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교도 사상과 청교도 운동] 17세기 청교도 사상과 청교도 운동은 유럽의 근대화에 훨씬 더 넓고 큰 영향을 발휘했음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8세기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국을 비롯한 세계 최고의 문명국가들을 지켜내고 있는 것은 청교도 사상이요, 청교도 정신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 인류가 오늘의 행복과 평화를 누리게 된 것은 결코 청교도들이 남긴 유산과 무관하지 않다. 다만 그것이 청교도 사상에서 유래되었고, 그래서 수없이 많은 피를 흘린 사람들의 희생에 근거해서 발전되어져 나온 것임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청교도의 기여와 성취는 뉴잉글랜드에 건설된 미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류 역사의 근대화에 대한 수많은 이론들이 난무하지만, 먼저 미국의 역사와 뿌리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 청교도 운동이 남긴 위대한 유산 중에서 미국의 정치와 사회를 지탱해 나가는 결정적인 원리들이 청교도들에게서 나온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이전에는]전 세계는 오랫동안 신분제 사회로서 한 사람의 국왕에게서 출생한 후손들이 절대 권력을 가지고 마음대로 폭정을 하는 일들이 지속되었다. 그 주변에는 일부 귀족들이 지역을 나눠서 다스리던 봉건체제가 뒷받침하고 있었다. 청교도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국왕도 국가의 법률을 지켜야만 한다는 “입헌군주제”를 제기하였다. 청교도 혁명을 일으켜서, 귀족들과 시민들의 의견을 전혀 무시하고 의회를 폐지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짓밟은 찰스 1세를 처형하였다. 전제군주의 시대에서 사회계약론으로 넘어가는 첫 단계, 근대사회가 열리는 엄청난 변화의 관문을 청교도들이 열어놓았다.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은 국왕의 전제정치에 맞서서 독립국가를 성취하였고, 시민들의 참여와 평등한 인권존중의 나라, 아메리카 합중국을 건설하였다. 이러한 결정적인 근거는 청교도 운동의 강력한 영향력이 발휘되었기 때문이다. 16세기와 17세기가 지나가고 난 후, 근대 민주주의 운동과 혁명의 시대가 다가왔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과 볼세비키 공산주의 혁명은 혼란과 무질서와 계급화를 빚어냈고, 실패하였다. 청교도 운동은 심령의 감화를 통해서 직업과 가정과 사회를 새롭게 하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하도록 하는 진리의 기준과 윤리를 확고히 제시하였다. 첫째는 청교도들에 의해서 근대 사회의 경제체계를 뒷받침하는 “자본주의”(capitalism)가 잉태되고 발전되었다는 평가는 매우 주목을 받아왔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책,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pitalismus, 1904-5)은 지금까지도 그 주제에 대한 논쟁이 제기되고 있다. 베버의 논지는 경제발전에서 문화적인 요소들이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는 일반적 주장이다. 그는 특히 잉글랜드 청교도들의 윤리적인 생활에는 근면, 성실, 절약 등이 드러나는데, 이러한 윤리적 생활이 곧 자본주의를 축적하게 했다는 것이다. 베버의 사회 진단에서는 문화적인 요인들이 자본주의 정신의 탄생에 있어서 근원적인 요소로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이고, “청교도들의 생활 철학은 근대 경제적인 인간의 요람이었다”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그 배경에는 칼빈주의 예정 교리가 자리하고 있어서, 잉글랜드와 미국의 경제적인 역동성이 형성되도록 기여했다고 진단했다. 또 베버는 “시간은 돈이다”(time is money)는 벤자민 플랭클린의 말을 인용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하는 청교도의 "사치는 죄악"이라고 생각하는 노동 윤리에 대해서 주목했다. 이 책이 나온 후 지금까지 “베버의 논지”는 근대 사회과학 분야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버드 대학교 경제 역사 교수 데이빗 란데스 (David Landes, 1924– 2013) 는 한 국가의 풍부와 빈곤을 추적하여 볼 때, 문화적 요소들이 결정적으로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베버의 논지를 옹호하고 있다. 베버 학파에서는 사회 변화를 정확히 진단하는데 있어서, 물질적인 요소들보다 정신적인 요인들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순수하게 이념적인 요소들만이 더욱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려했던 것도 아니다. 청교도들이 칼빈주의 예정 교리의 영향을 받아서, 매우 근면하게 살아가는 심리적인 상태를 형성케 했다는 부분은 대단히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베버는 청교도들의 마을은 풍요하고 부요하지만, 오랫동안 변화를 겪지 않은 로마 가톨릭 마을 사람들은 전혀 성취 의욕도 없고 열심히 노력하려는 자세가 없었다고 지적했다. 기본적으로 청교도 신앙의 핵심이 예정 교리라는 것은 사실이다. 청교도 신학을 집약시킨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와 대 소 요리 문답서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베버가 검토한 바, 청교도들은 구원의 확신을 갖고서 거룩한 삶을 추구하면서, 그들의 수입을 저축하고 투자했고, 경제적으로 성공한 삶을 살았다. 청교도들은 칼빈주의 교리를 철저하게 신봉하면서, 세속화된 사회에 물들지 않고 금욕주의를 실현하였으며, 자본주의가 잉태되는 정신적인 토대를 제공했다고 보았다. 1958년 미국 경제사학자 렌스키가 더 많은 근거들과 통계 자료를 제시하면서, 베버처럼 요한 웨슬레도 역시 동일한 입장으로 청교도 정신을 높이 평가했다고 주장했다. 칼빈주의와 자본주의를 연계시킨 베버의 저술은 기금까지도 찬성하는 입장과 반대하는 쪽으로 완전히 양분되어 있다. 베버와 뜻을 함께하는 연구자들은 주로 사회학자들이 많다. 미국 기독교 사회학자 토니는 청교도가 17세기에 경건의 생활화로 개인적인 경제활동을 하면서 이익을 축적하는 자본주의를 새로이 형성했다는데 동의한다. 이러한 논지를 지지하는 사회학자들이 많은데, 국가적으로 시민들의 복지를 지향하는 경제적인 구조를 창출해 냈다는 것이다. 막스주의학자 크리스토퍼 힐은 경제적인 변화로 나타나는 것들은 이데올로기적인 발전의 원동력으로 간주한다. 미국 경제발전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청교도 윤리가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론은 “신 베버주의”라고 부른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청교도들의 경제활동은 아직 근대 산업사회의 생산구조가 아니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둘째, 청교도들의 의회정치가 근대 혁명을 가져온 정치적 발전의 전형이자 근거가 되었다는 평가도 주목하여야 한다. 프랑스 자코뱅 혁명과 볼세비키 혁명을 거치면서, 유럽 정치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는데, 그들이 등장하기 이전에 청교도 혁명이 더 근원적인 정치발전을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16세기와 17세기에 프랑스와 독일, 스위스, 네델란드 등에서는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종교전쟁이 지속되었었다. 청교도 혁명은 근대 개인주의 혁명과는 차이점이 크지만, 근대 민주주의 인권존중 사상이 시작된 발아 지점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왕정복고와 함께, 전제군주제와 주교체제, 귀족주의와 전통적인 문화로 되돌아가 버렸지만, 결코 청교도 혁명의 노력들은 영국 민주주의 발전에서 헛되지 않았다. 오늘날의 미국은 너무나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청교도의 신앙과 정치적인 이상은 미국의 정체성과 정치적인 기준을 세우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청교도를 이해하지 못하면, 결코 오늘날 세계 최고 강국으로 등장한 미국의 정체성을 결코 파악할 수 없다. 제임스 모론의 정치적인 분석은 지금까지도 가장 널리 인정을 받고 있다. 미국에서는 무한한 자유를 주장하는 개인주의와 세속화된 국가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것 같이 보이나, 그렇게 겉모습만을 드러내는 한두 가지 사건들에 의존해서 평가해서는 안 된다. 미국의 초, 중, 고등학교에 재학하는 모든 학생들은 1630년대의 보스톤과 청교도 윤리와 정신을 배우고 익히면서 자라난다.