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1.29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마6.<의의 실행에서 주의>자아와 육을 처리, 주 임재 앞에서 은밀히, 주기도.용서와 용납.
첨부파일 :

개역개정]마6장

....[마6: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아크 디르슈 베레소나 에트-말쿠트 엘로힘 베-에트 체다카투 베-누사크 라켐 콜-엘레 .....먼저 바로 지금 찾을바(구하고 찾고 두드릴바), 하나님의 뜻의 생생한 실제화, 곧 하나님 속성 그대로 담긴 하나님의 일하심, 하나님 속성 그대로 담긴 하나님의 의를!!!..그리하면 들어 올리사 그분의 가르침 그대로 조성되고 말씀 담긴 그릇으로 나타날 바 "그분의 말씀 나타남"이라 칭하리라.]....... 아크(알렙-코프...바로지금) 디르슈(달렛-레이시-쉰-바브(상))..*다라쉬<찾다/구하다>..구하라) 베레소나(베이트-레이시-알렙-쉰-바브-눈-헤이.. *베레시트의 생생한 실제화..) 에트-말쿠트(멤-라멛-카프-바브(중)-타브) 엘로힘(알렙-타브(분배/전이통해 이뤄주실바 Q의 속성)..+엘로힘) 베-에트 체다카투(체데-달렛-코프-타브-바브.. *체다카=Q의 의) 베-누싸크(눈-싸메크-코프..*나싸(눈-싸멕-헤이 = 들어올리다)) 라켐(라멛-카프-멤..가르쳐 수용/적용케 하심으로써 그리 된 그릇만드심) 콜-엘레(카프-라멛, 엘레-드바림=새겨진 말씀<신명기>)


....##타락한 옛 생명(죄성, 곧 사탄적 육신)을 불식하여 작동됨 없도록 보혈로 덮고 주 이름으로 대적하라---천연적 생명(자기보존적 생존 본능)조차 주께 맡겨드리라 ---오직 <내주하는 참생명의 성령 따라> 거듭난 믿는이의 마땅한, 주님의  신성한 참 생명 삶에 올인하라##

---

[마6:19, 20, 21...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알 타아체루 라켐 오차로트 베-아레츠((20절에는 바-샤마임으로 대치됨)) 아쉬르 요켈룸<먹어버림> 솀 스스 베-라카브 베-가나빔 야흐테루 베-가나브)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아발 타아체루 라켐 오차루트  바-샤마임 아쉬르 사스 베-라카브 로  요켈룸<먹어버림> 솀 베-가나빔 로 야흐테루 바-로 야게노부)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키 비메콤 아쉬르-오체르켐 보 솀  이흐예 감-라바브켐) ]

===알(알렙-라메드)  ...타아체루(테이트-알렙-체데-레이시-바브) ....라켐(라메드-카프-멤) ...오차로트(알렙-바브(중심점)-체데-레이시-바브(상점)-테이트) ...바-아레츠(베이트, 알렙-레이시-체데) ... 라쉬르(알렙-쉰-레이시) 요켈룸(요드-알렙-카프-라메드-바브(중심)-멤)  ...솀(쉰-멤) ... 스스(싸멕-싸멕)  베-라카브(바브, 레이시-코프-베이트) ...베-가나빔(바브, 김멜-눈-베이트-요드-멤)  ...야흐테루(요드-헤이트-테이트-레이시-바브(중심점)) ...베-가나부(바브, 김멜-눈-베이트-바브(중심점) ===

===[아버지 뜻대로 공급하는바] 주님의 진리 말씀 안에 있는 참된 보물 = ((알렙부터 타브까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본성이니...거듭난 너희 마음 안의 참된 곳간/심령의 마음판에.. ((하나님-사람으로서 참된 삶 가능케 하는바 그 삶 살아갈 수 있도록!! 타브에서부터 시작하여 알렙에 이르도록 까지 거울상처럼 똑같이 완전-충만으로)) 감동된 진리말씀으로 채우라/.쌓아두라/새기라...그 본성이란 곧, 복음인바 그야말로 참된 보화이니... ((그 본성으로 충만케 됨 인해 참된 분별과 영안으로 가득차게 되고, 자연스레 하나님의 영의 실제 안에 있게 될바 주님의 불가침 영역 안에 있게 됨 = 잃어버릴 위험 전혀없음)) ...땅인바 참되게 믿는이인 너희 혼 안에... 창1:1,2절 그대로<엘로힘의 사역으로 샤마임-아레츠> 그대로 이루게 하실바 ... 그분의 말씀을 참되게!! 먹고-소화/동화함 통해 이루게 하실 바 ....이것은 인침 이룸이라, .즉, 당신 형상 그대로 부어주사 그분 자신의 그 이름(명성 = 하늘 샤마임) 어떠함을 그대로 나타내게 되리니.. 하나님이 원하심<갈망/의도하심의 수준 그대로>..측정/교정/조성 거쳐 완비됨에 이르게 되리라.....그리스도 영의 교통<듣고 순종함>을 마음 안에 가짐으로써 행하라/살라)  기름부음의 생생한 전달하심을 그대로 받아 <김멜-눈 = 간=동산...침범불가>, 마음 안의 동산에 거함이라 하리니,  ...부활생명의 영은 (깊이 파인바 결코 마르지않고 늘 새로이 샘솟아 넘쳐나는) 지혜의 샘 되고 머리가 됨...지속적 선순환 되게 함===<동심합의의 참 믿음으로 하나됨 견지하는 자마다 그 누구도 침범/참노하지 못할 바> 너희 보물은 너희 마음 안에 있나니.....그 까닭은  ...<하나님의 본성이> 그 마음에 거함 인해...부활생명의 그영과 하나된 그릇인, 너희 안에 있기 때문이니 ...바로 마음판에 새겨진 그 Q말씀을 필요한 시점마다 사용하기 위해 시시때때로 수시로 드나들 수 있고 여호와 주님 이름 부름으로써 그 해석을 성령께 들을 수 있는바 상호전달 가능한데, 그 까닭은 Q마음과 우리 마음이 같아짐/"베레시트"그대로 동심합의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

....엘/알(알렙-라메드....하나님의 가르침) ...주님 말씀 안에 있는 참된 보물=하나님의 본성을..

 ...타-아체루(테이트, 알렙-체데-레이시-바브...하나님이 십자가<체레브::싸여진 수의 뚫고 발아한 생명방변..십자가는 후차+체레브의 두방면 가짐>로 주와 하나되게 하신바 거듭난 마음) :: 거듭난 너희 마음 안의 참된 곳간/심령의 미음판에

....라켐(라메드-카프-멤...가르침 그대로 수용하여 새김) :: 쌓아두라/새기라

...오차로트(알렙-바브(중심점)-체데-레이시-바브(상점)-테이트... Q-사람의 영의, 연결된 하나의 완성 이룸) :: 그 본성이란 곧, 복음인바 참 보화이니... 

...바-아레츠(베이트, 알렙-레이시-체데) ... 땅인바 너희 혼 안에

...아쉬르(알렙-쉰-레이시) ::: 창1:1,2절 그대로 <엘로힘의 사역으로 샤마임-아레츠> 이루게 하실바

....요켈룸(요드-알렙-카프-라메드-바브(중심)-멤)  ::: 그분의 말씀을 먹고-소화/동화하여 그분과 형상이 똑같아질바

...솀(쉰-멤) :: 이것은 인침 이룸이니...즉, 당신 형상 그대로 부어주사 그분 자신의 그 이름(명성 = 하늘 샤마임) 어떠함을 그대로 나타냄 되리니..

... 사스/스스(싸멕-싸멕)  ::: 하나님이 원하심<갈망/의도하심의 수준 그대로>..측정/교정/조성 거쳐 완비됨에 이름

....베-라카브(바브, 레이시-코프-베이트...그리스도 영의 교통<듣고 순종함>을 마음 안에 가짐으로써 행하라/살라) 

...베-가나빔(바브, 김멜-눈-베이트-요드-멤) ...기름부음의 생생한 전달하심을 그대로 받아 <김멜-눈 = 간=동산...침범불가>, 마음 안의 동산에 거함이라  

...야흐테루/에이테루(요드-헤이트-테이트-레이시-바브(중심점)) ...부활생명의 영은 (깊이 파인바 마르지않는) 지혜의 샘 되고 머리가 됨...지속적 선순환 되게 함 

...베-가나부(바브, 김멜-눈-베이트-바브(중심점)

-----

...키(카프-요드..그 까닭은) ...비메콤(베이트-멤-코프-바브(상)-멤...메콤=살아있다...<하나님의 본성이> 그 마음에 거함 인해 )...아쉬르(알렙-쉰-레이시)  ...오체르켐(알렙-바브-체데-레이시--카프-멤....부활생명의 그영과 하나된 그릇인, 너희 안에 있다) 보(베이트-바브(상)...바로 그 Q말씀을 필요한시점마다 사용하기 위해 시시때때로 수시로 드나들 수 있는바)  솀(쉰-멤....주님 이름 바로 그대로) ...이흐예(요드-하이-요드-하이...여호와)  감(김멜-멤...상호전달 가능하다) 라바브켐(라메드-베이트-베이트-카프-멤...<라브>=마음...Q마음과 우리 마음이 같아짐/"베레시트"그대로 동심합의)

====

### [깨다/일어나다.부활하다]....소망하심 그대로 지성소 되게 하심 קום 쿰....코프-바브-멤  ( ::: 생명사역으로.생명(하임 ..חיים) )..

###((사역결과 변화됨에 있어서 여호와의 말씀을 의미하는 요드-바브 용례, 뜻))...요드+바브(좌중심점) :: 영안에 있는 말씀으로 연합<본질안에서 하나> 요드+ 바브((상) ::<인격으로 연합, 본성 안에서 하나> 요드+바브<생명으로 연결시킴>  

@@욤...יום...요드(요드 안에 점 있음)-바브(상)-멤 :: "날"로 번역했으나, 실은 "여호와의 그릇"을 의미.. ..

@@자아=에트..את ....@@표적/기사 = 오트..אוֹת  ///  베레쉬나 בראשין...  히브리어 בראשית..에서 요드-타브 대신에 요드-눈이 들어감..."눈"은 생명호흡 실제의 확장을 의미하므로, 베레쉬트(관련 600여 단어가 그 안에 다 포함되어 실제가 되고) + 이것의 전체가 확장되었다는 뜻

--##너희가 내가 창1:1,2에서 말한바, 베레시트 그대로 됨이야 말로 지고지선의 진복이라는 것을 참괴게 깨달아 알기에 네가 허락하고 "그대로 이루어주세요"하고 날마다 나와 동행-동거-동주함 안에서 바람이야말로 내가 원하는 바이니.. 그날에 너는 깨달아 알게 되리라.."베레시트"를 넘어서서 아버지께서 더해 주실바, 더 큰 것이 준비되어 있음을...다섯달란트 받은자가 다섯달란트 더 받았듯이...--이것이 오직(진짜-정말...히브리어"아크אך"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 하나님의 일이다!! = (나라..왕국 =하나님의 일)말쿠트מַלְכוּת <진리말씀을 참되게 배운제자로서 , 받은 그대로 심령변화의 완전함 이룸>+ (의)체데카 צְדָקָה<죽음/부활의 십자가 두방면 이루심으로써 부활생명의 영 따름의 소망을 실제화함>  아크 다라쉬우 베레쉬누하 에트-말쿠트 엘로힘 바에트-체다크헤

-----(솔로몬....평강안에 안식함..."준비하신 그대로 베레시트...이뤄주세요")살로마 = שְׁלֹמֹה


....우리는 5장17-48절에서 보았던 바,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보완하고 최고 수준의 완전한 내적 율법으로 바꾸고 계시는 이유는, 우리 내면에 뿌리내려 깊이 감추인 탐심과 정욕, 즉<무절제의 충동/극단적 치우침의(혈기방장한 기질/성질 냄...성급한 분냄/미워함으로 살인에 이르게 할 수 있는)--(간음 유발케 할 수 있는, 안목의) 정욕--(이에 더하여, 거듭난 자의 마땅한, 신성한 생명의 참된 겸손/온유/인내/자비/긍휼/선대/사랑의 정반대인) 신중/진지/분별함 없는 조급함/오만불손무례/무정/무자비/치우친, 탐욕-투쟁/자기방어적 이기심/염려 가득한 천연적 생명, 그 어떠함>을 파내고 드러내어 제거하고자 하심이었다. 이제, 6장에서는, 의를 행함, 곧 왕국 백성들의 의로운 행동 표출 통해<실은, 우리 안에 가득한, 조급한 성질이나 정욕과 탐심보다 더 나쁜, 지극히 추하고 더러워진> 자아와 육을 드러냄 위해 세 가지 예(구제-기도-금식)를 들어 사용하고 계심을 본다.


.....[그 어떤 염려, 곧 다른 이들의 관심 끌지 못함 인해 혹시 그 자신이 잊혀진 존재가 되거나 불이익이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무의식적) 염려가 깔려있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자신의 영광 드러내기 추구하는 <육>은 사람들 앞에서 선한 행동을 하기 원하지만, 천국의 다스림 아래 자기를 비우고<주님은 결코 그분의 자녀를 그분의 돌보심으로부터 빠뜨리는 실수가 없으시다!!>(자기를 돌아봄의 자기 연민의 감정에 휩싸이지 않게 한사람마다마다 일일이 돌보신다!!), 거듭나게 하신 바, 온유와 겸손의 영으로 살고 순수-순전-단순한 마음으로 행하는 천국 백성에게는, <일부러 사람들의 주목 끌려 하거나>사람들의 칭찬 듣기 위해 육으로 어떤 것을 행함은 결코 허용되지 않으며, 다만 하늘 아버지의 기쁨을 위해 모든 것을 영 안에서<성령 인도하심 그대로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시요 그들의 아버지이신 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아버지에 의해 거듭난 천국 백성이라 해도 이 땅을 사는 동안, 그들에게는 여전히 피조된(창조함 받은) 천연적 사람의(타고난) 생명이 있을 뿐 아니라(이것은 온 인류에게 공통적이다), 또한 <거듭나게 하신 아버지에게서 받는 바, 창조되지 않은> 영적인 신성한 생명이 있다.  그러므로 왕 그리스도께서 산 위에서 공포한 천국의 새 율법이 제자된 그들에게 주어진 의도는 그들이 그 새로운 율법을 그들의 타락된 사람의 <천연적>생명으로 지키지 않고 ((오직 내주하시는 아버지-아들의 영이신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써)) 아버지의 영원하고 신성한 생명으로 지킴 인해 그들로 사람의 영광을 얻음 아니라 아버지의 상을 받게 하기 위해서이다. 


....세 가지 예(구제-기도-금식)들에서 주님은, 각각 [사람에게 보이려 하지 않음, 곧 은밀히]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계신다(마6:4, 6, 18절).... 의로운 행동조차 은밀히 하라 하심은, 하늘 아버지의 자녀인 천국 백성들은 <은밀함 가운데 계신,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의 임재 안에 살아야 하며, 아버지의 임재를 주의해야 하기 때문이요, 그들이 위하는 바는 다름 아니라 오로지 아버지의 나라를 위함이기에 은밀함이 필요한 것인데, 그 은밀한 중에 아버지께서 갚아주심의 보상은 이 시대에 주어질 수도 있고(고후9:10-11), 장래 오는 시대에도 주어질 수도 있다(눅14:14) .... 이 때, 의로운 행동을 은밀히 행함의 효과는 그 무엇보다도 <자아와 육을 사용하지 않음의 결과로서>자아와 육이 죽임 당하는 것이다...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의 큰 병폐 중 하나는 나팔 불며> 기획-전시-공연을 통한 기부금 모금인 것을 참되게 분별해야 하리라.


....**주께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시는 상을 말씀하고 계셨지만, 그 무엇보다 더 크고 중요한 것은 상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감추인 상급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은밀한 체험 통한 생명의 비밀한 성장 성숙임을, 그리고 또 한 가지 부가적 유익이 있는 바 그대의 자아와 육을 죽임이 뒤따름인 것을, 반드시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그대의 주위 사람은 아무도 그대가 무엇 하고 있는지 알거나 깨닫지 못하는, 눈치채지 못하는--우리의 자아와 육을 죽이는 체험적인> 은밀한 방법으로 주께 기도하고, 주께 경배하고, 주님을 접촉하고, 주님과 교통함으로써만 이 생명의 성장 성숙은 이루어지게 된다

.... 성급한 화냄이나 정욕도 물론 추한 것이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신성한 참 생명의 성장 성숙을 가로 막아 좌절케 하는 가장 큰 장벽은 바로 자아인데!!, 자아는 사람 앞에서 드러내 보이기를 즐기는 사실 가운데서 가장 잘 나타나 보이며, 자아는 사람 앞에서 의로운 행동 보이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모두 그와 같은 자아를 가지고 있는 바, 언제나 드러내 보이는 방법으로 행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극도로 간교한] 자아로 충만하고 [극도로 간교한] 육으로 충만하다.  자아는 영광 받기를 사랑하고 육은 눈길 끌기를 사랑한다.. 

.... 참된 생명의 성장은 자아를 끊어버림 통해 오는 법이다.. 하나의 원칙이 있으니... 사용하지 않으면 약화되고 마치 없는 것처럼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는 것.....물론, 간혹 자아가 베어지고 육이 처리된 사람들조차도 <다른 이들의 영적 유익과 생명 추구에로의 초대 위해> 때때로 그들의 실행에 관하여 말해야 할 때가 어쩔 수 없이 필요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말 조심해야 할 바는, 그런 경우에 처해서도 그대 자신의 의로운 행동을 드러내는 것은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과장 없이, 진솔함을 유지하고> 정말 아주 조심스러워야만 한다. 어쩔 수 없이 말하더라도 그 말함 후에는 이전보다 더욱 더 보다 주 앙망함 안에서 회개하고 주 안에 머물기를 힘써야 하리라...우리는 많이 기도해야 하지만 다른 이들이 우리가 얼마나 기도하는지 알 수 없도록 <은밀히 주 아버지 임재 안에서, 홀로> 주께 집중해야 하리라. 이때, 그대는 건강하고 또한 자라고 있음을 의미한다. <자의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알도록 함은 그대의 상을 잃는 것이자 생명 성장과 영적 건강을 깨뜨림이 될 수 있음을 정말 명심하고 주의하라.....그러므로 그대의 <주 임재 앞에서 주께서 누리시도록 주께 드림이 되는> 모든 행동마다 {정말, 가능한한!!] 감춰져 있고 은밀하신 분께만 드림이 되도록, 은밀함을 유지하도록 하라....이 때 알게 되는 것은 더 많은 <감추인> 신성한 생명 체험 통해 하나님을 앎의 선순환이 이루어짐이  실제화 된다.  이것이 바른 길이다.

....주님의 긍휼과 은혜로,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감추인 방법으로 <능가하는 그리스도의 의, surpassing righteousness of Christ>를 행하도록 해야 한다.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들을 행하려 하되 은밀한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도록(그들이 알지 못하도록), 오직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당신을 드림의 주께 향기로운 비밀한 제사로서, 의로운 행동을 하도록 하자....구제-기도-금식 등 뿐만 아니라 그 외의 <주 보시기에 합당한> 어떤 의로운 행위라도, [심지어 간증과 죄 고백에서조차도....이 때 무엇을 말해야 할지 성령께서 시종일관 온전히 주장해 주시도록 구하라..그대는 다만 그분의 통로됨 기억하라] 우리는 끊임없이 [친히 주님 이끄심-주장하심 통해 신성한 생명의 성장과 성숙의 충만함으로 아들 됨 이루어 가시도록] 자아와 육신을 거절하는 방법으로 행하기를 연습-실행하도록 하여 그것을 체질화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사람들이 알게 하여 그들로부터 칭송 받으려 함의 유혹을 거절하고> <홀로 그대를 기뻐하시는 분, 주 임재 안에서, 그분과 내밀한 교통 통해, 곧 그분의 신성한 생명 안에 머물러> 성령따라 행하기를 연습-실행해야 할 필요가 여전히 있음을 말씀하고 계신다....신앙의 위인들 중에서 그들 안에 감추인, 신성한 생명의 비밀함 안에서 탁월하게 성장 성숙함으로 그 자신들을 드렸던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을 본받도록 하자.....교회 생활 중에서조차 아마도 10번중 8-9번은 은연 중 자신 드러내고 있음을 발견할 수도 있다!!..다만 주의 긍휼과 은혜를 구하라.

....우주를 보라, 우주는 Q이 감추인 분이요 은밀하신 분임을 가리킨다. 많은 것을 행하셨지만 사람들은 그분이 그것들을 행하셨음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신 것들은 보았을지 모르나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는데, 이는 그분이 언제나 감취어 있고 언제나 은밀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그처럼 은밀하고 감취어지는 본성을 감추고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타고난, 천연적>생명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한다면 결국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전시하려 할 것이지만(이것이 바로 위선적 행태인데, 거기에는내적 실제라 할 만한 것이 전혀 없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한다면 이 사랑은 언제나 감추인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하나님은 그분 안에 엄청나도록 매우 많은 것들을 가지고 계시지만 단지 조금만 나타내신다.  이것이 신성한 생명으로 천국 백성이 의로운 행동을 하는 데 있어서의 본성적 특성인 것이다.


==Q, 영광의 아버지께서 주시는 지혜와 계시의 영이 밝혀 주시는 바, 참된 소망의 비전 따라 행하도록, 마음(내적 존재, 속 사람, 인격, 영의 양심+지정의)의 눈<영적 분별력> 깨끗케 하는, 말씀의 씻는 물 = 말씀과 하나 되어 역사하사 모든 부정 씻어 정결케 하시는 성령(그 영)== 이 때, 눈은 몸의 빛임
[마6:22, 23...*22.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22 “The eye is the lamp of the body; so if your eye is clear [spiritually perceptive], your whole body will be full of light [benefiting from God’s precepts]. 23 But if your eye is bad [spiritually blind], your whole body will be full of darkness [devoid of God’s precepts]. So if the [very] light inside you [your inner self, your heart, your conscience] is darkness, how great and terrible is that darkness!]
[엡5:25-27..*25.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25 Husbands, love your wives [seek the highest good for her and surround her with a caring, unselfish love], just as Christ also loved the church and gave Himself up for her, 26 so that He might sanctify the church, having cleansed her by the washing of water with the word [of God], 27 so that [in turn] He might present the church to Himself in glorious splendor, without spot or wrinkle or any such thing; but that she would be holy [set apart for God] and blameless]
[딛3:4-7...*4.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5.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7.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4 But when the goodness and kindness of God our Savior and His love for mankind appeared [in human form as the Man, Jesus Christ], 5 He saved us, not because of any works of righteousness that we have done, but because of His own compassion and mercy, by the cleansing of the new birth (spiritual transformation, regeneration) and renewing by the Holy Spirit, 6 whom He poured out richly upon us through Jesus Christ our Savior, 7 so that we would be justified [made free of the guilt of sin] by His [compassionate, undeserved] grace, and that we would be [acknowledged as acceptable to Him and] made heirs of eternal life [actually experiencing it] according to our hope (His guarantee).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2 And do not be conformed to this world [any longer with its superficial values and customs], but be [c]transformed and progressively changed [as you mature spiritually] by the renewing of your mind [focusing on godly values and ethical attitudes], so that you may prove [for yourselves] what the will of God is, that which is good and acceptable and perfect [in His plan and purpose for you].
[시119:9....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이 원칙은 교회 안에서 합당한 기능적 섬김 발휘함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데, 결국 자기를 내세움의 자기 자랑이 되지 않도록 <즉, 자아와 육신에 영광 돌림이 되지 않도록> 정말 주의할 필요가 있다.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주와 하나된 자로서, 오직 주님만 보시게 할 바>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광고-선전 말라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

......[[주기도문]]Q뜻(베레시트)을 알고 구하라.. 

אבינו שבשמים...아비누 쉐바 샤마임(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יתקדש שמך, תבוא מלכותך..이트카데쉬 쉬메카, 타보 말쿠테카(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יעשה רצונך, כבשמים כן בארץ...예아쎄 르촌카, 케 베샤마임 켄 바 아아레츠(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את לחם חקנו תן לנו היום...에트 레헴 후케누 텐 라누 하욤(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וסלח לנו על חטאינו כמו שסולחים...우슬라흐 라누 알 하타에누 케모 쉐솔힘(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גם אנחנו לחוטאים לנו...감 아나흐누 라호테임 라누(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ואל תביאנו לידי נסיון...베 알 테비에누 리데 니싸욘(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כי אם חלצנו מן הרע...키 임 할체누 민 하라(악에서 구하소서)

כי לך הממלכה והגבורה והתפארת...키 레카 하맘라카 베 하그부라 베 하티페레트(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לעולמ-עולמים, אמן...레올메 올라밈 아-멘(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

@@라켄::Q이 이렇게 정하셨으니..이랗게 기도하라...받아들여서 확장하라(Q의 <속성을>공급하신바 그 말씀으로...야켄 = 야긴...성전 기둥) ..

@@코 : 받아들임은 카프...헤이--그 실제, 즉 그, 실제를 받아들임을 의미.. 

@@타타펠랄루 :: **펠=기도...**타브+타브 : 목적/목표 이루실바 Q의 완전하심을 열어 공급하심으로써, 주어 온전케 하심..그것을 의미 ..**.라멛-라멛 = 라일라(라멛-요드-라멛 = <인내-참음-견딤의 과정안에 두심으로>그분의 다루심 통한 합당한 영에로의 조성 시간 : 신진대사적 영적 선순환 통한 그분에로의 조성 시간)..**펠 : Q의도-목적-계획 그대로 이루심을 <동심합의로!!!>구함이 바로 기도이다!!.. **바브(중) =영안에 이루심  

@@아비누 : 아버지<아브>Q이 마음안에 들어오셔서 만드신 바 그 실제 =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것으로 채워져야 하기에 그리하실것을 의미....그렇게 조성된 아들 = 아벤 = 보석...또한 알렙-베이트 = 아버지의 집 = 성전.. 

@@셰바-샤마임 ... **셰바 = <하늘에...보좌에>앉아계심 **샤마임 ..쌍수(우리가 만들어진 상태로, 하나님과 그분의 그릇인 우리를 합하면 복수 상태임..엘로힘의 꼬리글자 요드-멤...실지로는 그분의 모든 속성이 우리 안에 넣어주셨기에 우리 영혼은 하늘<영..샤마임>과 땅<혼=에레츠>인것..

@@이트카도쉬 **이트 :: 베레쉬를 포함하고 있음을 전제함..**카도쉬 : 순수/순결/순전...그분이 그러하시듯 그분의 소유된 우리도 혼합이 전혀 없이 Q으로만 채워짐.. "카-코프" 는 교통 "도-달렛"은 구별 "쉬"..는 쉰 

@@솀카>쉰-멤-코프> : 하나님 형상이 그릇안에 들어가서 그대로 수용/적용됨으로써 하늘에 앉혀짐 --그분의 마음-눈으로 보는 바 시야/각도/방향/생각/분별/뜻이 하나됨을 의미..

@@말라쿠투 :  말 + 라크 *말(멤-라멛) ::: 진리 공급 인해 마음 속에 성령의 검이 작동되어 Q것 아닌 부분들을, 나 자신을 베어냄 --->*라크:: <우리의 동역 통해> Q께서 그 공간을 당신으로 채우심 인해 온전케-완전케 됨  *멜렉 = 왕.

@@이아쎄  = 이 + 아싸 : 요드+ 아인-쉰 + 헤이 --여호와 안에서 <나의 동의함 인해> 우리 안에 새로운 참 존재로의 새창조가 이뤄짐...

@@레촌카(레이시-체데-바브(상)-눈-) : 아<레>츠 ..Q의 운함/의도대로..동의함 인해 영 생명의 확장 됨 인해...나타나는것은 @@카-아쉬르<창1ㅣ1,2...베레세트 이뤄짐>...즉 베레시트의 샤마임은 예슈아 그분자체이심 @@감 : 성령의 전달하심이 그릇<우리>안에 <동심합의로> 이루심 @@베-아레츠 : 땅에 이뤄짐

@@ 에트-레헴(라멛-헤이트-멤 = 양식 <창1:1,2>= 예슈아 = 신성과 인성의 완성 그 자체) :"헤이트-멤 = 열정.. 곧 Q의 열망...이 열망은 레촌 그대로 이루기를 갈망함이니...그것을..이루기 위해서는 양식을 먹어야 함..

@@후크누(헤이트-코프-눈-바브(중) = Q과 우리 사이가 맺어짐을 뜻함 :: "받아먹으로/받아마시라" 하심대로!! 양식<에트.. 그 자체이신 예슈아>을 먹고 마시면 소화-분해-흡수된 바... 그분으로 조성되는 바, 그 예수로 삶, 예수를 살아냄이 그냥 자연스러워짐..=이것이 참된 규례/율례임

@@탄 = 주다.. *타님 (타브-눈-요드-멤) :: Q을 표현할바 주님 눈에도,  사람이 볼 때에도 비교할 자 없을만치 완성된  크게-위대하게 만드신바 됨

@@하-욤...<헤이-요드-바브(상)-멤> :  "요드-바브" 자체가 여호와의 약자..성령의 그릇인바 여호와를 호흡함 됨.. 

@@라헴...역으로 읽어보면 "마할..치유/용서하다"...JC를 먹은바 그 사람은 그분으로 인해 용서/치유받은자... 치유 받은자가 또 <진리-간증 전달/공급함으로써> 치유하게 됨 ...이미 Q은 창조 이전에 이미 현재 우리의 상태를 감안하여 이 말씀 주셨음을 명심하라....

@@알<아인-라멛>-하보타이누<헤이트-베이트-바브(상)-타브-요드-눈-바브(중)> :: 헤이트-눈 .. 즉 은혜 그 단어가 전후 철자를 이루고 있는데, 그 안의 내용을 보면 <베이트-바브(상)-타브-요드 :: 보티>가 들어 있음 .즉, .Q 임재 앞에 있을 때 ((그분을 제한함 인해 은혜를 온전히 이루지 못함 그자체가, 실지로는 의무-책임 방기가 되는 것인데...그분을 제한함 인해 받지못한것이 있음을 알게됨을 의미, 이것은 깨닫게 된바 그것을 믿음으로 인정-고백함 통해 변화 받고 주님이 일하심으로써<보티...주님/주인이신 그분의 성전되고-그분과의 인격적 관계의 온전함 이뤄 완전케하심으로써 은혜를 온전케 하심> 온전한 자유-기쁨/해방의 은혜-사랑-감사 충만-넘치는 강동/동감 이루심!!...바로 이것을 나눔이 은혜 나눔 됨 = 이것이 진정한 치유/용서인것!!

@@ 테비에누<타브-베이트-요드-알렙-눈-바브(중)>...시험에 들다/?? -- 마음의 상처?? = 이런 것 없음!! .....발성할 수 있는 언어화 하면서 알(알렙-라멛)을 비틀어 표현해 버렸음... *테바(타브-베이트-헤이> = 방주 =성전 **보(베이트-알렙) : 오다-가다..옮겨지다..**요드 = 야드 :: 구별된 사역..우리안에서 일하심

@@니싸욘<눈-싸멕-요드-바브(상)-눈>...요드-바브-눈..이것은 Q의 사역으로 그분의 인격이 우리안에 흘러들어옴을 의미..  **닛쉬<눈-싸멕-요드> = 승리-깃발-장대 ...우리가 채워진바 충만한 진리 그 자체가 되면 그분이 저절로 들어올려짐이 됨...**나하쉬트<눈-헤이트-쉰-타브-타브>...구리뱀

@@타하라체누<타브-헤이트-라멛-체데-눈-바브(중) ...타할레체<타브-헤이트-라멛-체데>..역으로는 *첼라헤트 = [깨닫게 하시는 바 말씀 진리로 충만케 하심 인해 완전히 나를 굴복시키시고 정복하심 인해] Q이 성취하심/성공하셨음 = 나로 이기는자 되게 하심  *체레흐= (진열된)그릇//Q나타나심 = "단쇠"로도 표현.. ..*첼(렘) = 형상

@@민<멤-눈 = 만나>-하라아<헤이-라멛-아인 :: 목양하심으로 분배/전이하심> :: 말씀의 생명 확장으로 목양하시며 영을 분배/전이하소서.. 

@@마믈라카 : 나라, 왕국 @@ 갑보르 : ((영으로 말미암음))권세-능력

@@하타-포아르트<헤이트-타브-페이-아버지-레이시-타브> 영원히 있음 *포아르 : 영화롭게 됨..

=======

##라켄 = (라멛=공급하심) 그대로 되니라.(켄-카프<적용>-눈<확장>) 요드-카프-눈 = 야켄<야긴 :: 그가 세우신다>.코(=카프-헤이 :: 받아들여 수용/적용한 그대로 실제가 됨)..

##타타팔랄루 : 타브-타브<(온전/온전)목표/목적이룸>...페이-라멛<기도 :: 내가 말한 그대로 바로 그리 되도록 동의/앙망함으로"아멘"하거라, 곧 내게 중심으로 열어 맡겨라..내가 친히 이루리니..밤, 곧 라일라(라멛-요드<만듦/조성의 신진대사사역>-라멛)..역경-고난-인내-견딤 중에>...라멛-바브(중) <연합된 그영에 의해 이룸>-- 

##아베누 : 알렙-베이트-요드-눈-바브(중..거룩케함의 신진대사 변화가 영안에서 이루어짐을 의미)..= 아버지의 모든것 전달해주시려는 그뜻이, 그분의 사역하심이 영안에서 이루어져 확장되게 함....알렙-베이트 = 아버지, 곧 성전...베이트-눈 = 벤..아들...알렙-베이트-눈 = 아벤 =돌 = 보석  

##셰베-샤마임 :: 하늘(보좌)에 앉아계심.. ##셰베-샤마임...**샤마임[Q의 속성, 곧 진리가 담긴 분이 좌정해 계심 그자체를 "하늘"로 총칭하고 있음...그러므로 생각을 넓힐바!!  "너희, 바로 나 예수를 믿는, 네 마음속에 하늘=하나님나라=이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기에 예수님의 승천은 바로 내 마음속으로 승천한 것도 됨..]...마임의 열린멤 아래 가로선은 쌍수<복수..Q만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연합됨 인해 이룬 상태>를 의미..진리이신 하나님(열린 멤)의 공급하셔서 만들어진 바 우리(꼬리 멤...이는 Q의 모든것 넣어 들어가게 하신바  그릇 "엘로힘"의 꼬리글자) 

##이트카도쉬(<베레쉬..부분이 생략된 형태 또는 베-하 아레츠 하이타(헤이-요드-타브-헤이 :: 완성 상태 를 뜻함)에서 생략된 형태>요드-타브,  코프-달렛-쉰)  ^^히브리어의 특징는..예를 들어서 알렙과 쉰으로 이루어진 단어가 있다면 그 안에 집어넣은 철자는 그 내용의 어떠함을 나타낸다는것..그러므로 첫 철자와 마지막 철자를 함께 유심히 살펴보는 습관을 길러야함  **카도쉬 :: Q의 거룩하심은, 어떤 것도 섞여있지 않으심..순결-순수-순전하심, 진리 그 자체 (믿는이의 거룩은 Q의 속성으로 순전하게 변화됨을 의미) ...즉, (일방적인 교통으로 공급-다루심/깎아냄 거쳐 부어주신바) 세상으로부터 구별됨(열린문을 들어갈때마다 또 열린문의 길을 계속 반복적으로 경험케 하심)과 동시에 당신의 형상 그대로 나타나도록 이루심.. 

##솀카(쉰-멤-코프) = 솀  출현  ...*솀 :; 그분자신의 어떠함, 곧 형상 부으심이 그릇안에 담겨져 그 실제가 적용/완성되어 출현됨 = 진리말씀이 우리안에 들어와서 우리속에 완전히 적용된것 = 하늘에 앉히심(함께 같이-보고-듣고-느끼게 됨)...이름--하늘--형상 

##타바 말라쿠트크 --^^말-라크=왕.. ^^말<멤-라멛> -- Q께서 지속적으로 우리안에서 진리 공급하심인해...^^라크<라멛-코프> --성령의 계속적인 내적 할례 <내속에서 Q아닌것들을 베어내어 제거해버림의 실제>일어남의 동역 이룸  ^^쿠트<카프-바브(중)-타브> : 수용/적용한 바 그대로를 성령께서 완성하시고 이루심 

##이-아싸<요드, 아인-쉰(=동의를 통한 창조), 헤이>..아싸<창조>단어는 원래 아인-쉰-헤이로..철자가 구성됨.....그런데, 여기서는 요드(Q의 사역)과 헤이(실제)가 앞뒤에 붙음 = 이것은 여호와의 약자이니....이것은 나의 동의가 있을 때 진리의 주님이 이루시는 <우리를 만드시는>창조가 있음을 뜻함 

##레촌 ...= 뜻...레이시-체데-바브(상)-눈, 코프 ::  레츠(레이시-체데) = 아레츠(알렙-레이시-체데...베레..부터 하-샤마임까지 이미 이루어진 상태를 전제로 함) ..거꾸로 읽을 때 "추르<체데-레이시> = 반석"...영 안에서 우리의 의도가 <인격적 교통 통해>Q과 같아져야만 Q의 본성의 확장(눈)-적용이 완성된다는것.....이때, 당연히  창1 : 1의 완전한 적용!!..키-아쉬르<카프-알렙-쉰-레이시>가 나오게 됨 -->##베-샤마임..베-샤마임<우리 마음의 그릇 안에 베레시트가 들어있음을 의미 ...베-샤마임 안에 베레시트가 들어 있는 것이, 바로 예슈아!! 라는것을 알려주고 계심> 감 베-아레츠 ..감(김멜-멤..성령의 전달하심..곧, 아버지뜻대로 성령이 마음에 친히 담기고 계심) -->베-아레츠<하늘이신 예수에게서처럼, 그분과 하나이기에,  그분의 거처인 땅, 우리에게도 아버지의 뜻 그대로 이루어짐> 에트<알렙-타브...Q의 모든 속성>-레헴(양식..Q의 진리/의도이신JC..레촌<창1:1>을 갈망함으로써.)<라멛, 헤이트-멤(함..열정.)> 후카누<헤이트-코프[후크=율례/규례...내용/속성 그대로 JC를 그대로 살아냄] 눈[코프-눈, 칸=관계가 맺어짐]. 바브(중)[--영안에서]> 

##탄<타브-눈>-라누<라멛-눈-바브(중)> ^^타님..창1:21<타브-눈-요드-멤>..Q의 모든것으로 받아 그대로 이루어짐-나타남/표현됨이 크게 될것.. ..이때, 눈=눈-요드-눈..큰 물고기로 표현했었음

##하욤<헤이-요드-바브(상)-멤>..헤이~멤, 그 안에 요드-바브(상)이 들어 있는 구조 = 창1:1,2의 여호와가 담겨있음,  "날"로 번역은 오류임..

##라헴<라멛-헤이트-멤>.....일용양식 먹은자마다 Q뜻대로 변화 나타남....용양식 먹은자마다 Q의 인격으로 조성됨 의미...==>라헴((양식))을 거꾸로 하면 => 마할

##보-마할 + 성령의 치유=용서하심..마할 = 용서하다/치유하다.<.마치 중풍병자처럼 Q의 일하심을 방해케 만드는 Q으로부터 온것 아닌  질병들을 치유하심 -->자신이 치유받은 이들마다 진리 전해줌으로써 또 다른 이들을 치유 받게 함  됨>  

##알-하보타이누<아인-라멛, 헤이트-베이트-바브(상)-타브-눈-바브(중)> ....Q이 이미 모두 부어 주셨으나, 제한하고 받지 않음 인해 그 선순환 기능의 역할 제한하고 있었던바...[가르침 받고 믿음으로 반응함 인해!! 누릴바 한량없는 은혜가 모두 저절로 이룸을 볼것]..((윤리-도덕적))의무/빚짐/법적 책임에 대해서조차도 은혜가 감당함/풀어줌<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말라!!>..헤잍~눈=은혜!!..그 안에 <베이트-비브(상)타브>가 들어있는 구조이니, 일용양식 먹은자마다 Q의 인격으로 조성됨 의미.....마치 성전처럼!!

@@....결국 <용서/사하여줌>는 <하나님이 이미 그리하신바...이뤄놓으신 빛비췸 안에서 은혜의 확장이라 할 수 있는바, 바로 그렇게 적용하는 것...아버지가 시시콜콜히  추궁함 없이 그냥 탕자를 맞아주심처럼 바로 그렇게 껴안고> (조용히!! 기뻐함으로써!!) 맞아줌인것을 알라.. 

--------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 Q)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아들 Q)나라가 임하시오며 (그 영 Q)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 아버지 ::: 이름(아버지의 거룩한 이름)---나라(아들의 왕국)---뜻(그 영의 뜻)

....하늘 영역에서 반역자 마귀사탄은 그의 반역으로 인해 이미 하늘에서 쫒겨났고, 비록 땅을 혼돈-공허케 만들었었으나, (주님은 땅의 회복을 위해 돕는 동역자로서 사람을 창조하셨으며) 사탄은 십자가 상의 그리스도에 의해 머리가 깨뜨려졌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땅이 온전히 회복된 것은 아닌 바 구주 재림 시에 완전히 회복될 것..

.....@@델레마 :: 의지 ==>뜻 will, 의도, 의향 intention , 목적-소원-욕망....델레마(동>델로..목적하다-소원하다-지향하다-원하다-바라다-추구하다)...하나님의 뜻(=GOD's Will = 하페츠[=기뻐하고 즐거워 함 = 희락] + 라촌[기쁨-호의-소원]), 자아의 의지 ::: 기쁘신 뜻[전적으로 선하고 주권적-창조적-자기 결정적인 의지] =그분의 이름과 그분의 통치 자체와 관련되어 사용됨

(a)  사복음서에서 델레마. 사복음서에서 마태와 요한은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보다 자주 말한다. 그러나 마가는 막 3:35에서만, 누가는 눅 22:42에서만 말한다.

① 마태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뜻은 항상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다. -

마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마 18: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영혼 구원

마 21:31: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아버지께 돌아옴/회개/화해/일치

마 26: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따라서

마 7:21-마 7:23은 유대교에서와 같이 마태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뜻이 토라와 일치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자들은 불법을 행한다. 그렇지만 이제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과 이웃 사랑으로 하나님의 뜻의 근본적인 목적을 나타낸다(참조: 마 22:34-마 22:40; 마 24:12).따라서 마 18:4에 의하면 "소자 중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택정하여 불러내신 영혼마다 구원의 완성에 이르도록 하고 계심

마 26:42에서 하나님의 델레마(뜻)에 대한 예수님의 복종은 오직 겟세마네의 기사에서만 언급되어 있다: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병행구, 눅 22:42). 

---오직 성육신하여 오신 구주의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장사됨-부활 승천-성령 강림/내주하심 통한 복음 전파로만 구원이 이루어지게 하셨음

②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보내신 자의 뜻을 자기의 전생애의 기초와 내용으로 직접적으로 언급하신다. 요 4:34에서 예수님은 절대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을 책임지고 있는 분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아버지의 뜻은 오직 구주JC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독생자를 영접하고 그분으로 끝까지 사는 생생한 믿음 통헤서 이루시고 계심

요 5:30에서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고 판단하신다: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마지막 날에 모든 영혼마다 부활하여 그분의 심판대 앞에 서는 바 구주의 의로운 최종 심판이 있음

요 6:39에서 하나님의 뜻은 구세주(소테르, 참조: 요 3:17)인 예수님이 생명을 약속 받은 자들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요 6:40에 의하면 하나님의 뜻으로 생명을 얻는 자들은 예수 안에서 구원을 깨닫고 그 구원을 간직한 자들, 즉 그를 믿는 자들이다("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이외에도 요한은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며(요 9:31; 요일2:17) 인간의 뜻이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요일 5:14이하). 

---참 신앙은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참되게 깨달아 알고 그대로 순종하여 행하는 것임....영원한 참 생명, 곧 영생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자 JC를 아는것이요, 바로 그분을 순종하여 이끄심/인도하심 그대로 하나되어(연합-일치-교통) 살아감이 영생- 구원- 복락의 삶인바, 이는 그 어떤 도덕/윤리보다 더 극상-최상의 탁월하고도 영원한 가치임

요 7:17에서 계시자의 정당성을 실현하는 유일한 기준은 그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그러나 요한에게서 윤리가 신앙보다 우월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다시금 지식이 신앙에 순종하게 됨을 의미한다. 

---(주님께서 자비로 열어 보여주신바) 세상에 허락하여 주신, 일반은총으로 주어진 그 어떤 지식이라도(=유한함) 참신앙의 빛(=무한함) 아래 순복함이 합당한 이유는 그 어떤 지식도 주로부터 오지않은 것이 없기 때문임

(b)  바울 서신에서 델레마는 가장 자주 하나님의 뜻에 대해 사용되었다.

① 롬 2:18에서 하나님의 뜻을 토라와 동일시한다: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오직 여기서만 유대인들에게 말한다. 

::: 율법 학자는 그가 율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식별할 수 있으므로 소경의 인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과 그 자신의 행위 사이에 존재하는 바로 그 모순은 하나님의 뜻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리스도는 새 세대의 여명이시기 때문에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 즉 성령을 받아 생각이 변화되는 것이 필요하다(롬 12:2). 이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의 일부이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안에서 믿는 자들은 합당한 행동을 해야한다(롬 12:2).

