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역개정]요일2장 [90.주예수내가알기전] [91.슬픈마음있는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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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그리스도시요,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인성 가진 완전한 사람이심(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이루시려 하나님에 의해 그 영으로 기름부음 받으셨음<요1:32-34, 마3:16>, 곧 기름 부음 받은 자이심<요20:28, 19:5>)에 대한 이단들을 처리하며 다룸]]
::: 요일2장 --세린티안(예수=그리스도...이것을 부정하고 <그 선지자>라고만 한정...)...
::: 요일4장 --영지주의자(그노시즘......그리스도의 영이 타락 안에서 육신 입어 태어난 사람인 예수에게 일시적으로 임했다가 그의 죽음과 함께 떠나버렸다고 주장.....<제한 초월한>.영적인 몸으로의 부활 + 변형되사 생명 분배와 생명공급으로서 영원히 내주하시는 주 영을 부인, 곧 부활 부인 ), 도세티즘(가현설......진짜 성육신이 아니었다고 주장)을 주장하는 분파,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구약 관련 내용들을 깡그리 제거해 버리려는 마르시온(말키온)파가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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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에서 유독 특이하게 충분히 계시되어 드러나는 신격의 삼위일체성]]
...그리스도가 영원 안의 바로 그 하나님이심(요1:1),
...그분이 시간 안에서 사람이 되셨음(요1:14)
...그분의 신성은 온전, 인성은 완전하기에, 그분은 신성과 인성을 모두 겸비한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시다.(요20:28, 19:5)
...사람으로서 그분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이루시려고 하나님에 의해 그 영으로 기름 부음 받으셨다(요1:32-33, 마3:16), 곧 기름 부음 받은 자이심(요20:31)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분은 하나님의 형상이시요(골1:15),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요 본체의 표현된 형상이시며(히1:3), 하나님의 형체로 존재하시며, 하나님과 동등하시다(빌2:6, 요5:18)....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분은 아버지와 함께[헬라어<파라, -로부터 함께>..요6:46] 오셨기에, 그분은 아버지라 불리우신다.(사9:6)....영원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셨으며(요1 :1-2), 아버지와 항상 동시에 존재하실 뿐 아니라 상호내재하고 계신다(요14:10상, 11상, 17:21)..그분이 땅위에 육신으로 계시는 동안에도 아버지는 그분과 함께 계셨다(요16:32)...그리스도는 아버지와 하나이셨으므로(요10:30),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와 함께 일하셨고(요10:25, 14:10하), 아1버지의 뜻을 행하셨고(요6:35, 5:30), 아버지의 말씀을 말했고(요3ㅣ34상, 14:24),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했고(요7:18), 아버지를 표현하셨다(요14:7-9)
...영원한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는 만물의 창조자이시고(요1:3), 물질적인 혈과 육을 지니고(히2:14), 육신으로 오신 사람으로서(요일4:2) 그분은 하나님의 피조물, 즉 모든 피조물 가운데 먼저 나신 분이시다(골 1:15하)...그러므로 그분은 창조자이신 동시에 피조물이다.
...아버지께서 그분의 아들의 이름 안에서 보내신(요14:26), 그 영을 주시는 분이요 보내시는 분이신(요15:26, 16:7, 3:34하) 아들은 육신 안에서 마지막 아담이시며,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생명 주는 영이 되셨는데(고전15:45하, 요14:16-20), 그 영은 아들에 관해 증거하고 아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요15:26, 16:14) 아들에 속한 모든 것을 받으셨고(요16:14-15) 아들의 호흡이시다(요20:22)...그러므로 그분은 또한 믿는이들 안에서 아들과 아버지와 함께 동시 존재하고 상호 내재하면서 거하시는(요14:17, 23) 그 영이시며(고후 3:17), 믿는 이들을 영 안에서(롬8:16 딤후 4:22) 한 영으로 그들과 연합된(고전6 :17) 영이신 TUQ이시다....결국 그분은 아들 곧 어린양의 일곱 눈이신(계5:6) 하나님의 일곱영이 되셨다(계1:4, 4:5)
--- 난제들>
==하나님의 영이신 일곱 영이 신격의 두번째이신 아들의 일곱 눈이 되심...신격의 세번째가 두번째의 눈들이 되실 수 있겠는가..
==사9:6에서 아들의 이름은 아버지로도 불리운다..주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분은 또한 아버지와 함께 오셨다!!(기억하라!!)
==주님은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오셨고,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일하러 오셨다고 하셨다(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일하고 계심임을 기억하라!!)...아들은 그 자신의 뜻으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셨고 다만 그 대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다.....마찬가지로 그분은 그분자신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않으셨고 오직 아버지의 말씀만 하셨다...그분은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셨고, 아버지를 표현하셨다.
==요한복음에서 아들은 그 영을 보내시는 분이시요 주시는 분이다. 그런데 동시에 그 분 자신이 그 영이 되셨다.
이 영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요. 어린 양이신 아들의 일곱 눈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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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과거 이전부터 선재하여 계신 하나님, 창조주 YHWH-TUQ, 영원생명이신 분, 근원이신 아버지-체현의 말씀이신 독생자 아드님-표현이신 능력의 성령님 ....<미리 말씀하신대로 시대적 경륜따라 이루시려> JC의 성육신 통해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을 걸으셨고 <점흠티주름 전혀 없으신 그분이> 십자가 대속의 죽음-부활 거쳐 제한 벗은 <그러나 만질 수 있는> 부활의 영적 몸 입으시고(승천하심), 동시에 변형거치신 제한 받지 않는 주 영으로서 자신을 믿는 이의 생명으로 믿는 이의 영마다에 분배-내주하사 생명공급 해 주시며 더 나아가 그분의 권능을 충만히 부으사 복음 전파 사명과 소명 감당케 하시는 성령, 주 영으로 믿는 이 각자의 영에 (영원히) 살아계심... 되어진 이 모든 사실을 친히 듣고-보고-자세히 미루어 살핀 바, 통찰과 성찰, 접촉 통해 나타내신 JC를 참되게 경험, 체득한 JC의 증인으로서, 그 증언을 그리스도의 몸에 두루 전함은 사귐-누림-기쁨 충만-그분으로 조성된 거룩-온전-완전-순전한 아들들(그리스도의 지체) 됨을 위함
영원한[영존-영속의 점흠티주름없이 절대적 완전-순전-온전한] 생명, 아버지와 함께[연결-교통-살며-행동함] 계시다가 [생명 계시-분배함으로써 아버지와의 생명의 연결과 교통안으로 이끄시기 위해]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 전함은[들은 바를 이해-체험한 바, 곧 본 바를 전함] 너희로 우리와 사귐[<새 예루살렘안의 생명수 흐름, 내주하시는 그 영의 흐름인 바>영원생명 흐름 통해 아버지-아들과 함께 누리는 코이노니아, 교통, 교제, 친교..공동 참여=공통 참여]이 있게 하려 함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은혜를] 누림이라 ::: 먹고 마심, 소화하여 존재의 조성, 곧 일부와 전부가 되게 함, 이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들 됨 이루어 나감
::: 생명-말씀-빛-진리이신 분께 나아가서 그 말씀으로 조명 받고 통찰-성찰하는 바 그대로 자복-회개함 통해 처리받는 자마다, 생명의 포도나무 본체 줄기의 뻗어나옴인 가지됨 이룸 (말씀에 적셔짐-점유됨-충만케됨-변화됨-새겨짐-상호 기업-상호소유-상호 누림)으로 성령안에서 교제의 누림 회복 통한 자유함, 성령의 열매 (사랑-기쁨-평강-오래참음-자비-양선-충성-온유-절제) 충만함 누림, 더 나아가 <나의 나 됨 : 겉사람이 속사람에게 먹히움 통해, 나의 나 됨 이룸>, 이와 함께 <그리스도께서 하신 바로 그대로> 자기를 내어 줌으로써 영적 후사 보게 될 것
:: JC는 생명-빛-->길과 진리 비춰 보이심
::: 하나님과 신자사이의 관계는 생명의 문제이기에 그 어떤 경우에도 끊어질 수 없지만, [우리 생활 중의] 교통은 [선택에 따라 좌우되는]조건적이어서 중단될 수 있음을 명심하라..생명 흐름 누림의 상실 느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주 임재 앞에 나아가서 빛 비춤 받은 양심 안에서 보혈로 씻김 받을 필요가 있다. ::: 보혈로 깨끗케 함 받을 때에야 교통[생명 흐름]이 회복됨에 주의하라!!
우리가 [우리 영 안의 그 영의 기름부음따라 생명흐름안에서 친밀하고 살아있는 접촉으로서의]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습관적으로, 알면서 고의적으로 사탄적 어둠따라 범죄함으로]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성의진선 그대로>살아내지] 아니함<진리 방기함>이거니와 :: 이것이 바로, 도덕론 폐기론자(antinomian)들의 행태...^^진리 = 주님이 제시하는 유일한 생명 길 - 실재, 진실-참됨-정확-성실-신뢰할만 함-진상/실상
*분명히 우리의 죄, 곧 본성안의 죄는(롬7:17), 속죄제물이신 그리스도로ㅡ 우리의 허물들(죄들)은 속건제물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처리되었다...그러나, 거듭난 후에도 우리는 요일1:8에서 보듯이 우리의 본성 안에 있는 죄 때문에 그리스도를 우리의 속죄제물로, 1:9에서 보듯이 우리의 행위 안에 있는 죄들 때문에 그리스도를 우리의 속건제물로 취해야 한다.
:: 거듭난 후에도 여전히 본성 안의 죄, 행위 안의 죄들이 있게됨을 결코 잊지말고 <적극적, 능동적으로!!>그리스도의 보혈로 처리해야 한다!!....완전한 구원은 이미, 그러나 아직은 아니의 날카로움 안에 살아가면서 맡겨진 사명/소명을 함께 체휼하여 아는 <중보자>로서 살며 감당케 하셨음을 기억하라....이를 위해 성령께서 도우심!!..대망하는 바 주의 재림의 날에 옛몸 벗고 새로운 영적인 몸 입기까지는 주 오라 하실 때까지 여전히 싸워 나가야 함!!
---**결국 죄 범함의 문제는 <모든 의식과 무의식 영역에서조차> 주를 의지함-주를 따름의 선택 의지 문제임을 명심하라...주안에서, 거듭난 새 사람의 JC생명-말씀-성령따라 살 것인지, 말씀을 방기하고 옛사람으로 살 것인지를 선택하라.... 사용하지 않으며 쪼그라 들고 죽어버린 것이 된다!!......실상, 그리스도 영접함 이전의 익숙함은 바로 옛사람 자체였었다....이제 영의 새로움 안으로 돌이키라!!!.그리스도 임재 안에 살기를 연습하라, 처음엔 어색할 지도 모르나, 자연스러워지게 만들라...자연스레 주 안에서 행하기를(말씀 암송-묵상-찬양-기도-주 앙망함으로써 마음 열어드리기, 그 임재 느낌 안에 거하기, 모든 거리낌 토설하여 버리고 JC이름으로 대적하기) 꾸준히 행하라..그냥 <범사에 주 이름 부름> 망각한 채 사려분별없이 무심코 행함은 옛사람으로 돌이킴인 바, [옛사람의] 본성 안의 죄, 그 열매인 죄들(허물)에 자신을 방기하는 것이다!!
##@@거하다 = 거주하다 = 동거하다 = <자녀된 이의 일상의 본질적 요소가 영원 Q의 존재의 본질적 요소와 동일함, 곧 함께 생명의 교통 관계 안에 남아 머무름 통해 대화하며> 살며 걸으며 행하고 움직이고 처신함으로써 동참하다..공허-허무와 헛됨-회한, 거리낌-잘못된 느낌...이 모든 것 마다 <사탄적 어두움>이요 주님과의 교통 단절을 의미한다.
##**신성한 생명, 그 교통안에 머무름, 한편 여전히 육신안에 남아 있어서<하나님과의 생명 교통과 누림을 깨뜨려 방해하려는> <타락한 육신의> 본성 안의 죄에 대해 경계함으로 깨어 있음 통해 <속이고 정복하여 죽이려 함, 신성한 교통-누림을 끊고 뺏으려 함>의 죄 범함을 대적할 때에야 그 교통과 누림이 지속될 것
**파라클레토스 --믿는 이의 영에 내주하여 계시는 아버지와 하나이신 주JC의 영, 진리<실제>의 영이심....돕는 자(도우미)/돌보미, 대언자/변호사/중재자-상담자/위로자/안위자, ::: 이 땅에 오신 JC자신이 보혜사이셨음(이제 승천하사 하늘에 계신 보혜사로서 아버지와 보좌에 함께 계심),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부터 보내셔서 믿는 우리의 영에 거하게 하신 보혜사, 또 다른 보혜사는 믿는 이 안에 내주하시기 위해 변형되신 그리스도의 영이심...."아버지"라는 신성한 단어를 사용함은 우리의 소송건이 다름 아닌 가정의 일, 곧 [의와 사랑의] 아버지와 [거듭난 후에도 범죄함으로써 징계를 받아야 마땅한]자녀들 사이의 <가정법원>문제임을 시사하며,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써 자기를 내어주어 사랑과 의로움의 완전 충족요건을 완성하신, 화목제물이 신] 맏형이신 JC께서 우리의 소송건을 맡아 대언/변호/중재하신다는 것..((롬3:25...하나님이 이 예수를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속죄소(=<하나님과 자녀된 백성들이 대화하며 교통하며 상호 누림을 갖는 화해의 장소, propitiation-cover...hilasterion)로 세우셨으니..))
===대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거듭난]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부지불식간에, 또는 고의/반복/습관적으로]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 [신성한 생명 누림의 첫째 조건] 죄를 범하지 않도록 늘 주 안에서 깨어 경계함..이미 JC 참되게 믿고 영접하여 JC이름을 소유한 바 그 신성한 생명따라 <주의 사랑-희락-화평-오래참음의>교통안에 상호거함 안에서 살아감이 당연함, 그러나, 거기에서 일탈함으로 [습관적-고의적-반복적인 것이 아니라, 우발적으로 부지불식간에]죄 범케 됨...이것은 [성가족의 가정 안에서의 문제로서, 아버지 앞에서 늘 그와 함께 살고 계신 <유일무이한 참 의인>맏형 JC께서 친히 화목(화해-진정시킴)제물로 자신 드리심 통해 <늘 돕는 조력자-중재/중보자-위로자-보혜사>변호자 되심으로써 중단된 교통을 회복시키심]..믿지 않는 이들은 그 화해의 효능 체험 불가능함
2. 그는 [또한 거듭난]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3. [거듭난]우리가 그의 계명[=명령..서로 사랑의 새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체험적으로]아는 줄로 알 것이요 :: [신성한 생명 누림의, 교통 회복의 두번째 조건은, 주의 말씀<계명>지키고 형제 사랑함에 있음 :: Q을 주관적-체험적으로 알 때, 그분의 신성한 생명 본성의 맛을 따라 성격이 바뀌고 행동을 통제하게 되며 그분의 속성이 아닌 것은 무엇이든지 거절하려는 경향이 뒤따름으로 인한 절제가 저절로 수반됨.
4.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 Q앎 = 체험적으로 지속적으로 알아 왔고 친밀한 교통 가짐
5. 누구든지 그의 말씀[=모든 계명들의 총체요 총합인 바, 영과 생명..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을 지키는 자는 [믿는 이에게 부어주신 바 Q의 사랑은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체험-누림 통해 산출-증가-성장하여 표출되는 바 하나님과 형제들을 향해 선순환 됨]하나님의 사랑[=아가페..이것이 하나님의 본질....말씀은 아가페 사랑의 전달-공급하는 것임]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하나됨의 연합-상호 교통 통한 하나님 나타냄] 있는 줄을 아노라 :: 믿는 이의 사랑은 Q이 부어주신 사랑<그분의 내적 본질인 바, 주의 사랑>으로 인해 생겨난 사랑으로서 <이제 믿는 이 안에서 믿는 이의 내적 본질이 됨 통해> Q을 향해, 그리고 형제들을 향해 바로 그렇게 사랑으로 상호 반응하는 사랑임.
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주와 생명의 교통-누림 안에서]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 그대안의 기름부으심을 따르라!!
===옛 계명과 새 계명....[314.내구주예수를더욱사랑]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로 사도가 만들어 낸, 또 다른]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JC로 부터 듣고서] 가진 [형제들간에 서로 사랑하라는]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아가페 사랑의 전달-공급수단인, 영과 생명인..요6:63]말씀이거니와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들은 바, 참되게 깨닫고 분별하는]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어두움을 삼켜 버리는, 늘 새롭고 신선한 느낌을 불러 오는]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9.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용서하기를 거절함으로 인해 늘 마음에 짐과 거리낌 있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 형제사랑은 주께 합당한 상호 교통 통해 세우며 하나되는 교회 생활을 가져 옴.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 **신성한 교통 유지 위한 두 가지 조건들 : *1>죄를 자백함 *2>Q과 형제들을 사랑함 == 형제 사랑함이 곧 교회생활임을 기억하자!!
12. ○자녀들아[모든 믿는 이는 다 하나님의 자녀임...믿음의 연륜과 성장성숙 분량에 따라 어른-청년-아이로 나누고 있음]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는 바, 아버지께서 <대속의 구주 십자가, 그분의 정결케 하는 보혈 효능 믿음 통한 영적-근본적 거듭남의>놀라운 사랑을 베풀어주셨기 때문임. 여기에 자녀라는 말은 친 자녀를 가리킴. 바울은 우리가 양아들로 받아들여졌다고 하며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법적인 부자관계로 보았으나, 한 걸음 더 전진하여 사도 요한은 ‘휘오스’(양자)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테크나’(친자)라는 말을 쓰는데, 법적인 아들뿐 아니라 친자녀를 가리키는 말로서, 하나님의 친 자녀가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 요한은 '우리가 그러하도다'라고 재확인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친 자녀가 된 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사랑인지 재차 감격하며 강조하고 있다.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영원하시고 미리 존재하시는, 태초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 말씀-생명-빛-길-진리)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거듭난 초신자...<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아버지와 아들이 없는> 적그리스도를 주의 깊게 분별-대적하는 것을 배워 실행해야 함]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말씀과 기도로 Q뜻 추구하며 동행하고 따르며 마귀 대적하여 이기는 삶을 살아감, 일상의 경건 훈련 중임]
15. [특히 청년들은 명심할지니, 잠시 거쳐가는 곳인]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이로써 당연한 귀결인 죄/중독-정욕/탐심-교만에 스스로를 방기한다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믿는 이, 청년들을 오도하여 미혹되도록 유혹하는 바]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딤전4:4-5]..*4.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메시지) *4.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니,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멸시하며 내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5.지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기도로 거룩해집니다. //*4. For everything God has created is good, and nothing is to be rejected if it is received with gratitude; *5. for it is sanctified [set apart, dedicated to God] by means of the word of God and prayer.
---- 무엇 위해 어떻게[피조물을] 사용하고 있는지를 [합당한 가치따라 근본 동기를 살피고] 돌아봐야 함.... [악한 사탄 마귀 조직 체계인] 세상을 사랑함은 영적 간음이요,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함은 세상을 주신 Q의 뜻 따름에서 돌이켜 세상 가치를 우상 삼아 올인함으로써 세상가치에 미혹-중독됨 통해 스스로를 영멸에 방기하는 것임을 명심하라.
****<매슬로우의 5(6)대욕구>[불안 회피]생존/안전 욕구 ==>[소속/친밀 유지]애정/존중 욕구==>[실현/초월]자기 실현/초월 욕구
....[육신의 정욕]...죄-중독-게으름/안일/나태, 평안과 안식 아닌 편안함/게으름/일락 추구케 함 통해--죄와 중독/주색잡기의 무력감/허무/허망함의 함정에 빠뜨림] <악한 사탄적 요소가 우리의 육체적 몸 안에 거하고 있어서>타락한 몸의 격렬한 욕구인 <육신의 정욕>을 유발하는 바, <단순히 고행과 금욕을 강조하는> 금욕주의는 육신의 정욕 처리를 위한 참된 대안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Coram Deo-Cum Deo-Sola Fide-Sola Scriptura-Soli Deo Gloria로 주 임재 의식 안에 주바라기의 일상을 영위함 그 안에서 생명 충만하신 주님 추구하며 열심히-부지런히 균형을 유지하면서 따라가는 경건훈련이 그 답이 되리라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일독해 보되, 그 안의 금욕주의적 경향은 잘 분별하고 배제하기를 배우라.>
....[안목의 정욕]<눈을 통한, 선악지식나무 열매를 취함 통해 육신이 된 몸에 종노릇 하는, 부패된 혼(정신적 생명, 혼 생명psuche)의 격렬한 욕구[Q말씀과 사회적 공익 위한 도덕적 규약<인의예지신>의 균형적 한도를 자의적으로 벗어나 절제되지 않는 <식성수물명..보암직/먹음직함>의 탐욕의 마음<탐심...자기희생적 이웃과 형제사랑에서 벗어남>]로서 이제 몸은 혼에, 혼은 몸에 서로 죄된 일을 이루기 위해 악한 의미에서 상호 악순환의 증강을 이루게 된다.
....[이 생(육신의 생명인 bios = 현실 생활)의 허영<자랑, 뻐김>]이란, 현실생활 누림에 있어서 필요한 물질적 소유<또는 건강이나 사회적 지위까지 포함하는 바...이것들은 모두가 <주시는 분도, 취하여 가시는 분도 YHWH임에도 불구하고..흥망성쇠/생노병사, 천변만화의, 일시적/찰나적인 착각으로, 유일무이한 창조주 Q께서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것>들에 대해 스스로의 힘으로 달성-획득한 듯이 헛된 자랑-교만-신뢰-확신-과시....이는 영원불멸하는 가치로서 Q의 생명인 조에(zoe)와는 전혀 다르다
***요한일서 기본구성 :*1>신성한 생명 교통(1:1-2:11), *2>신성한 기름부음(관유)의 가르침(2:12-27) *3>신성한 출생의 미덕들(2:28-5:21) 영원하시고 미리 존재하시는, 태초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 생명 성장의 정도에 따라 아이, 청년, 아비를 분류함..
.....<악한 사탄 마귀가 믿는이들을 속이고 사취하기 위해 사용하는 가면들은 두 가지> 적그리스도와 세상이다 ==>이것을 가르쳐 주셔서 깨닫게 하시는 분은 바로 내주하시는 기름부음<관유...곧 그 영>이심
...아이들<신성한 생명을 이제 막 영접한 믿는이로서>일지라도 아버지를 알며,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들었지만 거룩하신 자 JC에게서 기름부음 받고 적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것을 깨달아 알게 됨...적그리스도(이단이 그 대표적 예로서 당시에는 영지주의적 이단이었다)는 자신들이 적그리스도라 결코 생각해 본 적도 없으며, 깨닫는다 해도 인정하려 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그리스도를 진실로 위하는 자들이라고 <위선-거짓-속임수로 가득한> [자가당착적-아전인수격] 주장을 하는 법이다.
...한편, 청년들은 세상<사탄에 의해 부패되고 탈취당한 타락한 인류...이는 Q을 대적하는 사탄의 악한 세상 조직 체계와 그 구성원들임>이라는 가면을 분별, 대적해야 한다 ...악한자 사탄 마귀는 정욕-쾌락 추구 안에 있는 사람의 타락한 본성을 통하여 의식주-교통수단 등 생활 필수품과 그 요소들 및 정치-경제-사회-교육-종교-문화-오락-기업-제반 사업들 등등의 제반 영역을 통해 Q을 대적하는 세상 조직을 형성하여 세상을 이미 통째로 장악했기에 세상은 온통 악한 자 안에 처해 있다(요일5:19), 그렇지만 마치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럼 교묘한 위장전술을 쓰고 있기에 결국 믿는이가 세상 사랑함은[=이는 영적 간음인 바, 세상에 자신을 열어 개방하는 것이기에] 믿는이 자신을 패배시키고 점령할 수 있는 빌미와 틈을 악한자에게 내어주는 것이 되고 만다.... 따라서, 사도는 믿는이가 세상을 사랑한다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있지 않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여기에서 아버지의 사랑은 그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생성된,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다!!.... 우리는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이해-체험-참되게 알고 바로 그 사랑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오직, TUQ께로, 그분의 말씀에로 피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견고한 피난처-성-요새와 보호가 되신다....Q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가 Q말씀 안에 머물 때 우리는 악한 자로부터 보호받게 됨을 체험적으로 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아야 함과 함께 세상에 속한 것들(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지 않도록 주의하라.[세상을 사랑함 = 세상에 자신을 열어 개방하는 것이니, 간음 범함이다]
===적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자녀 ... [370. 주안에 있는 나에게] [380. 나의 생명 되신 주]
18. ○아이들아[18-27까지]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19.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20. [믿고 거듭난 아이들인]너희는 거룩하신 자[아버지와 늘 함께 계신 아들]에게서 기름 부음[TUQ의 영, 복합적 관유로 상징된. 과정을 거쳐 변형되심으로 내주하시는 보혜사 HS, 생명-권능-진리의 영...이는 TUQ의 최종 완성임]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21. 내가 너희에게[아이들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
22.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23.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24.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JC 말씀을 품으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25. 그가[=말씀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26.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 ***[기름부음] 성육신 하시고, 아버지의 뜻 이루시기 위해 성령의 기름부음 받으신 독생자 하나님이 (아버지와 아들, 영에 대해 완전히 이해-체득함 통해 JC의 신성<감람유>+인성<몰약(죽음의 향기)-육계(죽음의 멸절 효능)-창포(부활의 향기)-계피(부활의 이기는생명 효능)>을 함께 가진, 복합적 관유로 상징되는, 거듭남의 생명과 권능, 사랑과 진리의 그 영되심 통해서, 그리고 그의 영을 부어주심으로써, 믿는이마다 그의 영에 보혜사로서 영원히 내주하여 계심으로써, 관계적 인격<실제적 성품> 가지신 TUQ을 체험-누림-인도/동행 가능케 하여 주셨음:
28. 자녀들아[아비-청년-아이들 모두] 이제 그의 안에[아버지-아들-영 TUQ, 말씀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아들] 강림[파루시아]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29. 너희가 그가[=아들이자 아버지] 의로우신 줄을 알면[=오이다..깊은 내적 통찰-깨달음. 이해+체험적 주관적 앎] 의를 행하는 자마다[=일상생활중에서 습관적으로 자연스레 무의식적으로, 자동적으로 의를 행하는 가운데 방출되는 신성한 생명-진리-사랑, 곧 Q의 어떠하심의 내적 생명 바로 그대로의 표현] 그에게서[=아버지] 난 줄을 알리라[기노스코..객관적 지식화 된 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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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2:18, 22, 요일4:3, 요이 : 7절...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 거짓 선지자들 개념>....예수가 <신격을 가지신> 선재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성육신 하심으로써 이땅에 참 사람의 인성 입어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을 <실제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사 40여일간 이 땅에 사셨고 하를로 승천하사 아버지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며, 동시에 변형되신 TUQ의 최종완성이신 주 영으로서 믿는이마다의 영에 영원히 내주하여 사시는 <신성+인성>의 그리스도이심....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 진리의 영 따르지 않고 미혹함으로써 결국 이것을 부인하는, <적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이단적으로 가르치는 거짓 선지자들 = 적그리스도들(2:18, 22-23)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음,.... 살후 2:3, 4절에서, 더 나아가 단7, 8, 9, 11장의 예언들, 그리고 계시록13, 16, 1920장의 [바다에서 나온 짐승] [땅에서 올라 온 짐승], 곧 정치적 지배자로서의 적그리스도 및 거짓선지자 개념과는 다소 다름에 주의하라....이에 더하여 마24장에서 보면, 거짓선지잗ㄹ이 한 범주, 거짓 그리스도들이 또 다른 범주로 주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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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유를 포함하시며, 하나님이시며, 아들이시며 아버지이시며 그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의 세 방면 : JC가 아버지이심<사9:6>-----JC가 동시에 피조물 가운데 으뜸이심((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이시며, 죽은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자시요<골1:15, 18>, JC가 창조주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완전한 사람, 피조물이시며<히2:14>, 하늘보좌에 사람으로서 앉아 계심)) ----<모든 믿는이마다의 영에 내주하시는, 생명 주는>그 영, 주 영이심<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15:45, 주는 그 영이시니..고후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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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새번역]요일2장
===그리스도는 우리의 중보자
1. 나의 자녀 여러분,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씁니다. 누가 죄를 지을지라도,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계시는데,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그는 우리의 죄 때문에 속죄제물이 되셨으니, 우리의 죄 때문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하여 그렇게 되셨습니다.
3.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이것으로 우리가 그분을 참으로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4.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요, 그 사람 안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5.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하나님께 바치는 사랑이 참으로 완성됩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압니다.
6.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과 같이, 마땅히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새 계명
7.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새 계명을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옛 계명을 써 보냅니다. 그 옛 계명은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그 말씀입니다.
8. 나는 다시 여러분에게 새 계명을 써 보냅니다. 이 새 계명은 그분에게도 참되고, 여러분에게도 참됩니다. 그것은,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9.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도, 자기의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10. 자기의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이니, 그 사람 앞에는 올무가 없습니다.
11. 자기의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가운데 있고, 어둠 가운데서 걷고 있으니,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12. 어린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그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13. 아버지이신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태초로부터 계신 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이미 그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14.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이미 아버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이신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태초로부터 계신 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있어서, 여러분이 그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15.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안에 아버지의 사랑이 없습니다.
16.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신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의 자랑거리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17. 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리스도의 적대자
18. ○자녀 여러분,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여러분이 적그리스도가 올 것이라는 말을 들은 것과 같이, 지금 적그리스도가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압니다.
19. 그들이 우리에게서 떠나갔지만, 그들은 원래 우리에게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속한 자들이었다면, 우리와 함께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침내, 다 우리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20. 여러분은 거룩한 분에게서 성령으로 기름부으심을 받고, 모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1. 내가 이렇게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여러분이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알기 때문이요, 또한 여러분이, 거짓은 어느 것이나 진리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22. 누가 거짓말쟁이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사람이 곧 적그리스도입니다.
23. 누구든지, 아들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버지를 모시고 있지 않는 사람이요, 아들을 시인하는 사람은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사람입니다.
24.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그것이 여러분 안에 있으면, 여러분도 아들과 아버지 안에 있게 될 것입니다.
25. 이것은, 그분이 친히 우리에게 주신 약속인데,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26. ○나는 여러분을 미혹하는 사람들을 두고 이렇게 썼습니다.
27. 여러분으로 말하면, 그가 기름부어 주신 것이 여러분 안에 머물러 있으니, 여러분은 아무에게서도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기름부어 주신 것이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참이요, 거짓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28. ○그러므로 어린 자녀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그것은, 그가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담대함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며, 그가 오실 때에, 그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29.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분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에게서 났음을 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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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ohn 2 Amplified Bible
===Christ Is Our Advocate
1 My little children (believers, dear ones), I am writing you these things so that you will not sin and violate God’s law. And if anyone sins, we have an Advocate [who will intercede for us] with the Father: Jesus Christ the righteous [the upright, the just One, who conforms to the Father’s will in every way—purpose, thought, and action].
2 And He [that same Jesus] is the propitiation for our sins [the atoning sacrifice that holds back the wrath of God that would otherwise be directed at us because of our sinful nature—our worldliness, our lifestyle]; and not for ours alone, but also for [the sins of all believers throughout] the whole world.
3 And this is how we know [daily, by experience] that we have come to know Him [to understand Him and be more deeply acquainted with Him]: if we habitually keep [focused on His precepts and obey] His commandments (teachings).
4 Whoever says, “I have come to know Him,” but does not habitually keep [focused on His precepts and obey] His commandments (teachings), is a liar, and the truth [of the divine word] is not in him.
5 But whoever habitually keeps His word and obeys His precepts [and treasures His message in its entirety], in him the love of God has truly been perfected [it is completed and has reached maturity]. By this we know [for certain] that we are in Him:
6 whoever says he lives in Christ [that is, whoever says he has accepted Him as God and Savior] ought [as a moral obligation] to walk and conduct himself just as He walked and conducted Himself.
7 Beloved, I am not writing a new commandment to you, but an old commandment which you have had from the beginning; the old commandment is the message which you have heard [before from us].
8 On the other hand, I am writing a new commandment to you, which is true and realized in Christ and in you, because the darkness [of moral blindness] is clearing away and the true Light [the revelation of God in Christ] is already shining.
9 The one who says he is in the Light [in consistent fellowship with Christ] and yet [a]habitually hates (works against) his brother [in Christ] is in the darkness until now.
10 The one who [b]loves and unselfishly seeks the best for his [believing] brother lives in the Light, and in him there is no occasion for stumbling or offense [he does not hurt the cause of Christ or lead others to sin].
11 But the one who habitually hates (works against) his brother [in Christ] is in [spiritual] darkness and is walking in the darkness, and does not know where he is going because the darkness has blinded his eyes.
12 I am writing to you, little children (believers, dear ones), because your sins have been forgiven for His name’s sake [you have been pardoned and released from spiritual debt through His name because you have confessed His name, believing in Him as Savior].
13 I am writing to you, fathers [those believers who are spiritually mature], because you know Him who has existed from the beginning. I am writing to you, young men [those believers who are growing in spiritual maturity], because you have been victorious and have overcome the evil one. I have written to you, children [those who are new believers, those spiritually immature], because you have come to know the Father.
14 I have written to you, fathers, because you know Him who has existed from the beginning. I have written to you, young men, because you are strong and vigorous, and the word of God remains [always] in you, and you have been victorious over the evil one [by accepting Jesus as Savior].
===Do Not Love the World
15 Do not love the world [of sin that opposes God and His precepts], nor the things that are in the world. If anyone loves the world, the love of the Father is not in him.
16 For all that is in the world—the lust and sensual craving of the flesh and the lust and longing of the eyes and the boastful pride of life [pretentious confidence in one’s resources or in the stability of earthly things]—these do not come from the Father, but are from the world.
17 The world is passing away, and with it its lusts [the shameful pursuits and ungodly longings]; but the one who does the will of God and carries out His purposes lives forever.
18 Children, it is the last hour [the end of this age]; and just as you heard that the antichrist is coming [the one who will oppose Christ and attempt to replace Him], even now many antichrists (false teachers) have appeared, which confirms our belief that it is the last hour.
19 They went out from us [seeming at first to be Christians], but they were not really of us [because they were not truly born again and spiritually transformed]; for if they had been of us, they would have remained with us; but they went out [teaching false doctrine], so that it would be clearly shown that none of them are of us.
20 But you have an anointing from the Holy One [you have been set apart, specially gifted and prepared by the Holy Spirit], and all of you know [the truth because He teaches us, illuminates our minds, and guards us from error].
21 I have not written to you because you do not know the truth, but because you do know it, and because no lie [nothing false, no deception] is of the truth.
22 Who is the liar but the one who denies that Jesus is the Christ (the Messiah, the Anointed)? This is the antichrist [the enemy and antagonist of Christ], the one who denies and consistently refuses to acknowledge the Father and the Son.
23 Whoever denies and repudiates the Son does not have the Father; the one who confesses and acknowledges the Son has the Father also.
24 As for you, let that remain in you [keeping in your hearts that message of salvation] which you heard from the beginning. If what you heard from the beginning remains in you, you too will remain in the Son and in the Father [forever].
===The Promise Is Eternal Life
25 This is the promise which He Himself promised us—eternal life.
26 These things I have written to you with reference to those who are trying to deceive you [seducing you and leading you away from the truth and sound doctrine].
27 As for you, the anointing [the special gift, the preparation] which you received from Him remains [permanently] in you, and you have no need for anyone to teach you. But just as His anointing teaches you [giving you insight through the presence of the Holy Spirit] about all things, and is true and is not a lie, and just as His anointing has taught you, [c]you must remain in Him [being rooted in Him, knit to Him].
28 Now, little children (believers, dear ones), remain in Him [with unwavering faith], so that when He appears [at His return], we may have [perfect] confidence and not be ashamed and shrink away from Him at His coming.
29 If you know that He is absolutely righteous, you know [for certain] that everyone who practices righteousness [doing what is right and conforming to God’s will] has been born of Him.
===Footnotes
1 John 2:9 This focuses more on the self-centered, hateful actions (not the emotion) of someone who habitually cultivates an obstructionistic attitude, and ignores the command to act in a way that expresses unselfish Christian love (see note v 10).
1 John 2:10 The key to understanding this and other statements about love is to know that this love (the Greek word agape) is not so much a matter of emotion as it is of doing things for the benefit of another person, that is, having an unselfish concern for another and a willingness to seek the best for another.
1 John 2:27 Or you are abi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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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2장 (개요)
유약한 자들의 죄에 대한 경고(1,2).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과 사랑(3-6).
형제애에 관한 새로운 교훈(7-11).
연령층에 따른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몇 가지 충고(12-14).
세상적인 사랑에 대한 경고(15-17).
미혹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18,19).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보장(20-27).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위한 권고(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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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1)(요일 2:1-2)
이 구절은 사도 요한이 참된 그리스도인에 대한 죄를 언급하고 있는 1장의 결론과 연결된다.
여기에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과 아울러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말하고 있다.
Ⅰ. 첫째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죄지을 틈을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1절).
이 서신의 의도와 목적, 즉 나와 하나님과의 사귐 그리고 불신앙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사귐을 파괴시킴에 대해 언급한 의도는 저희로 하여금 죄를 금하고 떠나게 하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애정에 넘치는 사도의 권고를 들어 보라!
"나의 자녀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바된 자녀들, 또한 연령과 경험에 있어서 사도보다 좀더 어린 자녀들,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 하나가 되어 있는 사랑스러운 어린 자녀들", 이렇게 성도들에 대한 목회자의 사랑이 가장 충만하게 흘러 넘치고 있는 곳에 또한 그러한 때에 확실히 복음은 가장 효과적으로 전파되었다.
아마도 사려 깊은 독자는 이러한 금지와 경고에 대한 사도 요한의 의도는 바로 아래와 같은 말에서 찾아 볼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이 한 말씀은 독자로 하여금 그가 앞에서 말한 바 있는 죄의 확실한 용서에 대한 언급을 다시 돌이켜 보게 할 것이다.
곧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1:9)란 말씀이다.
하나님의 호의와 은혜에 대한 남용을 방지하는 것이다.
"죄의 용서는 통회 자복을 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할지라도 내가 이를 씀은 죄를 조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 곧 죄를 짓지 않게 하려 함이다. "
한편 사도는 죄인들을 위한 대언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 하고 있다. 즉 예상할 수 있는 대로 그것은 실수와 의식적으로 짓는 죄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것을 씀은 너희가 죄를 짓게 하려 함이 아니다. 너희로 하여금 죄사함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
그러나 아래와 같이 잘못된 생각(마치 어느 학자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을 하고 있는 자들도 물론 있다.
곧 "그러나 사람은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치유하심을 경험하게 된다"는 생각이다.
Ⅱ. 죄 가운데서, 믿는 자가 받을 도움과 구원에 대해 생각해 보자.
"만약 누가 죄를 범하면(우리 중 누가 혹은 앞서 언급한 하나님의 사귐이 있는 자가)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1절) 이 말씀을 주시하자.
구원의 복음 가운데 속해 있는 신도들도 아직은 죄 가운데 있다. 그러나 세상의 죄인들 간에는 큰 차이가 있다.
즉 세상에는 기독교화된 자(그리스도의 신비스러운 영적인 몸에 대해 거룩한 구원의 특권 아래 있는 자)와 비기독교화되어 있는 자, 즉 중생한(born-again sinner) 죄인과 중생하지 못한 죄인들이 있다.
진실로 죄를 범했을지라도 다른 사람에 비하여 죄를 짓지 않은 자로 간주되어진 사람들이 있다(3:9).
곧 신도들은 용서와 의롭다하심을 입게 하는 하늘의 대언자를 소유하고 있다.
그는 죄 중에 있는 신도들에게(혹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움과 속죄 그리고 피난처가 되신다.
곧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다. " 대언자란 말은 간혹 성령을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이 성령은 보혜사(위로자)로 호칭되기도 하며 그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며, 우리의 심령에는 기쁨을, 입에는 변론을 가져다주신다.
그가 우리를 위해 변호해 주심으로 우리들의 대언자가 되어 주신다. 대언자의 맡은 바 사명과 책임은 심판자를 향한 것이다.
심판자 앞에서 그는 소송 의뢰인의 소송 사유를 변호해 준다. 심판자는 아버지 곧 그의 아버지가 되시며 또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그는 복음의 법정(범법자를 다스리는 법정) 곧 하늘나라 법정 또는 은혜의 법정에 서 계시는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그의 왕좌와 심판석은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자리가 된다.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현세에 있어서나 생사 문제 또는 시간과 영원에 대한 최고의 심판자가 되신다.
"너희는 만민의 심판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이르렀느니라"(히 12:23).
신도들은 그들의 소송 사유가 성립되면 대언자는 그들에게 힘이 되도록 아래의 몇 가지 신분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신다.
1. 대언자의 인격과 그 이름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
곧 그는 중보의 절대적 사명과 구원의 온전한 역사 그리고 중재자와 대언자의 사명 성취를 위해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2. 그는 사명 수행을 위한 적격자이심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그리스도는 심판대에서 또한 심판자의 면전에서 유일한 의인이 되신다.
다른 어느 대언자(혹은 다른 법정에서의 대언자)는 이 불의한 자일 것이며, 그리고 여전히 변호할 만한 정당한 이유(이러한 경우 정당한 사람에 대한 소송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를 가지고, 이에 따라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서 소송당한 죄인은 범죄자이다.
즉 그들의 무죄와 법적인 정당성은 변론될 수 없다. 그들의 죄는 고백되어지거나 또는 필히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의로운 대언자만이 죄인들을 변호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죽을 때까지 그들을 위해 의로우셨다. 그는 영원한 의로움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점을 심판자는 결코 묵인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 의지하고 대언자는 죄인들의 죄가 그들 자신에게 돌아가지 않도록 변호한다.
3. 그가 우리의 대언자가 되실 수 있는 이유를 밝혀 주고 있다.
즉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시다"(2절).
그는 속죄를 위한 희생 제물이요, 그의 위엄과 계명, 그리고 그의 권위에 대해 우리가 범한 모든 죄를 위해 심판자에게 드리어진 화목 제물이시다.
로마 가톨릭의 신앙 고백자들은 <성모마리아를 의지함으로써> 헛되이 구속자로서의 대언자와 또는 중재자로서의 대언자 혹은 각기 상이한 임무에 대한 중보자를 구별하는데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이다.
중재자를 위한 중보자 혹은 우리를 위한 대언자가 곧 구속자로서의 중보자 또는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시다.
그의 변호자로서의 자격은 곧 그가 화목 제물이 됨을 말해 주고 있다.
만일 그리스도가 피를 흘린 이후 하늘에 있는 중보자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면 그 피의 가치와 효능이 상실되었다고 생각되기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중재자로서 위대한 대언자(검찰 총장)의 사명을 계속한 이상 지금 우리는 그 피의 귀중함을 알게 된다.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오는 자들을 휘한 중재를 이룩하기 위하여 그는 일찍이 살아 역사하고 있다.
4. 대언자의 변호 대상과 화목 제물의 영향이 미칠 수 있는 범위를 밝혀 주고 있다.
이는 단순히 한 나라에만 국한된 것이거나 하나님이 택하신 옛날 이스라엘에게 만 특별히 한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신다.
즉 그는 우리의 죄뿐만이 아니라(유대인인 우리의 죄 뿐만 아니라 다시 말해서 육신을 따라 아브라함의 씨가 태어난 우리의 죄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신 것이며(2절) 단순히 과거나 현재에서 믿는 우리만을 위함이 아니라, 그를 앞으로 믿게 될 모든 자들과, 그를 통해 하나님께 나오는 모든 자들의 죄를 위한 것이다.
중보자의 죽음은 모든 족속과 모든 민족 그리고 모든 나라에 이르는 것이다. 그가 유일한 존재인 것같이 그는 하나님에게 부름을 입어 그의 사랑과 용서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될 모든 사람들을 위한 유일한 속죄물과 또는 화목 제물이 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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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2)(요일 2:3-6)
이 구절들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1장 7절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여기에 나타난 구절들과 1장 7절 말씀 사이에는 죄중에 있는 신도의 의무와 구원에 관한 토론이 대두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신도의 특권 즉 중보자의 피로 말미암아 죄에서 깨끗게 함을 얻는 특권이 언급되었다. 이 구절에서 사도 요한은 빛 가운데서 행함으로 얻는 유익한 결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면, 이러한 거룩한 사귐과 친교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특권이 된다. 여기서 빛과 사랑을 따르는 데에는 또한 증거가 따라야 한다.
Ⅰ. 빛에 대한 시험.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3절),
하나님의 빛과 지식은 마음의 아름다움과 진보를 말한다. 지혜와 지각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중보자)의 제자가 됨을 의미한다.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새로운 빛을 과대 평가하며, 그들 자신이 갑자기 짧은 기간에 얻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기 쉽다.
그리고 나이가 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식이 만족할 만큼 충분한 것으로 잘못 생각하기 쉽다.
즉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알고 있으며 복음의 많은 내용을 알고 있다고 큰 소리를 친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게 하는" 지식만이 우리들의 지식이 건전하고 완전하다는 증거가 된다.
하나님의 온전함이 그의 권위를 이룩케 한다. 즉 지혜로운 생각과 풍성한 은혜 그리고 위대한 그의 역사가 그의 율법과 나라를 권위 있게 만든다.
주의 깊게 그의 계명에 의식적으로 순종함은 하나님의 권위를 이룩케 한 이 모든 일들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영혼 속에 은혜 깊게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4절)라고 하신 말씀을 명심해야 한다.
진리를 고백하는 사람들은 가끔 그들의 무지로 부끄러움을 당하며, 때로는 그 진리를 소유했다고 하다가 부끄러움을 당한다.
곧 그들은 간혹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지식을 가장 많이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자부한다.
"네가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롬 2:19).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다 완전하고 철저한 순종의 대상이 됨을 깨닫지 못하는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이러한 지식이 나타나고 알려진다 할지라도 그 지식이 마음을 순종으로 이끌지 못하게 될 때 이 지식은 얼마나 헛되며, 또한 피상적인 것에 불과한 것인가!
순종하지 않는 생활은 거짓된 신앙적인 지식에 대한 면박과 수치를 나타낸다. 그것은 이러한 자신의 자랑과 구실에 대해 거짓말임을 폭로하며 또한 여기에는 어떠한 신앙이나 진실도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Ⅱ. 사랑에 대한 증거.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5절).
하나님의 말씀 또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일은 곧 삶의 길과 동기를 거룩하게 만든다.
말씀을 지키므로 이러한 삶이 이루어지며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케 된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좀 더 적극적인 면에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해를 가지게 된다.
그의 말씀을 실제로 지키지 아니하고서는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온전케(또는 그 사랑의 온전한 의도와 열매가)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들은 사랑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며 부끄러움이 없는 자는 부르심을 받았다고 우리는 선한 일을 이루도록 특별한 백성으로 구별되었다.
즉 거룩하신 성령으로부터 좀 더 완전한 성화에 참여하도록 용서함을 받고, 또한 의롭다하심을 받았다.
우리들은 거룩과 복종의 길을 행하도록 성결함을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에 경건히 접하지 아니하고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사랑의 온전한 경건과 결과 내지는 효과를 이룩할 수 있는 거룩한 사랑의 실현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
15절에서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과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라고 하신 3장 17절의 말씀에서 나타난다.
지금 빛은 사랑의 촛불을 켜들고 있다.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하며, 또한 지키게 될 것이다.
그는 항상 기뻐하며, 섬김을 받고, 하나님의 선포된 뜻을 지키기를 기뻐하며, 또한 섬기기를 즐긴다.
여기에서 사랑은 활용되어지며 자신의 위력을 나타내게 된다. 이로써 사랑은 자태를 나타내게 되며, 사랑의 완전한 효능과 힘, 그리고 기쁨을 소유하게 된다. 이로써(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의 뜻에 충실히 따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안에 있음을 알게 되며, 5절) 우리로 하여금 복종하도록 도우시는 성령에 의하여 그와 함께 연합되어 있음을 인정한다면 아래와 같이 우리에게 강권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주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거하시는 분이요, 또한 이 곳에서 행하시는 분이시다.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모범적으로 보여 주셨다.
그의 편에 서서 그와 함께 거하는 자들은 그와 더불어 행하며, 또한 그가 보여 준 표본과 모범을 따라 행해야 한다.
옛날 몇몇 철학파에 속해 있던 무리들은 그들의 존경할 만한 선생들과 학파의 요원들의 가르침과 행실에 대해 크나 큰 존경을 했다.
그리스도 안에 또한 그와 함께 거하기로 고백한 그리스도인은 어느 누구보다 그의 변치 않는 주와 대장을 닮도록 하며, 그의 지시와 명령을 따르도록 더욱 힘써야 한다. "너희가 나의 명한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하신(요 5:4) 말씀대로 그의 말씀을 따라 순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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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사랑(1)(요일 2:7-10)
7절은 바로 앞서 기록한 바(여기에서 새롭게 나타난 것이 아니다. 옛 계명으로 나타나있는 바 그리스도를 따라 행하는 것을 말하며 또한 사도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이끌어 온 것을 확실히 가르치고 있음을 말한다.)를 돌이켜 보거나, 또는 사도가 말하려 하고 있는 것과 형제애에 대한 법을 미리 예견하도록 하는 것을 생각케 하는 귀절이다. 이것은 처음부터 전하여진 메시지이며(3:10), 옛 계명인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권고를 시도하면서 아래와 같은 사랑에 넘치는 칭호로써 교훈을 위한 준비를 갖추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 곧 너희에게 간청하는 바 사랑으로 피차 결속되어진 것 가운데 있는 사랑스러운 자들이여!"
이러한 칭호로 시작해서 그들에게 형제애의 교훈을 가르치고 있다.
Ⅰ. 옛 계명으로써의 교훈.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라"(7절).
사랑의 교훈은 인간의 본성이 오래된 것과 같이 옛 것에 속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몇 가지의 규율과 시행(enforcement) 그리고 동기를 구비하고 있어야 한다.
만일 순수한 인간의 본성이 참되게 전달되었더라면, 인간들은 한 피를 나눈 형제로서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 위에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 특히 참신자들이라면, 죄의 상태에서 또한 그 죄를 사함 받으리라는 약속 안에서 그들은 창조주 되신 하나님과 관련을 맺고 있는 자로서 또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 피를 나누고 그들과 동일한 소망을 나누는 자로서 서로서로 사랑해야만 한다.
히브리인들은 각별히 한 공동체를 이루어 살게 되었을 때 그들은 언약과 선택함을 받고 그들로부터 메시야와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가 나신 바 특권이 부여된 민족으로서 피차간 사랑해야만 했다. 그리고 사랑의 법에 따라 하나님은 새로운 이스라엘에 대해 새로운 의무를 부여하셨다.
그러므로 그것은 옛 계명 혹은 복음적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처음부터 들은 바 있는 말씀이다(7절).
Ⅱ. 새로운 계명.
"또 다시 너희에게 이러한 의무를 더욱 일깨워 주기 위해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 즉 저희에게도 참되며 그 공동체의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가장 참된, 새로운 공동체 혹은 기독교 공동체의 법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다. 곧 새로운 공동체의 진리는 그 안에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며 또한 풍부하게 있었다. 그가 교회를 사랑했으며 교회를 위해 자신을 바치셨다. 그것은 너희에게 참된 것이다. 이 법은 너희 마음 안에 얼마간 이미 기록되어 있는 법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기를 하나님으로부터 배웠다. 이는 더구나 이미 어두움이 즉 저희의 중생하지 못한 마음(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간에)과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비참할 정도의 무지가 지나갔고, 진리의 빛이 비치고 있기 때문이다"(8절).
복음적인 계시의 빛이 생명과 크나큰 힘으로 저희의 마음에 비치었다. 기독교의 사랑의 탁월성을 안 이상에는 이로써 기본적인 의무를 안 것이 된다.
" 기독교의 기본적인 것(특별히 기본적인 교훈)을 알게 되면 새로운 것이거나 옛 것이거나 간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개혁 교회에 있어서 개혁된 교리 또는 개혁된 신앙은 새 것이며 동시에 옛 것에 속하는 것이다. 새 것이라 함은 지루한 어두움 후에 개혁의 빛으로 말미암아 깨우쳐진 것이요, 로마의 변조된 것으로부터 깨끗해짐을 받은 바 새 것을 이름이다. 그러나 옛 것은 처음부터 배웠고 또한 들은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되었던 은혜와 능력은 또한 우리 안에서도 참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들은 우리의 머리에 일치될 수 있다.
어두움이 지나갈수록 또한 복음의 빛이 우리에게 비치면 비칠수록 옛 것이든 새 것이든 간에 하나님의 계명에 더욱 더 순종하기에 이르게 된다.
빛은 적당한 열을 발산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그리스도인의 빛에 대한 하나의 시련의 필요성이 있게 된다.
하나님께 대한 복종으로 인정함을 받기 전에 그리스도인의 사랑으로 인정함을 받아야 한다.
1. 이러한 사랑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자는 그의 빛을 헛되이 받은 자들이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다"(9절).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이루신 일들을 수락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가시적인 교회(visible church) 안에는 사실 이상으로 자신을 평가하는 자들이 종종 있다. 즉 그들은 스스로가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며 또한 하나님의 계시가 그들의 마음과 영혼에 감화를 미쳤다고 말하면서도, 그들은 믿는 형제들을 계속 미워하며, 적의에 찬 행동을 한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써 형제를 대하도록 감동을 입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기독교 신앙으로 중생함을 입은 척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 어두운 상태에 머물러 있다.
2. 이러한 사랑으로 지배를 받는 자는 그의 빛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증거한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의 형제로서) 빛 가운데 거하게 된다"(10절).
그는 기독교적인 사랑의 근본과 동기를 알고 있다. 그는 기독교의 구원의 중요성과 그 가치를 깨닫는다.
