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역개정]요21장 ..***구원 : Q, Q말씀께로 참되게 돌아감/하나됨-교통-거함/누림-빼어닮음/Q으로-따라 삶
[384.나의갈길다가도록]...[370.주안에있는나에게] [375.나는갈길모르니] [374.나의믿음약할때] [[379.내갈길멀고밤은깊은데] [380.나의생명되신주] [382.너근심걱정말아라] [386.만세반석열린곳에] [389.내게로오라하신주님의] [390.예수가 거느리시니] [391오놀라운구세주예수내주] [393.오신실하신주]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 모여 있는 7 제자들에게, 공식적 나타나심은 3번째 ... 갈릴리, 곧 디베랴 호수에서, <갈릴리에서 만나자 하신 약속대로>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회복의 장<일상에서조차> 암시.<베드로와 도마가 앞에 나오고 있음>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 일상속의 주 임재안에 거하기를 연습함..주께 여쭈며 신뢰하고 순종...모든 것 미리 다 아시며 예비하신 것을 내어 주시는 분의 새로운 차원 경험하게 될 것...지금 시점은 사도들의 파송이 있기 전, 오순절 성령 임재 사건을 예비하는 때임..일상속에서 주 임재 경험 쌓으라!!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 노젓는 위치는 선수기준 우측, 선미를 보며 젓게 됨..그물은 대개 선수기준 좌측에 펼치게 됨.
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노력하여 얻은 것은> 어느하나 버릴 것 없음!!<예비>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이전에는 그물이 찢어졌었다!!(눅5:11)
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내 양을 먹이라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샤마, 쉬메온 :Q이 들으신다,listen to, pay attention to, hear, understand-examine-answer-obey)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아가파오)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필레오)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보스코)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예호하난..여호와+하난<은혜...형)한눈:은혜로운>)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아가파오)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필레오)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포이모네오)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필레오)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뤼페오 : 고통을 느끼다, 상심하다,feel pain)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필레오)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보스코)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할라크, <자기 존재 의미를 알고, 동의/순은하여 하나됨으로, 일치하여 뒤따르며>동행하다<아콜루데오>..아가파오차원까지 이끄실 것!!)하시니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24.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25.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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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새번역]제21장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1. 그 뒤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는데, 그가 나타나신 경위는 이러하다.
2.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제자들 가운데서 다른 두 사람이 한 자리에 있었다.
3.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하고 말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나가서 배를 탔다. 그러나 그 날 밤에는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4. ○이미 동틀 무렵이 되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바닷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가 예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5.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고 물으셨다. "못 잡았습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니,
6.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잡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그물을 던지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서, 그물을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7.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저분은 주님이시다" 하고 말하였다. 시몬 베드로는 주님이라는 말을 듣고서, 벗은 몸에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렸다.
8. 그러나 나머지 제자들은 배를 탄 채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면서, 해안으로 나왔다. 그들은 육지에서 백 자 남짓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들어가 있었다.
9. ○그들이 땅에 올라와서 보니, 숯불을 피워 놓았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10.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지금 잡은 생선을 조금 가져 오너라."
11.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가서, 그물을 땅으로 끌어내렸다. 그물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렇게 많았으나, 그물이 찢어지지는 않았다.
12. 예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서 아무도 감히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주님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13. 예수께서 가까이 와서, 빵을 들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또 생선도 주셨다.
14.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신 것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내 양을 먹여라
15. ○그들이 아침을 먹은 뒤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내 어린 양을 먹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16. 예수께서 두 번째로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을 쳐라."
17. 예수께서 세 번째로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때에 베드로는 예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이나 물으시므로, 불안해서 "주님, 주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을 먹여라.
18.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너의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
19.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암시하신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20. ○베드로가 돌아다보니,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이 제자는 마지막 만찬 때에 예수의 가슴에 기대어서 "주님, 주님을 넘겨 줄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묻던 사람이다.
21. 베드로가 이 제자를 보고, 예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23. 이 말씀이 그들 사이에 퍼져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않을 것이다" 하였지만, 예수께서는 그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뿐이다.
24. ○이 모든 일을 증언하고 또 이 사실을 기록한 사람이, 바로 이 제자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5. ○예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어서, 그것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 기록한 책들을 다 담아 두기에 부족하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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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21 Amplified Bible
==Jesus Appears at the Sea of Galilee
1 After this Jesus revealed Himself again to the disciples at the Sea of Tiberias (Galilee). And He did it in this way:
2 Simon Peter, and Thomas who is called Didymus (the twin), and Nathanael from Cana of Galilee, as well as [John and James] the sons of Zebedee, and two others of His disciples were together.
3 Simon Peter said to them, “I am going fishing.” They said, “And we are coming with you.” So they went out and got into the boat; and [a]that night they caught nothing.
4 As morning was breaking, Jesus [came and] stood on the beach; however, the disciples did not know that it was Jesus.
5 So Jesus said to them, “Children, do you have any fish [to eat along with your bread]?” They answered, “No.”
6 And He said to them, “Cast the net on the right-hand side of the boat (starboard) and you will find some.” So they cast [the net], and then they were not able to haul it in because of the great catch of fish.
7 Then that disciple (John) whom Jesus loved (esteemed) said to Peter, “It is the Lord!” So when Simon Peter heard that it was the Lord, he put on his outer tunic (for he was stripped for work) and threw himself into the sea [and swam ashore].
8 But the other disciples came in the small boat, for they were not far from shore, only about a hundred yards away, dragging the net full of fish.
9 So when they got out on the beach, they saw a charcoal fire set up and fish on it cooking, and bread.
10 Jesus said to them, “Bring some of the fish which you have just caught.”
11 So Simon Peter went aboard and hauled the net to land, full of large fish, a hundred and fifty-three [of them]; and although there were so many, the net was not torn.
==Jesus Provides
12 Jesus said to them, “Come and have breakfast.” None of the disciples dared to ask Him, “Who are You?” They knew [without any doubt] that it was the Lord.
13 Jesus came and took the bread and gave it to them, and likewise the fish.
14 This was now the third time that Jesus appeared to the disciples, after He had risen from the dead.
==The Love Motivation
15 So when they had finished breakfast, Jesus said to Simon Peter, “Simon, son of John, do you love Me more than these [others do—with total commitment and devotion]?” He said to Him, “Yes, Lord; You know that I [b]love You [with a deep, personal affection, as for a close friend].” Jesus said to him, “Feed My lambs.”
16 Again He said to him a second time, “Simon, son of John, do you love Me [with total commitment and devotion]?” He said to Him, “Yes, Lord; You know that I love You [with a deep, personal affection, as for a close friend].” Jesus said to him, “Shepherd My sheep.”
17 He said to him the third time, “Simon, son of John, do you love Me [with a deep, personal affection for Me, as for a close friend]?” Peter was grieved that He asked him the third time, “Do you [really] [c]love Me [with a deep, personal affection, as for a close friend]?” And he said to Him, “Lord, You know everything; You know that I love You [with a deep, personal affection, as for a close friend].” Jesus said to him, “Feed My sheep.
==Our Times Are in His Hand
18 I assure you and most solemnly say to you, when you were younger you dressed yourself and walked wherever you wished; but when you grow old, you will stretch out your hands and arms, and someone else will dress you, and carry you where you do not wish to go.”
19 Now He said this to indicate the [d]kind of death by which Peter would glorify God. And after saying this, He said to him, “Follow Me [walk the same path of life that I have walked]!”
20 Peter turned and saw the [e]disciple whom Jesus loved following them; the one who also had leaned back on His chest at the supper and had said, “Lord, who is it that is going to betray You?”
21 So when Peter saw him, he asked Jesus, “Lord, and what about this [f]man [what is in his future]?”
22 Jesus said to him, “If I want him to stay alive until I come [again], what is that to you? You follow Me!”
23 So this word went out among the brothers that this disciple (John) was not going to die; yet Jesus did not say to him that he was not going to die, but only, “If I want him to stay alive until I come [again], what is that to you?”
24 This is the same [g]disciple who is testifying to these things and has recorded them; and we know [without any doubt] that his testimony is true.
25 And there are also many other things which Jesus did, which if they were recorded [h]one by one, I suppose that even the world itself could not contain the books that would be written.
==Footnotes
John 21:3 Fishing at night was commonplace and normally productive.
John 21:15 As indicated by the amplifications, Peter uses a different Greek word for love (phileo) than Jesus does (agapao) in His first two questions to Peter (see note v 17).
John 21:17 This time Jesus uses the same word for love that Peter previously used twice (phileo).
John 21:19 Peter ministered some thirty years after the resurrection of Jesus. He was martyred in Rome by Emperor Nero in about a.d. 67. The Roman historian, Eusebius said that Peter was crucified upside down at his own request.
John 21:20 John the Apostle. The mothers of Jesus and John, Mary and Salome, were related as sisters.
John 21:21 It is believed that John was the only apostle to die of natural causes. He lived to the age of ninety-four and died in about a.d. 100.
John 21:24 John the Apostle, author of this Gospel.
John 21:25 Or in det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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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삶속에서>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요 21:1-14)
여기에 그리스도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을 볼 수 있다. 이제,
1. "전에 일어났던" 일들과 이 현현을 비교해 보자.
...그 전에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나타내신 때는, 아마 그의 나타나심을 기대하고 그들 모두 함께 있었으며 주님의 날로서 엄숙한 모임(경건한 예배였기에 그러했을 것이다)에서 만났을 때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가 자기를 나타내신 때는 그들이 그것에 관하여 거의 생각하지 않고 물고기를 잡고 있을 때였으며, 평일로써, 그들 중 몇 명에서 일시적인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사람들에게 자신을<자신의 임재를> 알리시는 데에는 많은 방법이 있다. 보통 의식 속에서 나타나시지만, 때때로 그들이 일상 일에 종사하고 있을 때 그의 영으로 그들을 방문하시는데, 이것은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던 목자들"(눅 2:8)에게처럼, 여기에서도 역시 그러하다(창 16:13).
2. 이것을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자기를 만나도록 명하셨던 갈릴리에 있는 그 산에서 일어났던 일과 비교해 보자(마 28:16).
...거기에서는 그들은 무교절이 끝나자마자 행동하여서 이 알현 또는 총 회합으로 정한 시간까지, 그들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처신하였다.
...이제 이 현현은 그들이 그것을 기다리는 동안 기다림에 지칠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종종 자기 말씀보다 더 신실하시나 결코 더 불실히지 않으시며, 종종 자기 사람들의 믿는 기대를 앞서고 능가하기는 해도 결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신다.
본문의 세세한 점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살펴 볼 수 있다.
Ⅰ. 그때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나타내 주신 사람들(2절). 열둘 모두가 아니라 그들 중 일곱에게만이었다.
...나다나엘이 그들 중 하나로 언급되는데, 우리는 그를 1장 이후로 만나지 못했었다.
그러나 어떤 이는 그가 열 둥 중의 하나인 바돌로매와 동일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름을 말하지 않은 두 사람은 벳새다 사람 빌립과 가버나움의 안드레로 추측된다. 다음을 유의하여 보자.
1.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엄숙한 종교적인 집회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 사교와 일상 일에 있어서도 함께 지내도록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수단에 의하여 자기들의 열정을 증거하는 동시에 증진시키고, 서로 기뻐하며, 대화와 동시에 간증으로 서로를 계발해야 한다.
2.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함께 있을 때 자기를 나타내기로 택하신 것은 그리스도인 사회를 장려하기 위할 뿐만 아니라, 동일한 사실의 공동 증인이 되며 또한 그렇게 서로의 증거를 확실케 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에 이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일곱 사람이 있었다. 이에 따라 어떤 이는 로마의 법은 한 유언에 대하여 증언 일곱이 필요했다는 것을 주시한다.
3. 도마가 그들 중의 한 사람으로 베드로 다음으로 기명되어 있는데 이로써 그는 그전보다 이제 사도들의 모임에 더 가까워져 있는 듯하다.
...우리가 우리의 소홀함 때문에 생긴 손실로 인하여 차후에 오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더욱 주의한다면 그것으로 만족한 것이다.
Ⅱ. 그들이 종사(從事)했던 과정(3절). 다음을 살펴 보자.
1. 고기잡이 가는 데 대한 그들의 동의,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몰랐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고 베드로가 말한다. 그러자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함께 있어야 하니까 하고 그들이 말한다.
통속적으로 같은 장사끼리는 화합이 될 수 없지만 그들은 가능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떠났던 그들의 배와 그물로 돌아온 것이 잘못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렇게 본다면 그리스도께서 그때 그곳으로 방문하심으로 그들을 장려하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에게 있어서 칭찬할 만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것을 행한 것은,
(1) 시간을 벌고, 나태하지 않으려 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직 그리스도의 부을 전파하도록 명령받지 않았다. 그들의 임무는 작성되어 있었으나 완전하지 않았다. 행동개시의 시각은 되지 않았다.
그들의 주님께서 그들에게 자기의 승천 후, 성령이 강림한 다음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게 되기 전까지는 자기의 부활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분부하신 것 같다. 이제 그 동안 그들은 아무 것도 않기 보다는 물고기를 잡으려고 했는데, 이것은 오락으로써가 아니라 사업으로써였다.
...그것은 그들의 겸손의 한 실례다. 비록 그들이 주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보냄 받으신 것처럼 그리스도로부터 보냄 받기로 선발되었지만, 아직 그들에게 형편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을 떠낸 반석"을 기억했다. 그것은 그들이 근면하다는 한 본보기와 같으며, 또한 그들이 그 당시의 훌륭한 처세가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들은 기다리고 있는 동안 태만하지 않으려고 했다.
자기들의 생애를 즐겁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공백들을 메우려고, 그 생애의 단편들을 수집하기에 고심해야만 한다.
(2) 그들은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여 남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그러했다.
...그들의 주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을 동안에는, 그를 섬기던 자들이 그들에게 친절했었다.
그러나 이제 "신랑을 빼앗겼으니," 그들은 그 무렵에 금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처럼 "자신들의 손으로 그들의 쓸 것을 채우지" 않으면 안 되며, 이 까닭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하고 물으신다.
...이것은 고요한 중에 우리에게 "일하여 얻은 자기 자신의 떡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준다.
2. 물고기 잡는 데 있어서 그들의 실망.
...그들은 누가복음 5장 5절에서처럼,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되," 이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인데, 그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다.
이 세상의 헛됨을 보라. 부지런한 자들의 손도 종종 빈 손으로 돌아온다. 선한 사람들이라도 그들의 정직한 사업에서 바라던 성공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뜻은, 그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고, 아침에 기적적인 어획고를 올림으로 더욱 경탄하고 또 더욱 만족스럽도록,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우리에게 대단히 고통스러운 그런 실의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종종 대단히 은혜스러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 것이다.
사람은 참으로 "바다의 고기를 다스리게"되어 있으나 그것들이 항상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만이 "바다의 길을" 아시고 또 가운데로 지나는 것을 명하신다.
Ⅲ.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신 방법.
..."그는 자기를 나타내셨으니"라고 기록되어 있다(1절).
주님의 몸은, 물론 참된 실재의 몸이지만, 우리의 몸이 그렇게 될 것처럼,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으므로 자신이 친히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는 때에만 보이는 것이다. 혹은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너무 빨리 왔고 또 사라졌기에 순식간에, 한순간에 "눈 깜짝할 사이에," 여기 또는 저기에 계셨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신 것에서 다음 네 가지를 살펴 볼 수 있다.
1. 주님께서는 적절한 때에 그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다(4절).
...보람없는 한 밤의 수고 후,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다.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들에게 자기를 알리실 때는 그들이 가장 난처할 때이다.
그들이 자기들은 길을 잃었다고 생각할 때라도 주님께서는 그들이 자기를 잃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실 것이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만일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바다 위로 걸어서가" 아니요,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까닭에 그는 이전의 그로서 그들과 함께 있게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바닷가에 서신"것은, 그때 그들이 그를 향하여 나가기로 되었기 때문이다.
...옛날 사람들 중 어떤 이는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역사를 마치고, 폭풍의 바다와 피의 바다를 지나서 그가 승리 가운데서, 안전하고 고요한 바닷가에 이르렀다는 의미로 본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들 앞에 일거리를 둔 채 수고와 위험 속에서 아직 바다에 있었다.
우리의 뱃길이 거칠고 폭풍이 몰아칠 때, 우리의 주께서 바닷가에 계시고, 우리가 그에게로 재촉해 가는 것은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2. 그는 점차적으로 그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다.
...제자들은 그와 가깝게 지난 사이였지만 단번에 "예수인 줄 알지 못했다."
그가 거기에 계실 줄 거의 예상하지 못했고, 또 눈여겨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물고기를 사기 위하여 자기들의 배가 도착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어떤 평민으로 생각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종종 우리가 생각하기 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계시며, 따라서 우리가 그후 깨닫고 나서 우리의 위로를 얻을 것이다라고 요약된다.
3. 그는 긍휼의 한 본보기로써 그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다(5절).
"애들아(파이디아) - 즉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너희는 고기를 좀 잡았느냐?" 여기에서 보면,
(1) 호칭이 대단히 친밀하다.
...그는 한 아버지가 자기 아들들을 보살피고 다정하게 대하며 말하듯이 "얘들아"라고 그들에게 말하신다.
비록 그는 그때 높은 자리에 들어 갔지만, 여전히 예전과 같은 친절과 애정으로써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연령으로 아이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그의 아이들이었다.
(2) 물음이 대단히 친근하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그는 자기 자식들에게 적합한 것이 준비되었는지, 또는 준비되지 않았다면 그들의 공급을 보살펴 주려고 하는 어떤 상냥한 아버지처럼 물으신다.
...요약하면,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고전 6:13).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사람들의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들을 알고 계셔서, 그들이 은혜에 충족할 뿐 아니라 식물에도 넉넉하도록 약속하셨다.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시 37:3).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자들의 오두막집을 들여다 보시면서,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하고 물으시므로 그들이 자기들의 "사정을 그에게 털어놓도록 권유하신다. 그리고 믿음의 기도로 저희 구할 것을" 그에게 아뢴 다음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돌보시고 또 그들을 보호하시기 때문이다. "그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우리에게 우리의 형제들을 향한 자비심 많은 관심의 한 본보기를 보여 주신다.
노동에 무능하고 좌절되어 곤경에 처하게 되어버린 가장들이 많이 있다. 그들을 향하여 부자들은 이와 같이,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물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극빈자들은 극히 부르짖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물음에 대하여 제자들은 짤막하게 대답했는데, 이는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불만과 불평어린 태도로 그러했던 것이다.
그들은 "없나이다"라고 말했을 뿐이고, 주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것과 같은 그러한 친근하고 공손한 호칭도 그에게 사용하지 않았다.
...최선의 것들이 그렇게 짤막하게 주 예수를 향한 그들의 사랑의 보답으로 나타나다니,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그 질문을 하신 것은, 그가 그들의 궁핍을 모르셨기 때문이 아니고 "그들로부터 직접" 그것들을 알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부터 공급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자신들이 공허하고 궁핍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4. 그는 자기 능력의 한 실례로 그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며, 이것이 그 발견을 성취시켰다(6절).
...그는 그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명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던졌었던 반대편이었다.
그리고 그때 빈손으로 집으로 가려던 그들은 엄청난 어획으로 부유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1)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하신 명령.
...그리고 그 명령에 첨부된 약속. 그러한 곳에 "그물을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그에게는 아무 것도 숨겨지지 않고, 참으로 "큰 물 밑의 수족"(욥 26:5)조차 그러한, 주님께서는 배 어느 편에 물고기 떼가 있는지 잘 알고 계셨으며, 그들에게 그쪽으로 지시하신 것이다.
...요약하면, 하나님의 섭리는 가장 미세하고 불확정적인 일들에까지 확장되므로, 자기들의 일을 처리하는 데에 있어서 거기서부터 암시를 받아 깨닫는 법을 알고, 또 모든 점에서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행복한 것이다.
(2) 이 명령에 대한 그들의 순종,
...그리고 그것의 좋은 성과. 아직까지는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그러나 그들은 어떤 사람에게서라도 기꺼이 충고받고자 했으며, 이 나그네라고 생각된 사람에게 제 할 일이나 하고 남의 일에 참견 말라고 말하지 않고 그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이와 같이 나그네의 말을 준행함으로 그들은 부지중에 그들의 주께 순종하게 되었다. 그것은 훌륭하게 잘 진척되었고 이제 그들은 그들의 모든 수고에 보상이 되는 어획고를 올렸다.
...요약하면 겸손하고, 근면하며, 또 인내성이 있는 사람들(비록 그들의 노고가 어긋날지라도)은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며, 때때로 그들은 많은 몸부림과 결실없는 시도 후에 그들의 일이 행복한 때를 얻는 것을 살아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명령을 지킴으로 잃어 버린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말씀의 법칙과 성령의 인도, 그리고 섭리의 통지를 따라는 사람들은 순조롭게 잘 되어 간다. 이것이 "곧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는 것"이다.
이제 물고기의 포획은 다음과 같이 간주될 수 있다.
① 그 자체가 기적임.
...따라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한 것으로" 심으셨으나 강한 것으로 다기 사셨다는 사실과, 또 만물이 "그 발아래 복종하게 되며 바다의 고기"도 예외는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사람들에게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을 그들을 위해 행하심으로 자기를 드러내 보이셨는데, 그것은 "그들이 예기치 못했던 것이다."
② 그들을 향한 자비심.
...그들의 필요에 대한 시기적절하고 풍성한 공급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기들의 창의성과 노력으로 실패했을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때맞추어 나타나셨으며, 그는 자기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자들이 어떤 좋은 것에도 부족하지 않도록 보살피고자 하신 것이다.
우리가 가장 곤경에 처했을 때에, 여호와이레인 것이다.
③ 이전에 베푸신 자비의 기념일.
...그 자비로써 그리스도께서 이전에 베드로에게 그의 배를 빌리신 것에 대하여 보상하셨던 것이다(눅 5:4 등등).
이 기적은 그 기적과 아주 흡사해서 베드로가 그것을 회상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전자와 후자 이 둘이 그 자신의 영역 즉 그 자신의 생업 속에서 그에게 마주쳤기에 상당한 영향을 그에게 미치었던 것이다. 나중 은혜는 이전 은혜를 회상하도록 계획되며, 그렇게 먹은 떡이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④ 신비임. 그리고 또 그리스도께서 이제 확대된 임무로써 그들을 파송하시려는 매우 중대한 바로 그 사업임.
...선지자들은 영혼들을 낚아왔었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했거나 거의 잡지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린 사도들은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많다"(갈 4:27).
...그들은 자기들의 이전 소임에 따라서 첫 번째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을 당시에, 그들이 지금 마땅히 거두어야 할 성과와 비교하여 아주 적은 것을 거두었었다. 그러나 이 일 직후 삼천 명이 하루에 회개했는데, 이는 "그물이 배 오른편에 던져진" 것이다.
...그것은 자기들의 임무를 계속 근면하게 수행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에게 큰 힘이 된다.
겨우 단 한 번의 복된 포획이 복음의 그물을 던지기에 수고한 여러 해 동안의 노고를 보상하기에 충분할 수도 있는 것이다.
Ⅳ. 제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정체를 이렇게 밝히신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7,8절). 거기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알게 된다.
1. 요한은 가장 총명하고 눈치 빠른 제자였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그는 "주시라"하고 제일 먼저 말한 사람이었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특별한 모양으로 자기를 드러내시기 때문이며, 그의 비밀은 그가 총애하는 자들에게 있다. 요한은 자기의 고통 중에 그들 중 어느 누구보다 더 가까이 자기의 주님께 매달렸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굳센 지조에 대한 보상으로 그들 중 어느 누구보다 더 밝은 눈과 통찰력있는 판단을 소지한 것이다.
...요한은 주님이신 것을 스스로 깨달았을 때에 자기의 아는 바를 자기와 함께 한 자들에게 전했다.
이렇게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누어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다." 그들 자신이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를 알게 되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그 안에는 우리 모두를 위할 만큼 풍족하므로 우리는 그를 독점하지 않아도 된다.
...요한이 특별히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는 자기의 소견을 말했는데, 이는 그가 그들 중 어느 누구보다 더 주님을 뵙고 기뻐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비록 베드로는 자기의 주님을 부인했었지만 이제 참회했으며 다시금 제자들의 교제 속으로 들어옴으로써, 그들은 이전과 같이 그와 더불어 활발하고 친밀했다.
2. 베드로는 가장 열심있고 온정 있는 제자였다.
...왜냐하면 그는 주시라는 말(요한의 말을 믿었기 때문에)을 듣자마자 배도 그를 붙잡아 둘 수 없었고, 배가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기다릴 수도 없었으며, 단지 즉시 바다로 뛰어내려 그리스도께로 제일 먼저 도달하려고 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1) 그는 "겉옷을 두름"으로 그리스도께 자기의 존경을 표했다.
...이는 자기가 지닌 가장 좋은 옷차림으로 주님 전에 나타나기 위함이었으며, 또한 그가 중사하고 있던 그 일은 몹시 고된 것이고 또 그는 그 안에서 수고하려고 결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끼와 잠방이 차림으로 벗은 채였으므로, 주님의 존전에 무례히 불쑥 나타나지 않기 위함이었다.
어쩌면 그 겉옷은 가죽이나 유포(油布)로 만들어져서 물에 젖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가 고기잡이에 골몰할 때에는 그물을 올린 후 종종 그러한 것처럼 물 속을 통과하여 그리스도께로 급히 가기 위하여 그것을 둘렀을지 모른다.
(2) 그는 바다에 뛰어 내림으로써 그리스도께로 향한 그의 애정의 강도와 열렬한 소망이 자기에게 있음을 보여 주었다.
...주님께 도달하기 위하여 바닷가까지 물 속을 걷거나 헤엄쳤다.
-- 그가 물 위로 걸어서 그리스도께로 갔을 때(마 14:28, 29)에는, "그가 신중하게 배에서 내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가 황급하게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라고 말한다.
가라앉든지 헤엄치든지 간에, 그는 자기의 호의와 예수님과 함께 있고자 하는 자기의 의향을 보여 주고자 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내가 물에 빠져 죽도록 방임해 주셔서 주님께 이르지 못한다면, 그것은 내가 주님을 부인한 것에 대한 당연한 보상일 뿐이다"고 생각한다.
...베드로는 크게 용서받았으며, 주님께 도달하기 위하여 기꺼이 모험을 치르고 또 고난을 겪음으로 또한 크게 사랑했던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과 함께 있어 온 사람들은 그에게 도달하기 위하여 폭풍의 바다, 피의 바다 속으로 기꺼이 헤엄쳐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를 사이에서 누가 먼저 주님께 이를까 경쟁하는 것은 찬양할 만한 경주이다.
3. 나머지 제자들은 주의 깊고 정직한 마음을 지녔다.
...비록 그들은 베드로와 같이 바다로 뛰어 내리는 것과 같은 그러한 열광적인 열성은 없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배 안에서 바닷가로 서둘러 황급히 갔다(8절). "다른 제자들" (그리스도이신줄 처음 발견한 요한이 이들과 함께 있었다)은 늦게 도달하였지만, 그들도 그리스도께 도달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을 유의해 볼 수 있다.
(1) 하나님께서는 극히 다양하게 은사를 나누어 주신다.
...베드로와 요한과 같이 어떤 이들은 탁월하여 은사와 은혜에 있어서 심히 뛰어났으며, 그것으로 인하여 그들의 형제들과 구별된다.
다른 이들은 단지 평범한 제자들로 자기들의 본분을 지키고 주님께 신실하나, 주목할 만한 아무 일도 행치 않았다.
그러나 전자와 후자, 탁월한 자들과 미미한 자들 둘 다 영광 중에 그리스도와 함께 앉게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
---탁월한 자들 중에서 요한과 같이 어떤 이들이 뛰어나게 명상적이며, 큰 지식의 은사를 가지고 있어서 그것들로써 교회를 섬긴다. 반면 다른 어떤 이들은 베드로와 같이 뛰어나게 활동적이며 담대하고, 또 강하며 큰 공을 세워 그렇게 가지들의 세대에 크게 쓰인다. 어떤 이는 교회의 눈과 같이 유용하고, 다른 어떤 이는 교회의 손과 같으며, 모든 이는 몸의 유익을 위하여 있다.
(2)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길에 있어서 어떤 훌륭한 사람들과 또 다른 사람들 사이에 심히 많은 상이점이 있을 수 있지만, 둘 다 모두 "그를 받아들인다."
...어떤 이는 헌신의 행위와 종교적 열심의 비범한 표현으로 그리스도를 더 많이 섬기는데, 그들은 훌륭히 행하는 것이며, " 그것을 행함은 주를 위한 것이다."
---베드로는 바다로 뛰어내린 것에 대해 비난받아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의 열심과 애정의 강도에 대하여 칭찬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마리아와 같이 "그의 발 곁에 앉기 위"하여 세상을 떠난 자들도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다른 어떤 이는 보다 더 세상사 속에서 그리스도를 섬긴다. 그들은 여기에 있는 다른 제자들처럼 세상이란 배에 계속 있으면서 그물을 끌고, 또 고기를 바닷가로 운반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도 세속적이라고 비난받아서는 안 되는데, 이는 그들도 자기들의 위치에서 가난한 자에게 음식을 베푸는 것에 이르기까지, 또 다른 이와 마찬가지로 진실로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제자들이 다 베드로와 같이 행하였다면, 고기와 그물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러나 만일 베드로가 그들처럼 행했더라면, 우리는 이 거룩한 열심의 실례를 아쉬워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양자 다 기뻐하셨으니 우리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 세상이라는 바다를 떠나서 바닷가에 계신 주님께 이르는 데에는 몇 가지 길이 있다.
...어떤 이는 그리스도를 향한 열심히 바다로 뛰어 내린 순교자들처럼 급격한 죽음으로 주님께로 인도된다.
다른 어떤 이는 그물을 끌면서 보다 덜 두려운 자연사에 의해서 주님께로 인도된다.
그러나 양자가 다 마침내 그리스도와 함께 안전하고 고요한 바닷가에서 만나는 것이다.
Ⅴ. 그들이 육지에 올라오자 주 예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환대의 내용.
1.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미리 준비하셨다.
...그들이 물에 젖어 춥고, 지치고 배고픈 상태로 육지에 올라보니, 그들을 따뜻하게 하고 몸을 말려 줄 훌륭한 불과 또 훌륭한 식사를 위한 충분한 준비로 생선과 떡이 있었다.
(1) 우리들은 까마귀가 엘리야에게 가져다 준 음식의 출처와 마찬가지로 이 불과 생선과 떡의 출처를 캐 묻고자 하는 호기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보리떡과 물고기를 증가시키신 그 분은 원하신다면, 새 것을 만드시거나 또는 돌을 떡으로 바꾸시거나, 혹은 그가 아시는 대로 그것이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천사들을 보내어 그것을 가져 오게 하실 수 있었다.
이 준비가 옥외에서 마련되었는지 혹은 어떤 어부의 집이나 바닷가에 있는 오두막에서 그러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웅장하거나 섬세한 점은 전혀 없다. 우리는 보잘 것 없는 것들을 만족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리하셨기 때문이다.
(2)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제자들을 보살피시는 이 실례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그 무엇을 지니고 계시며, "우리가 필요한 것을 아신다."
주님께서는 그 어부들이 일에 지쳐 돌아왔을 때에, 친절하게 그들을 위하여 예비해 두셨다. 그러므로 "진실로 주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는 자는 먹이실 것이다."
...자기들을 고용하여 자기들을 위해 예비해 주시는 주님을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에게는 큰 힘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이 세상에서" 용기를 잃고,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기"에 이른다 할지라도, 여기에서 그들이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써 그들 자신은 만족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더 좋은 것들을 예비로 소유하고 있으며, "그의 나라에 있어 그의 상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먹고 아시게"될 것이다(눅 22:30).
...얼마 전에 "제자들이 구운 생선"으로 그리스도를 대접하였었는데(눅 24:42), 이제 주님께서는 친구로서 그들의 친절에 보답하여 같은 것으로 대접하셨다.
아니, 어획에 있어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백배 이상으로 갚아 주셨다.
2. 주님께서 그들이 잡았던 것 중 약간을 요구하셨으며 그들이 그것을 내놓았다(10,11절). 다음을 유의해 보자.
(1)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육지로 그들의 고기 잡은 것을 가져오라고 하신 명령.
..."지금 잡은 생선을 이리 좀 가져와서, 그것들을 좀 먹자"고 하신 것은, 주님께서 그것을 필요로 하셨거나 그것없이는 그들을 위해 조반을 마련하실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① 주님께서는 그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수고한 것을 먹도록 원하셨다(시 128:2).
...만일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우리의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게" 하신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산업과 정당한 수고 위에 내리신 하나님의 축복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인하여, 그 안에서 독특한 즐거움을 향유하고 있다.
..."그는 자기가 사냥한 것도 굽지 아니하나니" 한 것은 게으른 자에 대한 말인데, 그는 자기가 지금까지 수고하여 잡은 것을 요리할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이다(잠 12:27).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에 의하여 우리가 우리의 가진 바를 사용하도록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다.
② 주님께서는 그들이 자기의 초자연적인 은사의 풍성함을 맛보기를 원하셨다.
...이는 그들이 그의 능력과 그의 인자하심, 양면의 증인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은혜는 매몰하거나 은닉해 두기 위한 것이 아니라 활용하고 널리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③ 주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해 자기가 지니신 영적 향연의 한 본을 제시하고자 하셨다.
...그것은, 이 점에서, 가장 자유롭고 친밀한 것으로, "곧 그는 그들과 더불어 먹고, 그들은 그와 더불어 먹는"것이다.
그들이 받은 은혜는 그를 기쁘시게 하고 ...그의 위로는 그들을 기쁘게 하며, 그는 그가 그들 안에서 역사하신 그것을 그들로부터 받으시는 것이다.
④ 사람을 낚는 어부인 사역자들은 자기들이 잡은 모든 것을 자기들의 주께로 가져 오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는 그들의 성과는 그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2) 이 명령에 대한 그들의 순종(11절).
..."고기가 많아 그물을 육지로 들 수 없더라"고 기록되었다(6절). 즉 그들은 그것이 자기들이 잘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아서 곤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을 육지로 가져 오라고 명하신 주님께서 그것을 쉽게 하셨다.
따라서 사람을 낚는 어부들은, 복음의 그물 속으로 영혼들을 둘러쌌을 때라도, 하나님 은혜의 계속적인 작용 없이는 육지로 그들을 끌고 올 수 없으며 착수해 놓은 선한 사업을 수행하여 완성할 수 없는 것이다.
--- 만일, 그의 도우심 없이는 우리가 아무 것도 잡지 못할 뻔 했을 때에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잡도록 도우신 주님께서 "그들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저희를 건축함"에 의하여, 우리가 그들을 지켜 육지로 끌어 올리는 것을 도와 주시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마침내 그들을 잃어 버리게 될 것이다(고전 3:7).
다음을 유의해 보자.
① 고기를 육지로 끌어 올리는 데에 가장 활동적이었던 인물은 베드로였다.
...앞 장(7절)에서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욱 그의 주님의 모습에 열렬한 애정을 보여 주었던 것처럼, 이곳에서는 그의 주의 명령에 더욱 즉각적인 순종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믿는 자들 모두가 한결같이 급진적인 것은 아니다.
② 잡힌 물고기의 수.
...그들은 그것들을 세어 보고 싶은 호기심이 있었으니, 어쩌면 그것은 분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들은 모두 "일백 쉰 세 마리"였으며 모두 큰 고기였다.
이것들은 그들의 당시의 보급에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들을 팔았을지 모르며, 그 돈을 그들이 얼마 안 있어 돌아가고자 한 예루살렘에 가는 비용을 지탱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을지 모른다.
③ 그리스도께서 기적과 자비, 이 둘을 확대하여 그들을 돌보신 잇달은 실례.
..."더우기 큰 고기가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고기 중 단 한 마리도 잃지 않았으며, 그물도 손상하지 않았다.
...누가복음 5장 9절에는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이 자기들의 그물을 버린 지 오래 되었으므로, 아마 이것은 빌린 그물일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빌린 것을 마치 우리 자신들의 것인 양, 우리가 소중히 다루도록 가르치고자 하셨을 것이다.
...이전에 그들이 그물을 깁던 그런 한가로움이 이제 그들에게 없기 때문에, 그럴 때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한 것은 잘된 일이다.
복음의 그물이 하루에 삼천이나 되는 많은 사람을 에워싸지만, 찢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여전히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이끌기에 강하다.
3. 그는 그들을 조반에 초대했다.
...그들이 거리를 두고 있으며, 더구나 "그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다"는 것을 주시하셨으므로, 그는 그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고 매우 친밀하게 부르신 것이다.
(1)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얼마나 자유스럽게 대하셨느나를 보라.
...그는 그들을 친구처럼 대하셨다. 그는 "와서 섬겨라." "와서 시중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말씀하셨다.
종들이 그렇게 하도록 지시를 받는 것처럼 "가서 너희끼리 조반을 먹으라"가 아니라, "와서 나와 함께 조반을 먹으라"인 것이다.
