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역개정]마12장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르다
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3.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5.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다
9. ○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10.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3.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15.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16.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9.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21.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예수와 바알세불
22. ○그 때에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23.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24.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25.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26.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27.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33.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악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인자구주/메시야 됨 입증하는 기적...이미 그토록 많이 보이셨고, 그토록 구주이심 깨닫도록 말씀하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믿고 따름으로써 더 새로운 깨달음 가운데 들어감의 선순환 안으로 들어가기를 망설이고 있음 = "들을 줄 모름"]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솔로몬을 극히 탁월한 지혜자 되게 하신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진정하고 참된 탁월한 지혜"를 추구하여 땅끝에서부터 찾아온 남방여왕(스바여왕)조차 초월적 참 지혜의 근원이 바로 여호와이심과 그 지혜 받은자가 바로 솔로몬이었음을 알아보았는데.....너희는(아쉽게도) 솔로몬보다 더 큰이(근원적 참지혜, 성육신하여 오신 JC)가 바로 지금 여기 있는데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것으로 보아..너희는 [겉만 번지르르한!!, 입으로만 "주여주여" 하며 구주 찾는다 말하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임에 분명하다!!_왕상10장 참조..
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 자매
46.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47.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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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2장 (개요)
본 장(章)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
Ⅰ. 안식일에 관한 제 4계명에 대한 그리스도의 [분명한]해석(clearing)과, 유대 교사들에 의해 제기된 어떤 미신적인 관념[언급.superstious notion]들이 사실이 아님을 반증하셨고(vindicating), 반드시 [[(일상유지에)필요한 일(necessity)이나 자비(mercy)의 일들이]] 안식일, 바로 그 날에 행해져야 함을 나타내어 보이셨다(1-13).
Ⅱ. 기적을 행함에 있어 신중함(prudence)-겸손(humility)-자기부인(self-denial)으로 행하시는 우리 주 예수님(14-21).
Ⅲ. 그리스도께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을 마귀와의 제휴(compact)로 간주해 버린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모독적인(blasphemous) 트집(cavil)과 중상(calumny)에 대한 그의 대답(22-37).
Ⅳ. 하늘로부터 온 표적을 보여달라고 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시험적인 요구(tempting demand)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38-45).
Ⅴ. 그리스도의 혈족(kindred)과 친척(relatives)에 대한 JC의 판단(judgement)(4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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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 논쟁(마 12:1-13)
유대 선생들은 여러 계명들을 본래 의도(뜻)보다 더 자유스럽게 해석해 버림으로써 오염( 타락)시켰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발견하시고 산상보훈(마5:1-48)에서 이를 시정해 주셨다.
그러나 제4계명에 관하여 그들은 또 다른 극단적인 오류를 범하였는 바 그것을 너무 엄격하게 해석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종종 볼 수 있는 바, 마음이 불결한(오염되어 타락한) 사람들은 흔히, 예배의식이나 종교의 외적 봉사에 상대적으로 더 열심을 냄으로써 자신들의 도덕적 느슨함에 대한 속죄로 여기고 있음을 은영중에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의 말씀을 더하거나 빼는 바로 그 사람"은 저주를 받고 있는 것이다(계 22:16, 19; 잠 30:6).
그런데 지금 이 장면에서 우리 주 예수님이 강조하시는 바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받아 마땅한 것으로 여겨 행하기를 주저하거나 망설이게 하는 바]유대인들이 (마땅히)삼가야 할 계율로써 가르침을 받았던 것들로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일과 자비의 일들은 안식일에도 합당(정당)하다는 것이다.
제 4계명에 대한 그리스도의 자세한 설명은 "일주일에 하루를 거룩한 안식일"로 삼아 종교적으로 지키라는 안식일의 영구적인 의무를 암시하고 있다.
그는 곧 사라져 없어질 율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려고는 하시지 않으셨다.
의심할 여지없이 모든 세대에 걸쳐서 그의 교회에 유익이 될 어떤 목표를 정하기 위하여 의도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우리들에게 가르치는 바는 우리 기독자의 안식일은 비록 제 4계명의 명령하에 있기는 하지만 유대 장로들의 계율 하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율법의 의미는 실제로 일어난 경우들에 주어진 판단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통례인데, 이 율법의 의미도 이와 같은 방법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여기에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함께 마련된 두 가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은 시간적으로 서로 떨어진 시간에 일어난 것이며 또한 그 성격도 다르지만 이러한 취지에 대해 동일한 관점으로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Ⅰ.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은 것을 정당화하심으로써 안식일에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 "옳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살펴 볼 것은,
1. 제자들은 무엇을 행하였는가?
그들은 어느 안식일에 주님을 따라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고 있었다. 아마 그들은 회당으로 가고 있었던 것 같다(9절).
왜냐하면 안식일에 "할 일 없이 거니는 것"(take idle walks)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합당치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매우 시장하였다."
그렇다고 그것이 우리 주님의 집안 살림을 비난하는 구실이 될 수는 없다.
아마 제자들은 안식일에 해야 할 일들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식사하는 일도 잊어버렸거나 또는 아침예배에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었기 때문에 금식하면서 서둘러 나왔던 것 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회당에 늦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들로 하여금 "밀밭 사이로 지나가게" 하셨고 거기에서 그들은 음식의 공급을 받았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의 필요할 때는 그들에게 적당한 양식을 가져다 줄 여러 가지 방법들을 가지고 계시며, 또한 옛날에 예루살렘으로 경배하러 갈 때(시 84:6, 7) 그 백성들을 위해 비를 웅덩이에 채우셨던(역주: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셨던) 것과 같이 그들이 회당으로 가고 있을 때 그들에 대하여 특별히 유의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의무의 길에 있는 동안(역주:의무를 행하고 있는 동안) "여호와 이레"이신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위해 준비하시도록 하라.
곡식 밭에 있었으므로 그들은 "이삭을 뽑기"시작하였다.
하나님의 율법이 이것을 허락하신(신 23:25)은 백성들에게 이웃간의 화목을 도모할 것과 사소한 일에 정당성을 주장하지 말 것을 가르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유익을 입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 밀 이삭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게는 빈약한 것이었으나 그들이 가졌던 최상의 식사였으며 또한 그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였다.
(*유명한 휫트모어의 볼(Ball)씨는 그의 안식일 식사에 두 가지 음식 그릇을 가졌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 하나는 뜨거운 우유와 찬 우유 그릇이었다. 그는 그것으로 매우 만족하였다고 한다.)
2. 바리새인들은 이 일에 대해 어떤 반대를 취하였는가?
그것은 초라한 식사에 불과했지만 바리새인들은 그들로 하여금 조용히 그것을 먹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제자들이 다른 사람의 곡식을 잘랐다는 것을 비난하지는 않았고(그들은 공의에 대하여 크게 열심을 내는 자는 아니었다), 그것을 "안식일에" 했다는 것을 비난하였다.
안식일에 곡식의 이삭을 자르거나 비비는 것은 그것이 "추수의 일종"이라 해석하여 장로들의 유전에 의해 강력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JC의 제자들의 무해하고 무죄한 [실제적]행동이 특히 자신들 스스로의 발명/창안 (역주:그들은 자신들이 [임의대로] 부가적인 율법을 창안하고 그것을 더하였음)에 급급한 자들에 의해 사악하다는 말을 듣거나 부당하게 비난을 받는 것은 결코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한다고 해서 그 주인에게 불평을 토로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나님께서 부당하다고 하시지 않은 것을 부당한 것으로 만드는 자들은 그리스도나 그의 제자들의 친구가 못된다는 사실이다.
3.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트집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어떻게 답변하셨는가?
제자들이 스스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은, 특히 그들에게 시비를 걸었던 사람들이 그들 편에서 안식일의 거룩함에 대해 엄격함을 가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요, 또한 제자된 자기들의 실수로 돌리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과 모든 기독자들을 세상적 불법과, 더 나아가 바리새인들의 부패와 그들의 비성경적으로 덧붙인 장로들의 유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오셨으며, 따라서 그들을 위해 말할 것을 가지고 계셨으며, 또한 제자들의 행한 것이 [사려분별이 없는 일반인들이 보기에는]표준에서 어긋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의 근원을 살펴서 바로밪고 정당화하고 계시는 것이다. [[오직, 자유케 하는 바 성령안에서 생명과 사랑의 기준을 따라 행하라!!]]
(1) 그는 바리새인들도 옳다고 인정한 전례(前例)를 들어서 그들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계시다.
① 그는 옛날 다윗이 평상시에 행해서는 안 되는 것을 시장했을 때에 행하였던 실례를 들고 있다(3,4절).
"너희는 다윗이 제사장밖에 먹지 못하는 진설병(레 24:5-9)을 먹었다는 성경 이야기(삼상 21:6)를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그 진설병은 "아론과 그의 후손들에게"는 "매우 거룩한 것이었다." 또한 "타인은 그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출 29:33).
그러나 제사장은 이 떡을 다윗과 그의 부하들에게 주었다.
예외적으로 필요한 경우가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러나 이러한 예외는 이런 경우나 그 밖의 모든 의식적인 제정에서 내포(암시)되어 있다.
다윗이 성전에 들어가 진설병을 먹은 것은 그의 권위가 아니라(웃시야 왕은 비록 왕이었지만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의 직무를 행하려다가 문둥병에 걸렸다. 대하 26:16 ,등). 굶주림 때문이었다.
위대한 사람은 욕망에 빠져들지 않으나 비천한 사람은 자신들의 부족함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굶주림은 억제될 수 없는 자연적인 욕구이며, 이것은 충족되어야만 된다. 또한 이 굶주림의 욕구는 음식물 이외의 다른 것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굶주림이 돌로 된 벽도 뚫는다"고 말한다.
이제 "주님은 육신을 입으셨으며" 또한 그 자신의 결정을 면제할 것을 허락하셨다(역주:그리스도는 명령자이시므로 상황에 따라 자신의 결정을 생략하거나 면제하실 수 있다). 하물며 장로들의 유전들이야 면제(폐지)될 수 있지 않겠는가?
여기에서 유의할 것.... 다른 때에는 행해질 수 없는 것이 필요할 경우에는 행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반드시 해야하는 필수성을 가지지 않은 법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에 대해서는 하나의 법이다.
"도적이 만일 주릴 때에 자신의 마음을 만족케 하려고 훔쳤을" 때 사람들은 그 도적을 업신여기지 않고 동정하는 것이다(잠 6:30).
② 그는 제사장들의 일상적인 실례를 들고 있는데, 그들은 이와 같이 "율법을 읽었으며" 또한 그 율법에 따르는 것이 불변적인 습관이었다(5절).
"성전에 있는 제사장들"은 안식일에 비천한(servile)일을 많이 행하였다. 즉 번제할 짐승을 죽이고, 가죽을 벗기며 태우는 일들이었는데, 이런 일들은 대개의 경우 "안식일을 모독하는 일"들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제4계명을 범하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성전 봉사는 이러한 일을 필요로 하였으며 정당화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암시하는 바는, "생명을 유지하거나 그 날의 봉사"에 반드시 필요한 그러한 노동들을 안식일에 행한다고 해도 합당하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회중들을 함께 모으기 위하여 종을 울린다든지, 교회로 나가는 일 등이 그러하다.
안식일의 휴식은 안식일의 예배를 촉진하기 위한 것이지 그것을 방해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2) 그는 세 가지 긍정할 만한 논증을 통하여 제자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고 있다.
①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6절).
만일 성전을 봉사하는 일이 제사장들이 그들의 직무상 행하였던 일을 정당화시켰다고 한다면, 그리스도께 대한 봉사는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모시고 행하였던 그 일을 더욱 정당화시키게 될 것이다.
유대인들은 성전에 대하여 극단적인 숭배심을 가졌으며, "금으로 신성시하였다." 스데반은 "성전을 모독하였다"는 죄목으로 고소를 당하였다(행 6:13).
그러나 밀밭에 계신 주님은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임재"가 그 안에 상징적으로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이 "구체적으로" 거주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만일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우리가 그 일을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또한 "그에게 하는 것처럼" 한다면 아무리 그 일이 사람들에게 비난과 힐책을 받게 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에게 은혜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②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시며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7절).
의식적인 의무들은 도덕에게 자리를 양보해야만 하며, 또한 사랑과 자기 보존의 본래적, 왕적인 법이 의식적인 계율들을 대신케 해야만 한다.
이 구절은 호세아서 6장 6절에서 인용된 것이다.
이 구절은 앞서 9장 13절에서는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자비의 증명으로 여기에서는 자신들의 몸에 대한 자비의 증명으로 사용되었다.
