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향심기도2-퍼온 글

제6절  향심 기도의 요약


1. 신학적 배경
   오순절의 은총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영광 받으신 그리스도로서 우리 안에 계심을 확인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각자 안에 각성을 주시는 분으로서 언제 어디서나 계시다. 그분은 살아 계신 주님으로서 언제나 우리 안에 사시도록 성령을 보내 주시며, 기도와 활동 중에 성령의 열매와 참된 행복(마 5장)을 경험하고 또 나타내도록 힘을 주심으로써 당신의 부활을 증거 하게 하셨다.


2. 거룩한 독서
   거룩한 독서는 그리스도와의 우정을 키우는 가장 전통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대화 중에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대화의 주제를 알려 주시듯 성서에 귀를 기울이는 방법이다. 매일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의 말씀을 사색하면, 그저 안다고 하는 관계를 넘어 우정과 신뢰와 사랑의 태도로 발전시켜 준다. 대화는 단순해지고, 6세기의 대 그레고리오 성인이 크리스찬 관상 기도의 전통을 요약하면서 말한 "하나님 안에서 쉼"이라는 통공(혹은 합일, 교통, 영적예배communion)의 상태로 이른다. 이것이 16세기까지 관상 기도에 관한 고전적인 의미였다.


3. 관상 기도
   관상 기도는 성세의 은총과 정기적인 거룩한 독서로부터 자연스럽게 발전한 것이다. 우리는 기도가 사고와 감정이 언어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한 가지의 표현일 뿐이다. 관상기도는 사고와 단어와 정서를 넘어서서 절대 신비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가슴과 마음을 열어 드리는 것이다. 호흡보다 더 가까이 계시고, 사고보다 더 가까이 계시며, 선택보다 더 가까이 계시고, 우리의 의식 그 자체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우리 안에 계심을 믿음으로 알고 있는 그 하나님께 우리의 인식을 열어 드리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우리가 동의하기만 하면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어 줄 수 있게 우리를 내적으로 정화시켜 주는 과정이다.


4. 향심 기도의 방법
  향심 기도는 거룩한 독서로 시작된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깊게 해 주도록 만들어진 것이며, 관상 기도의 은총에 우리의 기능들을 준비시켜 줌으로써 관상 기도를 촉진시키게 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예전의 가르침(예를 들면 무지의 구름, The Cloud of Uuknowing)을 현대적 형태로 제시하면서 거기에 어떤 순서와 규칙을 부여하여서 만든 것이다. 이것은 다른 기도를 대치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기도들을 새롭고도 완전한 각도에서 조명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 기도 중에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또 활동하시도록 동의한다. 그리고 다른 시간에는 우리의 주의가 나의 밖으로 옮겨 가서 모든 것 안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한다.


  향심 기도의 방법은 관상으로 가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을 줄이는 방법이며 인간의 기능들을 이 은총에 협조하도록 준비시키는 방법이다. 이것은 이전에 있었던 가르침을 현대적인 형태로 제시한 것이며 거기에 어떤 순서와 질서를 첨가한 것이다. 이것은 다른 모든 종류의 기도에 대신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그 대신 다른 종류의 기도에 새로운 시각을 부여한다. 이 기도 시간에는 내면에 계시는 하나님의 현존에 주의를 향하게 한다. 다른 기도에서는 주의를 외부 세계로 돌려 어디에나 현존하시는 하나님에게로 향한다. 향심 기도는 거기에서 끝나는 기도가 아니라 기도를 시작하는 기도이다. 그것은 체험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삶속에서 열매를 맺으려고 하는 기도이다.
  향심 기도의 방법은 우리의 일상적 사고의 흐름을 꺼 버리려고 만들어진 것이다. 이 사고의 흐름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는 습관적인 방법,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습관적 방법을 강화할 뿐이다. 이것은 마치 라디오를 장파에서 단파로 돌리는 것과 같다. 우리는 장파 라디오로 장파 방송을 듣는 데 익숙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먼 거리에서 오는 방송을 들으려면 다른 파장으로 돌려야 한다. 이와 비슷하게, 당신의 일상적인 사고와 정서적 패턴을 꺼 버리면, 당신 앞에 새로운 현실 세계가 열린다.


