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1.26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마4.40일금식후시험받으심(시내광야).갈릴리목회전도시작.첫제자들을부르심.전도-가르침-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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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있는 모든 것, 일시적/파괴적/자멸의 허망함으로 귀결됨  ::: Q불신/배역함의 미혹 도구 := (타락 결과)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 ....본래는  천연적  생명의 5욕(식성수물명) ::생존안정-애정존중-명예성취<자기초월>3가지 욕구 만족 추구 + 5감만족중독(색성향미축) << Q 말씀안에 이 모든 것에 대한 근원적 만족-기쁨-누림의 무한 풍성충만-영원한 공급이 있음


##@@40일 금식에서 40 숫자는....영적 연합 의미.....(세상에 속하지 않은 Q 영역안으로 들어감 의미) ==>돌([생명 없는 형해종교 상태인 율법.교리/주관-객관적 판단/심판/정죄 기준....즉, Q 생명양식을 생명 없는 돌로 만들어 제공해버렸기에, 스데반은 그 돌에 맞아 죽었다!!...한편, 예수님도 율법 교리의 또 다른 형태인 죽이는 형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으로 떡덩이 되게 하라 = ..[자아(타락한 자아는 사탄적 총체)의 의견따라 살라.]맣하고 있음....<==>신8:3 :: Q-사람 JC, [Q으로 자신 채움 위해 자기 혼(=자아)조차 버리신(=무죄하신) 유일한 분 JC] 그리스도처럼 그리스도로, 그리스도를 살게 하며, 공급하게 하리라..!!,  -- 이제 그분이 사역하시는바, 친히 Q의 입의 말씀 사역 인해 그분의 선민/성민에게 제2의 성육신 이루고 계심...곧 [ 마치, 두짝 갖춘, 작동되는 맷돌에 의해 껍질 벗겨진 씨앗, 그 가루를 조리함 통해 그 가루안의 영양 그대로 소화분해흡수함으로 참되게 몸이 삶의 에너지 얻음처럼!!....더 근본적이자 완벽한 영이요 생명, 곧 생생한 Q 생명 말씀을 친히 먹이고 계신다!!] Q-사람, 즉 거듭난 사람마다 그리스도, 그분을, 그분으로 살며 그분을 공급한다..[자아(총체적 사탄)의 의견따라 삶  아니라] @@


##Q은 Q의 그릇인 성민 각자마다에게 Q 말씀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공급하심으로써 그 존재 안팎을 참되게 예수-사람으로 동시에!! 조성되게 하고 계심


@@에벤 = 아브+벤, 부자, 집의 요소 , 따로 "돌"의 의미로도 쓰임 신령한 산 돌,JC공븝자 삼으시나니, 에벤마다 그 집의 건축재료로다

@@유대광야 : 사해 북동쪽 13km지점의 여리고(그  남쪽에 사해가 있음), 사해 북서해안의 쿰란--엔게디--마사다 지역으로 이어지는 요르단 열곡 라인과 여리고에서  남서서 방향으로 30km 떨어진 위치의 예루살렘-->남남서 10km 지점의 베들레헴-->남남서 지점20km의 헤브론으로 이루어진 유대 산지 라인 사이의 폭 25km 전체길이 96km정도의 메마른 광야지역 (여리고 바로 아래 서쪽근방에 있는 아골골짜기~예루살렘선은 유다지파 북쪽 경계를 이루었었는데,  유대광야 북단은 여리고~예루살렘 라인, 남단은 사해남부, 즉 엔게디와  그 남부 마사다 지역으로 볼 수 있음..시험산은 여리고 인근 서북서 방향에 위치)


##**영이신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는 영과 진리의 예배..곧 에메트-루아흐로 드려지는 예배이니...진정한 예배/경배는 : 그 공통 특징은 달렛, 곧 동심합치의, 그분의 뜻 그대로 이룸 위한 절대적 하나됨 -일편단심-일심으로-자원함의 의지로 오직 주님뜻 이루심에 동참함으로써 받으심 되는데...반드시 이루심의 약속 그대로 친히 이루고 계시는바, 전적인, 절대신뢰-절대긍정-절대기쁨-절대감사의 살아생동하는 산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받ㄴ으시는 합당한 예물은 그리스도이시니] 산 제사 드림이라!!...Q의 모든 속성 그대로 담긴 영(하-샤마임)-혼(하-아레츠) 가진, 원판 엘로힘이신 예수님의 판박이 = 완전히 결합하여 붙좇는 짝꿍 엘로힘, 하나님께서 낳으신바 그 하나님 삶을 사는 참제자/Q아들들/그리스도의 단체적 신부-어린양의 아내/단체적 한 새 사람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들)으로서 주 이름부름으로써 기ㅣ름부음따라 그대로 청종/순종/준행함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그분의 임재 앞에 *1)샤하<שָׁחָה ..쉰(우)-헤이트-달렛...굴복하다/엎드리다/도우심 구하다 :: 동심합치의, 부활생명의 영으로 붙좇는바 하나됨 삶> *2)아바드<עָבַד ...아인-베이트-달렛...그분의 거처됨..곧 동심합치로, 분배하심의 말씀 그대로 붙좇아 따라 살아감>


@@사람 man.....a[nqrwpo"(444, 안드로포스) ---원래의 뜻은 "위를 바라보고 사는 존재"라는 뜻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안드로포스(Homer 이래)는 아마도 아네르(ajnhvr, 435)와 옵스(w[y: 사람의 얼굴, 눈)의 합성어로서 `사람의 얼굴'이라는 의미를 지녔다가 `사람, 인간'을 의미하게 되었을 것이다. 일반 헬라어에서 안드로포스는 짐승이나 신과 반대되는 `인간'을 의미하였다. 

이 단어는 경멸적인 의미로 `노예'를 의미하였다(Hdt.와 다른 작가들에 의해 여성형으로도 사용되었다). 또한 본래 이 단어는 비난의 의미를 지니고 노예를 부를 때(Hdt.) 사용되기도 하였다. 즉 "이봐!"(Plato)이다.

2. 70인역본의 용법 

안드로포스는 70인역본에서 1500여회 나오며, 주로 아담, 이쉬, 에노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안드로포스는 신약성경에서 약 540여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안드로포스는 종(species )으로 `인간'을 나타낸다.

① 안드로포스는 동물(마12:12), 천사(고전 4:9), 그리스도(갈 1:12), 하나님(마 11:30)과 구별되는 인간을 나타낸다.

② 안드로포스는 약해지지 쉽고(약 5:17), 죽음(히 9:27), 죄(롬 3:4), 악(마 10;17)의 지배를 받으며, 아첨하고(눅 6:26), 실수하기 쉬운(갈 1:1) 인간을 나타낸다. 

"카타 안드로폰"이란 어구는 인간적 영역과 인간적 논리에 대한 유비(類比) 뿐만 아니라(갈 3:15; 고전15:32) 하나님에 비교하여 볼 때 인간의 사고와 행위의 제한적 속성(롬 3:5; 고전 9:8; 갈1:11)을 암시하며, 때로는 인간의 죄된 본성에 강조점을 두기도 한다(고전 3:3; 벧전4:6).

(b)  안드로포스는 추상적인 어떤 것과 관계나 소유의 관계를 표현할 때는 속격과 함께 셈어적 양식으로 사용되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4).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은 선택된 메시야의 구원받은 공동체이다.

살후 2:3에서 불법의 사람은 적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딤전 6:11에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이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딤후 3:17). (참조: Walter Bauer ; J. Jeremias ; J. Stafford  Wright ). 


@@@말 word......rJh'ma(4487, 레마) ..육성으로 발설된 (인용된)말..

명사 레마(Pind., Hdt. 이래)는 레오(rJevw, 4483: 말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살아있는 목소리에 의해 발설되는 것이나 발설된 것, 말한 것, 말'을 의미하며, 이 본래의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가 나온다.

(a)  목소리에 의해 발설되는 일정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온갖 소리, 말하는 소리, 한 소리의 말, 히 12:19; "말할 수 없는 말", 고후 12:4.

(b)  복수 타 레마타, '연설, 강화, 설교', 눅 7:1; 행 2:14; '말들, 진술', 요 8:20; 요 10:21; 행 16:38; '아무개가 말한 내용', 눅 24:8; 눅 24:11; 또는 '가르친 내용', 롬 10:18; 나의 가르침, 요 5:47; 요 12:47 이하; 요 15:7; "내가 이른 말", 요 6:63; 요 14:10; "영생의 말씀", 당신의 가르침은 영생을 낳는다, 요 6:68.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누군가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선포하시는 언설, 요 8:47;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시는 것을 말한다, 요 3:34;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말하다", 이 생명, 즉 영원한 생명에 관한 전체의 교리를 전하다, 행 5:20;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 당신이 내게 말하라고 명하신 것, 요 17:8; 그것에 의하여 ~할 것들을 아무개에게 가르치다, 행 11:14; 아무개가 예언한 것, 벧후 3:2; 유 1:17; 아무개에게 관하여 욕하는 말을 하다, 행 6:11; 어떤 것에 대적하여, 행 6:13.

(c)  '한 문장으로 결합된 일련의 말',

① 보편적으로, '발언, 선언': 마 26:75; 막 9:32; 막 14:72; 눅 2:50; 눅 9:45; 눅 18:34; 눅 20:26; 행 11:16; 행 28:25; 형용사들과 함께, "무익한 말", 마 12:36; 아무개를 욕으로 공격하다, 마 5:11.

② '어떤 종류이든 하나의 진술', 예컨대 '전언, 이야기': 어떤 사건에 관한 것, 눅 2:17; "믿음의 말씀", '믿음의 말', 즉 그리스도를 믿을 필요성에 관한 말, 롬 10:8; '약속', 눅 1:38; 눅 2:29; "하나님의 선한 말씀", 하나님의 은혜로운, 위로하는(구원의) 약속, 히 6:5;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약속에 따라(본래의 의미, 그의 약속의 '말씀에 입각하여', 즉 죄 용서의 약속), 엡 5:26; '어떤 일을 명령하는, 지시하는, 분부하는 말': 마 4:4; 눅 4:4; 히 11:3; '명령', 눅 5:5; 눅 3:2(렘 1:1), "그의 능력의 말씀", 그의 전능한 명령, 히 1:3. '교리, 가르침', 복음 전파자들에 의한 신적 가르침, 롬 10:17(혹자들은 여기의 rJ에 '명령, 위임 명령'의 의미를 부여한다); 하나님이 그 근원이 되시는 구원의 진리, 엡 6:17; 벧전 1:25; "예언"의 말, 예언적 알림, 계 17:17.

(d)  "서술"의 문제(일): 눅 2:15; 행 10:37; 복수, 눅 1:65; 눅 2:19; 눅 2:51; 행 5:32; 행 13:42.

(e)  "명령"의 문제(일): 눅 1:37(참조: 창 18:14; 신 17:8).

(f)  "논쟁"의 문제(일), 재판 중인 '소송': 마 18:16; 고후 13:1(신 19:15).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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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the Word, 진술, 연설.....lovgo"(3056, 로고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a)  로고스의 다양한 의미.

명사 로고스는 서사시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지만, 헬라의 합리성(rationality)의 출현과 더불어 중요한 단어가 되었다.

① 이야기, 연설, 말로서의 '설명'

② 하나의 원리, 증명 또는 설명(상업적으로는 계정)으로서의 계산의 결과.

③ 수학적으로는 '비례', '관계', 또한 더욱 일반적으로는 '기준'이나 '순서'

④ 주관적으로는 인간의 이성, 정신 또는 사상을 의미한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이 단어는 표현, 열거, 정의(定義) 등의 개념들을 결합한다. 이 단어는 반드시 진리, 지식, 미덕, 법, 생명, 본질, 영과 같은 단어들과 관련되어 나타난다. 이 단어는 풍부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한편, 창조적인 힘을 지닌 말이나 연설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된 적은 없다. 강조점은 말 속의 합리적인 요소에 있다; 레마는 감정적이며 의지적인 면에 강조점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로고스는 있는 것에 대해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것, 귀소본능을 의미한다. 마술에서만 이 단어가 주문(呪文)이라는 전문적 의미로 사용된다.

(b)  헬라 세계에 있어서 로고스 개념의 발전.

① 그 양면성. 한 면에서 볼 때 로고스는 어떤 것을 해명해 주거나 설명해 주는 것으로서의 말이나 계시를 의미한다. 어떤 사물의 법칙, 의미, 기초, 구조의 견지에서 볼 때 로고스는 그것의 내용이다. 다른 면에서 볼 때 로고스는 형이상학적 실재, 사물의 기본적인 이해할 수 있는 법칙으로서, 생을 설명할 수 있고, 결정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로고스는 후에 우주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② 헤라클리투스(Heraclitus). 로고스는 우주와 인간 양자의 존재를 구성하는 것으로서 인간을 우주, 인간 자신, 신과 연결시킨다. 따라서 로고스는 인간을 참된 존재로 확립시킨다. 여기서 로고스는 인간의 말과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말이자 의미이다. 사물의 법칙 또는 원리로서 로고스는 인간의 견해를 초월하며, 프쉬케의 근거가 되며, 우리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하는 권리를 주장한다.

③ 소피스트(Sophists). 이제 로고스는 현저히 인간의 이성을 의미하게 된다. 즉 사고력과 말하는 능력을 의미하며 정치에서는 설득력을 의미한다. 그것은 정치 생활 뿐만 아니라 교육과 문화의 기초이다.

④ 소크라테스(Sophists)와 플라톤(Plato).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더불어 로고스의 개념은 발전하여, 일상 언어를 통해 나온 로고스는 사물의 실재에 일치하는 방식으로 친교를 확립하는 능력을 가진다. 이성의 로고스와 실재의 로고스간의 조화가 전제가 된다. 로고스가 사물들을 해석해 줄 때, 진리를 얻게 된다. 그러나 로고스는 사물들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로고스는 그것이 존재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철학을 가능케 한다. 로고스는 사고, 말, 사건, 본질, 존재, 규범과 상호 연관되어 있다.

⑤ 아리스토텔레스(Aristole).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로고스는 인간의 미덕과 신앙의 근원인데, 이는 행동은 이해에 의해 결정되며, 인간은 말에 의해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2. 신약성경의 용법. 

로고스는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인 의미와 신학적인 의미 두 가지 모두로 331 회 사용된다(빌레몬서와 유다서를 제외하고 모든 문서들에 나온다). 로고스는 신약성경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는데,‘진술, 말, 언사, 포고, 격언, 선언, 강화, 연설, 가르침, 교훈, 교리, 이야기, 일, 용건, 사건, 행위, 질문, 명령, 보고, 정보, 소문, 어법, 입으로 하는 말, 이성, 고려, 계산, 해명, 설명, 관계, 원인, 근거, 기록된 말씀, 그리스도 자신이신 말씀’등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특별히 생각하고자 한다.

그러면 이“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말씀인가? 우리는 여기서“하나님의 말씀”으로 불리워진 몇 가지를  제시할 수 있다.

(a)  사도행전에서“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적 용법은 이미 사도들의 전도에서의 통상적인 우회적 표현이다(행 4:29; 행 6:2; 행 6:7; 행 8:4; 행 11:19; 행 13:5; 행 13:7; 행 13:44; 행 13:46; 행 16:32; 행 17:13; 행 18:11). 하나님의 말씀은 그 내용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사건(word-event)을 갖고 있으니 곧 유대에서의 말씀의 시작에서부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 제자들의 파송까지의 말씀의 역사(history)이다(행 10:37).  사도들이 선포하는 사도적 말씀-사건(word-event)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말씀 -사건에 기초된 것이며(행 10:36이하), 이것이 그 규범적인 주제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의 메시지는 유대인과 헬라인, 곧 세계인 모두를 위한 "구원의 말씀"이다(행 17:30).

사도의 전도에 있어서 이 하나님의 말씀, 또는 주의 말씀이 전해지고(참조: 행 4:29, 31; 11:19; 13:46) 선포되고(행 l3:5; 15:36; 17:13), 또한 받아들여졌다(행 8:14; 행 17:11).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행 4:4; 13:7, 44; 19:10), 또한 믿음으로 영접되고 찬양받았다(행 4:4; 15:7; 13:48). 만일 사도들의 전도하는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 사건에 대한 메시지라면‘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G. Kitte1. TDNT Ⅳ 116).

(b)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다(눅 6:1). 예수님의 말씀들은 성부의 말씀이며,  그 안에서 성부의 역사가 실행된다(요 14:24; 참조: 3:34; 14:10; 17:8).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요 5:24; 8:51; 12:48; 14:24; 15:3; 17:14, 17). 예수님의 말씀은 동시에 성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따라서 그것은 구원의 말씀이며(요 14:24), 진리의 말씀이니(요 17:17)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이 신자들에게 생명을 주고(요 5:24) 비신자들에게는 심판을 초래하는(요 12:47 이하) 이유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들은 그 전체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자기 계시이다(요 14:6, 14. 17).  이 계시자(the Revea1er) 의 말씀들은“말씀 the Word”로서 계시자(the revealer) 와는 동일하지 않다(R. Schnacken -burg,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c)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이신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요 1:1, 14). 하나님의 말씀들로서의 예수님의 (선포의) 말씀들은 말씀으로서의 예수님의 본질에 근거한다. 그가 말씀, 또는 하나님의 말씀들을 발언하셨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로고스다고 불리움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예수님께서 로고스이시기 때문에, 즉 신적 계시자이시며 구속자이시기 때문에 그의 말씀들이 하나님의 말씀들의 힘(force)을 소유하는 것이다(R.Schnackenburg,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로고스를 예수님과 동일시함으로써 이처럼 로고스 개념을 완전히 인격적으로 사용한 것은 요 1:1, 14 외에는 오직 요일 1:1(“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과 계 19:13 에서 발견된다. 계 19:13에서는“하나님의 말씀”이란 명칭이 승리 가운데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사용된다(지혜서 18:5와 단 7장의 결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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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4:12, 13...*12.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12 For the word of God is living and active and full of power [making it operative, energizing, and effective]. It is sharper than any two-edged [b]sword, penetrating as far as the division of the [c]soul and spirit [the completeness of a person], and of both joints and marrow [the deepest parts of our nature], exposing and judging the very thoughts and intentions of the heart. 13 And not a creature exists that is concealed from His sight, but all things are open and exposed, and revealed to the eyes of Him with whom we have to give account.]
[롬1:16, 17...*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6 I am not ashamed of the gospel, for it is the power of God for salvation [from His wrath and punishment] to everyone who believes [in Christ as Savior], to the Jew first and also to the Greek. 17 For in the gospel the righteousness of God is revealed, both springing from faith and leading to faith [disclosed in a way that awakens more faith]. As it is written and forever remains written, “The just and upright shall live by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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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30:11-14...*11.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2.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13.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14.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11 “For this commandment which I am commanding you today is not too difficult for you, nor is it [c]out of reach. 12 It is not [a secret hidden] in heaven, that you should say, ‘Who will go up to heaven for us and bring it to us, so that we may hear it and obey it?’ 13 Nor is it beyond the sea, that you should say, ‘Who will cross the sea for us and bring it to us, so that we may hear it and obey it?’ 14 But the word is very near you, in your mouth and in your heart, so that you may obey it.]

[롬10:6-10...*6.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8.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6 But the righteousness based on faith [which produces a right relationship with Him] says the following: “Do not say in your heart, ‘Who will ascend into Heaven?’ that is, to bring Christ down; 7 or, ‘Who will descend into the abyss?’ that is, to bring Christ up from the dead [as if we had to be saved by our own efforts, doing the impossible].” 8 But what does it say? “The word is near you, in your mouth and in your heart”—that is, the word [the message, the basis] of faith which we preach— 9 because if you acknowledge and confess with your mouth that Jesus is Lord [recognizing His power, authority, and majesty as God], and believe in your heart that God raised Him from the dead, you will be saved. 10 For with the heart a person believes [in Christ as Savior] resulting in his justification [that is, being made righteous—being freed of the guilt of sin and made acceptable to God]; and with the mouth he acknowledges and confesses [his faith openly], resulting in and confirming [his] salvation. ]

[신8:3...*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3 He humbled you and allowed you to be hungry and fed you with manna, [a substance] which you did not know, nor did your fathers know, so that He might make you understand [by personal experience] that man does not live by bread alone, but man lives by every word that proceeds out of the mouth of the Lord.]

[마4:4...*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새로운 날에 합당한, 그 날 그날 날마다 새로운 만나)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4 But Jesus replied, “It is written and forever remains written, ‘Man shall not live by bread alone, but by every word that comes out of the mouth of God.’”]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관련된 모든 것은 (유한한) 우리가 (무한하신, 영원 자존-영생하시는)그분 안에서 받은 생명 JC를<알파와 오메가, 처음이자 나중이심> 포함하는데, 이 생명은 분명하게 그 근원을 가지고 있으며, 생명은 특별하고 특정한 통로를[="Q 말씀"...여호와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 통해 일정한 방식[마음에 믿고 입으로 시인함의 = 발휘되는 "믿음"...아멘-아만-에무나-에메트이신 분 Q이신 "말씀"을 붙좇음]으로 우리에게 공급-영접되고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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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이 말씀하시는 바, 주님이 원하시는 참 사람으로서, Q의 아들 됨 = JC를 믿음으로 인해 거듭난 존재로서, 내주하시는 성령 따라 살아감으로써, 구속 받은 몸 안에 Q의 생명과 본성이 주 보시기에  온전-완전하게 채움 받고 끝까지 날마다 언제나 어디서나 주 그리스도로 사는 사람

***광야 기간을 두시고, 그 다양한 고난을 거쳐 성숙함에 이르도록 임마누엘로서 함께 통과하시면서 친히 훈련시키시고 계신 바, 광야를 졸업하게 하시는 Q의 조건은 그 무엇보다도 전적으로 Q의 기뻐하심, 곧  주 보시기에 그의 마음이 [요셉처럼] Q의 말씀이자 말씀하시는 Q이신 그분의 아들 JC, 그분의 사랑-믿음-소망과 하나 되어 일편 단심-일심-전심으로 주를 향하고 fellowship-participation-impartation, 곧 내주하사 교통하시는 주님으로 살고 온유-인내-절제로 주께 순종하며 섬기기를 배워 그분의 <생명-본성의> 성숙함에 도달함의 가치를 깨닫고 결단함으로써 참되게 배우고 익혀,  [참 인성 가진, 거듭난, 사람의 아들로서 주와 함께 파트너가 되어 그분 따라 싸우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만큼 구비되었는지]여부임....이것 없이는 Q의 근심을 불러 일으킬 뿐이니, 그분의 기쁘심과 만족, 되었다 함이 없으시다..

@@마귀에게 시험 받으심은, 기름부음 받은 왕이신 그분이 과연 천국의 왕으로서의 자격을 구비했는지에 대한 테스트.