안식일의 휴식은 사람을 위하여 그 몸의 유익을 위하여 제정되었다(신 5:14). 율법은 그 자체의 목적에 위배되도록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너희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더라면," 자비를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더라면, 너희는 그들이 자신들의 굶주림을 채우기 위하여 이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음에 대하여 미안하게 생각하였을 것이며, 또한 "무죄한 자를 정죄 하지는 않았을"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첫째, 무지는 우리의 형제에 대하여 성급하고 무자비하게 비난하는 원인이 된다는 사실이다.
둘째, 우리가 성서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그 뜻을 알기 위하여 노력해야만 한다. "읽는 자로 하여금 깨닫게 하라."
셋째, 성경의 뜻을 모르는 것은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특히 수치스러운 일이다.
③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8절).
이 법은 다른 모든 휴식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손에 놓여져 있으므로 그가 원하시면 고치거나 강요되거나 폐지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만드셨으며, 또한 그를 통하여 완전무결하게 안식일을 제정하셨으며, 그를 통하여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셨으며, 또한 중재자이신 그는 계명들의 제정을 위임받으셨으며 그가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고치도록 위임을 받으셨다.
그리고 특히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는 이 안식일을 주의 날, 즉 주 그리스도의 날이 되게 하신 것과 같이 그 날을 바꾸실 수 있는 권위를 가지셨다.
그리고 만일 그리스도가 "안식일의 주인"이 되신다면, 그 날과 그 날의 모든 일은 그에게 바쳐지는 것이 합당하다.
이러한 능력에 의하여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즉 그 일들이 참으로 필요한 것이라면, 꾸며지거나 자기가 꾸민 필요성이 아니라 꼭 있어야 하거나 해야만 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일을 안식일에 행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 법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그 법이 영원한 것이었음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 즉 예외는 규칙을 확증한다- 역주:예외 없는 규칙은 없다와 비슷함).
그리스도는 이렇게 하여 바리새인들을 잡담케 만드시고, 그들에게 대해 명확한 해결을 짓고 나신 후(9절), "떠나," "회당," 즉 이러한 바리새인들이 관할하였고 또한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이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을 때 그가 향하여 가시고 계셨던 "회당"으로 들어가셨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우리는 생활에서 거룩한 계명을 어기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하며, 우리가 그 계명에서 떠나는 일이 없도록 특별히 유의해야 한다.
"타락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사악한 논쟁"과 그밖에 많은 방법을 통하여 우리에게 시비를 걸거나 불안케 하려고 하는 사탄의 술책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의무를 계속적으로 수행해 나가자.
둘째, 자신의 반목이나 개인 감정 때문에 공공 예배에 불참해서는 안 된다.
바리새인들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에게 악의적으로 트집을 잡았지만 그는 "그들의 회당으로 들어 가셨다."
사탄이 형제들 사이에 분쟁의 씨를 뿌려 놓고 모인 회중, 그들 중의 누구라도 회당이나 신자들의 모임에서 내어쫓는데 성공한다면 이 점이 바로 사탄이 노리는 목적인 것이다.
Ⅱ. 그리스도는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심으로써" 자비스러운 일이 안식일에 행해지는 것이 정당하고 합당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고 있다.
반드시 필요한 일은 제자들에 의해 행해졌으며 또한 그리스도에 의해 옳다함을 얻었다.
자비스러운 일은 그 자신에 의해 행해졌다. 자비스러운 일은 그의 필수적인 일이었다.
"선을 베푸는 것이 그의 식사요 음료수"였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가르쳐야만 한다"(눅 4:43)고 하셨다.
이 치유의 사실은 그것이 안식일에 행해진 시간 때문에 기록이 되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1. 이 가난한 사람이 당하고 있었던 고통. 그의 손은 메말랐기 때문에 "손으로 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성제롬은 말하기를, 나실인들(역주 :나사렛 사람들)과 에비온파 사람들이 사용하던 히브리어 마태복음에는 이 손 마른 사람의 형편에 대하여 첨가하고 있는데, 거기에 보면 이 사람은 "벽돌공"(Cacmentarius)으로써 예수님께 이와 같이 말하였다. "주님, 나는 벽돌공으로써 - 즉 노동하여 생계를 꾸려 왔습니다. 오 예수님, 간구 하오니 내 손을 다시 회복시켜 주셔서 - 즉 나로 하여금 구걸하지 않아도 될 수 있도록 해주옵시소서"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말한다(Hieron의 해당 항 참조). 이 불쌍한 사람은 바로, 회당에 있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거의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세상을 위해 할 것도 거의 가지지 못한 이러한 사람들은[장애자나 병약자들] 자신의 영혼들을 위하여 부자나 노인이나 허약한 자들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2. 여기에는 이 불쌍한 사람의 정경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던진 간악한 질문이 기록되어 있다.
"이 사람을 고치는 것이 합당하니이까?"라고 그들은 물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이 불쌍한 사람이 예수님께 자기를 치료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사실을 찾아 볼 수 없지만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시기 시작하셨음을 눈치채었으며 또한 예수님은 "자기를 찾지 않은 자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것이 그의 통례인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꼬투리 잡기 위해]악한 마음과 그 감정을 가지고 그의 베푸실 바 선행을 예기하였으며 선행의 길목에 거침돌로 삼으려 하였다.
그들은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물었다.
그들은 "의사가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은지의 여부에 대하여 자기들의 책(역주:탈무드, 미쉬가 등)에서 논쟁을 하였으며, 또한 사람들은 이러한 종류의 치유를 행함으로써 신적인 능력과 선행을 나타내고 그 자신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자임을 입증한 "선지자들이 병 고치는 것이 옳은지의" 여부에 대한 사실을 과거의 논쟁으로 생각하려고 했다.
그 누군가가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병고치신 것이 옳은가? 라고 질문한 일이 있는가?
그리스도는 "율법 아래 놓이신"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그는 장로들의 계율아래 놓이신 것은 아니었다.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어떤 행위의 타당성 여부를 질문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는 예수님 이외의 누구에게도 보다 더 적합하게 이와 같은 질문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여기에서 질문한 것은 예수님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그를 "책잡기 위함"이었다.
만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합당하다고 한다면 그들은 그를 안식일을 범하는 자로 고소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지나칠 정도로 미신적으로 지켰으므로 생명의 위험에 직면한 경우가 아니라면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을 전혀 허락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하신다면, 그들은 그가 그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 잘라먹는 것을 정당화하셨으므로 편파적이라고 그를 비난하려고 했을 것이다.
3. 그리스도는 그들 자신의 의사를 물으시고 그들의 의견과 실행에 동의를 구함으로써 이 질문에 답변을 하셨다(11,12절).
한 마리의 양(잃어버린다 해도 별로 대수롭지 않은 단지 한 마리의 양일지라도)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 일을 행할 것이며 또한 제 4 계명도 이것을 허락하고 있다.
그들은 그 일을 행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자비로운 사람은 그의 짐승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또 바리새인들도 그 양을 잃는 것보다는 그렇게 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양을 돌보시는가? 물론 그는 그렇게 하신다.
그는 사람과 짐승을 모두 지키시고 양육하신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우리를 위하여 그 말씀을 하시고 계시며(고전 9:9, 10), 그러므로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고 반문하신다.
양은 무해하며 유익한 짐승이기 때문에 소중하게 보살핌을 받는다. 그러나 사람은 여기에서 이보다 훨씬 더 귀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사람은 그의 존재성에 비추어 볼 때 가장 좋은 야생 동물보다 더 낫고 가치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이성적인 피조물이며, 깨닫고 사랑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양보다 더 낫다.
따라서 양의 제사는 영혼의 죄를 속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생각하지 못하였으며,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가난한 자나 아마 그들의 가족보다도 자기들의 말이나 개의 훈련과 보호, 먹이에 대해 더 염려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처음 보더라도 매우 합리적이고 선하게 보이는 진리를 추론하고 계신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그들은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물었다.
그리스도는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 병고치신 것과 같은 치유가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할 사람이 누구인가(고 반문하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안식일에 하나님께 직접 예배를 드리는 일보다 더 "선을 행하는" 방법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즉 병자를 돌보거나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일, 예기치 않은 고통가운데 빠진 자들을 도와주거나 급히 구해 주는 일 등이 그러한 일들이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일들이 "선을 행하는"일들이다.
이 선은 사랑과 자비의 원리에 입각하여, 겸손과 자기부정의 태도와 영적으로 [하나님 임재 앞에서]하나님을 닮는 자세를 가지고 행해져야만 한다.
이것이 "선을 행하는"일이며 또한 "열납 되어지는" 일이다(창 4:7).
4.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반대할 것을 미리 아시면서도 병자를 고치셨다(13절).
그들은 예수님의 논증에 대답하지는 못하였지만 계속적으로 자신들의 편견과 적의를 고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이러한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진행하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의무는 행하지 않은 채로 방치되어서는 안되며 또한 반대가 두려워서 선행의 기회를 간과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그 치료 방법이 주목할 만하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네 손을 내밀라. 네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해 보아라"고 하셨다.
그 병자는 그렇게 하였으며 그 결과 "그 손이 온전하게 회복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다른 치유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1) 우리의 손은 타고날 때부터 메말라 있으므로 우리는 선을 행하는 데 전적으로 무기력하다.
(2) 그리스도만이 그의 은혜의 능력에 의해 우리를 치유하실 수 있으시다.
그는 죽은 영혼을 소생케 하심으로써 마른손을 고치시며 우리로 하여금 의도하고(to will) 행할 수 (to do) 있도록 역사 하시는 것이다.
(3) 우리를 치유하시기 위하여 그는 우리에게 "손을 내밀 것을," 즉 우리의 본래의 힘을 이용하고 또한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도록 명하신다.
즉,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손을 내밀 것과 신앙으로 그리스도를 붙잡기 위해 손을 내밀 것과 거룩한 간구를 함으로써 손을 내밀 것을 명하시고 있다.
바로 그 때까지, 이 사람은 쇠약한 환자가 일어나 자기 침대를 옮길 수 없었던 것처럼, 또한 나사로가 그의 무덤에서 나올 수 없었던 것처럼 스스로 자기의 마른손을 내밀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렇게 하도록[네 손을 내밀라] 명하셨다.
우리 스스로는 [전혀] 할 수 없는 의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격려해 주시면서, 믿음으로 행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들은 마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는 명령보다 더 어리석거나 부당한 것은 아니다.
그 명령에는 말씀에 의해 주어지는 약속이 있다.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 주리니"(잠 1:23).
멸망하는 자들이란 모름지기, 만일 이 사람이 그의 손을 내밀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치유함을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면 이 일에 대해 도저히 변명할 수 없는 것처럼 변명을 하지 못하는 자들이다(역주:손을 내밀지 않아 병 고침을 못 받았다면 무슨 변명할 말이 있겠는가?).
그러나 구원받은 자들이라 하더라도, 이 사람이 자기의 손을 내밀음으로써 구원받은 것을 자랑하지 않은 것과 같이 자신들이 구원받은 것에 대하여 자만하지 말아야 한다(자만할 것이 없다). 오히려 그 사람과 같이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혜에 빛을 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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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태도(마 12:14-21)
그리스도께서 가장 큰 수치를 당하실 때에 그의 위엄이 증거 되었던 것처럼, 가장 큰 영광 중에 계실 때에 그는 자신의 겸손을 나타내셨다.
또한 전능한 일을 행하셨을 때 자신의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는 했지만 오히려 "자신을 비우시고 사람들의 칭찬을 구하지 않으셨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
Ⅰ. 그리스도께 대한 바리새인들의 가증스러운 음모(14절).
그의 이적의 확실한 증거에 격분한 그들은 "밖으로 나가 어떻게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였다."
그들이 격분한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명성이 가리워졌을 뿐만 아니라 그가 전파하신 교훈이 직접적으로 자신들의 교만과 외식, 세상적인 관심사에 대해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율법적으로 가장 큰 범죄였던(출 35:2), 안식일을 범하는 일을 JC께서 하셨기 때문에 이를 못마땅히 여기는 것처럼 꾸며댔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가장 사악한 행위가 가장 그럴듯한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의 음모를 살펴 보라. 그들은 [공의회에서]이것에 대하여 논의를 하였으며, 또한 가장 효과적으로 [예수를 죽여 없앰]그것을 수행하는 방법을 숙의하였다.