② 살전 4:3에서 하나님의 뜻은 사람의 성화(기록)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은 거듭난 참제자이자 증인으로서, 우리의 거룩함 = 일심-일편단심의 하나(야하드 :: 연합-일치-상호 거함/소유-기업-누림-음미-생명교통 인한 생명 열매맺음의; 영속성..) 이룸에 있음...자의적 생각/주장-육적 충동으로 행함은 참생명 주님과 분리-단절-곁길로  나아감이요, 이는  영적 음란이니, 이것을 분별하여 버려야 함

----오직, 거듭난 참 제자요 증인된 이마다 성령(그리스도의 영)의 내주하심과 위로부터 한량없이 부어주시는 권능의 성령으로 행함 인해 친히 영생하도록 살아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살아계시사 일하며 향함으로써 이루시는 전도-선교는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줌인 바, 거기에 이르기까지 행할 수 있도록 능략이 되심] 이웃 사랑이라-이 때 그리스도의 몸의 확장-증대-성장성숙이 이루어짐

③ 살전 5:18에서 하나님의 뜻은 항상 감사하는 것이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항기쉬기범감 안에서 주와 하나를 살아감

④ 골 1:9; 골 4:12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은 성경이 주시는 지혜와 총명에 관계되어 있다. 즉 그것은 교리의 지식, 토라에 대한 성장과 관계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성장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안에 있는 토라(야라흐..참 생명이신 하나님의 페다고지 교과서)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의 성장과 성숙함이야말로 지혜와 총명에 직접 연결되어 있음..

⑤ 하나님의 뜻은 생명의 형상을 만든다: 따라서 예수님의 그의 생애의 희생(sacrifice )는 하나님의 뜻에 기초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갈 1:4).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고후 1:1; 골 1:1; 엡 1:1; 딤후1:1), 그의 사도직의 수행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결정되었다(롬 1:10; 롬 15:32).

그렇지만 고후 8:5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마게도냐 교회의 헌금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뜻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성령의 열매로 귀결되는. 상호 긍휼-자비-겸손-온유-오래참음-용납-용서-사랑-기쁨-평강-감사 충만한 하나 됨의 생명 삶 가운데] 하나님의 성품과 마음-생각을 따라 그 안에서 행하는 바, 사랑의 나눔과 자발적 참여로 나타나는 섬김과 순종은 그리스도의 몸의 확장-증대-성장-성숙에 이르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뜻 실행함이 되는 바 이것이 축복 누림이 실제이다.

⑥ 에베소 교회에서 축복의 주체는 전 인류와 우주 역사를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의지이다. 이 행위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넓으신 구원의 뜻에 맞추어 아들들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며(엡 1:5) 이를 위하여 우리에게 그의 구원의 뜻의 신비를 드러내셨다(엡1:9). 왜냐하면 모든 만물이 그 안에서 하나로 통일되게 하신 것이 그의 뜻이기 때문이다(참조: 엡 1:10).

이러한 구원의 뜻에 기초하여 그의 백성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창조의 지혜에 대하여 그들의 눈을 떴는데 이는 지금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형성된 공동체 안에서 나타난다. 이스라엘을 그의 자유로우신 예정 안에서 그의 기업이 되게 결정하시고 그의 모든 역사하심을 계승하도록 결성하신 것도 또한 그의 뜻과 일치한다(엡 1:11). 델레마 투 데우(하나님의 뜻)가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미리 정하신 구원의 뜻을 나타낸다.

(c)  후기 사도들의 기록에서 델레마는 의심없이 하나님의 뜻의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능력을 표현한다. 특별히 신 의지의 능력은 히 10:7, 히 10:9이하의 예수님의 수난에서 보여졌다. 그리고 벧전 3:17; 벧전 4:19에서 보여졌다. 그것은 항상 "미쁘신 조물주"의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벧전 4:19).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인류를 향해 선을 도모하고(요일 5:14; 히10:10), 각 사람에게 그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갖추어 주는,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앞에 즐거워하는 것을 이루는 자의 뜻이다(히 13:21).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부지중의+고의적인 잘못들 모두 그 안에 포함됨..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6:9...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라켄 코 티트팔랄루 

***아비누 셰바-샤마임 ***이트카다쉬 쉬메카] .....라켄<라멛-카프-눈> 코<카프-헤이> 티트팔랄루<타브-타브-페이-라멛-라멛-바브(중)> 아비누<알렙-베이트-요드-눈-바브(중)> 셰바-샤마임<쉰-베이트, 쉰-멤-요드-멤> 이트카다쉬<요드-타브, 코프-달렛-쉰> 쉬메카<쉰-멤-코프> 

[마6:10...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타부<타브-베이트-바브(중)> 말쿠테카<멤-라멛-카프-바브(중)-트브-코프> ***이아쎄<요드-아인-쉰-헤이> 레초네카<레이시-체데-바브(상)-눈-코프>, 키아쉬르<카프-알렙-쉰-레이시> 베-샤마임<베이트, 쉰-멤-요드-멤> 감<김멜-멤>  바-아레츠<베이트, 알렙-레이시-체데>]

[마6:11.^^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

***에트<알렙-타브>-레헴<라멛-헤이트-멤> 후케누<헤이트-코프-눈-바브(중)> 텐<타브-눈>-라누<라멛-눈-바브(중)> 하욤<헤이-요드-바브(상)-멤>]

[마6:12.^^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예수와 하나된 참제자마다 베레시트 이룸 위해 사는자, 이미 먼저 사함받은자 됨 아는자, 그 마땅한바!! 은혜-긍휼-자비-평강의 인도권 행사하며, 보좌에 나아가 !! 친히 받은바 CJ이름의 중보-중재권 행사함이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우메할<바브(중)-멤-헤이트-라멛>-라누<라멛--바브(중)> 알<라멛-아인>-호보테이누<헤이트-베이트-바브(상)-타브-요드-눈-바브(중)> 카-아쉬르<카브-알렙-쉰-레이시> 미할레누<멤-헤이트-라멛-눈-바브(중)> 감<김멜-멤>-아나흐누<알렙-눈-헤이트-눈-바브(중)> 레하야베이누<라멛-헤이트-요드-베이트-요드-눈-바브(중)>^^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마6:13.^^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새롭게 하시는 바 참생명 주님, 그 기름부음을 따르라!! 새로와진 영, 새로와진 혼으로서 주와 하나됨으로 걷는자이니!!, 그 마음은 에덴동산이요-방주로 산다, !!날마다 영생의 매순간!!)), 

***베알<바브, 아인-라멛>-테비에누<타브-베이트-요드-알렙-눈-바브(중)> 리데이<라멛-요드-달렛-요드> 니싸욘<눈-싸멕-요드-바브(상)-눈>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키<카프-요드> 임<알렙-멤>- 테할레체누<타브-헤이트-라멛-체데-눈-바브(중)> 민<멤-눈>-하라<헤이-레이시-아인>(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키<카프-요드> 레카<라멛-코프> 하마멜라카<헤이, 멤-멤-라멛-카프-헤이> 베하게부라<바브, 헤이, 김멜-베이트-바브(중)레이시-헤이> 바하티페에레트<바브, 헤이, 타브-페이-알렙-레이시-타브> 레올라메이<라멛-아인-바브(상)-라멛-멤-요드> 올라밈<아인-바브(상)-라멛-멤-요드-멤>- 아멘]

====

[[.9....((하늘 아버지여, 아버지의 거룩하신 이름을 거룩케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친히 뜻하신 그대로 말씀-영으로 낳으신바 영-하늘-형상인 우리 영마다 거룩하신 아버지의 가르침 그대로 조성되어 그 영-참생명 호흡으로 사는 참제자-엘로힘 판박이 그 자체라, 오직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 이룬 그분의 지체, 그리스도의 단체적 신부, 어린양의 단체적 아내로서 내주하시는 하나님을 참되게 살아가게 하심으로써 그리 하옵시며)) 가르침 받은바 Q의 모든 속성 담긴 말씀 그대로 수용/적용/조성-확장/증대되어가는 참생명-참제자 ::: 전존재가 그리 조성된바 생명 호흡으로 살며-- 완전/온전/순전함의 기도로 [막힘-제한 전혀 없이] 상호 교통하는 참되게 주님을 친밀히 알며 주님 자신의 모든 부어-분배하심의 그 참생명으로 사는 참제자로 변화의 온전함 이루며--아버지의 사역하심으로 생명의 확장/변화 이룬바-- 형상 부어주심의 그 거처는 샤마임((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은 내 영안에로의 승천/내주하심이기도 하다!!))... 그분 사역의 완성인 성도는 그분의 형상 샤마임의 실제..바로 거기서 시작하여 아레츠<알렙(하방3점)-레이시(하방3점)-체데>((혼-땅))에도 여전히 그분의 모든 속성[에트 = 알렙-타브]로 충만히 채워 이미 다 이루신바 다 구비되어 있음 ..바사르조차도 바사르<베이트(중점,하방ㅜ)-쉰(좌상점, 하방ㅜ)-레이시>, 그 근본이 아버지임을 알기에 그분 이름을 [즐거이, 사랑-기쁨-평강 안에서 확신하며, 사랑스레 부름으로써 이미 누릴바 그분 거처((성전 안뜰로 비유됨))임을 자각하며... 막힘없이 부어주사 교통하는 주님[그영, the Spirit]이 바로 거듭난 내 존재의 머리/주관자 됨 참되게 알기에 "이제는, 내게 오너라"하실 그 때까지 참 에덴/방주/가나안으로서 친히 불의 방어벽으로 두르심을 그냥 확신한다..

10.......((아버지의 모든 속성의 부요함 부어주시려 갈망하심/ 그 뜻대로, 아버지 나라의 일을 온전히 이루심, 곧 거처 삼으신바 영-하늘에서부터 우리의 혼-땅에까지 온전히 확장하심으로써 우리 마음/영혼마다 그 마음판에 새겨져 완성된 하나님 말씀의 거처 삼으시오며))  완성된 마음/거처 ::: 진리말씀 가르침으로 수용/적용/조성으로, 영의 변화/완성된 실제, 주와 합한 그 마음 안에는 영의 분배/부어주신 모든 형상이 함께 거하며 ---의의 생명 품은 영의 실제<아쉬르>가 조성-완성된, 거처, 곧 샤마임이자 동시에 확장된 성령의 거처인바 에레츠까지 확장되며

11.....((아버지의 뜻하심 그대로,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충만히 담겨진 그릇-거처로 만드실바 주님 아닌것들마다 신진대사적으로 제거되게 하심으로써 오늘도 치유/용서-평강의 온전함을 이루옵소서)) 이 샤마임과 아레츠는 이미 Q의 모든 속성 그대로 이루신바, 말씀을 먹고 살도록 만드신, 하나님의 모든 속성의 그대로 이뤄진 그릇 ::: 부활생명의 영적 실제 --그 확장-변화- 완성 이루 거처

12.....((오늘 우리에게 당신<여호와>을 일용양식, 그 말씀으로서 내어주사 받아먹고 생명 삶 살게 하시는바 주예수님은, 곧 진리-생명양식 안에 있는 참생명-Q속성/본성이시기에, 말씀 받아 먹은 우리로, 보좌에 앉히신 존재됨,  바로 그대로 대속적 사랑의 중보/중재 이루며-내어주며-섬기시는 주예수님!!, 바로 그분을 빼어닮은 참제자요-신부로서 그리스도를, 그 기름부음따라  주 영광의 빛이요 소금으로서 살아감에 있어서 그 어떤 거리낌/장애 하나없이 살아가게 하옵시며))  영의 변화와 함께 진리생명 가르침-그 확장 변화, 가르침과 함께 분배된바 부활생명의 거처로서 완전케 된 영 ::: 그안에 조성된 바 아쉬르 누림 + 진리-생명-가르침의 말씀 안의 생명으로 확장 변화가 발현된 성령의 그릇이니 아버지와 부활생명으로 살아감이 날로 확장-증대되는 거처

.13....((아버지의 영의 분배와 모든 속성 부어주심 그대로 온전히 변화 이룬바 신성한 참 인성의 온전케 된 그릇 안에 하나님의 영이 충만 임재로 늘 계시며 운행하며 움직이심 알게 하사ㅡ그로 인해 그 친밀함과 성장성숙이 아버지와 하나이신 엘로힘-독생자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에까지 이르도록 하옵소서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시옵소서, 나라를-권세를-영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나이다, 영원히..아멘)) 영분배/전이하심이 완전케 되어 거하며, 그 사역으로 아버지께 도달하도록 생명의 상승 변화 과정 중에 있고, 마침내 그 사역으로 인해 연합한 하나 이루며 하나님의 보좌에 앉히신바 된, 참생명 근원 아버지의 거하시는 처소요 온전케 된 영혼이라, 가르침받은바 의와 생명 변화 확장 증대 이룬 진리말씀생명의 영의 분배/전이 완성됨 인해 아버지에까지 이르른, 근원이신 분 아버지를 빼어닮은 그분의 거처로 나타나게 되기를...아멘]]

----------

@@하나님의 갈망하심, 그 뜻 그대로<창1:1-2:6..베레시트는 "에트<알렙-타브>" 속에 들어 있는바, 그것이 우리의 참 생명 양식임 = 여호와를 빼어닮음에 이르도록!!, 곧 여호와 엘로힘의 찍어낸 복사판으로서 연합한/결코 분리됨 없는 하나됨 가운데> 우리 마음판에 이뤄지고 새겨지기를 구하라!!....**땅/혼=아레츠<알렙-레이시-체데>에서 아르<알렙-레이시> = 오르<알렙-바브(상)-레이시..인격화된, 근원적 빛>을 의미함((영의 빛이시기도 하지만, 혼에 있어서, 근원적 빛이 바로 예수이심...예수님이 그 빛을 비추실 그 때, 쌓여진 말씀을 깨닫고 그분으로 충만케 되고 새겨지는 바 진정한 영의 존재 이뤄지는 것임...이 때 비로소 그 능력이 나타남, 곧 그분께 완전히 굴복됨을 이룸 = 은혜를 입은자 됨...바로 그에 의해 Q의 창고가 열려 하늘과 땅을 연결함이니, 그것이 참 지혜라, 주님의 주관하심(마샬)이 나타나게 되는 것)).

--------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 주옵시고....오해해서는 결코 안됨] .에트-레헴 후카누

...^^에트<알렙-타브 :: Q의 모든 속성-요소-어떠함<알파요 오메가, 알파에서 오메가까지>가, 곧 참된 하늘 양식이요, 그것을 참되게 말씀하여 <동심합의로> 이루고자 하심이 바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 = 진리말씀임-

...^^레헴<라멛-헤이트-멤 :: 양식 먹고/가르침 받은바 부활생명의 거처됨> 

...^^후카누<헤이트-코프-눈-바브(중) :: 부활생명의 거함 인해 세워짐으로써 영의 생명 변화 이룸> 

@@탄-라누<타브-눈, 라멛-눈-바브(중) ::온전케 된 생명-전존재에 그 확장/침투되기에 이르기까지, 그 가르침 받음 인해 생명의 변화 이룬> 

@@하욤<헤이-요드-바브(상)-멤...[요드-바브]하나님이 만들어 거하시는바 그 거처>...

 

@@ 후카누<헤이트-코프-눈-바브(중) :: 생명 세움 통해 영의 변화됨...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명 사역 - "후켄">...하나님의 속성을 따라 변화받은 영으로서 살며, 그리고 영의 감동으로 일깨워 말하게 하실바, 그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그 내용만을 Q 심정과 하나되어 감동 가운데 말함  = 에트-밈 ^^샤마임에서,  마임/밈<멤-요드-멤>::: (사람 사이에 사역/섬김 도구는 바로 진리의 하나님이 사역하여 조성된 그릇이기에//그 마음에 진리 하나님이 담겨진바 됨.. ^^켄<코프-눈.. 사이에-세우신 (방주의) 간막이...곧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상호 연결시키는 간...Q을 머리삼고 Q으로 연결됨 인해 일어남...상호간에 진리를 흘러보냄/전달받고 전달함으로써, 상호 똑같은 복사판을 만들어 낼 수 있음> =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생명으로 사역함인것!! ---> 후카누<헤이트-코프-눈-바브(중)...부활생명 거하심으로 세워짐>

----

.....<요한복음에서 나오는 바> 기도에 대해서 주님이 말씀하실 때에는 여러번 주님 이름으로, 그분의 이름 안에서(in His name) 기도하라고 히셨다. 그분의 이름 안에서 기도한다 함은 그분의 생명-인격과 하나되어  기도함을 의미한다. 곧, 그분 안에 하나되어 거하며 머물러 있음으로써 그분의 생명-인격과 하나되어 (한 이름-한 생명-한 인격 안에서) 그분의 영으로 그분과 함께 기도한다 함이다 

....<마태복음에서 나오고 있는 이른 바 주 기도에서는 요한복음에서와는 전혀 달라서, 생명을 볼 수는 없고, 오히려 두 차례에 걸쳐서 나라(왕국)가 언급되고 있다.> 마6장의 기도는 왕국에 대한 기도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싸우는 기도로서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하나님의 원수를 대적하여 싸우는 기도인 것이다.

....<겔28:12-17...*12.....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도장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13.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준비되었도다  *14.너는 기름 부음을 받고 지키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불타는 돌들 사이에 왕래하였도다  *15.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네게서 불의가 드러났도다  *16.네 무역이 많으므로 네 가운데에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지키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냈고 불타는 돌들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17.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왕들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 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사14 : 12-15...*12.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14.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15.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

....<주 기도>본이 되는 기도, 그 내용 구성 *1)하나님의 이름-왕국-뜻을 먼저 주의해야 함 ==>그 다음에 우리의 필요를 주의함==>*3)하나님 앞에서, 왕국 백성들의 실패<결점-실수-그릇 행함>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주의함 :: 너그러이 먼저 다른 이들의 과실을 용서하고 탕감해 준 자마다 용서 받게 될 것. ==>*4)<스스로는 지극히 무력하고 약한 자임을 말씀드리고>악한 자의 시험(유혹)을 처리하는 것<건져 주심>을 주의함 ==>*5)Q의 왕국과 권세와 영광을 인식함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

14.키 임-타메할루  리베네이-아담 알-하토토탐 이메할 감-라켐 아비켐 셰바사마임 

==@키<카프-요드>..수용/조성-새겨주심의 말씀따라 실행하라 @임<알렙-멤>-티메할루<타브-멤-헤이트-라멛-바브(중)>..엘로힘 에서 하마임까지 창1:1,2에서 이르신 말씀 그대로!! 십자가로 이루신 진리말씀, 곧 부활생명의 영으로 사는 삶을 표현하라  @리베네이<라멛-베이트-눈-요드>-아담<알렙-달렛-멤> 말씀 안의 생명을 실행하는 Q과 연합한 하나, 그분의 담지자 된 참사람을 살라 @알<아인-라멛>-하토토탐<헤이트-테이트, 알렙-타브-멤>..분배하신(깨달음)말씀 그대로 부활생명의영, 그 흐름인바 참 지혜, 곧 Q의 모든 속성 그대로 조성됨 그릇이니.. @이메할<요드-멤-헤이트-라멛>..그대로 청종함이 부활생명 말씀 담지자의 마땅함이니.. @감<김멜-라멛>-라켐<라멛-카프-멤>..그 말씀의 생명을 잉태한바, 그말씀으로 수용/조성되는 그릇이니.. @아비켐<알렙-베이트-요드, 카프-멤>..곧 아버지께서 행하심, 그 수용/조성된 바 그릇됨이라 @셰바사마임<쉰-베이트, 쉰-멤-요드-멤> ..부어주심 그대로 거하는바, 부어주신 말씀으로 행함의 그릇을 살라

15. 베-임 로 티메할루 리-베네이 아담 감-아비켐 로-이메할 레하토테이켐

==@베-임<바브, 알렙-멤>그러므로,..엘로힘 에서 하마임까지 창1:1,2에서 이르신 말씀 그대로!! 십자가로 이루신 진리말씀, 곧 부활생명의 영으로 사는 삶을 표현하라 @로<라멛-알렙>말씀하시는 하나님이니.. @티메할루<타브-멤-헤이트-라멛-바브(중)> 온전히 부활생명 말씀 담지자 됨 살라 @리베네이<라멛-베이트-눈-요드> @아담<알렙-달렛-멤> .. 말씀 안의 생명을 실행하는 Q과 연합한 하나, 그분의 담지자 된 참사람을 살라 @감<김멜-라멛>-아비켐<알렙-베이트-카프-멤> 말씀을 품고 그 생명 잉태한바 아버지께서 행하심, 그 수용/조성된 바 그릇됨 @로<라멛-알렙> .. 말씀하시는 하나님 @이메할<요드-멤-헤이트-라멛>.. 그대로 청종함이 부활생명 말씀 담지자의 마땅함이라 @레하토테이켐<라멛-헤이트-테이트, 알렙-타브-요드-카프-멤>..부활생명의 영, 말씀 안에 있는 바 그 흐름이 바로 참 지혜요, 곧 Q의 모든 속성이니 그것으로 수용/조성/새겨짐 이루라

---


===외식으로 금식하지 말라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다른 이들에게 주는 것을 꺼려 하는 이유는  물질 결핍 가능성에 대한 염려때문이요, 바로 이 때문에 물질적인 것들을 사랑하고 추구한다, <주님은 다함 업는 무한 풍성의 공급자이시기에> Q 생명에는 염려란 아예 없기에<이것은 사탄으로부터 온 것이다> 우리는 우리 생활의 마땅한 의무를 다 해야 하지만 우리의 생활에 대한 염려 없이 그 의무를 다함이 옳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좋은 교육을 능동적-적극적으로 받아 열심히 부지런히-탁월하여 전뮨적 지식 습득하도록 공부하는 것은 <미리 염려함 없이 마땅히 하도록 되어 있는 바>경작하는 것이요, ((도중에 그만 둠 없이)) 모든 합당한 과정을 마친 후 졸업하는 것은 수확과 동일하다

....<진정> 하나님을 위하여 이 땅에서 살려면 학업을 합당한 방식으로 적극적-능동적으로 잘 해내고, 합당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마쳐야 하는데, 염려를 위함이어서는 결코 안되고,(생활의 필요에 대해서는 주께 맡기고!!) 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한 그대의 (하늘 아버지의 생명과 본성에 따라 참되게 주는 자로서의)의무 다함을 위해서 그리하도록 함이 옳다.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둠 =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마19:21), + 궁핍한 성도들에게(행2:45, 4:34-35, 11:29, 롬15:26), + 주님의 종들에게 주는 것(빌4:16-17)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한 가지 사물에만 집중하여 초점 맞출 때만 밝히 보이는 바, (그대의 우선순위가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분 그리스도라면, 내주하여 계시는 주님 인도 따라) 나아갈 바 그대로 몸이 정로로 나아가게 될 것이요 마침내 목표에 도달케 될 것....하늘과 땅에 동시에 재물 쌓음이란 <동시에 두 가지를 행하려 함이기에> 결국 시야의 흐려짐 인해, 온 몸의 어둠과 손상을 초래하게 되는 법이다.

....참 빛(말씀이신 하나님. 모든 것의 공급 근원이심) 비췸 있을 때라야, 성한 눈(영적 분별력)은 작동됨...영적 분별력 주시기를 구하라...비록 재물이라도 하나님이 주신 바인지 그 참됨 여부를 알게 하여 주시는 바 추호의 거리낌 없이 감사드리게 할 뿐 아니라, 그분이 주신 것을 땅에 쌓음 인해 그냥 썩이는 것 아니라 <두 손을 펴서 받아 가진 것을 열어> 주께 드리며-(믿음의 형제 자매와, 은밀히)나누며-(빈자에게, 아낌없이) 베풀며-(가족들의 일상 생활의)누림 위해 주어졌음을 알고 바르게 재물을 사용하게 한다.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엡 1장 17~19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 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Q, 영광의 아버지께서 주시는 지혜와 계시의 영이 밝혀 주시는 바, 참된 소망의 비전 따라 행하도록, 마음(내적 존재 = 속 사람 = 인격 = 영의 양심+지정의)의 눈<영적 분별력 제공> 깨끗케 하는, 말씀의 씻는 물 = 말씀과 하나 되어 역사 하사 모든 부정 씻어 정결케 하시는 성령(그 영)  ((회개함 인해 적용되는 보혈-성령-말씀은 <단절/멸절/죽음/사망 이김의 부활 생명>능력, 곧 말씀의 씻기는 물의 표상))제사장의 섬김 위한--놋 물두멍의 물//백성들의 부정 씻김 위한-- 암송아지 번제의 잿물.. TUQ의 완전한 만족이신 성육신하여 오신  JC = 유일무이하게 TUQ께 합당한 번제 예물 -->참 회개하는 자녀에게 속죄제/속건제 되심으로써 죄를 정결케 함(점흠티주름 없는 무흠무결케 회복)  + 소제-화목제-전제의 삶 통한  기업의 풍성 누림과 살아계신 JC 영광 재현 가능케 하심 ==> 이 때, 눈은 몸의 빛임((오직 주 안에서!! 거듭난 생명에 합당하게 보고 듣고 먹고 마시며 음미/감상하며, 모든 허탄한 상상-생각-말함을 통제하라))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AMP..마6

===Giving to the Poor and Prayer

1 “Be [very] careful not to do your [a]good deeds publicly, to be seen by men; otherwise you will have no reward [prepared and awaiting you] with your Father who is in heaven.

2 “So whenever you give to the poor and do acts of kindness, do not blow a trumpet before you [to advertise it], as the hypocrites do [like actors acting out a role] in the synagogues and in the streets, so that they may be honored and recognized and praised by men. I assure you and most solemnly say to you, they [already] have their reward in full. 

3 But when you give to the poor and do acts of kindness, do not let your left hand know what your right hand is doing [give in complete secrecy], 

4 so that your charitable acts will be done in secret; and your Father who sees [what is done] in secret will reward you.

5 “Also, when you pray, do not be like the hypocrites; for they love to pray [publicly] standing in the synagogues and on the corners of the streets so that they may be seen by men. I assure you and most solemnly say to you, they [already] have their reward in full. 

6 But when you pray, go into your most private room, close the door and pray to your Father who is in secret, and your Father who sees [what is done] in secret will reward you.

7 “And when you pray, do not use meaningless repetition as the Gentiles do, for they think they will be heard because of their many words. 

8 So do not be like them [praying as they do]; for your Father knows what you need before you ask Him.

9 “Pray, then, [b]in this way: ‘Our Father, who is in heaven, [c]Hallowed be Your name.

10 ‘[d]Your kingdom come, Your [e]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11 ‘Give us this day our [f]daily bread.

12 ‘And forgive us our [g]debts, as we have forgiven our debtors [letting go of both the wrong and the resentment...부지중의+고의적인 잘못들 모두].

13 ‘And do not [h]lead us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i]evil. [j][For Yours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

14 For if you forgive [k]others their trespasses [their reckless and willful sins], your heavenly Father will also forgive you. 

15 But if you do not forgive others [nurturing your hurt and anger with the result that it interferes with your relationship with God], then your Father will not forgive your trespasses.

===Fasting, The True Treasure, Wealth (Mammon)

16 “And whenever you are fasting, do not look gloomy like the hypocrites, for they put on a sad and dismal face [like actors, discoloring their faces with ashes or dirt] so that their fasting may be seen by men. I assure you and most solemnly say to you, they [already] have their reward in full. 

17 But when you fast, put oil on your head [as you normally would to groom your hair] and wash your face 

18 so that your fasting will not be noticed by people, but by your Father who is in secret; and your Father who sees [what is done] in secret will reward you.

19 “Do not store up for yourselves [material] treasures on earth, where moth and rust destroy, and where thieves break in and steal. 

20 But store up for yourselves treasures in heaven, where neither moth nor rust destroys, and where thieves do not break in and steal; 21 for where your treasure is, there your heart [your wishes, your desires; that on which your life centers] will be also.

22 “The eye is the lamp of the body; so if your eye is clear [spiritually perceptive], your whole body will be full of light [benefiting from God’s precepts]. 

23 But if your eye is bad [spiritually blind], your whole body will be full of darkness [devoid of God’s precepts]. So if the [very] light inside you [your inner self, your heart, your conscience] is darkness, how great and terrible is that darkness!

24 “No one can serve two masters; for either he will hate the one and love the other, or he will be devoted to the one and despise the other. You cannot serve God and mammon [money, possessions, fame, status, or whatever is valued more than the Lord].

===The Cure for Anxiety

25 “Therefore I tell you, stop being worried or anxious (perpetually uneasy, distracted) about your life, as to what you will eat or what you will drink; nor about your body, as to what you will wear. Is life not more than food, and the body more than clothing? 

26 Look at the birds of the air; they neither sow [seed] nor reap [the harvest] nor gather [the crops] into barns, and yet your heavenly Father keeps feeding them. Are you not worth much more than they? 

27 And who of you by worrying can add one [l]hour to [the length of] his life? 

28 And why are you worried about clothes? See how the lilies and wildflowers of the field grow; they do not labor nor do they spin [wool to make clothing], 

29 yet I say to you that not even Solomon in all his glory and splendor dressed himself like one of these. 

30 But if God so clothes the grass of the field, which is alive and green today and tomorrow is [cut and] thrown [as fuel] into the furnace, will He not much more clothe you? You of little faith! 

31 Therefore do not worry or be anxious (perpetually uneasy, distracted), saying, ‘What are we going to eat?’ or ‘What are we going to drink?’ or ‘What are we going to wear?’ 

32 For the [pagan] Gentiles eagerly seek all these things; [but do not worry,] for your heavenly Father knows that you need them. 

33 But first and most importantly seek (aim at, strive after) His kingdom and His righteousness [His way of doing and being right—the attitude and character of God], and all these things will be given to you also.

34 “So do not worry about tomorrow; for tomorrow will worry about itself. Each day has enough trouble of its own.

===Footnotes

Matthew 6:1 Lit righteousness before men.

Matthew 6:9 I.e. as a model or pattern.

Matthew 6:9 I.e. set apart, keep and treat as holy, revere.

Matthew 6:10 A plea for God’s kingdom to be inaugurated on earth.

Matthew 6:10 Including what God wishes to be done by the individual believer—His commands and precepts.

Matthew 6:11 I.e. life’s essentials.

Matthew 6:12 I.e. sins, moral failures.

Matthew 6:13 I.e. lead us away from situations where we are vulnerable and have the opportunity to sin. God does not tempt man (see James 1:13) but does allow man to be tested.

Matthew 6:13 Or the evil one.

Matthew 6:13 This clause is not found in early mss.

Matthew 6:14 Gr anthropoi.

Matthew 6:27 Lit cubit, here probably applied metaphorically to a lifespan.

---------------NASB

1.  "Beware of practicing your righteousness before men to be noticed by them; otherwise you have no reward with your Father who is in heaven.

2.  "When therefore you give alms, do not sound a trumpet before you, as the hypocrites do in the synagogues and in the streets, that they may be honored by men. Truly I say to you, they have their reward in full.

3.  "But when you give alms, do not let your left hand know what your right hand is doing

4.  that your alms may be in secret; and your Father who sees in secret will repay you.

5.  "And when you pray, you are not to be as the hypocrites; for they love to stand and pray in the synagogues and on the street corners, in order to be seen by men. Truly I say to you, they have their reward in full.

6.  "But you, when you pray, go into your inner room, and when you have shut your door, pray to your Father who is in secret, and your Father who sees in secret will repay you.

7.  "And when you are praying, do not use meaningless repetition, as the Gentiles do, for they suppose that they will be heard for their many words.

8.  "Therefore do not be like them; for your Father knows what you need, before you ask Him.

9.  "Pray, then, in this way: 'Our Father who art in heaven, Hallowed be Thy name.

10.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11.  'Give us this day our daily bread.

12.  'And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13.  'And do not lead us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

14.  "For if you forgive men for their transgressions, your heavenly Father will also forgive you.

15.  "But if you do not forgive men, then your Father will not forgive your transgressions.

16.  "And whenever you fast, do not put on a gloomy face as the hypocrites [do,] for they neglect their appearance in order to be seen fasting by men. Truly I say to you, they have their reward in full.

17.  "But you, when you fast, anoint your head, and wash your face

18.  so that you may not be seen fasting by men, but by your Father who is in secret; and your Father who sees in secret will repay you.

19.  "Do not lay up for yourselves treasures upon earth, where moth and rust destroy, and where thieves break in and steal.

20.  "But lay up for yourselves treasures in heaven, where neither moth nor rust destroys, and where thieves do not break in or steal;

21.  for where your treasure is, there will your heart be also.

22.  "The lamp of the body is the eye; if therefore your eye is clear, your whole body will be full of light.

23.  "But if your eye is bad, your whole body will be full of darkness. If therefore the light that is in you is darkness, how great is the darkness!

24.  "No one can serve two masters; for either he will hate the one and love the other, or he will hold to one and despise the other. You cannot serve God and mammon.

25.  "For this reason I say to you, do not be anxious for your life, [as to] what you shall eat, or what you shall drink; nor for your body, [as to] what you shall put on. Is not life more than food, and the body than clothing?

26.  "Look at the birds of the air, that they do not sow, neither do they reap, nor gather into barns, and [yet] your heavenly Father feeds them. Are you not worth much more than they?

27.  "And which of you by being anxious can add a [single] cubit to his life's span?

28.  "And why are you anxious about clothing? Observe how the lilies of the field grow; they do not toil nor do they spin,

29.  yet I say to you that even Solomon in all his glory did not clothe himself like one of these.

30.  "But if God so arrays the grass of the field, which is [alive] today and tomorrow is thrown into the furnace, [will He] not much more [do so for] you, O men of little faith?

31.  "Do not be anxious then, saying, 'What shall we eat?' or 'What shall we drink?' or 'With what shall we clothe ourselves?'

32.  "For all these things the Gentiles eagerly seek; for your heavenly Father knows that you need all these things.

33.  "But seek first His kingdom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shall be added to you.

34.  "Therefore do not be anxious for tomorrow; for tomorrow will care for itself. [Each] day has enough trouble of its own.

========

마태복음 6장 (개요)

그리스도는 앞장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와전된 교리나 견해들, 특히 율법에 대한 그들 나름대로의 주석(그들의 누룩으로 불리웠다. 마 16:12)에 대항하여 그의 제자들을 무장시키고 난 후, 본 장에 들어와서는 그들의 와전된 행위, 즉 두 가지 죄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죄란 비록 그들의 교리에 있어서 그들이 옳지는 않았을지도 그들의 교제에 있어서 그들이 널분명히 두드러지게 범죄하였고, 그들을 칭찬하는 자에게 자기들의 행실을 본받을 것을 권하기까지 한 것으로서,  곧 외식과 속된 마음이라는 죄였다. 그것은 죄 중의 죄요, 특히 신앙 고백자들이 깨어 조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죄들은 정욕을 통해 세상에 들어온 보다 큰 타락을 피한 자들까지도 가장 쉽사리 공격하는 죄이므로, 가장 위험한 죄악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경고를 받고 있는 것은,

Ⅰ. 외식에 대하여. 우리는 외식가처럼 되어서는 안 되며 또는 외식가들처럼 행해서는 안 된다.

1. 구제에 있어서(1-4)

2. 기도에 있어서(5-8). 

.....여기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하고, 어떻게 기도해야할 것인가에 대해 교훈 되고 있다(9-13). 또한 기도에서 용서하는 것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14, 15)

3. 금식에 있어서(16-18)

Ⅱ. 세속적인 것에 대하여

1. 속된 것을 선택하는 것, 그것은 외식가들이 짓는 멸망할 죄이다(19-24).

2. 우리의 속된 염려에 있어서, 그것은 많은 선한 기독자들을 불안케 하는 죄이다(25-34).

=======

구제 생활(마 6:1-4)

우리는 마음의 죄, 즉 마음의 간음이나 마음의 살인에 있어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아야만 하는 것처럼, 사람의 칭찬이 아닌, 하나님의 시인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마음의 종교를 유지하거나 보존시키는 것 또는 내적이고 중요한 원리에서 행하는 것에 있어서 그들보다 나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바리새인들의 누룩이었던 외식과 또한 그들의 교리에 대하여 경계를 해야 한다(눅 12:1)

"구제나 기도, 금식은 세 가지 위대한 기독자의 의무이다"

─아랍인들은 율법의 세 가지 기초라고 말한다. 그것들에 의해 우리의 세 가지 주요한 관심으로 하나님께 경의를 표하며 봉사를 하는 것이다. 

"기도"에 의해 우리의 "영혼"으로, "금식"에 의해 우리의 "신체"로, "구제"에 의해 우리의 "재산"으로 드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함으로써 우리는 "악에서 떠나야 할"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하고," 그것을 훌륭히 해야 하며 또한 "영구히 머무르게"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구절들에서 구제시 외식에 대한 경고를 받고 있다. "그것에 대해 주의하라." 그것에 대해 조심하라고 경고를 받은 것은 그것이 죄임을 암시한다.

1. 우리는 그렇게 할 "큰 위험 속에" 있다. 그것은 미묘한 죄이다. 

허영은 때때로  인식하기도 전에 우리의 행위에 슬며시 끼어들어간다. 제자들은 그들이 많은 기적적인 일들을 행했던 능력이나 또는 그들을 칭찬하는 자들과 멸시하는 자들과 사는 생활에 의해 그것을 하도록 시험받았을지도 모른다. 이 양자는 육적으로 남에게 그럴 듯하게 보이기를 몹시 바라는 시험이다.

2. 우리가 그러한 것을 하도록 "큰 위험 속에" 놓여져 있다는 사실은 죄이다. 

외식을 주의하라. 왜냐하면 외식이 너희를 지배한다면 그것이 너희를 파멸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귀중한 연고상자를 못쓰게 하는 죽은 파리이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 일이 상정되고 있다.

Ⅰ. "구제를 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이 그들의 능력을 따라서 많이 해야 하는 큰 의무이다. 그것은 자연법이나 모세의 율법에 의해 기술되고 있으며, 선지자들에 의해 크게 강조되고 있다.

여러 고대 사본은 여기에 있는 "너희의 구제" (th;n ejlehmosuvnhn uJmw'n)를 "너희의 의"(th;n dikaiosuvnhn uJmw'n)로 읽고 있다. 왜냐하면 "구제"는 "의(義)"이기 때문이다(시 112:9; 잠 10:2). 

유대인들은 "가난한 자를 위한 상자"를 "의(義)의 상자"라고 불렀다. 가난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그들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이라고 말해진다(잠 3:27).

구제 의무는 외식가들의 자만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들에 의해 남용되었기 때문에 덜 필요하거나 두드러지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만일 미신적인 교황제 신봉자들이 자비의 행위에 공포를 두었다면, 그것이 이러한 선한 행위에는 도무지 불모지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욕심 많은 개신교 신자들에 대한 변명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의 구제 행위는 하늘에 갈 수 있는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 없이는 하늘 나라에 갈 수 없다는 것도 역시 사실이다. 

구제는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약 1:27)이며, 큰 심판 날에 시금석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그의 제자들이 "구제를 베푸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승인하고 있으며 그는 하지 않는 자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Ⅱ. 구제에는 큰 보상이 뒤따르지만 만일 그것이 외식에 치우친다면 그 상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것은 현세적인 일들속에서 때로 보상을 받는데, "풍족함으로"(잠 11:24; 25, 19:17), "궁핍하지 않게"(잠 28:27; 시 37:21, 25), "고통에서 구출"(시 41:1, 2)하시며, "영화와 좋은" 이름을 얻게 될 것이다(시 112:9). 어쨌든 그것은 의로운 자가 부활할 때(눅 14:14) "영원한 부귀"로 보상받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1. 이 의무에 대해 "외식가들의 행위"는 어떠하였는가? 

그들은 실로 구제를 행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해 순종이나 사람에 대한 사랑의 원리에서가 아니라 자만과 허영에서 이 일을 하였다. 또한 가난한 자에 대한 동정심에서가 아니라 순전히 겉치레를 위하여 구제를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좋은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자신들의 행위를 과시함으로써 그들이 주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하였다. 

이러한 의도를 따라 그들은 구제를 "회당과 거리에서"하였는데, 그곳에는 그들이 구제하는 너그러움 때문에 칭찬을 보냈으며, 그들의 가증스러운 교만을 분별하지 못하였던 무지한 군중의 무리가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회당에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 헌금을 모았으며 대부분의 거지들은 거리나 큰 길가에 늘 몰려 다녔으며, 이러한 공공 장소를 택하여 그들은 구제를 하였던 것 같다.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구제를 하는 것이 부당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우리를 보도록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히려 덜 주목되는 자선의 대상을 찾아야 한다. 외식가들은 자기 집에서 구제한다고 할지라도 적선 받을 거지들을 불러 모운다는 구실 아래 "나팔을 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들의 자선을 널리 선포하고 주목을 끌며 이야기를 주제로 삼게 하려고 함이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이것에 내린 판결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즉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언뜻보면 이것은 약속처럼 보인다. 즉 만일 그들이 보상을 받는다면 충분히 받는 것이라고, 그러나 그 안에 있는 두 단어는 이 말을 경고로 만든다.

(1) 그것은 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의" 상이다.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약속한 상이 아니라, 그들이 그들 자신에게 약속한 상으로서 보잘 것 없는 상이다. 그들은 그 일을 "사람에게 보이려고"했으며, 또한 사람의 눈에 "띄게"되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속였던 "자신의 미혹을 선택하였으며," 또한 그들이 선택한 것을 가질 것이다. 

육적인 신앙 고백자들은 승진과 영예 부귀를 위한 기복적 하나님으로 규정하며 그들은 그러한 것들로 배를 채울 것이다(시 17:14). 그러나 그들로 하여금 더 이상 기대하지 않도록 하라. 이러한 것들은 그들의 위로(눅 6:24)이며 그들의 좋은 것(눅 16:25)이며, 또한 그들은 이러한 보상으로 끝나게 것이다.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않았느냐? 네가 이와 같이 결정한 바를 지켜나가는 것이 계약인 것이다."

(2) 그것은 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의 상"이며, 그들은 그것을 "받고 있다." 

장차 그들을 위해 예비 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것으로 짐작하는 모든 것을 지금 받고 있으며, 여기에서 받고 있다. 그러므로 장차 받을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 "상을 받았느니라"(아페쿠신 톤 미스돈, 6:2)는 "완전히 영수한 것"을 의미한다. 

경건한 자가 이 세상에서 받는 상은 "지불금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후에는 더 많이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외식하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상을 "모두" 받았으며, 장차 받을 것은 하나도 없게 될 것이다. 그들 스스로가 그것을 결정한 것이다. 세상은 성도들을 위해 아무 것도 "예비"하지 못하였으며, 돈을 마구 허비한다. 그것은 위선하는 자들에게 지불되며 그들의 몫이 된다.

2. 구제에 대한 "우리 주님의 규범"은 무엇인가?(3, 4절) 

그 자신이 이러한 겸손의 본보기이신 주 예수님은 이를 수행할 때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제자들에게 강조하고 있다. "너희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것은 아마 그들이 성전으로 들어갈 때 임의대로 헌금을 던지게 되어 있는 통행의 "오른 편"에 있는 고르반, 즉 가난한 사람을 위한 헌금궤를 암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은 "오른손"으로 그 속에 예물을 넣었다. 또한 "오른손"으로 구제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준비와 결심을 암시한다. 그것을 어색하고 잘못된 의도로 하지 말고 기민하게 하라. "오른손"은 가난한 자를 돕거나 그들을 들어올리거나 그들을 위해 쓰거나 그들의 아픈 상처를 싸매거나 그 밖의 다른 방법으로 그들에게 주는 데 사용될 수 있다. "네 오른손이 가난한 자에게 친절을 베풀었다고 할지라도 그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할 수 있는 대로 그것을 숨기라. 꾸준히 그것을 혼자 지키라. 그것이 좋은 행위이므로 행하라. 그것이 너에게 좋은 이름을 제공하기 때문에 하지 말라." In omiburmfjsep factis, re, non teste, moveamur, Cic. de Fin ─ 즉 우리의 모든 행동에 있어서 그 대상과의 관련 때문에 영향을 받아야 한다. 관찰자 때문에 행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암시하고 있다.

(1) 우리가 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알도록 해서는 안 된다. 

아니,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 "우리의 왼손" 곁에서 있는 사람도 모르게 해야 한다. 그들이 알게 하는 대신에 가능하면 그들에게서 감추도록 하라. 그들이 눈치채지 않도록 숨길뿐만 아니라 스스로 간직하며 더 이상 나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2) 우리는 자신이 한 것을 너무 많이 주목해서는 안 된다. 

