혜와 진리로 교회를 형성하신 분이라는 의미를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 속에서 드러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와 같은 신앙은 기독교가 당시의 이방 철학이나 종교 그리고 율법 주의 및 로마 제국주의에 대항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源泉)이었다. 특히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시 성도들 사이에 암호로 통용된 물고기 그림에서 당시의 신앙을 발견할 수 있다. 헬라어로 '물고기'는 '잎뒤스'(* )로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주'(에에수스 크리스토스, 데우 휘오스, 소텔, '*, , )라는 말의 약자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굳건한 신앙 고백을 토대로 교회가 온갖 박해를 이기고 어두움 속에 빛을 비추었듯이, 오늘날의 물신주의와 이데올로기(ideology)의 와중에서도 교회가 설 수 있는 기반이 바로 '독생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라는 사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1:19

사도 요한은 다른 복음서들(마태복음, 누가복음)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해서 알고 있던 당시의 성도들에게 다시 반복해서 성육신 기사를 쓰지 않는다. 따라서 저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직전부터 복음서의 본문을 기술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공생애 직전의 상황을 세례 요한과 결부시키고 있다(19-36절). 이는 세례 요한이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증거자임을 입증(立證)하기 위한 것이다(6, 7,15절). 

당시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회개의 촉구 그리고 세례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더구나 군중들 중에 일부는 세례 요한을 메시야로까지 간주하기도 하였다(눅 3:15;행 13:25). 이러한 현상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종교 지도자들의 민감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따라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공회인 산헤드린은 요한의 정체를 탐지할 사람들을 파견했던 것이다. 모세 율법에 대한 해석을 주해한 미쉬나(Mishna)에 의하면 거짓 선지자에 대한 규명과 재판이 산헤드린 공의회의 주요 직무 중 하나로 규정되어 있었다.

@요한의 증거 - '증거'란 바로 요한의 사명이며(7절), 그의 사역은 말씀이며 구원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의 역할이었다.

=====1:20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 원어상으로 볼 때 저자는 본절에서 헬라어 접속사 '카이'(* )를 무려 3회에 걸쳐 병렬적으로 기록하므로 진솔하고도 꾸준한 증거자인 세례 요한의 태도를 암시하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표현은 세례 요한이 자신의 하고자 하는 답변의 심각성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였던 의도를 보여준다. 

특히 '드러내어 말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고백하다', '확언하다'라는 뜻을 지닌 '호몰로게오'(* )의 부정 과거형으로서 요한의 증언이 믿음의 확신으로 말미암은 고백적 증언임을 보여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 산헤드린으로부터 파견된 자들의 입에서는 메시야에 관한 말이 전혀 나오지 않았으나, 세례 요한은 이미 그들의 의도를 정확히 읽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메시아로 오해할 수 있는 일체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단호한 어투로 말한다. 특히 세례 요한은 '나'라고 하는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하는 강조법으로써 예수의 탁월성에 자기 자신을 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용법은 본장에서 만도 여러 차례 반복된다(23, 26, 29, 30, 31, 33, 34절). 

여기에서 세례 요한이 강력하게 부인했던 '그리스도'란 히브리어인 '메시야'와 같은 의미를 지닌 헬라어 표현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며 옛 언약을 완성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창조하실 분을 지칭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개념은 이스라엘의 선민 사상과 융합되어, 식민지적 상황을 종식시켜 줄 정치적 메시야 사상으로 변질되었다. 즉 유대인들은 메시야 사상으로 변질되었다. 즉 유대인들은 메시야와 세속적인 왕을 동일시하는 오류에 빠졌다. 따라서 세례 요한이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강력히 천명했던 것은 (1) 옛언약의 완성이자 새 언약의 창조자이신 그리스도의 증언자로서의 사명을 자각하였음과 (2) 로마 제국으로 하여금 자신을 제국에 반대하는 정치적 모반자(謀叛者)로 오인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1:21

@네가 엘리야나 - 이것은 당시 세례요한이 (1)약대 털옷을 입고,(2)금욕적인 식사를 하고,(3)이스라엘을 향해서 회개를 선포하고, (4)헤롯의 비리를 꾸짖은 행동들이 구약의 엘리야를 연상케 한 점도 아울러 작용했던 질문이었다.

@나는 아니라 -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엘리야라고 한 말씀(마 11:14;17:12)과 비교해 본다면 겉보기에는 본 증언은 오류로 보일 것이다. 또한 세례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한'(20절) 증언이 거짓으로 판명날 것이다. 또한 요한의 이러한 대답은 23절과도 어긋나게 보인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의 질문의 배경을 자세히 분석하면, 요한의 대답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랍비들이 주로 이용한 자구적(字句的) 성경 해석을 따랐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려면 먼저 하늘로 승천 했던 엘리야가 다시 와서 메시야의 도래를 준비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세례 요한이 바로 '구약의 엘리야인가?'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요한의 대답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우크 에이미'(* )이다. 이는 20절의 '나는 아니다'(* , 우크 에이미 에고)와는 그 표현 강도가 [분명히] 다르다. 즉 여기에서 세례 요한의 대답은 20절의 강조형(* , 에고)를 취하지 않는다. 이는 세례 요한이 '결코 그리스도가 아니며, 당시 유대인들이 인식한 엘리야도 아님'을 잘 드러내는 표현이다. 

한편 세례 요한을 엘리야로 비유한 예수의 말씀(마 11:14;17:12)도 정당한 것이다. 즉 세례 요한은 실제 엘리야가 아니라 단지 선지자 말라기가 예언한 엘리야적 사역 즉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사역을 수행하는 자'였다(말 4:5,6).

@네가 그 선지자냐 - 요한의 두번째 대답과 사두개인들의 질문 사이에는 원문상으로 접속사가 없는데 이는 사두개인들의 집요한 질문 공세로 발생하는 긴장 관계를 현장감 있게 드러내는 문장 구성 양식이다. 

본문에서 '그 선지자'(*' ,호 프로페테스)란 모세가 예언한 '나와 같은 한 선지자'(신 18:15)를 가리킨다. 따라서 공동번역은 '우리가 기다리던 그 예언자'라고 번역했다. 이는 '그 선지자'란 개념이 곧 메시야와 직결됨을 시사한다(7:40). 

성령 강림(降臨)후에 사도들은 '그 선지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했으며 이를 선포했다(행3:22;7:37).

@아니라 - 이것의 헬라어 '우'(* )는 본절의 맨 뒤에 위치해 있다. 이는 세례 요한이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아주 단정적으로 부정했음을 보여준다.

=====1:22

@또 말하되 누구냐 - 산헤드린의 조사단이 짐작했던 요한의 정체는 그들의 예상을 빗나가 버렸다. 그들의 질문에 대한 세례 요한의 세차례의 부정은 그들의 조사 활동을 더욱 난감하게 하였을 것이다. '또'라고 번역된 헬라어 '운'(* )이 논쟁적 어감을 띠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들의 심정은 더욱 조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 사두개인들의 난감함과 조급함의 원인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즉 그들은 진리를 찾는 자들이 아니라 기존 권위의 하수인(下手人)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사두개인들은 그들의 추측대로 요한에게 질문하지 않고 세례 요한의 자기 진술을 요청하게 된다. 따라서 이어지는 질문인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는 말은 어떠한 암시도 전혀 개입되지 않은 질문 형태로서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소?'(공동번역)라고 번역하는 것이 어감상 잘 부합된다..

=====1:23

@가로되 - 본절에서는 '증언하다'라는 뜻을 지닌 헬라어 '페미'(* )의 부정 과거 3인칭 단수형인 '에페'(* )가 문자의 맨 앞에 놓임으로써 요한의 증언을 극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 선지자 말라기가 예언했던 엘리야의 도래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불식(拂拭)시키고, 자신의 사역의 본질과 성격을 드러내기 위하여 세례요한은 이사야 40:3을 인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세례 요한의 생생한 자기 증언은 공관복음에서도 이사야 예언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반영되어 있다(마 3:3;막 1:2-4;눅3:3-6).

@주의 길을...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 앞길을 예비하는 선구자임을 밝히는 본 구절은 이사야의 예언을 단축한 형태로서, 이러한 어투는 대화체에 적합하며 이것이 직접 세례 요한의 입을 통해 나온 말임을 뒷받침한다. 이에 반해서 공관복음은 이사야의 예언을 직접 인용함으로써 세례 요한의 자기 증언을 예언 성취의 형식으로 제시하고 있다(마 3:3;막 1:3;눅 3:4). 

결국 본문은 저자가 당시의 상황을 목격하고 그대고 재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본문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는 표현은 '이사야의 말'이라는 표현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즉 이사야가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했듯이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였다. 그리고 이사야의 말은 그리스도를 증언한다는 점에서도 세례 요한의 소리와 서로 일치한다. 

특히 '외치는 소리'의 헬라어 '포네 보온토스'(*)의 두 단어에 서로 관사가 없는 것은 히브리어 '콜 코레'(* , 사 40:3)를 헬라어 문장 양식으로 번역한 것으로서, 일종의 감탄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공적인 일을 선포하는 전령자(傳令者)라는 의미를 지닌 '보온토스'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사야나 세례 요한의 '소리'(the voice, NIV)가 바로 이들을 파견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임을 잘 드러낸다. 

또한 이사야와 세례 요한의 이와 같은 대비를 잇는 용어 '카도스'(* , '...같이')가 사용됨으로써 사도 요한의 문학적 재능이 한결 돋보인다. 이는 본서가 주로 말씀과 강화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리스도가 '말씀'으로 나타난 점에서 볼 때, 언어 구사에 있어서 요한의 능수 능란함을 엿보게 한다.

=====1:24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 산헤드린 공의회의 양대 세력인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중에서 산헤드린의 조사단이 전자에 의해 보내진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에 산헤드린(Sanhedrin)의 의장이 사두개파의 영수인 대제사장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1)19절에서 언급한 유대인들이 산헤드린 공의회가 아니거나, (2)본절에서 '저희'가 '제사장들과 레위인'으로 (19절) 구성된 산헤드린의 진상 조사단이 아닌 것으로 보여질는지도 모른다. 만일 후자가 맞다면 '저희'란 바리새인들이 파견한 다른 진상 조사단을 지칭한다. 그러나 19-28절까지의 본문의 흐름상 여기에서 '저희'란 바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로 구성된 산헤드린의 진상 조사단이라고 봄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왜 본절에서는 사두개파의 영수(領袖)인 대제사장이 의장으로 있는 산헤드린 공의회와 바리새인을 일치시키고 있는가? 이는 당시 바리새인들이 대다수의 백성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당시의 상황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즉 산헤드린 공의회의 의장이 대제사장이었을지라도, 산헤드린의 주도권은 바리새인들에게 있었다.

따라서 당시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본의와는 다를지라도 바리새인들이 '만일 우리의 의견을 따르지 아니하면 일반 민중이 가만히 있지 아니할 것'이라는 협박에 속수 무책이었다(Josephus). 이러한 정황에서 볼때, 본절에서 '저희'는 바로 산헤드린 공의회가 파견한 '사두개인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은 28절까지 이어지는 세례 요한의 증언을 일관성있게 이어주고 있다.

=====1:25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자들이 이러한 질문을 던졌던 이유에 대해서는 그들이 세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던가에 따라 대략 다음 두 가지 견해로 요약될 수 있겠다. (1)이방인들이 개종과 관련시켜 이해했다고 보는 견해. ::: 유대 사회에서 세례는,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경우 이방 세계에서 오염되었던 죄악을 떨쳐버린다는 의미로 사용했던 공인된 의식이었다고 한다(Jeremias).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자들은, 세례 요한이 개종자들에게 베풀어야 마땅할 세례를 유대인들에게 실시한 사실에 대해 질타(叱咤)하고 있다는 것이다. (2) 메시야의 사역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보는 견해. 겔 36:25;37:23;슥 13:1 등에서 물로 씻음 곧 세례 의식이 메시야 대망과 관련되어 언급되어진다. 이와 같은 범민족적 차원의 정결과 성결은 오직 메시야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는 과업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본문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는 것이다.

=====1:26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 세례에 관한 물음에 대해 요한은 본 구절로써 대답하고 있다. 

'물로' 세례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마 3:11;막 1:8;눅 3:16). 다시 말해서, 세례 요한의 물세례는 예수의 성령 세례를 전제로 할 때 비로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물론 요한의 세례가 백성들을 그리스도께 이끌기 위해 그들의 심령을 깨끗하게 준비시키는 '회개의 세례'였기는 하나(눅 3:3) 본질적으로는 우리를 새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는 성령 세례를 상징하는 의식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요(6-8절)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23절)인 세례 요한의 사역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즉 (1) 요한의 '하나님 나라 도래와 회개의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와 회개의 섶로'를 예비한 것이며, (2) 요한의 물세례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성령 세례를 예비(豫備)한 것이다. 또한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까지도 그리스도에게 보내는 자였다. 이러한 요한의 사역은 자신보다도 그리스도를 족히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더 높이는 겸손에서 극치를 이룬다(27절).