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 시대에도 미국이 전 세계를 향하여 도덕적 정치를 강력하게 주장한 바 있었다. 미국인들의 정치적 기초는 탁월하고 고상한 청교도적 도덕에 기인하고 있다. “언덕 위에 빛나는 도시”를 건설하려던 청교도들은 거룩한 공동체를 꿈꾸었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청교도들이 노동과 결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일상적인 삶의 교리를 발전시켰다고 평가했다. 셋째, 로버트 머튼은 청교도 운동이 새로운 탐구와 근대 과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음을 높이 평가하는 주장을 제시하였다. 청교도 운동의 중심지였던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가 자연과학을 중점적으로 발전시킨 학교는 아니지만, 중요한 자연과학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들이 청교도 후손들이라는 점은 기억할 만한 부분이다. ====== [웨일즈 대 부흥운동] 웨일즈 부흥운동의 주역 이반 로버츠 1904년 영국의 웨일즈 부흥운동의 주역은 이반 로버츠이다. 전형적인 웨일즈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로버츠는 성직자가 되기 위해서 신학교에 들어가 침체된 신앙의 회복을 위해 10년이상 기도했다. 그가 참석했던 한 집회의 주제는 ‘나를 굴복하게 하소서’였는데 이것이 특별히 로버츠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성령께서 “이것이 네가 필요로 하는 것이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로버츠는 앞으로 나가서 “오 주여! 나를 [온전히]굴복하게 하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후 그는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다. ===부흥의 불길 "놀라운 부흥이 웨일즈 전역을 덮고 있다. 나라 전체와 도시에서, 지하의 탄광까지 복음의 영광으로 불타고 있다." 1904년 이 거대한 영적 각성의 지도자는, 머리카락은 탄진으로 뒤범벅이고 손톱 사이에는 새까만 때가 낀 웨일즈 출신의 한 젊은 광부였다. 그는 웅변가의 어떤 기술도 없었고, 박학도 아니었다. 그가 알고 있는 유일한 책은 성경이었으며,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그의 거룩한 말씀에 대한 정열로 불타고 있었다. 어느날 로버츠가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웨일즈에 부흥을 보내실 것이며, 10만명의 불신자들이 그리스도께 돌아올 것을 계시하여 주셨다. 그런 후 성령님은 로버츠에게 앞으로 올 부흥은 프레리 초원에 불이 번지는 것처럼 영국에 퍼진 후,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전역에 퍼져갈 것을 보여주셨다. 이 비전에 불타서, 로버츠는 설교할 기회를 찾았지만, 전혀 없었다. 그는 그의 목사에게 설교를 시켜 달라고 간청했으나, 처음에는 당황한 목사가 이처럼 너무 열광적인 탄광 노동자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여러 번 더 간청한 후에, 목사는 마지못해 허락하였다. "좋아, 이반, 다음 주 수요일 저녁예배에서 설교를 할 수 있네, 만일 누군가가 남아서 듣는다면 말이야." 17명이 의아해하며 뒤에 남았다. 젊은 전도자는 담대하게 하나님께 들은 말씀을 선포하였다. 그의 메시지는 단순했다. 1) 당신은 생각나는 모든 죄를 하나님께 고백해야만 한다. 2) 당신은 생활 속에서 좋지 않은 습관은 모두 제거해야만 한다. 3) 당신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즉각 순종해야 한다. 4) 당신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대중에게 나아가야만 한다. 비록 로버츠의 설교는 미숙했지만, 목사와 17명의 교인들은 마음이 하나님을 만남으로 불타기 시작했다. 다음날 밤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젊은 설교자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으며, 부흥의 불길은 순식간에 다른 교회에 퍼져갔다. 그후 30일 안에, 3만7천명이 강단 앞에 나와서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했다. 그리고 5개월 안에, 10만명이 웨일즈 전역에서 울면서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모여들었고 결국 로버츠의 비전은 성취되었다. 양의 뿔이라고 불리는 신문은 다음과 같이 게제했다. "이반 로버츠는 무명의 청년이지만, 어느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는 순종하였다. 그는 자신이 지금의 사역에 인도된 것은, 성령님의 직접적인 인도에 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번의 의심이나 망설임도 없이 그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그가 어디를 가든지, 마음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불붙었다." 또 감리교 기록지는 이렇게 보고하였다. "웨일즈는 지금, 과거의 어떤 부흥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부흥의 격렬한 아픔과 환희의 한가운데 있다. 이것은 이른바 ‘도덕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웨일즈의 신문들은 새롭게 태어나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의 명단을 싣기 시작했다. 대학은 문을 닫고, 학생들은 하나님을 찬미하고 노래하면서 기도 모임으로 향했다. 어떤 기사에 의하면, 법정에서 재판관과 배심원이 심리를 중단하고 피고를 위해 기도하자 피고인이 그리스도를 영접했다고 한다. 부흥은 탄광 안에서도 똑같이, 갑자기 시작되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그대로, 로버츠는 영국에 급격한 부흥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영국에서 약 200만명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 그런 후에 성령님은 서유럽과 북유럽으로 부흥을 확산시켰다. 1906년 정신적 육체적으로 크게 지친 이반 로버츠는 공식적인 부흥 사역을 접었다. 그러나 그는 무의미하게 은퇴 생활을 보낸 건 아니었다. 다수의 소책자와 기사를 썼고, "The War on the Saints" 의 공동 저자로 책을 출판했으며 Overcome 잡지의 부 편집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0년대 말까지 로우골에서 활동하던 부흥 운동 사역자들을 도와 많은 기도 모임을 인도했다. 이반은 온 웨일즈 국민의 애도 가운데 1951년 소천했으며 3년 후 부흥 운동 50주년을 기념하면서 가장 큰 사역을 감당한 이반 로버츠를 기리며 그를 위한 기념비가 세워졌다. ===부흥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교회들은 몇번 흥미진진한 예배를 드리고, ‘부흥’했다고 선언한다.그러나 부흥은 그보다 더 큰 것이다. 부흥의 특징을 몇 가지 간단히 살펴보겠다. 첫째로 부흥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역사이다. 둘째로, 부흥은 하나님이 방문하신 것이다. 셋째로, 부흥은 성령 안에서 개인적인 겸손과 용서와 회복의 시간이다. 넷째로, 부흥하는 동안 성령의 기름 부으심 아래 두려움 없이 말씀을 선포한다. 다섯째, 성령의 임재에는 힘이 있다. 여섯째, 부흥은 지역사회와 국가를 변화시킨다. ---------- 박용규, 교회사학 제6권 제1집 (2007): 83-138 ===웨일즈 대 부흥운동(The Welsh Revival) 1904-1905 박용규(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교회사학 제6권 제1집 (2007): 83-138 ==목차 1. 웨일즈 대부흥운동의 발흥 2. 웨일즈 대부흥의 확산 3. 웨일즈 대부흥의 특징과 성격 4. 웨일즈 대부흥의 영향 ==맺는말 -------- 1904년과 1905년에 발흥한 웨일즈 부흥운동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나타난 가장 강력한 성령의 현시 가운데 하나였다. 이미 17세기부터 영적각성운동을 여러 차례 경험한 웨일즈 교회가 20세기에 막 접어들면서 또 다시 강력한 부흥을 경험한 것이다. 웨일즈 부흥운동은 당시 영미에서 일고 있던 복음주의 부흥운동과 밀접한 연계성을 지니며 발전했다는 사실, 강력한 성령의 역사와 사회개혁이 수반되었다는 점에서 근대 부흥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 모든 것보다 현대 영적각성운동의 역사에서 웨일즈 부흥운동이 갖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역시 그 부흥운동이 인도와 한국의 부흥운동을 필두로 아프리카, 호주, 미국, 중국에 이르기까지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진행된 부흥운동의 진원(震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웨일즈 대부흥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었다. 