5. 향심기도의 실행
   향심기도를 체계적으로 하기 위하여,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을 수 있는 편안한 자세를 취하라. 그리고 눈을 감아라. 보통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눈을 감음으로써 이 세상의 반은 사라진 셈이다. 사고들의 흐름을 늦추게 하기 위하여, 하나의 생각만을 하여라.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당신이 편하게 느끼는 한 음절 혹은 두 음절의 단어를 선택하라.
  어떤 이들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때에도 거룩한 단어를 사용할 때와 마찬가지의 절차를 따른다. 이 단어는 사고와 상상과 정서너머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신비에 당신을 열어 드리려는 지향을 상징하기 때문에 거룩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그 내용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그 지향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현존을 향하여 안으로 들어가는 움직임의 방향을 나타내는 지침(指針)일 뿐이다.
  시작하기 위하여, 푹신거리는 솜 덩어리 위에 새 깃을 아주 부드럽게 올려놓듯 그 거룩한 단어를 당신의 상상 속에 살짝 떠올려라. 어떤 형태이든지 이 거룩한 단어를 계속 생각하라. 그렇다고 이것을 반복하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점차로 맥빠진 듯이 되고, 희미해지고, 흑은 습관적으로 반복되다가 사라지기도 할 것이다. 어떤 형태로 일어나건 그대로 받아들여라.
  당신이 어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면, 당신의 지향을 나타내기 위해 그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라. 이것이 효과적이기 위하여서는 자주 열심히 이 단어를 되풀이하는가에 달려 있지 않다. 오히려 시작할 때에 당신의 상상에 얼마나 부드럽게 이 단어를 떠올리는가, 또 다른 생각들이 떠올랐을 때에 어떻게 즉시 이 거룩한 단어로 돌아오는가에 달렸다.
  향심 기도 중에 사고들은 불가피한 부분이다. 우리의 일상적 사고들은 강 위에 배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떠 내려오기 때문에 우리가 그 강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여기에서 "사고(思考)"라 하는 것은 의식의 스크린을 지나가는 어떠한 지각 내용을 뜻한다. 우리는 보통의식의 내적 스크린을 끊임없이 지나가는 상상, 기억, 감정, 외적 인상 등을 인식한다. 우리가 사고의 흐름을 얼마간 늦추면 그 배들 사이로 공간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거기에 현실이 떠오른다.
  향심 기도는 당신의 주의(注意)를 일반적인 것에서 특수한 것으로 구체적 형상에서 무형의 것으로 옮겨 주는 방법이다. 처음에는 지나가는 배에 주의를 빼앗긴다. 그 다음에는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관심을 갖게 된다. 그렇지만 그것들을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 두라. 그것들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음을 알게 되면, 당신의 내면에 현존하시는 하나님께로 향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바로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라.
  거룩한 단어는 당신의 지각이 더욱 깊어지는 수준으로 생각하는 단순한 사고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 당신 안에 올라오든지 간에 그 거룩한 단어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입술에 떠 올리는 것은 외부적인 것이어서 이 기도와 상관이 없는 것이다. 상상 안에서의 사고는 내적인 것이며, 의지를 나타내는 단어는 더욱더 내적이다. 당신이 단어를 넘어서 순수한 인식으로 가는 것만이 내면화를 완성하는 과정이다. 이것이 베다니아에서 마리아가 예수의 발치에서 했던 것이다. 마리아는 듣는 말씀을 넘어가 말씀하시는 분에게로 나가고 그와의 일치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앉아서 향심기도를 하면서 하는 것이 바로 거룩한 단어를 내면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거룩한 단어를 넘어서 그 단어가 가리키는 분, 즉 궁극적 신비, 하나님의 현존과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어떠한 지각도 넘어서- 일치하는 것이다.


6. 향심기도 중의 사고들


  우리가 정신을 가라앉히려고 할 때 의식의 흐름 속에 여러 가지 종류의 사고들이 떠오른다. 사고의 종류에 따라 적절한 반응이 따르게 된다.


1). 상상으로 하는 공상. 
    가장 분명히 나타나는 사고들은 우리의 상상력의 끊임없는 활동으로 만들어 내는 피상적 사고들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필요 이상의 주의를 주지 않으면서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두 사람이 대화를 할 때에 길거리에서 오는 소음이 창을 통해 들려오는 것과 같다. 이 두 사람은 서로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만 밖에서 나는 소음을 피할 도리가 없다. 그러다 보면 그 소음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때가 있다. 또 어떤 때는 자동차 경적 소리가 순간적으로 주의를 산만하게 만들기도 한다. 가장 합당한 반응은 그 소음을 받아들이고 가급적 거기에 주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 상황에서 주의가 분산되지 않고 대화를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2). 정서적으로 흥미를 끌며 떠오르는 사고들. 
   두 번째의 사고는 길거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흥미를 느낄 때 일어나는 사고들이다. 예를 들면 말다툼이 벌어져서 호기심을 끈다. 이러한 사고는 어떤 대응을 요구하는 사고이다. 이 때에는 하나님께 드리고 있던 사랑의 주의로 돌아가는 뜻으로 거룩한 단어를 떠올려야 한다. 이러한 흥미를 끄는 사고들에 빠졌을 때에 자신에게 짜증 내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짜증도 또 다른 하나의 사고이기 때문에 당신을 내적 침묵으로부터 멀리 가게 만든다. 내적 침묵이 이 기도의 일차적인 목표이다.


3). 내적 성찰, 그리고 심리적 개안. 
   우리가 깊은 평화와 내적 침묵에 잠길 때에 세 번째 종류의 사고가 떠오른다. 우리 정신 안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주 눈부신 신학적 성찰이나 엄청난 심리적 개안처럼 보이는 것이 맛있는 미끼같이 우리 눈앞에 어른거려서 "잠시 시간을 내어서 이 기막힌 성찰을 잘 파악해야지." 하고 생각하게 된다. 만일 당신이 그것을 기억에 넣을 만큼 오랫동안 이러한 성질의 사고를 묵인하면 당신은 내적 침묵의 깊고도 신선한 물에서 건져 올라오게 된다. 고의적으로 하는 사고는 당신을 침묵에서 올라오게 한다.
  이 기도에서는 아주 밀접한 종류의 자기 부정이 필요하다. 영적인 행복의 시간인 피로 회복과 같은 경험이 기도의 부산물이긴 하지만 이것만이 기도의 목적은 아니다. 이 목적은 우리가 가장 집착하고 있는 것 -말하자면 우리의 깊은 사고들과 감정들이 솟아나는 그 원천- 즉 거짓 자아를 부정하는 데 있다.
  이러한 종류의 금욕 수련은 우리의 거짓 자아의 정서적 프로그램에 집착하는 그 뿌리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은 철저하고도 기쁨을 주는 자기 부정인데 이것이 효과적이기 위하여 시달릴 필요는 없는 자기 부정이다. 문제는 가장 유용하고 적절한 종류의 자기 부정을 선택하느냐와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인 것이다.


