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향심기도1-퍼온글

###향심기도(마음의 기도)


제1절  향심기도의 발상


   향심기도는 14세기 무명의 작가가 쓴 「무지의 구름」과 십자가의 성 요한 등과 같은 사람들의 그리스도인 전통에서 나온 하나의 기도 방법이다. 향심기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현존으로 들어가게 하여 듣고 받아들이는(受容的) 관상적 태도를 길러 준다. 이것은 가톨릭 전통에서 언제나 성령의 순수한 선물이라고 생각해 온 것과 같은 엄격한 의미의 관상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의 너무나 바쁜 마음과 삶 때문에 오는 장벽을 줄여 줌으로써 관상을 준비하도록 해주는 방법이다.


 제2절  향심 기도의 첫 단계들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로마 가톨릭 교회는 사제나 수도자들에게만 국한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온전한 크리스찬 생활을 하도록 권장하여 왔다. 이것은 평신도들도 봉쇄 생활을 하지 않으면서도 복음의 관상적 차원을 생활화할 수 있는 어떤 구조적 삶을 각자가 찾을 창의력과 책임을 가지라는 것을 뜻한다. 봉쇄 생활이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곳에 사는 수도자 수녀들에게도 결점들도 있고 허점들도 있다.   수도 생활이란 그 나름대로의 어려움들을 갖고 있는 특수한 생활방식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모든 인간관계가 현미경을 들여다보듯 아주 세밀해진다. 세속에서와 같은 시험은 없다고 하겠지만 그들이 부딪치는 시험은 더욱 굴욕적인 것들이다. 수도자들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흥분하게 되며 왜 그렇게 흥분하는지 알지 못할 때도 많다.


  신적인 일치(Divine union : 하나님과의 일치)는 모든 크리스찬의 목표이다. 우리는 세례를 받고 성례를 행하며, 인간으로서 또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장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특수한 삶의 방식만이 이 목표를 달성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기도에 앞선 사람들은 결혼을 한 사람들이거나 목회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며 그들은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하루 종일 바쁘게 뛰는 사람들이다. 몇 년 전에 나는 평신도 단체들의 대표들 모임을 가진 적이 있었다. 이 단체들은 부부 피정(marriage encounter), 사회 활동 단체, 사회기구, 새로운 공동체들이었다. 나의 주제는 수도원 영성에 바탕을 둔 것이었는데 나는 "수도원"이란 말 대신 "크리스찬"이란 말을 썼다. 이 전통적인 가르침(수도 생활에 관한)에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것을 보고 나는 매우 감동을 받았다. 수도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자신들의 경험과 연결되었던 것이다. 이 예는 영적 여정이 복음을 열성적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크리스찬에게 해당된다는 확신을 나에게 주었다.


  신적인 일치라는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신적일치를 이루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 위에 동양이나 서양의 영성 수련은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향심 기도는 관상 기도로 들어가는 데에 일어나는 장애를 줄이려고 만들어진 것이다. 이 신중하게 마련된 방법은 관상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제공한다. 이것은 크리스찬 전통의 영성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낡은 서가 속에서 꺼내어 현대의 밝은 빛으로 내놓은 방법이다. 동양의 묵상훈련 방법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사실이 이러한 방법들이 오늘날에 중요하다는 것임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향심 기도는 단지 방법일 뿐만은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기도이다. 만일에 우리가 관상 기도로 이끌어가는 방법도 관상 기도의 일부라고 그 뜻을 확장 해석한다면, 향심기도는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기 위하여 한 단계 한 단계씩 오르는 관상 기도의 사다리에서 제일 첫번째 다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향심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직관력을 세련시켜 관상 기도로 쉽게 들어가게 하는 방법이다. 향심 기도는 이렇게 가는 유일한 길일뿐만 아니라 매우 좋은 길이다. " 방법으로 말하자면 향심 기도는 수도 영성의 하나의 정수(精髓)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수도훈련의 기본을 하루에 두 차례씩의 기도 기간으로 응축시킨 것이다. 우리가 항생제를 먹을 때 약물로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적당량의 항생제를 먹어야 한다. 또 그 질병을 이기기 위해서 핏속에 요구되는 양만큼의 항생제가 들어 있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관상 기도로 이득을 보기 위해서는 우리의 심령과 신경 조직에 어느 수준의 내적 침묵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수련으로서의 향심 기도는 우리의 정신 집중이 우리의 일상적인 사고의 흐름에서부터 빠져 나오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우리자신을 그 사고의 흐름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그 보다 더 깊은 자아의 부분이 있는 것이다. 이 기도는 우리의 의식을 우리 존재의 영적 수준에 열도록 하는 것이다." 이 수준을 토마스 키딩은 “우리의 기억, 상상, 감정, 내적 체험, 외부 사물의 인식 등과 같은 것이 더 있는 큰 강으로 비유한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적인 사고와 감정에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위와 같은 정신적 현상들이 솟아나는 그 원천을 의식하지 못한다. 배나 물건들이 강의 표면에 떠 있듯이 우리의 사고와 감정들도 어디엔가 떠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내적 의식의 흐름 위에 떠 있으며 이 내적 의식의 흐름으로써 우리는 우리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안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수준은 우리의 일상적 의식에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가 이 수준과 직접 접촉하지 않고 있으므로 우리가 이 수준의 의식을 개발하기 위하여는 어떤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우리 인간적 존재의 이 수준이 바로 우리를 가장 인간적이게 만드는 수준이다. 우리의 심령 위를 떠내려가는 가치들보다도 내적 수준에서 발견하는 가치가 우리에게는 더욱 기쁨을 주는 가치들이다. 우리는 이 수준에 들어가 매일매일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해야 한다. 우리에게 신체 훈련, 음식, 휴식, 수면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내적 침묵의 순간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침묵이 우리에게 가장 깊은 새로움을 주기 때문이다.
 