마귀[디아볼로스, (Q앞에서)참소자-(사람들 앞에서)비방자]사탄은 분명히 자각하는 바, JC께서 성육신하여 참 사람으로서 오셨음을 인정하는 순간 그 자신은 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TUQ 중의 한 분이신 Q의 아들이 성육신하여 [무흠무결무죄한 인성의,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함 통해 그의 머리를 깨뜨릴] 사람으로 오신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기에(그것은 그의 패배를 시인하는 것이다), 침례 받고 물에서 나오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였고 동시에 아버지는 [그분의 사랑과 기쁨인] Q의 아들로  JC를 인정하셨기에, [이제 마귀는, 그분을 시험함에 있어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Q의 아들로서 시험하고 있었다...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40일간의 금식으로 극도로 쇠약해진 몸 상태에 있는 JC께, 사탄은 찾아와 시험하고 있었다..[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즉 오로지 Q의 아들로서 (제 소견에 좋아보이는 대로) 기적을 통해 당면 문제들을 단칼에 해결해 버리는 것이 어떠냐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Q 말씀을 먹고 살아감이 최우선순위가 아니지 않느냐) 너 자신이 지금 당장 배 고프니까 기적을 행하여 돌로 떡을 만들어 먹는 것은 어떠냐> <사람들이 순순히 복종하려면, 먼저 인생들의 주목을 끌어야  성공하기 쉬울텐데, 그러기 위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어떠냐>...그러나, 주 예수님은 오로지 (Q 이야말로 죄인이나 의인 모두 차별없이 이땅을 사는데 필요한 모든 필요를 정말 잘 아시고 친히 공급하시는 분이시기에 오직 그분의 말씀 따라 사는 것이 합당하며, [그분의 말씀이 없는데도 함부로 자의적 판단으로, 괜한 호기심으로] Q을 (조롱-비아냥거리며) 대적하며 시험해 보는 것은 [영원한 멸절을  의미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분명히 거절함으로써] Q을 경외하는 참 사람의 입장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계신다....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탄 자신에게 경배하면 사탄은 자기가 얻은 그 모든 것을 JC께 넘겨주겠다고 하지만, 경배 받기에 합당한 분, 섬김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은 오직 여호와 한 분이심을 선포하심으로써 그 마지막 제의도 거절하심으로써 승리를 거두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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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4:1-11.. *1.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8.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1. 아즈 나사 하-루아흐 에트-야후슈아 하-미드바라 레마안 예나쎄후 하-사탄  2. 바-예히 아히레이 추모 아르바임 욤 베-아르바임 라엘라 바이레아브  3. 바이-가쉬 엘라이브 하-메나쎄 바이-오마르 임 벤-하엘로힘 아타 다베르 라-아바님 하-멜레 베-타흐예나 레-라헴  4. 바이-아안 바-요마르 헨 카투브 로 알-하레헴 레비도 이흐예 하아담 키 알-콜-모차 피-아도나이  5. 바이-쉬에후  하-사탄 엘-아르 하-코데쉬 바이-아미데후 알-피나트-가그 베이트 하-미크다쉬 6. 바이-오메르 엘라이브 임 벤-하엘로힘 아타 네폴 레마타 키 카투브 키 말로아카이브 예치베-라크 베알-카파임 이샤우네카 펜-티고프 바-에벤 라겔레카  7. 바이-오메르 엘라이브 야후슈아 베-오드 카투브 로 테나쎄 에트-아도나이 엘로헤이카  8. 바이-오쎄프 하-사탄 바이-쉬에후 엘-하르 가보아흐 메오드 바이-르에후 에트-콜 마멜르코트 테벨 우-케보단  9. 바이-오메르 엘라이브 콜-조트 레카 에트네나 임-타코드 베-티셰타하베 리  10. 바이-오메르 엘라이브 야후슈아 쑤르 미메니 하-사탄 키 카투브 라-아도나이 엘로헤이카 티셰타하베 베-오토 레바도 타아보드  11.바이레프 미메누 하사탄 베힌네 니게슈 엘라이브 말르아킴 바이쉬레투후---

===1. 아즈 나사 하-루아흐 에트-야후슈아 하-미드바라 레마안 예나쎄후 하-사탄  

---다루시며 측량하시며 빚어가시는 하나님.. 그 생명이 육화되신 하나님을..동심합치의 그영, 곧 부활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부어 분배하신바 Q의 모든 속성 가지신, 동심합치로 아버지께 시종일관 일편단심-일심이신 예수를.. (그분은 진리말씀의  머리이신 교통하는 그영으로 상호 마음문 열어드림으로써 존재 바닥으로부터 머리에 이르기까지 연합한 하나로 구별된 그영의 실제 나타남 이루신 분이시지만).. 공급하심의 진리말씀 분배하심 통해 그러 살게 하시고.. 일하시는 생명을 측량받는 실제이자 동심합치의 온전한 변화 그 이룸 됨 나타나게 하시니.. 육의 지혜가 발동하여 시험하는 바.. 

---@아즈<알렙-자인>..다루시며 측량하시며 빚어가시는 하나님.. @나사<눈-쉰(좌)-알렙>.. 그 생명이 육화되신 하나님..  @하-루아흐<헤이, 레이시-바브(중)-헤이트>..동심합치의 그영, 곧 부활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에트-야후슈아<알렙-타브,  요드-헤이-바브(중)-쉰(우)-아인>.. 부어 분배하신바 Q의 모든 속성 가지신, 동심합치로 시종일관 일편단심-일심이신 예수를.. @하-미드바라<헤이, 멤-레이시-달렛-베이트-레이시-헤이>,, 진리말씀의  머리이신 교통하는 그영으로 상호 마음문 열어드림으로써 존재 바닥으로부터 머리에 이르기까지 연합한 하나로 구별된 그영의 실제 나타남 이루사.. @레마안<라멛-멤-아인-눈>.. 공급하심의 진리말씀 분배하심 통해 그러 살게 하시고.. @ 예나쎄후<요드-눈-싸멕-헤이-바브(중)>.. 일하시는 생명을 측량받는 실제이자 동심합치의 온전한 변화이룸됨 나타나게 하시니.. @하-사탄<헤이, 쉰(좌)-테이트-눈>.. 육의 지혜가 발동하여 시험받게 된바.. 

===2. 바-예히 아히레이 추모 아르바임 욤 베-아르바임 라엘라 바이레아브 

---창1ㅣ1,2절 그대로 영의호흡으로 행하시기에.. Q의 부활생명의 그영으로 ~을 실행하심.... Q주권아래 (동심합치 이루고 일편단심-일심으로) 겸손히 그분의 생명-인격변화 온전히 이룬바 됨으로써 하나됨 실행에 전념하고 계시는바.. Q의 그영께서 분배/전이/전달하며 일하심의 거처 됨.. 곧 여호와의 그릇 되심..곧 4 곱하기 10 = 40 채움,  말씀공급 받은 바로 그대로 청종/준행하며 사는 참제자 됨의.. 40일을 온전히 지나심.. (그후에 느끼시는바) 분배 받은 그영 자체로만 거함 아셨다(=주리신지라)..

---@바-예히<바브-요드, 헤이-요드>.. 창1ㅣ1,2절 그대로 영의호흡으로 행하시기에.. @아히레이<알렙-헤이트-레이시-요드  *아하르 : 그후에>.. Q의 부활생명의 그영으로 ~을 실행하심.... @추모<체데-바브(중)-멤-바브(상)>..Q주권아래 (동심합치 이루고 일편단심-일심으로) 겸손히 그분의 생명-인격변화 온전히 이룬바 됨으로써 하나된바.. @아르바임<알렙-레이시-베이트-아인-요드-멤>..Q의 그영께서 분배/전이/전달하며 일하심의 거처 됨.. @욤<요드-바브-멤  *욤 : "날"..>.. 곧 여호와의 그릇 되심.. @베-아르바임<바브, 알렙-레이시-베이트-아인-요드-멤>..곧 4 곱하기 10 = 40 채움 @라엘라<라멛-요드-라멛>.. 말씀공급 받은 바로 그대로 청종/준행하며 사는 참제자 됨.. @바이레아브<바브-요드, 레이시-아인-베이트>..분배 받은 그영 자체만 거함 되시다(=주리신지라)..

===3. 바이-가쉬 엘라이브 하-메나쎄 바이-오마르 임 벤-하엘로힘 아타 다베르 라-아바님 하-멜레 베-타흐예나 레-라헴  

--- 창1:1,2절 그대로, 준행하심으로써 성령충만의 모든것 이루심 가운데. 진리말씀의 생명 측량<동심 합치 여부>함의 실존 됨이시니.. 창1:1,2 그대로 이르시는도다.. 이는 그분이 아버지 말씀 양육 거처되심이라.. 아드님, 곧 말씀 공급하시는 아버지를 호흡함으로써 사역하는바, 그분의 거처/마음그릇/담지자 시니.. Q의 속성의 모든 것 거하며 나타냄의 실존이요.. 그 중심이 완전히 시종일관-일편단심-일심으로 동심합치 이룸 가운데 그 마음판은 오로지 영의 감동으로 말씀 새겨진바 되심이라.. 말씀공급 Q  거처요 그 참생명으로 행하며 사는 마음그릇이라.. 동시에, 공급 말씀이신 아버지의 실존 그 자체시라.. 일하시는 여호와 그분의 생명 온전히 이룬바 그 실존이시니... 공급하심, 곧 그 말씀이시며 부활생명이신 그영의 거처로다..  

---@바이-가쉬<바브-요드, 김멜-쉰(우)>..창1:1,2절 그대로, 준행하심으로써 성령충만의 모든것 이루심 가운데.. @엘라이브<알렙-라멛-요드-바브>.아버지 말씀공급 받고 변화 이루신 가운데.. @하-메나쎄<헤이, 멤-눈-싸멕(중)-헤이>.. 진리말씀의 생명 측량<동심 합치 여부>함의 실존 됨.. @바이-오마르<바브-요드, 알렙-멤-레이시>.. 창1:1,2 그대로 이르시나니.. @임<알렙-멤> 아버지 말씀 양육 거처되심이라.. @벤-하엘로힘<베이트-눈, 헤이, 알렙-라멛-헤이-요드-멤>.. 아드님, 곧 말씀 공급하시는 아버지를 호흡함으로써사역하는 그분의 거처/마음그릇/담지자 시니.. @아타<알렙-타브-헤이>.. Q의 속성의 모든 것 거하며 나타냄의 실존이요.. @다베르<달렛(중)-베이트(중)-레이시>.. 그 중심이 완전히 시종일관-일편단심-일심으로 동심합치 이룸 가운데 그 마음판은 오로지 영의 감동으로 말씀 새겨진바 되심이라.. @라-아바님<라멛, 알렙-베이트-눈-요드-멤>.. 말씀공급 Q  거처요 그 참생명으로 행하며 사는 마음그릇이라.. @하-엘레<헤이, 알렙-라멛-헤이>..공급 말씀이신 아버지의 실존 그 자체시라..@베-타흐예나<바브, 타브-헤이-요드-요드-눈-헤이>..일하시는 여호와 그분의 생명 온전히 이룬바 그 실존이시라.. @ 레-라헴<라멛, 라멛-헤이트-멤> .. 공급하심, 곧 그 말씀이시며 부활생명이신 그영의 거처로다.. 

==4. 바이-아안 바-요마르 헨 카투브 로 알-하레헴 레비도 이흐예 하아담 키 알-콜-모차 피-아도나이

--- 창1:1-2절 그대로 분배하여 이루신 바 그 생생한 나타남과,, 또한 엘로힘-샤마임-아레츠가 그대로 이루어짐, 또한 첫째날에서 여섯째날에 이르는 도합 6일까지 이루신 일 그 자체에 근거하는바, 동심합의/일치 통해 말씀 수용/적용-조성/새겨짐의 완성 이룬 거처 나타남 된바.  바로 그분, 말씀공급의 하나님이니.. 분배/전달/전이하신 말씀, 곧 호흡하심의 공급말씀마다 부활생명의 영 거처라. 상호열린 마음문의 교통으로 근본동기와 무의식/잠재의식에 이르기까지 사랑-생명으로 구별된바 연합한 거룩한 생명-인격변화 온전히 이룬 하나시라.. 친히 일하시는바 부활생명의 영의 실존이시라.. 그 존재는 바로 참 아담, 사랑-생명-전존재의 뿌리부터 머리에 이르기까지 열린문의 온전한 교통으로 [하나님의 모든 속성 그안에 이룬] 하나된 존재, 곧 하나님의 거처라.. 그리 조성되신 그대로 일하시나니.. 분배하시며-조성하시는 말씀공급은 [생명-인격의 온전한 변화 이룬] 의의 말씀, 곧 아버지시라.. 이제, Q이신 그분이 친히 입을 열어 말씀하며 그 말씀대로 틀림없이 행하시나니, 곧 동심합의/합일/합치 이룬바 일하시며-호흡하시는 영, 아도나이 주님이시라

---@바이-아안<바브-요드, 아인-눈>..창1:1-2절 그대로 분배하여 이루신 바 그 생생한 나타남에 근거하며,, @바이-오마르<바브-요드, 알렙-멤-레이시>.. 또한 엘로힘-샤마임-아레츠가 그대로 이루심에 근거하며,  @헨<헤이-눈>.. 첫째날에서 여섯째날에 이르는 도합 6일까지 이루신일에 그 자체에 근거하는바["여기를 보소서!"=힌네] @카투브<카프-타브-바브(중)-베이트>..동심합의/일치 통해 말씀 수용/적용-조성/새겨짐의 완성 이룬 거처 나타남 된바.. @로<라멛-알렙>..말씀공급의 하나님이니.. @알-하레헴<아인-라멛, 헤이-라멛-헤이트-멤>.. 분배/전달/전이하신 말씀, 곧 호흡하심의 공급말씀마다 부활생명의 영 거처라.. @레비도<라멛-베이트-달렛-바브(상)>..상호열린 마음문의 교통으로 근본동기와 무의식/잠재의식에 이르기까지 사랑-생명으로 구별된바 연합한 거룩한 생명-인격변화 온전히 이룬 하나라.. @이흐예<요드-헤이트-요드-헤이>.. 친히 일하시는바 부활생명의 영의 실존이시라.. @하아담<헤이, 알렙-달렛-멤>.. 그 존재, 사랑-생명-전존재의 뿌리부터 머리에 이르기까지 열린문의 온전한 교통으로 [하나님의 모든 속성 그안에 이룬] 하나된 존재, 곧 하나님의 거처라.. @키<카프-요드> .. 그리 조성되어 일하시나니.. @알-콜-모차<아인-라멛, 카프-라맫, 멤-바브(상)-체데-알렙>.. 분배하시며-조성하시는 말씀공급은 [생명-인격의 온전한 변화 이룬] 의의 말씀, 곧 아버지시라.. @피-아도나이<페이-요드, 요드-헤이-바브(중)-헤이>.. 입을 열어 말씀하며 그 말씀대로 일치되게 행하시나니, 곧 동심합의/합일/합치 이룬바 일하시며-호흡하시는 영, 아도나이 주님이시라..

==5. 바이-쉬에후  하-사탄 엘-아르 하-코데쉬 바이-아미데후 알-피나트-가그 베이트 하-미크다쉬

--- 그런데 사탄은, 창1:1,2 그대로 지어졌으되,  그 중심이 육에 있는바, [세상의] 으뜸된 영, 부어주신바된 Q의 모든것을 변개해버린바 세상 지혜로 사는 영이로되, 예수는 아버지의 공급말씀을, 그대로 공급-분배-전달하며 행하시는분, 참 으뜸이시요 교통하는 그영, 곧 거룩하신 하나님, 분배/전이하심의 진리말씀그대로, 동심합치로 연합한 하나 만드시는 분, 분배의 공급말씀, 입 열어 말씀하는 그대로 생생하게 나타남 완성 하시는 분, 곧 영의 완성이신 분, 열망하시는 바 진리말씀으로 하여금 유일무이한 으뜸-교통하는 그영되도록 Q의 모든것 부어주시는 분

---@바이-쉬에후<바브-요드, 쉰(좌)-알렙-헤이-바브(중)>.. 창1:1,2 그대로,  그 중심이 육에 있는바, [세상의] 으뜸된 영, @하-사탄<헤이, 쉰(좌)-테이트-눈>.. 부어주신바된 Q의 모든것을 변개해버린바 세상 지혜로 사는 영, 그 사탄이.. @엘-이르<알렙-라멛, 아인-요드-레이시> 하-코데쉬<헤이, 코프-레이시-쉰(우)>.. 아버지의 공급말씀을, 그대로 공급-분배-전달하며 행하시는분, 참 으뜸이시요 교통하는 그영, 곧 거룩하신 하나님, 예수께.. @바이-아미데후<바브-요드, 아인-멤-요드-달렛-헤이-바브(중)>.. 분배/전이하심의 진리말씀그대로, 동심합치로 연합한 하나 만드시는분을..  @알-피나트-가그<아인-라멛, 페이-눈-타브, 김멜-김멜>.. 분배의 공급말씀, 입 열어 말씀하는 그대로 생생하게 나타남 완성 하시는 분, 곧 영의 완성이신분을.. @베이트<베이트-요드-타브>..거처되심으로써 행하시며 온전케 하시는 분을.. @하-미크다쉬<헤이, 멤-코프-레이시-쉰(우)>.. 열망하시는 바 진리말씀으로 하여금 유일무이한 으뜸-교통하는 그영되도록 Q의 모든것 부어주시는 분이시라..

==6. 바이-오메르 엘라이브 임 벤-하엘로힘 아타 네폴 레마타 키 카투브 키 말로아카이브 예치베-라크 베알-카파임 이샤우네카 펜-티고프 바-에벤 라겔레카 

--- 창1:1-2 그대로 [Q 진리말씀의 그영인바] 말씀으로.. @엘라이브<알렙-라멛-요드-바브>..아버지의 공급말씀 그대로 사역하며 만드시는바.. Q의 말씀.. 벤-하엘로힘<베이트-눈, 헤이-알렙-라멛-헤이-요드-멤>.. 그  엘로힘 Q의 아들이요..그분의 모드 속성의 실존이라면.. 입을 열어 생생하게 말씀 공급하여 보라.. 공급하는 바 진리말씀 가운데 그 지혜의 실제 나타내보라.. 조성하여 만드는바 사역해 보라.. 조성하여 만드는바 [동심합치의] 그 지혜가 실제 되게 하여 보라.. 조성해 보여라.. 진리 말씀 공급자 하나님으로 하여금 조성하여 나타내게, 만드시게 하여 보라.. 동심합치 이루사 하나된 분 여호와, 그 말씀 실제 나타나게 해 보라.. 분배하신바 그 공급말씀을 [네가 입을 열어 말하여] 조성하여 행한바 그 거처됨으로 나타나게 해 보라.. 동심합치 이루사 하나된 분 여호와, 그 말씀 실제 나타나게 해 보라.. 네 입 열어 말함으로써 생생하게 나타내보라, 온전하신 성령의 실제를 입증해 보라. 거하시는 아버지, 그분의 거하심을 생생하게 해 보라. 성령이신 그 영의 교통하며 말씀 공급하심을 나타내 보라.. 

@바이-오메르<바브-요드, 알렙-멤-레이시>..창1:1-2 그대로 [Q 진리말씀의 그영인바] 말씀으로.. @엘라이브<알렙-라멛-요드-바브>..아버지의 공급말씀 그대로 사역하며 만드시는바.. @임<알렙-멤>..Q의 말씀.. 벤-하엘로힘<베이트-눈, 헤이-알렙-라멛-헤이-요드-멤>.. 그  엘로힘 Q의 아들이요.. @아타<알렙-타브-헤이>.. 그분의 모드 속성의 실존이여.. @네폴<눈-페이-라멛>.. 입을 열어 생생하게 말씀 공급하라.. @레마타<라멛-멤-테이트-헤이>.. 공급하는 바 진리말씀 가운데 그 지혜의 실제 나타내보라.. @키<카프-요드>.. 조성하여 만드는바 사역하라.. @카투브<카프-타브-바브(중)-베이트>..조성하여 만드는바 [동심합치의] 그 온전함이 실제 나타내 보라.. @키<카프-요드>..조성해 보여라.. @말르아카이브<멤-라멛-알렙-카프-요드-바브>..진리 말씀 공급자 하나님으로 하여금 조성하여 나타내게, 만드시게 하여 보라..  @예치베-라크<요드-체데-바브(중)-헤이, 라멛-쿠프>.. 동심합치 이루사 하나된 분 여호와, 그 말씀 실제 나타나게 해 보라.. @베알-카파임<바브-아인-라멛, 카프-페이-요드-멤>.. 분배하신바 그 공급말씀을 [네가 입을 열어 말하여] 조성하여 행한바 거처됨 나타나게 해 보라.. @이샤우네카<요드-쉰(좌)-알렙-바브(중)눈-쿠프>..동심합치 이룬바 육화된 하나님 생명의 그 실제 나타내 보라.. @펜-티고프<페이-눈, 타브-김멜-쿠프>..네 입 열어 말함으로써 생생하게 나타내보라, 온전하신 성령의 실제를 입증해 보라.. @베에벤<베이트-알렙-베이트-눈>..거하시는 아버지, 그분의 거하심을 생생하게 해 보라.. @라겔레카<레이시-김멜-라멛-쿠프>..성령이신 그 영의 교통하며 말씀 공급하심을 나타내 보라.. 

==7. 바이-오메르 엘라이브 야후슈아 베-오드 카투브 로 테나쎄 에트-아도나이 엘로헤이카

--- 붙드신바, 창1:1-2, 그대로!! ..Q의 말씀공급, 바로 그대로따라 일하며 온전한 변화 이루시나니.. 예수시로다.. 분배/전이/전달 받은 그말씀 그대로 생명-인격의 온전한 변화 입음 안에 [요동없이!!] 거하며 행하시는바.. 동심합치로 조성-변화-거처됨 이루시며,. 흔들림없는 말씀공급의 하나님이시니.. 생명 보좌에 앉으신, 완전한 그 실존이심이라.. Q의 모든 속성 그대로, Q의 완전하심, 동심합치로 행하시는 여호와의 실존, 주님이시라.. Q의 공급말씀의 실제이심이로다...

---@바이-오메르<바브-요드, 알렙-멤-레이시>..창1:1-2, 그대로!! @엘라이브<알렙-라멛-요드-바브>..Q의 말씀공급, 바로 그대로따라 일하며 온전한 변화 이루시나니.. @야후슈아<요드-헤이-바브(중)-쉰(우)-아인>.. 예수께서.. @베-오드<바브, 아인-바브(상)-달렛>..분배/전이/전달 받은 그말씀 그대로 생명-인격의 온전한 변화 입음 안에 [요동없이!!] 거하시는바.. @카투브<카프-타브-바브(중)-베이트>.. 동심합치로 조성-변화-거처됨 이루시는바.. @로<라멛-알렙>..말씀공급의 하나님이시니.. @테나쎄<타브-눈-싸멕-헤이>..생명 보좌에 앉으신, 완전한 그 실존이시라.. @에트-아도나이<알렙-타브, 요드-헤이-바브(중)-헤이>..Q의 모든 속성 그대로, Q의 완전하심, 동심합치로 행하시는 여호와의 실존, 주님이시라.. @엘로헤이카<알렙-라멛-헤이-요드-쿠프>.. Q의 공급말씀의 실제 나타내심이라..

