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역개정]요일5장 [개인의 필요 =아이테오 종재간구기도= 에로타오...
[92.위에계신 나의친구] [317.내주예수주신은혜] [542.구주예수 의지함이][309.목마른내영혼 주가 이미허락한] [내 진정 사모하는] [찬양하라내영혼아] [주님과 같이]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 [주께 가까이 날 이끄소서]
===세상을 이기는 믿음(내주하시는 기릅부음따라, 생명 교통 안에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형제자매 사랑하기 : 고전13장.암송-묵상해 보라!!
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JC)를 사랑하느니라
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자녀들-형제자매들-을)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 사랑 베푸시는 Q께 [바로 그 사랑으로 (열어 보여주사 이해-체험하고 깨닫는 그대로 기름부음의 이끄심따라 반응함으로써) 사랑하기...Q 말씀의 진의 그대로 <육을 처리함 통해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십자가를 지며>그리스도의 평강의 무궁함 안에서 참되게 순종함으로 형제 사랑하며 섬기기.
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참되게 JC께 배운다면, 내주하시는 성령께 집중-몰입-교통-동행한다면]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일상생활 중에 그 어떤 괴로움, 갈등을 느낀다면, <자신의 영혼 상태에 대해>주께 여쭈라 : 대개 <말씀과 계명 안에 거함>에서 떠났기 때문인 경우가 많기에..분별케 하심 그대로 따라 순종하면 회복될 것....(마11:238,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주님과 교통 안에 머무름 통해 :: 기도로 말씀 읽으며, 감동된 영을 사용하면서 영의 감동 안에 머물러, 신성한 생명의 영 따라, 영 안에서 행함으로써] 세상을 [저절로, 자연스레]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유기적 연합mingling을 발동케 하는 스위치인, 살아 생동하는] 믿음(faith)이니라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포도나무 본체 줄기이신 그분의 뻗어나옴인 가지로서 그분께 붙어 있어서 의지-신뢰-교통하며 그 생명의 진액을 공급받아 사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믿는이마다 TUQ의 체현이신 아들, 내주하사 비추시며 모든 힘과 능력 근원이신 그 영과의 유기적 연합,mingling안으로 인도하사 그분의 신성한 생명으로 살게 하심으로 이김 이루심
6. 이는 [세례, 옛창조 끝냄의]물과 [십자가 죽음, 죄에서 구속하는]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진짜 사람, 곧 십자가 대속의 희생제물로..요19:34]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덮음의 기름부음과 강림, 포도나무 본체줄기에서 자라난 가지의, 새 순 싹 틈 같이 역사하시는]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7.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 하늘영역에서 증거하시는 세 분, 아버지-말씀-성령, 이분들은 하나이신 한 분 하나님이시며(KJV), <동시에>땅에서는 믿는이 안에 내주하시는 주 영, HS이심
8.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그리스도께서 변형되심 통해 우리의 영에 들어오시는 과정인 바, 그 결과는 새 창조함 받은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이시니]합하여 하나이니라 :::이리하여, 그들은 Q께로부터 태어나서 Q의 자녀가 되어 그분의 표현을 위해 진리와 Q의 뜻과 Q의 의와 사랑을 자연스레 실행함으로 생활 영위함
9.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친히]증언하신 것이니라
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신 그 영, 주 영의 내주하여 영원히 계심따라, 받은 바 참된, 개인적-주관적]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 이 신성한 생명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자본]이요 모든 부요함과 능력이다...영을 따라 행하는 이들마다 바로 그 실제를 경험하여 누림!!
===영생을 알게 하려 함이라
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영원 생명의 교통 안에서 Q을 접촉함으로써 공급받고 새로워지는 바, 거리낌 없는 양심의]담대함이 이것이니 [우리의 육적 갈망-기호-방법을 따라 구함이 아니라,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가르쳐 깨닫게 하시는 바]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 이것은 영원 생명, 곧 영생의 구원 능력 실행임
15. 우리가 [그의 뜻대로]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아이테오...주께 형제의 죄사함 위해 간구/중보함)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간구기도한]그에게 [형제에게 분배 공급할 바 Q의] 생명을 주시리라 [형제를 위하여 간구하는 자에게 친히 주께서 일깨워 주실 바, <주님의 판단은 항상 최상인 바>통치상의 경륜적 다루심으로서 육신의]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에로타오....친밀한 맏형님, 그리스도께 아뢰어 부탁함) 하지 않노라 :::[약5:14-16]*14.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장로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발씻김 + 기름바름의 중보...JC의 발씻김에는 <심지어 포도주에 적신 떡:성찬에까지> 가룟유다도 참여했음!!..그러나 배반했다] *15.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16.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분명히]있도다 :: 먼저, <그대 자신을 주 임재 앞에 두고 기억나는 죄들마다 진실로 자백함으로써 보혈로 씻김 받아 자유로운 평강의 느낌안에서 이제 형제를 위한 중보로 들어가라.....범죄한 그 형제의 죄사함을 위한 간구로 나아가라...그 다음 그가 병들었다면 그의 치료를 위해 간구해 보라...여전히 평강이 있는가? 아니면 <그대 안의 성령이> 기도를 금하시는 느낌이 드는가?..아마 이것으로 분별이 가능하리라...형제들을 위한 간구, 측복 기도나 친밀한 중재/중보의 전제 조건과 준비, 기초는 내주하시는 기름부음 안에 머무는 Q의 의와 사랑의 교통 실행에 있으니.
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함부로-고의적/습관적으로]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Q자녀인 그의 영 안에 하나되어 내주-교통-감화감동충만하심과 그를 감싸 주심 통해] 그를 지키시매[지키며 보호하심, 비추심따라 그 자녀의 혼 영역조차도 그의 영 안에 견고히 거하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아니하느니라...악한 그 어떤 시도도 헛된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 **[[요일5:18]] *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그리스도, 그리고 JC와 하나된 믿는이가(영혼이)> 자신을 지키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않느니라<믿는이가(그의 혼의 생각-정신-감정-의지가) 영원 생명 교통의 기름부음 안에 머무름, 곧 그의 영 안에 거하는 한, 그것은 시간 낭비이기에!!> //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18. We know [with confidence] that anyone born of God does not habitually sin; but He (Jesus) who was born of God [carefully] keeps and protects him, and the evil one does not touch him.(우리가 확신하며 아는 바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누구나, 습관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 하나님으로부터 난 분, 예수께서[또한 예수님과 하나된 거듭난 우리의 영이] 주의깊게 깨어 친히 지키며 보호하고 계시기에 악한(포네로스,evil :: 유독하고 해로운 악이자, 타인을 악하고 사악하게 되도록 영향 주는 악....참조>카코스(kakos)::무가치한/썩은, 사프로스(sapros)::본래 미덕이 변질된) 자가 그를 만지지도(만지다, touch ::해를 끼치고 악한 목적 이루기 위해 움켜 쥐거나 붙잡다)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는 이가 고의적-습관적으로 죄 범함은, 신성한 생명의 교통을 방해할 뿐 아니라(1:6-10) <영 안에 머무르지 않고 육 안에 있어 자신을 대적에게 (만지고 삼키도록)노출시킴이다!!> 심지어 육체적인 죽음을 가져 올 수 있기에(5:16-17), 그가 이미 들어서 있고 체험-소유하며 누리고 있는, JC믿음으로써 얻고 거하는 바 신성한 출생과 영원 생명의 교통과 기름부음, 그로 인해 승리하는 생활을 가능케 하신, 내주하시는 그리스도, 그분의 죄를 예방하는 지킴과 보호의 영원 생명 능력, 그 안에 믿음으로 하나된, 씻김 받은 영은 습관적-고의적으로 죄 범함을 허락하지 않고, 일깨워 경고하시며, 더 나아가 늘 깨어 기도함 통해 항기쉬기범감의 평강 안에 머물도록, 회개를 촉구하신다....
....그대가 내주하시는 기름부음따라 영원생명의 풍성 체험-누림 충만 안에 있을 때, 주 보시기에 그것이 필요한 경우라면, 깨달음의 감동을 주사 <함께 하는 기도나 함께 하는 교통 통해> 다른이에게 이 생명을 분배할 수 있도록 하시리라....특별히 많은 말 하지 않더라도 다만 방문함 통해 그를 접촉함으로써 그대 안의 충만한 기름부음, 곧 영원 생명을 흘려 보내 전달할 수 있을 것인 바....다만 오직 그대는 시종일관 주님 바라기, 그분 임재의 평강 안에 기도하며 머무르라....생명 충만과 자연스러움을 잃지말라... 우선순위는 그 무엇보다 주께서 하실 바, 그 형제를, 그 형제의 발 씻김인 것을 기억하라.....그외에 그가 치료될 수 있을지, 혹은 그 어떤 죄가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인지 여부를 알고 싶은 호기심 발동은 제어하라.....그 발씻김 결과와 나머지는 주께 맡겨드리고 그 자리를 떠나되, <이제 홀로 있을 때에 그에 대해 합당한 기도 드릴 수 있기를> 그분의 인도따라 구하라..
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로 부터 함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여전히 마귀에게 사로 잡혀, 강탈과 통제, 조종 아래]처한 것이며 :: 세상은 세상 조직(2:15)과 타락한 인류(세상 사람)으로 구성됨
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성육신하신 JC께서 믿는이로 하여금 Q을 생명과 은혜와 진리<실제>로 얻고 누림-체험 통해-Q의 사랑과 빛에 참여케 하시려 오셨음] 우리에게 지각[거듭난 영 안에서 신성한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 진리(실제)의 영(요16:12-15)에 의해 비춤 받고 능력 받은 우리의 생각 기능]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JC]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 Q생명으로 거듭난 믿는 이의 영, 그 영 안에 내주하시는 기름부음, 진리<신성한 빛의 실제>의 성령의 비춤과 계시하며 보여주심 통해 열어주신 깨달음에 의해, 영적 지혜와 총명-이해력 충만한, 밝아지고 새롭게 된 생각의 기능을 통해, 거듭 난 영 안에서(엡1:17) 참 Q을 알게<체험-누림-소유함> 하심..
21.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세상 정욕과 탐심]우상에게서 멀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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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새번역]요일5장
===세상을 이기는 믿음
1.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낳아 주신 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 그에게서 태어난 이도 사랑합니다.
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면, 이것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압니다.
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4.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다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5.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아들에 관해서 증언함
6. ○이분은 오셔서 물과 피를 거치신 분인데,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를 거쳐서 오셨습니다. 성령은 증언하시는 분입니다. 성령은 곧 진리입니다.
7. 증언하는 이가 셋인데,
8. 곧 성령과 물과 피입니다. 이 셋은 일치합니다.
9. 우리가 사람의 증언을 받아들인다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증언은 더욱더 큰 것입니다. 하나님의 증언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두고 증언하여 주셨다는 그 사실입니다.
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그 증언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두고 증언하신 그 증언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1. 그 증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것과, 그 생명이 그 아들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12. 그 아들을 모신 사람은 생명을 가진 사람이고, 하나님의 아들을 모시지 않은 사람은 생명을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아는 지혜
13. ○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여러분에게 이 글을 씁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14.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지는 확신은 이것이니, 곧 무엇이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15.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면, 하나님께 구한 것을 우리가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
16. ○누구든지, 자기의 형제나 자매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가 아니면,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죽을 죄를 짓지 않은 그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죽을 죄가 있습니다. 이 죄를 두고 간구하라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17. 불의한 것은 모두 죄입니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지 않는 죄도 있습니다.
18.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신 분이 그 사람을 지켜 주시므로, 악마가 그를 해하지 못합니다.
19.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런데 온 세상은 악마의 세력 아래 놓여 있습니다.
20.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그 참되신 분을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이해력을 주신 것을 압니다. 우리는, 그 참되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분이 참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21. ○어린 자녀 여러분, 여러분은 우상을 멀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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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ohn 5 Amplified Bible
===Overcoming the World
1 Everyone who believes [with a deep, abiding trust in the fact] that Jesus is the Christ (the Messiah, the Anointed) is born of God [that is, reborn from above—spiritually transformed, renewed, and set apart for His purpose], and everyone who loves the Father also loves [a]the child born of Him.
2 By this we know [without any doubt] that we love the children of God: [expressing that love] when we love God and obey His commandments.
3 For the [true] love of God is this: that we habitually keep His commandments and remain focused on His precepts. And His commandments and His precepts are not difficult [to obey].
4 For [b]everyone born of God is victorious and overcomes the world; and this is the victory that has conquered and overcome the world—our [continuing, persistent] faith [in Jesus the Son of God].
5 Who is the one who is victorious and overcomes the world? It is the one who believes and recognizes the fact that Jesus is the Son of God.
6 This is He who came through water and blood [His baptism and death], Jesus Christ—not by the water only, but by the water and the blood. It is the [Holy] Spirit who testifies, because the Spirit is the truth. [He is the essence and origin of truth itself.]
7 For there are three witnesses: (([KJV : *7.For there are three that bear record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Ghost: and these three are one.:하늘에서 증거하시는 아버지-말씀-성령 -이분들은 하나이심]))
8 the Spirit and the water and the blood; and these three are in agreement [their testimony is perfectly consistent].
9 If we accept [as we do] the testimony of men [that is, if we are willing to take the sworn statements of fallible humans as evidence], the testimony of God is greater [far more authoritative]; for this is the testimony of God, that He has testified regarding His Son.
10 The one who believes in the Son of God [who adheres to, trusts in, and relies confidently on Him as Savior] has the testimony within himself [because he can speak authoritatively about Christ from his own personal experience]. The one who does not believe God [in this way] has made Him [out to be] a liar, because he has not believed in the evidence that God has given regarding His Son.
11 And the testimony is this: God has given us eternal life [we already possess it], and this life is in His Son [resulting in our spiritual completeness, and eternal companionship with Him].
12 He who has the Son [by accepting Him as Lord and Savior] has the life [that is eternal]; he who does not have the Son of God [by personal faith] does not have the life.
===This Is Written That You May Know
13 These things I have written to you who believe in the name of the Son of God [which represents all that Jesus Christ is and does], so that you will know [with settled and absolute knowledge] that you [already] have eternal life.
14 This is the [remarkable degree of] confidence which we [as believers are entitled to] have before Him: that [c]if we ask anything according to His will, [that is, consistent with His plan and purpose] He hears us.
15 And if we know [for a fact, as indeed we do] that He hears and listens to us in whatever we ask, we [also] know [with settled and absolute knowledge] that we have [granted to us] the requests which we have asked from Him.