@너희가 알지 못하는 - 산헤드린 조사단이 요한을 메시야로 착각한 것은 그들의 영적 무지를 스스로 폭로한 것이다. 

본 구절은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10절)라는 말씀을 연상시키며 이 말은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이 실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 즉 세상에 속한 자들이요 마귀의 자식들이라는 사실까지도 내포하고 있다(8:44).

따라서 세례 요한은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규탄했던 것이다(마 3:7;눅 3:7).

=====1:27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 '신들메'란 당시 유대인들이 도보여행시 착용하였던 신발(가죽 샌들)의 끈을 가리킨다. 

유대 풍습에 의하면 주인은 초대한 손님이 방문하면 자기 집에서 가장 천한 종을시켜 손님의 신발끈을 풀고 발을 씻기게 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세례 요한의 고백은 자신을 그리스도에 비할 때 가장 비천한 종의 자격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다. 특히 이 표현은 사복음서에서 공히 요한의 자기 진술형식으로 표현되고 있다(마 3:11;막 1:7;눅 3:16).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는 진상 조사단의 물음에 대해 세례 요한이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증거하는 형식으로 답한 것은, 자신의 사역을 메시야의 사역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곧 예수를 증거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요한 자신의 위치를 밝히 드러낼 수 있었다. 비록 메시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천한 존재였지만, 메시야의 앞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라는 직분은 그누구에게도 비길 수 없는 영광스럽고 기쁜 것임을 요한은 자부하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31절에서 설명되듯이, 세례요한 자신도 처음에는 예수가 진정 메시야라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아마 세례 요한은 평소에 예수에 관해 알고 있었고 나름대로의 확신을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진실로 예수를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로 분명히 인식하게 된것은 예수께 세례를 베풀 당시 성부와 성령의 충만한 계시를 받게 됨으로부터였다(눅3:21, 22).

=====1:28

@이 일은...된 일이니라 - 저자 요한은 산헤드린 조사단이 세례 요한을 조사한 사실을 목격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세례 요한의 자기 증언'의 장소를 언급한 것은 단순한 부가적 설명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저자 요한은 당시 상황이 너무도 인상적이며 중요한 것이라 여겼으므로 그 생생한 기억을 여기 옮기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란 예루살렘 남동쪽으로 약 3km 지점에 있는 마을(11:18)이 아니라, 요단강 동쪽에 위치한 장소로서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푼 장소였다. 

본서에서 '베다니'라는 두 개의 지명을 구분하여 사용된 것은 본서가 영지주의자인 어느 헬라인의 저작이 아니라 당시 유대의 상황과 지리에 익숙했던 사도 요한의 저작임을 입증하는 일례이다(본서의 서론 '저자'부분 참조).

=====1:29

@나아오심을 보고 - 생동감을 느끼게 하는 현재 중간태 분사 '에르코메논'(*, '나아오다')을 사용함으로써, 본문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 전달되는 효과를 연출한다.

@보라 - 헬라어 '이데'(* )는 찬탄이 섞인 감탄사로서, 세례 요한의 적대자들이 떠나고, 그가 증거한 예수께서 밝은 빛처럼 찬연하게 다가오셨을 때에 그가 드러낸 찬탄과 감격을 극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 본문은 '하나님의 어린 양, 곧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분'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 

19-27절이 예수께 대한 요한의 간접 증언의 성격을 띠는 반면에, 여기에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직접 증언한다. 세례요한의 사역에 대한 성격 규정(6-8절, 15절), 사두개인들과의 논쟁을 통한 그리스도에 대한 간접 증언을 거쳐서 드디어 그리스도의 오심을 보고 감격과 놀라움에 떨리는 직접 증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원어상 본문에는 문장을 종결하거나 서술하는 동사가 없다. 그리고 '보라'는 감탄사에 이어 '하나님의 어린양'(the lamb of God, NIV) '세상 죄를 지고가는 분'이 동격으로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본문은 죄된 세상과 하나님 사이의 대립 관계를 보여주며, 이러한 관계를 화목케 할 존재를 부각시키고 어두움속에 빛이 비추어 세상을 밝게 하듯이(5절) 죄악에 빠져 헤매이는 이 세상을 은혜와진리의 세계로 변화시킬 그리스도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준다(17, 18절). 

한편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역의 성격을 뚜렷이 반영한다. '어린양'에 해당하는 헬라어 '암노스'(* )는 신약성경에서 4회 사용되었는데, 두 번은 본서의 본장에서(본절, 36절) 한 번은 행 8:32에서 그리고 또 한 번은 벧전1:19에서이다. 이 중 벧전 1:19는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에 관한 예언의 일부인 사 53:7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신약성경의 몇몇 구절에서는 사 53장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적용시키고 있다(12:38;마 8:17;눅 22:37;행 8:32-35;벧전2:22-24). 또한 죄를 대속하는 '속죄양'에 관해서는 구약의 여러 부분에서도 나타난다(창 22:2-8;레 14:10-25;민 6:12).

=====1:30

@내가 전에 말하기를...있는데 - 본문은 15절의 말씀을 다시 반복함으로써, 세례 요한에게 나아온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증거해야 할 사명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재차 환기시킨다. 

특히 본문에서 '내뒤에 오는 사람'에서 '사람'의 헬라어 '아네르'(* )에 주의할 필요가 있는데 '아네르'는 일반적인 의미인 '인간'을 가리키는 '안드로포스'(* )와는 달리 '남성'을 가리킨다. 특히 이 용어는 결혼 관계에 있어 남성이 여성의 머리가 됨을 시사하는 용어이다(엡 5:23). 따라서 이 용어는 예수그리스도께서 그를 따르는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머리가 됨을 암시한다.

@계심이라 - 이것의 헬라어 동사는 '에이미'(* )의 3인칭 단수 현재형인 '에스티'(* )로서 세례 요한에게 증언을 받는 현장에서의 그리스도를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또한 동사 '에스티'는 '계시니라'(1절)로 번역된 '에이미'의 3인칭 부정과거형인 '엔'(* )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즉 '엔'이 영원전부터 선재하고 계신 그리스도를 나타낸다면, '에스티'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성육신하시고 인류구속을 위하여 공생애를 시작한다는 현장감(現場感)을 느끼게 한다.

=====1: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 예수와 세례 요한은 친족 관계였다(눅 1:36). 따라서 세례 요한이 예수를 모를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세례 요한의 진술은 바로 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이는 본문의 원문인 '카고우크 에데인 아우톤'(* )을 분석해보면 알수 있다. 

먼저 '카고'란 일반 사람들이나 무지한 종교 지도자들처럼 '나 역시도'라는 뜻이다. 그리고 '알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데인'은 경험에 입각한 앎을 뜻하는 '기노스코'(* )와는 달리 '영적인 앎'(막1:24;고전2:2)을 주로 의미한다.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 본문은 세례 요한의 사역을 함축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즉 세례 요한의 사역의 골자(骨子)는 메시야의 도래를 예비하여 죄사함을 받게 하는 세례의 시행에 있었다(겔 36:25;슥 13:1). 당시의 세례는 기종자나 참회자를 물 속에 완전히 잠갔다가 일으키는, 현대적 표현으로 하면 '침례'였다(3:23;행 8:36-38). 그러나 이와 같은 '침례형 세례'는 물이 부족한 지역이나 지역별 관습상의 차이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 (물뿌리기, 관수식, 침례)로 병행되어 왔다. 특히 세례에 관해 언급한 최초의 문서인 [디다케]에보면, 물의 양이 충분하지 못할 경우 세사람이 함께 침례 의식을 받는 일과 물을 머리에 붓는 일도 허용되었다(the Didache 제7장). 이것은 기독교의 세례가 형식의 고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 본질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마 28:19;롬 6:4;골 2:11, 12).

=====1:32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 '하늘'(* , 우라노스)은 일반적으로 지상과 대칭되는 창공과 우주를 의미한다. 그리이스인들은 하늘을 신들의 거처인 올림푸스로 생각했다. 

그러나 성경의 관점에서 볼때 '하늘'이란 (1)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창공(창 1:6-8;행 4:24) 혹은 (2)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전 5:2;마 5:16;막 11:25)을 의미한다. 하지만 위의 두 개념은 엄밀하게 말해서 서로 판이하다. 즉 피조된 이 세상과 영원한 하나님의 거처인 하늘 나라는 동일하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 본문의 '하늘'은 후자를 가리킨다. 

이는 그리스도가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듯 성령도 함께 계셨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여기서 성령의 강림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보증(保證)하며,그리스도의 사역을 돕기 위한 것이다. 특히 성령이 '불이 혀'(행2:3)로 상징된 것과는 달리 예수의 수세(受洗)시에 비둘기로 상징되어 강림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1) 죄에 대해서 순결하신 그리스도의 본성(마 10:16;히 4:15), (2) 온유하신 그리스도의 성품(마 11:29), (3) 하나님의 사랑과 총애를 받으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아 1:15;마 3:17;막 1:11;눅 3:22) 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 임한 성령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세례 요한이 눈으로 볼 수 있게끔 임하였음이 분명하다(33, 34절).

=====1:33

@나에게 말씀하시되 - 앞 구절과 연관되어 세례 요한의 예언자적인 특성을 나타낸다.

즉 이 표현 방식은 계시를 전달할 때 선지자들이 주로 사용한 양식이었다(사 1:2;25:8;렘 2:2;6:16;겔 3:24). 이는 세례 요한이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증언한 것처럼 자신이 구약의 선지자들과 같이 그리스도의 도래(到來)를 예언하고 준비하는 자라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성령이 내려서...머무는 것을 보거든 - 32절의 반복적 증언으로서, 32절이 요한의 목격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본문은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에 근거한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 - 성령 세례란 성도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생명으로 함께 거듭나는 중생의 경험을 가리킨다. 이 근본적인 변화의 체험을 통해 어두움의 자녀가 빛의 자녀로(12절;고후 5:17), 그리스도의 지체로 된다(고전 12:13,14, 27). 

한편 여기서 물과 성령은 서로 대조적인 관계에서 언급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설교한 모든 것이나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눅 3:3)는 궁극적으로 모두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성령의 역사는 오순절 성령 강림 때까지(행 2:8) 제한성을 가졌다는 것 뿐이다. 결국 요한의 세례는 성령세례를 예표하고 준비시키는 의의를 지닌다는 점에서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1:34

@내가 보고...증거하였노라 - 세례 요한의 이러한 증언은 막연한 추측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을 생생하게 반복한 것이다(막 1:11).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사복음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주장이며(마 26:63, 64;막3:11;눅 4:41), 특히 본서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말씀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로부터 시작하여(1-4절)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 관해 보다 심도있게 묘사하고 있다(3:18;5:26;17:5;19:7;20:31).

=====1:35

요한의 증거 바로 뒤에 이어지는 본절 이하에서는 예수와 첫 제자들 간의 대면이 소개된다. 예수의 첫 제자들은 주로 세례 요한의 증거를 토대로 예수를 따랐던 자들이다. 저자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이 예수를 증거했던 사건과 예수께서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는 사건 전체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계속되는 일련의 사건으로 다루고 있다. 그 첫 부분에서는 세례 요한의 예비 진술에 관해 다루고(19-34절) 둘째 부분에서는 예수와 제자들과의 초기 만남에 관해 다루었으며(35-51절) 셋째 부분에서는 예수의 능력을 보여주고 동시에 제자들의 믿음을 확고하게 해준 이적 사건을 다루고 있다(2:1-11).

@자기 제자 중 두 사람 - 여기서 한 사람은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다(40절). 그러면 익명의 한 제자는 누구인가? 19-34절의 생생한 필치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당시 세례 요한의 제자로서 세례 요한과 사두개인들과의 논쟁과 세례 요한의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 증언을 목격한 자였음이 분명하다. 또한 본서가 사도 요한의 저작임에도 불구하고, 사도 요한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기입하기에 인색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 익명의 제자는 바로 사도 요한 자신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세례 요한의 주요 메시지가 하나님의 어린양을 증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의 전(全) 관심은 예수께 집중되었을 것이다.

=====1:36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 바로 하루 전의 증언을 반복함으로써(29절) 세례 요한은 함께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확인시킨다. 제자들 역시 어제 일어났던 제반 상황과 요한의 증언을 상기했을 것이다. 요한이 그의 두 제자에게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선포한것은 그들을 예수에게로 보내고자 함이었다. 이는 그리스도 앞에서 겸손해진 세례 요한의 신앙자세를 잘 나타낸다(3:30). '하나님의 어린양'에 대해서는 29절 주석을 보라.