그리스도가 사랑한 자들을 우리도 사랑해야 함이 마땅함을 알게 된다. 이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그 안에 거리낌이 없게 된다(10절).
그는 그의 형제에게 걸림돌이나 장애물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의 형제를 죄짓도록 유도하지 않으며, 신앙의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도록 항상 의식적으로 주의할 것이다.
기독교의 사랑은 형제의 영혼을 귀중히 다루도록 하며, 그의 순결성과 평화로움을 해치게 될 모든 것을 두려워하도록 가르쳐 준다.
3. 두려워함은 영적인 어두움의 표징이다.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이다(11절).
심령의 빛은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스며들며, 성령의 첫 열매 중의 하나는 사랑이다.
믿는 형제들에 대해 악의를 품는 자는 영적인 빛의 결핍 상태에 있는 자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그는 "어두움 가운데 행하게 된다"(11절).
그의 생활은 어두운 마음과 양심에 일치하게 되며,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며, 이 어두운 영이 자신을 어디로 이끌어 가는지 보지 못한다.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했으므로(11절)" 어두운 영은 그를 극심한 암흑의 세계로 이끌어 갈 것이다.
악한 영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죄의 암흑은 생명의 빛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곧 어두움이 거하는 곳에는 마음, 판단 그리고 양심이 어두워지게 되며, 거룩한 생명의 길을 잃어버리게 한다.
여기에서 우리의 사도는 맹렬하고도 불에 타는 듯한 그의 감정의 치유함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입었는가를 엿볼 수 있다.
무지한 사마리아인들이 제자들을 영접지 아니한 때 사도 요한은 하늘로부터 불이 그들 위에 떨어지기를 구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가 자신의 감정(기분)을 알지 못하고 있으며 그 감정이 결과적으로 그를 어디로 이끌어 갈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영에 충만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선한 뜻과 또한 모든 형제들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었다.
사랑으로 충만된 위대하신 주(Master)는 주 예수이시다.
사랑의 학교는 그의 학교(교회)이다. 그의 제자들은 사랑의 제자들이며, 그의 가족은 사랑의 가족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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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사랑(2)(요일 2:12-17)
거룩한 사랑에 대한 자극적인 어조로써 이루어진 이 새로운 지시는 여기에서 언급되어진 바 제자들의 몇 가지 계층에 대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기독교회의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은 피차간 신성한 사랑 안에서 결속을 유지해 온 것이 확실하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형제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 생명력 있는 신앙이 아니고서는 결속될 수 없기에, 서로 지켜야 할 중요한 금지와 권고가 있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학교(교회)에서 사랑을 몇 가지 형태의 교훈으로 우선 정정당당히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어린아이나 미성년자, 성인 또는 연장자(텔레이오이, 5046)들로 하여금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일러주고 있다.
Ⅰ.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이루어진 여러 가지 형태와 계층에 따라 주어지는 권고가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동일한 위치와 신분에 있지 않다. 즉 그리스도 안에는 애기들이 있는가 하면 성숙된 사람들과 노년층이 있다.
이 사람들이 각기 다른 상태에 있는 것같이, 그들은 그들의 독특한 직분을 가지고 있다.
각별히 서로 사랑하고 세상을 미워하는 가운데 그들 모두에게 공통적인 교훈과 상응하는 복종이 주어지고 있다.
현명한 목회자는 주의 깊게 생명의 말씀을 나누어주고 그리스도의 권속들에게 그들이 차지할 몫을 부여하게 될 것이다.
"나는 자녀들과 아비들 그리고 청년들인 너희에게 편지하노라." 이렇게 계층에 따라 사도는 아래와 같은 권고를 하고 있다.
1. 기독교 학교(교회)에서의 초보자.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12절), 여기에서 그들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 단계에 이르고 있다.
초보자들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아기들과 같은 자들이다.
사도 요한은 누구보다 먼저 그들을 지원함으로써 그들을 격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연소자들에게 일러 준 말을 귀담아 듣는 것도 성숙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으로 보여진다.
초보적인 원리는 반복되어져야 한다. 이러한 원리는 모든 것의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교회 안에 있는 자녀에게 말하고 있다.
(1) 사도 요한이 그들에게 말하는 이유는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
가장 순진하고 진실한 제자는 용서함을 받는다. 성도의 친교는 죄의 용서로 이루어진다.
죄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용서되고(그의 온전하심은 용서에서 나타났다) 그리스도의 공로와 구원의 능력과 더불어 그의 이름으로 용서함을 받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방해하는 세상의 사랑을 단호히 끊어 버려야만 한다.
(2)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기 때문이다.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로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12절),
어린아이들은 그들의 아버지와 같이 쉽게 깨달아 알 수는 없다. 기독교 안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아이들은 하나님을 알아야 만하고 또한 알게 된다.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나를 앎이라"(히 8:11).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녀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됨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함이 그들의 지혜가 된다.
우리들은 아버지를 아는 자만이 참 지혜로운 자식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를 알아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중생 되어지고 그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아버지를 아는 자는 이 세상의 사랑을 미련 없이 버리게 될 것이다. 사도는 아래와 같이 그의 말을 계속하고 있다.
2. 사도 요한이 존칭을 사용하리만큼 보다 높은 지위와 신분을 가지고 있는 자들과 교회 안에 있는 연장자들에게 말하고 있다.
즉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13,14절)이라든가, "오래된 제자, 나손에게 쓴다"(행 21:16)는 말씀으로 알 수 있다.
사도는 교회 안에 있는 밑바닥에서부터 높은 데까지, 또한 가장 낮은 신분에서부터 가장 높은 신분에 있는 자들에게까지 직접 다루고 있는데 이는 중간에 있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배운 바를 기억하고 또한 그들이 이르러야 할 목표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다.
"아비들아 내가 쓰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학교에 오래 머물러 있는 자들일수록 더 많은 권고와 교훈이 필요하다.
가장 오래된 제자는 그의 손에 책 곧 성경을 가지고 하늘나라(하늘에 있는 대학)에 가야만 한다. 곧 아비들은 그곳에서 등록되어야 하며 또한 배워야 한다.
누구나 너무 나이가 많아서 배울 수 없을 정도에까지 이른 자는 없다. 사도는 그들이 이미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쓴 것이다.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로부터 계신 이를 아는 까닭"(13,14절)이라는 것이다.
노인들은 지식과 경험을 소유하고 있으며 또한 존경받기를 기대한다.
사도는 노인들에 대한 지식과 이에 대해 노인들을 축하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그들은 태초로부터 있는 주 그리스도에 대해(1:1) 특별히 알고 있다.
그리스도가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것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지식에 대해 처음과 마지막이 된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빌 3:8).
그가 이 세상이 생기기 전 곧 태초부터 계신 분임을 아는 자들은 이로써 용이하게 이 세상을 포기하기에 이르게 될 것이다.
3. 한창 중에 있는 중년층 그리스도인들에게 권고하고 있다.
"젊은 너희에게 쓰는 것은"(13,1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건전한 정신과 마음으로 선악을 식별할 수 있는 성숙한 단계에 이른 성년들이기 때문이다.
사도는 아래와 같은 이유로써 그들을 격려하고 있다.
(1) 그들의 훌륭한 전공(戰功)으로 그들을 칭찬하고 있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 편에 있는 모범적인 병사들이다.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13절).
계속적으로 사람들에게, 특별히 주의 제자들에게 도전적인 "악한 자"가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도장에서 잘 교육을 받은 자들은 그들의 무기를 활용하여 악한 자를 섬멸하게 된다.
악한 자를 섬멸할 수 있는 자들은 마귀의 크나큰 도구인 세상을 또한 섬멸시킬 수 있는 자라고 볼 수 있다.
(2) 성공을 이룩한 그들의 강함 때문에 그들을 칭찬하고 있다.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14절).
젊은이들은 보통 자신의 힘을 자랑하게 된다.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 안에서 강함은 젊은이의 자랑이 될 수 있다.
이는 그들의 기쁨이요 마귀를 이기는 힘이 된다. 만일 그들이 마귀를 대항하기에 어렵지 않다면 마귀는 그들을 대항하여 이기지 못할 것이다.
활기 있는 그리스도인들이여 세상을 정복하는데 힘을 나타내시라! 마귀 정복을 위해 활용되었던 힘이 또한 세상을 정복하는 데에도 쓰여져야 한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음을 칭찬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있음이라"(14절).
하나님의 말씀은 성숙한 제자들 안에 거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영양소와 힘이 되며 그들은 악한 자를 이기는 무기로 삼게 된다.
성령의 검, 이것으로 마귀의 맹렬한 공습을 막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거하는 자들은 세상 정복을 위한 힘을 공급 받게 된다.
Ⅱ. 생명적인 종교에 있어서 기본적인 경고가 되는 훈계와 충고가 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15절). 세상에 대해 못 박히고 물욕과 세상의 향락을 억제하라." [자기합리화-핑계-게으름을 버리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대해 죽음으로 이 교훈 안에서 합치되어야 한다. 만일 그들이 이와 같이 합치되었다면 그들은 즉시 또 다른 동기에 일치하게 된다.
즉 그들의 사랑은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 세상을 위해 사랑을 소비하지 말라. 여기에서 이러한 충고와 주의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이러한 권고의 필요성은 불가피하다. 제자들 스스로가 세상에 대한 사랑을 금하도록 하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권고의 동기는 아래 몇 가지 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 이 세상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일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15절),
인간의 마음은 좁아서 두 가지 사랑을 모두 포함할 수 없다. 세상은 인간으로부터 하나님 사랑을 끌어내린다.
세상에 대한 사랑이 더하면 더 할수록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더욱 감소하며 시들어 버린다.
2. 세상적인 사랑이나 정욕에 대한 금지로써 이러한 충고와 훈계는 불가피하다.
즉 세상적인 사랑이나 정욕은 하나님의 정하신 바가 아니다. "이는 아버지의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것이다"(16절).
하나님은 세상적 사랑과 정욕으로부터 우리를 부르셨다. 그러나 세상적 사랑과 정욕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강요한다.
세상은 사랑의 약탈자이다. 십자가에 못박고 거부하여야 할 세상에 대한 온당한 견해와 관점이 여기에 나타나 있다.
육체적인 면으로 생각해 볼 때 세상은 선하며 하나님의 작품과 그의 완전하심이 비치는 거울로써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은 지금 부패된 상태에 있는 우리와 관련해서 생각해야 한다. 세상은 우리의 연약함을 조장하며 우리의 사악한 애착심을 자극하고 불을 지른다. 이 세상과 육신간에는 크나큰 유사성과 동일성이 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육신을 침투하며 부식케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대항하는 하나의 파당을 이룬다. 그러므로 세상의 일들은 부패된 본성에 대해 뚜렷한 경향에 따라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1) "육신의 정욕"이 있다.
여기서 육신은 "안목"과 "이 생"과는 구분되는 것으로 육체(body)를 의미하는 것이다.
육신의 정욕은 [시청향미촉의 오감 만족 추구]가 오도되고 미혹됨 인해 <특히, 좀더 오래, 좀더 쉬고자 하는 게으름-안일-나태함과 함께 과도한 식욕과 성욕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로 인해 타자를 착취-오남용하는데에 이르게 하는 바>내적으로 탐욕적인 욕신의 기질과 욕망을 이름이다.
이 정욕은 일반적으로 "쾌락" 또는 [쾌락] 또는 일락(나태-사치/방탕/허비-음란/음탕-중독)적 정욕이라고도 일컬어진다.
(2) "안목의 정욕"이 있다.
눈은 물질과 건강하고 아름다운 것을 얻어 소유하는 것을 기쁨을 삼는다. 부(富)와 부의 소유와 사람을 탐닉함은 쾌락적인 눈에 의하여 갈망되어진다. 이것은 [탐욕]적 정욕이다.
(3) "이 생의 자랑"이 있다.
허황된 마음은 모든 사치와 화려한 장신구와 그리고 헛된 이생의 쾌락적 [허영]을 추구한다.
이것은 칭찬-인정-지배 욕망을 이름이며, 항상 명예와 칭찬, 아첨만을 바라고 있다. 어느 점에서 이것은 귀가 병들어 있음을 의미한다.
허황된 마음은 감탄과 칭찬에 의하여 움직여지게 된다. 이러한 욕망의 대상은 스러짐을 당하고 포기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애착과 욕망을 독차지하는 바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다"(16절).
무리한 정욕이나 욕망은 제어되어야 하며 또한 감소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정욕에 빠지는 것은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유혹적인 세상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3. 이러한 것들을 만류하는 세 번째 이유는 이 세상 것들의 허무성 때문이다. "이 세상도 정욕도 다 지나가는 것이다"(17절).
정욕 그 자체와 정욕을 즐기는 기쁨은 시들어 없어질 것이다. 정욕적인 모든 것은 끊어지게 될 것이다(전 12:5).
무덤에서 지금 썩어져 누워 있는 모든 자들의 향락과 기쁨은 어찌 되었는가?
4. 네 번째의 이유는 영원불변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사랑 때문에 이러한 훈계와 주의를 주는 것이다.
이 세상의 것이나 없어질 세상을 사랑하는 자와는 반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살게 된다(17절).
없어질 정욕과는 반대로 그의 거룩한 열정과 사랑은 영원히 살아남게 된다.
사랑은 없어지지 아니한다. 그는 영원한 생명의 상속자로 현세에서 내세로 이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모든 구절을 통해 우리들은 사도적인 교훈의 순수성과 영적인 면을 통찰할 수 있다.
동물적인 삶은 거룩한 신적(神的)인 삶에 복종해야 하며 육체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영혼에 순복해야 한다.
또한 영혼은 신앙과 하나님께 대한 승리적인 사랑으로 말미암아 지배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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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그리스도에 대한 경고(요일 2:18-19)
Ⅰ. 여기에서 "때"에 대한 예시가 나타나 있었다.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18절).
우리들은 여기에서 사도 요한이 다시 한번 초보적인 단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항상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신앙에 있어서 어린 상태에 있는 아이들아! 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라고 타이르고 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경고를 주기 위한 호칭이 될 수 있다.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곧 교회나 국가에 있어서 유대인들의 모든 무리는 마지막을 재촉하고 있다.
모세의 제도와 교훈은 사라져가는 중이다. 또한 다니엘의 때(weeks)는 끝나 가고 있으며 히브리인들의 성읍과 성소의 멸망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그의 종말은 홍수에 밀려남 같을 것이며, 또한 전쟁이 있으리니 크게 황폐할 것이다"(단 9:26).
제자들이 때의 종말에 대해 경고하며 예언적인 종국을 설명해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Ⅱ. 이 마지막 때의 징조는 무엇인가?
이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이다(18절).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과 나라를 대적한다.
적그리스도가 용납되어지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섭리 중에 하나이지만, 그들이 이를 경우 제자들이 적 그리스도를 식별할 수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목회자들은 이스라엘 집을 지키는 파수군들이다. 하기에, 이러한 적 그리스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크나큰 타격이나 손실이 될 수 없다.
1. 적 그리스도의 도래는 이미 예언된 바로 "적 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바와 같다"(18절).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지속적이며 숙명적인 적수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드러났다(살후 2:8-10).
그러므로 이에 대한 많은 전조와 증거가 나타났음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미 지금 악한 일을 이루고 있는 많은 적그리스도가 있다.
2. 적 그리스도는 마지막 때의 징조로써 이미 예언된 것이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로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
이러한 것들은 유대인의 나라와 민족 그리고 종교의 몰락에 대한 전조를 나타낸 것이었다. "이로써 마지막 때가 이르렀음을 알게 된다"(18절).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미혹자들이 있음을 이미 알았으므로 이러한 예견으로 모든 미혹자를 대항해 싸울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강화하자.
Ⅲ. 미혹자들 또는 적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자.
1. 좀 더 적극적인 면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한 때 사도적인 교훈을 받아들이며, 또한 이 교훈에 대해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었다.
사도행전 15장 1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쳤으나 그들은 우리들의 동료와 예루살렘 교회와 유대 교회로부터 나갔다"(19절).
가장 순수한 교회는 배교자와 배신자를 가지게 된다. 사도적 교훈이 이를 듣는 모든 사람들을 개종시키지는 못했다.
2. 소극적인 면을 들어 생각해 보자.
"그들은 우리들과 같은 자가 아니었다. 즉 그들은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바 건전한 교훈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지 못했다. 즉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못한 자였다."
(1) 그들이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고, 진실하지 못했다는 결혼을 얻게 되는 이유는 그들의 배신적인 행위 때문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속하였다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을 것이다."(19절).
만일 거룩한 진리가 그들 안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면 그 진리가 그들과 우리를 하나로 묶어 놓았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위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고 이로써 진실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그들은 적그리스도의 편으로부터 떠나 배교의 상태에 이른 자들은 배교 이전의 신앙이 위선적이었음을 충분히 암시하고 있다.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인 자들은 파괴적인 죄로부터 보호함을 받게 된다.
(2) 이와 같이 그들이 사도적인 교훈과 친교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 이유는 그들의 불성실함에 기인된다.
"저희가 이런 일을 행함은(저희가 나간 것은)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다"(19절).
교회는 누가 그의 진실하고 생명적인 성원인지 아닌지를 잘 모른다. 그러나 교회는 내적으로 성화된 상태를 점검하게 된다.
여기에서 위선자는 드러나게 되며, 그들이 죽을 죄를 짓지 아니하였다든가, 타인에 대해 귀찮은 존재나 경계를 요하는 인물이 아니라 할지라도 진리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의 부드러운 점이나 덕스러운 점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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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요일 2:20-27)
Ⅰ. 사도 요한은 미혹자들이 성행하는 위태로운 시대에 그의 편지를 받고 있는 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즉 배교가 성행하는 이 시대에 그들에게 안전을 보장해 주기 위해 격려하고 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20절). 여기에서 우리는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1. 제자들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기름으로 말미암아 부요해지는 축복을 얻게 되었다.
"너희가 기름 부음을 받았느니라."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이며 그들의 이름은 이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은혜의 기름과 은혜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은사와 온갖 영적인 선물로써 기름 부음을 받았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들로서 주님의 사명과 흡사한 것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
성령은 불과 물이라고 비유될 수 있는 것같이, 기름으로도 비유될 수 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심은 곧 기름 부음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을 말씀하신 이는 거룩하신 자로 이러한 축복은 거룩하신 자, 성령 혹은 주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이다(계 3:7).
주 그리스도는 그의 거룩하심에 있어서 탁월하신 자다. 주 그리스도는 거룩하신 성령의 은혜를 부어 주신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그 자신과 같도록, 또한 그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 그의 제자들에게 기름을 부으신다.
2. 기름 부음의 효과는 안약과 같다. 기름 부음은 이해의 눈을 밝혀 주며 또한 이를 강화한다.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20절).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신앙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약속되어지고 또한 부여된 것이다(요 14:26).
주 그리스도는 그의 모든 제자들을 똑같이 취급하지 않았다. 어떤 제자들은 다른 제자들 보다 더 많은 기름 부음을 받았다.
이와 같이 기름 부음을 받지 못한 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해 진실하지 못하게 되므로 오히려 적 그리스도에게 돌아가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와 영광에 반역하는 자리에 이르게 될 위험이 있다.
Ⅱ. 사도는 본서를 기록한 의도와 뜻을 그들에게 말하고 있다.
1. 첫째로 부정적인 방법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도가 본서를 기록한 의도가 그들의 지식을 의심하거나 복음의 놀라운 진리에 대해 무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다(21절). 진리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너희의 안전을 충분히 보장할 수도 없으며 또한 위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것도 경하할 만한 것이 못된다."
믿는 형제에 관해 심사숙고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들의 추측을 뒤엎을 때까지 우리는 그들을 주시해야 한다.
즉 신앙인들에 대한 정당한 신뢰는 그들의 신실성을 더하게 하며 고무시키는 결과가 된다.
2. 확신과 인정의 방법으로써 사도는 본 서신의 의도를 밝히고 있다.
"너희가 예수 안에 진리를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점에서든지 진리를 아는 자들은 이로써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 무엇임을 식별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된다.
곧바른 줄은 삐뚤어진 줄이 어떤 것임을 보여준다. 참과 거짓은 혼합되거나 함께 어울릴 수 없다.
기독교의 진리를 잘 알고 있는 자들은 이로써 적 그리스도의 죄악과 미혹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힘을 강화하게 된다.
거짓말은 자연 종교나 계시 종교 어느 것에도 속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도들은 거짓을 저주한다. 그리고 그들의 교훈과는 모순됨을 폭로했다.
만일 거짓말로 진리를 전파했다면 사도들은 어느 누구보다 자신을 멸망케 하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기독교가 자연 종교와 일치하고 있음은 기독교를 높이 평가해야 할 점인데 기독교는 자연 종교의 기초가 되며 기독교의 요소와 원리를 지니고 있는 유대교와도 곧잘 일치하고 있다.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즉 사기와 협잡은 진리를 선포하는데 가장 부적합한 도리가 되기 때문이다.
만일 부적합한 방법이 사용되지 아니하였더라면 종교의 상태가 보다 낫게 되었음을 상상해 보자.
사기와 협잡의 부적합한 방법을 사용한 결과가 우리들의 어지러운 시대에 나타나고 있다.
예로부터 이루어진 사기와 사악한 행위에 대한 탐색이 무신론과 불신앙 가운데 있는 우리의 세대에서 행해졌다.
그리고 기독교의 진리를 나타내기 위해 보다 크게 공헌을 이룩한 사람들은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었다.
Ⅲ. 사도는 새로 일어난 미혹자들을 또 다시 소추(訴追)하며, 고발하고 있다.
1. 그들은 거짓말쟁이며, 거룩한 진리에 대해 지독한 반대자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누가 거짓말쟁이 , 아니 누가 악명 높은 거짓말하는 자이겠는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닌가?"
하나님은 거짓되며 거짓말하는 자들의 아버지라고 세상에 유포된 낭설은 가장 유해하며, 오래된 것이며,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 허위와 거짓을 말하고 있다. 세상에는 완전 무결하게 증명되어진 진리는 없다. 오히려 혹자들은 진리에 반대하며, 또한 진리를 부인한다.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였다는 사실은 하늘과 땅 그리고 지옥에 의하여 증거 되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으로 말미암아 어떤 자는 강한 미혹에 버려짐을 당한 자가 있는 것 같다.
2.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자는 아버지의 증거와 증언을 거부하며, 아버지가 그의 아들에 대해 나타낸 확증을 거부한다(22절).
"즉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임을 거부한다(요 6:27).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아버지의 증거와 증언을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심을 거부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계시와 세상과 화해를 이룩하는 바 그리스도 안에서의 모든 특별한 계시를 저버리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추론하고 있다(23절).
즉 그는 아버지에 대한 참된 인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자이다. 그 이유는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최선의 계시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에 대해서, 그의 호의와 은혜 그리고 구원에 대해 무관심한 자다. 이는 "아무도 아들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타난 대로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게 된다.
아버지와 아들간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과 같이 양자간에는 교훈과 지식 그리고 관심사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동일한 점이 있다.
그러므로 아들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버지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기독교의 계시를 고수하는 자들은 그 위에 자연 종교에 대한 능력과 축복을 얻게 된다.
Ⅳ. 여기에서 사도는 처음부터 그들에게 들리어진 옛 교훈을 지키라고 권고하고 있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24절).
진리는 오류보다 더 오래 된 것이다. 성도들에게 맨 처음으로 주어진 그리스도께 대한 진리는 어떤 새로운 사건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받은 바 그리스도께 대한 진리는 가장 확실한 것이며 이 진리는 그들의 수고와 노력 끝에 얻어진 것으로 길이 소유하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기독교 진리는 옛 것을 변호하며 이로써 또한 권고할 수 있다. 권고는 이러한 면에서 강화되어진다.
1. 기본적인 진리와 믿음을 고수함으로써 참된 유익을 얻을 수 있다.
(1) 이로써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거룩한 연합을 이루게 될 것이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24절).
"그리스도의 진리가 우리 안에 거함은 죄를 멀리하게 하고 동시에 하나님과 우리를 연합하는 수단이 된다"(요 15:34).
아들은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와 연합하게 하는 매개체 또 매개자가 된다. 이러한 복음의 진리에 우리들은 어떠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겠는가?
(2) 이로써 그들은 영생의 약속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까지도, 5:11)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하신 것이다"(25절).
하나님이 그를 진실하게 따르는 자에게 이루시는 약속은 실로 위대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위대한 능력과 선하심에 기인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이다. 축복의 하나님은 그의 아들에게 위대한 가치와 진리를 부여하신다.
그들이 진리 안에(진리의 빛과 능력과 그 영향권 안에) 거하게 될 때 하나님은 영생을 약속해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2. 본문 기록의 목적을 말하는 바 앞에서 언급된 권고는 더욱 강조되고 있다.
본 서신은 미혹하는 자들을 대항할 수 있도록 그들을 강화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26절). 그러므로 처음부터 들은 것에 거하지 아니하면 본서의 기록과 또한 모든 봉사는 헛된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사도들의 모든 서신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무의미하며 열매 없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내가 저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가지로 기록하였으나 저희가 관계없는 것으로 여기도다"(호 8:12).
3. 하늘로부터 받은 유익한 축복으로 그의 권고를 강조하고 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니"(27절),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들이 받아들인 바 거룩한 진리에 대한 내적인 확증을 가지고 있다.
즉 성령이 그들의 마음과 심령에 진리에 대한 내적인 확증을 나타내셨다.
주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의 심령에 계속적인 증거를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
신실한 제자들에게 충만하게 쏟아 부어 주는 은사 곧 기름 부음은 그리스도의 진리와 교훈에 대한 하나의 징표(seal)이다.
이 징표는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으며 다만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고후 1:21) 이 거룩한 성유(聖油) 또는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는 것은 아래와 같은 이유로 권유할 만한 것이다.
(1) 그것은 지속적이며 영원한 것이다. "기름이나 연고는 물과 같이 쉽게 말라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27절에 있는 말씀대로 거하는 것이다. 너희 안에 확실한 것을 위해서 거룩한 조명은 지속적이며 영구적인 것이어야만 한다.
시험과 올무 그리고 미혹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기름 부음은 영원히 존속하게 된다.
(2) 기름 부음은 인간의 교훈보다 월등하다. 즉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27절).
주어진 사명이 없이는 당신에게 기름 부음으로 해서 가르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기름 부음으로 당신을 가르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치 않으신다면 기름 부음이 우리들 보다 더 잘 가르칠 수 있을지라도 기름 부음으로 해서 당신을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27절). 당신들이 기름 부음을 받기 전에 우리들에 의하여 가르침을 받았으나 우리의 가르침은 기름 부음에 족히 비교될 수가 없다. "하나님은 그 권능으로 큰 일을 청하시나니, 누가 그같이 교훈을 베풀겠느냐?"(욥 36:22)
거룩하게 기름 부음을 받는 것은 부수적인 교훈을 무효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완전케 한다.
(3) 기름 부음은 명확한 진리이며, 그것이 가르치는 모든 것은 틀림없는 진리이다.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27절).
성령은 진리의 영임이 틀림없다(요 14:17). 그가 주신 교훈과 모든 가르치심은 진리 안에 있는 것이며 또는 진리에 속한 것임이 확실하다.
즉 진리의 영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현세에서 필요한 모든 것과 그리스도와 복음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지식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신다.
(4) 거룩한 기름은 보존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즉 거룩한 기름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로 하여금 유혹자들과 그 유혹들로부터 보존함을 받도록 할 것이다.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27절). 기름 부음은 당신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을 인도하듯이 또한 당신을 구원할 것이며 그리스도를 반역하지 않도록 당신의 마음과 심령을 주장할 것이다.
"우리에게 기름을 붓고 또한 인을 치고 우리의 심령에 순수한 성령을 부어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고후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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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강림(요일 2:28-29)
거룩한 기름 부음 받음에 대한 축복을 언급한 다음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또는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라는 충고와 권고를 하고 있다.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28절).
사도는 "어린 자녀"란 친절한 칭호를 반복하고 있는데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 칭호는 작은 자라기보다는 "사랑하는 자녀"를 의미하는 것 같다.
그는 사랑으로 타이르고 이성으로 뿐만 아니라 사랑스러운 표현으로 권고하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만이 아니라 너희에 대한 사랑이 너희에게 인내를 가르치도록 우리를 강권한다. 이는 그의 인격을 말하고 있는 진리 안에와 그와 연합된 가운데 그리고 그에 대한 충성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복음적인 특권은 복음적인 의무를 수반한다.
주 예수에 의하여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은 어떠한 반대에도 저항하여 그와 함께 살아야 할 크나큰 의무를 지닌다.
시련기에 있어서 참고 견뎌야 할 의무는 아래와 같은 두 가지 관점에서 강조되어진다.
1. 이는 주의 재림을 대비하기 위함이다.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28절).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은 여기에서 당연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것은 그들이 처음부터 들은 사실이다.
그가 다시 오시게 될 때,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공연하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에 비하면 그의 탄생은 은밀한 중에 이루어졌다. 그는 태초로부터 나와 조용히 마구간에 누이셨다.
그러나 그가 다시 오실 때에는 열려진 하늘로부터 임할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그를 보게 될 것이다.
모든 시험 중에도 그와 함께 거하는 자들은 그를 봄으로써 담대함과 확신, 기쁨을 얻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로부터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질 것을 알고 있으므로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머리를 들게 될 것이다.
이와 반대로 그를 저버린 자들은 그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즉 그들은 스스로 부끄러움을 자처하고 구세주의 영광을 저버린 가운데 불신앙과 배신, 만용 그리고 어리석음으로 부끄러움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를 저버림으로 소망과 기대에 반해 비겁과 위선과 모든 불의의 삶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함이다." 사도는 자기 자신도 그들의 수에 포함시키고 있다.
"너희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있게 하려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들로 하여금 그가 오실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2:28).
그가 공공연하게 나타나서 그를 저버린 모든 사람들을 부끄럽게 할 것이며, 그들을 모른다고 부인함으로 그들을 당황하게 만들 것이며, 사람들과 천사들 앞에서 그들을 부끄럽게 할 것임을 선포하면서, 그들을 어둠과 마귀와 끝없는 절망의 구렁이로 내던질 것이다(막 8:38).
사도는 동일한 충고와 권고를 계속하고 있다.
2. 시련기에 있어서 참고 견뎌야 할 의무는 그리스도와 그에 대한 신앙을 고수하고 있는 자들에게 주어질 권위와 특권이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29절).
의를 행하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에게 주시는 또 다른 명성을 얻게 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법과 사랑에 거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그에게 충성하며 복종하는 생활에 이르기 때문이다.
주 안에 거하는 자는 역사하고 실천하며, 의와 복음의 능력을 행하여야 한다. 이렇게 행하는 자는 "그에게서 난 자임이 틀림없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었고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주 그리스도가 의로우신다는 것(그의 본질과 성품에 있어서 우리를 성결케 하시는 자요 우리에게 성결함이 되시는 의로우심)을 안 이상 믿음의 행실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사는 자는 이것이 당신에게 있어서 유일한 관심이 되는 그리스도로 난 자임을 알게 된다.
새로운 영적인 성품은 주 그리스도로부터 비롯된다.
시련기에 있어서 신앙을 실천하기 위해 계속 힘쓰는 자는 위에 계신 주 그리스도로부터 난 자임을 나타내는 좋은 확증을 얻게 된다.
주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아버지시다. 그에게서 난다는 것은 크나큰 특권과 권위가 아닐 수 없다. 그에게서 난 자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이 말씀은 3장의 문맥과 연결이 되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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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제 2장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나의 자녀들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크니아 무'(*)는 신약성경에서 본절에서만 나타난다. 이것을 수신자들을 향한 요한의 자비롭고 따뜻한 사랑을 암시한다((Stott, Smalley).
한편 '이것을'이 가리키는 것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1:6-10을 가리킨다. (2) 1장 전체를 가리킨다. (3) 본서 전체를 가리킨다. 가능한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앞서 1장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영원한 생명을 보고 듣고 만지며 계속적으로 사귐이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범치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죄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과의 사귐을 단절시킬 뿐만 아니라 당시 영지주의자 들처럼 사귐이나 사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줄로 착각하게 하기때문이다((Barker).
요한은 본문에서 본서 전체의 기록 목적이 사귐을 지속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사귐을 지속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사귐을 유지하며 단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임을 제시한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 '죄를 범하면' 이 헬라어 '하마르테'(* )는 상반절의 '하마르테테'(*, '죄를 범치')와 마찬가지로 부정과거 시상이다. 이는 범죄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죄된 행위들'을 나타낸다.
한편 '대언자'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클레토스'(* )는 문자적으로 '돕기 위해 곁에 부름을 받은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위로자 또는 옹호자'를 가리킨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성령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으나(요 14:16, 26;15:26;16:7) 본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존전에서 인간의 죄를 위해 중보하심을 시사한다.
이처럼 요한복음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성령'과 본절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사이에는 중보하고 계신 위치상 커다란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며(행 16:7;롬 8:9;빌1:19), 요 14:16에서 '또 다른 보혜사'라고 되어 있어 예수께서 '파라클레토스'이심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Smalley).
'파라클레토스'이신 성령께서는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중보하시는 분이시며 '파라클레토스'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하나님 존전에서 그리스도인의 죄를 중보하신다(Stott).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예순 크리스톤 디카이온'(* )은 문자적으로 '의로운 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디카이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존전에서 중보 사역을 행하실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셔서 흠이 없고 깨끗하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상에서의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셨다. 예수의 이러한 의로움은 그 안에 거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하게 되며 그것을 근거로 하나가은 그리스도인들의 의롭지 못한 모습을 깨끗하게 하신다(롬 3:26, Smalley).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이 의도적으로 사용한 표현이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부정하던 예수의 인간되심을 강하게 강조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된 인간이심을 나타내어 죄인들을 중보하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드러낸다.
=====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하마르티온'(*)은 복수형이다. 이는 범죄의 행위들을 가리킨다.
한편 본문은 앞절에서 언급된 '의로우신'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 사역을 행하실 수 있는 자격으로서 '화목 제물'임을 제시한다.
'화목 제물'로 번역된 헬라어'힐라스모스'(* )는 제의적인 용어로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혹자는 '속죄'(expiation)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Westcott, Dodd). 이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속죄를 위한 제사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속죄의 근원이 된다. (2) 혹자는 '달램'(propitiation)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ill). 이 해석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속죄를 위한 희생 제사의 대상이 되셔서 희생 제사를 받으신다. 이 두가지 해석은 서로 배타적이라기 보다는 상호 보완적이다(Barker, Smalley, Stott, Law).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희생 제사를 제정하심으로 속죄의 길을 여셨을 뿐만 아니라 그 희생제사를 받으셨다(레 16:34). 또한 신약성경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죄인들을 의롭게 하시고 믿음으로 예수 안에 거하는 자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롬 3:21-26). 즉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셔서 속죄의 수단을 삼으셨을 뿐만아니라 그 희생을 통하여 원수되었던 인간과 자신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다.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속죄 사역은 그리스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 세계를 위한 것이다.
여기서 '온'으로 번역된 헬라어 '홀루'(* )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가 인류 전체에서 미친 것임을 시사한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구주가 되신다(요3:16;4:42).
=====2: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 요한은 본절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과 계명을 연결시켜서 설명하고 있다. '계명'(* , 타스엔톨라스)은 구약성경에서 십계명 안에 내포되어 있으며(출 20:2-17)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과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압축 되었다(마 22:37-40;롬 13:8-10;갈 5:14).
이러한 계명에의 순종은 비록 하나님을 아는 조건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특징이며, 참된 앎을 분별하는 시금석이 될 수 있다(Bultmann, Smalley).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도덕적인 행위를 동반하게 된다(Barker).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 '우리가...알 것이요'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노스코멘'(* , '지식')는 본서나 요한복음에서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인 가르침, 즉 신비한 지식을 깨달음으로 구원을 얻으며 구원을 얻은 자들은 죄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도덕폐기론을 염두에 둔 듯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절대로 지식에 의한것이 아니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믿고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성취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요한은 명사를 사용하지 않고 동사를 사용함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적이고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적이며 역동적인 것임을 시사한다.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일련의 사고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한 영적인 관계이다(Smalley).
그래서 요한은 '아는 줄로'에 해당하는 헬라어를 완료 시상인 '에그노카멘'(* )으로 표현하여 과거에 알았던 경험이 지속적으로 발전해야 함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계멸과 연결시켜 하나님의 도덕법을 지키는 것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저'로 번역된 헬라어 '아우톤'(*)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Stott) 보다 세밀하게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Smalley).
=====2: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속에 있지 아니하되. - 본절은 앞절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이다. '저를 아노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영생을 소유하였음을 나타내는 주장이다(요 17:3). 하나님과 이러한 관계를 형성한 자라면 그는 하나님의 도덕적인 요구인 계명에 순종하는 모습이 드러나야만 한다.
'지키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론'(*)은 3절의 '테로멘'(* , '지키면')과 같이 현재 시상이다. 이는 항상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저를 아노라'고 주장하면서도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함이 없는 영지주의자들과 같이 도덕폐기론을 주장하고 죄를 가볍게 여긴다면 그는 거짓말장이일 뿐만 아니라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1:6).
여기서 '진리'는 요한이 '구원의 복음'이나 '참된 것'을 나타낼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본문의 '진리'는 사변적이거나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적고 구체적인 행위이다. 즉 '하나님을 아노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에 나타난 도덕을 행해야 함을 의미한다.
요한은 이 진술을 통해서 영지주의자들의 도덕폐기론을 강력하게 반박하고 있다.
=====2:5
개역성경에는 '드'(* , '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본절이 앞절과 연결된 상반된 측면의 진술임을 시사한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 '그의 말씀'(*, 아우투 톤 로곤)에서 '그의'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가리킨다.
더욱이 요한은 본절에서 앞절의 '계명' 대신에 '말씀'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하신 도덕적인 계명 뿐만 아니라 자신을 계시하신 모든 복음의 내용에 대한 순종으로 그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Barker). 한편 '지키는'의 헬라어 '테레'(*)는 현재 시상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지속적인 것이어야 함을 시사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 '하나님의 사랑'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아가페 투 데우'(*)에서 나타난 속격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혹자는 주격으로 해석하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Westcott, Houlden, Bultmann). (2) 혹자는 목적격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ooke, Marshall). (3) 혹자는 특성을 나타내는 속격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일종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chnackenburg). 본절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은 세 가지 견해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한편 '온전케 되었나니'의 헬라어 '테텔레이오타이'(*)는 완전과 성숙의 개념을 내포한다(Barker). 더욱이 '테텔레이오타이'는 완료 시상이다. 이는 완전과 성숙이 이미 시작되었으며 현재까지 지속되어 성숙의 과정 속에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지속적 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인 안에서 성숙되어가며 완전하여져 간다. 하나님의 말씀에 지속적으로 순종함으로 그 사랑이 그리스도인 안에서 성숙되고 온전해질 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하나님 안에 내주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2:6
@저 안에 거하는 자는. - '저'에 대해 혹자는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Stott) 문맥상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Smalley, Barker).
그러기에 '저 안에 거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안에 내주함을 시사한다. 이 내주는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신비한 지식을 획득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즉 믿음과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성취된다(5절). [[이는 사랑-희락-화평의 기름부음과 누림으로 느끼게 될 것!!]]
@그의 행하신는 대로 자기도 행할 지니라. - 본문은 하나님 안에 내주하는 자들의 삶속에 윤리적인 행위가 동반되어야 함을 나탸낸다.
여기서 지시 대명사 '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케이노스'(* )는 상반절의 '저'와는 달리 분명히 예수그리스도를 지칭한다(Stott, Smalley, Barker). 왜냐하면 본서에서 '에케이노스'는 그리스도를 지칭하기 때문이다(3:3, 5, 7, 16;4:17).
한편 '행하시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파텐센'(* )은 부정과거 시상으로 예수께서 지상에서 사신 삶을 가리킨다.
요한은 본절에서 하나님 안에 내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대한 모델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함으로 하나님 안에 내주함을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생활하신 것과 같이 생활해야 함을 강조한다. 즉 하나님 안에 내주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윤리적인 계명은 물론 복음에 대해 순종함이 그 삶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드러나야 한다.
=====2:7
@사랑하는 자들아. - 이것은 요한이 수신자들을 부를 때 즐겨 사용하는 호칭으로 새로은 단락이 시작될 때 자주 나타나다. 요한은 이 호칭을 사용하여 두 가지를 암시하고 있다. (1) 하나님 안에 내주하여 빛 가운데 거하는 자의 삶에는 사랑이 드러나야 함을 암시한다. (2)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고 빛 가운데 거하는 자의 증거로 사랑을 제시함으로써 도덕폐기론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 가르침이 잘못되었음을 공격하고자 한다.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 요한은 상호 보완적인 본문의 두 개의 절을 이용해서 이제부터 언급할 '사랑의 계명'이 수신자들에게 생소한 것이 아니라 잘 알려진 계명임을 밝히고 있다. 즉 '새 계명...이 아니라'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은 동일한 내용을 가리킨다. 여기서 '처음부터 가진'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 사랑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롬2:14;13:8-10) 동시에 사랑의 계명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시사하는 자들이 먼저 갖추어야 할 것임을 암시한다(엡 5:2;약 2:8;벧전 2:17).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 본문에서 '계명'으로 번역된 헬라어'헤 안토레'(* )는 단수이다. '엔통레'가 단수임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옛 계명이 의미하는 '사랑의 계명'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완성한 계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십계명을 하나의 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고 계신다(마 22:37-39).
한편 '들은 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쿠사테'(* )는 부정 과거 시상이다. 이는 사랑의 계명이 이미 선포되었으며 수신자들이 사랑의 계명에 대해 과거에 들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사랑의 계명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요 13:34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임을 암시한다. 요한의 수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부터 예수의 가르침을 들었을 것이며 따라서 사랑의 계명은 수신자들에게 결코 생소하거나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부터 알고 있었던 익숙한 계명이었다.
=====2:8
@다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팔린'(* )을 본문과 같이 '다시'라고 번역할 수도 있으나(again, KJV)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번역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yet, NIV, RSV).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로 참된 것이라. - 본문의 '새 계명'은 앞절에서 사랑의 계명을 옛 계명으로 지칭한 것과 모순되는 듯 보인다.
여기서의 '계명'은 예전부터 수신자들이 전해들었다는 의미에서의 옛 계명을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새 계명'이다. 그 이유는 네 가지이다(Stott, Smalley,Barker). (1)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서 인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결정적으로 보여 주셨다(4:9;요 3:16). (2) 예수께서는 순종으로 모든 계명의 완성인 사랑을 행하셨다(요 12:27;롬 10:4). (3) 예수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새로운 삶, 즉 영생을 부여하셔서 자신이 행했던 바와 같이 사랑의 계명을 행할 수 있도록 하신다(4:8-11;5:11,12). (4)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먼저 모범을 보이시고 모든 믿는 자들로 행하도록 역사하시는 사랑의 계명을 자각하고 성취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의 계명은 한편 으로 옛계명이지만 새 계명이 된다. 이러한 새 계명은 그리스도와 모든 믿는 자에게 성취되어 분명한 실체로 나타났다(Barker, Stott).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 본문은 새 계명이 그리스도와 믿는 자 안에서 성취될 수 있는 이유이다.
본문에서 '어두움'과 '참빛'의 대조는 요한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 방법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참빛, 즉 실재하는 빛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어 어두워진 이 세상에 오셨다(1-5-7;요 8:12).
한편 '비췸이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네이'(* )는 현재 시사이다. 이것은 빛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세상에 빛을 비추셨으며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구속의 빛을 비추심을 의미한다. 이 빛은 완전한 빛이 비추는 다가올 세대, 즉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Smalley).
=====2:9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 '...하는 자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호 레곤'(* )은 문자적으로 '말하는 자'를 의미한다.
'호 레곤'은 '하나님을 아는 자'(6절;요 15:4), 그리고 본절의 '빛 가운데 있는 자'(요 12:46)에 공통적으로 사용되어 세 가지 주장이 하나의 주장, 즉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음을 나타낸다. 즉 '빛 가운데 있다'는 사실은 빛 되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관계는 윤리적인 계명에 대해서만 아니라 복음 전체에 대한 순종을 요구한다. 그러기에 빛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사랑치 않는다는 것은 모순된 주장이며 진절한 의미에서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는 빛 되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한편 본절의 '형제'는 일반적인 모든 사람을 지칭하기 보다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수신자들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요한은 본서를 쓰면서 기본적으로 수신자공동체의 문제와 관계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Smalley). 그렇다고 해서 일반적인 모든 사람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요한은 '형제'를 일차적으로 수신자 공동체를 지칭하는데 사용하고 있으나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도 사용하여 모든 사람을 배제시키지 않고 있다(8절, Barker, Smalley).
=====2: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나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두운 가운데 있어서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것과는 반대로 진정으로 빛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형제를 사랑함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하는 자들이 모두 빛 가운데 거한다는 뜻은 아니다. 본절은 앞절과 대조를 이루어 빛 가운데 거하는 자들에게 '사랑하라'는 윤리적 계명에 순정하는 삶의 모습이 드러나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 '자기 속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아우토'(*)에서 대명사 '아우토'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빛 가운데 거하여 형제를 사랑하는 자를 가리킨다. 이 경우에는 '그 사람속에'를 의미한다(Barker, Haas). (2) 빛을 가리킨다. 이 경우에는 '빛 안에'를 의미한다(Schnackenburg,Smalley).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전자의 경우로 해석하면 빛 안에 거하여 형제를 사랑하는 자들은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걸림돌이 될만한 것이 전혀 없음을 의미하며, 후자의 경우로 해석하면 빛 안에는 사람들로 걸림돌이 되거나 넘어지게 하는 것이 전혀 없음을 의미한다. 한편 '거리낌'의 헬라어 '스칸달론'(*)은 신약성경에서 배교나 범죄토록 하는 유혹을 가리킨다(고전 1:23). 이러한 '스칸달론'의 대상에 대해서는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빛 가운데 거하며 형제를 사랑하는 자 자신이며(Brooke, Westcott, Barker) 또 다른 하나는 타인이다(Stott). 본문은 두 종류의 대상을 모두 내포하는 듯하다. 빛 가운데 거하며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스스로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을 뿐더러 타인에게도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2: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 본절은 9절에 언급된 진술의 부연 설명이다.
빛 가운데 거한다고 주장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눈이 멀어서 스스로의 실체를 본명히 인식하지 못하는 자다. 즉 그들은 스스로가 빛과 어두움 사이에서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구분하는 분별력을 상실하여 어두움에 속해 있으면서도 스스로는 빛 가운데 거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는 빛 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착각함으로 스스로 살아가는 삶의 방향을 상실하였으며, 실상 하나님을 멀리 떠나 어두움 가운데 헤메고 있다.
=====2:12
@자녀들아...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 본문은 1, 2절과 1:9을 반영한다.
'죄사함'은 구약성경에서 새 언약에 속한 자들에게 주어진 축복이다(렘 31:34;겔 36:22-25). 신약성경에서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행하신 예수의 이름과 연관되어 나타난다(마 1;21;행 ;12;10:43;딛 2:14). 여기서 '이름'은 그 이름의 소유자의 인격을 비롯한 모든 것을 나타낸다(Smalley).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본문은 죄사함이 그리스도께서 하목 제물이 되심으로(1, 2절) 그의 이름을 통해서 성취되었음을 시사한다(Stott).
한편 '사함을 얻음이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온타이'(* )는 완료 시상이다. 이것은 수신자들이 처음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죄사함을 경험하였음을 시사한다.
=====2:13
@아비들아...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 '태초부터 계신 이'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tott, Bruce, Dodd). 이들에 의하면 본문은 시대에 상관 없이 전혀 변함이 없으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미한다. (2) 혹자는 하나님과 성육신 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 둘 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malley). (3) 혹자는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Barker, Westcott,Brooke). 이들에 의하면 본문은 선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다음절의 '아이들을' 향한 말씀에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Barker). 요한은 '태초부터 계신 이', 즉 선재하신 그리스도를 언급함으로 당시에 팽배해 있던 이단 교리에 대해 공격하고 있다. 당시 이단자들은 하나님의 선재하신 말씀, 즉 로고스가 나사렛 예수 안에 성육신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하였다. 요한은 이러한 거짓 교리가 흔하던 수신자 공동체에서 '태초부터 계신 이'로서의 그리스도를 언급함으로 이단 교리의 거짓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앎이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그노카테'(* )는 현재 완료시상이다. 이는 수신자들이 개종할 때부터 그리스도께서 이단자들의 가르침과 정반대로 선재하신 말씀이셨음을 알았고 그 앎이 현재까지 지속되어 신앙이 성숙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청년들아...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 '악한 자'의 헬라어 '톤 포네론'(* )은 남성 명사이다. 이는 사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악을 인격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이 사단은 빛과는 상관이 없으며 어둠의 세계를 조종하고 통제한다(14절;3:12;5:18, 19;요 17;15;엡 6:16;살후 3:3).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빛 가운데 거한다고 주장하면서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들은 스스로 빛 가운데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며 사실상은 어두운 가운데 행하여 사단의 조종 아래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이기었음이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네니케카테'(*)도 현재 완료 시상으로 과거에 성취한 승리가 지속적으로 효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인들은 개종하였을 때 그리스도의 승리를 통해서 승리하였으며(눅10:18;골 2:15;계20:2), 그 승리를 근거로 현재도 지속적으로 사단과의 영적 투쟁에서 승리를 쟁취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지속적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악을 향해 저항하고 투쟁하는 삶을 산다(Stott, Smalley).
=====2:14
@아이들아...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 12절에서는 '테크니아'(*, '자녀들아')로 부르고 있는 반면에 본절에서는 '파이디아'(* , '아이들아')로 부르고 있다.
'테크니아'와 '파이디아'는 의미상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엄밀하게 구별하면 '테크니아'는 부모와 유아의 관계성을 나타내는 단어로 아이가 약하여 부모에게 의존하는 것을 더 강조하는 반면에 '파이디아'는 아이의 미숙에 초점을 맞추어 교육과 지도가 필요함을 나타낸다(Westcott, Stott).
한편 '아버지를 알았음이요'에는 13절의 아비들을 향한 말씀인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재 완료 시상이 사용되어 아이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인하여 죄사함을 받았을 뿐만아니라(12절) 개종할 때부터 지도자 아래서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해 배워 알고 있음을 나타낸다(Barker).
@청년들아...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 본문은 13절과 병행된다. '강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스퀴로이'(* )는 육체의 강함보다는 영적인 강건함을 의미한다(엡6:10;계 18:8). 청년들이 영적으로 강건해서 악한 자, 곧 마귀의 대적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실체로서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영적으로 강건케 하여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악한 자에 대한 승리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한다(Smalley).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 본절에서 17절까지는 '세상'이란 단어가 6번 등장한다. 여기서 나타난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에 의해 통제를 받는 체제를 가리킨다(4:3-5;5:19;요 16:11, Barker, Stott).
이러한 세상은 본질상 하나님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한다(요 15:18, 19;17:25). 한편 본문의 '사랑'에 대해 혹자는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기호'나 '매력'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arshall, Bultmann). 그러나 사실상 사랑과 매력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기호나 매력'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이기에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기 보다 는 그것의 방향과 동기가 문제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욕구나 매력, 사랑은 빛가운데 거하는 자로서 타인에 대해 올바르고 창조적인 방향과 동기를 지닌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사랑은 옳지 못하고 이기적인 방향과 동기를 지니게 된다(Smalley).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 본문은 요한이 수신자 공동체에서 세사을 사랑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것을 세상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이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랑'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아가페 투 파트로스'(*)에서 속격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목적격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arshall). 이 견해에 따르면 세상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공존할 수 없도록 만든다. (2) 혹자는 주격으로 보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주장한다(Houlden). 이 견해에 따르면 세상을 사랑할 경우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람 안에 거할 수 없다. 두 가지 견해는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보완적이다.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 본문은 앞절에서 언급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의 예이다. 이 세 가지 예중에서 첫번째는 나머지 두 가지에 대한 일반적인 원리를 나타내는 듯하다(Smalley). (1) 육신의 정욕. '육신'의 헬라어 '사르코스'(* )는 일반적으로 신체적인 의미에서 인간을 의미하나 본문에서는 '영적인'것과 대조를 이루는 악한 욕망의 근원을 의미한다. '육신의 정욕'은 타락한 사람의 본성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 만족만을 추구하는 자세를 의미한다(Barker, Stott). (2) 안목의 정욕. 이것은 외적인 것을 봄으로 유혹을 일으키는 성적인 욕망은 물론 모든 사물을 탐닉하는 욕망을 의미한다(Marshall, Bultmann). (3) 이생의 자랑(*, 헤 알라조네이아 투 비우). 여기에 나타난 속격에 대한 견해에 따라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주격으로 이해할 경우 본문은 세상적인 물질이나 명성에 대해 과대 평가하여 자랑하는 허세를 의미한다. 2 목적격으로 이해할 경우 본문은 세상적인 것에 대한 자랑을 의미한다. '이생의 자랑'은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내포하고 있다. 즉 그것은 소유하고 있는 물질 뿐만 아니라 태도나 행위를 자랑하거나 혹은 과대 평가하여 허세를 부리는 것을 의미한다(Marshall, Law).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로 좇아온'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크'(* )는 기원을 나타내는 전치사이다. 요한은 '에크'를 사용하여 상반절에서 언급된 세 가지 예,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세상, 곧 사단이 지배하는 타락한 사람들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기에 세상과 하나님 아버지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해서는 안된다.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또다른 이유이다. 세상은 한시적이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그날에 세상과 세상을 사랑한 모든 사람은 공동의 운명으로 파멸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랑하기를 거부하고 죄를 미워하며 오직 사랑의 계명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거하게 될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때문이다(3;14;5:11, 12;고후 4:18).
=====2: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약속의 땅을 소유하고 예루살렘을 회복하며, 열국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온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 입증될 날을 기대하였다(사 2:2, 3;겔 38:14-23).
