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12.06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시136.택정예비인도돌봄가르침공급돌봄언약통행.특별한소유됨감사.헤세드=아가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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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시136....겸손히주를섬길때212  


https://m.blog.daum.net/my-jc   Loving Jesus Column ΙΧΘΥΣ -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나의 구주


1.  여호와께 감사하라(야다) 그는 선하시며(토브) 그 인자하심이(헤세드) 영원함이로다(올람)

2.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엘로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3.  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아돈)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4.  홀로(바드) 큰(가돌) 기이한(팔라) 일들을 행하시는(아사)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5.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라카)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6.  땅을 물 위에 펴신(아사)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7.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8.  해로 낮을 주관하게(멤샬라)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9.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0.  애굽의 장자를 치신(나카)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1.  이스라엘을 그들 중에서 인도하여(야차)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2.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  홍해를 가르신(가자르)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4.  이스라엘을 그 가운데로 통과하게(아바르)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5.  바로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나카)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6.  그의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게(아바르)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7.  큰 왕들을 치신(나카)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8.  유명한 왕들을 죽이신(하라크)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9.  아모리인의 왕 시혼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0.  바산 왕 옥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1.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나할라)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2.  곧 그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3.  우리를 비천한(셰펠) 가운데에서도 기억해(자카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4.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차르) 건지신(파라크)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5.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레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6.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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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B]시136

1.  Give thanks to the LORD, for He is good; For His lovingkindness is everlasting.

2.  Give thanks to the God of gods, For His lovingkindness is everlasting.

3.  Give thanks to the Lord of lords, For His lovingkindness is everlasting.

4.  To Him who alone does great wonders, For His lovingkindness is everlasting;

5.  To Him who made the heavens with skill, For His lovingkindness is everlasting;

6.  To Him who spread out the earth above the waters, For His lovingkindness is everlasting;

7.  To Him who made [the] great lights, For His lovingkindness is everlasting:

8.  The sun to rule by day, For His lovingkindness is everlasting,

9.  The moon and stars to rule by night, For His lovingkindness is everlasting.

10.  To Him who smote the Egyptians in their first-born, For His lovingkindness is everlasting,

11.  And brought Israel out from their midst, For His lovingkindness is everlasting,

12.  With a strong hand and an outstretched arm, For His lovingkindness is everlasting;

13.  To Him who divided the Red Sea asunder, For His lovingkindness is everlasting,

14.  And made Israel pass through the midst of it, For His lovingkindness is everlasting;

15.  But He overthrew Pharaoh and his army in the Red Sea, For His lovingkindness is everlasting.

16.  To Him who led His people through the wilderness, For His lovingkindness is everlasting;

17.  To Him who smote great kings, For His lovingkindness is everlasting,

18.  And slew mighty kings, For His lovingkindness is everlasting:

19.  Sihon, king of the Amorites, For His lovingkindness is everlasting,

20.  And Og, king of Bashan, For His lovingkindness is everlasting,

21.  And gave their land as a heritage, For His lovingkindness is everlasting,

22.  Even a heritage to Israel His servant, For His lovingkindness is everlasting.

23.  Who remembered us in our low estate, For His lovingkindness is everlasting,

24.  And has rescued us from our adversaries, For His lovingkindness is everlasting;

25.  Who gives food to all flesh, For His lovingkindness is everlasting.

26.  Give thanks to the God of heaven, For His lovingkindness is everlasting.

====시136개요====

이 시편의 내용은 앞에 나온 시편과 같다. 

그러나 그 구성에서 매우 독특한 점이 있다. 각 절의 하반절이 모두 똑같다. 시편 끝까지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결코 헛된 반복이 아니다. 우리가 그것을 부르는 대로 그러한 반복구 혹은 “상응구”는 노래의 아름다움에 많은 것을 첨가해 주며, 시를 살아 있게 하고, 감동 있게 하는 도움을 주고 있다. 각 구절이 많은 무거운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비가 영원하다는 것보다 더 좋은 반복구는 없다. 

그것의 반복은 여기에서 26회나 나타났다. 이러한 구성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1.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반복, 묘사된다. 말하자면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적으로 무한하게 진보하고 발전하면서, 반복 묘사되었다.

2. 모든 특별한 은총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주시해야 하며, 그것이 영원함을 알아야 한다. 

지금도 과거와 똑같이 인자하시며, 지금과 같이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것을 주시해야 한다.

3. 하나님 자비의 영원한 존속은 그의 큰 영광이며, 그는 거기에서 영화롭게 되신다. 

그것은 성도들의 위로가 되며, 그들은 거기에서 영광을 돌린다. 우리의 마음은 그것으로 충만해야 하고, 감동 받아야 한다. 

그에 대한 가장 빈번한 언급은 우리를 싫증나게 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소성케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영원토록 우리의 찬양의 주제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 가장 아름다운 문장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 나타난 반복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노래를 받으셨다는 열납의 암시적 표징에 의해서도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광대케 한다. 

솔로몬 시대에(대하 5:13. 그들이 이러한 말로 노래했을 때, 즉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고 노래했을 때, 성전이 구름으로 충만했다), 

그리고 여호사밧 시대에(그들이 이러한 말로 노래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승리를 주셨다. 대하 20:21-22) 

바로 그 때 감사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열납하심이 암시적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확실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리로다” 하고 노래하는 것을 사랑하게 해준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1. 위대하고 인자하신 분으로서(1-4).

2. 세상의 창조자로서(5-9).

3.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그 구원자로서(10-22).

4. 우리의 구속자로서(23-24).

5. 모든 피조물의 크신 은혜자로서, 그리고 영원히 찬양 받으실 모든 것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서(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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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에의 권면(시 136:1-9)

우리가 여기에서 반복해서 부르심을 받은 의무는 “감사하라”는 것이며, 땅의 소출이나 가축으로써가 아니라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로 “항상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것”(히 13:15)이다. 

우리는 기도하며 참회하라고 진지하게 부르심을 받지 않고, “감사하라”고 부르심 받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앙의 가장 즐거운 일로 풍요하게 되며, 하늘의 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고찰해 보자.

Ⅰ. 우리는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 것인가? 

우리가 모든 선을 받은 그에게, “여호와께”,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1절).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천사들이 경배하는 하나님, 그에게서 통치자들이 저희의 권력을 받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거짓 신들이 정복되며 정복될 것이다(2절).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께”, 모든 통치자들 위에 뛰어난 주권자이며 모든 지지자에 뛰어난 구원자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3절). 

우리는 모든 경배의 행위에서 초월자로 계신 하나님의 우수성을 보아야 하며, 대적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이 높은 그의 권세와 지배를 보아야 한다.

Ⅱ. 우리는 무엇을 감사해야 하는가? 

자기의 모든 감사를 자기 자랑으로 한정시킨 바리새인처럼 하지 말고(“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감사하나이다. 내가 이러저러하게 된 것을 감사하나이다”), 감사를 모두 하나님의 영광에로 향하게 해야 한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1절).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가 선을 행하시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또한 선하시기 때문에 감사해야 한다(모든 물줄기는 그 근원에까지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인자하실 뿐만 아니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후대에 올 자들에게도 인자함으로 대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지금 나누어준 자비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하늘의 영광과 기쁨 중에 영원할 인자하심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2. 우리는 그의 권능과 지혜의 기사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일반적으로(4절) 그는 “홀로 큰 기사를 행하신다.” 

그 고안은 놀라우며, 계획은 무한한 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 

그는 홀로 놀라운 일들을 행하신다. 그 외에는 아무도 그러한 일을 행할 수 없다. 그는 다른 어떤 것의 조력이나 충고 없이 그것들을 이루신다. 특히 하늘 등을 이루신 기사를 살펴보자.

(1) 그는 하늘을 지으시고 펼치셨다. 

우리는 거기에서 그의 지혜와 권능을 볼 뿐만 아니라, 하늘의 온화한 작용에서 그의 인자하심을 맛본다. 하늘이 지속되는 한 하나님의 자비는 그 안에 존속할 것이다(5절).