=====1: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 '듣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쿠산'(* )은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다는 뜻이다(막 4:24;요일 1:1). 

그리스도의 말씀(복음)을 듣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임이며, 구원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러한 '들음'은 수동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까지 내포하고 있다(롬1:5;10:17;살전 2:13). 따라서 '에쿠산'은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요한의 증언을 듣고 곧 그 말에 순종하여 예수를 따랐다는 뜻이다.

@예수를 좇거늘 - 말씀을 들음은 곧 순종을 동반했다. '좇거늘'의 헬라어 '에콜루데산'(* )은 원래 지적, 종교적, 도덕적인 입장을 받아들이고 추종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이 용어는 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1:43;마 8:19;19:27, 28;막 6:1;8:34 등). 그리스도를 '좇음'은 바로 그리스도를 향한 전적인 헌신을 동반한다. 따라서 제자가 된다는 것은 구원(8:12;막 10:17) 뿐만 아니라 고난(12:24;막 8:34)에 까지도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본문에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잠정적인 탐색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예수와 운명을 같이하기 위해 결단의 주사위를 던진 것이다. 특히 우리는 이 장면에서 진리의 실체이신 예수께로 자신의 제자들을 흔쾌히 인도하는 세례 요한의 거인적(巨人的) 면모를 엿볼 수 있다.

=====1:38

@무엇을 구하느냐 - 여기에서 '구하느냐'의 헬라어 '제테이테'(* )는 '찾아다니다', '구하다'라는 뜻이며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 구해야 할 것을 의미하는 동사로서(행 17:27;고전 1:22),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구원에 연관되어 사용되었다(마 18:12;눅19:10). 

따라서 예수의 질문은 '너희가 궁극적으로 찾아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뜻이다. 이는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를 따르는 동기를 확고히 상기시키는 말씀이다. 본서에서 예수의 말씀으로서는 최초로 나오는 이 문장은 죄악된 세상이 참으로 구해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궁극적인 가치와 숨겨진 보화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요일 2:16).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의 소중함을 깨닫는 자들은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그 보화를 살 것이다(마 13:44).

@랍비여 - '랍비'(* )란 '나의 존경하는 분'이란 뜻을 지닌 아람어이다.

초기 유대교에서 부터 이 용어는 (1)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상급자를 지칭하거나 (2) 제자들이 선생을 칭할때 사용되었다. 그후 B.C. 2세기경부터 이 용어는 제자들이 선생을 공손히 부를 때에만 주로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이 용어는 복음서에만 나온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서기관들을 비난하기 위해 이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반해서(마 23:7), 마가복음에서는 베드로나 유다가 예수를 부르는 칭호로 사용되었다(막 9:5;11:21;14:45). 

본문에서 이 칭호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단호한 결단과 아울러 그들의 영적 제한성(制限性)을 함께 시사한다. (1) 먼저 이 칭호는 그들이 예수를 스승으로 모시고 어디든지 따르겠노라고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37절 주석 참조). (2)그러나 그들은 아직 예수의 신분이나 행하고자 하시는 일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이다. 바로 앞에서 이 두 사람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예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29절)이시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34절) 이시라는 말을 들었지만, 진정 그들의 마음속에 신앙 고백적 차원의 깨달음이 없었기 때문에 스승을 일컫는 정중한 어투인 '랍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 계시오니이까 - 헬라어 '푸 메네이스'(* )란 문구는 '랍비'라는 호칭과함께 사용되었던 유대인의 관용적 표현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 교사들에게 대화를 요청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두 제자의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며 또한 겸손하게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번역하면 - '번역하다', '해석하다'라는 뜻의 동사 '레프메누오'(*)의 현재 수동태 분사가 사용되었다. 특히 이 용어는 그리이스의 신들 중에서 변론(辯論)과 전령(傳令)의 신인 '헤르메스'(* )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또는 신약성경은 같은 의미인 '메데르메뉴오'(* )라는 표현도 사용하며, 개역 성경에서는 이 두용어를 모두 '번역하면' 또는 '번역한즉'이라고 옮겼다. 이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마태복음에 1회(마 1:23), 마가복음에 3회(막 5:41;15:22, 34), 요한복음에 4회(본절, 41, 42절;9:7), 사도행전에 3회(행 4:36;9:36;13:8), 히브리서에 1회(히 7:2)쓰였다. 이러한 표현이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이유는 예수 당시 이스라엘에서 사용된 히브리적 용어나 아람어를 헬라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함이었다. 특히 저자 사도 요한은 당시의 상황을 현장감있게 재현하기 위하여 아람어를 사용했으며, 이 용어들이 헬라인들에게 이해될 수 있도록 번역을 첨부한 것이다.

=====1:39

@와 보라 - 이 말은 워어상 '오다'(* , 에르코마이)의 현재 명령형과 '보다'(* , 호라오)의 미래 직설법, 그리고 접속사 '카이'(* )로 구성되어 있는 짤막한 문장이다. 여기서 '오라'는 말은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오라는 초청의 말씀이며, '보라'는 말은 제자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을 확정하는 말씀이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는 자들을 향한 초대(超待)와 구원의 보장(寶藏)이다. '와 보라'는 표현은 랍비들이 사용했던 권위있는 초청 표현형식으로서,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는 표현과 서로 상응한다. 즉 사도 요한은 본문에서 당시의 표현 어법을 재현하며,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과 그들을 초청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 '와 보라'는 표현이 명령형과 미래중간태 직설법으로 표현된 데 반해 '가서...보고'는 두 동사 모두 부정 과거형을 사용함으로써, 제자들이 예수를 따른 것이 실제의 사실임을 명시한다. 또한 본문은 '와 보라'는 예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표현하는 구절이다. 여기서 '계신 데'란 예수께서 가족과 함께 거처하시던 갈릴리 나사렛이 아니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베다니 근처의 어느 장소였을 것이다. 이처럼 구체적 장소를 명시하지 않고 단순히 '계신 곳'을 뜻하는 헬라어 관용구로써 예수의 거처를 처리해버린 것은 그들이 추구해야 할 것이 어느거처나 장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그리스도 자신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는 사실을 나타내려는 저자 요한의 의도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때가 제 십 시쯤 되었더라 - 이 내용은 부가적 기록인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시각이 명시되어 있는 것은 그 만남이 역사적(歷史的) 사실임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십시'란 유대 시간법을 따라 오후 네 시라는 견해도 있으나, (1) 본서의 저자가 바로 현장을 목격한 사도 요한이라는 점과 (2) 본서가 에베소에서 헬라인들을 위하여 기록된 점, (3) '번역하면'(38절)이란 표현이 신약성경 중에서 본서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는 점등을 고려한다면 로마식 표기법을 따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예수를 만난 시간은 오전 10시에 해당한다. 이 시간은 (1) 예수 그리스도와 본서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 만난 시점으로 추정됨과 아울러 (2) 인류 역사상 최초로 기독교 '공동체'가 탄생한 기념비적인 날이었다(Westcott).

=====1:40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 - 안드레가 시몬 베드로의 형제라는 말로 지칭된 것은 주로 예수의 공생애 초기, 즉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였다(1:44;6:8;마4:18;10:2;막 1:16, 29; 눅 6:14). 그러나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떠난 이후로 안드레는 베드로와 결부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지칭되었다(12:22; 막 13:3;행 1:13). 

한편 안드레가 베드로의 형제로 묘사된 것은 당시 베드로가 예루살렘 12사도의 수반(首班)으로서 활동했다는 사실을 초대 교인들이 잘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동시에 이 표현은 사도 요한이 공관 복음서 뿐만 아니라 교회 역사상 희미해져가는 안드레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는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즉 안드레가 사도 요한과 함께 예수의 첫 제자였으며, 자발적인 최초의 복음 전도자였다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사도 요한은 소상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1:41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 이름 좀더 정확하게 옮기면 '우리가(찾던) 메시야를 발견했다'(We have found the Messiah;KJV, RSV, Living Bible)로 된다. 

그들은 조상 대대로 그토록 기다리던 대망의 메시야를 만나고서 그 놀라운 소식을 시몬에게 곧장 전하였던 것이다. '우리'란 구체적으로 안드레와 사도 요한 두 사람을 가리키는 듯하며, 이는 재판정에서 증인의 최소 구성 인원인 2인을 상기시킨다(신 19:15). 이 두사람의 동시적 증언(testimony)은 이를 듣는 시몬에게도 놀랍고도 확실한 소식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리스도 - '기름을 붓다', '기름을 바르다'라는 뜻의 헬라어 '크리오'(* )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본래 '크리스토스'(* )란 '기름을 발리워진'이라는 뜻의 형용사이며, 이 용어가 명사형인 '토크리스톤'(* )으로 쓰일 경우에는 '의료용 연료'를 가리켰다. 그러나 '크리오'는 헬라적 관점에서 보다는 동양(근동)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규명에 도움이 될 것이다.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종교적, 정치적 의미보다는 일상 생활의 편의나 용도를 위함이었다. 그러나 근동에서는 '기름'을 붓는 것'이 정치적인 혹은 종교적인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는 의식이었다. 특히 구약에서는 왕, 제사장,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음으로써 그들이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대표자이며 책임자임을 명백히 하였다(출 29:7-9;삼상 10:1;16:13;왕상 19:15, 16). 그런데 왕정 후기로 내려 오면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곧 '메시야'임을 의미하게 되었다(사 61:1;단 9:24). 그후 바벧론 유수(幽囚) 이후에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이민족들의 침략하에 시달렸으며, 그속에서 이스라엘을 구할 메시야의 도래에 대한 사상이 점점 더 고조되었다. 특히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주(屬州)로 전락되고, 에돔 족속인 헤롯 왕가가 이스라엘의 통치권을 장악하여 무자비한 권력을 행사하자 메시야 사상은 급진적 혁명 운동을 위한 신앙으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왜곡된 메시야 사상은 결국 성전 파괴와 이스라엘의 멸망을 초래한 요인이 되었다. 신약성경은 예수를 '그리스도'라 칭한다. 이는 사도 베드로의 설교에서 명백히 제시되었으며(행 10:38), 초대 교회의 신앙 고백이 되었다. 그리고 이 고백은 예수께서 구약의 완성자요 새 언약의 중보자(the Mediator)라는 신앙에 기인한다. 즉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지도자란 '기름부음 받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를 지칭했듯이, 예수는 이 세 가지 직분을 한 몸에 지니시고 죄에 빠진인류와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새 예루살렘 성도들의 머리가 되신다. 

한편 메시야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막 8:27-38 주제 강해 '메시야 사상의 전개'와 막 10:35-45 주제 강해 '메시야 예언의 양대 조류'를 참조하라.

=====1:42

@보시고 가라사대 - 원문은 '여블려사스 아우토...에이펜'(*... )이다. 여기에서 '엠블려사스'는 '주목하다', '눈여겨 보다'라는 뜻의 헬라어 '엠블레포'(* )의 부정 과거 분사로서 예수께서 베드로의 성격이나 사람됨을 통찰하셨음을 시사한다. 즉 예수와 베드로의 첫 만남은 비록 단시간이었음에도 직접적이고도 진지한 만남이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 여기에서 '시몬'(Simon)과 '게바'(Cephas)가 서로 대조를 이룬다. '시몬'이란 베드로의 다른 이름으로서 이는 예수께서 베드로의 자연적 성품을 꿰뚫고 계심을 나타낸다. 즉 '요한의 아들'이란 표현에서 예수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 상태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시몬'은 '시므온'(* , 쉬메온)이라고도 불리었다(행 15:14). 그렇다면 '시몬' 이란 구약의 12지파 중 시므온 지파의 조상인 야곱의 둘째 아들 시므온(LXX)과 동일한 명칭이다. 시므온이 과격하고 성미가 급한 인물이었듯이(창 34:25-31). 변화되기 이전의 시몬 베드로도 충동적이고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다(18:10, 25-27;마 26:31-35;막 8:32, 3;14:27-31;눅 22:31-33). 이러한 시몬의 성격을 간파하신 예수는 시몬이 장차 '게바'로 불리울 것을 예언하신다. '게바'(* , 케파)란 '반석'이란 뜻의 아람어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의 베드로의 성격을 잘 반영한다. 즉 '게바'라는 이름은 베드로가 교회를 위한 사도적인 터전을 구축(構築)한 여러 요긴한 반석 중의 하나가 된 사실을 상기케한다. 예수 공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 중에 베드로는 예수를 세차례나 거듭 부인하는 나약함을 보였고(마 26:34), 갈 2:11에서도 우리는 베드로의 흔들리는 모습과 오히려 사도 바울의 견고한 반석같은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인간적 약점들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극복하고 초대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소임을 충실히 감당하였다(행 1:15-25). 후에 베드로에게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 고백으로 인해 '베드로'라는 칭호가 공식적으로 부여되었다(마16:16-19). 이는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 되었던 것처럼(창32:24-30), 요한의 자녀'인 시몬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중생하여 '하나님의 아들'인 게바(베드로)로 되었음을 시사한다.