그들은 가까이에 있는 악당들과 모여 함께 모의한 것은 서로가 격려하면서 협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의 잔인성을 살펴 보라. 그들이 회의를 한 것은 예수를 붙잡아 감옥에 넣거나 멀리 추방해 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오신 그를 죽여버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 나라의 가장 큰 축복이시며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법외 방치자(사회에서 버림받은 자, outlaw)나 그 땅의 말썽꾸러기로 끌어내리려 하는 것은 그에 대한 얼마나 큰 모욕인가!
Ⅱ. 예수님께서 이 경우에 피하여 거기를 떠나신 것은 그의 일이 거절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위험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15절) 때문에 "그는 거기서 떠나셨다."
그의 기적을 통해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하실 수 있었지만 통상적인 피신 방법으로 떠나셨다.
왜냐하면 다른 일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일에서도 우리의 천성을 가지신 무죄하신 연약성에 순종하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주님은 자신을 겸손히 낮추셨으며 친히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는 일반적인 바닥(지경)에까지 내려가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한 성에서 너희들을 박해하거든 다른 성으로 가라"고 하신 주님 자신의 규칙에 대해 모범을 보여 주시려고 하셨다.
그리스도는 만일 이성과 이적이 확신할 수만 있다면 그러한 바리새인들을 확신시키기에 충분할 만큼 분명하게 말씀하셨고 행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확신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격분하였다.
그러므로 JC는 그들을 치유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렘 51:9).
그리스도는 자신의 안일을 위하여 물러가시지 않으셨으며, 또한 자기의 사역을 내버릴 구실을 찾으려 하시지도 않았다.
아니, 그가 물러가신 곳에서도 할 일이 많이 있었으며, 또한 그가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에로 물러가셨을 때도 거기에서 많은 선행을 베푸셨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그의 사역자들이 자신들이 의도한 바를 행할 수 없었을 때에도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행하도록 친히 모범을 보이셨으며 또한 그들이 구석진 곳으로 옮겨갔을 때에도 가르치는 일을 계속할 것을 모범으로 나타내셨다.
국가의 위대한 지도자요, 학자인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를 그들에게서 추방하고 물러갈 것을 강요하였을 때조차 일반 군중들은 그를 따라 몰려들었다. "많은 무리가 그를 따랐다." 그리하여 그를 찾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그에 대한 비난의 구실로 삼으려 했으며 또한 그를 폭도들의 장본인으로 부르게 하는 근거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편견이 없고 선입관이 없으며 세상의 허식에 눈이 멀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게 진지하고 열심 있게 그를 따랐다는 사실과 또한 그가 어디로 가시든지 그들은 그를 따르려 했으며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를 뒤쫓으려고 한 사실은 참으로 그의 영예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 사실이나 또한 그들이 그를 영접하였을 때 그는 그들을 받아들였고 또한 그들을 모두 고쳐주셨다는 사실은 그의 은혜의 영예(the honour of his grace)였다.
그리스도는 낮은 세상을 비취는 태양처럼, "그의 날개 아래에 치유함을 가지고" 의사로서 세상에 오시었다.
바리새인들은 주께서 하시는 선행 때문에 그리스도를 핍박하였지만 그는 그 일을 계속하셨으며 또한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이 지도자들의 사악함을 인하여 나쁘게 여기거나 홀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불친절하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불친절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유용성(usefulness)과 은밀성(privacy)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하셨다.
"예수께서는 저희 병을 다 고치셨지만," 그러나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계하셨다"(16절). 이 말씀은,
1. 사려분별(신중)의 행동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것은 이적 그 자체에 관한 것이라기 보다는 바리새인들을 격분시킨(23, 24), 그리하여[때가 아직 이르기전에]더 심해질 수 있는 과도한 반발을 막아보기 위한 공적인 말씀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비록 선행을 게을리 하시지는 않았지만 그것들에게 대한 반대를 피하고 자신이 위험에 빠져들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 일을 될 수 있는 한 아무런 소음 없이 행하시려고 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지혜롭고 선한 사람은 선행을 하려고 애쓰되 그것이 공공연하게 회자됨으로써 공격대상이 되는 것을 꺼려하는(멀리하는) 법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선한 지혜자가 목표하는 것은 사람의 칭찬이 아닌, 하나님께 열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난의 때에도 우리는 담대하게 선행, 곧 우리의 의무를 계속적으로 수행해야만 하지만, 우리에게 대적할 구실을 찾는 자들을 필요 이상으로 격분시키지 않도록 그 상황을 어떻게 통제할 지를 세심하게 주의해야만 한다. "너희는 뱀같이 지혜로워라"(마 10:16)."
2. 그것은 바리새인들의 마음과 태도에 대한 의로운 판단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
그들(바리새인들)은 그들이 보았던 이적들을 매우 업신여겼으므로 그의 이적에 대해 더 이상 어떤 것을 듣기에는 합당치 못한 자들이었다.
빛에 대하여 눈을 감아 버림으로써 그들은 그 유익을 상실하고 있다.
3. 그것은 겸손과 자기 부정의 행동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적을 베푸시는 의도는 그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입증하는 것이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믿도록 하는 것이며 또한 이를 위하여서는 그들이 반드시 알게 되어야만 하지만 때때로 그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선전하지 말고 오히려] 감추도록 경계하셨다.
이는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 주시고 또한 우리 자신의 선행이나 가치를 선포하거나 그것이 선전되는 것을 바라지 말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주님은 그의 제자들이 자신들의 선행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했던 자들과는 정반대로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Ⅲ. 이 모든 사실에 있어서 성경 말씀이 성취됨(17절).
그리스도는 조용하고 은밀한 곳으로 물러가셨는데, 이는 그가 비록 가려지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고 이로 말미암아 [때에 맞게 자연스레]설명되고 영화롭게 되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성취되었다고 언급된 성경 구절은 이사야 42장 1-4절인데, 18-21절에 대부분 인용되고 있다.
그 목적은 우리 주님이 그의 임무를 얼마나 관대하고 조용하게, 또한 얼마나 성공적으로 수행하실 것인가를 보여 주시기 위한 것이다.
즉 우리가 앞 구절들에서 본 두 실례가 이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여기에서 살펴 볼 것은,
1. 그리스도에게 대한 성부의 즐거움(18절).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여기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1) 우리의 구세주는 우리의 구속에 대한 위대한 사역에 있어서 진정 하나님의 종이었다.
그는 이렇게 하심으로써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었으며(히 10:7), 또한 사람의 배교에 의해 갈라진 틈을 회복시킴으로써 그의 은혜의 계획과 그의 영광의 참여에 기여하셨다.
"종"으로서의 그는 그에게 부과된 위대한 사역과 또한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바 위임된 큰 신뢰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우리의 구원 역사를 위하여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율법을 받으시고, 속박이 되신 것은 그의 수치의 일부분이었다. "그가 아들이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다"(히 5:8). 이 왕의 표어는 Ich dien(내가 봉사하나이다)이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대한 큰 구속 사업의 처리를 위해 오직 유일하게 합당하고 적절하신 분으로써 하나님께 선택하심을 받았다.
그는 par negotio(직무에 있어서 동일한 자)로써 "내가 선택한 나의 종"이다.
그리스도 이외에도 그 누구도 구속자의 일을 할 수 없으며, 또한 구속자의 면류관(crown, 역주:혹 가시면류관)을 쓰기에도 적합하지 못하다.
그는 무한하신 지혜자에 의해, 사람이나 천사는 자격이 없는 봉사와 영예의 지위(post)에로 "백성들에게서 선택함을 받으신 자"(시 89:19)이시다.
그리스도 이외에는 그 누구도 모든 만물 가운데서 탁월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리스도는 이 사업을 거절하시지 않으셨으며 적절한 시기에 선택함을 받으셨다.
그리스도는 선택의 머리가 되시기 위하여 다른 모든 선택자의 머리가 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으셨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엡 1:4).
(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이며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이시다.
하나님이신 그는 영원 전부터 그의 품속에 계셨다(요 1:18). 그는 "날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가 되셨다"(잠 8:30).
성부와 성자 사이에는 창세전부터 영원적이고 상상도 못할 사랑의 교제와 교통이 있었으며,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태초에 그를 가지셨다"(잠 8:22).
성부는 중보자이신 그를 사랑하셨다. 그가 자기의 목숨을 버리고 순종하실 때 "아버지는 그를 사랑하신다"(요 10:17).
(4)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유일한 자이시며 그를 말미암아 하나님은 즐거워하신다.
이것은 가히 최고의 만족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하늘의 음성으로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고 선포하셨다.
"그가" 기뻐하신 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유의하셨던 이적의 역사를 훌륭하게 잘 감당하셨기 때문이며 또한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을 즐거워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를 사랑하는 자로 받으시도록 하셨기"(엡 1:6) 때문이다.
타락한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에 근거를 두는 것은 이에서 기인한다.
왜냐하면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요 14:6).
2. 두 가지 사실에 있는 그에 대한 아버지(성부)의 약속.
(1) 그는 모든 방면에서 그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을 구비하게 될 것이다.
"내가 그에게 성령, 즉 지혜와 재능의 신을 부어 주리라"(사 11:2, 3).
하나님께서 어떤 봉사를 위해 부르신 자들을 그는 틀림없이 이에 합당한 자격을 주시는 것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가 그들을 이런 봉사에로 부르셨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될 것이다. 그 실례로는 모세가 있다(출 4:12).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성부와 동등하셨다.
중보자이신 그는 성부로부터 능력과 영광을 받았으며, 또한 그가 주실 수 있도록 받으셨다.
성부는 그리스도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자격을 주기 위하여 부여하신 모든 것은 이 말씀, 곧 그가 "그에게 성령을 부으셨다"에 종합되어 있다. 이것이 그가 "그의 동류들보다 승하게 복음을 받으신 즐거움의 기름"(히 1:9)이었다.
그는 성령을 조금 받으신 것이 아니라 "한량없이" 받으셨다(요 3:34).
여기에서 유의할 것....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기뻐하시는 자는 누구든지 간에 그는 틀림없이 "성령을 그들에게 부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의 사랑을 베푸시는 곳은 어디든지 간에 그의 형상의 어떤 것을 베푸실 것이다.
(2) 그는 그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보내신 자를 정녕 인정하실 것이다.
이것은 오래 전부터 우리 주님에 대한 약속에 의해 확실시된 것인데, 곧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10)이다.
또 우리는 여기에서 날로 번성해 가는 즐거움의 말씀을 읽어 볼 수 있다.
① 그는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방 국가에 인접한 자들에게 전파하시고(막 3:6-8) 또 그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그의 복음을 나타내실 것이 여기에서는 그의 심판이라고 불리웠다.
구원의 길과 방법, 즉 아들에게 맡겨진 심판은 위대하신 대제사장이신 그의 의하여 수행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대선지자이신 그에 의하여 나타내 보여지고 선포되었다.
인간의 마음과 생활을 변화시키고 개선시키는 직접적인 영향력을 지닌 실천과 대화의 규범인 복음은 이방인에게 알리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유대인 특유의 것(시 147:19)이었으나,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해 그 심판이 "이방인들에게도 임할 것이라"고 종종 예언되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이 심판이 불신적인 유대인에게 임하였을 때 놀라워하지 않은 것처럼 하물며 자신들에게 임하였을 때 놀라워해서는 안 될 것이다(역주: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②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21절).
그는 이방인들에게 심판을 보이실 것이므로 그들은 그가 보이신 것을 유의하시며 또한 그것으로 감화되어 주님을 의지하고 헌신하며 그 심판에 순응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유의할 것.... 복음의 큰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도록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예수, 즉 구세주라는 귀중하신 이름으로 불리우며, 쏟아 부어진 이름과 같이 귀중한 이름이시다. 즉 그는 "우리의 의로움이신 주님"이시다.
복음서 기자들은 여기에서 70인역을 따르고 있다(혹은 70인격의 후대 역이 복음서 기자들을 따르고 있다).
히브리 성경은 "섬들이 그의 말씀을 기다린다"(사 42:2)고 기록하고 있다.
이방의 섬들은 "하나님께서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실 것이라"(창 9:27)고 언급된 야벳의 후손들이 사는 곳이라고 말해진다(창 10:5). 이 예언은 "섬들"(선지자들이 말하고 있다), "이방"(복음서 기자들이 말하고 있다)이 "그의 법을 기다리며" 또한 "그의 이름을 바라게 될"(믿게 될)때인 지금 성취되었다. 이것들을 함께 비교해 보라.
그리고 그들이, 아니 그들만이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신뢰할"수 있으며, 결심을 가지고 그의 법에 의해 지배를 받도록 하기 위하여 "그의 법을 기다릴"수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또한 유의할 것.... 우리가 기다리는 법은 믿음의 법이며, 그의 이름을 믿는 신뢰의 법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곧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큰 계명인 것이다(요일 3:23).
