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역개정]시131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전능의 공급-양육자 엘샤다이. 405.주의친절한팔에..주품에품으소서..주내소망은..
****선지자-제사장-왕의 기름부음으로 살아가신 JC는 먼저 [Q말씀으로 복음전파-가르침-고치심의]선지자의 직무를 마치신 후 [자신을 대속제물로 드리심의] 제사장의 직무를 완성하신 다음, [부활승천하사] 왕의 직무로 들어가신다!! ****
@@[오늘, 매순간, 모든 만남에서] 내맘, 내눈과 귀를 열어주소서, 앙망하오니, 주여 나아온 이들 위해 무엇을 주시리이까, 지고지선의 진복, 오직 주님자신! 복음진리생명말씀! 구하오니 성령이시여, 오늘 매순간마다 일깨워 영혼몸 늘 새로이 채우소서 주님마음, 오직 사랑의 감동, 충만한 기쁨, 합치되어 하나된 주님평강, 바로 그 말씀 JC! 나아오는 사람마다 눈 들어 바라볼 때 모든 몸짓마다 친히 만나주소서, 감싸 주소서 새롭게 JC를 발견하고 믿어 영접함과 전적으로 의지함, 그 구원과 동행함안으로 이끄소서 @@
@@허물[말씀안의 생명과 성령, 사랑의 뜻을 벗어나 자행자제-치우침]--.죄[말씀안의 주뜻에부합하지 못함 = 말씀안의 참생명과 성령 순종-연합-누림 없음]--악[주님의 말씀을 거부/거절하기에 말씀이 없음]@@
**[[누가 하나님괴 같으랴!! ..하나님은 믿는, 절대긍정-절대신뢰-절대기쁨으로 하나됨을 사는 내게 절대 만족-절대진리-절대진복이요 영생이심 ]] ^^피상적인 허망한 색성향미촉의 오감 중독/상대적 일시적 만족감을 초월한 근원적 절대만족(무한 풍성-부요-충만-능력) * 열납하시며 열어주사 누리게 하시는 바 절대기쁨/절대긍정/절대신뢰의 유일무이한 초월적 근원적 진리 샘(길-진리-생명) * 지고지선의 진복=요동없는 초월적 절대 평강의 하나됨/거함/누림/의지-빼어닮음/행복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일시적/파괴적/자멸의 허망함으로 귀결됨 ::: Q불신/배역함의 미혹 도구 :=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 = 5욕(식성수물명)추구 + 5감만족중독(색성향미촉) << Q 말씀안에는 원하는 바, 이 모든 것에 대한 근원적 만족-기쁨-누림의 무한 풍성충만-영원한 공급, 더 나아가 영생이 있음
--------------------- =====여호와 구속자, 구속하시는 여호와=====@구속[무름(속량)/자유]회복---속전(지속적으로 정결케 하는 보혈의 능력)--보수./보응/심판 la'G:(1350, 가알) 되 사다, 속량하다, 구속하다, 근친의 역할을 행하다 [구속자 redeemer..근친/근족/혈연자 =고엘] 가알(동사)은 기본어근이며, '되사다, 도로 찾다, 속량하다, 구속하다 redeem, 근친 역할(권리, 의무)을 행하다'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어근은 '자기 친족을 어려움이나 위험에서 구하다'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 어근과 매우 유사한 어근 파다([d"P; , 6308): 구속하다 redeem) 사이의 한 가지 차이점은, 일반적으로 가알(la'G: , 1350)의 강조점이 구속자의 자격과 행함에 있는데, 반드시 근친이어야 하며, 근친의 특권이나 의무는 다름아닌 속량에 있다는 것이다.((JC가 바로 그러하시다..그는 태초이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신 아들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이미 예고된 대로, 참사람으로서 성육신하셨고 인성을 가지셨기에 [죄로 인해 자기의 모든 것을 사탄에게 넘겨주고 파산한 자들인]우리의 피를 나눈 근친/근족으로서 모든 면에서 참된 자격과 능력을 갖추신 유일무이한 고엘이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00회 이상 나오며, 칼형과 니팔형으로만 사용되었다. 가알은 착하고 진실한 사람이 자기의 친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포함하는 4개의 기본적인 상황에서 사용되었다. (a) 첫째로, 가알은 오경의 법령에서 궁핍한 때에 판 밭을 되사는 것이나 가난할 때 자신을 판 이스라엘인 노예를 자유롭게 하는 것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합당한 대가를 치르고 되사서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바로 그대로 각 사람에게 배정/배분된 대로 모든 것을 돌려주고 모든 권리를 회복시켜 지고지선의 진복 누림의 바탕을 제공하여 주는 구속의 일]로서 이런 매입과 무르는 일은 근친의 의무였다(레 25:25-54). 레 25:25에서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라고 하였다. 물론, 만약에 자신이 부유하게 되면 그 사람 자신이 그것을 '무를' 것이다(레 25:26). 한편, 가난한 자는 기업만이아니라 자기 자신을 동족 이스라엘인에게나(레 25:39)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타국인(레 25:47)에게 팔기도 하였다. 그를 속량할 책임은 가장 가까운 친척 - 형제, 삼촌, 사촌들, 가족의 혈족 - 에게 있었다(레 25:25, 레 25:48, 레 25:49).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친척을 속량한 redeemed 자(혈연자)는 '근족 - 구속자'로 알려져 있었다. (참조: EDBW). ---가난한 자의 구제에 관한 가장 유명한 실례는 수혼법에 대한 구약성경의 증거가 가장 광범위하게 미치는 룻기에 있는 것 같다. 신 25:5-10에 의하면, 남편의 형제는 후사 없는 과부를 취하여서 씨를 영속시키고, 남자 후손과 결부되어 있는 땅의 계승을 보증해야 했다. 여기 [수혼법의 실행 의무]에서 그것을 실행하는 근친은 야밤이라고 불리어지며, 어근 가알은 사용되지 않는다. ....룻의 상황에서는 두 가지 것들, 즉 밭을 되사는 것과 수혼이 언급된다. 근친은 밭을 사는 것을 기꺼워했지만, 룻과 결혼하는 것은 기꺼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의 요지는 나오미가 가난하여 밭을 팔 수 밖에 없었을 때, 근친은 그녀를 위해 그 밭을 되사야 했다는 데 있다. 그는 후사 없는 형제의 과부를 위해서 이 일을 기꺼이 하려 했지만, 그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그 근본을 모르는] 룻과 결혼하여 그들의 기업을 지속시킬 자손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그는 거부하였으며 여기에 보아스가 개입하였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것, 즉 친족과 수혼은 구별되어야 한다. 