본고에서는 앞으로 좀더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논의가 이루어질 것을 희망하면서 웨일즈 대부흥운동의 발흥 배경, 발흥, 확산, 성격, 그리고 영향을 중심으로 웨일즈 대부흥운동을 역사적으로 기술하려고 한다. 1. 웨일즈 대 부흥운동의 발흥 1) 웨일즈 부흥운동의 영적 토대 1740년대부터 조지 휘필드, 하웰 해리스, 다니엘 로랜드 등 칼빈주의 감리교도들의 활동으로 강력한 영적각성운동이 일어난 웨일즈 지역은 1859년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루었고, 다시 1904년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다. 1859년 부흥의 열기가 시들면서 1904년 웨일즈 부흥운동이 발흥하기 직전의 웨일즈의 영적상황은 참으로 비참했다. 1871년 남부 웨일즈 지방, 1887년 서부와 북부 카마던(Camarthern), 1890년 글래스모건셔의 상류 가어샐렘(Caercalem), 그리고 Richard Owen을 통해 북 웨일즈에 나타난 영적각성이 말해주듯 1859년 이후에도 간헐적인 때로는 강도 높은 부흥의 조짐이 나타났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이후 나타난 신학적, 종교적, 사회적 변천은 웨일즈에 대단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특히 자유주의 신학의 발흥, 다윈의 진화론, 고등 비평, 심리학의 출현은 웨일즈 지방의 신학교와 신학생 그리고 목회자들에게 깊숙이 침투하고 있었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로랜드 윌리엄스는 1860년에 시작된 Essays and Reviews 잡지를 주도하면서 고등 비평을 웨일즈 지성인들에게 확산시켜 나갔다. 그가 웨일즈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던 Lampeter College 히브리어 교수였기 때문에 그 영향력은 한층 강했다. 뒤 이어 자유주의 신학을 선도한 애버딘 대학의 W. Robertson Smith, 진화론과 고등 비평을 융합시킨 찰스 고어(Charles Core) 모두 웨일즈의 신학적 변천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1837년부터 1852년까지 Bala Theological College 교장을 지낸 루이스 에드워즈(Lewis Edwards), 진화론을 신학에 도입하여 진화론의 원리를 영적가치 기준으로 주창한 웨일즈 출신 David Adams는 웨일즈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경험의 다양성>(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이 보여주듯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심리학은 종교를 주로 생물학적 반응으로, 회심을 본질적으로 “통상적이고 미숙한 현상”으로 치부해 버렸다.1) 이 같은 현상은 웨일즈 신학에 깊은 영향을 미치면서 교회를 살려야 할 신학이 교회로부터 생명력을 앗아갔다. 신학적 변천이 웨일즈 교회에 영향을 미치면서 당시만큼 웨일즈가 영적으로 침체되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채 사람들이 교회를 떠난 시대도 드물었다. 이제 남아있는 신자라고 해도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이것을 깊이 우려한 웨일즈 장로교 총회장 퀸딜란 존스(J. Cynddylan Jones)는 1902년 총회에서 “교단 신학”이라는 설교를 통해 현대 자유주의 신학을 깊이 우려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초자연적 존재로 믿으며, ... 성경을 초자연적 계시로 믿으며, ... 그리스도를 초자연적인 분으로 믿는다”2)고 역설했다. 그로부터 2년 전 1900년 6월 웨일즈 장로교 총회장 에반 필립스 역시 웨일즈의 신학적 변천을 깊이 우려하면서 이렇게 피력한 바 있다: “교회의 신앙이 인간의 노력에 의존하려는 이처럼 무시무시한 경향에 어느 정도 기울어져 있는지 모르지만 기독교 신앙을 무신론의 방향으로 끌어 들이려는 간과할 수 없는 오류가 분명히 존재한다. 헤겔의 철학과 진화론의 원리가 극단적 형태로 신앙의 영역에 범람하고 필시 가장 파괴적인 힘을 발휘하고 ... 오류의 영이 공중에 가득하게 되어 소리 없이 인간 지성의 잠재의식에 파고 든 영향은 사람들에게서 살아 계신 하나님, 인격적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빼앗고 있다”3) 회의적이고 심지어 무신론적인 책들이 신성해야 할 신학계에서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적지 않은 도회지의 교회 주일학교에서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속죄, 성령의 인격을 부정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다윈의 진화론이 과학계를 정복하고, 고등 비평과 자유주의 신학이 신학계를 장악하고, 심리학이 인간의 회심을 생물학적 반응으로 치부하고, 문학이 회의적이고 무신론적인 사상을 확산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교회는 위기를 만나고 있었다. 신학적 변천은 교회의 영적 생명력을 급감시켰고, 영적 생명력을 상실한 교회는 더욱 병들어 갔고 사람들은 교회로부터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성경의 권위를 상실한 설교는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1890년대부터 웨일즈 교세는 급감하기 시작 1900년까지 불과 10년 동안 12,844명이 감소했다.4) 이것은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었다. 비공식적인 통계까지 포함한다면 그 수치는 더욱 증가했을 것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인식한 이들은 부흥의 필요성과 긴박성을 소리 높여 외쳤다. 웨일즈 장로교 총회장 에반 필립스는 “부흥이야 말로 우리에게 가장 시급히 요청되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다른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만다.”고 강조했고, 1902년 11월호 웨일즈 장로교 월간지 <보고>는 “하늘에서 내리는 성령의 임재만이 그 가라지를 뿌리 뽑고 웨일즈 땅이 무신론과 불신에 희생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5)고 강조했다. 웨일즈의 영적 상태를 정확히 읽고 있는 자들은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종교만이 지금 웨일즈에 만연해 있는 도덕적, 영적 질병에 대한 유일한 치유책”이라는 사실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1902년 12월 <교회의 벗>에서 한 지도자는 만약 “내가 마지막으로 웨일즈 전역에 있는 동포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은 “현재 나의 조국과 민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성령의 특별한 임재를 통한 영적 부흥”이라고 결론을 내렸다.6) 바로 이런 상황에서 1904년 성령의 불길이 웨일즈 전역을 휩쓸었던 것이다. 곧 교회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을 돌려보내야 할 만큼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오전 10시부터 밤늦게 까지 쉴 사이 없이 교회에 모임이 계속되었으며, 교회마다 주일 하루 동안 세 차례 예배를 드렸다. 놀라운 영적부흥이 발흥한 것이다. 모든 부흥운동이 그렇듯이 1904년의 웨일즈 부흥운동 역시 하루아침에 태동된 것이 아니었다. 웨일즈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영적 각성운동의 토양을 제공해준 몇 가지 사건들이 있었다. 첫째 케직 사경회이다. 19세기 말 시카고의 무디 성경학교와 영국에서 해마다 케직(Keswick) 사경회가 열렸는데, 여기에 참석하고 돌아온 13명의 웨일즈 인들이 웨일즈에서도 그와 같은 사경회가 열리기를 간절히 염원하며 기도를 시작했다. 1903년 웨일즈 클랜드린도드 웰스(Llandrindod Wells: Welsh에서 Llan은 ‘클랜’으로 발음하며 ‘교회’를 뜻함)에서 첫 케직사경회가 열리면서 드디어 그들의 기도는 응답되었다. 케직사경회 기간 동안 몇몇 웨일즈 목회자들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회개, 변상과 화해, 예수님의 주권, 성화, 성령께 순종할 것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외쳤다.7) 둘째 젊은이들의 기도이다. 1903년에 접어들면서 네 명의 웨일즈 청년들이 매일 밤 웨일즈의 부흥을 놓고 기도를 시작했다. 기도 소식은 전광석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전해졌고, 많은 사람들이 기도모임에 합류하면서 기도의 열기가 더욱 강하게 타올랐다. 6개월간 매일 밤 기도회를 가졌으며, 매주 주일 저녁에는 특별집회를 열고 웨일즈 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어느 주일 저녁 특별집회 때 주께서 응답하셨다. 