이 친절한 초대는 다음을 시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말하면,
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여기에 있는 은혜 안에서 자기와 함께 하는 교제 속으로 부르시는 초청.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와서 조반을 먹으라." 그리스도께서 잔치이신 것이다. 와서 그를 조반으로 먹으라. 그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그의 피는 참된 음료이다. 그리스도께서 친구이신 것이다. 와서 그를 더불어 먹으라. 그가 너를 환영하시리라(아 5:1).
② 그가 장차 영광 중에 있을 자기의 성취 속으로 그들을 부르시는 초청.
..."오라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앉으라."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모든 친구들과 추종자들을 먹일 자력(資力)을 지니고 계시며, 그들 모두를 위해 충분한 자리와 양식이 있는 것이다.
(2) 제자들이 그리스도 앞에서 얼마나 공손한가를 보라.
...그들은 그가 자기들에게 초대한 자유를 구사(驅使)하기에 다소 수줍어했다. 그가 그들을 식사에 초빙하므로써, 그들은 모름지기 망설이며 서 있었던 것 같다. "한 다스리는 자, 곧 그러한 다스리는 자와 함께 먹을 것이므로, 그들은 자기들 앞에 계신 분을 자세히 살펴 보느라 당신이 누구냐? 하고 감히 묻는 자가 없었다." 이것은 다음 둘 중 하나 때문이었을 것이다.
① 그들은 그를 대하여 그토록 뻔뻔스럽지 않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가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던" 그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던 대로 이 때에도 처음에는 다소 변모된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할지라도, 그들에게 그이시며 다른 어떤 사람도 될 수 없다고 생각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② 그들은 저희 자신의 우매를 무심코 그렇게 많이 드러내지 않고자 했기 때문이다.
...자기의 능력과 인자하심의 이 본보기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을 때에, 만일 그들이 그이신가 아닌가를 물었었다면 그들은 정말 멍청했음에 틀림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섭리 안에서 우리의 몸을 보살피신 뚜렷한 증거를 우리에게 주시고, 또한 자신의 은혜 안에서 우리의 영혼에 호의를 베푸시며 또 선한 역사를 이루신 명백한 증거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을 때에,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불신을 부끄럽게 여겨야 하며, 그가 우리에게 질문할 여지를 남겨 두지 않으신 것에 대해 감히 묻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근거없는 의심은 억압되어야 하며, 발동되어서는 안 된다.
4. 그는 잔치의 주인으로서 그들을 위해 떼어 주셨다(13절).
...그들이 여전히 수줍어하며 소심한 것을 아시고, "예수께서 가셔서 친히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그들 각자에게 얼마큼씩,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그가 축사하시고 감사를 드렸을 것은 의심할 바 없다(눅 24:30 처럼).
그러나 그것은 그의 이미 잘 알려진 변함없는 습관이었으므로 기술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1) 이곳에서의 연회는 그저 평범했으니, 곧 단지 생선 조반뿐인데다가 허름한 옷차림이었으며, 호화로운 데라고는 조금도 없는 데다가 호기심을 끌 만한 것도 없었으며, 진실로 풍부하기는 했지만 그저 수수하고 검소했을 뿐이었다.
...시장이 반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높이 올리운 자리에 들어가셨지만, 잔치에 참석하심으로 왕되신 자기를 나타내시지 않고, "잡수심으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셨다."
--- 양념과 포도주가 없는 한, 떡과 생선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자들은, 여기에 계신 그리스도 자신과 더불어 조반을 먹을 마음이 거의 내키지 않을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친히 개시하셨다.
...그는 영광된 몸을 지니셨으므로 어쩌면 잡수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지만, 능히 잡수실 수 있는 참된 몸을 지니셨다는 것을 보여 주시고자 했다.
사도들은 이것을 부활의 한 증거로 제시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었다"는 것이다(행 10:41).
(3) 그는 자기의 모든 초대객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셨다.
...그는 그들을 위해 그것을 예비하고, 그들을 초대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친히 그들 중에서 그것을 나누셔서 그들의 손에 얹어 주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그의 덕택으로 구속의 은혜를 획득할 뿐 아니라, 적용도 하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그것들을 먹을 능력을 주신다.
...본 복음서 저자는 그들을 조반에 머물러 두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14절).
"이것은 예수께서 살아나셔서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혹은 그들의 대부분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이것은, 혹자들이 그렇게 보는 것처럼 "세번째 날이다."
그가 부활하신 그 날에, 그는 다섯 번 나타나셨으며, 둘째 날은 일주일 후의 그날이었고, 이것은 세 번째이었다.
혹은 이것은 제자들의 상당수가 함께 있을 때에 그들에게 나타나신, 그의 세 번째 나타나심이었다.
비록 그가 마리아에게와 여인들에게와 두 제자에게, 그리고 또 게바에게 나타나셨었지만, 그는 그들 일행이 한 자리에 함께 있을 때에는, 이것 전에는 단지 두 번만 그들에게 나타나셨었다. 이것으로 다음을 주목하게 된다.
① 그의 부활의 사실을 확고하게 하기 위함임.
...그 움직이심은 이중적이며 삼중적으로 되었는데, 이는 그 사실이 확실한 때문이었다.
첫 번째 표적을 삼지 않는 자들도 나중 표적들의 표명을 믿기에 이를 것이다.
② 제자들에게 베푸신 그리스도의 계속된 친절의 한 실례로써, 그는 한 번, 다시 한 번, 그리고 세 번째 그들을 찾아오셨다.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방문을 중히 여기는 것이 좋으니, 이는 그가 그것들을 중히 여기시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그것들에 대해 무가치하게 처신한다면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두 번 나타나셨던 사실을 회상하게 되었을 때 그것들이 그에게 불리하게 기억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은 우리에게 불리하게 상기될 것이다.
"이것은 세 번째이다." 우리는 "맞추었다는 첫 번째와 두 번째"에 비하여 마땅히 향상되었는가? 고린도 후서 2장 14절을 참조하라. "이것은 세 번째이나,"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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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나누신 대화(요 21:15-19)
우리는 여기에서 조반 후에 베드로와 나누신 그리스도의 대화를 볼 수 있는데, 그 대부분이 그 자신에 관한 것이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그는 자기에 대한 그의 사랑을 시험해 보시며, 그에게 자기의 양떼에 관한 책임을 부여하신다(15-17절). 다음을 유의해 보자.
1.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함께 대화를 시작하신 시기.
...그것은 그들이 조반 먹은 후였다. 그들은 모두 먹어서 배불렀으며, 우리 주 예수께서 식사 중의 좌담으로 종종하셨던 것과 같은 그런 교훈적인 대화로 흥겨워졌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베드로에게 하지 않으면 안 될 내용이 그에게 상당한 불안을 줄 것이라고 미리 아셨으므로 조반을 다 먹을 때까지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이는 그가 그의 조반을 망치지 않으려 하셨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자기가 주의 노여움을 샀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으며, 자기의 배신과 배은망덕으로 인하여 책망받는 것 외에는 달리 기대할 수 없었다.
"이것이 친구에 대한 너의 친절이었는가? 너는 얼마나 비겁한 자인가를 알게 될 것이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던가?"
아니, 그는 당연히 제자들의 명부에서 제명되고 신성한 단체에서 추방되는 것을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만일 세 번이 아니면 두 번, 그는 부활 후 주를 만났었지만, 주님께서는 그것에 관하여 그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베드로가 자기와 주님과 어떤 관계에 서 있는가에 대하여 의혹이 가득한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그는 다른 제자들과 같이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았었기 때문에 때때로 최선을 기대하였지만, 그러나 최후에는 모든 것을 보응하는 책망이 오지 않을까 하여 상당히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드디어 주께서 그를 고통으로부터 옮겨 놓으시며, 그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을 말씀하셨고, 그를 사도로서의 자기 지위에 굳게 서게 하셨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그 허물에 대하여 조급히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상당한 시간 동안 지연시키셨는데, 이는 조반 중의 모두를 소란케 함으로 때 맞지 않게 그것을 그에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저희가 함께 조반 먹은 후에, 죄인과 함께 한 것같이 아니하고 오히려 친구에게 한 것같이 화해의 표로써 그것에 관해 그와 함께 대화하고자 하신 때문이다.
...베드로는 그것에 대하여 스스로 책망하였으므로 그리스도께서 그것에 대하여 그를 책망하지 않으셨으며, 그에게 그것을 직접적으로 말하지도 않으셨고, 오직 무언의 암시로써 알리셨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의 성실에 만족하셨기 때문에 그 죄는 용서되었을 뿐 아니라, 잊혀졌으며,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자기에게 여전히 사랑스럽다는 것을 그가 알도록 하신 것이다.
--- 이 속에서 그는 우리에게 회개한 사람을 향하신 그의 자비심의 한 격려가 되는 실례를 보여 주셨으며,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온유의 영으로써 쓰러진 자들을 회복시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2. 대화 자체의 내용.
...여기에 세 번 물어진 똑같은 질문과 세 번 답변된 똑같은 대답과 세 번 주어진 똑같은 응답이 거의 변화없이 있었지만. 결코 공연한 반복은 아니었다.
그것을 말함에 있어서 우리 구주에 의하여 같은 것이 반복될수록 베드로와 함께 있던 다른 제자들에게 그만큼 더 영향을 미쳤으며, 그것을 기록함에 있어서 본 복음서 저자에 의하여 그것이 반복됨에 따라 우리와 그것을 읽는 모든 자에게 더 많은 영향을 미쳤다.
(1) 세 번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그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않는지를 물으셨다.
첫 번째 질문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이다. 다음을 유의하여 보자.
① 그가 그를 부르신 방법. "요한의 아들 시몬."
...그는 그에게 이름으로 말씀하심으로 그에게 더 많은 영향을 미치는데, 이는 누가 복음 22장 31절에서 "시몬아, 시몬아"하는 것과 같다.
주님께서는 그를 그가 주셨던 이름인 게바 또는 베드로(그가 그 이름이 뜻하는 능력과 불변성의 신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에)라고 부르시지 않고, 다만 그의 본 이름인 시몬을 부르신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비록 그에겐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에게 엄한 말을 하시지 않으시며, 그의 이름을 빼고 그를 부르시지 않고, 도리어 그가 그에게 축복을 선언하셨을 때에, "바요나 시몬아"라고 부르셨던 것과 같이 하신다(마 16:17).
...주님께서 그를 "요나의 아들"(요한 혹은 요하난)이라고 부르신 것은, 그의 태생이 미천하며 그가 향하고 있던 그 영광을 누리기에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그에게 상기시켜 주시기 위해서였다.
② 주님께서 그에게 문답식으로 가르치신 경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첫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만일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의 제자인지를 알아 보고자 한다면, 우리가 그를 사랑하는가? 하는 이것이 질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제 그것을 베드로에게 적용하신 데에는 특별한 까닭이 있다.
a. 그의 실패가 그의 사랑을 의심케 하는 원인이 되었다.
..."베드로야, 내가 너의 사랑을 의심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만일 네가 나를 사랑했었다면, 네가 고난 중에 있는 나를 시인하기에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의 마음이 나와 함께 있지 않으면서, 네가 어떻게 감히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느냐?"
...요약하면, 우리 자신이 미심쩍게 하는 일을 행하였을 때에는, 우리는 우리의 성실이 의심받는 것을 모욕으로 여겨서는 안 되며, 소름끼치는 실패 후에 그릇된 토대 위에 안주하지 않도록, 우리는 너무 속히 안주하는 것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질문은 충격적이다. 그는 "네가 나를 두려워하느냐? 네가 나를 존경하느냐? 네가 나를 찬미하느냐?"하고 묻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증거만 보여라. 그리하면 모욕은 사라져 버릴 것이며, 더 이상 그것에 관하여 말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하신다.
베드로는 그 자신이 고해자이며, 자기의 눈물과 또한 제자들의 모임으로 복귀함의 증인임을 고백했었다. 그는 이제 한 고해자로서 시련 중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질문은, "시몬아, 네가 얼마나 많이 울었느냐? 네가 얼마나 자주 금식하며, 네 영혼을 괴롭혔느냐?"가 아니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인 것이다.
회개의 다른 표현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고해자들 속에서 눈여겨 보시는 중대한 점은, 그들이 자기들의 회개 가운데서 그를 보는 눈이다. "그녀의 많은 죄가 사하여진 것은, 그녀가 많이 울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많이 사랑했기 때문이다."
b. 그의 직분은 그의 사랑의 실천을 위한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양들을 그의 책임에 맡기시기 전에, 그는 그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양떼에 대하여 세심한 배려를 지니신 나머지 그것을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으시고, 다만 그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자기의 양떼를 맡기실 것이므로, 그들은 그를 위하여 그의 것인 모두를 사랑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결코 진정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며, 혹은 그들의 형편을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만큼 자연스럽게 보살피지 못할 것이요, 혹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사역자는 자기의 일을 사랑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밖에는 사역자들을 그들의 임무 가운데서 마주치는 곤경과 낙망을 즐거이 뚫고 나가도록 강권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후 5:13, 14).
그러나 이 사랑이 그들의 일을 쉽게 만들며, 그들을 그 가운데서 참으로 진지하게 만들 것이다.
둘째, ‘플레온 투톤’(“이 사람들 보다 더”) - 즉 네가 이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a. "네가 이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너는 네 친밀한 친구들인 야고보와 요한, 혹은 너의 형제이자 동료인 안드레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세상에 있는 그들의 가장 친한 친구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지 않으며, 또한 그들이 비교와 경쟁(역주:세상의 친한 친구냐 그리스도냐 하는) 속에 설 때마다 그것을 명백히 하지 않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혹은, "네가 이들, 즉 이 배들과 그물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 어떤 이들이 오락으로 삼는 고기잡이의 모든 즐거움보다 더 ) 혹자들이 천직으로 삼는 고기잡이에서 오는 이득보다 더."
---온갖 관능의 쾌락과 이 세상의 온갖 이익보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는 자들만이 참으로 그를 사랑한다.
"네가 지금 종사하고 있는 이 직업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만일 그렇다면, 그것들을 버리고, 나의 양떼를 먹이는 데에 전적으로 종사하라." 휫트비(Whitby) 박사도 그렇게 보았다.
b.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나머지 다른 제자들 중 어느 누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그리고 또 이 질문은, "모든 사람이 주를 부인할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라고 한 그의 자만심 강한 자랑에 대하여 그를 책망하는 것을 뜻한다.
"네가 여전히 똑같은 마음이냐?" 혹은, 그에게 그가 이제 그들 중 어느 누가 가진 것보다 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유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기 위해서이다. (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버린 그들의 죄보다도 그를 부인한 그의 죄가 더 컸던 만큼, 그들 중 누구에게 보다도 그에게 더 많은 것이 사하여졌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 중 누가 그를 가장 사랑하겠느냐?"(눅 7:42)
...요약하면, 우리는 그리스도께로 향한 우리의 사랑에 있어서 월등하게 뛰어나기를 모두 배워야만 한다.
누가 그리스도를 가장 사랑하는가를 경쟁하는 것은 치안 방해가 아니며, 또한 이 사랑에서 남보다 앞서는 것이 훌륭한 예의의 침범도 아닌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께서 이 질문을 던지신 두 번째와 세 번째.
a. 그가 "이 사람들보다 더"란 비교를 생략한 것은, 베드로가 자기의 대답 가운데서, 그들 앞에서 자기를 훨씬 적게 드러내며 자기 형제들과 자기를 비교하지 않으려고, 겸손하게 그것을 생략했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다른 사람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을지라도, 만일 우리가, 우리는 참으로 그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받아들여질 것이다.
b. 그는 마지막에서 원문에 있는 대로 용어를 바꾸셨다.
...처음 두 질문에서 원어는, ‘아카파스 메’ - 즉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에 대한 대답으로 베드로가 사용한 다른 용어는 더 강조된 말로써, ‘필로 세’ - 즉 나는 당신을 극진히 사랑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지실 때에, 그리스도께서 그 용어를 다음과 같이 사용하신다. 네가 참으로 극진히 나를 사랑하느냐?
(2) 세 번 베드로는 똑같은 대답으로((‘필로 세’ ))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께 응수한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다음을 유의해 보자.
① 베드로는 나머지 다른 제자들이 사랑한 것보다 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체하지 않는다.
그는 이제 "모든 사람이 주를 부인할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라고 했던 저기의 그 성급한 말을 부끄럽게 여기는데, 그가 그것을 부끄럽게 여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요약하면, 비록 우리가 남보다 더 낫게 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살아 온 날들을 스스로 주 앞에서 점검해 본다면 우리 형제 중 어느 누구보다, 나자신이 더 악하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② 베드로는 여전히 자기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재삼 고백한다.
"주여, 그러하외다, 확실히 나는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만일 내가 그렇지 못했다면, 나는 살 가치가 없었을 것이니이다."
--베드로는 진정 주께 대하여 높은 존경과 가치를 그리고 그의 친절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으며 그의 명성과 관심사에 온전히 몰두했다.
마치 그것 없이는 그가 영락(零落)한 것과도 같이 그의 소망은 오로지 그를 향하였으며, 또한 마치 그가 그 안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되어야만 하는 것과도 같이 그의 주 안에서의 즐거움도 그를 향해 있었다!!.
이것은 결국 그의 죄에 대한 통렬한 자책 통한 회개의 고백과도 같은데, 이는 사랑하는 자를 욕보인 것이 우리의 마음을 아픔과 슬픔, 미안함과 죄송함으로 한없이 울게 하기 때문이며, 이것은 또한 금후로는 (결코 그런 일 없이)그를 굳게 신봉하겠다는 뜻으로 드리는 바 다음과 같은 맹세의 약속과도 같은 것이다.
"주여, 나는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그리고 결단코 당신을 버리지/떠나지/부인하지 않겠나이다." ...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다"(눅 2:32).
그리고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사랑도 그러하였으니, 믿음은 사랑에 의해서 작용하기 때문이다..(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그러나, 베드로는 부인했기에 그리스도에 관한 ((사랑하는 자로서의))자기의 자격을 상실당했었고, 그는 이제 그의 회개에 따라서 다시 용인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은 논점으로 그의 시험을 내 놓으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베드로는 그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토론에 참가한다. "주여, 나는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요약하면, 은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진실로 말할 수 있는 자들은, 그들이 비록 매일 연약하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기들의 권익으로 인해 회개하고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③ 그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리고 세 번째에는 그 위에 더 강조하여,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한다.
....그는 동료 제자들을 자기를 위해 증언해 주도록 보증으로 세우지 않는다.
- 그들은 그를 잘못 보았을지도 모르며, 혹은 그는 자기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 그의 말은 이미 신용을 잃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 자신에게 증언해 주도록 부르짖는 것이다.
첫째,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아시며, 특히 마음을 아시고, 또한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는 자이심을 확신했다(16:30).
둘째, 베드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그에 대한 자기의 사랑의 진실을 알고 계시며, 그를 위하여 그것을 기꺼이 증명해 주시리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이 위선자에게는 무서운 일인데, 이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이 그에게 불리한 증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한 그리스도인에게는 다음과 같이 호소할 데가 있는 것이 큰 위인 것이다.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보인이 높은 데 계시니라."
-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우리를 잘 아신다. 비록 우리가 우리 자신의 정직을 모를지라도, 그는 그것을 아시는 것이다.
④ 그리스도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셨을 때 "그는 근심하였다(17절)."
첫째, 그는 그것으로 인하여 자기가 그리스도를 세 번 거듭 부인했던 사실을 상기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분명히 그렇게 하도록 의도되었다.
"그리고 그 즉시 생각하고 울었더라." 과거의 죄 - 용서받은 죄까지도 - 에 대한 일체의 기억은 진정한 회개의 비애를 새롭게 한다.
둘째, 그가 그것으로 인하여 근심하게 된 것은, 주께서 그를 향한 자기의 사랑의 고백에 대하여 큰 모순이 될 이전과 같은 자기의 어떤 더 큰 실패를 미리 알고 계신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때문이다.
"그렇다. 만일 주님께서 그것에 대한 어떤 원인을 보시지 않았다면 나를 이처럼 추궁/고문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내가 다시 시험받아야 된다면 나는 어찌될 것인가?"하고 베드로는 생각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간절함과 두려움을 이룬다(고후 7:11).
(3) 세 번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자기의 양떼를 돌보도록 위탁하심.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①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의 보호 아래 맡긴 자들은 그의 어린 양과 그의 양이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의 양떼이며, 그것을 그가 자기 자신의 피로 사신 것이요(행 20:28). 그는 그것의 목자장이시다.
이 양떼 중에 혹자는 어린 양으로서 어리며 미숙하며 연약하고, 혹자는 양으로서 장성하여 상당한 능력이 있으며 성숙하다.
이점에서 목자는 둘 다 돌보되, 첫째는 어린 양이니, 이는 주님께서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들에게 특별한 자비를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그는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었다"(사 40:11).
② 주님께서 그들에 관하여 그에게 주신 책임은 그들을 먹이는 것이다.
...15절과 17절에서 사용된 단어는 ‘보스케’ - 즉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뜻이다.
그러나 16절에서 보다 넓은 의미로써 사용된 단어인 ‘포이마이네’ - 즉 그들에게 목자의 모든 임무를 다하는 것을 뜻한다.
"그들에게 알맞은 것으로써 어린 양을 먹이라. 그리고 적절한 식물로 양들에게 그와 같이 하라.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그들을 먹이라. 그리고 이 우리에 속하지 아니한 다른 양에게도 그리하라."
요약하면 그의 어린 양과 양을 먹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자들의 의무인 것이다.
..."그들을 먹이라," 즉 그들을 가르치라. 왜냐하면 복음의 도는 신령한 식물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먹이라," 즉 "그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며, 그들의 종교적인 집회를 주재하고, 그들에게 모든 의식(儀式)을 베풀어라. 그들 각자의 형편과 경우에 따른 개별적인 처방에 의해서 그들을 먹이되, 그들 앞에 먹을 것을 차려 놓지만 말고, 완고하여 먹지 않으려는 자들이나 혹은 연약하여 스스로 먹을 수 없는 자들에게 그것을 먹이라."
그리스도께서는 높이 올리우시면서 목자들을 주셔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그 양떼를 맡기시고 자기를 위하여 그들을 보살피고자 하셨던 것이다.
③ 그러나 그는 왜 특별히 베드로에게 이 책임을 부여하였는가?
...교황 지상권 옹호자들에게 물어보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것으로 인하여 전 그리스도 교회에 대한 절대적 통치와 지도적 권위를 베드로에게, 따라서 그의 계승자들에게, 그리고 로마의 사교들에게 부여하고자 예정하셨다. 이는 마치 양을 섬길 책임이 목자들 위에 군림하는 권력을 낳은 것과 같다. 그러나 사실은 베드로 자신이 그러한 권력을 결코 요구하지 않았으며, 다른 사도들이 그에게서 그것을 인정한 적도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베드로에게 주어진 이 책임은 교묘한 술책에 의하여 양들을 먹이기 보다는 그들의 털을 깎아서 그들을 먹고 사는 그의 거짓 계승자들의 찬탈을 지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베드로에게 특별히 적용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의도에서였다.
---첫째, 그에게 그의 사도직을 회복시켜 주기 위함이었는데, 그가 자기의 사도직 포기를 참회하였으므로 그 자신과 그의 형제들의 만족을 위하여 그의 임무를 새롭게 하고자 했다.
어떤 죄의 범죄에게 주어진 임무는 결국 용서에 이르게 하는 데 있으며, 베드로에게 부여된 이 임무는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만족하셨다는 증거였으며, 그외에는 그가 결코 그의 안에 있는 그러한 확신을 둘 수 없었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우리를 배반한 자들에 대하여 우리는, "비록 우리가 그들을 용서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그들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를 용서하시자마자, 자기가 이 땅에서 지니신 가장 귀중한 보물을 그에게 맡기신 것이다.
---둘째, 그것은 그로 하여금 그의 사도로서의 직분을 근면하게 이행하도록 그를 자극하기 위하여 예정된 것이다.
::: 베드로는 담대하고 열성적인 기질의 사람이었으며 항상 말과 행동에 앞섰다. 그래서 그가 목자들을 감독하는 일을 떠맡으려는 유혹을 일으키지 않게, 그는 그 자신이 모든 감독자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위탁한 대로, 양을 먹이도록 위탁받은 것이지 " 하나님의 택한 자들 위에 군림"하도록 된 것이 아니다(벧전 5:2, 3). 만일 그가 행하려 한다면 그로 하여금 바로 이것을 행하게 하고, 감히 그 이상 더 어떤 것을 꾀하게 말라.
---셋째,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은 바로 모든 제자들에게 하신 것이다. 그는 그들 모두가 죄인들을 귀의케 함으로 사람을 낚는 어부(비록 그것이 베드로에게 말씀된 것이지만, 눅 5:10)가 되도록 위탁하셨을 뿐 아니라, 성도들을 교화함으로 양떼를 기르는 자가 되도록 위탁하신 것이다.
Ⅱ.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그의 할 일을 이와 같이 명하신 다음, 그의 고난받을 일을 그에게 명하신다.
...그에게 사도의 영광을 확신시키신 후 그는 이제 그에게 예정된 그 이상의 특혜 - 순교자의 영광에 관하여 그에게 말씀하신다. 다음을 유의해 보자.
1. 그의 순교가 예언되는 경위(18절). "네 팔을 벌리리니." 강제로 남이 네게 띠 띠우고"(붙들어 메인 죄수처럼),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 그는 베드로에게 고난에 대해 알리시기 전에 먼저,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하는 엄중한 단언을 내리신다.
...그것은 아마 일어날지도 모를 있음직한 일처럼 말씀된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네게 이르노니, 하는 확실한 일처럼 말씀되었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이 일이 결코 당신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하고 네가 내게 말했던 것과 같이 네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의 모든 고난을 미리 아셨던 것과 같이 자기를 따르는 모든 자들의 고난을 미리 아셨으며, 비록 베드로에게 하신 것처럼 일일이 하시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이 자기들의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전반적으로 그들에게 예언하셨다.
그의 양을 먹이도록 그에게 위탁하신 후에, 주님께서는 그가 그 일에 있어서 안일과 영광을 바라지 말고, 오히려 고통과 핍박을 기대하며 선을 위하여 고난을 받기를 명하시는 것이다.
(2) 주님께서 특별히 그가 사형 집행인의 손에 의해서 비명에 죽을 것을 예언하신다.
...어떤 이는 그가 팔을 벌리는 것은 그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모양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고대의 전설에 의하면, 만일 우리가 이것을 신뢰할 수 있다면, 베드로는 A. D 68년 혹은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79년에 네로 치하에 로마에서 십자가에 못박혔다.
혹자는 그것은 사형 선고로 차꼬에 채워진 속박과 감옥에 갇힘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처형의 웅대하고 장엄한 의식은 죽음의 공포를 훨씬 더하게 하며, 감각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갑절로 가공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무시무시한 형상으로써의 죽음은 종종 그리스도를 성실히 믿는 자들의 운명이 되어 왔으나, 그들은 "어린 양의 피로서 그것을 이겨"내었다. 이 예언은 주로 그의 죽음을 가리키지만 그 이전의 고난에서 성취를 보게 되어 있었다. 그것을 멀지 않아 그가 옥에 갇히면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행 4:3; 5:18; 12:4).
...여기에서 그가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감을 당할 것이라는 것에서는, 그가 급격한 죽음을 당할 것 이상을 암시하지는 않으며, 그러한 죽음은 죄 없는 자조차도 두려움 없이는 생각할 수 없으며 얼마큼 싫어하지 않고는 가까이 할 수도 없는 것이다.
:::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 옷 입는다는 것이 인간을 벗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그 쓴 잔을 받지 않으려고 기도하셨다.
고통과 죽음에 대한 선천적인 염오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성스러운 복종으로 더불어 잘 양립될 수 있다.
성 바울은 짐을 벗기를 사모하였지만 자기는 "벗고자 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고후 5:4).
(3) 주님께서는 이것을 그의 이전 자유와 비교하신다. "이러한 고난을 조금도 몰랐을 때에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고통이 올 경우에 우리는 그렇지 않으면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악화시키기 쉽다.
그리고 우리는 자유와 건강과 풍요의 즐거움을 알았기 때문에 속박과 질병과 빈궁의 고통에 더욱 괴로워하기 쉬운 것이다(욥 29:2; 시 42:4).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방향을 달리하여 우라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논할 수도 있다.
"내가 당연히 받을만 하며 향상될 정도 이상의 번영을 내가 얼마나 많이 여러 해 동안 누려 왔었는가? 그리고 내가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또한 받지 아니하겠는가?" 여기서 다음을 유의하자.
① 얼마나 큰 변화가 이 세상에서 우리의 형편에 따라 우리에게 이루어지는가!
..." 힘과 명예를 스스로 띠를 띠며" 최대의 자유, 어쩌면 방종에 빠진 자들이 이 모든 것과 대치되는 그러한 처지로 전락할지 모른다(삼상 2:5 참조).
② 얼마나 큰 변화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자들에게 즉시 이루어지는가!
...그들은 더 이상 스스로 띠를 띨 필요가 없으니 그가 반드시 그들을 띠 띠울 것이다.
그리고 또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이 원하는 곳으로 다닐 필요가 없고 다만 그가 원하시는 곳으로 다니면 되는 것이다.
③ 만일 우리가 늙도록 살게 된다면, 얼마나 큰 변화가 우리에게 확실히 이루어질 것인가!
...젊었을 때엔 육체의 기력과 정신력을 지니고 사업이나 곤경을 쉽게 뚫고 나갈 수 있었으며, 그 하고 싶은 낙을 즐길 수 있었던 자들도 늙게 되면, 그 머리털이 짤려서 "다른 때와 같이 몸을 떨칠 수 없게 되었던" 삼손처럼 자신들의 힘이 사라져 버린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그 만년에 이와 같이 그가 고난받게 될 것을 알려 주신다.
① 그는 이미 늙어서 자연의 추세대로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적들은 그가 세상을 고요히 하직하려고 할 때에 그를 몰아 세워서 급격하게 세상을 떠나도록 하고자 했으며, 그리고 또 거의 촛대까지 타 내려 간 그 촛불을 꺼버리고자 했던 것이다(대하 36:17 참조).
② 하나님께서는 그가 늙기에 이르기까지 그 대적들의 노(怒)로부터 그를 보호하고자 하셨는데, 이는 그가 고난받기에 적합한 자가 되도록 하고 또한 교회가 좀더 오랫 동안 그의 섬김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2. 본 예언에 대한 설명(19절).
..."이 말씀을 베드로에게 하심은 그가 그 일생을 마치면서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다음을 주목하라.
(1) "한번 죽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정해진" 것일 뿐만 아니라, 자연사이거나 변사(變死), 혹은 더디거나 급하든지 그리고 쉽거나 고통스러움 등, 어떠한 죽음을 당할 것인지도 각 사람에게 정해져 있다.
...바울이 그렇게 "거대한 죽음"에 관하여 말할 때에 그는 죽음의 등급이 있음을 암시하는데, 세상으로 들어오는 데에는 한 길이 있으되 나가는 데에는 많은 길이 있으며, 우리가 어느 길로 가야만 하는 가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이다.
(2)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하여 어떠한 죽음을 당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모든 경건한 사람의 중대한 관심사이니 " 주님의 말씀에 따라 주님을 위하여 죽는" 것 이외에 우리의 주요한 목적이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참을성 있게 죽거나 -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함으로 기꺼이 죽으며 - 그리고 또 신앙의 진리와 덕에 대하여 증거하여 남을 격려함으로 유익하게 죽는다면, 우리는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 그리고 이것이 바로 모든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며," 바울에게서와 같이, "살든지 죽든지 그들에게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할 수 있는 것이다"(빌 1:20).
(3) 순교자의 죽음은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진리는, 이를 지키기 위하여 그들이 죽었는데, 이것으로 말미암아 견고해진다. 그들이 매우 굳센 지조로써 고난을 끝까지 버티도록 이끌어 준 하나님의 은혜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존귀케 된다. 그리고 그들의 고난과 그의 약속과 그들의 위로의 샘 속에서 그들에게 충만했던 하나님의 위로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모든 성도들에게 신앙과 기쁨으로 권고되어 온 것이다.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와 수천(數千)의 전향과 창립의 씨가 되어 왔다. 그러므로 그를 존중히 여기는데 따라서,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 것이다." 따라서 대개 그러한 희생으로 그를 존중히 여기는 자들을 그도 존중히 여기실 것이다.
3. 여기서 있어 주님께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명하신 말씀.
...아마 베드로가 그것 때문에 멍해진 것을 알아 채셨으므로, "이 말씀을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어쩌면 주님께서는 자기가 조반 때에 앉으셨던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걸음을 조금 떼어 놓으신 후에, 베드로에게 자기를 수행하도록 명하셨을 것이다.
"나를 따르라" 하신 이 말씀은,
(1) 주님의 은혜와 사도직에 대한 그의 회복을 더 굳게 확증한 것이다.
..."나를 따르라." 이는 최초의 부르심이었기 때문이다.
(2)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에 대한 이해의 실마리를 베드로에게 주시기 전까지는 그가 어쩌면 처음에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을 그의 고난에 대한 예언을 설명한 것이다.
... "나를 따르라." 이는 "내가 받았던 대로 대우 받으며, 내가 네 앞에서 밟았던 것과 꼭같은 피투성이의 길을 밟으리라고 기대하라. 제자가 스승보다 크지 못하기 때문이다"는 것을 말한다.
(3) 그것은 그가 사도로서의 자기 일에 성실하고 부지런하도록 자극하며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었으며, 그의 목전에서 양치는 자의 모범을 자기에게서 보게 하셨다. 즉, "내가 행한 대로 하라." 대리 목자들이 목자장을 닮도록 배우게 하라.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그를 따랐었는데, 이제 그가 그들을 떠나시면서도 비록 다른 방향에서 이행될지라도, "나를 따르라"는 역시 똑같은 의무를 그들에게 부여하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가 주신 계명과 그가 자기들에게 보이신 모범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수고와 고난 중에서, 이것보다 더 큰 격려가 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① 이러한 점에서 그들은 그를 따랐으며, 그것은 그들의 당시의 영광이었으니, 누가 그러한 지도자를 따르기에 부끄러워 했겠는가?
② 이후도 그들은 그를 따랐으며, 그것은 그들의 장래 행복이었으니, 그런고로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주셨던 "네가 후에는 나를 따라 오리라"는 약속의 반복인 것이다(13:36).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를 성실하게 따르는 자들은 확실히 영광에 이르기까지 그를 따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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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요 21:20-25)
본 귀절들에서 다음을 보게 된다.
Ⅰ. 그리스도께서 그 사랑하시던 제자인 요한에 관하여 베드로와 함께 나누신 대화.
1. 베드로가 그를 바라보는 눈(20절).
...베드로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주님을 따랐으며, 주님께서 당시에 자기에게 베푸신 영광을 기뻐하면서,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도 같이 따르는 것을 본다." 여기에서 다음을 유의하라.
(1) 요한이 기술(記述) 방법.
...그는 자기 자신의 이름이 이러한 기록 속에 간직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므로,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그가 누구를 뜻하는가 하는 것을 충분할 정도로 묘사해 주고 있으며, 동시에 그가 그리스도를 그렇게 가까이 따랐던 이유를 설명해 주기도 한다. "그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였으니,"
...이는 주님께서 다른 제자들보다 그에게 특별한 애정을 지니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그 귀중한 몇 분 동안, 그가 그리스도의 은혜가 넘쳐 흐르는 말씀이 들리는 데서 가능한 한 많이 있고자 한 욕심에 대하여 그를 비난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언급은 요한이 베드로의 충동에 따라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그 배신자에 관하여 질문했던 것과 같이, 베드로가 이 전의 그 호의에 대해 요한에게 보답하기 위하여 그에 관하여 그 다음에 계속되는 질문을 한 것을 들어 말하는 것 같다.
그 당시에는 요한이 총애를 받는 자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가슴에 의지하여 베드로의 소청을 들어 주기 위하여 기회를 타서 말하였다.
그런데 이제는 베드로가 총애를 받는 자리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그는 우리 모두가 장래 일을 알고 싶어하는 것처럼 요한도 그리할 것으로 보고, 그 소원을 들어 주려는 생각으로 그를 위해 그러한 질문을 하는 것이 그에게 보답하는 길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던 것이다.
::: 요약하면, 우리가 은혜의 보좌에 세력이 닿아 있을 때에, 우리는 서로의 유익을 위하여 그것을 활용해야만 한다. 한 때 기도로써 우리를 도운 자들은 다른 때에 우리의 기도로써 우리에게 도움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교제인 것이다."
(2) 요한의 행한 일.
...그도 역시 예수님을 따랐는데, 이는 그가 얼마나 깊이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사랑했는가를 보여 주며, 그가 계신 곳에 그의 종 요한도 있고자 했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부르셨을 때에, 그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그와 함께 어떤 비밀 이야기를 할 예정인 듯이 보였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의 주님에 대해 깊은 애정을 지닌 나머지 그리스도의 어떤 이야기를 듣는 혜택을 잃기 보다는 차라리 무례한 듯 보이는 일이라도 행하고자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을 그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받아들였는데, 이는 "나를 따르라"고 명하신 그 말씀이 모든 제자들에게 부여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최소한도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귐이 있는 자들과 더불어 사귐을 가지며 또한 그리스도를 수행하던 자들과 동행하기를 원했다.