신구약 중간기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박해로부터 구원해 줄 메시야를 대망하였다. 이러한 메시야 대망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파루시아 때의 예수에게 적용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마지막때'(* , 에스카테 호라)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엄은 의미의 말세로 받아들여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 때까지의 기간을 의미하거나 혹은 관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말세에 나타나는 포괄적인 징후나 성격등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Brooke, Dodd). (2) 혹자는 좁은 의미로 이해하여 마지막날들 중의 마지막 때, 곧 재림의 때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tott). 요한복음에서 '시간'이 구속을 성취시키는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요 2:4;4:21;7:30;8:20;12:23) 두 가지 견해를 모두 내포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Barker).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 '적그리스도'로 번역된 헬라어 '안티크리스토스'(*)는 관사가 없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보아 본문의 '적그리스도'는 어떤 특정한 인물을 가리키기 보다는 그리스도, 즉 메시야를 대적하거나 반대하는 자를 의미한다. 이것은 본문에 나타난 '안티크리스토 폴로이'(*, '많은 적그리스도')가 복수인 사실로도 입증된다. 그래서 혹자는 본문의 '안티크리스토스'에서 접두어 '안티'(* )를 '적'이 아니라 '거짓'의 의미로 이해하여 그리스도에 대해 거짓말 하는 자를 가리킨다고 해석한다(Law, Stott, Dodd). 요한이 이러한 '적그리스도'가 당시에 많이 나와 있음을 언급한 것은 당시 그리스도에 대해 잘못된 교리를 전파하던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때문인 듯하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완전한 인간이심을 부정함으로 그리스도를 부정하였다(요이 1:7,Smalley).
=====2:19
@저희가 우리에게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 본문은 앞절에 언급된 '적그리스도'가 다른 종교를 가진 자가 아니라 수신자 공동체 일원으로 있다가 거짓교리에 빠진 자임을 나타낸다.
여기서 '나갔으나'는 수신자 공동체에서 강제로 출교시킨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수신자 공동체에서 이탈한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스스로 나간 것을 보고 요한이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다'고 진술하는 것은 영지주의자들이 형식적으로는 수신자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자들이었지만 사실상은 전혀 공동체에 일원이라 할 수 없었음을 암시한다. 그들이 공동체에서 이탈한 것은 스스로 그 공동체의 일원이 아님을 증명하는 행위였다(Barker).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리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 개역성경 본문에는 '가르'(* ,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 '가르'는 본문이 공동체에서 이탈한 자들이 공동체에 속하지 않았다는 앞의 진술에 대한 근거임을 시사한다. 인간이시면서 동시에 참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주장하는 수신자 공동체의 교리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공동체를 떠났다. 그들의 이탈은 자신들이 거짓 교리를 전파하는 적그리스도임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으로 번역된 헬라어 '호티 우크 에이신판테스 여스 헤몬'(*)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서이 가능하다. (1) '에이신'의 주어를 '적그리스도'로 볼 때 본문은 '적그리스도 모두가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한다'(that they all are not of us, RSV)의 뜻이다. 이 경우에 '모두'를 의미하는 '판테스'(* )는 강조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2) '에이신'의 주어를 '수신자공동체'로 볼 때 본문은 '공동체 회원들 모두가 우리에게 속한 것은 아니다'(that not all in our company truly belong to it, NEB)라는 의미가 된다. 이 경우에 본문은 수신자 공동체 내에 사이비 일원들이 있음을 나타내다. 두 가지 해석 중 전자가 더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 이제까지의 문맥과는 달리 주어가 바뀌기 때문이다(Smalley).
=====2: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 성경에서 '거룩하신 자'라는 칭호는 두 가지 경우에 사용된다. (1) '하나님'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시 78;41;사1:4;합 3:3). (2)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데도 사용되었다(요 14:18;15:26;16:7;행2:27;3:14). '하나님'과 '그리스도'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한편 '기름 부음을 받고'는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신비한 지식을 깨닫고 기름 부음을 받는 성유식(聖油式)을 행한 것을 반영한다(Dodd, Schnackenburg). 요한은 당시 영지주의자들의 주장과 의식을 염두에 두고 요한복음에서 성령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기름 부음' 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눅 4:18;요 14:17;15:26;16:13;행 4:27;10:38;고후 1:21,22, Barker, Stott, Smalley). 수신자 공동체 일원들은 영지주의자들처럼 단순히 성유식을 행한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성령을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공동체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고 성령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셔서 자신 안에 거하게 하셨다. 그러기에 영지중의자들이 신비한 지식을 깨달아 구원을 얻고 하나님안에 내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임이 분명하며 진정한 수신자 공동체 일원들은 그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아느니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다테 판테스'(*)는 '너희 모두가 안다'(you all know, RSV)나 '너희 모두가 진리를 안다'(all of you know the truth, NIV)를 의미한다. 두 가지 중 후자에서 '진리를 '이 삽입된 것은 다음절과의 연관성을 나타낸 해석이다.
요한은 본문은 통해서 신비한 지식을 깨달은 극소수만이 하나님과 모든 것을 안다고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의 거짓된 주장을 수신자 공동체가 분명히 알고 있다고 진술함으로 영지주의자들의 잘못된 교리를 공격하고 있다(Smalley). 또한 극소수만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요한은 '너희 모두'라고 진술하여 수신자 공동체 중 일부만 아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알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어 영지주의자들의 거짓을 드러내고 있다.
=====2:21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 본절은 세 개의 '인함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티'(* )로 구성되어 있다. 세 번 사용된 '호티' 중에서 처음 두 번에 대해 혹자는 선언이나 진술을 나타내는 서술격(that,'...것')이라고 주장한다(Blutmann, Haas, Schnackenburg).
그러나 세 번 중 처음 두 번의 '호티'는 원인격(because, '때문에')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Smalley). 왜냐하면 요한은 본절에서 앞절에 언급한 내용을 더 발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즉 수신자 공동체 일원들이 모두 거룩한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아 진리를 식별할 수 있기 때문에 본서를 기록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한편 세번째 '호티'에 대한 해석의 견해는 세 가지이다.(1) 혹자는 원인격으로 보아 본문이 '거짓이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너희에게 썼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ooke). (2) 혹자는 서술격으로 이해하되 '쓴 것'과 연결시킨다(Schnackenburg).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나는 거짓이 진리에서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희에게 썼다'를 의미한다. (3) 혹자는 서술격으로 이해하되 '너희가...앎을'과 연결시킨다(Dodd, Smalley).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거짓이 진리에게서 날 수 없다는 것을 너희가 안다'를 의미한다.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타당한 듯하다. 요한은 앞에 나타난 두 번의 '호티'를 원인격으로 기술함으로 수신자공동체가 기름 부음을 받아 온전히 진리를 식별할 수 있음을 밝히고, 마지막'호티'를 서술격으로 사용함으로 '거짓이 진리에게서 나올 수 없다'는 진리를 선언하고 있다.
=====2:22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임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 앞절에서 진리가 '거짓'에서 나올 수 없음을 선언한 요한은 본절에서 '거짓'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거짓말하는 자'란 예수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메시야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이땅에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다(4:2, 3;요이 1:7). 이들은 예수께서 참인간으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이시며, 신성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하는 것이며, 아들을 부인하는 것은 곧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다(요 12:44, 45).
=====2:23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 본절은 앞절의 결과에 대해 부연 설명한 것이다. '없으되'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데...에케이'(* )와 '있느니라'의 헬라어 '에케이'(*)에서 '에케이'는 문자적으로 '가지다'란 뜻이다.
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영적인 경험을 시사한다. 또한 본장에서 '에케이'는 '거하다'의 헬라어'메노'(* )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여(24, 27, 28절) 확신의 동기를 제공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이심을 시인하지 않는 자는 결코 하나님 아버지를 소유하지도 못하고, 그와 교제를 나누지 못할 뿐 아니라 상호간의 내주도 경험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셨으며(요 1:18;14:9) 아들 예수께서 죄로 인한 하나님과 인간의 원수 관계를 화목하게 하셨기 때문이다(1,2절;요 14:6).
=====2:24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리라. - (, 휘메이스 호에쿠사테 아프 아르케스 엔 휘민 메네토). '처음부터'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수신자들이 처음 복음을 듣고 개종한 때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ooke, Marshall). (2) 혹자는 사도들이 초대 교회에 처음 복음을 선포한 때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malley).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 '들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쿠사테'(* )는 부정과거 시상이다. 이는 수신자들이 과거에 선포된 복음을 들은 것을 가리킨다. 요한은 수신자들에게 과거에 사도들이 선표했던 복음을 지속적으로 소유하고 있으리라고 명령한다.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안 엔 휘민메이네 호 아프 아르케스 에쿠사테'(*)이다. 본문의 헬라어 어순과 본절 상반절의 헬라어 어순을 살펴보면 두 가지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1) '너희 안에'에 해당하는 '엔 휘민'(* )이 상반절에서는 후반부에 기록되어 있으나 본문에서는 앞에 기술되어 있다. 이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20절) 수신자 개인의 삶에 거하고 있는 복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2) 상반절에서는 '에쿠사테'(*, '들은')가 '아프 아르케스'(* , '처음부터')보다 앞에 기술되어 있으나 본문에서는 '아프 아르케스'가 '에쿠사테' 보다 앞에 진술되어 있다. 이는 본문과 상반절에 교차 대구법을 사용하여 복음이 원초적이며 근본적인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 22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기술되어 '아버지'가 '아들'보다 먼저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본문에서는 '아들'이 '아버지'보다 먼저 기술되어 있다. 이는 요한의 강조점이 아들에 있음을 시사한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임을 시인할 때 아버지와 교제를 나누고 상호간의 내주가 성취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거하리라'의 헬라어 '메네이테'(*)는 상반절에서 현재 시상을 사용한 것과는 달리 미래 시상이다. 이것은 지속적인 상호간의 내주를 통한 현재의 영적 경험이 미래의 온전한 구원을 향하고 있음을 강조한다(Smalley).
=====2: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 '그'가 누구를 가리키는 가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malley). (2)혹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Houlden).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한편 '약속'은 본서에서 처음 나타나나 성경 전체에서는 자주 나타난다. 성경은 구약의 족장들과 예언자들에게 주신 약속이 메시야이신 예수 안에서 완성되며(행 13:23;롬 15:8;고후 1:20-22) 새 언약이 옛 언약을 대치할 것이라고 말한다(갈 3;16;엡 2:12;히 10:23;11:13, 39, 40). 또한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구속받은 자들이 약속된 성령에 의한 새 시대, 즉 메시야 시대의 종말론적 축복을 공유하게 될 것을 나타낸다(눅 24:49;행 1:4, 5;2:33). 목회 서신은 믿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본질이 영생임을 진술하고 있다(딤전 4:8;딤후 1:1;딛1:2).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 이것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 17:3). '아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며, 성령의 역사 안에서 복음을 굳게 견지하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대한 순종을 수반해야 한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는 아들을 알지 못하며 동시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인 영생을 소유할 수 없게 된다.
=====2:26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 '미혹케 하는 자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플라논톤'(* )은 현재 분사이다. 이는 앞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심을 부정하는 적그리스도들의 특성이 거짓말로 미혹하는 마귀의 특성을 닮고 있음을 나타낸다. 더욱이 요한은 현재 분사를 사용하여 적그리스도의 미혹행위가 지속적인 것으로서 현재에 볼 수 있는 실제적인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썼노라'의 헬라어 '에그랖사'(*)는 서간체 부정 과거이다. 이 '에그랖사'는 본서의 수신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의 시점, 즉 수신자 공동체가 본서를 받아보면서 요한의 기록 시점을 생각하는 당시 표현방식이다.
=====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 24절에서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고 수신자 공동체에게 권면한 것과 같이 본절에서도 요한은 이단적인 교리를 전파하여 미혹하는 적그리스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 안에 안전하게 거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미 수신자들이 거룩한 자에게서 받은 '기름 부음'을 강조하고 있다. '기름 부은'은 성령을 가리킨다(20절 주석 참조).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진리이시다(5:7). 여기서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는 신약성경에서 나타나는 교사직에 대한 언급(행 4:18;5:28, 42;고전 12:29;엡 4:11;딤후 2:24)과 상치되는듯 보인다. 그러나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르치는 직분을 받은 교사들은 진리이신 성령의 은사를 통해서 가르쳐야 하며 그들의 가르침의 은사를 통해서 가르쳐야 하며 그들의 가르침의 내용은 진리에 의해서 시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4:1, 5;요이 1:9, 10, Schnackenburg). 즉 그 가르침의 내용은 이미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각 개인에게 가르쳐져야만 한다. 그런 반면에 당시에 이단적 교리를 전파하는 적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요한은 이런 의미에서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음을 강력하게 권고하여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 가르침을 공격하고 있다(Brooke, Houlden). 한편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는 요한복음에 언급된 보혜사 성령의 성격과 병행된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셔서(요14:17;15:26) 제자들을 진리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요16:13) 그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요14:26).
이런 사실은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유식과 대조를 이룬다.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유식은 지적인 것이며 거짓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기름 부음은 그리스도인들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영적 지식을 소유하게 하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그 안에 거하게 한다.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레데스 에스틴 카이 우크 에스틴 프슈도스'(*)는 문자적으로 '그것은 참되고 거짓이 아니다'란 뜻이다. 여기서 '에스틴'(* . '이다')의 주어인 그것은 기름 부음에서 비롯된 가르침보다는 기름 부음 자체를 가리킨다(Smalley). 기름 부음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가리킨다. 그러기에 그는 물론 그의 가르침 전체가 참되며 거짓이 없다. 한편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의 주어는 '기름부음'으로 보기 보다는 '예수'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더욱이 '가르치신'의 헬라어 '에디닿센'(* )은 부정 과거 시상이어서 예수께서 지상 사역 때에 행하신 가르침과 관계가 있음을 암시한다(Smalley). 성령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야 할 일을 가르치신다(요14:26).
=====2:28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 본문은 요한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자신의 권면을 요약한 것이다. '그 안에 거하라'는 본장에서 자주 언급된 권면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영원한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내주를 통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게 되며 '사랑하라'는 계명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 계명과 말씀에 대한 순종을 동반한 그리스도인의 내주는 그리스도인들로 약속된 영생을 소유하게 한다.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하려 함이라. -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종말론적이다. 즉 요한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 이유를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있을 심판과 연결시키고 있다.
'나타내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네로데'(* )는 육신을 입으신 예수께서 역사 위에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은 '파네로데'와 '강림'의 헬라어 '파루시아'(* )를 연결시켜서 그리스도게서 눈에 보이게 광채를 입고 재림하실 것을 시사하고 있다(Barker).
한편 '담대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르레시안'(* )은 신약성경에서 31번이나 나타나며 그 중에서 13번이 요한이 쓴 책들에서 나타난다. '파르레시안'은 헬라 세계에서 '자기의 의견을 공적으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시민의 권리'를 의미하며 성경에서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나(행4:29; 고후7:4)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딤전3:13; 히10:19) 담대함을 의미한다. 본절에서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서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라'는 계명과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2:29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 요한은 본절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거듭나고 영생을 소유한 자들의 삶 속에 나타나야 할 표식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의'이다. 여기서 '그'에 대해 혹자는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하나(Smalley)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Law, Barker, Stott). 왜냐하면 다음 절인 3:1에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언급되어 있어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임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서 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삶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아버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야만 한다. 그래서 요한은 본장에서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거짓말하는 것이며 어두움에 있는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다(3-6절). 만약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지상 생활 가운데서 보여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순종의 생활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는 아버지에게서 난 자라고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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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vklhto"(3875, 파라클레토스) 돕는 자, 중재자, 변호자, 위안자
파라클레토스는 돕는 자, 중재자, 변호자, 위안자를 의미하며, 개역한글판에는 "보혜사", "대언자"라고 번역되었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파라클레토스는 동사적 형용사로 처음에 '남을 도우기 위해 부름받은'이란 수동적 의미를 가지었으며 , 여기서 '법정에서 도우는 자'란 의미로 발전되었다. 이 단어는 법정의 법률 용어로서 처음으로 발전되는데 '법적인 보조자', '변호자'를 의미한다. 파라클레토스가 이런 대리인의 뜻으로 사용되는 용법은 법정에서의 법적인 조력, 다른 경우에 변론이란 견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욥기 16:2에서 욥의 '안위자들이' 복수 파다클레토레스로 불리워진 것이다. 이것이 70인역본의 유일한 용례이며 해당 히브리어는 메하나임이다. 이 안위자들은 욥을 권고하러 왔으나 그렇게 할 수 없는 표면상 친구들이다.
필로는 이 단어를 증재자, 변호자, 돕는자, 충고자(고문)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피고를 위하여 말하는 자들은 파라클레토이이며 하나님의 사랑, 중재 기도, 선행들은 하나님 앞에서 파라클레토이가 된다. 대제사장의 의복의 상징적인 장식은 성전에서의 그의 속죄 사역에서 그를 변호하는 것들이다.
랍비 유대교에서 페라클레트, 또는 이와 유사한 형태로 음역했으며, 차용어로 특히 하나님 앞에 인간을 위한 변호자, 옹호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회실과 선행은 심판 때에 그들을 변호하는 것들이 될 것이다.
신약의 영향을 별문제로 하고 초기 기독교 문헌에서 디다케는 부자만 돕는 변호자들에 대하여 언급한다. 유세비우스 교회사에서는 총독 앞에서 박해를 받는 형제의 변호자인 에파가도스를 언급한다. 그 다음 일반적으로 법정에서 고소 당한 자들을 위하여 말할 수 있는 '돕는 자'를 의미한다. 초기 기독교 문헌에서 단 한번 '위로자'라는 의미로 나온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파다클레토스는 고전 문헌에서 본래 '돕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자'라는 수동적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신약성경에서 파라클레토스는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보낸(요 14:26; 요 15:26; 요 16:7), 주어진 (요 14:6이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요청으로 파라클레토스를 보내셨다면 파라클레토스는 요청(부름)을 받아 보내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변호자, 돕는자, 중재자라는 의미는 이 단어가 나오는 모든 경우에 적합한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파라클레토스로서 아버지의 법정에서 죄 범한 신자를 대변하는 변호자이시다 (요일 2:1 이하).
성령은 파라클레토스로서 역사하신다. 요 16:7 이하에서 심리(tria1) 라는 의미가 있으나 그러나 여기서 성령은 세상과 관계하여 제자들의 고문이나 조언자이다. 성령은 권위있는 교사로서(요 14:26), 계시에 대한 증인으로서(요 15: 26),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리하실 때 말하는 자로서(요 16:8이하) 나타낸다. 이러한 구절들은 파라클레토스가 '돕는 자'라는 더욱 넓은 의미를 시사하여 준다. 협상은 파라클레토스를 알지 못하나 제자들은 저를 알고 저는 제자들과 함께 거하며 제자들 속에 계시게 되는 것이다(요 l4: 17).
파라클레토스에 대하여 영역본들은 헬라어 음역 paraclete 를 위시하여, 조언자(고문), 변호자,
위로자, 돕는자라는 의미로 번역한다. 그러나 이 모든 의미를 포괄하는 '돕는자'가 아마도 가장 훌륭한 번역일 것이다. 공동 번역의 협조자, 한글개역의 보혜사도 무난한 번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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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Jlasmov"(2434, 힐라스모스) 달램, 화해, 화목제물.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힐라스모스(Plut.)는 힐라스코마이(iJlavskomai, 2433)에서 유래했으며,
(a) '달램, 조정, 화해',
(b) '화목제물'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힐라스모스는 70인역본에서 10회 나오며, 히브리어 킵푸르(보상, 죄값, 속죄; 레 25:9; 민 5:8), 슬리하(5547: 용서; 시 130:4; 단 9:9)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제의적 속죄와 하나님의 용서를 의미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힐라스모스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화목제물'을 의미한다.
(a) 요일 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b)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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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jntolhv(1785, 엔톨레) 명령 command, 계명 commandment, 훈령 order.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엔톨레(Pind ., Hdt. 이래)는 엔텔로마이(ejntevllw, 1781: 명령하다)에서 유래했으며,
(a) 왕, 관원, 신의 '명령',
(b) 교사의 교훈, 마술과 관련된 지시들,
(c) 여러 형태의 '위임'(commission)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엔톨레는 70인역본에서 약 244회 나오며, 주로 미츠와(계명, 명령), 다음으로 픽쿠딤(훈계, 규례, 계명)과 그외 7개 이상의 히브리어 단어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엔톨레는 70인역본에서 '명령, 위임, 계명, 교훈, 율법'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엔톨레는 신약성경에서 6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사람들의 엔톨레.
① 요 11:57에서 엔톨레는 '공적 명령'을 의미한다: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② 엔톨레는 사람들의 '명령'을 나타낸다. 눅 15:29에서 아버지의 '명령', 행 17:15; 골 4:10에서 사도들의 '명령', 딛 1:14에서 유대인의 '가르침'을 나타낸다.
(b) 신적 권위의 엔톨레
① 엔톨레는 구약 율법의 계명들을 나타낸다.
눅 23:56: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
히 7:16에서 형통에 관계된 가르침을 나타낸다: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히 7:18이하에서 제사장직에 관한 모세의 가르침을 나타낸다: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② 엔톨레는 법적 명령의 총체를 나타낸다(마 5:19; 마 19:17; 막 10:19; 눅 18:20).
③ 엔톨레는 단순한 계명들을 나타낸다: 엡 6:2; 마 22:36, 38; 막 10:5; 막 12:28; 막 12:31; 롬13:9; 엡 2:15, 히 9:19.
④ 엔톨레는 하나님의 명령을 나타낸다: 고전 7:19; 요일 3:22, 24; 계 12:17; 계 14:12.
⑤ 엔톨레는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나타낸다: 요 10:18; 요 12:49이하; 요14:31; 요 15:10.
⑥ 엔톨레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나타낸다: 요 13:34; 요 14:15; 요 14:21; 요 15:10; 요 15:12; 고전14:37.
⑦ 엔톨레는 그리스도교의 도덕적 가르침을 나타낸다: 딤전 6:14; 벧후 2:21; 벧후 3:2.
(참조: Walter Bauer ; G.Schrenk ; H -H.Es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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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evw(5083, 테레오) 보존하다 preserve , 지키다 keep.
1. 고전 헬라어의 용법
동사 테레오(Pind ., Thu. 이래)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a) `유의하다, 관찰하다, 인식하다, 시험하다(test), 기다리다(적절한 기회를), 숨어서 기다리다'(사람을),
(b) '조심하다, 경계하다, 관리, 통치하다'
(c) `보호하다, 지키다, 보존하다'(물건, 사람, 그리고 충성, 믿음, 순결 같은 도덕적 가치들을), `스스로 지키다'.
(d) `주의하다, 지키다(준수하다), 복종하다, 동의하다, 따르다'(가르침, 관습, 법적 요구를)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테레오는 70인역본에서 38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샤말을 번역한다. 70인역본에서 테레오의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의 명령이나(삼상 15:11; 잠 19:16) 그 대상인 지혜의 명령을(잠 3:1) 준수하는 것, 생명을 보존하고 지키는 것(잠 13:3; 잠 16:17; 잠 19:16)을 의미하는 것이다. 렘 20:10에서는 이 단어가 `숨어서 어떤 사람을 기다린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테레오는 신약성경에서 60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문자적 의미.
(1) 테레오는 '지키다' guard를 의미한다. 예를 들면 행 12:6에서 감옥, 마 27:36; 마 27:54; 행 12:5; 행 16:23; 행 24:23; 행 25:4; 행 25:21에서 죄수들을 지키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마 28:4에서 "수직하던 자들"에 대해 사용되었다: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2) 테레오는 주어진 시점까지 '간수하다, 보존하다, 지키다' keep를 의미한다.
예를 들면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요 2:10), 소망 중에 기다리는 종말론적 기업(벧전 1:4), 수동태로 사람에 대해, 예를 들면 감옥에 있는 바울(행 25:21 상반절), 심판을 피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지키시는 타락한 천사들과 불의한 자들(벧전 2:4; 벧전 2:9; 유 1:6 하반절)과 또한 세상(벧후 3:7)이다.
다른 한편 마지막 형벌이 죄악된 세상을 위해 예비되어 있다(벧후 2:17; 유 1:13).
(3) 테레오는 '지속하다, 유지하다'라는 의미에서 부정어와 함께 '상실하다, 잃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유 1:6에서 이 의미를 나타낸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b) 전이된 의미.
(1) '보존하다' to preserve, '보호하다' to protect, '지키다' to guard를 의미한다. 테레오의 목적어는 제자나 교회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다.
① 그가 세상 가운데 행할 때 시험이나 타락의 위험에 노출된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요 17:11),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요 17:12);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 엔 토 오노마티("이름으로", 요 17:12)와 에크 투 포네루("악에 빠지지 않게", 요 17:15)는 서로 대응됨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여기서 엔(ejn, 1722)은 구격적 의미를 지니지 않고 전이된 공간적 의미를 지니며, 악의 세력과 대조하여 "당신의 이름을 믿는 믿음의 능력의 영역 안에서"로 번역될 수 있다.
② 계 3:10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변모하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공동체를 종말론적 시험에 대항하여(ejk, ejx, 1537) 보호하신다.
③ 그리스도인들의 영과 혼과 육이 흠없이 지켜지기를 바라는 바울의 소망도 종말론적 의미를 지니며, 파루시아에서 그리스도와의 친교와 관련된다(살전 5:23).
④ 유다서의 인사말은 부르심을 입은 자, 그리스도를 위하여 즉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통치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을 자에게 주어진다.
요일 5:18의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마귀와 죄로부터 보호해 주심과 그가 가능하게 하시는 성령 안에서의 삶이 마귀와 죄로부터 보호해 줌을 뜻한다.
⑤ 재귀 용법은 개인의 행동(사도 쪽에서의)을 부각시킨다: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거니와"(고후 11:9);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을 필요 조건으로 하는 그리스도인의 행실에 대한 언급과 함께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딤전 5:22).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 1:27).
⑥ 유 1:21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라는 표현에서 "하나님"은 주격적 속격이다(참조: 요 15:9; 요일 2:5; 요일 3:17; 요일 4:12).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심이 속격으로 표현되고, 인간의 반응이 이 동사로 표현된다.
(2) 비인격체 목적어와 함께 테레오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필수적인 기능이나 본질을 실제로 유지하는 것을 나타낸다. 예를 들면 "믿음을 지키다" 같은 것으로(딤후 4:7), 이것은 세속적 언어에서도 발견되나 여기서 특별한 기독교적 내용을 지니는 일종의 표현 형식이다.
① 엡 4:3에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키라"는 말은, 성령에 의하여 생겨난 일치는 시작부터 주어지며, 아직 달성되어야 할 어떤 것이 아님을 전제한다.
② 계 16:15의 복합적인 표현인 "깨어 자기 옷을 지켜... 자가 복이 있도다"에서 이 동사는 비유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옷은 유지해야만 하는 구원의 상태에 해당한다.
(3) 테레오는 '지키다, 준수하다, 이행하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특별히 신조나 명령, 규칙, 교훈에 관련되어 언급되었다.
① 청년에게 하신 말씀에서 그것은 모세 율법의 중요한 계명들을 말씀하신다: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7). 행 15:5에서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 요 9:16에서 "안식일", 즉 안식일 준수에 관한 명령을 지키는 것, 마 23:3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교훈, 막 7:9에서 그들의 전통(유전)을 따르거나 이행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② 교회 시대에는 로열법(royal Law)을 지켜야 한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초대 팔레스타인 공동체에서 전통적인 교리문답서들이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간주되어 엔톨라이(계명들)의 형태로 그리스도인들의 행실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진 것도 역시 마 28:20의 말씀에 비추어 고찰될 수 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③ 목회 서신에서 디모데는 그 명령을, 즉 규범적인 전승들을 파루시아 때까지의 기간 동안에 왜곡됨 없이 지키고 사용하라고 권면 받는다: "...내가 너를 명하노니...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딤전 6:13 이하).
④ 테레오의 이러한 용법은 특별히 요한의 문헌에서 흔하다.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은 하나님의 사랑에 지배 받는다고 본다. 그리스도를 향해 응답하는 사랑은 감정에 제한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의 순종하는 행실에서 표현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참조: 요 14:21). 엔톨라이(계명들)는 그들의 편에서 "새 계명"에 관련되어 있다(요 13:34).
여기서도 역시 표현 방식은 교리문답적인 전승에 관한 지식을 전제로 한다. 엔톨라이(계명들)는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계시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천부에 대한 예수님의 순종과 사랑이 출발점이요 본보기다(요 8:55; 요 15:10). 다른 한편 이것은 "내 계명을 지키는 것"은 "내 말을 지키는 것"(요 14:23 이하)과 같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요 14:15; 요 14:21에 유비하는 일련의 사상에서 다른 측면에서 표현된다. 이 테레오 톤 로곤은 예수님께서 전하신 메시지에 동의함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선택은 믿음을 예정하고, 따라서 순종을 예정한다(요 17:6).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신(전해주신) 계시의 말씀은 믿음과 순종의 명령으로 이들에 의해 전해진다: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터이라"(요 15:20). 믿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것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으며, 따라서 심판과 죽음에서 자유한다(요 8:51 이하). 베다니에 있었던 기름 부음 사건에서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요 12:7)은 아마도 '그녀를 가만히 놔 두어라. 그녀는 장차 있을 나의 죽음을 생각하고 이 일을 행했느니라'라는 의미일 것이다.
⑤ 요한 서신과 요한계시록은 기독교의 표식으로 가장 중요한, 명령을 지키는 것에 관한 요한 복음과 동일한 부류의 표현과 사상을 보여준다. 예컨대 요일 2:3; 요일 2:4; 요일 3:22; 요일 3:24; 요일 5:3에서 예수님의 명령의 "계명을 지키라"는 것이다. 계 12:17에서 예수님에 대한 증거와 결합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 요일 2:5; 계 3:8에서 "말씀을 지키는 것", 계 1:3; 계 22:7; 계 22:9에서 "기록한 것을 지키는 것"이나 "말씀을 지키는 것"(우리가 충실하게 보존해야 하고 변조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하는, 높임 받으신 그리스도의 말씀이신 요한계시록의 예언의 말씀 혹은 그 기록한 것을 지키는 것) 등이다.
계 3:3은 기독교 전승을 보호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성취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도 응답의 선행 조건이자 성령의 역사의 결과이다(요일 3:22; 요일 3:24).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동료를 향한 사랑과 인간의 삶을 함께 규정하는 명령(계명)에 대한 준수에서 나타난다(요일 5:2 이하).
계 2:26의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는 테레오 타스 엔톨라스(계명을 지키다)와 포이에오 타 에르가(일을 행하다)(참조: 요 8:39 이하; 요 6:28)가 융합된 문체상의 발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참조: H-G. Schutz; Walter Bauer; J. H. Thayer; H. Riesenf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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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nwvskw(1097, 기노스코) 알다 know, 이해하다 understand.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기노스코(Homer 이래)는 기본 어근 그노(gnw)에서 형성된 단어이며, 다음의 의미를 지닌다.
(a)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사물이나 사람 또는 상황을 감각으로, 특히 시각으로 '알아차리다, 지각하다, 인식하다'를 의미한다. 호머(Homer, Od.)애서 보는 것과 기노스코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경험의 세계에서 그렇게 인지되었던 것을 마음 속에 지적으로 정리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 단어는 또한 '경험하다, 배우다, 알게 되다'를 의미한다. 즉 경험된 것이 그것을 경험한 사람에게 알려진다.
(b) 이 단어는 '구별하다' distinguish를 의미한다. 그 유사한 것이나 서로 다른 것들 사이에 있는 어떤 현상에 대한 경험이나 인지가 이런 일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Homer, Il).
(c) 이 단어는 '인격적으로 알다'(Heracl., Frag.), '이해하다'(Homer, Od.), '알다'(친밀함이 인격적 지식을 가져온다). '~와 알고 지내다, ~와 친하다, 숙달되다, 노련하다'(Plato, Rep.)를 의미한다.
(d) 이 단어는 '결정하다, 판단하다'(Democr. Fr., Demosth).
(e) 형사 법원이나 민사 법원의 판결은 주어진 사실의 비중에 의거하여 내려지기 때문에 이 판결들은 기노스코의 수동형으로 표현되어 '재판을 받다, 판결을 받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f) 이 단어는 "아는 사이나 친밀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육체적으로) '알다', 즉 '~와 성적인 관계를 가지다'라는 헬라 용법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아마도 이 용법의 배후에는 헬라어 아닌 다른 언어에서 차용한 단어의 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단어의 어근이 라틴어 기그네레([아이를] 낳다)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 왔다(참조: H. Leisgang, Die Gnosis).
(g) 이 단어는 '확인하다, 입증하다, 확증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철학적 지식의 목적은 보는 것인데 이는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이 세상의 현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눈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영원하고도 실질적인 것을 보는 것이다. 이 확인은 원래 관찰로 말미암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노스코는 '통찰력을 얻다, 알아차리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통찰력의 대상은 궁극적으로 종교의 영역에 속할 것이다(Herach., Frag. 5).(참조: E. D. Schmitz; Bultmann).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기노스코는 70인역본에서 약 800회 이상 나오며, 히브리어 야다(알다)와 그 어형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라아(보다), 하자(보다), 샤마(듣다) 등 13개 단어의 역어로도 사용되었다. 헬라의 일반적인 태도와 마찬가지로 구약성경에서도 지식은 감각을 통해서 획득된다. 이미 알려진 것은 감각으로 나타나야 하며 그 자체는 그렇게 알려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듣는 것(듣다)과 보는 것(보다)에 관한 동사가 아는 것에 관한 동사와 병행되어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예: 출 16:6 이하; 신 33:9; 삼상 14:38; 사 41:20). 이것으로 우리는 70인역본이 라아(삿 2:7)와 하자(사 26:11)와 샤마(느 4:15)의 역어로 기노스코를 사용한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헬라와 히브리 사상에서 아는 것에 관한 개념들은 대체로 일치하며 이 두 경우에 감각을 통하여 얻는 경험이 기본적인 것이다.
(a) 70인역본에서 야다/ 기노스코는 '알아채다, 인지하다, 경험하다, 관찰하다'를 의미한다(예: 창 3:7; 창 41:31; 삿 16:20; 전 8:5; 사 47:8; 호 5:3).
(b) 야다/ 기노스코는 '구별하다' distinguish를 의미한다. "선악을 아는 것"(창 3:5; 창 3:22)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이다. 좋고 흉한 것을 구별하는 것은 필요하다(삼상 19:36). 어린 아이는 왼손과 오른손을 구별하지 못하며(욘 4:11) 또 선과 악도 구별하지 못한다(사 7:15). 후자의 구절의 문맥과 사 8:4에 나오는 이와 비슷한 언명은 이 언급이, 어린 아이는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을 구별할 줄 모른다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시사해 주는 것 같다.
좋고 흉한 것, 좌우와 같은 것에 대해 관찰하는 것은 결국 그것들을 구별하는 것이 된다.
(c) 야다/ 기노스코는 '배워서 알다' know by learning라는 의미를 지닌다(잠 30:3).
(d) 이 분사는 사냥(창 25:27), 학문(사 29:11-13), 애곡(암 5:16), 바다를 항해하는 일(대하 8:18),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는 일(삼상 16:16)에 능함을 묘사하는 어구에 나온다.
(e) 야다/ 기노스코는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을 표현한다.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창 29:5; 출 1:8; 삼하 3:25). 푸알 분사형은 '친척'(왕하 10:11 등)과 '아는 사람'(욥 19:14; 룻 2:1 등)을 지칭한다.
(f) 야다/ 기노스코는 '관계하다, 관심을 가지다'(시 1:6; 시 37:18; 시 119:79), '~와 관계를 맺고 싶다'(예: 신 33:9). 신학적인 문맥에서 자주 이 단어가 적절한 지식을 얻지 못해서 결국 관심의 결여를 초래하고 마는 것에 대한 문제로 나온다(예: 렘 8:7; 시 95:10).
(g) 야다/ 기노스코는 '성적 관계를 가지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를 알았다"고 하는 유명한 완곡 어법과 그 병행구들(창 4:1; 창 19:8; 민 31:17; 민 31:35; 삿 11:39; 삿 21:11; 왕상 1:4; 삼상 1:19)에서 남녀 쌍방의 성적인 관계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남색(창 19:5; 삿 19:22)이나 강간(삿 19:25)과 같은 성적 도착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h) 야다/ 기노스코는 '다른 사람과 인격적이며 친숙한 관계를 맺다'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름으로, 대면하여 모세를 아신다(출 33:17; 신 34:10).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이나(렘 1:5) 어떤 민족을(암 3:2) 아실 때 하나님께서 그를 선정하시거나 선택하신다(참조: 민 16:5 70인역본). 선택으로 이해되는 이 지식은 은혜롭고 자애로운 것이지만 이것은 인격적인 응답을 요구한다.
(i) 야다/ 기노스코는 일반적인 문제에 대한 지식 외에도, 다른 신들을 아는 것이든(신 13:3; 신 13:7; 신 13:14) 여호와를 아는 것이든(삼상 2:12; 삼상 3:7) 간에,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렘 10:25) 선지자들에 의하면,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렘 4:22). 애굽의 재앙은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애굽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 보내졌다(출 10:2 등). 그는 그가 하나님이심을 이스라엘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사 60:16) 그들을 파멸시키시고(겔 6:7) 회복시키실 것이다. 특히 선지자 에스겔은 위협할 때,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는 어구를 사용한다(겔 6:7; 겔 6:10; 겔 6:13; 겔 6:14; 겔 7:4; 겔 7:9;겔 7:27 등).
(j) 요약하면 희랍인들이 초연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또한 사물의 형이상학적 본질에 사변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반해, 구약성경은 지식을 끊임없이 인격적인 만남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구약성경이 하나님과 창조에 관해서 언급한 것을 보고서, 우리가 이 언급들을 존재론적 추론으로 여겨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하는 믿음의 선포로 간주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역사적 과거와 약속된 미래 즉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존재하고 있는 이 지상의 영역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를 찾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예배와 행동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적과 요구를 식별할 수 있었던 것이다.(참조: E. D. Schmitz; Bultmann).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기노스코는 신약성경에서 221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기노스코의 용법은 헬라의 용법과 구약성경의 용법과 매우 유사하다.
(a) '느끼다, 간파하다'(막 5:29; 눅 8:46),
(b) '주목하다, 알아 차리다'(막 8:17; 막 12:12; 마 26:10; 고후 2:4; 요 5:42; 요 8:27),
(c) '인정하다, 인지하다' recognize(눅 7:39; 마 12:15; 마 22:18; 갈 3:7; 약 2:20; 요 4:1; 요 5:6; 요 6:15),
(d) '듣다, (들어서)알다'(막 5:43; 막 15:45; 눅 9:11; 행 17:13; 행 17:19; 빌 1:12; 빌 2:19; 요 11:57; 요 12:9; 마 10:26과 병행구; 행 9:24; 빌 4:5).
(e) '확증하다, 확실히 하다, 확인하다' confirm(막 6:38; 막 13:28 이하; 눅 1:18; 고전 4:19; 고후 13:6; 요 4:53; 요 7:51).
(f) ① 알아채고 있다(의식)라는 의미에서 '알다' know(마 24:50와 병행구; 눅 2:43; 눅 16:4; 히 10:34; 계 3:3; 요 2:24 이하; 요 7:27; 요일 3:20).
② 또한 익히 앎이나 아는 사이라는 의미에서 '알다'(마 25:24; 눅 12:47 이하; 눅 16:15; 행 1:7; 롬 2:18; 롬 7:1; 고전 5:16; 요 1:48; 요 7:49).
③ 그리고 이해라는 의미에서 '알다'(눅 18:34; 행 8:30; 고전 14:9; 요 3:10).
(g) '구별하다, 분별하다' distinguish를 의미한다.
고전 14:7,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h) '~하는 방법을 알다' know how to.
마 16: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i) 경험을 통하여 '알다, 깨닫다' find out(요 13:58; 요 15:18; 요 19:4; 요일 2:3; 요일 2:5).
(j) '~와 관계를 맺다'
① 마 1:25; 눅 1:34에서 성적인 관계에 대해 사용되었다.
② 마 7:23에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나는 너희와 전혀 관계를 맺지 않았다'라는 의미이다.
③ 고후 5:21에서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다"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그가 죄에 대해 지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서 죄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이란 선언이 범죄 행위와 반어법을 나타내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④ 롬 7:7에서도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라는 문구는 '율법이 없었다면 인간인 나는 죄와 본질적인 관계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의역할 수 있다.
⑤ 고후 5:16에서 '~와 관계가 있다, ~와 관계를 맺다, 개인적으로 알다'를 나타낸다. 이 구절의 의미는 많은 논쟁의 주제가 된다. 상반절에는 오이다멘("우리가 아노니")이 나오며, 하반절에는 기노스코가 에그노카멘("우리가 알았노니")과 기노스코멘("우리가 아노니")의 형태로 나온다.
(k) 고전 5:11-21에서 바울은 자기를 개인적으로 공격하며 사도직을 공격하는 적대자들과의 논쟁에 관련되어 있다. 그들은 바울에게는 사도라고 확증할만한 눈에 보이는 영적인 특성, 예를 들면 무아지경의 현상들이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고전 5:13). 그들은 그를 자기 자신만을 칭찬하는 '허풍선이'라고 비난했던 것 같다. 바울은 고전 5:11("우리가 ... 사람을 권하노니")과 고전 5:12("우리가 ...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에서 그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듯하다. 바울의 변호 중에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그래서 상상된, 눈에 보이는 영적인 특성을 가진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하는 언급도 부분적으로 들어있다(고전 5:14 이하).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본 성령과 능력의 분명한 증거에 따라서 지금부터-모든 가치의 전도, 즉 시대의 전환점을 의미하는 그리스도와 관련된 사건 이후로-"우리가 ...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못하노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것을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고전 5:14). 이것이 얼마나 명백한 것인가를 나타내기 위해 바울은 모든 사람이 분명히 알 수 있는 언명을 고전 5:16 하반절에 삽입하고 있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즉 그와 그렇게 관계하지 않고 오직 우리가 섬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만 관계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주이시며, 그가 주님이시라는 것은 외면상으로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과 사도라고 하는 그의 주장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던 것 외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외적인 판단과 일반적으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준에 예속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오직 새로운 피조물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외적 현상에 의한(엔 프로소포, 고전 5:12) 판단을 포함하여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도다"(고전 5:17). 이 논쟁에 비추어 볼 때, 바울이 고후 5:16에서 그가 지상의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알았다는 것을 확증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마찬가지로 바울에게 있어서 이것은 역사적 예수님의 의미와 관계를 띠고 있지 않은 것이다.
(l) 기노스코는 '인정하다, 알아주다'를 의미한다.
① 고전 4:19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가 갈 때 교만한 자의 말이나 그들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즉 중요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② 계 3:9에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높임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이방인?) 기독 교회에 와 보면 부활하신 이가 그들을 사랑하심을 인정하게 되리라고 약속하셨다(계 2:23). 이렇게 하심으로서 그는 유대인의 종말론적 소망을 뒤짚어 놓으셨다(참조: E. Lohmeyer).
③ 롬 7:1에서 "법을 아는", 롬 2:18; 행 22:14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와 같은 문구들은 단순히 이론적인 지식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적용되어 인간의 순종을 요구한다는 것에 대한 인지를 암시한다.
④ 요 7:29에서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라고 한 바리새인들의 말은 일반 백성들에 대한 잘 다듬어진 랍비 학자들의 비웃음을 반영해 주는 것이다(참조: SBⅡ 494-521). 이것은 일반 백성들이 실제로 율법을 알아 율법에 순종했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추종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을 기록하면서 요한은 여기서 율법이 바로 그들 자신을 지적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무의식적으로 비꼬는 것이다(참조: 요 7:42; 요 5:29 이하; 요 11:49 이하). 요 7:51에서는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고 반박하고 있다.
⑤ 롬 1:21에서 하나님을 알았던 자들의 생각이 허망하여졌다는 말은 헬라 사상의 견지에서 모순된 것으로 보였음에 틀림없다. 그들의 허망함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결과다(참조: 지혜서 13:1).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반드시 그에 합당한 찬미와 감사를 포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거부한 이교도들은 이 지식을 단순한 지적인 활동으로 격하시켰으며 그들이 지혜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상 어리석음일 뿐이었다(롬 1:22 이하). 이교도들이 분명히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하더라도, 그들이 하나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그들은 핑계할 수 없게 되었다(갈 4:9; 요 1:10; 고전 1:21; 갈 4:8).
⑥ 엡 5:5; 약 1:3; 약 5:20 등에서 지식에 관한 명령과 권유는 이 은사를 붙잡아 변화하는 생활 상황에서 이것을 올바르게 사용하라는 요구인 것이다.
⑦ 눅 10:11에서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인정해야 한다. 행 2:36에서 "이스라엘의 집"은 오순절 사건에 비추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마 24:43의 비유에 나오는 명령문도 참조하라.
⑧ 고후 8:9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즉 "부요하게 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을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하게"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실제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에 대해 언급한다. 우리는 이것을 리쯔만(Lietzmann)이 해석한 것처럼 단순히 그리스도께서 관대하심의 본이시다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H. Lietzmann, An die Korinther).
(m) 기노스코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선택하시는 지식을 언급하는데 사용되었다.
-딤후 2:19(민 16:5을 인용함),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찌어다 하였느니라".
-고전 8: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느니라".
-갈 4: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여기에서 하나님의 지식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똑같이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모든 행동을 포함한다. 이 지식은 영원히 하나님의 피조물에게 유효한 것이며 죄와 불순종에 대한 승리이다. 롬 10:2은 이에 대한 일종의 상대 구절이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을 위한 유대인의 열심을 인정하긴 하지만 이것이 카타 에피그노신("[참된] 지식을 좋은 것")은 아니다(참조: Arndt, 291). "이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보다 깊이 통찰하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결핍되어 있는 지식은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지식과 인지이다"(E. Gaugher, Der Brief an die Romer).
(n) 기노스코는 어떤 구절에서 신학적이고 이론적인 지식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① 마 13:11(참조: 막 4:11TR)은 오직 제자들에게만 허락된 "천국의 비밀"에 관한 감추어진 지식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지식이 그들을 그 외의 경우에는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는 비유의 권위 있는 해석가가 되게 했다.
롬 6:6에서는 신학적인 진리에 관한 지식, 예를 들면 세례에 관한 특별한 가르침에 대한 지식까지도 삶으로 나타내는 순종을 그 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지식의 명백한 목적은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에 있는 것이다.( R. Bultmann; E. D. Schmitz).
※ 영지주의와 논쟁에서 나타난 용법 등.
신약성경 시대에는 자기들이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전 1:18-2:16; 고전 13:12 이하; 골 2:8; 딤전 4:7; 딤전 6:20).
신약성경 기자들은 자주 사도적 케뤼그마(khvrugma, 2782: 선포, 전도)에 대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순례 설교자들과 충돌하곤 했다. 디모데는 이른바 거짓된 지식(그노시스)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도록 명백히 경고받고 있다(참조: 딤전 6:20).
계 2:24에는 "사단의 깊은 것"을 배웠다고 주장했던 적대자들이 언급되어 있다. 이 기자는 풍자적이면서 올바른 비평적인 판단을 가지고 "하나님의 깊은 것"을 배웠다고 하는 그들의 주장에 항변했던 것 같다(E. Lohmeyer).
(a) 바울 서신.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주장하는 지식은 이처럼 바울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 8:2). 이것은 고전 15:34과 비교될 수 있는데, 여기에서 바울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아그노시안 ... 데우)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바울은 그가 지식으로 이해한 것을 설명하라는 강요를 받은 것이다. 그는 지식을 이미 알려져 있는 것으로서 오직 수동적으로만 표현할 수 밖에 없음을 알았다(갈 4:9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이라는 어구를 첨가시킴으로서 인간이 능동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하는 사상을 시정했다). 이미 알려져 있는 이러한 것은 인간이 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이전의 어떤 능동적인 이해와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상응하는 것이다(고전 8:3). 하나님에 대한 완전하고도 참된 지식은 오히려 종말론적 약속과 기대의 일부이다(고전 13:12). 바울은 육을 입고 지상에 오신 존재를 간단히 무시해 버림으로써, 하나님에 의해 알려진 것과 인간이 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일치시키는 영지주의자들의 에스카톤(목적)에 대한 환상적 기대를 완전히 거부했다. 왜냐하면 바울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우리를 이미 알고 계셨다는 것을 전적으로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노스데나이(하나님에 의해 알려진 것)는 선택을 포함하고 있다(참조: G. Bornkamm). 제 아무리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에서 자신을 계시하심으로서 전달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주신 영이다(참조: 고후 4:6). 에스카톤 이전에는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 때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빌 3:10; 참조: 골 2:1 이하). 그러나 그리스도는 신학적인 사색을 통해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에 의해서 만나지게 될 때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주로 고백하게 될 때 알려진다(빌 3:8). 이러한 고백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된다. 이러한 고백이 없는 곳에서 지식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은 쓸데없는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고전 14:38).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 Love은 하나님에 의해 아시는 바가 되는 것이다(고전 8:3).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복종과, 죄의 주권으로부터의 해방(참조: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0, 참조: 롬 6:3)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나타내는데 열심히 봉사하는 곳에서 구체화되는데, 한편으로 사람들은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의 약속된 부활에 이르려한다(빌 3:10). 참된 지식은 하나님께서 사도의 증거를 통해 어느 곳에서나 나타내셨던 지식이다(고후 2:14). 이것은 최종적으로 완성된 지식은 아니다. 지금 이 지식은 단편적일 뿐이지만(고전 13:12) 완성을 기대한다. 바울이 몬 1:6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지식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영지주의자들은 교만하여 이 지식에 대한 어떠한 것도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내가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 풍자적으로 요구했다(고전 14:37). 이 모든 점에 비추어 볼 때, 바울의 논법이 본질적으로 구약성경적 지식 개념의 범위 안에 머물러 있음이 분명하다. 동시에 그는 이 개념을 종말론적으로 확대하여 완성시켰다.
(b) 요한의 기록.
지식이 예수님과 요한 자신의, 그리고 요 10:14 이하에서는 예수님(아들)과 하나님(아버지) 사이의 상호 내적인 친교를 나타낼 수도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영지주의적 배경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레미야스(J. Jeremias)는 불트만(R. Bultmann)이 그의 저서(The Gospel of John, 1971, 380 이하)에서 주장한 것처럼, 이것이 헬라의 신비주의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셈족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식을 친교로 묘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알고 있는 자, 즉 지식을 전달하는 하나님의 사자와 완전한 초월자로 알려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동등성에 의거한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영지주의적, 이원론적 대조는 세상이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진리의 영"(요 14:17)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언명에 의하여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미움을 받은 것은(요 15:18; 요 16:2)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제거할 수 없는 구별의 결과로 이해되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마찬가지로 계시의 목소리도 하나님이 아닌 마귀를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자들에 의해서 그렇게 인식되어질 수 없다(참조: 요 8:42-43). 반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분에 대한 지식을 포함하며, 영생과도 동일시되었다(요 17:3). 구원을 가지고 오는 이 지식은 외부로부터의 부르심, 즉 이해력, 말하자면 진리 되신 분을 아는 능력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도래를 통하여서만 가능하다(참조: 요 5:20).
지식에 관한 요한의 언어와 요한의 견해가 영지주의의 용어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만약 우리가 기독교의 메시지를 받아들인 자들과 이 메시지를 반대한 사람들이 이 메시지를 표현하는 형태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의 목적은 영지주의자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들의 언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입장에서 영지주의자와 직면하여 자기 자신의 무기를 가지고 그를 공박했다. 이것이 복음을 신화로 만들거나 요한을 영지주의자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었으나(참조: 요 1:18), 하나님은 그의 보내심을 받은 자, 즉 그 아들에게서 알려지게 될 것이다(눅 10:22). 그는 육체가 되셨던 로고스(말씀)이시다(참조: 요 1:14; 요일 1:1-4).
예수님을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 14:9; 요 12:45). 그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은 아버지도 알 것인데, 그 이유는 이 사람이 그를 이미 알았고 또한 보았기 때문이다(요 14:7). 따라서 하나님과의 교제는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만 행해질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 교제가 예수님의 하나님과의 교제에 상당하기 때문이다(요 10:15). 이 두 가지 수준의 교제는 기노스코로 표현된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람들 사이에 나누는 교제는 서로를 아는 지식에 의해서 효과적인 교제가 되지만, 이 교제가 영지주의에서와 같이 인간을 신격화시키거나 인간을 이 세상과 역사에서 완전히 제거시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요한에게 있어서 지식은 한 분이신 하나님과 역사적인 통로를 통해서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그 형태를 취한다. 자기 아들을 보내심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요 17:23; 참조: 요일 4:19 이하)과 세상에 대한(참조: 요 3:16)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아들은 자기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의 척도에 따라 자기의 백성들을 사랑하셨다(참조: 요 15:9; 요 17:26). 따라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의 지식은 역사의 영역 안에서 사랑으로 표현된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아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아버지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입증하셨듯이(요 14:31), 그를 아는 자도 하나님의 명령, 무엇보다도 자기 형제를 사랑하라는(요일 4:7 이하; 요일 2:7-11) 명령을 지킴으로서(요일 2:3 이하), 또한 죄를 짓지 아니함으로써(요일 3:6), 자기의 지식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처럼 기노스코는 두 가지로 적용된다. 첫째로, 이 지식은 아들의 보내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을 의미하며(요 17:8; 요일 3:6), 둘째로는 선포된 메시지에 복종하는 것으로도 묘사되는 이 지식에 기초한 사랑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요일 4:6). 이러한 지식은 이미 지금 여기에서 영원한 생명 Life이 되었는데(요 17:3)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에서 유래된 역사 속에 있는 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요한의 개념은 영지주의의 개념과 고의적인 정반대적인 것으로 두드러진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서 믿음과 지식을 똑같은 수준 위에 두는 것도 적어도 지식과 대조시켜 믿음을 낮게 평가한 영지주의에 대한 논박의 일부분이다. 요 17:3이 영생을 지식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지만 요 3:36은 믿음에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베드로의 고백에 관한 요한의 견해에서(요 6:69) 우리는 믿음을 지식에 종속하는 제일 첫 단계로 보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으나, 요일 4:16에서는 이 순서가 "알고 믿었노니"로 되어 있다.