16 If anyone sees his brother committing a sin that does not lead to death, he will pray and ask [on the believer’s behalf] and God will for him give life to those whose sin is not leading to death. There is a sin that leads to death; I do not say that one should pray for this [kind of sin].
17 All wrongdoing is sin, and there is sin that does not lead to death [one can repent of it and be forgiven].
18 We know [with confidence] that anyone born of God does not habitually sin; but He (Jesus) who was born of God [carefully] keeps and protects him, and the evil one does not touch him.
19 We know [for a fact] that we are of God, and the whole world [around us] lies in the power of the evil one [opposing God and His precepts].
20 And we [have seen and] know [by personal experience] that the Son of God has [actually] come [to this world], and has given us understanding and insight so that we may [progressively and personally] know Him who is true; and we are in Him who is true—in His Son Jesus Christ. This is the true God and eternal life.
21 Little children (believers, dear ones), guard yourselves from idols—[false teachings, moral compromises, and anything that would take God’s place in your heart].
===Footnotes
1 John 5:1 This could refer either to other born-again believers or to Jesus.
1 John 5:4 Lit everything that is. John uses the Greek neuter to underscore the fact that everyone who has been born again, regardless of gender or age, is victorious over the world.
1 John 5:14 Confident, abiding faith combined with God’s power can produce amazing results, if the request is in harmony with God’s will. God is fully capable of doing that which man regards as impossible (Mark 14:36; James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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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5장 (개요)
사도 요한은 아래의 몇 가지 점을 강조하고 있다.
Ⅰ. 신자의 위엄(1).
Ⅱ. 사랑에 대한 신자의 의무와 그 측정(1-3).
Ⅲ. 신자의 승리(4,5)
Ⅳ. 신자의 믿음에 대한 확실성과 확증(6-10).
Ⅴ. 영생에 대한 믿음의 진보(11-13).
Ⅵ.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한 자들을 예외로 한 기도의 응답(14-17).
Ⅶ. 죄와 사탄으로부터의 보존(18).
Ⅷ. 세상으로부터의 성별(19).
Ⅸ.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과(20) 우상을 멀리 함(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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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믿음(요일 5:1-5)
Ⅰ. 우리가 앞 장 결론 부분에서 주장한 바를 보았다
사도 요한은 두 가지 관점 즉 첫째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과 둘째로 하나님의 계명과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언급한 다음, 셋째로 아래와 같이 부언하고 있다. 즉, 이러한 사랑은 하나님과 인간의 뚜렷한 관계에 의하여 이룩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의 믿는 형제와 동료들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1절)라고 하였다.
1. 믿는 형제는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묘사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 .
다시 말해서 그가 메시야 되심과 그의 본성과 사명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 모든 세상의 기름 부음 받은 자들 중의 머리되심과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름 부음을 받은 모든 제사장들과 선지자들 및 왕들의 머리가 되심을 믿는 자들이다.
또한 그들은 영원한 구원의 역사를 위해 온전한 준비와 성장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보호와 지도에 자신을 맡기는 자들이다.
2. 또한 그는 새로운 혈통으로 말미암아 권위 있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다"(1절).
이에 대한 믿음의 본질과 이에 따라 이룩되는 새로운 성품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생기가 넘치게 된다.
하나님의 양자 됨은 육신의 혈통에 의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나 하나님의 옛 이스라엘 백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믿는 자들은 비록 본래 이방의 죄인들일지라도 영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혈통을 이어받은 자들이요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이다.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1절).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의 아들을 사랑해야 하며, 아버지의 형상을 이어받은 그들에게 있어서 또한 아버지의 사랑을 닮게 되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보여진다.
먼저 "독생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기본적으로 사랑해야 하고 그 다음으로 "은혜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진 자들"을 사랑해야 한다.
Ⅱ. 사도 요한은 아래와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1. 중생한 자들에게(born-again christian) 베푸는 우리들의 사랑의 진실성, 혹은 참된 복음적인 성격을 알 수 있는 방법을 말해 준다.
진실성의 근거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2절).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은 단순히 세속적인 조건, 즉 그들이 부하다든가 학식이 많고 우리에게 친절하며, 우리 교파에 속한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요, 그들 안에 하나님의 생동하는 은혜가 임하며 그의 형상과 모습이 그들에게 나타나고 또한 하나님이 그들 안에서 사랑을 받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로써 형제들에 대한 사랑이 어떠한 것임이 본서에 나타나고 있다. 즉 형제들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와 주 예수의 택함을 받은 자로서의 사랑이다.
2. 다음으로 하나님의 대한 우리 사랑의 진실성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의 경건한 복종에서 나타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2절) 하나님께 대한 우리들의 사랑의 진실성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하나님을 진실되게 그리고 복음적인 입장에서 사랑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은 한 영혼으로 하여금 기쁨을 누리게 한다. "그러므로 그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니다"(3절). 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것이니" 이로써 그의 계명이 쉽고 기쁜 것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고, 지키기로 결심하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오! 내가 주의 율례를 사랑하나이다.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사랑과 성령으로 내 믿음을 넓히시오면) 내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리이다"(시 119:32).
3. 거듭남-중생/갱신/재생/재건(regeneration = born again)의 결과와 효험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이 세상을 지혜롭게 영적으로 정복하는 것이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4절).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하나님을 위하며 결과적으로 다른 하나의 세계를 위해 태어난 자이다. 또한 보다 높고 나은 세계를 향한 성품과 성향을 지닌 자이다. 그는 ["아들을 사랑하신 아버지의 사랑, 바로 그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는] 무기를 공급받음으로 이로써 세상을 물리치고 정복할 수 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4절). 믿음은 승리의 근본이요 세상을 이기는 수단과 도구며 영적인 갑옷이요 크나큰 무기가 된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1) 믿음 안에서 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세상의 유혹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수 있다.
(2) 믿음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안에서 또한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역사하며,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물러나 회피하도록 한다.
(3) 믿음은 우리의 마음을 성결케 하며 세상이 우리를 뒤엎고 정복하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킨다.
(4) 믿음은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이 세상의 불평과 아첨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이끌어낸다.
(5) 믿음은 복음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거하는 자마다 더 크고 은혜로우신 성령 안에 거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된다.
(6) 믿음은 이 세상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수 있다.
Ⅲ.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의 참된 정복자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단정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세상은 하늘나라로 가는 노정을 가로막고 있으므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데 우리에게 큰 방해가 되고 있다.
그러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자는 이로써 예수가 세상의 구세주가 되기 위하여, 또한 우리를 이 세상으로부터 하늘나라로, 그리고 그곳에서 기쁨이 충만하신 하나님께로 우리를 이끌기 위하여 오셨음을 믿는다. 이렇게 믿는 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이겨야만 한다.
1. 그 이유는 이 세상이란 그의 영혼과 경건함과 구원 그리고 축복에 대한 맹렬한 대적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는 세상에 있는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6).
2.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는 이 악한 세상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해 내는 일이 구세주의 사명 중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갈 1:4)라고 바울은 말하였다.
3. 그는 지상에서 주 예수의 생애와 교훈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부인되고 정복되어야 할 것을 알고 있다.
4. 그는 주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들을 위해서 이 세상을 정복하셨음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제자들도 주 예수의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신 주님의 승리의 기쁨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5. 그는 세상에 대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르침과 지도를 받는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4).
6.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산 소망으로 거듭나게 되었다(벧전 1:3).
7. 그는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시어서 그곳에서 그의 신실한 성도들을 위하여 장소를 예비하고 계심을 믿는다(요 14:2).
8. 그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며 세상을 심판하시고 믿는 자들은 그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하실 것임을 알고 있다(요 14:3).
9. 그는 이 세상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 이 세상을 넘어서 저 하늘나라를 향해 가는 영과 성향에 사로 잡혀 있다.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고후 5:2)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그의 개종자들마다 절대적인 지배권을 부여한다.
기독교의 계시는 세상을 정복하며 가장 순수하고 평화로우며 복되고 영원한 세상을 얻는데 가장 큰 수단이 된다.
이러한 계시를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과 반역적인 이 세상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전쟁과 다툼이 어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이 세상의 길이나 기질과 본질과는 정반대의 거룩한 원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영이 전달되어지고 두루 퍼지는데 있어서 세상의 영의 능력을 능가하며 또한 이에 거스린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이 세상은 그의 나라가 아니었으며 또한 지금도 아니다. 그의 나라는 이 세상과 구분되어 있으며 천국과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구원받은 무리들을 위해 준비하신 것은 이 세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구원받을 모든 무리들이 그와 함께 항상 거할 수 있도록 또한 만일 이생뿐이라면 그들은 종국에 가서 가장 비참한 자들이 될 수밖에 없음을 믿도록 하기 위해 그가 하늘로 올라가심 같이 그들의 처소를 하늘나라에 예비하기 위해 승천하심을 그들에게 확신시키셨다.
그들이 바라고 추구하는 영원한 축복의 세계는 가장 명확히 드러났다. 또한 이 세상의 공격과 시험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무기를 소유하게 된다.
우리는 세상이 자신의 화살로 자신을 죽이며 자신의 무기로 자신을 겨냥하게 될 것이며, 세상의 반대와 대적과 핍박은 우리들이 세상을 정복하며 무리로 하여금 보다 높은 영원한 세계에 이르도록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우리들은 각계 각층의 천군 천사들의 도움을 힘입어 이 세상을 이기며 면류관을 얻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을 정복하고 놀라운 승리의 기쁨을 맞이하는 영웅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이후에 이를 내세가 없으므로 슬퍼하는 일이 없다. 그는 다만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바라보며 또한 예민한 영적인 감각으로 열심히 하늘나라를 사모하며 나간다. 온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외에 누가 이렇게 세상을 이겨 나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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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의 증거(요일 5:6-9)
신자의 믿음은 이와 같이 강하고 승리적인 것이므로 그 믿음은 튼튼한 기초에서야 하며, 주 예수의 거룩한 사명과 권위 그리고 직무에 대한 뚜렷한 확신으로 말미암아 고조되어야 한다. 즉 예수는 그가 올 때에 신임장을 가지고 오셨으며, 그 신임장은 그를 증거하는 것이었다.
Ⅰ. 그는 이 세상에 오실 때 은밀하게 오신 것이 아니라, 구세주로서 당당하게 뚜렷한 증거를 가지고 오셨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이다."
그는 우리들의 죄를 사해 주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며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오셨다. 그는 이 사명을 보다 확실히 수행하기 위해 "물과 피로서" 임하셨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다.
어느 누구도 이렇게 임한 자가 없으니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렇게 임하셨다. 다시 말하거니와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서 임하셨다"(6절). 이 세상을 위한 가장 참된 구세주의 증거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물과 피로 임하셨다." 그가 우리를 고치며 구원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물과 피로 임하신 것이다. 그가 이와 같이 구원의 사명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셔야만 했던 사실은 아래와 같은 사실들로 나타난다.
1. 우리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모두 부패된 상태에 있다.
(1) 우리는 우리의 본성 안에 잠재하고 있는 죄의 힘과 타락으로 말미암아 더럽혀져 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내적인 불결로부터 정결함을 얻기 위한 신령한 물이 필요하다. 즉 이 신령한 물이 피의 영혼과 힘에 이르게 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선 그에 의하여 중생에 이르게 하는 씻김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의 역사가 있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실 때 이를 거부하는 베드로에게 "너희 발을 씻겨 줌이 없이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심으로 이러한 사실을 주님이 넌지시 암시해 주셨다.
(2) 우리들은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죄의 행위와 힘으로 말미암아 외적으로 더러워져 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분리되었으며 그의 귀하고 은혜스러우며, 아름다운 면전으로부터 영원히 쫓김을 당했다. 따라서 우리들은 속죄의 피로 깨끗함을 받아야 한다.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도 없다"(히 9:22)는 것이 하늘나라 법정의 법이요 판결문이다. 그러므로 구세주는 죄로부터 인간을 구하기 위해 피를 가지고 임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
2. 정결케 하는 두 가지의 방법은 옛날 의식에서 나타났다.
사람과 물건은 물과 피로써 정결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임이니라"(히 9:10)한 말씀이 있다.
또한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3) 하신 말씀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히 9:22) 하는 모든 말씀은 우리에게 이중적인 불결함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에게는 두 가지 정결케 하시는 역사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3.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때 군사들의 창에 찔려 그의 옆구리에서는 즉시 물과 피가 흘렀다.
사랑하는 사도는 이 장면을 보고 많은 충격을 받은 것 같다. 그만이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 사실에 어떤 신비한 요소가 있는 것으로 기록해야 할 책임과 사명이 있음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도 믿게 하려 함이니라"(요 19:34, 35)고 말하고 있다.
이 물과 피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가장 필수적이며 효과적임을 알 수 있다. 물로써 우리의 영혼이 빛 가운데서 천국과 성도의 신분에 합당하도록 씻기어지고 정결함을 받게 된다.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며 그의 율법은 존귀하게 되며 그의 용서하시는 탁월성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바울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가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은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5, 26)고 하셨다.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과 화해를 이룸으로 의로운 존재로 나타나게 되었다. 피로 말미암아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하시고 정결케 하시는 성령이 우리의 성품을 깨끗케 하는 내적인 세척을 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 아래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함이라"(14절).
물과 아울러 피는 거룩하신 구속자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물과 피는 우리의 구원에 가장 필요 불가결한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다.
물과 피는 하나님께서 이 위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시는 모든 것을 확고히 하고 온전케 하실 것이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죄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5:25-27).
물과 피로써 임한 그는 온전한 구주이시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방법으로 무엇을 가지고 임하셨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신임장을 아래와 같은 증거로써 확실히 확인할 수 있다.
Ⅱ.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는 자는 하나님의 역사를 온전케 이루시는 성령이시다(6절).
세상의 구주로서의 사명을 지니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역사를 지원할 수 있고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지속적인 능력을 소유할 수 있다는 사실은 당연하다.
거룩한 능력이 그와 그의 복음과 그의 종들에게 함께 하는 일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들이 어떠한 책임과 사명을 가지고 왔으며, 무슨 권위로써 보냄을 받았는지를 세상에 알려 줄 수 있다는 것도 당연하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리스도 자신의 예언에 의하면 "내가 사람들에 의하여 배척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릴지라도 그는(성령) 나를 영화롭게 할 것인데 이는 그가 내 것을 받아 위하시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사명을 그대로 이어받지는 않으실 것이다. 즉 그는 너희를 위하여 죽으시고 또한 다시 살아나시는 일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의 일을 이어받아 나의 일이 계속 이루어지도록 수행할 것이며 나의 임무와 진리 그리고 주장을 취하여 이를 너희와 너희로 말미암아 온 세상에 나타내 보이게 될 것이다"(요 16:14).