그 현장에서 모임을 이끌었던 침례교 목사 존스(R. B. Jones)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렇게 증언했다. “성령께서 임하시어 그 집회를 장악하셨으며 위에서부터 강한 능력으로 우리를 압도하셨다. ... 나는 거의 말을 할 수 없었으며 하나님의 임재가 너무도 분명하게 나타났다.”8) 특별집회가 열리는 주일 저녁에 성령의 임재는 여러 주간 계속되었고 그 현장에 있던 증인의 고백대로 “그 후 많은 영혼들이 매일 구원받았다. 우리 교회는 오순절의 축복을 받게 되었다. ... 이제 우리 교회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영혼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남녀 교인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9) 저녁 특별기도회에 참석한 수많은 영혼들이 영적인 재충전을 받거나 회심을 경험했다. 기도회에서 시작된 웨일즈의 부흥의 불길은 “성경과 역사 기록은 기도 없는 부흥이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는 루이스 킹(Louis L. King)의 말을 새롭게 환기시켜준다.10) 그 후 부흥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수 주일 동안 존스가 인도한 웨일즈의 앵글시(Anglesey) 섬 집회에 하나님의 임재가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존스가 이사야 6장을 가지고 하나님의 거룩한 빛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의 죄가 얼마나 더러운지, 제단으로부터 정결케 하시는 숯불을 가져다 그들의 더러운 삶에 대실 수 있는지를 설교하자 온 회중이 깊은 죄의식을 느끼며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각 개인의 심령을 감찰하시는 성령께서 내면에 숨겨진 은밀한 죄악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시자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존스가 증언한대로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어찌나 강하게 임하던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 앞에 그 자신도 그만 압도되고 말았다. 그가 서있던 강단이 온통 하나님의 빛으로 가득 차는 바람에 설교자인 자신도 뒤로 물러서서 목사실로 퇴장해야 했다.11) 성령의 강력한 임재가 회중들 가운데 나타난 것이다. 곧 이와 같은 집회는 웨일즈의 여러 곳으로 확산되었고, 특히 그로 인해 웨일즈 남부 및 중부 지방의 여러 교회들 가운데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웨일즈에서는 비록 모든 연령층의 사람들이 이 강력한 성령운동에 사로잡히긴 했지만 특히 청년들이 부흥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다.12) 셋째 플로리 에반스(Florrie Evans)라는 한 소녀의 간증이다. 1904년 2월 3일 주일 아침 웨일즈 남서쪽 해안휴양지, 카디건셔 뉴키(Cardiganshire, New Quay)에 있는 조셉 젠킨스(Joseph Jenkins)가 시무하는 예배당에서 젊은 사람들을 위한 기도 모임이 있었다. 기도 모임을 인도하면서 젠킨스는 영적체험을 경험한 자가 있으면 간중하라고 참석자들에게 요청하자 최근 회심한 한 소녀, 플로리 에반스가 일어나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구주 예수님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합니다.”13) ...저널리스트 스테드(W. T. Stead)가 말한 것처럼 그 소녀의 간증은 “마치 그곳에 모인 회중들에게 전기 충격과 같이 역사했다. 하나 둘씩 연이어 일어나 완전히 굴복했고 그 소식은 요원의 불길처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퍼져나가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며 심령들이 주께로 돌아왔다.”14) 이런 가운데 1904년 8월, 두 번째 “웨일즈 케직 사경회”가 열린 것이다. 케직사경회에 참석한 이들은 웨일즈의 부흥을 놓고 간절히 기도했고, 웨일즈의 여러 교회들이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이 6개월 간 매일 기도회를 가졌던 웨일즈의 한 교회에서 그해 말 120명이 회심했다. 그해 11월 20일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고 밤마다 기도회를 가진 교회도 있었고, 10주 동안 밤 기도회를 가지며 부흥의 은혜를 경험하고 150명이 회심한 교회도 있었다. 넷째 이 과정에서 몇몇 영적지도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카디건셔 뉴키에서 칼빈주의 감리교회를 담임한 조셉 젠킨스는 “하나님의 깊은 영적인 것들을 체험”하고 나서 웨일즈의 도덕적 사회적 타락에 동화되어 잠자는 영혼들을 깨우는 일에 전념했다. 조셉 젠킨스보다 웨일즈 부흥의 발흥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셋 조수아(Seth Joshua)였다. 1891년부터 전진운동에 동참하여 활동해온 셋 조수아는 1904년에 접어들어 초교파 복음전도자로 웨일즈 북부와 남부 지방을 순회하면서 순회전도에 전념하며 웨일즈의 영적각성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웨일즈에 영성보다 지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만연해 있는 것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깊은 말씀 연구와 기도생활이 뒷받침 된 그의 순회전도로 웨일즈에 영적 서광이 비추이기 시작했다. 그가 인도한 카디건셔 뉴키 지역의 집회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와 권능이 임했다. 1904년 9월 20일 조수아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부흥의 불길이 계속되고 있다. 나는 12시까지 심지어 새벽 1시가 되어서도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나는 수차례 예배를 폐회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예배가 시작되는 것을 통제할 수 없었다.” 이틀 후인 9월 22일 목요일 그 강도는 더욱 강했다. “오늘밤 우리는 또 한번 잊을 수 없는 집회를 열었다. 사람들은 자기 믿음을 완전히 확신하기를 갈구하면서 삼삼오오 무리지어 설교단으로 몰려왔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한명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이 기도에 동참했다는 사실이다. 불의 혀가 각 사람에게 내려왔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시간 감각을 완전히 상실했다.”15) 조수아가 인도한 집회에 성령이 얼마나 강도 높게 임했는가를 말해준다. 이어 그가 부흥의 불을 가지고 간 것은 존 필립스가 교장으로 있는 뉴캐슬 에믈린 예비학교였다. 25일 월요일에 시작된 이 집회는 처음 냉랭하다 27일 화요일 저녁부터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났다. 이날 조수아가 자신의 일기에 기록한대로 “오늘 저녁 많은 사람이 은혜를 받았다. 몇몇 학생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서 자신의 구원을 고백했다. 주님께서 이곳을 감동시키실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 속에 그런 갈망이 있었다.”16) 그 다음날 그 강도는 더욱 강했다. “내가 설교하기보다 성령께서 이끄는 대로 말하고 기도하고 찬송하도록 그들을 권면했다. 이것에 앞서 성령의 불이 그들 모두를 크게 감동시켰다. 그들의 영혼이 녹아 내렸으며 많은 사람이 소리 높여 구원을 간구했다. 이 예배로 말미암아 주님께 찬양하리로다.”17) 2) 이반 로버츠의 회심 이와 같은 영적각성의 움직임 속에서 웨일즈 부흥운동의 주역 이반 로버츠가 등장한 것이다. 1904년 후반 성령충만을 경험한 26세의 젊은 청년 이반 로버츠가 혜성처럼 등장한 후 부흥의 불길이 마치 요원의 불길처럼 웨일즈 전역에 솟아올랐다. 고향에서 부모님과 함께 모리아 칼빈주의 감리교회에 출석하며 광부이자 대장공 일을 하던 이반 로버츠는 “도저히 꺾을 수 없는 영혼의 간절한 열망,” “하나님의 백성의 부르짖음” 그리고 “성령의 역속과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18)을 깊이 확신한 후 칼빈주의 감리교회 목사가 되기 위해 목사 후보생으로 신학수업을 막 시작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복음 사역을 준비하기 위해 뉴키(New Quay)에 인접한 뉴캐슬 에믈린(Newcastle Emlyn)에서 신학예비수업을 하고 있던 로버츠를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이다. 