==8. 바이-오쎄프 하-사탄 바이-쉬에후 엘-하르 가보아흐 메오드 바이-르에후 에트-콜 마멜르코트 테벨 우-케보단

--- 이미 보좌에 앉아계신바, 온전한 생명-인격의 변화 입히시는 분을 불평하며..세상에 속한 지혜의 생명, 곧 사탄은.. 창1:1-2절 그대로 지음 받았으되, [변질된 생명 으뜸이라]..다시 ..>..[Q의 말씀공급, 곧 영의 호흡하심으로 임재 있었던 곳.. 일명 하나님의 산] 성령의 거처 하심 실지로 있었던 곳, 바로 거기.. 진리말씀이신 하나님의 그영의 장엄한 임재로 임하신 곳.. 그 당시, 그영 이신 하나님이 바로 여호와이심을 보이셨으니..  그렇게, 진리말씀의 거처요 참제자라, 조성하신바 그 생명-인격 변화의 온전함을 입증하셨도다.. 그분의 거처된 참제자마다  온전케 됨 입게 되나니.. 날마다 새로이 더욱더 조성되어가는, 이미 조성된바 그 생명-인격 변화의 온전케 됨 입은 참생명의 거처로다..

---@바이-오쎄프<바브-요드, 바브(상)-싸멕-페이>.. 이미 보좌에 앉아계신바, 온전한 생명-인격의 변화 입히시는 분을 불평하며.. @하-사탄<헤이, 쉰(좌)-테이트-눈>.. 세상에 속한 지혜의 생명, 곧 사탄은.. @바이-쉬에후<바브-요드, 쉰(좌)-알렙-헤이-바브(중)>.. 창1:1-2절 그대로 지음 받았으되, [변질된 생명 으뜸이라]..다시 @엘-하르<알렙-라멛, 헤이-레이시>..[Q의 말씀공급, 곧 영의 호흡하심으로 임재 있었던 곳.. 일명 하나님의 산] @가보아흐<김멜-베이트-헤이>.. 성령의 거처 하심 실지로 있었던 곳, 바로 거기.. @메오드<멤-알렙-레이시>..진리말씀이신 하나님의 그영의 장엄한 임재로 임하신 곳.. @바이-르에후<바브-요드, 레이시-알렙-헤이-바브(중)>..이로써, 그영 이신 하나님이 바로 여호와이심을 보이셨으니.. @에트-콜<알렙-타브, 카프-라멛>..Q의 모든 속성으로 조성하신바 참제자 이루셨으니.. @마멜르코트<멤-멤-라멛-카프-바브(상)-타브>..그야말로 진리말씀의 거처요 참제자라, 조성하신바 그 생명-인격 변화의 온전함을 입증하셨도다.. @테벨<타브-베이트-라멛>..거처된 참제자마다  온전케 됨 입게 되나니.. @우-케보단<바브, 카프-베이트-바브(상)-달렛-눈>..조성된바 그 생명-인격 변화의 온전케 됨 입은 참생명의 거처로다..

==9. 바이-오메르 엘라이브 콜-조트 레카 에트네나 임-타코드 베-티셰타하베 리 

--- 오직 창1:1-2, 그대로!! Q의 말씀공급, 바로 그대로를 따라 일하며 온전한 변화 이루심으로써.. 참제자 그 실존 나타나게 하심이라..조성된 참제자마다, Q의 모든 속성 그대로 완전히 이루시나니.. 참제자 그 실존 나타나도다.. Q의 모든 속성, 그 생명 삶의 실존이 거함이라.. Q의 진리말씀의, 그 열망 그대로 완전케 된바, 사랑-생명의 상호 열린 마음 통해 근본동기-의식/무의식/잠재의식에까지 모두 Q속성 이룬바 연합한 하나 이룬, 구별/성별/분별된 그 사람 이루심이니.. Q의 부으신 모든것으로 온전케 되고 그 완전함 이룬바, 곧 부활생명의 영으로 온전한 변화 이룬 그 실제라.. 공급말씀 그대로 생활하며 살아가도다

---@바이-오메르<바브-요드, 알렙-멤-레이시>..창1:1-2, 그대로!! @엘라이브<알렙-라멛-요드-바브>..Q의 말씀공급, 바로 그대로따라 일하며 온전한 변화 이루시나니.. @콜-조트<카프-라멛, 자인-알렙-타브>..조성된 참제자마다, Q의 모든 속성 그대로 완전히 이루시나니.. @레카<라멛-쿠프>..참제자 그 실존 나타남이라.. @에트네나<알렙-타브, 눈-눈-헤이>..Q의 모든 속성, 그 생명 삶의 실존이라.. @임-타코드<알렙-멤, 타브-코프-달렛>..Q의 진리말씀의, 그 열망 그대로 완전케 된바, 사랑-생명의 상호 열린 마음 통해 근본동기-의식/무의식/잠재의식에까지 모두 Q속성 이룬바 연합한 하나 이룬, 구별/성별/분별된 그 사람이니..  @베-티셰타하베<바브, 타브-쉰(우)-타브-헤이트-바브-헤이>..Q의 부으신 모든것으로 온전케 되고 그 완전함 이룬바, 곧 부활생명의 영으로 온전한 변화 이룬 그 실제라.. @리<라멛-요드>..공급말씀 그대로 사역하도다.. 

==10. 바이-오메르 엘라이브 야후슈아 쑤르 미메니 하-사탄 키 카투브 라-아도나이 엘로헤이카 티셰타하베 베-오토 레바도 타아보드 

--- 창1:1-2, 그대로!! Q의 말씀공급, 바로 그대로를 따라 일하며 온전한 변화 이루셨나니.. 바로 그분 예수시라.. 그 예수께서.. 보좌에 앉아계신 그영과 동심합치로 말씀하여 물리쳐 이르시되.. [진리말씀의  그릇됨의 생명으로 행하사.. ] 너 사탄아..이젠 그만하거라.. 나는 동심합치 이룬자 됨이니.. 진리말씀의  주님이라,  하나님의 실제됨으로 행하리라.. Q의 모든 부으심 그대로 그 변화 입은바, 온전/완전케 된 부활생명 충만의 실존이나니.. 공급말씀의 거처됨이, Q의 모든속성의 거하며, 그 생명-사랑의 교통으로 연합한바 마음의 완전한 열림 인해 근본동기-의도-존재의 그 모든 영역의 뿌리까지 하나 이룬 구별/성별/분별의 한 새사람이라 .. 완전한 예배자/섬김이/통치자로다.. 

@바이-오메르<바브-요드, 알렙-멤-레이시>..창1:1-2, 그대로!! @엘라이브<알렙-라멛-요드-바브>..Q의 말씀공급, 바로 그대로를 따라 일하며 온전한 변화 이루셨나니.. 바로 그분..@야후슈아<요드-헤이-바브(중)-쉰(우)-아인>.. 예수시라.. 그 예수께서.. @쑤르<싸멕-바브(중)-레이시>..보좌에 앉아계신 그영과 동심합치로 말씀하여 물리쳐 이르시되.. @미메니<멤-멤-눈-요드>..진리말씀의  그릇됨의 생명으로 행하사..  @하-사탄<헤이, 쉰(좌)-테이트-눈>..너 사탄아.. @키<카프-요드>..그만하거라.. @카투브<카프-타브-바브(중)-베이트>..나는 동심합치 이룬자 됨이니.. @리-아도나이<라멛, 요드-헤이-바브(중)-헤이>..진리말씀의  주님,  @엘로헤이카<알렙-라멛-헤이-요드-쿠프>.. 하나님의 실제됨으로 행하사.. @티셰타하베<타브-쉰(우)-타브-헤이트-바브-헤이>..Q의 모든 부으심 그대로 그 변화 입으신바 온전/완전케 된 부활생명 충만의 실존 드러내시니.. @베-오토<바브, 알렙-바브(상)-타브-바브(상)>..그 변화의 온전/완전한 생명-인격이심을 나타내시니....- @레바도<라멛-베이트-달렛-바브(상)> 공급말씀의 거처됨이, Q의 모든속성의 거하며, 그 생명-사랑의 교통으로 연합한바 마음의완전한 열림인해 근본동기-의도-존재의 그 모든 영역의 뿌리까지 하나 이룬 구별/성별/분별의 한 새사람이라 @타아보드<타브-아인-베이트-달렛>..완전한 예배자/섬김이/통치자 시로다.. 

==11.바이레프 미메누 하사탄 베힌네 니게슈 엘라이브 말르아킴 바이쉬레투후

---변화시키며 일하시는바, 그영의 말씀하심-충만케 하심으로.. 동심합치로 진리말씀의 거처로서 생명 작동된바.. 그 사탄은 [물러나고] 보라 거기엔....[동심합치로 일하시는분] 생명의 성령 부으심으로 임재 충만 가득케 되고..Q의 말씀 공급하심의 역사-변화가 넘치도록 일어나는바..오직 [동심힙치로] 진리말씀으로 공급하심을 그대로 받아들여 수용/적용-조성하심/새겨짐 그대로 이룬바 그분의 거처/참제자/엘로힘의 판박이의 산출 있게 되나니.. 창1:1-2 그대로 이루심인바, [동심합치로 이루는바] Q의 모든 속성 부어주시는 그영의 온전케 하심의 실존 나타나도다..

 

--@바이-레프<바브-요드, 레이시-페이>..변화시키며 일하시는바, 그영의 말씀하심으로.. @미메누<멤-멤-눈-바브(중)>.. 동심합치로 진리말씀의 거처로서 생명 작동된바.. @하-사탄<헤이, 쉰(좌)-테이트-눈>..그 사탄은 [물러나고] @베-힌네<바브, 헤이-눈-헤이>..보라 거기엔.. @니게슈<눈-김멜-쉰(우)-바브(중)>..[동심합치로 일하시는분] 생명의 성령 부으심으로 임재 가득케 되고.. @엘라이브<알렙-라멛-요드-바브>..Q의 말씀 공급하심의 역사-변화가 일어나는바.. @말르아킴<멤-라멛-알렙-카프-요드-멤>..[동심힙치로] 진리말씀으로 공급하심을 그대로 받아들여 수용/적용-조성하심/새겨짐 그대로 이룬바 그분의 거처/참제자/엘로힘의 판박이의 산출 있게 되나니.. @바이-쉬레투후>바브-요드, 쉰(우)-레이시-타브-바브(중)-헤이-바브(중)>..창1:1-2 그대로 이루심인바, [동심합치로 이루는바] Q의 모든 속성 부어주시는 그영의 온전케 하심의 실존 나타나도다..


개역개정] 마4장
===시험을 받으시다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참소자-비방자<내적 원수>)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레마" = Q의 호흡하심인 바 항상 있는 말씀<다바르>인 "로고스"를, 상황에 합당하게 인용하여 발설한, 즉각적인 생생한 말씀을 의미...신8:3에서는 밑줄 친 말씀을 "주님의 입으로 발설된 모든 것(말씀)"으로 영역하고 있다)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Aadversary..대적자<외적>)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비로소 천국을 전파하시다
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어부들을 부르시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네 제자의 부르심 받음<요1장 : 35-37, 40>은 어제였던가 ..(요단 강가에서) 세례요한이 사역하는 중에 <세례요한의  제자들 중> 안드레가 먼저 주 예수께 인도되었고, 그는 그의 형제 베드로를 찾아서 주님께 인도했으며 주님은 그의 이름 시몬을 게바로 바꾸셨다.(요1:40-42)  동일한 일이 야고보와 요한에게 일어났는데, 세례 요한의 제자 두 사람으로 언급된 이가 바로 요한이었고 그는 또한 자기 형제 야고보를 주님께로 인도했다.  따라서 마4장의 (갈릴리 해변에서) 부르심이 있기전에 요1장에서 나온대로 이미 요단 강가에서 구원받았음을 알 수 있다. [요단 강은 매장-부활-끝냄과 싹틈을 의미하며 갈릴리 바다는 사탄에 의해 부패된 세상을 상징한다] . 그러나 요단 강가에서 구원 받았음에도 그들은 그들에게 일어났던 일을 잊어버리고 그저 갈릴리 해변의 고기 잡는 일로, 옛 직업으로 돌아갔으나, 주 예수님은 그들을 잊지 않으셨다. 시험 받으신 후 그분은 사역을 시작하셨고 그들을 찾아 오셨다.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가르치시며 전파하시며 고치시다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25.  갈릴리(요단서북방)와 데가볼리(므낫세반지파구역,,요단동북방10개도시)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요단동편..르우벤. 갓지파 지역)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사마리아는 여기에서  빠져있음에 주의!!


.......사탄은 분명히 자각하는 바, JC께서 성육신하여 참 사람으로서 오셨음을 인정하는 순간 그 자신은 패배하며 끝장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귀신들은 예수를 Q의 아들이라 부른다(마8:29), 그러나 악한 영들은 예수가 육신으로 온 것을 결코 시인하지 않는다(요일4:3). 게다가 악한 영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JC를 Q의 아들로 믿게 하지 않으려 훼방하는 것은, 만일 그렇게 믿게 되면 사람들이 구원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요20:31)].

......TUQ 중의 한 분이신 Q의 아들이 성육신하여 [무흠무결무죄한 인성의,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함 통해 그의 머리를 깨뜨릴, 그 자신 마귀사탄을 죽일, <여자의 후손>] 사람으로 오신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기에(그것은 그의 패배를 시인하는 것이다), 침례 받고 물에서 나오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였고 동시에 아버지는 [그분의 사랑과 기쁨인] Q의 아들로  JC를 인정하셨기에, [이제 그분을 시험함에 있어서] 사람으로서 시험함이 아니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즉 오로지 Q의 아들로서 (제 소견에 좋아보이는 대로) 기적을 통해 당면 문제들을 단칼에 해결해 버리는 것이 어떠냐고 요구한다. 

......<40일간 배 곯았으니...(Q 말씀을 먹고 살아감이 최우선순위가 아니지 않느냐) 너 자신이 당장 배 고프니까 기적을 행하여 돌로 떡을 만들어 먹는 것은 어떠냐> <사람들이 순순히 복종하려면, 먼저 인생들의 주목을 끌어야  성공하기 쉬울텐데, 그런 [종교적으로] 주목 받는 사람으로 드러나 서기 위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것은[..혹은, 그대가 기도해서 죽은 자가 살아나고 가망 없는 병자가 그 자리에서 낫게 된다면.....꼭 급한 용도로 쓸 돈이 필요한데 며칠내로 공급해 주시도록 기도한다면] 어떠하냐....즉, 성경을 한 방면으로만 인용함으로써 유혹하고 있었다.>...그러나, 주 예수님은 오로지 말씀하시기를 ((또, 기록되었으되!!...라고 다른 방면에서 성경을 인용하심으로써 물리치고 계신다....우리는 다만, <주여, 이러저러한 사정이 놓여 있습니다..그러하오나, 그 무엇보다도 오직 주님의 원하신 그 뜻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구합니다>라고 기도함이 옳다.)) 

.....(Q 이야말로 죄인이나 의인 모두 차별없이 이 땅을 사는데 필요한 모든 필요를 정말 잘 아시고 친히 공급하시는 분이시다. 오직 사람은 [내가 지금 Q의 아들의 위치라면 너 사탄에게 시험받을 필요가 없지만 나는 참 사람으로서 네게 시험 받고 있는 것임을 나는 안다...그러므로 너는 지금 나를 유혹하여 둘째 사람으로서의 나의 위치를 떠나도록 하려 한다] 그분의 말씀 따라 사는 것이 합당하며, [그분의 말씀하심이((성경에 항상 있는 말씀은 로고스요, 이제 주님이 신8:3의 말씀, 그것을 인용할 때 그 말씀은 그 상황에 적용된 즉각적인 말씀인 레마<레오..발설하다>가 된다....모든 성경은(성경에 있는 말씀은) Q의 입으로부터 나온 Q이 호흡해 내신 말씀들이다<딤후3:16>)) 없는데도 (따라서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함부로 자의적 판단으로, 괜한 호기심으로] Q을 (신뢰함으로든, 아니면 그 반대 입장으로든) 종교적으로 시험해 보는 것은 [주님을 시험하는 것은 심지어 영원한 멸절을  초래케 할 수도 있는 것이기에 분명히 거절함으로써] Q을 경외하는 참 사람의 입장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계신다....[그러므로 오직 범사에 주님의 원하시는 뜻 그대로 이루심을 구함이 옳다!!....그것이야말로 그대가 그대의 능력 안에서가 아니라 생명 안에서 행하고 있음이다...비록, 기회를 주실 때에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지는 않겠지만 달려 내려오게 될 수도 있을 것이며 최소한 그대가 좋은 주자임을 보여주기 위해 더 빨리 달리려 할 수도 있지만....그러나, 진실로 원수를 패배시키기를 원한다면 그대는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있어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야 하고 나의 그리스도가 모든 것이 되심이 중요하다.... 그 때 원수, 유혹하는 자는 그대와 하나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도살될 것이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탄 자신에게 경배하면 사탄은 자기가 얻은 그 모든 것을 JC께 넘겨주겠다고 하지만, 경배 받기에 합당한 분, 섬김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은 오직 여호와 한 분이심을 선포하심으로써 그 마지막 제의도 거절하고 계셨다.

.....주님의 왕의 사역((교회의 길을, Q의 경륜의 길을 택하여 걷기))으로 들어가려면 제일 먼저 닥치는 시험은 생활에 관한[육신의 영역에서 오는]  시험이다...진정 좁은 길이다...주 보시기에 합당하고 참되게 <먹고 사는 생활의 문제...곧 육신적인 요구는 낮추고(내려 놓고) (오직, 최우선적으로) 영적인 요구를 돌봄>를 돌 볼 수 있어야 함.....[어느덧 well-being과 easy-going, 안전이 우상이 되어버렸으니, 통탄할 일이로다!!] ....(보통, 많은 경우 우리 아내들이 생활의 염려--의식주에 대한 걱정, 장래 걱정에 대해 말하는 것을,. 심지어 <고생스럽고 . 생활 수준이 낮아지리라는 것을 어느정도 예측하여 알 수 있기에> 절대 반대하는 것을 반드시 듣게 된다) 진실을 말하자면 주님이 보시는 영적 측면에서 볼 때, 잘 살기, 즉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직장-합당한 집 갖는 것들은 모두 부차적인 것이요 영적인 음식 먹음이 최우선적이요 일차적인 것이다....우리는 오직 우리의 영이 공급 받는가, 즉 우리의 영이 Q의 말씀과 Q 자신으로 더불어 잔치를 누리는가를 가장 먼저 주의해야 한다..그분은 40일간 육신에 필요한 모든 음식을 저버리심으로써 육신의 요구를 잊어버리셨으나, 영적인 필요를 위해서 자신의 영에 필요한 영양 공급을 위해 무척 많은 것을 드셨다.  그러므로 사탄이 주 예수께서 그동안 광야에서 아무것도 드시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은 전적으로 착오였으니...그분은 육신적인 음식은 금식하고 있었지만 영적인 음식에는 참여하고 계셨다.


---chap.4.---

===The Temptation of Jesus

1 Then Jesus was led by the [Holy] Spirit into the wilderness to be tempted by the devil. 

2 After He had gone without food for forty days and forty nights, He became hungry. 

3 And the tempter came and said to Him, “If You are the Son of God, command that these stones become bread.” 

4 But Jesus replied, “It is written and forever remains written, ‘Man shall not live by bread alone, but by every word that comes out of the mouth of God.’”

5 Then the devil took Him into the holy city [Jerusalem] and placed Him on the pinnacle (highest point) of the temple. 6 And he said [mockingly] to Him, “If You are the Son of God, throw Yourself down; for it is written, ‘He will command His angels concerning You [to serve, care for, protect and watch over You]’; and ‘They will lift you up on their hands, So that You will not strike Your foot against a stone.’”

7 Jesus said to him, “On the other hand, it is written and forever remains written, ‘You shall not test the Lord your God.’”

8 Again, the devil took Him up on a very high mountain and showed Him all the kingdoms of the world and the glory [splendor, magnificence, and excellence] of them; 

9 and he said to Him, “All these things I will give You, if You fall down and worship me.” 

10 Then Jesus said to him, “Go away, Satan! For it is written and forever remains written, ‘You shall worship the Lord your God, and serve Him only.’” 

11 Then the devil left Him; and angels came and ministered to Him [bringing Him food and serving Him].

===Jesus Begins His Ministry

12 Now when Jesus heard that John [the Baptist] had been arrested and put in prison, He left for Galilee. 

13 And leaving Nazareth, He went and settled in Capernaum, which is by the sea, in the country of Zebulun and Naphtali. 

14 This was to fulfill what was spoken by the prophet Isaiah:

15  “The land of Zebulun and the land of Naphtali, By the way of the sea, beyond the Jordan, Galilee [in the district] of the Gentiles—

16  “The people who were sitting (living) in [spiritual] darkness have seen a great Light, And for those who were sitting (living) in the land and shadow of [spiritual and moral] death, Upon them a Light has dawned.”

17 From that time Jesus began to preach and say, “[a]Repent [change your inner self—your old way of thinking, regret past sins, live your life in a way that proves repentance; seek God’s purpose for your life],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The First Disciples

18 As Jesus was walking by the Sea of Galilee, He noticed two brothers, Simon who was called Peter, and Andrew his brother, casting a net into the sea; for they were fishermen. 

19 And He said to them, “[b]Follow Me [as My disciples, accepting Me as your Master and Teacher and walking the same path of life that I walk], and I will make you fishers of men.” 

20 Immediately they left their nets and followed Him [becoming His disciples, believing and trusting in Him and following His example]. 

21 And going on [further] from there He noticed two other brothers, James the son of Zebedee, and his brother John, in the boat with their father [c]Zebedee, mending their nets; and He called them [to follow Him as His disciples]. 

22 Immediately they left the boat and their father, and followed Him [becoming His disciples, believing and trusting in Him and following His example].

===Ministry in Galilee

23 And He went throughout all Galilee, teaching in their synagogues and preaching the good news (gospel) of the kingdom, and healing every kind of disease and every kind of sickness among the people [demonstrating and revealing that He was indeed the promised Messiah].

24 So the news about Him spread throughout all Syria; and they brought to Him all who were sick, those suffering with various diseases and pains, those under the power of demons, and epileptics, paralytics; and He healed them. 

25 Large crowds followed Him from Galilee and the [d]Decapolis and Jerusalem and Judea and the other side of the Jordan.

===Footnotes

Matthew 4:17 Jesus’ public ministry began at this time and He was preaching the same message John the Baptist had proclaimed.

Matthew 4:19 The concept of “follow” can represent three separate possibilities: in the early stages of His ministry, (1) walking with Him physically (literally), that is, merely being in His presence regardless of personal belief or commitment, (2) accepting and identifying with the salvation He offered; and later on, (3) being identified with Him by being subject to the scorn and rejection of unbelievers because of personal belief and commitment to Him.

Matthew 4:21 Zebedee’s wife, Salome, is believed to be the sister of Jesus’ mother Mary. 