왼손은 우리들의 지체 중 한 부분이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선행에 대해 우리들 자신 안에서 너무 많이 주시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우리 자신을 칭찬하거나 찬탄해서는 안 된다. 자만심과 자족감, 우리 자신의 모습을 경탄하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 허영과 겉치레와 같이 위험스러운 자만의 부분들이다. "우리가 주의 주리신 것과 목마르신 것을 보았나이까?"(역주:마 25:37)

3. 구제할 때에 "이와 같이 진지하고 겸손한 자들에게 대한 약속"이 무엇인가?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그들을 "보실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선행에 대해 최소로 주목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 대해 최고로 주목하신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행한 잘못들을 우리가 듣지 않은 것처럼 그냥 용서하고 넘겨버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행해진 잘못을 경청하듯이(시 38:14, 15), 우리가  베푼 선행에 유의하지 않고 속히 입어버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의해 행해진 선행을 보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 것"은 외식하는 자들에게는 두려움이 되지만 진실한 기독자들에게는 위로가 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관찰과 칭찬뿐만 아니라, 보상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 "그 자신이 공개적으로 너에게 보상할 것이다." 구제할 때에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자는 스스로를 주인이신 그에게 넘겨 줄 따름이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외식하는 자들은 그림자를 붙잡지만 의로운 사람은 실체를 손에 넣는다. "그가 상 주실 것이며, 그 자신이 주시는 이가 되실 것이라"(히 11:6). 얼마나 그것이 강조적으로 표현되어 있는가를 살펴 보라. 그만이 그것을 친절하게 보충하실 수 있다. 아니, 그는 자신이 "큰 상급"(창 15:1)이 되실 것이다. 

그는 자기 종에게 꼭 그가 벌어들인 것만 주며 그 이상은 주지 않는 주인과 같이 주시지 않으며, 자기를 봉사하는 아들에게 아낌없이 풍족하게 더 주는 아버지와 같이 상을 주실 것이다. 아니, 그는 현 시대에서가 아니라면 큰 심판 날에 "공개적으로" 보상할 것이다. "그 때에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공공연한 칭찬을 받을 것"이며,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게 될 것이다. 만일 행위가 공개적이 아니라면 보상은 공개적이 될 것이며 그것은 더 좋은 것이 될 것이다.

------

기도생활(마 6:5-8)

"기도"할 때 우리는 "구제"할 때보다 더 즉각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진지하여야 한다." 그것이 바로 여기에  특별히 강조되어 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5절), 이것은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이 "기도"하는 것을 당연한 사실로 여기고 있다. 바울은 개종하자마자 "기도하였다." 

너희는 기도하지 않고 살아 있는 기독자보다는 숨쉬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을 찾기가 더 쉬울 것이다. 기도가 없으면 은혜도 없다. "이제,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또한 저희가 행하는 대로 하지 말라"(2절). 

수단과 행동에서 외식자와 같이 행하지 않으려는 자는 그들의 기분과 성향에서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되지 말아야 한다. 그는 누구를 지적하시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분명히 드러나 있다(마 23:13). 그리스도는 특히 여기에서 외식하는 자를 서기관과 바리새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기도할 때 두 가지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다. 이것에 대해 여기에서 경고되고 있는데, 즉 헛된 영광(5, 6절)과 중언부언(7, 8절)이다.

Ⅰ. 우리는 "기도할 때 자만하거나 허영스러운 것"이 되어서는 안 되며, 사람의 칭찬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1. "외식하는 자들의 방법과 행위"는 무엇이었는가? 

그들이 기도하는 모든 행위는 그 주요 목적이 이웃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려는 것이었고, 이로서 자신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그들이 기도할 때 "윗 쪽으로 솟아오르는 것처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만일 그것이 정당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영혼이 올라가는 것이다), 그때에 그들의 눈은 그들의 미끼로서 이 세상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다음의 일을 살펴보자.

(1) 그들이 기도하기 위해 택했던 "장소"는 어떤 곳이었는가? 

그들은 "회당"에서 기도하였다. 회당은 개인적인 기도를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공중적인 기도에는 실로 적합한 장소이다. 그들은 이로서 그들의 모인 장소를 영예롭게 하려는 것처럼 꾸몄지만, 실상은 자신들을 영화롭게 하려는 속셈을 가졌다. 

그들은 "거리의 어귀," 즉 넓은 거리(단어의 의미가 그러하다)에서 종종 기도하였다. 그들은 마치 경건한 충동에 의해 서둘러 이쪽으로 온 것 같이 보였지만 실을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하기 위함이었다. 두 거리가 만나는 이곳에는 양쪽에서 함께 내다보일 뿐만 아니라 이곳을 돌아가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들을 바라볼 수 있었으며, 또한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도 있었다.

(2) 그들이 기도할 때 사용했던 "자세." 그들은 서서 기도하였다. 이것은 합당하고 적절한 기도 자세였다(막 11:25 , "서서 기도할 때에"). 그러나 무릎을 끓는 것은 더 겸손하고 정중한 자세이다(눅 22:41; 행 7:60; 엡 3:14). 

그들이 서서 기도하는 것은 교만과 자신감을 나타내려는 기미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눅 18:11). "바리새인들은 서서 기도하였다."

(3) 그들이 공공적인 장소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그들의 그만"은 두 가지 일에서 표현되고 있다.

① 그들은 거기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들은 그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려고 할 때 또한 그들을 주시하는 기회가 주어질 때 기도하기를 좋아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선행을 공개적으로 행해져야 할 경우가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보고 칭찬하게 될 경우가 있다. 그러나 범죄가 되고 위험스럽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좋아하고 기꺼이 하려고 할 때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만한 기질을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②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거리에 서서 기도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칭찬과 갈채를 얻기 위하여 기도했으며, 또한 과부와 고아들의 재산을 자기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이와 같은 기도를 하였다(누가 이렇게 열심있게 기도하는 사람을 믿지 않을 것일까?). 더욱이 그들은 아무 스스럼없이 그것들을 마구 탈취하였을 것이다(마 23:13). 또한 실제로 그들은 백성을 노예로 삼기 위하여 자기들의 공공연한 음모를 수행하였던 것이다.

(4) 이 모든 것의 "결과"는 "그들이 자기 상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봉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기대했던 모든 상을 다 받아 버린 것이다. 그것은 실로 보잘 것 없는 보상이다. 만일 우리의 주인이 "잘하였도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동료 하인에 대해 좋은 말을 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가 사람의 칭찬을 많이 들으면 들을수록 그만큼 하나님의 상은 적어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거리에서 기도했으며 또 그렇게 되었다. 그들에게 그 일을 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일 수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이 성실로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칭찬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은 사람이 아니며 그에게서 응답을 기대할 수도 없다. 그들은 우리의 재판장이 아니며, 우리와 똑 같은 먼지와 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과 우리의 영혼 사이를 통과하는 것은 보이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회당에서 예배를 볼 때는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는 자들"(사 58:4)처럼 우리의 개인적인 기도를 두드러지게 하려는 모든 일을 피해야만 한다. 공중적인 장소는 개인적으로 경건한 기도를 드리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2. 이것에 반대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도"는 무엇인가? 

겸손과 성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가장 큰 두 가지 교훈이다. "너는 기도할 때에‥‥하라"(6절). 특별히 네 스스로, 네 혼자서 기도하라. 개인적인 기도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이 반드시 필요로 하는 의무와 행위로 생각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자.

(1) 이에 관하여 여기에 주어진 명령(지시).

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기도하지 말고 그 대신에 "네 골방." 즉 개인적이고 외진 장소에 "들어가라." 

이삭은 들판으로 갔고(창 24:63), 그리스도는 산으로 가셨으며, 베드로는 지붕 위로 올라갔다. 만일 그것이 목적에 부합된다면 기도는 하는 장소에 의해 응답 여부가 결정되지는 않는다. 

은밀한 기도는 우리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그렇게 함으로써 겉치레를 피하기 위하여 외진 곳에서 수행된다. 또한 방해받지 않음으로써 산만해지지 않고 또한 들리지 않음으로써 보다 큰 자유를 활용하기 위하여 은밀한 곳에서 수행된다. 

우리는 아무리 해도 남의 눈에 띄게 선행을 할 수밖에 없게 되고, 그리하여 남들의 칭찬을 받는 처지에 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자만심을 채우기 위해 그런 처지를 좋아한다면, 그것이 죄요 위험이 되는 것이다.

②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그 대신에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나에게, 나에게 기도하라"(슥 7:5, 6).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보다는 오히려 사람에게 기도하였다. 그들의 기도의 형식이 어떻든 간에 그 의도는 사람의 칭찬을 구걸하거나 그들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 기도하라. 그것으로 만족하라. 기꺼이 경청하고 응답하려고 하시며, 너를 동정하고 도와주며 구원해 주시려는 네 아버지이신 그에게 기도하라. 은밀한 곳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은밀한 기도를 할 때 우리는 모든 장소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 밖의 아무도 골방에 없을 때 거기에 계신다. 특히 네가 "그를 부를 때" 네 곁에 계시는 곳이 골방이다. "은밀한" 기도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께 그의 우주적인 존재의 영광을 돌리며(행 17:24), 그 위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2) 이에 대해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격려.

① 네 아버지는 "은밀한 중에 보신다." 

아무도 너를 칭찬하지 않고 너를 바라보지 않을 때에도, 그의 눈은 너를 받아들이기 위해 너를 주시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다니엘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내가 보았노라"고 말씀하셨다(요 1:48). 그는 어떤 거리, 어떤 집에서 기도하는 바울을 보셨다(행 9:11). 하나님이 모르시는 비밀이나 일이 있을 수 없다. 그는 그것을 주목하고 계신다.

② 그는 "공개적으로 갚으실 것이다"(한글 성경과 다소 다름). 

그들은 공개적으로 행한 자기 상을 받았다. 너는 그것을 은밀한 중에 행한 네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상"이라고 불리웠다. 그러나 "빛"으로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는다. 

구걸에는 무슨 공로가 있을 수 있는가? 그 상은 공개될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영예스럽게 소유하게 될 것이다. 공개적인 상은 외식하는 자들이 즐겨하는 상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위해 기다리는 인내심을 가지지 못하였다. 때로 은밀한 기도는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대한 주목할 만한 응답에 의해 공개적으로 보상을 받기도 한다. 그것은 그들의 원수들의 양심에 하나님의 기도하는 사람들을 나타낸다. 

어쨌든 큰 심판 날에는 공개적인 보상이 있을 것이며, 그때에는 기도하는 사람들이 큰 중재자(간구자)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모든 동네 사람들 앞에서" 자기 상을 이미 받았으며, 그것은 "섬광이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상이다." 참된 기독자는 그들의 상을 "모든 세계"와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받게 될 것인데, 그 상은 "영광의 심히 중한 것"(큰 영광)이 될 것이다.

Ⅱ. 우리는 기도할 때 "중언부언"해서는 안 된다(7, 8절). 

기도의 생명이 "영혼을 고양(高揚)시키며 마음을 쏟아 붓는 것"이기는 하지만 기도할 때는 말이 필요하며 특히 공동 기도에는 말을 해야 한다. 아마도 주님께서는 여기에서 특히 공동 기도에 대해 말씀하신 것 같다. 왜냐하면 앞에서는 "너는 기도할 때에"라고 했지만 여기에서는 "너희가 기도할 때에"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다음에 뒤따라오는 주기도문은 공동 기도이다. 

공동 기도를 할 때 다른 사람들의 입의 역할을 대신하는 자는 대개 말이나 표현에 있어서 겉치레를 하려는 시험을 받게 된다. 이것에 대해 여기에 경고되어 있다. 즉 혼자 있거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거나 "중언부언하지 말라." 바리새인들은 이것에 영향을 받아 "길게 기도하였으며"(마 23:14), 그들의 모든 관심사는 기도를 길게 하는 것이었다.

1. 여기에서 책망되고 정죄 된 "잘못"이 무엇인가? 

그것은 기도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단지 입만을 놀려대는 것이며, 영혼의 예배가 아닌 입술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여기에서 두 가지 단어, 곧 "중언부언" (Battologva)과 "많은 말"(Poluvlogiva)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1) "중언부언" ─ 같은 말의 중복(tautology), 말을 더듬거림(battology), 마치 battus, sub illirmfjsep montibus erant, erant sub montiburmfjsep illis 등과 같이 아무런 뜻도 없이 제멋대로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인데, 이것은 바보가 군말을 지껄이는 것과 같다. 즉 "우매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자기 뒷일을 말 할 자가 누구이냐?"(전 10:14) 

이것은 대화할 때 버릇없고 매스꺼운 말이다. 하물며 하나님과 이야기할 때는 얼마나 더 하겠느냐. 여기에서 정죄 되고 있는 것은 기도할 때 되풀이하는 모든 반복을 총칭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공연한 반복(중언부언)이다. 

그리스도 자신도 일상적인 열심과 성의를 넘어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눅 22:44). 다니엘도 마찬가지였다(단 9:18, 19). 또한 같은 말을 매우 아름답게 반복한 곳도 있다(시 136:). 우리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거나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일으키기 위해 같은 말을 사용할 수 있다.

교황제 옹호자들처럼 염주로 "아베 마리아"나 "우리 아버지"(paternosters)를 아무런 뜻도 없이 계속적으로 되풀이하는 미신적인 반복이나, 같은 일에 대해 무미건조하게 되풀이하여 언급하는 것, 단지 기도를 오래 끌며 기도하는 것, 실제로는 아무런 느낌도 없으면서 자신의 감정이나 애정을 과시해 보이려는 것 ─ 이러한 것들이 여기에 정죄 된 중언부언이다. 우리가 많이 말하려 할지라도 적절하게 많이 말할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과 모든 현명한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든다.

(2) "많이 말하는 것"은 기도할 때 장황하게 꾸미는 태도로서 자만이나 미신에서 비롯되며, 또한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 의해 알려지고 설득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로서 어리석음과 무례함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들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오래 하는 기도가 모두 금지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온 밤을 새며 기도하셨다(눅 6:12). 솔로몬의 기도는 긴 기도였다. 우리의 용건이나 감정이 특별하다면 때로 오래할 필요가 있다. 마치 오래 기도해야만 하나님을 더 즐겁게 하며 효과가 있는 것처럼 오래 기도하는 것만이 여기에서 정죄되었을 따름이다. 

정죄 되는 기도는 "많이 하는 기도"가 아니다. 아니, 우리는 "항상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그러나 많이 "말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오류는 우리가 단지 기도를 "말할 때" 범할 수 있으며, "기도할 때"는 범할 위험성이 없다. 이 경고는 솔로몬에 의해 표현되어 있는데, 즉 "말을 적게 하라"(전 5:2). 다시 말하면 사려 깊고 신중하게 말하라.

"너는 말씀을 가지라"(호 14:2). "말을 택하라"(욥 9:14). 또한 마음에 또한 처음 생각을 모두 말하지는 말라.

2. 이러한 기도를 하지 말라는 이유가 무엇인가?

(1) 이것은 "이방인들이 하는"방법이다.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神)을 예배하는 것같이 기독자가 그들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기독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이방인은 자연의 빛에 의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예배의 대상에 관한 그들의 상상에 있어서 헛되게 되어버렸으며, 그들이 예배하는 태도나 특히 여기에 있는 실예에서 그렇게 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을 전혀 그들과 같은 분으로 생각하였으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말한 것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하여 또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도록 하기 위하여 그에게 많은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마치 하나님은 연약하고 무지하며 간구하기가 매우 어려운 분인 것처럼 생각하였다. 그래서 바알의 제사장들은 아침부터 거의 저녁까지, "오 바알이여, 응답하소서. 오 바알이여, 응답하소서"라고 중언부언하면서 발악을 했다. 그들은 공연한 간구를 드렸다. 그러나 엘리야는 간단한 기도를 드림으로써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장작을 쌓은 것을 불사르게 하고 물을 말리게 하였다(왕상 18:26, 36). 기도할 때 아무리 입술을 놀린다 해도, 그것이 전부라면 헛수고가 되고 말 것이다.

(2) "네 방법을 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께서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이렇게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것은 기도할 때 필요가 없다고 하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기도에 의해 네가 그를 필요로 한다는 것과 그를 신뢰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또한 그의 약속을 간구하기를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의 사정을 털어놓으며 네 마음을 그 앞에 쏟아 놓아라. 그리고 그것을 그에게 남겨두라."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해 보자.

① 우리가 기도드리는 대상인 하나님은 창조와 계약에 의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그러므로 그에게 대한 우리의 요청은 용이하고 자연스러우며 꾸밈이 없어야 한다. 

어린 자녀는 그들의 부모에게 어떤 것을 요구할 때 말을 길게 할 필요가 없다. "아빠, 아빠"하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사랑과 존경과 신뢰로서 그에게 다가가자. 그리고 그때에 그들은 많은 말들을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양자의 영에 의해 "아바, 아버지"라고 올바르게 말하라고 가르쳐지고 있다.

② 그는 우리 자신보다 우리의 처지와 필요를 더 잘 아시는 아버지이시다. "그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아신다." 

그의 눈은 자기 백성의 필요를 관찰하시기 위해 세상의 이곳 저곳으로 움직이고 있다(대하 16:9). 또한 그는 종종 "우리가 부르기 전"에 응답하시며(사 65:24), "우리가 요구한 것 이상으로" 주신다(엡 3:20). 만일 그가 자기 백성에게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주시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그것이 그들에게 필요가 없거나 그들에게 좋지 않은 것임을 하나님께서 잘 아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보다 더 우리의 사정을 잘 판단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처지를 나타내는 데 말을 길게 하거나 많이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에게 말할 수 있는 것보다 그것을 더 잘 아신다. 그는 단지 그것을 "우리에게서" 아신다(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것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그에게 말씀드릴 때 우리는 그에게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의 앞에 있나이다"(시 38:9)라고 말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말을 많이 하거나 길게 하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지는 않으신다. 가장 능력 있는 간구는 "말할 수 없는 탄식"(롬 8:26)으로 하는 기도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명령을 내려서는 안 되며 요청을 해야 한다.

-----

기도의 본(주기도문)(마 6:9-15)

그리스도께서 잘못된 것을 책망하셨을 때 그는 더 잘 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책망은 교훈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여기에서 우리가 말해야 할 것을 문장으로 나타냄으로써 우리의 연약함을 돕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9절). 유대인들은 이 기도의 의무에 잘못된 많은 변조들을 몰래 삽입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의 내용과 방법을 알려 주기 위하여 새로운 규범서를 제시할 필요성을 느끼셨다. 그는 기도를 한 모형으로, 우리기도의 몇 가지 특별한 것들을 요약 내지는 그 내용으로 잘 사용될 수 있도록 한 문장으로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마치 이 주기도문이 다른 기도를 드리는 데 꼭 필요한 것처럼 이 형식에만 언제나 얽매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와 같이, 이러한 말들로, 이런 취지로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누가복음에 있는 것은 이와 다르다. 이 주기도문이 사도들에 의해 사용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여기에서는 우리가 그 후에 하고 있듯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하지도 않았다. 여기에서는 성령이 부어졌을 때 도래하였던 나라가 임하시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없이 주기도문을 한 모형으로 사용하는 것은 매우 좋다. 주기도문은 성도들의 교제의 간구이며 휘트비(Whitby) 박사의 말에 의하면 적어도 3세기 이후에서부터는 모든 교회에서 사용되어 왔다.

그것은 주님의 기도이며, 그가 만드시고 지정하신 기도이다. 그것은 매우 간명하면서도 알기 쉬우며, 기도에 약한 우리의 약점을 동정하여 주신 것이다. 그 내용은 정선되고 필수적인 것이며, 그 방법은 교훈적이며, 그 표현은 간결하다. 주기도문은 짧지만 많은 내용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그 의미와 뜻을 익히 알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주기도문은 사려분별이나 중언부언 없이 사용되는 것 이상으로 마음에 들도록 사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주기도문(모든 기도도 실제로 마찬가지이지만)은 땅에서 하늘로 보내는 편지이다. 편지의 제명(題銘)을 보면 수취인은 "우리의 아버지," 장소는 "하늘나라," 그 다음에는 몇 가지 요구 사항을 적은 내용, 맺는 말은 "나라가 아버지께 있사옵니다." 보증인(印)은 "아멘"이다. 만일 여러분이 원한다면 날짜는 "오늘이다."

다음과 같이 주기도문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Ⅰ. "머리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의 용건에 이르기 전, "우리 아버지여"라고. 우리는 그 용건을 말하려는 사람에게 엄숙한 인사를 드려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가 한 일원이며, 서로가 교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하나님께만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성도들이나 천사들에게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를 잘 모르며, 우리가 기도에서 드리는 영예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한 우리가 기대하는 은혜를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인사하며, 그에게 붙일 수 있는 근사한 이름보다는 자애스러운 칭호가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기 때문이다.

1. 우리는 "우리 아버지"이신 그에게 말해야 한다. 또한 그를 그렇게 불러야 한다. 

그는 창조에 의해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인 아버지가 되신다(말 2:10; 행 17:28). 그는 특별한 방법으로 양자와 중생에 의해 성도들에게도 아버지가 되신다(엡 1:5; 갈 4:6). 또한 그것은 말할 수 없는 특권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에서 그를 바라보아야 하며, 그에 대한 좋은 생각을 유지해야 한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보다 하나님과 내 자신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리스도는 기도할 때 대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 

만일 그가 우리의 아버지이라면 그는 연약함과 부족함 가운데 있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 것이며(시 103:13), 우리를 아끼실 것이며(말 3:17), 비록 부족하기는 하지만 우리의 행동에 만족하며, 우리에게 좋은 것은 어느 것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우리에게 좋은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주실 것이다. 눅 11:11-13). 

우리는 아버지이신 그에게 담대히 나아가며, "아버지와 양자의 영으로 더불어 대언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회개할 때 우리는 탕자가 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로 보아야 한다(눅 15:18; 렘 3:19). 

은혜와 평화, 아들의 유업과 축복을 구할 때, 우리는 화목하지 못하고 복수하는 심판자로서의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며 은혜스러우며 화목한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에게 나아간다는 사실은 격려가 된다(렘 3:4).

2. 우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시다." 

각처에 있는 것처럼 하늘에도 계시다. 하늘은 그를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하늘과 그 밖에 도처에 그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보좌이기 때문이다(시 103:19). 그것은 믿는 자들에게 은혜의 보좌이다. 

우리는 그곳으로 우리의 기도를 향해야 한다. 왜냐하면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는 지금 하늘에 계시기 때문이다(히 8:1). 하늘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영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기도로 대화하는 것은 영적이어야 한다. 하늘은 높은 곳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세상 위로 들어 올려져야 하며, 또한 우리의 마음을 들어 올려야 한다(시 5:1). 하늘은 완전히 정결한 장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끗한 손을 들어 올려야 하며, 거룩한 분이시요, 거룩한 장소에 거주하시는(레 10:3) 그의 이름을 거룩케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하늘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의 자녀를 보신다(시 33:13, 14). 또한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를 보시는 그의 눈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는 우리의 부족함과 무거운 짐, 소원, 연약함에 대해 완전하고도 분명하게 알고 계시다. 하늘은 그의 조망(眺望)의 궁창일 뿐만 아니라 "권능의 궁창"이기도 하다(시 150:1).

그는 기꺼이 우리를 돕고자 하시는 아버지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도울 수 있으며, 우리가 구하면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일을 우리를 위해 하실 수 있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다. 

그는 우리의 필요를 그것으로 채우신다. 왜냐하면 모든 좋은 선물은 위에서부터 온다. 그는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함을 가지고 그에게 올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경심을 가지고 그에게 나아가야 한다(전 5:2). 따라서 우리의 모든 기도는 기독자인 우리의 큰 목적이 되는 것과 일치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일치해야만 한다. 우리의 모든 대화의 목표이신 하나님과 하늘은 모든 기도에서 특별히 주시되어야만 한다. 즉 우리가 모두 향하는 중심이 있는 것이다.

Ⅱ. "간구." 여섯 조목이 있다. 

절반에 있는 세 조목은 보다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영광에 연관되어 있고, 후반에 있는 세조목은 우리 자신의 현세적인 관심과 영적인 관심에 연관되어 있다. 십계명에서와 마찬가지로, (전반 네 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후반 여섯 계명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가르치고 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방법은 먼저 "하나님의 왕국과 그의 의"를 찾을 것을 가르치며, 그 다음에 "다른 일들이 부가되기를" 희망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1.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다른 곳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sanctified)라고 번역된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고어인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hallowed)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것은 단지 사람들이 주기도문에서 이 말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 말에서,

(1)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린다. 

그것은 간구가 아닌, 예배(찬미)로서 간주될 수 있다. 이것은 "주님께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소서. 영화롭게 하옵소서"와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의 모든 완전성의 위대함이나 영광이다. 

우리는 기도를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서 시작해야 하며, 우리가 그에게서 자비와 은혜를 받으려고 기대하기 전에 그가 먼저 섬김을 받아야 하며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합당하다. 먼저 그의 완전함을 찬양하자. 그 다음에 그 완전함의 유익을 소유하자.

(2) 우리는 우리의 목표를 고정한다. 

그것은 목적된 바른 목표이다. 또한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시는 것은 우리의 모든 간구에 있어서 주요하고도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다른 모든 간구는 이것에 부속적이고 종속적인 것이 되어야만 한다. 

"아버지여 나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내 죄를 용서하심으로서 당신을 영화롭게 하소서." 등 모든 것은 그에게 속하며, 그로 말미암기 때문에 모든 것은 그를 향해 있어야 하며 그를 위해 있어야 한다. 기도할 때 우리의 생각과 감정은 대개 하나님을 향애, 하나님께 대해 실행되어야만 한다. 바리새인들은 그들 자신의 이름을 그들의 기도의 주요한 목적으로 삼았다(5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우리의 모든 간구에 있어서 이것을 중점에 두어야 하며 그것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 "당신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하시옵고, 나에게도 그리 하소서. 그렇게 하는 것이 당신의 영광을 위하는 것에 한해서만 행하옵소서."

(3)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 즉 하나님 자신이 알게 하신 모든 것에서 우리와 다른 사람, 특히 그 자신에 의해 거룩히 여김을 받고 영화스럽게 되어야할 것을 바라고 기도한다.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이 아버지로서 또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서 영화스럽게 여김을 받도록 하시옵소서. 당신의 선하심과 지고하심, 위엄과 자비를 영화스럽게 하옵소서.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왜냐하면 당신의 이름은 거룩하시기 때문이옵니다. 우리의 타락한 이름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주여, 당신의 위대한 이름에 무엇을 행할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스럽게 되기를 기도할 때에는,

① 우리가 필연적인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을 원하든지 원치 않든지 그 자신의 "이름을 거룩케 하실"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열방 중에서 높힘을 받으리라"(시 49:10).

② 우리는 확신하는 바가 주어지도록 기도한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기도하실 때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을 거룩케 하시옵소서"라고 하셨으며, 그것은 즉시 응답되었다. "내가 그것을 영화롭게 하였고, 또한 다시 영화롭게 할 것이다."

2. "나라가 임하옵시며." 

이 간구는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그 당시 전파하였던 교리에 대한 언급으로서, 이것은 전에 세례 요한이 전파하였고 또한 후에 그리스도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전파하도록 보낸 메시지였다. 즉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다.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의 나라, 즉 메시야의 왕국이 가까웠으니, 그것이 임하도록 기도하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는 우리가 듣는 말을 기도로 돌려야 하며, 우리의 마음은 그것에 반영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내가 정녕 속히 오리라"고 약속하셨는데, 우리는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대답해야 한다. 

교역자들은 말씀에 대해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라"고 전파할 때에 그들은 "아버지여,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한 것을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약속들은 기도를 폐지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고무시키고 격려하기 위하여 주어진다. 또한 약속의 성취가 가까이 있거나 문 곁에 있을 때 하늘나라가 가까이 이르렀을 때 우리는 더욱 진지하게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마치 다니엘이 이스라엘의 구출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을 때 그는 그때가 가까이 이르렀다고 이해하였다(단 9:2; 눅 19:11 을 보라).

"그로 하여금 그의 나라를 다스리게 하시며, 그의 구속이 번창케 하시며, 그의 메시야가 오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케 하시옵소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일상적인 기도였다(휘트비 박사, ex Vitringa).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옵시며, 복음이 모든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게 하옵소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에 관해 말씀하신 기록에 찬동(서명)케 하시며, 그를 그들의 구세주와 통치자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복음적인 교회들의 범위가 넓어지게 하시며,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로 되게 하시며 모든 사람들이 그것에 충족되며 그들의 특성에 합당하게 살도록 하옵소서."

3.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실 때 우리와 다른 사람이 그 나라의 모든 법률과 규칙에 순종하게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것에 의해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 드러나도록 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이것에 의해 그 뜻이 "하늘나라"로 오는 것이 드러나도록 하며, 그것이 "지상 천국"을 도입케 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왕이라고 부르면서도 그의 뜻을 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를 단지 유명무실한 이름뿐인 왕으로 만들게 될 것이다. 그가 우리를 지배하도록 기도하고 난 후 우리는 모든 일들에서 그의 지배를 받게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자.

(1) 기도할 것은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이다. 

"주여, 나와 내 것으로 당신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시옵소서(삼상 3:18). 나에 관한 당신의 모든 계획이 이루어질 것을 당신에게 말씀드리며 만족하나이다."  바로 이런 의미로 그리스도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였다. "나로 하여금 당신을 즐겁게 하는 바를 행할 수 있게 하옵시며, 당신의 뜻에 대한 바른 지식과 그것에 합당한 순종에 필요한 은혜를 주시옵소서. 당신의 뜻이 나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성실하게 행해지게 하옵소서. 우리가 하는 일에서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거나(ut nihil nostrum displiceat Deo)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불쾌함이 되지 않도록(ut nihil Del displiceat nobis) 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의 뜻이나 육신과 마음의 뜻, 또는 사람의 뜻(벧전 4:2), 더욱이 사탄의 뜻(요 8:44)이 행해지지 않게 하옵소서"

(2) 그것의 모형은 하나님의 뜻이 휴식과 즐거움의 장소인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우리의 시련과 시험의 장소(이곳에서 우리의 행위가 행해져야 하며 혹은 결코 행해지지 않을 것이다)인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준수함으로서 더욱 천국과 같이 되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이 땅은 사탄의 뜻이 우세하였기 때문에 거의 지옥과 같이 되어 버렸다). 또한 성도들이 그들의 헌신과 순종에 있어서 더욱 거룩한 천사들과 같이 되어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우리가 "땅 아래"(under the earth)에 있지 않고 "땅 위에"(on the earth)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침묵 속으로 내려가 버린 죽은 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자"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4.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 

왜냐하면 우리의 자연적인 존재(생명)는 이 세상에서 영적인 행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 뜻을 구한 후에는 이 세상의 현실적인 생명에 필요한 양식과 즐거움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바로 이것,  날마다 소용되는 양식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우리의 남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일용한 양식", 가까운 날을 위한 양식을 그에게 구하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장차 올 때를 위한 양식, 또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조건에 맞는(잠 30:8) "우리의 생존을 위한 양식," 우리의 지위와 신분에 따라 "우리와 우리의 가족에게 편리한 양식"을 구해야 한다.

여기에 있는 모든 단어는 그 안에 교훈을 가지고 있다.

(1) 우리는 "양식"을 구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온건과 절제를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진미(珍味)나 여분의 양식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맛은 좋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건강에 유익한 것을 구한다.

(2) 우리는 "우리의" 양식을 구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정직과 근면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입에서부터 양식을 구하지 않으며, 또한 "속이고 취한 식물"(잠 20:17)이나 "2을리 얻은 양식"(잠 31:27)이 아닌, 정직하게 얻은 양식을 구하는 것이다.

(3) 우리는 우리의 "일용한" 양식을 구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내일을 염려하지 말고"(34절) 그날 벌어 그날 지내는 자로서 하나님의 섭리에 꾸준히 신뢰해야 한다.

(4) 우리는 하나님께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도록 비는 것이다. 

그것을 팔거나 빌려 달라는 것이 아니라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일용한 양식"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한다.

(5) 우리는 기도하기를, "그것을 우리들에게 주시옵소서. 나에게만 아니라 나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게도 주시옵소서." 

이것은 우리에게 자비와 또한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대한 동정심을 가르쳐 준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우리의 가족들과 함께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우리와 우리 집안 식구들은 함께 먹고 있으며 따라서 함께 기도해야 한다.

(6)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오늘" 우리에게 주실 것을 기도한다. 

이것은 우리의 몸의 결핍이 새로워지는 것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영혼의 소원이 새롭게 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날이 더디오느니 만큼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께 날마다 기도해야 하며, 우리는 양식 없이 한 날을 잘 지낼 수 있는 것처럼 기도 없이도 잘 지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5.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것은 전자와 연결되어 있다. "또한 사하여 주옵시고"는, 우리의 죄가 용서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생활의 위로나 양식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우리의 일용한 양식"은 만일 우리의 죄가 용서받지 못한다면 "도살한 어린 양"으로 키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가 일용한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에 못지 않게 일용한 "사죄"를 위해 기도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씻음 받는 자"는 "그의 발"을 씻어야 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1) "간구"가 있다. "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리의 죄(빚), 당신에게 대한 죄를 용서하신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① 우리의 죄는 우리의 빚이다. 

피조물인 우리는 창조자에게 대한 빚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것에서 면제되기를 기도하지 않으며, 그것을 갚지 않으면 형벌의 빚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 쉽다. 율법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형벌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빚을 진 자는 소송을 당하기 쉽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죄인은 율법에 대해 빚진 자이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②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에게 대한 마음의 소원과 기도는 매일 행해져야 하며, 그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용서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또한 형벌에 대한 책임이 취소되고 무효가 될 수 있도록 또한 우리가 "정죄에 이르게 되지 않도록, 또한 면제되고 그 위로를 가질 수 있게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를 청구하여 얻을 때 우리가 신뢰를 두어야 할 큰 증거는 우리의 죄에 대한 방면(면제)을 떠맡으신 우리의 보증인(오히려 행동에 대한 담보인)이신 주 예수님의 죽음에 의하여 사람의 죄를 위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셨던 속죄(satisfaction)이다.

(2) 이 간구를 강조하기 위한 논거. 

즉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이다. 이것은 공로의 빙거가 아니라 은혜의 빙거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을 거스리는 죄의 용서를 위해 그에게 이르는 자들은 그들을 거스린 자들을 용서하는 것에 대해 자각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주기도문을 말할 때 그들 자신을 저주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의무는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하는 것"이다. 돈의 빚에 관하여 우리는 그들 자신이나 가족을 파산하지 않고는 그 빚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자들에게 그 빚을 달라고 강요할 때에 가혹하거나 엄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것은 상해(傷害)의 빚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에게 빚진 자들은 "우리에게 죄를 범하고," "우리를 때리는 자이며"(마 5:39, 40), 법의 엄격성에 호소하여 벌받아야 할 자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욕과 우리에게 행해진 허물을 참고 견디며, 용서하고 잊어버려야 한다. 이것은 용서와 평화를 위한 조건(자격)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것이라"는 소망을 북돋아 준다. 만일 우리에게 이러한 은혜스러운 성벽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생기며, 따라서 그 자신 안에 두드러지고 초월적으로 있는 완전성이다. 그것은 그가 용서의 조건을 우리에게 작동함으로써 우리를 용서하신 증거일 것이다.

6.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 간구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고 있다.

(1) 소극적으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죄의 하물이 옮겨지기를 기도하고 난 후에 우리가 다시 어리석음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시험을 받지 않게 되도록 기도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죄에로 유혹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주여, 사탄을 우리에게로 풀지 마소서. 울부짖는 사자를 잡아매소서. 왜냐하면 그는 간교하고 사득하기 때문입니다. 주여, 우리를 자신에게 내버려두지 마소서. 왜냐하면 우리는 매우 약하기 때문입니다(시 19:13). 주여, 우리 앞에 거침돌이나 덫을 두지 마시고, 또한 넘어질 수 있는 환경에 있게 마소서"이다. 

시험은 기도로서 대항해야 한다. 왜냐하면 첫째로 시험은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며, 둘째로 우리는 시험에 의해 정복되고 이에 뒤따르는 죄와 슬픔을 맛볼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2) 적극적으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악한 자에게서", 마귀 즉 시험하는 자에게서 구하옵소서. 

"우리가 마귀에게 공격당하지 않도록, 또한 그러한 공격에 의해 정복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주옵소서." 또는 "악한 일," 즉 사악한 것들 중 가장 나쁜 죄에서, 또는 사악에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사악한 일이나 사탄이 사람을 유혹하고 그들을 빠뜨리는 사악한 일에서 구하옵소서. "주여, 우리를 세상의 악, 정욕을 통해 세상에 있는 부패에서 구하옵소서. 세상에 있는 여러 상태의 악에서, 죽음의 악에서, 죄악인 사망의 쏘는 것에서 우리를 구하옵소서.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의 악한 마음에서 구하시며, 악한 자들이 우리에게 거침이 되지 않고 또한 우리가 그들에게 미끼가 되지 않도록 그들에게서 우리를 구하옵소서."

Ⅲ. 결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어떤 사람은 이것을 다윗의 송영과 결부시키고 있다. "여호와여, 광대하심이 주의 것이로소이다"(대상 29:11). 주기도문의 송영은,

1. 앞서 언급한 간구를 강조하기 위한 청원의 형식이다. 

하나님을 움직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 변백한 말을 입에 채우며(욥 23:4), 기도로 하나님께 간청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믿음을 격려하고, 열심을 일으키기 위해 또한 그 둘을 증명하기 위해 그에게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인 것이다. 

그런데 기도에 있어서 가장 좋은 호소 제목은 하나님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거나 또한 그가 그 자신에 대해 알려 주신 것에서 취한 것들이다. 우리는 우리의 청원의 성질과 또 그 탄원의 절박성 때문에 하나님과 겨루어 씨름해야 한다.

여기에 있는 청원은 첫번 조목의 세 가지 간구와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나라가 임하옵시며(나라가 당신의 것이옵니다), 뜻이 이루어지며(권세가 당신의 것이옵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영광이 당신의 것이옵니다)." 또한 우리 자신의 특별한 임무에 관하여 이러한 것들은 격려가 된다.

"나라가 당신에게 있사옵나이다. 당신을 세상을 지배하시며 성도를 보호하시나이다. 당신을 그 일을 자발적으로 하시옵니다." 하나님은 왕과 같이 베풀고 구원하신다. 

"권세가 당신에게 있사옵니다. 그 나라를 유지하고 보존시키며, 당신의 백성에게 당신의 모든 좋은 약속을 맺기 위해 권세가 당신에게 있사옵니다."

 "영광이 당신에게 있사옵니다." 성도의 기도에 응답하여 성도들에게 주어지고 또 그들을 위해 행해지는 모든 것들의 목표인 "영광이 주의 것이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찬양"이 주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도에 있어서 위로와 거룩한 신뢰의 주제이다.

2. 이 송영은 칭찬과 감사의 형이다. 

하나님께 대한 최고의 간구는 그에 대한 칭송이다. 그것은 더욱 자비를 얻는 방법이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받기에 합당케 한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모든 청원에 있어서 칭송은 괄목할 만한 몫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합당하다. 왜냐하면 칭송은 "성도들에게 합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평하고 평등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드리는 것은 그가 그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 아니라(그는 천사의 세계에 의해 칭찬을 받는다), 그것을 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할 때 그의 계획에 순응함으로써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은 우리가 할 의무이다.

 칭송은 하늘 나라의 일이며 행복이다. 장차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는 자는 누구든지 현재 그들의 하늘나라를 시작해야만 한다.

 이 송영이 얼마나 완전한 것인가를 살펴 보라. "나라와 권세와 영광," 이 모든 것이 당신에게 있사옵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을 여러 가지 말로 찬양하는 것이 우리에게 합당하다는 사실이다. 참된 성도는 자기가 하나님에 대해 결코 충분히 영광스럽게 말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말씨가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는 그것이 "영원히"라는 말이다. 하나님에게 "영원히"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그것은 영원히 마땅하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요, 또한 위에 있는 천사들과 성도들로 더불어 영원히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진지한 소원을 암시하기도 한다(시 51:14).

끝으로, 여기에서는 이 모든 것들에 우리의 "아멘"(그렇게 되시기를)을 첨가하라고 교훈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멘"은 허락이다. 그의 "명령"은 그것이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아멘"은 요약된 소원일 뿐이다. 

그렇게 말함은, "그렇게 되어지이다"라는 뜻이다. 우리가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은 들어주시리라는 우리의 소원과 확신의 증거이다. 

"아멘"은 앞서한 모든 간구에 연관된다. 따라서 우리의 연약함에 대한 동정에서,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종결함으로써, 세부적인 말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과 실언했던 것을 총괄적으로 함께 모을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가 유쾌한 마음으로 경건한 의무를 마칠 수 있기 위해서는 다소 온화하고 힘있게 그 의무들을 결론짓는 것이 좋다. 

옛적에 선한 사람들은 모든 기도의 끝에 크게 "아멘"이라고 말하였다. 만일 그것이 사도가 지시하는 것과 같이(고전 14:16) 이해심을 가지고 올바르게 행해진다면 그것은 칭찬할 만한 관습이 된다.

주기도문에 있는 간구의 대부분은 유대인들의 기도에서 또는 그 기도와 같은 취지로 일반적으로 사용되어 오던 말이다. 

그러나 여섯 번째 간구에 있는 구절들, 즉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 주님은 여기에서 그것을 첨가한 이유를 보여 주고 있다. 즉 비록 그럴 만한 충분한 근거는 있었지만 그 시대의 사람들의 까다로움과 소송하기 좋아함, 심술궂음에 대한 어떤 개인적인 비난에서가 아니라 이 일 자체의 필요성과 중요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할 때 우리에게 손상을 입힌 자를 우리가 용서하는 것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신다. 따라서 우리가 사죄를 위해 기도할 때는 우리 자신이 그 의무를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속박되기 위해서 그 의무에 대한 우리의 자각을 언급해야만 한다. 그 비유를 보아(마 18:23-25). 이기적인 성품은 이것에 순응하기를 싫어하며, 따라서 여기에 비난되고 있다(14, 15).

1. 약속에 있어서.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실 것이다." 

이것이 요구되는 유일한 조건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거기에는 회개와 신앙, 새로운 순종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실제로 다른 미덕이 작용하고 있는 곳에는 남을 용서하는 미덕도 있게 되는 것처럼, 이 미덕은 우리들의 다른 미덕의 진지성에 대한 좋은 증거가 될 것이다. 

그의 형제를 향하여 가엾게 여기는 자는 이로서 그가 그의 하나님을 향해 회개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주기도문에서 "빚"이라고 불리운 것이 여기에서는 "과실," 즉 손상의  "  빚 " 우리의 육체나 물건, 명성에 있어서 우리에게 향한 잘못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과실"은 허물(paravptwma, 거침, 미끄러짐, 넘어짐)을 경감시켜서 하는 말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에게 행해진 손상을 보다 경감해서 말하고 이해해 주는 말로 칭찬하는 것은 곧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데 대한 좋은 증거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런 일을 "큰 죄"라고 부르지 않고 "과실"이라고 부르며, 고의적인 손상이 아닌 우연한 실수라고 부른다. "그것은 우연한 착오로다"(창 43:12). 

그러므로 그 결과를 선용하라. 우리는 용서받기를 원하는 한 남을 용서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의를 품거나 보복을 계획해서는 안 되며, 우리의 형제가 우리에게 행한 손상을 나무라거나 그에게 일어나는 어떤 상해를 기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를 돕고 그에게 선행을 하려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하며, 또한 그가 회개하고 다시 친구가 되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이전과 같이 그와 더불어 허물없이 친숙하게 되어야 한다.

2. 경고에 있어서.

 "너희가 너희를 손상시킨 자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희가 그 밖의 다른 필수적인 조건을 가지지 못하고, 또한 사죄 받기에는 전혀 부적합하다는 불길한 징조인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아버지라고 부르며 또한 아버지로서 너희에게 합당한 은혜를 베푸시는 너희 아버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만일 너희가 다른 장점들은 많이 가지고 있지만 용서하는 것이 크게 부족하다면 너희는 사죄의 위로를 기대할 수 없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 자비를 찾으려고 하는 자들은 모름지기 그들의 형제들에게 자비를 보여 주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에게 "분노와 다툼이 없이"(딤전 2:8) 거룩한 손을 들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은혜의 손을 펼 것을 기대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분노 가운데서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분노 가운데서 응답하실 것이다. "분노 가운데 행해진 기도는 쓸개에 기록된다"는 말이 있다. 유순함을 잊지 말라!!

우리가 한 데나리온의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에게 빚진 1만 달란트의 빚을 용서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위대한 화평 조성자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해"할 뿐만 아니라 서로가 화목하기 위함이며, 이것에서 우리는 그를 쫓아야만 한다. 

그리스도가 여기에서 강조한 것을 경시하려는 것은 그릇된 가정이며 위험스러운 오만이다. 사람의 걱정이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

금식 생활(마 6:16-18)

여기에는 앞의 구제와 기도 때와 같이 금식할 때 위선에 대해 경고를 주고 있다.

Ⅰ. 여기에는 종교적인 금식이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요구되는 의무라는 것이 추측되고 있는데, 그때는 하나님이 그의 섭리에 있어서 제자로 불리우거나 어떤 사건에 대한 그들 자신의 영혼의 처지가 그것을 요구하는 때이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마 9:15). 

여기에서 금식이 맨 나중에 두어진 것은 그 자신을 위해 의무라기 보다는 오히려 다른 의무를 위해 우리에게 배치된 수단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구제와 금식의 생명과 정수로서 양자 사이에 들어간다.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경건한 유대인들 가운데 일반적으로 사용된 자발적인 헌금과 같이 특별한 사람들이 그들 자신에 대해 규정을 내린 것과 같은 개인적인 금식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하루를, 또 어떤 사람은 이틀이나 매주를 금식하였다. 이 날에는 그들은 해질 때까지 먹지 않았으며, 그때는 매우 삼가서 이 일을 했다. 그리스도께서 책망하신 것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는 바리새인들의 금식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그들의 자랑이었다(눅 18:12).