오직 자기 자신의 구원에만 관심을 가지는 영지주의의 자기 만족은 형제 사랑(요 13:35)과 단합(요 17:21 이하)에서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과는 반대된다. 더욱이 이 배후에 있는 궁극적인 목표는 아들이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세상이 믿게 되고 또한 이 계시가 온 세계에 알려지게 될 때에만 달성될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우주(창조)와 구원에 대한 영지주의의 이원론을 요한이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영지주의자에게 있어서 이러한 이원론은 극복될 수 없는 것인데, 그 이유는 이 이원론은 우주적인 타락 이전에 이미 정해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지주의의 견해에 따르면 우주는 완전히 그리고 치명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구원 받을 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참조: 요 1:1 이하; 요일 2:14).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 대한 증오로 표현되는 알지 못하는 것은 나타난 계시를 믿지 않는 결과이며(요 8:42 이하) 이것은 결과적으로 죄를 초래한다(참조: E. Kasemann). "만약 '유대인들'이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그들이 참으로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도 이 지식을 심화시키고 풍요롭게 하는데 관심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만 들으려고 할 뿐, 새로운 것을 들어 그들이 전에 알고 있던 모든 것과 그와 아울러 이런 지식의 상태 곧 자기에 대한 그들 자신의 이해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는 들을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왜 들을 수 없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이 영역에서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것과 어떤 것을 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이며 동일하다는 점에 대한 이해 부족을 나타내어 줄 뿐이다"(R. Bultmann). 지식과 믿음에로의 부름은 이렇게 세상을 위해서도 남아 있다. 아들을 보내심으로 나타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제 실제적인 것으로 나타나서 실재의 새로운 차원을 연 것이다.
요한의 어휘가 영지주의와 명백히 유사성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의 주제는 영지주의의 신화적 사변보다는 구약성경의 전승에 나오는 지식의 개념과 훨씬 더 가깝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분명하다.(참조: E. D. Schmi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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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gavph(26, 아가페) 사랑 love.
1. 성경 외의 용법.
명사 아가페는 아가파오(ajgapavw, 25: 사랑하다)에서 유래한 후기 헬라어이며, 성경 외의 문헌에서는 단 한번 발견되는데, 바로 여신 이시스(Isis)에게 아가페라는 칭호가 붙여졌다(P.Oxy. 1380, 109; A. D. 2세기).
--> 아가파오(ajgapavw, 25)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아가페는 70인역본에서 19회 나오며 아하바(160: 사랑)의 역어로 사용되어 연애(삼하 13:5), 남녀의 사랑(렘 2:2)에 대하여 주로 사용되었으며, 아가서에서 주로 나타난다(아 2:4 이하; 3:5, 10; 5:8; 7:6; 8:4 이하).
70인역본이 의미가 복잡한 에로스보다는 오히려 보다 단순한 단어인 아가페를 사용하는 것도, 인간의 모든 사상, 감정, 행위 그리고 예배가 하나님의 선행 작용에 대한 하나의 반응이기 때문이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아가페는 신약성경에서 116회 나오며, '사랑, 애정, 호의, 자비심'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단어는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아가페는 인간의 사랑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① 고전 8:1; 고전 13:4-고전 13:8; 빌 1:9; 롬 13:10; 마 24:12; 롬 12:9; 고후 6:6; 딤전 1:5; 요일 4:16; 고전 13:1-고전 13:3; 빌 2:2; 고전 14:1; 딤전 6:11; 딤후 2:22; 골 3:14; 벧후 1:7; 골 1:8; 살전 1:3; 고후 8:8; 히 10:24; 빌 2:1; 벧전 5:14; 몬 1:7; 롬 14:5; 엡 5:2; 골 4:21; 엡 4:15; 고전 16:14; 엡 3:17; 엡 4:2; 골 2:2; 살전 5:13; 엡 4:16; 갈 5:13; 갈 5:6; 몬 1:9; 살전 3:6; 살전 5:8; 딤전 1:14; 딤후 1:13; 몬 1:5; 엡 6:23; 딤전 2:15; 딤전 4:12; 딤전 6:11; 딤후 2:22; 딤후 3:10; 딛 2:2; 계 2:19; 고전 13:13; 골 1:4 이하; 살전 1:3; 살전 5:8; 딤후 1:7; 롬 12:9; 고전 6:6; 벧전 4:8; 갈 5:22; 롬 15:30; 골 1:8; 살후 2:10; 엡 1:15; 골 1:4; 살전 3:12; 살후 1:3; 고후 2:4; 고후 2:8; 벧전 4:8; 요 13:35; 고후 8:7; 고전 15:24.
② 하나님을 향한 사랑. 눅 11:42; 요 5:42; 요일 2:15; 요일 3:17; 요일 4:12; 요일 5:3; 살후 3:5; 고후 7:1; 히 6:10.
(b) 아가페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요일 4:9; 요일 4:16; 롬 5:8; 요일 3:1; 엡 1:4이하; 엡 2:4; 고후 13:13; 요일 4:7; 고후 13:11; 요일 4:8; 요 15:9; 요 15:10; 요 15:13; 롬 8:35; 고후 5:14; 엡 3:19.
②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 요 15:10; 요 17:26; 골 1:13.
(c) 아가페는 초대교회에서, 친교의 입맞춤이라는 형태로 표현되었다. 이 입맞춤은 회중 예배시, 하나의 정규적 순서였었다(예: 롬 16:16; "거룩하게 입 맞춤으로"[엔 휠레마티 하기오]). 벧전 5:14에서 "사랑의 입맞춤"(엔 휠레마티 아가페스)이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사실상 이 의식(rite)의 상세한 사항들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d) 유 1:12에서 복수 아가파이스는 "애찬"(love-feasts)을 의미한다: "저희는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의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이 애찬은 '초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예배와 관련하여 형제적인 사랑을 북돋우고 표현하기 위해' 함께한 식사를 말한다. 이단자들은 애찬에 참석하는 것을 자기네의 탐욕과 부도덕을 증진시키는 기회로 삼았으며, 심지어 고린도 교회는 이단자들로 인하여 분열되어 파당이 생기고 술취한 자들의 난장판이 되기도 하였다(고전 11:17-고전 11:22).(D. R. Rose).
[아가페는 초대 교회 의식들 중의 하나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단지 암시적으로 나타나 있을 뿐이다. 고전 11:17이하는 성찬식이 평상의 식사와 함께, 후에 "애찬"(love feast, 아가페)이 주의 만찬 자체로부터 분리되었으며, 그 본연의 위치에서 거행되었다(참조: 유 12; 벧후 2:13; Ign. Smy. 8:3; Clem. Alex., Paedogogus 2, 1).
그 차이점은, 설교가 행해지는 예배나 성찬식 예배의 중심이 기쁨에 찬 신앙의 선포였던 반면, 공동 식사의 주요한 의의는 그들이 아가페 속에서 함께 나눈 특별한 친교의 실시에 있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분명히 이와 같은 예배는 신도들이 사회적 자선 행위를 통해 자기들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참조: 행 6:1이하).
(W. Gunther; H.-G. Link, TBZNT)]
(e) 아가페의 헬라어 의미는 대등한 사람들간의 존경과 호의이다. 기독교의 아가페는 하나님과 그의 자비 앞에서는 모두 똑같이 가치없음을 자각함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사랑(caritas)의 정신에 의해 형제들에 대한 태도와 교제가 결정된다. 따라서 이 새로운 형제애는 에로스로 인해 타락하고, 승화된 에로스에 의해 스스로를 초월하려고 헛되이 시도하는 세상 안에서 성장하여 간다. 바꾸어 말하면 바라지 않고 주는 사랑을 아는 교회가 성장한다. 감각과 초감각이 혼합된 신비적 사교들이 아 뮈스테리아 아가페스(사랑의 비밀)의 맑고 깨끗함 앞에 굴복한다.(E. Stauffer).
초대 교회에서 형제들과 자매들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던 여러가지 이름들은, 아가페(agape)에 기초를 둔 이 새 공동체가 그들 스스로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이해했다는 증거이다.(W. Gunther, H.-G. Link).(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 Stauffer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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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gaphtov"(27, 아가페토스) 사랑하는, 친애하는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아가페토스는 동사 아가파오(ajgapavw, 25: 사랑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사랑하는, 친애하는'을 의미하며, 인사에 사용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형용사 아가페토스는 약 22회 나오며, 히브리어 야히드(3173: 유일한, 단 하나의, 유일하게 태어난)의 역어로 7회 나온다.
구약성경에서 나오는 야히드를 거의 모두 아가페토스(사랑하는 자)로 번역한 것은(창 22:2; 창 22:12; 창 22:16; 삿 11:34; 암 8:10; 슥 12:10; 렘 6:26) 아마도 독자가 부모에게 특별히 소중하고 가장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독자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특별히 소중하고 가장 사랑하는 자'를 지적하기 위해 그렇게 번역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가페토스는 야디드(3039: 사랑하는, 소중한)의 역어로 5회(시 60:6; 시 84:1; 108:7; 127:2), 도드(1730: 사랑하는)의 역어로 1회(사 5:1), 아헤브(157: 사랑하다, 분사로는 사랑하는 자, 친구)의 역어로 1회(슥 13:6), 악키드(3357: 매우 귀중한, 귀여운)의 역어로 1회(렘 3:20) 나오며, '사랑하는, 사랑하는 자, 친구'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아가페토스는 신약성경에서 약 60회 나오며, '사랑하는, 친애하는, 좋아하는'을 나타낸다.
형용사 아가페도스는 신약성경에서 하나님과 그의 아들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하지만(막 1:11; 눅 9:7; 마 12:6; 마 12:8; 벧후 1:17의 "사랑하는 아들", 고유의 이름과 함께 아델포스와 결합되어 사용되기도 하고(엡 6:21; 골 4:7; 골 4:9; 벧후 3:15; 참조: 골 1:7; 골 4:14; 딤후 1:2) 인사말로 사용되기도 한다("사랑하는 자여": 요삼 1:2; 요삼 1:5; 요삼 1:11; 롬 12:19; 고후 7:1; 고후 12:19 등). 그리스도인들은 롬 1:7에서, 롬 11:28에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로 불리운다. 살전 2:8에서 바울은 독자들에게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아가페토이는 또한 딤전 6:1 이하의 종들에 대한 교훈의 끝에 나타나는데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로서 그리스도인 상전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참조: 롬 11:28; Ign. Phld. 9:2)(E. A. van Leeuwen).(참조: G. Schnei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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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evw(3404, 미세오) 싫어하다, 미워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미세오(Homer 이래)는 미소스(mi'so": 증오)에서 유래했으며,
(a) '싫어하다, 미워하다, 혐오하다, 배척하다'를 의미한다.
(b) 미세오는 어떤 행동에 대한 반감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나 심지어 신에 대한 인간의 적개심을 의미한다. 아에스퀼루스(Aeschylus)의 비극에서 신들은 악한 행위와 행악자들을 미워하는 것, 희극에서는 신들은 꼴사나운 욕정을 싫어하는 것을 나타낸다. 에픽테투스는 인간적 충동의 하나인 미움은 마땅히 극복되어야 하고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만다야교 문헌 안에는 우리가 미워하는 바를 이웃에게 행하면 안된다는 황금률과 더불어 미움에 대한 금지가 나온다.
2. 70인역본의 용법.
미세오는 70인역본에서 약 15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샤네(미워하다, 증오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미세오는 70인역본에서 형제를 시기하여 미워하는 것(창 37:2 이하), 아내들이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창 29:31, 33; 신 21:15 이하; 22:13 이하; 사 60:15),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출 20:5; 신 5:9; 신 7:9-11), 바른 지식이나(잠 1:22, 29), 의로운 사람(시 34:21; 시 69:4; 시 9:13; 잠 29:10)을 미워하는 것, 악을 행하는 자를 미워하는 것(렘 44:3 이하; 슥 8:17; 말 2:6; 호 9:15; 렘 12:8), 자신을 미워하는 것(잠 15:32)을 나타내며, 원수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신 7:15; 30:7; 삼하 22:18; 시 18:17 등).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미세오는 신약성경에서 39회 나오며, 그 중 요한의 기록에서만 20회 사용되었다.
(a) 사람들 사이에서의 미움, 혐오. 미세오는 70인역본에서처럼 신약성경에서 여러가지 어감을 지닌다. 이 단어는 우선적으로 종교적 배경 없이 인간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 혐오를 나타낸다.
마 5:43에서 예수께서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을 인용하실 때, 그것은 레 19:18의 명령을 상기시킨다. 유대교는 이 명령에 대해 그릇되게 제한시켰는데, 사실 이 명령의 후반부는 증명되지 않은 것이다. "이 명령 전체는 예수님 시대에 일반 이스라엘인들의 친구와 원수를 향한 태도를 결정지우는 대중적인 금언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구약성경 자체가 아니라 구약성경에 대한 특정한 해석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미움을 미움으로 갚는 것을 기본적으로 금하신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눅 6:27).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사람,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명하신다. 예수님은 사람들에 대한 거룩한 증오를 인정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그는 구약성경에서, 그리고 특히 유대교에서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을 폭로한다. 마 6:24; 눅 16:13에서 서로 상반되는 아가판(사랑)/ 미세인(미움)은 독특한 의미를 풍긴다. 이 두 구절은 신 21:15-17에 근거하고 있다. 눅 14:26에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b) 하나님의 공동체에 대한 미움. 복음서는 현재(누가복음, 요한복음)와 미래(특히 마태복음, 마가복음)의, 하나님의 공동체를 핍박하는 미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누가복음의 유년 기사에서 의인은 이미 원수들의 공격을 받으며 미움을 받고 있다고 한다(눅 1:71). 미움을 받는 것은 제자들의 운명이기도 하다(눅 6:22; 눅 6:27).
예수님의 예언에서 미세인은 신학적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묵시적 미래의 도래요 표징이다(마 10:22; 마 24:9; 막 13:13; 눅 21:17). 공관복음서의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의 오심은 미움으로부터의 구원(눅 1:71), 미움에 대한 승리(눅 6:22; 눅 6:27) 뿐만 아니라, 또한 미움의 증가를 의미한다(마 10:22; 마 24:9 이하).
(c)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미움. 눅 14:26(마 10:37); 요 12:25에 기록된,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은 충격적이다: "예수님과 함께 일하고 예수님의 동료가 되기 위한 조건은, 자신의 목숨까지 포함하여 우리가 사랑해야만 할 모든 것을 미워하는 것이다. 이것은 심리학적인 의미에서 미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의 지혜 문헌에서 말하는 바와 같은 단념, 포기, 거절, 부인을 뜻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될 자들은 예수님에게 절대적으로 헌신해야 한다. 그들은 다른 무엇이나 어느 누구에게라도 얽매여서는 안된다. '미워하라'는 말은 제자들의 분리를 요구하는 것이며, 아무든지 무엇이든지 더 사랑하지 말라는 경고가 시금석이다. 이러한 포기는 심리학적이거나 광신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d) 하나님의 거부하시는 미움.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미움의 사상은 구약성경을 상기시킨다.
롬 9:13에는 말 1:2 이하가 선택의 교리와 관련하여 인용되어 있다: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그러나 이 예언적 말씀에는 선택에 대한 특정한 주장이 선행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과는 무관한 하나님의 자유로운 뜻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선택의 비밀이다. 하나님의 미움은 그의 완강하심의 수수께끼이다. 하나님의 미세인은 주님이자 심판자로서의 하나님과 관련된다.
계 2:6은 예수님과 에베소 교회의 미움을 언급한다. 즉 에베소 교회와 예수님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한다. 여기서 미움은 차별과 거부, 형벌과 심판을 나타낸다. 공동체는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유혹을 거부한다.
따라서 히 1:9이 시 45:7의 말씀을 예수님의 주되심에 적용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예수 그리스도는 의를 인정하고 불법을 거부하였다. 이리하여 주님이자 심판자로서의 예수님이 여기서 묘사된다.
(e) 요한복음에서 사랑과 미움. 아가판과 미세인의 대조는 요한의 사상에서 절정에 이른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사랑(**)의 운동(cmovement)은 미움(**)의 우주적 운동(movement)과 상충하게 된다. 이 둘은 배타적이면서 포괄적이어서 하나님과 세상의 본성을 드러낸다. 하나님, 그리스도, 제자들, 공동체에 대한 세상의 이러한 미움에는 참으로 죄와 살해가 놓여 있다. 여기서 빛이 어두움으로부터 차별화된다. 악을 행하는 자는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다(요 3:20). 빛을 미워하는 것은 어둠의 세력에 의해 눈이 멀어 그것에 이끌려 다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미워하지 않는다. 미워하는 것은 빛에 적대하는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요. 빛을 거부하는 것이요, 빛의 영역을 피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요한의 사상을 정확히 이해한다면 이 뿌리깊은 미움은, 하나님은 빛이요 사랑이시라는 사실의 대응물이다. 바로 그리스도가 세상의 빛이요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이기 때문에 세상의 미움과 적대가 강조된다. 불법의 비밀이 세상의 '미움' 속에 감춰져 있다.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한다(요 7:7; 요 15:18).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다(요 15:23 이하). 세상은 또 제자들도 미워한다(요 15:18; 요 17:14; 요일 3:13). 빛의 영역 안에 사는 것은 필연적으로 어둠의 미움의 타켓이 된다. 이 영역에 살지 않는 자는 미움을 받지 않는다(요 7:7).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는 경고는 요한일서에서 특별한 신학적 중요성을 가진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빛이 아닌 어둠의 영역에서 사는 것이다(요일 2:9; 요일 2:11; 요일 3:15; 요일 4:20). 요한일서는 어떻게 이러한 미움이 표현되는가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의미는 어둠의 세력이 형제들과의 관계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미움은 귀신적인 추상적 세력이 된다.
물론 기억해야 할 것은 요한에서 미세인의 이와 같이 더 깊은 개념과 함께 이전의 전승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공관복음서의 제자직의 조건의 영향을 요 12:25에서 발견한다. 시편 기자의 불평(시 35:19; 69:5; 고난의 시편)이 요 15:25에서 반향된다. 계 2:6은 구약성경의 거룩한 미움과 연관되어 있다.
(f) 롬 7:15. 로마서 7장의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의 비참한 처지에 대한 묘사에서 우리는 롬 7:15의 말씀을 본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여기서 델레인(원하는 것)과 미세인(미워하는 것)이 부합한다. 자아의 긍정적인 의지와 부정적인 의지가 행위를 낳지 않는다. 행위는 보다 더 강력한 죄(롬 7:17)와 육신(롬 7:18)이 일으키는 것이다. 여기서 미세인이 에고(나)에 의한 거부를 나타낸다는 사실은 부차적인 것이 아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단지 원치 않는 바를 행하게 될 뿐만 아니라 미움과 거부(미세인)도 행하게 된다.
(g) 미움의 개념의 기타 측면들. 눅 19:14; 계 17:16에서 미세인은 보다 세속적인 의미를 지녀, 정치적 반목을 나타낸다. 계 18:2에서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는 '하나님과 인간에게 미움받는 새'를 뜻한다. 계 2:6; 계 17:16; 계 18:2을 비교하면 이 용어가 묵시적 전승에서 많은 의미들을 획득함을 알 수 있다. 엡 5:28 이하의 훈계는 정혼한 아내를 사랑할 의무를 남편에게 지우는 것이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아내는 그에게 속하지 아니한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의 제 2의 에고(나)이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엡 5:29). 에베소서는 하나님이 뜻하신 생명의 질서와 인간 경험을 반복하여 말한다. 물론 이러한 것들도 예수님의 제자직으로 인해 제한되는 것은 사실이다(참조: 롬 13:14).
딛 3:3에 따르면 미움은 구세대(aeon)의 본질에 속하는 것으로서, 예전에 그리스도인들이 그 속에서 가증스럽게 행하고 서로 미워하곤 하던 생활에 속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악덕에 관한 결론은 유대교의 사상과 부합하며, 인간 관계의 완전한 붕괴를 드러내 준다. 우리는 여기서 미세인에 관한 요한의 개념을 상기한다. 하지만 여기서 그 사상은 독자적인 중요성을 지니며 연쇄적인 사상의 일부분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다.
유 1:23은 다소 이상하다: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여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싸워서 진 거짓 교사는 교회의 자비를 경험하더라도, 그는 위험스러우므로 그와의 모든 영적 혹은 육체적 접촉을 피하라는 뜻이다. 더럽힘이란 방탕이란 의미에서 문자적으로 취할 수도 있고, 영적인 것이든 귀신적인 것이든 인간의 정신적 태도와 힘이 그의 옷에 스며있다는 고대의 대중적인 신앙의 견지에서 이해될 수도 있다(막 5:27 이하; 행 19:11 이하).
끝으로 유 1:23 배후에는 신약성경에서도 역시 채택된 하나님의 증오라는 구약성경의 사상이 놓여 있다(참조: 계 2:6). 그러나 악에 대한 이러한 증오가 인간과 물건들에게도 확대되는가 하는 의문은 남아있다(유 1:23). 만약 그렇다면 이 미세인은 이 세대와 우주의 악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대의가 분리됨을 신학적으로 암시하며 따라서 공동체에게 그것은 거짓 교사를 피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본문이 강조하는 것이다.
(h) 개념의 독특성.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미워하지 말라고 명하신다(눅 6:27). 사도들은 형제들을 미워하는 것(요일 2:9; 요일 2:11; 요일 3:14; 요일 4:20), 인간의 서로 간의 미움(딛 3:3)에 대해 말하며, 이것들은 어둠과 구 세대에 속한 것이라고 선포한다. 그러므로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모든 정욕은, 일반적인 것이든, 국가적 혹은 종교적인 것이든 뿌리에서부터 공격 당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 거절하고 거부하는 거룩한 증오의 사상은 신약성경에서 역시 순화된다(구약성경에서 이 사상은 동기와 사람 양자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다).
신약성경도 악에 대한 거룩한 거부와 거절을 가르치지만 이것은 사람이 아니라 사물에게 향한 것이다. 지고한 사랑의 법은 결코 도전받지 않는다.
계 2:6의 미움도 니골라당의 행위를 향한 것이지 사람들을 향한 것이 아님을 주목할 만한다. 예수님께서 제자직의 조건을 제시하실 때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은 제자들이 친척들(눅 14:26; 마 10:37) 및 자신의 생명(요 12:25)과 얽매인 자연적, 법적 결속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역시 인간의 견지에서 설명할 수 있는 심리학적인 조건부의 멀리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요구의 무조건성과 절대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의 요구는 심지어 율법 자체를 포함하여 지상의 가장 중요한 결속까지도 그만두라는 것이다. 신약성경에 거룩한 거부와 포기(미스에인)가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새 세상의 능력과 본질인 사랑으로 포용되고 해석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성화시키고 깨끗케 하기 때문에 거룩한 미움을 금지된다. 사랑에서 나오지 않고, 사랑으로 이끌지 않는 거부는 신약성경에서 호소력을 가질 수 없다. 신약성경은 종교를 포함하여 인간과 인간 사이의 어떠한 가능한 형태의 미움도 극복한다. 그러나 악에 대한 거룩한 거부와 인간적인 조건 없이 그리스도께 헌신할 것을 신약성경은 가르치고 있다.(참조: O. Michel; H. Seeb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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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avndalon(4625, 스칸달론)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 함정, 죄로 이끄는 유혹.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스칸달론은 '앞 뒤로 움직이는 것, 치는 것, 어떤 것에 가까이 가는 것, 덫을 놓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후에 '범죄, 처벌의 이유'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Secular pap).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스칸달론은 70인역본에서 약 20회 이상 나오며, 히브리어 모케쉬(미끼나 유혹물: 암 3:5; 비유적으로 사람을 파멸시키는 덫, 시 14:9; 삼상 18:21; 그를 죄짓게 하는 덫, 수 23:13; 삿 2:3; 삿 8:27; 시 106:36)와 미크숄(소경 앞의 장애물: 레 19:14; 비유적으로, 불행의 원인: 시 119:165; 또는 마음에 걸리는 것의 원인: 삼상 25:31)과 도피(과실, 흠, 결점, 비방하는 것, 시 50:20)와 케셀(어리석음, 시 49:13)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스칸달론은 신약성경에서 1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① 마 13:41에서는 판타 타 스칸달라("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를 "불법을 행하는 자들"과 동일시함으로 말미암아 의인화하는 것 같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종말론적인 경향을 지닌 구약성경의 말씀들을 인용하고 있다(습 1:3; 단 11:41). 이 스칸달라는 마귀에게서 난다(참조: 마 13:18 이하). 따라서 그들은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마 13:42). 저들은 디카이오이("의인들", 마 13:43), "천국의 아들들"(마 13:38)과 대조된다. 천국의 아들들의 존재는 인자에게 기원하며(마 13:37), 아버지 나라에 참여할 것이다(마 13:43). 스칸달라(대격, 복수)는 분명히 종말론적 악마의 모습으로 특징 지워지며, 그들 자신의 구원의 상실의 원인은 바로 그들 자신이다.
스칸달라는 죄짓도록 유혹함으로써 멸망을 자초하며, 악마나 그의 사자들과 더불어 함께 종말을 맞게 될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② 마 16:23에 따르면 베드로는 사단과 마찬가지로(참조: 마 4:10) 예수님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그에게 예정하신(마 4:22) 고난의 길을 피하도록 꾀하고자 시도함으로써, 예수님의 의인화된 시험(유혹)이 되었다.
여기에서 기초돌(고전 3:11)이면서, 거치는 반석(롬 9:33)이 되신 예수님 자신의 역할과 비슷한 역할을 부여 받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돌이 되었다. 베드로는 인간적인 생각을 하나님의 뜻에 대립시킴으로써, 사탄의 도구로 행동하였다. 십자가에 이르는 예수님의 길을 스칸달론으로 본 그 자신이 스칸달론, 즉 예수님을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나는 일을 하게 하는 의인화된 시험이 되었다.(참조: G. Stahlin).
③ 마 18:7,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교회 안에서 "소자", 아마도 '약한 자들'의 보호에 관한 문맥 안에서(참조: 마 18:6-10) 예수님은 '죄로 이끄는 시험'("실족케 하는 일") 때문에(마 18:7a)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난) 세상에 대하여 종말론적 경고("화가 있도다")를 발하신다. 비록 예수님은 그러한 '시험'("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음을 인정하시지만(마 18:7b) 결정적으로 그 '시험'을 초래하는 사람에게 종말론적 "화"를 선언하신다(마 18:7c). 스칸달론은 여기서 믿음을 저버리도록 하는 유혹(시험)에 대해 사용된다. 마 18:7과 유사한, 병행구 눅 17:1도 역시 그러한 시험이 피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이 있게 하는 자는, 그를 이미 하나님의 심판 아래 두는 종말론적 "화"를 받는다.
「스칸달론은 영원한 파멸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매우 위험하다. 복음과 같이 스칸달론은 세상, 즉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며, 신적으로 불가피한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계획으로 통합된다. 왜냐하면 신앙에 대한 이러한 장애는 하나님을 위하거나 하나님을 반대하는 결단으로 이루어져 있는 역사의 망의 결정적인 가닥이기 때문이다.」(참조: G. Stahlin).
(b) 바울 서신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스칸달론으로 자주 언급한다.
① 그가 능변의 지혜로 복음을 전파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능력을 잃게 된다는 논제를 변증하는 과정에서(고전 1:17), 바울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메시야에 대한 선포가 유대인에게는 스칸달론이 되어 종말론적 멸망으로 인도하고, 이방인에게는 어리석음(모리아, 고전 1:23)이 되어 역시 재앙을 가져옴을 보여준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십자가에 대한) 선포의 어리석음을(고전 1:21)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들 자신의 공적에 의거하지 않고(고전 1:22) (하나님에 의해) 부름받았음을 스스로 나타냄으로써- 십자가에 못박히신 메시야를,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자(고전 1:24; 참조: 고전 1:18b)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만드는(고전 1:20d) 하나님의 지혜(고전 1:24)로 경험한다.
② 갈 5: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여기서 스칸달론은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NASB)이나 '거리끼는 것'을 의미한다.
할례(율법)와 "십자가의 거치는 것"은 상충한다. 구원이 이르는 길로서 할례를 전하는 것은 십자가의 스칸달론을 제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에서 종말론적인 결정적인 능력을 제거하는 것이며, 모든 종류의 인간 스스로의 구원 방식에 대한 십자가 자체의 비판적 기능을 무력화 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참조: 고전 1:18-24).
③ 롬 9:33,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서 사 22:16; 사 8:14을 혼합 인용하는데, 이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는 대신에(롬 9:30; 롬 9:32; 롬 9:33) 율법에 기초하여 의를 추구함으로서 이스라엘의 그리스도에 대한 거부가 그 전면에 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에게 믿음의 거부로 이끄는 "부딪히는 돌"(리도스 프로스콤마토스)인 이유요 '그들로 걸리게 하는 반석'("거치는 반석": 페트라 스칸달론)인 이유이다.
④ 벧전 2:8은 동일한 혼합 인용을 사용하여,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위한 그들의 결정을 굳게 유지하는 것을 강화하기 위하여 불신자들을 위협한다: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⑤ 롬 11:9,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여기서 시 68:23(70인역본)을 인용한다. 이 말씀에 따르면 희생 제사 제의는 유대인들에게 멸망의 '함정'(pitfall)이 될 것이다; "밥상"은 단순히 교제의 친교가 아니라(H. Schlier, Rom[HTKNT] 325) 오히려 이스라엘이 구원을 기대하는 대상을 가리킨다. 랍비 전승은 "밥상"을 속죄의 능력을 가진 제단으로 이해한다(참조: 또한 고전 10:21; 또 Muller 23-27).
⑥ 롬 14: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여기서 스칸달론은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NASB)을 의미한다. 여기서 바울은 자기가 본래 참예하고 있는 "강한 자"에게(롬 14:14), 중언법 프로스콤마 헤 스칸달론("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또 롬 14:15 하반절(아폴륌마)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습관에 따라 먹음으로 말미암아 "약한" 자에게 믿음에 어떠한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로, 즉 걸려 넘어지게 하여 죄짓게 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훈계한다.
⑦ 롬 16:17에서도 스칸달론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여기서 스칸달라(복수)는 교회의 구성원들의 구원을 위태롭게 하는 거짓 교사들의 여러가지 사단의 활동이다. 이 거짓 교사들은 옳은 교훈에서 떨어져 나가도록 유혹하는 자들이다. 그러한 교사들은 또 교회의 일치와 존재 그 자체를 위협한다.
유사하게 계 2:14에서 스칸달론은 거짓 교훈의 맥락에서 믿음에 대해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올무")을 가리킨다.
⑧ 요일 2: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여기서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신자 안에는("빛의 영역 안에" 가 아님, contra R. Schnackenburg. 1-3 John [HTKNT] 115) '걸림이나 죄의 동기'가 없다. 즉 불신앙의 동기와, 따라서 구원의 상실의 동기가 없다.
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부적당함의 주제가 여기서 거론된다("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참조: 특히 요일 3:6).(참조: H. Gie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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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fivhmi(863, 아피에미) 내보내다, 버려두다, 용서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아피에미(Homer 이래)는 아포(ajpov, 575)와 히에미(i{hmi: 보내다)에서 유래했으며, 어떤 사람에게서 법률로나 실제적으로 통제를 당하는 사람이나 물건의 임의적인 석방을 의미한다.
(a) 아피에미는
① 인칭에 대해 '보내다, 떠나게 하다, 내어보내다, 쫓아내다(여자에 대해서는 '이혼하다', 모임에 대해서는 '해산하다, 끝내다'), 가게하다, 급파하다'.
② 비인칭에 대해, '풀어놓다'(배를 바다에다), '쏘다'(화살), '포기하다'를 의미한다.
(b) 아피에미는 비유적 의미로 '내버려두다, 허락하다, 통과시키다, 무시하다, 포기하다', 법적인 용법으로 '법적 속박에서 벗어나다, 방면하다, 면제하다, 용서하다(죄, 의무, 처벌로부터)'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아피에미는 70인역본에서 약 130회 나오며, 히브리어 누아흐의 역어로 '가게하다'(삿 3:1)를, 하달(2308)의 역어로 '포기하다, 버리다'(삿 9:9, 11, 13)를, 아자브(5800a)의 역어로 '남겨두다'(삼하 15:16; 삼하 20:3)를, 사아트(8058)의 역어로 '면제해 주다'(신 15:2)를 나타내며, 나사(5375: 죄책이나 형벌에서 벗어나다, 창 18:26; 시 25:18; 시 32:1 5; 시 85:2; 사 33:24), 살라(5545: 용서하다, 사죄하다, 레 4:2 이하; 레 5:6 이하; 민 14:19; 민 15:25 이하; 사 55:7), 킵페르(3722: 덮다, 속죄하다, 사 22:14)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아피에미는 신약성경에서 약 143회 나오며, 다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a) 아피에미는 '가게하다, 보내버리다'를 의미한다.
① 문자적 의미로, 인격적 목적과 함께 무리에 대해 사용되었다(마 13:36; 막 4:36; 막 8:13).
② 비인격적 목적과 함께, '영을 버리다, 포기하다'를 의미한다(마 27:50),
③ 법적 의미에서 '이혼하다'를 의미한다(고전 7:11 이하).
(b) 아피에미는 '취소하다, 탕감하다, 용서하다'를 의미한다.
① 빚 탕감에 대해(마 18:27; 마 18:32),
② 죄사함이나 용서에 대하여(마 6:12; 마 6:14 이하; 막 11:25 이하; 마 9:2; 마 9:5 이하; 마 12:31; 막 2:5; 막 2:7; 막 3:28; 눅 5:20 이하; 눅 5:23; 롬 4:7; 요일 1:9; 약 5:15; 행 8:22; 막 12:32; 막 18:21; 막 18:35; 막 4:12; 눅 11:4; 눅 12:10; 눅 17:3 이하; 눅 23:34).
(c) 아피에미는 '버리다, 버려두다'를 의미한다.
① 문자적으로, 마 4:11; 마 26:56; 요 10:12; 막 10:28; 눅 21:6 등.
② 비유적으로, 계 2:4; 롬 1:27; 히 6:1.
③ '돌보지 않다, 소홀히 하다', 마 23:23; 막 7:8 등.
(d) 아피에미는
① '~하게 하다, 용납하다'를 의미한다, 마 15:14; 막 5:19; 막 11:6; 막 14:6; 눅 13:8; 행 5:38; 계 2:20; 요 11:48.
② '허락하다, 내버려 두다', 마 8:22; 마 13:30; 마 19:14; 마 23:13; 막 1:34; 막 7:12; 막 7:27; 막 10:14; 눅 8:15; 눅 9:60; 눅 12:39; 눅 18:16; 요 11:44; 요 18:8; 계 11:9.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R. Bultmann; H. Vorla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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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jscurov"(2478, 이스퀴로스) 힘있는, 강한, 강력한 strong, mighty.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이스퀴로스(Aeschyl. 이래)는 이스퀴오(ijscuvw, 2480: 강하다, 능력이 있다)에서 유래했으며, 신체나 정신이 '강한, 강력한, 힘있는'을 의미하며, 신, 생물, 혹은 사물들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형용사 이스퀴로스는 70인역본에서 약 170회 나오며, 25개의 히브리어 단어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사람(민 13:18; 거민의 강약), 동물(잠 30:30, 사자), 사물(사 8:7, 하수) 그리고 하나님(신 10:17)에 대해 '강한'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이스퀴로스는 신약성경에서 30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이스퀴로스는 신약성경에서 독립적으로 사람과 사물에 대하여 사용되었다(눅 15:14; 고전 4:10; 고전 10:22; 고후 10:10; 히 5:7; 히 11:34; 계 18:2; 계 18:21).
(b) 고전 1:25에서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들보다 "더 강하다"고 언급한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인간의 윤리와 종교는 구원과 관련하여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십자가의 약해 보이는 것과 어리석어 보이는 것이 인간의 지혜와 능력보다 더 강하다.
(c) 히 6:18에서는 앞서 가신 우리의 대제사장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행위에 근거를 둔 위로와 격려의 힘을 언급한다: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d) 요일 2:14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젊은이들 안에 거하기 때문에 그들이 강하다고 언급한다: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e) 계 18:8은 하나님께서 친히 강하신 재판장이 되신다고 한다. 그는 강한 바벨론을 심판하실 것이다(계 18:10).
(f) 우리는 계 5:2에서 강한 천사들을 볼 수 있다: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계 10:1; 계 18:21에서도 마찬가지다.
(g) 마 3:11과 그 병행구절에서 세례(침례) 요한은 그의 뒤에 오시는 보다 더 강한 자를 언급한다. 세례(침례) 요한 자신은 하나님 나라를 바라면서 단지 회개의 물침례 만을 줄 수 있을 뿐이지만, 이 더 강한 자는 성령과 불로 세례(침례)를 주실 것이다.
(h) 눅 11:20 이하에서 예수님께서는 친히 자신을 더 강한 자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문맥은 예수님의 귀신 축출에 대한 논쟁이다.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그 능력을 바알세불에게 돌렸지만, 예수님은 더 강한 자에게 강한 자(사단)가 패하는 것을 비교하시면서 답변하셨다. 사단은 어떤 지배권을 가지고 있지만 예수님의 역사는 사단의 지배권에 대한 성공적인 공격과 사단의 지배를 전복시키는 역사이다. 이러한 진술 배후에 사 49:25(용사의 포로를 빼앗음)과 사 53:12(고난받는 종은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눈다)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와 비슷한 구절들은 구약성경의 위전(僞典)과 랍비 문헌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신약에서도 나타난다(참조: 눅 4:6; 눅 13:16). 이러한 구절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요점은 사단이 인간을 죄, 질병, 귀신들림, 그리고 죽음의 노예로 만들었으나,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지배를 깨뜨리시고 사단을 정복하여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을 자신의 사역으로 간주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방시키시는 사역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강하신 능력은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다. 예수님은 이 능력을 그의 죽음과 부활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생애와, 유혹에 대한 그의 승리와, 그의 치유와 귀신 축출, 죽은 자 가운데서의 살리심에서 이미 드러내셨다. 사 53:12은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과 관련을 가진다(속죄의 비유). 사 53:12과 눅 11:22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 부활을 인간 해방의 결정적인 행위로 보는 매우 밀착된 관계를 형성한다.
(참조: W. Grundamnn; G. Brau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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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nhrov"(4190, 포네로스) 나쁜 상태에 있는, 병든, 나쁜, 악한, 사악한.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포네로스(Hes., Thu. 이래)는 포네오(수고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카코스(kakov", 2556)와 카키아(kakiva, 2549) 및 그 파생어들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포네스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a) '슬픈, 불행한, 근심으로 괴로워하는'.
(b) '괴롭게하고 슬픔을 초래하는 것, 재난이나 재앙을 가져오는 것'(이런 불행을 가져오는 병에 대해 사용되었다)
(c) '가련한, 무력한, 비참한, 초라한, 매력없는, 부적당한, 쓸모없는, 파멸적인, 해로운, 불리해지는(손해를 주는), 나쁜, 불행을 가져다주는, 치명적인, 불운한'.
(d) '성공하지 못한'(정치나 군에서).
(e) '평민의'.
(f) '정치적으로 쓸모없는, 가치없는, 국가의 적대자'.
(g) '도덕적으로 비난할 만한, 나쁜' 등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형용사 포네로스는 70인역본에서 약 300회 이상 나오며, 대부분 히브리어 라아(악한, 나쁜, 무가치한, 무용한)를 번역하였으며, 동물, 음식, 땅, 인격체에 대해 사용되었다.
동물들에 대해 사용될 경우에는 '위험한, 해로운'(창 37:20)을, 또 인격체의 명예에 손상을 준다는 의미로(예: 신 22:14), 인간의 심령과 관련하여 '악한'이라는 의미로(예: 삼상 16:14이하), 아 2:2에서는 슬픈 기색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포네로스가 윤리적 측면에서는 인격체이든(창 13:13; 사 9:17[16]; 집회서 25:25), 사물이든(사 3:9), '악한, 나쁜, 가치없는, 부패한, 타락한'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카코스처럼, 포네로스 역시 도덕적 의미 뿐만 아니라 종교적 의미까지도 함축하고 있다.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과의 분리, 하나님과 그의 뜻에 반대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암 5:14이하).
신약성경과는 대조적으로, 이 단어는 악마를 뜻하는 말로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선악"이라는 표현(창 3:5, 창 3:22)에서는 포네로스가 사용되었는데, 이 선악은 가장 넓은 의미로 볼 때, '모든 것'을 의미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포네로스는 신약성경에서 7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1. 포네로스의 '나쁜, 해로운, 쓸모없는, 무익한'이란 의미에서,
(a) 포네로스는 '나쁜, 해로운'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계 16:2에서 포네로스는 '독'종을 묘사한다: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며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
엡 5:16에서 때가 악한 것(포네로스)은 때가 나쁘다는 것이다. 즉 시간과 기회를 잘못 사용하도록 인도하려는 압박이나 많은 장애가 있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생활에서 해이해져서는 안되며 언제나 그러한 압박이나 장애를 극복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엡 6:13에서도 유사한 표현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여기서 "악한 날"은 악한, 위험한, 위기의 날, 고통과 위난의 날이며, 따라서 치명적이며 파멸을 가져오는 날이기도 하다. 이 때는 대외적인 핍박과 기독교인의 교제 안에서 일어나는 대내적인 시험으로 말미암아 투쟁이 가장 극심해질 때, 죽음의 날, 심판의 날이며, 마귀가 특별히 세력을 발휘할 때이다.
복음서에 나타난 계시적인 구절과(참조: 막 13:4-막 13:23) 바울 서신의 몇 구절은(참조: 살후 2:3) "주님의 날"이 이르기 전에 투쟁의 속도가 빨라지고 전쟁의 극렬함이 증가하며 점차 가속화된다는 사실을 비슷하게 언급하고 있다(참조: 요일 2:18 - 요일 2:19),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악한 날"이 이르기 이전에 준비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이루어져야 할 많은 일들이 있으며, 또한 봉사할 수 있는 많은 기회도 있다. 그러나 바울은 위대한 일 심지어는 사도의 직분을 감당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지막 날에 가서는 버림받은 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참조: 9:24-9:27). 그래서 그는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즉 모든 위대한 일을 수행한 후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가장 강조적인 어법으로 강조하고 있다(참조: F.Foulkes; F.Hauck; S.Schulz).
갈 1:4에서 현재의 긴 시대를 악한 시대라고 하는데, 이는 고통과 시험으로 가득찬 시대이기 때문이다.
(b) 마 7:18에서 포네로스는 구약성경에서와 같이 '쓸모없는, 무익한' 열매를 의미한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 18:32; 마 25:26; 눅 19:22에서 "악한 종"은 비난 받아 마땅한 '무익한' 종이다.
2. 포네로스의 도덕적 의미.
(a) 포네로스의 형용사적 용법.
① 사람에 대해 사용되는 경우, 인간들은 도덕적으로 악하다(마 7:11). 인간과 대조적으로 하나님만이 홀로 선하시다(막 10:18).
바리새인들은 마음이 완악하다는 의미에서 악했다(마 12:34). 그들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말들을 낸다(마 12:35).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악한 세대였다. 그들은 말씀과의 만남이 개방되었는데도 메시야적 표적을 구하는 악한 세대이다(마 12:39; 마 16:4; 눅 11:29). 이 두 부류는 예수님을 대적함으로써 그들의 성향을 나타내 보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는 누구든지 악하다.
딤후 3:13에서 악한 자들은 처음에는 예수님과 그의 메시지에 대해, 그 다음에 살후 3:2에서 악한 자들은 믿는 자들과 그들의 신앙을 반대하는 자들이다.
행 17:5에서는 포네로스가 사회적 치욕인 어떤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② 사물에 대해 사용되는 경우, 눅 6:22에서 포네로스는 '도덕적으로 나쁜 비난 받아야 할'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제자들의 이름은 '도덕적으로 나쁜', 또는 '비난받을만한' 것으로 멸시를 받고, 거절을 당했다. 어떤 경우에도 포네로스는 개인 제자들의 이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막 7:22; 마 20;15에서 '흘기는' 눈은 시기로 가득찬 탐욕적인 눈을 의미한다. 그것은 역시 "사악한" 눈초리를 의미할 수도 있다.
마 6:23; 눅 11:34에서 포네로스는 '사악한'이나 '병든'을 의미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구약과 신약성경은 마음과 눈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고, 악한 눈 혹은 탐욕스러운 눈이라는 생각은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마 15:19에서 악한 생각들은 내부로부터 온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참조: 막 7:21).
약 2:4에서는 명성이나 돈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동기를 악하다고 말한다.
딤전 6:4에서 교묘하게 환심을 사는 것이나 악한 의심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히 3:12에서 내적 인격은 악하다. 왜냐하면 자기 뜻대로 배교(背敎)하기 때문이다(히 10:22에서는 나쁜 양심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고 한다). 말들과 행동들이 악할 수 있다(약 4:16의 오만, 골 1:21의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행위, 또는 딤후 4:18에서 하나님의 말씀 전파자들에게 행하였던 일들 등이다.
요 3:19에서 빛과 어둠의 대립은 포네로스(참조: 요 3:20-요 3:21)의 내용을 결정한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 7:7에서 세상의 일들은 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런 일들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을 거스리는 모든 것들은 다 사악한 것이다. 이것은 잘못이며, 그 보급, 그것에 묶여 있는 전체 성향을 포함하며(요이 1:11), 싸우는 대적자들의 말들을 포함한다(요삼 1:10), 악한 일의 결과는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이 이유 때문에 가인의 일은 악한 것이다(요일 3:12).
행 18:14에서 갈리오가 이 말을 했을 때에는 법에 의해 처벌될 수 있는 법률적인 잘못이라는 보다 세속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는 자주 악한 영이라고 표현된다(마 12:45; 눅 11:26). 예수님과 사도들은 이런 의미들을 자유스럽게 사용한다(눅 7:21; 눅 8:2; 행 19:12; 눅 19:13; 눅 19:15; 눅 19:16).
(b) 포네로스의 명사적 용법.
① '나쁜 사람'. 많은 사람들이 마 22:10의 "악한 자"를 사회적인 의미, 곧 누더기를 걸친 자로 해석하고자 했으나, 이 귀절에서도 역시 신앙적으로 악한 사람을 뜻한다. 예복을 입지 않은 그 사람의 경우와 마찬가지다(마 22:11). 사실상 그 사람(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복음을 거절해온 사람인 것이다.
마 5:39 상반절의 말씀도 다른 영역본(RSV와 NEB)처럼 악한 자로 해석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구절의 하반절을 보아서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마 13:49이하에서는 마지막 심판 날 하나님께서 포네로이(복수)를 갈라내어 형벌에 처하실 것을 선언하고 있다(참조: 마 22:13이하).
교회는 악한 사람을 축출해야 한다(고전 5:13).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은 악한 자들이 지상에 사는 동안 그들에게도 임하므로 기독교인들은 그들에게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한다(눅 6:35).
② '마귀'. 마 13:19에서 호 포네로스는 절대적 의미에서 '악한 자'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 병행구인 막 4:15에서는 '사탄'이라 하였고, 눅 8:12에서는 '마귀'라고 지칭하고 있기 대문이다. 요 17:15; 엡 6:16; 살후 3:3(RSVmg,NEB) 등도 마찬가지이다. 요한일서에서는 이 단어가 자주 눈에 띤다(참조: 요일 2:13, 요일 2:14; 요일 3:12; 요일 5:18, 요일 5:19). 마 13:38의 투 포네루를 남성(즉, 악한 자)으로 해석해야 될지 아니면 중성(즉, 악)으로 해석해야 될지에 대해서는 아직 토론의 여지가 있다. 하더(G.Harder)는 후자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도 전혀 불확실한 것인데, 이는 마 13:39에서 그 악의 근원을 마귀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마 13:38의 악에 대하여 어떤 약화된 의미를 부여할 수 없게 한다. 신학사적으로 볼 때, 악의 인격화를 피하고자 하는 노력이 결국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비인격화를 초래하였다.
마 6:13에서 "다만 악에서 구원하소서"라는 문구는 번역자들과 해석자들 사이에 의견을 달리한다. 이 단어에 붙은 관사는 남성도, 중성도 될 수 있는데, 중성으로 볼 때는 '악', 남성으로 볼 때는 '악한 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이것은 이 시대를 지배하며 계속 그들을 위협하고 있는 마귀가 주도하는 악한 세력까지도 '악'이란 말에 포함될 수 있다. 로마이어(E.Lohmeyer)는 "악에서"라는 말을 내적·외적인 모든 결정적 위험에 대한 총괄, 즉 사탄의 그 모든 능력에 대한 묘사로서 간주하고 있다(The Lord's Prayer). 벵겔(J.A.Bengel)은 그노몬(Gnomon)에서 말하기를, 여섯번째와 일곱번째 간구는 같은 문제에 대해 적극적이면서 소극적인 양면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혹자는 하나의 내용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는 마 6:13에 관한 힐러(Hiller)의 언급을 인용하고 있는데 '악한 자는 아담을 시험에 빠뜨린 이래 아직까지 그의 목적을 변형시키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악한 자이며,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적이자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적이다'고 해석했다.
③ "악". 포네로스는 중성 명사형으로 사용되어 '악'을 나타낸다(토 포네론, 눅 6:45b; 롬 12:9; 살전 5:22; 마 5:11; 행 5:4; 행 28:21). 신약성경은 여러 곳에서 악을 마귀와 연결시키고 있다. 마 9:4과 마 12:35에서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그들의 악한 생각에 대하여 책망하실 때도 역시 포네로스는 마귀와 연관되었다. 그 외에도(요 8:44)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불렀다. 하나님과 마귀 사이에는 어떠한 중간 지대도 없으므로 악을 순수한 중성적 입장에 놓을 수는 없다.(참조: J.H.Thayer; Harder; E.Achil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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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kavw(3528, 니카오) 이기다 be victorius.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니카오(Homer 이래)는 니케(nivkh, 3529: 승리)에서 유래했으며,
(a) `이기다',
(b) `패배시키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실제적, 법적 의미에서나 은유적 의미에서나 전쟁이나 싸움에 있어서 승리나 우월을 의미한다. 또한 이 동사는 `능가하다, 정복하다, 더 강하다'는 의미로 번역되기도 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니카오는 약 25회 나오며, 합 3:19에서 나차흐(영속하다, 뛰어나다, 감독자이다)의 역어로, 시 51:4에서 자카(깨끗하다, 순결하다)의 역어로, 잠 6:25에서 하마드(탐하다, 원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외경에서 `이기다'나 `패배시키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집회서4:2; 16:10; 18:22; 마카베오이서 3:5; 8:6 등).
3. 신약성경의 용법
니카오는 신약성경에서 28회 나오며, 거의 항상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와 이에 대항하는 마귀 세력들과의 투쟁을 전제로 한다.
(a) 눅 11:22에서 더 강한 자가 강한 자를 `이긴다':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참조: 병행구, 마 12:29; 막 3:27에는 `결박하다')
더 강한 자가 강한 자를 이기고 그의 무장을 해체시키고 그의 것을 약탈한다. 이 은유는 마귀의 능력들을 압도하는 예수님의 우월성을 설명한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 11:20). 지상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행동들로서 자신이 하나님께 대항하는 세력들을 압도하는 숨겨진 승리자이심을 증거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과 마귀를 정복하시고 마지막 승리를 거두심은 부활 이후였다.
(b) 요 16:33에서 예수님의 결정적인 승리를 언급한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한은 하나님께 반항하는 세력들을 코스모스(kosmos: 세상)라는 술어로 요약한다. 예수님의 오심과 고난과 아버지께로 돌아감은 세상을 이기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승리는 완료 시제로 표현된다(요 16:33). 악한 자, 곧 세상의 지배자는 예수님에 의해 그의 능력을 제한당하였다. 이는 더 강한 자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악한 자의 지배로부터 자기 백성을 자유롭게 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싸움이 아직 끝나지는 않았지만 이미 판결이 나있는 것이다. 믿음으로 기독교인들은 이 승리에 참예하므로 스스로 세상을 이기시는 위치에 놓여있다. 그러므로 주님은 담대하라고 하신다.
(c) 롬 3:4에서 니카오는 법정에 기소 당할 때나 기소할 때 소송에서 `이긴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d) 요한계시록에서 세상에 재앙을 가져오는 세력들의 승리에 대하여 언급한다.
계 6:2,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계 11: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계 13: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그러나 이러한 승리들은 `허락된' 것이고, 따라서 한정된 것이다.
(e) 계 5:5에 의하면 악의 세력들의 승리들이 두려운 것일지라도 사자가 이미 최후 승리를 거두었다: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계 17:14에서도 그리스도와 그에 속한 자들의 승리를 언급한다: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계 15:2에서 짐승을 이긴 자들은 유리 바다가에 서서 하나님을 찬양한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그러므로 모든 교회의 이긴 자들에게는 약속이 주어진다(계 2:7, 계 2:11, 계 2:17, 계2:26; 계 3:5, 계 3:12, 계 3:21).
이 승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성취될 것이다(계 21:7). 이 승리는 종말론적인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피로 이미 승리하셨고(계 3:21; 계 12:11), 그의 청소년들은 악한 자를 이기었고(요일 2:13-요일 2:14), 악은 선에게 정복 당한다(롬 12:21). 믿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승리에 참예하므로 스스로 세상을 이기시는 위치에 놓여 있다. 믿음은 세상을 이기는 승리인 것이다(요일 5:4이하). 이 승리의 근거는 세상보다 큰 하나님이시다(요일 4:4이하).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W. Gunther; O. Bauernfe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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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ntivcristo"(500, 안티크리스토스) 적그리스도 Antichrist.