(2) 그가 육지를 나타나게 하실 때 땅을 바다에서 올리시고 인간을 위한 거주지로 적합하게 만드셨다. 

거기에서도 인간에 대한 그 인자하심이 영원할 것이다(6절). 왜냐하면 “인간에게 땅을 주시고”, 그 모든 선물을 주셨기 때문이다.

(3) 그는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그 거리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에 관계를 정하셨다. 

해와 달과 별을 지으심으로써 그것을 창공에 두어 이 땅에 빛을 비추시고, 영향을 미치게 하셨다(7-9절). 이것들은 우리에게 크기 때문에 “큰 빛들”이라고 불린다. 

천문학자들은 달이 많은 별들보다 작다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달이 지구에 더 가깝기 때문에 더 크게 보일 뿐이다. 그들이 연중 계절을 지배하며 세상에 유익을 주기 때문에  관계적 유익의 측면에서 “주관한다”고 불린다. 

그리고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는다”(눅 22:25). 지배권이 나누어져서 “해로 낮을 주관케 하고,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했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지시와 처분에 복종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우상화한 통치자들은 세상의 종이며, 하나님의 신민이다. “해야, 너는 조용히 서 있고, 너 달아, 밤을 주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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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송축함(시 136:10-22)

하나님께서 처음 이스라엘을 하나의 백성으로 형성하시고, 그들 가운데 그의 나라를 세우셨을 때, 그가 이스라엘을 위해서 행하신 큰 일들이 다른 시편에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베푸신 하나님의 권능과 특별한 친절의 기사로 언급된 것과 같이 여기에서도 언급되었다(135:8 등 참조).

Ⅰ. 그는 애굽으로부터 그들을 구출해 내셨다(10-12절). 

그것은 그들에게 오래 지속된 자비였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 특징지워진 그리스도에 의한 우리의 구속은 실로 영원하다. 왜냐하면 영원한 구속이기 때문이다. 

시136편에서는 애굽에서 일어난 모든 재앙들 중에서 장자의 죽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죄와 어둠을 를 정복하는 재앙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재앙에서 애굽 사람들로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별하신 하나님은 마침내 간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멀리 펼치며 큰 일을 행하시는 강한 손과 팔로 그들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인도해 내셨다. 

그들은 이스라엘에 율법을 전하라는 모세의 임무를 깨달았다. 이러한 자비의 기적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그 율법에 복종하는 영원한 의무를 갖게 되었다(출 20:2).

Ⅱ. 그는 그들에게 가로막힌 홍해를 건너게 하셨다. 

그는 자연의 일반 법칙과 작용원리를 통제하시는 초월적 권능으로 “바다를 둘로 가르시고”, 그 사이에 길을 열어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 사이로 통과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이제 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들어가게 되었다(렘 34:18 참조). 

그는 바다를 가르셨을 뿐만 아니라, 바다가 갈라져셔 양쪽에 거대한 물기둥을 이루고 바닥은 마른 땅으로 변했을 때 그리로 통과해서 지나갈 용기를 그의 백성들에게 또한 주셨다. 

이것은 바다에 대한 하나님의 권능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에 대한 하나님의 권능의 기사였다. 그리고 그것은 자비의 기적임은 물론 정의의 기적이 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통로가 되었던 홍해가 추적자들에게는 무덤이 되었다. 그는 거기에서 바로와 그의 군대를 엎드러지게 하셨다.

Ⅲ. 그는 그들을 황막하고 쓸쓸한 광야로 통과하게 하셨다(16절). 

그는 그들을 적막한 광야로 인도하셨고, 그들을 먹이셨다. 

바로 그 적막한 풀한포기 나지 않는 광야를 걷는 동안 그들의 장막은 40년 동안 계속되는 기적의 연속으로 음식이 가득했으며, 강하게 되었다. 

그들이 광야에서 늑장부리며 방황했다고 할지라도 결코 멸망되지 않았다. 

이때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그 인자하심의 미쁘신 불변성은 그들이 광야에서 그를 거역하고 사막에서 그의 마음을 상하게 했기 때문에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Ⅳ. 그는 이스라엘에게 삶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그들 앞에 있던 왕들을 멸망시시셨다(17-18절). 

단지 그왕들을 위축시켜 스스로 물러가게 하거나  살려두어 추방하지 않고 살육하고 죽였다.=멸절시켰다.  

그왕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고, 이스라엘에게는 그의 자비, 변하지 않는 자비가 나타났다. 

그들은 “큰 왕”과 “유명한 왕”을으로 자화자찬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인간의 자녀 중에 가장 미천하고 가장 약하고 작은 자들처럼 쉽게 정복하셨다. 

그들은 악한 왕들이었다. 그들의 위엄과 영광이 하나님의 정의를 결코 피하지 못하게 했다. 그들이 위대하고 유명할수록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는 그러한 왕들을 이스라엘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혼과 옥이 특별하게 언급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요단강 편에서 정복당한 최초의 두 왕이었기 때문이다(19-20절). 

하나님의 은총을 전체적으로 보는 것보다 구체적인 항목에 들어가 보는 것이 더 좋다. 각 기사를 관찰하고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고 고백하는 것이 좋다.

Ⅴ. 그는 그들에게 좋은 땅을 소유하게 했다(21-22절).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을 소유하시고 세상과 거기에 거하는 것을 소유하신 그가 땅을 한 백성에게서 빼앗아 자기가 기뻐하시는 다른 백성에게 주셨다. 

“아모리 족속의 죄가 넘쳤다.” 그러므로 그 땅을 그들에게서 빼앗으셨다. 

“이스라엘”은 그의 “종”이었다. 그들이 광야에서 반역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예배 받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그들에게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애굽 사람들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가나안 사람들에게도 “내 백성을 들어가게 하라”,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나를 섬기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들에게 “영원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늘의 가나안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가 영생에 이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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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하나님의 자비(시 136:23-26)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하심이 송축되었다.

Ⅰ. 그의 교회의 구속에서(23-24절). 

우리는 유대 교회를 그 압제자의 손에서 건져내신 많은 구속에서(그들의 지위가 낮아지고 고역을 치를 때 하나님은 그들을 기억하시고 구원자와, 사사들과 다윗 왕을 보내셨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모든 적으로부터 보호하셨다), 

그러나 특히 보편적인 교회의 큰 구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 많은 이유를 갖고 있다. 

“우리를 비천한 데서 기념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는 우리를 죄와 사망과 지옥과 우리의 모든 영적인 적들로부터 구속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는 죄지은 천사로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Ⅱ. 그가 모든 피조물을 위해 만드신 식물에서(25절). 

“그는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다.” 

그가 생명을 주신 곳 어디든지 합당하고 충분한 음식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 섭리의 인자하심의 일례다. 그는 거대한 가족을 부양하시는 선한 가장이시다.

Ⅲ. 그의 모든 영광과 그의 모든 은총에서(26절).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이 구절은 그가 영광스러운 하나님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인자하심의 영광이 우리의 찬양에서 주목되어야 한다. 그의 “영광의 부요함”이 “긍휼의 그릇”에서 나타난다(롬 9:23). 