@번역하면 - 헬라어 '헤르메뉴에타이'(* )는 '헤르메뉴오'(*)의 현재 직설법 수동태로서 자세한 것은 38절 주석을 참조하라.

=====1:43

@이튿날 - 이 날은 빌립과 나다나엘을 제자로 부르신 날이다. 특히 이 날은 사도 요한과 안드레를 세례 요한을 통해 제자로 삼으신 것과는 달리 예수께서 직접 제자를 부르는 장면이 인상적으로 나타나는 말이다.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 당시 갈릴리는 헬레니즘 문화의 침투(浸透)가 극심한 지역이었고, 예루살렘과는 달리 사회적으로 하층민들이 많이 거주했던 곳이다. 따라서 갈릴리는 유다와 예루살렘인들에게 있어서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었다(46절). 그러나 예수는 공생애 초기와 후기의 짧은 유대 사역을 제외하고는 주요 사역 무대를 갈릴리로 채택하셨다(단, 본서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유대 사역에 관한 언급이 많다). 이렇듯 사회적으로 천대받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갈릴리에서 메시야의 사역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구약 예언의 성취라 하겠으며(사 9:1, 2;마 4:14-16), 하나님의 뜻을 떠난 유대교를 파기하고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경륜(經綸)을 엿보게 한다(17장;21장;마 28:16-20;막 16:7, 15-20;눅 24:44-53;행1:3-14).

@빌립을 만나 - '만나'의 헬라어 '휴리스케이'(* )는 3인칭 단수 현재 능동태로서, 예수와 빌립의 만남에 현장감과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제자들 간의 만남이 생생한 필치로 재현되고 있는 것은 저자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적으로 만난 실제 체험을 회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로 이 만남을 통해서 새 언약 공동체인 교회가 시작되었으며, 지금도 하나님 나라가 계속 확장되고 있다.

@나를 좇으라 - 빌립을 향한 그리스도의 제자로의 부르심이다. '좇으라'의 헬라어'아콜루데이'(* )는 현재 명령형으로서, '만나'(* ,휴리스케이)와 '이르시되'(* , 레게이)라는 두 현재형 동사와 부합되어 예수의 부르심이 그 당시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유효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예수의 부르심은 '바로 지금'의 현재적 시점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라는 신앙적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특히 이 동사가 예수께서 제자들을 모으실 때 자주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8:22;9:21;19:21;막 1:18;2:14;6:1;10:21, 52;눅5:27;9:59;18:22;요 21:19).

=====1:44

@빌립은...벳새다 사람이라 - 사도 요한이 빌립의 출신지를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라고 표현 것은 누가가 기록한 '벳새다 줄리어스'(눅 9:10)와 구분하기 위함이었다. 본서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갈릴리 사역을 강조하지 않는데 이는 예수의 갈릴리 사역이 이미 성도들에게 알려졌다는 전제하에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사도요한은 본서에서 공관복음서에서 생략한 예수의 예루살렘 사역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벳새다라는 지명만 들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갈릴리 사역을 연상했을 것이다. 벳새다는 '사냥이나 고기잡이 하는 집'이라는 뜻의 지명이다. 이는 벳새다가 갈릴리 호수 근처의 벳새다임을 암시한다. 또한 안드레와 베드로가 출신지가 가버나움임에 비추어 볼 때(눅 4:31-39), 벳새다는 가버나움 근처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요한은 '갈릴리의 벳새다'(12:21)라고 명명한다. 벳새다에서의 예수의 사역은 (1) 오병이어의 이적의 베푸심(마 14:13-21;눅 9:10-17), (2) 사천 명을 먹이심(막 8:1-9), (3) 소경을 치유하심(막 8:22-26) 등이다. 이로 보건대 벱새다를 비롯한 갈릴리사람들이 예수를 많이 따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일용할 양식을 보고 예수를 추종하였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영안(靈眼)을 뜬 것은 아니었다(6:30-70).신앙보다는 육체적 욕구를 추종한 벳새다를 위시한 갈릴리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저주는 주목할 만하다(마11:20-24;눅 13:16).

=====1:45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 '나다나엘'(* )이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이며 그의 이름은 오직 본서에만 나온다. 그는 예수를 만나기 전에 율법에 충실했던 사람이었다(46-48).

그의 집은 갈릴리 가나였으며(21:2) 예수를 만날 때에는 아마도 벳새다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혹자는 나다나엘을 바돌로매와 동일인으로 본다(Zahn, Meyer). 왜냐하면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바돌로매'란 명칭이 바-톨마이(Bar-Tolmai, '톨마이의 아들')이므로 이는 고유 명칭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시몬 베드로가 '바요나'(Bar-Jona)라고 불리운 것과 동일하다(마 16:17). 혹자는 나다나엘이 '마태'와 동일인이라고 추정한다(Hanhart). 이는 마태란 명칭의 뜻이 '여호와의 선물'이므로, 나다나엘은 마태의 다른 명칭이라는 것이다. 또한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서 구약 율법의 성취라는 측면을 강조했다는 점이 나다나엘의 율법 연구와 유사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두가지 학설은 명확한 증거가 될 수 없으므로 단지 추정에 지나지 않는다.

@모세가 율법에...기록한 그이름 - 빌립은 메시야에 대한 소식을 율법을 근거로 하여 말한다. 이는 율법에 충실한 나다나엘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한 빌립의 열정을 잘 드러낸다. 본문은 빌립이 예수야말로 율법과 예언서로 대표되는 구약의 모든 말씀을 성취하시는 메시야이심을 확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빌립은 세례 요한의 제자였을 가능성이 크며 이는 빌립의 친구들인 안드레,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는 점 및 43절에서 빌립이 예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했으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확신있게 전도했다는 점에서 뒷받침된다.

@우리가 만났으니 - 이것의 헬라어 '휴레카멘'(* )은 '휴리스코'(* )의 1인칭 복수 완료 직설법 능동태로서 메시야를 만난 빌립의 감격과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우리'에 대해서는 41절 주석을 참조하라.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 - 빌립이 만난 메시야의 인간적인 신분이 제시된다. 원래 예수의 출생지는 베들레헴이지만 갈릴리 나사렛에서 성장하셨기 때문에 자칭, 타칭으로 '나사렛 예수'라 불리었다(마 2:23). 그리고 '요셉의 아들'이란 표현은 법적 차원에서 볼 때 옳은 것이기는 하지만 예수의 신적(神的) 기원과 본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시사도 주지 않는다. 따라서 빌립은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은 알았으나, 성육신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럼으로 결국 나다나엘의 반론을 야기시킨다.

=====1:46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 원문상 '나사렛'(* )으로 끝난 빌립의 말(45절)은 나다나엘을 격분시켰다. 그는 율법을 연구하는 자였으므로 메시야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을 알고 있었다(미 5:2). 또한 당시 나사렛은 갈릴리의 한 마을이므로 율법주의자의 입장에서 볼때 멸시당해 마땅한 지역이었다(7:52). 그러므로 본문은 당시 율법주의자들이 갈릴리 지방을 조롱할 때 쓰던 관용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와 보라 - 나다나엘의 빈정거리는 말투와 그 말투에 내포된 논리적 타당성은 빌립의 말문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심한 모멸감(侮蔑感)까지 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은 나다나엘을 강권한다. 여기에서 '와 보라'의 헬라어는 '에르쿠카이 이데'(* )이다. '에르쿠'는 '오다'라는 뜻을 지닌 '에르코마이'(* )의 2인칭 단수 현재 명령형이며, '이데'는 '호라오'(* )의 부정 과거 명령형으로서 '보라', '볼지어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빌립이 말한 '와 보라'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와 보라'(39절 주석 참조)와는 다른 어감을 가진다. 즉 빌립의 강권(强權)은 당시 랍비가 제자들을 초청하는 형식이 아니라 제자가 다른 한 제자를 랍비에게 소개하는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말은 율법적인 논리보다는 역사적으로 성육신하신 메시야라는 실체를 목도(目睹)하여 보라는 말이다.

=====1:47

@보라 이는...간사한 것이 없도다 - 나다나엘을 처음 대면하기 직전에 그의 인격을 통찰하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잘 나타난 구절이다. 특히 본문은 '참'(* , 알레도스)과 '간사한'(* ,돌로스)이라는 두 반의적 수식어를 통해서 나다나엘의 성품을 잘 반영한다. 여기서 '알레도스'는 '겉과 속의 일체'혹은 '진지성'을 뜻하는 말이며 반면 '돌로스'는 고기를 낚기 위한 '미끼', 트로이 전쟁시의 목마(木馬)등 과 같이 '속임수'나 '간계'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특히 이 표현은 야곱의 '간교한' 성격을 상기시키는 말로서(창 27:35), 나다나엘이 야곱처럼 간교한 자가 아니라 메시야 대망을 충실히 기다리며 율법을 연구하는 자였음을 시사한다. 시편 기자는 '마음에 간사가 없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시 32:2).

=====1:48

@너를 부르기 전에...보았노라 - '...전에'라는 말이 시간적 의미의 답변이라면 '무화과나무 아래'라는 표현은 공간적 의미로서의 답변이다. 무화과나무는 유대 민족의 번영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될 정도로(왕상4:25;미 4:4) 팔레스틴에서 번식하였다.

특히 무화과나무는 무성한 커다란 잎으로 그늘을 드리웠으므로 당시의 랍비들은 이를 율법을 교육하거나 묵상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무화과나무 아래'라는 표현은 나다나엘이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율법을 묵상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또한 여기서 '보았노라'는 말은 단순히 '알았다'라는 예지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주목하고 있었다는 의지적(意志的)인 측면까지도 내포하는 용어이다. 이는 예수께서 이미 나다나엘을 당신의 제자로 지목하였다는 뜻이다.

=====1:49

@대답하되 - 이것의 헬라어 '아페크리데'(* )는 '자력으로 판단하여 결정적으로 대답하다'라는 뜻으로서 나다나엘이 예수의 답변에 대해 항거할 수 없는 힘에 이끌리어 그분이 바로 메시야라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고백했다는 뜻이다. 바클레이(Barclay) 말을 빌면 나다나엘은 자신의 마음을 샅샅이 꿰뚫어 보고 만족시켜 주신 예수의 권위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랍비여 - 38절 주석을 참조하라.

@당신은 하나님의...임금이로소이다 - 비록 나다나엘은 이 고백 속에 담긴 진의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을 터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 고백이 결코 겉치레인 것은 아니었다. 이 두 존칭은 메시야의 도래를 예언한 시 2:6, 7에 그 근거를 둔 것으로 짐작되며,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도 직결된다(마 16:16). 이 중 '이스라엘의 임금'이란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세 곳에 등장한다. 먼저 마 27:42네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조롱하는 야유로 언급되며, 막 15:32에서는 '그리스도'와 동의어로서 나온다. 그리고 본서 12:13에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당시 군중들의 찬양 가운데 언급된다. 한편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왕으로 인식되었으며(삿 *:22, 23;시 84:3) 신약 중간사 시대부터는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代理)하실 왕적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두루 퍼져있었다.

=====1:50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 '이보다'라는 표현에서 '이'가 지적하는 바는 나다나엘이 체험한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지식을 가리킨다. 나다나엘로 하여금 예수를 메시야로 믿게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중에서 가장 작은 한 면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예수는 공생애 기간 동안 수많은 이적과 권능들을 나타내사 많은 사람들의 곤경을 타개해 주셨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입증하셨다.

=====1:51

@진실로 진실로 - '더 큰 일'에 대한 예수의 말씀의 서두이다. 주로 공관복음서에서는 '진실로'라고만 쓰여진데 반하여(마 5:18;6;5;막 3:28;8:12;눅 4:24;18:17), 본서에서는 '진실로 진실로'라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3:3-5;5:24, 25;6:47). 이는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강조하려는 요한의 의도를 반영한다(6:47 주석 참조).

