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1.13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요20.부활.막달라마리아_제자들에게나타나심_의심하는도마_제한받지않는부활생명의성령공급_존재론적유신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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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역개정]요20장   [161. 할렐루야 우리 예수] [149.주달려죽은십자가] [166. 싸움은 모두 끝나고]


^^내주하시는 분의 충만, 하나됨의 생명 교통-공급 가운데 레마로 말씀하고 계시는 주관적 그리스도(Q-사람이신, 곧 Q의 신성+ 근원적 참 인성 가지신 [모든 과정 거치신] TUQ의 최종 완성이신 성령, 프뉴마 하기오스)를 거듭난 이의 주님 삼음(곧 그분을 거듭난 이의 모든 규준Canon 살아계신 주체, 생명<근본 동기-활력 원천>과 인격<통제-행함, 관계적 틀로서의 미덕>으로 받아들임 = 영접함의 믿음 발휘함)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 나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심>....영접함, 람바노 = 데코마이, 다바크-라카-라카흐...:::환영 + 환대- 그분의 보혈과 생생한 임재로 인해 날마다 그분께 합당한, 새로운, 깨끗케 된, 그분을 담는 거듭난 그릇(담지자)로서 자기의 전부, 곧 영원 유일무이한 머리이자 참 남편, 영원유일무이한 왕이요 주인이자 주인으로서 죽기까지 붙좇음으로써 그분과 하나되어 생각-심정-마음에서 그분과 교통-교제-사귐 통해 순종-동행함 이루며 그분 존재 자신자신의 이름(=생명+인격)_영광의 모든 것과 현재와 미래를 죽기까지 같이함[날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 그분이 사시는 삶 이룸]


((엡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여기서의 말씀은 항상 있는 말씀인 로고스,logos가 아니라 잠잠하지 않고-끊임 없이 현재적으로 말씀하시는-즉각적인 말씀인 레마,rhema를 의미함...그리스도를 그의 생명과 인격으로 취하는 사람은 <침묵하며 잠자코 있을 수 없는 바> 말씀하시는 그분 따라 그분에 의해 강제로 말할 수 밖에 없다!!..요6:63...그분의 임재는 지금 그분의 말씀하심에 있다..<(삼상3:10)주여, 말씀하소서, 주의종이 듣겠나이다,.. 내가 경청하고 또 그 말씀하심 그대로 내가 먼저 주와 하나되고 그렇게 말씀을 살아내고, 주님 움직임따라, 하나되어 나타내며, 말씀하시는  주님 말씀  그대로 참되게 전하리이다그분께 돌이켜 그분으로 말씀하시게 하고, 그분이 넣어주시는 말씀을 말하라...그리스도의 말씀하심이 곧 그 영이니, 그 때 깨끗케 하심과 거룩케 하심,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심 체험한다.] ....생명 주는 영, 그리스도의 단계

.... [객관적 진리 말씀의 주관적 체험화 = 하늘에 계신 객관적 그리스도 뿐 아니라 영 안에 내주하시는 주관적 그리스도 체험 회복!!..갈2:20]...성경 말씀 안으로 들어가되<사랑하는 주께서 그대를 흔들어 깨어나게 해 주셔서 그분을 알되, 더욱 더 친밀히 알도록 해 주시며, 말씀 앞에 기다리고 있는 그대를 지금 만나주시도록 말씀드리고 기다리라....말씀하시는 그 영 그리스도의 움직임과 운행하심에 전존재 맡겨드리고 말하기를 배우라> 성경 안에 계시된 그리스도, 그분은 잠잠하지 않고 끊임없이 지금도 생생하게, 즉각적인 말씀으로 임재하고 계심을 확실히 믿고 기대하고 그분의 마음의 말씀에 귀 기울이라..... 깨닫게 하시는 바를 말하게 하심따라 말함으로써 동시에 그분께 감사하며 사랑한다 고백하며 올려드리라...결코 객관적인 말씀 지식 알기를 주관적 그리스도 체험보다 더 귀히 여김으로써 또 하나의 우상숭배가 되게 해서는 안된다...


[[어떻게 말할 것을 주의하라,,주님 듣고 계신다]]

**병든 형제자매(믿는 이)에게 나아갈 때에마다, [다만 오직 지고지선, 다함 없는 극진한 사랑, 모든 부정적인 것 비추고 드러내어 끊어 내며 태워 버리시고 관통-충만하여 새롭게 만드시는 치유하는 강력한 생명 빛이요 무궁한 지혜의 주님 앙망하면서 주님 품안에 거하며 동행합시다...개인적 원함이 분명히 있지만 내 뜻 아니라 주님 뜻 이루시도록 구하며, 신뢰함으로 한 걸음씩 끝까지 따라 가십시다]고 권하라.. **그리스도인의 장례라면 [모든 싸움 이기고 주 품에 안기신 분께, 참 기독자의 모본 보여 주신 주께 감사합니다]**불신자의 장례에라면 합당한 말은<명복을 빕니다>가 아니라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가 적절하다!!


@@[요한복음은 항상 생명의 관점에 있다.]]....[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다!!!]

[잠8:16]*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 죽음은 부활을 위한 것이기에, 죽음이 끝이라는 사탄이나 일반사람들 생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진정한 승리와 능력 얻는 통로라는 것을 명심하라.

.... 이미 요12;24에서 JC는 자신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다른 밀알들을 낳고, 또한 그의 생명을 해방하여 그들안으로 그의 생명을 분배해서 넣어주려는 한 알의 [생명 충만한] 밀알이라 하셨으며, 이제 자원하여 사망 안으로 넣어짐 통해서 그분의 죽음을 이겨낸 [제한 받지 않으시는 그리스도 곧 부활 통해 변형된 그리스도이신 주 영으로서 자신을 분배해 주사 믿는 이들 안에 내주하심으로써 하나님 독생자이신 그분의 재생산과 증식을 가져왔고, 이로써 바로 그렇게 얻은 바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단체적 표현인 교회를 산출할 수 있었다.

.... 포도나무 비유에서 보듯이 이것은 [산출하는 생명으로 충만한]가지는 뿌리 깊은 본체 줄기의 새로 뻗어나옴 그 자체요, 이를 통해 포도나무(뿌리-줄기)는 가지를 통해서 순-꽃-열매를, 곧 포도나무 자체의 표현을 얻게 된다. 


@@[요한복음은 전체가 그 초점이 부활을 향하고 있다.] 

....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주님의 성육신 목적이 <죽음-부활>과정 거쳐서 해방되고 변형된 그분 자신을 많은, 참되게 믿는 이들 안에로 분배하여 넣어주심으로써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을 확대 재생산, 복제-증식하는 것이었다. 

.... 많은 믿는 이들을 <친히 달리신>십자가로 대속하고 (이것은 믿는 이마다, 주님의 죽음 과정을 누구나 예외없이!, 바로 지난 날의 무지로 인한 죽은 행실을 인정하는 참된 회개와 주 십자가 구속없이는 살 수 없음 시인함의 동일한 믿음의 적용 통해서!  주 달리신 십자가가 바로 그 자신마다를 위한 것임을 고백함으로써 자기 옛사람을 십자가죽음에로 넘기는 것이 되며 - 이 때 죄에서 자유함, 곧 죄 사함 얻음이 선포 되며- 구주의 부활 생명이자 그 능력시요 하나님의 무한 권능의 보혜사이신 성령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이들이기에 주 앙망하며 기다리는 간절한 심령에 오셔서 내주하사 영원히 함께 하실 성령을 믿음으로 받도록 하셨다), 

.... 이제 믿는 이의 영마다에 온전-완전-순전한 구원과 영생, 회복을 이루시는 바, 과정 거치신 그분의 영<주 영>을 분배하심으로써만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의 확대 재생산, 복제-증식>이 가능하였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무이한 지고지선 최상의 길이 바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무한하신, 유한계의 모든 제한을 뛰어넘고 역사하실 수 있도록] 변형되심, 이로써 자신을 믿는 이의 영에 분배하여 주심으로써 영원히 내주하여 사심의 방법이었다. 

.... 좀 더 과감하고도 엄밀히 말하자면, 성육신으로 이땅에 오사 제한 받았던[스스로를 제한하셨던] 독생자 하나님이 <십자가 죽으심-부활>로 그 모든 제약을 벗으사 해방되고 변형된, 완전하신 분, 영과 혼을 가지신 부활의 몸이요, 차원의 제한을 초월하신 [무한 능력의 제한 받지 않으시는] 맏아들 되심, 달리 표현하자면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독생자는 마침내 그리스도의 몸[그리스도의 신부-어린양의 아내인 단체적 그리스도, 유일무이한 유기체적 공동체-우주적 교회]을 이루는 많은 아들들<형제들...이들의 영혼은 맏아들의 복제-증식인 바 구주를 빼어닮았다!!...이제 더 나아가 새로운 부활의 몸도 이미 준비하셨다>을 산출하셨고 지금도 산출하고 계신다(롬8:29)..**거제는 <높이 올려 드림/내려 옴, 승천 :: 죽음  감수함 통해 이루는 승천..사명 이룸 위해 변형되어 보내신 바 됨>, 요제는 <부활, 앞 뒤로 흔들어 드림/ 새로이 받음 :: 주님 주신 것을 주께 내어드림으로써 주신 바 그분 자신을 생명으로 받아 양식 삼고 합당 성숙이룸>

-------요20장의 짝이라 할 수 있는, [롬8장,1-39]---암송, 묵상해보라... 

[롬8장] <생명의 성령의 법>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를 영접함, 즉 그 이름을 믿는이마다에게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바, 곧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분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고 장사되고 부활 승천함, 보좌에 앉게하심, 그의 참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취어지고, 그의 거듭난 영 안에 리스도의 영, 곧 그 영의 영원히 하나되어 내주하심으로써 옛사람-사탄-죄들-죄성-세상은 헤렘되었다 하시기에 그렇게 믿고 여겨 받아, 오로지 주 안에서 거듭나게 하신 바 새 영-새 마음에 충만케 하시는 바 그분으로 살아가며 이 땅에 그리스도로부터 화목의 대사로 복음 전파자로 보냄 받은이가 되었기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율법의 요구 = 죄의 삯은 사망 = 사망 선고 그대로를 따라 죽음<십자가죽음>에로 의로운 자신을 내어주어 모든 요구를 충족시킴으로써 정죄함에서 해방시킴 통해 구주 믿는 모든 이들마다 <이에 더하여 부활 생명과 권능의 성령으로서 영원히 내주하시며 주로부터 위임받은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거듭난 하나님의 아들들로 재생산-확대-증식하고 계심]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하나님앞에서 전무후무, 유일무이한 참 의인인 아들, 그의 의로운]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날마다 구주 이름 부름으로써 주 십자가 보혈의 영원한 능력-곧 새로이 씻어 깨끗케 하심, 새 창조하심을 적용하심으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주인오로서 친히 사시도록 해 놓으셨음]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그러므로 생각하라!]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비록 거듭난 자라 해도] 육신대로 [옛사람 패러다임따라 행함으로써]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깨어 있어 경계함으로 벗어나는 버, 무심코 행할 때마다 옛사람대로인]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구태여 세상 말로 표현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으나...진실로 사실을 말하자면 성령, 곧 TUQ의 최종 완성이신, 과정거치신, 영원하신 그 영, 하나님의 참아들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모든 피조물이 구원을 고대하다>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리스도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부활증인들]

....아마도 (사랑 충만한) 막달라마리아가 (예수의 시신을 안치한 돌무덤 위치를 확인해 두었으나 닫힌 돌문이 걱정되었다.. 하여안식후 첫날 이른새벽에, 닫힌 돌문을<게다가  군병들이 지키고 있었는데-이 사실은 아예 몰랐을 수도 있어서 생각 밖이었던 것 같다- 어떻게 열고 들어가야 하나 고민하면서 가장 먼저 무덤을 홀로 찾아왔다.... (여인들끼리 무덤을 찾아와서 예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로-아마도 셋 또는 네사람이었던 것 같다- 의견 일치를 보았고, 그런데  누가 돌문 열어줄꼬 걱정하면서 일단 향품을 준비하였으리라) 돌무덤의 돌문이 열린 것 확인 -->일단 제자들에게 알림(베드로와 요한이 이를 확인했고 거처로 돌아감)-->한편, 막달라 마리아는<요안나, 살로메,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등...:막16:1, 눅24:10의 기록에서 볼 수 있는> 여인들과 함께 <향품 바르려>무덤을 다시 방문 --->[돌문이 열린 돌무덤 밖에서 한 천사를 만나서 그 안으로 안내 받고 들어가서 누우셨던 곳을 확인한 후, 여인들에게 천사는 <갈릴리에서 보자 하신다>는 내용의 전갈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돌아가 전할 것을 말함^^] 세 여인은 먼저 돌아가고, <친히 부활 주님을 자기 눈으로 보지도 못했고 또 목적했던 바 주님 시신에 향유를 바르지도 못했고 단지 천사를 통해서 부활하셨음에 대해, 그리고 주님 약속하신 말씀에 대해 들었기에 여전히 해결이 되지 않는 슬픔에 싸여>뒤에 처진 막달라 마리아는 울면서 무덤안을 들여다 보는데, 그 안에 두 천사가 하나는 머리편에, 하나는 발치편에<마치 지성소 시은좌를 덮는 그룹처럼!1 시립하여> 서 있고 <인기척을 느끼는 바>그녀의 뒤에 계신 누군가에게 인사하는 것을 느끼고 뒤돌아 봄으로써 비밀히 <홀로> 무덤안에서 두 천사와 부활예수를 함께 만남의 체험 + 갈릴리에서 보자는 구주의 전언을 직접 구주로부터 받아 제자들에게로 돌아가면서 앞서 가는 세 여인을 따라 좇아 만나서 합류(합류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이 사실을 돌아가고 있는 (반신반의하면서?) 세여인들에게 전언(그랬을 것으로 추측!!), 이제 다 함께 제자들에게 구주 말씀<갈릴리에서 만나자>을 전하러 가는 도중에 다시 구주를 (그들과 함께 합류했다면, 막달라 마리아는 구주를 두번째로 직접 다시 만났으며, 또 구주의 전할 말씀은 세번째 듣는 셈!!) 만나 경배하고 구주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함께 전함 ::: <눅24: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막16:1에서는 살로메도 기록됨-와 (소)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베드로에게 개인적으로 나타나심]-->예루살렘에서 10km떨어진 곳 엠마오로 가는 도상에서 [글로바와 다른 제자]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교제하심<눅24:13-35> 그들도 떡을 뗄 때 그분이 구주이심 깨닫고 바로 돌아와 다락방에 합류, 증언(거기에는 도마 포함 11제자가 모여 있었음시몬에게도 이미  개인적으로 나타나 보이셨음도 알려짐 : 24장33절)--->안식후 첫날<부활의 날, 첫째 주일>바로 그 날 저녁, <문이 닫힌> 마가 다락방에 나타나심<먼저 10제자..도마는 부재중>, 7일이 지난 두번째주일, <문이 닫힌 마가 다락방> 도마 포함 11제자에게 다시 나타나심.. ...: :따로 추가된 증인들<고전15:5-8..아마도 오순절 이후>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예수님의 동생]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여인들이 본 것은 한 천사였는데, 마태복음에는 굴려낸 돌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마가복음에서는 무덤속에 들어가서 누우셨던 곳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을 본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 천사가 전한 말은 다음과 같이 동일하였다.(그렇다면 굴러낸 돌 위에 앉아 있다가 여인들을 환영하듯이 안내하여 그가 누우셨던 곳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그 침상 우편에 앉아서 여인들에게 말했던 둣 하다) ...[마28:6,7. *5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막16:6, 7 ....*6.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

@@부활의 날, 태어난 지 제8일 할례의 말, 안식일 다음날, 추수한 첫 곡식 한단을 요제로 드리는 날

<<요제의 날>>레23:10, 11, 15-[안식일 다음날...안식일은 제 7일째였기에 안식일 다음날은 이제 그 주간의 첫날이며, 동시에 새로운 부활 주님 안에서의 첫날이기도 함...이것이 요20에서 성취된 예언임]에, 수확물의 첫 열매 한 단을 요제(앞뒤로 흔듦..부활을 의미)로 드렸는데, 첫 열매 수확의 그 단은 부활 안에 첫 열매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예표였음(고잔15:20, 23)  [--이에 반해, 거제란 위아레로 흔드는 동작으로서 승천하시는그리스도를 예표함]
<<할례의 날...창17:12>>...남아마다 태어난지 8일째에 할례를 행하도록 하셨음 :: 의미--천연적 출생의 옛창조를 끝내고 부활한 생명과 그 합당한 본성으로 살아야 함을 의미...골2:11, 12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우리는 모두 그분의 십자가로 할례받았음을 선언하고 있음.. 부활은 전적으로 새 창조 안에 새로운 세대를 위한 새로운 시작임을 공포하시려 의도하신 바임..

@@무덤에 남기는 것마다 옛창조를 의미하는 바 <그분의 수의, 여유롭게 당당하게 따로 개켜 정갈하게 놓여진 머리수건(요11장에서 나사로는 부활했으나 수의와 머리수건을 감싼 채로 나왔기에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셨었다)...아리마대요셉과 니고데모가 함께 그분의 주검을 감싸드렸던 것으로서>이 물품들은 그분의 부활하심-사망을 이기셨음의 증거로서 대표적인 물품이 되었으며, 그분의 부활하심(다시 죽지 아니하심)에 대한 증거임
[[십자가 밑의 여인들..요19:25]]
.....예수의 어머니와 이모,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모친(마리아 = 알패오 또는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이 <작은>야고보는 레위 마태와 함께 주님의 12제자에 속함..그외에 요세<또는 요셉>, 시므온<나중에 예루살렘 2대 감독이 됨>과 함께 알패오에게는 4 아들이 있었음)
[[부활의 날 아침 무덤을 찾아 나선 여인들]]
.....살로메(세베대의 아들들인 요한과 야고보의 모친), 요안나(헤롯 안디바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 예수께 병고침 받은 후 전 소유를 드려 전도자의 삶 시작(눅8:2,3)),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막달라라는 마을은, 갈릴리 호수 서쪽 항구인 디베랴의 북서쪽으로 5km 정도 위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호숫가에서 육지쪽으로 조금 떨어진 작은 마을......*1> 예수께서 [로마군인들의 폭력으로 가솔들이 당한 처참한 죽음때문에 받은 상실감과 우울상태로 인해 사로잡혔던 바] 일곱 귀신을 쫓아 주신 이후, 다른 여인들과 함께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의 일행을 섬기며 예수님의 복음 사역에 함께 하였음....*2>사복음서에 모두 등장하는데, 구주의 십자가 상의 운명하심과 무덤에 장사됨의 증인이자, 안식후 첫날 새벽 미명에 맨먼저 주님 무덤을 방문하여 돌문 열린 것을 발견하여 <베드로와 요한에게> 고지함....조금 후 다른 여인들과 동행하여 시신에 바를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도착하였으나 베드로와 요한이 발견한 바 시신이 없어졌음을 보게 됨, 하여, <한 천사의 부활 고지 받고> 같이 왔던 여자들은 먼저 떠났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 시신을 잃어버린 극한 슬픔가운데 다시 무덤을 들여다 보다가 두 천사를, 그리고 부활 예수를 그 누구 보다도 먼저 직접 만나게 됨(갈릴리로 가서 제자들과 만날 것이라는 전갈을 마가의 다락방의 제자들에게 전함)..*3>예수님의 <베다니의 동산에서>승천하신  이후,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다른 제자들과 함께 마가의 다락방에서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고 있음을 보게 됨.
^^^@@[글로바 = 알패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중 한사람... 목수 요셉의 동생, 즉, 예수의 작은 아버지...(노년에 부부가 함께 골로새로 내려가서)골로새 교회의 지도자가 됨. [아들 다섯을 두었다??] 레위<세리>마태, 다대오 유다, (작은)야고보, 그외에 요세(요셉), 시므온을 아들로 두었음..예루살렘의 두 번째 감독이었던 시므온의 아버지로서, 알패오로도 불리며 예수님의 세 제자로서 레위 마태와 다대오 유다, 야고보(작은 야고보=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그리고 요세(요셉)가 시므온과 함께 그의 아들들이요, 그의 아내 이름도 마리아였음<야고보와 요세의 모친 마리아, 글로바의 마리아>...위 마태와 (작은)야고보는 예수와 사촌지간이었다..

##[[세명의 야고보]]......*1>요한의 형제 야고보(큰 야고보,,모친은 살로메, 부친은 세베대), ...*2>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작은 야고보, 형제로는 레위(마태), 요세(또는 요셉), 시므온(예루살렘교회 2대 감독), 모친은 마리아, 부친은 알패오 = 글로바, 예수의 작은 아버지)...*3> 야고보서의 저자 야고보(예수의 형제, 예루살렘교회 초대 감독)

## ((눅6:12)) 12제자의 이름 중 기억해 둘 것들 : 열심당--시몬, 다대오, 가룟유다

....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 마태-(작은)야고보, 시몬(젤롯당), 다대오(=유다), 가룟유다

*1>[형제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마태<레위>-<작은>야고보-다대오<유다>, 

*2>다대오( 마가복음에서의 명칭 )= <다대오라 하는> 레뷰스( 마태복음에서의 명칭 ) = 야고보의 아들 유다( 누가복음에서의 명칭)  ...유다서의 집필자로 보고 있음  

*3>시몬 = 가나안인 시몬 = 젤롯(=열심당)  이라 하는 시몬 

*4>빌립과 바돌로매<= 나다나엘>, 도마, 가룟유다


**유일하신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태초부터 계신 그분은 태어날 필요가 없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독생자가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 중 맏아들이 되시기 위해서는 [성육신하시고] 죽음 통과하여 부활 안에서 <차원적 제한을 넘어서는>변형된 몸을 가지신 분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셨음을 기억하라(행13:33, 히1:5).

...그분이 부활하신 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맏아들로서 출생하신 바 되었으며, [그 몸, 곧 교회의 머리]가 되기 위해 죽은 자들 가운데 처음 나신 자가 되셨으며(골1:18), 요15장의 포도나무 비유로 표상된 것처럼 줄기인 당신의 재생산이자 확장-증식인 가지들(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산출하시고, 그들을 통해 당신의 표현인 모든 충만을 나타내실 수 있게 되셨다.

...이 유기체적인 공동체이자 우주적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자 어린양의 아내,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무덤에 남기는 것마다 옛창조를 의미하는 것임을 명심하라. ::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옛창조 전체가 이미!!> 그 무덤에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음을 선포하고 계시다!!

... <그분의 수의, 여유롭게 당당하게 따로 개켜 정갈하게 놓여진 머리수건(요11장에서 나사로는 부활했으나 수의와 머리수건을 감싼 채로 나왔기에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셨었다)...아리마대요셉과 니고데모가 함께 그분의 주검을 감싸드렸던 것으로서>이 물품들은 그분의 부활하심-사망을 이기셨음의 증거로서 대표적인 물품이 되었으며, 그분의 부활하심(다시 죽지 아니하심)에 대한 증거임


===살아나시다

1.  안식 후 첫날[="주의 날"이자 "<부활 그리스도>주의 첫날"이라고 공식적으로 칭하게 됨!!]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어둡고 답답한, 소망 없는 심령!)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때때로 모든 열심으로, 홀로 JC 추구하고 <특별한 연인의 사랑으로> 사랑함으로써 직대하기를 힘쓰라!!

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막16:9] *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라 기록하고 있다!!..본장16절은 그 만남을 묘사한다.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 시신이 사라졌다, 다른 무덤으로<그 무덤은 아리마대 요셉의 소유였기에!> 옮겨 갔을 수는 있지만 수의와 머리수건은 그 자리에 따로 개켜진 채 남아있으니.. 이건 분명히 뭔가 이상하다-꺼림칙하다는 의문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 말씀 체험 통한 참 (객관적+주관적)지식 체득 필요.

......[눅9:22...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눅24:6,7...*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 더 이상 추구하기를 멈추고, 마가 다락방으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시다  ::: 이것은 전적으로 거룩-헌신-몰입-열정 충만한 섬김과 몰입-추구하는 신부의 주관적 사랑의 중요성을 드러내고 있다(잔느 귀용!!)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 베드로와 요한에게 처음 목도한 그 상황을 고지한 후, 아마도 같이 향품 바르기로 준비한 세 여인에게로 가서 향품 바를 준비하고서 함께 무덤에 왔고<이 때 베드로와 요한은 이미 떠나 거처로 돌아가서 길이 엇갈렸을듯>, 한 천사의 고지를 받고 함께 주가 누우셨던 자리를 확인한 후 세 여인들은 돌아가려 하고 있는 중이나 마리아는 극한 슬픔으로 발이 떨어지지 않고 있다,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 마치, 지성소 안의 속죄소/시은좌를 옹위하여 그룹 둘이 시위하는 그림처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어떤 인기척 느낌-두 천사의 몸짓 인사 인해]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요14:21...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도드, 랍오니>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잠8:17....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지극한, 친말한 애칭으로...내 주, 내 사랑, 내 선생님]선생님이라는 말이라)  :: 눈을 열어 주사 계시하여 주시는 그리스도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거제의 (비밀한)승천 통한 하늘 지성소에 자기 피를 드림 이루셔야 함] 너는 내 형제들에게[부활하심 통해 맏아들이 되신 주님은, 제자들을 친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형제들=많은 아들들로 칭하고 계심]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부활하신 후 먼저 사랑하는 이들에게 부활한 몸을 보여주신후(행1:9-11의 공개적 승천과는 다른, 비밀한 승천)통해 [Q의 만족-하늘성전에 대속의피 드림의 대제사장적 사역- 위해 올라 가시는 바] 아버지께로 가셔서<거제(곡식 한 단을 위아래로 흔들어 드림 : 승천 의미)-요제(부활 ::.곡식단을 앞뒤로 흔들어 드림) 를 이루심!!> 다시 방문하셔서, <차원적 제한을 벗어버린 <십자가고난의 상흔 가지신 어린양으로서> 부활의 몸을 확인시켜 주시고, 당신의 <모든 차원을 초월하신, 제한받지 않는> 부활생명을 분배해주려 하심..그 후, 지상에 40여일간 머물러 계시는 동안 <제자들에게> 보이는 임재와 보이지 않는 임재 연습을 시키시면서 사명을 주셨음,  그후 <베다니에서 가까운 동산에서> 공개적으로 승천하심...[[이는 또한 요16:7의 성취를 위한 것으로 보임..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이제 조금 후에 친히 오셔서 <모든 과정 거치신 주님 그 자신이신> 부활 생명의 성령을 불어 넣어 주신다]...이는 참되게 믿는 이마다, 각 사람을 사명자요 소명자로 세우시고 부활생명으로 살되, 또한 막힘없는, 제한 받지 않는 권능의 영으로 따라 살며 그것을 성취케 하려 하심이다]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다....엠마오로 가던 글로바와 다른 제자가 다락방으로 복귀, 개인적으로 자신에게 나타나신 주님을 본 시몬도, 그외 다른 제자들도 함께 모여 있음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부활하신 당일날] 저녁 때에[히2:10-12, 시;22:22 성취]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부활하셔서 아버지께로 가셔서 당신의 피를 지성소 속죄소에 드리시고 <제한 받지 않는, 차원을 초월한...요16:16, 19, 22)의 약속 성취> 변형되신 몸(눅24:37-40, 고전15:44)과 부활생명의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 곧 변형된 몸, (상흔을 가진 채)을 가지신 그 영<주 영>으로 오셨음

.... **주님은 아버지의 체현이요, 그 영은 그리스도이 실제화이시며 실재이심...모든 과정 거치시고 [제한된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시고, 제한 받지 않는 몸 가지신] 변형된 그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부활의 날 저녁에(!!) 오셔서 그분의 생명의 호흡을 내쉬어 분배해 주심으로 (그 이후, 구주 믿는 자마다 받게 되는 바, 받아들인 제자에게마다 그를 그분의 상호거처 삼으시고, 그 배에서 그침 없는 생명의 생수의 강들로 흘러나오도록), 약속된 보혜사 성령으로서의 [그들의 생활을 위해, 그분의 생명과 모든 것을 포함한 내주하시는 생명의 그 영 분배해 주시겠다 하신]의 약속 이루심(요14:16-17, 26, 15:26, 16:7--8, 13).....**한편, 행2:1-4의 [아버지의 약속하신 바(눅24:49, 요14:17, 행1:8)], 강하고 세찬 바람과 같은, (아버지 뜻 이룸 위한 , 그리스도의 분배 통한 Q의 거처 이룸 위해, 곧 제자들의 일을 위해 그들 위에  능력으로 임한) 경륜적 성령의 강림과는 다른 형식을 보이셨다....[한가지 주의 !!...그 당시에는 두 가지 단계를 거쳐 분배되셨으나, 지금 구주를 참되게 믿어 영접한 이마다에게,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영 곧 그 영은 이 두 가지 측면을 완전히 함께 가지고 내주하며 역사하심을 기억하라!!]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알아]보고 기뻐하더라

.... 제자들의 기쁨의 이유--새로 태어난 아이(요15:21)인, 부활 안에서 Q의 아들로 나신(행13:33) 부활 주님을 보았기 때문... 또한 5가지 축복을 제자들에게 가져다 주셨다 *1)주님의 임재 *2)주님의 평안 *3)생명의 성령(요20:22) *4)주께서 보내심=전권 대사/사도권 위임(요20:21) *5)주님을 대표함의 [죄사함/대적 굴복케 함의]권위(요20:23) ==> 오순절 경륜적 성령 부어지심 이후 참되게 믿는이들에게 있어서는 그 영의 두 측면(호흡과 바람)을 동시에 이루어지게 하시며, 이것은 몸의 건축(한 새 사람)  + 신부됨 + 전사됨에 필수적임....((그러므로 다른이의 특별한 체험과 비교하려 말고 앙망하면서 주님의 원하시는 때에 주께서 알게 해 주시도록 맡겨드리고 오직 그분의 움직이심따라 순종-복종함에만 집중하라...반드시 임마누엘 주님 내주-동행하심에 대한 확증 주시리니!!))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 요15장 아포스텔로, 엑스아포스텔로 참조).제자들의 생명이자 모든 것 되시는 그분 자신과 함께 제자들을 보내심(요17:18)...이 선포의 말씀 직후 숨을 내쉬면서 그분의 성령을 그들 안에 영원히 내주하시도록(요14:16, 17) 그들 안으로 불어 넣으심으로써 제자들이 보내어지는 곳마다 그들과 하나되어 함께 계시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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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20:22...바-아하리 다바리 조트 바이-페흐 베하마 바이-아마르 엘레헴 카후 라켐 에트-루하 하카도쉬] ===곧 이어, 그후에 그 입을 열어 말씀하심으로써... Q의 속성 운행하심으로써 조성되게 하고 계심이요, Q으로서 말씀하사, Q생명 호흡의 거처 삼으시는바, 창1:1,2절 그대로 JC의 말씀하심을 받음으로써 생명호흡의 거처됨 이룸 통해, 그토록 열망하시는바 부활생명의 영께서 거하는 참제자, 공급하심 그대로 수용/적용-조성된 엘로힘 판박이/짝 이루는바 그의 영 안에 Q의 모든 속성 그대로 들어있는, .....지성소된 성도 됨 이루고 계셨다 

----바-아하리<바브, 알렙-헤이트-레이시-요드...곧 이어, 그후에> 다바리<달렛-베이트-레이시-바브(상)..::: ㄱ 입을 열어 말씀하시기를....Q과의 연합에 필요한바 참진리-영, 곧 말씀 받음 인해 감동-하나됨 이루시는바 성령 감동>  조트<자인-알렙-타브 : Q의 속성 운행하심으로써 조성되게 하고 계심> 바이(창1:1,2)-페흐<Q으로서 입을 열어 말씀하사> 베-하마<Q생명 호흡의 거처 삼으신바> 바이-아마르 엘레헴<엘레-요드-헤이-멤, 창1:1,2절 그대로 JC의 말씀하심을 받음으로써 생명호흡의 거처됨 이루며> 카후<그토록 열망하시는바 부활생명의 영께서 거함> 라켐<참제자, 공급하심 그대로 수용/적용-조성된 엘로힘 판박이/짝 이룬> 에트-루하<그의 영 안에 Q의 모든 속성 그대로 들어있는바> 하-카도쉬<=지성소된 성도 됨 이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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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20:23...바-하야 콜-아쉬르 타-쌀라후 라-하타탐 바-누쌀라흐 라헴 바-아쉬르 타-이쉬무] 

=== 여호와의 생명 호흡 받은, .판박이 참제자 ...창1:1,2 그대로 이룬, 진리말씀을 참되게 알며(믿고-살고-누림)-살며-그대로 되어가는바 진복의 사람이니...Q이 친히 당신으로 충만히 채워 충만케 하심 인해 상태가 완전히 바뀐 참생명의 사람 됨..즉, 신진대사적 변화 통해 과오마다 지속적으로 제거해버리심으로써, 생명 측정 통해 참된 건축 위해 생명말씀 공급하사, 그 생명으로 알렙에까지 이르도록 거처/그릇 만들고 계심..Q의 참생명으로 측정하여 말씀공급 통해 부활생명 그릇 만들고 계심...그 진리 말씀을 실지로 호흡하는 그릇/마음-지성소/바다 됨....아버지의 모든 것 부으심 통해 창1장 그대로 영혼을 조성하고 계심 ....참 인성 가진 영, 그분의 영과 하나 이루는 그릇 조성 사역 완성하심이었다  

 

....바-하야<바브, 헤이-요드-헤이...여호와의 생명 호흡> 콜<카프-라멛. .판박이 참제자>-아쉬르<알렙-쉰-레이시...창1:1,2 그대로 이룬, 진리말씀을 참되게 알며(믿고-살고-누림)-살며-그대로 되어가는바 진복의 사람이니> 타-쌀라후<타브, 싸멕-라멛헤이트-바브(중)...Q이 친히 당신으로 충만히 채워 충만케 하심 인해 상태가 완전히 바뀐 참생명의 사람 됨..즉, 신진대사적 변화 통해 과오마다 지속적으로 제거해버리심으로써> 라-하타탐<라멛-헤이트-테이트-알렙-타브-멤...측정 통해 참된 건축 위해 생명말씀 공급하사, 그 생명으로 알렙에까지 이르도록 거처/그릇 만들고 계심..**라하타-예방/치유..**하타트-이미 속죄제 JC 십자가 통해 친히 :대가를 다 지불하신바 (구원의 은혜로 내주하심 통해 매순간마다 참빛비췸-Q속성 그대로 담긴바 진리말씀 공급 통해, 동시에 무궁한 헤세드 그대로 적용하심-친히 낳으신 자녀로서 긍휼(라함)/자비(라홈) 적용하시기에!! 잘못마다 캐묻지 않고 그냥 간과하심/그 어떤것이라도 씻어주고 풀어주심<용납/해방하고 "메라헤페트" 그대로 품어 주사 엘로힘 만들어 가고 계심..창1:2>을 의미> 바-누쌀라흐<바브, 눈-싸멕-라멛-헤이트...Q의 참생명으로 측정하여 말씀공급 통해 부활생명 그릇 만들고 계심> 라헴<그 진리 말씀을 실지로 호흡하는 그릇/마음-지성소/바다 됨> 바-아쉬르<바브, 알렙-쉰-레이시...아버지의 모든 것 부으심 통해 창1장 그대로 영혼을 조성하고 계심> 타-이쉬무[<타브-알렙-쉰-요드-멤-바브(중)...요드-멤 = 서쪽 = 지성소 = 참 인성 가진 영, 그분의 영과 하나 이루는 그릇 조성 사역 완성  *이쉬 = 불 말씀 진리 빛...**이스라엘 국기 삼각형 = 이쉬(불), 역삼각형 = 얌(물) = 지성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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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람바노)  

:: 모든 과정 거치신 부활 예수께서 그분의 영, HS을 참되게 믿는 이마다에게 분배하여 주심 통해 영원히 내주하여 사시며 인도하신다. 이때 진실로 중요한 깨달음은, 주 영께서 믿는이의 주권자 참 주인-왕-머리-남편으로서 사시며 자유로이 행하시도록 거듭난 자마다 더더욱 그리할 바, 자기 부인-자기 십자가 짐-자길 내려 놓고 비워 내어드림의 전적인 순종 통해서만 그분의 충만 안에서 그분의 원하시는, 기뻐하시는 뜻 이루실 수 있으시다는 것....

@@[성령을 받으라..요20:22]....취하다 take, 받다 receive....lambavnw(2983, 람바노) ...람바노 또한 전심으로 섬겨 순종 동행하며 따를 바 주인으로 보내시는 그분 자신이시니, 이 역시 날마다 그분 자신을 한층 더 새롭게 공급하심인 바 "제2의 라카(라카흐::이미 주님것으로 보좌로 주께 취함 받고 보냄 받은바..그의 영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부활 생명 샘 분배 공급이심), 곧 제2의 데코마이"다....이에 반해,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불의 혀 같이 갈리져서 하나씩 제자들 위에 임하심은 "그리스도로 옷입음" 이니, 곧 Q의 영원한 경륜의 갈망 이룰 경륜적 증인으로서 부활하신 구속주 JC를 살아내며 증거하여 전파하기 위한 온전-완전한 모든 구비 능력(=코아흐=뒤나미스)+완전한 방패-안식처/피난처/보호-지킴/요새-산성-성채-영원반석이신 주 품에 안아주심의 이중적 능력이니, 곧 시공 초월한 영광의 임재 그 자체이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람바노는 '취하다'라는 기본적인 의미로부터 다음과 같은 의리를 지닌다.

(a)  이 단어는 능동적인 의미로 ① '자신에게로 취하다, 받다, 수집하다' ② '붙잡다'를 의미한다.