금식은 칭찬할 만한 행동이며, 기독자들이 일반적으로 이들을 멸시하는 것은 슬퍼해야 한다. 안나는 많이 많이 금식하였으며(눅 2:37), 고넬료도 금식하고 기도하였다(행 10:30). 초대 교회 기독자들은 많이 금식하였다(행 13:3). 

경건을 위한 개인적인 금식은  당연한 것으로 상정되고 있다(고전 7:5). 금식은 자기 부정의 행동이요 육신의 고행이며, 우리 자신에 대한 거룩한 보복이며, 하나님의 손 아래 놓이는 겸손이다. 

최고로 성장한 기독자는 이로써 그들은 자랑할 것이 없으므로 일용한 양식에 대해 하등의 가치가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금식은 육체와 그 욕망을 억제하며, 마치 풍족한 빵이 우리를 졸립게 만드는 것처럼 우리를 경건의 연습에 있어서 보다 더 생기 있게 만들기 위하여 필요한 수단이다. 바울은 "종종 금식하였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몸을 제어하고 복종시켰던 것이다."

Ⅱ. 우리가 금식의 상을 잃지 않도록 "위선하는 자들"이 하는 것처럼 이 일을 행치 말라고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억지로 이 의무를 수행하면 할수록 그 상은 더욱 잃게 마련이다. 그런데,

1. "위선하는 자들"은 그들이 금식의 생명이요 정수인 영혼의 회개나 겸손이 없으면서도 금식하느라고 가장하였다. 

그들의 겸손은 흉내만 내는 가짜 금식이었고 본체가 없는 한낮 겉치레와 그림자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실제의 자기보다 더 겸손을 가장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에게 더 큰 무례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를 속이려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이며 그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것을 금식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다(사 58:5). 육체적인 연습이 그것의 전부라면 유익이 적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나 그 자신에 대한 금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2. 그들은 그들의 금식을 널리 선포하였고, 그들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과 더불어 금식하는 날임을 주시하도록 하기 위해 이 일을 행하였다. 

이러한 금식 날에 그들은 골방에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거리에 나타났다. 그들은 풀이 죽은 시늉을 했으며, 우울한 표정, 더디고 엄숙한 걸음걸이를 취하였다. 그들은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얼마나 자주 금식하는가를 알도록 함으로써 그들을 열심 있고, 고행하는 사람으로 칭송하도록 하기 위하여 철저히 자신들을 위장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감각적인 죄악인 바 그자신들의 쾌락을 어느 정도 억누른 사람이, 영적인 죄악이며 역시 위험스러운 자신들의 교만에 의해 파멸 당할 것이라는 사실은 슬픈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그들은 역시 "자기 상," 즉 그들이 열심히 바라는 사람의 칭찬과 갈채를 "이미 받아버린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받았고," 그냥 그것이 전부이다.

Ⅲ. 개인적인 금식은 어떻게 행해야할 것인가가 교훈 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개인적으로 지켜야 한다(17, 18절). 그는 우리가 얼마나 자주 금식할 것인가에 대해 언급하시지 않고 있다. 환경이 서로 다르며, 그 때마다 지혜가 할 바를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씀 안에 있는 성령은 그것을 마음 안에 있는 성령에게 맡겨 두었다. 

그러나 유의해야 할 것은 너희가 이 의무를 이행할 때는 언제든지 네 자신을 하나님께 입증해 보이려고 노력해야 하며 결코 사람들의 칭찬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겸손은 언제나 우리의 겸허(겸비)에 수반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금식의 실제성에 대한 어떤 것을 약화시키려고 가르치시지는 않는다. 그는 "소량의 음식을 먹고 적게 마시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니, "몸으로 고통을 받게 하라. 그러나 그것을 나타내려고 하지 말라. 평상시의 모습과 태도, 복장을 하라. 네 몸의 음식을 삼가는 동안 다른 사람, 아니 가장 가까이 있는 자에게 그것을 보이려고 하지 말라. 네 기도를 감추기 위해 평상시 하는 것처럼, 유쾌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그리하면 마지막 날에 칭찬을 잃어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에게서 칭찬을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칭찬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금식은 의무의 내심인 영혼의 겸손(시 35:13)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너의 주요한 관심이 되게 하라. 그리고 네 겉모양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 하지 말라. 만일 우리가 경건한 마음으로 금식을 하며, 겸손하며 우리의 증거를 위해 하나님의 전능에 신뢰를 두며 우리의 상을 위해 선하심을 믿는다면, 그가 "은밀한 중에 보셨다"는 것과 "공개적으로 상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경건한 금식은 올바르게 지켜지기만 한다면 영원한 금식으로 머지않아 보상받게 될 것이다. 개인적인 금식을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려면 사람의 칭찬(우리는 이것을 받을 목적으로 금식해서는 안 된다)과 또한 비난(그것을 두려워하여 금식하기를 꺼려해서는 안 된다)에 자신을 죽은 자로 만들어야 한다. 보라, 다윗의 금식은 도리어 그에게 욕이 되어 돌아왔었다...그러나, 주께서 옳다 인정하셨다!!(시 69:10).

--------

땅의 보물과 하늘의 보물(마 6:19-24)

세속적인 마음은 다른 징후만큼 일반적이고도 치명적인 위선의 한 징후이다. 

사탄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그럴 듯한 신앙 고백의 미명 아래, 그 어떤 죄보다도 바로 이러한 죄를 통해서 영혼을 더 확실하고 굳게 붙잡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사람의 칭찬"을 열망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고 나서 그 다음으로 세상의 부귀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위선하는 자들처럼 되지 않기 위하여, 그들이 행하는 것처럼 행하지 않기 위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들이 범하는 근본적인 잘못은 "자기 상"을 위해 세상을 택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재물과 목표, 주인을 선택함에 있어서 위선과 세속적인 것에 유의해야 한다.

Ⅰ. 우리는 "우리가 쌓아둔 재물"을 선택함에 있어서 유의해야 한다. 

누구든지 사람은 "재물"과 몫을  [ 이 땅에서 필요한 분복=헬레크로서 주신바 되었기에 ]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이것에 마음을 두고 미래를 위해 의지한다. 그것은 "좋은 것"이라 솔로몬은 강조하고 있다(전 2:3). 

사람은 가장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 다른 일들에 무엇보다도 만족과 신뢰를 두는 것을 가지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의 재산을 탈취하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여기에는,

1. "현세적으로 보이는 것"을 우리의 최선의 것으로 삼는 것과 우리의 행복을 이것에 두는 것에 대해 "선하고 좋은 경고"를 하고 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으니, 지금도 동일한 선한 마음을 유지하도록 하라. 

"보화"는 그 자체가 적어도 우리 의견으로는 값지고 귀한 무엇이 풍부함을 말하며, 후에 크게 도움이 되는 그런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 보물을 쌓아 두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면

(1)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최고의 것으로 여기거나 또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이나 우리에게 가장 쓸모 있는 것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 

우리는 라반의 아들들이 했던 것처럼 그것들을 영광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그들은 "뛰어난 영광"에 비하여 아무 영광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인정해야 한다.

(2) 우리는 탐심하는 자들과 같이 이러한 일들의 풍부함에 대해 욕심을 내거나 더욱 이것들을 붙잡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3) 우리는 장차 올 때에 우리의 안전과 공급을 위해 이것들에게 신뢰를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황금에게, "너는 내 소망"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4)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가 필요로 하고 원하는 모든 것이나 되는 것처럼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적은 것에도 만족해야 하며, 모든 것을 가져야만 만족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일들이 우리의 "위로"(눅 6:24)나 "좋은 것"(눅 16:25)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후손"을 위해서 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저 세상에서 "우리의 자신들"을 위해 쌓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선택하도록 되어 있다. 우리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위해 쌓아 두는 것"은 우리의 것이다. 

현명하게 선택하는 것은 당신에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네가 스스로 선택하며, 선택한대로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우리의 능력이 얼마나 되며, 우리가 얼마나 존속되는가를 알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땅에 보물을 쌓으려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2. 여기에는 우리가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을 우리의 "보물"로 여겨서는 안 되는 "이유"가 제시되어 있는데, 그것은 잃어버리거나 녹슬기 쉽기 때문이다.

(1) 안에서의 부패 때문에.

 "땅 위에 있는" 보물에는 "좀과 동록"이 해친다. 

만일 "보물"이 좋은 옷이라면 가장 안전하다고 할 때에 "좀"이 해쳐버리기 때문에 결국 서서히 못쓰게 되고 말 것이다. 

만일 그것이 창고를 가득 채운 사람처럼(눅 12:16, 17) 곡식이나 그 밖의 먹을 것이라면 "녹"(우리는 그렇게 읽는다)이 그것을 "해칠" 것이다. brw'si" ─ 즉 먹는 것, 사람에 의해 먹히는 것인데, 이는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더하기" 때문이다(전 5:11). 즉 쥐나 해충에 의해 먹히게 된다. 

만나 그 자체는 벌레를 번식시키며 또한 그것은 곰팡이 냄새가 나게 되고 케케묵은 것이 되며, 침해를 당하고 더럽게 되며 못쓰게 된다. 열매는 곧 썩게 된다. 

또한 만일 우리가 그것을 은이나 금으로 이해한다면 그것들은 색이 변하고 서서히 파괴된다. 그것들은 더욱 쓸모 없이 되며 보존하기 어렵게 된다(약 5:2, 3). 

"좀이나 동록"은 그 자체가 금속이나 옷 속에서 배양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세상적인 부귀는 부패하고 녹 쓸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시들게 되며, 없어지고 만다.

(2) 밖에의 강포(폭력) 때문에.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모든 폭력의 손은 "보물"이 놓여있는 집을 겨냥할 것이며 어떤 것도 안전하게 쌓아두지 못하며, 그것을 빼앗길지도 모른다. Numquam ego fortunae credidi, etiam si videretur pacem agere; omniailla quae in me indulgentissime conferebat, pecuniam, honores, gloriam, eo loco posui, unde posset ea, sine metu meo, repetere. Seneca, Consol, ad Helv. ─

즉 나는 운명의 여신이 자비롭게 보인다 할지라도 결코 그녀에게 신뢰를 둔 적이 없다. 그녀의 호의가 베푼 은혜가 어떤 것이라도, 그것이 부귀나 명예, 영광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그것들에 대해 마음이 없으므로, 나에게 아무런 경종을 울리지 않고도 그것들을 취소하는 것은 그녀의 힘에 달려 있다. 쉽게 도난 당할 것을 우리의 "보물"로 삼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일이다.

3. 여기에는 다른 세상의 즐거움과 영광(그것은 '보이지 않는 영원한 좋은 것")이 되게 하며 그것들에 우리의 행복을 두게 하는 "좋은 계획"이 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다음과 같다.

(1) 이 땅에 있는 것처럼 확실하게 "하늘에도 보물"이 있다. 

하늘에 있는 보화만이 오직 유일한 참된 보물이며 그들이 완전하게 성화 될 때 성화 된 자가 참으로 도달될 수 있는 하나님의 오른손 곁에 있는 부귀와 영광과 즐거움이다.

(2) 그러한 "보물"에 우리의 "보물을 쌓아 두는 것"은 우리의 지혜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생명에 대한 우리의 칭호를 확실케 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것, 그것을 우리의 행복으로 신뢰하는 것,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하늘 나라의 것과 비교될 가치가 없는 것으로 하찮게 여기는 것은 우리의 지혜이다. 

우리는 이러한 행복이 있다는 것을 확고히 믿고 이것에 만족하고 결심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이 그러한 "보물들"을 우리의 것으로 삼는다면 그것들은 쌓아지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안전하게 지킬 것을 신뢰할 수 있다. 

그쪽으로 우리의 모든 계획을 세우고, 우리의 모든 소원을 그리고 넓히자. 

그쪽으로 우리의 최고의 노력과 애정을 앞서 보내자. 

우리에게 짐이 되고 우리를 더럽히며 침몰케 하기 쉬운 이 세상의 현금으로 무거운 짐을 지지 말고 가장 안전한 곳에 쌓아 두자. 

그 약속들은 참된 모든 성도들이 그들의 "보물을 하늘나라"의 것으로 바꾸고 장차 그것을 지불 받을 수 있는 수표이다. 따라서 우리는 확실케 될 것을 확실케 해야 한다.

(3) 우리의 "보물"을 안전한 "하늘나라"에 쌓아 둔다는 것은 우리에게 격려가 된다. 

그 자체가 녹 쓸거나 없어지지 않을 것이며 "좀이나 동록"이 그것을 부패시키지 못할 것이다. 또한 억지로나 속임수에 의해 그것을 빼앗기지도 않을 것이다.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그것은 무상의 행복이요 무한의 즐거움이며, "부패되지 않는 기업"이다.

4. 여기에는 우리가 이와 같이 선택해야 하는 "선한 이유"와 또 우리가 그렇게 행했다는 증거가 있다(21절).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땅이든지 하늘이든지 "네 마음도 있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보물"을 선택함에 있어서 올바르고 지혜로울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질, 또한 결과적으로 우리의 생활의 진로는 그것에 따라서 육적이나 영적, 지상적이나 천적(天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늘이 자석을 따르듯이, 해바라기가 태양을 좇아가듯이 "마음"은 "보물"을 따르기 마련이다. "보물이 있는 곳"에 가치와 평가가 있으며, 사랑과 애정이 있다(골 3:2).
우리의 소원과 추구가 가는 곳에 목적과 의도가 돌려진다. 모든 것은 그와 같이 행해진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우리가 그것에 어긋나지 않도록 우리의 관심과 두려움이 있다.
그것에 관하여 우리는 대개 갈망한다.  거기에 우리의 희망과 신뢰가 있으며(잠 18:10, 11), 우리의 즐거움과 기쁨이 있을 것이며(시 119:111), 우리의 생각이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내적인" 생각이 있을 것이며, "자유롭고 고정되고 빈번하며 친근한" 생각이 있게 될 것이다.
"마음"은 하나님의 당연한 권리(잠 23:26)이며, 그가 그것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의 "보물"'이 그와 더불어 쌓어져야 하며, 그때에 우리의 영혼은 그에게로 올려질 것이다.
"보물"을 쌓아두는 데 대한 이 명령은 매우 적절하게 앞서의 경고, 즉 "사람에게 보이려고" 경건한 일을 행하려 하지 말라는 경고에 적용될 수 있다.
우리의 "보물"은 우리의 구제와 기도, 금식이요 또한 그로 인한 하늘 상급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이러한 일들을 다만 사람들의 칭찬을 얻기 위하여 행하였다면, 우리는 이 "보물을 땅에" 쌓아 두는 것이요 또한 사람의 손에 맡기는 것이며 그것에 대해 더 이상의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다.
이렇게 행하는 것은 진실로 어리석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렇게도 열망하는 "사랑들의 칭찬"은 부패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곧 녹이 쓸고 좀이 먹고 쓸모 없이 되고 말 것이다.  우매(愚昧)는 죽은 파리와 같이 곧 그것을 부패케 할 것이다(전 10:1).  중상과 비방은"구멍을 뚫고 그것을 훔쳐가는 도적들이다."  그와 같이 우리는 우리의 선행의 모든 "보물"을 잃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헛되어 달리며 공연히 수고한 셈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그것들을 행함에 있어서 우리의 의도를 잘못 두었기 때문이다.
위선적인 봉사는 하늘에 아무 것도 쌓아 두지 못한다(사 58:3). 사곡한 자가 이익을 얻었으나 하나님이 이 영혼을 취하실 때에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욥 27:8).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그의 용납하심을 목표하고 진리안에서 기도하고 금식하며 구제한다면 우리는 그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게 될 것이다. "기념책에 기록된다"(말 3:16).
기념책에 기록되므로 그들은 거기에서 상을 받게 될 것이며 또한 우리는 죽음과 무덤 저편에서 위로를 가지고 그들을 다시 만날 것이다. 외식하는 자들은 "땅"에 기록되지만(렘 17:13), 하나님의 신실한 자들은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다(눅 10:20).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보물은 "하늘에 있는 보물"이며, 이것은 썩거나 도적 당할 수 없다. 하나님의 "선행"은 영원히 불변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와 같이 우리의 "보물"을 그와 더불어 쌓아 둔다면, 우리의 "마음"도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어느 곳이 더 나을까?
Ⅱ.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목표"를 선택함에 있어서 위선과 세속적인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에 관한 우리의 관심은 사람이 가지는 두 종류의 눈에 의해 표현되고 있는데, 즉 그것은 "성한 눈"과 "나쁜 눈"이다(22, 23절).
여기에 있는 표현은 간결하기 때문에 약간 모호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다양하게 해석해야 한다. "몸의 등불은 눈이다." 이것은 분명하다. "눈"은 발견하고 지시한다. "세상의 등불"은 "몸의 등불"이 없이는 우리에게 거의 쓸모가 없다.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눈의 등불"이다. 여기에서 "몸"에 있는 "눈"에 비교되어 있는 것은 무엇인가?
1. 만일 "눈," 즉 "마음"(어떤 사람은 이렇게 해석함)이"성하면"─ aJplou'" ─ "값없고 자비로운"이란 뜻이다(이 단어는 종종 그렇게 해석된다. 롬 12:8; 고후 8:2; 9:11, 13 . 약 1:5 과 같이 "선한 눈"이라고 읽는 경우도 있다, 잠 22:9).
만일 마음이 선과 자비에 감동을 받아 그곳으로 향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자의 행동, 곧 모든 생활은 "빛으로 충만"하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약 1:27)인 기독자의 증거와 실례로 가득찰 것이며, "사람들 앞에서 빛을 비추는" 선행의 빛으로 가득찰 것이다.
그러나 "만일 마음이 나쁘며," 탐욕스럽고 강퍅하고 움켜쥐며 인색하다면(이러한 마음의 기질은 종종 "나쁜 눈"으로 표현되고 있다, 마 20:15; 막 7:22; 잠 23:6, 7), "몸이 어두울 것이며," 모든 생활이 이방인과 같고 비기독자와 같이 될 것이다. "궤휼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지만, 고명한 자는 고명한 일을 도모한다(사 32:5-8)."
"만일 우리 안에 있는 등불," 우리를 선한 것에로 인도해야 할 그러한 영향력이 "어두우면," 만일 이러한 것들이 더러워지고 세속적이 된다면, 만일 사람 안에 선한 성품이나 친절한 성품이 없다면 사람의 부패나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냐!"
이 의미는 문맥과 일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구제를 베푸는 데 있어서 너그럽게 함으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어야"한다. 또한 그것은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해야 한다(눅 12:33; 고후 9:7). 그러나 병행 구절에 나와 있는 "몸의 등불"이란 말들을 보면 전혀 그러한 경우에 들어맞지 않는다(눅 11:34). 따라서 본문에 있는 일관성 때문에 위와 같은 해석이 이 말의 본의라고 결정할 수는 없다.
2. "눈" 즉 "이해"(어떤 사람은 그렇게 읽는다)이다.
 "몸"에 대한 "눈"과 같이, 사람의 행동을 안내하고 지도하는 영혼의 또 다른 기능인 실천적인 판단, 양심을 말한다.
 "만일 이 눈이 성하면," 즉 만일 그 눈이 특히 "보물을 쌓아 두는 일"에 있어서 참되고 올바른 판단을 내린다면, 은혜와 위로의 등불로 가득찰 감정과 행동을 올바르게 안내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 눈이 나쁘면," 즉, 부패한다면 인도하는 대신에 내부의 능력은 그것에 의해 인도되고 매수되고 치우치게 된다.
만일 이 눈 곧 판단하는 양심이 잘못되고 진리에서 벗어나서 오해와 착각으로 인해 오도된다면 마음과 생활은 "어두움으로 가득찰"것이며 모든 대화는 타락될 것이다. "무지각한 자"는 "흑암 중에 왕래한다"고 말해진다(시 82:5).
 "주님의 촛대"가 되어야 하는 사람의 영이 "도깨비불"(ignis fatuus, 헛된 기대, 현혹시키는 것)이 되는 것은 슬픈 일이며, 또한 "백성의 지도자," 단체의 지도자가 " 다스림 받는 단체나 백성을 미혹케 하는"것은 슬픈 일이다. 왜냐하면 그때에 "인도를 받는 자는 멸망을 당하기" 때문이다(사 9:16).
실제적인 재판에 있어서 오류는 피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는 것"이라고 불리운다(사 5:20). 그러므로 사물을 올바르게 판단하려고 애써야 하며, 우리의 눈에 안약을 발라야 할 필요가 있다.
3. "눈"은 즉 "목적과 의도"이다.
"눈"에 의해 우리는 목표를 정하며, 겨냥해 쏠려는 표적과 가려는 목적을 세우며, 목표로 삼아 이에 따라 우리의 행동을 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경건하게 행하는 모든 일에는 우리의 "눈"에 두고 있는 뭔가가 있다. 그런데 "만일 우리의 눈이 성하면," 즉 만일 우리가 진지하게 목표를 삼는다면, 올바른 목적을 정하고 그들을 향해 올바르게 움직인다면, 만일 우리가 순전히 그리고 유일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삼는다면, 그의 영광과 은혜를 구하고 모든 것을 전적으로 그에게로 향한다면, 그때에 "그 눈은 성한 것이다."
바울이 "내게서 사는 것은 그리스도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러하였다. 이런 문제에 옳다면 "온 몸이 밝을 것이다." 즉 모든 행동은 규칙적이며 은혜스럽게 될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들에게 위로를 주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 눈이 나쁘면," 만일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하거나 그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사람의 칭찬을 받으려고 치우친다면, 또는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스럽게 한다고 공언하면서도 우리 자신을 영화롭게 하려고 하며, "그리스도의 일을 추구한다"는 구실 아래 우리 자신의 일을 추구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모든 것을 못쓰게 하며, 모든 생활은 왜곡되고 휘청거릴 것이며, 또한 모든 기초는 흔들려 빗나갈 것이며, 그 상부 건물에는 "혼돈과 온갖 사악한 일"만이 있게 될 것이다.
원주에서 중심이 아닌 다른 점으로 선을 긋는다면 그것들은 가로지르게 될 것이다. "만일 네 안에 있는 등불이" 희미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어둡다"면 그것은 근본적인 잘못이며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파멸을 안겨다 줄 것이다.
목적이 행동을 구체화시킨다. 우리가 목적에 있어서 올바른 것, 즉 "일시적"이 아닌 "영원한 것"을 우리의 목표로 삼는 것이 종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후 4:18).
외식하는 자는 한 쪽을 보면서 다른 쪽으로 노젓는 사공과 같지만, 참된 기독자는 여행의 목표를 눈에 담고 있는 여행자와 같다.
외식하는 자는 아래에 있는 미끼를 노려보며 적당한 기회가 있을 때 내려오려는 솔개와 같이 높이 날아다니지만, 참된 기독자는 아래에 있는 것들을 잊어버리고 보다 더 높이 나르는 종달새와 같다.
Ⅲ.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주인을 선택함에 있어서도 위선과 세속적 마음을 조심해야 한다(24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다."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은 "성한(영문에는, "단일한")눈"과 정반대이다. 왜냐하면 "눈"은 주인의 손을 바라기 때문이다(시 123:1, 2).
우리 주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갈라지려 하거나, "땅의 보물"과 "하늘의 보물"을 함께 가지려 하거나 하나님과 사람을 동시에 기쁘게 하려는 사람들의 속임수를 드러내고 있다.
왜 그렇게 할 수 없는가?라고 외식하는 자는 말하고 있다. 제2의 방책을 강구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닌가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들의 종교적인 봉사를 자기들의 비종교적인 관심사로 만들려고 한다. 그리하여, 두 방법(길)을 이용하려고 원하는 것이다.
거짓 어머니는 어린아이를 둘로 가르려고 했다. 사마리아인들은 하나님과 우상을 혼합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은 일은 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것"은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딤전 6:5). 여기에는,
1. 규정된 일반적인 격률이 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하물며 두 하나님을 섬길 수는 없다)는 것은 유대인들 가운데 있던 한 격언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두 주인의 명령은 언젠가 서로 상반되거나 모순될 것이며, 그들의 입장이 대립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주인"이 함께 간다면, 종은 두 주인을 따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갈라설 때는, 너희는 그 종이 누구에게 속해 잇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두 주인을 올바로 사랑하거나 주목하거나 집착할 수 없다. 만일 이 주인이면 저 주인은 안 되며, 혹 이것이나 저것을 미워하거나 경시해야 할 것이다. 이 진리는 일반적인 경우에 있어서도 분명하다.
2. 이 격률이 눈 앞의 관심사에 적용되어 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재물"(Mammon)은 수리아어로서 "유익"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세상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가 자신에게 "유익"이라고 여기는 것은 모두(빌 3:7) "재물"이다. "세상에 있는 것들(코스모스 바이오스 : Cosmos Bios...그 삼위TRIAD인 바),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재물"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배"가 그들의 "재물"이며 그들은 그것을 섬긴다(빌 3:19).  또 어떤 사람에게는 그들의 안일과 잠, 쾌락, 오락이 "재물"이 된다(잠 6:9).  어떤 사람에게는 세상적인 부귀(약 4:13)가 또 어떤 사람에게는 명예와 좋아하는 물건이 "재물"이 된다.
사람들의 칭찬과 갈채는 바리새인의 "재물"이었다. 한 마디로 자기 자신, 즉 세상의 삼위가 한 곳으로 집중되는 일체성, 감각적이고 세속적인 자아는 하나님과 겸하여 섬겨질 수 없는 "재물"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섬겨진다면 하나님과는 경쟁되거나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해서는 안 된다." 또는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우리는 둘 다 사랑하거나"(요일 2:15; 약 4:4), 함께 붙잡거나, 둘을 섬기거나, 순종하거나, 따라가거나, 신뢰하거나 의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둘은 서로가 모순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내 아들아, 나에게 네 마음을 달라"고 말씀하시지만 "재물"은 "아니, 그것을 내게 달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네가 가진 이러한 것들에 만족하라"고 말씀하지만 "재물"은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붙잡으라. Rem, rem, quocunque mode rem─ 즉 돈, 돈,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돈을 붙잡으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네가 하는 모든 거래에 있어서 속이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라. 정직하고 공평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재물"은 "만일 네가 필요하다면 네 아버지도 속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비를 베풀라"고 말씀하시지만, "재물"은 "네 자신을 주장하라. 내세우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아무 것도 유의하지 말라"고 말씀하시지만, "재물"은 "모든 것에 유의하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하시지만, "재물"은 "세상 사람들처럼 그 날을 사용하라."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재물"의 명령하는 바는 일치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둘을 섬길 수 없다. "하나님과 바알 사이를 머뭇거리지 말고 내가 섬길 자를 오늘 선택하도록"하라. 그리고 너의 선택에 의해 거하도록 하자.
------
땅(세상)의 염려와 하늘의 염려(도우심)(마 6:25-34)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보물"과 그 마음이 "세상"에 있다는 나쁜 징조인 바, 이 세상의 사물들에 관하여 불안하고 괴로워하며 믿지 못하여 염려하는 죄보다 더욱 자세하고 진지하게 그의 제자들에게 경고하고, 또 더욱 다양한 논증으로서 경계시켰던 죄는 거의 없다. 그러므로 그는 자세하게 그 죄를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는,
Ⅰ. 규정된 금지가 있다.
이 세상의 일들에 관해 "염려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주 예수님의 권고와 명령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는 우리의 율법 수여자와 우리 마음의 지배자로서 이것을 말씀하시며, 우리의 위로자와 우리의 즐거움의 조력자로 말씀하신다.
그가 말씀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것이다. 즉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네 목숨을 위하여, 네 몸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25절).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하지 말라"(31절). "염려하지 말라").
외식과 마찬가지로 세상적인 염려에 대해 세 번씩이나 반복하고 있으며, 이것은 공연한 반복(중언부언)이 아니다. 동일한 취지에서 "교훈에 교훈을," 점층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염려는 "우리를 쉽사리 공격하는 죄"이다. 이것은 염려 없이 사는 것이 그리스도를 얼마나 즐겁게 하며, 또 우리가 얼마나 깊이 관심해야 할 일인가를 나타낸다.
세상에 관한 염려로 자신들의 마음을 나누거나 부숴뜨려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제자들에게 대한 주 예수님의 반복된 명령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사물들에 관한 "보살핌"도 있는데 그것은 정당한 의무이기도 하며, 덕스러운 여인이 해야 하는 것으로 추천되고 있다(잠 27:23). 이 단어는 교회에 대한 바울의 염려나 영혼의 상태에 대한 디모데의 염려에 사용되고 있다(고후 11:28; 빌 2:20).
그러나 여기에서 금지되고 있는 "염려"는,
1. 불안하게 하고 고통을 주는 "염려"이다.
따라서 마음을 이리저리로 분주하게 재촉하며 불안 속에서 망설이게 한다.
또한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의 즐거움을 혼란시키고 그 안에 있는 우리의 소망을 좌절케 하며, 잠을 깨우며 우리 자신과 친구의 기쁨,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쁨을 방해한다.
2. 불신적이고 믿지 못하는 "염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속한 자를 위하여 선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생명"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 즉 양식과 덮개를 마련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맛좋은 진미가 아니라 필요한 것을 주신다고 하셨다. 그는 결코 "그들은 진수성찬을 먹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정녕 그들은 먹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장차 올 때를 위한 과도한 염려나 그러한 양식의 결핍에 대한 두려움은 이러한 양속에 대한 불신과 신적 섭리의 지혜와 선함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다. 또한 그것은 악한 것이기도 하다.
현재의 생존에 관하여 우리는 그것을 얻는 데 있어서 정당한 수단을 사용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시험하게 된다.
우리는 부르심에 부지런해야 하며, 우리가 가진 용돈을 배당함에 있어서 현명해야 하며, 또한 "일용한 양식"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또한 만일 그 밖의 모든 수단이 실패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줄 수 있는 자들의 구원을 요구할 수 있고 요구해야만 한다. "빌어 멀자니 부끄럽구나"(눅 16:3)라고 말했던 사람은 "부수러기로 배불리려는 사람"(21절)과 마찬가지로 최선의 사람은 못되었다.
그러나 장래에 대해서는 우리는 "우리의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때에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어떻게 줄 것인가를 아시는 하나님께 대한 질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편안히 안주하게 하자! 은혜스러운 태평은 세상의 수고와는 반대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잠과 같다(시 127:2). 여기에 있는 주의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네 목숨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목숨은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최대 관심사이다. "그는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을 그의 목숨을 위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
① 네 목숨의 의 "연장"에 관해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께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목숨을 "연장시키거나 단축시키도록" 말씀드리라. "내 때는 네 손에 있다." 그것들은 "선한손 안에 있다."
② 이 목숨의 "평안"에 관해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께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이생을 쓰라리게 하거나 달콤하게 하시도록 말씀드리라.
우리는 이 목숨의 필연적인 양식, 즉 "음식"과 "옷"에 관하여 염려하지 말자. 하나님은 이것을 약속하였으며, 따라서 우리는 더욱 확신 있게 기대할 수 있다.
 "무엇을 먹을까?"라고 말하지 말라. 이것은 안절부절 못하거나 거의 실망하는 사람이하는 말이다. 비록 많은 선한 사람들이 적은 것을 기대하지만, 그러나 현재의 양식은 적게나마 주어진다.
(2) "내일," 즉 앞으로 오는 미래를 위해 "염려하지 말라."
다음 해에 어떻게 살 것인가, 늙었을 때 어떻게 살 것인가, 뒤에 남겨둘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 우리는 내일에 대해 "자만"해서도 안 되지만 내일이나 내일의 사건을 위해 "염려"해서도 안 된다.
Ⅱ. 이 금지를 강조하는 이유와 논의.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그리스도의 명령은 실상 우리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는 우리의 영혼의 평안과도 무관하게도 불안과 불신에서 오는 염려라고 하는 이 어리석은 죄를 억제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죄에 얼마나 관심이 깊으며, 그의 "자비를 바라는 자들"을 그가 얼마나 "기뻐하시는"가를 보여 주기 위하여 그 명령은 더욱 강력한 논의로 뒷받침되고 있다.
만일 지혜가 우리를 지배하기만 한다면 정녕 우리는 이 가시에서 해방될 것이다.
근심스러운 생각을 없이하고 제거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우리들에게 "위로하는" 생각을 제시함으로 위로로 채워지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한 염려를 단념하거나 그것을 우리 자신이 부끄럽게 여기기 위해 우리의 마음으로 애쓰는 것은 값있는 수고일 것이다. 그런 염려는 올바른 지혜를 가지면 약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단지 능동적인 신앙에 의해서이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1.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25절).
그렇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와 같이 예수님은 현재 일에 참된 가치를 두려고 했던 자들에게 말씀하시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들을 만드셨고 공급하시며 그것들로 우리를 부양하시기 때문이다. 현실이 스스로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의 할 것은,
(1) 우리의 "목숨"은 우리의 "생계"보다 더 큰 축복이라는 사실이다.
목숨이 생계 없이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목숨이나 몸보다 못한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 음식이나 옷은 장식이나 쾌락을 위한 것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것에 대해 염려하기 쉽기 때문이다.
음식이나 옷은 목숨을 위한 것이며 그 "목적"은 "수단"보다 더 고상하고 탁월하다. 맛있는 음식이나 화려한 옷은 "땅"에서 비롯되지만, 목숨은 "하나님의 숨"에서 비롯된다.
목숨은 "사람들의 등불"이다. 음식은 그 등불을 밝히게 하는 "기름"이다. 그러므로 부귀와 빈곤의 차이는 아주 하찮은 것이다. 왜냐하면 가장 중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그들이 똑같은 수준에서 있으며, 단지 하찮은 문제에 있어서만 서로 다를 뿐이기 때문이다.
(2) 이것은 우리에게 "음식"과 "옷"을 위해 하나님을 신뢰할 것과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들에 관한 복잡한 모든 염려에서 안심할 것을 격려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목숨과 몸을 주셨다. 그것은 능력의 행동이었고 은혜의 행동이었으며 우리의 염려 없이 행해졌다. 그것을 행하셨던 그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못할 것인가?─그가 못할 것이 무엇인가?
만일 우리가 몸이나 그 목숨보다 더 나은 우리의 영혼과 영원성에 관해 염려를 한다면 우리는 보다 못한 음식과 옷을 우리에게 마련해 줄 것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우리의 목숨을 유지시키셨다. 그는 우리를 보호하셨고 생존케 하셨다. 우리가 직면한 악에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는 자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좋은 것"으로 공급해 주실 것이다.
만일 그가 우리를 죽이거나 굶주리게 하시려고 했다면 우리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 자주 "우리에 관한 책임을 그의 천사들에게 부여하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2.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여기에는 섭리에 의거한 기능을 따라서 보다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에서 취한 논의가 있다. 타락한 인간은 "공중의 새"들에게 공부를 위해 보내어졌으며, 그 새들이 인간을 "가르쳐야만"했다! (욥 12:7, 8)
(1) "공중의 새"를 눈여겨 보라.
그리고 "음식"을 위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우라(26절). 그리고 "무엇을 먹을까" 불안해하지 말라.
① 그들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를 살펴 보라.
그들을 눈여겨보고 교훈을 받으라. 새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그것들은 수 없이 많으며 몹시 굶주리는 새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편리한 음식으로 부양되고 있다.
겨울에도 먹을 것이 없어 죽는 새는 거의 없다. 그들을 먹일 양식은 해마다 모자라지 않는다. 새는 사람에게 봉사를 거의 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의 배려나 염려를 받지도 않는다. 사람은 종종 그것들을 잡아먹기는 하지만 기르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것들이 어떻게 길러지는가를 알지 못하며, 그것들 중에 어떤 것은 가장 악천후에 가장 잘 길러진다고 한다.
"그것들을 기르시는 분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이시다." 그는 네가 잘 길들인 짐승을 아는 것보다 더 "산의 모든 야생 조류들을 아신다"(시 50:11). 참새가 곡식을 먹기 위해 땅에 앉는 것은 모든 보잘 것 없는 피조물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특별히 유의할 것은 이 새들은 그들 자신의 어떤 염려나 계획 없이 길러진다는 사실이다. "그것들은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개미나 벌은 실로 그렇게 하며, 그것들은 지혜와 근면의 실예로서 우리에게 제시된다. 그러나 공중의 새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들 스스로가 미래를 위해 양식을 마련하지 않으며 날마다 먹을 것이 시시때때로 공급된다. 그들의 "눈"은 "모든 육체를 위해 음식을 마련하시는" 위대하고 선한 집주인이신 "하나님을 호위한다"(문안드린다).
② 하나님을 믿는 데 있어서 너희의 격려를 위해 이것을 활용하라.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그렇다. 확실히 너희는 그러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늘의 "상속인"은 하늘의 "새들"보다 더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보다 더 고상하고 탁월한 존재이며 신앙에 의해 그들은 더 높인 날아다닌다. 그들은 "하늘의 새들보다" 더 나은 특성과 교육을 가지고 있으며 "보다 현명"하다(욥 35:11).
비록 이 세상의 자녀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알지 못한다면 학과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 만큼도 지혜롭지 못할 것이다(렘 8:7). 그것들은 열린 창공을 날아다니지만 너는 하나님께 더욱 친근하고 가까이 가는 것이다.
그분은 그들을 지으신 자시요, 주님이시요, 소유자이시요, 주인이시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이외에 그는 너희의 아버지이시며, 그의 견지에서 "너희는 많은 새들보다 더 가치가 있다." 너는 그의 자녀요 장지이다. 그런데 자기의 새를 먹이시는 분은 정녕 그의 어린아이들을 굶기시지 않을 것이다. 새들은 너희 아버지의 섭리를 믿는다. 그런데 너희는 믿지 않으려는가? 섭리를 믿기 때문에 새들은 내일을 위해 염려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새들은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영위한다. 새들은 "가지에서 노래를 부른다"(시 104:12). 또한 온힘을 다하여 그들의 창조자를 찬미한다.
만일 우리가 믿음에 의하여 새들과 같이 내일에 대해 염려를 갖지 않았다면 우리는 새들과 길이 즐겁게 노래 불러야 한다. 왜냐하면 어느 것보다 더 우리의 기쁨을 손상케 하며 우리의 찬미를 침묵케 하며 우리의 즐거움을 좌절시키는 것은 세상적인 염려이기 때문이다.
(2) "백합화"를 눈여겨 보라.
그리고 "옷"을 위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우라.
"우리가 무엇을 입을까?"라는 것은 우리의 염려의 또 다른 부분이다. 무엇으로 우리를 가릴까, 무엇으로 따뜻하게 할까? 그밖에도 많이 있다. 위대하고 아름답게 보이기 위하여 무엇으로 꾸밀까? 우리는 옷을 다양하고 맵시 있게 입으려고 많은 염려를 하기 때문에 일용할 양식만큼 종종 이 염려가 생각되고 있다.
그런데 이 염려를 덜기 위하여 "들의 백합화를 생각"하도록 하자. 그것들을 "눈여겨 볼 뿐만" 아니라(모든 눈이 즐거움으로 그렇게 한다) 그것들을 "생각하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만일 우리가 생각하기만 한다면 우리가 매일 볼 수 있는 것에서 배울 수 있는 많은 좋은 것이 있다(잠 6:6; 24:32).
① 백합화는 얼마나 "연약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
그것들은 한낮 "들풀"에 지나지 않는다. 백합화는 비록 그 색깔에 의해 구별되기는 하지만 역시 "풀"에 불과하다. 따라서 "모든 육체는 풀과 같다."
비록 어떤 사람은 몸과 마음의 타고난 재능에 있어서 백합과 같으며, 많은 칭찬을 받지만 여전히 그것들은 풀이다. 다시 말하면 본질과 구조에 있어서 풀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과 동일한 수준에 위치한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다"(벧전 1:24). 이 풀은 "오늘 있다가 내일은 아궁이에 던짐을 받는다." 얼마 있으면 "우리를 알고 있는" 장소는 "우리를 더 이상 알지" 못할 것이다. 무덤은 우리가 장차 던지우게 될 아궁이 이며, 우리는 거기에서 불 속의 풀과 같이 소멸될 것이다(시 49:14).
이것은 우리가 무엇을 입을까?라고 내일을 위해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나타내고 있다. 왜냐하면 내일 우리가 수의(시체에 입히는 옷)를 입게 될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② 백합화는 얼마나 "걱정을 하지 않는가"를 생각해 보라.
 "그것들은"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옷을 얻기 위하여 "수고하지 않는다." 종들처럼 제복을 얻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여자들이 하는 것처럼 옷을 만들기 위해 "길쌈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이 때문에 이 세상의 적당한 직무를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라는 것이 아니다. "손으로 솜뭉치를 들고 손가락으로 가락을 잡고 베로 옷을 지어 파는 것'은 덕스러운 여자의 미덕이다(잠 31:19, 24). 게으름은 그를 "신뢰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시험한다."
그러나 하등적인 피조물을 위해 그들이 수고하지 않아도 양식을 마련하시는 그가 우리의 의무로 삼았던 우리의 수고를 축복함으로써 우리를 위해 더욱 양식을 마련해 주실 것이다. 만일 우리가 병 때문에 "수고나 길쌈"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으로 공급하실 수 있다.
③ 백합화는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가를 생각해 보라.
 "어떻게 자라는가," "무엇으로부터 자라는가"를 생각해 보라. 백합화나 튤립의 뿌리는 다른 구근(球根)과 같이 겨울에는 땅 속에 묻히지만 봄이 돌아오면 그 뿌리는 점차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합화와 같이" 자라게 될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약속되고 있다(호 14:5).
또 그들이 무엇을 향해 "자라나는가"를 생각해 보라. 얼마간은 눈에 띄지 않다가도 백합화는 매우 화려하고 피어나기 때문에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으니라."
솔로몬의 성장(盛裝)은 매우 훌륭하고 우아하였다. 여러 왕과 방백들의 특별한 보물을 헌납 받는 솔로몬은 최고의 옷으로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었다. 특히 전성기에는 그의 영광이 극도에 달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를 가장 아름다운 옷으로 입힌다고 할지라도 백합화의 아름다움에는 미치지 못하며, 튤립의 화단은 그를 무색케 한다. 그러므로 백합화에 의해 압도되었던 솔로몬의 "영광"보다 아무 것에 의해서도 압도되지 않았던 솔로몬의 "지혜"(우리가 있는 곳에서 의무를 행하는 지혜)를 열망하도록 하자. 지식과 덕이 사람의 완전성이니, 아름다움이나 더욱이 훌륭한 옷은 인간을 완성시키지 못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에서 "들풀을 입히신다"고 말해진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피조물들의 모든 탁월성은 그것들의 샘이요,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온다. 말에게 힘을 부여하시고 백합화에 아름다움을 주시는 분은 바로 그분이시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그대로 우리에게 나타나 있다.
④ 이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얼마나 교훈적인가를 생각해 보라(30절).
첫째, "좋은 옷"에 관하여.
이것은 우리에게 전혀 그것을 위해 염려하지 말 것과 그것을 탐하지 말 것과 그것에 대해 자만하지 말 것과 옷 입는 것을 장심품으로 삼지 말 것을 가르치고 있다. 결국 백합화는 이것에 대한 염려에 있어서 우리보다 나은 것이다.
우리는 그것들이 입는 것만큼 아름답게 치장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과 더불어 경쟁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의 치장은 곧 쇠퇴할 것이며 우리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것들은 "오늘 시들고" 내일은 쓰레기처럼 "아궁이에 던짐을 받을 것이다."
우리가 자랑하는 옷은 닳아 헤어지며 그 광택은 곧 없어지며 그 색깔은 바래지며 그 모양은 낡은 것이 되며 잠시 후에 그 옷은 헤어지게 될 것이다. 사람은 그의 모든 화려함에 있어서 이와 같으며(사 40:6, 7), 특히 부자는 더욱 그러하다(약 1:10).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둘째, "필요한 옷"에 관하여. 이것은 그것에 대한 염려를 하나님께 던질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여호와 이레(여호와는 준비하신다, 배려하신다) 백합화를 입히시는 분에게 너희가 입을 것을 마련해 주실 것이라는 신뢰를 두라.
그가 이러한 훌륭한 옷을 풀에게 주신다고 하면 하물며 그 자신의 자녀에게 어울리는 옷을 주시지 않겠는가! 그들을 따뜻하게 할 옷들을 "남풍으로 하여 땅이 고요할 때" 뿐만 아니라 "북풍으로 하여 그가 그것들을 동요시킬 때"도 주실 것이다(욥 37:17).
그는 더욱 너희를 입히실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보다 고상한 피조물이요 보다 탁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그와 같이 수명이 짧은 들풀을 입히신다면 하물며 불멸을 위해 만들어진 너희를 더욱 입히시지 않으랴! 니느웨의 자손들이라 할지라도 박넝쿨보다 더 낫다(욘 4:10, 11). 하물며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시온의 아들들이랴 ! 그가 그들에게 부여한 칭호, 즉 "믿음이 적은 자들아"에 대해 살펴 보라.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첫째, 비록 그것이 연약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참된 신앙에 대한 격려로 간주될 수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신적인 염려와 적당한 공급의 약속에 대한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위대한 신앙은 칭찬 받게 될 것이며 위대한 일들을 산출할 것이지만, 적은 신앙도 거절당하지 않고 음식과 의복을 공급받게 될 것이다. "건전한" 신자들은 비록 그들이 "강한"신자는 아니라 할지라도 온갖 공급을 받을 것이다. 가정에 있는 어린 아기들은 성장한 자들처럼 먹여지고 옷 입혀질 것이며, 또한 특별한 염려와 보살핌으로 그렇게 될 것이다.
나는 어린아이와 마른나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사 56:3, 5). 왜냐하면 비록 "가난하고 궁핍하다고 할지라도 주님은 너를 생각하시기" 때문이다.
둘째, "믿음이 적은 자들아"는 그것이 참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연약한 신앙에 대한 비난이다(마 14:31). 그것은 우리의 모든 지나친 염려와 생각의 근저에 있는 것을 나타낸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의 연약성과 우리 안에 있는 불신앙의 잔여물에 기인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보다 더 신앙을 가진다면 덜 염려하게 될 것이다.
셋째, 그러므로 "너희 중에 누가," 너희들 중에 가장 지혜로운 자나 가장 강한 자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27절)
"그 키"를 어떤 사람은 "그 나이"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한 규빗의 단위는 키를 상징하고 있으며, 가장 긴 생애도 손 넓이에 지나지 않는다 했다(시 39:5).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보자.
(1) 우리가 현재의 키에 도달한 것은 우리 자신의 염려나 생각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
손 넓이만큼의 어린 아기는 육척의 성인으로 자라났다. 그런데 그 누가 이 키에 한 규빗이라도 더 하겠는가? 그 자신의 예상이나 계획에 의해 할 수 없다.
사람은 그가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에 의해 어떻게 자랐는가를 알지 못한다. 이제 우리의 몸을 만들고 그들을 이러한 크기로 만드신 그분은 정녕 그들의 쓸 것과 먹을 것을 위해 염려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적인 힘과 키의 증가에서 인정되며 필요한 모든 양식을 위해 신뢰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가 몸을 위해 마음을 둔다는 사실을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자라나는 시기는 생각이 없고 염려가 없는 시기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라고 있다. 우리에게 이와 같은 배려로 기르시는 그가 어찌 우리의 모든 것을 준비하시지 않겠는가?
(2) 우리는 자신이 원한다고 할지라도 현재 우리의 키를 변경시킬 수 없다.
낮은 키를 가진 사람이 키를 더하기 위해 그 자신을 어지럽게 하거나 잠을 깨거나 그의 머리를 때리거나 또는 계속적으로 어떻게 하면 한 자라도 더 크게 할 수 있는가를 염려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우스운 일인가! 결국 그는 자신이 그것을 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며 그러므로 현재의 그대로에 만족하고 인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의 키는 모두가 일정하지 않으며 서로의 키가 차이 있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못되며 크게 생각할 것도 못된다. 우리가 우리의 육체적인 키에 관련하여 생각해 본 것처럼 역시 우리의 세상 재물에 대해서도 그런 생각을 해야 한다.
① 우리는 자신의 키를 한 치라도 더하려고 욕심내는 것에 못지 않게 이 세상 부귀의 풍성함에 욕심을 내어서는 안 된다.
조금씩 자라는 것으로 충분하다. 갑자기 한치가 커지면 그 사람은 주체스럽고 부담스럽게 될 따름이다.
② 우리는 우리의 키에 만족하는 것처럼 우리의 재산에 대해 만족해야 한다.
우리는 편리한 것을 불편한 것과 비교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불가피한 일을 쾌히 행해야만 한다. 개선될 수 없는 것은 최선으로 삼아져야 한다. 우리는 섭리의 처분을 수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치 삭개오가 나무 위로 올라가 자신의 키를 돋운 것처럼 할 수 있는 데까지 우리의 불편함을 잠자코 받아들여 그것들에 순응하며 자신을 돋우어 불편을 덜어야만 할 것이다.
4.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32절).
세상에 관한 염려는 "이방인적인" 죄이며, "기독자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방인들은 이러한 일들을 구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나은 것들"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 대해 열심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나은 세상에 대해서는 낮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러한 것들을 염려와 근심으로 갈구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 없이 이 세상에 사는" 자들이며 그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우상을 경외하고 예배를 드리지만 구원과 양식을 위해 그들을 신뢰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며 따라서 그들은 염려로 가득차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자에게 있어서는 수치스러운 일이다. 기독자는 보다 더 고상한 원리 위에 세워져 있으며, 또한 섭리자가 계신다는 것과 또 현재의 생명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약속이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을 신뢰하고 세상을 멸시하는 것을 가르치며, 그래야 할 이유를 가르쳐 주고 있는 그런 신앙을 공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자가 이방인들이 행하는 것처럼 행하고 자신들의 머리와 마음을 이러한 것들로 채우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5.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32절).
즉 이러한 필수적인 것들, 다시 말하면 음식과 옷이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 그는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의 필요성을 아신다.
비록 그는 하늘에 있지만 땅에 있는 자녀들의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를 주시하신다. "내가 네 궁핍을 아노라"(계 2:9).
너희는 만일 이러한 좋은 친구가 너희의 궁핍과 곤란을 알기만 한다면 곧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너희의 하나님은 그들을 아신다. 또한 그는 너희를 사랑하시며 긍휼히 여기시는 너희의 아버지이시며 너희를 도우려고 하신다.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는 너희의 필요를 공급할 필요한 자금(수단)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모든 불안한 생각과 염려를 버리라. 네 아버지에게 가라. 그리고 그에게 말씀드려라. "그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 그는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요 21:5)고 말씀하신다. 네가 가지고 있는가의 여부를 그에게 고하라. 그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는 그것을 우리로부터 아시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개할 때에는 우리의 공급을 위해 그의 지혜와 능력, 선하심에 기꺼이 임하도록 하자. 그러므로 우리는 무거운 짐을 하나님께 던짐으로써 그것에서 편안함을 얻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를 위해 염려하시는 분은 바로 그이시기 때문이다(벧전 5:7). 우리가 야단법석을 떨어야 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그가 염려하신다면 왜 우리가 염려해야만 하는가?
6.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33절). 여기에 "염려"의 죄에 대한 이중적인 논법이 있다. 네 목숨, 즉 네 몸의 목숨을 위해 "염려하지 말라." 왜냐하면,
(1) 너희는 너희의 영원한 목숨, 영원한 목숨에 대해 염려해야 할 보다 크고 나은 일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필요한 것"으로서(눅 10:42) 너희는 그것에 대해 염려해야 하며 또한 그것은 일반적으로 세상적인 염려가 마음에 가득차 있는 사람들에게서 무시되고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우리 자신의 구원을 성취하는 데 보다 더 유의를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즐겁게 하거나 세상에 있는 재산을 성취하려는 것에는 덜 염려를 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의 영혼에 대한 염려야말로 세상을 위한 염려에 대해 가장 효과적인 치료제이다.
(2) 너희는 이 세상의 필수품을 얻는 데 있어서 그것들에 대해 안달하고 염려하고 초조해 하는 것보다 더 확실하고 용이하며 안전하며 간명한 방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방법이란 곧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고," 자진하여 종교를 네 임무로 삼는 것이다. 이것은 굶게 만드는 방법이라고만 하지 말라. 아니다! 이 방법이야말로 땅에서도 잘 공급받는 방법이다. 2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① 요구된 큰 의무.
그것은 우리의 모든 의무의 총합이요 본질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신앙을 너희의 최대의 주요한 관심사로 생각하라."
우리가 할 일을 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바라고 추구하고 목표로 삼는 것이다. 이 단어는 그 속에 새 계약의 구성에 대한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비록 우리가 도달되지 못하고" 여러 많은 일들에서 실패하고 미치지 못한다 할지라도 성실한 추구(신중한 관심과 진지한 갈구)는 받아들여진다. 여기에서 살펴볼 것은,
첫째, 이 찾는 것의 대상(목적)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이다.
우리는 하늘 나라를 우리의 목표로, 거룩한 성을 우리의 방법으로 삼고 유의해야 한다. "은혜와 영광의 나라의 위로를 너희의 더 없는 행복으로 구하라. 하늘나라를 목표로 삼으라. 그것을 향하여 돌진하라. 그것을 확실케 하려고 노력하라. 이 영광과 영예, 불멸을 추구하라. 땅과 땅의 즐거움에 앞서 하늘 나라와 그 축복을 선택하라."
우리가 그것을 하늘 나라로 만들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종교를 경멸해서는 안 된다. 이 나라의 "행복"을 가지고 그 "그 의"를 추구해야만 한다. 그 의는 "하나님의 의," 즉 그가 우리 "인에" 또한 "우리에 의해"역사 되기를 요구하는 "의"로서, 이와 같은 의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의 의를 능가한다. 우리는 "화평함과 거룩함을 쫓아야"한다(히 12:14).
둘째, 찾는 순서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너희 자신의 영혼과 다른 세상을 위한 염려가 다른 모든 염려에 대신하도록 하라. 이 세상의 목숨에 대한 모든 관심사를 장차 올 생명의 것에 예속시키도록 하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들보다 그리스도의 일들을 더 추구해야 한다. 만일 그들이 이전에 경쟁을 했다면, 우리는 어디에 우선권을 주려고 했는가를 기억해야 한다. "이 일들을 먼저 구하라. 너의 날에 먼저 구하라. 청춘의 아침을 하나님께 드려라. 지혜는 일찌기 추구되어야 한다. 종교적이 되는 것은 때를 맞추어 시작하는 것이 좋다. 먼저 이것을 매일 구하라. 하나님에 대해 눈를 떠라." 가장 필요한 것을 먼저 행하는 것을 우리의 원리로 삼으라. 그로 하여금 첫 번(the First)이 되시게 하고 첫번을 가지시도록 하라.
② 부가된 은혜스러운 약속. "이 모든 것," 즉 생활의 필수품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더 많이 주어지게 될"것이다. 이와 같이 그것은 여분으로 있는 것이다. 너희는 열심히 찾은 것, 즉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찾게 될 것이다. 이 이외에도 너희는 덤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은 마치 물건을 사는 자가 덤으로(into bargain) 주어진 종이와 포장 끈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경건은 금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8), 솔로몬은 지혜를 구하였더니 그것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도 부가되었다(대하 1:11, 12). 이 세상에서 편안히 먹을 것을 얻게 되는 최상의 방법은 다른 세계에 대해 전념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이 진리를 굳건히 믿기만 한다면, 오 우리의 마음과 생활에 얼마나 축복된 변화를 일으킬 것인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는 것은 그 일을 올바른 목적을 가지고 시작한 것이 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확신케 하려고 열심히 노력한다면 여호와 이레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다고 여기시는 것이나 우리가 원하지 않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더욱 많이 마련해 주실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목표인 "우리 기업의 분량"을 위해 그를 신뢰하였는가? 또는 그것에의 과정에서 "우리의 컵의 분량"을 위해 그를 믿지 않을 것인가?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결국 가나안으로 인도되었을 뿐만 아니라 광야를 통해 떠맡겨진 자기들의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오, 우리가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들에 대해 더 염려한다면 보이는 일시적인 것에 대해 덜 염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또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창 45:20, 23).
7.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34절).
우리는 미래의 사건에 대해 지나치게 동요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매일과 같이 그 자신의 염려와 고통의 무거운 짐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교훈 되고 있다.
(1) 내일을 위해 "염려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만일 궁핍과 고생이 한 날과 더불어 새로워진다면 이와 같이 새로워진 도움과 준비가 있을 것이다. "긍휼"은 "아침마다 새롭다"(애 3:22, 23).
성도는 "매일 정수대로(스 3:4) 아침마다 그들의 팔이 되시며 신선한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시는 친구를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그는 그를 언제나 신뢰하는 자기 백성을 지키신다. 그러므로 그것을 내일의 힘에게 맡기고, 내일의 일꾼이 하게 하고, 내일의 짐꾼이 지도록 하자.
내일과 내일의 일은 우리 없이도 준비될 것이다. 우리는 왜 이미 현명하게 배려된 것을 위해 이와 같이 염려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것은 신중한 예견과 그에 따를 준비를 금지시키는 말이 아니다. 어쩌면 결코 닥치지도 않거나 닥치더라도 쉽사리 견딜 수 있을 일에 대한 곤란이나 역경, 또는 그 피해를 미리 생각하여 안달하고 불안에 떠는 것을 금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의미는, 현재의 의무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자," 그리고는 "하나님께 결과를 일임시키자," " 한날의 일을 그 날에 하자," 그리고는 "내일로 하여금 그에 따르는 일을 가져오도록 하자"는 것이다.
(2) 내일을 위한 염려는 부유케 되려는 자들이 빠지는 "어리석고 해를 끼치는 정욕들" 중의 하나이며, 그들이 자신을 찌르는 "많은 근심들" 중의 하나이다.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오늘은 그것에 수반하는 많은 근심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예견"함으로써 무거운 짐을 "축척"할 필요가 없으며 오늘의 괴로움에 첨가시키기 위해 내일의 괴로움에서부터 혼란을 차용해 올 필요도 없다.
내일의 괴로움이 어떤 것일까, 어떻게 될 것인가는 불확실하며, 그것들이 올 때 염려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다른 날에 속한 염려와 근심(이것은 장차 그것들이 올 때 결코 가벼워지지는 않을 것이다)으로 오늘 스스로 자신에 대해 염려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섭리하시는 분이 조금씩 견디라고 현명하게 명령한 것을 단번에 끌어내리려고 하지 말자. 이 모든 사실의 결론은, 주님의 제자들은 그들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며, 그들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하나님이 그들에게 허락하신 고난의 결과보다도 자기들이 생각한 고난 때문에 생을 더 어둡고 불쾌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주님 뜻이요. 명령이라는 것이다.
일상적인 기도에 의해 우리는 매일의 고통을 참을 수 있는 능력을 조달할 수 있으며, 그것들에 수반되는 시험에 대해 우리를 무장시킬 수 있으며, 그때에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것이다.