4). 자아 성찰. 
   깊은 평화에 들고 어떤 특정한 사고들로부터 해방하고 나면 자신 안에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해 성찰하고자 하는 욕망이 생긴다. 당신은 "마침내 나는 해냈다."라든가, "이 기분은 참 좋군." 혹은 "내가 어떻게 이 경지에 도달했는지 정신적으로 기록해 두어 내가 원할 때마다 이렇게 한다면!"하고 생각할 것이다. 당신은 진행되고 있는 것을 성찰하든지 아니면 그러한 체험을 떠나보내든지 선택해야 한다. 만일 떠나보내면 당신은 더 깊은 내적 침묵으로 들어간다. 만일 성찰하면, 당신은 거기에서 나오게 되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다시 시작하는 일이 빈번할 것이다.
  성찰은 체험에서 한 걸음 물러난 것이다. 이것은 실재의 사진일 뿐이다. 당신이 체험을 성찰하기 시작하면 체험은 끝났다. 즐거움에 대한 성찰은 그 즐거움을 가지려는 시도일 뿐이다. 그러면 즐거움은 잃어버린다. 관상 기도에서 성찰하려는 경향은 가장 다루기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순수한 즐거움, 순수한 체험, 순수한 인식의 순간을 저장하고 싶어진다. 우리는 우리가 원할 때에 다시 그곳에 이를 수 있도록 어떻게 거기에 이르렀는지를 기억하려고, 깊은 평화와 일치의 순간을 성찰하기 원한다. 그러나 당신이 이 유혹을 지나가도록 버려두면, 당신은 새로운 자유의 수준을 지나면서 더욱 세련된 즐거움을 맛볼 것이다.
  하나님의 현존은 우리가 숨쉬는 공기와 같다. 당신이 그것들에 매달려서 그것을 소유하려고 들지만 않는다면 당신이 원하는 만큼 가질 수 있다.
  이 기도는 사랑이며 은총인 하나님의 성령과 통교(교통,영적예배communion)하는 것이다. 소유가 아니라 관계안에서 그분을 응시하며 나의 전존재를 기울여 사랑을 드림으로 안식하는 것이다. 탐욕에는 하나님이 반응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소유 본능은 우리를 유쾌하게 만드는 즐거운 삶에 매달리게 만드는데, 관상이나 향심기도는 떠나보냄이다.  하나님의 현존보다 더 기쁜 것은 없고 이것은 깊은 안정과 평정감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온전히 손에 닿을 수 있는데 그것을 자유로이 받아들이면서도 소유하려고 들지 않을 때에 그럴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의 기도는 자아 승복을 배우는 기도이다. 그것은 많은 실수를 통하여 소유하려 들지 말고 떠나보내도록 우리를 가르친다. 만일 당신이 이 기도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성찰하려는 뿌리 깊은 습관을 극복하면, 당신은 평화를 얻고 그것을 소유하려는 생각을 안하게 되며, 그리하여 그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된다.


5). 내적 정화. 
   어떤 형태의 묵상이나 기도든, 사고를 초월하는 것이면 내적 정화의 작업을 갖게 한다. 이 작업은 하나님이 하시는 정신 치료의 학교이다. 이것은 깊이 뿌리박고 있는 긴장을 사고라는 형태로 표출하도록 우리의 신체를 도와준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치료에서 오는 사고들은 그것들이 어디서 그리고 왜 오는지 본인은 알지 못한다. 그 사고들은 어떤 힘을 가지거나 정서적으로 충전된 채 떠오른다. 어떤 이들은 최근의 어떤 사건과 관련지을 수 없는 분노, 슬픔, 두려움 등을 느낀다. 이러한 것들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하여 일생 동안의 해결되지 못했던 심리적 문제들이 점차로 해소되고, 본능적 욕구에 기초를 두고 행복해지려고 어렸을 적에 마련하였던 정서적 반응 체제들이 무너지면서 거짓 자아는 참자아에게 자리를 내어 준다.
  일단 당신이 이 사고들이 불가피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치유와 성장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기만 하면, 그것들에 패해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것들을 고통스러운 주의 산만으로 보는 대신에, 내적 침묵과 사고 두 가지를 포용하는 넓은 시각으로 보게 되는데, 이 사고들은 비록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깊은 평정의 순간과 마찬가지로 정화에 아주 가치 있는 것임을 알게 된다.


7. 하나님 안에서 쉼


  당신이 평온히 앉아서 깊이 들어가면 당신은 사고는 물론이고 그 거룩한 단어도 사라지는 곳에 도달할 것이다. 이것은 자주 의식의 정지라는 어떤 공간처럼 경험하게 된다. 다음에 당신이 자각하는 것은 "내가 어디에 있었나 나는 거룩한 단어를 떠올리지도 않았고 사고들도 없었는데." 하는 생각이다. 혹은 시간 밖(外)에 있었다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시간은 동작을 재는 자(尺)다. 만일 일상적 사고가 줄어들어 아주 적은 수의 사고 밖에 없게 되면 기도의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
  내적 침묵이나 "하나님 안에서 쉼"은 사고와 상상과 정서의 저편의 일이다. 이러한 인식은 당신에게, 당신의 존재의 핵심은 내적이어서 파괴될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에게서 사랑을 받고 있고 그분의 거룩한 생명을 나누어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 중에 내적 침묵의 분명한 경험을 즐기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고요, 평정과 동시에 간헐적인 사고들이 떠오름을 늘 체험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러한 체험을 하지 못한다. 어떠한 형태와 정도의 내적 침묵이 일어난다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되 바라지는 말라. 바람은 또 다른 사고이기 때문이다.