한 사람을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인도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이끄는 것이 되리라. 나를 "인도하라 그러면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아 1:4).
(3) 베드로의 주목(注目). "베드로가 돌이켜 그를 보니," 이것은 다음 둘 중 하나로 고려될 수 있다.
① 그의 주님을 따르는 것으로부터의 무도(無道)한 전환(轉換)이다.
...그는 그의 주님을 따르는 것에 마음을 온전히 향했어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계속 말씀하실 것을 듣도록 기다렸어야 하고, 그런 후 누가 따르는지 돌아 보아야 했다.
::: 요약하면, 최적임자(最適任者)라도 "분요함/분산됨이 없이 주를 섬기는" 것이 어렵다는 것과, 또한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에 그들이 마땅히 그리해야 할 만큼 그 마음을 일심으로 집중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또한 우리의 형제들에 대한 불필요하며 시기(時期)에 부적절한 관심은 종종 우리를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다른 데로 돌려 놓는다.
② 그의 동료 제자에 관한 칭찬할 만한 관심이다.
...그는 주님께서 다른 제자들 중에서 자기를 발탁(拔擢)하심으로 자기에게 주신 명예 때문에 그 뒤따르던 자에게 상냥한 눈길을 돌리지 않을 만큼 그렇게 의기양양하지는 않았다. 우리의 형제들에 대한 사랑의 행위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앙의 행위와 병행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2. 베드로가 요한에 관해 행한 질문(21절).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당신께서 나에게 나의 일 - 양을 먹이는 것과, 또한 나의 운명 - 내가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감을 당할 것을 알려 주셨나이다. 그의 일과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나이까?" 이것은 다음 중 하나를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 요한에 관한 관심과 그를 향한 호의(好意)를 말한다.
..."주여, 주께서 나에게 매우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나이다. 여기 내가 그랬던 것과 달리 당신의 은혜를 한 번도 상실한 적이 없는 당신의 사랑하시던 제자가 오나이다. 그는 환대받기를 바라고 있나이다.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실 것이 없나이까? 당신께서는 그가 어떻게 스임 받게 되며, 또한 어떻게 영광을 받게 되어야 하는가를 알려 주시지 않겠나이까?"
(2) 그리스도께서 그의 고난에 대하여 그에게 말씀하셨던 것에 대한 불안을 말한다.
..."주여, 내가 홀로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져야만 하나이까? 나는 소멸(消滅)되도록 정하여져야만 하고, 이 사람은 십자가를 분담하지 않아도 되나이까?" 특별한 고난이나, 우리가 생각하기에 우리 홀로 견뎌야 하는 고통에 만족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3) 그 자신에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 관한 장래 일을 알고자 하는 호기심과 어리석은 욕망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답에 의하면, 그 질문 속에는 잘못된 점이 있는 것 같다.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그러한 보배를 맡기시고, 또한 그러한 시련을 예고하셨을 때에, 다음과 같이 말했었더라면 그에게 좋게 되었을 것이다.
"주여, 그러시면 이와 같은 위탁에 대하여, 또한 이와 같은 시련 속에서 내가 충성된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어떻게 하면 되겠나이까? 주여, 나의 믿음을 더하소서. 나의 살이 있을 동안 나의 힘이 있게 하소서."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대신에,
① 그는 그 자신에 대해서 보다 다른 사람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다른 사람들의 일에 분주하기 쉬우나, 오히려 우리 자신의 영혼에 대한 관심에는 태만하며 - 집 밖으로는 눈이 밝으나 집 안으로는 눈이 어둡고 - 우리는 겨우 "우리 자신의 일을 살피고, 또한 겨우 우리 자신의 길을 깨달으면서," 남을 판단하고, 또한 그들이 행할 것을 예언한다.
② 그는 의무에 관해서 보다는 사건에 관하여 더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요한은 베드로보다 더 젊었으므로, 자연의 추세대로 그보다 더 오래 살 것 같았다. 그는 "주여, 그는 어떤 때를 위하여 예비될 것이니이까?"하고 말한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께서 은혜로써 우리가 끝까지 견뎌서 최후를 잘 마치고, 무사히 천국에 이르게 할 힘을 주신다면, "우리의 뒤를 따라올 자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하는 것을 물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 평강과 진리가 나의 생애에 있다면 그것으로 족(足)하지 않은가? 성경의 예언들은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양심의 길잡이로써 목도(目睹)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3. 본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22절).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며, 네가 그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달리 그가 고난을 받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네 자신의 임무, 즉 현재의 임무인 네가 나를 따르는 것에나 유의하라."
(1) 여기에서 요한에 관한 그리스도의 의도(意圖)가 다음 두 가지로 암시되고 있는 것 같다.
① 그는 베드로와는 달리 결코 비명(非命)에 죽지 않으나 자연사(自然死)에 의해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기에게로 그를 데려 가시기 위해 오실 때까지 머물 것이다.
...가장 신뢰할 만한 고대 역사가들에 의하면, 요한은 열두 제자 전체 중에서 실제로 순교자로서 죽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종종 위험과 속박, 그리고 추방에 처했으나, 마지막에는 매우 늙은 나이로 집안에서 죽었다. 요약하면,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에서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시기 위해 오시며, 그것은 우리가 그의 오심에 대한 준비를 하는 데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둘째, 비록 그리스도께서 제자 중 얼마를 불러내셔서 피흘리기까지 대항하게 하셨지만 모든 자에게 그리하신 것은 아니다. ...비록 순교의 면류관이 빛나고 영광스러울지라도 그 사랑하시던 제자는 거기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②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 예루살렘이 멸망되기까지 그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혹자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한다는 것을 그렇게 이해한다. 다른 모든 사도들은 예루살렘 멸망 이전에 죽었으나, 요한은 그보다도 여러 해 더 오래 살았다. 하나님께서는 현명하시게도 사도들 중 한 사람을 그토록 오래 살도록 명하셔서, 신약의 정전(정전)을, 요한이 엄숙하게 행한 대로(계 22:18), 완결하게 하셨으며, 또한 그 종들이 잠들기 전인데도 가라지를 뿌린 원수의 모략(모략)을 미리 방지하게 하셨다.
요한은 살아서 에비온(Ebion)과 세린투스(Cerinthus), 그리고 또 다른 이단자들을 직면하였는데, 그들은 때마침 일어나서 "사악한 일들을 말하였다."
(2) 혹자는 그것은 단지 베드로의 호기심에 대한 책망일 뿐이며,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그가 머물 것이라는 것은 불합리한 추측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어찌하여 네게 맞지 않고 은밀한 것을 캐묻느냐? 내가 요한이 결코 죽지 않도록 예정했더라도,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겠느냐? 요한이 언제, 혹은 어디에서, 혹은 어떻게 죽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것이 네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나는 네게 너로서는 어떻게 죽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알려 주었으니, 너는 나를 따르라는 그것을 아는 것으로 네게는 족(足)한 것이다."
::: 요약하면, 그리스도의 뜻은 제자들이 자기들의 현재 임무를 마땅히 지키는데 있으며, 또한 그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관한 장래 일에 대하여 캐어 묻고 싶어하는 호기심을 가지 않는 데에 있는 것이다.
① 우리는 우리에게 아무 상관없는 많은 일에 대하여 염려하기 쉽다.
...다른 사람들의 명성은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들을 판단하는 것은 우리에게 상관없는 것이다(롬 14:4). 그들이 어떠할지라도 나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바울은 말한다. ...다른 사람들의 일은 조금도 참견할 것이 아니며, 우리는 조용히 우리 자신의 일이나 돌보면서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뜻과 보이지 않는 세계의 상태에 관한 수많은 까다롭고, 기이한 질문들이 "서기관들과 이 세상 변론자들"(disputers)에 의하여 행하여지는데, 그에 관하여 우리는,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라고 말해도 좋다.
::: 당신은 무엇이 여사여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을 흔히 받을 것인데, 이는 "그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인가?"라고 상대편에 의해 쉽게 대답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다.
"때와 기한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인가? 은밀한 일들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닌 것이다.
②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본분(本分)이지 사건이 아니다.
...본분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요, 사건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며 - 우리 자신의 본분이지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니니, 이는 모든 사람은 그 자신의 짐을 지게 되어 있기 때문이요 - 현재의 본분이지 장래의 본분이 아니니, 이는 한날의 지시(指示)는 그날로 족하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며(시 37:23), 사람은 한 걸음 한 걸음 인도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모든 본분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 한 가지로 요약된다. 우리는 그의 거동(擧動)을 따라야 하며, 거기에 순응하고, 그 주인의 종으로서 그에게 명예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그가 행하신 길로 행하지 않으면 안 되며, 또한 그가 계신 곳에 있으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일심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본분에 열중한다면, 우리는 마음이나 시간 그 어느 것도 우리가 참견할 수 없는 것으로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4. 그리스도의 이 말씀으로부터 일어난 오해.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고," 오히려 언제까지나 교회와 함께 머물 것이라는 것,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반복함으로써 이러한 발의(發意)를 억누름(23절). 여기서 다음을 유의하라.
(1) 그리스도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고, 그리고 또한 추측을 견해로 탈바꿈함으로 교회 안에서 오해가 쉽게 야기(惹起)됨.
....요한은 순교자로 죽지 않는다니까, 그들을 그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① 그들은 그것을 소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참되기를 바라는 것을 쉽게 믿는다.
...요한이 다른 제자들이 떠나간 후 살아서 머물며,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세상에 계속 체류한다는 것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교회에 대한 크나큰 축복이요, 또한 그것은 무든 세대에 신탁(神託)으로써 그를 의지하는 것이 있을지 모른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신체적 임재를 유실(遺失)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을 때, 그들은 그 사랑하시던 제자에게서 그것을 얻게 되기를 바라는데, 이는 마치 보혜사 성령이 그것을 행하기로 된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말한 그것이 그 부족을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같다.
::: 요약하면, 우리는 사람과 수단, 도구(道具)와 외면적 도움을 지나치게 사랑하기 쉬우며, 만일 우리가 항상 그것들을 우리 수중에 소유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행복하다고 생각하기 쉬운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일군들을 새로이 하실 것이며, 자기 일을 계속하시는 까닭에, "능력의 탁월함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교회가 영원한 성령의 인도함 아래 있는 동안에는, 불멸의 사역자들이 교회의 인도자가 되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② 아마 그들은 요한이 당시에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더 오래 산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 그들의 기대를 확고히 했을 것이다.
...그는 오래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가 언제나 살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웠다. 그런데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다"(히 8:13).
③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부터 빚어진 오해일지라도 그 후에 그것이 교회의 전해 내려오는 말이 되었다. 여기서부터 다음을 알게 된다.
...첫째, 인간적 전설의 불확실성.
그리고 그 위에 신앙을 쌓아 올리는 어리석음. 전설, 사도 시대의 전승(傳承), 즉 형제들 사이에 널리 처져 나간 말씀이 이런 것이었다.
그것은 때 이르고, 일반적이며, 공공연한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위였다.
그렇다면 트랜트 공의회(the council of Trent)가 "성경에 돌려야 할 것과 동등한 존경과 경건한 애착심"으로 받아들이기로 포고한 저 비문서(非文書) 전승들이 신뢰될 만한 것이 얼마나 적은가. 전통적인 성서 해석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조금도 새로운 것을 앞세우지 않고, 단지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말씀하신 것에 따라서 형제들에 의하여 행해진 해석일 뿐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릇된 해석이었다.
성경은 대부분 그 자체의 증거가 있고, 또한 스스로 입증하는 대로, 그 자체가 해석자가 되며 스스로 설명하도록 놓아 두자. 왜냐하면, 성경은 빛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기 쉬운 인간의 경향(傾向).
가장 큰 오류는 논의할 여지 없는 진리의 그늘 아래로 오류 그 자체를 덮어 가리는 것이며, 또한 성경은 그 자체가 몽매(蒙昧)하고 변덕(變德) 많은 자들에 의하여 왜곡(歪曲)되어 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들이 잘못 해석되며, 적 그리스도의 오류나 뻔뻔스러운 화체설(化體設) - 이를테면, 이것은 내 몸이니라는 그리스도의 축사를 감히 개조(改造)하려고 꾀하는 것을 비호(庇護)하기 위하여 인용되는 것을 들을지라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말씀을 고수(固守)하며, 또한 그 말씀을 따름으로써 이러한 오해를 쉽게 교정(矯正)함. 이와 같이 본 복음서 저자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바로 그 말씀을 반복함으로써 형제들 사이의 그 말을 정정(訂正)하며 단속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제자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그렇게 말하지 말자.
그리스도께서는, 만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그렇게 말씀하셨으며,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셨다.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스스로 변호하게 하며, 또한 순수하고 본래대로 인 것 외에는 어떤 의미도 거기에 덧붙이지 않게 하고, 우리는 그 안에서 의견이 일치되도록 하자. ::: 요약하면, 인간의 논쟁 중에 최상의 목적은 성경에 명시된 말씀들을 굳게 지키고자 하는 것이며, 또한 그 말씀에 따라 생각하는 것은 물론 말하는 것이다(사 8:20). 성경의 언어는 성경의 진리를 전달하는데 가장 안전하고 가장 적절한 매개물이니, 곧 "성령이 가르치신 말씀이다"(고전 2:13).
...성경 그 자체는 충분히 유의하게 되며, 모든 위험한 오류들을 상(傷)하게 하는 최선의 무기(武器)인 것과 같이(그러므로 이신론자들:理神論者:deists, 소시니안들:socinians, 교황주의자들:papists, 그리고 열광주의자들이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고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행하는 것이다), 성경 그 자체는 겸손하게 수락(受諾)하게 되며, 동일한 진리에 관한 상이한 표현 양식에 의하여 생긴 상처들을 치유하는 최선의 무기가 되는 교양(weaponsalve)인 것이다.
동일한 논리와 형이상학, 그리고 모호한 것에 관한 동일(同一)용어의 타당성, 또한 그것들의 적용 등에 찬동할 수 없는 자들이라도, 동일한 성경의 용어에는 일치할 수 있으며, 그런 후에 서로 사랑하기로 동의(同意)할 수도 있는 것이다.
Ⅱ. 여기에서 우리는 본 복음서의 결론, 그와 동시에 복음의 기사(記事)의 결론을 보게 된다(24,25절).
본 복음서 저자는 다른 세 복음서 저자들과 같이 그렇게 돌연히 끝 맺지 않고, 어느 정도 운율을 가지고 끝 맺는다.
1. 본 복음서 저자는 전에 일어난 일로 고아(高雅)하게 이행(移行)함에 의하여 일관된, 저자 혹은 필자의 기술(記述)로써 결론을 내린다(24절).
그 당세대(當世代)를 향해 "이 일을 증거한 제자가 이 사람이요," 후대(後代)의 유익을 위하여 이 일을 기록하고 그에 관하여 앞 절들에서 베드로와 주님께서 회담하셨던 바로 이 사람 - 사도 요한이다. 여기에서 다음을 주목하라.
(1) 그리스도의 역사를 쓴 자들은 거기에 자기들의 이름을 써 넣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여기서 요한은 자기 이름을 사실상 서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구약 성경의 토대였던 구약의 처음 다섯 권의 저자가 누구였는지를 확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약의 오경(五經)인 사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필자가 누구였는지도 확실히 알고 있다.
그리스도의 생과 사(生死)에 관한 기록은 우리가 누군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기록이 아니라, 온전히 잘 알려진 사람들에 의해서 작성되었는데, 그들은 맹세를 따라 그것을 증언하려고만 하지 않고, 그 이상으로, "그들의 피로써 그것을 보증"하려고 했었다.
(2)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록한 자들은 소문에 의해서가 아니라 목격하고 경청한 증인의 그 견문(見聞)에 따라서 기록하였다.
본 기록의 필자는 한 제자였는데 그는 사랑하시던 제자로서 그리스도의 품에 의지했었던 자이며, 그 자신이 직접 그리스도의 설교와 담화를 들었었으며 그의 기적과 부활의 증거를 보았던 자였다. 그가 분명히 확신한 것을 증거하고 있는 자가 이 사람이다.
(3)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록한 자들은, 그들이 목격했었던 것을 증거했던 것과 같이, 그들이 처음에 증거했었던 것을 기록하였다.
그것은 기록으로 남겨지기 전에 최대의 확신을 가지고 구두어(口頭語)로써 널리 알려졌다.
그들은 강단과 법정에서 그것을 증거하였는데, 일행을 즐겁게 하기 위한 여행가들의 여행담으로써가 아니고, 최대한의 신중함과 정확성가지고 판결에 도달하기까지, 선서에 따라 그들이 중대한 문제로써 잘 알고 있는 것을 진술하는 증인으로서, 엄숙하게 증언하고 또 확고부동하게 공언하였다.
그들은 그 거룩한 것을 그들이 굳게 지켜야 하는 선서 구신서(具申書)처럼 기록하였다.
그들의 기록은 그리스도의 교훈인 진리의 세계에 대한 영구적인 증언이며, 또한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데 따라서 우리에게 유리하거나 혹은 불쾌한 증언이 될 것이다.
(4) 그리스도의 생애가 기록되어진 것은 교회의 지지(支持)와 유익을 위하여 은혜롭게 정해진 것인데, 이는 그것이 보다 큰 풍부함과 확실성으로써 각처로 전파되고 또 모든 세대를 통하여 지속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2. 본 복음서는 여기까지 진술되어 온 내용의 진실성을 증언함으로써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이것은 다음 중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
(1) 이 세상의 일에 있어서의 인간의 공통된 지각, 즉 흠 없는 명성을 지니고 엄숙하게 그 본 바를 증거하며 또 보다 큰 확실성을 위해 그것을 기록한 한 목격자의 증언은 더할 나위 없는 증거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는 아노라," 즉 이러한 증언은 확실한 것이며, 우리가 그것을 논박(論駁)하지 않는 한, 우리는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신앙에 의하여 그것을 신뢰하기에 이른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 모두가 알고 있다. 그리고 다른 경우에 있어서 평결(評決)과 판결은 이러한 증언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다.
복음의 진실성은 이 세상의 일에 있어서 우리가 합리적으로 바라거나 기대할 수 있는 모든 증거에 의해서 확증되기에 이른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교훈을 전파하셨고, 그러한 기적을 행하셨으며 또 죽음에서 부활하신 사실은, 다른 경우에 있어서 항상 인정되는 것과 같은 그러한 증거에 의하여, 따라서 공평무사한 모든 것에 만족하도록 모순없이 입증된다.
그런 연후에 교훈으로 하여금 그 자체를 천거하게 하며 기적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입증하게 하라.
(2) 여기에 진술된 내용의 진실성에 관한 "그 당시" 교회들의 만족을 나타낸다.
혹자는 그것을 예베소 교회의 동의라고 간주하며, 혹자는 본 기사(記事)에 대한 아시아 교회들의 사자(使者) 혹은 사역자들의 동의라고 간주한다.
영감에 의한 기록은 사람들로부터 어떤 증언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과 같이, 그 신빙성에 어떤 것을 거기서부터 첨부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그들은 그것을 영감에 의한 기록으로써, 교회의 인지(認知)에 천거하였으며, 그들이 그것에 의해서 받았던 만족을 선언했던 것이다.
(3)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안다(19:35)고" 한 것처럼 본 복음서 저자의 기록한 바의 진실성에 대한 자기 확신을 나타낸다.
그가 그 자신에 대하여 복수(複數)로 말하면서, "우리는 안다"라고 한 것은 요한 일서 1장 1절에서, "우리가 본 바요"라고 한 것과 베드로 후서 1장 16절에서처럼,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겸손을 보이기 위함인 것이다.
요약하면 복음서 저자들은 그들이 우리에게 증언하고 전했던 내용의 진실성에 대하여 전적으로 만족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믿지 않은 것을 우리에게 믿도록 요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은 자기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는 그들이 그것에다가 이 생명과 내세(來世)를 둘다 내걸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고 기록한 바의 신용에 따라서 이 생명을 버리고 다른 것을 의뢰했던 것이다.
3. 본 복음서는 "이 외의 많은 일에 관하여 등등"(管管)으로써 결론을 내리는데, 이는 우리 주 예수님에 의하여 말씀되고 행하여진 크게 기억할 만한 것으로 당시에 살고 있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잘 알려진 것이었으나, 후대(後代)를 위하여 기록되기에는 합당치 않게 생각된 것이었다(25절).
주목할 만하고 개선(改善)할 수 있는 일이 많으니, 만일 그 중의 여러 사정들이 상세히 기록된다면, 이 세상 즉,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도서관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바울과 같이,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히 11:32)라고 하며 웅변가처럼 결론을 내린다. 만일, 왜 "복음서들이 규모가 더 크지 않으며, 왜 그들은 구약처럼 신약의 기사(記事)를 풍부하고 길게 작성하지 않았는가"라고 질문된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이 답변될 수 있다.
(1) 그것은 그들이 화제에 고갈되었거나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더 이상 기록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복음서 저자에 의해서도 기록되지 않았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하신 일이 많았는데, 이들은 황금 글씨고 기록되어도 좋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왜냐하면,
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모든 일은 우리에게 알려질 만한 가치가 있었으며, 활용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쓸 데 없는 말이나 보람없는 일을 행치 않으셨다. 아니, 그는 결코 대단치 않거나, 사소하거나 혹은 경박한 일은 조금도 말씀하지 않으셨으며 행하시지도 않으셨으니, 이는 가장 지혜로운 혹은 훌륭한 사람에 관하여 이야기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것이다.
② 그리스도의 기적들은 너무 많고 맑았으며, 그 종류도 맑았으니까 기회가 있을 때에 동일한 일이 종종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한 참된 기적이 대게 하나님의 권한을 나타내기에 족할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저히 많은 사람들에 따라서, 현저히 다양한 경우에 있어서, 그리고 현저히 많은 증인들 앞에서 일어난 기적들의 되풀이는 그것들이 참 기적임을 입증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모든 새로운 기적은 그 전의 기사를 더 잘 믿게 해 주며, 그 기적들 중의 다수는 모든 기사를 논의할 여지가 없게 하여 주는 것이다.
③ 복음서 저자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기적에 대하여 수많은 개별적인 것들을 포함하여 몇 번이고 개괄적인 설명을 한다(마 4:23, 24; 9:35; 11:1; 14:14, 36; 15:30; 19:2; 그리고 다른 많은 곳에서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 앞에 풍부한 화제를 지니고 있다.
"실제는 기록을 능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 절반도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성 바울은 그리스도의 말씀 중 한 마디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어떤 복음서 저자에 의해서도 기록되지 않은 것이며(행 25:35), 또한 그외에도 많은 것이 있을 것을 의심할 바 없다. 그의 모든 말씀은 잠언(箴言)이었던 것이다.
(2) 그것은 다음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① 그것은 더 이상 기록할 필요가 없었다. 이 점이 여기에 암시되고 있다.
그외에도 많은 일이 있었으나, 그것들을 기록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기록되지 않았다. 기록된 것이 그리스도 도(道)의 충분한 계시이며 또한 증거이고, 그 나머지는 동일한 취지를 향한 것일 뿐이다.
이 점에서 우리의 믿음과 행위의 법으로써 성경이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비문서 전승(非文書傳承)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자들은 기록된 말씀을 완전케 하는 체하는 그 전승들 속에 있는 그 어떤 것을 나타내 보여 주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그것에 모순되는 것이 거기에 있는 것을 확신하며 따라서 그들을 배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들로 인하여 "경계를 받도록 하자.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도다"(전 12:12).
만일 우리가 기록된 것을 믿지도 또 활용하지도 않는다면, 더 많은 기록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② 모든 것을 기록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성령으로서는 모든 것을 짓는 것이 가능하였지만, 필자에게는 모든 것을 쓰는 것이 참으로 불가능하였다.
"이 세상이라도 그 책을 두기에 부족하리라." 세상이 방대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책들을 채울 것이라는 말은, 이것보다 더 이상의 것을 가리킬 수 없을 때에, 흔히 있음직하고 또 정당화될 수 있는 한 과장법이다.
그것은 전에 없었던 그러한 거대하고 비대한 기사(記事)가 되었을 것이며, 모든 다른 기록들을 밀어 젖히고, 우리에게 그것들을 위한 조금의 여지도 남겨 두지 않게 하는 그러한 것이 되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쓸 데 없는 반복이 조금도 없이,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던" 것을 보아, 만일 우리가 그가 하신 그 모든 기도의 기록을 작성했었더라면, 그리스도의 기도로 채워질 책의 분량이 얼마나 되었겠는가? 더욱이 만일 그의 모든 설교와 담화와 함께 그의 기적과 그의 병고치심과 그의 모든 수고, 그리고 그의 모든 고난이 낱낱이 기록된다면, 그것은 끝없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③ 많이 기록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라도, 양심 속에서,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와 똑같은 이유로 복음서 저자들은 그들이 쓰고 싶었던 것을 쓰지 않았었다. ‘코레사이’ - 즉 이 세상이라도 용납할 수 없다. 이것은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다"(요 8:37)에서 사용된 바로 그 단어이다. 그 말씀들은 너무 많았었기 때문에 있을 곳을 찾지 못하였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간이 읽는 데에 소비되었을 것이므로, 그로 인하여 다른 의무들은 밀려 났었을 것이다.
기록된 많은 부분은 간과되고, 많은 부분이 망각되며, 또한 많은 부분이 끝모를 논쟁 속에 버려지게 되는데, 만일 그 모든 기사가 팽창된 것과 같은 그러한 동일한 권위와 동일한 필요성의 산더미 같은 책들이 있었었더라면, 이것은 더욱 더 그런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 기록된 내용이 묵상되고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것은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현명하시게도 그것을 위한 여지를 남겨 두시기를 합당하게 생각하였다.
어버이와 사역자들은 훈계를 하는데 있어서 그들이 가르치는 자들의 역량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며, 또한 야곱처럼 과도한 부담을 지우는 것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기록된 책들에 대하여 감사하되, 그 평범함과 간결함 때문에 그것들을 보다 작게 평가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려고 계획하신 것을 부지런히 활용하면서, 또한 보다 높이 처하기를 사모하여, 거기에서 우리의 역량이 크게 향상 및 증대되어서 그것들의 과중한 짐이 되는 위험이 따르지 않도록 하자.
본 복음서 저자는, 아멘으로 끝을 맺으며, 이로써 자기의 인(印)을 치는데, 우리도 우리의 인을 치도록 하자.
이는 본 복음에 동의서명(同意署名)하면서, 그것이 참되고 또 그 모든 것이 참되다는 믿음의 아멘이요, 그리고 또한 기록된 내용에 대한 만족의 아멘으로써 우리를 지혜롭게 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지어다. 아멘.
******
요한복음 제 21장
=====21:1
@그 후에 -시간을 나타냈던 20:26의 표현과는 달리 일반적인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표현법이다. 이 문구로는 이후에 이어지는 사건의 발생 시점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학자들은 20:26-29의 현현 이후 그리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고 본다(Tenney).
@디베랴 바다 - 요한은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로 내려갔음을 따로 기록하지는 않았으나 본문은 이를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디베랴 바다'는 '갈릴리 바다'(6:1), '긴네렛 바다'(민 34:11), '긴네롯 바다'(수 12:3), '게네사렛 호수'(눅 5:1) 등의 이름으로 불리어 지기도 했는데, '디베랴 바다'로 불리어진 까닭은 '디베랴'가 갈릴리 지방의 수도였기 때문일 것이다.
@나타내셨으니 - 여기에 서술되는 예수의 현현은, 요한의 말대로 하면 세번째이나 정확하게는 네번째이다. 첫번째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내셨고(20:16, 17), 두번째는 도마 외의 다른 제자들이 모여있을 때(20:19-23) 세번째는 도마를 포함하여 제자들이 모였을 때(20:26-29), 그리고 지금이 네번째이다.
아마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에게나타나신 것과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만을 구별하였던 듯하다. 한편 여기에 나오는 현현(顯現)의 이야기는 장소가 갈릴리 바다라는 점, 소재가 물고기라는 점에서 눅5:1-11과 유사하다는 견해(Harnack, Bernard)가 있으나 다음과 같은 분명한 차이 때문에 결코 동일한 사건이라고 볼 수 없다.
첫째, 눅 5장에서는 제자들이 고기글 잡지 못하여 밖으로 나와 있다가 예수의 명령을 따라 다시 바라로 나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비해 여기에서는 제자들이 계속 바다에 있었던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둘째, 눅 5장에는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 그물자이 찢어진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비해 여기에는 153마리에 달하는 많은 고기가 잡혔지만 그물른 찢어지지 않았다고 보도된다.
셋째, 눅 5장은 예수의 공생애 시작 부분에서 발생한 것이나 여기에 오는 이야기는 지상을 떠나기 직전에 있었던 일이다.
=====21:2
@함께 있더니 - 함께 있던 제자들은 모두 7명이었다. 이중 '세베대의 아들들'이란 요한과 야고보를 가리킨다. 요한이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세베대의 아들'로 표현한 것은 아마 그의 겸손한 성품 때문일 것이다.
한편 본문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두제자는 빌립과 안드레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J. Haubleiter). 또한 여기에 나온 제자들이 왜 갈릴리에 내려왔는지에 대해서 저자는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다. (1)예수를 십자가에 처형시킨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그의 추종자들을 의혹의 눈초리로 바바보고 혐의점을 찾아 핍박하려 했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기 위해 갈릴리로 갔을 것이다(20:19 주석 참조). (2)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자 실망에 빠진 나머지 과거에 자기들이 거주하였던 갈릴리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3)갈릴리로 가서 예수를 만날 준비를 하라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리하였을 것이다 (마28:10, 16주석참조). 이 가운데 첫번째와 두번째 추측은, 현재의 상황이 이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라는 점에서 다소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며 세번째가 가장 타당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결코 하찮은 일이라 할 수 없는 갈릴리에서의 재회 약속이 언급되지 않은 점과 제자들이 예수를 알아 보지 못한 점 등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21:3
@물고기 잡으러...잡지 못하였더니 - 본문을 통해 제자들이 과거의 직업으로 되돌아 갔다고 추론하는 것은 20:26-29와 쉽게 조화되지 않아 보인다.
혹자는, 최초에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으로 간다고 했을 때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니면 무료함을 달래거나 정신적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는지 불확실하다 하더라도 이 이야기가 복음서의 현 위치에서 갖는 의미는 사도의 사명과 관계가 있다고 본다. 즉 사람을 낚는 것으로서의 사도적 사명은 예수의 명령과 도와주심에 의해서만 온전(穩全)하게 수행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는 것이다(Sanders).
본문 가운데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라는 표현은 베드로를 비롯하여 그의 동료 제자들이 주님과 관계없이 일을 시작했을 때 그들은 완전한 실패에 부딛힐 수밖에 없었음을 말해 주며 예수께서 직접 관여하여 성공을 거둔 것과(6절) 좋은 대조를 이룬다. 사도적 사명은 온전히 주님의 지시를 따를 때만 좋은 결과를 얻들 수 있다.
한편 본문의 '이 밤에'는 갈릴리에서 고기잡이에 가장 좋은 시간이 밤이었음을 감안할 때 더욱 잘 이해되는 부분이다(Barrett).
=====21:4
@날이 새어갈 때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로이아스(* )인데, 이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는 (1)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하고 있으나 아직은 어두운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와(Barrett). 이렇게 보는데에는 다른 곳에서 사용된 '프로이'(*)의 용법을 고려하였기 때문인 바 마 20:1에서 이 단어는 그날의 일이 시작되는 시간과 관련이 있다.
이렇게 볼 때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은 다음과 같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즉 지금 갈릴리 바다에는 여명이 밝아와 어느 정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만큼 밝아졌다. 그런데 바닷가라는 특성상 자주있는 일인 것처럼 어느 정도 안개가 끼어 있었다. 그런데다 제자들은 설마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곳에 나타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기 때문에 예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두번씩이나 예수릎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것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아니면 눅 24:16의 상황처럼 제자들의 눈이 가리워져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바닷가에 서셨으나 - 여기에는 예수께서 어디서부터 또 어떻게 그 자리에 왔는지 설명이 없다. 다만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다고 언급될 뿐이다. 아마 이것은 20-:19에서 문이 닫혀 있었음에도 아무런 물리적 작용없이 제자들 사이에 서셨던 것과 같은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21:5
@애들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디아'(* )는 '아이'를 뜻하는 '파이스'(* )에서 온 말인데 현재의 문맥에서 이에 호칭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로 갈린다. 혹자는 '어! 여보게들!'의 뜻으로 보며 (Robertson) 또 어떤 학자는 '젊은 이들!'의 의미로 본다(Lenski). 현대 헬라에서는 성인(成人)들에 대하여 그 칭호를 사용한다고 한다(Barrett). 본문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애들아'(Children, RSV)라고 불렀을 때 그것이 부모가 아이들을 부르는 것과 같은 의미였든 아니면 젊은이들로 부르는 것이었든, 적어도 매우 친밀하고 애정이 담긴 부르심이었을 것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예수께서는 이런 마음으로 아침 식사를 마련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9절).
@고기가 있느냐...없나이다 - 예수께서는 이미 제자들이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이 물음은 18:35에서처럼 당연히 부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물음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본문에서 '고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라기온'(*)은 '먹다'라는 의미의 어근 '파그'(* )와 '....와 함께'를 뜻하는 '프로스'(*)가 결합된 것으로'떡과 함께 먹는 양념'(특히 생선과 함께 요리함)을 가리키기도 하고 '일용 양식의 하나'를 가리키기도 하였으나 후에는 생선을 가리키는 '아폰'(* )과 같은 의미로 쓰였다(Robertson). 그러니까 본문의 '고기'는 '생선'이라는 의미에서 정확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없나이다'라는 부정의 대답은 제자들이 철저한 실패의 상황에 직면하였음을 말해 주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은데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21:6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 예수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한 것에 대해 (1)갈릴리에서 어부 생활을 했던 제자들이 익히 알고 있던 고기잡이 방법과 전혀 다른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시험해 보려고 했다거나 (2)아니면 위치상 예수께서 물고기의 떼를 더 잘 식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등의 추측이 있으나 그러한 추측은 본절에 접근하지 못하는 피상적(皮相的)인 것에 불과하다. 예수께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명령했을 때 이는 제자들이 밤이 새도록 헛수고한 행위를 다시 한번 반복해 보게 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중요한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그 명령에 순종했을 때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또한 혹자는 '오른쪽(* , 뎌시오스)이라는 단어의 이차적인 의미가 '행운'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행운'에 초점을 맞추기도 하지만, 요한이 이 사건을 통해 독자들이 깨달아 알기를 기대했던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예수의 명령에 대한 제자들의 즉각적인 복종 그리고 그에 따른 놀라운 결과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물을 들 수 없더라 - 순종의 결과로 얼마나 많은 고기가 잡혔는지 그물을 들어올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끌어 올리다'(* ,여퀴에인)는 말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오는 것을 나타내는 데도 사용되었음을 감안한다면 (6:44;12:32), 여기에는 표면적인 의미 외에 또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즉 고기는 개종자를, 고기를 잡는 행위는 사도직의 수행을 뜻한다고 볼때 제자들이 예수에 의지하지 않고 자력으로 했을 때 단 한 사람의 개종자도 이끌어 낼 수 없었으나 예수의 명령에 따라 했으때 그들은 놀라우리 만큼 많은 개종자를 만들수 었었다는 것이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절대 의존읜 관계에있으며 그들의 능력의 원천(源泉)은 오직 예수에 대한 절대적 복종에 있었다.
=====21:7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주시라 - 그물을 들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힌것은 하나의 이적이었고 그 이적은 요한으로 하여금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명하신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게 하였다. 20:8에서도 그랬거니와 여기서도 요한은 남달리 빠른 직관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제일 먼저 주님을 알아보았고 그사실을 베드로에게 말해 주었다.
@시몬 베드로...겉옷을 두른후...뛰어 내리더라 - 20:6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베드로의 적극적이고 급한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배를 끌고가자니 잡은 고기를 처리해야 하는 사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냥 물에 뛰어내려 헤엄으로 예수께 가고자 했다.
그런데 베드로가 겉옷을 두르고 뛰어내렸다는 것은 그가 일하는 동안 활동을 편안히 하기 위해 옷을 벗고 있었거나 거의 벗은 상태로 옷을 느슨하게 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여기서 베드로가 겉옷을 두른 이유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다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영을 하기 위해서는 도리어 옷을 벗어야 했지만 그래도 주님 앞에서는 옷을 벗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거의 벗겨지다시피 헐렁하게 걸쳐져 있던 겉옷을 수영하기 위해 제대로 동여맸다고 보는 것이다. 어떤 것이 옳든 중요한 것은 열정(熱情)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15절 주석참조).