(b)  이 단어는 또한 보다 수동적으로 '얻다, 획득하다'를 의미한다. (c)  중간태로는 '어떤 물건이나 사람을 붙들거나 잡다'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람바노는 70인역본에서 주로 히브리어 라카흐의 역어로, 그리고 나사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람바노는 70인역본에서 '취하다'는 의미에서 '검을 들다'(창 34:25), '아내로 삼다'(창 4:19)를 나타내며, '받다'는 의미에서 뇌물의 취하다(삼하 8:3), '직책이나 상을 받다'(시 109:8; 잠 11:21)를 나타낸다.

람바노는 '생명을 취하다'(죽이다)(Bar. 2:17), '인구조사를 하다'(민 3:40), '(노래를) 시작하다'(시 80:2), '죄의식을 가지다'(레 16:22; 참조: 겔 14:10; 겔 18:19이하)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람바노는 신약성경에서 258회 나오며, 마태복음에 53회, 요한복음에 46회 요한계시록에 23회, 바울서신에 34회 사용되었다.

(a)  람바노의 (a)의 의미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막 10:38),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요 3:11), 예수님께서 보내신 자들(요 13:20)이나 예수님 자신을 영접하는 것(요 1:12),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아내는 것(히 7:8) 등과 같은 문맥 안에서 나타난다.

(b)  람바노의 (b)의 의미는 신학적 구절들에서 현저히 나타난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한 것을 담당하시고(마 8:17),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시며(계 5:12), 예수님도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없다(참조: 고전 4:7; 벧후 1:17). 믿는 자는 하나님의 성령을 받으며(요 7:39; 행 10:47) 성령의 은사들을 받는다(벧전 4:10). 그들은 믿음으로 성령을 받으며(갈 3:2), 선물로서 받는다(참조: 롬 1:5). 신자들은 참으로 지상의 것들까지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으며(딤전 4:4), 그들이 받을 수 있도록 구하라는 요청을 받기도 한다(요 16:24). 내세에는 썪지 아니할 생명의 면류관이 있는데, 신자들은 이것도 또한 받을 것이다(고전 9:25). 받는 것은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지만(고전 4:7), 복음을 받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 자신께로부터 받는 것이다(갈 1:12).(참조: G. Delling;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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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만함을 받고..행2:4] ...가득차다, 충만하다.....plhvqw(4130, 플레도) 

동사 플레도는 핌플레미(pivmprhmi: 완전히 채우다)의 한 어형이며, '가득차다, 충만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다.

(a)  가득하다, 마 22:10; 눅 4:28; 눅 6:11; 행 5:17; 행 13:45. (b)  머금게 하다, 마 27:48. (c)  충만함을 입다, 눅 1:15; 눅 1:41; 눅 1:67. (d)  다 되다, 눅 1:23. (e)  차다, 눅 1:57; 눅 2:6; 눅 2:22. (f)  되다, 눅 2:21. (g)  채우다 눅 5:7. (h)  머금다, 요 19:29. (i)  충만함을 받다, 행 2:4. (j)  충만하다, 행 4:8; 행 4:31; 행 13:9. (k)  충만케 하다, 행 9:17.

(l)  기타, 눅 5:26; 행 3:10; 행 19:29.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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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기에 그 람바노의 사람을<데코마이-δέχομαι>함은 곧 람바노의 축복 , 그 실제이신 JC를 영접함의 입구에 선 것임..

[마10:40......("람바노"를 통해 JC를 주와 하나님으로 영접한, 람바노의 사람인) 너희를 영접하는(=데코마이) 자는 나를(JC)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아버지) 영접하는 것이니라]

[요13:20...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람바노)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요1:12...영접하는(=람바노)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영접하다의 헬라어는 <데코마이δέχομαι>... 환영하다 받아들이다의 뜻 ..Receive와 Welcome의 의미 ... 아무 생각없이 단순히 받는 것이 아닌 인격적으로 받아 들이는 것 ....아무것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받아들임이 아니라 분명한 믿음과 신뢰를 기반으로 새로운 관계가 맺어 지는 것을 의미.... 일순간의 만남이 아닌 지속성을 뜻하며 더욱더 성장-성숙으로 연결 될 것을 뜻하고 있다 

.....<데코마이δέχομαι>는 인내하며 참다의 의미가 추가적으로 있으니, 인내 할 수 있는 목적이 분명히 있기때문에,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기로 결단하여 영접하며 받아 들였던 인격적인 관계 때문에 그러하다.

.....또한 <데코마이δέχομαι>는 앞으로 나아가다의 의미가 있으니,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닌 인격적 측면과 관계에서 상호간에 전진-발전-성장-성숙이 당연히 뒤따르는 것, 곧 그 관계적 생명이 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합니

 <데코마이δέχομαι>는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이니...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삶에 받아 들이는 것,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 하나님을 생명의 능력으로 받아 들이는 것,  온 마음을 다해서 받아 들이는 것,  인생의 주님으로 모시는 것을 의미한다......<데코마이δέχομαι>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는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먼저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믿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믿는 것이 그 은혜의 시작인 것이다

성령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람바노-ἔλαβον>했기에 누리는 축복!

[마10:40... 너희를 영접하는(=데코마이)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요1:12...영접하는(=람바노)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눅9:48....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데코마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  

......영접하다의 헬라어는 <람바노ἔλαβον>....온 마음을 다해서 취하다 받아들이다 + 받아 들이고 꼭 붙잡다의 뜻이 있다 ......입술로만의 영접이 아닌 온 마음과 뜻을 다해서 받아 들이는 인격적인 영접을 의미 + 그리고 절대로 빼앗기지 않으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  그 가치를 알기에 그 손을 놓지 않는 것이다

.....<람바노ἔλαβον>는 받아 들일 때 그 진정한 가치를 이미 알고 있는 것, 인생의 전환점이 될 것을 믿는 것이니, 유일무이한 절대자를 주변에 두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마음 중심에 두는 것이다 <람바노ἔλαβον>는 <내>힘으로 살 수 없는 것을 깊이 깨달을 때라야 가능함을 의미한다 ---주 앞에 선 유한한 존재로서 홀로설 수 없는 자신의 전적인 무지무능무력무가지함을 깊이 자각한 후리야, 가장 처절한 좌절, 즉  인생의 모든 것이 <내>힘으로 결코 안되는 것을 깊이 깨닫고나서라야 마음을 열게 될 것인데,  바로 그때 성령께서 그 마음에 빛을 비춰 주실 것이요, 마음에 따뜻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내>가 아닌 <내>게 손을 내미시는 절대자를 깊이 만나기 때문이다  ---<람바노ἔλαβον>는 입술의 고백부터 달라지기 시작할 것,  절대자에 대한 사랑의 고백 그리고 삶의 중심에 주님으로 모시려고 할 것인데.. 이 모든 것이 성령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이러한 영혼은 마음이 열려 있을 것, <나>보다 주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살펴 보려고 할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사는 삶은  <람바노ἔλαβον> 곧 영접에서 시작하게 되는 것이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데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는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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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주 이름과 마음-심정따라, 중재-중보함, 거기에 더하여 (가득케 하신 평강 따라) 주 이름으로]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 TUQ의 이름으로 보냄받은 사명자마다 그 임무/사명 수행에 있어서, [특별히] JC이름으로 죄사함과 자유함의 권세 베풂에 있어서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서, 그리고 상호간에) 회개와 용서가 그 무엇보다 최우선순위가 됨.....죽으시기전 임재/현존은 육체적 가시적이었고, 부활 후 그분의 임재는 비가시적이었으나, 부활의 저녁에 가시적 임재 현존의 모습을 나타내고 계심....그후 떠나심 여부에 대한 기록이 없음은, 평상시 그분의 임재는 비가시적 임재임을 암시함과 동시에 [그리스도인마다,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마음의 청결함 안에서 중심을 열어 주 이름 부름으로써 그 임재 체험이 가능케 하셨는데] 영역과 차원을 초월하시는 그 영 앞에서 그분의 비가시적 임재 누림 연습이 필요함을 시사...그 이유는 비가시적 임재는 가시적 임재보다 더 유용-우월-고귀-풍성-실재적이기 때문임.

===도마가 의심하다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글로바와 다른 제자가 다락방에 복귀하여 도착했을 때는 11제자가 거기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분명히 거기에 있었지만, 주님 방문때에는 자리를 비웠었다!! ---[눅24:33] *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33.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 (진정한 참 믿음의 의미를, 알고 있다 해도 적용하기를 거절함의, 전형적인 실증주의적 태도를 고집함) 

.... 더 이상 다른 제자들은 꾸짖거나 책망하거나 억지로 강요하지 않고 용납함으로써 (침묵으로, 주님 일하심을 기대하며) 기다려 주고 있다.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참 믿음이란, 지금 말씀하고 계시는 분이 진정 누구신지를 깨닫고, 그 말씀과 그분 안으로 믿어들어가서 그분과 그분의 말씀을 생명과 인격 삼아 하나되어 누림이다.

::이제는, 주로 비가시적 임재로 <믿는 이들마다 믿음을 발휘함 통해 앙망할 때마다 그 어디에서나 그분을 알고 교통할  수 있도록, 환경-상황-조건을 초월한 믿음을 발휘함 통해 교통-누림-동행-인도 가능한,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계시는 영생의 주님임을 알게 하신다!!

===이 책을 기록한 목적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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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20  Amplified Bible  

==The Empty Tomb

1 Now on the first day of the week Mary Magdalene came to the tomb early, while it was still dark, and saw the stone [already] removed from the [groove across the entrance of the] tomb. 

2 So she ran and went to Simon Peter and to the [a]other disciple (John), whom Jesus loved (esteemed), and said to them, “They have taken away the Lord out of the tomb, and [b]we do not know where they have laid Him!” 

3 So Peter and the other disciple left, and they were going to the tomb. 

4 And the two were running together, but the other disciple outran Peter and arrived at the tomb first. 

5 Stooping down and looking in, he saw the linen [c]wrappings [neatly] lying there; but he did not go in. 

6 Then Simon Peter came up, following him, and went into the tomb and saw the linen wrappings [neatly] lying there; 

7 and the [burial] [d]face-cloth which had been on Jesus’ head, not lying with the [other] linen wrappings, but [e]rolled up in a place by itself. 

8 So the other disciple, who had reached the tomb first, went in too; and he saw [the wrappings and the face-cloth] and [f]believed [without any doubt that Jesus had risen from the dead]. 

9 For as yet they did not understand the Scripture, that He must rise from the dead. 

10 Then the disciples went back again to their own homes.

11 But Mary [who had returned] was standing outside the tomb sobbing; and so, as she wept, she stooped down and looked into the tomb; 

12 and she saw two angels in white sitting there, one at the head and one at the feet, where the body of Jesus had lain. 

13 And they said to her, “Woman, why are you crying?” She told them, “Because they have taken away my Lord, and I do not know where they have laid Him.” 

14 After saying this, she turned around and saw Jesus standing there, but she did not know that it was Jesus. 

15 Jesus said to her, “Woman, why are you crying? For whom are you looking?” Supposing that He was the gardener, she replied, “Sir, if you are the one who has carried Him away from here, tell me where you have put Him, and I will take Him away.” 

16 Jesus said to her, “Mary!” She turned and said to Him in [g]Hebrew, “Rabboni!” (which means, Teacher). 

17 Jesus said to her, “[h]Do not hold Me, for I have not yet ascended to the Father; but go to My brothers and tell them, ‘I am ascending to My Father and your Father, and to My God and your God.’” 

18 Mary Magdalene came, reporting to the disciples that she had seen the Lord and that He had said these things to her.

==Jesus among His Disciples

19 So when it was evening on that same day, the first day of the week, though the disciples were [meeting] behind barred doors for fear of the Jews, Jesus came and stood among them, and said, “[i]Peace to you.” 

20 After He said this, He showed them His hands and His side. When the disciples saw the Lord, they were filled with great joy. 

21 Then Jesus said to them again, “Peace to you; as the Father has sent Me, I also send you [as My representatives].” 

22 And when He said this, He breathed on them and said to them, “Receive the Holy Spirit. 

23 If you forgive the sins of anyone they are forgiven [because of their faith]; if you retain the sins of anyone, they are retained [and remain unforgiven because of their unbelief].”

24 But Thomas, one of the twelve [disciples], who was called Didymus (the twin), was not with them when Jesus came. 

25 So the other disciples kept telling him, “We have seen the Lord!” But he said to them, “Unless I see in His hands the marks of the nails, and put my finger into the nail prints, and put my hand into His side, I will never believe.”

26 Eight days later His disciples were again inside the house, and Thomas was with them. Jesus came, though the doors had been barred, and stood among them and said, “Peace to you.” 

27 Then He said to Thomas, “Reach here with your finger, and see My hands; and put out your hand and place it in My side. Do not be unbelieving, but [stop doubting and] believe.” 

28 Thomas answered Him, “My Lord and my God!” 

29 Jesus said to him, “Because you have seen Me, do you now believe? Blessed [happy, spiritually secure, and favored by God] are they who did not see [Me] and yet believed [in Me].”

==Purpose of Writing this Gospel

30 There are also many other signs (attesting miracles) that Jesus performed in the presence of the disciples, which are not written in this book; 

31 but these have been written so that you may believe [with a deep, abiding trust] that Jesus is the Christ (the Messiah, the Anointed), the Son of God; and that by believing [and trusting in and relying on Him] you may have life in His name.

==Footnotes

John 20:2 See note 19:26.

John 20:2 This indicates others were also present.

John 20:5 Removing the burial wrappings and spices from a dead, decaying body would have been not only extremely difficult (if not impossible), but overwhelmingly nauseating. If a tomb robber had even attempted such a thing, the tomb would have been left in shambles. It would make no sense for a tomb robber to remove a dead body from the wrappings before stealing it.

John 20:7 The word used here, soudarion, is taken from Latin (sudarium), where it refers to a linen handkerchief (cf Acts 19:12) or large linen napkin. This suggests something of the dimensions of the cloth, which was probably a new, unused piece of material.

John 20:7 Jesus either caused the tight linen wrappings to fall from His body miraculously or His resurrected body miraculously passed through the linen wrappings, leaving them just as they were where He was lying (except for the face-cloth), unlike Lazarus who emerged from the tomb and had to be released from the wrappings. In either case, the grave wrappings would collapse on themselves on the flat surface of the slab where His body had been placed. The text also indicates that Jesus may have removed the face-cloth Himself once His hands were free, and neatly placed it apart from the other wrappings.

John 20:8 John, the “other disciple,” knew immediately that no one could have fabricated the sight before him: (1) no one could have surreptitiously removed the stone covering the entrance (cf Matt 28:2), even if the guards assigned to the tomb had fallen asleep, as they were later paid to say by the chief priests (Matt 28:13); (2) removing the grave clothes from a dead body in a dark tomb in the middle of the night made no sense (cf note v 5); (3) stealing Jesus’ body would have accomplished nothing. The disciples’ reaction of disbelief when told of His resurrection implies they were neither expecting nor prepared for this miraculous event (cf Matt 28:16, 17; Mark 16:8-14; Luke 24:6-11). The actual resurrection of a living, flesh-and-bone Jesus gave the disciples the courage to begin proclaiming anew the message of salvation, and provided the strength for them to face both great personal suffering and martyrdom for their faith.

John 20:16 I.e. Jewish Aramaic.

John 20:17 In her joy Mary had probably reverently embraced Jesus at the knees or ankles.

John 20:19 A normal Hebrew gree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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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장 (개요)

본 복음서 기자는 서두를 다른 복음서의 서두와 같게 시작하지는 않으셨지만 끝 부분은 그들과 같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歷史)로 종결짓고 있다. 

그렇다고 그가 부활 사건 자체를 기록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가 부활하시는 모습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부활의 증거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또 이 증거들이 그가 부활하셨음을 우리에게 확실히 나타내 준다. 

우리가 본장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들은 다음과 같다.

Ⅰ. 묘지에서 직접 발견할 수 있었던 증거들.

1. 묘지가 비어 있었고 수의가 정리되어 있었다는 점(1-10).

2. 두 천사가 묘지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난 점(11-13).

3. 그리스도가 직접 그녀에게 나타난 사실(14-18).

Ⅱ. 후에 사도들의 모임 가운데서 발생된 증거들.

1. 부활하신 같은 날 저녁 도마만이 자리에 없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타내셨다(19-25).

2. 다른 한 번은 도마가 제자들과 같이 있던 팔일째 되는 저녁에 자신을 나타내셨다(26-31). 

---본문에 기록되고 있는 내용들은 대부분 다른 복음서 기자들이 기록하지 않은 부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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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1)(요 20:1-10)

사도들은 주님의 부활에 대한 본질적 증거를 제시하는 일에 가장 큰 관심을 가졌다.

1. 그 이유는 예수 자신이 그의 메시야 되심이 최종적이고 가장 설득력있는 증거로 호소하셨기 때문이었다. 

다른 기적들을 믿지 않으려는 자들에게 주님은 요나 선지자의 표적을 말씀해 주셨다. 

예수의 적들은 요나의 기적이 곧 예수가 자기의 부활을 말하려고 한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가 부활한다면 그들은 살인자가 될 뿐만 아니라 메시야의 살인자들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요나의 기적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지는 것을 저지하려고 애를 썼다.

2. 그 이유는 우리의 구속과 구원을 위한 그의 사업의 수행이 이 부활에 그 결과가 의존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가 자기 생명을 대속물로 주기만 하고 다시 그것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그의 생명을 드림이 만족스럽게 받아들여진 것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그가 우리의 빚 때문에 갇히셔서 그대로 거기 머물러 계신다면 우리에게는 절망밖에 없는 것이다(고전 15:17).

3. 그 이유는 그가 부활하신 후 자신의 산 모습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내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행 10:40, 41). 

우리의 욕심대로라면 "예수의 치욕적인 죽음은 알려지지 말고 그의 영광스러운 부활은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같지 아니하셨다. 하나님은 예수의 죽음을 대낮에 공개적으로 이루어지게 하셨다. 

그러자 태양이 이 사실을 부끄러워하여 얼굴을 감추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활은 그의 특별한 몇 친구들만에게 증거가 제시되었다. 

그리고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에게 복이 되기 위하여 몇몇 증거자들에 의하여 세상에 전파되도록 정해졌던 것이다. 

부활에 대한 증거의 성격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규례를 경건하게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만족함을 주지만 불신 가운데서 무지하고, 오만한 그대로 머물러 있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별 신통성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마련인 것이다. 

부활의 증거가 시련을 극복한 사람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정당한 일인 것이다.

우리는 본문의 내용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를 향한 첫걸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묘지가 빈 채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가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고 천사들이 말하였던 것이다(마 28:6). 

만일 그가 무덤에 계시지 않았다면 파수군들이 그의 시체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에게 말해야 할 것이며, 아니면 그가 부활하셨다는 결론밖에 내릴 수 없는 것이다.

Ⅰ. 막달라 마리아는 묘지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발견하였다. 

---본서의 기자는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갔던 다른 여인들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아니한다. 다만 막달라 마리아에 대하여서만 언급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여인이 묘지를 방문하는 일에 가장 능동적이고 솔선적이었고 그리고 그녀에게서 가장 큰 사랑을 찾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그녀를 위하여 행한 아름다운 일을 생각하여 정당한 이유 때문에 불붙은 것이었다. 

많은 용서를 받았으므로 그녀는 또한 많이 사랑하였다. 그녀는 그가 살아 계신 동안도 그에게 애정을 쏟았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에 경청하였으며 자기의 재산을 드려 그리스도를 섬겼다(눅 8:2, 3). 

그녀가 예루살렘에 거하였던 것은 다른 용무가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주님을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당시는 여인들이 절기에 참여할 의무는 없었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라간 것처럼(왕하 2:1) 아마 그녀와 다른 여자들도 예수를 계속 따라 다녔던 것 같다. 

이 여인들은 주님이 곧 "죽으실" 것을 알고 더욱 그를 가까이서 따라 다녔다. 

---그녀의 사랑의 신실성은 그녀가 그의 죽는 자리에서 또 그의 죽으신 후에도 계속 그에게 보인 경의를 통하여서 증명되는 것이다. 

그녀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죽음" 곧 십자가의 죽음 만큼이나 "강하였다." 왜냐하면 그녀의 사랑이 십자가 곁을 지켰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사랑은 "무덤 만큼이나"무서웠다. 왜냐하면 그 사랑이 그녀로 무덤을 방문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무덤의 공포가 그녀의 무덤 방문을 막지는 못하였기 때문이다.

1. 그녀는 그녀의 눈물로 주님의 시신을 씻기 위하여 "묘지에 갔다." 

---이는 그녀가 "무덤에 가서 울었고" " 시체에 향료를 넣어 주기 위하여" 향품을 준비하여 갔다는 사실을 보아 알 수 있다. 

무덤이란 사람들이 방문할 마음이 내키지 않는 집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라야 생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주검까지도 사랑하도록 한 막달라 마리아의 그에 대한 사랑은 특별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랑을 연약하고 소심한 여성이 지녔다는 것은 특별히 놀랄 만한 것이었다. 

"돌을 굴려 버릴" 충분한 힘도 없었던 그녀가 어떻게 무덤에 들어가려는 마음을 먹을 수 있었을까? 

유대인들의 신앙에 의하면 필요 이상으로 무덤이나 시체들을 만지는 것은 금지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묘지를 방문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서나 제자들에게 있어서나 "그를 훔쳐 내려고" 한다는 혐의를 받을 각오를 해야 할 일이었다. 

이런 정황에 그녀가 주님에게 무슨 봉사를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녀의 사랑은 이것들을 해냈다. 수천 가지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아무런 유익을 드릴 수 없는 정황에서도 그에게 영예를 돌릴 방법을 연구해야만 한다.

(2)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죽음과 묘지에 대한 공포도 벗어나게 해 준다는 사실이다. 

.....음침한 골짜기를 거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에게 갈 수 없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우리가 그를 사랑하면 "해받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게" 될 것이다.

2. 그녀는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무덤에 갔다. 

그녀가 빨리 무덤에 갔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을 통해서 찾아 볼 수 있다.

(1) 그녀는 안식일이 지나간 직후인 "주간 첫날에" 무덤에 갔다. 

.....그녀가 간 것은 "곡식을 팔려거나 밀을 내려고" 해서가 아니라 무덤을 찾기 위해서였다(암 8:5).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사람들은 그들이 그를 존경하는지 시험해 볼 기회를 한 번 가져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날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최초 안식일이었다. 그리고 이 안식일은 그리스도를 찾아 갔던 한 여인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녀는 전 날은 창조의 과업을 기념하는 일을 위하여 보냈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날 쉬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구원의 과업을 찾는 일에 나섰다. 

그러므로 그녀는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그리스도를 방문한 것이다.

(2) 그녀는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무덤에 당도하였다. 

.....이 말은 그녀가 집에서 상당히 일찍이 출발하였음을 나타내 준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하여 그를 찾는 사람들은 일찍이 그를 찾아야만 한다!!.

① 단잠을 좀 설치는 한이 있더라도 그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하도록 하자. 

.....그를 놓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일찍이 일어나 그를 찾도록 하자.

② 그를 부지런하게 찾도록 하자.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데는 우리 자신이나 자신의 휴식까지도 부정할 수 있어야만 한다.

③ 늦기 전에 그를 찾도록 하자. 

.....전 생애에서도 될 수 있는 대로 일찍이 또 하루하루의 삶에서도 일찍이 그를 찾도록 하자. "너희가 아침에 나의 음성을 들을 것이라"는 말씀이 있다. 

한 날을 이렇게 시작한다면 보다 아름답게 그 날이 끝날 수 있으리라.

" 아직 어두울 때에도" 그리스도를 부지런히 찾는 사람들은 그에 관한 깨달음을 얻을 것이며 더욱 밝게 그를 깨달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3. 그녀는 돌이 치워진 것을 발견하였다. 

.....그녀는 그 돌이 "묘지 입구에서 멀리 굴러 가 있는 것을" 보았다.

(1) 그녀는 이러한 경우를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광경은 그녀에게 대단히 놀라움을 주었다.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인생의 샘이다. 그의 무덤은 또한 구원의 우물이다. 

만일, 우리가 신앙으로 이 무덤을 찾으면 비록 육적 마음을 지닌 자들에게 그것은 닺혀진 샘으로 보일지 모르나 우리는(창 29:10 의 경우처럼) 돌이 굴러간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또 자유롭게 출입하며 그 샘을 통한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일찍이 그를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놀랄 만한 위로가 자주 주어지게 된다.

(2) 돌이 굴러간 것은 영광스러운 발견의 서막이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주님이 부활하신 것을 깨닫지 못했지만 결국 이 사실을 알았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①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따르고 그를 찾는데 부지런한 사람들은 누구나 다 신의 은총을 제일 처음으로 또 달콤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치욕 중에 계신 그리스도를 최후까지 따른 막달라 마리아가 또한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를 최초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을 기억하자.

② 하나님은 보통 점진적으로 자신과 그의 위로를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다는 사실을 가억하자. 

.....또한 그는 점진적으로 우리의 기대감을 불러 일으키시며 주님에 대한 우리의 궁금증을 소생시켜 주신다.

Ⅱ. 그녀는 돌이 굴러간 것을 발견하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서둘러 달려갔다. 

.....그들은 아마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마을 변두리에 거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그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고 뛰어간 것이다. 

그녀는 "저희가 주님이 아름다운 묘지에 묻힌 영광을 시기하여 주로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우리가 그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해야 하는데 그를 어디서 찾을지 알 수가 없다"고 말하였다. 본문에서 아래의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1. 현재의 사태에 대하여 마리아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 

---그녀는 돌이 굴러간 것과 무덤을 들여다 보고 그것이 빈 것을 발견하였다. 

우리는 처음 이 광경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틀림 없이 주님이 살아나셨구나"라고 생각하였으리라고 기대할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그녀는 그리스도가 죽으셨을 때 비로소 그의 말이 성취된 것을 깨달았다) 그들에게 말씀할 때는 언제나 그는 이어서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실 것도" 추가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녀가 묘지로 오고 있던 중 또는 오려고 준비하고 있는 중에 일어났을 때 진동을 느끼지 못했을까? 

그리고 지금 무덤이 빈 것을 보고도 부활하셨으리라는 생각이 안들었을까? 아니 그래 상상이나 의문도 느끼지 못했단 말인가? 

아마도 그녀는 옮겨 놓기에는 너무나 먼 거리에 돌이 옮겨진 것을 보고 기이한 해석을 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불행한 날"에 취한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 보게 될 때 자신의 어리석음과 건망증에 놀라게 될 것이다.

" 이렇게 명백한 해결이 있는데 그때는 그 생각을 어째서 못했지?" "막상 문제에 부딪치니 그래 그렇게 당황하게 된단 말인가"라고 자문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그들이 주님을 가져간 것 같다"고 말하였다. 즉 대제사장들이 그를 더 나쁜 장소로 옮기느라고 가져갔든지 혹은 요셉과 니고데모가 유대인들의 악의에서 그의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를 가져 갔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시신이 없어졌다는 것은 그녀에게 당황함과 불안감을 안겨 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그녀는 의심하였다. 그렇지만 반면에 그녀가 이 현실을 바르게 이해하였더라면 이 이상 더 기쁜 일도 없었으리라. 

약한 신자들은 사실은 소망의 근거가 되며 기쁨이 되는 일을 불평스러운 것으로 여기기를 잘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는 이런 저런 이 세상적 위로가 상실당했다고 울부짖는다. 그리고 어떻게 그것들을 회복할지는 알지 못한다. 

때로 우리가 그 때문에 탄식하는 세상적 위로의 빼앗김이 우리의 영적 위로를 소생시키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시 이 일에도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2. 그녀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이 일을 알린 사실을 살펴 보자. 

---그녀는 혼자서는 이 슬픔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 일을 그녀의 친구들에게 알린다. 

슬픔을 서로 고하는 것 이것은 성도들의 사귐을 증진시키는 좋은 방법임을 기억하자. 

.....베드로는 그의 주님을 부인하기는 하였지만, 주님의 친구들을 버리지는 않았다. 이 사실에 의해 그의 회개의 진실됨이 나타난다. 

그는 예수께서 사랑하던 제자들과 합세하였다. 그리고 베드로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전처럼 그와 사귐을 계속한 것은 우리에게 연약한 영혼 때문의 잘못을 가르쳐 준다. 하나님께서 저희가 회개할 때 저희를 용납하셨다면 어째서 우리는 용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Ⅲ. 베드로와 요한은 전해진 사실의 진실성을 확인하고 또 무슨 다른 사실을 발견이라도 할 수 있을까 하여 무덤으로 전력을 다해 달려갔다(3,4절). 

---어떤 이들은 이 소식이 전해졌을 때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를 저희들은 누가복음 24장 9절에 "저희가(여자들을 말함)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들에게 고하였다"는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막달라 마리아가 오직 베드로와 요한에게만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한다. 

---여하간 제자들 중에 묘지에 간 것는 베드로와 요한뿐이었다.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사랑했던 세 제자들 가운데 두 명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제자의 의무를 더 잘 감당하고 선한 사업을 하기 위하여 고난과 역경을 감당하는 사람들에게 수제자(首弟子)로서의 영예를 부여한다는 것은 잘된 일임을 기억하자.

1. 본문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살펴 보자. 

---마리아가 자신이 경험한 것을 그들에게 말하였을 때 그들은 그녀의 말을 그녀가 말한 대로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가서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자 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씀의 위로와 그로 오는 유익을 전해 줄 때, 그들의 말을 한 번 직접 시험해 보도록 하자. 그리고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지 와서 보자.

2. 우리가 친구들의 염려와 두려움에 같이 참여할 준비가 얼마나 되었는지 살펴 보자. 

---베드로와 요한은 마리아의 근심에 만족할 만한 답변을 주기 위하여 서둘러 묘지로 달려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약하고 소심한 추종자들을 위로하고 돕는 일에서 오는 고통에 대하여 불평해서는 아니 된다.

3. 우리가 선한 사업이나 좋은 임무를 수행하고자 할 때, 서둘러서 일에 착수해야 한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의 안녕이나 또는 당할지도 모르는 위협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할 생각도 아니하고 무조건 묘지로 달려갔다. 

이로써 그들은 자기들의 주님에 대한 열심과 사랑을 나타냈고 또한 촌각도 낭비하지 않으려 하였다. 

우리도 하나님의 계명을 수행하러 갈 때, 이와 같이 달려가야 한다.

4. 선한 사업을 하는데 좋은 동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살펴 보자. 

---아마 이들 제자들중의 누구도 감히 혼자 묘지에 가려고 한 사람은 없었으리라. 그러나 함께 힘을 합하니까 어려움이 없었다(전 4:9 참조).

5. 제자들 가운데서 선한 사업에 다른 사람을 능가하고 뛰어나려고 애쓰는 훌륭한 경쟁을 한 사실을 살펴 보자. 

---요한이 젊기 때문에 베드로보다 앞서 달려갔다는 것을 흉이라고 볼 수는 없다. 각자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리고 나보다 다른 사람들이 잘한다고 부러워할 것도 없고 좀 못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들이 최선을 다한다면 경멸하지도 말자.

(1) 이 경주에서 앞서 달린 사람은 예수께서 특별히 사랑한 제자였다. 

.....그러므로 그도 특별한 방법으로 예수를 사랑하였다.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인식하고 다시 우리 속에 그에 대한 사랑을 불붙이는 것은 우리의 덕성을 계발하는데 유익한 것이다. 그 어느 것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에 대하여 충성하도록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2) 뒤에서 달려온 사람은 베드로였다. 

.....그는 그의 주님을 부인하였고 그 때문에 그는 치욕과 슬픔 속에 잠겨 있게 되었고 이 사실이 그의 몸을 천근처럼 무겁게 하였다. 

이와 같이 죄의식은 우리를 짓밟고 이것이 우리의 하나님을 섬기려는 마음을 막아 버린다. 

양심이 죄로 마비되면 우리는 삶의 근거를 잃어버리게 되고 만다.

Ⅳ. 묘지에 당도한 베드로와 요한은 여러 가지 조사를 해 보지만 거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지 못한다.

1.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가 혼자 갔던 장소 이상 더 나아가지는 않았다.

(1) 그는 호기심을 가지고 무덤을 들여다 보았으나 그것은 비어 있었다. "그는 구부려 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스도를 발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허리를 구부려 <겸손히 몸을 굽혀> 안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즉 겸손한 마음으로 신의 계시의 권위에 복종하고 또 지혜있게 구해야 한다.

(2) 그러나 그는 묘지에 들어갈 용기는 없었다. 

.....온화한 사랑을 지닌 자에게는 흔히 과감성있는 결단이 결여될 때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굳게 서서 싸우는 일은 등한히 하면서 신앙의 경주만을 빨리 달리려고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2. 베드로는 비록 늦게 당도하였지만 용감히 먼저 무덤에 들어갔고 그리하여 요한이 발견한 것보다 더 정확히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6,7절). 

---요한이 그를 앞서 달려갔지만 그렇다고 베드로는 낙심하여 돌아서려고 하였거나 그 자리에 서 있지 아니하였고 힘을 다하여 그를 따라갔다. 

요한이 조심스럽게 묘실을 들여다 보고 있는 동안 그는 당도하여 큰 용기를 내서 "무덤으로 들어갔다."

(1)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용감성과 또 하나님이 그에 은사를 어떻게 다양하게 부어 주시는가를 살펴 보자. 

.....달리는 일은 요한이 베드로 보다 앞섰으나 용기에 있어서는 베드로가 앞섰다.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에 대하여 시적으로 표현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도 용감하다"고 하였는데 이같이 한 사람이 두 가지를 다 갖춘다는 것은 드문 일이다(삼하 1:23). 어떤 제자들은 빠른가 하면 다른 제자들은 용감하다. 

전자가 느린 사람들을 촉진시키는데 유익한 반면, 후자는 소심한 사람들을 담대하게 하는데 유익을 끼친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하나라"는 말씀과 같다. 베드로가 무덤으로 감연히 들어간 사실은 다음의 사실들을 가르쳐 준다.

① 진지하게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근거 없는 걱정이나 "가는 도중에 사자나 없을까 또 무덤가에 귀신이라도 있으면 어떻게 하나"라는 어리석은 환상 때문에 겁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②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은 무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누우셨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무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무덤이란 파멸의 구덩이도 아니요, 그 안에 절대로 죽지 않는 벌레들이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시체를 보거나 무덤 가운데 혼자 있다고 해서 생기기 쉬운 두려움에 빠져들지 말고 그것을 정복해야만 한다. 

오히려 우리도 곧 죽어 무덤에 묻히리라는 것을 생각하며 죽음과 무덤을 우리의 가까운 친구처럼 사귀도록 하자(욥 17:14).

③ 우리는 무덤을 거쳐서 그리스도에게 기꺼이 나아가야만 한다. 

.....그 길을 거쳐서 그리스도는 영광에 이르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삶의 목표인 바!!...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하나님의 모습과 사심을 알 수 없다면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욥 19:25).

(2) 베드로가 묘실에서 발견한 물건들의 상태를 고찰하여 보자.

① 그리스도께서는 거기에 수의를 남겨 두시었다. 

.....그가 무슨 옷을 입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지 우리에게 전해진 것은 없다. 

그러나 그는 유령이 흔히 그러리라고 상상되는 것처럼 수의를 입고 나타나지는 아니하셨다. 그는 그것들을 한쪽 옆에 남겨 놓으셨다.

첫째, 그 이유는 그가 부활하사 다시는 죽으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죽음이 그를 더 이상 지배할 수 없었다(롬 6:9).

나사로는 그의 수의를 걸치고 나왔었다. 왜냐하면 그는 다시 수의를 사용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불사의 생명으로 부활하셨으므로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나오시었다.

둘째, 그 이유는 그가 영광의 옷으로 덧입힘을 얻으려 가시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영광의 옷에 비하면 누더기와 같은 수의를 남겨 두시었다.

하늘의 낙원에서는 지상에서처럼 옷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는 없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승천하던 엘리야선지자도 그의 겉옷을 떨어뜨리고 올라갔던 것이었다.

셋째, 우리가 죄의 죽음에서 의의 생명으로 부활할 때 우리 뒤에다 우리의 수의를 남겨 놓아야 하며 모든 우리의 부패함도 벗어버려야만 한다.

넷째, 그리스도께서는 수의를 우리가 쓸 수 있도록 정돈해서 남겨 놓으셨다. 

.....무덤이 (주님의)생도(성도)들의 침대여야 하므로 주님은 그 침대에 시트를 깔아 놓으셨고 또 성도들을 위하여 그것을 준비해 두시었다. 

그리고 머리를 쌌던 수건은 애곡하는 생존자들마다 "그들의 눈물을 씻게 하시기 위하여" 남겨 두시었다.

② 수의는 잘 정돈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 사실은 사람들이 잠들고 있는 동안 누군가 시체를 훔쳐간 것은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 

무덤을 털어가는 도적들은 옷은 훔쳐가고 시체는 남겨두는 것이 상식적이다. 

더구나 옷이 훌륭한 세마포요 새 것인데 시체는 가져가도 옷은 남겨 둘 도적은 없을 것이다(현대 부활론자들이 이런 주장을 한다)(막 15:46). 

또한 시체를 가져간다고 하여도 알몸이 된 시체를 가져가기 보다 옷이 입혀진 시체를 가지고 가려 할 것이다. 

또한 만일 시체를 훔쳐간 것이 사실이고 그들이 수의를 뒤에 남겨 두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들이 여유만만하게 세마포 옷을 정돈하였으리라고 상상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3) 베드로의 용기가 요한을 어떻게 격려하였는가를 살펴 보자. 

---이제 요한도 들어갈 마음이 생겨서 들어간다(8절). 그리고 그도 "들어가 보고 믿었다." 