제7절 향심기도가 깊어지는 체험


  키딩은 프로이트의 대단한 관찰력은 인정을 하지만, 그와는 아주 다르게 무의식을 이해하고 있다. 용어 사용에서 키딩은 칼 융의 관점에 오히려 더 가깝게, 무의식은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를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사용한다. 거기에는 우리가 아직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잠재력도 있고, 우리가 완전히 억압해 넣은 정서적 내용들이나 정서적으로 부하된 사건들이 거기에 있다.
  아니면,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해서, 무의식을 '심리적'인 것과 '존재론적'인 것의 두 부분으로 구별할 수 있다.
  심리적인 부분은 우리의 인간적인 전 역사, 특히 주로 생존해야 한다는 동기로 어렸을 적에 억압해 넣었던 정서적 충격들을 가지고 있다.
  존재론적인 무의식에는, 다른 말로 존재의 수준에는, 아직 활성화되지 않고 있는 영적 발달에 대한 모든 인간적인 잠재력들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또 자연적인 에너지와 은총의 에너지로 구분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이 두 가지 에너지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이 두 가지를 다 창조하시고 돌보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에너지는 생명의 힘, 역동적 근거, 쿤다리니, 우주적 에너지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이것들을 통하여 모든 존재하는 것이 생겨나고 돌아가는 어떤 창조적인 과정에 우리가 참여한다. 그리스도교의 용어에 따르면 "세상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요한 복음의 서두)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에너지는, 만일 방해를 받지 않는다면, 잉태에서부터 육체적으로 온전히 성숙할 때까지, 점차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동시에 두뇌와 신경계통을 통하여 정신적이고 영적인 발전의 기초를 이루어 준다.


  우리가 영적 여정을 처음 시작했을 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 접촉하지 못한 선천적이고 거룩한 에너지와 더불어, 거기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삼위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현존도 있다. 이 삼위는 교회의 교부들의 용어에 따르면 분리될 수 없는 일치 속에 무한히 서로 다른 세 가지 '위격'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엄청나고도 무의식적인 거룩한 생명이, 우리의 세례 때에 혹은 영적 여정에 진지하게 투신할 뜻을 표시하면서 세례에 대한 열망을 가질 때에,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고 있거나 모르고 있거나, 자연적인 에너지와 은총의 에너지로 이 거룩한 생명에 참여하며 나눈다. 이러한 인간에게 내재하는 신화(神化 : divinized, 초대 그리스 교부들이 즐겨 사용한 말)의 잠재력을 실재화하고 활성화하는 것이 인간이 해야 할 탐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탐험에 우리가 어느 정도 우선을 두느냐에 따라,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있는 존재적 힘이 우리의 특정한 삶 속에서 얼마나 활성화될 것이냐 하는 정도를 결정짓는다.