 단순한 믿음이란 하나님께 자신을 열고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것이다. 영적 여정을 위해서 우리는 다른 곳으로 갈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와 함께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의 일상적 사고(思考)가 우리 의식의 후면으로 물러나게 하여서 우리가 그 사고들을 의식하지 않은 채 우리의 의식이라는 강 위를 떠내려가게 내버려 두고, 그리고는 우리의 의식의 강 자체로 우리의 주의를 돌리는 데 있다. 우리 자신을 강가에 앉아서 배가 떠가는 강을 바라보는 사람으로 치자. 우리가 앉아서 배보다는 강을 바라보다보면, 의식 위에 흐르는 사고(배와 같은)에는 더 이상 주의(注意)를 주지 않는 습관이 발전되면서 좀 더 깊은 주의 집중이 생겨날 것이다.
  이 방법에서는 우리의 내적 의식의 스크린에 비춰지는 어떠한 지각(知覺)도 사고라고 본다. 이것이 정서, 영상, 기억, 계획, 외부에서 오는 소음, 평화스런 감정, 심지어 영적 교감일 수도 있다. 다른 말로하면 의식의 내적 스크린에 비춰지는 어떠한 것도 "사고'라고 간주한다. 이 기도(향심 기도)의 방법은 기도 중에 일어나는 어떠한 사고, 심지어 아주 신앙심 깊은 사고라 할지라도 떠 내려 보내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떠 내려 보내기 위하여서는 비교적 편안한 자세를 가져서 자신의 몸에 대한 사고(思考)가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 혈액 순환을 방해하는 자세도 피해야 한다. 이래야 도중에 몸의 불편을 느끼지 않게 된다. 지나친 소음이나 기대하지 않았던 소음 때문에 방해되지 않을 비교적 조용한 장소를 선택해야 한다. 집안에 그럴 만한 장소가 없을 경우에는 가장 방해받지 않을 시간을 선택하라.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눈을 감는 것이 좋다. 일상 활동으로부터 감각들을 거두어들이면 깊은 휴식을 가질 수 있다. 전화 소리와 같은 갑작스런 소리나 방해가 생겨서 깨우게 될 수도 있다. 자명종이나 타이머로 끝나는 시간을 알리도록 되어 있으면 가급적 소리가 조용한 것이 좋다. 시계가 시끄러운 것이면 베개로 덮어 둔다. 외부 소음을 가급적 줄이도록 함이 좋다. 소음이 일어나더라도 흥분하지 말라. 흥분하는 것은 감정으로 채워진 사고의 일종으로서 일단 침묵에 이른 상태를 깨어 버리게 된다. 가장 정신이 맑은 때를 기도 시간으로 선택하라. 하루의 일상 사업이 시작되기 전의 아침 시간이 좋은 시간이다.
  이렇게 편하게 느낄 적절한 시간, 장소 의자, 자세들을 선택하였으면 눈을 감고,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열고 자신을 내어 드리는 의향을 표시하는 거룩한 단어를 선택하여 그 단어를 상상의 수준에 도입한다. 이 단어를 입술로나 목소리로 나타내지 않는다. 편하게 느끼는 한두 음절이나 한 단어라야 한다. 당신이 기도 중에 무슨 사고가 의식 속에 들어왔을 때마다 그 단어를 가볍게 의식 속에 떠올린다.
  거룩한 단어는 당신이 가고 싶은 어떤 곳으로 가게 하는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당신의 지향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함으로써 당신의 영적 성향이 이끌리는 그 무엇에 대하여 더욱 깊은 의식을 갖도록 개발하는 데 필요한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당신의 목적은 모든 생각을 뛰어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의 은총의 힘이 아주 강해서 하나님 안에 곧바로 빠져 들지 않는 한, 침묵을 시작한 뒤 한동안은 사고들이 떠오를 것이다. 향심 기도는 스위치를 켜듯 하나님의 현존을 켜는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 다음은 하나님에게 달렸다. 향심 기도는 하나님께 당신 자신을 맡겨 드리는 것이며, 그 결과를 결정하는 이는 하나님이다.
  당신은 아마도 두 손을 합장하고 손가락들을 하늘로 향하는 자세를 알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모든 심적 기능들을 함께 모아 하나님께로 향함을 뜻한다. 거룩한 단어는 이와 똑같은 목적을 갖는다. 이것은 방향을 가리키는 지침이며 육신적이 아니라 정신적인 지침(pointer)이다. 거룩한 단어는 전혀 애쓰지 않으면서 도입해야 하는데, 아무런 노력 없이 자발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처럼 의식에 떠올려야 한다.
  거룩한 단어는 일단 잘 습관화되면, 보통 떠오르는 일상적 사고들의 수를 줄이는 방법이 되며 의식의 흐름을 타고 흐르는 사고들 중에서 관심을 끄는 사고들을 막아 주는 방법이 된다. 이것은 그 사고들과 직접 부딪쳐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안에 현존하시며 내 안에서 활동하시게 하는 당신의 지향을 다시 한 번 확인함으로써 이루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당신 의지가 동의(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대한)를 거듭하고 이것이 습관이 됨으로써, 당신은 불요불급한 사고의 흐름들을 쉽게 무시할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어느 시간 동안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하여 불안하게 느낀다면, 아무도 밤에 6, 7시간 동안 잠드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바란다. 그렇지만 이 기도를 행함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매우 조용한 활동이다. 계속해서 거룩한 단어로 되돌아감으로써 당신의 의지가 지속해서 하나님께 동의하는 것이며, 이것이 정신이 깨어 있기에 충분하고도 정상적인 활동인 것이다.
  20, 30분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적 고요를 이루고 피상적인 사고수준을 넘어가는 데 필요한 시간이다. 당신은 아마 더 계속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경험을 하다보면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를 알게 된다. 적당한 시간이 지난 다음에 당신의 일상적인 사고로 다시 되돌아간다. 이 시간이 아마도 하나님과 대화하기 좋은 때일 것이다. 이때에 당신은 조용히 목소리로 기도하기 원할 수도 있으며 하루의 일과를 계획하기를 원할 수도 있다. 눈을 뜨기 전에 최소한 2분 정도 그대로 있는 것이 좋다. 잠시 동안 외적이거나 내적 감각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깊은 영적 주의성을 얻게 되므로 금방 눈을 뜨면 신경을 거스르게 된다. 
 