여기서 또한 사도는 이 증인(성령)에 대해 만족할 만한 점을 부연하고 있다. 즉 "성령은 진리이다"(6절). 그는 하나님의 영이시오, 거짓말할 수 없는 분이다.
어떤 사본은 "그리스도는 진리니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보여주고 있다. 성령의 증거는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증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가 진리이심을 증거하는 자가 성령이시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기독교는 그 시대의 진리요 하나님의 진리이다. 그러나 한 두 개의 사본이 원본의 의미를 변케 하는 일은 합당치 못하다.
현재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번역이 가장 합당한 것이므로 우리는 이를 고수하고 있다. "성령은 진리니라." 그는 참으로 진리의 영이시다(요 14:17). 그는 진리의 영이시며 모든 뜻을 나타낼 만한 증거자로서 그리스도의 진리와 권위에 대해 하늘로부터 나타난 모든 증인들 중 한 증인이 되신다. "이는 하늘에서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시니 이들 셋은 하나이니라".
성령의 증거가 참된 것임을 7절에서 가장 적절히 표현되고 있다. 만일 성령이 하늘에서만이 아니라 "아버지와 말씀과 함께" 땅의 증인이 되신다면 그는 참되시고 그 자신이 진리이심이 틀림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1. 우리들은 7절에 관한 분분한 논쟁에 접하게 된다.
대부분의 옛 헬라어 사본에는 7절이 누락되어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이 점을 논란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생각은 없다. 어느 사본에 이 구절이 기록되어 있지 아니한가에 대해서는 비평가들도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비평가들이 참고하고 있는 사본의 통일성과 진가를 우리들에게 충분히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오류 투성이의 고전 헬라어 신약 성경과 같이 어떤 사본들은 많은 오류를 포함하고 있을지도 모르므로 이로써 비평가들은 바른 독송(讀誦)을 시도할 수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본 수집가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도록 하라. 거기에는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사본과 그 해석을 뒷받침해 주는 몇 가지 합리적인 추론이 있다.
(1) 만일 우리가 7절을 빼고 8절을 대신 놓게 된다면 6절의 내용 즉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오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라고 한 내용과 "증거하는 이는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하고 하신 말씀과는 너무나 동일한 반복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들이 현재 사용하고 있는 본문만큼 세 가지 증거하는 자들에 대한 서론으로써 합당하지 못한 것이 된다.
(2) 많은 사본들이 "땅 위에"라고 하는 특수한 구절을 기록하고 있다. 즉 "증거하는 이가 땅 위에 셋이니"라고 했다.
이 구절은 다른 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몇몇 증거에 대해서는 현저히 어울리지 않는 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분문에 의혹을 품고 있는 자들에 의하면 7절이 누락되어 있는 대부분의 책 중에는 이 구절이 생략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동일한 이유로 모든 것에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6절을 예로 든다면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말씀과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고 한 구절은 만일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오류가 없이 참되시고 진리 자체가 되시는 분을 우리에게 확신시키고자 할 때 지상에 있는 모든 증거를 우리들에게 말하고자 했음을 상상하는 길이 없이는 이 구절은 "증거하는 이가 땅 위에 셋이니"라는 말씀과는 자연스럽고도 적당하게 연결될 수 없다.
(3) 헬라어 원전에서 7절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을 내릴 수 있다. 어떤 사본은 ‘헨 에이신’-즉 하나이라로 기록하고 있으며, 또 다른 사본은 "한편이라" 혹은 "같으니라"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TR에서 8절의 경우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엔 테 게’-즉 땅에(on earth) 대신 ‘에피 테 게’-즉 땅 위에란 말을 쓰고 있는데 이 말은 단순히 일반적인 라틴어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권위만이 아니라, 우리들로 하여금 신뢰케 하는 바 어떤 헬라의 권위 있는 문서에 의존하고 있는 듯싶다.
(4) 7절은 사도 요한의 서체와 신학에 가장 잘 일치되고 있다.
① 사도 요한은 "아버지"란 칭호를 즐겨 사용하고 있는데 이로써 그는 유일한 하나님을 암시하거나 아들로부터 거룩하신 위(位, porson)를 구본하고 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나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나와 함께 있느니라." "내가 아버지께 기도하리니 그가 너희에게 다른 보혜사를 보내시리라."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요 11:3).
② "말씀"이란 칭호는 이 사도에게는 가장 특이한 것(꼭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을 지라도)으로 알려져 있다.
만일 본서가 다른 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면 세례의 형식이나 교회의 일반적인 용어로 보아 "말씀"보다 "아들"이란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더욱 용이하며 합당했을 것이다.
터툴리안(Tertullian)과 씨프리안(Cyprian)이 구절을 언급할 때에 "아들"이란 용어를 사용했는데, "말씀"이란 말을 피하고 "아들"이란 말을 씀으로 본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씨프리안의 표현은 파컨더스(Facundus)의 인용문에서 명확히 드러나 있는 것 같다. 즉 "칼타고의 감독이요, 순교자인 성·씨프리안은 삼위일체에 대해 기술한 서한문과 다른 저서 가운데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대한 사도 요한의 증거를 언급했다. 사도 요한이 주께서 이르시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고 하셨음을 말하고,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언급한 다음 이 셋은 하나임을 말하고 있다."
이들이 하나라고 하는 말은 다른 곳에는 없고 7절에만 나타나 있다. 기억에 의존하든가 혹은 말보다도 사건을 이름보다도 인물을 중요시하던(일반적인 또는 논쟁적 토론에서) 씨프리안은 제 2위를 "말씀"이란 칭호 대신에 "아들"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씨프리안은 성령과 물과 피는 요한이 하나라고 말한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을 의미했다고 하는 파컨더스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요한의 의견에 만족할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씨프리안은 모두 명칭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사도가 기술한 명칭의 순서도 바꾸어 놓았음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씨프라안이 두 번째로 놓은 피(아들)란 명칭을 사도는 맨 나중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그는 "아들"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로써 사도는 아들 자신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씨프리안은 생각했음을 추론해야 한다. 그 아들은 물로써 설명되어질 수 있으나, "아들"의 옆구리에서 흐른 물로써 사도 요한은 성령의 위(person)를 나타내려 했고, 6절에서는 진리로 나타나 있으며, 복음에서는 진리의 영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바 성령으로서 사도는 "아버지"의 위(person)를 나타내고 있음을 추론해야 한다. 실은 사도 요한은 "아들"과 "성령"이 연관되어질 경우 자신이 이러한 명칭을 사용한 곳이 아무데도 없다. 우리는 칼타고의 교부가 사도를 이렇게 이해할 수 있었던 충분한 증명을 요구하게 된다. 사도를 이렇게 이해하는 그는 역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땅 위에서 세 증거자들이 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셋째, 씨프리안은 세 증거자들이 되고 이 셋은 하나임을 주장하고 있음을 파컨더스는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의 말들은 8절에 속한 것이 아니라 7절에 속해 있는 것이다. 이 말들은 땅 위에 있는 성령과 물과 피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에 대해 언급되어지고 있다.
씨프리안과 동시대의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Debaptismo haere ticorum의 저자가 헬라어 사본과 고전 번역물과 일치하고 있는 요한의 말을 아래와 같이 인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요한이 그의 서신 가운데서 우리 주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이는 물과 피로써 임하였는데, 물로만 아니라 물과 피로써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증거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요, 이 셋은 같다."
만일 모든 헬라어 사본과 고전 번역물이 성령과 물과 피에 관해 언급하고 in unum sunt -즉 그들이 같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면 씨프리안 당시의 사본(copies)에 나타난 다양성 즉 그들은 하나(they are one, unum sunt)라고 쓰여져 있다고 씨프리안이 말한 것은 헬라어 사본이나 고전 번역물에 속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씨프리안의 말은 7절에 대한 확고한 증언이 될 수 있는 것이며, 원문의 고안자가 하늘의 둘째 증거자이신 "말씀"에 대해 사도적인 명칭을 명확히 나타내 보여주고 있는 하나의 암시처럼 보여진다.
③ 이 사도는 구세주의 옆구리에서 흐른 물과 피의 역사를 유일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들에게 구세주의 약속과 구세주를 영화롭게 하며 그를 증거하고 그의 복음서(요 14:16, 17-26; 15:26; 16:7-15)에 나타난 대로 불신적인 세계에서 그의 의로운 자들에게 확신시키고자 성령이 오시리라는 예언을 우리에게 말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성령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자로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는 것은 사도 요한의 복음서나 그가 인용한 용어로 보아 가장 타당한 것이다.
(5) 사본의 가필자가 7절을 고안해서 삽입하기보다는 본문을 베낀 사람이 한눈을 팔거나 혹은 필기를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7절이 그 책장 맨 윗부분에서나 또는 가장 아랫부분에서 말살되거나 훼손되기가 더 쉬운 일이었다.
창피를 모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필경사는 대단히 대담하고도 뻔뻔스러운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고, 거룩한 책에 당돌하게 첨가를 기도한 자도 또한 불경한 자임이 틀림없다.
(6)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에 의지하여 그를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의 근거를 밝혀 주며,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증거를 말하고 있는 사도 요한이 9절에서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데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고 말한 것을 보더라도 그리스도에 대한 최고의 증거를 생략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지상에서의 세 가지 증거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증거가 되지 못하며, 어느 누구도 참되시며 온전하신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증인이 될 수 없다.
원본에 있어서 삼위일체 반대론자들은 성령이나 물과 피가 하나님 자신이 되심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판단으로는 주 예수의 진리를 뒷받침하는 몇 가지의 증거와 그의 성직수임의 신성에 대한 훌륭한 설명이 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근거와 구주께서 가지고 오신 신임장과 간략히 요약된 설명이 있다.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를 철회하고, 있지만 부분은 이에 대한 모든 뜻을 내포하고 있다.
2. 이러한 합리적 근거를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계속해 보자.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가 진리 되심을 증거하는 바 성령을 말한 다음, 성령은 하늘에 계시고 그는 진실하실 뿐 아니라, 진리 자체가 되심을 나타내 보여주는 또 다른 자들이 있음을 확신시켜 주면서, 성령도 진리이심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이는 셋이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신데 이 셋이 하나이니라"(7절).
(1) 사명과 자격에 있어서 주 예수의 진실성과 권위를 세상에 증거하고 보증하는 바 거룩하신 삼위되신 자들을 나타내고 있다.
① 맨 첫 번 순으로 "아버지"가 계시다. 즉 그는 주 그리스도가 세상에 있는 동안의 사명을 확증하고 있다.
첫째, 세례 받으실 때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선포하심으로 증거하고 있다(마 3:17).
둘째, 변화산상에서 그의 신분을 확증하고 있다(마 17:5).
셋째, 신비한 능력과 사명을 부여하심으로 증거하셨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 10:37, 38).
넷째, 그의 죽음에서 증거를 나타내셨다.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켜보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마 27:54).
다섯째, 그리스도를 죽음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그를 영화롭게 하심으로 증거하셨다.
곧 "그는 세상에 의를 확증하실 것이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서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요 16:10; 롬 1:4).
② 두번째 증거자는 말씀인데 이로써 그는 세상이 있기 전에 존재하였고 세상을 창조하였으며, 아버지와 함께 하신 참된 하나님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가장 높은 품격을 의미하는 신비한 이름이다.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해야만 했다. 이로써 그가 우리를 구속하시고 증거하셨다.
첫째, 그가 행하신 놀라운 역사로 나타내셨다.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둘째, 변화산상에서 그에게 임한 영광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셋째, 죽음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 나타났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③ 세번째로 증거하는 자는 성신 혹은 성령이시다.
이 이름은 거룩함의 소유자 또는 거룩의 본체이신 자에 대해 가장 적합하고도 신성한 이름이다.
거룩하신 성령께 그의 확증과 유일한 증거를 나타내신 자에 대해 그는 참되시고 미쁘신 자임에 틀림없다. 그는 성도의 세계의 머리가 되시는 주 예수께 참되시고 미쁘신 일을 행하셨다. 아래와 같은 예를 들어 말할 수 있다.
첫째, 동정녀의 몸을 통해 흠이 없는 인간을 출산케 하심에서 나타난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 1:35).
둘째, 그리스도에게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의 뚜렷한 임재로 증거를 보여 주셨다.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써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눅 3:22).
셋째, 지옥과 어둠의 영들에 대한 효과적인 정복에서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셨느니라"(마 12:28).
넷째,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사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세계에 전파할 수 있는 은사와 능력을 그들에게 주기 위해 사도들 위에 임한 뚜렷하고 강력한 임재로 증거하셨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요 1:4, 5).
다섯째, 휘트비(Dr. Whtby) 박사가 그의 저서 <신약 성서 주석> 제2권 서문에서 언급한 대로 200년 동안 제자들과 교회에 의하여, 또한 그들 위에 임한 놀라운 은사와 역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이름과 복음과 사랑을 증거하는 가운데 나타내고 있다.
이들은 하늘에 있는 증거자들이며 또한 하늘로부터 증거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증거하는 일에서뿐만 아니라 하늘에 있는 자들로서 좀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볼 때 거룩한 존재와 본질 면에서 하나가 된다. 만일 "아버지"와 하나이라면 그들은 한 하나님이심이 틀림없다.
(2) 서로 연관되어 있을지라도 이상에서 말한 하늘에 있는 세 증거자에 반해 아래 말씀대로 땅 위에 세 증거자가 있다.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경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8절).
① 이 증거하는 이들 중에 첫째가 성령(the spirit)이다.
이 성령은 하늘에 계시는 성신(holy ghost)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사도 요한이 말한 바에 의하면) 성령(spirit)으로 난 자는 영(spirit)이라고 말할 수 있다(요 3:6).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주의 제자들도 육으로 난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부패된 육신적 성향을 지니고 세상에 태어났다. 이 육신적 성향은 억제되어지고 또한 분쇄되어야만 할 것이다. 옛 정욕과 죄악은 제거되어야 하며, 참된 제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
인간의 중생과 새로운 변혁은 주님에 대한 하나의 증거가 된다. 또한 이것은 자신의 확실한 최초의 구원을 의미한다.
그것은 이 세상의 교회로 인하여 이루어지며 또한 하늘에서 비롯된 어떤 놀라운 징조에 의해 시행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승리이다.