그리스도의 아들이심과(요일 4:15; 요일 5:5)과 그의 메시야이심과 그의 육체로 오심(요일 2:22; 요일 4:2; 요일 5:1; 요이 1:7)을 고백하는 것은 동질의 것들이다.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고백하는 자들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며(요일 4:2; 요일 5:1), 그들의 고백은 성령으로 인한 것이다(요일 4:2).
그러나 그것을 부인하는 자들은 안티크리스토이이다(요일 2:22; 요일 4:1-요일 4:3; 요이 1:7). 그들은 적그리스도의 영에게 지배 당한다(요일 4:2 이하).
안티크리스토스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오직 요한의 서신서에만 나오며 초대 교회의 최초의 교사들 중에는 매우 드물다. 요한 일서 저자는 적그리스도가 올 것이라는 공동체의 인식에 대해 이야기한다(요일 2:18; 요일 4:3).
적그리스도는 여기에서 다가오는 종말의 현상이다. 이 현상은 유대의 종말론자들 중에 있는 하나님의 대적자와 관련되며, 그것의 역할이 다른 곳에서 종교사 속에서 발견된다. 하나님의 대적자는 그의 능력과 세상에 대한 지배력을 세상 종말의 직전까지 확대시킨다.
그런 다음 그는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이다. 비록 안티크리스토스라는 용어가 요한의 서신 이전까지 사용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초기의 기독교 종말론에서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시라는 고백은 적그리스도에게 그리스도가 반대하는 형태를 제시한다(참조: 계 13장 etc.; 살후 2:3-살후 2:10; 막 13:14-막 13:27). 이런 구절들은, 예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에 이의를 제기하고 그것에 의해 그들의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헌신의 토대를 손상시킴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타락시키는 거짓 선지자들에게서 이미 활동하였다고 말함으로 종말적 현상이 현존함을 나타낸다. 그것들은 내부로부터 상황을 위협한다. 그들의 도래는 마지막 때가 시작되고 있음을 나타낸다(요일 2:18; 참조: 요일 4:3; 요이 1:7).(참조: Grund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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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comai(2064, 엘코마이) 오다 come, 나타나다 appear.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엘코마이(Homer 이래)는 '오다, 가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인격과 무생물에 다같이 사용되며, 전치사나 문맥에 따라 특별한 관계나 여러가지 어감을 지니며, 자연적 사건, 마음의 상태, 편지를 받는 것, 소유물의 이전, 혹은 계약하는 것 등과 같은 다양한 언급을 한다.
엘코마이의 제의적 용법은 특별히 중요하다. 헬라인의 헬라적 경건은 신이 인간에게로 오는 것 또는 인간이 신에게로 가는 것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엘데(오다)라고 부르는 기도의 권고(참조: 시 80:2[79:3])는 고대의 여러 기도문이나 여러 마술 파피루스에서 발견된다(참조: S. Schnoider). 그러나 형식적인 유사성을 제의하면 이교도 예배와 성경의 예배 사이에는 연관성이 전혀 없다.
2. 70인역본의 용법.
엘코마이는 70인역본에서 1,000회 이상 나오며, 35개의 히브리어 단어 및 어군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대부분 보(가다, 도착하다, 들어가다)를 번역한다.
엘코마이는 70인역본에서 주로 공간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제의적 기사에도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집에, 성소에, 예루살렘에 오는 것,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하는 것, 하나님의 자비가 임하기를 구하는 기도, 하나님, 그의 말씀, 천사, 메시야, 시대, 구원의 날, 성령의 도래, 혹은 열방들이 하나님의 기업에로 옴에 대해 사용되었다. 시편, 욥기 등에서는 선한 것과 악한 것 모두, 특히 악한 것이 온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엘코마이는 신약성경에서 631회 나오며, 대부분 '오다, 가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엘코마이는 인격체와 사물에 대해 사용되었으며, 때때로 오는 것은 나타나는 것, 공개적으로 나아오는 것, 현장에 오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때때로 결정적 사건들, 자연적 현상, 조건 등에 사용된다. 눅 14:31에서 '적대적 접근', 행 19:27에서 '평판이 나빠지는 것', 막 5:26에서 '더 악화되는 것'을 나타낸다. 눅 15:17에서 '자기 자신에로 오는 것', 고후 12:1에서 '새로운 주제로 옮겨 가는 것'을 나타낸다.
(a) 공관복음의 용법.
① 엘코마이는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나타낸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오심과 관련하여 이 어군은 신현현의 핵심을 묘사해 준다. 예수님께서 1인칭으로 엘돈을 사용하신 말씀은 그의 메시야 의식에서 나온 것이며 그의 메시야 임무를 진술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천국을 선포하러(막 1:38),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막 2:17), 새로운 생활 질서를 세우러(마 5:17), 땅에 불을 붙이러(눅 12:49), 그리고 불화를 조장하러(마 10:34 이하) 오셨다.
메시야로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구원하러 왔으며(눅 19:10; 눅 9:56; 마 18:11), 그의 책무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는 것이다(막 10:45; 마 20:28). 예수님이 그의 생의 사역을 수행하는 방법은 마 11:18 이하; 눅 7:33 이하에 묘사되어 있으며, 세례(침례) 요한의 금욕주의와는 다른 이 세상의 좋은 것에 개방적이었다. 막 1:24; 눅 4:34에서 보면 귀신들은 예수님의 오심이 자신들의 파멸도 포함한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의 오심을 비슷하게 묘사하였다.
② 엘코마이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나타낸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보면 종종 큰 무리들이 예수님께로 온다. 하지만 참으로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은 우리가 특정한 개인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마 8:2; 마 9:18; 마 14:33; 마 15:25; 막 5:33; 참조: 마 2:2), 제의적인 행동을 수반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행함으로,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기꺼이 내어 맡기는 것을 수반한다(눅 6:47; 눅 9:23; 눅 14:27). 만찬 비유와 혼인 잔치 비유는 하나님의 초대에 대한 응답으로 오는 것, 혹은 오지 않는 것을 묘사한다(눅 14:17 이하). 탕자의 비유에서 오는 것은 또한 잃음과 멀어짐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눅 15:20; 눅 15:30).
③ 엘코마이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나타낸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서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해야 한다(마 6:10; 눅 11:1).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시에 백성들은 오시는 메시야와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에 대하여 찬양을 돌렸다(막 11:10). 이 나라는 권능으로 임한다(막 9:1). 미래의 이 나라는 영생을 의미하는 장차 올 세대와 동일하다(막 10:30; 눅 18:30). 미래의 그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올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나라 안에 그리고 그의 나라와 함께 오신다(마 16:28; 눅 23:42).
④ 엘코마이는 메시야가 오시는 것을 나타낸다. 공관복음에서는 구원 시대를 열 메시야는 엘리야가 되돌아 온 뒤에 오실 자로 언급한다(마 11:14; 마 17:10; 마 17:12; 마 27:49; 막 9:12 이하). 세례(침례) 요한은 예수님이 오실 그 분인지를 묻는다(마 11:3; 눅 7:19; 눅 7:20).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에 그를 메시야로 환영하는 군중들은 예수님을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으로 환호하였다(마 21:9; 눅 19:38; 참조: 시 117:25 이하).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 중에(마 16:27; 마 25:31), 하늘의 구름을 타고(마 24:30; 마 26:64와 병행구) 오실 약속된 메시야이시다. 이를 위한 때는 언제인지 예정되어 있지 않으며(마 24:42 이하와 병행구) 돌연히 임할 것이다(막 13:36). 메시야라고 사칭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먼저 올 것이다(마 24:5).
⑤ 엘코마이는 하나님이 심판하러 오시는 것을 나타낸다. 마 21:40의 악한 농부의 비유에서 하나님은 그의 종들과 아들을 박해한 농부들에게 무서운 심판을 집행하러 오시는 포도원의 주인이시다.
눅 13:6-눅 13:7의 무화과 비유에서 하나님은 과원에 와서 그 열매를 구하나 얻지 못했을 때 무화과 나무를 없애버릴 것을 명령하시는 주인이시다.
마 25:19의 달란트의 비유에서 하나님은 그의 종들과 회계하러 오사 상벌하시는 주인이시다.
⑥ 엘코마이는 결단의 날이 오는 것을 나타낸다. 이와 관련해서 엘류손타이 헤메라이("날이 이르다")라는 공식 문구에 의해 소개되는 일련의 기사들을 찾아볼 수 있다(눅 17:22; 눅 21:6; 눅 23:29; 마 9:15).
눅 22:7의 "무교절일이 이른지라"에서 이 날은 결정적인 어떤 일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게 일어날 날이나 절기이다.
막 14:41의 "때가 왔도다"에서 이 때는 예수님의 수난이 시작하는 시간이다.
눅 2:27에서 시므온이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간" 시간은 하나님이 정한 시간임을 암시한다.
(b) 요한의 기록들의 용법.
① 엘코마이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오심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요한 문서들에서 광범위한 비유적 용법으로 사용되며 아울러 보다 강한 신학적인 내용을 지닌다. 1인칭으로 된 예수님의 "오심"에 관한 말씀들은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 논쟁적인 측면을 지닌다.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오신 것이 아니다(요 7:28; 요 8:42). 사람은 예수님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한다(요 8:14). 그의 주장은 하나님의 보내심에 근거하고 있다(요 8:42). 그는 아버지의 이름으로(요 5:43) 빛을 주고(요 10:10) 세상을 구원하려고(요 12:47) 오신다. 비록 그가 심판하려고 오신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요 12:47), 그의 오심은 심판을 의미한다(요 9:39). 왜냐하면 빛이 올 때 어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빛을 거부하기 때문이다(요 3:19). 그는 진리를 증거하러 오셨으며(요 18:37), 진리에 속한 사람들은 그의 말씀에 귀기울일 것이다. 예수님의 메시야적 주장은 그의 출신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요 7:27)과 메시야가 아직 오시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요 4:25)에게 대항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메시야적 주장은 빛, 곧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러 왔고(요 1:7) 예수님을 장차 오실 분으로 인정하고(요 1:15), 세례(침례)-예수님의 현시(manifestation)로서 종말적 의미를 지니는 세례(침례)로써 그의 길을 예비하는(요 1:31) 세례(침례) 요한에 의하여 지지받는다. 그리스도보다 먼저 온 다른 사람들은 도적들이요 강도들이다(요 10:8).
② 엘코마이는 요한복음에서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오는 것을 나타낸다. 요한복음에서도 공관복음에서와 같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본다(요 3:26; 요 6:5; 요 10:41). 예수님은 사람들을 오라고 초청한다(요 7:37). 이 초청에 응답하는 사람들은 제자가 됨으로써(요 1:47) 특별한 의미에서 오는 것이다(요 6:35). 제자들도 초대를 할 수 있다(요 1:46). 예수님은 오는 사람들을 거부하지 않으시고(요 6:37) 그들에게 생명을 줄 것이다(요 6:35).
그렇지만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오는 것에 대한 결정적 권위는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다. 요한에 의하면 예수님께 오는 자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이다(요 6:45). 다음 그 대답은 아버지께서 그를 이끌지 않으시면 아무도 올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 오는 것은 하나님의 영향을 받아 오는 것이다. 분명히 인간의 자유 결정은 하나님이 정한 결정이다. 요한의 기사들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선택 사상이 놓여있는 것이다(요 6:65).
따라서 예수님께 오는 자들은 예수님을 믿는다. 신자들로서 그들은 이미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요 5:24). 그들은 "주(당신)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고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고백에 이른다(요 11:27). 예수님께 오는 사람은 성령에 의해 거듭난 사람이며, 그의 기원은 신비로운 것이다(요 3:8).
예수님께 오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죄를 계속 고집하는 결심에 근거하여 있다. 예수님께 오기를 거부하거나(요 5:40), 빛으로 오기를 거부하는 것은(요 3:20) 결국 영원한 구원에서 제외이다.
③ 엘코마이는 요한복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오시는 것을 나타낸다. 요한에게 있어서 엘코마이는 부활 현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요한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시는 세 가지 신비를 기록한다:
·부활하신 주님은 도마가 없는 제자들에게 오셨다(요 20:19). 못과 창에 찔린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는 것은 주님의 정체를 확인하고 인식하는데 도움이 된다.
·부활하신 주님은 도마가 함께 한 제자들에게 오셨다. 도마의 의심은 부활하신 주님의 영적 실체에 의해 완전히 사라졌다(요 20:26).
·부활하신 주님은 디베랴 바닷가에 있는 제자들에게 오셨다. 그 때 음식은 주님의 임재로 신성하게 되었다(요 21:13).
④ 엘코마이는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낸다. 요 14:3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에 대해 증거하신다. 요 21:22 이하에서도 이에 관해 언급한다.
그렇지만 초림과 재림 사이에는 보혜사 성령이 오신다(요 15:26; 요 14:28).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지상에 오신 것과 같이 보혜사는 승귀하신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의 공동체에 오신다. 보혜사의 오심은 예수님의 오심의 계속을 포함한다. 사람들은 지금 예수님이 있는 곳으로 올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혜사 성령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올 수 있게 한다(요 7:34; 요 8:21-요 8:22; 요 13:33).
⑤ 엘코마이는 요한복음에서 '시간의 도래'를 나타낸다. 요한복음에서 이 단어는 그의 오심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특정한 시점에 관하여 말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들은 요한의 공식 문구 엘 케타이 호라('때가 온다')에 의해 소개된다. 요 4:21에서 호라(때)는 미래의 구원의 때이다. 그러나 메시야의 구원의 때는 이미 동텄다는 사실을 표현한다(요 4:21; 요 4:23). 이런 사실은 요 5:25의 부활의 때에도 적용된다.
이 점에 관해서 가장 의미심장한 진술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시간에 대한 언급이다. 그것은 요한에게 있어서 영화와 동시에 일어난다. 호라(때)는 하나님의 정하신 시간이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지상 인간 역사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시간이다. 요한복음에서 이 종류에 대한 두 기사가 있다. 첫째는 예수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이고(요 7:30; 요 8:20), 둘째는 때가 왔다는 것이다(요 12:23; 요 13:1; 요 17:1).
요 16:2; 요 16:4에서는 제자들의 때에 대해 언급한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박해와 죽임이 있는 순교의 때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 시대는 이미 주님 자신의 체포의 때와 더불어 시작되었다(요 16:32).
⑥ 요한 서신들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해 언급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요일 4:2에서 "육으로" 오신 자이고, 요일 5:6에서 "물과 피로" 오신 자이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고 적그리스도가 오는 것은 마지막 때의 징조이다(요 2:18).
⑦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해 언급한다. 영원한 하나님은 이미 오셨으며, 지금 오시고 계시며, 장차 오실 분이다(계 1:4; 계 1:8; 계 4:8). 그리스도는 빨리 오실 것이다(계 2:5). 교회는 그의 오심을 위해 살아가며(계 22:17), 그것을 대망하는 기도 제목으로 삼는다(계 22:20). 그리스도는 도적같이(계 16:15) 구름을 타고(계 1:7) 오실 것이다. 그의 오심은 심판을 가져 올 것이나(계 6:17 등), 메시야적인 환난 후에(계 3:10) 그의 오심은 또한 기쁨도 초래할 것이다(요 19:7).
(c) 바울 서신의 용법.
① 바울 서신에서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한 언급보다 그의 종말론적 오심에 관한 언급이 더 많다. 그의 초림에 관한 언급은 엡 2:17; 딤전 1:15에만 나온다.
② 그리스도의 오심에 관한 종말론적 기사들은 초대교회 전통의 골격으로 되어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기대하며 살았다(고전 4:5). 바울의 아람어 간구는 독특하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 16:22). 주의 만찬에 대한 바울의 기사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언급을 포함한다(고전 11:26).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갑자기 밤에 도적과 같이 오실 것이다(살전 5:2). 그러나 그는 영광 중에 오실 것이다(살후 1:10). 구원의 때는 온전하는 것이 오는 때이며, 부분적인 것은 폐해지는 것이다(고전 13:10). 하나님의 진노는 불신자에게 임할 것이다(골 3:6; 엡 5:6). 그리스도께서 나타나기 전에 배교가 있고 죄의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살후 2:3).
③ 바울은 또한 계명(롬 7:9)과 믿음(갈 3:23)이 오는 것과 같은 의미심장한 사건들에 대해서도 "온다"라는 말을 사용한다. 사도로서 바울 자신은 복음의 축복을 가지고 온다(롬 15:29). 그리고 그는 고상한 말을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고전 2:1), 복음을 전파하러 온다(고후 2:12). 그는 온유함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며(고전 4:21), 근심으로 나아가거나 징벌하려고 나아가기를 원치 않는다(참조: 고후 2:1; 고후 2:3). 그리고 그는 비록 회개하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만, 그가 나아갈 때에 낮춤을 당할 각오를 하고 있다(고후 12:20-고후 12:21).
(d) 신약성경의 다른 기록들의 용법.
여기에서는 이 단어의 종말론적 용법이 지배적이다.
① 행 1:11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언급한다: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구원 시대의 옴(히 8:8), 기롱하는 자들이 옴(벧후 3:3), 성령의 도래는(행 19:6), 구원 시대가 이미 동텄음을 보여준다(참조: 행 2:17-행 2:18).
② 행 2:20에서 큰 심판의 날이 임하는 것을 언급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③ 히 8:8에서 구원의 시대가 오는 것을 언급한다: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히 10:37에서도 마찬가지다.
④ 행 19:6에서 구원의 시대가 이미 동텄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⑤ 벧후 3:3에서 마지막 날에 기롱하는 자들이 올 것을 말한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J. Schneider; W. Mund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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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vnomai(1096, 기노마이) 생겨나다, 일어나다, 되다, 만들어지다, 행해지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기노마이(이오니아의 산문 문학과 일반 헬라 문헌에서 Aristot. 이래로 나타남)는 '존재하게 되다, 생겨나다, 생산되다, 일어나다, ~이 되다'를 의미한다.
2.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기노마이는 신약성경에서 670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기노마이는 ① '태어나다' be born(갈 4:4), ② '자라다, 맺다' grow(열매에 대해, 마 21:19),
③ '일어나다' arise, '생기다' happen, '이다' be,(여러가지 사건들에 대해, 마 8:26; 행 6:1; 행 12:18), ④ '만들어지다' to be made, '행해지다, 지은바 되다' be done(요 1:3; 마 11:21), ⑤ '어떤 것이 되다' to become something(막 1:17), ⑥ '오다' come(갈 3:14) 등 여러가지 의미 및 뉘앙스를 나타낸다.
(b) 기노마이는 에이나이(ei+'nai, 1511: ~이다, 있다 to be)를 대신하기도 한다(예를 들어 마 10:16; 막 4:22). 소유격을 수반하여 이 단어는 '기원'이나 '회원의 자격'을 나타낸다(눅 20:14; 벧후 1:20; 참조: Funk §162(7)). 사람에 대하여 여격을 수반하는 경우 이 단어는 '소속'을 나타낸다(롬 11:5).(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J. Guh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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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jxevrcomai(1831, 엑셀코마이) 나가다 go out, 나오다 come out, ~에서 나오다 get out.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엑셀코마이(Homer 이래)는 엑스(ejk, ejx, 1537: ~로부터)와 엘코마이(e[rcomai, 2064)에서 유래했으며,
(a) '나오다, 나가다, 떠나다, 지나다, 올라오다, 나아가다',
(b) 비유적 의미로 '발행하다, 발하다, 성취하게 되다, 내다, 방출하다' 등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엑셀코마이는 70인역본에서 약 700회 나오며, 대부분 히브리어 야차(나오다, 나가다, 앞으로 가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엑셀코마이는 70인역본에서
(a) 땅에서 '나는' 소산이나 열매,
(b) 사람이 '산출하는' 몸이나 입술의 열매,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발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사 51:4; 사 51:5; 민 16:46; 창 24:50; 사 28:29; 사 55:11 등; 사 45:23).
집회서 24:3에서 지혜는 '나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입으로부터 나왔다'고 말한다.
(c) 지혜서 16:14에서 '나가버린' 생기, 시 146:4에서는 호흡이 '끝나는' 것을 나타낸다.
(d) 제의적 의미로 신의 현현(사 42:13; 슥 14:3; 슥 14:8), '기도하러 오는 것'(유딧 12:2)을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엑셀코마이는 약 214회 중,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에 172회, 바울서신에는 8회 나온다.
1) 엑셀코마이의 '나가다, 나오다'라는 의미는 나가는 장소나 떠나는 지점에 대한 언급과 함께 사용되었다.
(a) 자발적으로 어떤 장소를 떠나는 자에 대하여.
① 단지 속격과만 함께, 마 10:14; 행 16:39. 막 5:2; 막 7:31; 요 4:30; 요 8:59; 행 7:3 이하; 고전 5:10; 계 18:4 등. 속격과 함께 엑소가 따름-에이스 및 장소 대격과 함께, 마 21:17; 막 14:68; 혹은 장소 대격 붙은 파라와 함께, 행 16:13; 혹은 프로스티나(인격 대격)와 함께, 히 13:13. 아포 및 장소 속격, 마 13:1; 막 11:12; 눅 9:5; 빌 4:15; 히 11:15; "거기서 나가다", 마 15:21; 막 6:1; 막 6:10; 눅 9:4; 요 4:43. 오덴 엑셀돈("내가 나온"), 마 12:44; 눅 11:24. 에크와 함께 '~에서 나오다', '어떤 장소에서 나오다' 마 8:28; 계 14:15; 계 14:17; 계 14:18; 계 15:6. 엑셀데인 아포(~에서 [아무에게로] 나오다), 마 15:22.
요한복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심으로써 하늘에서 하나님과 함께한 그곳을 떠나신 것을 나타낸다: 요 16:27; 요 16:28; 요 13:3; 요 16:30. 에크 투 데우와 함께: 그가 하나님과 함께 한 곳에서, 하나님의 거처에서 나왔다. 요 8:42; 요 16:28.
② 축출되거나 쫓겨난 것들(특히 귀신들린 자의 몸에서 쫓겨나는 귀신들)에 대해: 막 1:25 이하; 막 5:8; 막 7:29; 눅 4:35; 마 12:43; 마 17:18; 눅 4:35; 눅 8:29; 눅 8:33; 눅 8:35; 눅 11:24; 행 16:18.
③ 그들을 억류하던 것(예: 감옥)에서 놓이거나(석방되거나) 나오는 자들에 대해: 마 5:26; 행 16:40.
(b) 나가는 장소에 대한 언급 없이 나타난다.
① 그 장소(예: 집, 도성, 배)가 바로 앞에 언급된 경우: 마 8:12; 마 9:31 이하; 마 10:11; 마 12:14; 마 18:28; 마 14:14; 막 1:45; 눅 1:22(성소에서); 눅 8:27; 요 13:30; 요 13:31 등.
동사 엑셀케스타이가 귀신들의 떠나가는 것을 가리킨다: 마 8:32; 막 5:13; 막 7:30; 막 9:29; 행 8:7; 행 16:19(여기에서는 귀신 자체가 직접 언급되지 않고 서술절인["자기 이익의 소망"]으로 대체되어 있다.).
② 어떤 일을 행하기 위해 나가는 경우, 이런 경우 자기 집이나, 혹은 적어도 머물던 곳에서 나가는 것이 분명하다. 부정사가 따른다, 마 11:8; 마 13:3; 마 20:1; 막 3:21; 막 4:3; 눅 7:25 이하; 행 20:1; 계 20:8. 에피(~에 대하여)와 함께, 마 26:55; 막 14:48; 눅 22:52; 에스 투토("이를 위하여")와 함께, 막 1:38; 히나와 함께, 계 6:2.
또한 목적을 나타내는 여하한 부정사나 접속사 없이 사용되었다, 막 6:12; 행 8:11; 행 14:16; 행 16:20; 눅 5:27; 눅 9:6; 요 21:3; 행 10:23; 행 20:11; 고후 8:17; 장소 대격과 함께 에이스가 따른다, 마 22:10; 마 26:30; 마 26:71; 막 8:27; 막 11:11; 눅 6:12; 눅 14:21; 눅 14:23; 요 1:43; 행 11:25; 행 14:20; 고후 2:13.
③ 엑셀코마이는 어디로 나가는 것인지가 앞의 언급이나 문맥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경우: 마 24:26; 마 27:32(마을에서 십자가에 못박을 곳으로 나가다)는 단독으로, 이전에 거주하던 땅을 떠나는 사람에 대해(행 7:7; 참조: 히 11:8);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사들(마 13:49)에게 사용되었다. '~를 만나러 나가다', 마 25:1; 마 25:6; 요 12:13; 마 8:34.
④ 동방의 중복적인 서술 양식에 따라서 분사 엑셀돈은 종종 '떠남'을 나타내는 다른 정형 동사 앞에 놓인다, 마 8:32; 마 15:21; 마 24:1(성전에서, [참조: 21:23]). 그는 그(성전) 부근에서 떠나셨다, 막 16:8; 눅 22:39; 행 12:9; 행 12:17; 행 16:36; 행 16:40; 행 21:5; 행 21:8.
2) 엑셀코마이의 비유적 용법.
(a) 어떤 집회(집단)에서 '나가다', 즉 그것을 버리거나 떠나는 것을 나타낸다, 요일 2:19; 고후 6:17.
(b) '물리(육체)적으로 나오다', ~에서 생기다, 태어나다, 마 2:6(마 5:2의 인용); 히 7:5.
(c) 아무의 영향력에서 벗어 '나가다', 안전하게 그것에서 피하다: 요 10:39.
(d) 세상에(공중 앞에) '나오다', 색다른 견해로 주의를 끌어 모으는 자들에게 사용되었다, 요일 4:1.
3) 엑셀코마이의 사물에 관한 비유적 용법.
(a) 보고, 명성, 소문, 메시지, 가르침 등에 관하여, '말해지다, 들리다', 계 16:17; 계 19:5. '알려지다, 선언되다', 고전 14:36.
(b) '퍼지다', 마 9:26; 눅 4:14; 막 1:28; 롬 10:18; 요 21:23; 눅 7:17; 살전 1:8. '포고(선포)되다', 눅 2:1.
(c) ① '나오다, 즉 방출되다', 마음, 입에부터(마 15:18 이하; 약 3:10; 계 19:21) 나오는 것, 발(표)하는 것을 나타낸다.
② 몸에 흘러 나오는 것을 나타낸다. 요 19:34.
③ 방사(출) 하다 to emanate, 나오다, 눅 8:46; 계 14:20.
④ 번개의 갑작스런 번쩍이는 것을 나타낸다, 마 24:27.
(d) 소망이 '끊어지거나 사라지는 것'을 나타낸다, 행 16:19.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J. Schnei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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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io"(40, 하기오스) 거룩한 holy, 신에게 바친 sacred.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하기오스는 어원이 분명치 않다. 이 단어는 하조마이(a{zomai)와 관련이 있다. 하조마이는 '~에 두려워하다, 움츠리다'('신이나 부모를 두려워하는 것, Homer, Il. 1, 21에서 아폴로를 두려워하는 것)와 '존경하다'(Aesch., Eumenides 1002에서는 제우스가 팔라스의 보호 아래 있는 사람들을 존경함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를 의미한다. 은유적으로는 '그것은 나를 죽음의 공포로 채우지 않는다'(Eur., Orestes 1116)라는 표현에서 사용되었다. 부정적으로 쓰일 경우에는 '거룩한 분노로 채워지다'를 의미한다(Eur., Frag. 348). 하기조마이는 70인역본에나 신약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옛 헬라어 하기오스는 존경의 의미에서든 반감의 의미에서든 '두려움의 대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금기(taboo)보다는 예배할 가치가 있는 거룩한 것을 더 강하게 시사한다. 그 후에 '사당'(shrine; Herodouts에서), '사람'(Aristoph)에 대해 사용되었고, 헬레니즘 시대에 이 단어는 '신들'이나 '신들을 묘사하는 수식어'로 사용되었다.
하기오스는 동방의 신들(이시스[Isis], 세라피스[Serapis], 바알[Baal] 등. TDNT Ⅰ89)을 묘사하는 수식어로 사용되었는데, 이로부터 헬라의 신들에 대해서도 적용하게 되었다.
2. 구약 및 70인역본의 용법
형용사 하기오스는 70인역본에서 약 800여회 나오며, 20개의 히브리어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주로 코데쉬와 카도쉬를 번역했다.
70인역본에서 하기오스에 해당하는 이런 단어들은 '분리'나 '구별'이라는 개념이 강하다. 따라서 카도쉬는 본질적으로 거룩한 것, 또는 신적 의식이나 제의 행위에 의해 거룩한 영역에 속하게 된 것을 가리킨다. 구약에서 거룩한 것들은 도덕적 순결보다 범속한 것으로부터 분리, 곧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보통 사용으로부터 분리하여 놓거나 따로 떼어 놓은 것들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라는 말은 모든 것, 특히 악한 것으로부터 하나님의 절대적 분리성을 표현한다(사 17:7). "거룩한 백성"은 하나님이 다른 민족들로부터 분리, 구별하여 자기의 소유물로 삼았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레 20:26; 신 7:6; 14:2; 26:19).
예배 의식에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거룩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님 예배를 위해 따로 떼어(분리, 구별) 하나님께 바쳐진, 거룩한 영역에 속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희생제사의 여러 부분(레 6:16; 7:6), 제사의 의식에 사용된 특정 물품(출 29:37; 출 30:29), 제물, 거룩한 향(출 30:37), 거룩한 기름(출 30:37), 성전과 그 구성요소(시 65:4; 레 6:16 등), 제사장(레 21:6, 8), 레위인(대하 35:3), 절기, 안식일(출 16:23; 사 58:14) 등이 이에 해당한다.
같은 맥락에서 '예배하기 위해 모인 회중', '이스라엘 백성', 때때로 '천사들'을 "성도들"이라고 부른다(출 15:11; 19:6; 신 7:6; 시 16:3; 34:9; 89:5, 7; 단 7장; 에녹 1:9; 19:1, 4-5; 유딧 31:14).
그러므로 '거룩한 것'이라는 개념은 윤리 이전의 개념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또한 윤리적 가치를 지향하는 개념이기도 하다(출 31:13; 시편과 선지서).
하기오스는 구약성경을 통과하면서 '거룩한, 신성한, 성별된, 봉헌된, 순결한'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하기오스는 신약성경에서 약 230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하나님의 거룩. 신약성경에서 거룩은 구약성경에 근거하여 물질적 요소는 인격적 요소에 크게 양보한다. 신약성경의 거룩은 하나님의 내적 본질의 묘사를 담고 있다. 그것은 전능, 영원, 영광을 포괄하며, 두려움을 불러 일으킨다.
① 계 6:10에서 순교자들은 하나님을 "거룩하고 참되신" 분이라고 부른다: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② 요 17:11에서도 하나님의 거룩은 "거룩하신 아버지"로 나타난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③ 벧전 1:15이하에도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 나타난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구약성경과 비교하면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묘사하는 경우가 매우 적다.
(b) 거룩하신 자(하기오스)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는 간혹 하기오스로 묘사되었으며 이 묘사는 잘 알려진 중요한 것이다.
① 누가복음에서 그것은 "성령"이 마리아에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그녀를 덮으신 예수님의 기적적 탄생에 근거되어 있다(눅 1:35). 여기서 토 겐노메논("나실 바")과 관련된 하기온("거룩한 자")은 주어에 속하고 휘오스 데우("하나님의 아들")는 술어에 속한다. 토 겐노메논 하기온("나실 바 거룩한 자")은 새 생명의 초자연적 기원을 설명하며, 그 기원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운다. 그러므로 여기서 휘오스 데우 곧 하나님의 아들은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직무에 근거하지 아니하고 그의 기원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마귀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부른다(막 1:24; 눅 4:34). 70인역본에서 이러한 칭호는 삿 13:7과 삿 16:17에만 나타나며, 이 표현의 지칭 인물이 거룩함으로 충만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② 요 6:69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 고백 받는다: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③ 요일 2:20에서 그리스도는 거룩하신 자로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기름을 부어 주신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④ 유사하게 계 3:7에서 그리스도는 거룩하고 진실하신 자로 나타난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이러한 구절에서 하기오스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⑤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종"으로 불리운다(행 3:14; 행 4:27; 행 4:30).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이 과거에도 선지자들을 언제나 부인하고 죽였듯이 예수님을 거부하였다(행 7:51이하).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았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 저항하는 것은 하나님께 저항하는 것과 똑같다.
(c) 거룩한 영(성령)
성령의 거룩은 그리스도의 거룩과 분리될 수 없다(참조: 행 2:17이하).
① 성령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특히 세례(침례) 받으실 때에 활동하셨다(마 1:18; 마 1:20; 눅 1:35; 마 3:11과 병행구). 이는 성령의 시대의 시작인 것이다.
요한은 그리스도는 성령의 세례(침례)를 베풀 것이라고 하였고(행 1:5), 부활 후에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다(오순절, 행 2:4). 성령은 이제 나타나셨으며, 그러므로 거부는 용서받을 수 없다. 세례(침례)는 이제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② 누가는 특히 한정적, 비한정적 형태 모두에서 프뉴마 하기온, "거룩한 영"(성령)이라는 어구를 즐겨 사용한다. 누가는 하나님의 영을 다른 영들과 구별하기를 원하며, 그 제의적 요소보다는 카리스마적인 요소를 강조한다.
③ 바울은 보다 더 인격적 강조를 하며, 제의적 측면을 지지하나 영적화 한다. 예를 들어 거룩한 성전인 교회와 그리스도인 안에는 성령이 거하신다(엡 2:21; 고전 6:19; 참조: 롬 15:16; 고후 13:13; 살전 4:8). 세례(침례)와 성찬(고전 12:13)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나누는 것(교제)을 의미하는 예배 공동체의 표시이다.
(d) 교회의 거룩. 구약성경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종인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신 성령의 전으로서 거룩하다. 거룩한 백성들인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해야 한다(벧전 2:9; 벧전 1:16). 그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다(고전 1:2).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들은 이제 성도들 중에 속한다(엡 2:19). 교회와 마찬가지로 교회들도 거룩하다(고전 14:33). 거룩은 본래부터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은총의 부르심으로 말미암는다(롬 1:6; 고전 1:24; 빌 1:1). 거룩한 백성은 하나님의 기업을 가진다(엡 1:8; 골 1:12; 참조: 신명기).
(e) 그리스도인의 거룩. 교회가 성전인 것처럼(고전 3:17; 엡 2:21)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롬 12:1; 롬 15:16). 사랑으로서 서로 섬기는 것은 거룩을 나타내는 것이다(갈 5:13; 롬 15:25; 롬 16:2). 거룩한 입맞춤은 그것을 보증한다(고전 16:20).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된 자는 그들의 가족 전체를 거룩하게 만든다(고전 7:14). 여기서의 거룩은 도덕적인 성격을 지니며, 불순, 특히 이방의 성적인 것과 대조되는 것이다(행 10:14; 엡 5:5). 거룩에 대한 제의적인 언급은 거룩을 단순한 도덕적인 것으로 되는 것을 막아준다.
끝으로 마지막 심판에서 거룩의 원리는 기준인 것이다(고전 6:2). 신자들은 심판할 것이다-이리하여 믿음은 그 자체가 거룩하다고 불리워질 수 있는 것이다(유 1:20).
(f) 교회의 승리.
① 거룩한 천사들은 승리를 거둔 교회에 속한다(막 8:38; 눅 9:26; 계 14:10; 유 1:14).
천사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돌아올 것이다(살전 3:13). 그러나 이 구절은 세상을 떠난 성도들을 가리키거나 포함하는지도 모른다(살후 1:10).
② 그리스도인들은 성도로서 승리한 교회에 속한다(계 14:12; 계 17:16).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될 것이다(계 22:11).-그러나 스스로 거룩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거룩해졌다. 거룩은 이미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인 그리스도인들의 중심 결의(central determnation)인데, 그리스도인들이 벌써 그리스도의 거룩한 제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되고 성령의 전이 된 것이다.(참조: O. Procksch; H. Seebass; C. Br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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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vsma(5545, 크리스마) 기름 부음 anointing, 연고 unction.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크리스마(크세노픈, 보다 초기에는 크리마[chrima])는 '기름, 연고, 치료제 연고, 도료, 백회, 문지르거나 바름'을 의미하며, 칠하거나 문지르거나 기름을 붓는 행위까지 의미한다.(참조: W.Grundmann)
2. 70인역본의 용법
크리스마는 70인역본에서 11회 나오며, 히브리어 마사흐(기름 바르거나 붓다), 미쉬하(바르는 기름), 모쉬하(기름 부음)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크리스마는 신약성경에서 요한일서에만 3회 나온다.
요일 2:20, 요일 2:27에서 크리스마는 성령에 대해 사용되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요한에 있어서 크리스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해의 능력을 주셔서 다른 교사를 필요치 않게 하시는 진리의 성령이다(요일 2:27). 이 기름 부음을 통해 그들은 성령을 받고, 성령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생각하게 한다(참조: 요 14:26; 요 15:26; 요 16:13이하).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은 하나님의 권위의 말씀을 통해 신자 안에서 역사하는 능력이다. 예수님을 따르고 또한 예수님 안에 거할 때(요일 2:28) 그리고 교회에서 역사하는 설교된 말씀을 통하여 신자는 예수님의 메시야적 기름부음을 한 몫을 받게 된다. 신자는 영을 분별할 수 있는 성령님을 받는다(요일 4;1이하; 요일 2:18).(D.Mu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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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rnevomai(720, 아르네오마이) 거절하다 refuse, 부인하다 deny.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아르네오마이(Homer 이래)는 일차적으로 `부인하다'를 의미한다. 요구 혹은 도전의 문맥에서 부인은 분명히 `거부하다, 거절하다, 사절하다'이란 의미를 분명히 내포한다(Hesiod, Works and Days, 408; Demosthenes, 18, 282). 해명을 필요로하는 문제 혹은 의문에 대한 언급과 함께, 아르네오마이는 `논쟁하다, 경쟁하다, 다투다, 부정하다, 반박하다'(Thuc.6, 60)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아르네오마이는 70인역본에서 6회 나오며, 창 18:15에서 히브리어 카하쉬를 번역하여 `논쟁하다, 부인하다'를 의미하며, 지혜서 (12:27; 16:16; 17:10)에서 `거부하다', 마카베오사서 (8:7; 10:15)에서 `포기하다, 부인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아르네오마이는 신약성경에서 3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거절하다', 히 11:24.
(b) `부인하다', 요일 2:22, 눅 8:45, 요 1:20, 행 4:16.
(c) `부인하다, 관계를 부인하다, 제것이 아니라고 하다'.
①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에 대해, 마 10:33; 눅 12:9; 행 3:13, 행 3:14; 유 1:4; 요일2:23; 벧후 2:1; 마 26:70; 마 26:72; 막 14:68; 막 14:70; 눅 22:57; 요 13:38; 요 18:25; 요 18:27.
②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에 대해,
딛1:16에서 행위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을 표현한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요일 2:22에서 하나님과 그의 아들을 부인하는 것을 거짓말과 동일시한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이러한 부인은 지상의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공격의 초점은 참으로 영적인 구속자를 육(肉)으로 오신 분에게서 구별하는(영지주의적?) 가르침에 집중되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에게서 떼어놓는 것이며(요일2:23), 자기 스스로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는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반대편에 선다는 것이다.
③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에 대해, 마 10:33에서 세상에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의 종말론적 보답을 묘사한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딤후 2:12에서 주님과 친분 관계를 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④ 비인격적 대상과 함께 `거절, 거부하다, 사절하다'.
딤전 5:8에서 믿음을 `저버리는 것'을 나타낸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계 2:13,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부인하는 것'을 나타낸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계 3:8, 예수님의 이름을 `부인하는 것'을 나타낸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d) `자기 자신을 부인하다, 포기하다.'
눅 9:23에서 완전한 비이기적인 방식의 행위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을 나타낸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딤후 2:13에서 자기 자신에 진실하지 않은 것을 나타낸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딤후 3:5에서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을 나타낸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딛 2:12에서 비신앙적인 것을 `버리거나 포기하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참조: Walter Bauer ; H.-G.Link ; E.Tiedtke ; H.Schli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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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Jmologevw(3670, 호몰로게오) 약속하다, 고백하다, 시인하다, 선포하다, 선언하다, 찬미하다, 칭찬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
동사 호몰로게오는 소포클레스와 헤로도투스에서부터 나타나며, 헬라어 문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법률과 종교 분야에서 중요한 용어이다. 호몰로게오는 호모(동일한 것, 유사한 것)와 레고(말하다), 또는 로고스(말, 연설)의 합성어이며, 따라서 '동일한 것을 말하다', '말에 동의하다'를 의미한다. 이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a) '그 말에 동의하다'(Hdt.,Ⅰ,142,4), '같은 언어를 말하다, 그의 확언을 받아들이다, 책임을 인정하다, 죄를 고백하다'(Soph.Phil.에서부터).
(b) '영수증을 확인하다'(pap에서 때때로).
(c) '제안에 동의하다'(Hdt.,Thuc.), '제안에 따르다'.
(d) '소원에 동의하다, 약속하다'.(참조: O.Michel).
이 단어(와 이 어군의 단어들)에는 법정적인 의미가 현저하게 함축되어 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진술(말)에 동의하고 어떤 사항을 인정하거나 고백하고(예: 재판관 앞에서의 자기 죄에 대한 인정이나 고백), 어떤 일에 대해 동의하고(예: 다른 사람의 소원에 대한 동의) 또한 약속한다. 이 동의는 법정적 또는 법적 계약(서)로서 서약, 약속 또는 고백 행위로 표현한다.
이 단어들의 종교적 용법은 이 단어들을 협정(조약)이나 법정 언어로 사용한 용법에서 파생되었을 것이다. 어떤 맹세(호몰로게오)로서 자신을 구속하는 사람은 신(神)과의 조약 관계에 들어 간다. 그래서 이 개념은 법정에서의 과실에 대한 엄숙한 고백을 뜻하는 개념에서 신께 대한 죄의 고백을 뜻하는 개념으로 변형되었다. 이러한 개념들은 루디아(Lydia) 와 프리기아(Phrygia)의 속죄에 대한 비문들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특히 동양의 이교들에서 사용되었다. 현대 헬라어에서 이 개념은 제사장에게 하는 신성한 고백을 의미하게 되었다. 곧 엑소몰로게오마이는 '나는 고백을 한다'는 뜻이며, 엑소몰로게오(ejxomologevw, 1843)는 '나는 고백을 듣는다'는 뜻이다(참조: D.Furst).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호몰로게오는 70인역본에서 14회 나오며, 히브리어 야다(3034: 찬양하다, 욥 40:14[9]), 나다르(5087: 서원하다, 렘 44:25[51:25]), 샤바(7650: 맹세하다, 겔 16:8)의 역어로 각각 한번씩 사용되었으며, 그러한 의미를 나타낸다.
그리고 오경, 지혜서 18:13에서 하나님의 자손임을 '인정한다'는 의미로, 집회서 4:26에서 잘못을 '고백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호몰로게오는 신약성경에서 26회 나오며, 그 중에 l0회는 요한복음에 나온다. 이 용법은 일반 헬라어의 기본 의미로 시작하여 70인역본의 의미를 경유하여 그 후기의 저술에서 나타난 의미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의미를 나타낸다.
(a) 호몰로게오는 '언명하다, 약속하다, 시인(인정)하다, (엄숙히)공언하다, 증거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마 14:7에서 헤롯은 의붓딸에게 그녀의 소원을 들어 주겠다는 맹세의 약속을 했다: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 [허락하거늘]". 이 경우에 공언하는 것은 약속이나 맹세와 동일한 것이다. 호몰로게오에는 말하는 자를 그의 말에 묶는(구속하는) 것이 함축되어 있다.
행 7:17에도 비슷한 용법이 나온다. 곧 아브라함에게 한 공언 또는 약속은 의무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요 1:20에서 세례(침례) 요한은 자신이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자가 아님을 언명 또는 공언하였다: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여기에서 호몰로게오는 복음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 공개적인 엄숙한 선언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범주에 속한다(요 1:7; 요 1:15; 요 1:19).
히 11:13은 아마 고백(confessing)과 공언(avowing)에 대한 일반 헬라어 용법을 가장 잘 이해한 것 같다. 약속의 땅 입구에서 족장들은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자신들이 땅에서는 이방인에 불과하다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말은 하나의 선언 및 증거, 곧 공개적으로 한 고백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저자는 신중하게 호몰로게오를 사용함으로 두 가지 해석을 모두 허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b) 히 13:15의 호몰로게오는 '찬미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이 문맥은 교회에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을 찬미할 것을 요구한다. 곧 예수님의 중재를 통하여 그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찬미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c) 호몰로게오는 '고백하다, 공개적으로 고백하다, 공적으로 진술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요일 1:9에서 호몰로게오는 죄를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언명 또는 공언을 하는 자는 어떤 사실과 직면한다. 그는 그 사실을 감추지도 부인하지도 않는다. 그는 죄인이다는 것을 인정하고 공개적으로 특정한 죄들을 고백한다.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이 정직하게 자신의 과실을 깨닫고 공언할 때 그는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의로우심을 경험하게 된다.
롬 10:9 - 롬 10:10(참조:신 30:14)에 의하면, 믿음과 고백은 연결되어 있다(참조: 고후 4:13). 고백과 선포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고백에는 종말론적인 책임이 따르며(참조: 고후 4:14), 종말론적인 구원의 약속이 있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의 고백 형식이 롬 10:9 이면에 놓여 있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행 23:8 이하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의 고백도 종말론적 양상을 나타낸다: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부인했으나 바리새인들은 오는 세상과 관계된 종말론진리에 대한 그들의 교리적 고백으로 사두개인들의 교리를 반대했다.
참된 믿음에 필요불가결한 부분은 하나님의 성육신한 아들에 대한 공적 고백이다(요일 4:2; 참조:요 1:14).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교제는 이 고백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요일 2:28; 요일 4:15). 이것은 예를 들어 예수님과 그리스도의 동일성을 부정하는 그노시스파와 같은 이단적 운동을 정면으로 반대하여 있는 참된 기독론의 표적이다(요일 4:2 이하; 요일 4:15; 참조: 요일 2:22).
요한이 고백에 대하여 기록할 때 결코 고립된 교훈을 의미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산출하는 완전한 진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진리는 신학의 주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인격이다. 사람이 자신의 고백에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지지하고 그 사실에 자신의 생을 복종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시금석 곧 영혼을 시험하는 표적이 된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공공연하게 고백하는 자는 회당에서 추방되었다고 말하고 있다(요 9:22; 요 12:42). 또한 요한은 교회에 명하기를 교회의 모임에서 참 고백과 거짓 고백을 구별하라고 하였다(요일 4:1 이하).
딛 1:16도 역시 이단적인 고백에 대한 공격이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이 고백-아마도 그노시스파의 더 높은 지식을 주장하는 고백과 이것을 추구하는 자의 생활은 서로 모순되므로 그 고백이 거짓이라는 것이 분명한 것이다.
딤전 6:12에서 바울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고 하였다. 예수님의 선한 증거는 제자들이 따라야 할 본보기이다(마 10:32; 참조: 딤전 6:13). 이러한 고백은 공적이며 (딤전 6:12), 구속력이 있고(딤전 6:12-13), 결정적인 것이다(마 10:32). 교회 또는 개인 신자는 죄의 용서에 대하여 응답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동을 공적으로 고백함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이 고백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으로 인정되고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는 증언을 하는 것이다. 신자는 자신의 믿음의 "고백에서" 자기 자신을 부인한다. 곧 자신의 존재와 모든 것을 예수님이 행하신 바를 통한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R.Bultmann). 믿음의 행위로 서의 이러한 고백은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 행위와 관련된다.
(d) 호몰로게오는 법적인 의미에서 '진술하다', '증언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호몰로게오의 법적인 용법은 아마도 신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하며,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호몰로게오는 눅 12:8과 병행구 마 10:32에서 사용되었다: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예수님은 자기를 시인 곧 고백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누구든지 자기를 고백하면 자기도 종말론적인 증인으로서 아버지 앞에서 그것을 확증할 것이다고 하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땅에서의 인간의 행동과 심판자 곧 증인의 말씀의 일치이다.
부인은 항상 예수님께 대한 배반과 일치하는 것이므로 이 고백은 종말론적인 면이 특히 강조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예수님을 알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의 편에 서거나 또는 예수님과 관계를 끊거나 할 때 그는 하나님께서 심판의 행동을 하실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계 3:5; 참조:마 12:32 이하; 막 8:34). 신자는 예수님과 교제 관계에 너무 완전하게 포함되어 있으므로, 사람들 앞에서의 그의 고백, 예를 들어 박해 시기 동안에 인간 법정 앞에서 고백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하는 고백과 같이 간주된다.
이러한 문맥에서 고백은 사람이 말하는 것만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전생애에서 보여지게 되는 순종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전적인 순종이 나타나지 않는 곳에서, 즉 사람이 구원에 대한 자기의 이해와 지식으로 만족하는 곳에서 이것은 부인과 동등한 것이 된다.
마 7:23에서 보면, 이러한 고백자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심판 때에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공언하실 것이다: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여기서 호몰로게오는 종말론적 증거, 또는 심판에 의한 거부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을 나타낸다.(참조: O.Michel; D.Fur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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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jpaggeliva(1860, 에팡겔리아) 알림, 발표 announcement, 약속 promis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에팡겔리아(Demosth. 이래)는 에팡겔로(ejpaggevllw, 1861)에서 유래했으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a) '알림, 선언, 보고'.
(b) 국가가 어떤 것을 언급할 때는 '명령'을 뜻한다.
(c) 법률에서 '고소의 통지, 판결 언도'를 뜻하는 전문 용어이다.
(d) '약속', 약속에 있어서 말과 행동 사이에서 긴장이 느껴진다. 따라서 약속은 종종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된다.
(e) '돈의 약속'은 특별한 유형의 약속이며 이런 의미에서 '기부' 혹은 '증여'의 개념이 생겨났다(국가의 종교 의식이나 통치자들의 즉위 때 그들에게 주는 선물, 사제 지망을 입증하는 선물을 약속하는 사제들).
(f) 헬라시대에서 우리는 또한 축제의 "선포"를 뜻하는 특별한 용법을 발견한다. 모든 예들 중에서 오직 한가지 예만이 신의 약속에 대해 사용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에팡겔리아는 70인역본에서 6회 나오며, '약속'이란 의미를 나타낸다(에 4:7; 시 56:8; 암 9:6 등).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에팡겔리아는 신약성경에서 5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누가의 기록에서 에팡겔리아.
① 행 23:21에서만 사람의, 곧 천부장의 언질을 나타낸다: "당신은 저희 청함을 좇지 마옵소서 저희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자 사십여 명이 그를 죽이려고 숨어서 지금 다 준비하고 당신의 [허락]만 기다리나이다 하매".
② 그 외에 에팡겔리아는 항상 하나님의 약속을 뜻한다. 에팡겔리아는 약속 뿐만 아니라 약속한 것의 성취 모두를 의미한다.
행 7:17에서 아브라함은 약속의 수령자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행 26:6이하에서 조상들에게 한 약속은 메시야에 관한 약속이다: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그리스도는 그것을 성취하셨다(행 13:23; 행 13:32).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여준 바대로(행 1:4) 메시야는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다(눅 24:49; 행 2:33). 기독교인들은 죄가 용서되고 성령이 부어진 성취의 시대에 살고 있다(행 2:38-행 2:39).
(b) 바울서신에서 에팡겔리아.
① 율법과 약속. 바울은 율법과 약속의 관계를 고찰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죽은 자를 일으키시거나 무에서 창조해내시기까지 하는 분이시니(참조: 롬 4:17), 약속하신 것을 능히 행하실 수 있다고 확신한다(롬 4:20 - 롬 4:21). 그러나 그 약속들이 성취되었을 때 그 약속들은 우리가 행할 수 없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뜻 및 행동과 마땅히 관련된 것이다(롬 4:16).
약속을 율법과 묶는 것은 우리의 위법과 그 결과인 심판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무효화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롬 4:13).
만약 약속이 율법에 의존한다면, 약속은 더 이상 약속이 아니다(갈 3:18). 언약의 약속은 율법에 앞선다. 율법은 생명을 주지 못하며(갈 3:21) 오직 죄인들을 행위에서 믿음으로 인도하는 일만 할 뿐이다(갈 3:22).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들은 고후 7:1에서처럼 명령을 지닌다. 이 약속들은 신자들의 행위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이 약속들이 신자들의 행위를 결정한다.
② 약속의 수령자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은 약속의 수령자이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롬 4:13).
유대인들은 메시야적 구원의 약속을 맨 먼저 받은 자들이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롬 9:4).
이방인들은 이 약속에 대하여 외인이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 2:12).
예수님은 유대인이다(롬 15:8). 그렇지만 이 약속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유대인들로부터 열방들에게 확대된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이신 한 씨 안에서(갈 3:16이하; 엡 3:6)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이다(롬 4:16). 그리스도를 덧입거나 그 안에 있거나 그에게 속한 사람들은 약속에 따라 아브라함의 후손이자 상속자가 된다(갈 3:27 - 갈 3:29).
③ 약속의 내용. 약속의 내용은 유업으로서의 메시야적 구원, 생명, 성령, 의, 그리고 아들 됨이다(롬 4:13이하; 갈 3:14이하; 롬 9:8; 엡 1:13). 모든 약속들은 율법의 저주를 제거하고(갈 3:14), 성령을 담보와 보증으로 주시고 인치신(엡 1:13 - 엡 1:14) 하나님의 긍정(the yes of God)이신(고후 1:20)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
(c) 히브리서에서 에팡겔리아.