이 기도를 매일 수련함으로써 당신 존재의 영적 차원에 대한 감수성이 개발되면서 일상 활동을 하는 시간에도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인식이 일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으면서도 당신은 하나님께 내면으로 향하라고 불린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당신의 영적 생활의 질이 향상되면서 이전에 느껴 보지 못하였지만 이제는 세상으로부터 어떤 진동 같은 것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을 억지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당신의 일상 직업 중에 하나님이 현존하심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마치 흑백 텔레비전 스크린에 색상을 가한 것과 같다. 영상은 그대로이지만 이전에는 감지하지 못했던 새로운 영상의 차원(色)으로 질이 아주 높여진 것이다. 과거에도 하나님은 현존하셨지만 이 현존을 감지할 적절한 도구가 없었기 때문에 전달되지 않았을 뿐이다.
  언제나 존재하였고 또 참여하도록 초대되어 왔던 실재의 더 충만한 수준으로 자신을 조율하는 방법이 관상 기도이다. 이와 같은 확장된 의식으로 가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을 줄이기 위하여 몇 가지 합당한 훈련이 필요하다. 한 가지 길은 의식의 흐름을 타고 일상적 사고가 흐르는 속도를 늦추는 일이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사고들 사이사이에 틈이 생기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사고의 저변에 있는 실재를 인식하기 시작하게 된다.
  이 향심 기도를 논의하면서 호흡조절이라든가 요가라든가 달리기처럼 우리의 신체와 정신과 신경을 평온하게 만드는 어떤 방법을 계발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방법들은 이완 작용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믿음의 관계다. 이러한 관계는 매일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자신을 열어 드리기 위하여 시간을 내어드리는 것으로 나타내는데, 다시 말하면 누구도 깨뜨릴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심각한 데이트를 하나님과 갖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기도는 사고(思考)라는 정신 기능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병석에 있을 때에도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향심 기도에서 가장 근본적인 마음가짐은 하나님께 자신을 열어드리는 것이다. 크리스찬의 수련은 인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신약 성서에 의하면 인내란 무제한의 시간 동안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며, 중도에 포기하거나 지루함이나 절망으로 빠지지 않음을 뜻한다. 이것은 복음서에서 자정이 지나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마음가짐과 같다. 주인이 마침내 집에 돌아오면 그 종은 그 때에 집안일을 맡아서 해야 한다. 이와 같이 당신이 만일 참고 기다린다면 하나님은 결국 자신을 드러내 보이실 것이다. 물론 오랫동안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제3절 향심기도에서 의지와 지향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영원으로부터 한 말씀을 하시며 이 말씀을 침묵 속에서 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이 침묵 속에서 그 말씀을 듣는다."라고 했다. 이러한 말을 빌리면 침묵이 하나님의 첫 번째 언어이고, 나머지는 모두 유치한 번역이라고 볼 수 있다. 향심기도나 다른 전통적인 수련의 방법들은 우리의 감지기관을 아주 순수하게 만들어,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과 우리의 가장 깊은 존재에게 아주 단순하게 하시는 말씀을 더욱 잘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방법들이다. 그러므로 향심기도는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에 관상기도 자체가 아니고 관상을 준비하는 기도이다. 그렇지만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그것은 관상기도라는 사다리에서 첫 단이라고 부를 수 있다.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향심기도가 어느 때에 엄격한 의미의 관상이 되는지 알 수 없다. 우리는 단지 수련을 통하여 우리가 그 방향으로 가고 있으며 성령께서 우리를 향하여 움직여 오신다는 것을 알뿐이다. 우리의 수련이 더욱 습관화되어 감에 따라 성령이 주시는 지혜와 이해의 은사가 더욱 강해지고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떠맡아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 습관적으로 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꼭 기도 중에만 느껴지는 것은 아니고 일상생활 중에 그 효과를 경험하게 된다. 향심기도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면 우리의 내적 침묵의 능력이 향상되고 일상생활 중에 성령의 섬세한 움직임에 대하여 민감해지면서 우리를 정화와 거룩함으로 인도한다.
  이 수련 중에 우리의 활동이 한 몫을 하기는 하지만 아주 부드러운 활동이다. 우리의 활동이 아주 최소한으로 될 때에 우리의 공헌(기도에 대한)이 시작되고, 우리의 활동이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에 공헌이 끝난다. 향심기도의 기본적인 수련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것에 동의한다는 지향을 나타내는 단어 -예를 들면, "아빠", "예수님", "평화" 혹은 이와 유사한 다른 단어들- 를 선택하는 것과 우리의 지향이 점점 흐려져 갈 때에 그 단어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향심기도는 아마도 관상으로 이르게 하는 움직임을 촉진하기 위해 만들어진 수련 중에서 가장 수용적(소극적)인 방법일 것이다. '수용적'이란 말로 내가 무엇을 뜻하려고 하는가  다양한 수용적인 그리고 주의 집중적인 수련들을 눈금으로 나타낸 선상에서 향심기도는 한 쪽 끝을 나타낸다. 향심기도는 주의(注意, attention)를 집중하는 수련도 아니다. 주의를 연습하는 수련도 아니다. 그것은 지향(志向, 의지적으로 마음의 주의를 한 곳으로 향하게 함intention)의 훈련이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 즉 우리의 선택의 기능을 계발하려는 것이다. 또 의지는 우리의 영적인 사랑이 하는 기능이며 기본적으로 의지는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의 감정을 동반하기도 하지만 이것을 반드시 요구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하는 자아포기의 태도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와 다른 생명체에게 가지시는 것과 같은 사랑어린 관심을 다른 사람들에게 갖겠다는 의향과 태도이다.
  향심기도는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받아들이는 것뿐 아니고 하나님의 활동하심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기도기간 중에(그리고 기도하지 않는 기간 중에라도) 갖는 경험은 성령과 우리가 갖는 관계, 그리고 성령은 기본적으로 치유적이라는 특성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우리가 병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일 건강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러한 성령의 의료적인 활동(고전적으로 이것을 정화적이라고 부른다.)에 부딪히면 우리는 아마 대단히 놀랄 것이다. 때때로 하나님 안에서 쉴 때에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어떤 행복한 고요를 경험하는 대신에 무의식으로부터 나오는 강한 정서나 눈물을 흘리는 것과 같은 거친 움직임에 부딪치기도 한다. 우리의 신뢰가 자라면서 이러한 일들을 기도 과정의 일부로 보고 그것을 감수할 수 있게 된다. 어떤 진료는 매우 고통스러울 수가 있는데 이것은 의사가 우리의 고통을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질병이 심각해서 그러한 심각한 치료를 필요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의지는 하나님께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는 버릇을 길러 준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의 기도 안에 성령의 영향도 증가한다. ( 성령이 우리를 향하여 오는 것으로 상상할 수도 있다. 향심기도의 수련이 깊어 갈수록 상호 작용이 생겨서 때로는 우리의 부드러운 활동이 우세하기도 하고 때로는 성령이 기도를 떠맡기도 한다.
  후자의 경험은 아빌라의 데레사가 내면의 성에서 주입된 평정, 고도의 기도, 일치의 기도, 온전한 일치의 기도라고 부른 기도의 상태들에 대해 기술한 내용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것들은 우리 기능들이 침잠하는 수준이며 동시에 이 상태를 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현존의 활동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활동을 다소간에 인식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활동은 더욱 깊은 친밀의 수준에 들어갔을 때에는 단지 현존하심뿐일 수가 있는데, 너무 친밀한 상태에서는 사실상 우리의 여러 기능들은 그것들을 해석하거나 어떤 경험으로 나타내 보일 수도 없는 것이다.