본격적인 신학수업은 18세기 하웰 해리스의 부흥운동으로 유명한 탈가쓰(Talgath)의 트레베카(Trefecca) 칼리지에서 행해졌으며 그 이전에 뉴캐슬 에믈린에서 예비수업이 이뤄졌다. 로버츠는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신앙의 열정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찬송을 암송하고 성경 읽기를 좋아했으며, 기도 생활을 열심히 해왔다. 인근 마을의 어린이들을 위해 예배를 인도하거나 설교도 했고 주중 5일간 밤에 교회에 갈 정도로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다. 12살 어린 나이에 탄광에서 일할 때 저녁에 집에 돌아와 피곤한 가운데서도 몇 시간씩 성경을 얽었고 때로는 식사하는 것도 잊고 기도에 전념했다. 이반 로버츠는 웨일즈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11년 혹은 12년 전인 1891년부터 웨일즈의 부흥을 위해 기도해왔을 정도로 영적각성을 사모했다. “나는 부흥운동에 관해 읽거나 이야기하다 온 밤을 지새우곤 했다. 부흥운동에 관해 생각하도록 나를 움직이신 분은 성령님이셨다.”19) 1904년 봄에 로버츠는 일련의 비상한 영적 체험을 경험했는데, 그는 <리뷰 오브 리뷰스>(Review of Reviews)의 영국인 편집장 스테드(W. T. Stead)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아주 오래 동안 나는 기독교의 실패에 대한 생각 때문에 나의 영혼과 심령이 상당히 괴로웠다. 그러나 내가 이 문제로 대단히 깊은 기도를 드린 후 어느 날 밤 나는 깊이 잠들었다. 그런데 새벽 1시에 갑자기 나는 잠에서 깨어났고 전능하신 하나님 바로 면전에서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경외에 찬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4시간 동안 마치 한 사람이 그의 친구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나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하는 특권을 가졌다. 5시에, 나는 마치 내가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날 새벽만 아니라 3개월 혹은 4개월 동안 거의 매일 아침 그 같은 것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본성을 바꾼 듯했고 나는 다른 빚 속에서 사물들을 보았으며 그리고 나는 하나님이 이 나라 웨일즈, 그리고 더 나아가 이 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나라에 역사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20) 로버츠는 마치 1735년 6월 18일 하웰 해리스가 “불 앞에 놓아 둔 양초처럼 내 심장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녹아 내리는 느낌”을 경험했던 것처럼, 또한 1859년 웨일즈 부흥의 주역 데이비드 모건(David Morgan)이 새벽 4시에 잠에서 깨어나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 가운데 특히 기억력을 놀랍게 조명해” 주시는 “어떤 기이하고 신비로운 변화”를 경험하였던 것처럼 특별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다.21) 이런 일련의 경험을 가지면서 로버츠는 주의 사역에 대한 비전을 품고 웨일즈 남서부에 위치한 뉴캐슬 에믈린(Newcastle Emlyn)의 예비 신학교로 왔던 것이다. 1904년 9월 29일 목요일 로버츠는 뉴캐슬 에믈린에서 20명의 젊은이들과 함께 칼빈주의 감리교 전진운동(the Calvinistic Methodist Forward Movement)의 루이스(W. W. Lewis)와 셋 죠수아(Seth Joshua)가 근처 브래나너크(Blaenannerch)에 개최한 집회에 참석했다. 그날 루이스가 인도하는 개회예배가 아침 7시에 시작되었다. 그날 아침식사를 위해 잠시 모임을 중단하기 전 죠수아가 기도를 드렸는데, 기도하면서 그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일들을 베풀어 달라고 간구했다. 그중의 하나가 ”우리를 굴복시키소서(Bend Us)”22)라는 것이었다. 로버츠는 특별히 이로 인해 감동을 받았다. 그의 고백을 직접 인용한다면 “바로 이것이 네가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성령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는 밖으로 나가면서 ‘오 주님 나를 굴복시키소서’라고 기도했다.”23) 오전 9시에 모임이 시작되었을 때 로버츠는 자신의 영혼 상태에 대해 상당한 비탄에 빠졌다. 몇 사람이 차례로 기도했고 그런 후 로버츠가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약 2분 동안 무시무시했다. 나는 “나를 굴복시키소서! 나를 굴복시키소서! 나를 굴복시키소서!”라고 소리쳤다. ... 그것은 나를 굴복시키려는 하나님의 명령, 곧 그의 사랑이었지만 나는 그 안에서 명령하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내 자신이 굴복한 후에야 평화의 파고가 나의 가슴에 흘러 넘쳤다. 그런 후 심판날의 무시무시한 공포감이 내 마음에 찾아왔고, 나는 흐느껴 울었다. 그 후 영혼의 구원이 엄숙하게 나를 압도했다. 나는 웨일즈 전역을 다니며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려는 열망으로 불타올랐으며 그리고 내가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꺼이 값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24) 로버츠의 눈에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고 얼굴에는 땀이 비오듯 했다. 이반 로버츠가 13년 동안 기도해 왔던 성령 충만의 역사가 임한 것이다. 이반 로버츠 자신의 말을 빌린다면 “그때 내 가슴은 웨일즈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돌아다니며 구세주에 대해 말하고 싶은 강한 열망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25) 이반 로버츠는 그 경험 후에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26) 로버츠에게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난 것이다. 그가 기도하던 방이 성령으로 충만했으며, 로버츠의 말을 직접 빌린다면 “성령께서 어찌나 강하게 임하시던지 나는 하나님께 그만 손을 거두시라고 간청해야 했다!”27) 아마도 이 사건 이후에도 로버츠는 또 다시 하나님과 4시간의 교제를 위해 매일 새벽 1시에 깨어난 것으로 보인다. 로버츠는 이 기간 동안에 여러 번의 환상을 보았다. 그 중의 한 환상은 활활 타고 있는 지옥 불의 모습이었다. 그 지옥은 문 하나만 남기고 벽으로 둘러 쌓여있었으며, 지평선 너머로부터 무수한 영혼들이 지옥 불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또 그가 본 다른 환상에서는 사탄이 울타리 안에서 자신을 얕잡아 보듯이 막 웃어대고 있었는데 이 때 백옥처럼 흰 옷을 입으신 주님이 이글거리는 긴 검을 높이 들고 계시다가 사탄을 내리치자 사탄이 즉시 사라졌다.28) 또 한 경우, 그는 전에 보다 훨씬 더 밝게 광채 나는 달에 대한 환상을 보았다. 에이비온 존스(Eifion Jones)는 이렇게 기술했다: ...짧은 순간에 달이 거룩한 모습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곳에는 무엇인가를 주장하며 세계를 향해서 뻗어 있는 팔이 나타났다. 또 다른 때에는 그 팔과 손이 희미했으나 그 팔과 손은 거기에 100,000의 숫자가 기록된 종이를 들고 있었다. 그 후 그가 기도할 때마다 그는 그 숫자의 영혼을 위해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기도할 때까지는 평안이 없었다.29) 로버츠는 10만명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라는 비전을 학교에서 다른사람들과 나누었다. 이때 그를 잘 알고 있던 사람 중 한 사람인 신학교의 교장 이반 필립스(Evan Phillips)는 “로버츠가 우리의 심령에 한편의 라디움과 같았다“30)고 말했다. 10월 10일 로버츠는 고향인 러퍼(Loughor) 집에서 친동생 단 로버츠(Dan Roberts)와 이 비전을 나누며 하나님께 맡기기로 다짐했다.31) 10월이 지나면서 로버츠는 점점 더 러퍼(Loughor)에 있는 그의 모교회(Moriah Chapel), 특별히 젊은이들에 대한 관심으로 불타올랐다. 드디어 10월 30일 주일 뉴캐슬 에믈린 저녁집회에 앉아 있을 때 그의 마음은 온통 집으로 돌아가는 문제로 가득 찼다. 기자 스테드(W. T. Stead)와의 인터뷰에서 로버츠가 밝힌 것처럼 그는 예배에 마음을 집중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예배 시간 내내 눈앞에는 하나의 환상, 곧 그가 알고 있는 러퍼의 학교 교실이 보여 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교실에는 옛 친구들과 청년들이 보였다. 그날 그 환상 속에서 로버츠는 그의 친구들에게 설교하고 있었다. 