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1.20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갈5. 성령 안에서 행함+ 성령 인도 따라 목표까지 나아감.. 아가페로 Q과 이웃을 제몸처럼 사랑함..믿는것=동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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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갈5장....[아 하나님의 은혜로310]


@@"나오미"라는 이름의 뜻 = '나의 즐거움,' '행복,' '희락' ‘유쾌함' ....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선함]의 뜻을 가진, ‘노암’이라는 히브리어에서 파생..

[요5:29..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마19: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이는 오직 한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벧전4:19...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요삼1:11...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선함>의 히브리어는 <노암עםַנֹ<...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에서 온 말.... "아름다운, 은혜로운,  즐거운, 은총의,  매력적인,  기쁜" 을 의미....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에게 주시는 은혜/은총으로서... 그 영혼의 내면에 여호와의 아름다움이 흘러 넘칠 것... 선한 성품과 은혜로운 말이 있을 것...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할 것... 그 무엇을 해도 하나님의 은총이 머무는 사람일 것... 다른 사람의 마음을 Touch하는 영혼의 매력이 있을 것...이 모든 은혜가 <노암עםַנֹ<이니......성령의 9가지 열매가 <노암עםַנֹ<속에 있음이라... 예수 그리스도가 <노암עםַנֹ<의 본체이시니...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는 영혼을 살리는 선한 <노암עםַנֹ<의 능력이 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서 <노암עםַנֹ<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 삶의 모든 영역에서 <노암עםַנֹ<이 주는 은총이 있을 것... 만일 삶이 메마르고 내면에 여유가 없다면 하나님의 아름다움 <노암עםַנֹ<의 은혜로 돌이켜야 하리라.. [주님의 집 = 떡집, 베들레헴]에로 돌이켜야 하리라... 찬양과 경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으며, 기도를 통해서 내면의 <노암עםַנֹ<의 축복을 누릴 수 있으니... 하나님의 사람은 사람의 매력보다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에 귀 기울이려고 하는 바,  그런 영혼에게 흘러 넘치도록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 <노암עםַנֹ<이 머물게 될 것. 

[미6:8-9상...*8.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9상.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성령 안에서(성령으로) 행함 + 성령의 인도 따라 끝까지 나아감 

*1)페리파테오 = 피스튜오...페리파테오 프뉴마[바짝 옆에 붙어/부둥켜안겨  함께 걷다=2인3각, 믿는것 = 동행함]  walk habitually in the [Holy] Spirit ..모든 일상에서 (새 존재의 본질적 새 생명) 성령 안에서 성령을 따라(믿음으로) 두루 행함 ==> 

*2)스토이케오 ..자오 프뉴마 live by the [Holy] Spirit, we must also 스토이케오[바짝 그 뒤따라 걷다-한줄로/생명길] 프뉴마walk by the Spirit.. Q의 목표 향해, 성령께서 인도-통제하시는 생명 길(규준)을 따라 곧 새 창조를 향해 행진하여 목표에 도달하는 삶....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롬4:12.하 ...*12...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그 어떤 것을 취사선택 해야 하는 경우, 그 어떤 규정을 따라서가 아니라 그 영을 우리 생명의 본질, 곧 우리 존재의 본질로 취함을 최우선 순위의 고려사항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요, 그러할 때 비로소 날마다 그 영이 우리의 길과 통로가 되실 것이요 우리를 위한 Q의 목적이 달성될 것...기존의 그 어떤 율법-종교-전통-조직-교리-규정에 얽매이는 것 아니라, 과정을 거치신 TUQ이 우리 존재의 새로운 본질과 우리의 길의 통로가 되심 인해, 그분에 의해 살고 그분 안에서 행함의, 그 영에 의한 두 가지 행함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와 바울, 둘이 한 생명 한 생활 가졌던 것처럼(갈2:20) 정말로 그리스도께 접붙임 된 생명을 한 영됨의 상호 교통하는 삶 통해 매일 그리스도를 (동시에, 호흡하여 받아들임으로써) 살고 있는지 돌아보라...범사에 그 영을 앙망하고 교통하며 의지함 없이 그저 자기만의 습관이나 율법(사회적 윤리--성경적 원칙--자신의 루틴--내적 생명률)을 따라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멈춤 없이 자연스레 주께 마음 열어 주 이름 부름 통해 한 영됨으로써 그리스도 살기에서 얼마나 자주 벗어나고 있는지를....진지하게 돌아보고 고백하고 주만 향함으로 바로잡으라...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set free..해방/방면하다) 자유를(freedom..완전한 해방/방면..타락한 육신 그 상태로는 .적극적 참사랑 실행이 전혀 불가능하므로,  대속의 십자가 죽음-장사됨으로 모든 사람의 죄를 없이 하시고 , 부활 승천  안에서 성령으로 오사 내주하심 통해)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깨어 경계하며) 다시는 (정죄의 울법 적용 받는, 죄의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율법은 정죄의 기능과 참 사람에로 돌이킴 권함의 두 기능을 가짐, 하기에 율법의 완성은 Q사랑과 형제 간의 상호 사랑이다.....상호 해방!!..즉, 영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영을 충만히 채우고 넘치심 통해 혼조차 완전히 점유/장악-거룩케 함 이루시도록 주도권 넘겨드림이 필요함.

....(set free, 영혼몸 전존재의 완전한 해방/방면..거듭남 곧 부활 생명의 새 창조 안에서  새로이 자유 의지를 부여하심으로써 Q의 자녀 됨의 권세를 회복시켜 주섰고, 거듭난 자로서는 회개할 때마다  죄들과 불의를 사해 주심으로써, 또한 말씀의 씻는 물로 정결케 하심으로써 자녀 됨의 권세를 늘 새로이 회복시키고 계심, 그러나 미혹받고 기만 당하여 그리스도로부터 스스로를 단절한 자마다 스스로를 다시 대적에게 매이는 데 넘겨주는 것이 될 수 있으니, 깨달을 그 때마다 다시 회개하고 주께 철저히 돌이켜야 함)  .(...우리를 자유케 하신,  거듭남 인해  획득한 그 자유는 그리스도 안의 자유 freedom, 즉 근원적, 자유 의지의 회복이요, 세상적인 단순한 해방/놓임이 아님) (그러므로 먼저 믿는 이마다 그의 영과 하나되어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주 되시게 하라...그분은 [그분을 그댜위 주권 넘겨드림 통해서만 진정한 주인으로서 자유케 되실 수 있음, 곧] 그대의 동의없이는 그대 안에서 제한되실 수 밖에 없으사다. 그러기에 그분을 제한하지 말고 주 되심 인정하며 높여드리며 [진정한 주인 되시도록, 내려놓고 내어-비워드리라] 순종-복종하라...그분이 바로 길-진리(실제)-생명-빛이신 그리스도이시니, 그분으로 그대의 거듭난 혼의 전 영역을 온전히 적셔 점유하고 변화시키시도록 주도권을 내어드리라, 그대의 영을 충만케 하신 그분으로 하여금 훌러 넘쳐 이제 그대의 생각-감정-의지조차 그리스도의 생각-감정-의지 되게 하라!!)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사랑 : 할례와 율법 준수 행위냐, JC말씀 붙들어 은혜로 거듭난, 진리 안에서 자유 얻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발휘로 HS과 동행함이냐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자유케 하는, 성령의 생명으로 삶의 거듭남, 곧 영적 할례 받아 그리스도를 사는)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이는 마치 포도나무 본체로부터 잘려 나간 가지와 다름 없게 됨.

3.  내가 [육적]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음 인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혜택에서 제외되어 버림..진실로 그러함..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하루하루 생생한 산 믿음 발휘함 인해 그 길이신 성령의 힘과 능력에 의지하며 걸어감으로써) 의의 소망(후에 나타날, 부르심의 소망 =기업의 영광의 풍성 = 상호 기업 됨...그리스도를 얻고 그 가운데 발견됨)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의미가)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Q의 [능치못함 없는]전능의 믿음 능력 발현 됨에 있어서, 그 근본 동기는, 부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인 바, 그분의 사랑겨우심에 의해 활성-작동-표현-발휘되어 효력 나타내는, 살아 생동하는) 믿음뿐이니라

.... 의의 소망이란 바로 그리스도, 그분 얻고 그 가운데서 발견됨이요, 거기 도달함은 오직 유일한  참 길이신 그리스도(성령) 통해서, (참 사랑의 동기로만 작동되는, 생생하게 발휘되는) 참된 산 믿음으로써만 가능함. 

....그리스도 안에서 의미와 효력이 있는 것은 Q편에 있어서의 그 영과 우리 편에서의 믿음이다. 그 영은 우리의 누림을 위한 만유를 포함한 땅이요, 믿음은 우리가 이 부요한 땅에 참여하고 누리기 위한 기관이다.. 오직 그 영과 믿음만이 효력이 있기에 그것들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는 Q 기뻐하시는 진정한 믿음은 사랑으로써만 역사한다고 말한다. 산 믿음은 활동적인데 오직 사랑으로써 (지고지선의) 율법을 이루기 위해 역사한다(5:14) 할례란 생명 능력은 없는 외적 규례일뿐이기에 효력(힘이나 실제 능력)이 없다... 믿음은 능력 충만한 생명의 영을 받는 것이다(3:2). 믿음은 율법 뿐 아니라 Q의 단체적인 표현을 위해 Q의 아들의 명분을 완성하는 Q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랑을 통해 역사한다.

7.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8.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10.  나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사는 바, 그리스도의 영적 할례를 각자의 마음에 받았기에 육적 할례가 더 이상 필요없음 깨닫고 굳세게 견지하는]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거세하여(포피뿐 아니라 정낭까지)] 버리기를 원하노라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부르심 받고 회개 - 구주 믿음- 영접함으로써 거듭나게 하사 자유 주심은 [십자가로 처리된 옛 사람의 세속적 정욕-탐심-이기심의 패러다임 그대로 살도록 함이 아니라] 거듭난 새 사람의 행할 바, 사랑의 섬김 위한 것으로서 서로 서로 사랑하며 무엇이 최선인지 주께 여쭙고 그대로 추구하며 섬기도록 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율법수여의 근본 뜻= 주신 바, Q의 아가페로 Q과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함)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롬8을 보라

....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Q의 구속과 함께(감추어져 있는 형태이지만) 구속 경륜의 목표에 대해 나와 있음...즉, 구속 경륜의 목표는 Q의 아들의 명분이다!!...롬1-4에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다루고 있지만 이어지는 5장부터는 [아들의 명분에 대해, 그 명분을 향하여 서신을 전개해 나가고 있을믈 볼 수 있어야 한다.  갈4장에서는 아버지께서 구속을 성취하시려고 자기 아들을 보내셨음을 말한다(4-5절) 그런 다음 그분은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고 그의 아들의 영(그 영)을 보내셨다.  즉,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속하셨고, 그 영은 우리에게 Q의 생명을 분배함으로써 우리로 Q의 아들들이 되게 한다. 즉 그 영을 보내심은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고 우리의 체험 안에서 아들의 명분이 생생한 실제가 되게 하려 하심이다.  이어서, 롬8에서는 2절에서 생명의 영을, 15절에서는 아들의 명분의 영을 말하고 있다. (아들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Q의 아들의 생명이 있다.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페리파테오 프뉴마!! walk habitually in the Spirit [= 피스튜오....본질적 새 생명(그 영)  안에서 걷기...매일의 생활에서 깨어 있어서. 믿는 그대로 주와 친밀한 하나 됨 안에서 동행함을 일상적 습관화 함) 그리하면 육체[=아말렉=타락한 사람..Q의 대적자는 사단 그 자체보다는 오히려 타락한 육체[=죄성]이며, 사단마귀를 대적한다는 것은 육욕의 그 공급근원을 끊는 것임..유혹받고 미혹되어 말씀 거역한 사람의 몸 안에 사단은 그 자신의 정수 그자체인 죄성(육신)을 주입하여 그보다 더 악한 전위대, 곧 육체가 되게 한 바, Q의 뜻 이룸을 거스려 대적하게 함....성령(그영)을 따라 행할 때 JC의 이름[=임재]은 이미 이긴 권세를 적용하여 육욕의 그 공급원 자체를 끊어버리심]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고후3:16,17..주는 그 영이시니(요7:39..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전6:17..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롬8: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그리스도로 산다, 예수님과 동행한다 함은 그분과 결합한 하나 됨 안에서, 내주하시는 성령 따라 매 걸음 걸음 교통 안에서 행함이다] ...오직 말씀이 가라 하는 곳까지만 가고, 멈추라 하는 곳에서 멈출 의무만 거듭난 믿는이에게 주어졌고, (말씀을 도외시 한 채) 옛 자아의 습관 따라 [함부로 짐짓 추정하여] 제 멋대로 멈추거나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거나, 내 눈에 좋게 보이거나 내 맘 끌리는 대로 방향을 바꾸거나 하는 등, 그 모든 것이 고범죄(presumptous sin)에 해당된다......

[딤후2:5...(거듭난 자는 마땅히 말씀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살라는 규준을 주셨다)..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벧후2:10...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

..... 그러므로 “PRESUMPTUOUS SIN” 이란 “하나님(말씀)의 직접적인 허락이나 금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이 때는 주께 나아가 교통 안에서 여쭈어 보아야 한다..주님은 너무도 사랑스럽고 친절하시기에 반드시 알게 하신다))., 자신의 판단에 의하여,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여 행하는 죄”를 가리켜 고범죄라 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잣나무로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으므로 "노아가" "잣나무로" "방주를 지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소나무로는 지으면 안된다는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니기에, 소나무로 방주를 지어도 무방하다고 스스로 판단하여 소나무로 방주를 지었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고범죄(故犯罪)” 곧 “PRESUMPTUOUS SIN” 을 짓는 것이다))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짐의 곧, 삶의 영역 이주의 근본적 문제이다!!...결코 흔들리지 말라..더러워진 것은 (회개함으로써) 씻으면 된다..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의 모든 미덕은, 즉 성령의 열매란 내주하시는 그분의 충만 따른, 영적 속성의 넘쳐남인 것을 분명히 깨달을 필요가 있다.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자오 프뉴마 live by the Spirit=가장 먼저 최우선 선결 요건은 듣고 믿고 구주 영접함으로써 거듭남의 생명 얻음이요, 그 다음에라야 그분을 살 수 있게 됨...그분의 주 되심 인정하고 그분을 의지함으로써 (육체따라 세상 지향함의 곁길로 새지 않고) 바로 그분을 실지로 살고 있다 주장한다면] 또한 [바로 그렇게 언행일치로 나타낼 바!!, 실지로 인도하시는 그분과 함께, 평생 중단없이 그분을 호흡함으로써 그대의 반쪽이요 전부이신 (전존재에 녹아계셔서 실지로 친밀히 알게 하시길!!) 그분 따라, 그분 향해서, 시종일관 일편단심으로, 하나되어 계셔서 인도하시는]성령으로 행할지니(스토이케오 프뉴마,,walk by the Spirit: 기본 원칙 삼아  살아 온 그대로, 그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끝까지, 잘 훈련된, 통제되고 정렬 상태의 흐트러짐 없는 질서정연한 군대 행진)

.... 거듭남 안에서 Q의 아들로 우리를 낳으신 아버지는 밖으로는 Q의 형상과 모양, 안으로는 Q의 생명과 성품을 가진 아들의 생명으로 사는 Q의 아들들로 거듭나게 하셨다.

.... Q의 경륜 안에 있는 Q의 목표는 거듭난 믿는이마다 새 창조를 살도록 함, 곧 새 창조의 삶의 기본 원칙은 TUQ과 하나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함인데, 범사에 거듭난 우리 안으로 넣어주신 Q의 생명-성품-성분-요소를 공급하시는 그 영을 따라  행하는 것을 통해서 Q의 아들의 명분을 완성함에 있으며, 이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장성함의 분량의 충만에 이르는 교회, 곧 한 새사람-그리스도의 신부이자 전사를 이루고 계신다.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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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새번역]갈5장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자유

2.  ○나 바울이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할례를 받는다면, 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3.  내가 할례를 받는 모든 사람에게 다시 증언합니다. 그런 사람은 율법 전체를 이행해야 할 의무를 지닙니다.

4.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5.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힘입어,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을 소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7.  ○여러분은 지금까지 잘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누가 여러분을 가로 막아서, 진리를 따르지 못하게 하였습니까?

8.  그런 꾐은 여러분을 부르신 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9.  적은 누룩이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합니다.

10.  나는 여러분이 다른 생각을 조금도 품지 않으리라는 것을 주님 안에서 확신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교란시키는 사람은, 누구든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11.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아직도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아직도 박해를 받겠습니까? 그렇다면, 십자가의 거리낌은 없어졌을 것입니다.

12.  할례를 가지고 여러분을 선동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자기의 그 지체를 잘라 버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13.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14.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15.  그런데 여러분이 서로 물고 먹으면, 양쪽 다 멸망하고 말 것이니, 조심하십시오.

===육체의 행실과 성령의 열매

16.  ○내가 또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지 않게 될 것입니다.

17.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바라시는 것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이 둘이 서로 적대 관계에 있으므로,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18.  그런데 여러분이,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는 것을 따르면,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19.  육체의 행실은 분명합니다. 곧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원수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노와 이기심과 분열과 분파와

21.  질투와 술취함과 흥청거리는 연회와, 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내가 전에도 여러분에게 경고하였지만, 이제 또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입니다.

22.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23.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금할 법은 없습니다.

24.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25.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26.  우리는 허영에 들뜨거나, 서로 노엽게 하거나, 질투하거나 하지 않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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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atians 5 Amplified Bible

==Walk by the Spirit

*1. It was for this freedom that Christ set us free [completely liberating us]; therefore keep standing firm and do not be subject again to a yoke of slavery [which you once removed].

*2. Notice, it is I, Paul, who tells you that if you receive circumcision [as a supposed requirement of salvation], Christ will be of no benefit to you [for you will lack the faith in Christ that is necessary for salvation]. 

*3. Once more I solemnly affirm to every man who receives circumcision [as a supposed requirement of salvation], that he is under obligation and required to keep the whole Law. 

*4. You have been severed from Christ, if you seek to be [a]justified [that is, declared free of the guilt of sin and its penalty, and placed in right standing with God] through the Law; you have fallen from grace [for you have lost your grasp on God’s unmerited favor and blessing]. 

*5. For we [not relying on the Law but] through the [strength and power of the Holy] Spirit, by faith, are waiting [confidently] for the hope of righteousness [the completion of our salvation]

*6. For [if we are] in Christ Jesus neither circumcision nor uncircumcision means anything, but only faith activated and expressed and working through love.

*7. You were running [the race] well; who has interfered and prevented you from obeying the truth? 

*8. This [deceptive] persuasion is not from Him who called you [to freedom in Christ]. 

*9. A little [b]leaven [a slight inclination to error, or a few false teachers] leavens the whole batch [it perverts the concept of faith and misleads the church]. 

*10. I have confidence in you in the Lord that you will adopt no other view [contrary to mine on the matter]; but the one who is disturbing you, whoever he is, will have to bear the penalty. 

*11. But as for me, [c]brothers, if I am still preaching circumcision [as I had done before I met Christ; and as [d]some accuse me of doing now, as necessary for salvation], why am I still being persecuted [by Jews]? In that case the stumbling block of the cross [to unbelieving Jews] has been abolished. 

*12. I wish that those who are troubling you [by teaching that circumcision is necessary for salvation] would even [go all the way and] castrate themselves!....네 손이 너로 범죄케 하거든 잘라내 버려라!!

*13. For you, my brothers, were called to freedom; only do not let your freedom become an opportunity for the [e]sinful nature (worldliness, selfishness..세속적 정욕-탐심-이기심), but through [f]love serve and seek the best for one another. 

*14. For the whole Law [concerning human relationships] is fulfilled in one precept,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that is, you shall have an unselfish concern for others and do things for their benefit].” 

*15. But if you bite and devour one another [in bickering and strife], watch out that you [along with your entire fellowship] are not consumed by one another.

*16. But I say, walk habitually in the [Holy] Spirit [seek Him and be responsive to His guidance], and then you will certainly not carry out the desire of the [g]sinful nature [which responds impulsively without regard for God and His precepts]. 

*17. For the sinful nature has its desire which is opposed to the Spirit, and the [desire of the] Spirit opposes the [h]sinful nature; for these [two, the sinful nature and the Spirit] are in direct opposition to each other [continually in conflict], so that you [as believers] do not [always] do whatever [good things] you want to do. 

*18. But if you are guided and led by the Spirit, you are not subject to the Law. 

*19. Now the practices of the [i]sinful nature are clearly evident: they are sexual immorality, impurity, sensuality (total irresponsibility, lack of self-control), 

*20. [j]idolatry, [k]sorcery, hostility, strife, jealousy, fits of anger, disputes, dissensions, factions [that promote heresies], 

*21. envy, drunkenness, riotous behavior, and other things like these. I warn you beforehand, just as I did previously, that those who practice such things will not inherit the kingdom of God. 

*22. But the fruit of the Spirit [the result of His presence within us] is love [unselfish concern for others], joy, [inner] peace, patience [not the ability to wait, but how we act while waiting], kindness, goodness, faithfulness, 

*23. gentleness, self-control. Against such things there is no law. 

*24. And those who belong to Christ Jesus have crucified the [l]sinful nature together with its passions and appetites.

*25. If we [claim to] live by the [Holy] Spirit, we must also walk by the Spirit [with personal integrity, godly character, and moral courage—our conduct empowered by the Holy Spirit]. 

*26. We must not become conceited, challenging or provoking one another, envying one an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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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5장 (개요)

본장에서 사도는 그의 전 장에서의 강론을 아제는 현실적, 실제적 문제에 적용한다. 

그는 먼저 일반적인 경고 또는 교훈을 줌으로 본문을 시작한다. 그는 이 경고를 몇 가지 저의로 생각하게 함으로 더욱 강조한다(2-12). 

그런 다음 그는 몇 가지 실제적인 경건을 강조한다. 경건은 거짓 교사의 함정을 피하게 하는 가장 훌륭한 방부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다음과 같은 경건이 강조된다.

Ⅰ. 서로 다투지 말 것(13-15).

Ⅱ. 죄에 대항하여 싸울 것.

1. 영과 육의 투쟁은 누구에게서나 찾아 볼 수 있는 사실임을 제시한다(17).

2. 이 투쟁에서 더 좋은 편에 드는 것이 우리의 의무요 권리이다(16,18).

3. 그는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분류한다. 전자에 대하여서는 우리가 경계하고 극복해야 하며 후자의 열매는 우리가 맺어야 하고 또 귀하게 여겨야 한다. 또한 그는 그들이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의 중요성을 제시한다(19-24). 그런 다음 그는 거만과 시기에 대하여 주의함으로 본장을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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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세게 거할 것을 교훈함(갈 5:1-12)

본장의 전반부에서 사도는 유대적 경향을 띤 교사들에 대하여 주의하라고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명하였다. 이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은 율법의 멍에 아래로 다시 메어 두려고 하는 자들이었다. 

그는 전에 이들을 반박하는 논리를 전개하였고 그리고 복음의 정신에 입각한 교사들의 원리와 입장과 저희의 입장이 얼마나 대조적인가를 광범위하게 제시하였었다. 

본문은 그가 논하였던 모든 사실을 다시 한 번 개괄적으로 언급하고 구체적 사례에 적용시킨 말씀이다. 

그는 지금까지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는 것을 율법의 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된다는 것과 이제 모세의 율법은 더 이상 효력이 없으며 기독교인들이 그것에 복종할 의무가 없음을 논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다음과 같이 권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여기서 다음의 사실을 고찰하자.

1. 우리가 복음 아래서 해방을 얻어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우리는 형식적 율법과 도덕법의 저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리는 형식적 율법을 준수할 의무에 구속을 받지 않으며 또 엄격한 도덕법에 매이지 아니한다.[도덕법준수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이 결코 아니로되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으로서가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절대 준수불가함) 아니라, 오직 주 HS의 도우며 이끄심에 순종함으로써 저절로 참되게 이루어 지게 하심..그 법에 비추어 본 바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고백하며 JC의 사죄하사 새로이 출발하게 하는 보혈의 능력을 의지함으로써 사죄의 은총따라 얻는 마음중심의 청결함과 공급하시는 평안을 힘입고, 일깨우며 이끄시는 HS따라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묵상하며 동행함-무가치함과 무력함을 고백하며 자기를 내려놓고 주께 내어 비워드릴 때 하나님생명의 연합안으로 이끄사, JC의 어떠하심 빼어닮기를 친히 이루어 가시며 마침내 몸의 구주되심, 곧 몸의 구속까지 저절로 이루어 가심,,,이 과정에 주님의 섭리 따른 고난의 인내을 통한 자기부인 + 자기십자가를 짐(자기를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과목이수는 필수가 됨.] 