고엘(구속자)이란 단어는 후자의 제도를 가리키지 않는다. ....레게트(Leggett)는 룻기에 구속적이고 메시야적인 유형론의 주제가 들어있다고 보았다. ...."고엘(goel)로서의 보아스의 행동들에서 우리는 보아스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가 예시되어 있음을 보았다. 보아스가 구속의 권리를 소유하였으면서도 분명히 룻을 위하여 개입할 의무(까지)는 없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보라...룻은 나오미의 견해를 따라서 겸손하게 자신을 신부로 취하여 후사를 낳도록 해 달라는 뜻으로 보아스의 이불을 들추고 눕는다!!...겸손과 순종의 극치이다!!)) ....보아스가 이 가난한 과부들의 곤경을 보았을 때 그의 생애가 여호와와 여호와의 율법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었으므로 그들을 구원하러 왔던 것과 같이 메시야의 경우도 그의 생애가 하나님의 법에 의해 지배되고 또한 그가 가난한 자들과 억압 받는 자들을 공정하고 정당하게 대우하실 것이라는 사실이 예언되었다(시 72:2, 시 72:4, 시 72:12, 시 72:13, 사 11:4). (b) 둘째로, 가알은 재산이나 여호와께 바쳐진 희생제물 아닌 짐승들을 무르는 것, 혹은 부정한 짐승들의 첫 소산을 무르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레 27:11-33). 이 [속전!!]사상은 인간이 교환물로 그에 상응하는 것을 여호와께 바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속전은 부정직한 교환을 피하기 위해 약간의 추가 몫이 제공되었다. 이런 경우에 무르는 자는 친족이 아니라 재산의 주인이었다. (c) 셋째로, 가알은 살해당한 사람을 대신하여 "피의 보수자"(RSV '보복자' revenger)가 되는 가장 가까운 친족을 언급하는데 사용되며, 칼 분사 고엘로 나타난다. 고엘은 구속자이며, 이 구속자는 '피의 보수자'로 불리우는데, 그의 임무는 자신의 친척을 살해한 자를 처벌하는 것이다(신 19:6). 이 사상은 가까운 친족이 생명에는 생명으로 지불해야 한다는 것임에 틀림없다. 돈을 지불함으로서 집을 재매입하거나 노예를 속량할 수 있는 것처럼, 친족의 잃어버린 생명은 마땅히 살인자의 그에 상응하는 생명으로 지불되어야 한다. 친족은 피의 보수자이다. 이런 사형 제도는 피비린내 나는 숙원과 구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고엘은 죄없는 사형 집행인이었으며 따라서 살해되어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보수자'라는 의미로 12회 나온다(민 35:12, 민 35:19, 민 35:21, 민 35:24, 민 35:25, 민 35:27, 신 19:6, 신 19:12, 수 20:3, 수 20:5, 수 20:9).(참조: R. L. Harris). (d) 넷째로, 가알은 하나님께서 '구속자'로서 '구속하시는 행위'에 대해 사용되었다. ....출 6:6에서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라고 약속하신다(출 6:6, 참조: 시 77:15). 이스라엘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출 15:13). "하나님이 저희의 반석이시요 지존하신 하나님이 저희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시 78:35). ....이사야서에는 '구속자'라는 단어가 하나님을 지칭하여 13회 나오는데 모두 사 41- 63장에서 사용되었다. 가알은 하나님에 대해 9회 사용되었으며, 사 43:1에서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가알은 애굽으로부터의 구원(사 51:10, 사 63:9)과 바벨론의 포로생활로부터의 구원(사 48:20, 사 52:3, 사 52:9, 사 62:12)을 언급하는데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의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사 41:14)이며 '너희의 왕 이스라엘의 창조주'(사 43:14, 사 43:15)이며 '만군의 여호와'(사 44:6)이며 '야곱의 전능자'(사 49:26)이다. 그의 구원에 참예하는 자는 '구속 받은 자'이다(사 35:9). ....시편에는 종종 영적인 구원이 육적인 구원과 병행되어 나온다. 예를 들면 시 69:18., "내 영혼에게 가까이 하사 구속하시며 내 원수를 인하여 나를 속량하소서". 시 103:2, 시 103:4.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윤택을 잊지 말찌어다...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이 그러하다(참조: EDBW). [욥19:25,26,27]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25. "And as for me, I know that my Redeemer lives, And at the last He will take His stand on the earth. *26. "Even after my skin is destroyed, Yet from my flesh I shall see God; *27.Whom I myself shall behold, And whom my eyes shall see and not another. ....유명한 구절, 욥 19:25에서 고엘이란 단어는 흠정역성경에서 '구속자' redeemer로 번역되며 어떤 이들은 이 단어가 속죄의 사역을 하러 오실 그리스도의 오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히브리어 "파다"에 의해 더욱 특징적으로 표현될 것이다. ....이제 욥 19:25에 나오는 이 단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결국에는 욥을 죽음의 먼지에서 구속할 친구이자 친족으로서의 하나님의 사역과 더욱 정확하게 관련된다. 욥 19:26의 난해한 어구, "이 가죽을 벗은 후에"는 다른 모음들과 함께 "내가 깨어난 후에"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NIV 각주와 욥 14:12-14을 참조하라. 욥 14:12-14에서 부활에 관한 욥의 질문은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그를 돌아보시며 욥은 나무처럼 제 2의 성장을 할 것이라는 그의 소망에 의해 절정에 달하게 된다 - 욥 14:14의 할리파는 욥 14:7의 할랍에 대한 응답이다). 어쨌든 욥은 마침내 자기 자신의 눈으로 자기의 고엘이신 하나님을 볼 것으로 기대한다(참조: R. L. Harris).