@하늘이 열리고 - '열리고'의 헬라어는 현재 완료 능동태 분사로서 '한 순간이라도 닫힘이 없이 항상 열려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와 같이 하늘이 열린다는 표현은 야곱이 벧엘에서 꾼 굼과 연관되며(창 28:10-22),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재확립되는 징조를 상징한다(사 64장). 이러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늘이 열리고 그동안 죄로 인해 막혔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하늘이 열리고'라는 말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곧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보며 또한 그 나라를 소유하게되는 축복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보리라 - '하나님의 사자'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천사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영적 존재로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매개자로 활동한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란 '열려진 하늘'이 상징하듯, 예수 그리스도가 야곱이 보았던 '사닥다리'(창 28:12),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the Mediator)가 되신다는 것이다. 한편 '인자'에 관해서는 8:21-59주제 강해 '인자칭호에 관하여'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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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hqaniva(963, 베다니아) 베다니 Bethany.

베다니아는 베트 아니야(가난하고 고통 받는 자들의 집, 아나냐의 집)를 의미하며, 한글 개역 성경에서 "베다니"라고 번역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의 동쪽 3㎞의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감람산의 동쪽 경사면에 자리 잡고 있다. 

오늘날에도 베다니에는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고 있으며, 그 주민은 약 1,000명 정도이다. '엘-이지리예'(el-Aziriyeh), 즉 나사로의 마을로 알려져 있다.

베다니는 신약성경에서 11회 나오며, 사복음서에만 사용되었다.

(a)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오리쯤 되었으며(요 11:18),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가 살았고(요 11:1; 요 11:2), 나병 환자 시몬의 집이 있는 곳이다(마 26:6; 막 14:3).

(b)  예수님께서는 자주 베다니를 방문하고 거기서 유하기도 하셨다(마 21:17; 눅 10:38-눅 10:40; 요 11:1; 요 11:2; 요 12:1).

(c)  베다니에서 예수님은 죽어 무덤에 장사 지낸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다(요 11:42 이하).

(d)  예수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 잔치에 참석했을 때,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다(마 26:6-마 26:8; 막 14:3; 요 12:1-요 12:3).

(e)  예수님께서는 베다니에서 나귀를 취하여 타시고 입성하셨다(막 11:1-막 11:11).

(f)  예수님께서 베다니 근처에서 승천하셨다(눅 24:50; 눅 24:51).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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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kolouqevw(190, 아콜루데오) 따르다, 뒤따르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아콜루데오(Homer 이래)는 켈류도스(kevleuqo", 길)에서 유래했으며,

(a)  문자적 의미로 '함께 가다, 동반하다, 뒤따라 가다, 따라가다'이며,

(b)  비유적 의미로는 '(추세나 의견)을 따르다, 동의하다, 순응하다'를 의미한다.

(c)  스토아 철학자들은 아콜루데오를 종교적, 철학적 의미로 사용했다. 이 단어는 현자가 세상 법칙에 따른다는 것을 언급하는데 사용되었다. 자연 혹은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철학적 삶의 기본 방향이다. 여기에서 따른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통합에 의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의 이면에는 이성적인 인간과 하나님과의 본유적 관계에 대한 헬라적 견해가 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아콜루데오는 70인역본에서 14회 나오며, 주로 할라크의 역어로 5회, 히브리어 상당어 없이 6회 사용되었다.

(a)  아콜루데오에 상당하는 히브리어는 민 22:20에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함께 가라"는 것 외에는 할라크 아하레(직역: 뒤따라 가다, 4회)로 나타난다.- 삼상 25:42에 아비가일이 다윗의 사자를 따라가는 것, 왕상 19:20에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르고 싶어한 것, 호 2:7에 이스라엘 백성이 연애하는 자를 따라 가는 것, 사 45:14에 만방이 주를 따르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b)  구약성경에서 할라크 아하레라는 표현은 특별히 호세아, 예레미야, 신명기 기록에서 이교로의 변절에 전문 용어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그 독특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다른 신(神)들을 따라가는 것은 백성의 기본 죄이며, 모든 재난(심판)의 원인이다(삿 2:12; 신 4:3; 신 6:14; 왕상 21:26; 렘 11:10). 호세아에서 이 표현은 간음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정부를 따르고 남편을 잊어버렸다(호 1:2; 호 2:7; 호 2:13).

여호와를 따르는 것은 신명기에 나타나지만(신 1:36 등) 별다른 강조가 없다(왕상 18:21은 예외). 그 이유는 그것이 우상숭배와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렘 2:2의 광야에서 여호와를 좇는 것(출 13:21-22)에 대한 언급에서 결혼에 대한 개념이 고려되고 있다. '하나님의 길로 걷는다'는 표현이 애호되고 있다(신 5:30 등).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아콜루데오는 신약성경에서 90회 중 복음서에 80여회, 사도행전에 3회, 바울서신에 1회, 요한계시록에 6회 나타난다.

(a)  신약성경에서 따른다는 개념은 하나님께 결코 적용되지 않는다. 이 개념은 팔레스타인 용법에 의해 암시되지 않았으며 초기 기독교도 이 표현을 형성하는데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전혀 새롭고 독특한 개념이 생도 관계를 뿌리로 하여 그 속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심지어 하나님을 따른다는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관념에 익숙한 헬레니즘 영역으로 그리스도교가 들어갔을 때조차도 아콜루데오라는 동사와 따른다는 개념 전체는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실로 역사적 예수님을 '따른다'는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이 말들은 더 이상 어떤 다른 종교적 용법으로 전환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제자직에 엄격히 제한되어 사용된 아콜루데오의 특별한 용법은 통계상으로 분명하게 증명된다. 요한계시록에서 단 한번 사용된 경우를 제외하면 아콜루데인은 전적으로 사복음서에서만 발견된다. 이 용어는 어느 정도는 외적으로 따르는 것을 함축하는데, 예컨대 막 3:7과 병행구절, 마 8:10과 병행구절에서 무리가 예수님을 좇는 것과 마 8:19에서 좁은 의미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좇는다고 할 때이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제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는다(막 10:28; 막 1:18; 눅 5:11). 그러나 이것은 아콜루데인의 모든 다른 관계들을 끊는다는 의미에서의 자기 헌신을 의미함을 암시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마 8:22),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눅 9:61).

제자는 랍비의 생도가 행하는 바와 같이 행하되, 외적으로는 랍비의 생도와 똑같으나 내적으로는 예수님께 결속되어 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제자직의 의미를 여전히 가지면서 한편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내용과 표시를 획득한다.

이 용어의 신약성경의 용법의 배타성은 원시 기독교에게는 유일한 하나의 제자직만 있으며, 따라서 유일한 하나의 좇음, 즉 예수님과의 관계만이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막 2:14과 병행구절에서 아콜루데이 모이, "나를 좇으라"는 요구는 곧 메시야의 요구이다.

(b)  아콜루데인(따르는 것)은 메시야를 좇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 제자직은 본질적으로 종교적 선물이다. 아콜루데인은 예수님 안에 제공된 구원에 참예함을 의미한다. 눅 9:61 이하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만이 아콜루데인을 성취할 수 있다. 막 10:17; 막 10:21 및 병행구에서 아콜루데이 모이는 "영생"에 관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요 8:12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동일한 사상이 계 14:4에서도 나타난다: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c)  하지만 아콜루데인은 또한 예수님의 운명에 함께 하는 것을 암시한다. 마 8:19 이하에서 아콜루데소 소이("좇으리이다")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이다. 막 8:34과 병행구절에서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하신다. 요 12:25-26에서도 동일한 관계를 찾아볼 수 있다. 이 구절들을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는 바는, 어떤 의미에서 아콜루데인은 예수님의 본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의 구원을 누림으로 야기되는 메시야와 함께 하는 삶과 고난에 전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d)  이 용어의 은유적 용법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다음의 고찰에 의해 드러난다.

한편으로 전승은 확실히 본래부터 마 10:38; 눅 14:27과 같은 말씀들을 보유하고 있으며(마 10:38,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눅 14:27,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다른 한편으로 전승은 예수님과 함께 다닌다는 의미에서 아콜루데인을 행사하지 않는 제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매우 본래부터 나타낸다.

더욱 더 두드러진 것은 전승의 세번째 명백한 특징이다. 즉 이 단어와 예수님의 역사(history)의 구체적인 활동이 너무나 강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다른 명사도 이 제자직의 개념에 일치하여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신약성경에는 단지 능동적인 표현만이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이 용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행위이지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아콜루데인이라는 용어가 복음서에서만 사용되고, 또 사복음서 모두에서 그 용법상 일치점이 있으며, 복음서들이 이 용어가 의미하는 관계를 역사상의 예수님에게 국한시키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신약성경의 서신들에서는 다른 표현들이 높임 받으신 퀴리오스(kuvrio", 2962: 주, 주님) 및 그의 프뉴마(pneu'ma, 4151: 영)와의 관련을 강조하는 데에 사용된다.

이 용어가 예외적으로 복음서 외에서 유일하게 사용된 계 14:4은 분명 마 10:38을 특정한 부류의 신자들에게 적용한 것이다. 여기서 그 개념에 주어진 분명한 새로운 내용은 마찬가지로 사도 시대에 '따른다'는 묘사가 예수님의 제자들 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비록 사도행전은 바나바와 마가, 혹은 바울과 그의 집단(circle)의 경우처럼 스승과 제자(master-pupil) 관계에 친숙해 있었지만 어쨌든 다른 자료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식의 표현을 피한다.

(참조: G. Kittel; C. Blendinger;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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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hqsai>dav(966, 베드사이다) 벳새다 Bethsaida(지)

베드사이다는 아람어 베트 차이야(고기잡이의 집), 또는 베트 차이야(어부의 집)의 음역이며, 한글 개역 성경에서 '벳새다'라고 음역했다.

(a)  벳새다는 갈릴리 북쪽 해변 요단강 근처의 마을이다. 플리니(Pliny)와 제롬(Jerome)은 이곳이 요단 동쪽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막 6:45에서 제자들은 요단 동편에서 벳새다로 보내진 것이다(참조: 요 6:17). 그렇다면 요단 서쪽의 두 번째 벳새다, 곧 '갈릴리 벳새다'로 주장되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옳지 않다. 벳새다가 요단강의 동편에 있었는지 서편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요세푸스의 기록이 분명하게 밝혀준다. 어촌인 벳새다는 생산물이 풍부한 이 호수 일대의 여러 성읍들의 지명일 수 있었다 요세푸스는 헤롯 빌립이 '게네사렛 호수에 위치한 벳새다 마을을 도시로 승격했으며, 이 도시를 시이저의 딸과 동일한 이름인 줄리어스(Julias)로 불렀다'고 기록했다. 요단강 서쪽 기슭의 줄리아스의 교외가 막 6:45과 가장 잘 어울린다.

만일 좀 더 일반적인 의미로 요단강의 동쪽과 갈릴리 바다의 북쪽에 이르는 갈릴리를 이해한다면 '갈릴리의 벳새다'(요 12:21)라는 표현은 분명해진다.

(b)  벳새다는 신약성경에서 7회 나오며, 사복음서에만 사용되었다.

① 벳새다는 예수님의 제자들인 안드레, 베드로, 빌립의 출신지이다(요 1:44; 요 12:21).

② 예수님은 벳새다에서 많은 권능을 행하셨다(마 11:21; 눅 10:13). 예수님은 이 곳에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시고(눅 9:10), 소경을 고쳐 주셨다(막 8:22-막 8:26).

③ 벳새다는 불신앙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통렬한 책망을 받았다: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마 11:21; 병행구, 눅 10:13).(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NBD; PEB; IS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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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wshvf(2501, 이오세프) 요셉 Joseph(인)

1. 구약성경 

이오세프는 히브리어 요세프(3130)의 음역이며, '하나님께서 더하실 것이다'를 의미하며(창 30:23), 한글 개역 성경에서 '요셉'이라고 음역했다

구약성경에서 네 명의 사람이 '요셉'이라는 나오는데, 이름으로 그 중 야곱의 아들만이 신약성경에 나타난다.

1. 야곱의 아들 요셉.

(a)  요셉은 라헬이 낳은 야곱의 11번째 아들이며(창 30:22-24),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며(창 39:6), 야곱의 총애를 받았다(창 27:3).

(b)  요셉은 야곱의 편애 때문에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고(창 37:4), 꿈을 꾸고(창 37:7, 9), 그 꿈 이야기를 형들에 말하고 그 때문에 형들에게 더욱 미움과 시기를 받았다(창 37:5-11).

(c)  요셉은 형들의 살해 음모(창 37:14-20)로 시작하여 대상들에게 팔려 가서(창 27:26-28) 애굽의 시위 대장 보디발에게 다시 팔렸다(창 37:36).

(d)  보디발의 집에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함으로(창 39:2-3), 요셉을 인하여 보디발의 집에 여호와의 복이 임하여 번영했다(창 39:5). 그래서 보디발이 소유를 다 요셉에게 일임했다(창 29:6).