이 도덕법을 각 사람을 그들에게 행하라고 기록된 대로 계속 행하지 아니하면 저주한다(3:10).

2. 우리가 이 자유를 얻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서이다. "우리를 자유케 하신"분은 바로 그분이시다. 

그의 공로로 그는 파기된 율법의 요구를 채우셨고 또 왕으로서의 그의 권위에 의하여 그는 유대인들에게 강요되었던 형식적 율법 준수에 대한 의무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다.

3. 그러므로 이 자유 안에 "굳세게 서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즉 끊임없이 실천하고, 복음과 또 복음이 주는 자유를 따르고 남의 꾀임을 받아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는 것이요, 모세의 율법으로 되돌아가게 하려는 설득에 넘어가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전반적인 경고 또는 교훈이었다. 

사도는 다음 절들에서 몇 가지 논증 또는 근거를 제시함으로 이 경고를 강조한다.

Ⅰ. 할례를 절대화하고 율법의 행위에 의지하여 의를 얻으려는 저들의 의도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에 명백히 모순이 되는 일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이 얻는 모든 유익한 것들을 포기해 버리는 행위라고 한다(2-4절).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아래의 사실들을 고찰하여 보자.

1. 어떠한 엄숙함으로 사도가 이 사실을 주장하고 선포하였는가 하는 점. 

본문에 보면 그는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2절)라고 서두를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3절에 반복하여 "내가 너희에게 다시 증거하노니"라고 말씀한다. 

이 말을 풀어 쓰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그리스도의 사도임의 스스로 입증하였고 그리스도에게 나의 권한과 교훈을 위임받은 나는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는 사실을 선포하며 또한 나의 신용과 명예를 걸고 맹세하노라." 

이로써 그는 지금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대단히 중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복음의 존망이 걸릴 문제임을 보여 주고자 한다. 

그는 평소에 할례에 대하여 전하는 전도자가 아니었고 따라서 그들이 할례에 복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장 중대한 문제로 취급하였다.

2. 그가 그토록 엄숙하고 확신있게 선포한 내용, 

그 내용은 "그들이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본문에서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단순히 할례만일 것이라든가 또는 그가 말하는 의도가 할례받은 사람은 아무도 그리스도의 덕을 입지 못하리라는 뜻에서 말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구약의 모든 성도들도 할례를 받았었고 바울 자신도 디모데가 할례받을 것을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할례에 대하여 말할 때 그가 말하고자 하는 할례는 유대적 경향을 띤 교사들이 강요하고자 하는 그러한 식의 할례였다. 

그들은 "저희가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가르쳤다(행 15:1). 

그러므로 그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4절에서의 의도와 같은 것이라고 하겠다. 

거기서 그는 율법에 의하여 의롭게 되기를 구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저주를 표현한다. 

그들이 할례를 받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할례에 순복하면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아무 유익도 없고 그들에게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가 주어지며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아무런 힘도 없고 또 그들은 은혜에서 떨어진 자"임을 선언한다. 

이 모든 사실들을 통하여 갈라디아인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의인(義認)의 길을 버리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들은 하나님이 도저히 의롭다고 보실 수 없는 그러한 자리에 스스로 처하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 전체를 지킬 의무를 진 자들이 되었고, 그들에게 요구된 이러한 복종은 그들이 결코 수행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는 일에 실패한 자들에게는 저주가 선포되고 정죄되며 결코 그들이 자기들을 의롭게 할 수 없는 그러한 것이었다. 

이같이 그리스도로부터 떠나 반역하고 그들의 소망을 율법에다 둔다면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아무 유익도 없을 것이요, 그가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같이 유대인교사들은 할례를 받음으로 기독교를 배척하였고 동시에 그리스도를 통한 모든 유익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켰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신자들은 자기들이 받아들인 가르침에 견고히 서서 구속(拘束)의 멍에는 다시 메지 말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되는 것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빠진 자들도 구하실 수 있지만 한편 그가 아무 유익도 줄 수 없는 무리들로 있다는 사실이다.

(2) 율법에 의하여 의롭게 되기를 구하는 모든 자들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들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하실 수 없도록 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율법의 행위에 그들의 소망을 세움으로써 그로부터 오는 모든 소망을 거부해 버린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그들의 유일한 구세주로 인정하고 의지하지 않으려는 자들에게는 구세주가 되기를 원하시지는 않는다.

Ⅱ. 그들을 복음의 교훈과 자유에 굳게 세우기 위하여 자신과 또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다른 유대인들의 경우를 본보기로 제시한다. 

그리고 그는 이들 신앙의 본이 될 만한 사람들이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렸음"을 저희에게 알려 준다. 

그들은 본래 유대인들이었고 율법 아래서 양육을 받았지만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에 이른 후 모든 율법의 행위에 대한 의존을 버리고 그를 믿음으로만이 주어지는 의인과 구원을 바랐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결코 율법의 행위에다 그들의 소망을 두려고 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이었던 것이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기독교인들이 기다려야 할 대상. 그것은 "의의 소망이다." 

이 소망에 의하여 우리는 저 세상의 행복을 이해하게 된다. 세상에서의 삶은 기독교인들의 희망의 대 목적이므로 의의 소망은 또 한 기독교인들의 소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들이 바라고 추구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의에 근거한 저 세상에 대한 소망으로써의 의의 소망은 저희들 자신의 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주 예수의 의에  근거한 것이다. 

왜냐하면 의의 생활이 이러한 행복으로 이끄는 길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를 위하여 이 의를 얻게 해 주며 또 그것에 의하여 우리가 의를 소유하게 되기를 바라는 바 수단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인 것이다.

2. 그들이 이 행복을 얻기 위하여 소망할 수 있는 근거. 

그것은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 믿음을 통해서다. 

또한 그들이 이러한 행복을 얻기 위하여 무엇인가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믿는 길밖에 없다. 

이 방법을 통해서만이 그들은 이 세상에서 그 행복을 소유할 자격을 획득할 수 있기를 기대할 수 있으며 또는 저 세상에서 그 행복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3. 그들이 기대하는 이 소망이 우리에게 오게 되는 통로, 

그것은 "성령을 통해서이다." 이제 그들은 성령의 지시와 영향력 아래 행동하게 된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권유에 설득될 수 있었던 것도 또 그를 믿을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그를 통하여 의의 소망을 바라 볼 수 있었던 것도 성령의 지시 아래 이루어진 것이요, 그의 협조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사도가 기독교인들이 취할 길을 이같이 규정한 것은 그들이 만일 다른 방법으로 의롭게 되거나 구원받기를 기대하다면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과 그러기에 그들은 그들이 받아들였던 복음의 가르침을 대단한 관심을 갖고 따라야 할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다.

Ⅲ. 그는 기독교 제도의 성격과 목적을 논하면서 기독교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구별을 폐지시키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방법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세우셨음을 말한다. 

그는 그들에게(6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즉 복음의 통치 아래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다"고 말한다. 

율법이 지배하고 있었던 시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차이가 있었고 할례받은 자와 안 받은 자의 차이가 있어서 전자는 하나님의 교회의 특권을 받을 자격을 누렸고 후자는 그 자격에서 제외되었지만 복음이 지배하는 시대가 되어서는 사정이 바뀌었다는 말이다.

"율법의 마침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므로 할례자든 무할례자이든 구별이 없게 된 것이다. 

그는 한편에게는 잘해 주시고 다른 편에서는 나쁘게 대한다거나 한편은 하나님께 천거하면 다른 편은 제외한다거나 하시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유대적 경향을 띤 교사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고 또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을 의무화시킨다는 것은 불합리한 일일 뿐 아니라 이러한 저들의 말에 복종하는 갈라디아 교인들도 어리석은 자들인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는 데는 구별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에게 해야 할 의무를 제시한다. 

그것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진지한 사랑에 의하여 그 진실됨과 순수성이 밝혀진다. 

만일 그들이 이러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가졌다면 할례나 무할례가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할례가 없어도 그 누구도 그들의 가로막지를 못하는 것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한 믿음이 없이는 어떤 외적인 유리한 조건이나 고백도 우리를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게 할 수 없음을 기억하자.

2. 참된 믿음이란 역사하는 힘을 지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것은 사랑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우리의 형제에 대한 사랑에 의하여 역사한다. 이같이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야말로 기독교의 본질 중에 본질이라고 하겠다.

Ⅳ. 그들을 뒷걸음질하는 데서 돌이켜 미래를 위하여 더욱 확고하게 세우기 위하여 그는 그들의 훌륭하였던 출발을 상기시키고 어디서 그들이 있었던 상태에서 이탈하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라고 권한다(7절).

1. 그는 그들에게 "그들이 달음질을 잘 하였다"고 말한다. 

그들이 처음 기독교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그들이 매우 모범적으로 행동하였다. 그들은 기꺼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신앙의 생에 대하여 열심히 냈다. 

그들은 세례를 받으면서 자신들이 하나님께 드려졌고 또 그리스도의 제자되었음을 선언하였으며 동시에 그들의 행동도 그들의 고백이나 기독교인으로의 성품에 어긋남이 없었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기독교인의 삶은 경주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상을 얻고자 하면 잘 달려야 하고 또 끝까지 달려야만 하는 것이다.

(2) 우리가 이 경주를 달리는 것만으로, 즉 기독교에 대한 신앙을 고백함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고 잘 달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즉 신앙대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갈라디아 교인들도 얼마 동안은 잘하였었다. 그러다 도중에 잘못되어 길에서 이탈하거나 또는 도중에 힘이 빠져버리고 비틀거리었다. 그러므로

2. 그는 "누가 너희를 막느냐?"고 물으면서 대답하기를 재촉한다. 

어찌 되어서 그들이 잘 달리던 방해한 자들이 누구인지 또 방해한 장애물이 무엇인지를 잘 알았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스스로 자문할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그들이 그들에게 이 같은 혼란을 야기시켜 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만한 이유가 있는지 또 저희가 그들에게 제의한 것이 그들의 현재의 생활 속에서 의롭게 되기에 충분한 것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라.

(1) 신앙 생활의 출발을 잘하여 한동안 잘 달리던 많은 사람들이(즉, 경기를 위하여 지정된 라인 안에서 열심히 또 재빠르게 뛰던 사람들이) 어떤 문제에 부딪쳐 계속 뛰지 못하거나 또는 길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2) 잘 달리다가 이제는 길에서 벗어났거나 또 길 가운데서 지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 그들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초신자들은 사탄이 그들의 장도(壯途)에 거치는 돌을 놓으리라는 것을 각오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가 그들을 코스에서 이탈하게 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동원할 것이란 점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정로에서 벗어날 위기에 직면해 있음을 발견한 때에는 언제든지 그들을 훼방하고 있는 것이 진리를 순종치 못하게 되는 결과가 초래되며 따라서 그들이 신앙 안에서 행한 모든 공을 상실한 위험에 직면하게 되는 것임을 말한다. 

그는 자기가 그들에게 전하였고, 또 그들이 받아들이고 신앙 고백한 그 복음의 진리임을 확증한다. 

복음 안에서만이 의인과 구원의 참된 길은 발견될 것이며, 또 복음의 유익을 그들이 얻을 수 있기 위하여서는 그들이 복음에 순종하고 굳굳하게 그것을 따르며 복음의 지시에 따라 계속 그들의 생을 지배받고 소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복음에서 이탈하고자 한다면 그들은 가장 연약하고 어리석은 자가 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① 진리는 믿어져야 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복종해야 하며 우리가 진리의 빛 안에 거해야 할 뿐만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고 그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② 진리에 바르게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확고하게 계속 진리를 따르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③ 진리를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하듯이 진리에 복종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기독교 신앙 가운데서 잘 달리다가 계속 견디지를 못하고 걸려 넘어지는 자들은 매우 어리석은 자들인 것이다.

Ⅴ.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들을 복음으로부터 이끌어 내려는 해로운 설득에서 벗어나 복음에 대한 믿음과 자유 안에 굳건히 거하라고 권한다(8절). 

그러므로 그는 "그 권면이 너희들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도가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권면은 물론 그들이 할례를 받아야 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하며 모든 의롭다함을 얻기 위하여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다 율법의 행위가 결합되어져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권면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유대적 경향을 띤 교사들이 그들에게 강요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한 그들이 쉽사리 넘어가고 있는 권면이었다. 

그들이 이러한 권면이 그들을 부르신 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을 말한다. 즉 하나님이나 또는 사도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을 말한다. 

사실 이 복음은 하나님의 권위에 의하여 그들에게 전파되었고 복음의 교제안으로 그들이 불리움을 받았을 것이며 또 사도는 그들을 복음에도 부른 도구로써 부름받은 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권면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권면은 하나님이 세우신 의인과 구원의 길과는 정 반대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권면은 그들이 바울 자신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누가 뭐라 하더라고 그는 내내 할례를 반대하여 왔고 할례를 강요하는 설교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평화를 목적으로 하여 할례를 용인한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는 결코 할례를 기독교인들에게 강요하지 않았고 더구나 구원받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 일은 없었다. 

그 권면이 그들을 부르신 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그들에게 그러한 가르침이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 판단해 보기를 권하고 또한 그것이 사탄과 그의 도구들에게서 나온 것임을 충분히 암시한다. 

사탄과 그의 동료들은 이러한 수단을 써서 그들의 신앙을 무너뜨리고 복음의 진보를 꺾고 결국 갈라디아 교인들로 복음을 거절한 이유를 들어 그들을 돌아서게 하며 그들이 전에 받아들였던 진리 안에 견고히 설 수 없도록 하는 데 애를 썼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기독교인들 가운데 역사하는 신앙의 다른 권면을 바르게 판단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부르신 그분에게서 나왔는가 하는 점과 그들이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권위에 근거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관심을 갖고 물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2. 만약 조사를 하여 그들이 이러한 근거에서 출발하지 않은 것이 나타나면 누가 그들의 권면을 들으라고 우리에게 강요한다고 해도 결코 그들에게 굴복하지 말고 그들을 거절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Ⅵ. 이 주장의 파급으로 야기되는 나쁜 결과 및 다른 사람들에게 끼치는 나쁜 감화력, 

사도는 그들이 거짓 교사들과 마음이 맞아서 그들이 강요하고 있는 교훈에 말려들고 있음에 대하여 그 불가성을 계속 논증한다. 

사실 그들의 잘못은 바울이 생각하는 것처럼 심각하지 않다고 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자기들을 이러한 교훈과 행실에도 이끌고자 하는 거짓 교사들이 그들 가운데 몇 사람 되지 아니하며 그들이 이들 교사들에게 동조하는 것은 사소한 문제들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은 그들이 할례에 응하고 유대 율법의 몇몇 의식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기독교를 배척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또 유대교로 넘어가는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또는 그가 이 서신에서 표현하고 있듯이 그들의 거짓 교사들에 대한 추종이 큰 잘못은 안 된다고도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들 가운데 거짓 교사들이 몇 명 안 되므로, 따라서 그 일에 연루(連累)된 사람이 많으리라고 그가 생각할 이유는 없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가면을 벗겨 버리고 그들이 인식하는 것보다 더 많은 위험이 있음을 그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그는 "적은 누룩이 온 덩이 퍼진다"(9절)고 말한다. 

기독교 전체가 이러한 한 가지의 잘못된 원리에 의하여 오염되어 부패될 수 있다는 것과 모든 기독교인 공동체가 이러한 가르침을 베푸는 한 사람에 의하여 오염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러한 단순한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걸려들지 말아야 할 것과 또는 만일 어느 누가 이러한 가르침에 걸려 넘어진 자가 있으면 적절한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그들 가운데서 이 오염을 제거해야 할 것을 말한다. 

기독교회에 파괴적인 영향을 끼칠 과오를 용납하는 사람들을 격려하거나 또 자신들이 이러한 과오를 퍼뜨리는 데 참여하는 자들은 교리에 위험스러운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본문의 경우가 바로 그러한 경우였다. 거짓 교사들이 부지런히 퍼뜨리려 하고 또 이들 교회의 몇 사람이 거기에 동조하고 있는 그 교훈은 사도가 앞에서 보인 바와 같이 기독교 자체를 전복시킬 수 있는 그러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의 수효가 비록 적을지라도 이러한 움직임이 품고 있는 치명적 영향과 인간 본성을 타락시키는 힘을 생각하여서 또 이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감염될 위험이 너무나 높기 때문에 그는 그들의 문제를 가볍게 또한 무관심하게 넘겨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는" 것을 저희에게 상기시킨다. 

만약 이들을 제 멋대로 버려두면 오염이 더욱 퍼져 많은 사람들이 곧 오염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만약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번 사례를 묵인한다면 그것은 복음의 진리와 자유를 완전 파괴시킬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었다.

Ⅶ. 그는 자기가 말한 것에 대한 그들의 존경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하여 그가 그들에 관하여 갖고 있는 소망을 표현한다(10절). 

그러므로 그는 본문에서 "나는 너희가 다른 아무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고 말한다. 

그는 그들에 관하여 여러 가지 염려와 의심을 품고 있었지만(이것이 그가 그들에게 분명한 입장을 자유로이 밝힌 이유였다) 하나님의 축복을 통하여 그가 쓴 내용에 관하여 그들도 같은 마음으로 동조하여 그가 그들에게 전한 복음의 진리와 자유를 인정하고 거기에 거부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로 확신에 거하게 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본문을 통하여 그는 대단히 우려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사람들에게도 최대 희망을 품어야 할 것을 가르쳐 준다. 

그들의 믿음의 불확고성에 대한 그의 책망에 그들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보다 거짓 교사들에게 더욱 비난의 화살을 겨누었다. 

이 사실은 그가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고 한 말을 통하여도 엿보게 된다. 

그는 (1:7 에서 말하였 듯이) 그들은 요란케 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는 자들이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앞장 서서 부지런을 떨며 그들 가운데 소요를 일으키는 주 원인이 되고 있는 특정 인물들을 지적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었다.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의 변절이나 꾸준치 못함보다 거짓 교사들의 이러한 결점에 대하여 비난한다. 

이 사실로 배워야 할 것은 우리에가 죄와 과오를 책망할 때는 주모자와 선동을 당한 자를 구분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같이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책망하면서도 그들이 돌아 올 수 있도록 더욱 잘 설득할 수 있기 위하여,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자유롭게 하신 그 자유에 그들이 굳건히 설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잘못을 대단히 이해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그들을 선동한 자는 그가 한 명이든 여러 명이든 또한 그들이 누구이든지 간에 "심판을 받으리라"는 것을 선언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저희의 행위에 따라 응분의 처벌을 주실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원수 노릇를 하고 있는 그들을 향한 응분의 분노를 발하여 "그들은 출교시킬 것"까지 생각하였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와 그에 의한 온갖 소망에서 그들을 제외시킨다는 말은 아니고 교회의 경고를 통하여 그들을 교회에서 쫓아 버릴 것을 바랐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은 복음의 순수성을 침식시키는 이들 교사들에 대한 경고가 될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복음에 대한 믿음을 저해하고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평화를 동요시키는 자들은 그들이 사역자이든 혹 다른 누구든지 불문하고 기독교 공동체와 사귐을 나누는 특권을 발탁하고 마땅히 교회에서 제거해야 한다.

Ⅷ. 그들의 유대교의 경향을 띤 교사들의 말을 듣는 데서 이들 갈라디아 교인들은 돌이키도록 설득하기 위하여, 또한 이들 교사들이 그들에게 심어놓은 나쁜 영향에서부터 그들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그는 이들 교사들을 자기들의 계획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매우 비열하고 불순한 방법을 사용한 자들로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자기들의  미혹을 드러내고 있다. 

그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자기들의 목적을 쉽게 관철시키기 위하여 바울 자신을 비난하는 일까지 서슴없이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시도한 것은 갈라디아 교인들로 할례에 응하게 하며 또 기독교에다가 유대교를 혼합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목적을 더 잘 성취시키기 위하여 그들은 바울 자신도 할례를 전하는 자라고 말하였다. 

이 사실은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11절)이라고 한 말을 보아서도 그들이 그들 할례를 가르친 자로 선전하였음이 명백히 나타난다. 

그들은 이 거짓 증거로써 갈라디아인들을 설득하여 할례를 받게 하려고 하였다. 

아마도 그들이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바울이 디모데를 할례받도록 한 사실을 근거로 하여서였던 것같이 보인다(행 16:3). 

그러나 그는 그 때의 경우에는 선의에 의하여 할례를 용인하였지만 그가 할례를 전하는 자였고 또 그들이 이 사실을 근거로 하여 할례를 강조한다는 사실은 전적으로 부인한다. 

그는 그들의 자기에 대한 책임 전가의 부당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만일 갈라디아 교인들이 차분히 생각해 본다면 스스로 바울의 입장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1. 만일 그가 할례를 전하였다면 박해를 면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본문에서 내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라고 말한다. 

그가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고 박해를 받았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었다. 

만일 그가 그들을 할례를 전하는 자로 또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구원에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자들로 규정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그를 박해하고 반대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들이 노리고 있던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즉 만일 그가 그들의 수중에 이미 들어가 있었다면 그는 그들의 분노의 대상이 되기를 커녕 그들의 환영을 받았을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그들에게 박해를 받았다는 것은 그가 그들과 동조하지 않았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가 되었다. 

그는 이로써 자기가 비난을 받고 있는 교의를 전하기 보다는 아무리 큰 고난이라도 기꺼이 감수하려고 하였다.

2. 만일 그가 유대인들에게 굴복하였다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가 저희에게 굴복하였다면 그들이 지금 하는 것처럼 기독교의 가르침에 반하고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바울이나 그의 사람들도 지금처럼 고난을 받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는 우리에게(고전 1:23)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는 (또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 유대인들에게는 거침돌이 되었음을 알려 준다. 

그들이 할례와 모든 율법의 제도를 그대로 도입하려고 한 것은 바로 이 십자가의 도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십자가의 도에 대하여 극단적인 분노를 터뜨렸고 솔선하여 그리스도의 도에 대한 신앙 고백자들을 반대하고 핍박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제 만일 바울과 그와 입장을 같이 하는 자들의 할례는 아직도 보존되어야 하며 모세의 율법 준행이 구원에 필요한 조건으로 기독교 신앙에 도입되어야 한다는 저들의 견해를 따랐다면 십자가의 도에 대한 저희의 분노가 상당히 경감되었을 것이요 그들이 그 때문에 지금 받고 있는 고난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비록 다른 사람들과 특별히 그를 할례의 교리를 전하는 자라고 나서서 중상하는 자들이 쉽사리 이러한 움직임에 편승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는 진리를 부패케 하고 복음의 자유를 포기하기 보다는 안일과 다른 사람들과의 우호적 관계 또는 생명까지라도 포기하고자 하였다. 

이 까닭에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기독교에 대하여 적의를 나타내는 것이며 또한 그를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자라고 비난하였던 것이다. 

이같이 사도는 그의 적들이 그에게 덮어 씌운 부당한 비난을 규명한 동시에 그를 이렇게 부당한 방법으로 대우하는 자들을 그가 얼마나 경멸하는가 하는 점과 어떤 이유 때문에 심지어 그들이 제거되기까지 소망하였는가를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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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 생활의 실천에 대한 강조(갈 5:13-26)

본장의 후반부에서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 거짓 교사들의 함정을 피하는 가장 좋은 자구책으로 진지한 경건 생활을 실천할 것을 권고한다. 

특별히 두 가지 사실을 그들에게 말한다.

Ⅰ. 서로 다투지 말고 살아할 것을 권고한다. 

그는 그들에게(13절) "그들이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자유롭게 하신" 그 자유에 그들을 굳건히 서게 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음을 말한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이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 것" 즉 그들이 부패한 것에 대한 애착을 갖거나 그러한 행위에 탐닉하지 말 것과 특별히 이러한 일들을 멀리하고 가까이 하지 말며 이러한 일들로 그들 가운데 분쟁과 다툼의 근거가 되게 하지 않도록 할 것을 당부한다.