============

===호크마==

..마태복음 6장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ㅇ사람에게 보이려고 - 이 구절은 1-18절까지의 서론에 해당된다. 이 단락에는 그 당시 유대인들이 지켜오던 세 가지 종교적 의무, 즉 의(義, 2-4절), 기도(5-15절), 그리고 금식(16-18절) 등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이 제시되고있다. 즉 5장에서 예수께서는 율법의 직접적인 내용에 대한 올바른 정신과 해석을 설명하시고도 높은 경지의 의(義)를 가르치신 후 이곳에서부터는 율법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은 유전(inheritance)과 관습에 관한 바른 지침 및 그들이 당면할 종교적 위선의 위험성을 계시하고 있는것이다.

특히 예수께서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외식(外飾)적으로 이 같은 종교적 관행을 하고 있음을 비평하며 바로잡고 계신다. 여기서 '보이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아데나이'는 어떤 구체적인 '목적'을 강조하는 제 1부정 과거 수동태를 취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에게 보이려고'란 '그 행동의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사람에게 과시하고, 인정받으려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제시한다. 이처럼 전적으로 인간을 의식하고 그의 판단을 고려하면서 취하는 행동은 항상 위선의 위험성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연약성을 익히 아시고, 또 그것을 능히 극복케 하시는 하나님을 먼저 고려하고 날마다 신전(神前,Coram Deo)의식을 지닐때 인간의 오류와 위선은 최소화 될 수 있다.

ㅇ너희 의를 - 어떤 사본에는 이 말이 '너희 구제를'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 까닭은 아마 '의'란 말이 히브리어로 '체다카'로서 70인역(LXX)에 따르면 간혹 구제를 위한 의를 가리키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신  6:25).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의'를 '구제'란 의미로 직접 변형하여 사용한 적이 없고, 또 다음 절에는 '구제'란 말이 따로 쓰이기 때문에 이를 구제란 말로 사용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따라서 바리새인과 구별되는 '너희'라는 말과 더불어 이 '의'(디카이오쉬넨)는 예수의 제자들이 지켜나가야 할 의로운 생활 방식의 배후에 있는 거룩한 동기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D.A. Carson).

ㅇ행치 않도록 - 의를 행한다고 하는 것은 율법의 요구 사항을 실천하고 율법의 규정에 따라 바른 행위를 함을 가리킨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또 사람들로부터 경건한 자로 인정받기 위해 고의적(故意的)으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만 이를 행하였다. 이에 주께서는 이러한 위선적 행위를 규탄하고 하나님의 실존(현존)을 의식하고 그분이 미구(未久)에 내려주실 온전한 보상만을 기대하며 몸과 마음을 일치시켜 하나님께 진정으로 헌신해야 할 것을 요구하신 것이다.

ㅇ주의하라(프로세케테) - 이는 주로 고대 헬라어에서 종종 발견될 뿐 성경 문학에서는 좀처럼 사용되지 않는 단어로서(LXX, 욥 7:17), 특히 성경에 도입된 이 단어는 '마음'을 뜻하는 '눈'이란 말이 생략된 형태이다. 따라서 이 말의 원의(原意)를 살펴보면 '이것을 항상(생각)하라','오직 이 일에 마음을 집중시키라'는 뜻이 된다. 

ㅇ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 바리새인들은 하나님보다는 사람들의 눈을 더 염려했으며, 또 그들에게서 이미 위대하며 경건하다는 칭찬을 상(賞)으로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사람의 행위 전체를 바라보고 계셨던 하나님께는 받을 상이 없는 것이다.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ㅇ그러므로 - 이 말의 원어 '운'은 여기서 앞 구절에 대한 결과를 말하는 것이아니라 그에 대한 보충적 설명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따라서 이는 '예를 들자면', '이에 대한 구체적 사례를 들자면'의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ㅇ구제할 때에 - 이 어구가 '구제한다면'이라는 조건문으로 기록되었으면 구제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겠으나, 이 어구는 단순히 직설적으로 '구제할때에'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주께서는 구제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말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구제가 공적(功績)을 쌓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방편 중의 하나로 생각할 정도로 구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구약 외경 토비트 12:8, 9). 어쨌든 여기서는 공적에 대한 신학적 논쟁을 하거나 그들의 구원관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선(善)을 행함에 있어서 과시나 보이기 위해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제시되었다.

ㅇ외식하는 자(호이 휘포크리노마이) - 이는 '가면을 쓰다', '위선적 태도를 취하다', '...인 체하다'는 등의 뜻인 '휘포크리노마이'에서 유래한 말로서 '타인의 흉내를 내는 사람', '배우'등으로 이해된다. 한편 이 용어는 주로 겉과 속이 판이하게 다른 바리새인들의 거짓되고 위선적인 형태와 연관되어 본서에 자주 사용되고 있다(5,16절;7:5;15:7;23:13-15;24:51). 여하튼 '외식'은 타인과 자신을 동시에 속이는 악행으로서 전지(全知)하신 하나님 앞에 반드시 단죄될 것이다(고후 5:10).     

ㅇ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 의와 기도 그리고 금식으로 삼대별(三大別)되는 유대인의 종교적 의무 중에서 아마 '의'의 일부에 속한 이 구제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셨던 것 같다. 그러나 외식자들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는 동기(動機)에서 사람들의 눈에 띄기 쉬운 회당과 거리에서 이러한 종교 의무를 했던 것이다. 실로 그들은 인간의 본분인 하나님께 '오직 영광'(Sola Gratia, 전 12:13;롬 11:36)을 돌리는 데는 전혀 무신경했던 것이다.

ㅇ나팔을 불지 말라 - 이에 대해 많은 주석가들은 예루살렘 성전 내에서 궁핍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성금을 모을때 나팔을 불던 것을 가리킨다고 해석하고 있다(Hill,Bonnard). 그리고 칼빈(Calvin)은 구제자들이 성금을 내면서 이 사실을 알리고자 나팔을 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어떤 학자는 헌금궤(눅 21:1)의 모양이 뿔피리 모양으로 생긴 데에 이 말의 근원이 있다고 주장한다(Edersheim, Jeremias).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이를 뒷받침할만한 확정적 자료가 없다는 점에서 그렇게 단정 지을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실제로 나팔을 부는 것을 가리킨다기 보다는 '자랑하지 말라'는 뜻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이와  더불어 '뷔흘러'(A.Buchler, St. Matthew V:1-6)의 다음과 같은 견해를 재고해 보아야 한다. 즉 '공적인 금식 기도는 나팔소리에 의해 선포되었다. 그런 때에는 사람들이  비오기를 탄원하는 기도 등을 길 거리에서 드리곤 하였다(5절).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구제 행위가 자신들의 그러한 금식과 기도의 효과를 한층 더 보장해 준다고 생각했다(Sanhedrin 35a;P. Tannith 2:6). 그리하여 사람들은 구제를 하게 되었는데, 이런 구제 행위가 자기 과시(誇示)적인 행동을 낳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ㅇ상을...받았느니라 - 바리새인들이 원하던 것은 하나님의 상이 아니라 대중의 칭찬이었으므로 그들은 헛된 영광의 상을 이미 받은 것이다. 여기서 '받다'에 해당되는 원어 '아페쿠신'은 상업 용어로서 자주 쓰이는데, 거기서 이 말은 전액을 영수(receipt)했다는 뜻이다.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ㅇ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 왼손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도와주며 이둘은 항상 함께 일한다. 따라서 '왼손이 알지 못하게 하라'는 말은 자신이 베푼 자선을 도무지 기억지말고 의식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즉 그 선행이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듯이 하라는 당부인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한 몇가지 설명을 들자면, (1) 겸손하고 은밀하게 그리고 말없이 주는 것을 상징한다(Chrysostom). (2) 오른손으로 일을 해놓고 왼손으로 그 결과를 거두려고 하지 말라(Luther). (3) 선을 행하고는 그것을 바다에 던지라 고기들은 모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아시리라(동양 격언) 등을 열거할 수 있겠다. 

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ㅇ은밀하게 하라 - 이는 아무도 모르게 하라는 명령이기도 하고 또한, 사람의 상을 기대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ㅇ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 이 어구는 이곳 외에 6절과 18절에 다시 반복된다. 그런데 KJV나 Textus Receptus의 자의적 해석에 의하면 본절과 6절에 '은밀히'와 대구를 이루는 '드러내 놓고'(openly, 엔 토 파네로)란 말이 첨가되어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공개적으로 갚으시리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의역이라고 생각된다. 예수께서는 보상의 내용에 대해서는 그저 침묵하실뿐이다. 여하튼 우리가 우리의 자선을 잊게되면 잊게 되는 만큼 하나님이 주목해 보실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그것을 높이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한 만큼 하나님은 그것을 무시하실 것이다.

ㅇ너의 아버지 - 하나님은 외식하는 자들에게는 은밀한 중에 그 위선의 속깊은 내면을 보고 계시는 심판주로 다가오시기 때문에 매우 두려운 존재로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자기 의(義)를 드러내지 않는 주의 제자들에게는 자신의 선한 행위를 조용하고 따사로은 눈길로 다 하나하나 보시고 기억해 두시는 '아버지'로 다가오실 것이며, 따라서 그 같은 사실 자체가 크나큰 기쁨과 위로가 될 수 있다.

ㅇ갚으시리라(아포도세이 소이) - 직역하면 '그에 합당한 양을 어김없이 되돌려 준다'는 뜻이다. 그런데 주께서는 여기서 하나님이 어떻게 갚아 주실 것인지 또는 그 보상의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언급치 않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들이 계시하고 있는 여러 증거들을 참고할 때 우리는 그 보답이 현세와 내세에서의 지고(至高)한 기쁨과 원숙한 인격의 완성으로 주어질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Broadus).   

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ㅇ기도할 때에 - 기도는 하나님께 자신의 문제를 직접 아뢰는 것으로서 인간으로서는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따라서 이는 구제보다 더 즉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호소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때에'(호탄)란 말이 가정법 현재 시상과 더불어 사용됨으로써 규칙적인 기도가 요구된다는 사실을 넌즈시 비추고 있다(Lenski).

ㅇ외식하는 자 - 외식하는 자는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1) 악하면서도 선을 가장(pretence)하는 유형, 이런 사람은 자신이 남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22:15-18). (2) 자기 만족에 도취하여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속이면서 또 타인을 속이는 유형, 이런 유형의 의식자들은 보통 스스로 경건한 체하지만, 타인을 속이지는 못하고 곧 발각된다(9:1-5). 아마 예수의 책망을 들었던 이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이 유형에 속했던 것 같다. (3) 외식을 하면서도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 스스로 가장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 유형, 이는 가장 완벽한 위선자이다. 따라서 이들은 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그 행위를 보는 모든 사람을 속일 수 있다.

ㅇ되지 말라 - 이는 제자들의 기도를 전제한 표현이다. 즉 예수는 제자들이 의식적인 기도에 빠지지 않도록 여기서 그 허황된 위선에 대해 경계하신 것이다. 특별히 이 '되지 말라'는 말은 강한 의지를 내포하고 있는 미래 시상의 어구로서 이 경고를 받은 이후부터 절대 그 같은 잘못을 범치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ㅇ회당과 큰 거리 어귀 - 이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로서 1차적으로 외식자들이 자신의 경건 생활을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수단으로서 이 장소를 택해서 기도하고 있음을 비난한 내용이다. 대개의 경우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회당에 올라가 기도를 드렸다(눅 18:9-14;행 3:1;10:9). 만약 외출 중에 기도 시간을 맞게 되면 길가에 서서라도 기도하는 열성을 보였다(M.Taanith 2:1, 2). 이렇듯 그들 행위의 처음 의도는 순수했으나 이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외식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다. 즉 기도 시간에 일부러 외출하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기도는 오직 하나님과 자아와의 순결한 만남의 장(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교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명성을 얻고자하는 것은 금을 주고 돌을 사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며 나아가 창조자의 순결한 사랑을 인간의 음흉한 위선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 된다(눅 18:1-4). 이처럼 예수께서는 기도의 장소나 자세 등을 문제 삼아 그들을 책망하였다기 보다는 그들이 기도한 동기와 목적이 불순(impurity)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기도를 통해 진실로 하나님께 호소하는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경건하다는 칭찬을 듣고자 외식적 태도로 장황하게 기도했던 것이다.

ㅇ서서 기도하기를 - 성경에는 기도의 자세가 몇 가지 언급되고 있다. 즉 기도는 엎드려서(민 16:22;단 8:17;계 11:16), 또는 무릎을 꿇고(대하 6:13;눅 22:41;행 9:40), 또는 앉아서(삼하 7:18) 또는 서서(삼상 1:26;막 11:25)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기도의 자세가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려' 한 그들의 헛된 동기(motive)인 것이다.

ㅇ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 외식자들은 관례에 따라기도 시간(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에 맞추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공 장소에 나아가 수려하고 장엄한 언어로 기도한 것 같다. 그렇게해서 사람들의 영광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실 여지(margin)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예수의 가르침을 오해한 사람들 중에는 아예 공적(公的) 기도를 폐지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분명 예수는 모든 공적 기도를 금하지 않았으며 초대 교회는 그것을 오해하지도 않았다(18:19, 20;행 1:24;4:24-30). 실로 공적인 기도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공적인 기도와 사적인 기도의 구분이 기도하는 사람의 동기를 판단하는 좋은 기준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정보다 사람의 칭찬에 더 관심있는사람, 곧 경건보다 경건으로 인한 명성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 사적인 기도는 무시한채 공적인 기도만을 추구할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외식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다음에 이어지는 '골방 기도'이다.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ㅇ네 골방에 들어가 - 골방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 드리던 장소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엘리사의 침실과 비숫한 곳이었던 것 같다(왕하 4:33). 여기서 골방은 바리새인들이 기도의 장소로 선택하였던 '회당과 큰 거리 어귀'와 뚜렷이 대조되고 있다. 한편 '골방'의 원어 '타메이온'은 '자르다'는  뜻의 '템노'와 '청지기'란 뜻의 '타미아스'의 합성어로서 세상 모든 것과 단절하고 오직 하나님과만 내밀(內密)한 대화를 나눌수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단어는 저장실(store room), 내실(inner room), 침실(bed room, 사 26:20)등을 가지고 있다.

ㅇ문을 닫고 - 사 26:20에는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간 숨을지어다'란 말씀이 있는데, 본문은 분명히 이 예언의 말씀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이사야가 이 예언을 베풀 때는 분명 마지막 심판날의 무서운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아마 제자들이 이런 심판날을 두려워하는 심정으로 기도하되, 이를 관습화하기 원하셨던 것같다. 여하튼 자신의 방문을 닫는다는 것은 잠시나마, 오직 자신과 하나님 이외에는 어떠한 제 3자의 개입을 불허(不許)한다는 뜻인 동시에 순결한 영혼의 교제만이 있을 뿐임을 시사한다.

ㅇ은밀한 중에...기도하라...갚으시리라 -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분 앞에 아무런 숨김없이 간구하는 자에게 그 기도의 자리에 함께 하셔서, 모든 것을 듣고 계셨던 그 하나님께서 모두 '갚으실'(4절)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품성을 온전히 반영한 약속이다.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ㅇ이방인과 같이 - 산상수훈에는 이방인이 세 번 언급되고 있는데(5:47;6:32), 본문의 이방인은 두번째의 언급이다. 갈릴리 지방은 이방 지역과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이방인들의 출입이 잦았고 심지어 그들과 섞여 살기도 했다. 따라서  갈릴리 사람들은 이방의 관습에 익숙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해서 예수는 자연적으로 앞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적 행동을 비난함과 아울러 바른신앙 생활을 가르치셨던 것같이 이들 이방인들의 잘못된 종교 관행을 빌어 참된 기도의 자세를 가르치신 것이다. 물론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앞에서는 기도의 장소와 그 동기적 측면이 강조된 것이라면, 본문은 주로 기도의 내용적 측면이 강조되었다 하겠다.

ㅇ중언 부언 - 이 말의 원어는 '밭타로게세테'로서 신약성경에서는 이곳을 제외하고는 쓰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 어원 역시 분명치 않다. 어떤 학자는 말더듬이인 '바투스'란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며(Erasmus), 또 어떤 이는 장황하고 반복적인 시(詩)를 읊는 사람의 이름에서 나왔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최근에는 대부분 이 말이 정확하지도, 그렇다고 명쾌하지도 않은 일종의 의성어(onomatopoeic word)에서 나왔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중언 부언'이란 말은 잡다할 정도로 말을 길게 끌거나 아무 의미없는 말을 거듭 반복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 이방인들은 이와 같은 주문(呪文)과도 같은 내용을 지겹고도 공허하게 계속 반복함으로써 그들의 신(神)을 질리게 만들었다(왕상 18:26, 28)

ㅇ말을 많이 하여야 - 이는 중언 부언하는 기도의 방법이다. 그렇다고 기도를 언제나 짧고 간단하게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주께서도 잡히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에서 온 밤을 지새우며 오랫동안 기도하셨다. 따라서 본문은 장황하고 긴 기도가 믿음의 순수한 표현이 될 수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실로 하나님께 합당한 기도는 기도의 길이에 관계 없이, 그분이 자신의 기도를 듣고 계시며 또한 기쁘게 응답해 주실 것을 믿는 마음으로 간구하는 것이다(사 65:24;히 11:6)     

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ㅇ본받지 말라 - 기도를 길게 하거나 반복하게 되면 기도의 효력이 강화(强化)되어 쉽게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미신적인 생각을 가진 이방인들의 어리석은 신앙관(왕상 18:26-28)에 미혹되어 신앙의 본질을 망각치 말라는 당부이다.

ㅇ구하기 전에...아시느니라 - 이는 기도에 앞서 가져야 할 신앙적 지식을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며, 전지전능하시므로 우리 자신보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더 잘 아시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특히 여기서 '이시느니라'(오이덴)는 말은 긴밀한 관계성 속에서 이뤄지는 직관적 인식을 뜻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이전부터 그 간구하는 자의 삶에 깊이 개입(介入)해 오신 분으로서 그 필요(necessity)를 익히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필요를 모두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오해하여 전혀 간구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과의 인격적 대화를 원하시며 또한 그들이 당신께 대한 깊은 신뢰감을 지니기 원하시기 때문에 그 필요를 구하기를 원하신다(Hill). 그렇기 때문에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이러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많은 기도와 많은 노력을 통해 신에게서 탈취하듯 복(福)과 소원을 앗아옴으로써 그 간구한 바를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ㅇ 너희는 -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잘 알고있는 우리 기도의 영원한 모범이 된 주기도문이 등장한다. 그리고 누가도 주기도문을 기록하고 있는데(눅 11:2-4), 양식(form)적인 면에서 몇가지 상이(difference)점들이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를 두고 복잡한 견해들을 내놓고 있으나 우리는 예수께서 이 기도문을 수차례 반복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과정에서 마태는 그 중의 한 경우를 기록했고, 누가는 또 다른 경우를 기록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고다(Carson). 본문의 '너희'는 이방인들과 대조된 주의 제자를 가리킨다.

ㅇ이렇게 기도하라 - '이렇게'에 해당하는 원어는 '후토스'로서 단지 자구적(字句的)인 답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과 내용 및 그 순서상의 방법에 대한 모범적 제안을 의미한다. 즉 예수께서는 이미 앞에서 경고하신 바, 그릇되고 아무 효과도 기대할 수 없는 이방인들의 기도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올바른 기도의 모범을 제시하고자 하신것이다. 한편 여기서 '기도하라'(프로슈케스데)는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으로서 단회적인 행동이 아닌 지속적(continual) 행동을 염두에 둔 명령이다. 즉 예수께서는 제자듸이 '기도할 때마다' 이러한 모범을 따를 것을 요구하신 것이다.

ㅇ하늘에 계신(호 엔토이스 우라노이스) - 이는 하나님께서 하늘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계시는 분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땅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을 당신의 권능과 지혜로 친히 통치하시며 심판하시는 초월적인 분이심을 강조한 표현이다. 특히 원문서는 복수로 표기된 '하늘들'이라는 말은 하늘이 3충천(天)으로 조성되어 있다고 믿었던 히브리인들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즉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무한성(無限性, 왕상8:27)과 편재성(偏在性, 시 139:8;사 66:1)을 언급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지극히 높은 3충천의 하늘이 분명 하나님의 거처일 것으로 소박하게 믿고 있었다(시 33:14;사57:15;63:15). 따라서 '하늘에 계신'이란 기도의 문두(文頭)는 당신의 사람들로 하여금 전지전능하시며 초연하여 계신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소망과 깊은 신뢰를 안고, 또한 하늘나라가 진정 자신들의 본향(本鄕)임을 인식하고 기도할 것을 바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

ㅇ우리 아버지(파테르 헤몬) - 구약에서는 여호사 하나님을 이렇게 호칭한 적이 별로 없었다. 이사야 선지자같은 경우 이스라엘의 반역은 '자녀들'의 반역으로(사 1:2). 하나님을 버림받은 '고아'와 같은 피조물들이 궁극적으로 의지할 분으로 묘사하여(사 63:16) 간접적이나마 하나님의 '부성'(父性)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되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난것은 예수에게서였다(Jeremias, Prayers, pp. 11ff).  따라서 '우리 아버지'란 호칭은 그리스도로 인한 새 언약의 표시로 이해할 수 있다.  여하튼 기도의 서두에 '우리 아버지'로 묘사된 것은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인지를 가르쳐 준다. 그는 단순히 '존재의 근거'(grounds of being)가 아니라 인격적인 분이시며, 폭군이나 압제자가 아니라 친밀히 자녀를 돌보는 참된 부성을 지닌 유일한 아버지(only father)이시다(엡 3:14, 15). 한편 '우리 아버지'(Ourfather)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우리'라는 복수형태가 주기도문 전체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1) 예수의 제자와 하나님 사이의 독특한 관계성을 정립(定立)시켜 주는 말로서,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무분별하게 모든 사람의 아버지는 아니시다(5:45). (2) 주기도문이 혼자서 드리는 기도의 모범이 아니라, 제자들끼리 서로 교제를 나누며 드리는 기도의 모범(18:19)이 됨을 시사해 준다.  

ㅇ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주기도문의 본론에 해당하는 7개항의 기도 내용 중(앞선 3개항-찬양과 친국 도래 및 하나님의 주권 ; 뒤이은 4개항-개인의 현실문제) 첫번째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십계명의 제1, 3계명과 깊은 연관이 있다(출 20:3,7). 

여기서 먼저 하나님의 이름은 그가 누구인지를 보여준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대로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시며 그가 자신을 계시하시는 대로의 그 자신이시다(출3:14). 따라서 그의 이름에는 거룩하신 인격과 능력과 권위도 함께 한다. 그리고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는 것은 그분의 이름이 거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이름의 가치만큼 거룩하게 대접받게 해 달라는 것이다(레 19:2;겔 36:23;벧전 1:15). 즉 이 세상에는 그분의 이름만큼이나 거룩한 것은 없으므로 그 거룩한 이름이 주의 형상대로 창조함 받았으나 순수성을 상실(loss)해 버린 인간들의 천한 생각과 행동에 의해 경멸받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이다(말 1:6). 실로 간혹 '분리','성별'이라는 의미로 생각되는 '거룩'은 하나의 속성이기보다 '하나님 자신'(What he is)이다. 즉 '거룩'은 하나님의 신성 자체와 관계가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모든 세속과 사악에서 구별되며, 절대무흠(無欠)하신 지존자(至尊者)요, 유일한 예배와 경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사 29:23).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ㅇ나라 -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거룩하시듯이 또한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시고 영원히 통치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Kingdom)란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reign)가 미치는 영역을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더불어 나타났지만 세상 끝날에 비로소 완성되는 이중 구조를 지니고 있다(막 1:15 강해, '하나님 나라의 개념',28:10;눅 21:27, 28;계 21:1-8).

ㅇ임하옵시며 - 사람들이 하나님께 머리숙여 복종하고 또 구원의 종말론적 축복을 미리 누림에 따라 하나님의 구속적 통치가 계속 확장되게 해달라는 기도이며, 그 나라가 완성되게 해달라는 기도이다(고전 16:22;계 11:17;22:20). 한편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위로'(눅 2:25)를 기다렸으며, 메시야가 통치할 다윗 왕국을 대망하였었다. 특히 그들은 회당 예배가 끝날 때마다 고대 아람어 기도인 '콰디쉬'(Qaddish, 성화를 뜻함. 여기에는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소망이 간절히 깃들어 있다)를 암송하기도 했다(Jeremias, Prayers, p.98).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에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나라가 시작되어 그 나라의 완전한 실현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것이다.

ㅇ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 이 말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롬 12:2) 하늘에서 온전히 성취된 것같이 땅에서도 이뤄지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여기서 '뜻'에 해당하는 원어 '델레마'는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들(7:21;12:50)과 구속사에서 어떤 사건을 전개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18:14;26:42)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십자가와 같은 대속적(代贖的) 죽음이 실현되어야 하고, 동시에 절대적 순종과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한편 본문의 '하늘에서'란 하나님과 천사들만이 존재하는 세계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 보다는 두번째의 간구('나라이 임하시옵시며')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통치와 의(義)가 지금 현재 온전히 성취된 상태, 또는 그러한 세계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렇다면 이와 상용되는 '땅에서'란 말은 앞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할 대상(타락한 이 지상과 역사와 인격들 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찌되었든 하나님의 뜻은 현재 '하늘'에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거기에는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은 아직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구현되지 않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메시야 왕국의 왕성을  뜻하는 기도라 할 수 있다.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ㅇ오늘날(세메론) -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한 기도가 끝나고 이제부터는 개인의 신앙과 생활에 실제 필요한 내용들이 기도되고 있다. 그중 첫째가 '양식'(bread)에 관한것이다. 

여기서 '오늘날'이란 '오늘' 또는 '지금'이란 뜻으로서, '매일 매일' 또는 '날마다'라는 의미로만 국한하여 보려 해서는 안 된다. 물론, 문자적으로 보건대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구하는 것은 '그날' 하루의 양식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주기도문은 우리의 필요에 대한 요구이지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기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같은 겸손한 기도는 하루에 한 번씩 급료를 지급받아 생활했기 때문에 만일 며칠을 앓아 눕기라도 하면 그만 굶을수 밖에 없는 1세기의 수많은 노동자들의 불안정한 생활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물질적으로 여유있는 자들에게는 이 기도가 큰 의미를 지니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 벌어 그날 먹어야 하는(from hand to mouth) 자에게는 이 기도야말로 귀중하고 절박한 간구가 아닐 수 없다. 

한편 마태와는 달리 누가는 이를 '날마다'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 본문의 오늘날이란 개념 속에는 '지금'이라는 뜻 외에 '바로 뒤 따르는'(immediately following)라는 뜻이 담겨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종합적으로 이해하면 '앞으로 올날을 위하여 우리의 양식을 오늘날 우리에게 주옵소서'란 뜻이 된다. [보라. 광야생활 중의 이스라엘 백상에게 만나를 주실 때를 떠 올려보라!!...안식일에는 그날 아침에는 만나(생명의 일용양식...해가뜨면 스러졌다)를 거두러 나가지 않도록 그 전날에 일용양식 기준으로 [썩지 않는] 이틀치를 미리 챙겨두도록 풍성하고 넉넉하게 주고 계셨음을 명심하라...이는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좋은 땅인] 가나안 정착 후 안식년을 맞이하는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하심으로써 안식년 직전 해에는 2년치를 거둘 수 있게 약속하셨고, 일곱 안식년 다음해인 희년을 맞게 되는 경우에는, 희년 1년전에 3년치 양식을 거둘 수 있도록 더 풍성히 주고 계셨다!!]

ㅇ일용할(에피우시온) - 이 단어 역시 그 의미가 좀 애매하며 또한 어원에 대한 해석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 이 단어는 흔히 '내일을 위한', '생존을 위한', '오늘 필요한', '매일 필요한' 등의 뜻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제롬(Jerome)은 이를 라틴어'Superstantialem'(뜻'물질을 초월하는', above material substance)으로 번역하여 그 양식의 영적 측면을 강조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언어학적으로 정당화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뒤이어지는 '앙식'은 실제의 음식물이며, 더 나아가서는 우리 인간이 물질 세계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Luther). 한편 이 말은 전치사 '에피'(...에 대하여)와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에이미'동사의 변형으로 합성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는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또는 '매일의 생존에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등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ㅇ양식을 주옵시고 - 여기서 '양식'이란 모든 음식물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 용어이다(잠 30:8;막 3:20;살후 3:12;약 2:15). 그런데 초대 교부들은 이를 물질적인 의미의 음식이 아니라 성찬이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 단어를 이 같이 비물질적 의미로 해석하는데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그 근거가 확보되지 못했으므로 적절한 견해라고 볼 수 없다. 실로 예수께서는 비록 사소하게 보이는 것이지만 인간 생존(生存)에 가장 필요한 것들인 육(flesh)의 '양식'을 기도하게 하심으로써 그 생존의 기본 원리와 생존의 근본 동인(動因)의 문제를 밝히 드러내셨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것은 하나님께서 앙식을 '주신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가 일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라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교훈은 예수의 제자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것(6:34)을 전제할 뿐 아니라, 노동으로 우리의 양식을 벌수 있는 능력은 물른 모든 선한 것들이 하나님의 손길로부터 온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신 8:18;고전 4:7;약 1: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은 부(富)가 증가하고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능력에 만족하게 될 때에는 쉽게 망각한다.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ㅇ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 신약성경에서 혼히 죄로 번역되는 원어는 '하마르티아'로서 어떤 목표에 미달(未達)된 것을 뜻한다. 그리고 누가도 이 부분을 '하마르티아'로 기록하고 있다(눅 11:4). 그러나 마태는 이곳을 흔히 빚(debt) 또는 부채(loans)로 번역되는 '오페이레마타'로 기록하였다. 아마 마태의 기록이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담은 것이고, 누가의 것은 2차적으로 해석된 것으로 보인다. 즉 누가는 온유적 의미가 담긴 빚이란 말보다는 그 뜻을 보다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하마르티아'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한편 죄는 하나님께 마땅히 해야할 바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도덕적인 빚으로 볼 수 있다.

ㅇ우리가...사하여 준 것 같이 - 이는 하나님의 사죄의 양(量)과 우리의 사죄의 양을 비교하는 정도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사죄의 사실에 대한 비교이다. 