Matthew 4:25 The district of the ten Hellenistic (Greco-Roman) cities east of the Sea of Gali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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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4장 (개요)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하기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하였고, 또한 그와 같음이 입증되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베풀고 그에 관하여 증거를 하고 난 후에는 그의 활동에 대해 더 자세한 것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그가 행하려 온 바를 행하였으며, 그 이후에는 요한에 대해 언급했던 것만큼 예수님의 활동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하고 있다. 마치 이것은 태양이 솟아오르면 새벽 별이 사라지는 것과 같이 4장에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Ⅰ. 그리스도께서 당한 시험, 시험하는 자가 그에게 행한 세 번의 공격, 그 공격에 대한 그리스도의 반격(1-11).
Ⅱ. 그리스도께서 떠맡으신 가르치는 일, 그가 전파하신 장소(12-16), 그가 전파하신 주제(17).
Ⅲ.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즉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심(18-22).
Ⅳ. 그리스도의 병 고치심(23, 24), 그리스도에게 가르침과 병고침을 받으려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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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시험(마 4:1-11)
이곳에는 백중지세(伯仲之勢)의 유명한 백병전, 즉 천사장 미가엘과 용,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 아니 뱀 그 자신과의 싸움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 이야기에서 여인의 후손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함으로써 그의 발꿈치를 상하였다. 