3. 그의 관한 예언과 그의 임무를 온화하고 침착하게 수행하심에 관한 예언(19, 20절).
그리스도의 인상적인 은둔과 자신을 감추신 사실에 의거하여 이 말씀이 인용된 것은 주로 이러한 목적에서이다.
(1) 그는 시끄러움이나 자랑함이 없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실 것이다.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19절)리니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눅 17:20, 21).
독생자가 세상에 오셨을 때는 행사나 의식이 없었다. 그는 공적인 입장을 취하시지 않았으며 또한 그를 왕이라고 선포할 전령사도 가지시지 않았다. "그는 세상에 계셨지만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다."
화려한 구세주에 대해 소망을 품고 있던 자들은 큰 오해를 법하였던 것이다(오산을 하였다).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19절).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그가 저기에 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넌지시 암시하셨지만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적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는 소음을 내시려 하지 않았으며 이과 같이 조용하게 내려 오셨다. 그는 가능한 최대의 겸손과 자기 부정으로써 말씀하시고 행동하셨다.
그의 왕국은 영적이었다. 그러므로 강제나 폭력, 또는 겉치레에 의해 진전되지는 않았다. 아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2) 그는 자신의 임무를 혹독하거나 잔인하게 수행하시지 않을 것이다(20절).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실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악한 자를 참으시는 그의 인내로 해석을 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바리새인들을 갈대와 같이 쉽게 꺾으실 수도 있었으며, 꺼져 가는 심지처럼 끄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원수들을 자신의 발등상으로 만드시는 심판 때까지 그와 같이 일을 하시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이 말씀을 약한 자를 붙드시는 그의 능력과 은혜로 해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그의 복음의 목적은 비록 연약할지라도 신실한 자에게 용기를 주는 구원의 방법을 확립시키는 것이다.
복음은 이유 없는 순종을 강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의롭고 자발적인 마음을 받아들인다.
그리스도를 온유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떨면서 따르는 특별한 사람들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① 그들의 처지(형편)가 여기에서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가?
그들은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와 같이 어린 초신자들은 "상한 갈대"처럼 약하며, 그들의 약함은 "꺼져 가는 심지"처럼 저속하다(offensive).
그들의 생명(역주:신앙의 수명)은 길지 못하며, 그것은 마치 상한 갈대와 같다. 약간의 열은 있지만 그것은 꺼져 가는 심지와 같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아직도 연약하였으며, 따라서 대부분이 그 가족에게 미련을 두고 있었다.
그들이 지닌 은혜와 선함(good-ness)은 상한 갈대와 같았으며, 그들이 지닌 타락과 사악함은 꺼져 가는 등불, 즉 꺼졌지만 아직도 연기를 내며 타는 심지와 같았다.
② 우리 주 예수님은 그들에게 대하여 어떤 동정심을 가지고 있는가?
주님은 그들을 낙심시키려고 하지 않으셨으며, 더구나 그들을 배척하거나 버리시려고 하지 않으셨다.
상한 갈대는 꺾이워지거나 밟혀서는 안 되며 오히려 받쳐 주어야 하고 삼목(cedar)이나 무성한 종려나무와 같이 강하게 되어야 한다.
새로 켜진 촛불은 그것이 연기만을 내며 불꽃이 일어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불어서 꺼버려서는 안 되며 오히려 불이 일으켜야만 한다.
"작은 일들의 날"이 "귀중한" 일들의 날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날을 업신여기시지 않고 오히려 "큰 일들의 날"로 삼으실 것이다(슥 4:10).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 주 예수님은 참된 은혜를 소유한 자들을, 비록 그들이 연약하다고 할지라도 친절하게 대하신다(사 40:11; 히 5:2)는 사실이다. 그는 우리가 티끌이며 육신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신다.
③ 이 말씀의 좋은 결과와 성공은 "그가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시리라"는 말씀에 암시되어 있다.
그가 이방인들에게 보여 주신 심판은 성공적이 될 것이며, 그는 계속적으로 이기고 또 이기실 것이다(계 6:2).
이 세상에 있는 복음 전파와 마음에 있는 복음의 능력은 모두 유력할 것이다(우세할 것이다).
은혜는 부패보다 우세할 것이며(역주:부패를 이길 것), 마침내 영광 중에서 완성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심판은 승리를 가져올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심판하실 때 그가 이기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진리로 공의를 베푸실 것이다"(사 42:3). 진리와 승리는 매우 흡사하다. 왜냐하면 "진리는 위대하며 또한 승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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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중상 모략(마 12:22-37)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Ⅰ. 신적인 허락에 의해 마귀의 지배와 그 소유 아래 있었던 자를 치유하심으로써 사탄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승리(22절).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이 사람의 처지는 매우 슬픈 것이었다. 그는 "귀신이 들려 있었다."
예수님 당시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러한 경우가 더욱 많이 있었다.
이는 사탄을 반대하고 내어쫓는 데 있어서 그리스도의 권세가 더욱 높혀지고 또한 그의 목적이 더욱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더구나 그가 "마귀의 사역들을 파괴하려고 오셨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귀신들린 이 불쌍한 사람은 장님이었고 벙어리였다.
사탄의 지배 아래 있고 그에 의해 사로잡힌 영혼(마음)은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 장님이며, 은혜의 보좌에 대해서도 벙어리이다.
아무 것도 보지 못하며 목적을 가지고 말할 수 없다. 사탄은 신앙의 눈을 멀게 하며 기도의 입을 막아 버린다.
2. 그의 치유는 매우 이상하였으며, 더욱이 그것은 돌연적이었다. "그는 그를 고쳐 주셨다."
사탄을 정복하고 내어 좇는 일이 곧 마음의 치유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 원인이 제거되었으므로 곧 그 증세(결과)는 멈추었다. "그 그런데 멀고 벙어리 된 자가 말하며 보게 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그리스도의 자비는 사탄의 악의에 직접적으로 반대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의 은총은 사탄의 악에 반대가 된다.
사탄의 권세가 영혼 속에 깨어질 때 그 눈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열려지며, 그 입술은 그의 칭송을 말할 수 있도록 열려진다.
Ⅱ. 이 사실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었던 확신.
그들은 다 "놀랐다."
그리스도는 이와 같은 여러 이적들을 전에도 행하셨다. 그러나 그의 기적들이 놀랍지 못한 것이거나 다른 사람들이 기이히 여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들은 종종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사실에서 추론하기를 "이 사람은 다윗의 후손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메시야는 다윗의 후손으로 올 것이라고 예언되지 않았는가? 이분은 오실 그이가 아닌가? 우리는 이 질문을,
1. "조회하는"(enquiring) 질문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들은,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에 대해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그 인상들은 그럴 듯했지만, 그것들은 일시적이었다.
그들이 당초부터 시작하였던 질문은 매우 좋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사라져 버렸고 계속되지 못한 것처럼 보여진다.
이러한 확신은 머리(지식)에로 가져가야만 한다. 그러나 그들은 아마 마음으로 가져온 듯하다.
2. "긍정적인"(확인하는, affirming) 질문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그렇다. 확실히 그렇다. 그 이외의 분은 결코 아니다. 이와 같은 이적들은 분명히 메시야의 왕국이 지금 세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또한 그리스도의 이적을 보고 그러한 추론을 해낸 사람들은 모두가 서민층이었다.
무신론자들은 말하기를, "그것은 그들이 바리새인들보다 더 무식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고 할 것이다.
아니다, 그 사건은 분명하였으며 많은 조사를 해볼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들이 다윗의 자손임을 추론한 것은 바리새인들이야말로 세상적인 일들에 의해 편견 되거나 편파적이 아닌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메시야이시며 세상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위대한 진리를 아는 방법이 나무나 분명하고 쉽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모두가 다 알 수 있다(그것을 놓칠 수는 없다).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다"(사 35:8 을 보라).
그것을 찾는 자들에게는 발견되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에게 숨겨진" 것들이 "어린아이들에게 계시된" 사실은 신적 은혜의 겸손의 본보기이다.
세상은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으며 지혜 있는 자는 어리석은 일들로 말미암아 혼동되었다.
Ⅲ. 바리새인들의 모독적인 트집(24절).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신적인 법(율법)에 대해 더 많이 알며 또한 열심인 것처럼 가장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사람들 가운데서 가진 명성에 대해 자만하였으며, 그것으로 자만하고 권세를 지탱하며 치부를 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들이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 즉 "이는 다윗의 후손이 아니냐?"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들은 이적 그 자체보다는 그 소리에 매우 화가 치밀었다. "그의" 인기가 백성들 가운데서 상승됨에 따라 "그들의" 인기는 분명히 떨어지고 감소되었을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예수님을 질투하게 되었다. 그들은 마치 사울이 여인들의 칭송을 인하여 다윗을 시기했던 것처럼(삼상 18:7, 8) 그를 시기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사람들의 칭송과 박수갈채 소리에 자신들의 행복이 묶여버린 자들(역주:칭찬을 듣고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칭찬하는 아름다운 말을 듣고는 끊임없이 불안감에 쌓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영예의 그림자는 그것을 피하셨던 그리스도를 뒤쫓았지만, 그것을 열심히 추구했던 바리새인에게서는 멀리 도망가 버렸다.
그들은 말하기를,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는 다윗이 후손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그들이 그리스도를 "이가"(thirmfjsep fellow, "이 녀석")이라고 부른 것은 얼마나 무례한 말인가?
"기름 부으심을 받는 자"(그리스도)라는 그의 귀중한 이름이 그들의 입술로 말해지는 것이 합당치 않았던 것 같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높이면 높일수록 그들은 더욱 더 그를 비난한 것은 그들의 교만과 거드름과 마귀적인 시기의 본보기이다.
자신이 초라하기 때문에 선한 사람을 악하게 말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2. 그들은 그의 이적에 대해 얼마나 모독적으로 말하였는가?
그들은 눈앞에 전개된 엄연한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귀신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해 쫓겨난 것은 너무도 명약관화한 사실이었다.
또한 그들은 그 일이 비상하고 초자연적인 일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러한 사항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는 다윗의 후손이라"는 결론을 피하고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의역). 즉 그리스도와 귀신 사이에 어떤 계약이 있었다고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귀신은 그의 말씀에 의해 쫓겨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물러났거나, 혹은 동의에 의해 목적을 가지고 굴복하였다는 것이다.
마치 귀신의 왕과 협상함으로써 그는 부하 귀신들을 내쫓는 권세를 가진 것처럼. 이보다 더 큰 거짓과 악의가 있을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하면 진리 그 자체이신 그가 세상을 속이기 위하여 거짓말의 아버지와 연합될 수 있는가! 이것은 그들이 분명한 확신에 대해 끝까지 대항하려고 결심했던 완고한 불신의 돌파구이자 속임수였다.
여기에서 살펴 볼 것.... 귀신들 가운데는 왕, 즉 하나님께 대한 배신과 반역의 두목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왕은 바알세불 ─ 즉 파리의 왕, 똥더미의 신이다. 오 루시퍼야! 너는 파리들의 왕이 되려고 빛의 천사에서부터 떨어졌구나!
그리고 이 루시퍼는 역시 귀신들의 왕이며, 지옥의 영들의 패거리들 중에서 우두머리이다.
Ⅳ. 이 비열한 암시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25-30절).
"예수께서는 저희 생각을 아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때든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아시며, 사람 안에 있는 것을 아신다는 사실이다.
그는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감찰하신다."
바리새인들은 수치스럽기 때문에 그것을 드러내 놓고 말할 수는 없었으며 그것을 마음속에서 생각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그러한 말을 함으로써 백성들을 만족케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 자신의 양심의 확신을 누그러뜨리기 위하여 그러한 생각을 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인정하기를 부끄러워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숨길 수 없는 것들로 인해 자신들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역주:어떤 그릇된 생각 때문에 할 일을 못한다.).
어쨌든 바리새인들이 심중에 속삭인 생각들은 다른 사람들을 강퍅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들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리스도의 답변은 그들의 생각에 대한 답변으로 언급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어떤 원리에서 그것을 말하였는지를 아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것을 서둘러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뿌리가 있는 악의 소산물이었다.
이러한 비난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은 풍부하고 납득이 갈 만한 것이었는데, 즉 입이 불과 유황으로 닫혀지기 전에는 "모든 입"은 지성과 이성으로 "닫혀질 수 "(역주:제어될 수)있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에서 세 가지 논증을 통하여 그들이 제시한 이 제안의 불합리성을 지적하고 있다.