교회의 중생과 새로워지는 변혁은 이 성령에 속한 것만이 아니라, 교회의 점진적인 성화와 이 세상에서의 승리, 평화, 사랑, 기쁨과 빛 가운데 성도의 유산으로 합당한 바를 이루게 되는 모든 은혜에 속하는 것이다.
② 둘째 증거자는 물이다.
이것 앞에서 구원의 방편으로 언급되어진 것과 같이 여기에서도 구세주 자신에 대한 증거자로 또한 그의 정결케 함과 정결케 하는 능력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 세상에서의 그의 자신의 성품과 행위의 정결함을 의미한다.
"그는 거룩하며 흠이 없고 티가 없었다."
둘째, 구세주에 대해 증거한 세례 요한의 세례의 증거는 구세주에 대해 사람들을 예비시키고 그에 대해 언급해 주었다(막 1:4, 7, 8).
셋째, 사람들이 깨끗케 되고 씻김을 받는 그의 교훈의 정결함을 나타낸다.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넷째, 그의 제자들의 정결함과 경건함을 뜻한다. 그의 몸은 거룩한 보편적 교회를 이룬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벧전 1:22).
다섯째,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고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 3:21)하신 말씀으로 제자들에게 물로 베푸는 바 세례를 명하는 것을 알 수 있다.
③ 셋째로 증거하는 이는 피다.
즉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고 이는 우리의 속죄를 위한 몸값이었다. 이로써
첫째, "우리의 유월절 어린 양 그리스도께서 희생하심으로" 구약시대의 희생제는 이미 끝이 났음을 증거하고 있다.
둘째, 그의 모든 예언과 봉사와 교훈의 참됨을 확증해 주고 있다(요 8:37.)
셋째,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요 14:30, 31) 하신 말씀대로 피는 하나님께 대한 비교할 수 있는 사랑과 자비와 영광과 존귀를 위하여 세상 죄를 속함으로 희생의 죄물이 되심을 보여주었다.
넷째, 피로써 우리를 위한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나타내었다.
그는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는 자를 속이지 않는다(요 14:13-15).
다섯째, 이는 주 예수의 어떤 세속적인 유익과 미득에 사심이 없음을 나타내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여섯째, 주 예수를 위하여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고난과 죽음을 각오할 의무를 부여한다. 속이는 자는 자기편으로 개종자들을 유인하여 주 예수께서 행한 바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 하리라"(요 16:2).
그는 그의 종들을 불러 그와 함께 고난에 참여하도록 하신다.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오직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3). 이 말씀은 그나 그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일곱째, 그의 피로 말미암아 얻어진 유익은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세주란 사실을 나타내 보여준다.
여덟째, 이 피의 유익은 그가 말한 마지막 만찬석상에서 나타나고 증명되어졌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이러한 것은 모두 땅 위에서의 증거가 또한 다. 또한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 되시는 자에 대한 다양한 증거가 된다.
이러한 확증을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을 훼방하는 자라는 판단을 받고 종국에는 죄사함을 얻지 못하고 멸망에 이르게 됨은 이상할 것이 없다.
이 세 증거하는 자들은 (전자의 세 증거와는 다른) 피차간 서로 동일한 것이라고 말하며 하늘로부터 나타난 세 증거자와 동일한 것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적합치 못하다.
Ⅲ. 사도는 정정당당히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9절)고 결론짓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1. 앞에서 말한 바에 근거를 두고 하나의 추측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로써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증거하신 바 "하나님의 증거가 있다."
확실히 이 증거는 틀림없는 증거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직접적인 증거이었음을 암시한다. 즉 그는 자신이 그의 아들을 세상에 선포하고 증거하셨다.
2. 그의 증거의 권위와 신빙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 증거는 가장 작은 것에서부터 가장 큰 사건에까지 이른 것이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이러한 증거는 모든 재판소나 모든 나라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큰 것이다." 하나님의 증거는 진리 자체이며 최상의 권위와 가장 순수한 진실성을 지니고 있다.
3. 이러한 기준의 적용은 현재에도 가능하다. 즉 이것은 하나님의 정거이기 때문에 또한 아버지의 증거뿐 아니라, 말씀과 성령의 증거이며, 이로써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증거하셨다.
"거짓말할 수 없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사랑의 아들이심과, 사명에 있어서 세상을 자신에게 화해시키고 회복시킬 아들이 되심을 세상에 충분한 확증으로 나타내셨다. 곧 하나님은 기독교 신앙의 진리와 거룩한 근본을 나타내 보이셨고,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에게로 이끌어 가는 유일한 길이요, 수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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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의 특권(1)(요일 5:10-13)
이상의 말씀 가운데서 아래의 몇 가지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
Ⅰ.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특권과 안전성.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기 위해 그에게 담대히 나갈 수 있는 자로서 "그 자신 안에 증거를 가지고 있다"(10절).
그는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바 외적인 확증만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진리가 그의 영혼을 위해 어떠한 것들을 이루어 놓았으며 그 안에서 무엇을 보고 발견할 수 있었는가를 말할 수 있다.
1. 그는 자기의 죄와 죄된 행위 그리고 참혹함을 깊이 통찰하며 자기 안에 이러한 구세주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2. 그는 하나님의 아들의 우월성과 아름다움과 사명 그리고 그의 영적은 궁핍과 불쌍한 환경에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적합한 구세주가 되심을 알았다.
3. 그는 죄와 지옥으로부터 자신을 구속하기 위해 또한 그를 용서하고 하나님과의 화평의 관계를 이룩하기 위해 이러한 구세주로 준비하고 보내신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보고 감사하게 된다.
4. 그는 그의 영혼을 상하게 하고 교만을 꺾기도 하시며, 한편 치유하며, 생기 있게도 하며, 위로하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교훈의 능력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
5. 그는 그리스도의 계시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가장 큰 발견과 증거가 됨과 동시에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불을 키고 그 사랑을 더욱 일깨워 요원의 불길을 일으키게 하는 최적의 능력있는 수단이 됨을 알게 된다.
6. 1절의 말씀대로 그는 그리스도의 진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서 난 자이다. 그는 새로운 마음과 성품, 새로운 사랑과 성향 그리고 기쁨을 소유하게 되며, 그는 이미 이전의 사람이 아니다.
7. 그는 아직도 그리스도의 교훈 가운데서 자신과 죄와 육신과 세상의 보이지 않는 악한 힘과 더불어 투쟁을 하게 된다.
8.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주어진 소망과 능력으로 세상을 경멸하며, 극복해 가면서 좀더 나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음을 안다.
9. 그는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또한 그의 중재를 통해 그의 이름으로 드려진 기도로써 하늘에 계신 중보자의 관심사가 무엇임을 알게 된다.
10. 그는 새로운 소망에 대해 거듭나고, 하나님과 그의 선하신 뜻과 사랑을 신뢰하는데 있어서 거듭나며, 양심의 두려움과 죽음과 지옥의 공포로부터 유쾌한 승리를 이룩하는 데에 거듭나며, 간구함으로 그의 생이 부요해지며 구속의 날까지 보장을 받음으로 생명과 영생에 대한 만족할 만한 기대에 있어서 새로 거듭나게 또한 다.
이러한 확신은 복음을 믿는 자에게 주어진다. 즉 그는 자신 안에 증거를 가지게 된다. 그리스도가 그 안에 이루어지게 되며 그는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온전하심과 완전하신 혹은 완전하신 형상을 향해 자라게 된다.
Ⅱ. 믿지 않는 자의 죄와 불신하는 죄의 악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결과적으로 그는 하나님의 거짓을 밝히려는 것이다.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10절). 하나님이 나타내신 바 많은 증거를 우리에게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세상에 그의 아들을 보내시지 않았다고 믿어야 하며, 혹은 모든 증거가 그에 대해 말하며 확증해 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믿어야 하며, 하나님은 이 세상을 속이기 위해 또는 이 세상을 죄와 비참함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셨음을 사람들로 하여금 세계 각처에 순수하고 거룩하며 더렵혀지지 아니한 기관으로 종교를 고안하도록 하고 인간의 이성으로 포착되리 만큼 인간에게 허용되었으나 아직도 기만과 거짓으로 차 있고, 그들에게 그의 성령과 능력을 주어 이 세상에 그 기만과 거짓을 나타내도록 강요하는 것임을 믿어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 아버지를 거짓의 장본인이요 교사자로 만드는 것이다.
Ⅲ.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 모든 거룩한 증거의 본질과 핵심과 내용.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11절).
이것이 복음의 총체이다. 이것이 앞에서 언급한 여섯 증거자들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증거의 총체와 요약이 된다.
1.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
하나님은 그의 영원한 목적 안에서 우리를 위해 영생을 계획하셨다. 그는 영생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데 필요한 모든 수단을 마련하셨다. 하나님은 그의 약속과 언약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영생을 허락하셨다. 그리고 그의 아들을 믿고 영접하는 모든 자들에게 특권과 명분을 허락 하셨다.
2. "이 생명이 아들 안에 있다."
아들은 생명이시다. 영원한 생명이 그 자신의 본질과 그 몸 안에 존재한다(요 1:4; 요일 1:2). 그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시며 우리의 영적이며 영광된 생명의 샘이 되신다(골 3:4). 그로부터 이생과 내세에 있어서 우리에게 생명이 주어진다. 이로써 아래와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된다.
(1)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12절).
아들과 연합되어 있는 자는 생명과 연합되어 있는 자다. 아들에 대해 명분을 가지고 있는 자는 생명과 영생에 대해서도 명분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존귀를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허락하셨다. 또한 이러한 존귀를 우리도 그에게 돌려야 함이 마땅하다. 아들 앞에 나아가 입을 맞추자 그리하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2)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12절).
그는 율법의 저주 아래 머물게 된다(요 3:36). 즉 생명 자체가 되시며 생명의 소유자가 되시고 생명의 길이 되시는 아들을 거역한다. 그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에 대해 증거하신 바를 믿지 않는 이상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을 끝없는 죽음의 자리로 넘기도록 자극한다.
Ⅳ. 사도가 믿는 자들에게 이 사실을 전하는 목적과 이유,
1. 성도들의 기쁨과 위로를 위해 이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13절).
이 모든 확증과 증거 위에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자들이 서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세상은 하늘로부터 응답되어질 수 있는 증거를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 세상은 하늘에 있는 세 증거자의 보장을 받아야만 한다.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는다. 그들은 영생을 복음의 언약 안에서 얻는다. 그들 안에 있는 영생의 첫 열매에서 그리고 하늘에 계시는 그들의 주와 머리되시는 그 안에서 얻는 것이다.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게 되는 것과 영생을 기대하는 가운데 생기를 얻고 용기와 위로를 얻게 됨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위로와 구원을 위해 많은 것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2. 믿는 자들의 신앙의 확신과 진보를 위해 전하고 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함이라"(13절).
그리고 믿는 일을 계속하게 하려 함이다. 믿는 자는 인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일을 떠나는 것은 영생을 포기하는 것이며, 멸망을 자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끝까지 그들을 고무시키고 격려하기 위하여 믿음에 대한 확신과 진보는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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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에 이르는 죄(요일 5:14-17)
여기서 몇 가지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Ⅰ.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따르는 특권, 다시 말해서 기도의 응답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14절).
주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간구와 요구를 가지고 어떤 형편 중에라도 하나님께 담대히 나갈 수 있도록 격려하신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간구가 하나님께 드려지고 응답된다. 우리의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의 뚜렷한 뜻과 일치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에 위배되거나 그의 소유요, 그에게 속해 있는 우리 자신의 선함에 상반되는 것을 구하는 일은 합당치 않다. 그리고 믿음의 기도는 하늘에 응답되어진다는 담력을 얻어야 한다.
Ⅱ. 이러한 특권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유익.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는 줄을 또한 아느니라"(15절).
구원과 자비와 축복은 경건한 자가 바라는 바 가장 큰 것이다. 그의 간구가 들려지고 응답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그 간구가 응답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만큼 기쁜 일이다.
그가 하나님께 간구하도록 허용된 것처럼 그는 불쌍히 여김을 받고, 용서와 권유, 성결과 도움 그리고 구원을 얻게 된다.
Ⅲ.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한 기도에 대한 지시.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할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16절). 여기에서 몇 가지 점을 생각해 보자.
1. 우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남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들이 뉘우치고 회개하며 구원을 얻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믿는 형제들로 하여금 신실하며 그들의 죄를 사함 받고 악과 하나님의 징벌로부터 구원함을 받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보존함을 받도록 위해 기도해야 한다.
2. 흉악한 죄와 일반적인 죄 사이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다.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며"(16절),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다"(7절).
(1) 죽음에 이르는 죄가 있다.
죄에 대한 시비와 율법적인 판단으로는 모든 죄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을 대적하기에 그러하다!!!))죄의 삯은 사망이다.
"무릇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 3:10).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죽음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다.
(2) "죽음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이 죄는 분명히 생활과 양립하는 신적 혹은 인간적 제정에 따른 모든 죄를 포함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헌법 안에서는 세속적 혹은 육체적인 생활로 양립되고, 신적인 헌법 안에서는 육체적 또는 영적이며 복음적인 생활과 양립하는 모든 죄를 포함한다.
① 인간의 의로운 헌법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바 죽음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다.
즉 죽음의 심판에 이르지 않는 여러 가지 다양한 불의와 이와 같은 것들이다.
이것과는 정반대 되는 죄가 있는데, 의로운 헌법에 따라 죽음에 이르는, 혹은 법률상으로 생명을 잃게 되는 죄가 있는데, 이러한 죄를 우리는 치명적인 죄악이라고 부른다.
② 다음으로 신적인 헌법에 따라 죽음에 이르게 되는 죄가 있다. 더구나 육체적인, 혹은 영적이며 복음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첫째, 육체적인 죽음이다. 이러한 [양심을 따르지 않음, 걷다르고 속다름??] 육체적인 죄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와 같이 위선적인 죄를 말할 수도 있다.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고전 11:30)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죄짓는 성도에게 말한 바와 같이, 믿는 형제에 대한 죄를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정죄함을 받지 아니하는 자들 중 육체적인 죽음에 이를 자도 있을 것이다.
내가 말한 바 이러한 죄는 육체적인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복음서에 나타난 신적인 죄의 형벌은 그리스도의 지체의 보다 많은 보이는 죄를 직접으로 또한 단호하게 죽음으로 위협하지 않고 다만 모종의 복음적인 징벌을 가하고 있다. 즉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히 12:6) 하신 말씀과 같다.