  고요의 기도라는 영적인 위안을 받았다거나 일치의 기도로 하나님 안에 완전히 잠입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성령의 활동이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은 오히려 우리가 너무나 병들어 있어서 특별한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뜻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들로 우쭐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반면에 우리는 그것에 저항해서도 안 된다. 그것들이 우리의 치유에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깊은 치료 중에 치료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치유자와 전이(轉移: transference)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비로운 정서적 과정으로서 우리가 치유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우리가 어릴 적에 있었던 권위적인 인물과 가졌던 관계를 그 치유자에게 전이하는 과정이다. 그러면 그 치유자는 우리가 아동기에 느껴 보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받아들임을 우리에게 보여 줄 수가 있다. 이 받아들임은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정서적 결함을 치유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연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우리를 정서적 수준에서 온전히 받아 주는 경험을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온전한 자아 동일시를 갖거나, 영적 여정에 중요한 자산으로서, 심리학자들이 부르는 튼튼한 자아를 갖기가 매우 힘든 것이다.
  어린 시기부터 많은 상처를 지금까지 가지고 온 바로 이 자아를 우리가 하나님에게 드려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결핍되어 왔기 때문에 자신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심지어 잘못 태어났다는 정서적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현대 우리 문화에 전염병처럼 번진 자기혐오라는 질병의 원천이다. 이 질병은 영적여정이 발달되기 위하여 어느 정도 치유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영적 여정은 우리 자신과 자아 동일시를 포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자아 동일시를 가지고 있지 않는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다.
  영적인 위안을 확인받거나 어느 기간 동안 평화와 새로워지는 기분을 갖는 것은 하나님과 갖는 일종의 전이와 같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부모들이 자신들이 어릴 적부터 가져온 상처들 때문에 알게 모르게 우리를 거부했을지도 모르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확인해 주신다. 우리가 만일 자아 혐오와 어렸을 적의 상처들을 극복할 수 있다면 다음 세대에 상당한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부모들은 자녀들이 다 자라기 전에 자신의 잘못들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지만 이 문제에  대하여 죄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슬픈 이야기는 아담과 하와 때부터 있어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조건이다. 여기에 대하여 가져야 하는 올바른 반응은 우리 자신의 잘못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다루어 그것에서 나와 성장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주 현실적인 과정이 영적여정에서 중요한 측면인 것이다. 진단적인 관점에서, 현대 심리학자들의 발견이 인간 조건이 정말로 무엇인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인간 조건은 병(病)적이기 때문이다.


  성령이 우리의 기도에서 우세하게 되면 향심기도 중에 거룩한 단어나 거룩한 상징을 쓰는 일이 점점 덜 필요하게 되며 덜 중요하게 된다. 우리의 기억이나 상상의 수준에서 어떤 사고들이나 감정에 우리가 집착해 있음을 알게 될 때에 자유로이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며, 이것은 사고들을 밀어 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에 동의한다는 우리의 원래의 지향을 재확인하려는 것이다. 시각적으로 더 적응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팔에 안겨 자신이 쉬고 있다는 영상이나 하나님의 사랑하는 눈빛 안에 머물고 있다는 영상을 쓰기를 더 좋아할 수도 있다. 호흡에 맞추는 것도 허용되는 수련인데 이것은 특히 동양 묵상의 방법에서 호흡수련을 받은 사람들에게 더욱 매력을 준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향심기도 중에 이러한 상징에 주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상징은 단지 우리의 지향을 나타내려고 사용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거룩한 단어도 지향에 초점을 맞추려고 사용하는 것이지, 주의의 대상으로서나 주의집중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거룩한 단어나 거룩한 상징은 비디오카메라에서 초점을 조절하는 기구와 같은 것이다. 만일 청중을 찍으려고 한다면 앞에 앉은 사람들에게 약간 초점을 조절해야 하는데 중간에 있는 사람들은 흐려질 것이다. 중간에 있는 사람들을 찍으려면 그들에게 초점을 맞추기 위하여 렌즈를 조절해야 하며 뒷자리에 앉은 사람들에게도 이와 같이 해야 할 것이다.
  위와 같은 비유에서는 우리가 물리적인 명료성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나는 여기서 다른 문맥에 관하여 생각하고 있다. 거룩한 단어가 가져다 주는 초점 맞추기는 어느 얼굴이나, 물체나, 상징들을 상상 속의 초점에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향이 흐려질 때에 이 지향에 초점을 맞추려는 것이다. 지향은 어떠한 관상기도 수련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인이지만 향심기도 중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 기도 중에 우리가 하는 유일한 활동은, 기도시간 중에 하나님께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도록 동의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지향을 유지하는 것이다.