(e)  그러나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자기를 욕보이려 했다는 무고로 옥에 갇히었다(창 39:17-20). 옥중에서도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으로 범사에 형통하고(창 39:21-23), 떡굽는 관원장과 술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주고 석방의 때를 기다렸다(창 40:21-23).

(f)  요셉은 바로의 꿈을 계기로 하여 석방되어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대안을 제시했다(창 41:29-36). 그리하여 애굽의 총리가 되어 애굽 경제를 다스렸다(창 41:38-40; 창 41:46-49; 53-57). 사브낫바네아라는 이름을 얻었다(창 41:45).

(g)  요셉은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아내로 삼고(창 41:45),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낳았다(창 41:50-52).

(h)  요셉은 가나안 땅의 기근으로 인해 애굽에 곡식 사러 온 형을 만나고 야곱 족속을 애굽 고센 땅으로 이주시키었다(창 45:3-6). 야곱의 요셉은 축복하고 죽어 막베라 굴에 장사되었다(창 50:12-14). 요셉은 그의 형제들을 끝까지 돌보아 주었다(창 50:19-21).

(i)  요셉은 백세에 애굽에서 임종했으나(창 50:26), 그 유골이 출애굽과 함께 나와 세겜에 이장되었다(창 20:25; 출 13:19; 수 24:32).

(j)  요셉의 인격과 신앙에 대해서는,

① 믿음의 사람이었고(창 50:20; 수 24:32).

② 과실에 대해 민감하고(창 37:2),

③ 마음이 친절하였고(창 40:7-8),

④ 성실성과 마음의 순수성을 지녔고(창 39:9, 11-12),

⑤ 겸손하였고(창 41:16),

⑥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였고(창 45:8),

⑦ 하나님의 신의 감동한 지혜를 소유했고(창 4:38-39),

⑧ 예언자적 기질을 가지었고(창 45:6; 출 13:19),

⑨ 감정이 풍부하고(창 43:30, 31),

⑩ 하나님의 도우심이 그와 함께 하셨고(창 39:2-3; 시 106:17-20),

⑪ 관용적인 사람이었다(창 50:19-21).

2. 아삽의 아들 요셉.

다윗 시대에 아삽의 수하에서 신령한 노래를 불렀다(대상 25:2).

3. 요야김 때의 스바냐 족속의 제사장(느 12:14).

4. 잇사갈 지파의 가나안 정탐군(민 13:7).

2. 신약성경. 

이오세프는 신약성경에서 34회 나오며, 주로 사복음서에 나타나며, 사도행전과 히브리서에 나타난다.

신약성경에서 8 사람이 요셉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등장한다.

1. 야곱의 아들 요셉.

(a)  요셉은 야곱의 편애 때문에 형들에게 마음과 시기를 받아 애굽을 끌려갔으나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다(행 7:9).

(b)  히 11:22에서 요셉의 믿음의 행위가 언급되어 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2. 다윗의 자손 요셉

(a)  그는 마리아의 남편이었다.

마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눅 1: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b)  그는 목수였다.

마 13: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막 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c)  그는 나사렛에 거주했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눅 2:4).

(d)  그는 의로운 자였다,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하여"(마 1:19).

(e)  그는 동거하기 전에 잉태한 약혼녀 마리아와 파혼할 것을 결심하였다,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하여"(마 1:18; 마 1:19).

(f)  그는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마리아를 데려왔다,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하니라 24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마 1:20-마 1:21; 마 1:24-마 1:25).

(g)  그는 호적지의 구유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지켜보았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 되었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눅 2:4-눅 2:6).

(h)  그는 모세의 법대로 결례를 행했다, "22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 가니 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함이더라"(눅 2:22-눅 2:24).

(i)  그는 꿈에 계시를 받고 가족과 함께 애굽으로 피신했다: "13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마 2:13-마 2:14).

(j)  그는 다시 계시를 받고 가족과 함께 나사렛으로 돌아왔다, "20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오니라 23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이루려 함이러라"(마 2:20-마 2:21; 마 2:23).

(k)  그는 예수님의 섬김을 받았다, "50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눅 2:50-눅 2:51).

3. 아리마대 요셉.

(a)  그는 공회 의원이었다,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눅 23:50).

(b)  그는 예수님의 제자이며 부자였다.

①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마 27:57).

②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요 19:38).

(c)  그는 빌라도에게서 예수님의 시체를 인수했다,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눅 23:52).

(d)  그는 자기의 새 무덤에 장사했다, "53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54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눅 23:53-눅 23:54).

(e)  예수님을 장사할 때 니고데모의 도움을 받았다, "39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요 19:39-요 19:40).

4.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얀나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눅 3:24).

5. 위와 다른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

"그 이상은 시므온이요 그 이상은 유다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그 이상은 요남이요 그 이상은 엘리아김이요"(눅 3:30).

6. 예수님의 동생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마 13:55).

7. 가룟 유다 대신에 사도로 추천을 받은 자

"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23 저희가 두 사람을 천하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행 1:22-행 1:23).

8. 바울의 동역자인 바나바의 본래 이름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행 4:36).(참조: ZT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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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Jravw(3708, 호라오) 보다 se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호라오(Homer 이래)는

(a)  '보다, 바라보다, 관찰하다, 지각하다'.

(b)  '상상하다, 경험하다, 출석하다, 참여하다'.

(c)  비유적 의미로 '이해하다, 인식하다, 고려하다, 주의하다'.

(d)  수동태로 '나타나다, 보이다'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호라오는 70인역본에서 매우 많이 나오며, 주로 라아와 그 다음으로 하자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보다, 깨닫게 하다'(창 27:1), '주목(주의)하다, 의식하다'(시 34:8), '알다, 경험하다'(신 11:2), '염려하다, 관심하다'(창 37:14; 사 5:12), '듣다'(렘 33:24), '이해하다'(삼상 12:17), '보이다' 등을 의미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호라오는 신약성경에서 449회 나오는데 호라오와 미래형 옾소마이가 110회, 부정과거형 에이돈이 336회 나온다.

(a)  눈으로 '보다, 주목하다'(마 28:7; 마 28:10; 막 16:7; 눅 16:23; 요 8:57; 요 9:37; 요 14:9; 요 6:16; 요일 4:20; 계 1:7 등), '보이다, 나타나다'(행 2:3; 계 11:19 등).

(b)  마음으로 '보다, 인지하다, 알다, 이해하다'(행 8:32; 골 2:18; 히 2:8; 약 2:24), '의식하다'(요삼 1:11).

(c)  '경험하다'(눅 3:6; 눅 17:22; 요 3:36 등).

(d)  '주의하다, 조심하다, 삼가다'(마 8:4; 마 18:10; 막 1:44; 살전 5:15; 마 16:6; 막 8:15 등).

(e)  '마음을 쓰다, 유의하다'(마 27:4; 행 18:15).

(f)  수동태로 '나타내다, 보이다'(눅 9:31; 천사들 눅 1:11; 눅 22:43; 행 7:30, 35; 하나님, 행 7:2; 죽은 자, 마 17:2; 막 9:4; 부활하신 예수님, 눅 24:34; 행 9:17; 행 13:31; 행 26:16; 고전 15:58; 딤전 3:16; 장차 재림하실 예수님, 히 9:28; 환상, 행 16:9; 계 11:19; 계 12:1, 3 등). 