  우리가 무의식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때때로 인간적인 그리고 신적인 성장으로 가는 길이 벽에 부딪치기도 한다. 이것들은 신체적이거나 정서적이거나 영적일 수 있다. 향심기도는, 엄격한 의미에서 관상에 이르게 하면서, 우리의 삶 중에서 인정하지 않았던 문제들을 정면으로 부딪치라고 부드럽지만 끊임없이 우리를 부른다. 때로 우리는 그것이 정말로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다. 때로는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처럼 그 문제들이 무의식적인과정이기 때문에, 그 문제의 어떤 측면을 우리는 아직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벽에 부딪히면,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그 무엇이 하나님의 뜻에 우리를 맡겨 드리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경고해 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현재의 상황하에서는 우리가 그것에 대해 행동할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벽이 무너지기를 기다리면서 기도하는 일이다. 그리고 때로 이것은 오랜 기다림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향심기도를 정규적으로(하루 두 번씩) 하면, 은총에 대항하는 우리의 내적 저항이 끊임없이 줄어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고 싶어하시는 것을 인정하려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려고 하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하여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저항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저항은 다른 방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아픔과 같은 육체적인 증세, 진지하게 "네"라고 대답할 수 없다는 감각, 아니면 일반화된 불편한 마음 등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대로 기다리면서 향심기도를 정기적으로 하면, 언젠가는 저항의 둑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성을 갖기 시작하는 연령쯤에 정상적으로 사색적 자아의식(reflective self- consciousness)을 온전하게 갖게 되면서, 우리 안에 계신 신성한 에너지와의 접촉을 완전히 상실한다. 향심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것에 대하여 동의하는 움직임이다. 향심기도를 오래 수련할수록 우리가 언제 깊은 곳으로 가는지를 더욱 잘 모르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잘 안되는군." 하고 생각한다. 언젠가 하나님의 현존에 강하게 사로잡혔던 때가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인간의 기관은 상황에 대하여 놀랄만큼 잘 적응한다. 팔 다리가 없거나 눈이 멀었거나 다른 신체적인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삶에 매우 적응을 잘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나 깊은 휴식에 아주 익숙해지면서, 우리는 그 사실을 잘 알아차리지도 못하곤 한다. 그렇다고 은총이 우리 안에서 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도 초기에 우리는 자주 하나님 안에 잠기곤 했지만 이제 3,4년이 지난 다음에는 마치 기도를 하는 것이 이를 닦는 것과 같이 습관화되어 아침저녁으로 우리가 자동적으로 기도하게 된다. 평정의 기도를 경험하더라도, 처음에 이 체험을 했을 때에 가졌던 인상을 이제는 갖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앉아서 기도하더라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지나가는 사고들을 인식하고 나서는 일어나 일상의 사무로 돌아가고, 이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간다.
  사실 정화의 과정이 언제나 진행되고 있지만, "나는 지금 휴식하고 있다. 나는 지금 짐을 덜어 내는 중이다. 나는 지금 원시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 나는 지금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려고 애쓰고 있다."는 등과 같은 신호판들이 옛날처럼 우리 앞에서 신호를 주고 있지는 않는다. 휴식한다는 감각은 상대적이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깊이 잠입했다는 것을 다른 신호를 통하여 짐작해야  한다. 이러한 것 중에 하나는 시간의 흐름이다. 앉아 기도를 하면 사고들이 계속 지나간다. 우리가 이전에 녹음되어 있는 모든 비평들을 무시하는 것을 아직은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은 기도가 잘 되지 않는군." 하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기도시간이 다 되어서 기도시간의 끝을 알리는 비퍼 소리가 들릴 때에 금방 기도를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거나 시간이 매우 짧았던 것처럼 보이면 분명히 깊은 곳에 가 있었던 것이다. 시간은 동작을, 특히 특정한 물체가 지나가는 것을 재는 단위이다. 사고가 많았을 때에는 기도가 긴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많은 사고들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시간이 짧은 것처럼 보이면, 우리가 단단히 향심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복음의 위대한 가르침을 기억해 보자. 하나님의 왕국은 커다란 경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평상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은총의 씨가 자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끼여드시지만 우리가 알아차리도록 하지는 않으신다. 우리의 기도가 실제로 깊어질수록, 그것은 더욱 습관적으로 우리의 정상적인 인식의 밖으로 떠나간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서 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그렇게 해석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경험의 해석은 우리의 문화적 배경과 기질과 개인적 역사에 의해 조건화된 것이다.
  은총의 경험이 더욱 섬세해지고 영적으로 되면 우리는 그것을 덜 알아보게 된다. 그렇다고 우리가 위안이라든지, 내적인 감미로움이라든지, 아니면 사랑의 물결과 같은 형태로 오는 영적인 경험에 저항해야 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각각 다른 시기에 우리의 다른 의식 수준에게 말씀하신다. 그렇지만 우리가 의식의 사다리를 올라가서 이성의 수준 너머 직관의 수준으로 가면,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아이디어는 확장되고, 다른 수준에서 하시던 의사소통을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하시지 않으신다.


