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1.21 작성자 : 양시영
제   목 : 요일4.영지주의_구원파_ING
첨부파일 :

개역개정]요일4장  [90.주예수내가알기전] [380. 나의 생명 되신 주] [389. 내게로 오라 하신 주님의] [412.내영혼의그윽히깊은데서] [405.주의친절한팔에안기세]


**지금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통해 영광의 하나님을 항상 온전-완전히 열어 보여 주시며 당신을 공급해 주는 바<주님을 먹고 마시며 누림 통해 그분의 어떠하심 그대로 빼어닮도록 조성해 가고 계심>, 참되게 믿는 기독자로서 나의 장래 소망[부활의 영적 몸 입음 + 영원히 주와 함께 거함]과 믿는 나의 현재 신분,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과 이를 깨우치시고 가르쳐 인도하시는 [내주하시는 임마누엘 그리스도 주 성령]따라 사는 하나님의 아들 됨을 합당하게 살기에, 날마다 그리스도 예수 이름 부르며 보혈 의지함으로써 본성 안의 죄를 고백함 + 행위(모든 언행심사) 안의 죄들을 회개 자복함 통해 보혈에 모든 죄를 정결케 되도록 씻김 받고, 성령 인도하심에 나의 모든 일상의 주님 되시도록 주도권을 내어드리며 전적으로 순종하는 빛된 삶을 통해 주님을 닮아가며,  [사랑-희락-화평 안에서 열락의 기쁨이신] 주님을 나의 모든 것으로 누리며 주님의 생명을 공급하는 통로됨....이것은 주 오셔서 완성하시기까지 [already, but not yet]의 지속되는 ING임...<아직, 여전히, 되었다 함 없음 인정!!>>

----------

[[성경에서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실재 = 현실적 (생생한, 상상이 아닌) 존재, **실제 = 사실(있는 그대로)의 경우나 그 형편/양상  **체현 : 사상-관념-이론-특성 등 무형적 내용이 구체적 형체나 실천적 행위로 나타내어 현실화 함  **표현 : 구체적인 생각이나 느낌을 소통수단을 써서 나타내어 표출함

**1>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와 함께 오신 아들 

..요8:29..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29 And He who sent Me is [always] with Me; He has not left Me alone, because I always do what pleases Him.”)

...요16:32..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32 Take careful notice: an hour is coming, and has arrived, when you will all be scattered, each to his own home, leaving Me alone; and yet I am not alone, because the Father is with Me. )

**2>주 예수님이 땅에 계시는 동안 아버지 안에 계셨고 아버지는 그분 안에 계셨음[동시존재 + 상호내재]

...요10:38..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38 But if I am doing them, even if you do not believe Me or have faith in Me, [at least] believe the works [that I do—admit that they are the works of God], so that you may know and keep on knowing [clearly—without any doubt] that the Father is in Me, and I am in the Father [that is, I am One with Him].”)

...요14:10, 11..*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0 Do you not believ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s in Me? The words I say to you I do not say on My own initiative or authority, but the Father, abiding continually in Me, does His works [His attesting miracles and acts of power]. 11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s in Me; otherwise believe [Me] because of the [very] works themselves [which you have witnessed]. )

**3>아들의 이름은 <또한> 영원하신 아버지이시기에 <그 이름으로도 불리우심>

...사9:6..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For to us a Child shall be born, to us a Son shall be given;  And the government shall be upon His shoulder,  And His name sha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 Mighty God,  Everlasting Father, Prince of Peace.)

...요10:30..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30 I and the Father are One [in essence and nature].”)

**4>아들의 실제인 그 영, 주 영, :: 그분 자신을 믿는 이마다의 영에 분배하심 통해 내주하사, 생명이요 생명 공급하여 주고 계시는 보혜사 : 아들은 부활 안에서 생명 주는 영이 되셨음 = 아버지-아들-영 셋 모두 상호 내재하시는 하나이심

...요7:39..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39 But He was speaking of the [Holy] Spirit, whom those who believed in Him [as Savior] were to receive afterward. The Spirit had not yet been given, because Jesus was not yet glorified (raised to honor).)

**4>기름부음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TUQ. ...믿는 우리에게 도달하시는TUQ은 그 영으로 오심..이 영의 <활기와 생명력을 고양시켜 넘치게 하심>움직이심은 우리 안에 있는 기름부음이심...우리의 생명 되시며, 우리의 본성, 구성 요소, 미덕, 속성, 능력, 지혜, 의, 거룩, 구속, 친절, 겸손을 포함한 우리의 모든 것 되심

...요일2:27..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27 As for you, the anointing [the special gift, the preparation] which you received from Him remains [permanently] in you, and you have no need for anyone to teach you. But just as His anointing teaches you [giving you insight through the presence of the Holy Spirit] about all things, and is true and is not a lie, and just as His anointing has taught you, [c]you must remain in Him [being rooted in Him, knit to Him].)

===(AD325,니케아 종교회의 : TUQ교리 정립)..여기에서 나온 사도신경은 여전히 성경에 비추어 부족하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사항들이 있음===

*1>그리스도의 인격 측면에서의 언급이 여전히 부족한 점들 

.....: ^1)아들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와 함께 오셨으며, 아들이 영원하신 아버지로 불리우심에 관한 언급이 없음 

.......^2)아들이 부활 안에서 생명 주는 영이 되셨음을 분명히 하고 있지 않음  

.......^3)하나님의 영이 <계시록에서>결국 일곱영으로 완성됨에 대한 언급이 없음 

.......^4)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서 처음 나신 자인 그리스도에 관한 분명한 언급이 없음

.......^5)그리스도는 만유를 포함하시며,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시요, 그 분은 아들이시며 아버지이시며 그 영이시다....그분은 또한 창조자이시며 피조물 가운데 처음 나신 자이시며, 그리스도는 여전히 사람이시며 만질 수 있는 <시공차원을 넘어선>영적인 몸을 가지신 분이시며(요20:27), 오늘날 하늘 보좌에 계신 그리스도는 여전히 사람의 본성(인성)을 가지고 계신다.(마26:64, 행7:56)

.......^6)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옛창조 안에서 으뜸이시며 또한 하나님이 새 창조인 부활 안에서 으뜸이시다(골1:15, 18)...만유를 포함한 이 분은 믿는 우리의 능력-지혜-의-거룩함-구속함-구속-생명-생명 공급이시며 친절-겸손-인내-온유를 포함한 인간의 모든 미덕들이시며, 우리의 누림-잔치-새 달-안식-음식-음료-의복이시다. 

.......^7)TUQ는 우리의 체험과 누림을 위하여 주관적이신<personal experience,주관적으로 체험 가능한> 하나님이시다.... 우리 안에 생명과 생명 공급으로 거하시기에, 매일 매순간마다 체험하고 만지고 누릴 수 있는 분이시며.(고후13:13), 성육신-인생-십자가에 못 박힘-부활-승천의 과정을 거치신 후 만유를 포함한 영으로 완성되셔서 믿는이마다의  영 안에 오셔서 내주하여 계신다. 

##[만물을 충만케하시는 분의 충만으로서의 교회<그리스도의 몸>, 만물이 그의 발 아래<또한 교회에게> 복종하는 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만유(모든 사람)의 아버지로서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는 분 ::: 만유보다 크시며, 만유를 품어 주시는(포함하시는), 그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그리스도, TUQ의 체현]...창1:28의 생육-번성-충만-정복-다스림의 축복선언 그대로 이루심!!

((창1:28))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28.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moveth upon the earth.))

((엡 1:22, 23)) *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AMP * 22 And He [i]put all things [in every realm] in subjection under Christ’s feet, and [j]appointed Him as [supreme and authoritative] head over all things in the church, *23 which is His body, the fullness of Him who fills and completes all things in all [believers].//NASB *22. And He put all things in subjection under His feet, and gave Him as head over all things to the church,  *23. which is His body, the fullness of Him who fills all in all.))

((엡4:4-6)) *4.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AMP :: *4 There is one body [of believers] and one Spirit—just as you were called to one hope when called [to salvation]— *5 one Lord, one faith, one baptism, *6 one God and Father of us all who is [sovereign] over all and [working] through all and [living] in all.//[KJV] *4.There is one body, and one Spirit, even as ye are called in one hope of your calling;  *5.One Lord, one faith, one baptism,  *6.One God and Father of all, who is above all, and through all, and in you all.)

((골2:9)) *9.그(JC)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AMP :: 9 For in Him all the fullness of Deity (the Godhead) dwells in bodily form [completely expressing the divine essence of God]. //[KJV]*9. For in him dwelleth all the fulness of the Godhead bodily.

----------

@@오직 기억하고 명심하고 추구해야 할 바는 Q말씀은 "진실로 유일무이한 생명-빛-진리"라는 것...그러기에 생명 곧 관계적 인격이시요 모든 미덕<전능의 능력과 힘>의 근원이신 아버지-아들-영, TUQ 전체에 대한 로고스 말씀 접할 때마다 살아 생동하는 능력-레마의 말씀 됨, 곧 정말 바로 그렇게 전존재(특히 영으로부터-혼-몸에 파급되어 작동되도록까지)로 주관적으로 받아 거함-누림-체험-고백-간증해 냄이 중요함....., 이 하나님이 최종 완성이신 분, 기름부음으로 오셔서 내 안에  거하시는 바, 하나님의 모든 미덕과 사랑 그 자체 이신 그 영, 주 영이시며, 그분 자신을 믿는이마다의 영 안에 생명으로 분배하셔서 그분을 내적 사랑으로서 참되게 누릴 수 있도록 하신 바 주님의 모든 미덕과 사랑으로 흠뻑적심 통해, 믿는 내가 기름부으심을 따라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바로 그 사랑으로>사랑하는, 그 사랑 자체가 되도록까지 나를 적시고 계심....(요일3:23, 24...*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23 This is His commandment, that we believe [with personal faith and confident trust] in the name of His Son Jesus Christ, and [that we unselfishly] love and seek the best for one another, just as He commanded us. 24 The one who habitually keeps His commandments [obeying His word and following His precepts, abides and] remains in Him, and He in him. By this we know and have the proof that He [really] abides in us, by the Spirit whom He has given us [as a gift].)

------------

사람을 창조하실 때부터 사람이 하나님의 표현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을 사람안에 분배해 주시기를 원하셨던 바, 사람이 죄로 타락한 이후에는 이제 아들 하나님이 친히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로부터 함께,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모든 말씀을 가지고, 성령과 함께] 사람이 되어 오셔서 하나님-사람인 그리스도로서 십자가 죽으심 통해 죄문제를 해결하시고, 부활승천하사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을 분배하여 주심 통해 그리스도를 믿는이마다 그로 인해 살면서 하나님의 담지자, 곧 그분을 담는 그릇으로서, 하나님의 표현으로 살 수 있도록 하여 주셨음..

---------

이미 성경에서 제시해 주고 있는 신성한 생명, 곧 그리스도의 인격과 모든 미덕들에 대한 모든 교리들을 인정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내주하시는 기름부음을 따름 통해 그분 자신으로 적셔주시며 역사하시며 교통하시는 하나님의 본질, 그것을 실제로 누리고 체험함 통해 바로 그분으로 조성됨 통해 하나님 자신을 공급함에로 나아가야 하며,  동시에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생각-습관-문화적 표준-종교적 전통-윤리적 관념 등 그 어떤 천연적 관념도 그리스도를 대치하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임..

--------

**그리스도를 믿음 통해 거듭나게 하신 바로 그대로, 신성한 출생 통해 받은 바 신성한 영원 생명<씨, 모본이신 JC>의 모든 풍성-부요-충만-능력이 온전히 자라나도록 하심 통해, <사랑-은혜이신 하나님, 빛-진리이신 하나님. 영이신 하나님을, 참되게, 자연스레 체험-누림 통해 알아가며 JC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하심에까지> 주 안에 거함-신성한 생명 살아냄을 극도로 이루시며 비로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도록 이끄소서


===하나님의 영과 적그리스도의 영<삽입구>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 화자의 얘기를 그냥 무심코 받아들임 아니라 [마음을 내주하시는 주 영께 향하여 열고], 주 안에서 주와 함께 분별함 통해 경청하기를 힘쓰라.

2.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5.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3:24의 연속>

@@요3:6에서, (하나님의)영으로 난 것은(사람의)영이니...라 하심 그대로, 요일2:28~5:21에서는 : [하나님의 영을 믿는이의 영에 주입해 주심 인해] Q생명으로 거듭난 바,  Q자녀로서 거듭남(신성한 출생)과 관련되어 부어주신 두 가지 미덕들을[virtues = power and strength 7대 미덕들 : 신망애 + 용기-정의-절제-사려분별 + 성령의 9 열매들] 볼 수 있음<하나님의 의를 실행함 + 하나님의 사랑을 실행함> : Q의 의를, 그리고 Q의 사랑을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기초는 거듭남이요, 그 수단은 신성한 생명[Q의 영원 생명]으로서 믿는 이마다의 영 안에서 내주하시며 역사하시는 기름부음을 따라 Q과의 교통 안에 거함 통해 Q의 의를, 그리고 Q의 사랑을 실행할 수 있게 하셨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믿는이는 그가 접촉하게 되는 영마다 시험해 볼 필요가 있으며, 또한 Q의 담지자로서 지고지선의 사랑이시요 넘치는 생명의 영이신 Q을 참되게 누림-체험함이 꼭 필요하다....이에 더하여 영에서부터 혼 안으로 신성한 생명이 확장되어 산출되는 현상을 신약에서는 변화<내적 존재의 신진대사적인 변화>라고 부른다....더 나아가, 이제 주의 재림때에는 우리의 몸조차 신성한 생명의 능력에 의해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형될 것을 기대해 볼 수 있다.

@@내주하시는 기름부음과 믿는이의 영이 연합한 하나됨은 세상이 말하는 의미에서 생명 없는 단순한 연합unification개념이 아니라 상호간에(아버지와 아들, Q과 자녀, 형제자매들 사이에) 사랑의 생명공급의 교통 안에서 상호 소유-상호 기업-상호 누림-상호 거함-상호 내어줌-상호간에 모든 것 됨 이룸/건축됨의 mingling, 조화로운 지고지선의 어울림이라는 것을 명심할 것.....이것이 이루어질 때 형제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됨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이미 체험한 바로 그대로, 먼저 자신의 모든 것이자 가장 귀한 독생자를 내어주심, 또한 내주하사 교통하시는 HS 통해 끊임없이 생명 공급해 주시는, 바로 그 Q의 사랑으로, Q이 공급하시는,  지고지선의 사랑과 믿음 발휘함으로써]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이로써, 세상은 우리 안에 살아계신 Q의 일하심을 마침내 발견하게 될 것..**"온전히" 사랑을 이룸 == 형제사이에서조차, 먼저 Q과 믿는이 각자마다 그 사이의 상호 교통 통해 공급받는,  하나님이 사랑하신 바로 그 사랑을 공급받아 바로 그대로 발휘함으로써 형제간에 사랑할 수 있게 하시기 때문임..

13.  그의 성령[=기름 부음]을 [한량없이]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 기름부음은 믿는 우리 안에서 우리의 생명, 생명 공급, 누림,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되시는, <과정 거치신> TUQ, 그분의 움직이심-역사하심-적셔주심이다!! ***mingle 개념임 : 일관된 목적 위해, <자신을 잃어버림 없이>서로 <조화롭게, 발전적으로 수용-교통하면서>어우러져 섞임 == 은혜와 진리가 충만케 됨(요1:14) 이루심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 영으로서]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참되게 체험-누림 통해, 더욱 견고하게, 처음에는 듣고-<깨달아>알고-<참되게>믿고-알고의 선순환에로 나아감]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상호 사랑 안에 거함 이룸...이로써 형제 사랑 실행 가능하게 됨 ]

17.  이로써 [기름부음 통한 교통 충만의 온전한]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오늘 여기 지금 뿐 아니라]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오직 날마다 새로이 기억하고 명심하고 다짐하여 새기며, 믿고 붙들어 추구하고 실행함으로써 강화하며(=엘레겐!!) 사랑으로 반응하며 그 안에 거할지니]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내주하시는 기름부음따라]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바로 그렇게]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습3:17.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시1.복있는사람은.. 사랑하는 자들아---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1.오직 주의 사랑의 매여  내 영 기뻐 노래합니다. 이 소망의 언덕 기쁨의 땅에서 주께 사랑드립니다.

2, 오직 주의 임재안에 갇혀 내영 기뻐 찬양합니다. 이 소명의 언덕 거룩한 땅에서 주께 경배드립니다.

주께서 주신 모든 은혜 다는 말할 수없네 내영혼 즐거이 주 따르렵니다. 주께 내 삶드립니다.

[다 표현 못해도]

다 표현 못해도 나 표현하리라 다 고백 못해도 나 고백하리라 다 알 수 없어도 나 알아 가리라 다 닮지 못해도 나 닮아 가리라(반복)

그 사랑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사랑 얼마나 날 부요케 하는지 그 사랑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그 사랑 얼마나 나를 감격하게 하는지 

[서로 용납하라]

서로 용납하라 주 너를 용납함같이 서로 용납하라 주 너를 용납함같이

서로 아껴주라 주 너를 사랑함같이 서로 아껴주라 주 너를 사랑함같이 

우리 모두 하나되어 주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려 드리세

우리 모두 하나되어 주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려 드리세

서로 용납하라 주님 하신대로 주님하신대로 서로 용납하여라

 

서로 아껴주라 주님 하신대로 주님하신대로 서로 사랑하여라

[롬15:5-7]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

표준새번역]요일4장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적대자의 영

1.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영이든지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가를 시험해 보십시오. 거짓 예언자가 세상에 많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2.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을 이것으로 알 수 있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음을 시인하는 영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입니다.

3.  그러나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영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영입니다. 그것은 적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여러분은 그 영이 올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영이 세상에 벌써 왔습니다.

4.  자녀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에게서 났고, 그들을 이겼습니다. 여러분 안에 계신 분이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5.  그들은 세상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세상에 속한 말을 하고, 세상은 그들의 말을 듣습니다.

6.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에게서 나지 않은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알아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10.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주시고, 우리의 죄를 속하여 주시려고, 속죄제물이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1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

14.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 주신 것을 보았고, 또 그것을 증언합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계시고, 그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16.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알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17.  이것으로써 사랑은 우리에게서 완성된 것이니, 곧 심판 날에, 우리가 담대함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담대해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대로,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형벌과 맞물려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19.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20.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의 형제나 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21.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자매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주님에게서 받았습니다.

---------

1 John 4 Amplified Bible

===Testing the Spirits

1 Beloved, do not believe every spirit [speaking through a self-proclaimed prophet]; instead test the spirits to see whether they are from God, because many false prophets and teachers have gone out into the world. 