그것은 또한 그가 위대한 은혜자임을 의미한다. “모든 선하고 온전한 은사는 위로부터”, 빛의 아버지로부터,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물줄기를 그 근원에까지 찾아 올라가야 한다. 여기에 나타났고 앞에 나타난 특별한 인자하심은 어쩌면 잠깐 동안 지속될지 모르지만, 하나님 안에 있는 인자하심은 “영원하다.” 그것은 그칠 줄 모르고 솟아오르는 샘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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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d:y:(3034, 야다) 던지다, 쏘다, 감사하다, 찬양하다, 고백하다
야다(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던지다, 내던지다 throw, cast'를 의미한다. 좋은 것을 던져 줄 수도 있고, 나쁘거나 불필요한 것을 던져 버릴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44회 나오며, 칼형에서 '쏘다'(화살, 렘 50:14), 피엘형에서 '던지다'(애 3:53), 히필형에서 '감사하다, 찬양하다, 고백하다', 히트파엘형에서 '고백하다, 감사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야다의 기본적인 의미는 '죄, 하나님의 품성과 역사, 혹은 인간의 특성을 시인하다 혹은 고백하다'이다. 이 동사와 그 동의어 할랄의 기본적인 차이는 후자의 용어가 '갈채하다, 자랑하다', 혹은 어떤 대상을 '기뻐하다'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야다는 좋든 나쁘든 어떤 사실에 대한 '인정'과 '선언'을 강조한다. 70인역본은 일반적으로 야다를 엑소몰로게오로 번역한다.
동사는 세 가지의 기본적인 방법으로 사용된다.
첫째, 이 단어는 개인적으로든 국가적으로든 죄의 시인 혹은 고백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기본적인 개념은 시 32:5에 묘사되어 있는 다윗의 개인적인 고백에서 분명하게 관찰되었다. 여기에서 시적인 병행구는 고백이 죄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께 알리는 것이었음을 설명해 준다. 죄에 대한 고백이 하나님께 행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국가적인 고백의 개략은 속죄일 의식에서 발견된다. 이때 대제사장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죄를 고백하면서, 자기의 손을 염소의 머리 위에 두어 상징적으로 민족의 죄를 염소에게 전가 시켰다(레 16:21). 힛파엘형은 이 동사가 국가적인 죄의 고백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될 때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이 어간은 또한 이스라엘 죄의 대 고백이 다니엘(단 9:4, 단 9:20), 에스라(스 10:1), 느헤미야(느 1:6), 그리고 바벨론 포로기 동안과 그 이후의 이스라엘 백성(느 9:2-3)들에 의해 행해졌을 때에도 사용되었다. 국가적인 죄의 고백은 일반적으로 공적인 것이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앞에서 우리의 죄를 시인하여(참조: 요일 1:9), 자기와의 본래의 관계를 유지하기를 매우 원하신다.
둘째, 야다는 하나님의 속성과 그의 일에 대한 인간의 공적인 선포나 선언(고백)을 나타내기 위해 주로 사용되었다. 이 개념은 찬양의 의미의 핵심에 있다. 찬양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그리고 그가 무엇을 행하는가에 대한 고백이거나 선언이다. 이 용어는 영역본들에서 가장 자주 '감사하다' thank로 번역되지만, 베스터만(Westermann)에 의하면, 이 번역이 실제적으로 적당한 번역은 아니라고 한다. 즉 구약성경에서 ...아직까지 '감사하다' thank만을 의미하는 동사는 없었다. 일반적으로 '감사하다' thank로 번역되는 호다는 구약성경에서 사람들 사이의 감사에 대한 표현을 뜻하는 말로는 단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처음부터 이 호다는 하나님과 인간에게 똑같이 사용될 수 있는 우리의 언어 '감사하다' thank와 일치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들 사이에 일어나는 어떤 것으로서의 우리의 '감사하다'가 가장 분명하게 발견되는 구약성경의 구절들에서 사용된 동사는 베레크이다. 이 동사는 '찬양하다' praise의 기본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축복하다' bless를 의미한다.
이런 사실에 비춰볼 때, 구약성경은 감사하는 것에 대한 독립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는 찬양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찬양의 한 방식이다(Westermann, Claus, The Praise of God in the Psalms, Richmond; John Knox Press, 1965, pp. 26-27).
이 용어의 가장 좋은 역어는 '고백' confession이다. 왜냐하면 시편(참조: 시 89:5, H6, 시 105장, 시 106장, 시 145장)과 그 외의 곳(참조: 대상 29:13)에서 충분히 볼 수 있듯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속성과 일을 고백하거나 선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다는 '찬양하다' praise를 뜻하는 주요 단어들 중의 하나이다. 이 단어는 히브리인들의 시에서 언제나 할랄(찬양하다) ,자마르(악기로 찬양하다) 룸(높이다), 자카르(기억하다), 카밧(찬양하다), 그리고 나갓(선언하다)과 같은 찬양 용어들과 병행되어 나온다. 감사는 찬양 뒤에 온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속성과 일을 선언할 때, 이런 것들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찬양은 대개 감사로 이어진다.
[베스터만은 한 주요 요지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렇지만 그의 말이 모든 세부적인 것들에 다 필요한지는 의심스러울 것이다. 만약 때로 감사가 찬양에 포함된다면, 특히 이 어근의 기본적인 의미가 BDB가 시사한 바처럼, '인정하다' acknowledge일 때, 어떤 행동이나 일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야다가 사용되는 실례들이 감사하다라는 우리의 개념과 동일시될 수 있을 것이다(R. L. H)].
찬양은 일반적으로 여호와나 그의 이름을 그 대상으로 취한다(시 97:12, 시 99:3, 시 136:1-3, 시 136:26).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만이 하나님을 찬양하였다(사 38:18-19, 시 6:5, H6, 시 30:9, H10, 시 88:10, H11). 찬양의 수창자(首唱者)에는 의로운 개인들(시 140:13, H14), 이스라엘 백성(시 106:47), 열방들(시 45:17, H18), 지상의 모든 왕들(시 138:4), 하늘들(시 89:5, H6), 사람의 노(시 76:10, H 11)와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위대한 속성과 그의 기적적인 역사들을 고백했다. 여호와에 대한 찬양은 공적인 것으로, 열방들 사이에서(삼하 22:50),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 회합에서(시 35:18) 발견되었다. 개인이나 백성이 와서 여호와를 찬양할 때, 그들은 종종 악기를 수반하여(대하 5:13, 시 33:2, 시 43:4), 말이나 노래로써, 구두로 찬양하였다(시 109:30, 시 28:7). 이런 찬양은 일반적으로, 다윗이 엄격하게 여호와의 인격에 대한 찬양과 고백으로 경축하는 임무를 맡긴 그런 레위인들(대상 16:4)의 지시하에 성막(혹은 성전)에서 행해졌다(시 100:4, 시 122:4). 이것은 매일 아침과 저녁에 성막에서 수행되어야 했던 예배의 주요 측면이었다(대상 23:30). 이 찬양은 여호와의 옳은 길(여호와의 의)에 따라(시 7:17, H18)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시 119:7) 전심으로 행해져야 했다(시 86:12, 시 111:1). 이런 찬양은 계속적으로 - 영원히 - 행해져야 했다(시 30:12, H13).
셋째, 야다는 또한 어떤 사람에 관한 어떤 진실을 고백하는, 즉 사람에 대한 사람의 칭찬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되었다(시 49:18, H19). '찬양' praise을 의미하는 "유다"라는 이름은 이 어근에서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유다의 형제들이 그를 찬양(혹은 고백)하였기 때문이다(창 29:35). (참조: R. H. Alexander; B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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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jcaristevw(2168, 유카리스테오) 감사하다 thank.
1. 고전 헬라어 문헌 
동사 유카리스테오는 유카리스티아에서 유래했으며,
(a)  '감사하다'(주전 4세기 Demosthenes; 384-22 주전]로 부터).
(b)  '감사를 드리다'  (주전 2세기 Polybius 로부터). 물론 이러한 단어들은 비문들 속에서 자주 발견된다.
2. 70인 역본의 용법 
동사 유카리스테오는 70 인역본의 외경에서 6 번 나온다. 마카베오이서 12:31에서 마카베오 일당에 속한 사람들은 어떤 이교도들이 스키토폴리스(Scythopolis)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베풀어준 친절에 대해 감사한다. 외경 에스더서(Ad. Est.)16:4에서 어떤 관리들은 자기들에게 은혜를 베푼 페르시아 왕에게 갚아야 할 감사를 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이유들로는 대적들에 의한 압제와 박해로부터의 구원(마카베오이서 1:11, 마카베오삼서 7:16), 승리하게 하심(마케베오이서 10:7) 때문이다. 지혜서 18:2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악용한 자들에 대하여 앙갚음을 하지 않게 하여 주심을 감사하는 거룩한 백성들의 감사가 기록되어 있다. 유딧 8:25에는 어떤 역경과 불우한 환경과 사정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고 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유카리스테오는 신약성경에서 38회 나오며, 거의 독점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단지 2회만(눅 7:l6; 롬 16:41) 사람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영적 행동을 뜻하는 문맥으로 이해된다.
(a) 유카리스테오는 바울서신의 서론 부분에 매우 흔히 나온다. 아무리 그 서신에 충고와 비판을 뒤이어 기록할지라도, 사도 바울은 자주 그의 수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서언적 인사말을 쓴다. 즉 그들의 믿음과 그로 인해 "온 세상에" 전파된 결과(롬 1:8), 교회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고전 1:4), 믿음과 실천적인 사랑 사이의 조화(엡 1:15 이하; 골 1:3 이하, 살전 1:3, 몬 1:4 이하), 복음 안에서의 성도의 교제(빌 1:5), 견고한 믿음(살전 1:2 이하), 하나님께서 택하신 일(살후 2:13)  등이다. 바울이 격식을 갖추려는 것이 아니라 점차 그 서신의 주제로 이끌어 가기 위해 자신의 감사함을 삽입해 넣었다는 사실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