서로 애정을 간직하여 그들 가운데 다소의 견해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서로 존경과 친절을 베푸는 데 주저하지 말 것을 부탁한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자들이 마땅히 지녀야 하는 덕성인 것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즐기는 자유는 방종을 위한 자유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원하셨지만 그렇다고 그가 율법에 대한 책임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신 것은 아니다. 

복음은 "경건에 관한 교훈"으로(딤전 6:3) 복음이 죄를 조금이라도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피하고 정복할 강한 의무에도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라 하겠다.

2. 우리가 기독교인이 자유 안에 굳게 서야 하겠지만 그 자유를 근거 삼아 기독교인이 베풀어야 할 자애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자유를 동료 기독교인들이 우리와 다른 마음을 가졌다고 해서 그들과 다투는 근거로 삼아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오직 서로 온후하게 대하며 사랑으로 서로 섬길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득한다. 그가 이 목적을 위하여 그들에게 제시한 두 가지 생각해야 할 점들이 있다.

(1)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다"(14절)는 사실이다. 

사랑은 모든 율법의 핵심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첫번째 의무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두번째 의무인 것이다. 

사도는 본문에서 후자의 것을 언급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의 상호 관계를 말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 말씀을 그들을 서로 사랑하도록 설득하는 근거로 사용한 것은 이것이 그들의 신앙의 신실성을 나타내 주는 좋은 증거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으며 또 그들 가운데 존재하는 분쟁과 분열을 뿌리 뽑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이 나타날 것이다(요 13:15). 

그리고 자제할 수 있다면, 기독교인들 가운데 있는 불행한 불일치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지 않도록 저지하는 작용은 한 것이다.

(2) 서로 다루는 것은 슬프고도 위험스러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15절). 

그러므로 그는 본문에서 "만일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대신에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고 한다. 

만일 그들이 인간답게 또한 기독교인답게 행동하는 대신에 사나운 짐승들처럼 서로를 찢으려고 덤빈다면 아무 유익함도 없을 것이고 하나씩 멸망하게 되고 말 것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서로 분쟁하고 다투는 데 열심을 내지 말아야 할 절대적인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형제들간의 다툼이 계속되면 공동의 멸망밖에 낳을 것이 없음을 기억하자. 서로 먹으려고 하는 자들이 하나씩 사라져 버린다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기독교 교회는 결국 그들의 자신 손에 의하여 파괴될 수밖에 없게 된다. 

즉 서로 돕고 같이 기쁨을 나누어야 할 기독교인들끼리 짐승들처럼 서로 물면서 잡아먹고자 한다면 결국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 베풀 것을 보류하시고 사랑의 성령도 그들을 버려둘 것이며 그들을 버려둘 것이며 파괴시키기를 구하는 악령이 득세할밖에 그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Ⅱ. 그들이 전적으로 죄에 대항하여 싸울 것을 강조한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다른 모든 다툼을 그치고 그 대신 죄를 대항하여 싸우는 데 전념을 다한다면 교회를 위하여 큰 축복이 될 것이다. 

그들간의 견해 차이 때문에 서로 물고 먹으려 하는 대신에 자기 자신에게서와 자신의 삶의 주변에서 죄를 추방하기 위하여 전념을 기울인다면 교회에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는가? 

죄야말로 우리가 주로 관심을 갖고 싸워야 할 대상이며 죄에 반대하고 죄를 정복하는 것을 그 무엇보다 우리의 본분으로 죄에 반대하고 죄를 정복하는 것을 무엇보다 우리의 본분으로 삼아야 한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자극을 주고 도움을 주기 위하여 사도는 다음 사실을 보여 준다.

1. 각자의 내부에는 육과 영 사이의 투쟁의 존재한다는 사실이다(17절). 

그러므로 본문에서 그는 "육체(우리의 부패하고 육적인 부분을 이르는 말이다)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린다"고 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의 모든 역사를 반대하고 영적인 모든 것에 대하여 항거한다. 

반대로 "성령(우리의 내부의 다시 새로워진 부분)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린다"고 한다. 

또한 성령의 소욕은 육체의 의지와 소욕을 반대한다. 

이렇게 상반되는 세력의 다툼으로 "우리는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 안에 있는 은혜의 본질이 타락된 옛본성이 우리를 이끌어 가려고 하는 모든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것처럼, 또한 부패하고 육적인 본질로부터의 도전에 의하여 우리가 하기를 원하는 모든 선을 행할 수도 없게 한다. 

자연인에게도 일종의 이러한 투쟁이 있다.

(그의 양심의 소리와 마음의 부패된 성품이 서로 투쟁한다. 그의 양심의 소리는 자신의 악성을 정복하려고 하며 또 그의 악성은 양심의 소리를 침묵을 시키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일종의 선한 본질이 형성된, 다시 새로워진 사람에게도 옛 성품과 새 성품 사이에 투쟁이 있고 잔존한 죄의 세력과 시작된 은혜 사이에 투쟁이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이 양자의 작용이 끊임없이 존재할 것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2. 이 투쟁에서 우리가 보다 나은 편에 속하는 것 또한 우리의 악성에 반대하고 믿음에 거하며 욕망을 버리고 은혜 안에 거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요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는 사실이다. 사도는 이것을 우리의 의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승리 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을 제시해 준다. 

우리가 이 나은 길을 보다 효율적으로 따라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그는 한 가지 원칙을 우리에게 제안한다. 

즉 그것은 지체 없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악성의 기선을 제압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그것은 곧 성령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16절)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영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다.

(역주: 한글 개역에는 성령으로 되어있으나 K.J.V에는 영으로 되어 있음). 

본문에 영이란 성령자신을 말하는 것으로 그는 강림하셔서 그가 새롭게 하고 거룩하게 한 자들의 심령속에 거하시며 그들이 의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남아서 선을 거스림으로 은혜로운 본질을 백성들의 마음에 심어 이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육체에 항거하게 하신다.

따라서 본문에서 우리에게 요구된 의무는 복되신 성령의 인도와 지배 아래 스스로 거하는 일이며 우리 안에 생성된 새로운 성품의 지시에 순응하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의무 준수가 우리 생활의 일생 과정을 통하여 그리고 생의 여로에서 주의깊게 이루어진다면 비록 우리가 우리의 부패한 본성의 거스림에서 완전히 자유로와지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욕망에서 비롯되는 악의 성품에 사로잡히는 데서 보호될 것을 신뢰해도 좋을 것이다. 

또한 영적인 일들에 관하여 많은 담화를 나누며 영혼의 일들을 마음에 두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영적인 부분으로 육욕이 자리잡은 몸의 다른 부분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다. 

또한 우리 자신을 말씀의 인도하심에 맡겨야 한다. 

말씀을 통하여 성령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며 우리가 의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그의 도움과 영향에 의존하도록 하신다. 

그리고 이것이 육의 욕망을 이루는 데서 그들을 보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되는 것처럼 동시에 그들이 참된 기독교인이라는 훌륭한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는(18절) "너희가 만일 성령이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그는 "너희가 세상에 있는 동안은 육과 영 사이의 투쟁을 각오해야만 한다. 영이 육체를 거스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육은 성령을 거슬려 투쟁할 것이다"라고 말하였었고 그리고 여기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성령이 너희 생의 과정 속에서 우위에 서시게 되면, 또한 만일 너희가 성령이 너희 가운데 심어 놓으신 영적 성품과 기질의 인도와 다스림을 받는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 원리로 삼고 하나님의 은혜를 너희 본질로 삼는다면 비록 너희가 아직 율법의 명령과 위력 아래 있기는 하지만 너희가 율법 아래 곧 율법의 명령과 위력 아래 있기는 하지만 너희가 율법 아래 곧 율법의 저주 아래 있지 아니하다는 것이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들의 육체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요 성령을 따라 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고 말씀한다.

3. 사도는 육체의 일들을 분류한다. 

육체의 일을 우리는 경계해야한 하고 또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들을 소중히 여기어 열매를 맺어야 한다(19절 이하). 

그는 이 두가지를 세목까지 자세히 분류함으로 바울은 나아가 자신이 어떠한 자이냐 하는 점을 그들에게 인식시키려 한다.

(1) 그는 "육체의 일"부터 시작한다. 

그것들은 그 수도 많은 동시에 분명한 것이다. 그가 본문에서 말한 것들이 육체의 일들이며 부패하고 타락된 성품의 소산이라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육체의 일들의 대부분은 본질 자체로부터 비치는 빛에 의하여 또한 성서의 빛에 의하여 죄로 규정된 것들이다. 그가 분류한 세목은 대단히 다양한 것이었다. 

어떤 것들은 제 7계명에 거스리는 죄들인데 그것들은 "음행, 간음, 더러운 것, 호색"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죄들을 행동에 옮겼을 경우뿐만 아니라 범죄를 실행할 동기가 될 수 있는 그런 생각, 말, 행동[언행심사]도 포함되는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우상 숭배와 술수" 같이 제 2계명에 거스리는 죄들이다. 

또 어떤 죄들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으로써 이웃에 대한 죄 또는 형제애라는 철칙에 위배되는 죄들이다. 

이 죄가 동기가 되어 "분리함과 이단과 시기"가 유발되며 때로는 "살인"으로도 파급된다. 

즉 우리의 동료들의 이름이나 명성을 손상시킬 뿐만 아니라 그 생명 자체까지 해치는 죄를 낳는다. 

또 다른 죄들은 "술취함과 방탕"같이 자신을 거스리는 죄들이다. 

그리고 그는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결론을 내림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육체의 일들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주의할 것을 경고한다. 

그리고 그들이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 볼 것을 소망하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이러한 일을 행하는 자들에 대하여서는 전에 내가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들이 아무리 헛된 소망으로 자신을 속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육체의 일들을 인간으로 하여금 하늘 나라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죄들임이 자명하다. 

영들의 세계는 육체의 탐욕에 젖어 있었던 자들에게는 결코 위로가 되지 못한다. 

또한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먼저 "주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는 한"(고전 6:11)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시지도 않으며 또한 그의 앞에 오게 하시지도 않는다.

(2) 그는 성령의 열매들 또는 거듭난 성품의 열매들에 대하여 분류한다. 

이것들은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맺기 위하여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들이다(22,23절). 

본문에서 우리는 육체 또는 악한 성품이 인간들에게 죄를 행하게 하는 동기가 되고 자극제가 되기 때문에 죄를 "육체의 일들"이라고 칭하였었다. 

마찬가지로 은혜[=하나님이 자기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온통 주심]는 뿌리가 있으므로 열매가 달리는 것처럼 오로지 성령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은혜를 "성령의 열매"라고 하였다

사도는 앞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해로운 일을 하게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서로 해를 끼치게 하는 육체의 일들에 관하여 주로 분류하였었고, 여기서는 기독교인들 자신의 마음에 평안을 주고 서로 타인을 용납하게 하는 성령의 열매들에 관하여 언급한다. 

이 말씀은 그가 전에 주었던 경고나 교훈(13절), 즉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말씀에 상합하는 말씀이다. 

그는 특별히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서로 사랑할 것을 권고한다. 

또한 "희락"을 말하고 있다.

이는 친구와의 담화를 나눌 때 [성령안의 기쁨으로 기대하고 축복하며 이해하고 알아주며 영접하여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태도]를 말한다.

그는 하나님과 "화평"하고 또 우리의 마음에 화평을 간직할 것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마음이나 행동이 평화롭기를 권고한다. 

또 그는 "오래 참음"을 권고하는데 이는 분내기를 더디하는 인내와 남의 가해에 대하여 너그러이 참아주는 태도를 가지는 것을 말한다. 

또한 "자비"를 권고하는데 이는 부드럽게, 곧 남의 잘못에 대해 함부로 정죄함 없이 너그러이 열린 마음으로 [유익하도록] 대하며, 항상 상냥하고 예의바르게 배려하고, 존중하며 대하는 성품을 가리키는 말인데, 특히 그는 우리가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에 대하여 상냥하고 예의있게 대한 것과 어느 누가 우리에게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너그러이 대하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였다. 

다음 그는 "양선"(친절과 덕행을 뜻함)을 권고한다. 이 말은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라(생명말씀을 공급하며 힘써 얻은 것을 필요대로 서로 나누라)는 말이다. 

다음에 그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약속하거나 고백하는데, 있어서 "신실한 것"(충성) 곧 변함없고 정의로우며 정직할 것을 권고하며, "온유"할 것을 권고한다. 즉 온유함으로 우리의 혈기와 원한을 다스림으로 쉽게 격노하지 말 것과 설사 화가 나 있을 때에도 곧 마음에 평정을 회복하기를 권고한다. 

마직막으로 그는 "절제"를 권한다. 즉 먹고 마시는 것에 있어서 또한 생활의 다른 즐김에 있어서 지나치지 말고 분수를(균형과 조화의 합당함) 지킬 것을 권한다. 

이러한 일들을 금지하거나 또는 성령의 열매들이 발견되는 이러한 사람들을 정죄하고 처벌할 그러한 법은 없다고 사도는 말한다. 

이로써 그들이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아래 있는 것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인간의 내부에 작용하는 성령의 열매들을 18절의 말씀처럼 그들이 "성령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며 따라서 그들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함"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육체의 일들과 성령의 열매들을 분류함으로 우리에게 피하고 반대할 것과 또 귀하게 여기고 촉진시킬 것을 지시함과 동시에 사도는(24절) 이것이야말로 모든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진지하게 노력하고 보살펴야 할 것임을 제보한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외양이나 고백으로써 뿐만 아니라 신실함과 진실됨에 있어서도 참 기독교인인 사람들)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라"고 말씀한다. 

그들이 세례를 받음으로 이러한 책임이 그들에게 주어졌고(왜냐하면 그들이 그리스도로 세례를 받으므로 그의 죽음과 함께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롬 6:3) 

동시에 그가 우리의 죄를 인하여 죽으셨듯이 신실하게 이 일을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이며 그들의 주님과 일치하여 죄에 대하여서는 죽어지내기 위하여 애를 써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아직 죄에 대하여서는 완전히 승리를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들은 자기 안에 성령도 거하실 뿐만 아니라 육체도 지니고 있다. 아직도 그들에게 적지 않은 장애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죄가 그들의 죽을 몸에서 왕노릇하지 못하게 되어 몸의 사욕을 순종치 않게 되었듯이"(롬 6:12) 이제 그들은 죄의 완전한 파괴를 구해야 하며 죄를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여겨야 하셨던 것이다. 

만일 우리가 자신을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인정한다면 또 그와 연합되어 있고 또 그에게 관심이 있음을 시인한다면 육체를 그것의 타락한 열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우리의 계속적인 관심사로 여겨야 한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죄의 종으로 복종시키는 자들을 결코 자기의 사람들로 인정하시지 않는다. 

사도가 본문에서는 참된 기독교인들을 보살피고, 그 특성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언급만 하였지만 이 말에는 반면에 그가 전에 분류하였던 성령의 열매로 우리가 보일 수 있어야 할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의 의무일 뿐만 아니라 신앙에 대한 우리의 신실성을 보여 주는 데 적지않게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악을 행하는 것을 멈추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선을 행하는 것까지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의 기독교는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죽을 뿐만 아니라 의에 대하여 살 책임도 부여한다. 

육체의 일들을 거절한 뿐만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을 것도 요구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참으로 속하였음을 나타내려고 한다면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을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의 지대한 관심사로 여겨야 할 것이다. 

본래 사도의 의도는 전자를 피하고 후자를 힘쓰는 것을 우리의 의무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독교인으로서의 우리의 특성을 유지하는데 의무가 필요한 것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말씀 속에서(25절) 한 마디로 집약된다. 즉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해야 한다"는 말씀에 집약된다. 

다른 말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다고 고백한다면 또는 우리의 마음 속의 영이 새롭게 되었고 영적 생활의 원리로 덧입힘을 받았다고 고백한다면 우리의 삶 속에 성령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므로 그것을 나타내야 할 것이다"는 말씀이다. 

그는 전에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모든 사람들에게 수여되는 특권이라고 말하였다(4:6). 이제 그는 말한다. 

"우리가 그의 자녀에게 속한 자로 고백한다면 또 그러한 특권을 획득한 자로 고백한다면 그러한 고백과 일치하는 성품과 행동을 통하여 그것을 보이도록 하자."  

우리의 대화는 언제나 우리가 인도를 받고 지배를 받고 있는 그 원리에 부응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롬 8:5).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의 영에 동참한 자임을 보이고자 한다면 "육을 따라 살지 말고 성령을 따라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육체의 일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사는 데 있어서 진지함을 보여야만 한다.

4. 사도는 본장을 교만과 시기에 대하여 경고를 함으로 결론을 맺는다(26절). 

그는 전에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라"고 훈계하였었다(13절). 

그리고 이 일 대신에 "서로 물고 먹으면" 그 결과가 어떠할 것도 그들에게 상기시키셨다(15절). 

이제 사도는 그들을 성령의 열매는 맺게 하고 육체의 일은 금하도록 하기 위하여 헛된 영광을 사모하는 것과 또는 사람들의 칭찬과 박수 갈채를 부당하게 사랑하는 것을 하지 말도록 [허영과 시기를 절대적으로 경계하고 성령으로 물리치라!!]그들에게 경고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을 구하다 보면 틀림 없이 서로가 서로를 격동시키게 될 것이고 서로 시기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허영과 시기가 기독교인들 가운데 우세하게 역사하는 이상 그들은 자기들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무시하고 경멸해 버리게 될 것이고 또 그들이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자들이 자기들을 존경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할 것이요, 그리고 어떤 사람 때문에 자기들의 명예가 손상될 경우가 생길 때 그들을 질투하게 되고 말 것이다. 바로 허영과 시기가 모든 분쟁과 다툼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이로써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마땅히 서로 유지해야 할 사랑과는 일치하지 않게 생활하게 되며 따라서 그들은 기독교 신앙 자체의 명예와 이익에 대단한 손실을 끼치게 된다. 

그러므로 사도는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이 일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자 한 것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사람들로부터 오는 영광은 헛된 영광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소망스러운 것이기는 커녕 우리를 죽게 하는 것이다.

(2) 인간들의 찬조와 칭찬에 대한 부적절한 맹종은 현재 기독교인들 가운데 존재하는 불행스러운 분쟁과 다툼의 큰 요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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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다 love.....ajgapavw(25, 아가파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일반 헬라어는 영어와는 달리 '사랑하다'를 의미하는 단어가 여러 종류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들은 필레오(filevw, 5368), 스테르고(stevrgw), 에라오(ejravw), 아가파오(ajgapavw, 25) 등이다.

(a)  동사 필레오(filevw, 5368)는 사랑과 애정의 표현에 가장 널리 사용되는 단어이다. 이 단어의 여러 파생어를 보면 이를 명백히 알 수 있다. 

이 단어는 관심, 돌봄, 환대, 사물에 대한 애착 등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 필레오(filevw, 5368)을 보라.

(b)  동사 스테르고(stevrgw)는 드물게 나타나며, '사랑하다, 애정을 느끼다' 등을 의미하며, 특히 부모와 자식 간의 쌍방의 사랑을 나타내는데 자주 사용되었다.

스테르고는 또한, 통치자에 대한 국민의 사랑, 인간에 대한 수호신의 사랑, 주인에 대한 개들(dogs)의 사랑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남편과 아내의 사랑을 나타내는데는 별로 사용되지 않았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합성어 아스토르고스(a[storgo", 794, 롬 1:31; 딤후 3:3)와 필로스토르고스(filovstorgo", 5387, 롬 12:10)가 나타날 뿐이다.

(c)  동사 에라오(ejravw)와 명사 에로스(e[rw")는 신비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에라오는 '정열적으로 사랑하다, 욕구하다, 그리워 하다'를 의미한다. 에로스는 '정열적인 사랑'이란 의미를 지닌다.

에로스적인 사랑은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것)을 원하거나 갈망하거나 사랑하는 정열적인 사랑이다. 이 사랑은 남·여의 사랑, 또는 어떤 대상에 대한 갈망, 열망, 욕구를 나타낸다. 특별히 관능적이고 선정적인 양상을 띤다.

① 모든 시대에서 헬라인들은 육감(관능)적으로 즐거워하는, 하급 신(神), 곧 광란적인 에로스를 열렬히 찬양하는  것이다. 

그들이 찬양하는 에로스 신(god)은 모든 것을 강제하지만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강요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헬라인이 에로스에서 추구하는 것은 도취(intoxicaion)와 황홀이며, 이것은 그에게는 신앙(종교 religion)이다. 

그에게 있어서 반응은 하늘의 능력들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Soph, Ant 683이하). 그것은 인간성의 성취이다.

그렇지만 그 반응은 무아경적인 흥분(광란)으로 나타난다(한편 때때로 증오와 더불어 나타나기도 한다). 

오로지 반응에 목적을 두고 완전히 감각 또는 감정적으로 몹시 흥분하는 에로스는 모든 인도적 인간성의 표준과 형태를 파괴한다. 

관능적 환락(sensual ecstasy)은 중용(moderation)과 균형(proportion, 조화, 바른 관계 등)을 저 멀리 내버려두고 돌보지 않는다.

헬라의 비극작가들은(Soph, Ant. 781이하) 환락(ecstasy, 황홀)에 점점 빠지게하여 이성과 의지와 판단력을 상실하게 하는 에로스(사랑의 신의 이름은 역시 에로스이다)의 불가항력적인 힘을 알고서, 그것을 광신만큼 무서운 것으로 평가했다.

그것은 하나의 신(a god)이며 신들보다 능한 것이다(Eur. Fr., 132, Nauck). 하늘과 땅의 모든 힘은 에로스의 한 최고의 힘과 비교하면 제 2급의 힘들이다. 

그것의 전제적인 힘에 사로잡힌 자들에게는 어떠한 선택도, 의지도, 자유도 무시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에 지배를 받는데서 최고의 희열(행복)을 얻는다. 우리는 여기서 에로스의 어떤 신비한 힘을 찾아볼 수 있다.

② 이러한 에로스는 신비 종교들에서 더욱 무서운 것으로 나타났다. 

이 관능적인 도취의 데모니즘(demonism)이 종교적 광신과 함께 행해지는 곳에는 반대로 신앙(religion) 자체가 이 황홀경(ecstasy)에서 경험의 최고점(절정)을 추구한다.

창조적 에로스는 다산을 기원하는 풍요제 의식들의 중심이며, 매춘(prostitution)은 큰 여신들의 신전에서 유행했다. 때때로 동양권에서 행해졌다. 그래서 색정적인 그림과 상징들이 많이 사용되었다. 신화에서 이야기한 신들과 사람들간의 성적 결합은 이러한 예찬(cultus)에서 그 현실적 실현에 도달했다. 이런 신전 혼인에서 그 신자들은 신들의 세계와 육체적인 결합을 경험한다. 신앙과 황홀은 종교적으로 변질된 에로티시즘(eroticism=호색)에서 함께 만나 결합한다. 이런 현상은 한국의 신비종파나 사이비종파에서 찾아볼 수 있다.

③ 헬라인들은 에로스를 더 신비적으로 이해했는데 그것에 의해 그들은 보통 사람이 지니는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 완전에 이르고자 노력했다.

헬라인들이 에로스에서 추구하는 도취는 필연적으로 관능적인 것이 아니다. 이미 헬라의 비전(mysteries)에서 때때로 신비주의에서 그렇게 한 것처럼 에로틱(erotic)의 개념들은 많은 방법으로 육감이나 관능 이상과의 만남에 대한 상징으로 영화된 것이다.