2 By this you know and recognize the Spirit of God: every spirit that acknowledges and confesses [the fact] that Jesus Christ has [actually] come in the flesh [as a man] is from God [God is its source]; 

3 and every spirit that does not confess Jesus [acknowledging that He has come in the flesh, but would deny any of the Son’s true nature] is not of God; this is the spirit of the antichrist, which you have heard is coming, and is now already in the world. 

4 Little children (believers, dear ones), you are of God and you belong to Him and have [already] overcome them [the agents of the antichrist]; because He who is in you is greater than he (Satan) who is in the world [of sinful mankind]. 

5 They [who teach twisted doctrine] are of the world and belong to it; therefore they speak from the [viewpoint of the] world [with its immoral freedom and baseless theories—demanding compliance with their opinions and ridiculing the values of the upright], and the [gullible one of the] world listens closely and pays attention to them. 

6 We [who teach God’s word] are from God [energized by the Holy Spirit], and whoever knows God [through personal experience] listens to us [and has a deeper understanding of Him]. Whoever is not of God does not listen to us. By this we know [without any doubt] the spirit of truth [motivated by God] and the spirit of error [motivated by Satan].

===God Is Love

7 Beloved, let us [unselfishly] [a]love and seek the best for one another, for love is from God; and everyone who loves [others] is born of God and knows God [through personal experience]. 

8 The one who does not love has not become acquainted with God [does not and never did know Him], for God is love. [He is the originator of love, and it is an enduring attribute of His nature.] 

9 By this the love of God was displayed in us, in that God has sent His [One and] only begotten Son [the One who is truly unique, the only One of His kind] into the world so that we might live through Him. 

10 In this is love, not that we loved God, but that He loved us and sent His Son to be the propitiation [that is, the atoning sacrifice, and the satisfying offering] for our sins [fulfilling God’s requirement for justice against sin and placating His wrath]. 

11 Beloved, if God so loved us [in this incredible way], we also ought to love one another. 

12 No one has seen God at any time. But if we love one another [with unselfish concern], God abides in us, and His love [the love that is His essence abides in us and] is completed and perfected in us. 

13 By this we know [with confident assurance] that we abide in Him and He in us, because He has given to us His [Holy] Spirit. 

14 We [who were with Him in person] have seen and testify [as eye-witnesses] that the Father has sent the Son to be the Savior of the world.

15 Whoever confesses and acknowledges that Jesus is the Son of God, God abides in him, and he in God. 

16 We have come to know [by personal observation and experience], and have believed [with deep, consistent faith] the love which God has for us. God is love, and the one who abides in love abides in God, and God abides continually in him. 

17 In this [union and fellowship with Him], love is completed and perfected with us, so that we may have confidence in the day of judgment [with assurance and boldness to face Him]; because as He is, so are we in this world. 

18 There is no fear in love [dread does not exist]. But perfect (complete, full-grown) love drives out fear, because fear involves [the expectation of divine] punishment, so the one who is afraid [of God’s judgment] is not perfected in love [has not grown into a sufficient understanding of God’s love]. 

19 We love, because [b]He first loved us. 

20 If anyone says, “I love God,” and hates (works against) his [Christian] brother he is a liar; for the one who does not love his brother whom he has seen, cannot love God whom he has not seen. 

21 And this commandment we have from Him, that the one who loves God should also [unselfishly] love his brother and seek the best for him.

===Footnotes

1 John 4:7 See note 2:10. 

1 John 4:19 Because God bestowed on humanity a free will, man is not forced to love Him, but rather consciously and freely chooses the response he makes to God’s love.

=========

요한일서 4장 (개요)

본 장에서 사도 요한은 영들을 시험할 것과(1) 시험에 대한 기준(2,3) 및 세상에 속한 자와 하나님께 속한 자를 보여준다(4-6). 

또한 다각적인 면에서의 기독교의 사랑에 대한 언급(7-16)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그 결과(17-21)를 묘사한다.

======

영에 대한 분별(요일 4:1-3)

하나님이 우리 안에 와 우리와 함께 거하심은 그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알려질 수 있음을 말한 다음부터 성령은 식별되고 구분되어질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Ⅰ. 사도 요한은 성도들로 하여금 영들과 한참 성행하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계와 세심한 조사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1. 조심할 것을 이르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라. 하나님의 영에 대해 가식적인 것을 취하고 있는 모든 영들에 대해 또는 환상, 영감, 혹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모든 신앙 고백자들을 관심도 두지 말고 믿지도 말며 따르지도 말라." 

진리는 허위와 거짓에 대한 반증이 된다. 진리는 언제나 성령과 더불어 참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모든 것들은 이에 반(反)한다. 

비록 악용되어지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지혜와 선하신 방법을 취하신다. 

비록 다른 자들이 마치 동일한 자격을 가진 것처럼 심히 교만하고 악할지라도 하나님은 세상의 영감을 받은 선생들을 보내셨으며, 우리들에게 초자연적인 계시를 나타내 주셨다. 성령과 영감을 빙자한 모든 거짓된 것과 이에 대한 어떠한 해명도 믿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 악을 행한 경우는 영적인 사람이 패역해 있을 때였다(호 6:7).

2. 세심한 조사를 해야 한다. 

성령께서 요구하시는 바인가를 시험해야 한다.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1절).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 그러나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자에게가 아니라 신앙에 있어서 믿을 만하고 신뢰할 수 있는 영을 따르며 거짓과 참을 식별하는 자들에게만 성령을 허락하신다. 이성은 이러한 식별을 위해 주어졌다.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왔음이니라"(1절). 구세주의 강림의 시기에 대한 많은 기록이 세상에 나타나 있는데 이스라엘의 구속자에 대한 유대인 중의 일반적인 기대와 구속자가 받는 치욕과 정신적인 혁명, 그리고 그의 고난은 구세주에 대한 잘못된 견해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예견하신 대로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선지자와 메시야로 행세하였다(마 24:23, 24). 

거짓 선생들이 교회에 많이 나타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이러한 현상은 사도 시대에도 있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미혹의 영이었으며 그들 자신이 선지자와 영감받은 전도자로 자처하며, 큰 소리를 쳤으니 어찌 용납될 수 있겠는가?

Ⅱ. 사도 요한은 제자들이 이러한 거짓 영에 대한 시험을 시도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거짓 영들은 선지자와 의사, 그리고 신앙의 군주로 군림하는데, 그들은 스스로 교리를 만든다. 

사도 요한이 살고 있던 당시의 시험은(여러 시대 여러 교회에서 시험하는 기준이 다양하다) 이러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2절), 

즉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로부터 아버지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아들로서 또한 영원한 생명, 그리고 말씀으로써 고백되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유한성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나중에는 예루살렘에서 죽음을 당하셨다. 

신앙적으로 단련되어지고 교화된 마음으로써 이 사실을 고백하고 전파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이를 행한 것이며 하나님은 이러한 것을 알게 하신 주동자가 되신다. 이와 반대로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 그리스도의 영이니라"(3절). 

비록 지금은 하늘에 계실지라도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우리의 몸과 동일한) 이 세상에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하나님은 많은 증거를 보여주셨다. 

이러한 증거를 보여 주심은 이에 상반되는 어떠한 충동이나 거짓 영감은 모두 하늘이나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계시종교의 전모는 그리스도와 그의 인격 그리고 사명에 대한 설명에서 나타난다. 

그리스도와 그의 사명에 대한 더욱 악화된 조직적인 반대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세상에 있느니라"(3절). 

적 그리스도의 출현과 그의 영이 하나님의 영과 그의 진리를 대적하리라는 것은 하나님이 미리 알려 주신 바다. 

또한 유력한 적 그리스도가 나타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와 영광을 대항하는 세상에서의 장기간의 지루한 싸움이 있을 것이 예언되었다. 

무서운 적 그리스도는 그의 길을 예비하게 되며 그의 도래는 그의 보다 작은 적 그리스도들과 그를 위해 사람들의 마음에 악한 역사를 이룩할 악령에 의하여 촉진될 것이다. 즉 적 그리스도는 일찍이 사도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사람들의 적 그리스도의 영과 하나님의 아들과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에게 나타내신 모든 증거에 대적함으로 어두움과 미혹에 내던져짐을 당하는 하나님의 심판은 얼마나 무섭고도 놀라운 일인가? 그러나 이러한 대적이 일어날 것은 이미 예언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격정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많이 보면 볼수록 우리들은 그 말씀의 진리를 더욱 더 확신하게 되기 때문이다.

-----------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의 대한 식별(요일 4:4-6)

여기에서 사도 요한은 이 미혹하는 적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한 두려움과 위험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제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1. 사도는 그들 안에 좀더 거룩한 원리가 있음을 제자들에게 확신시키고 있다. 

즉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4절),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다"(6절)라고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났고, 하나님에 의해 가르침을 받으며, 그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았고 악한 미혹으로부터 구원함을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은 치명적인 미혹을 받지 아니하도록 그의 택한 자들을 보호하고 계신다.

2. 하나님은 그들에게 승리에 대한 소망을 부여하신다.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4절). 

여러분들은 이로써 이 미혹하는 자들과 그들과 그들의 시험을 극복했으며 지금도 계속 증거할 수 있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승리할 수 있는 소망의 두 가지 근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1) 여러분 안에 든든한 보호자가 계신다.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4절).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그는 사람들이나 마귀보다 더욱 권능이 크시다. 성령이 그들 안에 거하심은 크나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2) 여러분들은 미혹하는 자들과 동일한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의 영은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합당하도록 지으셨다. 

저희는 세상에 속한 자들이다. 그들 안에 있는 영은 세상으로 그들을 인도한다. 그들의 마음은 세상에 빠져 있다. 

그들은 허영과 쾌락과 세상의 이익만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한다. 

그들은 세속적인 메시야와 구세주를 믿는다. 또한 그들은 세속적인 생각과 통치를 계획한다. 

그들은 참된 그리스도의 왕국은 이 세상적 것이 아님을 잊고 세상의 재물과 보화만을 탐한다. 이러한 세속적인 의도는 그들로 하여금 변절자들을 낳게 한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5절). 세상은 이러한 것들을 따르게 된다. 즉 세상은 세상의 것을 사랑하며 세상의 것은 세상을 사랑하게 된다.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을 극복하는 자는 크나큰 상처를 입게 하는 미혹을 이기게 된다.

3. 사도는 믿는 무리의 수가 비록 적을지라도 보다 나은 점이 그들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보다 신성하며 거룩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거룩하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하나님의 진리와 신실하심,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 하나님의 징후와 증거를 아는 자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알아야 한다. 

이 사실을 아는 자는 우리에게 속하고 또한 우리와 함께 거하게 된다. 자연 종교에서 원만하게 육성된 자는 기독교에 대해서도 한층 더 침착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의 본성과 도덕적 우월성 계시와 역사에 관한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6절). 

반대로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아니한자(자기 자신의 본능적 성향을 따라 행하는 자)는 우리와 함께 하지 아니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자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종으로부터 비롯된 자들이다. 

이 세상에 더 깊이 몰두해 있는 자들은 누구보다도 기독교 정신에서 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자들이다. 이와 같이 우리와 다른 이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6절).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여러분을 이끄시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가르침은 진리의 영의 표시이며 이는 미혹의 영에 대해 적대관계에 놓여 있다. 

교훈이 순수하고 거룩하면 할수록 이는 더욱 하나님의 것임에 틀림이 없다.

=======

형제애(요일 4:7-13)

진리의 영이 교의(敎義)에 의하여 밝혀질 수 있듯이, 사랑에 의하여 또한 밝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7절). 

그는 피차간 사랑으로 연합하도록 하기 위해 사랑 안에 그들을 결속시키려 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너희를 사랑함으로 피차간 영원한 사랑을 나누도록 간청하노라!" 이러한 권고가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Ⅰ. 사랑은 가장 높고 귀한 것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즉 "사랑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원천이요, 창시자요, 부모요 명령자이시다.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과 복음의 총체이다. 

즉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다"(7절). 

하나님의 영은 사랑의 영이시다. 하나님의 자녀의 새로운 성품은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이다. 그 성품의 성격과 외형은 사랑으로 나타난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다"(갈 1:22). 사랑은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Ⅱ. 사랑은 거룩한 성품에 대해 참되고 바른 이해를 나타낸다.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안다"(7절).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8절). 

사랑의 속성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은 그의 선하심을 온 세상에 비추신다. 하나님의 존재를 온전히 나타내고 있는 그의 지혜와 위대함, 그리고 광대한 창조의 유용성은 동시에 그의 사랑을 보여주며 증명해 준다. 

그리고 자연과 절대자의 탁월성에 대하여 생각하며 추리하도록 주어진 이성은 최고의 선이신 하나님을 추리하고 발견해 내야 한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에 대한 건전하고 온전한 지식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확실하다. 

즉 그의 사랑은 하나님의 가장 위대하신 완전하심 가운데 빛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이며 그의 본성과 본질이 또한 그의 끗과 역사 하심이 본래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기념은 단지 사랑뿐만 아니라 사랑과 아울러 빛이 되심을 알게 된다(요일 1:5).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이 본래 사랑이시며 사랑으로 비롯된 완전함을 소유하고 계심과 같이 그는 필연의 실재성과 탁월성과 영광을 지니셔야만 한다. 

오직 사랑은 거룩한 전능자의 본성이며 속성이다. 

즉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는 하나님 자신이 사랑을 나타내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1. 그가 우리를 사랑함은 이렇게 나타났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3절), 곧 반역한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나타내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하나님이 더럽고 헛되며 악하고 먼지와 재같이 쓸모 없는 자들을 사랑해 주심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2.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시리 만큼 우리들을 사랑해 주신 까닭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다"(9절).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로 각별히 따로 세움을 받은 자이다. 그는 독생자이다. 

만일 우리가 그를 하나의 피조물 혹은 창조된 존재로 간주한다면 그는 독생자가 될 수 없다. 

우리가 그를 하나님의 영광, 혹은 영광스러운 실재 또는 본질로부터 비롯된 자연적인 필연의 방사(放射)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JC는 독생자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아들을 우리를 위해 세상에 보내 주심은 거룩한 사랑의 신비와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놀랍고도 기이하며 엄청나게) 사랑하사"란 표현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3.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흔히 예측할 수 없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다"(10절). 

우리가 그를 사랑하지 못하고 죄와 비참과 피 아래 있을 때, 또한 용납될 수 없고 부패하고 더럽고 거룩한 피로 우리의 죄씻음 받을 자격조차 없었던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다.

4. 하나님은 아래와 같은 사명과 목적을 위해 우리에게 그의 아들을 주셨다.

(1) 그의 임무는 우리의 죄를 사해 주는 것이었다. 

즉 "결과적으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하나님의 율법과 저주 아래 죽고 그의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고 십자가에 달리고 그의 영혼의 상처를 입고 그의 옆구리에 창이 박히고 우리를 위해 장사되시는 것이다"(10절).

(2)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주신 목적은 우리에게 선하고 유익한 목적, 그를 통해 우리를 살리려 하시고(9절), 그를 통해 영원히 살고, 하늘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며 그와 함께 영원한 영광과 축복 안에서 살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Ⅲ. 형제에 대한 거룩한 사랑이 우리의 사랑을 강권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큰 관심을 가지고 내가 말하는 바 사랑을 기억해 주기를 간청하노라) 하나님이 이같이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11절). 

이 말씀은 저버릴 수 없는 논증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강요하고 있다. "우리는 그의 자녀로서 그의 제자(혹은 모방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대상은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영원한 하나님이 사랑하신 그들을 어찌 우리가 사랑하기를 거부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의 사랑을 숭배하는 자 또는 그의 사랑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하며 그 안에 있는 자비심과 만족함을 사모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그가 사랑한 자들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사랑은 전 인류 가운데에 보편적인 사랑을 강권하고 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5). 교회와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각별한 사랑은 단 하나의 각별한 사랑을 이룩해야 한다. 

즉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11절).

Ⅳ.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거룩한 임재의 보증이 된다.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12절). 

하나님은 가시적인 임재로 우리의 눈에 직접 나타나지 아니하시고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 12절) 그의 성령으로(13절) 우리 안에 거하신다. 

곧 하나님을 본 자는 아무도 없다. 그는 우리의 눈에 보이도록 자신을 나타내거나 우리의 직관에 나타내 보이지 않으신다. 

또한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의 사랑을 요구하거나 강요하지 아니하신다. 

다만 그는 받을 만하고 요구할 만 한다고 생각되는 경우에 사랑을 요구하시며, 기대도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과 그의 사랑을 모든 교회 특별히 교회의 형제들과 성도들에게 주셨음을 예증하는 것이 된다. 

그들 안에 그들을 위하여 그들과 함께 나타나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전이된다. 전능자는 특별히 그 안에 거하신다."

Ⅴ. 여기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은 우리 안에 이루어진다.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12절).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와 우리 위에 온전히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자신에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와 우리와 더불어 온전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그의 사랑은 결코 우리 안에서 헛되이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하나님의 사랑의 참된 목적과 초점은 이로써 성취되어짐으로 그 사랑은 온전하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은 그 믿음의 역사로 말미암아 온전케 되며, 사랑은 그 사랑의 수고로 말미암아 온전케 된다. 

거룩한 사랑이 하나님과 형제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사랑을 이룩하게 될 때에 우리의 사랑이 현세에서 비록 불완전하고 또한 우리에게 사랑의 높은 목적이 부재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 사랑은 세상에 존재하며 온전하게 이루어진다. 

이로써 하나님이 우리에게 온전하게 이루신 자신의 사랑을 평가한다면 이 형제에 대한 기독교적인 사랑은 얼마나 귀한 것인가! 

사도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에 대한 크신 사랑을 언급한 다음 아래와 같은 설명을 첨가하고 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13절). 

확실히 우리가 그 안에 그가 우리 안에 거하는 일은 우리들이 알고 증거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고귀하고 위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 안에 거하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곧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라고 하신 말씀 중에 나타나 있다. 

거하심에 대한 온전한 의미는 축복받은 세계에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상호적인 내재의 뜻을 알게 된다고 사도는 말한다. 

곧 그가 우리 마음속에 그의 성령의 형상과 열매를 이룩하셨고(13절), 그가 우리에게 주신 성령은 그의 것 혹은 그에게 속한 능력과 관대하심 그리고 왕국에 대한 사실을 바로 일깨워 주는 혁명과 이해력을 부여하시는 분이시다(딤후 1:7).

--------

거룩한 사랑(1)(요일 4:14-16)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이룩하며,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형제에 대한 사랑의 불길로 옮겨져야 하므로 사도는 여기에서 기독교 신앙의 초석으로써 사랑을 말하고 있다.

Ⅰ.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조항은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다. 

즉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14절)라고 하신 말씀 중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바는 아래와 같다.