  어떤 사고나 감정이나 인상에 이끌려서 일상적인 인식의 수준으로 다시 떠오르면 우리의 지향은 흐려진다. 이것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 사고가 무의식에 있는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 중의 어느 하나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그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아동기 때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우리가 비록 복음의 가치를 따르기 위해 아동기의 태도나 행동을 의식적으로는 거부했다 하더라도 정서적 프로그램은 아직도 무의식 속에 잠재해있을 것인데, 예를 들면 자신이 속한 특정한 문화 속에 있는 안전의 상징에 정서적으로 집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어릴적에 가졌던 불안감에서 오는 고통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강하다면 그 결핍의 기억을 무의식 속에 억압해 넣는다. 그러나 무의식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 정서는 에너지이기 때문에 그것을 억압한다고 해서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신체 속에 저장되어있다. 신체는 적절하게 처리되지 않은 정서적 에너지를 저장하는 창고이다. 그 결과로, 어떤 사람은 신체와 신경계통에 에너지가 건강하게 흐르는 것을 막아 버린다. 이것은 다시 그 아픔을 감추기 위하여 보상적 활동을 할 필요를 더 강하게 한다. 중독이란 자신이 직면하기를 원치 않는 정서적 아픔에서 자신의 의식을 분산 시키는 궁극적인 방법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에 영적 여정은 인격 성장의 한 과정이며, 그리고 어른으로서 생활을 파멸시키거나 우리의 인간관계를 방해하는 아동기의 정서 수준에 고착하는 것에서 해방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여정은 신성한 정신치료의 한 형태이며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보통 신체와 정서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수준에서 우리를 치유해 주시는 것이다.
  정서적으로 강한 각각의 수준에는 우리의 기억 저장소에 미리 녹음된 끝없는 비평이 그것과 상응하게 저장되어 있다. 강한 정서가 일어나면 그 사람은 즉시 솟구치는 비평에 사로잡혀서 그 비평들은 평화와 고요와 초연함에서 더욱 멀어지고 그래서 관상을 요구하게 된다. 인식의 표면에 지나가는 사고들이 무의식에 있는 정서 프로그램을 자극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대한 우리의 동의가 점점 흐려질 때에, 우리가 초점을 맞추는 기구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향심기도의 용어상, 이러한 사고들을 강의 표면을 지나는 배로 비교한다. 
  조절을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의 주의가 아니다. 주의는 향심기도에서 2차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특정 사고나 사물 혹은 만트라와 같은 기도에서 하는 것처럼 거룩한 단어에 주의를 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주의는 일반적이며 하나님의 현존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향심기도가 하는 실제의 일은 하나님의 현존에 동의하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심리적인 내용과 함께 현재의 순간을 떠나보내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고나 감정이 비평과 함께 무의식적인 프로그램을 휘저어 일으키면, 우리가 그 '배에 오르기' 전에 거룩한 단어로 돌아간다.


   시간과 인내와 많은 실수를 통하여 우리는 사고들을 즉시 떠나보내는 습관을 기르게 되는데, 우리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함으로써가 아니라 단지 거룩한 단어로 아주 부드럽게 돌아감으로써 한다. 만일 당신이 배에 오른 것을 알게 되거든 그저 단순히 내려라. 거기에 당신이 생각을 가졌다는 자책감이나, 한숨이나, 혹은 괴로운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어떠한 반성도 또 다른 사고, 즉 배인 것이다.
  이 기도는 그 자체가 아주 단순한 -어린이의 특징인 단순성, 이전에 무엇이 일어났는지는 잊어버리고 지금 현재의 순간에 몰두하는 것과 같이- 기도이다. 어린이의 기분이 아주 쉽게 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순간적으로 눈물에서 웃음으로 바뀐다. 단순히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기를 동의하는 것이 향심기도에서 요구되는 활동의 전부이다. 어떠한 분석이나 비평이나, 죄악감이나 자책감은 원래의 사고보다 더욱 산만하게 하는 것이다. 원래의 사고는 아마도 단순히 미래에 대한 계획이거나 하나의 기억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원래의 사고는 감정이나 부끄러움이나 죄악감같이 정서를 동반하는 사고처럼 내적 침묵에서부터 당신을 끌어내 오는 효과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 기도에서 우리의 사고들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습관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사고들을 전부 피할 도리가 없다. 만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관상에서 완전하게 되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그 경우라면 당신은 아마도 이 책을 읽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이 다른 99.9퍼센트의 사람과 같다면 이러한 과정 속에 어느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며 당신의 일생 중에 아마도 끝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 여정은 기도 중에 일어난 것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기도 중에 일어난 일이 우리의 일상생활을 정화 과정의 연속이 되도록 만드는 데 있는 것이다. 평범한 일상생활의 부침(浮沈)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여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죽음, 있는 그대로 우리와 결속을 하신다. 완덕이란 우리가 온전하다고 느끼거나 완전해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우리가 알아차리지 않으면서도 하는 데 있다. 어떠한 점수도 바라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저 행할 뿐이다.


  이것을 정리하면, 우리의 지향을 온전히 명료하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도구와 같이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취약하며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이 아직도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어느 때이고 원래의 지향 -즉 우리 안에 하나님이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것에 동의한다는 지향- 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어떤 방법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정기적으로 수련을 하면, 우리는 즉시 떠나보내는 것이 수월해진다. 그러면 우리는 무지의 구름으로 들어가는데 이 무지의 구름은 조그만 동의의 행동을 계속 반복함으로써 발전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충분하게 정서적 프로그램을 무너뜨렸으므로, 그것들이 다시 침입해 들어오는 것에 민감해져서 우리의 원래의 지향에 즉시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이며, 때로는 거룩한 단어나 상징으로 돌아올 필요조차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 한다.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우리를 열어 드린다는 우리의 지향의 상징으로서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는 데서 오는 어떠한 움직임으로, 우리의 존재의 영적인 수준에 조금씩 다가간다. 이것을 다른 비유로 말한다면 강의 표면을 따라 지나가는 것보다는 의식이라는 강 자체에 일반적인 주의성을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거룩한 단어는 우리의 지향성의 상징일 뿐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선택해야 하는 단어도 없고 더 좋고 나쁜 것도 없다. 그러나 어떤 단어는 아이디어의 연상을 불러 오고 다른 일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으며 이러한 단어는 피하는 것이 좋다. 이 기도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주의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능력을 발전시킨다. 사랑으로 한다는 것의 특징은 수련에 충실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수련을 하는 동안 인내를 가지고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향심기도의 지침


1.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한다는 지향을 상징하는  거룩한 단어를 선택한다.
2. 편안한 자세로 앉아 눈을 감고 잠시 마음을 정리한   다음 하나님께서 내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것에 동의한다는 상징으로 거룩한 단어를 마음에 떠 올
   린다.
3. 어떤 사고가 마음속에 들어온 것을 인식하게 되면, 아 주 부드럽게 그 거룩한 단어로 돌아간다.
4. 기도시간이 끝나면 눈을 감고 약 2분간 침묵 속에 머문다.