히브리서 기자는 다른 관심을 지닌다. 그가 고찰한 바와 같이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 이삭, 사라, 족장들, 선지자들, 그리고 백성들에게 주어졌다(히 6:12 - 히 6:13; 히 11:9, 히 11:11, 히 11:33; 히 4:1이하). 개별적인 약속들, 예를들면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은 그들을 위해 성취되었으나, 궁극적인 약속들은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다.
히 6:15에서 아브라함에 대하여 "저가 … 약속을 받았느니라"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언급은 단지 부분적인 성취에 불과하다(이삭의 출생). 궁극적으로 그 약속은 복음의 견지에서 해석되어지고 있는데, 요컨대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전한 구원을 언급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참조: 히 4:2). 따라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 11:39에서 그리스도 전에 왔던 구름과 같은 많은 증인들이 기다렸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고"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족장들이 외국인과 나그네로서 멀리서 보고 환영한 메시야적 구원으로 수렴된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히 11:13).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진 새 언약은 보다 나은 약속들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히 8:6). 인용된 약속들은 예레미야 31장의 약속들이다. 이 약속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성취되었다: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9:15).
이 약속들의 최종적 성취는 아직도 미래에 속하여 있으나(히 10:36) 우리는 이미 에스카톤("마지막")에 살고 있으며(참조: 히 1:2), 우리는 불신앙으로 인하여 약속들을 잃지 않도록 "이미"와 "아직 아니" 사이의 긴장을 견뎌내야 한다(히 4:1이하). 하나님의 편에서, 약속들을 최종적으로 성취하려는 그의 뜻은 불변하며, 그는 맹세로 약속의 성취를 보증한다. 이 사실들은 믿음 안에서 우리를 강하게 한다(히 6:12이하).
(d) 베드로후서에서 에팡겔리아.
그리스도의 재림의 지연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오심에 관한 약속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조롱자들이 생겨났다: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벧후 3:4). 그 대답은 하나님의 약속이 더딘 것같이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예언의 말씀은 확실하다(참조: 벧후 1:19이하)는 것이다.
(참조: Walter Bauer; J.Schniewind; G.Friedrich; E.Hoff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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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jpaggevllw(1861, 에팡겔로) 선포하다, 약속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에팡겔로(Homer 이래)는 에피(ejpiv, 1909: 위에)와 앙겔로(ajggevllw:알리다, 전하다)에서 유래했으며,
(a) '지적하다, 선언(포)하다',
(b) 집결을 '명령하다',
(c) 중간태로, '자신에 관한 어떤 것을 알리다, 공적을 선포하다', 어떤 것에 있어서 '자기의 지배력을 보이다', 어떤 것을 '공언하다',
(d) '제공하다, 약속하다, 맹세하다'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에팡겔로는 70인역본에서 11회 나오며, 에 4:7에서 한번 히브리어 아말(말하다, 의도하다, 명령하다, 약속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잠 13:12에서는 히브리어 상당어 없이 '약속하다'를 나타낸다.
외경에서 이 단어는 '공언하다'(집회서 2:13), '약속하다'(마카베오일서 11:18; 마카베오이서 2:18)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에팡겔로는 신약성경에서 1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에팡겔로는 하나님에 의한 약속을 언급한다.
① 히 10:23에서 하나님은 약속하신 분으로 나온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잠시 잠간 후면 오실이가 '오실 것'이다(참조: 히 10:37). "그 날이 가까움"을 보고 있다(참조: 히 10:25). 그러므로 남아있는 짧은 기간동안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굽게 잡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 하나님이 관계하고 계시는 한에 있어서 그 약속은 파기되지 않는다. 그 약속은 하나님의 맹세이다.
② 히 6:13에 의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할 때 맹세로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 그 권고를 받아들여서 그들을 위한 약속을 확고히 붙잡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참조: 히 6:11이하).
③ 히 11:11에서 이삭에 대한 약속을 언급하는데, 사라는 그 약속하신 이를 믿음으로 잉태하는 힘을 얻은 것이다.
④ 히 12:26이하에서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말씀하셨을 때 땅이 진동하였거니와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고 합 26:6의 말씀을 인용하여 약속하셨다. 그 약속에는 영원한 종말론적인 구원, 진동치 못할 나라를 포함한다.
(b) 에팡겔로는 종말론에 관하여 사용되었다.
① 약 1:12에서 생명의 면류관이 약속되어 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② 영원한 생명은 또한 약속의 주체이다: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요일 2:25),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딛 1:2).
③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나라를 유업으로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약 2:5).
(c) 에팡겔로는 행 7:5에서 아브라함적 약속에 대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d) 바울은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생명의 약속과 관련시킨다.
① 롬 4:21에서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은 확고하여, 이 약속은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가지는 것이며(참조: 롬 4:15, 롬 4:17),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에게서 성취되었다.
② 갈 3:19(참조: 갈 3:18 - 갈 3:19)에서 그리스도는 약속의 씨이며, 약속된 것은 기업, 즉 위에 있는 예루살렘의 시민권이다(참조: 갈 4:28, 갈 4:26).
(e) 에팡겔로는 사람에 의한 약속이나 공언에 대해 사용되었다.
① 막 14:11에서 대제사장들이 유다에게 돈을 주기로 약속했다: "저희가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② 딤전 6:21에서 거짓 가르침을 공언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을 [좇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③ 벧후 2:19에서 이단들이 거짓 자유를 약속한다: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
④ 딤전 2:10에서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공언하는 자들은 선을 행해야 한다: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참조: Walter Bauer; E.Hoffmann; J.Schniewind; G.Friedr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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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jwvnio"(166, 아이오니오스) 시작이나 끝이 없는, 영원한, 세세의.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아이오니오스는 아이온(aijwvn, 165)에서 유래했으며, '영원한'(orphic. Hymn., 875; Plat., Xen.)을 의미하며, '영원한 하나님'이란 표현이 사용되었다.
후기 시와 산문에서 아이온의 기본 의미와 일치하여, '일생동안'이나 '항구적인'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 후에 제국은 많은 유사한 신들의 서술 용어와 같이, 황제(영원한 황제)들에게 적용했다(참조: H.Sasse).
2. 70인역본의 용법
형용사 아이오니오스는 70인역본에서 약 160회 이상 나오며, 히브리어 올람 어군(영원, 영원히, 항상 긴 시대, 오래된, 고대의 등)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시 24:7; 시 77:5; 창 21:33 등).
3.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아이오니오스는 신약성경에서 70회 나오며, 3가지 양식으로 '영원한'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아이오니오스는 롬 16:26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하나님에 관한 아이오니오스는 시작과 끝이 없는 무제한적 시간의 개념 뿐만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성의 개념을 포함한다.
(b) 아이오니오스는 하나님의 소유와 선물에 대해 사용되었다. 고후 4:18에서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과 비교되어 있는데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이다.
히브리서에서 동일한 견해가 발전되어 있다. 보기로 히 9:14에서 성령은 신에 속하기 때문에 영원한 영이시다. 동일한 맥락에서 이 단어는 [영원한] 영광(딤후 2:10; 벧전 5:10; 고후 4:17), 영원한 능력(딤전 6:16), 영원한 복음(계 14:6), 영원한 구원(히 5:9),영원한 속죄(히 9:12), 영원한 기업(히 9:15)을 나타낸다.
(c) "영원한 나라"라는 표현에서 아이오니오스(벧후 1;11)는 종말론적 기대의 목적을 위한 용어로 사용되었다. 같은 의미는 히 1:15의 영원한 기업, 눅 16:9의 영원한 처소, 고후 5:1의 영원한 집이란 표현에도 나타난다. 이러한 표현에서 아이오니오스는 하나님의 영원성이라는 완전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영원한 불(마 18:18; 마 25:41; 유 1:7), 영벌(마 25:46), 영원한 멸망(살후 1:9), 영원한 죄(마 3:29)에서 아이오니오스는 '그치지 않는, 끝없는'이란 의미만을 지닌다.
그러나 영원한 심판(히 6:2)과 같은 표현은 여기서도 순전한 일시적 의미를 넘어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d) 영원성의 개념은 롬 16:25; 살후 1:9; 딛 1:2; 몬 1:15에도 나타난다.
(참조: J.H.Thayer; H.Sasse; J.Guh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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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davskw(1321, 디다스코) 가르치다 teach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a) 동사 디다스코(Homer 이래)는 '가르치다'와 '배우다'를 뜻하는 어근 다(스)(da[s])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이 단어에는 '받아들이기 위하여 반복해서 손을 뻗히다'를 뜻하는 어근을 포함하고 있으며, 따라서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것을 받아들이게 하다'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 단어는 호머 시대 이래로 '가르치다, 알다, 교육하다, 증명하다, 지시하다'를 의미하며, 중간태로는 '스스로 배우다, 생각해 내다, 숙달하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교사와 생도,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데 전형적으로 사용된 말이다. 생도나 제자는 비단 지식, 사상, 사실만이 아니라 예술적 기교와 전문적인 기술도 배우는데 이 때 학습자는 스승과 제자의 반복적인 학습 활동을 거쳐서 이 모든 것들을 체계있게 철저하게 습득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단어는 생도의 가능한 한 최고의 발전을 그 목표로 삼는 이론적이고 실제적인 지식 전수라는 넓은 의미에서의 가르침과 학습을 의미한다.
(b) 파피루스(papyrus)와 오스트라카(ostraka)에서 입증된 일반적인 어법에서 디다스케인은 지적이고 권위적인 요소가 매우 강하다. "가르치다, ~을 알리다' 등의 의미 외에 디다스코는 '논증하다, 입증(증명)하다, 보여 주다'라는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단어는 공식적인 계약(아나그노시스 테스 호몰로기아스)의 기록에 관하여, 명확한 어떤 것을 '양도했다 yielded'라는 말이 될 수도 있다(Mitteis-Wilcken, Ⅱ, 2, 96, Col. Ⅱ, 5[A.D. 4세기]). 다른 경우에 이 단어는 '타당한 증거가 제시되어야 한다'라는 요구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
(c) 헤로도투스(Herodotus)는 합창단 지휘자의 직무를 묘사하는데 디다스코를 사용하였다. 이 경우에 '지휘하다'나 '연주하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시의 경연들이 있었던 시기(B.C. 5세기에서 4세기)에 지휘자들은 대개 공연되는 작품들의 작가였기 때문에, 디다스케인은 비극(Aeschylus에 관한 Aristoph. Ra., 1026; 참조: Hdt., Ⅵ, 21)이나 희극(Plat. Prot., 327d)은 물론 주신찬가(dithyramb)의 작곡(HDT., I, 23)을 포함하는 '시적인 활동'을 의미할 수도 있다.
(d) 헬라어 문헌에서 이 단어가 종교적인 의미로 사용된 경우는 드물며, 특히 주전 1세기까지는 이런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 이 단어는 안드로스(Andros)의 이시스 찬가(Isis-hymn)와 키메(Kyme)의 이시스 찬가(Isis-hymn)에서 등장하는데, 이 두 찬가는 여신을 우주와 그 개개 분야에서의 의미있는 질서를 위하여 전능으로 관여하고, 따라서 인간의 문화와 종교적 발전을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자로 묘사하면서 이 단어를 사용했다.
필로(Philo)는 매우 자주 이 단어를 고전 헬라어 어법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그는 예를 들어 모세를 헬라적 의미에서의 교사로, 즉 에픽테투스(Epictetus)의 작품에 나오는 철학자와 같이 다른 사람의 마음과 접촉하는 사람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따라서, 디다스코는 학생의 능력 계발과 지식 및 기술을 전달하는 것이 그의 관심인 '교사의 행위'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단어가 신들의 행위를 묘사한 경우는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모든 가르침의 목표는 생도의 능력을 계발시키기 위하여 지식과 기술을 전수하는 것이며, 생도의 의지를 어떤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압력을 가하는 것이 아니다.
2. 70인역본의 용법.
(a) 동사 디다스코는 약 100회 나오며, 그 중 57회의 경우에 히브리어 라마드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따라서 이 라마드가 지배적이다.
보통 디다스코는 신명기와 역사서들과 시편들(시 18:34은 제외)에서 라마드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다른 한편 디다스코는 욥기의 14회 중에서 욥 21:22에서만, 그리고 잠언의 7회 중에서 잠 5:13과 잠 30:3에만 라마드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70인역본에서 디다스코가 신 4:5; 사 40:14; 사 48:17을 제외하면 라마드만을 나타내는 단어이기 때문에 더욱 인상적이다. 이것은 디다스코가 헬라어를 말하는 유대인들에게 더욱 더 전문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70인역본에서 라마드와 마찬가지로 디다스코를 종교적 영역에 한정하지 않는다. 두 경우 모두에 있어서 이 용어는 무기들의 사용법에 대한 지시나(삼하 22:35 등) 노래를 연습시키는데 대해(신 31:19, 신 31:22 등) 사용되었다. 그러나 디다스코의 특별한 목적은 그것의 선포와 요구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다. 따라서 시 93:10에서 디다스코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가 사람들에게 그노시스를 가르치신다고 언급되어 있으며, 욥 22:2에서 하나님은 지식을 가르치는 자로 언급되었다.
디다스코는 특별히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신 4:1)와 말(레마타, 신 4:10) 또는 넓게 노모스(1Esr. 9:48)에 대해 사용될 때,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이끌 때(시 142:10; 참조: 시 50:13)에 명확한 하나님의 뜻의 선언에 대하여 사용된다. 가르침을 베푼 자가 하나님 자신이시든지(신 4:10), 가정의 가장이든지(신 11:19), 혹은 의인이든지(시 50:13) 간에 차이가 없다. 이 용어는 항상 지적인 것은 물론 의지적인 면도 지닌다는 것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70인역본의 디다스코는 항상 단지 사람의 어떤 특정한 부분이 아닌 전 인간에 대해 권리를 주장한다. 이것은 이 말이 하나님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뜻과 길에 대해 사용되는 곳에서 가장 분명하다. 렘 12:16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가르쳐 바알로 맹세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그 나라들의 범죄이다. 디다스코의 사용은 여기에서 우리가 이스라엘을 그들의 하나님에게서 떼어 놓으려는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시도에 관계되어 있다는 것과 이 시도가 성공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디다스코와 관련된 절대적인 요구 때문에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이 그 뜻에 복종하고 맞추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그 뜻을 보이시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가 되기에 특히 알맞은 것이다. 이 점에서 세속적인 사용과 70인역본의 사용 간의 차이가 생겨난다. 절대적인 요구의 사상은 세속 헬라어에는 발견되지 않으며 세속 헬라어에서 디다스코의 목적은 재능과 잠재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한편 70인역본(구약)에서 그 관심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의 전 인간과 그의 교육에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세속의 디다스코의 의미와 구약에서의 의미 사이에 어떤 궁극적인 단절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가르침의 목적이 어디에서나 어떻게든 목표로서 관찰된다는 공통적인 연결점이 존재한다. 구약에서 구원이 올 것이라는 예언적 선포가 결코 디다스코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 목적은 언제나 비록 수용되거나 발전되어야 하지만 이미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어떤 것이다.
(b) 구약의 후반부와 랍비 유대주의의 토양에서 우리는 유대인들 가운데서 이 단어의 역사에 나타나는 경향을 따르는 고정된 용법을 발견하게 된다. 독립적으로 사용될 때, 디다스코 또는 그에 상응하는 림메드는 계시된 하나님의 뜻의 총체인 율법을 설명함으로 가르치는 방식을 의미하며, 가르침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개인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와 다른 한편으로는 이웃과의 관계를 정돈하기 위해 주어진다.
이 용법은 이미 대하 17:7 이하에서 발견된다. 그 구절에서 이 단어는 몇 명의 뛰어난 사람들로 하여금 백성들을 가르치게 한 여호사밧에 대해 사용된다.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책'을 가지고 순회하였다는 것도 아울러 언급되어 있다. 기자는 그것이 종교적인 교육을 목적으로 율법을 가르치는 일이었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이것은 림메드(가르치는 것)가 그에게 있어서 명백한(unambiguous) 용어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랍비들에게서 림메드는 때때로 세속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따라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생업( trade)을 가르쳐야 하며, 만약 그가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아들에게 도둑질을 가르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bQid., 30b)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림메드는 이제 토라를 개인의 삶을 위한 구체적인 지도로 해석한다는 의미를 지닌 전문화된 용어이다. 이제 때때로 토라 등이 목적어로 덧붙여질 수 있으나 목적어 없이 사용되는 것도 일반적이며 매우 명확하다(unambiguous). 민 3:1 이하의 랍비들의 해석에서, 아론의 아들들은 역시 모세의 아들들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아론이 그들을 낳았고 모세는 그들을 가르쳤기 때문이며, 랍비들에게는 한 사람에게 토라를 성공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그 사람 자신과 하나님 모두에게 그의 탄생에 못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bSanh., 19b). 율법에 대한 실제의 교육은 해석적인 견해를 포함하기 때문에 그것이 보다 더 정확하게 규정되지 않았을 때에도 림메드는 종종 "학문적인 해결에 도달하다", "확립된 학문적인 견해를 표명한다"를 의미할 수 있다(Sanh., 11, 2 등); 서기관의 권위자가 율법적인 질문에 사려깊은 판단을 제시하고, 그것을 가르친다(Ber., 2, 5 이하 등). 그러므로 림메드라는 단어는 유대인들의 귀에 명확한 의미를 전달한다. 이것은 더 나아가 율법 교육(디다케)을 의미하는 파생어 탈무드에 의해 예증되고, 마찬가지로 "성경이 가르침을 준다"라는 등의 문구(S. Nu., 70 on 9:13, p.67, 1, Horovitz)와 "그것이 말하는 것 안에 (성경의) 가르침이 있다"라는 문구(Ab., 5, 1; Sota, 5, 4 등)에 의해서도 예증된다. 이것은 형식적인 면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 제재는 개별적인 연구를 필요로 할 것이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디다스코는 신약성경에서 약 95회 나오며, 그 3분의 2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첫 부분에 나타난다. 반면에 바울 서신에는 10회만 나온다. 따라서 우리는 이 용어가 소아시아와 헬라의 이방인들의 모임에서보다는 첫 번째 제자들의 무리 중에서와 원시 교회에서 두드러지게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단어는 의미에 있어서 "가르치다, 교육하다 to teach, to instruct"라는 명확한 의미를 지닌다. 뉘앙스에 대해서는 논의할 필요가 거의 없다. 왜냐하면 그런 뉘앙스는 여러 문맥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 28:15에서 그 문맥은 종교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며, 70인역본에서의 이 단어의 역사와 일치하여 단순히 지시(derection)가 있었고 그 지시를 준수한다는 것을 언급할 뿐이다. 한편 신약성경에서 디다스코의 내부 구조를 연구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a) 공관복음서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
① 복음서의 일치된 증거에 의하면 디다스케인은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직무 중의 하나였다. 예를 들면 마 4:23의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행하신 사역에 대한 포괄적인 언급에서 우리는 첫 번째로 그가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는 기록을 읽게 되며, 그 다음에는 바실레이아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시고 병자들을 고쳤다는 기사만이 나온다. 마 9:35; 마 11:1을 참조하라. 회당(마 9:35; 마 12:9 이하; 마 13:54과 병행구절; 막 1:21; 눅 4:15; 요 18:20 등)이나 T Sukka,4, 5에 언급된 교육 회관이 딸려 있는 특별한 회당이 있는 예루살렘의 성전(막 12:35; 눅 21:37; 마 26:55과 병행구절, 그리고 요 7:14 이하; 요 8:20도 참조하라)이 줄곧 가르치시는 장소로 언급되는데, 이것은 대부분의 회당이 교육적인 목적을 위해 시설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jMeg., 73d, 23). 어쨌든 질서있는 교육이 성전에서 행해졌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에 관하여 전하는 것 중 많은 부분이 가르치는 요소라는 것에 확실히 일치한다.
②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방식은 그 시대의 유대인 교사들이 가르치는 방식과 같은 것이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외형에 관하여 말한 것을 듣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거의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복음서가 기록된 시기의 교회의 일부는 이미 그들이 관찰한 관습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다른 일부는 그 형식에는 관심이 없고 가장 중요한 내용에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우리는 적어도 나사렛의 회당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눅 4:16 이하).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셔서 성경의 일부분(사 61:1 이하)을 선택하여 읽으신 후 그 시대의 다른 해설자들처럼 앉아서 풀이하셨는데 이것은 통상적인 유대교와 랍비들의 관습이었다(참조: 눅 5:3; 막 9:35; 마 5:2; SB Ⅱ 150 등). 따라서 단어 없이도 그 내용이 충분히 명료하게 드러나는 눅 4:16 이하에서는 생략되기도 하였지만, 마 13:53 이하와 병행구절에서는 나사렛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간결한 언급에서 순전히 디다스코만이 사용되었다(마 13:54; 막 6:2). 가르치기 위해 앉는 이와 같은 습관은 산상수훈이 시작되는 마 5:1과 누가 최고인가 하고 다투는 열 두 제자들을 훈계하시는 막 9:35에, 그리고 게네사렛 호수에서의 설교가 시작되는 눅 5:3에 언급된다. 이것이 당연히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관계된 유대 전통 역시 림메드 형식으로 말한다는 것이다(bAZ, 17a).
③ 만약 예수님의 가르치시는 외적인 방식이 후기 유대교의 골격 내에 존재한다면, 그 내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사렛에서(눅 4:16 이하) 그는 이사야의 말씀을 근거 또는 출발점으로 사용하셨다. 다른 경우들에서는 토라의 해석(마 5:21 이하; 마 15:3 이하; 마 22:37 이하와 병행구절; 참조: 마 22:23 이하)을 사용하셨다. 다른 한편 그는 그의 가르침을 율법을 해석하는 것에 한정하지 않으셨다. 첫째, 그는 율법에 대해 단지 율법 그 자체를 존중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신다. 다음으로, 그는 구원을 확보하려고 추구한 생명 없는 율법주의적 결의론과 같은 것을 가르치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 및 그의 이웃과의 관계에서 삶을 정리하기 위한 것이었다(마 22:37 이하와 병행구절; 참조: 마 19:16 이하와 병행구절).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가르친 것은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님, 그의 왕국, 그리고 그의 뜻 등 당대 유대교가 문제 삼았던 모든 주제들이었다. 그는 자신이 말한 바를 모두 동료 인간과 더불어 사는 인간 생활의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하였고, 논의되고 있는 주제 속에 온 몸으로 참여하셨다.
따라서 그의 가르침은 항상 의지에 호소하여 하나님의 뜻을 위하든지 아니면 그의 뜻을 거부하든지 실제적인 결단을 요구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그의 섭리, 그의 은총 또는 그의 진노에 관하여 단지 이론적으로만 가르침을 베푼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진노를 보여 준다(예: 눅 15:1 이하). 그는 또한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서 머리 속으로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나라가 임박하였음을 선포하고(막 1:15) 회개와 행동의 변화를 촉구하셨다(막 7:15; 마 5:21 이하). 이것이 예수님께서 랍비나 선지자들의 방법으로 말씀하셨으나 그들과 다른 급진적 방법이었다.
예수님은 그가 성경과 특히 율법(노모스)에서 하나님의 뜻의 계시를 본다는 사실에서 랍비와 바리새인들의 집단과 공통적인 근거를 발견하며, 그래서 그가 단 한 글자라도 버리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마 5:17 이하). 이 구절에서 "율법과 선지자들은 구약성경 구성의 본질적 부분이다. 율법은 구원의 필요를 깨닫게 하는 것이고 선지자들은 그 구원의 미래 성취를 지적하는 것이다"(Tholuck). '이룬다'는 것은 실행과 말씀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 성취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실행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 가르침과 실행은 십자가에서 최종적으로 절정에 달하였다. 그것은 율법이 '예언적으로' 가리키는 바로 그 사역이며, 또한 율법이 존속하는 길은 율법이 이 가르침에 순응하여 따르고 완전히 변화되어지는 길 뿐이다"(R. Banks).
따라서 가르침의 주제에 관한 예수님과 랍비들 사이의 격차는 내용 자체에서가 아니라 그 분 자신의 인격에서, 즉 그의 아들로서의 자기 인식이라는 사실에서 발견된다. 이것이 그의 가르침이 설명의 형식으로든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든지 간에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이유이다(마 7:28; 마 13:53과 병행구절 등).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9; 막 1:22).
이것은 또한 예수님께서 율법의 절대화를 거부했을지라도 그의 가르침에 관하여 디다스코의 독립적 사용에 결정적 의미를 부여해주는 요점이기도 하다. 이 거부는 단순히 이탈이나 탈선에 대한 거부로 본다. 예수님은 그 탈선에 반대하여 그에게서 기인하는 디다스케인에서 림메드의 참된 노선을 되찾으신다. 그는 모순도 이론의 반영도 허락하지 않는 방식으로 전 인간을 향하여 하나님의 요구를 다시 제시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떠한 중간적인 권위에도 구속 받지 않고 요구받는 사람의 인식과도 완전히 관계없는 절대적인 요구이다. 그 목적지가 하나님의 뜻에 의한 인간의 교육과 개혁인 이 요구(참조: 마 5:48)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실체가 된다. 랍비들이 율법을 기록된 가르침의 토대와 주제로서 그리고 인간이 애써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는 길로 생각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이런 이유로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롬 10:4). 이것이, 그 전통 속에서 초기 기독교가 예수님의 그의 백성 가운데서 가르치시는 활동을 언급할 때, 초기 기독교가 독립적으로 가르침에 대해 말한 역사 언어학적 이유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이 그의 말씀 속에서 계시되고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계시될 때, 모든 말씀으로 그의 청중들을 하나님의 뜻에 직접 직면하도록 하시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은 독립적으로 가르치시는 가르침인 것이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사역에 대해 언급하는데, 림메드와 같은 식으로 독립적으로 사용된 디다스케인이 헬라인들 귀에는 이상하게 들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유대적 사고 세계 밖에 있는 독자들을 위해서 기록한 누가복음 조차도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디다스케인을 독립적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을 주목하여야 한다. 이것은 그가 이 단어를 사용한 예수님과 관련하여 이 단어와 예수님의 인격과의 관계 때문에 이 단어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였다는 가정하에서만 설명될 수 있다. 새로운 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계신 것이지 특별한 방식으로 가르치고 계신 것이 아니다.
④ 공관복음서의 새로운 특징은 지적인 면을 강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은 헬라 저술가들(고전, 고전 이후, 헬레니즘, 그리고 심지어 유대 헬레니즘 저술가들) 사이에서는 어디서든지 보편화 되었으며 랍비 주석에서는 헬레니즘의 분해하는 힘을 검토하기 위한 노력으로 발전하였다. 그래서 어떤 집단들에서는 율법을 연구하는 것이 율법을 행하는 것보다 더 높게 평가되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절대적인 주장은 구약 개념의 보다 참된 성취를 나타낸다.
(b) 요한의 기록에서의 디다스코
① 요한의 기록에서 이 단어는 요한복음에 10회(요 6:59; 요 7:14, 요 7:28, 요 7:35; 요 8:2; 요 8:20, 요 8:28; 요 9:34; 요 14:26; 요 18:20), 요한일서에 3회(요일 2:27), 요한계시록에 2회(계 2:14, 계 2:20) 나온다.
이 구절들 중 몇몇은 최소한 간단하게나마 단독으로 다룰 만한 가치가 있다. 즉 보다 더 강조적으로 하나님과 성령에 의한 가르침에 대해 말한 구절들에 대해서이다. 나머지는 그들 중에서 예수님의 가르치신 특정한 내용에 관계없이, 본질적으로 이미 예수님의 디다스코에 관해 말한 내용의 범주에 들어간다(요 6:59; 요 7:14; 요 7:28; 요 7:35; 요 8:20; 요 18:20). 디다스코가 고침받고 예수님의 증인이 된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에게 사용된 요 9:34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참으로 그것은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을 예수님의 적대자들에 관하여 사용된다. 구약에서의 림메드/ 디다스케인의 사용을 얼마간 모델과 전제로 취하여 발람과 이세벨의 가르침에 대하여 말한 요한계시록의 두 구절들(계 2:14, 계2:20)도 예외에 들어간다.
② 요 8:28; 요 14:26; 요일 2:27에서 디다스코의 용법의 특징은 첫 번째로 이 단어가 직접적인 영감이나 계시의 임재를 암시한다는 것이다.
요 8:28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에 관한 그의 진술에 대해 말씀하신다: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요 14:26에서 예수님께서는 보혜사 성령과 약속들에 대한 가망을 제자들에게 제공하신다: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일 2:27에서 기자는 아무도 그의 독자들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받는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름부음(크리스마)은 의심할 여지없이 성령을 말하며, 그래서 이 구절은 요 14:26과 연결된다. 어쨌든 그것은 다른 세계로부터의 디다케(didachv, 1322: 가르침)의 부여를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헛되이 공관복음서 저자들에게서 찾는 디다스코의 용법이다. 그러므로 이런 용법은 복음서의 다른 곳의 용법에 의하여 설명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이 헬라적 용법인가 아니면 헬라적 개념에서 기원한 용법인가 하는 의문이 일어난다. 그러나 지금까지 세상 밖으로부터 빌렸다는 가정을 정당화하는 병행절은 제시되지 않았다.
요 8:28의 문맥에는 매우 두드러진 권위적인 요소가 있다: "아버지께서 가르치셨다". 그것은 우리가 확인한 대로 가르친 사람이 가르침 받는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전적인 주장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림메드를 지적한다. 그러므로 요 8:28의 디다스코를 림메드나 공관복음에 사용된 디다스코에 비추어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다.
만약 유대인들의 귀에 디다스케인이 다른 사람의 뜻이 어떤 사람에 의해 성공적이고 완전하게 구현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면, 디다스케인은 다른 곳에서 요한이 진술한 문구, 호 펨프사스 메 파테르(나를 보내신 자 아버지)와 같은 사상, 즉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뜻의 일치라는 사상을 표현한다. 만약 여기서 예수님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관여에 대해 펨페인보다 오히려 디다스케인이 사용되었다면, 이것은 이 언급이 아들로서의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일 2:27에서는 공동체에 대한 절대적 또는 전체주의적 주장을 제기하는, 근본적으로 격퇴되어야만 하는 거짓 교사들에 관하여 단언하고 있다. 예수님과 유대가 끊어지지 않는 한 그러할 것이다. 디다스코가 선택된 이유들 중 하나는 분명한 목표들이 간과될 수 없는 것과 전 인간의 헌신을 요구하는 이 양 측면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의 기름부음은 상기한 거짓 교사들에 대항하는 안전 장치가 된다.
이것을 이들 구절들에서 뿐만 아니라 디다스코가 나타나는 요한의 기록의 모든 구절에도 적용된다. 그렇지만 요한의 기록에서(계 2:14; 계 2:20 제외) 그 단어가 계속적으로 '계시하다' reveal라는 의미에 접근해 있다면 이것은 어떤 특별한 용법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단지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의 디다스코의 주제(요 9:34도 포함하여)가 항상 예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관복음의 용법과 요한의 기록들을 구별한다. 그러나 요한의 기록들에서, 그것은 그들 자신들에서 아무 두드러진 의미를 지니지 못한 말조차도 예수님께서 중심에 위치하심으로 인해 내용에 있어서 어떻게 영향받는지를 보여준다.
계 2:14; 계 2:20에서 두 번 나오는 디다스코는 각각 버가모와 두아디라 교회에서 벌어진 거짓 교사들의 행위를 가리킨다.
눅 11:1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소서"라고 요청한다. 이 요청은 공관복음의 용법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여기서 디다스코도 예수님의 명령에 전적으로 무조건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상을 표현해 준다.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그 장면은 그 장면이 첫번째로 지닌 것처럼 보였던 삽화적인 성격을 잃게 된다.
누가복음에서 이 익명의 제자들의 요청은 마 16:13 이하와 병행구절; 요 6:60 이하의 예수님의 메시야이심에 대한 고백과 나란히 교회의 역사에서 중심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c) 초기 기독교의 가르침.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에 제시된 자료는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 번째는 림메드의 의미를 따라 디다스케인을 사용한 구절들이며, 두 번째는 예수님에 대하여 디다스케인을 사용한 구절들이며, 세 번째는 교회의 기능으로서의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한 구절들이다. 특히 그 단어가 주로 독립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에서 볼 때, 그 세 그룹들 사이에 뚜렷한 차이가 있을 가능성은 없다.
① 이미 예수님의 생애 동안에, 그리고 그의 명령으로 제자들은 가르치기를 시작하였다(막 6:30). 이렇게 그들은 예수님의 요구를 선포하는 것을 자신들의 일로 삼았다. 마 28:19; 마 28:20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 직무를 계속하는 것을 그의 백성의 필생의 사업으로 만드셨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가르침은 세례(침례)를 주거나 제자를 삼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하며, 그 가르침의 내용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으로서, 예수님에 관한 선포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의 디다케(가르침)이다.
사도행전 4장에서 보면 사도들은 부활을 선포하면서(행 4:2),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르쳤다(행 4:18). 만약 여기에 구약성경의 해석이 포함된다면, 이것은 회개에의 부름에서 절정에 이르게 된다. 외적인 형식에서는 그들도 유대 관습을 따른다(참조: 행 5:25). 주석과 권면은 가르침의 근간이 되며, 심지어 때로 율법에 있는 교훈의 요점에 국한한다(롬 2:21; 행 15:1). 이런 점에서 새로운 시작은 예수님 안에서 율법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행해져야 한다(히 5:12).
② 따라서 기독교 가르침의 일차적인 목적은 성경에서부터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야임을 증명하는데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가르침은 "예수에 관한 것을 … 가르침"(행 18:25), 또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침"(행 28:31)이다. 여기에 가르침의 내용의 한계가 있다. 행 18:25에서 디다스케인은 회당에서 행해지는데 회당은 당연히 그 교수법을 결정한다(성경의 증거를 들어서 가르침). 행 28:31에서 디다스케인은 특별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와 함께 언급되는데, 디다스케인은 바울의 로마에서의 선교에 대해 포괄적으로 정의하기 위해, 즉 그 선교의 두가지 측면을 묘사하기 위해 그 어구와 함께 언급된다. 그들은 사실을 전하지만 사람들이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성경을 거부할 수 밖에 없는 그런 방식으로 전한다. 물론 적대자들은 이것을 모세 및 율법과 반대되는 가르침이라고 보았다(행 21:21; 행 21:28). 바울이 행 18:11에서 가르친 하나님의 말씀도 일반적인 구원 메시지가 아니라, 구약성경에 근거하고, 구약성경의 관점에서 구원 메시지라고 하는 똑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참조: K. H. Rengstorf).
③ 바울은 로마서, 고린도전서, 그리고 갈라디아서에서 디다스코를 겨우 5회 사용하였는데(롬 2:21; 롬 12:7; 고전 4:17; 고전 11:14; 갈 1:12), 이 사실은, 바울이 회심 이후에 이 단어에 대해서 갖게 된 연상의 비중을 고려해 볼 때 놀라운 일이 아니다. 회심 이전의 그의 삶 전체는, 그가 "가르침을 받은" 파라도세이스 파트리카이(장로들의 유전, 갈 1:14)의 지배를 받았다. 롬 2:21에서 그가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라고 유대인에게 물었을 때, 그는 디다스코를 전적으로 전통적인 히브리어 림마드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롬 12:7에는 교회 안에서의 디다스칼로스(교사)의 직책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는데, 교사의 직무는 신앙의 원리들을 해설해주는 것이다(고전 4:17, 여기에서 바울은, 디모데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행사"-이것은 아마도 그의 신앙 원리를 의미하는 듯하다-를 사도 교회에 상기시키고 그것들을 가르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갈 1:12에서 디다스코는 '전통을 전수하다'라는 뜻을 지닌다. 고전 11:14에 기록되어 있는 바울의 어법은 주목할만한 것으로서, 여기에서 그는 본성의 가르침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고 방식은 아마도 스토아 철학의 배경에서 유래했을 것이다(참조: Epictetus, Dissertationes, 1, 16, 10).
④ 살후 2:15에서는 데살로니가전서와 구전 전승으로 본다: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그러므로 여기에서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더 이상 "어떤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메시지를 듣다"라는 뜻을 나타내지 않고, 오히려 "전승된 가르침을 받아서 지키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랍비들의 교수 방법을 상기시킨다. 디다스코는 또한 엡 4:21에서 수동태로 나오고 있는데, 여기에서 엔 아우토 에디다크데테("너희가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라는 구절은 그 앞에 나오는 만다네인 크리스톤(그리스도를 배우다)이라는 구절과 마찬가지로 이 말을 듣고 배우는 사람들의 회심을 언급한다.
골 1:28과 골 3;16에서 사용된 디다스코의 의미를 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바는 아마도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필요한 실제적인 권면일 것같다. 이 두 성구에서 디다스코를 한정하고 있는 엔 파세 소피아(모든 지혜 안에서)라는 구절은 가르침의 내용보다는 가르침의 방법과 관련된 것이다.
⑤ 목회 서신들에는, 가르치는 것이 디모데의 권리이자 의무라고 언급되어 있다(딤전 4:11; 딤전 6:2). 딤후 2:2에서 가르치는 것은 일정한 요건을 갖춘 사람들이 맡는 과업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한편 딤전 2:12은 여자가 가르치는 일에서 제외되고 있다. 이 모든 구절에서 가르침 받은 것은 "선한" 또는 "건전한" 교리(디다스칼리아)로 상정되어 전승되어 보존된다(즉 가르침을 받는다). 가르치는 일이 이제 특수한 몇몇 사람들에게만 국한되고, 골 1:28에 기록된 바와 같이 더 이상 모든 기독교인에게 맡겨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딛 1:11의 디다스코는 이득을 취하기 위하여 유대교적 신화와 사람들의 계명을 가르치는 이단자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목회서신에서 피스토스 호 로고스("그 말은 미쁘다")라는 성구에서 강조된 바와 같이(참조: 딤전 1:15; 딤전 3:1; 딤전 4:9; 딤후 2:11; 딛 3:8), "가르치다"라는 말은 어느 정도 고정된 전승을 전수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 단어의 강조점은 그 전승을 전수한다는 데에 있다.
⑥ 히브리서에서 이 단어의 용법은 목회 서신의 용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히 5:12에서 기자는, 비록 독자들이 이미 전부터 교사들일지라도, 그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즉, 히 6:1 이하에 나타나 있는 그리스도교의 기본적인 교리들)를 새로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들어 독자들을 책망한다. 히 8:11에서 이 단어는 렘 31:31 이하에서 인용한 문장 속에 나오는데, 여기에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것은 또한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뜻에 관한 지식이다-이 가르침의 주제인 듯하다.(참조: K. Wegenast; K. H. Rengsto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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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ousiva(3952, 파루시아) 출현, 오심, 강림.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파루시아는 파레이미(pavreimi, 3918)에서 유래했으며, 다음의 의미를 가진다.
(a) 파루시아는 '임재, 현존, 있음' presence(Aeschyl., Aristot.),
(b) '재산' property, '부, 번영' fortune, '수입' income(Plato), '군대, 병력' troops(Thuc.),
(c) '옴' coming, '도착' arrival, '강림' advent, '누군가 임석하기 위해 오는 것'(Soph., Eur., Thu., Polyb.)을 의미한다.
파루시아는 왕, 황제, 치리자와 같은 통치자의 도착에 대해서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대(Ptolemaic period)에서 주후 2세기까지의 군대의 도착에 대해서 까지도 전문적으로 사용되었다. 특별물품세와 각종 세금이 물품 비용을 치루는데서 강제 징수되었다. 희랍에서는 하드리안의 파루시아에서부터 새 시대가 열린다고 생각되었으며, 특별 방문기념 주화들이 한 황제의 파루시아를 기념하기 위하여 여러 곳에서 주조되었다. 이에 상응하는 라틴어는 아드벤투스(adventus)이다. 고린도(Corinth)와 파트라스(Patras)와 같은 도시들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편지를 쓰던 당시에 다스렸던 네로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방문 주화를 주조했다. 이 동전들에는 아드벤투스 아우구스티 코린디(Adventus Aug[usti] Cor[inthi])와 아드벤투스 아우구스티(Adventus Augusti)라는 명각을 새겼다(참조: A. Deissmann Light from the Ancient East). 이로부터 사람들을 위해서 신들이 출현했다고 언급하는대로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다(참조: Corp. Herm.), '나의 파루시아[parousia]는 저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것은 헬라의 신비 종교 관념들과 일치하는 것이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파루시아는 70인역본에서 마카베오이서 8:12에 군대의 침입에 대해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파루시아는 신약성경에서 24회 나오며, 마태복음(4회), 바울서신(14회), 야고보서(2회), 베드로후서(3회) 요한일서(1회)에만 사용되었다.
(a) 파루시아는 문자적 의미로 '있음(현존)'과 '도착'을 의미한다. 바울만이 이러한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했다.
① 고전 16:7에서 바울은 스데바나가 온 것을 기뻐하고 있다: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유하기를 바람이라".
② 고후 7:6; 고후 7:7에서 바울은 디도의 도착으로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다: "6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7 저의 온 것뿐 아니요 오직 저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고함으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③ 빌 1:26(그리고 빌 2:12)에서 바울은 자기가 빌립보에 온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하려 함이라".
④ 고후 10:10에서 바울의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는 질책을 바울은 겪어야 했다: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
(b) 마태복음 24장에서 파루시아는 그것에 관한 제자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에 나타난다.
① 마 24:3에서 제자들이 주의 파루시아의 징조에 대하여 묻는다: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② 예수님의 대답에서 인자의 오심은 미래의 일이며(마 24:39), 그 날짜는 어느 누구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으며(마 24:36), 그날은 갑자기 그리고 사람들이 전적으로 현재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 어느 때에 임할 것이다(마 24:27; 마 24:37 이하)고 설명하신다.
(c) 예수님의 파루시아에 대한 언급과 그의 죽음과 부활과 더불어 파루시아 사상은 이 시대의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것에 대한 교회의 기대와 관련을 맺게 되었다.
(d) 살전 4:15에서 파루시아에 대해 언급하는 최초의 신약성경 구절인데 이것은 바울이 인용한 주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의 말씀"에 대한 언급은,
① 마 24:30 이하를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② 지금은 상실되어서 알려지지 않은 말씀의 인용문일 수도 있으며,
③ 은밀한 계시에 대한 언급(참조: 고후 12:1 이하; 갈 1:12; 엡 3:3; 행 21:10 이하)일 수도 있으며, 혹은
④ 바울이 그리스도의 생각과 일치한다고 믿고 있는 것에 대한 언명일 수도 있다(참조: 고전 2:16; 고전 7:10; 고전 7:12).(A. L. Moore).
여기에서 부활과 파루시아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 이유는 파루시아가 일어날 때 잠들어 있는 사람들이 겪게될 불리한 점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며, 살아있는 자가 누릴 유리한 점도 전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e) 고전 15:23에서도 위와 동일한 사상을 채택하여, 그 결정적 순간에 그리스도가 만유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바울은 파루시아를 엄밀한 신학적 의미로 나타낼 때 대개 전치사 엔(ejn, 1722)을 그 단어 앞에 사용하고 있다. 살전 4:15에서만 에이스(eij", 1519)라는 전치사가 나온다. 파루시아는 확실히 여러 범주 사람들도 포함할 것이나 그렇다고 해서 사도 바울이 이중의 부활이 있어, 그 사이에 천년왕국이 있다거나 혹은 연대순으로 체계화된 종말론적 사건들이 있음을 염두에 두었다는 말은 아니다(참조: W. G. Kummel).
(f) 살전 5:23에서 바울은 주님의 파루시아를 생각하고, 오직 하나님의 성결케하시는 행위만 그 날의 시험에 대비하여 신자들을 대비시킬 수 있음을 언급한다. 바울은 또한 성결을 보존하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염두에 두고 있다. 성결은 그날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 까닭은 보존을 뜻하는 기도가 그 날까지 연속되기 때문이다(A. E. Airthart).
(g) 살전 2:18; 살전 2:19에 보면 비록 사단의 농간으로 데살로니가 교회와 갈라서게 되었으나, 바울은 여전히 이 교회를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그의 "소망", "기쁨', 자랑의 면류관으로 묘사하고 있다.
(h) 데살로니가후서는 분명히 또 다른 상황을 고려하고 있다. 지금 여기에서 체험되어진 그리스도의 임재와 미래 어느날에 있을(유대 묵시문학적) 파루시아 사이에는 분명한 대립이 있다: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2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살후 2:1-살후 2:2).
이 서신은 실제로는 여전히 미래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 사건들을 현재에 체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공박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바울은 사단과 그리스도의 파루시아가 있기 전에 있을 불법한 자의 파루시아에 대해서 격렬하게 경고하고 있다.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라"(살후 2:8; 살후 2:9 이하).
(i) 야고보서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 지연됨에 따라 사람들은 그 날이 실제로 임할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야고보는 약 5:7; 약 5:8에서 인내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j) 베드로후서에서 신자들은 지금까지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파루시아를 계속해서 기대하라는 권고를 받고 있다.
① 벧후 1: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② 벧후 3:4,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③ 벧후 3: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k) 요일 2:28,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참조: A. Oepke; G. Braumann;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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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jrJhsiva(3954, 팔레시아) 개방, 밝히 드러냄, 신뢰, 확신, 대담함, 솔직.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a) 팔레시아는 민주주의 전체 조건으로서 정치적 영역에서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① 모든 것을 말하는 자유(권리),
② 진리에 대한 개방성,
③ 대담, 솔직, 담백을 의미한다.
말하는 자유가 예의 없고 파렴치함이란 취지로 오용되는 몇몇 실례에서 부정적 의미로 나타나기도 한다. 확대된 의미에서 팔레시아는 확신과 즐거움을 의미한다.
팔레시아(의 단어군)는 유리피데비스와 아리스토파네스에서 처음으로 발견되며, 원래 정치의 영역에 속했던 것으로, 헬라 도시국가의 완전한 시민이 누리는 민주주의의 권리를 의미한다.그러나 노예나 외국인에게는 그러한 권리가 없었다. 백성들의 공적 집회에서 그들은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터놓고 말할 수 있었다(참조: Polyb., 2,38,6). 이러한 권리는 민주주의의 특징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이 권리에는 남용의 위험이 있다(Rep.8,557b).
(b) 팔레시아는 개인적인 일상 업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여기서 중요한 의미는 솔직, 곧 정직이다. 휠리아(우정)에 대한 교훈이 나오는 문맥에서 이 단어는 친구와 만나는 사람이 갖는 솔직함을 나타낸다(참조: Aristot.,Eth. Nic. 9,2). 그러나 '무례, 오만, 후안무치' 등의 나쁜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c) 철학자들은 팔레시아를 정치적 자유보다 도덕적 자유와 관계 시켜 생각했다. 도덕적으로 자유하는 사람은 팔레시아이다. 그러나 욕정에 지배를 받는 사람의 입술에 대해서 팔레시아는 단순히 '파렴치함'을 의미한다. 그의 팔레시아는 오직 모욕하는 것을 함축한다. 그러나 좋은 의미의 팔레시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세계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는 공적인 인물들이다.
2. 70인역본의 용법
팔레시아는 70인역본에서 12회 나온다.
레 26:13에서 팔레시아는 자유로운 백성을 묘사하며,
잠 1:20에서 공개적이고 솔직한 말로서 팔레시아는 특별히 신적 지혜에 속하는 것이다.
욥 27:9 이하에서 하나님 앞에서 팔레시아는 특별히 중요한 것이다. 여기에서 팔레시아는 하나님 앞에 '자유' 혹은 '기쁘고 즐거운 섬'이며, 더 이상 장애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공개적 접근을 함축한다. 잠 13:5에서 팔레시아는 디카이오스(의)의 덕행이며, 즐거운 기도로 표현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팔레시아는 신약성경에서 31회 나오는데, 요한의 기록에 13회, 바울 서신에 8회, 사도행전에 5회,히브리서에 4회, 마가복음에 1회이다.
(a) 마가와 요한의 기록. 요한복음에서 팔레시아는 예수님의 사역에 관련되어 나타나며, '공개적으로(openly), 공공연하게(in public)'라는 독특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는 그의 사역을 은밀히 하지 않고 회당이나 성전 등에서 공공연히 하셨다(요 18:20 - 요 18:21; 요 7:25 - 요 7:26; 요 11:54).
①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 각 구절들에서 팔레시아는 예수님의 공적 가르침에 있어서의 담대함을 언급한다. 사람들에게 깨닫게 하기 위하여 공개적으로 어떤 일을 행하라고 예수님께 강권했던 예수님의 형제들의 의미와는 약간 다르다(요 7:4).
예수님의 경우에 팔레시아는 헬라어에서 원래 의미하였던 바와 같이 공적으로 나타내는 권리 또는 용기, 말하는 자유, 솔직함 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후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의미와 같이 공적으로 실행되는 행동들을 언급한다(R.Bultmann, The Gospel of John).
이와 대조적으로 요 7:13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아무도 공공연하게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요 10:24; 요 11:14; 요 16:25; 요 16:29에서 팔레시아는 '명백하게 plainly' 라는 약간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수님께서 공공연하게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우화나(요 11:14; 요 10:24 이하), 숨겨진 비유(요 16:29)로만 말씀하셨던 것이 아니라 또한 명백하고 솔직하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직 신자들을 위하여 이렇게 드러내어 말씀하셨다(요 16:25; 요 16:29). 세상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들로 말씀하셨는데, 이 비유들은 믿음 없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 요한의 이중성(dualism), 곧 생명과 사망, 진리와 거짓 등에 상응하는 팔레시아와 파로이미아(비유) 사이에는 정신적 긴장 상태가 존재하며, 이 긴장은 결단을 요구하며 믿음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② 마가복음에서 팔레시아는 막 8:32에 한번 나타나는데, 여기서도 제자들에게 주신 '공개적으로' 말씀하신 것을 가리킨다: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그러나 여기서 공개적이라고 하는 것도 아직은 비밀이라고 할 수 있다. 믿음으로 아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러한 것이다. 이 사실은 막 8:32 - 막 8:33에서 보면 명백하다.(참조: 막 9:32; 막 10:32).
③ 요한일서에서 팔레시아는 하나님을 향한 담대함을 뜻한다. 요일 3:21에서 자신의 마음으로 책망받을 것이 없는 자는 담대함을 가진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이 담대함은 양심과 믿음 그리고 사랑(참조: 요일 3:22 - 요일 3:23)을 전제하며, 또한 성령의 선물이다(요일 3:24). 이러한 팔레시아는 기도 중에 표현된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 요일 5:15). 담대한 자는 기도에 확신을 갖는다. 그러면 여기서 그 담대함은 무엇인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확신이다.
이러한 현재적인 팔레시아 외에 미래적인 팔레시아가 있다. 즉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여 심판대 앞에 담대하게 서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하며,("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요일 2:28),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
이와 같이 팔레시아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 구원의 확신, 죄의식의 정복, 기도의 능력, 미래에 대한 기대'라는 여러 개념들을 포괄하고 있다(O.Michel).
(b) 사도행전. 사도행전에서 팔레시아는 예수님의 팔레시아와 상응하여 사도들의 솔직하고 권위적인 증거에 대해 사용되었다. 사도행전은 베드로, 바울 또는 그밖의 사람들이 얼마나 담대하게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 앞에 서서 하나님의 역사를 선포하였는가 하는 것을 계속하여 전하고 있다. 이 명사는 행 2:29; 행 4:13; 행 4:29; 행 4:31; 행 28:31에 나타난다.
하나님은 사도들에게 이러한 팔레시아를 주시고, 사도들의 말을 기사와 표적으로 뒷받침하신 것이다(행 4:29 - 행 4:30; 참조: 14:3). 이 담대함은 인간이 스스로 자제하면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계속하여 구해야 하는 성령의 열매이다: 행 4:29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행 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c) 바울의 서신들. 바울도 기독교인의 팔레시아, 특별히 사도들의 팔레시아에 대하여 강조한다.
팔레시아는 기독교인의 생활, 특별히 사도의 생활의 중요한 측면을 묘사한다(빌 1:20; 엡 3:12).
팔레시아는 또한 복음을 전파하는 것과 관련하여 나타난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엡 6:19 이하).
팔레시아는 하나님(고후 3:12; 빌 1:20; 엡 3:12)과 사람을 향한 개방성 및 솔직함(고후 3:12; 고후 7:4; 딤전 3:13; 몬 1:8)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고후 3:12 이하에서 문제는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팔레시아는 바울이 하나님을 향해 바라보는 베일을 벗은 바울의 얼굴로서, 이스라엘과는 달리, 사람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베일을 벗은 얼굴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향해 열려있는 얼굴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열려있는 것이다. 이 개방적인 얼굴은 성령으로 인하여 계속적으로 변화해 가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 주는 얼굴이다.
엡 3:12에서 개방성(openness)은 믿음으로 하나님에게 접근할 수 있는 담대한 자유를 의미한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팔레시아가 고후 7:4에서는 사랑이 애정이라는 뉘앙스를, 그리고 몬 1:8에서는 권위라는 뉘앙스를 갖고 있다.
딤전 3:13에서 팔레시아의 근거는 믿음이다: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빌 1:19 - 빌 1:20에서 팔레시아는 또한 성령에 감화 받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관계를 가진다: "19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골 2:15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팔레시아로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공공연한 승리로 전세계를 향해 권세들을 드러내셨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objective relatively
(d) 히브리서. 히브리서에서 팔레시아는 상대적인 성격을 지닌다.
히 3:6에서 팔레시아는 믿는 자로서 가져야 하고 지켜야 하는 어떤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이것은 소망의 대상과 관련이 있다.
내용에서 팔레시아는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자유를 뜻하며, 이 자유는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받고,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사역에 근거하고 있다(히 4:14 - 히 4:15; 히 10:19).
히 10:34 이하에서 팔레시아는 환난 중에 인내로 보존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히 10:35).
히 4:16에서 팔레시아는 심판자 앞에서 '담대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한 것을 뜻한다".(참조: Walter Baure; J.H.Thayer; H.-C.Hahn; H.Schl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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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jscuvnw(153, 아이스퀴노) 부끄러워하다, 수치를 당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아이스퀴노(Homer 이래)는 아이스코스(ai'sco": 천함, 추함, 수치, 창피, 불명예)에서 유래했다.