1. 사탄이 이러한 타협을 통해 스스로 내어쫓김을 받게 되리라는 발언은 매우 이색적이며 또한 거의 신빙성이 없다.
만일 그렇다면 사탄의 "왕국은 스스로 황폐하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간교성을 고려할 때 이것은 상상될 수 없는 문제이다(25, 26절).
(1) 여기에는 잘 알려진 규칙이 제시되어 있는데, 즉 모든 사회에 있어서 공통적인 파멸은 상호 분쟁의 결과라는 것이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 질 것이다." 모든 가정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 즉 악의나 분쟁에 의해 전복되지 않을 만큼 강한 가정이 어디 있으며, 견고한 단체가 있는가?(Cic Lael. 7) 불화는 대개 황폐(파멸)로 끝난다.
만일 우리가 서로 부수고 깨뜨린다면, 우리가 서로를 나눈다면, 우리는 공동의 적에게 쉽사리 먹이가 되고 말 것이다.
하물며 "우리가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하게 될 것이다"(갈 5:15). 교회와 국가들은 슬픈 경험을 통하여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2) 자체 내의 경우에 대한 이 말씀의 적용(26절). "사단이 말일 사단을 쫓아낸다면,"
만일 귀신의 왕이 부하 귀신들과 불화가 된다면, 모든 왕국과 그 지배력은 곧 깨어지고 말 것이다.
아니, 만일 사단이 그리스도와 협정을 맺었으면 그것은 그 자신의 파멸일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전파와 이적들의 두드러진 목적과 의도는 암흑과 사악, 그리고 하나님께 대할 적개심을 가진 왕국인 사단의 왕국을 전복시키고 그 멸망의 터전 위에 빛과 거룩, 그리고 사랑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반역자요,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폭군인 "마귀의 사역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러므로 바알세불이 이러한 목적을 지지하고 나선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매우 어리석은 생각이다.
만일 바알세불, 그가 그리스도에 의해 무너진다고 하면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그는 자신이 그것을 전복시키는 데 기여하게 되는 셈이 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귀신(마귀)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데 있어서 왕국, 즉 공통적인 지배 세력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힘을 다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대항하려고 할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 그리스도와 바알세불이 어찌 조화되겠는가?" (역주:고후 6:14, 15)
그리스도는 마귀의 왕국을 파괴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바알세불과의 은밀한 계약과 같은 그러한 유치한 기교나 계획에 의해 그것을 행하실 필요가 없으시다.
아니, 이 승리는 보다 고상한 방법으로 획득되어야만 한다.
귀신의 왕으로 하여금 그의 모든 힘을 다 내어보도록 하라. 자신의 힘과 수단을 다 동원하고 그의 가까운 공모자들과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라.
그러나 그리스도는 마귀의 연합세력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극강할 것이며 따라서 그의 나라는 서지 못할 것이다.
2. 귀신들이 반드시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내어 쫓김을 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은 전혀 이상하거나 황당무계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1)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유대인들 가운데는 최고의 하나님, 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에 호소함으로써 종종 귀신들을 내어쫓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요세푸스는 그 당시에 그 일을 했던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유대인 박수"(행 19:13)에 대해 알고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았거나(막 9:38) 그에게 신실치 못했던 자였을지라도(마 7:22)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었던" 사람들에 대한 기사들을 읽어볼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정죄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이 행했던 것을 하나님의 성령의 탓으로 돌렸으며, 또한 이것 때문에 그들 자신과 그들의 국가를 자랑하였다.
따라서 다른 이들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귀신들을 내어쫓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면서도 그리스도가 행하신 것은 바알세불과의 협상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악의와 시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사악한 사람들, 특히 그리스도와 기독교에 대해 악의적으로 핍박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그들이 미워하는 것은 똑 같은 일이라 할지라도 정죄하며, 또한 자신들이 좋아하는 일은 시인하고 환영한다는 사실이다.
즉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옳고 그름, 곧 시비의 판단은 일 자체의 어떠함나 도덕적 판단에 의해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편이냐, 즉]사람에 의해 내려지는 것이며, 또한 이성이 아닌, 편견에 의해 내려지고 있는 것이다.[[전형적인 파당적 치우침..내로남불의 극치!!]]
그러나 얼굴(외모)만 알고 심판 때에는 그 밖의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는 것은 매우 합당치 않다.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너희 자신의 이러한 모순은 마지막 심판 때에 너희를 거스려 일어날 것이며, 또한 너희를 정죄할 것이다." 마지막 심판 때에는 모든 죄뿐만 아니라 그 악화(aggravation)까지도 계산될 것이며 또한 의롭고 선하였던 우리의 어떤 개념도 우리에게 편파성을 확신시켜 주기 위하여 증거해 줄 것이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2) 이 귀신의 추방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워졌고 나타났다는 표식이요 암시이다(28절).
"그러나 만일 참으로 내가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성령으로 귀신들을 내어쫓았다고 한다면 너희는 비록 그것을 기꺼이 받으려고 하지 않았지만 메시야의 왕국은 지금 너희 가운데 세워지려 하고 있다고 단정을 내려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다른 이적들은 그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 이심을 입증하였지만 이 이적은 그가 귀신들의 왕국과 그 사역들을 파괴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이심을 입증하였다.
이제 큰 약속은 분명히 성취되었으며, "여인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였다"(창 3:15).
"그러므로 오랫동안 기대하였던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사업은 지금 시작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① 귀신의 능력의 파멸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수행된다는 사실이다.
신앙의 순종에로 역사 하시는 성령은 불신앙과 "불순종의 자녀들 가운데서 역사 하는" 영의 세력을 전복시키신다.
② 귀신을 내어쫓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실한 서론이다.
만일 마음에 대한 귀신의 관심(역주:또는 세력, interest)이 습관이나 외적인 억제에 의해 저지되거나 거룩한 자이신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꺾이거나 깨어진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나라"가 그 마음, 즉 은혜의 나라, 영광의 나라를 진지하게 찾는 그 마음에 "임하게 될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이적들, 특히 귀신들을 내어쫓는 이 이적과 그의 교훈,
그의 거룩하신 종료의 목적과 의도를 비교한다면 그가 사탄과 연합되었다는 것은 전혀 사실과는 다르며, 따라서 그는 귀신에 대하여 정면으로 맞서 대항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의역).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29절)
"결박한 후에야" 그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두움 속에 처해 있고 사악한 가운데 놓여 있는 이 세상은 마치 한 집이 강한 자의 소유와 지배 아래 있는 것과 같이 사탄의 소유와 그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 거듭나지 못한 영혼도 이와 같다. 거기에는 사탄이 거주하고 있으며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1) 그리스도의 복음의 목적은 강한 자와 같이 세상을 지키던 마귀의 집을 처부수는 것이었다.
즉 사람들로 하여금 "암흑에서 광명으로," 죄악에서 성결로, 이 세상에서 보다 나은 세상으로, "사탄의 능력에서 하나님에게로"(행 26:18) 돌이키는 것이었으며 또한 영혼들의 성질을 개조시키는 것이었다.
(2) 이 목적에 따라서 그는 그의 말씀으로 불결한 영들을 내어쫓을 때 강한 자를 결박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마귀로부터 "홀"을 빼앗기 위하여 그의 손에 "검"을 빼앗으셨다.
그리스도의 교훈은 그의 이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며 또한 그가 사람의 몸에서부터 얼마나 쉽고 효과적으로 귀신들을 내어쫓았는가를 보여 주심으로써(보여 주셨을 때), 그는 모든 신자들로 하여금 사탄이 아무리 사람의 마음을 유린하고 괴롭힐지라도 그는 그의 은혜로 그것들을 깨뜨리실 것이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다.
그는 마귀를 깨뜨리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마귀를 결박하실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위정자들이 자원하여 먼저 스스로 적극적인 회개를 통해 주께 돌이킴으로써 전국적인 회개운동을 장려함따라 "우상 숭배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그 추구하는 바를 바꾸었을 때, 최악의 죄인들이 거룩하고 의롭게 되어 최선의 성도가 되었을 때, 그리스도는 마귀의 집을 훼파하셨으므로 또한 앞으로도 더욱 더 그것을 훼파하실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 사탄과 그의 왕국을 힘있게 대적하여 싸우신 이 거룩한 전쟁은 그의 중립적인 태도를 허용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타내 준다.
즉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이다(30절).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에서 일어났던 사소한 의견 대립에서 우리는 문제의 다양성을 배우며 또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와 함께 하는 자"(눅 9:50)로 여김으로써 화목을 구하여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마귀와의 큰 싸움에서는 평화가 있을 수 없고 또한 어떤 호의적인 해석도 대수롭지 않게 내려질 수 없다.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위하지" 않는 자는 실제로 그를 "대적하는"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대의(cause)에 있어서 냉담한 자는 적으로 간주된다.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 논쟁이 있을 때 둘 사이에는 망설임이 있을 수 없다(왕상 18:21).
그리스도와 벨리알 사이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나라는 사탄의 나라에 대해 영원히 반대적이며,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나라는 사탄의 나라를 영원히 이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길르앗은 요단 저편에, 아셀은 해변에" 거할 곳이 없으므로(삿 5:16, 17),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에 온전히, 신실하게, 확고하게 거하여야만 한다. 그것은 "오른"(right) 편이며, 마침내 "오르는"(rising) 편이 될 것이다(출 32:26 을 보라).
후반절도 전반절과 똑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30절).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1)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모으는 것이었는데, 즉 추수하여 모으며 또한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을 모으는 것이었다(요 11:52; 엡 1:10).
(2) 그리스도께서 그와 함께 한 자에게서 기대하시고 요구하시는 것은, 그들이 그와 함께 모이는 일이며 또한 그들 자신만이 그에게 모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있는 곳에서 다른 사람들을 그에게로 모아들임으로 말미암아 그의 지배 세력을 한층 강화시키는 일이다.
(3) 그리스도의 나라의 선지자로서 나타나거나 행동하지 않는 자는 그것을 방해하는 자로 간주되고 취급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모으지 않는다면 우리는 헤치는 자가 되고 말 것이다."
우리가 [흐뜨러 뜨리지]헤치지 않는 것만으로 족하지는 않다. 오히려 우리는 반드시 선을 행해야만 한다.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에는 넓은 틈이 있다는 이러한 사실은 그 둘 사이에 바리새인들이 수군거렸던 것처럼 어떤 계약이 있지 않았음을 보여 주고 있다.
Ⅴ.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이 경우에 의거하여 사람이 입술로 짓는 죄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백성들에게로, 논쟁에서부터 교훈으로 화제를 돌리신 것처럼 보인다.
그는 바리새인들의 죄에서부터(죄를 보시고) 백성들에게 세 가지 입술 범죄에 관하여 경고하고 계시다.
다른 사람들의 잘못은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1.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가장 큰 입술죄(tongue-sins)이며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31, 32절).
(1) 여기에는 복음적인 조건에 근거하여 모든 죄는 사하심을 받는다는 사실에 대한 은혜스러운 확증이 있다.
그리스도는 이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 또한 아무리 큰 죄라고 할지라도 만일 우리가 참으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다면 그것(큰 죄)이 우리가 하나님께로 받아들여지는 데 어떤 방해물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에게 대한 위로의 말씀이 아닐 수 없다.
JC의 이름을 믿고 영접하는 자들에 관하여,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는다"(31절).
비록 그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사 1:18), 그 성질이 매우 악하였을지라도, "그 죄가 하늘에까지 사무쳤을지라도," "하늘 저편에까지 이르는 주님의 자비하심이 있다." 자비는 모독죄, 즉 하나님의 이름과 그 영광을 즉각적으로 훼손하는 죄에까지도 미칠 것이다.
"훼방자였던" 바울(딤전 1:13)도 자비를 얻었다.
자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그는 죄악을 사유하신다"(미 7:18).
비록 말로 인자를 거역한다고 할지라도 사하심을 얻을 것이다. 그의 죽음을 모욕한 많은 사람들도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다.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을 거스려 말하는 모든 말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본을 보여 주셨다.
"귀머거리인 나는 듣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 "그들은" 마귀가 아닌 "사람에게 용서받게 될 것이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타락한 천사보다 우위에 있는 모든 죄가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전 세계 인류에 대한 사랑이다.
(2) 여기에는 오직 유일하게 사함을 받지 못하는 예외적인 죄인 "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살펴 볼 것은,
① 이 죄는 어떤 죄인가? 그것은 "성령을 거스려 말하는 죄"이다.