믿었다 함은 시체가 없어졌다는 마리아의 말을 (누가 주님의 시신을 가져가 버렸나 봐요!)그대로 믿은 것이 아니라(그가 본 것을 믿은 것은 마리아의 힘이 컸던 것은 사실이다) 아직 그의 믿음이 약하고 흔들렸지만 예수께서 다시 사셨다는 것을 (어슴푸레나마)믿기 시작하였다.

① 요한은 용기를 내서 베드로를 따라 들어간다. 

만일 베드로가 먼저 무덤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가 묘실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는 못하였을 것처럼 여겨진다. 

.....다른 사람들의 용기에 힘입어 자기도 선한 사업을 하는 일에 용기를 얻는다는 것은 좋은 일임을 기억하자. 

다른 사람들의 결단과 용기를 보고 장애와 위험에 대한 공포를 벗어버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요한의 재빠름이 베드로를 더 빨리 달리게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의 담대함이 요한으로 담대하게 하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두 명은 각자 한 가지만을 수행하는데 그쳤으리라. 베드로에게는 최근 배반자라는 낙인이 찍혀졌고 요한은 베드로와 보조를 같이 하였을 뿐만 아니라 베드로의 뒤를 따르는 것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② 그렇지만 요한은 베드로의 믿음을 촉발시키는 역할을 수행한 것처럼 보인다. 베드로는 보고 기이히 여겼으나(눅 24:12) 요한은 보고 믿었다

.....사고형의 사람이 행동형의 사람보다 신의 진실의 증거를 더 빨리 받아들이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그들이 더디 믿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복음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전해 주고 있다(9절). 

아직 그들이 "성경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그들은 그가 "즉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리라"는 성경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생각해 보거나 응용하거나 때 맞게 이해하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구약은 메시야의 부활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였고 그들은 그가 메시야이심을 믿었다. 

또 예수 자신도 그가 구약 성경의 말씀에 따라 다시 부활하실 것을 자주 저희에게 말씀하셨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모든 사실을 적용하여 현재의 상황을 설명할 정도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자.

첫째, 제자들 자신이 처음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기를 얼마나 주저하였는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심이 극복된 후에 그들이 확신을 가지고 부활을 증거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부활에 대한 믿음에 그들이 주저하였다는 사실은 그들의 부활에 관한 믿음이 경솔하게 결정된 것이 아니며 또한 날마다 무조건 믿는 단순한 사람들이 가지는 신앙은 아님을 나타내 주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부활을 통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증진시키고자 하였다면 그들은 부활의 증거의 첫 번째 섬광을 보고 탐욕스럽게 매달렸을 것이고 부활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를 불러 일으키고 또 그 기대를 지지하며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에 부활에 대한 말씀들을 받아들이도록 준비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들의 희망은 소멸되어 버려서 현재의 사건은 그들에게 기이한 일 정도로밖에는 보여지지 않았고 그들은 전혀 부활과 관련시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처음에 베드로와 요한은 이 사실을 믿는데 너무 소심하였었다. 

그러나 후에 이 사건은 그들에게는 가장 확실한 부활의 증거로 여기실 수 있게 되었고 확신있게 부활을 사람들에게 증거하게 되었다. 

이 사실들을 통하여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속일지 모르는 정직한 사람은 일 뿐만 아니라 외적인 압력에 의해서 쉽게 넘어가 버리지 않는 주의 깊은 인물들이라는 사실이 나타난다.

둘째, 그들이 서서히 믿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본문에 의하면 그것은 그들이 "성경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HS안에서 성경읽고 기도로 추구하여 깨닫기를 힘쓰라

.....이 사실은 복음서 기자가 자신의 결점이었음을 수긍하는 말로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예수께서 저희에게 아직 나타나시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던가 "그의 손과 옆구리를 저희에게 보여 주시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성경을 깨닫도록 저희의 마음을 여시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눅 24:44, 45 참조). 

왜냐하면 성경 말씀이 "가장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3. 베드로와 요한은 탐구를 계속하지 않고 믿음과 불신앙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단념하고 말았다(10절). 

본문에 의하면 "두 제자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이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희랍어 사본에 보면 ‘프로스 헤아우투스(혹은 아우투스)’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나머지 제자들도 현재 같은 숙소를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자기 친구들과 동료들에게로 돌아갔다는 말로 간주할 수 있겠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예루살렘에 각각 자기 집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갔다.

(1) 시체를 훔쳐갈 계획으로 왔다는 혐의를 받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또는 시체가 없어진 지금 그들이 그것을 훔친 것이라는 혐의로 고소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들의 믿음이 증진되는 대신에 저희들은 자기의 안전을 도모하는 데만 급급하였다. 

어렵고 위험스러운 시대에는 훌륭한 사람들일지라도 결단력 있게 그들의 사명을 계속 수행한다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른 아침에 가장 먼저 무덤을 찾은 막달라마리아는 전심으로 주님의 시신이라도 확보하기를 추구하며 남아있다!!))

(2) 저희가 당황하였고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또는 그들이 본 것에 대하여 모슨 방도를 취할지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용기있게 무덤에 머물지를 못하고 그들은 집으로 가서 하나님이 "이 사실마저 그들에게 계시해 주실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심한다. 

이것은 아직도 그들이 연약하다는 증거다.

(3) 아마 나머지 제자들은 함께 거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이 발견한 사실을 알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의논하기 위하여 나머지 동료들에게 돌아갔다. 

아마 그들은 저녁에 모이기로 작정했던 것 같고, 그때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오셨다.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당도하기 전에 천사가 거기 나타나서 돌을 굴려버리고 여인들을 위로해 주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이 말씀은 요한복음의 본문에 대한 말씀이 아니고 마태나 누가의 기록에 대해 언급된 말씀이다. 

요한복음과 달리 거기서는 여러 여인들이 무덤에 찾아갔고 거기서 그들은 한 천사를 본다. 그 다음 그들은 제자들에게 달려 갔었다:역주). 

또한 제자들이 무덤을 떠나자마자 본문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서 두 천사들을 보게 된다(12절).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에 가서 그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하였으나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옳겠는가?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갔을 때 그 전에도 나타났었고 또 그들이 간 후에도 나타났던 천사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끝까지 추구하는 바 마음-뜻-정성 다하는, 끈질긴 사랑의 진정성과 열정?!))

① 천사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명령과 지시에 따라 마음대로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한 장소에 나타날 수도 있다. 

또한 그들은 동시에 어떤 사람에게는 보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민 22:23; 왕하 6:17). 

어떻게 그들은 보이다가는 사라지고 또 다시 나타나는지 우리는 알 수 없고 다만 추측이나 해볼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점는 본문의 이야기로 보아 분명하다.

② 천사들은 볼 수 있는 특권은 그리스도를 일찍부터 그리고 계속하여 찾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제일 먼저 와서 끝까지 머무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다. 

그러나 다만 잠깐 들려가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천사들의 모습은 눈에 뜨이지 않는다.

③ 사도들은 천사들로부터 지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은혜의 성령으로부터 지시를 받았다(히 2: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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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2)(요 20:11-18)

성 마가는 그리스도께서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고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막 16:9). 

그 현현에 대하여 본문에 상세히 언급되고 있다.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의 내용을 찾아 볼 수 있다.

Ⅰ. 주 예수에 대한 막달라 마리아의 지속적이고도 뜨거운 사랑(11절).

1. 그녀는 베드로와 요한이 간 후에도 무덤에 남아 있었다. 

---왜냐하면 거기 그녀의 주님이 묻히셨기 때문이었고 또 거기서 주님에 대한 무슨 소식을 [더] 들을 듯 싶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사랑이 있는 곳에는 그에 대한 계속적인 추종이 있게 되며 그에게 메달리려는 단호한 결심이 있게 마련이라는 점이다. 

.....이 훌륭한 여인은 주님을 그녀가 포기한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 그를 잃어버리고 주님 때문에 무덤 곁에 거하며 주님의 사랑의 위로가 없었으나 그녀는 계속 그를 사랑하였다.

(2) 그리스도를 사귀려는 참된 욕망이 있다면 그를 [참되게] 알려는 온갖 수단도 동원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호세아 6장 2,3절에 "여호와께서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라는 말씀을 참조하라.

본문에서의 마리아처럼 우리가 계속 알려고 한다면 부활의 의미를 발견할 것이다.

2. 그녀는 거기 남아서 [원하였던 바, 어떤 상태라 하든지 무관하게 꼭 보고싶었기에, 속상하여!!] 울고 있었다. 

---그녀의 눈물은 주님에 대한 그녀의 애정을 웅변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었다.

자기의 모든 것이었던 그리스도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울 만한 이유가 있다. 

---그녀는 그의 극심했던 고난을 기억하고 울었다.

또한 그의 죽음 때문에 그리고 그녀와 자기 친구들과 마을이 주님을 통하여 은덕을 입었던 것을 잃었으므로 울었다. 

---또한 그녀는 주님 없이 외로이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을 생각하고 울었고 또한 지금 그의 시체를 그녀가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울었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찾는 사람들은 "울면서 그를 찾아야만 한다"(눅 2:48).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서 울어야만 한다.

3. 그녀는 눈으로 확인하고 다시 그녀의 사랑을 더 뜨겁게 하려는 듯 "울면서 구부려 무덤 속을 들여다 보았다." 

---우리가 잃은 것을 찾을 때는 마지막으로 그것을 남겨 두던 곳을 기억해서 반복하여 살펴 보아야 하며 또 그것을 찾으리라는 기대를 가져야 한다.

그녀는 알지는 못하였으나 결국은 용기가 될 만한 <그 어떤 단서라도>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 줄 믿고 계속 무덤을 들여다 보았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울음이 주님을 찾는데 지장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는 울면서 "구부려 무덤 속을 들여다 보았다."

(2) 무엇을 찾되 구하던 것을 발견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진실한 눈물로써 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Ⅱ. 그녀는 무덤 속에서 두 천사들의 모습을 보았다(12절). 본문의 내용을 고찰하여 보자.

1. 그녀가 본 대상자들의 모습. 

---그들은(바위를 쪼아서 만든 것으로 여겨지는 선반 또는 긴 평상 위에) "앉아 있는 흰옷 입은 두 천사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는 "머리 편에" 하는 "발 편"에 앉아 있었다. 본문에는 다음과 같이 그들에 대하여 기술되고 있다.

(1) 그들의 본성. 그들은 천사들로 이 큰 사건 때문에 보냄을 받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사자들이었다.

① 그들은 인자에게 영예를 돌리기 위하여 또한 그의 부활의 장엄미를 더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다....시은좌의 두 그룹처럼!!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다시 오셨으므로 천사들에게 그를 수종할 책임이 주어진 것이다.

마치 그가 태어나실 때도 천사들이 그리하셨듯이 말이다(히 1:6).

② 그들은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다. 

.....슬픔에 잠긴 그들에게 아름다운 말을 전하며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 주므로 그를 만날 준비를 시키기 위하여 온 것이었다.

(2) 그들의 수효. "천군들의 떼가" 나타나 찬양한 것이 아니라 "두 명"이 나타났다. 

---증언을 위하여서는 두 명으로도 족하였기 때문이었다. 두 증인의 입에서 나온 말로도 이 세상은 변모될 수 있는 것이다.

(3) 그들의 복장. 그들은 "흰 옷"을 입었다.

① 흰 옷은 그들의 순결과 거룩함을 의미한다. 

.....최상의 인물들도 "천사 앞에 서서"그들과 비교하여 보면 "더러운 옷을 입은 것"처럼 추하게 보인다(슥 3:3).

그러나 천사들은 흠이 없다 하지만 영광을 입은 성도들은 천사처럼 변모되어 "흰 옷을 입으신 그리스도와 함께" 걷게 될 것이다.

② 흰 옷은 그들의 존재의 영광됨과 또한 이 사건의 영광됨을 의미한다. 

.....그들이 입은 옷의 흰색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모습의 밝음을 나타내 준다.

(4) 그들의 자세와 위치. 

.....그들은 그리스도의 무덤에서 휴식을 취하며 앉아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원기회복을 위한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천사들이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하여 자신들을 정립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사들이 무덤으로 들어간 것은 우리에게 무덤을 두려워하지 말도록 가르치기 위한 것이며 또한 우리가 잠시 동안 무덤에 머문다고 하여서 우리의 영생에 지장이 있을까하는 염려를 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믿는 자들에게 무덤이라는 것은 하늘나라로 가는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한다. 

.....또 천사들이 무덤에 들어간 것은 천사들이란 성도들이 죽을 때 그들을 아브라함의 품으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 심판날에 "그들의 몸을 일으키기 위하여"(마 24:31) 고용된 존재임을 나타내 주기도 한다. 이

들 천상의 파숫군들은(천사들이 "파숫군"으로 칭하여지기도 한다. 단 4:23) 예수의 적들이 세운 파숫군들을 놀라게 하여 쫓아버리고 무덤을 지켰는데 이는 어둠의 세력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타내 주고 있다. 즉 어둠의 세력을 패주시키셨음을 나타내 준다.

이 같이 미가엘과 그의 천사들은 가장 뛰어난 정복자들이다.

그들이 서로 마주하여 하나는 예수의 침상 머리 편에 하나님 발 편에 앉은 것은 그리스도의 전신을 그들이 보호한다는 의미를 띠고 있다.

즉 그의 자연적인 육체뿐만 아니라 그의 신비한 몸까지도 머리에서 발끝까지 보호함을 의미한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속죄소 양 끝에 서로 마주하게 하여 세워놓은 두 스랍들을 상기시켜 준다(출 25:18).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위대한 속죄소이시다.

그의 머리 편과 발 편에 두 스랍들이 있어서 이들은 불검으로 우리를 지키지는 않으나 안내하는 사자(使者)가 되어 생명의 길을 우리에게 지시해 준다.

2. 막달라 마리아가 슬퍼하는 이유에 대한 저희의 동정적인 질문(13절). 

---본문에 의하면 그들은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라고 물었다. 이 물음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이 물음에는 그녀의 울음에 대한 비난의 뜻이 담겨 있었다. 

.....즉 "네가 기뻐해야 할 때인데 어찌하여 우느냐?"는 말이다. "네가 어찌하여 낙담하는가"라는 뜻의 말이다.

(2) 이 질문은 천사들이 성도들의 슬픔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가를 보여 주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었다. 

.....천사들은 성도들을 위로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이같이 성도들도 서로 동감하며 동정을 베풂으로 말없는 위로를 베풀 줄 알아야 한다.

(3) 이 질문은 그녀의 애통을 기쁨으로 변모시키며 "그녀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시기 위하여"(시 30:11)한 소식을 전해 주려는 의도 때문에 주어진 것이었다.

3. 그녀는 천사들에게 자신의 현재의 곤경을 슬픔 어린 어조로 설명하였다. 

---그 이유는 "내가 향유를 뿌리고자 하여 와 보니 사람들이 복된 주님의 시신을 가져가 버렸고 또 그들이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한다. 그녀는 2절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했었다. 그녀의 말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들을 찾아 볼 수 있다.

(1) 그녀의 믿음의 연약함. 

.....만일 그녀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절대적인 신뢰로 생동하는, 발휘되는 산) 믿음이 있었다면 이 산을 옮기울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자주 불필요하게도 상상에 불과한 곤란 때문에 당황한다. 신앙은 우리에게 이러한 곤경을 참된 유익으로 발견하게 해 준다. 

.....훌륭한 많은 사람들도 그들이 겪고 있는 구름과 어두움에 대하여 불평한다.

그러나 역경은 그들의 영혼을 겸손하게 하며 그들의 죄를 극복하게 하며, 그들이 그리스도를 귀하게 여기게 하는데 필요한 은총의 방법인 것이다.

(2) 그녀의 사랑의 힘. 

.....참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영혼 속에 그의 사랑의 위로가 되는 증거를 잃어버렸거나 또는 그와 속삭이는 위로의 기회를 잃어버렸거나 또는 그의 말씀을 지킴으로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을 이루지 못할 때면 큰 상처를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갑작스런 천사의 나타남으로 인한 놀람으로 주어진 질문을 기피하지 아니하였다.

또한 나타난 영광스러운 (천사의) 모습 때문에 만족하지도 아니하였다. 천사의 현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슬픔은 한결 같았다.

그러므로 그녀는 여전히 "그들이 주님을 가져갔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모습과 그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미소없는 천사들의 모습이나 저희들의 웃음이 그녀를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녀는 천사들의 출현을 그리스도가 어디 계신지 묻는 기회로 삼았다.

모든 피조물들 그것이 아무리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일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과 우리를 사귀게 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또 그렇게 이용되어야 마땅하다. 

.....천사들은 그녀에게 "네가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하여 그녀는 말한다.

"내게는 울 만한 이유가 있나이다. 그들이 나의 주님을 가져갔기 때문입니다"라고 한다.

미가와 같이 "내가 무엇을 더 하리이까? 내가 어찌하여 우느냐고 당신이 물으시나이까? 그것은 나의 사랑하는 자가 가버렸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버림받은 자의 슬픔 그것은 경험한 자 이외에는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녀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위로의 증거와 하늘의 소망을 가졌었으나 이제 그것들을 잃고 어둠 속을 걷게 되었다.

이같이 상처받은 영혼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Ⅲ. 그녀가 아직 천사들과 말하면서 그녀의 사정을 토론할 때 그녀에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다. 

---그들이 그녀에게 무어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녀의 질문에 만족스러운 답변을 주시기 위하여 나타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기 때문이다. 예수에게로 이끌 수 있는 사람은 그분 이외에는 없는 것이다.

이제 마리아는 기쁨으로 그녀의 주님이 계신 곳을 알게 될 것이며 그녀의 오른 편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게 되리라.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그리스도를 뵙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그는 더디 나타나시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를 찾는 사람에게 "너희가 헛되이 찾는도다"라고 결코 말씀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네가 바라는 것이 그리스도인가? 네가 그리스도를 뵙게 될 것이다"라고 응답해 주신다.

2. 그리스도는 그를 찾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시되 그들의 기대보다 빨리 나타나신다는 사실이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시신을 보기를 원했고 또 그것이 없어졌음으로 불평하였다. 그러나 보라. 이제 그녀는 다시 사신 주님을 뵈옵게 된 것이다.

이같이 주님은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구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이상의 것으로 응답해 주신다.

그리스도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심에 대하여 다음의 사실들을 생각하여 보자.

(1) 그는 처음에 그녀에게 자신을 숨기셨다.

① 그는 보통 사람처럼 서 계셨다. 그리고 그녀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14절). 

.....그녀는 천사들에게 한 그녀의 호소에 대한 답변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녀의 뒤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 같은 또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천사들과 말을 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그녀가 찾는 바로 그 분이 계셨으나 그녀는 그가 "예수신 줄 알지 못하였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첫째,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되" 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가까이 하신다는 사실이다(시 34:18). 

.....그리스도를 찾는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그를 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가 그들로부터 멀리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부지런히 주님을 찾는 사람들은 그를 찾는데 온갖 방법을 다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찾든지 사랑하든지 올인하라!!))

.....마리아는 혹 무엇을 발견할까 하는 기대로 "뒤를 돌아보았다."

몇몇 고대 교부들은 마리아보다 먼저 주님을 발견한 천사들이 일어나 그에게 경배하려는 모습을 보고 그녀가 뒤를 돌아보아야 할 필요를 의식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들이 이 같이 대단한 경의를 표하는 분이 누구인지 알기 위하여 뒤를 돌아 보았다고 여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의 말이 옳다면 그녀가 주님을 동산지기로 알았을 리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녀가 뒤를 돌아 본 것은 백방으로 그에 대하여 알아 보려는 그녀의 진지한 소망 때문이었던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 가까이 계시나 그들이 그를 알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 "그녀는 그가 예수신 줄 알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그가 다른 모습으로 나타타신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녀가 그를 무심하게 바라 보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녀의 눈은 염려로 가득 차 있었으므로 그녀는 그를 잘 분간할 수 없었다.

아니면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처럼 "영혼의 눈이 감기어 있었으므로 그를 알지 못하였던 것이리라"(눅 24:16).

② 주님은 그녀에게 평범한 질문을 던지셨다. 그리고 그녀는 그 질문에 따라 그에게 답변하였다(15절).

첫째, 그가 그녀에게 던진 질문은 평범한 질문으로 누구나 물을 수 있는 성질의 질문이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이렇게 일찍이 동산에 무슨 볼 일이 있어서 왔는가? 그리고 왜 그렇게 소란을 떠는가?"라고 하신다. 

.....이 말은 좀 거칠게 말씀된 것같이 느껴진다. 마치 요셉이 자신을 형제들에게 알리기 전에 자기를 낯선 사람처럼 가장하기 위하여 말하였듯이 그는 말씀하시었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처음으로 하신 말씀인 것처럼 보여진다. "내가 부활하였는데 어찌하여 우느냐?"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에는 모든 우리의 슬픔을 진정시키며 흐르는 눈물을 저지시키며 눈물의 근원을 말리울 만한 힘이 간직되어 있다.

다음 사실들을 생각하여 보자.

a.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들의 슬픔을 아시고 "너희가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으신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들의 눈물을 담아서 간직하시며 그의 책에 그들이 애통한 사실들을 기록해 두신다.

b.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들의 염려를 아시고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신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그를 찾는 것을 주님은 본인들로부터 아시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이 누구를 구하는지 그에게 고해야만 한다.

둘째, 그녀가 그에게 한 대답 또한 평범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직설적인 답변을 하지 아니하였다. 

.....그녀의 말투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

"어찌하여 당신이 나를 희롱하나이까? 또한 내 눈물에 대하여 책하시나이까? 당신은 내가 왜 울며 누구를 찾는지를 아시나이다." 

.....그녀는 그가 아리마대요셉이 그의 정원을 가꾸기 위하여 고용한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또한 그가 자기 맡은 일을 하려고 이렇게 일찍 온 줄로 알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다음 문제들을 생각하여 보자.

a. 그녀의 잘못된 이해. 

.....그녀는 우리 주님 예수를 동산지기로 착각하였다. 아마도 주님이 위엄있게 어찌하여 그녀가 거기에 있는가 물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불운한 세월 속에 고통을 겪는 심령들은 (스스로의 착각에 빠져서) 그리스도를 잘못 알고 그의 섭리와 은혜 내리시는 방법에 대하여 허황된 생각을 갖기가 쉬운 법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b. 그녀의 사랑의 참됨. 

.....그녀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찾는 일에 얼마나 집중되었는가를 살펴 보자.

그녀는 사랑에 열중한 연인이 그러하듯이 만나는 사람마다 "당신은 내 영혼이 사랑하는 그분을 보셨습니까?"라고 질문을 하였다. 

.....그녀는 동산지기에게도 경어를 써서 그를 "주(sir)"라고 부른다.

이것은 그에게서 그녀가 사랑하는 분에 관한 무슨 소식을 얻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에게 주님의 이름을 대지 아니한다. 그 이유는 그가 "옮겨 갔다면" 이 동산지기도 그녀처럼 예수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녀가 누구에 대하여 말하는지 알 수밖에 없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사랑이 강하다는 또 다른 증거는 그를 어디에 두었든지 그의 시신을 옮겨 오려고 한 것을 보아서도 나타난다.

상당한 양의 향료가 첨가된 그의 시체는 그녀가 옮길 엄두도 못낼 만큼 무거운 것이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녀는 그 이상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어떤 장애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녀는 이 동산지기가 불명예스럽게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자의 시체가 그의 주인의 쓰지 아니한 무덤에 묻히는 영예를 누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그가 그런 시체에게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좋지 않은 곳으로 시체를 옮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마리아는 동산지기의 주인에게 일러서 그로 그 장소를 알아 내게 하겠다고 그에게 협박하지는 아니하였다.

다만 예수의 시체를 모시기 원하는 다른 무덤을 찾아 보겠노라고 말하였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짐처럼 생각하는 곳에 머무실 필요가 없는 것이다.

(2)그리스도는 결국 자신의 정체를 그녀에게 알려 주셨고 놀라운 기쁨으로 몸둘 바를 모르는 그녀에게 그의 부활에 대한 확고한 확신을 넣어 주시었다. 

.....요셉이 결국은 그의 형제들에게 "내가 요셉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도 막달라 마리아에게 그가 영광을 입으셨음을 말씀하신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① 그리스도께서 눈물로써 그를 찾고 있던 이 훌륭한 여인에게 어떻게 자신을 나타내셨느냐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16절). 

.....본문에 의하면 "예수께서 그녀에게 마리아야"라고 하셨다.

그는 강조적 어투로 또한 그녀에게 친절히 자유롭게 말하기를 원하시었다는 듯이 말씀하시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음성을 바꾸사 동산지기와는 같지 않게 자신이 평소 말씀하시던 식으로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가 자신을 그의 백성들에게 알리시는 방법은 말씀을 통하여서이다.

그의 말씀은 그들의 마음을 향하여 호소하시며 또 입장에 따라서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 속에서 그에게 이름으로 기억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은 그의 은총의 능력 속에서 그들을 이름으로 부르신다(출 33:12).

하나님은 저희에게 그의 아들을 나타내 보여 주시는데 이는 저들로 그를 증거케 하시기 위함이시었다(갈 1:16).

바울이 이와 같은 경우로써 그리스도는 그를 "사울아 사울아!"라고 이름으로 부르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양은 "그의 목소리를 안다"(10:4).

본문에 "마리아야"하고 부르신 말씀은 폭풍을 만난 제자들에게 "나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과 유사한 성격의 말씀이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훈과 약속을 우리의 것으로 삼을 때 그의 말씀은 우리에게 복이 된다. "이 교훈과 약속 안에서 그리스도는 나를 부르고 또 내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② 이 놀라운 사실을 그녀가 어떻게 선뜻 받아들였는가를 생각하여 보자.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야. 네가 나를 알 수 있느냐? 너와 내가 어찌 이렇게 낯설게 되었단 말인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연인이 "사랑하는 자의 음성"을 분별하듯이(아 2:8) 즉시 그가 주님이신 줄을 깨달았다. 그녀는 뒤로 돌이켜 "랍오니여" 곧 "나의 선생님"이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은 의문형으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하다.

"랍오니이신가요? 나의 선생님이란 말입니까? 아니 정말로 선생님이 맞습니까?" 다음 사실들을 생각하여 보자.

첫째, 그녀가 그에게 붙인 경칭(敬稱). 

.....그녀는 그를 "나의 선생님" 곧 ‘디다스칼레’ - 즉 가르치시는 주님이라고 불렀다.

유대인들은 훌륭한 사람들이나 학자들을 "랍비"라고 불렀다. 그런데 "라본"이란 말은 그들에게 있어서 "랍비"보다 더 명예로운 칭호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이 명칭을 택한다. 그리고 "나의 위대한 선생님"이라고 덧붙여 부른다.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격의없는 대화를 우리와 나누시기를 원하신다고 하여도 우리 편에서는 그가 우리 "주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경건한 두려움"으로 그를 대해야 한다.

둘째, 그녀는 감격어린 어조로 쳐다보고 있었던 그리스도를 이같이 불렀다. 

.....그녀는 천사들로부터 "돌이켜" 예수를 바라 보았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만 붙잡혀 살기 위하여 모든 피조물(그것들이 아무리 밝고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에 대한 집착을 떠나야 한다.

그 어느 것도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자. 또한 그 어느 것도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를 간섭하지 못하게 하자.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생각하였을 때" 그녀는 그에게 말하면서도 마음은 다른 데로 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가 그리스도의 음성을 알았을 때 "그녀는 돌이키었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를 향하여 돌이키고 기쁨과 환희에 쌓여 "나의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기쁨으로 그를 높여서 부르는지 기억해 두도록 하자.

그녀는 "나의 선생님. 나의 훌륭하신 선생님"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③ 그리스도께서 그녀에게 앞으로 행한 일을 지시하심(17절). 

.....그것은 "나를 만지지 말라. 그리고 제자들에게 가서 이 소식을 전하라"는 것이었다.

첫째, 그는 그와 친밀히 정을 나누기를 전하는 그녀의 기대를 거부하셨다. 

.....그러므로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신다.

마리아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주님의 모습을 보고 감격하여서 자신을 잊어버릴 정도다.

또한 그가 앞으로 영광을 입으시리란 것도 잊었고 그를 감격적으로 얼싸안음으로 그녀의 기쁨을 표시하려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이것을 금하시었다.

a. 내가 승천해야 하기 때문에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신다. ::: 요제를 이루었으니 승천의 거제를 이루어 하늘 성소 속죄소에 피뿌림 이루셔야 한다..

.....그는 제자들에게는 그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기 위하여 자기를 만져보라고 명하시었다.

또한 그는 여인들에게는 그의 발을 잡고 그에게 경배할 것을 허락하셨다(마 28:9).

그러나 마리아는 그리스도가 나사로처럼 부활하셔서 저희와 계속 생활하시며, 전처럼 자유롭게 저희들과 말씀을 나누리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가정에 입각하여 전에도 흔히 그랬던 것처럼 그의 손을 붙잡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그리스도는 그녀의 이 잘못된 생각을 교정하시기 위하여 그녀가 자기를 붙잡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셨다.

그녀가 지금 할 일은 그를 믿는 것이요 영광 받으신 분으로 그를 경배하는 것이었고, 그분의 뜻 마저 다 이루시도록 놓아드려야 하고, 지금은 전처럼 늘 하던대로 그와 사귀기를 기대하여서는 아니 되었던 것이다(고후 5:16 참조). 

.....그는 그녀가 정신없이 그의 몸에 접촉하는 것을 금하셨다.

이는 그녀가 이러한 접촉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또 계속되기를 기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자기가 아버지께 승천하신 후 자기와 나누어야 할 영적 사귐과 대화로 인도하시었다.

왜냐하면 그의 부활의 최대의 기쁨이란 이 부활이 승천을 향한 일단계라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리아는 저희들이 오랫 동안 고대하였던 것과 같은 세상의 왕국을 그가 부활하셨으니 세우실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리라..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아니다. 이러한 기대를 내게 품지 말아라. 나를 세상에 있게 할 생각으로 나를 붙잡으려고 하지 말라. 내가 아직은 승천하지 못하였으나 승천하게 될 것인데 이 사실을 내 형제들에게 가서 전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운명하시기 전에와 마찬가지로 부활하신 후에도 그가 떠나 "세상에 있지 아니할 것이라"는 같은 내용의 말씀을 하신다.

그러므로 그들도 예수의 육체적 현현 이상의 높은 곳을 바라보아야 하며 사물의 현상 너머를 볼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b. "나를 만지지 말라. 나를 만지느라고 머물러 있을 시간이 없다. 또한 이것 저것 물을 시간이나 또는 한가하게 기쁨을 나눌 시간이 없다. 이는 내가 아직 승천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즉시 떠나지 않을 터이니 여타의 것들은 다른 틈을 내서 해도 무방하리라.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과업은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니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전력을 다하여 달려가라"는 뜻의 말씀이다. 

.....개인적 욕구 충족보다는 공적 임무를 우선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또한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더 복된 것이다."

날이 샐 때, 야곱은 천사를 놓아 보내야만 했다. 왜냐하면 야곱이 자기 가족을 돌보아야 할 시기이기 때문이었다.

마리아는 그녀의 선생님과 담화를 나누려고 지체하여서는 아니 되었다. 그녀는 그의 메시지를 전해야 했던 것이다.

이 날은 기쁜 소식이 들려진 날이기에 그녀는 기쁨에 도취하여 있어서는 안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소식을 전해야 했던 것이다(왕하 7:9 참조).

둘째, 그는 그녀에게 무슨 내용의 메시지로 그의 제자들에게 전할 것인가를 지시하였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내가 부활한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그녀가 그를 보았기 때문에 그녀 혼자라도 이 사실을 그들에게 말할 수 있었다) 내가 승천하리라는 사실도 전하라"고 하신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자.

a. 이 메시지를 전달받을 사람. 이 소식을 가지고 "형제들에게 가라"고 하였다. 

.....그는 그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a) 그는 이제 그의 영광을 입으시기 직전에 있으시었고, 또 전보다 더 큰 "권능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로 천사들에 의해 선포되셨다." 

.....그렇지만 그는 제자들을 그의 형제들로 여기신다. 그리고 전보다 더 부드러운 애정을 그들에게 보이신다.

그가 그들을 친구들이라고 부르신 적은 있었으나 형제들이라고 부르신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리스도는 존귀히 되셨으나 교만하지 않으셨다.

그의 높아지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초라한 옛 관계를 멸시하지 아니하셨다.

(b) 제자들은 최근에 그에게 아주 불성실하였다. 

.....그가 염려하였던 대로 "그들 모두 그를 버리고 달아난 뒤에" 지금에서야 저희가 같이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었다.

이러한 정황이었으므로 그는 그들에게 진노의 메시지를 보내야 마땅한 것이었다. 즉 "가서 믿을 수 없는 배신자들에게 내가 저희를 다시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하라. 또 내가 저희와 다시는 상관하지 않겠노라고 말하라"고 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용서하시고 기억치 아니하시고 책망하지 않으신다.

b. 메시지의 전달자. 

.....그것은 "막달라 마리아"였다. 예수께서는 "그녀에게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시었다." 주님은 그녀를 신뢰하셨다. 

.....이러한 신뢰는 그녀가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르고 그의 계신 데를 찾으려 한데 대한 보상이었다.

또한 죽으신 예수를 수종드는 일에 그녀처럼 정성을 쏟지 아니하였고 또 부활하신 예수를 맞이하는 데도 그녀처럼 일찍 서두르지 않은 사도들에 대한 계획적 책망을 위해서이기도 하였다. 그녀는 사도들에게 보냄을 받은 사도가 된 것이다.

c. 메시지의 내용.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간다"는 것이었다. 이 말씀 속에는 두 가지 위로가 완벽하게 표현되어 있다.

(a)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 하나님과도 연쇄적 관계를 가지게 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된다. 

.....그는 빛과 생명과 축복의 끊임이 없는 샘에 대하여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그가 나의 아버지인 동시에 너희의 아버지이시매 나의 하나님인 동시에 너희의 하나님이시다."

이 말이야말로 그리스도나 신자들 사이를 가장 가깝게 표현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2장 11절에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그들은 일치하여 하나이라"고 하였다.

여기 그들을 서로 가깝게 하여 연합시키기 위하여 사후 처리가 놀랍게도 잘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그리스도는 낮아지시고 그리스도인들은 높임을 받는다.

[a] 예수 안에 있을 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믿은 자들의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은 신자들에게 큰 영광이 된다.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그는 영원 무궁토록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우리는 다만 은혜에 의하여 양자로 피택된 것이다. 그러나 이 양자됨으로 우리에게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이 보장되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신 이유이다. 즉 그의 아버지가 곧 그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는 이제 "아버지 곧 그의 아버지에게 우리를 중재하시기 위하여" 승천하시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우리의 아버지에게" 우리 대신 무엇이고 간구하시리라 희망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이루어 주실 것을 다 같이 바라자.((마땅히 구해야 할 바의 아이테오 바탕위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구함>의 에로타오가 열납됨!!))

[b] 그리스도께서 신자들과 함께 같은 하나님을 섬기기를 기뻐하셨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겸비를 나타내 준다. 

.....그러므로 그는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라고 본문에서 말씀하셨다.

즉 나의 하나님이시므로 너희의 하나님이실 수 있다는 말씀이요, 구속자를 지원하시기 위하여 그의 하나님이 되셨듯이 이제 구속받은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는 말씀이다(시 89:26). 

.....새 계약의 총 개요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리고 그리스도는 계약의 확증이요, 또 선두가 되셔서 계약 관계를 자신에게 이루사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으셨다. 

.....신자들은 오직 그를 통하여 그의 영적인 계승자가 되므로 그의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

즉 우리가 신의 본성에 참여하므로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또한 주님이 인간 본성에 참여하시므로 우리의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b) 우리를 위한 사업을 앞으로도 실행하시려고 그리스도가 하늘에 오르셨다는 사실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된다. 

.....그는 "내가 곧 승천할 것인데 이것이 내가 다음 번에 취할 조치이라고 그들에게 전하라"고 하신다.

그가 승천하실 것이라는 말씀의 의도는 아래와 같다.

[a] 제자들에게 그의 육신의 삶이 세상에서 계속 되리라는 기대나 또는 그들이 꿈꾸던 것 같은 이 세상 나라를 그가 세우시리라는 기대를 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주신 경고의 말씀이다. 

....."내가 부활하였으나 그들과 함께 머물지 아니하고 저희를 위하여 하늘 나라로 가실 것임을 그들에게 전하라"는 말씀이다.

이 같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일치하여 영적 생명으로 부활한 사람들은 그들도 부활하여 승천할 것을 미리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그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사 그와 함께 하늘이 앉게 하실 것이다"(엡 2:5, 6). 

.....믿는 사람들로 이 세상이 그들의 집이요, 휴식처라고 생각지 못하게 하자. 그들은 하늘로부터 태어났으므로 하늘에 귀속되어 있다.

그들의 목표는 저 세상이어야만 한다. 내가 승천하니 너희도 위의 것을 구해야 한다는 이 사실이 항상 그들의 마음을 차지해야만 한다.

[b] 그의 승천은 그들뿐만 아니라 "저희의 말을 통하여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씀이 된다. 

.....그는 "그의 아버지 곧 우리 하나님에게 승천하셨다." 이것은 그의 승격을 뜻한다.

그는 자신의 낮추심의 보상으로써 영예와 권세를 받으시기 위하여 승천하셨다.

그는 의기양양하셔서 그를 사랑하는 자들은 그의 승격을 기뻐하리라고 말씀하신다. 

.....그의 승격은 우리에게 이익이 된다. 왜냐하면 그는 정복자로 승천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사로잡힌 자를 인도하여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시 68:18). 그는 "우리를 위한 처소를 예비하시기 위하여" 또 우리를 영접할 준비를 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선두 주자(走者)로 승천하시었다.

..... 이 메시지는 요셉의 형제들이 야곱에게 요셉에 대하여 가고 온 메시지와도 유사하다(창 45:26).