누가는 이곳을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눅 11:4)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죄와 우리의 사죄 중에 어떤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마태의 기록은 분명히 우리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근거로써 제시되고 있다. 즉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반면에 누가는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여 준다는 점을 강조하고있다. 한편 본문에 대해 혹자(Jeremias)는 '우리가 사하여 주었다'는 뜻인 '아페카멘'을 완료시제로 보지않고 현재완료형으로 보아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이 기회에 용서해 주오니'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 해석보다 용서에 있어서 그 '공적'(deserts)과 '자격'(capacity)을 구분하여 해석한 모울(C.F.D. Moule)의 주장이 더욱 원문에 가까울 것이다. 즉 그는 말하기를 '자신이 하나님께 대하여 지은 죄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일단 깨달은 사람의 눈에는 남들이 자신에게 끼친 해가 상대적으로 극소화되어 나타난다. 반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끼친 해를 과장해서 보는 사람은 또한 자신의 잘못은 극소화하여 보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진정한 회개와 자각은 단순한 후회와는 달리 철저한 자기 부정과 겸손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ㅇ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 야고보는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사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본문의 시험(temptation)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다. 사실 신약성경 여러 곳에는 성도들이 시련이나 역경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기쁘게 여기라고 가르치는 말씀들이 나온다(고전 10:13;약 1:2). 하지만 이러한 시련(testing)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신앙을 연단하여 더 큰 믿음을 낳게 하려는 것으로 본문의 시험(temptation)과는 엄격히 구분된다. 혹 어떤 이들은 '시험'이란 주의 재림 때에 있을 종말론적 환난, 즉 배교(apostacy)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Jeremias, Prayers, pp. 104-7). 그러나 본문의 시험(페이라스모스)란 단어에 어떤 한정사가 첨가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문맥상 본문의 기도가 단지 종말에 국한시켜야만 할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위의 주장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 한편 본문을 허용적 뉘앙스를 지닌 문장으로 이해하여 '(악마에) 의하여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주옵소서'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는 '시험'(temptation)이라는 말이 '타락의 결과를 가져오는 유혹'을 뜻하는 것으로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막 14:38;갈 6:1). 여하튼 이 간구는 분명 시험에 날마다 노출될 수 밖에 없으며, 또한 사악한 악마의 미혹에 쉽게 넘어질수 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깊이 자각한 자만이 드릴 수 있는 기도이다. 실로 우리는 감당할수 없는 시련에 빠져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뿐 아니라(고전 10:13) 그러한 시험에 직면했을 경우라 할지라도 능히 극복케해달라는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한다.

ㅇ다만(알라) - 이는 '그러나', '도리어'라는 뜻의 반의적(反意的)인 접속사로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앞의 간구와 분명히 대조되는 또 하나의 간구(일곱 번째 기도)임을 보여 준다. 즉 이 '알라'라는 접속사는 바로 전의 간구가 소극적이고 피동성이 강한 기도였다는 전제를 깔면서 바로 이어지는 간구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면이 강할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사실 이어지는 간구는 악에 대한 능동적 승리를 기도한 것이다.

ㅇ악(루 포네루) - 이 말은 남성 또는 중성 소유격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중성으로 해석할 경우는 추상명사로서의 악을 가리키고  남성으로 이해할 경우는 악한 자로서의 사단을 가리킨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여러 곳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때 이는 분명히 남성인 것으로 보인다(요 17:15;살후 3:3;요일 2:13, 14).  

ㅇ구하옵소서 - 이는 사단의 공격에서 보호하고 지켜달라는 간구이다(엡 6:16;요일 3:12). 우리는 사단 앞에서는 전혀 대항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로서 그를 이길 수 있는(4:1-11) 주님 만이 우리의 보호자가 될 수 있다.

ㅇ나라와 권세와 영광이...있사옵나이다 아멘 - 고대의 유력한 사본 및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누가 복음에는 나와있지 않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기도의 끝에 반드시 송영(Doxology)이 뒤따랐던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라 후대 기독교회가 주기도문을 완전한 기도문의 형태로 만들기위해 첨가 내지는 삽입한 것 같다. 한편 본문의 송영 자체는 신학적으로 심원하고 문맥상으로 적절하다. 특히 마지막 세 간구들 안에 삼위일체에 대한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송영이 문맥상 더욱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송영안에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각각의 사역에 대한 내밀한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성부의 창조와 섭리는 우리에게 양식을 공급해 주고, 성자의 속죄는 우리의 용서를 확보해 주며, 성령의 내주(內住)하는 능력은 우리의 안전과 승리를 보장한다고 말한다. 한편 '나라'는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킨다(10절). 따라서 그 나라를 유지(維持)하시고 당신의 백성에게 선한 약속들을 성취시킬(12절) 권세와 거기에 수반되는 모든 '영광'이(9절) 다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앞의 주기도문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본문의 송영은 전통깊은 교회의 신앙 고백적 찬양으로서 오늘날 우리들에 의해 계속 낭송되어져야 마땅할 것이다.   

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ㅇ과실(파라프토마타) -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한 편에 치우침'이란 뜻으로서 진리나 의(義)로부터의 이탈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이는 분명 치명적인 결과를 안겨주는 근본적인 범죄, 곧 '하마르티아'와 구별된다.

ㅇ용서하면 - 이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죄 용서함을 받는데 반드시 갖추어야 할 조건부적인(conditional) 공적(merit)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되겠다. 단지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원하는 자가 타인을 용서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실로 타인의 잘못을 용서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의 죄악에 대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행위이며 참된 회개의 자세이다.

ㅇ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 이는 주기도문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죄를 사하여 주옵시고"(6:12절)라는 다섯번째 갈구를 더욱 심화시키고 강조한 내용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상이 이곳 뿐만 아니라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반복되고 있다(18:23-35;막 11:25). 이는 예수를 주로 모신 공동체의 성격이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임을 지적한 것이다.     

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ㅇ용서하지 아니하면 - 내용적 측면에서 14절의 반복이라 할 수 있다. 실로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 자는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시는 아버지라 하더라도 그로부터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받기 원하는 바를 우리는 형제에게 베풀어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황금율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자비를 얻고자 하면 형제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고, 하나님과의 화해를 원하면 형제와 화해해야 한다.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ㅇ금식할 때에 - 모세의 율법에는 1년에 한 번 지키는 속죄일에 모든 백성이 다 금식(禁食)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레 16:29-31;23:26-32;민 29:7). 그리고 바벧론 유수 기간에는 하나님이 개입하셨던 지난 날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새로운 자세를 가다듬기 위해 정기적으로 금식할 것을 규정하였다(슥 7:3-5;8:19). 그러나 이런 국가적 차원의 금식 외에 각 집단이나 개인의 차원에서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금식이 행해지기도 하였다. 금식은 때때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세를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또는 주앞에서 더욱 겸비해지기 위해서(느 9:1, 2;시 35:13;사 58:3;욘3:5 등) 그리고 헤어날수 없는 큰 번민과 위기 또는 절망에 빠졌을때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기 위한 방법으로(출 24:18;삼하 1:12;예 4:16;행 14:23 등) 행해졌다. 사실 이 금식은 구약 시대 뿐 아니라 신약의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신앙적 측면에서 자기 훈련의 한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구약 시대에서부터 금식이 단순히 형식적이거나 위선적으로 행해지는 경우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판이 가해졌다(사 58:3-7;렘 14:12;슥7:5, 6). 그중에서도 특히 금식을 하면서도 이웃 구제에 무관심한 사실에 대해 혹독한 비판이 내려졌었다(사 58:1-7).

ㅇ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 이는 바로 앞의 '금식할 때에'라는 말이 현재 시상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즉 당시에 금식은 어떤 특별한 행사라기보다 유대인들이 늘상 게속해 오던 행사였던 것이다. 사실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한 주에 두 번, 즉 월요일과 목요일 경에 금식하였다. 그리고 '안나'와 같은 경건한 여선지는 일상적으로 금식하였다(눅 2:37). 그런데 이러한 금식을 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배고픔과같은 육체적인 고통통 따르게 마련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같은 고통을 자기 의(義)와 경건을 자랑하는 도구로 사용하여 자연적 고통에 인위적인 표정까지 가미(加味)하는 위선을 범하지 말 것을 명하셨다. 마찬가지로 일상의 신앙 생활을 결코 자기 의(義)를 만족시키는 도구로 전락(轉落)시켜서는 안 된다. 오직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이뤄져야 하는 참된 경건인 것이다.

ㅇ사람에게 보이려고 - 금식을 할 때에 자연적으로 용모가 흐트러지고 또한 자신의 내적인 죄악을 깊이 통회하고 자복하는 중에 기름을 바르지 않고 재(災)를 뒤집어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주님이 지적하시는 것은 자신의 진실된 통회의 표시로써 금식이 행해졌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 자신의 종교심을 자랑하고 또 사람의 칭찬과 존경을 받으려는 동기에서 외식적인 금식이 행하여졌던 것에 대해서이다.

ㅇ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 여기서 '흉하게 하다'는 뜻의 원어 '아파니주신'과 사람에게 '보이려고'라는 뜻인 '파노신'은 그 음운상 비슷한 단어로서 헬라 문학에 있어서의 일종의 재담적(才談的)표현이다(Robertson). 한편 '얼굴을 흉하게 하는'것이란 먼지와 재 등을 머리에 뒤집어 씀으로서 본 얼굴을 거의 보이지 않게 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것이다(삼하 15:30;겔 24:17).

ㅇ자기상을...받았느니라 - 2절 주석 참조.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ㅇ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 여기서 기름을 바르는 행위는 어떤 특별한 기름의 상징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몸단장을 위한 한 절차로서 사용된 것을 말한다(룻3:3;삼하 12:20;전 9:8). 그 한 예(例)로써 다윗은 밧세바가 낳은 아이의 병을 위해 금식하다가 그 아이가 죽고 나자 금식을 중단하고 일어나 몸을씻고 기름을 발랐다(삼하 12:15-20). 이처럼 기름을 바르는 것은 금식의 행위를 밖으로 나타내 보이지 않는 구체적인 대응 방법으로 간주할 수 있다.

ㅇ얼굴을 씻으라 - 이 역시 일상의 몸단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지시를하신 예수께서 금식 그 자체를 금한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예수께서는 금식의 필요성을 절대 부인하지 않으셨다(9:14, 15). 다만 진정한 금식은 하나님을 향하여 하는 것이므로 특별히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위해 슬픈 기색을 지을 필요가 없음을 강조하신 것이다.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ㅇ네 아버지께 보이게 - 금식은 자기 부정의 행위이며 육신의 고행(苦行)이고, 또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위한 일종의 육체적 단절 행위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온갖 세상욕망과 혈기를 죽이고 더욱 거룩, 겸손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금식은 반드시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여야지 조금이라도 사람을 대상으로하면 차라리 하지않은 것보다 못하다(4절 참조).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ㅇ보물 - 이 말은 본래 소중한 물품을 보관해 두는 장소라는 뜻이었으나, 그 의미가 발전하여 그 장소에 보관해 둔 물품, 그 자체를 가리키게 되었다(2:11). 여하튼 이 보물은 값비싸고 귀중한 귀금속을 말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홋날 최고의 가치를 발하게 될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한편 본문의 장면은 은행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 팔레스틴인들이 자기의 소중한 물품을 땅속에 묻어두었던 전통에 입각해 제시된 것이라 할 수 있다(13:44).

ㅇ땅에(에피 테스 게스) - 하늘과 반대되는 장소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는 상징적으로 영원한 미래가 없는 순간적이며 변화무쌍한 이 세상을 의미한다고 본다.

ㅇ쌓아 두지 말라(메 데사우리제테) - 이는 현재 시상으로서 '쌓아두기를 그만 두라'(stop storing up)로 번역하는 것이 원문에 더 가깝다(Turnur, Syntax, p. 76). 이는 그릇된 행위를 단호히 끊어버릴 때가 왔음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말씀 속에는 현세적으로 보이는 것에 최선의 가치와 행복을 두지 말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재물에 관한 그리스도인들의 자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이 땅에 쌓인 재물과 보화가 최상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장 귀중한 것으로 여겼다가는 훗날 큰 화(禍)를 만날 수 있다. (2) 탐욕이 가득한 자들은 지상의 재물에 애착을 느끼고 그것을 위해 살고 있으나 신자(信者)는 하늘의 것을 사모해야 한다. (3)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때 이런 것이 우리를 구할 수 없다. (4) 재물이 그리스도인에게도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이것을 풍족히 소유해야만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적은것에도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ㅇ좀과 동록(세스 카이 브로시스) - 먼저 '좀'(moth)은 옷이나 음식을 해치는 벌레들, '동록'(rust)은 금속의 부식(corrosion)을 기리킬 뿐 아니라 간혹 쥐들이나 곰팡이에 의해 입게되는 해를 가리키기도 한다. 성경에서는 종종 하나님의 영원한 가치와  반대되는 일시적 재물이나 명예, 보물 등이 이것들에 의해  잠식되고 파괴된다고 기록한다(사 51:8;약 5:2, 3).

ㅇ도적이 구멍을 - 당시 팔레스틴에 건축된 가옥들은 대개 진흙벽이나 흙색돌을 쌓아 만들어졌기 때문에, 도적들은 주택의 출입구를 통과하지 않고 그 흙 벽에 구멍을 뚫음으로써 그 집의 귀증품을 훔쳐갈수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바로 앞 문구에서는 재물의 내적인 파괴 원인이 언급되었으나 여기서는 외부의 손길에 의해 이땅의 재물이 안전하지 못함을 밝히고 있다.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ㅇ하늘에 쌓아 두라 - 지상의 보물에는 여러 가지 위험 요소가 뒤따른다(19절). 본절에는 이에 대한 대책으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면 안전하다는 내용이 서술되고 있다.  특별히 '땅'에 대비되는 '하늘'은 그 안전성의 차이 뿐 아니라 그 영원 '지속성과 거룩성 및 무한한 가치성에 있어서 땅에 쌓아 둔 보물과는 비교할수 없을 만큼 위대하다(눅 12:33;유대 문헌중 M. Peah 1:1;Pss Sol 9:9). 한편 '하늘의 보물'이란 이 땅 위에서 행한 선한 일로서 영원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면 그 무엇이나 해당된다. 즉 의(義)로운 일을 행하는 것,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것. 남을 용서해 주는것 등, 이 모든 것들은 보상이 뒤따른다는 점에서 하늘에 쌓아둔 보물이 된다(5:12;고후 4:17). 또한 남들에게 친절을 베풀거나(10:42;25:40), 자기 소유를 타인을 위해 기꺼이 투자하는 것 등도 하늘의 보물이라 할 수 있다(딤전 6:17-19).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ㅇ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 신앙인의 영원한 경구(警句)인 본문의 요지는, 인간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인 그 사람의 인격의 중심, 즉 마음을 사로잡아 그의 지(知). 정(精), 의(義)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보물은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그의 마음에 틈타서 반드시 그의 행동의 방향과 그의 가치관을 결정짓고 만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명예를 가장 귀하게 여기는 자는 분명 야망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고, 돈을 최고로 여기는 자는 돈의 노예가 되며, 쾌락을 제일 좋아하는 자는 필연코 방탕에 빠지게 된다'고 가르친 바있다. 그러나 위의 것을 늘 생각하고(골 3:1, 2) 천국의 법에 지배받기를 원하는 자들은 항상 선한 일에 힘쓰게 되며 또한 그들의 행적(行蹟)이 언제까지나 남아 그에게 영원한 기쁨이 될것이다(계 14:13).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ㅇ눈은 몸의 등불 - 눈을 통해 몸이 갈길을 찾고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눈은 '몸의 등불'이 된다. 물론 본문에서는 이 '눈'이 은유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지칭하는 것임이 분명하다(Philo). 그러나 이 '눈'을 단지 상징적 의미로서 뿐 아니라 실제적인 육체의 눈 그 자체의 역할에 대해서도 간과(onerlooking)해서는 안 될 것이다. 즉 육체의 '눈'이 보는 바는 '마음'이 보는 바와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육체의 눈이 세상의 것에 심취한다면 그마음 역시 타락의 늪으로 빠져들 것이며, 반면 육체의 눈이 하늘의 것을 바란다면 그 마음은 신령한 것으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ㅇ성하면(하프루스) - 이 말은 원래 '주름없는'이란 뜻으로서 일차적으로는 '건강한', 이차적으로는 '진실한'(고후 11:3), '단일한', '풍부한', '관대한'(약 1:5) 등의 복합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하튼 이 말은 빛을 받아들이는 '눈'의 상태를 지칭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눈과 마음은 긴밀한 연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성하면'이란 적어도 육체와 마음에 궁극적으로 유익을 얻게할 수 있을 정도로 '건전하다'(is sound, RSV)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두 개의 물체(땅의 보물과 하늘의 보물)를 동시에 바라보는 혼란하고 난시안적인 상태가 아니라 오직 한 방향으로 '단일한'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는 진실하고 성실한 상태를 일컫는다고 볼 수 있다.

ㅇ온 몸이 밝을것이요 - 건전하고 진실한 눈을 통하여 얻어진 밝은 빛으로 인하여 몸은 바른 판단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유익을 얻게 하는일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실로 밝은 빛되신 하나님의 신령한 진리를 굴절없이, 혼선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는 참으로 신령한 것과 속된 것을 바로 구분할 뿐아니라 그 빛 안에서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진리를 진리 그대로 분별하고 평가하며, 또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참된 지혜가 아니겠는가?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ㅇ나쁘면(포네로스) - 이 말은 분명 22절의 '성하면'과 대조되는 표현으로서 혼히 '악한'의 뜻을 가진다. 그리고 유대인의 관용적 표현에서 '악한 눈'은 이기적이고 인색(吝嗇)하다는 의미로 쓰인다. 이런 의미에서 '눈이 나쁘다'는 어구는 문맥상 하나님과 재물 양자에다 관심을 나누어서 하나님의 뜻과 영적인 세계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뜻으로 볼수 있다.

ㅇ온몸 - 앞 구절에서도 언급되었다시피 빛을 받아들이는 물질적 몸을 가리킴과 동시에 도덕적 차원의 전 인격을 상징하기도 한다.

ㅇ어두울 것이니(스코테이노스) - 어둡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빛이 없는 암흑 속에서 대상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함을 가리킨다. 즉 세상 재물에 현혹(眩惑)되어 영적 세계와 참된 진리를 보지 못하는 눈은 온몸에 진리의 세계를 전달해 주는 기능이 마비되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온몸으로 상징되는 그의 전 인격과 영혼은 아무것도 분간치 못하는 흑암 상태에 놓이는 것이다.

ㅇ네게 있는 빛 - 여기서 '빛'은 헬라어로 '토 포스'로서 태양 빛과 같은 일반적인 빛(light)을 가리키지만 문맥상 이는 22절의 등불로 번역된 '호 뤼크노스'와 동일한 뜻의 빛(lamp)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따라서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영적인 진리의 세계를 밝혀주는 마음의 등불이 어두우면 진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ㅇ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 여기서 '어두움'은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쁜' 눈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다. 실로 본래의 기능이 밝은 빛을 받아 들여야 하는 눈이 어두움만을 받아들인다면 그 온몸의 상태는 얼마나 치명적이며 절망적이겠는가! 진정 '성한' 눈을 통해 진리의 세계를 분간하지 못하는 자는 이방인과 같은 생활을 하고 죄와 악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ㅇ한 사람이 두 주인을 - 예수께서는 앞에서 우리가 과연 어디에다 보물을 쌓아야 할것인지 또는 우리의 눈을 그 무엇에 고정(fixation)시켜야 할 것인지 하는 선택적 문제를 제시하였다(J. Stott, Sermon on the mount, p. 158).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누구를 주인으로 섬겨야 하는지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선택의 문제를 제시한다.

ㅇ섬기지 못할것이니 - 누가는 불의(injustice)한 청지기 비유를 설명한 다음 이와 동일한 내용의 기사를 싣고있다(눅 16:13). 이는 우리의 마음이 단순해야 하고 또 목적이 분명해야 함을 가리킨 내용이다. 사실 '종'이란 오직 한 주인에게 전적으로 매인바 되어 그 주인의 명령에 자신의 전의지를 동원해 순종해야 한다(Tasker). 따라서 그 종이 진실하다면 결단코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게 된다. 만약 그가 두 주인을 섬긴다고 한다면 그는 그들을 자신의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유익을 얻는 한 수단으로서 그 주인들을 섬긴 것이 된다.

ㅇ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 한 주인을 섬기게 되면 다른 사람을 섬길 수가 없다. 즉 두 주인을 섬기려 하는 것은 한 주인도 섬기지 못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미움'과 '사랑'은 인간이 지닌 본성적 감정을 뜻하기 보다 어떤 구체적인 목적성을 지닌 마음의 현상을 뜻한다. 어찌되었든 이 양자는 엄밀히 말해 겸비(兼備)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울은 우리가 죄의 종이 되어 사망에 이르든지 또는 순종의 종이 되어 의에 이르든지 하게 된다고 말한다(롬 6:16).

ㅇ이를 중히 여기며(에 헤노스 안뎌세타이) - '중히 여기다'란 말은 그에 대해 변함없이 성실하다란 뜻이다. 그리고 본 어구에서는 둘 중에 하나인 '이를'이란 말이 강조되고 있다.

ㅇ재물(맘모나) - 이는 나쁜 의미로서의 재물을 가리킬 때 쓰는말로서 특정한 부(富)나 재산을 뜻하는 아람어 '마노나'에서 유래하였다. 유대 문학에는 재물과 돈을 같은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본문에서 이 재물은 하나님과 병기(倂記)되어 의인화되고 있으며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이 재물 역시 종의 주인으로 묘사되었다.

ㅇ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 여기서 '겸하여'(카이)란 원어상 '대등하다'는 뜻의 접속사로서 친지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그분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물질과 동등한 위치예 두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전적인 헌신을 받으시거나 또는 아예 섬김을 받지않으시거나 둘 중에 하나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물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며 양자 모두에 헌신하고자 하는 것은 주를 따르는 제자가 취할 태도가 아니며, 또한 이러한 행위는 부분적 죄악이 아니라 근본(根本)적인 죄악으로서 그 원인은 탐심이라는 우상숭배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여기서 재산 소유를 정죄한 것은 분명 아니다. 사실 그리스도인 역시 세상에서 살아갈 때 재산을 모을 수 있으나 이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거나 그것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정당하게 모은 재산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ㅇ그러므로(디아 투토) - 이 말은 문자적으로는 '이로써'란 뜻으로서 본절에 언급될 세상살이에 대한 근심을 버려야 할 이유가 앞에서 언급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사실에 있음을 가리킨다. 즉 재물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선택했을 때 발생할 세상 염려에 대한 지침(指針)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ㅇ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 예수의 절대적 권위릍 나타내 주는 표현으로서 그 가르치는 바가 세상의 어떤 진리들과도 비교될 수 없는 참 진리임을 시사하고 있다.

ㅇ목숨을 위하여(테 퓌스케 휘몬) - '목숨'으로 번역된 '퓌스케'는 인간의 비물질적인 부분으로서 육체적 죽음 이후에도 멸절되지 않는 영혼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이 '퓌스케'는 죽이지 못한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였다(10:28). 따라서 이는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으로서 물질적인 그 어떤 것보다 더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염려해야 하는 것이다.

ㅇ염려하지말라 - 이는 아무 일에도 관심을 갖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이것은 앞 절에서 시사한 바 있는 세상 일에 대한 지나친 욕심과 집착을 버리라는 뜻이다. 여기서 '염려'(메림나오)란 '분열되다', '나뉘다'는 뜻의 '메리조'(에서 유래한 단어로 지나친 근심 걱정으로 인해 마음이 여러 갈래로 분열되는 상태를 뜻한다. 실로 이러한 염려의 늪에 빠지게 된 자는 생(生)에 있어서 참 목적을 상실하게 된다. 사실 우리가 고민하여야 할 대상은 물질적인 문제에 앞서 먼저 영적인 문제여야 한다. 그리고 물질적인 문제 때문에 마음이 분열되어 영적인 문제를 망각(oblivion)하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ㅇ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 음식은 생명체의 존속에 필요한 소모품(consumption goods)이다. 따라서 음식은 생명을 위해 있는 것이지 생명이 음식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따금 생명 그 자체보다는 목숨에 소용되는 음식물에 집착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때가 있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바른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이 목숨과 몸을 준 이상, 이에 필요한 음식과 옷은 우리에게 당연히 주실 것이다.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ㅇ공중의 새를 보라 - 누가의 기록에도 이와 유사한 구절이 등장하는데, 거기서는 '새'라는 말 대신에 '까마귀'로 언급된다(눅 12:24). 본문의 '공중의 새'란 순수한 히브리문학적 표현으로서 '하늘을 날으는 새', 곧 크게 중요하지 않는 그런 종류의 생명체를 상징한다. 한편 본문의 '보라'(앰브려사테)는 눈을 뜨고 살펴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ㅇ심지도 않고 - 새들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미래의 자기 생존에 관해 염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ㅇ거두지도 않고 - 이 말씀을 오해하게 되면 우리는 먹고 사는 문제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된다. 사실 새들도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다 먹이를 떨어뜨려 주시도록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존을 위해 본능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따라서 '거두지도 않고'란 말은 먹을 것에 대한 지나친 고민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ㅇ천부께서 기르시나니 - 이는 성경적 우주론(宇宙論)을 전제하고 있는데, 우리는 자연의 피조물들이 먹고 마시는 문제를 어떨게 해결해 가는가를 살펴 봄으로써 온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이 어떠한가를 볼 수 있어야 하며 나아가 하나님과 그분의 사역 안에서 참 믿음을 가지도록 해야한다. 실로 하나님은 이 창조 세계를 질서있게 경영하고 계시며 따라서 이 자연계 전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섭리를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의 '천부'에 관해서는 5:16주석을 참조하라.

ㅇ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하나님은 모든 자연계 피조물의 창조주이시지만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를 통한 인격적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선자는 새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귀중한 존재인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귀하다'(디아페로)란 말의 원뜻은 '다르다', '구분된다'로서 새와 인간과의 본질적인 차이를 강조하고 있다. 더욱이 '...보다'로 번역된 바로 앞의 혤라어 '말론'은 '심히', '대단히'라는 뜻인 '말라'의 비교급 부사로서 '훨씬 더', '더욱'이라는 강조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실로 우리는 공중의 새보다 훨씬 더 귀중한 존재로 하나님께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 법칙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그 이면(裏面)에 담겨있는 우리를 향하신 깊으신 뜻까지도 포착(capture)해야 할 것이다.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ㅇ그 키를(텐 헬리키안 아우투) - '키'로 번역된 '혤리키안'은 '신장(身長)의 길이'나 '생명의 길이' 모두를 뜻할 수 있다. 키를 '한 자'(펙쿠스 헤나; 한 팔 길이로서 히브리인들의 '규빗'과 비교될 수 있다)나 더 한다는 것은, 신장의 길이를 나타낼 때는 약8인치 가량 늘인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생명의 길이를 뜻할 때는 나이를 더 먹는다는 뜻이 된다. 현대 주석가들은 이를 생명의 길이, 곧 나이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상 어느 누구도 염려함으로 더 오래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목숨의 연장(延長) 여부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다.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ㅇ의복을 위하여 - 앞에서 주님은 주로 음식에 대해 말씀하셨으나 여기서는 의복을 통하여 인간의 궁극적 관심사와 부차적 관심사를 구분해 주고 계신다.

ㅇ들의 - 이 말은 마태의 기록에만 등장한다. 아마 이는 자연 발생적으로 자라난 쓸모없이 보이는 풀 조차도 하나님이 입히심을 강조한 것 같다. 그리고 앞 절의 '공중의 새'와 대조적으로 사용하여 '땅과 하늘 그 어디나'라는 간접적인 강조로 이해할 수도 있다.

ㅇ백합화(타 크리나) - 원어 '크리나'는 백합화 뿐만 아니라 아네모네, 양귀비, 글라디올러스, 붓꽃 등 여러 종류의 꽃들을 포함하는 말인 것 같다(Robertson). 즉 '들의 백합화'란 갈릴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든 야생화(wild flower)들을 대표하는 꽃으로 볼 수 있다.

ㅇ생각하여 보라(카타마데테) - 26절의 공중의 새를 '보라'란 말의 원어 '엠브려파테'란 말이 단순히 눈을 뜨고 살펴 본다는 의미인데 비해 이 말은 많은 관심을 가지고 그 성장을 면밀히 관찰해 보라는 의미이다.

ㅇ수고도 아니하고 - 공중의 새들이 먹을것을 찾아다니되 염려하지 않는 앞 절의 대구적 어구와는 조금 다르다. 즉 새들과는 달리 식물은 전혀 이동하지 아니하고 노력하지 아니한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와 관심이 너무도 보잘 것 없으며, 또한 그 생명까지 짧아 곧 없어질 풀에게까지 꽃으로 입히실 만큼 풍부하심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ㅇ길쌈도 아니하느니라 - 인간은 자신의 치장을 위해 '옷감을 짜지만' 그들풀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해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는다는 의인법적 표현이다.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ㅇ솔로몬의 모든 영광 - 원문은 솔로몬이란 말을 강조하고 있다. 즉 '솔로몬 조차도' 라고 이해하면 좋겠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제 3대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왕들 중에서 가장 부유하고 화려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초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였고 가장 훌륭한 궁궐에서 그 영광의 극치(極致)를 누렸다.

ㅇ입은것이...못하였느니라(우데 페리에발레토) - 이 말은 헬라어 중간태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는 '자기 자신을 입히지 못하였다'라고 이해할 수 있다.

ㅇ이 꽃 하나만 - 아름다운 백합화의 그 자연스럽고 찬란한 모습은 그 어떤 예술가도 창조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며, 그 어떤 디자이너도 그와 같이 꾸밀 수 없는 조화롭고도 완벽한 치장이다. 왜냐하면 꽃 하나 하나에는 하나님의 생명의 범칙이 숨쉬고 있으며 신적(神的)인 기운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고의 영광을 누린 솔로몬도 이와 같이 아름다운 것으로 자신을 장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ㅇ오늘 있다가(세메론 온타) - 이 말은 '비록 오늘은 존재한다 하더라도'란 뜻으로 그 생명이 극히 짧은 하찮은 들풀을 수식한다.

ㅇ아궁이에(에이스 클리바논) - 아궁이로 번역된 '클리바 논'은 솥과 비슷한 것으로서 꼭대기보다 밑바닥이 더 넓은 편편한 오븐(oven) 모양의 흙으로 만든 이동용 불 그릇이다. 이 그릇은 바닥이 넓어 열을 모두 흡수하고 흔히 떡을 굽는데 사용되었다. 한편 예수 당시에는 땔감으로 주로  건초(乾草)를 사용했다고 전한다.

ㅇ던지우는 - 이는 들풀들이 불쏘시개로 던져짐을 말한다.

ㅇ들풀(톤 콜톤 투 아그루) - 문맥상 이것은 백합화를 가리키고 있으나 그 의미하는 바는 백합화가 자라는 곳에 함께 핀 들꽃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리고 이 말의 원어'콜톤'은 들의 모든 풀에 공통적으로 사용되었다. 누가는 이 부분을 '톤콜톤 엔 토 아그로'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문자적으로 '들에 있는 풀'이란 뜻이다. 즉 누가는 솔로몬의 궁전과 대조되는 황량한 이 들판을 강조하여 들판의 영광이 궁궐의 영광보다 뛰어남을 대비시키는 데 더 강조점을 두었다.

ㅇ믿음이 적은 자들아(오리고피스토이) -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조용히 꾸짖듯 말씀하신 것으로서 모든 근심은 바로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不信)에서 비롯됨을 역설한 것이다. 한편 잠언은 환난날에 낙담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는데(잠 24:10), 특히 우리 신자는 물질적인 궁핍과 가난으로 낙심하여 믿음이 적은 자란 책망을 받지 않도록 해야겠다. 염려와 근심은 모두 불신앙에서 나오는 것인 만큼 오직 모든 필요를 홀로 채우시는 하나님을 믿는 굳건한 신앙으로 오늘의 불만족스럽고 불공평한 이 현실을 진실되게 그리고 의롭게 극복해야 할 것이다.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말라

ㅇ무엇을 먹을까...입을까 하지 말라 - 25절과 맥을 같이 하는 명령으로서 특히 본문의 '하지 말라'는 말은 부정 과거 시상으로 표현되어 '조그만치도 염려하지 말라'는 절대 금지(禁止)를 나타내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하나님은 무가치해 보이는 극히 작은 것이라도 크나큰 관심을 보이시는 것 이상의 말할수 없는 풍부하신 관심으로 신자들을 돌보고 계심으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즉 굶지나 않을까 헐벗지나 않을까 하는 근심과 걱정을 온전히 떨쳐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계속적인 염려는 당신 백성들의 요구를 미리 아시며(8절) 풍족히 채우시는 하나님께 대한 모욕이 되기 때문이다.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ㅇ심하면서 오직 먹고 마실 것만 추구하는 자들을 통칭한 맡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지 않기 때문에 그의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한다. 또한 물질적인 것들을 초월한 신앙적 자세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항상 세상적 염려와 근심에 쫓기고 있다.

ㅇ천부께서...아시느니라 - 신자가 세상일에 대해 염려해서는 안 될 이유가 본절에서 몇 가지로 제시되었다. 그 첫번째는 앞에서와 같이 물질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 없이 생활하는 이방인들의 행위와 같기 때문이며, 두번째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실 뿐 아니라 크나큰 사랑으로 당신의 자녀를 돌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다 아시기 때문인 것이다.

실로 하나님의 '아심'은 단순한 지적 인식(recognition)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필요를 채워주되 넉넉히 채워주시는데까지 미치는 완전하고도 전인적인 인식을 뜻한다(8절).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ㅇ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 및 예수에 의해 이미 시작된 메시야적 왕국에 대한 복음을 듣고 또 순종하며 그 복음을 전파하기에 힘쓰라는 뜻이며 또한 그나라의 완성을 고대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라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고 하는 것은 신학적 의미에서의 칭의(稱義)를 구하라는 것이 아니라 산상수훈을 통해 예수께서 줄곧 강조해온 바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는 가운데 하나님과의 내적인 바른 관계를 지니고 외식을 피하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를 염두에 두고 선(善)을 행할 것을 가리킨다. 특별히 본문에서 '먼저'(프로톤)는 이방인들이 인생의 목표로 정하고 추구하고 있는 세속적 욕망과 세상적 노력이 모두 이차적이요, 부차적인 것임을 강조한 말이다. 따라서 정녕 이 말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일이 인생의 가장 중요하고 긴급히 선결해야 할 문제임을 강조해 주고 있다. 결국 경건(piety)에도 자아 중심과 하나님 중심의 두 종류가 있듯이 포부(aspiration)에도 두 종류가 있다. 곧 자신을 위한 포부와 하나님을 위한 포부가 그것이다. 제 3의 선택이란 있을 수 없다(Stott, Sermon on the mount, p. 172). 이 둘 중 무엇을 먼저 선택하겠는가?

ㅇ이 모든 것(타우타 판타) - 이 어구의 강조점은 '모든 것'에 해당하는 '판타'에 놓여져 있으며, 이는 언급한 전체를 가리킨다기 보다는 필요로 하는 모든 종류를 뜻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한 포부로 가득찬 사람들에게 영혼의 만족과 평안(peace)을 주시며 또 인생의 필요 조건을 충분히 채우시겠다는 의미이다.

ㅇ더하시리라(프로스테쎄세타이) - 오리겐(Origen)은 본문에 관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추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조그마한 것들을 덤으로 주겠노라. 하늘의 것을 추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세상의 것도 덤으로 주겠노라'고 말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로 우리들 마음에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은 일시적인 지상의 소모품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 양식이어야 하며, 신자들은 이방인의 염려의 대상인 먹을 것, 마실 것에 지배받지 말고 아버지께서 이미 필요한 것을 아시는 만큼 주실 것을 믿고 하늘의 뜻을 사모해야 한다. 그러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간구하고 추구한 모든 것 위에 '덤으로' 세상에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채워주실 것이다(딤전 4:8).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ㅇ내일 일을 위하여(에이스 텐 아우리온) - 우리는 세상의 염려와 걱정을 해결하기 위해 오늘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만, 내일은 언제나 다시 다가오며 따라서 내일의 문제는 결코 오늘 다 처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늘의 은혜는 오늘에 족하고 새로운 날을 맞이하면 새로운 은혜를 힘입어 살아가야 할 것임을 암시(hint)하셨다. 즉 내일의 염려는 내일의 새 은혜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ㅇ한 날 괴로움 - 여기서 '괴로움'(카키아)이란 말의 문자적 의미는 인간적 견지에서 본 '악'을 뜻하나 본문에서는 윤리적 측면의 '죄악'을 뜻하지 않고 인간이 감내(堪耐)하기 힘든 고초, 역경 등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또 이 말은 가끔 우박으로 인해 수확물을 몽땅 잃어버리는 등의 절망적 재해를 가리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70인역(LXX)은 히브리어 '라아'를 '카키아'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 '라아'는 '악한', '불운한', '곤고한'의 뜻을 가지고 있다. 결국 '한 날 괴로움'이란 우리의 현실에서 각 날(日)들에서 마주치는 온갖 어려움이라고 해석할 수있다.

ㅇ족하니라(알케톤) - 그 날에 주어진 것은 그 날의 고통으로 충분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같은 원리, 즉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해야 하는 내일에 대한 원리는 결국 염려의 근원적 치유(healing)를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넘치는 약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것이다. 실로 내일 일의 염려는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기울여야할 관심은 오늘로서 끝나야 할 것이며 내일의 불행과 고난(distress)은 오늘 앞당겨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b. Sanhedrin 100b;b. Berakoth 9a). 한편 본문의 교훈적 말씀을 살전 5:16-18과 비교해 볼 때, 이는 단순한 권면과 위로의 메시지가 아니라 염려 자체가 불신앙적 행동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진정 '내일'의 주인은 고뇌하는 '인간'이 아니라 은혜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말씀따라 주뜻대로 기도하기=아이테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눅6:12)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렘29:12)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그들의 기도를 멸시하지 아니하셨도다”(시102:17)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9:29)

<빌다>의 헬라어는 <아이테오-αἰτέω>입니다. “구하다, 간청하다, 기도하다, 요구하다”의 뜻입니다.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요청하는 것입니다. 힘이 없는 자가 능력이 많은 존재에게 구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간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로 구하면서 나아가는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는 것이 <아이테오- αἰτέω>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는데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도록 하는 것이 <아이테오>입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더 아름답게 응답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함께 하시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능력이 이 땅에 임하도록 하는 것이 <아이테오- αἰτέω>입니다. 

구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위해서는 <기도- 아이테오>가 중요합니다.

<아이테오-αἰτέω>는 이미 약속하신 것을 속히 주시도록 요구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그 약속을 믿는 신실한 믿음이 <아이테오-αἰτέω>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에 그 약속을 주장하는 믿음의 태도가 <아이테오-αἰτέω>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도 살아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

===용서 ===

[마6:12-15]....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 *12. ‘And forgive us our [g]debts(죄<빚>), as we have forgiven our debtors [letting go of both the wrong(잘못, 범과) and the resentment(분한)].  *13   ‘And do not [h]lead us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i]evil. [j][For Yours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  *14 For if you forgive [k]others their trespasses [their reckless(무모한.무심코 행한/악의없는, 부주의한, 부지중의) and willful(고의적인, 의도적인, 일부러 알고 저지른) sins], your heavenly Father will also forgive you. *15 But if you do not forgive others [nurturing your hurt(상처) and anger(분노) with the result that it interferes with your relationship with God], then your Father will not forgive your trespasses.(범과, 잘못, 과실)

---Q 앞에서 왕국 백성들의 실패와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주의함 ---

<무엇보다도 싸우는 기도를 드리는 이 마다, 그 자신의 마음의 참 평강 유지가 중요하기에> 그들에게 죄<빚>진 자를 탕감해 줌 같이 , 그들의 죄<빚>-실패와 허물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아버지께 구할 필요가 있음을 <분명히> 기억하라....이것은 [왕국을 위해] 싸우는 기도인데, 우리가 (여전히 <부지불식 간에> 다른 이들에게 죄<빚>를 졌을 수 있고, 결점과 실수를, 그릇 행함을 가지고 있음을) 먼저 주님 앞에서  인정하고 자백해야만 함을 가리킨다. [더 나아가, 나중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사자에게 합당하게 ((반드시 성령의 인도따라서!!)) 또한 용서를 구하여야 함을 기억하라.....14절, 15절은 다름 아니라 12절의 확실한 부연 설명임을 말한다....기도 드리는 자는 먼저<마땅히 자신을 돌아 보아, 평강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나 기억이 있는지 점검하고, 자백해야 할 바, 용서해야 할 바를 기억나게 하심따라 선제적으로 아버지께 토설하고 용서를 선포함 통해> 다른 이들의 과실을 잊어버릴 수 있음이다.

===용서하다...forgive = for : completely + give(giefan)===

...<(대개 어떤 상대방이 범한 잘못으로 인해 마음이 늘 편치 못하거나, (상대방을) 정죄하려 하는 느낌이나 불편감의 빌미를 제공했던 상대방의 그 어떤 과실에 대한 기억을 [선제적으로 주께 아뢰어 맡겨드리고] (비록 상대방이 인식해서 자기 잘못을 고백하지 않았더라도) 먼저 완전히 떠나 보낸다는 뜻....관계 회복에 있어서 먼저 <용서한 자로서 대해 줄 때, 상대방의 마음의 응어리와 자괴감도 풀리고, 잘못 고백의 여지가 있게 된다...이것까지는 그대의 몫은 아니지만..긴장은 팽팽한 줄다리기와 같기에 감정 에너지를 부정적인데에 새어나가게 하지 말라>=== 용서할 때 비로소 forget<(부정적 느낌의) 완전한 망각 ==> 주님의 평강-사랑-주 영의 기름부음이 작동됨>

===============

[(죄를, 과실을)사하다/용서하다] 내보내다, 버려두다, 용서하다.  ajfivhmi(863, 아피에미)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아피에미(Homer 이래)는 아포(ajpov, 575)와 히에미(i{hmi: 보내다)에서 유래했으며, 어떤 사람에게서 법률로나 실제적으로 통제를 당하는 사람이나 물건의 임의적인 석방을 의미한다.

(a)  아피에미는

① 인칭에 대해 '보내다, 떠나게 하다, 내어보내다, 쫓아내다(여자에 대해서는 '이혼하다', 모임에 대해서는 '해산하다, 끝내다'), 가게하다, 급파하다'.

② 비인칭에 대해, '풀어놓다'(배를 바다에다), '쏘다'(화살), '포기하다'를 의미한다.

(b)  아피에미는 비유적 의미로 '내버려두다, 허락하다, 통과시키다, 무시하다, 포기하다', 법적인 용법으로 '법적 속박에서 벗어나다, 방면하다, 면제하다, 용서하다(죄, 의무, 처벌로부터)'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아피에미는 70인역본에서 약 130회 나오며, 히브리어 누아흐의 역어로 '가게하다'(삿 3:1)를, 하달(2308)의 역어로 '포기하다, 버리다'(삿 9:9, 11, 13)를, 아자브(5800a)의 역어로 '남겨두다'(삼하 15:16; 삼하 20:3)를, 사아트(8058)의 역어로 '면제해 주다'(신 15:2)를 나타내며, 나사(5375: 죄책이나 형벌에서 벗어나다, 창 18:26; 시 25:18; 시 32:1 5; 시 85:2; 사 33:24), 살라(5545: 용서하다, 사죄하다, 레 4:2 이하; 레 5:6 이하; 민 14:19; 민 15:25 이하; 사 55:7), 킵페르(3722: 덮다, 속죄하다, 사 22:14)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아피에미는 신약성경에서 약 143회 나오며, 다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a)  아피에미는 '가게하다, 보내버리다'를 의미한다.

① 문자적 의미로, 인격적 목적과 함께 무리에 대해 사용되었다(마 13:36; 막 4:36; 막 8:13).

② 비인격적 목적과 함께, '영을 버리다, 포기하다'를 의미한다(마 27:50),

③ 법적 의미에서 '이혼하다'를 의미한다(고전 7:11 이하).

(b)  아피에미는 '취소하다, 탕감하다, 용서하다'를 의미한다.

① 빚 탕감에 대해(마 18:27; 마 18:32),

② 죄사함이나 용서에 대하여(마 6:12; 마 6:14 이하; 막 11:25 이하; 마 9:2; 마 9:5 이하; 마 12:31; 막 2:5; 막 2:7; 막 3:28; 눅 5:20 이하; 눅 5:23; 롬 4:7; 요일 1:9; 약 5:15; 행 8:22; 막 12:32; 막 18:21; 막 18:35; 막 4:12; 눅 11:4; 눅 12:10; 눅 17:3 이하; 눅 23:34).

(c)  아피에미는 '버리다, 버려두다'를 의미한다.

① 문자적으로, 마 4:11; 마 26:56; 요 10:12; 막 10:28; 눅 21:6 등.

② 비유적으로, 계 2:4; 롬 1:27; 히 6:1.

③ '돌보지 않다, 소홀히 하다', 마 23:23; 막 7:8 등.

(d)  아피에미는

① '~하게 하다, 용납하다'를 의미한다, 마 15:14; 막 5:19; 막 11:6; 막 14:6; 눅 13:8; 행 5:38; 계 2:20; 요 11:48.

② '허락하다, 내버려 두다', 마 8:22; 마 13:30; 마 19:14; 마 23:13; 막 1:34; 막 7:12; 막 7:27; 막 10:14; 눅 8:15; 눅 9:60; 눅 12:39; 눅 18:16; 요 11:44; 요 18:8; 계 11:9.(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R. Bultmann; H. Vorlander). 

=====노아 Noah....j'nO(5146, 노아흐) ===

노아흐(명남)는 누아흐(j'Wn , 5117: 쉬다, 안식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안식'을 의미하며, '도움과 구체적인 위안'이란 의미에서 '위안'에 의해 설명되었다(창 5:29)(C. F. Keil).