오직 유일하게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그러한 죄라고 하면 입술로 짓는 죄야말로 얼마나 가증한 것인가를 살펴 보라.
"그러나 예수는 저희 생각을 아셨다" (25절).
여기에서 의미하는 것.... 성령의 인격이나 본질, 또는 그의 보다 개인적인 어떤 활동들에 대해 거스려 말하거나, 또는 죄인 가운데서 역사 하는 그의 내적 역사에 대해 거절하는 것을 모두 일컫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게 될 것인가?"
사면(indemnity)의 행동은 언제나 은혜와 또한 그 행동의 목적인 자비의 덕택으로(in favour of) 해석될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법에서도 판결이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행동에 있어서의 예외는 필요 이상으로 확대되지는 않는다.
복음은 사면의 행동이다. 이름으로, 말로 거슬리는 것은 모두가 예외적으로 간주되지만 "성령을 모독한 죄"만은 결코 제외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가장 좁은 의미로 해석되어야만 한다.
아주 오만불손한 죄인들은 사면과 신앙 회개의 범위에서 사실상 제외된다. 그러므로 더 이상 다른 예외들을 찾을 필요가 없다.
또한 이 성령 모독죄가 예외인 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자비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공로에 어떤 부족(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불가피하게 죄인을 불신앙과 완악함에 그대로 내버려두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한 열심히 그의 공로와 자비에 동참하려고 열망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이러한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죄를 범하였다고 두려워하는 자에게마다 그들이 그렇지 않다는 적절하고도 좋은 표징을 주라.
(*박학한 휘트비(Whitby) 박사는 이 사실을 잘 해석하고 있는데, 즉 그리스도는 지금 말해졌거나 행해진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되어질 일 who so evershallblaspheme ─ 즉 누구든지 앞으로 훼방할 자(막 3:28; 눅 12:10)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고 하였다. )
그리스도가 세상에 계실 때 그를 훼방했던 자들이나 그를 "포도주를 즐기는 자, 속이는 자, 모독하는 자" 등으로 불렀던 자들이 그나마도 변명할 구실이 있다고 하면 그의 외모가 초라했으며 그에 대한 위정자들이나 지도층의 편견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의역).
그의 신적 사명은 그의 승천 후까지 완성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회개에 의해 그들은 사함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도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죽였던 많은 사람들이 실천하였던 것처럼 성령의 부으심에 의하여 확신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소망이 있다.
그러나 만일 성령이 계시의 내적인 선물로 주어져 방언을 말하고 기타의 일들을 하면서도(이러한 성령은 사도들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그 성령과 똑 같은 것임) 악령들처럼 계속적으로 성령을 모독한다고 하면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리라는 희망은 결코 없다(결코 그리스도를 믿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사도들 중에 역사 하신 성령의 선물은 하나님께서 복음의 확증을 위해 사용하시려고 의도하셨던 마지막 증거이며 또한 다른 방법들이 진행될 때 여전히 보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이것은 가장 힘있는 증거이며 이적 그 자체보다도 확증시키기에 더 적합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셋째, 그러므로 이 성령의 섭리를 모독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이 분명히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바] 이적을 보고 행하였던 것처럼 그러한 이적들을 마귀와의 공모로 전가시켜버린(돌려버린) 자들을 누가 확신시킬 수 있는가?(도저히 불가능하다) 이것은 그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강퍅한 불신이며 따라서 용서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로 말미암아 회개가 죄인들의 눈에서 감추어지기 때문이다.
② 이 죄에 내려진 판결이 무엇인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 하리라,"
유대 교회의 그 당시 상황을 보면 "오만하게(presumptuously) 범죄한 영혼"을 위해 속죄하는 제사가 없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에서 종종 "오는 세계"라고 일컬어지는 복음적 은혜의 시대 하(下)에서도 "언약의 피를 짓밟고 은혜의 성령을 업신여기는" 죄는 사함 받을 수 없다. 병 고침을 직접적으로 거절하는 죄에 대해서는 아무런 치유도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를 위한 지성소는 없다는 것이 우리의 옛 법에 있는 규칙이다.
또한 그것은 죄인 자신의 양심에서 지금 "사함 받을 수" 없을 것이며, 사죄가 선포될 "큰 심판 날에" 도 결코 사함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일시적인 형벌과 영원한 형벌에 대한 죄인임을 나타내는 죄일 뿐 아니라 현재의 진노와 "장차 오는 진노"에 대한 죄인임을 나타내는 죄이다.
2.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그 밖의 사악한 말들, 즉 마음을 지배하는 타락의 소산물과 거기에서 나오는 말들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다(33-35절).
25절에는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라고 기록되었으나 여기에서는 그들을 목표로 삼아 그들의 마음이 적의와 사악으로 가득 차 있으므로 그들이 그렇게 악한 말을 하는 것은 이상스러운 일이 아님을 보여 주고 계시다. 그들은 종종 이러한 생각을 감추기 위하여 의로운 사람의 행세를 한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님은 그 근원을 지적하시며 그것들을 치유하시는 것이다. 마음을 깨끗케 하라. 그리하면 그것이 우리의 마음에 나타날 것이다.
(1) 마음은 "뿌리"이며, 말은 그 "열매"이다(33절).
만일 나무의 본질이 좋으면 이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은혜가 마음속을 지배하는 원리인 곳에서는 그 언어는 가나안의 언어일 것이다.
반대로 그 마음이 정욕의 지배를 받는다면 그것을 깨어지고 말 것이다. 병든 허파는 거북스러운 숨을 내쉬게 된다.
사람의 언어를 보아 그들이 어느 지방 출신인가를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이 어떤 영의 소유자인가"를 알 수 있다.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고 하라. 순수한 마음을 가져라. 그리하면 너희는 순수한 입술과 생활을 가지게 될 것이다. 혹 그렇지 않으면 나무는 썩게 될 것이며 따라서 그 열매도 썩게 될 것이다. 너희는 야생나무 줄기에 좋은 나무의 싹을 접붙임으로써 좋은 나무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 나무가 여전히 똑같은 것이라면, 네가 원하는 곳에 그것을 심고 물을 주어도 그 열매는 여전히 나쁜 것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마음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 생활은 철저하게 개조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바리새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들의 사악한 생각을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러한 쓴맛을 지닌 쓴 뿌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불쾌히 여기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감추려고 한 그들의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여기에서 암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는 외적으로 좋게 보이게 하려고 하기보다는 실제적으로 좋게 되기를 유의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2) 마음은 "샘"이며, 그 말들은 시내이다(34절).
시내가 샘에서 흘러나오듯이, " 그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
악한 마음은 "샘이 그 물을 솟쳐냄 같아, 악한 것을 잘한다"(렘 6:7)고 기록되어 있다.
솔로몬이 말한 것과 같은 흐려진 우물과 더러워진 샘(잠 25:26)은 "더럽고 지저분한 시내들을 발할 수"밖에 없다.
사악한 말들은 사악한 마음의 자연적이고 순수한 산물이다.
은혜의 소금을 샘에 던지지 않고서는 물을 정결케 하거나 "말을 고르게 하거나", "타락한 대와(교제)"를 정결케 할 수 없다.
그들은 이것을 원하였으나 그들은 악하였다.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그들은 "독사의 자식들"이었다. 세례 요한도 역시 그들을 이와 같이 불렀다(마 3:7). 그들은 지금도 똑 같았다.
"구스 사람이 그의 가죽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역주:구스 사람들은 흑인이었다) 백성들은 바리새인들을 성도의 후손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을, 그 자신과 그의 복음에 대해 악의를 지닌 "독사의 자식," 즉 "뱀의 후손"으로 부르고 있다.
독스럽고 악의적인 것 이외에 독사의 자식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독사에서 독 이외에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는가?
여기에서 유의할 것.... 옛 잠언이 말하는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삼상 24:13)와 같이 악한 것들은 악한 사람들에게서 기대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한다"(사 32:6).
그 자신이 악한 자들은 선행을 할 수도 없고, 또한 그들이 마땅히 말해져야 되는 선행에 대해 말할 수도 없다.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어떤 사람을 찾는가를 알기 위하여 그들이 살고 있는 곳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가를 알도록 하셨다.
그들은 "전갈 가운데"(겔 2:6) 있는 에스겔과 같으며, 또한 만일 그들이 찔리거나 물리우면 그것을 이상스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3) 마음은 "보고(寶庫)"이며 그 말들은 이 보고에서 가져올 것들이다(35절).
또한 여기서부터 사람의 성격이 나오면 또한 판단될 수 있다.
① "선한 사람"의 특징은 "그의 마음속에 선한 보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여기서부터 "선한 것들이 맺히는 것이다."
은혜, 위로, 경험, 선한 지식, 선한 애정, 선한 결심, 이러한 것들이 "마음에 있는 좋은 보화"이다.
거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은 거기에 거하며, 지배하는 신적인 진리는 마치 좋은 집주인의 쌓은 것(저축물)과 같이 그러하면서도 모든 경우에 쓸 수 있도록 준비가 된 가치 있고 적합한 보화이며, 안전하고 은밀히 보존된 보화이다.
이와 같은 자격을 구비한 "선한 사람"은 요셉이 그 쌓은 것에서 "선한 것을 맺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교화를 위하여 선한 것을 말하고 행할 것이다.
잠언 10장 11, 13, 14, 20, 21, 31, 32절을 보라, 이것은 "선한 것을 낸다(맺는다)."
어떤 사람은 "선한 보화"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마치 자신이 선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가장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파산자가 되고 말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마음속에 선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위장을 하지만, 그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한다.
그들은 그것을 가지게 되고 또한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기를 원하며, 또한 자신들의 말과 행동은 어떻든지 간에 선한 마음을 가지게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지혜와 지식의 선한 보화"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상호적(communicative)이 아니며, "열매를 맺지 못하는"것이다.
그들은 달란트(재능)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으로 어떻게 장사해야 할지를 모른다.
완전한 기독교인은 "이런 점"에서 "선하시고," 또한 "선행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② "악한 사람"의 특징은 " 그 마음에 악한 것(보화)"을 가지고 있고 또한 그것에서 "악한 것을 낸다"는 것이다.
마음에 도사리고 있으면서 지배하는 정욕과 부패는 악한 보화(것)이며, 이로부터 죄인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남을 해치는 악한 말들과 행동들을 내게 되는 것이다. 창세기 6장 5, 12절, 마태복음 15장 18-20절, 야고보서 1장 15절을 보라.
그러나 "불의의 재물"(잠 10:2)은 "분노의 재물"이 될 것이다.
3.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무익한 말"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으며 또한 그들에게는 어떤 악이 있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36, 37절).
하물며 바리새인들이 말하였던 것과 같이 이러한 악한 말들 속에는 얼마나 많이(악한 것들) 있을 것인가!
그러한 사실은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혀에 의거하여 점검(check)될 심판날에 대하여 많이 생각하게 한다. 마음의 사실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1) 입술죄는 심판날에 어떻게 특별하게 간주될 것인가?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심문을 받을 것이다"(36절).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① 하나님은 우리가 한 모든 말들, 심지어는 우리가 나타내지 않은 말들까지도 살피신다.
시편 139편 4절을 보라.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아무런 뜻도 없이 무심코 한 말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에 대해 다 알고 계신다.
② 헛되고 무익하며 무례한 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며, 좋은 의도를 가지지 못한 말은 교훈하는 데도 좋지 못하다.
그것은 공허하고, 다투는 마음의 산물이다. 이러한 "무익한 말들"은 금지되어 있는 "어리석은 말과 희롱의 말"(엡 5:4)과 같다.
이것은 종종 "유조치 아니한 이야기, 무익한 말"(욥 15:3)에서 발견될 수 있는 죄이다.
③ 우리는 머지않아 이 무익한 말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account for)만 한다.
무익한 말들은 우리를, 이성과 언어의 기능(이것은 우리에게 맡겨진 달란트이다)을 발전시키지 못한 무익한 종으로 입증하는데 증거로 제시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무익한 말에 대해 회개하지 않는다면, 또한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제 틀린 것이다.
(2) 그 말에 대한 심판은 얼마나 엄격한가?(37절)
"네 말로 의롭다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즉 다시 말하면 사람의 재판에서의 일반적인 규칙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규칙에 적용됨)에 의해 의롭다함을 받거나 정죄함을 받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의 대화의 경향(취지)은 그것이 은혜스러운 것인가 아닌가에 따라서 큰 심판날에 우리를 위하거나 반대하는 증거가 될 것이다. 경건하게 보이면서도 혀를 재갈먹이지 아니한 자는 헛된 경건으로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고 말 것이다(약 1:26).