"요셉이 아직 살아 있나이다. 살아서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 모든 권세가 그의 수중에 있더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내가 나의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는 말씀을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우리도 부활하리라는 약속이 포함된 것으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마 22:32)는 말씀을 통하여 죽은 자의 부활을 입증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본문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빙 둘러서 표현하고 계신다.

"그가 나의 하나님이심으로 나를 일으키셨으니 이제 그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셨음으로 너희를 일으키실 것이고 영원히 너희의 하나님이 되시리라"고 하신다(계 21:3). 즉 "내가 살았으니 너희 또한 실리라"는 말씀이다.

"내가 승천하여 나의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였으니 너희도 너희 하나님되신 그에게 승천할 것이라"는 말이다.

Ⅳ. 막달라 마리아는 그녀가 보고 들은 것을 제자들에게 성실하게 보고하였다(18절). 

---"그녀는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가서 주님을 보았다는 사실을 말하였다." 

---베드로와 요한은 먼저 떠났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것만 가지고 그 문맥 안에서만 생각해 본다면!!)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주의 깊게 주님을 찾는데도 남아서 그녀와 함께 그를 찾지 아니하고 그녀를 남겨 두고 와버렸다.

그런데 이제는 그녀가 (오히려!!) 그들에게 가서 자기가 그를 발견한 사실을 말하고 그들로 하여금 [이미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분의] 시체를 찾도록 잘못 인도하였었음을 고백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주님의 몸이 산 몸이요, 영광을 입으신 몸임을 발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찾던 것을 발견하였다. 또한 몸소 주님을 뵈었음으로 뛸 듯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기쁨을 즐겁게 전달하였다.

왜냐하면 이 소식이 그들에게 좋은 소식일 것임을 그녀는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쁘게 하실 때 우리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시려는 경륜이 있으시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기가 본 것을 또한 들은 것을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녀는 주님이 사신 것을 보았었다. 이 사실은 "그가 그녀에게 말씀하신 것들"을 메시지로써 제자들에게 전달하라고 하신 사실에서, 또한 그녀가 그 내용을 성실하게 전달한 사실에서 명백히 증명되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깨달아 아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들의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고 그들이 자기들과 같이 많은 것을 알게 되는 것을 못마땅히 여겨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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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요 20:19-25)

---그리스도의 부활의 절대 확실한 증거는 "그가 친히 사심을 나타내셨다"는 것이다(행 1:3). 본문에는 그가 부활하신 바로 그날에 예수께서 제자들이 모여있는 가운데 나타나신 사실이 설명되고 있다. 

---그는 부활의 소식을 신실하고 진실한 사자(使者)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알리시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그의 사랑을 나타내시고 그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굳건히 하기 위하여 친히 나타나사 부활의 진실성을 규명하기로 원하던 그들에게 온갖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셨다. 

---그들이 그의 부활을 세상에 증거하고 그 증거 위에 교회를 세워야 했기 때문에 그는 저희에게 부활의 소식을 들려 주는 것으로 그치시지 않고 그들 스스로가 그의 사심을 목격하고 증인이 되게 하시었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여 보자.

Ⅰ. 그가 나타나신 장소와 시기. 

---그날은 그가 부활하신 당일로써 유대인의 안식일 다음 날 곧 "주(週)의 첫 날"이었다. 그리고 장소는 제자들의 비밀 집회소로써 거기에는 10명의 제자들과 제자들의 몇몇 친구들이 함께 있었다(눅 24:33).

---우리 주님 예수께서 그의 교회에서 계속 수행되도록 제정하신 세 가지의 보조적 규례들이 있다.

이것은 [3가지 일차적 규례, 곧 말씀과 성례전과 기도를 보조하고 바르게 시행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이 세가지 보조적 규례들은 주님의 날과 제반 신앙 집회와 목사직(ministry)을 말한다.

이 보조적 규례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정신이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록한 본문 가운데 명시되고 있다. 

---첫 번째 두 규례는 19절에 다른 하나는 21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그가 부활하신 직후 사람들 가운데 세워졌다. 바로 이 부활의 날에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루어졌다. 

그가 부활한 날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하찮은 평일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날이지만 그러나 신앙을 지닌 인물들에게는 교회의 전 역사를 걸쳐서 이 날은 가장 뜻깊은 날로 여겨지는 것이다.

1. 본문에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이 제자들에 의해 지켜지고 우리 주님 예수에 의하여 용인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을 방문하신 날은 "주의 첫날"이었다.

"주의 첫날"과 같은 방식으로 숫자로 날(日)이나 달(月)이나 해(年)를 표시한 곳은(나의 생각으로는) 신약 성서 속에 부활에 관한 기사 외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리고 이 날은 신앙적으로 엄수해야 할 날로써 여러 번 언급되고 있다.

그리스도가 "주의 첫날"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본문(1절)에 특별히 언급되었었지만 여기서(19절) 강조하기 위하여 다시 언급되고 있다.

그는 이 날을 경사스럽게 하시기 위하여 같은 날 저녁에 나타나셨다. 그리고 "주의 첫날임"이 반복하여 강조되고 있다. 

---즉 이 날은 사도들이 기념하기 위하여 정한 것이 아니라(그들은 그때까지 부활에 관하여 의심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첫 방문을 그날에 받게끔 제자들이 함께 있게 하심으로 그날을 영광된 날로 삼으신 것이다. 이 같이 사실상 하나님이 그날을 복 주시고 성별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날에 구속주께서 안식하셨기 때문이었다.

2. 본문에 제자들이 엄수하고 주님 예수께서 승인하신 그리스도인의 집회를 찾아 볼 수 있다. 

---아마 제자들은 일종의 신앙적 훈련 즉 함께 기도하기 위하여 만난 것같이 보인다.

아니면 그들은 주님의 부활에 관해 각각 들은 이야기들을 비교 검토하여 부활의 충분한 증거를 찾을 수 있는지 검토해 보고 또 그들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즉 계속 모일 것인지, 흩어진 것인지를 협의하기 위하여 모인 것같이 보인다.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알기 위하여 또 서로에게 용기를 주고 중대한 고비에 직면하여 적절한 대비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모인 것이다. 

---이 집회는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그들은 감히 공개적으로 특히 집단으로 나타나기를 꺼려하였다.

그들은 집에서 모였다. 그러나 그들이 함께 있는 것이 눈에 뜨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문을 잠그고 모였다.

그리고 아는 사람들 이외에는 아무도 들여 보내지를 아니하였다. 유대인들이 제자들을 범인으로 기소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자기들을 가리켜 거짓 교훈을 믿고, 그것으로 세상을 현혹시키려 한 자들이었다고 기소할까봐 두려워하였다.

또한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그를 훔쳐간 것"이라는 누명을 자기들이 쓰지나 않을까 하여 두려워하였다. 다음 사실들을 기억하자.

(1)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비록 고난의 시기라 할지라도 "함께 모이기를 폐하지 말아야 한다"(히 10:25). 

.....폭풍우를 만나서 "양떼가 흩어지더라도" 양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다시 모이듯이 모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모임이 구석진 곳으로 쫓기고, 광야로 내몰림을 당하였다는 사실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계 12:14; 잠 28:12).

(2) 하나님의 백성들이 본문의 경우처럼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골방으로 들어가 숨어 문을 닫아 걸 수밖에 없었던 것"은 흔히 있던 일이었다. 

.....그들에게 박해가 닥쳐왔다고 그 박해를 피하지 말라(피해서는 안된다!)는 법은 없다. 그리하여 그들은 "암혈과 토굴"로 피신하곤 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같이 도망해야 한다는 것은 (비록) 슬픈 일은 될 수 있을지언정 비난이 될 수는 없다. :: 순교 여부는 주님이 결정하신다!!

Ⅱ.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방문하셔서 행하신 행적과 말씀. 

---그가 그들과 나눈 대화에 대하여 고찰하여 보자. 

---그들이 모여 있을 때 전의 모습대로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다.

그는 영광을 이미 받으시기 시작하셨으므로 그의 몸의 광채를 옷(휘장)으로 가리우지 않았다면 그의 변화산에서 변화하셨을 때처럼 제자들은 눈이 부셔서 그를 쳐다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들 가운데 나타나사 그의 약속이 이루어진 실례를 보여 주신다.

즉 "나의 이름으로 두세 명이 모인 곳에 내가 그들과 함께 하리라"는 약속을 실현하신 것이다. 그는 비록 "문이 닫혀 있었지만"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렇다고 이 사실이 부활 후 그의 몸이 참 인간의 육신을 입으셨다는 증거를 약화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문은 닫혀 있었지만 그는 소리 없이 문을 여는 방법을 아셨고 그러기에 전에 물 위를 걸으셨을 때처럼 그가 오는 소리를 그들이 듣지 못하게 들어오신 것이다. 즉 그는 [제한받지 않는, 새롭게 된] 참 몸을 입으시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들의 신성한 집회를 비밀리에 가질 수밖에 없다하더라도 어떤 잠긴 문도 그리스도의 오심에 장애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통하여 우리는 다섯 가지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1. 제자들에 대한 그의 친절하고도 낯익은 인사.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그들에게 인사하셨다. 

.....이 말은 친구들이 만날 때 흔히 주고 받는 인사말은 아니었다.

이것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은 온갖 복된 결실을 그들에게 수여하시는 엄숙하고도 특별한 축복의 기원이었다.

평범한 문장에 불과하기는 하나 여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은 "온갖 축복이 너희에게 있기를" 또는 "무슨 일을 통하여서든지 언제나 온갖 평강이 깃들기를!"이라는 뜻이 함축된 기원이다. 

.....그리스도는 유산으로 그들에게 그의 평강을 남겨 주셨다(14:27). 유언자가 죽으므로 유언은 효력을 지니게 된다.

이제 주님은 그의 유언을 입증하고 또 그것을 몸소 집행하시기 위하여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따라서 그는 본문에서 그의 유언을 재빨리 집행하신다. 고로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하셨다. 

.....그가 평강을 말씀하시면 평강은 이루어진다. "그의 말씀이 곧 평강을 창조한다"는 말이다.

그의 제자들에 대한 말씀은 그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기를 바라는 말씀이요, 또한 저희 양심의 평강을 기원하는 말씀이다.

즉 "온갖 평강이 너희와 함께 하기를!"이란 말씀이다. 그러나 세상과의 평화가 아니요,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강인 것이다. 

.....그들이 그에 관하여 의심이 가득 차 있을 때 또 자신들의 문제로 두려움에 차 있을 때 그는 "저희 가운데" 갑자기 나타나셨다.

이러한 그의 나타나심으로 그들은 당혹과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저희들의 이러한 술렁거림을 그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으로 진정시킨다.

2. 그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분명하고 부정할 수 없게 나타내심(20절).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여 보자.

(1) 그의 부활의 참됨을 그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하여 그가 취하신 방법. 

.....이제 그들은 그가 사신 것을 보았다. 이 삼일 전만해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눈으로 목격하였었다.

그러므로 이제 한 가지 남은 의문점은 그들이 지금 보는 이 살아나신 분이 며칠 전에 죽었던 분과 과연 동일 인물이냐는 점이었다.

이 사실을 입증하는 데는 그의 몸의 상흔을 확인하는 것만큼 정확한 것은 없었다.

① 매우 깊이 파인 상흔(이 상처는 고통이나 괴로움을 의식하지 못하실 때 입으신 것이었다)은 부활하신 후에도 주 예수의 몸에 남아 있었다. 

.....이것은 그의 부활의 진실성을 제자들에게 입증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정복자들은 그들이 입은 상흔을 자랑으로 여기는 법이다.

그리스도가 입으신 상처들은 그가 죽으신 바로 그 분임을 세상에 웅변적으로 입증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상처를 지니신 채로 부활하셨다.

또한 그가 하는 나라에서 영원히 사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중재하실 때도 이 상흔은 호소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상흔을 지니신 채 승천하셨고 보좌의 사이에서 "일찍 죽임을 당하고 새로이 피를 흘리신" 어린 양으로 나타나셨다(계 5:6).

또한 그가 다시 오실 때도 "그를 찌른 자들이 그를 볼 수 있도록" 상흔을 지니신 채 오실 것으로 여겨진다.

② 그는 제자들을 믿게 하기 위하여 이 상처 자국을 그들에게 보이셨다. 

.....그들은 예전의 모습 그대로의 그를 볼 수 있었고 오랫 동안 들어서 익숙해진 바로 그 음성으로 그가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감격에 차서  바로 그의 자태, 그의 눈과 손이 맞아! 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더 확실한 증거인 상흔까지 볼 수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손바닥에 난 상처를 보여 주시기 위하여 손을 펴 보이셨다. 또는 그는 유모가 그의 어린이에게 하듯 앞가슴을 열어 보이셨다.

이는 옆구리에 생긴 상처를 그들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서였다. 

.....구속자는 영광을 입으셨어도 여전히 그의 모든 신실한 친구들과 추종자들에게 자신의 손을 펼쳐 보이시고 가슴을 열어 보이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리스도께서 위로의 성령을 통하여 믿는 자들에게 그의 사랑을 나타내시고 "그가 살았기 때문에 그들도 살리라"는 것을 확신시키고자 하실 때 "그는 그들에게 그의 손과 옆구리를 내보이신다."

(2) 그 상흔을 확인하고 제자들이 받은 인상 및 효과.

① 그들이 주님을 보았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믿음도 굳건하여졌다. 

.....그들은 처음에 유령이나 환상을 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것이 주님 자신임을 알았다.

이 같이 수많은 참된 신앙인들도 그들의 믿음이 연약한 동안은 그들이 받은 위로가 환상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하여 두려워한다.

그러나 후에 그들은 은혜를 통하여 그 위로가 실제적이고 가치있는 것임을 발견한다.

이제야 그들은 '이 분이 주님일까?" 묻지 않고 "그가 바로 주님"이라고 확신하였다.

② "제자들이 기뻐하였다." 

.....그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한 예수시라는 확신이 이제 그들에게 기쁨을 불러 일으켰다. "믿고서 그들은 기뻐한다."

복음서 기자는 이 사실을 황홀감과 승리감에 도취하여 기록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제자들이 주님을 보고 그 다음에 춤출 듯 기뻐하였다"는 뜻의 기록을 하였다.

"요셉이 아직 살아 있다"는 소식이 "야곱의 기운을 소생시켰다면"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사실은 제자들의 마음에 얼마나 큰 힘이 되었겠는가?

그것은 그들이 죽었다가 살아난 듯한 감격적 사건이었다. 이제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라"던(16:22) 말씀이 성취되었다. 

.....그의 다시 사심이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기었다.

그리스도를 뵈옵는 것은 제자들에게 언제나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가 그리스도를 뵈올수록 더욱 우리는 그의 안에서 기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모습대로 그를 대할 그곳"에 이르기까지는 우리의 기쁨은 결코 완성될 수 없으리라.

3. 예수께서 그들을 그의 교회를 세울 대행자로 위임하심.

--- 이 위임은 제자들에게 영예가 되었고, 직분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21절).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1) 위임을 위한 서언. 

.....그 서언으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먼저 번의 인사가 엄숙하게 반복되고 있다. 이러한 서언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 것이다.

① 그가 그들에게 행할 위임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다. 

.....앞의 인사는 그들이 부활의 증거에 대하여 조용히 경청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즉, 그들의 공포로 인한 동요를 진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뒤의 인사는 그들의 기쁨으로 들뜬 분위기를 무마시키기 위한 것으로 그들에게 그가 말씀하시는 것을 조용히 듣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② 그들이 용감하게 그들에게 수여된 위임을 수락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임무를 수행하는 데는 상당한 괴로움이 따를 것이 분명하였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들이 그 일에서 영광과 위로를 받도록 계획하셨고 그러기에 그들에게 평화가 될 것이라고 하신다.

기드온도 "너는 안심하라"는 말씀과 함께 그의 사명을 위임받았었다(삿 6:22, 23).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강이시다. 만일 그가 우리와 함께 계시면 평강도 우리의 것이 된다.

이제 그리스도는 세상에 평화를 선포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보내셨다(사 53:7). 

.....그가 그들에게 이 사명을 위임하신 것은 그들의 만족을 위하여서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이 사명을 맡김으로 모든 평화의 아들들에게 전달되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다(눅 10:5, 6).

(2) 위임의 내용. 

.....그것은 거창한 어조로 시작된다. 본문에 의하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셨다.

① 그리스도가 그들을 어떻게 보내셨는가 하는 문제는 이해하기가 용이하다. 

.....그는 그들을 임명하사 세상에서 그의 일을 수행하게 하셨고 인간들 가운데 그의 복음을 전파하고, 그의 나라를 이룩하기 위하여 자기들의 생명까지 내어놓게 하셨다. 그는 그들을 신의 보증으로 인정하고 신의 권능으로 무장하여 보내셨다. 

.....또한 그들을 평화를 체결하기 위한 대사로서, 평화를 선포할 선포자로 보내셨다. 또한 그들을 결혼식에 초대장을 돌릴 하인들로서 보내셨다.

그러기에 그들은 "사도들 곧 보냄을 받은 자들"이라고 불리워졌다.

② 그러나 아버지께서 그를 보내신 것같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보내셨다는 말씀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확실히 그들이 받은 위임과 권능은 그가 받으신 위임과 권능에 비하면 무한히 저열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느 점에서 그들이 받은 위임이 그가 받으셨던 위임과 같은 것일까? 고찰하여 보자.

첫째, 그들의 사명이 그의 사명과 같은 성격의 것이었다. 

.....그들은 그가 물려 주신 것을 인수받아 계속 추진하였다.

그들에게 그가 지니셨던 제사장이나 왕의 임무는 주어지지 아니하였어도 그의 예언자(대언자)로서의 임무는 그들에게도 주어졌던 것이다.

그가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러 보냄을 받은 것처럼 그들도 그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다. 

.....그렇다고 그와 같이 그들이 화해의 중재자로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고 화해를 선포하고 설교하는 자로 보냄을 받은 것이었다.

그가 "다스림을 받고자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요, 다스리고자 보냄을 받으신 것처럼 또한 그의 뜻을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이의 뜻을 이루려 보냄을 받으신 것처럼 또한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려는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기 위하여 보냄을 받으신 것처럼" 그들도 위의 일들을 위하여 보냄을 받으신 것이다. 아버지께서 그를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을 위하여 보내신 것처럼 그도 그들을 전(全) 세상으로 보내신 것이다.

둘째, 아버지께서 그를 보내실 권한을 가지셨듯이 그도 그들을 보낼 같은 권한을 가지고 계셨다. 

.....즉 힘의 문제에 있어서 양자가 대등하다는 말인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바로 그 권위에 의하여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말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명하여 준다. 그가 주신 위임은 아버지께서 주신 위임과 똑같은 권위가 있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위임이나 아버지께서 환상 가운데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주신 위임과 그 취지와 목적에 있어 효력이 동등하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알기 쉬운 말로 베드로와 요한에게 부여하신 위임은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에 의하여 이사야와 에스겔에게 주어진 위임과 대등한 것이었다. 또한 그의 사업을 이룰 수 있도록 중재자에게 부여된 위임이나 중재자가 사도들에게 부여한 위임이 동등한 것이 된다.

그가 자기 사업을 위하여 그 어느 것에도 비길 수 없는 재능을 가지신 것이라면 그들도 그들의 사업을 위하여 이러한 권위와 재능이 수여되었다.

따라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란 말씀은 그의 권능이 제자들에게서 [그대로!!]재현됨을 뜻한다

.....그리스도는 중재자로서의 자기에게 주어진 권위에 의하여 그들에게 그의 사역자로서의 권위를 부여하셨다. 곧 그들로 사람들 가운데서 그를 위하여 또 그의 이름 안에서 행동하기를 바라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영접하거나 거절하는 자는 곧 그를 영접하거나 거절하는 것이 되며 이는 결국 그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거나 거절하는 것이 된다(13:20).

4. 위임에 의하여 그들에게 수여된 책임을 감당하기 위하여 그들이 갖출 자격(22절). 

---본문에 의하면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자.

(1) 그가 숨을 내쉬었음이 강조된 것은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즉 그의 숨을 내쉼은 그가 그들에게 지금 주시려고 하는 선물에 대하여 그들을 확신시켜 주신다는 뜻과 그 선물로 그들을 감화시키시리라는 뜻을 지닌다. "그는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생명의 호흡에 의하여 그가 참으로 살아나셨음을 그들에게 보여 주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에게서 받을 영적 생명과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영적 생명과 능력은 그들 앞에 놓여있는 모든 임무로 그들이 감당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마도 그가 숨을 내쉰 것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하여 하신 것이 아니고 모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신 것같이 보인다.

그러므로 도마가 그들과 함께 있지는 아니하였지만 주의 성령은 그가 어디 있는지를 아시며, 거기도 찾아가 역사하셨을 것이다.

성령께서 엘닷과 메닷이 진에 머물고 회막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있는 곳을 아시고 거기 임하셨듯이 말이다(민 11:26). 

.....그리스도께서 본문에 숨을 내쉰 것은 그가 최초의 인간 창조에 대하여 말씀하려 하셨던 것으로 여겨진다(창 2:7).

그리고 그는 창조의 장본인이며 그의 사역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생명과 능력은 마치 아담과 그의 후손의 육체적 생명이 그러한 것처럼 그로부터 유래되고 그에게 의존되어 있음을 뜻한다.

"전능자의 호흡과 생기"가 사람에게 생명을 주어 옛 세계가 시작되었듯이 전능한 구세주의 생기가 그의 사역자들에게 생명을 주셨고 그리하여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 것이다(욥 33:4). 이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① 성령은 "아들로부터 유출된 것으로" 곧 그리스도의 생기(숨)라는 사실이다. 

.....구약에서 성령은 생기에 비교되고 있다(겔 37:9). 그리하여 "오라, 생기야"라고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신약에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숨(생기)으로 비교되고 있다. "하나님의 숨"은 그의 진노의 능력을 표현한다(사 11:4; 30:33).

그러나 그리스도의 숨은 그의 은총의 능력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중재에 의하여 진노의 숨이 사랑의 숨으로 변화된 것이다. 

.....우리가 호흡 과정을 통하여 말을 할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말씀이 곧 "성령이요, 생명"이다.

말씀은 성령으로부터 유래되었고 또한 성령은 말씀을 따라 임하여 온다.

② 성령은 그리스도의 선물이라는 사실이다. 

.....사도들은 안수에 의하여 성령을 사람들에게 부여하였다. 그런데 안수한 손은 먼저 기도를 위하여 높이 들려졌던 손이었다.

이 사실은 그들은 이 축복을 간구할 수 있을 뿐이고 중재적인 역할을 감당할 뿐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숨을 내쉼에 의하여 성령을 수여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이 선물의 창조자이시며 그에게서 성령이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구약에 보면 모세는 성령을 줄 수 없었고 하나님이 그것을 주셨다(민 11:17). 그러나 그리스도는 스스로 그것을 주셨다.

(2) 이 상징을 통하여 의미되고 있는 것은 그가 성령을 수여하심을 뜻한다. 

.....그러므로 본문에 "너희가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인 성령의 수여로 "며칠 안 되어서" 그들이 받은 성령의 전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까지 그들이 받았던 것보다 많은 성령을 지금 받았다고 볼 수 있겠다. 

.....이 같이 성령의 축복은 점진적으로 주어진다. 이제 예수께서 영광을 입으시기 시작하자, 더 많은 성령이 주어지기 시작한 것이다(7:39 참조).

이 성령의 수여의 의미는 무엇인가 고찰하여 보자.

① 그들이 지금 그가 위임한 임무를 앞으로 수행하게 될 때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성령으로 도우시겠다는 확실한 약속이다. 

....."내가 너희를 보내노니 너희가 가는 곳마다 성령이 역사할 것이라"고 하신다.

이제 그들 앞에 놓인 모든 임무를 수행할 능력을 부여하기 위하여 "주의 성령이 그들에게 임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가 선택하신 사람에게 성령으로 덧입히시며 모든 필요한 능력을 공급하신다.

② 그가 당장에 그들로 성령의 영향력을 경험하게 해 주셨다는데 의미가 있다. 

.....그는 그들에게 그의 부활의 진실성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하여 그의 손과 옆구리를 내보이셨었다.

부활의 현장을 눈으로 목격한 유일한 목격자인 병사들이 거짓 증언을 하는 한 아무리 자명한 것이라 할지라도 증거물만으로는 믿음역사를 불러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성령을 받으라. 그러면 너희 안에 믿음이 생길 것이고 너희의 지각이 열리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 곧 "너희가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을 그는 모든 참된 신앙인들에게 지금도 말씀하신다(엡 1:13).

그리스도가 주신 것을 우리도 받아야만 한다. .

....그리고 우리 자신과 우리의 전 영혼을 복된 성령의 소생시키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영향에 복종시키도록 하자.

성령의 지시를 받고 그 지시대로 따라 행하자. 또 성령의 능력을 받고 성령의 능력을 이용하자.

"성령의 능력을 받으라"는 말씀을 교훈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약속된 말씀의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그들은 성령을 그들의 길의 안내자로서 그들의 하늘나라의 유업의 전조로써 받게 될 것이다.

5. 금번의 위임을 통하여 그들에게 한 가지 특수한 능력이 주어지고 있다. 그것이 본문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고 있다(23절).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다. 너희에게 맡겨진 능력을 적절히 행사하면 저희의 죄가 저희에게서 사하여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사죄의 위로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즉 그들의 죄가 사해지지 않고 그대로 구속력을 지닌다고 선언하면 죄가 그대로 있으리라. 그러면 죄인들은 죄가 자기에게 그대로 역사함을 알고 슬퍼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죄의 사유는 그들이 성령을 받은 결과로 수반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비범한 분별의 성령을 받지 못하였다면 그들에게 이러한 권능을 부여하기는 적당치 못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생각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이 은사는 사도들과 첫 번째 복음 전도자들에게 특별히 위임된 은사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된"(행 8:23) 사람들과 그렇지 아니한 사람들을 분별할 수가 있었다.

이 능력에 의하여 베드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저주하여 죽게 하였고 바울은 엘루마는 눈을 멀게 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은 교회나 그 사역자들이 세상의 일개인들 또는 한 집단을 절대 무모하게 심판할 수 있다는 말로 받아들여서는 아니 된다.

다만 교회와 그 사역자들은 사람들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성실한 청지기로 힘껏 일하도록 가르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것이다.

이 원칙에 입각하여 본문의 말씀은 받아들여져야 한다. 

---사도들에게는 사죄를 전하되 예루살렘에서 시작하라는 명령이 주어진다. 예루살렘이 얼마 전 그리스도의 피를 흘리는 죄를 범했음에도 말이다.

그리고 "저희가 복음을 받아들이면 그 죄를 용서해주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 말씀을 실행하였다(행 2:38; 3:19). 

---그리스도는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하여 부활하시고 그의 복음 전파자들을 보내셔서 사죄가 시작되었고 사면의 법령이 시행되고 있음을 선포하게 하셨다. 그리고 바로 이 규범에 의하여 사람들이 심판받을 것을 선포하셨다(12:48; 롬 2:16; 약 2:12).

하나님은 이 심판의 규범을 결코 변경시키시지 않을 것이며 이 규범을 변칙적으로 적용하지도 않을 것이다.

즉 복음서에 의해 사면이 인정되는 사람들은 사면을 받을 것이요, 복음서에 의하여 정죄되는 사람들은 정죄함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복음의 능력은 목회의 영예를 무한히 높혀 주고 또 목회자에게 무한한 용기가 된다. 

---보편적으로 사도들과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죄를 사하거나 그대로 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이것은 모두 다음의 두 가지의 권위있는 원칙에 근거하여 시행되어야 한다.

(1) 건전한 교리의 권위에 입각하여 죄를 사하거나 유보시킬 수 있다. 

.....사역자들에게는 세상에 구원받는 길은 복음을 통하지 않고서는 다른 방법이 없음을 전할 권위가 위탁되어 있다.

그리고 하나님도 이 사실을 인정해 주실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드리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어두운 운명이 임하고 말 것이다.

(2) 경건의 생활에 비추어 그렇게 할 수 있다. 

.....즉 복음의 원칙을 특정 개인의 삶에 적용하여 보아서 진위를 가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여러분이 복음의 원칙에 의거하여 여러분과 교제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이면 하나님도 그를 받아들이실 것이다. 또한 여러분이 회개치 못한 자를 또한 파문을 일으키고 남을 감염시키는 죄를 지닌 거만한 자로 인정하여 추방시킨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임할 것이다".

Ⅲ. 도마의 불신.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나타나셨다는 소식을 접하였을 때 도마는 그것을 믿지 못하였다.

1. 이 모임에 도마가 참석하지 아니하였다는 사실이 본문에 밝혀지고 있다(24절). 

---본문에서 그는 또한 "열두 제자 중에 하나" 곧 사도들의 무리의 한 명이라고 언급되고 있다. 

현재 그들은 열한 명이었지만 본래는 열두 명이었었다. 그리고 후에 다시 열두 명으로 보충되는 것을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다.

종전에 말한 것처럼 그들은 현재 열한 명에 불과하였다. 게다가 그들 중에 한명이 결석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모두 모였던 의미 깊은 날 이전까지는 결코 함께 모이지를 못하였다.

도마가 이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것은 그에게 불행이었다. 

그가 참석지 못한 것은 건강이 좋지 않았거나 모임에 대하여 알지 못하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또는 그의 죄됨과 어리석음 때문에 참석지 못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주님을 만날 이 기회보다는 사업에 몰두하거나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였는지 아니면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감히 올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는 자신의 겁 많은 마음을 자기가 조심성이 많고 자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핑계 대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하간 그는 불참으로 말미암아 그의 주님이 부활하신 것에 대하여 만족함과 동료들과 이로 인한 기쁨을 나누는 만족함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스도인들의 정규적인 엄숙한 집회에 마음대로 빠지는 사람들은 언제 무엇을 잃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2. 주님이 그들을 방문하셨다는 사실을 제자들이 도마에게 설명함(25절). 

---이 일 후 그들이 그를 보았을 때 그들은 기쁨으로 그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일어났던 모든 일, 특히 주님께서 그들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심으로 만족게 하셨다는 사실을 말하였다. 

---당시 도마가 그들과 같이 있지는 아니하였지만 그리 먼 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한 번 참석지 못하였다고 해서 영원한 변절자로 정죄하지는 말아야겠다. 도마는 유다와 같지는 아니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의기가 충천하여 이 사실을 말하였을까를 상고하여 보자.

그들은 "우리가 주님을 보았네. 이제껏 그렇게 감격스러웠던 순간은 처음이었어"라고 말하였다.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그들은 도마에게 이 사실을 말하였다.

(1) 그가 없었던 사실을 책망해야겠다는 생각에서 그들은 이 말을 하였다. 

....."우리는 주님을 뵈었는데 자네는 없어서 섭섭했네."

(2) 주님의 부활을 알려 주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주님을 보았네. 자네도 같이 있어서 그를 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나. 아마 자네도 굉장히 좋아했을 걸세"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서로 상대방을 거룩한 믿음에 세우기 위하여" 애를 썼다.

그들은 불참한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들은 것을 되풀이하여 다시 들려 주었다. 그리고 자기들이 경험한 것을 다시 전해 주었다. 

.....믿음으로 주님을 뵈었고 그의 은혜로우심을 맛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사실을 말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렇다고 자랑이 되지는 말도록 하자.

3. 도마의 반론. 

---그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자신이 없었던 것을 정당화시키려 하였다.

"주님이 사신 것을 보았다는 말일랑은 내게 하지 말라. 그대들은 너무 경솔해, 누군가 그대들을 기롱하는 것이 틀림 없지. 나는 그의 손바닥의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으로 만져보고 그의 옆구리의 상처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서는 결코 믿지 않을 작정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지금 그의 말을 전의 그의 말(11:16; 14:5)과 비교하면서 그가 거칠고 침울한 성격으로 비꼬아 말하는 경향이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여하간 이번의 그의 행위에 있어서는 많은 잘못이 있었다.

(1) 도마는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말씀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자주 하신 말씀을 유의하지 않았거나 또는 정당하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실은 주님이 말씀하셨으므로 설혹 그가 주님을 뵈옵지 못하였고 또 아무에게 그런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고 치더라도 "그가 살아나셨음이 확실해"라고 말했어야 옳은 것이었다.

(2) 그는 그의 동료인 제자들의 증언에 대하여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다. 

.....제자들은 지혜와 총명을 겸비한 인물들이었고 그러므로 그들의 말이니 신뢰해야 옳았던 것이다.

그는 그들이 정직한 사람들임을 알았다. 그런데 그들 열 명 모두가 확신을 가지고 일치하여 그의 부활을 증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의 진술이 사실이다"라고 스스로 설득되려 하지 아니하였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택하여 바로 이 사건을 모든 민족들에게 증언하게 하셨다.

그렇지만 그들의 동료의 하나인 도마는 그들이 신뢰할 만한 증인들임을 인정하려 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말을 자기가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여하간 그가 그들에게 의문을 품을 것은 그들이 진실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이번 일에 경솔하였을 것이라는 점에서였다.

그는 그들이 너무 경솔하게 믿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을 두려워하였다.

(3) 그는 그리스도를 시험하였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을 한계가 있는 분으로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방법에 의해서 믿으려 했거나 또는 전혀 믿으려고도 아니하였다.

그는 사도들이 보았다고 그에게 말한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 본다거나 그의 옆구리의 상처에 손을 집어넣도록 허락된다는 일은 있을 수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살아있는 몸을 이렇게 마구 다루는 것도 합당치 않은 일로 생각하였다. 그럼에도 도마는 이런 증거라도 있어야 믿을 수 있다고 고집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이 사건을 웃음거리로 넘겨 버림으로 그의 상상을 그럴 듯하게 하려한 것이든지 아니면 전혀 믿지 않으려는 속셈에서 나온 것이었다(마 16:1; 27:42 참조).

(4) 제자들은 그들 앞에서 이루어진 공개적인 장담 앞에서 정말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과 실망을 느꼈다. 

.....도마의 행위는 죄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거침이 되었다.

한 겁쟁이가 많은 사람을 겁쟁이로 만들 듯이 한 불신자 또는 회의론자가 "그 형제들의 마음도 그와 같이 떨리게 만든다"(신 20:8). 

.....도마가 만일 이 죄악을 마음에 품어 두기나 하고 발설하지는 않았다면 그의 잘못은 자기에게는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불신을 단호하게 선포하였으므로 아직 약하고 흔들리는 상태에 있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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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의 불신앙(요 20:26-31)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또 다른 현현에 대한 기사를 보게 된다. 이때는 도마도 이 자리에 참여하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대하게 된다.

Ⅰ. 그 때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오셨을 때였다.

--- "여드레를 지나서," 즉 부활 후 이레 되는 날, 그러므로, 말하자면 "그 주일의 첫날임에 틀림 없다."

1. 그는 얼마 동안 자신의 재현을 지연시키셨다. 

---그것은 그가 제자들과 계속 사귀기 위해 자신이 이전에 사셨던 그러한 모습으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때때로 필요할 때 천사들만이 그리하는 것처럼 이렇게 찾아 오신, 다른 세계에 속한 자로서 자신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서였다. 

---이 여드레 동안, 그리고 지상에 머무신 나머지 시간 동안에 그리스도께서 어디에 계셨는가 하는 것을 묻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또 그것을 규정한다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다. 그가 어디에 계셨던 간에 "천사들이 그를 수종들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의 사역의 시초에 그는 40일 동안 보이지 않는 중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마 4:1, 2).

그리고 이제 그의 영광의 시초에 그는 40일 동안 대부분 보이지 않는 중에 천사들에게 수종받으신 것이다.

2. 그는 그것을 7일간이나 오랫 동안 늦추셨다. 그리고 왜 그렇게 하셨나?...생각해 보라..

(1) 도마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는 제자들의 첫 번 모임을 등한시했었다.

그래서 그에게 앞으로는 은혜의 적절한 때를 더욱 중히 여기도록 가르치기 위하여, 그가 여러날 동안 그런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한 조수를 놓친 자는 상당히 오랫 동안 다른 조수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도마에게는 매우 우울한 주간이었으며 다른 제자들이 기쁨이 충만한 반면, 그는 의기소침하고 불안했었다고 생각될 만한 이유가 우리에게 충분히 있다. 

이것은 그 자신과 그 자신의 어리석음에 기인했다.

(2) 나머지 제자들의 믿음과 인내를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주님을 만나본 것에 만족했을 때 그들은 위대한 순간을 이루었었다. "그 때 제자들이 기뻐하더라."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이 여러 날 동안 자기를 보지 못해도 그들이 얻은 근거를 지킬 수 있는지를 시험해 보자 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지나치게 사랑하고 의존하던 그의 가시적 임재로부터 그들을 서서히 떼어 놓으려고 하셨을 것이다.

(3) 일주일의 첫날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 날은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이며, 거룩한 휴일이요 또 거룩한 집회로써 자기의 교회 안에서 지켜져야 한다는 자기 뜻을 명백히 알리기 위함이었다. 

칠일 중 하루는 경건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것은 타락 이전의 오랜 태초로부터의 명령이다.

더우기 메시야 왕국 안에서 일주일의 첫날은 그토록 엄숙한 날이 되어야 하며, 바로 그 날에 그리스도께서 재삼 제자들을 경건한 모임에서 만났다는 것을 암시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가 첫 번째 나타나셨을 때 그들에게 일주일 후 그 날에 다시 함께 모이기를 명하시고 그들을 만날 것을 약속하셨으며, 그리고 역시 40일을 지나는 동안 다른 시간 이외에 일주일의 첫날마다 그들에게 나타나셨을 가능성이 많다. 

.....이 날의 종교적 준수는 그 때부터 교회의 전 시대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 내려 왔다. 그러므로 "이 날은 주님께서 만드신 날이다."

Ⅱ.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이렇게 찾아 오신 장소, 그리고 그 과정. 그것은 예루살렘에서였다. 

---첫 번째와 같이 이 때에도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들이 닫혀 있었다. 