=====21:8
@오십간-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콘디아코시온'은 직역하면 '이백 규빗'이라는 뜻이다. 1규빗이 약 45cm에 해당된다고 볼 때 뭍에서 배까지의 거리는 약 90m(공동 번역은 100미터로 번역함)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작은 배...끌고 와서 - 베드로외에 물로 뛰어내린 제자는 없었다. 그물에 잡힌 물고기를 운반해야 했으므로 그럴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앞절에서(6절) 밝힌 바대로 너무많은 고기가 잡혔으므로 그물을 들어올릭 수 없어 뭍에까지 끌고오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여기서 '작은 배'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로이아리온'(* )은 '플로이온'(* )에 비해 작은 배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면 큰 배는 뭍에 밑창이 닿기 때문에 작은 배로 고기 그물을 예인한 것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요한이 앞의 두 단어를 같은 뜻으로 번갈아 가면서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6:17, 19, 21, 22, 24), 여기서도 3절의 '배'와 동일한 배를 가리킨다고 본다(Barrett, Robertson).
=====21:9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 제자들이 배를 뭍에 대고 예수에게로 왔을 때 거기에는 제자들의 예상을 초월하는 장면이 준비되어 있었다. 예수께서 이미 제자들을 위하여 식사를 준비해 놓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밤이 새도록 고기잡이를 하느라 피곤하고 지친 제자들을 위해 따뜻한 식사를 준비해 주시는 세심한 배려(配廬)를 보여주신다. 예수께서 어떤 경로를 통해 생선과 떡을 구했는지 전혀 언급이 없다. 다만 준비되어 있었다는 사실만이 언급되며 그것이 중요하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와 제자들이 함께 나눈 이 아침의 공동 식사는 서로의 마음을 여는 친밀한 교체의 시간이며(15절 주석 참조), 소명을 부여하는 시간이기도 했다(151-19절).
=====21:10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 명한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1)예수께서 미리 준비해둔 생선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그물에 걸린 생선을 가져오라 하셨다(L.Morris). (2)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와서 함께 식사를 하기 전에 고기 잡은 것을 처리하고 오라고 하신 것으로 본다(Lenski). 전자의 해석은, 그것이 예수께서 마련한 식사의 불충분성을 말한다는 점에서 동의하기 어려운 해석이다. 오병이어의 이적에서도 볼 수있었던 바(6:1-13), 예수께서는 단 한 마리의 생선으로도 충분히 제자들을 먹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후자의 해석도 적절하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지금의 상황에서 잡은 물고기를 처리하는 것은 시급하다고 보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제3의 해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예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체험할 수 있었는가를 주의깊게 상기시킴으로써 그들이 감당해야 할 소명(召命)을 새롭게 인식하고 그것에 대해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주고자 하셨다는 것이다.
=====21:11
@시몬 베드로가...큰 고기가 일백 쉰세 마리 - 그물에 든 고기를, 끌아올려 셈하는 일에 있어서 주도적인 제자는 역시 베드로였다. 본문에는 베드로 혼자 그 일을 다 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게 묘사되어 있으나 6절과 관련지어 볼 때 다른 제자들과 함께 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한편 본문에서 '고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잎뒤스'(*)는, 묘하게도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 글자를 모은 것과 일치하는데 이런 이유로 해서 초대교회에서는 물고기를 기독교 또는 기독교인을 상징하는 부호로 사용하였다. 초대 기독교인들의 거주지였던 곳에서 물고기 그림이 발견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한편 요한은 여기에서 잡힌 물고기의 숫자가 153마리였다고 기록하는데 이 153이라는 숫자는 기독교 역사상 많은 해석을 야기시켜 왔다. (1)어거스틴(Augustine)은 율법을 상징하는 10을 구약으로, 성령을 상징하는 7을 신약으로 보고 이 둘을 합한 수인 17에 이르기까지 1부터 더해 나가면(1+2+3+4+5...+17) 153이라는 숫자가 나온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 엿붙여서 이 153이라는 숫자는 신.구약 시대를 통틀어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를 입어 구원을 얻게 될 자들의 수를 가리킨다고 했다. (2)알렉산드리아의 시릴(Cyril of Alexandria)은 100을 이방인의 수로, 50을 유대인의 수로 그리고 3을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키는 수로 보는 해석을 제시했다. 이렇게 볼 때 100+50+3=153이라는 수가 도출되며 이것은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삼위 일체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 됨을 가리킨다고 한다. (3)고대의 동물학자들은 생선을 153종으로 분류했는데 본문의 이 숫자는 인류 전체의 인종(人種)을 상징한다고 본다(Hieron). (4)사도들에 '낚인' 즉 '구원받은'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본다(Barrett). (5)단지 많은 수의 고기가 잡혀다는 것 그리고 153이라는 숫자는 다만 사실의 보도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본다(TYemple, Leski). 위에 열거한 학자들의 제 견해들은 참고자료로 삼을 수 있을 뿐 그 이상의 확고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엄청나게 많은 물기가 잡혀 있었다는 사실이다(6절).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 이 표현은 적어도 그 정도의 물고기가 잡혔다면 당연히 그물이 찢어졌어야 마땅했음을 암시한다(눅 5:6). 그럼에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면 그것 역시 이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한편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다고 하는 것에 대해 학자들은 분리될 수 없는 교회의 통일성(unity)을 말해준다고 보기도 한다.
교회는 많고도 다양한 사람들로 채워지지만 그 통일성이 보전되어 언제나 하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21:12
@조반을...묻는 자가 없더라 - '조반'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리스테사테'(*)는 하루 중 첫 식사를 뜻하는데 후대에는 눅 11:37에서처럼 '만찬'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참고로 어떤 학자에 의하면 1세기의 유대인들은 보통 하루에 두끼의 식사를 했다고 하는데(L. Morris), 본문의 '아리스톤'(* )이 바로 그 첫번째 식사로 대개는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기 전에 먹었지만 때로는 이른 점심으로 먹기도 했다고 한다. 그 다음에 먹는 두번째 식사는 '데이프논'(* )으로 저녁 식사에 해당한다. 식사를 위해 제자들이 와서 숯불 주위에 둘러 앉았을 때 이미 제자들은 자기들을 식사에 초대하신 이가 바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자기들에게 두번이나 나타난 바 있던 주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153마리의 생선이 분명한 현실이듯 지금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려 하신 주님의 현존(現存)도 결코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 손으로 만져 느낄 수 있는 현실이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이제 더 이상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놀라움과 감격이 뒤섞여 감히 예수께 선뜻 말을 건네지 못한 듯이 보인다(Godet).
=====21: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생선도 - 본절에서 '예수께서 가셔서'라는 표현 가운데 '가셔서'의 의미가 무엇인지, 여분의 떡과 생선을 가져오셨다는 것인지 아니면 제자들이 머뭇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다가갔다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오셨다'는 의미가 특수한 어법인지 분명치 않다. 아무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떡과 생선을 나누어 주셨다. 어떠한 축복의 말씀도 없고 함께 식사를 했다는 언급도 없다. 따라서 이 식사를 굳이 성만찬과 관련시켜야만 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한편 혹자는 이 식탁에서 오병이어의 이적(6:1-13)과 같은 형태의 이적이 또 한번 있었으리라고 추측한다. 본절의 '생선'에 해당하는 말은 9절의 '와사리온'(* )과 동일하다는 점 그리고 11절의 '큰 고기'(* , 잎뒤스)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는 것이다(Hendriksen). 예수께서 이적적인 방법으로 생선을 가져오라 명하신 목적이, 예수께서 준비한 생선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에 잡은 것을 더 가져오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는 가능성은 더 희박해진다.
=====21:14
@세번째로 나타나신 것이라 -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난 것을 계산에 넣지않고 있다(20:15-17;19,20;26-29).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난 것을 계산에서 뺀 것은 그녀가 제자가(* , 메데테스)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Barrett). 그런데 요한이 언급하고 있는 세번의 현현은 다른 신약성경들과 관련시켜 볼 때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아마 요한은 자신이 쓰고 있는 복음서에서의 순서만 고려하고 있는 듯하다. 신약성경이 보도하고 있는 바 부활하신 예수의 현현에 관한 기사들을 도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21:15
@요한의 아들 시몬 - 이 이름은 1:42에 나오는데 그때 예수께서는 그에게 게바(베드로)라는 이름을 새로 주셨었다. 그렇게 하신 것은 그에게서 수제자(首弟子)로서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베드로는 예수를 세번 부인함으로써 '반석'이라는 의미의 이름에 걸맞는 행동을 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아직 그는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질 수 없었다 하겠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본문에서와 같은 호명은 단지 베드로의 자격을 박탈하거나 그의 나약함을 들추어 내기 위함이 아니라 그의 겸손을 유도해내고 그에게 다시 새로운 소명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본문에서 '이사람들'은 개역성경의 난하주(註)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이것들'로도 해석될 수 있다(RSV에서는 these로 되어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본문은 세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1)'네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2)'네가 이 사람들(함께 있던 제자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3)'네가 이것들(배와 기타 키잡는 도구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모든 해석이 다 가능하며 타당성을 갖는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현재의 문맥에서 가장 타당한 해석은 첫번째 것이라고 본다. 비록 예수를 사랑하는 제자들의 열성에 우열(優劣)을 가린다는 것이 어색해 보이긴 하지만,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과 자신을 비교하여 자신의 뛰어난 충성을 공개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막14:29) 그러한 결론은 무리가 되지 않는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 사용한 단어는 '아가파오'(* )였는데 베드로는 '필로'(* )를 사용하여 대답하였다.
흔히 전자는 하나님의 사랑, 신적인 사랑, 숭고하고 헌신적인 사랑, 완전히 이타적인 사랑을 가리킨다고 보며 후자는 인간적인 사랑, 조건적인 사랑, 친근하고 우정에 가까운 사랑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런데 본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위의 두 단어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는가 아니면 위에서 구분한 대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는가이다. 혹자는 두 단어가 다른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보아,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헌신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물었는데 비해 베드로는 자신이 실패한 경험도 있고 해서 자신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고 단지 그보다는 다소 차원이 낮은 사랑 즉 인간적인 우정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대답했다고 해석한다(Lenski). 그러나 다른 학자는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 두 단어를 구별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3:16;5:20;14:21;16:27)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이렇게 보는 또 하나의 이유는 베드로가 예수의 물음에 대해 '그러하외다'라고 대답함으로써 질문에 대해 변경된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두 견해가 다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갖는다. 그런만큼 하나의 견해가 전적으로 옳고 다른 하나의 견해가 전적으로 그르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본절에서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베드로가 비록 실패를 하기 했지만 아직도 예수에 대한 애정과 열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7절 주석참조).
@내 어린 양을 먹이라 - 본절에서부터 17절에 이르기까지 '먹이라', -'치라' -'먹이라'는 명령이 연속되고 있는데 혹자는 첫번째와 세번째는 양들응 목초지로 인도하는 것과 관련이 있고 두번째는 양들의 모은 활동을 돌보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구분하기도 한다(Tenney). 그러나 이처럼 뚜렷이 구분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며 먹이는 것과 돌보는 것이 크게 보아 같은 범부에 든다고 할 때 오히려 같은 의미의 반복으로 보는 것이 나을 듯하다.
한편 '어린 양'에서 '어린'이라는 표현은 베드로에게 부여된 소명은 힘이 들고 많은 사랑을 요하는 것이다.
=====21:16
@두번째 가라사대...내 양을 치라 - 두번째 질문은 다른 것과 비교하지 않고 다만 사랑하는가의 여부를 묻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도 첫번째 질문은 다른 제자들보다 우월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 베드로의 호언장담을 간접적으로 지적하고자 했던 것 같다. 이제 예수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예수 자신과 베드로 사이의 관계를 묻고있다. 문제의 핵심은 다른 것과의 비교 차원이 아니라 베드로가 예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느냐 하는 일대일 차원의 관계에 있었다. 베드로의 대답은 앞의 것과 동일하다. 적어도 베드로는 이 시간 매우 진지하고 솔직하게 그리고 과장없이 대답하고 있는 듯하다. 베드로의 대답은 세번 모두에 걸쳐 '주께서 아시나이다'의 형식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주께서 아십니다'가 주절로, '내가 주를 사랑한다'는 말이 종속절의 형식으로 진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21:17
@사랑하느냐 - 앞의 두 번의 경우와 달리 여기서는 '사랑'을 '필레오'(* )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읕 베드로가 계속해서 사용한 단어이다. 이것은 베드로의 진실성과 주님에 대한 그의 사랑을 수용(受容)하겠다는 마음의 표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주님께서 베드로의 친근한 사랑을 확인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이것과 관련하여 Living Bible은 본절을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진정 나의 친구이냐?"(Simon, Son of John, are you even my friend?)로 번역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15절주석을 참조하라.
@근심하여 가로되 - 베드로는 예수의 세번째 질문을 받고는 근심에 빠졌다. 베드로가 근심하게 된 이유는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세번 반복해서 들었기 때문인 바 어쩌면 자기가 세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것이 생각났는지도 모른다. 예수께 대한 그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으나 그는 이제 더이상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예전처럼 자신있게 호언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아시오매...아시나이다 - 그러나 베드로는 허위가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를 사랑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아시오매'는 하나의 기독론적(基督論的) 고백으로 볼 수도 있다. 즉 이 말 속에는 예수께서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 신적 통찰력을 갖고 계시다는 고백이 들어 있다(2:25;16:30). 베드로는 이것을 알고 있고 그런 만큼 그분 앞에서는 오직 진심을 이야기해야 함을 알고 있는 것이다.
한편 혹자는 베드로의 세번에 걸친 대답 가운데 세번째의 '아시나이다'에 해당하는 단어가 원어상 바뀌고 있는 점에 주목한다. 즉 앞의 두 '아시나이다'는 헬라어 '오이다'(* )의 번역으로서 어떤 사실에 대한 직관적인 앎을 의미한다는 것이며 그에 비해 세번찌의 '아시나이다'는 헬라어 '기노스코'(* )의 번역으로서 이 말은 '오이다'보다 더 강한 의미를 가지며 경험을 매개로 하여 얻어지는 지식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이 옳다고 한다면, 베드로는 비록 근심으로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대답을 했지만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인정받을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으며 그것을 담대히 그러나 교반하지 않게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내 양을 먹이라 - 예수는 베드로의 사랑을 세번 확인하였고 그에게 동일한 사명을 세번 반복하여 주셨다. 이것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하나는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함으로써 실추된 명예를 회복해 주는 의미가 있고(Barrett), 다른 하나는 교회에서의 베드로의 지도권이 다시 위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의미가 있다(Bultmann). 특히 여기서 베드로에게 주어진 권위는 교회 바깥으로 향하는 전도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내부에서의 지도권과 목회적 돌봄에 초점이 있다. 이런 점에서 본서의 분뷰는, '우리 밖'의 잃어버린 양떼에게 관심을 갖는 공관복음의 선교 지향적 분부(마28:19, 20;막 16:15-18;눅 24"46-48)와 비교된다.
=====21:18
@진실로 진실로...젊어서는...데려가리라 - '진실로 진실로'라는 도입 문구는 현재 분위기의 엄숙함을 시사한다. 그리고 도입 문구의 엄숙함에 걸맞게 베드로의 순교(殉敎)가 예고되고 있다. 혹자는 본절이 '어릴적에는 가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갈 수 있었으나 성인이 되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의미의 속담을 배경에 두고 있다고 보는데(Bultmann) 분명한 근거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한편 본절이 베드로의 순교 외에 구체적인 그의 죽음 방식에 대해서도 예언하고 있는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불트만(Bultmann)같은 학자는 본절이 '그가 전에는 자신의 길을 스스로 택했으나, 그의 마지막 길은 마음대로 가지 못한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보고 다음절(19절)과 관련시켜 볼 때 베드로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닌 방식 즉 순교의 형태로 죽음을 맞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본다. 그러나 그 죽음이 곧 십자가의 죽음을 뜻한다는 암시를 발견할 수는 없다고 본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1)'팔을 벌리다'가 십자가 처형에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손으로 잡으려고 또는 지도자를 향해 팔을 내미는 노인의 절망을 묘사하는 것이고, (2)'띠를 띠우다'(* ,존뉘나이)는 '묶다'는 뜻이 아니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바렛(Barrett)같은 학자는 본절에서 베드로의 순교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실현되리라는 암시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도 논의의 초점이 되는 것은 '팔을 벌리리니'와 '띠 띠우고'라는 문구인데 바렛은 불트만과 반대의 논리를 전개시킨다. (1)먼저, '팔을 벌리다'는 사65:2의 '내가 종일 손을 펴서'와 관계가 있다고 보는데, 사65:2는 바나바 서신12:4, 저스틴(., I 35), 이레니우스( ,79) 그리고 키푸리안( ,II, 20) 등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힘을 예시하는 것으로 해석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2)'존뉘나이'( ,'띠를 띠우다')가 묶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므로, 십자가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는 불트만의 견해는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동사는 사전적 의미보다 넓은 개념으로 확대되어 사용될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위의 두 학자들의 견해 가운데 어느 하나가 옳다고 단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다만 후대 교부들의 전승에 의하면 (2)의 견해가 지지를 받는다.
베드로에게 주어진 소명은 이제 거역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는 이제 더이상 자기의 삶을 자의적(自意的)으로 살 수 없다. 그는 주님께 붙잡힌 바 되었는데 그것은 억지로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과 감화로 말미암아(20:22) 자발적인 결단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양들을 위하여 예고된 죽음을 자취한 것처럼 베드로도 노쇠하여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하는 양들을 위하여(15-17절) 죽음의 길을 자발적으로 걸어가게 될 것이다.
=====21:19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 여기서의 '죽음'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고 양들을 돌보는 목회적(牧會的) 직무를 수행하다 강제적으로 부과된 죽음 곧 순교를 가리킨다. 이 순교는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점에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베드로는 이런 죽음을 당할 것이다. 그것은 그의 주님이신 예수께서 죽음으로 하나님을 영광되게 한 것과 같다.
그런데 성경에는 베드로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순교를 당했는 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그의 마지막 행적은 헤롯 아그립바I세(Herod Agrippa I, 37-44)의 박해를 받아 옥에 갇혔다가 천사의 도움으로 탈출한 후(행 12:1-19) 예루살렘 공의회에 나타난 것으로 끝을 맺는다(행15:1-11). 성경외의 초기 문헌들에는 베드로의 최후 생적에 대한 기록이 어느 정도 보존되어 있다.
로마의 감독 클레멘트(Clement, 88-97)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클레멘트1서)에는 베드로가 바울과 함께 로마에서 순교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터툴리안(Tertullian)은 베드로가 네로(Nero) 황제의 통치 하에서 바울과 같은 십자가에 처형되어 순교했다고 말했으며 그는 베드로의 십자가 죽음에서 '남이 네게 띠 띠우고' 라는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보았다( .15). 유세비우스(Eusebius)는 베드로의 십자가 처형과 관련하여 그가 자청하여 머리를 아래로 두는 형태로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었다고 전한다(HE, III, i. 2).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진술의 배경에는 '주님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바른 자세로 처형되었는데 내가 어찌 주님처럼 바로 매달릴 수 있겠는가'라는 의미에서 베드로의 겸손하고도 철저한 순종(順從)을 시사하는 뜻이 들어있다. 또한 신약 외경인 '베드로행전'에는 비록 사실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지만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베드로는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길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는데 베드로는 그리스도에게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다. 그러나 그분는 "네가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 하니 내가 다시 십자가를 지려고 로마로 간다"라고 대답하셨다. 이 대답을 들은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로마로 되돌아가 사역을 계속하다 체포당한 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채 처형당하였다는 것이다.
@나를 따르라 - 본문은 13:36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 결국 그 말씀은(13:36)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에까지 이르러야 함을 시사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미 베드로가 따르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그것은 베드로 자신의 힘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주시는 능력으로 가능하다. 순교에까지 이르도록 자신을 전적으로 부인하고 철저히 복종하는 것 그것이 사도직의 진정한 의미이다(12:25, 26;막8:34, 35)
=====21:20
@베드로가 돌이켜...따르는 것을 보니 - 소위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계속해서 베드로에 버금가는 중요한 인물로 서술되고 있다(7절;20:2-8). 이 제자가 예수에게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라는 13:23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한편 본문의 의미에 대하여 혹자는 베드로에게 방금 내려진 명령을 요한이 이미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베드로에 대한 요한의 우월성이 암시된 것이라고 한다(Barrett).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베드로가 아직 따르기 시작하지 않은 상태에서 요한이 먼저 따랐다는 것을 전제한 듯하나 본문은 그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를 베도로가 먼저 따르고 있고 그 뒤를 요한이 따라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개역 성경에는 '따르는 것을 보니'로 되어 있어 상황에 대한 불명확한 이해를 유발(誘發)시키는 데 공동 번역에는 "뒤따라 오고 있었다"로 되어 있어 주의 사랑하는 제자가 따르기 전에 베드로가 이미 행동을 나타낸 것을 암시한다. RSV의 번역을 보면 이것이 더 분명해지는데, 거기에는 "Peter turned and saw following them"으로 되어 있어 주의 사랑하는 제자가 따르는 대상이 단수가 아니라 복수(them)임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여기서 them은 예수와 베드로라고 봄이 무난할 것이다. 결국 본절은 베드로에 대한 요한의 우월성을 암시한다기 보다는 다만 요한도 베드로에 못지 않게 예수를 따르는 일에 뛰어났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21:21
@이 사람은 어떻게...되겠삽나이까 - 베드로의 이러한 질문에 대한 동기를, 많은 학자들은 요한 질투에서 찾는다(Olshusen, Lucke, Meyer, Baumlein). 즉 베드로는 자신의 순교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듣고서, 그렇다면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인 요한도 당연히 순교를 당함이 마땅하다는 식의 바램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베드로는 요한의 장래에 대한 안타까움과 동정심에서 이런 질문을 했을 수도 있다(Godet).
=====21:22
@내가 올 때까지...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베드로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 베드로는 요한도 자신과 같은 순교의 운명을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고 있었던 듯 하다. 그의 마음을 읽은 예수는 그의 생각과 전혀 다른 대답을 하고 있다. 즉 요한은 순교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심지어 주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살아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베드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베드로는 다만 자기의 사명에 충실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너는 나를 따르라'는 강조적 명령문에 의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너'(* , 쉬)가 강조적인 위치에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쉬 모이 아콜로이데이). 본절에서는 두가지 사실을 추출해 낼 수 있는데 하나는 베드로나 요한이나 그들 모두의 운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베드로와 요한은 각각 독립적인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 따라서 그들의 종국(終局)에 의해 그들의 비중이 결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21:23
@형제들에게...죽지 아니하겠다 - 본절은 베드로의 물음에 대한 예수의 대답이(19-22절) 상당히 오해되어 전파되었음을 보여준다. '형제들'이라는 호칭은 잘못 이해된 이야기가 기독교인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형제들'이라는 칭호는 초대 교회 시절부터 동료 그리스도교인들을 부를 때 사용했던 것이기 때문이다(행1:15, 16). 예수의 말씀은 요한이 당신의재림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만약 주님께서 당신의 재림 때까지 요한을 살려둔다 하더라도 베드로는 아무런 신경을 쓸 것이 없다는 의미였는데 전자의 의미로 오해되었다는 것이다. 이 오해는 본서의 저자로 하여금 바로잡아야 한다는 필요를 느낄만큼 심각한 문제였을 것이다. 초대 교회의 교인들 사이에 이런 오해가 설득력 있게 전파될 수 있었던것도 큰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초대 교회의 교인들은 매우 가까이 임박한 재림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 바 그들은 자기들이 죽지 않고 살아서 주의 재림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마16:27, 28;행 1:11;고전 115:51;살전4:15;계2:16;3:11).
렌스키(Lenski)에 의하면 요한이 죽어 장사된 다음에도 그가 죽지 않고 무덤 속에 살아있다는 전설이 유포(流布)되었었다고 하는데, 이는 초대 교회 교인들에게 오해된 말씀이(22절)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능히 짐작케 한다.
=====21:24
@이 사람이라 -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 그는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고 본서의 저자로서 복음을 증거하였을 뿐 아니라 기록으로도 남겼다. 예수의 생전에 그와 함께 하였던 제자, 더구나 예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애제자가 이 복음서를 기록하였다는 것은 그 증거하는 내용이 신뢰할 만큼 권위있음을 시사한다.
@우리는...참인줄 아노라 - 본문은, 요한이 쓴 이 복음서가 진실되고 신뢰할 만한 것임을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우리'라는 보증인을 내세우고 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는 것은 풀기 어려운 문제이다. 일찍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는 이 복음서가 어떤 의미에서 공저(共著)로 된 창작물이었으며 저자이외에 다른 사람들도 복음서에 대해 책임을 졌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단지 본문을 표면적으로 이해한 데서 온 것일뿐 어떤 증거에 근거한 얘기가 아니다.
최근의 주석 학자들은 이 '우리'라는 표현에 대해 '에베소의 장로들'이라고 보기도 하고(Lenski), 사도의 증거를 확증할 수 있는 사도 교회라고 보기도 한다(Barrett). 혹은 요한이 자신과 동역자들 그리고 본서의 독자들응 공동체 의식속에 묶어 본서의 진정성을 함께 확증시키려는 의도로 그러한 표현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 어느 것이 옳다고 확정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이건 본문이 이 복음서의 진정성을 받아들이도록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도 이미 인정하고 있는 복음서의 권위를 확증하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21:25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부족할 줄 아노라 - 요한은 20:30에 이어 다시 한번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이 자기가 기록한 것보다 비교도 안될 만큼 많다는 사실을 과정법적 표현까지 사용하면서 강조하려 애쓰고 있다. "그 하신 일들을 낱낱이 다 기록하자면 기록된 책은 이 세상을 가득히 채우고도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공동번역)는 표현은 확실히 모리스(L. Morris)가 '유쾌한 과장법'이라고 언급한 것처럼 여유있는 마무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결코 과장이라고 할 수 없는 진솔한 고백이 담겨있다. (1)그리스도가 행하신 놀랍고도 수많은 일들을 다 기록하기에는 저자인 요한의 힘이 너무 달린다든 것,(2)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계시된 복음은 몹시도 심원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에 다 둘 수는 없다는 것(Lenski)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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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gapavw(25, 아가파오) 사랑하다 lov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일반 헬라어는 영어와는 달리 '사랑하다'를 의미하는 단어가 여러 종류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들은 필레오(filevw, 5368), 스테르고(stevrgw), 에라오(ejravw), 아가파오(ajgapavw, 25) 등이다.
(a) 동사 필레오(filevw, 5368)는 사랑과 애정의 표현에 가장 널리 사용되는 단어이다. 이 단어의 여러 파생어를 보면 이를 명백히 알 수 있다. 이 단어는 관심, 돌봄, 환대, 사물에 대한 애착 등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 필레오(filevw, 5368)을 보라.
(b) 동사 스테르고(stevrgw)는 드물게 나타나며, '사랑하다, 애정을 느끼다' 등을 의미하며, 특히 부모와 자식 간의 쌍방의 사랑을 나타내는데 자주 사용되었다.
스테르고는 또한, 통치자에 대한 국민의 사랑, 인간에 대한 수호신의 사랑, 주인에 대한 개들(dogs)의 사랑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남편과 아내의 사랑을 나타내는데는 별로 사용되지 않았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합성어 아스토르고스(a[storgo", 794, 롬 1:31; 딤후 3:3)와 필로스토르고스(filovstorgo", 5387, 롬 12:10)가 나타날 뿐이다.
(c) 동사 에라오(ejravw)와 명사 에로스(e[rw")는 신비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에라오는 '정열적으로 사랑하다, 욕구하다, 그리워 하다'를 의미한다. 에로스는 '정열적인 사랑'이란 의미를 지닌다.
에로스적인 사랑은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것)을 원하거나 갈망하거나 사랑하는 정열적인 사랑이다. 이 사랑은 남·여의 사랑, 또는 어떤 대상에 대한 갈망, 열망, 욕구를 나타낸다. 특별히 관능적이고 선정적인 양상을 띤다.
① 모든 시대에서 헬라인들은 육감(관능)적으로 즐거워하는, 하급 신(神), 곧 광란적인 에로스를 열렬히 찬양하는 것이다. 그들이 찬양하는 에로스 신(god)은 모든 것을 강제하지만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강요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헬라인이 에로스에서 추구하는 것은 도취(intoxicaion)와 황홀이며, 이것은 그에게는 신앙(종교 religion)이다. 그에게 있어서 반응은 하늘의 능력들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Soph, Ant 683이하). 그것은 인간성의 성취이다.
그렇지만 그 반응은 무아경적인 흥분(광란)으로 나타난다(한편 때때로 증오와 더불어 나타나기도 한다). 오로지 반응에 목적을 두고 완전히 감각 또는 감정적으로 몹시 흥분하는 에로스는 모든 인도적 인간성의 표준과 형태를 파괴한다. 관능적 환락(sensual ecstasy)은 중용(moderation)과 균형(proportion, 조화, 바른 관계 등)을 저 멀리 내버려두고 돌보지 않는다.
헬라의 비극작가들은(Soph, Ant. 781이하) 환락(ecstasy, 황홀)에 점점 빠지게하여 이성과 의지와 판단력을 상실하게 하는 에로스(사랑의 신의 이름은 역시 에로스이다)의 불가항력적인 힘을 알고서, 그것을 광신만큼 무서운 것으로 평가했다.
그것은 하나의 신(a god)이며 신들보다 능한 것이다(Eur. Fr., 132, Nauck). 하늘과 땅의 모든 힘은 에로스의 한 최고의 힘과 비교하면 제 2급의 힘들이다. 그것의 전제적인 힘에 사로잡힌 자들에게는 어떠한 선택도, 의지도, 자유도 무시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에 지배를 받는데서 최고의 희열(행복)을 얻는다. 우리는 여기서 에로스의 어떤 신비한 힘을 찾아볼 수 있다.
② 이러한 에로스는 신비 종교들에서 더욱 무서운 것으로 나타났다. 이 관능적인 도취의 데모니즘(demonism)이 종교적 광신과 함께 행해지는 곳에는 반대로 신앙(religion) 자체가 이 황홀경(ecstasy)에서 경험의 최고점(절정)을 추구한다.
창조적 에로스는 다산을 기원하는 풍요제 의식들의 중심이며, 매춘(prostitution)은 큰 여신들의 신전에서 유행했다. 때때로 동양권에서 행해졌다. 그래서 색정적인 그림과 상징들이 많이 사용되었다. 신화에서 이야기한 신들과 사람들간의 성적 결합은 이러한 예찬(cultus)에서 그 현실적 실현에 도달했다. 이런 신전 혼인에서 그 신자들은 신들의 세계와 육체적인 결합을 경험한다. 신앙과 황홀은 종교적으로 변질된 에로티시즘(eroticism=호색)에서 함께 만나 결합한다. 이런 현상은 한국의 신비종파나 사이비종파에서 찾아볼 수 있다.
③ 헬라인들은 에로스를 더 신비적으로 이해했는데 그것에 의해 그들은 보통 사람이 지니는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 완전에 이르고자 노력했다.
헬라인들이 에로스에서 추구하는 도취는 필연적으로 관능적인 것이 아니다. 이미 헬라의 비전(mysteries)에서 때때로 신비주의에서 그렇게 한 것처럼 에로틱(erotic)의 개념들은 많은 방법으로 육감이나 관능 이상과의 만남에 대한 상징으로 영화된 것이다.
플라톤에 있어서 에로스는 생의 최대의 성취와 향상의 전형(epitome)였다. 그에게 있어서 에로스는 이성의 작용(합리성)을 넘어 사람을 기뻐 날뛰게 하는 황홀이며, 자연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원천이며, 최종적으로 창조적 영감을 산출하는 것이다. 에로스를 타오르게 하는 육체적 아름다움은 모든 사랑하는 것에서 의도하고 찾는 선한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지표이며, 영원한 존재와 진정한 선을 가리키는 지표이다(Symp, 2,100이하). 그에게 있어서 에로스란 의와 감정 억제와 지혜의 습득을 위한 분투,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선의 구현이자, 불멸을 얻을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Symp. 200, 206; Phaedr. 237ff, 242ff). 플라톤은 결정적으로 에로스를 모든 육감(관능)적인 것보다 높인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이와 유사하게 에로스를 단순한 경험적인 것에서부터 자유케 하여 발전시켰다.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질서와 운동을 유지시키는 원초적 원리인 견인력으로서의 우주적 기능이다. 따라서 내적으로 세계를 전체적으로 유지시키고 있는 이 사랑은 더 이상 도취와 아무 관계가 없다. 그것은 성격상 엄밀히 의지에서 나온 행동이다.
플로티누스(Plotinus)에게 있어서 진정한 에로스, 모든 사랑을 의미하는 것은 감각과 이성을 넘어 탁월함에 이르고, 모든 한계를 넘어 합치점에 이르는 영혼의 충동이다.
그 시대의 사회 생활에서 비밀 주신제(orgies)를 벌리는 에로스는 신들의 신화에 나오는 감정을 자극하거나 흥분시키는 체험들(사건)을 얻으려하고, 신전들에서 그러한 체험들에 이르게 한 것이다.
맥시무스(Maximus)는 인도적으로 발전시키었다. 플로티누스는 그것을 신비적으로 승화시키고 영화하여, 초자연적 지배자와 영적 결합을 하려는 신비적 열망으로 발전시키었다(Enneads).
초대교회의 시기에 그노시스(Gnosis)는 이런 접근법에 위치하여 자아 초월에 대한 인간 욕망이라는 특별한 경향을 나타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동일한 에로스, 인간 자신의 생활을 초월하는 것에 대한 자연적 충동이다. 여기서 에로틱한 종교의 원형은 관능적 도취이며, 최고 형태의 황홀이다.
에로스는 구약성경에서 잠 7:18("오라 우리가 아침까지 흡족하게 서로 사랑하며 사랑함으로 희락하자")과 잠 30:16("음부와 아이 배지 못하는 태), 이 두 곳에만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d) 그리고 아가파오와 아가페가 있다. 아가파오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충분히 설명한다.
2.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아가파오의 용법.
동사 아가파오(ajgapavw, 25)에서 헬라인은 에로스의 이상한 힘이나 마력(magic)을 느끼지 못했으며, 필레오의 따뜻함이나 열정도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 어원은 불확실하며, 그 의미는 근거가 약하고 가변적이다.
(a) 때때로 아가파오는 "어떤 것으로 만족하다"란 의미를 지닐 뿐이다.
(b) 때때로 외적 태도에서 이 동사는 "환영하다, 인사하다, 경의를 표(존경)하다"를 의미하며,
(c) 내적 태도에서 "어떤 것을 구하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을 요구하다"를 의미한다.
(d) 이 동사는 때때로 동료 끼리의 호의, 우정을, 혹은 때때로 동정을 의미하는데 사용되었다.
아가파오의 특별한 성격을 몇몇 실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을(~보다) 좋아하다, 선택하다, 다른 것보다 위에 한가지 선이나 목적을 두다, 다른 사람보다 한 사람을 더욱 높이 평가하다, 존중하다"를 의미한다.
이렇게 아가파오는 하나님이 어떤 특별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애호)에 대해 사용될 수 있다. 드물긴 하지만 이 단어가 신의 총애를 받은 사람에 대해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Dio. Chrys., 33:21) 분명히 에라오(ejravw)와는 달리, 재물이나 재산을 얻고자 하는 인간 자신의 욕망이 아닌, 타인을 위한 관대한 행위를 뜻하는 말이라 하겠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아하는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특별한 선물과 재물로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
아가파오의 특성은 이 점에서 확실히 보이는 것이다. 에로스는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찾는 일반적인 세상적인 사랑이다. 아가파오는 분명히 그 대상을 선택하여 지키는 구별을 두는 사랑이다.
에로스는 그 대상에 대한 다소 불확정한 충동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아가파오는 그 주체에 의해 자유로이 결정된 결정적인 행동이다.
에로스는 그 최고의 의미로서, 인간의 위쪽으로 향하는 충동, 곧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에 대해 사용된다. 아가파오는 주로 하나님의 사랑, 보다 높은 자가 보다 낮은 자를 들어올리는, 보다 낮은 자를 다른 사람보다 위에 높이는 사랑이다.
에로스는 다른 것들에서 자신(의 생명)의 주림의 충족을 찾은 것이다. 아가파오는 때때로 "사랑을 베풀다"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주는 능동적 사랑이다.
이 동사는 무엇보다 형용사 아가페토스가 사용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아가페토스는 동사와 같은 의미의 뉴앙스를 지니고 있으며, 합당한 사물이나 친애하는 자에 대해 사용되며, 특히 부모의 온갖 사랑을 독차지하는 독자(only child)에 대해 사용되었다.
아가파오는 에라오이나 퓔레오과 교환적으로 사용되거나 결합될 때 그 의미나 개성이 여전히 유동적이며 애매하다. 이런 경우에 아가파오는 때때로 단순한 동의어로서 강조나 다양한 표현 때문에 다른 두 단어와 나란히 위치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플로티누스(Plotinus)에서 아가판은 자기를 (겸손히) 낮추는 사랑에 대해, 에란은 높이 올라가는 사랑에 대해 의식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호머로부터 플로티누스까지 에로스는 계속적으로 시인과 철학자들의 사색이나 연구의 주제가 되어온 반면에 아가파오는 거의 언제나 기본적인 토의 주제로도 나오지 않는다. 명사 아가페는 성경 외에서는 단 한번 여신 이시스(Isis)를 아가페라는 칭호로 부른 것이다.