어떤 사람은 주님이 여기에서 엘리바스, 즉 "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요 네 입이니라"(욥 15:6)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는 오히려 솔로몬은, 즉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느니라"(잠 18:21)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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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에 대한 논쟁(마 12:38-45)
여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이야기를 하는 바리새인들은 아마도 그를 중상하고(24절), 또한 그가 보여 주시는 표적들을 믿지 않으려고 했던 동일한 자들은 아닌 것 같다.
이들은 이전의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그 표적들을 불신해야할 이유는 없다고 보았으며, 오히려 그리스도가 보여 주시는 표적에는 만족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만일 그가 자신들이 요구한 것과 같은 더 많은 증거를 제시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들의 사실성(증거, evidence)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Ⅰ. 그리스도에게 대한 그들의 인사(38절).
그리스도를 비난하려고 하였을 때 그들은 마치 그를 존경하는 것처럼 가장하면서 "선생님"이란 칭호를 붙였다.
(깨어 조심하라..그리스도를 "선생님"으로 부르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종은 아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요구하였다.
그들이 표적을 보겠다는 것, 즉 그리스도는 이적에 의해 자신의 신적 사명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매우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출 4:8,9]
(그러나, 잊지말라 !!, 그는 이적에 의해 세워진 종교의 모형(역주:이적 위에 세워진 종교들)을 낮추어 내리고,(take down...종결하고), JC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누리는 새생명, 그 언약의 복음진리말씀따라 그 안의 생명의 영HS으로 사는 참종교를 세우기 위하여 오셨다.)
그러므로 [주께서 모세를 통해 보이신 기적처럼]똑 같은 신임장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그것은 다름아닌 교만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임"을 충분히 입증하는 많은 표적을 이미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지금 표적을 요구하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하나님께로부터 보냄받은 자임을 이미 입증받았고 가르침을 듣고 처방, 곧 마땅한 수행명령을 이미 받았지만(prescribe), [자의적 교만따라 판단하여] 바로 그 처방대로 행하지(subscribing) 않고 전적으로 자기의 구색에 맞춘 새로운 처방을 요구하면서, 미리 처방받은 것을 진부한 것으로취급하여 복용하기를 거절하며 공격하는 것은 교만한 사람에게 흔히 있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위법 행위(공격, offence)가 그의 변명(방어, defence)이 될 수는 없다.
Ⅱ. 이러한 인사, 즉 이러한 무례한 요구에 대한 그의 대답.
1. 그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39절)라는 말로 이 요청을 책망하셨다.
그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만 이 책망을 하신 것이 아니라, 유대 전 백성들에게도 하셨다.
그들은 그들의 모든 지도자들로서, 그리스도의 이적을 믿는 일에 강퍅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를 비난하고 그의 이적을 무시하였다.
그들은 "음란한 세대"들이었다.
(1) 그들은 음란한 자식(brood)들이었다.
즉, 그들 조상들의 신앙과 순종으로부터 벗어나 너무나 타락하였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조차 그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사야 58장 3절을 보라.
(2) 그들은 음란한 아내들이었다.
그들은 언약에 의해 결혼한 바 된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었다. 그들은 포로 전에 있었던 우상 숭배의 음란죄를 범하지는 않았지만, 불신앙과 모든 불법을 자행하였으니, 이것도 역시 음란죄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신들(gods)을 추구하지는 않았지만, 그들 자신이 고안한 표적을 구하였다. 그것도 역시 간음이었다.
2. 그리스도는 이제 "요나의 표적"외에는 이미 그들에게 베푼 것 이외의 다른 표적 행하시기를 거절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성스러운 요구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려고 준비하시지만, 타락한 정욕과 희롱조차 만족시키지는 않으신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잘못 구하는 자들은 "구하지만, 얻지 못한다."
표적들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주권적 베푸심따라]아브라함과 기드온처럼 신앙의 확증을 위해 요구하는 자들에게 베풀어졌다. 그러나 [주권적 주님이심을 무시하고, 미리 규격화 해 놓은 바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불신앙에 대한 구실 삼으려고 요구하는 자들에게는 거절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그들은 결코 다른 이적들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조차도 [이제 베푸시려는 바, 요나의 기적을 통해]그의 놀라운 선하심과 너그러우심을 보게 될 것이다.
(1) 그들은 보다 큰 유익을 위해,
보다 풍부한 확신을 위해 여전히 되풀이된 동일한 표적을 보게 될 것이다.
(2) 그들은 이러한 표적들과는 다른 한 표적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곧 여기에서는 "선지자 요나의 표적"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그 자신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이것은 아직 그들의 확신을 위하여 예비 된 것이었으며, 그리스도가 메시야 되심을 증거하기 위해 의도되었다.
왜냐하면 이것에 의해 그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기 때문이다.(롬 1:4).
이 표적은 그 밖의 모든 표적들을 능가하며, 또한 그것들을 완성하고 성취시키는 표적이었다.
"만일 그들이 앞의 표적들을 믿지 않는다면, 이러한 표적들을 믿을 것이다(출 4:9). 또한 만일 이 표적이 그들을 확신시키지 못한다면 아무 표적도 그들을 확신시키지 못할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의 제자들이 와서 그를 도둑질해 갔다"(역주:예수님의 시체를)고 말함으로써, 이러한 기적적인 사실들을 믿지 않으려고 하였다.
보지 않겠다고 결심한 자들처럼 불치의 소경은 이 세상에 없는 법이다.
그는 여기에서 선지자 요나의 표적에 대하여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40절),
또한 그 때에 다시 안전하고 평안하게 나왔던 것 같이 그리스도는 오랫동안 무덤에 있다가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① 요나가 물고기의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그리스도는 무덤 속에 있었다.
그는 이곳으로 폭풍우를 잔잔케 하기 위해 던지워졌던 대속물처럼 던지워졌다.
그는 거기에 "음부의 뱃속에서"(욘 2:2)와 같이 있었으며, 마치 하나님의 시야에서 던지워진 것처럼 보였다.
② 그는 요나가 "밤낮 삼일"을 물고기의 뱃속에 있었던 것처럼 무덤 속에 계셨다.
그러나 온종일 삼일 낮과 밤은 아니었다(역주:만 3일은 아니었다. not there whole days and nights).
아마도 요나는 고기 뱃속에 그렇게 오랫동안은 있지 않았고 다만 평상적인(natural) 삼일(nucqhvmerai, 헬라인들은 그렇게 불렀다)을 가리키는 것 같다(역주:그러므로 만 2일도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이).
그리스도는 여섯째 날(금요일) 오후 6시에 장사되어 첫째 날(주일) 아침에 다시 살아나셨다.
이것은 매우 통상적인 화법이다. 열왕기 상 20장 29절, 에스더 4장 16절, 5장 50절, 누가복음 2장 21절을 보라.
요나가 오랫동안 그 자신의 죄로 인한 죄수였던 것처럼 그리스도는 오랫동안 우리의 죄로 인한 죄수였다.
③ 물고기 뱃속에 있던 요나가 다시 :주의 성전을 보게 될 것이라"는 확신으로 자신을 위로한 것과 같이(욘 2:4), 무덤에 계셨던 그리스도는 "썩음을 당치 않을 것이라"(행 2:26, 27)는 확신을 가진 자로서 "희망에 거하셨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④ 요나가 삼일 되던 날 그의 감옥에서 해방되어 "죽음 자의 소굴"(죽은 것들은 '물 아래에 모여있다"고 말해진다. (욥 26:6)
거기로부터 산 자의 땅으로 온 것 같이, 그리스도는 삼일 되던 날에 살아나셨으며,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널리 전하시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
3. 그리스도는 이 경우를 들어 그가 사셨던 세대, 즉 개조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파멸될 수밖에 없었던 그 세대의 슬픈 특징과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또한 그는 그들의 특징을 심판 날에 완전히 심문과 마지막 판결을 감당치 못하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사람들과 사물들은 지금 거짓된 색체로 나타나고 있다. 이 세상에서의 성질과 상태는 다분히 변덕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올바른 평가를 내리려고 한다면 마지막 심판에서부터 측정해야만 한다. 영원한 것이 참된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는 유대 백성들을,
(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정죄하게 될"(41절) 세대의 사람(a generation)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들에게 선지자 요나의 표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행하였던 것 같이 그렇게 좋은 결과를 거둘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니느웨 사람들은 이것에 의해 멸망을 면하게 된 회개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오히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멸망을 재촉하게 될 불신앙으로 강퍅하게 될 것이다.
심판 날에는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를 통해 죄를 더욱 죄되다고 심판하게 할 것이라고 언급될 것이다. (역주:악한 그들이 회개하였으므로 그들은 그보다 덜 악한 자들을 심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죄를 한층 더 죄 되게 하는 일이다)
따라서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전파한 자들에 대한 정죄나 지금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는 자들에 대한 정죄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요나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다.
① 요나는 우리와 같이 죄악된 열정에 지배를 받는 인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② 요나는 니느웨에서 낯선 자이었으며, 또한 자기 나라에 대해 편견(악의)을 가지고 있던 낯선 사람들에게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기 땅에 오셔서, 유대인들에게 전파하셨으며, 더욱이 그의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신앙고백자(그리스도인)에게 전파하셨다.
③ 요나는 단지 짧은 설교를 되는대로(엄숙하지 않게) 했으며, 그것도 거리를 지나가면서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의 부르심을 새롭게 하셨으며, 또한 앉아서 가르치셨고, 회당에서도 가르치셨다.
④ 요나는 단지 40일 내에 일어날 진노와 파멸에 대해서만 전파하였으며, 또한 회개를 위한 교훈이나 가르침, 격려 등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의 위험한 상태를 경고하시는 것 이외에 우리가 마땅히 회개해야 함을 보여 주셨고 또한 "천국이 가까왔기" 때문에 우리의 회개를 받아들이신 것에 대해 확증해 주셨다.
⑤ 요나는 그의 교훈을 확증시키기 위해 이적을 행치 않았으며 또한 니느웨 사람들에 대하여 선의(善義)를 보여 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적들과 모든 자비의 이적들을 많이 행하셨다.
그런데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지만,"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자신들의 영혼에 대해 도움을 별로 받지 않고 또한 유익도 받지 못한 사람들의 선함(the goodness)은 보다 더 큰 도움과 유익을 받은 사람들의 사악함을 가중시킬 것이라는 사실이다.
황혼의 희미한 불빛에서 "평화에 속한 일들"을 발견한 자들은 정오의 밝은 빛을 보고도 더듬는 자들을 부끄럽게 할 것이다.
(2)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을, 남방 여왕(시바)에 의해 정죄받게 될 세대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42절).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은 그들을 부끄럽게 할 것이며, 시바 여왕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자들을 부끄럽게 할 것이다.
그녀는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먼 나라에서 왔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리스도가 모든 면에 있어서 솔로몬 보다 더 크신 분이지만 그리스도의 지혜를 들으러 오려고 하지 않았다.
① 시바의 여왕은 초청을 받아 솔로몬에게 오거나 또는 환영의 약속을 받아 그에게 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초청을 받아 그의 발 밑에 앉아서 그의 말씀을 듣게 되어 있다.
② 솔로몬은 지혜로운 사람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지혜 그 자체이시며, "그에게는 지혜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
③ 시바 여왕은 극복할 수 없는 많은 난관들을 가지고 있었다.
즉 그는 여행하기에 불편한 여자였으며, 지루하고 위험스러운 여행을 해야 했다.
그는 여왕이었으며, 그녀가 없을 때 그 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몰랐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를 방해하는 이러한 걱정거리가 없다.
④ 시바 여왕은 그녀가 이렇게 멀리까지 이러한 목적으로 가는 것이 가치가 있는 일인가를 확신할 수 없었다.
명성은 사람을 우쭐하게 만든다. 아마도 그녀는 자기의 나라나 왕궁에 자기를 가르치기에 충분한 지혜자를 거느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난 후 그를 보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불확실성을 가지고 그리스도에게 오지 않았다.
⑤ "그녀는 땅 끝에서 왔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 가운데 모시고 있으며 또한 그의 말씀은 우리 가까이에 있다.
"볼지어다. 그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나니"
⑥ 시바 여왕이 얻으려고 왔던 지혜는 단지 철학과 정치학이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지혜는 구원에로의 지혜이다.
⑦ 그녀는 단지 솔로몬의 지혜만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지혜를 "줄 수"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에게 지혜를 주실 것이다.