1. 주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즉 그는 아버지의 아들이시며 이 아들과 같은 또 다른 이는 없으며 하나님도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유일한 분이시다.

2.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관계와 사명은 세상의 구주란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그의 죽음과 모범과 중재와 성령, 그리고 구원을 방해하는 대적을 대항하는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3. 그가 우리를 위해 구원을 이루신 목적은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었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 또한 그는 아들의 동의를 얻어 이후에 이뤄질 재림을 선포하셨다.

4. 이 근거에 대한 확증은 사도와 그의 형제들이 본 바에 의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진실한 성품과 그의 경건한 행실과 역사, 변화 산상의 모습과 그의 죽으심과 부활, 하늘로 승천하심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보았다. 

그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아버지의 독생자이었음을 확인하기에 충분한 모든 것을 그에게서 없었다.

5. 이에 대한 사도 요한의 증거는 아래에서 나타난다. 

즉 "우리가 없었고 또 증거하노니"라고 하신 말씀 가운데서 알 수 있다. 이 진리에 대한 증거가 우리로 하여금 그 사실을 증거하도록 강권한다. 

세계의 구원은 이 진리에 의존된다. 이 진리의 명확성은 진리에 대한 우리의 증거가 정당함을 입증한다. 

우리의 눈과 귀 그리고 손은 그 진리의 증거자가 되었다.

Ⅱ. 사도 요한은 이 진리를 시인함으로써 주어지는 탁월성 혹은 탁월한 특권을 말하고 있다. 

즉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14절). 

이러한 신앙 고백은 신앙 고백의 기초로써, 마음속에 있는 믿음과 입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시인함과 세상의 모든 아첨과 비난에 대항해서 생활과 행위로써의 신앙 고백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를 성령이 아니고서는, 또는 성령의 외적인 증거와 내적인 역사가 없이 주라고 할 수 없다(고전 7:3).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부요하게 되고 그에게 사로잡힌 바되며, 하나님에 대한 만족할 만한 지식과 그로 더불어 누리는 크나큰 기쁨을 소유하게 된다.

Ⅲ. 사도 요한은 거룩한 사랑의 고취를 위한 목적으로 아래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났고 그 안에서 시행되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16절), 

우리에게 꼭 알려져야 할 계시는 거룩한 사랑에 대한 계시다. 우리들에게 계시된 신조는 거룩한 사랑에 대한 조항이 가장 많다. 

주 그리스도의 역사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역사이다. 

그의 아들 안에서 또한 그와 더불어 이룩하신 모든 사건은 우리를 위한 그의 사랑의 증거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끄시려는 수단일 따름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더불어 화해를 이룩하셨다"(고후 5:19)> 우리는 여기에서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있다.

1. 하나님은 사랑이시다(16절). 

즉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무한한 사랑이시다. 그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사명과 중재로써 세상에 있는 우리를 위해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주어짐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매우 생소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이 되어진다면 이는 기독교 계시에 대한 가장 큰 장애와 그릇된 생각이 된다. 그렇게 위대한 분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은 아들의 영원성과 신성에 대한 잘못된 편견에서 나오는 생각이다. 

그것은 신비롭고 이해할 수 없는 것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는 "말할 수 없는 풍요함이 있다." 

거룩한 사랑의 방대함이 사랑에 대한 계시와 믿음에 대해 잘못된 편견을 가지게 한다는 것은 크나큰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의 온전한 사랑의 극치를 나타내시고자 하실 때에 못이루실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이 그의 능력과 지혜를 나타내시고자 하셨을 때 이와 같은  세상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당신의 보다 큰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하셨을 때 보좌 앞에 섬기는 무리들을 위해 하늘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의 사랑 곧 최고의 사랑을 나타내시며 그 자신이 사랑이심과 그 사랑은 그의 영원한 본성에의 가장 밝고 사랑스러우며 초월적이고도 역동적인 탁월성을 나타내시고자 하실 때 무엇을 하실 수가 없겠는가. 

이러한 일은 우리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천사들의 세계와 하늘의 주권자들과 능력자들을 위해 나타내시며, 잠시동안 우리를 놀랍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영원토록 그의 능력에 대한 존경과 찬양 그리고 축복을 위해 나타내심이 아닌가? 하나님이 이루시지 못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아들을 세우셨다는 것보다 우리를 위해 영원한 아들을 주셨다는 것이 그의 사랑의 목적과 위엄 그리고 풍성함에 더욱 부합되는 표현이 된다. 우리를 위해 독생하신 영원한 아들을 주심 같이 섭리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된 사랑을 분부하신다.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위탁하시고 하늘과 땅과 지옥의 면전에서 사랑을 분부하시며 그가 우리에게 자신을 위탁하시고, 최고의 진리와 사랑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맡기실 때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지 못할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만일 거룩한 사랑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특별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결과적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면, 이로써 섬기는 자들에게 나타날 하늘의 영광과 이 세상의 구원의 기쁨의 근거와 반면 지옥의 고통의 근거는 무엇일까? 이 결과는 가장 기이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이 그의 율법과 나라와 사랑 그리고 영광 가운데서 자신이 사랑이심을 확신시켜 주실 뿐만 아니라 저주받은 자들이 받을 심판을 보여주고 있다.

(1)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멸시한 것이 이미 드러났기 때문이다.

(2) 약속하신 사랑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3) 그들 스스로가 자신을 만족과 기쁨의 대상이 되기에 부적합한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상이 되지 못하는 자들과 보다 높은 사랑을 거부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통해 영원한 축복을 받을 수 있다면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 위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새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2.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게 된다"(16절). 

사랑의 하나님과 사랑하는 인간 사이에 놀라운 교통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을 사랑하는 일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관계와 그의 용납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룩된다. 

거룩한 사랑에 거하며 그의 중심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랑을 소유하고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결케 되고 인침을 받은 자는 거룩한 사랑에 대한 명상과 감명 그리고 취향 속에 살게 되며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될 것이다.

---------

거룩한 사랑(2)(요일 4:17-21)

사랑의 근원과 동기를 이루고 있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을 권유한 사도 요한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좀 더 사랑을 권장하고 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비롯된 형제애 혹은 그리스도인의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다.

Ⅰ. 하나님에 대한 사랑-모든 사랑할 만한 존재와 대상들 중에 첫째가 되며 으뜸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그는 모든 아름다움과 탁월성 그리고 사랑의 총체가 되시며 모든 인간들에게 선과 사랑을 부여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아래와 같이 표현할 수 있다.

1.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영혼의 평정과 만족이 요구되는 그 날 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가장 큰 기쁨이요 축복이 되는 그 날에 우리에게 심령의 평안과 만족을 주게 될 것이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17절), 

우주적인 심판의 날이 올 것이다. 그에 신앙적인 담대함을 가지고 얼굴을 들고 주님을 대면하고 그가 그들의 친구와 대변자가 되심을 알 수 있는 자들은 얼마나 복될 것인가? 

대망하는 가운데 거룩한 담력과 확신을 가지며 그날과 주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자는 복된 자다.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복되고 복된 자들이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케 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친구 되심을 확신케 할 것이다. 

즉 그가 우리의 사랑을 알고 계심을 확신할 때 우리의 친구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우리는 더욱 그의 사랑을 신뢰할 수 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사랑이 넘치시며 그의 약속에 신실하신 것과 같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심을 아신다고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의 사랑을 쉽게 따라갈 수 있으며 그의 사랑의 기쁨 열매를 얻게 될 것이다. 즉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한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룩된 우리의 소망은 결코 우리를 멸망시키지 아니할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기 때문이다(롬 5:5).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성령에 의하여 우리 마음에 부은 바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우리의 소망의 기초가 되며 우리의 소망이 드디어 아름답게 성취되리라는 확신의 기초가 된다. 

만약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그의 사랑의 대상이 된다.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의 의미와 확실성은 그를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속에 부은 바 되었다. 

이로써 우리들은 그에 대한 신뢰와 그 안에 있는 평안과 기쁨을 소유하게 된다. 

그는 그의 강림하심을 기다리는 모든 자들에게 의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 일치되는 점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앞에 담대함을 얻게 된다. 

즉 "그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기 때문이다"(17절). 

사랑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간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을 지극히 사랑한 것처럼 그는 또한 우리로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자로서의 자신의 이미지를 변치 아니할 것이다. 

그의 사랑은 우리들로 하여금 사랑하는 자가 되도록 가르칠 것이다. 

우리는 그를 위해 그와 더불어 고난을 당하며 그와 함께 영광에 참예할 것을 바라며 신뢰하지 아니할 수 없다(딤후 2:12).

2. 사랑은 크나큰 두려움으로부터 생기는 불쾌한 결과를 방지해 주거나 또는 제지해 준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18절). 

사랑이 넘치는 한 두려움은 사라진다. 내 생각으로는 두려워하는 것과 불안해하는 것 혹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하나님을 불안해하는 것은 구분해서 생각해야 할 것 같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신앙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써 언급되어지고 또한 지시되었다(벧전 2:17; 계 14:7).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과 그의 권위와 통치에 대해 지극히 높은 존경과 경외심을 가지게 한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온전한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한편 죄책감과 복수의 감정으로 비롯되는 하나님에 대한 불안한 감정이 있다. 

이러한 경우에 하나님은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과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감정은 "공포"라는 한 마디 말로 대치될 수 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을 가장 선하며 우월하고 귀엽고 사랑할 만한 존재로 생각한다. 

사랑은 하나님을 가장 선하신 존재로 생각게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가장 귀한 존재로 생각게 하며 두려움을 내어쫓고 대신 우리 안에 기쁨을 이룩한다. 사랑이 상징하는 것만큼 기쁨도 따라 증가된다. 그러므로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이나 공포를 내어쫓는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자들은 그들의 성품과 언어와 서약 중에서 온전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며 인간에 대한 공포심에서 온전히 해방을 받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이 진실을 사랑하신다는 것과 그의 사랑으로 승리하게 될 것을 잘 알고 있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는다는 사실을 사도는 이와 같은 말로 재치 있게 언급하고 있다. 즉 형벌은 두려움이나 공포를 내어쫓는다. 

그 이유는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기 때문이다(18절). 두려움은 특별히 복수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하나의 불안해하는 고통스런 감정이다. 

그러나 온전한 사랑은 사랑하는 자의 마음에 완전한 복종과 만족을 이루게 함으로, 형벌을 내어쫓는다. 

이와 동시에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한다(18절). 

곧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이나 염려는 우리의 사랑이 아직 온전한 자리에 이르지 못했다는 증거다. 

온전한 사랑을 간구하며 이를 이룩하도록 힘쓰자. 여기에 우리의 마음의 평정과 기쁨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정도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다.

3. 이러한 사랑은 하나님의 선행적 사랑의 기초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19절). 

그의 사랑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자극과 동기가 되며 도덕적 근원이 된다. 

사랑할 줄도 모르며 받을 수도 없던 우리를, 최초의 사랑의 행위자로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의 사랑을 애타게 기대하며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을 피흘리시게 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을 우리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을 낮추며 우리와 화해하기를 원하셨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에 온 하늘과 땅들은 무릎을 꿇어야 한다. 

그의 사랑은 우리에게 모든 풍성함의 원천이 된다. 하나님의 뜻(그의 사랑하시고자 하시는 자유 의지에 의하여) 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태어났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새롭게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충분히 깨달아 알도록 선택함을 받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에 그의 거룩한 사랑의 인을 쳐주셨다. 이는 주께서 우리의 마음이 그만을 향해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살후 3:4).

Ⅱ.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람이 아래와 같이 설명되어지고 있다.

1. 형제와 이웃에 대한 사랑은 그리스도 안의 신앙 고백에 가장 부합되며 일치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신앙고백에 있어서 우리의 신앙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우리는 고백한다. 

"만일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의 이름과 집과 예배를 사랑하는 자로 자처하면서 사랑해야 할 형제를 미워한다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이다"(20절). 

이로써 그의 고백이 거짓임이 드러난다. 이같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함은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에 의해 쉽게 드러나고 있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20절). 

보이는 것이 심령에 미치는 바 영향이 크다. 곧 보이지 않는 것은 마음과 심령에 미치는 바 영향이 크지 못하다. 

하나님에 대한 한계성은 그의 불가시성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성도는 자신 안에 하나님에 대한 가시적인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인간)을 미워하는 자가 어떻게 근원적이며 불가시적인 하나님 자신을 사랑한다고 하겠는가?

2.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에 가장 부합한 것이며 정당한 전제가 된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으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21절). 

하나님은 그의 형상을 우리에게 은혜로 허락하신 것처럼 우리의 사랑을 확신시키도록 하셨다.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최선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형제들은 하나님에게 기원을 두었고 그에 의해 용납된 자들이며 하나님이 관심을 두고 있는 자들이므로 하나님 안에서 다른 형제들도 사랑함이 마땅하다. 우리 믿는 형제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성품과 놀라운 특권이 주어졌고, 하나님은 우리들만 아니라 그들 모두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계시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모든 형제도 또한 사랑해야 함은 당연한 의무가 아닐 수 없다.