거기서 그들은 칠일 간 무교절을 지키기 위해 머물렀으며 무교절은 그 전날 끝났으나, 그들은 일주일의 첫날에 갈릴리로 여행을 떠나려 하지 않고, 그 다음 날까지 머물렀다. 왜냐하면 그 날은 그리스도의 안식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다음을 유의해 보자.

1. 도마가 그들과 함께 있었다. 

---비록 그가 먼저 번에는 스스로 떠나 있었으나 두 번째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가 어떤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될 때는 언제나 그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그 다음 기회를 포착하고자 더욱 더 진지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만일 그러한 손실이 우리의 갈망을 자극한다면 그것은 좋은 징후이나 그 갈망을 식혀 버린다면 그것은 좋지 못한 징후이다. 

---제자들은 도마를 자기들 가운데로 들어오도록 허락했으나, 그들이 말한 그대로 그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도록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때까지는 아직 그것이 단지 희미하게 나타났으며 그들은 회의적인 논쟁 속으로 그를 이끌어 들이지 않고 그가 기꺼이 와서 만나 보기를 바랐다. 

---그리스도께서는 도마의 만족을 위하여 나타나시지 않고, 그가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에 비로소 나타나셨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과 사역자들의 모임에 호의를 보이시며, "그들 가운데"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외에 주님께서는 모든 제자들을 자신이 도마를 책망하시고 또한 온유하게 보살펴 주신 사실에 대한 증인으로 삼으시려고 하셨을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그들 중에 "오사 가운데 서심"으로 그들 모두가 그를 알아 보았다. 

---이것은 그가 전과 같이 이때에도 변함없이 이전에 그 자신을 나타내신 그대로(19절), 자기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님의 겸손을 보라. 하늘 문들이 열려질 준비를 갖추었고, 거기서 그는 무수한 천사들의 경배 가운데 계셨을지 모른다.

그러나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그는 땅 위에 머무셔서 가련한 제자들의 작은 비밀 모임에 찾아 오셨으며, 그들 가운데 계시는 것이다.

3. 그는 전에 하셨던 그대로 그들 모두에게 친근한 모습으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고 인사하셨다. 

---이것은 공연한 반복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 사람들에게 주신 풍성하고 확실한 평강과 또한 그의 축복의 계속을 의미한다.

그로 인하여 그들은 "실패하지 않고, 매일 아침 새로워지며," 모임마다 새로워지는 것이다.

Ⅲ. 이 모임에서 그리스도와 도마 사이에 오고 간 내용. 

---그가 나머지 제자들에게 상당히 많은 것을 말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지라도 기록된 것은 그것 뿐이다. 다음을 유의하자.

1. 여기에 그리스도의 도마에 대한 은혜스러운 겸손이 있다(27절). 

---주님께서는 도마를 다른 제자들로부터 뽑아내시어 특별히 그에게 자신을 내미셨다.

'네가 그렇게 하려고 마음 먹은 대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못자국에 대한 너의 호기심을 최대한으로 만족시키며, 만일 그보다 더 너를 확신케 해 줄 것이 없다면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알게 된다.

(1) 주님께서는 여기에 있는 명백한 언급 중에서 도마가 말했었던 것을 한 마디 한 마디 그대로 응답하심으로 도마의 불신 발언을 은연중에 책망하셨다

.....이것은 비록 보이지는 않았을지라도 주님께서는 그것을 들으셨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도마에게 그렇게 말씀하심으로, 도마는 얼굴을 붉히게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요약하면 [모든 언행심사, 숨겨진 바 찰나적-무의식적 의도조차도!!] 우리의 혀로 불신의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전혀 그런 생각조차 우리 마음에 없을 때라도 그것을 주 예수님을 아신다(시 78:21).

(2) 그의 연약함에 대한 각별한 겸손은 다음 두 가지로 나타난다.

① 그는 자신의 지체가 제한되어지는 괴로움을 겪는다. 

.....위대한 인물들은 자기들보다 열등한 자들에 의해 지배되지 않으며, 특히 자기들의 은혜의 행위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도마와 관계를 끊어 그를 불신 가운데 내버려 두시지 않고, 오히려 그의 헛된 환상에까지 자신을 베풀어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선한 목자로서 "쫓긴 자를 돌아 오게 하며"(겔 34:16).

......우리도 이와 같이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야 한다(롬 15:1, 2).

② 주님께서는 도마에게 그의 손을 자신의 옆구리에 밀어 넣는 것조차 허용하셔서, 그로 인해 도마가 마침내 믿을 수 있다면 자신의 상처가 할켜지는 것도 참고 견디시리라. 

.....이와 같이 주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기 위해 차라리 잊어버리고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될 만큼 불명예스럽고, 수치스러운 죽음이지만 그 자신의 죽음을 기념하여 지키도록 성례전을 마련하신 것이다.

더욱이 그것은 우리의 믿음에 대한 격려가 되는 만큼 자기의 사랑의 증거이기도 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것이 기념되어지도록 명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 죽음을 보는 이 성례전에서, 말하자면 우리의 손가락을 그 못자국 속에 넣어 보도록 요청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로 당신의 손을 내밀어라." 그가 도움과 초청과 자비의 손을 당신에게 뻗치시리라.

.....그리스도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지 않으시면 안 되었던 마지막 말씀은 충격적인 것이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즉 너는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라. 마치 불신 속에 유폐된 것처럼, 그때 도마는 굽힐 줄을 몰랐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라"는 이 경고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다.

만일 믿음이 없다면 우리에게 그리스도도 없고, 은혜도 없으며 소망도 없고 기쁨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말하자.

2. 여기에 도마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시인이 있다. 

---그는 이제 자기의 불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절)라고 외친다.

그가 자기의 손가락을 못자국 속에 넣었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29절) 하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그가 그렇게 실행하지는 않았던 것이 분명한 듯하다. 그저 본 것으로 충분했다. 이제 불신과 씨름한 후에 믿음의 승리자가 되었다.

(1) 도마는 이 때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에 완전히 만족했다. 

.....그것은 십자가에 못박혔던 바로 그 예수께서 이제 사셨고, 이 분이 바로 그분이시다라는 것이다.

그가 믿기에 느리고 더디었던 것이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해 주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부활을 세상에 증거하며 그것에 생명을 걸었던 부활의 증인들은 경솔하게 믿은 사람들이 아니라 매우 신중했고, 또 그들이 요구할 수 있는 최대한의 증거를 보기 전에는 믿기를 보류했었다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온다." 

.....비록 지금, 또는 전에는 연약하여 흔들리더라도, 그 믿음이 진실하다면 <겨자씨처럼 살아 있다면>  마침내 영적 후사를 산출하는 영적 아비가 되리라!! 

(2) 그러므로 도마는 그가 주시요, 하나님이심을 믿었으며 우리도 그렇게 믿어야 한다.

① 우리는 그의 신성, 즉 본 복음서 저자가 처음부터 자기의 논리를 주장해 온 것처럼, 그는 하나님이심과 사람이 하나님을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안 된다(1:1). 

.....우리 거룩한 기독교회의 머리이신 창시자는 필요 불가결한 지혜와 능력과 주권과 하나님의 불변성을 지니고 계신다.

주님은 그것의 창시자일뿐 아니라, 그것을 계속 지속하기 위한 바탕이시며 또한 그것을 공급하기 위한 생명의 원천이시기 때문이다.

② 중보 즉 그는 주시며 한 주이심(고전 8:6; 딤전 2:5). 

.....그는 전권대사로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가로 놓인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고, 또 불가피하게 우리의 화근이 되어 왔던 논쟁을 처리하며, 나아가서 우리의 행복에 필수적인 교통을 확립하기 위한 충분한 권위를 부여받으셨다(행 2:36; 롬 14:9 참조).

(3) 도마는 그를 자기의 주시요, 자기의 하나님으로 시인했다. 

.....믿음 안에는 복음의 진리에 대한 이해의 일치와 함께 복음의 조건에 대한 의지의 일치도 있어야 한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그를 명하신 그대로 우리에게 되어지도록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안 된다.

Adonai - 즉 나의 주는(나의 바탕이요, 의지) Elohim - 즉 나의 하나님(나의 왕이며 제사장)을 가리켜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를 재판장과 중보자로 삼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선택을 인정하고 그에게 우리 자신을 온전히 의탁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생명력 있는 믿음의 행위이요, 그는 나의 것이다(아 2:16).

(4) 도마가 이것을 공개적으로 고백한 것은 자기의 불신과 의심의 증인이었던 바로 그 사람들 앞에서였다. 

.....그는 그리스도께 그것을 말한다. 그 의미를 완전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는 나의 주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읽지 않으면 안 된다. 

혹 그의 형제들에게라면 "이는 나의 주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다" 라고 말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가?

우리는 주님께 나아가서 다윗과 같이(시 16:2) 그렇게 아뢰지 않으면 안 되며, 그에게 "우리의 증거물"로써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고, 또한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에서 승리하는 자로서, "이는 내 사랑하는 분이시다"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도마는 자기의 모든 힘을 다하여 그리스도를 붙들고, "나의 주시요 나의 하나님"하며 사랑의 열정으로 말하고 있다.

3. 그리스도의 전체적인 판단(29절). 

---"도마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마침내 네가 믿음에 이르게 되어 어쨌던 잘 되었다. 그러나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다음을 보자.

(1) 그리스도께서 도마를 믿는 자로 인정하신다. 

.....비록 더디고 연약할지라도 확실하고 순수하게 믿는 자들은 주 예수를 은혜롭게 받아들이게 된다.

오랫 동안 버티던 자들이 마침내 굴복하면, 주님께서는 곧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도마가 그리스도를 시인하자마자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로하시며 그가 믿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시는 것이다.

(2) 주님께서 로마의 이전 불신을 책망하신다. 

.....그는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하고 부끄러워해도 좋았을 것이다.

① 그는 믿기를 너무 망서렸기 때문에 그 자신의 위로에 이르는 데에 그만큼 늦어졌다. 

.....그리스도를 따르게 된 성실한 자들은 좀 더 일찍 주님을 따르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하는 많은 이유들을 보게 된다.

② 도마가 마침내 믿음에 이르게 된 것은 상당한 요동함없이 된 것이 아니다.

..... "너는 만일 내가 산 것을 보지 못했다면 나를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 자신의 감각 외에는 어떤 증거도 용납될 수 없으며, 우리 자신이 목격한 것만 믿어야 한다면 모든 대화와 교제는 끊어질 것이다.

이것이 만일 입증의 유일한 방법이어야 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어떻게 전향해야 될 것인가?

그러므로 도마는 이것을 크게 강조하기 위하여 마땅히 책망받은 것이다.

(3) 주님께서는 더 쉬운 증거 (또는 조건)으로도 믿는 자들의 신앙을 칭찬하신다. :: 찬찬히 그대 주변을 둘러 보라, "나 여호와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믿는 자로서 도마는 진실로 축복받았다.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자기 눈으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더 복되다." 

.....그것은 믿음의 대상들(이것들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히 11:10; 고후 4:8)을 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동기/계기들(그리스도의 기적들, 특히 부활)을 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들을 보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복이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 보면 옛날 구약 시대 성도들로 간주할 수 있는데, 이들은 그들이 본 그것을 보지 못하였으나 조상들에 약속된 것을 믿고, 또 그 믿음으로 살았다. 또 다른 한편으로 보면 장차 믿게 되는 이방인들로 간주할 수 있는데, 이들은 유대인들과 같이 그리스도를 육체로 보지 못하였다.

이 믿음이 보고 믿는 자들의 믿음보다 더 칭찬할 만하며 갸륵한 것이다. 그 까닭은

① 그것은 믿는 자들의 더 훌륭한 마음 가짐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은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서 더 큰 성실성을 그리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보다 큰 마음의 고상함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한 보이는 것에 의존하는 자는 일종의 강압에 의해 자신 속에 있는 훼방을 이겨내야 하지만, 그런 것 없이도 믿는 자는 <어찌보면, 신사적인, 탐구적인>베뢰아 사람들처럼 보다 더 고상하다.

② 그것은 하나님 은혜의 능력을 나타내는 더 큰 예증이기 때문이다. 

.....증거가 보다 덜 감각적일수록 믿음의 역사는 그만큼 더 주님의 행사로 여겨진다.

베드로가 믿음으로 축복된 것은 혈과 육이 그것을 알게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마 16:17).

혈과 육은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의 신앙보다는 보고 믿는 자들의 신앙에 더 기여한다. 

***라이트푸트(Dr. Lightfoot) 박사는 한 유대 율법 학자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개종자(改宗者) 한 사람이 시내산 앞에 섰던 이스라엘인 수천명보다 더 하나님께 합당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고 율법을 받아들였으나, 한 개종자는 보지 못하고도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Ⅳ. 역사가가 어떤 결론을 내리는 것처럼 이 복음서 저자가 자기의 기록에 대하여 평하는 말(30,31절). 다음을 살펴 보자.

1. 모두 기록될 만한 가치가 있는 다른 많은 일들에 행하여졌으나, 그는 "많은 표적들이 이 책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알려 주고 있다. 

---어떤 이들은 "많은 표적" 이것을 예수님께서 자신의 전 생애 동안 행하신 모든 표적들과 그가 하신 모든 놀라운 말씀들, 또 그가 행하신 모든 놀라운 기적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행하신 표적들로 국한된 듯하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여기서 말하고 있는 다만 이 제자들 앞에서 만이기 때문이다(행 10:41).

주님의 몇몇 현현(顯現)은, 고린도 전서 15장 5-7절에 나타나신 것처럼,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사도행전 1장 3절을 참조하라. 이제 다음을 살펴 보자.

(1) 우리는 여기서 다른 표적들, 많은 다른 것들이 있었다고 하는 이 개략적인 증언을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기 위하여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상세한 기사들에 덧붙여서 그 증거를 매우 크게 강화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록한 자들은 증거물을 긁어 모으거나 그들이 찾아 낼 수 있는 그런 짤막하고 빈약한 증거를 잇대거나, 또 추측으로 그 나머지를 보완하거나 하기에 급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충분하여 남아 도는 증거와 그들이 필요한 이상으로 제시할 수 있는 더 많은 증거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 다른 표적들이 그들 앞에서 행해진 바로 이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해야 할 전도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 증거를  풍성하게 소유해야 했던 것은 필수적이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강력한 위로를 지니고 그것에 생명을 걸고 나아가게 하기 위함이었다.

(2) 우리는 왜 그것들이 모두 기록되지 않았는가라든지, 왜 이것들보다 더 많은 것이라든지, 혹은 이것들 말고 다른 것들이 쓰여지지 않았는가 하는 것을 질문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의 감동으로 이것을 모은 성령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좋았던 것 같다는 것으로 우리는 족하기 때문이다. 

.....이 기사(記事)가 단지 인간의 작품에 불과했다면, 그것은 논쟁이 된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과 또 그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작성된 긴 논증을 입증하기 위해서 숱한 증언과 구술서(口述書)로 부풀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사이기 때문에 필자들은 거룩한 보증으로 쓰고, 충분한 증거가 된 것을 말함으로써, 기꺼이 가르침 받고자 하는 자들을 확신시켜 주고, 불신 속에서 완악한 자들을 책망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더 많은 것이 기록되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간은 신용을 얻기 위하여 말할 만한 모든 것을 제시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그는 믿음을 줄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 기사가 호기심이 많은 자들을 환대하기 위하여 쓰여졌다면, 모든 사건마다 빛을 더하고 또 윤택함으로써, 내용이 더욱 풍부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을 믿음에 이르게 하려고 쓰여졌으며, 사람들이 들든지 말든지 간에, 그 목적에 부응하여 충분히 말해졌다.

2. 그는 우리가 여기에서 발견한 것을 기록한 의도 속에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알려 준다(31절).

--- "이런 기사들이 본장과 다음 장에서 주어진 것은 이러한 증거들을,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요, 또 그의 부활에 의해서 능력으로 그렇게 선포된 대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다."

(1) 여기에 복음을 기록한 자들의 의도가 있다. 

.....혹자는 자기들의 기분전환을 위하여 책을 쓰고 또 자기들의 이익이나 칭찬을 바라고 책을 발간하며, 혹자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유모어를 알려 주기 위해서, 또 혹자는 자기들의 세속적인 편리를 위한 기술과 학문을 가르치기 위하여 그렇게 한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들은 그들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 대해 어떤 일시적인 유익을 바라지 않고,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천국으로 인도하며, 또한 이를 목적으로 사람들이 믿도록 설복하기 위하여 썼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 그들은 가장 적절한 방법을 택했고, 충분한 증거를 뒷받침 받아서 하나님의 계시를 세상에 전한 것이다.

(2) 복음서를 읽거나 듣는 자들의 의무. 그리스도의 도(道)와 주님에 관하여 정해진 기록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다(요일 5:11).

① 여기에서 위대한 복음의 진리는 예수께서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그리스도이심을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이라고 알려 주고 있다.

첫째, 그는 바로 그 그리스도이시니, 곧 메시야라는 칭호 아래 구약의 성도들에게 약속되고 기대되었던 그분이시며, 또한 그 이름의 의미에 따라 왕과 구세주를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그 분이시다.

둘째,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곧 중보자(그때에는 그는 선지자요, 중재자며 입법자였던 모세보다 더 크지 않았었으므로)로서 뿐만 아니라 그의 중보자되심 보다 앞선 자이시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 받고, 또 하나님의 영광으로 칭함받은 신인(神人)이 아니었다면, 그는 구세주의 사업을 행하는 일이나, 또한 구세주의 면류관을 쓰는 일이나 그 어느 것에서도 합당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② 위대한 복음의 축복은 "우리가 그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된다는 믿음"을 우리들이 소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이것은 우리의 믿음을 지시하는 것으로, 그것은 우리 앞에 놓인 생명, 즉 생명의 면류관, 생명 나무를 주목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은 생명, 즉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더불어 맺은 언약 가운데서 제시된 생명은 우리의 기쁨의 충만, 그리고 우리의 모든 섬김과 고난에 대한 풍성한 보상으로서 우리가 기도(企圖)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둘째, 우리의 신앙을 격려하고, 우리를 믿음에 이르도록 초청하기 위한 것이다. 

.....어떤 큰 이익의 가망에 따라서 인간은 오래도록 모험한다.

그리고 복음이 그렇게 일컬어지듯이, "이 생명의 말씀"에 의해서 제시된 것보다 더 큰 이익이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다(행 5:20). 그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와 더불어 교제하는 가운데 있는 영적 생명과 아울러 그의 묵시와 결실 속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둘 다 포함하는 것이다.

이 양자는 그의 공로와 능력에 의해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는 것이며, 양자가 다 모든 참 믿는 자들에게 파기할 수 없이 확실한 것이다.

******

요한복음 제 20장

=====20:1

@안식후 첫날 - 이는 일주일의 각 요일에 해당하는 명칭올 사용하지 않고 있었던 유대인들이 안식일올 중심으로 요일올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안식 후 첫날'은, 하루의 해가 지는 시간부터 다음날 해지는 시간까지튤 하루로 계산하는 유대인의 방식에 따른다면 토요일 일몰 후부터 일요일 일몰 때까지의 어느 시점을 가리킨다. 

한편 본문의 '첫날'(* ,미아)은'하나'를 뜻하는 기수인데, 당시에 '첫째'(* ,프로토스)를 뜻하는 서수로 표현했던 일반 용법과는 다른 표현이다. 혹자는 이것이 셈어 (Sem 語)적 표현법의 영향이라고 보는데(Barrett), 확정적이지는않지만 히브리어나 셈어에 그런 표현이 있는 점을 감안할 때 근거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 어두을때 - 마태의 '미명'과 마가의 '해 돋을 때'라는 표현에 비해 다소 이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 흑자는 복음서들의 표현을 종합적으로 해석하여, 집을 떠날 때는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두운 때였고 무덤에 도착한 때는 여명이 밝아올 때였다고 본다(Lenski).아무튼 본문은 막달라 마리아가 매우 이른 시간에 예수의 무멈올 찾아갔다는 것을 말해 주는데, 이렇게 일찍 무덤을 방문한 것은 예수를 탄압한 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함일 수도 있고, 돌아가신 주님에 대한 식지않는 열정올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한편 본절의 '이른 아침' 그러니까 아직 어둡기는 하지만 이제 날이 밝아지기 시작하는 시각은 하나님의 구원사에 있어 매우 증요한 의미를 지니는 역사적 시점이다. 그것은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주일이 시작되는시점이며, 시작으로서의 창조를 기념하는 안식일이 완성으로서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로 대치(代置)되는 시점인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 - 이 여인은 한때 일곱 귀신에 들려 고통올 받다가 예수께 고침을 받은 이후 예수를 따르며 봉사하였던 여제자격의 인물인데(막 16:9; 눅8:2),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예수를 따르며 수종들었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에도 끝까지 남아 이를 지켜보았을 정도로 헌신적이었다(19:25). 혹 독자들 중예는 이 여인을 마르다의 동생이자 나사로의 누이인 베다니의 마리아와 혼동할 수도 있으나 양자는 전혀 별개의 인물이다(11장). 막달라 마리아(Mary Magdala)라는 이름은 가리키며 막달라라는 성읍은 디베랴(Tiberias) 북쪽 4.8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한편 본문에서는 무덤을 최초로 방문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인 것처럼 되어 있으나, 공관복음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 외에도 여러명의 제자들이 함께 동행하였다(마 28 :1; 눅 23:55;24:1). 이런 차이는 요한이 막달라 마리아 외에 다른 여인들이 동행했다는 사실을 모른데서 온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2절의 '우리'라는 표현은 복수의 인물들이 무덤올 방문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아마 요한은 첫 방문자들 가운데 핵심 인물인 막달라 마리아에만 초점올 맞추어 서술하였을 것이다.

@돌이...옮겨간 것을 보고 - 막달라 마리아 일행이 무덤을 방문한 것은 유대인의 관습에따라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라고 보는것이 가장 일반적이다(막 16:1) 향유를 바르는것은 곧 시신을 돌보는 것과 같은 의미인데,유대인듸은 시신이 썩기 전까지는 고인(故人)의혼이 시신 곁을 떠나지 않는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장사 지낸 후 사흘동안 시신을 돌보았던 것이다. 

한편 여인들이 무덤을 채아왔을 때 무덤입구를 막았던 돌문이 옮겨져 있었다는 것은 예수의 무덤에서 무언가 놀라운 일이 일어났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왜냐하면 무덤을 막았던 돌문은 장정 다섯 명이 힘올 합해야 겨우 옮길 수 있을 정도로 무거웠으며 입구에 움푹 패인 흠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인 몇몇이 옮기기에는 사실상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마가는 여인들이 돌문올 여는 것에 대해 염려하며 길을 떠나는 장면올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막 16:3).

=====20:2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달려가서 - 요한은 공관복음서에서와는 달리 천사에 대한 언급을(12,13절) 비교적 간략히 다룬다(마 28:2-7; 막 16:5-7; 눅24:4-7) 본서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 안을 확인해 보았는지 아니면 무덤 문이 열려져 있는것을 보고 직감적으로 시신의 도난을 생각했는지 분명치 않다. 여하튼 막달라 마리아는 시체가 없어졌다고 확신했고 그것올 급히 제자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달려갔다. 요한은 베드로와 사랑하는 제자만이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빈무덤의 사실을 전해들은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다른 복음서들과 콴련시켜 볼 때 모든 제자들이 그 소식을 들었을 것이 확실하다. 아마 요한은 직접 무덤을 확인한 두 중심적인 제자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해 나갔을 것이다(눅 24:12 주석 참조). 베드로는 세번씩이나 예수를 부인했던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다시 제자들 중 대표격으로 언급된다. 18:27이후로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으나 이제로부터 다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언급하는 바 '예수의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는 요한의 특징적인 표현으로(13:23;19:26) 21:20과 24절을 연관시켜 블 때 이 인물은 본서의 저자인 사도 요한자신임을 알 수 있다. 요한이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표현 속에 자신을 숨기는 것은 그의 겸손한 태도 때문이라고 블 수 있다.

@사람이 주를...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 본문의 '우리'라는 표현은 무덤을 방문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 혼자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1절 주석 참조). 막달라 마리아는 두 제자에게 누군가 예수의 시신을 가져갔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가져갔다'에 혜당하는 혤라어 '에란'(* )은 비인칭 동사로서 예수의 시신을 흠쳐갔으리라고 의심되는 대상을 분명하게 가리키지는 않는 표현이다. 아마 무덤 도굴꾼이거나 예수의 적대자들이 마리아에게는 혐의(嫌疑)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결국 막달라마리아의 보고 내용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가능성을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바 그녀가 무덤을 찾아간 것이, 예수께서 생전에 부활을 예고한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그것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는 해석은 전혀 타당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20:3

@베드로와...무덤으로 같새 -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 즉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곧바로 무멈율 향해 달려갔다. 아마 이들도 막달라 마리아의 생각대로 누군가가 예수의 시신을 횹쳐갔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확인해 보고자 했을 것이다(9절). 여기서 '갈새'(* , 에르콘토)는 미완료형으로 두제자가 달려가고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제자들이 이렇게 즉각적(卽刻的)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은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이 제자들에게는 전혀 금시 초문의 뜻밖의 사건이었음을 시사한다. 만약 제자들 가운데 누군가가 예수의 시신을 가져가 놓고 예수께서 부활했다고 하려는 계획을 진행시켰다면(마 27:63, 64) 베드로나 요한이 그것올 몰랐을 리가 없고 그들이 이렇게 서둘러 무덤으로 달려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한편 눅24:12에 의하면 무덤이 비어있음을 확인한 제자는 베드로 한 사람이다. 그런데 본문은 요한도 함께 갔다고 진술하고 있다. 본서의 기록이 더 정확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사븍음서 가운데 남자 제자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목격한 사람은 요한 혼자이기 때문에 (19:26, 27) 예수의 무덤을 알고 있던 요한이 베드로를 인도하여 무멈으로 함께 갔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4절에서 요한이 먼저 무덤에 당도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20:4

@달음질하더니 - 두 제자는 그들이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무덤이 비어 있고 누군가 예수의 시신을 가지고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때 그녀의 추측예 동의했건 예수의 부활을 떠올렸건 간에(물론 전자일 가눙성이 많지만, 9절 주석 참조)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런 심리상태로 침착하게 걸어간다는 것은 오히려 어색 할 것이다.

@다른 제자가...먼저 무덤에 이르러 - 베드로보다 요한이 먼저 무덤에 도착한 것에 대해 학자들은 대개 요한이 베드로보다 젊었기 때문이라고 본다(Lenski, Tenney).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대로(3절 참조). 요한이 무덤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첨가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먼저 무덤에 도착한 것이 곧 요한의 사도적 우월성올 뜻한다고는 볼 수 없다(5-4절)

=====20:5

@구푸려 - 이는 헬라어 '파라큐사스'(* )를 번역한 말로서 자세히 관찰하기 위하여 허리를 굽히고 들여다 보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베드로처럼 적극적이지 않고 세심한 요한의 성격을 잘 나타낸다. 그러나 요한은 세심하게 관찰을 할 뿐 선뜻 들어가지는 않고 있다. 혹자는 요한이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것은 수의가 무덤안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시신이 아직 있다고 생각해서 이 시신을 존귀하게 여겼거나 시체틀 만지는 부정(不淨)을 저지르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라고도 본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그다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8절).

@세아포 - 이것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감쌀때 사용한 삼베를 가리킨다(마 27:59). 성경상으로 살펴보면 삼베는 시체를 싸는 것 외에도 성막의 앙장(仰帳)(출 26:1), 귀족의 복장(창 41:42), 돛(겔 27:7), 이불(잠 7:16) 등을 만드는 데사용되었다.

=====20:6

@베드로도...세마포가 놓였고 - 베드로의 행동은 그의 성격대로 거침없이 단숨에 무덤안으로 들어가는 양태로 나타난다. 앞절과 본절에서는 무덤 안에 세마포가 있었다는 것이 거듭 확인되고 있다. 이와 갈은 확인은 세마포의 존재가 시체 도적설을 반증(反證)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에 거듭 언급되고 있는 듯하다(7절 주석 참조)

=====20:7

@머리를 쌌던 수건은...개켜 있더라 - '개켜 있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테튈리그메논'(* )은'싸다', '봉하다'라는 뜻으로 수건이 식탁보가 접혀있는 것처럼 납작한 형태가 아니라 둥그렇게 말려있는 모양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것이 머리에 말려있던 대로의 모양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사용하기 전의 처음상태로 말려있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만약 전자라면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을 때 손과 발이 세마포로 묶여 있고'머리에는 수건이 감겨 있던 것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온 몸을 감쌌던 세마포와 수건으로부터 몸만 빠져나오는 신비한 방식으로 부활했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되었을 가눙성은 희박하다. 왜냐하면 만약 세마포와 수건이 처음 싸여있던 그대로 제자리에 남아있고 예수께서 몸만 빠져나간 것이라면 그것을 요한이나 다른복음서 제자들이 상세히 기록하지 않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머리를 쌌던 수건은 셰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는 표현에 서 '딴'(* , 알라)이 '따로 떨어진'을 뜻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전자일 가능성은 더 희박해진다. 왜냐하면 전자의 해석을따를 경우에는 수건과 세마포가 '따로'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목 길이 정도의 간격을 두고 서로 나란히 눠여져 있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요한이 세마포가 그 자리에 놓여 있고 수건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한 목적은 시체 도적설을 반박하기 위함이라는 점이다. 만약 누군가가 시체를 훔쳐 갔다면(마 27:64) 세마포를 벗겨내어 두고 간다거나 머리를 감쌌던 수건을 벗겨내어 잘 정돈해 놓았을 가눙성은 회박하기 때문이다

=====20:8

@들어가 보고 믿더라 - 베드로가 담대히 무덤 안에 들어가 살펴보고 나자 요한도 힘올 얻어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여기서 '믿더라'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지를 규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것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대략 두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는, 요한이 무덤 안에 들어가 세마포와 수건이 있는 것을 보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게 되었다는 해석이다(Barrett, Godet, Hosknys). 특히 고데(Godet)는 '보고'와 '믿더라'의 두 동사가 모두 단수형임에 주목한다. 2-7절에서는 두 제자가 함께 언급되고 9절과 10절에서도 함께 언급되지만 유독 본절에서만 단수형인 둥사를 사용하여 그 다른 제자를 따로 언급한 것은 저자 요한이 자신만의 특별한 체험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를 보여주며, 따라서 사도 요한이 여러제자들 중 처초로 예수의 부활을 믿게 되었음을 본문은 밝히고 있다고 향다. 이 해석은 일면 타당성이 있지만 요한이 주님의 부활을 믿었다면 어찌하여 베드로나 무덤 밖에서 울고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님의 부활에 대해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설령 요한이 주님의 부활을 믿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주님의 부활의 의의를 총체적로 이해한 것도 아니며(9절), 보지 않고 믿는 것에 비해(29절) 충분하지 못한 믿음이었다 하겠다. 둘째는, 본문의 '믿더라'는 말의 뜻을 요한이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 사실임을 알았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입장이다(Broomfield).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는 전자에 가깝다.

=====20:9

@저희는 성경에...아직 알지 못하더라 - 본절은 베드로와 요한이 주님의 부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만약 요한이(혹은 베드로도) 무덤안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님의 부활을 생각했다면 그것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믿어 왔던 의인의 부활이라는 범주에서 이해한 정도였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지는 구원사적(救援史的) 의미를 이해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주님의 부활을 예언했다고 말하는 성경말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치않으나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시 16:10을 가리킨다고 본다(Robertson, Sanders, Tenney). 이 성구는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 중에도 언급되고 있다(행 2:27;13:35).그리고 눅 24:44-47에 잘 묘사된 바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당신의 부활이 구약성경에 예표되어 있음을 말씀하셨다.

=====20:10

@집으로 돌아가니라 - 요한과 베드로는 각각 자기의 집으로 간 것이 아니라 공동의 숙소로 다시 돌아간 것으로 븜이 타당할 것이다(공동 번역 참조). 한편 빈 무덤을 확인하고 돌아가는 두 제자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마 요한의 경우는 주님의 부활에 대한 어느 정도의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8절), 베드로는 다소 기이한 생각을 가지고 골똘히 생각하면서 돌아갔을 것이다(눅 24:12).

=====20:11

@마리아는...울면서 - 두 제자는 떠나고 막달라 마리아 횬자만 남아 예수의 시신이없어진 것을 애통해 하고 있다. 요한은 마리아가 언제 무덤에 다시 돌아왔는지 혹은 두 제자가 돌아갈 때 마리아와 다시 만났는지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다만 마리아가 통곡하는 장면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다. '울면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클라이오'(* )는 조용히 눈물을 횰리며 우는 것이 아니라 큰소리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통곡하는 울음을 가리킨다. 마리아의 이런 대성 통곡은 예수께 대한 그녀의 제자로서의 애정이 얼마나 뜨거운 것이었는지를 말해준다. 그러나 예수의 시신을 누가 가져갔다는 생각 외에 다른 가눙성(부활)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아직 믿음이 부족한 모습을 여실히 드러낸다. '구푸려'에 대해서는 5절을 참조 하라

=====20:12

@흰 옷 입은 두 천사 - 빈 무덤과 관련된 천사의 출현에 대해서는 사복음서가 모두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천사에 관한 구체적인 묘사에 대해서는 약간씩의 차이를 드러낸다. 가령 마태는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로 묘사하고 천사의 숫자는 하나인 것처럼 기록했다(마 28:2). 마가는 "횐 옷을 입은 한 청년"으로 묘사하고(막 16:5), 누가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눅 24:4). 이와 같은 천사에 대한 묘사를 비교해 보면 천사가 횐 색깔의 옷과 관련되어 있고 광채가 난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부분이 있고, 숫자에 관해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자는 천상적 존재의 거룩함과 정결함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고, 후자는 천상적 존재를 인간의 육안(肉眼)으로 관찰하여 묘사한다는 것이 본질적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전제로 할 때 별 무리없이 이해된다. 각 복음서 기자들은 둥일한 사건을 묘사함에 있어 관점의 차이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누가와 요한은 무덤주위의 사실에 대한 설명에 성실했던 반면 마태와 마가는 예수의 부활예 대한 사실 설명에 몰두한 나머지 천사의 숫자 같은 부대 사항들을 묘사하는 것은 소흘히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빈 무덤에서의 천사의 출현은 무덤에서 무언가 초자연적인 사건이 일어났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20:13

@천사들이...어찌하여 우느냐 - 마리아의 슬픔에 찬 울음이 어찌나 처절한 것이었던지 천사들조차 그것을 일차적인 관심으로 삼고 있다. 마리아가 이렇게 슬픈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 있는 것은 바로 삼 일 전에 사랑하는 주님이 처형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슬픔에 무덤 속의 시신마저 없어진 것에 대한 놀라움이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장례와 장사를 매우 중하게 생각했고 시신에 대한 결례를 끔찍한 일로 중오하였던 육대인들의 관습에 비추어 볼 때 마리아의 걱정과 불안 그리고 슬픔이 얼마나 큰 것이었겠는가는 능히 짐작이 간다. 그러나 천사의 물음은 그녀가 어떤 이유로 울고 있는지를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물음은 '여자여 그대는 어찌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을 모르고 슬퍼하느냐'의 뜻이었을 것이다(눅 24:5, 6). 

한편 본서에서는 천사의 역할이 그다지 중요한 의미를 시사하지 않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어찌하여 우느냐'는 질문을 하는 것 외에 다른말을 하지 않으며 더이상 둥장하지도 않는다. 이에 반해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천사가 주님의부활 사실을 고지(告知)하고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예고하기도 한다(마 28:5-7: 막 16:6, 7;눅 24:5, 6).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 여기서 2절에서와 달리 '내가'라는 일인칭 대명사를 사용한 것은 막달라 마리아 혼자임을 가리킨다. 한편 이 상황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바로 뒤에 부활하신 주님을 두고도 누군가 예수의 시신을 가져갔음에 틀림없다고 말하는 아이러니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20:14

@예수의 서신 것을...알지 못하더라 - 마리아는 무덤 속올 들여다 보고 있었고 천사들은 안에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마리아는 뒤를 돌아다 보았을까? 여기에 대해 서는 두가지 가눙성이 제시되어 왔다. 하나는 막달라 마리아가 뒤에서 나는 인기척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크리소스톰(Chrysostom) 이래 많은 주석가들이 제시한 것으로 천사들이 질문올 하면서 손가락으로 뒤에 계신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어느 것이 정확하다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또다른 문제는 막달라 마리아가 뒤에 서 계신 주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막달라 마리아의 눈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내리는 눈물이 시야톨 가려서일까? 그보다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형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이런 몸에 대해서는 바울이 '썩지 않는 영원한 몸'이라고 말한 바 있다(고전15:51-53). 이 견해가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몰라본 것이 막달라 마리아 혼자만이 아니라 엠마온 도상(道上)의 두 제자도 그랬고(눅 24:13-16). 해변에서의 제자들도 그러했기 때문이다(21:4). 여기에 덧붙여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몰라본 것은 주님께서 부활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첨가될 수 있을 것이다.

=====20:15

@여자여...누구를 찾느냐 - 부활하신 주님의 첫번째 물음은 천사의 물음과 동일한 것이다. 만약 막달라 마리아가 침착한 마음으로 생전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두번째 질문을 받았을 때 그 질문이 뜻하는 바를 알아챌 수도 있었을 것이나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마음은 걱정과 조급함 그리고 당황과 슬픔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마리아는 살아 있는 자 곧 부활하신 주님을 기다렸어야 옳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죽은 시신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는 물음은, 믿음이 부족한, 성도들이 괜한 걱정과 불안으로 무의미한 눈물율 흘리며 찾지 않아야 할 곳에서 주님을 찾을 때 들려주어야 할 물음인 것이다.