아니, 그는 친히 그들에게 "하나님에게서 지은 바 된 지혜"를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사실을 살펴 볼 때,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혜를 듣지 않는다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온 시바 여왕의 앞섬(for wardness)이 심판날에 일어나 우리를 정죄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솔로몬 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는 유대 백성을 그가 친히 사탄을 추방하고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사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탄의 소유와 지배하에 계속 머물러 있기를 결심하였던 세대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한 귀신이 나갔다가 많은 귀신들을 데리고 온 것에 비유되고 있다(43-45절).
마귀는 여기에서 "더러운 귀신"으로 불리우고 있는데, 이는 마귀의 정결성을 모두 잃어버렸고 또한 사람 가운데 있는 각종 불결한 것을 즐거워하며, 또한 촉진시키기 때문이다.
① 이 비유는 귀신(마귀)이 사람의 몸을 소유하고 있음을 나타내 보여 주고 있다.
JC가 최근에 귀신을 내쫓았을 때 그들은 "그가 귀신이 들렸다"고 말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그들이 얼마나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귀신들을 어떤 협정에 의해 내어쫓으신 것이 아님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증거이다.
왜냐하면 그때에 마귀는 다시 곧 돌아오려고 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마귀를 내어쫓으신 것은 최종적이었으며 다시 들어갈 수 없도록 완전히 추방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그가 귀신을 향하여 "나오고 다시는 들어가지 말라"고 명령하신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막 9:25).
아마 귀신은 그가 지배하고 있는 자들에게 종종 이와 같은 장난을 곧잘 하였던 것 같다. 그는 나갔으나 다시 더욱 난폭하게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귀신에 들린 환자가 잠시 정신이 맑아진 후에는 이전보다 더욱 발작을 일으키는 것이 예사이다.
귀신은 밖으로 나갔을 때 불편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악을 행하지 못하면 자지 못하기"(잠 1:16) 때문이다.
그는 매우 우울한 자와 같이 "물 없는 곳으로" 다닌다. 그는 그가 돌아오기까지 "쉴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마귀를 사람에게서 추방하였을 때 그들은 돼지에게 들어가기를 애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마른땅에서 오래 살 수 없어서 곧장 호수가로 들아 가고 말았던 것이다.
② 이 비유를 적용하신 것은 유대교와 유대 백성의 경우를 묘사하시기 위함이셨다.
" 이 악한 세대가 그러하리니," 즉 그들은 지금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많은 유대인들에게서 쫓겨난 귀신은 기독자들이 각처에서 사람들과 성전에서부터 추방하려고 할 이방인 가운데서 쉬기를 구하였다.
(*휘트비(Whitby) 박사도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 그들은 이곳의 유대인의 마음에서와 같이 이방 세계에서도 만족할 만한 거처를 찾지 못하였다. 하몬드(Hammlnd) 박사는 그와 같이 해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귀신은 다시 그들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들어갈 허락을 받지 못하였으며(역주: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엄청난 사악과 완고한 불신앙에 의해 이전에 받아들였던 것 이상으로 더 귀신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때에 마귀는 이곳에서 곱절 이상의 지배를 할 것이며 또한 이 백성들의 상태는 그리스도가 오기 전 그들에게 거하였을 때나 사탄이 결코 쫓겨나지 않았던 그 이전 상태보다도 더욱 절망적인 저주를 받게 되는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이다(하몬드 박사는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유대 백성들은 여기에서,
첫째, 배신한 백성으로 묘사되어 있다.
바벨론 포로 후에 그들은 자기들의 우상을 버리는 개혁을 단행하였으며, 종교의 면모를 갖춘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곧 또 다시 타락하였다.
그들은 결코 우상 숭배를 하지는 않았으나 각종 불경건과 모독스러움에 빠져들었고 이것은 더욱 악화되어만 갔다.
더구나 이 모든 나머지 악에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멸시하고 반대하는 악을 더하였다.
둘째, 멸망 받게 될 백성으로 묘사되어 있다.
새로운 범법자의 낙인이 그러한 위선적인 국가, 즉 하나님의 진노의 백성(사 10:6 과 같이)에 대해 붙여졌으며, 또한 로마인들에 의한 멸망은 마치 그들의 죄악이 극도에 이른 것을 보여 주기나 하듯이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심하였다.
그때에 "하나님의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다"(살전 2:15, 16).
이러한 사실을 모든 국가와 교회들에게 대한 경고로 알고 처음 사랑을 버리지 않도록 하자.
또한 그들 가운데 시작된 개혁의 선한 일을 방치하지 말며, 그들이 버렸던 것처럼 보인 사악함에 돌아가지 말도록 하자.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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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친족관(마 12:46-50)
탁월하고 유용한 많은 말씀들이 특별한 경우에 우리 주 예수님의 입에서 나왔다.
그의 즉석의 말씀도 그의 예정하신 말씀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교훈적이었다. 여기에서 살펴 볼 것은,
Ⅰ. 그리스도는 "그에게 말하려고 밖에 서있던 그의 모친과 동생들"(46, 47)에 의해 얼마나 방해를 받으셨는가?
그들의 요구는 군중들을 거쳐 그에게 전달되었다.
어머니를 따라왔던 형제들이 어떤 사람인가는 새삼스럽게 알아 볼 필요가 없다(아마도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던"것 같다, 요 6:5).
그렇다면 그들의 임무는 무엇이었는가?
아마도 그들의 목적은 그리스도가 피곤하실 것 같아 그의 설교를 중단시키려 했거나 또는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한 것 때문에 걸림이 되어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고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마치 "그에게" 지혜를 말할 수 있는 것처럼 그에게로 왔던 것이다.
1. 그는 아직도 백성들에게 말씀하고 계셨다.
그리스도의 설교는 담화(이야기, talking)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 담화는 분명하고, 쉽고, 친근하였으며, 그들의 능력과 처지에 적합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말한 것에 대해 비난을 당하였지만 계속하여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우리가 일할 때에 직면하게 되는 반대는 우리로 하여금 그 일을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는 바리새인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그만 두셨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에게 선을 행할 수 없음을 아셨기 때문이다.
오히려 바리새인들과 같이 자신들의 지식에 자만하지 않고 기꺼이 배우려고 했던 서민들에게 계속적으로 말씀하셨다.
2. 그의 모친과 형제들은 그들이 마땅히 안에 있으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밖에 서서 그에게 말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매일 개인적으로 그와 더불어 이야기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공중 설교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종종 지식과 은혜의 방편(수단)에 가까이 있는 자들이 대부분 무관심하다는 사실이다.
친근함과 접근하기 쉬운 용이성은 멸시를 일으키게 한다.
우리는 오늘만이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날임을 잊어버리고 또 다른 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오늘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내일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격언에는 많은 진리가 있다. "즉 교회로 가까이 갈수록 하나님에게서 멀어진다."
그렇게 된다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3. 그들은 자신들이 그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쁘게 듣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였다.
마귀는 우리 구세주의 설교를 방해하는 악독한 원수이다.
마귀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부당한 트집에 의해 그의 이야기를 중지시키려고 하였다.
또한 마귀는 그런 식으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였을 때 친척들의 부적당한 방문에 의해 그것을 깨뜨리려고 노력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는 종종 우리 주위에 있는 친구들에 의해 우리의 일을 수행하는 데 방해와 저지를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으며, 또한 정중한 인사에 의해 우리의 영적인 관계를 끊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우리가 잘 되며 우리의 일이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때로는 경솔하게 우리의 일을 방해할 때가 있다.
마치 베드로가,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에게 장해물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 주님의 어머니는 그에게 말하려고 하였다. 그녀는 그때에 자기의 아들(son)에게 명령할 수 없었던 것 같이 보여진다.
그러나 마리아에 대하여 불법적인 우상 숭배를 하고 있는 로마 교회에서는 이것을 그녀에 대해 가르치는 구실로 삼고 있다.
그녀는 그들이 만들어 놓은 것처럼 전혀 잘못이 없거나 어리석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역주:마리아는 잘못이 있고 어리석다).
모든 일을 현명하고 적절하게 잘 처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특권(prerogative)이지 그의 모친의 특권은 아니었다.
그리스도는 언젠가 그의 어머니에게,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라고 말씀하셨으며, "마리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다"(눅 2:49)고 하였다.
그러나 만일 그녀가 이것을 지금 기억하였다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일을 하려고 했을 때 이러한 방해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우리가 좋은 진리를 듣고 그것을 마음속에 잘 두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사용하려고 할 때는 없어져 버리고 마는 진리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Ⅱ. 그리스도는 이러한 방해에 대해 어떻게 분개하셨는가?(48-50절)
1. 그는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일에 너무 열중하였으므로 자연적이거나 공적인 관계가 그로 하여금 그 일을 못하게 할 수는 없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이것은 타고난 혈연적인 애정을 부인한 것이 아니며, 또한 종교라는 미명하에 부모를 존경하지 않거나 다른 친척에게 불친절하게 대하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일은 적당한 때에 아름다우며" 또한 보다 큰 의무가 행해질 때 보다 적은 의무는 제쳐 두어야 한다.
우리의 친척에 대한 관심이 하나님을 봉사하거나 "선을 행하는" 기회를 이용하는데 상충이 된다고 하면, 이 경우에 우리는 레위가 한 것처럼, "우리의 아버지에게 나는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고 말해야만 한다(신 23:9). 가장 가까운 친척들은 비교적 미워져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그들을 그리스도보다 덜 사랑해야만 하며(눅 14:26), 또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는 우선적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이것을 우리에게 본보기로 보여 주시고 있다.
"하나님의 집에 대한 열심히 그를 삼켜 버렸기" 때문에 그것은 그로 하여금 자신을 잊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사랑하는 친척도 잊게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의 친구들이 우리를 기쁘게 하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나쁘게 대해서는 안 되며 또한 그들을 나쁘게 보아서도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을 위해 경건한 열심으로 쉽사리 돌려질 수 있는 그러한 무관심을 기꺼이 용서해 주어야만 한다.
아니, 우리는 우리의 친구들은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의무에서부터 전환시키거나 빗나가게 할 수 있는 것을 행하는 것보다 오히려 우리 자신들과 우리 자신의 만족을 부인해야만 한다.
2. 그리스도는 이 경우를 이용하여 그의 영적인 친척들이었던 제자들이 이와 같은 본래부터의 친척들보다 더 앞선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계시다.
이것은 그가 왜 자신의 동생들과 더불어 이야기하려고 설교를 중단하지 않았는가를 보여 주는 좋은 이유였다.
그는 그의 친척들을 기쁘게 하는 것보다는 그의 제자들을 더 위하려고 하셨다. 여기에서 살펴 볼 것은,
(1)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대한 묘사.
그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들이다. 그것을 듣고 알고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제자가 되기 위한 최고의 준비(요 7:17)이며, 또한 그것의 최고 증거(마 7:21)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참된 그의 제자라고 명명해 준다. 그리스도는 "누구든지 내 뜻을 행하면"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아버지의 뜻과는 다른 그 자신의 뜻을 찾거나 행하려고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뜻과 그의 아버지의 뜻은 동일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의 아버지의 뜻에 대해 언급하시는 것은, 지금 그의 현재 상태나 사역에서 그가 그것에 대해 언급하셨기 때문이다(요 6:39).
(2)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존엄성.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모든 것을 버려두고 그를 쫓았으며, 그의 교훈을 받아들인 그의 제자들은 육신에 의해 친척이 되었던 자들보다 그에게 더욱 친근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친척들보다 그리스도를 더 앞장 세웠다.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를 남겨두었다"(마 4:22; 10:37).
또한 지금은 그들을 수정하기 위하여 또한 결코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았음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그는 그들을 그의 친척들보다 앞세웠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명예면에서 "백 배"(마 19:29)를 받지 않았는가?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고 말씀하신 것은 매우 다정스럽고 용기를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만의 특권은 아니었으며, "모든 성도들은 이러한 명예를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 순종하는 모든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가까운 친척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의 이름을 지니고 있으며, 그의 형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성품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의 가족이다.
그는 그들을 사랑하시며 마치 그의 친척처럼 그들과 더불어 대화를 하신다.
그는 그들에게 자기의 상에 오도록 기꺼이 명하시며, 그들을 유의하시며 그들을 위해 준비하시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신다.
그가 죽으셨을 때 그는 그들에게 부요한 유산을 남겨 두셨으며, 또한 하늘에 계신 지금에도 그는 그들과의 유대를 유지하시며 마침내는 그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또한 "친족이 행해야 할 것"(룻 3:13)은 반드시 수행하시며, 그의 가난한 친척들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실 것이며 사람들과 천사들과 아버지 앞에서 그들을 시인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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