그러나 뱀은 그의 시험에서 완전히 실패하였으며 따라서 그의 머리를 깨어졌던 것이다.
우리의 주 예수님은 정복자가 되심으로써 그를 따르는 충실한 추종자들에게 확실한 위로를 보장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시험에 관하여 다음의 몇 가지 사실들을 관찰할 수 있다.
Ⅰ. 이 시험이 일어난 시기, "그 때에"란 말이 강조되어 있다.
그리스도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내려와" 하나님의 아들과 세상의 구세주로 선포된 바로 직후, 우리가 그에 관하여 들은 소식은 "그가 시험을 받으셨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 때에" 그는 시험과 더불어 맞붙어 가장 잘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다음과 같다.
1. 큰 특권들이나 특별한 신적 은혜의 표적이 우리를 "시험"받는 곳으로부터 굳게 지켜 줄 수는 없다.
2. 아니 오히려 큰 명예가 우리들에게 주어진 후에도 겸손케 하는 어떤 것을 기대해야 만 한다. 이것은 마치 바울이 삼층천에 갔다온 후 사탄의 사자(使者)가 그를 때려눕히기 위해 찾아왔던 사실과 대동소이하다.
3. 하나님은 흔히 그의 백성들을 시험하시기 전에 그 시험을 대처할 수 있는 준비를 시키신다. 그는 "날을 따라 힘을 주시며," 쓰라린 시험 전에는 평범한 위로보다 더 큰 능력을 부여하신다.
4.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다는 확신은 시험에 대처할 수 있는 가장 큰 준비가 아닐 수 없다.
만일 선한 성령이 우리의 양자 된 것을 친히 증거 하신다면 양자권에 대한 확신은 우리를 타락시키고 불안케 하려는 계획을 가진 악령의 모든 제안들에 대해 응답해 주실 것이다.
"그 때에," 즉 그리스도께서 엄숙한 세례식을 마치시고 새로이 오셨을 그 즈음에, 다시 말하면 그가 세례를 받으셨을 때 바로 "그때에 시험을 받으신"것이다.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를 가지도록 허락된 후에는 사탄에 의해 기습을 당하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부요해진 영혼은 두 배의 감시와 경계를 해야한다. "너희가 먹고 배부를 그때에 조심하라."
"그 때에," 즉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을 이스라엘에게 나타내어 보이기 시작하셨을 바로 그때에 "시험을 받으셨으며," 이와 같은 시험은 그가 홀로 계실 때에는 결코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마귀는 유용한 사람들, 즉 선할 뿐만 아니라 선행을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그들이 처음 시작할 때에 특별한 악의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시락의 아들에 대한 충고이기도 하다. 즉 "내 아들아, 만일 네가 주님을 섬기려 한다면 시험에 대처할 준비를 하라"이다(Ecclesiasticus ii. 1). 젊은 교역자들은 앞으로 다가올 것과 이에 따른 무장을 단단히 하라!
Ⅱ. 이 시험이 있었던 장소. 그 장소는 "광야"였다. 이
광야는 아마도 모세와 엘리야가 "40일 간 금식하였던 시내산 근처"의 대광야인 것 같다, 그 이유는 유대 광야(유대산지와 사해사이)라면 마가복음 1장 13절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이 들짐승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세례를 받으신 후 예루살렘으로 그에게 주어진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가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광야로 후퇴하여 물러가셨다.
기억하라,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진 후에는 주께 받은 것을  마음중심에 새겨 간직하기 위해 잠시동안 홀로 머물러 있음으로써,  많은 군중과 세상적인 번잡함 때문에 그 받은 바를 쉽게 잃어버리지 않도록 가장 귀한 보배를 감추듯 깊이 간수하는 것이 좋다.
그리스도께서 광야로 물러가신 목적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1. 그 자신에 유익을 얻기 위함이다.
물러남(후퇴)은 하나님과 더불어 명상과 교제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가장 활동적인 생활을 한다고 일컬어지는 자들일지라도 (그럴수록 더욱 더) 반드시 주님앞에서 묵상할 시간, 하나님과 더불어 홀로 있는 시간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그 자신 스스로 은밀하게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의 일들에 관하여 대화를 가지지 못한 사람이 공공연하게 그 일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부적당하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으로서 대중앞에  나타나셨을 때 사람들이 그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는 여행에서 최근에 돌아왔다. 그는 해외에 다녀왔으며 세상을 살펴보았다"고 말하도록 해서는 결코 안된다. 오히려 "그는 광야에서 최근에 나오셨으며, 하나님과 그 자신의 마음과 더불어 대화하시면서 홀로 계셨다"고 말히도록 해야 한다.
2. 그가 광야로 물러가신 것은 시험하는 자로 하여금   유리한 위치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있을 때보다는 시험하는 자에게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선한 마음의 소유자에게는 고독 그 자체가 친구이기도 하지만, 사탄은 그 고독을 이용하여 믿는 이를 시험하는 방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홀로 있는 자에게 화가 있도다."
성결과 헌신을 가장하여 토굴과 광야로 물러나는  사람들이라 해도 그들의 영적인 원수들의 미치는 활동범위를 결코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거기에서 조차 서로 붙들어 줌으로써 상호 유익을 도모할 수 있는  성도간 교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가 물러가신 것은 다음과 같은 일을 하기 위함이었다.
(1) 즉 사탄으로 하여금 제멋대로 일을 하도록 내버려두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승리를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하여 자기편에서 원수가 사용할 수 있는 도구로써 해와 바람을 원수에게 제공하였으나,  원수는 그를 좌절시키지는 못하였다.
그리스도가 마귀로 하여금  유리한 위치를 점유하게 허용 하신 것은 "이 세상의 왕은 그에게 있어서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으므로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고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2) 그리스도께서 광야로 물러가신 것은 그 자신이 전력을 다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 위하여, 즉 그 자신의 힘을 돋우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홀로 포도 짜는 틀을 짓밟으리니," 사람들 중에 나와 같은 자가 없었음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단번에 마귀와의 접전에 돌입하였다.
Ⅲ. 이 시험을 위한 두 가지 준비.
1. 그리스도는 전투를 하도록 명령받았다.
그는 자발적으로 시험에 그 자신을 내맡기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비둘기와 같이 내려온" 성령은 그를 "온유하게" 만들었지만 "담대하게"는 만들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게 조심해야 하지만,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로 우리를 연단 시키기 위해 시험의 환경 속으로 들어가도록 명령하신다면 우리는 이러한 것을 이상히 여겨서는 안되며, 이에 대한 방어를 갑절이나 튼튼히 해야한다는 사실이다.
 "주안에서 강건하라, 신앙 안에서 견고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잘되어 나갈 것이다.
만일 우리 자신의 힘을 과신한 나머지 마귀로 하여금 우리를 시험하도록 시험해 본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게 하도록 자극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느 곳으로 인도하시든지 우리는 그가 우리와 함께 동행하실 것과 "정복자들보다 더욱" 우리를 데려가기를 희망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오직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성령께) 이끌리셨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기 때문이다"(약 1:14).
마귀는 그 핸들을 잡고 있으며,  사로잡은 바 타락한 그 암송아지로 밭을 간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은 타락한 성품을 소유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마치 전사(戰士)와 같이 아무런 두려움이나 떨림이 없이 순전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담대하게 이끌리셨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시험받으신 것은
(1) 그 자신의 겸손과 비하(卑下)의 본보기이다.
시험은 "급격한 돌진이요, 육체의 가시이며, 돌연한 타격이며, 체로 치는 것이며, 씨름하는 것이며, 전투/쟁투하는 것"으로 이 모든 것은 어려움과 고난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을 감수하셨으며, 이는 그가 "이 모든 일에서 그의 형제와 같이 되시기 위하여" 그 자신을 낮추셨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자기를 치는 자에게 기꺼이 등을 돌려주었다."
(2) 그리스도께서 시험받으신 것은 사탄을 당황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투 없이 정복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시험받으신 것은 (JC를 믿고 의지하는 자마다 JC를 힘입어) 시험하는 자를 이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사탄은 첫 아담을 시험하여 이겼지만 언제나 승리할 수는 없었으니, 곧 둘째 아담이 그를 쳐부수어 승리함으로써 그를 포로로 사로잡아 결박해버린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 시험받으신 것은 모든 성도들에게 위안을 준다.
그가 시험받으신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원수는 교묘하고 사악하고 매우 대담하게 시험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원수는 타도될 수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그 원수가 아무리 "강하게 무장되었다"고 할지라도 우리 구원의 대장은 "그보다 더 강하다." 그리스도께서 "시험받으시면서" 고난 당하신 것은 생각만 해도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 왜냐하면 시험이란 그것에 굴복하지만 않는다면 죄가 아닐 뿐만 아니라 이러한 시험들은 단지 고난에 불과하며 때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자들의 신분(몫)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에게는 대제사장이 있으니 그는 실제로 시험을 받아 고난 당하셨으므로 "시험받을 때에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지 않고" 더욱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져 주실 것이다(히 2:18; 4:15).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시험을 받으시되" 우리를 위해 승리하신 것을 생각하면 더욱 위로가 된다. 즉 우리가 맞붙어 싸우는 그 원수는 정복당하여 좌절되고 무장이 해제된 원수일 뿐만 아니라 그 원수를 쳐부수어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를 통하여 우리는 "더 큰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2. 그리스도는 "이기기를 다투는 자가 절제하듯이"(고전 9:25), 전투를 위해 음식을 조절하셨다.
그가 보통 사람들과 달리 더욱 빼어나신 것은 "사십 주 사십 야"를 주리신 것인데, 이는 구약에 나타난 두 인물, 즉 위대한 율법 수여자 모세와 위대한 개혁자 엘리야의 모형과 실례에 준하는 사실이다.
세례 요한은 엘리야로 왔으며 금식한 사실은 단지 도덕적인 것이었고 이적적인 것은 아니었다(요 10:14). 그러한 영예는 그리스도를 위해 마련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금욕이나 고행을 위해 주리실 필요가 없으셨다(그는 억제해야 될 타락된 욕망을 소유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그가 "주리신" 이유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1) 그리스도께서 주리신 것은 그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시고 또한 "아무도 흠모하지 않는" 버리운 자로 보이게 하기 위함이다.
(2) 사탄에게 그리스도를 대적할 수 있는 계기와 장점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귀를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함이다.
(3) 거룩케 하거나 우리에게 금식하도록 권장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로 이 일을 명하실 때는 우리가 궁핍한 지경에 처해 있을 때, 일용한 양식이 모자랄 때, 육신을 억누를 필요가 있을 때, 생기 있는 기도를 해야할 때, 즉 시험을 위한 특별한 준비를 해야 할 때이다.
만일 선한 사람이 낮아지거나, 친구나 구원자가 없어지게 될 때에는, 그들의 주님 자신도 동일한 처지를 당하셨다는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떡이 궁핍하더라도 하늘의 총아(寵兒)가 되거나, 성령의 지배 아래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교황절대주의자(가톨릭교도) 들이 예수님의 사십 일간 금식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관련시켜서] 사순절(四旬節) 금식으로 명명하여 지키는 논거는  일종의 겉치례와 미신에 불과하다(Stat. 3 Eliz. chap. V. sect. 39, 40).
 "그는 사십 일을 주리셨지만" 배고픔을 느끼신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늘과의 대화가 곧 고기요, 양식이었다. 그러나 "금식이 끝나자 그 직후에는 시장기를 느끼셨다."
이것은 그가 참으로 인성의 소유자이심을 나타내 보여 준다. 또한 그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육신적인 연약성을 취하셨다.
사람은 먹는 것으로 말미암아 넘어지며 그 때문에 종종 범죄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굶주리신 것"이다.
Ⅳ. 시험 자체들,
사탄이 그 모든 시험에서 궁극적으로 노린 것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해 죄를 짓도록" 함으로써 영원히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 근본 저의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마귀가 노린 것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① 그의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실망케 하기 위하여
② 그의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케 하려고
③ 그의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영예를 사탄에게 내어 줌으로써 소원(疏遠)케 하기 위함이었다. 위의 ①과 ②에서 마귀가 그를 "하도록"(to) 시험했던 것은 무지함에서 비롯된 것 같으며 여기에는 시험하는 자의 교활함이 나타나 있다.
③에서 그를 "으로써"(with) 시험했던 것능 그것을 가지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앞의 두 항목(①, ②)이 분별할 수 있는 큰 지혜를 필요로 했던 간교한 시험이라고 한다면, 뒤의 항목 (③)은 저항할 수 있는 큰 결심을 필요로 했던 강한 시험이었다. 그러나 마귀는 이 모든 것에서 실패의 쓴잔을 마시었다.
1. 마귀가 그리스도를 시험한 것은 그로 하여금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실망케 하고 그를 보살피는 아버지의 배려를 불신케 하기 위함이었다.
(1) 이 시험이 어떻게 진척되었는가를 살펴보자(3절).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왔다."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마귀는 "시험하는 자"로서 "사단"(대적자)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마귀는 우리의 철천지 원수로서 우리를 범죄하도록 유혹하며, 또한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그의 일을 하며, 그의 계획을 수행한다.
마귀가 강조적으로 "시험하는 자"로 불리워지는 것은 우리의 첫 조상에게도 이와 같은 일을 행하였고 지금도 그렇게 하기 때문이며, 그 밖의 모든 시험하는 자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역사하고 있다.
시험하는 자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을 가지고 그리스도에게 나아왔는데, 이것은 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민할 때와 같이 두려움과 협박을 주던 모습은 아니었다.
일찍이 "자신을 빛의 아들로 가장하였던" 마귀는 지금도 그렇게 가장할 뿐만 아니라 수호신이나 수호천사로 꾸미는 것이다.
이 첫 시험과 이전 것과는 연관하여 그 시험을 더욱 강하게 하려는 "시험하는 자"의 간교함을 살펴보기로 하자.
① 그리스도는 주리셨으므로 그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데 꼭 필요한 영양을 공급하기 위하여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는 것은 매우 적절한 행동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탄의 간계들 중의 하나는 우리의 외부적인 조건을 이용하여 그것을 그의 시험의 포대로 세운다는 것이다.
그는 간교할 뿐만 아니라 매우 조심스럽다. 그가 교활하게 우리를 대적하여 이용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더 부지런하게 그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가 주리셨을 때, 더욱이 그것도 먹을 것이라고는 도무지 않는 "광야에서" 주리셨을 때 마귀는 그를 공격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궁핍과 가난은 불만과 불신앙을 야기시키는 가장 큰 시련으로서 필요에는 법칙이 없다는 격언을 구실로 삼아 우리의 안락을 위해 부당한 수단을 사용하도록 유혹한다는 사실이다.
굶주림이 돌로 된 벽을 깨뜨릴 것이라는 사실은 이것으로 변명되지만 그 변명이 결코 합당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에게 돌로 된 별돌보다 더 강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굴이 가난에 대해 기도한 것은 그것이 고통이나 비난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시험이 되기 때문이다. "즉 내가 가난하기 때문에 도적질하게 될까봐 두려워하나이다." 그러므로 궁핍한 처지에 몰리게 된 자들은 그들의 방어를 갑절로 대비해야 하며, 또한 죄로 말미암아 살고 번창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굶주려 죽는 편이 나을 것이다.
② 그리스도는 그 즈음에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으며, 여기에서는 마귀가 그로 하여금 이러한 사실을 의심하게 하려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는 말로 유혹하고 있다.
마귀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면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또한 이 예수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추측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리스도가 지금 그의 영광을 덮은 베일을 벗기지 않았거나 또한 마귀가 철면피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면 이와 같은 말을 감히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첫째, "너는 지금 하나님의 아들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받고 있다.
만물의 상속자인 하나님의 아들이 과연 이렇게 궁핍한 처지로 떨어질 수 있을까? 만일 하나님이 네 아버지라면 그는 네가 굶주려 죽는 것을 차마 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삼림의 모든 짐승들이 다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시 50:10, 12).
하늘로부터의 소리, 즉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소리는 실제로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히 망상에 불과하며, 너는 그것에 속은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네 아버지가 아니든지 매우 몰인정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1. 사탄이 좋은 사람을 시험할 때 크게 노리는 것은 그들과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려 버림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신뢰, 그에게 대한 의무, 그와의 교제를 단절시켜 버리는 것이다.
형제의 위로자로서의 선한 성령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입증하지만, 형제의 고소자로서의 악한 영은 할 수만 있으면 그 증거를 동요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2. 사탄은 외부적인 고통이나 궁핍, 무거운 짐 등을 근거로 내세워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의 부성적인 사랑이 참으로 그들과 함께 한다면 고통은 있을 수 없다는 식으로 그들의 양자 됨을 의심나게 한다.
그들은 이 시험에 대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잘 알고 있으며, 경건한 욥과 같이 "그가 나를 죽일지라도, 그가 나를 굶기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지할 것이며, 그가 비록 원수와 같이 나를 대적하러 나오는 것같이 보일지라도 그를 친구로 사랑할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3.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믿음을 흔들려고 의도하며, 그 말씀의 진리에 대하여 의심나게 한다.
따라서 마귀는 처음부터 우리의 첫 조상에게 "그래,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나?라고 속삭이면서, "정녕 그렇게 말씀하시지는 않았을꺼야"라고 말로 의심을 자아내게 만들었던 것이다.
여기에서도 마귀는 "참으로 하나님이 너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하더냐? 정녕 그는 그렇게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혹 그가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들 중 여하한 진리에 대해서라도 의심할 때는, 바로 그 때가 "마귀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때"임을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거짓의 아버지인 마귀가 하는 주임무는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반대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4. 마귀가 그의 계획을 수행할 때는 대부분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하나님은 몰인정하고 불신실 하거나 또는 용감하게 자신들의 모든 것을 포기하거나 잊어버린 것처럼 꾸며 그에 대해 강팍한 생각을 가지게 한다.
마귀는 우리의 첫 조상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지식의 나무를 금하셨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려고 갖은 애를 다 쓰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귀는 지식의 나무로 말미암아 그들이 이익을 얻게 될 것을 질투하고 꺼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귀는 여기에서 우리 주님에게 넌지시 속삭이기를 그의 아버지는 그를 내어던져 버렸으며, 자기 힘으로 모든 일을 꾸려 나가도록 방치해 두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암시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이며, 또한 어떻게 쉽사리 답변되었는가를 살펴 보라.
만일 그리스도가 시장기를 느끼셨기 때문에 이제 단순한 사람으로 보였다면, "40일을 금식하신 후에"는 사람 그 이상인 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왜 고백하지 않았는가?
둘째, "너는 지금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 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가지고 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아마 그 앞에 놓인 돌무더기)이 떡덩이가 되게 함으로써 그것을 증명하라(3절).
세례 요한은 언젠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흔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했으니,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능력은 그 자녀들을 위하여 돌들로 떡덩이를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만일 네가 그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네 자신을 위해 필요한 시기인 바로 지금 그 일을 행하라."
마귀는 "돌들로 떡덩이가 될 수 있도록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고, "그렇게 되라고 명령하라"고 하였다. 즉 네 아버지는 너를 버렸으므로 이제는 네 스스로 자립하여 더 이상 네 아버지의 신세를 지지 말라는 것이었다.
마귀에게는 겸손이라곤 조금도 없으며 하는 일마다 건방지다.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할 마음을 그만 두게 할 수만 있다면 자기의 의견을 통하게 하며, 또한 혼자서도 충분히 자급자족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2) 이 시험은 어떻게 격퇴되고 극복되었는가를 살펴보자.
① 그리스도는 그것에 응하기를 거절하였다.
그는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라고 명령하시지는" 않았으며, 그것은 그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은 아니었다.
바로 이 시험을 받고 난 후 그리스도께서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으며," 이러한 그의 능력은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왜 그는 이와 같이 하시지 않았는가? 언듯 보면 이 일은 매우 타당한 듯 보이며, 참으로 시험이 그럴 듯하고 겉으로 아름답게 보이면 보일수록 더 위험하다.
이 일은 논의할 것이었지만, 그리스도는 즉각적으로 풀 속에 도사린 뱀을 알아차리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는데, 즉 ① 그가 하늘로부터 들었던 음성에 대한 진리를 의문시하거나 이미 결정된 것을 새로이 시험하려고 하는 듯한 일이나 ② 그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불신하려는 듯하거나 그로 하여금 그를 위해 준비한 한가지 특별한 방법에 제한하려는 듯한 일. ③ 그 자신을 내세우거나 그 자신이 조각사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 ④ 사탄의 거동에 따라 일을 함으로써 사탄을 만족시키는 듯한 일 등을 도무지 하시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실이 마귀에게도 응분의 몫을 주려는 좋은 계획이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시종드는" 자가 마귀와 논의하는 것은 응분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셨음에도 에그론 신에게 물었던 것과 같다.
② 그리스도는 마귀의 이 질문에 답변하려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4절).
그는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으로써 사탄의 모든 시험에 대답하시고 좌절시키셨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영원한 말씀으로서 모세의 글에 의거하지 않고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제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성경 말씀을 존중하셨으며, 또한 율법에 쓰여진 것에 호소함으로써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다.
그는 기록된 말씀에 대해 의심할 여지없이 충분히 잘 알았다고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사탄에게 하신 것이다. 마귀의 자녀들이라도 하나님의 책에 기록된 것을 매우 잘 알 수 있다. 즉 "마귀도 믿고 떠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죄에 대한 시험을 받을 때마다 이 방법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기록되었으되"란 말로 시험을 저항하고 격퇴시켜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으로서 기독교인의 전신무장 중에서 유일한 공격용 무기이다(엡 6:17). 또한 이것을 마치 다윗이 골리앗의 검에 대해 말하듯이, 우리의 영적인 투쟁에 있어서 "그와 같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대답은 다른 세 가지 대답과 같이 "제2율법"을 의미하는 "신명기"에서 인용한 것인데, 이 책에는 의식적(儀式的)인 것이라고는 거의 없다.
레위적인 제사나 정결은 그것이 비록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이라 할지라도 사탄을 내어쫓을 수가 없거늘 하물며 인간이 만들어낸 성수(聖水)나 십자가 상(역주:카톨릭 교회에서는 이것을 의식에 사용하거나 붙이고 다님)이랴! 그러나 신앙과 혼합된 도덕적인 교훈이나 복음적인 약속들은 사탄을 물리치는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있는 말씀은 신명기 8장 3절에서 인용되었는데,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나로 양육하신 것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것임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이 말씀을 그 자신의 경우에 적용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불러낸"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호 11:1),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였다(마 2:15). 그때에 이스라엘은 광야에 있었고 그리스도도 지금 광야에 계시며, 아마 그 광야는 동일한 광야였는지 모른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 수 있다.
첫째, 마귀가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의 아들 됨을 의심하게 한 것은 그가 궁핍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아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들의 소행을 참고 사랑하였던 그의 아들이었지만 그들을 궁핍한 처지에 있게 하였다"고 하였다.
인용된 이 구절에 이어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신다"(신 8:5)고 기록이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성자로서의" 그리스도는 "순종을 체득하고 있다."
둘째, 마귀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의 아버지의 사랑과 배려를 불신케 하려고 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아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이 궁핍에 처해 있을 때,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냐? 또는 그가 광야에서 탁자를 마련할 수 있느냐? 떡을 줄 수 있느냐?고 말했던 것과 똑 같은 일을 하는 격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셋째, 마귀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가 주리시기 시작할 바로 그 무렵에 즉시로 먹을 것을 찾도록 하려고 했다.
한편 하나님은 현명하고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을 먹이기 전에 굶주리게 함으로써 겸손하게 하고 시험을 받게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궁핍할 때에 그들을 기다리실 뿐만 아니라 호위할 것이다.
넷째, 마귀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의 굶주림을 떡으로 채우도록 하려고 했다.
그리스도는 말하기를 "아니다. 그렇게 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로 40일간 살았던 것과 같이 사람이 떡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것은 오랫동안 아무런 의의없이 입증되어온 정설(定說)이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그의 섭리 가운데서 일반적으로 "지면에서 나오는 식물"(욥 28:5)로 사람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만일 그가 기뻐하신다면 사람을 생존시키기 위하여 다른 방법도 사용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 하나님이 그 목적으로 명령하시고 지정하신 어떤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빵과 같이 좋은 생계 수단이 될 것이며, 그들의 생명을 잘 연장시켜 줄 것이다.
우리가 "떡을 가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의 축복을 몰리치신다면 배부르지 못할 것이며(학 1:6, 9; 미 6:14 , 떡이 목숨을 지탱해 주지만, 실제로 목숨을 지탱해 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떡이 부족하여"도 다른 방법으로 배부를 수 있다.
하나님은 떡 없이도 모세와 엘리야를 생존케 하셨으며, 바로 지금 그리스도 자신이 사십 일 동안 떡 없이도 사신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 즉 천사의 음식으로 이스라엘을 양육 하셨고, 엘리야 에게는 기적적으로 까마귀가 날라다 준 떡과 기적적으로 늘어난 과부의 밀가루로 배불리셨으며, 따라서 그리스도는 돌들로 떡이 되게 할 필요가 없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주리시기 이전 사십 일 동안 행하셨던 것같이(역주:그리스도는 사십일 동안 금식하신 후에 주리셨음) 현재 주린 상태에 있는 그로 하여금 다른 방법으로 살게 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가장 부요 할 때에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가장 궁핍할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는"것을 배워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무화과나무가 꽃을 피우지 않을 때, 들판이 고기를 내지 않을 때" 원조와 공급의 일상 수단이 끊어졌을 바로 그때에 우리는 "여호와를 즐거워해야"한다.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위배되는 것이지만 자신의 임의대로 원하는 것에 대하여 명령하려고 해서는 안 되며, 그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장 합당하게 생각하여 주려고 하는가를 기도해야 한다. 또한 그것이 비록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일용한 양식을 주심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우리가 여기에서 배울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찾으신 것이지 그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또한 우리의 궁핍이 매우 절박할 때에 변칙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쓸 것을 공급해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배워야 한다(시 37:3).
"여호와 이레," 즉 여호와는 여하한 방법으로도 "준비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의 열매를 의지하여 가난하게 사는 것이 우리 자신의 죄의 소산물에 기대어 풍족하게 사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다.
2. 마귀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의 아버지의 능력과 보호하심을 믿도록 유혹하였다. 마귀는 얼마나 끈질기고 지칠 줄 모르는 원수인가! 그가 한 번 공격하여 실패했다면, 또 공격하려고 준비하는 것이다.
이 두 번째의 공격 시도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있다.
(1) 그 시험은 어떤 것이었으며, 또한 어떻게 수행되었는가를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마귀는 아버지께서 그를 양육하신다는 점에서 그의 돌보심을 매우 확신하고 있다고 알아차린 후 그로 하여금 그를 안전하게 보호하신다는 점에서 그의 돌보심을 믿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는 좌우 양편에서 자칫하면 길을 잃어버릴 위험에 놓일 때가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한편을 피할 때, 사탄의 간교함에 넘어가서 다른 편으로 달려가 치우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하며 또한 더불어 방탕과 방종을 극복함 통해  탐욕에로 떨어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우리의 영혼 문제에 있어서 차근차근 한걸음씩 나아감이 아니라  미리 앞서서 염려함따른 섣부른 실망이나 짐짓추측보다 더 위험한 극단은 없다.
어떤 사람들은 진실로 그리스도가 그들을 "죄로부터"(from sins) 구원할 수 있으며, 또한 구원하려고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으면서도 때때로 그가 그들을 죄에 자신을 방치해 둔 상태, 곧  "죄 가운데서"(in sins) 구원하실 것이라고 믿도록 미혹 당할 때가 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이 열심으로 경건에 힘쓰려고 할 때 사탄은 급히 서둘러 그들을 완고한 신앙과 매서운 더위 속으로 몰아놓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 시험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살펴볼 수 있다.
---① 마귀는 이 시험을 어떻게 진행시켰는가?
그는 그리스도를 억지로나 강압적으로 이끌어간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스스로 예루살렘으로 가게 유도함으로써 자신을 따르게 했다. 물론, 그 당시 그리스도가 지면에 계셔서 계단을 거쳐 성전 꼭대기로 가셨는지, 또는 공중으로 가셨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그가 "성전의 작은 뽀족탑"(pinnacle 또는 spire)이나 "신전"(fane, 어떤 사람들의 주장), 흉벽(胸壁)(battlements, 어떤 사람들의 주장), 익면(翼面), (wing 단어의 뜻)에 놓여지신 것만은 확실하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으로 하여금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기 위해 이와 같이 재촉되어 시험을 받는데 그대로 순응하였다.
그렇지만 마귀는 그를 꺼꾸러뜨릴 수 없었다. 여기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인내는 후에 그가 고난받고 죽으실 때와 마찬가지로 사탄이나 그의 하수인들의 능력보다 더 크고 놀라운 것이었다.
사탄이나 그의 하수인들은 "위로부터 그들에게 주어진 것" 이외에는 그리스도를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거스리는 사탄의 능력을 풀어놓아 주지만 우리를 거스리도록 그와 같이 내버려두지는 않으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그것을 견제하신다는 이 사실을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인가!
둘째, 마귀는 그의 시험할 장소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매우 교활하였다.
마귀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거나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뢰를 헛되게  하기 위하여 인구가 조밀하고 "온 땅의 즐거움"인 예루살렘의 공공연한 장소로 그를 이끌어간 것이다.
세상의 경이 중 하나인 성전은 뭇 사람들의 존경과 흠모를 한 몸에 지니고 있었다. 바로 이 장소야말로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을 드러내어 많은 사람들에게 내보임으로써 그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절호의 장소가 될 수도 있었다.
즉 이것은 그가 광야의 어둑한 곳에서 겪은 이전의 첫 번째 시험 때에 몰아 부쳐진 것과는 달리 많은 무리들 앞에서 모든 행동이 가장 잘 두드러지게 보이는 곳에서 시험 당하신 것이다. 이 사실을 더 자세히 고찰해 본다면,
1. 여기에서 예루살렘이 "거룩한 성"이라고 불리운 것은 이름과 신앙 고백에서 그러하였고, 또한 그 안에는 그 성의 실체였던 "거룩한 씨"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알아야할 것은, 이 세상에는 마귀와 그의 시험을 면하거나 그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만큼 "거룩한 성"은 없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 아담은 "거룩한 동산"에서 시험받았지만, 두 번째 아담은 "거룩한 성"에서 받으셨다. 그러므로 어떠한 장소에서도 우리의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자. 아니, "거룩한 성"은 마귀가 큰 장점을 가지고 성공리에 사람을 교만하고 건방지게 하도록 유혹하는 장소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위에 있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는 어떠한 불결한 것도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영원무궁토록 시험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2. 마귀는 그를 "성전 꼭대기"에 두었는데, 이 꼭대기는(조세푸스가 Antiq. lib. XV. cap. 14에 기록한 것과 같이) 매우 높았으므로 사람이 이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알아야할 것은 성전 꼭대기가 시험의 장소라는 사실이다. 나는 이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1) 높은 장소는 다 이와 같다.
즉 높은 장소는 미끄러지기 쉬운 곳이다. 세상의 출세는 사탄으로 하여금 그의 난폭한 화살을 겨냥하여 쏠 수 있는 선명한 표적을 만든다.
하나님은 내려뜨린 후 일으켜 세우지만, 마귀는 일으켜 세운 후 내려뜨린다. 그러므로 넘어질까 조심하는 자들은 기어오르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2) "교회에서의" 높은 자리는 특별한 방식에서 위험스럽다.
은사면에서 특별한 사람들이나, 주요한 직책을 맡은 사람들, 또는 큰 명성을 얻은 사람들은 겸손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사탄은 확실히 그들을 겨냥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만에 부풀게 함으로써, "마귀의 저주 속으로 떨어지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높은 위치에 서 있는"자는 모름지기 "견고히 서 있기를" 유의해야 한다.
---② 마귀는 어떻게 이 시험을 일으켰는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지금 네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어 보임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라. 네 자신이아래로 뛰어내리라. 그리하면,
① "네가 하늘의 특별한 보호 아래 있는 것으로 뭇 사람들의 존경과 찬탄을 받을 것이다.
네가 이렇게 높은 벼랑에서 떨어질지라도 다치지 않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멜리데의 토인들이 바울에게 말하였던 것 같이), 당신은 하나님이라고 말할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박수인 시몬"은 바로 이와 같은 일로 그 자신이 신(神)임을 증명하려고 했지만 그의 거짓은 이내 탄로나 버렸다. 왜냐하면 그는 거꾸러져 처참하게 찢기웠기 때문이다.
② "네가 하늘로부터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온 것으로 영접을 받을 것이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네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그 이상의 분이라는 것과 "홀연히 그 전에 임하실"(말 3:1) 언약의 천사, 즉 사자(使者)라는 것을 알고 깨닫게 될 것이며 또한 그 이후로 거룩한 성의 거리로 퍼질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신시키는 일을 간단히 끝나 마무리될 것이다."
마귀가 "뛰어내리라"고 말한 것에 유의하라. 비록 사소한 일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마귀는 결코 그를 성전 꼭대기에서 내어 던질 수 없었다.
여기에서 알아야할 것은, 사탄의 능력은 제한되어 있으며, "이제까지 왔지만 그 이상은 더 나가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만일 마귀가 "그를 내어 던져 떨어지게 했다면," 자기의 주장을 내세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마귀에 의해 강제적으로 밀쳐냄을 당하였다면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어떠한 불행이 우리에게 닥친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자신의 행동 여하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단지 "뛰어내리라"고 말할 수 있지만 억지로 뛰어내리게 할 수는 없다. 사람마다 시험을 받는 것은 그 자신의 정욕에 이끌릴 때이며, 그것은 강제적이 아니라 유혹을 받아 스스로가 이끌릴 때이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 해를 입지 말자." 그 누구도 우리를 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자(잠 9:12).
---③ 그리스도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시험을 물리치셨는가?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라." 그러나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는가?" 사탄도 성경 말씀을 재빨리 인용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숙달되었는가? 아마도 그런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마음에 하나님과 모든 선에 대하여 적대심으로 가득찬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머리는 성경 말씀의 개념으로 꽉 차있고, 입으로는 거침없이 성경적인 표현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마귀가 성경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은 그들의 불행과 고통을 증가시킨다. 마귀는 그리스도에게 "나는 네가 누구인지를 안다"고 말했을 때보다 더 그 자신이 화나게 말하지는 않았다.
마귀가 그리스도에게 "뛰어내리라"고 말한 것은 그 스스로가 자살자가 되어, 그 자신이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그리스도와 그의 임무를 끝장나게 하려고 했다.
마귀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이 일을 하도록 권하기 위해 그에게 전혀 위험이 없다는 것과 사자들이 그를 떠받들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었으며(시 91:11),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속살거렸다. 이 인용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여기에는 "옳은 것"이 있었다.
성도의 보호를 위해 천사들의 직무에 대한 이러한 약속들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마귀는 경험으로 이와 같은 것들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마귀는 그들에게 대항해 보아야 아무런 소득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또한 그렇게 두드러지게 말한 욥에 대해 철저한 봉쇄를 감행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그것에 대해 조바심을 내고 격노하는 것이다.
그가 이 말씀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한 것도 역시 옳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성도 보호에 대한 모든 약속은 원래적으로 또는 두드러지게 그에게 속한 것이며, 또한 그들에게는 그를 통하거나 그 안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뼈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않을 것이라"(시 34:20)는 약속은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요 19:36). 천사들은 그리스도를 인하여 성도들을 보호하시는 것이다(계 12:5, 11).
둘째, 이 성경 말씀의 인용에는 커다란 "잘못"이 있었다.
아마도 마귀는 이 약속을 대항하려는 특별한 흉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그것을 악용하였다. 왜냐하면 이 약속은 그의 길에 훼방을 놓았으며, 성도들을 대적하려는 그의 악랄한 계획들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1. 마귀는 이 성경 구절을 "잘못 인용하였다." 또한 그것은 매우 사악하였다.
그 약속은 그들이 "당신을 지켜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네 모든 길에서" 그 밖의 뜻은 없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길에서" 벗어나 버린다면, 우리의 의무의 길에서 벗어난다면, 우리는 약속을 잃어버리게 되고, 따라서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시험하는 자를 거스리게 했고, 따라서 마귀는 부지런히 이 말씀을 무시해 버렸던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밑으로 뛰어내리셨다면" 그는 하나님의 길을 벗어나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사명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필요에 따라서 종종 하나님의 말씀을 참고로 하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무용지물로 만들거나 뒤섞어버리는 자들에게 속지 않도록 사물들에 신뢰를 두지 않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는 매일 성경을 상고하였던 숭고한 베뢰아인들과 같이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마귀는 성경 말씀을 "잘못 적용하였다." 그것은 더욱 나쁜 일이었다.
성경은 죄를 장려하는 것이 강조될 때에 잘못 악용된다. 따라서 사람이 성경 말씀을 그들 자신의 시험에 맞추어 왜곡시킬 때 "스스로의 멸망을 자초하고야 만다"(벧후 3:16).
이 약속은 견고하며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마귀가 신적 배려를 믿도록 격려하는데 이 말씀을 사용할 때는 "그릇되게 사용하고" 마는 것이다.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릇된 것으로 바꿔지는 것"이나 또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한 뜻을 발견한 것에 근거를 두어 죄 가운데서 격려를 받는다는 것은 결코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면 "은혜가 풍성하기 위하여 죄 가운데 계속 머무를 것이냐?" 천사가 우리를 떠받들게 하기 위하여 뛰어내릴 것이냐? 하나님은 이를 금하시고 계신다.
(2) 그리스도는 어떻게 이 시험을 극복하셨는가?
그는 조금 전에 말씀하신 "기록되었으되"라는 말로 이 시험을 물리치고 승리하셨다. 마귀가 성경을 "악용"한 것이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것은 사용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지는 못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즉시로 신명기 6장 16절, 곧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는 말씀을 힘주어 강조하셨다. 이 의미는 "그러므로 너는 나를 시험하지 말라"가 아니라, "그러므로 나는 내 아버지를 시험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 말씀이 인용된 구약 성서에는 "너희는 시험하지 말라"라고 복수로 되어 있으나, 이곳에는 "너는 시험하지 말라"고 단수로 되어있다. 여기에서 알아야할 것은 우리가 각별히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일반적인 약속들을 경청하고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탄은 말하기를 "기록되었으되"(역주:개역 성경에는 "기록하였으되"로 되어 있음), 예수님도 똑같이 "기록되었으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것은 성경 구절의 서로 배치되지 않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며, 그의 말씀도 하나이며, 또한 하나님은 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다.
그러나 전자는 약속이며 후자는 계명이다. 그러므로 전자는 후자에 의해 설명되고 적용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성경에 대한 최고의 번역자이기 때문이다. 예언을 하거나 성경을 해설하는 자는 이 일을 믿음의 분수대로(롬 12:6), 계속적으로 실제적인 경건으로 행해야만 한다.
만일 그리스도가 "뛰어내렸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① 이것은 이미 완전히 확인된 것에 대해 "더욱 확실한 확증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이미 자신의 아버지이셨다는 사실과 그를 보살피고 천사로 하여금 자신을 떠받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충분히 확신하고 만족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새로운 경험으로 확인하려는 것은 마치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를 시험하듯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이미 지상에서 많은 기적 기사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제한하고 있다.
② 이것은 할 필요가 없는데도 "특별한 보호를 요청"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시지 않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의무의 길에서 자신을 뒤따라야만 하며, 우리의 궁핍을 채워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자신의 비위를 맞추고 자신의 취미를 즐겁게 해 주어야 하며, 또한 우리를 지켜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기꺼이 우리 자신을 위험 속으로 뛰어들 수 있으며, 지정된 수단을 사용하지 않아도 소원하는 것은 끝까지 다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그것은 한낮 망상에 불과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만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그러한 분이라면 죄악은 더욱 더 악화될 것이며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할 특권을 악용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는 이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를 믿으라고 권고하였지만 우리가 그를 시험한다면 그것은 배은망덕한 일이 될 것이다. 즉 이것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 그분에게 마땅히 해야할 의무에도 배치된다.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영광 돌려야할 분에게 공공연히 모욕을 주는 행동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 이상의 어떤 것을 스스로 약속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3. 마귀는 "어둠침침하고 소름이 끼치는 우상," 즉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시험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1) 마귀는 어떻게 이 시험으로 주님을 공격하였는가?(8,9절)
가장 악질적인 시험이 맨 나중에 마련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때로 성도의 마지막 접전은 "아낙" 자손들과 더불어 싸우는 것이며, 마지막 타격은 격심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공격이 우리에게 엄습해 오더라도 우리는 그것에 대처할 준비를 갖추어야 하며, 좌우편에 의의 갑옷을 입고 모든 공격에 대해 이를 단호히 격퇴할 수 있도록 완전무장을 해야한다.
---① 마귀가 보여 준 "천하만국."
이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마귀는 그를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갔다. 발락이 발람 선지자에게 원했던 것처럼 마귀는 승리를 기대하여 전 지면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성전 꼭대기는 그렇게 높지 않았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임금인 마귀는 그리스도를 이끌어 그의 영토에서부터 더 높이 올라가야만 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기록된 높은 산은 요단강 맞은 편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추측한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 1장 28, 2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시험을 받고 나신 바로 직후에 그곳에 계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높은 곳은 모세가 하나님과 더불어 기도할 때에 그가 모세에게 가나안의 모든 나라들을 보여 준 바 있는 "비스가산"일지도 모른다.
우리 주님은 마귀에게 이끌리어 이곳에서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마귀는 세상에 대해 천하 만국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통치하신 주님께서 이미 알고 계셨던 것보다 더욱 더 많은 것을 보여 줄 듯이 그를 데리고 간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비록 그 영광은 아닐지라도 유대 인근에 위치한 몇 개의 왕국들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의심할 여지없이 속임수와 미혹이 있었다. 아마 마귀가 보여 준 것은 단지 하나의 경치, 즉 대사기군이 쉽사리 세우고 짜맞추는 것과 같은, 구름 속의 공기와 같이 가볍고 환상적인 표현들에 불과하였다.
어울리고 생생한 색으로 왕들의 영광과 휘황찬란한 모습들을 나타내었으며, 그들의 화려한 옷들과 왕관, 수행원들과 마차, 경호원들, 또한 화려한 행차, 어전회의 품위 있는 궁전들, 성 안에 있는 사치스러운 건물들, 부귀영화와 쾌락의 극치를 보여 주는 데 저택의 정원들과 들판들을 진열하여 나타내 보임으로써 강력하게 마음을 끌어 탄성을 발하며 이것들을 좋아하게 되기를 바랐다.
마귀가 그를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보인 것은 단지 "그것들에 심취되게" 하며, 또한 속임수를 착색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 시험에 속지 않으셨으며 이 속임수들을 꿰뚫어 보셨다. 그리스도께서 사탄이 하는 짓을 그대로 내버려두신 것은 그의 승리를 더욱 빛내기 위함이었다.
사탄의 시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이러한 시험들은 마땅히 보아야할 것을 보지 못하는 어두운 "눈"을 가진 사람에게 밀어닥친다. 또한 마땅히 돌이켜야할 허영심에 눈을 현혹함으로써 시험한다.
첫 번째 범죄는 눈에서 시작되었다(창 3:6).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눈과 더불어 계약을 맺고 하나님께서 이 허영심을 보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둘째, 이러한 시험들은 일반적으로 세상과 그것의 사물들에서 비롯된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마귀가 시험할 때 사용하는 가장 매력적인 주제이다.
셋째, 이 시험은 마귀가 빈약한 영혼들을 유혹할 때 사용하는 "큰 속임수"이다.
그는 속이고 파괴한다. 마귀는 어두운 그림자와 거짓된 색채로 사람을 속이며, 세상과 그 영광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 모든 영광의 자랑을 더럽히는 죄나 슬픔이나 죽음, 또는 큰 재산에는 늘 붙어 다니는 염려와 재난, 왕관에 둘러쳐 있는 가시는 감추어버린다.
넷째, "세상의 영광"은 "지각이 없거나 경솔한 자"에게 가장 매력적인 시험이며, 사람은 대부분 이 시험에 속아 넘어간다.
"라반"의 아들들이 "야곱"을 질투하고 미워한 것은 "이러한 모든 영광들" 때문이었으며, "이생의 자랑"은 가장 위험한 덫이다.
---② 마귀는 그리스도에게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9절)고 말하였다.
마귀는 앞서의 시험에서 다소간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마귀가 요구했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귀는 여기에서 그리스도를 단지 하나의 인간으로 보아 넘기고 있다. 마귀는 말하기를 "보라, 네가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아버지는 너를 버렸고 굶어 죽게 하지 않느냐! 그것이 바로 네 아버지가 아니라는 표식이야. 그러나 만일 네가 나의 지배를 받는다면 하나님이 하는 것보다 더 잘해 줄 수 있어. 나를 너의 아버지로 삼고 축복을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마귀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도록 설득할 수 있을 때는 사람들이 쉽사리 달라붙을 수 있는 미끼를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이 약속의 기만성은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는 데 있다. "이 모든 것"이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참되고 실속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지도와 그림, 환상에 불과하였다.
마귀는 이러한 것을 그에게 주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사탄의 속임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있지 않은 것을 바라봄으로써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마귀의 미끼는 모두가 가짜 모조품이다. 이 모든 것들은 마귀가 그들을 속이거나 그들이 그들 스스로를 속이는 한낮 겉치레와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지상의 나라들"은 오래 전에 메시야에게 약속되었었다. 만일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세상의 나라들은 그에게 속할 것이다.
사탄은 선한 천사, 아마 왕국을 넘겨 줄 수 있었던 천사들 중의 하나인 것처럼 가장하였고, 또한 약속을 따라 그에게 소유물을 넘겨주는 사명을 맡은 자로 행세하였다.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일지라도 마귀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받기를 조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죄악된 방법으로 그것을 붙잡음으로써 그 실행을 촉진하게 될 때 특히 유의해야 한다.
둘째,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이라는 조건은 얼마나 야비한가?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마귀는 "경배 받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이방인들은 그들의 신들에게 드리는 경배는 모두 마귀에게 하는 것이며(신 32:17), 따라서 마귀는 "이 세상의 신"이라고 불리 운다(고후 4:4; 고전 10:20).
마귀는 이방인들의 우상 숭배를 추어올리고 그것을 다시 유대인들에게 소개하려고 선생으로 자처하였으며, 그때에 세상의 나라들은 곧 그에게로 몰려들 것이라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흥미를 돋우어 설득하려고 했다. 이보다 더 가중되고 음흉한 시험이 또 있을까?
여기에서 알아야할 것은 최고의 성도는 최악의 죄에로 시험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특별히 우울의 세력 아래 있을 때이다. 죄악의 죄란 무신론, 불경죄, 살인, 자살 등과 같은 것들이다.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역경임에 틀림없으나, 그것에 동의나 시인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죄는 아니다. 그리스도는 사탄을 경배하라는 시험을 받았다.
(2)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마귀의 돌격을 방어하시고, 그 공격을 좌절시키셨으며, 또한 어떻게 정복자가 되었는가를 살펴보자.
① 그리스도는 혐오와 증오로써 마귀의 제안을 물리쳤다. 즉 그리스도는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앞의 두 시험은 생각할 여유를 주는 듯한 어떤 느낌이 있었으나 이 시험은 어떤 담판의 기회도 허용하지 않을 만큼 순간적이며 전격적이었다. 첫눈에 혐오할 만큼 보였으므로 즉시 거절해 버린 것이다.
만일 이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이상과 같이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고 우리에게 제안했다면 꾸준히 들어서는 안 된다(신 13:6, 8).
어떤 시험들은 그것들의 사악함이 앞 이마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이미 공개되어 있는 것들이며 논쟁할 필요없이 단번에 거절해 버리야 한다. 즉 "사단아 물러가라. 거둬 치우라. 나는 그런 생각을 도저히 할 수 없단 말이야!"라고.
사탄이 그리스도로 하여금 스스로 뛰어내림으로써 불행을 자초하도록 시험했을 때, 그는 이에 굴복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듣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 시험이 하나님을 향해 정면으로 대들어온 이상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단호히 "사단아 물러가라"고 명령하였다.
하나님의 명예를 손상시키거나 그의 왕관에 일대 타격을 가하는 어떤 일의 제안에 대해 의분(義憤)을 내는 것은 정당한 것임을 유의하라. 아니, 주님이 미워하시는 것으로 확신되는 가증한 것은 무엇이든지 이와 같이 철저히 미워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것들을 멀리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시험을 물리는데 있어서는 단호해야 하며, 사탄이 속살거리는 말에는 우리의 귀를 막는 것이 좋다는 사실이다.
② 그리스도는 마귀의 이 제안을 성경에서 끄집어낸 논증으로 거절하였다.
죄를 대항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결심을 굳게 하려면 그러한 결심에 대한 상당한 논거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좋다. 신명기 6장 13절과 10장 20절에서 인용한 논증, 즉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는 말씀은 그 목적에 완전히 부합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마귀가 빛의 천사(그는 빛의 천사로 가장하였다)인지 아닌지를 논쟁하지 않았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마귀에게 경배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오직 경배하고 영광 돌릴 분은 하나님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마귀로 하여금 반대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하여 시험에 답변하는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충분하고 간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주님은 이 경우에 긴요하면서도 보편적으로 필수적인 기본법을 사용하고 있다. 종교적인 경배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드려야 하며 또한 어떤 피조물에게도 바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분리될 수 없는 왕관의 꽃이며, 또한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주지 않을 영광의 가지로서, 그가 "하나님과 같거나 동등하지"않은 분이었다면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함에도 그의 아들에게 이 영광을 주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종교적인 예배에 관한 이 법칙을 인용하고 있으며 또한 그 자신에 적용하여 이것을 인용하고 있다.
첫째, 그의 겸손의 신분에서 그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그는 스스로 "이 법칙 아래" 놓이셨다(율법 아래 나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경배를 받으셨지만,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공적으로 개인적으로 경배하였다. 그는 맨 처음에 그 자신을 기꺼이 하려 했던 것 이상을 우리로 하여금 하게 하시지 않는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모든 의로움을 성취하셨다.
둘째, 이것은 종교적 예배의 법칙이 의무상 영원히 당연한 것임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그는 비록 예배의 많은 격식과 제도를 폐지하고 수정하셨지만 이 기본적인 자연법, 즉 하나님만이 경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확신시키려 오셨다.
Ⅴ. 이 싸움의 결말은 11절에 서술되어 있다. 비록 하나님의 자녀가 많고 큰 시험을 겪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결코 허락지 않으신다(고전 10:13).
그들이 많은 시험을 통해 어려운 가운데 처해 있는 것은 잠시 동안에 불과하다.
이제 그 결말은 영광스러웠으며, 그리스도의 영광은 더욱 빛나게 되었다.
1. 마귀는 실패하였고, 그 싸움터를 떠나고 말았다.
이에 마귀는 "사단아 물러가라"는 예수님의 추상같은 명령에 압도되어 어쩔 수 없이 그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망신만 당한 마귀는 수치와 창피를 느끼며 황망히 물러가 버렸다. 그의 공격이 무모하면 할수록 그에게 주어진 칼은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Magnis tamen excidit ausis-어쨌든 그 공격은 실패하였고 무모하였다.
마귀는 제멋대로 천하만국과 그 영광으로 그리스도를 시험하려 했지만 그는 결코 이 미끼에 걸려들지 않았으며 또한 이전에 수많은 사람의 자녀들을 넘어뜨린 시험으로는 도저히 그를 이길 수 없음을 알아채리고는 이내 떠나고 말았다.
마귀는 이제 그를 사람 이상으로 알고 단념하였다. 마귀는 그리스도를 이러한 시험으로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음을 알자 이에 대해 실망을 느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결론을 내림과 동시에 그를 더 이상 시험하는 것이 무익하다고 단정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만일 우리가 마귀를 거절하면 그는 도망할 것이며, 또한 우리의 입장을 고수한다면 그는 우리에게 굴복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마치 "나오미가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쳤던"(롬 1:18) 것과 같다.
마귀가 그리스도를 떠났을 때 그는 스스로 완전히 참패하였음을 자인하였다. 그의 머리는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물어뜯으려고" 공격하였을 때 이로 말미암아 깨어졌다.
마귀가 그를 떠난 것은 그에게 더 이상 할 일이 없으며 붙잡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해보아야 소용없음을 안 마귀는 모든 것을 단념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마귀는 모든 성도의 원수이지만 정복된 원수라는 사실이다. 우리 구원의 대장 되신 그리스도는 그를 패배시켰고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승리를 추구할 것밖에" 없다.
2. 거룩한 천사가 나아와 승리하신 우리 구속주를 수종들었다.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11절). 그들은 마귀가 그리스도를 시험하던 때와 같이, 볼 수 있는 모습으로 나아왔다는 사실이다.
마귀가 우리 주님에게 공격을 가하고 있는 동안 천사는 멀찌기 서서 지켜볼 뿐 즉각적인 원조와 수종을 중지하였다. 그것은 그가 사탄을 자신의 힘으로 물리침으로써 그의 승리가 더욱 두드러지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후에 천사장 "미가엘"이 그의 천사들로 하여금 "용과 그의 천사들"과 더불어 싸우도록 했을 때, 이것은 그가 "그들을 필요"로 하거나 그들 없이는 싸움을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을 거느리고 있는 한 그들의 위선과 명예를 기꺼이 높여 주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 천사가 그에게 음식을 날라다 주는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많은 천사들이 그를 수종들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존경하고 그의 명령을 받을 만한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져 있음을 입증하기 위함이다.
이것을 보라!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1) 즉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또는 모든 특별한 성도들에 대항하여 싸우려는 사악하고 악의에 찬 영들의 세계가 있는가 하면 그들을 위해 예비 되고 고용된 거룩한 영들의 세계도 있다는 사실이다.
"마귀와의 싸움"과 연관하여 우리는 "천사와의 교제"에서 많은 위로를 얻을 수 있다.
(2) 그리스도의 승리는 천사의 개선(triump)이기도 하다.
천사들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축하하고 그와 더불어 기뻐하며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기 위해 그에게 나아왔다. 왜냐하면 큰 용이 내어 쫓김을 당할 때 하늘에서는 큰 소리로 이를 축하하여 찬송하기 때문이다(계 12:9.10). 이제 "구원과 힘"이 이르렀다.
(3) 천사들은 주 예수님을 음식으로만 아니라 이 큰 굶주림에 뒤따른 모든 궁핍을 채워 줄 수 있는 것으로 공궤하였다.
그리스도의 비하(卑下)와 겸손의 모본이 어떻게 그의 영광의 표식과 평행 되는지를 살펴 보라. 그가 "연약하여 괴로움을 당하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신 것처럼, 그는 연약하여 시험을 받아 굶주리고 피곤하셨지만 그의 신적인 능력으로 천사들의 직무를 명령하셨다.
이와 같이 인자는 천사의 떡을 먹었으며, 엘리야와 같이 광야에서 천사로 말미암아 음식을 공급받아 먹게 되었다(왕상 19:4, 7).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어려움과 궁핍에 처하게 하시지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공급해 주시기 위해 효과적인 배려를 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멸망하는 것을 간과하지 않으시고 천사를 보내어 먹여 주신다. "여호와를 의뢰하라, 그러면 정녕 배부름을 얻게 될 것이다"(시 37:3).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시험에서 구원받으신 것은,
① 그의 임무를 계속적으로 수행함에 있어서 용기를 북돋아 줌으로써 그를 대적하는 마귀의 세력들을 보았을 때 그와 함께 하는 하늘의 능력을 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② 우리가 그를 믿는 데 있어서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함이다.
그리스도는 친히 시험을 당하심으로써 그 시험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견디기 어려운 것인가를 친히 맛보셨을 뿐만 아니라 그 시험에서 구원받으심으로 그것이 얼마나 편안한 것인가를 직접 경험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시험받는 그의 백성들을 동정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에게 적절한 위로를 해 주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그것은 싸움에서 돌아온 아브라함을 만났던 멜기세텍이나 이곳에 있는 예수님을 수종들었던 천사들을 통하여 수행될 것이다.
끝으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음성과 성령의 강림, 마귀에 대한 통치, 천사들에 대한 지배에 의한 불가시적(不可視的)인 세상에서 이와 같이 두드러지고 위대하게 되신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가시적(可視的)인 세상에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 나타나시기에 적절하였다. "이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셨는가를 곰곰히 생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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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의 근거지(마 4:12-17)
이곳에는 그리스도께서 갈릴리의 회당에서 전파하신 사실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가 전도자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애써 완성하신 이 큰 구원을 전파하기 시작하셨는데(히 2:3), 이는 그가 이 큰 구원에 대해 얼마나 심혈을 쏟았으며, 우리가 어떻게 이에 합당한 자가 되어야 할 것인가를 그대로 보여 주기 위함이다.
마태복음 이외의 복음서들, 특히 요한복음에 있는 몇 기적들은 그리스도의 생애의 순서에 있어서 그의 시험과 갈릴리 전도 사이에 삽입된 것으로 추측된다.
예수님께서 [시내광야에서 40일 금식 후] 시험받으신 다음에 처음으로 [갈릴리에]모습을 드러내신 것은 세례 요한이 그를 가리켜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고 말하였을 때이다