===
===
요한일서 제 4장
=====4:1
@사랑하는 자들아. - 이것은 수신자들의 주의를 환기시켜 저자 요한이 진술하고자 하는 주체로 수신자들의 관심을 전환시키기 위한 호칭이다. 요한은 본절 외에도 이와같은 표현을 본장에서 두 번 더 사용하여 수신자들의 관심을 야기시키고 있다(7,11절,Brooke).
@영을 다 믿지말고. - '믿지 말고'의 헬라어 '메...피스듀에테'(*)는 '진실한 것으로서 받아들이지 말라'라는 의미이다. 이는 '시험하라'와 연결되어 모든 영을 대할 때에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잘 분별하여 받아들여야 함을 시사한다.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 '영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타'(* )는 복수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나 악한 자의 영이 많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후에 언급된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가리킨다(Marshall).
한편 '시험하라'는 기준을 가지고 분별하는 것을 가리킨다(Stott). 이것은 바울 서신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로 바울에 따르면 영들을 시험하여 분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의 특별한 은사이다(고전12:10). 그러나 여기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하는 분별력을 가리킨다(Westcott). 요한은 당시 수신자들 사이에 스스로 영감을 받았다고 자장하던 이단자들을 염두에 두고 수신자들이 이들을 시험하여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인가를 분별함으로 무조건 따르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 본문은 수신자들이 영들을 시험해야 할 이유이다. '거짓 선지자'는 신약성경에서 '진실한 선지자'를 대적하는 자나(눅6:26; 벧후2:1), 혹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사도들을 대적하는 자들을 가리킨다(마7:15; 24:11,24; 행13:6).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의 등장은 종말론적 현상이다(2:18; 막13:22, Barker). 거짓 선지자는 적그리스도와 깊은 연관을 맺으며 그리스도를 반대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자신들의 거짓된 가르침이나 교리로 미혹하는 자들로서(마24:11; 살후2:3; 계20:10)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유혹한다.
=====4:2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 '하나님의 영'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성령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13절; 3:24, Stott). 이 견해에 따르면 본절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증거하심을 의미한다. (2)혹자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JB, Smalley). 이들은 본절이 앞절과 연관되어 성령의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고백함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이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나 문맥상 후자의 견해가 더 나은 듯 하다. 
한편 '알지니'로 번역된 헬라어 '기노스케테'(* )에 대해서 혹자는 명령법으로 해석하나(Law), 본서 어디에서도 명령법으로 사용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직설법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Westcott, Smalley, Brooke). 요한은 본문에서 수신자들에게 새로운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수신자들이 알고 경험했던 영적인 사실들을 잘 지키며 올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상기시키고 있다(13절;3:16; 5:2)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 본문은 영감을 받았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거짓 영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분별하는 기준이다. 
그 기준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의 인정 여부이다. 요한 당시 수신자들 가운데에는 영지주의의 가현설(Docetism)에 빠져서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고 오신 사실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다(공동서신 개론의 "공동서신의 이단 사상" 참조). 요한은 본절에서 이러한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거짓선지자를 공격하고 있다. 
한편 '오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렐뤼도타'(*)는 완료 시상이다. 이것은 요이1:7에서 현재 시상으로 사용된 것과 대조를 이루어 그리스도께서 역사적으로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신 사건이 영원한 사실이며 현재에도 계속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시사한다(Stott, Smalley). 
그리스도께서는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시며 이 땅에 육체를 입고 오셨다(1:1,2; 3:1; 5:1; 요1:12-14, Westcott).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인간이 되셨음을 시사할 뿐만 아니라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암시한다. 즉 그는 완전한 인간이시며 동시에 신이셨다(Marshall, Smalley).
=====4: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 비록 '육체로 오신'이 생략되어 있다 할지라도 본문은 앞절과 대조를 이루어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자가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자임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반대로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사실을 부인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고 거짓 영에게 지배를 당하는 자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참된 성령의 도움으로 성육신을 시인하는 것과 거짓영의 지배를 받아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에는 절대로 중간 지대란 있을 수 없다(Law). 오직 양극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 '적그리스도의 영'으로 번역된 헬라어 '토 투안티크리스투'(* )는 헬라어 어순상 앞절의 '토프뉴마 투 데우'(* , '하나님의 영')와 대조를 이루어 '프뉴마'(* , '영')가 생략되어 있는 형태로 볼 수 있다. 이 경우에는 '토 투 안티크리스투'가 거짓 영을 의미하나(Law) 문맥상 본문은 거짓 영에 의해 지배를 받는 사람들, 즉 거짓 선지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Stott, Smalley).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세상에 오심을 부인하거나, 그리스도께서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은 사단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거짓 선지자들이다.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 '이제 벌써'는 강조적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요한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의 영들이 종말에 출현할 것이라는 사실을 경고했고(2:18) '이제 벌써' 수신자들 사이에 존재함을 밝힘으로 종말의 긴박성을 암시하고 있다(Smalley). 한편 '세상에'는 1-6절 사이에 무려 6번이나 나타나며 모두 부정적인 측면에서 사용되고 있다. '세상'은 적그리스도의 영이 지배하며 통제하는 곳으로 하나님과 그의 뜻을 대적하는 세상 사람들을 비롯한 모든 것을 지칭한다.
=====4: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 요한은 본문에서 다시 '자녀들아'라는 호칭을 사용함으로 수신자들의 주의를 환기시켜 수신자들이 적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지배를 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속하여 그들을 이기었음을 확신시키고 있다. '하나님께 속하였고'는 수신자들이 하나님을 반대하고 대적하는 세상과 연합하지 않고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시사한다. 
한편 '이기었나니'의 헬라어 '네니케카테'(* )는 완료 시상이다. 이것은 승리가 과거에 결정적으로 성취된 것임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 효과가 현재까지 지속됨을 시사한다(Houlden). 이 승리에 대해서 혹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교리가 거짓임이 판명되었다는 사실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나(Stott) 본서에서 믿음과 행위가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본문의 승리는 지식적인 면에서 거짓된 교리에 대한 분별 뿐만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을 통해서 거짓된 교리를 정복하고 있음을 시사한다(Smalley). 그러기에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거짓된 교리의 유혹을 물리치고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교제를 통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 본문은 하나님께 속한 수신자들이 세상을 이긴 이유이다. '너희 안에 계신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엔 휘민'(* )에서 '이'를 의미하는 '호'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하나님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3:20, Haas). (2)혹자는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2:14; 3:24; 요14:20,23, Westcott). (3)혹자는 그리스도인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6절; 2:20,27; 요14:16,17;16:13-15, Stott, Houlden). 이 세 가지 견해 중 어느 하나를 택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이신 삼위 일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가운데 역사하셔서 사단의 영향력 하에서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이기게 하시기 때문이다. 즉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고백함으로 하나님에게 속하게 되며 그 결과로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Barker,Smalley). 한편 '세상에 있는 이'는 사단이나 악한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2:13,14; 3:12; 5:18,19) 그는 하나님에게 소속되지 아니하고 세상에 속한 자들을 미혹하며 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력은 오직 세상에 속한 자들에 한하며 하나님에게 속한 자들에게는 그 세력을 행사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단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이루셨으며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그 승리에 동참하기 때문이다(6절; 요16:33; 롬8:31, Stott, Calvin).
=====4:5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 '저희'는 적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교훈을 전하는 거짓선지자들을 가리킨다(Barker, Smalley). 
한편 '세상에 속한 고로'의 헬라어 '에크 투코스무'(* )에서 '에크'는 기원을 나타내는 전치사로 거짓선지자들이 세상에서 비롯되었으며 세상과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임을 시사한다. 또한 '세상'을 지칭하는 '코스무'는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1)복음과 반대되는 사상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요한 당시 거짓 선지자들이 주장하던 성육신을 부인하는 사상들은 당시에 유행하던 사상과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2)그러한 사상에 미혹된 자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에 대치되는 당시 사상에 탐닉했고 그것에 빠져 거짓된 가르침을 전파하고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려 했다.
=====4: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 요한은 4절까지 '너희'라는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수신자들만을 지칭하였으나 본절에서는 인칭 대명사 '우리'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에 대해 혹자는 사도들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나(Stott, Brooke) 사도들을 포함한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Smalley, Barker, Haas,Schnackenburg). 왜냐하면 이미 수신자들이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언급하였기 때문이다(4절). 사도들을 포함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으며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 그의 영향력 하에 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 본문은 '하나님을 아는 자'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 '우리의 말을 듣고'와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를 대조시키고 있다. '아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노스콘'(* )은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거짓선지자들이 가르친 거짓 교리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얻는 지식을 가리킨다. 더욱이 본절의 '아는'은 현재 시상으로 그 지식이 지속적이며 성장하는 것이어야 함을 시사한다. 한편 '우리의 말'은 사도들이 선포한 그리스도의 복음, 즉 처음부터 있었던 말씀을 가리킨다(2:7,24; 3:11; 요이1:5,9). 거짓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가르침을 주장하는 바와 같이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을 부인하고 순종하지 아니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할 뿐마 아니라 하나님에게 소속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 '진리의 영'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요14:17; 15:26;16:13, Marshall, Stott). (2)혹자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malley, Dodd, Haas).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며 의미상으로 별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성령의 지배 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사도들을 포함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과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하는 것에 대해서 진술해 온 것으로 보아 후자가 보다 적합한 듯 하다. 한편 '미혹의 영'은 '진리의 영'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 이것 역시 사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사단의 지배 하에서 거짓 가르침을 전하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구별하는 기준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청종하는 여부에 달려있다.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 '사랑하는 자들아'는 본서에서 6번 나타난다(1,11절; 2:7; 3:2,21). 이 호칭은 요한이 수신자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사도로서 수신자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요한은 이 호칭을 사용하여 서로 사랑해야 함을 요구하기 이전에 자신의 사랑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한편 '사랑하자'의 헬라어 '아가포멘'(* )은 현재 시상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하나님의 요구임을 시사한다. 이 명령은 예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3:11; 요13:14-17,35).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 본문은 다음절의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와 연결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해야 하는 근거이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는 사랑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시사한다. 하나님은 본질상 사랑이시며 모든 사랑의 근원으로서 그 사랑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먼저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주셨다(Westcott, Marshall, Barker).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 '...자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스 호'(* )는 사랑하라는 명령이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해야 할 대상에 대해서 혹자는 수신자 공동체 일원에 대한 사랑이라고 주장하나(Bultmann) 보다 넓은 의미에서 모든 사람에 대한 일반적인 사랑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Schnackenburg, Smalley). 
한편 이러한 사랑은 단순히 사랑하는 태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 행위를 내포한다.(3:18). 그리스도인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마음은 물론 행위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러한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에게서 난 자녀이며 하나님을 아는 자임을 드러낸다(Law). 곧 행위를 동반하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자이며 하나님을 아는 자임을 드러내는 기준이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며 하나님께서 먼저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것으로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서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메 아가폰'(* )에는 앞절의 '사랑하는 자마다'(* , 파스 호 아가폰)에 삽입되어 있는 '파스'가 생략되어 있다. 본절에서 '파스'가 생략된 것은 본절의 사랑이 개인적인 권면을 가리키는 앞 절과는 달리 일반적인 의미임을 암시한다(Smalley). 한편 '알지'의 헬라어 '에그노'(*)는 부정 과거로 현재 시상을 사용한 앞절의 '기노스케이'(* ,'알고')와 대조를 이룬다. 
'기노스케이'가 사랑하는 자들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을 시사하는 반면에 본절의 '에그노'는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하나님을 전혀 알거나 경험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Marshall). 사랑하는 자가 모두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아는 자는 반드시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요한은 이러한 사실을 앞절과의 대조를 통해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 본문은 7절의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보다 더 발전된 표현이다. 
요한은 7절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랑의 근원이심을 밝힌데 이어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랑 그 자체이심을 선언한다. 즉 이것은 사랑이 하나님의 모든 행위들 중 하나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가 사랑임을 시사한다. 
요한은 본서에서 사랑을 언급할 때 행위와 연결시켜서 설명하고 있다. 이 사실은 수신자들 사이에 존재한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인 가르침, 즉 신령한 지식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공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신령한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나 사실상 그들의 삶에서는 사랑의 행위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본질상 사랑이시기에 그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사랑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 '우리에게'로 번역된 헬라어 '엔 헤민'(* )에 대한 해석은 네 가지이다. (1)혹자는 '우리 사이에'(among us)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malley, Stott). (2)혹자는 '우리 안에'(in us)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ooke, Westcott). (3)혹자는 '우리게게'(to us)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chnackenburg). (4)혹자는 '우리를 위하여'(for us)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ultmann). 이러한 네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Barker). 
한편 '나타난 바 되었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파네로데'(* )는 '파네로오'(* , '나타내다')의 부정 과거 수동태이다. 요한은 '파네로오'를 예수의 사역(1:2; 3:5,8),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나타나심(요21:1,14), 그리고 예수의 강림(2:28)에 사용하고 있다. 본절에서 사용된 부정 과거 '네파네로데'는 명확한 역사적 순간을 나타내는 것으로 다음에 그리스도를 보내신 사건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성육신을 가리킨다(Law, Smalley). 요한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사랑을 현시하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 '독생자'의 헬라어 '모노게네'(*)는 히브리어 '야히드'(* )를 번역한 것이다. '야히드'는 70인역에서 두 가지로 번역된다. (1)'사랑하는'(beloved)을 의미한다. (2)'유일한'(unique)을 의미한다. 본절에서의 '모노게네'도 예수께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유일한 아들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한편 '보내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스탈켄'(*)은 완료 시상으로 과거에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사건이 지속적으로 그 효력을 발휘함을 시사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셨을 뿐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그 사랑을 증거하신다.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 본문은 '히나'(* , '위하여')로 시작하여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을 나타낸다. '살리려 하심이라'는 인간이 전에 '죽은 상태'임을 전제로 한다. 인간은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나타내시고 이루심으로 영적으로 죽은 인간을 생명으로 인도하셨다(3:14).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지상 사역 그리고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을 소유할 수 있다.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 '여기 있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투토 에스틴'(*)은 앞서 기술된 내용, 즉 9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3:16). 한편 '우리가...사랑한 것'(* ,에가페카멘)는 부정 과거 시상으로 본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사이에는 시상의 변화가 있다. '에가페카멘'은 완료 시상으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 결코 지속적인 것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반면에 '에가페센'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역사적인 특별한 사건에 의해서 나타났음을 시사하는데 곧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9절). 요한은 이러한 시상의 변화를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고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인간의 사랑이 지속적이지 않아서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다(Law, Smalley). 반면에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인간에게 계시되어 사랑의 궁극적인 기원을 이루셨다.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사랑은 이러한 궁극적인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하는 것이다(Houlden).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 본문은 앞 절의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와 병행을 이룬다. 9절에서의 '보내심'(* , 아페스탈켄)은 완료 시상인 반면에 본절의 '보내셨음이니라'(* , 아페스테일렌)는 부정 과거시상이다. 이 부정 과거 시상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구현된 특별한 속죄 사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화목제'로 번역된 헬라어 '힐라스몬'(*)은 본래 '달래는 것'(propitiation)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의미는 단순히 성난 자를 달래는 차원이 아니라 속죄(expiation)를 전제로 한다(Dodd, Westcott).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한 속죄함이 없이는 죄로 인해 형성된 하나님과의 소원한 관계는 절대로 회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본절의 '힐라스몬'은 '속죄'(expiation)의 의미와 '화목'(Propitiation)의 의미 둘 다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죄를 위한 화목제로 보내심으로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속죄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생명을 소유하게 되었다(9절, Barker,Stott).