(a) 아이스퀴노는 본래 '보기 흉하게 하다, 추하게 만들다'를 의미했다.
(b) 아이스퀴노는 헬라 문학 속에서는 거의 전적으로 중간태나 수동태로 사용되어 '수치를 느끼다, 부끄러워하다, 당황하다, 난처해 하다'를 나타낸다.
2. 70인역본의 용법.
(a) 동사 아이스퀴노는 70인역본에서 100회 이상 나오며, 대부분 히브리어 보쉬(창피를 주다)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65회). '부끄러워하다'라는 중간태 의미나 '겸손'의 의미는 헬라어 용법과 비교해 볼 때 매우 드물게 사용된다. 이 단어는 시편, 이사야, 예레미야에서 주로 나타나는데, 이런 구절들에서 강조점은 아이스퀴노의 사회학적 측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신학적 측면에 있다. 하나님에 대한 완곡적 표현으로 사용된 수동구문(일반적으로 미래 2인칭 수동태)에서와 같이 일반적으로 여호와는 아이스퀴노의 주어로서 암시되거나 명시되어 있다(사 1:29; 20:5; 렘 2:26).
시편 기자들은 여호와의 심판을 기원하며(참조: 시 6:10; 35:26; 40:15), 선지자들도 여호와의 심판을 예언한다(사 1:29; 41:11; 렘 2:26). 여호와의 심판은 그들의 원수들과 불경한 자들을 부끄럽게 할 것이다.
따라서 아이스퀴노는 구약성경에서 우선적으로 악을 행하는 자들 혹은 모든 민족의 객관적인 파멸을 언급하고 있다(시 69:4-7, 19 이하). 여호와의 심판 행위는 그의 원수들로 하여금 수치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만들 것이다(시 40:14; 시 83:16-18).
(b) 아이스퀴노는 성적인 의미로 에스겔서에서 자주 나타난다(16:36 이하; 23:10, 18 등). 창 2:25의 표준적인 진술,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에서 육신의 부끄러움은 죄책감의 가장 원초적인 표현이자 인간의 육체적 본성이 당하고 영육의 합일에 대해 의심을 품는 장해의 표징이다. 이러한 장해는 여호와에 대한 불복종의 행동에 기인하는 것이며, 그에 대한 반응으로 인간은 결백함을 객관적으로 상실하게 되고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심오하게 장애를 받게 된다(창 3:7; 참조: G. von Rad, Genesis, 1961, 88, 95-9).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아이스퀴노는 신약성경에서 5회 나오며, '부끄러워하다, 수치를 당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a) 눅 16:3에서 중간태는 어떤 일을 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b) 아이스퀴노는 부정어와 함께 '부끄러워 하지' 않는 것을 나타낸다(고후 10:8; 빌 1:20; 벧전 4:16).
요일 2:28에서는 우리가 부끄러워하여 그로부터 위축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R. Bultmann, TDNT; G. Link; DN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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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navw(1080, 겐나오) 낳다, ~의 아버지가 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겐나오(Pind., Hdt. 이래)는 겐나(gevnna)에서 유래했다.
(a) 겐나오는 '낳다, ~의 아버지가 되다'를 뜻하며, 아버지에 의한 출생과 어머니에 의한 출산에 대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항상 그렇게 사용하지 않고 직계 후손, 또는 법적 후손에 대해 사용하기도 한다.
(b) 신약성경 시대의 세속 세계에서 겐나오는 비유적 의미로 '생기게 하다, 태어나게 하다, 존재하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겐나오는 70인역본에서 주로 히브리어 얄라드(낳다)의 역어로 간혹 하라(잉태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문자적인 용법 외에도 욥 38:28에는 비유적인 용법이 나온다: "비가 아비가 있느냐 이슬 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겐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호칭에서 신뢰나 애정의 표시로 사용되었다(삼상3:16; 삼상 24:12; 왕하 3:12).
겐나오는 하나님께서 메시야 왕을 낳으심에 대해 사용되었다(시 2:7; 시 110:3).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겐나오는 신약성경에서 97회 나오며, 마태복음에 45회, 요한의 기록에 28회 사용되었다. 겐나오의 실제적인 의미는 고전 헬라어의 용법과 같이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모두 사용되고 있으므로 문맥에 의하여 능동태와 수동태로 결정된다(참조: 마 1:3, 마 1:5이하; 마 2:1, 마 2:4; 마 19:12; 눅 1:13; 요 9:34; 요 16:21; 갈 4:23). 그러나 이 동사는 다음과 같은 비유적인 의미 또는 확대된 의미로도 사용된다.
(a) 겐나오는 여러 구절들에서 어떤 사람을 낳았다고 언급되는 하나님 자신에게 사용되었다.
① 행 13:33과 히 1:5; 히 5:5은 시 2:7을 인용한다. 히브리서의 구절들은 의미심장하게 이 술어를 시 110편과 삼하 7;14와 관련시킨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아들이며, 하나님의 왕으로 나타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의 왕들이 성취하지 못한 것들을 성취하셨다. 왜냐하면 십자가 상에서 죽으시고 무덤에서 살아나신 분으로서, 그는 참되게 기름 부으심을 받은 분으로서 여호와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직분을 취하셨다. 두드러진 것은 신약성경이 시 2:7을 예수님의 탄생 기사들에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 2편이 신약성경에서 인용되는 어는 곳에서나 육체적이며 성적인 출생은 완전히 배제된다.
행 13:33은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라는 말씀을 예수님의 부활에 적용한다.
반면에 눅 3:22의 서방 본문(고대 라틴 역본들, 저스틴과 오리겐)의 다양한 독법은 시2:7의 말씀을 세례(침례)에서의 예수님께 적용한다.
히 1:5과 히 5:5에서 "오늘 날"에 대하여 그 의미를 정확하게 결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스트라드만(H. Strathmann)은 이것은 예수님의 세례(침례)를 언급하는 것이며 이것이 단순히 본문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시 2:7의 하반절이 히브리서에 인용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J. Jeremias and H. Strathmann). 케제만(E. Kasemann)은 겐나오를 승천 후에 하늘의 선언을 통한 아들 신분의 확증과 동일시한다(Dss Wandernde Gattesvolk, 58). 그러나 "오늘 날"이라는 단어는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하나님에 의한 출생이 양자됨이라는 구약성경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은 명백하다. 이 구절들은 성자께서 이미 어떤 분이라는 것에 대한 선언과 선포에 관계한다. 예수님의 아들 신분은 하나님의 성육신의 신비를 나타낸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아담이시다(호 에스카토스 아담, 고전 15:45). "이와 같은 출생이 양자됨이라는 의미에서 혹은 동정녀 탄생의 의미로 생각해야 한다는 사상은 그리스도를 믿는 초기 기독교 신앙과 성경의 이해에 대한 오해에 근거하는데 특히 예수님의 부활과 그 결과로서의 새로운 아이온의 기본 의의에 대해, 요컨대 초기 기독교 사상의 종말론적 충동에 대한 오해에 근거한 것이다"(F. Buchsel).
② 요한이 기술한 성경들은 겐네데나이 에크(~에서 탄생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신자들의 기원을 묘사하고 있다. 이 어구는(에크시-) 에르케스다이 에크(~에서 나오다; 참조: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 말씀하시는 요 8:42)와 에이나이 에크(~에서 오다, ~의 출신이다 be from; 참조: 행 5:39 사건들에 대해; 요일 3:10, 사람들에 대해)와 비교된다.
신자의 자신의 참된 존재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신자는 이것을 알고 있다. 곧 자신의 시작과 끝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거듭남(겐네데나이)에 대한 언급은 사람이 새로운 혈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자신의 옛 본성을 버리고 새로운 본성을 취하여 거듭나야 한다(요 3:3, 요 3:5-8; 참조: R. Bultmann, The Gospel of John). "거듭 남"이라는 개념은 "하나님께로서"(에크 투 데우, 요일 3:3; 참조: 요일 2:29; 요일 4:7) 거듭남과 또한 "위로부터"(요 3;7; 참조: 요 8:23) 거듭남과 같은 동일한 본질적인 사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이 사상을 하나님의 행위로 묘사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이하). 사람의 생각에는 이러한 거듭남이 필연적으로 불합리하게 보인다(요 3:4). 왜냐하면 이 개념이 인간의 역량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이것을 성령님의 역사로 돌린다(요 3:5-8). 오직 성령으로 태어난 자만이 자신의 혈통을 이해하고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요 3:5; 참조; 마 19:28).
수많은 학자들이 아노덴 겐네데나이(위로부터 나다)라는 표현이 영지주의에서도 나타난다고 한다. 아노데(위로부터)은 거듭남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요 3:3, 요 3:7) 위로부터 빌라도에게 주어진 권세에 대해서도 사용된다(요 19:11). 예수님께서는 위에서(아노) 난 자신을 아래서(카토) 난 자신의 대적자들과 비교하신다(요 8:23).
그러나 아노덴은 또한 "다시"라는 뜻을 나타낼 수도 있다. 이 탄생은 또한 물(엑스 휘다토스)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을 언급한다(요 3:5). 그러나 요 1장과 요한일서에서 물 또는 세례(침례)에 대한 언급은 없다. 요한과 바울은 모두 세례(침례)를 2차적인 것이며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요 4:2; 고전 1:14-17).
요 3:5에서 물이 창조를 언급하는 것이 아닌가(창 1:2) 하는 문제와 씻음이 탄생에 따르는 것이 아닌가(인간의 탄생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는 문제는 충분한 주의를 끌지 못하였다. 중생이 세례(침례)의 동의어가 된 것은 저스틴(Justin)과 이레네우스(Irenaeus)와만 관련된 것이다.
(b) 바울은 겐나오를 고전 4:15와 몬 1:10에서 자신의 개심과의 관계에 대해 사용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신자들 속에 형성되기까지의 수고함(오니노) 또는 해산의 고통을 겪음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었다(갈 4:19). 동일한 사상들이 믿음 안의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말하는 구절들의 배경으로 존재한다(고전 4:17; 딤전 1:2; 딤후 2:1; 참조: 벧전 5:13).
(참조: A. Ringwald; R. Bult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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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gapavw(25, 아가파오) 사랑하다 lov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일반 헬라어는 영어와는 달리 '사랑하다'를 의미하는 단어가 여러 종류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들은 필레오(filevw, 5368), 스테르고(stevrgw), 에라오(ejravw), 아가파오(ajgapavw, 25) 등이다.
(a) 동사 필레오(filevw, 5368)는 사랑과 애정의 표현에 가장 널리 사용되는 단어이다. 이 단어의 여러 파생어를 보면 이를 명백히 알 수 있다. 이 단어는 관심, 돌봄, 환대, 사물에 대한 애착 등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 필레오(filevw, 5368)을 보라.
(b) 동사 스테르고(stevrgw)는 드물게 나타나며, '사랑하다, 애정을 느끼다' 등을 의미하며, 특히 부모와 자식 간의 쌍방의 사랑을 나타내는데 자주 사용되었다.
스테르고는 또한, 통치자에 대한 국민의 사랑, 인간에 대한 수호신의 사랑, 주인에 대한 개들(dogs)의 사랑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남편과 아내의 사랑을 나타내는데는 별로 사용되지 않았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합성어 아스토르고스(a[storgo", 794, 롬 1:31; 딤후 3:3)와 필로스토르고스(filovstorgo", 5387, 롬 12:10)가 나타날 뿐이다.
(c) 동사 에라오(ejravw)와 명사 에로스(e[rw")는 신비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에라오는 '정열적으로 사랑하다, 욕구하다, 그리워 하다'를 의미한다. 에로스는 '정열적인 사랑'이란 의미를 지닌다.
에로스적인 사랑은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것)을 원하거나 갈망하거나 사랑하는 정열적인 사랑이다. 이 사랑은 남·여의 사랑, 또는 어떤 대상에 대한 갈망, 열망, 욕구를 나타낸다. 특별히 관능적이고 선정적인 양상을 띤다.
① 모든 시대에서 헬라인들은 육감(관능)적으로 즐거워하는, 하급 신(神), 곧 광란적인 에로스를 열렬히 찬양하는 것이다. 그들이 찬양하는 에로스 신(god)은 모든 것을 강제하지만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강요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헬라인이 에로스에서 추구하는 것은 도취(intoxicaion)와 황홀이며, 이것은 그에게는 신앙(종교 religion)이다. 그에게 있어서 반응은 하늘의 능력들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Soph, Ant 683이하). 그것은 인간성의 성취이다.
그렇지만 그 반응은 무아경적인 흥분(광란)으로 나타난다(한편 때때로 증오와 더불어 나타나기도 한다). 오로지 반응에 목적을 두고 완전히 감각 또는 감정적으로 몹시 흥분하는 에로스는 모든 인도적 인간성의 표준과 형태를 파괴한다. 관능적 환락(sensual ecstasy)은 중용(moderation)과 균형(proportion, 조화, 바른 관계 등)을 저 멀리 내버려두고 돌보지 않는다.
헬라의 비극작가들은(Soph, Ant. 781이하) 환락(ecstasy, 황홀)에 점점 빠지게하여 이성과 의지와 판단력을 상실하게 하는 에로스(사랑의 신의 이름은 역시 에로스이다)의 불가항력적인 힘을 알고서, 그것을 광신만큼 무서운 것으로 평가했다.
그것은 하나의 신(a god)이며 신들보다 능한 것이다(Eur. Fr., 132, Nauck). 하늘과 땅의 모든 힘은 에로스의 한 최고의 힘과 비교하면 제 2급의 힘들이다. 그것의 전제적인 힘에 사로잡힌 자들에게는 어떠한 선택도, 의지도, 자유도 무시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에 지배를 받는데서 최고의 희열(행복)을 얻는다. 우리는 여기서 에로스의 어떤 신비한 힘을 찾아볼 수 있다.
② 이러한 에로스는 신비 종교들에서 더욱 무서운 것으로 나타났다. 이 관능적인 도취의 데모니즘(demonism)이 종교적 광신과 함께 행해지는 곳에는 반대로 신앙(religion) 자체가 이 황홀경(ecstasy)에서 경험의 최고점(절정)을 추구한다.
창조적 에로스는 다산을 기원하는 풍요제 의식들의 중심이며, 매춘(prostitution)은 큰 여신들의 신전에서 유행했다. 때때로 동양권에서 행해졌다. 그래서 색정적인 그림과 상징들이 많이 사용되었다. 신화에서 이야기한 신들과 사람들간의 성적 결합은 이러한 예찬(cultus)에서 그 현실적 실현에 도달했다. 이런 신전 혼인에서 그 신자들은 신들의 세계와 육체적인 결합을 경험한다. 신앙과 황홀은 종교적으로 변질된 에로티시즘(eroticism=호색)에서 함께 만나 결합한다. 이런 현상은 한국의 신비종파나 사이비종파에서 찾아볼 수 있다.
③ 헬라인들은 에로스를 더 신비적으로 이해했는데 그것에 의해 그들은 보통 사람이 지니는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 완전에 이르고자 노력했다.
헬라인들이 에로스에서 추구하는 도취는 필연적으로 관능적인 것이 아니다. 이미 헬라의 비전(mysteries)에서 때때로 신비주의에서 그렇게 한 것처럼 에로틱(erotic)의 개념들은 많은 방법으로 육감이나 관능 이상과의 만남에 대한 상징으로 영화된 것이다.
플라톤에 있어서 에로스는 생의 최대의 성취와 향상의 전형(epitome)였다. 그에게 있어서 에로스는 이성의 작용(합리성)을 넘어 사람을 기뻐 날뛰게 하는 황홀이며, 자연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원천이며, 최종적으로 창조적 영감을 산출하는 것이다. 에로스를 타오르게 하는 육체적 아름다움은 모든 사랑하는 것에서 의도하고 찾는 선한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지표이며, 영원한 존재와 진정한 선을 가리키는 지표이다(Symp, 2,100이하). 그에게 있어서 에로스란 의와 감정 억제와 지혜의 습득을 위한 분투,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선의 구현이자, 불멸을 얻을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Symp. 200, 206; Phaedr. 237ff, 242ff). 플라톤은 결정적으로 에로스를 모든 육감(관능)적인 것보다 높인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이와 유사하게 에로스를 단순한 경험적인 것에서부터 자유케 하여 발전시켰다.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질서와 운동을 유지시키는 원초적 원리인 견인력으로서의 우주적 기능이다. 따라서 내적으로 세계를 전체적으로 유지시키고 있는 이 사랑은 더 이상 도취와 아무 관계가 없다. 그것은 성격상 엄밀히 의지에서 나온 행동이다.
플로티누스(Plotinus)에게 있어서 진정한 에로스, 모든 사랑을 의미하는 것은 감각과 이성을 넘어 탁월함에 이르고, 모든 한계를 넘어 합치점에 이르는 영혼의 충동이다.
그 시대의 사회 생활에서 비밀 주신제(orgies)를 벌리는 에로스는 신들의 신화에 나오는 감정을 자극하거나 흥분시키는 체험들(사건)을 얻으려하고, 신전들에서 그러한 체험들에 이르게 한 것이다.
맥시무스(Maximus)는 인도적으로 발전시키었다. 플로티누스는 그것을 신비적으로 승화시키고 영화하여, 초자연적 지배자와 영적 결합을 하려는 신비적 열망으로 발전시키었다(Enneads).
초대교회의 시기에 그노시스(Gnosis)는 이런 접근법에 위치하여 자아 초월에 대한 인간 욕망이라는 특별한 경향을 나타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동일한 에로스, 인간 자신의 생활을 초월하는 것에 대한 자연적 충동이다. 여기서 에로틱한 종교의 원형은 관능적 도취이며, 최고 형태의 황홀이다.
에로스는 구약성경에서 잠 7:18("오라 우리가 아침까지 흡족하게 서로 사랑하며 사랑함으로 희락하자")과 잠 30:16("음부와 아이 배지 못하는 태), 이 두 곳에만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d) 그리고 아가파오와 아가페가 있다. 아가파오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충분히 설명한다.
2.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아가파오의 용법.
동사 아가파오(ajgapavw, 25)에서 헬라인은 에로스의 이상한 힘이나 마력(magic)을 느끼지 못했으며, 필레오의 따뜻함이나 열정도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 어원은 불확실하며, 그 의미는 근거가 약하고 가변적이다.
(a) 때때로 아가파오는 "어떤 것으로 만족하다"란 의미를 지닐 뿐이다.
(b) 때때로 외적 태도에서 이 동사는 "환영하다, 인사하다, 경의를 표(존경)하다"를 의미하며,
(c) 내적 태도에서 "어떤 것을 구하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을 요구하다"를 의미한다.
(d) 이 동사는 때때로 동료 끼리의 호의, 우정을, 혹은 때때로 동정을 의미하는데 사용되었다.
아가파오의 특별한 성격을 몇몇 실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을(~보다) 좋아하다, 선택하다, 다른 것보다 위에 한가지 선이나 목적을 두다, 다른 사람보다 한 사람을 더욱 높이 평가하다, 존중하다"를 의미한다.
이렇게 아가파오는 하나님이 어떤 특별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애호)에 대해 사용될 수 있다. 드물긴 하지만 이 단어가 신의 총애를 받은 사람에 대해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Dio. Chrys., 33:21) 분명히 에라오(ejravw)와는 달리, 재물이나 재산을 얻고자 하는 인간 자신의 욕망이 아닌, 타인을 위한 관대한 행위를 뜻하는 말이라 하겠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아하는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특별한 선물과 재물로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
아가파오의 특성은 이 점에서 확실히 보이는 것이다. 에로스는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찾는 일반적인 세상적인 사랑이다. 아가파오는 분명히 그 대상을 선택하여 지키는 구별을 두는 사랑이다.
에로스는 그 대상에 대한 다소 불확정한 충동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아가파오는 그 주체에 의해 자유로이 결정된 결정적인 행동이다.
에로스는 그 최고의 의미로서, 인간의 위쪽으로 향하는 충동, 곧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에 대해 사용된다. 아가파오는 주로 하나님의 사랑, 보다 높은 자가 보다 낮은 자를 들어올리는, 보다 낮은 자를 다른 사람보다 위에 높이는 사랑이다.
에로스는 다른 것들에서 자신(의 생명)의 주림의 충족을 찾은 것이다. 아가파오는 때때로 "사랑을 베풀다"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주는 능동적 사랑이다.
이 동사는 무엇보다 형용사 아가페토스가 사용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아가페토스는 동사와 같은 의미의 뉴앙스를 지니고 있으며, 합당한 사물이나 친애하는 자에 대해 사용되며, 특히 부모의 온갖 사랑을 독차지하는 독자(only child)에 대해 사용되었다.
아가파오는 에라오이나 퓔레오과 교환적으로 사용되거나 결합될 때 그 의미나 개성이 여전히 유동적이며 애매하다. 이런 경우에 아가파오는 때때로 단순한 동의어로서 강조나 다양한 표현 때문에 다른 두 단어와 나란히 위치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플로티누스(Plotinus)에서 아가판은 자기를 (겸손히) 낮추는 사랑에 대해, 에란은 높이 올라가는 사랑에 대해 의식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호머로부터 플로티누스까지 에로스는 계속적으로 시인과 철학자들의 사색이나 연구의 주제가 되어온 반면에 아가파오는 거의 언제나 기본적인 토의 주제로도 나오지 않는다. 명사 아가페는 성경 외에서는 단 한번 여신 이시스(Isis)를 아가페라는 칭호로 부른 것이다.
우리가 살펴본 바 성경 헬라어 이전 문헌에서 아가파오의 특성을 알 수 있으며, 우리는 이 특성을 성경 헬라어 아가파오란 단어에서 찾아볼 수 있다.
3. 구약 및 70인역본의 용법.
구약성경에서 사랑을 뜻하는 중요한 히브리어 동사는 아헵이며, 그 역어로서 아가파오가 주로 사용되었다. 이 동사에서 유래한 명사 아하바의 역어로는 아가페가 주로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 사랑은 그 사람을 강요하여 그가 좋게, 또는 올바르게 평가하거나 인정하는 사물이나 사람에게로 이끌어 가는 자발적인 힘이다. 사람은 이 사랑의 힘에 제어를 받아 자기 자신을 주거나 혹은 사랑의 원인이 되는 대상을 확고히 붙잡거나 혹은 즐거움을 주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사랑은 내적 인격에 심은 영혼의 불가해한 힘이다.
사람이 사랑의 대상을 올바로 인정하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한다(신 6:5). 사랑과 미움은 생의 양극이다(전 3:8; 전 9:6).
사랑은 인간 상호간의 사랑, 하나님의 인간과의 사랑, 사물에 대한 사랑 등을 나타낸다.
(a) 이 단어는 남녀의 사랑에 대해 사용되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하나님과 관계, 그리고 남녀의 성적 관계를 시사해 준다. 이 남녀의 사랑은 이성(sexes) 상호간의 생명력 넘치는 충동을 의미한다. 선지자 예레미야(렘 2:25)나 호세아(호 3:1; 호 4:18), 그리고 에스겔(겔 16:37)은 사랑의 성적(sexual) 측면을 매우 진하게 묘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히 성욕 및 성행위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단어는 남녀의 연애나 열애(창 29:18이하; 창 34:3; 삿 16:4), 합법적인 부부의 행복한 사랑(창 24:67; 삼상 1:5)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창조의 기사는 성의 구별과 부부간의 사랑이 생을 풍요하게 하는 은사임을 설득력있게 이해시켜 준다(창 2:18이하).
「그러나 이 사랑은 성적 사랑의 범위를 포함하지만 그것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헌신적 사랑과 생활의 충실함이 합쳐져 있다. 구약의 초기 기록에 의하면 이러한 사랑은 일부다처나 일처다부 사상과 부합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은 충실(참조: 창 20:13; 삿 14:16; 삿 16:4-5; 겔 16:8; 겔 23:17; 호 3:1), 상호의존(참조: 창 24:67), 책임(참조: 삼하 13:1, 4, 15)과 같은 인간 사랑의 다른 측면을 제외하고 성적인 것에 집중하는 위험을 이해시켜 준다(The interpertreter's D.B).」
더 나아가서 아가서는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라고 열정적인 사랑의 강력한 힘을 찬양까지 한다. 이 노래는 성적(남녀) 사랑의 기이함과 적극적인 힘을 찬양하지만 그 찬양에는 그 사랑이 근거를 두고 있는 상호의존과 신앙심(헌신)을 강조하고 있다(참조: 아 2:16; 3:1-8; 7:10; 8:6-7). 아가서에서 사랑을 묘사할 때 거의 대부분 아헤브(아가파오)와 아하바(아가페)를 사용했다. 그러나 여자가 남자를 부른 칭호는 도드(히 1730: 사랑하는 자)를 사용했다.
이러한 사랑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암논과 다말의 이야기는 성충동의 야수성, 즉 대상자와 성적 관계를 가지려는 무절제한 요구를 보여준다(삼하 13:1-22). 사랑은 성애 또는 성욕적인 영역에서 세상이 알지 못하는 근원, 곧 마귀로부터 기인한 원시적 힘인 미움을 부인함으로 맞서는 적극적인 능력이다. 이 이야기는 이 두가지 충동의 야수성도 투명하게 보여준다(삼하 13:1-22).
결혼이나 부부 생활은 상대에 대한 사랑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다. 삼손의 신부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치 아니하는도다"라는 히스테릭한 말에서(삿 14:16; 참조: 삿 16:15; 창 29:31, 33) 동일한 요소가 표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심지어 법까지도 사랑과 미움의 성욕적 증상에 관여하고 있다(신 21:15이하; 22:31이하; 24:1이하).
(b) 이 단어는 부모와 자식, 가족간의 사랑에 대해 사용되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사랑했으며(창 22:2), 리브가는 아들 야곱을 사랑했다(창 25:28). 야곱은 요셉과 베냐민을 사랑했다(창 37:3; 44:20). 잠언은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경계하느니라"고 했다(잠 13:24).
또한 이 단어는 며느리의 시어머니를 향한 사랑과 같은 가족간의 사랑을 표현한다(룻 4:15).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은 어느 곳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부모를 존중하고 존경하며 또 부모에게 복종해야 한다.
「참고-창 47:29에 보면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인애(헤세드: 친절, 자비; 70인역본 )란 단어를 사용하여 자기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기를 요청했다. 이것이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족속이나 가족의 유대는 이스라엘에서 매우 강하였다. 그러므로 '근친' 관계의 중요한 요소인 사랑에 대하여 놀랄 일이 아니다. 그것은 룻 3:10에서 이성 곧 남녀 사랑과 관련되어 있다. 그곳에서 인애(헤세드: 친절, 자비; 70인역본 ejleo")는 남녀 사랑의 개시와 가까운 친족에 대한 충실, 이 둘을 포함하고 있다.」
성경은 가족적 사랑이 너무 선택적일 때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다(창 25:28). 그 결과로 야곱과 에서가 서로 반목하고 미워하게 되었다. 요셉에 대한 야곱의 편애로 인하여 다른 아들들이 요셉을 미워하고 시기하게 되었다(창 37:4). 배타적인 사랑은 증오가 들어올 수 있는 지점이 될 수 있다. 이는 사랑이 헌신적일 뿐만 아니라 책임을 다 해야 하기 때문이다.
(c) 이 단어는 친구의 특별한 애착을 나타낸다. 다윗과 요나단 사이의 사랑은(삼상 18:1, 3; 20:17) 여인의 사랑보다 더 깊은 우정의 차원이었다-"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삼하 1:26).
(d) 더 나아가 이 사랑은 사회적 공동 생활의 근본과 규범으로 나타난다-"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 19:18). 이러한 면에서 사랑은 이웃을 위한, 그리고 이웃을 향한 헌신이며, 이웃을 형제로서 받아들이는 것이고 이웃이 당연히 받아야할 대우를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특히 외국인(레 19:34)과 가난한 자(레 25:35)와 고아의 권리와 관련된 사회적 법률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이웃 사랑은 단순한 친절이나 호의로 해석할 수 없다. 이것은 편협한 배타주의를 배제한다.-바로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웃이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적(enemy)으로 생각되는 것같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도 의미한다.
그 이유로 신 22:1-4이 동포를 도울 의무를 부과하는 것인 반면, 출 23:4-5은 특별히 이 의무를 적대적인 사람에게 적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웃은 동료일 수도 있고 적일 수도 있으므로, 그는 사랑의 대상이지 법적 제한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개인은 법적 개인보다 우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형태에서 출 23:4이하의 요구와 아마도 한층 더 높은 수준인 잠 25:21에 있는 기본적 진술("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은 원수를 향한 성향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으나 한 특별한 방식의 행위의 의무를 지우는 것으로서,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적으로 가르치려고 한 것이다. 요셉은 그의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선으로 악을 갚는 그런 실례를 보여준다(창 50:19).
물론 구약성경에는 이러한 원수를 사랑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시 109편과 잠 14:20 및 적대 국가들에게 향한 일반적인 태도는 이에 대한 예증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의해 부과된 윤리적인 요구의 고결함은 여전히 존재한다.
(e) 이 단어는 구체적인 것이나 추상적인 것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기름(잠 21:17), 은과 풍부(전 5:10), 뇌물(사 1:23)을 사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악(시 52:3-5), 사망(잠 8:3), 허사(시 4:2-3), 거짓 맹세(슥 8:17)를 사랑했다. 또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시 119:47), 율법(시 119:97), 증거(시 119:119), 법(119:159), 그리고 그들은 선(암 5:15), 진실과 화평(슥 8:19), 구원(시 40:16-17)을 사랑했다.
4.신약성경에서 아가파오의 용법.
동사 아가파오는 신약성경에서 143회 나오며, 요한의 기록(요한복음에 37회, 요한1-3서에 31회, 요한계시록에 4회)에 가장 자주 나타난다.
1. 공관복음의 용법.
(a) 예수님은 새로운 사랑을 요구하신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두 계명에 기초하고 있다(마 22:36-마 22:40; 병행구, 막 12:28-막 12:34). 이 두 명령은 신 6:5과 레 19:8을 결합시킨 것이다. 첫째 부분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명령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의식적으로 그의 백성의 도덕적 전통의 입장을 취하신다. 그러나 그가 요구하는 사랑은 오로지 모든 다른 계명을 그 사랑에 이르게 하고 모든 의가 그 표준을 그 안에서 찾는다는 것을 뜻하는 사랑이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사랑은 의지와 행위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가 듣는 이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태도로 하나님을 위해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결단하고 준비되어 있기를 요구하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가능성을 근본적인 양자택일에 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인의 노예처럼 그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참조: 눅 17:7). 그것은 충실히 유순하게 그의 명령을 듣는 것이며, 스스로를 그의 지배 아래 두는 것이며, 다른 그 무엇보다도 이 통치의 실현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참조: 마 6:33). 한편 그것은 그의 전 존재의 근거를 하나님에게 두며, 전적인 신뢰로 그에게 매달리며, 모든 관심과 책임을 그에게 위탁하며, 그의 손에 의해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지도 않고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는 모든 것은 미워하고 멸시하는 것이며, 다른 모든 인연과의 관계를 끊는것이며, 방해되는 모든 것을 잘라버리는 것이며(참조: 마 5:29이하), 오직 하나님과 묶는 것 이외의 모든 구속을 끊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세력, 즉 재물과 허영은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포기하거나 싸워야 하는 세력들이라고 특별히 언급하신다. 재물을 중히 여기고 부를 축적하려는 자는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는 믿음이 적은 불신자이다(마 6:24b; 마 6:30이하).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 대해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문자적으로 '사랑하는도다')"라고 화를 선언하신다(눅 11:43). 명성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양립할 수 없다.
또 하나 아직 이 사랑을 위협하는 세 번째 위험, 즉 박해에 대한 긴장이 있다. 제자직에는 고난이 수반된다. 아키바(Akiba) 같은 위대한 유대인 순교 신학자들처럼 예수님께서는 부득이 그의 ┻湧?당할 폭행과 고통과 모욕과 수난이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충성에 대한 중대한 불 시험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아시고 말씀하신다(참조: 마 10:17이하; 마 5:10이하). 큰 최후의 고통이 인간에게 다가올 때가 있다(참조: 마 5:29이하; 마 24:10이하; 마 24:12이하). 이 말씀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특성은 순수하고 단호하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강렬한 열정이며 모든 혼란과 권세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사랑하는 주님이 나타나실 때까지 굳게 인내하는 적은 무리들의 열정이다.
그리고 제자로서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된다(참조: 마 10:37이하; 마 25:31이하; 눅 6:22이하). 이와 같은 요구는 사랑이 직면해야 할 고난을 뜻한다. 사랑이란 고난을 통해서만 이 세상에서 이룰 수 있다. 사랑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이를 희생시키게 하였다면, 그의 제자들에게도 분명 이 사실이 적용될 것이다.
(b) 다음에 예수님께서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명령하신다: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9; 병행구 막 12:31).
이 둘째 부분인 이웃 사랑의 계명은 롬 13:9; 갈 5:14; 약 2:8에도 인용되어 있다. 문자적으로 '둘째는 그것과 같이 너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다'로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예수님께서 명하신 근본적인 큰 요구이다. 그것은 인류 속에서 새로운 실재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이 사랑 자체가 인간 상호간의 사랑의 기초이자 동기이다.
랍비 아키바(Akiba)는 이웃 사랑의 계명이 토라(Torah)의 기본 원리이며, 여타의 모든 것들이 이 속에 함축되어 있다고 하였다(참조: 마 22:36이하에 관한 SB I 900-8).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 이런 명령을 덧붙여서 실체화한 것은 신약성경의 특징이다.
예수님은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는 구약성경 및 유대인의 요구를 받아들이시지만 그러나 동포에 국한하는 이웃 사랑에 대한 제한을 단호하게 제거하신다. 그는 또한 이웃 사랑을 우리의 길에서 만나는 의지할 데 없는 사람에게 집중시킨다.
이웃 사랑에 대한 이해를 위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눅 10:29이하). 서기관은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가장 가까운 동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외국인에게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의 체계적인 목록을 제시함으로써 답변하지 않으신다(Philo, supra, 40). 또한 모든 사람들이 형제들이라고 하는 가장 멀리 있는 자들에 대한 별난 사랑을 칭찬함으로 대답하지도 않으신다. 그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이가 누구인가?"라고 역으로 질문하심으로 노미코스(nomikov", 3544)의 질문에 대답하신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나를 중심에 두고 동심원을 그리는 이전의 그룹 짓기를 산산이 부수는 한편 유기적인 이웃의 개념을 내세우신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개념에 의해 당신이 중심에 있다는 새로운 그룹 짓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 체제는 모든 사람과 장소에 도식적으로 적용되는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절대적인 결합체로 구성된다. 그것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둘레에 겹겹이 형성된다. "마침"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가장 가까이에 서 있는 자는 누구든지 똑같이 그에 대하여 이웃의 의무를 지닌다. 세 사람은 똑같이 강도들을 만나 고통하는 사람 가까이에 있다. 그들 중 누가 이웃의 의무를 이행하는가? 이방의 사마리아인이다. 왜인가? 보고 불쌍히 여긴 것이다. 마음이 최종적인 결정을 한다. 마음이 타인의 고통을 알아내는 자가 그의 이웃의 의무를 이행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다른 두 사람은 주저하였으므로 그들의 이웃으로서의 의무를 위반한다. 그러나 이 불쌍히 여김의 도입이 이웃 사랑에 있어서 감정의 낭비를 내포하지 않는다. 요구되는 것은 최대한 감정에 흐르지 않고, 가장 비감상적으로 도움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사마리아인은 매우 침착하게 가까운 앞날을 대비하면서 그 순간이 요구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행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허비하지도 않고 그 의무와 타인의 죄에 대하여 쓸데없이 말하지 않는 자비를 베푼 것이다. 그는 해야만 하는 것과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이 이야기에 피할 수 없는 절박함을 부여한다.
(c) 예수님은 의식적으로 유대의 전통과 대립하는 요구로서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하신다. 마 5:43이하와 눅 6:32이하의 간결한 말씀에서 그 요구에 대한 3중의 결정을 볼 수 있다.
첫째로 그것은 새 시대의 새 요구이다("옛 사람에게 말한 바...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마 5:21; 마 5:43).
둘째로 그것은 칭찬(카라스)을 지적한다("삼", "더하는 것",마 5:46 이하).
셋째로 그것은 "죄인들"(세리들, 이방인들, 마 5:46 이하)과 날카롭게 구별되는 "듣는 자들"에 적용된다(눅 6:27).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원수에 대한 사랑은 이 세상과 세대의 자녀들에 관하여, 그 미래가 그들에게 속한 하나님의 새 백성의 자녀들의 태도이다. 그들은 되돌려 받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 사랑을 보여주어야 하며, 상환의 가능성이 거의 없는 곳에서 빌려주어야 하고, 제한없이 주어야 한다. 그들은 세상의 적의도 기꺼이 저항없이 희생적으로 감수해야 한다(눅 6:28). 참으로 그들은 그들을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해야 하며, 저주하는 자를 위해 축복해야 하고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눅 6:27 이하; 마 5:44). 이들 요구 중 몇몇에 대해서 랍비의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 완전하고 단호한 강령과 비교해 볼 때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옛 백성, 유대인 공동체의 순교자의 정신조차도, 아직 들어보지 못한 이 순교의 의지에는 훨씬 못 미친다. 여기서 한 새로운 중재가, 순교자의 과업, 즉 하나님을 미워하고 그의 신실한 백성을 멸하는 적대적인 세상을 위한 중재가 이루어진다.
이상주의자들은 항상 있어 왔다. 그러나 여기에서 환상이나 감상적인 생각없이 이웃 사랑의 이상을 현실 속에 전하신 자가 말씀하신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해야하고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와 같이 흔들리지 않는 진지한 어조와 현실 감각을 가지고 이 불가능한 요구들에 대해 말씀하신다. 항상 형제 사랑과 보다 좋은 세계에 대한 열광주의자들이 있어 왔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아시며 그러므로 오로지 사랑에 근거를 둔 세계 안에서 사는 삶을 요구하신다. 그는 냉철한 현실성과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하신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미움과 원수에 대한 유대인의 견해를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레 19:18에 대하여, 동족의 자손들에 대해 분노와 복수의 감정 같은 것은 금지되나 다른 백성들에 대해서는 금지되지 않는다고 해석하여, 시 139:19-22과 시 140:9-11과 같은 구절을 그들의 원수들을 미워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예수님은 사랑을 이웃에게 제한한 레 19:18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원수까지도 이웃 사랑의 대상에 포함시킨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원수들을 이전의 미움과는 대조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계명을 더 이상 확장시키지는 않았으며, 사랑에 관한 율법을 복음의 가르침 아래에 두었다. 이 복음의 가르침은 눅 10:29-눅 10:37에서 분명히 설명된다. '곤경에 처해 있는 자는 누구든지 항상 나의 이웃이다'는 진술은 '나의 이웃은 나에게 자비를 베푼 자이다'는 진술에 부속하고 뒤따른다(참조: 눅 10:37). 바르트는 그의 중요한 신학적 해설에서 내가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어리석은 짓임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전의 원수였던 사마리아인은 나에 대한 그의 자비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나의 이웃이 되었으며 따라서 나로 사랑으로 행하도록 도전(요구)하였기 때문이다(눅 10:37). 다른 말로 하면 사랑 받아본 경험이 도전을 앞서며, 복음이 명령을 앞선다. 그 이유는 예수님 자신이 이 비유의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의 모습을 통하여 예수님의 모습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 자비로운 구속(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d) 예수님께서 새로운 상황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사랑에 대한 그의 요구는 당연한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사건인 하나님의 자비를 선포하신다. 그는 죄사함을 가져오시고,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 속에서 새롭고 넘치는 사랑이 흘러 나온다. 이러한 사랑은 모든 생명과 활동에 충만하여 그들을 지도한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새로운 관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서로간의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하였다(눅 6:36이하). 이것은 자비의 관계요 화해의 관계이다.
2) 바울 서신의 용법.
(a)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로 말미암아 창조되는 새로운 상황을 분명히 깨닫고 묘사한다. 이제 바로 동트는 새 시대에 대한 로마서의 주요한 논제는 하나님을 향한 선택된 자들의 사랑으로 시작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아가고 마침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아가페, 롬 8:39)에 대한 확신으로 끝맺는 하나의 찬양에서 절정에 달한다(롬 8:28; 롬 8:31이하). 이 확신은 세 가지 사실에 근거한다.
첫째,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보내시고 이 사랑의 행위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롬 8:27), 곧 아들께서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 십자가 위에서 성취되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사도를 부르시고 계속해서 그가 택하신 자들을 부르신다. 그의 사랑의 의지가 그들에게 향한다.
셋째, 하나님의 아가페를 우리의 마음에 널리 흐르게 하시며, 그리하여 그 사랑을 결정적으로 경험하게 되고 우리의 삶 속에서 현실된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활동을 하나님의 활동과 구분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었던 죄를 용서하시는 일을 하신 것과 같이,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과 동일한 것으로 여긴다(롬 8:37; 살후 2:16).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행위 속에서 계시되고 실행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아가페)을 확증하셨"다(롬 5:8).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건이 된다. 바울은 이런 변화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준동사형(verbal forms)으로 말하고, 항상 부정과거형으로 말한다(롬 8:37; 살후 2:16; 갈 2:20; 엡 2:4; 엡 5:2).
하나님의 사랑은 선택을 의미한다. 바울은 사랑함과 미워함, 택함과 거절함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대해 언급하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고(롬 9:13; 롬 9:25), 형식상의 병행절에서 아가페토이(사랑하심을 입은 자들)와 클레토이(부르심을 받는 자들)(롬 1:7) 또는 에클렉토이(택하신 자들)와 에가페메노이(사랑하신 자들)까지도 사용한다(롬 1:7; 골 1:12). 선택적인 사랑의 개념에 미리 예정하심(pre-temporal ordination)과 그리스도 사건의 표적(sign)에서 현재적(temporal) 부르심에 대한 두 가지 근본적인 사상이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엡 1:4이하[아가페]).
하나님께서 그의 크레스토테스(crhstovth", 5544: 선하심)와 아포토미아(ajpotomiva, 663: 엄위)에서 이제 죄인들의 무리로부터 구별된 선택받은 공동체는 하나님과의 영속적인 친교에서 사랑과 평화를 누린다.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은 살아있는 능력으로 일하고 계신다(롬 8:35; 고후 13:11이하). 사랑은 우리를 포로로 사로잡는다(고후 5:14).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다"(롬 5:5). 이 새롭고 살아있는 능력의 실체는 이들 바울의 말보다 더 설득력있게 표현될 수 없다.
바울 서신의 하나님의 아가페(ajgavph, 26)의 개념의 의미는 명백하다. 그것은 인간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와 이 세상의 구원을 지향하는 것(orientation)이다. 사랑의 행위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목적하시는 것이다. 아브라함 시대부터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백성을 미리 아셨다. 그는 아들을 보내시고 최종적으로 성령을 보내심으로 이 백성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이 성령은 갈라디아서의 위대한 마지막 부분(갈 5:2-갈 6:10)에 사랑의 성령으로 묘사된다(갈 5:22). 서신은 이렇게 역사의 행로를 남긴다.
(b)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의 목적은 새로운 인간이다. 그러나 이 목적은 인간과 인간의 사랑의 행위 없이는 성취되지 않는다. 모든 하나님의 행위는 창조이든지 구원이든지 간에 인간의 행위의 가능성과 필연성 둘 다를 전제로 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의지를 배제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긴급한 부르심은 자유에로 부르심이다.
이 기본적인 법, 곧 예수님이 사건에서 가장 분명히 볼 수 있고, 바울에 의하면 모든 곳에서 하나님 행위와 인간의 행위 사이의 관계를 결정하는 이 기본적인 법은(참조: 빌 2:12이하), 하나님 사랑과 인간의 사랑 사이의 관계에 관하여 사도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첫 번째로 말씀하신다. 그가 관계를 세우신다. 이것은 롬 8장에 단호하게 주장되어 있다. 결단, 선택과 부르심은 확고하다. 그로부터 아가페라 불리는 모든 것이 생겨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사랑은 부름 받는 자에 쏟아 부어진 하늘로부터의 사랑에 대한 응답일 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근본적인 사랑의 행위, 그 자체와 같이 결단의 행위이다.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백성과 맺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물리치는 언약이 성취된다(롬 8:28; 참조: 롬 8:37).
바울은 고전 8:3에 똑같은 근본적인 관계를 재치있게 공식화시킨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느니라".
우리는 오직 그의 앞에서의 우리의 수동성의 크기만큼 하나님을 향하여 능동적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첫째로 어떤 참된 의미에서 우리를 의지가 있고 행동하는 인간이되게 하는 생명을 창조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을 사람에게 불러 일으키신다. 그러나 피스티스는 단지 작용을 시작하며, 진정한 실현은 디 아가페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갈 5:6).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신 자들에게 프뉴마를 부으신다(롬 5:5; 살전 2:13). 다시 한번, 인간은 수동적이다. 그러나 프뉴마는 사랑 안에서 행하는 최상의 활동을 위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자유는 사랑 안에서 그 자체를 억제하고 완성시킨다.
프뉴마가 그것에 의해 자유롭게 되는 아가페에 선행한다는 것은 갈 5:22에 고전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또 "성령의 사랑"(롬 15:30)과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골 1:8) 같은 결합에서 그리고 고전 4:21에 보다 세련되게 표현되어 있다.
프뉴마와 자유의 관계에 대해서는 롬 8:2에, 자유의 한계와 목적으로서의 아가페에 대해서는 갈 5:13에 나타나 있다. 사랑을 위해 해방됨으로 율법이 성취되고 초월되고 극복되며, 어떤 후퇴와 방해도 허용하지 않는 새로운 질서가 시작된다.
사랑의 한 가지 중요한 목적은 부름받은 자가 그의 이웃에 대한 봉사로서 그의 삶을 사랑과 자유에 두는 것이다: "13 ...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갈 5:13-갈 5:14).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이하),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살전 3:12). 바울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명령에 집중하여 예수님과 같은 방법으로 그 명령을 확립한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관심은 형제 사랑에 집중되어 있다: (참조: 갈 6:10).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동포를 돕기 위해 준비되어 있음을 의미하던 이웃 사랑은 이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는 함께 시민된 자들을 위한 봉사를 의미한다. 그것은 형제간의 복지를 행위의 지배 원리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살전 4:9; 골 1:4; 몬 1:5; 엡 4:2; 엡 6:23; 골 3:19; 엡 5:25). 아가페토스와 아델포스는 서로 바꾸어 사용할 수 있는 용어가 된다(살전 2:8; 몬 1:16).
형제 사랑을 요구하는 우주적이고 역사적인 카이로스에 의해 형제 사랑이 결정적으로 한정된다(참조: 갈 6:10; 롬 13:11). 형제 사랑은 십자가와 텔로스 사이에서 이 결단의 시기에서 유일하게 적절하고 전진적인 태도이다. 그것은 십자가의 표적 아래 선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으심으로 인해 존재하게 된 공동체 안에서(빌 2:1이하; 골 3:14이하; 엡 5:2; 참조: 고전 8:11) 봉사와 희생, 용서와 이해(consideration), 도움과 동정, 그리고 쓰러진 자를 세우고 낙담한 자를 회복시키기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롬 12:9; 고전 13:4 이하; 참조: 갈 5:25 이하). 사도 자신의 최상의 가능한 목표는 교회의 선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아직 남은 고난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참조: 고후 6:3; 골 1:24 이하). 그러나 이것은 또한 바울에게 있어서 기본 원칙인 하나님과 인간의 행위 간의 근본적인 관계에 따라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행위에 대한 봉사로서 인간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가 결합한다.
사랑은 세우는 일을 한다(고전 8:1). 사랑은 장래의 일을 세운다. 아가페(ajgavph, 26)는 텔로스(tevlo", 5056)의 표적 아래에 있다. 이것은 고전 13장의 위대한 진리이다. 이런 이유로 사랑은("제일 좋은 길", 곧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하는 하늘의 선물이며, 사랑은 믿음, 소망, 사랑이 이루는 삼각 구조의 중심에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둘 보다 위대하다. 믿음과 소망은 이 불완전한 세계(aeon)의 한계나 사건들을 견딘다. 사랑으로 인해 장래 세대의 능력은 이미 현재의 세계의 형태 속으로 침입한다. 예수님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에게 있어서도 아가페는 이 죽음의 세계(aeon) 가운데서 미래가 가지는 유일한 생명의 힘이다.
3. 야고보서의 용법.
(a) 약 1:12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b) 약 2:5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얻는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의 나라로 부르실만큼 선하다고 여기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자는 나의 형제들이며 그들이 비록 누추한 옷을 입고 온다할지라도 뒷자리에 앉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c) 약 2:8에서 사랑, 곧 이웃 사랑은 새 왕국의 최고의 '법'이다: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그러므로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범법자가 된다(참조: 약 2:9).
4. 베드로의 용법.
(a) 벧전 1:8에서 성도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으나 사랑한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b) 벧전 1:22에서 진리로 영혼을 깨끗하게 하면 참으로 형제를 사랑할 수 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베드로는 벧전 2:17에서 "형제를 사랑하라"고 권고한다.
(c) 벧전 3:10에서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악을 떠나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d) 벧후 2:15에서 발람은 불의 삯을 사랑하다가 망했다: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5. 요한의 용법.
바울에게 있어서 아가페는 미래의 원리(principle)이며, 요한에게 있어서 사랑은 현재의 우주적 위기에서 세워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세계의 원리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일 3:16; 요일 4:9 이하).
이 기본적인 사상에서 요한과 바울(롬 8:32)은 일치한다. 그러나 요한이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대한 사랑에 대해 항상 이야기하는 방식에는 다른 점이 있다(요 3:35; 요 10:17). 모든 사랑은 예수님께 집중된다. 그는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의 중재자이시다. 대조적으로 요한은 아버지에 대한 아들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거의 말한 적이 없다(요 14:31). 그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그의 "친구들"로 주신 자들에 대한 아들의 사랑을 더욱 강하게 강조한다. 아들을 통해 아버지의 사랑이 인간의 세상에 이른다(요 17:23 이하; 요 14:21 이하; 요일 4:19; 요 11:5; 요 13:23). 이 사랑은 그의 죽음에 의해 성취되고 공표되었다. 아들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그의 목적을 이루신다(요 13:1; 요 15:13).
요한복음의 아가페는 매우 명백히 겸손한 사랑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한 단계 한 단계 이 세상으로 내려오는 천국의 실체이다. 그렇지만 이 천국의 실체는 계시와 도덕적 행위에 의한 승리를 성취한다. 따라서 요한은 바울이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명백하게 설명한 것을 이해하고 있다. 빛과 생명의 세계는 이 세상에서 사랑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요한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모두의 삶에서 아가페의 적극적인 특성을 강조할 수 있고 또 강조해야만 한다.
요한이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요 5:42; 요 8:42; 요 14:28)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고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는 형제에 대한 사랑에 의해 가리워 지도록 한 것은(요 13:34 이하; 요 14:15 이하; 요 21:15 이하; 요일 4:20) 극히 일부분이다. 형제 사랑, 아버지와 아들과 아들의 백성의 서클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공동체를 구성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공동체의 삶을 위한 궁극적인 실체이며 그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은 그 생활의 법이다(요 15:9 이하; 요일 2:10; 요일 3:10; 요일 4:11 이하).
요일 3:14에는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않는 자는 사상에 거하느니라"고 한다. 요일 3:14; 요일 2:15 이하; 요 3:19에도 그렇다. 아가판은 어떤 목적어에 의해 한정되지 않은 채로 있으며, 단지 이 절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다. 눅 7:47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는 단독으로 사용된 아가폰의 독립적인 배치는 요한일서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요일 3:18; 요일 4:7 이하; 요일 4:19). 이 사랑은 생생한 활동이며, 존재의 방식이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현실화이다. 사랑의 법이 모든 세부적인 요구들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고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고상한 일관성으로 독자들 앞에 제시된다는 사실이 이것과 조화된다. 단지 때때로 사랑에 대한 요구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와 같은 표현에 의해 정확하게 정의된다(요일 3:18; 요이 1:1).
요한의 서신에서는 보다 일반적으로 훈계가, 여기에서 선택의 사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지만 형제의 관계에 대해서는 매우 단순하게 적용되는 아가페테와 아가페토이라는 절박한 부르심에 의해 중단된다(요삼 1:5; 요일 4:7).
요한계시록에서 형제 사랑에 대한 요구(계 2:19)는 이 분열과 고통에서,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라도 하나님께 굳게 매달리라는 열정적인 부르심에 의해 완전히 가리워 진다. 여기에서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이해는 전적으로 그 시대의 필요에 의해서 새로운 생명에 닥친 수난에 대한 신학 사상에 의해 결정된다. 요한계시록의 시작 부분에 충성된 증인 "우리를 사랑하신 자"(토 아가폰티 헤마스)에 드리는 찬양이 나오고(계 1:5) 사랑하는 도시의 마지막 때의 상황의 변화(계 3:9; 계 20:9)와 하나님의 적들에 대한 위협과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는 책망(계 2:4)과 함께 죽기까지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계 12:1) 피스티스(믿음)와 아가페(사랑)를 지킨 자들의 영광이 뒤따른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는 때가 왔다(마 24:12).
6. 사도 시대 이후의 용법.
초기의 신조는 몇가지 새로운 이상의 고취와 아울러 이 시대에 전수된다. 클레멘트일서 49-50은 지고의 사랑, 그리고 이 사랑이 공동체와 세상에 대해 가지는 실질적인 의의에 대해 계속적인 인식을 예증해준다. 아가페와 아가폰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기초적인 용어가 되었다. 에가페메노스(**)와 아가페토스(**)는 예수님에 대해 즐겨 사용되는 용어인데 때때로 휘오스(**)나 파이스(**)와 연결되어서 사용되기도 하고 때때로 독립적인 명칭, 사랑하는 아들(Only-Beloved)로 사용되기도 한다(벧후 1:17; Herms, 5, 2, 6; M. Pol., 14, 1; Dg., 8, 11; Barn., 3, 6 등).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하나님께 사랑받고 선택받은 자들이며, 그의 선하신 기쁨이 그들에게 머무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 아가페와 아가판은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의 경건을 요약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세상에 대한 경멸과 미움을 요구한다. 이러한 긴장 상태는 여기 유대교에서 경건과 하나님의 사랑의 최후의 표현으로 고귀하게 평가되는 순교를 초래할 수도 있다.