===[시몬, 시므온, 쉬메온]듣다, 응답하다, 순종하다//작은 모래알이나 심지어 진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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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상과 모양에 대한 분별 ...모양은 대개 형상과 혼동하여 쓰이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번역에 세심함이 요구됨>....사람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형상은 본질과 본성의 어떠함 곧 인성의 내적 그릇[이것은 하나님의 호흡으로 조성된 사람의 영이라 할 수 있음....진정한 짝은 참생명<=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관계적 인격>인 바 하나님의 참생명<조에>로만 극도로 만족 누리며 살도록 되어 있음]에 담긴 내용이라 할 수 있음, 모양은 외적 그릇됨[몸의 모든 상태, 태도,  행실까지 포함]의 표현...사람이 창조되었을 때 [죄 없으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음 받았으나 그 형상안에 하나님의 참생명<영접함=믿음, 곧 생명나무(열매)를 취하여 먹음 통해서만 얻음>은 하나의 최선의 선택가능성이었는데, 아담이 사탄의 유혹을 따라 선악지식나무를 택한 바, 사망의 뱀독<반역적 죄성>이 이물질처럼 먼저 주입되었고, 그 결과 모양인 몸도 죄인의 몸이 되었음...한편,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처녀 마리아의 <의지하고 순종하는>믿음을 의로 여기심따라 거룩하게 된 인성[내적 그릇]안에 성령<참 생명, 삼위일체 하나님>이 오셔서 연합한 한 영(합체)되심으로써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되 신성이 인성을 통해 표현되심을 이루셨는데, 결국,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몸은 죄인의 모양이나 그 속에 죄(죄된 본성)는 없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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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요한의 사역적 특징 -- 생명[= 믿는 이의 기업이신 그리스도 예수 자신의 인격<관계적 인격>]으로 보수하는 사역(바울과 베드로 : 건축 사역) ...... 하나님(영원, 태초이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말씀, 그 안에 있는 참생명<길, 진리, 생명>-참 생명이자 참 빛 그리스도는 믿는 이가 그로 인해 살도록 되어 있는, 믿는 이에게 공급되는 하나님 생명) , 공급수단 : 말씀[=정의되고 설명되고 표현되신 하나님,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곧 생명수강과 그 주변의 생명열매나무(생명수와 생명열매)를 영으로 접촉하여 영을 사용하여 먹고 마심으로써, 만짐 <기록된 성경말씀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 기록한 바 영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그 말씀을 묵상/읊조림 ; 렉티오 디비나, 기도로 말씀 읽기/말씀으로 기도하기 + 회개하고 결단하기>+<인도하시며 가르치사 깨우쳐 주시는 성령따라 실행하여 체득하기>으로써 그 생명을 실지로 공급받고 참되게 경험하는, 곧 하나님을 보고 듣고 만지는 것이 됨
---[엡6:17, 18] *17 And take the helmet of salvation, and the sword of the Spirit, which is the Word of God.   *18 With all prayer and petition pray [with specific requests] at all times [on every occasion and in every season] in the Spirit, and with this in view, stay alert with all perseverance and petition [interceding in prayer] for all [e]God’s people. :: 구원의 투구(절대 긍정-절대기쁨-절대 확신/신뢰를 견지함)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취하라 : 간직하고 사용하라], (그것으로부터 참생명을 얻어내고 또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영적 무기로>사용함에 있어서) 모든 시기-모든 경우마다/항상 [오직 성령안에서]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라,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로 중보하면서, 모든 인내와 간구로 깨어 있도록 하라.
---[고후3:6] *6 He has qualified us [making us sufficient] as ministers of a new covenant [of salvation through Christ], not of the letter [of a written code] but of the Spirit; for the letter [of the Law] kills [by revealing sin and demanding obedience], but the Spirit gives life.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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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 성자 하나님이 성육신(하나님이자 사람이신 예수)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람에게로 이끌고, 하나님을 사람에게 선포하심 : 생명, 빛, 은혜와 실재<보고 듣고 접촉하여 체험하여 누림 가능한 확고한 실상을 가진 실제 =진리>로 나타나셨고 맛보고 감상-음미-누림-동행 통해 그분으로 조성됨이 가능하도록 하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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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죽으심과 부활 거쳐 승천하사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으로서 오셔서 사람의 영안에서 사람과 함께 거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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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접함(그 시작은 믿음<영접하는, 곧 그 이름을 믿는..> : 먹고 마심(생명수<인자의 피>와 생명의 떡<인자의 살>, 곧 영적 음료와 양식으로서) + 접촉하여 체험(영을 사용)  : 신체와 영혼의 반응-->변화-->그 성분으로 조성) : [주 보시기에]건축 재료인 (진흙-조약돌-놋쇠가) 산 돌이 됨(에덴동산에서는 정금, 진주<베델리엄>보석<호마노>...기억하라, 새예루살렘에는 <고난 상징>순은 성분은 더 이상 볼 수 없음 :: 벧엘의 기름부은<성령 뜻함> 돌베게와 야곱의 하늘 사닥다리 꿈<교통>, 창조된 남자의 갈빗대로 만들어진<건축재료의 조성> 여자 = 성도들)
==>교회(그리스도의 신부, 새예루살렘) 건축에 사용됨 [이 건축된 교회란 사실상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고 [그로 인해 분배받은 바 삼위일체하나님], 곧 체험한 하나님으로 인해 [그분의 성분으로]조성되기에 그리스도<또는 과정 거치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조성되어 그분을 빼어닮은, 그리스도의 확장/증대, 단체적 그리스도, 단체적 사람=한 사람이라 할 수 있으며] 곧 하나님의 한 표현이 되는 것.
==>모조품과 진품들
*1>에녹성 (:: 사탄이 가인의 아들 에녹의 이름을 따서 만든 첫모조품...창4:16-24 --노아의 홍수 심판 초래) //노아의 방주 건축<벧전 3:20, 21..그리스도 상징>, 홍수 이후 제단<주를 위함>과 장막<자신과 후손 이스라엘을 위함> 건축
*2>사탄의 두번째 모조품, 바벨성과 바벨탑 건축 //아브라함의 단과 장막 건축 
*3>소돔의 건축//벧엘의 건축
*4>바로의 국고성 건축/?광야 성막의 건축, 예루살렘성과 예루살렘성전의 건축 --
*5>바벨론성의 건축과 예루살렘 황폐화 //성전과 예루살렘 재건 -->교회 건축(마16:18)
*6>종교적, 정치적 바벨론의 건축(계17, 18)//새예루살렘의 건축(히11:10,16 ..12:22.....계21:2, 10..22:2)
[[참조말씀]] : 시36:8-9(복락의 강수, 생명의 원천). 요10:10(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더 얻게, 더 풍성히 얻게 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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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타락한 노아의 후손들에게 임한 바벨의 심판<창11>-->그 가운데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가나안땅(생명충만한 좋은 땅, 그리스도)으로 인도하심<창12 : 이것은 누림이 없는 종교에서 누림이 있는 그리스도안으로의 부르심이며 믿는이의 생명산출을 위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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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자녀(요1:1-13 ::: 단체적으로 하나님, 곧 그리스도를 나타냄)...하나님의 독생자(요1:14-18 ::: 하나님을 드러내고 표명함으로써 그분을 은혜와 실제로 누리게 함)...사람의 아들(인자 : 요1:19-51 :::: 하나님의 집 건축을 위한 터전이자 토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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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어린양(죄문제 해결, 거룩함, 성별의 회복 ::사람을 하나님께로 회복시키는 대속과 하나님 안에서 사람사이의 연합 위함) + 비둘기(하나님과 사람을 연결시킴, 하나님을 공급 : 사랑스럽고 유순하며 작으나, 생명과 통찰력<중생, 기름부음, 변화-연합-건축 위함>이 충만함)
==>12장24절 : 생명 충만한 한 알의 밀<능력이 아니라 구속과 생명을 위함> : 재생산과 생명안에서의 번식하는 많은 열매 산출 위함 [이것이 연합되어 하나의 산 떡이요 몸인 교회가 됨으로써 그리스도를 나타내게 됨
==>생명 충만한 밀알들은 이윽고 산 돌[반석, 정금, 진주, 보석]로 변화하고(마 16:18, 고전3:12,13), 터 곧 그리스도의 인성[His humanity]위에 세워진, 열린 하늘과 교통하는  벧엘을 이루게 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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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1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기사와 창1:2사이에 일어난 어떤 일로[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일어난 일로서, 하늘의 에덴에서 야기된 사탄의 배반사건] 인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위에 운행하시니라[사탄의 배반으로 인해]본래의 상태와는 달라진 변화를 겪은 황폐케 됨(혼돈)-공허-깊은 물 위의 흑암[하나님을 배반한 사탄-공중의 악한 영-그들에게 합세하여 반역한 땅의 피조물들에게 임한 심판의 결과]가운데 <물에 잠겨 있는>땅, 그러나 성령(하나님의 영]은 그 수면위에 운행하고 계심<포기하지 않고 마치 암탉이 병아리가 태어나도록 알을 품듯>....여기에서 [전적으로 사람을 위한...시간안에서의 ] 하나님의 창조(사람을 위한 회복과 사람의 창조)는 시작되고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함
....[고후 4:6]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요5:23, 24] *2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4.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약1:18] *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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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음]은 깊은 물을 의미, 물은 2중적 의미를 가짐 : *1>적극적 의미에서 물은 항상 생명을 의미(흐르는 물은 갈증을 해결해 주며 사람에게 생명을 제공한다) *2>소극적 의미에서 물에 잠김은 죽음을 의미<세례는, 엄몰하는 홍해나 요단강의 물이 뜻하는 것처럼 죽음을 의미함>
@@파괴된 것들의 회복 + 사람을 위한 필요한 것들의 회복과 사람의 창조....2장4절 "이것이 천지가((원초적 창조 : 하늘들이 먼저, 땅이 나중에 창조됨..회복적 창조의 질료가 만들어짐)) 창조될(create...없던 것을 있게 함 = 원초적 창조 때)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make...이미 있는 질료로 다른 것을 만듬...회복을 위한 창조) 날에".... 1장3절에서 마지막절까지 땅과 하늘들을 만드셨음....세째날에 물에 잠겨 있었던 땅을 회복하셨음 ==>네째날 궁창<하늘>을 회복하셨음 
---##궁창 :: 제1하늘<대기공간...공중 >. 제2하늘<우주공간>을 합친 개념.....바다는 땅과 경계를 인접한 궁창아래 물인 바다와 궁창위의 물<유리바다..(.그 위가 제3하늘인 삼층천)> 사이의 공간을 의미 :::  대기(제1하늘 :땅위의 궁창) : 대기(공중)과 우주공간 경계는 대기권----우주공간<하늘의 궁창 :제2하늘>과 삼층천 간 경계는 유리바다가 됨
::: 생명 지으심을 본다면 , 세째날 땅이 지어진 시점에 먼저 식물의 생명이, 물속에는 동물의 생명이, 공중에 있는 동물의 생명, 땅위에 있는 동물의 생명, 이어서 사람의 생명이 나타나고 마지막으로 2장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나타남:
@@먼저 영(성령)이 미리 오셨고, 그 다음 하나님 말씀<이르시되>이 오시며 그 다음에 빛<그리스도, 곧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오심이 바른 순서임
==> 첫째날, 빛과 어둠이 나뉨(객관적...다소 흐릿하지만)
==> 둘째날, 궁창<공중과 우주공간..공기/대기(공중..땅을 둘러쌈)아래 물과 궁창 위의 물(유리바다?)로 나뉨(주관적) :: 십자가<하나님 말씀>의 영(성..하늘)과 육(속..땅)을 나누는 역사를 뜻함.... 겉보기에 선해 보이는 좋아 보이는 언행 등 같은 말이라도 영에 속한 것인지 육에 속한 것인지를 분별함....둘째날 궁창과 물을 만드신 날에는 좋아하셨다는 말이 없음.....공기는 타락한 천사로, 물은 귀신들로 가득히였기 때문
==>세째날, 부활의 날<생명 낳음을 위함, 동시에 바다의 한계를 정하심...렘5:22...하나님의 역사가 완성될 때에는 바다는 다시 있지않게 됨..계21:1>, 마른 땅((**땅 : (헬)humilitas , 겸손))
이 물 아래에서 드러남(바다<사탄의 왕국에서 제일 중요>는 죽음이요 땅은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JC의 죽은자가운데서 부활하심 인해 우리가 거듭났음..벧전1:3...땅에서 모든 종류의 생명이 산출됨 : 식물생명, 동물생명. 사람의 생명...어류와 바다생물들도 그 근원도 아마 땅일것으로 생각...그 환경에 적응했다고 보는 것이 합당. --> 땅에 죄악이 관영한 결과 노아시대 홍수 물심판<그리스도에게서 끊어졌음을 의미..창7, 8장>이 닥치게 되나 땅을 회복시키시고 무지개언약으로 더 이상의 물심판은 없을 것을 확증하심)
***[식물 생명 산출] 풀((짐승과 동물의 먹거리))-->씨 맺는 채소-->씨 가진 과목((채소와 과목은 사람을 위함)) :: 생명수준이 어떤 정도인가 생각해 보라.
==>네째날, (빛과 어둠을 분리하는) 첫째날의 빛 보다 더 세고 강하고 분명한 광체(해-달-별  :: 생명의 분별과 성장에 필수적..요일1:5-7....빛의 주관과 규제가, 곧 율례가 있어야 함..창1:18하....분별/표적(표시)/징조-절기-날-연한 이룸) 출현 : 해<그리스도는 믿는 이의 태양, 치료하는 의로운. 날개 가진 해(말4:2), 여명이자 돋는 해(눅1:78. 79), 죽음과 사망의 그늘위로 떠 오른 큰 빛(마4:16), 그리스도로 인해 이기는 성도 또한 해로 비유됨(마13:43)>..달<교회..요셉(그리스도의 표상)의 꿈(창37:9-11) :: 햇빛을 달이 반사하듯, 교회는 그리스도의 빛을 (밤에만...밤은 교회시대임)반사함(보름달-반달-초승달이 될 수도 있음)>...별들<그리스도로 인해 이기는 성도들(단12:3..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하는 자는 별과 같이 빛나리라)...성도로 구성된 교회는 어둠속에서 빛나는 촛대(바른 번역은 등대..계1:20), (교회안에서 살아 있어서 생명을 공급하는 자들로서)사자들은  빛나는 별들, 세상의 빛(마5:14, 빌2:15)
==>다섯째 날, ^1.물속에 있는 생물 출현(가장 낮은 차원의 의식가진 생명체)...짠 바다물 가운데서 생존 가능 : 살아 있을 때는 물고기는 결코 소금<사망의 환경>으로 절여지지 않는다. ^2.하늘에 있는 생명체(공중의 새...더 높은 2단계의 생명) 출현 : 여하한 환경도 날아 올라 초월함(사40:31)
==>여섯째 날, ^3.땅위의 생명 출현 ==순종, 섬김과 산출의 생명[육축-->짐승-->땅에 기는 것]