징벌과 채찍을 어떻게 가할까를 결정하는데 있어서는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과 복음적인 준엄함에 의한다. 또한 죽음에 이르게 되는 죄도 때로는 불가피함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둘째, 신적인 헌법에 따라 영적이며 복음적인 죽음에 이르게 되는 죄가 있는데 이러한 죄는 영적이며 복음적인 생활과 일치하지 못하며, 영적인 삶과 또한 보다 높은 세계로부터 얻을 수 있는 복음적인 진리와도 일치하지 못한다.
이러한 죄는 전혀 뉘우치지 못하며 믿지 못하는 죄이다. 끝까지 뉘우치지 못하며 불신앙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서 증거하신 바 하나님의 영을 모독하고 기독교의 진리의 빛과 그 뚜렷한 명확성을 전적으로 배격하는 것이 되므로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것들은 영원한 죽음을 동반하는 죄들이다.
Ⅳ. 그 밖의 다른 종류의 죄에 대한 기도의 지시는 이와 같이 구분 될 수 있다.
기도는 생명을 부여할 수 있는 것으로 기대될 수 있다. 간구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생명을 허락하실 수 있다.
생명은 하나님에게만 구해야 할 것이다. 그는 생명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며 합당한다고 생각될 때에 그의 제정과 섭리에 따라 생명을 취하기도 하신다.
죽음에 이르지 않는 죄(앞에서 언급한 바)의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믿음과 소망 가운데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 그리고 특별히 그의 영혼과 육체의 생명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 죽음에 이르는 죄의 경우에 있어서는 기도가 허용되지 아니한다.
아마도 바울의 표현은 죽을죄를 위해 기도해야만 한다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너희에게 약속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기도에는 보장이 없다는 정도의 의사를 표현했을 것이다.
1. 인류의 보편적인 안전과 유익을 위해 인과응보의 법칙은 반드시 시행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범죄한 형제들도 공의의 심판(근본적으로 신성한)을 받아야 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긍휼에 맡겨야 한다.
2. 복음적인 형벌의 제거(어느 면에서 이렇게 불려질 수 있을 것이다)와 죽음의 방지(이 죽음은 어느 특별한 죄의 경우에 있어서는 불가항력적인 것이다)를 위해 단순히 조건적 혹은 감정적인 기도를 드릴 수가 있는데, 복음적인 형벌의 제거는 특별히 이러한 죽음의 방치를 이룰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뜻과 영광으로 이룩된다는 조건부에서 행해질 수 있다.
3. 회개치 아니하고 믿지 않는 상태에 있는 한 이러한 죄의 용서를 위해 기도할 수 없으며, 계속 이러한 죄에 머물러 있는 한 죄의 용서를 기대하는 바 생명 혹은 영혼을 위한 어떠한 긍휼도 베풀어지기 위해 기도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회개를 위해, 또한 그리스도를 위한 믿음이 풍성해지기 위해, 또한 이로써 다른 믿는 이들을 위해 이루게 하는 긍휼함을 얻기 위해 기도할 수 있다.
4. 성령에 대해 용서할 수 없는 모독의 행위를 행했거나 기독교 신앙의 놀라운 능력에 대해 전적인 배도의 행위를 행했을 경우 전혀 이를 위해 기도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있으리라"(히 10:27). 이러한 종국이 곧 죽음에 이르는 죄로써 사도 요한이 중점적으로 표현하려는 죄인 것 같다.
5. 사도 요한은 죽음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즉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17절).
그러나 만약 모든 불의가 죽음에 이른다면(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모든 불의를 행하였고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지 못한 이상) 우리 모두는 단호하게 죽음에 매여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모든 불의가 죽음에 이르지 아니하는 이상(일반적으로 말해서 믿는 형제들이 삶에 대한 권리를 소유함으로) 죽음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음이 틀림없다.
일반적인 견해에서 볼 경우, 용서받을 죄는 없을지라도 영원한 죽음을 당하지 아니할 죄, 즉 용서받을 죄가 있다.
만약 용서받을 죄가 없다고 하면 의로움이나 의로운 상태의 지속은 있을 수 없다. 복음의 제정이나 언약은 죄의 행위를 가볍게 하고 변축하며 철회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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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의 특권(2)(요일 5:18-21)
여기에서 우리는 아래의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Ⅰ. 건전한 신자의 특권과 우월성에 대한 재언급.
1.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죄로부터, 또한 죄의 전적인 지배와 죄된 행위로부터 구원함을 받는다.
즉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이다. 1절)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니"(18절)
범죄하는 자들이 행하는 바(3:6, 7 에서 언급한 대로) 마음과 심령에 넘치는 죄와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죄의 행위를 범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그는 죽음을 모면할 수 없는 죄와 그리고 확실히 죄의 삯으로 죄인을 넘기워 버릴 죄로부터 구원함을 얻게 된다.
곧 새로운 성품, 거룩한 성령의 안주하심으로 말미암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보호를 받게 된다.
2. 믿는 자들은 마귀의 파괴적인 도전에 대비할 힘을 얻게 된다.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18절).
이는 악한 자가 그를 건드리지도 못한다. 다시 말해서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없다. 이것은 단순히 중생한 자의 의무나 혹은 행위에 대한 서술이 아닌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중생한 자들의 능력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능력으로써 악한 자들의 치명적인 타격과 비난에 대해 대비하게 된다.
악한 자는 그에 대해 대비하게 된다. 악한 자는 그들의 영혼을 건드리지 못하며, 다른 사람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독약을 주입시키며, 그의 독소 해독제인 중생의 원리를 제거하거나, 복음의 제정에 따라 영원한 죽음으로 인도할 죄로 그들을 유도하지도 못할 것이다.
악한 자는 믿는 자들보다 어떤 악한 행위로 이끌어 가는데 우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중생함이 마귀의 위치와 저주 아래로 그들을 이끌어 가고자 하는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주장하려는 것이 사도 요한의 의도이다.
3. 믿는 자들은 세상과는 반대로 하나님의 편과 그의 이권에 서게 된다.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19절)라고 하신 말씀에서 나타난다.
인류는 두 개의 크나큰 파당과 통치령으로 나뉘인다. 곧 하나님께 속하든지, 악한 것 또는 악한 자에게 속하든지 하게 된다.
신자는 하나님께 속해 있다. 그들은 그의 것이요, 그로부터 왔으며, 그에게 속해 있고, 그를 위해 있는 자들이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신 32:9) 하신 말씀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옛 이스라엘 백성의 권리와 기회를 이어 받았다고 한다.
이와는 반대로 나머지의 세상은 악에 처해 있고 악한 자의 입안과 창자 안에 들어 있다.
사실 하늘과 공중에는 많은 악한 자들과 악한 영들이 있는데 그들은 악한 본성과 계략과 원리에 함께 연합되어 있으며, 그들은 한 우두머리 아래 연합되어 있다.
마귀의 왕국에는 마귀들 중에 한 동의자가 있다. 악한 세상에는 우두머리가 있다. 그는 세상에서 이러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 "이 세상의 신"이라고 일컬어진다.
자신의 파멸과 영원한 저주를 모면해야 할 것을 알고 있는 영특한 영이 전능자와 그의 비위를 가차없이 거스리고 있음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닌가?
악한 자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은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이 세상에서 악한 자의 지배를 멸하시고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사랑하는 이들의 왕국에 이르도록 하시기를 기원하자.
4. 믿는 자들은 진실로 영원한 하나님의 지식으로 깨우침을 받은 자들이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셨다"(20절).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들의 세상에 임하셨고 우리가 그를 보았으며 이미 나타난 증거에 따라 그를 알게 되었다.
그가 참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시었다(요 1:18 의 말씀과 같이). 우리의 지각에 내적인 광명을 주사 그 계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면, 이로써 우리는 참 하나님의 영광을 식별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나타내 주신 분이 참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모든 이방의 신들보다 성결과 능력과 완전에 있어서 보다 우월하신 분이시다.
그는 살아 계시며 참되신 하나님의 모든 우월성과 아름다움 그리고 부요함을 지니고 계신다.
모세의 말에 의하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자신과 특별한 계약으로 우리의 족장들을 택하신 자와 동일한 하나님이시며, 애굽에서 우리의 조상을 이끌어내신 하나님, 곧 우리에게 거룩한 말씀을 주시고, 이방인들도 불러 개종케 하시기로 약속하신 하나님이시다."
그의 계획과 역사에 의해, 그의 사랑과 은혜에 의해, 그리고 그의 위엄과 심판에 의해, 우리는 오직 그만이 완전한 존재로서 살아 계시며, 참되신 하나님이심을 알게 된다.
5. 그들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과의 복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아들은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하며, 우리는 아들과 아버지 안에 있고, 두 분의 사랑과 보호 가운데 있으며, 두 분과의 계약과 동맹 관계 안에 있으며, 또한 성령의 내주하심과 역사하심으로 두 분과의 영적인 합일관계에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얼마나 놀랍고 복된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동시에 참되신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생명이 되신다(요 1:1; 요일 1:2). 두 분이 밀접하게 연합되어 있는 것과 같이 우리들도 참되신 하나님 곧 영원한 생명과 연합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바는 아래와 같다.
Ⅱ. 사도 요한의 결론적 권고.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 하라"(21절).
"참되신 하나님을 알고 그 안에 거하는 이상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도전하는 모든 것에 대해 당신의 빛과 사랑으로 자신을 지키도록 하라. 이교도적인 세상의 거짓 신을 떠나라. 그들은 당신의 주인이요, 당신의 섬기고 있는 하나님과는 족히 비교될 수 없다. 어떤 물체나 형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지 말라. 하나님은 영이시며 이러한 천박한 행위로는 기뻐하시기 않는다. 우상을 섬기는 이교도적인 이웃과 상종하지 말라. 하나님은 질투하는 신이요, 항상 그들로부터 멀리하기를 당신에게 요구하신다. 오직 하나님께만 드리기에 합당한 마음의 왕관을 빼앗기지 않도록 육신을 제어하고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한다. 당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당신을 창조하신 자요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당신을 구속하신 자요, 당신에게 복음을 전해 주신 자요, 당신의 죄를 용서하신 자요,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당신에게 영생을 부여하신 자다. 믿음으로 그에게 더 가까이 나아가자. 하나님으로부터 당신의 생각과 마음을 멀리 하려는 모든 것에 반해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속 순종하라. 살아계시며 참되신 하나님께 영광과 권세가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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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제 5장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 '믿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튜온'(* )은 현재형이고 '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겐네타이'(* )는 완료 시상이다. 양자의 헬라어 시상에 의하면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 먼저요 믿음은 그 다음이다. 즉 믿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이 아니라 그 결과 혹은 증거인 것이다(Smalley, Stott, Barker).
'믿음'은 예수께서 구약성경에서 이미 예언된 메시야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신앙으로(4:15; 요9:22)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가를 분별하는 시금석이다.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 본문은 4:21의 반복이다.
'내신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겐네산타'(* )는 '낳다'러눈 의미의 동사 '겐나오'(* )의 부정 과거 분사형으로서 '아버지'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을 낳으시고 자녀삼아 주셨으며 친히 아버지가 되셨다. 요한이 이같이 하나님을 '내신 이'로 표현한 것은 하나님과 신자들을 가족 관계로 유비(類比)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한편 '그에게서 난 자'로 번역된 헬라어 '게겐네메논'(* )은 단수형이다. 이에 대해 혹자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나(Augustine)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문법상 단수로도 집합적인 의미의 그리스도인 전체를 지칭할 수 있으며, 문맥상 본문이 믿음과 모든 그리스도인들 간의 사랑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로서 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 또한 하나님 안에서 형제를 사랑한다. 요한은 본절에서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 사랑의 불가분리적 관계성을 강조한다(4:19,20).
=====5: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 본서는 전반적으로 형제 사랑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라는 형식으로 기술되고 있으나 본절에서는 본절에서는 그 표현이 반대 형태로 되어 있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에 나타난 역설적 표현의 어색함을 해소하기 위해 '이로써'가 앞절에 설정된 원리를 가리키며, '우리가...사랑하는 줄을'을 '우리가 사랑해야만 한다'로 해석한다(Marshall, Dodd). 그러나 '이로써'가 앞절을 가리킨다고 해석할 이유는 없다. '이로써'는 본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형제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근거함을 나타낸다(4:8,16,19, Smalley).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 사랑은 불가분리의 관계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며 형제 사랑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는 점에서 입증된다.
=====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 즉 순종과 불가 분리의 관계를 맺는다. 모든 계명 중 가장 우월한 계명이 사랑 계명인 바 그 안에 하나님의 계명이 내포되어 있으며(Smalley) 그 계명에 대한 순종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게 된다. 그의 계명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이미 예수께서 모범을 보이신 것이다(요14:31; 15:10).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 '무거운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레이아이'(* )는 바리새인과 랍비들이 주장하는 무거운 또는 가벼운 율법이 라는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마23:23, Smalley, Schnackenburg).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주장한 율법과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었던 반면에(마23:4; 눅11:46) 그리스도께서 주신 멍에는 쉽고 가벼운 것이다(마11:30).
하나님께서 먼저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셨고(4:19)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사랑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해주셨으며(Dodd) 설사 그 계명을 만족시키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용서해주시기 때문에(Calvin) 하나님의 계명은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인 순종을 통해 계명을 지키는 것이므로 그것은 가벼운 것이다.
=====5:4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 여기서 '난 자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 토 게겐네메논'(* )은 중성이다. 계속 남성 명사를 사용하다가 갑자기 중성 명사로 바꾸어 쓴 것은 이 말씀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원리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대적하는 부정적인 의미의 인간적 욕망을 가리킨다(2:15-17, Smalley).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역사하는 이러한 악에 대해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서 승리한다(18-20절; 2:13,14). '이기느니라'의 헬라어 '니카'(* )는 현재 직설법으로서 계속해서 이겨나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과의 투쟁 속에서 이러한 계속적인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신 이김에 기초하기 때문이다(요16:33; 19:30). 사도 요한은 본절에서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삶을 말하려 하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주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요16:33)를 우리가 믿고 고백할 때 그 이김은 우리의 거싱 되고 우리는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게 된다(롬8:37). 여기서 '이긴'에 해당하는 헬라어 '니케사사'(*)는 부정 과거 능동태로 한 개인의 회심과 같은 개별적인 경험을 표현할 때나 공동체의 역사에서 특별한 한 순간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시제이다(Brooke). 본절에서 사용된 '니케사사'는 과거에 성취된 명확한 승리와 상관 관계를 갖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기신 세상에 대한 승리를 그리스도인이 공유하는 것을 시사한다(Haas, Smalley).