(b)  바울은 신학적 논증에서 자기 자신을 언급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기도 한다(고전 1:14; 고전 14:18; 참조: 행 28:15). 대조적으로,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을 지라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아니한다(롬 1:21).
(c)  감사는 끊임없는 의무이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 5:20; 고후 1:11; 골 1:12; 골 3:17; 살전 5:18).
(d)  눅 18:11 이하(자기 만족적인 바리새인들)과 요 11:41 이하(나사로 무덤 앞에 선 예수님의)에 감사 기도가 나온다. 이 단어가 고전 14:16 이하에선 방언으로 드리는 감사기도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e)  바울은 서신의 서론 이외에서도 자주 일반적이며 특별한 은사들에 대한 감사를 언급한다. 예를 들면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음에 대해 (골 1:12), 성도들이 사람에 의해 설교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임에 대해(살전 2:13), 방언의 은사에 대해(고전 14:18) 감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 14:18에서 바울은 독자들의 관심을 교회의 진실한 성장과 일치에 가지도록 하기 위해 그의 감사함을 말할 때 얕보는 듯한 의미의 표현을 쓰고 있다.
(f)  마 15:36과 병행구절 막 8:6에서 예수님께서 음식을 위하여 감사하셨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한 후에 않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바울은 유대인의 습관과 예수님의 본을 따라 음식 앞에서의 감사 기도에 대하여 말한다. 이 관습은 기독교 공동체에서 일반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사도는 음식과 관련된 논증에서도 감사기도를 언급한다. 이 기도는 고전 10:30에서 깊이 생각할 문제이다. 우상들에 바친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한 논의에서 바울은 그가 감사한 것에 대해 왜 비난을 받는가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한다.
(g)  유카리스테오는 또한 주의 만찬(Lord's Supper) 의식을 언급하는 말에 나온다. 예를 들면 눅 22:19에서 떡과 포도주와 함께, 고전 11:24에서 단지 떡과 함께(그러나 25 절의 "또한 이와같이"란 말 속에 포도주가 포함된 것이다), 막 14:23과 마 26:26 (그러나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란 말은 상당어구로 사용된 것이다)에서만이 포도주와 함께 언급된다. 그러므로 2세기 동안에 유카리스티아(eujcaristiva, 2169)란 말은 전체적인 성만찬 예배를 의미하는 일반적인 명칭이 되었다.
(h)  유카리스테오는 요계시록의 찬가 가운데 감사의 찬송을 의미하기도 한다(계  11:17 이하). 감사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천적 존재의 영광송에 속하는 것이다.
(참조: Walter Bauer; J.H.Thayer; H.-H,Es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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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카리스, 감사 - 유카리스테오 ....'감사'는 주님과 하나되는 신앙의 경험이요 고백이다!
신약 성경에 나타난 단어들 중
은혜(恩惠), 은사(恩賜), 감사(感謝), 성찬(聖餐)은 한가지 어원에서 나온 것입니다.
특히 은혜- 카리스라는 단어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 은혜-카리스라는 단어에서 모든 것이 시작이 됩니다.
1) 은혜(恩惠) χαρισ 카리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2:8]
*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만남과 깨달음의 감격입니다.
*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은사-카리스마를 선물로 받습니다. 
2) 은사(恩賜) χαρισματα  카리스마
 "다 병 고치는 은사(恩賜-카리스마)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고전12:30]
* 우리도 병고침의 은사(恩賜)와 능력 행함의 은사등을 선물로 받고 나누기를 소원합니다.
3) 감사(感謝) ευχαριστεω 유카리스테오
"범사에 감사(感謝)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8 ]
감사의 유카리스테오는 카리스(은혜)가 풍성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은혜를 고백하는 신앙이기도 합니다. 감사와 은혜는 하나로 연결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은사도 연결되어있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은사의 기적과 능력도 체험합니다.
4) 성찬(聖餐) ευχαριστια 유카리스티아
" 축사(祝謝)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고린도 전서 11:24)
영어로 성찬(聖餐)을 유카리스트(Eucharist)라고 부르는데 이 단어는 예수님께서 성찬 때에 축사(祝謝)하셨다는 단어에서 왔고 더 엄밀히 말하자면 이 축사(祝謝)로 번역된 단어는 감사(感謝)하셨다는 뜻의 ευχαριστεω '유카리스테오'와 같은 단어입니다.
단어의 원래 뜻은 감사이지만 성찬에 관한 용어로서 ευχαριστία '유카리스티아' 라고 고유명사화 해서 부릅니다. 성찬(聖餐)의 성경적 용어는 고린도 전서11:20에 나오는 '주(主)의 만찬(晩餐)'입니다.
"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晩餐)을 먹을 수 없으니" (공동번역은 '주의 만찬'을 성찬(聖餐)으로 번역했습니다.
성찬(聖餐)예식은 이 너저분한 물질계, 이차원, 삼차원의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와 같은 모양으로 같은 삶을 사시기 위해 친히 오신 예수님의 사랑의 신비를 맛보며 예수님과 하나됨을 체험하는 신비의 거룩한 의식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됨에 꼭 필요한 중요한 요소는 '감사(感謝)'라는 사실입니다.
성찬예식은 '감사'를 통하여 주님과 하나되는 의식입니다.
즉 '감사(感謝)'는 내 기분이나 감정이 아니라, 주님과 하나되는, 하나되기 위한 거룩한 의식의 신앙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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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f(2896, 토브) 좋은, 선한, 즐거운, 선, 이익, 번영, 복지
토브(형용사)는 토브(b/f , 2895)에서 유래했으며, 형용사로는 '좋은, 선한, 즐거운, 유쾌한', 명사로는 '좋은 것, 선, 이익, 번영, 복지'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60여회 나온다.
'선한'은 실제적인 혹은 경제적인 이익을 언급하는 것으로 잘 나온다. 좋은 열매(창 2:9)와 바로의 꿈에 나타난 이삭(창 41:5, 창 41:36)은 먹기에 좋은 것이었다.
요셉의 노예상태가 "좋은" 것은 양식과 민족의 생존 같은 실재적인 이익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선하지 못한" 모세의 재판에는 실제의 행정적인 불이익도 포함되었다: "모세의 장인이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하는 것이 선하지 못하도다"(출 18:17).
토브로 전달된 다른 실제적인 선은 아합에게 거부한 승리의 약속(대하 18:7); 환대와 우정(창 26:29); 유익한 충고(삼하 17:7, 삼하 17:14); 일반적인 경제번영(왕상 10:7); 농업 번영(호 10:1, ASV); 그리고 하나님의 의지(암 9:4) 등이다.
그러나 국가의 풍기를 문란케한(느 5:9) 강포한 삶(잠 16:29)과 행동은 "선하지 못하다"고 일컬어 진다.
노동의 "선"은 일에서 얻은 실제적인 이득을 가리키는 것 같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전 3:13, 참조: RSV '기쁨' pleasure).
"선"은 여러 가지 광범위한 추상적인 관점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선한 이름은 명성이나 평판의 관점에서 볼 때, 후손보다 더 낫다: "내가 내 집에서, 내 성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며"(사 56:5). 다윗이 제후인 아기스에게 충성한 것은 "선한 것"으로 묘사된다: "아기스가 다윗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내 목전에 하나님의 사자 같이 선한 것을 내가 아나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은 말하기를 그가 우리와 함께 전장에 올라가지 못하리라 하니"(삼상 29:9, RSV '흠이 없는' blameless).
엘리후는 진리나 타당성과 관련 지어볼 때 무엇이 선한 것인지를 결정하라고 동료들에게 요구했다: "우리가 스스로 옳은 것은 택하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 보자"(욥 34:4).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있어, 노를 더디 내는 것은 이상적인 용사의 폭력적인 힘보다 더 바람직하였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마찬가지로,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아이는 고집 센 왕보다 "더 나았다"(전 4:13).
이 단어는 심미적이거나 감각적인 선함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비친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이나 매력(창 6:2), 리브가의 아리따움(창 24:16), 그리고 밧세바의 아름다움(삼하 11:2)을 묘사한다. 이 단어가 사람을 묘사할 때, 영어의 관용구는 '잘생긴' handsome이란 말을 사용한다(삼상 16:12).
감각적인 기쁨이나 좋은 것은 "단"이라고 묘사하는 데에서(렘 6:20), 그리고 다메섹의 물이 요단의 흙탕물보다 더 "낫다"는 나아만의 판단(왕하 5:12)에서 나타난다.
다른 것보다 더 나은 것으로서의 한 포도를 묘사하는 데에는 감각적인 매력도 포함되어 있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이제 행한 일이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삿 8:2).
'선한'은 자주 '행복한' happy을 나타낸다. 이것은 왕이 결혼하는 때를 묘사한다: "내 마음에서 좋은 말이 넘쳐 왕에 대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필객의 붓과 같도다"(시 45:1). 행복한 축제일은 "좋은 날"로 묘사되기도 한다: "왕의 조명이 이르는 각 도, 각 읍에서 유다인이 즐기고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날로 경절을 삼으니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에 8:17, RSV '휴일' holiday; 참조: 삼상 25:8).
"좋은 마음"은 행복을 나타낸다(대하 7:10, 잠 15:15).
행복은 술에 의해 야기되기도 하는 것 같다(전 9:7).