플라톤에 있어서 에로스는 생의 최대의 성취와 향상의 전형(epitome)였다. 그에게 있어서 에로스는 이성의 작용(합리성)을 넘어 사람을 기뻐 날뛰게 하는 황홀이며, 자연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원천이며, 최종적으로 창조적 영감을 산출하는 것이다. 에로스를 타오르게 하는 육체적 아름다움은 모든 사랑하는 것에서 의도하고 찾는 선한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지표이며, 영원한 존재와 진정한 선을 가리키는 지표이다(Symp, 2,100이하). 그에게 있어서 에로스란 의와 감정 억제와 지혜의 습득을 위한 분투,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선의 구현이자, 불멸을 얻을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Symp. 200, 206; Phaedr. 237ff, 242ff). 플라톤은 결정적으로 에로스를 모든 육감(관능)적인 것보다 높인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이와 유사하게 에로스를 단순한 경험적인 것에서부터 자유케 하여 발전시켰다.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질서와 운동을 유지시키는 원초적 원리인 견인력으로서의 우주적 기능이다. 따라서 내적으로 세계를 전체적으로 유지시키고 있는 이 사랑은 더 이상 도취와 아무 관계가 없다. 그것은 성격상 엄밀히 의지에서 나온 행동이다.

플로티누스(Plotinus)에게 있어서 진정한 에로스, 모든 사랑을 의미하는 것은 감각과 이성을 넘어 탁월함에 이르고, 모든 한계를 넘어 합치점에 이르는 영혼의 충동이다.

그 시대의 사회 생활에서 비밀 주신제(orgies)를 벌리는 에로스는 신들의 신화에 나오는 감정을 자극하거나 흥분시키는 체험들(사건)을 얻으려하고, 신전들에서 그러한 체험들에 이르게 한 것이다.

맥시무스(Maximus)는 인도적으로 발전시키었다. 플로티누스는 그것을 신비적으로 승화시키고 영화하여, 초자연적 지배자와 영적 결합을 하려는 신비적 열망으로 발전시키었다(Enneads).

초대교회의 시기에 그노시스(Gnosis)는 이런 접근법에 위치하여 자아 초월에 대한 인간 욕망이라는 특별한 경향을 나타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동일한 에로스, 인간 자신의 생활을 초월하는 것에 대한 자연적 충동이다. 여기서 에로틱한 종교의 원형은 관능적 도취이며, 최고 형태의 황홀이다.

에로스는 구약성경에서 잠 7:18("오라 우리가 아침까지 흡족하게 서로 사랑하며 사랑함으로 희락하자")과 잠 30:16("음부와 아이 배지 못하는 태), 이 두 곳에만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d)  그리고 아가파오와 아가페가 있다. 아가파오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충분히 설명한다.

2.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아가파오의 용법. 

동사 아가파오(ajgapavw, 25)에서 헬라인은 에로스의 이상한 힘이나 마력(magic)을 느끼지 못했으며, 필레오의 따뜻함이나 열정도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 어원은 불확실하며, 그 의미는 근거가 약하고 가변적이다.

(a)  때때로 아가파오는 "어떤 것으로 만족하다"란 의미를 지닐 뿐이다.

(b)  때때로 외적 태도에서 이 동사는 "환영하다, 인사하다, 경의를 표(존경)하다"를 의미하며,

(c)  내적 태도에서 "어떤 것을 구하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을 요구하다"를 의미한다.

(d)  이 동사는 때때로 동료 끼리의 호의, 우정을, 혹은 때때로 동정을 의미하는데 사용되었다.

아가파오의 특별한 성격을 몇몇 실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을(~보다) 좋아하다, 선택하다, 다른 것보다 위에 한가지 선이나 목적을 두다, 다른 사람보다 한 사람을 더욱 높이 평가하다, 존중하다"를 의미한다.

이렇게 아가파오는 하나님이 어떤 특별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애호)에 대해 사용될 수 있다. 드물긴 하지만 이 단어가 신의 총애를 받은 사람에 대해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Dio. Chrys., 33:21) 분명히 에라오(ejravw)와는 달리, 재물이나 재산을 얻고자 하는 인간 자신의 욕망이 아닌, 타인을 위한 관대한 행위를 뜻하는 말이라 하겠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아하는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특별한 선물과 재물로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

아가파오의 특성은 이 점에서 확실히 보이는 것이다. 에로스는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찾는 일반적인 세상적인 사랑이다. 아가파오는 분명히 그 대상을 선택하여 지키는 구별을 두는 사랑이다.

에로스는 그 대상에 대한 다소 불확정한 충동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아가파오는 그 주체에 의해 자유로이 결정된 결정적인 행동이다.

에로스는 그 최고의 의미로서, 인간의 위쪽으로 향하는 충동, 곧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에 대해 사용된다. 아가파오는 주로 하나님의 사랑, 보다 높은 자가 보다 낮은 자를 들어올리는, 보다 낮은 자를 다른 사람보다 위에 높이는 사랑이다.

에로스는 다른 것들에서 자신(의 생명)의 주림의 충족을 찾은 것이다. 아가파오는 때때로 "사랑을 베풀다"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주는 능동적 사랑이다.

이 동사는 무엇보다 형용사 아가페토스가 사용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아가페토스는 동사와 같은 의미의 뉴앙스를 지니고 있으며, 합당한 사물이나 친애하는 자에 대해 사용되며, 특히 부모의 온갖 사랑을 독차지하는 독자(only child)에 대해 사용되었다.

아가파오는 에라오이나 퓔레오과 교환적으로 사용되거나 결합될 때 그 의미나 개성이 여전히 유동적이며 애매하다. 이런 경우에 아가파오는 때때로 단순한 동의어로서 강조나 다양한 표현 때문에 다른 두 단어와 나란히 위치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플로티누스(Plotinus)에서 아가판은 자기를 (겸손히) 낮추는 사랑에 대해, 에란은 높이 올라가는 사랑에 대해 의식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호머로부터 플로티누스까지 에로스는 계속적으로 시인과 철학자들의 사색이나 연구의 주제가 되어온 반면에 아가파오는 거의 언제나 기본적인 토의 주제로도 나오지 않는다. 명사 아가페는 성경 외에서는 단 한번 여신 이시스(Isis)를 아가페라는 칭호로 부른 것이다.

우리가 살펴본 바 성경 헬라어 이전 문헌에서 아가파오의 특성을 알 수 있으며, 우리는 이 특성을 성경 헬라어 아가파오란 단어에서 찾아볼 수 있다.

3. 구약 및 70인역본의 용법. 

구약성경에서 사랑을 뜻하는 중요한 히브리어 동사는 아헵이며, 그 역어로서 아가파오가 주로 사용되었다. 이 동사에서 유래한 명사 아하바의 역어로는 아가페가 주로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 사랑은 그 사람을 강요하여 그가 좋게, 또는 올바르게 평가하거나 인정하는 사물이나 사람에게로 이끌어 가는 자발적인 힘이다. 사람은 이 사랑의 힘에 제어를 받아 자기 자신을 주거나 혹은 사랑의 원인이 되는 대상을 확고히 붙잡거나 혹은 즐거움을 주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사랑은 내적 인격에 심은 영혼의 불가해한 힘이다.

사람이 사랑의 대상을 올바로 인정하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한다(신 6:5). 사랑과 미움은 생의 양극이다(전 3:8; 전 9:6).

사랑은 인간 상호간의 사랑, 하나님의 인간과의 사랑, 사물에 대한 사랑 등을 나타낸다.

(a)  이 단어는 남녀의 사랑에 대해 사용되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하나님과 관계, 그리고 남녀의 성적 관계를 시사해 준다. 이 남녀의 사랑은 이성(sexes) 상호간의 생명력 넘치는 충동을 의미한다. 선지자 예레미야(렘 2:25)나 호세아(호 3:1; 호 4:18), 그리고 에스겔(겔 16:37)은 사랑의 성적(sexual) 측면을 매우 진하게 묘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히 성욕 및 성행위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단어는 남녀의 연애나 열애(창 29:18이하; 창 34:3; 삿 16:4), 합법적인 부부의 행복한 사랑(창 24:67; 삼상 1:5)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창조의 기사는 성의 구별과 부부간의 사랑이 생을 풍요하게 하는 은사임을 설득력있게 이해시켜 준다(창 2:18이하).

「그러나 이 사랑은 성적 사랑의 범위를 포함하지만 그것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헌신적 사랑과 생활의 충실함이 합쳐져 있다. 구약의 초기 기록에 의하면 이러한 사랑은 일부다처나 일처다부 사상과 부합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은 충실(참조: 창 20:13; 삿 14:16; 삿 16:4-5; 겔 16:8; 겔 23:17; 호 3:1), 상호의존(참조: 창 24:67), 책임(참조: 삼하 13:1, 4, 15)과 같은 인간 사랑의 다른 측면을 제외하고 성적인 것에 집중하는 위험을 이해시켜 준다(The interpertreter's D.B).」

더 나아가서 아가서는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라고 열정적인 사랑의 강력한 힘을 찬양까지 한다. 이 노래는 성적(남녀) 사랑의 기이함과 적극적인 힘을 찬양하지만 그 찬양에는 그 사랑이 근거를 두고 있는 상호의존과 신앙심(헌신)을 강조하고 있다(참조: 아 2:16; 3:1-8; 7:10; 8:6-7). 아가서에서 사랑을 묘사할 때 거의 대부분 아헤브(아가파오)와 아하바(아가페)를 사용했다. 그러나 여자가 남자를 부른 칭호는 도드(히 1730: 사랑하는 자)를 사용했다.

이러한 사랑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암논과 다말의 이야기는 성충동의 야수성, 즉 대상자와 성적 관계를 가지려는 무절제한 요구를 보여준다(삼하 13:1-22). 사랑은 성애 또는 성욕적인 영역에서 세상이 알지 못하는 근원, 곧 마귀로부터 기인한 원시적 힘인 미움을 부인함으로 맞서는 적극적인 능력이다. 이 이야기는 이 두가지 충동의 야수성도 투명하게 보여준다(삼하 13:1-22).

결혼이나 부부 생활은 상대에 대한 사랑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다. 삼손의 신부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치 아니하는도다"라는 히스테릭한 말에서(삿 14:16; 참조: 삿 16:15; 창 29:31, 33) 동일한 요소가 표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심지어 법까지도 사랑과 미움의 성욕적 증상에 관여하고 있다(신 21:15이하; 22:31이하; 24:1이하).

(b)  이 단어는 부모와 자식, 가족간의 사랑에 대해 사용되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사랑했으며(창 22:2), 리브가는 아들 야곱을 사랑했다(창 25:28). 야곱은 요셉과 베냐민을 사랑했다(창 37:3; 44:20). 잠언은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경계하느니라"고 했다(잠 13:24).

또한 이 단어는 며느리의 시어머니를 향한 사랑과 같은 가족간의 사랑을 표현한다(룻 4:15).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은 어느 곳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부모를 존중하고 존경하며 또 부모에게 복종해야 한다.

「참고-창 47:29에 보면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인애(헤세드: 친절, 자비; 70인역본  )란 단어를 사용하여 자기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기를 요청했다. 이것이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족속이나 가족의 유대는 이스라엘에서 매우 강하였다. 그러므로 '근친' 관계의 중요한 요소인 사랑에 대하여 놀랄 일이 아니다. 그것은 룻 3:10에서 이성 곧 남녀 사랑과 관련되어 있다. 그곳에서 인애(헤세드: 친절, 자비; 70인역본 ejleo")는 남녀 사랑의 개시와 가까운 친족에 대한 충실, 이 둘을 포함하고 있다.」

성경은 가족적 사랑이 너무 선택적일 때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다(창 25:28). 그 결과로 야곱과 에서가 서로 반목하고 미워하게 되었다. 요셉에 대한 야곱의 편애로 인하여 다른 아들들이 요셉을 미워하고 시기하게 되었다(창 37:4). 배타적인 사랑은 증오가 들어올 수 있는 지점이 될 수 있다. 이는 사랑이 헌신적일 뿐만 아니라 책임을 다 해야 하기 때문이다.

(c)  이 단어는 친구의 특별한 애착을 나타낸다. 다윗과 요나단 사이의 사랑은(삼상 18:1, 3; 20:17) 여인의 사랑보다 더 깊은 우정의 차원이었다-"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삼하 1:26).

(d)  더 나아가 이 사랑은 사회적 공동 생활의 근본과 규범으로 나타난다-"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 19:18). 이러한 면에서 사랑은 이웃을 위한, 그리고 이웃을 향한 헌신이며, 이웃을 형제로서 받아들이는 것이고 이웃이 당연히 받아야할 대우를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특히 외국인(레 19:34)과 가난한 자(레 25:35)와 고아의 권리와 관련된 사회적 법률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이웃 사랑은 단순한 친절이나 호의로 해석할 수 없다. 이것은 편협한 배타주의를 배제한다.-바로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웃이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적(enemy)으로 생각되는 것같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도 의미한다.

그 이유로 신 22:1-4이 동포를 도울 의무를 부과하는 것인 반면, 출 23:4-5은 특별히 이 의무를 적대적인 사람에게 적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웃은 동료일 수도 있고 적일 수도 있으므로, 그는 사랑의 대상이지 법적 제한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개인은 법적 개인보다 우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형태에서 출 23:4이하의 요구와 아마도 한층 더 높은 수준인 잠 25:21에 있는 기본적 진술("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은 원수를 향한 성향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으나 한 특별한 방식의 행위의 의무를 지우는 것으로서,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적으로 가르치려고 한 것이다. 요셉은 그의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선으로 악을 갚는 그런 실례를 보여준다(창 50:19).

물론 구약성경에는 이러한 원수를 사랑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시 109편과 잠 14:20 및 적대 국가들에게 향한 일반적인 태도는 이에 대한 예증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의해 부과된 윤리적인 요구의 고결함은 여전히 존재한다.

(e)  이 단어는 구체적인 것이나 추상적인 것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기름(잠 21:17), 은과 풍부(전 5:10), 뇌물(사 1:23)을 사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악(시 52:3-5), 사망(잠 8:3), 허사(시 4:2-3), 거짓 맹세(슥 8:17)를 사랑했다. 또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시 119:47), 율법(시 119:97), 증거(시 119:119), 법(119:159), 그리고 그들은 선(암 5:15), 진실과 화평(슥 8:19), 구원(시 40:16-17)을 사랑했다.

4.신약성경에서 아가파오의 용법. 

동사 아가파오는 신약성경에서 143회 나오며, 요한의 기록(요한복음에 37회, 요한1-3서에 31회, 요한계시록에 4회)에 가장 자주 나타난다.

1. 공관복음의 용법.

(a)  예수님은 새로운 사랑을 요구하신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두 계명에 기초하고 있다(마 22:36-마 22:40; 병행구, 막 12:28-막 12:34). 이 두 명령은 신 6:5과 레 19:8을 결합시킨 것이다. 첫째 부분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명령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의식적으로 그의 백성의 도덕적 전통의 입장을 취하신다. 그러나 그가 요구하는 사랑은 오로지 모든 다른 계명을 그 사랑에 이르게 하고 모든 의가 그 표준을 그 안에서 찾는다는 것을 뜻하는 사랑이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사랑은 의지와 행위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가 듣는 이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태도로 하나님을 위해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결단하고 준비되어 있기를 요구하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가능성을 근본적인 양자택일에 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인의 노예처럼 그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참조: 눅 17:7). 그것은 충실히 유순하게 그의 명령을 듣는 것이며, 스스로를 그의 지배 아래 두는 것이며, 다른 그 무엇보다도 이 통치의 실현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참조: 마 6:33). 한편 그것은 그의 전 존재의 근거를 하나님에게 두며, 전적인 신뢰로 그에게 매달리며, 모든 관심과 책임을 그에게 위탁하며, 그의 손에 의해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지도 않고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는 모든 것은 미워하고 멸시하는 것이며, 다른 모든 인연과의 관계를 끊는것이며, 방해되는 모든 것을 잘라버리는 것이며(참조: 마 5:29이하), 오직 하나님과 묶는 것 이외의 모든 구속을 끊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세력, 즉 재물과 허영은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포기하거나 싸워야 하는 세력들이라고 특별히 언급하신다. 재물을 중히 여기고 부를 축적하려는 자는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는 믿음이 적은 불신자이다(마 6:24b; 마 6:30이하).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 대해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문자적으로 '사랑하는도다')"라고 화를 선언하신다(눅 11:43). 명성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양립할 수 없다.

또 하나 아직 이 사랑을 위협하는 세 번째 위험, 즉 박해에 대한 긴장이 있다. 제자직에는 고난이 수반된다. 아키바(Akiba) 같은 위대한 유대인 순교 신학자들처럼 예수님께서는 부득이 그의  ┻湧?당할 폭행과 고통과 모욕과 수난이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충성에 대한 중대한 불 시험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아시고 말씀하신다(참조: 마 10:17이하; 마 5:10이하). 큰 최후의 고통이 인간에게 다가올 때가 있다(참조: 마 5:29이하; 마 24:10이하; 마 24:12이하). 이 말씀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특성은 순수하고 단호하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강렬한 열정이며 모든 혼란과 권세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사랑하는 주님이 나타나실 때까지 굳게 인내하는 적은 무리들의 열정이다.

그리고 제자로서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된다(참조: 마 10:37이하; 마 25:31이하; 눅 6:22이하). 이와 같은 요구는 사랑이 직면해야 할 고난을 뜻한다. 사랑이란 고난을 통해서만 이 세상에서 이룰 수 있다. 사랑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이를 희생시키게 하였다면, 그의 제자들에게도 분명 이 사실이 적용될 것이다.

(b)  다음에 예수님께서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명령하신다: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9; 병행구 막 12:31).

이 둘째 부분인 이웃 사랑의 계명은 롬 13:9; 갈 5:14; 약 2:8에도 인용되어 있다. 문자적으로 '둘째는 그것과 같이 너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다'로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예수님께서 명하신 근본적인 큰 요구이다. 그것은 인류 속에서 새로운 실재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이 사랑 자체가 인간 상호간의 사랑의 기초이자 동기이다.

랍비 아키바(Akiba)는 이웃 사랑의 계명이 토라(Torah)의 기본 원리이며, 여타의 모든 것들이 이 속에 함축되어 있다고 하였다(참조: 마 22:36이하에 관한 SB I 900-8).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 이런 명령을 덧붙여서 실체화한 것은 신약성경의 특징이다.

예수님은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는 구약성경 및 유대인의 요구를 받아들이시지만 그러나 동포에 국한하는 이웃 사랑에 대한 제한을 단호하게 제거하신다. 그는 또한 이웃 사랑을 우리의 길에서 만나는 의지할 데 없는 사람에게 집중시킨다.

이웃 사랑에 대한 이해를 위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눅 10:29이하). 서기관은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가장 가까운 동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외국인에게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의 체계적인 목록을 제시함으로써 답변하지 않으신다(Philo, supra, 40). 또한 모든 사람들이 형제들이라고 하는 가장 멀리 있는 자들에 대한 별난 사랑을 칭찬함으로 대답하지도 않으신다. 그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이가 누구인가?"라고 역으로 질문하심으로 노미코스(nomikov", 3544)의 질문에 대답하신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나를 중심에 두고 동심원을 그리는 이전의 그룹 짓기를 산산이 부수는 한편 유기적인 이웃의 개념을 내세우신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개념에 의해 당신이 중심에 있다는 새로운 그룹 짓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 체제는 모든 사람과 장소에 도식적으로 적용되는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절대적인 결합체로 구성된다. 그것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둘레에 겹겹이 형성된다. "마침"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가장 가까이에 서 있는 자는 누구든지 똑같이 그에 대하여 이웃의 의무를 지닌다. 세 사람은 똑같이 강도들을 만나 고통하는 사람 가까이에 있다. 그들 중 누가 이웃의 의무를 이행하는가? 이방의 사마리아인이다. 왜인가? 보고 불쌍히 여긴 것이다. 마음이 최종적인 결정을 한다. 마음이 타인의 고통을 알아내는 자가 그의 이웃의 의무를 이행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다른 두 사람은 주저하였으므로 그들의 이웃으로서의 의무를 위반한다. 그러나 이 불쌍히 여김의 도입이 이웃 사랑에 있어서 감정의 낭비를 내포하지 않는다. 요구되는 것은 최대한 감정에 흐르지 않고, 가장 비감상적으로 도움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사마리아인은 매우 침착하게 가까운 앞날을 대비하면서 그 순간이 요구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행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허비하지도 않고 그 의무와 타인의 죄에 대하여 쓸데없이 말하지 않는 자비를 베푼 것이다. 그는 해야만 하는 것과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이 이야기에 피할 수 없는 절박함을 부여한다.

(c)  예수님은 의식적으로 유대의 전통과 대립하는 요구로서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하신다. 마 5:43이하와 눅 6:32이하의 간결한 말씀에서 그 요구에 대한 3중의 결정을 볼 수 있다.

첫째로 그것은 새 시대의 새 요구이다("옛 사람에게 말한 바...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마 5:21; 마 5:43).

둘째로 그것은 칭찬(카라스)을 지적한다("삼", "더하는 것",마 5:46 이하).

셋째로 그것은 "죄인들"(세리들, 이방인들, 마 5:46 이하)과 날카롭게 구별되는 "듣는 자들"에 적용된다(눅 6:27).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원수에 대한 사랑은 이 세상과 세대의 자녀들에 관하여, 그 미래가 그들에게 속한 하나님의 새 백성의 자녀들의 태도이다. 그들은 되돌려 받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 사랑을 보여주어야 하며, 상환의 가능성이 거의 없는 곳에서 빌려주어야 하고, 제한없이 주어야 한다. 그들은 세상의 적의도 기꺼이 저항없이 희생적으로 감수해야 한다(눅 6:28). 참으로 그들은 그들을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해야 하며, 저주하는 자를 위해 축복해야 하고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눅 6:27 이하; 마 5:44). 이들 요구 중 몇몇에 대해서 랍비의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 완전하고 단호한 강령과 비교해 볼 때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옛 백성, 유대인 공동체의 순교자의 정신조차도, 아직 들어보지 못한 이 순교의 의지에는 훨씬 못 미친다. 여기서 한 새로운 중재가, 순교자의 과업, 즉 하나님을 미워하고 그의 신실한 백성을 멸하는 적대적인 세상을 위한 중재가 이루어진다.

이상주의자들은 항상 있어 왔다. 그러나 여기에서 환상이나 감상적인 생각없이 이웃 사랑의 이상을 현실 속에 전하신 자가 말씀하신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해야하고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와 같이 흔들리지 않는 진지한 어조와 현실 감각을 가지고 이 불가능한 요구들에 대해 말씀하신다. 항상 형제 사랑과 보다 좋은 세계에 대한 열광주의자들이 있어 왔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아시며 그러므로 오로지 사랑에 근거를 둔 세계 안에서 사는 삶을 요구하신다. 그는 냉철한 현실성과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하신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미움과 원수에 대한 유대인의 견해를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레 19:18에 대하여, 동족의 자손들에 대해 분노와 복수의 감정 같은 것은 금지되나 다른 백성들에 대해서는 금지되지 않는다고 해석하여, 시 139:19-22과 시 140:9-11과 같은 구절을 그들의 원수들을 미워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예수님은 사랑을 이웃에게 제한한 레 19:18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원수까지도 이웃 사랑의 대상에 포함시킨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원수들을 이전의 미움과는 대조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계명을 더 이상 확장시키지는 않았으며, 사랑에 관한 율법을 복음의 가르침 아래에 두었다. 이 복음의 가르침은 눅 10:29-눅 10:37에서 분명히 설명된다. '곤경에 처해 있는 자는 누구든지 항상 나의 이웃이다'는 진술은 '나의 이웃은 나에게 자비를 베푼 자이다'는 진술에 부속하고 뒤따른다(참조: 눅 10:37). 바르트는 그의 중요한 신학적 해설에서 내가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어리석은 짓임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전의 원수였던 사마리아인은 나에 대한 그의 자비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나의 이웃이 되었으며 따라서 나로 사랑으로 행하도록 도전(요구)하였기 때문이다(눅 10:37). 다른 말로 하면 사랑 받아본 경험이 도전을 앞서며, 복음이 명령을 앞선다. 그 이유는 예수님 자신이 이 비유의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의 모습을 통하여 예수님의 모습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 자비로운 구속(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d)  예수님께서 새로운 상황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사랑에 대한 그의 요구는 당연한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사건인 하나님의 자비를 선포하신다. 그는 죄사함을 가져오시고,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 속에서 새롭고 넘치는 사랑이 흘러 나온다. 이러한 사랑은 모든 생명과 활동에 충만하여 그들을 지도한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새로운 관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서로간의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하였다(눅 6:36이하). 이것은 자비의 관계요 화해의 관계이다.

2) 바울 서신의 용법.