=====5: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1절의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이라는 표현과 거의 동일한 의미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안에 계시되어 있음을 시사한다(Marshall).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는 세상을 능히 이기고도 남음이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공유하신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게 된다.
한편 '이기는 자'의 헬라어 '니콘'(* )은 현재 분사형으로서 4절의 '니카'(*, '이기느니라')와 같은 시상이다. 이는 투쟁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이겨나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승리의 원동력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
=====5:6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 본문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혹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사 옆구리를 창에 찔렸을 때 흘리신 물과 피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Augustine, Williams) (2)혹자는 요4장과 6장을 근거로 하여 세례와 성찬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Cullmann, Westcott, Luther, Calvin). (3)혹자는 구약시대의 희생제사와 연관하여 물은 정결케하는 것이며 피는 희생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Plummer, Candlish). (4)혹자는 물은 예수께서 받으신 요한의 물 세례요 피는 십자가의 대속의 보혈이라고 주장한다(Tertullian, Alford, Meyer, Barker, Stott,Marshall). 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요한 당시에 케린투스(Cerinthus)와 같은 영지주의자들은 천상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을 때 예수에게 임하셨다가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에 떠났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였다. 요한은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의 거짓 가르침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고 오셔서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것을 분명하게 설파함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과 동시에 육체를 가지신 인간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 본문은 앞서 언급된 상반절의 반복으로 영지주의의 가르침이 잘못되었음을 강조한다. 본절 상반절에서 물과 피로 임하셨다고 할 때는 '디'(* , '...을 통하여')를 사용한 반면에 본문에서 물과 피로 임하셨다고 할 때는 '엔'(* , '...안에서')을 사용한다. 본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예수께서는 물과 피를 통하여 임하셨을 뿐만 아니라 물 안에서 그리고 피 안에서 임하신 자이다'라는 의미이다. 요한은 위치나 장소를 나타내는 두개의 전치사를 사용함으로써 예수의 육체로 오심을 더욱 강도하고 있다(Marshall, Smalley).
=====5:7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 개역성경에는 본절이 앞절과 분리되어 또 하나의 절로 기술되어 있으나 헬라어 본문에서는 본절이 앞절에 포함되어 있다. '증거하는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마르튀룬'(* )은 현재 분사로 성령께서 지속적으로 증거하심을 시사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체로 오셨음을 믿게 하는 성령께서 믿는 자안에 내주하셔서 지속적으로 예수에 대해 증거하신다(2:20,27; 4:1-6, Stott). 또한 성령은 예수께서 물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임하심으로 객관적인 증거를 보이셨다(요1:32).
@성령은 진리니라. - 예수께서는 자신을 진리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요14:6) 성령을 가리켜 진리의 성령이라고 증거하셨다(요15:26; 16:13).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이 본문에서 성령께서 진리이심을 선언한 것은 진리이신 성령만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증거할 수 있음을 밝히기 위함이다(Johnson).
=====5:8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 '성령과 물과 피'에 대한 견해는 다섯가지이다 (1)혹자는 성령과 물과 피를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세 가지 등급으로 생각하여 예언자와 세례요한, 그리고 요한 일서의 저자인 자신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engel). 그러나 성령을 예언자와만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한 발상이며 피를 요한 일서의 저자와 연결시키는 것은 합당한 근거가 없는 논리이다. (2)혹자는 세 가지 증거들이 세례(요3:5-8), 성만찬(요6:54-56), 그리고 성령을 받음(요20:22)의 '신비적인 사건들'에 각각 상응한다고 주장한다(Windisch). 그러나 이 주장은 상당히 작위적이다. 이 견해는 정당성을 주장키 위해 본절의 세 가지 증거들의 순서를 바꾸고 있으며 더욱이 근거로 제시된 참고 성경 구절들도 예수를 증거한다는 개념과는 무관한 것들이다. (3)혹자는 세 가지 증거들이 기독교 초기에 존재한 '기름 부음과 세례와 주의 만찬'이라는 예배 의식에서 기인했다고 주장한다(Manson, Nauck).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세례 이전에 기름 부음을 실행했다는 증거가 어디에도 없다. (4)혹자는 물과 피를 세례와 성찬이라는 두 성례전의 상징으로 보아 세례와 성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된다는 견해를 주장한다(Dodd, Bultmann, Law, Westcott, Barker). 세례와 성만찬즉 이 두 가지 성례전 가운데 성령이 역사하여 증거한다. (5)혹자는 '물과 피'를 6절과 같은 의미로 보아 물은 예수의 세례를 상징하고 피는 예수의 십자가의 수난의 피를 상징하며, '성령'은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의 머리 위로 강림하셨고(요1:32), 예수께서 십자가의 수난의 피를 흘리사 그의 사역을 다 이루시고 (요19:30) 영광을 받으신 후에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증거하심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요7:39; 20:22, Smalley). 이러한 견해들 중 마지막 두 견해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 요한은 본문에서 성령과 물과 피가 같은 결과를 향하여 함께 작용함으로써 한 점에 수렴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즉 세 가지 증거들이 예수께서 메시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며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증거함을 시사한다. 한편 구약 시대 율법에 의하면 증인이 둘 이상이라야 어떤 사실이 입증되었다(신19:15). 요한이 이러한 율법을 염두에 두고 세 가지 증거를 제시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Stott).
=====5:9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 율법에 의하면 두 세 사람의 증인이 증거하는 일은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한다(신19:15). 죄악되고 부패한 본성을 가진 사람들의 증거일지라도 받아들여야 한다면 더욱 크고 완전한 하나님의 증거는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증거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 선포되며 물과 피를 통하여 역사 속에 선포된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면(裏面)에서 세 가지 증거 즉 성령과 물과 피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가장 근원적인 증거이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호티 하우테 에스틴 헤마르튀리아 투 데우, 호티 메마르튀레켄 페리 투휘우 아우투). - 본문은 두 개의 '호티'(* , '왜냐하면')로 구성되어 하나님께서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을 받아들일 만한 이유를 나타낸다. 그 하나님의 증거는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세 가지 증거들, 즉 성령과 물과 피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증거하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마르튀레켄'(* )은 완료 시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신 것이 지속적으로 유효함을 나타낸다. 즉,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에 성령의 임재와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자신의 아들임을 확증하셨으며(마3:16,17; 요1:33,34) 예수의 고난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증언하셨다(요12:28-30). 이러한 역사적 증언은 성령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사람들에게 증언되고 있으며 두 가지 성례전 가운데 성령의 내증으로 실현되고 있다(Stott, Barker).
=====5: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믿는 것은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9절). 그 결과 믿는 자들은 자기 자신 안에 하나님의 증거를 소유하게 된다. 이 증거는 성령께서 믿는 자 안에 내주하여 증거하시는 내적 증거를 의미한다(8절, Brooke, Law, Williams). 이러한 내적 증거는 외적 증거인 '물과 피'와 조화를 이루어 믿는 자들의 믿음을 근원이 됨과 동시에 결과가 된다(Stott).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 본문에서 하나님을 믿지않음이란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를 믿지 않음을 말한다. 즉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물과 피로 임한 인간이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에 관해 이렇게 증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증거를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증거를 거짓으로 만들며,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취급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요한은 이러한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자기 주장을 극단적으로 확증한다. 한편 본절은 롬1:19,20을 상기시킨다. 우주 만물 속에 하나님의 신성이 분명하게 각인되어 있으므로 믿지 않는 자들은 도무지 자기의 불신앙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을 것이다.
=====5: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 '영생'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이 생명은 본래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가(1:2)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안에서 완벽하게 현시된 것이다. 이것은 아들이신 예수와의 관계성 속에서 믿는 자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과 유일하시며 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영적이고 도덕적인 지고의 생활이다(요17:3,Smalley). 이러한 영생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실 뿐만 아니라 성육신하신 인간이심을 증거하신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 들일 때 이루어지는 결과이다.
그러기에 이 결과인 영생을 알고 소유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증거가 참되며,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과 동시에 인간임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된다.
한편 '주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도켄'(* )은 유일회적인 역사적 사실을 나타내는 보정 과거 능동태로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아들 예수를 통해 구속사역을 행하신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활동의 실제성과 역사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생을 이미 주셨으며, 영생을 주신 사실은 불변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 본문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영생과 아들의 불가 분리적 관계를 나타낸다. 그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한 인간이신 예수 안에 현시되어서 그 아들이 행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 즉 '물과 피'의 증거를 통해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곧 생명임에도 불구하고(요14:6) 요한이 예수와 생명을 동일시하지 않고 생명이 아들 안에 있다고 표현한 것은 아마도 예수께서 성육신하셨음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인 듯하다.
=====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 여기서 '있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콘'(* )은 '에코'(* , '가지다')에서 파생된 현재 분사이다. 요이1:9에서는 같은 뜻의 현재 동사 '에케이'(* , '가지다')가 '모시다'란 말로 번역된 것으로 보아 본절에서 아들이 있는 자란 현재 아들을 마음 속에 모신 자를 가리킨다. 아들이 생명 자체이며 아들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11절; 1:2; 요11:25; 14:6) 아들을 모신 자는 영생을 소유하게 되며 아들의 말씀에 순종하여 높은 수준의 영적,도덕적 삶을 영위함과 동시에 그러한 삶 속에서 아들의 인격을 닮아가게 된다. 아들은 그리스도인 안에 거주하면서 함께 삶을 영위하며(3:24) 완전하게 하며(4:12) 영원한 삶을 영위케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생명을 주셨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길 이외의 어떤 길에서도 생명을 찾을 수 없다(요14:6; 행4:12).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를 마음 속에 모시지 못한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한편, 본절 상반절에서는 '아들'이라하고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 점에 주목하여 '하나님의'란 말이 추가된 것에 대해 혹자는 불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며(Bengel, Plummer) 혹자는 영생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며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영생을 줄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Brooke,Marshall).
=====5:13
@이것을 쓴 것은. - '이것을'의 헬라어 '타우타'(* )는 문자적으로 '이러한 것들을'을 의미하는 것으로 '타우타'가 가리키는 것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1-12절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ooke, Schnackenburg). 혹자는 본서 전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Smalley, Williams).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절에 나타난 기록 목적은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인 요20:31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며 '타우타'가 다양한 주제를 가리키는 복수로서 1-12절까지 언급된 영생이라는 한 가지 주제에만 제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쓴'에 해당하는 헬라어'에그랖사'(* )는 서신체 부정 과거로 비록 요한이 현재 본서를 기록한다 할지라도 본서를 받아보는 수신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과거의 행위이기 때문에 단순과거로 기록되어 있다.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 본문은 '히나'(*, '위하여')로 시작하는 목적절로서 본절이 본서를 기록한 목적임을 나타낸다. 본절에 나타난 기록 목적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요20:31).
즉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영접한 모든 이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확신시키기 위함이다. 한편 혹자는 본절이 요한 일서의 본론이고 14-21절은 후대의 삽입이라고 주장한다(Bultmann). 본절이 요한 일서의 전체적 결론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이 견해는 타당성을 가지나 결론적 언급이 꼭 이 편지의 맨 마지막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기 때문에 본절은 요한이 자신의 편지를 끝맺기 위한 결론적 언급의 서두로 간주되는 것이 더 타당하다(Johnson).
=====5: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 여기서 '향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 )는 '생동적인 교제 안에서 실현되는 관계'를 암시하는 전치사이다. 이는 믿는 자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생동적이고 영적인 교제를 나누고 있음을 암시한다(Brooke).
한편 '담대함'의 헬라어 '파르레시아'(* )는 본서에서 네번 사용되었다. 즉 주의 재림과 심판날에 믿는 자들이 갖는 담대함과(2:28;4:17), 하나님께 기도할 때 갖는 담대함을 의미하는데 사용되었다(3:21,22). 본절에서 믿는 자들이 기도할 때 갖는 담대함은 기도 응답의 확신에서 비롯된다.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 '구하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토메다'(* )는 중간태로서 간구하는 행위 자체가 주어인 간구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기도자의 간구가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응답자이신 하나님의 계명 즉 그의 뜻에 부합되어야 한다(요15:7, Marshall). 이러한 기도는 단순한 요구사항이 아니며 기도자의 생활과 뜻을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부합되게 하여 복종하겠다는 고백이다(Johnson). 그럴 때에 그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게 된다.
=====5: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 본문은 14절의 반복이다. 14절의 간구와 응답은 구체적 현실성이 강조된 반면에 본절의 경우는 일반적 원리성이 강조된다. '무엇이든지'라는 말씀에는 죄악된 인간의 이기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간구는 당연히 제외되며 앞절에 언급된 것처럼 하나님 뜻에 부합되는 올바른 기도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들으신 것처럼(요11:42) 믿는 자들의 기도도 들어주신다.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 '구한'에 해당하는 헬라어'에테카멘'(* )은 직설법 완료형으로서 기도자의 객관적 기도 사실과 그 결과를 강조한다. 하나님 뜻에 부합되는 진정한 간구는 이미 그 결과를 얻은 것이다. 기도의 가시적인 응답이 미래에 나타날지라도 그 기도는 이미 효력을 발생하였다(Plummer, Brooke, Dodd).
한편 본절은 '안즉...아느니라'(*, 오이다멘...오이다멘)로 되어 있어 지도자가 갖는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확신은 기도의 응답에 대한 확신을 초래하여 기도자의 확신이 더욱더 확실하게 됨을 시사한다(Stott).
=====5: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 본절에 나타난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살인이나 간음 혹은 우상 숭배와 같은 특별한 죄를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주장한다(Tertullian). 그러나 신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죄를 사망에 이르는 죄로 분류한 것을 찾아 볼 수 없기에 이 견해는 적합하지 않다(Stott). (2)혹자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배교나 적그리스도 혹은 거짓 교사들의 죄와 같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과 부합되지 않는 죄를 가리키며,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는 믿는 자들이 유혹에 넘어가 범할 수 있는 일반적인 죄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ooke, Marshall, Smalley, Johnson,Alford, Clarke). 이 견해는 이제까지 요한이 언급한 문맥과 일치한다. 이 두 번째 견해에 대해 혹자는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범한 형제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것으로 보아 그 형제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주장함으로 반론을 제기한다(Stott). 그러나 이 반론 역시 문맥에서 해결이 가능하다. 즉 지속되는 불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배교를 하도록 하는 가능성을 내포하기에 요한은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게 하며 우상을 멀리하라고 경고하고 있으며(18,21절)
초대 교회 당시에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배교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히6:4-6, 10:26-31). 한편 요한은 앞에서 기도와 응답에 대해서 진술한 바와 같이 본절에서도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범한 형제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범죄한 형제를 위한 기도는 굶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직접 제공하는 것과 같은 사랑의 행위로 (3:17)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기도이다(Johnson). 이러한 중재 기도를 통해서 범죄한 형제는 죄의 고백의 필요성과 서로의 용서의 필요성을 확인하며 행하게 된다(요20:23). 이러한 중재 기도의 권면과는 달리 요한은 사망에 이르는 죄 즉 배교의 죄를 범한 자를 위해서는 기도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금하지도 않고 권하지도 않는다.