토브를 포함하는 관용어로는 선호나 뜻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는 "[어떤 사람의] 눈에 선한"이란 용법이 있다. 이런 용법의 예들로는 도망친 노예가 어떤 곳을 거처로 택함(신 23:16, RSV "그를 기쁘게 하는 곳), 그리고 슬로브핫의 딸들이 남편으로 택함(민 36:6)이 있다. 하나님의 뜻은 이런 식으로 표현될 것이다(삼상 3:18). 이것은 타락하고 죄에 가득찬 욕망을 묘사한다(창 19:8, 삿 19:24). 이런 경우에, 이 관용어는 도덕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토브는 우수한 질이나 상재적인 가치에 대한 개념도 포함한다. 이런 식으로 이 단어는 하윌라의 "정"금(창 2:12)과 고급 향유(아 1:3, RSV "바르는 기름" anointing oils)를 묘사한다.
우수한 장인은 모세가 "준수하다" (즉 고귀하다)고 묘사되는 경우(출 2:2)처럼, 인간의 성품의 특성이나 고귀성과 마찬가지로 이런 식으로 지칭된다(사 41:7).
토브의 중요한 용법은 도덕적인 선을 가리킨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시 34:14, H15)라는 명령은 분명히 "선"을 도덕적인 악과 대조 시킨다. 하나님께서 다루기 어려운 자기 백성을 가르치실 "선한 길"은 도덕적인 삶을 가리킨다(왕상 8:36). '선한'과 '옳은'을 뜻하는 야샤르는 종종 도덕적인 선을 뜻하는 유사한 말로 나온다(대하 14:1, 대하 31:20).
토브는 하나님에 대해 사용되었다.
어떤 용법들에는 앞에서 논의된 둘 이상의 의미의 영역들이 뒤섞여 있다. 옛 언약의 "좋은 땅"은 실제적이며, 경제적이며 미학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신 1:25, 수 23:13).
마찬가지로, "선한 분"으로서의 하나님 개념도 "선한"이란 단어의 모든 가능한 의미들을 충분히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은 선하시며(시 106:1, 대상 16:34), 좋으신 주님이시다(시 52:9).
구약성경에서 선의 개념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신앙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하나님의 개념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적인 것으로서의 선의 개념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선은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은사이며, 그렇기 때문에 선은 인간의 힘의 통제권 밖에 존재한다(창 3:5).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단지 '선'이 아니라 선하신 성품을 가지신 분이시라는 사상이 철두철미하게 전제되어 있다. 이러한 인식이 구약성경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 개인의 관계가 성숙해지는 과정에서 더욱 발전하였다.
하나님만이 오로지 선하신 분이시다라는 사실은 구약성경에서 그가 선택한 백성을 구원하신 것, 율법을 주신 것(신 30:15, 잠 28:10), 그리고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출 18:9, 신 10:29이하)과 같은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명백해졌다. 이스라엘인들은 하나님의 창조 활동(창 l:1-8)에서건, 그의 말씀에서건(사 39:8), 그의 영에서건(시 l43:10), 심지어 그가 반대자들에게 말하기 위해 나타나셨을 때 조차도(창 50:20) 그에게서 유래되는 모든 것은 선하다라는 사실을 알고부터 하나님을 오로지 선하신 분으로 찬양하는 새로운 계기로 발전하였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한 그의 사역에서 선(참조: 출 l8:9)을 행하시는 바 그 목적은 구원이며, 율법을 통해 인간에게 방향을 제시해 주는데 있다. 선은 이미 행해져 왔으며, 또한 준비되어 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약속했던 선은 메시야적, 종말론적 구원에서 실제로 성취될 것이다(레 32:39 - 42; 사 52:7). 한편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통하여 선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선을 행하는 자는 선하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도움,없이 가능할 것인가는 논쟁이 되고 있다. 전도자는 하나님의 도움,없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전 7:20).
랍비 유대주의는 하나님의 선함이 구원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했다. 선한 것과 성취 가능한 것은 율법에 계시되어 있다. 하나님의 법을 실행할 때 비로소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있고 또 선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선은 오로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동료 인간들 사이의 인격적 관계에서만 실행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앞의 논의에 비춰볼 때, 각 개별 용법은 앞의 의미들 중 어느 것이 가능한지를 고찰하기 위해 분명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수많은 문학적인 표현들은 특별한 취급을 필요로 한다. "선과 악"은 보편성에 대한 관용어로 이용된다(민 24:13, 삼하 13:22). 어떤 이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이런 보편성을 뜻하는 관용어에 지나지 않는다고 시사하였다(창 2:9). 그러나 창세기 앞부분의 문맥은 전체적으로 이 어구의 도덕적 의미에 기초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선한 것"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곧 동의나 수용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도덕적 판단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왕하 20:19, 참조: 삼상 20:7).
"선한 눈"은 관대함을 나타낸다(잠 22:9, RSV '관대한 눈' bountiful eye ).
전도서에서, "선을 보다" to see good는 좋은 것이나 삶의 기쁨을 경험하다로 번역된다(전 5:18, RSV '기쁨을 발견하다' find enjoyment; 전 6:6, RSV '선을 향유하지 못하다' enjoy no good). (참조: A. BOWLING; E. BEYREU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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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eje(2617, 헤세드) 친절, 인자, 자비, 자애 [긍휼=아가페]...지고지선의 진복에로의 회복, 곧 완전한 은혜, 구원의 완성, 영생복락, JC빼어닮음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그 근저에 낳은 자식 불쌍히 여겨 아파하며 동참/동감/동정하는 파토스의 자비(친절/온화/선대/아낌/위함)가 깔려 있음!!]
1. 헤세드(명남)는 하사드(ds'j; , 2616)에서 유래했으며, '친절, 인자, 자비, 자애'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40회 나온다.
2. 헤세드(명남)는 하사드(ds'j; , 2616)에서 유래했으며, '책망, 비난, 수치, 치욕'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회 나온다(레 20:17, 잠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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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드>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할 때 사용하는 구약성경의 용어이다. 
시편 136편에서 시인이 하나님을 노래하여 ‘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36:1 개역) 라고 읊조린다. 
이때 ‘인자하심’이라고 번역한 단어가 <헤세드>이다. 
개역/새번역은 ‘인자하심’, 공동역은 ‘사랑’, 카톨릭역은 ‘자애’라고 옮겼다. 
<헤세드>는 LXX에서 그리스어로 <엘레오스...자비-친절/호의/선대-긍휼>, VUL에서 라틴어로 <메세리코르디아>라고 옮겨졌다. 사전의 정의를 보면 보통 ‘친절/자비/선대’라고 정의한다.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을 보호하기 위하여 아내를 누이라고 소개하는 일에 동의하였다. 이것이 남편을 향한 사라의 <헤세드>였다(창20:13).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헤세드>를 베풀었다고 강변한다(창21:23). 
감옥에 갇힌 요셉은 꿈의 해석대로 석방되는 술관원장에게 <헤세드>를 구하였다(창40:14). 
야곱은 임종 시에 시신을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고 요셉의 <헤세드>를 구하였다(창47:29). 이상의 사례들에서 <헤세드>는 인간의 ‘친절/호의/자비’란 관념을 전달한다.
명사 <헤세드>는 오경에 20회 나온다. (레20:17의 <헤세드>는 ‘수치’란 뜻의 다른 단어이다) 
창세기에서 <헤세드>는 하나님의 언약에 바탕을 둔 것이다. 
롯은 아브라함에 베푸신 하나님의 <헤세드> 때문에 살아남는다(창19:19).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며느리를 구하러 밧단아람으로 갈 때 줄곧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베푸신 <헤세드>를 자기에게도 베풀어 만사형통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창24:12, 14, 27, 49). 
야곱은 하나님의 <헤세드>로 인하여 하란의 고생 중에서도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창32:10). 
하나님의 <헤세드>로 인하여 요셉은 감옥에서도 형통하였다(창39:21).
그러면 <헤세드>와 언약<베리트>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언약<베리트>를 창6:18 이후로 줄곧 ‘내 언약’이라고 부르신다. 
본래 <베리트>는 갑과 을의 쌍방 간에 맺는 계약[쌍방 준수의무가 전제되는 쌍방간의 계약]을 가리켰다. 이런 의미로 볼 때, 성경에 나타난 <베리트>는 계약의 갑이 되신 하나님께서 계약을 을이 되는 백성에게 전적으로 계약 조건을 이행하기로 약속하는 언약이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계약은 하나님의 ‘언약’이 되었다. 
그런데,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자, 하나님은 세우신 그 안약에 일편단심 일향 신실하시건만, 사람은 변덕스럽기 한이 없다... 따라서 <헤세드>는 하나님과 계약을 맺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변덕스러운 인간의 죄성 때문에 생겨난 용어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스스로 짊어지신 의무를 끝까지 수행하신다. 하나님의 아가페사랑, 곧 <헤세드>는 죄 속에 갇힌 백성을 저버리지 않고 끝까지 지키시는 사랑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상을 잘 전달하기 위하여 신약성경은 헬라어 단어 <아가페>를 사용한다.
창세기 15장과 17장의 계약체결 사건은 하나님의 <헤세드>를 잘 보여준다. 