(a)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로 말미암아 창조되는 새로운 상황을 분명히 깨닫고 묘사한다. 이제 바로 동트는 새 시대에 대한 로마서의 주요한 논제는 하나님을 향한 선택된 자들의 사랑으로 시작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아가고 마침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아가페, 롬 8:39)에 대한 확신으로 끝맺는 하나의 찬양에서 절정에 달한다(롬 8:28; 롬 8:31이하). 이 확신은 세 가지 사실에 근거한다.

첫째,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보내시고 이 사랑의 행위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롬 8:27), 곧 아들께서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 십자가 위에서 성취되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사도를 부르시고 계속해서 그가 택하신 자들을 부르신다. 그의 사랑의 의지가 그들에게 향한다.

셋째, 하나님의 아가페를 우리의 마음에 널리 흐르게 하시며, 그리하여 그 사랑을 결정적으로 경험하게 되고 우리의 삶 속에서 현실된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활동을 하나님의 활동과 구분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었던 죄를 용서하시는 일을 하신 것과 같이,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과 동일한 것으로 여긴다(롬 8:37; 살후 2:16).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행위 속에서 계시되고 실행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아가페)을 확증하셨"다(롬 5:8).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건이 된다. 바울은 이런 변화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준동사형(verbal forms)으로 말하고, 항상 부정과거형으로 말한다(롬 8:37; 살후 2:16; 갈 2:20; 엡 2:4; 엡 5:2).

하나님의 사랑은 선택을 의미한다. 바울은 사랑함과 미워함, 택함과 거절함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대해 언급하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고(롬 9:13; 롬 9:25), 형식상의 병행절에서 아가페토이(사랑하심을 입은 자들)와 클레토이(부르심을 받는 자들)(롬 1:7) 또는 에클렉토이(택하신 자들)와 에가페메노이(사랑하신 자들)까지도 사용한다(롬 1:7; 골 1:12). 선택적인 사랑의 개념에 미리 예정하심(pre-temporal ordination)과 그리스도 사건의 표적(sign)에서 현재적(temporal) 부르심에 대한 두 가지 근본적인 사상이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엡 1:4이하[아가페]).

하나님께서 그의 크레스토테스(crhstovth", 5544: 선하심)와 아포토미아(ajpotomiva, 663: 엄위)에서 이제 죄인들의 무리로부터 구별된 선택받은 공동체는 하나님과의 영속적인 친교에서 사랑과 평화를 누린다.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은 살아있는 능력으로 일하고 계신다(롬 8:35; 고후 13:11이하). 사랑은 우리를 포로로 사로잡는다(고후 5:14).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다"(롬 5:5). 이 새롭고 살아있는 능력의 실체는 이들 바울의 말보다 더 설득력있게 표현될 수 없다.

바울 서신의 하나님의 아가페(ajgavph, 26)의 개념의 의미는 명백하다. 그것은 인간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와 이 세상의 구원을 지향하는 것(orientation)이다. 사랑의 행위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목적하시는 것이다. 아브라함 시대부터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백성을 미리 아셨다. 그는 아들을 보내시고 최종적으로 성령을 보내심으로 이 백성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이 성령은 갈라디아서의 위대한 마지막 부분(갈 5:2-갈 6:10)에 사랑의 성령으로 묘사된다(갈 5:22). 서신은 이렇게 역사의 행로를 남긴다.

(b)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의 목적은 새로운 인간이다. 그러나 이 목적은 인간과 인간의 사랑의 행위 없이는 성취되지 않는다. 모든 하나님의 행위는 창조이든지 구원이든지 간에 인간의 행위의 가능성과 필연성 둘 다를 전제로 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의지를 배제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긴급한 부르심은 자유에로 부르심이다.

이 기본적인 법, 곧 예수님이 사건에서 가장 분명히 볼 수 있고, 바울에 의하면 모든 곳에서 하나님 행위와 인간의 행위 사이의 관계를 결정하는 이 기본적인 법은(참조: 빌 2:12이하), 하나님 사랑과 인간의 사랑 사이의 관계에 관하여 사도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첫 번째로 말씀하신다. 그가 관계를 세우신다. 이것은 롬 8장에 단호하게 주장되어 있다. 결단, 선택과 부르심은 확고하다. 그로부터 아가페라 불리는 모든 것이 생겨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사랑은 부름 받는 자에 쏟아 부어진 하늘로부터의 사랑에 대한 응답일 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근본적인 사랑의 행위, 그 자체와 같이 결단의 행위이다.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백성과 맺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물리치는 언약이 성취된다(롬 8:28; 참조: 롬 8:37).

바울은 고전 8:3에 똑같은 근본적인 관계를 재치있게 공식화시킨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느니라".

우리는 오직 그의 앞에서의 우리의 수동성의 크기만큼 하나님을 향하여 능동적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첫째로 어떤 참된 의미에서 우리를 의지가 있고 행동하는 인간이되게 하는 생명을 창조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을 사람에게 불러 일으키신다. 그러나 피스티스는 단지 작용을 시작하며, 진정한 실현은 디 아가페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갈 5:6).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신 자들에게 프뉴마를 부으신다(롬 5:5; 살전 2:13). 다시 한번, 인간은 수동적이다. 그러나 프뉴마는 사랑 안에서 행하는 최상의 활동을 위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자유는 사랑 안에서 그 자체를 억제하고 완성시킨다.

프뉴마가 그것에 의해 자유롭게 되는 아가페에 선행한다는 것은 갈 5:22에 고전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또 "성령의 사랑"(롬 15:30)과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골 1:8) 같은 결합에서 그리고 고전 4:21에 보다 세련되게 표현되어 있다.

프뉴마와 자유의 관계에 대해서는 롬 8:2에, 자유의 한계와 목적으로서의 아가페에 대해서는 갈 5:13에 나타나 있다. 사랑을 위해 해방됨으로 율법이 성취되고 초월되고 극복되며, 어떤 후퇴와 방해도 허용하지 않는 새로운 질서가 시작된다.

사랑의 한 가지 중요한 목적은 부름받은 자가 그의 이웃에 대한 봉사로서 그의 삶을 사랑과 자유에 두는 것이다: "13 ...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갈 5:13-갈 5:14).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이하),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살전 3:12). 바울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명령에 집중하여 예수님과 같은 방법으로 그 명령을 확립한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관심은 형제 사랑에 집중되어 있다: (참조: 갈 6:10).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동포를 돕기 위해 준비되어 있음을 의미하던 이웃 사랑은 이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는 함께 시민된 자들을 위한 봉사를 의미한다. 그것은 형제간의 복지를 행위의 지배 원리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살전 4:9; 골 1:4; 몬 1:5; 엡 4:2; 엡 6:23; 골 3:19; 엡 5:25). 아가페토스와 아델포스는 서로 바꾸어 사용할 수 있는 용어가 된다(살전 2:8; 몬 1:16).

형제 사랑을 요구하는 우주적이고 역사적인 카이로스에 의해 형제 사랑이 결정적으로 한정된다(참조: 갈 6:10; 롬 13:11). 형제 사랑은 십자가와 텔로스 사이에서 이 결단의 시기에서 유일하게 적절하고 전진적인 태도이다. 그것은 십자가의 표적 아래 선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으심으로 인해 존재하게 된 공동체 안에서(빌 2:1이하; 골 3:14이하; 엡 5:2; 참조: 고전 8:11) 봉사와 희생, 용서와 이해(consideration), 도움과 동정, 그리고 쓰러진 자를 세우고 낙담한 자를 회복시키기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롬 12:9; 고전 13:4 이하; 참조: 갈 5:25 이하). 사도 자신의 최상의 가능한 목표는 교회의 선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아직 남은 고난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참조: 고후 6:3; 골 1:24 이하). 그러나 이것은 또한 바울에게 있어서 기본 원칙인 하나님과 인간의 행위 간의 근본적인 관계에 따라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행위에 대한 봉사로서 인간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가 결합한다.

사랑은 세우는 일을 한다(고전 8:1). 사랑은 장래의 일을 세운다. 아가페(ajgavph, 26)는 텔로스(tevlo", 5056)의 표적 아래에 있다. 이것은 고전 13장의 위대한 진리이다. 이런 이유로 사랑은("제일 좋은 길", 곧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하는 하늘의 선물이며, 사랑은 믿음, 소망, 사랑이 이루는 삼각 구조의 중심에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둘 보다 위대하다. 믿음과 소망은 이 불완전한 세계(aeon)의 한계나 사건들을 견딘다. 사랑으로 인해 장래 세대의 능력은 이미 현재의 세계의 형태 속으로 침입한다. 예수님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에게 있어서도 아가페는 이 죽음의 세계(aeon) 가운데서 미래가 가지는 유일한 생명의 힘이다.

3. 야고보서의 용법. 

(a)  약 1:12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b)  약 2:5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얻는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의 나라로 부르실만큼 선하다고 여기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자는 나의 형제들이며 그들이 비록 누추한 옷을 입고 온다할지라도 뒷자리에 앉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c)  약 2:8에서 사랑, 곧 이웃 사랑은 새 왕국의 최고의 '법'이다: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그러므로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범법자가 된다(참조: 약 2:9).

4. 베드로의 용법. 

(a)  벧전 1:8에서 성도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으나 사랑한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b)  벧전 1:22에서 진리로 영혼을 깨끗하게 하면 참으로 형제를 사랑할 수 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베드로는 벧전 2:17에서 "형제를 사랑하라"고 권고한다.

(c)  벧전 3:10에서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악을 떠나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d)  벧후 2:15에서 발람은 불의 삯을 사랑하다가 망했다: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5. 요한의 용법. 

바울에게 있어서 아가페는 미래의 원리(principle)이며, 요한에게 있어서 사랑은 현재의 우주적 위기에서 세워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세계의 원리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일 3:16; 요일 4:9 이하).

이 기본적인 사상에서 요한과 바울(롬 8:32)은 일치한다. 그러나 요한이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대한 사랑에 대해 항상 이야기하는 방식에는 다른 점이 있다(요 3:35; 요 10:17). 모든 사랑은 예수님께 집중된다. 그는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의 중재자이시다. 대조적으로 요한은 아버지에 대한 아들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거의 말한 적이 없다(요 14:31). 그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그의 "친구들"로 주신 자들에 대한 아들의 사랑을 더욱 강하게 강조한다. 아들을 통해 아버지의 사랑이 인간의 세상에 이른다(요 17:23 이하; 요 14:21 이하; 요일 4:19; 요 11:5; 요 13:23). 이 사랑은 그의 죽음에 의해 성취되고 공표되었다. 아들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그의 목적을 이루신다(요 13:1; 요 15:13).

요한복음의 아가페는 매우 명백히 겸손한 사랑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한 단계 한 단계 이 세상으로 내려오는 천국의 실체이다. 그렇지만 이 천국의 실체는 계시와 도덕적 행위에 의한 승리를 성취한다. 따라서 요한은 바울이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명백하게 설명한 것을 이해하고 있다. 빛과 생명의 세계는 이 세상에서 사랑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요한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모두의 삶에서 아가페의 적극적인 특성을 강조할 수 있고 또 강조해야만 한다.

요한이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요 5:42; 요 8:42; 요 14:28)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고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는 형제에 대한 사랑에 의해 가리워 지도록 한 것은(요 13:34 이하; 요 14:15 이하; 요 21:15 이하; 요일 4:20) 극히 일부분이다. 형제 사랑, 아버지와 아들과 아들의 백성의 서클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공동체를 구성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공동체의 삶을 위한 궁극적인 실체이며 그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은 그 생활의 법이다(요 15:9 이하; 요일 2:10; 요일 3:10; 요일 4:11 이하).

요일 3:14에는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않는 자는 사상에 거하느니라"고 한다. 요일 3:14; 요일 2:15 이하; 요 3:19에도 그렇다. 아가판은 어떤 목적어에 의해 한정되지 않은 채로 있으며, 단지 이 절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다. 눅 7:47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는 단독으로 사용된 아가폰의 독립적인 배치는 요한일서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요일 3:18; 요일 4:7 이하; 요일 4:19). 이 사랑은 생생한 활동이며, 존재의 방식이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현실화이다. 사랑의 법이 모든 세부적인 요구들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고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고상한 일관성으로 독자들 앞에 제시된다는 사실이 이것과 조화된다. 단지 때때로 사랑에 대한 요구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와 같은 표현에 의해 정확하게 정의된다(요일 3:18; 요이 1:1).

요한의 서신에서는 보다 일반적으로 훈계가, 여기에서 선택의 사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지만 형제의 관계에 대해서는 매우 단순하게 적용되는 아가페테와 아가페토이라는 절박한 부르심에 의해 중단된다(요삼 1:5; 요일 4:7).

요한계시록에서 형제 사랑에 대한 요구(계 2:19)는 이 분열과 고통에서,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라도 하나님께 굳게 매달리라는 열정적인 부르심에 의해 완전히 가리워 진다. 여기에서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이해는 전적으로 그 시대의 필요에 의해서 새로운 생명에 닥친 수난에 대한 신학 사상에 의해 결정된다. 요한계시록의 시작 부분에 충성된 증인 "우리를 사랑하신 자"(토 아가폰티 헤마스)에 드리는 찬양이 나오고(계 1:5) 사랑하는 도시의 마지막 때의 상황의 변화(계 3:9; 계 20:9)와 하나님의 적들에 대한 위협과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는 책망(계 2:4)과 함께 죽기까지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계 12:1) 피스티스(믿음)와 아가페(사랑)를 지킨 자들의 영광이 뒤따른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는 때가 왔다(마 24:12).

6. 사도 시대 이후의 용법. 

초기의 신조는 몇가지 새로운 이상의 고취와 아울러 이 시대에 전수된다. 클레멘트일서 49-50은 지고의 사랑, 그리고 이 사랑이 공동체와 세상에 대해 가지는 실질적인 의의에 대해 계속적인 인식을 예증해준다. 아가페와 아가폰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기초적인 용어가 되었다. 에가페메노스(**)와 아가페토스(**)는 예수님에 대해 즐겨 사용되는 용어인데 때때로 휘오스(**)나 파이스(**)와 연결되어서 사용되기도 하고 때때로 독립적인 명칭, 사랑하는 아들(Only-Beloved)로 사용되기도 한다(벧후 1:17; Herms, 5, 2, 6; M. Pol., 14, 1; Dg., 8, 11; Barn., 3, 6 등).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하나님께 사랑받고 선택받은 자들이며, 그의 선하신 기쁨이 그들에게 머무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 아가페와 아가판은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의 경건을 요약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세상에 대한 경멸과 미움을 요구한다. 이러한 긴장 상태는 여기 유대교에서 경건과 하나님의 사랑의 최후의 표현으로 고귀하게 평가되는 순교를 초래할 수도 있다. 

또 다른 형태로 하나님과 이 세상의 현상간의 긴장, 하늘의 사랑과 세상적 사랑 간의 긴장은 금욕주의로 이끌 수도 있다. 아가판은 훈련받은 또 때때로 절제하는 삶을 나타내는 용어, 또는 실제로 금욕의 훈련을 나타내는 용어가 된다. 순결한 아가페는 에로틱한 사랑보다 강하다. 그러나 아가페와 그 파생어들의 가장 일반적인 사용은 형제 사랑을 의미한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관한, 율법의 의미와 성취에 관한, 그리고 원수의 사랑에 관한 옛 말들은 크게 존중되고 적용된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경우에 형제들은 중요하다.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지치지 않고 봉사로 융화로 선으로 악을 이김으로 형제애적 친교의 의지를 강화시키기 위해 힘써야 한다(벧전 4:7 이하; ICI, 49이하; Barn, 1, 6). 아가페토스는 유행하는 인사말의 형식이다. 아가페는 식탁에서의 친교가 발전된 형제들의 애찬에 대한 전문적인 용어가 되었고 사회적인 의미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참조: E. Stauffer;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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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락, 기쁨, 즐거움 Joy.carav(5479, 카라.) 

1. 고전 헬라어의 용법 

명사 카라(Homer이래로)는 카이로(caivrw, 5463: 기뻐하다, 즐거워 하다)에서 유래했으며,

(a)  문자적으로는 '기쁨, 즐거움',

(b)  환유적으로는 '기쁨의 상태'와 '기쁨의 대상'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카라는 70인역본에서 50여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심한(기쁨, 즐거움)와 사손(기쁨, 즐거움)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카라는 신약성경에서 59회 나타나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a)  문자적으로는 '기쁨, 즐거움'을 의미한다.

① 마 13:20; 병행구, 막 4:16; 눅 8:13에서 카라는 '말씀을 받는 (부정적) 기쁨을 표현한다: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마 28:8에서 제자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두려움 뿐만 아니라 큰 기쁨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눅 1:14에서 사가랴에게 카라의 약속이 주어졌다: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눅 10:17에서 70인의 제자는 악령을 제어할 수 있는 예수님의 능력을 공유할 수 있었고 기쁨과 만족이 가득하였다: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눅 15:7; 눅 15:10에서 카라는 잃은 것을 찾은 자의 기쁨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잃은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 모든 것은 거기에 달려 있다. 하나의 죄인이 회개할 때 하늘에서 기뻐한다. 진실로, 잃은 양과 잃은 은전, 잃은 아들의 비유를 담고 있는 누가복음 15장 전체가 보여 주는 바는, 아버지께 돌아온 잃은 자에 대해, 예수님께서 인간들에게 자기와 함께 기뻐하라고 촉구하고 계신다는 것이다(눅 15:6, 눅 15:9, 눅 15:32).

눅 24:41, 눅 24:52에서 카라는 놀라움과 넘치는 기쁨을 표현한다: "41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52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② 행 13:52에서 제자들은 성령께서 힘주심을 통해 핍박을 받을지라도 기쁨을 경험하였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박해가 복음의 승리적 진행을 정지시킬 수 없다(행 20:24). 행 8:8에서 보면,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고, 그들이 믿을 때, 그리고 이적이 나타날 때 거기에 해당된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였다.

③ 요 3:29에서 카라는 '기쁨'의 충만이라는 중요한 특징을 표현한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세례(침례) 요한은, "신랑" 즉 약속된 하늘의 진리의 계시자로 인하여 지금 기쁨이 충만해 있다(참조: 마 9:14이하).

요 15:11에서 예수님은 완전한 기쁨을 가지고 계셨으며, 이 기쁨은 제자들에게도 부여될 수가 있었다. 이것을 그는 아버지께 요청한다(요 17:13).

요일 1:4에서 카라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으로 가지는 기쁨을 표현한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요 16:22에서 카라는 장차 슬픔을 대신할 기쁨을 표현한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현재의 슬픔은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이 종말론적 기쁨은, "어떤 황홀한 정신적 상태로 묘사되지 않고, 신자들이 더 이상 아무 것도 바랄 필요가 없는 상황으로 정의된다"(R.Bultmann).

④ 바울 서신들은, 기독교인의 기쁨은 슬픔과 고통과 근심 가운데서만이 얻을 수 있다는 역설적 의미를 증거하고 있다. 진실로 이와 같은 사실이야말로, 이 기쁨의 능력을 확실히 증명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기쁨의 원천은, 단순한 지상적, 인간적 기쁨 너머에 있다. 그것은 엔 퀴리오 즉 주 안에 있는 기쁨이며 따라서 우리의 외부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빌 1:25; 롬 15:13에서 그것은 "믿음과 기쁨"이다(빌 1:25; 롬 15:13). 그것은 소망, 믿음, 확신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 믿음은, 모든 싸움과 두려움(고후 7:5)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통한 칭의(justification)를 확신하며(롬 8:31이하), 부활하신 주님으로서의 그의 재림을 고대한다. 믿음의 기쁨으로서, 그것은 또한 성령(→ 영 Spirit)의 → 열매 Fruit이기도 하며(갈 5:22), 성령 안에서의 기쁨이라고도 불린다(롬 14:17; 살전 1:6). 이처럼 기쁨은 하나의 영적 은사이며, 이러한 점에서 카리스(charis: → 은혜 Grace)의 개념과 근사하다.

고후 1:14에서 바울은 그는 고린도인들에게 "우리는 너희의 기쁨을 위해 너희와 함께 일한다"고 확언하였다. 고후 2:3에서 바울은 주 안에 있는 기쁨인(참조: 고후 13;11; 빌 3:1) 자기의 기쁨을 모두가 함께 나눠 갖도록 하기 위해 편지를 썼다.

고후 7:13에서 카라는 안심에서 오는 기쁨을 표현한다: "이로 인하여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의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를 인하여 안심함을 얻었음이니라".

바울은 그들을 이전에 엄히 책망했었으나, 그의 권면이 결국 유익한 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그들에 대하여 다시 안심하게 되었다.

⑤ 히 10:34에서 카라는 극심한 박해와 위험을 초월하는 기쁨을 표현한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당시에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는 이미 극심한 경지에 이르러 교회의 존속 그 자체까지 위협을 받을 정도였다(참조: 벧전 4:13; 롬 8:17). 그러나 비록 물질적 재산을 빼앗겼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기쁨까지 빼앗을 수는 없었다(이것은, 시 46편에 영감을 받은 루터의 찬송가 "견고한 성"(Ein' Feste Burg)의 마지막 몇 행이 잘 예증해 준다:

그리고, 우리의 생명, 재산, 영예, 자녀 아내까지, 그들이 취하여도 그것의 유익은 하찮도다; 이는 모두 사라질 것: 하나님의 도성의 영원함이여.

⑥ 약 1:2은 순교에 대해 기뻐하라는 기독교적인 가르침에 가깝다(참조: 약 5:41). 그러나 교회사상(敎會史上) 이것은 종종, 사실상 순교 그 자체를 위해 순교를 추구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약 4:9이하에 대해서는, 그 말씀을 신약에서 말하는 구원의 믿음과 같은 것으로 잘못 생각하여, 율법주의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으로써 그와 같은 견해는 배척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견해는 십자가 상에서 이룬 그리스도의 사역의 일회적, 영구적 가치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b)  환유적으로는 ① 카라는 '기쁨의 대상'을 나타낸다. 빌 4:1에서 카라는 아무개의 기쁨이 되는 인격체에 대해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살전 2:19이하에서 카라는 같은 용법을 나타낸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② 카라는 '기쁨의 상태'를 나타낸다. 마 25:21; 마 25:23에서 카라는 "주인의 즐거움" 곧 주께서 누리는 지복을 나타낸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21).

히 12:2에서 하늘의 하나님 우편에 있는 지복을 나타낸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리스도 자신의 기쁨을 기꺼이 버리고 스스로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지셨다. 오직 그를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시험에서의 참음과 인내를 얻을 수 있다(히 12:2).

③ 카라는 '즐거운 잔치'를 나타낸다. 마 25:21; 마 25:23에서 카라는 '잔치',또는 '축하, 회식'이라는 의미도 가진다. (참조: E. Beyreuther; G. Finkenrath; Walter Bauer's GEL 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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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 평화, 복지, 번영....eijrhvnh(1515, 에이레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에이레네의 기본 개념은 본래 사람들 사이의 관계(relationship)나 태도(attitude)를 의미하지 않고 상태(state), 즉 '평화의 때', 또는 '평화의 상태'를 의미하며, 처음에는 순전히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상태에서의 한 막간(a interlude)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 단어는 전쟁에 반대되는 것, 혹은 전쟁의 종식으로부터 결과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평화는 복된 번영을 가져 오도록 법과 질서가 유지되는 상태이다. "에이레네"는 평화의 상태이며, 평화의 상태에서 땅과 백성을 위한 복이 흘러나온다. 필레몬(Philemon)은 이를 최고의 선(supreme good)으로 격찬했다.

에이레네는 평화 조약이나 평화의 타결과 관련이 있다. 에이레네는 또한 소란, 소요의 정반대를 의미할 수 있다. 에이레네는 평화적인(온화한) 태도, 즉 적의가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에픽테투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의 스토아 철학자들의 작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에이레네는 영적 평안이나 마음의 평안이라는 의미를 띠고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단어는 이들의 저작에 그리 자주 사용되지 않았다.

특별한 언급으로, 아우구스투(Augustus)가 지중해 세계를 지배한 에이레네를 들 수 있다. 이 시대에서 구속(redemption)을 동경하는 강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황금시대라고 불리워진 이 평화의 상태는 로마 황제가 군대의 힘으로 성취한 법적 또는 정치적 안정이다(Toerster, TDNT).