=====5: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 여기서 '불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디키아'(*)는 '옳지 못한 행실'을 의미한다. 요한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와 사망에 이르는 죄의 문제를 언급하다가 갑자기 본문을 진술한 것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와 사망에 이르는 죄를 인간적으로 구분하고, 그 외에도 여러가지 죄들의 경중을 마음대로 구분함으로써 '죄 자체의 심각성'이 축소되어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인 듯하다.
=====5:18
@하나님게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 본문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앞절과 관련시켜서 믿는 자들은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지 아니한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Calvin). (2)혹자는 '범죄치 아니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크 하마르타네이'(* )가 현재에도 계속되는 동작을 나타내는 현재시상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믿는 자는 계속 반복되는 범죄나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Stott).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 '우리가 아노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다멘'(*)은 18-20절에 걸쳐 세 번 사용되고 있다. 이 '오이다멘'은 지식의 활동 상황을 나타내는 '기노스코'(* , '알다')와 달리 주로 지식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본절에서 영적 지식의 확실성을 한층 더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 본절의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 , 호겐네데이스 에크 투 데우)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1)상반절의 '난자'(* , 게겐네메노스)는 완료 분사형인 반면에 본문의 '나신 자'(* , 겐네데이스)는 부정 과거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이라는 특별한 역사적 사건을 가리키기 때문이며, (2)'나신 자'를 예수 그리스도로 보아야만 문맥상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개념은 신약성경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요17:12; 벧전1:5; 유1:24). 요한도 역시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악과 사단의 영향력에서 보전하실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요17:12,15).
=====5: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 본절은 하나님과 세상을 날카롭게 구분한다. 여기서의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적대하는 사단의 세력권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비록 사단의 세력이 강하다 할지라도 믿는 자들은 하나님게 속하여 사단이 만지지도 못할 정도로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보호하신다.
=====5: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가리키며(1:1,2) '참된 자'는 하나님을 지칭한다(Smalley, Stott, Brooke).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실재로서 그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으며(요14:6)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하셔서 대속 사역을 이루심으로 믿는 자들에게 참된 자되신 하나님의 실재를 깨닫도록 인도하셨다.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 본문은 본절 상반절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실재를 계시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실재를 계시하시는 중보자가 되신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자들은 참된 자이신 하나님 안에 있게 되며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 예수께서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요17:21).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 '그'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토스'(*)는 문자적으로 '이 사람'을 의미한다. '후토스'가 가리키는 자에 대한 견해는 두가지이다. (1)혹자는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Stott, Smalley,Brooke). (2)혹자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uther, Calvin, Marshall,Hass, Schnackenburg, Brown).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녀서 어느 하나를 지지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토스'는 문맥상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낫다(Johnson).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실재를 계시하는 참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여 하나님을 부정한 것에 대한 요한의 결론적인 공격이다. 한편 그리스도께서 '영생'이라는 사실은 이미 본서 서두에 언급된 것으로(1:1,2; 요11:25; 14:6)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곧 영생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 있는 것과 같아서 수신자들이 이미 영생을 소유하고 있음을 재차 강조하기 위한 요한의 결론적 진술이다(Smalley).
=====5:21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 하라. - 우상에서 멀리하라는 저자의 권고는 요한 서신 전체의 논지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우상 숭배란 용어 자체가 본서에서는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서 자체가 당시의 이단 종파인 영지주의에 대하여 날카롭게 공격하고 있음을 볼 때 본절에서 말하는 우상 숭배는 영지주의 사상을 인정하고 승인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우상에서 멀리하라는 말은 영지주의의 위험을 피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굳게 믿으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요한은 이러한 파격적인 결론을 통해서 수신자들에게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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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다, 요구하다. aijtevw(154, 아이테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아이테오(Homer 이래)는 원래 '어떤 것을 원하다, 자신의 몫으로 어떤 것을 요구하다'를 의미하며, 이로부터 '구하다, 요구하다' 등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아이테오는 70인역본에서 주로 히브리어 샤알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약 90회 중 57회).
샤알은 '구하다, 요구하다, 바라다, 요청하다'를 의미한다(신 10:12; 삿 5:25; 삼상 12:13 등).
이 단어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과 함께 사용되었는데, 기도라는 개념에 거의 가까우며 종종 기도의 응답에 대해 감사하는 것과 관련되어 사용된다(삼상 1:20; 시 105[104]:40; 21[20]:4 등).
히브리어 샤알은 '묻다'(창 24:57), 법적인 용어로 쓰일 때 '심문하다'(신 13:15), '~의 의견을 듣다, 조언을 구하다'(삿 18:5)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 요구가 매우 특수한 것일 경우에만 아이테오로 번역되었다(출 3:22; 수 14:12; 삿 5:25; 삼상 12:17).
예를 들면, 한나는 그녀 자신을 위하여 여호와께 아들을 얻게 해달라고 구하였고 엘리는 그녀에게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삼상 1:17)을 약속하였다.
이와 유사한 예로서 시편에서는, 이 동사가 기도의 응답에 대한 약속을 표현할 때마다 특수한 요청의 뒷 배경에 대하여 쓰인 것을 알 수 있다(시 2:8; 21:4; 27:4; 40:6; 78:18; 105:40; 참조: 사 7:11이하; 58:2; 잠 30:7).(H. Schonweiss)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아이테오는 신약성경에서 70회 사용되었으며, 복음서(마 14회, 막 9회, 눅 11회, 요 11회)와 사도행전(10회)에는 자주 나타나지만 서신들에는 드물게 나타나며, 목회서신, 히브리서, 요한계시록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아이테오는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요구하다'(demand), '요청하다'(request), '구하다'(ask)를 의미한다.
(a) 아이테오는 '요구하다'를 의미한다.
① 아이테오의 대상이 아래 사람일 때, 그 의미는 '요구하다'(눅 1:63; 행 16:29)를 의미하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빌려준 물건이나 위탁해 준 것들을 돌려달라고 요구할 때, 혹은 그것에 대해 보고해 달라고 요구할 때에도 이와 같은 의미를 띤다(눅 12:48).
여기에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요구에 대해 말한다.
②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메시야 되시는 증거로서 표적을 요구하였다.
이 의미는 고전 1:22에서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의 요구 배후에 놓여있는 의미를 밝혀준다.
사람이 이런 태도를 취할 때 그는 사실상 자신을 하나님 위에 올려놓고 하나님에게 책임을 묻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그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셨던 것에 관련하여 하나님 자신이 옳음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③ 벧전 3:15에서 베드로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우리의 신앙에 대한 설명을 요구할 것이라고 말한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이라는 구절은 그 보고의 진실 및 신빙성에 대한 증거를 요구하거나 혹은 단순히 정보를 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에서 살펴본 바, 신약성경에서 '요구들'은 종종 종교적으로 적용되었다.
(b) 아이테오는 '요청(간청)하다'를 의미한다.
신약성경에서 아이테오는 세속적 의미와 종교적 의미에서 모두 이 용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능동태와 중간태 사이의 구별도 거의 없다.
① 세속적 용법으로는 거래, 계약(마 14:7; 막 6:24-막 6:25) 혹은 공적인 요구(마 27:20; 막 15:43; 눅 23:23; 행 9:2)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가 사람의 지위에 대해서는 거의 항상 윗사람에게 구하는 경우에 사용되었다.
아이테오는 오직 이 구절에서 '불쾌하다'라는 어감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혹은 적어도 '다른 사람이 불유쾌하게 느낄 정도로 요구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힐(D. Hill)은 마 5:42에 나오는 두 개의 절이 병행절이며 또한 여기에서의 아이테오가 '꾸어달라고 요구하다'라는 뜻이라고 주장한다(참조: 출 22:25).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요청들까지도 제자들이 응답해야만 한다고 강조하신다(참조: 마 7:7; 마 7:8).
이 구절이 지니고 있는 윤리적인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주목해야 한다.
즉, 나는 내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을 극복하고 요청하고 있는 사람에게 마음과 손을 열어 펼친다.
왜냐하면 그 요청은 실로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그를 향해 열며 복종하라고 나를 부르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② 종교적인 용법에서, 즉 하나님에게 요청하는 것을 표현한 그 구절들에서 이 동사의 능동태형과 중간태형 사이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이러한 차이는 때때로 약 4:2 이하를 근거로 하여 시도되었다. 능동태는 입술로 기도하는 것을 뜻하고 중간태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았다(Mayor, Exp., 525). 그러나 신약성경의 나머지 구절들에서 그런 차이는 나타나지 않는다(참조: 특별히, 요일 5:15; 요 16:24; 요 16:26; 마 21:22; 요 11:22).
③ 기도에는 확신이 요구된다.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표현한 구절들에서 하나님께서 그 구하는 것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마 6:8; 마 7:7; 마 7:11; 마 18:19; 마 21:22; 요 14:13 이하; 요 15:7; 요 15:16; 요 16:23 이하; 요 16:26; 요일 3:22; 요일 5:14 이하; 약 1:5).
이러한 확신은 모든 기도를 계속 살아있게 하는 것이며 이런 확신이 의심으로 인해 약해지거나 없어지게 되면 기도는 죽게 된다.
마 7:8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구하는 것을 들으시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기본 원칙이라고 말씀하셨다: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이 원칙은 여기에서 그 명령의 기초이며 이에 따른 약속, 즉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의 토대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토대는 마 6:8; 요 15:16; 요 16:23; 요 16:26 이하; 골 1:9-골 1:12 및 특별히 마 7:9-마 7:11과 같은 구절들에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사랑하는 것보다도 더 욱 하나님 자신의 아들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이시며, 따라서 자식들의 요청이 헛되게 됨을 허락치 않으시는 아버지이시므로 오직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그들에게 주신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구하는 자가 그의 요구가 응답 받는다는 것을 확신하는 이유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버지 같은 선함과 사랑에 대한 확신이 그 자신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듣고 보시고 동정으로 가득찬 마음을 갖고 계시는 살아있는 하나님이시라는 확신이다.
④ 간구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해야 한다.
요일 5:14-요일 5:16에서 기도와 하나님의 뜻 간의 관계를 밝히면서, 기도에 있어서 담대함과 그 효험을 얻는 방법을 제시한다(요일 3:21-요일 3:22).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그로부터 옳고 좋은 것을 구한다는 뜻이다(마 7:11). 누가는 이를 특별히 성령을 구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눅 11:13).
요 15:7에서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는 구절은 곧 우리의 존재가 예수님 그리고 그의 말씀에 밀접하게 연합되어 있어 우리의 요구가 분명히 그의 뜻에 일치함에서 생기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요일 3:22은 한층 더 윤리적인 면으로 진전되고 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이것은 우리의 요구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태도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기도 중에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함축적인 의미를 간략하게 요약하여 제시한다.
마 18:19 역시 하나님의 뜻과 관계 될 수 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제자들이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는 모든 이기적인 욕망을 버린 것임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기적인 기도는 그릇된 것이며, 하나님에게서 아무 것도 받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약 4:3; 막 10:35).
기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려져야 한다(요 14:13; 요 15:16; 요 16:23 이하).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께 접근을 허락 받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는 것은 마치 예수님 자신이 기도하였던 것처럼 기도하는 것이며, 성자가 우리에게 성부를 알려주셨던 대로 성부께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 있어서 기도의 초점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의 기본 특징이 여기에 있으니, 기도는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을 위해 확보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기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조화되는 기도이다(J.G.S.S. Thomson).
기도는 믿음으로 드려야 한다(마 21:22; 약 1:5 이하).
⑤ 예수님 자신의 요청이나 기도에 대해서는 아이테오가 아니라 에로타오(2065)나 데오마이(1209)가 사용되었음이 명백하다(참조: 요 14:16; 요 16:23-요 16:26; 눅 22:32). 그 이유는 아마도 아이테오가 자기 자신을 위한 요구, 혹은 구한다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거나 에로타오보다 덜 친근하기 때문인 것 같다. (참조: G. Stahlin; TDNT; H. Schonweiss, DN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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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다 ask, 요청하다 request. ejrwtavw(2065, 에로타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에로타오는 호머(Homer) 이래로 나타나며,
(a) '묻다' ask, '문의하다' enquire, '정보를 구하다' seek information.
(b) '요청하다' request, '요구하다' demand를 의미한다.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에로타오는 70인역본에서 약 70회 나오며, 거의 샤알(7592: 묻다, 문의하다, 요구하다, <사랑의 친밀함 안에서, 이타적 사랑 실행따른> 간청-중재-중보하다, 기도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주로 '묻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요청이나 간구하다'는 의미도 나타낸다(창 24:47, 57; 출 3:13; 수 4:6; 삿 4:20; 삼하 5:19; 대상 14:10; 느 1:2; 욥 12:7; 욥 42:4; 렘 6:16 등).
3. 신약성경의 용법.
에로타오는 신약성경에서 63회 나오며, 사복음서에서 51회, 사도행전에 6회, 바울 서신에 4회, 요한 서신에 2회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고전 헬라어 용법에서처럼 사용되었다.
(a) 에로타오는 첫째로 '묻다 to ask', '질문하다 enquire', '정보를 구하다 to seek information'를 의미한다.
① 눅 22:68,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할 것이니라".
② 마 19:17에서 예수님께서 젊은 부자 관원에게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고 말씀하신다.
③ 예수님 자신이 그의 제자들에게 이용할 수 있는 떡의 개수(막 8:5)와 그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마 16:13)에 대해 물으신다.
·막 8:5,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마 16: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하느냐".
④ 예수님은 그의 엑수시아(ejxousiva, 1849: 행할 힘, 권세)에 대해 그의 적대자들이 교활하게 질문했을 때, 그들에게 세례(침례) 요한의 엑수시아(ejxousiva, 1849)에 대해 역으로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라고 대답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마 21:24; 병행구 눅 20:3).