아브람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횃불이 되어서 지나가셨다(창15:17). 이로써 쌍방 간에 져야 할 의무는 하나님께서 홀로 감당해야 할 ‘내 언약’으로 변하였다. 
창세기 17장에서 할례의 계약을 제의하실 때 ‘내 언약’이라고 말씀하셨다(창17:2). 
아브람은 순순히 응하였으나 내년에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웃어버렸다(창17:17). 
이로써 믿음으로 그 체결이 마무리되어야 하는 할례의 계약마저도 무위로 돌아갔다. 아브라함과 맺은 모든 계약은 하나님의 친히 일방적으로 지켜야 할 ‘내 언약’이 되었다. 그래서 주께서는 노아홍수기 서두에서 ‘내 언약’이고 하시고 줄곧 그 표현을 사용하신다(창6:18; 9:9, 15). 
<헤세드>는 ‘내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성실하신<에메트....하나님만은 참되고 신실하게 말씀하신바 그대로 일방적으로 지키시는> 아가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 곧 <헤세드>는 사람의 사랑과 같지 않다. 사람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이후로 죄 속에 갇혀 있기에 변치 않는 사랑을 할 수가 없다. 자기 맘에 들지 않으면 버리고 맘에 들면 취한다. 인간의 사랑은 조건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고토감탄 조변석개의 사랑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헤세드>는 변치 않는 하나님의 언약이다. 그래서 주의 <헤세드>는 영원하다<러올람>.
우리가 죄 속에 갇혀있었을 때 주께서 친히 독생자를 보내주셔서 우리를 살리신 사랑이 곧 <헤세드>이다.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의 <헤세드>였다(출15:13). 시내산에 나타나신 여호와는 <헤세드>의 하나님이다. 십계명은 천대까지 베푸실 <헤세드>를 약속하셨다(출20:6; 신5:10; 7:9, 12). 
금송아지 사건으로 깨어진 계약을 다시 세우신 것은 언약의 사랑 <헤세드>였다(출34:6, 7). 
광야에서 백성이 거듭 거역하였을 때에도 하나님은 <헤세드>의 사랑으로 용서하시곤 하였다(민14:18, 19).
하나님의 <헤세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절정에 이른다. 외아들을 죄인을 위하여 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헤세드>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이루신 그 큰 구원의 사역이 <헤세드>이다. 
그 사랑<헤세드>은 영원히 찬송 받기에 합당하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헤세드>이 영원함이로다’(시136:1, <호두 라도나이 키 토브 키 러올람 하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자...이제, 그리스도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HS과 하나되어 그분의 기도-찬양-말씀따라 살아 생동하는 믿음으로 사는 이들은 주님 말씀으로 적셔지고 점유되고 충만케 되며 JC의 피뿌림과 성령의 거룩케 하심으로 아버지께서 부어주신 아가페사랑 바로 그것으로 합당하게 하버지를 사랑하신 JC, 그분을 닮도록 예비하신 아버지의 뜻에 순복함으로써 JC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까지 아가페사랑으로 사는 산돌로서, 교회의 머리이신 JC와 연합된 몸의 지체가 되도록 구원영생은혜의 뜻안에서 계획하셨음을 믿고 바로 그렇게 연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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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5769, 올람) 영원, 긴 기간, 고대, 옛날, 미래
올람(명남)은 '영원, 긴 시대(기간), 고대, (먼) 과거, (먼) 미래, 세상'이란 의미를 지닌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440회 나오며, 다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a)  올람은 일정 기간의 범위를 나타낸다.
종의 고용 기간(신 15:17, 출 21:6), 사무엘의 성전 봉사를 위한 헌신 기간(삼상 1:22), 아론의 자손들의 제사장 복무 기간(출 29:9)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모든 경우에 그 기간은 사람의 전 생애에 걸치며, 또한 그 생애 내에만 국한된다. 이것은 평생 왕직의 약속의 경우(삼상 13:13), 모세가 생존하는 한 백성들이 그를 신뢰함의 경우(출 19:9) 혹은 평생 가신 관계의 경우(삼상 27:12)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모든 것이 그 관련자의 죽음과 더불어 종결됨은 물론이다.
(b)  올람은 '긴 기간'을 나타낸다.
① 올람은 개인 뿐만 아니라 세대나(예: 출 40:15, 출 32:13, 시 18[17]:51) 혹은 전 민족(수 4:7, 삿 2:1)에 대해 사용될 경우에도 역시 위의 (a)와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이러한 실체들의 쇠퇴와 더불어 그들의 시간도 종식된다.
이것은 '영원'이나 '영원'이라는 말들로 표현되는 관용구들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도 신뢰할만한 단서를 제공한다. 대상 16:36에서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하리로다"고 하였다. 찬양의 계속은 이처럼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민족의 영속과 연관된다. 사실상 대상 16:15에서 "영원히"와 "천대에"가 병행한다. 그러므로 관용구 "영원부터 영원까지"는 다른 문구 "대대로"(출 40:15, 사 13:20)에서 유래하였음이 아주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관용구는, 여기에서도 추상적이고 무한정적인 관점에서 생각되는 영원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결부된 인간의 생애와 찬양의 문제라는 점에서 그 진정한 의미를 되찾는다. 삼상 2:30과 삼상 3:13 이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은 추상적 불변성이 아니라, 인간과의 상호적 관계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고스란히 보존되는 한, 영원하지만 부서질 수 있다.
② 영원히 세워진 큰 약속이라도 단지 초시간적, 불변적으로 유효한 것이 아니다. 이 약속들은 살아계신 하나님 안에서 살아있는 관련점에 결속되어 있다. 성전의 영원성이 하나님의 임재에 달려있으며(왕상 9장), 왕권의 영원성도 그러하다(삼하 7장).
(c)  올람는 완전한 의미에서 '영원'을 의미한다. 인간의 생명은 제한되었으므로(창 6:3), 그 수명이 끝없는 지속의 바탕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완전한 의미에서 아이온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이 멸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영원히 살아계시고(신 32:40, 참조: 창 21:33)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며(참조: 사 40:28)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신다(시 90:2)라는 것을 의미한다. 영원은 무궁한 시간이다.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계시므로 말씀은 영원하며(사 40:8), 그의 구원은 영원하다(사 45:17)(참조: Arndt).
(d)  올람은 미래의 시간(출 14:13, 신 13:16, 신 23:3, 신 23:6, 신 29:29, 수 8:28, 미 4:7) 뿐만 아니라, 먼 고대의 시간도 의미할 수 있는 그 까닭을 설명해 준다(창 6:4, 신 32:7).
신 32:7과 욥 22:15에서 올람은 선조들의 시대를 가리키는 것 같다. 잠 22:28, 잠 23:10, 렘 6:16, 렘 18:15, 렘 28:8에서 이 단어는 다소 먼 과거를 지칭한다. 사 58:12, 사 61:4, 미 7:14, 말 3:4과 스 4:15, 스 4:19의 아람어 본문에서 이 단어는 바로 이전 시대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삼상 27:8, 사 51:9과 사 63:9, 사 63:11, 그리고 아마도 겔 36:2에서 이 단어는 출애굽 사건을 언급한다. 창 6:4에서 이 단어는 노아 홍수 직전의 때를 가리킨다. 이러한 과거에 대한 언급들 중에서 끝없음이나 무한의 개념을 지니는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각각의 언급은 살아있는 자들이 직접적으로 아는 시대 이전의 오랜 때를 가리킨다(CA. A. M).
여호와의 미래의 날과 관련하여 암 9:11, 미 5:2에 나타난다.
(e)  우리가 또 주목할 것은 서력 기원 전환기의 랍비 유대주의와 A.D.1세기의 묵시 문학에서(예: 에스드라스 하) 시간적 의미와 공간적 의미를 아울러 나타내는 올람의 아주 새로운 용법이다. 분명히 페르시아 사상의 영향 하에서 최초의 시간과 최후의 시간에 관한 구약의 진술들(사 24-27, 욜 2장)은 두 세계(aeons) 교리로 체계화되었다. 이 교리에서 유일한 공통 요소는, 하나님은 이 세계와 저 세계의 주이시며, 이 시대와 저 시대의 주이시라는 점이다. 이 시대는 불의와 죄, 고통의 시대이므로 이 두 세계는 대조적으로 관련된다. 장차 올 시대가 이 시대를 밀어내고 대신 들어서게 될 때 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니, 그 때에는 의인이 살 새 땅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 용어 아이온(aion: 영원)과 코스모스(kosmos: 세계)의 신약적 유사성도 이 사상에 근거한다. 대망되는 메시야가 미래 시대에 친히 오시거나 혹은 "메시야의 날"이 새 시대가 뒤따를 과도기로서 생각된다. 이것은 "이 시대"(헬, 호 아이온 후토스/ 히, 하올람 핫제), "장차올 시대"(헬, 호 멜론 아이온/ 히, 하올람 합바)라는 용어에 반영되어 있다.
사 64:3에서 KJV는 이 단어를 '세상의 시작'으로 번역한다. 시 73:12("항상")와 전 3:11("영원")에서 이 단어는 '세상'(world)으로 번역되는데, 이는 앞에 언급한 것과 같은 새로운 용법의 영향일 것이다. (참조: Arndt.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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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노라..등대, 촛대======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계1:12-15)
“등대” “촛대”의 히브리어를 <메노라-מנורה>라고 합니다. 성소에 들어가서 왼쪽에 있는 금 촛대를 <메노라>라고 합니다. 어두운 성소를 밝히는 역할을 했습니다. 제사장들은 성소 안에 있는 금 촛대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 <빛>은 영원한 진리를 상징합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모세가 시내산에서 불이 피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 나무 사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 떨기 나무에서 만난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 <메노라>입니다. <메노라-מנורה>는 이 땅에 말씀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보여주고 싶어 하시는 영원한 진리를 뜻합니다. 그 진리의 빛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소의 영원한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메노라-מנורה>에는 일곱개의 촛대가 있습니다. 일곱 교회를 상징합니다. 영원한 진리의 빛을 교회에 비춰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이 땅에 유일한 희망인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뜻합니다.