..[[사59:20,21]]..*2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21.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9:24]] *23.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24.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샤칼..알아들음) 나를 아는 것(야다)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빈 : 식별/분별/지각/이해) 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합당한 사랑/경외함/존귀히여김/친밀한 섬김동행-경험 체득한 바 참지식-심사숙고/주의집중-이해/총명/명철(샤칼)/통찰-배운바를 깨달아앎(=야다)/분별/지혜 [[성품/뜻과 길-기념이름-능력과 힘]]...추구할 바 ..[[미가6:8]]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의-인-신따라]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
--죄인괴수 죄성 지닌 자, 세상살이는 메섹과 게달의 장막에 사는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 탈취와 노략의 쟁투, 곧 환난의 날이라, 오직 구주JC께 부르짖어 그분안에 충만히 거하라. [시120] *1.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2.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3. 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 *4. 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숯불이리로다 *5. 메섹에 머물며 게달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 *6.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 *7.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 --이제, 마음 열어, 중심으로 동행하시는 영원반석/성채/산성-보혜사-인도하시며 지키시는 목자, 엘에제르 HS와 동행하라 [시121] *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3.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7.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보라, 그리스도를 살라, 사람들로 하여금 평강과 형통 허락하시는 네안의 여호와를 감사하며 흠모하고 기리게 하라, 자원하여 나아와 공예배에 함께 참석하기를 원하도록 만들라. [시122편] *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2.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3.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4.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5. 거기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 *6.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7.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8.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9.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네눈을 [세인의 조소와 멸시로부터]구주 JC께 돌려 중심으로 산 믿음 발휘함으로 앙망하라, 긍휼 구하라, 정복자 그 이상의 존재, , 허락하신 영생안에서 모든 이김을 감사하라 [시123편] *1.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2.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3.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4.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엘에제르, 임마누엘 여호와께 감사하라...[세인의 약탈-침노와 멸절로부터] 말씀의 뜻대로 행하시도다. [시124] *1.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였으랴 *2.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3.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우리에게 맹렬하여 우리를 산채로 삼켰을 것이며 *4. 그 때에 물이 우리를 휩쓸며 시내가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며 *5. 그 때에 넘치는 물이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 할 것이로다 *6. 우리를 내주어 그들의 이에 씹히지 아니하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7.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8.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지고지선의 진복은 오직 구주로 사는 (선을 행하며 정직하게 동행하는) 기독자들은 여호와의 선대하심/평강형통 깨닫고 감사하라.. [시125편] *1.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2.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3. 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들로 하여금 죄악에 손을 대지 아니하게 함이로다 *4. 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 *5.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부활-오순절-해방/회복]구속 은혜 기쁨안에서: 섭리의 때, 해방 감격 = 전존재로 누리는 영적 기쁨과 감사, 실제적 형통 [모든 이들이 주께 돌이킴] 회복/부흥 추구 실행의 긍휼 간구 [시126편] *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2.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3.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솔로몬에게 깨닫게 하신 말씀--친히 집과 가정을 세우며 지키시는 전능-은혜 구주를 높이며 친밀한 하나됨 이루어 따르라, 자랑-기쁨의 가정과 기업된 자녀들이여 [시127편] (솔로몬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3.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4.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5.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 경외함 : 야다-에셰르-바라크, 구주영접/영생부활생명의 은혜, 믿음소망사랑오래참음기쁨평강-감사/형통/번성/번영/창대함-- [시128편] *1.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2.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3.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4.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5.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6.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세상 악인들이 주님의 기독자, 영적이스라엘을 미워하며 괴롭히나 결코 이기지 못하리라..JC안에서 소명과 사명 이루라--- [시129편] *1.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도다 *2.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3.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4.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 *5.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 *6. 그들은 지붕의 풀과 같을지어다 그것은 자라기 전에 마르는 것이라 *7. 이런 것은 베는 자의 손과 묶는 자의 품에 차지 아니하나니 *8. 지나가는 자들도 여호와의 복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거나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한다 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부르짖음과 간구로 기도하며 주님을 앙망하노라--- [시130편] *1.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2.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4.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5.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6.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7.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8.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그러므로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바, 내마음은 임마누엘 여호와안에서 고요히 쉬며 앙망하노라----