로버츠의 말을 빌린다면 환상이 보이자 “나는 참을 수 없어 내 머리를 흔들었고 이 환상을 떨쳐버리려고 했으나 그 환상은 곧 다시 되돌아왔다. ... 그런 후 드디어는 더 이상 그것을 떨쳐버릴 수 없어 나는 말했다. ‘주님, 만약 그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제가 가겠습니다.’ 그러자 곧 그 환상은 사라졌고, 전 예배당이 찬란한 빛으로 가득찼고, 너무 빛나 나는 강단의 목사가 희미하게 보였으며, 그와 나 사이에 하늘의 태양 빛처럼 영광이 나타났다.”32) 로버츠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일주일간 청년들과 집회를 가질 수 있도록 자신이 다니고 있는 신학교 교장, 이반 필립스(Evan Phillips)에게 요청을 했다. 다음날 아침 로버츠는 뉴 키(New Quay)에 있는 플로리 에반스(Florrie Evans)에게 편지를 보내 러퍼에서 집회를 개최하기 위해 돌아갈 것이며 이를 위해 친구들에게 기도를 요청했다.33) “저는 한 주간 청년들과 지내기 위해 오늘 아침 돌아갈 생각이다. 이것은 성령께서 원하시는 일이다. ... 집회는 일주일간 매일 밤 열릴 것이다.”34)) 로버츠는 기자 스테드(W. T. Stead)에게 지난 저녁예배 동안에 체험한 일, 자신의 스승 필립스와 상의한 일, 그가 집으로 가도록 격려하였음도 알려주었다.35) 1904년 10월 31일 월요일 스승 필립스로부터 허락을 받은 로버츠는 즉시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은 그가 왜 집으로 돌아왔는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로버츠는 가족들에게 자신이 성령의 충만을 받은 사실을 알려주었다. 집에 돌아온 그는 웨일즈의 영적 필요를 생각하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고, 부흥과 영혼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할 때는 기뻐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금치 못했다. 가족들은 달라진 로버츠의 모습을 보고는 혹시 정신병에 걸린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3) 로버츠의 첫 활동, 모리아 채플 그의 고향 러퍼(Loughor)의 모리아 예배당에서는 매주 월요일에 정기적인 기도회가 열렸다. 역사적인 1904년 10월 31일 월요일 저녁, 로버츠는 기도회가 끝난 다음 기도회에 참석한 자들을 대상으로 집회를 가질 수 있었다. 로버츠는 그곳에 남아 있던 한 어린이를 포함한 17명의 청년들에게 뉴키와 뉴캐슬 에믈린 지역에서 어떻게 성령께서 자신 가운데 역사하셨는지 이야기하며 웨일즈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비전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각 개인이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고백할 것을 촉구했다. 집회는 2시간 넘게 진행되었다. 로버츠는 그 후 진행된 사건들을 아래와 같이 언급했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함께 모일 것을 요청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과 이야기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게 왔고 나는 서서 그들에게 말씀을 전했다. 집회는 뉴 캐슬 에믈린의 교회에서 내가 보았던 환상 그대로였다. ... 처음에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으나 나는 계속 했고, 드디어 성령의 권능이 임했다.36) 마침내 그 모임에 참석한 사람 17명 모두가 주님을 영접했다. 그 가운데 로버츠 형제들와 세 자매, 전체가 그 밤에 주께로 돌아왔다.37) 다음날 11 월 1일 화요일 저녁 로버츠는 모리아(Moriah)의 지교회 예배당, 피스가(Pisgah)에서 더 많은 청중들에게 말씀을 전했다. 여기서 전날 주님을 영접한 몇 명이 자신들의 새로운 기쁨의 체험을 간증했다. 그 집회는 3시간 동안 계속되었으며 신앙고백, 기도, 그리고 개인간증으로 특징되었다.38) 이때 여섯 명의 청년들이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고백했고 몇 사람은 전날 밤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가 자신들의 구주이심을 체험했는지에 대해 간증했다. 로버츠의 말을 직접 빌린다면 “지난밤 집회는 전적으로 성령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것을 회고할 때 나는 성령이 순종을 가르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39) 인근 골세이논(Gorseinon)의 리바누스 예배당에서 열린 다음날 수요저녁 집회에는 더 많은 청중들이 로버츠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어서 모리아 예배당에서도 집회가 열렸고 그 열기는 동일했다. 로버츠는 앞으로 놀라운 부흥을 허락해주실 것과 약 10만 명이 주께로 돌아설 것을 약속해 주셨음을 알려주었다. 로버츠가 자신의 환상을 자세히 제시하고 긴박하고 폭넓게 전개될 부흥운동에 대해 성령께서 주시는 비전을 들려주자 참석자들은 큰 관심을 기울였다. 여덟 시간이나 계속된 이 집회에서 20명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역사가 나타났다. 필립스가 지적한 것처럼 이날 로버츠는 다음 세 가지 사실, “1. 집회에 몰려오는 수많은 사람들, 2. 교단들 간에 이루어진 연합정신, 3. 성령 세례”40)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고 말했다. 로버츠는 그곳에 모인 이들 에게 다음 4가지 사실을 촉구했다. ... 1. 만약 지금까지 고백하지 않은 과거의 죄 혹은 죄들이 있다면 우리가 성령을 받을 수 없다. ... 2. 만약 우리의 삶에 어떤 의심스러운 것이 있다면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 3. 성령께 우리 자신을 완전히 복종시켜야 한다.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말하고 실천해야 한다. ... 4. 그리스도에 대한 공개적인 고백이 있어야 한다.41) 11월 3일 목요일 아침에 로버츠는 불타는 촛불의 환상을 보았다. 촛불 뒤에는 너무도 영광스러운 모습의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에게 비추어진 촛불의 빛은 그때에 있었던 부흥운동을 대변하였고 한편 떠오르는 태양은 부흥이 아직 도래할 것임을 상징하였다. 그날 저녁 로버츠는 마태복음 7장 7절을 가지고 설교하면서 “만약 사역이 성공하려면 이것들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원하시며 응답하실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42)고 말했다. 금요일 저녁까지 그의 활동은 대중의 관심을 끌었고 회중들은 이전보다 더 많았다. 로버츠는 “우리는 온 밤을 새우곤 했다. ... 나는 머지않아 축복된 부흥 운동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43) 2. 웨일즈 대부흥의 확산 1) 특별하고 놀라운 성령의 역사 1904년 11월 5일 토요일 밤에 로버츠는 다섯 시간이나 지속된 집회에서 골세이논(Gorseinon) 지역의 리바누스(Libanus) 예배당에 운집한 청중들에게 설교했다. 비록 그것은 젊은이를 위한 집회로 알려졌지만 참석한 많은 부모들은 젊은이들의 급진적인 변화에 놀랐다. 다음날 주일 저녁 로버츠는 에베소서 5장 18절,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말씀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다. 그는 술취하는 것이 죄라고 경고하며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외쳤다. 사람들에게 성령의 부으심을 위해 기도에 집중할 것을 요청했다. 플로리 에반스가 그날의 역사를 이렇게 증언했다. “마지막 중에는 성령이 우리와 항상 함께 계셨다. 그리고 마지막 날 밤에 세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가 성령세례를 받았다. 아! 그것은 굉장한 집회였다. 이곳에 참석한 모든 사람은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지금 성령을 보내주소서!’ 그것은 계속 이어진 기도였는데 모든 사람이 여기에 동참했다. 아! 결과는 참으로 놀라웠다.”44) 11월 6일 주일날 그는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자정 쯤 되자 온 회중이 다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 그런 다음 사람들이 앉아 있던 의자에서 바닥으로 내려앉더니 서로 가까이 다가앉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자, 우리는 성령께서 오신다는 사실을 틀림없이 믿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어쩌면 오실 거라고 생각하거나 성령께서 오시기를 바란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께서 오신다고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나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약속들을 읽어주고 그 약속들이 얼마나 확실한 약속인지를 지적해 주었다. (기억할 것은,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인도 아래 한 것인 만큼 찬양 또한 성령께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 후에 성령께서 모든 사람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제는 죄를 자백하거나 찬양하거나 자신이 체험한 것을 간증하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믿고 기다리십시오. 