=====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 '이같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토스'(* )는 9,10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현시된 방법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고 대속적인 죽음을 가리킨다. 한편 '하셨은즉'의 헬라어 '에이'(* )는 사실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것으로 사실상의 이유나 근거를 의미한다. 이것은 본문이 이후에 언급되는 '서로 사랑하라'는 권면의 근거가 됨을 시사한다.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께서 주신 계명으로(요13:34,35; 15:12,17)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요한의 이 권면은 당시 사랑의 계명을 평가절하하는 이단적 교리가 수신자들 사이에 팽배해진 것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다.(Smalley). 
한편 '마땅하도다'로 번역된 헬라어 '오페일로멘'(*)은 사랑의 계명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임을 시사한다. 물론 사랑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그것이 선택 사항은 아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사랑의 계명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 당연히 나타나야 할 실천 행위이다.
=====4: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 본절에서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유대적인 사상으로(출33:20,23; 신4:12)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본문에 대해 혹자는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잘못 삽입된 것이라고 주장한다(Houlden). 그러나 그렇게 해석해야 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본문은 수신자들 사이에서 영지주의를 전파하는 이단자들을 염두에 둔 진술이기 때문이다(Schnackenburg, Barker). 영지주의자들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보아서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한다. 요한은 이러한 이단자들의 주장을 직접적으로 반대하면서 하나님을 보는 것과 사랑의 계명을 연결시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계명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영적으로 식별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나 그리스도 자신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과 같다'라는 예수의 말씀과 동일한 것으로(14절; 1:1-3; 요1:18; 12:45; 14:9; 17:24).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영적으로 인식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 요한은 하나님을 가시적으로 보았다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직접적으로 반격하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비록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볼 수는 없을지라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행함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갈 수 있음을 강조한다. 즉 하나님 품 속에 독생하신 예수께서 자신의 사랑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함으로 자신들 속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 '거하시고'의 헬라어 '메네이'(* )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들 간의 지속적인 친근한 관계를 나타낸다(요15:1-10). 하나님의 내주와 깊은 관계를 나타내는 '메네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사랑이 하나님의 내주와 지속적인 관계로 인해서 이루어 진다(Stott). 즉 하나님의 내주와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사랑의 행위의 근거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들 안에 존재하며 하나님께서 내주하심을 드러내는 증거이다.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 '그의 사랑'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아가페 아우투'(* )에 대한 이해는 그 안에 나타난 속격과 관련하여 세 가지가 가능하다. (1)혹자는 주격적 속격으로 이해하여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arker, Brooke, Wengst). (2)혹자는 목적격 속격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Dodd, Lewis). (3)혹자는 속성을 나타내는 속격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tott, Schnackenburg, Law). 이러한 세 가지 해석은 긴밀한 연관성을 맺고 있는 것으로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 '온전히 이루느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테텔레이오메네'(* )는 완료 시상으로 지속적인 성취를 나타낸다. 이러한 사랑의 성취에 대한 요한의 주장은 2:5에서 이미 언급되었다. 요한은 2:5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케하는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는 반면 본문에서는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성취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실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온전히 순종하는 것임을 암시한다(Smalley).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사랑을 통해서, 즉 인간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다(Barker, Westcott, Stott).
=====4: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는 '호티'(* , '왜냐하면')로 시작하는 절로서 본문 하반절에서 언급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의 근거가 됨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인들이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다(1-3절; 고전12:3).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한 성령은 그들로 하여금 믿음과 사랑을 경험하게 하여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 즉 상호간의 내주를 확신할 수 있도록 내적인 증거를 제시한다(3:24). 
한편 상호간의 내주를 나타내는 '거하고'(* , 메노멘)와 '아느니라'(* ,기노스코멘)는 현재 시상이다. 이 현재 시상은 믿는 자가 경험한 내주의 확신이 지속적인 것임을 시사한다. 
요한이 '기노스코멘'을 사용한 것은 영지주의를 주장하는 이단자들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들은 영적으로 신비한 지식을 깨달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나 요한은 이에 대해 반박하면서 성령을 공유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상호간의 내주를 경험하며 확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가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격적이며 지속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교제함으로써 상호간의 내주를 확신한다. 성령을 통한 하나님과의 이러한 교제, 즉 상호간의 내주(內住)는 사랑하는 것과 믿는 것을 가리킨다(3:24; 요3:5,6; 갈5:6).
=====4: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 아들의 칭호인 '구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테라'(* )는 예수께서 승귀된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로서(2:22,23) 사람들을 죄로부터 자유케 하셨음을 시사한다. 이 역시 영지주의를 주장하는 이단자들을 염두에 둔 것인 듯하다. 그들은 구원을 신비한 지식을 소유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죄보다는 무지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육체로 오신 예수께서 구주이시며 그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서 죄를 사함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선언함으로 영지주의자들을 반박하고 있다(2,10절; 1:7; 2:2; 5:6,Schnackenburg). 
한편 '보내신'의 헬라어 '아페스탈켄'(* )은 9절과 같이 완료 시상이다. 이는 과거에 아들을 보내신 성육신 사건과 그의 구속 사역의 효력이 현재까지 지속됨을 시사한다(Stott).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 '우리'가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예수의 지상 생활을 직접 지켜 본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tott, Brooke, Schnackenburg, Wengst). (2)혹자는 기본적으로 사도들을 의미하며 그들에 의해 설립된 교회를 포함한다고 주장한다(Marshall, Westcott). (3)혹자는 예수의 지상 생애를 지켜 본 목격자들과 연합한 교회 전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arker, Smalley, Dodd). 
이와 같이 '우리'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다 할지라도 포괄적인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한편 '보았고'(* , 테데아메다)는 완료 시상이며 '증거하노니'(* , 마르튀루멘)는 현재 시상이다. 비록 둘 사이에 시상의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지속성을 나타낸다. 즉 과거에 보고 응답한 믿음과 현재에 그 믿음을 증거하는 것은 하나로 연결된 것으로 연속적이며 지속적인 효과를 시사한다. 성령을 수여받은 사도들을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할지라도(12절)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구주되신 예수를 알게되며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서 그 깊이를 더해 갈 뿐만 아니라 성령과 더불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요15:26).
=====4: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 '누구든지'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가 어떤 특정 부류의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임을 시사한다. 이것은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신비한 지식을 소유한 자신들만이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단 하나의 전제 조건, 즉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기만 하면 누구나 예외없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선언한다. 한편 '시인하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몰로게세'(* )는 부정 과거이다. 영역 성경에서는 이 과거 시상을 표현하기 어려워 두 가지로 번역하고 있다. (1)미래 시상으로 번역한다(shall confess, KJV). (2)현재 시상으로 번역한다(acknowledges, NIV, NEB; confess, RSV). 그러나 본문의 '호몰로게세'는 미래 시상이나 현재 시상이라기 보다는 비록 시간은 정해지지 않았을지라도 공적으로 고백하는 자체를 강조하는 것이라고 봄이 훨씬 더 타당하다(Stott, Smalley).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상호간의 내주를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과 인간 상호간의 내주를 가능하게 하는 믿음과 순종의 고백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13절).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 본문은 13절에서 언급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를 나타낸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처럼 상호간의 내주도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속사역을 믿고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친밀하고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식하고 확신하게 된다(3:1,2).
=====4:16
본절이 속한 단락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본절이 11-15절에 속한 것이 아니라 본절부터 새로운 단락이 시작된다고 주장한다(Marshall, Schnackenburg). (2)혹자는 앞절과 연결되어 11-16절까지 한 단락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Law, Stott,Barker).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문맥상 13,15절에서 언급된 상호간의 내주에 대한 진술이 본절에서 보다 발전된 형태로 진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으로 번역된 헬라어 '텐 아가펜 헨 에케이 호 데오스 엔 헤민'(*)은 문자적으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사랑을'이란 의미이다. 이것은 우리를 위해 행하신 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 뿐만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삶 속에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Law, Marshall, Westcott, Smalley). 한편 '알고 믿었노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그노카멘 카이페피스튜카멘'(*)은 완료 시상이다. 이것은 사도들은 물론 모든 수신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미 과거에 경험하여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알고 믿고 있음을 시사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확신할 수 있다. 요한은 이러한 진술을 통해서 영지주의자들의 견해를 반박하고 있다. 영지주의자들은 황홀경이나 특별한 지식에 의해서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주장하나 요한은 본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한 것에 있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의지하는 믿음에 달려있음을 선포하고 있다(9,10,14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 본문은 8절의 반복이다. 요한은 사랑이 하나님의 본질임을 주장하여 하나님을 알고 믿으며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를 나누는 자에게 사랑은 절대적인 속성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 본문은 13,15절에서 전술된 바 있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에 대한 보다 발전적인 표현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지며(13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할 때 성취된다(15절).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를 이루어 가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이 나타나야만 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사랑의 삶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드러내는 증거이며 그것은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Smalley, Dodd).
=====4:17
@이로써.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투토'(* )가 가리키는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본문 다음에 언급되는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ooke, Schnackenburg). (2)혹자는 16절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Marshall).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본문은 앞절과 이어지는 단락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 '사랑'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혹자는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생활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chnackenburg). (2)혹자는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arker, Stott). (3)혹자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Haas). (4)혹자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둘 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arshall, Houlden). 이러한 네 가지 견해 중 포괄적인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한편 '담대함'의 헬라어 '파르레시안'(*)은 2:5에서 온전히 성취된 사랑과 연결되어 '순종'으로 묘사되었으며 요한복음에서는 담대함이 믿음과 결과로 나타난다(요3:18; 5:24). 
이러한 사실은 사랑이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에 지속적인 내주를 이루며, 그 내주로 말미암아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됨을 시사한다. 즉, 믿음과 사랑 그리고 순종의 생활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지막 날에 담대함을 가질 수 있는 근거를 이룬다(Smalley, Westcott).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호티카도스 에케이노스 에스틴 카이 헤메이스 에스멘 엔 토 코스모 투토). - 이는 문자적으로 '왜냐하면 그가 어떠하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서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는 두 가지를 의미한다. (1)예수의 영원한 순수성, 사랑, 의로우심, 그리고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를 의미한다(Brooke, Westcott,Haas). (2)그리스도가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유혹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고 사랑 가운데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교제를 나누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할 것을 암시한다(Barker, Smalley, Stott).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보스'(* )는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의미한다(행9:31; 롬3:18; 고후5:11; 7:1; 엡5:21). 그러나 본절에서의 '포보스'는 앞절의 담대함의 반대 개념으로 노예가 갖는 두려움을 가리킨다(요19:38; 20:19; 롬8:15). 이러한 '포보스'는 사랑과 함께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그 사랑을 소유하고 있다면 앞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서 전혀 두려움이 없이 담대해질 수 있다. 
비록 죄는 두려움을 유발시킬지라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사랑을 소유한 자들에게 사랑은 담대함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 본문은 사랑과 두려움이 공존할 수 없는 이유이다.
'형벌'에 대해서 혹자는 마지막 날과 연결시켜 하나님의 정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며(Schnackenburg), 혹자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방해하는 고통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Bultmann). 이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Haas,Marshall). 즉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고 사랑 안에서 생활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상호간의 내주와 사랑의 관계를 유지시켜 나가게 되며 그 결과 마지막 날에 죄로 인한 정죄함에서 오는 두려움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갖는 담대함을 갖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사랑은 공존할 수 없는 두려움을 내어쫓기 때문이다.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 개역성경에는 반의접속사인 '데'(* , '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헬라어 본문의 '데'는 본문이 17절 상반절의 내용, 즉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하나님의 사랑'을 역으로 진술한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로 인하여 사랑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졌다(Westcott, Law). 그러기에 믿음과 사랑 그리고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었다. 이와 반대로 만약 누구든지 담대함이 없이 두려움에 사로잡힌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지 못하였으며 그 사랑의 실체를 온전히 성취하지 못한 자이다.
=====4:19
요한은 10절을 반복하여 진술함으로 가장 일반적이고 근본적인 사랑의 원리에서 출발하여 20,21절에서 형제 사랑의 문제로 요약하고 있다.
@우리가 사랑함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포멘'(* )은 문자적으로 '우리가 사랑한다'라는 의미로 목적어가 없다. 목적어의 부재로 인해 '사랑'의 대상인 누구인가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로 나뉜다. (1)혹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고 주장한다(Stott, Houlden). 이들은 앞절의 진술과 연결시켜 하나님을 사랑하기때문에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해석한다. (2)혹자는 타인에 대한 사랑이라고 주장한다(Schnackenburg). 이들은 20,21절에서 형제 사랑에 대해 언급된 것과 연결시켜 해석한다. (3)혹자는 둘 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aas, Marshall).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본문은 전후 문맥을 연결시키는 것으로 어느 하나를 제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 본문은 이유를 나타내는 '호티'(* ,'왜냐하면')로 시작하여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근거를 나타낸다. '사랑하셨음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가페센'(* )은 부정 과거 시상이다. 이 시상은 전순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성육신 사건을 통해 계시된 것을 가리킨다(9,10절, Law, Smalley).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사랑의 삶은 본질이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누구든지'의 헬라어 '에안 티스'(* )는 본서에서 거짓 이단자들에 대해 언급할 때 사용된 표현 방법이다(1:6,8,10; 2:4,9). 본문 역시 수신자 공동체 내에 팽배해 있던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진술이다. 
영지주의자들은 공동체 내에서 신비한 지식을 통해 구원을 받고 다른 일원보다 우월하다는 환상에 빠져 타인을 돌보지 않았다. 요한은 그러한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사랑하는 자들은 반드시 다른 형제들을 사랑하게 됨을 강조한다. 
여기서 '형제'는 수신자 공동체 일원을 가리키는 것은 물론 교회 밖의 일반적인 사람들 전체를 가리킨다(7,11,19절). 즉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은 단순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공동체만을 향한 것이며 그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게 된다. 
한편 '거짓말하는 자니'는 두가지 차원에서 이해된다(Barker, Smalley). (1)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진리를 말하지 않는 자며, 그 진리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자이다. (2)거짓말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통해서 스스로가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은 자들임을 드러낸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주장하나 실상은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자들이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 개역성경에는 '가르'(* ,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본문이 상반절에서 언급된 '거짓말하는 자'의 근거임을 시사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가 거짓말쟁이인 것은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다른 형제에 대한 사랑 안에서 표현된다(12절). 즉 그리스도인은 타인에 대한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타인을 사랑하게 된다.
=====4:21
본절의 헬라어 본문은 '카이'(* , '그리고')로 시작하여 본절이 20절과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 요한은 이제까지 진술해 온 '사랑'을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과 연결시키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단 하나의 계명이기 때문이다(Stott).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반영한 것으로(막12:29-31) 요한은 이 계명에 대해 본서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위대한 계명으로 진술하고 있다(3:23; 요이1:5,6). 