  많은 관상기도자들이 논리적 묵상이나 어떤 특정한 소망을 아뢸 수 없게 됨을 경험한다. 그것들은 그저 마비되었다. 그들은 기도하지 않는 시간에는 이와 같은 정신적인 일들을 잘할 수 있지만, 그들이 기도를 하려고 하자마자, 그들은 무기력한 상태로 들어가고 만다. 성령께서 그들의 기도를 떠맡으셨다고 해서 그들의 성찰에 대해 성령께서 관심을 덜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성찰과 같은 정신활동들은 사실상 기도의 예비에 불과할 뿐이다. 만일 성령께서 뛰어난 생각들을 원하신다면, 천사를 불러 시킬 수도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천재를 원하셨다면 하나님은 천재들을 더 많이 창조하셨을 것이다. 유다 -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기도 중에 깊은 휴식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원천은 주파수가 매우 높아서 휴식이나 위안과 같은 것으로 더 이상 전달되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단순히 신비한 이끌림이나 하나님에 대한 배고픔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우리가 관상기도에서 진전되고 있다는 확실한 표시의 하나이다. 평상적인 인식의 강에 눈에 뜨이는 보트가 지나가면서 우리의 무의식에 뿌리박고 있는 정서 프로그램 중의 하나를 건드렸기 때문에 우리의 동의가 약간 흐릿해질 때면, 언제나 성령은 우리의 동의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움직이신다.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과 그에 따라 고통스럽게 만드는 욕망들을 가진 거짓 자아가 완전히 비워질 때까지는, 지나가는 사고들은 계속해서 마음을 끌거나 혐오감을 자아낼 것이다. 그 이유는 아직도 무의식 안에 자극받을 그 무엇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 안에 자극받을 만한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때에 내적 자유는 완성되고 평화는 습관적으로 찾아온다.
  처음 몇 년 동안에 경험했던 휴식에 대한 영적인 감각은 늘 휴식하고 있는 상태로 순수해지기 시작한다. 이 휴식의 영주 상태는 '평화'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으로서 감각되지 않는, 즉 감각으로는 지각되지 않는 그러한 평화를 말한다. 그것은 기쁨과 슬픔을 넘어선 것인데 하나님의 현존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항구한 사랑 속에 안전하게 머문다. 그렇지만 아직도 완전히 부숴지지 않은 거짓 자아가 남아 있어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인 정서 프로그램의 하나에서 오는 욕망을 일깨워 주는 자극에 우리가 아직도 민감하다면 우리의 평화는 아직 어떤 주의를 요한다고 보아야 한다.
  휴식은 평화로 이끈다. 평화란 특별한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가 어떤 무엇에 대해 평화로운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저 평화로운 것이다. 시편 작가는 이러한 경험에 대하여 아주 잘 표현을 하고 있다.   "차라리 이 마음은 고스란히 가라앉아 어미 품에 안겨 있는 어린이인 듯 내 영혼은 젖 떨어진 아기와 같나이다."(시편 131) 
  엄마의 우유를 먹으려고 안달하기를 마침내 끝내고 우유 때문에 보채는 일 없이 엄마가 그저 엄마이기를 받아들인 아기의 모습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이 진전인가, 아닌가
  우리가 감정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우리 기도의 심리적인 내용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 내용에 대해 만족을 갖는다는 의미에서 하나님 안에 쉴 수 있다면 시간은 빨리 지나간다. 가끔 우리가 어떤 무의식적인 내용에 부딪히기도 하지만 그것은 이제 더 이상 극적인 것은 되지 않는다. 어릴 적에 가졌던 원시적인 정서들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여러 번 정신적 역겨움을 경험하고 난 뒤에는 그것에 대해 더 이상 두려움을 가지지 않는다. 경험이 새롭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처음 대할 때에는 충격적인 것으로 보인다. 일생 쌓여 온 정서적인 내용들을 아직 계속해서 덜어 내지만, 무의식의 짐을 내려놓는 것이 이제는 상대적으로 잘 보이지 않는 경향이 있고, 그러한 일들이 일상적인 기도 중에 일어난다.
  이 기간은 한 수준의 무의식 혹은 한 수준의 믿음에서 다음 수준으로 옮겨가는 과정이다. 영적 여정의 봄기간 후에, 특히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이 하나님의 활동으로 뿌리 뽑히는 감각의 밤이 거듭될 때에, 이성과 감각으로 가졌던 믿음은 사라진다. 우리 자신의 활동으로 우리가 치유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점차로 하나님의 활동에 -특히 위안이라는 모유에서 이유(離乳)하는 동안에- 우리 자신을 맡겨 드리고, 느껴지는 위안 대신에 순수한 믿음의 수준에서 하나님의 현존이 주는 안정된 감각을 받아들이면서, 치유는 우리에게 일어난다. 순수한 믿음은 어떠한 종류의 대가를 바라지 않으며, 특히 '영적인 정크'라고 할 수 있는 감각적 위안을 바라지 않는다. 영적인 여정의 단단한 음식은 순수한 믿음이다. 이것은 '생명으로 이르는 좁은 길'이며 어떤 특별한 심리적인 느낌이나 경험 없이 그저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다림으로써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향성이 어두움에 떠오르는 별과 같다. 그것이 관상기도의 '초점'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봉사하고, 하나님께 귀를 귀울이고, 하나님을 기다리고, 하나님께 맡겨 드린다는 우리의 지향이 순수하게 남아 있는 한, 어떠한 종류의 사고를 하더라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것들은 우리 기도의 순수함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意志)가 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치료에 자신을 맡겨 드리고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지향이 확고하면, 신성한 치료는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영적 여정이 잘 진전되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지향에 거짓 자아가 끼여들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거짓 자아는 착각을 주는 데에 도사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위하여, 그리고 자신을 하나님에게 굴복시키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생각도, 영적인 자만에 아주 미묘하게 영향을 줄 수 있다. 영적 자만에 대한 마지막 정화가 전통적으로 영의 어둔 밤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것은 무의식에 있는 거짓 자아의 잔재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한, 그리고 결과적으로 변형적 일치를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마지막 정화가 진행될 때까지 우리는 우리의 지향성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하면서, 섬세하게 일어나는 집착들을 알아차리자마자 그것을 인정하고 끊어 버린다. 우리가 그 거짓 자아를 전례로 가져오고 성사를 받을 때에 가져올 수는 있지만, 그 거짓 자아를 관상기도에 언제까지나 가져올 수는 없다. 그 이유는 관상기도의 성질이 그 거짓 자아를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의사소통하시는 주파수가 높을수록, 신적 전달은 더욱 잘된다. 가장 높은 수준을 해석할 만한 인간의 기능은 없다. 믿음만으로 그것과 접촉할 수 있다. 어떻게 우리의 동의로서. 이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 처음에는 이처럼 극히 단순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현존하신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분의 현존을 놓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문제이다. 모든 영적인 훈련은 하나님께서 부재(不在)하시다는 극적인 착각을 줄이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지(부재하시지) 않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대로 우리가 실제로 행동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재하신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 혼동을 용해시키기 위해 어떠한 일을 하기만 해도 우리의 영적 여정은 앞으로 나간다.
  무의식을 덜어 냄은 보통 정서적으로 부하된 사고의 형태를 취한다. 우리의 기도가 자리 잡고 나면, 덜어 내는 과정은 어둔 밤이 극렬하게 진행되는 때와 같이 어떤 정화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눈에 덜 뜨이게 된다. 다음그림에서 보듯이 사고와 휴식은 같은 원형과정에 있는 다른 두 개의 순간이다. 사고에 저항하거나
                     