또 다른 형태로 하나님과 이 세상의 현상간의 긴장, 하늘의 사랑과 세상적 사랑 간의 긴장은 금욕주의로 이끌 수도 있다. 아가판은 훈련받은 또 때때로 절제하는 삶을 나타내는 용어, 또는 실제로 금욕의 훈련을 나타내는 용어가 된다. 순결한 아가페는 에로틱한 사랑보다 강하다. 그러나 아가페와 그 파생어들의 가장 일반적인 사용은 형제 사랑을 의미한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관한, 율법의 의미와 성취에 관한, 그리고 원수의 사랑에 관한 옛 말들은 크게 존중되고 적용된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경우에 형제들은 중요하다.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지치지 않고 봉사로 융화로 선으로 악을 이김으로 형제애적 친교의 의지를 강화시키기 위해 힘써야 한다(벧전 4:7 이하; ICI, 49이하; Barn, 1, 6). 아가페토스는 유행하는 인사말의 형식이다. 아가페는 식탁에서의 친교가 발전된 형제들의 애찬에 대한 전문적인 용어가 되었고 사회적인 의미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참조: E. Stauffer;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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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vw(5368, 필레오) 좋아하다 be fond of, 사랑하다 lov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필레오(Homer 이래)는 필로스(fivlo", 5384)에서 유래했으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a) 필레오는 흔히 아가파오(ajgapavw, 25: 사랑하다)와 의미나 용도가 매우 유사하지만 일반 헬라어에서(70인역과 신약은 그렇치 않음) 아가파오보다 더 자주 사용되며 '좋아하다'는 의미보다 '사랑하다'라는 의미를 더 지니고 있다.
(b) 필레오는 중성 목적어와 함께 사용될 경우에 '좋아하다, 중히 여기다'를 의미한다.
(c) 필레오는 부정사와 함께 사용될 경우에 '~하기를 좋아하다, ~하는데 익숙해 있다, ~하는 것이 습관이다'를 의미한다.
(d) 필레오는 '입맞추다'를 의미하며, 아가파오와는 달리 애무나 특히 입맞춤과 같은 애정의 행위를 나타낼 때도 사용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필레오는 70인역본에서 30회 나오며, 아헤브(사랑하다, 창 27:4, 9, 14; 창 37:4; 잠 29:3; 전 3:8; 호 3:10; 사 56:10), 나샤크(입맞추다, 창 27:26; 창 27:27; 창 29:11, 13; 창 33:4; 창 48:10; 창 50:1; 욥 3:27; 잠 7:13; 잠 24:26; 아 1:2; 아 8:1), 레아(친구, 애 1:2)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필레오는 신약성경에서 2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필레오는 마 6:5에서 그 본래 의미로 사용되었다. 거기에 보면 외식하는 자가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는 것을 좋아한다(사랑한다)고 되어 있다.
마 23:6과 눅 20:46도 유사한 경우들이다. 눅 11:43에서 아가파오가 사용되고 비슷한 내용인 눅 20:46은 그렇지 않다는 점은 의미상의 차이가 항상 지켜진 것 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b) 마 10:37에서는 가족 관계에서 비롯된 사랑을 의미한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여기서 한마디 부언하자면, 이 문장은 신학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이 단어가 신학적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왜냐하면 비교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 문장의 표현법은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외 다른 곳에서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하나님의 통치의 선물인 아가페로 표현되었다. 이 문장의 초두에는 친족간에 서로 나누는 타고난 사랑이 언급되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그 사이에 끼어 들게 될 때, 보통 가정의 친교의 끈과 고리까지도 하나님의 가족 사이의 새로운 교제를 위해 풀릴 수가 있다는 점이다.
(c) 요 11:3; 요 11:36에서 나사로와의 예수님의 사랑의 결속을 언급한다. 여기서 친구에 대한 사랑이 언급되지만, 나사로는 특별히 선택된 사람이며, '그는 나의 친구'가 아닌 '우리의 친구'라고 불리운다(요 11:11).
(d) 요 15:19에서 '자기의 소유의 것을 사랑한다'는 기본 의미가 명백히 나타나 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한은 세상(코스모스)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둠의 영역으로도 묘사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코스모스 안에(in) 있는 사랑이나 코스모스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에 대한 증오와 동일하다(참조: 약 4:4).
요일 2:15은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 하신 말씀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e) 요 16:27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요구에 부응하였으며, 예수님께 대한 그들의 사랑에 답하여 아버지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신다. 여기서의 사랑은 요 3:16에서 언급되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사랑과는 구별되는 듯하다. 그러나 필레오와 아가파오가 모두 성자에 대한 성부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듯이(요 5:20; 요 3:35 등). 제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도 아가파오로 표현될 수 있다(참조: 요 14:21, 요 14:23). 하지만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요 13:1)이나 제자들 상호간의 사랑(요 13:34), 아버지께 대한 예수의 사랑(요 14:31)을 나타낼 때는 오직 아가파오만 사용되었다. 요한복음에는 성부에 대한 제자들이 사랑이 아무데서도 언급되지 않는다.
(f) 요 21:15이하에서 아가파오와 필레오가 번갈아 나오는데 일부 성경 해석가들은 예수님께서 세 번째 질문에서 필레오를 사용하셨기 때문에 베드로가 근심했다고 주장하지만(요21:17), 요한복음에서 이 단어들은 거의 동의어이므로 베드로가 근심한 까닭은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물으셨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이 사람들 보다"(요 21:15) 자신을 더 사랑하기를 원하시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특별한 사명을 맡기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이 위임도 부인이나 특별한 사랑의 시인과 마찬가지로 세 차례 반복된다. 이 예외적 사랑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랑하시는 제자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에 대응되는 것이며, 목회 사역과 죽음이라는 베드로의 이중적 사도 직분의 기초가 된다. 베드로는 '아가파오'라는 사랑은 물론 '필레오' 사랑까지 언급한 것이다.
(g) 고전 16:22에서 바울은 필레오를 단 한번 사용했으며, 또한 중요하기도 한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거기에서, 퀴리오스(주)에 대한 사랑은 구원의 조건으로 묘사되어 있다. 은혜는 오직 말과 행실로써, 즉 온전히 믿음을 바쳐 주께 사랑을 고백하는 자들에게만 임한다.
(h) 딛 3:15,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찌어다". 믿음 안에서의 사랑으로 이해된 인간적인 사랑을, 아들(Sun)에 의해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과 관련하여 새로이 해석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할 때, 비로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믿음 안에서"라는 문구는 그리스도교적 중요성을 나타내며, "우리를"이란 단어는 특정한 배타성을 암시한다. 사도 바울에 대한 사랑은 교회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연합하는 결속이 된다.
(i) 계 3:19에서 승천하신 주님은 구약 성경의 구절을 인용하여 말씀하신다(잠 3:12). 그리스도의 징계하시는 사랑(참조: 고전 11:32)은 다름아닌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다. 이 배경은 공동 식사 안에서 사귐의 성취를 이루는 하나님의 우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잘못하는 아이를 뉘우치도록 교도하는 가운데서 나타나는 부모의 사랑이다.
계 22:15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절대적으로 대립을 이루는 명제 가운데 앞의 개념들을 특징지어 주는 결론적 구절을 보게 된다(참조: 요 3:19; 요일 2:15; 약 4:4).
(j) 막 14:44에서 필레오는 '입 맞추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하였는지라".
(참조: C. Brown; G. Stah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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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lhqhv"(227, 알레데스) 진실한, 진짜의, 신실한.
1. 고전 및 70인역본.
형용사 알레데스(Homer 이래)는 부정 접두어 아(a)와 레도(lhvqw: 남의 눈을 피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문자적으로 '숨기지 않는'을 의미하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변치않는, 일정한, 충실한' constant, '확실한, 타당한, 정당한, 유효한' walid(Jos. Ant., 8, 337과 343 등; Sib., v. 449; Fr 1, 10; 사 43:9).
(b) ① '신뢰할 수 있는' trustworthy 또는 '믿을 수 있는' reliable(1 Cl., 45, 2), 느 7:2; 잠 22:21.
② '성실한' sincere 또는 '정직한' honest(Aeschyl., Thu.; Did., 15, 1; Pol. 1. 1; Jos. Ant., 13, 191).
(c) '실제의, 실재하는' real(Jos. Bell., 1, 254), '실제로 있는 것'을 나타낸다.
(d) '참된', true(Jos. Ant., 4, 219; Herm. m; papyrus; 단 10:1). '참된 교리'(알레데스 도그마)에 대해 사용되었다(Leg. All. 3, 229).
(e) '진짜의' genuine 또는 '진정한' proper, 신의 실체에 대하여 사용되었다(Thu; Philo Leg 등).
2. 신약성경.
형용사 알레데스는 신약성경에서 2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벧전 5:12에서 알레데스는 '정당한, 타당한, 효과적인'을 의미한다: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b) 빌 4:8에서 알레데스는 '올바른' upright을 의미한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c) 롬 3:4에서 알레데스는 '신뢰할 수 있는, 믿을 수 있는'이란 의미를 지닌다: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기록된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d) 알레데스는 '성실한, 정직한'을 의미한다.
① 막 12:14,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병행구, 마 22:16). 여기서 알레데스는 '거짓말, 은폐, 속임수'와 반대되는 '정직, 성실'을 나타낸다. 그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한 질문의 요점은 예수님이 그 말을 함으로써 얻어질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진리를 감추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그는 자기 견해를 피력하는데 정직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② 요 3:33,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③ 고후 6:8,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e) 알레데스는 '실제의, 실재하는, 진짜의'를 의미한다.
① 행 12:9,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 쌔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② 요 10:41,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③ 요 4:18,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④ 요 19:35,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니라".
⑤ 요일 2: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⑥ 요일 2: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f) 알레데스는 '참된'을 의미한다.
① 요 5:31,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② 딛 1:13,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③ 벧후 2:22,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참 속담은 경험에 비추어 본 바대로 진리를 의미한다.
(g) 알레데스는 '진짜의, 진정한'을 의미한다.
① 요 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② 요 3:33,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여기서 알레데스는 보다 분명한 의미로 나타나는데, 즉 믿는 자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음을 확인함으로 하나님이 계시를 주신다는 것을 확증한다.
③ 요 7: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이 구절에서 요점은 단순히 성실하신 분으로서만이 아니라 그 분은 실재하시며, 그 분 자신이 진짜이시고, 알레데이아에 의해 결정되고, 그러므로 그 분은 계시자이시다는 것이다.
④ 요 8:26,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R. Bultmann; A. C. Thisel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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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lhqinov"(228, 알레디노스) 진짜의, 실제의, 정당한, 신뢰할 수 있는.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알레디노스(Heraclitus, X., Pla. 등)는 알레데스(ajlhqhv", 227)에서 유래했으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알레디노스는 '성실한, 진실한, 참된',
(b) '올바른, 의로운, 정직한',
(c) '신뢰할 수 있는, 믿을 수 있는'을 의미한다.
(d) 알레디노스는 그 독특한 의미로, '실제의' real, '진짜의' genuine란 의미를 지닌다. 크세노폰(Xenophon)은 이름을 붙일만한 군대라는 의미의 실제 군대(스트라튜마티 일레디노이[strateutnati aleithnoi])를 거느리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Anabasis 1, 9, 17). 플라톤은 진정한 철학에 대한 참된 열정(알레디네스 휠로소휘아스 알레디노스 에로스)을 갖는 것에 대해 말한다(Republic 499c). 필로가 하나님을 가짜가 아닌 진짜 화폐나, 단순 부품이 아닌 어떤 품목과 같이 "실제적인 분"으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볼 때 그 의미는 신학적으로 흥미있는 것이다(Congr. 159).
2. 70인역본의 용법.
형용사 알레디노스는 70인역본에서 약 50회 나오며, 아멘(진실로), 에메트(진실함, 신실함), 야사르(올바름, 정직한), 요셰르(올바름, 정직함) 등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알레디노스는 말이나 말씀이 '참되거나 진실한 것'(삼하 7:28; 왕상 10:6; 단 10:1), 하나님의 '진실'(출 34:6), '진짜의, 실제의, 진실한' 하나님(대하 15:3; 사 65:16; 마카베오삼서 6:18)을 나타낸다.
3.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알레디노스는 신약성경에서 27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알레디노스는 공관복음에서 눅 16:11에만 한번 사용되었다.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여기에서 이 말의 의미는 분명히 "진짜의" genuine. 혹은 "실제의" real이다.
(b) 알레디노스는 바울 서신에서 살전 1:9에만 한번 나온다: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여기에서 알레디노스는 그 독특한 의미로 '실재하는, 실제의, 진실의'를 의미하며, 우상의 허황함과 대조되는 참 하나님을 나타낸다.
(c) 알레디노스는 히브리서에서 3회 나온다.
① 실체를 모형과 대조시키는데 사용되었다.
·히 8:2에서 하늘에 있는 장막을 세상의 것과 대조되는 "참 장막"이라고 한다: "성소와 참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히 9:24에서 "참 것"(참 장막)은 참 것의 그림자인 성소와 대조시킨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② 알레디노스는 히 10:22에서 '성실한, 진실한'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참 마음"은 정직하고 거짓됨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신자는 악한 양심을 떨쳐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신앙의 완전한 보증을 받아, 분열된 자아의 부담이나 속임수 없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간다.
(d) 요한복음에서 알레디노스는
① 그 독특한 의미인 '진짜의, 실제의'를 의미한다. 요 4:23(호이 알레디노이 프로스퀴네타이)에서 '진짜의' genuine라는 의미로 본다면 그것은 그러한 참된 예배자는 계시에 의해 결정되는 사실에 관하여 있다.
그러므로 이 참된 예배자는 열망에 근거하여 예배하거나 성실과 내적인 것으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에 근거하여, 즉 계시를 근거로하여 이해하는 실재에 근거하여 예배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참된 빛"(요 1:9)과 "참 포도나무"(요 15:1)로 묘사한 표현에서 알레디노스는 첫째로 '참된'(true) 또는 '진짜의'(genuine)이라는 의미를 지니지만 여기에서 '진짜의'(genuine)가 의미하는 바는 인간과 이 세상의 실체와 대조되는 '신의, 신성의'(divine)를 의미하며, 또한 이것은 알레데이아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계시를 시행하는'을 의미한다.
요 1:9; 요일 2:8의 "참 빛"은 요 8:12의 "생명의 빛"과 같으며, "참 포도나무"는 실질적으로 요 6:35; 요 6:48의 "생명의 떡"과 같은데, 우리는 이 구절을 요 6:32과 비교해 보아야 한다: "하늘에서 내린 참 떡". 만일 요 7:28; 요 17:3에서 일반적인 의미에 더하여 하나님이 알레디노스로 불리운다면 이 단어는 그가 계시를 이루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내포한다.
② 그리고 예수님의 크리시스(판단)가 알레디네("참되니", 요 8:16)로 불리울 때, 이 단어는 단지 '참된' true 또는 '믿을 수 있는' trustworthy을 뜻할 뿐 아니라 '타당한' proper과 '명확한' definitive을 의미한다. 그것은 계시가 그 속에서 성취되는 계시의 결과에 대한 판단이다.
③ 요 4:37에서 알레디노스는 '참된' true, '옳은, 정확한' correct을 의미한다: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요 19:35에서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줄 알고 너희로믿게 하려함이니라". 이것은 요 8:16에서 이 단어를 해석하는 방법이다: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나와 함께 계심이라". "판단이 참되니".
(e) 요한계시록에서 알레디노스는
① 계 21:5에서 계시의 로고스(말씀)가 '피스토이카이 알레디노이'로 불리울 때, 중어법(hendiadys)이 사용되었다: '믿을 수 있고 확실하다'(개역: "신실하고 참되다").
계 22:6에서 마찬가지다: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② 계 19:9,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다." 여기서도 아마 위에서와 같은 방법으로 해석 할 수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실제적인 말씀이다'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③ 하나님의 오도이(그의 규칙)와 크리세이스(심판)가 알레디나이("참되고")와 디카이아이("의로우시다")로 불리워지며, 이런 구절에서 알레디노스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정당한 요구나 정의, 의(righteousness)라는 의미의 에메트에 의해 통제된다.
·계 15: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계 16:7,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
·계 19:2,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참조: 시 19:9; 토빗 3:2, 5; 단 3:27에서 알레디노스는 크리세이스 또는 크리마타의 특성으로 나타난다.
④ 하나님은 "거룩하고 진실한 분"(계 3:7),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다.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R. Bultmann; A. C. Thisel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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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ivnw(5316, 파이노) 빛나다, 비치다, 나타나다, 명백하게 하다, 보이(게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
동사 파이노의 수동태와 능동태는 호머(Homer)에서부터 발견된다. 파이노는 자동사로 '비치다, 빛나다'를(예를 들면, 해, 달, 등불이 비치는 것이다), 타동사로는 '나타나다, 비추다, 보이게 하다'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파이노는 70인역본에서 약68회 나오며, 오르(히필형:보이게 하다), 라아(니팔형:보이게 되다, 나타나다) 등, 13개의 히브리어형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a) 파이노는 신약성경에서 9회 나오는데 그중 7회가 요한의 기록에서 나타난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천체(빌 2:15), 해(계 1:16; 계 21:23; 참조: 계 8:12), 달(계 21:23)과 같은 자연 발광체의 빛이나 등불의 빚이 비취는 것을 의미한다(요 5:35; 벧후 1:19; 계 18:23). 그러나 이 모든 구절들에서 언급된 빛은 빛의 좀 더 강력한 근원과 대조된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영광이 거룩한 예루살렘을 비출 때(계 21:23), 해와 달은 그 빛을 잃을 것이다. 파이노는 오로지 두 곳에서만 '참' 빛, 즉 그리스도를 가리켜 말한다(요 1:5; 요일 2:8).
(b) 파이노마이는 신약성경에서 22회 나오는데, 그 중 17회는 공관복음서에 나타난다. 이 단어는 별의 출현(마 2:7), 밀 가운데 가라지가 나타나는 것(마 13:26), 천사들이 꿈에 나타났다는 탄생설화(마 1:20; 마 21:3; 마 21:19), 그리고 엘리야가 출현했다는 소문(눅 9:8)이나 부활한 그리스도의 출현(막 116:9)에 관한 언급에 사용되었다.
유사하게 어떤 특별한 현상의 출현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수반될 것이다(마 24:27; 마 24:30). 이러한 '보인다'라는 것에 관한 사상은,
마 9:33에서 그리스도의 행위와 관련하여 나타난다: "귀신이 쫓겨나고 벙어리가 말하거늘 무리가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때가 없다 하되".
약 4:14에서 인간의 짧은 생애를 비유한 안개와 관련하여 나타난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벧전 4:18에서 마지막 심판 그때에 경건치 못한 자들에 대하여 나타난다: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마 6:5; 마 6:16; 마 6:18; 마 23:27 이하는 사람들이 은밀히 행할 것과 이것에 대조하여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외모로 행하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자신의 최우선적인 관심사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훌륭함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선행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고후 13:7). 막 14:64과 눅 24:11은 어떤 일을 어떤 사람에게 '나타내는' 방법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롬 7:13에서도 이와 유사하다 - 죄의 참 본질은 계명을 통해서 인간에게 계시된다.
히 11:3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여기서, '보이는 것'의 근본 원인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창조적인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엑스 니힐로(ex nihilo) , 즉 창조의 교리는 유물론의 오류에 대항하여 안전하게 보존된다. 유물주의는 '영원함'(aeons)이 '나타나는 것들'(화이노메나)로부터 자연스럽게 진화되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믿음은 지식의 수단이라는 인식론적 원칙이 여기에 시사되어 있다. 많은 우리의 지식이 개인 현존이나 입증으로 말미암는다기보다는 어떤 믿을 만한 사람이나 보고의 자료 속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어진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를 확신하지만 보지는 못하였다. 우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 창조의 행위에 있어서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왔다'(NEB)고 서술된 형이상학적 사실은 믿음에 대한 저자의 변호에 한층 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실재(reality)에 대한 가장 궁극적 의미로 실재하는 세계는 현상적 질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질서이다. 우리의 물리적 감각에 대하여 실재인 듯한 것은 사실상 우리의 감각에 비실재적인 듯한 것으로부터 나온 결과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믿음은 세상을 믿게 하는 아름다운 공상이 아니라 엄격히 그 반대의 것이다. 즉 그것은 보이는 것 뒤에 있는 근본적이고도 영원한 실재를 잡으려고 보이는 표면의 세계로 스며 들어간다. 믿음은 그러므로 신앙의 유치원 정도의 수준에 대한 양여(讓輿)가 아니라 성숙한 신앙에 대한 전체이며 건전한 철학의 한 중심에 있다(R.S.Taylor)].(참조: R.Bultmann/D.Luhrmann; H.C.H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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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leiovw(5048, 텔레이오오) 완성하다, 수행하다, 이루다, 끝내다, 완전케 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텔레이오오(Hdt., Soph., 이래)는 텔레이오스(tevleio", 5046)에서 유래했으며, '텔레이오스하게 하다', 수동태로 '텔레이오스 되다'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동사는 '완수하다, 완성하다', 연속에 있어서 '시작하다, 전진하다, 마치다, 최고 단계에 이르다, 성취하다, 성숙하다, 익다' 등을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텔레이오오는 70인역본에서 25회 나오며, 주로 말레(가득하다, 완성하다, 성취하다)와 타맘(완성하다, 끝내다, 완전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단어는 스스로를 완전하게 즉 흠없이 나타내다(삼하 22:26; 집회서 31:10), 아름다움을 온전케 하다(겔 27:11)를 의미한다. 이 동사는 모세오경에서 종교적 술어로 9회 사용되는데(레 4:5는 별도) 즉 '제의를 위해 봉헌하다'를 나타낸다(예: 출 29:9, 29). 그러나 이 동사는 또한 '결말에 이르게 하다'를 의미하기도 한다(대하 8:16; 느 6:16).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텔레이오오는 신약성경에서 23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누가의 기록.
① 눅 2:43에서 소년 예수님은 유월절 절기가 끝났을 때 예루살렘에 남으셨다: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② 눅 13:32에서 예수님께서는 헤롯에게 "내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고 말하라고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셨다. 헤롯 안티파스의 살인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오늘"과 "내일" 인간들의 구원을 위한 자신의 역사를 계속하시기를 결심하셨다. 제 삼일에 예수님의 온전하심이 의미하는 바가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지는 않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제 삼일에 예수님의 역사를 끝내신다는 뜻일까? 아니면 예수님께서 뜻하신 바는 어떠한 폭력으로 인간들이 나를 괴롭힐지라도 나는 계속 일을 할 것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삼일에 나는 온전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라는 것일까(참조: 눅 9:22; 눅 18:33; 눅 24:7, 46)?" 그의 사역의 완성을 암시한다.
③ 행 20:24에서 텔레이오오는 자기의 사명을 완수하는 것을 나타낸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b) 바울 서신(1회).
빌 3:12에서 텔레이오오는 '완성 단계나 최고의 단계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라는 바울의 진술은 그가 궁극적인 것,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위에서 부르시는 부름을 받는 승리자의 상에 아직 도달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c) 히브리서.
텔레이오오는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들에서 사용된 것과는 다르게, 여기에서 9회 나온다.
① 여기서 텔레이오오는 거의 항상 제의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텔레이오오는 '봉헌하다'는 의미로 '완전케 하다'라는 뜻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구약성경의 제사장들처럼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올 수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텔레이오오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완전해지셨고(히 2:10) 또한 영원히 완전하시며(히 7:28) 그렇게해서 자기 백성들을 위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실 수 있으셨던(히 5:9)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와, 연약함의 지배를 받고(히 7:28) 그들의 희생제사가 그들의 양심을 완전케할 수 없었던(히 9:9; 히 10:1) 옛 언약의 제사장들 사이의 차이점을 밝히는데 사용한다. 그리스도만이 홀로 한번의 제사로 자신의 백성을 온전케 하실 수 있다(히 10:14). 율법(히 7:19), 즉 레위 제사장 직분은 성화(히 7:11)를 이루는데 완전히 실패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땅의 성소와 비교하여 그리스도의 하늘의 성소를 "더 온전한" 것이라고 칭한다(참조: 히 9:11).
② 텔레이오오는 제의에 대한 언급없이 2회 사용된다. 히 11:40은 옛 언약 하에 있던 믿음의 증인들은(히 11:39) 온전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히 10:14). 그러나 이제는 그들도 온전함에 참여하게 되었다(히 12:23).
(d) 야고보서(1회).
약 2:22에서 텔레이오오는 '완전하게 되다, 완성하게 되다'를 의미한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믿음은 행함으로 완전에 이른다.
(e) 요한의 기록들.
텔레이오오는 요한복음에 5회, 요한일서에 4회 나타난다.
① 요 4:34; 요 5:36; 요 17:4에서 텔레이오오는 예수님께서 성취해야 하는 아버지의 일들에 관해 사용되었다.
요 17:23에서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기도로 자신이 온전하여져서 하나가 됨으로써 세상이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인식할 수 있기를 기도하신다(참조: 요 17:21).
요 19:28에서 텔레이오오는 성경이 성취되는 것에 대해 사용된다: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참조: 시 22:18).
② 요한일서에서 텔레이오오의 수동태가 사랑에 관해서 사용되었다.
요일 2:5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 안에 충만하게 된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요일 4:12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서로 사랑할 때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된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요일 4:17에서 이 사랑은 사람들이 심판날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때 그 목적을 달성한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참조: 요일 2:28).
두려움을 느끼는 자는 이 사랑에 의해 완전히 좌우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기 때문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라"(요일 4:18)(참조: J.H.Thayer; G.Delling; R.Schipp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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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vnw(3306, 메노) 머무르다 remain.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메노(Homer 이래에 이미 발견됨)는 다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a) 메노는 '떠나는 것'의 반대로 '어떤 장소에 머무르다, 체재하다, 살다, 존재하다, 남아있다', 비유적으로 '어떤 영역에 남아있거나 머무르다'를 의미한다.
(b) 메노는 '흔들리거나 달아나는'(도피)에 반대로, '반대에 맞서다, 굴하지 않다, 견디다, 굳게 서다, 굳게 지키다'를 의미한다. 법적 논쟁 또는 협정에 사용되었다.
(c) 메노는 '이동이나 변화되는 것'의 반대로, '변함없이나 여전히(…의 상태로) 있다, 그대로 지속하다, 계속 머무르다'를 의미한다. 고정된 별들, 영원한 하나님, 불변하는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사용되었다.
(d) 메노는 파멸, 파괴되거나 소멸되는 것의 반대로, '남아있다, 존속하다, 계속 살아가다', 특히 '법적으로 유효한 것으로 남아있다'를 의미한다. 법적 협정, 유언장에 대해 사용되었다. 종교적 언어에서 메노는 계속 존재하는 것, 곧 신들, 혹은 신들에 영감을 받는 것(예: 마음, 사상)에 관하여 사용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메노는 70인역본에서 약 90회 나오며, 16개의 히브리어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메노는 가장 많이 아마드(서다, 남아있다, 머무르다, 지속하다, 견디다, 살아남다)와 그 다음으로 쿰(일어서다, 일어나다), 야샵(앉아있다, 거하다, 남아있다), 하카(지연하다, 기디리다), 카와(기다리다) 등의 순으로 번역하고 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메노는 신약성경에서 118회 나오며, 고전 헬라어와 70인역본의 용법과 거의 같이 사용되었다.
(a) ① 메노는 문자적으로 '머무르다' 즉 한곳에(눅 19:5), 혹은 누구와 함께 머물다(눅 24:29; 마 26:38); 특정한 때를 위해 계속 존재하다(마 11:23); 살다(요 1:38)를 의미한다.
② 은유적으로 '꼭 붙잡다, 확고부동하게 머물다'를 의미한다. 예를 들면 교훈에(딤후 3:14; 요이 1:9), 친교에(요 14:10),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고전 7:40) 머무는 것에 사용되었다. '견고히 서다, 시험에 견디다(합격하다)'를 의미하며, 예를 들면 공력이 심판 받을 때(고전 3:14)에 대해 사용되었다.
(b) 메노는 행 20:5에서 '기다리다'를 의미한다: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c) 신약은 구약의 사상을 이어서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말하는 바 하나님은 자기의 말씀을 유지하시고(벧전 1:23; 참조: 단 6:26; 벧전 1:25; 사 40:8의 인용) 자기의 모사를 유지하신다. 그는 인간의 역사에서 그의 선택한 계획을 끝까지 계속하여 이행하신다(롬 9:11). 하나님의 불변성은 영속하시는 메시야 예수님을 보내심과 그의 생애에서 보게 되었다(히 7:24). 하나님의 영속하시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난 자들은(벧전 1:23) 성령으로부터 시시때때로 황홀한 체험 뿐만 아니라, 그들 속에 계속하여 거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받는다(요일 2:27).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니, 곧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그에게 결속되었다(요일 4:14이하). 그는 여기서 영속하는 도성을 찾지 못하나(히 13:14), 하늘에 영속하는 소유를 갖고 있다(히 10:34).
바울은 모세로 말미암아 드린 일시적인 예배와 대조하여, 성령과 의의 예배는 영구적이며(고후 3:7-고후 3:11), 또한 그것과 더불어 믿음, 소망과 사랑이(고전 13:13), 그 중에서도 그 자신이 통제를 받는 것으로 안(참조: 고후 5:14) 사랑이 영구적임을 지적하였다(참조: 고전 13:8).
(d) 메노는 요 14:10에서 성부와 성자의 밀접한 관계를 나타낸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그리스도는 선지자처럼 어떤 특정한 사명이나 어떤 제한된 기간을 위하여 부르심받지 않았으며, 그의 전 인격이 성부와, 영속적이고도 독특한 밀접성 하에 머무른다(요 1:32). 마치 아들이, 노예와는 달리, 언제까지나 아버지의 집에서 계속 거하는 것과 같다(요 8:35). '만약 그가 성령을 받은 자로서 성부와 하나되어 행동하지 않으셨다면 인간들과의 그의 친교는 무력하며 무가치하였을 것이다'(A.Schlatter; 요 1:32).
(e) 메노는 하나님 및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표현한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이 친교 안에 머무르도록 부르시며, 그도 그 안에 머무르실 것을 신자를 위하여 보장하신다(요 15:4이하). 여기서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있는 것(요 15:4이하)과 그의 사망과 부활 후에 그들 안에 있는 것(요 15:4이하)이 구별된다. 신자 안의 예수님의 이 거하심이, 성령께서 그들 안에 거하시리라는 약속에서 선포되었다(요 14:17; 요일 2:27).
그리스도가 신자 안에 거하신다는 진술은 의심할 여지 없이 신비적 요소가 있다. 그것이 내적 단일성, 즉 신비적 단일성을 조성한다. 이것은 신자 안에 그리스도가 거하심은 그들 안에 그의 말씀이 거하심과 불가분리의 관계이며(요 15:7; 요일 2:24; 요 8:31 참조). 예수님의 죽으심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화해의 권능을 계속적으로 받아들임과 불가분리의 관계이다. 이것이 요한복음에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56)라고 표현되었다.
이 개념이 요한에게 있어서의 주의 만찬의 참 의미를 표현한다.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이 내적 친교에서 "요구되는 충성은 일차적으로, '위한'(for) 계속적인 존재가 아니라, '~으로부터 온'(from) 존재이며, 그것은 어떤 지위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소유되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 관계는 상호적인 것이 될 수 있고, 실로 '되어야만 한다'(must)"(요 15:4에 대한 R.Bultmann의 해석).
(f)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깊은 곳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소유물로 만든다. 그것은 영적 관계 혹은 영적 일치에 제한되지 않고, 구원의 체험의 현존을 의미한다. 그런 까닭에, 그것은 생명(요 6:57)이다. 그러므로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는, 혹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생명은, 그의 영과 본성에 순응하는 생명을 요구하시고 형성하시며, 성화를 원하시고 또 성취하신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열매를 맺는 것과 동일하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만일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이미 친교가 방해받고 있다는 징조이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 15:6; 요일 3:6). 이러한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의 진노가 신자에게 임한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관계는 결국, 그가 예수님의 말씀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A.Schlatter).
요 15:1-요 15:8과 병행하는 요 15:9-요 15:17에서 이것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한다. "제자에게 요구되는 바인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가 받은 사랑 안에서 즉, 사랑을 받는 상태에서 머무름을 뜻하며, 요 15:4에 이미 진술되어 있는 바와 같이, 그것은 계시자(Revealer)의 섬김 즉, 세족(洗足) 행위에서 상징적으로 이미 명백하게 보여 주신, 바로 그와 같은 섬김에, 그의 존재가 전적으로 의존해야 함을 의미한다."(R. Bultmann, 요 15:9; 요 13:1-요 13:20참조). 사랑 안에 거함은 행위를 통하여(요 15:10), 즉 계속적으로 과실을 맺음으로써 사실이 되며(요 15:16), 이러한 행위는 예컨대 형제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에서 가시적이 된다(요일 2:10; 요일 3:14이하).(참조: F.Hauck; K.Munz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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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그리스도<안티크리스트>_기름부음<크리스마>(요일2:18-29)]]
1.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단어는 ‘적그리스도(안티크리스토스/안티크리스트)’이다. ‘
적그리스도’라는 말은 지난 2천 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말이었다. 지금도 일부 개신교인들은 가톨릭을 ‘적그리스도’라 칭하고 있고, 한 때는 가톨릭, 특별히 교황이 적그리스도라는 말이 난무한 때도 있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당시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칭하며 공격하고 비판했던 것의 영향이 크다.)
2. 또한 모든 서구적 가치의 전복을 꿈꿨던 프리드리히 니체는 <안티크리스트/적그리스도>라는 책을 써서 서구 사회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기독교적 요소를 적나라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을 통해서 서구 사회의 기독교적 요소를 비판했기에 기독교인으로부터 ‘악마’라는 비난을 들었고, 지금도 사람들은 니체를 일컬어 ‘적그리스도’라고 부른다. 그는 기독교를 대적하는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3. 적그리스도라는 말이 기독교 역사에서 하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지만,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는 요한1서에만 나오는 용어이다.
이 용어가 나올 법한 곳, 요한계시록에도 적그리스도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서로 사랑하라’를 그토록 강조하는 요한1서에만 이 용어가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꽤 충격적이다.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4. 요한일서의 화자, 요한 사도는 왜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누구에게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을까?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는 요한일서에서만 등장하지만 그와 비슷한 의미를 가진 용어들은 성경 곳곳에 발견된다.
대표적으로 데살로니가 후서의 ‘불법의 사람’ 또는 ‘멸망의 아들’(살후 2:3-9)이 있고,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포학하여 가증한 것’(단 9:27)이 있고, 마가복음에 나오는 ‘멸망의 가증한 것’(막 13:14) 등이 있다. 적그리스도는 표면적으로 그리스도를 대신하려는 사람 또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5. 요한일서에서 ‘적그리스도’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데에는 특별한 정황이 있다.
요한 공동체는 매우 초기의 기독교 공동체이므로, 아직 분열이 없었고, 자기 스스로 ‘그 교회(the church)’라 생각할 만큼, ‘예수가 그리스도다’라는 신앙 위에서 진리 그 자체를 품고 있는 공동체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공동체에 시련이 닥친다. 함께 세례도 받고,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던 사람들 중에 스스로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한 마디로, 분열(schism)이 요한 공동체를 강타했다. 그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거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19절).
6.요한 공동체를 떠난 이들을 일컬어서 ‘적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다.
공동체를 떠난 이들에게 ‘적그리스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초대교회의 특권처럼 느껴진다
7.이런 아픈 역사성을 가진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는 요한 공동체의 특별한 정황 속에서 살펴봐야 정확하게 사용할 수 있다.
요한 공동체의 맥락 안에서 ‘적그리스도’는 ‘요한 공동체를 박차고 나간 이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요한이 그들을 적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진리에서 떠나 거짓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한이 말하는 진리는 무엇이고, 적그리스도가 말하는 거짓이란 무엇인가? 진리를 알면 거짓이 무엇인지 드러나는 법이다.
8. 요한이 말하는 진리는 그가 만들어낸 진리가 아니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다.
그것을 사도적 전승(사도로부터 전해진 복음/그래서 교회는 사도적 교회라 불린다)이라고 하는데,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경험한 사도들은 다음과 같은 진리를 전해준다. “예수는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이고, 진리의 표현이다.
요한 공동체를 비롯한 기독교 공동체는 모두 이 진리 위에 서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했고, 주님은 베드로의 이러한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마 16:15-18).
9. “예수는 그리스도다!” 이것은 진리이다. 거짓은 무엇인가? 이 진리를 부인하는 자다.
즉,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이다. 이것은 더 나아가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이다. ‘적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자들은 요한 공동체를 떠나갔다.
그들이 요한 공동체를 떠나간 이유는 그들이 더 이상 “예수는 그리스도다!”라고 하는 진리를 고백하지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들은 것에’ 더 이상 거하지 않았고, 그들이 요한 공동체를 떠났다는 뜻은 그들이 더 이상 진리 안에 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래서 그들은 거짓을 말하는 자들일 뿐이다.
10. [기름부음, 기름바름]....구약의 기록을 보면, 이 때 사용되는 기름은 특별히 "관유"라 하며 감람유(신성) + 몰약(완전한 죽음의 향기)-육계(죽음의 멸절 효능)-창포(완전한 부활의 향기)-계피(부활의 생명충만 효능)으로 구성됨...관유(성유)는 하나님께서 제사장-선지자-왕을 세워 위임할 때나 성소의 성물들을 성별할 때 뿌리거나 발랐다. 이와 같이, 관유(灌油)는 성막과 그 모든 기구, 제단, 물두멍과 그 받침, 제사장들에게 바르는 데 사용되었다...출30:23-29, 민4:16
본문에는 ‘적그리스도’처럼 문제적 용어는 아니지만, 그것과 매우 대조되는 신비한 용어가 하나 등장한다. 그것은 ‘기름부음(크리스마/anointing)’이라는 용어이다.
이 편지는 요한 공동체를 떠난 적그리스도에게 쓰는 편지가 아니라, 공동체에 여전히 ‘거하고 있는’ 지체들에게 쓴 편지이다.
공동체를 떠난 적그리스도와는 달리 그들이 공동체에 여전히 거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처음부터 들은 것’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 안에는 ‘기름부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한 사도가 말하고 있는 ‘기름부음’은 무엇인가?
11. 구약성경을 보거나 기독교의 다른 전통을 보면 기름을 바르는 전통들이 있다.
구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 ‘기름부음’의 전통은 선지자나 제사장 또는 왕을 세울 때 나타난다.
그들에게 기름(올리브 오일)을 붓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특별히 구별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메시아라는 말 자체가 ‘기름부음 받은 자(the anointed one)’라는 뜻이다.
12. 그러나,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기름부음’은 이러한 것과는 다른 맥락으로 쓰이고 있다.
이것은 물리적 기름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가리키는 뜻으로 쓰인다.
이러한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요한복음 16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요한복음 16장 배경에는 엄청난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요한 공동체가 기존의 율법 준수에 바탕한 유대교 회당 공동체로부터의 공공연한 출교 및 에비온-세린티안-도세티즘 등 영지주의 이단 사상 발호로 인한 상대적 손상 위기 가운데 처해 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출교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법 바깥으로 쫓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출교 당한 이들을 누군가 죽여도 살인자는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런데, 요한 공동체는 그러한 박해와 압박 위기에 놓여 있으며, 유대인들이 출교 당한 요한 공동체를 죽이더라도 그들은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며 요한 공동체를 죽이는 일에 더 열심을 낼 것이었다.
13. 이러한 무시무시한 일을 앞에 놓아두고 떨고 있는 제자들(요한 공동체)에게 위로의 말씀을 건네시면서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한다.
요한복음 16장에서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고 불린다.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 부르고, 그 진리의 영이 요한 공동체에 임할 것이라는 말씀은 굉장히 중요하다.
예수의 제자들(요한 공동체)이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는 그리스도다!”라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고백 때문에 죽을 위기에 처한 제자들에게 그들의 고백이 헛된 것이 아니며 진리를 행하는 것이고, 오히려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이 거짓를 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이는, 믿는이의 영마다 그 안에 내주시며 살아계시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다.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옳다!’고 하나님이 판결을 내려주시는 것과 같다.
무슨 일이든지, 그것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일이라면 박해를 받더라도, 설사 죽임을 당하더라도 가치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하여 언제나 ‘진리’를 구하는 법이다.
14. 요한복음 16장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상황이 지금 요한일서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하고 있다.
요한일서에서 공동체의 지체들에게 “너희는 주께 받은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한다”라고 말할 때의 ‘기름부음’은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도는 기름부음, 즉 성령을 받은 요한 공동체의 지체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27절).
15.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왜 적그리스도는 요한 공동체에 머물지 못하고 떠났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적그리스도’, 그리고 ‘기름 부음’과 함께 본문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용어 ‘거함(abide/메노)’이라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또한, "메노라"란 단어는 감람유<..순결한 신성 의미>를 태워서 성소 안을 밝혀 주는, 가지 일곱을 가진 등대를 지칭한다....거함은 곧 내주하시는<거함 = 메노> 기름부음<크리스마...복합적 관유로서 TUQ의 최종완성이신 그 영, 주 영, 그리스도의 영>의 충만, 그 분의 움직이심따라 비췸 받고 인도함 받아 동행함인 것이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라는 말씀을 하셨듯이, 요한일서에서도 ‘거함’이 강조되고 있다. 요한 공동체는 ‘거함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거함’에 대하여 강조한다.
16. ‘거한다는 것’은 머물고 집중하고 헌신한다는 뜻이다.
영어 단어 중에 ‘mindfulness’가 있다. ‘mindfulness’란 정신이 빈 데 없이 꽉 찰 정도로 딴 생각하지 않고 그 마음이 한 곳에 집중해 있다는 뜻이다.
마음이 지금 바로 여기에 100% 머물러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거한다’라는 뜻은 이것보다 더 강력한 뜻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함(abide/메노)’은 몸과 마음과 영혼이, 즉 한 인간이 전인적으로, 온 인격체가 머물고 집중하고 헌신한다는 뜻이다.
17. 본문을 보면, 우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
그것을 요한일서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한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정말 감사할 일이고 은혜이다.
한 번 상상해 보라.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선포를! 부흥회 용어, 또는 범퍼 스티커 같은 용어로 이것을 ‘성령충만’이라고 부른다.
성령충만이라는 말은 사실 굉장한 말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고 우리에게 집중하시고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고 영원히!!>우리에게 헌신하신다.
이것을 좀 더 말랑말랑한 용어로 바꾸면, 성령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사랑이란 머물러 있고 집중하고 헌신하는 것 아닌가.
18. 사도는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처음부터 들은 것’에 거하는 것, ‘성령이 우리를 가르친 그대로 주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한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궁극적인 이유는 우리가 ‘우리가 처음부터 들은 것’ 즉 복음, 다시 말해,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진리 안에 거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는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진리 안에 머물러 집중하고 헌신하고 있는가.
나의 육체가, 나의 마음이, 나의 영혼이, ‘예수는 그리스도다!’에 ‘충만히/fully’ 머무르고 집중하고 헌신하고 있는가.
19. ‘기름부음’은 정말 중요하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셔야 우리의 육체와 마음과 영혼(우리의 전인격/인간성)을 엉뚱한 것에 빼앗기지 않고,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이 세상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만이 진리이고,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 즉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진리 안에 있는 자, 거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진리를 떠난 ‘적그리스도’가 아닌, 진리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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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
인류의 교사요, 성자인 어거스틴(Augustine)은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여정”으로 세계적 불후의 고전인 고백론(Confession)을 썼다.
그 고백론 10.30.41절에 신약 성경 요한일서 2장 16절인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대한 고백이 나온다.
그는 이 3가지가 영혼을 병들게 되는 원인이라고 했다. 영혼의 병 요인 3가지에 대한 그의 견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육신의 정욕[식성수]
육신을 입고 사는 인간이 육신의 감관(感官)의 욕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색성향미촉)의, 이목구비와 피부> 5대 감관이 있기에 삶이 가능하듯이 육신의 감관적 욕구는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욕구이다.
더욱이 그중에서도 <미각의>식욕(食慾), <시청후촉각의>성욕(性慾)은 모든 생물의 자기 보존과 종족 보존을 위한 자연발생적 욕구이다.
그러나 이것이 [미혹과 오도됨 인해] 기본적 욕구의 정도와 한계를 벗어나서, 상상적 왜곡 또는 도착적 오용, 과도한 탐닉, 곧 쾌락에 몰두함에서 벗어나지 못할 그 때는 성경에서 말하는 정욕(libido)이 되어 버리는 바, 죄 범함과 [약물 남용 및 오락] 중독 상태에 빠지게 되고, 이는 삶의 참된 의미를 상실한, 허무/허망-황폐/무가치감 가운데 인생을 허비하는, 우울-공황-마비-정신병에 자신을 방치함 뿐 아니라 타인을 색욕거리로 삼아 생명 경시-Q경외함 상실한, 영멸과 단절의 자기 파괴 상태를 유발하게 된다.
어거스틴은 정욕 중 가장 절제하기 힘든 것이 성욕으로 본다. 깨어있을 때 어느 정도 절제가 가능한 성욕이 꿈속에서는 절제하기 힘든 힘을 가지고 있다고 밝힌다.
그는 성욕은 몽중에서도 자신이 육신을 충동시키고 동물적 행태를 보인다고 했다(고백론 10.30.42).
“몽중에는...내 마음과 육체에 끼치는 영향이 너무나 커서 내가 깨어 있을 때에는 실제의 인물을 보고도 하지 못할 짓을 몽중에 있는 나를 설득하여 하도록 한다 ”(고백론10.30.41).
>>안목의 정욕[물]
눈을 통해 들어오는 사물에 대한 욕망으로 본다.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호기심 통해 탐구하는 욕구는 자연적이고 자연스럽다.
그러나 아름다움과 친밀감, 소유욕이 [미혹과 오도됨 인해, 도덕적 절제, 사회적 규약 한도를 벗어나서] 목적 아닌 <자기 만족의> 수단으로 삼아 오용과 남용, 도착적 쾌락 탐닉 즐김의 목적으로 변하고 영혼을 사로잡아 좌지우지 하게 되고 호기심이 정욕적 탐심과 추구로 변질될 때 죄악이 된다고 본다.
“ 쾌락은 보기 좋고, 듣기 좋고, 냄새 좋고, 맛좋고, 부드러워 만지기 좋은 것을 추구하지만, 호기심은 더 나아가 새로운 경험을 얻으려는 것이 목적이어서 때로는 전자와 정반대 방향으로 가기도 한다. 물론 그것은 불쾌한 것을 체험하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찾고 발견하고자 하는 욕구 때문이다. ” (고백론 10.35.55).
어거스틴은 이런 안목의 정욕이 가득찬 자신의 심령을 두고 이렇게 기도한다.
“ [의식과 무의식 전반에 걸쳐서]나의 삶은 이런 것들로 가득차 있으니, 나의 유일한 희망은 주님의 자비뿐입니다. ”(고백론 10.35.37).
>>이생의 자랑[명]
“ 사람들이 자신을 두려워하고 사랑해 주기를 좋아하는 ” 욕구라고 했다.
이것은 칭찬-인정-존중 받고자 하는 기본 욕구인데, 사회와 공동체 유지에 필요한 욕구라 할 수 있고, [이것이 오도되고 미혹됨 거쳐] 변질되게 되면 섬김 아닌 군림의 폭력적 지배-자랑/개인적 영달 추구의 허영적 욕망으로 변하는 바, 더 나아가 타자 조종-지배 + 자기를 드러내고 높이 세우고자 하는 교만으로 변하게 됨이다.
어거스틴은 남의 칭찬받기를 좋아하는 것보다 진리를 더 좋아하는 자신이 되도록 기도한다.
“ 칭찬을 좋아하는 자는 자기 개인의 영광을 내 세기 위해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거지가 동냥을 구하듯이,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구걸하고 수집합니다. 칭찬받기를 좋아하는 허영의 시험은 내가 속으로 그것을 꾸짖을 때도 나를 시험합니다. 아니, 내가 그것을 꾸짖고 경계한다는 그 자세 자체 속에도 남에게서 칭찬을 받고자 하는 허영의 유혹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의 허영을 꾸짖는 일, 그 자체에서 자기를 헛되어 자랑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백론 10.38.63).
어거스틴은 이처럼 자신의 내면에 잔재하고 꿈틀거리고 있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의 욕망과 욕구, 이것의 왜곡인 죄성이 바로 병이며(고백론 10.41.66)이며. 자신은 이 병에 걸린 환자이며(고백론 10.28.39), 하나님은 이 병을 고치는 의사(고백론 10.28.39)라고 고백했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영혼의 병에 걸린 자신을 고쳐달라고 영혼의 의사에게 간구한다.
“ 내 마음이 떨고 있는 것을 주님은 보고 계십니다. 내가 이런 것으로 어려움을 당하지 않은 것보다 오히려 주님의 은혜로 제가 고침을 받기를 원합니다. ” (고백론 10.39.64).
어거스틴은 의사되신 주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의사가 되고 자신의 병을 고쳐주신다고 간구했다.
“ 내 병은 많고도 중합니다. 정말 내 병은 많고도 중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약은 내 병보다 더 강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주님의 말씀이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고 절망했을 것입니다. ” (고백론 10.43.69).
여기서 어거스틴의 은총론을 정리할 수 있다. 영혼의 질병인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병들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인생, 그러나 진리이신 하나님의 은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치유 받고 구원받는 은혜와 은총을 갈구하고 있다. 다음과 같이 기도를 드린다.
오, 나의 영혼의 진단하시는 주님, 내 영혼 깊숙이 박힌 침이 있나이다.
아담의 후예인 저와 저의 후손들까지 깊숙, 깊숙이, 박혀 있는 독침입니다.
뽑아도 뽑히지 않는 흉측한 악독의 침입니다.
독침에 맞는 내 영혼, 죄악과 사탄, 양심의 조소와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이독으로, 육신의 정욕은 흘러내고, 안목의 정욕은 쏟아지고, 이생의 자랑은 솟구칩니다.
독을 내뿜는 죄악의 바이러스가 나의 전 인격, 나의 삶, 나의 인생을 파괴하고 병들게 했나이다.
길르앗의 유향 되신 주님이시여, 영혼의 진정한 의사 되신 주님이시여,
주께서 흘리신 보혈만이 온전한 해독제이기에 영혼을 말살한 독을 풀어주시고,
제 인격에 박힌 독침과 제거하여 주옵소서
병약한 영혼에 성령의 빛, 생명의 빛을 내리소서,
성령의 좇아 진리의 검으로 승리하며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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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장이>적그리스도들의 원칙들 =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을 <어느 정도>부인함 + 그리스도를 대적함 + 그리스도를 다른 것으로 대치하는 어떤 것을 갖는 것임 --- 많은 적그리스도들이 나타났음(요일2:18) *1>예수께서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의 체현]이심을 시인하지 않는 자들(2:22, 4:3) *2>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들(2:22) *3>세상에 나온 미혹하는 자들(요이:7절)
....세린터스의 이단론 :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부인, 동시에 그로 인해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한 것임>땅에 계신 예수와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를 분리시켰음(예수를 요셉과 마리아의 육적 아들이라 했음) + 예수께서 침례받은 후 그리스도가 비둘기처럼 그분 위에 내려왔지만 그분의 사역이 끝날 때 예수를 떠났으며 그 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셨으며, 한편 그리스도는 영적 존재로 분리되어 남아있다 함.
....현대주의자들 : 그리스도가 <모든 인류의 죄를 구속하는> 구속자이심을 절대로 믿지 않고 부인함.....그들이 주장하는 바는, 다만 그리스도는 자기가 믿는 바 그 가르침 때문에 핍박 받았고 십자가에서 순교했다고 주장...[그리스도를 순교자로 대치함]
....그리스도는 만유를 포함하시며 그분이 하나님이시며 아들이심과 동시에 아버지이시며 그 영이심, 이에 대한 성경의 증언들 :::
*1> [주는 그 영이심] 고후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17 Now the Lord is the Spirit, and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liberty [emancipation from bondage, true freedom].)
*2>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15:45하..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45 So it is written [in Scripture], “The first man, Adam, became a living soul (an individual);” the last Adam (Christ) became a life-giving spirit [restoring the dead to life].)
*3> [예수는 아버지이심]..
사9:6..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For to us a Child shall be born, to us a Son shall be given; And the government shall be upon His shoulder, And His name sha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 Mighty God, Everlasting Father, Prince of Peace)
*4>[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이심]..
골1:15..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15 He is the exact living image [the essential manifestation] of the unseen God [the visible representation of the invisible], the firstborn [the preeminent one, the sovereign, and the originator] of all creation.)
*5>[그리스도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이심...부활 안에서 친히 만물의 으뜸, 피조물 중에서 으뜸이심]..
골1:18..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18 He is also the head [the life-source and leader] of the body, the [e]church; and He is the beginning, [f]the firstborn from the dead, so that He Himself will occupy the first place [He will stand supreme and be preeminent] in everything.)
*6>[그리스도께서 혈과 육에 참여하셨음 = 곧 그분의 인성에 관한 한 피조물이심]..
히2:14...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14 Therefore, since [these His] children share in flesh and blood [the physical nature of mankind], He Himself in a similar manner also shared in the same [physical nature, but without sin], so that through [experiencing] death He might make powerless (ineffective, impotent) him who had the power of death—that is, the devi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