한편 '주께'에 해당하는 헬라어'아프 아우투'(* )는 문자적으로 '그로부터'라는 의미이다. '그'가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예수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illiams, Stott, Westcott). (2)혹자는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malley).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니며 상호보완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
===
[[특별기고)영지주의란 무엇인가(1)]]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을 가장 미혹하는 신앙의 양태를 영육이원론의 영지주의로 지목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라”고 하였다(요일 1:7). 
최근 전 세계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예수는 신화다]나 [다빈치코드] 등은 모두 영지주의의 현대적 부활이라는 성격이 농후하다. 
뉴에이지운동의 범신론적 성격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허호익, 2016).
영지주의란 영적 지식(gnosis)을 추종하는 동방 종교와 희랍철학과 신지학(theosophy),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혼합형태로 주후 80년부터 150년 사이에 초대교회와 경쟁했던 가장 강력하고 위협적인 운동이었다. 
영지주의는 엄격한 의미로 보면 종교도 아니고 순수하고 단순한 철학도 아니었고 일종의 밀의적인 민중신앙이요, 교회사 최초로 출현한 이단 가운데 하나다. 
영지주의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기독교 이전부터 존재해온 영지적인 사고와 개념 또는 분위기를 지닌 종교운동을 가리키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고, 다른 하나는 2세기에 널리 유포되었던 기독교 이단종파를 가리키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영지주의는 기본적으로 “특별한 지식을 통한 영혼의 우주적 구속을 가르친 사상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이성호, 2012).
영지주의는 무엇이며, 어떻게 일어나서, 누가 무엇을 주장했는가? 
당시 교회는 영지주의에 어떻게 대처했으며 왜 이단으로 간주했는가? 현재 한국에는 어떤 영지주의 이단이 활동하고 있는가?
이단은 정통을 전제로 한다. 정통은 기원적이고 이단은 반영적이다. 
기독교는 절대적 진리를 표방하고 심오하고 놀라운 만큼 신비스러운 메시지를 선포했다. 
처음부터 기독교는 구원과 영생이 믿음으로 말미암으며, 그 믿음이 그리스도 나사렛 예수 즉, 역사적 개인(인격)이신 분에 대한 것을 믿은 것을 의미했다. 
 분의 생애, 죽음, 부활, 그리고 재림하신다는 의미는 각 기독교인에게 생사를 걸만큼 중요한 진리였다(브라운, 2001).
정통은 일반적으로 우선순위를 역사에 두지만, 이단은 지식적 이해에 둔다. 
그래서 정통은 신학자들 가운데 보다 신학적이지 못하고 보다 역사적인 마음을 가지게 하지만, 이단은 보다 신학적이고, 보다 철학적이고, 보다 추상적이다.
골로새서와 요한일서는 영지주의와 가현설주의(decetism)에 대한 항거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유대교주의와 율법주의와 함께 영지주의는 초대교회의 위협적 이단으로서, 믿음과 관련하여 지식을 과대평가하였다.
20세기 전반까지 Irenaeus, Tertullian, Hippolytus, Epithanius와 같은 이단전문가들(heresiologists)은 영지주의자(Gnostics)에 대한 일차적 정보원이었다. 
이들은 영지주의자들이 성경의 의미를 조작하고 왜곡하여 기독교를 오도하는 것에 대해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영지주의자들은 특히 창세기와 요한복음, 그리고 바울서신을 자기들 목적을 위해 왜곡하였다.
Irenaeus와 같은 교부는 영지주의와 기독교의 종교적 혼합을 교회에 대한 공공연한 위협으로 간주하여, 영지주의자들의 성경해석을 왕의 아름다운 그림을 분해하여 여우의 그림으로 짜맞추는 것에 비유하였다.
우리는 영지주의라 부르는 사상이 고대세계를 휩쓸었던 극단적, 철학적, 영적 경향의 한 쪽 측면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브라운, 2001).
영지주의가 일어났던 때는 사도들이 이미 세상을 떠나고 사도들의 신앙을 계승한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어렵사리 자리를 잡아가던 상황이었다. 
교회에 침투한 영지주의 사상으로 인하여 초대교회는 크게 몸살을 앓게 되었다. 
초대교회 속으로 침투한 영지주의는 ‘영지주의 이단’을 형성하여 교회의 참 복음을 심각하게 위협하였다.
초대 교회 당시 교회에 가장 큰 해악을 끼친 대표적인 이단들은 영지주의, 마르시온주의, 그리고 몬타누스주의이다. 
여기에 대하여 교회는 신앙의 준칙을 확립하고, 감독의 사도권을 교회 내에 정착시키고, 정경을 확정함으로 응전하였다.
----(2)------
초대교회는 이단의 공격에 대하여 정경화, 신조화, 직분의 확립을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지켰다.
이단은 기본적으로 성경의 본질적인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을 더하거나, 그것에서 본질적인 교리를 빼는 것을 의미한다(계 22: 18-9). 
영지주의와 몬타누스주의(신령한 예언)는 전자에 해당하고, 마르시온주의자들(구약적 요소를 제거)은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리멘트(Clement, 150-215)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영지주의의 창시자는 시몬 마구스(Simon Margus)라는 인물이다. 
시몬 마구스는 사도행전 8:9-13절에서 등장하는 마술사 시몬과 동일인물이며, 그는 마술을 행하여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하는 재주를 부렸고, 많은 인기를 얻자 자신이 사람의 형태로 나타난 신이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이 자신을 경배하도록 만들었다. 시몬은 자신이 겉으로는 사람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하나님이라고 가르쳤다. 
영지주의와 정통 기독교는 거의 동시대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이성호, 2012). 
영지주의 사상이 교회에 침투하여 초기 기독교를 심각하는 위협하는 이단 세력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흔적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버가모에 있는 교회에 보내신 편지의 내용 중에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계 2:15)라는 내용이 있다. 
이것이 초대교회에 침투한 영지주의와 관련된 흔적이다. 
‘니골라당’(Nicolaitans)이라는 말은 초기 영지주의의 지도자 니콜라스(Nicolas)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니콜라스는 안디옥 출신으로서, 사도들에게서 신앙을 전수받고 집사의 직분을 받았으나 결국 이단의 길로 빠지고 말았다.    
성경 외의 문헌에서도 니골라당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있다.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 165년 순교)이 Trailians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 중에 “니골라당을 멀리 하십시오.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쾌락을 사랑하지만 중상적인 혀를 놀립니다”라고 말하는 내용이 나타난다.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변증가 이레니우스(Irenaeus, 125-202)가 저술한 책「Adversus Haereses」에도 다음과 같이 영지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니골라당은 사도들에 의해 집사직을 처음으로 받은 자 니콜라스를 추종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무절제적인 방종한 삶을 살고 있다. 이런 자들의 특징에 대해서 요한계시록에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영지주의라 부르는 사상은 고대세계를 휩쓸었던 극단적, 철학적, 영적 경향의 한 쪽 측면이라 할 수 있는데, 영적 형태로서 20세기의 실존주의를 닮았다고 할 수 있다(브라운, 2001). 
Mary Baker Eddy(1821-1910)의 '크리스천 싸이언스‘(Christian Science)는 현대판 영지주의이다.
역사가 소크라테스 (Socrates the historian, 5C.)가 남긴 기록에서도 초대교회가 영지주의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했다는 기술되어 있다. 
소크라테스는 사도 요한이 성경에 남긴 다음의 말씀이 그 당시 교회에 침투한 영지주의 이단 사상을 물리치기 위해 했던 말이라고 기술하였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1-3) 
1. 기독교 영지주의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 지방에서 영지주의 문서가 대량 발견됨으로써 영지주의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다.
처음에는 영지주의가 초기 기독교 내에서 발생한 하나의 기독교이단사상이었다고 여겨졌으나, 최근에 간행된 활발한 연구결과에 의해 영지주의는 기독교 밖에서 시작되어 고대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크게 미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교회에 침투한 영지주의 사상으로 인하여 초대교회는 크게 몸살을 앓게 되었다. 
---(3)-----
초대교회 속으로 침투한 영지주의는 교회의 참 복음을 심각하게 위협하였다.
교회사에서 영지주의가 문제된 것은 2세기 이후였다. 영지주의는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가? 영지주의의 뿌리는 무엇인가?
⑴동양 종교 유래설이다. 조로아스터교, 신비종교, 점성술, 마술 등 동양종교에서 그 뿌리를 찾는다.
⑵헬라사상 유래설이다. 기독교 신앙이 신플라톤 철학의 흙탕물로 오염되었다고 보는 견해다. 동방종교인 불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Edward Conze).
⑶유대교 유래설이다. 유대교의 금욕적이고 묵시적인 종파 에세네파의 이원론적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⑷기독교내부 유래설이다. 기독교내부의 이단적 사상에서 유래했거나 1-2세기에 번창한 기독교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⑸고대종교 및 사상의 혼합설이다. 기독교전파과정을 통해 일어난 일종의 혼합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기독교 이전부터 존재했던 종교혼합주의가 기독교 안에 침투해 복음을 변질시키려 했던 것으로 본다.
기독교로 개종하는 과정에서 페르시아의 이원론, 동양의 신비종교, 헬라 철학, 유대교 사상 등 여러 요소가 기독교 교훈에 혼입되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 기독교 영지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지주의 사상이 교회에 침투하여 초기 기독교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이단 세력에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흔적을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버가모교회에 보내신 편지의 내용 중에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계 2:15)라는 내용이 있다. 
이것은 초대교회에 침투한 영지주의와 관련된 흔적이다(정이철).
‘니골라당’(Nicolaitans)이라는 말은 초기 영지주의 지도자 니콜라스(Nicolas)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니콜라스는 안디옥 출신으로, 사도들에게서 신앙을 전수받고 집사의 직분을 받았으나 결국 이단의 길로 빠졌던 사람이다. 
영지주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 신성이 공유되고 있다고 여기는 현대의 뉴에이지 운동의 원형이었다. 
한국인들이 기독교에 개종할 때 무속신앙과 기독교 신앙을 혼합한 것과 비슷하다 할 것이다. 
2. 영지주의의 일반적 특징
영지주의는 지식을 의미하는 헬라어 Gnosis에서 유래하였다. 일반적 지식이 아니라 신비적 합일을 통한 앎을 의미한다. 
영지주의는 그 성격상 밀의적인 혼합종교이므로 그 교리와 제도와 의식이 너무나 다양하여 한 마디로 규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영지주의 자체는 복잡하고 다양하지만 공통된 일반적 특징을 몇 까지 간추려보자.
⑴ 영육이원론(dualism) : 모든 영지주의는 이원론에 기초에 두고 있는데, 영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 영혼과 육체는 서로 존재론적으로 대립의 관계에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영육 이원론은 영혼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는 선악이원론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존재론적 윤리적 이원론이 그대로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에 적용된다.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이 고통을 당하고 죽는 까닭은 인간이 이 악한 물질세계에서 악한 육신을 입고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본다. 
육신은 악하기 때문에 육신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인간 육신을 적대시하고 천시하는 영지주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극단적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 극단적인 금욕주의로서 일체의 육식과 결혼을 금한다. 
둘째, 이와는 정반대로 육신은 전혀 쓸모없는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윤리적 방탕주의(반율법주의)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신앙적 고행이나 금욕은 구원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허호익, 2016).
영지주의에 의하면, 구원은 영적 각성을 통해 인간의 영혼이 육신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영적 본향으로 귀향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육체적 죽음과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에 대한 믿음을 통해 죄사함을 받아 영육간에 구원을 얻는다는 기독교의 구원론을 조잡한 것으로 배척한다. 
영적 세계로의 귀환이라는 신화론적 구원론에 집착한다. 
----(4)----
⑵ 육체의 감옥에 유폐된 영혼. 영지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 천상의 영적 존재였는데, 천상의 영적 존재였던 인간은 자신 안에 있던 ‘신적 불꽃’을 상실하고 지상의 물질세계로 추방되어 고통과 죽음의 운명을 지닌 육신의 감옥에 유폐되었다."고 보며, 그래서 이들은 육신을 영혼의 감옥이라고 보았다. 
사람은 자신의 추방과 유폐의 과정조차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다고 가르친다. 
⑶ 구원은 영적 깨달음에서 온다. 
영지주의 구원관을 보자면, "구원은 영적 지식의 각성에 의해 이뤄진다. 영적인 인간임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육체의 감옥에 갇힌 인간이 자신이 영적 존재라는 각성에 이르게 되어야 구원을 얻는다. 영적 각성은 영적 지식을 통해 가능하다, 따라서 영지를 중시한다."  즉, 영지, 영적 비밀에 대한 지식을 중시한 것이 영지주의의 가장 큰 특징이다. 
지성적이며 과학적인 지식이 아니고 직관적이며 직접적인 지식, 신적인 것에 참여함으로 얻는 영적인 지식을 말하는데, 신인 합일의 지식이요 구원의 직접적인 경험이라 한다. 
자신의 현재 상태로부터 해방과 구원을 성취하는 자기인식(깨달음)의 행위이다.
영지주의 이원론은 구원론과 밀접한 연관을 갖게 되는데, "우리의 영혼은 물질(육체)에 갇혀 있다. 따라서 이 영혼이 육체에서 해방되는 것이 진정한 구원이다."고 본다. 
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참다운 지식이 필요하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득도(깨달음)를 해야 구원을 얻는 것이다. 
영지주의에 따르면(구원파가 영지주의다), 진정한 구원은 우리의 믿음이나 행함이 아니라 참 지식의 소유 여부에 달려 있다. 
그 결과 영지주의자들은 윤리에 대해 부정적이고 소극적이었다. 그들은 율법에서의 해방과 양심의 해방을 강조한다. 
이 지식은 특별한 사람들에 의해서 비밀스럽게 전수된다고 주장하였다.  영지주의는 신비적 지식을 통해 구원을 성취하려 한 종교운동이다. 
영지주의는 상징적인 의식, 신비적인 예식, 무술적인 형식의 가르침을 도입하여 사변적 우주론을 대중화했다. 
우주론적 신화, 헬라와 동양의 이교적 철학사상, 기독교의 진리를 융합한 대중운동이었다. 
⑷ 영지주의는 분파가 다양하다. 
기독교인, 유대교인, 이교도들이 각각 영지주의의 다양한 그룹과 분파를 형성하고 있었다. 
2세기에 들어와서는 영지주의와 기독교 신앙이 혼합되어 기독교적 영지주의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대표적인 기독교 영지주의자가 바로 Marcion이었다. 그 가르침의 단순성과 기독교와의 유사성 때문에 많은 추종자를 얻게 되었다. 
154년에 로마를 방문했던 주교 폴리갑은 마르키온을 만나 토론한 다음, “나는 네가 확실히 사탄의 맏자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단죄하였다. 
이때 반영지주의 신학자로 활약한 것이 바로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이었다. 
⑸ 반(反)권위적, 반(反)성직계급적이다. 
영지주의자들은 권위주의와 성직계급제도를 거부했다.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구원은 ‘신적 불꽃’을 지니고 있는 극소수의 사람에게 국한 된다는 점에서 선민적 운명론이며, 은밀한 비밀이라는 점에서 밀교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영지주의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불만계층에도 많은 매력과 호소력이 있었다. 
3. 영지주의의 교리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만이 신과 인간과 구원에 관한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영지주의의 다양한 견해를 단순화하거나 일반화하는 데는 무리가 있지만 공통적 특징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⑴ 이원론 : 영적인 세계와 물질적인 세계를 철저히 구분하는 이원론적인 사고다.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에 의하면, 물질의 영역은 물리적 세계의 영역이다. 
불완전하며, 일시적이고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정신의 영역은 ‘이데아’의 영역, 영구성, 완전성, 사실성의 영역이다. 
정신의 영역이 물질의 영역보다 우위를 차지한다. 정신은 진흙으로 된 육체 안에 갇혀 있으며 거기서 해방되기를 갈구하고 있다.
----(5)------
종교적 이원론에는 절대적 이원론과 완화된 이원론이 있다. 
전자는 두 가지 원리가 영원한 싸움을 계속하는 것으로 본다. 후자는 선의 원리가 종국에는 악의 원리를 멸할 것이라 주장한다.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와 헬라의 플라톤 철학의 영향에 기인한다. 플라톤의 이원론은 존재의 영역을 구분하는 형이상학적 이원론이다. 
정신적이며 영원한 관념의 세계와 일시적이며 물질적인 감각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전자는 참으로 존재하는 실재이며, 후자는 존재의 상실을 의미하고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물질을 악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영지주의, 특히 금욕주의 영지파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물질과 영, 천상적인 것과 지상적인 것을 이원화시키는 것이 영지주의의 일반적 특징이다. 
이분법적 사고의 틀에 따라 인간을 영적인 인간과 혼적인 인간으로 분리하기도 한다. 
⑵ 하나님 : 다신론적 신관을 견지했다. 그들은 미지의 하나님(unknown God)과 데미우르고스를 구분했다. 
마르키온이 창조주와 구속주, 또는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 율법과 복음의 하나님을 구별하고, 후자를 영지주의 하나님으로 간주한 반면, 전자를 유대인의 하나님으로 취급했다.
영지주의는 일반적으로 두 하나님을 전제로 하는 이원론적 신관을 견지했다. 
이는 이원론적 세계관의 산물이었다. 영지주의를 관통하는 한 가지 공통점은 참 하나님은 창조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신화적 사고와 헬라철학에 기초하고 있다. 
플라톤은 “세상은 무로부터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재료를 변형한 것”이라고 했다. 피조된 세계는 악하다고 보았다. 
영지주의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 아니라 무감각한 비인격의 하나님이다(근광현, 2003).
영지주의 세계관에서는 ‘모나드’라고 하는 우주의 궁극적 ‘신성’이 존재하며, 이것으로부터 하위의 신들이 ‘발출’되었다고 본다. 
영지주의에서는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신성’으로부터 방출되어 나온 하위의 신적인 존재들을 ‘아이온’이라고 하며, 기독교의 하나님도 여기에 해당된다고 여긴다.
이레니우스는 영지주의의 초월신관을 가리켜 하나님의 절대성과 전지성, 그리고 전능성을 훼손하고 있는 잘못된 신관이라고 비판했다.
사도 요한이 성경에 남긴 다음의 말씀은 초대교회에 침투한 영지주의 이단을 물리치기 위해 했던 말로 이해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1-3). 
⑶ 인간 : 영지주의는 인간이해에 있어서도 교회의 전통적인 교훈이나 성서해석과 입장을 전적으로 달리한다. 특히 인간의 기원과 타락문제에 있어 이해를 달리했다.
①하나님의 인간창조를 부정한다. 창세기의 인간창조 이야기를 신화나 알레고리로 이해하고 그들 자체의 창조신화를 제시했다. 
천상의 세계에 거주하던 영적 존재가 어떤 치명적 사건으로 인해 세계로 떨어져 육신을 입게 된 것에서 인간이 기원했다고 본다.
②인간구성에 대한 3분설적인 이해다. 영지주의는 인간을 육, 혼, 영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육과 혼은 물질세계에 속하는 반면, 영은 신적 본질에 속한다. 
인간에게는 참 하나님에게 속하는 부분, 즉 신적 불꽃이 있다. 그것이 육과 혼과 더불어 인간을 구성하는 영이라는 것이다.
인간을 세부분으로 보는 3분설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3분설은 2분설과 더불어 정통교회도 받아들이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3분설의 자의적인 적용으로 인한 오도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영지주의자들의 입장은] 아담과 하와는 실제 육체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심리적 기질과 영적 기질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6)-----
3분설을 인간계층의 분류에도 적용했다. 
이교도를 육적 인간에, 유대교와 기독교도를 혼적 인간에, 그리고 참된 기독교인, 즉 영지주의자는 영적 인간에 속한다고 보았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지식을 복음을 통해 계시하셨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이러한 3분법에 근거한  방식의 구원은 그 내용에 있어서 영육간 전인적인 구원이 아니라 영혼 구원이 우선순위적 목표라고 여겨질 수도 있게 된다.
성경에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분이 엄격하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지만...믿음으로 말미암는 전인적 구원 없는]신과의 합일은 영적인 삶의 목표가 아니다. 
워치만 니에 따르면(살전5:23에도 표현되어 있듯이), 인간은 세 부분, 즉 속사람(영), 겉 사람(혼) 그리고 제일 바깥의 사람(육체)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상 사람들은 겉 사람에 속해 있기 때문에 정서도 지적 사고도 하나님이 소유한 성품과 동일하지 않다. 오직 영만이 하나님과 관계하는데, 영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자아 또는 혼은 깨어져야만 한다고 보았다. 
Watchman Nee의 사상적 제자 권신찬은 “지성이나 감정이나 의지로써 영이신 하나님과 접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③인간영혼의 선재설이다. 인간의 영은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기 전부터 천상세계에서 영적 존재로 선재했다고 주장한다.(이하는 영지주의 주장이며, 워치만 니의 입장은 아니다)
④인간의 타락에 대한 신화적 해석을 한다. 
에덴동산의 이야기는 인간의 타락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영지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말해준다고 본다. 
뱀이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도록 유혹하여 그를 타락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각성하게 했으며 하와와 아담이 그 열매를 먹음으로서 얻은 것이 영지라는 것이다. 영지주의는 하와를 아담보다 우월한 존재로 간주한다. 영지를 얻은 최초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영지주의는 인간의 기원이나 본성과 타락에 관한 성경의 증언을 부정했으며, 역사적 사실을 신화로 취급하여 교회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인간관을 제시하였다.
현대의 영지주의: 대부분 영지주의자들은 이원론자들이다. 이들은 물질과 육체는 본래 악한 것으로 보았으므로 성육신을 부정했고 영혼만은 순결하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 
삼분설을 따르는 이들 가운데 영지주의자들이 많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성육신한 예수와 그의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이니”(요일 2:7)라고 말하며 영지주의자들의 활동을 경계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1-3).
===현대판 영지주의 신천지. 
오늘날에도 영지주의 이단이 있다. 자기들만 갖고 있는 영적 비밀을 깨달아야 구원받는다고 유혹하는 신천지가 대표적인 경우다. 
교주 이만희가 자칭 보혜사이기 때문에 성경의 비밀스러운 영적 지식을 알려주고 풀어줄 수 있다고 한다. 
신천지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만 믿을 수 있고, 믿은 후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지신행). 
성경의 비유와 계시록의 감추어진 비밀스러운 지식을 아는 사람만이 구원받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7)------
보혜사는 진리의 영으로서 성령님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단 교주들은 자신을 보혜사, 동방의 감람나무, 이슬성신, 약속된 목자, 사도 요한격 목자, 즉 이긴 자, 만왕의 왕, 만유의 대주재, 총회장 등으로 신격화한다.
영지주의 이단 구원파. 정통 교회는 모두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여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뢰해야 구원 받는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박옥수는 [죄사함, 거듭납의 비밀]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포교활동을 벌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회개하면 죄가 씻어진다는 말이 성경 어디에 있는가? 회개해서 죄를 씻는 것도 성경적인 방법이 아니다."(「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 2」p.50 기쁜소식사)라고 강조한다. 
성경은 분명히 “회개하여…죄 사함을 받으라"(행 2:38)고 말씀하고 있다. 
박옥수는 의지적 회개가 없이 자신의 죄가 사해진 것을 “의지와 관계없이 수동적으로" 깨달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영지주의적 이단사상으로 많은 이들을 미혹하고 있다.
정통 교회는 예수를 믿어 의롭다함을 받은 후에도 성품은 여전히 사함 받은 죄인이라고 가르치나 (우리는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다), 박옥수는 신분과 성품이 한꺼번에 의인이 되었다고 가르친다.  기독교는 회개로 시작하여 회개로 끝나는 종교이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무지한 박옥수는 죄 사함을 깨달음으로만 의인이 된다는 교리를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은 것이지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천은 신분상 의인이지만, 성품상으로는 여전히 죄성을 가지고 있는 죄인이다. 