@동산지기. 막달라 마리아는 얼떨결에 뒤에 서있는 주님을 동산을 관리하는 사람 그러니까 아리마대 요셉의 동산지기라고 착각했다. 그토록 이른 시간에 동산 주위에 서성이는 사람으로서 동산지기를 떠올림은 자연스러운 생각이었다.

@주여...가져가리이다 - 여기서 사용된 '주여'(* , 퀴리에)는 13, 18절의 '주'(* , 퀴리오스)와는 달리 일반적인 존칭어로 사용되었으므로 '선생님' 또는 '여보세요'(공동번역)가 옳은 번역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시신을 찾아야 한다는 염원이 너무나 강했던 나머지 부활하신 주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했고 그녀의 마음은 너무나 조급한 나머지 '누구의 시신이 없어졌는지를' 밝히지도 않은 채, 만일 옮겨 놓았다면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고있다. 단신(單身)으로 그것도 여자의 몸으로 주님의 시신을 찾아 자신이 다시 매장하겠다고 나서는 마리아의 주님에 대한 사랑은 부활하신 주님을 동산지기로 오해한 실수를 어느 정도는 덮어주고 있다.

=====20:16

@마리아야 -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단 한 마디의 말로 자신의 정체를 나타내고 마리아의 가려진 눈을 띄어 주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생전에 자신을 부르시던 음성과 억양을 기억하고 지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분이 바로 그분임을 알았던 것이다. 부드러운 음성으로 마리아를 부르시는 이 극적인 장면은 매우 감동적이다. 이 극적 장면은 목자가 자신의 양을 부르면 양들은 그 음성을 듣고 목자를 알아본다고 하는 10:3, 27말씀을 연상시킨다.

@돌이켜...랍오니여 - 본문의 '돌이켜'는 8절과 연관시켜 블 때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이에 대해 혹자는 14절의 동작이 절반쯤 돌아선 상태를 묘사한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 혹자는 돌아서서 말한 후에 다시 무덤 쪽으로 돌아섰다고 보기도한다. 그러나 전자는 '스트라페이사(* 라는 표현이 완전히 돌아선 것을 뜻한다는 사실에 의해 거부되며 후자는 15절과의 문맥상 마리아가 말을 하고 다시 돌아섰을 가눙성보다 대답을 기대하면서 마주보고 있을 가능성이 훨씬 많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아마 이것은 요한이 극적인 장면을 강조하기 위하여 즉 마리아가 주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받았을 충격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러한 수사법을 사용했으리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Lenski). 

한편 '랍오니'(Rabboni)는 '나의 선생님'을 뚱하는 헬라어 '디다스칼레'(* )에 상응하는 아랍어이다. 이 칭호가 본문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1) 단순한 선생님이라는 뜻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견해와 (Barrett, Lenski) (2) 문자적 의미 그대로 즉 '선생님'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Bultmann). 그러니까 전자는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제대로 인식하였다고 보아 '나의 친애하는 주'의 뜻으로 보는 견해이며 후자는 마리아가 자기 앞에 서 있는 분에 대해 부활하신 주님으로가 아니라 생전의 예수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보아 단지 '선생님'으로 보는 것이다. 두 견해가 다 어느정도의 설득력을 갖는다고 볼 수 있는 바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는 쉽지 않다. 여하튼 마리아는 순간적으로 기쁨에 넘쳐 주님을 향해 달려들었다(17절)

=====20:17

@나를 만지지 말라 - 본문은 금지를 나타내는 '메'(* )와 함께 쓰인 현재 명령법 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이미 진행되고 있는행동을 중지시키는 것인지 아니면 거의 행동화되기 직전의 상태에서 중지시키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대개는 본문의 금지령이 이미 행동화된 상태에서 이제 그만하라고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Lenski, Rebertson, Tenney).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주님께서 자신의 발을 붙잡고 경배하는 것을 허락한 마태의 기록(마 28:9)을 고려해서 이다. 그러나 불트만(Bultmann)과 버나드(Bernard)는 이와 다른 건해를 제시한다. 불트만은 마리아의 행동이 있기 이전에 그녀의 행동을 멈추게 한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만약 마리아가 이미 주님의 발을 붙잡았다면 '만지지말라'는 표현 보다는 '나를 놓으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버나드는 본문얘서 여러가지 해석상의 문제가 생기는 것은 근본적으로 본문상의 훼손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즉 본문의 '메 아프트'(* , '만지지 말라')는 '메 프토우'(* , '두려워 말라')의 훼손된 형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구체적인 본문상의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추측에 불과하므로 앞의 두 견해가 진혀 타당하지 않다고 증명되는 경우에만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있다. 일단 마태의 기륵(마 28:9)을 고려해 볼때 첫번째 견해가 가장 무난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의 금지령이 최동화된 이후이건 흑행동화 되기 이전이건 가장 중요하게 물어야 할 핵심적인 문제는 왜 주님께서 마리아의 행동을 제지하셨는가 하는 문제이다.

@아버지께로...못하였노라 - 앞 절에 이어 여기서 생기는 물음은 어찌하여,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늘예 올라가지 않은 것이 마리아가 예수를 만지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는가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1) 예수께서 아직 승천하지 아니하였고 또 즉시 승천할 것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만나보고 올라가려 하므로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그러니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본다(Tenney).(2) 먼저 아버지에게 간 후에야 제자들과의 접촉을 허락한다는 의미로 본다. 여기에는 마 24:9와 조화될 수 없는 난점이 있다.(3) 예수께서 마리아의 행동을 제지한것은 그녀가 주님을 보았올 때 생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여기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이 생전의 삶으로 복귀하는 것으로 오해되는 것을 막아야 했다는것이다. 아무튼 이제 마리아는 생전의 랍비로서가 아니라 죽고 부활하신 주님으로서 예수와 관계틀 맺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위의 세 견해 중 세번째 것이 가장 무난하리라 본다.

@내 형제들에게 - 이 문구의 의미가 예수의 직계 혈육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이것은 여기서 갑자기 나타나는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이미 예수께서는 생전에'누구든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라고 말한 비 있고(막 3:35),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 대하여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하기 않으셨다'(히 2:11)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본서에서 본문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예수와 제자들간의 관계가 친구(15:14, 15)사이에서 나아가 영원한 혈육의 관계로 발전된다는 의미까지 내포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뒤에 이어지는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라 는 표현으로 볼 때 더욱 분명해 진다. 다시 말해서 당시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은 예수의 보혈로 말미암아 예수와 한 가족, 한 몸이되었다(고전 12:27)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 여기서 주님과 제자들을 따로 분리하여 진술한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다. 하나는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가 제자들과 하나님의 관계와 다르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이다.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는 영원 전부터 일체(一體) 상태에 있는 특별한 관계이지만 제자들과 하나님의 관계는 양자로 선택된 관계라는 것이다(Barrett, Tenney, Lenski). 어거스틴(Augustine)은 이것을 '본성으로는 나의 하나님이며 은혜로는 너희의 하나님이다'라는 문구로 표현한다. 다른 하나는 본문이,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성(同等性)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는 입장으로 룻 1:16을 인용하여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Moule, Brown). 그런데 전통적인 기독교의 교리상 전자의 견해가 우세하다고 본다.

@올라간다 하라 - 혹자는 본절과 관련하여 예수께서 마리아의 행동을 제지하신 것은 '나를 만지지 말고 가서 내 형제들에게,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가기 전에 이 사실을 전하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Toray). 예수께서 부활하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첫째, 수난으로 시작되는 구원사으 결정을 완성하는 의미가 있다(6:52-62). 둘째 올라감은 또한 다시옴을 뜻한다(14:18, 23). 이것은 곧 성령의 도래를 뜻한다(7:39;16:7). 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한 후 성령께서 내려오면 예전보다 더 친밀한 영적 연합의 관계가 맺어지게 될 것이다.

=====20:18

@제자들에게...이르니라 - '이르니라'(* ,앙겔루사)는 현재 능동태 분사로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달려가 거의 환호에 가까운 감정으로 외치는 장면을 생동감 있게 그려주고 있다. '내가 주를 보았다'는 외침은 어디서 소문을 들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목격한 사실임을 말하는 것으로 주님의 부활을 확정적으로 선포하는 의미가 있다. 이어서 미리아는 주께서 분부한 메시지를 충실하게 전달하였다. 요한은 여기서 이야기를 맺고 장면을 바꾸고 있으며 마리아의 메시지 전달에 대해 제자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한편 이에 대하여 마태는 직접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제자들이 분부대로 갈릴리의 산에 모여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주님의 메시지가 전달되었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마 28:16-20). 그리고 마가의 경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여인들이 빈 무덤과 천사의 임재를 경험한 후에는 두려움에 싸여 아무말도 하지 못하였고 두번째 예수께서 친히 막달라 마리아에게 현헌하셨을 때는 그녀가 가서 전하였으나 제자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막 16:8, 9-11). 누가는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는 생략한 채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주의 부활을 고했으나 제자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눅24:8-11). 이런 사실들로 볼 때 제자들이 처음에는 여인들의 부활 보도를 선뜻 믿으려 하지 않은 것 같다.

=====20:19

@안식 후 첫날 - 이 날은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주일'(Lord's day)을 가리킨다. 이 '주일'이 정확하게 안식일 다음 날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초대교부들의 문헌에 의하면 초대 교회가 '주의 날'로 일컬어진 특정한 날에 예배와 친교를 가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주의 날'이라 공식적인 칭호가 나오는 계1:10 이나 고전 16:2 등을 참조할 때,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과는 다른 어떤 특정한 날을 지켰음이 확실해진다.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는 더이상 안식일이 시간적 구속력을 강요하는 율법적 멍에가 아니라는 사상이 보편화되고 있었다(골 2:16). 그들은 안식일의 기본 정신은 폐기하기 않으면서도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큰 의미를 주는 '안식 후 첫날'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다가 로마인들이 태양의 날(Sun day)로 인정했던 주간의 첫날이 A.D.321년 콘스탄틴(Constantine, 274-337) 대제에 의해 공휴일화 되면서 이 날이 '의로운 태양'(말 4:2)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날로 굳어진 듯하다.

@문들을 닫았더니 - 제자들은 일찍이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당할 때 뿔뿔이 흩어져 제각기 피신했었다. (마 26:56). 제자듸은 위험한 선동자의 추종자로 혐의를 받고 있었으므로 비밀스러운곳에 은신하고 있었고, 언제 산헤드린의 군사들이 체포하러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었으므로 문을 굳게 닫고 있었던 것이다.

문들을 받았더니...가운데 서서 - 요한이 누가와는 달리(눅 24:38-36) 문이 굳게 닫혀진 사실을 기륵한 것은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 외에 예수께서 어떤 장애에도 방해받지 않고 공간올 통과할 수 있는 영적인 몸을 입은 신적인 존재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본다(Bultmann, Lenski, Tenney). 예수의 부활체는 20절로 미루어 볼 때 지상 생애 당시의 몸과 연속선상에 있음을 알수 있다. 예수는 공생애 기간에도 당신의 뜻에따라 물리적 제한을 초월하실 수 있음을 나타내 보이셨다(6:16-21). 그러나 이 부활체는 고전15:44에 언급된 '신령한 몸'이라는 점에서 단순히 자연 상태인 육체와는 엄연히 구분되어진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 '평강'에 해당하는 혤라어 '에이레네'(* )는 '평화', '화평','븍지'의 뜻으로 히브리어의 '샬롬'에 상응하는 말이다. 이는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인사말인데, 길에서 사람을 만났을 때(왕하 5:21), 헤어질때(삼상 1:17;행16:36). 이웃을 방문할 때(마 10:12) 등의 일상의 생활에서 주고받는 인사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 말이 주님의 입에서 베풀어졌을 때, 그 뜻은 일상적인 인사의 범주를 넘어 세상이 가져다 주는 평안과는 다른 그분의 평안이라는 범주에서(14:27) 이해된다. 아마 이 평강은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한 결과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행 13:4-12. 참조).

=====20:20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기뻐하더라 - 본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께서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자 제자들은 유령이 나타났다고 생각하여 무서움에 빠졌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유령이 아님을 확인시켜 주기 위하여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상을 보여주는 것이 본문의 장면이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보고 기뻐하기 시작했다. 누가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더 확신시키기 위하여 생선율 달래서 먹었던 일도 같이 전해주고 있다(눅 24:41-43). 예수게서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준 것은 그의 부활한 몸이 육신과의 연속성(連續性)을 가지고 있으며 죽으신 분과 부활하신 분이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님께서 영으로만 부활했다거나 기타 가현실적인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임을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한편 혹자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주님의 현현이 '너희에게 오리라'는 약속(14:18)이 성취된 것이라고 보며, 본절의 '기뻐하더라'는 앞에서 빌어준 평강이 실현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본다(Bultmann). 아무튼 사랑하는 주님을 잃고 목자없는 양같이 되었을 때의 제자들의 심정이 얼마나 곤횬스러웠을지를(19절) 상상한다면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의 제자들의 기쁨과 위안이 얼마나 컸겠는지는 눙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한편 십자가 처형에 관한 사븍음서의 기록은 한결같이 '십자가에 못박은' 사실만 간략히 언급할 뿐(마 27:35;막 15:25;눅 23:33) 구체적인 장면을 생략하고 있다.

다만 눅 24:39, 40을통해 우리는, 예수의 손뿐만 아니라 발에도 십자가에 못박히신 흔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21

@평강이 있을지어다 - 19절의 말씀과 동일하다. 19절의 평강 기원이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을 위로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면, 본절의 평강 기원은 제자들이 파송을 받아 복음을 전파할 때 당할 환난에 대해 담대히 맞설수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께서...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 복음서들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이다. 본서에서도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것은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3:34; 5:36,38;6:57;7:29;8:42;11:42;17:3, 8 등).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음을 깊이 인식하였고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고 부활하심으로 그 사명올 완성하였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심이, 아들이 제자들을 보내심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로써 제자들은 사도로서의 사명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이제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 것처럼 그들의 생명을 바쳐 복음선포의 사역을 완수해야 한다. 아울러 사도들은 그들의 사도적 권위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자각하여(13:20) 권위의 순결성을 간직해야 한다. 혹자는 13:20이나 본문을 사도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으로 간주한다(Bernard). 그러나 이러한 파송이 넓게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적용된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내신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고 순종하였던 것처럼(4:34;5:19;17:4). 또 온전히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하였던 것처럼 (1:32), 교회가 주님께 철저히 의존되어 있고 복종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때 위의 사도적 사명과 권위는 교회에 의해 승계(承繼)된다.

=====20:22

@숨을 내쉬며...성령을 받으라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이 장면 묘사는 마치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하신 것과 유사하다.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는 겔 37:9의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는 표현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태초에 하나님이 숨올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한 것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어 성령을 주시는 것이 병행을 이루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주심이 새로운 창조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지음받은 최초의 사람들이 피조된 만물에 대한 책임을 가졌다면 (창1:27, 28), 주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 새롭게 창조된 사도들은 영적 세계에 대한 책임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마 28:16-20). 이 새 창조는 븍음증거의 사명에 필요한 능력의 출처를 말해주는 바, 사도들은 인간적인 지혜나 말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에 의해 직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다(고전 2:1, 4). 

한편 '받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라베테'(* )는 '영접하라'는 뜻으로 성령을 받는다 함은 어떤 능력을 받거나 도구적 수단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인격으로서의 성령을 인간 실존속에 모신다는 뜻이며 또한 사도들을 통해 어떤 역사가 일어난다 해도 그 일의 능력의 원천은 사도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사도들 속에 내주하는 성령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제자들에게 주어진 성령은 오순절(五旬節) 날 한 곳에 모여있던 제자들에게서 폭발적인 능력올 나타내기 시작했다(행 2:1-4).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약속의 성취였다(7:39;16:7).

=====20:23

@뉘 죄든지 사하면...그대로 있으리라 - 누구의 죄를 사하거나 사하지 않을 권세는 오직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막 2:6, 10). 본절의 의미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제자들이 자의적으로 사람의 죄를 용서하거나 말 수 있는 권세를 부여받았다고 해석하는 학자는 없다. 혹자는 본절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진실함과 충성하는 자세를 갖지 않는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으나 오직 성령의 충만함에 의해 이끌려 지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권세를 설명하고 있다고 재해석하기도 한다(Filson). 그러나 그보다는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와 거부하는 자에게 생기는 결과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고다. 즉 사도들에게는 븍음 증거의 사명과 권위가 주어졌다. 그리고 사도듸이 복음을 증거할때,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의 열매를 맺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받는 결과가 생긴다. 그러나 복음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죄가 그대로 남아 끝내는 심판을 받게 된다(막 16:16). 

이런 의미에서 사도들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거나 말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자면 제자들에게 엄청난 책임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사도들이 복음 증거의 사명을 소홀히 하여 누군가 복음을 듣지 못하거나 잘못된 교훈을 받게 된다면 그리하여 그 사람의 죄가 용서받을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사도들의 직무 태만에 그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사람들을 선별하여 븍음을 들려줄 수 있는 권세를 가지지 않으며 다만 할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한다. 사도들이 받은 사명은 고귀한 권세이자 엄청난 책임을 수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20:24

@다두모라 하는 도마 - '도마'(Thoma)는 '쌍둥이'를 뚱하는 아랍어인데, '디두모'(*)는 이에 대한 헬라어 번역이다. 본래 사람의 이름이 그의 생의 행적을 결정짓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디두모'의 원래 의미가 '둘의', '이중적인'의뜻인 것과 과거에 그가 보여준 대단한 열정에 비해(11:16) 너무도 나약한 현재의 대조적인 모습은 우연의 일치치고는 퍽 의미 심장하다. 요한은 도마가 어떤사정 때문에 주님이 현현했을 때 함께 있지 못했는지는 전혀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도마가 제자들의 증거를 대하는 태도(25절) 등 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으로 인해 큰 낙담과 좌절에 빠져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20:25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 마리아도 그랬던 것처럼 '주를 보았다'는 진술은 곧 '주께서 부활하셨다'는 의미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18절).

@손의 못자국...아니하겠노라 -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여인의 말을 믿지 않았던 것보다 더 강한 의혹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는 살아나신 주를 눈으로 볼 뿐만 아니라 손으로 그 몸의 상처 자국을 만져봐야 믿을수 있다고 증거를 요구한다. 도마가 보인 강한 의혹때문에 그는 많은 주석가들에 의해 '비관론자', 또는 '회의주의자'라는 혹평을 받아왔다. 그가 그토록 강한 의혹을 나타내 보인 것은 예전의 충성스러운 모습(예수께서 눈에 보이고 만져질 때, 11:16)을 떠올려 볼 때 다소 이해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언정 보지 않고 믿지 못하기는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는 점(막 16:11)을 고려한다면 도마만을 '회의주의자'로 매도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도마가 주님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만져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했을때, 그것은 예수의 부활이 유령의 츨현을 본 것에 근거한다는 일부 적대자들의 이의 제기를 반영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결국 도마는 예수의 부활하신 몸을 보고 그분이 바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분임을 확인했으며 끝내 믿음에 이르게 되었고 일부 적대자들의 문제 제기는 이유없는 것으로 기각된 것이다.

한편 어떤 학자들은 못이 사람의 체증을 지탱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내세워 십자가 처형시 밧줄이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확실한 근거가 없는 추측일 뿐이다

그리고 '(못) 자국'에 해당하는 혤라어 '튀폰(* )은 '혼적','표'(print,KJV ; MARK,RSV)라는 뜻이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를 '장소','위치'를 뜻하는 '토폰'(*)의 오기(誤記)로 보기도 한다.(wounds, LB). 그러나 이역시 추측일 뿐이다.

=====20:26

@여드레를 지나서 - 23절과 24절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길지 않았다면 '여드레'를 지난 지금은 주님께서 처음 현현하신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다음 일요일이었을 것이다(Barrett, Buitmann, Tenney, Robertson).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갈릴리로 가서 제자들을 만나실 것을 약속하셨고(마 26:32) 또한 천사들을 통해 이 사실이 재차 통보되었음에도 불구하고(막 16:7) 제자들이 여전히 유대에 머물고 있었던것은, 그들의 믿음이 부족한 탓도 있었지만 도마를 기다리기 위함이었으리라고도 짐작할 수있다(Godet).

본절에 보면 이제는 도마를 포함한 모든 졔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전과 같이 문은 닫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문을 닫아놓은 이유로 유대인에 대한 두려움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 혹자는 이것에 대해, 지금은 성령이 주어진 다음이기 때문에(22절) 그런 어려움이 문제로 등장할 수 없었다고 본다(Hwenton). 이번에도 예수는 '평강'을 기원하는 것으로 말씀을 시작하고 있다. 그의 죽음은 제자들예게 깊은 좌절과 슬픔을 가져다 주었지만 그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기쁨과 평강을 가져다 주었다. 슬픔은 잠깐이었지만 평강온 영원할 것이다. 비록 주님은 그들 곁을 떠나지만 성령께서는 그들을 더 강하고 담대하게 붙들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22절).

=====20:27

@네 손가락...네 손 - 주님의 이번 현현은 마치 도마 한 사람을 위함이었던 것처럼 도마와의 대화만이 언급되고 있다. 주님께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도마가 믿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제시한 사항들에 대해 증명해 보일 용의(用意)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의심을 나타내었을 때 예수는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으므로, 도마는 예수께서 자신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을 듣고 놀라움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믿음 없는 자...믿는 자가되라 - '믿음 없는 자'예 해당하는 헬라어 '아피스토스'(* )는 고전 6:6;14:22과고후 4:4 등에서 '믿지 않는 사람' 즉 '그리스도교인이 아닌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도마에게 그 단어가 문자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여기서의 강조점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의 핵심이라 할 만큼 중요한 내용이라는 사실에 있다. 주님의 분명한 요구는 '믿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명령이다.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명령은 그가 보여준 회의에 대한 책망이 아니라 아직 온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가 굳건한 믿음을 갖게되기를 간곡히 원하는 주님의 애정에 근거한 것임에 분명하다. 이러한 주님의 태도는 마침내 도마를 감화시켰고 그로부터 위대한 신앙 고백을 이끌어 내었다(28절). 

한편 본문에서 '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누'(* )에 대해서 몇몇 학자들은, 가끔 사용되는 용법 즉 '자신을 보이다'의 의미로 해석한다(고진 15:58;골 3:15; 살전1:5;2:7, Lenski, Barrett). 이럴경우 믿는 자가 되라는 말은 '네 믿음을 보이라'로 바꿀 수 있다. 이런 해석도 의미는 있다. 참다운 믿음을 가진 자는 그 믿음의 참됨을 내보여 줄 수 있어야 하기 매문이다.

=====20:28

@나의 주...나의 하나님 - 도마가 주님이 허락한대로 그분의 손과 옆구리의 상흔(傷痕)을 확인해 보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됨이 없이 바로 감격에 겨운 신앙 고백이 서술되고 있다. 아마 도마는 너무나 분명하고 확연한 현실을 보는 것으로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본절의 고백은 원문상 '나의 주, 그긔고 나의 하나님'이라고만 되어 있다. 그렇다면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번역한 공동 번역이 정차하다고 할 수 있다(My Lord and My God!, RSV). 한때 도마가 증거를 요구하며 믿음이 없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지금 그의 입을 통혜 나온 신앙고백은 과거의 실수를 만회할 만하며, '나의 선생님'이라고 고백한 마리아의 신앙 고백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16절).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의 모습 속에서 생전의 주님을 재발견한 것이 아니라16,17절 주석 참조)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한 것인데, 이는 곧 예수의 부활의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했다는 의미이다. 본서 마지막부분에 기록된 이 결정적인 고백은, 처음 예수의 본원적(本源的) 정체가 하나님이심을 밝혀는 것으로 시작했던 것과 병행되면서(1:1), 예수 그리스도의 진면모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는 인간이기 이전에 태초에 하나님콰 함께 계셨던 영원한 말씀 곧 로고스였고 지금은 아버지 곧 하나님과 함께 가졌던 영광으로 다시 영화롭게 되신 분이다(17:5).

=====20:29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 주님의 말씀은 도마의 믿음의 동기에 대해 지적하지만, 그것은 책망이 아니라 교훈적인 의미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에서 일단은 도마의 믿음이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본 것에 근거해 있다.

주님이 바라는 바는 믿음이지만 그 믿음에 이르는 과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보아야 믿는 형태이며 이 믿음은 현상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모종의 이적을 요구하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보지 않고 즉 어뗘한 이적적인 사건에 의하지 않고도 믿음을 갖는것이다. 물론 도마를 비룻하여 제자들은 전자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바람직한 것욘 후자의 경우이다. 이것은 요한의 독자들 그리고 이어지는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주는 것이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올 직접 목격하였고 결과로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만 주어진 특정한 상황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보지 않고서도 성도들은 제자들이 가졌던 믿음과 동일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믿음에 있어서 '보는 것'은 불가결의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완성된 신.구약 성경이 예수를 증거하고 또한 성령께서 친히 예수를 증거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의 모습을 직접보지 않아도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벧전 1:8).

=====20:30

@제자들 앞에서...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일부 학자들은 30, 31절이 본서의 요약이며 다음 장은 나중에 첨가한 것이라고 본다(Barrett, Tenney, Bultmann). 그 많큼 이 두절은 본서 전체를 훌륭하게 요약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자신이 쓴 복음서의 끝머리에 자신이 기록한 것은 예수의 행적 가운데 일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요한이 본서를 기록함에 있어 자신의 집필 의도와 일치하는 것들만 선별(選別)하였음을 입증하는 구절이다. 여기에 미처 기록하지 못한 예수의 행적들이 부활 이전의 일인지 아니면 부활 이후의 일인지는 분명치 않다. 아마 부활까지 포함하여 예수의 공생애 전체에 걸쳐 있었던 일들을 가리킬 것이다. 또한 요한이 이 표적을 설명함에 있어 '제자들 앞에서' 행한 것이라고 표현한 사실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요한은 여러가지 표적들을 비롯한 예수의 행적 가운데 일부만을 선별하여 기륵하였지만 그 나머지 사실들에 대해서는 이 제자들의 중언을 통해 증거될 것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행 4:30).

=====20:31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믿게 하려함이요 - 요한은 독자들을 향한 직접 화법으로 자신이 복음서를 기록하게 된 목적을 두 가지로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 첫째 목적이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은 본서의 서론과 부합되는 내용으로서(1:1-18) 모든 성도의 신앙의 본질과 총체(總體)를 압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는 동격으로 언급된다. 

앞의 칭호는 요한의 복음서에 가끔 나타나는데 요한이 예수를 소개할 때(1:34), 나다나엘이 예수를 향하여(1:49), 그리고 예수 자신이 (5:25;10:36;11:4) 이 칭호를 사용한다. 그러나 '기롬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의 '메시야' 즉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드물게 사용되며 특히 예수는 이 칭호를 자신에게 사용하지 않으셨다. 혹자는 예수가 이 칭호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당시에 그 칭호가 지녔던 정치적 의미 때문이라고 본다(Tenney). 당시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메시야는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 및 옛 다윗의 영광을 되찻아 줄 인물로 기대되었던 만큼 예수가 이 칭호률 사용할 경우 자신을 정치적 혁명가로 오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의 나라는 헌재의 정치적 왕국과는 전혀 다른 나라였다(18:36).

@믿고...생명을 얻게 -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는 것은 곧 구원을 얻음을 뜻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자녀됨'(1:12),),'생명을 얻음'(본문)으로 표현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신앙만이 구원 즉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확인되어야 하는 것은 신앙 그 자체에 구원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을 수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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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9가지열매..갈5:22-23]사랑-희락-화평-오래참음-자비-양선-충성-온유-절제
**[벧후1:5-7...그리스도의 성품학교] : 미덕지절인경우사
믿음(살아생동하는,발휘되는 믿음, Faith..conformity-communion-complacency : belief : believe into = be life into= attach to, cling to) ==>덕(탁월함, 담대함과 용기/도전, Virtue  :: 덕 = Excellency탁월함>미덕 Virtue=: ~다움, 영혼의 힘/에너지(이성-열정/열망/갈망-담대함/기개)....이 영혼의 힘/에너지를 목표달성위해 집중/조절하는 실천능력(지혜-정의-절제-용기)....이것이 덕(아레테Arete ...Virtue))....그 능력의 실제(신중-고결-온유/겸손-친절-관용-중용/균형과조화)  ==>지식(하나님-사람-사물에 대한 참지식, Knowledge) ==>절제(오직 말씀과 성령을 따라가며 죄성/육신-세상과 타협하지 않음, 몸을 쳐서 복종시킴-Self-control) ==>인내(참아내며 견뎌 이겨냄, Endurance)==>경건(Q경외함 가운데 JC의 내적형상 빼어닮기..Godliness) ==>형제우애(Philadelphia, 필레오+델피아, Brotherly love.순전-온전-충심-성실-신뢰-돌봄-보호-축복-공유 : 부모형제자매, 곧 한가족됨의 의식)==>사랑(Agape..Caritas..Love feast..경천애인..아버지-아드님의 사랑으로 부음받아, 부활영생소망안에서 죽기까지 서로 내어주며 희생적으로 사랑함 : 온 인류차원으로 확대되는 선대)
**[하나님을 닮아가는 성장 : 신앙인격발달의 8단계....글리슨 주니어.]
기본적신뢰(Basic trust)-->자율성(Automacy..긍정적 마인드)-->주도성(Initiaty..선택의지결정/탐구)-->덕성(탁월성.Virtue)-->근면성(Industry...끈기/견인)-->성실성(Faithfulness...성취/책임감)-->정체성(Identity...영적 신분 확인)-->소명감(Integrity.통전성/온전성...사랑하기)
**에릭슨 심리사회적 성격 발달8단계
기본적 신뢰(Basic trust)-->자율성(Automacy..긍정적 마인드)-->주도성(Initiaty..선택의지결정)-->근면성 --> 자아정체성-->친밀감-->생산성-->자아통일감
[[죽은 자를 살리심]] :::  나인성과부의 아들(눅7:11~23) ---야이로의딸(마가복음 5:21-24,35-43)---베다니의 나사로(요 11:25~27) 
**이중적 성육신 : 하나님이 육신을 입어 세상에 오심-->부활로 차원을 초월한 , 제한받지 않는 새로운 몸을 입으셨음
**이중적 구원 : 부르심/구원 --> 택하심/JC의 영광에 참여함을 마침내 완성하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승천하사 HS으로 내주하시는  JC를 나의 주-하나님으로 믿고 거듭남/중생안으로 살아감의 은혜(=구원의 시작) ===>새로운 영적 참자아로 사는 삶 가운데, 전개되는 모든 고난을 기뻐하고 즐거워 함은  그 모든 고난마다  동참-체휼하시는 JC를 체득함으로써 그분의 완전/온전하심안으로 빼어닮아가며 마침내 그분의 영광에 참여함 열어주심때문임 = 구원의 완성 

====십가가죽으심과 부활증인된 여인들]]===

[[요안나]]..

....십자가 앞의 여인들 :  주의 모친 마리아,  큰  야고보의 모친  살로메(세베대의 아내),  작은 야고보와 마태, 요세(요셉)의 모친 마리아(=알패오(글로바)의 아내),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주의 모친 마리아 외에 나머지 네 여인이 부활아침에 무덤을 찾았음.

1. 인적 사항 

 ① 요안나는 '여호와께서 은혜를 주신다'라는 뜻.  ② 헤롯 안디바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눅 8:3). 

 ③ 예수께 병고침을 받은 후 전도자로서 삶(눅 8:2). 

 2. 시대적 배경 

 예수 당시 헤롯안디바(B.C.4-A.D.39년)가 통치하던 갈릴리 지역의 주민이었음. 

 3. 성품 

 ① 병고침을 받고 소유를 주께 드리며 평생을 전도자로 산 것으로 보아 감사할 줄 아는 헌신적인 여성(눅 8:3).  ② 예수님 사후, 제자들조차도 도망간 상황에서 향유를 준비하여 무덤으로 찾아간 것으로 보아 용기 있고 실천적인 신앙을 소유한 자(눅 24:3).  ③ 예수의 죽음에도 변절치 않고 예수의 죽음을 애도하며 무덤을 찾고, 또 예수의 부활을 맞아 사람들에게 그 기쁨을 증거할 정도로 지조 있고, 변치 않는 믿음을 소유한 자 

4. 주요 생애 

구사와 결혼(눅 8:3)..예수께 치유 받음(A.D. 28년..눅 8:2)...모든 소유로 주를 섬김(A.D. 28-30년.. 

눅 8:3)..예수의 죽음 목격(A.D. 30년...눅 23:44-49)..향품과 향유를 갖고 예수의 무덤을 찾음(눅 24:1)..

예수의 빈 무덤 목격(눅 24:3)..사람들에게 예수 부활의 증거(눅 24:9)

5. 구속사적 지위 

 ① 예수께 병고침을 받은 후 헌신적으로 예수를 섬긴 여제자.  ② 예수 부활을 최초로 목격한 증인들 중의 하나. 

 6. 평가 및 교훈 

 ① 주님께 치유함을 받고 자기의 소유를 주께 드려 감사한 요안나의 갸륵한 마음씨는 구속의 은총을 입고도 이에 감사하기는커녕 불평과 원망이 습관화된 현대의 신앙인 들에게 감사하는 삶의 좋은 본보기가 된다(눅 8:3). 

이에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을 받는 자들로서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인의 모습을 갖추어야 하겠 다(살전 5:18). 

 ② 요안나는 예수의 죽음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껴 모든 제자들이 도피한 가운데서도 신앙의 지조를 지키며 주님의 무덤까지 찾아갔다(눅 24:3). 

이는 오늘날 환경과 여건에 따라 쉽게 신앙과 불 신앙의 탈을 번갈아 바꿔 쓰는 현대의 신자들에게 신앙의 정절이 무엇 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이에 우리 성도들은 "몸을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마 10:28)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그리하여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신앙의 절개를 지킬 줄 아는 담대한 신앙인이 되자. 

 ③ 끝까지 주님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요안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최초로 목격한 증인 중 하나가 되는 영광을 얻었다(눅24:1-12).  

이와 마찬가지로 변함 없이 주님을 섬기는 자들 역시 마지막 날에 구원의 반열에서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영광을 얻을 것이다. 

===부활(resurrection)과 소생(rising)===

**베드로 : 욥바의 도르가(다비다=사슴), 바울 : 3차전도여행후반부, 드로아의 유두고(행운)

[[신약의 부활신앙]]

신약성서의 부활은 크게 예수의 부활과 일반인들의 부활로 구분지을수 있다. 

필자는 이 두가지 구분을 늘 염두에 두고 사복음서에서 시작하여 초대교회의 바울에 이르기까지 이 부활들에 대한 논의를 살피고자 한다. 

첫째, 사복음서에서는 예수의 부활과 일반인들의 부활의 차이점, 특히 예수부활의 특징들, 그리고 지금고 여전히 논점이 되는 부활에 대한 전승들을 개관한다. 둘째, 초대교회 시대에서는 고린도전서 15장을 중심으로한 바울의 부활이해를 살피고자 한다. 

여기에서도 예수의 부활과 일반인의 부활을 구분하여 언급하지만 특별히 죽은자들의 부활에 큰 관심을 가진다. 

나아가 논외로 죽은자들의 부활과 부활의 시기에 대하여도 간단히 언급하려 한다.

1. 사복음서에서의 부활이해

예수의 죽음은 그의 생애의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죽음에서 좌초하지 않고 죽음을 통과하면서 죽음을 극복하고 다시 부활했기 때문이다.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지만, 역사에서 유비(비슷함)를 찾을 수 없는 새로운 하나님의 행위였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입증하거나 반증할수 있는 사건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제자들의 환상(D.F.Strauss)이나 십자가의 의미의 연장(R.Bultmann)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nova creatio)였다.

여기에서 한가지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것이 있다. 

그것은 신약의 관점에서 볼때 예수의 부활은 일반적인 부활의 전형적인 예로 이해되지도 않았으며, 또 그렇게 이해될수도 없다. 즉 예수의 부활은 다른 일반인들의 부활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다루어 져야 한다. ((뼈가 꺾이지 않았음 + 썩음을 보지 핞음 + 다시 죽음을 보지 않고 영생안으로 들어감))

신약에서 예수의 부활에 사용된 용어는 '아나스타시스'(resurrection) 인데 이 명사는 다른 죽은자들의 일어남에 대하여는 사용되지 않았다.

이는 영원한 부활을 의미하며 다른 일반인들의 부활에는 다시 '살아남'(=소생...rising) 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A. 일반적인 부활

(1) 야이로 딸의 부활 (마 9:18-26: 막 5:21-43: 눅 8:40-56)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때 예수는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는 명령과 함께 그녀를 살려내신다. 

특별히 누가는 소녀의 '영'이 돌아왔다는 말을 첨가함으로써 이 기적을 몸의 소생이 아닌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 "영"(프뉴마..바람, 호흡, 생명, 영, 성령)은 몸으로부터 떨어졌다가 다시 돌아와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 말은 헬라사상에서 나타나는 "혼"(프쉬케..영혼, 목숨, 생명..<히>레브, 레바브, 네페쉬)에 해당한다...몸에 영, 곧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옴으로써 숨쉬는 산혼=생령이 됨...성령의 생기, 곧 프뉴마/네페쉬 없이는 죽은 것임)) 그러나 여기 사용된 표현은 구약에서 유래한 것으로서(왕상 17:21) 무슨일이 일어났는지를 가리킬 뿐 아니라 예수의 활동과 엘리야의 활동(사르밧 과부의 아들 살림)이 가지는 유사성을 암시해준다. 그 결과 소녀는 즉시 살아난다.

(2) 나인성 과부 아들의 부활 (눅 7:11-17)

예수가 나인성문 가까이에 이르렀을때 장례행렬을 만난다. 그리고는 가까이 다가가셔서 관에 손을 대시고 "일어나라"고 명하신다. 이에 죽은 사람이 예수의 명령에 "일어나 앉아" 말을 하기시작함으로 살아난것을 증명한다. 