그 촛대는 항상 밝게 켜져 있어야 합니다. 진리의 빛이 꺼져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은 항상 밝게 빛나기 때문입니다. 그 빛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갈망할 것입니다. 그 영적인 교제를 사모할 것입니다. 영혼의 호흡입니다.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빛을 끊임없이 비춰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기도의 빛으로 충만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 성소가 하나님의 빛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그 성소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한 영혼, 그리고 한 영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사랑하셨던 그 한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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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27:4)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수1:5)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하니”(눅1:28)
<함께>의 히브리어가 <에하드-אחד>입니다. 영어로는 with입니다. 그 뜻 안에는 “하나가 되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에하드>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께서 삼위일체의 모습으로 함께 계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에하드>의 모습으로 함께 계시듯이, 한 영혼을 바라 보시면서 그 안에 함께 더불어 살기를 원하십니다. <에하드>는 완전한 연합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께서 믿는 영혼과 더불어 사실 것입니다. 결코 떠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나>의 문제를 하나님께 올려 드릴 때, 하나님의 문제처럼 여기실 것입니다. <나>혼자가 아닌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시는 그 삶.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그리고…
<에하드-אחד>는 “단 하나, 가장 중요한 하나, 가장 중요한 우선 순위”를 뜻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의 “한 가지 일”이 <에하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뜻을 정하며, 인생에서 하나님만을 고백하고 싶어 하는 그 마음 중심이 <에하드-אחד>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영혼에게 하나님은 늘 함께<에하드-אחד>하실 것입니다.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늘 함께<에하드-אחד>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에하드-אחד> 하시지 않는 인생의 영역은 없습니다.
그런 영혼의 고백은 단 한가지<에하드-אחד>,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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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창49:22)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출1:7)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1:3)
히브리어 <파라-פָּרָה>는 “중다하다, 열매를 맺다, 풍성한 결실을 맺다, 생육하다, 자라다, 증가하다, 무성하다”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 하신 후에 피조물에게 가장 먼저 축복하신 것이 <파라-פָּרָה>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은혜 주신 것도 약속의 땅에서 <파라-פָּרָה>의 축복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의 집안이 누렸던 축복도 하나님 안에서 풍성한 결실을 맺는 <파라-פָּרָה>의 축복이었습니다. 요셉 지파 또한 무성한<파라-פָּרָה> 가지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파라-פָּרָה>의 축복은 천국을 상징합니다. <파라-פָּרָה>는 “열매 맺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씨를 뿌린 후, 한 여름의 혹독한 시간을 지나서 가을의 추수기를 거쳐서 열매를 얻게 됩니다. 천국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혼이 이 땅에서 수 많은 어려움을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이겨낸 후, 천국의 아름다운 열매를 누리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낙원>을 히브리어로 <파르데스-פרדס>라고 합니다. 풍성한 열매로 가득한 정원을 의미합니다. <파라-פָּרָה>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풍성한 열매로 가득 찼던 에덴 동산은 <낙원>을 상징합니다. “아가”서에서는 <낙원>을 석류로 가득 찬 과수원(아4:13)으로 묘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 누렸던 풍성한 열매, 무성한 가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낙원, 천국을 바라 보는 믿음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파라-פָּרָה>와 <파르데스-פרדס>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으로 가득한 은혜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풍성한 은혜를 사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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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찌어다”(시29:1) “대저 궁창에서 능히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 권능 있는 자 중에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시89:6)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모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욥12”13)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시118:16)
히브리어 <게브라-גבורה>는 “힘, 권능” 능력, 권세”를 의미합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의 힘을 말합니다. 그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뜻합니다. 
<게브라-גבורה>는 “전능, 위대, 강력, 전능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와 권세 곧, 그 어떠한 피조물도 감히 하나님께 대항 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이심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게브라-גבורה>의 권위는 모든 피조물에게 절대 순복을 요구합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만드셨기에 그 권한은 절대 하나님께 있으십니다. 그 순복을 히브리로 <쉐마-שמע>라고 합니다. “듣다”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는 피조물인 사람에게 “들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권위가 은혜와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영혼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권능을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조금의 제한도 없으십니다. 그 능력의 권한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권능을 순종하는 영혼을 위해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쉐마-שמע> 영혼이 순종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영혼입니다. 
그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곧 하나님의 Presence가 그 순종하는 영혼에게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영혼에게 보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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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그를 거룩하게 하라 그는 네 하나님의 식물을 드림이니라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나 여호와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자는 거룩함이니라”(레21:8)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6:3)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벧전1:16)
“헌신하다”의 히브리어가 <나자르-נזר>입니다. <나실인>이 <나자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진 사람”을 뜻합니다. 
<나자르- נזר>는 “바치다, 봉헌하다, 드리다, 헌신하다”의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 정확한 의미로는 “구별되다, 성별되다, 분리되다”입니다. 
사람의 눈에 드러나는 헌신과 봉사 보다도 하나님 앞에 거룩히 성별 되려는 그 마음 중심을 더 기쁘게 받으시는 하나님입니다.
봉사와 정성도 중요합니다. 헌신과 열정도 중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성별 되어진 삶의 태도는 훨씬 더 중요할 것입니다. 