그 후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셨으며(요 2:), 니고데모(요 3:)와 사마리아 여인(요 4:)과 대화하신 후 갈릴리로 돌아와 거기에서 전파하셨다.
마태는 갈릴리에 머물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 전파를 하신 그의 공적인 활동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Ⅰ. 시기.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12절).
유의할 것은 성도의 고통의 부르짖음이 주님의 귓전을 울렸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요한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따른 자신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는 속박과 고통을 기억하신다."
1. 그리스도는 "요한이 잡힌 사실에 대해 듣기 전에는" 마을로 가시지 않았다. 

그는 주님 자신이 나타나시기 전에만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그에게 주어진 시간을 가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빛나기 전에" 요한은 마땅히 "빛을 잃고 사라져야만" 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섭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현명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사람들의 마음은 예수님과 요한으로 말미암아 엇갈려 어수선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나는 요한에게 속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나는 예수님에게 속하였다"고 말하였을 것이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선구자이지, 결코 그의 적수는 아니다. 달과 별들은 태양이 떠오르면 사라지는 법이다.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촉구하여 이를 행함으로써 그의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그 다음에는 스스로 길을 비켜선 것이다. 

증인들은 그들의 증거를 다 마치기 전에는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계 11:7).
2. 그리스도는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내 마을로 가셨다.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하신 것은, 헤롯이 요한을 대적한 것처럼 유대에 있는 바리새인들이 그를 원수시하는 것을 알았으므로 자신의 안전을 위해 어떤 대책을 강구해야 했으며, 또한 세례 요한의 공백을 메꾸고 그가 닦아둔 좋은 기초 위에 쌓아 올리기 위함이었다.
유의할 것은, 하나님은 그 자신을 증인 없이 내버려두시거나, 자기 교회를 인도자 없이 방치해 두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가 유용한 도구를 없이 하실 때는 또 다른 도구를 일으켜 세우실 수 있다. 

그는 성령의 남은 부분을 소유하시며 해야 한다면 행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내 종 모세는 죽었으나" 그 대신에 여호수아가 계승한 것처럼, 요한은 잡혔으나 이제 예수님은 그 뒤를 이으신 것이다.
Ⅱ. 그가 전파하신 장소.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신 곳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갈릴리 지방이었는데, 이곳은 야만적이고 촌스러운 지방으로 멸시를 받았다. 

이 지방의 주민들은 억세고 야비한 사람들로 취급받았고, 또는 군인으로나 적합하다고 여겨졌으며, 버릇이 없을 뿐 아니라 학자로서는 합당치 않은 자들로 취급되었다.
그리스도는 이곳으로 가셨으며, 그곳에서 복음의 가치를 높이 세우셨다. 그는 다른 일에서와 같이 이 일에서도 자신을 낮추셨다.
1.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자신의 거처로 삼으신 곳은 그가 자라셨던 나사렛은 아니었다. 아니, 그는 나사렛을 떠나셨다.
우리는 특별히 이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13절). 그가 나사렛을 떠나신 것은 그곳 사람들이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냈기" 때문이었다(눅 4:29).
그리스도는 맨 처음으로 매우 공평하게 그들을 봉사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그와 그의 가르침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분노가 가득차 살기등등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나사렛을 떠났으며 그의 가르침을 방해한 자들에 대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버렸다.
나사렛은 그리스도를 거절했던 최초의 동네이며, 이로 말미암아 그에게서 버림을 당하였다.
유의할 것은 복음이나 은혜의 수단을 멸시하거나 밀쳐버리는 자들에게서 이것들을 빼앗아 버리는 것은 하나님에게 합당하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환영하지 않는 곳에서는 오래 머물지 않으신다. 

"불쌍한 나사렛이여! 네가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번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가서 사신 [전도의 본거지] 가버나움"은 나사렛에서 멀리 멀어진 갈릴리 [호수 북서쪽]지방의 한 고을로서 그 규모가 크고 번화하였다.
여기에서는 이 고을이 "해변"에 위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해변"이란 큰 바닷가는 아니고 디베랴 바다, 즉 "게네사렛 호수"로도 불리우는 육지안의 큰 바닷가였다.
가버나움은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곧 갈릴리 호수의 서북편에 위치하였다(역주:현재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음).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그의 아버지 요셉이 이곳에 살았었다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적어도 그가 거처할 집이 있었다고 하며, 또한 어떤 사람은 그가 거의 확실히 시몬 베드로의 집에 살았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 계속적으로 정착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가 선행을 하면서 돌아다니셨기 때문이다. 

때로 이곳은 그의 사령부가 되기도 하였다. 그는 잠시나마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였고 머리를 두었다. 

아마도 그는 나사렛에 있을 때 보다는 가버나움에서 더 환영과 대접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거절한다면 다른 사람이 이를 환영하고 받아들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가버나움은 나사렛이 버린 자를 기꺼이 환영하였다. 그의 고향 사람들은 모여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는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너 가버나움아, 이제 영광의 날은 이르렀도다. 이제 너는 하늘에까지 들어 올리워졌다. 현명하여 네 방문의 때를 알지어다."
2. 이곳에서 성취된 예언(14-16절)은 약간의 변동이 있기는 하나 이사야 9장 1,2절에서 인용되고 있다.
선지자 이사야는 여기에서 임마누엘을 멸시하는 자에게 닥쳐올 고통의 큰 흑암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는데, 이것은 비교적 경미하였던 벤하닷에 의한 제1차 포로시(왕상 15:20)나, 보다 극심했던 앗수르의 제2차 포로시(왕하 15:29)에 그곳에 임했던 고통보다 더 큰 것이었다.
복음을 거절한 유대 민족에게 내릴 형벌은 이보다 더 비참한 것이 될 것이다(사 8:21, 22 절을 보라). 

왜냐하면 이들 포로 된 장소들은 속박에서 해방되어 다시 큰 빛을 보았기 때문이다(9:2). 이것이 바로 이사야가 나타내려고 하는 뜻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예언에 대한 많은 성취가 기록되어 있으며, 복음서 기자는 여기에서 후반절을 취하고 있는데, 이 구절은 포로의 흑암 속에 싸여 있었던 이러한 땅에 자유와 번영의 빛이 회복되어 다시 비추었다는 사실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에게 복음이 나타난 사실을 이것에 적용시키고 있다.
15절에는 이 장소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스볼론 땅"이 "해변가"에 있다고 한 것은 옳다. 왜냐하면 "스볼론은 배 매는 곳이며, 나가는 것을 기뻐하였기" 때문이다(창 49:13; 신 33:18). 납달리에 대해서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며"(창 49:21), 또한 "은혜가 족하다"(신 33:23)고 한 것은 복음이 그에게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복음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다운 소리이며 하나님의 충족한 은혜를 전해 준다. 

요단강 저편에 있는 지방도 이와 같이 언급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종종 이곳과 이방의 갈릴리, 즉 이방인들의 상업 거래가 빈번했고 유대인들이 섞여 사는 갈릴리 윗 지방에서 전파하였는데, 이는 가난한 이방인들을 위해 예비된 긍휼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가버나움에 오셨을 때 복음은 그 인근의 모든 땅에 골고루 전파되었으니 이와 같이 의의 태양은 그 빛을 널리 비추었던 것이다.
이 장소에 거주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다음의 몇 가지 사실들을 고찰할 수 있다.
(1) 복음이 이르기 전 그들이 놓여있던 상태(16절).
그들은 "흑암 속에" 있었다. 

그리스도가 없는 자는 흑암 속에 있는 자일 뿐 아니라 그들 자신이 곧 흑암이며, 이 흑암은 "깊음 위에 있는"(창 1:2) 흑암과 같은 것임을 유의하라.
아니, 그들은 "사망의 땅과 그늘"에 있었다. 이것은 무덤이 흑암의 땅인 것처럼, "큰 흑암"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큰 위험"을 나타내기도 한다.
거의 소생할 수 없을 정도로 병든 사람이나 회복할 가망이 전혀 없는 사람은 비록 생명이 끊어지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사망의 그늘의 골짜기"에 놓여있다.
마찬가지로 가난한 백성들은 아직 정지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정죄의 경계선에 놓여 있었다. 즉 실제로는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을 이러한 상태에 "앉아" 있었다. 앉는 다는 것은 계속적으로 머무르는 자세를 말한다. 앉는 것은 곤 머무르는 것이다.
그들은 흑암 속에 처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였고, 절망과 자포자기 속에 허우적거렸다. 또한 앉는 것만 만족한 자세이다. 그들은 흑암 속에 있었으며, 흑암을 사랑하였고, 빛보다는 오히려 흑암을 택하였다. 그들은 자진해서 무지한 자가 되었다.
그들의 상태는 실로 처참하였다. 많은 강대국들의 상태도 여전히 이와 같기에 이들에 대해 긍휼함으로 기도하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상태는 더욱 처참하다. 이는 그들이 복음의 빛 가운데 흑암 속에 앉았기 때문이다.
밤이기 때문에 흑암 속에 있어야만 하는 자들은 머지 않아 태양이 떠오를 것을 확신할 수 있지만, 소경이기 때문에 흑암 속에 있는 자들은 그렇게 빨리, 그의 눈이 열리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빛을 가지고 있지만, 그 빛이 주님 안에서 빛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2)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이 이르렀을 때 그들이 얻는 특권은 일찍이 미개한 여행자를 비추었던 빛만큼 매우 생동적인 것이었다.
유의할 것은, 복음이 이를 때는 빛도 함께 이른다는 사실이다. 