우리가 살펴본 바 성경 헬라어 이전 문헌에서 아가파오의 특성을 알 수 있으며, 우리는 이 특성을 성경 헬라어 아가파오란 단어에서 찾아볼 수 있다.
3. 구약 및 70인역본의 용법.
구약성경에서 사랑을 뜻하는 중요한 히브리어 동사는 아헵이며, 그 역어로서 아가파오가 주로 사용되었다. 이 동사에서 유래한 명사 아하바의 역어로는 아가페가 주로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 사랑은 그 사람을 강요하여 그가 좋게, 또는 올바르게 평가하거나 인정하는 사물이나 사람에게로 이끌어 가는 자발적인 힘이다. 사람은 이 사랑의 힘에 제어를 받아 자기 자신을 주거나 혹은 사랑의 원인이 되는 대상을 확고히 붙잡거나 혹은 즐거움을 주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사랑은 내적 인격에 심은 영혼의 불가해한 힘이다.
사람이 사랑의 대상을 올바로 인정하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한다(신 6:5). 사랑과 미움은 생의 양극이다(전 3:8; 전 9:6).
사랑은 인간 상호간의 사랑, 하나님의 인간과의 사랑, 사물에 대한 사랑 등을 나타낸다.
(a) 이 단어는 남녀의 사랑에 대해 사용되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하나님과 관계, 그리고 남녀의 성적 관계를 시사해 준다. 이 남녀의 사랑은 이성(sexes) 상호간의 생명력 넘치는 충동을 의미한다. 선지자 예레미야(렘 2:25)나 호세아(호 3:1; 호 4:18), 그리고 에스겔(겔 16:37)은 사랑의 성적(sexual) 측면을 매우 진하게 묘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히 성욕 및 성행위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단어는 남녀의 연애나 열애(창 29:18이하; 창 34:3; 삿 16:4), 합법적인 부부의 행복한 사랑(창 24:67; 삼상 1:5)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창조의 기사는 성의 구별과 부부간의 사랑이 생을 풍요하게 하는 은사임을 설득력있게 이해시켜 준다(창 2:18이하).
「그러나 이 사랑은 성적 사랑의 범위를 포함하지만 그것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헌신적 사랑과 생활의 충실함이 합쳐져 있다. 구약의 초기 기록에 의하면 이러한 사랑은 일부다처나 일처다부 사상과 부합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은 충실(참조: 창 20:13; 삿 14:16; 삿 16:4-5; 겔 16:8; 겔 23:17; 호 3:1), 상호의존(참조: 창 24:67), 책임(참조: 삼하 13:1, 4, 15)과 같은 인간 사랑의 다른 측면을 제외하고 성적인 것에 집중하는 위험을 이해시켜 준다(The interpertreter's D.B).」
더 나아가서 아가서는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라고 열정적인 사랑의 강력한 힘을 찬양까지 한다. 이 노래는 성적(남녀) 사랑의 기이함과 적극적인 힘을 찬양하지만 그 찬양에는 그 사랑이 근거를 두고 있는 상호의존과 신앙심(헌신)을 강조하고 있다(참조: 아 2:16; 3:1-8; 7:10; 8:6-7). 아가서에서 사랑을 묘사할 때 거의 대부분 아헤브(아가파오)와 아하바(아가페)를 사용했다. 그러나 여자가 남자를 부른 칭호는 도드(히 1730: 사랑하는 자)를 사용했다.
이러한 사랑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암논과 다말의 이야기는 성충동의 야수성, 즉 대상자와 성적 관계를 가지려는 무절제한 요구를 보여준다(삼하 13:1-22). 사랑은 성애 또는 성욕적인 영역에서 세상이 알지 못하는 근원, 곧 마귀로부터 기인한 원시적 힘인 미움을 부인함으로 맞서는 적극적인 능력이다. 이 이야기는 이 두가지 충동의 야수성도 투명하게 보여준다(삼하 13:1-22).
결혼이나 부부 생활은 상대에 대한 사랑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다. 삼손의 신부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치 아니하는도다"라는 히스테릭한 말에서(삿 14:16; 참조: 삿 16:15; 창 29:31, 33) 동일한 요소가 표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심지어 법까지도 사랑과 미움의 성욕적 증상에 관여하고 있다(신 21:15이하; 22:31이하; 24:1이하).
(b) 이 단어는 부모와 자식, 가족간의 사랑에 대해 사용되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사랑했으며(창 22:2), 리브가는 아들 야곱을 사랑했다(창 25:28). 야곱은 요셉과 베냐민을 사랑했다(창 37:3; 44:20). 잠언은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경계하느니라"고 했다(잠 13:24).
또한 이 단어는 며느리의 시어머니를 향한 사랑과 같은 가족간의 사랑을 표현한다(룻 4:15).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은 어느 곳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부모를 존중하고 존경하며 또 부모에게 복종해야 한다.
「참고-창 47:29에 보면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인애(헤세드: 친절, 자비; 70인역본 )란 단어를 사용하여 자기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기를 요청했다. 이것이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족속이나 가족의 유대는 이스라엘에서 매우 강하였다. 그러므로 '근친' 관계의 중요한 요소인 사랑에 대하여 놀랄 일이 아니다. 그것은 룻 3:10에서 이성 곧 남녀 사랑과 관련되어 있다. 그곳에서 인애(헤세드: 친절, 자비; 70인역본 ejleo")는 남녀 사랑의 개시와 가까운 친족에 대한 충실, 이 둘을 포함하고 있다.」
성경은 가족적 사랑이 너무 선택적일 때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다(창 25:28). 그 결과로 야곱과 에서가 서로 반목하고 미워하게 되었다. 요셉에 대한 야곱의 편애로 인하여 다른 아들들이 요셉을 미워하고 시기하게 되었다(창 37:4). 배타적인 사랑은 증오가 들어올 수 있는 지점이 될 수 있다. 이는 사랑이 헌신적일 뿐만 아니라 책임을 다 해야 하기 때문이다.
(c) 이 단어는 친구의 특별한 애착을 나타낸다. 다윗과 요나단 사이의 사랑은(삼상 18:1, 3; 20:17) 여인의 사랑보다 더 깊은 우정의 차원이었다-"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삼하 1:26).
(d) 더 나아가 이 사랑은 사회적 공동 생활의 근본과 규범으로 나타난다-"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 19:18). 이러한 면에서 사랑은 이웃을 위한, 그리고 이웃을 향한 헌신이며, 이웃을 형제로서 받아들이는 것이고 이웃이 당연히 받아야할 대우를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특히 외국인(레 19:34)과 가난한 자(레 25:35)와 고아의 권리와 관련된 사회적 법률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이웃 사랑은 단순한 친절이나 호의로 해석할 수 없다. 이것은 편협한 배타주의를 배제한다.-바로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웃이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적(enemy)으로 생각되는 것같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도 의미한다.
그 이유로 신 22:1-4이 동포를 도울 의무를 부과하는 것인 반면, 출 23:4-5은 특별히 이 의무를 적대적인 사람에게 적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웃은 동료일 수도 있고 적일 수도 있으므로, 그는 사랑의 대상이지 법적 제한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개인은 법적 개인보다 우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형태에서 출 23:4이하의 요구와 아마도 한층 더 높은 수준인 잠 25:21에 있는 기본적 진술("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은 원수를 향한 성향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으나 한 특별한 방식의 행위의 의무를 지우는 것으로서,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적으로 가르치려고 한 것이다. 요셉은 그의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선으로 악을 갚는 그런 실례를 보여준다(창 50:19).
물론 구약성경에는 이러한 원수를 사랑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시 109편과 잠 14:20 및 적대 국가들에게 향한 일반적인 태도는 이에 대한 예증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의해 부과된 윤리적인 요구의 고결함은 여전히 존재한다.
(e) 이 단어는 구체적인 것이나 추상적인 것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기름(잠 21:17), 은과 풍부(전 5:10), 뇌물(사 1:23)을 사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악(시 52:3-5), 사망(잠 8:3), 허사(시 4:2-3), 거짓 맹세(슥 8:17)를 사랑했다. 또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시 119:47), 율법(시 119:97), 증거(시 119:119), 법(119:159), 그리고 그들은 선(암 5:15), 진실과 화평(슥 8:19), 구원(시 40:16-17)을 사랑했다.
4.신약성경에서 아가파오의 용법.
동사 아가파오는 신약성경에서 143회 나오며, 요한의 기록(요한복음에 37회, 요한1-3서에 31회, 요한계시록에 4회)에 가장 자주 나타난다.
1. 공관복음의 용법.
(a) 예수님은 새로운 사랑을 요구하신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두 계명에 기초하고 있다(마 22:36-마 22:40; 병행구, 막 12:28-막 12:34). 이 두 명령은 신 6:5과 레 19:8을 결합시킨 것이다. 첫째 부분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명령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의식적으로 그의 백성의 도덕적 전통의 입장을 취하신다. 그러나 그가 요구하는 사랑은 오로지 모든 다른 계명을 그 사랑에 이르게 하고 모든 의가 그 표준을 그 안에서 찾는다는 것을 뜻하는 사랑이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사랑은 의지와 행위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가 듣는 이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태도로 하나님을 위해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결단하고 준비되어 있기를 요구하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가능성을 근본적인 양자택일에 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인의 노예처럼 그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참조: 눅 17:7). 그것은 충실히 유순하게 그의 명령을 듣는 것이며, 스스로를 그의 지배 아래 두는 것이며, 다른 그 무엇보다도 이 통치의 실현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참조: 마 6:33). 한편 그것은 그의 전 존재의 근거를 하나님에게 두며, 전적인 신뢰로 그에게 매달리며, 모든 관심과 책임을 그에게 위탁하며, 그의 손에 의해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지도 않고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는 모든 것은 미워하고 멸시하는 것이며, 다른 모든 인연과의 관계를 끊는것이며, 방해되는 모든 것을 잘라버리는 것이며(참조: 마 5:29이하), 오직 하나님과 묶는 것 이외의 모든 구속을 끊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세력, 즉 재물과 허영은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포기하거나 싸워야 하는 세력들이라고 특별히 언급하신다. 재물을 중히 여기고 부를 축적하려는 자는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는 믿음이 적은 불신자이다(마 6:24b; 마 6:30이하).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 대해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문자적으로 '사랑하는도다')"라고 화를 선언하신다(눅 11:43). 명성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양립할 수 없다.
또 하나 아직 이 사랑을 위협하는 세 번째 위험, 즉 박해에 대한 긴장이 있다. 제자직에는 고난이 수반된다. 아키바(Akiba) 같은 위대한 유대인 순교 신학자들처럼 예수님께서는 부득이 그의 ┻湧?당할 폭행과 고통과 모욕과 수난이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충성에 대한 중대한 불 시험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아시고 말씀하신다(참조: 마 10:17이하; 마 5:10이하). 큰 최후의 고통이 인간에게 다가올 때가 있다(참조: 마 5:29이하; 마 24:10이하; 마 24:12이하). 이 말씀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특성은 순수하고 단호하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강렬한 열정이며 모든 혼란과 권세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사랑하는 주님이 나타나실 때까지 굳게 인내하는 적은 무리들의 열정이다.
그리고 제자로서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된다(참조: 마 10:37이하; 마 25:31이하; 눅 6:22이하). 이와 같은 요구는 사랑이 직면해야 할 고난을 뜻한다. 사랑이란 고난을 통해서만 이 세상에서 이룰 수 있다. 사랑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이를 희생시키게 하였다면, 그의 제자들에게도 분명 이 사실이 적용될 것이다.
(b) 다음에 예수님께서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명령하신다: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9; 병행구 막 12:31).
이 둘째 부분인 이웃 사랑의 계명은 롬 13:9; 갈 5:14; 약 2:8에도 인용되어 있다. 문자적으로 '둘째는 그것과 같이 너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다'로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예수님께서 명하신 근본적인 큰 요구이다. 그것은 인류 속에서 새로운 실재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이 사랑 자체가 인간 상호간의 사랑의 기초이자 동기이다.
랍비 아키바(Akiba)는 이웃 사랑의 계명이 토라(Torah)의 기본 원리이며, 여타의 모든 것들이 이 속에 함축되어 있다고 하였다(참조: 마 22:36이하에 관한 SB I 900-8).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 이런 명령을 덧붙여서 실체화한 것은 신약성경의 특징이다.
예수님은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는 구약성경 및 유대인의 요구를 받아들이시지만 그러나 동포에 국한하는 이웃 사랑에 대한 제한을 단호하게 제거하신다. 그는 또한 이웃 사랑을 우리의 길에서 만나는 의지할 데 없는 사람에게 집중시킨다.
이웃 사랑에 대한 이해를 위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눅 10:29이하). 서기관은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가장 가까운 동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외국인에게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의 체계적인 목록을 제시함으로써 답변하지 않으신다(Philo, supra, 40). 또한 모든 사람들이 형제들이라고 하는 가장 멀리 있는 자들에 대한 별난 사랑을 칭찬함으로 대답하지도 않으신다. 그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이가 누구인가?"라고 역으로 질문하심으로 노미코스(nomikov", 3544)의 질문에 대답하신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나를 중심에 두고 동심원을 그리는 이전의 그룹 짓기를 산산이 부수는 한편 유기적인 이웃의 개념을 내세우신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개념에 의해 당신이 중심에 있다는 새로운 그룹 짓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 체제는 모든 사람과 장소에 도식적으로 적용되는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절대적인 결합체로 구성된다. 그것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둘레에 겹겹이 형성된다. "마침"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가장 가까이에 서 있는 자는 누구든지 똑같이 그에 대하여 이웃의 의무를 지닌다. 세 사람은 똑같이 강도들을 만나 고통하는 사람 가까이에 있다. 그들 중 누가 이웃의 의무를 이행하는가? 이방의 사마리아인이다. 왜인가? 보고 불쌍히 여긴 것이다. 마음이 최종적인 결정을 한다. 마음이 타인의 고통을 알아내는 자가 그의 이웃의 의무를 이행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다른 두 사람은 주저하였으므로 그들의 이웃으로서의 의무를 위반한다. 그러나 이 불쌍히 여김의 도입이 이웃 사랑에 있어서 감정의 낭비를 내포하지 않는다. 요구되는 것은 최대한 감정에 흐르지 않고, 가장 비감상적으로 도움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사마리아인은 매우 침착하게 가까운 앞날을 대비하면서 그 순간이 요구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행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허비하지도 않고 그 의무와 타인의 죄에 대하여 쓸데없이 말하지 않는 자비를 베푼 것이다. 그는 해야만 하는 것과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이 이야기에 피할 수 없는 절박함을 부여한다.
(c) 예수님은 의식적으로 유대의 전통과 대립하는 요구로서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하신다. 마 5:43이하와 눅 6:32이하의 간결한 말씀에서 그 요구에 대한 3중의 결정을 볼 수 있다.
첫째로 그것은 새 시대의 새 요구이다("옛 사람에게 말한 바...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마 5:21; 마 5:43).
둘째로 그것은 칭찬(카라스)을 지적한다("삼", "더하는 것",마 5:46 이하).
셋째로 그것은 "죄인들"(세리들, 이방인들, 마 5:46 이하)과 날카롭게 구별되는 "듣는 자들"에 적용된다(눅 6:27).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원수에 대한 사랑은 이 세상과 세대의 자녀들에 관하여, 그 미래가 그들에게 속한 하나님의 새 백성의 자녀들의 태도이다. 그들은 되돌려 받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 사랑을 보여주어야 하며, 상환의 가능성이 거의 없는 곳에서 빌려주어야 하고, 제한없이 주어야 한다. 그들은 세상의 적의도 기꺼이 저항없이 희생적으로 감수해야 한다(눅 6:28). 참으로 그들은 그들을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해야 하며, 저주하는 자를 위해 축복해야 하고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눅 6:27 이하; 마 5:44). 이들 요구 중 몇몇에 대해서 랍비의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 완전하고 단호한 강령과 비교해 볼 때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옛 백성, 유대인 공동체의 순교자의 정신조차도, 아직 들어보지 못한 이 순교의 의지에는 훨씬 못 미친다. 여기서 한 새로운 중재가, 순교자의 과업, 즉 하나님을 미워하고 그의 신실한 백성을 멸하는 적대적인 세상을 위한 중재가 이루어진다.
이상주의자들은 항상 있어 왔다. 그러나 여기에서 환상이나 감상적인 생각없이 이웃 사랑의 이상을 현실 속에 전하신 자가 말씀하신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해야하고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와 같이 흔들리지 않는 진지한 어조와 현실 감각을 가지고 이 불가능한 요구들에 대해 말씀하신다. 항상 형제 사랑과 보다 좋은 세계에 대한 열광주의자들이 있어 왔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아시며 그러므로 오로지 사랑에 근거를 둔 세계 안에서 사는 삶을 요구하신다. 그는 냉철한 현실성과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하신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미움과 원수에 대한 유대인의 견해를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레 19:18에 대하여, 동족의 자손들에 대해 분노와 복수의 감정 같은 것은 금지되나 다른 백성들에 대해서는 금지되지 않는다고 해석하여, 시 139:19-22과 시 140:9-11과 같은 구절을 그들의 원수들을 미워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예수님은 사랑을 이웃에게 제한한 레 19:18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원수까지도 이웃 사랑의 대상에 포함시킨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원수들을 이전의 미움과는 대조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계명을 더 이상 확장시키지는 않았으며, 사랑에 관한 율법을 복음의 가르침 아래에 두었다. 이 복음의 가르침은 눅 10:29-눅 10:37에서 분명히 설명된다. '곤경에 처해 있는 자는 누구든지 항상 나의 이웃이다'는 진술은 '나의 이웃은 나에게 자비를 베푼 자이다'는 진술에 부속하고 뒤따른다(참조: 눅 10:37). 바르트는 그의 중요한 신학적 해설에서 내가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어리석은 짓임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전의 원수였던 사마리아인은 나에 대한 그의 자비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나의 이웃이 되었으며 따라서 나로 사랑으로 행하도록 도전(요구)하였기 때문이다(눅 10:37). 다른 말로 하면 사랑 받아본 경험이 도전을 앞서며, 복음이 명령을 앞선다. 그 이유는 예수님 자신이 이 비유의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의 모습을 통하여 예수님의 모습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 자비로운 구속(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d) 예수님께서 새로운 상황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사랑에 대한 그의 요구는 당연한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사건인 하나님의 자비를 선포하신다. 그는 죄사함을 가져오시고,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 속에서 새롭고 넘치는 사랑이 흘러 나온다. 이러한 사랑은 모든 생명과 활동에 충만하여 그들을 지도한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새로운 관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서로간의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하였다(눅 6:36이하). 이것은 자비의 관계요 화해의 관계이다.
2) 바울 서신의 용법.
(a)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로 말미암아 창조되는 새로운 상황을 분명히 깨닫고 묘사한다. 이제 바로 동트는 새 시대에 대한 로마서의 주요한 논제는 하나님을 향한 선택된 자들의 사랑으로 시작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아가고 마침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아가페, 롬 8:39)에 대한 확신으로 끝맺는 하나의 찬양에서 절정에 달한다(롬 8:28; 롬 8:31이하). 이 확신은 세 가지 사실에 근거한다.
첫째,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보내시고 이 사랑의 행위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롬 8:27), 곧 아들께서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 십자가 위에서 성취되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사도를 부르시고 계속해서 그가 택하신 자들을 부르신다. 그의 사랑의 의지가 그들에게 향한다.
셋째, 하나님의 아가페를 우리의 마음에 널리 흐르게 하시며, 그리하여 그 사랑을 결정적으로 경험하게 되고 우리의 삶 속에서 현실된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활동을 하나님의 활동과 구분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었던 죄를 용서하시는 일을 하신 것과 같이,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과 동일한 것으로 여긴다(롬 8:37; 살후 2:16).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행위 속에서 계시되고 실행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아가페)을 확증하셨"다(롬 5:8).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건이 된다. 바울은 이런 변화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준동사형(verbal forms)으로 말하고, 항상 부정과거형으로 말한다(롬 8:37; 살후 2:16; 갈 2:20; 엡 2:4; 엡 5:2).
하나님의 사랑은 선택을 의미한다. 바울은 사랑함과 미워함, 택함과 거절함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대해 언급하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고(롬 9:13; 롬 9:25), 형식상의 병행절에서 아가페토이(사랑하심을 입은 자들)와 클레토이(부르심을 받는 자들)(롬 1:7) 또는 에클렉토이(택하신 자들)와 에가페메노이(사랑하신 자들)까지도 사용한다(롬 1:7; 골 1:12). 선택적인 사랑의 개념에 미리 예정하심(pre-temporal ordination)과 그리스도 사건의 표적(sign)에서 현재적(temporal) 부르심에 대한 두 가지 근본적인 사상이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엡 1:4이하[아가페]).
하나님께서 그의 크레스토테스(crhstovth", 5544: 선하심)와 아포토미아(ajpotomiva, 663: 엄위)에서 이제 죄인들의 무리로부터 구별된 선택받은 공동체는 하나님과의 영속적인 친교에서 사랑과 평화를 누린다.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은 살아있는 능력으로 일하고 계신다(롬 8:35; 고후 13:11이하). 사랑은 우리를 포로로 사로잡는다(고후 5:14).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다"(롬 5:5). 이 새롭고 살아있는 능력의 실체는 이들 바울의 말보다 더 설득력있게 표현될 수 없다.
바울 서신의 하나님의 아가페(ajgavph, 26)의 개념의 의미는 명백하다. 그것은 인간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와 이 세상의 구원을 지향하는 것(orientation)이다. 사랑의 행위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목적하시는 것이다. 아브라함 시대부터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백성을 미리 아셨다. 그는 아들을 보내시고 최종적으로 성령을 보내심으로 이 백성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이 성령은 갈라디아서의 위대한 마지막 부분(갈 5:2-갈 6:10)에 사랑의 성령으로 묘사된다(갈 5:22). 서신은 이렇게 역사의 행로를 남긴다.
(b)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의 목적은 새로운 인간이다. 그러나 이 목적은 인간과 인간의 사랑의 행위 없이는 성취되지 않는다. 모든 하나님의 행위는 창조이든지 구원이든지 간에 인간의 행위의 가능성과 필연성 둘 다를 전제로 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의지를 배제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긴급한 부르심은 자유에로 부르심이다.
이 기본적인 법, 곧 예수님이 사건에서 가장 분명히 볼 수 있고, 바울에 의하면 모든 곳에서 하나님 행위와 인간의 행위 사이의 관계를 결정하는 이 기본적인 법은(참조: 빌 2:12이하), 하나님 사랑과 인간의 사랑 사이의 관계에 관하여 사도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첫 번째로 말씀하신다. 그가 관계를 세우신다. 이것은 롬 8장에 단호하게 주장되어 있다. 결단, 선택과 부르심은 확고하다. 그로부터 아가페라 불리는 모든 것이 생겨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사랑은 부름 받는 자에 쏟아 부어진 하늘로부터의 사랑에 대한 응답일 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근본적인 사랑의 행위, 그 자체와 같이 결단의 행위이다.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백성과 맺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물리치는 언약이 성취된다(롬 8:28; 참조: 롬 8:37).
바울은 고전 8:3에 똑같은 근본적인 관계를 재치있게 공식화시킨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느니라".
우리는 오직 그의 앞에서의 우리의 수동성의 크기만큼 하나님을 향하여 능동적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첫째로 어떤 참된 의미에서 우리를 의지가 있고 행동하는 인간이되게 하는 생명을 창조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을 사람에게 불러 일으키신다. 그러나 피스티스는 단지 작용을 시작하며, 진정한 실현은 디 아가페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갈 5:6).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신 자들에게 프뉴마를 부으신다(롬 5:5; 살전 2:13). 다시 한번, 인간은 수동적이다. 그러나 프뉴마는 사랑 안에서 행하는 최상의 활동을 위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자유는 사랑 안에서 그 자체를 억제하고 완성시킨다.
프뉴마가 그것에 의해 자유롭게 되는 아가페에 선행한다는 것은 갈 5:22에 고전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또 "성령의 사랑"(롬 15:30)과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골 1:8) 같은 결합에서 그리고 고전 4:21에 보다 세련되게 표현되어 있다.
프뉴마와 자유의 관계에 대해서는 롬 8:2에, 자유의 한계와 목적으로서의 아가페에 대해서는 갈 5:13에 나타나 있다. 사랑을 위해 해방됨으로 율법이 성취되고 초월되고 극복되며, 어떤 후퇴와 방해도 허용하지 않는 새로운 질서가 시작된다.
사랑의 한 가지 중요한 목적은 부름받은 자가 그의 이웃에 대한 봉사로서 그의 삶을 사랑과 자유에 두는 것이다: "13 ...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갈 5:13-갈 5:14).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이하),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살전 3:12). 바울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명령에 집중하여 예수님과 같은 방법으로 그 명령을 확립한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관심은 형제 사랑에 집중되어 있다: (참조: 갈 6:10).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동포를 돕기 위해 준비되어 있음을 의미하던 이웃 사랑은 이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는 함께 시민된 자들을 위한 봉사를 의미한다. 그것은 형제간의 복지를 행위의 지배 원리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살전 4:9; 골 1:4; 몬 1:5; 엡 4:2; 엡 6:23; 골 3:19; 엡 5:25). 아가페토스와 아델포스는 서로 바꾸어 사용할 수 있는 용어가 된다(살전 2:8; 몬 1:16).
형제 사랑을 요구하는 우주적이고 역사적인 카이로스에 의해 형제 사랑이 결정적으로 한정된다(참조: 갈 6:10; 롬 13:11). 형제 사랑은 십자가와 텔로스 사이에서 이 결단의 시기에서 유일하게 적절하고 전진적인 태도이다. 그것은 십자가의 표적 아래 선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으심으로 인해 존재하게 된 공동체 안에서(빌 2:1이하; 골 3:14이하; 엡 5:2; 참조: 고전 8:11) 봉사와 희생, 용서와 이해(consideration), 도움과 동정, 그리고 쓰러진 자를 세우고 낙담한 자를 회복시키기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롬 12:9; 고전 13:4 이하; 참조: 갈 5:25 이하). 사도 자신의 최상의 가능한 목표는 교회의 선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아직 남은 고난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참조: 고후 6:3; 골 1:24 이하). 그러나 이것은 또한 바울에게 있어서 기본 원칙인 하나님과 인간의 행위 간의 근본적인 관계에 따라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행위에 대한 봉사로서 인간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가 결합한다.
사랑은 세우는 일을 한다(고전 8:1). 사랑은 장래의 일을 세운다. 아가페(ajgavph, 26)는 텔로스(tevlo", 5056)의 표적 아래에 있다. 이것은 고전 13장의 위대한 진리이다. 이런 이유로 사랑은("제일 좋은 길", 곧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하는 하늘의 선물이며, 사랑은 믿음, 소망, 사랑이 이루는 삼각 구조의 중심에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둘 보다 위대하다. 믿음과 소망은 이 불완전한 세계(aeon)의 한계나 사건들을 견딘다. 사랑으로 인해 장래 세대의 능력은 이미 현재의 세계의 형태 속으로 침입한다. 예수님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에게 있어서도 아가페는 이 죽음의 세계(aeon) 가운데서 미래가 가지는 유일한 생명의 힘이다.
3. 야고보서의 용법.
(a) 약 1:12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b) 약 2:5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얻는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의 나라로 부르실만큼 선하다고 여기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자는 나의 형제들이며 그들이 비록 누추한 옷을 입고 온다할지라도 뒷자리에 앉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c) 약 2:8에서 사랑, 곧 이웃 사랑은 새 왕국의 최고의 '법'이다: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그러므로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범법자가 된다(참조: 약 2:9).
4. 베드로의 용법.
(a) 벧전 1:8에서 성도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으나 사랑한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b) 벧전 1:22에서 진리로 영혼을 깨끗하게 하면 참으로 형제를 사랑할 수 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베드로는 벧전 2:17에서 "형제를 사랑하라"고 권고한다.
(c) 벧전 3:10에서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악을 떠나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d) 벧후 2:15에서 발람은 불의 삯을 사랑하다가 망했다: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5. 요한의 용법.
바울에게 있어서 아가페는 미래의 원리(principle)이며, 요한에게 있어서 사랑은 현재의 우주적 위기에서 세워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세계의 원리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일 3:16; 요일 4:9 이하).
이 기본적인 사상에서 요한과 바울(롬 8:32)은 일치한다. 그러나 요한이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대한 사랑에 대해 항상 이야기하는 방식에는 다른 점이 있다(요 3:35; 요 10:17). 모든 사랑은 예수님께 집중된다. 그는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의 중재자이시다. 대조적으로 요한은 아버지에 대한 아들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거의 말한 적이 없다(요 14:31). 그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그의 "친구들"로 주신 자들에 대한 아들의 사랑을 더욱 강하게 강조한다. 아들을 통해 아버지의 사랑이 인간의 세상에 이른다(요 17:23 이하; 요 14:21 이하; 요일 4:19; 요 11:5; 요 13:23). 이 사랑은 그의 죽음에 의해 성취되고 공표되었다. 아들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그의 목적을 이루신다(요 13:1; 요 15:13).
요한복음의 아가페는 매우 명백히 겸손한 사랑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한 단계 한 단계 이 세상으로 내려오는 천국의 실체이다. 그렇지만 이 천국의 실체는 계시와 도덕적 행위에 의한 승리를 성취한다. 따라서 요한은 바울이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명백하게 설명한 것을 이해하고 있다. 빛과 생명의 세계는 이 세상에서 사랑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요한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모두의 삶에서 아가페의 적극적인 특성을 강조할 수 있고 또 강조해야만 한다.
요한이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요 5:42; 요 8:42; 요 14:28)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고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는 형제에 대한 사랑에 의해 가리워 지도록 한 것은(요 13:34 이하; 요 14:15 이하; 요 21:15 이하; 요일 4:20) 극히 일부분이다. 형제 사랑, 아버지와 아들과 아들의 백성의 서클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공동체를 구성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공동체의 삶을 위한 궁극적인 실체이며 그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은 그 생활의 법이다(요 15:9 이하; 요일 2:10; 요일 3:10; 요일 4:11 이하).
요일 3:14에는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않는 자는 사상에 거하느니라"고 한다. 요일 3:14; 요일 2:15 이하; 요 3:19에도 그렇다. 아가판은 어떤 목적어에 의해 한정되지 않은 채로 있으며, 단지 이 절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다. 눅 7:47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는 단독으로 사용된 아가폰의 독립적인 배치는 요한일서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요일 3:18; 요일 4:7 이하; 요일 4:19). 이 사랑은 생생한 활동이며, 존재의 방식이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현실화이다. 사랑의 법이 모든 세부적인 요구들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고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고상한 일관성으로 독자들 앞에 제시된다는 사실이 이것과 조화된다. 단지 때때로 사랑에 대한 요구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와 같은 표현에 의해 정확하게 정의된다(요일 3:18; 요이 1:1).
요한의 서신에서는 보다 일반적으로 훈계가, 여기에서 선택의 사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지만 형제의 관계에 대해서는 매우 단순하게 적용되는 아가페테와 아가페토이라는 절박한 부르심에 의해 중단된다(요삼 1:5; 요일 4:7).
요한계시록에서 형제 사랑에 대한 요구(계 2:19)는 이 분열과 고통에서,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라도 하나님께 굳게 매달리라는 열정적인 부르심에 의해 완전히 가리워 진다. 여기에서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이해는 전적으로 그 시대의 필요에 의해서 새로운 생명에 닥친 수난에 대한 신학 사상에 의해 결정된다. 요한계시록의 시작 부분에 충성된 증인 "우리를 사랑하신 자"(토 아가폰티 헤마스)에 드리는 찬양이 나오고(계 1:5) 사랑하는 도시의 마지막 때의 상황의 변화(계 3:9; 계 20:9)와 하나님의 적들에 대한 위협과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는 책망(계 2:4)과 함께 죽기까지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계 12:1) 피스티스(믿음)와 아가페(사랑)를 지킨 자들의 영광이 뒤따른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는 때가 왔다(마 24:12).
6. 사도 시대 이후의 용법.
초기의 신조는 몇가지 새로운 이상의 고취와 아울러 이 시대에 전수된다. 클레멘트일서 49-50은 지고의 사랑, 그리고 이 사랑이 공동체와 세상에 대해 가지는 실질적인 의의에 대해 계속적인 인식을 예증해준다. 아가페와 아가폰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기초적인 용어가 되었다. 에가페메노스(**)와 아가페토스(**)는 예수님에 대해 즐겨 사용되는 용어인데 때때로 휘오스(**)나 파이스(**)와 연결되어서 사용되기도 하고 때때로 독립적인 명칭, 사랑하는 아들(Only-Beloved)로 사용되기도 한다(벧후 1:17; Herms, 5, 2, 6; M. Pol., 14, 1; Dg., 8, 11; Barn., 3, 6 등).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하나님께 사랑받고 선택받은 자들이며, 그의 선하신 기쁨이 그들에게 머무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 아가페와 아가판은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의 경건을 요약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세상에 대한 경멸과 미움을 요구한다. 이러한 긴장 상태는 여기 유대교에서 경건과 하나님의 사랑의 최후의 표현으로 고귀하게 평가되는 순교를 초래할 수도 있다.
또 다른 형태로 하나님과 이 세상의 현상간의 긴장, 하늘의 사랑과 세상적 사랑 간의 긴장은 금욕주의로 이끌 수도 있다. 아가판은 훈련받은 또 때때로 절제하는 삶을 나타내는 용어, 또는 실제로 금욕의 훈련을 나타내는 용어가 된다. 순결한 아가페는 에로틱한 사랑보다 강하다. 그러나 아가페와 그 파생어들의 가장 일반적인 사용은 형제 사랑을 의미한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관한, 율법의 의미와 성취에 관한, 그리고 원수의 사랑에 관한 옛 말들은 크게 존중되고 적용된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경우에 형제들은 중요하다.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지치지 않고 봉사로 융화로 선으로 악을 이김으로 형제애적 친교의 의지를 강화시키기 위해 힘써야 한다(벧전 4:7 이하; ICI, 49이하; Barn, 1, 6). 아가페토스는 유행하는 인사말의 형식이다. 아가페는 식탁에서의 친교가 발전된 형제들의 애찬에 대한 전문적인 용어가 되었고 사회적인 의미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참조: E. Stauffer;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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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vw(5368, 필레오) 좋아하다 be fond of, 사랑하다 lov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필레오(Homer 이래)는 필로스(fivlo", 5384)에서 유래했으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a) 필레오는 흔히 아가파오(ajgapavw, 25: 사랑하다)와 의미나 용도가 매우 유사하지만 일반 헬라어에서(70인역과 신약은 그렇치 않음) 아가파오보다 더 자주 사용되며 '좋아하다'는 의미보다 '사랑하다'라는 의미를 더 지니고 있다.
(b) 필레오는 중성 목적어와 함께 사용될 경우에 '좋아하다, 중히 여기다'를 의미한다.
(c) 필레오는 부정사와 함께 사용될 경우에 '~하기를 좋아하다, ~하는데 익숙해 있다, ~하는 것이 습관이다'를 의미한다.
(d) 필레오는 '입맞추다'를 의미하며, 아가파오와는 달리 애무나 특히 입맞춤과 같은 애정의 행위를 나타낼 때도 사용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필레오는 70인역본에서 30회 나오며, 아헤브(사랑하다, 창 27:4, 9, 14; 창 37:4; 잠 29:3; 전 3:8; 호 3:10; 사 56:10), 나샤크(입맞추다, 창 27:26; 창 27:27; 창 29:11, 13; 창 33:4; 창 48:10; 창 50:1; 욥 3:27; 잠 7:13; 잠 24:26; 아 1:2; 아 8:1), 레아(친구, 애 1:2)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필레오는 신약성경에서 2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필레오는 마 6:5에서 그 본래 의미로 사용되었다. 거기에 보면 외식하는 자가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는 것을 좋아한다(사랑한다)고 되어 있다.
마 23:6과 눅 20:46도 유사한 경우들이다. 눅 11:43에서 아가파오가 사용되고 비슷한 내용인 눅 20:46은 그렇지 않다는 점은 의미상의 차이가 항상 지켜진 것 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b) 마 10:37에서는 가족 관계에서 비롯된 사랑을 의미한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여기서 한마디 부언하자면, 이 문장은 신학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이 단어가 신학적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왜냐하면 비교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 문장의 표현법은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외 다른 곳에서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하나님의 통치의 선물인 아가페로 표현되었다. 이 문장의 초두에는 친족간에 서로 나누는 타고난 사랑이 언급되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그 사이에 끼어 들게 될 때, 보통 가정의 친교의 끈과 고리까지도 하나님의 가족 사이의 새로운 교제를 위해 풀릴 수가 있다는 점이다.
(c) 요 11:3; 요 11:36에서 나사로와의 예수님의 사랑의 결속을 언급한다. 여기서 친구에 대한 사랑이 언급되지만, 나사로는 특별히 선택된 사람이며, '그는 나의 친구'가 아닌 '우리의 친구'라고 불리운다(요 11:11).