세상을 등지고 멀리 떠난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구별되어진 마음 중심을 뜻합니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을 깊이 경외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나자르-נזר>의 삶을 사는 영혼입니다. 그 영혼이 충성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충성을 히브리어로 <아만-אָמַן>이라고 합니다. “믿다, 충성되다, 진실되다”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믿음은 결국 세상에서 성별된<나자르-נזר> 삶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보기에 평범한 삶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은 귀히 보실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받은 소명이 무엇인지 여쭈어 보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먼저 거룩히 구별된 <나자르- נזר> 삶을 살고 있는지 살펴 보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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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시26:2)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시16:7)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시7:9)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후1:12)
히브리어 <킬야- הילכ>는 사람의 오장육부의 내장 기관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깊은 속마음과 생각을 의미합니다. “양심”이 머무는 곳을 <킬야>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는 마음 속 깊이 숨겨진 은밀한 생각을 <킬야- הילכ>라고 합니다.
<마음>을 뜻하는 히브리어 <레바-לִבָּה>는 심장을 의미합니다. 속 마음을 뜻합니다. 반면, <양심>을 뜻하는 히브리어 <킬야- הילכ>는 콩팥을 의미합니다. 마음 속에 숨겨진 동기와 태도를 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레바-לִבָּה>도 중요하지만, 그 마음 속에 숨겨진 동기<킬야- הילכ>와 태도는 더 중요할 것입니다. 
사람은 그 마음 중심의 태도를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확하게 다 보고 계십니다. 똑같은 말과 행동을 할지라도 그 마음 중심 속에 숨겨진 동기와 뜻은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를 연단하시는 목적 중의 하나가 그 마음 중심을 하나님의 심령으로 채우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 마음 중심의 태도<킬야- הילכ>를 말씀으로 다듬기 위해서 입니다. 아무도 모를지라도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보고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똑같은 행동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똑같은 말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전혀 똑같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내> 마음의 중심과 태도는 어떠할런지 하나님의 존전에 엎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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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것이라”(사10:21)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롬11:4)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왕하19:31)
“남은 자”를 히브리어로 <쉐아르- שְׁאָר‎>라고 합니다. 영어로 <렘넌트- Remnant> 라고 합니다. “남다, 남겨지다”의 <샤아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죄악을 심판하실 때, 보호 받는 자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믿음이 있는 자를 뜻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불로 심판하실 때, 롯과 두 딸이 남은 자가 되었습니다. 노아의 시대 때, 홍수로 심판 하실 때, 노아와 그의 아들들이 남은 자가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으로 심판하실 때, 고센 땅에 머물며 하나님을 경외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은 자가 되었습니다. 엘리야 시대 때, 바알과 아세라 신상에 절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했던 칠천명이 남은 자가 되었습니다.
“남은 자”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영혼들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 보는 사람들입니다. 세상과 구별 되는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믿는 영혼이 남은 자입니다.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영혼들입니다. 그 “남은 자”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영혼들입니다.
<남은 자>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속에서 보호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손이 함께 하는 영혼들입니다. <남은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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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시73:1)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을 찧어 낸 순결한 기름을 켜기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말고 등잔불을 켤찌며”(레24: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 목전에 내 손의 깨끗한대로 내게 갚으셨도다”(시18:24)
“순수한”의 히브리어는 <자크-זך>입니다. “맑은, 깨끗한, 정결한”의 뜻입니다. 조금의 불순물도 섞이지 않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그 어떤 첨가물이 들어가지 않는 모습입니다. 성소에 있는 금 촛대의 불은 항상 켜져 있어야 했습니다. 순수한<자크-זך> 감람유로 그 불을 밝혔습니다. 그 기름이 성령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죄로 인해서 타락할 수 밖에 없는 그 심령을 다시 순결하게 만들어 주시는 성령의 임재가 하나님의 <자크-זך>의 은혜입니다.
성소의 일곱개의 금 촛대가 순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조금의 불순물도 없는 정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 위에 순결한 감람유를 채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항상 순결한 불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 불이 영적인 깊은 교제이며, 예배입니다. 기도입니다. 정금으로 만들어진 금 촛대는 조금의 죄도, 흠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순결한 <자크-זך>어린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하나님 앞에서 순수한<자크-זך>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의 임재 속에서 마음이 순결해<자크-זך> 지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심령이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그 시간에 마음이 하나님의 영으로 순결해<자크-זך> 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배의 성소에서 성령께서 부어 주시는 순결한 영을 매일 경험하고 싶습니다. 그 은혜로 새롭게 하시는 순결한 심령의 축복을 누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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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6:16)
“완전히 비워지다”의 헬라어는 <케노시스-κένωσις>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시면서도 자신을 완전히 낮추셔서 연약한 사람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을 이루시고자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자신을 비우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케노시스-κένωσις>는 빌2:7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시며, 순종의 모습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의 핵심입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십자가의 고난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 없는 영화는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자신을 낮추고, 비울 때, 하나님께서 다시 높여 주시는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인생의 길을 걸을 때,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 곧 그 영광이 삶 가운데 함께 하시는 것을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내> 자신을 비울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의 그 말씀 앞에 더 엎드릴 수 있을까요? 라는 갈등을 많이 합니다. <케노시스-κένωσις>의 영성을 사모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보다 <내>자아가 더 크게 드러나는 것을 보고 놀랄 때가 많습니다.
<케노시스-κένωσις>의 영성은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사랑 속에서 연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안에 사시며 그 말씀의 생명력을 누릴 때 가능합니다.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케노시스-κένωσις>의 영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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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신32:11-12)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케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출35:31)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욥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