1. 여호와여 내 마음이(레브) 교만하지(가바흐)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룸...높이다.처들다..일어나다) 아니하오며 내가 큰(가돌...위대한)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팔라...기이하고놀라운, 뛰어나고 비범한) 일을 하려고 힘쓰지(할라크..오가다) 아니하나이다 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네페쉬) 고요하고(다맘...잠잠하고 고요한, 침묵하는) 평온하게(샤와...일치/부합하다) 하기를 젖 뗀(가말...젖을 떼다)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네페쉬..중심) 젖 뗀 아이와 같도다 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앗타) 영원까지(올람)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야할...기대/앙망하고 바라며기다리다) -------- NASB]시131 1. {A Song of Ascents, of David.} O LORD, my heart is not proud, nor my eyes haughty; Nor do I involve myself in great matters, Or in things too difficult for me. 2. Surely I have composed and quieted my soul; Like a weaned child [rests] against his mother, My soul is like a weaned child within me. 3. O Israel, hope in the LORD From this time forth and forever. ======= 시편 131장 (개요) 이 시편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써 겸손하게 지어진 다윗의 겸손의 고백이다. 결코 헛된 영광을 추구하기 위해 씌어진 것이 아니다. 이 시편은 다윗이(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사울과 그의 신하들의 모략에 대한 답변으로 지은 것임이 거의 틀림없다. 그들은 다윗을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가장하고, 교만한 마음으로 나라를 노렸던 야심에 불타는 자로 묘사했다. 그러나 다윗은 그와 반대로 하나님께 호소한다. 1. 그는 높은 것이나 위대한 것을 결코 노리지 않았다고 함(1). 2.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할당해 주신 어떤 여건이라도 편안했다고 함(2). 3.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행한 것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모든 선한 백성들을 격려함(3). ---어떤 사람들은 “나의 마음이 교만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자들이 많기 때문에 다윗의 시편을 부르는 데 거부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이 시편을 우리 자신을 가르치고 권면하며, 다른 사람들도 가르치고 권면하기 위해 읽고 노래해야 한다. 참회하며, 또 그렇게 해 우리를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고 감사함으로써 겸손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 ------------ 겸손한 신뢰(시 131:1-3) 여기에 우리에게 위로가 될 두 가지 일이 나타나 있다. Ⅰ. 우리의 성실성에 대한 자각. 이 사실은 다윗이 기뻐하는 것이었다. 그의 마음은 그가 받았던 비난과 그가 처해 있던 유혹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같이 걸었다는 것을 증언할 수 있었다. 1. 그는 높은 지위를 원하지 않았고, 세상에서 두드러진 위인이 되기를 갈망하지도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셨다면 그는 양의 우리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것같이 그의 일생을 지내기에 만족했을 것이다. 그의 형은 격노하여 그가 교만하다고 비난했지만(삼상 17:28), 그 비난은 근거가 없는 것이었고 부당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아신다. (1) 그는 자기 자신의 의견이나 공로를 자부하지 않았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나이다.” 겸손한 성도들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을 높이 평가하지 않으며, 자신의 옛 모습을 사랑하지도 않고, 자신의 달성이나 성취를 과장하지 않는다. 마음을 지배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지나친 자애를 정복한다. (2) 그는 업신여기는 자세나 높은 것을 바라보는 자세를 갖지 않았다.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옵니다. 나는 내 위에 있는 자들을 부러워해 바라보지도 않으며, 나보다 아래에 있는 자들을 경멸하여 바라보지도 않나이다.” 교만한 마음이 있는 곳에 주로 교만한 모습이 있다(잠 6:17). 그러나 겸손한 정치가는 그의 눈을 그리 높게 올리지 않는다. (3) 그는 그의 지위보다 높은 일에 관여하지 않았고, 그에게 너무 큰 일이나 높은 일에 종사하지 않았다. 그는 너무 높은 것을 연구하는 데 시간을 소비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묵상으로 삼았으며, 즐거운 사색이나 의심스러운 논쟁거리로 즐거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씌어진 것 이상으로 현명하게 되기를 탐하지도 않았다. 하나님과 우리의 의무를 안다고 함은 우리에게 충분히 높은 것을 배움과 같다. 그는 너무 큰 일에 힘쓰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추구했고, 결코 정치가가 되기를 준비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병사가 되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의 형이 전쟁터에 나갔을 때 그는 집에서 양을 지키기 위해 머물러 있었다. 우리의 영역을 지키며, 우리가 보지 않은 것을 참견하지 않고,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것을 간섭하지 않음이 우리의 지혜며, 우리의 찬양이 된다. 방백들과 학자들은 사람들에게 너무 크거나 높은 일에 관심하지 말아야 한다. 낮은 자리에 있는 자들과 평범한 능력을 가진 자들은 그들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을 바라지 말아야 하고, 실속 없이 뽐내지 말아야 한다. 과도한 명예에 매혹되는 자들은 부끄러움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2.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상황에 잘 적응했다(2절).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다.” 그가 교만하게 왕국을 노리지 않았던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기름부으신 이래로 그는 누구에게도 오만하게 대하지 않았으며, 때가 이르기 전에 왕관을 얻으려 시도하지도 않았다. (1) 그는 어미 품에 있는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했고, 높은 것을 바라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루기 쉽고, 다스려지기 쉬울 정도로 겸손했다. 어머니나 유모의 뜻에 따르는 아이처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 품에 있는 아이처럼, 그는 왕으로 임명되었지만, 자기 자리를 고수하거나 발전된 미래를 전망하면서 자신을 높이 평가하지도 않았다. 우리의 구원자는 이와 같은 비유로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치셨다(마 18:3). 우리는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한다. (2) 그는 어린아이가 젖을 뗐을 때의 그 가슴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부귀와 영광에 무관심한 것 같다(하몬드 박사는 이렇게 해석한다). “나는 젖뗀 아이처럼 고요하고 평온했다.” 이 구절은 어린아이가 어머니 품을 갈망하듯이 우리의 마음은 본성적으로 [익숙해져 있던]세상적인 것들을[육신의 정욕-안목의정역-이생의 자랑] 갈망함을 암시한다. 그와 같은 방법으로 그것을 좋아하며, 그것을 위해 부르짖고 기뻐하며,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처럼 반응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성화된 영혼은 그러한 세상적인 것들을 마침내 [끊어내야 할 시점에 오면 배설물처럼]버린다. 이 때[하나님의 도우시는]섭리는 가슴에 쓴 쑥을 발라놓고 젖을 떼도록 우리를 돕는다. 아마도 [성화된 영혼속의]어린아이는 젖을 떼는 동안 성을 내며 안달할 것이다. 그리고 [유방이 말라 비틀어져서]젖을 잃었을 때 원상태로 돌아오기를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지나면 그것은 잊혀진다. 애타는 시기가 지나고, 새로운 음식물이 충분히 공급되며, 이제는 젖이 아니라 단단한 음식에도 잘 적응하며 견디게 된다. 이와 같이 은혜로운 영혼은 사랑하던 것의 상실과 바라던 것에 대한 실망에도 평온하며, 어떤 일이 일어나도 고요하다. 하나님과 언약의 은총에 의해 안전하게 살아간다. 그때 피조물의 메마른 젖가슴이 드러나게 하실 것이다. 