^4.사람의 창조 : 식물생명3가지(풀-채소-과목)외 동물생명5가지(물고기-새-육축(소)과 짐승(사자)와 땅에 기는 것)가 먼저 있고 난 후에야 완전한 생명으로서의 [하나님을 위해 섬기며 다스릴 존재로서] 사람을 창조하시기 위해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모여 회의를 거치신다.....당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려면 성부성자성령 모두 꼭 함께 하셔야 함을 잊지말라....이처럼 하늘<햇빛, 비, 공기>은 땅을 위해<광물은 식물을 위해, 식물은 동물(육축-->짐승-->땅에 기는 것)을 위해, 모든 식물과 동물들, 곧 땅은 사람을 위해,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있기에, 사람이 창조의 중심이요 만물은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렸는데, 이는 하나님의 결혼식을 위함이다. ((이는 마치 동양의 결혼 풍습에서 보는 바와 유사하다 : 신랑이 모든 것을 준비한 후 맨 나중에 신부가 온다))...[창1: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우리가(삼위일체 하나님)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남자와 여자들인 단체적 한 사람<새사람>을 의미)
##사람의 창조의 의미는 두가지 측면에서 중요하다,
---^1.하나님이 하나님을 나타내는 사람을 얻기 위함 :: 그리스도 형상 으로 변화에서 더 나아가 빼어닮음에 이르러, 하나님의 형상 그 충만에 도달한 단체적 사람...이것에 반드시 도달할 필요가 있음,
---^2,또 하나는 하나님의 다스리는 권위를 행사할 사람을 얻기 위함 : 다스림에는 다스릴 범위/영역<귀신들의 거처인 바다, 악한 권세 곧 사탄과 그의 악한 천사<악령>들의 처소인 공중(엡2:2, 6:12), 사탄의 활동무대인 땅(눅 4:5,6)을 모두 포함함>과 그 영역에 대한 권한, 그 양자가 갖추어져야 함..
##더불어 중요한 것은 그 권한을 주신 의도(뜻)가 있음을 반드시 기억하라...
==^1.하나님의 원수를 처리함(<뱀이나 전갈처럼>땅에 기는 것<창1:26>으로 상징된 사탄<마귀-악마-사탄 : 창3:1에는 사탄은 뱀으로 상징되었음...계12:9절에서는 옛뱀으로 불리움 >을 처리하는 것)  <<원초적 창조에서는 하나님 자신을 나타냄이 유일한 목적이었음>>
==^2.[사탄에게 정복된 상태_식민지인] 땅을 회복하기 위함(창1 :26-28...시8편을 노래하기 위함...마6:9, 10의 기록대로 기도하라....하나님은 궁극적으로 땅에 내려오사 땅을 영원한 처소로 삼으려 하고 계심에 유의하라...사탄은 공중에서부터 땅으로 내던져지고, 결박되어서 무저갱에 처박하게 될것이며 그후에 지옥불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3.땅에 <믿는 이가 행사할 바>하나님의 권위를 가져오기 위함
@@하나님의 보좌주위의 네 생물[피조물의 대표] 겔1, 계4: 앞은 사람, 우편은 사자의 얼굴, 좌편은 소(계4장에서는 송아지..주께는 나이든 것에서 어린 것이 산출됨...영적 측면에서는 자랄수록 더 젊어짐>의 얼굴<사자와 소는 사람 얼굴과 많이 닮았다>, 뒤편은 독수리의 얼굴<사람 얼굴과 가장 닮지 않았다>....허나, 사람의 생명에 있어서 가장 놀랍고 큰 특징은 하나님을 나타내고 하나님을 대표할 수 있게 하는  [의식]임을 기억하라 .
......사람 창조의 최종 목적은 생명 산출에 있음...이를 위해 [먼저 하늘은 사탄과 그의 사자들을 축출하심으로써 회복되었고] 땅의 회복, 사람 얻음<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며, 동시에 하나님의 원수를 처리하시기 위함>, 생명을 낳는 것이 회복과 창조의 중심점임..
::: 네 생물은 에스겔서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바요, 계시록에서는 그리스도 자신의 표현을 의미함.((그리스도의 4방면의 표현들 ::: 마태복음 --왕/사자, 마가복음 --노예/소, 누가복음 : 인자/사람 요한복음 : 하나님/독수리))...창1장에서는 흑암, 사망의 물과 땅에 기는 것들을 제외한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지으셨기에] 모든 것이 되신다...그러나, 아홉가지 생명중에서 [얼굴의 이목구비를 가졌기에] 새-육축-짐승-사람에게만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 있는 자격이 있음에 주의하라
**하나님의 형상(image, imago dei, 내적 특성, 그의 본성-성품-인격적 어떠함...형상은 권위의 참된 근거 :: 최종적으로 벽옥으로 표현/묘사되는 새예루살렘:계4:3, 21:18상) = 그리스도(곧 그분의 생명=그분의 인격...따라서 아담은 그리스도의 표상이자 예표. 곧 사진이요 담는 장갑이자 그릇이다)....사람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성화>될 수 있고<내면적(이면적)> 빼어 닮을<표면적 : 내적 어떠함이 충만하여 광채처럼 빛남> 수 있다 :: 먼저 이면적 변화는 표면적 닮음에로까지<영화..해같이 빛남/해를 몸에 입은 자...고후3:18 :: 주님외에, 주님이 아닌 모든 것은 그 어떤 [선한]것이라도 주님 영광 접촉을 가리는 수건이 될 수 있음에 주의할 것!!..모든 편견과 짐짓추정, 선입견을 배제하라...오직 주님만 집중하라, 내가 주님을 바라볼 때 사탄은 모든 것을 다 이용해서 시선을 돌리도록 주의를 분산시키려 하나, 주님자신만은 이용할 수 없다..([[그리스도의 참 영광을 보고 그분의 영광에 이르는 성화와 영화[영광의 형상에 이름]를 방해할 수 있는. 사탄의 방해물로 작용 가능한  영적 수건들에 대한 경계를 기록한 서적4권들]] **갈라디아서(율법 종교 유전) **골로새서(철학-영지주의) **히브리서(모든 예식과 제도에 나타난 예표들) **고린도전서(모든 영적 은사들)..> 나아가도록 성령께서 이끄시는 바, 그리스도 형상 온전히 빼어닮기를 이루게 하신다 )
**하나님의 모양(likeness, 외적 형태/닮기) = 외모-외양-외관, 곧 그리스도를 본떠서(따라서) 만들어 졌다. 어느날, 그리스도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고 [친구로서] 교제를 나누셨다.(빌2:6...<소돔성 멸망 직전의 아브라함 : 창18:2상, 22...<브니엘의 야곱 : 창32:24, 28-30>...<여리고 전쟁전 여호수아 : 수5:13-14>)....공중재림시 변형된 성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모양과 흡사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창조함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회복적 창조의 절정인데,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가졌기에 하나님의 (어떠하심의) 표현이요, 하나님처럼 그 모양(외양, 생긴 모양, 외관)이 닮았기에 하나님을 대표하여 능력과 권위로 다스리는 권세(통치권)를 받았다.
**창조의 최종완성-절정-이란 하나님이 나타나고 대표되는 사람 얻음에 있음 = 곧, 추수이자 완전한 성숙인 새 예루살렘(계21,22장)은 하나님의 참 형상과 권위(통치권)를 드러냄.....하나님의 형상을 [그분의 충만-장성한 분량까지] 가지고 나타내는 참생명(조에)의 성도야말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그러셨듯] 하나님을 대표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권위(통치권을 스스로 주장하려 함이 아니라 만물이 그의 어떠함을 인지하고 저절로 자발적으로 먼저 복종하게 되는)를 행사할 수 있음에 주의하라...^^제사장 직분은 하나님 형상을<이는 고난을 거쳐야만 얻게 되는 생명 충만을 의미>, 왕의 지위는 다스림의 권위<이는 얻은 바 하나님 형상으로 말미암음>를 위함이다  ---형상과 권위는 참 기독신자의 마땅한 권리임에 주의하라...참 사람람은 [하나님에 대해]제사장이요, 제사장은 [모든 환경에 대해]왕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으로 변화하고 닮음<닮아감>은 접촉<제단을 쌓고, 앙망하고 머물러 함께 교통하며 그 참생명(인격)과 교제함>할 때에만 비례적으로 일어나게 되며, 말씀과 제단, 곧 주님을 가지고 나아갈 때 원수는 무너지게 될 것  :: (삿5:31..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하니라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
##오직 하나님의 형상 닮은 피조물인 사람만이 하나님의 생육-번성-충만-정복-다스림(창1:28)의 풍성한 축복을 받기에 합당한데, 이 축복은 하나님의 표현이 되고 하나님을 대표함, 곧 그분의 형상과 통치권에 뒤따르는 것임...[[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안식일은 사람의 첫째날임을 묵상해 보라 :: 하나님 안에서 쉼을 맛보라]]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대한 교육 계획을 잠깐 보도록 하자... 먼저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려 하셨고, 그 후에 보내어 전도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다(막3:7-10=열두제자를 따로 뽑아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며 또 내보내어 전도도하게 하셨다.., 눅10:1 =72명의 제자를 두명씩 당신이 직접 갈 모든 도시와 마을들로 미리 보내셨음)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복음전파란 그저 외적 활동만이 아니라 속생명의 풍성과 농익어 흘러나옴으로써 열매 맺음을 지향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마태-마가-누가복음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모든 족속을 제자삼으라고 분명히 명령하셨다, 또한 동시에, 요한복음(15장1-17절)에서는 참포도나무의 참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 이 말씀들이 서로 다른 말이라고 여겨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은 당시 제자들은 무슨 말씀인지 정확히 깨달아 알아들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요, 게다가 주님은 제자가 [하나님의 형상-속생명 충만함과 복음전파, 또 세상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 당하는 바 고난에 대한 인내에 있어서조차] 제자가 그 선생 같으면 ...족하다(마10:25) 하셨다......좀 더 깊이 면밀히 생각해 본다면, 주님은 제자들이 추구할 바는 먼저 그리스도와의 함께 있으면서 보고 듣고 나누는 생활속의 교제를 통해 그들의 속생명이 선생님인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까지 충만케 되어감을 바라시며, 동시에 복음 전파 실습을 통해 그 과정에서 당하는 온갖 핍박을 참고 견딤 통해 더욱 가속되는 속생명의 충만의 상승 증강을 통한 생명열매 맺음을, 그리고 그 생명열매의 씨가 마치 알곡처럼 30배, 60배, 100배로 확장됨을 원하셨던 것 같다.  결국 진정한 복음 전파란 아무런 속생명의 준비가 없이 사람을 이론적으로 설복하여 그들의 생각을 정복하고 그들의 관념을 변화시키려 함이 먼저가 아니라, 오히려 보고 듣는 사람들에게 전파자의 속생명, 곧 내주하시는 성령께 순종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누림으로 인해 충만하여 넘치는 바, 하나님의 형상인 참 생명을 공급함이라 할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사탄, 악한 영들, 귀신들]------
[[창1:1-2]]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그리고)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위에 있고..[그러나 <원초적 창조로서의>땅은 <심판 결과>혼돈하고 공허하게 되어, 깊은 물과 흑암으로 덮여 있었으나,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고 계셨다<암탉이 알을 품듯>...Concordant역] ....
[[욥38:4-7]] [하나님의 아들들<천사들>이 사람보다 먼저 지음 받았다]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6.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7.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겔28 : 1-19]] *1.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거늘   *3.네가 다니엘보다 지혜로워서 은밀한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 없다 하고   *4.네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얻었으며 금과 은을 곳간에 저축하였으며   *5.네 큰 지혜와 네 무역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말미암아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   *6.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하였으니   *7.그런즉 내가 이방인 곧 여러 나라의 강포한 자를 거느리고 와서 너를 치리니 그들이 칼을 빼어 네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치며 네 영화를 더럽히며   *8.또 너를 구덩이에 빠뜨려서 너를 바다 가운데에서 죽임을 당한 자의 죽음 같이 바다 가운데에서 죽게 할지라   *9.네가 너를 죽이는 자 앞에서도 내가 하나님이라고 말하겠느냐 너를 치는 자들 앞에서 사람일 뿐이요 신이 아니라   *10.네가 이방인의 손에서 죽기를 할례 받지 않은 자의 죽음 같이 하리니 내가 말하였음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셨다 하라   *11.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2.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슬픈 노래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도장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13.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준비되었도다((고대에서 북이나 피리는 왕을 높이는 의식에 사용되었음 : 단3:5, 6:18...그의 지위는 하나님보다는 낮으나 피조물 중 가장 존귀한 자, 법궤를 덮는 그룹의 수장, 천사장 중 최고지위, 땅과 우주까지 총괄하는  우주 가운데 가장 높은 왕적 제사장 지위였음...요12:31 이세상 임금, 엡2:2 공중권세 잡은 자<임금>...눅4:5-6 천하만국을 보이며...<아담의 범죄 이후가 아니라 이미 그 전에 하나님께서 주신 바>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미가엘보다 더 높은 지위 :유9절...모세의 시체로 인해 다툴 때 미가엘이 감히 사탄을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14.너는 기름 부음을 받 <법궤를 덮는 그룹, 아마도 보좌주위의 네 생물의 얼굴을 가진 4 그룹들, 또는 지성소 시은좌를 덮는 두 그룹과 같은 부류에 속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탁월함..겔1:10, 계4:7...출25:20, 계11:19>지키는 그룹임이여(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피조물로서 네 생물의 얼굴을 가진 그룹의 부류에 속하되 그들 중 머리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짊어진, 가장 높은 천사장이자 우주 공간까지 포함하여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 앞장섰던 기름부음 받은 제사장이었을 것...^^각각의 그룹의 얼굴 사면 형상은 앞은 사람, 좌측은 사자, 우측은 소, 뒤쪽은 독수리 형상임[[시은좌를 덮는 얼굴면은 사람의 얼굴이며, 휘장에 새겨진 얼굴도 앞을 향하기에 사람의 얼굴일 것]]))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불타는 돌들 사이에 왕래하였도다(사14장 :12...계명성<샛별, 루시퍼>, 아침의 아들 ....사탄과 그의 악한 천사들1/3이 맡았던 영광스러운 섬김지위를 이제 참 샛별이신 그리스도의 성도들로 함께 맡게 하시며 성도에게 주시려 교회를 오게 하심이 아닐까. )   *15.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네게서 불의가 드러났도다(교만과 이기적 야망이 배반의 요인임)   *16.네 무역이 많으므로 네 가운데에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지키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냈고 불타는 돌들 사이에서 멸하였도다(계12:4, 9, 하늘의 별1/3과 함께 땅으로 던져짐...= 마25:41, 마귀와 그사자들... = 엡6 :12, 공중에 있는<사는 곳이 공중임> 정사와 권세들 = 악한 영들...한편, 심판 당시 땅위의 생물들은 사탄 일당과 함께 모의 하고 배반하여 땅위의 귀신들이 되었음<귀신들의 거처, 본거지는 바다(**고대 유대때에는 땅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보이는 지중해를 무저갱의 입구로 여겼음)요, 즐겨 사는 곳은 땅이요 땅에서의 임시거처는 사람의 몸임>..마12:22-27, 43-45 :::: 즉, 귀신들은 타락한 천사[악한 영, 악한 천사]가 아님, 행23:8-9 :: 유대인들은 귀신들과 악한 천사들은 다른 부류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음)   *17.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왕들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 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18.네가 죄악이 많고 무역이 불의하므로 네 모든 성소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네 가운데에서 불을 내어 너를 사르게 하고 너를 보고 있는 모든 자 앞에서 너를 땅 위에 재가 되게 하였도다   *19.만민 중에 너를 아는 자가 너로 말미암아 다 놀랄 것임이여 네가 공포의 대상이 되고 네가 영원히 다시 있지 못하리로다 하셨다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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