(d) 요 15:19에서 '자기의 소유의 것을 사랑한다'는 기본 의미가 명백히 나타나 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한은 세상(코스모스)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둠의 영역으로도 묘사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코스모스 안에(in) 있는 사랑이나 코스모스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에 대한 증오와 동일하다(참조: 약 4:4).
요일 2:15은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 하신 말씀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e) 요 16:27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요구에 부응하였으며, 예수님께 대한 그들의 사랑에 답하여 아버지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신다. 여기서의 사랑은 요 3:16에서 언급되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사랑과는 구별되는 듯하다. 그러나 필레오와 아가파오가 모두 성자에 대한 성부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듯이(요 5:20; 요 3:35 등). 제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도 아가파오로 표현될 수 있다(참조: 요 14:21, 요 14:23). 하지만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요 13:1)이나 제자들 상호간의 사랑(요 13:34), 아버지께 대한 예수의 사랑(요 14:31)을 나타낼 때는 오직 아가파오만 사용되었다. 요한복음에는 성부에 대한 제자들이 사랑이 아무데서도 언급되지 않는다
(f) 요 21:15이하에서 아가파오와 필레오가 번갈아 나오는데 일부 성경 해석가들은 예수님께서 세 번째 질문에서 필레오를 사용하셨기 때문에 베드로가 근심했다고 주장하지만(요21:17), 요한복음에서 이 단어들은 거의 동의어이므로 베드로가 근심한 까닭은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물으셨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이 사람들 보다"(요 21:15) 자신을 더 사랑하기를 원하시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특별한 사명을 맡기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이 위임도 부인이나 특별한 사랑의 시인과 마찬가지로 세 차례 반복된다. 이 예외적 사랑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랑하시는 제자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에 대응되는 것이며, 목회 사역과 죽음이라는 베드로의 이중적 사도 직분의 기초가 된다. 베드로는 '아가파오'라는 사랑은 물론 '필레오' 사랑까지 언급한 것이다.
(g) 고전 16:22에서 바울은 필레오를 단 한번 사용했으며, 또한 중요하기도 한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거기에서, 퀴리오스(주)에 대한 사랑은 구원의 조건으로 묘사되어 있다. 은혜는 오직 말과 행실로써, 즉 온전히 믿음을 바쳐 주께 사랑을 고백하는 자들에게만 임한다.
(h) 딛 3:15,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찌어다". 믿음 안에서의 사랑으로 이해된 인간적인 사랑을, 아들(Sun)에 의해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과 관련하여 새로이 해석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할 때, 비로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믿음 안에서"라는 문구는 그리스도교적 중요성을 나타내며, "우리를"이란 단어는 특정한 배타성을 암시한다. 사도 바울에 대한 사랑은 교회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연합하는 결속이 된다.
(i) 계 3:19에서 승천하신 주님은 구약 성경의 구절을 인용하여 말씀하신다(잠 3:12). 그리스도의 징계하시는 사랑(참조: 고전 11:32)은 다름아닌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다. 이 배경은 공동 식사 안에서 사귐의 성취를 이루는 하나님의 우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잘못하는 아이를 뉘우치도록 교도하는 가운데서 나타나는 부모의 사랑이다.
계 22:15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절대적으로 대립을 이루는 명제 가운데 앞의 개념들을 특징지어 주는 결론적 구절을 보게 된다(참조: 요 3:19; 요일 2:15; 약 4:4).
(j) 막 14:44에서 필레오는 '입 맞추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하였는지라".(참조: C. Brown; G. Stahrin).
====아가페안의 에로스-스토르게-필레오=======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한량없는 주님의 (상대방의 지고지선의 진복누림=평강의 완전한 회복 위해 자신의 모든 것 <능동적으로>자기목숨까지도 내어주어 희생적으로 섬기시는) 아가파오안에는(하나님의 아가파오에 그나마 가장 많이 닮은 것이 부모, 특히 모친의 자녀에 대한 모든 것 쏟아붓는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 3가지 유형의 사랑, 곧 에로스(남성여성사이의 생명낳기위해 질투하는/독점적/배제적/단독적 사랑의 하나됨...주앞에 선 단독자의 표상)-스토르게(한 가족 공동체인 부모형제자매사이에 한핏줄/혈연/공통점에 근거한 교통과 이해/끈끈함...서로 서로 곤경에서 돕고 위하는 한가족됨의 예배공동체)-필레오(존귀존중존경신뢰맹약축복의 충심/우정어린 친구사이의 <수동적으로>자기눈까지도 빼어내어줄만큼 극진히 위함/허심탄회하게 서로 의지하며 세워감)의 사랑의 어떠함이 함께 녹아있게 됨....결국, 모든 마음의 중심을 아시며, 그 사랑의 차원과 깊이를 아시는 하나님을 배역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사랑이란 어떤 형태이든지 그 본질적 의미와 가치의 참생명력을 상실케 됨은 당연지사!!
------((양을 먹이다 = 라아))---------
bovskw(1006, 보스코) 먹이다, 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보스코(Homer 이래)는 어근 보트(bot)에서 유래했으며, 목자의 행위로서 '먹이다, 치다', 수동태로 '먹다'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보스코는 70인역본에서 약 26회 나오며, 히브리어 라아('풀을 뜯기다, 방목하다, 돌보다, 지키다)를 번역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a) 보스코는 '먹이다, 치다'를 의미한다. 막 5:14; 눅 15:15; 요 21:15; 요 21:17에서 비유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모든 방법으로 교회의 일원들의 영적 안녕을 증진시키는 그리스도인 교사의 의무를 묘사한다.
(b) 호 보스콘은 목동, 목자를 나타낸다. 마 8:33; 눅 8:34.
(c) 수동태로 '먹다'를 나타낸다. 마 8:30; 막 5:11; 눅 8:32.
---((양을 치다=지켜 돌보다...나하크))------
poimaivnw(4165, 포이마이노) 양을 치다, 돌보다, 지키다 to herd, tend.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포이마이노(Homer. 이래)는 포이멘(poimhvn, 4166: 목자)에서 유래했으며,
(a) '목자가 되다, 가축을 지키다(돌보다), 가축을 먹이다',
(b) 비유적으로 '돌보다'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포이마이노는 70인역본에서 약 55회 나오며, 거의 모두 히브리어 라아(떼, 양떼)의 역어로, 1회 시 48:14에서만 나학(인도하다, 몰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실제적 의미와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포이마이노는 신약성경에서 11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포이마이노는 본래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눅 17:7; 고전 9:7.
(b) 포이마이노는 비유적 의미로
① '다스리다, 통치하다'를 의미한다. 통치자들에 대하여, 마 2:6; 계 2:27; 계 12:5; 계 19:15; 교회의 감독자들(목회자들)에 대해, 요 21:16; 행20:28; 벧전 5:2.
② '목초 또는 음식을 제공하다, 기르다'를 의미한다. 유 1:12에서 자기 몸을 기르는 것, 계 7:17에서 영혼의 필요를 공급하거나 먹이시는 것을 나타낸다.
(참조: J.H.Thayer; E.Beyreu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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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가나의 혼인잔치]]...JC재림-어린양의 혼인잔치의 모델..
....[약혼식]성문앞에 장로들, 마을사람들, 신랑측 사람들(친척들, 친구들) 신랑, 신부, 신부측 사람들(친척들, 친구들. 들러리들)이 함께 모인가운데 신랑의 아버지가 (반드시 ~하게 구체적으로 시행하겠노라고 확정하는) 혼인약속의 서류를 낭독하고 신랑은 포도주를 특별한 잔에 담아서 신부에게 건네는데,( 신부는 약혼조건이나 신랑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그 잔 받기를 거절하면 그 혼약은 취소됨), 그 포도주잔을 마심으로써 혼약은 이루어지고 (결혼준비에 쓰일)신부의 지참금은 지급되며, 이제 신랑측은 모두 함께 당당히 아버지집으로 돌아가게 됨.[[그리스도의 승귀]]
....혼인식날짜는 전적으로 신랑의 아버지에게 일임하는데((약혼식후 대개 1년이내에 그 언제라도)) 신랑의 아버지가 신부를 데려오는 바로 그날밤에 피로연을 베풂으로서 이루어지게 됨...(대개 밤중에 갑자기 결혼피로연을 시행함).
....[신랑과 신부의 결혼준비]이제, 신랑은 아버지 집의 공간을 넓혀서 부부(또한 자녀들이) 함께 거할 공간을 스스로 완비한 채 언제나 심신을 정결하게 가꾸고 스탠바이 상태로 지내게 됨...한편, 신부는 들러리들(항상 넉넉한 등기름과 등을 예비한 슬기로운 7처녀 모델)과 함께 자기집에서 웨딩예복을 마련한 후 매일밤마다 그 옷을 마련해 두고 항상 청결하게 심신을 유지한 채 그옷을 입고 자도록 예비함 ((더불어 신부 및 늘 함께 머무는 들러리는 항상 등과 함께 매일 밤 등불을 밝히는데 쓰일 기름을 각자 넉넉히 준비해 두어야 신랑을 알아 볼 수 있고록 불을 밝힐 수 있게 되며 신부와 함께 혼인피로연이 베풀어지는 신랑의 아버지집까지 동행하며 결혼피로연의 누림까지도 참여할 수 있음))
....[혼인식] :: 신랑의 아버지가 돌연히 가장 적절한 시점이라고 깨닫는 그 시점에 신랑을 갑자기 깨워서 ((자, 이제 네신부를 데려오라))고 하면 신랑은 뿔나팔을 불면서 당당하게, ((마음에 참여하리라고 미리 작정함으로써))이미 초청받은 인근 이웃들과 마을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제 베풀어 질 혼인잔치에 깨어나 참석하라}}고 일깨우고 신부를 맞으러 나아감.....나팔소리를 들은 신부는 들러리와 함께 이미 모든 것 준비된 채로 자기처소에서 나와 집 문밖에 서 있다가 신랑을 맞고((신랑친구들이 마련한 가마에 앉혀진 채로)) 신랑과 함께 마을거리들을 지나 신랑의 아버지 집 문앞까지 도달한 후 내려서 문안으로 뿔나팔소리와 함께 들어가고 모든 동행자들과 뿔나팔소리를 듣고 깨어난 사람들도 함께 아버지집에 들어간 후((JC재림-신부의 공중영접 ==>어린양의 혼인잔치 개시 조건 완비)) 이윽고 곧 문이 닫히게 되며 향후 7일간((이른 바 그 기간동안 지상에서의 7년 대환난 경과??))은 문을 여는 일이 결코 없게 됨....그 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은 밖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됨...==>심판주로서 재림, 아마겟돈전쟁-->천년왕국 -->곡과 마곡의 전쟁 -->새하늘과 새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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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의 전체 윤곽]===
모든 차원, 우주천체, 천지만물, 만유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 영원한 생명이신 분, 영이신 하나님이 당신이 사람안에 친히 거하심 통해 전 우주에 유일무이한 살아 생동하는 유기체로서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만드시려는 그분의 한량없는 은혜의 뜻인바, 친히 생명씨앗이요 뿌리요 줄기[그는 교회의 머리이심]가 되시면서 동시에 [모든 하나님을 참되게 믿는 이들마다] 줄기의 뻗어남인 산 가지들 되게 하심 통해 하나의 유기적 공동체를 만들며 확장해 가고 계심.
...이를 위해 그 첫째로 당신의 호흡을 불어 넣으심 통해 사람의 영을 지으셨고, 그것을 방해하여 오던, 창조 이래로 관영하였던 죄 문제를 이제 성육신하여 오셔서 십자가 죽음으로 해결하시고 부활 거쳐 내주하시기에 적합한 생명의 영으로 변형되시어 그리스도 안으로 참되게 믿어 들어가는 이마다에게 들어오사 친히 내주하심 통해 앙망하는[그래서 영으로 접촉하는!!] 참되게 믿는 이마다에게 당신의 영원한 생명을 친히 공급해 주시며, 또한 권능의 영을 내려주심 통해 함께 하심을 입증하시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인격 가진 가지들로 만들어 가고 계심..
...이제, 그분은 땅끝까지 복음 전파 사명을 제자들에게 부여하고 계심!!
말씀이신 하나님은 육신이 되심 통해 <마귀를 멸하기 위해> 옛뱀(+<구속을 위한>어린 양 +<많은 밀알 산출을 위한 하나님 생명을 가진>한 알의 밀)의 형체를 동시에 가지셨다...
...이로써, 십자가 죽음에 자신을 넘기심과 부활 통해 산출된 <이미 베풀어 주신 말씀을 영으로 접촉함 통해 그분안으로 참되게 믿는(그분안으로 믿어들어가는) 이마다 그분의 생명을 가진<새롭게 태어난(출생한, 중생의, 거듭난)그의 많은 형제들이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됨>의 은혜 안에 거하여 누릴 수 있게 하셨다, [이것은 오직 4:24에서 말씀하신대로 영과 진리<실제...철저히 주관적임> 안에서 <그분을 받아들임 통해> 누리게 하신다],.
...또한, 믿는 이들 안에 거하는 그 생명은 참 빛이시기에, 그들에게 진리(실제)를 가져다 주신다..
...요약해 보자면,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은 결국, 참되게 그분을 믿는 우리로 하여금 TUQ의 유기체, 유일무이한 우주적 교회의 일부분, 그분의 지체가 되게 하셨다.
...요한복음에서는 그분의 떠나심에 대한 기록이 없음에 주의하라.
...보라, 다락방문을 잠근 채로 그 안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돌연히 나타나셔서 요20:22에 말씀하신 대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말씀하셨는데, 이 때 다락방에 모여 있던 제자들은 산 믿음으로 성령을 받아들임 통해 그들의 호흡을 통해 <비밀스런 방식으로> 그들의 <영> 안으로 들어 오신 바, 내주하시는 그리스도, 만유를 포함하신 분이 참되게 믿는 이들 안에 영구히 함께 사심으로써 우리를 그분 자신의 일부로 만드셨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그분의 진정한 의미에서 모든 차원을 초월하신, 차원들조차 창조하신 창조주, 영원 과거 전 부터 계신 그 분이심을 입증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목표는 그분의 충만-성숙-확장에 있음...창조로 사람안에 영을 지으심(슥12:1)--하나님 만이 [충만히] 채우실 수 있음---하나님은 구속의 역사 이루시고 생명주는 영이 되셨음(고전15:45) : 곧, 하나님은 창조자-구속자이시며 이에 더하여, 믿는 이마다 접촉 가능한 생명주는 영으로서, 그분을 믿음으로 접촉하는 그 순간, 우리의 영에 들어 오시며, 그 때 우리는 그분의 유기적인 몸의 부분이 되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함=충분한 분량까지> 우리안에서 자라심의 표현 통해 유기체적인 그리스도의 몸이 주님이 원하시는 데까지 성숙하고 확장되기를 갈망하심..
##요4:14, 24 ==>그 영(HS)이신 TUQ께 경배함 = 그 영, 곧 생수 마심 [*14.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23.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6:48, 57 ==> 그것은 산 떡, Q의 체현이신 JC를 먹는 것..*48에서, [나는 생명의 떡], *57에서,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해 살리라] 이 말씀이 중요하다.. ..[*47.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5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결론적으로,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믿음으로 접촉하여] 경배함으로써 살아있는 영이시며, 살아계신 생명의 말씀을 생명의 떡과 생명의 음료로서 먹고 마시는 것임
--->이로 인해, 7:37-39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된다.. ::::[ *37.○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따라서, 나는 TUQ의 유기체의 살아있는 한 부분으로서, <믿는 나의 새롭게 된 바> 영으로 그분을 접촉함 통해 그분을 먹고 마심으로써 그분에 의해 살고 있으며, 이 하나님은 내게로부터 흘러 나오셔서 나를 통해 그분 자신의 생명 열매를 맺음, 곧 나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심,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 하신 말씀을 이루심으로써 당신의 유기제. 곧 그리스도의 몸의 확장을 이루어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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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후 베다니의 감람산에서 승천하시기까지 JC의 40일간의 행적]]===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죄를 십자가에서 담당하시고 분명히 부활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곧바로 하늘로 승천하신 것이 아니라, 40일 동안 이 땅에 더 머물러 계시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행1:3)
성경에는 부활하신 주님이 40일 동안 11번 나타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무덤가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막16:9, 요20:14-18)
(2) 무덤에 갔던 4 여인들에게 (마28:8-10)
(3)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눅24:13-35, 막16:12-13)
(4) 베드로에게 (눅24:34, 고전15:5)
(5) 도마를 제외한 열 제자에게 (막16:14, 눅14:36)
(6) 도마를 포함한 열 한 제자에게 (요20:26-29)
(7)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던 일곱 제자에게 (요21:1-14)
(8) 갈릴리 산에서 열 한 제자에게 (마28:16-20, 막16:15-18)
(9) 500명의 성도들에게 (고전15:6)
(10) 야고보(알패오의 아들)에게 (고전15:7)
(11) 부활후 40일만에 감람산에서 승천하시면서 (막16:19-20, 눅24:44-53, 행1:1-11)
---이처럼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십자가 사형 판결을 승인한 빌라도에게 원수를 갚으러 가지도 않으셨고, 종교 지도자들과 군중들을 벌하러 가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절망속에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과 갈릴리로 도망친 제자들을 만나 주셨고, 죽으신 예수님을 잊지 못하는 여인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그들은 눈이 어두워 보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항상 그들 곁에 계셨습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떤 일을 했을까요?
(1) 부활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부활을 말씀하셨고, 마지막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시면서까지 장사된지 3일만에 살아 나실것을 말씀 하셨습니다 (마16:21, 17:23, 20:19)
그런데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 앞에 예수님께서는 직접 나타나 자신을 보여 주시면서 영혼육의 완전부활을 증명하기 위해 음식을 잡수시기도 하셨습니다. (눅24:38-39, 막16:14, 마28:17)
그리고 못박힌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만져 보라고 하시면서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더 복되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요20:27-29)
(2)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실의에 빠져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을 찾아가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오심과 사심 그리고 가심이 결국 성경에 말씀한 대로 이루어진 것임을 자세히 풀어 가르치실 때 그들의 눈이 밝아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절망의 발걸음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거슬러 올라가 부활의 참된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눅24:13-35)
(3) 평강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후 한결같이 축복하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평강’ 이었습니다. (눅24:36, 요20:19-29)
예수님께서 주신 평강은 세상이 줄수 없는 평강이며 (요14:27), 최고의 축복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것을 믿었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 마다 항상 평강을 축원했던 것입니다.
(4) 사명을 감당하도록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제자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다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마28:19-20, 막16:15)
또한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반드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을 받으라고 당부하기도 하셨습니다 (행1:4-5, 요20:22, 눅24:49)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맡기신 사명은 바로 우리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직접 모셨던 제자들도 성령을 받았을 때 그 사명을 감당할수 있었다면, 우리는 더더욱 위로부터 주시는 은혜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아 복음을 증거할 때 비로서 내가 살고, 가정이 살고, 이 나라와 민족이 살아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내 힘과 능력만으로는 감당할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날마다 말씀을 사모하고 기도에 더욱 힘쓰는 가운데 주시는 성령을 의지하여 주께서 남기신 십자가의 고난을 기쁨으로 채우며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골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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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의 복음 I (요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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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장 1-3절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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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장은 “그 후에”로 시작한다. 헬라어 메타 타우타는 문자적으로는 “그 일들 후에”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 일들”은 어떤 일들을 가리키는가? 필시 바로 앞에 나오는 사건들, 그러니까 요한복음 20장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을 만나 주신 사건들을 지칭한다. 자신들도 스승처럼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직접 나타나셨다. 또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눈으로 생생히 목도했다는 동료들의 증언을 묵살한 도마를 위해 다시 찾아오셨다. 그런 감격스럽고 충격적인 일들 후에 부활의 주께서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사건이 요한복음 21장에 담겨 있다.
저자 요한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님은 부활 후 딱 한 번만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다. 적어도 세 번 나타나셨다(요21:1 및 21:14 참조). 부활 후에도 거듭 제자들에게로 향하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그분의 놀라운 은혜를 엿보게 된다. 한편, 방문마다 고유한 목적이 있음 또한 보게 된다. 첫 번째 방문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부활하셨음을 알리시기 위한 방문이었다면, 두 번째 방문은 주님의 부활 소식을 강력히 거부하는 제자 도마를 위한 방문이었다. 그리고 요한복음 21장에 기록된 세 번째 방문은 15절 이하에서 볼 수 있듯이 베드로를 회복시키시기 위한 방문이다. 주님께서 일하실 때는 이처럼 분명한 목적이 있다. 주님께서는 결코 당신의 방문을 낭비하시지 않으신다. (물론 우리가 주님이 일하시는 목적을 늘 선명히 본다는 것은 아니지만……)
요한복음 21장의 기사는 일곱 명의 제자들을 소개한다(2절). 시몬 베드로를 필두로 요한복음 20장에서 부각되었던 도마 그리고 요한복음 1장에서 주목받았던 나다나엘,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들”(즉, 야고보와 요한)과 다른 제자 둘이 언급된다. 공관복음에서 핵심 제자군이라면 역시 베드로, 야고보, 요한, 그렇게 3인방이다. 변화산에 주님과 함께 올라갔던 것도 이들 아닌가?(막9:2 이하 및 병행구절) 그런데 요한은 “세베대의 아들들”을 언급하기에 앞서 도마와 나다나엘을 언급한다. 그러고 보면 요한복음에는 누가 더 핵심적인 제자인가에는 저자의 독특한 안목이 담겨 있는 듯하다. 어찌 보면 다른 동료 제자들을 먼저 언급하는 겸양의 표현일 수 있다. 그러나 제자 중 누구의 이름이 먼저 혹은 자주 언급되는가보다 누구의 제자인가가 훨씬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요한복음 21장 2절에 나오는 “또 다른 제자 둘”이란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요21:2)”
개역개정에 요한복음 21장 2절에 나오는 “또 다른 제자 둘”(저자 요한은 이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이란 표현의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그의 다른 제자 둘”이다. 2절에서 베드로로 시작해서 5명의 이름이 언급되었지만, 여기 “그의 다른 제자 둘”은 그 중 누구의 제자도 아니다. 이 두 명은 바로 예수의 제자다. 2절에 나오는 “그의”라는 대명사는 바로 앞에 등장하는 사람 중 그 누구도 지칭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대명사는 앞서 1절에 언급되었던 예수님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대명사가 어느 단어를 지칭하는지 확인할 때, 근접한 단어를 먼저 고려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일반적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바로 앞에 나오는 세배대의 아들들, 그 앞에 나오는 나다나엘, 도마, 베드로 중 누구도 저자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 두 사람의 스승이 아니다. 1절에 언급된 예수님이 이들의 스승이시다.
요한복음 21장 2절에서 대명사(“그의”)가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한 위와 같은 관찰은 다시금 요한복음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상기시켜 준다. 학자들은 요한복음 21장을 보통 에필로그로 분류한다. 요한복음 내러티브의 본체는 20장 마지막에 나오는 도마의 클라이맥스적 신앙고백과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에 대한 선언으로 마무리되고, 21장은 일종의 후기로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직접적인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학자들의 견해가 상당 부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위에서와 같이 2절에 등장하는 “그의”라는 대명사에 주목해 보면, 요한복음 1-20장에서와 마찬가지로 21장에서도 예수님이 여전히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남아 있음이 입증된다. 요한의 이야기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이 주인공이다. 우리의 이야기에서는 과연 누가 주인공인가?
머릿짓으로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를 대변인 삼고, 스승을 보호하고자 “용맹하게” 칼을 휘둘러 말고의 귀를 베었던 시몬 베드로는 여전히 제자들 무리 가운데서 “리더십”을 발휘한다(요21:3; 13:24 및 18:10 참조). 베드로가 고기 잡으러 간다고 하자 동료 제자들이 바로 따라나선다.
그런데 잠깐! 지금 물고기를 잡으러 간다고? 부활하신 주님을 두 번 대면한 후 제자들이 보여주는 반응이라기에는 다소 어색하고 부적절해 보인다. 시몬 베드로에게 그리고 동료 제자들에게 아직 해결해야 할 숙제가 남아 있는 듯한 암시를 받는다(요21:15-17참조). 고기잡이에 나선 제자들의 모습이 그들의 영적 둔감함을 암시해 주는지도 모르겠다(요21:4참조).
어찌 되었든 베드로의 “리더십”은 이날 밤 일절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낮보다 고기가 잘 잡힌다는 밤 시간을 골라 철야 작업을 했다. 적어도 세 명의 전문 어부들(베드로와 세베대의 아들들)을 포함한 일곱 명의 제자들이 밤새 동원되었다. 하지만 헛수고다. 완전 허탕이다. 디베랴 호수의 모든 물고기는 작은놈 하나 예외 없이 이들의 그물을 철저하게 그리고 처절하게 피해 간다(요21:6 참조). 크레이크 키너(Craig Keener)가 그의 두 권짜리 요한복음 주석에서 말한 대로, 저자 요한은 이 부분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5)”
그러나 요한복음은 바로 여기서 끝나지는 않는다. 예수님은 허무함과 탈진, 노동 무가치를 경험한 일곱 제자를 향해 다시 한번 은혜로 다가오신다(요21:4 이하 참조). 바닥을 치는 인생 경험이 때로는 축복의 짙은 그림자다. 만일 그런 경험으로 인해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면 말이다. 만일 그런 체험으로 인해 우리 삶에 주님의 개입이 필요함을 실제로 인정하게 된다면 말이다. 바로 이날 밤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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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의 복음 II (요21:4-6)
요한복음 21장4-6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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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예수님은 은혜의 주님이시다.
제자들의 죄를 위해 그리고 세상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던 그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변함없는 은혜로 제자들에게 계속 다가오신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던 주님의 사랑은 부활 후에도 변함없이 계속된다 (요13:1 참조).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던 예수님이 바로 부활하신 영광의 주시다!
부활하신 주님을 이미 두 번 대면했던 제자들은 전문 어부 출신인 베드로의 주도 하에 고기잡이에 나선다. 하지만 디베랴 호수의 물고기들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이들을 피해 간다. 제자들에겐 허무함과 탈진, 노동 무가치의 바닥 치는 경험만이 남는 듯하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다시 만나 주시기까지는 말이다. 저자 요한은 고기잡이에 나섰다가 밤새 허탕만 친 이 사건을 통해 제자들이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간접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듯하다 (요15:5 참조). 엄청난 포획(요21:6)이 기적인 것처럼 사실 어쩌면 밤새 물고기가 단 한 마리로 걸려들지 않은 것도 기적인지도 모른다. 이는 적어도 주님의 베푸시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기에 앞서 제자들의 심령을 일구시는 신적 간섭의 한 방식이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와 계셨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미 디베랴 호숫가 제자들 곁에 함께 계셨다. 이어지는 요한복음 21장의 내용을 보면 주님께서는 디베랴 호수에 당도해서 제자들의 아침 식사를 미리 준비해 놓으셨다(요21:9). 그러나 허무함과 탈진에 짓눌린 제자들은 주님께서 그들 곁에 와 계심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제자들에게 부활 후 이미 그들을 두 번 찾아오신 주님이 그들을 다시 만나러 오실 것에 대한 기대감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누군가 호숫가에 서 있는 것을 보긴 했지만 그게 예수님이라고는 생각치 않았다(요21:4). 그들은 그렇게 영적으로 둔감해져 있었다. 마치 우리처럼 말이다.
저자 요한은 주님께서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요 21:5)”고 물으셨다고 기록한다.
이 질문은 헬라어로는 파이디아 메이 티 프로스화기온 에케테 이다. 이 특정한 질문 형태는 질문자가 상대방이 어떻게 답변을 할지 이미 알면서 물어보는 경우에 사용된다. 특별히 “아니오”라는 답변이 나올 것을 미리 알고 물을 때 사용된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얘들아, 너희 물고기를 좀 잡았는지 아닌지 내가 확실히 잘 모르겠는데, 밤새 상황이 어떻게 되니?”라고 물으신 것이 아니라, “너희 밤새도록 잡은 물고기 한 마리도 없지? 맞지?”라고 물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물고기를 좀 잡았는지 아닌지를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밤새 허탕만 쳤음을 정확히 알고 계셨다. 그들의 허무함, 노동 무가치 경험, 바닥을 치는 체험을 속속들이 헤아리고 계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질문하신 의도는 결코 정보수집에 있지 않다. 도리어 제자들이 자신들의 상황을 직면하고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시는데 그 목적이 있다 (요15:5 참조).
아무것도 잡은 게 없다는 처절함이 담긴 제자들의 답변을 들으신 후, 주님은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배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라 명령하신다. 그렇게 하면 물고기를 잡을 것이라고 단언하신다 (요21:6). 당시에는 보통 키잡이 노가 배의 오른편에 있는 이유로 어부들이 배 왼편으로 그물을 던졌다고 한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은 전문 어부의 상식과 전통에 어긋나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어쨋든 제자들은 주님 말씀대로 행했다. 그랬더니 밤새 제자들을 피해 도망 다니던 물고기들이 총집합하여 단번에 그물에 걸려든다. 한 마리만 걸려들어도 밤새 허탕 친 것과 얼마간 대조를 이루겠지만, 겨우 그 정도가 아니다.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많은 물고기가 한숨에 걸려든다. 153마리의 큰 물고기들이 단번에 포획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요21:11참조).
도대체 제자들이 무슨 일은 한 것인가? 그들이 한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그저 은혜로 그들을 다시 찾아오신 주님 말씀대로 행한 것 외에는 말이다. 주님 말씀 대로 했더니 기적적 포획이 일어났다. 디베랴 호수의 제자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어린아이 같은 신뢰와 순종이었다.
디베랴 호수에서 일어난 기적적 포획의 사건은 주님 없이 스스로 해 보려는 인생과 주님 말씀을 어린아이처럼 신뢰하고 순종하는 인생의 극명한 차이를 절실히 보여준다. 그때나 지금이나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 말씀에 대한 어린아이 같은 신뢰와 순종 뿐이다. 우리가 진정 주님의 말씀을 우리의 생각과 경험보다 존귀하게 여기게 된다면, 그렇게 주님을 신뢰하고 그분 말씀대로 산다면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도 다가오는 세대의 풍성한 생명을 미리 경험할 것이다. 잘 알려진 찬송가 가사대로,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다.
은혜의 주님께서 제자들을 다시 찾아오셨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을 세번 째로 방문하셨다. 밤새 허탕만 쳤던 제자들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것 같은 포획의 기적을 경험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여기서 종결되지 않는다. 더 복되고 은혜로운 사건들이 제자들을 그리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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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의 복음 III (요21:7-8)
요한복음 21장 7-8절
7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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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주님을 이미 두 차례 대면한 제자들은 베드로의 주도로 고기잡이에 나선다. 밤새 수고했지만 다 허사다. 작은놈 하나 걸려들지 않는다.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을 세 번째로 만나주시려 이미 그들 곁에 와 계셨지만, 제자들은 그분을 인식하지 못한다. 호숫가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보았지만 그게 예수님이신 줄은 깨닫지 못한다. 고기잡이에 나선 제자들이 밤새 허탕만 쳤음을 아시는 주님은 대화를 통해 제자들이 철야노동에도 불구하고 작은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케 하시고 이윽고 배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라 명하시며 포획을 약속하신다. 제자들이 주님 말씀 따라 그물을 던졌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밤새 제자들과 숨바꼭질을 했던 디베랴 호수의 물고기들이 단숨에 그물에 걸려든다. 철야 작업 내내 단 한 마리도 건지지 못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제는 한꺼번에 물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들어 그물을 들어 올릴 수조차 없다.
그제야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 요한이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고 이를 베드로에게 일러준다 (21:7). 요한이 어떻게 바닷가에 서 있던 그분이 주님이심을 알아차렸을까? 아마도 전에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일 게다. 누가복음 5:1-11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처음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실 때도 밤새 허탕을 친 뒤 주님의 도움으로 기적적 포획을 경험한 일이 있었다. 누가복음 5:1-11의 기사는 다른 제자들보다 베드로에게 더 집중하고 있지만, 그의 동업자 야고보와 저자 요한도 그 자리에 같이 있었고 함께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단했다 (눅5:10-11).
사 복음서를 통틀어 예수님의 개입으로 기적적 대량 포획을 이룬 사건은 단 두 번 등장한다. 첫 번째가 누가복음 5:1-11이고 두 번째는 바로 요한복음 21장이다! 처음 갈릴리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때와 거의 동일한 포획의 기적이 요한으로 하여금 해변에 서 있던 그분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인식하게 했을 것이다.
바닷가에 서서 기적적 포획을 가능케 하신 그분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시라는 요한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베드로는 작업 하느라 벗어 두었던 겉옷을 얼른 두르고 허리띠를 졸라맨다. 고기잡이 작업을 위해 겉옷을 벗은 채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겉옷을 둘러 주님에 대한 예의를 갖춘 후, 베드로는 주저 없이 물속으로 몸을 던진다. 겉옷을 갖춰 입고 헤엄치는 것이 불편하겠지만, 베드로에겐 예수님에 대한 예의가 편하고 불편하고의 문제보다 더욱 중요하다. 불과 육지로부터 100야드(91.44m) 가량 떨어진 가까운 지점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던 터라 다른 제자들처럼 배를 타고 와도 오래 걸리진 않으련만 베드로는 단 일초라도 주님을 빨리 뵙고자 하는 열망에 하던 일을 모두 중단하고 포획한 물고기도 다 뒤로 한 채 단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물속으로 몸을 던진다. 주님을 먼저 알아본 것은 요한이었는데, 정작 물에 몸을 던진 것은 베드로다. 어찌 보면 좀 과장된 듯한 베드로의 행동은 바다 위를 걷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칼을 마구 휘둘러 대제사장 종의 귀까지 잘랐던 그의 과단성과 특심을 여실히 드러내 준다.
진리를 좇지 않는 열심은 위험하다. 하지만 진리를 소유하고 있음에도 삶과 사역에 대한 열정이라고는 잘 보이지 않는 경우를 자주 주변에서 경험한다. 사실 나 자신이 그런 모습은 아닌지도 자문해 본다. 그 가운데 베드로의 과단성과 특심이—비록 위험성을 적잖이 내포하고 있을지언정—귀하게 느껴진다. 주님 계신 곳이라면 만사 제쳐 놓고 나아갈 수 있는 베드로의 열정이 과연 우리 가운데 살아 있는가? 혹시 주변에서 일초라도 주님을 먼저 뵙고자 물속으로 주저함 없이 몸을 던지는 베드로 같은 행동을 볼 때, 그것을 과장되고 형식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 비판을 통해 우리 안에 주님 향한 열정이 사라진 것을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따라 베드로의 “거룩한 낭비”가 그립다.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요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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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의 복음 IV (요21:9-11)
요한복음 21장 9-11절
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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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는 부활 후에 제자들을 거듭 찾아주시는 은혜의 주님이시다. 부활하신 주님을 이미 두 번 대면한 베드로와 동료들은 함께 철야 고기잡이 작업에 나선다. 그러나 노동 무가치의 경험만 남는 듯했다. 밤새 허탕만 쳤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미 디베랴 호수 제자들 곁에 와 계셨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적적 포획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 요한은 그제야 호숫가에 서서 배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라 명하신 분이 주님인 줄 깨닫고 이 사실을 베드로에 일러 준다. 열정과 특심이 남다른 베드로는 예수님을 빨리 뵙고 싶은 맘에 서둘러 겉옷을 두른 후, 동료들과 포획한 물고기들을 뒤로 한 채 바로 물속으로 몸을 던진다.
뭍으로 올라온 베드로와 제자들은 주님이 피워 놓은 숯불을 발견한다. 주님께서 친히 아침밥상을 차리고 계셨음을 본다. 오늘 아침 메뉴는 숯불구이 생선과 떡이다! 조금 전까지 아무것도 잡지 못한 공허함과 허탈감에 짓눌려 있었는데, 이제는 한 마디로 축제판이다! 주님께서 이미 생선과 떡을 준비하고 계셨고 (21:9), 또 이제 막 기적적으로 포획한 생선들을 가져오라고 명하신다 (21:10). 그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바로 움직인다. 고기 잡는 일에도 앞장섰고, 주님을 발견한 후 단 일초라도 예수님을 빨리 만나려고 물속에 몸을 바로 던진 베드로가 이번에도 선수를 친다. 베드로는 큰 물고기들로 가득한 그물을 뭍으로 옮긴다. 너무 신기했는지 한 마리씩 세어본다. 하나, 둘, 셋, … 열, 스물, 서른…, 백, … 헉 모두153마리나 된다. 그것도 큰놈들로 말이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밤새 작은 물고기 한 마리도 없었는데, 주님 말씀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153마리가 그것도 큰놈들로 걸려들었다! 정말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주님 말씀대로 살면, 결실하고 수확하는 풍성한 삶을 누린다. 때로는 주님 따름으로 인해 더 어려움과 핍박을 겪지만, 때가 이르면 거두게 될 것이다 (갈6:9 참조).