우리의 상황이 마음에 맞지 않을 때 우리는 마음을 상황에 맞추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평안하게 되며, 만족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은 “젖 뗀 아이와 같이” 된다. Ⅱ. 하나님에 대한 확신. 다윗은 신뢰의 은택에 대한 자신의 경험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갖도록 추천한다(3절).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다윗은 그에게 주어질 왕관을 인내심 있고 조용하게 기다릴 수 있었지만, 그가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때가 차기 전에 그를 위해 어떤 일을 시도하려고 준비했다. 그는 그들을 조용하게 하려고 노력하며, 그들이 적당한 시기에 사건의 국면이 평화롭게 변화되는 것을 보도록 하기 위해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하고 명한다. “이와 같이 여호와의 구원을 소망하며,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유익하다.” ===== ==== Hb'G:(1361, 가바흐) 높다, 고귀하다 가바흐(동사)는 기본어근이며, '높다, 고귀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34회 나온다. 1. 칼형에서 (a) '높다, 키가 크다': 사람(겔 19:11, 겔 31:5, 겔 31:10, 겔 31:14), 하늘(욥 35:5, 사 55:9, 시 103:11), 사람(삼상 10:23)에 대해 사용되었다. (b) '높게 되다, 고귀하게 되다': 위엄과 영예의 사람(욥 36:7), 여호와의 종(사 52:13), 하나님(사 5:16), 하나님의 길(사 55:9)에 대해 사용되었다. (c) ① 좋은 의미에서 '고양되다': 대하 17:6에서 여호와의 도로 고양되는 것을 묘사한다. ② 나쁜 의미에서 '교만하다': 시 131:1, 잠 18:12, 대하 26:16, 대하 32:25, 겔 28:2, 겔 28:5, 겔 28:17, 사 3:16, 렘 13:15, 겔 16:50, 습 3:11. 2. 히필형에서 '높이다, 높게 만들다': 나무(겔 17:24), 벽(대하 33:14), 문(잠 17:19), 보금자리(렘 49:16, 옵 1:4), 거처(시 103:5), 요구(사 7:11), 낮은 자(겔 21:26), 불티(욥 5:7), 독수리(욥 39:27)에 대해 사용되었다.(참조: BDB). --------- !Wr(7311, 룸) 오르다, 일어나다, 올리다, 높다, 높이다 룸(동사)은 기본어근이며, '오르다, 떠오르다, 일어나다, 생기다, 올리다, 높이다, 높디'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90회 나온다. 룸과 그 파생어들의 비제의적 용례에서 3가지 넓은 개념 영역은 문자 ① 문자적인(실제적인) 높음, ② 영광 및 존귀와 같은 긍정적인 개념들의 상징으로서의 높음, ③ 오만 및 교만과 같은 부정적인 개념의 상징으로서의 높음을 나타낸다. 칼형은 '높다'라는 정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으며, 또는 높이 오른다는 동작을 암시할 수도 있다. 위에 언급된 세 가지의 넓은 의미 영역이 모두 발견된다. 이 단어가 백성의 높음(신 1:28), 별들의 높음(욥 22:12) 및 에스겔의 이상에서 천사들이 실제로 올라가는 것(겔 10:16), 방주가 떠오르는 것(창 7:17)을 언급할 때는 문자적인 높음을 가리킨다. '높은 소리'는 큰 소리를 뜻한다(신 27:14). 일어나다는 '나타나다'를 뜻하는 관용어이다(출 16:20, 한글개역, "벌레가 생기고", 문자적으로는 "벌레가 일어났다". 구약성경에는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 몇 개의 관용어가 나온다. 가장 빈번한 용법은 하나님의 높으심에 대해 사용되어 하나님의 높은 지위를 표현한다("하나님을 높일찌로다", 삼하 22:47, 시 18:46, 참조: 시 113:4, 사 6:1). 지혜는 너무 높아서 미련한 자가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기술되어 있다(잠 24:7). 구원은 구원받은 자의 머리의 높이와 동등하다(시 27:6, 문자적으로는 "내 머리가 내 원수들보다 높다". 이 구절은 전형적으로 수동태 "들리다" Be lifted up라고 번역됨을 주의하라. 한글개역 "내 머리가...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상대적인 높이는 상대적인 정치적 지위를 표현한다(민 24:7). "높은 손"은 승리를 상징한다(민 33:3). 하나님의 높은 손은 심판할 준비를 나타낸다(사 26:11). 높은 뿔은 기쁨을 가리킨다(삼상 2:1). 부정적인 관용어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높은 마음은 철면피(신 8:14)나 교만(겔 31:10)을 나타낸다. 높은 눈(시 131:1)과 높은 팔(욥 38:15)도 역시 주제넘음, 건방짐을 나타낸다. '높은 자' 혹 '오만한 자'(삼하 22:28)는 사악한 자를 나타내는 시어인데, 이는 마치 '고난 받는' 및 '겸손한'과 같은 용어들이 의인을 묘사하는 것과 매한가지다. 포엘형과 히필형은 위의 개념들의 사역적 의미를 표현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지위를 높게 할 수 있다(즉 그들을 '높일' 수 있다. 삼상 2:7, 왕상 16:2). 인간도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써 높일 수 있다(시 30:1, 시 99:5). 기타 관용어들로서 맹세를 하려고 손을 들어 올리는 것(창 14:22). 기도할 때 얼굴을 드는 것(스 9:6), 건물을 세우는 것(스 9:5)이 있다. 목소리는 도움을 부르짖을 때 높아질 수 있으며(창 39:15) 악기의 소리가 높아질 수 있다(대하 5:13). 히필형은 또한 제물, 특히 "요제물"을 드리는 것을 나타내는 전문 용어로 사용된다. 폴랄형과 호팔형은 위의 개념들의 수동적 의미를 표현한다. 히트폴렐형은 단 한번 나오는데 아마도 "스스로를 높이다" to exalt oneself(단 11:36)라는 재귀적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A. Bowling)(참조: BDB; Gesenius; TWOT). ------------ lwOdG:(1419, 가돌) 위대한, 큰 great 가돌(형용사)은 가달(ld'G: , 1431)에서 유래했으며, '위대한, 큰 great'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20회 나온다. (a) 가돌은 크기와 범위에서 '큰'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바다(민 34:6), 강(창 15:18), 광야(신 1:19), 비(왕상 18:45), 산(슥 4:7), 도시(창 10:12), 집(렘 52:13), 제단(수 22:10), 보좌(대하 9:17), 바다 괴물(창 1:21), 물고기(욘 2:1), 독수리(겔 17:3), 상수리 나무(삼하 18:9), 재물(창 15:14), 부요(단 11:2), 승리(삼상 19:5), 우물(삼상 19:22). (b) 가돌은 수에서 '큰'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민족(창 12:2), 회중(무리)(렘 31:8), 진영, 군대(대상 12:22, 겔 17:17), 희생 제사(왕하 10:19), 살륙(신 28:59, 삼상 4:17). (c) 가돌은 강도에 있어서 '큰'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두려운 일(신 4:34), 통곡(사 38:3), 권능(출 32:11), 기쁨(욘 4:6), 진노(신 29:23), 분노(렘 21:5), 죄(창 20:9), 죄벌(창 4:13), 악(창 39:9), 침해(겔 9:7). (d) 가돌은 소리가 '큰'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큰소리(창 39:14), 큰 곡성(출 11:6), 외침(수 6:5). (e) 가돌은 나이에서 '큰'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맏아들(창 27:1), 큰 딸(창 29:16), 큰 형(창 10:21), 큰 형(여)(겔 16:46). (f) 가돌은 중요성에서 '큰'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중요한 일이나 사건(출 18:22, 신 4:32, 삼상 12:16, 왕하 5:13, 왕하 8:13, 렘 30:7, 호 1:11, 욜 2:11, 욜 2:31, 습 1:14, 말 4:5), 위대한 사람(출 11:3, 삼하 5:10, 욥 1:3, 에 9:4, 전 9:14, 렘 27:7 등), 하나님에 대해(대하 2:4, 느 4:8, 느 8:6, 시 86:10, 시 99:2, 시 135:5, 사 12:6, 렘 10:6 등), 역사, 영광, 이름, 자비, 동정 등에 대해 사용되었다. (참조: BDB). ---------- al;P;(6381, 팔라) 뛰어나다, 비범하다, 기이하다, 놀랍다 팔라(동사)는 펠레(al,P, , 6382)에서 유래했으며, '뛰어나다, 비상하다, 비범하다, 기이하다, 놀랍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70회 나오며, '니팔, 피엘, 히필, 히트파엘형으로 사용되었다. 이 동사의 기본 의미는 "놀랍다"이며 히필형으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하다"라는 뜻이된다. 한편 피엘형에서는 "(서약을) 이행하다"라는 의미가 되며 레 22:21, 민 15:3, 민 15:8을 예로들 수 있다. 그러나 이 뉘앙스가 팔라의 다른 두 히필형 용례(레 27:2, 민 6:2)에도 존재한다. 이 동사와 실명사가 둘 다 하나님의 행위에 적용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은데 우주의 이적 또는 이스라엘을 위한 역사적 위업을 가리킨다. 즉 성경에서 이 어근 팔라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이례적 일들을 말한다. 그리하여 인간에게 그것은 놀라움(팔라)을 심어 준다. 