70인역본은 예나하메누(우리를 안위하리라)를 헬라어 디아나파우세이(안식하게 하다)로 대치하였다. 이것은 아마도 초기 랍비들의 주장대로 이 이름의 유래를 누아흐(안식)와 연관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a)  노아는 아담의 10대 후손이며(창 5:28 이하), 홍수 기사의 영웅이며(창 6:11-9:19),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탁월한 의인이다(창 6:9; 창 7:1; 겔 14:14; 창 14:20). 또한 그는 "포도 나무를 심고" 경작한 최초의 사람이다(창 9:20). 이 모든 것은 그가 태어날 때 그의 아버지 라멕이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창 5:29)고 한 예언의 성취임이 분명하다. 그의 아내와 세 아들 및 세 며느리와 함께 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가 건조한 방주를 타고 홍수에서 살아남았고 홍수 이후의 새 세계의 조상이 되었다.

(b)  노아는 라멕의 아들이며(창 5:28; 창 5:29), 셈, 함, 야벳의 아버지이다(창 5:32).

그는 패역한 시대에 살았으며, 그 시대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었다(창 6:1-13).

그는 방주를 만들라는 명령을 받고 그대로 준행했으며(창 6:14-22), 120년 동안 심판을 경고하고 의를 전파했다(창 6:3; 참조: 벧후 2:5).

그는 하나님의 심판인 홍수가 났을 때 그의 가족과 짐승들과 함께 방주에 들어가 구원을 받았다(창 7:6-8).

노아는 홍수에서 구원을 받은 후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렸다(창 8:20).

하나님이 노아와 더불어 언약을 세워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창 9:11; 창 1-19).

노아는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 재배를 하고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추태를 부렸다(창 9:20; 창 9:21).

노아는 이 사건과 관련한 아들들의 행위에 따라 그들에게 저주와 축복을 선언했다(창 9:22-27). 노아는 950세에 죽었다(창 9:29).

(c)  겔 14:14에서 하나님의 심판 때 노아는 자신의 의로서 자신만이 살아날 수 있다고 한다. 사 54:9 이하를 보면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하기 직전,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사랑이, "노아 때에" 인류와 맺은 그의 언약처럼 변치 않을 것이라고 보증하고 있다(비교, 창 9:8-17).

(d)  유대의 지혜 문학가들은 노아에게서 참 지혜의 한 예를 전한다. 벤 시라(Ben sira)는 그는 '완전하고 의로운 자로 알려졌기' 때문에, '홍수가 임했을 때 세상에 남겨진 자가 되었다'고 말했다. 지혜서 저자는 세상이 홍수로 뒤덮였을 때, 지혜는 그 의미를 값 싼 목조 구조물속으로 몰아넣은 후에 세상을 다시 구원하셨다고 언급한다(지헤서 10:4). 필로는 "노아가" 성경에 의인으로 기록된 첫 번째 사람이라고 주석을 달면서 그 이름의 의미로서 '안식'과 함께 '의로움'을 나란히 제시한다(Abr. 27). 그는 "노아가 하나님께 은총을 입은 자였기 때문에" 상을 받은 승리한 경주자라고 칭송하였다(참조: 창 6:9).

(e)  에디오피아어 에녹서에는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노아의 묵시들에 관한 단편 기사들이 실려있다(6-11; 54:7-55:2, 60; 65:1-69:25, 106; 107). 이것들 가운데 대부분은 천사의 타락, 이에 따른 홍수 심판 및 그 다음에 오는 축복의 시대에 관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중의 하나(106:1-19)는 갓 태어난 노아를 신동(神童)으로 묘사한다. 이 기사에 의하면, 라멕은 그 아기가 강제로 침입해 온 천사의 아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아버지 므두셀라에게 상의하였고, 므두셀라는 자기 아버지 에녹과 상의하려고 "세상 끝"까지 갔다. 에녹은 노아가 참으로 라멕의 아들이며, 하나님께서 그의 시대에 '세상에 새 일'을 행하실 것이라고 확증하였다. 근본적으로는 이와 동일한 이야기가 쿰란에서 출토된 창세기 외경(1Q Gen Apoc. 2)과 제 4동굴(Cave 4)에서 발굴된 단편들에도 나오는데, 한 단편에는 아기의 체중까지도 제시되어 있다(J. T. Milik, Ten Years of Discovery in the Wilderness of Judaea, 1959, SBT 26, 35). (참조: F. F. Bruce).

노아는 신약성경에서 8회 등장한다.

(a)  눅 3:36에서 노아는 예수님의 족보에 그의 조상으로 나온다: "눅 3:36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아박삿이요 그 이상은 셈이요 그 이상은 노아요 그 이상은 레멕이요".

(b)  마 24:37(병행구절 눅 17:26 이하) 이하에서 노아 때의 홍수가 소돔과 그 이웃 성읍들을 멸망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인자가 올 때 세계에 임할 심판의 한 모형으로 나타난다. 이 예를 들면서 주님은 그 때 주어진 경고도 절대 숨겨진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특히 강조하려고 하신다(창 6:3). 아마 대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홍수의 경고를 일백년 이상 걸쳐 받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경고하고자 하시는 재난도 결코 갑작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참조: 벧전 3:20). 단지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참조: A. L. Williams).

(c)  히 11:7에서 노아의 믿음이 강조되어 있다. 그의 믿음의 특징은 하나님의 권고에 즉각적으로 순종하였다는 것이다(참조: 창 6:22). 이렇게 하여 그는 "세상을 정죄하였고"(다시 말하면, 하나님 믿기를 거절한 사람들의 완악함을 드러내었으며) (훗날의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

(d)  벧전 3:19; 벧전 3:20에서 노아 때에 불순종 때문에 옥에 갇힌 영들에 대해 말한다: "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바로 그 영들에게 그리스도는 전파, 곧 추정컨대 그들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결정한 그의 승리를 전파하셨다고 한다.

(e)  벧후 2:4; 벧후 2:5 이하에서 노아를 "그 일곱 식구"와 함께 보존한 것과 반역한 천사들을 마지막 심판 때까지(참조: 유 1:6) 지옥 어두운 구덩이에 가둔 것을 대조하고 있다. 노아의 여덟 식구를 제외하고는 당시의 온 세상이 모두 "경건치 아니"하였다. 경건한 자를 보존하시고 악한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권세의 보증서이다. 노아는 이 구절에서 "의를 전파하는 자"로 불리운다.

한편 벧후 3:5-7에서는, "그 때 세상"의 물에 의한 멸망이 현재 세상이 불에 의해 멸망할 것을 보여주는 전조로 간주된다. (참조: F. F. Bruce; Walter Bauer; J. H. Thayer). 

======안위하다 !j'n:(5162, 나함) === 누아흐, 슈브

[Q께서...신인동형론적 관점!!...대부분의 예언을 통해서 보자면, 사람의 참회 반응을 전제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와 무관하게도 때때로 주도/주관적으로 행하시기도 함]회개/후회하다 repent,--->긍휼히/불쌍히 여기신다--->돌이키신다---> 위로하다 comfort......누아흐

[사람이]후회/회개/참회하다 repent(=re +pen<=punish..깊이 생각/반성/깊이 깨닫고 자백하며 토설함>).....슈브(안식의 회복)

나함(동사)은 기본어근이며, '후회하다 repent, 위로하다 comfort'를 의미하며, '회개하다, 애석해 하다, 유감으로 생각하다'라는 의미도 함축한다. 이 어근의 기원은 '깊이 숨쉼' 따라서 사람의 감정, 주로 슬픔, 동정, 위로의 육체적 표출이라는 개념을 반영하는 것 같다. 이 어근은 우가릿어(UT 19: no 1230의 '위로하다'를 보라)에서 나타나며 느헤미야, 나훔, 므나헴과 같은 구약성경에 언급된 고유명에서 발견된다. 70인역본은 나함을 메타노에오와 메타멜로마이로 번역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00회 이상 나오며, 니팔, 피엘, 푸알, 히트파엘형으로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후회하다'라는 의미로 약 40회, '위로하다'라는 의미로 약 60회 이상 사용되었다.

(a)  나함은 '후회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니팔형으로 38회).

학자들은 이 단어를 성질의 변화, 마음의 변화, 목적의 변화, 또는 행위의 변화에 대한 강조와 연관시킴으로 말미암아 나함의 의미를 확인하려 한다.

'후회하다'라는 의미에서 대부분의 실례가 인간의 후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후회를 언급한다. 인간의 후회나 회개를 나타내기 위해 자주 사용되는 단어는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이키다(to turn)'를 뜻하는 슈브(bWv , 7725)이다. 죄를 자각하여 진정한 후회와 비애를 느끼는 인간과 달리, 하나님은 죄에서 자유하신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후회하신다는 것(창 6:6-7, 출 32:14, 삿 2:18, 삼상 15:11 등), 즉 그는 자신의 주권적 목적에 따라서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거나 사람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말해준다. 표면상으로 볼 때 이런 언어는 하나님의 불변성을 단언하는 어떤 구절들과 상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조화하지 않는 것 같이 보인다(참조: 삼상 15:11, 시 110:4).

그러나 나함이 하나님께 사용될 때 그 표현은 신인동형론적인 것이며 궁극적 긴장은 없다. 단지 인간의 제한되고 세상적이고 휴한한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뜻이 변화한 것 같이 보일 뿐이다. 그리하여 구약성경은 하나님께서 행하기로 작정하셨던 심판이나 재앙을 내리시기를 '후회하셨다', 즉 '돌이키셨다'고 말한다(대상 21:15, 렘 18:8, 렘 26:3, 렘 26:19, 암 7:3, 암 7:6, 욘 3:10). 확실히 렘 18:7-10은 하나님 편에서 볼 때(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예언이 인간의 반응에 따라 조건부적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상기시켜 준다. 이와 관련하여 헤셀(A. J. Heschel)은 '어떠한 말씀도 하나님의 최종적인 말씀이 아니다. 인간의 행동이 변화하면 하나님의 심판도 변한다'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후회에 대해 좀더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창 6:6에서 하나님은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 이 구절에서 '후회하다'는 마음을 바꾸거나 뜻을 돌이키는 것을 함축한다. 하나님은 그가 이미 행한 일에 대해 사람처럼 후회하시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는 변화된 그 상황과 조화하는 방향으로 행동하셨다. 인간이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변경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죄를 범할 때 하나님은 교제의 관계를 징계의 관계로 바꾸신다. 인간이 죄로부터 하나님께 돌아올 때 하나님은 교제의 관계를 회복시키신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인간과의 관계를 완전히 심판의 관계로 바꾸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후회하심, 곧 돌이키는 것이다. 하나님은 후회하시거나 뜻을 돌이키지만 인간과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의는 신실하게 유지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마찬가지다: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repented, NASB는 'changed his mind'로 번역함)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때로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관련하여 시행하려고 계획했던 방침을 '돌이키신다' "만일 나의 말한 그 민족이 그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repent)"(렘 18:8).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케 하리라 한 선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repent)"(렘 18:10).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찌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repent) 재앙을 내리지 아니 하시나니"(욜 2:13). 다른 실례들에서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변경하신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분명히 인간이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서 마음을 바꿀 때 하나님께서도 마음을 바꾸신다. 그러나 인간이 악한 행위를 계속할 경우 악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바뀔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행위는 변하지만 그 자신의 의로우심에 대한 신실하심은 영원 불변하다.

어떤 상황에서는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기'(repenting)에 싫증을 내기도 하시는데(렘 15:6....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갔으므로 네게로 내 손을 펴서 너를 멸하였노니 이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지쳤음이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규정을 수행해야 할 점이 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행위의 실례로 사울에게 전한 사무엘의 말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사무엘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의 왕권을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repent)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삼상 15:29).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악한 행위에 대한 참회와 중재의 기도로 말미암아 자신의 마음을 바라고 자신의 행위를 '돌이키신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위한 중보자로서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간청하였다.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repent)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출 32:12). 이 기원의 응답은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출 32:14)는 말씀에서 나타난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니느웨에 전한 말씀에서도 이 용례를 볼 수 있다.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turned)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repented of)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욘 3:10). 

이러한 실례에서 하나님은 후회하시거나(repent) 그의 뜻을 돌이켜서(change his mind) 자신의 계획을 변경시키신다. 그러나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의는 신실하게 유지되는 것이다.

다른 구절들에서 인간들의 태도의 변화(혹은 이 변화의 부족)를 뜻하는 말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의 사악함을 회개하지 않을 때에 반역을 선택하여 벌하신다(렘 8:6).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에브라임(이스라엘 북쪽 지파의 대표자) 지파가 회개(repent) 한다면(렘 31:19)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실 것이다(렘 31:20).

사람도 타인에게 회개를 표명할 수 있다. 베냐민은 부도덕한 죄를 범함으로써 심한 고통을 받았다(삿 19-20장). "이스라엘 자손이 그 형제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쳐(repented) 가로되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끊쳤도다"(삿 21:6, 삿 21:15 참조).

(b)  나함은 '위로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피엘형에서 '위로하다', 니팔, 푸알, 히트파엘형에서 '위로 받다'를 의미한다.

① 나함은 바벨론 유수에서 살아남은 모든 경건한 유대인에게 잘 알려져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이사야의 '위로의 책'의 서언인 '나하무 나하무 암미'(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함'은 또한 '위로하다' (comfort)를 의미하기도 한다. 바벨론으로 망명한 자들은 생존자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도착했을 때 '위안을 받았다'(겔 14:23). 여기서 '위로하다'라는 말과 '후회하다(회개)'라는 말의 관계는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이 진실하다는 것에 대한 증거로서 예루살렘에 내린 재난에서 결과된 것이다.

동일한 단어가 시 23:4에도 나오는데, 여기에서 다윗은 그의 하늘의 목자에 대하여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말한다.

② 다윗은 밧세바의 죄 중에서 태어난 아이가 죽은 후에 그녀를 '위로하였다'(삼하 12:24). 이것은 그들의 부주의로 생긴 일에 대한 다윗의 후회를 지적하는 것 같다. 많은 구절들은 죽은 자들을 인하여 위로 받는 것("조상하다")을 다룬다(삼하 10:2, 대상 19:2, 사 61:2, 램 16:7, 렘 31:15). 사람들은 유아(삼하 12:24), 10대의 아들(창 37:35), 어머니(창 24:67), 아내(창 38:12) 등으로 인하여 위로받았다.

어머니는 자기 자녀를 위로함 같이(사 66:13)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로하신다(시 71:21, 시 86:17, 시 119:82, 사 12:1, 사 49:13, 사 52:9).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나훔, 나함의 파생어)이 따뜻하고 포근하게 된다'(호 11:8).

③ 다른 한편 이 단어는 인도적인 감정에 나온 '위로'에 대해 사용되었다. 욥은 세 친구들에게 물었다 - "이러한 즉 너희의 위로가 헛되지 아니하냐 너희의 대답은 거짓 뿐이니라"(욥 21:34, 욥이 뜻한 것은 그들의 태도는 잔인하고 무감각한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위로'(comfort)를 간구했다.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시 71:21). 

④ 나함은 '애석해하다, 유감으로 생각하다, 동정하다'라는 의미도 나타난다(신 32:36 = 시 135: 14).(참조: M. R. WILSON; NEDOT; BDB). 

===
===
[파스칼, 팡세]..Pensées, "생각"이라는 뜻...오늘날, 팡세는 단상을 모아 편집한 것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든지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지구의 전표면이 달라졌을 것이다"라는 말로써 알려진 <팡세>는 비꼬는 경구(警句)만이 나열된 단순한 인간관찰의 책이 아니다. 
본래 모든 사람을 신앙으로 이끌기 위해서 쓰여진 기독교 변증론의 초고(草稿)였다. 그의 사후 유고(遺稿)로서 미정리된 채로 발견된 단편(斷編)에 대한 원고의 판독(判讀)과 정리에 대한 노력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이 책 속에는 인간의 위대함과 비참함의 변증법에 의해서 신을 향한 사랑에 이르는 길(道)이 설명되고 있다
에픽테토스와 몽테뉴에게서 인간론을 배운 파스칼은 인간을 무한과 허무(虛無), 위대와 비참 사이에 부동(浮動)하는 중간자(中間者)로서 포착했다. 
인간은 광대무변한 우주에 비하면 겨우 하나의 점과 같은 갈대처럼 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공간에 의해서 우주는 나를 싸고, 하나의 점으로서 나를 삼킨다. 그러나 사고(思考)에 의해서 나는 우주를 싼다"는 점에 인간의 존엄성이 있다. 인간은 자기의 비참을 이해하는 점에서 위대하다. 
"나무는 자기의 비참을 모른다." 에픽테토스는 자기의 비참을 모른 채 자기 힘으로 신을 완전히 알고, 사랑하려 했기 때문에 오만(傲慢)에 빠졌다. 
그러나 몽테뉴와 같이 그리스도와의 내면적 교섭을 갖는 일 없이 자기애(自己愛)의 공허함을 말하고 인간의 비참에 직면한다면 구원할 수 없는 회의와 절망의 수렁에 빠지고 만다. 
인간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이 모순은 신의 위대함과 인간의 비참을 하나로서 체현(體現)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비로소 해결되는 것이다. 
이 중개자가 없다면 신과의 모든 교섭은 단절된다. 따라서 살아 있는 신을 알려고 하는 자는 고립적 정신의 차원을 떠나서, 그리스도와의 깊은 내면적인 공동 관계를 유지하는 '사랑'의 차원으로 비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을 직관(直觀)하는 것은 심정(心情)이며, 이성(理性)이 아니다. 이것이 즉 신앙이다." 파스칼은 정신의 질서를 초월해서 이 심정의 질서에 이끌렸을 때 비로소 신과 자기의 확실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에 파스칼의 본령(本領)이 있다
===
===
========
용납이란 어떤 이를 [하나님이 붙여 준 사람으로 인정하여 ]그 자체로서 일단 [선입견이나 짐짓 추정 않고 없이] 존중하며 받아줌이다. 
[비록 약점과 연약함이 보이더라도] 그냥 그대로 [그의 연약함을 꼬집어 비판하지 말고 그 사람의 연약함을 보더라도... 가룟유다를 <바로 그렇게> 받아주신 JC처럼] 인정하고 받아주라는 말씀이다. <이것 저것 따져 보면서> 불평하지 말고, 고치려 하지 말고 있는 그냥 그대로 두고 껴안음, 네가 [먼저 깨달은 자로서 그의 십자가를 대신 져 줌으로써 일절 오래참음으로 견뎌내며]인내함인 바, 사랑의 첫걸음이다.
====용납과 용서=====
용납과 용서는 동어반복인가? 아니면 서로 다른 무엇인가? 
용서는 과거 일에 대한 관용이고, 용납은 현재 일에 대한 관용이라고 정의 내려 볼 수 있지만, 골로새서의 말씀이 일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태도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으므로, 조금 더 생각을 진전시켜 볼 필요가 있다.
"용납"의 의미로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는 아네코ἀνἔχω인데, 전치사 아나ἀνά와 동사 에코ἔχω의 합성어이다. 
아나ἀνά는 원래 "가운데" "사이에"라는 뜻이었지만 후대로 오면서 "위"up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는데, 신약에서는 이 뜻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에코ἔχω는 "가지다"have나 "취하다"take의 뜻이 있다. 이 두 단어가 합쳐져 어떻게 용납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을까? 위에 가지다? 무슨 뜻인가? 어깨 위에 짐을 지다는 뜻이다. 영어로는 take up. 어깨 위에 지는 것은 십자가이다. 
마가복음 8:34에서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하실 때 영어 take up이 사용된 것을 생각하면 take+up의 의미가 연상이 된다.
 아네코ἀνἔχω에서 유추하는 "용납하라"의 기본 뜻은, 마음에 안드는 것을 네가 짐으로 지고 [그 내적 외적 부담을]인내하면서 견디라는 말이다. 
용납은 사랑의 첫단계이다. [일견 보기에]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말씀이다. 
용납하라는 말씀은 [짐짓 추측하여 거절하여 내버려 두지 말고!!]그냥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말씀이다. 불평하지 말고, 고치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두고 네가 인내하라는 말씀이다. 어려운 요구이다. 그러나 내가 상대하는 사람이 [[아직, 적극적으로]]나를 공격하거나 나에게 잘못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서 용서 보다는 쉽다.
"용서"는 사랑의 마지막 단계이다. 용납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이라면, "용서"는 나에게 잘못하고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말씀이다. 훨씬 더 어렵다. 
용서의 헬라어는 카리조마이χαρίζομαι인데, "은혜"를 뜻하는 카리스χάρις의 동사형이다. 하여, "용서"는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용서는 둘 사이에 [이미 책벌 통해] 정의가 실행되어 버리면[이루어지면] 결코 할 수 없는 것이다. 정의가 이루어진 곳에 은혜가 개입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당한만큼 되갚아 준 다음에는 정의는 세워졌을지언정 용서는 일어날 수 없다. 갚아주지 않고, 은혜를 베푸는 것이 용서이다. 그러니 정말 어렵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으니, 우리도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오직 그것이 이 어려운 요청에 응답할 수 있는 우리의 희망이다...그렇게 되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푸는 행위이다.
=======
[관용하는]ejpieikhv"(1933, 에피에이케스) ....[진리말씀을 밝혀 분명하게 과오를 지적하되, 죄벌 감당하기 어려운 죄인의 처지를 감안하여 죄벌을 (함께) 나누어 담당해 줌 통해 구원함 = 짐을 함께 나누어 져 줌으로써 자유케 해 줌]
온순한, 온화한, 순한, 온유한, 친절한, 참을성 있는, 관용하는.
1. 고전 헬라어 문헌 
형용사 에피에이케스와 명사 에피에이케이아는 에이코스(알맞는, 어울리는, 적절한, 온당한)에서 유래하였거나 아니면 에이코(굴복하다, 양보하다)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며,호머 시대 이래로 '온당한 알맞는 생활방식'이라는 의미로, 투키디데스 이래로 '관용, 인내, 온유'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에피에이케스 및 그 어군의 단어들은 본래 제멋대로 방자한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균형 잡히고, 지성적이며 잘 어울리는 외모를 표현하는 데에 사용되는 말이었다. 
후에 그것은 법률의 적용에 있어서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자기 자신의 공민권을 포함한 모든 공민권이 단호히 확립되어야 한다는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정의의 엄격성을 그 법률적 표현 및 제권리와 함께 융통성 있게 할 용의가 있는, 인정 있고 사려 깊은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게 되었다.
이 에피에이케스 단어군과 프라위스(prau?", 4239) 단어군의 개념, 이 개념은 모두 억제되지 않는 분노, 가혹함, 야수성 그리고 이기심과 반대된다. 
이 개념은 고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 즉 모욕을 받고도 화를 내지 않는 현인, 재판에 임하여 인정 많은 재판관,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자비로운 왕 등이 지닌 성격의 특징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 단어들은 이상적 통치자에 관한 묘사나 고위직에 있는 사람에 대한 찬사 속에 자주 등장한다.
헬라 및 헬라 철학에서 이 개념은 높은 가치를 지닌 사회적 미덕이자 이상을 표현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개념을 정열과 무감정의 양극단 사이에 있는 복된 중용의 덕이라고 생각하였다(F.Hauck/S.Schulz).
2. 70인역본의 용법 
70인역본에서 명사 에피에이케이아는 l0회 등장하며, 에피에이케스 및 그 형용사형은 6회 등장한다. 이 단어들은 세상 통치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자비심(삼상 12:22; 시 86:5; 지혜서 12:18)과 왕의 행동(마카베오이서 9:27), 선지자(왕하 6:3) 및 경건한 자(지혜서 2:19)의 행동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신약성경에서 에피에이케스는 5회 나오며, 에피에이케이아는 2회 나온다. 약 3:17에서 에피에이케스는 위로부터 난 지혜의 목록에 나타난다: 에피에이케스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함께 살 때 지켜야 할 규칙을 표현한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빌 4:5),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딛 3:2).
 딤전 3:3에서는 특히 감독들의 자질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감독은…오직 관용하며". 벧전 2:18에서 에피에이케스는 종들의 주인에게 적용되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고후 1O:1에서 바울은 프라위테스와 에피에이케이아를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동안 사람에게 보여주셨던 태도의 특징으로 언급하면서, 그것을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교회에 제시한다: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에피에이케이아는 기독교인에게 요구되는 태도를 표현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행 24:4에서 에피에이케이아는 총독 벨릭스 앞에서 유대인 변사 더둘로가 바울을 고소하는 연설을 할 때 사용되었다: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참조: F.Hauck/S.Schulz; W.Bauder). → prau?", 4239 프라위스.  → prau?th", 4240 프라위테스.
==[용납과 용서는 아가페 사랑 배우기의 시작과 마지막...아가페 사랑은 (입장 바꿔 생각해 보는)역지사지의 선대하는 사랑!!]==
..... 그리스도께서 먼저 보여주신 바, 그분의 대속하심의 (아가페) 사랑 실행 안에서 배우는, **일절 오래참음(인내..참아주고 끝까지 견뎌내심 = 용납)과 **새롭게 살 수 있도록 은혜 베품(=용서 +관용) --- (그분의 십자가 죽으심-부활-승천 안에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놓으시고) 먼저 정죄/심판하지 않으시고 일정한 때까지(끝까지) 참고 기다려 주심을 아는 자마다, 회개를 통한 <포로의 정죄감으로 묶어 놓았던, 원수의 모든 궤계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맛보는 자마다, 그 아가페 사랑 실행하기를 배우려 함이 당연함.....그 첫 행보가 바로 용납, 마지막 행보가 용서인 것임..
==[[용납<참고 감수함>과 용서<주님 십자가 앙망하고, 주께만 아뢰고 잊어버림>:이로써 참 자유함 안에서 하나됨 이룸]]==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여 주고, 서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골3:13)
용납과 용서는 동어반복인가? 아니면 서로 다른 무엇인가? 
용서는 과거 일에 대한 관용이고, 용납은 현재 일에 대한 관용이라고 정의 내려 볼 수 있지만, 골로새서의 말씀이 일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태도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으므로, 조금 더 생각을 진척시켜 볼 필요가 있다.
"용납"의 의미로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는 아네코ἀνἔχω인데, 전치사 아나ἀνά와 동사 에코ἔχω의 합성어이다. 
아나ἀνά는 원래 "가운데" "사이에"라는 뜻이었지만 후대로 오면서 "위"up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는데, 신약에서는 이 뜻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에코ἔχω는 "가지다"have나 "취하다"take의 뜻이 있다. 
이 두 단어가 합쳐져 어떻게 용납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을까? 위에 가지다? 무슨 뜻인가? 어깨 위에 짐을 지다는 뜻이다. 
영어로는 take up. 어깨 위에 지는 것은 십자가이다. 
마가복음 8:34에서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하실 때 영어 take up이 사용된 것을 생각하면 take+up의 의미가 연상이 된다. 
아네코ἀνἔχω에서 유추하는 "용납하라"의 기본 뜻은, 마음에 안드는 것을 네가 짐으로 지고 인내하면서 견디라는 말이다. 
용납은 사랑의 첫단계이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말씀이다. 
용납하라는 말씀은 그냥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말씀이다. 
불평하지 말고, 고치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두고 네가 인내하라는 말씀이다. 어려운 요구이다. 
그러나 내가 상대하는 사람이 나를 공격하거나 나에게 잘못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서 용서 보다는 쉽다.
"용서"는 사랑의 마지막 단계이다. 
용납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이라면, "용서"는 나에게 잘못하고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말씀이다. 훨씬 더 어렵다. 
용서의 헬라어는 카리조마이χαρίζομαι인데, "은혜"를 뜻하는 카리스χάρις의 동사형이다. 하여, "용서"는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용서는 둘 사이에 정의가 [이미 실행 되어] 이루어지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정의가 이루어진 곳에 은혜가 개입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당한만큼 되갚아준 다음에는 정의는 세워졌을지언정 용서는 일어날 수 없다. 
갚아주지 않고, 은혜를 베푸는 것이 용서이다. 그러니 정말 어렵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으니, 우리도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오직 그것이 이 어려운 요청에 응답할 수 있는 우리의 희망이다.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푸는 행위인 것이다.
===골3장 1~17절===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AMP] Put On the New Self  *1 Therefore if you have been raised with Christ [to a new life, sharing in His resurrection from the dead], keep seeking the things that are above, where Christ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God. *2 Set your mind and keep focused habitually on the things above [the heavenly things], not on things that are on the earth [which have only temporal value]. *3 For you died [to this world], and your [new, real] life is hidden with Christ in God. *4 When Christ, who is our life, [a]appears, then you also will appear with Him in glory.  *5 So put to death and deprive of power the evil longings of your earthly body [with its sensual, self-centered instincts] immorality, impurity, sinful passion, evil desire, and greed, which is [a kind of] idolatry [because it replaces your devotion to God]. *6 Because of these [sinful] things the [divine] wrath of God is coming [b]on the sons of disobedience [those who fail to listen and who routinely and obstinately disregard God’s precepts], *7 and in these [sinful things] you also once walked, when you were habitually living in them [without the knowledge of Christ]. *8 But now rid yourselves [completely] of all these things: anger, rage, malice, slander, and obscene (abusive, filthy, vulgar) language from your mouth. *9 Do not lie to one another, for you have stripped off the old self with its evil practices, 
*10 and have put on the new [spiritual] self who is being continually renewed in true knowledge in the image of Him who created the new self— *11 a renewal in which there is no [distinction between] Greek and Jew, circumcised and uncircumcised, [nor between nations whether] [c]barbarian or [d]Scythian, [nor in status whether] slave or free, but Christ is all, and in all [so believers are equal in Christ, without distinction].  *12 So, as God’s own chosen people, who are holy [set apart, sanctified for His purpose] and well-beloved [by God Himself], put on a heart of compassion, kindness, humility, gentleness, and patience [which has the power to endure whatever injustice or unpleasantness comes, with good temper]; *13 bearing graciously with one another, and willingly forgiving each other if one has a cause for complaint against another; just as the Lord has forgiven you, so should you forgive. 
*14 Beyond all these things put on and wrap yourselves in [unselfish] love, which is the perfect bond of unity [for everything is bound together in agreement when each one seeks the best for others]. *15 Let the peace of Christ [the inner calm of one who walks daily with Him] be the controlling factor in your hearts [deciding and settling questions that arise]. To this peace indeed you were called as members in one body [of believers]. And be thankful [to God always]. *16 Let the [spoken] word of Christ have its home within you [dwelling in your heart and mind—permeating every aspect of your being] as you teach [spiritual things] and admonish and train one another with all wisdom, singing psalms and hymns and spiritual songs with thankfulness in your hearts to God. *17 Whatever you do [no matter what it is] in word or deed, do everything in the name of the Lord Jesus [and in dependence on Him], giving thanks to God the Father through Him.
===용납하다..받다, 참다, 견디다..ajnevcw(430, 아네코) ==사랑의 시작=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아네코(Homer 이래)는 아나(ajnav, 303)와 에코(e[cw, 2192: 가지다, 쥐다)에서 유래했으며,
(a)  '들어올리다, 지지하다',
(b)  '버티다, 견디다, 참다',
(c)  '너그럽게 보아주다, 관대히 다루다, 묵인(시)하다'.
(d)  '자제하다'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아네코는 70인역본에서 16회 나오며, 어떤 행동이나 감정을 참거나 억제한다는 개념을 가진 히브리어 단어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창 45:1에서 사람에 관하여, 사 1:13; 사 42:14에서 하나님에 관하여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멸망에 대하여(사 64:11), 혹은 자비(사 42:14)로 말미암아 자제하신다. 사 63:15에서 이 의미는 '관대히 다루다'라는 의미에 흡수되어 버린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아네코는 신약성경에서 1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마 17:17에서 아네코는 인격적 대상에 대한 예수님의 분노의 질문에서 '참는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병행구절, 막 9:19; 눅 9:41). 
......예수님께서 이 질문을 하신 것은 제자들이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아이를 고치지 못한데서 비롯되었다. 예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제자들과 함께하셨고 삼년 동안 그들과 같이 행동하셨다. 그러나 여기에, 그 시대의 특징이었던 옛부터 있어온 불신앙이 다시금 예기치 않게 나타났으며, 이것 때문에 그들은 아이를 고치지 못했다. 예수님은 자기의 제자들로부터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할 권리가 있었다.
(b)  아네코는 비인격적 대상들의 <모든 수치-모욕-학대-편견-폭력-약탈-박해 등에 대하여> '참거나 견디다'((나를 참아주신 JC바라보며 그냥 참아 견딤으로 받아 주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① 고전 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② 살후 1:4,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c)  아네코는 교훈 및 권면에 관하여 특별히 '받는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① 히 13:22,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② 딤후 4: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③ 고후 11:4,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d)  아네코는 인격적 대상들에 관하여 '받는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① 골 3: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서로'"라는 말 속에서 이 단어에 대한 신약적 용법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즉 용납하는 마음 속엔 자기 중심적 요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소명 중 한 가지 필수적 요소는 다른 사람에 대한 봉사인 것이다. 또 알렐론(서로)이란 말에서 용납의 상호 관련적 특성을 찾아볼 수 있다.
엡 4:2에서도 이러한 표현("서로")이 사용되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② 고후 11:1, "원컨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컨대 나를 용납하라". 
바울은 사도적 권위를 전혀 표방하지 않고 온유하고 낮은 자세로 그들에게 접근한다. 그는 사도이자 또한 그리스도의 진리의 전달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사랑으로 고린도인들을 용납하신다. 그들도 바울을 용납해야 한다. 여기에서 상호 용납이라는 강력한 신학적 개념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들에게 보내진 자를 용납하는 것은 곧 그를 보낸 분을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③ 고후 11:19; 고후 11:20, "19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20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 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찌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 Schlier; U. Falkenroth; C. Brown). 
===용서하다, 값없이 주다, 은혜를 베풀다....carivzomai(5483, 카리조마이) ===사랑의 완성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카리조마이(Homer 이래)는 카리스(cavri", 5485)에서 유래했으며,
(a)  '자비롭게 주다, 값없이 주다, ~을 위해 즐거운 일을 행하다, 친절하다, 인자하다, 잘돌봐주다, 은혜를 베풀다, 호의를 베풀다, 총애하다, 용서하다',
(b)  '유쾌하다, 기분좋다',
(c)  '희생 제물로 신의 은총을 구하다'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카리조마이는 70인역본에서 12회 나오며, 히브리어 나탄(주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집회서와 마카베오서에서도 '주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카리조마이는 신약성경에서 23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호의에> 맡기다..맡겨주다) (<호의로> 석방되다)
행 3:14에서 바라바는 백성들의 호의로 석방되었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행 25:11에서 바울은 백성들에 대한 호의로 자기를 그들에게 넘겨주지 말라는 부탁을 한다.
행 27:24에서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그와 함께 여행하는 자들의 생명을 맡기셨다: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눅 7:21(참조: 눅 4:22)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하고 있으며, 눅 7:42-43은 또한 전형적으로 누가다운 본문이다.
(b) (<은혜로, 선물로> 아낌없이 내어 주다, 베풀다 --> 또한 고난중에도 감사하며 순종함에 대해 영광으로 보상하신다) (상호간에 용서하다)........<대신 죄과를 (긍휼의 마음을 따라) 변제해 주고 잊어버리다..대가를 바라지 않다>.
카리조마이는 바울에게 있어서 "주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① 롬 8:32에서 구원론적인 뉘앙스가 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② 고전 2:12에서 명사와 뜻이 가깝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③ 빌 1:29에서 고난을 선물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④ 예수님께서 퀴리오스(주)가 되신 것은 빌 2:9에서 순종에 대한 보상이라고 한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⑤ 골 3:13(엡 4:32)에서 카리조마이는 '용서하다'를 의미한다: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신자들은 주님이 용서하셨기 때문에 서로 서로 용서해야 한다.
골 2:13에서도 마찬가지다: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참조: H. Congzelmann; H. -H. Esser)
===
===[마6:21..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음 heart.....kardiva(2588, 카르디아)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카르디아(Homer 이래로)는 '마음'을 의미하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본래 생리학적으로, 사람이나 짐승의 신체의 중심기관으로서의 마음에 대하여 사용되었다(Homer, Aesch., Plat., Aristoph. 등)
(b)  비유적으로 도덕적, 지적 생명의 자리로서의 마음, 즉
① 감정과 열정의 자리(분노, 용기나 비겁, 기쁨이나 슬픔, 사랑과 미움 같은 것을 나타낸다),
② 생각이나 상상력의 자리,
③ 의지와 결심의 자리를 의미한다.
(c)  또 다른 비유적 용법으로, 자연에 관한 특별한 의미로 사용될 때 '나무의 심'과 '식물의 종자' the seed of plants 였다. 또한 카르디아는 핵심 즉(인간, 동물, 식물의) 가장 깊숙한 부분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도 지녔다.
이 단어는 더 이상 단순히 신체의 중심부를 지칭하는 말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의 지적, 영적 중심부를 지칭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카르디아는 70인역본에서 약 800회 이상 나오며, 주로 마음을 뜻하는 레브와 레밥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70인역본에서 카르디아는 감정적인 생활, 지적인 생활, 의지적인 생활 및 종교적 생활을 포괄한 인간 생활의 중심이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카르디아는 신약성경에서 148회 나오며, 공관복음서에 47회, 요한복음에 6회, 사도행전에 17회, 바울서신에 52회, 공동서신에 13회, 히브리서에 10회, 계시록에 3회 사용되었다.
(a)  카르디아가 신체의 중심기관이며, 육체적 활력의 자리라는 사상은 눅 21:34("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행 14:17의 시적 표현("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과 약 5:5에만 나타난다:"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참조: 삼상 21:7; 시 101:5; 시 103:15).
(b)  카르디아는 인간의 내부 생명과 영혼의 모든 힘과 기능의 근원과 자리이다.
① 카르디아는 느낌과 감정, 욕망, 정욕의 자리이다. 기쁨(행 2:26; 요 16:22; 행 14:17), 고통과 슬픔(요 16:6; 요 14:1; 요 14:27; 롬 9:2; 고후 2:4; 행 2:27; 행 7:54; 행 21:13; 눅 4:18), 사랑(고후 7:3; 고후 6:11; 빌 1:7), 욕망(롬 10:1; 눅 24:32), 정욕(약 3:14; 마 5:28; 마 6:21 등).
② 카르디아는 이해와 사고와 반성의 자리이다.
마 12:34(과 병행구),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마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라"
막 7:21(과 병행구),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눅 1: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눅 2: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눅 9:47,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행 8:22,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고전 2: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눅 2:19; 눅 2:51,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마 9: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막 11: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마 24:48(과 병행구),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롬 10: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계 18:7,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눅 24:25,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③ 카르디아는 의지와 결정의 자리이다.
고후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행 11:23,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전 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전 7:37, " 그러나 그 마음을 굳게 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할 권리가 있어서 그 처녀 딸을 머물러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
눅 21:14,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행 5: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요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계 17:17,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행 5: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골 4:8, "내가 저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낸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엡 6:22,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저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따라서 카르디아는 인간의 외부와 대조하여 인간의 내부 전체를 대표한다.
살전 2:17,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고후 5:12,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막 7:6(과 병행구),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 15: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롬 10:8, "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고후 6:11,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롬 2: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행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행 4:32,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골 2: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요일 3: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벧전 3:4,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④ 카르디아는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종교적 중심지이며, 종교적 생활의 뿌리이며 도덕적 행위를 결정하는 곳이다(예: 눅 16:15; 롬 5:5; 롬 8:27; 엡 3:17; 히 8:10; 벧후 1:19; 죄인의 마음, 막 7:21; 요 12:40; 엡 4:18; 약 1:26; 구속받은 자의 마음, 마 11:29; 딤전 1:5; 살전 3:13; 골 3:22; 벧전 3:15; 약 4:8, 등).
(c)  "땅의 내부"라는 의미는 마 12:40에서 나온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참조: Walter Bauer ; T.Sorg ; J.Behm). 
=======
심장 : ble(레브) 내부 인간(속 사람, 인격), 마음heart(영의 양심), 생각-정신mind, dl성(지식-지혜-이해력, understanding) 감정affection/emotion, 의지will/desire
레브(명남)는 레바브(bb;le)의 한 형태이며, '내부인간(속 사람, 인격), 마음 heart(영의 양심), 생각-정신 mind, 이해력 understanding, 의지 will'를 의미한다.
레브(ble)의 실제적인 의미는 내부기관과 유사 신체기관을 말한다.
그러나 추상적인 의미에서 "마음(ble)"은 인간내부의 총체 혹은 영적인 본질에 대한 가장 풍부한 성경 용어가 되고 있다.
성경 문학에서 이 단어는 성경에서 실제로 인간의 모든 영적인 기능이 "마음"에서 기인되기 때문에 기능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용어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영적인 인격 기능에 대한 가장 빈번한 용례이다. 구약성경에서 레브는 약 600회, 레바브는 약 250회 나온다.
율법서, 예언서, 시편은 종종 '마음(ble)'에 대해 언급한다.
이 단어의 어근은 아카드어, 앗시리아어, 이집트어, 우가릿어, 아람어, 아랍어, 후기 성경 히브리어에도 나온다.
'마음' heart은 창6:5의 사람에 관한 언급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ble)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6:5). 
창 6:6에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레브가 사용되었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레브는 몸의 기관을 가리키기도 한다.
"아론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한 이 판결 흉패를 '가슴' heart에 붙여..."(출28:29), 
"요압이...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압살롬의 '심장' heart을 찌르니..."(삼하18:14), "내 '심장' heart이 뛰고..."(시38:10).
레브는 어떤 것의 내부나 한가운데를 가리키기도 한다.
"...큰 물이 바다 '가운데' in the heart 엉기니이다"(출15:8), "...그 산에 불이 붙어 화염이 충천하고..."(신4:11, 
KJV는 '하늘 한가운데' in the midest of heaven, RSV는 to the heart of heaven), "너는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요..."(잠23:34).
레바브는 신30:14에서와 같이 겉 사람과 대조되는 속 사람에 대하여 사용될 수도 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으리라"(신30:14, 욜2:13),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레바브는 종종 강조를 위해 '영혼' soul과 함께 사용되기도 한다.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기를..."(창17:17),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라"(전1:16).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렘3:15).
욕망, 성벽, 의지의 자리를 '마음'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시86:12).
레브(ble)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 의미로 사용된다.
"정녕히 나의 마음(ble)과 정신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렘32:4)
'마음'은 감정의 자리로 생각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그가 너를 볼 때에 마음에 기뻐할 것이라"(출 4:14, 참조: 삼상 2:1). 그래서 즐거운 마음(삿 16:25), 겁내는 마음(사 35:4), 떨리는 마음(삼상 4:13)들이 있다.
'마음'은 지식과 지혜의 자리로 간주되며 '정신, 지성'의 동의어로 생각되기도 한다. 
'마음'이 '알다'라는 동사와 함께 나올 때 종종 이런 의미를 나타낸다: "너는...마음에 생각하고..."(신 8:5, NASB는 '너는...마음으로 알고'), "그러나 깨닫는(아는) 마음과...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신 29:4, KJV, RSV, 'mind').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참조: 왕상 4:29). 기억은 마음의 활동이다: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욥 22:22).
'마음'은 양심과 도덕적 특성의자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와 우리 주위의 세상의 계시에 어떻게 응답하는가? 욥이 대답한다: "...일평생 내 마음이 나를 책망치 아니하리라"(욥 27:6). 이에 반하여, "다윗이...그 마음에 자책하고"(삼하 24:10). 마음은 인간 행위의 근원이다: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창 20:5, 참조: 창 20:6). 다윗은 '정직한 마음'으로 행하였고 히스기야는 '전심'으로 행했다.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한"(시 24:4)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레브는 반항과 교만의 자리를 나타내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 8:21)고 말씀하셨다. 두로왕도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다: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중심에 앉았도다..."(겔 28:2). 그들은 모두 "죄가 마음 판에 새겨진"(렘 17:1) 유다와 같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지배하신다. 
인간의 자연 그대로의 마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놓여 있다: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그러므로 죄인들은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시 51:10),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시 86:11). 또한 다윗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대상 29:17)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승인을 구한다: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시 62:2).
'마음'은 인간의 내적인 존재, 곧 그 자신을 대표한다. 
마음은 그 자체로서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다(잠 4:4). 사람의 모든 생각, 욕망, 말, 행동들은 그의 내부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렘 17:9). 사람이 자기 자신의 방식대로 행하기를 계속할 때, 그의 '마음'은 점점 더 완고해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여(마음의 부정함을 제거시켜) 그들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도록 하실 것이다(신 30:6).(참조: NEDOT; TWOT).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개)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개개 왕상3:9)
기억은 마음의 활동이다.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욥22:22). "...일평생 내 마음이 나를 책망치 아니하리라"(욥27:6)
이에 반하여, "다윗이...그 마음에 자책하고"(삼하24:10)
마음은 인간 행위의 근원이다.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창20:5, 6)
다윗은 '정직한 마음'으로 행하였고 히스기야는 '전심'으로 행했다.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한"(시24:4)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모두 "죄가 마음 판에 새겨진"(렘17:1) 유다와 같이 되었다.
#,마음이 지배되고 있으면 하나님의 사람.
그러므로 죄인들은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시51:10),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시86:11)
또한 다윗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대상29:17)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승인을 구한다.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시62:2)
'마음'은 인간의 내적인 존재, 곧 그 자신을 대표한다.
마음은 그 자체로서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다(잠4:4)
#,결론
1) 하나님은 사람들 속(마음)에 함께 하시길 원하신다.
사람의 모든 생각, 욕망, 말, 행동들은 그의 내부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렘17:9) 사람이 자기 자신의 방식대로 행하기를 계속할 때, 그의 '마음'은 점점 더 완고해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여(마음의 부정함을 제거시켜) 그들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도록 하실 것이다(신30:6).
2) 66권 성경은 "태---맨"으로 하나님의 마음이의 총결이다.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1:1 .$r ar:B; tyviarEB]
신32:12  laer:c]yI AlK; ynEy[el] hv,mo hc;[; r~v,a} l/d=G:h' ar:/Mh' lkol]W hq;z:j}h' dY:h' l~kol]W
계22: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계22:21  JH cavri" tou' kurivou jIhsou' meta; pavntwn amhn
3) 테멘!(tyviarEB]+amhn) 심장 : ble(레브) 내부 인간, 마음, 정신, 의지
레브(ble)는 결론적으로 히브리 알파벧 즉 5경의 마지막 글과 처음 글자이다. 신명기의 마지막 자와 창세기의 첫 자이다. = 성경 전부가 하나님의 심정이다.
====
====마태복음 6장 5-8절====
6:5 “그리고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되지 말라. 그들은, 어떻게든 사람들에게 그들이 나타내어지게(수동태; 드러내어지게) 하려고, 회당 안과 큰 거리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진실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그들의 상을 받고 있다(현재). 
6:6 그러니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네 문을 닫고, 은밀한 것 안에 계시는 분인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러면 은밀한 것 안에서 보시는 분인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되돌려주실, 보상해주실) 것이다. 
6:7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이 그러하듯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많은 말로라야 그것들이 응답된다(수동태; 들려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6:8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을 닮지 말라(수동태; 그들과 같아지지 말라). 왜냐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그에게 구하기도 전에 너희가 갖고 있는 필요를(의역: 너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私譯)
----------
내가 알아서 의식적으로 챙기지 않아도 무의식적으로 숨을 쉬고 살도록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다는 것이 신비로울 정도로 새삼 놀랍다. 그 ‘목의 숨’은 인간의 소관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소관이라는 것을 알고 살라는 뜻이리라. 그러고 보면, 우리가 ‘무의식’이라고 일컫는 인간 내면의 ‘깊이’야말로 우리 ‘마음속 하늘’이고, 하나님이 계신 자리가 아니겠는가. ‘무의식적으로’ 숨을 쉰다는 것 자체가 지금도 하나님이 거룩한 영으로 내 안에 계셔서 나를 다스리신다는 뜻이요, 그런 면에서는 이런 ‘하나님의 다스림’도 ‘하나님의 나라’라 이를 만하다.
“기도는 호흡과도 같다”. 호흡처럼 기도도 신앙인에게는 삶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이 말도 맞는 말은 아니다. 호흡이 무의식적인데 반해 기도는 사뭇 의식적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무의식적인 호흡과도 같은 그 기도를 의식적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야말로, 우리 기도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기도를 하다보면, 가슴이 동하기보다는 생각이 앞서고, 생각이 앞서다 보니 머리만 굴리게 된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지금까지, 기도가 무엇이고 어떠해야 하는지조차 제대로 묻지 않은 채 기도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기야 기도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기도하는 건 분명 아니다.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곰곰이 되짚어보면, 딱히 기도가 무엇인지를 배운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새롭게 새겨들어야 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여기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는 6장 9절의 말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여기서 <그러므로>는, “위선자들처럼 되지 말라”는 5절의 말씀과 “이방인들이 그러하듯이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7절의 말씀을 전제한다. 위선자들의 기도와 이방인들의 기도를 비판하신 전반부의 가르침을, 이 “그러므로”가 이어받고 있다. 그리고 이 ‘그러므로’를 근거로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면서, 그 “이렇게”를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으로 제시한다. 가르침의 전반부와 후반부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와 ‘이렇게’라는 부사로 나뉘어 있는 구조이다.
먼저 전반부의 비판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예수님은 “위선자들처럼 되지 말라”고 하시면서, 기도하는 사람의 ‘위선’을 경계시킨다. 기도의 ‘내용’이나 기도하는 사람의 ‘자세’를 문제 삼는 게 아니다. 기도하는 ‘사람’ 자체를 문제 삼는다. 기도하는 걸 보니, 그 ‘사람됨’이 “위선자”라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의 눈에만 보이는 위선이고 사람됨이다. 무얼 보고 그렇게 판단하신 것일까? 
“어떻게든 사람들에게 그들이 나타내어지게(수동태) 하려고, 그들은 회당 안과 큰 거리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기도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이 문제될 리는 없다. 문제는 ‘장소’다. 그들은 기도를 해도, 굳이 “회당 안과 큰 거리의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회당이나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큰 거리가, 그들이 좋아하는 기도 장소라는 말이다. 기도 장소야 어디면 어떠랴 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이 굳이 그런 장소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들 속내를 간파하기에 충분하다. ‘호포스’(어떻게 하든지, ~하기 위하여)라는 접속사로 이어지는 하반절의 말씀이, 예수님에게 들켜버린 그들의 속셈을 말해준다. “어떻게든 사람들에게 그들이 나타내어지게(수동태) 하려고” 그런 장소가 의도적으로 택해졌음이 폭로된다.
그런데 ‘나타낸다’는 말이 ‘수동태’로 표현되었다는 것이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그들로서는, ‘나타내려고’ 그런 게 아니라고 극구 부인할 것이다. 다만 사람들에게 ‘나타내어졌을’ 뿐이고 그들 눈에 뜨인 것뿐이라고, 변명할 여지는 충분히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주장은, 그들이 ‘나타내려고’ 그런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나타내어지게(수동태) 하려고’ 했던 것만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6장 1절의 “보이려고”(우리말 번역)와 “보이게 하려고”(필자의 번역)의 차이만큼이나 미묘한 낌새가 헬라어 원문에서는 느껴진다. 더구나 ‘어떻게든(호포스) 나타내어지게 하려고’ 그랬다는 그들의 속셈을 놓고 보면, ‘위선자들’이라는 욕을 먹어도 싸다 싶을 정도로 그들 ‘사람됨’은 핫길(하질)이다. 그들에게는 기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기도한다는 ‘행위’ 자체가 중요했다. ‘경건한 행위’인 기도를 함으로써, 자기를 ‘의로운 자’로 드러내어지게 하려는 것만이 그들의 관심사였던 것이다. 경건한 행위를 하면서도 그들 마음은 전혀 경건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눈에 비친 그들의 위선이다.
그렇다. 남의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일지를 지나치게 관심하다 보면 그렇게 된다. 게다가 잔머리까지 굴리게 되면, 겉 다르고 속 다른 이 위선은 그 사람됨을 여지없이 망가뜨린다. 그들은 ‘경건한 자’가 되려는 게 아니다. ‘경건한 자라는 소리’를 들으려는 것뿐이다. 의롭게 되기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의로운 자라는 칭송’을 받으려고 그랬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실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고 하면서, “그들은 그들의 상을 받고 있다(현재)”고 선언하신다. 사람들로부터 듣는 ‘의로운 자’라는 그 ‘칭송’이, 바로 그들이 받고 있는 ‘상’의 전부라는 선언이다. 6장 1절의 말씀대로라면, 그런 사람들은 더 이상 하늘 아버지에게서는 받을 상이 없다는 확정판결이나 다름없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듣는 ‘칭송’과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상’이 극단적으로 대비되어 말해지고 있다.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훌륭한 목사’니 ‘보기 드문 신앙인’이니 하는 평가도, 이 말씀 앞에서는 무색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로부터 듣는 칭송, 그거야말로 듣고 돌아서서 ‘귀를 씻어야’ 할 말들이다. 그런데도 교회의 현실을 놓고 보면, 어떻게든 자기를 ‘나타내어지게 하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슬픈 현실이고, 불쌍한 사람들이다. 무엇을 어찌 행해야 할지를 예수님이 가르치면서도, 그 행하는 사람의 사람됨을 무엇보다 중시하셨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도 5절의 말씀은 좀 더 세심히 새길 필요가 있다. 이 5절 말씀은, 이 말씀에 대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져왔던 생각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너희가 기도를 할 때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대부분의 우리말 번역(새번역, 표준새번역, 개역개정판)이 “하지 말라”고 번역해놓고 있지만, “되지 말라”고 번역한 <개역성경>이 훨씬 원의에 가깝다. 
위선자들이 기도하듯이 ‘그렇게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기도를 하더라도, 그들처럼 위선자는 <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런 식으로 기도하면 불가피 위선자가 되게 마련이니, ‘위선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이다. 경건한 행위인 기도가 오히려 사람을 ‘몹쓸 사람’(위선자)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두려운 경고이다. 겉으로 경건한 체하는 사람들이 빠지는 함정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면 어찌해야 할까? 기도를 하면서도 위선자가 되지 않으려면, 기도하는 우리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고, 기도하는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이어야 할까?
예수님은 우리더러, 아니 나더러, “네 골방으로 들어가라”고 하신다. 5절의 “너희”가 보다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너”로 바뀌어 있다. 그래서 ‘네 골방’이라고 한다. 일단은 5절에서 말했던 “회당 안과 큰 거리의 모퉁이”에 대비되는 ‘골방’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이 ‘골방’을 집안에 따로 마련한 기도처(祈禱處)처럼 여겨서는 아니 될 것 같다. 다음에 이어지는 “네 문을 닫고”라는 말에서, ‘네 문’이라는 그 말이 ‘골방 문’을 지시한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우리말 성경은 “네 문”을 그냥 “문”으로 생각하여,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라고 번역해놓고 있다. 그 ‘문’을 마치 ‘골방 문’인 것처럼 착각한 것이다. 이러한 착각은, 그 ‘골방’을 마치 기도하기 좋은 ‘은밀한 장소’처럼 생각한 번역자의 단견을 여실히 드러낸다. 해석을 염두에 두지 않고 번역했음이 확연히 드러난다. 단언컨대, 여기서 말하는 ‘네 골방’은 ‘장소’로서의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기도를 하면서도 “나타내어지게 하려고”(5절) 했던 위선자들의 마음과는 다른, 그보다도 더 깊고 그윽한 우리의 마음자리를 지시한다고 보아야 마땅하다. 우리 저마다의 마음속에, 들어가야 할 “네 골방”이 있음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네 문을 닫고”라는 말 다음에 “은밀한 것 안에 계시는 분인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는 말이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키 어렵지 않다. 네 마음속 ‘은밀한 자리’야말로 네가 들어가야 할 골방이고, 그 ‘마음속 골방’이야말로 ‘네 하나님이 계신’ 곳임을 깨달아 알라는 뜻이다. 기도의 대상인 ‘네 하나님’은 “은밀한 것 안에” 계시고, ‘거룩한 영’으로 ‘네 마음속’에 계신다는 가르침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나의 ‘밖’에 계신 ‘타자’(他者)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이해되기 힘든 말이다. 구약에서 말하는 ‘야웨 하나님’이 “나는 나다”라고 하신 분임을 알아야 이해가 가능하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은, ‘나의 <나>’이신 ‘나의 <하나님>’이 ‘나의 은밀한 것 안에(내 골방에)’ 계신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신 것이나 다름없다.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그 ‘네 아버지’를 “은밀한 것 안에 계시는 분”으로 말하는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풀어 말하면, 네 기도의 대상인 ‘네 하나님’은 ‘은밀한 것 안에 계신 분’이기 때문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라”고 하신 것이고, “네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또 그래야 “은밀한 것 안에서 보시는 분인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되돌려주실, 보상해주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이 5절과 6절은, 기도를 하면서도 자기를 ‘나타내어지게 하려고’ 하는 그 마음의 위선을 경계시키고 있다고만 보아서는 아니 된다. “네 골방으로 들어가라”고 하면서, “네 문을 닫고, 은밀한 것 안에 계시는 분인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신 뜻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어쩌면 우리가 의식적으로 하는 기도와는 다른, 더 깊은 차원의 기도를 가르친다고 볼 수 있다. 우리 마음의 영적 차원이라고 일컫는 ‘무의식의 깊이’를 지시한다고 보아도 별로 틀린 이해는 아닐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로마서 8장 26절에 기록된 바울의 말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영(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돕는다.”고 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마땅히 기도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영(성령)은 말할 수 없는 신음(탄식)으로 대신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7절에서는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은 영의 의도(생각)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십니다.”(롬 8:27)라고 말하기도 한다. 과연 우리는 지금까지 기도를 하면서도,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대신 간구하신다’는 것을 믿기나 했던 것일까?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신다는 것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우리가 마음 깊이 품어 지닌 ‘영의 의도’를 우리가 입으로 아뢰는 몇 마디의 말로 대신할 수 없음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방인들이 그러하듯이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7절의 가르침도 새겨들어야 마땅하다. 여기서 ‘중언부언하다’라고 번역된 ‘밧톨로게오’라는 말은 ‘말을 더듬다, 같은 말을 반복하다, 재잘거리다’라는 뜻이다. “많은 말”이라는 명사가 연이어 쓰이고 있는 것을 보면,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이 말씀은 기도할 때에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조심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방인들의 기도가 그런 식이었다는 것이다.
말이 많기로 치면, 우리도 그들 이방인 못지않기 때문이다. 새벽기도고 철야기도고 할 것 없이, 몇 시간이고 입이 쉴 새가 없다. 더구나 통성기도라도 할라치면, 하늘이 들썩거릴 정도로 고함을 내지르는 사람도 더러는 있다. 하늘을 향해 두 손 치켜들고 부르짖는 것을 보면, 마치 하나님을 향해 데모(?)를 하는 것 같다.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떼를 쓰듯이 졸라댄다. 심지어 말투조차도 “아바지, 이러이러 해주셔야겠습니다.”하는 식이다. 말이 많은 것은 둘째 치고, 태도조차도 불손하다. 그야말로 막무가내다. 왜 이런 식으로밖에는 기도하지 못하는 것일까? 내가 원하는 ‘내 뜻’을 관철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위 ‘응답받는 기도’는 그래야 한다고들 생각해온 것이다.
바로 이 ‘생각’이 틀린 생각이다. 오늘날 우리처럼 그들 이방인들이 왜 중언부언하면서 말을 많이 하는 지, 그들의 속생각을 예수님은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말 많음으로라야(그들이 말을 많이 해야) 응답받는다(수동태; 들려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그들을 닮지 말라”(6:8)고 하신다. “그들과 같아지지(수동태) 말라”는 말씀이다. 이리되면 이것은, 단순히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정도의 가르침이 아니다. 더 깊이 들어간다. 그들 이방인들이 ‘생각하는’것처럼, 기도를 그리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도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생각’ 자체를 바꾸어주려고 하신다. 바로 이 점이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이다. 지금까지 해온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잘못된 기도였는지, 이 대목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런 면에서 이 6장 8절의 가르침은 참으로 중요하다.
곰곰이 뜯어가면서 찬찬히 씹어보자. 왜 이방인들의 ‘생각’이 틀렸는지 잘 설명되어 있다. 왜 기도할 때에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는지, 그 까닭을 예수님은 이렇게 설득하신다. “왜냐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도 전에 너희가 갖고 있는 필요를 알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너희는 너희가 필요로 하는 것을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너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너희가 무엇이 필요해서 기도하는지, <구하기도 전에> 이미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구하지 않아도 아버지가 이미 알고 계시는데, 너희는 마치 너희가 필요로 하는 것을 그분이 알지 못하기나 하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여,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다는 식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는 것이다. 더 적확하게 말하면, 그런 것들을 ‘구하는’ 식의 기도는 이제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어찌 보면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기도를 깡그리 깔아뭉개듯(?) 과격하시다. 이 과격함이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잘못된 생각’을 고쳐 치유하려면 이만한 과격함 쯤이야 감내해야 하지 않겠는가? 머큐로크롬을 바르는 정도로는 안 될 것 같아서 수술 칼을 들이대는 것이라면, 그 칼끝에서 우리의 어떤 잘못이 잘라내어 지고 있는지 두 눈 똑바로 뜨고 분명히 살펴야 마땅하다. 과연 우리 기도의 무엇이 잘못인지를 밝히 깨달을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이 말씀 속에서 주목하는 것은, “구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이테오’라는 말이다. ‘요구하다, 요청하다, 간구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 말이다. 물론 이것이 ‘요구’든 ‘요청’이든 ‘간구’이든, <달라>는 뜻인 것만은 분명하다. ‘필요해서’ 원하고 또 ‘원하는’ 것이기에, 달라고 ‘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니 달라고 요구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도 이 말 속에는 전제되어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이 ‘아이테오’라는 헬라어는, ‘누구에게 무엇을 요구한다’고 할 때 쓰는 말이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가 이 문장에서는 “그에게”이다. 그리고 <무엇을>에 해당되는 말이 “너희가 갖고 있는 필요를”이라는 말이다.
결국 이러고 보면 예수님은, “너희가 갖고 있는 필요를 그에게(아버지께) 구하는” 것이 지금까지 너희가 해온 기도였다는 것을 정확하게 집어내고 있다. 달리 말하면, 너희는 지금까지 이방인들처럼 하나님께 ‘주십시오, 주십시오’ 하면서, 너희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만 하는 <아이테오의 기도>만을 해왔다는 비판이다. 필요한 것 모두를 주워섬겨야 하나님께서 들으신다고 잘못 생각했으니, 많은 말로 중언부언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느냐는 지적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정작 너희가 갖고 있는 그 필요를 “너희가 <구하기도 전에> 이미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필요한 것을 구하는’ 그런 식의 기도는 하지 말라는 것이, 7절과 8절을 통해서 예수님이 일러주고자 하신 가르침의 요체이다.
우리 역시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기도해왔는데, 이제 그렇게 기도하지 말라고 하시니 도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이 막막함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던지 어떤 해석자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버지께서 아시지만, 그래도 기도해야만 주신다.”고 억지를 쓰기도 한다. 박사도 가짜임이 들통 나는 판국에 학자라고 함량미달이 없을까마는, 그래도 이건 너무했다. 바로 이런 억지 해석 때문에 기도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생각’이 고쳐지지를 못했고,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를 책으로 엮어 해석해내면서도 그 진수를 거머잡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는 9절의 말씀 속에서 그 <이렇게>가 제대로 해득되려면, 이 <그러므로> 앞에서 눈앞이 캄캄해지는 막막함을 한번쯤은 필히 느꼈어야 마땅한데, 그 막막함에 투철하지 못했던 것이다.
제기하는 문제점은,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씀 속의 그 ‘이렇게’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달라고 하면서 원하는 것만을 구하는 ‘아이테오의 기도’가 잘못된 기도라면, 예수님은 그가 제시하는 기도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어떤 기도를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시고 계신 것일까? 적어도 이 기도문이 머리로 외워서 입으로 주절거리라고 주신 게 아니라면, 여기에는 분명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그분 나름의 뜻이 있을 것이다. 그게 뭘까?
오랜 막막함을 해결해준 것은 6장 33절이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 속에서, 그 “구하라”는 헬라어가 ‘아이테오’가 아니라 ‘제테오’임을 발견한 것이다. 이 두 동사의 차이를 우리말 번역은 별로 괘념치 않는 듯하다. 6장 8절의 ‘아이테오’도 ‘구하다’라고 번역했고, 6장 33절의 ‘제테오’도 ‘구하다’라고 번역해놓고 있다. “구하라(아이테오) 주어질 것이요, 찾으라(제테오) 찾아질 것이다.”라는 7장 7절에서 그 차이가 번역에 조금 반영되었을 뿐이다. 사실 ‘제테오’라는 이 헬라어 동사는 일반적으로 ‘구하다, 찾다’라는 뜻과 함께 무언가를 ‘탐구하다, 추구하다’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이 ‘제테오’라는 말에서 ‘추구하다’라는 뜻을 주목한다. ‘달라’는 뜻으로 구하는 것과 ‘추구하는’ 뜻으로 구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달라’는 뜻으로 구하면, 불가피 상대가 있게 마련이다. ‘누구에게’ 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추구하는’ 뜻으로 구하면, 구하는 ‘무엇’은 있지만 그걸 ‘누구에게’ 구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내’가 구하고, 내가 ‘추구할’ 수밖에 없다. 두 동사의 결정적인 차이는, ‘누구에게’라는 말이 ‘아이테오’에는 따라붙지만 그것이 ‘제테오’라는 말에는 따라붙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6장 33절에서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해도,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다. ‘우리가 추구해야만 할’ 하나님의 나라요 그의 의이다. 6장 25절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도, 그것들보다 <먼저> 추구해야 할 것이 있음을 일러주기 위함이다. 너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기만’ 하면, “너희가 갖고 있는 필요를 알고 계시는”(6:8) 하늘 아버지로부터 먹고 마시고 입는 “그 모든 것들이 너희에게 더하여 주어질”(6:33) 것이라는 약속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버지’가 이런 분인 줄 알지 못하고 잘못 ‘생각’하여, 먹고 마시고 입는 삶의 필요조건들을 충족시켜달라고 졸라대는 기도만을 해왔다. ‘아이테오의 기도’만을 했을 뿐 ‘제테오의 기도’는 할 줄 몰랐던 것이다. ‘아이테오’보다는 ‘제테오’가 먼저요 우선인데, 우리는 ‘아이테오’에만 급급하여 ‘제태오’는 뒷전이었던 것이다. 바로 그 ‘제테오’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면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다음에 이어지는 ‘주기도문’인 셈이다. 모쪼록 우리가 해야 할 기도는 ‘아이테오의 기도’가 아니라 ‘제테오의 기도’임을 잊지 말기 바란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다. 네 안에서 내가 기뻐한다.”는 말씀이, 내딛는 여러분의 발걸음을 새롭게 할 것이다.
===
===