그런데 사실 기적적 포획보다 더 놀라운 기적이 있다. 큰 물고기들이 그렇게 많이 걸렸는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당시의 그물은 일반적으로 목화로 만들어졌다. 그렇기에 쉽게 찢어졌고 종종 수선해야만 했다. 원래 저자 요한도 그물을 수선하던 중에 처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막 1:19 참조). 원래 잘 찢어지는 편인 목화 그물이 어떻게 이 큰 물고기 153마리를 견뎠을까? 아무리 봐도 신적 보존에 대한 암시가 느껴진다 (요21:18-19 참조). 작은 물고기 한 마리도 없던 디베랴 호수에서 큰 물고기 153마리가 단숨에 포획된 것은 분명 기적이다. 그러나 부실한 목화 그물이153마리나 되는 큰 물고기의 중량을 견뎌낸 것은 그보다 더 큰 기적이다. 저자 요한은 의도적으로 이 사실을 강조한다.
이같이 [큰 물고기가]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요21:11)
처음에 베드로와 세베대의 아들을 부르실 때도 기적적 포획의 역사가 있었다 (눅 5:1-11). 그러나 그때는 그물이 찢어졌었다. 아니, 그런데 이번에는 어떻게 그물이 이처럼 성할까……?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주님께서 지금 무슨 일을 하시려고 하는 것일까?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시는 걸까? (요21:15-19 참조)
암 말기 환자가 기도를 통해 회복되면, 기적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스트레스와 고통이 극심한 삶 가운데도 암에 걸리지 않는 것 역시 기적이다. 차가 폐차될 만큼 큰 교통사고가 났는데도 몸에 아무 이상이 없으면 기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난 한 해 교통사고가 없었던 것에 대해서는 감격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우리는 이처럼 “기적”을 논할 때 보존의 은혜보다는 즉각적 치유와 회복에 편향적으로 초점을 두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즉각적 치유와 회복만 기적이 아니다. 무겁고 버거운 삶의 현장 한복판에서 우리를 보존하시고 보호하시는 것 역시 주님의 놀라운 기적이다.
제자들은 디베랴 호수에서 이중의 기적을 경험했다. 엄청난 포획이 기적이듯 특별한 보존 역시 기적이다.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는 저자 요한의 목격담은 연약하고 흠 많고 실수투성이인 제자들을 보존하고 보호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대해 잠시 멈추어 묵상하도록 독자들을 초청한다 (시편 46:10 참조).
사실 미래는 항상 불확실해 보이지만, 지난 일은 더 선명하게 보인다. 지난날들을 생각해 보면, 주님의 도우심 없었다면 벌써 쓰러지고 자빠져서 못 일어날 일들이 여럿 있었다. 삶이 늘 쉽진 않았지만 여기까지 온 것은 정말 주님의 은혜다. 그 은혜로 연약하고 부족하고 죄악된 날 붙잡아 주시고 보존해주셨기에 여기까지 왔다. 사실 내일도 그리고 모레도 다르지 않다.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가시는 주님의 영을 통한 새 창조의 역사 가운데 지금보다 더 충성 되고 신실한 오늘과 내일을 믿고 기대하지만, 그렇다 해도 나는 주님 앞에서 여전히 연약하고 부족하고 실수 많은 존재로 남아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시는 그 날까진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날 붙잡아 주시고 보존해 주신 은혜의 주님께서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이 땅에서 내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도 연약한 나를 그렇게 지켜 주실 것을 믿는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 주님을 신뢰하고 내일도 내 인생을 주님께 의탁할 것이다. 요한의 목격담은 사실 나 자신의 고백이다. 그리고 예수의 제자된 우리 모두의 고백이다.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요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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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의 복음 V (요21:12-13)
요21:12-13
12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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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제자들을 다시 찾는 부활 예수의 은혜로운 방문으로 (21:1, 14 참조) 이제 제자들 가운데 예수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자리 잡는다.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요21:12)
그들은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거듭 들었고, 눈으로 주목했으며, 손으로 만졌다 (참조요일 1:1; 요20:19-23, 20:24-29; 21:1-14). 다소 신학적인 표현을 사용하자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들의 스승 예수와 부활하신 그리스도 사이의 연속성에 대한 확신이 이제 제자들 안에 뿌리내렸다!
부활의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아침 식사로 직접 초대하신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21:12).
다시 사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밥상을 친히 챙겨주신다. 이 밥상은 아마도 제자들이 고기를 잡는 동안 주님께서 미리 준비해 두신 듯하다. 왜냐면 베드로가 가서 주님의 도움으로 잡은 생선을 가져오기에 앞서 이미 숯불 위에 생선이 놓여 있었고 떡도 함께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1:9-11). 이 특별한 날의 아침 메뉴는 떡과 생선이다 (21:13).
떡과 생선의 조합은 자연스럽게 오병이어 사건을 회상시킨다 (요6:1-14). 요한복음 6장의 오병이어의 기적과 요한복음21장의 아침 식사 모두 디베랴 바닷가에서 벌어진 일인데, 사실 신약성경에서 “디베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이 두 사건뿐이다 (요6:1 & 23; 21:1).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떡과 생선으로 풍성히 먹여주신 사건이 “디베랴” 바닷가에서 일어났다는 저자 요한의 기록은 자연스럽게 이날의 아침 식사를 오병이어의 기적과 중첩시킨다. 부활 주님과 함께 하는 식사는 오병이어적 잔치다. 예수의 제자들이 부활의 공동체로 모여 성령을 그 가운데 모시고 사랑과 연합의 식사를 나눌 때마다 그 식사는 오병이어의 기적 같은 잔치가 된다.
남자만 오천 명이나 되는 큰 무리가 다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을 정도로 풍성하게 군중들의 필요를 공급하셨던 주님께서 이날 아침 미리 아침 식사를 준비해 두신 데다가 제자들이 먹고 충분히 남도록 153마리의 큰 물고기들까지 포획하게 하셨다. 밤새 노동에 지치고 허기진 제자들을 그렇게 풍성하게 먹이신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친히 공급하실 것이다. (물론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들은 아니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필요 역시 풍성히 공급하신다.
주님께서는 잠시 후 베드로가 주님의 양을 돌보는 사역을 하도록 세워주실 것이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 내 양을 먹이라! (21:15-17)
그러나 그에 앞서 먼저 베드로를 먹여 주신다.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21:13)
오병이어 사건 때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통해 군중을 먹이셨다 (요6:11; 눅9:16 및 공관복음 병행구). 그러나 부활 후 제자들을 세 번째로 만나 주신 이 자리에서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먹이신다. 제자들은 사역자의 모드로 아니라 부모의 돌봄과 공급함을 경험하는 어린아이가 되어 주께서 친히 먹여주심을 경험한다 (참조: 요21:5 [“얘들아”]). 베드로와 친구 제자들은 주님의 전적인 사랑과 은혜로운 공급을 경험한다. 우리의 사역은 주님의 은혜로운 공급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도 그리고 지속될 수도 없다. (껍데기는 유지 될 수 있을는지 몰라도 속은 절대 그렇지 않다!) 이날 아침 베드로와 제자들이 그랬듯, 우리 역시 먼저 주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양식을 받은 먹은 후에야 다른 이들을 먹일 수 있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우리는 부활의 몸에 대해 생각할 때 종종 과도하게 영적으로 (hyper-spiritually)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부활의 몸이 마치 이 세상에서 완전히 유리되고 분리된 실체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 말이다. 아울러 “영성(spirituality)” 그리고 “영적(spiritual)” 같은 개념에 대해서도 극단적인 이원론적 접근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말씀과 기도는 거룩하게 생각하지만 (이것은 물론 옳다!), 일상의 삶은 열등하고 심지어 죄악된 실체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21장에 따르면, 부활하신 주님은 영광의 몸을 입으셨으되 결코 과도하게 영적이시지 (hyper-spiritual) 않다. 부활 후 제자들을 세 번째로 만나주신 주님은 밤샘 노동으로 지친 제자들에게 친히 아침 밥상을 차려 주신다. “내가 부활의 몸을 입었는데 너희 하찮은 끼닛거리 챙기는 일이나 신경 쓰게 생겼니?”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내가 영광의 몸을 입었는데 너희 일상의 일들이나 챙겨주게 생겼니?”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제자들의 필요와 고민을 친히 헤아리시고 그들의 삶의 자리 바로 거기서 친히 그들을 만나주시고 도와주시고 공급해 주신다.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시며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기셨던 예수님이 바로 부활의 주시다. 십자가에서 제자들의 죄를 그리고 세상 죄를 대신 지셨던 그 예수님이 바로 영광의 그리스도시다. 예수님은 영광의 몸을 입으신 후에도 겸손히 제자들의 밥상을 챙겨 주시는 섬김의 구주시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은 섬기는 자라는 가르침을 부활의 몸으로 이렇게 친히 보여 주신다 (막10: 35-45 참조). 우리가 믿고 따르는 부활 예수가 그런 분이라면, 필시 참된 제자도란 일상의 삶에서 하루하루 그분의 사랑의 섬김을 좇아가는 것이리라.
영적인 삶이란 결코 일상을 회피하거나 적대시하는 게 아니다. 영적인 삶이란 매일 삶의 한복판에서 크고 작은 도전들을 직면하면서 성령의 인도 하심을 따라 한 발짝씩 앞으로 내딛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 가운데서 십자가와 부활의 주 예수님처럼 내 옆에 있는 이들을 겸손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리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요2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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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의 복음 -마지막회 (요21:18-19)
요21:18-19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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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가 훗날 십자가에 처형될 것이고 그러한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그런 일이 어쩌면 있을 수 있겠다고 추측하시는 게 아니다.
베드로의 죽음에 대한 예언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21:18)라는 반복강조 어구로 시작하시면서 앞으로 베드로에게 벌어질 일의 확실성을 담보하신다.
그런데 디베랴 바닷가에서 주님을 대면한 베드로에겐 이 말씀이 어떻게 들렸을까?
만일 누군가 내게 와서 30여 년 후에 이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처형될 것이라고 말한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만일 다른 사람이 아닌 주님께서 직접 그런 말씀을 내게 하신다면 어떤 느낌일까? 꺼림칙한 느낌일까?
압도적인 부담감이 앞설까? 주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싶어질까? ‘아이, 설마 그런 뜻은 아니시겠지….’ 하며 어떻게 빠져나갈 구멍을 찾으려 들까?
그러나 저주의 선언처럼 들리는 주님의 예언이 베드로에게는 격려의 말씀으로 다가온다.
얼마 전 목숨 부지를 위해 스승과의 관계를 거침없이 부인하고 거듭 또 거듭 부인했던 베드로에겐 자신의 십자가 처형 예언이 위로 그 자체다.
처절히 실패했던 제자 베드로에겐 자신의 처참한 최후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샬롬(shalom) 그 자체다.
왜냐면 이 예언의 말씀을 통해 변절자 베드로가 충성된 제자로 끝까지 보존될 것이라 약속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베드로를 변절자가 아닌 주님의 사도, 교회의 목자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로 기억한다!) 물론 앞으로도 베드로는 여전히 불완전한 존재로 남을 것이다(갈 2:11-14). 하지만 주님께서 그 가운데 베드로를 붙잡아 주실 것이고, 그가 배신자가 아닌 충성스러운 제자로서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도록 보호해 주실 것이다.
베드로가 순교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궁극적 예배를 올려드릴 수 있도록 주께서 친히 도와주실 것이다.
그렇기에 십자가에 처형될 것이라는 저주 충만한 것 같은 선언이 베드로에겐 (적어도 베드로에겐) 축복 가득한 선포다.
일찍이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장담한 적이 있었다.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요 13:37)
하지만 그 결과는 실로 참담했다. 주님을 위해 생명을 던지겠다는 베드로의 호언장담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생존을 위한 세 번의 반복된 부인으로 이어진다 (요18: 15-18, 25-27; 13:18 참조). 그러나 이제는 배신자 베드로가 충성스러운 제자로 끝까지 보존될 것이라 약속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는 반복 강조의 표현을 통해 베드로를 지켜주실 것을 확실히 담보하신다.
그렇기에 로마의 십자가에 무참히 처형될 것이란 주의 말씀이 베드로에겐 도리어 복된 소식이다.
자신의 목숨부지를 위해 주님을 배신했던 베드로에게는 주님을 따르다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당하는 것이야말로 주님에 대한 궁극적 사랑을 표현할 기회다.
장차 순교를 통해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그의 거듭된 고백이 공허한 것이 아님을 확증할 것이다 (21:15-17 참조).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변절자 베드로가 충성스러운 제자로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도록 끝까지 그를 지켜 주실 것이지만, 그렇다고 베드로가 앞으로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저 그가 스스로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도 된다는 뜻도 아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매일의 삶 가운데 주님을 충성 되게 좇아야 함을 말씀하신다.
이 [베드로의 최후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요 21:19)
베드로는 여생 동안 매 순간 주님을 따라야 한다. 다가올 30년 이상을 그렇게 날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좇아가야 한다.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본받아 로마의 십자가에 달려 순교할 그때까지 하루하루 주님만 좇아야 한다 (21:22 참조).
과거엔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가는 삶이었다. 또 장래에는 십자가에서 충성스러운 주의 제자로 순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요21:18-19).
하지만 지금 베드로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순간순간 주님을 좇는 일이다 (요21:19).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나를 따르라(헬라어: 아콜루떼이 모이) (요21:19)”는 예수님의 명령에서 “따르라”는 헬라어로 아콜루떼이다.
이 명령형 동사는 현재시제인데, 헬라어의 현재시제 동사는 많은 경우 현재진행의 뜻을 담고 있고, 이 경우도 역시 그렇다.
다시 말하면, “나를 따르라”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명령은 단회적으로 결단하고 실천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매일 순간마다 따라야 할 명령이다.
어제의 제자도가 오늘의 제자도를 대신하지 않는다. 오늘의 충성이 내일의 충성을 대체하지 않는다.
순간순간마다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나아가는 삶, 그것이 바로 제자된 삶이다. 유진 피터슨이 말한 대로 “제자도”란 “한 방향으로의 오랜 순종”이다.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은 또한 지극히 인격적인 성격을 내포한다. 주님의 명령은 따라야 할 대상이 한 특정 인격체임을 분명히 한다.
주님께서는 단순히 어떤 교훈모음 혹은 특정 기관을 따르라 하지 않으셨다. “나” 즉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을 좇으라 명하셨다.
제자도란 본질적으로 예수님을 좇는 일이다. 성령을 통해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이다(갈2:20; 행16:5-6 참조).
그 가운데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이어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제자도는 지극히 인격적인(personal) 행위다.
요한복음 21:19의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은 베드로의 제자 소명을 재활복구 시켜주는 회복의 말씀이다.
십자가에 달려 처형될 그때까지 예수 좇는 소명 (요21:18-19 ).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그 소명이다 (빌2:6-8; 막10:45). 고난을 감내하고 순교와 핍박을 전제하며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만 묵묵히 그리고 끈기 있게 따라가는 그 소명 말이다 (막 8:27-10:45 및 공관복음 병행구들, 특히 눅 9:23참조). 매일의 삶 가운데 자신이 하고픈 일들 혹은 자신이 원한다면 선택하여 할 수 있는 일보다 주님 그분을 더 사랑하는 그 고귀한 소명 말이다 (요21:15; 막12:29-30). 그 가운데 새 출애굽(New Exodus)의 역사에 동참하는 그 영광스러운 소명 말이다 (막1:2-3; 8:27-10:45 참조).
부활하신 주님은 디베랴 바닷가로 처절히 실패한 제자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그를 재활 복구시킨다. 변절자 베드로가 이제 충성스러운 제자로 끝까지 보존될 것을 담보하신다. 그러나 동시에 베드로가 순간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 초점을 두고 그분을 긴밀하게 그리고 친밀하게 좇아야 함을 명하신다.
이렇게 디베랴 바닷가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다시 한번 신비롭게 하나가 되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요 21: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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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21장 [[ 1-14절...일상의 실제적 필요, 생계 문제를 돌보시는 주님]]....
마6:33에서 말씀하신 바 그대로 거듭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추구해야 한다. 그러면 주께서 우리에게 실제적인 공급을 더 하실 것이다
***[마6:25-34]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을 위임받은 거듭난 백성들이지만 이 땅에서 실제적으로 실생활을 살아가야 하는, 생계비를 벌어 살아야 하는 생활인들인 바 그들의 연약함을 도우며, 동시에 주님이 위임해 주신 그 위임의 목적과 간증을 이 땅에서 이룰 수 있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모든 충분한 예비하심(all-sufficient provision), 곧 도우시는 손이다......이로써, 결코 버리지도 떠나지도 아니하시며 매일 생활속에 함께 하사 인도-동행-보호하시며 회개 위한 경책/각성 통해 주님임재 안에 사는 훈련 통해 진정한 그리스도 누림 안으로 이끄시며, 그 임재훈련 통해 체득한 바 주님 자신을 <생명의 말씀 충만>으로 살며 , 살아 움직이는 생동력 넘치는, 발휘하는 믿음-사랑-소망으로 충만한 주님의 공급통로가 되게 하신다.
......먼저 베드로가 말한다..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 여기에 온 몸을 대표하는 숫자 7로 나타내 주는 바 일곱 제자들(리더인 베드로와 그 외에 도마, 나다나엘, 세베대의 두 아들<애고보-요한>, 다른 두 제자들)은 그들의 옛 직업으로 돌아가는 바, 뒤로 물러나 있음을 볼 수 있다....즉, 거룩한 위임의 명령을 잊고 있었다...주님은 [위임의 성령, 권능의 성령] 그 성령이 임하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예루살렘에 유하라 하셨었다(눅24:49)
----아무리 그 방면에 전문가라 할 지라도 <그들 자신 노력>만으로는 소득이 전혀 없었음을 주목하라....주님이 창조하시고 예비-공급하시고 운행 하시는 바 유한계<비가시적-가시적 세계>의 모든 만물과 그 모든 형상-질료 -관계들이 다 주님 주관-공급하시는 바이기 때문이다..
.......그날 밤, 온 밤을 지새웠지만.... 그들 외의 다른 배, 다른 어부들은 아마도 풍성하게 고기를 잡았겠지만 제자들, <고기 잡는 전문가인> 그들은 한 마리 고기도 잡지 못했음을 잊지말라...이것은 그 유명한 [한 마리 고기도 잡지 못한 기적]이다.,
.......주님에 의해 거듭났고 사명을 위임 받은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위임 받은 섬김 사역에 있어서는 당연히 그레야 할 것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또한 생계를 유지하면서 일상 생활 영위함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분은 진실로 주님이시기에!!...주로 주 되시게 하라!!], 당연히 주께 묻고 인도하심 따라 행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만일 믿는 우리가 인도하심 따르지 않고 자신의 육적 생각을 따라 행한다면, 그 결과는 <완전 허탕-빈손>뿐일 것임을 의미한다.. 이제, 날이 새어갈 무렵, <제자들은 그분이 주님이신 줄 몰랐으나, 묻는 소리가 있어 말하기를>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 주님은 물으신다....실은 주님은 그들과 함께 언제나 <제한 받지 않는, 보이지 않는 임재로> "나는 고기 잡으러 가노라"말하면서 떠날 때에도, 주께서 바닷가에 서 계실 때에도, 심지어 배안에서 고기를 잡고 있을 때조차도 그들안에, 그들 가운데 함께 계셨다, ...이제, 특별한 시점에서 주님은 [[보이는 임재]]로서 그분 자신을 보여 주고 계셨다.
......요21:5를 눅24:42-43까지와 비교해 보라..... 제자들이 올바른 위치에 있을 때 고기를 가지게 됨에 주의하라..[곧, 그분의 임재 의식 안에 거하며 여쭈며 따름, 위임 받은 그 자리에서 하라는 일에 전력 추구할 때에] 주님은 전존재의 그 모든 필요를 공급하신다. 이제 고기 잡기에 최적인 밤 시간은 다 지난 아침나절에 21:6에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고 말한다...[[이것도 진실로 기적이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21:7)" 주님을 처음 알아차린 이는 요한이었다, 베드로는 그것을 인식하자마자 바다로 뛰어 내려서 주께로 왔고, 다른 제자들은 고기가 가득한 그물을 끌면서 작은 배로 왔다....눅5:3-11에서 주님은 고기 잡는 기적에 의해 베드로를 부르셨는데, 여기에서 그분은 또한 고기 잡는 기적에 의해 그에 대한 그분의 부르심을 회복하셨다. 이처럼 그분은 그분의 목적안에서 변함이 없으시다.
......육지에 올라와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었다(21:9)"
실은 제자들은 바다에서 고기 잡을 필요가 없었는데 이미 육지에 얼마의 고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번째 기적, 곧 불 위에 놓인 고기와 떡의 기적이다.
주님은 그분의 뜻 아래서 그들이 어떤 장소에서도, 심지어 육지에서도 고기를 발견할 수 있음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기를 원하셨기에 이러한 기적을 수행하셨다.
한편, 만약 그분의 뜻 아래 있지 않다면 그들은 심지어 바다에 간다 할 지라도 어떠한 고기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고기를 잡는 것은 천연적인 방법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뜻에 달려 있다. 그분은 주권자이시고 모든 것은 그 분의 통제 아래에 있다. 심지어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어떤 고기도 없다고 생각하는 곳에서조차도 주님은 우리를 위해 고기를 예비하실 것인데, 이것은 바다에 있는 고기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이미 요리되고 준비된 고기이다.
여기에서 주님은 베드로의 생계를 위한 그분 안에 있는 그의 믿음을 훈련시키셨다.
베드로와 그와 함께 한 자들이 온 밤동안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런 다음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들은 많은 고기를 잡았다. 그러나 이러한 고기들이 없아도 주님은 고기가 있지 않는 육지에서조차 그들을 위해 고기와 심지어 떡까지 미리 준비하셨다. 이것은 기적이었다.
이로 인해 주님은 그분의 인도 없이는, 비록 그들이 고기가 있는 바다에 가서 고기잡는데 적합한 때인 밤증에 고기잡이를 하더라도 아우것도 잡을 수 없지만, 주님의 인도와 함께 하면 심지어 고기가 없는 육지에서라도, 고기를 잡기에 적합한 때가 아닌 아침일지라도 주님은 그들을 위해 고기를 제공하신다는 것을 깨닫도록 그들을 훈련시키셨다.
그런데,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많은 고기들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을 먹이는데 이것들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베드로에게 참된 공과였다. 그는 생활 영위하기 위하여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롬4:17)" 주님을 믿어야 했다.[요21:5]
*********[요21:5-14]*******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식사용으로가 아니라 카운트 하기 위한 명령이었다)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눅24:41-43] *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37.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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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다 love ajgapavw(25, 아가파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일반 헬라어는 영어와는 달리 '사랑하다'를 의미하는 단어가 여러 종류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들은 필레오(filevw, 5368), 스테르고(stevrgw), 에라오(ejravw), 아가파오(ajgapavw, 25) 등이다.
(a) 동사 필레오(filevw, 5368)는 사랑과 애정의 표현에 가장 널리 사용되는 단어이다. 이 단어의 여러 파생어를 보면 이를 명백히 알 수 있다. 이 단어는 관심, 돌봄, 환대, 사물에 대한 애착 등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 필레오(filevw, 5368)을 보라.
(b) 동사 스테르고(stevrgw)는 드물게 나타나며, '사랑하다, 애정을 느끼다' 등을 의미하며, 특히 부모와 자식 간의 쌍방의 사랑을 나타내는데 자주 사용되었다.
스테르고는 또한, 통치자에 대한 국민의 사랑, 인간에 대한 수호신의 사랑, 주인에 대한 개들(dogs)의 사랑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남편과 아내의 사랑을 나타내는데는 별로 사용되지 않았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합성어 아스토르고스(a[storgo", 794, 롬 1:31; 딤후 3:3)와 필로스토르고스(filovstorgo", 5387, 롬 12:10)가 나타날 뿐이다.
(c) 동사 에라오(ejravw)와 명사 에로스(e[rw")는 신비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에라오는 '정열적으로 사랑하다, 욕구하다, 그리워 하다'를 의미한다. 에로스는 '정열적인 사랑'이란 의미를 지닌다.
에로스적인 사랑은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것)을 원하거나 갈망하거나 사랑하는 정열적인 사랑이다. 이 사랑은 남·여의 사랑, 또는 어떤 대상에 대한 갈망, 열망, 욕구를 나타낸다. 특별히 관능적이고 선정적인 양상을 띤다.
① 모든 시대에서 헬라인들은 육감(관능)적으로 즐거워하는, 하급 신(神), 곧 광란적인 에로스를 열렬히 찬양하는 것이다. 그들이 찬양하는 에로스 신(god)은 모든 것을 강제하지만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강요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헬라인이 에로스에서 추구하는 것은 도취(intoxicaion)와 황홀이며, 이것은 그에게는 신앙(종교 religion)이다. 그에게 있어서 반응은 하늘의 능력들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Soph, Ant 683이하). 그것은 인간성의 성취이다.
그렇지만 그 반응은 무아경적인 흥분(광란)으로 나타난다(한편 때때로 증오와 더불어 나타나기도 한다). 오로지 반응에 목적을 두고 완전히 감각 또는 감정적으로 몹시 흥분하는 에로스는 모든 인도적 인간성의 표준과 형태를 파괴한다. 관능적 환락(sensual ecstasy)은 중용(moderation)과 균형(proportion, 조화, 바른 관계 등)을 저 멀리 내버려두고 돌보지 않는다.
헬라의 비극작가들은(Soph, Ant. 781이하) 환락(ecstasy, 황홀)에 점점 빠지게하여 이성과 의지와 판단력을 상실하게 하는 에로스(사랑의 신의 이름은 역시 에로스이다)의 불가항력적인 힘을 알고서, 그것을 광신만큼 무서운 것으로 평가했다.
그것은 하나의 신(a god)이며 신들보다 능한 것이다(Eur. Fr., 132, Nauck). 하늘과 땅의 모든 힘은 에로스의 한 최고의 힘과 비교하면 제 2급의 힘들이다. 그것의 전제적인 힘에 사로잡힌 자들에게는 어떠한 선택도, 의지도, 자유도 무시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에 지배를 받는데서 최고의 희열(행복)을 얻는다. 우리는 여기서 에로스의 어떤 신비한 힘을 찾아볼 수 있다.
② 이러한 에로스는 신비 종교들에서 더욱 무서운 것으로 나타났다. 이 관능적인 도취의 데모니즘(demonism)이 종교적 광신과 함께 행해지는 곳에는 반대로 신앙(religion) 자체가 이 황홀경(ecstasy)에서 경험의 최고점(절정)을 추구한다.
창조적 에로스는 다산을 기원하는 풍요제 의식들의 중심이며, 매춘(prostitution)은 큰 여신들의 신전에서 유행했다. 때때로 동양권에서 행해졌다. 그래서 색정적인 그림과 상징들이 많이 사용되었다. 신화에서 이야기한 신들과 사람들간의 성적 결합은 이러한 예찬(cultus)에서 그 현실적 실현에 도달했다. 이런 신전 혼인에서 그 신자들은 신들의 세계와 육체적인 결합을 경험한다. 신앙과 황홀은 종교적으로 변질된 에로티시즘(eroticism=호색)에서 함께 만나 결합한다. 이런 현상은 한국의 신비종파나 사이비종파에서 찾아볼 수 있다.
③ 헬라인들은 에로스를 더 신비적으로 이해했는데 그것에 의해 그들은 보통 사람이 지니는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 완전에 이르고자 노력했다.
헬라인들이 에로스에서 추구하는 도취는 필연적으로 관능적인 것이 아니다. 이미 헬라의 비전(mysteries)에서 때때로 신비주의에서 그렇게 한 것처럼 에로틱(erotic)의 개념들은 많은 방법으로 육감이나 관능 이상과의 만남에 대한 상징으로 영화된 것이다.
플라톤에 있어서 에로스는 생의 최대의 성취와 향상의 전형(epitome)였다. 그에게 있어서 에로스는 이성의 작용(합리성)을 넘어 사람을 기뻐 날뛰게 하는 황홀이며, 자연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원천이며, 최종적으로 창조적 영감을 산출하는 것이다. 에로스를 타오르게 하는 육체적 아름다움은 모든 사랑하는 것에서 의도하고 찾는 선한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지표이며, 영원한 존재와 진정한 선을 가리키는 지표이다(Symp, 2,100이하). 그에게 있어서 에로스란 의와 감정 억제와 지혜의 습득을 위한 분투,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선의 구현이자, 불멸을 얻을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Symp. 200, 206; Phaedr. 237ff, 242ff). 플라톤은 결정적으로 에로스를 모든 육감(관능)적인 것보다 높인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이와 유사하게 에로스를 단순한 경험적인 것에서부터 자유케 하여 발전시켰다.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질서와 운동을 유지시키는 원초적 원리인 견인력으로서의 우주적 기능이다. 따라서 내적으로 세계를 전체적으로 유지시키고 있는 이 사랑은 더 이상 도취와 아무 관계가 없다. 그것은 성격상 엄밀히 의지에서 나온 행동이다.
플로티누스(Plotinus)에게 있어서 진정한 에로스, 모든 사랑을 의미하는 것은 감각과 이성을 넘어 탁월함에 이르고, 모든 한계를 넘어 합치점에 이르는 영혼의 충동이다.
그 시대의 사회 생활에서 비밀 주신제(orgies)를 벌리는 에로스는 신들의 신화에 나오는 감정을 자극하거나 흥분시키는 체험들(사건)을 얻으려하고, 신전들에서 그러한 체험들에 이르게 한 것이다.
맥시무스(Maximus)는 인도적으로 발전시키었다. 플로티누스는 그것을 신비적으로 승화시키고 영화하여, 초자연적 지배자와 영적 결합을 하려는 신비적 열망으로 발전시키었다(Enneads).
초대교회의 시기에 그노시스(Gnosis)는 이런 접근법에 위치하여 자아 초월에 대한 인간 욕망이라는 특별한 경향을 나타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동일한 에로스, 인간 자신의 생활을 초월하는 것에 대한 자연적 충동이다. 여기서 에로틱한 종교의 원형은 관능적 도취이며, 최고 형태의 황홀이다.
에로스는 구약성경에서 잠 7:18("오라 우리가 아침까지 흡족하게 서로 사랑하며 사랑함으로 희락하자")과 잠 30:16("음부와 아이 배지 못하는 태), 이 두 곳에만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d) 그리고 아가파오와 아가페가 있다. 아가파오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충분히 설명한다.
2.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아가파오의 용법.
동사 아가파오(ajgapavw, 25)에서 헬라인은 에로스의 이상한 힘이나 마력(magic)을 느끼지 못했으며, 필레오의 따뜻함이나 열정도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 어원은 불확실하며, 그 의미는 근거가 약하고 가변적이다.
(a) 때때로 아가파오는 "어떤 것으로 만족하다"란 의미를 지닐 뿐이다.
(b) 때때로 외적 태도에서 이 동사는 "환영하다, 인사하다, 경의를 표(존경)하다"를 의미하며,
(c) 내적 태도에서 "어떤 것을 구하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을 요구하다"를 의미한다.
(d) 이 동사는 때때로 동료 끼리의 호의, 우정을, 혹은 때때로 동정을 의미하는데 사용되었다.
아가파오의 특별한 성격을 몇몇 실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을(~보다) 좋아하다, 선택하다, 다른 것보다 위에 한가지 선이나 목적을 두다, 다른 사람보다 한 사람을 더욱 높이 평가하다, 존중하다"를 의미한다.
이렇게 아가파오는 하나님이 어떤 특별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애호)에 대해 사용될 수 있다. 드물긴 하지만 이 단어가 신의 총애를 받은 사람에 대해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Dio. Chrys., 33:21) 분명히 에라오(ejravw)와는 달리, 재물이나 재산을 얻고자 하는 인간 자신의 욕망이 아닌, 타인을 위한 관대한 행위를 뜻하는 말이라 하겠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아하는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특별한 선물과 재물로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
아가파오의 특성은 이 점에서 확실히 보이는 것이다. 에로스는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찾는 일반적인 세상적인 사랑이다. 아가파오는 분명히 그 대상을 선택하여 지키는 구별을 두는 사랑이다.
에로스는 그 대상에 대한 다소 불확정한 충동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아가파오는 그 주체에 의해 자유로이 결정된 결정적인 행동이다.
에로스는 그 최고의 의미로서, 인간의 위쪽으로 향하는 충동, 곧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에 대해 사용된다. 아가파오는 주로 하나님의 사랑, 보다 높은 자가 보다 낮은 자를 들어올리는, 보다 낮은 자를 다른 사람보다 위에 높이는 사랑이다.
에로스는 다른 것들에서 자신(의 생명)의 주림의 충족을 찾은 것이다. 아가파오는 때때로 "사랑을 베풀다"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주는 능동적 사랑이다.
이 동사는 무엇보다 형용사 아가페토스가 사용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아가페토스는 동사와 같은 의미의 뉴앙스를 지니고 있으며, 합당한 사물이나 친애하는 자에 대해 사용되며, 특히 부모의 온갖 사랑을 독차지하는 독자(only child)에 대해 사용되었다.
아가파오는 에라오이나 퓔레오과 교환적으로 사용되거나 결합될 때 그 의미나 개성이 여전히 유동적이며 애매하다. 이런 경우에 아가파오는 때때로 단순한 동의어로서 강조나 다양한 표현 때문에 다른 두 단어와 나란히 위치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플로티누스(Plotinus)에서 아가판은 자기를 (겸손히) 낮추는 사랑에 대해, 에란은 높이 올라가는 사랑에 대해 의식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호머로부터 플로티누스까지 에로스는 계속적으로 시인과 철학자들의 사색이나 연구의 주제가 되어온 반면에 아가파오는 거의 언제나 기본적인 토의 주제로도 나오지 않는다. 명사 아가페는 성경 외에서는 단 한번 여신 이시스(Isis)를 아가페라는 칭호로 부른 것이다.
우리가 살펴본 바 성경 헬라어 이전 문헌에서 아가파오의 특성을 알 수 있으며, 우리는 이 특성을 성경 헬라어 아가파오란 단어에서 찾아볼 수 있다.
3. 구약 및 70인역본의 용법.
구약성경에서 사랑을 뜻하는 중요한 히브리어 동사는 아헵이며, 그 역어로서 아가파오가 주로 사용되었다. 이 동사에서 유래한 명사 아하바의 역어로는 아가페가 주로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 사랑은 그 사람을 강요하여 그가 좋게, 또는 올바르게 평가하거나 인정하는 사물이나 사람에게로 이끌어 가는 자발적인 힘이다. 사람은 이 사랑의 힘에 제어를 받아 자기 자신을 주거나 혹은 사랑의 원인이 되는 대상을 확고히 붙잡거나 혹은 즐거움을 주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사랑은 내적 인격에 심은 영혼의 불가해한 힘이다.
사람이 사랑의 대상을 올바로 인정하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한다(신 6:5). 사랑과 미움은 생의 양극이다(전 3:8; 전 9:6).
사랑은 인간 상호간의 사랑, 하나님의 인간과의 사랑, 사물에 대한 사랑 등을 나타낸다.
(a) 이 단어는 남녀의 사랑에 대해 사용되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하나님과 관계, 그리고 남녀의 성적 관계를 시사해 준다. 이 남녀의 사랑은 이성(sexes) 상호간의 생명력 넘치는 충동을 의미한다. 선지자 예레미야(렘 2:25)나 호세아(호 3:1; 호 4:18), 그리고 에스겔(겔 16:37)은 사랑의 성적(sexual) 측면을 매우 진하게 묘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히 성욕 및 성행위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단어는 남녀의 연애나 열애(창 29:18이하; 창 34:3; 삿 16:4), 합법적인 부부의 행복한 사랑(창 24:67; 삼상 1:5)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창조의 기사는 성의 구별과 부부간의 사랑이 생을 풍요하게 하는 은사임을 설득력있게 이해시켜 준다(창 2:18이하).
「그러나 이 사랑은 성적 사랑의 범위를 포함하지만 그것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헌신적 사랑과 생활의 충실함이 합쳐져 있다. 구약의 초기 기록에 의하면 이러한 사랑은 일부다처나 일처다부 사상과 부합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은 충실(참조: 창 20:13; 삿 14:16; 삿 16:4-5; 겔 16:8; 겔 23:17; 호 3:1), 상호의존(참조: 창 24:67), 책임(참조: 삼하 13:1, 4, 15)과 같은 인간 사랑의 다른 측면을 제외하고 성적인 것에 집중하는 위험을 이해시켜 준다(The interpertreter's D.B).」
더 나아가서 아가서는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라고 열정적인 사랑의 강력한 힘을 찬양까지 한다. 이 노래는 성적(남녀) 사랑의 기이함과 적극적인 힘을 찬양하지만 그 찬양에는 그 사랑이 근거를 두고 있는 상호의존과 신앙심(헌신)을 강조하고 있다(참조: 아 2:16; 3:1-8; 7:10; 8:6-7). 아가서에서 사랑을 묘사할 때 거의 대부분 아헤브(아가파오)와 아하바(아가페)를 사용했다. 그러나 여자가 남자를 부른 칭호는 도드(히 1730: 사랑하는 자)를 사용했다.