따라서 "믿음을 위한 기적의 진정한 중요성은 그것의 물질적 실제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증언적 성격에 있다...일반적으로 말하여 기적을 기적되게 만드는 것은 정상과 다른 그 사건의 특이성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강력한 충격을 주는 것은 기적 안에 내포된 하나님의 돌보심 또는 보응에 대한 뚜렷한 인상이다"(Eichrodt). 덧붙이건대 본질적인 것은, 기적이 너무 비정상적이어서 하나님의 돌보심 또는 보응으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팔라는 인간에 대해서 약 15회 적용되었다. 그 경우 팔라의 핵심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다"에 있다. 그런 까닭에 풀 수 없고 접근할 수 없으며, 기이하고 권능있는 하나님의 행위가 바로 그런 것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① 신 17:8, "네가 판결하기 '너무 어려운' 일이 생기거든"(LXX에서는 adunatein). 동일한 헬라어 동사가 창 18:14의 번역문에서 사용되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예레미야의 두 구절(렘 32:17, 렘 32:27)에도 이와 동일한 수사 의문문이 나오는데 거기에서는 LXX이 그 단어 대신 크륍테인(kruptein)을 사용하였다. 슥 8:6: "이 일이 그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 하려니와". ② 잠 30:18, "내게 '심히 기이히'(LXX, adunatos) 여기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 서넛이 있으니". ③ 신 30:11,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KJV: hidden; LXX: huperogkos) 것도 아니요". 즉 그것은 접근할 수 있으며 따라서 알 수 있다. 삼하 13:2과 애 1:9에서도 동일한 헬라어 단어로 팔라를 번역하였다. ④ 이 어근은 또한 "믿을 수 없는"이라는 부정적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단 8:24과 단 11:36에서 "믿을 수 없는(한글개역: "비상하게") 음모"를 꾸미고 "믿을 수 없는(한글개역: "비상한") 참람한 것들"을 말하는 마귀적인 묵시론적 인물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데 그 경우가 바로 이 의미이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팔라가 사람에게 적용될 때는 풀 수 없고 이성을 초월하며 믿을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팔라가 하나님께 적용되는 경우는 시편에서 그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서 펠레와 니플라오트 사이에는 아무런 의미상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듯하며, 일반적 의미에서이든 아니면 특별한 역사적 선행 사건에서든 양자가 다 하나님의 이적들을 가리킨다. 예상되는 바와 같이 이 어근은 감사의 찬송시 혹은 감사의 기도로서 분류되는 시편들에서 최다수가 나타나며 역사적 시편인 시 78편, 시 105편, 시 106편에서도 물론 출현한다. 종종 그러한 시편들에서 핵심적인 동사는 "호다"(찬양하다, 시 9:1, H2, 시 75:1, H2 등)가 되는데 니플라오트가 호다의 직접 목적어로 쓰인 경우는 시 107:8, 시 107:15, 시 107:21, 시 107:31 뿐이다. 나아가서, 하나님이 행하신 기이한 일들을 입으로 낭송하라고 백성들을 권면하고 있는 시편에서 명령형으로 사용된 동사들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예배 의식 거행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였다. 여기에서 가장 빈번히 사용되는 동사는 사파르(말하다 tell)이다. 시 9:2, 시 26:7, 시 75:2, 시 96:3 등등. 그러나 다음과 같은 동사도 역시 사용되었다: 시아흐(...에 대해 이야기하다 talk of, 시 105:2(= 대상 16:9), 시 119:27, 시 145:5), 나가드(선포하다 declare, 시 40:5, H6, 시 71:17), 다바르(말하다 speak, 시 40:5, H6).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개개인이 묵상해야 함은 물론 공동으로 향유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사들이 갖는 기능은 단지 능력을 나타내는 데에 있지만은 않고 결국 그 수혜자나 낭송자가 자비를 얻게 하는 데에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시 107:8, 시 107:15, 시 107:21, 시 107:31에서는 니플라오트가 헤세드("자비" loving kindness, mercy)와 병행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기적"(시 31:21, H22)을 베푸신다(한글개역: "기인한 인자").(참조: V. P. HAMILTON). ---------- &l'h;(1980, 할라크) 가다, 오다, 걷다 할라크(동사)는 기본어근이며, '가다, 오다, 걷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00회 나오며, 다양한 문맥에서 그 문맥에 따라 '가다, 오다, 걷다, 떠나다, 나아가다, 계속하다, 지나가다, 행하다, 생활하다, 여행하다, (물이) 흐르다, 추방하다, 파괴시키다, 돌아다니다, 함께 가다, 교제하다' 등 여러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할라크는 특히 다음과 같은 용법들, 즉 명령적인 외침의 용법(창 37:13, 창 37:20, 창 19:32, 창 31:44), 다른 동사의 역할을 확대시키는 부정사로서의 용법(창 8:3, 창 8:5), 다른 동사의 역할을 구체화시키는 한정사로서의 용법(창 27:14, 창 50:18, 왕하 3:7, 사 2:3)에 주목해야 한다. (b) 여러 종류의 '가는 행위'에 대한 구체적 적용은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뱀의 '기어 다님' creeping(창 3:14), 여우의 '노님' prowling(애 5:18), 배의 '항해' sailing(창 7:18), 물의 '흐름' flowing(창 2:14), 나팔 소리의 '커져 감' laying(출 19:19), 사람의 '걸어감' walking(출 14:29) 등이다. 다른 특별한 용법에서, 이 동사는 어떤 것의 끝을 의미하는데, 예를 들면, 비(아 2:11), 이슬(호 6:4), 바람(시 78:39), 슬픔(욥 16:6), 인간의 생명(창 15:2, 수 23:14) 등의 '끝'을 의미한다. (c) 이 단어는 가상적인 신(시 115:7)에 대해 사용되기도 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적용되기도 한다. 비록 신현현에 대한 기사에서는 일반적으로 다른 동사들이 사용되지만 신현현의 문맥에서 분명하게 할라크가 사용된 경우가 적어도 한번은 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창 18:33). 아마도 창 3:8도 역시 신현현의 문맥일 수 있지만 그 분사는 '여호와 하나님' 보다는 콜(음성)에 연결되는 것 같으며, 이때 그 번역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그날 바람결에 동산 전역에 퍼져 가던(going)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 신인동형론적으로 이해할 때, 하나님은 구름 위를 걸으시거나(시 104:3) 하늘에서 걸으신다(욥 22:14). 보다 더 흔하고 더욱 중요한 것으로서, 할라크는 심판이나 축복(삼하 7:23, 시 80:2), 특히 광야 방황 동안에(예. 출 33:14, 출 13:21) 그의 백성에게 오시는 여호와께 사용된다. 후자의 문맥과 관련하여 새로운 출애굽(사 45:2)을 기억하라. 광야에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궤를 뒤따랐듯이 그들은 의식에서 그 뒤를 따른다(드물게 할라크로 표현됨; 참조: 수 3:6, 민 10:32-36). (d) 배교는 그들이 다른 신이나 거짓 신을 '좇는다'(출 32:1, 렘 5:23)거나, 자기 자신의 악한 꾀(렘 7:24, 시 1:1)나 악한 마음(렘 11:8)을 추구하거나 어둠 속에 행하는 것으로(사 9:2 [H1]) 표현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한다(레 26:24). 진실로 경건한 자들은 그들이 행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른다(즉,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 왕상 3:14, 시 119:1 이하). 이 개념은 할라크 만으로도 나타낼 수 있다(체다코트, 사 33:15 등과 같이 단어 아하레와 함께 쓸 필요가 없다). 히트파엘형은 이와 관련하여 동작의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산 사람들의 좋은 예로는 에녹, 노아, 아브라함 등이 있다(창 5:22, 창 6:9, 창 17:1). (참조: L. J. Coppes; BDB). -------- !m"D:(1826, 다맘) 침묵을 지키다, 조용(고요)하다, 잠자코 있다. 다맘(동사)은 기본어근이며, '침묵을 지키다, 조용(고요)하다, 잠자코 있다(잠잠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30회 나오며, 칼, 니팔, 포알, 히필형으로 사용되었다. 1. 칼형에서 (a) 다맘은 '침묵을 지키다, 잠자코 있다(잠잠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다맘은 가끔 파국과 탄식의 문맥에서 발견되다. 아론과 에스겔은 사랑하는 자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지켜야만 했다(레 10:3, 겔 24:17). 