그것들을 자신의 주의를 산만하게 만드는 것으로 간주하면, 우리는 덜어 내는 과정에도 저항하는 것이며, 우리의 치유를 지연시킨다. 우리가 저항하지 않으면 그 과정은 계속된다. 그러므로 기본적인 수련은 그저 수련하는 것이다.
  물론 향심기도가 우리에게 좋은지를 알 권리가 우리에게는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좋은지를 아는 좋은 방법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나타나는 영향을 보는 것뿐이다. 그러면 그것은 어떠한 영향을 말하는 것인가 우리 인간에게는 성공을 어떤 큰 것으로 간주하는 속성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가치체계는 아니다. 거룩한 단어로 계속 다시 돌아감으로써 우리는 점차로 거짓 자아의 껍질들을 사라지게 하며 마침내는 그것들이 없어져 버린다. 그러고 나면 우리의 지향은 더 이상 도전을 받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네" 라고 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점점 더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의 동기로 행동하게 되는데, 이것은 어렸을 적에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만든 자기중심적 우주나 자신이 만든 자아에서 동기를 얻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수련에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여기 다른 현상 하나를 지적해야겠다. 여기서 '경험이 있는' 이란 말은 그것을 몇 년간 하루에 두 번씩 수련해 온 사람들을 말한다. 당신이 기도를 시작하여 휴식이나 평화로 옮겨가고 있다고 치자. 초심자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어떤 것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면 거룩한 단어로 아주 부드럽게 돌아가라."
후에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어떤 사고에 이끌리고 있음을 알아차릴 때마다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라."
초심자는 이 두 가지의 차이를 분간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거룩한 단어는 지향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우리 존재의 영적인 수준을 향해 가고자 하는 의지의 움직임이다. 우리가 평화에 도달하면 이중의 인식 수준이 나타난다. 25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나, 내일 일어날 일들, 아니면 다음 여름휴가에 대한 계획 등과 같은 사고들이 지나간다고 치자. 동시에 우리는 이러한 일들에 대하여 흥미를 갖고 있지 않음도 안다. 이럴 때에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야 하는가' 라고 생각한다.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야 하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우리가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거룩한 단어가 우리를 가도록 촉진하고 있는 그곳에 이미 와 있기 때문이다. 거룩한 단어는 그 이상의 일을 할 수 없다. 우리가 평화의 장소에 와 있으면, 우리는 더 이상 방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방법은 바로 깊은 평화에 머물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향심기도 중에 때로 우리는 두 가지 의식의 수준을 동시에 경험한다. 하나는 우리가 흥미를 느끼지 않는 사고와 감정의 인식,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섬세한 현존의 인식이다. 이러한 경우에 많은 사고가 지나가더라도 우리는 거기에 주의를 주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거리에서 들려오는 소음이나 슈퍼마켓에서 들려주는 음악과 같다. 우리는 그것을 무시하고 그대로 참아 낸다. 만일 우리가 그 소음을 없애기 위하여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려고 애쓴다면, 우리의 평화를 불필요하게 깨뜨리고 만다. 어떤 마음을 끄는 사고가 우리를 일상적인 인식의 수준(강의 표면)으로 끌어 올린다고 알아차렸을 때에만 우리가 거룩한 단어로 돌아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가 아주 순수해진 곳에 있기 때문에 거룩한 단어를 분명하게 떠올릴 필요도 없다. 우리는 단지 그것이 없어진 것을 알아차리고 그저 떠올리기만 하면 된다. 그 정도의 일이 아마도 내적 평화로 향하는 움직임을 다시 찾는 데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섬세하더라도 우리의 지향의 순수성이 도전을 받을 때에는 그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아주 덜어 냄을 심하게 하는 기간에 무의식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치 지하의 화산이 폭발하거나 지진이 일어나는 것과 흡사하다. 아니면 밀려오는 파도처럼 사고와 지각과 정서들이 거룩한 단어를 파묻어 버리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우리가 거룩한 단어를 찾을 수 없거나 찾는다 해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경우에는 일어나는 그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거룩한 단어의 구실을 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식 안에 원시적인 정서나 괴롭히는 사고들이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과 함께하고 싶다는 우리의 지향을 나타내는 상징이 될 수도 있다. 그것들이 사라지고 나면 그때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거룩한 단어로 돌아간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소나기였던 것이다. 비록 폭풍우 속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그것이 지나간 것으로 만족하고 거룩한 단어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평화란 우리가 모든 것, 즉 하나님, 자신, 다른 사람 그리고 우주에 대하여 갖는 올바른 관계이다. 이것은 평형을 유지하는 행동이다. 그 경험이 아주 섬세하여 우리는 그것을 경험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분명히 경험이지만, 우리가 그 이상의 것을 바란다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마치 복음의 비유에서 겨자씨와 같다. 그것이 아주 작기는 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나중에 큰 나무로 자란다. 우리의 시야를 일상적인 삶의 흐름 안에 유지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거기가 하나님의 왕국이 진정으로 있는 곳이다. 평상적인 삶의 흐름 밖으로 나온 것을 알아차리면 즉시 이것이 과연 하나님 왕국인가를 의심해야 한다. 키딩은 무의식을 덜어 내는 것에 대하여 걱정하는 것보다는 환시라든가 음성을 듣는 것과 같은 커다란 경험들을 더 우려한다. 이것들은 다루기가 더 어렵다. 이러한 것들이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온 의사소통이 아니라고 믿기도 어렵기는 하지만, 사실상, 이러한 의사소통에 대하여 우리가 그렇게 해석하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십자가의 요한에 따르면 하나님을 가장 안전하게, 확실하게 그리고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순수한 믿음이다. 그의 표현으로는 이것이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첩경'이다. 이 가르침은 훌륭하며 아주 순수하다. 그렇지만 보상적인 만족에 대한 욕망을 가질 희망을 배제하지도 않았다. 보상적 욕망은 하나님과의 일치가 오는 것을 늦추게 한다. 보상에 대한 욕망은 영적인 여정의 관점에서 볼 때에, 영적인 군것질이나 정크 음식을 찾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이 따위의 모든 것들을 정화하셔야 한다.
  그러면 무엇이 진정한 음식이며, 그것이 우리를 어떻게 양육할 것인가 히브리의 저자들은 인간의 기본요소로서 육체와 영혼과 영을 구분했다. 신체적인 육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적인 육신을 말한다. 영혼은 자체의 특수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그 표현 중의 하나가 우리의 정서로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경험한다. 그 예로서,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동정을 느끼거나 즉각 친밀감을 느낀다. 그 사람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 사람의 삶이나 욕망 같은 것들에 대하여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 안에 있는 그 무엇이 그 사람과 반향을 일으켜서, 그와 친구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안다. 혹은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당신이 하신 일이 나를 깊이 감동(touch)시켰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실제로 그 사람을 만지거나(touch) 하지 않았지만 거기에는 정서적인 상호작용이 있었던 것이다.
  '영'은 아마도 우리의 영적인 에너지를 말하는 것일 터인데,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 존재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신다는 것에 대하여 단순히 다르게 묘사한 방법이다. 심리적인 인식의 표면적인 수준 아래에는 더 깊은 영적인 수준이 있어서, 거기에서 사고와 감정의 일상적인 기능들보다 더 깊은 수준으로 하나님과 친밀하게 조율하고 있는 것이다. 이 수준이 향심기도로 지향(志向)하고자 하는 수준이다. 우리 존재의 핵심 안에서는 하나님의 내재하심에 대한 인식이 더 친밀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영적인 에너지가 활성화되고(하나님의 현존에 대하여 우리가 더욱 민감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그것들의 온전한 잠재력에 실제로 접촉하게 될 때에는 우리는 낮은 수준에서 그것들을 덜 지각한다. 그리고 감각적 위안과 성찰은 관심 밖으로 떨어져 나간다. 그것들이 아직 존재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이상 거기에 의존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육신과 영혼과 영의 세 수준에서 우리를 양육하시는 것 같다. 개인적인 발전이 진전되면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더욱 확장되고 심오해진다. 성령은 우리 자신 안에 경험하고 있는 모든 질병을 재정비하셔서 우리 존재의 각 수준에 알맞게 우리의 거룩한 에너지를 표현할 수 있게 하신다.