##JC께서 찾으시는 그 사람...성육신하여 오신, 대속의 십자가 죽음-부활-승천을 통해 <신성과 함께 참 인성을 얻으신> 만인의 구주-Q-대제사장이시요 차원의 제약 받지 않으신ㄴ 그영이 되사, 영접하는 이 곧, JC를 개인적인 구주와 Q로 진정 영접하여 하나됨으로 붙좇는 믿음과 그의 주님-주인-왕-머리로 삼고 친밀한 영적 교통과 직관으로 주님의 움직임과 운행하신-행하심따라 한걸음씩 동행하는 자 그의 도드 삼으신 분...구주의 부활 승천 후에도 (하늘에서 하나님 곁에서, <몸소 사람으로서 이 땅을 사시면서 인간의 연약함을 겪어 아시고 모든 시험 받고 십자가 대속의 죽음으로 이기셨기에> 그토록 많은 눈물과 부르짖음으로 여전히 유일무이한 중보,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중보하고 계시는 분을 바라볼지니.. <오직 모든 세대의 그 어느 한 사람도 멸망당하지 않도록, 회개하고 돌이켜 주 이름 불러 영접하여 믿어들어감으로써 아버지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Q이 사람을 지으신 이후로 그토록 오래 참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영적 병듦, 곧 무지무각-연약함에처해 있어서 그들이 스스로 무엇 하고 있며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자각이 없어 전혀 모르고 있음에 대해 긍휼히 여기사 모든 자비하심으로써] 더 참아주시도록 간구하고 계심>으로 인해(공의의 Q, 그분의 쌓여진 진노 쏟아냄을 아드님의 십자가 대속의 보혈 흘림의 공로를 보사 보류하시고 Q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더 오래참아주시도록..그리고 땅끝까지 모든 이들이 주님의 복음 듣도록 번파되기까지 기다려부시도록...이것이 주의 재림 지연의 유일한 ), 바로 그분 그리스도의 신부이자 어린양의 아내-반쪽으로서 JC의 마음=곧 생각과 심정을 알아드리며 날마다 눈물 범벅이 되어 계신 사랑하는 분 구주 JC의 마음을 찢는 애통의 중보에 전존재 기울여 동참하는자, 바로 그분의 사랑하심과 포기할 수 없는 열정을 그 자신이 경험하였고, 그분의 모든 것을 그 자체로 사랑하기에, 모든 것 내려놓고 내어 비워드려 그분으로 채워지기를 갈망하며, 막힘없이 교통하며 순종하며, 그분의 은혜에 동참함의 친밀한, 다함없는 기쁨으로 넘치며, 상황-환경-형편-처지에 괘념치 않고 일편단심 주와 하나됨으로 붙좇는자.....[마16: 24-28...*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27.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이 때 바로 그 주님이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는 바대로...그분의 긍휼어린 마음으로 한반도, 대한민국과 북한의 영적 실상과 [악이 악을 대하여 서로 권력투쟁하는 가운데 공멸에 빠져들기를 꾀하는] 사탄마귀의 궤계로 인한 영적 착시와 혼돈-염증을 불러 일으키는 현 실상에 대한 참된 이해를 가지고 중보/중재하도록 분별하며 합당하게 부르짖도록 하고 계심을 깨달아야 한다....기도는 결코 사라지지않음..

##기억하라...그리스도의 통치영역을 의미하는 좋은 땅 가나안의 서쪽과 동쪽 경계로서 대해와 요단강, 북쪽 경계 이루는 유브라데 강들은 이제 주님의 부활 능력 안에서 이미 이겼음을 의미한다...그러나, 남쪽 경계를 이루는 지역들인 애굽-에돔-염해는 인본주의(사탄체계인 세상을 의미하는 애굽)-물질주의(육신의 정욕을 의미하는 에돔)-쾌락주의(소돔과 고모라)를 의미하며 가나안 땅 안에조차도 멸절되어야 할 온갖 중독과 사로잡힘의 영적 질병이 만연한 상태임... 이교숭배(우상숭배)-사신숭배(초혼-영매-무당)-기복신앙(몰렉숭배-점쟁이-복술사-주술사)으로 물들어 있는 바, 이제는 주님의 기도 안에서  깨어나서 기도와 금식으로 영적 무장을 강화해야 한다...지금 모든 나라 족속 백성 방언, 곧 열방의 영적 상황이 그러하다.


[[믿는 이의 완전, 온전, 순전의 선순환, 그 시너지에 대한 느낌]]..주 안에 거함(요15:4-17)은 접붙임/붙좇음의 교통 살기..곧 주 이름 불러 앙망하며 먼저 Q, 말씀 청종, 주님 순종-동행함, 주님이 행함으로 보여주신 사랑 같이 (자기를 내어줌에 이르기까지) 서로 형제 사랑함 이룸, 이것이 JC 사랑함이니, 이로써 아버지께 사랑 받고, 주님 사랑 받음 되며, (아버지-아들-성령이 함께 오사) 그분의 형상의 실제 나타내심(요14:21,24-26) 이룸 

살아 생동하는, 발휘하는 산 믿음<진리를 믿고 붙들어 하나되고, 이제 주 이름 불러 주께 여쭈어 그 다음 행보를 인도받아 그분 임재 안에서 그대로 따라가기>을 실행함으로 그리스도를 경험함의 선순환 안으로 들어감 -->순전<보혈로 씻김>에서 <주님 알고 사랑함으로 부어주신 사랑 통해 역사하는 믿음으로 사랑하며 반응함의>온전으로, 이제 더 나아가 <무시로 하나님 임재 앞에서 행함의> 완전의 선순환 시너지 이룸.

...CORAM DEO  SOLA FIDE, SOLA SCRIPTURA, SOLA Christos, SOLI DEO GLORIA 

....완전 = 주님 말씀 전적 순복(청종...몸의 활동 돕게 하신 섬김이 역할 기능, 직분자의 구비 조건과 태도 완비 : 나는 죽고 구주 사심으로 살기..주가 준비하신 바로 그것을, 복음과 그분의 풍성을 그대로 살아내며 공급함)-

---온전 = (친히 내주하사 도우시며 위로-격려-세우시는 HS따라) 고난의 섭리 통해 연단된 JC 인격 그대로 닮는 성화---

---순전 = 날마다 회개/보혈에 씻긴, 자기 십자가 감당하며 주와 동행 이룸의 필수 요건


***인간의 연약함 = 영적 무지무각 + 미혹/오도됨 --> 인간의 절대무력함으로 인해 그 연약함의 당연한 귀결은 영적 사망(하나님으로부터 전존재적 단절...사탄의 손쉬운 먹이감으로 전락...하나님을 비웃고 조롱하는 수단으로 전락함) -->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화해를 위해 하나님이 인정-지명하여 세운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로우신 성품을 그대로 반영하면서(즉, 중보의 제사장은 하나님의 임재-현존 동시에 죄를 속하기에 합당한 희생과 예물을 하나님께 드려 중재하는  제사장이 필요함.. 


***우리 주 하나님, 말씀속에 계시며 말씀하시며 구원의 말씀을 부탁하신 아버지, 

모든 인생과 피조세계의 창조주-주권자-통치자-모든 공급근원, 유일무이한 절대 필요충분-모든 풍성부요충만과 참 능력근원<절체절명에서조차> 그 자체이신 아버지여

...사모하며 앙망하오니, 더이상  제 마음으로 주님을 제한함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소서 ((무한하신, 본래 제한 받지 않는 분이지만 우리의 무지함과 주관적 제한 안예서 제한 받으시는, 기꺼이 갈망하여 기다리면서 마음 문 열어 달라 노크하고 계시는, gentle하신 분이심))

참되게 기도하신 그리스도의 <기도의 영>을, <고난 통해 순종함 배우시고 온전케 되신 순종의 영을> 부어주소서...

<하나님 경외함>이루신 그리스도의 <일향 미쁘신, 일편단심, 경건의 영을> 부어 주소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말씀하시는 주 임재 앞에서 <완전한 경외함을 끝까지 견지하심으로> 경건함의 모본 보이신 JC 주님이시여,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아버지께 드리신 바 열정적인, 전존재 쏟아붓는 통곡과 눈물, 부르짖는 간구와 소원 기도(결코 포기함 없이 구하고 찾고 두드림의 열정 공급하사)의 영, 바로 그 영을 오늘이라는 (각자에게 허락하신) 시간동안 주님 얼굴 구하며 주 이름 부르는 나와 모든 형제자매 성도들에게 부어주사 참되게 회복시켜 주소서, 

하여, 그 안에 머무름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 뜻 온전히 이루게 하여 주소서. 

주 이름 부르는 모든 성도마다에게, 고난통해 순종함 배우셔서 온전케 되시고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신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르며, 얻고, [단체적 그리스도] 그 가운데에서 발견되도록 도우소서. 

오 주여, [진정한 참된 영광, 그리스도 빼어닮음, 그리스도의 형상 온전히 이룸, 이를 위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리스도께 자원하여 구하는> 성도 각자의 몸에 채우게 하소서].

===

===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

***은밀하다...(헬) (2927 kruptov(크루프토스)... (히) (5641,rt's תרַסָ)싸타르) ....숨기다, 감추다, 

[사45:14, 15...*14.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소득과 구스가 무역한 것과 스바의 장대한 남자들이 네게로 건너와서 네게 속할 것이요 그들이 너를 따를 것이라 사슬에 매여 건너와서 네게 굴복하고 간구하기를 하나님-(410, אלֵ엘)이 과연 네게 계시고 그 외에는 다른 하나님-(430, היםִלֹאֱ 엘로힘)이 없다 하리라 하시니라  *15.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네게 계시고(베 전치사를 써서 네 안에 계시고) 그 외에는 다른 하나님은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la(엘) 단수 아버지는 네 안에 계시고 그 외에 다른 !yhila(엘로힘) 복수 하나님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하늘들안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는 기도가 성취된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에 구원자 이스라엘의 !yhila(엘로힘) 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la(엘) 이시니이다 하고 나옵니다.  

그래서 la( אלֵ엘), 은 스스로 숨어 계시는 분인데 마태복음 6장에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죠. 그런데 la(엘), 을 사전에서는 전능자 힘센자 .하나님 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la(엘)이 아버지라는 것을 성경에서 찾아내는 겁니다.

1, 그러면 스스로 숨어계시는 la(엘) 아버지가 과연 어디에 숨어 계실까?

이것이 창9:13절에 나오는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노아홍수 후에 다시는 세상을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구름 안에다가 무지개를 두셨습니다.

그런데 애가 3:44절에 보면 주께서 구름으로 스스로 가리우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행1:9절에 보면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아니 하더라 하십니다. 여기서 구름이 가리워가 uJpolambavnw(슈포람바노) 입니다 두 단어 합성어죠. (슈포 uJpo + 람바노 lambavnw) 인데 그 뜻은 취하다, 받다, 입니다. 그러므로 구름이 저를 취해서 영접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la(엘), 하나님은 스스로 숨어계시는데 구름 안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2, 그러면 구름이 뭐냐?

히12:1절에 보면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많은 구름 증인들이 우리 곁에 있을 것을 의미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름은 바로 증인들입니다. 바로 구름 속에 가라워지셨다는 것은 증인이 된 우리 안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눅9:44절에 보면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하시고] 그 다음 45절에서는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나니 이는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셨다]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당신 자신이 숨김이 되셔서 말씀이 열리지가 않는다는 말입니다.

구약의 선지자 스바냐 hy;n]p'x](체판야) 라는 이름이 있는데 이 이름의 뜻이 여호와는 숨어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말씀도 가려져있고 la(엘), 아버지도 스스로 당신을 숨기고 있고, 그리고 창9:13절에 있는 무지개도 구름 안에 가려져 있습니다.

그러면 무지개의 의미는 무엇일까?

겔1:28절입니다.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여기서 무지개는 여호와의 영광의 모습의 광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지개가 여호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 시대에서는 예수님으로, 진리 시대에서는 그리스도 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지금까지 스스로 숨어 계시는 la(엘),하나님에 대해서 계속 강조했는데

3, 그러면 지금부터는 아버지를 살펴봅니다.  말2:10절입니다.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고 있지 아니하느냐 한 하나님 la(엘), 이 지으신바가 아니냐.]

이렇게 구약에서는 한 아버지 la(엘)이 있는데 신약을 헬라어로 기록하면서 모두 다 하나님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엘, 이라는 단어가 없어져버렸죠. 그러므로 신약을 히브리어로 보기 전에는 여호와나 엘을 알 수가 없습니다.

마23:9절을 봅니다.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아버지는 한분이시니 하늘들안에 계신 너희아버지 la(엘), 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내가 하늘들이 되어서 그분이 내안에 계실 때 바로 la(엘)이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죠.

말2:10절을 통해서 볼 때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고 있고 한 아버지가 지으신바인데 여기서 지으신 바라는 단어가 창세기 1장1절부터 ar:B;(바라) rm'a;:(아마르) ld"B;;(바달) 이런 식으로 사역동사가 쭉 나옵니다. 그런데 사역동사는 전부 다 단수로 나오는데 주어인 !yhila(엘로힘) 은 복수로 나왔습니다. 그래서 문법적으로만 말하는 분들은 주어가 집합 명사일 때는 동사를 단수처리 한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수 la(엘), 아버지를 찾아내자는 겁니다.

창1장1절을 보면 !yhila(엘로힘), 은 복수고 ar:B;(바라), 하신 분은 단수입니다 이것을 그냥 문법적으로 넘어가도 상관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수를 찾아내자 이겁니다

고전 8:6절을 보면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la(엘)이 계신데 바로 아버지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엡4:6절에서도 la(엘)은 하나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 이십니다

그래서 이런 성경 구절들을 통해서 la(엘)을 아버지로 보는 겁니다.

애가3:41절에 보면 [마음과 손을 아울러서 즉 한대 모아서 하늘들안에 계신 la(엘)에게 들자]

그리고 시42:8절에는 [나의 생명이신 la(엘)에게 기도하자]

또한 신30:2절에서는 [여호와는 네 생명]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골3:4절에 보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구약부터 계속 연결이 됩니다

출34:6절에서는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

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la(엘)이로다] 하셨습니다.

출34:14절에는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 하는 질투의 la(엘)이다,]

사43:12절에서는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la(엘), 여

호와의 말이니라.]

그리고 삼하22:32절에서도 [여호와 외에 누가 la(엘) 이냐. ]

슥14:9절에서는 [여호와는 한분이시고 그 이름이 하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 !yhila(엘로힘) 이 작정 계획하시고 2:4절부터는 여호와가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그러니까 사역하시는 실체가 !yhila(엘로힘)에서 h/:hy(여호와) 로 호칭이 바뀌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너희 하나님(엘)이신 여호와라고 그럽니다,

4, 그러면 la(엘)을 아버지라고 표현했으므로 이제는 엘 의 속성을 찾아보겠습니다.

신7;9절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la(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신다.]

여기 신실이 히브리어로는 레에만 이고 헬라어로는 피스토스입니다. ...그래서 그냥 보통 신실한 것이 아니라 아주 확실하고 충실한 신실을 말합니다.

5, 신약에서는 la(엘) 을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찾아봅니다.

고후1:18절 [하나님은 미쁘시다], 미쁘시다는 단어가 pistov"(피스토스) 신실입니다

히10:23절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다] 여기도 같은 pistov"(피스토스) 죠

요일1:9절 [저는 미쁘시고-pistov"(피스토스) 의로우시다] ...이것이 pistov"(피스토스)- la(엘) 의 속성입니다

그 다음에 딤전4:9절 말씀은 신실하시다, 또 딤후 2:11절 미쁘신 말씀, 딛3;8절 여기서도 이 말씀은 미쁘시다, 딛후2:13절 주는 일향 미쁘시다, 벧전4:19절 미쁘신 조물주,....그러니까 la(엘)의 속성은 신실인데 말씀이 신실하고 주가 신실하고 조물주가 신실하시죠....그러므로 아버지 속성이 신실이니까 아버지와 하나 된 아들 속성도 역시 똑같이 피스토스 신실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제 아들들의 신실에 대해서 찾아봅니다.

엡1:1절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골1:2절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마24:45절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줄 자가 누구뇨]. 

여기서 충성되다는 단어가 피스토스 신실입니다. 그래서 신실되고 지혜 있는 종이죠. 밑에 죽나오는 충성이라는 단어도 전부다 피스토스입니다.

또 마25:21절 [착하고 충성된(피스토스-신실)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 지어다]

딤전1:12절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피스토스)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여기서도 피스토스입니다

그래서 고전4:1-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 집 짓고 있는 자들이 마지막으로 구하여야 할 것은 충성된 자로 발견되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계1:5절 충성된 (피스토스) 증인이 나옵니다. 여기 증인은 예수님을 말하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그리스도가 되셨고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가 이제 충성된 증인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잠언25:13절에는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한다]고 표현 했습니다

그래서 요일5:7절에 우리번역 성경에는 없고 스테판역에만 있는 [하늘에서 증거 하는 이가 셋이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입니다

[요일5:6-8...*6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7.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8.성령(프뉴마)과 물(휘도르)과 피(하이마)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계19:11..*11.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피스토스)과 진실(알레디노스)이라 그가 공의(디카이오쉬네)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호 로고스)이라 칭하더라 *14.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5.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6.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계22:6...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호 로고스) 신실하고(피스토스) 참된지라(알레디노스)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이것이 계시록 19장의 백마 탄 자의 이름이죠,

oJlovgo"( 호로고스), pistov"( Πιστὸς 피스토스), jlhqinov"(  Ἀληθινός 알레디노스), 그 다음에 백마 타고 쫒는 군대들 복수가 나옵니다. 그 군대들의 이름이 우리들의 새 이름입니다.

계22:6절입니다.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oiJ lovgoi(οἱ λόγοι호이 로고이), pistoi;( πιστοὶ 피스토이), ajlhqinoi( ἀληθινοί 아레티노이),]

다시 정리 합니다.

백마 탄 자(그리스도) 백마 타고 쫒는 군대들(그리스도와 한 몸 된 자들) oJlovgo"(호로고스)  iJlovgoi(호이로고이) pistov"(피스토스) pistoi(피스토이) ajlhqinov"(알레디노스) ajlhqinoi(알레티노이)...그래서 이고유 명사가 이제는 이렇게 상태화로 변화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하나 된 자들은 말씀, 신실, 진리의 상태가 된 겁니다....이 상태에서 이제는 성경을 대하자는 얘깁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 엘 아버지가 내안에서는 숨어계시지 않고 밝히 드러나고 있는지를 성경을 통해서 확인해 봅니다. 그래서 골1:27절입니다.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영광의 소망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시므로 이제는 영광의 실체이시다.

그래서 고후3:5절이 연결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지 않으면 너희는 버리운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24:23절, 눅17:21절에 보면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는 것이고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그러므로 천국이 되었다 이겁니다. 그래서 팔복에서 말하는 천국상태가 되는 겁니다. 

어떻게? 요일2:27절입니다. [주께로부터 받은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고]  있는 기름부음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사30:20절이 나옵니다. [환란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스승은 숨지 아니하신다]고...[그러므로 네 눈이 스승을 볼 것]이라고...그래서 마23:8절에서 [우리에게는 한분 스승이 계시고 한분 지도자가 계시다]는 말이죠...그러므로 이제는 내안에 들어와 계시기 때문에 스스로 숨어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숨어계시는 분이 아니고 밝히 드러났기 때문에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동거하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마6:18절에서 말씀하신대로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십니다.

그런데 스테판역본에는 ajpodwvsei soi ejn< tw/'< fanerw/'.(아포도세이 소이 엔- 토- 파네로)가 나옵니다, 그러면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는 바로 당신 JC 자신이죠. 당신 자신을 soi(소이) 너에게 단순하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fanerw/'(파네로)는 분명하게 명확하게 그리고 ejn(엔)이 있으므로 당신 자신을 내 안에다가 ajpodwvsei(아포디도미-디도미에 아포)가 붙어서 분명하게 주신다는 개념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시는 상이 당신 자신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구약에서는 여호와가 분깃이라고 했고 신약에서는 말씀 상속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선택받은 백성이 되어서 이제는 그분이 나의 엘이 되셨는가? 입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면 머리로 아는 것이지 실제로 새로운 창조체가 된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엘로힘이 여호와로 사역하시다가 육신을 입고 현현하신분이 예수님이시고 죽고 부활하신 분이 그리스도인데 그리스도가 성경의 그리스도냐? 내게 오신 그리스도냐? 이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내게 오셨을 때 나에게 주님이시지 내게 오시지 않았으면 머리로 아는 주님이라는 말입니다.

창12:8절에서부터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창13:14절에서 이제는 여호와가 아브라함을 상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또 창26:25절에서 이삭도 여호와라고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창33:20절에는 야곱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엘,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면 이미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하나님을 엘로힘, 이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 la(엘) 이라고 불렀는데 우리는 아직도 !yhila(엘로힘) 에 머물러있다는 얘깁니다....그러니까 사44:15-17절에 보면 반대쪽도 나무로 우상을 만들어서 !yhila(엘로힘) 이 아니라 la(엘) 이라고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사 46:6절에서도 금과 은으로 우상을 만들어서 엘,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그러니까 이쪽에서 엘로힘이 여호와 엘로 호칭이 전의되니까 저쪽에서도 우상을 만들어서 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바로 우리가 그리스도로 호칭하니까 계13:18절에서 cx"(키 크시 시그마) 666 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저쪽에서도 그리스도라고 c(키) 를 쓰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적그리스도라고 말하는데 일단은 우리가 말씀이 점진적으로 성장하니까 저쪽도 같이 따라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많이 먹고 내가 충만한 상태에 있어야 선과 악을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

6, 그러면 지금부터는 !yhila(엘로힘)의 실체를 찾아보겠습니다.

신4:35절 여호와는 !yhila>h;(하엘로힘) 이라고 나옵니다. 엘로힘에 관사 h(하)가 붙습니다. 하엘로힘을 엘 차원으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여호와 그는 하엘로힘 이시요 그 외에는 없음을 네가 알지어다.] 또 신4:39절에서는 [너는 오늘날 상천하지에 여호와는 오직 하엘로힘 이시요 그 외에는 없음을 알지어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삼하 7:22절에서도 [당신 같은 이 없고 당신 외에는 엘로힘 이 없다]고 하셨고  그리고 대상17:20절에서도 [여호와여 귀로 들은대로 당신 같은 이 없고 당신 외에 엘로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시16:4절에서는 rjea'(아하르) 다른 분께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을 더 할 것이다 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다른 자가 누굽니까?

시16:1-2절을 보면 1절에는 엘 이 나오고 2절에는 여호와 가 나옵니다. 그래서 4절에서 rjea'(아하르)는 여호와 나 엘이 아닌 다른 엘로힘에게 제사하는 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43:11절서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또43:12절에서도 [내가 자세히 가르켜 주웠고 내가 구원하였고 내가 듣게 해주었고 너희 중에 다른 이가 없나니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엘 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신 것입니다.  계속해서 여호와 엘 당신 외에는 엘로힘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44:6절에서도 [이스라엘의 왕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엘로힘 은 없다]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45:21절 [나 외에 다른 엘로힘 은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시는 엘 이다 나 외에는 없느니라.]

45:22절에서도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엘 이라 나 외에는 없느니라.]

호13:4절 [나 외에 엘로힘 은 알지 말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그래서 출22:20절입니다.(원문은 19절) [여호와 외에 엘로힘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는 다 진멸시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후5:19절에서 엘로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계신다고 나옵니다. ...이것이 엡1:10절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유를 통일하려 하시는 겁니다....그래서 엘로힘도 여호와도 예수님도 그리스도로 호칭이 변화되셨고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만유가 통일되는 겁니다. 아멘


이전글 : 마5.회개/회심. 천국/메시아왕국..백성_정체성/방향성..회개_천국헌법/보상.구속/구원, 택정/명/직분..기복/팔복
다음글 : 마7.<긍휼 실행>오직 주님의 긍휼에 적셔짐으로..영적 분별 따라 다른 이 돌봄-배려-복음 전도...복음 진리 기초_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