 
제4절  상징으로서의 거룩한 단어


  거룩한 단어는 당신이 어떠한 것을 선택하였든지 관계없이 거룩하다. 그 이유는 그 단어의 뜻이 거룩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지향이 거룩한 때문이다. 거룩한 단어는 절대 신비이며 당신 안에 머물고 계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열어 드린다는 당신의 지향을 나타낸다. 그것은 당신의 의식 속에 지나가는 어떤 사고에 당신이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되돌아가야 하는 초점이 된다.
  그 단어에 편한 느낌이 들면 그 단어에 머물러라. 만일 당신이 어떤 다른 단어로 옮기고 싶으면 옮겨도 좋다. 그러나 이 단어 저 단어로 계속 옮겨 다니지 말라. 거룩한 단어는 당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나 화살표이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열어드리고 그분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당신의 지향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누가 다른 시간에 다른 형태의 기도를 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향심기도는 특별히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아니다. 당신을 하나님께 열어 드림으로써 당신은 의미상으로는 과거의, 현재의, 그리고 미래의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과 같다. 당신은 모든 창조를 끌어안는 것이다. 이로써 당신은 모든 실재(實在, reality)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실재를 비롯하여, 당신이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당신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실재, 말하자면 당신 존재의 영적 수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거룩한 단어는 당신이 당신의 원천(source)으로 파고들 수 있게 만든다. 인간은 무한한 행복과 평화를 위해 만들어졌다. 우리가 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알았을 때에 우리 자신을 그 방향으로 밀고 갈 필요는 없다. 어려운 점은 우리가 대부분의 시간 그와 반대의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의 거짓 자아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또 거짓 자아가 관심을 갖는 것, 그리고 그 거짓 자아를 자극하고 강화시키는 세속적인 것들과도 동일시한다.
  거룩한 단어는 의식의 흐름이라는 강의 표면에서 강 밑으로 우리의 의식을 옮겨 주는 방법이나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려는 하나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들고 있는 공을 그냥 놓아 주기만하면 그 공은 제 스스로 땅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러므로 내가 던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양으로 거룩한 단어는 공을 놓아 주듯 모든 생각을 그냥 떠나보내는 방법이다. 이것은 내적 침묵으로 이끌려 있는 영적 기능들이 자동적으로 그 방향으로 끌려갈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이러한 영적 움직임은 어떠한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우리의 일상적인 관심사를 떠나보내려는 뜻만을 필요로 할 뿐이다.
  인간의 의지는 무한한 사랑으로 향하고 인간의 마음은 무한한 진리로 향하도록 만들어진 만큼, 아무 것도 이것을 막지 않는다면 의지와 마음은 사랑과 진리로 향하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의지와 마음이 향하는 자유가 제한된 것은 이것들이 다른 방향으로 돌려졌기 때문이다. 향심기도 중에 이러한 기능들이 자유를 도로 찾게 된다.
  그러므로 거룩한 단어는 여러 가지 사고들을 줄여서 하나님께 열어 드린다는 하나의 생각으로 집약시키는 방법이다. 그것은 번잡한 상상을 침묵으로 옮겨 주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 은총의 힘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곳, 즉 영적인 영역으로 우리 자신이 들어갈 수 있도록 허용해 주는 조건이다.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떼어놓는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바로 우리의 생각이다. 우리가 그 생각을 떨쳐 버리면 우리의 문제는 상당히 줄어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며 그분이 모든 실재의 부분이시라는 믿음을 갖는데 실패한다. 현재의 순간순간, 우리가 보는 모든 사물들, 우리 존재의 근저(根底)가 모두 그분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확인하는 개인적 체험을 갖게 될 때까지는 이것을 잘 믿으려 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점진적으로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서로서로를 통하여, 그리고 모든 이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현존하신다는 내적 체험을 갖고 나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 모든 사건들, 그리고 모든 자연들 속에 계신 그분을 감지하는 능력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때에 우리는 어떠한 외적인 감각으로 그리고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의 일치를 즐기는 체험을 갖게 된다.
  관상기도는 우리 자신이 몸담고 있는 실재를 각성하는 하나의 길이다. 우리는 우리가 숨 쉬고 있는 공기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고 살지만 공기는 언제나 우리 안에, 우리 주변에 있다. 그와 같은 모양으로 하나님의 현존은 언제나 우리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시고 우리주변에 계시며, 또 우리를 감싸 주고 계신다. 우리의 인식은 이러한 실재의 차원에 대하여서 불행하게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기도와 성사와 영적 수련의 목적은 우리가 이것을 각성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은 매 순간순간에 현존하시지만 우리는 세상을 보는 우리의 관점 때문에 우리 안에 커다란 장애를 만들어 놓았다. 그러한 관점은 그리스도의 마음, 바로 그분의 말씀의 차원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 바울 사도에 의하면 믿음과 세례로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의 것으로 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진정으로 우리 것으로 하려면 그리스도의 초대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이 발전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들어라_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함께 먹게 될 것이다."(계 3:20) 하시며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이다. 문을 여는 데에 큰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일상적 관심사들에는 우리의 무의식적 가치관들이 내포되어 있다. 어떤 사고들은 우리의 마음을 끈다. 우리가 그것에 집착하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어렸을 때에 형성된 정서적 프로그램에 이 사고와 관련하여 저장되었던 그 무엇이 의식 속으로 솟아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들이 의식 속을 지나갈 때 거기에 심하게 정서적으로 연결된  가치관들이 자극하고 위협을 주기 때문에 우리 의식 속에서 신호등이 빤짝거리며 켜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모든 사고와 사고 형태들을 떠나보내는 훈련을 함으로써 우리의 정서적 속박과 강박에서 점차 자유로워지게 된다. 
 