2. 구약성경 및 70인역본의 용법 

1. 구약성경 및 70인역본의 용법 및 의미들

(a)  구약성경에서 에이레네는 250회 이상 나오는 히브리어 단어 샬롬의 역어로 사용된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이에 대하여 예외적인 경우들은 대체로 왕래 및 문안 인사에 관련된 구절들이다. 예컨대 창 26:31; 창 43:23이 이러한 예이다.

그러나 렘 20:10; 사 48:22; 57:21은 이러한 경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외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예외적인 구절에서는 소테리아(구원, 구출), 카이레인(기쁨, 안녕)등을 역어로 사용되었다.

약 15개의 구절에서 에이레네는 안식, 평온, 안전, 염려 없음, 믿음직스러움 등의 광범위한 의미 영역을 포괄하는, 히브리어의 여러 가지 단어들에 해당하는 역어로 사용되었다.

예컨대 대상 4:40에서는 '…로부터 안식을 얻다'를 뜻하는 샤카트(히2453)의 역어로, 욥 11:18; 잠 3:23; 사 14:30; 겔 34:27; 38:8, 11, 14; 39:6, 26에서는 '믿을만함, 안전, 염려없음'을 뜻하는 베타흐(히233a)의 역어로, 삼하 3:24에서는 '가다, 걷다'를 뜻하는 할라크(히498)의 역어로, 사 29:24에서는 '이해'를 뜻하는 레카흐(히1124a)의 역어로, 그리고 잠 17:1; 호 2:18에서는 '평온, 안락'을 뜻하는 샬와(히2392d)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또한 에이레네를 역어로 사용하고 있는 몇몇 구절들은 해당 히브리어 단어가 모호하거나 없다: 에 4:16; 미 2:4; 사 32:4; 겔 34:29; 잠언 8:18.

(b)  70인역본은 히브리어 단어들, 주로 샬롬의 역어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 히브리어의 의미들이 이 헬라어의 의미에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70인역본의 용법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헬라어는 새로운 풍부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샬롬과 70인역본의 에이레네를 살펴보면, 에이레네의 여러 가지 의미를 알 수 있다.

이 단어는 '평화 peace'라는 좁은 의미로 제한시켜서는 안된다.  그것은 모든 가능한 형태의 악(evil)과 대조되는, 가장 넓은 의미의 '안녕, 복리' well-being를 의미한다. 만남이나 편지에서(삼하 18:29; 삿 19:20; 단 4:1), 작별 인사에서(삿 18:6; 삼상 20:42) 다른 사람들에게 안녕을 빌며, 대화에서 다른 사람에 관한 안녕을 구한다(삼상16:5).  사람들은 문안 인사를 한다 : "문안하고".

왕하 9:17이하에서와 같이 어떤 사람이 오는 이유에 대한 질문이 있는데, 곧 "평안이냐"는 '도전적인 목적이냐 화평한 목적이냐'라는 질문이다.

왕상 2:13에서 밧세바가 아도니아를 맞이 하면서 "화평한 목적으로 왔는냐"(너의 옴이 화평이냐)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그녀가 그에게 그의 방문이 '좋은 일'을 뜻하는지를 실제로 묻고 있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에이레네를 '행운이나 형통'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는데, 불경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적용되고 있다. 의인은 악인의 이런 형통을 봄으로 시험을 받기도 한다(시 73:3). 그러나 이 형통은 외적인 것에 불과하며, 진정한 형통이 아니다(사 48:22).

사 57:18; 시 38:3에서는 육체의 건강을 의미한다.

집회서 38:8에서 의사가 가져오는 에이레네, 즉 건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전장에서 무사히 안전하게 돌아오는 사람은 건강을 보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수 10:21; 왕상 22:17; 대하 19:1; 시 55:18).

또 이 단어는 '만족이나 흡족함' satisfaction을 의미하였는데, 이별에 관하여(창 26:29; 출 18:23; 사 55:12), 잠자리에 드는 것에 관하여(시 4:8), 죽음에 관하여(창 15:15; 렘 34:5)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에이레네는 단순히 안식이나 마음의 평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폭력이나 재난으로 압도당하지 않은 인간의 전상태로서, 폭력을 당하거나 변사의 정반대를 의미한다(참조: 왕상2:6).

또한 살펴볼 가치가 있는 것은 사 29:24의 내용이다: "원망하던 자도 교훈을 받으라"(70인역-말더듬는 혀들은 평화를 말하는 것을 배울 것이다). 이 구절에는 히브리어 샬롬이 없지만 에이레네가 나온다. 이 문맥에서 에이레네는 그들이 올바르게(에이레네) 말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사야 32:4에서도 이와 유사한 의미를 나타낸다.

이 단어는 더욱 보편적으로, 전쟁과 대조되는 평화를 의미한다. 잠 17:1; 호세아 20:18("평안히 눕게하리라")과 사 14:30("평안히 눕게 하려니와")에서 이 의미로 에이레네가 샬롬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잠언에서는 다투는 가정과 대조되는 평화로운 가정의 안락을 의미하며, 호세아와 이사야에서는 이 단어는 평화의 때를 의미한다.

대상 22:9에서 평화의 상태를 의미한다: "내가 저의 생전에 평안과 안정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히스기야는 평화가 그의 시대에는 계속된다는 기대를 가졌기 때문에 이사야의 중대한 예언을 경솔히 취급했다. 여기에는 번영을 누리는 그룹, 예를들면 국가의 번영이라는 의미도 지닌다.

에이레네는 전 3:8에 전쟁과 대조시킨 "평화"와, 그리고 렘 29:7에 "성읍의 평안", 38:4에 "백성의 평안" 등에서 "평안을 구한다"는 표현에서와 같이 "평화의 상태"보다 더 근본적인 것, 즉 평화 =백성의 안녕에 관련된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샬롬/ 에이레네는 상태보다 오히려 관계를 암시한다.

많은 구절에서 이 단어는 이러한 의미를 가지는데, 국가나 그룹 간의(왕상 5:12; 삿 4:17; 왕상 5:4; 대상 12:18), 개인 간의(슥 6:13) 우호적 관계를 의미한다.

신 20:10에 '한 백성에 평화를 선언'하는 것은 한 백성의 관계의 수용을 의미하며(참조: 삿 21:13), 그 안으로 들어가는 자들은 평화의 사신들이다(사 33:7).

이 단어는 시편 35:27에서 외적 형통이나 성공에 더하여 인간의 전적인 안녕(well-being)을 의미할 수 있다: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로 기꺼이 부르고 즐겁게 하시며 그의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여기서 형통과 안녕은 선(good)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시편 122:8에서 시인은 "네 가운데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 70인역본에는 '내가 참으로 너를 위하여(에 관하여) 평화를 말했다'고 번역되어 있다. '너를 위하여'는 '예루살렘을 위하여'이다.

시인은 바로 앞에서 이미 안녕과 형통을 원했다. 환언하면 이 용어는 여기서 확고한 '형통'이라는 의미에서 '선(good)'이라는 더 넓은 의미로 쉽게 이동한다.

따라서 잠 3:17에서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고 말한다. 70인역본은 '그녀의 길은 옳은 길이요 그녀의 모든 첩경은 평화에 있느니라'고 번역했다.

시 34:14은 도덕적 선을 의미한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그를) 따를지어다."

슥 8:19에서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말 2:6에서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들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70인역본은 '그가 그의 길을 에이레네로 똑 바르게하여 내 앞에서 행하게 하며…'라고 번역했다.

잠 12:20에서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궤휼이 있고 화평을 논하는(조장하는) 자들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 70인역본은 '에이레네를 원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리라'고 번역했다. 이러한 구절에서 '에이레네'는 도덕적 선을 의미한다.

(c)  이 단어는 두람(J. I. Durham)에 의하면, '완전, 완성, 성공, 성취'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샬롬은 '완전'이란 개념은 민 6:24이하에 나오는 축복의 절정을 이루는 대목에 나타난다. 여기에서 이 개념은 다른 모든 축복들을 요약하고 있으며, 여호와의 임재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축복은 모세가 여호와로부터 받아 아론과 그의 자손들에게 이스라엘을 축복하는데 사용하도록 전한 것이다(민 6:22 이하). 이 축복의 내용은,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이다(민 6:24이하).

여기에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찌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 6:27)는 구절이 첨가되었다. 두람은 이 구절을 주석하기를 '샬롬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오직 그가 임재하실 때에만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축복 속에 샬롬이 사용된 것을 볼 때에도 샬롬은 제의 용어로서 사용되었으며, 여러 가지 번역본이나 많은 주석가들이 일반적으로 이 말에 부여해 온 것보다 횔씬 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다 확실하게 믿게 된다. 왜냐하면 민 6:24-26 에 나오는 샬롬은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고(바라크) 지킴을 받으며(샤마르) 은혜를 받는(하난) 사람, 하나님의 임재 속에 이 두가지 상태로 있는 사람, 즉 충족되고, 그리하여 온전하게 된 사람을 묘사하는 말로서 사용되고 있다. 실로 이러한 사람은 신약성경의 주의 말씀에 부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또 두람은 '샬롬은 구약성경에서 자주 포괄적으로 본 성취 또는 완성, 실제로 사람이 혼자 힘으로 가장 좋은 환경에서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성공이라도 훨씬 능가하는, 삶과 정신에 있어서의 완성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된다'라고 주장한다(창 15:15; 29:6; 37:14; 43:27이하.; 출 18:7,23; 민 25:12; 신 23:7; 삿 18:15; 삼상 17;18, 22; 20:7; 25:6; 삼하 11:7; 18:28이하; 왕상 22:27이하; 왕하 22:20; 사 45:7; 48:18; 53:5; 54:10, 13; 57:2,19; 59:8; 60:17; 66:12; 말 2:5이하.).

특히 이 점은 왕하 22:20에 나오는, 요시야가 열조에게 돌아가리라는 여호와의 약속에서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여기에서 요시야가 평안히(in peace, KSB) 열조에게 돌아간다는 식의 해석보다는, 그는 '성공하여 in success', 즉 그의 소명을 완성하고 흡족한 마음으로 열조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래서는 항목을 만들어 에이레네의 의미를 설명한다.

2.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에이레네

이 단어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서, 선, 좋은 것, 구원을 의미한다. 샬롬/ 에이레네와 연합된 좋은 것은 그것들을 위한 기도에서든, 그것들이 나타날 때 하나님의 선물로 인정하든, 자연적으로 이스라엘에서 항상 하나님과 관련시키었다.

기드온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샬롬'이라고 불렀다. 이 매우 오래된 고대 표현에 대한 분명한 해석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이 고백의 위대한 의미에는 경건한 자들이 후에 많은 다른 상황에서 말하고자한, 특별히 구약의 기도에서 표현된 것과 같은 모든 것을 그 근본에 포함하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평화를 만드시며(욥 25:2), 또한 우리에게 평화를 약속하시며, 그의 백성에게 평화의 복을 내리시며, 그의 종들의 형통을 원하신다(시 35:27; 참조: 147:14), "다윗과 그 집에는 여호와로 말미암은 평강이 영원히 있으리라"(왕상 2:33).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시 122:6).

샬롬은 진실로 여호와로부터 오며, 완전히 충족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신념은 시편 85편에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다. 기자는 기도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가 그 백성, 그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 영광이 우리 땅에 거하리이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입맞추었으며"(85:8-10).

이 사상의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성향은 완전한 지상적 평화의 동기로 생각된다. 여기서 우리는 샬롬이라는 말의 구약의 용법의 최고점을 본다.

레위기에서 하나님은 그 땅에서 그의 백성에게 샬롬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레26:6). 이 문맥은 확고한 복이 뜻하는 것, 즉 원수들과 야수들로부터 평화를 아주 분명히 보여 준다. 이것은 특별한 의미에서 일종의 구원이다. 그것은 약속의 땅에서 안식과 평온이며, 그러므로 신명기 기자는 독특한 용어 메구하(안식)를 표현한 것이다(신 12:9). 이렇게 그들은 예언적 약속의 바로 가까이에 있다.

에이레네는 이 시대나 구원 시대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게 되었다. 이 단어가 어떤 생활 영역에서나 하나님이 주신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구약신앙의 특성이다. 사 46:7에서 그 일반적인 기사를 볼 수 있다: "나는 평안도 짓고 환란도 창조하니". 이 경우에는 앞에서 언급한 레위기 26:3이하의 축복과, 그리고 민 6:26의 축복("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도 포괄한다.

때때로 에이레네의 정확한 내용을 말하기란 불가능하지만, 한편 그것이 항상 인간을 위한 선한 것이며, 거기에 그의 안녕이나 구원이 놓여있는 것이다. '에이레네'는 이런 의미에서 선한 것이며 구원이다.

이러한 구원을 의미하는 구절들을 더 들어보면, 렘 29:11에서 하나님은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시 119:165에서 율법을 사랑하는 자들의 큰 평화는 율법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들이 당하는 장애물과 대조된다. 여기에 평화는 내적 구원이며 파멸이 아니다.

따라서 집회서 1:18에서 에이레네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증진되고 '기에이아 야세오스'(건강한 치유, 완전한 건강)와 연결되어 있다(참조: 사 9:7). 시 35:8과 9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평화는 구원이며, 이 문장에서 평화와 구원이 연결되어 있다.

이 구원은 렘 16:5에서 하나님의 구원이라 부른다: "나의 평강". 애 3:17에 "주께서 내 심령으로 평강을 떠나게 하니"라는 말은 "내가 복(아가다: 선, 선한것)을 잊어버렸음이여"라는 말로 해석되어야 한다. 여기서 평강은 선한 것이며, 곧 구원이다. 이 평화에 참여한다는 것은 거기에 포함된 구원의 은총을 누린다는 것을 뜻하는 반면, 평화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그 모든 복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평화를 거두어 가시면 어쩔 수 없이 애통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히브리인들은 때때로 이러한 동맹이나 협정에 대해 베리트(언약)를 사용했으며, 따라서 샬롬은 베리트와 관련하여 나타난다. 이 두 단어의 관계는 너무 강하므로, 이런 문맥에서 샬롬은 일종의 공식 용어가 된 것같다.

이 사상은 샬롬의 관계가 언약에서 두 당사자에 의해 인쳐진다는 것이다(수 9:15; 왕상 5:12). 환언하면, 언약은 '샬롬'의 관계를 개시하는 것이다. '샬롬'의 관계는 언약의 결과이다. 여호와의 이스라엘과의 화평의 언약을 나타내는, 이러한 구절들에서 '샬롬'은 실질적 안녕이 아니라 언약을 맺은 자들의 성향에 의존하는 평화의 관계를 의미하는 동시에 구원을 위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누하스와 평화의 언약(민 25:12; 집회서 45:24), 레위와 평화의 언약(말 2:5), 다윗과 평화의 언약(겔 34:25; 37:26)은 구원의 언약이다.

사 54:10에서 여호와께서는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신다(Rad, TDNT).

3. 종말론적 기대의 한 요소로서 샬롬/ 에이레네

샬롬은 종말론적 기대의 한 요소이다. 영원한 평화의 최종적 상태에 대한 대망은 선지서들과 다른 성문서들에서 일관하게 표현하는 구약 종말론의 한 요소이다.

이 널리 퍼진, 다방면에 걸친 이 대망의 사실은 샬롬이라는 단어가 관계하고 있는 구절들에서 항상 발견되지 않을지라도 언급되고 있다.

낙원의 상태의 회복이 예언될 때(사 11:10이하; 호 2:20이하; 암 9:31), 하나님의 주관하에 국제적인 평화가 예언될 때(사 2:2이하), 혹은 평화의 때가 도래하는 마지막 시대의 한 겸손한 평화의 왕에 대한 기대를 말할 때(슥 9:9이하), 샬롬이라는 단어가 이런 중심적인 종말론적 구절에 사용되지 않거나 슥 9:10에서와 같이 오직 많은 다른 것들 곁에 사용될지라도, 우리는 가능한 한 가장 넓은 의미의 샬롬에 관한 예언적인 선포를 듣게 된다.

따라서 그 단어가 실제로 발견되는 구절들에 대해 어떤 보다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사 9:5에 메시야 아이의 이름들에서 그 최종 이름 샬롬 사르(평화의 왕)는 의미의 중요성에 있어서 선행하는 다른 이름들과 다를 바 없다. 그 이름은 하나님의 사명(commission)을 지닌 분(사 9:1-6)으로서의 메시야는 도래하는 메시야 왕국의 평화의 보증인(guarantor)과 보호자이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사 9:7의 가장 중요한 기사에서 다시 다윗의 보좌와 결부된 구원을 위해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미 5:5에서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시다"라는 표현은 이 전체 예언의 본질을 요약한 것이다.

피조된 세상은 지금은 그것이 저지른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고 있고 스스로 분열하고 있지만, 결국은 다시 온전하게 될 것인데(사 11:6-9; 29:17-24; 6:1-9), 그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이다(사 65:17-19; 참조: 계 21:1-4).

평화에 관한 언약의 갱신에 관련된 메시지는 우주적이고 영속적인 평화에 관한 약속으로 발전되었으며, 이 구원의 날의 도래는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사 61:1, 2)로서 평화의 나라의 담지자요 설립자인 평강의 왕(사 9:5,6)에 자주 결부되었다.

흥미있는 점은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모든 풍부한 의미를 지니는 데도 불구하고 어느 곳에서도 특별히 내적인 평화의 태도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참으로 그것이 개인보다 오히려 그룹에 대해 사용되는 구절들이 더 많다.

개인에 대한 용법의 전형적인 보기로서, 애 3:17을 들 수 있다: "주께서 내 심령으로 평강을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잊어버렸음이여". 그러나 여기에 샬롬도 감추인 내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외적 안녕의 형태로 나타낸다. 그룹과 관련된 대부분의 보기에서 샬롬은 분명히 외적으로 드러내보일 수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Rad, TDNT).

샬롬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열망에 관련된 사회적 차원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순전히 개인적인 영역을 훨씬 넘어서는 공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샬롬이 체다카(의, 사 48:18; 시 86:10)와, 그리고 미쉬파트(재판, 슥 8:16)의 실제적 이상과, 나아가 심지어는 페쿠다(관리, 사 60:17)와 밀접히 관련된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이것은 또한 가장 보편적인 용례에서 이 단어는 개인적 개념어라기 보다는 사회적 개념어임을 시사한다(H. Beck, C. Brown , DNTT).

4. 예언자의 메시지로서의 샬롬/ 에이레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에서 에스겔까지의 소선지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이 선포한 구원의 메시지를 강렬하게 대항했다. 수세기를 통해 계속된 이 투쟁에서 모든 사람의 주의를 끈 표어는 샬롬(평화)이다. 참으로 전문 용어 인나베 레샬롬(그는 평화를 예언한다)은 이와 관련하여 나타난다(렘 28:9).

샬롬은 어떤 선지자 서클의 정점이었으며, 따라서 이 용어는 두 파당 사이의 심한 투쟁의 중심이 되었다. 문제는 이미 구원의 선지자들을 반대한 미가야의 입장에서 보여졌다. 그러나 이 용어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왕상 22:5이하).

미가는 몇몇 대항자들과 싸웠는데 그들을 이득을 얻기 위하여 예언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그들은 이득이 있는 한, 구원을 선포할 것이다: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 도다…"(미 3:5이하).

예레미야는 그 치열한 투쟁에 투신하여 선지자들로부터 가장 강렬한 저항을 받았다. 큰 고통 중에서 예레미야는 샬롬 에메트(영원한 구원)를 약속하는 예루살렘의 운명이 무엇인지를 말한다(렘 14:13이하).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렘 28장에서 예레미야와 이런 선지자들 간의 극적인 교전의 이야기를 읽는다. 예레미야와 하나냐 간의 문제의 요점은 샬롬(평화)이냐, 라아(환란)이냐 이다.

최종적으로, 에스겔은 거짓 선지자들이 구원이 없는데도 샬롬 하존(구원의 이상)을 본다고 하며 백성을 잘못 인도했다고 동일한 항의를 했다(겔 13:16이하). 여기서 "이들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예언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의 묵시를 본다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니라…"며, 대항한다.

거짓 선지자들의 문제는 샬롬의 문제를 넘어가며, 이 문맥에서 추적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의심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선포한 샬롬이 신화적 개념으로 옷 입은 궁국적 종말론적 평화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실제적 정치적 평화, 즉 모든 중대한 정치적 문제가 잘 해결되어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보장하는 평화 가운데서 살 수 있다는 약속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마치 예레미야가 처음에 이 견해를 함께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다음에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게서 평강을 빼았으셨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렘 16:5).

거짓 선지자들의 프슈도스(yeu'do", 5579: 허위, 거짓말)는 그들이 샬롬을 예언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와 에스겔도 다른 상황들에서 이것을 예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이 백성의 죄를 알지 못했으며, 따라서 절박한 심판에 관하여 어두운 정치적 장면을 해석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로서는 대응 표어 에인 샬롬(평강이 없다)이란 표어를 만들었다(렘 6:14; 8:11; 12:12; 30:5; 겔 13:10,16).

거짓 선지자들의 샬롬과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에인 샬롬 간의 싸움은 강도를 더하여 갔으며, 그러나 주전 597년과 586의 예루살렘의 정복과 멸망으로, 어떤 긴장 완화가 있게 되고, 구원을 예언했던 거짓 선지자들은 철저히 불신을 당했다. 이제는 새롭고 더 큰 의미에서 샬롬의 약속은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예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사로잡힌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악이 아니라 구원을 생각하신다는 놀라운 기사를 기록한다(렘 29:11). 여기에서 우리는 예레미야서에 있는 후기 구원 예언의 근거를 본다. 다른 나라들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가져올 구원을 보고 떨 것이다(렘 33:9). 동일한 주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맺은 평화의 언약에 대한 에스겔의 절정에 달한 메시지에 다시 등장한다(겔 24:25; 37:26이하).

샬롬에 대한 싸움은 이사야의 마지막 장들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서 샬롬은 벌써 선지자의 입장의 어떤 중요한 양상을 보여주는 표어가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이 예언의 충분하고 장엄한 요지의 하나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다면, 그들의 샬롬은 강과 같이 흘러내렸을 것이고 그들의 체다카(의)는 바다의 물결과 같이 되었을 것이다(사 48:18). 여기서 이 평행 관계는 이 용어가 지금 한 영적 의미를 받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유사하게 사 54:13에서 예루살렘 자손에게 약속한 구원의 복은 체다카(의)의 복과 결부되어 있다. '샬롬'과 '체다카'의 동일한 결합은 하나님의 새 도성에 대한 예언적 표현에서 나타난다: "내가…화평을 세워 관원을 삼으며 의를 세워 감독을 삼으리니 다시는 강포한 일이 네 땅에 들리지 않을 것이요 황폐와 파멸이 네 경내에 다시 없을 것이며 네가 네 성벽을 구원이라 네 성문을 찬송이라 칭할 것이라"(사 60:17-18).

사 32:17에 의하면 샬롬은 의의 결과이다: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이 시적 예언에는 '샬롬'이 더욱 실제적 의미로, '카보드'(영광)와 연결되어 있는 사 66:12에서 다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가능한 가장 풍부한 음조를 발하는 것이 있다.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아름다운 소리로 "먼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사 57:19)고 한 것과 같이 평화는 풍부한 기대를 표현하는 용어지만, 더욱 정확한 신학적 용어로 해석되지 않은 용어이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어떤 모호함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러한 많은 측면적 용어를 잘 사용하지 못하는 번역자들은 때때로 이러한 구절들에서 샬롬이 그의 회복된 백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이상, 더욱 현실적인 '안녕, 복리 well-being'를, 더욱 분명한 '평화 peace'를, 신학적으로 더욱 포괄적인 '구원 salvation'을 사용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3. 랍비들, 위경 등 유대 문헌의 용법 

1. 랍비들의 문헌

(a)  랍비 문헌에서 평화라는 개념 전체에 깔려 있는 것은 여호와의 샬롬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와 그리고 순전히 인간적인 차원에서 모두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샬롬은 인사말로서 만날 때('샤알 베샬롬', 안녕을 구하거나 비는 말)나 작별할 때(안녕히 가라) 상대의 안녕을 구하는 것이다. 살롬으로 인사하고 인사에 답한다.