이 빛이 어떤 장소나 어떤 영혼에게 임하여 그곳을 환한 대낮으로 만든다(요 3:19; 눅 1:78, 79). 빛은 찾아내고 지시하는 역할을 한다. 복음도 이와 같다.
복음은 계시의 명백성과 그 증거를 나타내는 "큰" 빛으로서 촛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태양 빛이다.
지금은 폐기되어버린 한낱 그림자에 불과한 율법의 빛에 비하면 복음의 빛은 큰 것이다. 복음이 "큰 빛"인 것은 크고 중대한 일을 밝히기 때문이다.
이 복음의 빛은 다함이 없고 멀리 퍼진다. 이 단어는 "솟아오른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점점 커지는 빛"이다. 그들이 복음을 받을 때는 단지 새벽녘에 지나지 않았으며, 지금은 노을이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이후에는 "더욱 더 빛나는" 때가 이를 것이다.
겨자씨나 새벽빛과 같이 복음의 왕국은 처음에는 작지만 점점 성장하여 그 완성 때는 매우 커지는 것이다.
"빛은 그들에게 솟아올랐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들은 그것을 찾으러 가지 않았지만 이 선한 축복이 먼저 그들에게 찾아온 것이다. 이 빛은 그들이 이것을 알기 전에 먼저 그들에게 지정된 시간에 이르렀는데, 이일은 "아침을 명하고 새벽으로 그 처소를 알게 하여 그것으로 땅 끝에 비취게 하신"(욥 38:12, 13) 그분의 처리에 의한 것이다.
Ⅲ.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신 주제(17절).
"이때부터"란 그가 갈릴리와 스볼론, 납달리 땅으로 오신 때부터를 말하며 이때부터 전파하셨다.
그는 이에 앞서 유대에서 전파하셨으며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푸셨다(요 4:1). 그러나 그의 전파는 대중적이거나 또는 지금 시작하는 것처럼 지속적인 것이 아니었다.
목회의 사역은 매우 중대하고 두려운 것이므로 점차적인 과정과 진도를 따라 수행해 나가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곳에 있는 그의 설교에서 강조한 주제(그것은 그의 모든 설교의 총합이며 골자이기도 함)는 요한이 설교한 주제, 즉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와 대동소이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복음은 여러 시대에 걸쳐서 그 주제가 똑같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 명령이 같고 그것들을 수행해야 하는 이유가 똑같기 때문이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천사"라도 감히 다른 복음을 말할 수 없으며, 오직 이 복음만을 전해야 한다(갈 1:8).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한 복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회개함으로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계 14:6, 7). 그리스도께서 요한이 그 이전에 전파했던 것과 똑같은 의도로 전파하셨을 때 그는 요한의 전파에 대해 상당한 존경을 표하였다.
 이로써 그는 요한이 그의 사자와 전권대사였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의도를 있는 그대로 전달한 심부름꾼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의 사자의 말을 확증하셨다(사 44:26). 아들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얻기 위하여" 이전에 왔던 종과 같이 심부름으로 왔던 것이다(마 21:27).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가슴속에 있었으며 박학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수 있는 신적(神的)이고 천적(天的)인 일들에 대한 탁월한 개념을 전파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낡고 평범한 주제, 곧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을 선정하고 있다.
① 그는 먼저 이 주제를 전파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는 이 주제로 시작하였다. 목사는 새로운 의견을 제창하거나 새로운 구조를 짜 맞추거나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 내는 데 야심을 가져서는 안 되며 그들 스스로가 평범하고 실제적인 일, 또는 우리의 입이나 마음에 있는 가장 가까운 말에 자족해야 한다.
우리는 설교에 사용할 내용이나 언어를 찾기 위해 하늘에 올라가거나 깊은 곳으로 내려갈 필요가 없다. 요한이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했던 것처럼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길을 준비하였으며, 회개를 촉구함으로써 더욱 전개시켜 나갔던 것이다. "만일 사람이 그의 뜻을 행하려"하면 "그의 교훈에" 대해 더 "알게 될 것이다"(요 7:17).
② 그는 종종 이 주제에 대해 전파하셨다.
그는 어디에 가시든지 이 주제에 대해 교훈하셨으며, 또한 그나 그를 따르는 자들은 "가려운 귀"를 가진 자나 참으로 교훈적인 것보다는 신기하거나 다양한 것을 더 좋아하는 자들처럼 이 회개에 대한 주제를 케케묵은 것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이전에 전파되고 들려진 내용이 매우 유익하게 다시금 전파되고 들려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다시금 전파되고 들려질 때는 이전 것보다 더 낫고, 새로운 애정과 감동으로 행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바울은 이전에 말했던 것을 "눈물을 흘리며"(빌 3:1, 18) 다시 말하였다.
③ 그는 이 주제를 복음으로써 전파하였다. "회개하라. 네 길을 살피라, 네 자신을 돌이키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회개의 교리는 올바른 복음적 교리라는 사실이다. 우울하고 침통하게 보였던 엄격한 세례 요한뿐만 아니라 그 입술이 꿀샘과 같이 달콤하고 은혜스러운 예수님도 "회개를 전파하셨다." 왜냐하면 회개할 여지가 남아 있다는 사실은 말할 수 없는 특권이기 때문이다.
④ 그 이유는 여전히 대동소이하다.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성령의 충만한 임재가 있기 전에는 완전히 도래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은 이보다 한 해 앞서서 천국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더 많이 가까워졌으므로 그 논증은 한층 더 강력한 것이다.
지금은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다"(롬 13:11). 우리는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히 10:25) 우리의 의무를 서둘러 완수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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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제자들(마 4:18-22)
그리스도께서 그가 전파하실 때에 먼저 "제자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하였는데, 이 제자들은 지금은 그의 가르침을 "듣는 자"에 불과하지만 이후에는 "전파자"가 될 것이며 또한 지금은 그의 기적들을 본 증인에 불과하지만 이후에는 그것들에 관해 직접으로 증거 하는 증인이 될 것이다. 이곳에는 그리스도께서 그와의 사귐을 위해 친히 부르셨던 첫 번째 제자들에 대한 기사가 있다.
1. 이것은 그리스도에게로 부르심을 받은 "효과적인 소명"의한 실례이다.
그는 자신이 행한 모든 설교에서 모든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부르셨지만, 여기에서는 특별히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자들만을 부르셨다. 그리스도의 은혜의 능력을 보고 찬미하자. 그리고 그의 말씀을 그의 능력의 막대기로 인정하고, 복음 소명을 더욱 유효하게 하는 데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능력 있는 영향력, 즉 두드러진 영향력을 얻기 위해 그를 모셔들이자.
모든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 중에서도 이 사람들만이 불러내어져 구원함을 받았다. 그리스도는 이들에게만 자신을 드러내셨으며, 모든 세계에 드러내신 것은 아니다.
2. 이것은 목회 사역에 대한 계율과 명령의 한 실례이다.
선생인 그리스도께서 큰 학교를 세우셨을 때 그가 착수한 첫 번째 사업중의 하나는 교장 밑에서 가르치는 일을 전담할 보조교사를 임명하는 일이었다.
이제 그는 사람들에게 은사를 베풀고 토기 그릇에 보화를 담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그가 일찍이 자기 교회를 돌 본 하나의 좋은 본보기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살펴볼 수 있다.
Ⅰ. 그들이 부르심을 받았던 "장소" ─ "갈릴리 바다"로서, 이곳을 예수님이 걷고 계셨는데 가버나움은 이 바다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이 디베랴 바다에 관하여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그가 만든 일곱 바다 가운데서 이 게네사렛 바다만을 선택하셨다"고 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이곳에 나타나시어 이적 기사를 행하심으로써 영광스럽게 된 사실과 잘 들어맞는다.
여기에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광야를 거닐 때 이삭과 같이 바다의 둑길을 따라 묵상하면서 걷고 있었다. 그는 이곳으로 제자들을 부르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는 헤롯의 궁전(권세가나 귀족이 부르심을 받은 예는 거의 없음)이나 예루살렘(거기에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있었음)으로 가시지 않고 갈릴리 바다로 오셨다.
확실히 그리스도께서 보시는 것은 사람이 보는 것과 전혀 다르다. 베드로나 안드레를 유효하게 부르셨던 똑같은 능력이 안다스나 가야바에게는 미칠 수 없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대화나 배려에 있어서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셨으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세상의 가난한 자"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갈릴리는 유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북반부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그 주민들은 거의가 다 미개하고 상스러웠으며, 또한 그들의 언어 역시 순사투리였고 시비하거나 싸울 때는 매우 거칠게 들렸다. "그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그 신분과 지방을 알 수 있는 정도였다."
갈릴리 바다에서 선택함을 받은 자들은 그들보다는 좀더 세련된 갈릴리 사람들이 지니고 있었던 특권이나 장점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장차 그의 왕국에서 우두머리 장관이 될 사람들을 부르시기 위하여 이곳으로 오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기" 때문이다.
Ⅱ. "그들의 신분". 우리는 이곳에서 두 쌍의 형제들에 대한 기사를 읽어볼 수 있다. 즉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다.
베드로와 요한(아마 야고보와 요한도)은 이미 그리스도로 알고 있었으나(요 1:40, 41), 그때까지 친밀하고 지속적으로 그를 따르도록 소명 받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는 가난한 심령들과 더불어 점차적으로 교제를 맺으신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으나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회개의 연단을 거친 자들은 신앙의 즐거움에 영접될 것이다. 이것들에 대해 다음의 사실들을 알 수 있다.
1. 그들은 "형제들"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골육으로 친척 된 자"(롬 9:3 에서 바울 사도가 말한대로)가 함께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은 축복이라는 사실이다. "한 가족"이 "하나님의 식구"가 되었을 때 그것은 가문의 영예요 위로이다.
2. 그들은 "어부들"이었다.
(1) 어부였으므로 그들은 "가난한 자들"이었다.
만일 그들이 재산이나, 또는 상업상 적지 않은 저장품을 가지고 있었다면 고기잡이를 업으로 삼지는 않았을 것이며, 오히려 이런 것은 한낮 취미나 오락으로 즐겼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를 멸시치 않으시며, 따라서 우리도 그렇지 않음을 유의하라. 즉 가난한 자에게 복음은 전파되며, 영예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때로 가장 부족한 자에게 더욱 풍성한 영예를 베푸신다는 것이다.
(2) 그들은 "무식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애굽의 모든 지식을 통달하였던 모세와 같이 책과 문학으로 양육 받지 못하였다. 종종 주님께서는 보잘 것 없는 자들을 택하여 풍성한 은혜의 선물을 안겨 주려고 하신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지식과 언변에 대한 특별한 은사가 지금 당장에 기대되지는 않지만 필수적인 능력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얻어져야만 한다. 또한 이것들의 충분한 능력과 분량이 없이는 그 누구도 목회의 사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
(3) 그들은 노동으로 잔뼈가 굵어진 "직업을 가진 자들"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성실한 직업에 있어서 근면은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며 거룩한 생활을 하는데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모세는 양을 지킬 때, 다윗은 양 무리를 칠 때에 두드러진 사역에로 부르심을 받았다. 게으른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보다는 사탄의 시험에로 더 개방되어 있다.
(4) 그들은 "곤경"과 위험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어부라는 직업은 다른 직업보다 더 힘들고 위험한 직업이다. 어부는 종종 물에 젖고 추위에 떨어야만 한다. 그들은 주시하고 기다리고 수고해야만 하며, 때로 물의 위험을 당해야만 할 때도 있다.
고난을 참고 위험을 극복할 줄 아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를 갖거나 그의 제자가 되기에 매우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는 어려운 고난을 참고 견디어야만 한다.
Ⅲ. "그들의 직업."
그 때에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들의 그물을 사용하여 고기를 잡고 있었으나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그물을 "깁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들의 근면성과 절약성을 보여 주는 한 실례이다.
그들은 새로운 그물을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아버지에게로 가지 않았으며, 고생스럽기는 했지만 낡은 그물을 깁고 있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힘껏 해보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아버지인 세베대"와 함께 있으면서 그의 일을 돕고 거들어 주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자녀들이 그들의 양친을 돌보고 의무를 다하는 일은 즐겁고도 고무적인 일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살펴볼 수 있다.
1. 그들은 모두가 한 가지로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들이었고 게으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그렇게 하는 것이 보여질 때는 매우 행복한 일이 될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라고 우리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내가 내 직업 속에 있는가?"를 물어야할 것이다.
2. 그들은 서로 다르게 "일하고 있었다."
그들 중 두 사람은 고기를 잡고 있었고, 두 사람은 "그물을 깁고" 있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목사는 가르치든지 연구하든지 항상 일해야만 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언제나 할 수만 있다면 그들 스스로가 일할 것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물을 깁는 일은 한창 때에 고기를 잡는 일에 못지 않게 꼭 필요한 일이다."
Ⅳ. "그들의 소명"(19절)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들은 이전에 평범한 제자로서 그리스도를 따랐으며(요 1:37), 동시에 그리스도를 따르면서도 그들의 직업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보다 친밀하고 지속적인 참여가 필요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그들의 직업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소명된 자라 할지라도 특히 목회의 사역을 위해 택정함을 받았을 때는 더욱 더 가까이 그를 따르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1.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무엇을 의도하셨는가?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이것은 그들이 이전에 가졌던 직업을 넌지시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새로이 부과된 영광스러운 지위에 대해 자만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는 그들이 여전히 일개 어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새로이 할당된 임무에 대해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는 그들이 고기 잡는 것을 계속해 왔고 지금도 여전히 어부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일에서 끄집어낸 이러한 암시나 표현으로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것을 말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다윗은 양을 먹이는 데서부터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먹이도록 소명을 받았다. 그는 왕이면서 목자였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1) 목사는 "고기를 낚는 어부"로서, 사람들을 다른 환경으로 옮김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고 오히려 구원하는 것이다.
그들은 진노나 부귀, 명예나 진급, 또는 그 자신을 얻기 위해서 고기를 낚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고기를 낚아야만 한다.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며'(히 13:17), 또한 "그들이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너희인 것이다"(고후 12:14, 16).
(2) 그들을 어부로 만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는 사람들에게 이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며, 이 일을 하도록 불러내며, 권한을 주고 성공케 하신다. 또한 그들에게 영혼을 위해 고기를 낚는 사명을 주며, 그들을 얻을 수 있는 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와 같이 소명을 받은 교역자들은 모름지기 자신들의 사역에 큰 보람과 위로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2. 그들은 이 일을 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곧 "나를 따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제쳐놓고 부지런히 그리스도를 따르고 겸손히 그를 닮아가야 하며, 그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삼고 따라가야만 한다.
(1)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봉사를 위해 무엇보다도 우선 이에 합당한 자격을 구비한 자를 쓰신다. 다시 말하면 그에게 쓰임을 받으려는 자는 그의 부르심에 합당한 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2) "그리스도를 전파"하려고 하는 자는 먼저 그리스도를 "배우고," 또한 그에 대해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우리가 그를 잘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자식에로 데려올 수 있을 것인가?
(3) 그리스도와 교제를 가지려고 하는 자는 모름지기 그를 따르는 일에 부지런하고 계속적이어야만 한다.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항상 출입하실 때 그와 함께 동행함으로써"(행 1:21) 그들의 사역이 준비되었다. 지식을 얻는 데 있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지도를 받았으므로 그의 후계자가 되기에는 매우 적합하였다.
(4) 사람을 낚으려는 자는 부지런하고 신실하게, 또한 온유하게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가 행하는 것을 본받아 그대로 행해야만 한다. 그리스도는 설교자들에 대한 초대의 모본이며, 설교자들은 "그와 더불어 함께 일하는 동역자"가 되어야만 한다.
Ⅴ. "이 소명에 대한 좋은 결과."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부르신 소명은 성공적이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곧 그물을 버려 두고"(20절) 그를 쫓았으며, 야고보와 요한은 "곧 배와 부친을 버려 두고(22절) 그를 쫓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를 올바로 따르려는 자는 그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기독자는 모든 감정적인 것을 버리고 이것들에 냉담해야 하며, "아버지와 어머니를 미워해야"하며 (눅 14:26), 그들을 그리스도보다 덜 사랑해야 하며, 그들보다는 그리스도에게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목회의 사역에 헌신하려는 자는 특별히 전인(全人)을 요구하는 일에 전념하기 위하여 이 세상의 모든 일들과 인연을 끊어야 한다.
1. 주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이러한 예로 우리로 하여금 그의 은혜의 유효성을 믿도록 좋은 격려를 해 준다.
 그의 말씀은 얼마나 강력하고 유효한가! "그가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나를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서로 견주어 볼 만한 능력 있는 말씀이 있으니, 이는 "나사로야! 나오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즐거이 헌신하도록 만드는"(시 110:3) 능력이다.
2. 제자들의 유연성에 대한 이러한 예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명령을 순종하도록 하는데 있어서 좋은 본보기가 다녔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그에게 나오거나, 주인이신 그가 인도하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가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이 마땅히 지녀야 할 좋은 속성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현재 사역이나 가족과의 유대, 소명 받은 봉사의 어려움, 이 부르심에 합당치 못한 자신들에 대해 하 등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과 같이 "갈 바를 알지 못하였지만" 그들이 따르고 있는 분을 매우 잘 알았으므로 순종하여 나갔던 것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그물을 버려 두고" 그를 쫓았다. 그의 아버지(세베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으므로 알 도리가 없다. 그의 어머니 살로매는 그리스도를 항시 따르던 자였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의 아버지 세베대도 믿는 신자였으나 그리스도는 특별히 젊은이를 불러 자기를 따르게 했음이 분명하다. 청년기는 배우는 시기요, 일하는 시기이다. 제사장들은 한창 나이 때에 직무를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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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의 개요(마 4:23-25)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Ⅰ. 그리스도는 매우 부지런한 전파자였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것은 "천국 복음"이었다.
"천국," 즉 은혜와 영광의 왕국은 강조적으로 지금 와 있는 왕국, 즉 이 지상의 모든 왕국들을 능가하며 영원히 남아 있게 될 왕국이다.
"복음"은 왕의 대관식 선서를 포함한 왕국의 헌장이며, 이로써 그는 이 왕국의 국민들을 용서하고 보호하며 구원하시기 위하여 은혜스럽게 그 자신의 호의를 보이셨다.
복음은 또한 그들의 충성의 맹세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로써 그 왕국의 백성 된 자는 그의 계율을 준수하고 그의 명예를 추구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천국의 복음"이다. 그리스도는 이 천국 복음의 전파자였으며, 그것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확고히 하셨다.
2. 그가 전파하신 곳은 "회당"이었다.
이것은 회당에서만 전파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주로 회당에서 전파하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회당은 "집합의 장소"였으며, "지혜가 그 소리를 높이는"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예배를 위한 집합 장소로서 모든 백성들이 복음을 받을 마음의 준비를 이곳에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회당에서는 "천국 복음"을 쉽사리 설명하여 소개할 구약 성서가 읽혀졌다.
3. 그는 전파하는데 많은 애를 쓰셨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전파하셨다." 그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로 모이도록 선포하실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겸손과 또한 자기 은혜의 비하(卑下)를 보여 주시기 위해 그들에게 나아가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은혜로 기다리시며, 찾아 구원하러 오시기" 때문이다.
요세푸스(Josephus)는 말하기를, 갈릴리에는 2백개 이상의 성과 마을이 있었는데 그리스도는 대부분 이곳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그는 "선행을 베푸시면서" 다니셨다. 순례하는 전파자요, 지칠 줄 모르는 분이신 그리스도에 비할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그는 이 마을 저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가난한 죄인들을 찾아 하나님께로 회복시키려 하였다.
이것은 교역자들에게 모본이 되는데 즉 선행을 베풀려고 노력해야 하며 즉각적이고 부단해야 하며 언제나 늘 끊임없이 말씀을 전파하려고 준비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Ⅱ. 그리스도는 매우 효험 있는 의사였다.
그는 두루 다니시면서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병을 고치셨다." 그는 말씀으로 이를 행하셨으며 이로 말미암아 자신을 이름을 널리 드높이셨다. "그는 그들에게 말씀을 전파하셨고, 그들을 치유하셨다."
1. 그는 "예외 없이 거의 모든 병"을 치유하셨다.
의사들이 아무리 최선을 다하여 처방해도 고치기 힘들기 때문에 의사의 치욕이라고 불리는 병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병들은 이 만능적인 의사이신 그리스도에게는 오히려 "영광"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을 전부 치유하셨는데," 아무리 고질적인 병이라도 그에게는 하 등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의 말씀은 참된 panpharmacon, 즉 완치였다.
이 병의 명칭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곳에 사용된 세 가지 일반적인 용어는 다음과 같다. 즉 그는 "모든 병"을 고치셨는데, 이 모든 병이란 소경, 절름발이, 열병, 수종병 같은 병을 말하며, "모든 약한 것"이란 이 질병이나 폐병을, "고통에 걸린 자"란 통풍병이나 결석(結石)병, 지랄병, 그 밖에 고통을 주는 병들을 말한다.
그들이 아무리 급성병이든지 만성병이든지, 또는 고통을 주는 병이든지 쇠약케 하는 병이든지 그리스도께서 한 마디의 말씀으로 이를 치유하시는데는 고치기 어렵거나 힘든 병은 하나도 없었다.
세 종류의 특수한 병은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즉 가장 연약한 육체의 병에 걸린 "중풍병자"와 가장 고질적인 정신병에 걸린 "간질하는 자"와 가장 비참하고 처절한 육적, 정신적인 병에 걸린 "귀신들린 자"들인데, 이 "모든 병"을 그리스도께서는 고쳐 주셨다. 왜냐하면 그는 영과 육에 대한 탁월하신 의사이시며 모든 병들을 마음대로 지배하시기 때문이다.
2. 그는 어떤 환자들을 취급하였는가?
접근하기가 매우 쉽고 성공할 것이 확실한 의사, 고통스러운 위험이나 어떤 막연한 기대에 관계없이 또한 아무런 고통이나 어려움 없이 즉각적으로 치유하며, 돈을 한 푼도 받지 않고 무료로 치료하는 의사에게는 많은 환자가 모여들지 않을 수 없다.
각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로 몰려든 이 사실에 유의하라. 많은 백성들이 "갈릴리"와 그 주변에서, 또한 멀리 떨어져 있는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그에게로 몰려들었으니, 이는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 즉 온 유대인들과 이웃에 있는 나라에 퍼졌기 때문이었다.
지금 원근 각처에 퍼진 그에 관한 소문으로 말미암아 이방 나라들은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될 것이며 이후에는 그들에게 이 복음이 전파될 것이다.
많은 무리가 그에게로 온 이유는 그의 소문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타인으로부터 그리스도에 관해 들었다면 마땅히 그에게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시바의 여왕도 솔로몬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왔다.
소문은 "와보라"고 외친다. 그리스도는 "가르치시고 치유하셨다." 고침을 받으러 왔던 자들은 "평화에 속한 일들"에 대2해 가르침을 받았다.
어떤 일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또한 그에게로 오는 자는 그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그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수리아의 장군 나아만과 같이 이 수리아인들은 그들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그리스도에게 나아왔으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개종자가 되었다(왕하 5:15, 17).
그들은 육체의 건강을 찾았으며 또한 영혼의 구원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마치 나귀를 찾고, 왕국도 얻은 사울의 경우와 흡사하다. 그러나, 그 결과로 치유자로서의 그리스도를 기뻐한 많은 무리들이 선생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잊어버렸던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치유에 관련하여 한꺼번에 그 "이적," "긍휼," "신비"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병고침의 "이적".
이 이적은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말미암아 즉각적으로 행해졌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사명에 대한 하나님의 인치심이었다.
자연은 도저히 이적을 행할 수 없었으며 이를 행하시는 분은 오직 자연의 하나님이셨다. 의사의 기술로는 도저히 치료될 수 없는 많은 병들이 나음을 얻었고 신분이나 연령, 조건에 구애됨이 없이 거의 모든 사람이 병고침을 받았다.
이러한 병고침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행해졌는데, 물론 이들 중에는 혹 어떤 편견을 가지고 이러한 이적들을 거부하려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치유는 실패를 하거나 이후에 어떤 이의가 제기된 적은 결코 없었다. 그의 이적은 점차적으로가 아닌(자연적인 동기에 의한 치유처럼), 즉시로 행해졌으며, 그것은 말씀으로 이루어진 완전한 치유였다.
이상의 모든 것은 그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심을 증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그가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요 3:2).
그는 이것을 신임장으로 제시하고 있다(마 11:4, 5; 요 5:36). 메시야는 이러한 이적을 행하실 분으로 기대되었으며(요 7:31; 사 35:5, 6), 우리는 그가 메시야가 되신다는 사실에 대해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행하신 분은 일찍이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그의 치유와 설교를 일반적으로 함께 병행된다. 왜냐하면 전자는 후자를 견고히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여기에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셨던 것이다"(행 1:1).
(2) 병고침의 "긍휼."
모세가 자기의 임무를 증명하기 위해 행했던 이적은 대부분 온역과 심판에 대한 것으로서, 이는 비록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는 하지만 그 율법 시대의 두려움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적들은 대부분 치유하는 것이었으며, 이 모든 것(열매 없는 무화과를 마르게 하신 저주의 사건은 예외지만)은 축복과 은혜를 베푸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복음 시대는 사랑과 은혜와 친절에 기초되어 세워졌기 때문이다.
이적을 사용하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공포에 질리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순종케 하려고 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 병을 고치신 것은 백성들의 이목을 집중케 함으로써, 그 자신과 그의 가르침이 그들의 마음에 들도록 하게 하기 위함이다(호 11:4).
병고침의 이적은 그의 교훈이 "신실한 말씀"임을 입증하였고, 사람의 판단을 확신케 했다. 즉 병고침의 긍휼은 그의 가르침이 "모두 받을 만한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였고 그들의 편견에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이적들은 "위대하고 선한" 일들이었으며, 그는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이것들을 그들에게 보였다"(요 10:32).
이러한 선하심은 사람을 인도하여 회개케 하며(롬 2:4), 또한 친절과 긍휼과 선행이 우리의 능력과 기회가 미치는 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세우려 오셨던 거룩한 종교의 필수적인 지선(支線)임을 나타내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3) 병고침의 "신비."
그리스도께서는 "육체적인 질병"을 치유하심으로써 그가 이 땅에 오신 큰 목적은 "영적인 병"을 치유하는 것이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그는 "의(義)의 태양"으로서, "그의 날개 아래 이 치유를 지니고 떠오르신다." 죄인을 개심시키는 분이신 그는 "영혼의 의사"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부르도록 가르치셨다(마 9:12, 13).
죄는 영혼의 "질병이요 고통"이다. 그리스도는 "죄를 없이 하려고 오셨으며," 이 모든 질병들을 치유하기 위하여 오셨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치유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는 암시나 예증의 방법에 의하여 영적으로 적용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영적인 일들을 우리에게 계시하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회심과 성화에 있어서 영혼을 다루는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기 위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러한 병고침이 가장 의미심장하고 교훈적인 방법으로 기록되었으며, 이와 같이 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모든 병을 고쳐 주시는" 영광스러운 구속자의 명예와 찬송이 설명되고 드높여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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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쉬다, 불다....jp'n:(5301, 나파흐) 

나파흐(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숨쉬다, 불다'를 의미하며, '강하게 불다'는 개념이 이 어근의 가장 본래적인 의미이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2회 나오며, '칼형, 푸알형, 히필형으로 사용되었다.