기도하되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제 성령을 보내주소서.’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눈을 감았다. 내가 그 기도를 시작하자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기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린 소년과 소녀들이 기도하더니 젊은 청년 남녀들도 기도하기 시작했다. 조용히 간구하는 사람, 큰 소리로 간구하는 사람, 감정 없이 냉랭하게 구하는 사람, 감정이 풍부하게 구하는 사람, 의례적으로 딱딱하게 기도하는 사람, 눈물을 흘리며 간구하는 사람, 강한 목소리, 부드러운 목소리,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 기도하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나는 이처럼 큰 효과를 거두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그곳이 가득 채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도가 예배당에 있는 사람들 반 정도에까지 미치자 어떤 형제들이 ‘오, 주님! 주님! 어찌해야 좋으리까! 어찌해야 좋으리까! 오, 주님! 오, 주님!’ 하며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기도가 계속되자 그 감정이 더욱 고조되었다. 예배당이 점점 더 성령의 임재로 가득차게 되었다.”45) 이 주일 저녁집회는 하나의 전환점이었음이 입증되었다. 그곳에서는 각자 성령이 “더욱 강력하게” 임하게 해달라고 두 차례 돌아가면서 차례로 기도하였다. 두 여인이 성령의 충만을 입고 자신들을 주체할 수 없어 큰 소리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은 비록 경외함으로 압도되었지만 60명가량이 안위함으로 미소를 머금은 로버츠 주변에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참으로 수 없나이다 주 예수님, 아니면 내가 죽겠나이다!”라고 소리쳤다. 다른 사람들은 마루에 엎드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고, 울부짖고, 노래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로버츠의 증언을 직접 빌린다면 “나는 몇몇 형제가 흐느끼는 것을 들었다. ... 기도가 계속되면서 영향력이 더 강해져 그 장소가 점점 더 회개의 영으로 가득 찼다.”46)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임한 것이다. 역사가 에이비온 에반스(Eifion Evans)에 따르면 죄의 탄식으로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거나 부복한 많은 사람들의 모습과 함께 이것은 “전에는 찾을 수 없었던 믿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47) 이 특별한 경험은 그 도시에서 화제가 되었고, 모리아 예배당은 11월 7일 월요일 저녁에 사람들로 가득 찼다. 로버츠가 설교하기로 한 장소에는 은혜를 사모하는 이들이 점점 더 운집했고, 미처 교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은 교회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집회에 참석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기도했다. 자기 영혼을 위해 비탄에 젖어 기도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다. 에반 로버츠는 참석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금 성령을 보내주소서”라고 기도할 것을 요청했다. 참석한 온 회중들이 오직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기도에 집중하도록 독려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씩 일어나 그 기도를 반복하라고 말했다. 그는 성령께서 불가항력적으로 임하실 때까지 기도의 사슬을 두세 번을 반복하게 했다. 사람들은 곧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고, 중간 중간에 간간히 찬양을 불렀다. 그날 집회는 권능에 넘쳐 새벽 3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브린텍(Bryn-teg)에서 온 회중교회 대표들이 로버츠에게 오는 수요일에 자신들의 집회에서 설교해줄 것을 요청했고, 그는 기쁨으로 그들의 초청을 수락했다. 2) 확산되는 부흥의 불길 1904년 11월 8일 화요일에 가서는 부흥의 영이 더 이상 에반 로버츠의 집회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로버츠가 말씀을 전했던 골세이논(Gorseinon)에 있는 리바너스(Libanus) 교회 담임목사 토마스 프란시스(Thomas Francis)는 자신의 집회를 이렇게 기술했다: 심각한 침묵 속에 참석한 각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과 교통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위해 성령을 보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모든 연령층의 자녀들에게 임하셨다. 우리는 결코 전에는 그러한 울부짖음, 찬송, 그리고 기도를 목도한 적이 없었다.48) 1904년 11월 8일 존스(R. B. Jones)는 북 웨일즈 Rhos(Rhosllanerchrugog)에 있는 침례교회에서 일련의 집회를 인도했다. 마지막 집회 끝말 클라이막스 때 회중들이 기쁨, 찬양, 기도, 그리고 간증을 하면서 집회가 12시간이나 지속되었다.49) 런던에서 출간되는 케직 사경회 운동의 주간지 더 라이프 오브 훼이스(The Life of Faith) 11월 9일자에는 “한 사람의 손과 같은 구름”이 부흥운동을 전조하는 바, 웨일즈 전역에 일어났음을 목도한 제시 펜-루이스(Jessie Penn-Lewis) 여사의 기고한 글이 게재되었다. 같은 날 로버츠는 대단한 기쁨 가운데 8시간이나 계속된 브린텍 회중교회에서 열린 한 집회에서 설교하였다. 집회 열흘째인 11월 9일에는 더 큰 빌딩으로 옮겨서 집회를 가졌으며, 이날 광부들은 늦게 가면 자리를 잡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탄광에서 나오기 무섭게 작업복을 입은 채 집회 장소로 달려갔다. 그 곳에는 이 경이적인 사건을 기술하기 위해 신문기자들까지 참석하였다. 다음날 카디프(Cardiff)의 영자 신문 <웨스턴 메일>(The Western Mail)은 로버츠 집회에 대한 소식을 받고 이렇게 보고하였다: 놀라운 종교적 부흥운동이 지금 러퍼에서 일어나고 있다. 놀라운 흥분이 압도하여 교회가 위치한 거리에는 끝에서 끝까지 사람들로 성시를 이루고 있다. ... 상점원들이 예배당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일찍 가게 문을 닫았고, 함석과 철 노동자들이 노동자 복장을 한 채 그 장소에 모여들었다.50) 신문에는 연일 웨일즈부흥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들이 실렸다. 부흥의 소식은 웨일즈 지방을 넘어 다른 많은 지역에까지 알려졌다. 사람들이 11월 10일 목요일 집회에 참석하기위해 상당히 먼 거리를 여행했다. 웨스턴 메일(The Werstern Mail)의 한 저널리스트가 기록한 대로 예배드리는 동안 모든 것들이 매 순간 자원하는 순전한 마음에 의해 진행되었고, 로버츠는 “좌석 사이의 통로를 걷거나 앉아 성경을 손에 펴고는 한번은 권고하고, 다른 한번은 격려하고, 그리고 3분의 1은 은혜의 보좌로부터의 축복을 간청하며 무릎을 꿇었다.”51) 이날 아주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통회하는 이들, 기절하듯 땅바닥에 쓰러진 사람들, 통회의 눈물을 흘리는 악명 높은 죄인들과 술주정꾼들, 그동안 서로 원수처럼 지내다 성령 안에서 화해한 사람들, 그날 회중들 가운데 성령의 역사가 너무도 강하게 임했다. 그 역사적 현장에서 모든 사실을 목도한 에반 로버츠는 이렇게 증언했다: ...한 젊은 여인이 일어나 찬양을 했는데, 그것은 상당히 진지함으로 드려진 찬송이었다. 