관상기도 중에 성령께서는 우리가 완전히 안식할 수 있고 어떤 갈등도 없고 영적 전쟁이 필요없는 장소 - 하늘보좌에 계실 뿐 아니라, 자신의 신성과 사랑으로 낳으신 만유 위에 충만하시며, 우리안에 충만히 내재하시는 사랑 그자체이신 그분의 은밀한 품으로 우리를 데려 가셔서 우리를 품어 주신다. 놀랍고도 완전한 보호와 치유!!  거기에서는 마귀는 우리를 전혀 탐지조차 할 수 없다.  또한 성령께서는 은밀한 도유(塗油 : 기름을 발라 주심)를 통하여 우리가 지각할 수 없는 심적 수준에서, 우리 인간의 연약한 성질 때문에 생긴 상처를 치유해 주신다. 그것은 마치 마취된 사람이 수술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모르고 깨어난 후에야 알게 되는 것과 같다. 내적 침묵은 하나님의 사랑이 뿌리 내릴 수 있게 하는 완전한 온상이다.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하나님 사랑의 상징으로 겨자씨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그것은 씨 중에 가장 작은 것이지만 엄청나게 크게 자랄 여지를 갖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자라게 하고 우리를 변형시킬 힘을 가지고 계신다. 관상기도의 목적은 우리의 내적 변형의 과정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음절이나 두 음절의 단어로 그들의 사고들을 떠나보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만일 당신에게 시각적 영상이 더 도움이 된다면 그것을 사용하라. 그러나 그 영상을 상상의 수준에 도입하면서 만일 다른 사고가 들어왔다고 깨달을 때 바로 그 영상으로 부드럽게 되돌아와야 한다. 시각적 영상은 일반적인 것이어야 하며 너무 선명하거나 정밀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예수 성체 앞에서 기도할 때 영상의 방법이 특히 도움이 된다. 그들은 눈을 감고 있으면서 단순히 기도 중에 주님의 현존을 인식한다.
  자신의 호흡을 따라가는 것이 마음을 가라앉게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조심스럽게 구별해야 할 것이 있다. 향심기도에서 기도의 목적은 우리의 모든 사고를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아의 존재의 근저와의 접촉을 더욱 깊게 하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단순한, 순전한 믿음으로 갖는,  사랑 자체이신 그분께로 향한 마음의 지향이 이 기도의 근본이다.  향심기도는 우리의 주의를 어떤 단어나 영상이나 혹은 호흡에 맞추려는 것이 아니고, 호흡보다, 의식 보다, 생각보다 더 가까이 계신 성령님께 하나됨에 동의 하여 예수보혈을 지나, 예수님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 전 존재를 열어 사랑에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ㅣㅈㄴ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사랑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우리를 초청하신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 맡겨 드리며 그분을 응시하며 누리며 그 품에서 안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특별한 자세나, 만트라나 만다라 같은 것에 정신을 집중하여 얻어지는 우리의 영적 특성을 경험하는 것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가 전제되어야 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승복하도록 하는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크리스찬이면서 정신을 고요하게 만들기 위하여 어떤 육신적 심리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면 그것을 기도 중에 실행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만일 예를 들어 당신이 당신의 사고를 평온하게 하기 위한 방법을 지금 사용하고 있다면 그것을 하나님과 더 가까이 가려는 동기를 가지고 해 보라. 향심기도는 정신 이완 훈련은 아니지만 정신 이완의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은 우리의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의 훈련이다.


제5절  동의한다는 몸짓으로서의 거룩한 단어


  앞에서 보았듯이 우리의 의식을 강에 비유하고, 사고들을 강의 표면에 지나가는 배로 견주어 보았다. 강의 표면은 평상시의 심리적 인식수준을 나타낸다. 그렇지만 강에는 깊이도 있듯이 우리의 인식에도 깊이가 있다. 인식의 일상적인 심리적 수준이 있듯이, 인식의 영적인 수준 또한 있어서 거기서 우리의 지력과 의지가 영적인 방법으로 기능하고 있다. 더 깊은 수준 혹은 중심에는, 하나님께서 내재하고 계시면서 거기에서 현존하고 있는 신성한 에너지가 매순간 우리의 존재와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그림 참조).  우리 존재의 가장 중심에 혹은 가장 내면에 인간적인 노력과 하나님의 은총이 만나는데 그것을 신비가들은   '존재의 바탕' (ground of being) 혹은 '영의 정상'(peak of spirit)이라고 부른다.   많은 묵상의 방법들이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지만, 이러한 단어들을 각기 다른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우리 인식의 다른 수준에 표적을 두고 있다.
                      
  거룩한 단어는 우리의 가장 내적 존재 속에 하나님께서 현존하시는 것을 우리의 영인 의지가 동의한다는 표식이다. 그 단어는 상상 속에 나타나지만 일상적 의식의 흐름의 수준에 직접적이고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지향만을 나타내는 것이고, 이 지향은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현존에 나를 열어 드리고 맡기기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향심기도와 다른 수련, 즉 촛불을 바라본다든지, 만트라를 반복한다든지, 어떤 영상을 상상한다든지 하는 것과 같이 어떤 형태의 주의(注意)를 사용하는 방법들과 다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한 단어를 계속해서 반복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의 지향을 유지하기 위해서만 그것을 사용한다. 강 위에 배가 지나가듯이 사고들이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거나 감정을 건드리지 않고 그냥 지나가기만 한다면, 우리는 구태여 거룩한 단어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 이러한 경우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갖는 지향의 방향이 중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향을 나타내는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할 때에, 우리의 의지의 움직임이 상상 속에 아주 섬세하게 나타난다. 그 단어를 조심스럽게 완전하게 발음할 필요도 없다. 단어에 대하여 사색하지도 분석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단지표식이거나 상징일 뿐이다. 우리의 외적인 감각에서 시작하여 (거룩한 바라봄이나 호흡을 이용할 수도 있다), 우리는 영적인 수준과 영적인 감각으로 옮겨 가는데, 이 영적인 감각은 외적인 감각에 비유할 수 있다. 거룩한 단어는 우리의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와 상상 속에 다만 순간적으로 반향하는 반면에, 만트라나 주의집중을 하는 과정은 사고의 흐름을 느려지도록 만든 것이다.
  거룩한 단어의 일차적인 기능은 사고들을 밀어 내려고 하거나 서서히 사라지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현존에 머물고, 기도시간 동안에 성령의 활동에 우리를 맡겨 드린다는 지향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어느 보트가 그냥 지나가지 않고 우리를 끌어당기거나 우리를 밀치려고 할 때에만 거룩한 단어로 돌아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어떤 특별한 사고에 끌려 들어갈 때에는 하나님의 현존에 머문다는 우리의 일반적 사랑의 지향이 순수성을 잃어 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거룩한 단어는 이미 보았듯이 카메라에서 초점을 맞추는 기구와 같은 것인데 이것은 영상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지향에 맞추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를 시작할 때에는 우리의 일반적인 사랑의 지향을 하나님께 향한다. 그것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 수련을 처음 시작할 때에 편하게 느끼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우리는 어떠한 사고라도 예외없이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 둔다. 그것들이 즐거운 것이거나 고통스러운 것이든, 그것들이 영적인 위안을 주는 것이든, 아니면 사고와 감정이 폭우처럼 쏟아지든 관계없이 그냥 보낸다. 때로는 무의식으로부터 오는 사고들의 폭풍 속에 휘말려서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기 어렵거나 불가능한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는 그냥 가만히 앉아 그것을 감수하면, 그 고통 자체가 거룩한 단어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포기도 우리의 내면에서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하심에 대하여 깊은 동의를 하는 것과 같다.