바울은 구원을 받은 지 여러 해가 지난 후에도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하지 않았던가?(딤전 1:15)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을 깨달으면 구원받는다고 미혹하는 박옥수 집단도 대표적인 영지주의 이단이다. 
구원파는 매우 성경적인 듯 보이지만 신학적 오류에 빠진 집단이다. 신구원파라고도 불리는 기쁜소식선교회(박옥수)는 죄 사함의 복음을 깨닫고 거듭납과 죄 사함을 받으면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이 된다고 주장하여 사람들에게 거짓된 위안을 주고 있다(최태영).
(3)신일합일 : 기독교 영지주의는 신자들이 ‘영적인 지식’(깨달음)과 ‘영적인 안내자’(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 안에 잠재된 신성이 되살아나서 우주의 궁극적 신성과 일치됨을 누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영지주의 기독교에서는 신자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신일합일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착각하게 된다.
만일 인간이 정말 신일합일의 경지에 이른다면, 더 이상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기도는 땅에 있는 피조물인 인간이 초월자이시며 절대자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도우심을 받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 기도를 가르치셨다. 
그러나 영지주의에서는 신자들이 “깨달음”과 영적인 세계에서 내려오는 순간적인 ‘영적인 섬광’(spark)을 통해 자기 안에 내재된 신성이 각성되어 자신도 신성에 참여하게 되었으므로 굳이 다른 신에게 기도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구원파가 구원받은 신자들에게 더 이상 기도가 필요 없다고 가르치는 것은 영지주의 사상에 비롯된 것이다(정이철, 영지주의와 구원파 교리, 2014). 
⑷ 그리스도 : 이와 같은 잘못된 타락에 대한 이해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왜곡으로 이어졌다.
①삼위일체 하나님의 부정이다. 
영지주의는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로 믿지 않고 천상적인 존재인 에온 중 하나로 간주한다. 
그리스도는 물질적인 세계로부터 해방되는 길을 제시하기 위해 세상에 왔다고 가르쳤다.
②성육신 교리의 부정이다. 
그리스도는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올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육체는 하나님의 의지의 산물이 아니다. 
물질과 육체는 참 하나님의 계시를 나타내는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고 보았다.
------(8)------
가현설(docetism): 외견상으로 사람으로 보인 것뿐이지, 실제로 육신을 입은 것이 아니라는 이론이다. 
사도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 하지 않는 영에 대해 언급한 것(요일 4:2-3)은 가현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가현설은 물질은 악하며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헬라사상에 근거하여 예수님이 육체를 가졌을 경우, 그의 신성에 손상이 갈 것이라는 우려에서 나온 주장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무의미하게 만들기 때문에 이단으로 정죄 받게 되었다.
1세기 말 케린투스(Cerintus)는 그리스도와 예수를 구별하고, 그리스도의 신성은 단순히 인간성과 일시적 병존상태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예수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난 인간이었던 반면, 그리스도는 세례 받을 때 그에게 내려온 신적 존재였다.” 
③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환상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진정한 의미의 육체일 수 없고 육체의 모습을 가진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고 인간예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실제 일어난 것이 아니라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게 가현설적 기독론(docetism)을 주장하였다. 영지주의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몸은 진정한 육체일 수 없고 단지 육체의 모습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었다. 
④ 부활한 그리스도의 육체적 실재의 부정이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나 육체적 부활과 같은 정통교회의 일반적 신앙을 소박한 오해로 간주하며, 그리스도의 부활은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⑸ 구원 : 영지주의는 구원이 지식(깨달음)에 의해 이뤄진다고 주장한다.
① 구원은 영의 해방과 귀환이다. 영지주의에 따르면, 구원은 물질적인 것과 연합됨으로 육체 속에 갇혀 이 세상에서 데미우르고스와 그 세력들의 지배 아래 있는 영이 해방되어 본래의 거처, 천상계로 귀환하는 것이다. 
② 구원을 지식을 통해 성취된다. 영지주의는 구원이 예수의 희생적 죽음이나 예수를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고 영지, 즉 세계와 에온들과 참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소유함으로 이뤄진다고 보았다. 
이들은 믿음과 관련하여 지식을 과대평가한다. 엘리트를 위해 보다 높은 지식 즉, 비밀적인 지식이 요청된다고 주장한다(브라운, 2001).
구원파는 예수 그리스도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사해주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박옥수는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을 깨닫는 것이 구원이라고 가르친다. 박옥수는 정통 교회에서 하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회개와 믿음이라고 주장한다. 
의지적인 회개와 믿음이 빠진 깨달음에 의한 구원을 전하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구원파를 영지주의적 이단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에 영향을 받은 류광수 다락방도 죄인임을 인정하고 이를 통회하는 회개에 대한 강조를 하지 않고 다만 예수를 구주로 믿을 때 원죄와 자범죄가 다 용서받는다고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이단전문가들은 류광수의 다락방은 지방교회의 삼분설(살전5:23을 보면, 바울도 삼분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기는 하지만..치우치지 말아야 한다)과 박옥수의 깨달음, 그리고 김기동의 귀신론이 혼합된 영지주의 범주에 속한  이단이라고 분별하고 있다. 
③ 인간계층에 따라 구원의 가능성이 좌우된다. 
최하층인 육적 인간, 즉 이교도들은 어느 경우에도 구원을 얻을 수 없는 멸망 받을 인간이다. 
중간 층 혼적 인간은 신앙을 가졌으나 영지를 가지고 있지 못한 유대교인과 기독교인들로 이들은 구원받을 수도 있고 멸망할 수도 있는 인간이다. 
최고층 영적 인간은 참된 기독교인으로 영지로 구원을 얻은 인간이다. 영적 인간은 구원에 이르기 위해 예수의 교훈을 파악해 깨닫기만 하면 된다고 보았다.
----(11)----
===도덕, 윤리, 죄를 초월하는 영지주의
유병언, 박옥수, 이요한의 구원파가 인간의 구원을 ‘영의 구원’, ‘혼의 구원’, ‘육의 구원’으로 나누어서 설명하는 것이나, 구원받은 이후 육신으로 짓는 죄가 더 이상 죄가 아니라고 가르치는 것도 영지주의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정통 기독교 신앙은 인간이 대체로 (때로 바울도 살전5:23에서 삼분법적 이해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었다고 보지만, 영지주의적 입장은 인간이 영, 정신(혼), 육체, 세 요소로 구성되었다고 본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치우쳐버리는 것이 문제가 됨에 주의하라..
[참되게 믿는이마다 내주하사, 말씀을 조명해 주시는 성령을 따라 진실로 회개함,  그 안에서 주 임재 앞에서 깨어 동행하기를 구하는 바 이제, 그 객관적인 말씀(로고스)을 삶속에서 참되게 살아내도록 친히 일깨우시며 이끄시는 성령님을 의지하며 인도함 받음(레마) 통해 이해-체험-깨닫고 감사드림 통한 개인적-주관적 증거를 가진 자가 되게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어떠하심따라 장성한 분량의 충만에로 나아가기를 원하신다!!]
구원파도 인간을 ‘영적인 인간’(Pneumatics),‘정신적인 인간’(Psychics),‘육체적인 인간’(Hylics)으로 구분하는데, 영지주의 사상과 매우 유사한 부분이다. 
영지주의는 자신들이 속하여 있는 영적인 인간 부류가 구원을 얻을 가능성이 가장 높고,‘영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정신적인 인간’으로 분류하면서 이들도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육체적인 인간’ 부류는 영적인 지식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가르친다.
구원파가 신자들이 ‘구원에 관한 깨달음’을 통해 거듭난 이후 어떤 죄를 범하더라도 영혼과는 무관하고 더 이상 죄가 아니다 라고 가르친다.  
구원파의 가르침도 영지주의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영지주의 사상은 악한 물질세계 속에 속박되어 있는 자신의 신성에 대해 무지, 무감각한 상태에서 살던 사람에게 ‘영적인 깨달음’, 또는 신성을 일깨우는 ‘순간적인 섬광’이 임하면 궁극적 영적 실체와 일치되어 진다고 한다. 
기독교 속으로 들어온 영지주의 이단은 ‘영적 안내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인합일’의 길로 들어선다고 가르친다.
인간이 신인합일의 경지에 들어서면 육체와 물질세계로부터 완전하게 초월하고, 악한 물질세계로부터 더 이상 영향 받지 않는다는 이론적인 주장이 성립된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에서는 영적인 지식을 얻어 신성의 세계를 향하는 해탈한 인간에게는 더 이상 인간 세계의 도덕과 윤리가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친다. 
영적 지식을 통해 물질세계의 운명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또한 영적 지식을 통하여 구원받은 사람의 영혼은 이미 물질세계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그 사람의 육신이 무슨 일을 할지라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이론도 성립된다.
그래서 영지주의 사상에 빠진 사람들에게서는 각종의 쾌락과 방종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극도의 금욕생활이 나타나기도 했다. 
구원받은 후로는 완전해졌고, 육체로 범하는 죄가 더 이상 영혼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구원파의 가르침은 영지주의에서 유래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세월호가 침몰하여 무고한 승객 수 백 명이 죽게 되어도 그들을 걱정하지 않고 오직 자신들만 빠져나오는 구원파 신자 승무원들의 이상한 행동은 이 세상의 도덕과 윤리에 대해 상관하지 않는 영지주의 사상의 영향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4. 반영지주의 교부들
영지주의의 주요교리는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중대한 문제를 야기했다. 그들의 창조론, 구원론, 신론, 기독론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부정하거나 위협했다. 
물질세계를 영원한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니라 저급한 존재에 의해 이루어진 잘못된 결과로 간주하는 창조론은 물질세계를 긍정하는 유대기독교 신앙을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영지주의는 믿음이 아닌 지식에 의해 구원을 얻으며, 육체적인 몸의 구원과 부활을 부정했다.
최초로 영지주의를 논박한 사람은 Justin이었다. 
마르키온에 대해 귀신들에게 영향을 받은 자들로 간주했으며, 시몬 마구누스(행 8)의 교리를 사악하고 기만적인 것으로 경멸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反이단 문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이레니우스의 <이단논박>이다. 그는 전통과 성경의 권위에 근거하여 이단들을 논박했다.
Tertullian(150-220)은 서구신학의 기초를 놓았던 라틴교부였다.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을 부정하는 영지파들을 신랄하게 책망하고 비판하였다. 
Clement(150-216)는 “모순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거나 기독교인은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단순한 믿음을 넘어서 ‘참된 지식’을 이해할 수 있다고 논박했다. 
-----(12)------
Origen(186-254)은 단순한 신앙에 반대하고 올바른 성경해석을 통한 지식을 높이 평가했다. 
현교(顯敎)와 밀교(密敎)
종교는 크게 현교와 밀교로 구분된다. 
현교는 교리와 제도와 의식이 모두 공개되어 있고 의사결정이 민주적이고 예산과 결산이 투명하게 공개된다. 
반면에 밀교는 교리와 제도와 의식의 일부는 외부자에게 공개되고 그 일부는 내부자들에게만 공개되는 이중구조를 지니고 있다. 
영지주의는 밀교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단 사이비는 대부분 밀교의 형태를 띄고 있기 때문에 대체로 집회 참석조차 공개되어 있지 않고 교리와 의식과 제도가 숨겨져 있다. 
그리고 자기들만의 감춰진 비밀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고 그 내용을 비공개적으로 은밀하게 가르친다.
신천지 교인들은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숨기고 심지어 전도 방법<모략 전도>과 같은 내부유인물이나 분서의 유출도 철저히 금하고 있다. 
밀교는 비민주적으로 운영되며, 재정관리가 불투명하는 등 교리와 제도와 의식이 이중적이다. 
이러한 표리부동의 ‘비밀단체체제’는 밀교적 성격을 띄는 이단사이비집단의 전형적 특징이라 하겠다. 
신천지는 현대판 영지주의 집단으로서 교리와 제도와 의식의 일부가 외부인들에게는 철저하게 감추어져 있는 밀교의 성격이 강하다.
신천지는 기성교회에는 구원이 없다고 구원관을 완전히 뒤집어놓고, 신천지 12지파에 속하여야 신천지 예수교장막성전에 등록되며 144,000명에 녹명되고 이들만이 구원과 영생을 받게 된다고 믿고 시인하게 한다. 
6개월간의 성경공부를 즈음에 지금까지 배운 계시의 실상이 바로 마지막 때의 메시아요 보혜사인 이만희를 통해서 밝힌 구원의 진리임을 이야기한다. 
신천지 집회는 신천지 교인에게 발급되는 ID카드를 소지한 자에게만 허용된다.
보편적인 교회는 교회의 일치와 가정의 화합을 위해서 바른 교훈을 전하는데, 현대판 영지주의 밀교인 신천지는 신앙의 이름으로 가정의 해체와 교회의 분열을 부추기고 있다. 
한국의 영지주의
교회사적으로 거의 모든 이단들은 자신들만 바른 복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가장하고 공교회를 혼란시켰다. 
영지주의자들이 그랬고 <직통계시를 귿단적으로 주장하는>몬타니즘이 그랬으며 근래 한국교회의 문선명, 박태선, 이만희, 박옥수의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이장림의 10월 28일 재림론도 이 점에서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이들은 “그리스도의 비밀”이나 “구원의 비밀”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였다. 
이것은 류광수 다락방 전도운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류광수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 가운데 무슨 “비밀” 무슨 “비밀”이니 하는 말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복음의 비밀,” “구원의 비밀,” “전도의 비밀,” “일꾼 키우는 비밀”, “그리스도의 비밀”등과 같은 말이다. 
류광수는 자기 또는 자기를 추종하는 자들만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아 알고 있는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13)----
이것은 초대교회의 영지주의자들이 자신들만의 비밀스런 지식 gnosis를 갖고 있다고 호도한 것이나, 문선명, 박태선, 이만희, 안상홍 등 사이비나 이단들이 천국행을 보장받은 집단인 것처럼 기성교회를 미혹했던 현상과 별 다를 바가 없다.
한편 “현대 국학과 뇌과학의 창시자”로 자처하는 “대선사 일지 이승헌”은 1985년 단학선원을 설립하고 2002년 이를 단월드로 개명하였다. 
이승헌의 단학은 신일합일의 천화사상과 종교혼합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이승헌은 “진정한 ‘나’는 우리 내면에 있는 순수한 영혼의 불꽃, 바로 ‘神性’이다”고 주장하고, “모든 인간의 참 의미와 삶의 참 목적은 이 신성을 깨닫는데 있다”라고 강조하였다. 단학을 통해 인간의 완성이 이뤄지는데, 인간완성의 3단계는 육체의 완성, 정신의 완성, 천지인 조화의 완성인데, 이 마지막 단계가 천화라고 한다.
이승헌에 의하면, 단학수련을 통해 신성을 밝히 깨닫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한다. 
“단학수련을 통해서 우주의 신성과 여러분의 신성이 만나는 순간이 깨달음이요 구원”이라는 것이다.
이승헌의 신선도는 신일합일을 통해 구원을 얻을 뿐 아니라 영생에 이르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단월드는 영지주의가 한국에서 신흥종교의 옷을 입고 재현된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 결론
영지주의는 신비적 지식을 통해 구원을 성취하려 한 종교운동이었다. 교회는 영지주의를 논박하는 과정을 통해 신앙신조와 권위체계를 확립하게 되었다.
영지파의 비의(secret teaching)를 논박하는 과정에서 신약정경, 사도적인 전통, 사도적 권위가 정립되었다. 
영지주의 도전으로 신학활동이 촉진되었다. 따라서 많은 반영지주의 교부들이 배출되어 올바른 신론, 기독론, 인간론이 확립되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인간인 동시에 진정한 하나님임을 분명히 할 수 있었다. 영지주의는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이단의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다. 
혼합주의의 문제점과 위험성을 지적해주는 동시에 초기 기독교교부들이 생존을 걸고 확립한 성서적 기독교 진리를 잘 보존하고 가꾸어야 할 것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
=========
구원파를 왜 이단이라 하는가? ----박옥수의 대한예수교침례회(기쁜소식선교회)를 중심으로-
현재 전국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이단은 안상홍증인회(하나님의 교회), 무료성경신학원(신천지 교회), 그리고 구원파(대한예수교침례회와 기독교복음침례회)이다. 
이단은 지도자와 그의 가르침, 그리고 그 잘못된 가르침을 따르는 추종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단은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여 가르침으로 영혼을 멸망시키고 하나님의 교회를 분열시키며, 가정을 파괴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유병언과 이요한, 박옥수라는 세 인물이 이끌고 있는 구원파는 사이비기독교로서 초대교회를 어지럽히던 이단사상 도덕률(율법)폐기론과 영지주의가 2000년만에 새로운 옷을 입고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침례교를 빙자해서 세계 도처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구원파의 세력은 본래 외국에서 들어온 이단이라 할 수 있다. 
[유병언/권신찬의 기독교복음침례회, 이요한(이복칠)의 대한예수교침례회; 박옥수의 대한예수교침례회 중앙교회파, 서달석의 서울중앙침례교회]는 모두 미국의 헬리콥터 조종사 Dick York과 화란인 독립선교사 Kaas Glas의 사상을 물려받은 자들이다.]
현재 구원파는 국내에서는 크게 5계열로 나뉘어서 활동하고 있다. 
유병언씨는 서울 삼각지에, 이요한씨는 안양시 인덕원에, 박옥수씨는 대전시 변동에, 서달석씨는 광명시 철산동에, 윤방무는 미국 L.A.에 본부를 두고 있다. 
엄격한 의미에서 구원파는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이단이 아니라, 정통기독교를 부정하는 미국의 돌팔이 선교사에 의해서 수입된 이단이다.
국내적으로는 유병언과 그의 장인 권신찬이 모두 장로교(통합측) 출신이기 때문에, 장로교회에서 파생된 사이비침례교 또는 사이비기독교라고 할 수 있다.
===구원파의 분파현황
⑴ 권신찬, 유병언 계열(기독교복음침례회)
한국의 구원파(기독교복음침례회)는 1962년 경북 대구에서 고 권신찬과 그의 사위 유병언에 의해 시작되었다. 
권신찬은 대구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를 졸업하고 1951년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후 10년간 경북지방에서 장로교목사로 목회를 하였으나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는, 1961년 11월 8일 설교준비를 하던 중 로마서 3장 2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의가 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 십수년간 내 양심을 칭칭 동여 매었던 죄의 사슬이 한꺼번에 풀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얼마 후 그는 네델란드 선교사 Kas Glaas(길기수)에게 침례를 받음으로 경북노회로부터 제명처분을 받았다.
구원파의 실세인 유병언은 같은 시기에 대구서문교회에 다니다가 1962년 4월 7일 미국인 독립선교사 Dick York의 설교를 듣다가 "복음을 깨달았다." 
유병언은 1961년 외국인독립선교사들이 운영하던 대구성경학교에서 박옥수, 이종섭, 유강식, 심남섭, 김성준 등과 함께 공부하다가 그 무리에서 이탈하여 권신찬과 손을 잡고 그들 나름대로 포교활동을 펴기 시작했다.
서울의 극동방송에서 한국어방송을 담당하던 권신찬과 유병언은 1977년 [한국평신도복음선교회]를 결성하여 전국적으로 활동하다가, 그들의 이단성이 탄로나면서 1973년 방송국에서 밀려나 삼우트레이딩을 인수 사업에 전념하게 된다. 이 회사는 후에 (주)세모로 발전하게 되어, 오대양사건으로 일으키는 토양을 마련하게 된다. 
이어, 1981년 기독교복음침례회라는 교단이름을 사용하여 기존교회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다. 
오대양사건 이후 사업에만 주로 전념하고 있는데 그 교세가 현저하게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새길]이라는 정기간행물을 내고 있다. 
본부의 소재지는 서울 용산구 한강로 1가 231-23 서울교회로서 통상 삼각지교회로 불린다.
⑵ 이요한(이복칠)계열(대한예수교침례회)
이요한(본명 이복칠)은 목포출신으로 권신찬의 수제자이며, 그에게서 목사안수를 받은 거짓목사이다. 
이요한 계열은 유병언이 교회의 헌금을 사업에 전용하는 것을 문제삼아 기업이 곧 하나님의 일이라는 유병언 파를 비난하면서 교회와 기업을 분리해야 한다는 성명을 내고 1983년 분파되었다. 공주에 기도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안양 인덕원과 광주를 중심으로 3만명의 교세를 확보하고 있다. 
이들은 현재 [대한예수교침례회]라는 간판 아래 활동하고 있으며, 본부는 서울 서초구 방배동 239-1 삼원빌딩 4층 서울교회이다(안양시 인덕원에 교회당을 새로 지어서 이전했다). [생명의 빛]이라는 월간지가 나오고 있다.
이요한 계열은 권신찬, 유병언 계열에서 분파되었기 때문에 신조마저 유병언계의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라는 12개항을 약간 수정하여 [우리는 이렇게 믿는다]라는 10개항을 만들 정도로 거의 유사하다. 
종말론에 있어서 약간 다른 요소가 있으나 구원관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가 없음으로 이 글에서는 권신찬, 박옥수를 중심으로 구원파의 이단성을 파혜치기로 한다. 이요한 계열은 전국적으로 교회건축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⑶ 박옥수계열(대한예수교침례회)
박옥수는 중학교 3학년 중퇴생으로서 체계적인 신학을 공부한 적이 없고 Dick York과 권신찬의 영향을 받았으며, Dick York에게 개인적으로 목사안수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옥수씨는 경북 낙동강 유역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중학교를 중퇴하고 1962년에 대구에서 죄사함을 ꡒ깨달음ꡓ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대구 계명대학교 앞에서 1983년까지 단독 목회를 하다가, [서울제일교회]를 담임하기도 했고, 1984년부터 대전 변동에 한밭중앙교회(기쁜소식선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전국대도시의 체육관을 빌려 성경세미나를 벌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매년 4박5일의 일정으로 경북 김천에 기쁜소식선교회 수양관에서 여름수양회를 주관하고 있다. 
기쁜소식선교회의 이름으로 [죄사함, 거듭납의 비밀]을 비롯하여 많은 책을 무료로 배포하며 전도에 열을 올리고 있다. 
군부대와 교도소에까지 침투하면서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기쁜 소식]이라는 월간지를 내고 있다.
대한예수교침례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서울 관악구 봉천동 소재 서울제일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현재는 대전 변동에 있는 한밭중앙교회(기쁜소식선교회)를 본거지로 삼고 있다.
부흥회 대신 성경강연회 또는 성경세미나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세 계파의 공통점이다. 성경을 이지적으로 이해하고 깨달아야 할 책으로 보는 것이다. 이들은 5-7일 집회를 통해 기존정통교회를 의심하거나 부정하게 만든 후에 참석자들의 세계관과 교회관을 바꾸어 놓는다.
권신찬(유병언), 이요한, 박옥수는 회개를 부인하는 깨달음에 의한 구원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적 사상으로 인하여 1992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77회 총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구원파 지도자들은 성경을 억지로, 풍유적으로 해석한다. 대부분이 체계적 신학을 공부한 적이 없기 때문에, 즉 성경해석의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그들의 구원관을 강조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성경을 자의적으로, 억지로 해석하기를 서슴치 않는다(예: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 누가복음 10장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무화과나무의 비유 등). 
성경은 무식한 자들이 성경의 역사, 문화, 문법, 신학을 무시하고 말씀을 억지해석하여 이단을 만든다고 경고하고 있다(벧후 3:16). 
성경은 우리의 칭의와 성화 그리고 영화를 위해 죄인들을 변화시킬 목적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구원파는 성경을 지식적으로 깨달아야 할 책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이들은 성경부흥회나 심령부흥회, 사경회라는 표현을 거부하고 성경강연회 또는 성경세미나라는 표현으로 현대인들을 미혹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이단이 있다. 
첫째는 성경외의 자기 계시, 즉 자기 성경을 가지고 있는 이단이 있다. 통일교,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와 같은 이단이 이에 속한다. 
둘째는 성경만이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이 있다. 
둘째 이단이 첫째 보다 훨씬 더 무섭고 해악이 크다. 드러난 질병 보다 숨은 질병이 더 무섭다. 
이단은 그 본성이 미혹하는 자요, 속이는 자요, 노략하는 자이기 때문에 그 이단성을 효과적으로 숨기려 한다. 
구원파는 성경을 믿는다고 강조하기 때문에 그 미혹성이 더 크다고 할 것이다.
신학적으로 구원파의 이단성은 어디에 있는가?
유병언, 이요한, 박옥수 등 구원파의 여러 계파는 다음과 같은 공통된 문제점들을 드러내고 있다(종합 사이비이단연구보고집, 2001):
① 구원관이 잘못되었다. 회개와 믿음이 빠진 ꡒ깨달음ꡓ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② 회개관이 잘못되었다. 회개를 계속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한다.
③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면 지옥으로 간다고 한다.
④ 정통교회의 제도(장로, 집사)와 예배형식, 주일성수, 십일조, 새벽기도, 철야기도, 축도를 무시한다. 종교와 복음, 기독교인과 그리스도인, 종교생활과 신앙생활을 구분하여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1. 신관이 잘못되었다. 