1. 칼형에서

(a)  '끓어오르다'. 욥 41:20, 렘 1:13에서 끓어오르는 뜨거운 가마에 대해 사용되었다.

(b)  '숨쉬다, 불다'. 가장 중요한 용례는 생명을 주는 것이다. 창 2:7에서 흙으로 만든 몸에 생명의 영을 불어 넣은 것으로서 생명의 숨을 내쉬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겔 37:9에서는 자 생기야 사망 당한 자에게 불어 넣어서 살게 하라고 한다.

겔 22:21에서 분노의 불을 부는 것, 겔 22:20에서 풀무로 불을 부는 것, 사 54:16에서 숯불을 부는 것을 묘사한다.

렘 15:9에서 숨을 내쉬는 것 곧 숨을 거두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일곱 자식을 생산한 여인으로는 쇠약하여 기절하게 하며 오히려 백주에 그의 해로 떨어져서 그로 수치와 근심을 당케 하였느니라 그 남은 자는 그 대적의 칼에 붙이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학 1:9에서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는 '불어 흩어버렸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2. 푸알형에서 '불어지다'. 욥 20:26에서 사람의 숨으로 불어 피어지지 않은 불을 묘사한다: "모든 캄캄한 것이 그의 보물을 위하여 쌓이고 사람이 피우지 않은 불이 그를 멸하며 그 장막에 남은 것을 사르리라".

3. 히필형에서 '숨을 내쉬게 하다, 숨을 거두게 하다'.

욥 31:29, "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였으며 그의 재앙 만남을 인하여 기운을 뽐내었던가".

말 1:13에서 코로 숨을 내쉬는 행위는 코웃음 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에 '코웃음 치다'는 것은 병든 제물을 들임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에 의해 영감된(감동된) qeovpneusto"(2315, 데오프뉴스토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데오프뉴스토스(Ps. -Phoc. 129, Plut.)는 데오스(qeov", 2316: 신, 하나님)와 프네오(pnevw, 4154: 불다, 숨쉬다)에서 유래했으며, '하나님의 호흡을 받는'이란 문자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영감(감동)을 받은', '하나님에 의해 감동된'이란 의미를 지닌다.

2.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데오프뉴스토스는 신약성경에서 딤후 3:16에 한번 나온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하나님이 성경에 숨을 불어 넣으셨다는 것은 성경이 인간들의 어떠한 기록과도 확연히 구별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명시해 준다.

 

존 웨슬레(John Wesley)는 '하나님의 성경은 성경의 기자들을 감동시켰을 뿐만 아니라 간절한 마음의 기도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을 계속적으로 감동시키며, 초자연적 능력으로 말씀의 이해를 도와준다. 그러므로 성경은 교리의 학습에 유익하며, 무식한 자에게 훈계가 되고 오류와 죄에 빠진 자들에게 견책과 확신의 말씀이 된다. 또한 어떠한 잘못에도 교정의 지침이 되며, 하나님의 자녀들을 의로 교육하는데 더없는 기준이 된다'고 논평했다(참조: J. G. Gould).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딤후3:16의 "하나님의 감동으로"의 뜻은 무엇인가? 바울이 사용한 헬라어 `데오프뉴스토스'(theopneustos)는 `데오스'(theos 하나님)와 `프뉴스토스'(pneustos 숨쉬다, 불다)의 합성어이다. 

이 용어는 신약성경에 단 1회 사용되며, `하나님이 숨을 내쉰다'는 뜻이다. 이 용어는 구약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사용된 바 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었더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했다.(창2:7)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 하나님이 기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었더니 그들은 성경을 쓰는 사람이 되었고, 그들의 기록은 성경이 되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호흡이며 숨결이다. 성경의 원저자는 하나님이시다.

딤후3:16의 "하나님의 감동으로"를 벧후1:20은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표현했다. 

여기서 "감동하심을 입은"은 `...을 따라서 움직인다(moved)'는 뜻이다. 마치 배가 바람 부는 대로 움직이며 또한 바람이 멈출 때 멈추는 것과 같다.

또한 "하나님께 받아"는 기자들이 완전히 수동적인 타자기처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이는 성경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의 활동이 성령의 통제하시는 능력 아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하나님께 받아 말한"은 기자들이 하나님이 쓰기 원하시는 것을 썼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딤후3:16의 "하나님의 감동으로"란 특정한 사람들이 성령에 의해 초자연적으로 영향을 받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것은 기자들로 하여금 기계적으로 받아쓰도록 한 것이 아니다. 성령은 인격적인 분이시다. 성령께서는 그들의 인격을 억압하거나 강제하시지 않으신다.  

성령께서는 그들이 정상적인 삶과 임무와 활동을 하는 가운데 그들의 마음을 조명·통제하심으로(때로는 직접적인 계시를 주시고, 때로는 역사적인 기록을 참고하게 하심으로) 성경을 기록하도록 촉구하셨다.


====새 언약의 ‘새로움’ 이해 ....히브리어 <하다쉬שדחׁה>..그 달의 초하루 "호데쉬"에서 모음만 살짝 바뀐 형태임......<늘 새로우신>주님은 시종여일 영원무궁 변함 없이 신실하고 참되시나, 유한한 피조물로서 사람은 마치 그믐달-->초승달-->그믐달처럼 바뀜..

::: 소생/회복(회개/회심=슈브) + 라파(전인적 치유/건강) ==> 우르-쿰-아마드(깨워 일어나 바로 서다) ::: 부활(헬,에게이로)

[사43:19..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시64:9...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사42:9...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었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

[사48:6....네가 이미 들었으니 이것을 다 보라 너희가 선전치 아니하겠느뇨 이제부터 내가 새일 곧 네가 알지 못하던 은비한 일을 네게 보이노니]

히브리어 <하다쉬שדחׁה>는 새롭게 하다 회복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엉망이 된 상태 망가진 상황이 원상태로 회복되는 것, 사람이 보기에 조금의 가능성이 없는 곳에서 모든 것이 새롭게 바뀌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사람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할 것입니다. <하다쉬שדחׁה>는 "새 일", 사람이 조금도 기대할 수 없는 곳에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그 문을 여시는 <새 일>을 의미. ...하나님의 <하다쉬שדחׁה>가 예수 그리스도시니,. 모든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롭게 되며 다시 일어설 수 있기 때문... 그 어떠한 인생도 하나님의 방법인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는 다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하다쉬שדחׁה> 곧 새 일을 통해서 다시 일어서게 될 것...모든 상황이 너무 힘들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는 <회복>하게 하실 큰 능력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시 일어나는 것이 믿음이요... 다시 서는 믿음이 능력이다...성령께서 그 간절함에 기름 부어 주실 것이니...하나님께서 오늘도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부어 주고 계시기 때문이다.

--------새로운 new.kainov"(2537, 카이노스) -----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카이노스(Aeschyl., Hdt. 이래)는 '새로운'을 의미하며,다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a)  형태에 관하여, '새로운'을 의미하며, 즉 '갓 만들어지거나 형성된 것, 사용하지 않은 것'을 표현한다.

(b)  내용에 관하여, '새로운'을 의미하며 즉 '새로운 종류의, 전혀없는, 신기한, 전대미문의 것'을 표현한다.

(c)  일반적 용법에서 카이노스는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질적으로 새로운 것, 곧 과거의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이란 뜻을 나타낸다. 반면에 네오스(nevo", 3501)는 아직 없었던 것, 막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을 뜻하는 시간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이 단어들이 오래 사용될수록 개념상의 차이는 점차 약화되어 갔다.

2. 70인역본의 용법 

(a)  카이노스는 70인역본에서 약 60회 나오며, 거의 대부분 히브리어 하다쉬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보통 '새로운 것, 전에는 없었던 것'을 의미한다(예: 출 1:8, 새 왕; 신 20:5, 새 집; 수 9:13, 새 포도주 부대; 왕상 11:29, 새 의복).

(b)  카이노스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과거의 구원에 대한 경험의 문제를 제기하고 또한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의 활동을 알리는 예언자들의 종말론적 메시지에서 주로 신학적인 의미를 지닌다. 예레미야에 의하면 여호와의 이 새로운 활동은 시내산의 언약과는 대조적으로, 여호와께서 자신의 뜻을 이스라엘의 심령에 두시고 그의 백성들에게 새로운 순종을 야기시키실 새로운 언약의 확립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에스겔이 여호와께서 인간 안에 새 영과 새 마음을 만들어 내실 것이라는 약속을 언급한 것과 매우 유사하다(겔 11:19; 겔 18:31; 겔 36:26). 사 43:18이하에서 옛적 일과 새 일을 대조시키고 있다(참조: 사 42:9; 사 48:6).

그는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에서 돌이키시는 여호와의 새로운 활동을 이 민족과 모든 창조 질서를 포용하는 새로운 창조로 이해하는 것이다(사 43:16-사 43:21). 사 65:17이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를 선포한다(사 65:17이하). 선지자들의 종말론적 선포에서 여호와께서 미래에 행하실 행동으로 기대되고 약속되는 "새 일"은 인간 자신의 내적 부분들로부터 새 세계라는 우주적 범위에까지 뻗어나가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언약 공동체는 경험되고 기대된 여호와의 구원 행위를 시편 중에 있는 새 노래를 크게 부름으로써 응답한다(시 33:3; 시40:3; 시 144:9; 시 149:1이하).

3. 신약성경의 용법 

카이노스는 신약성경에서 42회 나오며, 고전 헬라어 용법과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a)  카이노스는 형태에 관하여 '새로운', 즉 '갓만들어진, 최신의, 사용하지 않은 것'을 나타낸다.

① 마 9:17에서, 갓 만들어진 새 부대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병행구, 막 2:22; 눅 5:38).

② 눅 5:36에서 갓 만들어진 새 옷에 관하여 사용되었다: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병행구, 막 2:21)

③ 요 19:41에서 새 무덤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병행구, 마 27:60)

④ 막 14:24에서 새로 이루어진 '새 언약'에 대하여 사용되었다(병행구, 눅 22:20, 고전11:25; 고후 3:6; 히 8:8; 히 9:15).

⑤ '새' 하늘, '새' 땅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벧후 3:13; 계 21:1.

⑥ '새' 예루살렘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계 3:12; 계 21:2.

⑦ '새' 사람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엡 2:15; 엡 4:24.

⑧ 계 21:5에서 "만물을 새롭게 하는" 것은 만물을 새롭고 더 좋은 상태를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⑨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 마 26:29; 막 14:25.

(b)  카이노스는 내용에 관하여 '새로운', 즉 '새로운 종류의, 전례가 없는, 신기한, 전대미문의 것'을 표현한다.

① '새' 교훈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막 1:27; 행 17:19.

② '새' 계명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요 13:34; 요일 2:7이하; 요이 1:5.

③ '새' 이름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계 2:17(참조: 사 62:2; 사 65:15).

④ '새' 노래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계 5:9; 계 14:3(참조: 시 143:9; 사 42:10; 시 32:3; 시 39:4).

⑤ '더 새로운' 것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행 17:21.

⑥ '새로운' 피조물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갈 6:15; 고후 5:17.

⑦ '새' 방언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막 16:17.

(참조: Walter Bauer; J.H.Thayer; H.Haarbeck; H.-G.Link; C.Brow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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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21:5..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amp)5 And He who sits on the throne said, “Behold, I am making all things new.” Also He said, “Write, for these words are faithful and true [they are accurate, incorruptible, and trustworthy].”(Rec)*5.And He who sits on the throne said, Behold, I make all things new. And He said, Write, for these words are faithful and true.

[렘31: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충실히 지키는 일에서 실패하였다. 실패의 원인은 하나님 자신에게 있거나 언약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지속적으로 지키며 유지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새 언약의 약속이 필요한 이유였다. 그렇다면 새 언약과 옛 언약 사이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곧 두 언약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새로움’은 어떤 의미인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새로움’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하다쉬’는 어원적으로 나빠진 상태를 본래 상태로 회복시키거나 나빠지는 상태를 막기 위하여 무엇인가 조치를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움의 대상으로는 황폐한 성읍이나 성전 등과 같이 눈에 보이는 것일 수도 있고, 영이나 시간과 같이 비가시적 대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본래 상태로의 복구를 의미한다. 

 회복의 의미로서의 새로움은 ‘달(月)’을 의미하는 같은 어원의 ‘호데쉬’에서도 찾아 볼 수가 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초승달이 떠오르는 것은 곧 그 달이 새롭게 시작되는 것으로 받아들여 월삭 축일로 삼았다. 그들은 달이 차서 이지러진 다음 다시 새롭게 떠오르는 것에서 본래 상태로의 회복을 본 것이다.

---- ‘새로움’은 회개와 동의어이기도 하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시 23:3)에서 ‘소생시키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슈브’이다. ‘슈브’의 기본적 의미는 ‘되돌아가다’인데, 구약성경에서는 ‘회개’를 뜻하는 대표적인 동사이다. ‘치료하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라파’ 역시 회복의 뜻을 담고 있다.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갈멜산에서 신앙대결을 벌리기 전에 먼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였다(왕상 19:30). 여기에서 ‘수축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라파’이다. 치료의 궁극적인 목적은 본래 상태로의 회복에 있다.  ‘새로움’의 우선적 의미는 갱신을 통한 본래 상태로의 회복이다. 

----그러나 ‘새로움’은 그런 과거지향적인 의미만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새로움’의 회복은 질적으로 옛 것을 뛰어 넘는 새로운 시작이다. 곧 옛 것의 본질을 공유하되 옛것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차원이 있다. 이사야가 강조한 ‘새 하늘과 새 땅’(사 65:17)은 옛 창조와는 구분되는 새로운 변형으로서의 창조이다. 그것은 옛 창조의 회복을 제시하면서도 옛 것을 능가하는 새로운 실체의 등장을 의미한다. 그에 비하여 전도서의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다‘(전 1:9)는 선언은 본질의 불변성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새 언약은 옛 언약과 본질적 요소를 공유하면서도 질적으로 새로운 언약임을 보여준다. 새 언약은 옛 언약과의 연속성과 함께 불연속성도 지니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옛 것의 실패를 통하여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신다.

=== [성구] 히브리어의 회개하다는 단어로서 "슈브"의 뜻과 용례===

bWv(7725, 슈브) ...(되) 돌아가(오)다, 회복하다

슈브(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되)돌아 가(오)다, 회복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000회 이상 나오며, 칼, 폴렐, 푸알, 히필, 호팔, 풀랄형으로 사용되었으며,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칼형과 히필형에 국한한다.

성경에는 회개의 과정에 있어서의, 인간의 책임을 묘사해 주는 관용구들이 풍부하다: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라"(수 24:23),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여호와께 속하라"(렘 4:4), "네 마음의 악을 씻어버리라"(렘4:14),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호 10:12) 등등. 그러나 인간의 회개 행위에 관한 이러한 모든 표현은 이 한 동사 슈브에 포괄되며 슈브로 요약된다. 이 동사는 본질적으로 회개의 두 가지 필수 조건들을 다른 어느 동사보다도 더 잘 결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필수 조건이란 악에서 돌아서는 것과 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칼 어간에서 슈브는 10가지 상이한 의미를 지니며 이 의미들도 각각 다시 나뉘고 그 중 몇몇 용례는 의미를 정확히 지적하기 어렵다고 한다(Hollacay). 이 중 두 세 가지는 특별히 고찰해 볼만하다.

우선 첫째로, 물리적 동작이나 운동의 뜻을 함축하고 있는 슈브의 기본 의미 '(되)돌아오다'는 270회 이상 출현한다. 하나님이 주어일 경우가 몇 번 있다: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사라)로 돌아오리라"(창 18:14). 인간이 주체인 경우가가장 많다: "내가(아브라함) 아이(이삭)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창 22:5). 히필 어간에서는 '되돌리다, 다시 가져가(오)다'라는 의미로 87회 등장한다.

둘째로, 종종(120회 이상) 슈브는 일종의 조동사 구실을 하여 둘째 동사의 행위를 되풀이하는 기능을 갖는다: "그리고 이삭이 그 우물들을 '다시' 팠다"(창 26:18).

셋째로 슈브의 칼형이 지니는 중요한 용법이 또 하나 있는데 이것은 신학적으로 극히 중대한 것으로서 언약의 공동체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회개의 의미에서), 또는 악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죄를 버리고 부인한다는 의미)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는 것(배교한다는 의미)을 다루고 있는 구절들에서 출현한다. 이러한 문맥에서 슈브의 칼형이 129회 사용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 대 인간의 관계를 논할 때 슈브의 히필형은 11회 밖에 사용되지 않는다.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칼명령형) 우상을 '떠나고'(히필)"(겔 14:6).

모든 어간을 고찰하고 난 후 홀러데이(Holladay)는 언약의 문맥에 슈브의 용례가 총 164회 등장한다고 결론짓는다.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의 대다수 곧 113회가 고전적/문학적 선지서들에서 발견되며 예레미야가 그 선두를 달린다(48회). 예레미야와는 대조적으로 이사야의 첫 39장에는 슈브의 언약적 용법이 단지 6회 밖에 발견되지 않는다(만일 우리가 사 30:15을 "너희가 [하나님께로]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고 읽지 않고 '여전히 앉아 yashab 즉 외국과의 동맹을 끊고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고 읽는다면 5회 밖에 되지 않음). 나머지 뒷 부분의 27장에서는 단 4회가 발견된다: 사 44:22, 사 55:7, 사 57:17, 사 59:20. 이처럼 우리는 이 두 예언서가 정경에서 서로 등을 돌리고 있는 흥미로운 현상에 접하게 된다. 즉 첫째 것은 이 주제에 관해 사실상 침묵하고 있으며, 둘째 책은 소리가 꽤 크게 울린다는 사실이다. 이사야의 용례 결핍 현상은 아마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는 식의, 이 선지자의 어투 때문일 것이다. 매우 통렬하게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말한다: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염려컨대 그들이 다시 돌아와서(슈브)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10). 돌아올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하고 말았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완악성을 미리 내다보시고 이를 자기의 계획 속에 혼입시켰다. 그러므로 선지자 이사야는 좌절할 필요가 없었다(마 13:13 이하).

수많은 구절에서 슈브가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다" to return from exile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칼형: 물론 에스라와 느헤미야에서 나오며(스 2:1, 느 7:6), 그리고 특히 사 10:22, 렘 22:10, 슥 10:9. 히필형: 특히 왕상 8:34, 렘 12:15. 포로 생활에서의 귀환 개념과 언약에로의 복귀 개념 사이의 관련성은 명백하다. 포로생활로부터의 귀환은, 어느 형태의 죄이든 그 죄에서 돌아서는 것 만큼의 갱생이었다. 하나님의 그 어느 쪽의 돌아옴이든 허락한다는 것은 그의 언약적 신실성을 확증해 주는 것이다.

확실히 구약성경에는 회개의 교리에 대한 체계적 설명이 없다. 이것은 그 어느 것보다 더 잘 예증된다(시 51). 그러나 백성들에게 '~에로' 또는 '~으로부터' '돌아서라'는 요구가 주어진다는 사실은, 죄가 근절할 수 없는 오점이 아니라 돌아섬으로써 즉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능력에 의해 죄인이 자기 운명의 방향을 수정할 수 있음을 뜻한다. 회개를 이해하는 데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즉 하나님의 자비의 임의로운 주권적 행동과, 인간이 통회와 슬픔을 초월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의식적 결단을 하는 것이 그것이다. 후자에는 모든 죄의 거부와 자기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을 긍정하는 행위가 포함되어 있다.(참조: V. P. Hamilton;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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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7:3]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대하36:13]또한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그의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게 하였으나 그가 왕을 배반하고 목을 곧게 하며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시22:27]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아6:13]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보게 하라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사9:13]그리하여도 그 백성이 자기들을 치시는 이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도다

[사10:21]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사10:22]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사11:10]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사19:22]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지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이므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들의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들을 고쳐 주시리라

[사55:7]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렘3:12]너는 가서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3:14]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너희를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렘3:22]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하시니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

[렘4:1]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네가 흔들리지 아니하며

[렘5:3]여호와여 주의 눈이 진리를 찾지 아니하시나이까 주께서 그들을 치셨을지라도 그들이 아픈 줄을 알지 못하며 그들을 멸하셨을지라도 그들이 징계를 받지 아니하고 그들의 얼굴을 바위보다 굳게 하여 돌아오기를 싫어하므로

[렘8:5]이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찌함이냐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도다

[렘24:7]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렘25:5]그가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자의 악한 길과 악행을 버리고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준 그 땅에 살리라

[렘26:3]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돌아오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

[렘30: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의 포로를 돌아가게 할 날이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 조상들에게 준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니 그들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렘30:18]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야곱 장막의 포로들을 돌아오게 할 것이고 그 거처들에 사랑을 베풀 것이라 성읍은 그 폐허가 된 언덕 위에 건축될 것이요 그 보루는 규정에 따라 사람이 살게 되리라

[호14:1]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

[호14:7]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그들은 곡식 같이 풍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되리라

[욜2:12]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욜2:13]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슥1:3]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슥1:4]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위를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3:7]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

[눅1:16]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눅1:17]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행9:35]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행11:21]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행15:19]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행26:18]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행28:27]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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