  관상으로 이르게 하는 모든 방법들은 다소간에 사고과정을 지나쳐 버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사고 과정이 우리의 중독적인 과정 -강박적인 사고에 기름을 붓거나 고통에 가면을 씌우기 위하여 외부 세계로부터 무엇을 얻고자 하는 걷잡을 수 없는 마음- 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사고 없이 20분에서 30분간 정기적으로 휴식할 수 있다면 우리는 자신이 자기의 사고와는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기 시작한다. 우리는 사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우리의 사고는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사고가 바로 자기라고 생각하며, 만일 자기의 사고가 흥분하게 하거나 기죽이게 하거나 불길한 것일 때에 그것에 얽매이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그런데 하나의 훈련으로서 매일 잠시 동안 그저 생각하기를 중단해 보면, 사람들은 자신의 사고에 지배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이다. 
  여기에 향심기도의 설명에서 '사고'라는 말은 단지 관념이나 영상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고 감정들, 우리 외부에서 그리고 내부에서 오는 감각적 인상들, 그리고 영적인 감각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어떠한 지각(知覺) 내용들도 모두 '사고'라는 포괄적인 개념에 들어간다.
  관상을 준비시키는 여러 가지 방법들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인간의 정신에게 말한다. 만일 우리가 이 모든 준비 방법들을 하나의 스펙트럼 상에 놓는다면 이것들은 수용적(受容的)인 방법에서부터 주의집중적인 방법까지 다양하다. 주의집중적인 방법에서는 우리가 많은 일을 혹은 모든 일을 하는 것으로서, 말하자면, 만트라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 우리의 호흡에 초점을 맞추는 것, 촛불이나 그와 유사한 물체를 바라보는 것, 어떤 자세를 계속 유지하는 것, 혹은 참선 중에 관(觀: 화두를 사색함)하는 것 등이다. 향심기도와 같이 수용적인 방법에서는 주의에 초점을 맞추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우리의 노력은 극히 최소한에 머문다.
  어떤 방법은 더 수용적이고 어떤 방법은 더 주의 집중적이다.
                    
선(禪)에도 향심기도와 아주 근사한 특별한 수련이 있는데, 이 수련에서는 어떤 자세로 그냥 앉아서 사고에 주의를 주지 않는다. 어떤 자세를 유지하려면 처음에는 어떤 노력을 필요로 한다. '긴장을 풀고, 그러나 정신은 예민하게'라는 조건 말고는 어떠한 특별한 자세를 요구하지 않는 향심기도가 아마도 가장 수용적인 방법이 아닌가 생각한다.


  향심기도와 다른 수련들을 구별  짓는 것은 향심기도의 지향성(志向性, intentionality)이다. 향심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주의성과 지향성의 차이를 구별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그러한 사람들은 향심기도와 다른 기도 사이에 외적으로는 유사하게 보이기 때문에 이것들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향심기도에서는 지나가는 사고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우리가 영적인 인식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전체의 심리적 인식 수준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세포로 삶을 시작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개인적인 빅 뱅(Big Bang ; 우주 형성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고 하는 하나의 창조이론)이다. 그러나 그 하나의 세포 속에는 나머지 삶을 지탱해 줄 만큼 충분한 에너지가 있다. 이제 우리의 가장 심층의 존재(inmost being) 혹은 존재의 신적인 바탕(divine ground of our being)을 살펴보자(위 그림 참조). 그 중심에서부터 참 자아(ture self)가 전개되고 그 에너지가 적절하게 표출된다. 우리가 왜 인간 조건이라고 부르는가 하는 이유를 알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이 참 자아와 접촉을 하지 않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유아기 때, 출생 때, 아니면 어떤 현대 정신 치료자들이 말하듯, 출생 이전에 가졌던 고통에 대한 반응으로서 아주 어릴 적에 우리는 거짓 자아라는 것을 만들어 내고, 이 거짓 자아는 참 자아를 억누르고 참자아의 잠재력을 감추어 버린다. 이 거짓 자아는 우리의 아픔과 자기 보호 노력에 영향을 받아 우리의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며, 그 결과로 대부분의 경우 외적 사건이나 그것에 대한 우리의 정서적 반응에 지배되는 상태를 경험한다. 거짓 자아는 우리가 내적인 자유로 행동하기보다는 외적인 사건에 지배를 받을 때에 기능하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심리적 의식은 마음을 사로잡는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완전히 그 영화에 사로잡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외적 사건이나 이 사건에 대한 우리의 정서적 반응에 지배를 받는 것은 마치 우리가 아주 좋은 영화를 보면서 우리 자신을 영화의 줄거리나 등장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자신이 지금 영화관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 이와 유사하게우리는 대부분의 시간, 우리 자신의 영적인 수준과 접촉을 하지 못하면서, 우리가 외부 사건에 대하여 자율적인 선택을 하기보다는 그 사건에 스스로 지배를 받도록 허용한다. 우리가 향심기도를 통하여 이러한 과점을 다루고 무의식에서 나오는 역동을 인정하게 되면서 우리의 영적인 기능과 참 자아가 해방된다.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거짓 자아가 요구하는 행복의 상징에게 자신이 부여한 정서에 얽매이지 않고 이것을 상대적인 관점에서 보게 된다. 그 이유는 우리가 내적 평화를 경험하기 시작하고 이러한 행복이야말로  참으로 찾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향심기도의 수련 중에 우리는 이전에 가졌던 것과 똑같은 정서적 반응에 직면하게 되지만, 이번에는 그것을 보지 못하면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아보게 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거짓 자아의 경향을 인정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 이유는 그것을 알아봄으로써만 그것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을 분석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것을 알아보면서 그대로 떠나보내면 되는 것이다.
  내적 자유가 발달되면, 우리는 마치 재미없는 영화를 보면서 언제고 일어나 영화관을 나갈 수 있는 사람처럼 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대로 앉아서 계속 관람해도 된다는 것도 안다. 이것이 영적 수련을 한 사람과 아직 시작하지 않은 사람의 차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러한 과정을 시작하기 이전에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나, 환경이나, 어릴 적에 형성된 우리의 내적 역동 -그 역동에 대하여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이 나를 계속해서 지배하도록 허용 한다. 기도 수련을 시작하면, 우리는 이러한 역동에 대하여 자율적인 힘을 가짐으로써 그것을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의 참 자아를 찾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창조적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이 우리 안에서 성장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중심으로부터 행동하기 시작한다. 향심기도의 가장 큰 효과는 자신의 중심으로부터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외부 세상과 상호관련을 맺지 않는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이전보다 더 잘 상호관계를 맺게 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나 환경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지 않으면서 믿음의 실재(reality)가 보여 주는 대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향심기도는 단지 하나의 기도 방법이 아니라, 우리의 전 존재가 복음과 그 가치에 응답하도록 만들어 주는 과정을 시작하는 기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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