유다의 장로들은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조용하게 앉아 있었다(애 2:10). 그러나 욥 29:21에서처럼 가끔 이 단어에는 강압의 개념이 결여되어 있다: "무리는 내 말을 들으며 나의 가르치기를 잠잠히 기다리다가". 사악한 자들(시 31:17)과 홍해에서의 애굽인들은 죽음으로 침묵하였다(출 15:16). 시편에서 몇 차례 이 동사는 조용히 명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침묵함에 대해 사용되었다(시 4:4).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해야 하며 끈기 있게 그분을 기다려야 한다(시 37:7). 그런데 고난에서 하나님의 구출하심은 시편기자로 하여금 침묵을 끝내고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였다: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시 30:12). (b) 삼상 14:9에서 '기다리다', 혹은 '가만히 서다'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의미는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해가 "머무르고" 달이 "그치도록" 간구했을 때 나타나는 뜻이며, 그래서 그는 아모리 사람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수 10:12-13). 이와 같은 기적을 태양열의 정지로 설명하는 그러한 해석가들은 이 단어를 해석하기에 보다 어려운 처지에 빠지는데, 특별히 달과 관련하여 고려해 볼 때 그러하다. 2. 니팔형에서 '침묵하게 되다, 잠잠해지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민족에 대한 심판은 '멸망하다'에 근접한 의미를 함축한다. 모압의 도시들(렘 48:2)과 두로의 섬의 성곽(겔 27:32)이 잠잠해지며, 전쟁하는 자들은 죽음의 적막에 이르게 된다. 예레미야는 이 단어를 다메섹(렘 49:26)과 바벨론의 군대(렘 50:30, 참조: 사 23:2)에 적용시키고 있다. 렘 8:14에서도 "멸망하자"라고 번역할만큼 죽음으로 침묵하는 것을 나타낸다. 3. 포알형에서 '스스로 고요하게 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시 131:2,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4. 히필형에서 '침묵시키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렘 8:14a에서 이스라엘을 운명 지우시는 하나님에 대해 언급한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멸하시며]".(참조: BDB; E. S. Kalland). ---------- hw:v;(7737, 샤와) 일치하다, 부합하다, 같다 샤와(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일치하다, 부합하다, 같다, 같게 되다, 닮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1회 나온다. 1. 칼형에서, (a) '~같다'(비교)(사 40:25, 잠 3:5, 잠 8:11, 잠 26:4), '~와 맞먹다, 대등하다'(보답에 있어서)(욥 33:27). (b) 분사에서 '동등한 (것), 대등한 (것)'(에 7:4), '부합한'(에 3:8, 에 5:13). 2. 피엘형에서, '평평하게 하다, 고르(게하)다'(사 28:25), '평온하게 하다'(시 131:2, 사 38:13), '놓다, 두다'(시 119:30). 3. 히필형에서, '같게 하다'(애 2:13, 사 46:5). 4. 니트파엘형에서, '비슷하다'(잠 27:15).(참조: BDB). ------------ lm'G:(1580, 가말) 대(우)하다, 나누어 주다, 행하다, 젖을 떼다, 익다 가말(동사)은 기본어근이며, (a) '(~을 충분히) 대(우)하다, 취급하다, 나누어 주다, 행(동)하다', (b) '젖을 떼다', (c) '익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37회 나오며, 칼과 니팔형으로만 사용되었다. 1. 칼형에서 (a) ① '~에게 나누어 주다, 행하다'(잠 31:12, 삼상 24:17, 창 50:15, 창 50:17, 잠 3:30, 사 3:9, 사 63:7, 잠 11:17). ② '~을 후대하다'(시 13:5, 시 116:7, 시 119:17, 시 142:7), '보답하다(상 주다)'(삼하 22:21, 시 18:20, 삼하 19:36), 나쁜 의미에서 '갚다, 보답하다'(시 7:4, 신 32:6, 시 137:8, 대하 20:11, 시 103:10, 욘 4:4). (b) '젖을 떼다', 어린 아이가 젖을 떼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삼상 1:22, 삼상 1:23, 삼상 1:24, 왕상 11:20, 호 1:8, 시 131:2, 사 11:8, 사 28:9). (c) '익다', 편도열매가 익은 것(민 17:8), 포도가 익은 것(사 18:5)에 대해 사용되었다. 2. 니팔형에서 '젖을 떼다', 이삭의 젖 뗌(창 21:8), 사무엘의 젖 뗌(삼상 11:22)에 대해 사용되었다.(참조: BDB; J. P. Lewis). ----------- lj'y:(3176, 야할) 기다리다, 기대하다, 바라다 야할(동사)은 기본어근이며, '기다리다, 기대하다 wait, 바라다, 희망을 하다 hope'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40회 나오며, '니팔, 피엘, 히필형으로 사용되었다. 70인역본에서 이 단어는 '바라다 hope'를 뜻하는 엘피조와 에펠피조로 번역한다. 야할은 니팔형으로 사용된 세 가지 용례들에서, '짧은 기간동안 기다리다'라는 단순한 개념을 지닌다. 예를 들면 노아는 비둘기를 보내기까지 "또 칠일을 기다렸다"(창 8:12). 겔 19:5에서는 "암 사자가 기다리다가 소망이 끊어진 줄을 알고 그 새끼 하나를 또 취하여 젊은 사자가 되게 하니"라고 했다. 이 개념은 또한 피엘형(욥 14:14)과 히필형(삼상 13:8)으로도 표현된다. 그렇지만 야할은 신자들에게 있어 '믿음, 신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결국 '인내심 강한 기다림'을 야기시키는 '기대' expectation, '소망' hope에 대해 사용되었다. 기대의 의미는 긍정적인 것이다. 즉 미래에 좋은 일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겔 13:6은 백성들이 거짓 선지자들의 공언에 의지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적절한 예이다: "사람으로 그 말이 굳게 이루기를 바라게 하거니와". 이 문구는 문자적으로 '그들이 그들의 말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속임으로, 그들이 스스로 속아 실제로 어떤 성취를 기대하고 있다. 시 71:14에서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라고 한다. 야할이 좋은 것을 나타낼 때, 70인역본에서 주로 '엘피조' 즉 '바라다'로 번역되었다. 이 야할(바라다 hope)은 고통을 없애주는 상상의 진정시키는 소망도 아니며(희랍 개념에서처럼) 불확실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야할(바라다 hope)은 의인에게 있어 기대의 확고한 근거이다. 이렇게 이것은 하나님께로 향해있다. 시편기자는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여호와께는 인자하심(히브리어 헤세드)과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시 130:7, 참조: 시 131:3)고 명령한다. 절망의 때에,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격려한다(시 42:5, H6, 또한 시 42:11, H12, 시 43:5). 그렇지만 이런 확신에 찬 기대에 대해서는, 욥이 "그가 나를 죽이신다 하더라도 내가 그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하리라"고 외치는 대목보다 더 잘 증거해 주는 것은 없다(욥 13:15). 그렇지만 ASV와 RSV는 이 구절을 "보라 그가 나를 죽일 것이니 나는 소망이 없다"(한글개역 -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라고 번역한다. 이것은 70인역본과 다른 역본들에 의해 뒷받침되는 케레(Qere) 대신 마소라본문의 케딥(Kethib) 독법을 따른 것이다. 이 경우에 욥의 성급함은 그가 여호와를 '인내하면서 기다리기를' 거부하였음을 나타내 준다: "내가 무슨 기력이 있관대 기다리겠느냐 내 마지막이 어떠하겠관대 오히려 참겠느냐"(욥 6:11). 그렇지만 야할(바라다 hope)은 바타흐(신뢰하다 trust)나 카와(기다리다 wait for, 바라다 hope for)와 의미가 비슷한 동의어이다. 예를 들면 미 7:7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나는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마지막 어구는 죄가 심판 당할 때, 하나님의 미래 행동에 대한 의인들의 확신을 분명하게 나타내 준다. 그러나 더욱이 이 절은 믿음의 근거이신 여호와 자신만을 숙고할 뿐만 아니라 그의 하나님의 구원 활동도 숙고하고 있다. 즉, 바랄 것은 인간의 상상에서 생겨난 어떤 요구 사항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과 그가 이루도록 제안하실 모든 것이다. 우리는 롬 8:28-29에 표현된 바와 같이, 기독교인의 확신을 상기하게 된다. 즉 경건한 사람은 확신에 차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할 것이다. 예를 들면, "주를 경외하는 자가 나를 보고 기뻐할 것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는 연고니이다"(시 119:74). 시편기자는 주의 규례(시 119:43), 주의 말씀(시 119:81, 시 119:114, 시 119:147, 시 130:5)을 바란다고 고백한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적 사랑에 대해서도 확신할 것이다. 