불트만(Bultmann)은 이 이야기가 헬라적 유다계 그리스도교회에서 생성되었다고 주장하는데 헬라적 기적 이야기들 속에서 몇가지 이 이야기들의 병행을 찾는다. 그러나 이런 병행적 이야기들이 있다고 해서 그것들이 이 이야기의 역사성을 입증하거나 반증하거나 하지 않는다. 죽은이를 살려내는 사상은 이미 널리 알려졌던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구약성서에서 그 가까운 병행을 찾을수 있다. 다만 장례행렬에 대한 서술만이 다를 뿐이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가 팔레스틴의 유다적 교회에 속한것이라고 보는 쉬어만(Schurmann)의 주장이 앞의 불트만의 주장보다는 더 타당하다고 본다.

(3) 나사로의 부활 (요 11:1-44)

죽은지 나흘이나 지난 [ 따라서 살이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하여 시신 썩는 냄새가 나는나사로는 예수의 "이리로 나오라"는 명령을 듣고 붕대에 감긴채 무덤속에서 살아나왔다. 요한복음서에서 이 기록의 의미는 단순하다. 

예수는 그의 아버지에 대한 복종과 의존성 안에서 그가 원하는 자에게 생명을 주는 권한을 갖는다. 그의 부활은 마술의 일화도 아니고 혹은 어떤 성인의 탁월한 업적이라고 할수 없었다. 그 부활의 독특성은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곧 resurrection)에 대한 하나의 선취라는 점이다. 또한 그것은 신자가 영생을 누리게 됨을 의미한다. 즉, 죽음을 지나서 생명에 이르게 됨을 말한다.

(4) 예수 임종시에 부활한 사람들 (마 27:52)

예수의 임종시에 '지진들이 일어났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는 기록은 유독 마태복음만의 기록이다. 

이 본문은 수많은 의혹을 가지고 있지만 죽은자의 부활이 있을것이라는 믿음(마 9:25: 22:23)이 현실화 한것이고 예수 재림때에 있을 모든 성도의 부활을 예증한다. 그러나 쉬바이쪄(Schweizer)를 비롯한 학자들은 이 52절의 원문이 다른 사본들처럼 53절 "예수의 부활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는 이후에 일어났다고 본다. 즉 예수 임종시에 일어난 부활이 아닌, 예수 부활이후에 일어났다고 본다. 이런 수정은 예수께서 부활한 자들중에 첫열매가 되며 그 이전에 다른이들이 부활할 수 없음을 부각시키는 것으로(고전 15:20) 이후 교회의 영향으로 보여진다.

한편 본문의 '부활한 성도들'(?????, 하기오이)는 교회의 한 전설에 따라 구약시대의 위인들(심지어 욥도 여기에 포함되었다고 봄)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사실 우리는 그에 대한 확실한 자료가 없기때문에 단정지을수는 없지만 분명 구약에서 메시야의 부활의 도래를 믿고 기다렸던 자중에 잘 알려진 인물이거나 또는 중간기 시대에 영적인 영웅들로써 활약한 자들이거나 이스라엘 역사상의 순교자들이 아닌가 추측해 보기도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일반인들의 부활(소생)은 생명을 회복하기는 하되 그것은 다시 죽게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단순히 그들의 죽음이 지연된 것뿐이다. 

그 외에도 바울을 통한 유두고의 부활(행 20:10)이나 베드로가 행한 도르가(행 9:37)의 부활에서도 마찬가지의 이해가 필요하다. 

한편 히브리인들의 관점에서 죽음은 삶의 한 약한 형태였다고 볼수도 있다. 

미쉬나에 따르면 시신은 그 죽음에 대하여 삼일 이내에 다시한번 확인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 영혼이 떠난지 삼일 지나면 시신이 썩는다고 여겨졌음...마찬가지로 고기는 삼일이내에, 곧 썩기전에 반드시 먹어치워야 했음]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죽은사람의 영혼이 사흘 동안 시신을 떠나지 않고 소생의 기회를 쁹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우리는 유대인의 죽음에 있어서 사람이 죽었을때 그 혼이나 영은 몸을 떠났으나 너무 멀리 가지만 않았다면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측면을 발견한다. 

이것이 바울이 유두고에 대하여 "생명이(문자적으로는 혼이) 저에게 있다"(행20:10)고 말한, 혹은 누가가 야이로의 딸에 대한 부활기사에 대하여 "그 영이 돌아왔다"(눅 8:55) 고 말한 이유이다. 

예수께서도 그 아이가 "죽은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고 나사로에 대하여까지도 "내가 그를 깨우러 가노라"(요 11:11)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정말 실지로 죽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경우들에 있어서 그 죽은 자들은 생명에로 다시 불리움을 받게 되는데, 이 사실은 시체가 눈을 뜨고 앉는(행 9:40), 혹은 앉아서 말하기 시작하는(눅 7:15) 것에 의해 설명되고 있다. 

또한, 죽은자를 일으키는 것은 이미 어떤 한계를 넘어선 치유 능력의 연장이다. 

회복시킬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의 고유한 권능이지만, 엘리사와 수넴여인의 아들의 경우와 같이(왕하 4:32-37) 그 능력의 대리자가 인간일수도 있다. 

실제로 죽은 자를 일으키는 것이 열두 제자들에게 주어진 정규 선교사업의 일부로써 포함되고 있다.(마 10:8) 

그러나 결국 그들의 부활은 제한적이고 일시적이다.((다시 죽게 되어있다))

B. 예수의 부활

(1) 예수 부활의 특징

반면에 예수의 부활은 아주 다르다. 거기에는 단순한 의식회복이라는 암시는 없다. 그는 그 한계를 넘어 떠나간 영들의 영역(스올)으로 들어갔다. 그는 또다시 죽게 되어있는 그 삶으로 단순히 되돌아온 것(rising)이 아니라 영원히 일어나셨다. 

그래서 성서는 이 예수의 부활에만 "Resurrection" 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언급은 이미 그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핵심부분이었다. 즉, 그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시고 제 3일만에 살아나야 할것을 비로서 가르치시니"(마 16:21)라는 말씀을 위시해서 예수는 자신이 부활할 것임을 이미 예언하셨다(막 8:31: 눅 9:22). 

그 외에도 사복음서에는 14번이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특별히 요 11:25의 말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는 말씀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또한 예수는 부활후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할것이 아니냐"(눅 24:25,26)라고 말함으로 자신의 부활을 친히 증거하고 있다. 

이후 예루살렘에 모인 무리에게도 나타나서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8,39) 말씀함으로 자신의 부활이 육체적으로 분명한것임을 증거하고 있다.

(2) 예수의 부활체

예수 부활의 또다른 특징은 그의 부활체에서 찾는다. 먼저 성서는 예수의 부활체에 대한 물리적 실재성을 확인하고 있다.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영은 나와 같은 살고 뼈가 없느니라"(눅 24:39) 

주님은 친히 증거하고 있고 손과 발, 옆구리를 내보이심으로 원래 그의 몸과 같은 몸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것이 예수께서 부활의 순간에 겪은 놀라운 변화를 배제하지는 않는다. 

예수는 부활이후 마음대로 나타나셨다가 사라질수도 있었다는 신비한 요소가 그의 출현설화에 등장한다.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서도 사라졌다.(눅 24:31) 또한 "그들중에서 계셨다"(눅 24:36) 는 기록에서 보듯 제자들중에 갑자기 나타난다. 

이래서 아마 제자들은 귀신을 보았다고 생각했을것이다.(37절). 

같은 사건을 기록한 요한은 예수께서 문이 닫혀 있었는데도 그들 가운데 와서 서계셨다고 한다.(요 20:19)

예수 부활체에 대한 신비한 요소들은 또 있다. 

사람들이 종종 예수를 첫눈에 알아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마 28:17 에서 예수를 보고 "어떤 이는 의심하더라"고 기록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를 동산지기로 오해했다. 그의 음성도 몰라 보았다.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처럼 예수께서 친히 이런 혼란을 조성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활체의 변화가 이렇게 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그러나 제자들중 아무도 "당신은 누구입니까 ?"라고 묻지 않았다. 결국 이후 승천하신 기적과 더불어 이런 신비적이고 기적적인 요인들을 통틀어 보면, 예수이 몸은 살과 뼈를 지니고 있었으나, 이제는 영화롭게 된 조건속에 있었고, 시공의 법칙에 무관하게 활동할수 있었음을 알수 있다. 

그렇다고 예수의 인성이 소멸된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그의 몸을 바울은 "영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신도들의 부활체의 형태이기도 하다고 하였다.(고전 15:44; 빌 3:20) 

여기서 영적이라고 하는 말은 비물질적인 것을 뜻하지 않는다. 바울의 용법에 의하면, 영적이라는 말은 언제나 성령의 통제를 받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영체란 하나님의 영이 원하시는 것을 행할수 있는 몸체를 뜻한다. 영체는 무한히 성령의 조정을 받는 몸이다. 이것이 주님의 불멸하는, 영화로운, 권능에 찬, 몸이며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영체이다.(고전 15:42-50)

(3) 부활전승 개관

복음서들은 예수의 생애에 관한 '순 역사적 보도'가 아니라 '신앙의 견지에서'의 서술, 즉  '부활신앙을 가지고 회고하는 관점에서' 서술한 것이다. 

복음서들은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죽은자들로부터 부활케하셨다는 증거를 증언하면서 끝맺고 있다. 

죽은자들로부터의 부활에 대한 메세지, 즉 부활신앙은 명백히 처음부터 복음에 속하는 것이었다. 

신약성서 저자들은 부활복음을 각각 자기 고유의 신학으로 소화시키고 있으면서, 예수부활에 관하여 매우 다양하게 증언하고 있다. 

'예수의 수난전승'을 전함에 있어서 사복음서 기자들은 전체적으로 비교적 일치된 보도를 하는데 반하여, 예수의 '부활보도와 부활증언'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이야기들을 조화시킬수 없으며, 하나의 통일된 이야기로 만들려면 무리가 따른다.

성서의 부활증언은 두개의 서로 다른 전통의 갈래로 나누어서 볼수 있다. 

즉 '부활의 케리그마'(부활선포)가 따로있고 '부활이야기'(부활사화:復活史話)가 따로 있는 것이다. 

케리그마에 사용된 전승과 부활 이야기 사이에는 결코 조화시킬수 없는 차이들이 있고 그리하여 이들은 단일전승이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우리는 비판적 분석 연구에 의해서만 그 기본 성분을 찾아낼수 있다. 

우선 부활이야기는 병행된 두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빈무덤 이야기'와 '발현이야기=부활체로 친히 나타나심'가 그것이다.

마가는 변질되지 않은 빈무덤 기사(記事)를 그대로 전한다. 

그런데 누가는 빈무덤의 발견과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을 따로따로 전한다. 

마태는 빈무덤의 발견을 발현보도와 연결시킨다. 

요한은 발현이 무덤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전한다. 

나아가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만을 보도한다.(고전 15장)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전승을 각기 따로 따로 연구해 보아야 한다.

먼저 빈무덤 설화는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것으로 부활을 소극적으로 증명한다. 

이 설화는 주로 예수의 추종자 중 여인들에 의해서 먼저 전해진 것이며, 제자들(베드로와 요한)에 의해 먼저 확인되어 전해진 것이 아니다. 

부활하신 예수가 여인들이 함께 있을 때 나타났다는 기사는 없고, 천사만 나타났다. (물론, 무덤가에서 막달라마리아에게 JC가 개인적으로 보이셨다.) 

이에 반해 발현설화는 주로 제자들의 체험이었다. 또 제자들에게는 천사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주(主)가 나타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런가 하면 부활선포의 케리그마에서는 베드로를 맨먼저 손꼽고 있는 반면에 부활이야기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이름들, 여인들의 이름들도 커다란 구실을 하고 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무덤을 비어 있는채로 발견했다는 보도가 부활이야기에는 전해지는데 다른 전승들에는 이 보도가 완전히 누락되어 있다는 점이다. 

빈무덤 설화 이외의 전승에는 빈무덤에 관한 말이 없다. 바울도 이는 말하지 않는다. 다른 전승들도 빈무덤 설화로 부활을 증명하려 하지 않았다.(너무나도 당연했기에 거론할 필요가 아예 없었다!!) 

또한 발현전승들은 본래의 [JC와 제자들사이에 약속된] 발현 장소로서 갈릴리를 가리키고 있는 반면에 무덤이야기들속에서 부활체로서 나타내 보이심은 예루살렘에서도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전한다.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여러 사정에 따라 나타내 보이셨다. + 또한, 갈릴리에서 실제로 다시 시작하신다]

그러나 이렇듯 서로 조화시킬 길이 없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전승들이 한가지 사실에서는 완전히 일치한다. 

예수는 당신의 죽음후에 특정의 몇몇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이다. 즉, 그분은 당신을 살아있는 분으로 몸소 보여 주셨고 그러기에 그분은 죽은자들로부터 부활하신 분으로 선포되고 있다는 것이다.

(4) 부활불신론

18세기 이후 성서에 대한 비판적 연구가 발달됨에 따라 성서 기록을 근거로 형성된 전통적 교리가 도전을 받게 되었는데 부활에 대한 불신이 그중의 하나였다. 성서에 대한 문서설적인 태도와 해석은 성서의 권위를 격하시켰고 따라서, 예수의 부활을 그대로 믿거나 인정치 않고 그속에 담겨져 있는 오해와 잘못된 부분들을 찾아내려고 노력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시도가 예수의 "빈무덤"에 대한 합리적 해명의 시도였다. 

복음서 기록에 따르면 예수의 묘는 빈무덤이 되었다(눅 24:3; 막 16:6). 그러나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론들이 있다.

첫째로 허위설이다. 

이는 예수의 제자들이 로마병정들을 돈으로 매수한 후 예수의 시체를 옮겨놓고 예수 부활을 허위로 퍼뜨렸다는 주장이다. 

두번째는 무덤오인설이다. 

몇명의 여인들이 향유를 준비하여 예수의 시체에 발라줌으로써 마지막 이별을 하려고 찾아갔으나, 그들은 매우 흥분했고, 새벽미명에 갔으므로 엉뚱한 무덤에 갔었다는 주장이다. 

세번째는 기절설이다. 

즉 십자가 위에서 예수는 운명한것이 아닌 기절한 것이었고 무덤속에서 깨어나 일어났다는 추측이다. 

또 제자들이 심히 피곤하였기에 예수의 환상을 보고 예수의 부활을 믿게되었다는 환상설도 있고, 신비설이라 하여 부활에 관한 바벨론의 신화를 예수께 적용하여 꾸몄다는 주장도 있다.

이밖에도 렛싱(G.Lessing)은 모든 종교적 진리가 이성의 판단하에 있어야 하는데 예수부활의 논리는 이성이 용인하지 않기에 인정할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부활을 포함하여 기독교의 모든 이적사건은 신화일뿐이라는 슈트라우스(D. Strauss), 예수부활이 실의에 빠져있던 베드로에 의해 꾸며진 이야기라고 하는 훌쯔만(H. Holtzmann), 그리고 예수는 메시야 의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자기를 신적 존재라고 생각치도 않았기에 부활도 있을수 없다는 한 봐이스(F. Weiss) 등도 있다.

이러한 부활불신론은 몇가지 결정적인 문제점을 안고있다. 

첫째, 그들은 우리의 역사적 자료인 성경의 신빙성을 부인한다는 점. 

둘째, 그들은 상상력에 의존하여 근거없는 해석을 내린다는 점. 

셋째, 제자들이나 여인들을 거짓말장이로 몰아세우고,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변화된 뒤의 저들의 인격을 무시한다는 점. 

넷째, 모든 비판학자들은 이성을 부활사건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점. 등을 들수 있다. 

이성은 종교적 사건을 판단하는 유일한 표준이 될수 없다. 왜냐하면 종교적 사건은 합리적 차원과 초합리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종합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결국 저들의 약점은 '성서의 정경성과 표준성을 부인한다는 점'과 '이성이 가장 중요한 표준'이라는 극단의 태도로 볼수있다.

2. 바울의 부활이해 (고전 15장에 나타난 부활을 중심으로)

A. 예수의 부활에 대한 이해

바울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부활과 나타나심에 대한 초대교회의 전승을 전해주고 있다. 

고린도서는 A.D. 55년 내지 56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부활에 대한 그의 중요한 멧세지가 담겨져 있다. 즉, 고전 15:3-8 의 말씀이 그것이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있고 어떤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이 귀절은 신약에서 예수님의 부활후 나타나심에 대한 가장 직설적이고 중요한 기사이다.

바울이 언급하는 예수의 부활에는 두가지 중요한 특성이 나타난다. 

첫째는 그 중심이 다분히 성부 하나님에게 있다는 점이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그의 글에도 항상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다는 것을 전제하고 예수가 '일으키심을 받았다'(was raised)고 기록한다.(고전 15:4; 살전 1:10) 즉, 그는 예수의 부활을 하나님 권능의 행위로 이해하고 있다. 

두번째 특성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사람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친밀히 연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고후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를 비롯하여 롬 8:34 살전 5:10 등의 구절에서 이러한 점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예수가 스스로만을 위해 받은 사건으로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종말적 하나님 관계가 중심이 되고 동시에 인간의 영원한 구원과 멸망이 중심이 되는 사건으로 설교하였다. 

그의 부활을 통하여 예수는 종말적인 직위 즉,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의 구세주가 되었다. 이후 하나님은 그가 그의 신실한 자들에게 약속했던 종말에 있을 그의 구원행동을 부활하신 예수께 위임하셨고, 그로 인해 예수는 하나님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님이었던 것같이 그를 믿는 무든 사람들에게 "주님"이 되었다. 부활하신 분은 소위 전권자(全權者) 곧,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은 대표자이다.

B. 일반인들의 부활에 대한 이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미래에 관한 견해는 헬라적이다. 즉 마지막 구원은 우리가 죽어 하늘나라에 가서 주와 함께 살때 이루어진다고 본다.

물론 바울도 중간기 상태에서 신자들의 영이 몸을 떠났을때 주와 함께 거함을 믿었으며 따라서 그는 이렇게 희망한다.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게 거하는 그것이라"

여기서 바울은 주와함께 거하는 곳이 어디에서 이루어지는지 말하지 않았으나 분명히 주와 함께 있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죽은자의 신분에 대해서는 "벗은자"로 표현되었는데 이는 죽음으로 인해 삶에서 분리된 존재의 상태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덧입어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일단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요 그후에는 어떤 종류의 생명도 있을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한 부활은 몸의 부활이 아니라 "영"의 부활이 있을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사후 영의 불멸성은 받아들이지만 몸의 부활에 대해서는 부인하는 헬라의 이원론적 가르침에 직면했을 것이다. 

이런 가르침을 반박하면서 바울은 우선 그리스도의 부활과 말세에 믿는 자들의 부활을 불가분리의 것으로 연결짓고 있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인들의 부활도 없으며, 지금까지 그가 전한 모든것이 거짓이 된다. 

그리하여 그는 믿는자들에 대한 부활에 대하여 두가지의 것을 주장하게 된다. 즉, 믿는자들에게 임할 부활은 "몸의 부활"이지만 그 몸의 부활은 또한 "변화된 몸의 부활"이라는 것이다.

그는 "죽은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고전 15:35) 는 질문을 예측했다. 

여기서 우리는 이전의 부활사상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되살아난 자의 부활체는 지상에서의 생존시 몸과 동일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 반면에 우리가 땅에서 지니고 있던 몸이 다시 살아나면 완전히 변형된 부활체의 몸을 지니게 될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한 바울의 첫번째 답은 "장차 임할 부활이 [새로운] 몸의 부활이 될것이다"는 것이다. 

이 대답을 입증하기 위해 그는 한 비유를 사용한다. 즉 땅에 묻혀 죽지만, 그 죽음의 현장에서부터 다시 몸이 나오는 씨를 뿌리는 것에 관한 비유가 그것이다.(고전 15:35-38절) 바싹 말라버렸고 죽은것만 같아 보이는 곡식의 씨앗 하나가 땅속에 묻혀 아름다운 초록 색깔의 싹을 돋게 하는것은 참 신기하다. 

물론 이 비유는 약간 부적합한듯하다. 왜냐하면 씨앗은 그 안에 자생력이 있는 자연현상이지만 부활은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장차 임할 나라는 자연의 과정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 나라의 현재의 양상과 미래의 양상 사이에 대조가 되는 것들을 가르쳐주기 위해, 예수님도 곡식 씨앗에 대한 비유를 사용하셨다.(막 4:26-29) 

요약컨대, 결국 한 몸은 땅 속에 묻히고, 다른 몸이 솟아 올라온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바울의 말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몸)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고전 15:38절)이 의미하는 바다.

바울이 제시하는 두번째 답은 "부활체는 현재 우리의 몸과 같이 죽을 몸과는 다를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는 모든 육체가 다 같은 육체가 아니라는 말을 꺼냄으로 이 문제를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육체중에는 인간의 육체가 있고 짐승의 육체가 있으며, 새의 육체, 물고기의 육체가 있다.(39절) 

여기서 바울은 육체(flesh)와 몸(body)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고 있다. 

그 후에 바울은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수 없다"(50절)라고 단언한다. 즉, 우리가 현재 이 땅에서 지니고 있는 죽고 썩을 몸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영광스러운 세계를 상속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썩은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을수 없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단지 육체적 몸이 있고 영원한 몸이 있다는 것이다. 부활체는 죽어서 묻힐 당시의 몸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육의 몸(고전 15:44)은 분명히 썩을 것이고 죽을것이다. 그러나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어야"(고전 15:54) 한다. 

그렇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 

바울에게 있어서 이 과정이 "그리스도로 옷입는것"(롬 13:14; 갈 3:27)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새사람을 입는것"(엡 4:24)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 새사람은 그리스도이며(엡 2:15; 4:12) 둘째 아담이다.(고전 15:45-47) 그 부활의 몸은 부활 통해 입으신 그리스도의 변화된 몸과 같은 부활의 형체인 바, 우리의 영혼과 재결합됨으로써 회복된 영광을 받게 된다.(고전 6:14-15) [더 크게 표현한다면 교회는 이미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참생명으로 충만한 새로운 몸이요 성도들은 그의 지체들이다!!]

부활한다는 것은 "하늘에 속한자의 형상을 입는것"(고전 15:49)이다. [전지전능의 창조주께서 각사람의 몸에서 흩어진 성분들을 모으시고 조성하사 새롭게 하심은 너무 쉬운 일일것이다!!][내적 JC의 형상<곧JC의 어떠함>의 외적 표현은 영광이라 말하고 있음을 명심하라!!....우리 영혼의 어떠함, 곧 내적 형상이 JC를 빼어닮기, 곧 그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에 도달할 필요가 여기에서 나타난다!!]

결국 바울은 부활체에 대하여 어느 신약성경 기자 못지않게 상세히 그리고 세밀히 묘사하고는 있다. 그러나 그는 그 몸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즉 어떤 물질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부활의 주요특징만을 언급하는데 만족한다. 

현재 우리의 몸은 죽어 썩을것이며 영광스럽지 못하며 약하다. 반면 부활체는 쇠하지 않으며 영광스럽고 능력이 있다.(42-43절) 

이런 몸은 지상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는 전혀 생각할수도 없다. 

바울이 몸에 대하여 언급한 이 귀절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하는 데서 해방된다"는 귀절과 맥락을 같이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구원은 단순히 혼이나 영만의 구원이 아니라 인간 전체의 구원을 의미한다. 

여기서 바울은 구약의 인간관과 일치하고 있다. 바울은 자기의 주장을 다음의 말로 요약한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44절)

3. 그외의 논점들

A. 교부들의 예수부활이해

베드로와 바울 이후 초대교회 교부들의 부활에 대한 이해는 그들이 남긴 신앙고백서를 통해 고찰해 볼수 있다. 

안디옥에서 순교한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자기 개인용으로 신앙고백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현재 교회가 사용하는 사도신조의 내용과 비슷하다. 그 중에 예수의 부활에 관해서는 "겉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가 실제로 삼일후에 죽은자로부터 일어나셨다"고 고백한다. 

여기에서 그는 "참으로. 실제로"라는 말로서 예수의 부활을 강조한다.

영지주의로부터 초대교회 정통신앙을 지켜낸 이레니우스(lrenius)도 두개의 개인용 신앙고백서를 가지고 있었는데 두가지 다 이단을 논박하는 글로서 함께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 언급한다. "처녀의 몸에서 탄생하고 고난을 당하시고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육체적으로 승천하셨다". 

터툴리안(Tertullianus)은 세가지의 신앙고백서에서 모두 예수가 죽었다가 3일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했다고 말한다. 

오리겐(Origen)은 비록 나중에 이단으로 정죄받기는 하였지만 신학원리론(De Principiis)의 그리스도론에서 예수의 부활에 대해 언급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탄생하시고 진짜 고난을 당하셨다. 그리고 겉으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참으로 죽는 그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진짜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그의 부활 후에 그의 제자들과 대화를 나눈 후 위로 올라가셨다." 그는 신플라톤 철학에 심취하였었음에도 예수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한 것에 대하여 주저하지 않고 믿고 고백하였다. 

유세비우스 또한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다.

이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모두 성경의 증언을 따라 예수의 부활사건을 역사적 사건으로 믿고 그 믿음을 신앙고백서들에 담았다. 

만일 그들이 조금이라도 이 사실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다면 그 부분을 포함시키지 않을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사람도 이를 의심치 않고 신앙고백서에 포함시켰다. 

이런 신앙고백서들이 결집되어 급기야 사도신조가 형성되었고 그 속에는 교회가 함께 받아들여 믿는 예수의 죽음에서의 부활이 포함되었다.

B. 죽은자의 부활

신약성서는 분명하게 모든 죽은자들의 부활을 가르치고 있다. 

즉 믿는자와 안 믿는자 모두가 부활하여 자기들의 행적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요 5:28,29; 행 17:31; 롬 14:10; 고후 5:10; 계 11:18; 20:11-15) 

인간은 그 전체로 볼때 영원을 위해 지어졌다. 반면에 심판이란 각자가 그 몸으로(있을때) 행한것에 관계할 것이다.(고후 5:10) 

따라서 죽은자의 부활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일수도 있고, 하나님의 진노에 의한 영원한 심판에 이르는 길일수도 있다. 

그런데 그의 부활에 의해서 영생이 보증된 것은 그의 신도들의 부활뿐이다.(고전 15:20 이하; 살전 4:14) 

성서의 요체는 구원의 복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없는 자들의 부활에 관해서는 성서에 언급이 별로 없다. 모든 강조점은, 성도들의 부활에 맞추어져 있다.

신약성서에서 부활에 대하여 언급할때 그것은 죽은자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지 결코 단순한 육체의 부활을 말하는것이 아니다. 

육체의 부활은 클레멘트와 저스틴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나타났다. 그러므로 항상 의미하는 바는 인간 전체이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바울은 단순한 이 육체의 부활을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50) 는 말씀으로 거부하고 있다.

현재의 많은 개신교 신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죽음은 불멸하는 영혼이 몸으로부터 분리되어 그 자체로서 계속 생존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이해하고 있는 바 죽음의 전체적인 특성은 인간 전체가 죽음에 손상되고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죽음과 부활사이에는 어떠한 중간적인 상태도 없으며, 부활은 하나의 완전히 새로운 창조이다.

C. 언제 죽은자들이 일어나는가 ?

[시차부활을 바울은 말하고 있음]

일반인 불신자들과 성도의 부활에 대하여서는, 신약성서의 일반론과 특별히 바울의 사상(고전 15:51,52; 살전 4:16)에 의하면 죽은 성도들의 부활은 주의 재림때에 일어난다. 이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존 성도들 역시 변화를 받게 된다. 모든 시대의 모든 성도들이 하나의 영광스런 성도 공동체를 이룬다. 

이들, 살아서 영체로 변화를 입은 성도들과 부활의 영체를 입은 성도들은 공중에서 자기들의 구주를 만나 영접하게 된다. 

이어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예루살렘]보좌앞에서 먼저 무죄선언을 얻고 하나님 아버지의 왕국에 영접된 다음(마 25:31-40), 이들은 불신자들과 타락한 천사들을 심판하는 데 [백보좌심판] 참여하게 될것이다.(마 25:41 이하; 고전 6:2,3) 

그러나 성도와 불신자들이 동시에 부활하게 될지 혹자들의 주장대로 성도들이 먼저 부활하게 될지는 확정할 수 없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영국과 미국의 보수주의자들 간에는 동시부활과 시차 부활에 관한 논란이 종종 있다. 

먼저 일부가, 그후에 나머지 전체가 부활한다는 시차부활론 주창자들은 계 20:4 이하를 근거로 들고 나온다. 

거기에 보면 그리스도가 지상에서 통치하는 동안 신실했던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하니 이는 첫째 부활이라"고 했다. 

그러나 동시 부활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위의 대목 외에는 신약성서 어디에도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을 구분해서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고 나온다. 

따라서 이들은 첫째부활(계 20:5)이란 그리스도를 믿던 신실한 자들이 죽음과 동시에 중간상태로 즉시 승천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화로운 삶을 누리는 사실을 가리킨다고 본다.(참고 빌 1:23; 히 12:22)

이상에서 우리는 신약성서에 나타난 부활신앙에 대하여 간단하게 고찰하였다. 

사복음서에 나타난 일반인들의 부활은 제한적이며 조건적인 부활(rising)이다. 즉 다시 죽게 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예수의 부활(resurrection)은 영원하며 완전한 부활이였다.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체가 육신을 입기는 하였지만 영화롭게 된 [공간의 제약을 받지않는 영화로운, 영광스러운 부활체로서의] 조건속에 있었고, 시공의 법칙에도 무관하게 활동적이었다는, 나아가 승천하였다는 기적속에서 알수있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전승들은 빈무덤 설화나 발현설화 모두에서 보듯 서로 조화시킬수 없는 차이들은 있지만 한가지 사실 - 예수는 당신의 죽음후에 특정의 몇몇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 - 에서는 완전히 일치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의 권능의 행위로 이해되었다는 점, 그리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친밀히 연관되어져 있다는 특징이 있다. 

한편 바울에게 있어서 일반인들의 부활은 두가지로 정리할수 있는데 먼저는 장차 임할 부활이 몸의 부활이 될 것이라는 점과 동시에 그 부활체는 현재의 우리 몸과는 다른 차원의 영광스러운 몸이 될것임을 말하고 있다. 

신약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부활할 것임은 부인하고 있지 않지만 그 주된 관심은 명백히 성도들에게 맞추어져 있으며, 그 부활이 시차부활, 곧 신자와 불신자와의 두번에 걸쳐 일어날지 아니면 동시에 일어나는 동시부활일지는 아직도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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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부활은 근본적으로는 창조 신앙+재림 신앙의 관점으로 접근해야”]] 

서울신학대학교, 부활신앙에 대한 신학접 입장 밝혀

최근에 일어난 부천 여중생 사망사건의 피의자 이 모 목사는 “죽은 딸을 위해 기도하면 부활할 것으로 믿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목회자들은 “극한 상황에서 적은 형량을 받고자 말한 진술일 것”이라는 의견과 함께 “부활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필요하다”고 요청했다. 

이에 대해 서울신학대학교는 최근 죽은 자의 부활 신앙과 이에 대한 잘못된 적용에 대한 입장을 표명했다. 

최인식 교수를 비롯한 조직신학 및 성서신학자들로 구성된 위원회는 ‘자신이 죽인 자의 소생을 위한 기도’는 ‘비성서적이며 무교적 행위와 다를 바 없는 미신’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특히 죽은 자가 살아나는 사건의 본문들을 성경적으로 해석하면서 “인간의 목적을 위한 죽은 자의 소생기도는 비성서적이며 반교리적인 그릇된 신앙행위”라고 밝혔다.

===구약에서의 부활사건 이해

구약성서에는 죽은 자를 실제로 살리는 사건이 세 번(왕상 17:17~24; 왕하 4:32~37; 왕하 13:21) 언급된다. 

그러나 구약성서에서 죽은 자를 살리는 행위는 빈번하게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일어났던 사건이었다. 

위원회는 열왕기상과 열왕기하에서 일어난 사건을 성서신학적으로 해석했다.

이들은 “구약성서에서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믿는 자의 부활(재림신앙과 관련된 resurrection...다시는 죽음 없음)’ 개념이 아니라, ‘죽은 자가 살아남’은 "소생(일어난, rising...반드시 다시 죽게됨.)"이라는 아주 단순하고, 초보적인 단계의 부활 개념이다”라고 지적했다.

열왕기상과 열왕기하에는 엘리야와 엘리사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과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렸고, 다른 시신을 살아나게 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활 묘사들은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믿는 자의 부활 개념(롬 4:17, 24)과는 거리가 멀고, 무관하다는 지적이다.

위원회는 세 사건에 대해 “엘리야와 엘리사의 자발적이고, 의도된 행동이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즉 자신들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알리기 위한 자기 변호적인 차원에서 엘리야와 엘리사는 죽은 자를 살렸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위의 해당 본문들은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논제의 핵심이 아니라, 엘리야와 엘리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는 것이 핵심이다.

또한 ‘죽은 자의 살아남’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한 일회적 사건이었다. 

죽은 자를 살리는 행위는 오랜 기간을 두고 시행된 기도운동의 결과가 아니었다. 

위원회는 “자신의 실수로 사람을 죽이고, 기도하면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부활 개념을 구약성서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며 “만약 그런 마음으로 부활을 기대했다면, 그것은 비성서적이고 저급한 무속신앙이나 하등종교의 영향에서 기인된 것이라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신약에서 이야기하는 부활 의미

기독교 신앙은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을 믿는 고백이 없이는 결코 불가능하다. 이런 차원에서 신약성서는 부활이 기독교의 핵심임을 증언하며 부활을 제외하면 기독교의 위상과 존재는 위협받게 된다.

그러나 위원회는 “신약성서가 이야기하는 부활과, 죽은 사람의 소생을 위해 기도하는 신앙은 분명히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위원회에 따르면 신약성서에서 강조하는 부활의 날은 세상이 새롭게 되어 온 땅이 갱신되는 자유와 희망의 날이며, 하나님이 새롭게 하실 새로운 세상이다. 새로운 세상은 고통, 슬픔, 탄식, 질병을 비롯하여 죽음까지 제거된 그야말로 전혀 다른 세상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이루실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에 복속되어 하나님의 자녀로서 종말론적으로 누릴 축복이다.

또한 위원회는 “부활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에 탐닉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새 시대를 소망하는 자세가 절실히 요구된다”고 덧붙였다.

===신유와 재림 신앙 구분해야

위원회는 “신학적으로 부활이란 모든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에게 있고 인간의 참된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종말론적 사건을 의미한다”며 “우리가 죽은 자가 기도를 통해서 소생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고, 성결교회의 신학적 입장이 아니다”고 밝혔다. 

또 위원회는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운명으로  죽은 자의 부활은 심판의 날 곧 예수 재림 시에 일어난다”며 “죽은 자의 소생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성서적 가르침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다만 “병든 자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성서적 가르침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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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여 다시 만날 소망으로 인해 세례받는 이들(고전15:29)===

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NKJV]고전 15:29 Otherwise, what will they do who are baptized for the dead, if the dead do not rise at all? Why then are they baptized for the dead? 

[NIV]고전 15:29 Now if there is no resurrection, what will those do who are baptized for the dead? If the dead are not raised at all, why are people baptized for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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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들의 경우에서 부활을 증거한다(29절). 

"만일 죽은자들이 도무지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죽은 자가 살지 못한다면  죽은 자를 (부활할 것이기에  서로 다시  만나보게 될 소망으로)  위해 세례받는  사람들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들의 세례가 얼마나 허망한 것일까! 

세례를 지지해야 하느냐 버려야 하느냐?  만일 죽은 자들이 살지 못하면 어찌 그들이 세례를 받겠는가?(휘페르 톤 네크론) 

죽은 자들을 위한 이 세례가 무엇일까?  바울의 논술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보편적인 결론인가, 혹은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특수한 사람에 대한 것인가? 

관사를 제외하면 세 단어로 구성되어 있지만 해석가들에 의하여 세 가지의 세 곱보다 더 많은 의미가 부여되는 이 모호한 귀절을 누가 해석할 수 있겠는가? 

세례의 뜻이 무엇인지 혹은 그것이 본래의 의미로 쓰였는지 비유적으로 사용하였는지 일치하지 않는다. 

만약 그것이 본래의 의미로 쓰여졌다면 그리스도인의 고유의 세례인지 혹은 다른 세례식인지도 모른다. 

죽은 자가 누구인지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무슨 의미로 ‘휘페르’ 이라는 전치사가 사용되었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은 죽은 자가 우리의 주님 자신이라고 이해한다.  앞에서 언급한 휘트비(Whitby)를 참고하라. 

만일 죽은 자가 살아나지 않으면 죽은 자 가운데에 남아있는 죽은 구주의 이름으로 누가 세례를 받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톤 네크론’ 가 한 사람의 죽은 자를 의미한다는 유일한 예이다.  그것은 그 말들이 다른 곳에서는 가지지 않는 한 의미이다. 

==세례받은 자들(호이 밥티조메노이)은 만일 죽은자들(호이 네크로이)이 우리 구주를 의미하면 일반적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어떤 특별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 점은 순교자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왜 그들은 그들의 신앙을 위하여 순교하는가? 

이것은 때때로 옛 사람들에 의하여 피의 세례라 불리어졌고 우리 주님에 의하여는 막연한 세례라 말하여졌다(마 20:22; 눅 12:50). 

그러나 무슨 뜻으로 순교를 하는 자들이 죽은 자를 위하여 세례를 받는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초대 교회 시대에 세례없이 죽는 자들의 이름으로 어떠한 사람을 세례 주는 한 관습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러한 관습이 그 당시에 유행했더라면 바울이 혐오하지 않고 그것을 언급했을 수가 없으리라는 뜻도 의미한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그 당시에 지켜주던 죽은 자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들의 부활을 소망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의 의미에 적당하나 그러한 행위가 사도 시대에 사용된 것 같지 않다. 