  양자 역학에 따르면 여러 가지 수준의 물질 에너지들은 동시에 같은 물리적 공간을 공유할 수 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하게, 신적인 에너지는 우리 안에서, 우리가 전혀 지각하지 못하는 여러 수준에서 일하실 수 있다. 그것은 이 에너지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든가 존재하더라도 현존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은총의 수준에서는, 우리가 성장하는 데에는 디딤돌이 되어 주기 때문에 좋았지만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이 온전하게 나타나는 데는 적절하지 못한, 집착이나 지나친 의존들에게서 믿음이 정화된다. 영적인 여정은 이렇게 하여 우리의 즉각적인 인식에서 떨어져 나가기도 한다. 신적인 에너지는 우리의 기능들이 그 에너지를 가장 지각하지 못하는 때에 가장 힘을 발휘하신다. 우리가 향심기도를 하려고 앉아서 우리의 지향을 정하고 나면, 하나님의 현존이 이미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그 현존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우리가 해야 할 모든 일이란 그저 동의하는 것이다. 신성한 에너지는 우리 안으로 우리를 통하여 흐른다. 가장 순수한 형태 안에서는 그것이 최대의 힘으로 24시간 열려 있다. 동의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또 무엇인지에 대하여 알려고 노력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그대로에게 우리를 열어 드린다.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인 역사나, 문화적 조건화나, 성격상의 편견으로 그것을 표현하고 전달하고 또 해석하는 매체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현존에 동의한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의 조건하에서 자신을 전달하신다. 그것은 우리의 동의이다. 환시나 위안이나 체험이나 심리적인 성취 등은 모두 어느 정도 가치를 가지고 있겠지만, 순수한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전부라는 최대의 가치를 우리에게 가리키(指)는 극히 제한된 가치들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믿음이 일단 확신으로 형성되고 나면, 내가 누구인가, 그리고 하나님은 누구이신가에 대한 관점에 변화를 준다. 이것은 신학적 덕과 성령 칠은을 통하여 적절히 작용해서, 일상생활의 현실과 일과들에 올바르게 반응할 수 있게 하고, 평범한 사람, 보잘것없는 사람, 그리고 고통받는 사람들 안에 계신 하나님의 현존을 알아볼 수 있게 만든다.


  여기에 에너지가 아직 더 남아 있는데 그것은 다음 삶을 위해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신학자들이 Beatific Vision(천국에서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본다는 신학적 용어 : 역자 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신체적 육신의 한계에서 자유를 얻을 것이 요구된다. 이 에너지는 아주 강력해서 만일 일상생활의 사건들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끼여들어서 이 신적인 에너지와 우리가 계속해서 접촉하는 것을 분산시켜 주지 않고 그 에너지에 우리가 그대로 노출되었더라면 우리의 존재는 아마도 그 강한 힘 때문에 순식간에 승화되어 흔적만 남고 사라졌을 것이다. 이 에너지가 성운(星雲)을 형성하는 에너지이다. 우리는 이 에너지를 한 번에 조금씩만 받을 수 있을 뿐이다. 하늘나라에서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 받을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본질을 말하자면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되는데, 그러고 나서야 우리의 육신은 영광을 받고 이 에너지를 다룰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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