또한 샬롬은 '순조(順調), 안녕, 안전'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pBer, 60에는 임신 6개월 부터 9개월 까지 순조로운 출산(순산)을 위해 기도한 것과 아이의 가고 오는 길에서의 보호,곧 안전을 위한 언급이 있다. 그리고 '휴식이나 안식'이란 의미로도 나타난다. 샬롬은 유대인의 무덤비에서 '안녕이나 구원'이란 의미로 기록되었다.

(b)  랍비 문헌에서도 구약성경에서와 같이 샬롬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벨론의 18개의 간구는 그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를 기원하는데 그 최종 간구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복과 평화가 임하기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샬롬은 베레카(복, 지복)와 병행되고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비록 유대인들 간에 메시야 시대의 평화의 개념에 대하여 견해차가 있었지만, 평화는 의인의 몫이며, 구약성경에서와 같이 메시야 시대의 지복(Blessings)의 총화이다. 이사야 52:7은 이것에 대하여 언급한다.

(c)  샬롬은 또한 사람들(개인들, 가정, 단체, 국가들) 간의 투쟁의 반대어이다. 따라서 사람들 간의 화평케 하는 것에 대해 자주 강조한 내용을 찾아 볼 수 있다. pea.,1.1에 의하면 이것은 그 열매들을 즐기는 것들 중에 하나이다. 학자들의 역할은 세상에 평화를 증진시키는 일이며(Ber 64a), 엘리야는 와서 세상에 평화를 먼저 확립한다(Eduy. 8:7). 예배에서 평화를 위한 기원으로 끝맺지 않은 축도나 기도가 없다(Lev. R. 9:9). '샬롬'은 하나님의 이름들 중 하나이다(Shab. 10b; 2:1, 4b).  UK. 3:12에 '거룩한 자여, 그는 찬양을 받으리로다. 그 안에 평화보다 더 가치있는 어떤 복을 간직하고 있는 그릇이 없도다'라고 말한다.

Rabban Simeon b. Gamaliel의 기록에 '세 가지, 즉 진리와 심판과 평화로 말미암아 세계가 보존된다'고 하였다(Avot 1:18). 이 기록에 의거하여 탈무드(Talmud)는 '만일 심판이 집행되면 진리가 지지를 받고 평화가 증진되기' 때문에 그 세 가지는 사실상 하나라고 선언한다(TJ, Ta'an. 4:2, 68a). 탈무드 랍비들의 최고 이상은 평화이기 때문에 그들은 할 수만 있으면 평화를 위하여 정의나 심판을 유보하거나 제외하였다.

힐렐(Hillel)에 있어서 아론은 평화를 추구하는 자의 한 모델이다(Ab,.1,12; ckawh, Str.B,.1.217). S.NU(42.6:26)에는 이방인들이나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의 죄가 있을지라도 그들이 평화하는 한 사탄이 그들을 해칠 수 없다고 한다. 랍비들은 호 4:17을 해석하여 '이스라엘이 우상들과 연합되어 있을지라도 평화가 그 안에 우세하고 있는 한 그대로 두라'고 가르친다(Gen. R.38:6).

평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진리의 엄격한 노선에서 벗어나는 것도 허락되었으며(Yer. 65b), 탈무드는 민 5:23에 관련하여 '만일 남편과 아내 사이에 평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신성하게 기록된 하나님의 이름을 지울 수 있다면, 전세계의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참으로 더욱 많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랍비들은 성경 자체와 모순하여 어떻게 사람들 간의 평화를 지지하는지를 설명한다(CKAWH,Slav. En. 52:11-13).

이것은 이웃의 '샬롬', 곧 구원을 구하는 문제가 아니라 다툼의 종식이라는 의미의 [샬롬]을 구하는 문제이다. 아마도 이것은 불일치나 불화가 메시야의 도래를 방해한다는 사상에 의한 것같다. 랍비들의 기록은 시기, 다툼, 불화가 하나님의 뜻에 반대가 된다는 강한 신조를 명시하고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바로 세상의 존속은 평화에 의존한다(Ab., 1,18). 물론 하늘에 있는 것들 역시 불화할지라도 그렇다는 것이다(참조, 골1:20).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하여 구약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샬롬'의 용법을 도입하게 한다. 다마스커스 문서는 하나님이 모든 육체와 다투고 있다는 사실로 시작한다. 이 다툼은 평화를 이루는 장막을 만들기까지 널리 펴져 나간다. 우상숭배와 같은 죄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반목을 조성하지만(Lv. r.,7 on 6:2), 제단의 돌들은 그들 간의 평화를 조성한다M. Ex., 29 등). 하나님과 사람 간의 평화와 다툼은 사람이 두 가지, 곧 긍정적으로와 부정적으로 행동하는 상호관계를 포함한다.

(d)  앞에서 살펴본 바, 샬롬은 유대인이 대망하던 구원의 핵심 바로 그것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평화를 추구하고( Rabbi Hille1, Aboth I:I2. SBI 217)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세우는 것은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었다. 랍비들의 가르침에서 평화롭게 하는 자의 역할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그것과 유사한데, 이 점에서 랍비 유대주의는 신약성경의 '새 계명'과 비슷하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근본 동기는 이유에 대한 적극적인 사랑이라기보다는 샬롬을 방해할런지도 모르는 모든 것을 제거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순전히 인간적인 차원에서 적용되는 것은 또한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이리하여 평화라는 개념은 사람이 행한 것과 행하지 않은 것 모두를 한층 중요하게 생각하는 새로운 차원을 얻게 된다. 이러한 평화에 대한 개념은 구약 시대 이후 발전한 새로운 용법에 큰 영향을 주었다.

2. 위경, 요셉푸스, 필로

(a)  위경에서 종교적 용법을 고찰해 보면, Test ⅩⅡ에서 '평화의 천사'라는 말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에이레네는 Test. L. 18:4와 D. 5:9,11에서와 같이 전쟁의 중단으로 표현된 구원을 의미하지만(Test. Jud. 22:1이하) 그것은 구원의 효과를 내지 못한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Test. ⅩⅡ와 특별히 Eth. En에서 평화의 반대는 랍비들의 견해와 같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또는 인류와 투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다.  Eth. En에 의하면 불경건한 자에게는 긍휼과 평화가 없고(5:15), 하늘의 타락한 수호 천사들에게는 평화도 없고 용서도 없지만(12:5), 반면에 의인에게는 평화가 약속되어 있다.

그러나 Eth. En. 1:17이하에 의하면, 평화는 심판의 유보 또는 비집행이며, 따라서 평화는 용서와 심판자의 긍휼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지만 평화는 또한 빛과도 연결되어 있어서 긍정적인 의미를 함축하며, 구원을 뜻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의 평화는 '평안히 내버려 두었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열 두 족장의 유훈에서 평화는 재판을 유보하는 것, 즉 범법자를 동정하여 유예해 주는 것, 혹은 적어도 그에 대한 형벌의 집행을 유예하는 것을 의미한다.  위경에서 평화는 또한 인간들 사이의 일치나 화합을 의미하기도 한다(Foerster, TDNT;  H.Beck, C. Bro wn, DNTT).

(b)  요세푸스는 구약성경과 랍비들의 용법을 철저하게 따른다(Ant. 1, 179; 11, 216; 8, 405; War 2, 135).

(c)  필로는 언어학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헬라 전승을 따른다. 그에게 있어서 에이레네는 정치적 평화와 욕망의 싸움과 대조로, 오직 하나님께만 속하고(Heinemann,413ff), 하나님으로부터만 찾아 얻을 수 있는 내면적 안식인 마음의 평안을 의미한다(Vit. Mos., 1, 304). 그렇다고 해서 평화의 외면적이고 객관적으로 입증이 가능한 상태를 가리키는 측면과 무관하지 않다. 내면적, 외면적으로 싸움과 평화는 그룹을 이룬다. 내면적 싸움이 가장 나쁘며, 그것이 모든 악의 근원이다.  필로는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역시 내면적 평화를 유혹과 탐욕에 대한 승리로 간주하였다(Jos. 57). 이디오피아어 에녹서 52:11은 '평화와 사랑을 가져오는 자는 복이 있다'라고 선언하고 있다(Foerster, TDNT).

3. 쿰란 문서

쿰란 공동체는 변절한 이스라엘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켜(1QS 8:4-9; CD 1:4과 해당 구절) 자신을 구원 받은 자들의 종말론적 공동체라고 생각하였다. 이 공동체의 성원들은 이미 종말론적 평화를 향유하는 경지에 들어간 것이다.

그들의 문헌에서는 영원한 평화(IQS 2:4), 평화의 넘치는 풍요( IQS 4:7), 끝이 없는 평화(IQH 7:l5), 지속적인 평화(IQH 15:16), 제한 없는 평화(IQH 18:30) 등에 관한 구절이 나온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아직도 투쟁의 와중에 있다(CD 4:13 및 그 밖의 해당 구절에서는 벨리알과 이스라엘 및 미가엘의 싸움이 언급되고 있고, IQM 1:9 이하에서는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의 싸움이 언급되어 있다).

평화의 도래는 재난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IQH 1:17). 구원은 구원을 받을 사람들이 불 붙는 용광로 속에서 연단을 받은 후에라야만 참된 것으로 인정 받는다(IQM 17:1). 하나님은 이미 영원 무궁한 평화의 언약(구원)을 생명의 바늘로 새겨 놓으셨다(IQM I2:3). 이러한 평화는 더 이상 거절을 당하지 않으며(IQH 9:11), 구원의 복으로 충만한 피난처가 된다(IQH 9:33). 평화는 구원과 행복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평화'(IQM 3:5; 4:14)와 '하나님의 기쁨'은 하나님의 백성이 안전한 그들의 고향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암호이다(1QM 3:11).

4. 신약성경의 용법 

1. 서론

에이레네는 신약성경에 92회 사용되었으며, 요한 1서를 제외한 신약의 모든 성경에 나온다. 복음서에 25회(마 4회, 막 1회, 눅 14회, 요 6회), 사도행전에 7회, 바울 서신에 47회, 야고보서에 3회, 베드로서에 5회, 유다서에 1회, 요한서신과 계시록에 4회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에이레네의 변화 또는 발전된 의미를 모두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단어는 형태와 내용에 있어서 70인역본과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전통을 착실히 따르고 있다. 그리고 랍비 문헌의 샬롬과 같은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추가로 고전 헬라어 문헌에 나타난 의미들이 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의 의미는 인사와 그리고 유사한 표현에서 안녕(well-being)이나 구원(salvation)이란 의미를 가진다.

마 5:34(눅 7:50)와 약 2:16에서 작별 인사로, 눅 10:5; (눅 24:36); 요 20:19; 요 20:21; 요 20:26에서 도착 인사로 사용되었으며, 당시 팔레스틴에서 유행한 인사를 번역한 것이다.

행 16:36에서 누가가 로마 간수의 인사말로 "평안히 가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그는 분명히 그 인사말을 70인역본에서 취했으며, 새 언약의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인사말이라고 생각했다.

사도 바울 역시 항상 그의 편지서들에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라는 인사말을 사용했다.

계 1:4에도 동일한 인사말이 나온다. 이것은 히브리인과 아람인의 인사와 같은 것이다.

디모데전·후서, 요한이서, 그리고 유다서에서는 자비를 뜻하는 말과 함께 사용되었으며, 평화는 또한 예를 들어 벧전 5:14; 요삼 1:15에서처럼 끝맺는 인사말에 나온다. 구약성경의 평안히 가라와 비슷한 말이 행 15:33과 고전 16: 11에 나오며, 눅 2:9에 나오는 시므온의 말도 이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안전(security)이란 의미의 에이레네는 눅 11:21에서 찾아볼 수 있다(참조: 살전 5:3). 고전 14:33에서는 구약성경의 영향이 한층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서 에이레네는 무질서의 정반대이며, 교회 안의 무질서에 반대되는 상태를 나타낸다. 행 14:2.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의 주요 의미는 분명히 헬라적인 의미가 아니라 보다 깊은 의미에서의 구원이다. 에이레네는 인간 간의 일치 또는 조화를 나타내며(행 7:26; 갈 5:22; 엡 4:3; 약 3:18; 참조: 벧전 3:11), 하나님과의 화평도 의미한다.

에이레네는 행 12:20; 행 24:2; 마 10:34; 계 5:4에서는 전쟁과 반대되는 평화에 대해 사용되었다. 바울은 이 단어를 영혼의 평안에 대해 사용하는데(참조: 롬 15:13), 이런 용법은 매우 드문 헬라의 용법이다.

눅 14:32에서는 평화의 조건을 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인사하는 것을 뜻하는 아람어투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문맥상으로는 존경과 무조건적 복종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그 용법상 세 가지 중요한 개념을 지니고 있다. - ⑴ 안식의 느낌으로서의 평화,  ⑵ 하나님과의 화해의 상태로서의 평화, ⑶ 그리고 종말론적 구원으로서의 평화이다. 이 중 마지막 의미가 기본적인 것이다.

2. 가장 광범위한 의미에서 만물의 정상적인 상태로서의 에이레네

고전 14:33에서 바울에게 있어 에이레네는 고린도 교회에서 생각을 예언함으로 야기된 어지러움(혼란스런 상태)과 반대되는 정상적인 상태이다.

영감을 주시는 하나님은 어지러움(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평화의 하나님이시다. 영감은 다툼과 혼란을 위한 구실을 허용하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시기와 분쟁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가 아니다. 여기서 지적하는 원리는 이적(miracles)이 법의 위반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법을 위반하는 편이 아니라 법을 지키므로 결과하는 평화, 곧 질서의 편이다. 이 질서의 평화는 진정한 교회의 정상적 상태인 것이다(고전 12:2; 약 3:16과 비교).

평화는 공동 예배(고전 14:33)와, 사도와 그의 협동자들 간의 교제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것이다. 이 의미에서 에이레네가 분명히, 강조적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주목을 끄는 내부와 외부 사이의 관계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건강한 또는 정상적인 상태는 하나님에 의해 영혼이나 인류에 제한되지 않고 전 우주에 미치는 것이다(참조: 1corinthians, ICC; V. Hasler, EDNT; Foerster, TDNT).

3. 인간의 종말론적 구원으로서의 에이레네

(a)  여기에서 출발점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 특별히 종말론적인 구원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구약성경의 샬롬이다.

눅 1:79에 사가랴의 찬송에서 에이레네는 대망한 종말론적 구원이다.

눅 2:14에 천사의 찬송에서 에이레네는 사람들 중에 평화나 하나님과 평화 뿐만이 아니라 이제 땅으로 온 구원을 가리킨다.

눅 19:42에 "평화에 관한 일"과 눅 19:38에 "하늘의 평화"도 구원이다.

계 12:10과 계 19:1에 "구원(소테리아)은 에이레네와 동일한 것이며, 그 의미는 (요한계시록에서 소테리아와 동일한) 에이레네가 하늘에 있고 하늘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적 사건으로 온다. 히 13:20은 이것을 "평강의 하나님"과 "양의 큰 목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자"를 동일시 함으로써 넌지시 암시한다.

히 7:2은 그리스도의 전형으로서의 멜기세덱은 살렘 왕, 곧 평화의 왕이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구원은 평화의 복음으로 선포된다(엡 6:15; 참조: 행 10:36; 엡 2:17).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이다(요 14:27). 세상은 오직 [샬롬]을 원하며, 그리스도는 자기가 확보한 구원을 주신다.

예수님은 관습적인 작별인사를 사용하셨으며(막 5:34; 병행구, 눅 7:50),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평안의 인사(이 집에 평안이 있을 찌어다)를 가르쳐 주셨다. 

제자들이 어느 집에든지 들어갈 때 하는 인사는 소원이 아니다.  그 평안은 그대로 거절하거나 받거나 해야 하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만일 거절하면 참으로 그 평안은 제자들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눅 10:5이하; 마 10:13). 

이스라엘의 마지막 세대는 최종적 선택을 직면하고 있다. 평화의 인사 형태에 동반하는 구원의 말없이 어느 성읍이나 집에도 들어갈 수 없다. 이 인사를 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평화의 아들'이 되지만 이 인사를 거절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으로부터 영원히 제외되어 있는 것이다(V. Hasler, EDNT).

그리고 편지서들(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빌 1:2; 살전 1:1; 몬1:3)과 계시록(계 1:5)에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라는 인사 또는 축도의 말은 특수한 의미를 지닌다. 유대인의 축복 공식문은 '긍휼과 평화'이다(2bar. 78:2). 바울은 이 축복문에서 '긍휼' 대신 '은혜'를 취하여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있기를 원하노라)"라고 축복한다.

그는 "은혜와 평강"을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시키므로, 예배 의식을 따랐다. 이 축복으로 그는 그의 독자들에게 주님의 구원의 은사를 수여하는 것이다.

그는 이 은사를 고전 1:4-고전 1:9의 서언에서 더욱 정확히 묘사하며, 갈 1:4에서 그 축복을 이어 부언하고 있다. 후자에서 카리스(은혜)는 희생제사의 방식으로 설명되어 있고, 에이레네는 악한 현세대로부터 구원 받는 해방의 과정으로 설명되어 있다. 사도 요한이 그의 계시록 서언에서 독자들에게 한 축복도 바울의 축복이 의미하는 바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 구원을 구해야 한다: 히 12:14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경고한다. 이 문구에서 에이레넨 메타(개역, 더불어 화평함)는 다른 사람들과 일치나 화합을 의미하지 않는다. 저는 다리가 고침을 받을 수 있는 우리의 발을 위한 곧은 길을 만들라는 권고 후에 모든 사람과 교제하여 구원을 구하라는 명령이 뒤따른다.

이 구원은 골 3:5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이다.

이 구원은 빌 4:7에서 사람을 보호하는 능력이다.

어떤 학자들은 6절에 비추어 이것이 불안에 반대되는 평안감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그것은 신자가 보호받는 왕국이다. 비록 인간 관계 속에서 이 구원이 때때로 사람의 외적인 일들과 동일하지 않으며, 심한 적대적인 경험으로 인도할지라도 그렇다(마 10:34이하).

(b)  이런 구절들에서 에이레네는 실질적으로 조에(생명)와 병행하며, 바울은 롬 8:6에서 평안과 생명을 동일하게 취급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바울은 육신의 노력은 사망, 영의 노력은 에이레네로 인도한다고 말한다. 그는 7절의 첫 부분에 근거를 둔다. 육신의 노력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며 오직 사망으로 인도한다. 조에(생명)와 다나토스(사망)가 종말론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일 존재 양식인 것과 같이 조에(생명)는 그와 병행하는 에이레네와 함께 있다.

에이레네(= 샬롬 = 구원)는 최종적 성취의 상태이며, 새로운 피조물의 정상적 상태이다. 이와 같은 특징은 벧후 3:14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안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엔 에이레네) 나타나기를 힘쓰라."

여기에서 에이레네는 기본적인 내적 성벽이나 내적인 평안도, 하나님의 은혜도 아니며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형성된 심신의 회복과는 별도로, 상상할 수 없는 완전한 복지(안녕)나 정상 상태를 암시한다.

이 의미에서 바울의 더욱 친숙한 인사는 때때로 데오스 테스 에이레네스(평화의 하나님)로 말한다. 이 묘사는 바울이 평화의 하나님을 기대한 것과 확고하게 연결되어 있다.

평화의 내용은 문맥에서 결정될 수 있다. 롬 16:20에서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고 말했는데, 이 사탄의 파멸은 구원의 일부이다. 평강(화)의 하나님('데오스 테스 에이레네스')이란 말은 하나님이 평화와 지복을 시행할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탄을 멸하실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벧후 3:14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정도의 구원과 복지(안녕)의 절대적인 내용은 살전 5:23에 나타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에 흠이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에이레네는 바로 '영적 번영'이 아니라 전인간, 곧 영혼과 몸의 구원이다. 동일한 의미는 히 13:20이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에이레네는 카리스(은혜)의 결과인 영혼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인간의 구원을 의미한다.

구약성경과 랍비적 용법에 근거해서, 에이레네는 이와같이 가장 심오하고 포괄적인 의미를 요구한다. 에이레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미 일어나고 있는 전인(whole man)의 종말론적 구원이다. 그것은 확실한 성취의 상태로서 카이네 크티시스(새로운 피조물)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 의미에서 구원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계시되었다(참조: Foerster, TDNT; H.Beck, C.Brown, DNTT; V.Hasler, EDNT 등).

4. 하나님과의 화평으로서의 에이레네

신약성경에서 에이레네는 하나님과의 평화의 관계에 대하여 드물게 사용되었다. 그 첫 언급은 엡 2:14-엡 2:17이다. 바울은 사 57:19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러므로 구원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용어가 15절에 나타날 때 그 반대어 에크드라(증오, 적의; 개역, 원수된 것)에 대하여 어떤 해석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적의를, 어떤 해석자들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의를 의미한다고 한다.

만일 율법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놓고 이스라엘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이 두 가지 역할을 알지 못한다면 이 구절들을 거의 올바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율법으로 말마암아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대와, 또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적대가 일어난다. 사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하여, 그리고 율법을 위하여 그들 자신들을 이방인들로부터 분리하고 이방인들을 원수로 생각해야 했으며, 이방인들은 그런 유대인을 적대적으로 대했다.

따라서 14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에이레네)이시라"는 포괄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폐하셨을 때, 두 가지 무질서 곧 사람들 중에 무질서와 하나님에 대한 무질서를 파기하셨다.

이 에이레네는 하나님과의 평화와 인류 중에 평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질서, 모든 관계의 회복(healing)을 의미한다. 그래서 15절에 에크드라(원수된 것)란 표현도 일반적인 의미를 가진다. 15절에 "화평하게 하시고"와 16절에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도 역시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에크드라와 에이레네는 여기서 인종 안에서 많은 서로 다른 형태를 취하는 객관적 상태들이다.

만일 하나님과 평화가 이 구절에서 에이레네의 일부이라면 롬 5:1에서 에이레네는 그 유일한 의미를 나타낸다. "하나님으로 더불어"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이 언급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적한다. 이것은 롬 5:10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원수들이며, 하나님이 그들과 화해하셨다는 사실에 동의한다(참조, 엡 2:16). 그래서 다음 평화는 사람이 변경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상호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의 사역을 하심으로써 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게 되는 관계이다.

5. 인간의 상호 평화로서의 에이레네

롬 14:17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한다. 그는 강한 자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먹고 마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서 의와 평화와 희락의 통치로 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희락(카라)"은 15절의 "근심하게 되"(뤼페이타이)어서는 안되는 것을 보여 주며, 의(디카이오쉬네)는 여하한 사람의 양심도 침해 당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생각나게 한다. 

평화(에이레네)는 하나님의 나라에는 어떠한 종류의 질병이나 악이나 불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계속하여 이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봉사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든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하여 "평화에 관한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라는 권고를 한다. 여기에 에이레네는 오이코도메(덕을 세움)와 병행하는 것이며, 그것은 분명히 상호 간의 평화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17절에서 에이레네는 이것보다 더 큰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은 성령 안에서 건강을 증진시키는 어떤 것의 창조, 즉 '에이레네'를 함축한다. 그렇지만 실제적으로 로마에 있는 교회에 적용하면, 이 건강을 증진시키는 일은 의심 없이 평화이다.

우리는 고전 7:15의 난해한 말에 동일한 사상의 어떤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화평 중에서 너를 부르셨느니라". 

바울이 만일 이방인 배우자가 결혼을 파하려고 하면 기독교인 배우자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주님께서 이혼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과 모순되는 것같이 보인다: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이것은 오직 주님의 말씀, 곧 우리는 이러한 경우에 노예들과 같이 구속받지 않는다는 말씀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15절에서 우리는 제한(restriction)이 아니라 이유(reason)를 가진다. 여기에 '데'는 '그러나 but'가 아니라 '오히려 rather'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부름에 대한 언급은 바로 앞에 말한 것을 위한 근거를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오히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언급된 개인적 경우를 넘어가서, 하나님이 우리를 평화로(혹은 평화를 위하여) 부르신 것을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말하는 근거를 확립한다. 