마치 그들이 예수님 자신의 말씀에 의해 납득될 준비가 되어 있고 그를 파괴시킬 길과 방법을 찾고 있지 않는 것처럼, 그들은 설명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가 역으로 하신 질문은 그들에게 애매한 대답을 피할 수 없도록 하여 그의 주장이 세례(침례) 요한의 그것이 했던 것보다도 더 그들이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한다.
⑤ 막 4:10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그의 비유들의 의미를 묻는다: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 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을 묻자오니".
⑥ 행 1:6에서 제자들은 또한 그에게 언제 하나님의 왕국이 세워질 것인지 묻는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⑦ 눅 9:45에서 예수님의 고난에 관한 언급에 대해 [묻기도] 두려워 했다: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나니 이는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 또 저희는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그러나 이 모든 절수들에서 에페로타오(ejperwtavw, 1905)도 마찬가지로 사용될 수 있다.
같은 뜻의 병행절들과 본문의 변형들은 그 단순형과 복합형이 마찬가지로 많이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한복음에 중요한 신학적 용법이 나오는데 그 용법의 거의 반이 요한복음에 나온다.
예수님의 떠나심에 대한는 문제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간의 관계에 있어서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다.
요 16:23에 의하면 미래의 구원의 일부는 제자들이 그에게 어떤 것도 더 물을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지식과 지각이 매우 특히 중심을 이루는 신학에서 질문은 (대개) 단지 불완전함만을 함축할 수도 있다.
이것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가장 깊은 수준에서의 그리스도와의 근본적인 친교에 의해서이다.
따라서 요 16:30은 마음을 아시는 자이시며, 그 마음을 말하기 전에라도 그의 백성의 질문을 아시는 예수님을 찬양하기 위해 말한 것이다(참조: 요 2:25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질문할 필요가 없는 깊어진 그들의 주님과의 지식과 이해의 친교 속에서 제자들에게 새로이 주어지는 주님의 수난의 길의 의미에 대한 통찰력을 설명한 것이다.
여기에 요한복음에 종종 나오는 바와 같이(요 16:23) 미래의 바로 가까이에 서있는 현재의 구원의 또 하나의 단계가 있다.
묻는 것은 물론 아들과 아버지와의 완전한 친교에 도달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의 필요성이 강조된다(요 16:5).
그러나 그것은 그것 자체 너머에 있는 목적지로 인도해야 한다.
이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에로타오가 떠나심의 설교 외에는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에 대해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요 9:2은 예외이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빈번하게 유대인 적대자들의 탐사하고 의심하는 논쟁적인 질문들에 대해 사용된다.
성구 참조
① 요 16: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② 요 16: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
③ 요 16: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b) 어떤 종류의 요청에 대하여 [내적 사랑 안에서, 깊은 신뢰와 친밀함을 따라, 그러나 겸손하게]'간청하다' to request, '요구하다' to demand를 의미한다.
행 1:6의 유일한 예외를 제외하면 복음서 밖에서는 이것이 이 단어의 주된 의미이다.
①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요청(마 15:23; 눅 4:38)과 빌라도에 대한 유대인들의 요청(요 19:31)을 다 나타낸다.
② 누가복음에서는 특히 식사 초대에 대해 사용된다(눅 7:36; 눅 11:37; 행 10:48; 행 18:20).
③ 많은 점에서 비슷한 데오마이(devomai, 1189)처럼 에로토 세는 "제발 청컨대" please(눅 14:18 이하)의 약화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종종 주장이나 열정(프로슈코마이, proseuvcomai, 4336)을 암시하는 아이테오(aijtevw, 154;Ⅰ, 191 이하)와 달리 에로타오는 [사랑 안에, 친밀하고도] 겸손한, 예의 바른 참된 간청<이로 인해 영원생명-구원, 곧 지고지선의 아버지 뜻 이룸에로의 돌파를 목표하는 바>을 나타낸다.
④ 요한은 이 용어를 특히 하나님께 하는 '기도하다' to pray라는 의미를 지닌 청구에 대해 사용한다. 그러나 이 점에서 우리는 뉘앙스의 차이에 주의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요일 5:16의 단 하나의 예외를 제외하면, 거의 오로지 예수님의 기도에 대해서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 홀로 아버지와 그러한 내적인 친교를 가지므로, 그 단어는 그리스도에 대한 제자들의 간청(예를 들면, 요 4:31)과 그 분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청원이나 중보기도 모두에 대해 사용될 수 있다(요 16:23 상반절과 요 16:30에도 불구하고 요 16:26에도 역시). (참조: H. Green; G. T. D. Ang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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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다, 경청하다, 주의하다, 들어서 깨닫다. ajkouvw(191, 아쿠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아쿠오(Oracula sibyllina 이래로)는 '듣다'라는 의미를 가졌으며, 본래 '들음'이란 의미로 소리에 대한 지각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들음'은 청각 작용 뿐 아니라 들려온 내용을 정신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이로 인하여 다양한 언어학적 용법이 나타난다.
2. 70인역본의 용법
아쿠오는 70인역본에서 매우 많이 사용되었으며, 대부분 히브리어 샤마를 번역한다.
따라서 아쿠오는 히브리어 동사의 미묘한 의미의 차이를 공유한다. 여기서도 역시 본래의 의미는 청각 작용이다(예를 들면, 나팔소리를 들음, 삼하 15:10). 한편 사람이 진술, 보고, 소식 등을 받자 마자(창 14:14) 즉시 이해는 수반된다.
이해는 수용, 경청(창 1:23; 창 23:11), 인식(창 11:7; 창 42:3), 들린 것에 대한 주의력("…을 듣고" 창 3:17; 창 23:16; 출 24:7)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샤마는 '복종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샤마는 70인역본에서 자주 강조형 복합어들로 번역되었다(이를테면, 창 42:21 이하; 삿 2:17).
아쿠오는 이런 과정을 걸으면서 '듣다, 경청하다, 주의(유의)하다, 이해하다'와 '복종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고대와 중세 영어에서 '듣다'와 '복종하다'는 두 의미를 동일한 단어로 표현한 것이 나타난다. 전자의 의미는 후자의 의미를 포함하며, 어떤 문장에서는 그것을 대용하기도 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아쿠오는 신약성경에서 약 430회 나오며, 본질적으로 헬라어 문헌과 70인역본의 용법을 따른다.
(a) 아쿠오는 신약성경의 메시지를 "어떻게" 듣는가라는 신학적 질문을 할 때 나타난다.
이 메시지의 내용은 옛 언약 하에서 약속된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구약성경의 메시지를 능가하는 구원의 충만함과 새로운 계기가 주어진다. 예수님 안에서 명시된 이 계시는 단지 들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모든 감각기관을 통해 인식된다(요일1:1). 본질상 이것은 듣는 것과 보는 것의 문제이다.
예수님은 그 이전 세대들에서 경건한 자들이 갈망했던 구원을 목격했던 자들의 눈과 귀를 향해 축복을 선포했다(마 13:16이하; 눅10:23이하). 예수님은 투옥된 세례(침례) 요한이 보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마 11:4; 병행구, 눅 7:22). 이와 같은 그의 말씀과 나란히 예수님의 능력있는 행위가 나타난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의 감추인 영광을 보았으며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었다. "저의 말을 들으라"(마 17:5; 병행구, 막 9:7; 눅 9:35).
예수님의 탄생 기사에 나타나는 목자들의 찬미의 노래 뿐만 아니라 산헤드린 앞에서의 사도들의 고백도 그들이 보고 들은 것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눅 2:20; 행 4:20).
(b) 사람들은 예수님의 생애, 부활, 오순절 사건도 보고 들은 것에 의해 인식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중대한 환상은(고전 15:9) 행 22:14, 행 22:15에 부연 설명되어 있다. 바울은 자기가 보고 들었던 것에 대해 증인이 되어야만 했다.
기독교 공동체에 미친 엄청난 효과를 미친 오순절 사건도, 본래 보고 들은 것을 통해 인식되어졌다(행 2:33).
고후 12:1 이하에 언급된 바울의 계시와 환상들도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 사도는 황홀경 속에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 12:4).
듣는 행위는 또한 요한계시록의 환상들 속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계 1:10; 계 5:11, 계 5:13 등).
한편 우리의 구원의 신비는 통찰 가능 영역을 넘어선 것임에 주의하라, 다만 결과적으로 직관적 깨달음 통해 인지할 수 밖에 없다. 즉,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전 2:9)......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이는 각자마다 그의 내적 변화를 깨달아 알게 됨으로써 구원받았음을 인식하게 된다.
(c)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중대한 계시적 사건에 근거하고 있다. 복음은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되었다.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받아 들이는 데는 믿음이 요구된다. 그러나 롬 10:14이하(비교: 시 19:14; 신 32:21; 사 65:1 이하)에 의하면 믿음은 듣는 것을 전제로 하며, 이 들음은 전파하는데 달려 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d) 눅 10:16의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라"라는 문구를 음미해 볼 때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의 말을 구분하지 않는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증인으로 충분한 자격을 부여받았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것을 들은 자들에 의해 확실하게 전달되었다(히 2:3).
그 메시지를 듣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진리의 말씀(엡1:13; 엡 4:20 이하) 또는 하나님의 말씀(행 13:7, 행 13:44 등)을 듣는 것이다.
이렇게 들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될 때 응당 그 결과로서 세례(침례)를 받게 된다: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행 18:8).
(e) 구약에서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의 연결을 신약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옛 사람들에게 선포되었던 말씀을 초월한다(마 5:21). 그의 가르침을 보면 그에게 주어진 권위가 표현되었다. 산상수훈을 결론짓는 비유에서 주님은 자기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를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로 비유한다(마 7:24이하).
눅 11:28에서 예수님은 자기의 말을 듣고 지키는 자들에게 축복을 선포한다. 요 10:16, 요 10:27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양에 대해 언급한다.
막 12:28이하에서 예수님은 경건한 유대인들에 의해 날마다 암송된 셰마("Hear") 또는 이스라엘 신조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신 6:4-신 6:9; 신 11:13-신 11:21; 민 15:37-신 15:41로 이루어져 있다. 그 구절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의 전(全)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의무를 날마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기억해야 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인용했던 것이다. 즉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인용문은 주로 70인역본을 따르고 있다.
(f) 말씀을 듣는 것은 항상 믿음, 즉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는데 이르게 하지는 않는다(막4:16; 눅 8:13).
만일 뿌려진 말씀의 씨가 열매를 맺으려면 듣고 깨달아야만 한다(마 13:23; 마 15:10).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며 그것을 수용하지 않는 거스리는 태도는 결국 강퍅한 마음을 낳게 된다. 그 까닭에 사 6:9이하에서 선포된 강퍅해짐을 나타내는 문장에 대한 언급이 신약에서 특히 유대 민족과 관련해서 여러 차례 나타난다(마 13:13이하, 병행구, 막 4:12; 눅 8:10; 요 12:40; 행 28:27; 롬 11:8).
요한복음에서 유대인들은 솔직이 그런 식으로 듣는 것은 실제로 듣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듣는다(요 5:37; 요 8:43). 이것은 스데반이 재판 받으면서 재판관들을 "마음과 귀에 할례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묘사했을 때 의미했던 것이며, 그 다음의 그들의 행동이 스데반의 그 책망을 입증한다(행 7:51, 행 7:57).
예수님의 제자들 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며 듣지 못함을 막지 못했다(막 8:17이하).
마찬가지로 히브리서에서도 성도들이 시 95:8과 관련하여 완고해짐을 긴급하게 경고하고 있다(히 3:7-히 3:11, 히 4:3-히 4:11).
이러한 완고해짐과 대조되는 현상이 하나님께서 귀를 열어주신 자들과(사 50:5) 착하고 선한 마음으로 말씀을 지키는 자들(눅 8:15)의 수용성으로 나타난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은 오직 이런 식으로 듣는 것 뿐이다(마 13:11; 병행구, 막 4:11, 눅 8:10).
그러나 그러한 들음과 깨달음이 하나님의 은사이지만 결코 인간의 의지적 행위가 배제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갖가지의 주의하라는 경고에서 이러한 것을 볼 수 있다. 즉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 11:15; 마 13:9; 병행구, 막 4:9; 눅 8:8). 또한 "듣고 깨달으라"(마 15:10). 또한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막 4:24). 또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7, 계 2:11, 계 2:17, 계 2:29; 계 3:6, 계 3:13, 계 3:22).
(g) 요 5:25, 요 5:28에서 아쿠오는 종말의 때에 듣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즉 무덤 속에 있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것이니 어떤 이는 생명의 부활로 어떤 이는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이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무덤에서 불러 내신 나사로의 부활은(요 11:43) 이와 같은 종말 사건에 대한 예기이다.
(h) 아쿠오는 하나님의 들으심에 대해 사용되었다.
요 11:41, 요 11:42에서 하나님의 들으심에 관해 언급한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계 9:20은 우상이 듣지 못한다는 구약성경의 표현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를 들으신다(요 9:31).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할 때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요일 5:14). 스데반의 증언에서는(출 3:7을 인용한 행 7:34) 애굽에서 들려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탄식하는 소리에 대해 언급한다.(참조: Walter Bauer; G.Kittel; W.Mund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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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알다, 경험하다.ei[dw(1492, 에이도)
동사 에이도는 호리아(oJravw, 3708)에 속한 단어이며, 동일한 의미를 가지며, 신약성경에서
(a) '본다, 지각한다'(마 2:2; 마 3:16; 요 21:21 등).
(b) '느끼다, 감지하다, 인지하다'(마 27:54; 막 15:39; 눅 17:15).
(c) '주목하다, 알아채다, 관찰하다, 발견하다'(마 27:49; 요일 3:1; 마 9:2; 눅 9:47; 롬 11:22 등).
(d) '당하다, 경험하다, 체험하다'(눅 2:26; 요 11:40; 히 11:5; 벧전 3:10; 계 18:7 등).
(e) '방문하다, 찾아보다'(눅 8:20; 행 16:40; 고전 16:7; 살전 2:17; 살전 3:10).
(f) '생각하다'(요 3:1; 행 15:6).
(g) '알다'(마 25:13; 막 10:19; 요 10:4; 롬 7:7; 고전 2:2; 계 2:2; 계 2:9 등), '알다'에서 '지식을 얻다, 이해하다, 인식하다'(마 12:25; 막 12:15; 눅 6:8; 눅 11:17; 막 4:13; 고전 13:2 등).
(h) 히브리어투로 '~을 존중하다, 소중하다, 주의를 기울이다'(살전 5:12; 참조: 창 39:6).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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