예를 들면,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헤세드)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시 33:18),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애 3:21),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애 3:24) 등이다. "소망"은 현재 문제로부터의 구원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종말론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궁극적인 구원을 "바라는 것"은 모든 고난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전능한 도움을 약속하신 사 51:5을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내 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 섬들이 구원자의 오심을 앙망하는 것은 그가 그들을 구속하시고 구원할 능력 있다는 소망의 믿음을 소유하고 있음을 말해준다(참조: G. RAWLINSON). 미 7:7에서는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라고 고백한다. 여기서 야할 즉 "바라보나니"는 간절한 믿음으로 구원의 하나님을 기다릴 것인데, 하나님이 지체하신다 해도 이 믿음은 무너지지 아니할 것이다. 믿음이 있으면 소망도 있는 것이다(참조: W. J. DEANE).(참조: P. R. GILCHRIST; BDB).
========= (55강) 요한일서 5:18 신자와 죄 <본문>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한일서 5:18) <설교> 신자라면 누구나 죄 문제로 인해 많은 갈등을 겪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안되는데’라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결국 안된다고 여기는 그 길로 가고 있는 자신을 볼 때면 자신의 믿음에 대해 의심마저 들기도 할 것입니다. 분명 이웃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고, 또 사랑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타나는 것이 미움일 때면 ‘과연 내가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사람인가?’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18절)는 본문의 말씀은 우리를 더 크게 낙심케 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안다’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로서 난 신자는 범죄하지 않는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신자라고 하면서 여전히 범죄하는 우리는 결국 하나님께로서 난 신자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한다’는 내용은 3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6절의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는 말씀과 9절의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처럼 사도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범죄하지 않는다는 말을 거듭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과연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 하여 범죄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인간이 있을까요? 그럴 가능성은 전무합니다. 일단 하나님께로 나서 범죄하지 않는다면, 즉 죄를 범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적어도 그 사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가 필요 없습니다. 즉 범죄하지 않는 자신의 의로서 구원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를 보면 인간의 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신자라 할지라도 여전히 [스스로는] 선을 행할 수 없는 불의한 존재이기 때문에 죄악 가운에 있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심지어는 바울 자신까지도 죄로 인해 애통해 하며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까지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바울과 요한은 서로 모순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성경이 그럴 수 없음을 생각해 본다면 사도 요한이 범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뭔가 다른 의미가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는 ‘범죄하지 않는다’는 문구를 죄짓지 않는 것, 즉 우리가 죄라고 생각하는 그 어떤 죄도 범하지 않는 것으로 [피상적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말씀에서 벗어나고 흠이 되는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악한 생각도 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죄를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17절의 내용에 대해 말씀을 드린 바 있지만, 17절에서는 죄를 둘로 나누어 말하고 있습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죄에 두 종류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즉 어떤 죄는 사망에 이르고, 어떤 죄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든 사망에 이르는 죄만 범하지 않으면 천국 간다는 뜻도 되지 않겠습니까? 죄는 다 같습니다. 17절에서도 모든 불의가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범죄함에서도 사망에 이르지 않는 것은 어떤 경우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죄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죄에서 은혜를 바라본다는 것은 자신의 노력으로 죄를 이길 수 없음을 알고 깨달아 회개하였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뼈아픈 통회와 회개를 통해 신자가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의 죄를 없게 하였기에 사망에 이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3:5절에서도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의도적으로든 무심코이든 죄를 [ 모든 허물과 죄, 악을] 범한다 함은 결국 인자(변치 않는 사랑, 곧 주하나님, 구주의 언약적 사랑 안에 합당하게 일편단심으로 깨어 있어 동행하며 머무르리라 결심한 사랑)의 상호 언약을 어김으로써 JC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통렬한 자각이 있기 때문이며, 결국 인자에서 벗어남이 되어 하나님을 슬프게 함이요, 진실무망, 한량없는 구주의 사랑을 배반함이 되기에 아파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망에 이르는 죄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상관이 없는 자의 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지를 못한 채 살아갑니다. 죄의 결과에 대해서도 무지합니다. 결국 날마다 죄에 머물러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진실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죄인괴수된 자신을 비추어 보아] 죄가 무엇인가를 알며, 자신에게서 죄를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죄로 말미암아 애통하게 되고 예수님의 피가 은혜가 되어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하였음을 감사하며, [오직 성령의 은혜따라 구주이름부르며 하나됨의 연합 통해서 주님의 참생명으로 충만케 신진대사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을 대망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요한은 이것을 [의도적으로] 범죄하지 않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즉 사망에 이르는 죄에 있지 않다는 의미로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의도적으로, 고의적으로] 범죄치 않는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진정] 자신의 연약함과 불의함과 의를 행할 수 없는 무능함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망에 처한 자신의 본래 모습이라는 것을 자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나를 사망에 몸에서 건져주실 분은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