어떤 이들은 신앙을 위하여 죽은 자들의 이름이나 정절을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들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확실히 어떤 이들이 이것을 지킴으로써 기독교인으로 개종되었다. 

만약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이 살아나지 못하면 이런 동기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헛 것이 된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이 당시에 많은 핍박을 받지 않았고 순교의 일들이나 순교자들의 확고한 신앙에 의하여 개종하는 자들도 보지 못했다. 

‘호이 네크노이’는 너무나 일반적인 표현이므로 순교자들만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호이 네크노이’ 는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옮기어진 자들을 의미한다. 

"너희중에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11:30) 주의 식탁에서 무질서하게 행했기 때문이다. 

이 일이 그들의 얼마를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기적적인 지진이 간수를 개종시킨 일과 같다. 사도행전 16장 29, 30절을 참고하라. 

그러한 경우에 세례를 받은 사람은 죽은 자를 위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여질 수 있다. 죽은 자들과 세례를 받은 자는 서로 부합한다. 

이런 가정 위에서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의미를 오해하지 않는다. 

"죽은 자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들이 무엇을 하며 어찌하여 세례를 받았겠는가?" 

이들이 현명하고 옳게 행하였다고 너희들은 생각한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노엽게 하여 빨리 죽은 그들이 저편의 소망을 가지지 않겠는가?  

이 의미가 옳은지 혹은 다른 의미인지 모르나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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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5:29 죽은 자를 위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뜻은?....[[+ 연옥의 개념, 어찌 볼 것인가]]

[고전15:29]*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신자들은 장례식에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인사말을 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바로 그곳에서 합당한 위로를 하면 족한데, 아마도 유족에게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라고 말함이 가장 적합하리라.  

사람이 죽으면 그 즉시로 구원과 심판으로만 나뉘며, 그 중간의 회색지대는 없기 때문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느니라.”(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느니라.”(히9:27) 

이처럼 사람이 한번 죽은 후에는 분명히 구원과 심판으로 나뉨을 강조하고 있는데, 고전 15:29에서는 곤란한 질문을, 그것도 사도 바울 자신이 제기 하는데, 그 이유와 배경, 취할 바 올바른 해석은 무엇일까??

==사람이 죽으면 그 즉시로 구원과 심판으로만 나뉘며, 그 중간의 회색지대는 없기 때문이다. 

.....계시록을 인용해서 해석을 해 보자면, 

*1>일차로, <<그리스도 재림 후, 이 땅에 베푸실 바 천년왕국 참여에 합당한 지에 대해, 재림 주께서 공중재림시에 <주께 합당한 자로서>죽은 성도들의 부활이 일어나고 <그들은 주와 함께 섬기며 다스릴 자로서 부활하는 것임>, 이땅에서도 그리스도 왕국 참여에 합당한, 곧 주께 합당한 자들의 몸이 부활의 몸으로 변화 입어서 공중으로 들어올려짐 통해 주님 영접에 참여하게 되고,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의 신부, 어린양의 아내>인 이들의 구원 영생은 확실함!!

*2>이차로, <결국>그 때까지 <아직 들림 받지 못한 자들로서> 죽지 않고 땅에 사는 이들마다(물론, 여기에는 믿는 이들도 포함될 가능성이 있음!...그러므로, 나는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믿는가 주의하라!) <재림 주님의 아마겟돈 전쟁 승리 후 베풀어질> 예루살렘 보좌 심판에서 <살아 있는, 믿는 이들은> 양과 염소로 나뉘게 될 터인데, 양에 속한 이들은 천년왕국에 참여케 되고 염소에 해당하는 이들은<염소 그룹에는 (비록 미숙하지만)믿는 이들과 불신자들이 포함될 것> 그리스도의 왕국과 영생에의 참여에 합당한 성품 훈련 위한 다루심<연단>을 받기 위해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쫒김>당할 것....이것을 가톨릭>에서는 <연옥> 개념으로 오용하고 있는 것일 수는 있음.

*3>불신자들은 [비록, 천년왕국 시대 안에서 죽는다 해도] 마지막 최종적인 백보좌 심판이 예정되어 있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주께 합당하도록 최종적 보혜사이신 성령과 함께 하나님 말씀을 살며 순종하는 이들마다에게 저절로 이루어 가실 바[성령은 그리스도의 신부, 어린양의 아내를 준비하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를 빼어닮는 하나님의 아들들 됨 추구함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 그러므로, 영생구원의 다른 기회 찾지 말고 속지않도록 깨어 있어서 성령과 함께 <나는 날마다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 최우선이 될 것.

....., 지금, 여기에서 살아야 할 <주와 함께 하는 영생의 삶>에 집중하라...중요하지도 않고 <연옥>문제로 왈가왈부 하지말라...오직 실존적으로 살라.. <천국으로 옮겨질 수 있는 제2의 회개할 기회나 대기 장소도 없다>고 여기라.

..... 오직 그리스도, <그분의 보혈의 공로외에는!!! 천하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바 없으니> 그 이름 말고는 그 어떤 누구의 공로를 의지하려 하지 말라.....이미 주님은 에스겔18:1-20에서, 아비와 아들은 각각의 죄 행위에 따라 각각 심판 받는다는 것을 확정하셨음에 주의하라.....그러므로, 영생구원에 이르는 다른 길은 없다.....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였느냐 여부로 영생과 영벌 둘로만 나뉘게 되는 것이다.....그래서 신자들은 장례식에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인사말을 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바로 그곳에서 합당한 위로를 하면 족한데, 아마도 유족에게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라고 말함이 가장 적합하리라.

죽은 자를 위해 세례 받는 것도 당연히 하 필요가 없다는 것임!!. 아무 의미가 없음에도 그 본인이나 주위사람에게 마치 죽은 후에 제 2의 기회가 있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죄의 본성이 살아있고 종종 죄를 범하는 인간 신자가 대신 세례 받았다고 이미 심판으로 떨어진 자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은 아예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죄인의 구원과 심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 성령이 역사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의가 덧입혀질 때만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은 후에, 인간의 세례 한번으로 이미 죽은 자가 구원받게 되면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실 필요도, 십자가에 죽을 이유도 없다.

[고전3:1-3, 10-15...그리스도왕국 및 새예루살렘성<곧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란 그 공적<열매>이 불시험을 통해서도 그대로 남아 있는 자임]

*1.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마12:28-3732)....성령<과정 거치신 그 영, 주 영, 십자가죽음-부활 거쳐서 차원을 초월하는 부활의 몸을 입고 나타내 보이신, 변형되셔서 참되게 믿는 이의 영에 내주하사 하나되셔서 인도하고 계시는 보혜사>를 모독하는 자는 현세와 내세에서도 구원받지 못함....천년왕국 및 하나님 나라 참여 불가 + 백보좌심판 거쳐 영멸에 처해짐] *28. 그러나 내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33.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계22:10-21(12)]

*10.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11.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15.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을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고전15:29)

이 구절의 <본래적> 의미를 제대로 드러내려면, 전후문맥을 잘 살필 필요가 있음에 주의하라.....이 구절을 당시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당연시 하였지만 , 그 안에 감추인 진정한 의미는 놓쳤던 것 같다..

문제는 본문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 본다면, 마치 죽은 자를 위해 산 신자가 세례를 받아야 하고 그러면 다시 산다는 의미로 여겨지며((실제로 가톨릭은 그렇게 해석하여 행하고 있음)), 이는 전적으로 성경 전체가 말하는 바와 확실히 어긋난다. 그래서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바르게] 해석해 보도록 하자.

.... 그 속뜻을 긍정적 의미로 풀어 보면!!...! 영혼이 죽은 자(=불신자)가 부활해서(이 가능성에 대해 성경은 "그런 것 없다, 전무하다" 말하고 있으므로 논의할 가치도 없지만), <이것조차도 그 누구의 공적을 인함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 믿는이의 성화과정을 적용해보면, 예수를 믿어 “성령의 세례”를 받으면 구원 얻고 <그의 전 존재가...비록 아직 이 땅의 몸은 후패하여 가지만, 영이 새롭게 하심 받았고, 혼조차 성령께서 이끌어 가시는 바 되며, 구주 재림시 부활의 몸을 입게 될 바>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살아난다<부활에 참여케 된다>는 것이 합당한 해석이리라.. 

.... 그러나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본문이 포함된 앞뒤 문맥(15:12-58)이 죽은 자의 육신의 부활을 논하고 있음에 주목해서 제대로, 곧 전체적인 주제와 흐름과 합치된 해석을 추구해 보자..

가장 중요한 포인트!!...지금 바울은 육신 부활의 확실성을 논증하고 있다. 본문은 단지 그 진리를 더 강조하는 한 가지 예로 인용한 것이다. 

죽은 자를 위해 [산 자가] 세례를 받으라고 권면하는 뜻이 아니며 그런 의도 또한 전혀 없다. 

단지 부활이 확실하기에 [그것은 <고린도인들이 아직>성경을 잘 몰라서, 즉, 미숙하여....이들을 바르게 부드러이 인도하려 하고 있음!!] 죽은 자를 위해서 세례 받는 사람들도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이다.

성경해석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본문에 대한 해석에 몇몇 오해가 있었다. 

현대에 들어와 성경원어의 어원과 의미와 문법과 구조, 당시의 역사와 문화와 관습과 제도와 법률 등에 대한 연구가 발달하면서 성경본문에 대한 좀 더 세밀한 분석이 이뤄졌고 더 정확한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전에는 성경전체를 전부 무비판적으로 무조건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받아들였었다.

고대문서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신약 헬라어에도 어디서 새로운 문장이 시작되는지 구분이 없고 인용부호 등은 아예 없음을 최근 연구로 알게 되었다. 

이제 신학자들의 도움으로 하나님이 직접 하신 말씀, 성경저자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한 하나님의 계시, 저자의 개인적인 의견, 다른 이의 말이나 다른 사건을 인용한 것, 비유와 예화 등으로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요컨대 상기 본문도 하나님의 계시나 바울 본인의 의견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바울은 단지 당시에 죽은 자를 위해 대신 세례 받는 관습을 인용한 것뿐이었다. 알기 쉽게 해석하면 이렇게 된다. “부활이 있음을 알고 믿기에 지금 그런 관습을 시행하지 않느냐? 그럼 예수 십자가의 부활을 본 기독교 교회와 신자는 더더욱 부활을 확실히 믿어야 하지 않느냐?” 

같은 맥락에서 이어지는 구절(30-32절)에서도 바울은 부활이 확실히 있으므로 복음을 전하면서 모든 위험과 핍박을 감수 할 수 있었다고 변론하는 것이다.

원어의 의미와 가장 가깝다고 평가되는 최근의 표준새번역본 성경이 이 구절을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지 보라.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무엇 하려고 그런 일을 합니까? 죽은 사람이 정말로 살아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은 죽은 사람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습니까?” ....즉, 바울 자신은 <어찌 보면> 죽은 자를 위해 세례 받는 자들을 교회와 자신과 완전히 무관한 제 삼의 집단으로 지칭하고 있는 것 같다..

바울 당시에 고린도 교회 안에 그런 관습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혹시 있었다 해도 아직 십자가 구원의 진리를 정확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리라. 

실제로 초대교회 교부 크리소스톰의 기록에 따르면 바울의 이 구절을 오해하여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자를 위해 죽은 자가 누워있는 침상 아래에 들어가 세례를 대신 받아주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이미 온전히 믿은 자로 단지 세례 받지 못한 것만 대신하려는 뜻이었긴 하지만 이 또한 얼마나 많이 오랫동안 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시 강조하지만 상기구절에, 살아있는 신자의 세례로 1) 죽은 불신자의 구원이 가능하거나, 2) 죽은 신자가 천국에서 더 많은 상을 받거나 불신자는 지옥 형벌이 좀 감해지거나, 3) 이 땅에서 세례 받지 못한 것을 보충하는 식의 의미는 전혀 없다. 오직 당시의 그런 관습만 봐도 부활은 확실하지 않느냐고 한 가지 예를 들어서 부활을 강조한 것뿐임에 주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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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와 요한은 [오직, 사랑의 문제다!!..동일한 장소에 있었지만, 눈이 가려져 있었기에, 아직은 주님이 예비하신 그 때가 아니기에?!..천사도, 주님도] 보지 못하였었다.. [막달라 마리아와 세 여인들이 보고 듣게 된 것], 즉 천사가 돌무덤 입구에서 돌을 굴러낸 바로 그 돌문 위에 앉아 있는 것, 이제 그들을 인도하여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그리스도가 누우셨던 자리 우편에 앉아서 그분의 부활하심을 증언하면서 <주께서 갈릴리로 가시기에 그분을 거기서 뵙게 되리라>는 것을 보고 듣는 이것조차도  ((전적으로 자비로우신 주의 뜻하심에 따르는 것이기에, 때로는)) 각 사람마다 달리 경험될 수 있음을 잊지 말라.....오직 사랑으로 오직 믿음으로 집중-몰입하여 <열어주실 분>주님 앙망하며 추구하기를 힘쓰라..

......[초혼...김소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어! 허공중(虛空中)에 헤어진 이름이어!//불러도 주인(主人)없는 이름이어!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어!// 심중(心中)에 남아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하지 못하였구나.//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붉은 해는 서산(西山)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이의 무리도 슬피 운다.//떨어져 나가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어!//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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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 (히.인) 미리암<찬양자, 찬양- 주께 합당한 영광돌림  + 슬픔, 애통, 통한의 바다>...그 원천은 히브리어<마라 ::: (동)마르 : 논쟁-저항-원망하다, 쓴, 쓴맛의  (명): 메리, 반란-저항-반항-슬픔/논쟁>. :: <죄의 바다 벗어나 구원 받은, 찬양의 삶을 사는 자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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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6:17>바요나 시몬아( :: ^요나(=비둘기, 성령), ^바요나(바르-요나..요나의 아들), ^시몬 = 쉬메온, 시므온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다...//**<마16:18>너는 베드로라( ::: 베드로(히) 게바(아람), 페트로스(헬), <깨어진>바윗조각, 돌, 바위<반석>//**<요21:15, 16, 17>요한의 아들 시몬아 :: 요한(=요하난= 예호하난 = 예호와 + 하난, 한눈(은혜-자비-긍휼) = <그에게>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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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유안에 믿는 이 각자가 포함되기에, 만유를 포함한 내주하시는 초월적 그리스도> 안에 매순간 살도록 함이 마땅하다...다만 속지 말라!! 모든 점-흠-티-주름-거리낌마다 주께 아뢰어 벗어버리고 주 영의 움직이심과 깨닫게 하심에 순종하기를 연습하라...하늘의 열린문, 그 안으로, 지성소안에, 주 품에 거하며 승천의 영으로 섬기도록 하라...오직 주님의 관점과 심정, 마음 따라 걷기 원하오니, 주님 마음의 무한한 기쁨과 감동 주사  <무엇을 어떻게 말할지> 내 입에 주의 말씀 주소서, 주님의 찬송으로 채우시며, 주님의 기도로 기도하게 하소서

.....각사람의 옛사람-옛자아를 포함한 전존재가 예수와 함께 무덤에 장사되어 거기에 남겨진 바 되었고, 이제, 그분의 부활과 함께 <죄와 사망에게서 우리를 해방하사, 그분의 어떠하심과 똑 같이 만드시려 부활 안에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셨음.

.... 그 안에서 부활한 이들마다 부활한 새사람으로서 <영광의 자유를 누리는 바>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주님의 교회안에 있으며, 그분이 가지신 것과 똑 같은 생명-본성-위치를 가지고 있음을 붙들고 고백하는 것이 타당함....이로써 요한복음을 기록하게 하신 성령의 의도가 밝히 드러난다 

::: 즉, 그 사실을 믿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 <하나님의 독생자와 마찬가지로!!>, 주님이 아버지께서 그분을 사랑하셔서 이미 영원 과거 전에 그에게 주셨던 영광, 즉 하나님의 생명-하나님의 본성, 그리고 하나님의 충만을 가진 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것을 보여주려 하심이다.

.....이 영광은 믿는 우리 각자마다를 하나님의 표현과 나타남을 위한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드는 것이다....사람과 천사들, 곧 하늘과 땅이 주 예수의 부활에 대해 오늘도 증거한다.

.....이제, 주님을 참되게 믿는 자마다 <당신 자신과 똑 같게 만들어 주시고 친히 영으로서 우리 안에 하나되어 내주하고 계신,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시며 인도하시는 바> 그분 자신이 하늘에 속한 위임 통해 우리를 사명자로서 날마다 새로이 이 땅에 보내고 계신다. :: 오직 믿음으로 추구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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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도마(요20:19-31)
●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사람이었던 도마는 갈릴리 출신 어부로 ‘디두모’라고도 불렸다.
‘도마’는 히브리식 이름이고 ‘디두모’는 헬라식 이름인데, 둘 다 뜻은 ‘쌍둥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도마는 쌍둥이였던 모양인데, 그가 형제 쌍둥인지 자매 쌍둥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어떤 학자들은 마태와 쌍둥이였을 것이라고 추측하나 불확실하다. 성경에는 그의 부모나 그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록도 전혀 없다.
뿐만 아니라 만일 요한복음에 기록된 도마와 관련된 내용이 없었다면, 그는 단지 이름만 소개된 제자였을 것이다.

공관복음(마10:3, 막3:18, 눅6:15)과 사도행전(행1:13)에는 단지 이름만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요한복음에 있는 내용 덕분이다.
● 도마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오늘날까지도 그는 ‘의심 많은 제자 도마’로 알려져 있다. 어떻게 해서 도마는 이같은 인물로 평가되고 있을까? 그리고 그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정당한 것인가?

먼저 요한복음에 소개된 도마와 관련된 내용들을 살펴보자.
1) 요11장에 보면,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신 예수님은 베다니로 나사로를 도우려 가자고 하신다.
그 당시의 상황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유대인의 궤계가 임박해 있고 실상 얼마 전에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하였다.

따라서 그곳에 가신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가지 못하게 말렸다.

그런데,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도마는  나서서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한다.
도마의 이러한 반응은 어떤 의미였을까? 이것이 용기였을까 아니면 운명론자들이 갖는 염세주의적 기질에서 나온 것일까?

만일 예수께서 신변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유대 땅으로 건너가시려 하자 스승과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 하겠다는 비장한 결의의 표현으로 본다면, 도마는 단순하고 의협심 강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도마도 당시의 어려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면, 유대땅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 다소 자포자기의 의미를 지닌,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예수께서 가시자고 하니, 모든 것 다 운명에 맡기고 올라가자.”라는 의미로도 들린다.

신학자들이 이 구절에 대해 여러 각도로 해설을 해 놓았지만, 분명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하고 있다.
2) 두 번째로 도마가 등장하는 장면은, 요14장인데, 유월절 전날 밤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큰 위로의 말씀을 하신다. (요14:1-4 읽기)
그러자 도마는 질문을 한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 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도마는 그 길을 알아야 한다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도 예수님께 질문한다.
도마는 이미 앞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가르침을 듣지 못했단 말인가? 그는 귀머거리인가?

그는 주님께서 배신을 당하심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그분의 가르침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인가?

도마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세상 왕국을 꿈꾸고 있었다.

예수께서 떠나 가셔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실 때, 그들은 실제로 예수님이 어떤 다른 도시에 가시는 것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서 왕으로 기름부으심을 받고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하리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질문한다. “우리는 당신이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 길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요13장에서 베드로도 질문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13:36)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점에서 볼 때 그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었던 것을 잘 믿지 못하는 깨달음이 둔한 자였는가? 아니면, 자신이 이해되지 않을 때는 알 때까지 끝까지 파고드는 사람이었는가?
3) 세 번째 등장은 요한복음 20장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인데, ‘의심많은 제자 도마’로 우리에게 알려진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십자가 사건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첫번째 주일날]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나중에 그가 와 서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자기들에게 나타났다는 것을 들었을 때 그는 완고하게 그 사실을 믿으려 들지 않는다.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한다.
성경은 왜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도마와 같은 상황에 있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했겠는가? 도마는 부활의 증거를 믿기 전에 부활하신 자를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껴야만 했다.

도마는 진지하고 심각했다. 그는 실제로 예수님을 다시 보기를 원하였고, 그분이 죽지 않으셨음을 알기 원했다.

의심과 실망 가운데 있던 도마는 7일동안 제자들과 함께 머물러 있으면서 그들이 말한 것이 실제로 사실이었나를 알기 원했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을 만나 주시는데 일주일이 지체되었다. 그동안 도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다른 제자들에게는 기대와 소망이 넘치는 즐거운 일주일이었지만 도마에게는 근심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일주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어야 함을 느꼈으므로 그 무리들과 함께 있었다.
4) 네 번째 등장은 요한복음 20장에서 바로 이어지는 장면이다.

그 후 여드레를 지나서[즉, 두번째 주일날] 갑자기 예수님이 제자들의 한 가운데 다시 나타나셨을 때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도마도 다른 제자들과 함께 그 자리에 있었다.
그때 예수님은 도마에게 너의 손을 직접 만져보고 옆구리에 손을 직접 넣어보라고 하신다. 그리고 도마에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도마는 무릎을 꿇으며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을 한다.

이에 예수님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라는 말씀으로 이전에 도마가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은 데 대한 꾸지람을 하신다.
예수님은 도마가 말하는 것과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마 한 사람에게까지 찾아와 주셨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때로는 지체하시며, 때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개인과 가정, 교회를 방문하신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영혼을 가치 있게 보신다. 이에 도마는 놀라운 신앙고백을 하게 된다.
우리에게 도마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알려주는 요한은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도마를 잘 알고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그들은 같은 동네에서 자랐고 직업도 같았다. 또한 제자들이 디베랴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동안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에 도마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 요한은 특별히 도마를 지칭하여 말하고 있다.
도마에 대해 변함없이 묘사되고 있는 특징은 우울하고 의심 잘하는 그의 성격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이런 경험은 예사로이 할 수 있다. 그는 결코 성경에서 언급하는 “사악한 불신의 마음”을 지닌 자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휘몰아치는 의심과 싸웠으며 그런 의심들을 과감히 물리쳐서 자신의 의지를 주님 앞에 드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가 으례 도마를 생각할 때면 “의심 많은 도마”라는 상념을 떠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기록들이 그러하고 또한 주석가들도 “도마는 우리가 의심하지 않을 것까지도 의심하는 자”라고 예사로 논평을 해 왔기 때문이다.
성경의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도마는 성격상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들을 지니고 있었고, 특히 누구와 함께 융화되기 어려웠다. 그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질문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다보니 갈등을 일으키고 다른 이들과 쉽게 융화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분명히 기질상 쾌활하거나 명랑하기보다는 다소 우울한 성격이었을 것이다. 그는 인생을 냉담하게 혹은 절망적으로 보는 염세주의적인 기질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의심과 질문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의심이 많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사고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대충대충 넘어가지 않고 확실하게 하려는 삶의 자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강한 의지와 용기를 지닌 인물이었을 것 같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변하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선생님인 예수님에 대해서는 신실한 애정을 지니고 있었다.
용기 있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고난에 도전하고 정면으로 역경을 돌파하고 시련을 이겨내려는 의지가 있었던 도마는 분명히 용기 있는 제자였다. 제자들 가운데서도 스승에게 질문을 한다는 것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이다. 질문이 없는 조직이나 공동체는 퇴보하거나 실패하기 쉽다. 도마는 어렴풋한 생각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의문을 가지고 그대로 지나갈 수는 없었다. 올바른 지식과 인식을 얻고 전달하는 완전한 방법은 바른 질문에 있다.
도마의 오랜 의심은 드디어 강한 믿음으로 변했다. 그의 의심만큼 신앙도 깊어졌다. 사실 우리는 끊임없이 교회와 신앙, 그리고 자신의 삶에 계속 질문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질문이 없으면 발전도 없다.
● 이후 도마는 주님을 위해 능력 있게 사용되었다.
염세주의적이고 의심에 가득 찬 제자였던 도마가 열정적인 선교사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바벨론과 페르시아(이란)에 교회를 설립했고 나아가 인도에도 교회를 설립하고 복음을 전파했다.

전승에 의하면, 도마는 인도에서 선교하다 순교하였으며, 인도 마라폴에 묻혔다.

그곳에 끼친 그의 영향력은 여러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오늘날 세상에 속속 드러나고 있다.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보고서야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도마를 향해 예수님은 보고 믿는 믿음도 좋으나 ‘보지 않고 믿는 믿음’ 이 더 복되다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성도들 중에도 도마와 같이 ‘내가 예수님을 한 번 보고, 혹 이적을 한 번 체험해 보면 더 잘 믿을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다.

그러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임을 기억하여, 우리 성도들은 보지 못하는 중에도 믿음으로 복된 믿음을 소유하는 자들이 되자.
뿐만 아니라, 주님 앞에서 분명한 신앙고백을 한 도마가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된 삶을 담대하게 살았던 것처럼, 비록 우리 자신 역시 부족하고 어리석은 인생들이지만,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분명히 확증하고 점검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증인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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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 유신증명]

창1:1[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이 말씀은 이른바<존재론적 유신증명>의 기초라 할 수 있다.  

바로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주님 자신을 증거하고 계신지에 대해 집중하면서 바로 그 관점에서 자연과 사람을 볼 때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더욱더 새롭고 폭 넓게 깨달아 알아가는 <발휘되는 참 믿음의 단계로> 옮겨 갈 수 있음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세계는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을 보고서(주관적으로 그 사람의 참된 진면목!! 참되게 깨달아 앎!!!) 하나님을 아는(=알아채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창조 목적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보고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어쩌면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서로서로가 (세상에서 교육받고 경험한 관점에서 판단하도록 그렇게 정형화 되어버린 바를 토대로) 사람이란 존재는 연약하고 부족하며 또 악하다고 생각하며 또 그러려니 하고 짐짓추정하여 무심코 기계적으로 그렇게 대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이후에 한 번도 사람을 개량-개선하거나 바꾸신 적이 없음을 알고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정말 놀라운 일일진대 그렇게 느껴 본적이 있는가??...사람은 창조될 때 사람이나 지금이나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

단지 그 사이에 일어난 일이란 사람이 (타락한 결과로 인해),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과 세상의 일을 보고 <선>하다, <악>하다 판단하는 자리에 오른 일 밖에 없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사람이 판단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 일로 인해서 (타락한) 사람은 (자기외의) 사람을 (상대적으로 자기와 비교하며) 부정하게 여겼다. ...그래서 (자기를 들여다보면서 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그) 사람은 (도대체가) 이 사람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을 대리해서 만물을 다스릴 수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원래 만드실 때 그 모습의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가장 온전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모습 그대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 

예수님을 아들로 보내셨다는 것 자체가,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즉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을 연상하고 알 수 있는 존재라는 메시지를 보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리고 창세전에 그분의 소유로 택정하신자를 주님의 때에 부르시고 회개함과 JC를 개인의 구주와 하나님으로 영접함 통해 거듭나게 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어, 거듭난 참 믿는이가 가지는 바, 그 <참된> 믿음이란, 성육신하여오신 독생하신 하나님, 곧 [비록 내 눈 앞에 있는 바로 그 사람이] 요셉의 아들 예수님이 아니라 하더라도 (비록 지금은 그 자신이 주 안에서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영안이 닫혀있고 깨닫지 못하여, 헤매이는 중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그 안에 있는 택정함 받은 사람임을 거듭난 그대가 주님 마음과 눈으로 알아보고, 택정하신 하나님을 알아채고 발견하여 믿고 찬송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빛비춤의 메세지와 사랑의 말씀을 주는 것, 또 그대 자신에게 그것을 알게 하시는바, (어쩌면) 자신과 같이 일상 생활속에서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기에는 부족하고 보잘 것없어 보이는, 쓸모없어 버려진 쓰레기이자 죄인 취급 받는 바로 그 사람을 하나님이 보시는 열린 눈과 그분의 열린 마음으로 보며 받아들여 존귀한자로 여겨 [긍휼이여기시는]주와 함께 하나되어 기쁨으로 환영하며 받아들여 오래참고 기다리며 기대하며 그의 보배로움이 온전히 드러나도록 귀히 여겨 끝까지 주와 함께 섬길 수 있는 믿음 그것이 복된 <참> 믿음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Q과 하나가 되어 Q을 표현하는, Q 아들이라는 것을 진정 알아챌 수 있고 또 올바로 알아볼 수 있는<또 그 그릇으로 예비-택정하신바 된 자임을 알아보는> 그 사람이 복된(=영생구원 얻고 누림) 참 믿음의, 거듭난 참 믿는자라는 것이다.!!

요셉의 아들,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그 실체를 봐야 믿어지는 믿음이 아니라, Q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전하신, Q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참되게 분별하여 깨닫고 보아> 알 수 있는<바로 그가 그러한 이임을 알아챌 수 있는> 믿음, 그리고 요셉의 아들이 아니지만 Q이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신 뜻을 그의 삶으로 살아내는, 그분의 말씀이 삶 자체가 된 사람을 Q 같이 여기고 대할 수 있는 믿음, 그것이 복된 믿음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아브라함도 사람을 보고 하나님을 대한 것과 같다고 했고, 야곱도 자신을 죽이려 하고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은 그 형(에서)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본 것 같다고 했고, 바울 사도도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이 하라고 했고, 예수님께서도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예수님께 한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육신이 예수인 예수님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관점, 애굽의 관점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는 이 육신 가진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면 곧 하나님의 그리스도와 같은 (그분의 신격에서가 아니라 그분의 생명-본성 측면에서의 신성/거룩함을 그대로 물려받은 완전 복사판+그리스도의 참 인성 그대로 가진) 존재가 된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야말로[=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믿음이요, 하나님을 믿음이다] 복된 것이라는 것이다.

보지 않고도 [말씀하신 그대로!! 구주 부활하셨음을...그리고 ((시공을 초월하여)) 생명 주는 영으로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일하고 계심을] 믿는자가 복되다고 말씀하셨을 때... 도마가 보지 못한 것은 [유한한 시력에만 국한된] 요셉의 아들 예수님이었다. 그것은 객관적 실체의 대명사다. 

[요20:29....“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29 Jesus said to him, “Because you have seen Me, do you now believe? Blessed [happy, spiritually secure, and favored by God] are they who did not see [Me] and yet believed [in Me].””9)]  

[고후5:7...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7 for we walk by faith, not by sight [living our lives in a manner consistent with our confident belief in God’s promises]] 

믿음은 (단순히 머리로만, 성경에 쓰인 대로 로고스 곧) 객관적인 사실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이제 (물두멍 안의 물, 곧 말씀 안에 흐르는 생명의 물로, 깨끗하게 씻긴 양심과 생각-감정-의지의 마음 영역의) 영적 지각을 동원하여...즉, 구하는 이마다에게 주시는 (레마로 지금 말씀하고 계시는 주님을 참되게 깨닫고 알아볼 수 있도록 거듭난 그대의 영안을 열어 주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따라, 그대의 마음의 눈 밝혀 주심으로써] Q께서 사람을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을 간직하고 말해내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의 말을 Q께서 지금 현재적으로 말씀하고 계심을 받고 [세이경청하여 순종함으로써] 믿는 것이 산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났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한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진정한 믿음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 그래서 사람을 하나님과 같이 대할 수 있는 믿음이다. 그것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려면 마음에 선악과로 인한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없는 사람이어야 하고,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는 사람이어야 하며,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기 안에서 성령으로 잉태된 거듭난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어느 시대 어떤 사회에서도 하나님을 만나고 믿을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보지 못하고 믿는 복된 믿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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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4:23...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킹)Keep thy heart with all diligence; for out of it are the issues of life.(확) Watch over your heart with all diligence, For from it flow the springs of life. (표)Watch over your heart with all diligence, For from it flow the springs of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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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2:30..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30(확) Therefore the Lord God of Israel declares, ‘I did indeed say that your house and that of [Aaron] your father would walk [in priestly service] before Me forever.’ But now the Lord declares, ‘Far be it from Me—for those who honor Me I will honor, and those who despise Me will be insignificant and contemptible.(표)"Therefore the LORD God of Israel declares, 'I did indeed say that your house and the house of your father should walk before Me forever'; but now the LORD declares, 'Far be it from Me--for those who honor Me I will honor, and those who despise Me will be lightly esteemed.(킹)Wherefore the LORD God of Israel saith, I said indeed that thy house, and the house of thy father, should walk before me for ever: but now the LORD saith, Be it far from me; for them that honour me I will honour, and they that despise me shall be lightly esteem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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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20:21-23)) ㅡㅡ*21.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바-하이하 콜라-아쉬르 헤-콜라후 라하타함 바-누살라흐 라헴 베-아쉬르 헤아쉬이무 이-아쉬무

21>호시프 예슈아 베-아마르 라헴: 샬롬 라켐.... 케쉠 쉐-하아브 샬라흐 오티 ... 켄 감 아니 솔레아흐 에트켐  22>아-하레이 옴로 조트 --나파흐  알레이-헴 베-아마르 라헴 ...카블루 에트 루아흐 하코데쉬 ...23>콜 미 쉬트-슬레후 로 알 하타아-예브 헴 이살라후 로... 라콜 미 쉬트-자케푸 오탐 ...이자크푸 로 ((<==>바-하이하 콜라-아쉬르 헤-콜라후 라하타함 바-누살라흐 라헴 베-아쉬르 헤아쉬이무 이-아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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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프(헤이-바브, 시프<싸멕-요드-코프 :: 사프<점점더 =더하여>) 예슈아 베-아마르(알렙-멤-레시...이르다) 라헴(라멛-헤이-멤..가배익조판, 영의 실제 거처): 샬롬(쉰-라멛-바브-멤...부으심대로 배워 변화받은 거처) 라켐(<라카흐...취하다/삼다>라멛-카프-멤:배운바 그대로 품고 거처).... 

케쉠(카프-쉰-멤..수용한바 Q의 모든것의 거처) 쉐-하아브(쉰-헤이-알렙-베트, 부으신바 천부 실제) 샬라흐(쉰-라멛-헤트...부음-판박이됨-거함...<결과>내어보내다/용서하다) 오티(알렙-바브-타브-요드..Q이변화-완성-사역) ... 

켄(카프-눈...그대로 이루다/생생한 삶) 감(김멜-멤.. 성령 거처) 아니(알렙-눈-요드..Q의 생생한 사역) 솔레아흐(쉰-바브-라멛-헤트..부으심으로 변화받고 배움 거처) 에트켐(알렙-타브-카프-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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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레이(아하르,알렙-헤트-레시>+요드 : Q경청-심사이해관통) 옴로(아마르<이르다..알렙-멤-레시>+사역) 조트(자인-알렙-타브, 다듬어-완성) 

나파흐(눈-페이-헤트, 생기-참생명말씀-불어넣으심) 알레이헴(아인-라멛-요드, 헤이-멤 ::옮겨부으신 모든 가르침으로 변화받은 영적실제의 거처) 베-아마르(이르심) 라헴(영적실제-거처) 

카블루(:카브<코프-베트: 수용>, 루<라멛-바브>, 존재감동-거함-배움-변화//수용-배움-변화) 에트 루아흐 하코데쉬(거룩한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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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카프/받고-라멛/배움) 미(멤/진리-요드/사역) 쉐티-슬레후(수트/쉰-타브<베레시트>-살라흐<싸멬/붙듦-라멛/가르침-헤트/새거처....내보냄=용서 이룸으로써>-바브<변화>...진리말씀 사역을 전적으로 따라 베레시트 이루라) 로(가르침-변화) 알(아인/전이-라멛/가르침) 하타아-예브(어긋남-오해-착각-오도됨:: 교정사역하여 변화/회복<슈브>) 헴(영적 실제의 거처) 이<예>살라후(살라흐-바브) 로(가르침-변화)  

라콜(라멛-카프-라멛 :: 용납/품고 가르치기를 배움) 미(진리로 사역함 : 멤-요드) 쉐티즈케푸(쉬트-자케푸: 쉰-타브,자인-코프-페이,바브 = 부으심대로 완성될바, 다루심받고 증인됨, 변화 이룸) 오탐(알렙-바브-타브-멤 : Q이 변화시키실바 끝까지 거처되라)  이<예>자크푸(자크<정결> + 푸<말하심>...요드-자인-코프-바브 : Q친히 다루사 변화시키시리니.) 로(라멛-바브..가르치심대로 변화받으라) 

==="알렙"...아버지의 마음 가운데 있는바, 아들들의 자라남의 정도의 최종목표!! , 곧 엘로힘의 원판이신 JC의 판박이로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성숙함에 이르른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을 얻고자 하셨기에, 이미 그분의 작정하심(베레시트) 그대로 이루셨고!! 오늘도  일하사 이루고 계신 하나님..

[[ ***아본<אבון..알렙-베트-바브-눈..(Q 체득의 완전함 없이..김멜~하이, 자인~헤트~멤,.없음,)..부분적 앎의 육으로 살아감> ***하타<חָטָא>헤트-테트-알렙<חֲטָאָה>...Q 말씀의 사역 경험/체득(알렙~자인, 요드~타브, 없음) 없이 (다른 패러다임의) 영과 그 지혜를 머리 삼음..이는 모두 메하츠]]  .결국, 죄를 정의해 보자면!! .. ‘하페츠(חָפֵץ)’//즉 아버지가 뜻하신바<기뻐하신 뜻>이 켄<כן׃ 그대로 되다>, 베레시트 이룸이 중요...따라서!! 메헤츠(과녁에 꽂힐바 화살)는 마땅히 과녁(야드.יַעַד)에 꽂혀야 한다.....상처(셰베르.שבעת) 맞은 자리(막카מאקה 마하츠)마다 주님이 낫게 하시리라.. ....마하츠(깨부수다, 깨다, 때려부수다.) 그대로 이룸이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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