이러한 사랑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암논과 다말의 이야기는 성충동의 야수성, 즉 대상자와 성적 관계를 가지려는 무절제한 요구를 보여준다(삼하 13:1-22). 사랑은 성애 또는 성욕적인 영역에서 세상이 알지 못하는 근원, 곧 마귀로부터 기인한 원시적 힘인 미움을 부인함으로 맞서는 적극적인 능력이다. 이 이야기는 이 두가지 충동의 야수성도 투명하게 보여준다(삼하 13:1-22).
결혼이나 부부 생활은 상대에 대한 사랑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다. 삼손의 신부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치 아니하는도다"라는 히스테릭한 말에서(삿 14:16; 참조: 삿 16:15; 창 29:31, 33) 동일한 요소가 표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심지어 법까지도 사랑과 미움의 성욕적 증상에 관여하고 있다(신 21:15이하; 22:31이하; 24:1이하).
(b) 이 단어는 부모와 자식, 가족간의 사랑에 대해 사용되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사랑했으며(창 22:2), 리브가는 아들 야곱을 사랑했다(창 25:28). 야곱은 요셉과 베냐민을 사랑했다(창 37:3; 44:20). 잠언은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경계하느니라"고 했다(잠 13:24).
또한 이 단어는 며느리의 시어머니를 향한 사랑과 같은 가족간의 사랑을 표현한다(룻 4:15).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은 어느 곳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부모를 존중하고 존경하며 또 부모에게 복종해야 한다.
「참고-창 47:29에 보면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인애(헤세드: 친절, 자비; 70인역본 )란 단어를 사용하여 자기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기를 요청했다. 이것이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족속이나 가족의 유대는 이스라엘에서 매우 강하였다. 그러므로 '근친' 관계의 중요한 요소인 사랑에 대하여 놀랄 일이 아니다. 그것은 룻 3:10에서 이성 곧 남녀 사랑과 관련되어 있다. 그곳에서 인애(헤세드: 친절, 자비; 70인역본 ejleo")는 남녀 사랑의 개시와 가까운 친족에 대한 충실, 이 둘을 포함하고 있다.」
성경은 가족적 사랑이 너무 선택적일 때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다(창 25:28). 그 결과로 야곱과 에서가 서로 반목하고 미워하게 되었다. 요셉에 대한 야곱의 편애로 인하여 다른 아들들이 요셉을 미워하고 시기하게 되었다(창 37:4). 배타적인 사랑은 증오가 들어올 수 있는 지점이 될 수 있다. 이는 사랑이 헌신적일 뿐만 아니라 책임을 다 해야 하기 때문이다.
(c) 이 단어는 친구의 특별한 애착을 나타낸다. 다윗과 요나단 사이의 사랑은(삼상 18:1, 3; 20:17) 여인의 사랑보다 더 깊은 우정의 차원이었다-"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삼하 1:26).
(d) 더 나아가 이 사랑은 사회적 공동 생활의 근본과 규범으로 나타난다-"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 19:18). 이러한 면에서 사랑은 이웃을 위한, 그리고 이웃을 향한 헌신이며, 이웃을 형제로서 받아들이는 것이고 이웃이 당연히 받아야할 대우를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특히 외국인(레 19:34)과 가난한 자(레 25:35)와 고아의 권리와 관련된 사회적 법률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이웃 사랑은 단순한 친절이나 호의로 해석할 수 없다. 이것은 편협한 배타주의를 배제한다.-바로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웃이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적(enemy)으로 생각되는 것같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도 의미한다.
그 이유로 신 22:1-4이 동포를 도울 의무를 부과하는 것인 반면, 출 23:4-5은 특별히 이 의무를 적대적인 사람에게 적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웃은 동료일 수도 있고 적일 수도 있으므로, 그는 사랑의 대상이지 법적 제한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개인은 법적 개인보다 우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형태에서 출 23:4이하의 요구와 아마도 한층 더 높은 수준인 잠 25:21에 있는 기본적 진술("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은 원수를 향한 성향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으나 한 특별한 방식의 행위의 의무를 지우는 것으로서,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적으로 가르치려고 한 것이다. 요셉은 그의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선으로 악을 갚는 그런 실례를 보여준다(창 50:19).
물론 구약성경에는 이러한 원수를 사랑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시 109편과 잠 14:20 및 적대 국가들에게 향한 일반적인 태도는 이에 대한 예증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의해 부과된 윤리적인 요구의 고결함은 여전히 존재한다.
(e) 이 단어는 구체적인 것이나 추상적인 것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기름(잠 21:17), 은과 풍부(전 5:10), 뇌물(사 1:23)을 사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악(시 52:3-5), 사망(잠 8:3), 허사(시 4:2-3), 거짓 맹세(슥 8:17)를 사랑했다. 또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시 119:47), 율법(시 119:97), 증거(시 119:119), 법(119:159), 그리고 그들은 선(암 5:15), 진실과 화평(슥 8:19), 구원(시 40:16-17)을 사랑했다.
4.신약성경에서 아가파오의 용법.
동사 아가파오는 신약성경에서 143회 나오며, 요한의 기록(요한복음에 37회, 요한1-3서에 31회, 요한계시록에 4회)에 가장 자주 나타난다.
1. 공관복음의 용법.
(a) 예수님은 새로운 사랑을 요구하신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두 계명에 기초하고 있다(마 22:36-마 22:40; 병행구, 막 12:28-막 12:34). 이 두 명령은 신 6:5과 레 19:8을 결합시킨 것이다. 첫째 부분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명령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의식적으로 그의 백성의 도덕적 전통의 입장을 취하신다. 그러나 그가 요구하는 사랑은 오로지 모든 다른 계명을 그 사랑에 이르게 하고 모든 의가 그 표준을 그 안에서 찾는다는 것을 뜻하는 사랑이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사랑은 의지와 행위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가 듣는 이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태도로 하나님을 위해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결단하고 준비되어 있기를 요구하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가능성을 근본적인 양자택일에 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인의 노예처럼 그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참조: 눅 17:7). 그것은 충실히 유순하게 그의 명령을 듣는 것이며, 스스로를 그의 지배 아래 두는 것이며, 다른 그 무엇보다도 이 통치의 실현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참조: 마 6:33). 한편 그것은 그의 전 존재의 근거를 하나님에게 두며, 전적인 신뢰로 그에게 매달리며, 모든 관심과 책임을 그에게 위탁하며, 그의 손에 의해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지도 않고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는 모든 것은 미워하고 멸시하는 것이며, 다른 모든 인연과의 관계를 끊는것이며, 방해되는 모든 것을 잘라버리는 것이며(참조: 마 5:29이하), 오직 하나님과 묶는 것 이외의 모든 구속을 끊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세력, 즉 재물과 허영은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포기하거나 싸워야 하는 세력들이라고 특별히 언급하신다. 재물을 중히 여기고 부를 축적하려는 자는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는 믿음이 적은 불신자이다(마 6:24b; 마 6:30이하).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 대해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문자적으로 '사랑하는도다')"라고 화를 선언하신다(눅 11:43). 명성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양립할 수 없다.
또 하나 아직 이 사랑을 위협하는 세 번째 위험, 즉 박해에 대한 긴장이 있다. 제자직에는 고난이 수반된다. 아키바(Akiba) 같은 위대한 유대인 순교 신학자들처럼 예수님께서는 부득이 그의 ┻湧?당할 폭행과 고통과 모욕과 수난이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충성에 대한 중대한 불 시험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아시고 말씀하신다(참조: 마 10:17이하; 마 5:10이하). 큰 최후의 고통이 인간에게 다가올 때가 있다(참조: 마 5:29이하; 마 24:10이하; 마 24:12이하). 이 말씀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특성은 순수하고 단호하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강렬한 열정이며 모든 혼란과 권세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사랑하는 주님이 나타나실 때까지 굳게 인내하는 적은 무리들의 열정이다.
그리고 제자로서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된다(참조: 마 10:37이하; 마 25:31이하; 눅 6:22이하). 이와 같은 요구는 사랑이 직면해야 할 고난을 뜻한다. 사랑이란 고난을 통해서만 이 세상에서 이룰 수 있다. 사랑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이를 희생시키게 하였다면, 그의 제자들에게도 분명 이 사실이 적용될 것이다.
(b) 다음에 예수님께서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명령하신다: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9; 병행구 막 12:31).
이 둘째 부분인 이웃 사랑의 계명은 롬 13:9; 갈 5:14; 약 2:8에도 인용되어 있다. 문자적으로 '둘째는 그것과 같이 너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다'로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예수님께서 명하신 근본적인 큰 요구이다. 그것은 인류 속에서 새로운 실재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이 사랑 자체가 인간 상호간의 사랑의 기초이자 동기이다.
랍비 아키바(Akiba)는 이웃 사랑의 계명이 토라(Torah)의 기본 원리이며, 여타의 모든 것들이 이 속에 함축되어 있다고 하였다(참조: 마 22:36이하에 관한 SB I 900-8).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 이런 명령을 덧붙여서 실체화한 것은 신약성경의 특징이다.
예수님은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는 구약성경 및 유대인의 요구를 받아들이시지만 그러나 동포에 국한하는 이웃 사랑에 대한 제한을 단호하게 제거하신다. 그는 또한 이웃 사랑을 우리의 길에서 만나는 의지할 데 없는 사람에게 집중시킨다.
이웃 사랑에 대한 이해를 위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눅 10:29이하). 서기관은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가장 가까운 동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외국인에게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의 체계적인 목록을 제시함으로써 답변하지 않으신다(Philo, supra, 40). 또한 모든 사람들이 형제들이라고 하는 가장 멀리 있는 자들에 대한 별난 사랑을 칭찬함으로 대답하지도 않으신다. 그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이가 누구인가?"라고 역으로 질문하심으로 노미코스(nomikov", 3544)의 질문에 대답하신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나를 중심에 두고 동심원을 그리는 이전의 그룹 짓기를 산산이 부수는 한편 유기적인 이웃의 개념을 내세우신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개념에 의해 당신이 중심에 있다는 새로운 그룹 짓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 체제는 모든 사람과 장소에 도식적으로 적용되는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절대적인 결합체로 구성된다. 그것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둘레에 겹겹이 형성된다. "마침"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가장 가까이에 서 있는 자는 누구든지 똑같이 그에 대하여 이웃의 의무를 지닌다. 세 사람은 똑같이 강도들을 만나 고통하는 사람 가까이에 있다. 그들 중 누가 이웃의 의무를 이행하는가? 이방의 사마리아인이다. 왜인가? 보고 불쌍히 여긴 것이다. 마음이 최종적인 결정을 한다. 마음이 타인의 고통을 알아내는 자가 그의 이웃의 의무를 이행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다른 두 사람은 주저하였으므로 그들의 이웃으로서의 의무를 위반한다. 그러나 이 불쌍히 여김의 도입이 이웃 사랑에 있어서 감정의 낭비를 내포하지 않는다. 요구되는 것은 최대한 감정에 흐르지 않고, 가장 비감상적으로 도움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사마리아인은 매우 침착하게 가까운 앞날을 대비하면서 그 순간이 요구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행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허비하지도 않고 그 의무와 타인의 죄에 대하여 쓸데없이 말하지 않는 자비를 베푼 것이다. 그는 해야만 하는 것과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이 이야기에 피할 수 없는 절박함을 부여한다.
(c) 예수님은 의식적으로 유대의 전통과 대립하는 요구로서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하신다. 마 5:43이하와 눅 6:32이하의 간결한 말씀에서 그 요구에 대한 3중의 결정을 볼 수 있다.
첫째로 그것은 새 시대의 새 요구이다("옛 사람에게 말한 바...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마 5:21; 마 5:43).
둘째로 그것은 칭찬(카라스)을 지적한다("삼", "더하는 것",마 5:46 이하).
셋째로 그것은 "죄인들"(세리들, 이방인들, 마 5:46 이하)과 날카롭게 구별되는 "듣는 자들"에 적용된다(눅 6:27).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원수에 대한 사랑은 이 세상과 세대의 자녀들에 관하여, 그 미래가 그들에게 속한 하나님의 새 백성의 자녀들의 태도이다. 그들은 되돌려 받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 사랑을 보여주어야 하며, 상환의 가능성이 거의 없는 곳에서 빌려주어야 하고, 제한없이 주어야 한다. 그들은 세상의 적의도 기꺼이 저항없이 희생적으로 감수해야 한다(눅 6:28). 참으로 그들은 그들을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해야 하며, 저주하는 자를 위해 축복해야 하고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눅 6:27 이하; 마 5:44). 이들 요구 중 몇몇에 대해서 랍비의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 완전하고 단호한 강령과 비교해 볼 때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옛 백성, 유대인 공동체의 순교자의 정신조차도, 아직 들어보지 못한 이 순교의 의지에는 훨씬 못 미친다. 여기서 한 새로운 중재가, 순교자의 과업, 즉 하나님을 미워하고 그의 신실한 백성을 멸하는 적대적인 세상을 위한 중재가 이루어진다.
이상주의자들은 항상 있어 왔다. 그러나 여기에서 환상이나 감상적인 생각없이 이웃 사랑의 이상을 현실 속에 전하신 자가 말씀하신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해야하고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와 같이 흔들리지 않는 진지한 어조와 현실 감각을 가지고 이 불가능한 요구들에 대해 말씀하신다. 항상 형제 사랑과 보다 좋은 세계에 대한 열광주의자들이 있어 왔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아시며 그러므로 오로지 사랑에 근거를 둔 세계 안에서 사는 삶을 요구하신다. 그는 냉철한 현실성과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하신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미움과 원수에 대한 유대인의 견해를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레 19:18에 대하여, 동족의 자손들에 대해 분노와 복수의 감정 같은 것은 금지되나 다른 백성들에 대해서는 금지되지 않는다고 해석하여, 시 139:19-22과 시 140:9-11과 같은 구절을 그들의 원수들을 미워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예수님은 사랑을 이웃에게 제한한 레 19:18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원수까지도 이웃 사랑의 대상에 포함시킨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원수들을 이전의 미움과는 대조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계명을 더 이상 확장시키지는 않았으며, 사랑에 관한 율법을 복음의 가르침 아래에 두었다. 이 복음의 가르침은 눅 10:29-눅 10:37에서 분명히 설명된다. '곤경에 처해 있는 자는 누구든지 항상 나의 이웃이다'는 진술은 '나의 이웃은 나에게 자비를 베푼 자이다'는 진술에 부속하고 뒤따른다(참조: 눅 10:37). 바르트는 그의 중요한 신학적 해설에서 내가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어리석은 짓임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전의 원수였던 사마리아인은 나에 대한 그의 자비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나의 이웃이 되었으며 따라서 나로 사랑으로 행하도록 도전(요구)하였기 때문이다(눅 10:37). 다른 말로 하면 사랑 받아본 경험이 도전을 앞서며, 복음이 명령을 앞선다. 그 이유는 예수님 자신이 이 비유의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의 모습을 통하여 예수님의 모습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 자비로운 구속(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d) 예수님께서 새로운 상황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사랑에 대한 그의 요구는 당연한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사건인 하나님의 자비를 선포하신다. 그는 죄사함을 가져오시고,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 속에서 새롭고 넘치는 사랑이 흘러 나온다. 이러한 사랑은 모든 생명과 활동에 충만하여 그들을 지도한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새로운 관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서로간의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하였다(눅 6:36이하). 이것은 자비의 관계요 화해의 관계이다.
2) 바울 서신의 용법.
(a)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로 말미암아 창조되는 새로운 상황을 분명히 깨닫고 묘사한다. 이제 바로 동트는 새 시대에 대한 로마서의 주요한 논제는 하나님을 향한 선택된 자들의 사랑으로 시작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아가고 마침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아가페, 롬 8:39)에 대한 확신으로 끝맺는 하나의 찬양에서 절정에 달한다(롬 8:28; 롬 8:31이하). 이 확신은 세 가지 사실에 근거한다.
첫째,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보내시고 이 사랑의 행위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롬 8:27), 곧 아들께서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 십자가 위에서 성취되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사도를 부르시고 계속해서 그가 택하신 자들을 부르신다. 그의 사랑의 의지가 그들에게 향한다.
셋째, 하나님의 아가페를 우리의 마음에 널리 흐르게 하시며, 그리하여 그 사랑을 결정적으로 경험하게 되고 우리의 삶 속에서 현실된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활동을 하나님의 활동과 구분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었던 죄를 용서하시는 일을 하신 것과 같이,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과 동일한 것으로 여긴다(롬 8:37; 살후 2:16).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행위 속에서 계시되고 실행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아가페)을 확증하셨"다(롬 5:8).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건이 된다. 바울은 이런 변화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준동사형(verbal forms)으로 말하고, 항상 부정과거형으로 말한다(롬 8:37; 살후 2:16; 갈 2:20; 엡 2:4; 엡 5:2).
하나님의 사랑은 선택을 의미한다. 바울은 사랑함과 미워함, 택함과 거절함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대해 언급하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고(롬 9:13; 롬 9:25), 형식상의 병행절에서 아가페토이(사랑하심을 입은 자들)와 클레토이(부르심을 받는 자들)(롬 1:7) 또는 에클렉토이(택하신 자들)와 에가페메노이(사랑하신 자들)까지도 사용한다(롬 1:7; 골 1:12). 선택적인 사랑의 개념에 미리 예정하심(pre-temporal ordination)과 그리스도 사건의 표적(sign)에서 현재적(temporal) 부르심에 대한 두 가지 근본적인 사상이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엡 1:4이하[아가페]).
하나님께서 그의 크레스토테스(crhstovth", 5544: 선하심)와 아포토미아(ajpotomiva, 663: 엄위)에서 이제 죄인들의 무리로부터 구별된 선택받은 공동체는 하나님과의 영속적인 친교에서 사랑과 평화를 누린다.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은 살아있는 능력으로 일하고 계신다(롬 8:35; 고후 13:11이하). 사랑은 우리를 포로로 사로잡는다(고후 5:14).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다"(롬 5:5). 이 새롭고 살아있는 능력의 실체는 이들 바울의 말보다 더 설득력있게 표현될 수 없다.
바울 서신의 하나님의 아가페(ajgavph, 26)의 개념의 의미는 명백하다. 그것은 인간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와 이 세상의 구원을 지향하는 것(orientation)이다. 사랑의 행위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목적하시는 것이다. 아브라함 시대부터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백성을 미리 아셨다. 그는 아들을 보내시고 최종적으로 성령을 보내심으로 이 백성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이 성령은 갈라디아서의 위대한 마지막 부분(갈 5:2-갈 6:10)에 사랑의 성령으로 묘사된다(갈 5:22). 서신은 이렇게 역사의 행로를 남긴다.
(b)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의 목적은 새로운 인간이다. 그러나 이 목적은 인간과 인간의 사랑의 행위 없이는 성취되지 않는다. 모든 하나님의 행위는 창조이든지 구원이든지 간에 인간의 행위의 가능성과 필연성 둘 다를 전제로 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의지를 배제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긴급한 부르심은 자유에로 부르심이다.
이 기본적인 법, 곧 예수님이 사건에서 가장 분명히 볼 수 있고, 바울에 의하면 모든 곳에서 하나님 행위와 인간의 행위 사이의 관계를 결정하는 이 기본적인 법은(참조: 빌 2:12이하), 하나님 사랑과 인간의 사랑 사이의 관계에 관하여 사도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첫 번째로 말씀하신다. 그가 관계를 세우신다. 이것은 롬 8장에 단호하게 주장되어 있다. 결단, 선택과 부르심은 확고하다. 그로부터 아가페라 불리는 모든 것이 생겨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사랑은 부름 받는 자에 쏟아 부어진 하늘로부터의 사랑에 대한 응답일 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근본적인 사랑의 행위, 그 자체와 같이 결단의 행위이다.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백성과 맺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물리치는 언약이 성취된다(롬 8:28; 참조: 롬 8:37).
바울은 고전 8:3에 똑같은 근본적인 관계를 재치있게 공식화시킨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느니라".
우리는 오직 그의 앞에서의 우리의 수동성의 크기만큼 하나님을 향하여 능동적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첫째로 어떤 참된 의미에서 우리를 의지가 있고 행동하는 인간이되게 하는 생명을 창조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을 사람에게 불러 일으키신다. 그러나 피스티스는 단지 작용을 시작하며, 진정한 실현은 디 아가페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갈 5:6).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신 자들에게 프뉴마를 부으신다(롬 5:5; 살전 2:13). 다시 한번, 인간은 수동적이다. 그러나 프뉴마는 사랑 안에서 행하는 최상의 활동을 위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자유는 사랑 안에서 그 자체를 억제하고 완성시킨다.
프뉴마가 그것에 의해 자유롭게 되는 아가페에 선행한다는 것은 갈 5:22에 고전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또 "성령의 사랑"(롬 15:30)과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골 1:8) 같은 결합에서 그리고 고전 4:21에 보다 세련되게 표현되어 있다.
프뉴마와 자유의 관계에 대해서는 롬 8:2에, 자유의 한계와 목적으로서의 아가페에 대해서는 갈 5:13에 나타나 있다. 사랑을 위해 해방됨으로 율법이 성취되고 초월되고 극복되며, 어떤 후퇴와 방해도 허용하지 않는 새로운 질서가 시작된다.
사랑의 한 가지 중요한 목적은 부름받은 자가 그의 이웃에 대한 봉사로서 그의 삶을 사랑과 자유에 두는 것이다: "13 ...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갈 5:13-갈 5:14).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이하),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살전 3:12). 바울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명령에 집중하여 예수님과 같은 방법으로 그 명령을 확립한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관심은 형제 사랑에 집중되어 있다: (참조: 갈 6:10).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동포를 돕기 위해 준비되어 있음을 의미하던 이웃 사랑은 이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는 함께 시민된 자들을 위한 봉사를 의미한다. 그것은 형제간의 복지를 행위의 지배 원리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살전 4:9; 골 1:4; 몬 1:5; 엡 4:2; 엡 6:23; 골 3:19; 엡 5:25). 아가페토스와 아델포스는 서로 바꾸어 사용할 수 있는 용어가 된다(살전 2:8; 몬 1:16).
형제 사랑을 요구하는 우주적이고 역사적인 카이로스에 의해 형제 사랑이 결정적으로 한정된다(참조: 갈 6:10; 롬 13:11). 형제 사랑은 십자가와 텔로스 사이에서 이 결단의 시기에서 유일하게 적절하고 전진적인 태도이다. 그것은 십자가의 표적 아래 선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으심으로 인해 존재하게 된 공동체 안에서(빌 2:1이하; 골 3:14이하; 엡 5:2; 참조: 고전 8:11) 봉사와 희생, 용서와 이해(consideration), 도움과 동정, 그리고 쓰러진 자를 세우고 낙담한 자를 회복시키기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롬 12:9; 고전 13:4 이하; 참조: 갈 5:25 이하). 사도 자신의 최상의 가능한 목표는 교회의 선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아직 남은 고난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참조: 고후 6:3; 골 1:24 이하). 그러나 이것은 또한 바울에게 있어서 기본 원칙인 하나님과 인간의 행위 간의 근본적인 관계에 따라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행위에 대한 봉사로서 인간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가 결합한다.
사랑은 세우는 일을 한다(고전 8:1). 사랑은 장래의 일을 세운다. 아가페(ajgavph, 26)는 텔로스(tevlo", 5056)의 표적 아래에 있다. 이것은 고전 13장의 위대한 진리이다. 이런 이유로 사랑은("제일 좋은 길", 곧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하는 하늘의 선물이며, 사랑은 믿음, 소망, 사랑이 이루는 삼각 구조의 중심에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둘 보다 위대하다. 믿음과 소망은 이 불완전한 세계(aeon)의 한계나 사건들을 견딘다. 사랑으로 인해 장래 세대의 능력은 이미 현재의 세계의 형태 속으로 침입한다. 예수님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에게 있어서도 아가페는 이 죽음의 세계(aeon) 가운데서 미래가 가지는 유일한 생명의 힘이다.
3. 야고보서의 용법.
(a) 약 1:12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b) 약 2:5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얻는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의 나라로 부르실만큼 선하다고 여기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자는 나의 형제들이며 그들이 비록 누추한 옷을 입고 온다할지라도 뒷자리에 앉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c) 약 2:8에서 사랑, 곧 이웃 사랑은 새 왕국의 최고의 '법'이다: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그러므로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범법자가 된다(참조: 약 2:9).
4. 베드로의 용법.
(a) 벧전 1:8에서 성도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으나 사랑한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b) 벧전 1:22에서 진리로 영혼을 깨끗하게 하면 참으로 형제를 사랑할 수 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베드로는 벧전 2:17에서 "형제를 사랑하라"고 권고한다.
(c) 벧전 3:10에서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악을 떠나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d) 벧후 2:15에서 발람은 불의 삯을 사랑하다가 망했다: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5. 요한의 용법.
바울에게 있어서 아가페는 미래의 원리(principle)이며, 요한에게 있어서 사랑은 현재의 우주적 위기에서 세워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세계의 원리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일 3:16; 요일 4:9 이하).
이 기본적인 사상에서 요한과 바울(롬 8:32)은 일치한다. 그러나 요한이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대한 사랑에 대해 항상 이야기하는 방식에는 다른 점이 있다(요 3:35; 요 10:17). 모든 사랑은 예수님께 집중된다. 그는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의 중재자이시다. 대조적으로 요한은 아버지에 대한 아들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거의 말한 적이 없다(요 14:31). 그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그의 "친구들"로 주신 자들에 대한 아들의 사랑을 더욱 강하게 강조한다. 아들을 통해 아버지의 사랑이 인간의 세상에 이른다(요 17:23 이하; 요 14:21 이하; 요일 4:19; 요 11:5; 요 13:23). 이 사랑은 그의 죽음에 의해 성취되고 공표되었다. 아들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그의 목적을 이루신다(요 13:1; 요 15:13).
요한복음의 아가페는 매우 명백히 겸손한 사랑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한 단계 한 단계 이 세상으로 내려오는 천국의 실체이다. 그렇지만 이 천국의 실체는 계시와 도덕적 행위에 의한 승리를 성취한다. 따라서 요한은 바울이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명백하게 설명한 것을 이해하고 있다. 빛과 생명의 세계는 이 세상에서 사랑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요한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모두의 삶에서 아가페의 적극적인 특성을 강조할 수 있고 또 강조해야만 한다.
요한이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요 5:42; 요 8:42; 요 14:28)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고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는 형제에 대한 사랑에 의해 가리워 지도록 한 것은(요 13:34 이하; 요 14:15 이하; 요 21:15 이하; 요일 4:20) 극히 일부분이다. 형제 사랑, 아버지와 아들과 아들의 백성의 서클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공동체를 구성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공동체의 삶을 위한 궁극적인 실체이며 그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은 그 생활의 법이다(요 15:9 이하; 요일 2:10; 요일 3:10; 요일 4:11 이하).
요일 3:14에는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않는 자는 사상에 거하느니라"고 한다. 요일 3:14; 요일 2:15 이하; 요 3:19에도 그렇다. 아가판은 어떤 목적어에 의해 한정되지 않은 채로 있으며, 단지 이 절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다. 눅 7:47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는 단독으로 사용된 아가폰의 독립적인 배치는 요한일서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요일 3:18; 요일 4:7 이하; 요일 4:19). 이 사랑은 생생한 활동이며, 존재의 방식이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현실화이다. 사랑의 법이 모든 세부적인 요구들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고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고상한 일관성으로 독자들 앞에 제시된다는 사실이 이것과 조화된다. 단지 때때로 사랑에 대한 요구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와 같은 표현에 의해 정확하게 정의된다(요일 3:18; 요이 1:1).
요한의 서신에서는 보다 일반적으로 훈계가, 여기에서 선택의 사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지만 형제의 관계에 대해서는 매우 단순하게 적용되는 아가페테와 아가페토이라는 절박한 부르심에 의해 중단된다(요삼 1:5; 요일 4:7).
요한계시록에서 형제 사랑에 대한 요구(계 2:19)는 이 분열과 고통에서,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라도 하나님께 굳게 매달리라는 열정적인 부르심에 의해 완전히 가리워 진다. 여기에서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이해는 전적으로 그 시대의 필요에 의해서 새로운 생명에 닥친 수난에 대한 신학 사상에 의해 결정된다. 요한계시록의 시작 부분에 충성된 증인 "우리를 사랑하신 자"(토 아가폰티 헤마스)에 드리는 찬양이 나오고(계 1:5) 사랑하는 도시의 마지막 때의 상황의 변화(계 3:9; 계 20:9)와 하나님의 적들에 대한 위협과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는 책망(계 2:4)과 함께 죽기까지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계 12:1) 피스티스(믿음)와 아가페(사랑)를 지킨 자들의 영광이 뒤따른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는 때가 왔다(마 24:12).
6. 사도 시대 이후의 용법.
초기의 신조는 몇가지 새로운 이상의 고취와 아울러 이 시대에 전수된다. 클레멘트일서 49-50은 지고의 사랑, 그리고 이 사랑이 공동체와 세상에 대해 가지는 실질적인 의의에 대해 계속적인 인식을 예증해준다. 아가페와 아가폰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기초적인 용어가 되었다. 에가페메노스(**)와 아가페토스(**)는 예수님에 대해 즐겨 사용되는 용어인데 때때로 휘오스(**)나 파이스(**)와 연결되어서 사용되기도 하고 때때로 독립적인 명칭, 사랑하는 아들(Only-Beloved)로 사용되기도 한다(벧후 1:17; Herms, 5, 2, 6; M. Pol., 14, 1; Dg., 8, 11; Barn., 3, 6 등).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하나님께 사랑받고 선택받은 자들이며, 그의 선하신 기쁨이 그들에게 머무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 아가페와 아가판은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의 경건을 요약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세상에 대한 경멸과 미움을 요구한다. 이러한 긴장 상태는 여기 유대교에서 경건과 하나님의 사랑의 최후의 표현으로 고귀하게 평가되는 순교를 초래할 수도 있다.
또 다른 형태로 하나님과 이 세상의 현상간의 긴장, 하늘의 사랑과 세상적 사랑 간의 긴장은 금욕주의로 이끌 수도 있다. 아가판은 훈련받은 또 때때로 절제하는 삶을 나타내는 용어, 또는 실제로 금욕의 훈련을 나타내는 용어가 된다. 순결한 아가페는 에로틱한 사랑보다 강하다. 그러나 아가페와 그 파생어들의 가장 일반적인 사용은 형제 사랑을 의미한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관한, 율법의 의미와 성취에 관한, 그리고 원수의 사랑에 관한 옛 말들은 크게 존중되고 적용된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경우에 형제들은 중요하다.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지치지 않고 봉사로 융화로 선으로 악을 이김으로 형제애적 친교의 의지를 강화시키기 위해 힘써야 한다(벧전 4:7 이하; ICI, 49이하; Barn, 1, 6). 아가페토스는 유행하는 인사말의 형식이다. 아가페는 식탁에서의 친교가 발전된 형제들의 애찬에 대한 전문적인 용어가 되었고 사회적인 의미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참조: E. Stauffer;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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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다 be fond of, 사랑하다 love. filevw(5368, 필레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필레오(Homer 이래)는 필로스(fivlo", 5384)에서 유래했으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a) 필레오는 흔히 아가파오(ajgapavw, 25: 사랑하다)와 의미나 용도가 매우 유사하지만 일반 헬라어에서(70인역과 신약은 그렇치 않음) 아가파오보다 더 자주 사용되며 '좋아하다'는 의미보다 '사랑하다'라는 의미를 더 지니고 있다.
(b) 필레오는 중성 목적어와 함께 사용될 경우에 '좋아하다, 중히 여기다'를 의미한다.
(c) 필레오는 부정사와 함께 사용될 경우에 '~하기를 좋아하다, ~하는데 익숙해 있다, ~하는 것이 습관이다'를 의미한다.
(d) 필레오는 '입맞추다'를 의미하며, 아가파오와는 달리 애무나 특히 입맞춤과 같은 애정의 행위를 나타낼 때도 사용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필레오는 70인역본에서 30회 나오며, 아헤브(사랑하다, 창 27:4, 9, 14; 창 37:4; 잠 29:3; 전 3:8; 호 3:10; 사 56:10), 나샤크(입맞추다, 창 27:26; 창 27:27; 창 29:11, 13; 창 33:4; 창 48:10; 창 50:1; 욥 3:27; 잠 7:13; 잠 24:26; 아 1:2; 아 8:1), 레아(친구, 애 1:2)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필레오는 신약성경에서 2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필레오는 마 6:5에서 그 본래 의미로 사용되었다. 거기에 보면 외식하는 자가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는 것을 좋아한다(사랑한다)고 되어 있다.
마 23:6과 눅 20:46도 유사한 경우들이다. 눅 11:43에서 아가파오가 사용되고 비슷한 내용인 눅 20:46은 그렇지 않다는 점은 의미상의 차이가 항상 지켜진 것 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b) 마 10:37에서는 가족 관계에서 비롯된 사랑을 의미한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여기서 한마디 부언하자면, 이 문장은 신학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이 단어가 신학적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왜냐하면 비교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 문장의 표현법은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외 다른 곳에서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하나님의 통치의 선물인 아가페로 표현되었다.
이 문장의 초두에는 친족간에 서로 나누는 타고난 사랑이 언급되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그 사이에 끼어 들게 될 때, 보통 가정의 친교의 끈과 고리까지도 하나님의 가족 사이의 새로운 교제를 위해 풀릴 수가 있다는 점이다.
(c) 요 11:3; 요 11:36에서 나사로와의 예수님의 사랑의 결속을 언급한다.
여기서 친구에 대한 사랑이 언급되지만, 나사로는 특별히 선택된 사람이며, '그는 나의 친구'가 아닌 '우리의 친구'라고 불리운다(요 11:11).
(d) 요 15:19에서 '자기의 소유의 것을 사랑한다'는 기본 의미가 명백히 나타나 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한은 세상(코스모스)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둠의 영역으로도 묘사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코스모스 안에(in) 있는 사랑이나 코스모스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에 대한 증오와 동일하다(참조: 약 4:4).
요일 2:15은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 하신 말씀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e) 요 16:27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요구에 부응하였으며, 예수님께 대한 그들의 사랑에 답하여 아버지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신다. 여기서의 사랑은 요 3:16에서 언급되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사랑과는 구별되는 듯하다. 그러나 필레오와 아가파오가 모두 성자에 대한 성부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듯이(요 5:20; 요 3:35 등). 제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도 아가파오로 표현될 수 있다(참조: 요 14:21, 요 14:23). 하지만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요 13:1)이나 제자들 상호간의 사랑(요 13:34), 아버지께 대한 예수의 사랑(요 14:31)을 나타낼 때는 오직 아가파오만 사용되었다. 요한복음에는 성부에 대한 제자들이 사랑이 아무데서도 언급되지 않는다.
(f) 요 21:15이하에서 아가파오와 필레오가 번갈아 나오는데 일부 성경 해석가들은 예수님께서 세 번째 질문에서 필레오를 사용하셨기 때문에 베드로가 근심했다고 주장하지만(요21:17), 요한복음에서 이 단어들은 거의 동의어이므로 베드로가 근심한 까닭은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물으셨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이 사람들 보다"(요 21:15) 자신을 더 사랑하기를 원하시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특별한 사명을 맡기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이 위임도 부인이나 특별한 사랑의 시인과 마찬가지로 세 차례 반복된다. 이 예외적 사랑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랑하시는 제자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에 대응되는 것이며, 목회 사역과 죽음이라는 베드로의 이중적 사도 직분의 기초가 된다. 베드로는 '아가파오'라는 사랑은 물론 '필레오' 사랑까지 언급한 것이다.
(g) 고전 16:22에서 바울은 필레오를 단 한번 사용했으며, 또한 중요하기도 한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거기에서, 퀴리오스(주)에 대한 사랑은 구원의 조건으로 묘사되어 있다. 은혜는 오직 말과 행실로써, 즉 온전히 믿음을 바쳐 주께 사랑을 고백하는 자들에게만 임한다.
(h) 딛 3:15,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찌어다". 믿음 안에서의 사랑으로 이해된 인간적인 사랑을, 아들(Sun)에 의해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과 관련하여 새로이 해석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할 때, 비로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믿음 안에서"라는 문구는 그리스도교적 중요성을 나타내며, "우리를"이란 단어는 특정한 배타성을 암시한다. 사도 바울에 대한 사랑은 교회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연합하는 결속이 된다.
(i) 계 3:19에서 승천하신 주님은 구약 성경의 구절을 인용하여 말씀하신다(잠 3:12). 그리스도의 징계하시는 사랑(참조: 고전 11:32)은 다름아닌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다. 이 배경은 공동 식사 안에서 사귐의 성취를 이루는 하나님의 우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잘못하는 아이를 뉘우치도록 교도하는 가운데서 나타나는 부모의 사랑이다.
계 22:15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절대적으로 대립을 이루는 명제 가운데 앞의 개념들을 특징지어 주는 결론적 구절을 보게 된다(참조: 요 3:19; 요일 2:15; 약 4:4).
(j) 막 14:44에서 필레오는 '입 맞추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하였는지라".(참조: C. Brown; G. Stah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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