따라서 '에이레네'는 마지 못해서 유지하는 결혼 생활의 불화에 대한 반대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죄가 의도한 정상에 대한 파괴 상태와 정반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물의 건강한 상태, 정상적 상태를 함축한다. 당신이 배우자와 불화할 때 그를 구원하는 것이 당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해 보라. 구원과 그 결과인 화합의 복이 당신의 가정에 임할 것이다. 인간의 상호 간의 평화도 이 정상적 상태에 포함되어 있다. 다음 절(16절)은 '가르'로 시작한다. 여기서 '그러면, 그렇다면'이란 의미를 지닌다. : "(그렇다면)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딤후 2:22은 확실히 우리가 내적 경건(신앙심)으로 평화를 조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메타가 에이레네에 관계하지 않고 '…와 함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체 안에서 에이레네는 '구원을 가져 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당연하다. 한편 그것은 확실히 싸우고 있는 변론(제테세이스)을 한번 보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23절).

다음 구절들에서는 단순히 사람들 사이의 일치나 화합(concord)을 의미한다. 엡 4:3: "화평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약 3:18 :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의가 자라나는 씨는 화평케 하는 자들이 화평으로 뿌리게 되는 것이다. 시기(젤로스)와 다툼(에리데이아)은 '에이레네'의 정반대이다. 벧전 3:11에서 시 34편에서 인용하여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라는 말을 무슨 의미로 사용했는지 정확히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의미는 아마도 일치와 화합(참조, 9절)일 것이다(참조: Foerster, TDNT).

6. 영혼의 평화로서의 에이레네

롬 15:13에서 이 단어는 영혼의 평화를 의미한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그러나 이 단어가 어떻게 이 의미를 취하게 되었는지를, 즉 정상적 상태에 대한 신약성경의 이 단어의 일반적 용법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평강의 하나님"이란 말이 외적 생명에 관한 의미를 함축하는 것과 같이, 그리고 에이레네가 인간의 전존재의 정상적 상태 - 카라(기쁨)와 불가분리적인 상태인 구원 - 을 인간 안에 창조하신다.

여기에서 에이레네의 개념은 스토아 철학의 소극적인 갈레네(고요함, 평온)와 다르다. 이 평화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세상으로부터 은둔도 아니고 영적 세계나 시비적 명상에로의 경건한 도피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삶을 살아가면서 영원을 찾을 때에 이미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는 기쁨이 충만한 확신이다(참조: Foerster, TDNT; H.Beck, C.Brown, DNTT). 

이러한 영혼의 평화는 히브리어 샬롬의 특징도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평화는 독특하게 기독교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리고 영혼 또는 마음의 평화에 관한 문맥들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롬 8:6의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이라는 구절과 갈 5:22의 성령의 열매들 중 하나로서 "화평"은 이러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전자에서 에이레네는 생명인 구원을 뜻하고, 후자에서 사람들 간의 일치, 조화를 뜻하지만 내적, 영혼의 평화도 포함하고 있다(참조: 롬 14:17, [인간 상호 평화로서의 에이레네] 항목).

빌 4:7에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골 3:15에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평강",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이 다스리는 영역으로서 마음과 생각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 구원하는 능력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마음 또는 영혼이 평화를 누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참조: Walter Bauer; H.Beck; C.Brown; W.Foerster; G.Von.R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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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참음 long-suffering, 인내, patience, ....makroqumiva(3115, 마크로뒤미아)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마크로뒤미아(Menander 이래)는 마크로뒤모스(makroqumwv", 3116: 인내하는, 오래 참는)에서 유래했다.

(a)  이 단어는 '체념, 감수, 강제적인 수락'을 의미한다. 고통을 알지 못하는 신들의 행복과는 달리 인간에게 있어서 유일한 옵션은 마크로뒤미아 곧 체념이나 감수해야하는 인내이다(Menander).

(b)  이 단어는 '자포자기적인 인내'(Strabo)를 의미한다.

(c)  이 단어는 '지연, 지체, 행동을 연기하거나 미루는 것'(Artemid)를 의미한다.

(d)  이 단어는 '인내, 확고부동', 목적에 도달할 때까지 '참음'이라는 좋은 의미도 지니게 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마크로뒤미아는 70인역본에서 5회 나오며, '오래참음'(잠 25:15; 렘 15:15), '견딤, 확고부동' 등, 특히 고난과 재난을 참는데서 보이는 것 같은 것(사 57:15; 마카베오일서 8:4)을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마크로뒤미아는 신약성경에서 14회 나오며, 바울 서신에 10회,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에 각각 1회 사용되었다.

(a)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바울은 하나님의 오래참음을 그의 진노와 관련시킨다.

① 롬 2: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② 롬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하나님의 진노는 이미 명백히 나타났지만 오직 진노의 날에만 절정에 달할 것이다(참조: 롬 2:5). 오래참으심은 분명히 우유부단이나 굴종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감정에 의해 동요되지 않으며 의도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 지체는 회개의 시간을 허락할 수 있지만 또한 진노를 증가시킨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요구의 여지를 전혀 남겨 좋지 않으며 단지 그것의 종말론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분명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목표가 오직 소극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는 진노의 그릇들 조차도 자비의 그릇들에서 보이는 하나님의 자비를 선명하게 해주는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b)  그리스도인의 오래 참음.

하나님의 오래참음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유사한 오래참음을 가지도록 요구한다(참조: 살전 5:14).

① 갈 5:22에서 오래 참음은 사랑에 의해 지배되는 성령의 열매로서 결국 상호간의 보정(補正)이 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② 고후 6:6에서 오래 참음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필요한 자질이며 지식과 친절을 연결해 준다: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③ 골 1:11에서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영광에 그 기원을 둔, 그리고 즐거운 감내로 자체를 완성하는 하나의 영적 힘이다: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④ 골 3:12 이하에서 택함받은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들의 새 의복으로서 오래 참음을 입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⑤ 엡 4:2에서 오래 참음은 그리스도의 한 몸에로의 그들의 소명에 부합한다(참조: 엡 4:1 이하):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⑥ 딤전 1:16에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바울을 향하여 오래 참음을 발휘하신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와 같이 하여 그는 대적자들을 대함에 있어서 우리를 위한 하나의 모본을 제공하신다. 아무도 쉽게 포기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오래 참음은 자연적으로 찬양에 이른다(딤전 1:17).

⑦ 딤후 3:10에서 오래참음은 선교 사역에서 의무적인 것으로 부과된다: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⑧ 딤후 4:2에서 오류와 맞서는 최선의 길은 오래참음에 의한 것이며 이것은 한편으로 후퇴하지 않으면서 온갖 신뢰로 신적 재판관에게 판결을 맡기는 것이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⑨ 약 5:7 이하에서 부당한 고난을 당함에 있어서 마크로뒤미아는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는 오래참음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그리스도의 가까우심에 대한 인식은 분노의 감정을 끄며 승리적 확고부동함을 낳고 열매의 확실성을 부여한다.

⑩ 히 6:12(참조: 히 6:11-히 6:12)에서 강조점은 믿음과의 관련성에 놓여 있다: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마크로뒤미아는 기다림에 의해 초조해지지 않는 믿음과 소망의 확고부동성이다. 그것의 기초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약속이다.

⑪ 벧전 3:20 이하: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여기에서 노아의 시대에 하나님의 오래참음은, 구원과 멸망으로 나타날 순종과 불순종의 진전을 고려에 넣고 있다. 그것은 오늘날 선포와 세례(침례)를 통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해 특색을 이루고 있다.

⑫ 베드로후서에서는 하나님의 마크로뒤미아가 중심 개념이다. 

이것은 파류샤(재림)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 준다(참조: 벧후 3:4). 그것의 목적은 전적으로 적극적인 것, 즉 회개의 기간을 허락해 주는 것이다. 심판은 마침내 악인들 위에 떨어질 것이다(참조: 벧후 3:7).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흠없이 발견되도록 열심을 내야 한다(참조: 벧후 3:14). 그렇지만 우리는 주의 오래참으심을 구원으로 여겨야 한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벧후 3:15). (참조: V. Flkenroth; C. Brown; J. Hor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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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 양선, 선함 goodness, 친절함 kindness, 우정 friendliness. .....crhstovth"(5544, 크레스토테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크레스토테스(Eur., Isaeus. 이래)는 크레스토스(crhstov", 5543)에서 유래되었으며,

(a)  '정직, 존경할만함, 훌륭함, 가치있음',

(b)  '친절, 우호적인(우정), 온화함(온유)'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여러 비문에서 통치자들과 중요한 공적 인물들을 위한 영예로운 칭호로 사용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크레스토테스는 70인역본에서 약18회 나오며, 히브리어 토스 어군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크레스토테스는 사랑의 '선이나 의'를 표현하며(시 14:1; 시 14:3; 시 53:3), 하나님의 자비 및 친절한 성품과 행위를 나타낸다(시 25:7이하; 시 31:19; 시 65:11등).

3. 신약성경의 용법 

크레스토테스는 신약성경에서 10회, 바울서신에만 나타난다.

(a)  롬3:12에서 크레스토테스는 인간의 '선이나 의'를 의미한다: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 구절은 시 14:1을 인용한 것이다.

(b)  크레스토테스는 롬 2:4에서 그리스도 앞에서, 롬 11:22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와 통해서 나타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태도와 행위를 의미한다.

딛 3:4이하에서 크레스토테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완성을 이루는 하나님의 친절(자비)을 표현한다.

엡 2: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신적 구원 활동의 특수한 궁극성을 체험한다. 그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하늘의 영역으로 옮김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활동해 온 그분의 은혜와 친절하심(자비)에 대한 계시이다. 

'온유함, 친절함'을 뜻하는 크레스토테스는 여러 단계로 이루어져 있는 하나님의 운동 원인들 가운데 하나의 새로운 동인이다. 공동체가 비밀로서 소유하고 있는 것, 그리스도는 속량하시는 우주의 지배자라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을 통해 공동체 안에서 현실로된 것은 마땅히 드러나야 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공동체 속에서 활동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는 공동체를 경유하고 통과하여 전해지며, 앞으로 올 세대까지 확대된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통치를 전제로 삼는 신자들의 부활과 통치자적 지위는 앞으로 올 세대에서 밝혀져야 하고 드러나야 한다(Joachim Gnilka).

(c)  크레스토테스는 덕목 중의 하나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났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밖으로 퍼져나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체험은 그 자체로서 이제는 다른 사람을 향한 크레스토테스로 작용한다.

갈 5:22에서 크레스토테스는 성령의 열매이며, 고후 6:6에서는 성령과 관련되어 있다.

골 3:12에서는 이와 유사한 주님의 성품에 크레스토테스가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친절(자비)은 아가페의 직접적인 외관적인 활동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에 의해 인도되는 사람의 삶 속에서 항상 살아있고, 능동적이며, 자발적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고, 스스로 백성을 선별하셨으며, 죄와 사악함에도 불구하고, 때가 찰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무한한 인자함을 나타내 보이셔서 죄와 사악에도 불구하고 계속 인자함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원초적인 자비하심으로부터의 순환을 완성한다. 

여기서 비로소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그 목적 Goal을 달성하게 된다. 하나님의 자애로운 아버지와 같은 자비로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울을 보듯 분명히 볼 수 있다. 더욱이, 기독교 공동체, 즉 교회의 구성원들은 반드시 그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자비의 길을 자신들의 소명으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 동시에, 그들은 그러한 자비의 징표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세상에서 인자함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된다. (참조: J.H.Thayer; K.Weiss; E.Beyreu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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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성, 믿음 faith.....pivsti"(4102, 피스티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피스티스(Hes., Hdt.이래)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a)  피스티스는 '신뢰, 확신, 확실성, 확고한 확신'을 의미한다.

(b)  피스티스는 사람이 가지는 확신 뿐만 아니라 사람이 향유하는 확신, 즉 '신뢰할 수 있음, 의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차이가 있을지라도 확실성이나 신뢰성과 관련되어 있다.

(c)  피스티스는 신뢰의 가능성, 의지할 수 있는 것을 보장하는 '보증, 증명, 증거, 신실성'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피스티스는 70인역본에서 약 55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에무나(경고, 충실, 성실, 확고부동의 믿음)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피스티스는 신약성경에서 약 230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피스티스는 '신실성, 신뢰성'을 의미한다: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롬 3:3; 딛 2:10; 갈 5:22; 살후 1:48.

(b)  피스티스는 '엄숙한 약속, 서약'을 나타낸다: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딤전 5:12).

(c)  피스티스는 '증거, 보증'을 의미한다: 행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딤후 4:7.

(d)  피스티스는 '신뢰, 확신, 믿음'을 나타낸다.

① 하나님에 대하여, 막 11:22; 벧전 1:21; 히 6:1; 살전 1:8; 롬 4:5; 롬 4:9; 롬 4:11-롬 4:13; 롬 4:16; 롬 4:19이하 등.

② 그리스도에 대하여, 마 8:10; 마 9:2; 마 9:22; 마 9:29; 마 15:28; 막 2:5; 마 4:40; 마 5:34; 마 10:52; 눅 5:20; 눅 7:9; 눅 7:50; 눅 8:25; 눅 8:48; 눅 17:19; 눅 18:42. 롬 3:23; 롬 3:26; 갈 2:16; 갈 2:20; 갈 3:22; 엡 3:12; 빌 3:9; 약 2:1; 계 14:12.

(e)  피스티스는 '신앙의 내용, 교리'를 나타낸다: 유 1:3, 유 1:20; 롬 1:5; 갈 1:23; 갈 3:23이하; 딤전 1:19; 딤전 4:1, 딤전 4:6; 딤전 6:10; 딤후 2:18; 롬 12:6; 딤후 4:7. (참조: Walter Bauer; A.Weiser; O.Mich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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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 친절, 겸손, 동정심.....prau?th"(4240, 프라위테스) 

1. 일반 헬라어의 용법 

프라위테스는 프라위스(prau?", 4239)에서 파생되어 투키디데스(Thucydides) 시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온유, 온화, 친절'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프라위테스는 70인역본에서 11회 나오며, 히브리어 아나와 안와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에 3:13에서 아하수에로 왕은 자기가 온유하게 처신하기로 작정했다고 한다. 에 5:1에서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온유하게 변화시켰다고 한다. 시 45:4에서 왕과 관련하여 나온다: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시 90:10; 시132:1에는 '고생'이란 의미로 나타난다. 집회서 1:17; 4:8; 10:28에서 '유순, 온유, 겸손'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프라위테스는 신약성경에서 7회 나온다. 신약성경이 프라위테스를 주장할 때, 그것은 순전히 인간의 의지에 따라 좌우되는 태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구원의 징표이다. 즉 그것은 '부름'(엡 4:2)과 선택(골 3:12)의 표식이며 성령의 역사(갈 5:23)이다. 그것은 헬라적 의미에서의 미덕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진 생활과 행위의 가능성이다. 그것은 인간의 한 기질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결되고 그의 형상과 일치될 때에 생겨나는 것이다.

고후 1O:1에서 바울은 프라위테스와 에피에이케이아(ejpieivkeia, 1932)를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동안 사람에게 보여주셨던 태도의 특징으로 언급하면서, 그것을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교회에 제시한다: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프라위테스는 또한 죄를 범한 기독교인을 처리하는 일에 있어서 가져야할 태도에 관해서 언급된다(고전 4:21; 갈 6:1; 딤후 2:25).

약 1:20에서 프라위테스는 올게(ojrghv, 3709:성내는 것)와 대조되어 있으며, 선생에 대하여 분노를 터뜨리는 것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는 온유하고 겸손한 자세를 가리킨다. 온유는 신적 지혜로 영감된 참된 의인의 표식이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약 3:13). 여기서 온유는 의인의 전 행위에서 나타나며, "독한 시기와 다툼"과 반대된다(약 3:14; 참조: 집회서 3:17; 벧전 3:4).

벧전 3:15에서 당국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의 이유에 대하여 물었을 때 친절하게 온유 겸손히 응해야 한다고 한다. 비록 그들의 부당한 대우가  분개와 반항하도록 자극할지라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적대와 박해의 상황과 관련하여 언급한 것이다. (참조: F.Hauck/S.Schulz; W.Bauder).

→ prau?", 4239b 프라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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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 자제 self-control.....ejgkravteia(1466, 엥크라테이아) 

명사 엥크라테이아(Xen., Pla. 이래)는 엥크라테스(ejgkrathv", 1468: 강한, 지배하는, 억누르는, 자제하는)에서 유래했으며, '확고성'과 '자제'라는 어감을 지닌, 자신이나 어떤 것에 대한 '지배권'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성적 문제에 관련된 억제, 참을성, 견실이란 의미의 자제(self-control)도 의미한다.

소크라테스는 엥크라테이아를 윤리학에서 중요한 덕목의 하나로 처음으로 소개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이 개념을 채용했다. 플라톤에 있어서 엥크라테이아는 감각적 충동에 대한 통제력을 의미한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엥크라테이아가 인간 자유의 표시로써 간주되었다. 충동, 특히 성적 충동과 음식과 음주의 향락을 삼가는 것은 참된 인간이 되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부분이다.

신-피타고라스 학파는 이원론적인 체계를 발전시켰는데 그들에 따르면, 육체는 영혼이 신에게 갈 수 있도록 금욕을 통하여 억제되어야 한다고 했다. 금욕주의는 고대 세계에서 사람들을 제의적인 예배에 적응하도록 함으로써 큰 역할을 하였다. 필로(Philo)는 엥크라테이아를 충동과 열정을 초월하는 덕이라고 격찬하였다(Spec. Leg.).

예수님 당시의 에세네파 사람들(Essenes)은 독신을 권장하였고, 여러가지 다른 방법으로 금욕하며 살았는데, 예를 들면 소유와 음식에 대한 금욕과 철야 등이다(Josephus, War).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엥크라테이아는 70인역본에서 외경에서 3회 나오며, '억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집회서 18:30; 8:21; 마카베오사서 5:34).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엥크라테이아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행 24:25,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바울은 행 24:24 이하에서 첫째로 '그리스도 안에 믿음'에 대하여 그 다음에 의와 '절제'에 대하여 말한다. 이 말씀에서 "절제"는 아마 불의 (간통)의 결과인 지방 행정 장관 벨릭스의 결혼을 암시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계속 언급하고 있는 금욕주의적 경향을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참조: 행 2:44 이하; 행 4:32).

(b)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바울은 엥크라테이아를 "성령의 열매"로 묘사한다. 여기에서 자제 혹은 절제는 분명히 간음(포르네이아), 불순, 방탕, 우상숭배(갈 5:19)에 반대되는 긍정적인 행동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는 수단인 엥크라테이아는 결코 우리들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들이 복음에 의탁함으로써 성령의 선물로 새로이 받아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의 엥크라테이아가 단지 성적 측면에만 관련되느냐 혹은 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파악해야할 것은 바울이 성적 금욕주의에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적 금욕주의가 결코 이원론적으로 고정되지 않고(위의 고전 문헌) 본유적 가치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c)  벧후 1: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여기서 절제는 지식의 사용에 관여한다. 

절제란 모든 행사를 적절(법)하게 행하는 내적이며 외적인 자기 조절을 의미한다(E. R. Fuhrman). 

여기서 엥크라테이아를 금욕주의적 의미로 이해하면 안된다. 이 용어는 오히려 자신을 제어하는 능력을 지닌다는 본래의 의미로 사용되어 있으나, 그러나 그 능력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자기 실현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벧후 1:5; 벧후 1:6)으로부터 오는 지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신자가 곤고를 방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인내를 위한 선결 조건이다.(H. Baltenswei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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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마음을) 품다..생각하다, 판단하다, 전념하다, ~에 마음을 두다, ~하고 싶다.....fronevw(5426, 프로네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프로네오(Homer 이래로)는
(a)  '생각하다, 의견을 가지다, 판단하다', (b)  '전념하다, ~에 마음을 두다', (c)  '~하고 싶다', (d)  '계획하다'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프로네오는 70인역본에서 15회 나오며, 하캄(신 32:29; 슥 9:2), 사칼(시 93:8), 빈(사 44:18)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기타는 히브리어 해당어 없이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프로네오는 신약성경에서 26회 나오며, 그 중에 23회가 바울 서신에 나타난다.
(a)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막 8:33; 병행구, 마 16:23에서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에 나타난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베드로는 세상적 생활과 안녕에 초점을 맞춘 인간적 사상 만을 생각할 수 있었다. 베드로는 그의 생각과 뜻이 하나님의 일을 편들지 않고(하나님과는 반대되는) 인간의 일을 편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책망을 받았다. 예수님이 희생제물로 바쳐져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으며 하나님의 뜻을 반대함으로써 베드로는 하나님의 적들의 대의 명분을 조장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는 그 적들의 편에 가담한 것이다(그러므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는 신랄한 꾸짖음을 받았다).
(b)  바울서신.
빌 3:19에서 프로네오는 마음을 세상에 두고 있는 것을 나타낸다: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골 3:2에서는 그 반대를 묘사한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롬 12:3에서는 건전한 포부를 갖도록 권고한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롬 12:16에 보면 서로 같은 마음을 가지고, 높은 것들을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고전 4:6에서는 배움으로 교만한 마음을 갖지 않도록 하라고 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빌 2:2에서 바울은 목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마련하신 사귐에서(빌 4:2) 한 마음을 품는 것이며, 한 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이 마음을 가진 신자들은 다른 이상한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갈 5:10).고후 13:11과 롬 15:5에도 같은 마음을 거론한다.
빌 3:15이하에서 달리 어떤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롬 14:6에서 프로네오는 '준수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는 무조건 규정만을 준수해서는 안되고 책임적인 판단을 해야한다.
고전 13:11에서 성숙은 유치한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빌 1:7에서 프로네오(휘페르)는 생각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관심'을 의미한다: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빌 4:10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롬 8:5 이하에서 프로네오는 '~에 전념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인간은 항상 어떤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고투와 노력은 인간 본성의 한 부분이다. 인간은 소유하기 위하여 애쓰고 또 그것에 전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을 하나님의 영 안에 있는 생명으로 묘사하고 있는 이 8장의 문맥에서 바울은 인간의 마음은 모종의 객체에 집착해 있으며, 이것의 종류는 그가 육에 속한 사람인지 또는 영(Spirit)에 속한 사람인지에 따라 좌우된다고 논증하고 있다. 
따라서 육신을 좇는 자(롬 8:5)는 그들의 마음을 육체의 일에 둔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생각과 노력이(그것이 그들의 인생 전체이다) '단지 인간적인, 즉 세상의 덧없는 일들'에 향해 있다(R. Bultmann ).
반면 하나님의 영(Spirit)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호이 데 카타 프뉴마 온테스, 롬 8:5)은 약속된 성령의 은사에 의거하여, 성령의 지배하에서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이와같은 태도를 가진 자들에게는 "생명과 평안"(롬 8:6)의 약속이었다.
그러나 육신의 일에 마음을 두는 것은 사망을 뜻하며 이는 이 둘 사이에 어떤 필연적인 연관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참조: 롬 5:21; 롬 6:23), 육신에 마음을 두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거역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러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할 수 없는 까닭에 하나님을 거역할 수밖에 없다. 
이 구절은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은 그가 살아가는 방식, 즉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말하면 성령 안에서와 믿음으로 살아가든지 또는 대신에 육체 안에서, 다시 말하면 죄 안에서 그리고 영적인 사망 안에서 살아가든지 간에 어쨌든 그 생활 방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아주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생각과 노력이 그의 삶의 전체적인 방향과 분리되어 나타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의 삶의 방향은 그가 설정해 놓은 목표에 반영되어 있다. 생각과 생활 사이의 이러한 밀접한 상호 관계는 프로네오에 포함되어 있는 광범위한 의미로부터 메아리쳐 들려온다. 
이 단어는 지성의 활동은 물론 의지의 운동까지도 표현한다; 그것은 관심이자 동시에 결정이다. 따라서 그 의미가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을 "편듬"(taking  sides)이라는 개념에까지 실제로 확대되기도 한다.
(c)  행 28:22에서 로마의 유대인 지도자들이 바울에게 이 새로운 "파"에 관한 견해를 말해보라고 청한다: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노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라 하더라". (참조: Walter Bauer; H.Paulen; J.Goetzmann; G.Bertram ). 
[잠23:7.상..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For as he thinks within himself, so he is. ]  [마12:35...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The good man brings out of his good treasure what is good; and the evil man brings out of his evil treasure what is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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