찬양이 드려지는 동안 마치 전기 충격을 받은 것처럼 몇몇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리에서 고꾸라졌고, 용서해달라고 소리쳐 간구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새벽 4시 25분경에 모인 이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간에도 자신들의 집으로 향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이제 자신들의 삶에서 참된 주제가 무엇인지를 아직도 길에서 논하고 있는 수십 명의 사람들을 그곳에 남겨두고 클라네클리(Llanelly)로 돌아와야 했다.52) 이때에 로버츠는 자신이 학교로 돌아가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후에 자신의 여동생 메리(Mary)와 결혼했으며 인도의 선교사로 사역한 그의 절친한 친구 시드니 에반스(Sidney Evans)에게 자신의 소지품들을 부탁하고 신학교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를 펀지로 밝혔다.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 나는 완전히 만족하고 아침부터 밤까지 맡겨진 충만한 사역으로 인해 더 없이 행복하다.”53) 1904년 11월 11일 금요일 밤 집회에는 어느 때보다 더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다. 4시간 동안 계속된 이날의 집회는 회중교인, 침례교인, 칼빈주의자, 감리교인이 할 것 없이 한데 섞여 예배를 드렸다. 이날 에반 로버츠는 회중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금 성령을 보내주소서”를 반복해서 간구할 것을 요청했다. 로버츠는 첫째 줄부터 그렇게 하도록 했고 모인 회중들은 여기에 따라 순종하였다. 그러자 한층 강력한 회개가 나타났고, 많은 사람들이 죄의 회상으로 압도되어 무릎을 꿇고, 말을 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우는 자들도 있었고, 이어 한 목회자는 장시간을 간절히 기도했으며, 로버츠 역시 그곳에 참석한 이들과 웨일즈의 부흥을 위해 영혼의 힘을 다해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이날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그들 가운데 임했다. “그들 중 얼마는 퇴적 더미에 쓰러졌고 다른 사람들은 자비를 갈망하며 처절하면서도 소리 높여 울부짖었다.”54) 로버츠의 몇 마디의 권면, 짧은 기도가 사람들의 가슴에 부흥의 불을 지핀 것이다. 이날 해외선교를 위한 헌금 시간에는 참석자들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돈을 모두 바쳤다. 에이비온 에반스(Eifion Evans)의 말대로 ”사람들은 모든 일상사를 잊어버렸고, 음식에 대한 요구도 잊었으며, 자신들의 매일 사역으로 육체적으로 완전히 지친 것처럼 보였다.”55) 토요일에 두 젊은 여인들이 골세이논(Gorseinon)에서 많은 군중들을 매혹시킨 노천집회를 열었다. 집시들에게 찾아가 그들을 주께로 인도한 사람도 있었고, 소녀들은 술집 밖에서 옥외 집회를 가졌다. 술꾼들이 밖으로 나오다 성령에 사로잡혀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고 이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부흥의 불길은 더욱 더 놀랍게 확산되어 나갔다. 모여드는 많은 사람들로 인해 예배 공간이 모자라 이들을 분산시키기 위해 같은 시간 두 교회에서 동시에 예배를 드려야 했다. 이날 킨스브릿지 콤먼(Kinsbridge Common)에서 열린 노천야영집회에서도 많은 회심자들이 생겨났다. 그날 하루 동안 많은 각 가정에서 기도회가 열렸다. 에반스(Eifion Evans)는 이렇게 썼다. “하나님의 임재 및 성결의식이 가정, 사역의 현장, 상점, 그리고 공공장소에서 모든 인간경험의 영역을 지배했다. 영원은 피할 수없이 가까이 그리고 실재로 임한 것처럼 보였다.”56) 그날 밤, 모리아(Moriah) 채플과 피스가(Pisgah) 채플 두 곳에서 집회가 열렸다. 한 곳에서는 에반 로버츠가 말씀을 전했고, 다른 한 곳에서는 뉴캐슬 에믈린(Newcastle, Emlyn)에서 막 돌아온 시드니 에반스(Sidney Evans)가 말씀을 전했다. 그곳에 참석했다 성령의 은혜에 압도된 한 유명 가수는 발코니에서 “은혜로 구원 받았네”를 감격에 겨워 불렀고 회중들은 그 노래를 한 목소리로 따라 불렀다. 예배가 시작되기 수 시간 전부터 집회 장소는 사람들로 넘쳐났고 두 교회의 집회는 주일날 새벽 2시까지도 사람들로 넘쳐났으며 약 새벽 5시에야 끝났다.57) 에반스(Eifion Evans)가 지적한대로 성령의 역사가 회중들 기운데 강력하게 임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나, 즉 가정이나 일터나 상점이나 선술집 어느 곳이든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의식과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영원이 이주 가까이 실제적으로 다가와 있는 것 같았다. 두 번째 주말에는 부흥사 에반 로버츠가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성령께서 먼저 주도권을 쥐고 역사하신 것이 분명했으며 에반 로버츠의 희망 사항보다 하나님의 능력이 더 중요했던 그런 기간이었다.58) 그토록 짧은 기간에 그토록 강하게 부흥운동의 역사가 웨일즈 전역으로 확산될 수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부흥의 불길은 요원의 불길처럼 놀랍게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이미 은혜를 받은 많은 청년들과 복음전도자들이 여러 곳에서 집회를 열었고, 그리고 집회가 열린 곳마다 성령의 붙이 임했다. 카마던(Carmarthen)에서는 “축복의 수문”이 열렸고, 윌터 스트리트 교회(Walter Street Chapel)에서는 강력한 통회 역사가 나타났다.59) 아만포드(Amanford)에서는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꼈고, “온 회중이 거의 다 흐느껴 우는” 역사가 나타났다. 그 현장의 주인공 셋 여호수아가 증언한대로 오랫동안 사모했던 그 부흥의 날, 곧 “내 일생 중 가장 진기한 날 중 하루”60)가 찾아왔던 것이다. 로버츠는 다음날, 11월 12일 <웨스턴 메 일>(The Western Mail)에 실린 그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를 읽은 애버데일(Aberdale)의 회중으로부터 말씀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전보로 그 초청을 수락하고 다음날 아침 아주 최근 회심한 몇 명의 젊은 여인들과 함께 트레키논(Trecynon) 가까이에 있는 애버데일의 브라이언 시온(Bryn Seion)으로 향했다. 아더 긋리치(Arthur Goodrich)는 그들의 도착을 이렇게 기술했다: 주일아침 예배시간에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경쾌한 발자국에다 무거운 엄숙함이라고는 완전히 결여된 한 젊은이가 다섯 명의 젊은 여인들을 대동하고 들어와 놀랍게도 맨 앞으로 나아올 때까지 회중은 오랫동안 지루하게 격동적으로 소리 내 찬송을 부르며 기다리고 있었다. 30분 동안 그는 다소 관습적이지만 자세를 곧게 만들고 시선을 앞으로 집중시켜서 참석자들의 심령을 사로잡아 그 열정적인 심령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 혹은 한 소절조차 잃지 않도록 만드는 그런 자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회중들에게 말씀을 전하였다. 로버츠와 함께 온 여인 몇 명이 찬양을 부르자 회중들이 이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그곳의 모인 이들 모두가 웨일즈 소리, 웨일즈 열정으로 찬양을 부르자 싸늘했던 사람들의 감정이 반쯤 녹아내렸다.61) 에반스(Eifion Evans)에 따르면 로버츠와 그 일행에 대한 영접은 처음에는 쌀쌀했다. 그런데도 에반 로버츠와 골세이논에서 그와 함께 온 다섯 명의 여인들이 잘 참았고, 그리고 드디어 그들의 믿음이 보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는 로거[Moriah, Pisgah, 그리고 Libanus 채플]에서 목도된 그러한 성령의 임재의 장면들이 재현되었고, 사람들에게 1859년 부흥운동의 현상들을 상기시켰다.62) 데이빗 매튜스(David Matthews)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그곳에 모인 회중 기운데 가장 교만했던 사람 중 한명이 무릎을 꿇고, 억제하지 못하고 자신의 죄를 통회 자복하자 곧 각성운동이 폭발했다. ... 다른 사람들이 곧 그 뒤를 이어 통회했으며 그것은 그곳에 모인이들을 당황케 할 만큼 자발적이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그 집회는 온 종일 한번도 중단되는 일 없이 계속되었다! 그곳에서는 저녁시간도 심지어 주일학교도 없었다. 분명히 예배자 전원은 모든 신체적 불편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었다. ... 저녁이 되자 다른 교회들이 그 소식을 들었다. “부흥”이 일어나는 비교적 작은 한 건물로 어떻게 해든 들어가려고 이웃사람들이 이 한 곳에 모여 드는 것처럼 보였다. 들어가기 위한 경쟁은 무시무시할 정도였다.63) 여기로부터 로버츠는 그의 고향까지 가는 길 중간쯤에 있는 가르(Garw) 탄광계곡에 있는 폰키머(Poncymmer)로 향했다. 로버츠는 그 지역의 연합종교단체로부터 초청을 받았으며 많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