하나님은 인격이 아닌 영이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을 인격적인 존재로 믿지 않고, 이신론적 존재로 격하시키고 있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사실만을 강조하여, 하나님을 주로 인류역사, 특히 중동정세를 주관하는 비인격적이고 추상적인 힘으로 부각시킨다. 
구원파에서 전하는 하나님은 기계적으로 그의 계획을 성취하시는 이신론적인 존재일 뿐, 우리를 사랑하셔서 개인적으로 인도하시고 섭리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영성을 강조하고 인격성을 부인하거나 격하시킨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백성의 반응에 따라 뜻을 돌이키시기도 하시는 아버지이심을 보여준다. 
구원파의 대부격인 권신찬은 "영을 자기의 인격적인 활동과 혼돈하여 인격의 일부인 지성이나 감정이나 의지로서 영이신 하나님과 접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다"(양심의 해방, p.9)고 말하고 있다. 구원파는 "하나님은 영이시다"(요 4:24)라는 전제하에 복음을 깨달아 구원받는 것, 예배하는 것, 기도하는 것 등 모두를 "영, 즉 양심의 활동"으로 제한 시키고 있다. 
영의 세 가지 기능, 직관, 영교, 양심 가운데서도 특히 양심의 기능만을 강조하여 죄책감에서의 해방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니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 기도, 찬양, 예배를 경시하거나 무시하는 행태가 발달하게 된 것이다.
권신찬은 말한다. "예배는 형식을 갖춘 의식이 아니라 영의 동작이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데 있어서 어떤 형식을 갖추느냐 하는 문제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예배의 형식은 이교도의 제사의식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짙다"(세칭 구원파란, p.23).
한편 구원파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인정하지만, 예수님의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그의 인성을 무시하거나 극히 경시하는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구원파의 이단성은 역시 그들의 구원관에 있다.
2. 구원관이 잘못되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성육신하였다. 그러므로 구원문제는 기독교의 최초의 문제이면서 최후의 문제이기도 하다. 
구원파에서도 죄사함과 구원을 강조하나 이들은 다른 의미의 구원을 전하고 있다. 구원파는 특히 구원론에서 곁길로 빠지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 이단이다. 
이런 점에서 구원파는 이단 중의 이단이다. 대개 이단은 구원론, 종말론, 그리고 신비주의를 중심으로 생겨난다..
(1) 구원파의 세 계파는 사람을 "죄덩어리"로 규정하여 죄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예를 들어, 박씨는 죄(원죄)와 범죄(자범죄: 도둑질, 거짓말, 살인, 간음 등)를 구별한다. 박옥수가 말하는 죄는 아담의 원죄(original sin)를 가리키고, 범죄는 우리의 자범죄(present sins)를 일컫는 것이다. 죄와 죄의 증상을 구분하여 설명하는데, 문제는 그가 죄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단의 특징은 성경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되 자기들의 목적에 맞추어서 그 의미를 바꾸어서 사용하는 것이다.
박씨는 인간을 죄의 종, 사탄의 종으로 표현하면서, "죄 덩어리로 뭉쳐진 인간,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인간, 더 이상 가능성이 없는 죄악 덩어리, 죄 투성이"라고 설명한다([내 죄벌이 중하여], 2003, p.160). 
원죄란 아담이 범죄한 후 인류의 삶을 옭아매며 인간으로 하여금 계속 범죄하도록 만드는 힘있는 그 무엇이다. 자범죄란 이 힘에 의해 범한 악행을 의미한다.
박옥수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죄에 대한 회개는 한 번 하는 것인데, 기성 교인들이 죄를 회개하거나 고백하지 못하고 계속 범죄만 회개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죄인이냐 의인이냐를 물었을 때 의인이라고 고백하지 못하고 죄인이라고 하면 역시 구원받지 못한 사탄의 자식으로 정죄해 버리는 것이다. 
이점을 직접 그의 글 속에서 살펴보자.
"요한 1서 1장 9절의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는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지은 죄를 하나하나 모두 고하면 죄가 씻어진다는 말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달랐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되어 있지요?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도둑질하고 거짓말하고 살인하고 간음하는 것이 죄입니까? 천만에요.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여러분, 문둥병이 무엇입니까? 손가락이 빠지고 눈썹이 빠지고 코가 일그러지면 문둥병입니까? 아닙니다. 그것들은 문둥병의 증상이고 문둥병의 결과이지, 문둥병 자체는 아닙니다. 여러분, 장티푸스가 무엇입니까? 열이 나고 머리카락이 바지는 것입니까? 그것이 장티푸스가 아닙니다. 그것은 장티푸스 균이 들어 갔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지요. 그것처럼 죄와 범죄도 근복적으로 다릅니다."(박옥수,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기쁜소식사, 1993. p.33)
"성경에는 '죄'와 '범죄'에 대해 명백하게 나뉘어져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이 말씀에서 '내가 도둑질 했습니다'하고 범죄한 것을 자백하라는 것이 아니라 죄를 자백하라는 뜻입니다."(「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1」 p.36)
"시편 51편 5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그렇게 고백하지 않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자신이 무슨 무슨 죄를 지었다는 것이 아니고 그는 근본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그 자체를 고백한 것입니다. 나는 죄 덩어리로 뭉쳐진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의 결과를 고백하는 것과 죄의 근본을 고백하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1」p.37).
박씨는 심지어 성경에 회개하면 죄가 씻어진다는 말이 없다고까지 말한다.
"여러분, 아무리 유명한 부흥 목사의 이야기라 해도 성경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길이 아닙니다. 회개하면 죄가 씻어진다는 말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회개해서 죄를 씻는 것도 성경적인 방법이 아닙니다."(「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2」 기쁜소식사, 1993. p.50).
박씨에 의하면 죄를 해결해야 범죄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마치 감기를 고쳐야 열이 내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박옥수 씨에게 묻고 싶은 것은, 예수를 영접하고 회개한 후에는 죄가 해결되어서 죄인이 아닌 의인이 되었으니 그 다음부터는 범죄가 없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시면 더 이상 여러분 자신이 죄와 싸울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여러분이 더 이상 술을 끊으려고, 담배를 끊으려고, 도둑질을 하지 않으려고, 방탕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전혀 없게 됩니다. 여러분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 마음 속에서 그 모든 죄악을 이기게 해 주실 것입니다."(「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1」 p.16)
물론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따라서] 구원받은 후에는 죄를 안 짓느냐고 질문하면 안 짓는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둘 중에 하나인 것만은 틀림없다. 구원 얻은 자는 죄가 해결되었으니 어떤 죄(범죄)도 안 짓는다고 하든지 아니면 죄를 지어도 죄가 아니라고 해야 될 것이다.
성경적으로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그 증거를 세 군데만 살펴보자.
시편 51편 그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성경이다. (그는 자기 필요에 의해 여러 번 말했건만 스스로 자기 귀를 막고, 하나님의 말씀을 안 받아들이고 있다.)
그의 말대로 하면 14절에서,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라고 했는데, 이 '피 흘린 죄'는 '피 흘린 범죄'에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성경이 구별하지 않는 것을 왜 구별 하는가?)
사무엘하 24장 10절 다윗이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인구계수를 하여 하나님께 교만의 죄를 범하였다. 그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범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 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했다. 
(박씨의 말과는 정반대다. 죄가 있어서 인구 계수의 범죄를 했다고 해야 할 터인데,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다"고 하였고, 그 죄를 "큰 범죄를 하였다"고 하지도 않았다. 더욱이 "종의 범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하지도 않았다.)
마태복음 6장 12절 주기도문의 일부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했다. 
(박씨 말대로 하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었다"는 말이 불가능하다. 또한 박씨의 말을 인정한다면 우리 인간이 인간에게 범죄할 수는 있어도 죄를 지었다는 말이 불가능할 것이다. 더욱이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범죄가 아닌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가?)
(죄인임을 시인하고 죄를 해결하면 구원을 받게 되며, 그 후부터는 의인이 되었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요, 스스로 죄인이라 하며 회개하는 자는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가 보자....성경에 의하면, 우리는 아담의 죄가 아닌 각자의 죄 때문에 멸망한다(신 24:16; 역대하 25:4; 겔 18:4, 19, 20, 30; 행 3:19; 5:31) 
[더 이상 회개가 필요 없다는]회개무용론은 예수의 보혈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 같지만 결국 죄를 지어도 죄가 아니라는 율법폐기론에 빠지게 한다. 
바울은 구원을 받은지 3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하고 있다(딤전 1:15).
(2) 구원파는 구원받았습니까? 라는 질문으로 구원의 확신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킴으로 순진한 성도들을 미혹한다. 
(구원의 확신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예수님이지 어느 집단이거나 깨달음이 결코 아니다.)
마치 자신들이 구원여부를 시험할 수 있는 시험관이나 되는 것처럼 행동한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아야 구원의 확신이 있는 것이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고후 13:5). 
(회개와 신뢰로서의 믿음이 없이) 복음을 깨닫고 시인하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구원파는 18세기에 나타났던 Sandemanianism이 부활된 것으로 피동적인 깨달음에 의한 구원은 거짓된 평안과 안심을 심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예수님이지 죄사함을 깨달는 것이 아니다. 
박옥수는 구원받는데 어떤 의지나 결단도 요구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p.15). 
(총신대 김정우 교수의 지적처럼, 성경은 깨달음을 의지적인 결단이나 순종과 분리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거스르고 있음이다.)
유병언과 이요한, 박옥수의 구원관에 빠져있는 것은 의지적인 회개와 결단으로서의 믿음(신뢰)이다. 구원파는 수동적으로 죄사함을 깨닫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것이지만 구원과 용서는 조건적인 것이다. 회개하고 믿는 죄인들만 용서함을 받는다.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하는 회개가 전파되었다(눅 24:47; 행 17:30; 20: 21). 구원에는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필수조건이다(행 20:21). 
회개(metanoia)란 무엇인가?: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이켜 그를 섬기기로 작정하는 것이다. 자신과 하나님과 죄에 대하여 생각을 바꾸고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구원파의 구원에는 깨달음 즉, 이해와 지적 동의만이 있을 뿐이다. 성경의 가르침과 비슷하지만 다르다. 사이비기독교이다.
다시 회개에 대해 찬찬히 돌아 보자.
((회개의 중요성 : 회개는 생각과 느낌과 의지의 변화를 의미한다. 죄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회개에는 ⑴하나님의 거룩함과 자신의 죄와 죄책을 인식하는 이지적인 측면과 ⑵ 죄를 슬퍼하는 정서적인 측면과 ⑶죄에서 돌이켜 용서를 구하는, 그리고 목적과 동기를 바꾸는 의지적인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신약성경은 회개하라(마 3:2)는 명령으로 시작하여 회개하라(계 3:19)는 명령으로 끝난다. 회개(metanoeo)는 신약의 가장 보편적 개념이다. 
그것은 심지어 부활보다 더 자주 언급되고 있다. 이것은 부활에 대한 믿음이 기독교 복음의 설교를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특기할 만 하다. 
회개는 기독교설교에 하나의 목적을 부여하였다(William Chamberlain, The Meaning of Repentance, Westminster, 1943).
회개를 설교하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의 목적이었다(눅 24:46-47: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전파될 것). 
바울의 사역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행 26:17-18; 행 17:30-31; 롬 2:4; 계 3:19 (벧후 3:9)에서는 계속해서 회개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베드로는 회개하여 각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으라(행 2:38)고 설교하고 있다. 바울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고후 7:10).
회개와 믿음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둘은 중생에 따라 일어나는 것으로 회심의 두 가지 양상이라 할 수 있다. 
구원받게 하는 믿음은 회개로 침식되어 있고, 회개는 믿음으로 가득차 있다(John Murray). 죄인이 회개하여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회개하게 해야 회개는 가능한 것이다(행 20:21).))
구원파는 단회적 회개(히 6:1)와 성화를 위한 반복적 회개(마 6:12; 요일 1:8-9)를 구별하지 못하며, 죄에 대한 참된 통회와 회개는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모르는 자들이다. 
그래서 권신찬은 ꡒ회개는 죄인이 하나님께로 인도되는 것ꡓ이라며, "죄사함이 회개에 앞선다"고 해괴한 주장을 하고 있다(중동문화사, [임박한 대환란], p.145).
((회개는 생활설계(life design)를 바꾸는 것이다: 전체 생활패턴이 바뀌고, 삶의 목표가 바뀌고, 열망이 달라지는 것이다(Chamberlain).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강권하는 것은 설교자의 엄숙한 의무이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주권적으로 회개의 선물을 선사해 그에게 돌아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시다(Hoekema).
마틴 루터의 95개조문의 첫 조문을 다음과 같다. "우리의 주요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신자의 삶 전체가 회개이기를 의도하셨다." 
믿음의 중요성 : 믿음의 명사형pistis과 동사형 pisteuein은 신약에 약 240번 나온다. 믿음은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롬 10:9).
믿음은 어떤 진리에 대한 확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모든 것의 창조자가 되시며,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구원하시는 분이며, 그리스도는 우리의 메시야가 되신다고 믿을 수 있다(행 11:24; 롬 3:28; 엡 2:8). 믿음이란 단어는 동사로서 pisteuein,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 그를 의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배울 수 있다. ⑴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의 증언을 수용하는 것과 ⑵구원을 위해서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신뢰하는 것을 의미했다.))
영지주의는 단순한 믿음보다 지식을 우월하게 생각하였다. 
((믿음은 바라고 소망하는 것의 보증이다(Faith is the title-deed of the things hoped for: 히 11:1). 신약에서 믿음은 여러 가지 다른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스도께 오는 것(요 6:37); 그리스도를 먹는 것(요 6:51); 그리스도를 마시는 것(요 4:14);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요 15:5). 믿음은 우리 자신 대신에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분을 신뢰하고 그 안에 쉬는 것이다.
구원하는 믿음에는 지식(knowledge)과 동의(assent)와 신뢰(trust)가 포함되어야 한다. 무엇을 얼마나 알아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가 구속을 필요로 하는 죄인이며,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죄와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속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음으로 우리는 성경이 죄와 그리스도, 구원 그리고 우리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진리로 동의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구속을 신뢰하고 나를 떠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다. 믿음은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엄격하게 말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이시다.))
구원파에서는 믿음을 하나님께 매달리는 상태로 보기 보다는 확신하는 마음의 신념으로 본다. 그리고 믿음을 존재론적으로 설명한다. 
인격적 신뢰하기 보다는 어떤 진리를 깨닫는 상태로 오인하고 있는 것이다(권호덕, [박옥수 목사의 ꡐ죄사함ꡑ이해에 대한 비판], 2004, p.17).
((구원의 확신 : 요한일서 5:13; 로마서 8:16을 보면,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누가복음 17:5; 마가복음 9:24과 같은 말씀을 통해 우리가 확신에서 흔들릴 수도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믿음이 적은 자여"(눅 12:28; 마 8:26; 14:31)은 우리가 잠시 의심할 수도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믿음의 강함에 좌우되지 않는다. 구원의 근거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사역에 있는 것이다 (Gresham Machen).))
(3) 박옥수의 구원파는 구원받은 언제, 어디서 구원을 받았는지 시간과 장소를 묻는다. 
성경은 바울이나 삭개오, 간수장과 같이 즉각적인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반면에 디모데, 빌리 그래함 목사 사모님, 옥한흠 목사와 같이 회심(回心)한 년월일시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점진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온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박옥수는 점진적 회심을 인정하지 않는다. 어떻게 구원받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누리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회심에는 또한 점진적(gradual)인 회심과 급진적(sudden)이고 위기적(crisis)인 회심이 있다. 
바울이나 빌립보 간수는 극적 회심을 경험하였으나(행 9:1-19; 22:3-14; 26:9-18; 행 16:25-34)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점진적인 회심을 경험한다(딤후 1:5; 3:15). 우리는 같은 주님을 믿지만, 다양한 모습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예수께서 사람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불렀음을 인정할 수 있다. 우리가 섬길 주님은 오직 한분이나 우리는 다양한 회심의 경험을 통하여 그에게 나아오게 된다".(Samuel Southard).
어떻게 구원받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로 불리우는 로이드 죤스(Lloyd-Jones)목사님은 구원받은 날자와 장소를 고집하는 이들의 주장에 이렇게 논박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왔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신이 그 나라에 들어와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당신의 신성한 출생, 곧 거듭남이 극적이고 흥분된 것이었느냐, 아니면 조용히 거의 알아 차리지 못할 성질의 것이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성경 어느 곳에서도 당신이 정확한 순간을 대고 사용된 성구를 정확하게 인용하고, 설교자의 성명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은 발견하지 못한다. 이런 것들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 단 한 가지는 당신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있어야 한다는 바로 그것이다."
빌리 그래함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그리스도께 회심했다는 것을 그들의 신앙과 생활로 증거하고 있는 크리스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이 구원받은 정확한 시간을 잘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법칙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예외라고 생각된다. 그들이 그 정확한 시간을 기억하든 못하든 그들에게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너 뛴 순간이 있었다. 우리는 언제 밤이 변해 낮이 되는지 정확한 시간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낮이 되면 낮이 되었다는 것을 알지 않는가?"(빌리 그래함, 불타는 세계, 225).
또한 구원파가 주장하는 바는,  언제 구원을 받았는지 그 날짜와 시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회개하는 신앙 생활을 하면 구원받지 못한 것으로 단정해 버리는 것은 참으로 비성경적인 행위이다.
저들은 "어떻게 육신의 생일을 알면서 참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영적 생일은 모르느냐."고 묻는다. 의미가 있는 것같이 보이지만 그 말에 속에도 허점이 있다. 
육적 생일과 영적 생일은 유사성 내지는 유비성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다른 것이다.
예를 들자면 육적 생일을 알 듯이 영적 생일을 알아야 한다면, 영적 생일도 자기 스스로 알 수 없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적으로 태어난 사람 스스로 자기 생일을 감지하거나 아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박옥수 씨에게 "너는 네 생일을 스스로 알았느냐 네 부모가 가르쳐 주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박씨가 자기 생일을 스스로 알았다면 몰라도 그러지 않았다면 그런 질문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 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구원파에 속한 자가 어떤 집사님에게 구원받은 날짜를 모르는 것을 보니 구원받지 못한 것이 아니냐고 다그치니까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한다. 
"나는 언제부터 구원받았는지는 모르나 분명히 구원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 내 속에 성령님이 계시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내가 언제부터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내가 자전거를 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언제부터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는지 모른다고 나보고 자전거를 못 탄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내가 언제 구원받았는지는 모르나 분명히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 얼마나 통쾌한 대답인가?
박옥수씨는 구원을 확증하는 목적과 방법이 잘못되었다. 성경은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했다고 말하고 있다(롬 9:16). 또한 구원은 스스로 확증하라고 요구하고도 있다(고후 13:5). 
종합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셨을 때 구원을 확증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주권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인간의 확신은 결코 절대적일 수 없다. 
더욱이 자신들의 집단에 속한 자들만이 구원받은 것처럼 생각하여 구원을 확증하거나, 자신들의 구원 확증 방법만이 구원을 좌우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하는 것은 비성경적이요, 사탄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박옥수 구원파들은 구원받은 자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방법으로 구원이 확인되지 않는 자는 구원받지 못한 자로 정죄해 버린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주권 앞에서 겸손하지 못한 것은 마치 구원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기보다 자기들이 준 것처럼 하는 것이요, 자기들에 의해 좌우되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박씨의 책에 보면 자기 교회에 와서 구원받았다는 말이 많은 것은 정통교회 교인에 대한 미혹자로 활동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박옥수는 마치 하나님이 구원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 집단이 구원을 나누어주는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 
따라서 구원파에서 죄사함을 깨달았다고 하면 그들은 교만한 자세를 취한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 은혜 앞에 겸손하고 온유해진다. 이것이 참된 구원과 거짓된 구원의 차이인 것이다.
이전글 : 요일5.아이테오_에로타오
다음글 : 요일3..하나님의 자녀의 마땅한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